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H2O인가? -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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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최신 과학은, 물은 단순히 H2O라는 견해를 더는 지지하지 않는다. 물은 중수소를 비롯한 드문 동위원소들을 포함하고 있을뿐더러, 물의 익숙한 화학적 물리적 속성들은 다양한 이온들의 존재와, 인접한 물분자들 간의 끊임없는 결합 및 재결합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 단일분자의 화학식 H2O는 이 같은 물 분자들의 상호작용을 은폐한다. 만약에 우리 앞에 H2O 분자들이 단순히 쌓인 무더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물로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은 H2O다'라는 견해는 물의 구조에 관한 진리의 중요한 요소 하나를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탐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견해를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오히려 그 견해는 계속 전진하는 과학의 서사시에서 하나의 중요한 휴식 지점이었을 따름이다. 이 예에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과학자들이 이미 수정한 단순소박한 과학적 진리에 교조주의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다."(23-4)


1장 물과 화학혁명


1.1 요절한 플로지스톤


"프리스틀리(1733~1804)는 새로운 공기들을 가장 많이 발견하고 생산한 인물이었다. 그의 연구 이후, 평범한 공기는 최소한 두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화학반응에 의해 다양한 유형의 공기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정착했다." "프리스틀리는 '탈脫플로지스톤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평범한 공기에 섞여 있는 '플로지스톤'을 제거하고 남은 공기를 가리키기 위하여 그 문구를 사용했다. 플로지스톤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가연성의 요소였다. 여기에서 '요소'란 영어로 'principle'인데, 현대적 어법에서 'principle'은 '원리'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물질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고유한 속성들을 그 물질들에 부여하는 어떤 근본적인 물질을 뜻했다. 플로지스톤은 가연성 물질들에 가연성을 전달해주는 요소였다. 가연성 물질은 플로지스톤을 풍부하게 보유한 물질이었고, 그런 물질은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을 방출했다."(39-42)


"라봐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들과 관찰들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연소는 녹슮(프리스틀리는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하면, 금속은 자신의 핵심 속성들을 잃고 '금속회calx'로 변환된다고 생각했다)과 마찬가지로 산소와의 결합이었다. 프로스틀리가 탈플로지스톤화를 본 곳에서 라봐지에는 산화를 보았다. 라봐지에가 비춘 빛을 보고 난 화학자들은 다시는 플로지스톤을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과학혁명에서 패배한 진영이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토머스 쿤조차도 프리스틀리에게는 놀랄 만큼 냉담했다. 물론 라봐지에 화학에 대한 프리스틀리의 저항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었다는 점은 부정했지만, 쿤은 프리스틀리가 그토록 오래 저항한 것은 무리한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속한 전문가 집단 전체가 견해를 바꾼 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람은 그 저항으로 인해 과학자이기를 그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44-5)


"다원주의적 기획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1)과학자들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을 거부함으로써 상실한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한낱 이론보다 더 많은 것이 결부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론' 대신에 '시스템'이라는 표현을 쓸 것이다.) 바꿔 말하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했고 산소주의 시스템은 할 수 없었던 좋은 것이 있었을까? 과학혁명은 전형적으로 그런 지식의 상실을 동반한다고 쿤은 생각했다. 그를 기리는 뜻에서, 이를 '쿤 상실Kuhn loss'이라고 부른다. (2)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발전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이론의 때 이른 죽음 때문에 발전이 지체되거나 가로막힌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 (3)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이 둘 다 있었을 때,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이로운 결과들이 있었을까? (4)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 사이에서 이로운 상호작용이 계속되었을까?"(59)


1.2 플로지스톤이 살아남았어야 하는 이유


"(양 진영의 '인식적 가치들의 어긋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순성'과 '완전성'의 대립이었다. 산소주의자들, 특히 라봐지에 본인은 단순성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특히 우아함이라고 할 만한 유형의 단순성이 중시되었다. 플로지스톤주의자들, 특히 프리스틀리는 완전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주어진 문제 영역에 속한 모든 관찰된 현상들과 그것들의 모든 관찰된 측면들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라봐지에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견해에 멋지게 들어맞는 모범적인 사례들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더 지저분한 사례들은 제쳐놓기를 좋아했다. 반면에 프리스틀리와 몇몇 플로지스톤주의자 동료들은 자신들이 산출하고 관찰한 모든 주요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설령 더 난해한 사례들에서는 설명들이 어색해지더라도 말이다. 단순성이나 완전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각 진영이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그 가치들을 강조하는 정도, 혹은 그것들에 집착하는 정도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80-1)


"단순성과 완전성 외에 더 광범위한 유형의 인식적 가치들도 역할을 했다. 일종의 인식적 보수주의는 많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옹호한 가치들 중 하나였다. 반면에 산소주의자들은 개혁 혹은 참신함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이 견해들 중 어느 쪽이 가장 참된지를 실험으로 판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플로지스톤 원리가 모든 현상들을 적어도 라봐지에 씨의 원리에 못지않게 잘 설명하므로, 나는 플로지스톤 원리를 고수해왔다.〉 확실히 여기에서 나타나는 캐븐디시의 기질은 라봐지에가 1773년에 자신의 연구들은 〈물리학과 화학에서 혁명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드러낸 젊은 열정과 의미심장한 대비를 이룬다." "그렇지만 프리스틀리는 〈자유로운 토론은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플로지스톤을 옹호하는 많은 논증들의 동기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 라봐지에주의의 교조주의에 맞선 다원주의였다."(86-7)


"양 진영은 모두 통일성에 가치를 두었으며, 각 진영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유형의 통일성을 자신을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로 거론했다. 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수렴이 존재했다. 양 시스템 모두 연소, 녹슮, 호흡을 유사한 방식으로 통일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통일되는가, 하는 것에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유사하지만 더욱 두드러진 양상은, 양 진영 모두가 '체계성'systematicity을 중대한 가치로 여기면서 서로 상대 진영은 체계성 없이 자의적이고 무계획적이라며 비난했다는 점이다. 플로지스톤주의 진영에서 라봐지에주의자들에 대하여 제기한 비난은, '유사한 결과에 유사한 원인을 배정한다'는 규칙을 그들이 충실히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봐지에도 할 말이 있었다. 그는 다양한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다양한 새 현상들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애쓰면서 이론에 도입한 수많은 복잡한 대책들과 상호모순적 변화들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92-3)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제각각 화학물질의 근본적 존재론에 관한 중요한 형이상학적 교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자는 합성주의compositionism의, 후자는 요소주의principlism의 특수한 구현 사례였다." "합성주의 시스템-유형의 근본적인 인식활동 하나는 화학물질을 원소로서, 혹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화합물로서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더 실험적인 활동들이 있었다. 즉, 화합물을 원소들로 분해하기, 그리고 그 원소들로부터 그 화합물을 재합성하기가 있었다. 분해와 재합성 둘 다 할 수 있을 경우, 그것은 해당 물질의 조성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증명으로 간주되었다. 이 실천들은 성분들이 화학반응 내내 보존되는 안정적 단위들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했다. 또한 그 전제는 화학반응을 각각 특유하고 안정적인, 설령 합성 상태에서는 그것들의 속성이 표출되지 않더라도 내내 동일성을 유지하는 블록들의 재배열도 설명하는 활동을 떠받쳤다."(113-4)


"18세기에 합성주의 화학의 주요 경쟁자는 요소주의였다. 요소주의는 '요소' 개념, 곧 특정 속성들을 다른 물질들에 주는 근본물질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시스템-유형이다. 요소주의에서 핵심적인 인식활동들은 관찰 가능한 속성들에 따라 물질들을 분류하기, 요소들을 지목함으로써 물질의 속성들을 설명하기, 요소들을 추가함(혹은 빼냄)으로써 물질들을 변환하기였다. 합성주의와 마찬가지로 요소주의 시스템-유형도 많은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그것들 모두는 위의 세 가지 핵심 활동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요소주의 존재론은 요소들과 요소들에 의해 변환되는 기타 물질들 사이의 비대칭성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요소들은 능동적이었고, 기타 물질들은 수동적이었다. 요소주의에는 과거의 잔향殘響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바탕에 깔린 원소들이 요소들의 영향으로 달라진다는 과거의 형이상학, 심지어 물질이 형상을 부여받는다는 과거의 형이상학이 남아 있다."(115)


"요소주의와 합성주의 사이의 생산적 갈등은 화학에서 건강한 다원주의가 유지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합성주의가 더 순수한 형태로 발전하고 라봐지에로부터 돌튼과 그 이후까지 당당히 행진하며 점점 더 지배력을 강화함에 따라, 화학의 주춧돌을 다음과 같은 삭막한 선택의 문제로 간주하게 만드는 유혹도 커졌다. '단순소박한 원자론에 동의하라. 아니면, 화학적 물질에 관한 어떤 존재론적 논의도 포기하라.' 이것은 몇몇 논평자들이 19세기에 있었던 원자론과 실증주의의 대립을 서술하기 위하여 뽑아낸 문구다. 만약에 화학자들이 기본적인 합성주의를 유지하면서도 플로지스톤주의-요소주의의 성취들을 더 잘 알았다면, '원소'를 보는 더 유연한 관점과 '무게 없는 물질'에 대한 더 섬세한 해석을 발전시켜 전기와 열역학을 화학 안에 더 쉽게 편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얻어졌을 혜택 하나는 그 시스템이 미해결 문제들을 일깨우는 구실을 했으리라는 것이다."(139-40)


1.3 선택, 합리성, 대안


"합리성의 의미에 관한 보편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여기에서 몇 마디 말로 그런 합의를 제조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유익한 논점 몇 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그 논점들은 보편적 승인을 받아야 마땅하다. 첫째, 합리성은 진리에 관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합리성은 그때그때의 지식 혹은 믿음을 감안하면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는 좋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합리적인 판단들은 (궁극의 진리 따위가 있다면) 궁극의 진리를 한참 벗어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채택해야 하는 근거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합리적 사고 혹은 논의는, 아무튼 의식적 숙고가 존재하는 한에서는, 해당 공동체 내부에서 합의된 모종의 규칙 혹은 방법을 따른다. 셋째, 중요한 것은 합리성의 최소 조건이다.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면, 합리적 행위는 행위자가 밝힌 목표를 성취하거나 적어도 행위자가 특정 목표에 기여하는 행위로서 의도한 것이어야 한다."(141-2)


"충분히 납득할 만하게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반사실적 사고思考를 경계하고, 그런 사고는 실제 증거에 기초하지 않으므로 타당성이 없으며 명확히 정해진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고 염려한다. 반사실적인 것들은 소설가에게는 흥미로운 영역일지 몰라도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제는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 때문에 반사실적 역사를 연구한다." "첫째 이유는 인과론적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나는 반사실적 추론이 역사에 대한 인과론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제프리 호손의 주장에 동의한다. 〈X가 Y를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약에 X가 없었다면, Y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취지의(대게는 이런 확정적 진술보다 더 약한 형태의) 반사실적 진술을 하는 셈이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다루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상식이다." "한낱 상관성을 넘어선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모종의 반사실적 진술들도 수용할 용의가 있어야만 한다."(164-5)


"반사실적 추론의 둘째 목적은 우리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아는 바와 우리가 가능성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바에 의해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적당량의 반사실적 추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개방시켜주는 이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강조되지 않은 반사실적 역사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궁극적으로 나는 실제 역사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들을 단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과거에 실제로 선택되지 않은 가능한 발전 경로를 살려내야 할지, 또 어떻게 살려낼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으려면, 우선 그 경로가 선택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반사실적 역사는 더 능동적인 단계를 위한 예비 작업, 타당성 조사, 심지어 행동 계획으로 기능한다. 반사실적 추론은 선택되지 않은 경로들을 상상으로 따라가면서 어떤 길이 뚫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유망한지 판단하는 정찰 작업으로 구실할 수 있다."(167-9)


2장 전기분해: 혼란의 더미와 양극의 당김


2.1 전기분해와 그 불만


"물의 전기분해 실험이 라봐지에의 새로운 화학이 수용되는 것에 중요하게 기여했다고들 하지만, 산소와 수소가 혼합된 채로 산출되었기 때문에 이 실험은 깔끔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혼합 기체에 다시 스파크를 가하여 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소량의 혼합 기체를 쉽게 성분들로 분리하여 수소와 산소의 존재를 다른 방법으로 입증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니컬슨-칼라일 실험에서는 수소와 산소가 깔끔하게 분리된 채로 산출되었다." "그러나 니컬슨-칼라일 전기분해의 그 깔끔함은 또한 심층적인 문제 하나를 들춰냈다. 전기의 작용으로 물 분자 각각이 산소 입자와 수소 입자로 분해되는 것이라면, 왜 그 두 기체가 같은 장소에서 나오지 않고 거시적인 거리만큼(거뜬히 1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두 위치에서 나올까? 또 왜 산소는 전지의 양극과 연결된 전선에서 나오고 수소는 음극과 연결된 전선에서 나올까? 거리 문제는 분해된 물질들의 조성에 관한 전기분해의 함의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 듯 했다."(180-1, 188)


"19세기 초반의 전기화학을 돌이켜보면, 이 분야에서 미시적 이론의 구성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전기분해는 시대를 너무 많이 앞서간 실험 기술이었다. 우선, 전기분해의 메커니즘에 관한 신뢰할 만한 가설을 세우려면, 물을 이룬다고 추정된 원자적 입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관한 명확한 아이디어들이 필요했다. 어떻게 전기가 원자들을 떼어놓는가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려면, 무엇이 원자들을 함께 묶어놓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전기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심지어 전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지배적인 견해는 전기가 플로지스톤이나 칼로릭, 자기magnetism와 마찬가지로 무게 없는(또는 '미묘한subtle') 유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전기 유체가 존재하며 그것의 상대적 과잉과 결핍이 양전하와 음전하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들과 양전기 유체와 음전기 유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다."(202-3)


2.2 굴하지 않은 전기화학


"19세기 후반, 전기분해에 관한 새로운 존재론이 등장했다. 그 존재론은 거리 문제 자체의 바탕에 깔린 중요한 전제 하나를 부정했다. 〈만일 전기분해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기의 작용으로 물 분자 각각이 분해되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새로운 존재론의 핵심은 자유이온으로의 해리였다. 즉, 일부 물분자들은 외적인 전기를 가하기 전에도 이미 전하를 띤 이온들로 분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이온들이 액체 전체에 퍼져 있다가 자기가 보유한 전하에 맞게 전극들에서 선택된다." "물-화합물 전기화학은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 출발점을 수정하고 개선했다. 초기 전기화학(또는 초기 원자론)의 많은 부분이 물이 HO라는 전제에 기초하여 발전했다. 그러나 원자론 화학이 성숙하고 전기화학이 자유 해리의 개념을 받아들이자,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물의 화학식은 H2O로, 물의 이온 조성은 H+와 OH-로 바뀌었다. 물은 여전히 화합물이었지만, 처음에 상상된 단순한 수소-산소 화합물이 아니었다."(233-7)


# 물-화합물 전기화학 :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주장. 이에 맞서 물이 다른 원소와 결합(합성)될 수 있는 하나의 원소라는 주장이 있었다.


"19세기 전기화학이 명확한 패러다임을 보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중요하게 명심해야 할 점은 당시의 이론적 상황은 완전한 카오스가 아니라 '조율된 다양화'라는 것이다. 물-화합물 전기화학의 확증은 주로 실험 영역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험에 대한 몇몇 근본적인 이론적 해석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도 그 확증에 기여했다." "19세기 전기 화학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전-과학pre-science도 아니고 정상과학 기간들 사이의 혁명적 격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수의 시스템들이 공존하는 지속적 다원성이다. 다양한 시스템의 창조자들과 옹호자들은 출판된 글과 사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잘 소통했다. 시스템들과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대체로 생산적이었다. 현대 철학과 다르지 않게, 19세기 전기화학은 견해의 불일치, 논쟁, 토론을 기반으로 번창하는 분야였다. 지속적으로 견해가 어긋나는 학자들의 공동체를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개념적 관습적 공통 기반이 존재했다."(246-7)


2.3 전해질 용액 속 깊숙이


"나는 특히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흔하지만 일부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사회학자들도 공유한 암묵적 전제 하나를 반박하고자 한다. 그 전제는 더 다원주의적이었던 과학의 단계들에 계속 집중하는 것보다 합의의 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지프 슈왑의 생각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쿤의 정상과학/탈정상과학 구분과 슈왑의 안정적/유동적 탐구 구분은 매우 유사하지만, 과학의 발전이 계속되면 점점 더 많은 연구가 유동적 탐구에 할애된다는 것이 슈왑의 견해였다. 쿤이 말한 탈정상과학과 슈왑이 말한 유동적 탐구는 다원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띤다. 그러므로 과학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런 과학 단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심지어 쿤이 말한 정상과학에서도 연구의 최전선은 슈왑이 말한 유동성을 어느 정도 띠어야 한다. 모든 과학 분야의 근본적 논쟁이 깔끔한 종결에 이르는 때가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생각은 그럴싸하지 않은 생각이다."(263-4)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적 과학 단계가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며 따라서 더 통일된 단계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과연 옳은지도 불명확하다. 찬란한 통일과 합의의 순간은, 기초적인 수준의 통찰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그리 유용하지 않은 깨달음의 순간epiphany moment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 순간은 '과도한' 단순화와 '과도한' 확신의 순간이며, 그 다음에 과학자들은 대개 더 현실적이고 노련한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 다시 난점들, 예외들, 문제들, 흠집들, 숨어 있는 개념적 불합리들, 역설들, 실패한 예측들,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현상들을 다룬다. 분자유전학이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왓슨과 크릭의 '중심 교리'를, 곧 정보가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로 흘러간다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생각을 벗어난 덕분이었다. 만약에 코페르니쿠스적 천문학이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등속원 운동에 대한 황홀한 애착에 머물렀다면, 그 천문학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264-5)


3장 HO일까, H2O일까?: 원자의 개수를 세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3.1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셀까?


"당시에는(심지어 지금도) 개별 원자들을 직접 관찰할 길이 없었다. 분자 속 원자들을 개별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원자들의 개수를 셀 수 있을까?" "물의 전기분해 직후, 원자론이 등장했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화학적 원자론은 잉글랜드 북부의 과묵한 교사 존 돌튼(1766~1844)의 작품이다." "돌튼의 주요 업적은 익숙하고 오래된(심지어 고대에도 있었던) 원자 개념을 18세기 합성주의 화학과 융합하여 19세기 원자화학으로 이어지는 필수 연결고리를 창조한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화학물질들이 서로 결합할 때 따르는 비율의 놀라운 규칙성을, 화학결합이란 명확히 정해진 무게를 지닌 원자들의 결집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많은 화학자들은 돌튼의 원자를 곧이곧대로 믿기를 꺼렸지만, 기본 물질들(원소들)을 이루는 모종의 원자적 단위들의 결집과 재결집을 통해 화학반응을 개념화하는 것은 머지않아 통상적인 실천으로 자리잡았다."(292-4)


"자신이 말하는 원자들을 직접 관찰하기는 불가능함을 인정한 돌튼은 물 분자가 단순하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HO에 도달했다. 그가 아는 한에서,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은 물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물의 조성이 최고로 단순한 조성, 곧 수소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하나의 조합이 아니라고 그가 추측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물론 물 분자가 수소 원자 24개와 산소 원자 37개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 왜 그렇게 추측해야 할까?" "실제로 돌튼은 동일한 원소의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이한 원소들의 원자들과 달리) 화학적 친화성에 의해 서로에게 끌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학적 친화성이 있다면, 원자들 각각이 보유한 칼로릭의 척력과 화학적 친화성이 균형을 이뤄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내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만일 한 분자를 이룬 유사한 원자들의 개수가 더 많다면, 그 분자는 덜 안정적일 것이었다. 따라서 물은 HO여야 했다."(298-9)


"조제프루이 게이뤼삭과 돌튼은 둘 다 기체가 열에 기체가 열에 반응하여 보이는 행동을 연구하여 처음으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 관심을 화학결합으로 돌린 게이뤼삭은 계속해서 기체에 초점을 맞췄고 무게가 아니라 '부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끝에, 기체들이 서로 화학적으로 반응할 때는 (압력과 온도가 동일한 경우) 아주 단순한 부피 비율로 반응한다는 놀라운 일반적 규칙성을 발견했다. 예컨대 부피 2의 이산화탄소는 부피 1의 산소와 결합하여 부피 2의 탄산이 되었다. 부피 1의 질소는 부피 3의 수소와 결합하여 부피 2의 암모니아가 되었다. 물도 다시 등장한다. 일찍이 캐븐디시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을 형성할 때의 부피 비율이 2:1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물은 H2O라는 것이 뻔히 드러난 것이 아닐까? 그렇다. 하지만 그 그림의 암묵적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즉 동일한 부피의 모든 기체는 동일한 개수의 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그러하다."(307-8)


3.2 원자화학에서 다양성과 수렴


# 당대에 제기된 원자화학 시스템들

1. 무게 유일 시스템(돌튼)

2.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베르셀리우스)

3.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아보가드로)

4. 치환-유형 시스템(샤를 게르하르트)

5.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월라스턴)


"이런 질문이 떠오를 만하다. 원자화학 이야기가 다원주의의 작동을 멋지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이제 더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화학식 H2O와 같은 영원한 성취들이 '일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안을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정합성이다. 우리가 특정 시스템들 안에서 연구하고 있다면, H2O에 대한 불신은 당연히 우리의 실천 시스템 안에서 모종의 비정합성incoherence을 야기할 것이다. 1860년대 이후에 HO를 고수하면서 유기 구조 화학을 실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먼지가 가라앉은 지금,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물은 H2O가 아니라고 보는 화학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화학의 진화 계보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영원하며 변경 불가능한 성취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는 특정한 성취가 앞으로도 확고할 경계를 긋고 그 확고함이 존속하는 한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다."(401)


"고찰해야 할 또 다른 사안은 성공이다. 무게 유일 시스템이나 구식 이원주의 시스템 및 실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물을 HO로 보는 화학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물을 HO로 보는 다른 원자화학 시스템들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원자를 상정하지 않는 화학 시스템들도 실제로 있었다. 우리가 H2O를 배타적이며 영구적으로 선호하려면, 그 대안적인 시스템들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앞으로 성공적일 가망도 없다고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 확신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확신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의 지식이나 경험을 보유하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성공을 증가시키리라고 스스로 진지하게 믿는 바를 실천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전망이 암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장의 포기는 우리가 보장 없이 성취해온 바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401-3)


3.3 복잡한 화학에서 미묘한 철학으로


"여기에서 나는 작업주의operationalism와 표준적인 경험주의를 구별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경험주의는 관찰 가능한observable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데 집중한다. 반면에 작업주의의 초점은 '실행 가능한'doable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찰 가능성은 인간의 감각 기관들이 감각을 향상시키는 장치의 도움을 받거나 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개념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원자와 분자를 이런 의미에서 관찰 가능하게 만들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자와 분자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화학자들은 원자와 관련된 다양한 속성들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원자를 작업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측정은 수동적 관찰이 아니다. 왜냐하면 측정은 잘 정의된 특정 작업들의 계획적 수행에 의존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점은 비록 원자 자체는 관찰 불가능한 상태로 머물러 있더라도, 원자화학은 이런 식으로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이다."(406-8)


"19세기의 원자화학자들은 원자를 실재론-비실재론 스펙트럼상의 어느 한 위치에 놓기 어렵다는 철학적 태도를 취했다. 무게 유일 시스템에서는 어떤 불명확한 무게의 보유자로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과 인정은 있었지만 그 외의 의미에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딱히 없었다. 심지어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도 원자의 물리적 속성들로서 무게와 부피를 인정할 따름이었다.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에서는 실재론적 믿음이 조금 더 깊었다. 이 시스템은 전하를 띠었으며 경계가 명확한 입자로서의 원자들과 그것들이 서로에게 발휘하는 힘들을 상상했다. 치환-유형 시스템은 원래 무게 유일 시스템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원자의 실재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다만, 이 시스템은 기radicals에 화학적 단위로서의 실재성을 부여했다.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은 원자들 사이의 위상수학적 공간적 관계의 실재성을 믿고 인정했지만, 이 관계는 분자들의 실재적인 3차원 모양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았다."(418)


"나는 원자 개념의 작업화를 원자화학자들이 이뤄낸 성공의 열쇠로 지목해왔다. 19세기 화학자들의 다수는 원자의 존재에 관한 비생산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구체적인 실험적 이론적 연구에서 원자 개념을 활용 가능하게 만다는 다양한 길들을 추구했다." "일반적으로 퍼스에게서 유래했다고 여겨지는 신념, 곧 탐구의 길들이 결국엔 진리로 수렴할 것이라는 신념을 나는 배척한다. 오히려 나는 '결국'은 끝내 도래하지 않고 탐구는 영영 종결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진정으로 실용주의적인 인식론은 궁극적 수렴을 증명하려 안간힘을 쓰거나 진리의 의미를 성공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집중하는 대신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알고 사는가를 고려한다." "19세기 전반기 원자화학자들의 공동체에는 (실용주의의 한 요소인) 오류가능주의 정신이 명백히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오류가능주의는 내가 서술한 원자화학 시스템 다섯 개의 번창과 동시에 나타난 굳센 다원주의를 뒷받침했다."(422-3)


4장 능동적 실재주의와 H2O의 실재설


4.1 물은 실재적으로 H2O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뒤엠 문제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뒤엠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심화하는 것이다. 그 통찰에 덧붙여, 믿음은─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행위와 뗄 수 없게 얽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설의 검증에만 보조 전제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채택하는 임의의 검증 방법은 오로지 그 방법과 정합하는 다른 인정된 '실천들' 혹은 인식활동들의 맥락 안에서만 타당하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가설을 검증하는 활동은 오직 실천 시스템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이론의 입증은 오직 실천 시스템의 성공의 일부로서만 이루어진다. 사용 가능한 가설이나 이론은 어느 것이든지 실천 시스템 안에 내장된embedded 채로 등장한다. 이론은 실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데, 실천 시스템의 성공과 별개로 이론의 옳음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따라서 어떻게 이론들이 선택되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 시스템들이 선택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433-4)


# 뒤엠 논제Duhem thesis : 〈한 실험의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실험을 보증하는 이론들의 집단 전체를 신뢰하는 것에 기초한 행위다.〉 그러므로 실험은 〈고립된 가설을 결코 반박할 수 없고 이론적 집단 전체만 반박할 수 있다〉


"모든 관찰자가 보기에 적당히 안정적인 현상들의 영역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영역을 개념적으로 또 물리적으로materially 세분하고 정리하는 방법들은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 그 자체는 깔끔하게 세분되어 분류 상자들에 담긴 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 상자들을 스스로 발명해야 하고, 거기에는 우리가 고안하는 어떤 상자 시스템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있을 개연성이 높다. 분류를 위한 최선의 일반 원리는 중요한 차이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만, 몇몇 맥락들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들이 다른 맥락들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대다수의 화학적 상황에서 우리는 주어진 원소의 모든 동위원소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똑같은 원소로 취급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상황들에서는 동위원소의 다양성이 온갖 차이를 만들어내는데도 말이다(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부터 원자폭탄까지 온갖 것들이 작동하게 한다)."(447)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둘 것은 나의 진리 개념에 내재하는 다원주의다. 나의 진리 개념은 본래적으로 성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에는 다원주의가 내재한다. 현실의 삶에서 무릇 성공은 제한적, 상대적, 잠정적 성공이다. 설령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의 진리성이 전적으로 정확하고 확실하더라도, 그 진리성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그 시스템 자체에 대한 우리의 수용이 확정적인 만큼만 확정적이어야 하며, 그 수용은 다시금 그 시스템이 계속 성공적인 때만 보장된다. 성공은 역동적인 기준이며, 상대적 성공의 판정은 배제하기 게임이 아니라 용인하기 게임이다. 잠정적 성공은 '머무르기에 충분할 만큼 좋음'에 달려 있다. 래리 라우단이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추구pursuit이지, 수용acceptance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특정 시스템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시스템들이 단절되어야 한다거나 아무도 다른 시스템을 선택하면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450-1)


4.2 능동적 과학적 실재주의active scientific realism


"내가 '표준적 (과학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과학적 이론들은 (적어도 근사적이거나 부분적인) 진리를 보유했다는 믿음이다." "반면, 내가 말하는 과학적 실재주의는 우리가 실재와의 접촉을 추구하되 우리의 배움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능동적' 교설이지, 우리가 우주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거나 얻어왔는지에 관한 탁상공론식 서술이 아니다." "표준적 실재론의 표어가 진리라면, 능동적 실재주의의 표어는 '진보'다. 몇몇 극단적인 반실재론들과 달리 능동적 실재주의의 관점에서는, 관찰 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이론이 우리를 실재에 관한 더 많은 발견들로 이끄는 발견적heuristic 힘을 지녔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나 기타 반실재론이 실재가 어떠하고 어떤 유형의 이론들이 허용 가능한지에 관한 불필요하고 제약적인 표준-실재론적 전제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 실증주의를 비롯한 반실재론은 능동적 실재주의에 도움이 될 수 있다."(468-70)


"포퍼-쿤 논쟁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각각의 새 이론은 앞선 이론보다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할 때 포퍼는 능동적 실재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일원주의적 색채를 상당히 띤, 연속성에 대한 부당한 요구를 덧붙였다. 〈새 이론은 아무리 혁명적이더라도 항상 앞선 이론의 성공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쿤은 포퍼 풍의 연속성 요구가 지닌 한계를 꽤 명확하게 알아챘기에,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 사이의 비정합성과 한 패러다임에서 다음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 일어날  때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발생하는 지식의 상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쿤의 과학관조차도 일원주의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분야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이 독점권을 누리는 것을 정상과학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했다. 이런 패러다임-일원주의에서, 또 패러다임 이행기의 '쿤 상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에서 쿤은 능동적 실재주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했다."(471-2)


4.3 표준적 실재론의 파리 병에서 빠져나가기


# Truth의 다섯 가지 의미

(Truth1) 본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와 정확히 대응하게 진술한다는 의미의 truth(진리) 개념. 이 의미의 truth는 대응에 관한 것이지만 단지 내가 말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바 사이의 대응에 관한 것일 뿐이다.

(Truth2) 정의에 따라 truth인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정의를 내리고 사용하고 들이댐으로써 구성하고 판정하고 주장하는 truth(진리)다. 〈미터원기의 길이가 1미터라는 것은 당연히 진리true다.〉

(Truth3) 일부 truth는, 우리가 그것을 주어진 바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활동할 때, 전제-채택presumption에 의해 진리true로 된다. 그 전제-채택이 의식적이고 명시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truth를 '공리axiom' 또는 '공준postulate'이라고 부른다. 〈빛의 속력은 관찰자나 광원의 운동과 상관없이 동일하다.〉

(Truth4) 논리학의 맥락 안에서 명제들은, 당사자의 작업이 속한 논리 시스템의 공리들에 따라서, 다른 진리true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면 진리true다. 〈명제 P가 진리면, P의 대우contrapositive도 진리다.〉

(Truth5)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가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옳음correctness 검사를 '상황의존적으로'contingently 통과하면, 우리는 그 명제를 진리true로 인정한다.


"능동적 실재주의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진리 개념은 진리5(Truth5)다. 능동적 실재주의는 이 진리5를 끊임없이, 또한 겸허하게 탐색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나머지 진리1부터 진리4까지 각각도 탐구에 필수적인 다양한 인식활동들과 연결되어 있다. 즉, 경험의 보고, 개념의 정의, 탐구를 가능케 하는 전제의 채택, 논리적 도출과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진리의 다섯가지 의미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의미들은 효과적인 탐구에서 서로 조화롭게 연결된 활동들에서 유래한다. 각각의 시스템 안에서 진리5를 탐색하는 활동은 바라건대 실재에 관한 앎을 산출할 것이다. 서로 다른 시스템들 안에서 입증된 진리5들 사이의 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런 진리5들은 서로 일관될 수도 있고 비정합적일 수도 있다. 혹은 서로 관련이 없다시피 할 수도 있다. 능동적 실재주의는 각 시스템에서의 진리5 탐색을 옹호하며, 또한 진리5의 탐색을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시스템들의 육성을 옹호한다."(513-4)


"경험적인 사안들(진리5의 후보로 머물러 있는 명제들)을 다룰 때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확실성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잘해나갈 것인가다. 오늘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확실성보다 확률을 더 많이 거론하곤 하는데, 이는 건강한 경향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몇몇 베이즈주의 전통들에서는, 확률을 진리와 확실성 모두의 대리물로 취급하면서 우리의 탐구가 계속되면 확률이 상승하여 1에 접근함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려는 충동이 있다. 이 기획에서 확률의 개념은 제 '쓰임새'를 잃고 '근사적 진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역할만 하게 된다. 이것은 온당치 않다. 확률의 진짜 쓰임새는, 바로 확률값이 1이나 0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확률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애써야 할 것은 계획 수립을 위하여 '안정적인' 확률값들에 도달하는 것이지, 확률값들이 0이나 1에 접근하리라는 헛된 희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다."(516)


"'물'의 외연은 〈H2O 분자들로 이루어진 모든 전체들〉이라는 퍼트넘(1975b)의 생각은, 40년 전에 나왔으며 당시에도 이미 시대에 뒤처진 생각이었다." "헨드리(2008년)는 현재 화학에서 통용되는 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거시적인 물 집단body은 다양한 분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역동적인 뭉치congeries이며, 그 안에서는 개별 분자들의 해리, 이온들의 재결합, 소중합체들oligomers의 형성, 성장, 해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H2O 분자들 사이에서 그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물은 우리로 하여금 물을 물로 인정하게 만드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큐리얼의 도발적인 말마따나 〈얼마나 순수하거나 작은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태나 환경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어떤 분량의 물도 물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H2O 분자들이 모여 이룬 임의의 더미를 물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면 최신 과학을 위반하게 된다."(525-6)


5장 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


5.1 과학이 다원주의적일 수 있을까?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겸허함'이다. 프리스틀리는 인식적 겸허함에 대해서 특히 교훈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개념은 역동적이었다. 〈모든 각각의 발견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것들을 우리의 시야 안에 가져다놓는다.〉 그는 대단히 멋진 이미지를 떠올렸다. 〈빛의 원이 커질수록, 그 원을 둘러싼 어둠의 경계도 더 커진다.〉 지식이 늘어나면, 무지도 늘어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자각하는 무지의 범위도 늘어난다. 프리스틀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많은 빛을 얻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만족스러운 관조의 범위를 확장하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빛의 경계는 더욱더 확장될 것이며, 신의 본성과 창조물들의 무한함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끝없이 진보하리라고 우리 자신에게 약속해도 된다. 이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전망이다.〉"(532-3)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상대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적어도 어느 정도 동반하는 반면, 다원주의는 더없이 분명하게 그런 포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숙한 다원주의적 태도를 지닌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과 생산적으로 관계 맺는다. 이런 태도를 갖춘 인물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상대주의자의 캐리커처, 곧 '아무것이나'라고 말하는 사람과 전혀 딴판이다." "상대주의가 단지 존재'하는' 모든 대안들 각각을 동등하게 취급할 것만을 주장한다면, 다수의 대안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요구는 없는 것이다. 모두가 실제로 무언가에 동의하고 아무도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상대주의는 그 상황에 강하게 반발할 길이 없다." "〈'다원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다원성'의 요구다.〉 다원주의에서 관건은 실제로 다수의 시스템들이 공존할 때 얻어지는 혜택이다. 따라서 나의 다원주의 구호는 '어떤 것이든지 좋다Anything goes'가 아니라 '많은 것들이 좋다Many things go'이다."(544-5)


"과학을 모범으로 삼아 사회를 조형하려 한 근대주의적 프로젝트인 과학주의scientism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좋은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으로 여기는 것을 모범으로 삼아 과학을 조형하는 시도를 해볼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의 장점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지저분한 정치의 세계로부터 겸허하게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실패한 정치 시스템들도 인해 무수한 개인들이 겪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여러 세기에 걸쳐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다. 현재의 다원주의적 자유민주주의 형태들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형태들이 우리를 훨씬 더 나쁜 과도함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원주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투박하다. 즉, 일당독재를 피하고 적어도 양당 시스템을 두라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전체주의보다 여러모로 덜 효율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효율성이 사악한 목적에 종사하면 악몽을 빚어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539, 551)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유일무이한 진리를 탐색할 때 봉착하는 가장 명백한 난관은 우리가 그런 진리를 획득했는지 여부, 심지어 그런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과학적 진보의 역사는 오늘 가장 선호되는 경로가 내일은 가장 유망한 경로가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뉴튼 역학의 공식들은 속도가 낮은 상황에서 성립하는 특수상대성이론의 한계 사례로서 살아남았지만, 이 생존은 그 새 이론에서 절대공간 및 절대시간 개념의 설득력이 보존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의 전반적 성공은 그 뒤를 이어 유일무이한 진리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이 전혀 다른 탐구 방향에 놓여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보증서가 아니었다. 극복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 합리적인 행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어떤 탐구 노선이 결국 우리의 목표점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다수의 노선들을 열어두어야 한다."(565-6)


"다원성은 앎을 풍부하게 한다. 심지어 한 시스템이 우리의 목표들에 꽤 적합하게 종사할 수 있을 때도, 다른 시스템들 역시 똑같은 목표들에 새로운 방식들로 종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인식적 풍요는 우리를 기쁘게 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목표가 진리이고 우리가 진리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더 다원적인 풍요를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에 관한 진리인 이론을 보유하더라도, 과학이 종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을 시도할 수 있다! 동일한 주제에 관한 두 개의 진리는 서로 정확히 등가여야equivalent 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논리학이 요구하는 바는 진리인 이론 두 개가 정면으로 모순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나에게 양자역학의 하이젠베르크 버전, 슈뢰딩거 버전, 파인만 버전 '그리고' 봄 버전을 달라. 물리 세계를 음미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그렇게 많으면, 자연을 향한 창들이 더 많아지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진다."(577-9)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물은 H2O다'처럼 결정적인 과학적 상식이 당면 주제였다는 사실은 비판적 의식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느낌을 일으켰다. 나는 우리 모두가 물은 '단순히' H2O가 아님을 의식하는 것과 과학자들이 그 믿음에 도달한 미묘하고 정교한 이유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비판적 의식을 여러 방식으로 방해하는 다음과 같은 통념들 각각에 반대한다. (1)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며, 우리는 주로 과학자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좋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 (2)과학적 이론 선택에서 확실성과 합리성의 결여는 어떤 경우에든지 겉모습에 불과하며, 우리는 간과된 요인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겉모습을 떨쳐내야 한다. (3)우리는 현재 과학의 판결에 따라 과거 과학의 인식적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4) 혹은 과거 과학의 인식적 가치를 아예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5)무엇보다도 우리는 내려진 과학적 결정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모색해야 한다."(623)


"다원주의적 태도의 실험은 다원주의자에(혹은 적어도 일원주의를 향한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한세기 정도에 걸친 과학 연구의 많은 부분은 일원주의 실험이었다! 우리는 일원주의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얻었으며 일원주의를 가지고 우리가 어떤 성과들을 얻었는지 안다. 우리에게 심각하게 결핍된 것은 그에 맞먹을 만한 다원주의 실험 데이터다. 다원주의는 최근의 과학에서 큰 규모로 시도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계속될 일원주의적 과학과 나란히, 다량의 다원주의적 과학을 시작하는 것이다. 생물학의 몇몇 영역들과 비교적 새로운 일부 과학 분야들에서는 이미 다량의 다원주의가 실천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일원주의에서 얻은 것에 못지않게 충분한 경험을 다원주의에서 얻으려면 다원주의적 실천이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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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로르 도트리슈 지음, 이세진 옮김 / 프란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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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모든 음악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역사에 참여한다. 그들은 권력에 매혹을 느끼기도 하고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어떤 창작자는 음침한 정권의 대변인이 되기도 한다." "그들과 시대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우리는 온갖 것을 발견한다. 오페라, 교향곡, 칸타타, 피아노 소나타······ 이 위엄 넘치는 작품들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작품들은 군중을 전율시켰다. 이 작품들이 그들을 살게 했으며, 나아가 그들의 나라와 화해하게 했다. 작곡가들의 의도도 대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몇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선율, 현의 속삭임, 매혹적인 리듬으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때때로 시대에 떠밀려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타일의 전격적인 변화는 음악가가 작품에 혁명적이거나 정복자적인 어조를 부여하고자 할 때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정통적이지 않은 형식과 화성을 구사함으로써 음악사를 급작스럽게 변화시켰다."(13-4)


1 장바티스트 륄리


"1653년 2월 23일, 루이 14세의 프롱드의 난─프랑스의 귀족들이 루이 14세의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내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진압을 축하하는 「밤의 발레」 공연에서 륄리도 단역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아마 목동도 되었다가 병사도 되었다가 절름발이 분장도 했다가 하는 일개 실루엣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소 춤을 추는 왕과 한 무대에 오를 기회였다. 젊은 군주는 춤을 무척 좋아하여 매일 몇 시간이나 춤에 몰두했다. 륄리는 여기에 전부를 걸었다. 그는 왕에게 금빛 햇살로 짠 듯 화려한 의상을 입은 아폴론의 모습으로 무대에 서라고 권했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루이 14세는 이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전진하며 중신들에게 위엄을 떨쳤다. 젊은 왕은 이렇듯 예술을 통하여 궁정에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절대왕정의 광휘를 유럽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과시했다. 바야흐로 태양왕이 탄생하고 있었고, 륄리는 출세의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21)


"왕은 그를 신뢰했고 륄리는 그 대가로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다. 륄리는 왕의 치세를 드높일 생각밖에 없었다. 륄리는 무엇보다 태양왕을 무대에 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왕이 발레 「병든 사랑」(LWV 8) 전체의 작곡을 맡겼을 때 륄리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주어진 기한이 매우 짧았는데도 1657년 1월 17일 루브르궁에서의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왕은 첫 장면부터 륄리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등장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무대에 오를 터였다. 이제 막 작곡가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륄리의 음악에는 이미 마법적인 데가 있었다. 단순한 반음계 혹은 조성의 맛깔나는 변화만으로도 왕이라는 존재가 강력하고 눈부시게 부상하는 듯했다. 1653년부터 1661년까지 이 젊은 이탈리아인의 발레 음악은 프랑스 음악을 착착 장악해갔다. 아직 새로운 음악 형식을 만들어내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이미 프랑스 군주정을 음악으로 가장 잘 구현하는 음악가였다."(22)


"베르사유성은 군주의 영광을 드높이는 도구로 쓰였다. 1664년 봄, 왕은 성대한 연회에 올릴 혁신적인 공연물, 연극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는 작품을 륄리와 몰리에르의 합작물로 만들 것을 명했다." "소극과 풍속희극은 이 새로운 유형의 연회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륄리와 몰리에르는 영역을 바꾸었다. 그래서 「엘리드 공주」(LWV 22/5-22)의 스토리는 기마 수렵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놀라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모두에게 선보인 이 코메디발레의 장면들 중간중간에는 음악과 춤이 교차한다. 음악과 말이 처음으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륄리는 자신의 작곡 방식을 바꾸어 몰리에르의 운문을 따라갔다. 텍스트에는 운문과 산문이 섞여 있었고, 악구는 보다 유연해져 가사에 착 붙었다. 륄리는 아리아를 배우의 연기에 통합시켰다. 그러나 그가 고안한 가장 중요한 장치는 레치타티보, 즉 인물이 낭독을 하듯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때까지는 그러한 음악이 없었다. 프랑스 오페라의 첫 소산이었다."(26-7)


"1685년 1월 륄리는 치명적인 불명예를 입는다. 루이 14세에게 륄리가 왕의 시동 중 하나인 열세 살짜리 소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고발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궁정에는 륄리가 자신들과 같은 신분임을 절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귀족이 많았다. 그들은 여전히 냉소적으로 그를 바티스트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륄리는 언제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상대, 일개 하인이자 장인匠人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일을 이용해 그를 가장 강하게 공격한 이들은 다름 아닌 성직자들이었다." "1686년 2월, 그는 자신의 마지막 서정 비극 「아르미드」(LWV 71)를 왕에게 들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의 루이 14세는 그 작품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부 발췌 부분이 궁정 왕세자비 처소의 부속실에서 비공개로 연주되었으나 왕은 그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걸작, 륄리의 가장 빼어난 작품을 왕은 영영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했으나, 륄리는 이제 두 번 다시 왕 앞에 나서지 못할 운명이었다."(34-5)


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튀링겐주 아이제나흐의 교회, 거기서 바흐는 루터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세기의 간격이 있었지만 둘 다 그 교회의 성가대 소년이었다. 루터가 교황에게 파문당한 뒤 설교를 했던 교회가 바로 그곳이었고, 바흐 또한 그 교회에서 평생의 악기가 될 오르간과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어릴 적 그 교회에 딸린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바흐가 일곱 살 나이로 입학했을 때부터 교회학교에는 루터의 그림자가 떠돌고 있었다. 교육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음악, 그중에서도 가창이었다." "루터는 음악이 성경 말씀을 풍부하게 표현해준다고 보았다. 음악은 복음서의 말씀을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게 한다고. 바로 그 점이 바흐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데 확신을 더해주었다. … 1707년 4월, 스물두 살의 청년 바흐는 초기 교회 칸타타 중 하나, 즉 루터의 일곱 절 코랄을 바탕으로 작곡한 칸타타를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BWV 4)였다. 노랫말은 종교개혁의 가장 오래된 코랄중 하나에서 따왔다."(41-3)


# 칸타타 :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 독창, 중창, 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진다.


"그는 악보 첫머리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음으로써 신성한 영광의 표지 아래 자신의 작품을 둘 것이었다.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하지만 바흐가 루터를 맹목적으로 좇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형식을 다양화했다. 어떤 때는 칸타타를 호른과 트럼펫으로 화려하게 시작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현을 잔잔하게 깔아 보다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성경 말씀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인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대화, 혹은 양과 목자의 대화를 상상하기도 했다." "메시지는 가사뿐만 아니라 악기의 정묘한 사용으로도 전달된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구현하는 이미지처럼 악기 자체가 전례력의 한 장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트럼펫은 부활을 예고하고, 오보에는 크리스마스의 목가적인 면을 환기하며, 첼로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들을 장중하게 반주한다. 바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에서 반음계를 쓰고, 주의 숨이 끊어짐을 표현할 때는 빠른 트릴을 구사했다."(48-50)


"1730년에는 마침내 장엄미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B단주 미사」(BWV 232)가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을 그는, 죽기 직전에야 완성할 터였다." "생애 말년에 이르러 음악적 유언을 남기면서, 바흐는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교회를 초월하는 보편 교회에 기준을 두기라도 한 것 같다." "바흐는 현기증 나는 솜씨로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이 미사곡에 통합해냈다." "바흐가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 1750년, 세상의 풍조가 그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얼마 전부터 갈랑 양식이 유럽을 휩쓸던 참이었다. 복잡하고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평을 듣는 바흐의 음악보다는 귀에 착착 감기는 아름다운 선율 위주의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바흐의 음악은 계속 연주되었고 그의 제자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 스승의 이름을 이어나갔지만, 세상은 경건주의 운동과 계몽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럽은 음악적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제 6년 후에는 모차르트가 태어날 것이다."(52-3)


# 장엄미사 : 가톨릭의 대미사를 위한 곡


# 갈랑 양식 : 바로크 시대의 중후한 폴리포니(다성음악)에 반발하여 경쾌하고 우아한 호모포니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 양식


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은 사랑과 빛이 도처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이었다. 몇 년 전부터 모차르트는 가톨릭 교리의 관행에 냉담했다. 결코 충족되지 못한 커다란 열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는 신에게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당연히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미사에 참석했으며 사순절도 지켰다. 그렇지만 프리메이슨 지회에서 그는 종교적 관용과 박애라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는 프리메이슨 단원으로서 귀족들과 대등해졌다. 대단한 영주들 앞에서도 전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평민이 아니었다." "1785년 3월에 프리메이슨을 위한 첫 작품 〈직인의 여행 노래〉(K. 468)를 만들면서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노래는 과장 없이 경쾌하기만 하다. 단 한 연으로 이루어진 이 가곡에서 테너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새로운 앎의 단계에 다가가는 그대, 그대의 오솔길을 굳건히 걸어가시오. 그것이 지혜의 길임을 아시오.〉"(59-61)


"사실 빈은 모차르트에게 이미 싫증을 낸 터였다. 대중은 건반의 비르투오소 모차르트를 사랑했지만 그의 오페라는 지나치게 복잡하다며 불평했다. 새로운 화음이 그들의 귀에 생경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차르트 오페라의 독창적인 사상에 당혹감을 느껴서?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1786년에 모차르트는 환멸에 빠졌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빈의 청중에게 당최 전달할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를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프라하와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프라하의 거리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들도 그의 오페라 몇 소절을 휘파람으로 흥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빈에서도 프리메이슨 지회만큼은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서 그는 존경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았다. 모차르트는 다른 바람이 없었다. 자신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기가 다른 음악가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라도 주의 깊게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는 그 사람을 위해 몇 시간이고 연주할 수 있었다."(63)


"1791년 초 무렵, 빈에서 프리메이슨은 1780년대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빛나는 엘리트 집단이 아니었다. 요제프 2세는 죽고 1790년 2월 레오폴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참이었다. 그 전까지 프리메이슨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왔지만 프랑스대혁명의 성난 외침에 겁을 먹은 새 황제는 그들의 세력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자유를 존중했던 전임 황제의 태도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1791년 봄 프리메이슨 출신이자 빈의 한 극장장 에마누엘 시카네더가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에서 영감을 받은 오페라, 이 비밀결사의 영광을 기리는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했다. 이 작품이 다름 아닌 「마술피리」(K. 620)다. 형제들이 위협받고 있었으니,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이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권한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모차르트는 전혀 피곤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홉 달 뒤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69-71)


"모차르트는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따금씩 몸이 안 좋긴 해도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다. 그는 극심한 불안을 억압하기 위해 무절제한 생활에 빠지거나 미친 듯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8월에 의뢰받은 「레퀴엠」(K. 626)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가 잠시 작업을 멈추었다. 다른 데서 더 흥미로운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프리메이슨 칸타타였다. 모차르트는 자기 지회의 새로운 회합 장소 개막식을 위해 생애 마지막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가 '우정의 찬가'라 불렀던 「작은 프리메이슨 칸타타」(K. 623)이다. 「레퀴엠」은 결국 미완으로 남았으므로 이 칸타타가 그의 마지막 완성작이다. 당시의 극심한 피로를 반영하듯, 그의 편지 속 글씨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다. 하지만 악보만큼은 여전히 명쾌하며, 모든 음표는 완벽한 통제하에 놓여 있다." "육체의 피로와 빚더미에도 불구하고 더욱 박애적인 내일의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이 놀라운 작곡가를 보라! 그러나 그의 살날은 20일밖에 남지 않았다."(74-6)


4 프랑수아 조제프 고세크


"1789년 겨울, 쉰여섯 살의 고세크는 구체제의 유명 인사로서 25년 넘게 귀족들을 위해 일을 해주고 경제적 안락을 누려온 터였다." "온 나라가 혁명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했을 때, 고세크는 자신의 이력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겁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처럼 민활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는 1789년의 사건들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고세크는 왕을 존중하면서도 헌법이 제정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혁명사상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음악가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권력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없는 그였다. 이 위험천만한 일에 홀로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수완 좋은 사람답게, 민중이 틀림없이 그에게 보내올 신호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바스티유 점령 며칠 뒤 고세크는 당시 목숨을 잃은 시민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의적절한 음악을 만들기에 그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고세크는 주저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81-3)


"1795년 1월 21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 처형 2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고세크가 이끄는 연주자들의 공연도 마련되었다. 튈르리궁의 공연 장소에서 고세크의 오케스트라는 근엄하면서도 사색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서정성이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국민공회 의원들은 기가 막혀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구슬픈 소리는 뭐지? 이런 탄식으로 1월 21일을 기념한다고? 누군가는 역사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세크를 불렀다. 〈이 음악은 도대체 뭐요? 루이 16세, 그 독재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건가?〉 고세크는 당황해서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 〈저는 단지 독재자에게 해방된 행복이 섬세한 영혼들에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연주자들은 의혹을 남기지 않기 위해 곧바로 공화국의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몇몇 의원은 나중에 귀를 틀어막기에 이르렀다."(95)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혁명 음악의 시대는 끝났다." "보나파르트가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을 때 고세크는 다른 소수의 작곡가들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국가원수가 자신의 첫 정치적 승리들을 음악으로 옮긴 자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한 셈이었다. 그것이 고세크 인생의 마지막 훈장이었다. 동료 작곡가 에티엔 메윌이나 앙드레 그레트리가 그랬듯 고세크 역시 점차 총애를 잃는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814년에는 그 자신도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아흔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고세크는 두 친구와 함께 참으로 길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혁명의 아름다운 날들, 상드마르스의 여러 의식에서 그의 찬가들이 거둬들인 성공이었다. 인민을 음악에 입문시킨 순간들을 고세크는 즐겨 회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 민중이 처음으로 역사적 기념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고세크의 공로다."(96-7)


5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떠받치는 사람이라 믿었으며 그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교향곡에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내걸릴 것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만들어온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걸작을 내놓고 싶었다. 그토록 신봉하는 혁명을 음으로 옮기고 싶었다." "바로 그때, 1805년 5월, 파리에서 보나파르트가 머지않아 황제의 자리에 오를 뜻을 밝혔다. 베토벤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보나파르트 장군은 이제 나폴레옹 1세가 될 터였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적힌 악보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베토벤이 그토록 찬양했던 혁명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혁명은 전쟁 중에 와해되었다. 그가 교향곡에 붙이려 했던 제목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그 작품에 「영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어느 위대한 인간을 기억하며〉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제 그는 전에 없던 소리와 리듬의 조합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이어감으로써 음악의 혁명을 이루어낼 것이었다."(104-8)


"1808년 12월, 도시에서 가장 지체 높은 이들이 빈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날의 관람권 한 장 가격이 노동자의 일주일 치 급료를 뛰어넘었다. 이날 베토벤은 네 시간에 걸쳐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교향곡 5번」과 「교향곡 6번」(Op. 68)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보였고, 건반 앞에 앉아서 「피아노 협주곡 4번」(Op. 58)을 연주했다. 그다음에는 즉흥연주를 했다. 그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직접 연주하는 모습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각 상실이 그를 덮칠 터였다." "베토벤은 관객을 휘어잡고 싶었고, 자신을 향한 그들의 지지를 느끼고 싶었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로브코비츠 공작이 합의하여 베토벤에게 연간 4000플로린을 지급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빈에 계속 남는다는 조건을 준수하는 한, 베토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만들고 싶은 곡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110-1)


"하지만 외부적인 요소가 그를 후려쳤다. 180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다시금 전쟁에 돌입했다. 황실 가족은 빈을 떠나야 했고, 나폴레옹이 강제한 조약으로 인해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더는 후원자들에게 한 푼도 얻어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의 설원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이 중대한 역전의 첫걸음을 베토벤은 놓치지 않고 음악으로 옮겼다. 1813년 6월 12일, 바스크 지방의 비토리아 인근에서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격멸하자 나폴레옹 황제와 적대 관계에 있던 모든 이들, 특히 그곳으로부터 1600킬로미터 떨어진 빈에 있던 베토벤은 기뻐 날뛰었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로 작정하고 때맞춰 〈웰링턴의 승전〉(Op. 91)을 만들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당대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음악으로 한정된 숭배자와 음악 애호가 무리를 벗어나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111-4)


"그러나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이 옛일이 되자 애국적 색채가 짙은 작품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베토벤의 영웅시대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은 예전처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빈 사람들은 로시니의 경쾌한 음악, 카리스마 넘치는 테너가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기교적인 아리아를 훨씬 더 좋아했다. 베토벤의 주요한 후원자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이제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에 사로잡혀 낮이고 밤이고 일에만 몰두했다. 최고의 대작 「교향곡 9번」(Op. 125)이 완성되기까지는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입문의 여정처럼 작동시킨다. 이는 흡사 건축가의 작업과도 같다. 그는 가장 적합한 소리를 찾고 이런저런 시도를 싸하가며 오선보를 수없이 수정했다. 〈아니, 이건 우리의 절망을 상기시키는군.〉 그러다 마침내 환희를 노래하기에 알맞은 선율을 찾고서 이렇게 쓴다. 〈아, 찾았다 / 아름다운 기쁨.〉"(115-8)


6 엑토르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에게 1830년 7월혁명은 사상의 혁명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던 시기에 그는 음악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80대 노인 음악가들의 케케묵은 이론을 일거에 몰아내고 싶었다. 19세기의 뭇 음악가에게 영향을 주게 될 「환상교향곡」(H. 48)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마치 벼락처럼 일어났다. 베를리오즈는 비이성적인 것, 과한 것, 극단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에겐 숨 가쁘게 질주하는 상상력이 있었다. 상상력이 그의 존재 전체를 뒤덮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의 힘을 믿는다. 이성은 크나큰 신비를 해명할 수 없으며 상상이야말로 인간의 신비를 더 잘 통찰할 수 있으리라고 베를리오즈는 생각했다." "베토벤이 그랬듯 베를리오즈 역시 자기가 만드는 교향곡의 각 악장에 제목을 붙였다. 아니,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베를리오즈는 각 악장에 아주 상세하게 작성한 프로그램을 곁들였다. 역사상 최초의 표제 교향곡이었다."(131-2)


"베를리오즈는 마흔도 안 되어 국가의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대단한 후의를 입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열정적이고 몽상적인 낭만파 예술가였다." "1840년은 7월혁명 10주년이었다. 이 기념일에 인색하게 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루이필리프는 10년 전에 누렸던 인기를 되찾고자 했다. 당시 민중이 품었던 소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집단적 환멸만 남아 있었다. 왕은 이제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 60미터 높이의 기둥과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고, 영광의 사흘 당시 목숨을 잃은 500여 명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 올 계획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이벤트가 음악 없이 성사될 수는 없었다. 규모에 걸맞은 대곡, 기념식이 열리는 야외에서 성대하게 올릴 작품이 필요했다." "그는 진작부터 장송 교향곡을 기획 중이었고, 악보는 겨우 두 달 만에 완성되었다. 베를리오즈적 전통에서 하나의 기념비로 남게 될 이 작품의 제목은 「장송과 승리의 대고향곡」(H. 80)이었다."(136-7)


7 주세페 베르디


"1842년 3월 9일, 베르디는 밀라노 스칼라 극장 무대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 대중은 「나부코」(IGV 19)에 열광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오페라는 그들의 처지를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탈리아는 벌써 3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히브리 노예들이 저 매혹적인 〈날아가라, 상념이여〉를 한목소리로 부를 때 극장 전체가 열광에 빠졌다. 청중은 그 합창의 마법적인 힘과 트럼펫의 폭발적인 소리에 홀려버렸다. 당시만 해도 무기를 들고 일어나 오스트리아 주둔군을 몰아낼 생각을 하는 이탈리아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밀라노의 애국 투사들은 이미 국토 해방을 꿈꾸고 있었고, 그들에게 이 애달프고 매혹적인 노래는 금세 집합 신호가 되었다." "베르디의 음악은 민중의 가슴을 정통으로 울렸다. 강력한 조국애가 그의 오페라에서 뿜어져 나왔다. 베르디는 더욱더 민중의 취향을 고려하여 오페라에 서사시적인 기개를 불어넣기 시작했다."(144-5)


# 나부코 왕 :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이탈리아어로는 나부코도노소르


"민중은 그의 몇몇 오페라 아리아에 베르디 자신으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열정적인 의미를 한마음으로 부여했다. 비결은 그의 언어에 있었다. 베르디는 보잘것없는 시골 농부도 이해할 수 있는, 모두가 알아듣는 소박한 언어를 구사했다. 의미로 충만하다 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말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바그너가 전설을 말한다면 베르디는 인간의 드라마를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연약함, 감정의 힘, 미묘한 정서를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났다. 가장 비천한 이야기도 베르디를 통하면 위풍당당해졌다. 바로 그러한 점에 대중은 전율했다." "1850년대 초반에는 애국적인 오페라가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했다. 베르디는 이 시기에 일명 '대중적 3부작', 즉 「리골레토」(IGV 25)와 「일 트로바토레」(IGV 31), 「라 트라비아타」(IGV 30)로 이력의 정점을 찍었다." "베르디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하고, 감동을 주고, 꿈을 꾸게 만드는 주역은 다름 아닌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였다."(149-50)


8 클로드 드뷔시


"전쟁 발발과 함께 프랑스로 밀려드는 애국의 파도가 드뷔시를 사로잡았다. 드뷔시는 생각했다. 승리를 거두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음악을 통해 이루어질 터였다. 그는 전쟁에서 무엇을 들었는가? 귀에 거슬리는 전선의 소음, 병사들의 고통, 대포 소리. 그러나 그 소리를 곧장 음악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런 건 그의 음악적 양식과 맞지 않았다. 드뷔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1914년 11월, 작품 의뢰를 받은 그는 완성된 곡에 〈영웅의 자장가〉(L. 132)라는 제목을 붙여 벨기에 왕과 그의 용맹한 병사들에게 헌정했다. 전쟁 초 벨기에의 용감한 저항이 프랑스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속도를 늦춘 터였다." "친구들을 앗아간 전쟁의 와중에 드뷔시는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되살리려는 양 프랑스 전통으로의 회귀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한때 비유럽 음악에 대한 개방의 상징이었던 그가, 이제는 너무 많은 영향에 휘둘려 엇나가는 프랑스 음악의 명예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169-70)


"드뷔시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애국적인 대작을 쓰고 싶었다.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를 그 작품의 주제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이 그의 발목을 잡을 터였다. 비록 당분간은 몸이 버텨줄지라도. 1916년의 추운 겨울 저녁, 그는 파리의 한 살롱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 그의 아내 에마가 속한 '전쟁 포로의 옷' 사업단을 위한 자리였다. 때때로 그가 호소하는 무시무시한 피로는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날 저녁 그가 연주한 작품은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갓 완성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백과 흑으로」(L. 134)를 들고 온 것이다. 흑백의 대조보다는 벨라스케스의 회색을 생각하면서 썼다는 작품이다." "드뷔시는 독일을 상징하기 위해 루터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선율을 살짝 비틀어 단편적으로 삽입했다. 이 작품의 현대성이 그날 저녁 휘황찬란한 살롱에서 음악에 귀 기울이는 이들 모두를 휘어잡았다."(174-6)


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음악의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 접근 방식 또한 야심만만했다. 모두 독일 음악가들의 권리와 직결된 행보였다. 그는 저작권 규정을 개정해 창작자의 권리 보호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늘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야만 했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로서 이력을 쌓는 내내 늘 권력자들과 가까워지려 애썼다. 일단 새로운 선전부 장관 괴벨스 박사를 거쳐야 했다. 슈트라우스는 1933년 7월에 괴벨스를 만났다." "그의 제안은 직접적이었다. 독일 음악가들에게서 유대인의 영향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제3제국 음악원의 총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주저 없이 수락했다." "슈트라우스는 흡족했다. 괴벨스의 지지를 확신한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작은 시내〉(Op. 88-1)라는 노래를 헌정하고 국가사회주의 조직에서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준 히틀러와 괴벨스에게 감사를 표했다."(182-4)


"괴벨스는 슈트라우스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한 그가 독일의 위엄을 높이기에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1936년 8월 1일,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무수히 휘날리는 새 경기장에 히틀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12만 개의 팔이 일제히 나치식 경례를 붙였다. 군중은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올림픽은 독일의 위대함을 만방에 과시할 이상적인 기회였다. 베를린 올림픽 포스터에는 인간 같기도 하고 신 같기도 한 금빛 형체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행사의 음악을 담당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정장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경기장 중앙의 나무 연단에 올라가 오른손에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와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의 제창을 이끌었다. 〈올림픽 찬가〉가 연주되는 4분 동안, 슈트라우스는 박력 있고 불규칙하면서도 장중한 음악으로 나치 체제를 드높였다. 몰개성적인 수많은 목소리가 그들의 유일한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군중 속을 파고들었다."(190-1)


"1945년 2월, 괴테와 수많은 음악인의 그림자가 엘베 강변에 어려 있는 도시 드레스덴이 처음으로 폭격을 당했다.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재가 된 시체들만 남았다." "다음 날부터 슈트라우스는 레퀴엠 형식의 서정적이고 비탄 어린 작품 〈변신〉(Op. 142)을 쓰기 시작했다." "〈변신〉은 아마도 슈트라우스의 가장 영적인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마음을 자극하는 만큼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유대인 차별법,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존재했건만 그동안 슈트라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터였다.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고 수용소와 대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그랬던 그가 이 감동적인 작품을 통해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물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45년 4월 12일 이 악보를 완성했다. 그로부터 2주 뒤, 히틀러가 총부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자살은 제3제국의 최후를 뜻했다."(200-1)


10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대大숙청의 공포에 시달리던 1937년 4월,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게 될 「교향곡 5번」(Op. 47)의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작품에 체제순응적인 부제를 달았다.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 초연 날 저녁, 연주회장은 꽉 찼다. 박수갈채가 30분 넘게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고자 자신의 음악에 보다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부여해 웅장한 D장조의 군악풍 주제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작곡가는 그동안 비판을 사던 형식주의도 제거하여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스타일을 한결 단순화했다. 그 관습적 언어라는 껍데기 아래서, 극도로 주지주의적인 태도 이면에서, 일부 청중은 모종의 메시지를 감지해낼 터였다.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대숙청이 세상을 온통 마비시키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기로 작정한 한 남자의 메시지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공포를 악보에 옮기면서도 그가 가진 최고의 것을 드러내는 거장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213-4)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해 왔고,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도시는 세상과 단절된 게토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건만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낙관적인 음악을 요구했다. 「교향곡 7번」(Op. 60)은 대단한 호평을 얻었고 서양 사회, 특히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의용소방대 헬멧을 쓴 쇼스타코비치의 사진이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정권의 상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행간에 메시지를 흘렸다. 그의 작품에는 은밀한 암시와 인용이 숨어 있다. 3악장에서 바이올린은 영원히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앞 2악장에도 기쁨은 공포와 뒤엉켜 있다. 마치 이 미친 세상에서 공격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희희낙락해야 한다며 억지 웃음을 짓는 것처럼. 검열, 그리고 자신을 눈여겨보는 스탈린을 의식하면서도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몸부림쳤다. 그 무엇도 자기 예술을 포기하는 것보다 끔찍하지는 않았다."(214-5)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온 나라를 흔들어놓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전망이 열리기를, 스탈린 치세의 무거운 압박에서 비로소 해방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1970년대 초의 쇼스타코비치는 회한에 찌들어 기진맥진한 사내였다. 살아오면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지만 모두 죽은 사람들, 그야말로 시체들의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악보에 지시어를 쓰면서 종종 '모렌도morend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모렌도, '죽어가듯이'라는 이 단어는 마치 작곡가 자신의 삶의 반향 같다. 그는 비겁하게 살았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혔다. 여섯 번의 스탈린상과 세 번의 레닌상을 수상한 경력마저 자책의 이유가 되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는 괴로워하며 서서히 죽어갔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은 장례식을 성대하게 마련했다. 쇼스타코비치를 그토록 오래 박해했던 자들이 상석을 차지했다."(223-5)


11 기데온 클레인


"1941년 12월, 기데온 클레인은 프라하에서 출발한 세 번째 호송대에 이끌려 체코의 작은 마을 테레진에 있는 게토로 끌려갔다." "수용자들은 대부분 게토 정비 사업에 동원되었다. 가건물이나 화장터를 지어야 했고, 나치 친위대의 농지도 건사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 가스실은 없었다. 테레진은 잠시 머물다 가는 수용소였다." "나치 지도부는 처음에는 모든 예술 활동을 금지했지만 3주쯤 지나서부터는 방침을 바꾸었다. 음악을 허용하면 수용자들의 반항심이 잦아들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문화생활을 조금 누리게 해주면 훨씬 편해질 터였다. 게다가 테레진이 꽤 지낼 만한 게토라는 생각도 신빙성을 얻을 것이므로 수용소장 자이틀은 그들의 연주나 노래를 막지 않았다. 그는 수용자들이 아직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테레진에서 음악은 일종의 배경 장식이자 눈속임이었다. 나치는 수용소 내 문화생활을 장려하는 '여가 관리' 원칙까지 받아들였다."(229-33)


"적십자단이 다녀가고 나치 선전 영화 촬영이 있은 후로 아우슈비츠나 그 외 동부의 학살 수용소를 향해 떠나는 호송대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1944년 10월 초, 게토에는 이제 1만 1000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개중에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도 클레인의 열의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의 「현악 3중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악보는 음표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고통과 음악의 순수성이 빚어내는 대비가 악절마다 깊이 스며 있는 듯하다." "이 3중주는 게토 안에서 연주되지 못할 것이었다. 1944년 10월 16일, 그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이 완성된 지 아흐레 만에 클레인은 949번 표지를 단 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붉은 군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1945년 1월 27일, 나치유격대가 현장에 와 남아 있던 포로들을 몰살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기데온 클레인도 있었다. 그는 수용소 해방을 며칠 앞두고 죽었다.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241-2)


12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1958년 6월의 그 저녁, 테오도라키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야니스 리초스의 시 「묘비명」을 다시 읽었다. 시인이 1936년 살로니카 담배 공장 노동자 파업 진압으로 사망한 아들의 피투성이 시신을 들여다보는 어느 어머니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그 심정을 옮겨낸 작품이었다. 시를 읽던 중,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문득 속에서 음악이 샘처럼 치솟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수첩을 꺼내 오선을 긋고 떠오르는 대로 음표를 받아 적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쉬지도 않고 곡을 썼다. 그날 저녁에 쓴 곡만 여덟 편이었다! 프랑스 시에 곡을 붙일 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사랑하는 모국어에서 영감을 받은 선율과 악절은 숨 쉬듯 저절로 나왔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음악의 전통들을 한데 아울러 모든 그리스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어휘로 노랫말을 다듬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 조국 그리스와 음악을 하나로 아울렀다. 이 노래가 그리스인들의 희망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248-9)


"1967년 4월의 어느 밤, 전화가 왔다. 여성 동지가 전차들이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군사정권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헌법을 폐지한 것이다. 암울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라키스는 생각했다. 내가 잡힌다면,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작품이 뒷일을 맡아주리라. 그의 음악은 그보다 힘이 셌다. 군사정권은 민중이 그의 음악에서 어떤 힘을 얻는지, 그의 노랫말이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고 격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령들에게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특별히 취급할 만한 독보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령을 내렸다. 〈군령 13호. 공산주의자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과 노래에 대하여 재생과 연주를 금한다. 이 작곡가는 현재 해체된 공산주의 조직 람브라키스 민주청년단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음악은 공산주의를 보좌한다.〉 어찌 보면 압제자들은 이 자유의 작곡가에게 가장 아름다운 경의를 표한 셈이다."(254-6)


13 존 애덤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지 14년 후에 존 애덤스는 꼬박 2년을 「중국에 간 닉슨」에 할애하면서 자신이 이 오페라에 담고 싶은 소리를 찾았다. 색소폰 네 대와 타악기들이 포진한 오케스트라 구성은 1930년대의 스윙 악단과 비슷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댄스홀에 왔던 듀크 엘링턴 악단을 본 뒤로 재즈와 대중음악의 피가 줄곧 그의 몸속에 흐르던 터였다. 심지어 그 전설적인 재즈 연주자가 피아노를 칠 때 존 애덤스는 바로 옆에서 이를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는 금관악기의 박력에 압도되었다. 듀크 엘링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의 환희와 서정성,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특별한 방식에 그는 단단히 사로잡혔다. 애덤스의 신전에는 모차르트, 바그너, 시벨리우스뿐 아니라 마일스 데이비스, 비틀스, 지미 헨드릭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길잡이로서 이 작곡가의 삶에 함께했다. 존 애덤스는 클래식 음악 지식과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교차시키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갔다."(273-4)


"오페라에 아직 미래가 있다면 이 장르 역시 우리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애덤스는 생각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맞닿아 있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테러리즘에 대해서 말해야 했다. 하지만 정치가 개입되면 문제가 커지기 마련이다. 1990년에 그는 「클링호퍼의 죽음」을 만들었는데,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었다. 5년 전, 어느 팔레스타인 유격대가 유람선 아킬레 라우로호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집트 난바다에서 승객들을 볼모로 잡고 레온 클링호퍼라는 유대계 미국인인 하지 마비환자를 처형한 뒤 그의 시신을 휠체어와 함께 바다에 유기했다. 오페라 대본의 일부는 선장, 스위스인 할머니, 그 외 승객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망명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합창과 홀로코스트를 모면한 유대인들의 합창이 오페라를 여는데, 이 두 합창의 대결로 아킬레 라우로호 인질극 사건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더 넓은 집단적 비극의 맥락 안에 놓인다."(275-6)


"〈영혼의 환생에 대하여〉는 9.11 테러의 공포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지만 인상파의 작품이 그렇듯 내면에 집중한다. 고통의 아픔과 깊이가 여간하지 않아 그로서는 그 이상을 말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려 해봐야 소용없었다. 다만 애덤스는 서정성을 지나치게 쏟아내는 것만은 반드시 피할 작정이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증폭시키는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악취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2년 3월, 테러 이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 그는 미국을 횡단해 뉴욕으로, 그 테러의 현장으로 갔다. 현장 주변 거리의 벽마다 사고 직후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희생자를 찾기 위해 남겨놓고 간 낙서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꽤 흘러 흐릿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희생자의 사진과 이름, 신체적 특징, 전화번호 그리고 가슴 아픈 메모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만든 곡은 '추모의 장'이었다. 존 애덤스는 프로그램에 작품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각자가 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하고만 함께하는 작품.〉"(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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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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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프리카의 여러 시대: 모든 것이 시작된 곳 (기원전 5억 5000만~기원전 약 5000년)


"약 2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초기 인류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호모 하빌리스 또는 호모 에렉투스이다. 이런 발전의 끝에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에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약 10만 년 전에 몇백 명에서 많게는 2,000명 정도로 이루어진 상당히 작은 그룹의 호모 사피엔스 인간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시아 쪽으로 향했다. 현재의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기까지의 발전을 위해 필요로 했던 10만 년은 호모 사피엔스 전체 역사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에 아프리카대륙에서 수많은 민족과 종족들, 부족들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서 현생 인류가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유전학자들은 총 13종의 아프리카 초기 인류를 확인하였다.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향한 작은 그룹의 사람들에게서 오늘날 인류의 유전질 대부분이 나왔다.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에 엄청나게 다양한 인종이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 기원한다."(43)


2장 아프리카의 문명: 인간이 함께 모여 살다 (기원전 약 5000~서기 약 1500년)


"이집트와 누비아의 접촉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기원전 2450년에 파라오 사후레(Sahure)의 명령을 받고 떠난 원정대가 제출한 것이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이곳 남쪽 지역을 '푼트'라 불렀다." "이집트 사람들이 누비아에서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보물은 황금과 노예였다. 이집트의 노예들은 노동자로서 대개는 충분한 음식과 의복을 받았고, 나중에는 몇몇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생애 마지막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였다. 1500년 넘게 수많은 이집트 지배자들은 남쪽의 이웃에 대해 식민 통치자의 태도를 취하였다. 가능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가져오고 아주 조금만 돌려주었던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누비아 사람들도 이들 압제자가 하는 짓을 배웠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누비아 사람들이 최초의 중앙 집권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 나라에 '쿠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전에 자신들을 통치한 이집트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61-2)


"누비아가 아직도 이집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중부 아프리카의 콩고 분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같은 언어 뿌리를 가진 여러 민족이 기원전 800~500년 사이에 새로운 정착지역을 찾아 먼저 서쪽과 동쪽으로, 나중에는 남쪽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들은 '반투(Bantu)'라 불리는데, 이것은 각각의 민족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해도 비슷한 발음과 언어 형태로 '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다양한 반투 민족들은 한 번도 중앙 집권 국가를 구성한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몇백 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을 뿐이다. 일부 그룹은 다른 그룹들보다 더 전투적이었지만 그래도 대립이 다른 민족의 '근절'을 목표로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투 사회에서는 대부분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들의 위원회'가 일상의 생활을 결정하였고, 아주 예외적으로만 개인이 통치권을 얻었다. 유럽에서 이런 모델은 단순히 '원시적'이고 '미개발'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다."(79-80)


"반투 민족들은 중부 아프리카를 떠나 남부로 퍼져 나가면서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산족과 코이코이족을 만났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반투 민족들의 이동은 몇 년 만에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 일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때까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지역에서 새로운 형식의 농업을 시험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그곳에 이미 살고 있던 공동체들은 '정복'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배웠다. '새로 온 사람들'도 '군사력'을 가지고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대가족의 수를 넘지 않는 그룹 단위로 왔다." "언어학적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로만어와 비교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반투어를 쓰는 민족들은 오늘날 사하라 사막 남쪽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민의 다수를 이룬다. 동부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 탄자니아의 키쿠유어, 짐바브웨의 쇼나어, 나미비아의 헤레로어, 또는 남아프리카의 줄루나 코사어를 쓰는 사람들도 이들에 속한다."(80-2)


"622년부터 당시 아직 어린 종교였던 이슬람교가 아프리카 대륙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분할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가 맨 먼저 639년부터 이슬람이 되었다. 새로운 신앙은 이곳에서 수단 방향으로 퍼져 나가 나중에 북부 리비아와 튀니지로 퍼졌다. 800년부터 1250년 사이에 이슬람교는 북아프리카 전 지역과 사하라를 넘어 동부 아프리카 해안 지대 전체와 마다가스카르 고지대까지 퍼져 나가 정착하였다. 아프리카 북서부에 있는 베르베르 사람들과 그 아래쪽에 자리 잡은 투아레그 사람들은 군대의 압력을 받고 이슬람교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였다.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은 다음에 저항을 포기했다. 711년부터 아랍 사람들과 베르베르 사람들이 함께 남부 스페인을 정복하여 이슬람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의 그리스어가 그랬듯이, 이제는 아랍어가 북부와 북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교양인들의 언어가 되었다."(91-3)


3장 짓밟힌 아프리카: 유럽 나라들이 제멋대로 대륙을 나누어 갖다 (약 1500~1945년)


"1438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콩고 강 유역에 살던 바콩고 민족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그들은 원래 북쪽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여러 마을 공동체가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살고 있던 이곳의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그들의 중심지는 음반자 콩고였고, 그곳에서 콩고 왕 은징가 음벰바가 다스리고 있었다. 처음에 양측은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알폰소 1세─ 1491년에 은징가 음벰바가 세례를 받고 바꾼 이름─는 새로 얻은 무기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다른 민족들에게서 노예로 쓸 인간 사냥도 하였다. 이 노예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시작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국제 무역을 통해 해외로, 특히 브라질로 팔려갔다. 서부 아프리카 해안 앞에 자리 잡은 상투메 섬의 대규모 농장들은 짧은 시간 안에 유럽에서 가장 큰 설탕 공급지가 되었다. 알폰소 1세는 이곳 섬의 농장들을 위해서만 해마다 약 3,000명의 새로운 노예를 공급하였다."(109-11)


"맨 처음 유럽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국적인 모습' 덕분에 호기심 어린 관찰 대상이 되었다. '검둥이' 하인은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이 시기에는 아직 '검둥이'가 열등하다는 따위의 섬세하게 다듬어진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는 없었다. 그들은 '전혀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흥미롭고 '호기심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젊은 콩고 사람들은 포르투갈에서 대학에 다닐 수도 있었고,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1550년 무렵 포르투갈 인구의 10퍼센트 정도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남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농장에서 목화와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얻는 엄청난 이윤을 더욱 높이기 위해 점점 더 절실히 노동자를 필요로 하면서 사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극히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랍 상인들로 구성된 마피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며 완전히 새로운 노예 개념을 도입하였다."(114-5)


"영국인들은 대륙 남쪽에 최초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식민 지배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1652년에 이미 무역의 거점인 케이프타운을 건설한 네덜란드 출신의 보수적인 백인들을 해안 지방에서 내륙 지방으로 쫓아보냈다. 이런 갈등이 깊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영국 사람들과 네덜란드 출신 백인들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어서 1899~1902년에 그들은 그곳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계 백인과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 사이에 눈에 보이는 갈등을 남기고 있다. 영국 사람들은 남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자기들이 점령한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서 세 가지 자본주의 원칙을 고집하였다. 모든 식민지는 자급자족할 것, 영국에 원료를 공급할 것, 영국의 상품을 살 것 등이다. 백인들은 각기 여러 아프리카 종족과도 싸웠다. 특히 줄루족, 코사족과 싸움을 벌였는데, 이 아프리카 종족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124)


"1867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다이아몬드 산지가 발견되었다. 누가 장기적으로 이 다이아몬드 광산의 통제권을 가지느냐를 놓고 경쟁이 시작되었다."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 줄루족에 대한 영국 왕의 태도뿐만 아니라 '토착민 담당' 테오필러스 셉스턴의 태도도 완전히 바뀌었다. 셉스턴은 런던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남아프리카에서 '영국 연방' 계획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아 1877년 돌아온 다음에는 케츠와요 왕에 대한 태도를 싹 바꾸었다. 이때까지는 네덜란드계 백인에 맞서 줄루족을 지지하더니,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한 이후부터는 이 지역에서 영국이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줄루족이 남은 방해가 되었다." "결국 영국군은 훨씬 우월한 무기의 힘을 빌려 1879년 7월 4일에 줄루족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물리쳤다." "케츠와요 왕이 1884년에 죽었을 때 그의 왕국은 샤카 줄루가 처음 시작했던 시절의 규모로 줄어들었다. 1897년에 줄루 땅은 완전히 영국 식민지로 합병되었다."(128-32)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늦게야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맡았다."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의 연대기는 처음에는 마치 토끼와 고슴도치 사이의 경쟁처럼 읽힌다. 그것은 아무런 개념도 없고,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벌인 경쟁이었다. 프랑스가 1881년에 튀니지를 점령하자, 영국은 1년 뒤에 이집트를 집어삼켰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과 다른 '반란군들'을 제압하느라 머뭇거리는 동안, 프랑스 장교들은 세네갈과 서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을 뚫었다. 독일은 마지막에 황제의 비호 아래 브레멘의 담배상인 아돌프 뤼데리츠가' 독일령 서아프리카'(오늘날 나미비아)를, 카를 페터스가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를,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토고와 카메룬을 차지하였다. 벨기에 왕 레오폴 2세는 '작은 옥좌에 앉은 큰손 투기꾼'으로서 헨리 모턴 스탠리를 후원하여 콩고에 벨기에령 '콩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134-5)


"혼란이 점점 더 커지자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침내 '질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1884년 11월 15일에 유럽 13개 국가 대표들을(여기에 덧붙여서 미국과 오스만 제국의 대표들도 있었지만, 아프리카 국가의 대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베를린의 '콩고 회의'에 소집하였다. 이것은 콩고 강 하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요구와 벨기에 왕의 콩고 분지에 대한 식민 정책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나누어 갖는 계획으로 끝을 맺었다. 1885년에 나온 '베를린 협약 문서' 전문(前文)에 따르면 서명한 국가들은 모두 〈원주민들의 관습적·물질적 안녕을 증진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하기〉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앞으로 자기들끼리의 갈등을 피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약속대로 식민지의 약탈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약속한 것은 그후 20년 동안 극히 비인간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실행에 옮겨졌다."(135-6)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1500년 무렵에는 갖지 못했던 두 가지 이점을 확보했다. 1850년부터 의약품 키니네가 나와서 마침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자 수를 80퍼센트나 감소시켰고, 이어서 열대 지방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밖에도 새로운 무기들이(예를 들면 1884년 이후에 나타난 기관총 같은) 개발되었다. 이런 무기들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팔지 않기로 1890년 브뤼셀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합의를 보았다. 기관총은 초당 11발을 쏠 수가 있었다. 수단의 영국인 장교들은 단 한 번의 전투로 1만 800명의 아프리카 적군을 죽였는데, '아군의 손실은 49명뿐'이었다고 열광에 넘쳐 보고하고 있다." "막강한 유럽 세력에 맞선 저항의 문서들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예의바른 말투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매우 인상적이다. 그에 반해 유럽 사람들은 자주 '야만인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오히려 원시적이고 평범한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137)


"맨 먼저 상인과 모험가들이 왔다. 이어서 기독교의 영혼의 구원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동안은 그 반대도 있었다. 어쨌든 핵심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의 세속 지배자와 정신적 지배자 사이에서 아주 훌륭한 협동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권리를 잃어버리면, 선교사가 와서 유럽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고 동시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함 속에서도 평화를 지니고 살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 널리 알려진 속담은 다음과 같다. 〈백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성서》를 갖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성서》를 갖고 그들이 땅을 가졌다.〉" "이웃 사랑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조 형식은 흔히 대화나 동반자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구원자라는 태도와 의존을 장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150-5)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민지 경영 국가들은─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맞선 독일─아프리카에 있는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하였다. 1914년 8월에 이미 영국 외무부는 다음과 같은 비밀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독일 식민지를 접수한다. 평화 협상이 진행될 때 담보로 삼기 위해서이다.〉 전쟁 첫해에 벌써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에서 이 계획이 성공하였다. 다만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만 예외였다. 그 지역만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 군대가 약 1만 3,000명의 고용된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전쟁 마지막까지 대략 16만 명의 영국군을 계속 새로운 싸움에 끌어들이면서도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병사나 짐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기능을 맡아서든지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의 전투 행위에 직접 끌려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중 약 20만 명이 유럽의 주인들을 위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161-2)


"1919년에 패전국이 된 독일은 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국제연맹은 처음에 독일 식민지의 통치를 형식적으로만 떠맡았다가 실질적으로는 승전국인 영국·프랑스·벨기에 등지에 나눠주었다. 국제연맹은 이 기회에 유럽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역이 '현대 세계의 경쟁적인 조건 아래서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될 때까지 식민지를 통치하라고 위탁하였다. 선교 사업의 이념이던 것이 이제는 정치적인 의도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린이이기 때문에 '현대 민족들의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교육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많은 식민지 행정부들은 특별히 선택된 소수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이런 특혜는 아프리카 여자들에게는 거의 예외적으로만 주어졌다) 장기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1930년대 말까지 1억 6,500만 인구 중 대략 1만 1,000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16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식민지에 건설된 인프라 덕분에,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원자재가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41년, 처칠과 루스벨트는 이른바 '대서양협정'을 체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는 문서였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이 중요하였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권리를) 유보당했던 민족들까지' 모든 민족이 자기 결정권을 가질 것과 미국이 세계에서 '원료의 원천에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영국이 장기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고, 미국도 아프리카의 원료를 거래하는 데 동등하게 참가한다는 약속을 받으면 히틀러 독일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1944년, 이 협정에 분개한 드골은 모든 프랑스 식민지의 고위 관료들에게 〈식민지에서 자율 통치의 이념이나 ······ 아니면 독립 정부는 먼 미래에도〉 배제된 일이라고 선언하였다."(164-7)


4장 아프리카의 해방: 자유에 이르는 길은 왜 그리도 먼가? (1946~현재)


"1821년 한 백인 선교사가 최초의 해방 노예 무리를 데리고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쪽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곳 해안에는 크루(Kru)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땅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선교사도 해방된 노예들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협상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지금까지 평생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방법, 곧 폭력을 사용하였다." "1822년에 '라이베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지역은 1847년에 미국의 후견에 지쳐 독립을 선언하였다." "옛날 노예와 그들의 후손은 라이베리아 국경선에 살고 있던 다른 16개 민족들에 대해 스스로 노예 주인처럼 행동하였다. 커피 농장과 고급 목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들 민족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동자가 되어 가장 고약한 착취를 당하였다. 이제는 자신들을 미국계 라이베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옛날 아프리카계 아메리카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3퍼센트를 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모든 권리를 장악하고, 모든 궐기를 잔인하게 진압했다."(177-8)


"케냐에 있던 약 100만 명의 키쿠유 사람들─영국인들 아래에서 아무 말 없이 일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진─이 여러 달에 걸쳐 영국 식민세력에 맞선 비밀 궐기를 계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 엄수 맹세를 깨뜨릴 경우 누구든 죽이는 것이 옳다는 합의를 보았다. 궐기가 진짜로 시작되기도 전에 키쿠유 사람들은 자기들 내부의 배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진짜 배신자도 있었지만 그냥 배신자로 의심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처형을 당했다. 영국 사람들은 처음에 화가 나서 그냥 방관만 하다가 마침내 폭력적으로 개입하였다. 3년 동안의 궐기 끝에 적어도 1만 1,000명의 키쿠유 반란자와 32명의 영국 사람이 죽었다. 주로 젊은 남자들 약 8만 명이 여러 해 동안이나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키쿠유족으로서 뒷날 케냐의 대통령이 된 조모 케냐타는 이 궐기를 비판만 했는데도 1953년에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에 그는 독립된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82-3)


"1960년 5월에 벨기에령 콩고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파트리스 루뭄바가 승리하였다. 그는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고, 카사부부가 대통령이, 촘베는 겨우 카탕가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몹시 화가 났다." "7월에 많은 병영에서 혼란이 벌어지자 루뭄바는 유엔과 소련에 각각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벨기에에 주둔한 미국 대사는 워싱턴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와 아프리카 전체에서 우리의 본질적인 이해를 위험하게 하고 있다. ······ 루뭄바 정권을 해체하고 동시에 아프리카 나머지 지역에서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신하를 ······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당시 루뭄바의 개인 비서로 루뭄바가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던 조제프 모부투가 '또 다른 신하'가 되었다." "마지막에 모부투는 자신의 옛 상관을 카탕가에 있는 그의 철천지원수인 촘베에게 보냈다. 1961년 1월 17일에 파트리스 루뭄바와 그의 두 심복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총살당하였다."(184-9)


"1952년부터 영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황금해안에 최초의 정부를 허용하였다. 콰메 은크루마는 이 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대부분의 장관은 아프리카 사람들이었다. 1957년에는 유혈 사태 없이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은크루마는 가나의 독립이 모든 식민지의 해방을 위한 시작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USA', 곧 '아프리카 합중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의 비전에 충실히 머물렀다." "조국 가나에서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산업 생산이 자금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국고가 바닥나는 쪽이 더 빨랐다. 물가는 오르고 생활 수준은 떨어지자, 총리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졌다. 최초의 폭탄 공격과 태업이 나타나자 은크루마는 갑자기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1963년에 이미 3,000명의 정권 반대자들이 감옥에 있었다. 총리는 점점 더 독재자가 되어서 자신이 소속된 정당만 허용하였다. 1966년 콰메 은크루마가 외국에 있을 때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1972년에 기니에서 망명 중에 죽었다."(191-2)


"1981년의 마지막 날에 젊은 공군 소위 제리 존 롤링스가 두 번이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끝에 권력을 잡았다.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하였다. 그런 다음 나라 전체에 급격한 절약 정책을 명령하고 억지로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여러 조건을 이행하였다. 나라는 점차 똑바로 서고 투자 계획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며, 마침내 생활 수준이 차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사치는 아니라도 어쨌든 이전의 곤궁은 사라졌다. 1992년에 두 번째로 민주주의를 시행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가나에서는 그냥 '제이제이(J. J.)'라고 불리는 제리 존 롤링스는 정당을 설립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여 선거에 나섰다." "군복을 벗은 시민 롤링스는 자유 선거에서 58퍼센트의 표를 얻어 민주적인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모든 민주적 규칙을 지켰으며, 헌법에 정해진 대로 두 번의 임기를 끝내고 다시는 취임하지 않았다."(192-4)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 독립한 지 4년 만인 1964년, 장 베델 보카사는 프랑스에서 고국의 군대로 자리를 옮겼다. 보카사의 사촌이던 초대 대통령은 곧바로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하였다.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였다. 1965년에서 1966년으로 넘어가던 마지막 날 보카사는 공격을 시작하여 사촌을 쫓아냈고, 곧바로 1959년에 제정된 헌법을 효력 정지시켰다." "보카사가 중앙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존중하는 한 프랑스 정부는 10년 이상에 걸쳐 가장 고약한 인권 침해의 수많은 사례들을 묵인하였다.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편에 서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1972년에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된 보카사는 두 번의 쿠데타 시도와 한 번의 암살 시도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때마다 광란적인 학살이 뒤따랐다." "마침내 프랑스는 보카사를 쫓아내는 것에 동의하였고, 그가 1979년 9월에 리비아의 가다피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이 일을 처리하였다."(197-200)


"1962년 우간다가 영국에서 독립을 얻었을 때 이 나라는─2년 전 루뭄바의 콩고와 비슷하게─매우 다양한 종족 무리들이 뒤섞여서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일부러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최초의 정부는 간다 민족인 카바카(왕) 무테사 1세를 대통령으로, 랑고 민족에 속하며 간다 민족을 미워하는 정당 정치인 밀턴 오보테를 총리로 삼았다. 독립한 지 4년 만에 오보테가 공격을 개시해서 간다 왕의 권리를 뺏고 그를 영국으로 쫓아냈다." "이디 아민은 이슬람교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영국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후원을 얻었다. 1971년에 오보테가 외국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아민이 공격을 개시하여 스스로 군사 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이후 아랍 세계의 후원을 얻은 아민은 유럽 국가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8년 동안의 공포 정치 동안 적어도 30만 명이, 아마도 50만 명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201-3)


"1960년에 독립한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종족 무리와 종교들이 있다. 세네갈은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300킬로미터나 길게 세네갈 내륙으로 자리 잡은 감비아와 한 번도 갈등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1982년 이후로 두 나라에 경제적 이익이 되면서도 각자의 독자성을 확보해주는 연방을 이루었다. 1980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가톨릭교도 레오폴드 세다르셍고르는 처음부터 주민의 90퍼센트에 달하는 이슬람교도에 대해 상호 존중의 정책을 펼쳤다. 그는 다양한 종교적·종족적 출신 장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협동의 예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 다른 대륙의 문화와 대화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독자적인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기본 이념이 아프리카에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 여겼다. 언젠가 그가 말한 것처럼 '옛날부터 나눔의 이념이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06-7)


"1962년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또한 국제적으로도 많은 인정을 받았다." "새로운 탄자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우야마'(Ujamaa, 스와힐리어로 '가족 공동체')였다. 120개(!)의 서로 다른 민족들은 종족이나 그 밖의 사회적인 출신 성분과는 무관하게 농업을 위해 만든 우야마에서 평화롭게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탄자니아는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공식적인 국어로 선택한 아프리카 유일의 국가이다." "구(舊)소련, 중국, 쿠바 등의 후원을 받아서 1967년에 과격하게 시작된 우야마 마을의 농촌 개혁은 서방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국제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산업화를 소홀히 한 채 농업 중심의 개혁만으로는 점점 심해지는 나라의 빈곤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니에레레는 공개적으로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1985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까지 아프리카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209-12)


"1983년 8월 초 블레즈 콩파오레가 리비아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토마 상카라를 오버볼타의 새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상카라는 처음부터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다. 그의 특별한 정치적 관심은 풀뿌리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과 여성과 청소년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교육과 건강을 위한 체제를 만드는 것 등이었다." "그의 정부에서는 오늘날까지 아프리카의(유럽도!)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여성들이 활동하였다." "그의 혁명 1년 만에 오버볼타는 모시와 듈라(Dyula)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인 부르키나파소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블레즈 콩파오레를 중심으로 한 작은 무리가 상카라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7년 10월 15일에 그는 자기가 믿는 부하들 12명과 함께 잡혀서 같은 날 총살을 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블레즈 콩파오레는 스스로를 '혁명의 구원자'라고 부르지만 상카라의 꿈은 거의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213-5)


# 블레즈 콩파오레는 2014년 반정부 시위에 이은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다.


에필로그 아프리카에서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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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이단 아카이브
탁지일 지음 / 현대종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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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기독교 아카이브의 필요성


"이단(heresy)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에서 벗어난 주장에 대한 교리적 판단이 내포된 정통의 상대적 개념이고, 컬트(cult)는 사회적 역기능에 대한 표현으로 사이비의 의미와 용법이 유사하다. 두 용어 모두 부정적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학계에서는 이단이나 컬트보다는 신흥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이라는 표현을 주로 선호한다. 기성 종교보다 상대적으로 새롭고(new), 종교적 답변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종교적(religious)이며, 안정적인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행 과정(movement)에 있다고 정의하는 가치중립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단'은 기독교 성경 및 전통적인 교리와 차별화된 주장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지칭하는 경우에 제한하여 사용한다. '사이비'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종교적 단체라고 주장하지만, 사회적 역기능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에 적용하고, 기독교 교리를 악용한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동시에 노출하는 경우에는 '이단사이비'라고 정의한다."(15-6)


"일제강점 후반기에 열광적 신비주의의 모습으로 싹이 움트기 시작한 기독교이단 운동은, 6.25전쟁 혼란기에 본격적으로 태동한다. 6.25전쟁과 전후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적 상황은 기독교 이단의 발흥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후 1960~1980년대까지의 군사정권 시기는 이단의 성장기였다. 정치적 정통성이 취약했던 군사정권은 적극적인 지지층을 필요로 했고, 종교적 정통성이 부재했던 이단들은 기성 교단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군사정권과 이단들은 서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던 부적절한 공생의 시대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주화와 함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문화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JMS,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등 이단 2세대들의 활동이 가시화된다. 특히 1990년 초 공산권의 몰락으로 시작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온라인 환경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는 한국 이단의 세계적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17-8)


2장 이긴자론


2-1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 (박태선)


"박태선은 1917년 11월 22일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읍남리 148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사업을 했으며, 귀국 후에 남대문교회 집사로 있던 중,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영향을 받고, 이후 적극적인 신앙생활과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1955년 창동교회 장로였던 박태선은 1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한다. 하지만 3월 26일부터 4월 5일까지의 남산 천막집회로 인해 논란이 야기되자, 7월 1일 한국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한국예수교부흥협회를 조직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박태선의 활동이 사이비종교운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1956년 2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다. 한국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스스로 영생불사를 주장하던 박태선은 1990년 2월 7일 사망했다."(34)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박태선 신격화 교리가 등장한다. 예수는 마귀 대장의 아들이고, 성경의 98%가 거짓말이고, 예수가 한 번밖에 못한 금식기도를 자신은 13번이나 했으며, 죄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는 99% 죄 덩어리이고 음란마귀의 아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신약성경을 부인하고, 자신의 말이 곧 성경이며, 자신의 나이가 5,798세인 새 하느님이라고 주장한다." "박태선은 이사야 41장 2절의 〈동방의 의인〉이 자신이고, 41장 9절의 〈땅끝〉과 〈땅 모퉁이〉, 그리고 25절의 〈해 돋는 곳〉은 한국이며, 1절에서 〈섬들은 내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으니 일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북방에서 오게 하며〉를 북한에서 남한으로 자신이 내려온 것을 의미한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또한 스가랴 4장 11절과 요한계시록 11장 4절의 〈감람나무〉가 자신이며, 또한 요한계시록 2장 17절과 26절에 기록된 〈이기는 자〉의 사명과 권세가 주어졌다고 주장했다."(34-5)


"박태선은 1957년 9월 1일 신앙촌 건설을 선언한 후, 신앙촌이 말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고, 신앙촌에 들어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앙촌을 중심으로 한 박태선의 배타적 구원 주장은 점점 발전한다. 1957년 10월 23일에는,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으로 구원이 없으며, 전도관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1957년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 15만 평 규모의 제1신앙촌과 1962년 덕소에 5만 평 규모의 제2신앙촌을 조성했고, 1970년 부산 기장에 제3신앙촌을 세워 현재까지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태선에게 신앙촌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지상천국 〈새 예루살렘〉이었다." "박태선은 한국 이단의 뿌리로 일컬어진다. 전도관의 영향을 받은 영생교(조희성), 새마을전도회(구인회), 장막성전(유재열), 신천지(이만희), 실로등대중앙교회(김풍일), 동방교(노광공), 한국중앙교회(김순린), 한국기독교에덴성회(이영수) 등 다수의 단체에 영향을 주었다."(37)


2-2 대한기독교장막성전 (유재열)


"17세에 〈어린 종〉이 된 유재열은 1949년 2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북문로 1가 83번지에서 태어났다. 〈삼손〉 혹은 〈선지자〉로 불리던 유재열은, 부친 유인구와 함께 김종규의 호생기도원 신도로 있던 중, 1965년 1월경에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환상을 체험했다고 한다. 이때 예수님 머리 위에 무지개와 일곱 개의 별이 떠 있었고, 한 손에 어린양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김종규의 간음행태를 목격한 후, 호생기도원을 이탈해 부친과 독립적인 모임을 시작한다. 1966년 3월 1일 두 번째 신비체험 후, 유재열은 1966년 4월 4일 당시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청계산 계고에 소위 증거장막을 짓고 27명의 신도가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후 약 6개월간의 기도를 마치고 9월 24일 하산했으며, 1966년 11월 24일에 김종규를 축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부친 유인구 및 측근들과의 계속되는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고, 1969년 11월 1일 시한부 말세 심판 예언이 실패한 후, 세력이 약화된다."(68-9)


"유재열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동방〉(사 24:15)의 〈해 돋는 쪽〉(사 59:19) 그리고 〈생수가...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슥 14:8) 흐르는 곳인 한국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동서로 갈라진 산'(슥 14:4)이 과천의 청계산이고, 이사야 22장 11절의 〈못〉이 과천 막계리이며, 그곳에 세워진 장막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계 11:19)가 있는 곳이라고 해석한다. 장막성전이란 명칭은 요한계시록 15장 5절의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를 근거로 붙여졌다. 바로 이곳에 〈일곱 천사〉(계 1:20)와 〈어린 양〉(사 11:1~9) 유재열이 나타났으며, 바로 그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계 12:5)라고 주장한다. 이사야 34장 16절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를 근거로 짝을 맞춰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9-70)


"장막성전의 일곱 천사를 중심으로, 제1단계로 비사와 비유의 상징으로 된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2단계로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어 신도들을 모으는 한편, 기성교회의 부패와 모순을 개혁하고, 제3단계로 해외로 진출해 구원의 은총을 나눈다는 로드맵을 설정한다." "유재열의 장막성전의 영향을 받은 여러 분파가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만희), 새광중앙교회(김풍일), 천국복음전도회(구인회) 등이 장막성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분파들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장막성전 신도였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설립자 이만희는, 사기를 당해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1967년 2월 장막성전을 이탈했으며, 1971년 9월 7일에는 유재열을 고소하고, 1984년 안양교회를 세워 홍종효, 신종환, 유인구 등과 함께 『요한계시록의 실상』과 『신탄』 등의 교리서를 발간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조직해 나아가 오늘에 이르렀다."(71-2)


2-3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이만희)


"이만희는 1931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에서 태어났다. 신천지 홈페이지의 〈신앙적 약력〉에 따르면, 17세인 1948년 〈서울 침례교 외국 선교사에게 믿음 없이 침례〉를 받았고, 1957년에 〈고향 땅 야외에서 성령으로부터 환상과 이적과 계시에 따라 전도관에 입교〉했으며, 1967년에는 〈성령의 계시에 이끌려 경기도 과천시 소재 장막성전에 입교〉했다고 한다." "이만희의 신격화에도 전도관과 장막성전의 짙은 흔적이 나타난다. 이만희는 스스로를 말세의 〈이긴자〉 〈보혜사〉 〈약속하신 대언자〉 〈약속의 목자〉라고 주장한다. 2017년 1월 5일 개최된 신천기 34년 총회에서 이만희는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우리 이긴자 총회장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내심을 받은 참 목자〉라고 소개된다." "이만희가 『계시록의 진상』에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천지와 영생을 유업으로 받으니 곧 상속자가 된다〉고 언급한 영생불사 〈이기는 자〉가 곧 자신인 것이다."(88-9)


"이만희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을 보고 들었다고 주장한다. 전도관과 장막성전을 탈퇴한 후 유재열을 〈배도한 세례요한〉이라고 비판하며 신천지를 조직한 이만희는, 이로 인해 박태선의 전도관 교리와 많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먼저 〈성경은 때와 장소와 용도에 따라 빙자하여 비유 비사로 기록된 영적 말씀이다〉(이만희, 『요한계시록의 진상』, 512)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이미 일어난 〈교훈〉과 앞으로 일어날 〈예언〉으로 되어있고, 예언은 〈배도〉 〈멸망〉 〈구원〉의 일들로 구분되어 있으며, 구원의 일은 〈선민이 멸망 받을 때 피해 나온 자〉와 인 맞은 〈14만 4천〉과 〈수많은 사람〉(흰 무리)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의 신천지 신도가 바로 〈14만 4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2020년 신천지가 정부에 제출한 명단에 나타난 신천지 교세는 총 31만 732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신천지 신도들 가운데서도 14만 4천에 속하기 위한 경쟁이 불가피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90)


"코로나19 이전에는 모략(위장)이 신천지 포교 활동의 주된 전략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교회에 잠입하거나, 행사 및 활동을 주도하며 신도 모집에 집중했다. 하지만 신천지 대구교회의 코로나 집단감염사건으로 인한 '조직과 신도들의 신분 노출'과 '신천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신천지자원봉사단 중심의 공개적인 봉사활동을 펼치는 한편, 긍정적인 여론 전환과 이미지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신천지 본부는 현재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에 있다. 본부총회를 중심으로, 신천지 12개 지파 조직이 전국 도 단위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서울·경기지역은, 서울야고보, 시몬, 마태, 바돌로매, 요한 지파, 강원도는 빌립, 충청도는 맛디아, 전라북도는 도마, 전라남도는 베드로, 경상북도는 다대오, 경상남도는 부산야고보와 안드레 지파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는 안드레 지파가 담당하고 있으며, 각 지파별로 신천지 해외 조직들을 분담해 관리하고 있다."(92-3)


3장 성적타락론


3-1 이스라엘수도원 (김백문)


"김백문은 경북 칠곡군 인동면 안의동 488번지에서 1917년 10월 19일 출생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과는 다른 성적타락론을 기본으로 하는 교리를 체계화했으며, 저서들을 보면 그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백문은 대구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수련의 실습을 위해 머물렀던 함경북도 청진도립병원에서, 일제강점후반기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운동을 펼치던 황국주의 제자인 김남조를 만나 영향을 받았고, 이후 학교를 중퇴한 김백문은 김남조의 소개로 원산 이스라엘수도원장인 백남주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탁명환은 기록한다. 1943년 일제강점말기에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에 이스라엘수도원을 설립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 상도동에 교회를 운영했는데, 당시 통일교 설립자 문선명이 찾아와 김백문으로부터 교리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백문이 문선명에게 미친 교리적 영향의 흔적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 데칼코마니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105-6)


"김백문은 인류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해석한다. 즉 타락한 천사인 뱀에게 유혹된 하와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과 성적 관계를 갖고 타락하게 된 것이 곧 선악과를 범한 것이고, 다시 아담과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온 인류의 혈통에 죄악성이 들어오게 되었으며(김백문, 『基督敎根本原理』, 485), 〈아담으로 시작된 타락에 육성세계에 근본악성은 혈통적 육체계식을 따라 유전적으로 각종에 죄의 형태를 이루어 인종이 번창할수록 죄악의 종족도 번창했든 것이다.〉 즉 인류가 번창함에 따라, 죄도 함께 번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김백문, 『聖身神學』, 103). 하지만 성적 타락으로부터의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혈통 복귀 교리와 행위로 인해 비윤리적인 성적(性的)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통일교 문선명을 거쳐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등 성적타락론 유사교리를 주장하는 이단 단체들로 인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106-7)


"일제강점후반기 열광적인 신비주의의 확산이 이루어지던 1930년대 말부터 김백문은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김백문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바로 한국이며, 재림주가 강림할 곳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3월 2일 김백문은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계시와 새로운 교리를 세상에 알리라는 사명을 받은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김백문의 삶과 활동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통일교 측의 자료에 부분적으로 행적이 드러나 있고, 김백문의 저서들을 통해 활동의 흔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基督敎根本原理』 서해(序解)에서 김백문은 그의 저술 목적에 대해 〈본서(本書)는 그 신(神)의 가르친 신(神)을 논(論)했고 그 신(神)의 다시 짓는 인생(人生)을 논(論)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 이단 교리를 체계화한 김백문은, 대규모 세력을 형성하거나 광범위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신(神)을 논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논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107-8)


3-2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문선명)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태어났다. 1991년 문선명의 방북과 김일성 면담 이후, 그가 태어난 집터에 통일교 '정주평화공원'이 세워져 통일교 신도들의 성지순례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1945년 최선길과 결혼했으나 1957년 이혼하고, 1960년 18세의 한학자와 재혼한다. 1964년에는 그의 본명인 문용명을 문선명으로 개명한다. 문선명은 1935년 부활절에 인류구원의 사명을 실패한 예수님을 만나 지상천국 건설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1976년에는 〈공자, 석가, 예수까지도 나의 부하〉라고 주장하고, 1992년에는 〈본인은 재림주요 구세주〉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2002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 한학자도 〈구세주,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2012년 9월 3일 사망했으며, 현재 스스로를 〈6천 년 만에 탄생한 독생녀〉라고 주장하는 부인 한학자가 문선명의 뒤를 이어 통일교를 이끌고 있다."(111-2)


"『원리강론』은 인류의 타락이 성적 타락임을 주장한다. 〈인간을 꼬여 타락하게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하여 타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를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불륜한 성적 관계에 의하여 천사장과 일체를 이루었던 「해와」는... 「아담」으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위치를 떠나게 하여, 마침내 그들은 육적인 불륜한 성적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아담」마저 타락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계승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번식하여 내려온 것이다.〉 (문선명, 『원리강론』, 80-91)." "이를 구원하기 위해 제2의 아담인 초림주 예수님이 강림했지만 실패했으며, 이후 제3의 아담인 문선명이 재림주로 왔다는 내용이다.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이 동방인 한국에 세워진다는 것이 『원리강론』의 결론이며, 통일교는 이의 실현을 지상목표로 삼고 활동하고 있다."(112-3)


"통일교는 대표적인 기업형 종교조직이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원리강론』을 근거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단체로 활동하는 한편, 국내외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관련 사업체들을 통해 기업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는 재림주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 곧 통일교 왕국 건설을 목표로 진행되는 종교적 활동들이다." "국내외 각 지역 교회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7년에는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해 제18대 총선에 참여하는 등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모색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했다." "문선명 사후 현재 후계 구도를 둘러싼 친어머니(한학자) 및 친형제(문현진, 문국진, 문형진) 간 대립과 다툼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통일교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은, 문선명의 후계를 둘러싼 갈등과 긴장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한편, 통일교가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114-6)


3-3 기독교복음선교회(JMS) (정명석)


"정명석은 1945년 음력 2월 3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월명동에서 태어났다. 정명석이 1975년 3월 20일 자로 작성한 통일교 입회원서에 따르면, 그가 20년 동안 장로교 집사로 있었으며, 당시 통일교 진산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명석은 1974년 11월 15일에 통일교에 입교해, 1979년까지 승공 강사 등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탈퇴한 후, 1982년 애천교회를 세우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재림주로 따르던 문선명을 〈실패한 세례요한〉이라고 폄하하고, 자신의 이름 영문 첫 글자인 JMS를 사용해, 자신이 예수(Jesus), 메시아(Messiah), 구세주(Savior)라고 주장하며 독립적인 단체를 시작한다. 청년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포교 활동을 하며 교세를 증가시켰지만, 여신도들에 대한 성범죄 혐의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후 현재는 고향이자 활동거점인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월명동수련원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33-2)


"정명석은 〈하와는 십대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 뱀으로 비유한 천사장 루시퍼에게 사랑의 꼬임을 받고서 호기심에 사랑의 충동감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끊고 그와 사랑의 관계를 맺어 이성의 타락을 함으로 영, 육으로 타락을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와는 그 타락한 몸을 가지고 아담을 사랑함으로 또 아담을 타락하게 했다.〉(『구원의 말씀』, 207-209) 라고 주장한다. 정명석의 교리에 대해, 항소심 판결문은 〈통일교원리를 요약·인용한 것으로 성경을 상징과 비유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 재림 예수가 피고인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암시함으로써 위 교단의 신도들은 그를 메시아로 믿고 그의 면전에서 그가 메시아임을 고백〉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성적 타락을 회복하기 위해 정명석이 재림주로 왔으며, 그와 성적 관계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인류 회복을 위한 영적 행위로 합리화한 것으로 법원은 봤다."(134)


"1980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서대문구 신촌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한 후, 초기에는 강남구 삼성동, 성북구 삼선동, 중구 을지로4가 등지로 옮기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국내외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JMS는, 주로 CGM(Christian Gospel Mission) 혹은 위장 동아리의 형태로 운동, 문화, 악기연주, 댄스, 노래, 연예기획, 모델, 치어리더, 행사 의전, 신앙 활동을 내세워 신도들을 모집하고 있다." "김백문의 『기독교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의 주장이 정명석의 「30개론」에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들의 유사 성적타락론의 흐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 사회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탁명환은 〈통일교의 원리를 새 진리로, 문선명 교주를 이 시대의 중심인물의 대권을 자신에게 물려 줄 전자(前者)〉로 가르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애천교회의 최대의 목적은 기독교회와 통일교를 애천교회에 흡수시키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135-7)


4장 시한부종말론


4-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엘렌 G. 화이트)


"안식교로 알려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SDA)는 몰몬교와 여호와의증인과 함께 미국에서 전래 된 가장 대표적인 단체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는 1831년부터 임박한 재림을 주장하던 침례교 설교자 윌리엄 밀러의 주장을 근간으로 시작됐다. 1818년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일어난다고 확신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밀러를 따랐던 사무엘 스노우는 그날이 3월이 아니라 1844년 10월 22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재림 예언은 다시 실패했고, 추종자들은 소위 〈대실망(The Great Disappointment)〉에 직면한다. 이후 밀러에게 영향을 받았던 엘렌 화이트와 조셉 베이츠와 존 바잉턴 등이 시한부종말론을 수정한 후 공식적으로 안식교 활동을 본격화한다. 안식교의 설립과 초기 교리형성 과정에서 엘런 화이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화이트는 23년 동안 200여 차례의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다."(151-2)


"안식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 즉 〈영원한 복음〉(계 14:6)을 전하는 것을 궁극적인 사명으로 이해한다." "안식교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희생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효력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승천 직후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봉사하셨다. 그리고 2300주야(단 8:14)의 끝에 하늘 성소의 둘째 칸에 들어가 조사심판을 시작하셨다. 이 심판이 마친 후 예수께서는...재림하신다〉고 설명하면서, 〈재림의 징조에 관한 예언들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한국선교 100주년, 2904~2004〉, 31)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셉 베이츠는 토요일 안식일 준수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고 시내산 언약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시이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짐승의 표식이며, 안식일을 지켜야만 14만 4천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52-3)


"안식교의 국내 전래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와이 이민을 위해 일본에 잠시 체류하던 손홍조가 1904년 6월 12일 일본 안식교 전도자에게 침례를 받은 후, 이민을 포기하고 다시 귀국하여, 안식교 선교사들이 내한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08년에는 일본선교회로부터 독자적인 조선 선교회로 독립했으며, 1915년 4월에는 이근억과 정문국이 최초의 안식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5년 안식교에 참여하면 면직과 제명한다는 장로교의 공식 결의가 있었지만, 현재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는 안식교 삼육대학교가 정회원으로 참여하여 신학적 교류를 하고 있어, 안식교의 이단성 여부에 대한 목회현장의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탁명환은, 안식교 성경해석의 오류, 엘렌 화이트의 환상과 예언에 대한 지나친 권위 부여 등의 교리적 문제점들은 〈이단적인 요소〉라고 판단하면서도, 〈안식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교육, 의료, 사회사업, 구호사업, 금주금연운동 등 실로 괄목할만한 활동을 해왔다〉고 평가한다."(154-7)


4-2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회 (안상홍)


"하나님의교회는 설립자 안상홍을 〈재림 그리스도〉 〈재림 예수〉 〈하나님〉으로 신격화한다. 하나님의교회 홍보 전단에는, 성부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안상홍 하나님이라고 나타나 있다. 안상홍은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내남면 명덕리에서 출생했는데, 하나님의교회는 이날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안상홍은 유년 시절을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보냈으며, 1947년 7월 안식교에 입교했으나, 1962년 3월 24일 안식교를 탈퇴한 후, 1964년 6월 2일 하나님의교회를 설립했다. 안상홍은 1985년 2월 25일 사망했다." "안상홍이 사망한 후 전도사였던 장길자가 안상홍의 뒤를 잇는다. 하나님의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갈 4:26)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장길자를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이자 〈어머니 하느님〉으로 신격화한다."(172)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과 장길자,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신격화하는 새로운 유형을 보여준다.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 나오는 〈우리〉라는 복수형 단어와 하나님의 히브리 원어인 〈엘로힘〉이 복수형 명사라는 것을 근거로 남녀 하나님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엘로힘〉의 성경적 의미는 단수, 즉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 의미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성경해석의 오류라고 비판받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유월절 준수를 강조한다. 인류 역사를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고, 성부 시대에는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셨고, 성자 시대에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으며, 성령 시대에는 안상홍이 유월절을 회복해 구원을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안식교와 마찬가지로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교가 종말의 때라고 주장했던 1844년을 기준으로 새로운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웠다."(172-3)


"즉, 1844년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 들어갔다는 안식교의 주장에 덧붙여, 모세가 장막을 짓는데 소요된 시간이 168일이고, 성경에서 하루는 일년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1884년에 168년을 합치면, 2012년이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1988년, 1999년, 2012년 등의 시한부 종말을 주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나님의교회 정관에 따르면, 영구직 총회장인 김주철에게 조직운영과 소유권 등의 절대적인 권한이 위임되어 있다. 규모와 교세 면에서 신천지와 함께 국내 최대 기독교계 이단으로 알려져 있으며, 적극적인 친사회적 봉사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있으며, 특히 해외에서의 현지인 포교 활동을 통한 교세 확장이 두드러지고 있다." "사회봉사를 기반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가장 폭넓게 진출해 있는 대표적인 한국 기독교계 이단 단체이다. 특히 설립자 안상홍 사후에 급속도로 발전한 점을 고려할 때, 종교사회학적으로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71-3, 176)


4-3 다미선교회 (이장림)


"다미선교회 이장림은 1948년 2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출생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성결교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성결교회 목회자로 있으면서 '생명의 말씀사'에서 성경주석과 휴거 관련 서적들을 번역했다. 휴거와 관련된 책들을 발간한 후, '생명의 말씀사'를 나와 1988년 8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선교회' 즉 다미선교회를 설립한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 24시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1988), 『하늘 문이 열린다』(1988), 『경고의 나팔』(1989) 등의 도서판매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으며, 1989년 3월에는 다미선교회 본부였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 365-25 소재 대지 148평 건평 94평의 주택을 자신 명의로 매입하는 등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장림은 종말을 한 달여 앞둔 1992년 9월 24일 신도들의 헌금 34억을 개인 계좌로 이체까지 한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채권의 지급일은 휴거 이후인 1993년 5월이었다."(204-5)


"다미선교회는 〈인간역사 6000년이 지나면 천년왕국이 도래함을 알 수 있으며,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에서 한 세대는 이스라엘 독립 후(1948.5.14) 50년(희년)으로 볼 수 있고, 7년 환난 전에 휴거가 있으므로 1992년에 휴거가 있게 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0월 28일 24시에 휴거가 있다고 계시되고 있는 바, 이스라엘에서는 오후 해질 무렵(오후 6시)부터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를 하루로 보며 우리나라보다 6시간이 늦으므로 우리나라의 24시는 이스라엘의 오후 6시로서 하루가 바뀌어 나팔을 부는 시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라고 해석했다." "다미선교회는 휴거된 신도들은 공중에서 재림주와 7년을 지내고, 이때 지상에서는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며, 1999년에 지상 재림하여 이후 1천 년 동안 천년왕국이 지속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택받은 청소년들이 북한과 중공에 들어가 순교한다고 예언했으나, 모두 예외 없이 실패했다."(205-6)


"당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다미선교회 이장림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직통 계시를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이들 중 한국중앙교회 이천성은 1992년 6월 21일 종말 주장이 빗나가자 충청남도 논산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는 1988년 올림픽 개막식 때 사망한 교주 안상홍이 주경기장 공중에서 내려온다고 주장했으며, 영생교는 1992년 2월 18일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면서 조희성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주장했다." "다미선교회의 1992년 시한부종말론은 개신교계 이단 단체의 병리 현상이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던 신도들의 모습은 국내외 언론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휴거의 불발은 신도들과 가정 특히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한부종말론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업 중단, 가정 해체, 가출, 직장 포기, 낙태, 정신질환 등이 폐해가 나타났으며, 사회 혼란의 야기와 함께 개신교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었다."(207-9)


5장 사회적 논란


5-1 동방교 (노광공)


"노광공의 공식적인 출생기록에 따르면, 1911년 1월 13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동방교 〈說敎文〉에 따르면 1914년 갑인년 1월 13일 평양 상수리 일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계 형사로서의 친일행적이 있고, 해방 후에는 경북 안동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했다. 6.25전쟁 후에는 전도관 집회에서 북을 치며 박태선을 추종하다가, 1955년 대구시 신천동에 동방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동방교 경전인 『경화록』에 따르면, 노광공이 태어난 후 3시간 만에 〈내가 世上에 조금 일찍 와서 苦生하겠구나〉라고 말을 했으며, 7시간 만에 〈혼자 일어서서 步行〉을 했다고 한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3개의 치아가 있었고, 3세 때 시조(時調)와 음율(音律)을 읊었고, 6세 때에는 천자문을 20일 만에 통독 암송했고, 학교에서는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7세 때는 콜레라고 죽었다가 모친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한다."(235-6)


"동방교 모든 교리와 행동지침은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방교는, 예수는 일래(一來)이고, 〈심판주요 창조주〉인 노광공은 〈여호와 이래(二來)〉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광공과 그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를 삼위일체로 믿었다. 즉 노광공은 성부이고, 노영도는 성자이며, 노영구는 성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노광공을 〈이래 조부님〉, 노영도를 〈아바 조부님〉, 노영구를 〈아브니엘 주부님〉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신도들에 대한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또한 1970년대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으나 실패하자, 신도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연기되었다고 주장했다. 동방교는 구원의 조건으로 〈지성금(至誠金)〉을 내세웠다. 동방교 신도들을 〈성민(聖民)〉이라고 부르면서, 성민이 되기 위해서, 지성금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성금의 종류는 30여 종에 이르렀는데, 61계급의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그리고 각종 절기마다 온갖 종류의 지성금을 바쳐야 했다."(237-8)


"1967년 7월 26일 노광공이 당뇨병으로 사망한 후, 동방교는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 총회로 변신하고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주간기독교」라는 신문과 「청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고, 청림농림학원, 고등성경통신학교, 기독교통신대학, 성봉신학교를 운영했다. 재단법인 밀알복음전도선교회를 운영했으나 끊임없는 반사회적 범죄혐의로 인해 1976년 7월 13일 인가가 취소되었다." "탁명환은 〈1950년대 교조 노광공의 부산 여학생 간음 사건을 비롯하여 1960년댕에 접어들어 간음, 린치, 폭력, 살인 등 갖가지 사건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동방교는 1967년 7월 13일 그 재단법인이 대법원으로부터 취소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실로 가공할 사교로서의 범죄행각〉을 벌였다고 평가하고(『기독교이단연구』, 298, 325), 〈동방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또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로 변신한 동방교는 기독교 간판으로 위장한 사이비 종교집단〉(『한국의 신흥종교』 제2권, 62)이라고 결론짓는다."(239-42)


5-2 대한구국선교단 (최태민)


"최태민은 1912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서 태어났다. 출신과 배경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태민을 직접 만났던 탁명환은 그를 〈신흥종교단체의 교주〉, 〈유사 무속인〉, 〈권력 그늘 속의 종이호랑이〉, 〈권력의 시녀〉, 〈고려 말 괴승 신돈〉,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돈거래로 목사직을 산 것으로 보이는) 가짜 목사〉라고 묘사했다. 탁명환의 증언과 관련 자료들을 통해 최태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최태민의 종교적 활동이 노출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 최태민은 원자경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을 〈영세계 칙사관〉이라고 주장했다. 즉 스스로를 〈조물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불교의 깨우침, 기독교의 성령강림, 천도교의 인내천을 이룰 칙사님〉이라는 것이다. 혼합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자신의 영험함을 주장했던 유사종교 단체의 교주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구국십자군과 대한구국선교단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신교 목사로 변신했다."(356-7)


"최태민은 각종 기성 종교의 교리를 혼합해서 사용했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 곧 〈영세계 칙사관〉인 자신이 〈불교에서의 깨침,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라고 주장하면서, 〈난치의 병으로 고통받으시는 분께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고 선전했다. 질병 치료와 재난극복을 위해 최태민이 한 일은, 〈벽에다 둥근 원을 색색으로 그린 후 이를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최태민은 주장했다." "최태민은 대한구국십자군과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해 운영했다. 탁명환은 이에 대해, 〈당시 저항 세력이었던 기독교계의 저항을 희석시켜보려는 의도에서 대한구국십자군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357-9)


"최태민은 각종 기독교 행사를 주도했지만, 그는 여전히 '가짜 목사'였다. 정식적인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 그가 금전거래를 통해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증언까지 확보한 탁명환은 그가 가짜 목사라고 판단했다. 특히 그가 주도하거나 참여한 기독교 행사에서 목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최태민을 보면서 탁명환은 그가 목사직을 급조해 만들어 악용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최태민은 한국 사이비종교 역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권력 핵심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체계적인 교리와 치밀한 조직을 갖춘 통일교도 하지 못했던 일을 비주류 사이비종교 교주인 최태민이 해낸 것이었다. 특히 육영수 여사의 사망이라는 절묘한 시점과 그 유자녀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예상 밖의 선택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일단 관계가 형성되자, 소위 구국의 명분을 내세워, 핵심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사욕을 채웠다."(359-60)


5-3 영생교 (조희성)


"영생교의 설립자 조희성의 출생기록에 따르면, 1931년 8월 12일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박태선 전도관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영향을 받았다. 조희성은 전도관을 떠난 후에도 박태선을 〈영모님〉으로 따랐으며, 영생교는 현재도 전도관의 이슬성신절(매년 1월 1일)을 지키고 있다. 1981년 8월 18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서 독자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1년 10월 10일 부천시 역곡동 74-141에 승리제단을 설립한다. 조희성은 스스로를 〈이긴자〉 〈정도령〉 〈구세주〉 〈하나님〉 〈주님〉 등으로 신격화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이 〈구세진인 正道令〉이고 〈개벽의 주인공〉이며 〈경전과 예언서에는 이슬(甘露)을 내리는 자를 이긴자, 메시아, 생미륵불, 정도령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왔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1980년 10월 15일을 기하여 한국 땅에 출현〉(『승리신문』 1993년 11월 7일 자) 했다고 주장한다."(383-4)


"영생교의 공식명칭은 〈영생교 하나님의 승리회 승리제단〉으로, 〈하나님이 서 계신 승리대, 즉 승리하신 하나님의 재단이란 뜻〉이다." "〈성화(이슬성신)이란〉 제하의 영생교 유인물에는, 〈성경에는 구세주의 증표로 이슬성신이 내린다 했고, 불경에는 생미륵불의 증표로 감로수(甘露水, 이슬)를 부어주신다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예언서에는 정도령의 증표로 감로해인(甘露海印)을 사용한다고 되어있습니다〉라고 설명한 후, 〈승리제단에서는 「이긴자」 조희성님으로부터 10년 동안 계속 이슬성신이 내리고 있으며, 이 이슬성신에 의해 인간 몸이 변하는 새로운 장(場)이 열리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의 출생일인 8월 12일을 성탄절로 지키면서, 2004년 6월 19일 그의 죽음을 〈보광(普光)〉이라고 명명하면서, 보광은 〈구세주의 영광의 빛이 온 누리에 두루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완성〉된 조희성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385-6)


"1992년 9월 서울지검 강력부는, 영생교 신도 실종 사건에 조희성이 관련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1993년 1월 10일 도피 중이던 조희성을 검거했으며, 신도들에게 영생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현금 3억 6천만 원을 가로챈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구속수감했으며, 1994년 8월 30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은 징역 4년에 추징금 5백만 원의 실형을 선고한다. 1995년 3월 8일에는 실종 신도의 유골이 발견되는 한편, 영생교 간부들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조희성은 영생교 신도 6명에 대한 살인교사 및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004년 항소심에서 살인교사 혐의는 무죄, 범인도피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직후인, 6월 19일 수감 중이던 서울구치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현재 조희성 사망 직후인 2004년 6월 20일 승리재단 총재로 취임한 부인 이영자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384, 387-9)


6장 기독교이단 아카이브 현황 및 활용 방안


7장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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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성찰 비아 시선들
데일 C. 앨리슨 지음, 김선용 옮김 / 비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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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적 유용성의 문제


"현대 예수 연구 서적들에는 수많은 역사적 예수상像이 담겨있고 학자들이 제시한 예수상은 지나치게 많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유대인 예언자이자 거의 정통 그리스도교인으로 그린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를 영원한 지혜를 가르친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묘사한다. E. P. 샌더스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유사하게 예수를 유대 종말론적 예언자로 그린다. 존 도미닉 크로산에게 예수는 갈릴리인이면서도 견유학파 철학자 같은 소농peasant으로서, 권력에 바탕을 둔 로마 제국의 정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평등한 왕국과 비폭력적 하느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학자들이 합의점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할 수는 없다. 유명한 사람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한때 영향력 있던 생각도 이내 잊힌다. 오늘 학자들이 이룬 합의도 내일 깨질 수 있다. 예수에 관한 대작들은 구름과 같다. 아무리 크고, 인상적이고, 아름다울지라도 오래 가지 않는다."(31-5)


"신학자들이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활용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각 의견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학자의 역사적 예수상도 순수한 역사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도 역사적 예수 연구 활용을 어렵게 한다. 예수에 관한 (거의) 모든 거대한 책은 그 안에 일정한 신학을 담고 있다." "높은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을 견지하는 학자는 당연히, 역사적 예수가 높은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확률이 높다.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학자는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예수가 아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예수를 발견할 확률이 높다. 개인의 신앙과 역사의 발견 사이의 상관관계는 끝없이 이어진다. 개신교 복음주의자가 쓴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리는 예수는 개신교 복음주의에 우호적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유대교인으로 복원하려는 유대교인이 그리는 예수는 신실한 유대인일 것이다. 이념은 어디에나 있다."(46-9)


"일례로, 존 도미닉 크로산은 개인의 편향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역사를 예수 전승에 투사했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크로산은 자신이 고대 유대인과 근대 아일랜드인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산은 나르시시즘과 실증주의 사이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공간을 상호작용성interactivism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와 과거,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 사이에 가능한 한 정직한 변증법을 만들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본문에 연구자가 자신을 투영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하는 것과는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홀로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계의 구성원들이다. 어떤 이의 경향은 다른 이의 경향과 대화를 통해 겨룰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을 통해 연구자들은 물론 학계 전체의 이해는 확장될 수 있다."(55-7)


# 크로산은 나르시시즘을 인간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물이나 거울 등에 비친 모습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illusion이라고 보고, 역사 실증주의를 사건을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 망상delusion이라고 말한다.


"근현대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유럽의 이신론자deist들이 시작했다. 그들은 증거를 반反교회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의심의 해석학'이란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교회가 선포하는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 의심했고 그 의심이 맞음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신론자들의 목표는 진실과 허구, 즉 교회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예수에 관한 진실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 지어낸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지우고, 제도 교회가 만들어낸 초인 뒤에 감춰진 역사적 인물 예수의 정체를 알아내기를 원했다." "우리의 자료들이 결코 순수하지 않고, 과장된 이야기, 만들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가정 아래 역사적 관점에서 부활 이전의 예수를 탐구하는 작업은 꽤나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덧칠을 벗겨내는 것이 가능할까? 해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를 포함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예수를 그의 해석자들에게서 깔끔하게 분리해 낼 수 있는지 의심이 커짐을 고백해야겠다."(62-4)


"좀 더 중요한 점은, 교회라는 밭에 묻혀 있는 예수라는 보화를 찾을 때 내가 정확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탐구를 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좀 더 깊이 의식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 가운데 많은 이는 예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예수의 자기 이해를 정확히 가려내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정체는 그의 말과 행동, 자의식, 혹은 이들의 조합으로 축소될 수 없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종종 진지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이 질문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른다.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고려해야 하며 '나'와 중요한 상호작용을 해왔던 수많은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개인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을 이루며 산다."(64-5)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전기를 자서전으로 축소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칭송하기 전의 예수, 있는 그대로의 예수로 돌아가기 위해 마태오의 편집과 마르코의 신학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반드시 그를 오해한 이야기, 호도하는 이야기라는 법은 없다." "더욱이 한 사람은 자신의 전체 생애의 가치와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분명해진다.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영향의 물결을 막지 못한다. 그가 죽은 뒤에도 영향의 물결은 계속 뻗어나가고, 다른 사람의 물결과 만나 새로운 흐름을 빚어낸다." "시간이 흐르면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 관한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67-8)


2 논쟁적 문제들


"1970년대 신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책에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종교historical religion라고 쓰여 있었다. 그 책들은 힌두교, 불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는 실제 일어난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했다. 당시 이러한 이야기를 하던 수많은 책 중 두 권의 제목을 빌려 표현하면, 〈행동하시는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역사와 관련해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종교라는 생각을 암시했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하면서, 역사는 인식론의 보루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실은 해석을 결정하지 않으며 역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역사를 신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역사에서 신학이 나온다. 그러니 과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대한 현대적인 역사의 재구성은 종교적 믿음이나 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83-5)


"이제 우리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상상력의 산물임을 안다. 세상을 뒤덮은 홍수는 없었고, 동물로 가득 찬 방주도 없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그 역사성을 의심할 법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실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성서에 기록된 그의 활약은 때때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런 사례는 계속 열거할 수 있다. 한때 사람이 역사로 간주했던 것이 이제 대부분 실제 사건이 아님이 밝혀졌거나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받는다. 역사가 사라진 뒤에도 의미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의미가 반드시 역사에 기반을 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이러한 관점을 복음서에 적용하는 이들이 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말했다. 〈엠마오 사건(부활한 예수)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엠마오 사건은 항상 일어난다.〉"(92-3)


"어떤 이들은 (성서) 본문과 역사가 어긋난다면 본문의 권위를 박탈하고 역사의 권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성서 본문이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그 본문은 신학적 권위를 상실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예수를 구성할 때 모든 허구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들을 해체한 뒤 역사적 사실로 간주되는 요소만 빼내어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역사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정경의 지위와 기능은 학계에서 정경의 지위 및 기능과 동일하지 않다. 역사가로서 나는 복음서의 표면을 찢고 역사를 발굴하는 골치 아픈 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교인으로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복음서들을 존중하고 이를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인에게 복음서는 과거의 재구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도구다."(104-8)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인들을 양육하고, 전례 시 읽을거리를 제공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설교에 영감을 불어 넣고, 교리와 윤리 지침을 구성하는 데에 이바지한 것은 재구성된 역사가 아니라 성서 본문이다.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현대 역사가들이 비역사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본문들을 무시한다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과 다름없다. 먼 옛날 마태오와 루가는 Q의 어록 자료를 흡수해 없애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자료가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를 흡수해 둘을 사라지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정경은 이미 확립된 지 오래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버리지 않는 한 정경을 버릴 수는 없다. 정경 복음서에 대해 논쟁을 하더라도, 정경 복음서는 교회의 유산이자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신자들이 성서 내용을 정정하고 재해석할 경우와 마주하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성서나 성서 일부를 폐기할 수는 없다."(110-1)


3 어떻게 연구를 진행할 것인가


"1960년대 이후로 학자들은 이른바 '진정성 판별 기준'criteria of authenticity에 대해 논의했다. 진정선 판별 기준이란 자료들에서 실제 예수의 말과 행동을 걸러내기 위해 사용된 체sieve를 말한다. 주요 기준들(다중 증거의 기준(여러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일수록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론), 비유사성의 기준(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당대 유대교의 관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예수의 말과 행동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 일관성의 기준(몇 가지 역사성이 인정되는 자료의 예수상과 일치하는 본문이 역사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내 관심사는 어떤 기준이 좋고 어떤 기준이 나쁜지, 혹은 좋은 기준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기준들을 정말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내 대답은 〈아니오〉다."(133-5)


"복음서에 나오는 자료 대부분은, 실제 일어났는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우며, 자료가 얼마나 역사에 가까운지 정확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예수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실제 일어났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예수가 한 말이라고 기록한 모든 구절을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1) 예수가 실제로 한 말, (2) 예수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 (3)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예수의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말)." "(3)에 해당하는 본문의 수는 (1)과 (2)의 경우를 합친 수보다 훨씬 많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136-8)


"나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고찰을 통해 역사적 예수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항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전반적인 인상은 제대로 기억한다. 누군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대략의 요지는 기억한다." "우리는 과거 일어난 일의 세세한 부분을 빠뜨리거나,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세세한 부분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그 일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일반적인 사항은 대체로 잘 기억하는 편이다." "이를 고려하면, 일부 자료에 때 묻지 않은 기억이 보존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진정성 판별 기준으로 개별 항목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보다는 반복되는 흐름을 찾고 전체 그림big picture을 찾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믿으려면, 가장 믿을 만한 것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 "진정성 판별 기준은 전체보다 부분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개별 항목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도출한 일반적인 사항을 우선시하는 게 더 신중한 접근이다."(147-51)


"깊은 연민을 가르쳤든 아니든, 동기가 종말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든, 예수는 자기희생을 강조했다. 몇몇 사람에게는 자기를 즉시, 무조건 따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예수 전승의 역사성을 우리가 확증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 전승에 대해 진정성 판별 기준이 뭐라고 판단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수 전승들이 화음을 이루며 빚어내는 흐름이다." "내가 제안한 대로 예수 전승을 분석하면 꽤 많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예수는 사탄을 파멸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이해했던 축귀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분명 계속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며 여러 비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단에) 적용해 보면 1차 자료에 재래의 종말론 내용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가 종말론적 예언자였다는 결론이 거의 필연적으로 도출된다."(153-4)


"예수가 종말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내용이 모든 예수 전승, 즉 예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나 다른 이들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에서, 그리고 이야기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확실하게 나오고,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으나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자료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들어있는 전승과 루가 복음서에만 들어있는 전승도 마찬가지다. 바울서신, 사도행전, 요한 복음서, 도마 복음서, 그리고 기타 여러 문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자신을 어떤 칭호로 불렀느냐와 상관없이, 예수는 자기를 단순히 종말론적 예언자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종말 시나리오의 중심인물, 최후의 심판 때 핵심 인물, 즉 11QMelchizedek에 나오는 멜기세덱 혹은 에녹 1서의 '비유의 책'에 나오는 선택받은 자 같은 인물로 확신했던 것 같다." "반복해 나오는 양상이 실제 예수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예수를 영영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158-9)


"1차 자료는 예수가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데이비드 흄처럼, 기적의 가능성을 의심하거나 기적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1차 자료가 기적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 위의 연구 방법론(반복되는 양상에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 틀렸음을 드러내는 증거로 보일 것이다." "물론, 복음서에서 역사적 기억을 찾고자 하는 이에게 기적은 곤혹스러운 문제다. 나의 요지는, 체험 증언testimoney과 체험에 관한 설명explanation은 별개이며 예수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들을 꼭 순전히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 혹은 모세 전승 같은 기존의 이야기를 재창작한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비평을 근거로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관련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생전에 출중한 축귀자, 치유자, 기적 행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예수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으며, 예수를 아는 사람 중에 자신들이 정말로 예수의 기적을 목격했다고 믿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164-5, 182-4)


4 곤란한 결론들


"신약성서의 예수는 분투하고 의심하고 어떤 것은 알았지만 어떤 것은 알지 못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본문은 예수를 신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이에 대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그리스도교인 에비온파는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보았고 이 관점에 맞지 않는 전통을 거부했다. 이른바 '권능 중심의 단일신론자'들은 예수가 세례받았을 때, 혹은 부활했을 때 인간 예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어 하느님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충하는 전승을 조화시켰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과 혼soul은 가졌지만, 인간의 영spirit은 가지지 않았으며, 대신 이성적인 신적 로고스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는 하느님의 아들이 최초로 피조물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정통파는 역설적 견해, 즉 예수는 전적으로 인간이며 전적으로 하느님이라는 주장을 옹호했다."(192-6)


"일반적으로 정통주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니케아 신경의 그리스도론에 담긴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심지어 교회가 역사적 근거 없이 예수 이야기를 지어냈음을 주장한다고 여기기에 역사적 예수 탐구를 장려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예수가 지나치게 높은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는 이들(현대판 에비온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도 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예수가 높은 그리스도론을 가졌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면 이들은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예수가 언젠가 세상을 심판하려 돌아올 존재가 아니라 단지 영감을 주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이에게, 예수가 자신을 그토록 웅대한 존재로 여겼으리라는 추정은 불편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을 지고의 존재라고 말하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말한 수많은 구절을 보고 예수의 정신 건강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206-7)


"물론, 우리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든,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자기 이해로 한정되지 않는다. 예수는 예수 자신이 의식한 자기의 총합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정통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고 그에 부합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현대성서비평학은 그럴 가능성을 아예 뿌리 뽑았다." "슈바이처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말하면, 역사적 예수는 여전히 이방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나는 이 결론이 그다지 끔찍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적 꿈을 흐트러뜨리는 예수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분명 복음서의 예수는 현실 안주, 자기만족과 싸우는 인물이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우리의 신학을 확증해주는 역사적 예수는 현실 안주의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의 의견을 칭찬하는, 길들여진 예수는 결코 예수가 아니다."(212-4)


"예수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론'을 가졌느냐는 문제는 그의 종말론적 기대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예수가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교회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가 머지않아 있을 부활과 오순절 사건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했다고 믿었다. 반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을 말한 것이라고 믿었다." "면밀한 주석 작업을 바탕으로 요한네스 바이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종교적 이상주의를 통한 사회 정의의 점진적 실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일으키실 종말을 예고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많은 이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슈바이처는 바이스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바이스가 예수 연구에 기여했다며 열렬히 지지했다. 바이스의 견해는 예수를 철저하게 종말론적 인물로 제시한 슈바이처의 프리퀄이 되었다. 20세기의 연구물들은 대개 바이스와 슈바이처의 변주였다."(214-6)


"이 문제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 이유는 그들의 종말론의 언어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미리 보기가 아니라, 비교 종교 연구가 보여준 것처럼 신화의 옷을 입은 종교적 희망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허구다. 끝은 시작과 같다. 창세기는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고, 신약은 미래에 있을 종말을 예견하는 역사를 담고 있지 않다. 새 예루살렘과 마지막 심판, 부활은 에덴동산과 뱀과 아담과 같은 신학적 비유다. 이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시로 해석해야 한다. 종교적 시는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통해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종말론의 언어는 열 처녀의 비유, 가라지와 밀의 비유와 똑같은 미래에 대한 비전, 즉,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상상만 할 수 있는 것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루시아'는 하나의 비유이다.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날짜가 없기 때문이다."(231-3)


# 파루시아 : 예수의 재림


5 개인적 단상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르키는 이름이자 은유다. 이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예수 전승의 핵심 주제가 하느님 왕국이므로, 하느님에 관한 주된 심상은 왕이 자연스럽다. 특히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 문헌에 자주 나오는 보좌에 앉으신 하느님의 심상 말이다. 그런데,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을 왕으로 언급하는 구절은 드물다. 예수 전승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랑 많은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억압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보살피며 양육하는 존재다." "예수는 그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제압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가 나타내는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압제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선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248-50)


"예수는 창조주는 당연히 구속자이며, 하느님 아버지는 애통해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약속하는 선한 분이고 지금 우는 이들에게 언젠가는 웃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사랑이 넘치는 분임을 직관했다. 예수는 이런 하느님에 대해 굳건히 낙관하므로 〈영원한 삶〉에 대해서도 굳건히 낙관한다." "종말론은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지만, 종말론 없이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우리가 보게 될 전부라면, 잘못된 점들이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에게 이것은 진부한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이 절대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비극과 황량한 죽음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적어도 나는 예수가 말한 선한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수의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 또는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쓰자면 그와 비슷한 것을 믿는다."(263-4)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장차 올 세상에 의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아버지 하느님과 장차 올 세상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인식하고 이해했다. 그는 하늘의 관점으로 땅을 보았고, 자신을 미래에 투영한 후 뒤돌아봄으로써 현재를 해석했다. 세상의 주요 가치들은 세상 너머에 있다. 즉, 이 가치들은 세상 위에 계시고 세상 안에 계시며 세상 끝에서 기다리시는 하느님 안에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장차 올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장 18절에서 바울이 말했듯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면에서 예수가 비유로 가르쳤으며 상상력의 신봉자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어떤 대상을 그냥 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상상했다." "그의 비유와 격언은 하늘이 땅을 이기고, 미래가 현재를 이기며, 우리가 공허함으로 둘러싸여 있고 딴 곳에 쉽게 정신 팔릴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268-9)


"예수는 새것을 선포했다. 낡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뒤집었다. 세상이 뒤집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 전승에는 그가 특이한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나온다. 펑크의 말을 빌자면, 예수는 〈일반적인 인식을 비전형화하고 낯설게 만든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을 한다. 이야기 도입부에 청중이 잘 알고 공감할 내용을 말했다가 그것을 갑자기 뒤집음으로써 상식과 충돌하게 만들어 청중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예수는 사물과 사태의 진정한 본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확신했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최면에 걸린 듯 뻔하게 사는 삶을 흔들어 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콜리지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우리의 마음이 〈관습의 무기력〉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의 두 눈을 덮고 있는 익숙함과 이기적인 근심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도록 노력했다. 예수는 우리의 관심사를 옮겨 놓고, 인식을 바꾸고, 의식을 확장하고, 우리의 행동을 바꾸려고 애썼다."(270-3)


"인간 실존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석에는 반드시 대다수의 삶을 특징짓는 날카로운 양극성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들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비교적 잘 살아가는 와중에도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의 악의, 어리석음과 마주한다. 죄와 죄책감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삶은 육체와 정신의 고통으로 괴롭고, 늘 의미 없이 제멋대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희생자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불행과 비통 가운데서도, 불가해한 섭리로 인해 우리는 때때로 진, 선, 미를 보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웃음과 기쁨을 맛보며 지식과 지혜를 접한다. 더 나아가 종교적 믿음을 가진 이들은 때때로 수수께끼 같은 은총을 통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인간의 경험, 특히 종교적 경험은 강력한 역설을 제시한다. 어쩌면 파스칼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라고 쓸 때 파악한 진실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279-80)


"예수 어록에는 유대 종말론이 말하는 사건 발생 순서(고난 뒤 신원, 환난 뒤 축복, 죽음 뒤 생명)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는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를 이루는 자, 묵시적 기대의 극단들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한 자다." "예수의 말과 생애는 이 모든 것을 꼭 맞게 표현한다. 인간 경험의 양극단은 종말에 대한 기대에 담긴 양극단, 찬미와 십자가가 공존하는 삶으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예수가 미래에 있을 축복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의 믿음은 삶의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가망 없는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음이라는 운명과 종말의 환난에 대해서만 말했다면, 그의 희망이 너무 보잘것없고 그와 하느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의 환난 및 앞으로 올 환난뿐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구원과 앞으로 올 구원을 선포했기에, 현재와 미래를 모두 살아갔기에 우리는 그를 기리고 신뢰한다."(2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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