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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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프리카의 여러 시대: 모든 것이 시작된 곳 (기원전 5억 5000만~기원전 약 5000년)


"약 2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초기 인류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호모 하빌리스 또는 호모 에렉투스이다. 이런 발전의 끝에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에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약 10만 년 전에 몇백 명에서 많게는 2,000명 정도로 이루어진 상당히 작은 그룹의 호모 사피엔스 인간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시아 쪽으로 향했다. 현재의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기까지의 발전을 위해 필요로 했던 10만 년은 호모 사피엔스 전체 역사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에 아프리카대륙에서 수많은 민족과 종족들, 부족들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서 현생 인류가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유전학자들은 총 13종의 아프리카 초기 인류를 확인하였다.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향한 작은 그룹의 사람들에게서 오늘날 인류의 유전질 대부분이 나왔다.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에 엄청나게 다양한 인종이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 기원한다."(43)


2장 아프리카의 문명: 인간이 함께 모여 살다 (기원전 약 5000~서기 약 1500년)


"이집트와 누비아의 접촉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기원전 2450년에 파라오 사후레(Sahure)의 명령을 받고 떠난 원정대가 제출한 것이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이곳 남쪽 지역을 '푼트'라 불렀다." "이집트 사람들이 누비아에서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보물은 황금과 노예였다. 이집트의 노예들은 노동자로서 대개는 충분한 음식과 의복을 받았고, 나중에는 몇몇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생애 마지막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였다. 1500년 넘게 수많은 이집트 지배자들은 남쪽의 이웃에 대해 식민 통치자의 태도를 취하였다. 가능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가져오고 아주 조금만 돌려주었던 것이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누비아 사람들도 이들 압제자가 하는 짓을 배웠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누비아 사람들이 최초의 중앙 집권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 나라에 '쿠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전에 자신들을 통치한 이집트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61-2)


"누비아가 아직도 이집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중부 아프리카의 콩고 분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같은 언어 뿌리를 가진 여러 민족이 기원전 800~500년 사이에 새로운 정착지역을 찾아 먼저 서쪽과 동쪽으로, 나중에는 남쪽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들은 '반투(Bantu)'라 불리는데, 이것은 각각의 민족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해도 비슷한 발음과 언어 형태로 '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다양한 반투 민족들은 한 번도 중앙 집권 국가를 구성한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몇백 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을 뿐이다. 일부 그룹은 다른 그룹들보다 더 전투적이었지만 그래도 대립이 다른 민족의 '근절'을 목표로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투 사회에서는 대부분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들의 위원회'가 일상의 생활을 결정하였고, 아주 예외적으로만 개인이 통치권을 얻었다. 유럽에서 이런 모델은 단순히 '원시적'이고 '미개발'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다."(79-80)


"반투 민족들은 중부 아프리카를 떠나 남부로 퍼져 나가면서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산족과 코이코이족을 만났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반투 민족들의 이동은 몇 년 만에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 일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때까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지역에서 새로운 형식의 농업을 시험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그곳에 이미 살고 있던 공동체들은 '정복'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배웠다. '새로 온 사람들'도 '군사력'을 가지고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대가족의 수를 넘지 않는 그룹 단위로 왔다." "언어학적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로만어와 비교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반투어를 쓰는 민족들은 오늘날 사하라 사막 남쪽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민의 다수를 이룬다. 동부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 탄자니아의 키쿠유어, 짐바브웨의 쇼나어, 나미비아의 헤레로어, 또는 남아프리카의 줄루나 코사어를 쓰는 사람들도 이들에 속한다."(80-2)


"622년부터 당시 아직 어린 종교였던 이슬람교가 아프리카 대륙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분할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가 맨 먼저 639년부터 이슬람이 되었다. 새로운 신앙은 이곳에서 수단 방향으로 퍼져 나가 나중에 북부 리비아와 튀니지로 퍼졌다. 800년부터 1250년 사이에 이슬람교는 북아프리카 전 지역과 사하라를 넘어 동부 아프리카 해안 지대 전체와 마다가스카르 고지대까지 퍼져 나가 정착하였다. 아프리카 북서부에 있는 베르베르 사람들과 그 아래쪽에 자리 잡은 투아레그 사람들은 군대의 압력을 받고 이슬람교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였다.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은 다음에 저항을 포기했다. 711년부터 아랍 사람들과 베르베르 사람들이 함께 남부 스페인을 정복하여 이슬람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의 그리스어가 그랬듯이, 이제는 아랍어가 북부와 북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교양인들의 언어가 되었다."(91-3)


3장 짓밟힌 아프리카: 유럽 나라들이 제멋대로 대륙을 나누어 갖다 (약 1500~1945년)


"1438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콩고 강 유역에 살던 바콩고 민족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그들은 원래 북쪽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여러 마을 공동체가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살고 있던 이곳의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그들의 중심지는 음반자 콩고였고, 그곳에서 콩고 왕 은징가 음벰바가 다스리고 있었다. 처음에 양측은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알폰소 1세─ 1491년에 은징가 음벰바가 세례를 받고 바꾼 이름─는 새로 얻은 무기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다른 민족들에게서 노예로 쓸 인간 사냥도 하였다. 이 노예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시작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국제 무역을 통해 해외로, 특히 브라질로 팔려갔다. 서부 아프리카 해안 앞에 자리 잡은 상투메 섬의 대규모 농장들은 짧은 시간 안에 유럽에서 가장 큰 설탕 공급지가 되었다. 알폰소 1세는 이곳 섬의 농장들을 위해서만 해마다 약 3,000명의 새로운 노예를 공급하였다."(109-11)


"맨 처음 유럽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국적인 모습' 덕분에 호기심 어린 관찰 대상이 되었다. '검둥이' 하인은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이 시기에는 아직 '검둥이'가 열등하다는 따위의 섬세하게 다듬어진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는 없었다. 그들은 '전혀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흥미롭고 '호기심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젊은 콩고 사람들은 포르투갈에서 대학에 다닐 수도 있었고,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1550년 무렵 포르투갈 인구의 10퍼센트 정도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남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농장에서 목화와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얻는 엄청난 이윤을 더욱 높이기 위해 점점 더 절실히 노동자를 필요로 하면서 사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극히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랍 상인들로 구성된 마피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며 완전히 새로운 노예 개념을 도입하였다."(114-5)


"영국인들은 대륙 남쪽에 최초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식민 지배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1652년에 이미 무역의 거점인 케이프타운을 건설한 네덜란드 출신의 보수적인 백인들을 해안 지방에서 내륙 지방으로 쫓아보냈다. 이런 갈등이 깊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영국 사람들과 네덜란드 출신 백인들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어서 1899~1902년에 그들은 그곳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계 백인과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 사이에 눈에 보이는 갈등을 남기고 있다. 영국 사람들은 남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자기들이 점령한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서 세 가지 자본주의 원칙을 고집하였다. 모든 식민지는 자급자족할 것, 영국에 원료를 공급할 것, 영국의 상품을 살 것 등이다. 백인들은 각기 여러 아프리카 종족과도 싸웠다. 특히 줄루족, 코사족과 싸움을 벌였는데, 이 아프리카 종족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124)


"1867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다이아몬드 산지가 발견되었다. 누가 장기적으로 이 다이아몬드 광산의 통제권을 가지느냐를 놓고 경쟁이 시작되었다."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 줄루족에 대한 영국 왕의 태도뿐만 아니라 '토착민 담당' 테오필러스 셉스턴의 태도도 완전히 바뀌었다. 셉스턴은 런던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남아프리카에서 '영국 연방' 계획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아 1877년 돌아온 다음에는 케츠와요 왕에 대한 태도를 싹 바꾸었다. 이때까지는 네덜란드계 백인에 맞서 줄루족을 지지하더니,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한 이후부터는 이 지역에서 영국이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줄루족이 남은 방해가 되었다." "결국 영국군은 훨씬 우월한 무기의 힘을 빌려 1879년 7월 4일에 줄루족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물리쳤다." "케츠와요 왕이 1884년에 죽었을 때 그의 왕국은 샤카 줄루가 처음 시작했던 시절의 규모로 줄어들었다. 1897년에 줄루 땅은 완전히 영국 식민지로 합병되었다."(128-32)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늦게야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맡았다."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의 연대기는 처음에는 마치 토끼와 고슴도치 사이의 경쟁처럼 읽힌다. 그것은 아무런 개념도 없고,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벌인 경쟁이었다. 프랑스가 1881년에 튀니지를 점령하자, 영국은 1년 뒤에 이집트를 집어삼켰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과 다른 '반란군들'을 제압하느라 머뭇거리는 동안, 프랑스 장교들은 세네갈과 서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을 뚫었다. 독일은 마지막에 황제의 비호 아래 브레멘의 담배상인 아돌프 뤼데리츠가' 독일령 서아프리카'(오늘날 나미비아)를, 카를 페터스가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를,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토고와 카메룬을 차지하였다. 벨기에 왕 레오폴 2세는 '작은 옥좌에 앉은 큰손 투기꾼'으로서 헨리 모턴 스탠리를 후원하여 콩고에 벨기에령 '콩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134-5)


"혼란이 점점 더 커지자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침내 '질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1884년 11월 15일에 유럽 13개 국가 대표들을(여기에 덧붙여서 미국과 오스만 제국의 대표들도 있었지만, 아프리카 국가의 대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베를린의 '콩고 회의'에 소집하였다. 이것은 콩고 강 하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요구와 벨기에 왕의 콩고 분지에 대한 식민 정책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나누어 갖는 계획으로 끝을 맺었다. 1885년에 나온 '베를린 협약 문서' 전문(前文)에 따르면 서명한 국가들은 모두 〈원주민들의 관습적·물질적 안녕을 증진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하기〉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앞으로 자기들끼리의 갈등을 피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약속대로 식민지의 약탈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약속한 것은 그후 20년 동안 극히 비인간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실행에 옮겨졌다."(135-6)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1500년 무렵에는 갖지 못했던 두 가지 이점을 확보했다. 1850년부터 의약품 키니네가 나와서 마침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자 수를 80퍼센트나 감소시켰고, 이어서 열대 지방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밖에도 새로운 무기들이(예를 들면 1884년 이후에 나타난 기관총 같은) 개발되었다. 이런 무기들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팔지 않기로 1890년 브뤼셀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합의를 보았다. 기관총은 초당 11발을 쏠 수가 있었다. 수단의 영국인 장교들은 단 한 번의 전투로 1만 800명의 아프리카 적군을 죽였는데, '아군의 손실은 49명뿐'이었다고 열광에 넘쳐 보고하고 있다." "막강한 유럽 세력에 맞선 저항의 문서들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예의바른 말투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매우 인상적이다. 그에 반해 유럽 사람들은 자주 '야만인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오히려 원시적이고 평범한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137)


"맨 먼저 상인과 모험가들이 왔다. 이어서 기독교의 영혼의 구원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동안은 그 반대도 있었다. 어쨌든 핵심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의 세속 지배자와 정신적 지배자 사이에서 아주 훌륭한 협동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권리를 잃어버리면, 선교사가 와서 유럽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고 동시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함 속에서도 평화를 지니고 살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 널리 알려진 속담은 다음과 같다. 〈백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성서》를 갖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성서》를 갖고 그들이 땅을 가졌다.〉" "이웃 사랑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조 형식은 흔히 대화나 동반자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구원자라는 태도와 의존을 장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150-5)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민지 경영 국가들은─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맞선 독일─아프리카에 있는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하였다. 1914년 8월에 이미 영국 외무부는 다음과 같은 비밀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독일 식민지를 접수한다. 평화 협상이 진행될 때 담보로 삼기 위해서이다.〉 전쟁 첫해에 벌써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에서 이 계획이 성공하였다. 다만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만 예외였다. 그 지역만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 군대가 약 1만 3,000명의 고용된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전쟁 마지막까지 대략 16만 명의 영국군을 계속 새로운 싸움에 끌어들이면서도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병사나 짐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기능을 맡아서든지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의 전투 행위에 직접 끌려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중 약 20만 명이 유럽의 주인들을 위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161-2)


"1919년에 패전국이 된 독일은 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국제연맹은 처음에 독일 식민지의 통치를 형식적으로만 떠맡았다가 실질적으로는 승전국인 영국·프랑스·벨기에 등지에 나눠주었다. 국제연맹은 이 기회에 유럽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역이 '현대 세계의 경쟁적인 조건 아래서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될 때까지 식민지를 통치하라고 위탁하였다. 선교 사업의 이념이던 것이 이제는 정치적인 의도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린이이기 때문에 '현대 민족들의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교육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많은 식민지 행정부들은 특별히 선택된 소수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이런 특혜는 아프리카 여자들에게는 거의 예외적으로만 주어졌다) 장기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1930년대 말까지 1억 6,500만 인구 중 대략 1만 1,000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16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식민지에 건설된 인프라 덕분에,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원자재가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41년, 처칠과 루스벨트는 이른바 '대서양협정'을 체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는 문서였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이 중요하였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권리를) 유보당했던 민족들까지' 모든 민족이 자기 결정권을 가질 것과 미국이 세계에서 '원료의 원천에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영국이 장기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고, 미국도 아프리카의 원료를 거래하는 데 동등하게 참가한다는 약속을 받으면 히틀러 독일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1944년, 이 협정에 분개한 드골은 모든 프랑스 식민지의 고위 관료들에게 〈식민지에서 자율 통치의 이념이나 ······ 아니면 독립 정부는 먼 미래에도〉 배제된 일이라고 선언하였다."(164-7)


4장 아프리카의 해방: 자유에 이르는 길은 왜 그리도 먼가? (1946~현재)


"1821년 한 백인 선교사가 최초의 해방 노예 무리를 데리고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쪽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곳 해안에는 크루(Kru)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땅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선교사도 해방된 노예들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협상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지금까지 평생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방법, 곧 폭력을 사용하였다." "1822년에 '라이베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지역은 1847년에 미국의 후견에 지쳐 독립을 선언하였다." "옛날 노예와 그들의 후손은 라이베리아 국경선에 살고 있던 다른 16개 민족들에 대해 스스로 노예 주인처럼 행동하였다. 커피 농장과 고급 목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들 민족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동자가 되어 가장 고약한 착취를 당하였다. 이제는 자신들을 미국계 라이베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옛날 아프리카계 아메리카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3퍼센트를 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모든 권리를 장악하고, 모든 궐기를 잔인하게 진압했다."(177-8)


"케냐에 있던 약 100만 명의 키쿠유 사람들─영국인들 아래에서 아무 말 없이 일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진─이 여러 달에 걸쳐 영국 식민세력에 맞선 비밀 궐기를 계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 엄수 맹세를 깨뜨릴 경우 누구든 죽이는 것이 옳다는 합의를 보았다. 궐기가 진짜로 시작되기도 전에 키쿠유 사람들은 자기들 내부의 배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진짜 배신자도 있었지만 그냥 배신자로 의심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처형을 당했다. 영국 사람들은 처음에 화가 나서 그냥 방관만 하다가 마침내 폭력적으로 개입하였다. 3년 동안의 궐기 끝에 적어도 1만 1,000명의 키쿠유 반란자와 32명의 영국 사람이 죽었다. 주로 젊은 남자들 약 8만 명이 여러 해 동안이나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키쿠유족으로서 뒷날 케냐의 대통령이 된 조모 케냐타는 이 궐기를 비판만 했는데도 1953년에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에 그는 독립된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82-3)


"1960년 5월에 벨기에령 콩고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파트리스 루뭄바가 승리하였다. 그는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고, 카사부부가 대통령이, 촘베는 겨우 카탕가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몹시 화가 났다." "7월에 많은 병영에서 혼란이 벌어지자 루뭄바는 유엔과 소련에 각각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벨기에에 주둔한 미국 대사는 워싱턴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와 아프리카 전체에서 우리의 본질적인 이해를 위험하게 하고 있다. ······ 루뭄바 정권을 해체하고 동시에 아프리카 나머지 지역에서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신하를 ······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당시 루뭄바의 개인 비서로 루뭄바가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던 조제프 모부투가 '또 다른 신하'가 되었다." "마지막에 모부투는 자신의 옛 상관을 카탕가에 있는 그의 철천지원수인 촘베에게 보냈다. 1961년 1월 17일에 파트리스 루뭄바와 그의 두 심복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총살당하였다."(184-9)


"1952년부터 영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황금해안에 최초의 정부를 허용하였다. 콰메 은크루마는 이 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대부분의 장관은 아프리카 사람들이었다. 1957년에는 유혈 사태 없이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은크루마는 가나의 독립이 모든 식민지의 해방을 위한 시작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USA', 곧 '아프리카 합중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의 비전에 충실히 머물렀다." "조국 가나에서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산업 생산이 자금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국고가 바닥나는 쪽이 더 빨랐다. 물가는 오르고 생활 수준은 떨어지자, 총리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졌다. 최초의 폭탄 공격과 태업이 나타나자 은크루마는 갑자기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1963년에 이미 3,000명의 정권 반대자들이 감옥에 있었다. 총리는 점점 더 독재자가 되어서 자신이 소속된 정당만 허용하였다. 1966년 콰메 은크루마가 외국에 있을 때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1972년에 기니에서 망명 중에 죽었다."(191-2)


"1981년의 마지막 날에 젊은 공군 소위 제리 존 롤링스가 두 번이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끝에 권력을 잡았다.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하였다. 그런 다음 나라 전체에 급격한 절약 정책을 명령하고 억지로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여러 조건을 이행하였다. 나라는 점차 똑바로 서고 투자 계획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며, 마침내 생활 수준이 차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사치는 아니라도 어쨌든 이전의 곤궁은 사라졌다. 1992년에 두 번째로 민주주의를 시행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가나에서는 그냥 '제이제이(J. J.)'라고 불리는 제리 존 롤링스는 정당을 설립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여 선거에 나섰다." "군복을 벗은 시민 롤링스는 자유 선거에서 58퍼센트의 표를 얻어 민주적인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모든 민주적 규칙을 지켰으며, 헌법에 정해진 대로 두 번의 임기를 끝내고 다시는 취임하지 않았다."(192-4)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 독립한 지 4년 만인 1964년, 장 베델 보카사는 프랑스에서 고국의 군대로 자리를 옮겼다. 보카사의 사촌이던 초대 대통령은 곧바로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하였다.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였다. 1965년에서 1966년으로 넘어가던 마지막 날 보카사는 공격을 시작하여 사촌을 쫓아냈고, 곧바로 1959년에 제정된 헌법을 효력 정지시켰다." "보카사가 중앙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존중하는 한 프랑스 정부는 10년 이상에 걸쳐 가장 고약한 인권 침해의 수많은 사례들을 묵인하였다.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편에 서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1972년에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된 보카사는 두 번의 쿠데타 시도와 한 번의 암살 시도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때마다 광란적인 학살이 뒤따랐다." "마침내 프랑스는 보카사를 쫓아내는 것에 동의하였고, 그가 1979년 9월에 리비아의 가다피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이 일을 처리하였다."(197-200)


"1962년 우간다가 영국에서 독립을 얻었을 때 이 나라는─2년 전 루뭄바의 콩고와 비슷하게─매우 다양한 종족 무리들이 뒤섞여서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일부러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최초의 정부는 간다 민족인 카바카(왕) 무테사 1세를 대통령으로, 랑고 민족에 속하며 간다 민족을 미워하는 정당 정치인 밀턴 오보테를 총리로 삼았다. 독립한 지 4년 만에 오보테가 공격을 개시해서 간다 왕의 권리를 뺏고 그를 영국으로 쫓아냈다." "이디 아민은 이슬람교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영국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후원을 얻었다. 1971년에 오보테가 외국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아민이 공격을 개시하여 스스로 군사 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이후 아랍 세계의 후원을 얻은 아민은 유럽 국가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8년 동안의 공포 정치 동안 적어도 30만 명이, 아마도 50만 명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201-3)


"1960년에 독립한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종족 무리와 종교들이 있다. 세네갈은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300킬로미터나 길게 세네갈 내륙으로 자리 잡은 감비아와 한 번도 갈등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1982년 이후로 두 나라에 경제적 이익이 되면서도 각자의 독자성을 확보해주는 연방을 이루었다. 1980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가톨릭교도 레오폴드 세다르셍고르는 처음부터 주민의 90퍼센트에 달하는 이슬람교도에 대해 상호 존중의 정책을 펼쳤다. 그는 다양한 종교적·종족적 출신 장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협동의 예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 다른 대륙의 문화와 대화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독자적인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기본 이념이 아프리카에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 여겼다. 언젠가 그가 말한 것처럼 '옛날부터 나눔의 이념이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06-7)


"1962년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또한 국제적으로도 많은 인정을 받았다." "새로운 탄자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우야마'(Ujamaa, 스와힐리어로 '가족 공동체')였다. 120개(!)의 서로 다른 민족들은 종족이나 그 밖의 사회적인 출신 성분과는 무관하게 농업을 위해 만든 우야마에서 평화롭게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탄자니아는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공식적인 국어로 선택한 아프리카 유일의 국가이다." "구(舊)소련, 중국, 쿠바 등의 후원을 받아서 1967년에 과격하게 시작된 우야마 마을의 농촌 개혁은 서방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국제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산업화를 소홀히 한 채 농업 중심의 개혁만으로는 점점 심해지는 나라의 빈곤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니에레레는 공개적으로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1985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까지 아프리카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209-12)


"1983년 8월 초 블레즈 콩파오레가 리비아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토마 상카라를 오버볼타의 새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상카라는 처음부터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다. 그의 특별한 정치적 관심은 풀뿌리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과 여성과 청소년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교육과 건강을 위한 체제를 만드는 것 등이었다." "그의 정부에서는 오늘날까지 아프리카의(유럽도!)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여성들이 활동하였다." "그의 혁명 1년 만에 오버볼타는 모시와 듈라(Dyula)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인 부르키나파소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블레즈 콩파오레를 중심으로 한 작은 무리가 상카라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7년 10월 15일에 그는 자기가 믿는 부하들 12명과 함께 잡혀서 같은 날 총살을 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블레즈 콩파오레는 스스로를 '혁명의 구원자'라고 부르지만 상카라의 꿈은 거의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213-5)


# 블레즈 콩파오레는 2014년 반정부 시위에 이은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다.


에필로그 아프리카에서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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