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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드뷔시 ㅣ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3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너희들이 피아노를 배운 이후로, 가끔 피아노 음악을 같이 듣기도 하잖아. 많은 음악가들 중에 우리
식구 모두가 좋아하는 음악가 라흐마니노프. 문득 그 사람의 음악이 아닌, 그 사람의 삶이 궁금하더구나. 그래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악보가
아닌 라흐마니노프 전기나 평전 등 라흐마니노프 그 사람 자체와 삶에 관한 책을 읽어볼까 하고 인터넷 서점 검색을 해보았단다. 음,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 중에 그런 책이 없더구나. 모차르트, 베토벤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에 관한 책이 없다니… 원서를 찾아 읽을 수도 없고… 웹사이트 검색으로 만족해야 하나…
그런데 라흐마니노프의 전기나 평전은 없지만, 제목에 라흐마니노프가 들어가 있는 소설은 하나 있었단다. <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 삶을 소설로 쓴 것인가? 싶어 책 소개를 읽어봤더니 그런 건 아니더구나. 추리 소설이래.. 잉? 그리고 그 책은 나카야마 시치리라는 일본 작가 쓴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물의 하나라고 하더구나. 평점이 좋아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겠거니, 하고 말이야. 그런데 이게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의 2권이라고 했어. 이왕 읽는 거,
1권부터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1권을 검색해봤고, 그 1권이 이번에 아빠가 읽은 <안녕, 드뷔시>라는 책이란다.
아빠가 알고 있는 노래는 ‘달빛’이 유일하지만, 드뷔시도 유명한 음악가잖아. 너희들도 드뷔시의 <달빛>을
좋아해서 가끔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었고… 음악이라는 소재와 추리 소설과 만남이라… 이런 스타일의 소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자, 그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꾸나.
1.
드뷔시의 ‘달빛’만 알았지. 드뷔시에 대한 사람도 잘 몰랐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의 음악은 프랑스 인상주의로 분류되고, 1862년에 태어나서 1918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많은 유명한 음악을 남겼지만, 아빠가 아는 음악은 달빛 하나.^^ 이 책에는 드뷔시 달빛에 대한 곡 해석 부분이 나오는데, 별
생각 없이 듣던 아빠도 그 글을 읽고, 그런 감정으로 드뷔시의
<달빛>을 다시 들어보았는데, 싸구려
귀에는 그냥 피아노 소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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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영롱한 음 하나에 달빛
한 줄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음이 빛이 되어 마음속에 비쳐 든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더니 이내 정경이 떠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미사키 씨에 따르면 드뷔시는 음과 영상의 관계를
중시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다. 달빛이 호수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교교한 달빛 아래 한 쌍의 남녀가 한가로이 왈츠를 춘다. 시간마저
느릿느릿 흘러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위로 퇴락한 고성이 또렷이
떠오른다. 한 음이 끊어지기 전에 다음 음이 이어진다. 곡이
끝나자 나는 무척 후회했다. 왜 이런 곡을 그동안 허투루 들었을까. 선율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이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이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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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바로 책 이야기를 해볼게. 주인공은 고즈키 하루카. 피아니스트가 꿈이 소녀로 예술학교도 입학했단다. 자수성가해서 큰 부자가 된 할아버지, 은행에 다니는 아버지, 가정 주부인 어머니, 백수인 겐조 삼촌 이렇게 함께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사촌인 가타기리 루시아도 함께 살기 시작했어. 루시아는
아버지의 여동생의 딸 그러니까 하루카의 고종사촌이었어. 둘은 나이도 같아서 아주 친하게 지냈어. 루시아와 함께 살게 된 이유는 아주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단다. 2005년
인도네시아에는 아주 무서운 쓰나미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이 있었어. 그 때 루시아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거야. 2005년이면 이 책이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2009년 기준으로 얼마 전의 일이었지. 이 소설은
2009년보다 더 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얼마 전에 무서운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루시아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하루카의 부모는 루시아를 양녀를 들이려고 절차를 알아보고
있었고, 실제로도 루시아를 친딸처럼 생각했단다.
어느 날 별채에서 큰 불이 일어났어. 그곳은 할아버지의 작업실 겸 침실이 있었고, 하루카와 루시아도 별채의
또 다른 침실에서 자고 있었단다. 이 큰 불로 그만 할아버지와 루시아가 죽고 말았고, 하루카는 전신화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났단다. 며칠째 정신을 잃고
있었고, 처음에는 말도 못했어. 얼굴도 화상으로 엉망이 되어서
얼굴의 3분의 1이상을 피부이식을 해야만 했어. 가족을 잃은 슬픔. 자신이 꿈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좌절. 하루카는 잘 버텨나갈 수 있을까.
2.
그런 하루카를 자진해서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강사가 나타났단다. 미사키 요스케. 이 소설이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했잖아. 그 요스케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요스케는 하루카를 가르치던 학원
선생님의 후배이자 떠오르는 천재 피아니스트였어. 요스케는 피아노를 통해 하루카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단다.
…
갑부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의 재산에 대한 유산 분배가 있었단다. 유서에 적힌 대로
하루카가 1/2, 아버지가 1/4, 겐조 삼촌이 1/4이었고, 할아버지를 친절하게 돌봐주던 개인 간호사 미치코에도
적지 않은 돈을 남기셨단다. 미치코는 다른 식구들과도 친해서, 하루카의
병간호를 계속 해주기로 했단다. 할아버지의 유산 분배에 대해 겐조 삼촌은 자신의 것이 적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단다. 철 없는 삼촌이네.
…
그런데 얼마 뒤 집에서 하루카를 노리는 테러가 일어날 뻔했어. 일부러 계단의 미끄럼 방지를 떼어 놓아 하루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는데, 요스케가 옆에 있다가 구해주었어. 요스케가 아니면 큰 일 날 뻔했어. 누가 일부러 계단의 미끄럼 방지를 떼어 놓았을까.
요스케는 자신이 피아노를 잘 치는 것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잘 가르쳤단다. 아빠는 피아노를 못 치니 그가 소설 속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훌륭한 가르침인지 잘 모르겠지만, 읽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긴 하더구나.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너희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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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지. 건반을
힘주어서 정확히 치고 싶은 나머지 손끝에 체중이 실리도록 의자를 높게 조절하거든. 그런데 건반의 무게는
고작 70그램이야. 지압하듯 센 힘이 필요 없어. 앉은 위치를 낮추면 자연히 등허리가 세워지고 근육을 곧게 펴서 잘못된 자세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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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자, 음이 연속해서 나면
드디어 연주의 기본 요소가 갖추어진 셈이야. 기본 요소는 세 가지인데 첫째 리듬, 둘째 음, 그리고 셋째 스타일. 리듬은
작품의 짜임새인 만큼 무조건 정확해야 할 것. 또 연속해서 내되 각각의 끝소리가 다음 소리와 붙어 버리면
안 돼. 리듬이 애매해지거든. 따라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을 가늠할 필요가 있어.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오롯이 음절의 울림을 나타내는 셈이니까, 여기서도 너무 강하게 쳐서 울리지 않게 하는 건 마이너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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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스케의 가르침과 하루카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어. 학교 교장으로부터 콩쿨 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석해 보라고 했어. 학교
교장이 장애를 딛고 일어난 하루카를 다른 저의로 쿵쿨 대회을 제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하루카는 나가겠다고
결심했어. 그렇게 하루카는 다시 꿈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되었단다.
3.
그런데 하루카 집의 비극은 끝이 아니었단다. 하루카의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다가 낙상 사고로 그만 돌아가셨단다. 처음에는
단순 사고인 것 같았는데, 경찰은 이 사고를 할아버지의 화재 사고와 연관을 지어 조사했어.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사고도 누군가의 방화로 일어난 것일 수 있다면서… 요스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사실 요스케는 평범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단다. 요스케의 아버지는 유명한 검찰이었고, 요스케도 사법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고 사법연수원까지 마쳤었어. 하지만 자신의 꿈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그만 둔 것이지. 그런 요스케이니 어떤 사건에 대한 추리력이 있었던 것이란다. 그런
캐릭터이니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야. 아무튼,
하루카의 어머니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고 사건이라면, 누가?
하루카에게 테러를 하려고 했던 사람? 아무래도 범인은 가족 중에 있다 보니, 용의선상에 가장 먼저 올라오는 이는 유산에 불만이 있던 겐조 삼촌. 하지만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이들은 가장 범인 같은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겐조 삼촌은 가장 먼저 리스트에서 지워버리겠지. 아빠처럼^^
….
하루카에 대한 테러도 더 일어났어. 하루카의 목발을 일부러 고장 나게 하거나, 누군가 도로로 하루카를
밀치는 일이 있었어. 다행히 그때마다 실제 테러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
그렇게 좋지 않은 일들이 연속이었지만 하루카는 그런 아픔과
슬픔을 잊지 위해서라도 피아노에 더욱 열심이었단다. 드디어 쿵쿨 대회.
예선에서는 쇼팽의 <에튀드> 10-2,
10-4를 연주하고, 본선에는 드뷔시의 <달빛>과 <아라베스크 1번>을 연주하기로 했어. 이렇게 하루카가 피아노 쿵쿨을 준비하고
참가하는 동안 요스케는 계속 범인을 추적하여 드디어 범인을 밝혀낸단다. 그리고 하루카가 본선을 마치고
시상식을 기다릴 때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아무래도 사건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피아노 연중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말이야..
4.
이제부터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이어질 텐데, 스포일러가 싫다면 아래 글은 읽지 않아도 된단다. 자 그럼 강력한
스포일러를 이야기할게. 추리 소설의 범인은 늘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이가 범인이 되는 경우가 많잖아. 이 소설도 그 규칙에 맞았단다. 먼저 하루카에게 테러를 했던 이는
할아버지의 개인 간호사이자, 지금은 하루카를 돌보고 있는 미치코였단다.
왜냐고? 그 이유는 조금 있다가… 그러면 미치코가
엄마도 죽였냐고? 그건 아니야.
엄마를 죽인 것은 바로 루시아였단다. 뭐라고? 루시아는 죽었잖아. 사실
하루카는 하루카가 아니고 하루카의 사촌 루시아였던 것이란다. 화재가 일어난 날 둘은 잠옷을 서로 바꿔
입고 있었어.(전에도 가끔 이런 적이 있었거든) 화재가 일어나고
살아난 사람은 하루카의 잠옷을 입은 이였으니 다들 하루카인 줄 알았지. 얼굴과 머리도 화상으로 엉망으로
되었고, 루시아도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말도 못했으니 말이야. 루시아는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이 하루카가 되어 있던 거야. 이미 얼굴에 피부 이식과 성형으로 하루카의 얼굴이
되어 있었고… 순간, 루시아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루카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야.
그런 루시아를 처음 알아본 이가 미치코였어. 그래서 미치코는 루시아에게 테러를 가한 거야. 화재도 루시아가 낸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미치코는 돌아가신 하루카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는데 그런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니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 그런데 화재는 실재 사고였단다.
그리고 두 번째로 루시아를 알아본 것인 엄마였어. 비 오는 신사의 계단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엄마와 하루카, 아니
루시아… 엄마는 그 순간 루시아인 것을 알아보고, 둘은 서로
티격태격 하다고 우발적으로 루시아가 엄마를 밀쳤는데, 그만 계단이 높아서 떨어져 죽고 말았던 것이란다. 요스케는 이 사건의 전말을 하루카, 아니 루시아에게 모두 이야기해주었어.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라고 했고, 벌을 받고 난 다음에도 자신이
계속 피아노를 가르치겠다고 했단다. 피아노는 피아노이고, 사람은
사람이니까..
아빠도 루시아를 이해해 보려고 했단다. 어쩌다 보니 하루카가 되어 있었고, 우연히 엄마와 티격태격 하다가
실수로 엄마를 밀쳐서 죽게 만들었으니… 속으로 무천 힘들어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루시아는 콩쿨 시상식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겠다고 결심했단다. 1등을
한 그 시상식에서 말이야…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클래식 음악과 추리 소설의 콜라보… 나쁘지 않았단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피아노 연주에 관한 글도 나오고
음악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도 나오고 말이야. 예를 들어 쇼팽의 유명한 피아노곡 <혁명>이 어떤 사연으로 만들었는지 나왔단다. 그 이야기로 오늘 편지는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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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쇼팽은 1831년 파리로 향하던 길에 고국인 폴란드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짓밟힌 고향과 남겨 둔 가족. 이 곡(혁명)은 그때의 실망과 분노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곡 전반에 걸쳐 쇼팽의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곡은 왼손에서 시작해
낮은 음역부터 음계적으로 진행하고 내림나장조로 바뀐다. 도입부의 거친 화음은 몇 번이나 형태를 바꿔
나타나고 그때마다 흥분이 더해진다.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모른 채 솟구치기만 한다. 선율을 배경으로 전쟁에 쓰러져 가는 민중과 무너져 가는 건물이 보인다. 권총, 파괴음, 그리고 아비규환. 관객은
모두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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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건반에 손가락을 살포시 올려놓는다.
책의 끝 문장: 안녕, 드뷔시
쇼팽의 <영웅 폴로네즈>. 폴로네즈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볼로네즈 파스타와 헷갈리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파스타를 푸짐하게 삶아 줄 테다. 폴로네즈란 폴란드 무곡을 뜻하는 말인데 곡의 주선율은 과연 무곡풍이다. 서주부터 춤추는 듯한 선율이 이어져 듣는 이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연주하는 입장에서 이 곡은 그야말로 난곡이다. 화음을 이루는 음표가 건반을 폭넓게 넘나들어 손이 작은 연주자가 치기에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연속되는 왼손 옥타브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거의 중노동 하듯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차라리 파스타를 삶는 게 훨씬 편하다. 실제로 중간부에 접어든 시점에서 내 손가락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 P14
"아무리 근사한 옷이라도 취향과 체형에 맞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런 걸 오시키세(주인이 고용인에게 철마다 해 입히는 의복을 뜻하는 말)라고 하죠. 제 지인 중에도 실제로 있는데요, 주변의 기대와 착각 때문에 본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건 비극입니다. 인간은 물이 아니라서 준비된 그릇에 강제로 집어넣으면 뼈가 뒤틀리고 피멍도 생기지요. 그런데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무리를 거듭합니다. 그건 남의 인생을 사는 빈껍데기 같은 삶입니다. 그 괴로움과 허무함을 생각하니 암담한 기분이 드는군요." - P271
"으음. 하긴 수업이나 레슨에서는 음악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다만 그러다 보면 신체와 직감, 기술과 정신이 따로 놀게 돼. 마음에 곡의 이미지가 확립된 상태에서 손가락으로 재현할 때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운지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 반대로 새로운 움직임이 이미지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양쪽이 동떨어지면 연주는 절로 빈곤해지지. 잘 들으렴. 연주의 기본 요소 중 세 번째가 스타일이라는 건 전에 설명했지? 스타일이란 곡의 건축 형태를 가리켜. 연주자가 어떻게 칠 것인지는 곡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곡가의 어법을 연주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로 결정되지. 그리고 그 인식 방법은 직감과 조예를 통해 길러져. 악보에 기록된 이음줄, 악센트, 스타카토, 강약 등의 지시 기호를 존중한 상태에서 자신의 재능과 교양과 감수성이 그 곡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걸 선택하지. - P303
그것이 피아노였다. 피아노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목소리보다 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말보다 더 전달력 있는 말로 이야기한다. 나이, 성별, 국경, 언어와 같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꿈같았던 마법이 지금은 미사키 씨가 가능성을 끌어올려 준 덕분에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능력, 허락된 유일한 재산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피아노밖에 없다.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나조차 아니게 된다. 그래서 매일 연주했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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