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가 후계자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죽자 움마 공동체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급하게 소집된 원로회의에서 예언자의 오랜 친구이자 장인이고 최초의 무슬림 중 한 명인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하여 무슬림 공동체를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로 삼는데 만장일치로 합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알려진 바로는 첫 번째 무슬림은 예언자의 아내인 카디자이고 그다음은 사촌 동생인 알리, 세 번째가 아부 바크라고 한다.)

 

조그만 아파트의 대표자를 뽑는데도 지지고 볶고 시끄러운데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신흥 종교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분란이 없을 수 없다. 원로회의가 급하게 아부 바크르를 예언자의 후계자로 선언했지만 당시 움마에는 후계자 자리를 넘보는 세력이 적어도 세 집단은 있었다.

 

먼저 쿠라이시족 타임 가문의 아부 바크르와 쿠라이시족 아디 가문의 우마르 연합세력은 아부 바크르를 추대하고자 했으며, 메카에서 이주해온 예언자를 도와준 메디나의 토착세력도 역시 후계자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정당한 후계자로 보는 쿠라이시족의 하심 가문이 있었다바크르-우마르 연합세력은 먼저 메디나의 부족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후에 알리를 찾아가 바크르를 칼리프로 인정하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예언자의 딸이자 알리의 아내인 파티마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결국 우마르와 알리 사이에 칼싸움이 벌어졌고 결투 중에 알리의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알리도 새로운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함마드의 사망 소식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퍼지자 일부 부족들이 무함마드가 구축한 동맹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유일신을 믿고 무함마드의 권위는 인정했지만 더 이상 메디나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부족들도 많아졌다. 심지어 자신이 알라의 사도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아부 바크르는 이러한 이단과 분리주의자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는 결코 얕잡아 볼 수 있는 전략가였다. 배교자 전쟁이라고 불린 반란을 종식시키고 다시 아라비아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배교자들에게는 단호했지만 무슬림 공동체를 대할 때는 겸손과 애정, 자비심만을 보여주었다. 어깨가 구부정한 남자였던 그는 소박한 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았다. 메카에서 살던 시절에 아부 바크르는 부유한 상인이었지만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재산을 거의 다 잃었다. 칼리프로 지내면서 그는 움마를 지도하는 대가로 적은 봉급만 받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전에 하던 교역을 부지런히 되살려서 그 수입으로 그럭저럭 살아나갔다. 때로 그는 푼돈을 벌기 위해 이웃의 소젖을 짜기도 했다. 아부 바크르가 메디나의 거리를 걸어가면 아이들이 그에게 달려가 아빠! 아빠!”하고 소리쳤고 그러면 아부 바크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탕을 주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캘리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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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름부터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마호메트(Mahomet)라고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것은 옛 유럽인들이 사용하던 표기이다. 요즘 영어권에서는 무함마드(Muhammad)라고 표기한다. 무함마드라고 불러야 하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랍어 발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음에는 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코란도 꾸란이라고 해야 그쪽 발음에 가깝다. 둘째는 마호메트라는 표기에는 유럽인의 적대감이 담겨있다고 무슬림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무슬림들은 마호메트가 악마를 뜻하는 스코틀랜드의 옛말 ‘Mahound’의 변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1)

 

무함마드는 570년경에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가문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 밑에서 크다가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삼촌인 아부 탈리브가 맡아서 키웠다. 아부 탈리브는 나중에 4대 칼리프가 되는 알리의 아버지다. 무함마드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런대로 평범한 젊은이로 성장했다. 어려서는 양치기였으며 커서는 그의 아버지처럼 상인이 되었다. 그는 부유한 미망인 사업가인 카디자의 상단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다가 스물다섯 살에 열다섯 살이나 연상인 그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함마드가 가장 신뢰하는 반려자였고 그가 박해를 받을 때 그녀의 지지와 위안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첫 번째 무슬림이었다. 무함마드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해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40세 때 명상을 위해 산속의 동굴에 들어갔다가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신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곧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전도를 시작했다. 무함마드의 신앙은 당시의 우상숭배와 금권정치에 물들어있던 기존 질서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어서 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암살자들에게 쫓기며 622716일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헤지라라고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하여 그곳에서 이슬람 신앙 공동체인 움마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무함마드의 설교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는 분쟁을 조절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뛰어난 군사 전략가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적에 대한 관용과 고아와 과부, 노예 등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었다. 아무리 치명적인 손해를 끼친 적이라고 하더라도 복종하고 용서를 비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전쟁에서 전사한 동료의 가족은 물론 적의 가족까지 보살폈다.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부족들이 점차 무함마드의 지도력을 받아들이고 움마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메카의 군대와는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지만 6301월 무함마드는 메카를 평화롭게 접수했다. 카바 신전의 우상들은 모두 폐기되었고 카바는 이슬람의 성전이 되었다. 메카의 주민들도 거의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632년에 무함마드는 메카로 순례를 떠났다가 메디나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들었다. 예언자는 그가 하디자 이후로 가장 사랑했던 부인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세상을 떠났다. 예언자는 62세였고 아이샤는 18세였다.

 

무함마드는 흔히 세계 4대 성인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예수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죽은 자를 살리거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거나, 오병이어(五甁二魚)와 같은 기적은 단 한 번도 행하지 않았다.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죽은 뒤에 신이 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신과 소통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가 포교한 신앙은 들불같이 번져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어쩌면 지난날 유대인들이 예수에게서 원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무함마드와 같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우리가 죽은 뒤에나 갈 수 있는 천상의 왕국을 약속했지만 무함마드는 살아생전에 누릴 수 있는 신앙의 왕국을 이 지상에 건설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에 무함마드의 평전 또는 전기로 나와있는 책은 네 권 정도 되는 것 같다. 우선25의 작가로 유명한, 전생이 한국인이었다는 루마니아 태생의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가 쓴 마호메트 평전이 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찬가를 출간하기도 했으며, 특이하게도 루마니아 정교회의 사제의 신분으로 무함마드에 대한 평전을 썼다. 네 권 중에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의 평전이다시공디스커버리 총서로 나와있는 마호메트, 알라의 메신저는 내용은 소략이지만 말미에 이런저런 흥미로운 자료들이 첨부되어 있다. 7년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수녀 생활을 했던 영국 출신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마호메트 평전은 다소 설명적이다. 이슬람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나 이슬람에 대한 비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가 직접 나서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둥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함 같기도 하지만, 이름난 종교학자로서 이슬람이라는 이 거대하고 강력한 종교로부터 호의를 얻고 싶은 의도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에서 이슬람 비평가로 변신하여 살만 루시디처럼 죽음의 파트와가 발령된 하메드 압드엘-사마드의 무함마드 평전이 있다. 읽어보면 그가 왜 이슬람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평전이라고는 하지만 내용이 너무 편향적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이야기는 역시 무함마드의 여자문제다. 다른 평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여기 좀 자세하게 옮겨본다.

 

 (무함마드는) 말년에는 여자들을 기호에 따라 수집하는 물건처럼 대했다. 마지막 8년 동안 그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새로운 여자와 혼인했다. 하디자 뒤로 부인이 열두 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아홉 명이 같은 시기에 한집에서 살았다. 그 밖에 열네 명의 여자가 더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 혼인 서약은 했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또한 약혼했지만 전쟁 계획이나 다른 부인들의 계략 때문에 혼인하지 못한 여자도 스무 명이나 더 있었다. 여기에 추가로 전쟁에서 약탈했거나 선물로 받은 성노예들이 있었다. 2)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군주나 통치자들이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적 결속을 위한 혼인 역시 비일비재했다. (고려 왕건도 아내가 스물아홉 명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의 경우에 특이한 것은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에 남편을 잃어 생계가 어려운 여자와 그 자식들을 부양할 목적으로 과부와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인도적인 차원의 다처제라 할 것이다. 무함마드 아내의 명단에도 늙은 과부들이 몇 명 올라와 있다.

 

하지만 무함마드 평전은 하디제 사후 무함마드의 성적 분출이 마치 봇물이 터지듯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아내를 네 명까지만 둘 수 있다는 제한을 두었지만 자신은 그 계시를 지키지 않았다. 또 비록 양아들의 아내이지만 어쨌든 자신의 며느리와도 혼인을 했으며, 부하 병사가 선점한 여성 노예를 빼앗아서 취하기도 했다. 특히 6살에 불과한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혼인했는데 그때 무함마드의 나이는 50세였다. 잠자리를 가진 것은 3년 뒤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홉 살이었고 아이샤 본인이 직접 밝히기를 무함마드는 처음부터 성적으로 접근했고 삽입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위를 했다고 한다. 충분히 소아성애자로 오해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무함마드와 아이샤의 혼인은 향후 수백 년 동안 무슬림들이 미성년자와 결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무함마드 평전에 의하면, 무슬림 공동체에서 여성은 남성 위로라는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들의 낙원은 어떤 모습일까? 천상의 사창가를 연상시킨다. 여자들이 하루 24시간 순교자들에게 봉사한다. 순교자는 처녀 72명을 상으로 받고, 추가로 70명의 하녀도 얻는다. 중세 신학자 알 수유티는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가 후리와 잠을 자면 그들은 언제나 다시 처녀로 변한다. 무슬림의 성기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발기는 영원히 지속되며, 합방의 쾌락은 끝없이 달콤하고 이 세상에는 없는 맛이다. (중략) 모든 선택받은 자는 현세에서 가졌던 부인들 외에 후리 70명을 더 갖는다. 모두가 매혹적인 성기를 가졌다.”3)

   

물론 꾸란이나 무함마드의 여성에 대한 언급 중에는 여성을 배려하고 존중하라는 이야기들도 있다. 하지만 순교에 대한 보상 혹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천국에 대해서 저렇게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다

 

주  

1. 인터넷 한겨례신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515.html

2. 하메드 압드엘-사미드,무함마드 평전, 배명자 옮김, 한스미디어, 2016, p154~155

3. 하메드 압드엘-사미드,무함마드 평전, 배명자 옮김, 한스미디어, 2016,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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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은 아랍어의 정관사이며, ‘(lah)’는 신을 뜻하는 일라(ilaah)’를 줄인 말이다. 그러므로 알라(Allah)’는 유일신을 뜻한다. 이는 이슬람교의 핵심이다. 이슬람은 그리스도교 조차 일종의 다신교로 보고 있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이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이 오묘한 교리를 비신자들이 이해하기란 실로 난감하다. 무슨 삼총사도 아니고, 하나라는 말인지, 셋이라는 말인지, 셋이면서 하나라는 말인지,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셋이라는 말인지 참으로 오묘하다.

 

11세기에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결정적으로 이혼하고 갈라서게 되는 주요한 이유중 하나인 '필리오케' 문제도 그렇다. 서방 카톨릭에서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현된다고 믿었고,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현된다고 믿었다. 사실 처음 공의회에서 주교들간에 합의 공포된 내용은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현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서유럽 신도들이 신안고백인 신경을 암송하는 중에 '성자로부터도(필리오케)'라는 말을  슬쩍 집어넣으면서 그것이 관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의회에 따른  정통에 입각한 교회가 바로  동방 정교회인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신은 오직 하나다. 예수는 신이지만 무함마드는 그냥 사람 예언자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카이로의 어느 교통순경에 관한 농담이 있다. 다소 실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촌철살인의 예기를 느낄 수 있는 뼈 있는 농담이기도 하다.  

 

 

       사막에 배치된 그 경찰관은 너무나도 절실하게 도시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딱지를 끊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기독교 신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오토바이의 상태는 완벽했다. 심지어 신부는 헬멧도 쓰고 있었다. 경찰관은 실망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드러운 경고를 해 주는 게 다였다.

     “신부님, 사막을 혼자 여행하는 게 위험하다는 거 모르십니까?”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오.” 신부가 말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고 있다오.”

    “아하!!! 뭔가 있을 줄 알았어.” 경찰관은 소리를 지르며 수첩을 꺼냈다.

    “오토바이 한 대에 네 명 탑승. 딱 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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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 모범 장서가로서 응당 도서관이나 서점에 관한 책들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윤희윤의 <도서관 지식문화사>를 펼쳐 든 이유다. 이 책을 읽다가 56쪽에 나오는 <고대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도서관 복원도> 사진을 보다가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어 여기 몇 자 적어본다.

 

아래 사진 속의 건물은 고대 로마 제국 도서관의 복원도가 아니고 소생이 알기로는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 모습인 것 같다. 이 성당은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에 세워졌는데 이 그림은 6세기의 그림도 아니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둥근 원판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변신할 때 가져다 붙인 이슬람 캘리그래피 원판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최소한 1453년 이후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의 내부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이 원판은 지름이 7.5미터 가량된다.(어느 책엔가 그렇게 나와있었는데 지금 사진을 가만히 보니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보면 10미터도 넘어 보이는 것 같다) 캘리그래피가 그려진 나무판은 가볍고 습기에 강한 보리수로 제작되었다. 이 캘리그라피 작품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잘 모르는데 성당 2층으로 올라가서 가까이서 보면 정말 어머어마하게 크다. 그리고 이 이슬람 캘리그래피는 고색창연한 성당과 나름 조화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언가 고상하고 우아한 기품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1453년 이후 처음 이 원판 캘리그래피를 붙일 때는 6개였다. 그후 19 세기에 이 원판은 교체되었는데 이때는 설치된 원판은 8개로 2개가 더 추가되었다. 원판에는 이슬람의 유일신인 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4명의 정통 칼리프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그리고 19세기에 추가된 알리의 두 아들 하산과 후세인 총 8(1포함)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이슬람은 4대 칼리프 알리에 와서 다수인 수니파와 알리를 추종하는 소수 시아파로 갈린다. 오스만은 정통 수니파 제국이지만 19세기에 일어난 범이슬람 운동의 일환으로 시아파 성인인 후세인과 하산의 캘리그래피가 추가된 것 같다.

 

하여 생각난 김에 여기 거대한 원판에 새겨진 캘리그래피 8명(1신 포함)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전에 써놓은 글이 있어서 하루에 한 편씩 한번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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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1-29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범 소장가>일 뿐만 아니라, 이스탄불 혹은 콘스탄티노플 전문가이신 붉은돼지 님이 아니었다면 새까맣게 모르고 그냥 넘어갈 뻔했네요. 여러 자세한 설명들을 읽으니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쇠망사>를 다시금 펼쳐들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붉은돼지 2020-01-30 12:05   좋아요 0 | URL
2015년에 이스탄불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었는데, 그때는 아직 뭘 잘 몰라서 지금 돌이켜보니 중요한 것들도 많이 빠뜨린 것도 같고...사실 이스탄불은 워낙 볼 것이 많아서 몇일 일정으로는 다 보기도 어렵기도 하지만,,, 언제 또 가게 될 수 있을 지 아쉬움이 많습니다. ㅎㅎ

가넷 2020-02-06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윤희원이 아니라 윤희윤입니다. 저자 이름을 오래만에 보니 반갑네요. 학과 교수님이셔서.... ^^. 이런 교양서도 내셨네 하며 구입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군요.

붉은돼지 2020-02-06 18:14   좋아요 0 | URL
은사님 이셨군요.. 수정했습니다. 제가 원래 사람 이름을 많이 헷갈려하는 편입니다. 아직도 줌파 리하리인지 라히리인지 라하라인지 헷갈립니다. ㅎㅎㅎㅎㅎ
 

 

넷플릭스에 <오스만 제국의 꿈>이라는 다큐드라마가 개봉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에게는 아니 이게 왠 떡같은 즐겁고 놀라운 소식이다. 흠... 이번에 공개된 것은 <시즌1>로 총 6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다큐드라마라고는 하지만 거의 드라마에 가깝다. 중간 중간에 잠깐씩 전문가들이 나와서 친절하게도 부연설명을 해주고 있다. 다큐라고 하니 무슨 재연 배우들 나오는 어설픈 드라마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투 장면도 실감나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소생이 뭐 연기를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다. 

    

 

제목에 나와 있듯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주인공이다. 감독도 터키사람인 듯 하다. 그래서 드라마의 내용도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메흐메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메흐메드에 대해서는 어린시절의 상처와 알렉산더와 같은 정복자가 되고자하는 욕망과 절치부심, 고독한 최고 권력자의 고심고민 등등이 심층적으로 분석되지만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는 평면적인 단순한 묘사밖에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완전한 국뽕 영화인 <정복자 1453>에 비해서는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할만하다. <정복자 1453>에서 메흐메드는 위대한 영웅으로,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비겁한 군주로 묘사된다. 참내...    

    

 

 

 

 

 

 

 

 

 

 

 

 

드라마 중간 중간에 등장하여 조근조근 친절한 설명을 해주는 전문가로는 영국, 터키 등의 역사학 교수 2~3명과 작가 3명이 출연한다. 로저 크롤리, 라스 브라운워스, 제이슨 굿윈은 소생이 나름 이름은 알고 또 그 저서들도 몇 권은 읽어본 적이 있는 지라(당근지사로 원서는 해당사항이 아니다) 반가운 마음에 여기 소개를 올려본다.

 

로저 크롤리, 영국의 작가, 역사가, 케임브리지 졸업, 이스탄불에서 살기도 했다. 저서로는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부의 제국 베네치아>, <바다의 제국들> 등이 있다. 모두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있다.

 

  

  

 

 

 

 

 

 

 

 

 

 

 

 

라스 브라운워스, 미국 작가. 역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뉴욕타임즈에 소개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구에 지다, 서구 문명을 일으키고 사라진 비잔틴 제국>, <노르만족, 침략자에서 왕으로>, <바다의 늑대, 바이킹의 역사> 등이 있다. 앞의 두 권은 국내 미출간, 마직막은 번역본이 나와있다.

 

  

 

 

  

 

 

 

 

 

 

 

 

 

 

제이슨 굿윈, 영국 작가, 케임브리지에서 비잔티움 역사를 공부했다. 작품으로 <걸어서 골든혼까지>,<지평선의 군주, 오스만 제국의 역사>,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스네이크 스톤> 등이 있다. 앞의 두 권은 미출간, 뒤의 두 권은 번역본이 나와있다. 19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술탄 궁정의 환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으로 2007년 추리문학상인 에드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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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0-01-30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에 이 드라마 뜬 거 보고 붉은돼지님도 같이 떠올랐어요!!! 아직 시간이 없어서 못 보고 있는데 주말에 얼른 봐야겠어요. 메흐메드 2세 이미지가 저한테는 거의 퇴폐적인 미남인데 숨은 고수 같아서 실사판을 보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궁금해요 ㅎㅎ

붉은돼지 2020-01-30 20:53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 이 드라마 예고 나온 거 보고 아니 이게 왠 떡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역시 주인공은 메흐메드 여서 좀 멋지게 나오는 듯 합니다. 상대역인 콘스탄티누스가 메흐메드에 비해 많이 딸리는 것 같아 조금 실망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