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에릭 홉스봄은 올해 91세, 1917년 생이다. 지난여름 용정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문익환 목사와 시인 윤동주가 모두 1917년생이었다고 한다. 정치적 환경 탓인지 우리나라에는 이 나이의 세계적인 학자가 없는 듯하다. 영국계 유대인인 저자는 한 세기를 살면서 『극단의 시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미완의 시대』등 시대 시리즈를 썼다. 그러나 이 책의 원제목이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인데 이것을 『폭력의 시대』로 번역한 것을 보면 편집자의 의도가 제법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시대’ 시리즈 책들의 원제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를 분석했던 홉스 봄은 『폭력의 시대』에서 21세기를 분석한다. 그는 긴 역사의 터널에서 공시적으로 21세기를 선택하고 다양한 정치적 주제들로 탐구한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문제, 과거 영국과 현재의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의 성격과 미래, 민족주의의 성격과 변화, 자유민주주의의 앞날 그리고 정치적 폭력과 테러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가속화 되고 있는 세계화에 힘입어 홉스 봄이 선택한 이러한 주제들은 힘을 얻는다. 결국 이 책의 원 제목인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은 홉스 봄이 21세기를 요약하는 말이다.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40년에 걸친 미․소간의 냉전시대로 요약될 수 있다.  이시기의 전쟁은 주로 국가들 간에 벌어졌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붕괴이후 전쟁의 성격은 변해가고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전쟁의 주체가 아니며 내전이 증가하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전쟁의 피해자 역시 군인에만 그치지 않고 무고한 민간인으로 확산되고 있다. 또 반사회적으로 간주되는 국내외적 활동 역시 전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이어서 전쟁의 성격은 더욱 복잡해졌다. 실체가 분명치 않은 ‘마피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등이 그 예다. 

 

 

 19세기의 영국과 21세기의 미국은 세계적인 제국이다. 두 나라는 세계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군사력, ‘세계의 공장’이라 할 만큼의 자산, 영어의 세계화 등 제국으로서의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영토의 규모, 제국으로서의 사명감과 국가권위의 유무 등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미국은 팍스 브리타니카를 모델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꾼다. 그러나 영국이 자국의 한계와 시대의 변화를 인정한 것과는 달리 미국은 정치 군사적 힘만 믿고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억지를 쓰고 있다.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 역시 변화하고 있다. 냉전이 종식된 후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의 독재시대가 되었고 경제, 기술, 문화, 언어 등 다양한 영역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영역에서는 지리적 개념의 국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분증은 출생증명서나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패스포트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세계화는 자본과 무역의 이동은 성공적이었던 반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의 확립은 실패로 드러났다. 소련의 붕괴와 세계화 이후에도 외국인 혐오증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홉스 봄이 축구를 세계화와 국가적 정체성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것으로 들고 있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술과 군사력에서 가장 앞서있는 미국은 민주주의를 강압적으로 전 세계에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아무리 바람직한 제도라고 해도 세계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나 초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다. 오늘날 가장 명백한 전쟁의 위험은 통제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미국 정부의 세계적 야망에서 비롯된다. 국제사회의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미국이 이런 과대망상증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홉스 봄의 책을 읽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지도의 퍼즐 맞추기처럼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미국의 폭력 뒤에 감추어져 있는 경제논리가 빠져있는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섹스 씬이 빠져있는 허리우드 멜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밍밍하다.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게 느껴지던 것은 책을 통한 나의 변화다. 경제관련 책은 나를 다분히 감정적으로 만드는 반면 정치서적은 나를 상당히 이성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적 서술이 단단히 한 몫을 했을 터이지만 왠지 감당할 수 없는 적과 부딪쳤을 때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것과도 같은 심정이 되는 것 같다. 내게는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그래서인지 표지에 실린 홉스 봄의 사진이 책을 덮고 나자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높은 곳에서 얕잡아 보는 듯한 시선과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린 입술이 나를 비웃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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