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갑의 주인은 누구인가
남편의 겨울 잠바를 하나 사려고 백화점에 갔다. 지난 설날 남편에게 필요한 것을 사라고 아는 분이 백화점 상품권을 보내왔다. 좋은 남방 하나 사면 꼭 알맞을 금액이었다. 지금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좀 괜찮은 겨울 잠바였다. 나는 머리를 굴리느라 좀 어지러웠다. 남방을 포기하고 잠바를 사려면 아마 상품권만큼의 금액을 보태어야 할 것 같았다. 오륙십 년 만의 추위라니 가능하면 안에 털이 탈린 그런 잠바를 사고 싶었다.
남성복 매장은 오층에 있다. 백화점에 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층으로 직행하리라 마음을 먹었었는데 잠시 방심한 사이 내 다리는 ‘김유신의 말’이 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벽에 붙어있는 엘리베이터로 가는 대신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 가방 매장으로 갔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주인공이 구두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자주 가방에 정신을 뺏긴다.
짙은 코발트빛이 나를 매료시켰다. 게다가 딱 내 스타일로 큼지막했다. 좀 큰 카메라도, 책도, 수첩도, 물 한 병도 한꺼번에 다 들어가는 사이즈가 아닌가.
3월엔 아들 생일도 있고, 밤에 듣는 강의료와 자동차 보험료도 내어야 하고, 시누이댁 혼사도 있다. 돈 쓸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건만 나는 지중해에 못가는 대신 지중해 물빛(지중해에 안 가봐서 지중해가 코발트색인지 모른다) 가방이라도 갖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가방을 어깨에 메어보는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내가 그 가방을 가져야 할 이유를 서른 가지쯤 떠올렸다. 가방을 산지 일 년은 지났을 걸, 좀 있으면 결혼기념일이니 선물을 좀 일찍 산 셈 치지, 지난 연말 너무 힘들었으니까 내게 이정도의 보상은 무리한 게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게 너무 많아, 스페인에도 못 가게 되었잖아, 몸이 좀 아프니 기분전환을 하면 나아질 거야, 돈에 눈이 있다잖아 그러다가 다른 데 돈 쓸 일이 생길지 몰라, 다음 달에 먹으려던 한약을 그만두고 열심히 운동하지 뭐 등등.
‘정신을 차려 보니 카드 결재는 이미 끝나있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나에게 경고를 날린 책이 있다.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는 순진한(?) 소비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 한 권은 소비자들의 심리 문제를 다룬 <쇼핑학>이 있다. 삶에서 우리의 구매 결정을 충동질하는 무의식적 상념과 감정, 그리고 욕망을 학문적으로 접근했다. 둘 다 마틴 린드스트롬이 썼다.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이 책을 미리 읽었다면 나는 좀더 현명한 구매자가 되었을까. 답은 미지수다.
기업과 나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이다.

새해 들어서 광고에 대한 몇 권의 책을 보았다. 지난 가을 <기독교와 대중문화의 이해>라는 과목의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무분별하게, 무의식적으로 광고 시장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고객감동' '소비자 이해'라는 말로 포장해서 기업은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보화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의 소비 패턴을 연구하고, 광고라는 이름으로 쇼핑 정보를 제안하고,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아마 그에 대한 경계가 나로 하여금 그런 책들을 읽게 했다. 광고‘쟁이’나 광고‘고수’들이 어떤 전략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뒤흔들고 지갑을 넘보는가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마르쿠제는 계몽사상의 이성이 도구화 되었다는 측면에서 ‘기술적 이성’의 개념으로 산업사회의 기술지배를 설명하고자 했다. 기술적 이성은 고도생산을 성취하기 위해 생산력을 조직하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전면 관리하게 되는데, 마르쿠제는 이것을 ‘합리화’라 부르며, 결과적으로 합리화는 효율성을 위해 인간을 물화시킴으로써 이성의 비이성화, 이성의 도구화 현상을 제시하려고 했다. <기독교와 대중문화의 이해> p.27
현대의 소비는 생산의 과잉성을 필요한 생산으로 바꾸고 더 큰 과잉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의사생산이며 필요소비가 아닌 과잉소비만이 진정한 소비가 된다. 이러한 의사소비를 위한 전략이 욕구와 욕망을 조직해 나가는 소비사회의 자본전략으로 등장하게 된다. <기독교와 대중문화의 이해> p.42
아무튼 나는 거금을 들여서 가방을 샀다. 옷방 벽에 걸려있는 십여 개의 가방 옆에 또 하나의 가방이 걸리는 것이다. 명백한 과잉소비이다.
백화점에는 시계가 없다. 고객들이 최대한 시간을 오래 보내게 하기 위한 기업의 자상한 배려이다. 음악도 다소 느리고 고상한 클래식을 틀어준다. 누구나 이곳에서는 고상하고 수준 높은 고객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고객이라면 마땅히 적당히 비싼 가방도 들어줘야 격을 갖추는 것이다.
1990년대의 소비자는 물건 자체가 갖는 물리적 효용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물건의 모습을 바깥으로 들어내보여주는 디자인(외형, 외관, 모습), 물건에 붙은 라벨과 브랜드네임, 물건을 쓸 때 만들어지는 분위기와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물건이 보내는 신호와 자신과 물건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함께 소비한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과정에서 소비자 개인이 욕망을 함께 소비한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과정에서 소비자 개인의 욕망이 함께 연소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소비사회에서 소비된다는 것은 물리적 특성을 가진 상품자체가 아니라 의미, 기호, 상징, 이미지, 분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대중문화의 이해> p. 47
결국 나는 백화점에서 상품권의 금액만큼 더 보탠 금액으로 남편의 겨울 잠바를 사고, 지중해 빛깔(끝까지 지중해 빛깔이라고 고집할거다.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명분이 되니까)의 가방을 사서 집으로 왔다.
청구서가 날아올 다음 달부터 석 달은 대형마트와 백화점을 요즘의 독감처럼 멀리하며 지내야 한다.

내가 사고 친 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