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
아침에 일어나자 마음속의 공허가 느껴졌다. 바깥 대기는 온화했다. 나무 사이를 지나온 바람의 녹색 물결이 내 안으로 바다를 실어왔고, 그
소리와 더불어 떠나고 싶은 욕구가 밀려왔다. 잠에 쫓겨 갔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부르르 몸을 흔들어 그것을 떨쳐냈다. 사람들이 결혼으로 행복해
하듯 나도 음악 안에서 행복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음악에 관한 모든 질문에 하나의 대답으로 충분하다고
결론 내림으로써 이미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가. 음악이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가운데 우주를 향해, 상충하는 것들이 화합점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라는
것이 그 대답이 아니었던가.
(18)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수습하리라. 내게는 여유와 사랑과
고독이 필요했다. 그러면 은밀히 나를 괴롭히는 불안, 나를
압박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의문의 근원과 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21)
아프리카는 성격이 분명한 대륙이다. 아프리카라는 단어 속에는 코끼리의
울음소리와 치타의 으르렁 소리, 사자의 포효가 있고, 나아가
강렬한 태양 아래 쩍쩍 갈라지는 대지의 소리가 있다. 그곳에서는 공허조차 생동감에 넘친다. 아프리카는 지구라는 행성이 들려주는 원시의 노래다. 이 대륙의 본질
속에는 깊이 있고 유쾌한 그 무엇, 유쾌하지만 꼭 즐겁다고는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느껴진다. 알티플라노의 인디언들이 서글프고 수심에 찬 것만큼이나 근원에 닿아 있는 유쾌함 말이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이라는 목신의 피리 속에
깃든 잉카족의 그 천식성 숨결은 언제나 내 마음을 죄어들게 했다. 자신들의 신이 살해당한 후 귀머거리가
된 하늘을 향한 그 말 없는 애원, 소통이 불가능해진 그 대화, 드넓은
피라미드의 계단 위로 속절없이 흘러내린 그 많은 피, 그 종족은 핏속의 혈구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음악에서는 빈혈증세가 느껴진다. 산소 결핍과 신들의 무분별에
짓눌린 그 종족. 치명적인 코카나무 잎에 마취된 남녀들, 현실을
거부하고 조상이 그려놓은 하늘의 어둑한 별들 속에서 죽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
(43-44)
그의 얼굴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 “행운이 함께해 집중할 줄 아는
학생들을 만났을 때 내가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자 했던 게 바로 그거랍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공부하고 심화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적절한 때에 ‘전인미답의 것’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이런 열의야말로 배움이고, 이런 배움의 과정 가운데 열심히 헌신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최상의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현재 있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겸손,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오만을 가져야 하지요.”
(44-45)
“그러면 선생님, 어떤
학생이 좋은 학생, 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학생일까요?”
“간단하게 대답하지요. 이전의
지식을 답습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 학생, 그렇다고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학생. 아울러……”
“아울러?”
“현재 존재하는 걸 포착할 채비가 되어 있는 학생, 순간의 신비를 관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이지요. 그렇습니다. 좋은 학생이란 순간을 타는 곡예사입니다.”
(50)
“그렇지요. 많은 예술가와
영웅과 성자들이 그런 위대한 교훈을 주고 있지요.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역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위대한 창조의
알파벳을 배우기 위한, ‘지금 여기’에 낙원을 쓰기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글쓰기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편지가 됩니다. 시인 오든은, ‘글을 쓸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개념을 좀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하고 그런 죽음은 비극이 아닙니다. 인간이
뭔가를 창조하는 건 바로 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고, 그 창조가 끝나는 것도 오직 이 죽음에 의해서지요.”
(52)
“그런대로 애를 쓰긴 했지요. 학교(school)의 어원이 된 ‘여가’라는
뜻의 그리스어 ‘스콜레(schole)’에는 시제가 없답니다. 자유의 시제인 셈이지요.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시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서, 뭔가를 배울 수 있도록 위한 것입니다.
학교는 자유를 수련하는 곳이고 학생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에게서 필요한 것, 잉여의 것을
덜어내는 존재입니다. ‘스콜레’는 본질적인 시제인 셈이지요. 현실 속에 실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여는 시제이자, 가장 인간적인
행위, 곧 글, 사랑, 세계의
발견 같은 영혼의 활동에 스스로를 내어주는 시제입니다. 스승은 가르침을 주지만 작품 역시 사랑을 가르치지요. 당신은 음악가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81)
“개개의 공간에는 독특한 소리가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도시를 생각해 보세요. 두 눈이 천으로 가려지고
청각만을 쓸 수 있는 상태에서 당신이 어딘가에 떨어졌다고 해보죠. 그렇다 해도 거의 즉각적으로 그곳이
프랑스의 어느 도시란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거예요. 성당의 종탑에서 시간을 알리는 소리, 뛰어노는 아이들의 외침 소리, 아침마다 열리는 하수구의 물소리, 창문 아래로 지나가는 유리 장수의 외침 소리 같은 게 들릴 테니까요. 그것이
도시라는 것, 하지만 파리나 리용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소도시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대도시라면 줄곧 이어지는 자동차 소리, 전철이 우틍거리는 소리, 열차가 삐걱대는 소리, 소방대와 구급차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상점이나 자동차의 경보음이 줄곧 들려올 테니까요. 가엾은 사이렌들! 과거에는 노래를 부르더니 오늘은 울부짖고 있네요.”
(88)
“한밤중 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제겐 그렇답니다. 또 너울거리는 대양 속에 울려 퍼지는 고래의 노랫소리도 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늑대의 커다란 외침소리가 으뜸이죠.”
(119)
뉴욕을 떠나면서 나는 휴가, 곧 여행이 내게 필요한 휴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의 판에 박힌 일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빡빡한
일정이 표시된 시간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나 자신에게 생각을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이란
사물함 속에 넣어두고 떠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끝에 이르러도, 극지나 적도에 가도 사람은 여전히 자기 고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옥이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135-136)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언제든 무력감이 솟구칠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절망이 엄습할 수 있다. 그럴 때면 온 힘을 기울여
자신을 통합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환기시켜야 한다. 그런 빛살, 그런 열정, 그런 문장 없이는 자신 안에서 그 무엇도 완벽해질 수
없다. 내게는 그것이 음악과 늑대인 셈이다.
어떤 행위에 속에 어떤 생각 속에 완벽하게 몰입하기 위해서는 강한 에너지와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 무수한 상황들을 모두 통제한다는 것은 충족시키기 어려운
바람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 없이 기적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고, 지금도
일어날 수 없을 터.
(139-140)
오랫동안 나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지냈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광란의
밤을 보냈으며, 독일 소설들과 더불어 때로는 격분하고 때로는 즐거워했다.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거나 속수무책의 악의와 맞닥뜨릴 때면 언제나 책 속에서 도움을 구했다. 책 속에서는 심술궂은 이들조차 저속하거나 비루하지 않았다. 책 속에서는
속속들이 어리석은 이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독서는 언제나 나를 언제나 지복의 경지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강렬한 감정, 다시 말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열정적인 가슴을 갖도록
해주었다.
(166)
“예술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어요. 예술은 사랑을 펼치죠. ‘그’ 곧
진정한 사랑을 믿는 이들의 작품 속에는 사랑의 실존에 대한 기쁨이 표현되어 있어요.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나요? 아레초에 있는 시바 여왕의 눈길을 본 적이 있나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셨나요? 언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하지만, 가장 내밀한 마음속의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예술은 드러내지요. 예술은 영혼과 친숙하게 반말로 이야기합니다. 예술의 소통 대상이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죠. 예술에는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술은 종교, 곧 사랑과의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거기에 창조, 즐거움, 공감
같은 다른 이름을 붙일 수도 있어요. 조금 전 당신은 지성과 악의 새로운 결합을 강조했죠. 예술은 지성을 직관적인 사랑으로 돌려놓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특별한 힘이고, 예술의 능력은 아름다운 희망이기 때문이죠. 예술은
제 영혼을 무한하게 만들어줍니다.”
(183-184)
고백하건대, 나는 잠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잠이 건방진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하게 대한다. 잠자는 것을
좋아하고 육체적으로 잠이 몹시 필요한 나는 아주 기분 좋게, 관능적인 쾌감까지 느끼면서 잠의 품에 안겨
몸을 웅크린다. 침대에 들어가 눕는 순간 내 몸은 서양가새풀이 된다.
가장 깊은 꽃잎 속까지 나는 잠을 초대한다. 하지만 종종 연주회에 대한 신경성 긴장이나
피로가 잠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친다. 그럴 때면 다가온다 해도 잠의 포옹은 표면적인 것에 머문다. 이따금 결합이 이루어지면 잠은 나를 일으켜 이끌어간다. 내 꿈은
그와 하나가 된다.
(203)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에게 동물을 혹사할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인간은
동물을 이용하고, 종 전체를 아사시키고 질식시키고 멸절시킵니다. 대양
저 멀리에서 수백 년의 수명을 지난 거북이들이 해파리인 줄 알고 먹은 비닐 봉투가 위장에 가득 쌓여 죽어갑니다.
인간이 동물을 신성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고 그 절대적인 무구함을 부러워하는 그런 시대가 다시 올까요? 이집트인이나 아스텍족이 섬기던 신으로서의 동물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미트라가
숭배하던 힘센 수소는요? 인간이 동물과 자신의 혈연관계를 존중하고, 살아있는
존재와 대지와의 근원적인 관계를 가꾸어나가던 그런 시대는 어디로 간 걸까요?
(216-217)
구름에도 음악이 있다. 모차르트 소나타 같은 작고 둥근 흰 구름. 모리스 라벨과 에릭 시터 같은 풀어헤쳐진 긴 구름. 베토벤 같은
묵직하고 검은 안개구름. 브람스의 구름에는 성당의 하늘 같은 갈라진 틈이 있는데, 그 틈으로 빛줄기로 이루어진 붉은 광채가 비쳐 나온다. 그 광채가
어디에서 솟아나오는지는, 태양에서인지 지옥에서인지 혹은 희망에서인지 알 길이 없다.
(235)
그렇습니다. 자유,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것을 사랑으로 거부하고, 원하는 것, 받아들일
만한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권 말입니다. 저는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빛에 도달했습니다. 청빈의 정신을 넘어서만이 도달할 수 있는 빛 말입니다.
(237)
습관이나 나태로 말미암아 자신의 가슴과 영혼을 진지하게 천착하고 탐색하는 것을 그만둘 때 슬픔이 찾아옵니다. 이런 끊임없는 탐색 속에서만이 인간은 점점 더 소박해지고 진지해져서 모든 수식을 버리고 본질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최고의 기술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한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 싸울 무기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효과적으로 삶을, 그리고 빛을 지켜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무기는 그뿐인지도 모릅니다.
(246)
진정한 엘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내 영혼의
가치에 어울리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천분, 곧 자신만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내 스타일은
피아노, 믿음, 글쓰기에 대한 희망이 아닌가. 내 몸은 또 다른 생명을, 음악을,
결혼을, 음을 품고 있다. 내게 도전하는 음악, 나를 충족시키는 음악은 나를 무화시킬 수도, 나를 나 이상으로 들어
올릴 수도 있다. “당신의 삶이 음악의 연장선상에 놓이기를.”이라고
그 교사는 초입에서 그는 나에게 열쇠를 주었다. 세상을 여는 그 열쇠는, 나누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황폐하다는 의미일 터였다.
(247-248)
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행복이 타인에게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게으르고 무분별해서 자신의 정수에서 행복을
놓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상대의 본질적인 자유를 빼앗고 그것을 훼방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피상적인 행복에 만족하지 않는 데 있다. 훌륭한
그림이나 시나 노래에 스스로 헌신하듯 행복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249)
갈매기 한 마리가 작은 배의 돛 위에서 웃음을 터뜨렸고, 세 마리
제비가 하늘을 가르며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
나는 나 자신을 축소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활짝 펼치고 싶었다.
또다시 나는 내 운을 시험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