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2
레이먼드 웍스 지음, 박석훈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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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법론


"『국가론』에서 키케로는 자연법이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점, 자연법이 '상위' 법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는 점, 자연법이 이성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자연법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적'이다)을 부각시키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을 네 가지 범주, 즉 영원법(eternal law), 자연법(natural law), 신법(divine law), 인정법(human law)으로 구별한다. 영원법이란 신적 이성으로서 오로지 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법이란 영원법이 이성적 피조물, 즉 인간에게 분여(分與)된 것으로서 이성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 신법은 성경에 쓰인 계시를 통해 확인된다. 인정법은 인간이 그 이성에 힘입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자연법의 내용은 실천적 합리성(practical rationality)의 원리들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원리들을 기준으로 인간의 행위가 합리적인지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자연법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16-9)


"자연법의 세속화, 즉 자연법을 신으로부터 떼어놓는 작업에 대해 논하자면, 네덜란드 출신의 휴고 그로티우스(1583~1645)를 빼놓을 수 없다. 그로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내용은 똑같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국제법 분과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연법의 원리들은 법이 개인의 자연권(natural rights)을 침해했다는 논리로 (특히 미국 독립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원용되어왔다." "일부 사회계약론자들은 사회계약(social contract)에 터 잡아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구성하면서 자연법을 원용했다. 사회계약은 법적으로 엄밀히 보면 계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의 동의 없이는 다른 사람의 정치적 권력에 복종할 수 없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사회계약론은 존 롤스(1921~2002)의 정의론을 비롯한 자유주의 사상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22-4)


"홉스의 주장에 따르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계약만으로도 자연법론자들이 생각하는 불변의 자연법과 동일한 종류의 법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연 상태에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화(peace)가 첫 번째 자연법이어야 한다는 것이 홉스의 결론이다. 두 번째 자연법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모두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한) 일정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계약이고, 이는 도덕적 의무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홉스는 이러한 계약이 체결된다고 하여 곧바로 평화가 보장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평화가 보장되려면 사람들이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홉스가 말하는 세번째 자연법이다." "홉스가 보기에, 계약으로 정한 서로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주권자에게 계약을 위반한 자를 응징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26-7)


"홉스의 구상과는 정반대로, 존 로크(1632~1704)는 사회계약 이전의 삶을 낙원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자연 상태에도 중요한 결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자연 상태에서는 소유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달리 문제삼을 것이 없는 자연 상태의 유일한 결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일부 포기했다는 것이 (특히 『통치론』에서 나타나는) 로크의 생각이다." "로크가 보기에, 사회계약을 통해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연권이 보장되고 각자는 사적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홉스가 자연권이 자연법보다 먼저 존재하고 자연법은 자연권에서 도출된다고 했던 반면, 로크는 자연법, 즉 이성에서 자연권이 도출된다고 했다. 만인이 만물에 대한 자연권을 가진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라면, 로크는 자연권으로서의 자유권은 자연법과 그에 기초한 지시, 즉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에 의해 제한된다고 한다."(28-9)


"장 자크 루소(1712~78)의 이론에서는 사회계약에 견주어볼 때 자연법의 중요도는 떨어진다. 홉스나 로크의 사회계약에 비하면 더욱더 추상적인 루소의 사회계약은 (그가 집필한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합의이며, 개인은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 루소가 '일반 의지(general will)'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가 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강제'되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기로 유명하지만, 이는 개인들이 자유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국민 주권을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나아가 분할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일반 의지'가 이기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제되어야만 한다." "일반의지를 지탱하는 사회계약은 특정 파벌이나 특정 계급의 이익에 맞서 사회 전체를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국가의 절대 권력과 개인의 권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29-31)


"19세기에 두 가지 강력한 반론이 등장하면서 자연법론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첫째는 법실증주의와 관련된 입장들로서 자연법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다. 둘째는 도덕적 추론에는 합리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윤리학에서는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로 불리는) 입장으로서 자연법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면, 자연법의 원리는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따름이고, 그렇다면 이를 두고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에 쇠퇴했던 자연법론은 20세기에 부흥을 맞이한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인권에 대한 인식과 「국제연합 헌장」, 「세계 인권 선언」, 「유럽 인권 조약」, 「1959년 법의 지배에 관한 델리 선언」과 같은 선언에 담긴 인권에 관한 문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자연법을 법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헌법적 의미에서의 '상위법'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정법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이다."(32-3)


2 법실증주의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용어는 '내려진(laid down)' 또는 '세워진(poised)'이라는 뜻의 라틴어 'positum'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법실증주의자들은 법을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법'이나 '세워진 법'으로 이해한다. 법실증주의자들은 법 효력의 밑절미에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쉽게 말해, (과학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법실증주의는, 법을 인간의 제정 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자연법론의 입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법실증주의자치고 '있는 법'이 (연구와 분석을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있어야 할 법'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리 말해, '존재'(실제로 존재하는 것)와 '당위(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법실증주의자는 없다." "법실증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때까지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55-6)


"계몽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은 제레미 벤담(1748~1832)은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을 냉철한 이성을 통해 조명했다. 벤담이 보기에, 보통법은 언제나 불확정적이다. 불문법(unwritten law)은 본래 모호하고 불명확하기 마련인데, 불문법에 해당하는 보통법은 모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보통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명령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보통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벤담에게 그러한 체계적 접근이란 다름 아닌 법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법전이 있다면 법관의 권력은 현저히 제한될 것이다. 사법부의 기능은 법을 해석하는 일보다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이미 1804년에 2281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법전'이 공포되었던 대륙법계의 경우와는 달리, 영미법 국가에서 모든 법을 법전에 담아내기란 여전히 요원한 일이었다."(57-9)


"벤담의 제자였던 존 오스틴(1790~1859)이 제기한 법학의 영역에 관한 이론은 '법이란 주권자의 명령'이라는 생각에서 그 핵심적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오스틴에 따르면, 명령이 아니라면 애초에 법이 아닌 것이며, 일반적인 명령만이 법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주권자가 내린 명령만이 '실정법'에 해당한다. 오스틴은 법을 명령으로 이해했으므로, 관습법과 헌법, 국제법을 법학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관습법과 헌법, 국제법은 이를 제정한 주권자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스틴에 따르면, 제재란 주권자가 바라는 바를 준수하지 못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손해나 고통, 해악으로 정의된다.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 제재가 가해질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틴에 의하면, 최소한의 손해나 고통, 해악이 가해질 수 있다는 위협(threat)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제재가 부과될 가능성이 없어 한낱 바람을 표현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고 본다."(62-3)


"허버트 하트(1907~1992)의 법실증주의는 법을 대체로 강제라고 파악하는 벤담과 오스틴의 법실증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하트는 법을 해당 공동체에 실재하는 사회적 관행을 기술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하트는 공리주의와 오스틴과 벤담이 주장한 법명령설로부터 벗어난 법실증주의를 기획했다. 특히 법명령설에 대한 하트의 반박은, 법이란 총 든 강도의 명령, 즉 제재의 부과를 전제한 명령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하트의 이론의 핵심은, 법을 다루는 공직자들이 입법 절차를 규정한다고 인정하는 기본 규칙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규칙들 가운데 하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승인규칙(rule of recognition)이다. 승인규칙은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적 규칙이며,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은 이 승인규칙을 어떤 규칙이 실제로 규칙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효력 조건이나 기준을 명시한 규칙으로 인정한다."(68-71)


"칸트의 영향을 받은 한스 켈젠(1881~1873)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 같은 일정한 형식적 범주를 적용해야만 객관적인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즉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범주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규범(basic norm)과 같은 형식적 범주가 필요하다. 근본규범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법체계의 토대에 자리잡고 있다." "켈젠은 실정법의 규범들, 즉 누군가 행위 X를 저지르면 공직자는 그 행위를 저지른 자에게 제재 Y를 부과해야 함을 선언하는 '당위'만을 법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윤리적 요소 일체를 법으로부터 없애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켈젠은 '순수한(pure)' 법학을 통해 법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같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한다. 켈젠이 보기에, 법의 목적이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폭력의 독점화(monopolization of force)이다."(78-9)


"허버트 하트 같은 '연성(soft)' 법실증주의자들은 도덕적 내용이나 가치가 법의 효력을 갖기 위한 조건에 포함되거나 편입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와 달리 조셉 라즈(1939~  )는 법이 자율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법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도덕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라즈에 따르면, 법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관습과 제도, 법체계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도에 대한 사실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하나의 사실이지, 결코 도덕적 판단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즈는 '경성(hard)' 법실증주의자나 '배제적' 법실증주의자로 분류된다. '배제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라즈는 법을 통해 (도덕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법이 권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달리 말해, 법은 가장 중요한 행위 규범이며,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다."(85-6)


3 로널드 드워킨: 법은 도덕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로널드 드워킨(1931~2013)만큼이나 법실증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한 사람도 없다. 드워킨에 따르면, 〈법은 실제로 도덕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법률가와 법관이 하는 일은 민주 국가의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일과 다름없다.〉" "법관은 (논쟁적인 사안의) 해석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도덕적 주장과 유사한 논증들로 가득한 세계에 진입한다. 바로 이러한 법의 해석적 차원(interpretive dimension)은 드워킨 법이론의 근간을 이룬다." "드워킨이 보기에, 법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하트의 주장처럼) 오로지 규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아닌 기준도 포함된다.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을 맡은 법관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러한 (도덕적 또는 정치적) 기준들, 즉 원리(principle)와 정책(policy)을 논거로 삼게 될 것이다. 결국 드워킨의 법철학에는 법 원리와 도덕 원리를 구별 짓는 승인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과 정치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96-102)


"드워킨은 법은 본질적으로 '해석적 현상'이라고 본다. 드워킨에 의하면, 모든 법적 문제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법관은 정답을 찾아낼 의무를 진다. 법관이 찾은 해답이 정답이라면, 그 해답이 법관이 속한 사회의 제도적 역사와 헌법적 역사에 가장 잘 부합하고 도덕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워킨은, 법이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이를 토대로 법실증주의를 논박한다. 권리를 공공복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사항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에 대한 결론이 법관의 개인적 소신, 직관, 폭넓은 재량 등에 의해 좌우된다면, 개인의 권리는 심각하게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의 이익보다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드워킨은 개인의 권리를 '법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데 더욱 적합한 이론을 구성해낸 것이다."(103-4)


"드워킨이 보기에, 관행주의(나 법실증주의)는 법의 효력 기준을 둘러싼 논쟁들로 말미암아 많이 망가지고 말았다. 법실증주의자들은 승인규칙을 통해 X가 법이라고 확인되면 그 사실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즉 규칙의 기원(pedigree)이 규칙의 효력(validity)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워킨의 생각은 다르다. 승인규칙에 포함된 기준들만으로는 법의 효력 기초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이 '의미론적 독침(semantic sting)'에 찔려 있다고 비판한다. 즉 법실증주의자들이 법에 관해 벌이는 논쟁은, 알고 보면 '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둘러싼 의미론적 논쟁이라는 것이다." "드워킨은 이러한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어떤 주장이 타당한 경우를 확인하기 위한 기준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음에도 어쨌든 이러한 기준들이 존재해야만 유의미한 논쟁이 가능하다는 가정은 틀렸다는 것이다."(110-1)


4 권리와 정의


"(그 대상이 법적 권리이건 도덕적 권리이건 간에) 권리는 법과 법체계의 도처에 퍼져 있기에 법철학의 핵심 주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상은 법체계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가치에 해당하지만, 정의의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면 법 자체를 초월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기도 한다." "'권리란 무엇인가'에 응답하는 이론은 두 가지로 대변된다. 첫번째 이론은 '의사설(will theory)'로 알려져 있다. 즉 내가 무엇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할지 말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실제로 보장된다는 뜻이다. 의사설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이 강조된다. 두번째 이론은 '이익설(interest theory)'로 불린다. 이에 따르면, 권리는 단순히 나의 선택 가능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특정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이익설이 더 나은 설명을 제시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126-8)


# 이익설이 의사설을 반박하는 논리

1. '나의 권리'에는 다른 이가 내가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용할 의무가 있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할 권리나 특정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2. 권리에는 '실체적 권리'와 구별되는 '실체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특정한 권리를 선택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정치적·법적 논의에서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개념의 위상은 하늘을 찌른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거나 신문 기사를 읽어보라. 인권과 무관한 보도는 찾기 어렵다. 인권 개념은 ('자연권'의 형태로) 중세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지만, 17~18세기를 거치면서 인권은 종교적 색채에서 벗어나 이해되기 시작했고,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적 운동에 해당한다. 이러한 운동의 밑절미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 있다. 즉 우리 각자는 인간으로서, 다시 말해 바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종교,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기본적 권리들을 부여받았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권리들이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 그러한 권리들이 '상위법'에 해당하는 자연법에서 도출될 수 있는지 여부도 별다른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국제연합에서 1948년에 채택한 「세계 인권 선언」에는 인권을 보편적인 가치로 이해하고 보장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담겨 있다."(134-6)


"정의가 단순한 개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의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같은 것들은 같게, '다른 것들'은 다른 정도에 비례하여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곧 정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다시 '교정적(corrective)' 정의와 '배분적(distributive)' 정의로 구분한다. 교정적 정의는, 법원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때 문제된다. 배분적 정의는,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나눠주고자 하는 상황과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배분적 정의는 주로 (법관이 아니라) 입법자가 고려할 주제에 해당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서는 정의를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의지〉로 규정한다." "즉 정의의 핵심 속성 세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중요한 존재라는 점, 누구나 일관되고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 누구나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143-4)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정의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벤담식의 행위 공리주의─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는 그 행위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로 정해져야 한다─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좋음은 유쾌함과 불쾌함이 아니라 경험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가 그다지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밀이나 벤담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좋아해야 마땅한' 것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공리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정도를 최대로 늘리는 일에 대해 논의한다. 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개인의 선택권을 도외시하는 '좋음'에 관한 어떠한 이해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공리주의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유는, 정의의 기준을 따질 때 도덕적 직관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쉽게 와닿는 인간의 행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150-2)


"존 롤스(1921~2002)는 공리주의로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으며, 사회의 행복이 불평등을 통해 극대화되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불평등을 지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주장한다. 롤스에 따르면, 행복은 이익과는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행복은 자존감(self-respect)과 같은 '사회적 기본 가치(primary social goods)'와 관련을 맺는다. 특히 정의의 문제는 행복의 문제에 앞선다고 롤스는 생각한다. 즉 오로지 어떤 쾌락이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만 그러한 쾌락이 가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문 자체가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토머스가 고문을 하면서 얻는 쾌감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리주의자들이 '무엇이 좋은지'를 기초로 '무엇이 옳은지'를 정의한다면, 롤스는 그와 반대로 '무엇이 좋은지'보다 '무엇이 옳은지'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다."(160-1)


5 법과 사회


"에밀 뒤르켐(1858~1917)은 사회는 어떻게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회적 응집력을 촉진하고 유지하는 데 법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나아가 뒤르켐은, 사회가 종교의 힘이 퇴색하고 집단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보함에 따라 법의 주안점이 형벌(punishment)보다는 배상(compensation)에 놓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형벌을 통해 집단의 도덕적 태도가 표명되는 것이고, 형벌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가 지속된다고 한다." "형벌은 뒤르켐이 이해하는 범죄의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즉 국가는 국가를 거스르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집단의식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형벌을 〈사회가 특정한 행위 규범을 위반한 사회 구성원에 대응하여 작동하는 조직을 매개로 경중을 나누어 부과하는 강렬한 반작용〉으로 정의한다."(176-9)


"막스 베버(1864~1920)는 사람들이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유형의 정당한 지배를 제시한다. 첫째, 전통적 지배(traditional domination)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규칙과 권력의 신성함을 통해 정당화된다고 여겨진다.〉 둘째, 카리스마적 지배(charismatic domination)는 〈한 개인의 아주 신성한 일에 대한 헌신, 엄청난 용기, 본받을 만한 성품〉에 기초한다. 셋째, 법적-합리적 지배(legal-rational domination)는 〈제정된 규칙의 합법성 및 그러한 규칙에 따라 권위를 갖게 된 자들의 명령권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 물론 이 세번째 유형이 베버가 설명하는 법의 핵심 특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법적-합리적 권위라는 개념이 (법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는 법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베버의 가치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법적-합리적 지배와 현대 관료제 국가가 상호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184)


"카를 마르크스(1818~83)에 따르면, 법은 경제적 토대를 '반영'하며 계급을 억압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에서는 법이 필요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법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바로 국가가 노동자 계급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개혁적 법률을 제정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법률도 지배 이데올로기나 지배계급의 이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을 띤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무한히 행사할 수는 없고, 사회적 세력들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란 알고 보면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사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한 것이다."(189)


6 비판적 법이론


"넓은 의미에서 비판적 법이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법이론가들은 오랜 기간 법철학의 핵심으로 여겨져온 이론적 기획들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또 비판적 법이론에서는 자연의 이치로 여겨지는 것들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여성주의 법철학에서는 '남성중심사회(patriarchy)'가, 비판적 인종 이론에서는 '인종(race)'이, 비판법학에서는 '자유 시장(free market)'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메타 서사(metanarratives)'가 문제시된다." "비판적 법이론가들의 주된 목표는 법의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토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토대를 통해서는 법과 법체계가 제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비판적 법이론가들은 법을 다른 영역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분야로 여기는 생각에도 반대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법은 (정치나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이고 명확한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비판적 법이론가들은 법이 그러한 개념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206-7)


"1970년대에 미국에서 출현한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은 법체계의 기초에 놓여 있는 신념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첫째, 비판법학자들은 법은 체계가 아니며,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원리로 불린다. 둘째, 비판법학자들은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형태의 법적 추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형식주의(anti-formalism)의 원리로 불린다. 셋째, 비판법학자들은 인간 관계에 대한 유일하고 정합적인 견해가 법리로 요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비판법학자들은 법리를 통해 (대개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드러난다고 여기며, 그 가운데 어떠한 견해도 지배적일 만큼 정합적이거나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순(contradiction)의 원리로 불린다. 넷째, 비판법학자들은 (설령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법이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라 여길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주류(marginality)의 원리로 불린다."(222-3)


7 법을 이해하기: 아주 짧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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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8-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잘 모르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nana35 2022-08-29 21:14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 님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면 저에게도 기쁜 일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