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게 거의 30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 소생은 꿈없고 철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아침 등교시간이 아마 8시까지였나 그랬다. 학생부장 선생님과 선도가 무슨 통행세 뜯어내는 강도마냥 교문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8시가 넘으면 아예 바로 학교 인근 만화방으로 출근했다. 요즘 교육청에서 한창 떠들고 있는 아침독서운동을 소생은 이미 그때부터 선도적으로 생활화하고 있었다. 만화방에는 이런 선도적 학생들이 항상 소복하게 앉아 있었다. 어쨌든 만화방에서 30~40분쯤 독서를 하고 학교 뒤편 담장을 월장하여 아침 조례전에 교실로 들어가면 선생님이나 선도한테 걸릴 일도 거의 없이 깜쪽같았다.

 

 

당시 즐겨보던 만화로는 물론 이현세, 허영만은 말할 것도 없고, 무협만화로는 이재학, 하승남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무협만화가 쏟아져 나왔다. 기업만화로는 박봉성이 기억난다. 박봉성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라는 만화는 대단한 인기였다. 코믹만화로는 꺼벙한 눈의 구영탄이 등장하는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가 재미있었다.

 

 

이런 만화를 주로 보던 소생의 만화 경력에 어느날 갑자기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대포석(교실 맨 뒷자리에 앉은 5~6명의 인사는 스스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그들이 앉은 좌석을 대포석이라 명명하였다.) 멤버 중의 누군가가 순정만화를 빌려온 것이다. 아마도 황미나였지 싶으다. 순정만화라고 하면 눈알이 곧 굴러 떨어지기라도 할듯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내용도 얼토당토 않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전부인 저급한 만화로 치부하고 있던(사실 무협만화도 얼토당토 않기는 매일반 이지만....) 우리들은 “허..참 이게 뭐야... 내 오래 살다보니 별 꼴을 다보네, 흥흥흥” 모두 콧방귀를 뀌며 미친놈이라고 만화를 빌려온 친구를 놀렸다.

 

 

하지만 자도 자도 끝이 없는 그 기나긴 야간자습시간을 버틸려면 역시 뭐라도 해야한다.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보다는 그래도 이게 낫지 하며 몇장을 읽었는데 아아아!!! 이건 그냥 만화가 아니고 예술인 것이었다. 우리는 완전 매혹되어 만화를 보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몇몇 친구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기도 했다. 우리는 개안했고 놀라운 신천지가 안전에 도래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대포석 인사들은 이재학이나 하승남의 얼토당토않은 무협만화는 저급한 만화로 치부하고 순정만화를 보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을 순정만화 3대가로 지정하고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우리는 길 잃은 작은새를 보았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북해의 별>, <비천무>, <불의 검>,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등등 그야 말로 편편이 주옥같은 작품들을 보았다. 그런데 순정만화는 다 좋은데 다음 편이 너무 늦게 나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기다리다 눈알이 빠진 친구가 몇 있었고 또 몇은 목이 늘어나서 고생을 좀 했다. 아르미안의 경우에는 소생이 고딩 때부터 봐서 대학가서도 보다가 군대가기 전까지 종결이 안되어서 휴가나와서도 봤던 기억이 난다. 아 유장한 역사여~

 

 

어제 북플을 보다가 황미나의 <불새의 늪> 이 재발간된 사실을 알았다. 찾아보니 <굿바이 미스터 블랙>도 이미 재발간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황미나의 작품 중에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과 제목이 비슷한 <일곱 번째 봉인> 인가 하는 작품은 SF 판타지물로 어딘가에 연재했던 작품인데 정말 눈알빠지게 기다려가며 봤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꼭 좀 재발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하고 애절한 바램이다.

 

 

 

<추신>

 

만화이야기를 하면 역시 고우영을 빼 놓을 수 없다. 고우영은 우리나라 성인만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특히 삼국지는 놀랍고도 놀랍다. 경이로운 작품이다. 보시면 안다. 사건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촌철살인의 위트가 곳곳에서 번쩍번쩍한다. 고우영 삼국지를 두 번 정도 보고(아무래도 한번은 아쉽다.) 이문열이나 장정일이나 황석영 삼국지를 읽으면 머릿속에 영화가 상영된다. 글이 눈에 쏙쏙 들어오면서 머릿속에서 바로 영상으로 재생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것이다.

 

 

소생은 <삼국지>와 더불어 <일지매>를 적극 추천한다. <삼국지>는 중국 고전을 만화화한 것이지만 <일지매>는 고우영 개인의 창작물이다. 탐관오리들을 벌하고 불쌍한 서민들을 도와주는 로빈후드 같은 일지매의 활약은 흥미진진하고 일지매와 월희와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는 너무 애절하다. 이건 만화가 아니라 소설이다. 이런 작품이 왜 영화화가 안되었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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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4-12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악 여기에서 이 나이에 황미나를 마주할 줄이야! 저는 강경옥 언니 팬이었어요, 다시 읽고싶은 명작들_

붉은돼지 2015-04-12 21:16   좋아요 0 | URL
저는 황미나 팬이었습니다. 황미나 작품은 빠짐없이 다 봤다고 생각합니다. 강경옥은 당시에도 유명하긴 했었는데 왠지 저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cyan 2015-04-12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3 일요일 오후 만화방에서 친구와 영접했던 명작들이 떠올라요. 신일숙 작가, 강경옥 작가, 황미나 작가... 조만간 그 분(책지름신)이 오실거 같네요 ㅎㅎㅎ

붉은돼지 2015-04-12 21:18   좋아요 0 | URL
저도 고민입니다. 그 분이 오셔서요 ㅋㅋㅋ 굿바이 미스터 블랙은 곧 사야할 것 같구요.. <불새의 늪>은 완간되면 사야할 것 같습니다. 북플 생기고 도서구입비 지출이 더 늘어난 것 같아요...ㅎㅎㅎㅎ

AgalmA 2015-04-1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경옥을 빼다니! 했더니 야나님이 언급해주셔서 고자누룩...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케다 리요코 <올훼스의 창>이 만화방에서의 제 인생의 폭풍이었죠. 방학마다 그 만화책을 빌려다 베껴 그린 게 노트 한 가득;

붉은돼지 2015-04-12 21:40   좋아요 0 | URL
당시에는 이상하게 강경옥은 손이 안가더라구요..옛날에는 순정만화는 정말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세 사람 만화만 봤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강경옥의 <별 빛 속에>는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지금이라도 한 번 봐야겠어요.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기억납니다.

무스탕 2015-04-12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북별을 정확히 김혜린님을 사랑해주시는 남성분 그다지 많이 않은데 이렇게 만나뵙게되니 무지 반갑습니다.
제 닉네임 `무스탕`이 김혜린님의 작품 <아라크노아>에 등장하는 오토바이 이름이에요 ^^;;
제 경우는 김혜린님 작품 모두 소장하기(비천무의 경우 세가지, 불의검은 두가지, 북해의 별도 두가지, 테르미도르도 세가지 종류를 전 권 세트로 가지고 있지요;;), 팬클럽 가입부터 혜린님 모시고 정모하기, 단체 티셔츠, 점퍼 맞추기 등등.. 거의 이성을 잃고 지내죠.
아.. 김혜린님 이야기 시작하면 저 밤 새는데.. ㅎㅎ
하여간 반갑다는 말씀입니다~~

붉은돼지 2015-04-12 21:4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무스탕님~ 공자님 앞에서 불초한 것이 문자를 쓴 격이 되었네요 ㅎㅎ <아라크노아>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검색해보니 역시 절판이군요.. <북해의 별>은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지금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도 너무 멋지잖아요 ㅋㅋㅋ 빨리 재재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물선 2015-04-1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운 제목들이예요!

붉은돼지 2015-04-12 21:35   좋아요 1 | URL
그립다 말을 하니 더 그리워지는 것 같아요~~

stella.K 2015-04-12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럼 님의 연배가...ㅋ

붉은돼지 2015-04-12 21:39   좋아요 0 | URL
언제나 마음은 태양.....이 아니고...마음은 언제나 청춘이죠 ㅋㅋ
저도 한번씩 깜짝깜짝 놀래요...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믿기지도 않고요. 마음속에는 어릴 적 제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ㅎㅎㅎㅎ

돌궐 2015-04-1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일숙의 <1999년생>은 3권짜리 SF만화인데, 여동생이 재밌다고 해서 시큰둥하면서 봤어요.
읽다가 보니 핡, 처음부터 흡입력이 장난이 아니었고, 스토리의 탄탄함이나 긴장감, 막판 반전이 어우.. 이건 뭐 제가 본 거의 모든 만화들을 발라버리는 수준이더군요.

붉은돼지 2015-04-15 12:57   좋아요 0 | URL
신일숙은 특히 sf 판타지에 더 뛰어난 것 같아요..<1999년생>도 옛날에 본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ㅜㅜ 아마도 소장본을 사야할 것 같아요..돈 좀 생기면 ㅋㅋㅋ

transient-guest 2015-04-16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재학 프로의 작품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의 대본소 무협만화와는 그 내용이나 구성의 깊이가 다르죠. 그러면서도 적절히 대본소용이라능..ㅎㅎ 황미나를 비롯한 순정만화는 누님덕분에 좀 봤는데, 여자만화잡지 몇 권이 창간되던게 90-92년 사이거든요. 그때 참신한 작품들이 꽤 있었죠.ㅎㅎ 나이가 들어서 좋은것들 중 한 가지가 만화나 게임같은거 눈치안보고 살 수 있게된거라고 하면 이상할까요?ㅎㅎㅎㅎ

붉은돼지 2015-04-1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어른이 되어 직접 돈을 벌고 하니 만화책이나 프라모델이나 이런 것들도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좋긴합니다. 어릴때 처럼 뭐 하나 살려면 징징울고 때를 쓰거나 몇날 몇달을 모아서 겨우 하나 장만하거나... 참 용을 써야 했는데 말입니다.
뭐, 물론 요즘도 마누라 눈치는 보기는 봅니다만...ㅎㅎㅎㅎㅎ

나와같다면 2015-04-2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는 길 잃은 작은새를 보았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제목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순식간에 저를 중학교 시절로 데리고 가네요...

붉은돼지 2015-04-22 08:31   좋아요 0 | URL
저도 <우리는 길 잃은....> 인줄 알았는데 <나는 길 잃은...>이더군요.
황미나 만화 보면서 그 옛날로 그 시절로 한 번 돌아가 보아요 ㅎㅎㅎ

나와같다면 2015-04-22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미스터 블랙. 아뉴스데이 주문했어요 설렘 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