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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ㅣ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에선가 지나가는 동영상을 보다가, 낯익은 이가 휙 지나갔는데, 누구였지? 분명 낯이 익는데… 이러면서, 다시 그 동영상을 제대로 보니, 강신주 님이었단다. 그런데 아빠가 아는 강신주 님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어. 조금 통통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너무 살이 빠지고 부쩍 나이든 모습에 큰 병에 걸리셨나?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 동영상은 지난 해 EBS에서 강연하던 모습이었단다. 반갑지만, 너무 달라진 외모에 걱정이 들어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강신주 님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지만, 아빠처럼 강신주 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독자들의 글들만 볼 수 있었단다. 부디
별 일 없이 건강하시길 바란다.
강신주 님은 예전에 <감정수업>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다른 책들도 서너 권 읽고,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찾아보고 그랬단다. 아빠는 <감정수업>에서 느낀 그의 신선함과 독특함으로 여전히 강신주 님을 보고 있단다. 늘
좋은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그가 최근에 ESB에서
강의한 것을 책으로 낸 것이 아빠가 이번에 읽은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라는 책이란다. 책 소개를 봤더니, 불교 철학의 여덟 가지 키워드. 아빠가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한 때 불교 경전을 공부하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공부하진 않지만 여전히 불교에 관심이 많고, 절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삼배를 하고, 누군가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불교라고 이야기를 한단다. 강신주 님이 불교 철학에 대해 강의를 했다고 하니, 급 관심을 갖게
되더구나.
1.
강신주 님이 뽑은 불교 철학의 여덟 가지 키워드는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정(靜), 인연(因緣), 주인(主人), 애(愛), 생(生) 이란다. 이 여덟 가지 중에 또 하나를 뽑으라고 하면 무엇일까? 아빠가 생각하기에 강신주 님은 사랑(愛)을 뽑으신 것 같더구나. 책 제목에도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고, 책 제목에 또 다른 ‘아낌’이라는 것도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거든… 예전에 다른 책들에서도
늘 사랑을 중요하게 이야기하셨지. 사랑을 좀 다르게, 좀
솔직하게, 좀 자유롭게 해석하셨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이번 책에서도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이라는 큰 주제에
다른 것들도 담고 있다고 아빠는 생각했단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무한의 사랑, 끝없는 사랑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 하지만, 강신주 님은 사랑이라는 것이 밥과 비슷하다고 해서, 너무 많이 주게
되면 그게 고통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단다. 프롤로그에서 책 제목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의 의견에 적극 공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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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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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 중에 하나. 고통(苦)이 아닐까 싶구나.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라는 것을 없앨 수 있을까. 없을
거야. 신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이 제로가 되었다는 것은 죽었을 때나 가능한 거야.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완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잡아야 한단다. 사랑이라는 것도 상대방의 고통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란다. 배고픔의
고통을 한 공기의 밥을 줌으로써 해결하는 것처럼 말이야. 회사에서도 자신만 잘났다고 떠들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사랑의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이란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어야 고통을 줄이는데 힘쓰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야. 예전에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모순 덩어리 말이었던 거야. 학생의 고통을 공감한다면 어찌
때릴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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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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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신주 님께서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명을 해주셨는데, 하나씩 살펴보자꾸나. 앞서 첫 번째로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로 이어지는 것이 무상(無常)이란다. 영원한 것은 없고, 세상
만물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야. 강신주 님이 무상(無常)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언젠가 변해서 사라지는 인생무상임을 깨닫게
되었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더구나. 사랑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언젠가 사라지니,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야. 함부로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아빠도 반성하게 되더구나. 얼마나 많은 일을 미래로 미루면서 살고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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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7)
놀이의 삶에는 근사한
표어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표어이다. 반면 노동의 삶에도 그에 어울리는 표어가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표어다. 이는 연애 시절과 결혼 생활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연애 시절에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몰입한다. 가장 좋은 음식을 사주고 값비싼 선물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않으면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하염없이 미루기 쉽다. 대출을 갚아야 하고 아이들 양육비도 생각해야 하니, 맛있는 스파게티나 여행 등 오늘의 행복을 속절없이 미루게 된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는 순간, 오늘은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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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행복을 뒤로 미루기만 하다 보면 어느덧 삶의 끝자락에
도착을 하게 될 거야. 요즘에는 가뜩이나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는데 말이야… 아빠도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단다.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제대로 여행도 못 가고… 코로나를 모르던 시절에는
다음에 해야지, 다음에 가야지 하면서 미뤄두었던 일들이 코로나 때문에 기약 없이 뒤로 계속 미뤄지고
있구나. 그러면서 어떤 일들은 너희들이 커가면서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있고 말이야.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마련인데, 잠깐 뒤로 미뤄둔 일들이 코로나
같은 예상치 못한 일들 때문에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더구나. 안타까울 뿐이구나.
…
무아(無我)라는 말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도
하고 제법무자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제법(諸法)이란 ‘다르마’에서 온
말로 모든 존재를 이야기한단다. 세상 모든 존재는 본질이 없다는 뜻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거나 불멸하지도 않고 동시에 순간적인 것도 없다는 뜻이란다. 변화를 잘 받아들여야겠구나. 왜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엔 왜 그래?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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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먼저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가능성은
줄어드는 말이다. 아내와의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 혹은 친구와의
관계가 예전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라. 돈독하던 관계에서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어제와
다름없이 보이는 부모님, 아내, 남편, 아이의 얼굴에서 변화를 읽으려고 노력하라. 작은 주름 하나, 깊은 한숨 하나, 작은 새치 하나,
작은 어둠 하나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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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靜). 고요한 마음과 들끓는 마음을 설명한단다. 아빠의 마음이 고요했던
적이 있던가 싶구나. 늘 머릿속에는 생각이 많고, 어떤 작은
일에 대해서도 머릿속에서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그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적이 많아. 요즘에는 그걸
받아들이려고 한단다.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한 동안 아빠 머릿속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해 버려. 아빠처럼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에게 있어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 버리기로 했어. 물론 며칠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되니까, 그런데 가끔
이 파문이 사라지기도 전에 더 큰 파문이 일어날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이렇듯 아빠의 머릿속은 번뇌와
망집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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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52)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남자의 사례를 통해 ‘번뇌’와 ‘망집’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을 카페 의자에 둔 것이 맞을까?’ ‘스마트폰을 카페 점원이나 손님들 중 누군가 가져간 것은 아닐까?’ 등등, 번뇌란 이런 것이다. 스마트폰의 없음을 경험하자, 그의 뇌리에는 사라진 스마트폰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허탈해하며
카페에서 나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미 없어진 스마트폰이야. 없는
건 없는 거지. 잊자!’ 하지만 스마트폰의 없음을 받아들이려
할수록 없어진 스마트폰에 대한 기억은 더 강해질 뿐이다. ‘잊자, 잊어’라는 생각이 오히려 사라진 스마트폰을 떠오르게 하니 말이다. 바로
‘망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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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因緣).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보통 연기법과 함께 생각하게 된단다. 어떤
일이 그냥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뜻이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잖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게 되면 세상이 끝난 듯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도
또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보자고 하더구나.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 아빠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한동안 번뇌와 망집에 또 휩싸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도 보면 또 다른 인연을 만나게 될 거야.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듯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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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만성화된 슬픔, 고질적인 우울 속에 갇히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앞으로 앞으로” 삶을 밀어붙이면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부재하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인연이 끝나야 다른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별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가면, “앞으로 앞으로” 배를
수평선 쪽으로 밀어붙이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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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主人)이라는 챕터에서 설명하는 내용이 아빠에게 채찍을 가하는 듯했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보다 무엇인가 그만두고 싶은 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말에…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굳이 “노”라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단다. “노”라고 하는 순간 피곤한 일들이 이어질 것을 아니까. 그러므로 아빠의
생각과 다르지만 그냥 “예스”라고 하고 아빠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단다. 이로서 아빠는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것이란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다들 아빠와 비슷한 것 같아. 다들 자발적 노예인가 보구나. 회사가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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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1947~)는 <냉소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관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노”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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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는 멈출 수 있을 때, 그만둘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하더구나. 아빠가 가끔 유튜브를
보다 보면 회사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집을 짓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빠가 본 그 분들은 얼굴에 행복이라고 쓰여 있더구나. 물론 회사라는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 그 절벽에서 손을 떼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있었을 거야. 자신이 숨겨 두었던 날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야. 하지만
용기 있게 그 절벽에서 손을 떼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이 말에 아빠가 소심해서 딴지를 걸고 싶긴 하더구나. 절벽에 매달려 “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해볼 수 있겠는데, 그 절벽에서 손을 놓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같았어. 모든 사람이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진짜 끝없이 추락을
해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회사 안은 전쟁터이고, 밖은
지옥이라는 소리도 있고, 실제로 그런 예도 본 적이 있고 말이야. 그런
사람들의 경우 날개가 없는 것일까? 날개가 있음을 모르는 것일까? 사실
아빠도 아빠가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일단은 절벽을 잡고 보자… 비록 어깨가 아플지라도…. 아빠의 깨달음이 부족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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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228)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아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랑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인정일 수도 있다. 아이를 잡지 않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권고하는 사람도 돌아보면 돈이나 건강을 매달린 절벽처럼 붙잡고 집착할 수도 있다. 또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억세게, 저 집요하게 매달린
절벽을 잡으려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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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자발적 노예의 안락한 삶을 진정한 자유와 트레이드 오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그 자발적 노예를 사랑해 주고 절벽을 잡고 있는 팔과 어깨를 주물러 주는 너희들이 있음에 위안을 삼으면서… 뭐, 좀더 잡고 있어보지… 이런 생각을 해보았단다.
….
애(愛). 드디어 핵심 주제인 사랑(愛)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온단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시간을 잊게 만들고 아픔을 잊게 만든단다. 그 대상을 소중히 다루어 아끼게 되는데, 그런 말로 애지중지(愛之重之)라는 말이 있단다. 어떤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에 대해서는 대가를 바라면 안 돼. 그러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아끼는
것이 아니란다. 아빠가 우리 식구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런데
가끔 내가 이만큼 했던데 저 일은 좀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말로 튀어 나오는 경우도 있어. 그 경우 아낌의 관계는 깨지는
것이란다. 반려 동물을 사랑할 때와 비유를 하고 하는데 반려 동물을 사랑하면서 반려 동물에게 무엇을
바라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말길을 못 알아듣고 멀뚱멀뚱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는데 말이야. 핵심은 사랑을 할 때, 누군가를 아껴줄 때 대가를 바라지 말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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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아끼는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 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 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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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 님이 이야기하는 불교철학의 마지막 생(生)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이
부분에서도 애(愛)의 연장선상으로 아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단다. 나의 생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끼는 것들과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란다. 그
인연에는 가족들일 수도 있고, 반려 동물, 반려 식물일 수도
있고, 그 외 아끼는 모든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야. 건강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인연들에 있어 많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한 공기의 연이 필요하다고 강신주 님은 이야기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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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우리 각자에게 아끼는
대상이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아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반려묘일 수도, 아니면 화초일 수도 있다. 아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행복에 있어 ‘한 공기의 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농부의 물꼬 트기처럼 이 ‘한 공기의 연’을 우리가 채우지 못하면, 아끼는 사람의 삶은 불행에 빠진다. 그러니 좋은 공기, 맛있는 음식,
쾌적한 잠자리, 따뜻한 태양,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영화, 멋진
식당,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등등이 아끼는 사람에게 건강한
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 잘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잠도 잘 자야 한다. 우리게는 ‘한 공기의 연’을 채워야 할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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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의 처지에서 보면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는 것은 정말 어렵단다. 요즘 너희들이 커가면서 어떤 방향으로 안내를 해주어야 하나, 지금
이 방향이 맞나, 그냥 남들이 가니까 따라 가는 것은 아닌가? 등
고민이 많단다. 엄마도 고민이 많아 아빠한테 물어보곤 하는데, 아빠도
처음 겪은 일이니 쉽지 않더구나. 그렇다고 소위 방목 또는 방임하면서 키웠다가 전혀 엉뚱한 도착지에
가 있으면 어쩌나,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 어쩌나, 이런
걱정에 휩싸이게 되고…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강신주 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였단다. 아이를 진정으로 아낀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망(忘)과
조장(助長) 사이의 균형을 이루라고 하는구나. 망(忘)은 ‘잊다’라는 뜻이고, 조장(助長)은 ‘잘 자라도록
돕는다’는 뜻이란다. 방임과 관심의 사이를 균형을 이루라는
것인데, 이것도 앞서 이야기한 한 공기의 사랑, 한 공기의
아낌과 비슷한 말인 것 같구나. 그런데 그게 쉬울 것 같지는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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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아끼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어 학원에 보내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수영 강습도 받게 하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방학마다 여행을 가고 캠핑도 간다. 문제는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 혹은 ‘언젠가 아이가 원할 수도 있다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웃음과 미소를
점점 잃어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간혹 “우리는 아이를 방임해서
키워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도 있다. 김을 매지 않아
잡초들에 둘러싸인 벼처럼, 아이는 경쟁적 교육 환경, 왕따를
시키는 차별적 문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둘러싸여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되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되고, 관여하지
않되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혹은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 때까지, ‘망’과 ‘조장’ 사이 혹은
‘물망’과 ‘물조장’ 사이 그 어딘가를 지키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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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강신주 님의 이야기한 불교 철학 여덟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단다. 이 책의 핵심은 책 제목에 다 들어 있단다. 한
공기의 사랑과 아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사랑과 아낌이 중요하다…
이상. 끝.
PS:
책의 첫 문장: 그가 늦게 귀가했다.
책의 끝 문장: 좋은 추억으로 남을 만한 인연이자 하나의 행복한 축제였다.
사실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된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다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식물도, 토끼도, 사슴도, 독수리도, 늑대도, 그리도 인간도 생명체다. 식물을 살리려고 토끼를 죽여서도 안 된다. 토끼를 살리려고 늑대나 인간을 죽여서도 안 된다. 엄청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슴과 늑대가 동시에 배고픔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 이 난감함, 이 애절함,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의 진정한 의미, 혹은 ‘고통’의 기원이 아닐까. - P31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 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 P41
이렇게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내일의 삶을 목적으로 만들면, 오늘의 행복은 계속 내일로 미루어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행복한 적이 없다는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물론 이런 후회는 금방 사라질 수도 있다. 죽음 이후의 피안이나 이데아 세계, 혹은 기독교의 천국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마지막 기대를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기만적인 생각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현재의 삶을 좀먹는 독약과도 같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은 영원을 꿈꾸면서 무상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사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 P83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단순하다. 성숙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아끼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아파하게 된다. 간혹 아이들은 엄마가 아파서 밥을 못 해주면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아플 때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바로 이때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이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요한 물처럼 작동한 것이다. 비록 아이지만, 이 순간 아이는 부처다.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 P176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가슴에 사표를 품고 있는 직원에게 사장이 어떻게 갑질을 할 수 있을까? 캐리어를 들고 집을 떠날 수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학위쯤이야 우습게 여기는 학생에게 교수가 어떻게 사역을 시킬 수 있을까? - P244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면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삶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 P249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재산이나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랑하려면, 제래도 살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고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이만하면’이라는 전체를 붙인 너저분한 자기만족과 정신 승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아직까지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제대로 행복하고, 제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길 수 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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