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알려지지 않은 정책 결정자 윌리엄스의 역할
1)˝아무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의 결정: 미 군정의 실권자 윌리엄스
오늘 목표: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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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한국 주둔 미군과 동행한후, 하지의 개인 고문으로 3개월간 일하면서 윌리엄스가 한국 현대사에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상황과 구조는 미군 진주 이후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총체적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열쇠다. 윌리엄스 본인과 친구들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국에서의 3개월이 한국 현대사의 주요 경로를 결정하는 첫 디딤돌이 되었으며, 한국인은 자신들의 운명을 누가 결정했는지도 모른 채 발버둥치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같은 신세였다. - P229

나아가 윌리엄스는 막대한 전쟁후원금을 내서 친일파로 알려진 사업가도 사실은 자기 수입을 감추고, 일본에 제공해야 할 수입 2분의 1에 해당하는 수백만 원을 내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전쟁 노력을 사보타주했다며, 누가 이런 사람의 얘기를 책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마약왕"으로 알려진 전용순 등 유명한 친일파의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윌리엄스의 친일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와 심지어 긍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한 정보와 판단은 하지와 베닝호프의 친일 문제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들은 친일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친일파로 알려진 보수주의자, 교육자, 사업가 등이 사실은 항일 애국자였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졌다. 친일은 한국 내부의 문제일 뿐 미군정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238

넷째, 윌리엄스의 인식 중 놀라운 것은 북한의 소련 점령군에 대한혐오와 하지의 행정적·정치적 무능에 대한 칭찬이었다.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자비한 전체주의 정부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점령 정책에 있어서, 우리는 - P238

책임을 지고 있는 고위급 장군들이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너무 자주 하고 있다. 
다행히 우리는 정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장군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기들이 정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___한국인은 정부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은 장군들이 여기에 배치된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만약 장군들이 하고 싶은 바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더라면, 한국 인민들 사이에서 어떤 불충도 존재하지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1946년) 3월까지 정부를 갖게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미국 정부의 간섭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때까지 정부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 P239

윌리엄스의 발언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불러일으킨다. 일개 군의관이었던 윌리엄스 소령이 한국의 정부 수립, 장군들의 행정부 운영 능력등을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 직후 미군정 수뇌부의 행정적 무능과 정책적 판단 능력 부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하지 등 주한미군 고위 장교들이 모두 행정 업무에 무가능했으며, 사실상 멍청이였다는 평가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는 시기와 방법은 주한미군과 미군정이 마음대로 결정할 사만이 아니라 워싱턴이 연합국과 전시 외교를 통해 합의한 방침에 따라야할 사안이었다. 또한 하지가 
1946년 3월까지 정부 수립을 약속했다는 점도 진주 초기 미군정 내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우극(愚劇)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는 그런 약속을 할 위치도 아니었고, 그런 권한도 없는 상태였으며, 미군 지휘체계상 고위급 정책을 실행하는 말단의 집행자였을 뿐인데도 최고위급 정책 결정자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40

나아가 미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SWNCC 등이 제시한 점령의 기본 원칙 중하나가 특정 정치 세력을 육성·지원하거나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하지는 진주 초기부터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렇다면 미군정은 어떻게 행정 업무와 
정부 업무를 처리했는가? 그것은 바로 한국인 고문과 전문가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은행가를 불러서 정부의 금융체제에 대한 조언을 듣고, 농부를 불러 농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바꿔 얘기하면 윌리엄스는 미군정의 행정과 통치는 정책의 방향성을 갖고 일관성 있게 운영된 것이 아니라 베닝호프가 보고서에서 주장한 바대로 "매일 매일의 기초 위에서 임시방편으로 자타칭 한국인 전문가들을 불러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와 윌리엄스가 마음대로 한국 정부수립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했어야 하는데, 본국의 방해와 신문기자들의 보도로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한국인 고문 및 자문에 기초해서 인선을 하고, 정부의 기능을 수행해왔으므로, 최종적인 책임은 한국인에게 있다는 취지였다. 
미군정 진주 직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엽관운동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실상이 이러했다. - P240

윌리엄스와 베닝호프는 미국 사회에서 전혀 기억되지 않는 평범하고 "아무도 아닌자들"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미군정 경험은 기억되지 않을 정도의 단기간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되지 않는 "아무도 아닌 자들"이 미군정 진주 직후 자유재량적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경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253

커밍스의 지적처럼 미국인 지도자들은 한국 점령에 있어서 악의를갖고 있지 않았으며, 음모가들도 아니었고, 착취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악인이나 위선자가 아니었으며, 진지하게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확신했다. 문제는 이들의 인식이 미국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식민지에서 막 해방된 한국에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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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보스코는 말했어. "믿음을 가져라, 그러면 기적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아메리카 성당은 열려 있었어. 나는 들어갔고, 첫 번째 제대인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서 전능하신 분에게 내게 죽음의 여신을 보내지 않으셨으니 알렉시스를 되돌려 달라고 기도했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걸 보시고, 모든 걸 하실 수 있는 그분에게 제대에서 검은 옷을 입고 성당을 내려다보면서 수수하고 값싼 금도금 금속 조각의 후광을 받은 고통의 성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어. 남는 지폐를 아궁이에 태우는 청부 살인자의 삶보다 더 텅 비어 있었어.
- P135

여기에는 죄 없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죄 많은 사람이야. 무지와 가난, 이런 걸 이해하려고 해야 하지만...……… 그런데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모든 게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는 범죄에 영합하게 되는거야.

그럼 인권은? 인권은 무슨 인권, 그런 건 생각해볼 가치도 없어! 그건 영합이며 방탕이고 방종이야. 
자, 그럼 잘 생각해 보자고, 만일 여기 아래에 죄지은 사람들이 없다면, 그게 뭐지? 그건 범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게 아닐까? 범죄가 스스로 저질러지지 않고, 여기 아래에는 죄지은 사람이 없다면, 죄 있는 장본인은 저 위에 계신 분이야. 이런 범죄자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무책임한 분이셔. - P150

그런데 누가 그분을벌주지? 당신이 벌주나? 이봐, 파르세로, 나한테 쓸데없는 거짓말 하지 마. 난 이제 그런 건 이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고 보았던 것으로 판단하건대, 당신이 멋지게 말하는 것처럼 ‘결국에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끝나게 돼. 나한테 인권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마! 즉결 재판과 벽 앞에 세워 총살하기, 그리고 그 벽에서 쓰레기장으로 던지면 돼.
"국가는 탄압하고 총을 쏘기 위해 있는 거야. 나머지는 국민선동, 그게 민주주의야. 더는 말할 자유, 생각할 자유, 일할 자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면서 버스를 만원으로 가득 채우는 자유는 없어. 그건 모두 개소리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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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러 해 전부터 핀치콘티니가에 대해-미콜과 알베르토, 에르만노 교수와 올가 부인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페라라의 에르콜레프리모데스테 대로에 있던 그 집에 살았거나 나처럼 그 집에 드나들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지만 일 년 전인 1957년 4월 어느 일요일에서야 어떤 자극과 충동을 받아 실제로 글을쓰게 되었다. - P7

제1부
1
핀치콘티니가의 묘는 크고 단단하고 정말이지 위풍당당했다. 어렴풋하나마 일면 고대 신전 같기도 하고 동양 사원 같기도 한 모양새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오페라 극장에서 유행하던 <아이다>와 <나부코>의 무대장치에서 본 듯한 모습이었다. 인근 시립 공동묘지를 비롯해 다른 공동묘지에서라면 그렇게 과시적인 묘라 해도 놀라울 게 없을뿐더러, 다른 많은 무덤에 뒤섞여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 묘지에서 그런 묘는 유일했다. 그래서 입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반세기가 넘게 더이상 아무도 묻히지 않아 버려져 있던 저기 안쪽 땅에 있기는 해도, 다른 묘와 확연히 달랐고 금방 눈에 들어왔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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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ㅡ미군의 남한 진주와 알려지지 않은 막후의 영향력

오늘의 목표는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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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24군단의 남한 진주와 최초의 정보:17 방면군의 정보공작, 통역·문고리 권력의 등장
인천으로 향하는 미24군단1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 점령을 담당하게 된 24 군단의 구체적인 임무는 명확하지 않았다. 남한에 군정을 실시한다는 점은 명확했으나, 군정의성격과 구체적인 정책, 한국인의 대우, 군정 기간 등에 대한 최고위급 정책은 제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획득한 사이판, 티니안, 괌, 필리핀, 오키나와 등에서는 공격 개시 전 군정계획이 먼저 수립되었고 군정훈령 및 정책이 출간되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사전에 연구되거나 준비가 진행되거나 군정계획이 수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태평양전구에서 진정한 의미의 군정이 실시된 유일한 지역이자, 사전 준비 없이 점령한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점령 임무는 단기간에 종료될 것이며, 미군은 곧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적이고 암묵적인 전제가 24군단 내부에 형성되었다. - P201

1938년 이후 열렬한 친일활동을 펼쳤던 이묘묵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을 친일파·공산주의자로 무고하는 한편 
이를 발판으로 하지의 통역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입신했고, 나아가 사상검사를 이용해 자신의 친일 기록을 소각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중의 하나였다. - P224

"미영타도, 귀축영미"를 열성적으로 외치던 친일파는 미군 진주 후 하루아침에 친미파로 변신했다. 양지에서는 애국자이자 독립운동가를 친일파로 중상모략함으로써 미군정의 문고리 권력을 차지했고, 음지에서는 총독부 고관들과 거래한 결과 일제에 협력한 자신의 친일 경력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
보통의 상식이나 이성적 사고가 통용되지 않는 아이러니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삼중의 악질적 반역자가 애국자를 친일파로 음해하고 친미파로 거듭나는 순간 한국 현대사의 앞길은 예측 불가의 험로로 예정되어 있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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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사: 현대 한국의 원형>
매일 50쪽 이상 읽기~~
오늘의 미션 클리어(179쪽)
‘1장 ㅡ 폭풍: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이중권력의 창출‘
여운형과 건준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치안유지와 당시 일본의 패망이 유력한 가운데 식량이 배급되고 있던 상황을 감안하여 식량배급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한 활동이 주된 목표였다. 하지만 이후 그 목표가 변질되는 과정 그리고 여운형이 남한에서 인민공화국 체제로 미국으로부터 정부의 행정권을 위임받으려 했던 과정과 단체가 와해되는 과정도 관계했던 여러 인물들의 기록으로 알 수 있었다.

인공의 실패 요인이 여럿 있었지만 후일을 생각했을 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면 ˝인공의 현실적 위치가 지방의 대중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 부분이었다. 서울에서는 이미 미 군정이 인민공화국에서 국國이라는 이름을 빼라고 강하게 압박을 가한 점, 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임시정부의 역할이었음에도 ˝인민공화국˝ 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논리적 모순으로 대내외의 공격이 거세 존속이 어려운 실정이었던데 반해 지방의 인민위원회에서는 인공에 대한 과도한 맹신의 풍조가 있었는데 지방의 대중에게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시일을 끌면서 혼란을 가중시킨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1장은 에필로그: 총독부의 전후 공작‘만 남았다.
이 부분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전공이 아니라 교필이었기 때문에 책 한 권으로 끝.
못내 아쉬웠는데 궁금했던 부분 단편적이나마 더 알게 될 것 같다.

결국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체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공의 현실적 위치가 지방의 대중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공은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의해 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임시정부의 역할을 자임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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