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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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초등학교 때 소풍을 장릉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단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관내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저학년 때라서 장릉이 누구의 무덤인지도 몰랐고, 그저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주변 잔디밭에서 놀다 온 기억뿐이구나. 그리고 나중에 장릉이 조선시대 인조라는 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조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능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그런 왕의 무덤으로 소풍을 가서 그랬는지 소풍에 가서 무덤의 주인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구나. 선생님이 일부러 안 알려주셨던지, 아니면 아빠의 기억력의 한계이던지..

무능한 왕의 무덤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왕릉의 존재를 잘 모를 거야. 아빠처럼 그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알고 있지 말이야. 초등학교 때 소풍 이후에는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단다. 하기야 그렇다고 다른 왕릉에 가본 적도 별로 없구나. 우리집 근처에 있고, 아빠가 좋아하는 정조대왕의 왕릉만 여러 번 가본 것 같구나.

인조가 왜 무능한 왕이었는지, 아빠가 이번에 읽은 <병자호란>이란 책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단다. 지은이 한명기라는 분은 아빠가 십여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광해군>이라는 책을 쓰신 분이란다. 그 책을 통해서 아빠가 광해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반정으로 내쫓길 만큼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인조. 그런 인조는 왕다운 왕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

1.

1623 3 13. 조카 능양군은 신료들의 힘을 등에 업고 숙부 광해군을 끌어내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인조이고, 역사는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고 하였단다.

광해군.

임진왜란 때 도망간 왕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로 국내에서 활약했던 세자 광해군. 그런데 전쟁이 끝났을 때 선조의 정비는 이미 죽고, 후궁들만 있었는데, 뒤늦게 정비를 맞아들이고, 영창대군을 낳았어. 적자가 태어난 거야. 이미 후궁의 아들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분조까지 해서 왕이 될 준비까지 했는데 말이야. 영창대군이 크고 나면 세자가 바뀌는 것은 아닐까 광해군도 걱정이 되었겠지. 그런데 얼마 뒤 선조는 죽고 광해군이 즉위했단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 영창대군은 언제든 자신을 위협할 존재였어. 결국 영창대군을 죽였단다.

조선시대에 왕 주변의 권력다툼으로 친인척을 죽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단다. 영창대군뿐만 아니라 반대측을 죽였는데, 그 중에 능양군의 아버지, 능양군의 동생도 포함되었단다. 그리고 관계상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목대비도 유폐시켰단다.

능양군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생각했을 테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 거야. 그런 능양군과 뜻이 맞는 신하들이 있었고, 반정을 계획했어. 궁 안에서도 그런 반정의 기미가 보였지만, 안일한 대응을 했고, 결국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늘 인조. 명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 명나라에서 반정을 인정해주고, 왕으로 승인을 받아야 했어. 그렇다 보니 명나라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광해군을 몰아낸 이유 중에 하나라고 내세운 것이 후금에 공격을 받는 명나라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었거든. 명나라는 인조 왕권을 미루면서 그런 인조의 처지를 이용했어. 2년이나 승인을 미루면서, 조선군의 지원을 받게 되었단다.

.

2.

인조 반정에 성공에 공을 세운 사람 중에 이괄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분류되고 외지로 발령받는 등 불공평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괄은 다시 난을 일으켰고, 놀란 인조는 공주성까지 도망을 갔단다. 이괄의 난은 내부 배신자에 의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단다. 인조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작은 난에도 왕이 멀리까지 도망을 갔으니 민심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고, 개혁안을 밀어붙이기에는 능력 부족이었고, 명나라 사신들은 툭하면 와서 어마어마한 은과 인삼을 요구해서 강탈당하는 수준이었단다. 특히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함경도 앞에 작은 섬 가도에 머무르면서, 양곡을 수탈해갔어. 금과 조선을 견제한다고는 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본적이 없고, 조선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을 뿐이었단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가 광해군이 후금에 대한 공세가 소극적이었다는 것인데 인조반정 이후 후금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어 광해군의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단다.

반정 왜들 했나.

명나라 모문룡.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사람이었단다. 앞서 아빠가 인조 책봉에 있어 명나라가 2년간 질질 끌다가 이루어졌다고 했잖아. 모문룡은 자신이 인조 책봉에 큰 공을 세웠다면서 이것저것 참 많은 것을 요구했어. 인조 정권은 모문룡을 위한 송덕비까지 만들어주었단다. 이 노회한 인물은 조선에 대해 갑질 자유이용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어. 모문룡은 광해군 때부터 가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광해군은 그의 노회함을 알고 그를 멀리 했어. 하지만 인조는 책봉의 은인으로 발목이 잡혀서 그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단다. 모문룡 한 사람만 거들면 참아보기라도 하지.. 그의 군사들도 가도 밖에 나가서 온갖 수탈을 했단다. 그런 그의 군사들을 처벌을 했다가 오히려 좌천된 조선의 관리도 많았어.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참 꼴불견이구나.

3.

당시 명나라 사정을 좀 이야기해줄게. 한마디로 지는 해였어. 망해가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다고 보면 돼. 온갖 비리의 중심이었던 만력제라는 황제가 죽고 장남 태창제가 즉위를 했어. 개혁시도를 했지만, 명나라도 운이 다했는지, 이 능력 있어 보이는 태창제는 즉위 한달 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어.

그리고 16살의 준비라고는 전혀 안된 천계제가 즉위했단다. 이후 환관들이 권력을 잡고 정권농단에 앞장섰어. 그나마 웅정필, 원숭환 등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장수들 덕으로 요동 지역을 후금의 공력으로부터 막고 있었어. 특히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두었고, 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루하치가 부상당한 후 죽었단다.

이후 누루하치의 후계자로 홍타이지가 즉위했어. 홍타이지는 참 영리한 사람이었단다. 홍타이지는 한인 포용 정책을 써서 명을 배신한 한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어.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강경파였기 때문에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명나라 공격에 걸리적거리던 조선을 공격하기로 했어. 조선 때문에 명나라를 공격할 때 늘 후미가 신경 쓰였거든.

그는 1627 1 8, 조선 정벌을 명령했단다. 그것이 바로 정묘호란이야. 홍타이지가 조선 공격을 서둘렀던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었어. 누루하치의 후계자이긴 했지만 권력을 아직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홍타이지는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이 일인자임을 보여주려고 했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어. 조선의 군사였다고 후금에 투항을 했던 강홍립 같은 이도 같이 데리고 왔어.

후금 진격 소식에 방어할 생각은 전혀 없이 도망갈 생각부터 한 인조곧바로 강화도로 도망을 가버렸어. 후금은 대륙을 근거지로 한 나라이기 때문에 수군이 없었거든. 몇몇 장수들이 도망보다는 임진강에서 방어를 하겠다고 인조에게 군사를 요청했지만, 인조와 신료들은 자신들의 호위군을 보강하기 위해 군사를 지원해주지 않았어. 이괄의 난의 트라우마였나…. 나라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시는 위대하신 왕이시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을 가자, 후금군 대장 아민은 화의를 제안했어. 사실 후금도 명의 후방공격에 부담이 있어 조선에 오래 머물 수 없었거든. 조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어. 쯧쯧 도망간 것들이 무슨그러다가 결국 화친을 맺었어. 후금을 형으로 모시고, 조선 자신은 동생이 되겠다고 했어. 참 이상한 관계가 성립이 되었네. 조선은 명을 부모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명과 전쟁중인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으니 말이야.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럴 거면 반정을 왜 했는지….

후금이 형이 되었지만, 그리 착한 형은 아니었어. 후금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가는 곳마다 온갖 약탈을 했단다.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그래서 평안도 정봉수 등이 자체적으로 의병을 만들어 후금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어. 그러자 후금은 심한 불만을 쏟아냈단다. 감히 형이 하는데 동생이 무슨 참견이냐.

후금과 조선의 화친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당연히 강한 불만을 가졌어. 그리고 가도에 틀어박혀 있던 모문룡은 전혀 도와줄 생각 안하고 관망의 자세를 보였어. 조선은 모문룡이 후금의 후방을 공격해주길 기대했지만 가마니 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어. 정묘호란이 끝나고 나서는 자신이 기책을 내어 후금을 쫓아냈다고 명에 거짓보고를 했지. 참… 어찌 보면 어리숙한 인조와 조선 조정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구나. 하지만 그런 무능한 왕으로 인해 받는 백성들의 고통은 너무 크구나. 촛불을 들 수도 없고..

4.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을 맺고 인조는 다시 서울 경덕궁으로 돌아왔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고, 곳곳마다 민란이 일어났어. 그렇다고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썼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도 기가 살아났어. 국내 사정을 일본에 숨기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일본은 국교 재개를 요청했는데,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있나. 후금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실리를 찾고자 일본과 교역도 다시 재개했어.

명나라는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했어. 가도의 모문룡의 지지기반은 천계제와 그 주변의 환관들이었는데, 숭정제가 즉위하고 지지기반이 없어졌어. 이를 이용하여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치하기로 했어. 모문룡을 초대해서 속임수를 써서 처단했단다. 그래서 원숭환은 가도의 군대를 이용하여 요동반도 전체의 수비를 강화하려고 했어.

하지만, 홍타이지.. 이 영악한 인간이 꾀를 썼어.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질시킨 거야. 명나라 사신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거야. 원숭환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숭정제는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원숭환을 단칼에 처형시켰단다. 숭정제도 정세에 어두운 황제였고, 역시 간신들로 둘러싸여 있었어.

결국 명나라와 후금의 운명은, 그 나라의 지도자인 숭정제와 홍타이지의 능력의 차이로 결정나고 있었어. 이것은 비단 명나라와 후금만 그런 것은 아니지.. 당시 조선도 인조라는 왕으로 인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날에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봐도 바로 알 수 있잖니.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뿌듯하더구나.

다시 책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명나라와 후금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은 더욱 난처한 입장이 되었어. 샌드위치 신세라고 할까. 원숭환이 죽고 나서 가도는 무주공산.. 명나라의 유홍지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도의 일인자 되었어. 조선이 기회다 싶었어. 명나라의 반란을 일으킨 유홍치를 잡아 명나라에게 도움을 주고, 후금에게도 가도를 정리했다고 할 말이 생기고…. 그렇게 생각하고 가도 정벌을 나섰는데, 유홍치가 재빠르게 도망을 가버렸어.

그런데 도망을 갔던 유홍치는 명나라 정부를 어떻게 꼬득였는지, 반란군이 아닌 정식 관리인으로 다시 가도로 귀환을 했어. 모문룡이 유홍치로 바뀌었을 뿐 바뀐 게 없었어. 다시 조선을 괴롭히고 수탈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하고 내부 분란으로 죽고 말았단다.

정묘호란 이후 돌아간 후금은 조선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어. 화친을 맺으면서 약속했던 것들을 실행이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야. 무역 거래를 하기로 했는데, 조선이 무역 거래에 미온적이었고, 명나라보다 후금이 더 강한데 제대로 된 대접을 안 한다고 불만을 가졌어. 화친의 약속으로 조선의 배와 수군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조선은 그것도 빌려주지 않았어. 임진왜란에서의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주변국가들은 당시 조선의 수군과 전함이 명나라보다 낫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대. 그러고 보면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어서 그나마 결국은 승리를 했는데, 이때는 그런 영웅도 없고, 무능한 임금만 있었으니

5.

홍타이지는 명의 거점이었던 대릉하성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었어. 이 전투를 통해 명나라의 중요 장수들이 청으로 귀순을 했단다. 홍타이지는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고, 그들도 후한 대접에 보답을 하듯이 명군이 가지고 있던 대포와 전함 기술을 전수해주었어. 이로써 후금은 수군도 갖추게 되었단다. 조선은 여전히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장차 후금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도망가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러면서 방어진지도 강화도에만 집중을 하였단다. 참나.. 백성들은 육지에 다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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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인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신경을 썼어. 자신의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는데만 신경을 썼어. 이것으로 신하들과 계속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일이 년도 아니고 무려 10년이나 이어졌단다.

그 사이 후금은 계속해서 화친 때 약속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인조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의 처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후금과 절교 선언을 해버렸어. 대단한 용기일세. 많은 신하들이 만류하고 간청을 했지만, 절교 선언은 홍타이지에게 전달을 했어.

홍타이지는 오히려 조선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였어. 지금은 명과의 전쟁에 치중을 해야 할 때였거든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존재로 생각을 했을 거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이미 손 안에 든 물건이라고 생각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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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년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인조의 실정을 이야기하면서 정신 좀 차리라고 이야기했지만, 쇠 귀에 경읽기였어.. 강학년의 비판을 소개하면서 병자호란 1권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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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1634 11, 강학년은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자신을 장령으로 임명하자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인조의 실정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광해군의 아들을 죽인 것, 숙부 인성군을 죽인 것, 생부 정원군을 부묘하려는 것 등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조반정 이후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다음의 내용이다.

<서경>정치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어하고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전에 보전하라고 했는데 전하의 국사는 이미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들어섰습니다. 여러 차례 대란을 겪었음에도 조금도 허물을 반성하지 않고 고식책만을 써서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옛날 난정 때문에 나라를 전복시킨 자들과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전하께서 반정한 거사는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세상의 드문 조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엄연년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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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259)
정묘호란 이후 조건은 이렇게 모병과 후금군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오랑캐’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을 힐난했고, 후금은 그들대로 조선이 맹약을 어리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조선 조정은 양자 사이에 끼여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은 부득이한 기미책(羈縻策)임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후금 사신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모병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단을 일으켰고, 후금군도 그에 맞서 병력을 풀어 요격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모병들은 후금군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 조선 관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요컨대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샌드위치’가 되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은 화약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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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5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정으로 명의 눈치를 봤다던 인조 이야기에서 부정선거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박근혜가 연상되네요...

bookholic 2018-04-06 00:10   좋아요 1 | URL
두 분 모두 무능함의 쌍벽을 이루고 있어, 저도 박근혜가 많이 생각났어요..^^

레삭매냐 2018-04-0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선조 다음으로 무능한 왕이 인조가
아닐까 싶네요.

오늘 장만 평전이 나왔다는 소식에 검색해
보니 이괄의 난이 엮어 있더군요...

조선 역사에서 외적이 아닌 국내 반군에게
도성을 뺏긴 모지리 국왕은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대요.

명나라 깡패 모문룡의 갑질 자유이용권...
빵 터졌습니다.

국가운영 대신 정권유지에만 관심있는 정권
의 말로는 결국 삼전도 치욕으로 이어졌지요.

bookholic 2018-04-06 00:13   좋아요 0 | URL
장만이라는 사람은 저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서..^^
<장만 평전>이라는 책 검색을 해봤어요...
관심리스트에 추가해야헸습니다^^
국가운영 대신 정권유지에만 관심을 갖다 보면
삼전도 치욕이나 탄핵 치욕으로 이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