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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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산상수훈은 빈민과 피억압민들을 칭송했다. 예수는 군중이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들을 똑같이 나누었으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보였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성격상 정신적이었고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제도적 수단까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다음 시대의 일부 사상가들은 국가 권력을 식량과 주거, 보수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과 관련해 유력한 저작으로 1516년에 출간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1601년에 나온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가 있었다. 모어는 보통 남자, 하물며 보통 여자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완벽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캄파넬라는 책에서 사생활에 총체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보편적인 공정성을 제도화한 사회를 묘사했다."(33-4)


"16세기 독일과 스위스의 기독교 분파인 재세례파는 사유 재산을 폐지함으로써 평등주의 구상을 실천했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뮌스터에서 권위주의적 체제를 수립했다." 1642~1649년의 영국 내전기에 활동했던 "수평파와 디거파는 의회군 편에서 싸우고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재산을 재분배하는 계획을 옹호한 급진적 집단이었다."(35-6) "그라쿠스 바뵈프는 광신적 전통을 유지했다. 바뵈프가 주도한 '평등파의 음모'는 개인의 출신이나 양육 환경 또는 현재의 조건에 근거한 차이를 혁명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그들은 연령과 성적 구분만 감안했다. '음모'는 모임을 결성했고 파리에서 지지를 호소했다. 바뵈프는 1796년 정부가 그를 체포하라고 명령할 때까지 자신의 정치를 즐겼다. 그때쯤 그의 급진주의는 공공질서에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전에 의기양양한 단두대 옹호자였던 바뵈프는 (사전에 평결이 결정된 재판을 받고) 수레에 실려 처형 장소로 끌려갔다."(36-7)


"생시몽은 위로부터 조직될 거대한 '노동자들의 연합' 창설을 목표로 삼았다. 노동자들은 재능에 따라 과제를 배당받고 일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이다." "샤를 푸리에는 '팔랑스테르'라는 소규모 공동체를 상정하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 자치 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젊은이들에게 수도사가 되라고 한 중세 가톨릭교회의 요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혁명 전략의 중심에서 국가를 제거하기를 원한 또 한 명의 프랑스인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었다. 그의 유명한 슬로건은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이다. 프루동은 모든 권위를 증오했고 독재적인 사회주의 형태를 계획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난했다. 정부를 철저히 혐오했고 독립적인 코뮌들의 자유로운 연방을 요구했다." "블랑키는 비밀 봉기 결사의 구성원으로 출발한 음모의 대가였다. 그는 지배 계급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촉진할 독재 체제를 수립하는 폭력 혁명을 옹호했다."(38-9)


"루소는 인상적인 어투로 "공공의 행복이라는 멍에를 온순하게 짊어지도록" 인민들을 훈련시킬 필요에 대해 썼다. 개인적·분파적 이익은 포기해야 했다. 사회 전체에 대한 충성 외의 다른 충성은 결단코 중지해야 했다."(43-4)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프랑스의 당대 역사를 분석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변화의 경로가 '위대한 사람들'의 탁월함이나 역동적인 정부가 아니라 사회 계급 간의 충돌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고, 마르크스는 계급들이 자신들의 객관적인 경제적 이해를 추구한다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적 규모로 공산주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계급 사회'가 존재하기 오래 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와 같이 완벽한 사회가 자본주의가 전복된 후 필연적으로 재생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53-4)


"독일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가장 유력한 회원 정당이었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은 죽어버린 국제노동자협회를 대체하기 위해 1889년에 만들어진 기구였다. 그것은 곧 제2인터내셔널로 알려졌다." "당은 선거에서 성공했다. 1912년에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확보하면서 제국의회에서 가장 큰 당이 되었다. 여전히 절대 다수는 아니었지만 당 대변인들은─카를 카우츠키 같은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당 지도자들도─다수당이 된 것이 막을 없는 성공의 물결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독일사회민주당은 원칙적으로 무장 봉기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더는 혁명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진정한 혁명을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득한 미래로 연기된 혁명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현재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을 점차 개선하는 데 있었다."(68-9)


"제일 먼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공격한 사람은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였다. 뵘-바베르크는 기술적 창의성과 기업가의 진취성이 마르크스의 경제 분석에서 부당하게 빠졌다고 지적했다." "베버는 (역사적 운동의 원동력에는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문화·종교적 요인 또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 자본주의 경제가 시작될 때 프로테스탄티즘이 수행한 역할을 지적했다." "로베르트 미헬스와 가이타노 모스카가 난투극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미래 사회가 위계제적 권위 없이도 존속 가능하다는 주장을 철저히 부정했다. 그들은 엘리트가 정치적 분쟁의 불가피한 산물일 뿐만 아니라 기능적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미헬스가 관찰한 독일사회민주당의 당직자들은 "평당원들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테두리 밖에서 정책을 결정했다." "그들은 혁명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치적 현상 유지가 이루어지도록 협조하고 있었다."(70-2)


"엥겔스의 서기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교리라는 마차를 수리할 완전히 새로운 바퀴들이 필요하다고 느낀 최초의 주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대부분의 독일 노동자들이 처한 끔찍한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조건이 개선되고 있음을 인정했다." "1890년까지 독일 총리를 지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초보적인 연금과 사회 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 정책의 목적은 비밀이 아니었다. 독일의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은 노동 계급이 혁명 활동을 지지하게 만드는 원천을 고갈시키려고 했다." "베른슈타인은 프랑스혁명을 놓고 즐겁게 떠드는 것에 경악했으며 독일사회민주당 당원들이 폭력 투쟁과 독재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은 중간 사회 집단들의 성장을 강조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설명하려면 마르크스주의가 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2-4)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맞서 혁명적 마르크스를 방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카우츠키이다. "그는 전 세계의 산업 조직적 발전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견한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계급을 진전시키는 열쇠가 거대 정당 설립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거대 정당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봉사하리라는 게 그 주장의 가정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 가정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 문필가 얀 마하이스키는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형적으로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식인들에게 정당의 위원회를 운영할 권한을 부여한다고 주장하는 저술을 집필했다. 그는 이것을 논리적 귀결로 보았다. 마하이스키는 인텔리겐치아가 적절한 행정 기구를 설비할 기술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사실로부터 노동 계급의 이익을 억압하는 쪽으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면 혁명은 중간 계급 출신의 엘리트들을 권좌에 앉힐 것이라고 주장했다."(77)


"룩셈부르크, 라데크, 판네쿡은 독일인 동지들에게 혁명에 대한 강렬한 헌신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베를린 지도부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던 이들은 신뢰와 열정을 품고 있었고 당 대회에서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끊임없이 촉구했다." "룩셈부르크는 거리에서의 대결을 옹호하기 위해 비공식적인 '좌익' 반대파를 설립했다. 국가 권력을 동요시키고 전복하기 위해 그녀가 선호한 방식은 '대중 파업'이었다."(78-9)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의식이 20세기 초에 쇠퇴하기는커녕 계속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본주의적 경제 생산, 대중 교육, 공공 언론이 동시에 확대된 데 원인을 돌렸다. 이러한 추세 덕분에 사람들은 지역적─특히 농촌─정체성을 민족적 정체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오토 바우어와 카를 레너 같은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이 현상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멘셰비키는 민족적-문화적 자치 계획을 열정적으로 채택했다."(80-1)


"러시아 정치경찰 오흐라나(Okhrana)와 반란자들의 쫓고 쫓기는 게임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합법적인 공적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없던 러시아 혁명 운동은 '이론'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 추종자들은 나라의 사회 질서에 관해 피 말리는 내부 논쟁을 개시했고 정치, 경제, 철학을 둘러싸고 서로 열변을 토했다. 그들의 추상화된 이념은 현실에서 시험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딱딱하게 굳어졌다." "혁명적 사상가들은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영감을 러시아의 농촌 토지 공동체에서 끌어냈다. 농민들의 주기적인 토지 재분배 전통은 평등주의적 변혁의 기반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곧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농민들 자신이 혁명의 필요에 계속 무관심했다." "플레하노프에 따르면 해결책은 혁명가들이 독일에서 확산되고 있는 (노동자 중심의)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하는 것이었다."(87-8)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지도에 신물이 났다. 당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자신만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레닌이 논쟁에 쏟는 열정과 그의 비밀스런 방식뿐 아니라 그가 제안한 엄격한 규칙들은 많은 동맹자들까지 괴롭게 만들었다."(90)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정치 방식에 집중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최종적으로 권좌에 오르더라도 '부르주아 국가'가 유지될 것이라고 추정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했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폭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믿었다는 증거를 찾았다. 레닌은 그들이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인 '이행' 가능성을 용인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이 두 나라에서 전개된 사태가 군국주의를 낳았으며 이것이 사회주의자들의 권력 장악을 유일한 실천적 혁명 전략이 되게 했다고 레닌은 주장했다."(108-9)


한때 반反볼셰비키 입장을 견지했던 트로츠키는 가장 눈에 띄는 볼셰비키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 과정의 두 단계─보통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정한 대로─를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생략한) 한 단계로 압축하기를 원했다. 레닌은 자신의 <4월 테제>에서 은연중에 이 희망을 승인했다."(112) "1871년의 파리코뮌은 지도자들이 적들을 적절한 만큼 강경하게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했다는 것이 볼셰비키의 주장이었다. 자신들은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권력과 영광에만 관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영혼도 변화시키고자 했다. 볼셰비키의 복음은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들에게는 그냥 전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강제로 주입하려는 세속적 복음이었다. 그들은 프랑스혁명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볼셰비키는 전화기와 기관총을 가진 자코뱅이었다. 그들은 지난 시대에는 없던 유형이었다."(115)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을 정치 파트너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각의 요구를 무시하고) 혁명 정부의 권위를 강요하면서 밀고 나갔다.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수장으로 하는 보안경찰─반혁명·사보타주와 싸우기 위한 전 러시아 비상위원회(즉 체카Cheka)─이 설립되었다. 이 기구의 임무는 10월혁명에 저항하는 세력을 뿌리 뽑고 분쇄하는 것이었다."(122-3) "볼셰비키는 국가 폭력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어 반체제 세력에 대응했다. 볼셰비키에 맞선 파업은 '소비에트 권력' 첫 해에 진압되었다. 노동자들이 도시 소비에트들에서 멘셰비키에 찬성표를 던지자 볼셰비키는 선거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군대를 파병했다. 농민들은 토지령에 감사하기는커녕 농산물에 대한 보상을 계속 조금밖에 받지 못하자 항의의 뜻으로 농산물 제공을 보류했다. 인민위원회의는 곡물을 몰수하려고 무장 병력을 보냈다."(126)


명령의 중앙 집중화가 우선적으로 수행되고, 선거 절차는 의례적인 형식이 되었다. "1923년에는 당의 이해득실에 결정적인 모든 직책들을 명부에 싣는 정책이 비밀리에 도입되었다. 이 정책은 '노멘클라투라'라고 불렸다. 처음에 이 정책은 '중앙'에 적용되었다. 각 지방 당 위원회 위원장직뿐만 아니라 인민위원회의 의장직부터 크렘린 구내 경비 사령관직에 이르는 직책들이 포함되었다. 이 절차는 그 후 '지역'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이런 식으로 당은 신뢰할 만한 간부를 공공 기관에 심어 중앙 정책에 대한 순응을 보장할 수 있었다."(130) 공산주의자들이 후견-피후견 관계를 넘어 정실주의, 가족주의의 면모를 띠면서 "이제 공산주의 체제에서 바퀴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맡은 직무를 얼마나 유능하게 수행하는가보다는 얼마나 오랫동안 공산주의자였고 어느 지도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충성심이 능력보다 더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었다."(132)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레오 요기헤스는 베를린에서 '봉기'를 조직했다. 그들은 지적 능력 면에서 준비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계획을 짜는 부분에서는 완전히 무능력했다."(143) 국제적 정치 혁명에 대한 레닌의 희망과 달리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은 공장 소유자와 성직자, 지주에 맞서 궐기하는 대신 피우수트스키 주변에 결집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토리노를 장악하기 전에 도시의 반란자들을 진압했다. 그람시와 그의 동지들은 여전히 자유로웠지만 그들의 혁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났다. 공산주의는 유럽의 양 끝에서 분쇄되었다."(154-5) "1921년과 1923년에 독일에서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대실패는 코민테른에 유익한 교훈 하나를 남겼다. 그것은 러시아 외부에서 혁명적 시도를 벌이는 일은 당분간 극히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노동 계급의 피를 대가로 얻은 교훈이었다."(158)


1919년에 창설된 "코민테른의 일반적 목표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기존 당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공산당을 설립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당 정치국과 외무인민위원부는 공산주의인터내셔널에 자금을 댔다."(177)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이 제기한 조건들은 "러시아공산당 규약을 본뜬 것이었다. 중앙 집중주의, 복종과 선택의 원리가 부과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는 회원 정당들을 지도하고 징계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론적으로는 러시아공산당도 그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한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은 다른 나라 공산당의 안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조정이 요구되었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군대에서 전투원이 될 것이었다."(179)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는 볼셰비즘화에 관한 명시적인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조직 구조와 실행에 남아 있던 약간의 독자성은 제거되었고 러시아는 선善의 모델이자 그 모방자들의 심판관이 되었다."(182)


"1919년에 결성된 미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America)과 공산주의노동당(Communist Labor Party)은 서로 경쟁 당보다 레닌주의를 잘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은 두 당의 통합을 지시했고 "1921년 12월 뉴욕에서 창당 대회가 열렸다. 통합 조직은 미국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으로 명명되었고, 코민테른을 최고 권위로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 모든 정당을 망라했다."(191-2)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권위는 당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었다. 정책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분란이 발생했다. 개인들의 충돌은 당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도자들은 종종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일보다 서로를 반대하는 데 열중하는 것 같았다. 당이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196) 1929년 대공황은 "코민테른의 전 지구적 진단에 따르면 당의 인기를 급상승시켜야 했다. 그러나 당원 수는 1919년 7,500명에서 1939년 9만 명으로밖에 늘어나지 않았다."(201)


1930년부터 미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USA)으로 이름을 바꾼 "당의 전반적인 정책은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았고 브라우더는 그들에게 순종적인 광신자였다. 독·소 불가침 조약의 체결과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스탈린이 요구한 대로 브라우더는 미국이 갈등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정책은 뒤집어졌고, 미국공산당은 서유럽에서 '제2전선'을 개설하기 위해 미국의 치어리더가 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방침은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고 히틀러는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애국 정당으로 과시할 수 있게 되었고, 브라우더는 1942년 5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과거 정책의 관 뚜껑에 못질을 하면서 그는 소련, 미국, 영국의 대동맹이 지닌 잠재력을 찬양했다."(202-3)


점차 서방에서 정치적 좌파 편에 있던 많은 이들이 소련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다. "보그다노프는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자율적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은 가치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223) "그람시는 볼셰비즘의 군사주의적 측면을 싫어했다. <옥중수고>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노동 군대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으며 '무기의 힘'에 대한 스탈린의 의존에 대해서도 유사한 판단에 도달했다. 또 외부 세계의 객관적 현실에 대한 조악한 믿음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 부하린에 대해서도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그람시는 공산주의자들이 공리적 명제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실제로 자신들의 사상을 시험해보기를 원했다. 그는 공산당의 '경직화'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 그람시가 자신이 소장한 도서 중에서 감옥에 넣어 달라고 한 책 중에는 지도자들이 추종자들로부터 단절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 로베르트 미헬스의 고전전 정당 연구서가 있었다."(225-6)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내전 동안 반대파들이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한 당의 조직 체계를 이상화했다. 두 사람은 가혹한 검열이나 국가의 언론 독점에 반대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언론에서 종교와 민족적 주장, 여타 반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들은 1930년대 초의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를 비난했지만 전반적으로 공산주의의 적들을 박해하는 일은 승인했다. 사실 더는 그것을 박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무자비한 조치로 혁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가정에 의견을 같이했다."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가진 생각은 다음과 같다. "당 조직가와 공산주의 선전가들은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인민들 자체─을 설득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저지해야 한다. 세금 인하를 요청한 농민들은 무시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적 선善을 확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247-8)


"스탈린의 정신은 태어날 때부터 흡수했던 경건한 신앙심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스탈린은 사제로 훈련받았지만 공식 기독교 신앙이 숲의 정령에 대한 믿음, 주술, 밤의 악행 같은 더 오래된 사상들과 뒤섞여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았다. 필요할 경우 마법의 주문을 써서라도 검은 세력의 공격에 맞서 선을 보호해야 했다. 사람과 사물의 외관이 기만적일 수 있다는 인식은 이런 사고방식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현실은 겉모습과 다를 수 있고 점잖은 사람들은 속임수에 넘어갈까 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속임수가 도처에 만연했다. 그루지야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농민 가족들 사이에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 이 관점은 (소련 공산당의 공식 역사로 집필된) <단기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 언어로 재생산되었다." "게다가 '인민의 적들'은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난 이후에 더 위험하다고 주장되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사고방식에 스탈린이 기여한, 많지 않은 독창적인 것 가운데 하나였다."(291-2)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로부터 재촉받을 필요 없이 내부 억압을 단행했다. 1934년 중국 남부를 떠나 대장정을 수행하는 동안, 그리고 그 후 옌안의 '붉은 해방구'에서 가장 작은 반대파마저도 절멸하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노력 때문에 동지 정신은 무너졌다. 마오는 정적들에 대한 비난을 날조했다.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그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정적들이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주장했다."(303)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유별나게 자신의 당을 난타했다. 소련 독재자는 소련에서 공산주의 권력을 굳히기를 원했고 그 목적으로 대규모 억압 정책을 실시했다. 마오쩌둥은 국가 권력을 아직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홍군은 형성 중인 공산주의 국가였고, 그의 억압 조치는 스탈린과 같은 논리를 따랐다. 소련과 중국의 선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과 캄보디아 등지에서 그대로 따르게 될 것이었다."(306)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스탈린은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방법을 급박하게 생각하면서 코민테른을 폐지하는 발상으로 되돌아갔다. 세계 공산주의의 명목상 지도자인 디미트로프는 1943년 5월 8일 자신이 해임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스탈린은 자신이 이제 세계 혁명을 꾀하지 않는다고 미국과 영국을 안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공산당들이 곧 있을 세 거두의 회담 전에 정치적 경계 태세를 풀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탈린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붉은 군대가 막 유린할 유럽 국가들에서 공산주의의 매력을 극대화하려는 충동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코민테른의 중앙 기구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국제부로 단순이 이전되었을 뿐이었다. 국제부의 수장은 다름 아닌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였다. 이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각 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지령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스탈린에게 중요했다."(348-9)


전후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를 빼고 그 수가 매우 적은 데다 경험도 없었다. 전에 나치와 그들의 동맹자들도 이러한 사실에 주목했다. 붉은 군대는 무적이었지만 스탈린은 보안경찰이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신뢰할 만한 행정 기구가 없었다. 피점령국의 경제를 신속히 회복시킬 재원도 없었다."(361) 따라서 "동유럽 공산주의자들 중 일부는 제3제국의 동맹국으로서 자국 군대가 소련에 끼친 손실에 대해 소련이 요구하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자신들의 첫 번째 국가적 의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동독이 여기에 해당되었고 부다페스트가 지불한 보상 금액은 1947년 헝가리 국가 예산의 절반에 달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경제를 접수한다면 전후에 닥칠 불가피한 고통에 대한 비난을 받을 것이었다. 얼마간의 정치적 절제가 요청되었다. 스탈린은 여러 정당이 참가하는 민주주의 연립이라는 방패 뒤에서 공산당들이 전진할 것을 요구했다."(363-4)


스탈린을 모방한 집단화 정책이 실패한 뒤 틀에 박힌 소련식 체제보다 느슨한 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베오그라드는 1949~1952년에만 미국 돈으로 5억 달러 상당의 비상 원조를 받았다. 서방의 나라들이 유고슬라비아에 무기를 판매하자 군사 안보도 굳건해졌다. 이것은 스탈린이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상황, 즉 서구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동유럽으로 침입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티토도 정치적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는 그리스의 공산주의 혁명에 적극적인 지원을 그만두었고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대한 권리 주장도 포기했다."(400) 티토가 결성을 주도한 비동맹 운동은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또다른 균열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1956년 공산주의에 맞선 헝가리 봉기에 깜짝 놀란 티토는 소련의 군사 침공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일당 국가의 보존은 그에게 자명한 이치였다."(402)


그리스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스탈린은 "니코스 자카리아디스와 마르코스 바피아디스가 이끄는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에게 내전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자카리아디스와 바피아디스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 편에 섰던 충성스러운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러나 모스크바로부터 지원이 끊겼는데도 두 사람은 미국으로부터 풍부한 원조를 받던 정부군과 싸움을 그만두지 않으려 했다. 산악 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조치는 점점 더 극단적이 되어갔다. 사람들이 인질로 잡혔다. 테러와 학살을 저질렀고 청소년을 대규모로 강제 징집했다. 의심을 산 마을들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전쟁하는 동안 양측에서 모두 고문과 살육이 만연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반란은 승산이 없었다. 1949년 말에 공산주의 봉기는 분쇄되었고 반정부군 잔당은 알바니아로 도주했다."(418)


경제적 부활이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사이, "마오쩌둥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촌락과 민족 문제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을 형성했다.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마오쩌둥은 소련의 당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로 권력을 잡은 소련 모델을 적용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보기에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필요해 보이면 무엇이든 변경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역경을 견뎌내고 마침내 권력을 수중에 넣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자신의 독립성을 양도할 생각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대중이 누구를 박해해야 할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대중이 억압에 가담한다면 대중 자신과 혁명 정권의 관계를 계속 가깝게 인식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재산을 인민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공식 정책에 포함했으니 대중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계속 호의적일 이유도 존재했다."(445-6)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이 저지른 실수에서 항상 무언가를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앓았고 똑같은 식으로 큰 실책을 저질렀다. 때때로 외국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히 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매우 억압적인 정책을 강제했다. 소수의 동유럽 지도자들은 약간 온건해져야 한다고 여겼으나 크렘린의 반응이 두려워 움츠러들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국가의 질서에는 거의 융통성이 없었다. 일단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 통치를 맡으면 구조와 실천과 정책의 선택은 놀라울 만큼 획일적으로 이루어졌다."(458) "정책에는 사회가 다수의 충성스런 국민과 반역 가능성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었다. 충성에 대한 시험은 정기적인 전국 선거와 함께 이루어졌다. 선거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나, 그래도 모든 사람이 투표해야 했다."(464)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지도부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공산주의 원리는 어떠한 '개인 숭배'와도 대립한다고 선언되었다. 스탈린이 공공연히 비판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유산은 단호한 공격을 받았다. 미국에 예비 교섭이 제안되었고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이 추방된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일은 사라졌다."(480) "동유럽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흐루쇼프의 이른바 '비밀 연설'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을 흐루쇼프와 그의 동료 개혁가들보다 더 잘 헤아렸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이 나라들을 정복했다. 어떤 공산주의 정권도 선거를 통해서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 모두 경찰 국가였다. 스탈린이 전제군주로 비난받는다면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줌의 정당성마저도 사라지는 셈이었다. 흐루쇼프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고 소련의 대외 정책을 개혁하는 데 집중했다."(485-6)


인민들의 불만이 거세게 몰아치는 가운데 "1956년 가을의 부다페스트는 소련에 맞서 전체 인민이 일으키는 봉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재차 확고히 다지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은 흐루쇼프는 11월 4일 헝가리에 전차를 진입시켰다." "흐루쇼프는 임레 너지처럼 도전적 행동을 하는 공산주의자가 동유럽에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소련은 당시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제1서기였던 야노시 카다르의 괴뢰 정부 수립을 승인했다."(488) "폴란드의 고무우카만이 흐루쇼프에 반대했다. 그는 흐루쇼프의 바람과는 달리 권좌에 복귀했고 나중에 바르샤바에 적용될지도 모를 선례가 부다페스트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은 결코 미국과 경쟁하기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흐루쇼프는 소련의 국가와 사회 질서가 자본주의 세계 전체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다."(490-1)


"마오쩌둥은 세계 자본주의와 세계 공산주의의 '평화 공존' 전략에 혹평을 퍼부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동지들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결과를 소련과 미국이 전 세계를 공동 통치하려고 결탁한 징조로 간주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의 타협을 유럽 제국들이 남긴 빈 공간을 채우는, 제국주의의 가장 새롭고 가장 무서운 표현이라고 생각했다."(498) "흐루쇼프가 제도를 자주 바꾸는 바람에 고용 안정과 특권을 위협받은 당과 정부 관리들 사이에서 극심한 분노가 생겨났다. 쿠바 미사일 사건으로 소련에 뒤집어씌운 모욕에 대한 불만도 팽배했다. 흐루쇼프가 발탁한 인물이 구성원의 대부분이었던 당 간부회는 1964년 10월 흐루쇼프를 평화적인 쿠데타로 제거했다." "브레즈네프는 정책에 관해 동료들에게 자문하고 '집단 지도 체제'를 유지하며 모든 문제에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간부의 안정화'를 목표로 채택했다. 당 관리들은 당 노선을 따르는 한 평생 일자리를 보장받았다. 499-500)


"1972년 2월, 닉슨과 키신저의 주도로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친선을 맺자, 미국이 소련에 대해 온건해진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충격이 발생했다."(504)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정책을 그대로 고수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잊지 않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소련 지도부는 미국인들이 동유럽에서의 행동 방침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안전하다고 느꼈다. 알렉산드르 두브체크 주도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들이 장차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질 급진적인 정치·경제 개혁 과정에 착수하자 브레즈네프는 1968년 8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령했다. 크렘린은 또 1970년 12월에 폴란드에서 독립적인 노동 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할 것도 승인했다. 전 세계에서 소련의 명성은 점점 더 하락했다. 동유럽과 쿠바에 석유와 가스를 인위적으로 낮춘 가격으로 공급하면서 소련 예산은 '외부 제국'을 유지하느라 추가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다."(505)


"루카치는 소련에서 1920년대 말에 반레닌주의적이라고 비난받던 사상에 여전히 충실하면서도 자신을 레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 계급이 혁명 과정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다시 한 번 공개적으로 역설했다. 자본주의가 인민들을 모든 인간적 가능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상황을 창출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루카치는 노동자들만이 이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 전체를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상투적인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을 요구한 또 한 명의 베테랑 공산주의자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였다." "그는 경제적 지상 과제뿐만 아니라 성적 충동도 정치와 사회 기제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제는 미국공산당을 멸시했고 어떤 조직도 편들려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젊은 투사로서 쌓은 경험은 노동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잠식했다."(577-8)


#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동유럽

1. 헝가리 : 소련이 무력으로 임레 너지 정권을 카다르로 교체. 카다르는 신경제메커니즘 선포(시장 경제 도입)

2. 루마니아 : 차우셰스쿠가 산업화에 주력하는 스탈린 식의 일당 독재 고수, 민족주의 정서 강화

3. 알바니아 : 엔베르 호자는 흐루쇼프와 티토가 ‘현대 수정주의’의 지도자라고 맹비난

4. 동독 : 동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찰 국가. 울브리히트는 서독과의 경쟁을 의식하여 신경제체제를 도입했지만, 동시에 베를린 장벽도 건설

5. 폴란드 : 고무우카는 경제 통제를 완화하는 한편 애국적 지지를 규합하고자 유대인 차별 시작

6. 체코슬로바키아 : 1968년, 개혁을 방해하던 노보트니가 해임되고 후임 두브체크가 각종 국가 통제 완화 정책을 급격하게 실시하자 바르샤바조약군이 8월 20~21일 침공(프라하의 봄)


#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서유럽 (공산당)

1. 이탈리아 : 톨리아티와 베를링구에르는 당이 평화적인 선거 전략에 헌신해야 한다는 유러코뮤니즘 전략 도입

2. 스페인 : 1976년 프랑코 사망 후 귀국한 카리요는 유러코뮤니즘 교의에 동의했지만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

3. 포르투갈 : 모스크바와 우호적 관계 유지

4. 프랑스 : 1972년 서기장이 된 조르주 마르셰는 유러코뮤니즘 관점을 받아들였으나, 당은 확고한 친소련 태도 유지

5. 영국 :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과 결별


베트남 전쟁의 패배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에서 베트남을 축출했지만 하노이는 좌절하지 않았다. "레주언이 이끄는 공산주의 지도부는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베트남은 소련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리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중국은 "통일된 베트남이 국경을 넘어 군사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것이라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하노이에 대한 지원을 거두어들였고, 베트남이 코메콘에 가입하고 소련과 굳건한 동맹을 맺은지 몇 달 후인 1979년 2월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짧은 전쟁이 발발했다. 인도차이나는 희한한 정책을 초래하는 분쟁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서방 지도자들은 어디에서 공산주의가 솟아오르든 반대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친선을 도모하고 심지어 폴 포트의 공산주의 테러 정권을 지지했을 때인 1970년대에 버려졌다. 지정학, 민족적 적대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마녀의 냄비 속에 뒤섞였다."(627)


1975년 4월 캄보디아를 장악한 폴 포트는 광신적인 마오주의자였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을 농촌으로 몰아넣는 야만적인 운동도 벌였다. 그러나 마오쩌둥도 자기 나라 도시들을 폐쇄하지는 않았다. 폴 포트는 도시의 삶을 공산주의 진보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부당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630) "폴 포트 치하의 테러는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야만스런 행위를 저질렀다. 캄보디아 인구의 약 5분의 1이 죽었다.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일은 인구학적으로 20세기의 모든 공산주의 혁명 중에서 가장 파멸적인 결과였다." "폴 포트는 자국의 베트남 소수 민족에게 테러를 가했고, 어리석게도 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침공했다. 하노이 당국은 망명 군대 창설에 도움을 주었고, 적극적인 베트남 요소를 지닌 망명 군대는 크메르 루주를 공격하여 1979년 1월 폴 포트 정권을 전복했다."(632)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 단체 할크가 "카불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20세기의 마지막 공산주의 혁명이었고, 공산주의가 대규모 억압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련 동지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바에 자주 질겁했다. 그들은 스탈린 통치의 공포를 기억하는 세대에 속했고 폴 포트, (집집마다 수색을 벌여 반대파를 숙청한 '붉은 테러'의 집행자 에티오피아 대통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하피줄라 아민의 무모함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혁명은 초기 볼셰비키보다 더 거친, 심지어 스탈린과 마오쩌둥보다 더 거친 사람들이 이끄는 혁명이었다." "그렇다고 살바도르 아옌데의 점진주의적 접근이 더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아옌데 정권은 피노체트가 공격을 가하기도 전에 이미 경제적 재앙과 정치적 붕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혁명 통치는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내리막길로 밝혀졌다."(640-1)


"1988년 4월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하겠다는 결정을 공표했다. 그리고 1988년 12월 뉴욕의 국제연합 기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제 관계에서 '계급 투쟁' 같은 이데올로기적 원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레이건은 "두 번의 연설─한번은 1987년 6월 베를린 장벽에서, 또 한번은 1988년 5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을 통해 고르바초프가 현재 듣고 싶은 것을 훨씬 넘어서는 말을 했다. 서베를린에서 레이건은 그 자리에 없는 소련 지도자에게 요구했다.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파괴하시오!" 1988년 5월 모스크바에서 레이건은 거대한 레닌 흉상 아래 어울리지 않게 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란 단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정부 권위가 진실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고르바초프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동유럽의 현 상황에 대한 저항의 불길을 북돋우리라는 사실을 자신의 전문적 자문관들보다 더 잘 이해했다."(655-6)


1989년 고르바초프의 의도적인 방관 아래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차례대로 전복되었지만, 미국은 소련의 해체를 원하지 않았다. "동유럽과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일과 다민족 강대국이 따로 떨어진 불안한 개별 단위로 해체되는 일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12월 8일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대통령들은 소련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부시는 여전히 고르바초프를 옹호하며 돌아다녔다. 부시에게는 역사적 상상력이 거의 없었다.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부시는 '발트 국가들'(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연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분리되더라도 다른 소련 공화국들이 반드시 그 뒤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정에 집착한 것 같다. 부시는 경주가 끝난 뒤 패배한 말에 돈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필연성에 굴복했고 러시아를 독립시켜 달라는 옐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소련은 1991년 마지막 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종언을 고했다."(660-1)


1990년대 들어 공산주의 국가들이 속속 자본주의로 전향하고 '역사의 종언'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그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715) "그루지야와 키르기스스탄을 제외한 다른 옛 소련 공화국들은,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애국자로 변신하여 정치적 후원 관계를 이용한 공산당 당수들이 이끌었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바로 그 전형이었다." "대부분의 옛 소비에트연방 국가들에서 공산주의는 평화적으로 포기되었지만, 일부에서 끔찍한 예외가 발생했다. 러시아인 엘리트와 몰도바인 엘리트들은 몰도바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부족적·종교적 경쟁은 타지키스탄의 아프간 국경에서 광포한 내전을 야기했다. 체첸은 러시아연방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을 둘러싸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혈전이 격렬하게 펼쳐졌다."(718-9)


"소련과 동유럽의 몇몇 국가들에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부패, 사회적 특권이라는 특징이 계속 남아 있다. 후견-피후견 관계, 선거의 속임수, 경찰국가적 통치 방식은 어느 곳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741)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체주의적 사상과 제도와 실천은 극우파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법, 헌법, 국민의 동의를 무시하는 일당·유일 이데올로기 국가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이탈리아와 독일에 이식되었다. 무솔리니도 히틀러도 공산주의에 대응해 행동한 것만은 아니었고, 포괄적 통제에 사회가 강제로 굴복한 양상은 소련, 이탈리아, 독일에서 각각 다른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선례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생활의 모든 측면에 침투하는, 아무런 제한 없는 국가 권력이라는 목표는 그들이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동일한 현상이 사담 후세인의 세속주의 바트당 체제에서도 등장했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통치에서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이 지향한 이슬람주의 구상에서도 나타났다."(7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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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y028 2021-05-1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 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