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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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말 그대로 '포토카피'라는 용어가 잘 어울리는 산문집이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여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 순간들을 묘사해 놓았다. 존 버거의 이 책 속 문장 중에서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중)"는 말이 있는데 에세이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순간을 영원히 붙들어 매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내 사진을 앨범에서 한 장 꺼내 글로 묘사한다면 이런 느낌이 들 수 있을까, 나도 한번쯤 이런 '포토카피'라고 하는 에세이를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읽다 또 느낀 거지만...  난 이렇게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듯 묘사한 글을 좋아한다는 거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내가 잘 몰랐던 벽화를 복원하는 여인이기도 하고,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돌아간 아들을 추모하며 평생 상복을 입고 있는 안젤린이기도 하다. '안티고네를 닮은 여자'로 묘사되는 - 1943년 8월, 영국 켄트 주 애시퍼드의 한 요양소에서 '굶주림과 폐결핵에 기인한 심장근육 변성. 그에 따른 심부전'이 사인이었던 서른 네 살의 젊은나이에 단식으로 인한 자살을 선택한 여인 - 철학자 시몬 베유이기도 하다. '샤프카를 쓴 젊은 여인'은 신문에 실린, 러시아 의회 건물을 방어하기 위한 시위대의 한 사람일 수도 있다. 또는, 먼저 떠나 버린 친구일 수도 있고 저 멀리 바다 건너 멕시코의 무장 반군의 지도자일 수도 있다. 29 개의 짧은 에세이에 그리운 사람들, 혹은 신문에 실린 사람들, 그림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가의 가장 친한 친구 토니오는 마드리드 북쪽 엘 레켄코 계곡에 오두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땅딸막한 체격의 소몰이꾼 안토닌을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쓴다. 두 사람은 그저 가끔 테라스에 앉아 계곡 아래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거나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하고 산록에서 본 것을 주섬주섬 주워 섬기기도 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토니오가 안토닌에게 가벼운 식사를 하자고 청했고, 데려온 개 두 마리는 밖에 두고 들어오라고 말한다. 포도주와 빵, 올리브 기름을 얹은 토마토, 나이프와 포크를 더해 차려진 식탁에서 떠듬떠듬 대화가 이어진 식사가 끝났을 때 안토닌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평생 이런 식사는 처음이었소.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소." 엄숙히 선언하듯 말하는 안토닌은 사실 이런 식사 자리가 처음이었고 어색하기만 했는데 평생 산 속에서 '소몰이꾼'으로만 살아온 그에게 이러한 소박한 식탁조차도 사치로 여겨진 듯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서로를 껴안고 만다.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의 포토카피)


적어도 두 대륙의 산악에서 게릴라로 싸워 온 모하메드 브라힘은 뛰어난 요리사일 뿐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하루 전부를 기꺼이 바칠 그이지만 이야기는 그가 열세 살 때인 1947년 시작된다. 변성기를 맞아 목소리가 갈라지는 나이였지만 결단력만큼은 어른 못지 않았고, 그의 앞에 닥친 위험 또한 어른의 그것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가 되던 그 시절, 난민촌이 위험에 처하고 파키스탄으로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일부는 구조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남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참함 속에서 걸어서 탈출할 수 밖에 없다. 모하메드는 비해기를 타고 떠나기 전 형이 건네준 엽총 한 자루와 탄띠, 백 루피짜리 지폐를 들고 난민 행렬에 합류했다. 도중에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모하메드는 적이 달려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땅에 엎드려 기다리면서 도적 넷을 쏘아 쓰러뜨린다. 어느 한 낮, 행렬의 일행 중에 한 남자가 망고 숲으로 걸어가는 여자를 겁탈하려 할 때 따 따라가 사살한 모하메드는 살인자로 몰려 위기에 처하는데 아편쟁이 남자 '무사'가 구해준다. 위엄과 기품이 있었던 무사는 아편의 기운이 떨어지자 행렬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행렬이 마침내 국경에 도착했을 때 무사와 헤어진다. 칠 개월 후 보도에 웅크리고 앉은 남자에 걸려 넘어질 뻔한 모하메드, 가까스로 멈추고 돌아보니 칠 개월 전 헤어진 '무사'가 아닌가. 그는 무사를 흔들고 소리쳐 불렀지만 무사는 전혀 알아듣질 못하고 무사를 흔들며 소리치던 모하메드는 균형을 잃고 쓰러져 길가에 엉켜 넘어진다. 분노와 슬픔에 북받친 모하메드는 오랫동안 울었다. 그 순간 그는 혁명가가 되겠다고 맹세한다.('길가에 쓰러진 두 남자'의 포토카피)




<문장들>

  내가 그녀를 그리고 있음을 그녀는 물론 알고 있었다. 내 겨냥과 마주치기 위해 그녀는 무언가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보내는 것이 내 겨냥을 벗어나지 않고 닿으면 좋은 그림 하나가 생기게 될 것이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닮음이란 생김새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손가락 끝이 만나는 것같이 두 방향에서의 겨냥이 그림에 포착된 것이리라. ('6. 턱을 괴고 있는 젊은 여자' 중에서) 


  그는 자신의 모성적 글씨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11.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중에서)


  풀밭에 앉아 그 그림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갑자기 서늘해진 뭍으로, 아직 더운 바다로부터 미풍이 불어온다. 풀잎 조각 하나가 그림 위로 날아가 앉았다. 또 다른 그림 위론 작은 열매 하나가 날아 올랐다. 양피지처럼 투명한 옥수수 이파리 하나가 근처 밭을 맴돌다가 또 다른 종이 위로 날아 올랐다. 이런 비행들을 보지 못했다면 원래 그림에 그려져 있던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나는 이제, 어디에다 예술과 자연, 생성과 기원을 구분하는 선을 그을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신비에 싸여, 나는 어두워진 후까지, 닭들이 잠잠해진 후까지, 그 그림들을 응시했다. ('12. 풀밭 위의 그림' 중에서)


  마르셀의 빈 오두막 문을 밀었다. 기차의 칸막이 방만한 방이 둘 있다. 나는 속으로 번져가는 감정을 누르며, 유리 잔에 물을 채우고, 한 묶음 손에 들고 간 꽃을 꽂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하루가 저물 때면 거기 앉아 나는 커피를, 마르셀은 우유를 마시곤 했었다. 그가 가 버리고 없는 지금, 그 의자에 다시 앉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소떼들의 종소리 뒤로 고함치며 욕지거리하며 다가오는 마르셀의 목소리가 정적 속에서 들려 올 때까지, 나는 거기 가만히, 가만히, 서 있었다.('15.잔에 담긴 꽃 한 묶음' 중에서)


  책상 오른쪽은 창문이다. 북쪽을 향한 커다란 창이다. 오귀스트 콩트 가(街) 육층에 위치한 아파트는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바로 아래의 뤽상부르 공원부터 사크 레 쾨르까지 파리 전체가 내다보인다. 그 창가에 서서, 창을 열고, 겨우 비둘기 네 마리 정도 앉을 수 있는 발코니 쇠 난간에 기대어, 저 지붕들과 역사를 넘어 상상 속으로 비행한다. 상상 속의 비행에 꼭 맞는 높이다.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도시의 먼 외곽, 그 방벽들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의 높이. 그런 비행이 이 도시만큼 우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창 밖으로 보이는 그 풍경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가진 특권의 부당함에 깊이 절망했다. "진리와 고통은 자연스런 동류이다. 둘은 우리 존재 안에, 영원히 말없이 서 있도록 저주받은 침묵의 애원자들이기 때문이다." ...(중략) ... 아파트 입구 (지금은 들어가려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위 벽에 명판이 하나 붙어 있다. "철학자 시몬 베유, 1926년에서 1942년까지 여기서 삶." ('20. 안티고네를 닮은 여자' 중에서)


  삶은 힘들고 참혹해져 갔다. 너무 참혹해서, 특히 여자들의 경우 그런 삶을 다른 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나았기에, 인간은 출산을 중단하려 했다. 신이 성적 즐거움을 주는 행위들을 고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신은 하나씩 하나씩 그것들을 만들어 갔다. 그때 이후로, 사랑 행위를 하는 남녀는 힘든 현세를 용서하며 내세를 꿈꾸게 되었다... ('25. 바구니 안의 고양이 두 마리' 중에서)


  그날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스방은 세잔이나 피사로처럼 현장에서 사생하는 마지막 화가였다. 스방은 그들처럼 그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 보려는 시늉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손에 붓을 쥐고 눈을 크게 뜨고 무심히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무심히? 그렇다. 어떤 이유 같은 것은 묻지 않고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무심함.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화가들에게서 성인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겸손이 전혀 꾸밈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28. 19호실' 중에서)


  "저들이 입만 열면 우리에게 갖다 붙이는 '폭력 전문가'라는 말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그래요. 우린 전문가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전문은 희망입니다. ...우리의 기진하고 부서진 몸으로부터 반드시 새로운 세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생전에 그 세상을 볼 수 있느냐고요? 그게 중요할까요. 그런 세상이 올 것을 확신하고 있는 한, 또 우리가 가진 모든 것 ㅡ 삶, 몸, 영혼 ㅡ 을 길고 고통스러운 탄생,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인 탄생을 위해 바친 것을 확신하고 있는 한, 우리 생전에 이루어지고 아니고는 상관이 없다고 믿습니다. '아모르 이 돌로르(Amor y dolor)' ㅡ 사랑과 고통 ㅡ 이 두 낱말은 운만 맞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함께 동맹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29. 반군 부사령관' 중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창문 밖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하얀 새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 오른다. 다시 돌아온 '백로'로구나! 반갑다~~~

올핸 비가 자주 와서 그런지 우리 동네를 흐르는 냇물에서 논으로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아침에 보니 트랙터로 벌써 논을 갈고 계셨다. 논을 갈고 물을 채워 놓으면 어김없이 백로가 날아든다.^^ 

아랫 집 어르신 댁에 활짝 핀 목련 구경하러 가야겠다. 조금 떨어진 우리 집에서 내려다봐도 어찌나 탐스러운지 절로 기분이 들뜬다. 온 동네가 벚꽃이 피려고 준비 중인데 어르신 댁 커다란 벚나무는 아직 소식이 없다. 어르신 댁 벚꽃이 피면 나무가 크고 탐스러워서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루는데 마치 아름다운 책 표지에서 본 듯한 그 정경을 난 너무 좋아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피겠지?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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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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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들이 있다. 읽고 나면 쓰고 싶은 말들과 생각이 가득해서 얼른 뭐라도 남겨야지 하는 책들. 그런 책들은 읽을 때부터 리뷰를 꼭 남기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너무 많은 말들이 들어차게 만드는 책들은 그래서 더더욱 리뷰를 쓰기 어렵다. 쓰기 전까지 내 속에서 어떤 말들을 써야 할까 어떻게 써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고, 그런 말들이 다행히 정리가 되면 쓰는 건 순식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간절했던 마음은 정리가 안돼 흐지부지 되기도 하고 결국 쓰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오히려 생각의 갈래가 너무 많아서 방해를 받게 되는? 그런 책들. 지나고 생각해봐도 안타깝지만 그땐 이미 글을 쓸 동력을 잃은 셈이 되어 다시 그때의 진심을 끌어오기란 쉽지 않다. 배리 로페즈의 이 책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으면서도 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특히 이 책의 제목과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하늘 한 조각'에 실린 내용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계속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힘이 들어 잠시 쉬기도 했지만 중간에 그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절대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 혹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결혼 전에 다녔던 회사는 집에서 가까운 지금도 그 곳에 그대로 있는 기*자동차 소하리 공장이었다. 그곳 공장 업무부(총무부)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 자동차를 조립하는 생산 라인이 있으니 회사의 특성 상 여직원은 극히 드물고 - 수천 명의 남자 직원들이 득시글한 곳이었다. 당연히 남자 직원들의 푸시가 많을 수 밖에. 정말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젊고 날씬하고 키도 큰데 얼굴도 그럭저럭... 주말엔 자주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1980년대 말이었으니까 엄만 그런 나를 못마땅해 하시고. 그런데 원래도 우리 엄마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엄마의 결정적인 말 한마디" 때문에 이후에 내가 겪은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지... 엄마가 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난 솔직히 엄마의 그 말을 죽을 때까지도 엄마에게만 퍼붓거나 싸우지 않는 한,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더더구나 작가처럼 글로 도저히 남길 수 없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엄마니까 할 수 있다는 말, 엄마니까 해야 된다는 말. 그런 말은 개나 줘버려. 그래서 엄마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오히려 더 엇나가기도 하고 더 많이 싸우고 다투게 되었는데 아마 엄마는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충격이었고 심한 상처를 냈는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거다. 원래 가해자는 잊고 잘 사는 법이니까. 그 말 때문에 이후의 내 삶에서의 어느 한 부분에서는 지극히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 말 한마디로 인한 트라우마와 떨어진 자존감은 결코 회복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그 말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면서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마음은 30년도 더 지난 지금이라고 해서 바뀌지 않았다.그 말이 나는 너무너무너무 너무 싫었다. 고작 말 한마디였음에도 그 위력이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기도 한다는 걸 나는 절실히 깨달은 셈이다. 




그런데.... 작가 배리 로페즈는 불과 7살의 나이에 4 년 간이나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정황 상 어머니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머니가 몰랐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배리 로페즈는 동생에게만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일을 참아냈지만 동생도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이주를 한 후 비로소 새 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어떤 해결을 맡겼지만, 새아버지는 그런 배리의 절망을 헤아려보려 하지도 않았고 시간을 끌면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 일은 그만 잊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30 년 간 배리는 그 길을 택했다. "침묵".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못했고 새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무시 당하고 배신 당한 것이다. 배리는 말한다.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믿어주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고 "존엄의 감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과 "자기 존중의 회복이 돈보다 중요"하고 "복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침묵을 택했다고 해서 그 일을 정말 잊을 수 있었을까. 끝까지 침묵할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의 인생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가늠할 수조차 없는 절망 속에서 그 고통의 시간을 배리 로페즈! 그 사람은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어떤 말로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믿음을 저버린 어른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중 한 명이 성폭행 당한 다른 소년 세 명을 찾아냈는데 "괜찮은 아이가 없었다"고 했고, 배리가 그 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던 거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을 새 아버지가 말해 주었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갔다고???!!!!  그럼에도 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석사를 하고 박사에도 도전했으며, 환경 운동가, 작가로서의 길도 열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잊으려고 해도 속에서 치받아 올라왔을 테니까... 그럼 아마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어서 읽는 내내 힘들었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라는 제목과 푸른 숲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표지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내용이 책의 앞 부분에, 특히 '하늘 한 조각'이라는 내용에 집약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책을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마냥 아름다울 것으로만 예상되는 제목과 표지, '하늘 한 조각'에서 연상되는 건 그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내용일 것이라는 상상만이 가능했다. '하늘 한 조각'이 책의 뒷 부분에 배치가 되었다면 이 책에 대한 인상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내, 1989년부터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을 때 나도 마음 속으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리는 그때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스스로 살 속에 포탄 파편이 박힌 채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파편을 꺼내고 싶었다. 수 년 간 구석에 밀쳐뒀던 의심들과 이미지들이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날마다 내 안의 무참한 결핍과 대치하느라 끊임없이 뱃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안에 황폐한 텅 빈 갱도가 뚫렸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배우자의 애정으로도 친구들의 우정으로도 직업의 성공으로도 없앨 수 없었다. 하지만 과감한 한걸음, 과거와의 정면 승부를 시도한다면 이런 사고의 틀에 균열을 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방법이라면 자신을 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109쪽)."





"외상성 성적 학대(연쇄 성폭력을 일컫는 심리학 용어)"를 당하던 기간 동안 유일하게 내게 가장 깊은 안도감이 찾아온 때는 내 주변의 근원적인 자연의 힘을 마주하는 순간들이었다. 모하비사막에서 서쪽 샌퍼낸도밸리로 불어오는 뜨거운 샌타애나 국지풍, 주마와 말리부 서쪽 해안에 밀려드는 태평양 태풍의 큰 파도, 로스앤젤레스강으로 흘러가는 캐벌레로 크리크가 범람해 동네가 침수되던 겨울철 홍수, ... ... 인적 드문 샌타모니카 산자락 어디쯤에 혼자 앉아 코요테나 브러시토끼가 나타나길 기다릴 때,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운이 솟았다.(108쪽) 

그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치유가 되었던 일은 세상의 끝까지 뛰어들어 가는 모험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동물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나 보다. 숲과 평원을 걷는 일, 끝이 보이지 않는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의 사막엘 가고 알래스카의 유콘강 상류로, 남극의 세인트로렌스섬으로, 베링해 북쪽으로 답사를 떠나 그곳의 동물들의 생태를 연구하는 캠프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울버린과 흰올빼미, 붉은여우와 카리부, 툰드라 회색곰과 늑대, 흰매를 비롯한 야생동물과의 조우, 알래스카 선주민들과 함께 바다 코끼리를 사냥하러 떠나고 남극의 사우스조지아섬의 노르웨이 포경기지, 그리트비켄 공동묘지에 묻힌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의 묘지를 둘러보고 샴페인을 홀짝이며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 모든 장소들, 캠프활동과 연구활동에 참여한 이력들은 이 책 곳곳에 넘쳐 난다. 누구나 원한다고 경험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특권의 한복판에 머무른 나날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을  작품으로 써내고 다른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환경 운동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그가 스스로 실천해 온 인간과 동물, 지구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담담하게 펼쳐 보여준다. 해양 산성화, 기업의 부정행위, 정부의 부패, 끝없는 전쟁을 비판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든 살아내려면 어떤 것이 유의미한 삶인지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기임을, 근거 없는 희망에 꾸역꾸역 목매지 않기를, "황홀과 박애에 대해 더 깊은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더 큰 포용력을 탐색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지구 끝까지 달려간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인간이 기대하는 좋은 인생이란 전적으로 자신이 바라본 방향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56쪽)"고 말하는 그, "레시다 서부 어디쯤 비포장도로의 포플러 나무와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에서 여러 번 상상했던 내 인생의 비전에는, 당연하게도, 카우보이 영화에서 배운 대로 불행한 사람을 구하고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주입되어 있었다(55쪽)"고.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한편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므로 도망치고 싶은 적도 있었다고. 성인기의 절망에 혼자서나 남들 앞에서 흐느끼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신성의 영역이라 느낄 만큼 지극히 평온하고 고양되는 일의 기쁨을 마주하기도 하는 등의 극단적인 감정들을 인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었던 글이 '마음가짐: 문턱'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그동안 작가가 참여한 수많은 탐사 프로그램들을 복기하면서 왜 작가는 이렇게 세상의 끝으로 가지 못해 안달인 걸까, 고통을 몰아내기 위해 그런 것만은 아닐텐데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많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 대한 답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 같은 제도하에서 작가는 '자격'이라는 개념, 피부색이나 교육, 젠더, 인정, 소위 재능, 재산을 기준으로 우리 중 누구는 더 많이 누려 마땅하다는 전재가 존재함을 폭로할 소명이 있다"고 말한다. 극지나 바닷 속, 사막과 숲 탐사를 앞두고 두려움에 직면할 때 , 두려움이 나를 삼킬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이럴 때 발동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아마 일에 대한 '헌신'일 것이라고도 말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헌신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이런 상황에서의 헌신은 실제로 자아보다 더 큰 무언가를 향해 있다고 믿으며 친구들을 향한 사랑과 나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을 믿으며 더 정밀하게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는 '작가적 사명감'이 꿈틀댈 때,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한 발 내디딜 수 있었다고. 매일은 아니어도 한 번은 할 수 있었다고. 그 한 번이 도망치고 싶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지금부터 보게 될 테니까. 

이 아름다운 책에서 내 마음 속에 저장해 두고 싶은 문장을 꼽으라고 한다면, "마음가짐을 제대로 세우고 행동하는 것은 공포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사랑을 길러나가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341쪽)." 를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무지한 자만이 곤충과 철새가 이 세계를 떠나더라도 우리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니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할 지 모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무시무시한 불길이 팔레스타인을 태우고 시민들이 거리로 쫓겨나 포탄에 맞아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의로운 자에게 천국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발의 논리로 숲의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빙하가 녹아 잘 곳을 잃은 북극곰의 유빙 위 침대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에 실패한 세대라는 사실을 각성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사랑하는 것, 타인에게도 똑같이 촉구하는 것(255쪽, '공포시대의 사랑'에 수록)"이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기도 어려운 사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시대라서 -더구나 누군가 엄마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즉시 '예스'라 말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을 할 나이기에 -"냉철하게 바라본 우리 연약한 행성", "지구라는 대상을 향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향해 어색해하지 않고, 열렬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 불타는 세계를 두려움 없이 부둥켜안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돕는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염원이라고 말했다는 작가, 그리고 오리건 서부 매켄지 강가 큰 나무가 둘러싸인 집에서 45 년을 거주한 배리 로페즈의 마지막이 사랑에 둘러싸여 평온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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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03 1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좀만 더 빨리 올리시지… ㅠㅠ
은하수 님의 트라우마도 극복되시길 기원합니다.

은하수 2024-04-03 17:58   좋아요 0 | URL
앗... 왜요????
전 이 책 리뷰도 넘 힘들었는걸요 ㅠㅠ
지금이 최선이라구요^^
트라우마는 이제 극복이 안됩니다~~ 그냥 묻고 사는 거죠. 그래도 지금은 엄마와 그럭저럭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잠자냥 2024-04-03 18:35   좋아요 0 | URL
31일까지 리뷰 대회 응모하는 거였어요!!!!

은하수 2024-04-03 20:10   좋아요 0 | URL
ㅎㅎ
ㅈㅈㄴ 님을 비롯해 글 잘쓰시는 분이 넘 많은데다가 대회에 응모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글을 못쓸거 같아요~~
 
사유 식탁 - 양장, 영혼의 허기를 달래는 알랭 드 보통의 132가지 레시피 오렌지디 인생학교
알랭 드 보통.인생학교 지음, 이용재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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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어려운 요리 레시피들... 도구와 재료의 부재로 시도해보지도 못할 레시피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ㅠㅠ 누군가에겐 ˝영혼의 허기를 달래는˝ 레시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엔 공감.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이번에도 역시 ...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가슴 아픈 사실도 재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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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3-29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가슴 아픈 리뷰였네여...

은하수 2024-03-30 01:49   좋아요 1 | URL
ㅎㅎ
전 많이 아쉬웠어요.
이탈리아 요리 좋아하시는 분들껜 좋으실지도요...^^

구름표범 2024-03-3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진짜 아픈 후기네요 레시피에 큰 관심이 없어서 다행일까요..
알랭드보통은 즉시 한식 레시피를 내놓거라

은하수 2024-03-30 21:39   좋아요 0 | URL
ㅎㅎ
정말 해볼수 있는 요리가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대부분 모르는 요리들인데 사진도 거의 없어서 상상조차도 안되더라구요.
거기다 없는 재료는 왜케 많은지요... 아쉬움 가득이었답니다~~^^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 로맨스에서 돌보는 마음까지,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앳(at) 시리즈 3
신성아 지음 / 마티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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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연달아 읽게 된 사랑과 돌봄이 주제인 책들. 사랑에 수반되는 복잡 미묘함과 모순된 감정들... 혼자 감당하기 힘든 돌봄에서 파생되는 ˝감정과 사유, 성찰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고, 어쩌면 양립이 불가능할 듯도 한 사랑과 정치, 사랑도 정치적이라는 말이 아프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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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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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문제는 왜 언제나 여자들에게로만 귀결이 될까. 엄마라서 딸이라서 며느리라서 심지어 할머니라서, 큰 엄마라서까지... 어떠한 이름이어도 여자들 뿐이어야 할까. 다른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부정하면서 나도 그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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