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3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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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환경


"튜더와 스튜어트 시대의 잉글랜드는 한편으로는 영양부족과 무지에 시달린 인구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한 저개발 사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문필문화를 꽃피우고 과학과 지적 활동에서 전대미문의 흥분을 경험한 사회였다." "이 시대는 희곡, 시, 산문, 건축학, 신학, 수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문헌학, 기타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엄청난 창조활동이 분출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인구의 압도적 다수(17세기 중반에 성인 남성의 2분의 1에서 3분의 2 사이)는 여전히 문맹이거나 기호로 서명하는 수준이었다. 생계, 교육수준, 지적 감수성에서 이토록 큰 편차는 당시의 잉글랜드를 다양한 사회로, 그만큼 일반화하기 힘든 사회로 만든다. 16~17세기 내내 조건이 변화했는데, 그 기간 내의 어떠한 시점에서든 다수의 이질적 신앙체계가 존재했고 지적 정교함의 수준도 가지가지였다. 더욱이 활판인쇄술의 발명은 공간상 먼 사회나 시간상 먼 고대로부터 유입된 다양한 사고체계가 유지되고 확산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31-2)


# 튜더 왕조(1485-1603)와 스튜어트 왕조(1603-1714)


"이런 공동체[소규모의 동질적 공동체]에서는 모든 주민이 동일한 믿음을 공유하며 다른 사회로부터 유입된 믿음은 별로 없다. 반면에 역사가가 떠안는 것은 그처럼 단순하고 통일적인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이고도 무한히 다양한 사회이다. 그것은 사회적·지적 변화가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사회요, 무수한 세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사회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신앙체계들도 다양한 사회적·지적 층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신앙체계들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불행을 설명하고 줄이는 데 골몰했다는 점이다. 공통 관심사가 그러했다는 것은 환경이 매우 불안정하고 위협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말은 환경적 위협이 그런 신앙체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대다수는 오래전부터 전승되었으며, 그것들이 만개한 사회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7세기 환경에서 몇몇 고유한 특징이 그 신앙세계들에 덧칠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33)


"이 시대의 사회환경에서 빈곤과 질병과 돌발 재난은 만성화된 특징이었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 처한다면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은 시대착오의 오류이다. 튜더-스튜어트 시대 잉글랜드에서 질병과 낮은 기대수명은 친숙한 일상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유아기에 잃을 수도 있음을 잘 알았기에,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야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부는 한쪽이 죽은 후에야 남은 다른 쪽이 재혼한다는 관념에 익숙했다. 빈민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토아 철인처럼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많은 부르주아 논평자들이 페스트의 위험에 대한 그들의 불감증을 언급했으며, 사람들이 자기 안전을 위한 규제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빈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릴 때는 식량을 구하려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당시 정치적 급진주의에는 거의 기여한 것이 없었고,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58)


제1부 종교


2장 중세교회의 마술


"종교가 초자연적 수단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지상의 생활환경을 통제할 수단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도 이런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라는 신생 종교로의 개종은 개종자들의 기대에 자주 의존했다. 개종자들은 저승에서의 구원수단만이 아니라 새롭고도 한층 강력한 마술도 얻으려 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 제사장들이 대중 앞에서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켜 바알 신의 숭배자들을 압박하고 무력화하려 부심했듯이, 초대 교회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키고 초자연적 치료를 수행함으로써 추종자 무리를 이끌었다. 신약성경과 교부문학은 이 같은 초자연적 활동이 선교와 개종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은 곧 신성함의 필수불가결한 증거가 되었다. 초자연적 권능은 앵글로색슨 교회의 이교(異敎) 반대투쟁에서 필수적 요소였으며, 선교사들은 기독교 기도문이 이교 주문(呪文)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한목소리로 강조했다."(70)


"중세교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일으키는 것이 교회의 진리 독점권을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라는 전통에 편승하고 있었다. 그 전형을 일찍이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성인(聖人)전기물이었다." "성인숭배는 중세 사회조직의 중요한 일부였고, 모든 교회는 각기 나름대로 수호성인을 모셨다. 강한 지방색은 토템숭배에 가까운 성격을 성인숭배에 부여했다." "이렇듯 어떤 개인을 특정 성인과 엮어 준 것은 지엽적인 충성심이었다. 하지만 성인숭배를 전체적으로 지탱해 준 것은 옛 성인과 성녀가 도덕적 행위의 귀감이요, 초자연적 능력으로 추종자들이 지상에 서 겪는 불행과 재난을 줄여 주는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종교개혁이 임박한 시점에서 기성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다." "성인은 매개자에 불과하니 하나님이 그의 간원을 못 들은 체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는 신자들이 낙관적 기대에 부풀어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71-5)


"퇴마의식으로 정화된 성수는 악령과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질병과 불임 치료제이기도 했고 가옥과 음식에 축복을 비는 도구이기도 했다." "이런 절차들이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살얼음 걷듯이 만든다고 주장한 신학자는 없었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그 절차들이 단지 영적이나 상징적인 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굳게 믿었다." "성수뿐만 아니라 교회는 갖가지 예방부적과 기복부적의 사용을 장려했다." "비기독교적 상징물을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복음서 성구나 십자가 형상을 종이에 적거나 메달에 새겨 착용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고 신학자들은 주장했다. 이런 부적들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원래 부활절 양초로 제작되고 교황의 성별을 거쳤던 작은 양초 케이크에는 이제 어린 양과 깃발의 이미지가 새겨졌다. 이 이미지는 악마의 급습을 막는 수호기능만이 아니라 천둥, 번개, 화재, 익사, 분만 중 사망 등 다양한 위험에 대한 예방기능을 의도한 것이었다."(78-81)


"그러나 중세교회가 의도적으로 정교한 마술체계를 개발해 평신도들에게 전파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억지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문 암송, 성인숭배, 성수 이용, 성호 그리기 같은 의례들은 모두 속박용이 아니라 위무용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 성육신의 영속적 확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자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시혜자임을 자임했다. 물론 성사들은 집전 사제의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즉, 행해진 일 그 자체로부터 ex opere operato) 효력을 발휘한 것이었고, 따라서 중세 기독교에 현저히 마술적 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성사를 제외한 교회 사업은 대체로 선량한 사제와 경건한 평신도에 의해서만 (즉, 행한 자의 행한 일로부터 ex opere operantis)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교회 사업은 참여한 자들의 영적 조건에 의존했다. 일례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을 지닌 자도 신앙심이 약하면 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1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란 신앙기관인 것 못지않게 마술적 기관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강화한 몇몇 조건을 검토해보면, 첫째는 최종 개종이 남긴 유산이었다. 앵글로색슨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모신 성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이 있음을 강조했으며, 나아가서는 그 성인들이 이교도가 제공한 어떠한 마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예화들을 유포했다." "교회의 마술적 주장을 강화한 또 다른 조건은 교회 스스로 퍼트린 선전이었다. 신학자들은 종교와 미신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었지만, 그들의 〈미신〉 개념은 상당한 융통성을 가진 것이었다."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의례는 미신이고 교회가 수용한 의례는 미신이 아니었다." "신학자들은 그 신비한 권능이 신자를 악령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주목한 것은 교회 수중에 있는 대항마술이었다. 교회는 바로 이 대목에서 독점권을 주장했다."(112-6)


3장 종교개혁의 영향


"마술과 종교 간 경계선을 흐린 것이 중세교회였다면, 그 경계선을 다시 뚜렷하게 부각시킨 것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가톨릭 의례의 근간에 잠복한 것으로 보인 마술적 함축을 처음부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많든 적든 이용할 수 있다는 교회 주장을 전면 부정했다. 교회가 주관하는 축원, 퇴마, 주문, 성별, 그 어떤 것에도 효험이 있을 수 없었다. 성직자가 평신도 죄인들에게 내리기로 한 저주도 마찬가지로 효험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법을 위반했다면 하나님이 이미 그에게 저주를 내렸을 것이니 교회가 상관할 바 없으며, 위반하지 않았다면 교회의 저주가 효험이 없을 터였다. 이처럼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하나님이 정한 길을 따라 수행되는 것처럼 가장하는 교회마술을 거부했다. 교회가 도구적 권능을 소유한다는 주장, 교회가 그리스도의 일과 직분을 능동적으로 공유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주장은 부정되었다."(119-22)


"이 모든 것은 가톨릭 핵심교의인 미사에 대한 공격을 예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문과 퇴마에 효험이 없다면, 성변화도 거짓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집트의 어느 마술사도 실천할 수 없었고 감히 비슷한 짓조차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빵과 포도주를 변성한다는, 명백히 마술적인 권능을 가장하는 것은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칼뱅은 교황의 무리가 〈진정으로 효험이 있는 신앙과는 무관하게, 성사들에 미술적 힘이 있음을 가장한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성별된 성체의 기적적인 성변화 의례는 약식추모의례로 대체되었고 성체유보도 중단되었다. 성체배령이나 성체묵상이 세속적 이익과 직결된다는 낡은 관념 역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표적이었다. 성체배령자 수만큼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는 과거의 신중한 태도조차 공격을 받았다. 성찬례에 대한 그들의 처방은 그 해묵은 미신을 뿌리부터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23-4)


"성사의 마술적 측면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공격은 기성 교회 의례들을 현저하게 잠식하였다. 가톨릭교회의 7성사(세례, 견진, 혼례, 미사, 서품, 고해, 종부) 가운데 세례와 미사(성체성사)만이 성사로서의 뚜렷한 특징을 유지했지만, 그 두 성사의 경우에도 중요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547년과 1549년 사이에 교회는 성찬례용 물과 기름과 빵도 모두 폐기했다. 2차 에드워드 기도서에 규정된 환자방문 의례에서는 환자 도유가 생략되었다. 성별된 종이 악마를 쫓는다는 믿음도, 성찬례용 양초와 십자가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포기되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의례만으로 물질적 효험을 기대할 수 없고 사람의 기도로 하나님의 은총을 이끌어 내거나 강압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 견해가 실질적으로 수용되었다. 신흥종파 지도자 존 케인이 적시했듯이, 〈하나님을 위하도록 규정된 성사들이 주물이나 흑마술처럼 ···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130-1)


"프로테스탄티즘은 초대 교회가 유화적인 태도로 수용했던 이교 유산에 대해서도 새로운 투쟁에 착수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교 제민족의 미신들〉이 총결집된 거대 창고로 묘사되었으며, 가톨릭 의례의 대부분은 고대 이교의례의 눈가림식 변형으로 간주되었다. 성수는 로마의 정화수(aqua lustralis)에, 성축일 전야제는 로마의 바커스 축제(Bacchan alia)에, 참회의 화요일은 로마의 농신제(Saturnalia)에, 기원 행진은 로마의 풍년제(ambarvalia)에서 각각 유래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많은 노력이 기울어졌다." "동시대인들에게 뚜렷한 퓨리턴적 특징으로 각인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철저함이었다. 존 해링턴 경이 풍자했듯이, 누군가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독실한 퓨리턴은 〈그런 것은 주술이니 저주받아 마땅하리라〉고 말할 터였다. 사소한 문제조차도, 퓨리턴들은 비기독교적이거나 마술 낌새가 있는 모든 의례, 모든 미신, 모든 관행을 일소하려는 욕망을 표현했다."(146-9)


4장 섭리


"종교개혁 이후로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승에서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모든 글들을 관류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연(혹은 운)을 그 가능성마저 부정한 점이었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우연이나 운의 작용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던 반면에, 필킹턴 주교 같은 16세기 저자는 우연 따위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보에티우스에서 단테에 이르는 중세 기독교 문학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믿음과 함께 운의 여신 포르투나라는 이교 전통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튜더 시대의 신학자들에게는 운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님 주권에 대한 모독이었다." "삶이란 제비뽑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합목적적 설계가 반영된 것이라는 자각은 이런 양상으로 모든 기독교도의 가슴에 새겨졌다. 뭔가 잘못되면 불운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작용했다고 믿어야 옳을 터였다. 이승의 모든 사건은 제멋대로가 아니라 정연한 질서를 갖는다."(174-6)


"17세기 후반의 기계론 철학은 특별 섭리─하나님은 서로 다른 갈래의 인과(因果)사슬에 한꺼번에 작용함으로써 동시다발적으로 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개념─의 교의에 큰 압박을 가했다. 기계론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저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태초 창조행위에 국한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창조 이후로 세계는 창조주가 처음 작동시킨 법칙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굴러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700년 이전에는 아직 이처럼 정교한 합리화가 필요치 않았다. 세계는 창조주가 원하는 바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전개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제 의지대로 움직일 권리를 위임하고 숨어 버렸다는 '숨은 신'(deus abconditus) 관념은 아직 비난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기적이 가끔 일어날 가능성마저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매개 없이) 직접 작용한다는 것은 자연사건의 일상적 작용(규칙성) 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178-9)


"아이러니하게도 곤경과 역경의 경험만큼 인간정신을 종교로 향하게 하는 것은 없었고 세속적 성공보다 큰 신앙의 적은 없었다. 종교는 고통받는 자에게 위안을 주었고 자신감마저 줄 수 있었다." "신성한 섭리의 교리는 자기 확인적 성질을 가진 이론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놓쳐서는 안 될 요점이다. 그 이론은 일단 수용되기만 하면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악인이 역경에 처하면 하나님의 처벌임이 분명하지만, 선량한 신자가 괴로움을 당하면 하나님의 시험일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형편이 좋을 때면 자신의 행운을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지, 배교자인 이웃이 자기와 똑같이 잘 산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고난을 수반하지 않은 삶이란 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다는 끔찍한 징표일 수도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고통은 하나님이 그 고통을 겪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서 거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고단한 삶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181-2)


"무엇보다 신학적 접근이 용이한 것은 발병(發病)이었다. 엘리자베스 기도서는 소교구의 병든 신도를 방문할 때 성직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환자가 자신의 질병─성병이나 전염병이라면 더욱더─이 하나님의 처벌임을 깨닫도록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내과의가 자연적 수단을 사용해 치료를 시도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내과의의 치료는 하나님이 허용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전제하에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할 터였다. 1637년에 어떤 성직자는 독자에게 경고조로, 〈물질적 수단에 너무 기대할 것이 아니라 ··· 그 수단을 허용된 만큼 이용하되 하나님을 조심스레 살피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은 하나님이지 내과의가 아니었다. 외과의도 수술 전에 기도해야 하며 [수술 후] 자기 환자가 신앙심 없는 내과의를 이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17세기 후반까지도 대다수 신학자와 윤리개혁가(moralists)는 그렇게 가르쳤다."(188)


"섭리적 역사관의 저변에 깔린 것은 해묵은 믿음─인간의 도덕적 행동과 무시로 변하는 자연환경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모든 국민의 흥망은 하나님의 불가해한 목적이 표현된 것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이런 유형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고 자처한 부류였다. 존 폭스를 통해 민간에 널리 영향을 미친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이 신화에 따르면 잉글랜드인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한 국민이요, 섭리의 기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선민(選民)이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만든 신화에서 강력한 요소였고 종교개혁 후 1세기에 걸쳐 역사서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 "미덕은 미덕대로, 악덕은 악덕대로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는 일반적 가정은 당시 윤리의식의 강력한 잣대로 작용했다. '매너의 개혁'을 향한 퓨리턴의 열망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도, 사람이 개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가 직접적이고도 뚜렷하게 이 땅에 내릴 것이라는 확신이었다."(201-3)


"대체로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심판과 섭리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섭리에 대한 믿음에 힘을 실어 준 것은 바로 그 주관적 성격이었다. 오직 유리하게 해석될 만한 일화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은 저마다 주님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을 견고히 굳힐 수 있었다." "이런 관념의 배후에는, 세상살이가 보상받을 사람만 보상받고 처벌받은 사람만 처벌받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편적 성향이 놓여 있었다. 결국에는 미덕이 보상을 받고 악덕은 처벌을 비켜 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섭리의 교리는 겉보기에 제멋대로인 인간운명에 철두철미한 질서를 부과하려 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도덕적 혼란이 자리하던 곳에, 전능한 하나님이 주재하는 질서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고안물은 설명체계로서는 완벽했지만 설득력 면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해설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성과 물질적 성공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하는 많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는 정도였다."(231-4)


5장 기도와 예언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신성한 섭리라는 주제에 관해 가르친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사에 간여해 자신의 백성을 돕는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경건한 기독교도가 기도로 간원해서 얻지 못할 유익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론집》은 기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육신에 속한 것이든 영혼에 속한 것이든 뭔가가 필요하거나 부족할 때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야 마땅할 것인즉 모든 유익한 것을 내려주시는 유일한 시혜자가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같은 간원을 허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의무였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혼자의 노력으로는 최말단의 물질적 조건조차 충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날마다 재확인되었다." "이례적 곤경에서 벗어나고 구제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건강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간원기도는 규칙적으로 드려야 마땅한 것이었다."(245-6)


"1640년에 장기의회가 열리고 교회법원 및 특권법원이 폐지된 후로 전개된 광신적 활동은 그 규모면에서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이 기간에 다양한 신흥종파가 왜 그토록 폭발적으로 증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프로테스탄트의 고삐 풀린 자제력이 분열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종교집단들은 국교회가 적절히 배려하지 못한 빈민계층의 정치사회적 열망을 대변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신흥종파 교도들이 세속적 문제에 대해 초자연적 해결책을 제공하려 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주역들이 완강히 거부한 초자연적 해결책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고, 중세 가톨릭교회의 기적 의존적인 측면을 부활시켰다. 로마풍의 위계적인 특징까지 부활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예언과 신앙치료를 수행했다." "이런 종류의 치료와 퇴마는 종교개혁이 전복시키려 한 바로 그 종교행태로 되돌아간 측면이 있었다."(271-6)


"내란기에 흔한 일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정치적으로 특정인을 편든다고 선포한 환상을 해설함으로써 국왕이나 군지도부에게 로비를 벌이곤 했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목표가 항상 뚜렷했던 만큼 그들의 접근방법은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언자는 사적인 개인으로서는 무명인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인정한 무소불위의 능력을 내세움으로써, 일시나마 경의를 표하는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 권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이론이 기득권 유지에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편에 서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은 모든 개혁가에게 중차대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개혁가는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듯이 보이는 성경구절에서 도덕적·정치적 권면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 논증의 오랜 관행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제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성경인용보다 폭넓은 이용가능성을 가진 것이 바로 계시였다."(299-301)


"왕정복고와 국교회 부활이 비국교회 신흥종파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면서, 예언의 불길은 급속히 잦아들었다. 통치계급은 공위기─찰스 1세 처형 후 왕이 없던 시기─에 있었던 사회무질서가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신흥종파 교도들도 대체로는 스스로 준법정신을 입증하고자 부심했다." "이미 중세에도 종교적 예언을 빙자한 활동을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여긴 예리한 관찰자가 있었다. 17세기에는 이런 태도가 일상화되는 추세였다. 베이컨과 홉스는 생생한 예지몽과 전조예감을 육체적·심리적으로 설명할 길을 모색했다. 주교 스프랫은 질병이 계시라는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흥종파 교도들의 예언능력이나 환시능력은 그들의 금식 및 금욕과 육체적으로 연과된 것임을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 "16세기에는 자칭 예언자의 주장이 결국 사실무근으로 밝혀질지언정 늘 신중하게 조사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식자층 대다수가 그런 주장을 검증절차 없이 간단한 허풍으로 무시했다."(310-3)


"이런 활동의 일부는 표방된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부수효과 때문에도 존중되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활동을 액면 가치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산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역병퇴치를 위해 합심해 기도한 사람들이 단지 물질적 효과만을 노리고 그런 형식의 마술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하니님의 구제를 간원한 것은─비록 그 간원이 받아들여질 것인지 확신하지는 못했겠지만─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또 다른 의도는 공동체에 닥친 위협이 공동체 전체에 야기한 관심사를 한목소리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역병에 대항해 함께 뭉침으로써 사회적 연대감을 증명했으며, (그들이 믿기에) 역병을 야기한 그들의 죄를 함께 고백함으로써 공동체의 윤리규범을 재확인했다. 이 같은 집단표현은 공포심과 무질서를 저지하는 데도 탁월한 수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늘 헛되지 않다. 기도는 명시된 기능만이 아니라 사회학에서 말하는 잠재(latent) 기능도 갖는다."(314)


"성경주석이나 정치철학은 일정한 교육을 요구하는 활동이었기에 상류계급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예언자는 전혀 교육받지 못한 자였다."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믿음은 하층민 급진주의자들에게 자신감과 혁명추동력을 주었다. 유산자들이 그런 믿음을 증오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로서는 어떤 제5왕국파 교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특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맹남과 무식녀의 한 무리가 어두운 예언에 능통한 기술과 미래사건에 대한 예지를 내세우는데, 이런 능력은 가장 박식한 랍비나 가장 유능한 정치가조차 감히 희망하기 힘든 것이다.〉 왕정복고 이후로 지배계급 머릿속에는 종교적 광신과 수평화 운동이 한통속으로 엮였다. 광신과 수평화는 주교 애터베리가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천민의 자포자기식 음모〉라 부른 것의 두 얼굴로 간주되었다. 지배계급은 이제 다시는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혼동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319-22)


6장 종교와 사람들


"종교개혁 후 공식 종교가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요새를 선점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정통성을 결핍한 이 신앙체계들이 보여준 도전 강도는 언뜻 보아도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실제로 잉글랜드 국교회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였고 그 사회적 기능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모든 아이는 교회의 품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마을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고 부모나 그의 주인에게 넘겨져 신앙의 걸음마로 교리문답을 익혔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범죄였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도 사회 전체의 축소판이었다. 중세교회가 입장순서를 신중히 정했던 것처럼, 국교회 좌석배치는 소교구민들 간의 사회위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마술적 믿음은 종교가 갖춘 제도적 기반도, 체계적 신학도, 윤리규범도, 광범위한 사회기능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종교가 사람들의 충성심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외부의 경쟁자에게 매우 취약했다."(323-7)


"성직자들은 고해성사를 대체할 (설교와 권면 이외의) 새로운 수단을 개발해서 평신도들이 결단을 내릴 때 영향을 주려 했다. 중세에 고해신부용 매뉴얼의 특징은 결의론(決疑論)으로, 이것은 노련한 신학자들이 제시한 풍부한 사례에 의존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양심사례들〉을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했고, 식자층 독자는 그것들 중 자신이 부닥친 문제와 상황 면에서 가장 유사한 선례를 찾아내 해결책을 배울 수 있었다. 독실한 평신도를 내향화하는 것도 가능한 대안이었다. 이는 온갖 의문과 불확실한 것을 영적 일기에 담고 기도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평신도를 이끄는 것이었다. 퓨리턴에게 일기나 자서전의 심리적 기능은 가톨릭의 고해성사의 기능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개인적 조언을 대체할 만한 것은 없었다. 제레미 테일러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언제나 생생한 안내자를 선호하기 마련〉이었다."(336-7)


"세례, 혼례, 거룩한 장례 같은 의례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극빈층 중 다수는 정규 교인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증거로, 어떤 저자는 빈민의 여러 죄목 가운데 〈소교구 교회에 출석해 그들의 의무를 더 잘 듣고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포함시켰다. 18세기 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옥스퍼드셔의 어떤 성직자는 그의 소교구 교회의 축일 출석률이 저조한 이유에 관해, 〈불참석자는 모두가 빈민 노동자로, 법정기준을 초과해 구호품을 지급하지 않고는 그들의 참석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변명했다." "17세기 동안 독실한 신자들은 자신들이 이 타락한 세상에서 극히 열세에 놓여 있음을 자각했고, 천민을 참 종교의 최대 적으로 간주했다. 1691년 리처드 백스터는, 〈누군가가 지식과 종교를 박멸할 군대를 모집한다면, 수선공, 개백정, 짐꾼, 거지, 뱃사공 등 글모르는 자들이 앞다투어 그런 군대에 입대할 것〉이라고 외쳤다. 백스터는 〈훨씬 더 많은 주민〉이 실천 신앙을 혐오한다고 생각했다."(340-5)


"회의론의 강한 전염성은 공위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물론 1648년 '신성모독 금지령' 입안자들은 영혼불멸성을 부정하는 자, 성경을 의심하는 자, 그리스도와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 심지어는 하나님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런 이단설의 일부는 신흥종파들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소치니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란터파는 영혼불멸성, 부활의 사실성, 성경의 절대적 권위,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부정했다. 이 파는 패밀리스트파와 마찬가지로 이런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되 상징적 의미로만 사용했다. 이를테면 사람이 웃을 때가 천당이고 찌푸릴 때가 지옥이라는 식이었다. 지옥은 상상 속에나 존재할 뿐이었다. 리처드 코핀은 〈우리가 지옥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한에는, 우리에게 지옥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단설들은 결국 종교 전체에 대한 공식 거부로 흘렀다."(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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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코 자서전 - 지성사의 숨은 거인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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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소년기(1668~1686)


"비코는 제수이트회의 또다른 신부 주세페 리치의 지도 아래 다시 철학으로 돌아갔다. 리치 신부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둔스 스코투스 학파에 속했지만 밑바닥에서는 제논주의자─엘레오의 제논이 아니라 키티온의 제논을 가리킨다─였다. 비코는 리치 신부로부터 〈추상적인 실체〉가 유명론자 발조 신부가 말하는 〈양태modi〉보다 더 큰 현실성을 갖는다는 가르침을 기꺼이 배웠다. 이것은 비코가 언젠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철학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임을 예견해준 것이었는데, 스콜라 철학의 어느 누구도 스코투스만큼 플라톤 철학에 근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비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제논의 〈논점〉에 대해 논했던 것을 따라했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심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비코의 눈에는 리치 신부가 존재와 실체 사이의 형이상학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데에만 너무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새로운 앎을 원했다."(23-4)


"펠리페 아쿠아디아에게 법학을 배운 비코는 종종 시민법의 좋은 문구들을 되뇌어보면서 두 가지 일을 대단히 즐겨 했다. 첫째는 명석한 해석자들이 법을 요약하면서 법학자들과 황제들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행했던 형평성과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고려한 사항을 어떻게 일반적인 격률로 추출해내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코로 하여금 고대의 해석자들에게 이끌리도록 만들었는데, 훗날 그는 이들이 자연적 형평성의 철학자라고 인식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둘째는 법학자들 스스로가 얼마나 공을 들여 자신들이 해석하던 법과 의회의 포고령과 집정관의 칙령의 언어를 검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박식한 해석자들을 향하게 만들었는데, 훗날 그들을 로마의 시민법을 다루는 순수한 역사가로 인식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그 두 가지 즐거움은, 하나는 보편법의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 그가 쏟아부은 온갖 노력의 징표요, 다른 하나는 라틴어의 연구로부터 얻은 혜택의 징표였다."(27-8)


2 바톨라 시기의 자기완성을 위한 공부(1686~1695)


"바톨라 성에 머무는 동안, 교회법에서 교리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튼 것에 힘입어 그는 어느덧 은총에 대해 기술한 가톨릭 교리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별히 소르본의 신학자 리카르두스의 책을 정독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버지의 서점에서 그 책을 챙겨갔던 것이다. 리카르두스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캘빈과 펠라기우스라는 두 극단은 물론 그 두 극단을 따르는 다른 견해들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이려 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민족들의 자연법의 원리에 대해 숙고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마법의 기원은 물론 다른 모든 민족들의 시민법을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에 발판이 되어주었으며, 도덕철학과 관련된 은총에 대한 올바른 교리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로마의 법학자들이 우아한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난한 로렌조 발라는 키케로부터 시작하여 라틴어 능력을 배양하도록 이끌었다."(36-8)


"비코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모두의 도덕철학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둘 모두가 고독자들의 도덕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들만의 작은 정원에 갇혀 있는 게으른 사람들이었고, 스토아학파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명상가들이었다. 또한 애초에 비코가 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건너뛴 것은 이후 그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마지막으로는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을 경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래로 그는 플라톤이 따랐던 티마이오스의 물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세상이 수數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수긍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세상이 점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물리학도 경멸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둘 사이에 어떠한 실체적인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에피쿠로스나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둘은 모두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43-4)


3 나폴리로 귀환: 초기 비코 철학의 형성(1695~1707)


"비코는 모든 지식인들 중에서 단 두 명에게만 찬사를 보냈는데, 그들은 플라톤과 타키투스였다. 견줄 바 없는 형이상학적 정신으로 타키투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플라톤은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관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이 보편적인 지식을 통해 이데아를 아는 인간(철학자)을 구성하는 덕성의 모든 부분을 널리 알렸듯, 타키투스는 행운과 악운의 무한히 불규칙적인 사건들 속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인간(정치가)이 줄 수 있는 혜택을 조언 하러 내려왔다고 보았다. 이 두 명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비코의 찬사는 그가 훗날 공들여 만들 계획의 전조였다. 그 계획이란 모든 시간에 걸친 보편적 역사가 밟아가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사의 영원한 속성에 따라서 모든 민족이 흥기하고 정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겪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명한 사람이란 플라톤처럼 숨겨진(철학적) 지식도 알아야 하고, 타키투스처럼 범속한(실천적) 지식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81)


"마침내 비코는 베룰람 경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는 범속한 지식과 숨겨진 지식 모두에 있어 그 누구보다 능통한 사람으로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드문 철학자였다." "플라톤이 지혜의 제왕이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타키투스가 없듯이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는 베이컨이 없다. 또한 그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학문의 세계에 결여된 많은 것들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결함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게다가 가톨릭교를 침해했던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그는 특정 직업이나 분파에 대한 편견 없이 모든 학문을 존중하면서 각 학문마다 보편적인 문필 공화국을 구성하는 전체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제 비코는 언제나 무엇을 성찰하거나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세 명의 뛰어난 저자들을 눈앞에 두고 있듯이, 창의력에 대한 저작에 몰두하여 최종적인 결과로 『보편법의 한 원리』를 탄생시켰다."(81-3)


4 비코 철학의 두번째 형성(1707~1716)


"후고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1635)을 읽고난 후에, 비코는 그로티우스를 네번째 저자로 추가하였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민중적 지혜로 자신의 심원한 지혜를 확인하였다기보다는 장식하였다. 타키투스는 자신의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정치학을 아무런 체계도 없이 분산되고 혼돈되어 자신의 시대까지 전해져 내려온 사실들로 채웠다. 베이컨은 자신의 시대의 인간과 신에 대한 지식의 총체가 보충되고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직시했지만 법과 관련해서는 모든 도시와 모든 시간에, 즉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그로티우스는 보편법의 체계 속에서 철학과 문헌학 모두를 포용한다. 그는 문헌학을 이루는 두 부분인 역사와 언어에 모두 능통했는데, 실제의 역사이건 신화의 역사이건 사실과 사건을 다루는 역사는 물론 기독교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가장 수준 높은 세 언어였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잘 알았던 것이다."(117-8)


5 비코 철학의 결정적인 형태와 1723년의 공채(1717~1723)


"이러한 공부와 이러한 인식과 어느 누구보다도 찬양했던 이 네 명의 저자와 가톨릭 종교에 기여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더불어 비코는 마침내 최고의 철학, 즉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 신앙에 종속시키려고 고안된 체계가 문필의 세계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철학은 문헌학과 조화를 이루며, 그 문헌학은 언어의 역사와 사물의 역사라는 두 분야에서 학문적 필연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719년 연례 연설에서 다음의 논지를 제시했다. 〈첫째, 모든 학문의 원리는 신으로부터 온다. 둘째, '인식(nosse), 의지(velle), 능력(posse)'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한 영원한 진리의 신성한 빛은 모든 학문에 스며들어 그들 서로 간에 긴밀하게 결합되는 순서에 따라 처리하며 그들의 근원으로서 신에게 연결시킨다. 셋째,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원리에 대해 지금까지 그 어떤 것이 씌어져왔고 말해져왔든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그 원리와 일치하면 옳고 일치하지 않으면 그르다는 것을 논증하도록 하자.〉"(121-3)


6 『새로운 학문』 초판본(1723~1724)


"인류의 형이상학이란 민족들마다 갖고 있는 자연신학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인간이 갖는 신을 향한 어떤 자연적 본능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은 민족 최초의 창건자들로 하여금 어떤 여인들과 삶의 영원한 반려로 결합하도록 이끌었고, 그것이 혼례에 의한 최초의 인간사회였다. 그렇게 비코는 이교도 신학의 대원리와 신학적 시인들이 쓴 시의 대원리를 발견했던 것인데, 그들은 이교도 문명 최초의 시인이자 세계 최초의 시인이었다. 비코는 이러한 형이상학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도덕과 정치를 발견했고, 그 위에 인류의 법학을 근거시켰다. 민족들마다 그들 본성에 대한 관념을 펼쳐내고, 그에 따라 그들 정부의 형태도, 법학도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최종적인 정부의 형태는 군주제인데 여기에서 민족들마다 마침내 본성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비코는 아시리아의 니노스 왕국에서부터 시작되는 세계사에 남겨져 있던 큰 공백을 메웠던 것이다."(149-50)


"언어를 다룬 부분에서 비코는 노래와 시 모두를 포함하는 시학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노래와 시 모두 초기의 모든 민족에게 균일한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 원리를 따라서 그는 영웅(귀족)들의 '임프레제(위업)'의 원리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초기의 민족들이 분절된 언어를 형성하지 못했을 시기에 사용했던 묵음의 언어였다. 거기에서 그는 문장학紋章學의 새로운 원리도 발견하였다." "언어의 기원의 발견이 초래한 다른 결과들 중에는 모든 언어들에 공통적인 어떤 원리들이 있고, 그 예로서 라틴어의 참된 기원을 찾았다. 그 예가 다른 모든 언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비코는 보여주었다. 먼저 모든 토착어에 공통적인 어원의 관념을 제시한 뒤 외래어의 어원의 관념을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어원의 관념을 펼쳐낸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민족의 자연법을 적절하게 논의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언어의 과학이었다."(150-1)


"이러한 관념의 원리와 언어의 원리, 즉 인류의 철학과 문헌학과 함께 그는 섭리의 관념에 근거하고 있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전개시킨다. 그에 따라서 민족들의 자연법이 제정되었음을 비코는 저작 전체를 통해 논증한다. 이런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에 따라 시간 속에서 출현하고 발전하고 성숙하고 쇠퇴하다가 종말을 맞는 과정을 특정한 민족들의 역사마다 밟아간다. 이렇듯 비코는 그리스인들을 고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며 조롱했던 이집트인들로부터 고대의 중요한 파편 두 조각을 받아들여 활용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전의 시간 전체를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집트인들이 이전에 말했던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 첫번째는 신성한 언어로서 상형문자 또는 신성문자를 통한 묵음의 언어이다. 두번째는 영웅의 언어로서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한다. 세번째는 서간체 언어로서 일상적인 삶의 용도를 위해 사용한다."(151)


7 부차적 저술들(1702~1727)


8 〈반론〉과 『새로운 학문』 재판본(1728~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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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과학, 인문학 서양 역사와 문명 총서 1
이종흡 지음 / 장미와동백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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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 인간에게서 태어난 어떤 이론이 다른 인간에 의해 성숙되고 결실을 맺는 과정, 즉 문제 제기로부터 해결로 이어지는 역사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형성되던 17-18세기에, 그 형성을 주도한 사상가들이 '선구적' 이론을 만들고자 하였던가? 그들에게 〈근대적〉인 합리성이나 진보를 정초定礎하려는 의도가 있었던가? 코아레가 지적하듯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선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가가 어떤 이론의 함축이 뒤 시대에 실현되는 진보의 역사를 기술하려면 이론적 '선구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역사가에 의해 미리 결정된 틀에 선구자를 끼워 맞춘다는 데 있다." "베이컨이 근대 과학의 선구자냐 마술사냐, 비코가 19세기 역사주의의 선구자냐 르네상스 인문학의 뒤늦은 상속자냐에 관한 길고도 뜨거운 논쟁의 와중에서 희생당한 장본인은 바로 베이컨과 비코였다."(15-6)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필자가 설정한 '담론 상황'은 대화의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논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며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상황이다. 그들은 유사한 논증과 수사학적 장치를 사용하며, 그들이 논증에서 사용하는 논거는 중복된다. 이 상황에서는 과학의 방법이나 이론의 보는 바에 따라 양편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토론되는 논제는 과학 이론의 역사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어쩌면 그것은 '비학적' 논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우리는 주류 과학철학과 과학사가 이론의 형성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학자 개인의 시적이고 직관적인 재능 덕택으로 돌려 온 측면을 비판하였다. 방벙이나 이론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던 탓에, 방법이나 이론이 형성되는 실제 과정은 생략되거나 개인적 재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담론 상황'에 관한 연구는 그 같은 '재능'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상황적인 것임을 전제한다."(28-9)


"필자는 '연속성 수준의 분석'을 통해 근대 초 유럽의 비학과 과학의 관계를 비학적 담론 상황과 과학적 담론 상황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담론 상황의 연속은 비학의 상징 구조와 과학의 표상 구조 사이의 차이를 전제로 하지만, 두 구조 중 어느 하나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정하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과학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구조가 모든 담론적 실천과 담론 상황을 장악한다면, 새로운 것의 '형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설정한 연속성의 영역은 과학적 관점에서도 파악될 수 있고 비학적 관점에서도 파악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이다. 그렇지만 어떤 관점을 채택하든지, 우리가 휘그적 역사학으로 되돌아갈 염려는 없다. 첫째는 우리가 비학의 지속이나 과학의 소급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적'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두 조류가 공존하면서 상호 작용하는 양상을 비교적 중립적인 견지에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34)


"인간의 노력 없이 언어 스스로가 변화할 리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상징의 언어 구조 내에서 그것이 '표상'에 부적합함을 자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담론을, 구조적 갈등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담론을 두 계열로 구분한다. 하나는 과학적 표상을 만들어 가는 담론의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같은 과학적 노력의 의미를 분석하는 담론의 계열이다. 전자는 언어를 가능한 한 사물에 일치시키고자 하며, 후자는 언어와 사물의 본질적 불일치, 즉 사물에 대한 언어의 비유적 본성을 전제하면서 사물에 일치하는 언어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대체로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전자는 '자연과학'의 담론이 취했던 방향이요, 후자는 '인문학'의 담론이 취했던 메타적 방향이다. 이 두 계열은 상호작용하면서, 전통적인 상징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근대적 표상 체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위의 두 계열을 모두 '과학적 담론'의 범주로 묶었다."(36)


"근대 초 지적 담론의 지형을 비학·자연과학·인문학 등 세 영역에 의해 가늠하려는 이 연구는, 다음 두 가지 관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이 세 영역은 원래부터 각기 '폐쇄된' 지식 영역으로 구획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열린' 창문을 통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상호 작용하였다. 둘째, 세 영역을 차별화하는 기준은 담론의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각자에 고유한 지식이며 인식 방법론에 의해 구분된다기보다는,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하여 사회적 권력으로 만드는 방식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여 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 영역의 차이는 각자에 고유한 '수사학'을 통하여 충실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단순한 '꾸밈'의 기술이 아니라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비학적 상징의 수직성과 자폐성, 과학적 표상의 수평성과 강압성, 인문학적 표상의 총체성 등 각 영역의 차별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37-8)


제1부


1장 르네상스 비학의 인식체계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를 '새로운' 현상이었다고(비록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그것이 '외부'로부터 서방 라틴 세계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고대 말에 제설혼합주의syncretism 형식으로 형성된 신플라톤주의는, 중세에는 주로 비잔틴 지역에서 존속되었다." "그렇다면 비잔틴 세계가 서방에 전해 준 신플라톤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비잔틴 세계가 아랍 문명으로부터 수용한 '태고 신학prisca theologia'의 전통에서 실마리를 구할 수 있다." "태고 신학에 따르면, 서방-이집트 전통은 하늘의 빛과 지혜를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빛과 지혜를 거의 감춘 채 조금만 드러낸 것임에 반하여, 동방-페르시아 전통은 신과 천상의 신비를 빛과 어둠의 교의에 의해 공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천명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방-페르시아의 '태고 신학'은 서방-이집트의 그것보다 오래되었고 우월하다는 것이었다."(43-5)


"비잔틴 세계에서는 '태고 신학'의 전통이 그리스도교 교의와 결합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플라톤 철학을 융합하였던 초대 교부들의 전통이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의 견해는 크게 아우구스티누스(350-430) 계열과 락탄티우스(약 260-340)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유대 민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지혜만이 참된 것이었다." "반면 락탄티우스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호하고 은폐적인 형식으로나마 이교도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및 그리스 철학뿐만 아니라 칼데아, 이집트, 시리아, 유대 등 여러 민족의 고대 전통으로부터 '태고 신학'의 계보를 작성하려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었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이미 11세기에 프셀로스(1018-1078)는 조로아스터·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로부터 플라톤에게로 이어지는 '태고 신학'의 계보를 작성할 수 있었다."(45-6)


"르네상스 비학은 창조와 창조된 세계의 비밀을 논의함에 있어, '두 권이 책'을 전제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은 넓은 의미의 성전聖典들을 묶어서 부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물론, 이교 민족의 많은 태곳적 문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처럼 여러 권의 책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신적 창조의 비밀이 성서(특히 모세의 「창세기」)뿐만 아니라, 이교 세계의 태곳적 문헌에도 계시되었다는 '태고 신학'의 전통, 곰브리치의 표현을 빌리면, 〈복수적 계시의 교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권의 책은 '자연'을 지칭한다.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저자'의 의도를 담은 '책'으로 읽힐 수 있었다. '성전들'과 '자연'에서 모두 신적 계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관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곳적 문헌 속에서 저자의 의도를 해독하는 방식을 그대로 자연에 적용하여, 조물주의 의도나 의지를 '읽으려는' 시도는 중세에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현상이었다."(62-3)


"마술을 '신성한 것'에 대한 최상의 지식과 기술로, 주술을 정령에 의존하는 타락한 지식과 기술로 구분하는 태도는 15-16세기 사이의 마술사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마술사'의 태곳적 의미는 '철학자' 혹은 '현자'였다는 것, 마술은 자연철학의 정점이요 완성이라는 것, 마술을 타락시킨 미신적이고 불경한 주술사는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의 주장은 당시의 마술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주술 비판은 중세 교회의 '마술' 비판을 닮은 면이 있다. 9세기나 10세기에 편찬된 『교구법령』은 '마술'을 정령이나 악마에 의지하는 기술이요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였던바, 이러한 태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르네상스 마술사들은 '주술'을 비판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비판은 웹스터가 지적하였듯이, '주술'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한다는 점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수행된 것들이었다."(87-8)


"비학의 인식론은 수직적이다. 인식론적 수직축에 의해 한 마술사는 다른 마술사를 열등한 적(주술사)으로 규정한다. 누가 우월하고 열등한가, 수직적 상승에서 누가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였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옛날이든 지금이든 비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외부적 조건이 달라져도 이러한 특징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비학이 숨은 것을 추구하며, 결국은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진리'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비학은 상징으로 가득 찬 '두 권의 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상징의 가시적 이미지에 머무는 자를 열등한 적으로 규정한다. 비학은 상징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하지만, 종국적 진리는 그것을 파악한 사람 혼자만이 알 수 있다. 그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무리조차도 무엇이 진리인지는 모른다. 그들은 진리를 추종한다기보다, 진리를 파악한, 혹은 파악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추종할 따름이다."(91-2)


"이 시대의 많은 연금술 문헌은 연금술의 실제 작업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대속代贖 등 영적 과정과 유비하였다." "이러한 유비나 대입을 가능하게 한 근본 조건은, '성육화Incarnation'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곰브리치가 말했듯, 그리스도교 전통은 〈성육화의 비밀이며 계시의 교의에 따라 말씀Logos이 육신이 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은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말씀'의 육화로 간주되었다. 연금술은 이 육화된 실체로부터 역으로 '말씀'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요컨대, 예수가 육체적 시련과 죽음을 거쳐 부활과 대속이라는 창조주의 의지를 드러낸 방식은, '철학자의 돌'이 불의 시련과 재를 거쳐 결국 연금액(본질)으로 바뀌는 방식의 모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연금술에 대한 기대는 보다 일반적인 종교적 심성에서 배양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4-5)


2장 비학의 상징체계


"비학의 언어에서 수나 도형이나 이름 같은 '형상'은 그것에 어울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덕이나 '약' 같은 숨어 있는 성질은 그것에 적절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어떤 형상의 성질은 그 형상에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물의 형상은 그것에 내재된 성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비슷한 형상은 비슷한 성질이나 효능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형상이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형상이 더 높은 세계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에서 단어나 이름에도 덕과 성질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올바른' 이름은 '아담의 언어'(신성어)처럼 그 사물의 덕을 간직한다. 아담이 동식물을 올바르게, 각 동식물의 본성에 어울리게 명명함으로써 지배할 수 있었듯이, 마술사는 올바른 '이름'으로 그 이름에 의해 기호화된 사물을 지배할 수 있을 터였다. 비학의 인식론이 '두 권의 책'에 대한 해독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기이한 언어-사물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98-9)


"르네상스 마술사들은 언어의 두 '층위'를 구분하였다. 암호화된 사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본성은 계시의 도움을 받아 섬광처럼 해독자의 정신에 새겨진다. 피치노가 〈사물의 힘은 먼저 정신 안에서 파악된다〉고 말하면서 의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수준에서 정신에 형성되는 '이미지'는 사물의 본질과 거의 일치한다." "다른 한 층위는 음성과 철자에 의한 표현의 수준이다. 이 '표헌적' 수준에서 정신에 새겨진 이미지는 언어에 의해 가시화된다." "아그리파는 히브리어의 22철자 중 단철자 12개는 12궁에, 복철자 7개는 7행성에, 3개의 모자母字는 3원소(水, 土, 火)에 상응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표현적 수준에서의 '언어'도 정신적 이미지를 운반하는 매개자로서, 지시된 사물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갖는다. 아그리파가 말하듯이, 표현된 단어는 그것을 듣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물도 변화시킨다. 그러나, 표현된 단어가 정신에 새겨진 이미지와 일치할 수는 없다."(107-8)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는 헤르메스주의에 내포된 그리스도교적 '육화의 관념'이 조물주의 적극적 수사나 '시험'과 결합하는 하나의 계기를 예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계시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유사한 것으로 유사한 것을 표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하지 않은 것으로 유사한 것을 표상하는 길이다. 전자는 보다 높은 세계가 아름다움이며 빛이며 '금金' 같은 비유를 통해서 상징화되는 방식이며, 후자는 신비하고 기괴한 비유에 의해 상징화되는 방식이다. 성서의 텍스트가 겉보기에 부적합한 상징과 비유로 자주 구성되는 이유는, 하늘의 존재(별)가 〈신 같은 인간이거나 빛나는 의복을 걸친 형상〉(우상)으로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취하는 수수께끼처럼 기괴한 이미지(거지나 비둘기의 모습 같은)는 인간에 대한 시험이다. 그것은 비입문자에게는 신성한 비밀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는 자물쇠이지만 입문자에게는 신성한 비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열쇠이다."(117)


"수사학에서 '표현'이란 단순한 전달보다는 '효과적' 전달을 지향하며, 이 효과의 크기는 '설득력'을 기준으로 가늠될 수 있다. 설득에 성공하였다는 것은 움직이고movere(감동시키고), 가르치며docere, 이끈다delectare(어떤 곳으로 향하게 한다)는 수사학의 세 가지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스칼리제르는 모든 담론의 목적이 '설득'에 있으며, '진리야말로 설득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수사학은 '비유figure 혹은 trope'에 주의를 기울였다." "(비유법의 한 종류인) 은유는 화자나 저자의 편에서는 명료한 정신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자연적·효과적 수단이요, 청자나 독자의 편에서는 그것을 감각에 명료히 새겨서 저자나 화자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상징적 표현이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라는 가정은 비학에서뿐만 아니라 비학을 경멸한 에라스뮈스 같은 인문주의자에게서도 발견된다."(124-5, 129)


"겉으로는 16세기 비학과 17세기 과학이 인식론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양자의 담론 형식 사이에는 구조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특히 우리는 비학적 유비의 자폐성이 의사소통 상황에서 연장되고 정당화되고 강화되는 방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수사학(표현법) 일반에서 그러하였듯이, 비학적 유비도 역시 감각적인 효과를 중시한다." "그러나 지식의 효과적 전달을 목표로 하는 저자(화자)라면, 독자(청자)가 '감각이라는 문' 앞에 서성이기만 하는 것을 원할 리 없다." "따라서, 정말로 '지식의 전달'을 목표로 하는 저자라면, 독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지식이 독자의 '정신'에서 올바르게 판단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비학의 유비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배려'를 결여한 것이다. 그것은 '감각이라는 문'을 사용할 뿐, 독자들을 그 '문'으로부터 정신적 판단을 향하도록 배려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138-9)


"비학은 저자가 '진리'를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뿐, 그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비학적 유비의 수직 구조에서 '테너tenor'(의미)는 항상 숨어 있다. 우주의 비밀을 꿰뚫었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많은 사례를 동원하여 독자를 유혹할 뿐이다." "비학의 인식론은 항상 숨은 저자와 숨은 의미를 상정한다. 모델은 조물주의 창조이다. 피조물의 숨은 형상은 조물주의 창조의 말씀이다. 우주의 가시적인 혼돈 뒤에는 신성한 통일성과 조화가 숨어 있다. 이 숨은 형상이며 조화를 발견한 태고적 현자는 '상징',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유사성에 의해 연걸되는 언어로 창조의 비밀을 기록하였다. 르네상스 비학은 이처럼 '자연'과 '성전들'을 구성하는 '상징'을 뚫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창조의 비밀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태고 신학'을 계승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비학적 유비에서 '감춤과 드러냄'의 수사적 전략은, 지식의 축적보다는 반복을, 지식의 개선과 진보보다는 손상되지 않은 계승을 의도한다."(142-4)


제2부


3장 17세기 자연과학에서 비학적 논제의 연속성


"17세기에 과학의 새로운 '방법'이 비학의 낡은 '방법'을 개선하는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학의 '기계론'은 비학의 '애니미즘'을 대체하였고, 귀납법이며 연역법 같은 체계적 '방법'이 비학의 조잡한 경험과 관찰을 대신하는 과정은 실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적 교체(진보)의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겠다고 미리 결심하고 나서 17세기에 접근하는 역사가에게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컨이며 보일이며 뉴턴 같은 17세기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의 기계론과 비학의 애니미즘이 20세기의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대립적인 이론이나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기계론이 '승리'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17세기의 지적 분위기가 애니미즘 대 기계론의 '혈전'으로 점철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오류이다. '자연이라는 책'은 17세기 자연 연구에서도 현저한 상투어였다. 자연지식에 관한 담론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해독하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147-8)


"숨은 저자의 '책'을 해독하겠다는 르네상스 비학의 논제는 17세기 자연지식의 담론에서도 인식 대상과 방법에 관한 일반 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자연의 기하학적 상징은 무한한 속성을 내포하는 조물주의 전언이다. 조물주의 정신에서는 그 모든 속성이 단 하나의 정의에 의해 한꺼번에 파악되지만, 인간은 명제로부터 명제로 이행하는 담론적 추론을 통해 그 속성을 하나씩 '해독'할 수밖에 없다. 기하학적 상징은 신적 정신에서는 명료한 전언이지만, 인간의 정신에서는 '암호'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갈릴레오가 〈자연에서 조물주의 작용 양상modus perandi을 해명하고 조물주의 입법가적 의도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하기 위해 '자연의 수학적 법칙'을 정립하려 하였다는 추론이 무리가 아닐 것이다. 갈릴레오가 '수학적 법칙'에 헌신하던 17세기 초는 파라켈수스파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이언 해킹의 용어를 빌리자면 파라켈수스파의 '저급 과학'은 르네상스 비학을 대부분 수정 없이 계승한 것이었다."(148-50)


"파라켈수스적 예언과 17세기 말의 예언 사이에는 분명히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1531년과 1682년에 출현한 동일한 혜성(핼리 혜성)을 관찰함에 있어서, 파라켈수스는 그 혜성이 주기적 궤도를 몰랐지만, 17세기 말의 뉴턴이나 휘스턴이나 핼리(1656-1742)는 그것을 알았다. 파라켈수스에게는 막연히 대재앙의 전조였던 혜성이, 휘스턴이나 뉴턴에게서는 대홍수의 과학적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구와 인류의 동시적 종말은 양자의 공통 논제였다. 휘스턴은 혜성의 인력이 지구의 수분을 모두 빼앗아 가면 지구는 내부의 불의 분출로 인하여 최후의 대화재를 맞이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매뉴얼이 지적하듯이, 뉴턴은 〈행성의 형성과 행성 운동의 규칙성이 시간적 기원을 갖는 것처럼, 세계는 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소진될 운명에 있다〉고 믿었다. 뉴턴의 과학적 '법칙'은, 모세가 전한 세계 창조와 세례 요한이 예언한 세계의 최후 사이에서 시한부로만 작용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167)


"그렇지만 16-17세기 동안 진행된 종말론적 논의를 오늘날 점성술사의 대재앙에 대한 예언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점성술사는 '예언'에 그치지만, 근대 초 유럽의 자연 연구에서 종말론적 논의는 '예언된 미래에 맞춰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에 헌신하였다." "실낙원 이후 심하게 변형되고 왜곡된 자연을 태초의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조물주의 몫이지만, 왜곡된 자연 조건 속에서 태초의 낙원을 재건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이렇듯 16-17세기의 많은 저술에서 마술적 권력과 유토피아적 계획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였다. 아마도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다양한 논의가 공유한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목표가 '위대한 부흥Great Instauration'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위대한 부흥'은 〈인간[아담]이 태초에 소유하였던 주권과 권력〉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167-9)


4장 과학적 담론의 형성


"원래 르네상스 비학은 주술과의 차별화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였다. 주술은 우상 숭배인 반면, 마술은 참된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이었다. 조물주의 종국적인 전언을 해독하지 못한 채 중도에 머무는 '주술'에 대한 비판은, 마술이 종교적 목표를 표방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어떤 마술사가 그의 '기술'로 인간 조건의 개선을 약속하였을 때, 그는 인간의 육체적·물질적 조건과 인간의 영적·정신적 조건을 동시에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효용과 영적 용도의 결합은 원래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마술사는 환자의 영적 구원보다 돈벌이에 전념할 수도 있었고, 이단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 "부르주아 세력의 성장은 비학의 물질적 효용을 강화하였을 것이며, 영적 구원을 독점하려는 기성 교회는 비학의 영적 용도를 억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틈새' 혹은 긴장은 과학과 비학을 차별화하려는 노력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179-81)


"그렇지만 윤리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지식의 효용에 대한 베이컨의 강조가 교회나 부르주아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오히려 베이컨은 자연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집단'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려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왕국 벤살렘Bensalem의 중심은, 〈사물의 원인과 비밀스러운 운동〉을 탐구하는 과학자 집단, 즉 '솔로몬의 집'이다. '솔로몬의 집'은 벤살렘 왕국의 〈등불〉이다." "이처럼 독립된 과학자 집단은 이웃 사랑과 박애의 대가로 기존의 정치·종교 엘리트 집단이 갖고 있던 것에 버금가는 '사회적 권력'을 얻는다." "따라서 '지식이 권력'이라는 베이컨의 개념은 두 가지(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어떤 대상에 관한 지식이 그 대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준다는 의미요, 다른 하나는 어떤 지식의 사회적 효용이 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사회적 권력'을 제공한다는 뜻이다."(182-3)


"베이컨은 비학적 상징의 '감춤과 폭로'의 수사학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형하였다. 입문자와 비입문자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입문자는 과학 전문가요, 비입문자는 과학의 아마추어이거나 문외한이다. 베이컨은 아마추어로부터 전문가로의 상승 가능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입문자와 비입문자는 깊이 절연된 채,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대중은 '파편적' 지식을 사용하며, 보답으로 과학자를 더욱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는 사회적인 권위를 확보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해危害를 받지 않은 채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 "베이컨의 수사학은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입문자에게든 비입문자에게든 지식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지식의 명료한 전달만이 문외한으로 하여금 과학의 파편적 지식에 '경탄'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요, 과학자로 하여금 지식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보다 심원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196)


"'과학적 담론'에 적합한 언어가 무엇인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플러드와 케플러는 똑같이 이중적 표상과 이중적 전달을 의도하였다. 플러드에게 상징은 일상 언어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자연의 비밀을 표상하고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더 나아가, 상징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 이중의 독자, 즉 입문자와 비입문자를 차별화하는 동시에 입문자의 영적 계도를 의도한 것이었다. 물론 케플러의 상징도 이중의 독자를 구분하였다. 케플러의 경우에도 〈과학은 일상 언어나 감각에 호소하는 피상적 언어와는 구분되는 특수한 비밀의 언어〉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비밀의 언어'로서 수학이나 기하학 과학에 적합한 언어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결코 '영적 계도'를 표방하지 않았다. 비록 '수학적 상징'도 접근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를 구분하지만, 이제 차별화는 영적 우월자와 열등자 사이에서 진행되기보다, 오직 지적 엘리트와 무식한 대중 사이에서만 진행된다."(213-4)


"1661년에 로버트 보일은 파라켈수스파의 연금술사들을 비난하면서, 특히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과 그들의 〈애매한 표현〉을 비난의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파라켈수스파의 표현 방식은 〈독자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의 기예를 더욱 신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한 것이든, 독자에게 지식을 감추기 위한 것이든〉, 독자를 혼동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왕립학회의 또다른 회원인 그랜빌도 웹스터 같은 마술사들은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기는커녕, 〈은유, 천박한 비유, 광신적 어구, 환상적인 언어 체계〉로 인하여, 오히려 바벨의 혼란을 증폭시킬 뿐이라고 공격하였다. 홉스 역시 『리바이어던』에서 〈명석한 정의〉에 따라 사용되는 〈정확한 어휘야말로 인간 정신의 등불〉이라고 말하면서, 은유를 비롯한 애매한 표현을 〈어리석은 등불〉과도 같다고 지적하였다. 은유에 의존한 유비는 〈여러 모순 사이를 방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로크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224-5)


"윌킨스가 추구하였던 '실물 상징'은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언어를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의 질서'와 '말의 질서'를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반면에 로크에게 말의 질서는 〈자의적〉이다. 〈사람이 말을 그의 관념에 대한 기호로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특정한 분절적 음성과 어떤 관념 사이에 자연적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할 것이다. 어떤 단어는 자의적인 부여에 의해 자의적으로 어떤 관념의 표지가 된다. 따라서 단어의 용도는 관념에 대한 감각적 표시로 국한되며, 단어가 지시하는 관념이야말로 그 단어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의미이다.〉 이제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념을 지시하는 '자의적' 기호일 뿐이다. 언어는 사람 사이의 규약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될 뿐, 사물이나 관념과는 어떠한 자연적·필연적 관계도 없다. 로크의 주장은 소쉬르의 규약적·자의적 언어관을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226-7)


"자연에 대한 담론은 더 이상 저자(화자)의 정신과 혼동되지 않으며, 자연 그 자체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저자의 책을 비판하는 행위는, 사물에 대한 그의 표상을 비판하는 것이지, 그의 전인성을 모독하고 우주를 뒤바꾸는 것은 아니다. 모자이크처럼 폐기될 것을 폐기하고, 수정될 것은 수정되고, 수용될 것은 수용되어도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러한 지식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전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전체'가 모든 파편의 결합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누가 모든 파편을 모아서 '전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언어가 사물에 대한 투명한 표상이기를 포기하고 언어와 사물이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이러한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상적 언어가 포기되는 순간부터, 인간 정신은 끊임없이 불화하고 반목하는 언어와 사물 사이를 중개하려고 노심초사하지만 한 번도 중재에 성공하지 못한 불행한 주인(주체)이 되었다는 말이다."(230)


제3부


5장 근대 인문학에서 비학적 논제의 연속성


"17세기 자연지식 담론에서 논제가 토론되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서 '구조적 변화'란 바로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을 이어 주던 비학적 상징의 매개성이 파괴되었고, 언어가 인간의 정신적 관념을 '표상'하는 기능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17세기 중반 이후로 '성전들'에 대한 논의는 태곳적 현자의 관념이며 지식이 그 속에서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르네상스 비학이 '조물주의 전언'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태고 신학'의 언어는, 이제 단순히 세계에 대한 고대인의 지식이나 지혜의 수준을 전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제는 태곳적 기록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문학적 사색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또한, 태고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적 경과가 진보로서든 퇴보로서든 하나의 '연속체'로 파악되면서, '전체로서의 역사'의 의미가 '새롭게' 논의될 수 있었다."(233-4)


"17-18세기에 '태곳적 지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고대인의 '원시성'이나 '단순함'이 다방면으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기원전 1세기경에 루크레티우스는, 원시 인류가 농업이나 직조 기술도 없고 성적 통제도 없이, 거의 동물적인 야만 상태에서 살다가 점차 문명화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었다." "기원전 300년경에 유헤메로스는, 신화란 거의 동물적 격정과 상상력에 사로잡힌 시민을 무력과 간계를 이용하여 통치한 정치가나 영웅이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조작한 결과물이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신화를 원시인의 조야한 상상이나 정치적 간계의 산물로 해석하는 '루크레티즘'이나 '유헤메리즘'은 르네상스 시대에 모두 부활하였고, 그 이후의 신화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로, 특히 17세기부터는 신화 해석에 고대에는 없었던 요소가 새로이 첨가되었다. 고대 신화의 원시성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와 미묘한 긴장을 이루었다."(239-40)


# 고대인의 원시성 테제에 관한 논제

1. 라페이레르 : 아담 이전에도 선민과 이교도가 구분되지 않은 채 〈더럽고 야수적으로 살고〉 있었으며, 아담 이후로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 홉스 :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능력은, 피조물을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이성)일 뿐, 모든 피조물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나 추상화의 능력이 아니다.

3. 스피노자 :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지만, 그들의 기록이 심오한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들은 당시 정통 교리의 투사들로부터 '악마 삼총사'라고 비난받았다.


"아담이나 모세, 나아가서는 헤르메스가 어떤 종류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문제가 학문적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서도 퍽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태곳적 지혜'를 토론하는 동안, 그것의 시간적·역사적 성격은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저작과 그리스도교 성서의 '알레고리적' 의미가 동시에 폭로되었으며, 그것들이 제한된 시공간적 조건에 어울리는 담론이라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고대파Ancients와 현대파Moderns의 논쟁'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고대인의 지혜와 언어는 현대인의 그것보다 우월한가? 우열을 가릴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태곳적 지혜를 그것이 현대인의 지식보다 우월하든 열등하든 하나의 역사적 산물로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러빈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 논쟁은 한 차례의 대규모 전투라기보다, 수많은 작은 전투로 이어진 긴 전쟁〉이었다."(248-9)


"현대파의 승리를 위해 전기를 마련한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이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언어의 '자연적' 기원과 '인위적' 발전은 인류가 야만 상태로부터 문명 상태로 진보하는 과정으로 빈번하게 해석되었다." "행동(제스처)과 그림('상형어')은 오늘날의 입말과 글말처럼 동전의 앞뒷면이다. 행동으로 말하고 그림으로 기록하는 시대에, 인간은 감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상형어'는 심오한 지혜를 감추기 위한 의도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자연적·감각적 '필요'의 산물인 '조야한 언어'로 고정된다. 분절적인 음성과 알파벳적 기록에 의해서야 비로소 인간은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헤르메스, 모세, 종국적으로는 아담의 '신성한' 언어가 조잡한 원시 언어로 고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파의 승리도 점진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사聖史'와 '이교사異敎史'의 태곳적 지혜가, 태고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가 꾸준히 비교되었다. 비코는 바로 이러한 논쟁적 담론 상황에 속한다."(254-6)


"비코는 '성사'와 '이교사'를 완전 분리하여 '이교사'에 대해서만 야수적 기원 즉 '바바리즘'을 적용하였다. 성사와 이교사를 구분한 것이 이단 혐의를 피하면서 인류 문명의 기원이라는 위험한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태곳적의 '심오한 지혜'를 부정한 것은 데카르트파를 위시한 현대파로부터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코는 '야수-인간'의 테제를 수용하되, 카조봉처럼 그리스도교적 지혜가 이교적 야만성보다 우월함을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파처럼 '고대인'보다 '현대인'이 우월함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역사학적인 것'이었다." "비코가 보기에 '야수-인간'의 무리는 감각이나 본능에 따라 결속되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감각이나 본능에 따라 최초의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새로운 과학』 완성판(1744)의 주제인 '시적 지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비코가 내놓은 가장 충실한 답변이었다."(265-6)


"'시적 형이상학'은 태곳적에 살았던 사람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다. 태곳적 인간이면 누구나 '시인'이다. 태곳적 시인들은, 〈그들 자신의 관념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지순至純한 예지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며 인식함에 의해 창조하지만, 태곳적 사람들은 그들의 강건한 무지로 인해 오직 육체적 상상에 따라 사물을 창조하였다.〉 태곳적의 '시적 지혜'는 심오하거나 신성한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시적 형이상학'에 의해 형성되며, 그것의 요체는 '육체적 상상'이다." "비코는 〈모든 시적 표현〉은 〈언어는 빈곤〉하지만 〈설명하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는 조건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은유가 바로 그러하다. 어떤 것을 설명할 필요는 있는데, 그것에 합당한 어휘를 결여하고 있을 때 은유가 사용된다는 말이다. 이교 태고 문명이 발하는 찬란한 빛은 은유나 우화로부터 방출된 빛이요, 따라서 지식이 아닌 무지의 소산이다."(272-3)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은 섭리의 장소이다. 섭리는 늘 인간이 의도하는 '좁은 목적'보다 '넓고 우월한 목적'을 실현한다. 섭리는 '공통 감각'에 맞추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비코가 말하는 섭리의 작용은 '상형어'의 기능에 상응한다. '상형어'는 '야수-인간들'의 육체적 상상에 의해 형성되지만, 다시 그들의 감각과 상상을 사로잡는 '이상적 초상肖像'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모든 경험과 사고를 규율하며 질서 짓는다. '상형어'의 기능은 단순히 담론적 수준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기예와 제도가 '상형어'의 기능을 수행한다. 비코의 표현을 빌리면, 기예나 제도도 말이 아닌 사물로 구성되는 일종의 〈시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곳적 이교도들이 '만든' 모든 것은, 아우어바흐가 '마술적 형식주의'라고 부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각과 상상을 사로잡아 그들의 경험을 강제하고 규율하는 '상징'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281-2)


6장 인문학에서 '과학적' 담론의 형성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벽두부터 자연 및 섭리에 대한 인간적 인식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최초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신이 만든'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철학이나 의학이 과연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을 제기하였다. 물론 아직 페트라르카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창조하는 세계야말로 진리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의 살루타티는 과학의 토대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소란 인식 대상의 존재론적 높낮이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지적 능력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동시대의 자연철학을 공격하였으며, '신의 과학'(신학)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인간적 과학'(인문학)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였다. 인간이 신이 만든 피조물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자신이 창조한 것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정 '인간적인' 과학의 대상은 자연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인 법과 제도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297-8)


"페트라르카는 자유 기예liberal arts가 기계적 기예mechanical arts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윤리적·영적 영역에 한하여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을 인정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르네상스 비학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 기예와 신적 기예, 신이 만든 자연과 인간이 만든 세계 사이의 간극을 거의 제거하고,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을 넓은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학은 인간의 영적인 구원과 육체적 구원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기계적 기예와 자유 기예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술적 유토피아론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인간이 만든 것'은 자연과 섭리의 승인하에서만 진리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역사 세계는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만 가능한 세계였으며, 그 안에서 지상至上의 과제는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자연 지배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298-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데카르트가 논리적·수학적 필연성을 존재론적 필연성에 대입하여, 자연 세계의 '확실한' 인식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가히 지적 분수령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논리적·수학적 질서나 패턴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나아가서는 그러한 것만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세계상이 '기계화'된다는 것은, 단지 세계를 '기계'처럼 바라보게 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실물로든 상상으로든 인간에 의해 구성된 어떤 기계 모델이 실재에 부과되어 그 모델과 일치하는 실재의 질서만을 과학적 진리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기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비록 유한한 능력만을 가지지만, 적어도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유럽 전역의 지성계에서 눈에 띄게 진전되고 있었다."(299-300)


"비코의 『지혜』는 '진리'가 '만들어진 것'과 의미론적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테제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비코는 어떤 것을 만드는 조건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토마스주의의 입장을 계승하였다기보다는, 그 역으로 어떤 진리를 인식하는 조건은 그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키케로(혹은 둔스 스코투스)의 고전적 명제를 계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혜』에서 개진된 '베룸-팍툼'의 원리는 데카르트나 홉스가 제시하였던 진리 규준과는 다르다. 데카르트나 홉스에게는 '인간이 기하학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하학의 증명 가능성(진리)'을 보증하는 '조건'인데 반하여, 비코에게는 그것 자체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있다. 데카르트나 홉스가 '명석판명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비코는 '만들었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기준으로 정립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지혜』에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진리 기준이 수학과 기하학에 적용되지만, 『새로운 과학』에서는 그 기준이 '역사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303-5)


# 베룸-팍툼verum(진리)-factum(만들어진 것)의 원리


"비코가 '상상적 보편자'(상형어)에 주목하였던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우스'는 '천둥 번개'의 표상이었다는 식으로 그것이 '무엇'을 표상하였던가라는 문제도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비코의 진정한 관심은, 왜 고대에는 '상상적 보편자'(상형어)가 '확실한' 전언으로 '통용되었는가'를 구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처럼 언어를, 그것이 정립된 시점에서의 사회적 용도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그것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 생각하였던 것(관념)과 만들었던 것(사회관계나 제도)의 본성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코는 문헌언어학의 두 분과를 '언어의 역사'와 '사건의 역사'로 구분하였다. 문헌언어학은 〈사물의 역사를 참조함으로써 언어의 역사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헌언어학적 '확실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특정한 언어와 그것을 사용한 시대의 사회적·제도적 조건을 동시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313)


"비코의 '영원한 원형적 역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인간사에 대한 문헌언어학적 이해를 결합한 개념이었다. 역사의 변화는 인간 관념의 '철학적' 패턴을 따르지만, 철학적 패턴은 구체적인 '역사적 변양變樣' 속에서만 확인된다." "'factum'은 인간이 만드는 현실의 역사로, 'certum'은 문헌언어학에 의해 확인되는 그 역사의 확실성으로, 'verum'은 철학에 의해 증명되는 그 역사의 일정한 패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감각이나 영혼이나 이성을 통해 '시민 사회의 역사'를 전개하는바, 각 시대의 본성은 침묵어나 영웅어나 분절적 언어에 의해 확실하게 인식되며, 역사의 순환적 패턴에 의해 인간의 역사란 인간이 만든 것 이상일 수 없다는 진리가 증명된다. 실제로 '시민 사회의 역사'는 감각이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까지 한 차례의 순환을 완결하고 나면, 다시 이 순환을 반복한다. '감각의 바바리즘'으로부터 출발하여 '반성(이성)의 바바리즘'에서 종결되는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다."(316-7)


"인간 본성이 역사의 순환적 패턴을 결정한다는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물론 보댕이나 스페로니, 베이컨 등 17세기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답습되고 있던 해묵은 유산이었다. '베룸-팍툼'의 원리며 '야수-인간' 테제도 이미 17세기 중반에는 전 유럽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고대와 현대의 언어적 차이에 의해 각 시대의 본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현대파와 고대파의 논쟁'에서 핵심 주제였다. 비코의 어원 연구는 로렌초 발라를 위시한 르네상스 문헌언어학의 잔영이었다." "그러나 비코는 '과학' 자체가 하나의 '문제'로 부상하던 담론 상황에 속해 있었다. 비코에게 '유리한 고지advantage point'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시대'였다. 이 유리한 고지에서, 비코는 순환론이라는 '해묵은' 관념을 '새로운' 담론 상황에 응용하여, 시의 시대(감각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이성의 시대)를 동시에 반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코는 '과학에 대한 과학', 즉 '메타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의 위상을 정립하는 새로운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317-8)


"비코의 언어관을 '자연적' 아니면 '규약적'인 것이라고 양자택일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오히려 비코는 고대에든 현대에든 언어는 늘 '자연적인 동시에 규약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수 있다." "비코는 인간의 약속 없이도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자연적 언어관을 배격하는 동시에, 오로지 약속에 의해서만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규약적 언어관도 수정하고 있다. 각 시대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의 시대에 언어는 자연적 특징이 강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통용될 수 있지만, 인간의 시대에 언어는 '사물에 대응하는' 정의에 따라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시대에 어떤 어휘가 어떤 사물에 대응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규약에 의존하게 된다." "비코에게 언어는 고대든 현대든 '인간이 만든 것'이다. 고대에는 자연적-상징적 언어가 지배적이었고, 비코 당시에는 자의적-규약적 언어가 지배적이었을 따름이다."(333-4)


"반성력(이성적 추론 능력)에 의존하여 사물에 대한 엄밀한 표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 한구석에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거나, 진리를 가장하여 거짓을 말하는) '진리의 가면을 쓴 반영'이 동시에 형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비코가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참으로 흥미롭다. 비코는 두 상태의 '바바리즘'을 가정한다. 우선 그는 홉스가 만인 대 만인이 투쟁을 벌이는 '자연 상태'를 가정한 것처럼, '감각의 바바리즘'을 상정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 '감각의 바바리즘'으로부터 출발하여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에서 한 차례의 순환을 완결한다. '감각의 바바리즘'은 '야수-인간'이 아직 상상적 보편자(상형어)를 정립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공통 감각에 의해 언어의 의미를 규약할 수도, 서로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도 없다. 반면에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은 인간이 이성적 동의에 의해 의미를 규약할 수도, 따라서 서로를 믿고 의사소통할 수도 없게 된 상태이다."(341-2)


"청년 시절부터 비코는 일관되게 과학적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과학적 진술의 참·거짓의 문제를 떠나, 과학적 담론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오류의 낌새'마저 제거하려는 과학의 계획은 그것이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달리 참·거짓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반성의 바바리즘'을 초래한다. 삶의 공동체는 파괴된다. 비록 고대의 시인들이 만든 '상형어'는 미신의 산물이었지만, 그들은 '상형어'의 '빛나는' 이미지로 최초의 시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상형어'가 야수처럼 방황하던 인류의 '감각'을 사로잡은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활짝 만개한 인간의 '이성'을 무엇이 제어할 수 있는가? 과학적 진리로는 부족하다. 참·거짓을 따지는 담론 상황에서는 참을 가장한 거짓이 침투하기 마련이요, 이야기된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코는 인간 이성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비코는 현재의 과도한 이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최선의 처방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344-5)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동시대적 담론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비코의 '새로운 과학'은 단순한 반反과학도, 르네상스 비학의 부활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코는 과학적 담론이 야기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는 데 관심이 있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관심을 가린의 용어를 빌려 '새로운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새로운 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의 형성에는 비코 외에도 적지 않은 동시대인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근대 과학이 '생활 세계'에 야기한 영향을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자각한 중요한 실례에 해당한다." "비코의 수사학은 한 시대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그 시대에 고유한 '확실성'으로(그 시대에 확실하다고 믿어진 것으로) 환원한다. 이렇듯 한 시대를 좁은 수사의 권역에 묶어둠으로써, 비코는 우리에게 과학적 담론의 권역을 넘어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격을 선물한다."(352-3)


결론


"피치노가 『헤르메스 전서』를 번역한 1464년부터 비코의 『새로운 과학』(3판)이 출판된 1744년까지 대략 3세기는 서구 '근대성modernity'의 형성기였다. 근대적 국민 국가, 근대적 자본과 시장이 형성된 시대였다. 국가와 자본이 생활 세계를 두루 장악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빈발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합리성과 '계몽'이라는 새로운 가치 기준이 정립되고 있었다. 일찍이 비코는 한 시대의 언어를 통해 그 시대 전체를 두텁고 촘촘하게 기술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언어와 정치 제도, 언어와 종교 의식儀式, 언어와 경제적 교환 방식, 언어와 심성mentality, 언어와 일상 문화를 입체적으로 엮어 냈다." "3세기에 걸쳐 공통의 논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담론 상황'에서, 비학과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각자에 적합한 담론 영역을 구축하였다. 비학이 지식의 수직성(질과 깊이)을 유지하는 담론 형식을 유지하였다면, 과학은 지식의 수평성(양과 너비)을 강화하였으며, 인문학은 지식의 입체성thickness을 추구하였다."(360-1)


"포스트모던론자들은 '차이'와 '차별화'를 권력이 침투하는 틈새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판단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비록 차별화 과정에서 논쟁이 발생하고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지만, 지식의 진정한 다원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 담론의 지형을 어림잡기 힘든 조건에서는, 비학이 과학을 오히려 '과학적으로' 공격하고, 과학적 담론의 위력에 의해 인문학이나 비학의 특수성이 말살되고, 인문학과 비학이 자주 혼동되는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식의 분화는 끊임없이 발생하겠지만 지식의 진정한 다원화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지식 담론의 지형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서 제시된 것이다." "서구의 비학·과학·인문학을 각자에 고유한 '방법론'에 따라 차별화하는 작업보다는 각자에 고유한' 수사학'에 비추어 이해하는 작업이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약속할 것이다. 경험이 추상에 선행하듯이, 수사는 언제나 방법에 선행하기 때문이다."(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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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4 -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 근대세계체제 4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박구병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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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데올로기로서의 중도적 자유주의


"프랑스 혁명의 지문화(地文化, geoculture) 변화에 대한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반응은 사실 자유주의가 아니라 보수주의였다. 버크와 드 메스트르는 사건이 한창 전개되는 중에, 오늘날까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천으로 남아 있는 책에서 혁명에 대해 즉각적으로 기록했다."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는 무엇보다 먼저 정치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국가권력을 계속 유지하거나 다시 장악해야 하며 국가 기구들이 그들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 필요한 핵심 수단이었다는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이상적인 해법은 자유주의적 추진력을 반영하는 운동들의 완전한 소멸이었을 것이다." "보수주의의 지속적인 정치적 강점은 〈주권자 대중〉 속에 개혁에 대한 다양한 환멸을 반복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대중이 가지게 된 신중한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반면, 보수주의의 큰 약점은 항상 그것이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교의(원칙)였다는 점이다."(22-5)


"정치철학으로서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좋은 사회의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인민주권의 요구에 관한 메타 전략으로서의 자유주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타고난 어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하고, 흔히 상반되는 이해관계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815년 이후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적 공세의 반대자로 묘사했고, 그 자체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코뱅적〉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 기세, 지지, 권위를 얻게 되자, 그것의 좌파 증명서는 약화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우파 증명서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것이 중간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할 예정이었다." "변화라는 정상 상태에 직면하여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능한 한 변화의 속도를 늦추려는 우파─와 〈민주주의자〉(또는 급진파, 사회주의자, 혁명파)─가능한 한 그 속도를 높이려는 좌파─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장할 것이었다."(27-9)


"벤담에게 국가는 〈최대 다수의 최대 선(善)〉을 성취하기 위한 완전하고 중립적인 도구였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결코 반(反)국가주의의 메타 전략이거나 이른바 야경국가의 메타 전략도 아니었다. 자유방임에 반대하기는커녕, 〈자유로운 국가 그 자체는 자기조정적 시장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국 자유주의는 항상 개인주의라는 양의 가죽을 쓴 강력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하게 확실한 개인주의의 궁극적인 보증인으로서 강력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였다. 물론 누군가가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개혁을 이타주의로 규정한다면, 두 가지 목표는 양립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개인주의를 자기 자신이 규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개혁을 그 속에서 강자가 약자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고, 동시에 강자가 약자보다 더 쉽게 그들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내재적인 양립 불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32-3)


"사회주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형성되었다. 1848년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아직 그것이 분명한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광범위하게 비난받고 〈자유주의자〉가 다른 역사적 기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영국에서조차 〈급진주의자〉(미래의 〈사회주의자〉)는 처음에 단지 좀더 전투적인 자유주의자들처럼 보였다. 사실 정치 프로그램으로서, 따라서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를 자유주의와 특별히 구별해주는 것은 진보의 성취가 단지 지원이 아니라 '많은' 지원을 요구했다는 확신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진보의 성취는 매우 느린 과정일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프로그램의 핵심은 역사의 경로를 가속하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왜 혁명이라는 단어가 개혁보다 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개혁은 진지하고 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참을성 있는 정치 행위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고, 주로 관망하는 태도를 구체화한다고 인식되었다."(34)


"간단히 말해서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적절한 역사적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단지 누가 인민의 주권을 구현하는가에 대한 탐색에서 요구되는 세 가지 출발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이른바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이른바 전통적 집단이었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었다. 〈주체〉로서 인민은 가장 중요한 객체로서 국가를 소유했다. 인민이 그 의지를 행사하는 곳, 즉 인민이 주권자인 곳은 국가 내부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이래 우리는 또한 인민이 〈사회〉를 구성한다고 들어왔다. 우리는 근대성의 거대한 지적 모순(이율배반)을 구성하는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무엇보다 정치적 전략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각각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에 국가의 도움과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이 판명되었다."(38-9)


2 자유주의 국가의 건설 : 1815-1830년


"1815년 당시의 문제는 1789-1815년의 시기가 〈왕정복고〉와 〈토리 반동〉에 묻히고 만 일종의 혁명적 막간일 뿐이었는지 아니면 인민주권 개념이 오래 지속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것인지 여부였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구분은 막스 벨로프의 말에 따르면, 〈19세기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구분이었다.〉 19세기의 용례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명사들은 그렇게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인민주권의 구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후 줄곧 유효한 정치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일종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무지하고 변덕스런 대중의 엉뚱한 생각에 굴복하는 불쾌한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명사들에게 문제는 인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그러나 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였다. 그 작업은 쉽지 않을 터였다. 자유주의 국가가 역사적 해법일 수밖에 없었다."(51-2)


"도시 노동자들은 인민주권의 교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818년에 맨체스터는 〈당대인들에게 동요와 소란의 도시라는 특별한 평판〉을 얻었다. 특히 명사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저항운동의 특성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18세기 말에 여전히 저항운동의 지배적인 방식이었던 지역 차원의 식량 소요는 더 이상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대중운동은 〈범위에서는 전국적이고, 조직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그들은] 점점 더 [1880년 이후] 새로운 산업 지대와 결부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은 그 구호가 전반적으로 반산업적인 색조를 띠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과거 지향적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명사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 자체가 진보에 반대하고 폭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계급 구성원 내에서 놀랄 만한 조직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다이트는 〈노동계급 자코뱅〉에 맞서 토리와 휘그를 하나로 묶었다."(55-6)


"노동계급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인민주권의 확인과 민족주의의 시대가 머지않아 노동계급의 참정권을 배제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상류층은 이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향락주의조차 기꺼이 희생할 의지가 있었다. 18세기 영국에서 귀족문화는 사치스런 오락과 여흥, 방탕한 쾌락, 알코올 의존증을 야기하면서 〈광대하고 목가적이며 거만하게 뽐냈다.〉 19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개인적 습관의 규칙성과 질서, 자기규율, 절제〉를 설교하는 복음주의자들이 떠올랐다. 명사들은 행동 양식(나중에는 빅토리아 풍조로 제도화한)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개종시켜서 그 개종이 암암리에 재사회화─비용이 더 드는 가부장주의 형태를 비용이 덜 드는 형태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전에는 정치적 권리의 확대나 사회적 승인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56)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유럽의 협조체제가 가동되는) 1815년 이래 국경 내에 세계 각지에서 축적된 자본을 집중시키고자 했고, 그들이 얼마나 잘 그렇게 했는지는 단지 부분적으로는 각 기업이 가진 힘과 함수관계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노동 비용을 제한하고 외부 공급의 항구성을 보증하며 적절한 시장을 확보하는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적 규모에서 두 국가 모두 높은 편이었던 경제적 효율성을 증대하는 문제라기보다 정치적 과업이었다. 두 국가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그것의 사용은 미묘한 문제였다. 두 국가가 이득을 보증할 뿐 아니라 손상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국가 모두 길들여지고, 다룰 수 있어야 하며 합리적으로 이끌어져야 했다. 후속 60년 동안의 정치는 국가의 역할을 〈합리화〉하려는 노력, 즉 〈국부〉와 특히 국경 내에서 자본을 축적한 이들의 부를 늘릴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국가의 구조를 미세조정하려는 노력에 집중할 것이었다."(72)


"1815년 직후 영국 정책의 기조는 신중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인들은 보호주의적 조직의 해체에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들은 현금 지급의 재개에 신중했다. 식민지와 상업체계에도 신중하게 접근했다. 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제국주의에 반대했지만, 〈기존 체제의 갑작스러운 전복〉에도 반대했다.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내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다. 자유시장에는 찬성했지만, 자본 축적을 희생하면서까지는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지에 대한 가르침에서조차 신중했다. (이윤 창출이 최우선 과제였던) 영국인들에게 해외의 사회적 변화란 실제로 그것이 경제적으로 불가피했을 때에는 영국인들의 식민화를, 그리고 그것이 영국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유익했을 때에는 다른 국가들이 보유한 식민지들의 탈식민화를 의미했다. 나폴레옹식의 보편주의적 허식이 없는 섬나라의 국민에게 세계는 갑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기회의 장이 되었다."(92-3)


"독립운동에 대한 제한적인 지지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려는 영국의 태도는 발칸 반도와 오스만튀르크 제국까지, 특히 그리스의 경우까지 확대되었다. 영국의 여론은 어쨌든 그다지 문명적이지 않아 보이는 전제정치에 대한 경멸과 너무 깊이 연루되지 않으려는 신중한 욕구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에번스는 〈연루되지 않은 영향력〉이라는 말로 당시 영국의 외교정책이 유럽에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그렇지만 이 목적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존립원칙이 극도로 불안정한 신성동맹을 궁지에 빠뜨림으로써 그것을 천천히 침식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스 혁명은 1820-1822년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발생한 혁명과 거의 동시에, 그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신성동맹이 1822년 여전히 〈무시무시한 전조〉에서 1827년 무렵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면, 그것은 주로 그리스 혁명 때문이었다."(95-6)


# 신성동맹Heilige Allianz : 1815년 9월 26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서 체결한 동맹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1815년 이후 시기는 〈노동계급에게 번영도 풍족함도 가져오지 않았고〉 오히려 대도시를 중심으로 국내 이주가 진행되면서 실업의 악화를 선사했을 따름이다. 사회적으로 노동자들과 도시 부르주아지 사이의 간극은 엄청났다." "그런 가운데 1820년대 중반에 정치 과정에서 심각한 염증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자유주의적 토리당파가 정권을 잡은 바로 그 순간에 샤를 10세는 국왕(루이 18세)의 요절로 인해서 우연히 1824년 프랑스 왕위에 올라 특히 반동적 관점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인들과의 긴장, 국내에서 심지어 법률을 준수하는 대다수 인민과의 긴장, 그리고 노동계급과의 긴장을 초래했다. 게다가 샤를 10세의 즉위는 1825년에 시작되어 1829년에 크게 악화된 경제적 하강 국면과 시기적으로 겹쳤다. 정치적 경화(硬化)와 경제적 난국의 결합은 폭발적인 경향이 있었고, 직접 1830년의 혁명적 분위기로 이어졌다."(100-1)


"1830년 혁명은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동안 전개된 대중 혁명이었다. 영광의 3일은 곧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에 포획당했고, 자기 자신을 프랑스의 국왕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국왕으로 부를 준비가 되어 있던 루이 필리프와 함께 7월 왕정으로 귀결되었다. 티에르는 〈오를레앙 공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 무질서한 군중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구체제의 일부 형태를 진정으로 복구하기를 바라는 과격파에 맞서 7월 왕정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적 형태를 정당화했다. 〈1830년 혁명으로 1789년 혁명에 대한 공격은 마침내 패배했다.〉 노동자들은 〈경제와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1830년] 혁명이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을 신속히 깨달았다. 노동자들이 각성했을지라도 과격파는 낙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7월 왕정이 성공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최소한 초보적 형태였지만 자유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102-5)


"1830년 11월 18일, 벨기에의 국민의회가 (영국과 프랑스의 묵인 아래) 독립을 선언했다. 그것은 폴란드가 아니라 벨기에가 영국-프랑스 모델을 강화하는 데에서 잠재적으로 떠맡을 수 있는 역할을 입증해준다. 결국 선택된 왕 레오폴트 1세(재위 1831-1865) 아래 벨기에는 레오폴트 1세가 〈이기주의적 관례〉라고 비난한 〈의회제와 중간계급의 광범위한 합의에 토대를 둔 입헌군주정의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서 영국과 프랑스에 합류했다." "에번스는 이를 〈유럽 외교사에서 자연스런 분기점〉─동유럽의 전제정치, 서유럽의 자유주의 입헌체제─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개념인 〈서부〉의 구체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부자유한 동부〉에 맞서 개인의 자유라는 깃발을 높이 드는 서부의 개념은 19세기 나머지 시기와 20세기를 위한 모범이 될 것이었다."(115)


3 자유주의 국가와 계급 갈등 : 1830-1875년


"19세기 전반기에 개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개념으로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여전히 분리되지 않았거나 라브루스가 말하듯이 〈자코뱅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적 삶 속에 뒤죽박죽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 그 뒤 최소한 한 세기 동안 이 두 개념 사이의 완전한 구별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관용어인 듯하다)와 사회주의는 1830년 이후 정치적인 선택으로서 서로 다른 궤도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급과 계급투쟁의 개념은 카를 마르크스는 말할 것 없고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공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주의 기획의 일환으로 기조가 발전시키고 게속 실행한 생시몽주의의 구상이다. 근대 산업사회의 계급구조에 대한 생시몽의 관점에 따르면, 세 가지 계급, 즉 유산계급(재산 소유자), 무산계급 그리고 학자계급이 존재했다." "기조에게 계급 개념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염원을 정당화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다."(127-8)


"프랑스와 영국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들은 이제 산업주의가 배태한 〈사회문제〉가 되었고 특히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즉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화라는 공포〉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생시몽과 기조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될 것이었다. 1830년 혁명 자체는 특히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어려움(높은 실업률, 밀 가격의 비정상적 폭등)의 순간에 찾아왔다. 그것은 정치적 봉기의 유용성에 관한 증거를 제공했고 노동자들의 의식, 즉 〈오직 프롤레타리아로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식, 〈노동자의 자존감〉을 자극하는 데에 기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즉시 이런 변화를 인지했다. 티에르는 하원에 보내는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혁명 이후 우리는 그것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위험에 처한 질서였다.〉"(130)


"자유주의 국가는 중간계급의 정치적 역할을 정당화하고(따라서 그들에게 합법성을 부여받으면서) 지정학적 영역에서 그들의 지배를 보증하기 위해서 화친 협정에 불만을 품은 노동계급에 대한 국내적 억압을 결합시켰다. 이는 처음에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48년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취약했다." "그 취약성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유주의적 양보가 극도로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있었고, 만일 더 나아가 심각한 주기적 경기 침체에서 비롯된 혼란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는 자유주의 정부들을 힘겹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7월 왕정과 그 자유주의적 아류인 기조가 싫증나는 사회적 불만에 맞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보수화되고 있던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847-1848년의 경제 위기, 당시까지 알려진 것들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위기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를 강타했다. 위기의 절정기에는 파리의 공업노동자 75퍼센트가 실업 상태에 있었다."(139)


"1848년 2월의 봉기는 〈사회적 공화정〉, 즉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빈곤과 불평등에 시달리는 모두에게 해방을 제공할 막연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를 조명했다. 특권과 생산방식을 복원하려는 〈장인〉, 전통적인 집단적 관습을 재확립하려는 농민, 〈보통〉선거권을 확대하려는 여성, 노예제 폐지를 원하는 노예 등 모두가 자신의 주장을 내놓았다. 시계추가 너무 많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6월에 카베냐크 장군이 이끈 질서파가 제어하기 힘든 위험한 계급들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카베냐크는 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국가를 다시 합법화할 수는 없었다. 어떤 군주도 복귀할 수 없었다. 이런 공백 탓에 루이 나폴레옹이 힘들이지 않고 끼어들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롭고 질서가 잡혀 있으며 근대적인 국가를 재건하고자 했고, 젤딘이 잘 표현한 대로 〈[질서파의] 후보였기 때문에 선출된 것이 아니라 질서파가 보기에 틀림없이 승리할 것 같았으므로 그들의 후보가 될〉 인물이었다."(144-5)


"1850년대에는 영국의 수출 신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면포류 수출은 1850년대에 〈거의 두 배가 늘었고〉 실제로 성장률까지도 증가했다. 홉스봄이 주장하듯이 이는 〈매우 귀중한 [정치적] 휴식의 기회〉를 제공했다. 면직물은 여전히 영국의 부에서 핵심을 차지했으나 이 시기에는 금속과 기계류가 주요 공업 분야로 전면에 등장했고 더불어 〈도처에서 더 큰 규모의 공업 생산 단위〉가 출현했다. 분명히 영국은 공업 국가로 변화하는 여정에 들어섰다. 〈진로는 정해졌다.〉 영국에게 이는 〈활황기〉였다. 그동안 세계경제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지배력은 〈사실상 의심할 바 없이 확고해졌고〉 새로운 산업 세계는 〈화산이라기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의 뿔처럼 보였다.〉 영국은 항상 세계경제의 모든 변동을 감시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마음 편히 만족스럽게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누렸다. 영국에서는 이 시기를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호황〉이라고 불렸다."(161-2)


"프랑스에서도 19세기는 강력한 국가의 수립 시기였다. 확실히 국가의 수립은 리슐리외에서 콜베르, 자코뱅파, 나폴레옹, 제한군주정, 제2제정, 제3공화정을 거쳐 제5공화정에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2제정은 중대한 일보전진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수립한 것은 위로부터의 복지국가 원리였다. 제2공화정은 모든 인민의 주권이 〈그들 중 일부가 처한 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비참한 열세와 대조를 이루고 상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문제〉를 의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민주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자〉 가운데 첫 인물로서 나폴레옹 3세가 찾으려고 한 것은 〈대중에게 보존할 무엇인가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을 보수적으로 만들〉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프랑스를 자유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 기획을 완수할 수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는 자유주의 국가일 뿐 아니라 민족국가였고 19세기 유럽에서 이 두 가지의 동일시를 보증한 것도 바로 프랑스였다."(178-81)


"이론상 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식민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이론적인 차원에 그쳤다. 실제로 영국의 자유주의(그리고 사회주의) 경제학자들과 논객들은 다소 회의를 품었던 일부 시기(1780-1800년, 1860-1880년)가 있었지만, 〈야만인〉(이는 식민지의 백인 정착민들을 포함하지 않았다)에 대한 영국의 제국 지배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점점 더 그것에 호의를 보였다.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민족자결의 강력한 지지자들조차 (한 민족이 자치정부를 가질 수 있는) 〈적합성〉의 기준을 무리하게 강제했다. 인도는 물론 영국 제국주의 기획의 중심이었다. 베일리가 제대로 주장하듯이, 인도는 처음에는, 그리고 아마 주로 자유무역 제국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세입의 문제였다."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그에 못지않게 제국주의 국가에 적응했다. 결국 〈인류 진보의 확실성〉을 신뢰하는 많은 다른 이들처럼 생시몽에게 〈동양〉은 여전히 진보의 〈유아기〉에 있다고 생각되었다."(192-4)


"그들이 지배할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수립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시도는 크게 성공적이었지만, 큰 실패이기도 했다. 한편에서 양국은 경제적, 군사적 위세를 충분히 신장시켰지만 독일과 미국의 꾸준한 상승세를 막을 수 없었다. 독일과 미국은 실권을 강화하고 이들의 상호 경쟁은 1870년 이후 점점 더 갈등이 고조되는 세계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그들만이 속도를 정하던 방식에서 이제 (적어도 꽤 많은) 참가국들이 자유롭게 〈앞 다투어 쟁탈하는〉 방식으로 식민지 획득의 유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는) 세계체제에 자유주의라는 '지문화'를 부과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스마르크는 신성동맹의 언어를 재개할 수 없었고, 그러려는 관심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스마르크와 디즈레일리는 제2제정에서 긍정적인 교훈을 얻을 것이었고, 실제로 자유주의의 보수적 변형인 개화된 보수주의를 제안했다."(199-200)


"19세기 세계질서의 전환점은 1866-1873년, 즉 〈19세기 후반의 역사가 바뀌는 거대한 경첩(이음새) 같은〉 시기일 것이다. 미국은 연방을 유지했고, 1866년 독일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이라는 대도약에 합류할 참이었다. 1867년 영국의 의회 개혁은 상당히 정확하게 〈한 시대의 종말〉로 비춰졌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폭발과 더불어 1867년 영국의 개혁법은 1815년에 시작된 위험한 계급들─특히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길들이기 과정, 즉 이들을 체제 내로 정치적으로 통합해서 이들이 양국의 기본적인 경제, 정치, 문화 구조를 뒤엎지 않도록 만드는 과정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상징했다." "노동계급을 방어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 중간계급에게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보수주의자들은 영국을 더 명백한 자유주의 제국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200-4)


4 자유주의 국가의 시민


"불평등이 표준이었을 때, 다른 신분,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구분 이상의 어떤 구분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평등이 공식적 표준이 되었을 때, 누가 실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모든 사람〉, 즉 〈능동〉 시민에 포함되는지를 아는 것이 갑자기 중요해졌다. 평등이 도덕적 원칙으로 선포되면 될수록, 사법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장벽은 그것의 실현을 막기 위해서 더 많이 설치되었다. 시민의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문화적 기반을 구성하게 된 긴 이분법 목록의 (지적이고 법률적인) 구체화와 견고화를 강제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여성, 성인과 미성년자, 생계비를 버는 가장과 주부, 다수파와 소수파, 백인과 흑인, 유럽인과 비유럽인, 교육받은 자와 무지한 자, 숙련공과 비숙련공, 전문가와 아마추어, 과학자와 문외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이성애와 동성애, 정상과 비정상, 건강체와 장애인, 그리고 이 다른 모든 것이 암시는 원형의 범주, 즉 문명과 야만."(220-1)


# 시에예스 신부는 신체, 재산, 자유 등을 보호받을 권리(수동 시민의 권리)와 공적 권위의 형성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을 권리(능동 시민의 권리)를 구분했다.


"19세기에 이른바 중간계급이 서양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유럽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문제는 더 이상 거기에 어떻게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 자리에 머무를 것이냐였다. 국가 차원에서 중간계급, 전 세계적 차원에서 유럽인들은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본성과 미덕의 계승자가 됨으로써 그들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렀고, 이 개념은 그들이 기울인 노력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서양 세계에서 그것은 교육으로 바뀌었고 교육은 대중을 통제하는 방식이 되었다. 전 세계적인 무대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시작된(그러나 곧이어 다른 모든 유럽 열강들도 채택한) 〈이데올로기로서 문명의 개념은 염치없이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그저 정치적 상징과 문화적 기억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체제 전체에 기념비적인 유산을 남겼다. 바야흐로 주권은 인민, 달리 말해서 국민의 것이 되었다."(235-6)


"세계체제를 안정시키고 어느 정도의 정치적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런 불확실한 모색과 노력의 해소를 요구한 것은 바로 1848년의 세계혁명과 그것의 즉각적인 여파였다." "그것은 벨기에는 물론이고 민족주의가 결집의 계기를 부여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혁명들은 근대세계체제의 첫 번째 세계혁명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체제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지는 않았다. 또한 혁명가들은 목표를 성취하지도 못했다. 대개 혁명은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혁명은 배제라는 쟁점, 즉 시민권 혜택의 배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반체제 운동의 두 가지 부류, 달리 말해서 이 배제를 다루는 두 가지 별개의 방식─국가 내에서 더 많은 권리를 추구하는 방식(사회혁명)과 지배적인 다른 종족 또는 민족 집단으로부터 특정한 종족 또는 민족 집단을 분리하는 방식(민족주의 혁명)─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목격하게 된 계기가 바로 1848년이었다."(237-40)


"장기적 전략의 문제가 처음으로 분명히 제기된 것 역시 1848년이었다. 1815년부터 1848년까지 이념 투쟁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에서, (모든 전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프랑스 혁명 정신의 계승자와 더 오래된 세계관에서 유래한 질서를 회복하고자 열렬히 시도하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투쟁에서 〈민주주의자들〉과 〈급진파〉는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보수주의자들이 끔찍이 혐오하고 자유주의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주목을 끌 수 있도록) 더욱 대담해지도록 압박을 가하면서 기껏해야 쇠파리(잔소리꾼)의 역할을 맡았다. 1848년 혁명들의 역할은 때때로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만 또다른 경우 〈민족주의 혁명가〉라고도 부르는 이 민주주의자/급진파가 귀찮은 존재 이상의 역할을 맡을 수 있게, 그리하여 그들이 자유주의 중도파와는 구별되고 뚜렷이 다른 대중 활동을 조직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었다."(240)


"1848년의 경험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두 가지 교훈을 도출했다. 하나는 그들이 여러모로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보수주의자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 사이에 계속 구별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더 정교하게 고안해야 한다고 결심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교훈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영국이 보수주의자들이 좀더 중도적인 길을 따랐던 유일한 국가로서 적어도 중간계급 세력을 정치적 의사결정의 무대로 흡수하고 끌어들이기 위해서 얼마간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급진주의자들(옛 민주주의자)은 훨씬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자발성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자 한다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직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는 일시적 개념인 〈운동〉을 구성원과 지휘관, 재정과 언론, 강령, 그리고 궁극적으로 의회 참여를 동반하는 관료적 조직의 길로 이끌 것이었다."(241-2)


"이 시기 내내, 19-20세기에 걸쳐서도 〈대중에 대한 두려움, 질서에 대한 우려는······항상 지배계급의 행동에 내재하는 고민거리였다.〉 어떤 전술이 가장 바람직한가라는 문제는 노동계급에게든 지배층에게든 늘 남아 있었다. 지배층의 관점에서는 억압이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그것은 끓어오르는 불을 지피고 결국 반란을 낳는다. 그리하여 1860년대 말에는 나폴레옹 3세와 영국의 보수당 모두 제약을 완화하고 노동자 조직의 존재를 더 가능하게 만들며, 시민권에 대한 실제적 정의를 다소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노동자의 시민권 확립이라는 목표는 유럽 대륙의 노동운동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운동의 유일한 목표였다는 것은 잉글랜드에서조차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운동이 성취하게 될 모든 것이고, 이론적 측면에서 자유주의 중도파이자 실천적 측면에서 개화된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필요로 하거나 요구해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고 설득하고자 노력했다."(254-5)


"전 세계적으로 19세기는 유럽의 절정기였다. 〈유럽 혈통의 백인 남성들이 [이토록] 도전을 덜 받으면서 [세계를] 지배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군사력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에 의해서 보증되었다. 〈유럽은 문명이라는 통합적 체계의 건설을 통해서 '유럽화'되었다. 다른 모든 문화권들은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분류될 수 있었다.〉 국가들은 균질적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국민을 만들고자 시도하면서 동시에 생시몽이 옹호한 〈세계의 후진 지역에 맞서 싸우는 성전(聖戰)〉을 통해서 백인(유럽계) 인종을 창출하고자 했다. 성전은 식민화를 수반했다. 〈색깔을 인간 이하의 존재와 결부시키는 태도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 개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던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물론 이는 국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조던은 혁명 이후 미국에서 지식인들이 수행한 일은 〈사실상 미국을 백인 남성의 국가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지적한다."(316-7)


5 사회과학으로서의 자유주의


"모든 초창기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자들은 〈사회과학 이론이 결국 사회질서의 재건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며 이는 확실히 정치적인 목표〉라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경향의 근거지였던 반(反)평등주의적 주장의 요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전문화는 대중문화의 허세와 이윤 위주의 사업가들의 협소한 시각 모두를 겨냥했다." "전문적 능력의 권위는 새로운 〈과학의 사회적 조직〉을 요구했다." "이것이 반드시 목표로서 중도적 사회 개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표의 실행을 전문가들에게 더 견고하게 맡겨두는 것이었다. 이는 직접적인 지지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계 인사들에게는 학계 바깥의 저명인사들의 엄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객관적〉 지식, 달리 말해서 오직 과학적인 전문가들이 확립할 수 있었고, 일반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지식의 옷 속에 개혁의 목표들을 숨기는 일이었다. 묘책은 정치적인 듯이 보이지 않으면서 정치적이어야 했다."(345-7)


"사회과학의 전문화는 형태상 대학 내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학문 분야들을 확립하고 다양한 분야에 상응하는 전국적인(결국에는 국제적인) 전문/학술조직의 창설을 이끌었다." "새로운 대학 구조에서 그 존재를 확고히 한 최초의 학문 분야는 대학의 범주로서 가장 오랜 존재감을 가진 역사학이었다." "19세기에 벌어진 일은 역사가들의 저작을 위한 적절한 자료들의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역사서술의 〈과학혁명〉이라고 불리고 레오폴트 폰 랑케의 작업과 두드러지게 연관된다. 우리에게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기록해야 한다는 유명한 강조를 유산으로 남겨준 인물이 바로 랑케였다." "헤릅스트는 랑케식 역사주의의 모순을 이렇게 강조한다. 〈이상주의자로서 그들은 자기 학문 분야와 모든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의 자율성을 주장한 반면, 경험론자로서 그들은 자연과학의 도구들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353-4)


"랑케 식의 역사학 연구는 그것이 경험적 증거와 연결될 경우에 한해서 타당하다고 간주되었으므로 〈과학적〉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 대다수는 이런 경험적 연구에서 추론될 수 있는 법률과 같은 진술을 찾으려는 어떤 탐색도 거부하면서 이론적 접근에 반대했다." "노빅은 랑케의 〈도덕적 판단을 자제하는 태도가 사심 없이 객관적인 중립을 표명했다기보다 당시의 맥락 속에서 매우 보수적인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정치에 대한 분석을 〈가장 좁은 의미의 사건들〉로 〈축소시키는 것〉은 중도적 자유주의자들의 이해관계에 꽤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가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구성원들이 하나의 〈국민〉으로서 동질감을 만들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해야 하고, 그들은 거기에 주된 충성심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창출은 자유로운 국가의 토대로서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국민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를 가져야만 했다."(355-6)


"국민적 정체성을 창출하고 강화하는 일은 자유주의적 의제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강력한 국민적 정체성은 국가를 합법화하고, 계급, 종교, 종족 또는 언어 공동체에 대한 대안적이고 잠재적으로 대립적인 충성심의 정당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순조롭게 기능하고 특히 위험한 계급들의 반자유주의적인 압력을 앞지르기 위해서 자유주의 국가들은 계속 진행 중인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세 가지 법칙정립적 사회과학─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의 기능이 되었다." "이런 분열이 발생한 원인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근대성〉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사회구조를 서로 상당히 다른 세 가지 구획으로 차별화하는 것이었다는 자유주의 사상가(보수주의 사상가나 급진주의 사상가가 아니라)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 세 가지는 매우 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분리되어야 했고, 그러므로 아주 명확하게 분석되어야 했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였다."(360-1)


"W. S. 제번스는 1879년에 경제학이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명칭 변경을 제도화한 인물은 앨프리드 마셜이었다." "그렇다면 마셜은 무엇을 제도화했는가? 그것을 서술하는 하나의 방식은 경제학 연구의 초점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명칭의 변경은 가치의 생산과 국부의 분배과정에서 자본과 노동에 몰두하는 〈고전파〉 경제학과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했고, 경제학을 교환과 가격 형성의 학문으로 새롭게 재출범시켰다. 지대, 이윤, 임금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의 주체, 즉 지주, 자본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과 분배의 이론 대신에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그 틀 속에서 추상적인 경제적 주체의 계산이 희소 자원의 할당에 영향을 미치는 이론이 되었다. 새로운 가치 이론은 이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었고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그들의 욕구는 곧이어 그들이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따라서 시장 가격을 창출하도록 이끌었다.〉"(367-8)


"사회학(sociology)은 경제학과 동일한 전문화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사회 개혁에 헌신한다는 측면에서 사회학은 학문 분야로서 더욱 적극적이었다. 사회학이라는 용어는 사회적 관계의 연구를 실증주의적 활동의 절정, 즉 〈학문의 여왕〉으로 생각했던 오귀스트 콩트가 고안했다. 그렇다면 정치적 스펙트럼 속에서 콩트의 성과는 어디쯤에 위치할까? 니스벳은 이렇게 평가한다. 〈과학에 대한 콩트의 애정 어린 숭배를 통해서 가족, 공동체, 언어, 종교의 사회 구조들은 노골적으로 신학적이고 반동적인 맥락에서 제거되었고, 과학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그 맥락과 전문용어를 제공받았다······콩트의 작업은 후대의 사회과학자들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으로 보수적인 원칙들을 바꿔주는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콩트가 생시몽의 비서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이에크는 콩트가 더 좌파적인 입장에서 진화하여 더 분명하게 정치적 중도파에 도달했다고 이해한다."(373-4)


"법칙정립적 사회과학의 세 분야 가운데 정치학(political science)은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 가장 늦게 출현했다." "1903년 수립된 미국 정치학회(APSA)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선배처럼 〈사회과학을 위한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역할〉을 완수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 방법은 중도적 자유주의였다. 로위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서 늦게 그리고 천천히 출현한 연방정부는 자유주의 노선에 따라서 수립되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 역시 그랬다······우파와 좌파를 거부하면서 자유주의는 행동 규범이나 자본주의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을 회피했다. 자유주의 정부는 단지 결과적으로 해롭다고 간주되는 행동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었다. 사회과학은 그런 체제를 분석할 수 있었고 또한 행동과 그 결과 또는 그와 연관된 원인들에 관한 가설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런 체제에 봉사할 수 있었다. 이는 왜 정치학과 새로 등장한 연방정부가 모두 과학과 친화성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392-3)


"서양 세계는 (세계 체제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연구하고 자신의 기능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세계의 나머지는 열강(列强)에게 얼마간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타자〉를 가장 잘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자 했다. 통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조금이나마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필요한 지식을 산출하기 위해서 학계의 전문 분야들이 출현한 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나머지는 정치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전문가들은 때때로 식민지와 반(半)식민지를 언급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인류학(anthropology)이라는 학문 분야가 출현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대개 식민지나 본국(서구 열강)의 속령(또는 준주[準州]) 내에 있는 특정 지역들을 다루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두 번째 분야는 이 시기에 주로 반(半)식민지들을 다루었다(그러나 그 지역들만 배타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393-4)


"두 〈학문 분야〉는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심지어 21세기에도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그러했다. 더욱이 일련의 공통 주제에 대한 두 가지 변종으로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 분야 사이에 공통의 주제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두 분야가 19세기 말 지배적인 범(汎)유럽 지역의 일부가 아니었던 세계의 〈나머지〉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주제는 그들이 다루었던 주민들이 〈근대적〉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주민들이 근대적 〈진보〉를 구성하는 요소로 평가된 기술과 기계장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주민들은 범유럽 세계에서 상상되고 실행되는 것과 같은 근대적 가치들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인식되었다. 세 번째 공통 주제는 이 국가/지역/주민들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단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고 발전하며 진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394)


# 차이점으로는 인류학의 대상이 〈원시인〉들로 명명된 집단이었다면,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은 〈문명〉, 그러나 근대성이 결여된 〈문명〉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연구 대상인 부족 또는 문명의 근본적인 합리성을 설명하려는 인류학자들과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욕구는 거의 불가피하게 그들 자신을 암시적인 이념에서 중도적 자유주의자로 이끌었다. 그들은 권력자들이 다른 문명들을 더욱 지적이고 효과적으로 상대하도록 지원하면서 약자들과 권력자들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갈등과 더불어 무엇보다 범유럽적인 지정학적 세력의 현상을 급진적으로 뒤집으려는 시도를 제한하는 데에 도움이 된 개혁을 부추겼다." "영국과 (곧이어 미국의) 대학들에서 연구 분야와 학과목으로서 고전학(古典學)의 출현이 '지문화'에서 중도적 자유주의의 공세를 반영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해 보인다. 한편으로 고전학은 꼼꼼한 문헌 읽기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옥스퍼드-케임브리지 교육의 정체된 교육과정과의 단절을 상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불러일으킨 급진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대변했다. 그것은 일종의 〈제3의 길〉이었다."(397-400)


6 논점의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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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3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제2판 근대세계체제 3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인중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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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업과 부르주아지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주로 잉글랜드에서 일련의 혁신이 새로운 면직물 공업의 번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공업은 새로운 그리고/또는 개량된 기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공장에서 조직되었다. 동시에 또는 그후 즉시 철강 공업에서 면직물 공업과 비슷한 팽창과 기계화가 있었다. 이 과정이 생산에서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떠한 일련의 혁신들과 연관된 과정과도 달랐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그것이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의 과정을 촉발시켰다〉는 점이다. 이 후자의 개념은 실제로 사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시점을 정하는 것에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반면, 이 책의 중심 태제는 예컨대 축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는 형태의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한 16세기 이후로 줄곧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 모티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7세기의 장기적 침체가 이러한 점증적 과정의 중단이기는커녕 그것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해왔다."(40)


"(영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그것을 시간적으로 연장하거나, 두 단계의 과정으로 나누거나, 점진적인 양적 증가와 질적인 획기적 진전을 구분하는 따위의 미봉책으로는 결코 구제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세계경제의 틀 내부에서의 상대적인 위치의 배열인데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영국의 〈이점〉을 설명해주는 것은 절대적인 특징들의 배열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영국이 프랑스나 기타 다른 나라들보다 (그만큼) 앞서나갔는가가 (그리고 그 '앞섬'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전체로서의 세계경제가 특정한 시간(여기서 우리가 잡은 시기는 1730-1840년이다)과 장소에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왜 이 시기에 다른 국가들이 아닌 특정한 국가에서 가장 이윤이 높은 경제적 행위들이 더 집중되는 (그리고 왜 보다 많은 자본이 이곳에서 축적되는) 결과가 나타났는가이다."(55-6)


"〈최초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대충 시간적으로 겹치는 사건시기(event-period)를 나타낸다. 이 시기는 자주 주목을 받아왔고, 〈혁명들의 시대〉라는 표현이 이 시기를 지칭하기 위해서 때때로 사용되었다. 시간적인 연관관계는 개념적인 연관관계에 의해서 사실상 강화되었는데, 개념적인 연관관계는 시간적인 연관관계보다 덜 자주 논의되었다. 확실히, 많은 저자들은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변화와 급격한 공업적 변화의 〈매우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 역도 또한 사실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산업혁명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의 모든 정치적 열망을 구현하고 있으며,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그것의 유일한 실질적 경쟁자인 러시아 혁명보다도 아마 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할 것이다."(56-7)


"소불은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지를 권력과 경제의 지배자로 만든 오랜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결과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매우 인습적으로 잉글랜드 혁명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덜 급진적〉이었으며, 프랑스 혁명은 모든 부르주아 혁명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참으로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홉스봄의 〈거대한 모순〉에 부딪친다. 즉 〈이론적으로〉 프랑스는 〈자본주의 발전에 이상적으로 적합했고〉 따라서 그 경쟁자들을 훨씬 앞질렀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의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들, 무엇보다도 특히 영국에 비해서 〈더 느렸다.〉 홉스봄은 이렇게 설명한다 : 〈프랑스 혁명은······그것이 국민의회의 손으로 이루어낸 것들의 대부분을 로베스피에르의 손으로 없애버렸다.〉" "그렇다면 참으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이며, 설령 부르주아적이라고 해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혁명이란 말인가?"(61-2)


"프랑스 혁명은 분명히 (얼마간은) 반봉건주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층 부르주아는 적어도 1870년까지 귀족 타이틀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은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에 성공한 부르주아가 지녀온 것과 같은 형식적인 사회적 지위의 표시들을 계속 추구해왔다." "물론 무엇인가가 1789년에 변화했고 1791-93년에는 더욱이나 그러했다. 앤더슨이 말하듯이, 〈서양의 전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변화되었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국가기구의 변화는 200년 동안 계속되어온 과정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토크빌이 옳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도 아니었고,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도 아니었다. 차라리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측면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마침내 경제적 토대를 따라잡은 순간이었다. 그것은 이행의 원인이나 이행이 일어난 순간이 아니라 이행의 결과였다."(82-4)


2 핵심부에서의 투쟁─국면 3 : 1763-1815년


"17세기의 장기적 정체기에 핵심부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윤의 중요한 모든 원천을 그들의 국경선 안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래서 세계시장은 곡물 생산, 새로운 야금과 직물부문, 새로운 운송수단의 기간시설 그리고 대서양 중계무역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다소 이에 성공했다." "핵심부 내에서의 생산과정의 느린 재편은, 우리가 〈국내〉 수요의 약간의 증가와 세계경제의 경계선의 또 한번의 팽창의 불확실한 시작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각 국가 내부에서의 소득의 약간의 재분배를 가져왔다. 요컨대 1750년 이후의 시기와 연관되어 있는 대부분의 과정(농업과 공업의 기술적 변화, 지리적 팽창, 핵심부 내의 수요 증가)은, 비록 1750년 이후보다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 시기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경제적 팽창과 더불어 재개된 생산의 지리적 분화(전문화 또는 특화)와 핵심부에서의 증가된 기계화(〈산업혁명〉)가 일어났다."(92-3)


"파리 조약(1763)이 7년전쟁을 종식시켰을 때,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프랑스와 크게 다른 수준에 있었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각국이 상업에서 서로 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점차 약세였고, 이러한 침체를 〈해외〉에서의 영국의 상대적 지위 향상으로 보충하고 있었다. 7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막는 것, 즉 잉글랜드가 〈공해상에서 전제적인 권력〉을 창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통찰력 있는 네덜란드인 저자 아카리아 드 세리온은 1778년에 쓴 글에서 영국의 어려움은 국내가격과 임금의 상승으로 영국의 생산품이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그리고 홀란트)와 경쟁하기에는 너무 비싼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어려움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의 영국의 〈승리〉와 물론 유럽 안에서 영국의 경쟁적 지위를 즉시 재부여한 혁실들을 추진하도록 영국을 몰아세웠다."(109)


"공업의 규모에서 18세기에 보다 〈규모가 큰 생산단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0-1840년의 시기에 영국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희생시키면서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프랑스를 희생시키면서 보다 규모가 크고, 상대적으로 더 기계화된, 비교적 높은 이윤의 세계경제의 공업부문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유명한 〈기계장치의 물결, 즉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높았던 물결의 결과로─1780년대에 면직물 공업 생산에서 영국의 상대적인 효율성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원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더 위대한 〈창의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게끔 분명히 도움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이 시점에서 영국이 시장 접근에 유리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영국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국가기구라는 사실도 이점으로 작용했다."(121-3)


"1763년의 전환점으로 되돌아가 살펴보면, 프랑스는 스스로를 영국에 〈뒤처진〉 것으로 인식했다. 해결책으로 논의된 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였다 : 재정적, (지리적이든 혹은 계급에 기반을 둔 것이든 간에 원심력에 대해서) 사회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프랑스의 국가를 강화하거나, 또는 경제적으로 국가를 〈개방하는〉 것. 이 두 가지는 〈개혁〉 운동으로 여겨졌다. 하나는 프랑스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국가의 자원을 이용하여 기업가들을 지원하자는 제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자원을 이용하여 기업가들이 보다 〈경쟁력을 가지도록〉 압력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국론(國論)은 19세기에 익숙한 국론이 되었다. 이것은 보호주의적 간섭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간섭주의자들 간의 논쟁이다. 1763년 이후의 프랑스는 빈약한 결과만을 낳으면서 이 양자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고, 그래서 정치적 폭발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실제로 폭발했다."(124-5)


"미국 독립전쟁은 프랑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었고, 여러 가지 점에서 사실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영국의 수출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영국 식민지의 분리를 뜻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전쟁은 해외무역의 〈급격한 중단〉과 해외무역 총액의 감소를 초래함으로써 영국에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로서 그것은 하나의 〈보복전쟁〉이었고,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함의는 무시되었다. 영국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이점은 환상으로 판명되었다. 평화가 도래하자마자 〈잉글랜드인과 미국인들은, 초대받지 않고 개입해온 저 외국인들(라틴인과 로마 가톨릭 교도)의 등뒤에서, 가족간의 분쟁을 청산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탈식민지로서는─기존의 상업적, 사회적,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서─(다소 변형된 형태로) 그들의 옛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 관계를 다른 핵심부의 국가들로 이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기 때문이었다."(127-8)


"그러나 탈식민지화가 영국에게 안겨준 이러한 이점은 일차적으로 영국이 1763년에 이미 달성한 세계무역에서의 지배적인 지위 때문에 존속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유지하는 것은 모든 영국 관리들이 당시에는 즉각 깨닫지 못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이득이 없는 하나의 부담이었다. 돌이켜볼 때(단지 돌이켜볼 때에만 그럴까?) 〈상업적으로 식민지의 분리는 거의 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가 바란 대로라면 〈영국의 위대함의 조종(弔鐘)〉이어야 했던 미국 독립전쟁은 그리하여 그 대가를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치르도록 끝을 맺었다.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전쟁의 결과, 두 배가 되었다. 5년 만에 왕정은 〈더 이상 재정적으로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1788년에 미불금이 예산의 50퍼센트에 달했다. 국가는 〈도산〉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1763년 이후 세계경제에서 영국이 갖춘 축적된 이점은 1780년대에 증가했고 1815년에 이르러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129-32)


"무엇이 프랑스로 하여금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에 서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서게 만들었을까? 프랑스측의 교섭자들은 영국 제조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손해를 본 프랑스 제조업자들을 보상해줄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빴던 것은 그들이 프랑스에 주어진 새로운 반(半)주변부로서의 역할을 환영하는 듯이 보였다는 점이다." "조약이 프랑스에 미친 경제적 영향은 거의 즉각적으로 느껴졌는데, 특히 (1788년 프랑스 정부의 비망록이 지적하듯이) 〈고급 의류〉와 대비되는 〈일반 의류〉, 즉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민중〉의 소비에 쓰인 온갖 종류의 의류 부문에서 그랬다. 조약은 영국으로부터 면제품(그리고 기타 다른 제품)의 대량 수입, 〈명실공히 대홍수〉를 초래했다. 그것은 하나의 〈경제 혁명〉, 〈프랑스 공업사에서의 전환점〉의 하나였다. 프랑스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134-40)


"경제적 콩종크튀르와 국가기구 특히 국가재정 적자 증가의 콩종크튀르라는 두 개의 객관적인 콩종크튀르가 프랑스 혁명의 발발에 대한 〈설명〉으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개의 콩종크튀르들이 이야기의 전부라면, 여러 종류의 프랑스 혁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145-6)


#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를 포함한) 특권 계급에 맞서 봉기한 다수 민중(농민과 상-퀼로트들)의 직접적 압력이 이끌어간 혁명이고, 따라서 그런 압력이 강했을 때에만 급진적 조치들을 밀고 나아갈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모두가 깊게 맞물려 있는 세 개의 것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다양한 자본주의적 지배계층 그룹이 영국이 세계경제에서 헤게모니적 지위로 올라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프랑스 국가의 개혁을 강행하려는 비교적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이러한 것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개혁은 이루어졌으나 영국의 헤게모니를 막아낸다는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혁명과정은 영국의 우세를 아마도 강화시켰다. 둘째로, 프랑스혁명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에서 최초로 의미 있는 반체제(즉 반자본주의적) 운동, 즉 프랑스 〈민중〉의 운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공질서가 붕괴되는 상황을 창출했다. 반체제 운동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물론 실패였지만, 그 자체는 그 이후의 모든 반체제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이 정확히 아니기 때문이다."(170-1)


"셋째로,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영역이 마침내 경제적, 정치적 현실과 합치되게끔 하는 데에 필요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첫 세기들은 주로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의상을 걸치고 살았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도, 예상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지체는 정상적인 것이고 진정 구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고,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은 〈서양 세계혁명〉의 일부(그러나 핵심 부분)일 뿐이다─은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마침내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버크와 메스트르의 지적 반동에 있다. 사람들이 〈보수주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옹호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의문의 대상이 되고 더 이상 다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 이르러서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완전한 성숙의 순간을 가리킨다."(171)


"나폴레옹 전쟁의 종료와 함께 영국은 세계체제에서 마침내 진정한 헤게모니를 쥐었다. 그것은 일련의 해상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영국의 세계권력을 공고하게 만들었는데, 이 해상기지들은 영국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들과 합쳐져서 영국으로 하여금 이제 지구를 전략적으로 둘러싸게 했다." "더욱이 영국은 전쟁과정에서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서의 네덜란드의 역할을 종식시켰다. 상업 및 금융 지배를 통해서 영국은 이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대규모의 돈─보유 상선 선원의 벌이, 상업 수수료, 기술자와 해외 식민지 관리의 송금, 투자 소득─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영국의 수출무역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던 지속적이고 심지어는 팽창하는 무역적자를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국제수지 흑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은 또한 자신의 높은 보호주의적 장벽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업적 유럽의 교사〉로서의 그의 새로운 역할도 시작했다."(187-8)


3 새로운 거대 지역권들의 세계경제로의 병합 : 1750-1850년


"(대략) 1733-1817년 시기의 경제팽창(그리고 통화 인플레이션)의 재개과정에서 유럽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에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경계들을 깨버리고 새로운 거대 지역권들을 자신이 포괄하고 있는 효율적인 노동분업 속으로 병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이래 이미 유럽 세계경제의 외곽지대(extenal arena)에 놓여 있었던 지역권들─특히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인도 아대륙,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서아프리카─을 병합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병합은 본질적으로, 최소한 일정한 한 지리적 장소의 몇몇 중요한 생산과정들이 현재 진행중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노동분업을 구성하는 다양한 상품연쇄에 필수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병합은 어떤 지역권을 사실상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세계경제의 궤도에 〈거는 것(hooking)〉을 의미하고, 주변부화는 종종 자본주의 발전의 심화라고 언급되는 방식으로 그 지역의 세세한 구조들을 계속 변형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197-9)


"위 네 지역권들은 환금작물 농업(그리고 그와 유사한 형태의 1차 산업 부문 생산)을 창출하거나 이를 상당히 확대해나갔고, 동시에 지방의 제조업 생산활동은 줄이거나 제거해나갔다." "점점 더 높은 비율의 토지가 〈수출〉용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데에 특화함에 따라서 다른 토지단위들은 이 토지단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팔 식량을 재배하는 것으로 특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재산소유자의 권한으로 경제적 합리성이 노동력 계서제의 창출 쪽으로 움직이자 또다른 지역들은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토지단위와 식용작물을 재배하는 토지단위들 모두에서 노동할 사람들을 수출하는 것으로 특화하기 시작했다. 한 지역권 내에 세 개의 층으로 된 공간적인 특화가 출현했다는 것─〈수출용〉 환금작물, 〈지방시장용〉 식량작물 그리고 이주노동자라는 〈작물〉─은 이전에는 세계경제의 외곽지대였던 곳이 이제는 당시의 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노동분업 속으로 병합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였다."(210-1)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을 위대한 인도주의자들로 보는 권위 있는 전통 해석─쿠플랜드의 고전적 저작(초판 1933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바 있는─과 대결을 벌인 에릭 윌리엄스(1944)는 노예무역 금지의 밑바탕에 깔린 경제적 동기를 주장함으로써 과도하게 자기만족적인 그 해석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했다." "즉 대체로 미국 독립전쟁과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서인도 제도의 영국령 설탕 생산 식민지들은 〈영국 자본주의에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영국 자본가들은 세 가지 연속적인 개혁을 이루는 데에 성공하게 되었다─1807년에 노예무역, 1833년에 노예제 그리고 1846년에 설탕 관세에 반대하는 개혁. 〈이 세 사건은 분리할 수 없다.〉 이러한 조치들이 취해진 이유는 영국인 서인도에 대한 〈독점〉과 경쟁상의 우위를 상실함에 따라서 주요 문제로 떠오른 것이 설탕의 〈과잉생산〉이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법령들이었기 때문이다."(219-20)


"기본적으로 병합기 동안 서아프리카로부터 유럽 세계경제로 이루어졌던 수출의 양상은 세 시기를 거쳤다 : (1) (특히) 1750년경부터 1793년 사이로, 절대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어쩌면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노예 수출이 증가하고 이에 계속 집중한 시기, (2) 179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로, 소위 합법적 무역의 꾸준한 증가와 함께 노예 수출이 중요하게 유지되는 시기, (3) 1840년대부터 1880년대의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 초기까지로, 대서양 노예무역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1차 산물(특히 야자유와 땅콩)의 수출이 꾸준히 팽창하는 시기. 실제로 노예 약탈과 환금작물의 생산은, 그 두 가지가 결합되면 노동력의 이용을 둘러싸고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야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수출품은 동시에 번성할 수 있었고 대략 30-40년 동안 실제로 그러했다."(224)


"특정 지역권이 세계경제에 병합될 때 이는 종종 그 이상의 인접 지역권을 세계경제의 외곽지대로 끌어들인다. 인도가 병합되었을 때는 중국이 외곽지대의 일부가 되었다. 발칸 국가들, 아나톨리아, 이집트가 병합되었을 때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와 마그레브가 외곽지대로 들어왔다. 유럽 쪽 러시아가 병합되었을 때 중앙 아시아(그리고 심지어는 중국)가 외곽지대 안으로 들어왔고 서아프리카 연안이 병합되었을 때 서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 외곽지대로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외곽지대란,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그 지역의 상품을 원하지만 역으로 그 지역은 매뉴팩처 상품을 수입하는 것에 (아마도 문화적으로) 저항을 하며 자신의 기호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역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의 병합은 영국에게 영국 자신에게는 더욱 좋고 중국으로서도 받아들일 만한 몇몇 대안─대표적으로 인도-중국-영국의 삼각무역─을 제공했다."(254-5)


# 처음에는 면화 무역으로 출발했으나, 이후 아편 무역으로 변질된다.


"세계경제로의 병합은 필연적으로 정치구조들이 국가간 체제에 삽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이 〈국가간 체제 내의 국가들〉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든가, 그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의해서 대체되든가, 아니면 이미 국가간 체제 내에 속한 다른 국가들에 흡수되든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합과정의 막바지에 이르면, 내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생산과정에 직접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관료기구를 두고 있으면서 외적으로는 국가간 체제의 표준적인 외교망, 유통망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들을 보게 될 수 있다. 즉, 한 지역권이 세계경제에 병합되면서 그 지역의 국경간 무역은 세계경제에 대해서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 된다. 무역은 커다란 위험이 걸려 있는 어떤 것에서 국가간 체제에 의해서 장려되고 보호받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네 지역들에서 병합의 마지막 결과물들은 처음보다 차이가 덜한 것으로 드러났다."(260-1)


# 네 지역에서 진행된 병합의 마지막 결과물

1. 오스만 제국 : 제국의 위세와 영토는 터키 공화국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도처─발칸 지역, 초승달 지대,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지역 권력이 부상했다.

2. 인도 아대륙 : 무굴 제국뿐만 아니라 그보다 작은 모든 정치구조들이 해체되고, 인도라는 단일한 행정단위─최종적으로 세 개의 주권국가─로 재편되어갔다.

3. 러시아 제국 : 남동유럽, 흑해,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자신의 〈후진성〉을 보장하고 증진하는 방식으로 서유럽 하의 세계경제에 편입되었다.

4. 서아프리카 : 위 세 지역에 비견되는 세계제국이 부재한 상태에서, 서유럽에 유리한 〈무정부 상태〉, 곧 병합에 저항할 수 있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추구되었다. 


4 이주민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탈식민화 : 1763-1833년


"18세기 중반에 아메리카 대륙의 절반 이상의 영토가 법적인 측면에서 유럽 국가들, 즉 주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그리고 포르투갈의 식민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머지 영토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 체제 바깥에 놓여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사실상 이곳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이 (이전의 행정체들간의 일정한 결합과 분열이 있은 후에) 독립 주권국가들로 변형되었다. 더구나 당시 이 신생국가들은 그 반구의 나머지 영역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관할권을 주장했다. 이는 국가간 체제의 외형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이 〈탈식민화〉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이주되어온 흑인들은 모두 배제된 채 유럽계 이주민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 신생 주권국가들 중 많은 곳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흑인들이 인구 수의 상당 부분(심지어 다수)을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나의 예외가 바로 아이티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7년전쟁을 마무리하는 파리조약이 체결된 1763년에서 시작된다."(291)


"영국 정부는 세계경제에서의 권력 증대로 인해 이전보다 더 폭넓은 이해관계들을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것이 딜레마를 야기했다." "즉, 영국 국내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백인 이주민들이 새로 주장하기 시작한 요구들을 조정할 수 있는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0세기의 영연방(영국 본국과 영국의 과거 식민지들로 구성된 주권국가의 자유로운 연합체) 식의 해결책은 채택은 고사하고 고려하는 것 자체도 영국으로서는 아직 너무 이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영국 왕의 힘은 영국 내에서 여전히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의회가 권력 행사를 통해서 수많은 압력집단들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이익집단들의 시대〉로 영국이 이제 접어들 때까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이주민들은 다른 많은 경쟁적 이익집단들에 비해서 그 힘이 약했다. 〈북아메리카의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그 경제적 중요성에 필적하지 못했다.〉"(303-5)


"카리브 해 지역의 경우 식민지와 영국의 관계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제불황기를 경험하고 있던 영국령 북아메리카와는 달리 서인도 제도는 주요 수출품인 설탕 붐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1766년의 자유무역항법(Free Port Act)은 그 뿌리가 1751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서인도 제도의 무역불황을 타개하는 데에 성공했다. 서인도 제도의 상업은 한 세기 이상 대규모 밀무역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영국령 섬의 설탕 생산은 영국에는 충분한 공급량이었지만 대륙으로 재수출하기 위한 수요를 충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은 프랑스령 섬 지역의 불법적 수출에 영국령 서인도 항구들을 개방했고 또 이로써 프랑스령 섬 지역의 설탕은 영국을 경유해서 대륙으로 수출되었는데, 그 결과 영국은 사실상 식민행정에 필요한 정치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무역 및 운송 이윤을 챙기는 등 꿩 먹고 알 먹는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320-1)


"7년전쟁 이후 카를로스 3세의 첫 개혁조치는 군사적인 것으로서, 〈아메리카 대륙 재정복(Reconquista de Americas〉이라고 불린 행정명령이었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변화들은 민간행정에서 일어났다. 이는 총감찰(visita general) 제도, 즉 조사와 집행권을 가진 최고위 관리를 마드리드에서 파견하는 제도의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개혁과정의 핵심 인물, 돈 호세 데 갈베스는 원래 1765년에서 1767년 사이에 신에스파냐의 최초의 총감찰관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1776년 인도부 장관으로서 그의 첫 활동들 중 하나는 라 플라타에 부왕령(Viceroyalty)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신에스파냐와 페루 두 곳만이 부왕령이었다. 1739년, 세번째로 뉴그라나다가 세워졌다. 갈베스는 왜 1776년에 네 번째 부왕령을 만들었는가? 1775년이라는 시점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시기는 영국과 그 연합국인 포르투갈에 반기를 들기에는 최고의 호기였던 것이다."(327-8)


"북아메리카의 전쟁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왔다. 에스파냐는 식민지 반란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데에 망설였다. 프랑스는 더욱 강렬히 에스파냐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고 1779년 아란훼스 조약에서 에스파냐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그 대가란 영국을 공동으로 공격하는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에스파냐는 이를 〈지나치게 확장되어 취약해진 자신의 식민제국〉이 공격받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에스파냐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했다. 너무도 분명히 그 목적은 미노르카와 지브롤터를 되찾는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카리브 해의 모든 거점들에서 영국인들을 몰아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생명과 재산상으로〉 큰 대가를 치렀다. 전쟁의 결과 사실상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는 그 유대의 최초 단절─그 뒤에도 계속되었다─을 경험했다(전비 부담을 짊어지게 된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330-1)


"에스파냐의 〈마지못한〉 아메리카 독립전쟁 참여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의 중요한 반란, 즉 페루의 투팍 아마루 반란과 뉴그라나다의 농민(코무네로) 반란이 바로 이때 발생했다." "반란은 원초적 저항이기는커녕 무엇보다도 인디오들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연루된 결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루는, 단지 바로 얼마 전에야, 〈중앙행정부의 권력을 보다 강화시키는〉 여러 조치들에 의해서 더욱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투팍 아마루 개인의 사회적 동기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치 못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이다. 봉기의 핵심은 지방의 인디오 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르윈의 말처럼, 일반적으로 말해서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당시 서로 다른 두 개의 혁명운동, 즉 크리오요와 인디오의 혁명운동이 각기 존재했다. 〈그들의 길은 때로는 교차했고······또 때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332-5)


"결국 에스파냐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일부 엘리트와 평민들, 즉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 사이의 잠정적인 동맹은 성립 불가능한 동맹이었다." "이제 크리오요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자극제를 가지게 되었다─이베리아 반도인에 대한 크리오요의 불만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인과 크리오요 모두가 유색 하층민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분명히 크리오요들이 생각한 대로 식민 본국 정부의 〈자의성〉이었고 또 에스파냐 정부의 눈에 비친 크리오요들의 〈어리석음과 수상쩍은 불충〉이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의심이 느리기는 했지만 꾸준히 증대했다. 그러나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는 흑백(또는 백인과 비백인)의 단순한 분리 대신에 복잡하게 분류된 계서제가 존재했다. 3세기 이상 내려오는 유성생식상의 체질의 실제가 의미하는 바는 이베리아 반도인은 〈순수 백인〉이지만 크리오요들은 〈약간만 백인〉이라는 것이다."(338-41)


"그리하여 이제 1763년의 파리 조약 이후 20년도 못 되어서 (모든) 아메리카 대륙은 불가피하게 일련의 이주민 독립국가 건설의 도정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후 50년은 그 전반적 개요가 세밀하지는 않지만 이미 그려져 있는, 한 유형의 전개에 불과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두 종류의 인기 있는 주장들─이주민들이 〈자유〉를 위해서 바친 다소간의 영웅적 행위 또는 식민 본국 열강들의 몇몇 판단 〈오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주민들의 독립 시도는 일단 가동되기만 하면 집단적 이해관계라는 보다 협소한 계산을 종종 넘어서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그 자신의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그 궁극적 결과는 영국인들과 남북 아메리카 이주민들에게 동시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로운 것이었다." "이득을 본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사실상의 장기 동맹은 세계체제에 가장 직접적인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그것은 또 전 세계적 자본 축적을 위해서는 최상의 것이었다."(343)


"1812년 전쟁(1812-14년)은 아무래도 미국의 이주민 탈식민화의 마지막 장이었다. 미국은 1783년 이후 영국과 까다로운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진실로 관계를 끊은 적은 없었다. 영국은 미국을 경쟁자가 아니라 시장으로서 원했다.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자신의 지위를 개선시키고자 했다. 영불전쟁은 미국에게 하나의 기회이자 분통 터지는 일이기도 했다. 대륙에서 전쟁이 재발했을 때 미국이 영국을 압박할 기회 그리고 아마도 캐나다를 정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은 전쟁에서 신통치 못했다. 영어 사용자이든 불어 사용자이든 간에 캐나다인들 사이에는 미국으로의 합병에 대한 열정이 당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캐나다는 영국령으로 남았다." "헨트 조약에서 영국이 양보한 것은 서부와 남부 지역으로의 팽창에 대한 미국의 권리의 막연한 재승인 그리고 다가올 아메리카 대륙 탈식민지화의 전개시 인정될 발언권(최소한 하급 발언권)이 전부였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결정적이었다."(380-1)


"1815년의 빈 회의는 정통성과 절대주의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유럽에 평화를 확립하고자 함으로써, 즉 뒤틀린 방식으로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대한 에스파냐의 권리 주장을 약화시켰다. 유럽 주요 열강들은 에스파냐의 압제 조치가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고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독립을 낳는 혁명들은 유럽에서 〈자유주의 혁명을 부채질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파냐가 식민지들에 〈양보하기〉를 강력히 원했다. 나아가 이는 영국으로 하여금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챙기도록 해주었다. 특별히 그곳은 영국에게 면직물 판매의 주요 팽창 지역권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에스파냐 제국의 해체 과정이 시작되자 이전에는 독립에 회의적이었던 많은 크리오요들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국가들은 차례차례로 모호한, 폭력적인, 또는 보수적인 혁명들로 독립을 향해 나아갔지만, 미국과 달리 여기에 군사적 투쟁의 통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382-4)


"그리하여 50년간에 걸쳐 서서히 백인 이주민들은 서반구 전역에서 국가간 체제의 일부가 된 여러 국가들을 건설했다. 그 국가들은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새로운 헤게모니 열강인 영국의 정치경제적 후견하에 들어왔다. 비록 미국이 영국의 부관 그래서 또한 잠재적이고 궁극적인 경쟁자의 역할로 자신을 부각시킬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유일한 예외는 아이티였고, 아이티는 배척당했다.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어떤 역할로부터도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리고 흑인들과 인디오들도 그러했다. 유럽의 헌법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고대 아스텍을 국민(nation)의 진정한 기원으로〉 주장하며 하나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모렐로스의 꿈은 허망한 꿈에 그쳤다." "18세기 말의 대혁명들─이른바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대륙의 이주민 독립─중 그 어느 것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 체제의 계속적인 공고화와 견고화를 보여주었다."(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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