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 나오는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말. 이교도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했다는 말. “누구 내 목을 쳐 줄 그리스도교인 없소이까?”는 이교도 병사의 칼에 맞아서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생포되어 수모와 치욕을 당할 것을 염려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병사들이 전투 중에 죽는다면 적군의 손에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저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자살을 할 수 없고 적군이 황제인 자신을 알아본다면 당연히 생포하려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죽여달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기번도 쇠망사의 주석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기번의 주석에는 저 대사의 출처는 나와있지 않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황제의 최후는 워낙 쇼킹한 사건이어서 역사적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고 더하여 구전된 구구한 이야기들은 수를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당대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기번이나 런치만, 노리치, 나나미 등은 모두 이 원 사료들을 참고했을 것이다. 이런 원사료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transient-guest 님 덕분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우쭈쭈하고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호호호)
1. 프란체스
황제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였으며 1453년 5월 28일 저녁까지 황제의 서기로 그의 곁을 지켰던 프란체스는 도시가 함락된 후에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노예 생활 18개월 만에 빌린 돈으로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의 아들과 딸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베네치아령 코르푸 섬으로 망명했다가 나중에는 케르키라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프란체스는 그곳에서 자신이 겪었던 놀라운 사건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대기》를 썼다. 훌륭한 그리스어로 쓰인 이 기록은 그리스 역사가 중에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쓴 유일한 사료이다. 연대가 정확하지 않고 다소 편견도 있으나 내용은 대체로 진솔하고 생생하며 설득력이 있다는 평이다. 그는 1474년에 사망했다.
2. 크리토볼로스
동시대 그리스인 역사가 크리토불로스는 공방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크레도스 섬 북방 30킬로미터 지점, 겔리볼루 반도 왼쪽에 있는 큰 섬 임브로스 섬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서는 1451년부터 1467년까지 기간을 다루고 있다. 공방전에 대한 그의 기록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투르크인들로부터도 정보를 얻은 것이어서 귀중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3. 니콜로 바르바로
공방전에 대한 서방측 자료로서 가장 유용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베네치아 상선의 선의(船醫)였던 니콜로 바르바로가 남긴 《공방전 일지》다. 그는 베네치아 명문가 출신으로 공방전이 있기 직전에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던 사람으로 도시가 함락되던 날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골든혼에 정박해있던 베네치아 함선을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베네치아인다운 냉정한 시각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가 공방전의 상황을 날짜별로 알게 된 것도 다 그의 덕분이다. 한 사람의 충실한 베네치아인답게 그는 제노바인을 몹시 싫어했지만 그리스인에 대한 적대감은 다른 서방인들보다 덜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콜로의 일지는 아쉽게도 뒤늦게 학계에 알려졌다. 그 이유는 그의 일지가 중요 사료로 베네치아의 마르치아나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지 바르바로 가문의 먼지 쌓인 자료실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783년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도 니콜로의 일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이 많은 기번이 이 유용한 일지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어쩌면 훨씬 더 수다스러워졌을 것이다.
4. 이시도로스
교회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궁수 200명을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던 이시도로스 추기경도 살아남았다. 화려한 추기경의 옷을 걸인의 옷과 바꾸어 입은 덕분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포로로 붙잡혀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지로 팔려간 추기경은 곧 자유의 몸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제노바 식민지인 포체아로 갔다가 다시 키오스 섬으로, 키오스에서 다시 크레타로 갔다. 추기경은 크레타에 머무는 동안 교황 앞으로 두 통, 베네치아 총독 앞으로 한 통 등 총 다섯 통의 서한을 작성했다. 추기경의 서한에는 비록 내용이 간략하지만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의 중요한 상황들이 적혀있었다. 추기경은 로마로 돌아가서 대 오스만 십자군 결성에 동분서주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63년에 눈을 감았다.
5. 레오나르드
레스보스의 대주교였던 제노바 사람 키오스의 레오나르드가 쓴 기록도 남아있다. 도시가 함락되고 약 6주 후에 키오스 섬에서 쓴 것이다. 그는 황제조차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고 자신의 상관인 이시도로스 추기경도 나약했다는 암시를 풍기면서 동포인 제노바인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6. 테탈디
공방전에 직접 참여했던 피렌체 상인 테탈디는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수영도 못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베네치아 함선에 구조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가 운 좋게 탄 배는 베네치아의 해군기지가 있는 네그로폰테로 향하는 배였는데 여기서 그는 한 프랑스인에게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 프랑스인은 테탈디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아비뇽의 대주교에게 보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순식간에 프랑스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나중에 내용이 좀 더 다듬어진 테탈디의 이야기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사료로 간주되었다.
7. 이스칸데르
한편 러시아 정교도 네스토르 이스칸데르는 매우 흥미롭고 문제도 많은 연대기를 남겼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만 군대의 징집병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왔다가 포위전 초기에 도시로 탈출해서 도시 방위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 위에서의 싸움 장면 등 설득력 있고 구체적인 세부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지만 날짜와 순서가 뒤죽박죽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6》, 송은주 외 옮김, 민음사, 2011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3, 쇠퇴와 멸망》, 남경태 옮김, 바다출판사, 2008
스티븐 런치만,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2004
로저 크롤리,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이재황 옮김, 산처럼, 2015
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 최은석 옮김, 한길사, 2013
김형오,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21세기북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