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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스무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열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여행에서 돌아온 날. 집에 도착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알라딘에서 온 메일이 있었다. 이주의 마이리뷰에 당선되어 5만원이 적립되었다는 것이다. 알라딘에 로그인을 하니 하루 평균 10여명 남짓 드나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5,6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 리뷰가 뭔가 찾아보니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또 별로 쓰고싶어하지도 않았던 김훈의 책 <밥벌이의 지겨움>에 관한 것이다. 즐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뭔지 모르지만 묘한 기분이 되었다. 아마도 자기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학부모가 몰래 들이민 촌지를 뒤늦게 확인했을 때의 선생님의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알라딘 서점에는 독자들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기능들이 있는 것 같다. 책을 살 때 책값으로 대치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적립해준다거나, 다른 사람의 리뷰에 thanks to를 눌러주면 리뷰를 쓴사람과 책을 사는 사람에게 약간의 적립금을 주는 것 등 말이다. 이제 겨우 50여편 정도 올라 있는 허접한 나의 리뷰들도 심심찮게 누군가가 thanks to를 눌러 주고 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고마운 분들(경제적 의미는 아닌 다른 의미로)에게 감사드린다. '즐겨찾는 서재' 에 등록해둔 서재의 글들을 읽기 위해 매일 아침 로그인을 하게 되는데 껌값도 안되는 돈이지만 어떤 분이 이걸 눌러주고 간 날은 오색풍선을 든것처럼 마음이 즐겁고 혹시나 오탈자나 잘못된 정보가 있지나 않았을까 싶어 그 리뷰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
알라딘에서 마이리뷰를 뽑는 기준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thanks to 를 눌러 책 판매에 도움을 준 것이 기준이라면 명백하게 이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리뷰에 추천은 고사하고 thanks to를 누른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선택이 되었지만 작은 기쁨 하나는 남는다. 그것은 알라딘 관계자들이 아직까지 그렇게 상업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김훈의 책들을 다 찾아 보았더니 이제 안 읽은 책은 <자전거 여행> 한권만 남는다. 읽지도 않으면서 책은 왜이리 사다 쟁여놓았는지...... 하여간 빚 갚는 심정으로 <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을 읽었다. 배앓이로 뒤틀리는 창자를 기침이 다시 곧추 세워놓는 바이러스 하치장 같은 몸둥이를 방바닥에 뒹굴리면서 그나마 멀쩡한 눈이 있어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읽은 김훈의 모든 소설에 등장하는 '냄새'에 대한 천착 때문에 나는 김훈 소설에서 냄새의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집어든 책이 후각이 가장 발달한 개에 대한 이야기니 극약처방이 아닐 수 없었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며칠째 방바닥과 소파위를 번갈아 뒹굴고 있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냄새맡던 우리집 강아지를 생각하며, 또 스토커처럼 내 곁을 맴도는 이 작은 강아지의 발바닥을 끌어다 냄새를 맡으며 <개>를 읽는 시간은 생각외로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김훈의 다른 소설처럼 냄새가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으니까.
언젠가 딸아이가 물감을 묻혀 찍어낸 강아지 발바닥 무늬를 보고나서야 나는 강아지의 발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앙증맞은 강아지 발바닥에서는 누룽지 사탕 냄새가 난다. 피곤한 날 소파에 뒹굴 때 묘하게도 이 강아지의 발바닥 냄새가 내겐 위안이 된다. 만져보면 폭신폭신한 것이 제법 탄력적이기도 하다. 김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는 우리집 강아지보다 훨씬 큰 진돗개 숫놈 '보리'다. 그의 소설 <화장>에 잠깐 등장했던 개 이름도 '보리'였던 것 같다. '보리'는 댐이 건설되는 어느 산간마을의 노인 부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댐에 점점 물이 차올라 살던 집과 논밭을 버리고 떠날 때 보리는 노인 부부의 둘째 아들이 사는 서해안의 바닷가 마을로 가게된다. 주인부부와 초등학교 5학년생인 영희, 두살박이 영수와의 삶을 살아가는 보리의 이야기가 이 책의 줄거리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에 붙어있는 '가난한'에 주목했었다. 개에게 있어서의 가난함이란 무엇일까가 내 궁금증이었는데 책을 다 읽을때까지도 이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나니 이것은 개를 위한 수식어가 아니라 김훈 자신을 수식하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전거를 친구삼아 곳곳을 떠돌 때 주인없는 마을에서 울부짖는 개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는 발딛고 선 어느 곳에서나 만나는 모든 사물들과 혼자 노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버림받은 개들은 굶주리고 상처입었을 것이고 그런 개들과 그는 또 한 몸이 되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개가 되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품종 좋은 진돗개다. 어찌나 영특하고 부지런하고 사람의 마을을 잘 읽어내는지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 보리가 바라보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는 것같아 보리는 안타깝다. 내가 보는 보리는 어찌나 학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고 관념적인지 무섭기까지 하다.
나와 동거하는 인간들은 나보다 짐승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개구리, 열대어, 꿩, 닭, 개 등 살다간 동물의 종이 다양하기도하다. 말 그대로 꿩먹고 알먹던 꿩이야기, 어린 아들이 학교 앞 육교 위에서 건강한 놈이라고 골라잡아와 장닭이 되도록 키웠더니 새벽마다 동튼다고 고래고래 울어제쳐 15층 아파트 사람들의 새벽을 흔들다 쫓겨난 우리집 '계두', 집안에다 오줌싼다고 신문지를 말아 몽둥이 찜질을 했더니 내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서너시까지 오줌을 참던 풍산개 '백구', 오줌은 참아줘도 내가 채팅하는 꼴을 못보겠던지 실리콘으로 발라놓은 전화모뎀선을 잘근잘근 씹어놓던 놈. 한번만 더 개를 집에 데려오면 내가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나는 성질 드러운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후에 우리집에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으면서 날마다 내게 침을 발라놓는(?) '해피'. 서울 한 복판에 살면서 겪은 짐승과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의외로 많다. 더 궁금하신 분들은 개인적으로 문의하시압!
대추나무 가시가 박힌 듯 움직일 때마다 왼쪽 이마를 쑤셔오는 통증 가운데서도 함께했던 동물들과의 시간을 추억하는 동안은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잠시 맑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머리의 통증이 가시면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고 무언가 따듯한 것이 눈시울을 적셔왔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날 고흐가 즐겨마셨다는 압생트 한잔을 마시고 선실에 널부러졌을 때 내 몸을 낱낱이 핥고 지나가던 파도의 혓바닥처럼 김훈의 <개>를 읽으며 내 기억의 한 모퉁이에 숨어있던 말 못하는 짐승들의 눈빛과 몸짓들이 나를 핥고 지나갔다. 김훈에게 빚갚으려고 읽었는데 또 빚을 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