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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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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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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은 성경적이었으며, 교부시대의 지속되는 업적 중 하나는 언어와 영감 면에서 성경적으로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서양 문명에게 성경에 대한 통일되고 일관된 해석을 제공했다. 즉, 이것은 성경의 최초 독자들을 무시하는 해석은 교회의 책도 아니고, 서양 문학, 미술, 음악의 상상력이 풍부한 원천도 아닌, 단지 파편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토대로, 기독교 예배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성경(또한 성경에 대한 초기 해석들)으로부터, 곧 역사, 제의, 문헌으로부터 사고한다. 기독교 사상은 교회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시편 암송 같은 경건 활동으로 유지되고 예배, 특히 정기적인 성찬식 참여로 양분을 얻는다. 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개념과 관념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물 자체인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실천에 더 깊이 침잠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목적은 이해뿐 아니라 사랑이었다."(22-3)
1 기독교 사상의 토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최초의 기독교 문헌들은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2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으로 외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변증가들apologists로 불렸고, 이러한 맥락에서 변증apology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삶과 신앙 방식에 대한 방어와 설명을 의미한다." "최초의 변증가들 중에서 가장 명석한 사람은 2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순교자 유스티누스였다."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몇 권의 책을 썼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방대한 책을 한 권 남겼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두 종류의 비판자들을 동시에 다루어야 했다. 하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기원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후자의 성경(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른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성경으로 삼았다."(31-2)
"켈수스가 보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한 역사적 인물 속에 나타난 계시의 문제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된 것이었다." "켈수스가 신약성경을 읽음으로써 깨달았듯이,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내려왔고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면, 세상의 근본적인 질서와 구조는 돌이킬 수 없이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켈수스는 말했다. W. H. 오든의 기억할 만한 시구(詩句)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일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고정되고 불변한다. 영적 실재는 지상의 삶을 지배하는 강제력에 종속될 수 없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이 지상에서 대단히 의미없는 어떤 것을 바꾼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고 파괴할 것이다.〉"(37-8)
"교회사에서 가장 용감하고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켈수수의 『참된 교리』에 대응하여 『켈수스에 대항하여』라는 상세한 반박서를 저술했다." "켈수스는 정신의 고양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에서 돌이켜, 일련의 정신적 단계를 거쳐 하나님을 향해 상승해야 한다. 또 다른 비판자의 주장처럼 〈지적인 문제는 지적으로 알 수 있고 감각적인 것은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정신의 고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적 인물 속에서 인간들을 향해 내려오심으로 시작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켈수스가 인용한 플라톤의 주장이 고귀하고 인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로고스)이 모든 인간과 접촉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다고 성경이 주장할 때, 성경이 인류를 위해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는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38-40)
"오리게네스는 두 종류의 보는 방법을 구별한다. 인간이 물리적 대상을 감지하는 일반적 방법과 하나님을 보는, 곧 아는 영적 방법이다. 〈육체적인 것을 보기 위해선 그들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사물에 집중하는 눈〉만 필요하다." "하지만 〈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이 요구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할 때 그것이 보이려고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해야〉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른 예언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은총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의 눈은 그가 하나님을 보는 원인일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된 하나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47)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리니,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싶다.〉 교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뿐 아니라 외부인들에게 쓴 글에서, 가장 초창기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예배와 관행, 기도와 교리 교육, 성경의 말씀과 이미지와 이야기 속에서 전해진 것이 확고한 지적 토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것이 요점이다. 즉, 기독교의 이야기는 일군의 사상이나 원리로 축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개념체계도 복음주의 역사를 대체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5세기 로마의 감독이었던 대 레오가 썼듯이, 기독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다. 기독교 사상은 어떤 독창적 사상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며, 어떤 중요한 영적 통찰력에 의해 양분을 공급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한 인간의 삶에서 비롯되었다."(51-2)
2 기독교의 예배: 놀랍고 피 없는 희생제물
"유스티누스는 성찬식에서 교인들이 살아 있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라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요점은 기독교 예배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축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함께 기억하는 기념 식사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편 22편 설교에서 말했듯이 예배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며, 이런 식으로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요점은 그 예배가 명백히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존재하기 전에도, 기독교 기도들은 성삼위일체를 초청했다. 유스티누스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우주의 아버지께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찬양과 영광의 기도를 올려 드린다〉고 말한다. 유스티누스가 말하는 것은 초기 예배에서 빵과 포도주에 대한 기도 속에 메아리친다."(60-1)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제물로 제시되었다." "예배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상상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와 친밀한 관계로 이끌었다.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경험의 명백한 사실로서 말이다. 5세기 로마의 주교였던 대 레오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화해를 위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우리는 단지 과거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알 뿐 아니라 현존하는 사역의 권능 안에서 경험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문이 집필되기 전, 성경에 대한 학문적 주석이 나오기 전, 은총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나 도덕 생활에 대한 저술이 출현하기 전, 교회의 성찬식에 살아서 현존하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바치는 경외와 숭배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에 선행했다."(64-5)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행사였다. 감독과 다른 성직자들, 이웃과 친구들, 가족 등 모든 사람이 맡은 역할이 있었다. 매년 늦겨울과 봄에 반복될 때마다 엄격한 심사, 혹독한 금식, 낭랑한 신조 낭독, 축귀의식, 침례는 그 경험을 더욱 고양시켰다. 세례식은 장엄한 기독교 행사였다.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이 한 사람씩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을 뿌리거나 붓지 않고 물속에 잠겼다. 기독교는 빵과 포도주, 물, 기름처럼 사물과 관계가 깊다. 기독교 신앙은 사물들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행위 속에 담겨 있다." "세례식의 물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의에서, 하나님은 보고 만질 수 있는 한 인간을 통해 알려진다는 기독교의 핵심적 확신이 이제 물과 기름, 빵과 포도주, 우유와 꿀, 소금과 성인들의 뼈, 그리스도의 몸이 닿았던 성지(聖地), 그리고 성상처럼 만질 수 있는 다른 물건들로 확장된다."(68-9)
3 성경: 현재를 위한 하나님의 얼굴
"자신의 대표작인 『잡록』Stromateis에서 클레멘스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성에 대한 논의는 현재 알려진 모습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알려줌으로써, 예기치 못한 주장을 시작한다. 그는 플라톤의 유사함이 형상이라는 성경적 개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가 읽은 창세기에서 〈형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때 인간이 받은 것을 가리키며, 〈모양·유사함〉은 인간의 삶이 열망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이 가능하다. 유사함(모양)이라는 주제를 도입함으로써 클레멘스는 자신이 철저히 그리스인임을 보여주고,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에 대한 당대의 철학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하지만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클레멘스는 논의를 성경의 하나님께로 전환한다."(86-7)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변형을 요구한다. 클레멘스는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을, 특히 〈그리스도 따르기〉라는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논의 전체에 독특한 성경적 광택을 부여한다. 그는 사도 바울을 인용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목적, 곧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은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레니즘 정신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에 대한 증거로 여겨져 왔다. 전체 구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헬레니즘 도덕 전통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 닮기(모양)란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클레멘스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의 손에서 헬레니즘의 개념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빌려온 새롭고 이국적인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유사함〉은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다."(87-8)
"성경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자 기둥〉이라고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성경이 기이한 신학 프로그램을 위해 분할되고, 성경 본문이 영지주의자들처럼 자의적으로 사용된다면, 성경은 폐쇄적인 책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들 안에서 진리를 찾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뼈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성경은 마치 설계도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배열된 모자이크처럼, 혹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임의로 가져온 구절들을 함께 묶은 후 그것을 호메로스의 작품이라고 상상하면서 재구성한 시처럼 모호하다." "이레나이우스의 개요는 매우 담대하게 설정되어 있다. 성경해석에 대한 그의 접근이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것은 후대의 모든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아리우스에 대항하는 아타나시우스, 펠라기우스에 대항하는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네스토리우에 대항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읽든, 우리는 각 구절들을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95)
4 삼위일체: 항상 그의 얼굴을 구하라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성경에서 주어진 언어와 교회의 관행, 특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식에 의해 형성된 확신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힐라리우스는 하나님을 먼저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알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야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힐라리우스의 다소 수수께끼 같은 언어 배후에 모든 기독교 사상에 스며 있는 하나의 진리가 놓여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것, 초대교회가 경륜economy이라고 불렀던 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질서와 정리를 뜻하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신학적 담론에서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 성경적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 있는 자기노출을 의미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힐라리우스의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115-6)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없다.〉 힐라리우스는 부활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부활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는 보다 충격적인 주장도 제기했다. 일단 예수가 부활하자 도마는 〈신앙의 모든 신비를 이해했다.〉 이제 부활의 관점에서, 도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쉐마를 계속 암송할 수 있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은 〈제2의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나 신적 본성의 통일성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독한 하나님〉이나 〈외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힐라리우스는 말한다."(118)
"삼위일체에 대한 책을 집필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삶의 특정한 행위들과 성령의 사역을 연결하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태어났고, 성령은 그의 선구자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성령은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고, 성령은 그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고, 성령은 그와 동행한다. 그리스도는 승천하고, 성령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성자만의 활동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의 현존을 통해 확증되고 중개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신적 본성에 관해······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부께서 아들과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어떤 일을 행하시거나, 아들이 성령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행동한다고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와 관련되고 우리의 상이한 개념에 따라 지칭된 모든 신적 행동은 아버지 안에서 기원하며, 아들을 통과하고, 성령에 의해 완성된다.〉"(128)
"하지만 성령의 개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성경이 두 가지 〈보냄〉, 곧 아들의 보냄과 성령의 보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핵심 본문은 갈라디아서 4:4-6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보냄이 아들의 보냄 못지않게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이 본문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듯이,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보냄을 받거나 오순절 날에 교회 위에 부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영원부터 감추어진 것이 시간 속에 나타났다.〉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성령은 역사적 자료요 경험적 사실이었다."(128-9)
5 그리스도 인성의 비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설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난 인간이었고, 동시에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런 주장의 어떤 것을 불쾌하게 여긴 이들 중에서 가현설주의자들Docetists은 그리스도가 오직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의 인간적 외모는 단지 겉모양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극단에서, 에비온파 같은 집단은 그리스도가 단지 고대의 현인들이나 예언자들처럼 고귀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중심 전통은 그리스도가 온전히 신이며 온전히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5세기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은 교회의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고 살았던 사상가들의 진정한 노력이었다."(140-1)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키릴로스는 힐라리우스와 다른 차원에서 부활을 바라보았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독특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인류의 첫 열매로 드렸다.·····그는 우리를 위해 인류가 예전에 알지 못했던 길을 열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인간 본성은 죽음을 파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의 환란보다 우월하고 죽음보다 〈강하다.〉 따라서 그는 죽음과 부패를 정복할 수 있었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자신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을 우리에게까지 확대한다. 그런 후에, 키릴로스는 다음 문장을 추가한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정복했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으로서 정복했다면, 우리도 그 안에서 정복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오신 두 번째 아담이기 때문이다.〉 키릴로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이 그리스도를 독특하게 만든다."(146-7)
"이전 작가들은 예수께서 탄원하신 말씀, 곧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를 가설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 기도의 두 번째 부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가 이해되느냐고 묻는다. 동시에,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가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이라고 그는 언급한다. 막시무스가 보기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저항이나 공포가 아니라 〈완벽한 동의와 일치〉를 표현한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고, 이런 식으로 〈신적인 의지에 대한 그의 인간적 의지의 최고 동의〉를 보여주었다."(154)
"막시무스는 복음서에 또 다른 명령, 곧 또 다른 〈내게 이루어지이다〉가 있다고 제안한다. 즉, 인간 그리스도의 고통 말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의도한다." "고통의 잔을 받은 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영원한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연합하여 의도했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의도하신 것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의지는 신적인 의지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덜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더 인간적이다. 키릴로스처럼 막시무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인간이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새롭다고 막시무스는 말한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놀라우며,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낯설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의 새로운 에너지를 그 자체 안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156-7)
6 천지창조 이야기: 처음에 주어진 끝
"창세기에 대한 기독교 주석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중, 〈태초에〉라는 단어였다." "4세기 후반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는 〈태초에〉라는 단어에 그리스어 arche의 의미를 이용한다. 〈그것은 적절한 시작이다. 세상의 형성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가시적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지배적 영향을 행사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어 arche는 단지 〈시작〉, 곧 〈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원리〉도 의미한다. 서론도 없이 바실리우스는 청중을 그 원리로 이끈다. 창세기의 설명은 누군가 상상하듯이 세계가 자발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먼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친교 및 친밀함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없다.〉 우주론 연구는 영과 관련된 것으로 시작한다."(164-7)
"시작은 또한 목적end을 내포한다. 단지 세상이 끝날end 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가 〈유용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창조는 〈독단적 힘〉이나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예술적 이성〉의 작업이다. 즉, 창조에 목적이 있다는 것보다 더 도전적인 교리는 성경에 없다. 바실리우스도 창조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업이며, 세계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에 따라 섭리적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창조는 마지막 순간에 사물들에 영향을 끼친다. 태초에 하나님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고 바실리우스는 말한다. 창세기는 자체 내에 성장과 발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명계의 탄생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적절한 시간 내에 새로운 피조물들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도록 만들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다."(168-9)
"그레고리우스는 신약성경에서 직접 인용한 인간의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 첫째는 로고스(말씀) 혹은 이성이다. 이것은 그가 요한복음 1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썼던 사도 바울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셋째는 사랑이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요한복음과 〈하나님은 사랑이자 사랑의 원천이시다〉라는 요한1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다면 〈그 형상의 흔적은 뒤틀린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인성의 회복뿐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일체의 온전한 설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끝은 시작 속에서 주어진다〉라는 그의 말에서 완성과 시작이 상보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창조는 선물이자 약속이며,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민 태초에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된다."(180-1)
"〈인간의 창조〉에 대한 모든 온전한 설명은 인간의 파괴,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타락과 악의 완고함을 다루어야 한다. 그의 논문 중간 부분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에 관심을 보이고, 비록 간략하지만 인간의 비극적 삶을 논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생생한 언어로 죄의 결과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 불순종이란 잡초의 씨를 뿌린 삶의 교활함 때문에, 우리 본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보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죄 때문에 변형되고 흉하게 되었다. 우리 본성은 악한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 본성은 죄의 아비가 거느리는 악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인간 본성은 악에 의해 〈약해졌고, 무기력해졌다.〉 인간은 〈악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쉽게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인간은 죄를 짓기 쉬우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죄는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안에 존재한다.〉"(181-2)
7 인식의 길: 믿음의 합리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증인의 정직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식과 확실하고 명백한 수학적 지식을 구별한다. 7X7=49는 구구단을 암기한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지식은 우리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항상 간접적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한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개연성 있는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역사적 지식에 대한 적절한 단어는 〈믿음〉이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역사적 지식을 위해서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차이도 유지하고 싶었다. 역사적 지식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인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martyr가 기독교 사전에서 거룩한 단어가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martyr는 자신의 말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다."(195-6)
"역사적 지식은 증인을 요구한다. 그리고 증언은 증거하는 사람의 말에서 믿음과 확신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대한 토론에 '권위'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그는 〈우리는 권위에 우리의 믿음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절에, 권위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의 용법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틴어에서 권위auctorita는 auctor(이 단어는 영어의 author에 해당한다)에서 기원했고, 원래의 의미는 유언장이나 다른 법적 서류의 타당성과 진정성을 보증했던 사람을 가리켰다. 권위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행정관이나 유언장 작성자의 그러한 특성, 곧 어떤 사람이 말한 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특성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는 인간 삶과 사회에 공통되는, 없어서는 안 될 측면이다. 우리가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성실과 신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96-7)
8 지상과 천상의 나라: 하나님이 주님인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평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가 이해했듯이, 평화는 이생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인류가 자신들 안에 건설할 수 있는 평화는 항상 부서지기 쉽고 불안정하며 덧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 땅 위의 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평화는 항상 소망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도성이 열망하는 평화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선지자 하박국에 따르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추구할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선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에 뛰어난 매력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땅에 평화를 성취하려는 노력(비록 그것이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223-4)
"하나님의 도성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마음의 갈망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해결될 수 있고, 평화에 대한 희망도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성이 아직 순례 중인 이 삶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온전한 시민이었다. 다른 시민들처럼 그들도 법, 안정, 일치를 존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강제력 없이는 더불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의 권력, 판사가 휘두르는 칼의 권력, 집행관의 발톱, 군인의 무기, 주인의 징계, 그리고 선한 아버지의 엄격함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만의 방법과 명분, 이유와 유용함을 지닌다.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동안, 사악한 사람들은 특정한 울타리 안에 갇히고, 선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다만 모든 정치제도는 임시적이며, 그것들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28-9)
"『하나님의 도성』 제2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국가론』에서 정치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 문장을 인용했다. 〈시민은 공통된 법 정신과 집단적 이익으로 연합된 다수의 사람들〉로 정의된다. 이 정의에서 법으로 사용된 단어가 jus다. 이 단어에서 라틴어 단어 justitia가, 영어 단어 justice가 각각 유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가 정의justice없는 정치 공동체, 공화국,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정의(定義)를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정의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jus, 곧 어떠한 법, 평등,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단지 한 이익공동체일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은 jus로 함께 묶여야 한다. 단지 공통된 이익에 기초해서 연합된 사회는 기껏해야 폭도나 해적 집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는 없고 오직 도둑질과 무법과 착취만 있다면,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정의와도 관련이 있다."(230)
9 초기 기독교 문학: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행동
"몇몇 기독교 시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전통적 시로 다시 쓰려고 했다. 잘 맞춘 운율과 시적 어휘를 사용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낯익은 표현으로 종교적 시를 제공하고 싶어했다." "가령, 요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초기 기독교 시는 성경의 단어 〈예언자〉 대신, 라틴어 단어 〈점쟁이〉를 사용한다. 증인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인 〈순교자〉 대신, 라틴어 단어 〈목격자〉를 사용한다. 〈천사〉 대신 〈전령〉을 선택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인은 〈부활〉이라는 단어는 피하고 대신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경의 단어 〈성전〉은 이교적 단어 〈성소〉로 대체되었고, 〈요구하다〉라는 멋진 라틴어 단어가 〈기도하다〉란 성경적 단어를 대체했다. 이런 변화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늘날 〈이번 주일에 나는 제1침례교회의 컬트에 참석할 예정이다〉라는 표현에서, 기독교 예배를 〈컬트〉라고 지칭할 때처럼 그것은 고대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꺼림칙한 것이었다."(243)
10 초기 기독교 미술: 이것을 다르게 만들다
"고대 기독교 도시들에서 가장 경멸받던 관행 중 하나는 죽은 자를 예배하는 것, 특히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뼈를 숭배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강력한 적이었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를 죽은 자들의 무덤과 비석으로 가득 채웠다〉고 불평했다. 4세기 말 로마 세계의 도시들에는 유물들, 곧 거룩한 사람들의 뼈를 보관하는 성소들이 흩어져 있었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이런 거룩한 장소들을 경건하게 방문했다. 2세기 초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와 중보기도를 위해 무덤에 모임으로써 죽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에, 〈여기에 베드로가 있다〉라는 비문이 적힌 장식판을 걸기 위해서 벽에 벽감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런 성소에서 성인들의 고귀한 몸을 담은 석관을 바라보기 위해 신자들이 앉아 있던 의자와 제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뼈들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주었다."(265)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의 견해에 따르면 성상금지는,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역사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신앙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가능했다. 〈몸도 없고 형태도 없이 그의 본성은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며,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그가 자기를 비우고 본질과 본성에서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육신의 몸으로 발견될 때, 당신은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놀라운 낮아짐,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요단강 세례, 다볼산에서의 변화, 우리를 고난에서 자유롭게 했던 그의 고통, 죽음, 기적을 묘사하라. 그의 구원의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을 보여주라.〉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묘사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요하네스는 말했다."(271-2)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 모두 물질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성상파괴론자들의 경우, 물질이 거룩하게 되는 최고의 예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그 물질들을 사제가 축복함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성상은 보다 흔하고, 축성기도를 통해 축성되거나 성화되지 않았다.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상이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축성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테오도르는 말한다. 〈그것의 모양만으로도 성화聖化되기에 충분하다.〉 나무와 물감은 나무와 물감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나무 위에 그려진 형상이며, 성상에 의해 묘사된 인격이다. 그것이 그 성상을 귀하게 만든다. 그 형상이 닳거나 지워지면, 그것은 더 이상 성상이 아니고 더 이상 거룩한 물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인격의 형상을 담고 있는 한, 그 성상은 거룩하다."(288)
11 윤리의 삶: 하나님 닮기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잘 발달된 도덕 형성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것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이 의미했던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말은 〈좋은 느낌〉이나 특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환경이 변하거나 행운이 개입하면 왔다가 떠나는 일시적인 상태다. 고대인들에게 행복은 영혼의 소유물이었다. 즉, 사람이 획득한 어떤 것, 한번 획득하면 쉽게 빼앗길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행복은 인간 삶의 최고 목적, 고대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가리켰다. 도덕철학은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가능한 것을 다루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윤리학은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개념에 따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보다는, 특정한 방식의 삶을 통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303)
"그리스인들에게 도덕 생활의 목적은 〈신 닮기〉이고, 기독교 사상가들은 〈하나님 닮기〉나 〈신화〉(神化)라는 언어를 환영했다." "클레멘스의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 닮기〉는 덕의 실천을 의미했다. 기독교 작가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을 향한 안내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는 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닮기 위해 주어진 모델은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의 완전한 삶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은 모방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선택한 하나의 신적 속성은 팔복 중에서 예수가 언급한 가난이다." "겸손 역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정말로 그것은 참된 덕의 징표다. 오직 겸손을 통해, 우리는 오만과 자만이라는 독특하게 인간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닮는다〉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306-7)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인내에 대한 글을 썼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인과 죄인 모두에게 빛을 비추신다. 하나님은 땅이 가치 있는 자와 무가치한 자 모두에게 열매를 맺도록 허락하신다. 그는 인간의 죄와 잘못을 참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 때도 자신의 진노를 참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내의 가장 가시적인 징표는 성육신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한 여인의 자궁 속에 잉태되도록 허락하셨고, 그리스도의 탄생 전까지 인내 속에 여러 달을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인내의 특이한 징표는 참을성이나 용기가 아니라 희망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인내심이 없는 것은 희망 없이 사는 것이다. 인내는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미래를 지향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의 징표는 현재의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선을 기대하는 열망이다. 따라서 인내는 사랑을 포함한 다른 덕들의 열쇠가 된다."(313-5)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독교적 삶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종점)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행복이 〈하나님 닮기〉 안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처럼 그도 하나님 닮기가 신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산다는 뜻임을 잘 알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의 생명과 빛과 성결로 충만해진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도전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삶의 원천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의 저작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서 선을 꼭 붙들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주목한다. 또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그리스도인의 삶의 끈질긴 내적 갈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십계명, 산상수훈, 자유의지는 한 사람을 덕스럽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의 밧줄로 하나님께 묶여 있어야 한다."(316-7)
12 영의 삶: 감각적 지성의 지식
"초대교회에서 읽었던 그리스어 역본 아가서에서, 신부가 자신의 연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상처 받는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신랑의 〈화살〉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관통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박힌 멋진 화살은 바로 그리스도, 예언자 이사야의 〈갈고 닦은 화살〉(선택된 화살)이라고 그는 썼다.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상처 입을 때 그것은 불타오르고, 그 행복한 구절에서 〈보답하는 사랑〉을 제공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런 정서를 수세기 후에 다시 되살렸다. 〈사랑은 보답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하나님께 데려간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는 불이 붙었고, 위로 상승했다. 우리는 더욱 붉게 타오르며 위로 상승했다. 우리의 마음이 상승한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의 제단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사랑의 타오르는 불〉이라고 말한다."(323)
"『신곡』 '천국편Paradiso'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확히 이런 길〉, 곧 성육신을 의도하셨느냐고 묻는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자신이 지금 그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사랑의 불꽃 속에서 지성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려져 있다〉고 상기시켜 주면서 자신의 답변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투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도 못하고, 관음증 환자나 구경꾼, 호기심 추구자로 남는다. 하니님에게 모순은 신성모독이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물의 진리를 관통할 수 있다. 사랑이 부재하면 우리 마음은 진리를 단단히 붙잡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씩만 시도하면서 유치하고 미성숙한 채로 남는다. 단테가 말했다. 인간은 〈지성과 사랑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이 마지막 장의 주제는 사랑임에 틀림없다."(3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