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러한 리얼리스트들의 균형감각에 비하면 맹자의 아이디얼리즘은 참으로 무모한 것이다. 맹자는 이들의 패도에 대하여 왕도를 주장한다. 왕도라는 것은 인의(仁義)의 실현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의 쇠미기에, 서바이벌을 위해 합종이냐 연횡이냐를 점쳐야 할 긴박한 시기에, 어느 철인이 나타나 인정(仁政)을 외친다고 생각해봐라! 과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맹자는 중국의 동키호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키호테는 픽션이나 신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만, 맹자가 돌진하는 세계는 완벽한 논픽션이다. 맹자에게는 모든 아이디얼리즘이 리얼한 현실이다. 그가 신봉하는 이상적 가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76)

자하가 공자에게 여쭌다.: “정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오이까?” 공자는 타이른다. :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라. 작은 이익에 구애되지 말라.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면 전체적으로 통달할 수 없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90)

법은 도덕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기초하기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더 중시한다. 상앙에게 있어서 법이란 상과 벌, 그 두 개의 칼자루일 뿐이다. 법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심리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 정감은 벌을 싫어하고 상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법은 반드시 쉬워야 하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백성이 법의 저촉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형벌을 통해서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국가는 강성해질 수 있다. 형벌을 통하여 겁약한 백성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형벌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부유한 백성들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부유한 백성들은 마냥 부유해지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통하여 그 부를 흡수하여(작위를 주어 부를 빼앗는 등의 여러 방법 동원)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앙의 원칙은 세마디의 말로 집약된다:”빈자부(貧者富), 부자빈(富者貧), 국강(國强)” 가난한 자가 부유해지고 부유한 자가 가난해지면 국가는 강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104)

공자가 상향의 발돋움을 한 사람이라면 공생애의 맹자는 철저한 하향의 사명감이 있다. 맹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당대 민중의 고초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다. 그의 민중의 삶에 대한 묘사는 <맹자>라는 텍스트에 즉하여 보면 너무도 처참하다. 민중은 일상적 삶 속에서도 뙤약볕, 가뭄, 홍수, 한해, 기근에 시달린다. 이들은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경작, 제초, 관계 등의 노동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렇게 괴롭게 달성하는 작은 평화도 군주의 학정에 항상 무너지고 만다.


(116)

민생질서와 도덕질서, 이것이 그의 왕도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논어>에도 <자로>9에 보면, 공자가 위나라에 당도하였을 때 염유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염유가 참 인구가 많기도 하다고 감탄하니까, 공자는 이들을 풍요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에 또 무엇을 해야 할까요?”하고 물으니까, 공자는 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138)

그리고는 결론 짓는다:”술이란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게 마련이요, 즐거움이란 극도에 이르면 슬퍼지게 마련이요. 만사가 모두 이와 같소. 사물이란 극도에 이르면 아니 되는 것이며, 극도에 이르면 곧 쇠한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요.” 위왕은 이 말을 들은 후로 밤새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곤을 제후의 주객으로 삼았다. 그 후 왕실의 주연에는 항상 곤이 위왕을 곁에서 모셨다. 그러니까 순우곤은 위왕을 도덕적 교훈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골계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153)

타인이 나에 대하여 좋게 말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지어다. 타인이 나에 대하여 나쁘게 말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지어다. 자신의 신념을 견지하면서 그것이 스스로 평가될 때까지 기다려라! 마음을 텅 빈 채로 남겨두어라. 그것을 두 쪽으로 갈라 판단하려 하지 말라! 맑은 채로 스스로 깨끗해지도록 내버려두어라! 타인의 무책임한 언론에 귀를 기울여 실제로 사태가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사태를 살펴 중험할 뿐, 타인의 변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만물이 나의 신념과 일치하는 그런 때가 오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스스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169)

국가의 기본은 인간이며, 인간의 기본은 가족윤리에 있다. 가족윤리는 한 가족의 이해만을 중시하는 편협한 패밀리즘의 이기주의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도덕심을 함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minimal moral unit)를 말하는 것이다. 이 기본이 무시되는 사회는 아무리 외관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입장이다. 가족의 윤리를 통하여 국가의 질서와 윤리를 정립하고자 하는 맹자의 도적주의는 매우 아둔하게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국가의 기본으로서 생각하는 민중”(프롤레타리아라고 불러도 좋다)의 간절한 소망도 민생이며, 민생의 기본은 한 가정의 안락한 삶이다.


(19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또 왕의 군대를 통솔하는 참모장격인 장수가 사졸(士卒)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선왕은 말하였다: “나는 그 장수를 해임시키겠습니다.”

말씀하시었더: “그렇다면 또 국내 사경(四境) 전체의 민생고가 가중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문이 꽉 막힌 왕은 좌우를 둘러보며 딴청을 하였다.


(194)

맹자의 담론에 깔린 전체 논리구조는 이와 같은 것이다. 즉 첫째로 인륜에 의하여 처자식은 남편에게 위탁된 것이다. 따라서 남편은 처자식의 안위에 관하여 상황여하를 불문하고 책임이 있다. 둘째도 마찬가지로 군대의 장군에게는 왕권에 의하여 사졸이 위탁된 것이다. 장군은 상황여하를 불문하고 사졸의 안위에 관하여 책임이 있다. 셋째도 마찬가지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천명에 의하여 왕에게 위탁된 것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와 복지를 지키지 못하면 최고의 지도자는 혁명되어야 한다.


(239)

말한다: “감히 묻겠나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호연지기란 과연 무엇입니까?”

말씀하신다: “정말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의 기()됨이 지대하고 지강하여, 정의감에 의하여 배양되고 사악함에 의하여 상해 받지 않는다면 6척 단신의 기라 할지라도 천지지간(天地之間)에 꽉 들어차는 것이다. 그 기()됨이란 항상 의()와 배합되며 도()와 더불어 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이것이 결여되면 그 인간은 활력이 없어지고 시들어버린 쭉쩡이가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호연지기라는 것은 의로움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인간 내면에서 온양 배양되는 것이지, 어떤 돌발적인 정의감의 우발적 행동에 의하여 취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마음에 돌이켜 볼 때 꺼림직하거나 뒤가 켕기는 구멍이 있으면 그 인간은 결국 시들어버리고 만다. 호연지기가 상실되어 활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항상 말하기를 고자(告子)라는 분이 의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의를 심외(心外)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의는 외재적 존재일 수 없으며,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 노력의 결과를 예기(豫期)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의를 배양한다고 하는 큰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되지만, 빨리 효과를 얻기 위해 조장(助長)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54)

이로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의 단(, 단서, 실마리.)이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이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이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이다.


(257)

다음에 측은지심측은함이라는 감정을 노출시키는 심적현상일 뿐이다. 측은지심이 곧 인()이라는 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덕의 (), tip”일 뿐이다. 따라서 ()”은 인이라는 덕이 표현된 심적인 현상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 하는 측은도 감정이다. 따라서 사단(四端)”은 기()가 아니라 ()”라고 말하는 후대의 논설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사단도 칠정의 선한 형태일 뿐이라고 하는 고봉의 논의는 정당한 것이나 고봉은 애석하게도 퇴계의 논박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맹자의 논의를 후대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하는 분별적 카테고리 속에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자학적 태제를 가지고 맹자의 웅혼한 융통(融通)의 심()을 성()과 정()으로 갈라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오류이다. 맹자에게 있어서는 심() 그것이 곧 성선(性善)의 근거일 뿐이다.


(320)

맹자의 정전의 구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약자보호의 사상이며, 평등주의적 분배의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상은 하부고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교육이라는 상부구조의 도덕질서에까지 평등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항산과 항심은 동시적 교육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항산도 교육되어야 하며, 항심도 교육되어야 한다.


(348)

맹자는 이러한 당대의 비극적 정황을 고려하면서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국가의 권력을 뛰어넘는 자래야만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장부! 죽음으로써 천하의 광거, 천하의 정위, 천하의 대도를 지킬지언정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사나이! 그 사나이의 진정한 용기는 실존 내면의 도덕성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도 말했다: “신장은 항상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니 어찌 그를 강하다 하리오?” 사사로운 욕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한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공자는 또 말한다: “삼군의 거대병력에 맞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다. 그러나 초라한 필부에게서도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390)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남이 그토록 사랑했는데, 사랑해준 그가 나를 친하게 생각치 아니 하면 나의 인()을 반성하라! 내가 사람을 다스렸는데 다스려지지 아니 한다면 나의 지()를 반성하라! 내가 남에게 예()를 다했는데, 그가 나에게 응당한 보답을 하지 않으면 나의 경()을 반성하라! 행하여 내가 기대한 것이 얻어지지 않을 때는 항상 그 원인을 나에게 구하라. 나의 몸이 바르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로 돌아온다. <>(대아 <문왕(文王)>)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아니 하뇨!: ‘길이 길이 네 속의 천명에 배합될지니, 그것만이 결국 너의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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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6-05 17: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