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관념론 철학
니콜라이 하르트만 지음, 이강조 옮김 / 서광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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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부 피히테, 셸링, 낭만주의


서론


"독일관념론 사상가들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의 목표는 최후의 명백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는 포괄적이며 엄밀하게 통일적인 철학 체계의 창출이다. 모든 사상가들 앞에 저 〈미래의 형이상학〉의 이상이 떠올랐고, 칸트의 강력한 사유의 노력이 처음으로 그 서설을 제공했다. 그들은 칸트가 그의 후기의 두 비판에서 이 형이상학을 이미 개설적으로 구상했다는 사실을 전연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설은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체계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철학의 이념을 충족시키면서 성립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체계가 가능하고 또 인간 이성이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일체의 운동은 젊은이처럼 강력하고, 창조를 기뻐하는 철학적 낙천주의의 특징을 띠고 있다. 일체의 회의는 단지 통과해야 하는 단계의 의미, 검사 및 숙고의 법정이라는 의미, 그리고 여러 문제들을 보다 깊이 내면화하고 철저하게 처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을 의미를 가질 뿐이다."(24)


"이러한 철학적 전개에서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무엇보다도 철학적 영역에서 시도했고, 무한자와 비합리적인 것으로 향하는 그들의 동경의 정신을 관념론적 사변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이다. 유사한 내용이 횔더린에게도 일정 부분 적용된다." "비판적-체계적 사유의 구조 속에서는 낭만주의적, 범신론적 그리고 신비적인 요소가 우선은 여전히 이물(異物)처럼 작용하지만, 이것이 저 사유를 처음에는 천천히 안으로부터 밖으로 완성시켜서 그 직선적 궤도로부터 밀어제친다." "칸트로부터 합리주의적이라는 기분이 드는 관념론이 여기서부터 겪게 되는 만곡(彎曲)은 가장 실증적으로는 윤리학, 미학, 그리고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합리주의는 느지막하게 쇼펜하우어 및 셸링의 후기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만연한다. 반면에 사상적 동기의 풍부함에 있어서 낭만주의적 창작 및 생활의 덕을 입고 있는 헤겔은 최후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전능에 대한 믿음에 충실하고 있다."(27-8)


1장 칸트학도와 반칸트학도


"라인홀트는 〈비판〉을 체계로 변형하려는 요구를 가진 최초의 인물로서 등장한다. 비판은 이론적 부분에서는 경험으로부터, 실천적 부분에서는 도덕법칙, 즉 어떤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비판에서는 통일적인 전제, 즉 일체의 것이 도출될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 원리가 결여해 있다." "동시대인들은 칸트의 철학을 라인홀트의 철학에 비추어서 보았다. 그리하여 두 이론 간의 구별이 우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라인홀트가 전체적으로 보아 칸트철학의 의도를 긴밀하게 고수하면 할수록, 그만큼 바로 요소 철학의 일련의 특유한 특징들이 매우 성과 있는 방식으로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정말로 진실로 남아 있다. 이 특징들은 다음의 것이다. ①형식과 질료 이론의 관철, ②물자체의 필연성과 인식 불가능성의 정립, ③체계의 출발점으로서의 원칙의 통일성, ④조건들의 연속적인 제시로서의 도출 방법, ⑤실천적 능력에 의한 이론적 능력의 피제약성."(34, 41)


"마이몬에게도 물자체가 우선 장애가 되는 주요점이다. 그는 이 개념의 해명을 애초부터 회의적으로, 즉 바로 비판 자체의 그 정의들로부터 얻으려고 한다." "마이몬은 최초로 관념론적 관점을 진지하게 다룬다. 라인홀트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유할 수도 없다. 우리가 물자체에게 덧붙이는 모든 징표─단지 촉발 원인의 징표일지라도─는 의식 속에 정립되어 있고, 따라서 사실상 물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어떤 구조물에 귀속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의식의 바깥에 있는 물자체는 징표를 갖지 않은 대상일 것이고, 어떠한 사유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유는 징표에 의한 규정 작용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물이 아닌 것〉일 것이다. 마이몬은 그것을 수학의 허수에 비유한다. 이에 반해서 비판적으로 이해된 물자체는 유리수와 똑같이 실재하는 무리수─이 무리수가 근사치의 무한 계열의 한계치를 형성하기 때문에─에 비유된다."(49)


"그러나 마이몬은 자기의 고유한 입장을 가장 엄격하게 순수 이성 비판의 입장으로부터 구별할 줄 안다. 이 구별은 출발점 안에, 즉 사실의 문제 안에 놓여 있다. 칸트와 함께 그는 경험의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학문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이론(異論)을 제기한다. 이 점에서 그는 흄과 일치한다. 수학만이 선천적 종합판단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경험적 회의주의〉라 부른다. 경험적 회의주의는 슐체의 회의주의처럼 비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을 전제하고 있고, 비판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판의 절차만이 모든 경험은 불완전한 인식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이몬의 〈경험적 회의주의〉는 결코 경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경험적 사실 인식은 결코 〈온전한 의식〉이 아니다. 그러한 어떤 온전한 의식에게는 사실을 산출해 낸 선천적 형식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속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이몬의 회의론은 근본적으로 순수한 선천주의이다."(54-5)


"야코비에게 칸트의 체계는 순수한 주관주의를 의미한다. 칸트가 경험론적-관념론적 이해를 거부하게 되는 객관주의적 전환은 야코비에게는 관점상의 탈선으로 간주된다." "야코비가 보기에 우리가 칸트와 함께 물자체를 존립시킨다면, 비판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비판의 전체의 구상은 자발성과 수용성의 이원성에 기초해 있고, 수용성은 주관 바깥의 현존재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물자체 없이는 비판의 관점은 획득될 수 없고, 그러나 물자체와 더불어서는 비판의 관점은 주장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야코비에게는 비판적 관점의 유지 불가능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그는 비판의 결과로부터 역(逆)의 귀결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관념론과 물자체는 통일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포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관념론은 많은 가능한 관점 중의 하나일 뿐이고, 물자체는 모든 인식의 필연적 상관자이다. 따라서 물자체는 고수되어야 하고 관념론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실재론적 관점이 일어난다."(62-3)


"야코비는 자기의 신앙 이론을 매우 엄밀하게 칸트의 이론으로부터 구별할 줄 안다. 칸트 역시 물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서 승인하고 있고, 신앙에게 지식을 초월하는 우월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 신앙은 다만 실천적 확신을 갖고 있을 뿐이고, 따라서 이 신앙은 그 대상의 실재적 본성 속에서가 아니라, 단적으로 신앙하는 주관의 본성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신앙은 역시 인식 조건의 전체 계열과 똑같이 정확하게 주관적이다. 표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은 신앙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에 반하여 야코비에 의하면 신앙은 실재적 대상의 본성 속에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비주관적인 것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천적 확신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 확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대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 신앙을 통해서 제약되어 있다." "야코비에게 〈이성〉(Vernunft)은 곧 초감성적인 것의 〈지각〉(Vernehmen)을 의미한다. 이성은 칸트가 부인했던 능력, 즉 지적 지관을 소유하고 있다."(64-5)


"바르딜리는 칸트가 일관성 있게 주관의 자체 존재 이외에 어떠한 다른 자체 존재도 승인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 확정된 것이라고 본다. 이때 칸트의 철학은 주관으로부터의 객관의 연역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객관을 이와 같이 〈숙고하여 이끌어 내는 일〉을 실제로 수행하는 피히테의 시도는 바르딜리의 마음에는 길 잃은 형이상학을 위협하는 본보기로서 떠오른다. 이 시도를 거스르는 것은 야코비가 의지했던 상식의 자연스런 요구라기보다 바로 논리학의 엄격한 학문적 요구이다." "바르딜리는 야코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에서 비판철학에 일격을 가한다. 지각의 본성이 아니라, 순수 사유의 본성이 객관의 실재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응하여 바르딜리의 실재론 역시 야코비의 실재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르딜리의 실재론은 〈순수한〉(즉 선천적인) 또는 〈합리적〉 실재론이다. 그는 논리적인 것의 실재성을 모든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공동의 존재 토대라고 주장한다."(68-9)


2장 피히테


# 구상력(構想力) : 칸트 철학에서는 감성과 오성(悟性)을 매개로 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능력을 이른다.


"피히테의 철학적 근본 관심은 라인홀트와 매우 유사하다. 그 역시 철저히 윤리적-종교적 측면으로부터 칸트철학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피히테는 처음부터 칸트철학의 전체에, 그리고 기술되지 않은 보다 더 내면적인 이 철학의 핵심에 관계한다." "피히테는 라인홀트가 이미 그랬던 것처럼 결정론을, 비록 이 결정론이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필연적인 것으로 증명된다 할지라도, 적대적인 어떤 것,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게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라인홀트보다 본성상 더 힘 있고 무리하게 그의 사상을 전환시켜 다음과 같은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바로 이 이론적 필연성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고, 이론적 필연성이 최종적인 단안이라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도덕적 존재의 자유가 최초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주어지는 과제는 자연적인 것과 결정된 것의 세계가 어떻게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이해되는가를 지적하는 일이다."(80-1)


"이론적 자아는 비자립적이다. 이론적 자아에게는 비아(이론적 자아의 대상)가 영원히 대립한다. 이론적 자아는, 순수한 관념론이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비아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아의 독립성 때문에 자기 자신도 지양하게 될 것이다." "의식의 고유한 이론적 본질은 결코 의식을 이 이원성 너머로 올려놓을 수는 없다. 이 본질은 이원성, 즉 비아에 결부되어 있다. 단순히 이론적이기만 한 관점이 물자체를 극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자아는 동시에 행위 하고 있다. 행위는 대상에 대한 역의 관계를 의미한다. 자아는 행위 속에서 창조하면서 또 형태를 만들면서 비아에 간섭하게 되고, 자기의 상(像), 즉 자기의 정신의 목적에 따라서 비아를 변형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아에 대한 자기의 우월을 표명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자아는 사실상 산출적이다. 비아의 자아와의 동등한 권리는 여기서 중지되고, 이것과 더불어 이원성이 종말을 고한다."(89)


"행위 함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고, 직관될 뿐이다. 행위의 본질은 존재에 대한 그것의 대립으로부터 비로소 뒤늦게 파악된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아의 본질은 비아의 본질 속에서 비로소 인식된다. 직관은 아직도 인식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철학자 자신의 직관을 피히테는 이제 〈지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지적 직관은 행위에 대한 직접적 의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직관은 분명히 모든 경험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피히테에게 있어서 물자체는, 엄밀히 생각하면 사유할 수도 없는 〈순전히 비이성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물자체들은 여기서는 그 어떤 인식의 대상으로서도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지식학은 이것들에 대한 어떠한 장소도 갖고 있지 않다. 지식학에서의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감성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식학에서의 지적 직관의 오용(誤用)에 관한 우려 역시 쓸데없는 일로 되어 버린다."(94)


# 직관(直觀) :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자아는 행위가 관계하는 대상이 없다면, 자신을 행위 하는 것으로서 발견할 수 없다. 자아의 존재는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에게 동시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바깥에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정립은 그러나 분명히 자아의 정립에 대한 하나의 반정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반정립적 조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반정립은 자아의 정립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며, 그 자체에 의해서 요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모순이 극복되어야 한다면, 정립과 반정립을 종합으로 결합시키는 보다 높은 통일의 관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립된 것들의 통일의 점〉은 임의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 오히려 다만 이 통일의 점을 현존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일, 즉 통일의 점이 〈대립된 것들의 의식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변증법적〉 절차는, 피히테에게는 아직 발생 중에 있고, 불안정하며, 자기의 본래적 위기를 때때로 위반하기도 한다."(97-8)


"자아의 본질은 모든 자아가 대자적─비아를 규정하는 자로서 자신을 정립하는─이라는 점에 있다. 절대적 자아의 본질인 근원적 활동성은 따라서 자아로부터 원심적으로 무한 속으로 진행하여 자신을 의미도 계획도 없이 상실해 버리는 곳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근원적 활동성은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 속으로 반성될 때만 자아에 대해서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장애와 저지의 근거는 반성의 측면에서 보면 자아 자체의 본질로부터 요구되는 반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지는 활동성을 절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아의 활동성은 무제한적인 것이고, 또 모든 방해를 다시 넘어서고 일체의 저항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천적 태도에 대해서는 특징이 된다. 그러나 방해를 넘어서는 이러한 무제한적인 이행은 오로지 노력해야 하는 일일 뿐이고, 창조, 실현 또는 달성되는 일은 아니다. 무한자는 활동자의 속성이 아니고 활동성의 목표이자 이념이다."(116)


"역사철학은 피히테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윤리적 관점 아래에 서 있다. 역사철학은 역사학처럼 사실의 탐구가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그것이 가장 작고 덧없는 사회이건 또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사회이건 다같이─의 생동적인 작용 및 노력에 대한 불가결의 윤리적 방향 설정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현존재는 자유를 실현하려는 생각을 갖는다. 인류의 발전에 어떻게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역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상승, 보다 높은 발전, 진보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가치 실질은 가장 내면적인 인간 본질의 가치 실질, 즉 이성의 가치 실질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전체의 발전은 무죄의 상태와 더불어 시작하여 죄지은 상태에 이르고, 이 죄의 상태를 결국에는 극복하여 자각적 이성의 나라에서 끝나는 그러한 과정이다. 따라서 진보의 계기는 바로 도덕법칙의 척도와의 연관에서 결코 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반립적인 것이다."(164-5)


"피히테가 자기의 모든 본질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고 느끼는 시대는 〈계몽〉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개별 정신을 담지하는, 그리고 기초에 깔려 있는 위대한 이념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 시대는 전일(全一)의 이성의 생명을 인간의 생활 속에서 보지 못했다." "개별자는 눈앞에 있는 것, 즉 개별자를 감금하는 가장 협소한 범위의 관계 속에 있는 자기 자신만을 본다. 그의 최고의 것은 자기 보존이고, 자기 행복이며, 사리(私利)이다." "피히테는 계몽주의에서 그가 생명과 노력을 다 바친 윤리적 이념의 위엄이 위태롭게 됨을 보았다. 그는 여기서 그 특유한 가치가 모든 윤리적 노력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전체의 내용을 의미한 바로 그러한 자유의 의미가 오래되어 있음을 보았다.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위대한 것과 원대한 것을 옹호한 그는 계몽주의에서는 원칙적으로 편협하고 소규모의 것이 사물의 척도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세계를 축소시키는 사상과의 화해는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167-8)


3장 셸링


"피히테의 체계는 자유의 이념을 위한 투쟁의 결과로서 생겨났다. 이 투쟁은 가차 없고 난폭한 투쟁이었다. 자유에 대립된 것은 폐기되어야 한다. 필연성은 자유에 대립한다. 필연성은 모든 자연적인 것의 내적인 속박이다. 그러므로 피히테는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것을 자유의 창조적 작용 속에서 지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존재는 자연 속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러한 평가 절하는 비자연적이다." "그렇기에 피히테를 넘어서는 셸링의 제일보는 자연철학에로 이르게 된다. 셸링이 자연철학을 완성하고자 할 때, 그는 자연과 정신의 평행적인 구조에 대해서 여지를 갖고 있는 보다 넓은 새로운 기초에 의해서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이 기초를 동일철학의 사상에서 발견한다." "셸링은 이 사상을 거대한 규모로 완성함으로써 헤겔이 그 후의 모든 역사적 체계 가운데서 가장 정연하고 가장 포괄적인 체계를 구축하게 된 토대를 창조하였다."(183-4)


"그러나 헤겔이 지칠 줄 모르는 작업으로 자기의 대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동안에, 셸링은 다시 뿌리로 되돌아가서 파악한다. 셸링은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낭만주의에 가장 근접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문제들의 세계가 그에게 밀어닥치고, 또 해결을 요구한다. 그에게는 예술철학만이 이러한 자극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비로운 것에로의 경향도 이 자극으로부터 나온다. 셸링은 이러한 경향의 뿌리를 일체의 철학적 사유의 제1근본 원리 속에서 발견한다. 자연철학은 그에게서 종교철학으로 변한다.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은 그에게는 신성(神性)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동일성의 체계를 선언했던 이성의 저 전체의 합리적 철학은 참된 원근거(源根據)에 이르지 못하였고, 계시 철학만이 긍정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신앙과 지식의 모든 외견상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계시철학으로써 그는 헤겔의 이성 체계에 대립한다."(184-5)


"셸링의 자연철학은 통일성 철학의 순수한 전형이다. 이 철학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상은 동일성의 사상이다. 즉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 우리 속의 정신과 우리 바깥의 자연과의 본질의 동일성이다. 자연은 외부에 의하여 경계 지어진 것도 아니고, 정신은 내부에 의하여 한계 지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의 외부에도 동일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고, 우리의 내부에도 동일한 자연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자연의 영역 내부에서도 역시 존재하는 통일성의 철학이다. 그리하여 유기적 자연과 무기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원리를 갖고 있는 분리된 두 자연이 아니다. 셸링은 무기적 구조물의 기계론적 이론도, 유기체의 기계론적 이론도 배척한다. 그는 전체 자연을 구별 없이 유기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간주한다." "셸링은 당시의 과학적 성과들에서 취한 이념의 다양성을 자기의 목적론적 근본 사상의 통일성 속에서 포괄하고, 자연 현상의 상이한 유형들을 하나의 근원적 원리의 전상(展相)으로 파악하고자 한다."(195-6)


"이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동질적 통일성에서 차별의 다양성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다양성은 동일성 자체로부터는 유래할 수 없고, 이 동일성에 대립하여 동시에 이 동일성과 함께 현존하지 않을 수 없는 분열의 계기로부터만 유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계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자연 현상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이 공통적인 것은 명백히 분리하는 원리이고, 관통하는 이원성이며, 대립의 법칙이다. 셸링은 이것을 (자석과도 같은) 양극성의 원리라 부른다. 이 점에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대립의 쌍들의 항쟁이, 마치 진실로 〈전쟁〉이 만물의 〈아버지요, 왕〉으로 표현되듯이, 운동을 일으키는 자, 차이 나게 하는 자, 그리고 형성자이다─에 접근한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이 이미 존재자 일반의 전 영역을 통하여 그 모든 단계들을 결합하고 있다. 이 대립의 일치는 초월적인 것이요, 그것의 본질상 모든 인간적 사유를 벗어나 있다."(197)


"피히테의 의식에 관한 이론은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구성된다. 그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셸링은 제3의 구분지인 심미적 의식을 끼워 넣음으로써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인식의 철학 및 행위의 철학과 함께 예술의 철학이 등장한다. 이렇게 의식의 세계를 풍부하게 한 것은 셸링의 예술가적 천성 속에 뿌리박고 있기도 하고, 또 낭만주의 사회 속에서 획득한 이념과 자극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하다." "자연의 산출력과 주관의 산출력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창조적 정신이다. 자연은 대상의 실재적 세계를, 예술은 관념적 세계를 창조한다. 양자는 순수하게 생산적이다. 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통일적으로 일관된 예술품이요, 정신의 근원적인 무의식적 시(詩)이다. 그러나 예술품은 바로 소규모의 그와 같은 우주이고, 동일한 정신의 똑같은 계시이며, 단지 의식적으로 창조된 계시일 뿐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의식 속에서만 포괄적 동일성이 직접적으로 파악된다."(205-6)


"셸링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결코 세계 진행 속의 여타의 생기 현상과 같은 그런 이론적 대상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법칙성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법칙성으로 동화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자신 속에 인간적 결단의 자유를 포함하고 이 자유를 자연의 생기 현상으로부터 구별한다. 그러나 자연철학이 우주의 생기 현상 속에서 통일적 방향 또는 전개를 이끌어내어야 하는 것처럼, 역사철학은 인류의 생에서 진보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 속에서 실행되는 진보의 보편적 조건은 조건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는 탐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의로서 항상 동시에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의식의 관점에서는 필연성과 자유가 대립되지만, 절대자 속에서는 양자가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은 의식적 정신이 어떠한 지(知)로써도 도달할 수 없고 신앙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영원히 무의식적인 것이다."(214-5)


"예술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모방, 즉 모상들의 모사가 아니라, 신적 이념 그 자체의 상대물이며, 무기력하게 감탄하는 상태에서 자연의 배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넘어서서 자연을 고양시키는 것이며, 자연의 완성이요, 본질 그 자체─이것은 세계의 그 어느 곳에서도 혼합되지 않은 채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다─의 순수 직관이다. 예술의 자연과의 편차는 예술의 무력이 아니라 예술의 우월이다. 자연의 산물이 단지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그것을 예술은 영원한 것으로서─예술이 이 산물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고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이 자연의 산물을 그 순수한 존재 속에서, 즉 〈그것의 생명의 영원성 속에서〉 현상하게 한다. 예술은 자연이 결코 그러한 것일 수 없는 것, 즉 이념의 참된 현시(現示)이다." "셸링은 낭만주의와 철학적 관념론의 성공적인 종합에서 태어난 새로운 미학의 창조자가 되었고, 헤겔과 쇼펜하우어 및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에 대한 모범이 된다."(219-20)


4장 낭만주의 철학


"낭만주의는 본래 어떠한 신조도 원리도 아니고, 어떠한 목표도 과제도 아니며, 윤곽이 뚜렷한 사상이나 개념으로 구성된 어떤 체계 속에 자리잡을 그러한 것도 아니다. 순수한 낭만주의 그 자체는 결코 철학이 아니다. 창작이 거기에 보다 더 가깝다. 작가가 낭만주의의 가장 순수한 대변자이다. 셸링이나 슐라이어마허처럼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철학자들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의 단지 한 단편만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단편은 충분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이 전체일 수 없는 것은 사상의 구조가 생활의 어떤 태도 및 세계 이해─이것은 근본적으로 세계 감정이고 또 전체의 감정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다─의 전체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상은 반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세계에서 의도되는 것은 반성되지 않은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사상 진행이 아무리 반성되어 우리에게 자주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반성은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표현의 불완전한 수단일 뿐이다."(265-6)


"낭만주의는 특유한 방식의 생활 기분이다. 여기에 낭만주의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정서적 기분으로 동화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낭만주의는 개념적으로 파악불가능한 것에 대한 의식 속의 황홀경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개인의 유약함의 현상인 것이고, 자기의 눈앞에 떠도는 사실(事實)의 크기에 직면한 의식의 무력함일 뿐이다. 모든 기분의 가치 배후에는, 낭만적 문학이 우리에게 주선해 주는 것처럼, 내용적인 그 어떤 것, 생의 새로운 의미 및 실질, 아니 생 자체가 새로운 의미로 드러난다. 세계의 영원한 수수께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낭만주의자의 본질의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고, 또 이 본질 속에서 직접적으로 간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이 이 낭만주의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예술가의 행위는 무한자를 유한자 속에서 분명하게 현상하도록 하는 일이다. 존재는 숨겨져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마법의 지팡이이다."(266-7)


"낭만주의는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 신비와 유사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대한 자연스런 대립자이다. 천박한 합리주의의 무이념성, 〈상식〉을 통한 세계의 탈정신화에 대립해서 낭만주의는 영감을 받은 상태로, 영감을 부여하면서 등장한다. 낭만주의의 생은 전적으로 이념의 생이다. 여기에 낭만주의가 독일관념론의 철학적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 맺는 지점이 있다. 이 철학적 운동이 사변과 사상적 체계 속에서 추구하는 것을 낭만주의는 직접적으로 생활에서 찾는다. 오성적인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유용한 것, 실천적인 것은 낭만주의에서는 비현실적인 것,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그 고유한 본질이 보다 깊이 이해되면 될수록 이 본질은 더욱더 탁월한 것으로 생각되고, 더욱더 확정적으로 낭만주의 그 자체는 종교로서 파악된다. 낭만적 정신의 이와 같은 측면은 피히테의 지식학이 내면적으로 개조되던 시기에 그의 사상에서 생동하고 있던 그것이다."(268)


"형이상학에의 경향은 예술가적 창작의 충동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매우 유사하고, 양자는 어딘지 창작자의 영혼 안에서는 하나이다. 창작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일이고, 현실적인 것 너머에서 신성하게 부동(浮動)하는 상태이지만, 철학은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상적 포착이고, 파악이며, 간취(看取)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동일한 세계에 관계하고 있고, 동일한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 양자 속에는 이 양자가 하나로 있는 그러한 지점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 양자가 하나로 있는 그러한 인간이 존재한다. 이 통일을 자기 자신 속에 실현하는 일은 이 양자가 뿌리박고 있는 그 깊이의 문제일 뿐이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슐레겔이 동경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성취하는 것은 다만 〈개념적으로는 파악되지 않은 진리의 형상(形象)〉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동경을 자신 속에 있는 일종의 종교, 즉 무한성에의 경향으로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무한자는 예술과 철학의 공동 대상이기 때문이다."(283)


"슐레겔에 따르면, 철학의 본질은 직선적인 진보에 모순되는 것이다. 그것은 순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철학 속의 모든 것은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것이다. 〈중간으로부터의 시작〉이라는 것은 형상(形象)이 아니고, 방법이다. 철학자의 대상은 언제나 전체적인 것이고, 공존하는 것이다. 분리시키는 모든 작업은 여기서는 기술적인 것이다. 대상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파악하는 모든 작업은 대상을 중간에서 파악하는 일이거나─또는 전혀 파악하지 않는 것이다. 연관은 내적 연관이고, 모든 것은 자신 속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순환 철학의 이 개념 속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연관 역시 다만 전체로서 직관된 것이고, 모든 해명이란 것은 전체 속에서 직관된 것의 어설픈 노출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형이상학적 실재론] 속에 헤겔을 회상시키는 그 어떤 것, 적어도 후기의 헤겔적 체계의 의미에 있어서 가장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다."(285-6)


"노발리스를 횔더린─모든 것에 시작(詩作) 형식을 취한─과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극히 명백한 철학적 귀결과 그때그때 나타나는 고도의 개념적 명확성이고, 슐레겔과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변의 관념적 높이와 자연철학적 신비가 매우 우세한 점이다." "노발리스가 보기에,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비밀스런 작용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공동성에 의존하는 것이고, 자기 대화이며 내면적인 교신(交信)이다. 이 작용은 영혼의 비밀과 내면적 다원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자아에 〈관념적 자아〉, 즉 〈진정한 내면적인 너〉가 대립힌다. 그리고 〈최고의 정신적 및 감각적 교제가 발생하고, 최고의 정열이 가능하다. 천재는 어쩌면 그와 같은 내면적인 다원의 결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것이 이제 일종의 자기 계시, 자기 비평, 자기 접촉, 자기 입법적 운동으로 계속해서 특징지어진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의 품위와 의미는 상승한다."(312-5)


"노발리스는 결코 예술가와 예술가 아닌 사람 사이를 그렇게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는다." "철학자는 정신의 지배를 열망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시와 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슐레겔한테서보다도 노발리스한테서 더 강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활동성이란 계기, 즉 창조적인 것이 이 두 사람한테는 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을 또한 〈학문의 학문〉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러나 노발리스는 예를 들어 슐레겔이 순환철학의 이념 안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완결된 학문적 체계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본래적인 철학체계는 자유와 무한성, 또는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어떤 체계 속으로 들어온 무체계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에서는 인간 본성 및 도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규정성과 무규정성 사이에서 부동(浮動)하고 있는 동일한 관계임이 틀림없다. 철학의 본질은 따라서 가장 본래적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시(詩), 즉 절대적 창조이다."(327-9)


"철학적 동시대인 중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특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다만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낭만주의자 사회에 속해 있다. 그는 우정으로 슐레겔과 결합한다. 그는 그의 윤리관에 있어서 슐레겔로부터 자속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매우 다른 철학체계들의 특징을 서로 통일─이 통일은 틀림없이 피상적으로 절충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철저히 유기적인 것도 아니다─시킬 줄 안다. 이 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근원적인 시야의 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면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고, 또 낭만적-보편주의적 도야의 이상이다. . 슐라이어마허는 의식적으로 체계를 추구하였고, 그것을 세목에 있어서 놀랄 만큼 정교하게 수행할 줄 안다." "저 낭만주의자들은 본원적인 이념을 갖고 있다. 다만 체계적인 맥락이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반대로 그도 역시 기획하는 것, 즉 체계를 언제나 똑같이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이념들은 수합된 상태에 있다."(330-1)


"슐라이어마허에게 종교적 의식은 언제나 심미적 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러나 신앙을 담지하는 감정이 다르고, 예술적 창조 활동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 다르다. 이 다름을 규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감정의 대상에 대한 태도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감정은 자신으로부터 직관해 내지 않고, 형태를 산출하지 않으며, 생산적-대상적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헌신적인 것이다. 종교는 또한 계시의 일이 아니다. 계시 신앙은 이미 신의 계시하는 활동성을 안다. 우리는 사실 그와 같은 활동성에 관해서는 신의 그 밖의 본질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신성화된 전통도, 창조된 세계의 현존재도, 세계 속의 인간의 윤리적 과제라는 사실도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신을 가르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은 인식할 수 없고, 또 신에 관한 모든 지식은 그것이 직접적인 것이건 간접적인 것이건 간에 가상(假象)이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은 결코 신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 관한 이론인 것이다."(333-4)


제2부 헤겔


1장 헤겔의 철학 개념


"〈논쟁적(또는 〈형식적〉) 사유〉에서는 판단의 주어는 고정된 지반의 역할, 즉 〈토대〉의 역할을 하고, 이 토대에 내용이 술어의 형식으로 결합된다. 따라서 이러한 술어 속에서는 주어 그 자체는 결코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주어는 개념의 바깥에 머물러 있게 된다. 주어가 개념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그런데 주어는 개념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아니 주어는 본래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개념 그 자체의 의미가 변경되어야 하고, 술어의 외면성은 사라져야 하며, 술어의 다양성은 대상 자체(주어)의 전개되어 가는 본질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대상의 이 본질─따라서 모든 비사변적 사유에게는 개념에 대해 영원히 외면적인 것 및 초월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바로 그것─은 개념 자체로서, 개념의 가장 내면적인 것, 즉 개념의 진리로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유만이 〈개념 파악적 사유〉이며, 따라서 사태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논쟁적 사유〉의 운명이다."(409)


"〈개념 파악적 사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개념은 대상의 고유한 자기─이 자기는 개념의 생성으로서 나타난다─이기 때문에, 이 자기는 부동의 상태에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정지적인 주어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자기의 규정을 자신 속에 회수하는 개념이다.〉 여기에 사태의 본질이 나타난다. 개념의 다른 모습, 즉 개념의 변증법적 모습이란 대상에 대한 개념의 관계이고, 모든 형식적인 것에 대한 피안의, 그리고 반대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판단이나 명제와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는 개념으로 하여금 맨 처음으로 개념의 규정에 좇아서 존재하게 되는 그것으로,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으로 만든다. 요컨대 개념이 파악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형식의 구조물이 아니라, 차이성과 대립을 두루 관통하는 형식의 다양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상태를 개념이 전개되어 가는 관통 자체로서, 〈운동〉으로서, 즉 생동성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409-10)


"헤겔에서 우리는 인식 불가능한 것을 은폐하거나 논박하는 일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되는 것, 즉 인식되지 않은 것 그 자체를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서 추구하는 방법, 또 이렇게 추구하는 가운데서 직접 문제를 전개하는 모범적인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방법은 출현하는 어떠한 모순되 회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순 자체를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어떠한 형식에서이건, 무조건 타당하게 하는 그러한 방법이다. 변증법은 바로 이 일을, 즉 모순을 발견하고 또 이 모순을 그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시인하는 이 일을 변증법의 일반적 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변증법이 모순성을 또한 다시 극복한다는 것은─적어도 변증법의 경향에 따라서─변증법이 모순성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이성의 개념들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개념이 〈유동적인〉 구성물, 즉 사변적 개념이 되면, 오히려 비합리성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424-5)


"우리가 (헤겔) 논리학의 〈객관적〉 부분에서 처음으로 대자 존재라는 개념을 만나면, 그것의 의미는 외부에 대한 폐쇄성, 즉 단절되어 있음, 자립성 속에서 다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부른 합창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자 존재의 외적 측면일 뿐이다. 이 외적 측면 배후에는 〈대하여〉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또 다른 의미가 꽂혀 있다. 그렇게 되면, 〈대-자-존재〉는 자기 자신을 포착하는 존재, 따라서 자기 자신 속으로의 반성을 이미 거친, 그리하여 이제 이 반성을 자신 속에 보존하는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대자 존재는 그것이 완성되면 자기의식이 된다. 이것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대자 존재라는 것은 어떤 존재자가 그것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자기를 알면서 자신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안다고 하는 이 대자 존재라는 낱말의 그 의미심장한 뜻에 있어서 자기의식인 것이다."(434-5)


"그런데 우리가 어떤 존재자의 참된 존재론적 성질─따라서 존재자에 있어서 누군가에 대한 그것의 현상 방식만이 아니 그러한 것─을 그것의 〈즉자 존재〉라고 부른다면, 동일한 존재자의 대자 존재 속에는 실은 보다 높은 존재의 단계─이때 이 존재자가 〈즉자적〉이면서, 또한 〈대자적〉인 바로 그러한 것인 한에서─가 놓여 있다. 즉자 존재와 대자 존재의 이 종합을 헤겔은, 〈즉자-대자-존재〉라고 부른다. 헤겔에게 종합은 어떤 존재자 자신의 본질을 관통하는 자각적 통찰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자는 이러한 완전한 의미로는 하나의 자각한 본질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의 최고도의 정신적 형식에 있어서만 발견된다." "즉 모든 존재자는 정신적인 것의 이 최고의 형식에로 나아가는 경향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고, 또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의식에로 밀고 나아가며, 그 때문에 세계의 전체 단계 영역에 있어서 보다 낮은 단계가 보다 높은 단계 영역에로 이행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435)


"셸링의 동일철학에서 절대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무차별〉이다. 절대자는 또한 〈절대적 이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차별자가 어떻게 차별지워지며, 또 어떻게 자연의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다. 사실 절대적으로 구별 없는 통일성에서 다양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셸링의 사변이 직면한 한계는 또한 플로티노스의 사유도 부딪혔던 한계이고, 모든 형이상학적 절대적 일원론의 약한 측면이기도 한 동일한 한계이다. 즉 일자 자체는 다수를 낳을 수 없는 것이고, 만알 다수를 낳을 수 있다면 일자는 이미 다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엄밀한 일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일자로부터 다양성이 유래하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셸링은 절대자에 관한 지(知)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사유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지적 직관〉에 마련함으로써 이러한 귀결에 대처하였다."(449)


"여기서 헤겔의 논리학이 시작된다. 모든 세계 이해의 가장 중요한 점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개념 파악적 사유〉가 지적 직관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적 직관이 설정하는 절대자라는 꾸밈없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고, 규정성을 갖지 않은 무정형(無定型)의 실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자한테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기 내 반성〉은 직접적인 것의 자기 투시(透視)이다. 이제 여기서 절대자의 내적 다양성을 볼 수 있게 되거니와, 사상(思想)은 비로소 이 다양성을 차례에 따라 방법적 운동에 있어서 편력(遍歷)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절대자의 본래적 개념은 결국 이러한 편력의 종말에 가서 비로소 설명되고 깊이 사유된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개념은 본래 이 개념이 〈정립〉되었던 단초에는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파악되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449-52)


"절대자의 술어들의 총체성은 내용상으로 이해하면 세계, 따라서 자연, 그리고 정신의 총체성─〈사태 그 자체〉(이 사태를 가장 넓은 의미로 이해해서)─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태〉는 오히려 사유하는, 그리고 철학하는 이성으로서 우리들 속에서 자기의 〈논리〉를 갖고 있는 그 이성이고, 또 모든 자연 및 정신의 형식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그 이념이며, 변증법적으로 노력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그 사상이기 때문에, 이 학문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의 대립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취되어야 한다. 또한 이 학문에 있어서는 객관과 주관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세계와 세계의식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학문은 모든 즉자 존재자들을 해명한 대자 존재인 것이다." "논리학의 대상은 모든 사물의 단초이고, 대상에 관한 지(知)로서의 논리학 자체는 모든 사물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논리학 고유의 대상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은 논리학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결합하며 현실화된다."(455-6)


"칸트는 형이상학에 이르는 통로를 우선 실천 이성에서 발견하였고, 피히테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당위에 기초를 둔 체계를 만들었으며, 셸링은 이 체계를 우주에 확장시켰고, 그리고 헤겔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완성하였다. 헤겔이 이 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철저한 귀결들을 칸트 자신의 명제(정립)로부터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비판의 명제들은 형식상으로는 부정적 명제들이다. 그러나 부정의 의미는 폐기가 아니고, 어떤 긍정적인 것으로의 전진이다. 부정이 긍정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의 힘〉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이다. 칸트가 부정을 시인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 속에 내재해 있는 부정적인 것의 힘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헤겔은 이 힘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한다. 그리고 이때 그의 수중에서 발생하는 것은 바로 칸트가 갈망했던 〈순수 이성의 체계〉, 즉 낡은 형이상학과 그것의 비판을 종합한 새로운 형이상학이다."(467-8)


2장 정신 현상학


"(헤겔에서) 주관은 자기의 객관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도 변화한다는 〈경험을 한다.〉 변화를 추적하는 철학자는 주관의 이 〈경험〉에서 이 경험에 관한 지(知)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 "피히테 역시 자아는 자기 자신과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표상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주시한다〉라고 되풀이한 그 표현은 이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는 이 사정이 역전되어 있다. 그는 결코 연역하지 않는다. 결과라는 거은 선취된 것이 아니고, 자기의식은 전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관이 〈경험하는〉 것, 주관에게 주어진 것에 철저히 의존하고, 그것이 이 소여성에 있어서 어떻게 현시(現示)되는가에 의존한다. 이렇게 그는 사실상으로 주관으로부터서도 객관으로부터서도 그 어떠한 것도 도출하지 않는다. 그는 현상을 단계적으로 발견하는 대로 단순히 이 현상들을 기술할 뿐이다. 그는 의식의 아래로부터 위로의 현실적인 〈현상론〉(현상학)을 부여할 뿐이다."(515-7)


"헤겔은 결코 시간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내면적 단계를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의 다른 의미로, 즉 시간적인 의미로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학문에 이르는 의식의 교양〉이 매우 확실하게 정신의 역사의 단계들에서 재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학의 서문에서 헤겔이 이 관계에 관하여 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문구를 알고 있다. 그는 여기서 〈특수한 개인들〉과 〈보편적 개인〉 간의 관계─여기서 그는 후자의 이름 아래에서 개인들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있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성 일반은 바로 모든 주관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사실상 어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개인〉이 현상학의 본래적 대상이다. 이 보편적 개인은 역사의 기체(基體)─역사 속에서 보편적 개인의 경험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고, 동시에 우리들의 의식의 보편자이다."(535-6)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의식의 두 대립된 형태들〉이 서로 상관적인 관계에 놓인다. 〈하나의 형태는 독립적인 의식이며, 이것에는 대자 존재가, 그리고 다른 형태는 비독립적인 의식이며, 이것에는 타자를 위한 생명 또는 존재가 그 본질이다.〉" "주인이나 노예는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한 관계뿐만 아니라, 물적, 자연적 존재에 대한 관계도 갖고 있다. 주인은 자기의 자연적 존재, 즉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것이 그를 주인으로 만들었다. 노예는 자연적 존재를 위하여 자기의식을 포기하였다. 그는 물적인 것을 〈자립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속에서 비자립적으로 되어 버렸다. 그는 그의 자기 속에 사로잡혀 있다. 〈주인은 자립적인 존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노예에 관계한다.〉" "주인은 이 물적 존재(物的 存在)를 지배하는 위력이다. 동시에 이 (물적) 존재는 타자를 지배하는 위력이므로, 주인은 이러한 추론에서 이 타자를 자기 아래에 예속시킨다. 물적 존재는 노예의 사슬이다."(553-4)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관계가 바뀌게 되는, 그리하여 예속 상태로부터 노예가 고양되기 시작하는 그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인은 자신과 물적 존재 사이에 있는 노예에 명령하고, 자신을 위해서 노예를 노동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노예에게 이 물적 존재의 〈가공(加工)〉을 맡기고, 이 존재의 〈향유〉만은 자기의 것으로 한다. 〈욕망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것이 달성되고, 동시에 완성되며, 항유함으로써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완성되는 일은 쌍날의 것임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자립성〉에 대한 주인의 태도는 그와 동시에 순전히 수동적인 태도, 따라서 사실은 〈예속〉의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노예의 태도는 능동적인 태도, 따라서 자립성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자신 사이에 노예를 끼워넣는 주인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만 사물의 비자립성과 결합하고, 사물을 순전히 향유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립성의 측면을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맡긴다.〉"(554)


"자기의식은 이렇게 주인의 인격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노예에게는 주인의 대자 존재가 그 본질이다. 노예 자신은 수단이다.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 주인의 행위이다.〉 그러나 노예는 인정하는 의식이고, 주인은 인정받은 의식일 뿐이다. 따라서 주인의 대자 존재는 자기의 본질적인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노예의 〈비본질적 의식〉 속에, 이에 못지않게 자기의 〈비본질적 행위〉 속에 존립한다. 〈따라서 자립적인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이다.〉 이것은 전체적인 관계의 내적 모순이고,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이 전체적 관계 속의 불안정한 요소 및 해체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주인의 지배가 이 지배의 본질이고자 한 그것의 전도된 것〉(즉 예속성)임을 나타낸 것처럼, 〈노예의 신분 역시 이 신분을 완성시킴에 있어서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존재했던 그 내용의 역(逆)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 속으로 도로 밀려든 의식으로서 자신 속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자립성으로 역전된다.〉"(554-5)


"자기 자신과의 모순 속에서 자기의식은 〈이중화〉되어 있다.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 속의 이중적인 것이다. 이전에는 두 개별자(주인과 노예)에 할당되었던 것이 지금은 하나 속에 존재한다. 이 이중화는 실은 〈정신의 개념 속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양 측면의 통일성이 결여해 있는 곳에서는 의식은 지리멸렬하고 〈불행한 의식〉이 된다. 이중화의 특징이 되는 것은 가변적 의식과 불변적 의식으로의 양분이다. 전자는 인간이 대자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이 피안의 존재인 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차안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가치 없고,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덧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된다. 피안의 것에는 인간의 희망과 동경이 해당된다." "의식은 그 자신이 본질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자기의식은 하나의 확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부서진 자기 확신〉인 것이다."(558-9)


"의식은 자기의 대상에 대해서 사유하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면서 태도를 취한다. 의식은 〈사유 곁을 지나갈 뿐이고, 기도(祈禱)인 것이다.〉" "〈이 무한한 순수 내면적 느낌도 분명히 그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이 대상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대상은 어떤 낯선 것으로서 등장한다.〉 의식이 다만 기도(祈禱)로서 머무는 한, 어쨌든 의식은 자기의 본질과 동류이다. 그러나 의식의 경향은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의식의 고유한 무능력은 그에게는 유죄와 모독으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의식은 자신과 싸우고, 금욕하고, 고행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한다. 그의 태도는 의심을 품은 채 자기 자신을 망보는 것이 된다. 그 결과는 〈자신과 그 조그마한 행위에 한정된, 그리고 고심하면서 사유하는 초라한 만큼 불행한〉 위축된 〈인격〉이다." "의식이 자기기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의식은 동시에 그 자체에 있어서 이 자기기만의 지양을 경험하게 된다. 의식은 자신에 되돌아와 있음을 발견한다."(559-60)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이 되돌려지는 피안이란 것이 의식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의식 자신 속이 있음을 의식이 발견한다면, 의식은 피안 자체를 지양하게 되고, 피안 속에서 다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도달하게 되는 일은 관념론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이성의 관점을 증명해 준다. 이때까지의 〈타재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로 전환한다. 자기의식은 세계를 희생한 대가로서 자기를 구원하고 보존하는 일을 중지한 것이다. 자기의식은 세계를 다시 자신 속에 수용한다. 〈자기의식은 자신을 확신하는 이성으로서 세계에 대한 평온을 받아들였고, 세계를 견뎌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실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있거나, 또는 모든 현실성이 자기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님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의 사유는 직접적으로 그 자신 현실성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관념론이 현실성에 관계하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560-1)


3장 논리학


"현상학의 서문에서 예고되었던 내용이 이제야 나타났다. 〈학문의 생성〉의 길이 실현된 것이다. 의식이 자기의 대상과 자기 자신에 있어서 겪어야 했던 긴 경험의 계열이 편력된 것이다. 의식은 그 자신이 자기의식임을, 자기의식은 그 자신의 이성임을, 이성은 그 자신의 정신임을, 그리고 정신은 그 자신이 그 자신에 대한 개념적 파악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현상하는 지(知)〉의 현시(現示)는 〈실재적 지〉에로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실재적 지를 이제 완성해야 한다. 이 과제가 나타남으로써 이 연구는 현상학의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학〉이 착수할 일이다. 그러나 현상은 필연적으로 현상 속에 계시되는(〈현상하는〉) 어떤 존재자의 현상이기 때문에, 즉 모든 외면적인 것은 어떤 내면적인 것의 외적 표현이기 때문에, 논리학은 그 귀결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시 현상학의 내용을 이루었던 바로 그 동일한 형태의 계열, 즉 철학의 체계의 구성 요소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603-4)


"논리학의 대상은 절대자이다. 독일관념론의 근본 사상은 절대자가 이성이라는 것이다. 절대자는 의식이 아니다. 의식은 이차적인 것이다. 이성은 의식 이상의 것이다. 이성은 의식 없이 모든 존재자 속에, 또한 가장 시원적인 것 속에도 존재한다고 이미 셸링이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셸링은 우리가 어떻게 이성 속으로 개념적으로 파악하면서 파고들 수 있으며, 또 시원적인 것으로서의 이성을 이차적인 것으로서의 의식으로써 밝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절대자가 이성이고, 우리의 사고도─적어도 철학적 사고가─이성이라면, 우리가 순수한 사유, 즉 사유의 〈논리〉에로 상승하는 그곳, 곧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절대자가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절대자는 실로 의식은 아니지만, 절대자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 의식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식하는 자와 인식된 자는 동시에 실재하는 것으로 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유는 바로 절대자를 그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 된다."(604-5)


"사상과 사실, 개념과 존재자는 동일한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논리학과 〈진리〉로서의 논리학은 동일성의 두 측면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한 측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상은 〈자신을 전개하는 순수한 자기의식〉─어떤 타자가 아닌 〈자신〉을 전개시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단순히 즉자 존재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자적 존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사실은 동일한 자기의식이요, 동일한 절대자의 동일한 전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관찰이 어느 측면에서 시작하건 그것은 실제로는 상관이 없다. 관찰이 사실로써 시작하건 또는 사상으로써 시작하건, 관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전체에로 귀납된다." "관계의 양 측면은 물론 자신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반대 측면을 갖고 있다. 이것이 왜 사유에 관한 학문이 사상으로서의 사상을 다룰 필요가 없는지 하는 이유이다. 사유에 관한 학문은 순수한 사상〈이다〉라는 사실로서 충분하다."(609)


"범주는 절대자가 자신을 규정하는 술어들이다. 현상학의 서문은 그러한 술어들의 역할을 확실하게 확립하였다. 가능한 판단의 주어로서의 절대자는 술어 없이는, 그리고 술어에 〈앞서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이 어떤 규정들로 윤곽 지어지기 이전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 모든 사유는 규정성에 구속되어 있고, 그리하여 술어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주어는 술어에 선행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술어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때 주어가 무엇〈인지〉를 술어가 비로소 말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절대자가 그 술어에로 전개되는 곳에 일체의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절대자는 각 단계에서는 정확하게 그것의 술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이다. 〈단초〉는 공허한 것이고, 실체적인 것을 언표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즉 〈절대자에 관해서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절대자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그것이 진리 속에 있는 바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타당하다."(617-8)


"헤겔의 논리학에서 범주는 실제로 거대한 유기체의 기관으로 간주된다. 고정된 오성 개념의 경직성에 대립하고, 또 이 오성 개념의 논리적인 타성의 힘과 끊임없이 투쟁하여 생명력을 표현하는 많은 비유들─예컨대 운동, 출현, 이행, 귀환, 자기내 반성, 재귀, 원환, 소멸, 등장, 유동, 그리고 수많은 여타의 것들─은 결코 단순히 비유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유동화(流動化)라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정의 내려진 개념들은 실제로는 단지 불충분한 긴급 명령에 불과하다. 거대한 노선의 관통하는 역동성은 다른 개념들을 요구한다." "수많은 방법으로 절대자에 접근해 가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자기의 현실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에 대한 사색, 이 발전 과정에 직면하여 헤겔이 수행하는 시원적 행위는 마지막 항(項) 뿐이다. 즉 역사적 사유가 이 발전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체계의 형식으로─인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제가 해결되는 형식은 변증법이다."(621, 627)


"〈학문의 단초(端初)는 무엇으로써 시작되어야 하는가?〉 모든 체계적인 사상은 맨 먼저 이러한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최초의 사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아직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이 생성되어야 한다. 단초는 순수 무(無)가 아니라, 거기로부터 그 어떤 것이 출발해야 하는 그러한 무이다. 따라서 존재는 역시 이미 단초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단초는 양자, 즉 존재와 무를 포함하고, 그리하여 존재와 무의 통일인 것이다─또는 동시에 존재인 비존재이고, 또 동시에 비존재인 존재이다.〉" "〈대립된 것인 존재와 비존재는 따라서 단초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합일된 상태로 있다. 또는 단초는 이 양자의 구별되지 않은 통일이다.〉 거기로부터 단초 속에는 존재와 비존재 그 자체의 모순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구별된 존재와 구별되지 않은 존재의 모순도 놓여 있다는 결과가 생긴다. 단초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680-2)


"그러나 사상(思想)에 요구되는 바는 바로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어떤 적극적인 것으로서 사유하고, 이 동일성의 개념을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만약 우리가 이 양자 속에 어떤 공통된 적극적인 것을 지적할 수 있다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분명히 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존재와 무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양자의 변증법에 있어서이다. 말하자면 변증법적으로는 존재는 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존재는 무로서 증명되었고, 따라서 이 증명 속에서 무로 이행하였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진리인 것은 존재도 무도 아니고, 존재는 무로, 그리고 무는 존재로─이행하는 것이 아니라─이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으로 양자의 이원성과 대립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의 공통된 것, 즉 이행─물론 초시간적으로 이해된─그리고 연결, 유동, 운동 및 연속체의 한 계기, 따라서 현저히 긍정적인 것이 강조된다."(683-4)


"진리는 양자의 〈무구별성〉(동일성) 속에도, 구별성(비동일성) 속에도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주지하다시피 양자가 합일하여 있는 어떤 제3자, 즉 문자 그대로 실재로 모순되는 것(존재와 무)의 공존일 뿐만 아니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인 그러한 어떤 것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도, 그 비동일성도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진리〉는 〈각자가 직접적으로 그것의 반대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어떤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오래되고 잘 알려진 〈생성〉이란 개념 속에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생성〉을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의 운동─따라서 비존재의 존재로서의 이행과 존재의 비존재에로의 이행─으로 묘사하였다. 최초의 인물로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이 두 길은 하나이요 동일한 생성은 동시에 발생과 소멸이다. 그것은 두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일자의 소멸은 타자의 발생인 것이다."(684)


"〈정재〉(定在)는 이행동작(移行動作)이 사라지고, 존재의 휴지(休止)가 회복된 새로운 존재 형식이다. 헤겔은 이 걸음걸이를 〈생성의 지양〉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실은 소멸과 보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즉 계기들은 모두 보존되지만,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으로서 변화된 것이고, 여전히 재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다른 규정성에 있어서이다. 이 계기들에서 사라지는 것은 생성 그 자체의 불안정이다. 이러한 사정은 변증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즉 생성은 자기의 계기들(존재와 무)을 지양하면서 역시 자기 자신도 지양한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계기들의 소멸은 생성의 소멸이다. 그러나 생성은 〈버팀이 없는 불휴(不休)〉이기 때문에, 생성은 자기의 소멸 속에서 〈정지한 결과 속으로〉 붕괴된다. 이 결과 속에서도 역시 존재와 무의 대립이 존속하지만, 그러나 발생과 소멸의 역학에 있어서가 아니다. 〈정재는, 그것의 생성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비존재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691)


"유한성과 무한성이 진행 속에서 교대로 나타나는 것은 순환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순환은 하나이고, 유한성과 무한성은 순환 속의 계기들이며, 양자는 순화 속에서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아오며, 각자는 타자를 자신 속에 포함하면서 타자를 넘어선다. 이렇게 전체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양자의 특성 자체를─우리가 어떠한 출발점에서 매개 자체를 적용하는가에 따라서─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들 양자,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그 자체 진행의 계기들이기 때문에, 양자는 공동으로 유한자이고, 그리고 양자는 똑같이 공동으로 진행과 결과 속에서 부정되기 때문에, 양자의 저 유한성의 부정으로서의 결과는 진실로 무한자라고 불린다.〉" "대체적으로 윤곽 지어 보면, 절대자는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는 절대자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는 글자 그대로 〈대자적〉이다. 즉자 존재는 그것의 대자 존재에 도달한 것이다."(710-3)


4장 논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체계


"헤겔 철학이 세상에 선사한 풍부한 사상재(思想財)에서 〈객관적 정신〉이란 개념은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풍성한 결과를 생산하게 된 그러한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객관적 정신 개념은 체계의 귀결도, 변증법적 사상 진행의 산물도 아니다. 과연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사변적 학설 개념도 아니고, 소박한 기술적(記述的)인 개념이며, 관점에서 독립해서 언제나 제시되고, 서술되는 어떤 기본 현상에 대한 철학적 정의이다. 요약하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직관된 것이고, 완전히 그것 자체에 의존하는 헤겔의 발견이다." "헤겔은 처음부터 정신철학자이다. 초기의 저술들, 즉 현상학, 논리학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정신은 그에게는 마찬가지로 명백히 처음부터 객관적 정신─비록 이 술어는 겨우 조금씩 확고해진다 할지라도─을 의미한다. 즉 정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의식이 아니라, 보편자, 개념, 이념─이 이념이 그 객관적인 실현에 있어서 실재적 세계의 참된 내용인 한에서─이다."(822-4)


"객관적 정신은 우리들 모두가 그 속에 서 있고, 출생, 교육, 그리고 역사적 위기가 우리들을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게 하는 정신적 영역이다." "우리들은 어느 시대의 정신적 방향과 흐름에 관해서, 그 시대의 경향, 이념, 가치에 관해서, 그 도덕, 예술, 또는 학문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이것은 그 발생과 소멸, 따라서 그 생명을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시간 속에서 가진다─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들을 역사적인 개체 그 자체─마치 이 현상들이 단순히 개체의 것들인 것처럼─에 결코 돌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구체적으로는 선명하게 각인된 이러저러한 대표물에서 가장 쉽게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표물이 단지 대표물일 뿐임을 알고 있고, 이 대표물 속에서 뚜렷하게 새겨지는 저 정식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이 대표물의 것도 아니고, 또 내용적으로 대표물로 되는 것도 아님을 안다."(824-5)


"객관적 정신은 또한 현재의 생활 속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들의 시대의 지식〉에 관해서 명백하게 말한다. 개별자는 이 지식에 관여하고, 배우면서 이 지식 속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한다. 그러나 이 지식은 결코 개별자의 지식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식에 계속 종사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온전하게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전체적인 것, 관계를 맺는 것, 통일적으로 계속 전개하는 것, 자기의 질서와 법칙을 가진 어떤 형성물이다." "동시에 그것은 실재성에 속하는 모든 것, 즉 성장, 발전, 전성(全盛), 그리고 쇠퇴 등, 시간적 발생을 가지고 있는 철저히 실재적인 것이다. 객관적 정신의 실재성은 개인들의 실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객관적 정신의 생명과 지속이 개인들의 생명 및 질서와는 다른 것인 것과 같다. 객관적 정신은 개인들의 교체 속에서 지속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실재하는 것, 자기 방식의 존재자, 즉 객관적 정신이다."(825-6)


"그러나 객관적 정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객관적 정신이 실로 정신적인 보편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보편적 의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공동체는 의식적인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작품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법, 도덕, 습속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국가 의식, 법의식, 인륜적 의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별적 주관에 있어서일 뿐이다. 객관적 정신은 자기의 의식을 그 자신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들 속에, 즉 주관적 여러 정신 속에 가진다. 그러나 이 의식은 그에게 적합한 의식이 아니다. 객관적 정신은 분명히 보편적, 대우주적 정신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의식은 결코 보편적, 대우주적 의식이 아니다. 헤겔은 이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객관적 정신은 절대적 이념이지만, 그러나 단지 즉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객관적 정신은 그와 동시에 유한성의 토대 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현실적인 합리성은 이 유한성에 외면적으로 현상하는 측면을 지닌다.〉"(827-8)


"비록 인간은 맹목적으로 역사 속으로 몰려 들어간다 할지라도, 역사는 맹목적 생기현상(生起現象)이 아니다. 역사는 이미 역사 안에서 〈실체〉로 전제된 어떤 것이 목적에 따라서 행하는 실현인 것이다. 이렇게 방향을 잡은 존재는 어떤 외적인 숙명처럼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내적 방향이고, 역사의 자기 결정이며, 역사 속의 실체적 본질─이것은 동시에 실재적인 것으로서 현시된다─의 자발적인 창조 활동이다. 이 실재적인 것, 시원적인 것, 실체적인 것,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자가 객관적 정신이다." "정신의 위대한 긍정적인 창조물, 즉 법, 국가, 현존하는 도덕에서 사정은 역사에 있어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는 동일한 객관적 정신을 다만 다른 측면으로부터, 즉 객관적 정신의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이 역사 속의 본래적 시간성을 도외시한다 하더라도, 역사란 결국 자기의 단계들로 구별 지어진 객관적 정신의 전개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833)


"우리는 헤겔의 윤리적인 기본 관점을 현상학으로부터 알고 있다. 이 기본 관점에 의하면 참된 인륜성은 일체의 형식에 있어서 공동 사회 및 공동체의 일이고, 따라서 개인은 인륜성을 다만 공동 사회의 구성 요소로서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륜성은 마치 법 관계라는 외면성으로 몰리는 듯이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법이 인륜적 정감 작용의 제도이고 창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물은 창조하는 힘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산물이 아니고, 이 창조하는 힘의 고유한 생명이며, 그 정재(定在)의 형식이다. 또는 헤겔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법은 〈자유의 정재〉, 자유의 자기실현, 또는 자유에 있어서의 객관적인 것, 〈제2의 자연〉,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자유이다." "시원적으로 법은 오히려 〈자기의 정재 속에 있는〉 자유 그 자체이고, 객관적 정신의 실존 형식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이념인 것이다."(845-6)


"심정의 순수한 내면성으로서의 도덕, 그리고 형식적 법의 객관에 대한 주관성의 반정립으로서의 도덕은 아직도 본래적인 인륜성이 아니다. 인륜성은 최초로 이 형식적 법의 객관과 주관성의 종합이다." "헤겔이 논리학의 변증법적 원리를 그 증거로 끌어 들이는 이 이행(移行)은 인륜성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올바른 심정이 현존한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은 심정에 있어서도 현실적이어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심정도 역시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의 현실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또는 헤겔이 그것을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인륜적인 것은 주관적 심정이지만, 그러나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심정인 것이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불안정한 심정을 갖고 있는 인간은, 어떤 보편적인 것의 실체적 현실이 인간 속에 그것의 형식을 창조하는 한에서만, 이 실현을 객관 속에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인륜성의 외면적 형식은 국가라는 초개인적 형식인 것이다."(872-5)


"〈인륜적 현실성〉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공동적, 그리고 계통적으로 조직된 세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인륜적 현실성이 바로 국가이다. 자유는 자의가 아니다. 자유는 실체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인지하는 의욕과 행동인 것이다. 개인의 여러가지 자유는 국가의 제 법칙이다. 〈실제로 각각의 참된 법칙은 자유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객관적 정신의 이성 규정, 따라서 자유의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인륜적 현실성은 개인이 그 위에서 자라나고, 또 개인을 도덕적으로 바르게 실제로 맨 먼저 산출해 내는 실재적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자연적 생명이 유(類)의 생명 속에 놓여 있는 상태와 유사하다. 외견상으로는 개인들이 실재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개인들 안에서 보다 더 큰 통일적인 유의 생명이 실현된다. 다만 보편적 실체에게는 대자 존재가 결여해 있을 뿐이다. 정신의 영역에서는 이 대자 존재가 주관의 소유로 돌아간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개인에게 이념이 반영(反映)된다."(880-1)


"절대자는 이성이라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기본 명제는 어떠한 영역에서도 역사철학의 영역에서처럼 그렇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헤겔의 역사관은 순전히 목적론적 관점이다. 역사는 그 속에서 객관적인 〈세계의 궁극 목적〉이 일체의 생기현상을 지배하는 목적 지향적인 전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궁극 목적은 객관적 정신의 대자 존재, 자기-자신-에로 도달함, 즉 객관적 정신의 자기 파악이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객관적 정신의 자기실현인 것이다. 그 때문에 세계사는 〈이성의 형상(形象)과 업적〉이다." "헤겔의 해석에 따르면 역사 과정이란 부정적인 것의 바로 이 전진하는 소멸이다. 또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이 역사 과정은 자신을 인지하는 정신의 점차 순수해지는 자기 서술이다. 이 속에 놓여 있는 낙천주의는 분명히 인간적-행복주의적 낙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역사는 지복(至福)의 실현이 아니라, 이성의 실현이다. 이것은 모든 가치의 가치이다."(896-9)


"헤겔은 총괄적으로 역사 진보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이 진행의 결과는, 정신이 자신을 객체화하고, 이 자기의 존재를 사유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의 규정성을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의 보편자를 파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원리에게 어떤 새로운 규정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민족정신의 실체적 규정성은 변경되어 버린다. 즉 민족정신의 원리가 어떤 다른, 그리고 실로 보다 높은 원리로 상승된 것이다.〉 이행과 상승의 이 형식이 헤겔 역사철학의 핵심 사상이고, 헤겔 자신의 규정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의미 이해의 열쇠인 것이다. 역사 전진은 내면적인 〈변화라는 개념의 필연성〉이요, 변증법의 논리적 진행이 나타내는 것과 동일한 구조를 나타내는 전진인 것이다. 정신이 어느 민족한테서 성숙시키는 열매는 이 열매가 태어난 그 민족의 품안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민족은 저 열매를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이 열매는 그 민족에게는 쓴 음료가 된다.〉"(910-1)


"이 열매는 다시 씨앗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민족─이 민족을 성숙시키기 위한─의 씨앗이 된다. 정신이 할 일은 자기의 본질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단계를 밟아서 완성되는 일이다. 세계정신에 비추어서 헤아려 보면, 제 민족정신이 이 단계들인 것이고, 〈세계정신의 실현을 완성하는 자〉인 것이다." "이렇게 전진함에 있어서 세계정신은 자신에 맞게 세계를 만든다. 세계정신의 관점 아래에서는 세계사는, 현실성으로 되는 실재적인 것이 또한 언제나 그때마다 이성적인 것이 되는 참으로 〈신적인 과정〉인 것이다. 정신은 그 자신을 〈일정한 형태로서〉 산출한다." "세계정신은 말하자면 역사적인 민족들한테서─자기의 무의식 상태인 어둠을 벗어나서 대자 존재에로─암중모색하면서 전진한다. 과정 그 자체가 차츰 가시적으로 되고, 의식적으로 목표를 지향하게 되면서, 어떤 민족정신은 다른 민족정신에게 길을 비켜 준다."(911)


"역사는 역사 속의 정당한 것과 더불어 그 자신 대단히 정당하다. 그리하여 개인 또는 심지어 개별 민족의 운명에 있어서의 비극성도 역시 역사 속에서는 여전히 정당화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고, 사적(私的)인 행위와는 외견상으로 무관계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을 이 역사의 자기 초월의 수단으로 만들 줄 알기 때문에, 역사는 동시에 세계사이요, 세계의 법정이다." "역사적 지식은 정신적 존재의 한 형식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 지식 자신도 다시 자기의 역사를 가진다. 모든 역사적 지식에는 그것의 시대, 그것의 민족, 그것의 정신적 원리 및 지평의 정신적 친자 관계가 뚜렷하게 각인된다. 그것은─마치 객관적 지식이 자기 자신을 찾아서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처럼─객관적 정신이다. 객관적 정신은 이 발자취가 그 속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모든 오류와 사로(邪路)의 기초에 놓여 있다. 객관적 정신은 또한 역사 법칙의 기초가 되어 있기도 하다. 객관적 정신에게도 역시 역사는 세계의 법정이다."(918)


"신과 인간─이것은 가장 내면적인 변증법적 관계이다. 따라서 이 관계─이 관계는 모순이다─는 모순의 역학의 기저에 놓여 있다. 이 모순의 역학은 종합으로, 〈타자〉의 자기 해소에로, 신 속으로의 귀환에로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진정한 변증법에서 그런 것처럼, 출발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은 자기 자신을 인간 속에서 다시 보존한다. 그것은 신의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이렇게 하여 신은 비로소 대자적으로 된다. 즉 그것은 신이 인간의 인식 속에서 그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현실성은 신의 대자 존재 속에 존립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매개로 하여 비로소 현실적으로 된다. 이렇게 하여 계기들이 서로 바뀐다. 그리고 계기들의 서로에 대한 자립성은 가상(假象)으로서 가면을 벗는다. 〈신은 또한 유한자와 똑같고, 자아는 무한자와 똑같다.〉 이것은 신은 오로지 종교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한 철학의 엄격한 공식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기 때문이다."(944-5)


"정신, 인간, 즉 신의 힘이 자신에로 도달하고 또 〈대자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은 종교 그 자체의 정신이요,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 있어서의 종교의 현실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헤겔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독일 신비주의의 핵심 사상에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 헤겔은 이 일을 의식적으로 행하고, 그리고 그것의 증거로서 신비주의의 고전적 인물인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한다. 〈신이 나를 보는 눈은 내가 신을 보는 눈이다. 나의 눈과 신의 눈은 하나이다. 의로운 일에 있어서 나는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은 나 안에서 그 무게가 헤아려진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쉽사리 오해되는 일이요, 또 단지 개념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이를테면 일정한 종교의 정신이 아니라, 종교 일반의 정신이다."(945-6)


"헤겔의 체계는 최고의 대상으로서의 종교에서가 아니라, 체계 그 자체인 것, 즉 철학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헤겔에게 철학의 철학은 철학 곁에서가 아니라, 철학 안에서 그것도 어떤 특수한 분과 속에서가 아니라, 전체의 전개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이 전개가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서 원으로 완결된다는 것, 우리가 절대정신의 정점에서 다시 절대자의 저 시원적(始原的)인 범주─이 범주로써 논리학이 시작되었다─에 도달한다는─이 모든 것은, 이제 투시할 수 있고, 자명하다는 기분이 든다. 이러한 결과는 지나온 길 그 자체에서 매우 명확하게 발생한 것이다. 다만 이 원리는 그것이 자기의 본질─세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정신의 본질 속에서 완성된 상태로 재발견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 원리의 명제는 물론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고, 또 그런 명제로 지속한다. 체계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명제를 단지 그 귀결에서─대상의 단계들의 긴 계열을 통하여─미리 지시할 뿐이다."(9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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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합본, 양장) 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지음, 윤형식 옮김 / 이학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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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우리는 철학적 문제를 고려할 때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①질문 ②논변(들) ③답변 ④함축(들) 이중에서 제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꼽으라면 답변이 될 것이다. 적어도 답변은 다른 요인들에 비추어서만 유의미해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탈레스의 〈모든 것은 물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탈레스가 '변화'하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루어주는 원천인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탈레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 물었다. 실체(근저에 놓여 있는 것)는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요소와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②탈레스는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간접적 답변을 제시하였다. 즉 우어슈토프(물)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후 실체 문제와 변화 문제는 그리스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21-3)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항상 변화 속에 있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①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 그러나 ②변화는 불변의 법칙(로고스)에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③이 법칙은 대립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④그러나 이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집은 그와 같은 변화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 당분간, 즉 수년 이상 건설적 힘이 파괴적 힘보다 더 우세하고, 이 상황이 지속되는 한 집은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힘들 간의 균형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어느 날 파괴적 힘이 우세해지면, 집은 무너질 것이다. 중력과 부식의 힘이 반대되는 힘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즉 모든 변화하는 사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이것들을 지탱하는 기본 원리는 힘들 간의 상호작용이며, 이 힘들 간의 균형은 법칙, 즉 로고스에 따라서 변화한다. 근저에 놓여 있는 실체는 우어슈토프가 아니라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다양성 속에 숨겨져 있는 통일성이다."(32-3)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것도 변화 속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상정하였다. 이성은 변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감각기관은 변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형적인 그리스인인 파르메니데스는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성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이 옳고,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를 기만한다." "달리 말해 이성은 실재가 정지해 있으며 통일성이라고 인식한다. 감각기관은 우리에게 변화 속에 있고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실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 구분 혹은 이원론은 플라톤과 같은 여러 그리스철학자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이원론자들과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감각기관에 현상하는 모든 것이 실재를 결여하고 있다고 볼 정도로 감각기관과 감각 가능한 대상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감각 가능한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일원론'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36-8)


"3세대 그리스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고도 하고 변화는 불가능하다고도 주장하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와 맞서야 했다. 달리 말해 이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이를 매개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중재적 철학자들로 불린다. 엠페도클레스는 불, 공기, 물, 흙이라는 4원소(혹은 불변적인 우어슈토프)와 두 가지 힘, 즉 나누는 힘(미움)과 묶어주는 힘(사랑)을 상정하였다." "4원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불변적이다. 결코 이 넷보다 더 많거나 적을 수 없다(양적으로 불변). 4원소는 항상 그것들만의 고유한 특성을 보유한다(질적으로 불변). 그러나 이 4원소의 상이한 분량들이 (묶어주는 힘의 도움을 받아) 합쳐지는 것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엠페도클레스는 변화와 변화가 불가능한 것 모두를 포함하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변화하는 것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사물〉이고, 불변적인 것은 4원소의 양과 속성이다."(40-1)


# 아낙사고라스는 엠페도클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유했으며, 다만 원소들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바로 그 단순성 때문에 천재적이다. 오직 단 한 가지 유형의 우어슈토프만이, 즉 더 이상 분리가 불가능한 작은 입자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빈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데, 이것들의 운동은 전적으로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데모크리토스가 우주 전체를 그 다채로움과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수의 아주 작은 물질 입자들이 빈 공간 속을 돌아다니고 모든 위치 변화가 충돌에 의해서 결정되는 하나의 거대한 〈당구 게임〉으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빈 공간, 즉 비非존재는 존재, 즉 원자들의 운동의 전체 조건이다. 이것은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제자들과의 명백한 단절이다. 이 원자들은 물리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었다(그리스어: 아토모스atomos[나눌 수 없는]). 원자는 연장延長, 형태, 무게 등과 같은 물리적 개념들로 서술될 수 있는 양적 속성들이며, 색깔, 맛, 냄새, 고통 등과 같은 질적 속성들이 아니다."(44-5)


"초기 그리스철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이다. 이들의 기본 사상은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구조와 형식 혹은 수학적 관계들을 바탕으로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은 수학을 통해 〈빗장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적 구조가 모든 사물의 근본이라고(실체라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논변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사물들은 사라지지만 수학적 개념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 속에서 '불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 지식은 그 대상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다. 나아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수학적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나온다." "비록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을 정당하게 합리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수학이 이성을 통해서, 그러나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 신비로운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플로티노스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처럼 합리주의적인 신비주의자들이었다."(49-51)



제2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그리스철학자들이 제기한 첫 번째 물음은 자연, 즉 퓌시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략 기원전 600년에서 450년까지의 그리스철학 제1기를 〈자연철학적 시기〉라 부른다. 그런데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싹튼 시기와 같은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즈음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만 종종 잘못 논증된 자연철학적 사변에서 지식에 대한 회의적 비판과 지식 이론으로의 변화가, 〈존재론ontology('존재의 이론', 그리스어: 토온to on[onto] = '있는 것/~인 것', 로고스logos = '이론')〉에서 〈인식론epistemology('지식 이론', 그리스어: 에피스테메episteme = '지식[앎]')〉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인식론적 반응 외에 우리로 하여금 이 시기를 인간 중심적 시기라고 부르게끔 하는, 인간을 향한 또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다. 즉 이제야말로 윤리적-정치적 물음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인간은 이제 사유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로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54-7)


"소피스트들은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후기 소피스트가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론(〈확실한 지식은 없다〉)에, 윤리적-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보편타당한 도덕성이나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례로 고르기아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고 전해진다. ①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②무언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알 수 없다. ③앎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이러한 세 가지 극단적 언명은 철학이 무의미하다는 논증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사유의 일부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을 순전히 설득의 방법으로만 활용하는 입장을 채택했을 수 있다. 더 이상 참된 지식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합리적 토론과 합리적 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남는 것은 오로지 설득의 기술뿐이다."(60-3)


"소크라테스에게 덕(아레테)은 어떤 면에서 앎(에피스테메)과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개념적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호한 개념들─정의, 용기, 덕, 좋은 삶 같은 개념들─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앎을 추구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덕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과학이나 형식과학을 통해서는 그에 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는 목표나 가치를 포함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좋은 것(그리스어: 토 아가톤to agathon)에 대한 통찰도, 규범과 가치에 대한 통찰 내지는 규범적 통찰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앎이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앎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통찰이어야 하지, 단순히 그 사람이 〈나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말하는 정도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75-6)


제3장 플라톤 / 이데아론과 이상 국가


"플라톤의 이원론[이데아론]은 대체로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세계 구분과 일치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존재론적 구분이 보편적인 윤리적-정치적 규범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좋음─윤리적-정치적 규범들─은 이데아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데아에 대한 통상적 해석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불변적이다." "이것은 또한 좋음은 하나의 이데아로서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든 말든, 그것에 대해 알든 모르든 언제나 변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플라톤은 이로써 도덕성과 정치가 다양한 인간의 의견과 관습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데아론은 윤리적-정치적 규범과 가치에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토대를 확보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99-100)


"우리는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론)과 감각 세계를 경험하는 것(실천) 사이의 지속적 상호작용(변증법)의 형태로서 '인식의 과정'을 갖는다. 이것이 우리가 좋음의 이데아와 이 [감각 세계의] 삶에서 좋은 것, 이들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개선해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철학은─영원한 이데아와 관련하여─보편적이면서 동시에─우리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구체적이 된다. 철학은 지식인 동시에 교육이다. 이 교육과정은 위로는 이데아(빛)를 향하고 아래로는 지각 가능한 사물들(그림자들의 세계)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오로지 진리를 위한 진리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런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을 우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부분적으로 이데아에 대한 통찰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상황에 대한 통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획득된다. 이데아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성취한 사람은 이 통찰을 가지고 세계를 계몽하기 위해 다시 이 삶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102)


그런데 플라톤은 반민주적이지 않은가? 그는 모든 권력을 전문가들에게 넘기고 인민은 위로부터 통치를 받도록 한다. 이 말은 옳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 속의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첨언해야만 한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어떤 개념적 그리고 방법론적 전제들에 근거하여 실재의 특정 부분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좋음〉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에 관한, 사회와 인간의 삶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목적들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이런저런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해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의 의견보다 '민주주의'가 상위에 있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21)


"플라톤의 예술관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아론과 연관된 또 하나의 논지가 존재한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이데아들은 참된 실재를 대표한다. 감각 지각의 세계의 사물들은 어느 정도 이데아들의 반영물이다." "그래서 (감각 지각 세계의 사물들을 복사하는) 예술의 등급은 이차적이거나 심지어는 삼차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진리의 시각에서 볼 때 아주 높게 등급이 매겨질 수 없다. 복사한다는 생각, 즉 모방은 플라톤의 예술관에 근본적인 것이다. 지각 가능한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복사물이며, 예술 작품은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복사물이다. 그러나 이데아들은 또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이상이며, 따라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복사하는 예술 작품의 이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이데아들을 복사하는 시도를 해야 한다. 플라톤의 철학을 전제하는 이상, 이 요구는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모방(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이론은 (이상적 실재와 관련된) 진리에 대한 요구와 연결되어 있다."(127-8)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 / 자연 질서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플라톤은 이성이 요구하는 바에 입각해서 현실을 비판한다. 그에게 정치란 현실을 이상에 보다 가깝게 만들어가는 과제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하는 국가형태들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이성이란 현존하는 것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수단이다. 즉 플라톤은 현존 질서를 초월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으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은 당시 도시국가의 정치 상황에 보다 더 잘 들어맞는다는 의미에서 보다 현실적이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규정하는 것은 물론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차이점에 주목하느라고 둘이 가진 많은 공통점을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주는 연결 요소는 아리스토텥레스가 플라톤에게 반대하면서 논증적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에 있다. 즉 그는 플라톤에게 반대 논증을 제시하면서 플라톤을 합리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134-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식에 이르는 첫 단계는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개별 사물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부수적인 것의 추상을 통해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다다르는 것이다.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정의定義로 포착된다. 예를 들어 종으로서의 말에 대한 정의가 그렇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의 획득을 감각 경험으로부터 본질에 대한 통찰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정의를 향한 추상 과정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존재론에서 주장하다시피) 독립적 존재를 갖는 것은 바로 개별 사물들, 즉 실체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식은 (자신의 인식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속성들에 대한 지식이라고 믿는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이행하고 난 후, 우리는 이 인식을 다른 참된 명제를 얻도록 해주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에 이용할 수 있다."(140)


"형상과 질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은 현실태actuality와 잠재태potentiality의 구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나무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 (현실적으로) 단지 씨앗에 불과하지만 그 자체 내에 나무가 될 자연적 능력들(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무가 성장함에 따라 씨앗이 자체 내에 가지고 있던 능력들이 실현된다. 바로 잠재태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변화란 잠재력들의 현실화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개념과 연관된 문제 많은 비존재non-being 개념을 회피한다. 변화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란 무로부터ex nihilo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발전과 창조적 솜씨에 기초한 변화는 현존하는 능력의 실현을 포함한다. 가능한 것은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재하는 것이란 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화'를 추구하는 무엇이다."(148-9)


# 잠재태 없이 실재하는 유일한 예외는 순수 현실태 =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는 (각각 테오리아theoria, 프락시스praxis 그리고 포이에시스poiesis에 상응하게) 이론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그리고 포이에시스적인[시적인] 학문을 구분하는데 이것들은 각각 지식(에피스테메)과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 그리고 예술[기술] 혹은 기술적 능력(테크네techne)과 연관되어 있다. 이론적 학문의 목적은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다. 세 개의 이론적 학문 분야는 바로 자연철학과 수학 그리고 형이상학이다. 자연철학은 지각 가능하고 변화 가능한 사물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수학은 불변적이고 양화量化 가능한 속성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형이상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적 형상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획득한 윤리적 능력을 통해 지혜로운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리적 능력(프로네시스)은 그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할 때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암묵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156-7)


"포이에시스적인 학문 분야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학문들은 창조적(포에틱)이다. 이 생산은 예술적 창조를 통해 일어나는데, 그런 이유로 시학과 수사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술적 생산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종류의 공예를 염두에 두고 있다. 끝으로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을 그 자체로는 독자적인 학문 분야가 아니지만 모든 학문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연장[도구](그리스어: 오르가논organon)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를 연구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가 언어의 내적 구조로 간주한 것, 즉 논리적으로 올바른 연역들(증명들)을 발견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을 통해 우리는 일련의 참이고 확실한 명제들로부터 동등하게 참이고 확실한 다른 명제들로 나아가는 것이다. 논리학은 이러한 이행을 확보해준다."(158-9)


"예술이 복제(혹은 모방)라는 근본적 생각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이론을 재해석한 이후로는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을 모방으로 (그리고 인식으로) 바라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개별 사물들 내에 존재한다. 그래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은 플라톤의 경우보다 (형상과 관련하여)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복제하는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가 플라톤의 경우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를 이끌고 덕성스러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통찰에 대해 보다 민주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해서 (인식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은 도덕적 기능도 갖는다. 예술은 정화, 즉 깨끗하게 씻어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가장 깊게는 카타르시스, 즉 정화하기와 깨끗하게 씻어내기이다."(178-9)


제5장 후기 고대 철학


"우리는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저 인민의 정치적 무력함이 지성적 차원에서는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멀리하고 단 한 가지 문제, 즉 어떻게 한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간의 차이가 얼마나 크든 간에 그리고 이 두 학파 내에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했든 간에 우리는 단순화하자면 여러 면에서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이 두 철학이 집중했던 것은 바로 어떻게 개인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단 하나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답은 서로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도시국가와 연결된 〈공동체 속의 인간〉이라는 고대 그리스적 개념은 그 지반을 잃었다. 이제 한쪽에는 특수한 개인이, 다른 한쪽에는 제국이, 한쪽에는 개인의 덕성과 행복이, 다른 한쪽에는 어느 곳의 누구에게든 타당한 보편법의 개념이 등장한다."(186-7)


"쾌락(그리스어: 헤도네hedoné)을 최상의 (유일한) 좋음으로 보는 이론을 〈쾌락주의hedonism〉라고 부른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주의가 신중함과 숙고로 각성된 쾌락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을 순간적인 감각적 욕망으로 보지 않았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우정이나 문학적 활동과 같이 보다 정제되고 확실한 형태의 안녕을 강조했다. 우리가 사적인 행복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보다 확실하고 정제된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 동시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치적 활동에 반대하였다. 정치적 활동은 근심만 많이 만들어낼 뿐 확실한 쾌락은 거의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나 사회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직 쾌락만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이며, 이때 쾌락은 반드시 개인의 쾌락이다. 국가와 사회는 오직 개인의 쾌락을 증진시키고 개인의 고통을 예방할 때에만 좋은 것이다. 법과 관습은 개인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190-1)


"스토아학파는 행복은 진정으로 어떠한 외부의 재화에도 의존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덕은 이성에 따라서, 즉 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행복의 유일한 조건은 덕성스런 삶을 사는 것이고 덕은 앎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입장을 전적으로 일관되게 견지했다. 덕성스럽게 사는 것은 인간에게 유일한 선이다." "사람들의 외적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이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의 역경에 처하든 외부적으로 성공해서 명예와 인정을 얻든, 부자든 가난하든, 혹은 주인이든 노예든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구분은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구분이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외부 세계와 관련하여 금욕주의적 도덕을 설파했고 성품의 내적 강화를 위한 교육을 주장했다. 운명의 장난에 직면하여 인간은 스토아적 평정심을, 즉 초연함[그리스어: 아파테이아apatheia]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192-4)


"그리스-헬레니즘의Greco-Hellenistic 스토아학파─제논(기원전 약 326-264), 클레안테스(기원전 331-233), 크뤼시포스(기원전 약 278-204)─에게서 우리는 일종의 〈중간 계층〉의 심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금욕적 은둔만이 아니라 의무와 품성 형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스토아학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자연법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스토아철학은 점차 사회 상층부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변화를 거듭했다. 의무와 품성 형성 및 보편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의 학설은 로마의 상층계급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이들은 마침내 스토아철학을 일종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하층계급적인 퀴니코스학파의 세계 체념적 특징들은 억압되고, 의무와 강하고 책임감 있는 품성의 도야에 기초하여 국가를 뒷받침하는 도덕이 강조되었다. [스토아학파가] 처음에 주장한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은 이제 그 흔적만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내적이고 사적인 것과 외적이고 공적인 것 간의 구분이다."(196)


"로마의 스토아학파─키케로(기원전 106-43),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54), 에픽테토스(기원후 약 50-13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기원후 121-180)─는 인간을 보편적 국가와 보편법하의 한 개인으로 간주했다." "한 사람의 세계가 우주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한 사람의 이성도 보편적 이성의 일부이다. 따라서 인간의 법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영원한 법[법칙]의 일부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칙적으로 영원한 법과 일치하는 사회의 법률과 그렇지 않은 법률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한 법률들과, 보편적인 자연법과 일치함으로써 타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현존하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주장하는 법률들을 구분할 수 있다. 인간 이성은 그 모든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세계 이성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이다. 이 점이 사법적司法的, 정치적 법률은 보편적 자연법에 근거한다는 자연법 이론의 핵심 요점이다."(197-9)


"각 시기별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불행을 항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공통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인생철학 학설들 중 어느 것도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것이 고대가 끝나갈 무렵 많은 지지를 얻은 결론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낸 이 인생철학 학설들은 그것들이 약속했던 것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을 확보할 것인가?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초자연적 수단, 즉 종교를 통해서였다. 고대 말이 되면서 종교적 갈망은 커져만 갔다. 신플라톤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에 나타난 종교적 갈망에 부응하고자 했다. 신플라톤주의의 학설은 개인을 보다 광대한 우주론적 그림 안에 위치시키고 악을 결여로, 비非존재로 묘사했다. 또한 육체(물질)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즉 비존재로, 그리고 영혼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인의 영혼이 세계영혼과의 총괄적 합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영혼을 그 유한한 껍데기(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205-6)


제6장 중세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새로운 기독교적 개념들, 즉 만물의 중심인 인간, 직선적 발전 과정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무에서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 개념을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 개념들은 고대의 철학과 융합된다. 신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창조한 이상, 그리고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고 구원을 받을 운명인 인간이 바로 창조의 귀감인 이상, 모든 것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의 내적 존재는 조용한 이성 활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상이한 감정과 의지의 다양한 충동이 서로 다투는 전쟁터이다. 이 내적 존재는 비합리적 충동들의 놀이터, 죄악과 죄과와 구원에 대한 갈구가 난무하는 놀이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내적 삶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은총과 〈초인간적〉 조력을 필요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가 전적으로 신의 예정된 구원 계획에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했다."(243-4)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악마의 투쟁을 각 사람의 내부 투쟁으로 해석했던 것처럼 똑같은 투쟁을 역사적 차원에서는 하느님의 나라(키비타스 데이civitas Dei)와 지상의 나라(키비타스 테레나civitas terrena) 간의 대립에서 찾았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은 명확히 정치 이론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정치학적이 아니라 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특정 정치 체계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나라를 우연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본성이 타락했기(아담과 이브의 원죄) 때문에 인간의 악을 다스리려면 강한 지상의 나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상의 나라는 선과 악의 역사적 투쟁이 지속되는 한, 즉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부터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는 꼭 있어야 할 필요악이다."(244-5)


"〈보편자 문제〉는 보편적 개념들, 즉 보편적인 것[보편자普遍者universals]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어떤 존재 형식을 갖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벌어진 중세의 논쟁과 연관된다." "보편자 문제에서 견해 차이는 보편자의 존재 수준에 대한 물음에 어떤 답을 갖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보편자가 실재real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재론자realist〉(혹은 〈개념conceptual 실재론자〉)로 불린다.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name(라틴어: 노미나nomina)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명론자nominalist〉로 불린다." "초기의 중세철학에서는 실재론이 지배적이었다. 중세 중반(1250년)에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보편자는 신의 생각 속에(인테 레스), 개별 대상들 안에(인 레부스) 그리고 인간의 생각 속에 추상으로서(포스트 레스) 존재한다는 온건한 실재론을 만난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이르면 유명론이 세를 얻는데, 예를 들면 오컴의 윌리엄과 마르틴 루터가 대표적이었다."(260, 264)


"신학적으로 보편자 문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루터에 이르는 전통이 보여주듯이 기독교 유명론자들은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신앙과 계시의 독특함을 강조했다. 유명론자들은 신의 말씀과 신앙을 통해 계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이성이 파악할 수 있다면 신의 육화肉化의 핵심적 의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 실재론자들은 견해가 달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이성의 도움을 얻어 신(시원적 원천)에게 다가갈 것을 제안했는데 이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정신 속의 개념들이 실재에 조응할 경우만이다. 이것은 보편자 문제에 대해 소위 실재론적 입장으로 전개되었던 종류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전제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원죄설과 성체성사의 신비와 삼위일체설과 대속설代贖說을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였는데, 이것들은 개념실재론의 견지에서 볼 때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265-6)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신학적 종합을 이룩해냈다.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토마스주의Thomism적 종합의 특징은 '조화시키기'이다. 신과 세계를 조화시키고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보편자 문제와 관련하여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실재론을 수용하였다. 개념들은 존재하는데 오직 대상들 내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지식은 감각인상들로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는 추상을 통해 대상들 속의 보편적 원리들(보편자들)을 인식한다. 이것은 아퀴나스에게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이성을 통해 많은 우주의 원리를 인식할 수 있다. 우주가 고차원의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통찰도 이에 포함된다(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달리 말해 이성과 계시(신앙)는 합일된다." "그러므로 토마스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행위에 관하여 이성이 의지보다 우선한다는 일종의 주지주의主知主義intellectualism를 표방한다."(268-9, 280)


"『평화의 수호자』(1324)의 저자인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1275/80-1342)는 교황에 적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마르실리우스는 사회가 자족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회는 어떠한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정당화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경우 신앙과 이성은, 성聖과 속俗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사회는 교회와는 독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적 진리와 합리주의적(세속적) 진리에 대한 토마스주의적 조화를 거부했고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즉 이성은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신앙은 계시에 (즉 성서에) 토대하며, 따라서 내세에 적용될 뿐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실리우스는 종교(기독교)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신론은 18세기 프랑스의 산물이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종교를 〈내면화〉함으로써, 사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97-8)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주의적 인간론을 계승한 루터의 신학은 흥미로운 주의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다(주의주의voluntarism는 〈의지〉를 뜻하는 라틴어 볼룬타스voluntas에서 유래하였다). 신이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사이에 선을 그었다면 신은 이것을 자주적 의지의 행위로 행한 것이다. 옳음과 선이 옳고 선한 까닭은 신이 어떠한 도덕적 규준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것들을 그러하도록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신은 이 선을 달리 그을 수도 있었다(신의 전능함). 신은 신이기에 그의 의지는 어떠한 규칙이나 잣대의 규정을 받지 않는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오히려 신의 의지가 모든 사물의 잣대인 것이다." "또한 주의주의는 기독교 윤리를 신의 결단주의적 의지에 정초시킨다. 이로써 신은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은 절대적 존엄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루터에게 세계와 도덕적 규준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것들은 원칙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것일 수 있었다."(303-4)


"많은 기독교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라틴명: 아비켄나, 980-1037)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후기 그리스 형이상학(신플라톤주의)의 개념들을 원용하여 이슬람의 진리를 정식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븐 시나의 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그의 물질관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신이 무無로부터 물질을 창조하였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한 빛으로부터의 유출이 물질을 채우기는 하였으나 물질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초기 이슬람 철학 내에 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킨 출발점이 되었다. 위대한 이슬람 신비주의자이자 신학자 중 한 사람이 알 가잘리(1058-1111)는 여러 저작에서 이븐 시나의 신플라톤주의를 공격하였다. 그의 핵심 요지는 철학자들의 신은 코란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이 코란과 충돌할 경우에는 철학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같은 시기 기독교 세계에서도 유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318-9)


"알 가잘리의 도전에 응전한 것은 이븐 루시드(라틴명: 아베로에스, 1126-1198)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이븐 루시드주의[아베로에스주의Avrooism]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스콜라철학의 주요 특징을 이루었다. 알 가잘리와의 논쟁에서 이븐 루시드는 철학적 결론과 코란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명백한 모순들을 설명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이븐 루시드는 서양철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해석 원칙 하나를 도입한다. 그는 코란 속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코란 구절의 문자적 해석이 이성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알 가잘리와 이븐 루시드의 논쟁에 대한 이 간략한 서술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근본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철학과 기독교 철학 둘 다에 존재하는 오래되고 잘 알려진 도전이다."(319-20)


제7장 자연과학의 발흥


"르네상스의 방법 논쟁에서는 탐구를 사실상 중세 스콜라철학을 지배했던 (그러나 그리스철학을 지배했던 것은 아닌) 연역법적 과학의 이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불가피하게 되었다. 순전히 논리적 연역으로는 (논리적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미 전제들 속에 내포되어 있다. 연역적 답들은 확실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찾는 이들에게는 별무소득인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에 추구되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지식이었다. 연역법의 약점은 그것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득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이 인식론적 갈등에 참여한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인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과학적 이상으로서의 연역법을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가설과 연역적 추론과 관찰의 역동적인 결합에 놓여 있었다. 이 새로운 조합이 바로 바로 가설연역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이다."(331)


"체계적 관찰과 수학적 모델에 기초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태양중심설은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온 생활 경험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기 인식의 위기를 초래했다." "우리는 과학적 경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이론들이 인간의 생활 경험의 변형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의 자기 인식이 과학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인식의 변화는 그 의미가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추락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새로운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즉 새로운 세계관은 천구는 특별하며 인간이 거주하는 우주의 부분에 비해 질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믿음의 기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우주를 탐구하면서 성취한 진보 덕분에 새로운 긍정적 자기상을 구축할 잠재력이 있었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세속적이고 과학에 근거한, 진보에 대한 믿음의 뿌리이다."(342-3)


"갈릴레이는 과학 지식은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결코 충돌할 수 없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신은 성서와 자연이라는 책에 자신을 계시한다. 신은 두 가지 책 모두의 저자author이다. 그리고 신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다. 그래서 성서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를 조화시키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 갈릴레이의 생각이었다. 이 견해는 교회의 계몽된 구성원들도 수용하였다. 보다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조절과 조화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갈릴레이에 따르면 과학 이론들은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도구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해석은 자연과학에 맞게 조절되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학자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선다. 가톨릭교회로서는 당연히 이 견해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종교적 물음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것이 초래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352)


"[주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는 〈아래로 던져져 있는 것〉, 즉 〈아래에[근저에] 놓여 있는 것〉을 뜻하는 수브-옉툼sub-jectum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에 인간은 진정한 sub-ject가 아니었다. 근저에 놓여 있는 것(sub-stance[실체를 뜻하는 영어 substance는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sub-stans에서 유래했다])은 사물일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주체subject가 되고 다양한 사물들이 대상들이 된 것은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즉 인간은 이제 (근저에 놓여 있는 것subjectum으로서) 대체로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사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주체의 인식 대상들로 이해되었던 것이다(사물은 대상들로 파악되었다)." "관념적으로 보건대 인간은 더 이상 합리적 공동체, 즉 폴리스와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가정, 즉 오이코스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 즉 조온 폴리티콘이 아니었다. 인간은 기술적 지식과 함께 객체[대상]들의 우주에서 지배권을 쥔 주체가 되었다."(375-7)


제8장 르네상스와 레알폴리틱 / 마키아벨리와 홉스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은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정치 이론들과는 구분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물질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거의 한계를 모른다. 그런데 물자는 희소하기 때문에 갈등이 존재한다. 국가는 다른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 기초한다. 법을 지탱하는 권력이 없으면 무질서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인민의 안전을 보장할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점을 주어진 사실로 전제할 뿐,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분석은 행하지 않는다." "좋은 나라는 서로 다른 이기적 이해관계들 간에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안정된 나라이다. 나쁜 나라는 이기적 이해관계들이 적나라하게 갈등하는 나라이다." "정치의 목적은 고대 그리스나 중세에서처럼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함으로써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도덕과 종교를 포함한 다른 모든 것은 그 수단이다."(382-3)


"대부분의 그리스철학자와 기독교 신학자는 도둑질이나 살인과 같은 특정 행위(수단)가 그것이 바람직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치 않고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목적과 수단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주된 관심사는 순전히 정치적인 게임이었다. 나아가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몰역사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시대의 정치 상황을 공부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정치 상황에 통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로마사논고』 참조). 따라서 우리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정치학을 대부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방법은 우리의 개념으로 보자면 〈몰역사적〉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의 시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역사적으로 사유한 것이다."(386-7)


"홉스는 여러 면에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와 정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불변적이고 초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개별적 사실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일반화를 하는, 마키아벨리가 했던 것과 같은 단지 기술적記述的인 방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홉스는 새로운 과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궁극적으로 우주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자연과학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동시에 홉스는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자였다. 그는 그보다 앞선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변화하는 표피적 사건들을 해명해줄 근본원리를 찾고자 했다.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기초를 찾고자 했다. 르네상스 후기의 철학자로서 홉스는 이 기초를 인간에게서 찾고자 했다. 인간이 바로 수브-옉툼, 즉 토대이며, 이로부터 사회가 설명되어야 한다."(394-5)


"권력은 통합되거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홉스에게 움직일 수 없이 확실한 것이다. 이 통일성의 거소居所가 국왕인지 의회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홉스의 이론에는 오직 하나의 왕만 존재해야 한다는 말 같은 것은 없다. 홉스로서는 법과 질서를 강제하는 이가 한 사람인지 여러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홉스의 절대왕정에 대한 옹호는 빈약하다. 게다가 홉스에게 근본적인 것은 왕이 아니라 개인이다. 이기적이고 고립된 개인들 간의 투쟁이 국가와 왕정의 토대이다. 국가와 왕정은 개인의 자기 보존을 확보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홉스는 사회적인 모든 것이 국가, 더 나아가 개인의 자기 보존 욕구와 관련된다고 보았다. 개인들은 근본적으로 비사회적이며, 그런 점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실로 부차적인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한 자기 이익에 기초한 계약을 통해 창출된 인위적 산물이다."(402-5)


"국가는 개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주의liberalism가 관용을 지지하는 정치 이론을 의미한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이 경우 자유주의의 근원은 예를 들어 로크에게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틴어: 리베르타스libertas = 〈자유〉[liberalism은 libertas에서 유래]). 그러나 우리가 자유주의를 심리적 태도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개인, 계약 그리고 국가라는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정의한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용어 사용은 우리가 개인, 계약, 국가를 기본 개념으로 하는 자유주의(자유주의자liberalist)와, 관용과 법적 자유를 옹호하는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태도로서의 리버럴리티(리버럴한 사람liberal)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에 따른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자〉라 불릴 수 있지만 〈리버럴한 사람〉은 아닌 반면, 로크는 자유주의자이자 리버럴한 사람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은 리버럴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아니다."(408-9)


제9장 의심과 믿음 / 중심에 선 인간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인 동시에 낡은 것의 대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일소하고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 그의 신 존재 증명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철학은 끝없는 논란의 연속이었다. 오직 확실한 것은 연역적인 수학적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연역 체계'를 자신의 과학적 이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철학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철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같은 연역 체계가 되려면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참'인 전제들(공리들)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연역 체계에서 전제들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우면 결론들(정리들)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수학과 일부 연역적인 학문 분야들로부터 차용해 온 과학적 이상은 어떻게 하면 이 연역적인 철학 체계를 위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전제들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끌었다."(414)


"이 지점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懷疑'가 들어오는 지점이다. 방법적 회의는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을 찾기 위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명제를 걸러내는 수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을 연역 체계의 전제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방법적 회의의 목적은 이성적으로 정당하게 의심할 수 있는 것 혹은 그럴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방법적 회의는 연역적 철학 체계의 전제가 될 수 없는 모든 진술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 방법적 회의는 확실한 전제들을 갖는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유 주체는 바로 혼자 생각하는 개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의문에 대한 해답, 즉 회의를 종료시키는 확실성이 생각하는 개인의 확실성이라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의의 확고한 종료인 이 결과는 일정하게 이미 데카르트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속에 녹아들어 있다."(415-6)


"19세기에 그 절정에 도달한 새로운 역사의식은 명백히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에 의해서 미리 준비되었다. 비코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가 창조한 것에 대해서만 명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때 비코가 생각한 일차적 대상은 사회와 역사이지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제도와 법령도 역시 그 대상이다. 사람이 창출한 것은 신이 창출한 것, 즉 자연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자연은 사람이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신만이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오직 외부로부터만, 즉 관찰자의 시각에서만 자연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신처럼 그 내부로부터 자연을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우리가 그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것들뿐이다. 즉 인간이 그것들의 창조자임을 인식할 때뿐이다. 따라서 비코에게 있어 구성된 것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간의 구분은 중요한 인식론적 함의를 갖는다."(430-2)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상상해보고 그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보이지만 비코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비코는 우리가 공통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안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의도와 욕망과 이유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플라톤의 아테네나 키케로의 로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통찰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비코에 따르면 우리는 감정이입 내지 판타지아를 통해서만 그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코는 연역적이지도 않고 귀납적이지도 않은 (가설연역적이지도 않은) 통찰 내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확정하려고 노력한다. 비코가 제공한 새로운 방법적 원리들, 즉 비코의 새로운 과학[시엔차 누오바Scienza nuova]은 문헌학과 사회학과 역사 연구의 종합이다."(434-6)


제10장 체계로서의 합리주의


"스피노자는 시스템, 즉 체계를 세우는 데 뛰어난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합리주의적 체계 수립가로서 스피노자는 공리와 연역 추론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 능력을 극히 신뢰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사적 연결 지점들을 언급하자면, 도덕 이론과 관련해서는 스토아철학과 유사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자연론과 관련해서는 범신론과, 종교 사상과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성서 비판과, 정치 이론과 관련해서는 관용에 대한 근대적 요구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합리적 직관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자이다. 그는 또한 데카르트처럼 수학을 과학의 이상으로 여기면서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연역주의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공리를 찾는 데 주로 몰두한 반면, 스피노자는 공리들로부터 출발하면서 추론에, 체계에 역점을 둔다."(444-5, 450)


"『윤리학』 첫 페이지에서 우리는 기본 개념인 실체substance에 대한 정의를 발견한다.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된다. 즉 그것의 개념은 그것을 형성하기 위한 다른 어떤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체의 정의상 모든 한계 설정이 배제되기 때문에 실체는 하나이자 무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체는 세계에 하나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이다." "또한 다른 어떠한 것도 실체의 원인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 다른 어떤 것은 실체에 대한 완전한 개념 규정 속에 포함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실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연장延長 혹은 사유로 나타난다. 실체는 무한히 많은 현현顯現 방식을 갖지만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방식으로 현현한다." "연장과 사유는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두 가지 독립적인 기본 요소가 아니다(레스 코기탄스[영혼]과 레스 엑스텐사[물질]).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일 뿐이다."(450-4)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다. 개별 인간은 실체의 한 양상이다. 스피노자에게 우리 자신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체의 측면들로, 실체의 양상들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보다 평범한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속해 살아가는 관계들과 연관들도 이해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협소하고 사소한 인연과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괄적인 사회적 그리고 물리적 실재에 의해 내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구원을 주는 진리는 우리가 총체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다 큰 연관 관계 속에서 올바른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다."(456-7)


제11장 로크 / 계몽과 평등


"로크는 회의를 옹호했지만, 그가 옹호한 회의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오류 불가능한 지식을 얻기 전의 일시적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의심하고 검증하는 태도로서의 회의였다. 인식 과정은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끄는 과정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으로 이끄는 과정이다. 우리의 과제는 자연과학에서처럼 우리가 가진 지식을 점차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발흥은 로크에게 합리주의자들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태도와 이상적 인식에 대한 생각을 갖도록 했다." "지식 비판을 행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인식론은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는 도약대였던 반면, 로크와 경험주의자들에게 지식 비판이 갖는 치료적이고 지식을 촉진하는 힘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목적이었다. (로크가 보기에) 오로지 개념들만을 통해서 얻는 통찰은 한계가 있고 문제의 여지가 많다. 적절한 지식 획득은 경험과학에서 검증과 점진적 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466-8)


"우리는 어떤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로크는 이렇게 답한다. 〈정신mind은 어디서 그 모든 이성과 지식의 재료들materials을 가지고 오는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한 단어로 답하겠다. 바로 '경험EXPERIENCE'이다.〉" "그렇다면 경험이란 무엇인가? 로크는 외적 지각으로서의 경험(감각)과 우리 자신의 정신적 작용과 조건에 대한 내적 지각으로서의 경험(반성)을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사실 단순한 인상들(관념들)이다. 대체로 로크는 이 기본 경험들이 수동적으로 획득된다고 생각했다. 수동적으로 획득된 이 단순관념들simple ideas은 적극적으로 정신에 의해 상이한 방식으로 가공된다. 이렇게 해서 아주 다양한 우리의 복합관념들complex ideas이 생겨난다." "즉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지각과 반성을 통한 단순관념들로부터 비롯되지만, 정신은 이 재료를 적극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지식을 만들어내는데, 이 지식은 단순관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470-2)


"로크의 자연 상태는 무정부적 전쟁 상태가 아니라, 개인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생활 형태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적으로, 즉 그 자체로 모두 평등하다." "나아가 이 평등과 자유는 우리가 자유롭게 우리의 신체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성취한 것, 즉 우리 노동의 결과인 재산에 대해서도 처분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들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 정치적으로 질서 잡힌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자연 상태보다는 질서 잡힌 사회에서 사는 게 더 안전하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크에게 국가의 목적은 무엇보다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러한 로크의 견해는 분명 국가는 무엇보다 윤리적 과제를 갖는다는 고대와 중세의 통상적인 견해, 즉 국가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해야 하며,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윤리적-정치적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견해와는 반대된다."(480-1)


제12장 경험주의와 인식비판


"로크는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관념들, 감각 인상들)와 우리의 감각과는 독립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구분하였다. 우리는 오직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만 이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알 수 있다. 버클리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원인으로서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지각 불가능한 대상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구분은 형이상학적 구성물을 가지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각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에세esse[존재]는 페르키피percipi[지각됨]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에 의해 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지각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 조건하에서 지각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부정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지각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96, 501)


"버클리는 존재가 지각에 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원칙은 지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생각했다. 지각 개념은 반드시 주체(영혼)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반드시 지각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체에게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라는 것이 참이다. 에세[존재]가 지각함perceiving과 같은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인간의 의식, 즉 주체가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데 버클리에 따르면 또한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의식도 존재한다. 즉 지각 가능한 모든 것을 항상 지각하고 있는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신이다. 그래서 신은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세는 페르키피와 같다." "신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지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이 세계에 있지 않다. 즉 관념들 중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가, 질서 잡힌 다양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버클리의 신 존재 증명)."(501-2)


"흄은 오직 두 종류의 인식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경험, 즉 궁극적으로 감각 지각에 근거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주의적 해석에 따르자면 수학과 논리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들 간의 관계에 관한, 관습적으로 고안된 규칙들에 근거한 인식이다.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인식을 초월하는 지식은 가질 수 없다." "흄은 그가 〈인상impressions〉이라 부르는 것과 〈관념ideas〉을 구분한다. 인상은 강렬하고 생생한 지각으로서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감각 지각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증오나 기쁨 같은 직저적인 심리적 경험들도 역시 인상이다. 따라서 인상은 외적 지각과 내적 지각을 모두 포괄한다. 흄은 이러한 직접적 감각 지각, 즉 인상에 근거한 정신적 이미지들이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흄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실체 개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버클리와는 반대로) 신 개념을 포함하여 정신적 실체 개념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인과성 개념도 비판한다."(507-9)


"흄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는 그러한 가능한 필연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경험주의적 의미에서 지식이 아닌 구성 요소를 포함하는 인과성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사건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미래에도 똑같은 과정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흄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도덕규범을 알게 해주는 이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원리들을 알게 해주는 이성이나 이성적 직관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과관계에 대해 아는 것은 경험(감각 지각)에 기초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흄은 인식론적으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결과가 성취 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했지만, 경험과학에서의 점진적이고 자기 수정적인 진보의 가치는 힘주어 강조했다."(514-8)


"경험주의는 합리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경험주의자들은 직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합리주의자들이─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자들─자기들끼리 의견이 불일치한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성적 직관을 통해 참된 통찰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리주의의 비판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주의적 주장은 그 자체로 경험적 진리인가? 이 주장은 어떤 종류의 경험에 근거할 수 있는가? 경험주의적 주장이 그 자체로 경험적 진리가 아니라 모든 경험적 진리에 관한 주장이자 의미 있는 진술과 무의미한 진술 간의 구분에 관한 주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경험주의적 주장은 경험주의자들이 수용하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 즉 분석적 진리와 경험적 진리 중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다. 이것은 경험주의적 주장이 간접적으로 경험주의적 주장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529)


제13장 계몽주의 / 이성과 진보


"계몽주의 시대는 확장하는 중간 계층 내의 진보적 낙관주의와 새롭게 각성된 이성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특징으로 한다. 이 세속화된 메시아주의에서는 이성이 복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도움으로 실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밝히고 물질적 진보를 성취할 것이었다. 인간은 점차 근거 없는 권위와 신학적 후견을 벗어나 자율적이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주적이고 계시와 전통으로부터 독립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상이 해방되었다. 무신론은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곧 기대했던 진보를 실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이 이성(과학)이 크나큰 물질적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분명 옳은 듯 보였지만 그들의 이성 개념은 너무나 모호했다. 그 개념은 논리적, 경험적 그리고 철학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었고 서술적 통찰과 규범적 통찰을 담고 있었지만, 이 진보를 실현하는 데 닥칠 정치적 난점들은 고려하지 않았다."(537)


"계몽사상가들의 이성에 대한 도취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극단적 형태를 띠면 피상적이고 모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을 공격하면서 그것들을 부정의 형태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즉 감정의 함양과 회의적인 비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은 당시의 낙관주의를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루소는 계몽철학에 대한 이 순전히 부정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계몽철학자들이 다소 일방적인 이성의 함양을 부르짖었다면 루소는 감정의 함양을 내세웠다. 계몽철학자들이 개인과 자기 이익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면 루소는 공동체와 '일반의사'를 찬양하였다. 계몽철학자들이 진보를 찬미할 때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계몽철학자들이 악은 전통과 특권에 의해 조장된 무지와 불관용에서 기원하며 그 구제책은 계몽이라고 생각한 반면─이성과 과학이 승리하면 문명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선도 그 모습을 드러낼 것─루소는 문명으로부터 악이 기원한다고 생각했다."(557-8)


"국가가 계약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개인주의적 이론들과 보조를 맞추어 루소 역시 자연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사회계약으로 끝을 맺는 논증의 노선을 따른다. 그러나 루소에게 핵심은 그저 자연 상태와 국가에 의해 형태가 부여된 사회라는 두 개의 뚜렷이 구분되는 개념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형되는 것, 즉 계약에 의한 사회의 형성이라는 문제도 아니었다. 루소의 사유 실험은 사회와 인간의 점진적 발전을 재구성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발전의 궁극적 결과가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이다." "플라톤을 따라서 루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완전히 발전된 인간은 '사회-속의-시민'으로서 내적으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상위 중간 계층이 주창하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보수적 반동을 대표한다. 보수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반대로─밀접한 공동체적 유대를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다."(561-2)


"자유주의 전통은 비록 사회의 유기체적 측면을 종종 간과하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노골적인 권력의 악용으로부터 정치적 과정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양식들을 발전시켜야 하는 의의를 제공하였다. 루소의 유기체적 사회관은 대체로 제도적 문제들을 무시하였다." "일반의사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표현 가능한지가 불분명할 경우 우리는 독단적인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일반의사라고 내세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하는 루소의 유기체적 사회 이론은 비합리적이고 낭만적인 공동체 숭배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루소의 사상이 제도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의사 이론이 한편으로는 (로베스피에르나 마오쩌둥식의) 연속 혁명─인민의 자발적 의사가 통치를 이끌어야 한다─에 복무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버크의 경우처럼) 안정된 민족국가─인민의 의사는 연면한 전통에 의해 창출된다─에 복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564-5)


제14장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공리)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을 근본적인 규범적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엘베시우스를 따랐다. 벤담의 사상에서 새로운 것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일관되게 이 원칙을 법률 개혁의 지침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이 가장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지를 계산하는 체제를 개발하였다는 점에 있다." "쾌락의 계산보다는 고통의 계산을 말하는 것이 아마도 더 타당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우리의 행위 내지 재화의 긍정적 서열을 매기는 것보다는 일정한 근본적인 결핍들을 회피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공리 개념은 쾌락 개념과 같은 개인주의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쾌락 개념은 개인의 경험과 관련되는 반면, 공리 개념은 바람직한 결과와 관련된다. 따라서 공리의 철학, 즉 공리주의는 우선적으로 결과주의 윤리학이다."(578-9)


"벤담은 개인[개체]the individual에 대한 강조를 언어철학의 영역에서도 이어간다. 벤담은 의미를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별 사물들을 지칭하는 낱말들뿐이라고 주장했다. 개별 사물들을 지칭하지 않는 낱말들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벤담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들의 쾌락과 고통뿐이다. 명예, 조국, 진보 등의 낱말들이 종종 미혹과 조작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은 명확하다. 따라서 벤담의 유명론에는 올바른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벤담이 그러한 낱말들은 모두 미혹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 이상 실재의 측면들, 즉 사회적 연관 관계들을 은폐할 위험에 빠진 사람은 오히려 벤담 자신이다. 벤담이 모든 개념어를 거부하는 만큼 그는 익명적 권력 구조 같은 사회의 특유하게 사회적인 측면들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벤담의 유명론의 대가는 비합리적이고 해로울 수 있는 지배적 경향들에 대한 맹목과 무력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580-1)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와 경험주의에 의해 각인된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이 이론들의 이전 형태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그는 사회과학의 힘을 빌려 고전적 자유주의를 수정하려고 시도했고, 정치 이론에 있어서는 자유방임을 거부하고 적극적 입법을 강조하는 사회자유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밀은 익명의 사회적 힘들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로써 밀은 비非사회적인 인간 원자들과 그 외부의 국가 체계라는 설명 틀을 벗어난다. 사회도 개인 및 국가와 더불어 연구해야 할 영역이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국가가 외적 강제를 행한다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의 순진한 견해를 밀이 거부한 것이다. 사회자유주의자 밀은 국가와 법률을 넘어서는 강제성과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입법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가 최대한의 자유와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585, 590)


제15장 칸트 /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흄의 회의론에 대한 칸트의 거부는 인식론적 시각의 역전逆轉에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방법론과 동일하게 칸트는 주체가 대상[객체]object으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써 인식이 생겨난다는 기본적 사고를 뒤집었다. 그는 그 관계를 역전시켜 대상이 주체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주체인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의 역전이 바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인식론의 핵심이다. 칸트는 그가 경험주의적 회의론과 합리주의적 독단론이라고 보았던 것을 회피함으로써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종합을 시도한 셈이다. 칸트는 신과 도덕규범같이 감각을 초월하는 대상들에 대한 합리적 직관 대신에 경험의 근본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 통찰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인식론적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선험적先驗的, transcendental 지식이라 부른다."(602)


"칸트는 모든 인간은 동일한 원칙적 〈형식들〉을 갖는다고 전제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이 동일한 형식들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형식들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형식들〉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형식들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같은, 모든 인식의 일반적 특징들이다. 이것들은 모든 경험적 탐구에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들로서 경험심리학의 비판적 검증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동일한 형식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형식들에 의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확실한 무엇을 안다.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든 간에 그 경험은 시간, 공간, 인과성 등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이 구조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현재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학에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일정한 근본적 특징들이 존재한다."(605, 608)


"칸트는 그가 경험주의적 회의주의라고 보았던 것을 거부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의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 통찰이 존재하며, 이 통찰은 두 학문, 즉 수학과 자연과학이 확고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칸트는 그가 합리주의적 독단주의라고 보았던 것도 거부했다. 사변적 합리주의(형이상학)는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학문[과학]이 아니다.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성적 직관은, 가령 신에 대한 직관은 단지 가짜 통찰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사변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이 시작된다. 전통적 합리주의는 가짜 학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칸트처럼 경험의 조건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에 도달하려고, 즉 감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에 도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의 조건(과 한계)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612-3)


"흄의 윤리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여러모로 칸트의 인식론적 답변과 유사하다. 칸트는 〈너는 ~을 해야 한다〉라는 당위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떻게 이러한 당위 규범이 가능한가? 이 〈너는 ~을 해야 한다〉는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 의무이기 때문에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 없다. 경험적인 것은 (칸트에 따르면) 규범적인 것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험적인 것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너는 ~을 해야 한다〉는 우리 안에 내재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무조건적인 도덕 명령(〈너는 ~을 해야 한다)〉은 우리 행위의 결과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의 결과를 완벽하게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이 도덕 명령은 우리의 도덕적 의지에 적용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 이론은 결과주의 윤리학[공리주의]이 아니라 도덕적 의지의 윤리학이다."(616-7)


"이제 칸트 철학에는 인과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의 세계와, 우리가 자유롭고 책임 능력을 갖는 도덕성의 세계 간의 긴장, 간단히 말해 필연성과 자유 간의 긴장,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간의 긴장과 관련된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하여 칸트는 매개하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이론을 도입했다. 즉 판단력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능력이다(이 매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판단력이 목적론과 미학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우리는 비록 모든 설명이 사실상 인과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 형식들에 대해 즉각 목적론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삶이 마치 목적과 의미를 갖는 것처럼 사고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다. 목적과 의미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자연 발생적인 사유 방식은 두 세계(필연성과 자유) 속에서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636-7)


"미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두 세계를 조화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미학은 두 가지 기본 경험, 즉─위대한 예술이나 자연의 경우처럼─압도적이거나 숭고한 것의 경험과 아름다운 것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들은 인식의 판단이 아니라 〈취향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이 취향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취향이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우리가 이 분야에서도 공통된 의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경험적이고 이론적인 인식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미적 판단은 어떤 면에서 주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하다. 이 점은 우리 모두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예술 작품을 바라본다면 동일한 미적 쾌감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이 공통의 감정이 올바른 판단의 토대이고, 따라서 이 올바른 판단은 (잠재적으로) 보편적이다(이것은 일종의 암묵적 지식이다)."(637-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학은 객관적 토대를 갖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즉 미는 참[眞]과 선과 연관되어 있다. 칸트의 경우 진리와 (정언명령으로 구상된) 도덕성은 구분된다. 따라서 숭고한 것처럼 (그리고 목적론적 사고방식처럼) 아름다운 것이 둘 사이를 (진리와 도덕성 사이를) 매개해야 한다." "칸트의 시대 이후 낭만주의는 특히 창조적 과정에서, 또한 예술의 경험에서도 예술의 주관적 측면을 보다 더 강력하게 강조하는 미학을 발전시켰다. 위대한 창조적 인격체로서 천재가 각광을 받았다. 독특함이 찬양되면서 보편성이 희생되었다. 나아가 모방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전적 강조와는 반대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이 특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독특함에 대한 모든 찬양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 예술가와 비평가는 여전히 예술이 인간에게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특함을 통해서 예술가와 청중은 인간의 삶과 그 잠재력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638-40)


제16장 인문학의 대두


"독일 지성사에서 1770년대는, 합리주의적 계몽주의로부터 반反합리주의적인 전기 낭만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소위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흄으로부터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회의를 물려받았다. 그는 보편타당한 인간 이성과 영원한 보편 기준을 믿는 견해를 거부했다. 루소가 행한 문화 비판과 행복한 〈자연적 인간〉에 대한 이상화에서 헤르더는 계몽주의의 자기 이해와 진보 낙관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영감을 얻었다." "(헤르더의) 역사주의는 우리가 〈역사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일깨웠다. 역사는 철학과 사상의 틀이자 기본 전제 조건이 되었다. 나아가 역사 서술은 지배적 학문이 되면서 다른 인문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인문학들은 〈역사화〉되었다. 즉 인문학들은 (문학사, 예술사, 종교사, 언어사 등과 같이) 역사적 지향성을 갖는 학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주의가 현실을 보는 일정한 방식이자 동시에 인문학적 연구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646-7)


"먼저 역사주의는 역사적 현상을 '예외적이며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개성[개체성]은 개인이나 개별적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성[개체성]은 집단과 〈초개체적인 것〉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한 시대나 문화 혹은 민족은 독특하고 특수한 것이다. 이것이 역사주의의 개체화 원칙이다." "둘째로, 역사주의는 역사적 변화와 운동을 크게 강조한다. 실재에 대한 정적인 이해는 동적인 이해로 대체된다. 모든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처해진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강조는 서양 사상에서의 결정적인 〈혁명〉으로 해석되었다." "역사주의의 개인화 개념과 역사적 변화에 대한 강조는 계몽주의의 여러 기본 전제와 충돌했다. 예를 들면 보편성과 이성에 대한 강조, 인간의 본성은 불변적이라는 생각, 보편타당한 인권 개념 등의 기본 전제들과 충돌한 것이다. 이 점은 역사주의에 일정한 상대주의적 경향성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들어 더욱 뚜렷해졌고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647-8)


"독일의 종교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통상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서 해석학적 순환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텍스트와 같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그 전체를 이루는] 개별 부분들에 자국을 남긴다. 따라서 부분들은 전체를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체는 부분들의 내적 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해석학의 핵심은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개성적이고 독특한 영혼의 내용{〈개성[개체성]〉)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해석학의 지향점은 일차적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창조적 정신이다." "헤르더처럼 슐라이어마허도 텍스트와 저자의 사고방식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감정이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문헌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자와 텍스트의 지적 지평 속에 우리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인문학의 목적은 '이해'인 반면, 자연과학의 목적은 '설명'이다."(653-4)


"빌헬름 딜타이는 인문과학의 학문[과학]으로서의 위상에 대해서, 인문과학을 자연과학과 차별화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하였다." "딜타이는 통상 생生철학자로 불리는데, 이것은 삶[생활]이 그의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 범주라는 것을 뜻한다. 모호하고 해명이 불가능하지만 삶은 우리의 경험의 토대이다. 따라서 삶 자체를 명시적이고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은 삶을 넘어설 수 없다.〉 딜타이에게 인문과학은 해석학적 전회를 뜻했다. 해석학적 학문으로서 인문과학의 중심은 언어적 표현들의 해석에 놓여 있는데, 이 언어적 표현들은 본래의 체험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삶 자체가 텍스트와 예술 작품들로 객체화된 것이다. 달리 말해 인문과학의 탐구 대상은 문화와 사회 속에서 객체화된 정신의 형식들, 즉 도덕, 법, 국가, 종교, 예술, 과학 그리고 철학이다. 따라서 딜타이가 말하는 인문과학[정신과학]은 오늘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한다."(659-60)


"그리하여 인문과학에서 이해는 본래의 체험을 재생하고 추체험하는 연구자의 능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추체험이 가령 어떤 르네상스 예술가의 본래 체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딜타이는 표현의 원천인 주체와 그 표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주체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상정했다. 이 유사성은 궁극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불변적인 공통의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한다." "비코처럼 딜타이도 인문과학의 가능성의 제1조건은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딜타이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간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신은 정신이 창조한 것만을 이해한다.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정신의 활동과는 무관하게 산출된 실재를 포괄한다. 인간이 활동을 통해 자신의 각인을 새긴 모든 것은 정신과학의 대상을 이룬다.〉"(660-1)


제17장 헤겔 / 역사와 변증법


"칸트는 자신이 불변적인 선험적 전제 조건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직관 형식과 인과성을 포함한 범주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주체에게 내재되어 있다. 헤겔은 선험적 전제 조건들의 스펙트럼은 보다 넓으며, 선험적 전제 조건들은 크게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한 단계 속의 하나의 문화에 존재하는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 역사의 다른 단계들 속의 다른 문화들에서도 항상 타당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창출'되었고, 따라서 '문화적으로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확실하고 불변적인 것을 추구했던 반면, 헤겔은 변화 가능한 상이한 세계관들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헤겔에게 있어 구성적인 것[선험적 전제 조건들]은 그 자체로 구성되는 것이며, 이 구성적인 것의 구성이 바로 역사이다. 이로써 역사는 일련의 과거의 사건들과는 다른, 상이한 기본적 이해 형식들의 자기 발전이 이루어지는 집단적 과정으로 이해된다."(672-3)


"계몽철학자들은 대체로 과학적 지식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적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그러나 불충분한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좌파 헤겔주의자들이 말하는 해방의 뜻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초개인적 차원인 전통과 사회로부터의 개인 해방이 아니라 보다 이성적인 사회를 향한 일보로서 사회적 비합리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보다 적절한 사유의 틀을 만들기 위하여 불충분한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데올로기들)을 거부하는 비판적 성찰(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방적 성찰에 대한 헤겔적 시각에 따르면 역사는 고립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다. 역사는 인류가 가장 적절한 사유의 틀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나가는 성찰의 과정이다." "달리 말해 역사는 모든 선험적 전제 조건(삶의 방식)을 체험하고 검증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고 회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는 더욱더 적절한 자기 인식으로 이끈다."(677-8)


"지양하다[극복하다]aufheben라는 말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떤 입장의 결함들을 '폐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결함이 아닌 측면들을 '보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 입장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결함이 있는 입장의 변증법적 지양은 그 입장의 부정적 폐기가 아니라 보다 고차적인 다른 입장 안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뜻하는 헤겔의 용어가 바로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재 입장의 결함을 찾아서 보다 큰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화될 수 있는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우리를 보다 참된 선험적 전제 조건들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즉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변증법적 지양의 일부이다." "실제에 있어 변증법적 지양의 목적은 이전의 입장들보더 더 광범위하고 더 완벽한 입장을 성취하는 것이다."(682)


"헤겔이 보기에 개인주의는 원자론적이고 탈역사적이며 자족적인 개인을 가지고 작업하고, 집단주의는 살아 있는 인간과는 분리된 채 독립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국가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과 국가는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윤리적sittlich〉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자기실현을 성취하는데, 헤겔에게 이 윤리적 공동체는 바로 국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유기적 일부분이 될 수 있으려면 먼저 가족과 다른 사회집단 같은 보다 작은 집단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어떤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성장해 나오는 것이다. 이로써 헤겔에 있어 〈국가〉는 사람들을 서로 묶어주는 구체적 유대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유대 관계 덕분에 국가는 윤리적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이 유대 관계는 헤겔에 따르면 쾌락과 이윤에 대한 개인적인 계산을 토대로 한 어떠한 합의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이다."(688)


제18장 맑스 / 생산력과 계급투쟁


"맑스는 인간이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수용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소외가 아니었다. 이 종교적 소외는 단지 자본주의사회의 일반적 소외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노동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살기 위해서 일하고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노동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양측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변증법적 관계가 된다." "동시에 자본가와 프롤레터리아트 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노동의 생산물 간에 극단적 분할이 발생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들의 생산물의 주인이 아니다." "여기서 맑스가 이 굴욕적 상황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경제체제의 노예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굴욕적 상황은 노동자의 경제적 궁핍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모두가 굴욕적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709-10)


"인간은 외적인 힘들─사물화事物化reification와 노동 압박─에 예속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로 실현할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창조했으나 더 이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힘들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동기계처럼 작동해야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이 사물화된 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작동하는 이 〈변형된〉 자연 앞에서도 무력함을 느낀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들을 〈사물〉로 바라본다. 노동력으로, 피고용자로, 경쟁자로 바라본다. 따라서 소외는 이중적이다." "자본주의에서 소외는 안티테제다. 상황이 악화─자본주의의 위기─되면,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에 대해서, 기계와 공장에 대해서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다시 자신들의 인간적 가치를 회복한다." "소외는 혁명을 통해 철폐되고, 인간은 의식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이 된다. 무력함과 사물화는 극복된다. 인간은 경제를 통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710-1)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변증법적 사유

1. 처음에 인간은 천진무구한 상태에서 서로 조화롭게 살았다.

2. 그러다가 인간은 신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신은 인간적 속성들의 외적 표현, 즉 외화外化일 따름이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산물[신]에 의해 억압받는다.

3. 이 소외를 극복하려면 인간은 이 신이 실제로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자신들의 일부라는 것을, 즉 그 연관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맑스는 인간이 다양한 사회집단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를 공유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노동은 [노동이 인간의 자기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형성적formative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것보다 더 긍정적인 정의이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을 통해 사회제도가 변화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서 다른 인간적 속성들이 실현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인간은 도시국가에서 사는 인간들과는 다른 능력들을 실현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형성 과정이다. (역사적인 이유에서 이러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지평을 넘어선다.) 우리는 역사를 알게 됨으로써 인간과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맑스는 경제적 요인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경제의 역사, 노동의 역사이다. 경제적 생활에서의 질적 변화는 역사를 항상 전진하는 불가역적 과정으로 만든다."(712-3)


# 맑스는 〈경제적-물질적 요인들이 역사적 과정의 추진력〉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자'이다.


"그런데 노동은 맹목적인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 노동이다. 노동은 인간을 실재 세계와 접촉하는 하는 특유한 인간 활동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사물에 대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 스스로에 대해서 학습한다. 그리고 노동은 새로운 생산물을 창출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창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더욱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렇게 노동은 맑스 사상에서 근본적인 인식론적 개념이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인식한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광학적 자극을 받아들이는 카메라처럼 바라보는 고전적 경험주의자들의 정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인식 모델과 상충한다. 노동과 인식의 인식론적 연관성에 대한 이 해석이 옳다면 이것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엄격한 구분과 이러한 이분법에 기초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할 이유가 된다. 노동과 인식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노동이 인과적으로 인식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718)


제19장 키르케고르 / 실존과 아이러니


"한 인간으로서도 그리고 작가로서도 키르케고르는 긴장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죄와 불안을 중심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내향적 태도와,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을 향한 갈망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의식적이고 성숙한 태도 간의 긴장이었다. 이 두 태도는 키르케고르가 성장한 배경과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 그 뿌리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적 경건주의가 그 하나이고, 성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자기주장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다른 하나이다." "가끔 그는 헤겔과 사변철학을 아이러니한 태도로 비판하면서도 헤겔주의적 관념론자를 연상시키는 단어들과 표현들─주관적과 객관적, 개별적과 보편적 같은 대립적 용어들─을 사용했다. 경건주의와 자율성, 그리고 관념론과 낭만주의 간의 상호 중첩된 이 긴장들로부터 키르케고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바로 실존적 시각이 그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그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737-8)


"통상적인 산문이나 과학 논문에서 우리는─〈지금 시각은 12시 30분이다〉 혹은 〈허리케인이 동남쪽에서 접근 중이다〉 같은─〈직접적 의사소통〉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직접적 의사소통은 키르케고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표현, 즉 보다 시적인 표현이 필요하다. 이 경우엔 무언가에 대한 명제들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태 전체를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되는 태도와 〈의향〉 전체가 전달 대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이 문제가 될 때 진정한 주제는 바로 다양한 사태에 대한 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세상 속의 객관적 사태로서가 아니라 진정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표현형식이 요구된다. 이러한 종류의 통찰을 전달하고자 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성찰적 관계를 갖는 문학적 예술가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키르케고르는 〈이중 성찰적 의사소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740)


"세계와 관계하는 우리 자신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독자가 텍스트와 관련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한 텍스트는 과학적 주장이 그렇듯이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자신과 텍스트의 관계를 자유롭게 그리고 책임 있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열정적 몰두와 성찰적 거리 두기가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동시에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아이러니한 열정 그리고 초연한 현존─이 개념들이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하고자 했던 것을 나타내는 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키르케고르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단순하고 직접적인 명제들을 가지고 그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목적은 실존적 자기 인식의 전달과 교화이며, 그 수단은 수사와 아이러니의 사용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740-1)


제20장 다윈 / 인간 개념을 둘러싼 논쟁


"다윈의 자연선택설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특성들이 어떻게 유전되는가라는 문제와 새로운 유전적 특성들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해 설명되었고, 두 번째 문제는 돌연변이 개념에 의해서, 즉 돌연적이면서 상대적으로 항구적인 유전물질의 변화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이론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형질의 변이의 발생도, 자연선택도 어떤 의지나 의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돌연변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특정 돌연변이가 언제 발생할지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돌연변이는 원칙상 과학적으로,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자연선택도 의지나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토대로 하는 신학적 설명만이 아니라 생명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도 배제되었다."(759-60)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해석에 대해 열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중 하나가 바로 〈기본적으로〉, 즉 유전적으로 우리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은 우리의 자기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우리가 무엇인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당위적으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생존 투쟁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가 믿고, 그리하여 인간들 간의 관계가 이기주의적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부당하게도 〈존재〉로부터 〈당위〉로 이행한 것이다. 존재로부터 당위로 연역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과학 이론으로서의 다윈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적자, 즉 강자의 권리를 진화론적 주장을 빌려 사회를 조직하는 규범으로 승격시키는, 다윈주의에 대한 정치적 해석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763-4)


제21장 니체와 실용주의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와 역사를 의미 있고 이성적이며 정의롭다고 보았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세계관들은 단지 카오스를 회피하려는 인간의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세계를 지속적으로 〈위조〉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세계를 카오스로 바라보는 이 견해는 니체 철학의 지배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세계는 무계획적이며 운명의 장난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사유는 언제나 엄격한 논리적 형식과 구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실재는 형태가 없으며 혼돈이다. 카오스의 위협은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만들어서 〈형이상학적 예술가〉가 될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형태를 부여하고 생존하기 위해 〈의미〉와 〈목적〉을 부가한다. 철학적 체계와 세계관은 우리의 실존을 확보하는 데 쓰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부가한 구조는 점차 세계 자체의 구조로, 신에 의해 창조된 구조로 이해된다. 이것이 평화와 안전을 위한 가정이다."(773-4)


"신이 가치와 권위를 상실함에 따라 우리는 신을 대체하여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다른 별들, 즉 정언명령, 헤겔의 이성, 역사의 목적 등을 찾는다. 허무주의는 우리의 외부에도 내부에도 실제로는 어떠한 도덕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신에서 직접 귀결되는 하나의 사유 방식이자 심리 상태이다. 실존이 〈목적〉, 〈통일성〉, 〈목표〉 그리고 〈진리〉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는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무가치함의 감정이 생긴다. 가치가 부여된 이러한 범주들은 우리 자신이 세계에 부가한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범주들을 포기하면 세계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이 죽었다면 도덕과 진리의 토대도 사라진 것이다. 〈진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다 허용된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니체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 그의 화신인 차라투스트라는 신과 허무주의와 실존적 진공상태를 극복하게 된다. 그 조건은 우리가 만든 〈유용한〉 생활용 거짓말들을 떨쳐버리는 것이다."(774-5)


"니체는 그의 위버멘쉬[초인] 이론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다." "니체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가 위버멘쉬와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전망을 피력하려고 쓴 책이다. 역사 속의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세계가 선과 악의 싸움터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러한 실수를 저지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또한 그 점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도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스스로 이 유일한 목적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업을 떠맡았고, 이것이 바로 위버멘쉬 개념이 자리할 곳이다. 〈위버멘쉬가 지상의 의미[Sinn]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져 있는 밧줄이다. 사람한테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그가 위버강[넘어감]이자 운터강[내려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든 것을 떨쳐버려야 한다."(783-6)


"니체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 곧 진술과 사태 간의 대응correspondence이라는 진리대응설을 부인했다. 니체에 따르면, 그 이유는 우리의 이론에 대응하는 중립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사실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항상 〈이론 의존적〉이다. 순수한 사실이라든가 〈중립적 서술〉이란 것들은 모두 은폐된 해석일 뿐이며 여러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힘에의 의지 이론과 영원회귀 이론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허구들과 다른 허구들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니체는 이 이론들이 참이라고 생각했는가? 그 답변은 어떤 해석들은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 해석들은 삶과 삶에 대한 긍정에 유용한 것들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론들이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고 보았다. 그것들이 참인 이유는 그것들이 세계에 대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니체에게는 그러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도움이 된다[실용주의적 진리]는 의미에서이다."(791)


제22장 사회주의와 파시즘


"고전적 맑스주의는 공산주의가 도입되면, 즉 계급사회와 억압이 철폐되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국가가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는 억압 기구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경찰, 군대, 법체계─이 모든 것은 계급국가의 단면이다. 그런데 레닌은 권력을 획득하자 국가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소멸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야 했다. 레닌의 답변의 핵심은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반혁명 시도를 타도하고 봉쇄할 이행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이행기에 자본주의 계급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독재국가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새로운 폭력적 국가가 아니다. 이것은 한 단계 앞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의 독재체제인 자본주의하에서는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자본가들에 의해 억압당한다. 프롤레타리아트독재하에서는 반혁명적인 소수가 혁명적 다수에 의해 억압당한다."(801)


"그리스 말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이라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위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필요들을 토대로 사회를 재조직하자는 정치 운동이었다." "아나키Anarchy는 조직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조직이 자발적으로, 즉 공통의 이해관계와 그것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생해 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나키즘의 계급 개념은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급 개념과는 다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들과 오직 일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가진 자들 간의 구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통치자와 피통치자, 주인과 노예의 구분이다. 이것이 바로 아나키스트들이 일차적으로 투쟁 대상으로 삼는 구분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당독재 국가형태의 〈이행기〉가 새로운 계급사회 말고 다른 것을 이룩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적 조건의 진정한 변화를 이룩하려면 대중의 자기 조직과 행동을 토대로 해야만 한다."(803-5)


"파시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파시즘은 야만과 전제정치로의 도덕적 회귀일 것이다.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나타낸다. 자본가들이 무너질 것 같은 자신들의 제도를 테러와 폭력을 통해 안정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파시즘은 균형을 상실한 문화의 극단적 표현으로 보일 것이다. (종교로 대표되는) 진정한 공동체와 참된 권위가 상실되자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들을 추종한 것이다." "파시스트(나치) 국가에서 경제와 사회 일반은 평시에조차 가상적 〈전쟁 상태〉에 있다. 질서와 규율이 부과된다.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도 있는 사유는 제거된다. 자기 이익은 공동의 이익하에 종속된다. 문제들은 거의 명령과 힘에 의해 해결된다. 경제생활은 가격 동결, 임금 동결 그리고 파업 금지와 함께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간다. 동시에 취업률은 높고, 생산수단의 소유는 계속 사적 소유로 유지된다."(811, 815)


제23장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많은 면에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인간 개념을 전복시켰다. 데카르트, 로크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다. 이 능력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격의 핵심이자 의식적 〈자아〉와 연관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psyche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환상이라고 보았다. 의식적 〈자아〉는 단지 강력한 무의식적 정신생활의 외향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꿈과 사소한 실수와 농담과 신경증적 증상들의 배후에는 무의식적 (통상 성적) 동기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프로이트는 주체의 의식적인 의도와 동기에 비추어 볼  때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적 탐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이해가 불가능하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증상들을 무의식적 동기와 의도의 표현으로 볼 경우 그것들이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의심의 해석학〉을 도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23-5)


"우리의 충동과 외부 세계에 대한 관계와 우리의 양심(〈내부의 목소리〉)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생활의 모델(이드, 에고 그리고 슈퍼에고)을 구성했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허구의 개념과 실체 간의 경계 지점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공간적 외연을 가지며 합목적적으로 구성되고 삶의 욕구를 통해 발전된─오직 일정한 조건하의 특정 장소에서만 의식의 현상들을 발생시키는─정신 기구에 대한 우리의 가정은 심리학을 다른 모든 자연과학과 유사한, 예를 들어 물리학과 유사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분명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물리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의 근본적인 메타심리학적 가정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정신생활을 정신적 힘과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정신분석학이 자연과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832-3)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의 이론들이 명백히 경험에 의해 확증되었고 엄청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포퍼는 정신분석학의 강점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라고 보았다. 포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과학적 이론들은 어떤 가능한 과학적 결과들(〈사실들〉)과 양립될 수 없음으로써 반증될 수 있는 반면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모든 사실과 양립 가능하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반증될 수 없고, 그래서 비과학적이다. 즉 반증 가능성이 어떤 경험적 이론을 과학적으로 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반적 판단 기준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과학적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원칙적으로 어떤 사실이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정신분석학의 외관상의 성공은 이와 같이 그것이 내용이 없다는 사실 덕택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철학자는 정신분석학의 전제들과 가설들이 반증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845-6)


제24장 사회과학의 대두


"콩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그리고 실증적 단계라는 세 단계를 거쳐왔다.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은 이미 실증적 단계에 정착하였다. 이것들은 신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이미 벗어난 과학들이다. 그러나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은 여전히 신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콩트는 이 학문들을 실증적, 과학적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관점에서 그는 실증적 사회과학을 옹호했고, 그것은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실증적 학문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반反사변적이다. 실증적 학문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는 법칙적 연관 관계에 집중한다. 고전역학은 실증적 학문의 모델이며 사회학은 가능한 한 물리학을 모델로 구축되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자연과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구성적이고 교화적이라는 의미에서도 〈실증적〉이다."(854-5)


"토크빌은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서, 그리고 정치와 제도에서 모두 평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발전 경향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토크빌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것은 귀족적 가치와 엘리트적 지성의 가치만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주의 및 자유와 민주적 평등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적 다수가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잡으면, 다양한 소수와 일반적인 사회 관습을 따르지 않는 개인들은 억압받을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이 억압은 공개적인 물리적 폭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위험하다. 여론은 일반적이지 않은 견해들을 고통 없이 조용하게 억압한다." "토크빌은 자유와 평등은 결합시키기 어려운 것이며, 평등은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토크빌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강한 국가권력을 초래할 것이며 국가는 인민의 물질적 생활 조건을 통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857-8)


"짐멜에게 근대 세계는 균열이 가고 조각들로 분산된 세계였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짐멜은 자신의 대작 『돈의 철학』에서 목적-수단이란 연결 고리들의 계산이 근대적 삶에서 어떻게 더욱 득세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목적 합리성이 다른 형태의 합리성들을 몰아낸 것이고, 화폐경제 때문에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로 변형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짐멜은 독특한 사회관계에서의 소외 및 사물화 이론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만들어낸 사물들이 점차 우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적 상호작용은 객관적이고 초개인적인 구조들로 〈경화〉될 수 있다. 근대적 삶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문화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형식들에 내재하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결과들은 우리에게 낯설게 된다."(867-8)


"뒤르켐의 기본 사상은 사회의 토대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면 사회는 병든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이 연대를 회복하기 위한 올바른 처방을 찾아야 한다. 뒤르켐에게 사회학은 이 연대에 관한 학문이다. 즉 이 연대의 토대와 그것이 어찌해서 약화되는지, 또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뒤르켐은 자신이 살던 시절의 프랑스가 바로 연대가 약화된 사회, 즉 병든 사회라고 생각했다." "뒤르켐이 대체로 반대한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및 맑스주의에 공통되는 것, 즉 그것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계몽주의의 유산인 발전, 해방 그리고 진보의 이념들이었다. 이 이념들을 뒤르켐은 해체로 나아가는 위험한 경향들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안정과 행복의 전제 조건인 사회적 연대를 이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뒤르켐은 주장했다."(869, 873)


"우리는 연구 주제가 가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며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버가 보기에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는 것은 가치를 통해서이지만 우리가 과학자로서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베버의 과학철학에서는 〈이념형〉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념형은 과학에서 사용되는 기본 개념들로 이해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명론자인 베버에게 (〈경제적 인간〉과 같은) 이념형적 개념들은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리케르트와 신칸트주의를 좇아서 베버는 이념형은 단지 실재의 다양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는 형식적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념형은 사안의 특정 측면들을 순수하게 부각시키며 어떠한 규범적 성질도 갖지 않는다." "이념형은 연구자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지만, 주어진 사태와 관련하여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적합〉해야 한다."(878-9)


# 네 가지 〈순수한〉 행위 유형들(이념형들)

1. 행위는 주어진 목적과 관련하여 합리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목적 합리적 행위).

2. 행위는 절대적 가치와 관련하여 합리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가치 합리적 행위).

3. 행위는 행위자의 감정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정동적affective 혹은 감정적 행위).

4. 행위는 전통과 뿌리 깊은 습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전통 지향적 행위).


"과학적 합리화는 베버가 의미 상실 및 그에 따른 우리의 내적 곤경이라 부른 것을 초래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질병에 대한 진단에서 베버는 근대의 〈무의미성〉 문제에 직면했다. 확고한 윤리가 부재한 가운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등장했다. 이 투쟁의 결과는 합리적 주장과 판단 기준에 의해 결정될 수 없었다.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처럼 베버도 이 투쟁에서 우리는 어떠한 합리적 토대도 갖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베버의 소위 〈결단주의decisionism〉이다." "우리는 베버가 합리성과 관료화의 증대를 우리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베버가 이러한 발전에 대한 유일한 정치적 대안으로 본 것은 카리스마적인 〈수령민주주의(퓌러데모크라티Führerdemokratie)〉였다. 즉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통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의 미래관에는 비관주의가 스며들었다. 베버에게는 어떠한 낙관주의도 환상일 뿐이었다."(889-90)


제25장 자연과학에서의 새로운 진전


"자연이 예전에는 테크놀로지로 간주되었다면 이제는 테크놀로지가 자연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물리학에서 현대물리학으로의 이행과 함께 우리는 인식론적 전환을 하게 된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는 예전에는 연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수학적 속성을 가진) 자연적 과정을 인식하고 따라서 자연은 우리가─평형 바퀴, 낙하하는 구球 등과 함께─공학에서 볼 수 있는 원리들에 의해서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이제 우리는 자연적 사건이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와 공학기술에 의해 결정된 실험 장비 및 관찰 장비의 산물이 되었음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관찰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학적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측정과 관찰에 사용하는 개념 및 장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요건은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다. 〈실재론적인〉 인식론적 가정은 그렇게 함으로써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901)


"오늘날 우리는 사용하고 이해하는 데 장기간의 수련을 요하는 복잡한 테크놀로지와 복잡한 이론적 전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과 관계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 간의 상호 관계는 점차 이렇게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다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펜과 종이가 아니라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쓴다─[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정교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서도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점점 더 삶의 경험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코드들을 매개한다. 이렇게 과학화 과정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매개체를 창출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서나 우리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나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일면적이고 진부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921-2)


제26장 현대 철학 개관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라고 불리기도 하는 논리실증주의logic positivism는 영국 경험주의(로크, 버클리, 흄)와 계몽철학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물리학(아인슈타인)과 새로운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에 대한 철학적 응답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전체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들, 특히 독일 나치즘의 등장에 대한 반응으로도 볼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지식이 확증될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어떻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경험에 의해 검증될 때 주장들은 어떻게 강화 내지 약화되는가 하는 방법론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전적 경험주의와 현대적 방법론 및 논리학이 종합되어 논리경험주의로 귀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구문론)와 방법론적 검증에 호소한다. 〈논리경험주의〉란 명칭은 심리학으로부터 언어 및 방법론으로의 이러한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925-6)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언어는 한편으로 원자적 사실을 가리키는 〈원자적〉 언어 표현과, 다른 한편으로 이 언어 표현들 간의 논리적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논리적 관계들은 형식논리학에 상응한다." "변증법은 개념들 간의 내적 관계들을 토대로 한 총체성을 지향한다. 하나의 개념이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때 그런 관계는 '내적 관계'이다. 논리적 원자론에서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갖는 관계들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외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 실증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가치판단들─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은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경우의 거부는 신학적 진술과 형이상학적 진술에 대한 거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진술들은 인식적 근거 성립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태도와 평가를 표현하고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931-4)


"쿤은 서로 다른 과학 패러다임들 간에는 도약이 존재한다고 상정했기 때문에 중단 없는 직선적 발전으로서의 과학적 진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상이한 두 패러다임의 옹호자들 간에 상호 이해를 창출하는 일도 어렵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가정들의 관점에서, 즉 자신의 패러다임을 통해 논점을 바라볼 것이다. 의사소통은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는 가능하지만 상이한 패러다임들 간에는 그렇게 쉽지 않다." "또한 개별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중립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관성과 객관성과 진리의 모든 판단 기준은 특정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다. 그러한 판단 기준 중 어떠한 것도 상이한 패러다임들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고, 모든 패러다임에 공통되는 판단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만약 진리와 타당성의 문제가 상이한 패러다임들과 관련하여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많은 입장이다."(947-8)


"간략히 말해 분석철학은 언어와 실재 간의 일대일 대응 이론을 거부하며, 기본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특정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만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한 단어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는 오직 그 단어가 사용되는 구체적 방식을 언급함으로써만 답변이 가능하다. 단어와 문장은 고립된 채로는 오직 잠재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그것들은 특정 맥락 속에 투입됨으로써만 실제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사용이 의미를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맥락에서 언어는 기술적記述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시와 도덕에서 언어는 주로 실제 사태에 대해서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과학의 언어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언어를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과제는─시나 윤리적 상호작용이나 실생활 같은─각각의 맥락을 지배하는 독특한 언어 사용을 찾아내는 것이다."(950-1)


"비트겐슈타인적 전통에 따르면 무의미성이란 의미 있는 일상언어의 오용이다.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들은 이러한 오용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한 맥락에서는 의미 있는 기능을 가졌던 말들을 그것들이 쓰여서는 안 되는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분석철학은 일상언어의 오용으로 생겨난 언어적 혼란에 대한 〈치료법〉을 제공하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 같은 분석철학자들에게 이 치료법은 특히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위한 것이다." "치료법적 방법의 목적은 상이한 언어적 맥락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방법은 하나의 언어공동체 내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공동체의 의미 있는 언어적 실천 규칙들에 대한 묵시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언어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인 언어분석은 무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분석과 논증을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묵시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시도이다."(952-4)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 언어는 기본적으로 발화행위로 표현되며, 이때 발화와 과제와 대상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언어와 실재의 구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론


"현상학은 문자 그대로 현상들에 대한 학문으로서, 사건과 행위를 현상하는 대로 기술하려고 한다. 현상학은 자연과학에 의해서 기술된 것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비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언어철학자들의 언어게임 개념과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현상학이 (후설이 제시한) 생활세계(레벤스벨트Lebenswelt) 개념을 과학적 개념들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세계는 인식론적 우선성을 갖는다. 단순하게 과학이 생활세계로부터 역사적으로 생성되어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가 과학적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식론적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상학의 과제는 현상들(도구, 의도, 동료 인간 등)을 다양한 맥락 속에서 현상하는 대로 기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심원한 목적은 (과학 활동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활세계 내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위와 합리성의 의미 구성적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다."(962-4)


"실존주의는 엄밀한 의미의 철학 학파가 아니다. 이 용어는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 무신론자 장-폴 사르트르,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와 존재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서로 상반된 사상가들에게 붙여진다. 그런데 이들 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일정한 가족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방식의 뿌리는 키르케고르,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저 가족 유사성은 이 사상가들이 인간의 존재를─자기의식이 근본적이고 확고부동한 위상을 갖는─미완성의 삶 속에서 종종 비극적이며 역설로 가득한, 유한하고 죽을 운명인 개인으로서 내면화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실존철학의 기본 특징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실존적 성찰 속에서─죽음마저도 정면으로 직시하는─우리는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의식을 가지고 각성하고 사실상 다시 태어난다."(968-9)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는데, 그때는 보부아르가 거의 40세가 되었을 때였다." "당시에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타자'로 정의되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규정하고 여성을 〈제2의 성〉으로 규정한 남성의 시각이었다. 남성적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이 지배했다. 따라서 여성은 제2의 계급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자아관과 남성관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 결과 여성은 허위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규정은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또 그렇게 정당화되었다." "이 역할 모델을 재규정하려면 그것이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규정의 문제라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하고─이론적 노력과 실천적 노력을 통해─남성과 여성 양측이 자신과 타자를 보다 공평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부아르의 필생의 작업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그리고 철학과 문학 모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974-5)


"타자를 평등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현대(탈근대postmodern) 논쟁에서 점차 중심 테마가 되었다. 우리는 젠더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민족성과 문화 일반과 관련해서도 사회비판적으로 차이를 옹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포스트모던적인 문화 다양성이 전면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다양성과 관련하여 몇몇 철학자는 상이한 문화와 가치 간의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규범의 형태로 보편타당한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존 롤즈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반 규범이라는) 〈옅은thin〉 보편성을 찾으려는 이 시도는 새로운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 규범의 이상적 보편성 역시 구체적 상황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규범들을 구체적 상황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분별력을 요구한다."(977-9)


제27장 근대성과 위기


"르네상스 이후 인식주체가 철학적 출발점이 되었다. 경험주의자들에게도, 합리주의자들과 칸트에게도 그러하다. (로크에서 밀까지의) 정치 이론에서는 시장에서건 정치나 법에 있어서건 개인이 합리성의 담지자이다. 계몽된 주체의 적은 무지와 편견이다. 진보는 과학과 계몽, 자연에 대한 기술적 통제 그리고 물질적 복리의 증대이다. 독립적으로 행위하고 인식하는 주체, 과학과 계몽, 그리고 진보와 이성─이 개념들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개념들이다. 버크와 토크빌, 루소와 헤르더─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즉 이들은 전통의 힘과 진보의 애매모호함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으로부터 귀결하는 파괴적 경향을 강조했다. 이것들이 〈근대 프로젝트〉에 대한 보수적 비판의 주요 주제들이었다." "맑스와 프로이트와 니체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낙관주의적 믿음에 대한 수많은 비판─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이트의 이성과 자율성 비판, 그리고 니체의 도덕 비판─을 쏟아냈다."(989)


"우리가 자유롭고 도덕적인 행동과 태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합리화라고,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 왜곡이라고, 그리고 환상이라고 폭로되었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의 상이 산산조각났다. 우리에게는 숨겨진 욕구와 소망의 혼탁한 바다만이 남겨졌다." "따라서 진리와 비진리는 서로 손잡고 나란히 나아가고, 모든 것의 저변에는 생명력과 힘에의 의지가 놓여 있다. 과학적 활동과 정치적 행위에서 높이 찬양되는 합리성은 실상은 숨겨진 힘이다. 이로써 신학적이든 인문주의적이든 간에 가치는 환상임이 폭로된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그릇된 희망은 사라졌다. 유럽의 허무주의는 완성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과 숭고한 행위를 통해서만 합리성의 쇠우리를 벗어날 수 있다.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시적인 것뿐이다. 이것 말고 우리가 가진 다른 형태의 비판은 말과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힘을 폭로하는 〈해체〉이다."(989-90)


"하이데거에게 본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지만 우리 스스로 낯선 것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이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언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어는 열어젖힘이며, 특히 시적인 언어는 전달하기 힘든 것을 유난히 예민하게 포착한다. 같은 이유에서 진정한 예술이 중요하다. 언어는 말이다. 우리는 말로 우리의 뜻을 전달한다. 말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의사소통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알린다." "하이데거는 시를, 그리하여 말을 매우 높이 친다. 언어는 인간의 집이다. 그리고 시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재창조와 실현이 이루어진다. 빈말과 상투적인 언사와 수다에 의한 언어의 빈곤화는 인간 본질의 빈곤화이다. 하이데거에게 전위대는 과학자나 정치가가 아니라 시인이다! 고대 도시국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합리적 토론은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994-5)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의 전제 조건 중 하나는 진정으로 행위할 능력이나 기회가 없는─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측면인─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의 출현이다. 따라서 근대의 〈대중적 인간〉은 새로운 독재 체제의 상응물이다. 아렌트의 분석에서 대단히 흥미로운─그리고 우리를 깊은 불안에 빠지게 만드는─점은 근대의 분화와 합리화가 어떠한 뿌리나 정체성도 갖지 않은 개인들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잉여라고 느끼며, 따라서 자신들에게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정체성을 제공할 수 있는 지도자들에게 매료된다." "정의상 근대성은 모든 한계를 초월한다. 근대인은 언제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 결코 자신의 실존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근대인은 결코 〈여행에 질리지〉 않으며 불멸성을 추구한다. 근대인은 지상에 고착된 삶을 넘어서기를 원하고 이미 우주 공간에서의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 진보 이념은 일종의 휘브리스[오만]이다."(1000-1)


"아렌트는 오직 소수만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엘리트주의적 참여 민주주의를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렌트의 정치관은 다소 낭만적이었다. 정치는 시민들이 영광과 인정을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싸움터이다. 정치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싸움터가 된다. 이러한 사상은 아마도 자기실현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는 어느 정도 자기표현적 행위로 축소된다. 그래서 아렌트에게 진정한 정치는 위대한 연극과 유사하다. 이 관점에서는 일상 정치 개념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언제나 시한에 직면해 있으며 따라서 타협과 전략적 결단 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사라진다." "다양한 맥락에서 아렌트는 〈사회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사회문제는 정치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사회문제를 정치에서 배제한다면 정치적 삶은 아무런 실체적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1003-4)


"해석학자로서 가다머는 철학 텍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영향도 받았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해석이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저자와 저자의 필생의 업적 전체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특정 부분을 저자의 저작 전체에 비추어서만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 삶과 지적 삶 그리고 경력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위 해석학적 순환은 어떤 텍스트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다. 텍스트 이해는 텍스트 전체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부분들을 해석하고 부분들을 토대로 전체를 해석하는 작업을 번갈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삶도, 가급적이면 재구성된 전체로서의 저자의 저작까지도 끌어들이는 해석학적 순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텍스트 해석이 대체로 심리학적 (혹은 역사적) 프로젝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서 가다머는 유보적인 의견을 표명했다."(1007)


"데리다는 텍스트 혹은 글쓰기 개념을 확대하여 언어를 〈글쓰기〉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글쓰기〉로 이해했다." "〈존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서 토대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글쓰기〉를 특징짓는 것은 〈구분짓기(차연差延)〉이다. 글쓰기는 새로운 차이들 간의 끊임없는 경쟁,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같의 경쟁으로 나타난다. 이 열린 경쟁에서 다른 것, 즉 〈타자〉는 우리의 개념들을 가지고 그것을 포착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정의되는 것에 저항한다." "데리다에게 문제는 유명한 자기 지시의 문제이다. 해체가 진리 개념을 포함한 철학의 모든 고전적 개념이 〈분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데리다는 이것에 관해 자신이 말한 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만약 그가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그는 자기 지시적 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을 하나라도 말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1013-4)


"푸코는 구조주의적 입장을 옹호했다. 인간은 사회적 구성물이며, 실재는 근본적으로 구조이다. 다른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처럼 푸코도 구조적 조건 개념을 우선시하지 않고 인간을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는 인간 개념을 지지하는 이론들을 비판했다. 푸코는 그가 지식의 〈고고학〉이라고 부른 것, 즉 특정 시대의 근저에 놓여 있는 구조적 연관 관계를 찾아내려고 했다. 푸코는 특정 시대의 생각과 행동까지도 결정하는 결정 구조를 에피스테메epistémé라고 불렀다."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의 특징은 저작이 취하고 있는 학문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이 실천적(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의 합리주의를 비판함으로써 푸코는 해체주의자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데리다처럼 푸코도 〈타자〉로 정의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푸코의 정치적 헌신은 너무도 강렬했고 철학적 정당화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너무도 일관된 것이어서 그의 철학적 회의주의와 그의 실천적 헌신 간에는 명백한 긴장이 존재했다."(1014)


"로티는 진리대응설이 아니라 유용성을 강조했는데, 이로써 그는 실용주의 쪽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그는 생각은 항상 특정 맥락 속에 〈처해〉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맥락주의자이다. 로티의 실용주의와 맥락주의는 그에게 자신의 모국인 미국의 리버럴하고 민주적인 정치적 전통이 철학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로티에게 철학적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철학적 텍스트를 읽는 것은 흥미롭고 교양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식견과 비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나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티는 우리가 (진리와 허위의 구분 같은) 철학적 구분들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예를 들어 절대적 진리의 이념이 의문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그것들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형태들에 대한 반박이 진리 개념 같은 보다 온건한 형태들에 대한 반박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1015-8)


"해석학적 전통과 비판적 해체는 모두 텍스트로서의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비교문학 연구와 역사 연구, 신학 및 법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하버마스는 언제나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처음부터 언어를 발화행위로 파악했다. 하버마스의 경우 행위 (그리고 제도) 개념이 텍스트 개념보다 우선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자연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인식관점만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설명하고 통제하는 인식관심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인식관심─기술적 인식관심, 실천적 인식관심, 해방적 인식관심─이 적용 가능하다." "우리는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가설연역적 연구와 해석학적 연구(〈이해사회학)〉 둘 다를 수행할 수 있다. 보다 포괄적인 역사-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하버마스가 본질적으로 통제가 아니라 우리의 상호 이해 능력과 관련된 그런 종류의 합리성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행위가 있다."(1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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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역사 -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
김학이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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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역사가 변화라면,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포착하기 어렵다. 감정은 이념과 달리 제도로 귀착되지 않는다. 자유는 의회와 법으로 제도화되고, 평등은 경제의 집단화로 제도화된다. 따라서 그 역사적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감정에는 제도가 없지만 역사는 있다. 감정이 역사를 갖는 이유는 감정이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인간이 느끼는 격동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비밀스럽기도 하기에 도덕규범의 피안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문제로만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감정은 규범과 긴밀히 얽힌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마주한 상황이 정당치 않아서다. 감정의 문화적 차원은 1970년대 이후 인지심리학에서 정밀하게 연구되고 이론화되었다. 그 실험심리학은 인간의 감성체제the affective system가 특정 현실에 당면하여 비의지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발동시키지만, 그것은 실상 경험과 기대에 따라 사회 환경을 계산하고 평가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정보처리 작업의 결과라는 점을 논증했다."(10-1)


"대표적인 감정은 그 시대의 유일한 감정이 아님은 물론 지배적인 감정도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해당 시대에 가장 많이 말해진 감정이고, 가장 문제시된 감정이며, 따라서 시대의 가치가 함축된 감정이고, 그리하여 사회적 연관이 엮여 있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개념사의 '기본 개념'에서 '기본'에 해당하지만, '기본 감정'이라는 학술용어는 이미 보편적인 생물학적 감정을 지칭하기에 사용할 수 없을 따름이다. 시대적 감정은 생물학적 감정이 아니라 문화적 감정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감정을 시대별로 가려내고 그 감정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확인하면 각 시대의 고유성 역시 도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역사학의 의의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보면 공감과 혐오가 이 책에서 말하는 대표 감정이다. 그 감정 속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참여의 가치와 배제의 요구가 담겨 있고, 그 근저에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논의가 깔려 있다. 그 두 가지 감정은 우리 시대의 지표이다."(13-4)


1장. 근대 초 의학의 신성한 공포


"시초에 공포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를 근대 독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는 한 그렇다. 루터의 저술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팸플릿은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소교리 문답》이다. 루터는 십계명의 조항 하나하나를 간결하게 해설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썼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앞서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제2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도 해설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우리가 하나님 이름으로 저주하지 말고 맹세하지 말 것이며······.〉 제10계명까지 모든 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반복한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정작 제2계명에서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은 신이 〈처벌하지 않고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을 뿐인데, 루터는 모든 계명에서 신을 두려워하라고 쓴 것이다."(26-7)


"루터의 공포는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시대의 공포를 잘 드러내는 시대적 현상이 하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궁정 점성가를 역임했던 성직자 요한네스 리히텐베르거가 1488년에 《기이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입각한 라틴어 예언》이란 책을 발간했다." "리히텐베르거는 교회와 신성로마독일제국과 민중에게 닥칠 일들, 즉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의 침입, 플랑드르 도시들의 봉기, 별들에 의해 격동된 민중의 반란 등을 때로는 군주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서술했다." "예언서의 폭증은 중세 말의 정치사회적 격변 외에, 우주와 지상 만물과 인간을 통일체로 파악하는 지적인 혁명인 15세기 신플라톤주의에 의하여 추동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문헌의 (재)발견에 부심하던 휴머니즘 덕분에 대두했는데,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을 천사의 지위로 높였지만 그것에 접속한 예언서는 인간의 공포를 강화했다."(28-30)


"16세기의 독일인들은 공포를 '예종적 공포'와 '순애적 공포'로 구분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갖는 공포인 예종적 공포는 각종의 현실적 재앙에 대한 공포로서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죄다. 순애적 공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자식의 공포로서, 신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러해야 하고, 그것은 곧 구원의 길이다." "예종적 공포의 내용은 자기 자신과 세속에 대한 사랑이고, 순애적 공포의 내용은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다시 말해서 순애적 공포라는 기표의 기의는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신에 대한 공포에서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예종적 공포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선명히 대비되어 의미를 발동시킨다." "신에 대한 공포는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래서 루터가 십계명을 해설하는 가운데 신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동시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35-6)


"파라켈수스는 근대 해부학을 개시한 베살리우스와 혈액순환설을 제시한 하비와 함께 근대 의학의 비조로 꼽힌다." "파라켈수스는 1525년 《파라미룸 의서》라는, 자기 의학의 요점을 담은 책을 서술했다. 사후에 발간되는 그 책에서 그는 인체의 각 기관에 〈연금술사〉가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음식과 공기에서 영양분과 독소를 〈분리〉시키고 독소를 체외에 내보내는데, 그 분리 작용이 오작동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병이라고 주장했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사를 때로는 〈원력原力archeus〉이라고 칭하는데, 다름 아닌 화학 작용이다. 파라켈수스는 연금학의 원리를 의화학적 질병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체액의 불균형이 아닌 체내의 화학 작용에서 찾았던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또한 신이 연금술사를 인간 외에 동물 식물 광물에도 배치해두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치료법은 연금술사가 기능을 회복하도록, 금속 식물 동물에서 원력을 뽑아내어 인체에 투입하는 것이었다."(46, 57)


"파라켈수스는 병의 원인 여섯 가지를 지목하는데, 독, 자연, 별, 악마, 신 외에 인간의 〈정신〉이 그중 하나다. 그것을 파라켈수스는 의지로 칭했지만, 내용은 온전히 감정이다. 감정은 그에게 중요한 병인이었다. 다만 정말 놀랍게도 정신, 즉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병은 정신 주체의 병이 아니라 타인의 병이다. 인간의 내면이 주체의 욕망과 억압의 역동성에 의하여 병드는 게 아닌 것이다. 이는 16세기 인간의 내면이 18세기 이후의 내면과 얼마나 달랐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은 타인의 정신에게 자신의 의지적 감정을 강요한다. 그러면 두 정신은 투쟁을 벌이고, 이때 패배한 정신이 〈상처〉를 입는다. 〈나의 정신은 내 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나의 칼로 타인을 찌를 수 있다.〉 여기서 찔린 것은 정신만이 아니다. 정신이 찔리니 신체가 실제로 피를 흘린다. 정신의 상처가 신체의 상처로 물질화되는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정신에 의해 찔린 신체는 외과적으로 치료하려 해도 소용없고 정신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6-7)


"파라켈수스에게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은 몸과 환경의 물리적인 상호 작용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감정은 도덕과 신앙의 문제이기도 했다. 분노와 공포와 증오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표증이었다. 거꾸로 겸손과 기쁨과 사랑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 존재의 증거였다. 따라서 감정은 멸망이냐 구원이냐의 기준이었다." "문득 치밀어 오른 부정적 감정은 악마가 자신을 장악한 증거일 수 있었다. 그렇듯 인간은 감정의 물질성과 감정의 종교성 사이의 덫에 걸린 존재였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언된 16세기에 인간은 외적인 경건성과 일상적 행동은 물론 내밀한 감정까지 단속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그 자신만만했던 르네상스인들을 겨냥한 규율화 및 도덕화 장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파라켈수스는 그가 거부했던 당대 종교개혁가들과 일치한다. 그 역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간을 규율화함으로써 윤리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를 생산하려던 시대적 노력의 일부였던 것이다."(80-1)


2장. 30년전쟁의 고통과 감정의 해방


"요한네스 헤베를레(1597-1677)는 제화공이다. 그는 황제에 종속되지만 기여금 납부를 제외하고는 독립을 누리던 도시, 울름의 지배를 받는 농촌 수공업자였다." "30년전쟁의 참혹한 전화를 겪으면서 헤베를레는 무엇을 느꼈을까? 헤베를레의 연대기에는 감정어가 몇 개만 등장한다. 감정 명사만 열거하자면, 비탄, 가슴 아픔, 공포, 경악, 용기, 기쁨, 신뢰 등이다. 눈에 띄는 것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찌된 일일까? 가족의 죽음에 대한 서술을 보면 해석의 실마리가 발견된다. 헤베를레는 단 한 번도 슬프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1634년 10월 7일 갓 태어난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는 썼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심판 날에 그가 기쁘게 부활하게 하시고 그에게 영생을 주소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죽음 대부분을 그처럼 짧은 관용어로 표현했다. 루터가 신자는 죽음에 직면하여 슬퍼하되 그 슬픔이 신적인 슬픔이어야 한다고 거듭 설교했기 때문이다."(89, 93)


"그 끔찍한 고통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헤베를레는 군대와 병사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가 캐럴 스턴스는 근대 초 영국인들의 자아 문서에서 17세기말 이전 시기에는 분노를 표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려 9년 동안 일했지만 봉급 한 푼 못 받은 수공업 도제, 계모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모조리 빼앗긴 청교도 목사, 동료와 경제적 갈등에 휘말린 영국 국교회 수학자 등이 자서전에 자신들의 감정을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탄griefe〉이라고 돌려 말했다. 이는 당시 분노가 근본적으로는 신의 감정이었고, 세속에서는 제후만이 지배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반인의 분노는 광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헤베를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그는 분노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 그 많은 악행을 저지른 병사들을 '사악한'이라는 형용사로 묘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97)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헤베를레의 진면목은 다른 데서 발견된다. 그렇게 긴 개인 연대기를 작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고유성이다." "1600년경 독일 개신교 지역의 거의 모든 교구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도시 수공업자들의 문자 해득률은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문자 해득 능력과 글을 유창하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따라서 헤베를레는 자신이 연대기를 썼다는 것 자체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연대기에는 스트랄준트 전투, 마그데부르크 파괴,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아우크스부르크의 고난, 프라하조약, 프랑스군의 진군, 베스트팔렌조약 등, 30년전쟁의 결정적 사건들이 놀랄 만큼 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엄청난 지적 성취야말로 신분을 넘어 자신을 주장하는 그의 개인일 것이다. 그는 사회적인 '쓰인 자아'와 그것으로 채 수렴되지 않는 신분을 벗어나는 '쓰는 자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다."(103-4)


"페터 하겐도르프(?~1679)는 방아쟁이 수공업자 출신의 용병 병사다. 20년 넘게 전장을 누비며 폭력을 행사한 하겐도르프의 경험은 어떻게 감정으로 표현되었을까? 놀랍게도 17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연대기 전체에 감정 명사는 딱 한 번 쓰였다. 1636년 여름 벨기에 지역에서 부대원 11명과 함께 숲에서 양을 약탈할 때였다. 숲에서 2천 마리의 양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양 떼 때문에 〈공포감에 숨이 멎을 듯 질려서〉 도망쳤다. 눈을 씻고 찾아보면 감정을 지시하는 일반 명사가 있기는 하다. 1631년 5월 말, 마그데부르크 파괴를 지켜보며 그는 〈그 도시가 그토록 경악스럽게 불타는 것이 나를 심장으로부터 아프게leit 했다〉고 적었다. 1642년 5월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다리 아래 설치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을 〈보는 것이 하나의 쾌감lust〉이라고 적었다. 하겐도르프는 연대기에 자신을 감정적 자아로 내세우지 않으려 했다. 또한 인용문 속의 공포감, 심장의 아픔, 쾌감은 모두 감정의 신체성을 보여준다."(111)


"그의 연대기는 사건에 대한 건조한 진술로 일관하지만, 지역과 마을과 도시에 대한 서술은 놀랄 만큼 서정적이다. 그가 그처럼 감정적인 인간이라면, 즉 쓰는 자아가 그토록 서정적이었다면 쓰인 자아는 왜 그렇게 무감동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왜 자신을 그토록 무감동한 인간으로 내세웠을까? 이는 그가 군인의 직무를 인간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사무적인 업무로 내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력서인 연대기를 통하여 그의 문서 능력을 과시하고 더불어 자신의 직무 적합성을 자랑하려 한 것이 아닐까. 기실 연대기의 사실적인 내용 자체가 행정적이고 관료제적이다. 그 결과로서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무감동한 하겐도르프가 표현되었던 것이니, 직무와 사적 감정을 구분하는 인간이 그려진 것이다. 그런 인간은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의 결과로 출현했다고 강조한 '궁정인courtier'이다. 하겐도르프라는 용병 병사에게서 궁정인이 식별되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114, 118-20)


"폴크마르 하페(1587~1659)는 슈바르츠부르크 존더하우젠 백작령에서 봉급을 받는 진정한 의미의 공무원 관리였다." "하페의 연대기에서 감정은 상황으로부터 독립하지는 않았지만 규범으로부터는 완연히 독립했다. 이것은 하페가 헤베를레 및 하겐도르프와 다른 점이고, 또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특히 공포Furcht 감정이 그랬다. 하겐도르프는 그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고, 헤베를레도 극히 꺼렸다. 필자는 하페의 연대기에서 그 단어의 출현 빈도를 세다가 포기했다. 문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공포 감정이 당시에도 여전히 신적인 공포가 아니면 예종적 공포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페는 공포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그가 순애적 공포와 예종적 공포의 구분을 몰랐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하페의 연대기에서 공포는 부정적인 대상에 한정되지 않았다. 하페는 병사들과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 모든 상황에 대하여 그 단어를 사용했다."(121, 129-30)


"유의할 점은 하페가 (절규문이자 통곡문인 자신의) 그토록 감정적인 기록을 〈튀링겐 연대기〉로 칭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기록을 공적인 연대기로 간주한 것이다. 하페 역시 자신의 연대기가 식자층에게 읽히리라 예상했고 또 실제로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페는 공공성을 의식한 연대기에 자신의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인데, 이는 근대 초의 감정 레짐과 완전히 어긋난다. 근대 초에 인간은 공적인 기록에서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사적인 편지 등에서 상대적으로 다소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제 바뀐 것이다. 대단히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공적 문서에 데뷔한 것이다. 기존의 감정 레짐이 무력화된 것이다. 이 역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1670년대에 이르면 감정이 특히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과 인간학 서술에서 독립적 가치로 설파되기 시작하는데, 하페의 연대기는 그 전조가 30년전쟁의 와중에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33-4)


3장. 경건주의 목사들의 형제애와 분노


"경건주의는 독립 교파가 아니었다. 17세기 전반기 퓨리턴 대부분이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더욱 확실한 칼뱅주의를 관철하려 했듯이,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대부분 루터파 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경건한 열망》을 저술한 슈페너는 교리를 문제 삼기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의 상태를 비판했다." "《경건한 열망》에서 슈페너는 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을 세속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그가 적시한 문제는 〈궁정 생활〉이 관리, 일반민, 성직자들을 물들인다는 점이었다. 궁정 생활이란 빠르면 14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흔히 '르네상스 궁정'으로 일컬어지던 절대주의 제후의 궁정을 뜻했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세련된 '외적' 매너였다." "새로이 부각된 이상형은 '진정성'을 구비한 '신사'였다. 슈페너가 궁정 생활을 〈외적인 허영〉으로 선언하면서 그 반대 항으로 〈진정성〉을 제시한 것은 정확히 시대를 반영한다."(150-1, 158)


"또한 결정적인 것은, 슈페너에게 내적인 인간은 곧 감정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인간의 내면이란 곧 감정이었다는 점이다. 슈페너는 자신을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루터 역시 격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깨우침이 로마서 1장 17절(〈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그와 달리 슈페너는 신의 은총을 〈황홀하게〉 경험했다고 썼다. 신 앞에서 의로워진 루터와 황홀경 속에서 신을 만나는 슈페너의 차이가 경건주의의 본질을 말해준다. 경건주의 신자란 신을 감정적으로 확인하는 사람이다." "신앙이란 곧 사랑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악마의 유혹〉이다. 그리고 사랑은 실천으로, 즉 선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선행이 없다면 중생도 없다. 또한 그래서 중생한 사람들이 갖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도덕감정이다! 경건주의는 도덕감정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종교운동이었던 것이다."(158-61)


# 중생重生 : 성경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지점인 의인화義人化justification를 거쳐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30년전쟁은 감정사적 격변을 일으켰다. 전쟁이 감정을 기존의 도덕규범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감정 레짐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감정이 약동하게 된 것이다. 그 맥락에서 경건주의가 중생을 신을 만나는 황홀한 감정 체험으로 규정한 것은 자유로워진 그 감정에 호응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감정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 감정은 사회적 제약을 모조리 무시할 수도 있다. 슈페너와 프랑케의 인용문을 보면 격정을 〈육체적인〉, 〈사적인〉, 〈자기 자신도 끌 수 없는〉, 〈무절제한〉 등으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된 감정을 부도덕으로 직행하는 통행로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경건주의가 제시할 새로운 감정 레짐은 약동하는 동시에 절제된 감정이어야 했다. 그 내용은 부드러운 〈온유함〉이다. 그리고 그 신학적 내용은 〈절제의 영〉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감정 레짐의 내용은 형제애이고, 그 표현은 절제이며, '다정함'이다. 경건주의는 해방된 감정을 종교화, 재규범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162-3)


"계몽주의 목사 필립 마테우스 한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바로 멜랑콜리였다. 그는 언제나 멜랑콜리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다고 썼다. 육체를 거추장스러워 한 것이다." "작가인 카를 필립 모리츠는 1783년부터 1793년까지 《경험영혼론 저널》을 발간했고, 그 저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당대까지 유장하게 지속되어온 영혼론, 즉 인간의 내면을 인간의 정신·신체적 기능들의 교차로 설명하던 틀을 벗어나 내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방향 전환의 와중에 멜랑콜리가 신체적인 히포콘드리아 심기증과 정신적 우울로 분화된다. 그리하여 모리츠가 1785년부터 1790년까지 발표한 소설 《안톤 라이저, 심리소설》에서는 멜랑콜리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사회적 억압의 결과로 제시된다. 이는 감정사의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다. 17세기를 거치면서 규범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감정이 17세기 중반 이래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되더니 18세기 말에는 신체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187-9)


"목사 한의 일기는 18세기 중후반의 독일 부르주아가 1세기 전 슈페너의 부르주아와 무척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천적 사랑, 온유함, 다정함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목사 한은 분노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주 터뜨렸다. 물론 그것은 한이 접촉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정당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17세기 중반 이후 거세게 밀려든 사회적 이동성이 신분사회의 틀 내부에서 진행되다 보니 신분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이 중첩되었고, 이는 전선을 복합화했으며, 그 귀결은 정당성 기준의 혼란이었다. 그 문제 상황은 갈수록 심화되어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슈페너으 온유함과 감성주의의 감성은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었고, 그래서 한은 그리도 자주 분노를 격렬하게 표출했을 것이다." "다만 한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한은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줄곧 반성했다."(201)


"한의 반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내와 사별하고 새 아내를 고르는 모습은 삶이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반성하는 과정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새 아내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라고 변명했지만, 실상 그 선택은 육체적 감정에 대한 항복이었다." "미국 역사가 윌리엄 레디는 18~19세기 프랑스 감정 레짐에 대한 연구에서 카페, 독서회, 살롱, 프리메이슨 등의 부르주아 사회성들을 궁정문화의 외적 매너와 감정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감정의 피란처〉로 정했다." "그러나 그 피란처는 실상 숨 막힐 정도로 강력하고 위압적인 감정 통제 장치였다. 그것들은 필시 강력한 감정 통제의 기제인 동시에 감성이라는 새로운 감정 레짐을 실천하는 장이자, 그 실패를 확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로 얼룩진 그 경건주의적 실천이 독일인들을 깊이 내면화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가차없는 내적 감정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도달하기 힘든 감정 레짐을 추구하면서 근대를 만들었던 것이다."(202-3)


4장. 세계 기업 지멘스의 감정


"지멘스는 가족 중심 기업이었는데, 그 면모는 19세기 독일 기업사에서 예외적이기보다 전형적이었다. 가족 기업은 창업 자본의 조달은 물론 자본 확충에도, 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익 배당보다 기업 자본의 안정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경우에도 소유는 언제나 가족 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지분 위기가 초래되는 경우는 예외였다. 모두가 지멘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족은 제3의 생산요소였던 것이다. 가족은 생존공동체이자 자본공동체이지만 감정공동체이기도 했다." "베르너 지멘스에게 가족과 기업은 일상에서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창업한 뒤 줄곧 공장 1층에서 살았다. 유의할 점은 신뢰와 충성이 베르너가 아우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요구한 감정이었고, 회사에서도 스스로 '노동'한 감정이었다는 데 있다. 아내와 동생들의 가부장이었던 그는 마이스터와 노동자들에게도 가부장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가부장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223-5, 232)


"신뢰는 18세기 초까지 거의 언제나 신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 믿음은 신에 대해서 갖는 것이지 인간에게 갖는 것이 아닌 터였다." "신뢰는 감성주의를 거치면서 세속화되는 동시에 쾌감valence과 강도强度를 갖춘다. 19세기 전반기에 출간된 사전들은 신뢰란 '타인이 좋은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는 감정으로서, 그 사람은 그럴 힘과 의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시에 하등의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우리를 휘어잡으며, 그 기대가 우리의 삶에 행복을 준다'고 풀이했다." "충성은 19세기 내내 거의 언제나 신뢰와 함께 사용되었고, 두 단어는 교환 가능했다. 충성은 18세기 감성주의에서 신뢰와 늘 함께 쓰이면서 개인의 의무로 내면화되는 동시에 쾌감과 강도를 갖추게 된다. 충성은 이때 신뢰만으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것, 즉 미래적 확실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신뢰와 충성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노동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하는 기제였고, 두 감정에 노동자를 동기화시키는 장치였다."(237-9)


"베르너의 회고록에서 부각되는 키워드는 세 개다. 첫째가 유용성이고, 둘째가 행동력이며, 셋째가 기쁨이다." "베르너는 유용성 개념을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제시할 때 사용하면서 그것에 사업활동도 포함시킨 것인데, 유용성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공리utility이다. 그것은 서양의 산업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와 산업활동에 부여하는 도덕적 의미 그 자체다. 물론 유용성은 감정이 아니다. 다만 베르너는 유용성이 '행동력'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게서 행동력은 감정과 분리 불가능했다." "회고록에서 기쁨이 일상적인 만족감으로 쓰인 경우는 다섯 번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30회의 기쁨 표현 중에서 25회가 미래의 비전, 지식의 증가, 사업, 노동, 실험, 발명, 연구, 혁명, 성채 방어, 케이블 설치, 케이블 부설에 따른 위험의 극복, 선행의 기억, 문명의 건설, 아들의 무난한 경영 상속 등을 서술할 때 사용되었다. 기쁨이 인간이 기획하고, 행동하고, 성과를 얻은 것과 결합되어 사용된 것이다."(241-2, 247-8)


"노동을 기쁨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 아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노동은 징벌이었고, 종교개혁과 함께 신적인 소명이자 이웃사랑으로 변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및 관념론과 함께 인간이 자신을 완성하는 윤리적 통로로 의미화되었다." "베르너의 편지를 보면, 노동은 성공에서 의미를 갖고, 성공은 기쁨을 주는데, 노동은 행동력의 소산이고, 행동력은 멜랑콜리를 극복하게 해준다. 한편에는 멜랑콜리가, 다른 한편에는 노동과 기쁨이 위치한다. 그리하여 신뢰와 충성 및 명예 외에 기본 감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노동의 기쁨이었다. 흥미롭게도 멜랑콜리의 다른 표현으로서 1869년 미국 정신의학에서 고안된 신경쇠약이 1880년대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경제인이든 지식인이든 독일 부르주아들은 신경쇠약에 걸렸다며 너도 나도 의사를 찾아갔다. 바로 그 시기, 그러니까 1900년 무렵에 독일 산업세계와 학계에서 노동의 기쁨이 담론화된 것이다."(248, 251)


5장. 일상의 나치즘, 그래서 역사란 무엇인가


"무관심은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조차 되지 못한다. 무덤덤함은 오히려 나치즘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지지와 반대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나치가 그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못 견뎌했다는 데 있었다. 나치는 독일인들의 삶을 문자 그대로 관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끝도 없이 일상의 독일인들을 '동원'하려 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당의 최하 말단 조직인 블록Blockwart이 20만 개, 나치 복지단체인 인민복지회의 블록 조직이 51만 개였다. 나치당 블록이 평균적으로 60~80개 가구를 책임졌으므로, 우리로 치면 아파트 한 동에 나치당 블록 대표가 한두 명, 노동전선 대표위원 두세 명, 인민복지회 위원이 서너 명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 돌격대 대원 대여섯 명과 히틀러총소년단원 20~30명을 추가해야 한다." "1938년이면 독일인의 3분의 2가 어느 것이든 나치 기구 하나에는 속해야 했다."(270-1)


"나치에게는 모든 조직이 곧 도덕공동체였다. 이해관계의 조직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치즘을 해명하는 데서 도덕은 중요한 '설명' 요소이다. 그리고 나치 도덕공동체의 핵심에는 배제가 있었다." "전쟁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없었다면 의당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로 직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배제와 학살은 같은 것이 아니다. 배제 없는 학살은 없지만, 학살 없는 배제는 많다. 문제는 배제가 학살로 귀결되는 경로를 밝히는 일이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배제에만 항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수용소에 가둔 것에 대해서도 감히 항의하지 못했고, 개별 기업에서 나치의 간섭 덕분에 특혜를 얻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출하자 특혜의 범주 자체보다 해당 사람이 그 범주에 포함되어도 좋은지 다투었으며 또 그 특혜에 동승하고자 했다. 밀고는 이때 난무했다. 그 '부당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런 태도를 학살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274-5)


"유의할 것은 나치즘에 대한 지지 문제를 설명할 때 반드시 나치의 여론 독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원적 의사 형성 과정이 제거되자 인민의 여론도 나치즘에 부합하게 진행된 것이다." "자신은 〈진정한 독일 애국자〉이기에 나치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자신의 인종과 몸에 대하여 고민했다. 나치의 언어에 공명한 것이다. 간혹 그런 고민을 떨쳐낸 사람들은 공적 여론이 나치에게 독점되었던 탓에 자기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자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나치가 인민의 지지 여부를 묻고자 하면 일부의 일탈을 제외하고는 인민에게서 나치 자신의 모습만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현실은 자아의 확인에 불과하게 되고, 현실감각의 소실과 자기기만이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가 물리적인 객관적 한계에 부딪쳐 실현되지 않으면 의지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게 마련이고, 의지의 실현은 미래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미래는 자기예언적 실천이 된다."(285-6)


"서부 독일 졸링겐의 김나지움 교사 아우구스트 퇴퍼빈은 언어학 박사를 취득한 지식인이자 독실한 개신교도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여다. 그는 고백교회 인근에서 발행되는 저널을 받아볼 만큼 나치에 비판적이었다." "1939년 12월과 1940년 5월에 퇴퍼빈은 일기에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 소문〉을 기록한다. 1942년 5월 그는 급기야 벨라루스에서 자신이 목격한 유대인학살을 기록한다." "진정 놀랍게도 그후 무려 17개월 동안 퇴퍼빈은 유대인학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43년 11월 중순 그는 돌연히 쓴다. 〈우리는 비단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유대인만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 그 자체를 절멸하려 한다.〉 그가 17개월 만에 갑자기 양심의 고통을 느낀 것이다. 이유는 우연히 만난 어느 병사의 말 때문이었다." "영국 역사가 스타가르트는 퇴퍼빈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편적 맥락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논의의 자극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고 분석한다."(294-6)


"다시 말해서 독재 권력이 금지한 주제에 관한 한, 그에 대한 사적인 소통이 멈추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정립되지 못함은 물론 도덕적 자아의 점검 작업도 멈추었던 것이고, 양심은 그 문제가 소통에 의하여 다시 주제화되어야만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43년 9월 초 우크라이나에서 퇴퍼빈은 포로수용소의 독일군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서까지 소련군 포로 630명을 탈출시켰다. 그런 그가 1944년 여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대패한 독일군 병사들을 보면서 적었다. 〈병사들은 전투에 지치고 의심으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복종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명예의 한 페이지다.〉 그가 히틀러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최종적으로 버린 시점은 무려 1945년 3월이었다. 이는 나치즘에 대한 가의 입장에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가 얽혀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 복합성을 무시하고 나치 범죄를 '학살적 반유대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296-7)


6장. 나치 독일의 '노동의 기쁨'


"1925년에 출간된 《노동학. 기업 노동의 토대, 조건, 목표》의 기고자들은 대부분 테일러리즘을 비판했다. 노동자를 생산 도구로만 간주하여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기고자들은 노동을 '문화'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가치로서의 노동이 산업노동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되고, 그리하여 노동의 기쁨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실천적 질문에 가장 가까이 답한 사람은 기계공학자인 편집자 리델이었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부터 논한다. 기계는 고유한 법칙적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작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계의 낯선 운동에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 내부에서 작용하는 내적 역동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계의 운동이 노동자 자신의 일부로 경험될 수 있다. 요컨대 기계 작동에 대한 인지와 숙달과 그 과정에서 발동되는 감정적 동일시를 통하여 기계는 인간이 구축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309-11)


"1920년대 중반에 노동에 투여된 의미 성분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은 가치의 경험이자 창출이고, 그래서 문화활동이다. 둘째, 노동하는 인간은 감각 및 지각의 복합체가 아니라 영혼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심신 복합체이다. 셋째, 기계는 인간의 세계 안으로 통합되어 인간화될 수 있다. 넷째,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 과정, 그리고 노동 및 생활환경에 의하여 구성된다. 즉, 노동자는 조형적이다. 다섯째, 그 전체 과정을 통하여 노동자는 고유한 인격이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의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누빔점'이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이고, 그 의미 작동의 매개이자 결과물이 활동 감정, 가치감정, 생 감정, 노동의 기쁨이며, 그 감정의 내용은 〈존엄한 자아〉이다. 테일러리즘이 주장한 노동의 객관화가 노동의 주관화와 인격화로 전환된 것이다. 요컨데 비너와 리델은 노동의 기쁨을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자를 동기화하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12-3)


"1925년, 아른홀트는 '독일 기술노동교육연구소(딘타Dinta)' 소장에 임명됐다. 딘타는 나치 집권 이후 노동전선에 편입되고, 아른홀트는 노동전선 직업교육국 국장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아른홀트가 생산한 노동과학 언설은 바이마르공화국으로부터 나치즘으로 넘어가는 다리라고 할 것이다." "아른홀트의 교육시설에서는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와 가치로서의 노동이 삭제되었다. 따라서 아른홀트에게 자부심은 존엄한 자아와 그 활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많이 생산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능히 감당하는 신체적 힘에서 발생한다. 갓 입소한 수련생들은 턱걸이 한 번을 제대로 못하지만, 교육장의 수련생들은 권투, 체조, 수영, 육상, 축구를 순서에 따라 실행한다. 아른홀트에게 스포츠는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체조는 〈인간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을 살아나게 하고, 끝내 자기를 관철하려는 용기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스포츠는 궁극적으로 경쟁심, 즉 상승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314-5)


"1930년이 되자 아른홀트는 5년 전과 꽤나 달라져 있었다. 노동 감정을 강조하는 것은 같았다. 딘타의 목적은 공장을 〈창조의 기쁨〉의 샘으로 만드는 데 있고, 〈우리 노동자들은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을 보유하고 있기에 부정의한 대우에 가장 분노하고, 정상에 〈진정한 사나이〉가 서 있는 기업을 〈가장 사랑〉한다. 아른홀트의 강연은 노동자 인격이 아니라 〈지도자 인격〉에 맞춰져 있었다." "아른홀트는 나치당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한때 몸담았던 자유군단의 지도자와 추종자 개념을 가져다가 자본주의 정신으로 변조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자유군단은 전투 집단이자 정치 집단이었다. 그 조직은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이념 집단이자 행동 집단이었다. 그들의 이념은 민족공동체로서의 독일의 도덕적 혁신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그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독립적 개인의 집합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은 운동 속에서 신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했다."(316, 320)


"1936년의 아른홀트의 언설은 1925년은 물론 1930년과도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의미상의 듣는 이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가라는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이다. 바이마르 시절의 그는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노동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이제 그는 노동자의 태도를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기업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가장 큰 차이는 언설의 중심에 1925년의 노동자의 상승 욕망도, 1930년의 지도자 인격도 아닌, 〈독일인의 유類적 특징〉이기도 한, 〈창조하는 인간〉이 놓였다는 점이다." "아른홀트의 생각이 변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그가 노동담론 그래프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나치 노동전선의 자리에서 기업가들에게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민족공동체 속에서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는 기업을 민족공동체라는 정치 이념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24-6)


"감정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치 노동법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역사가도 주목하지 않은 결정적인 지점이 가시화된다. 나치 노동법은 감정법이다. 법조문이 신뢰, 충성, 배려, 명예라는 감정들로 누벼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법을 담당하는 기관들의 명칭이 '신뢰위원회' '노동신탁위원' '사회적 명예법원'이다." "우리가 베르너 폰 지멘스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신뢰, 충성, 명예가 19세기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사회적 도덕감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치 노동법은 그 감정들을 자유군단 '운동'의 지도자, 추종자, 공동체의 틀 속에 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립되는 기업공동체는 상호적인 동시에 위계적이었다. 기업 지도자들에게는 배려의 의무가, 추종자에게는 충성의 의무가 할당되었으나, 그 위계적 성격은 기업 지도자가 추종자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에 의해 약화되었고, 당시 노동법원은 기업 지도자에게도 추종자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부과했다."(328-9)


"1936년의 아른홀트는 열광의 이면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한 바람직한 인간은 타인의 감정적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차분한 인간이다." "그가 노동을 의미화하는 누빔점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5년에는 사회적 상승 욕망이, 1930년에는 지도자 인격이, 1936년에는 창조하는 인간이, 1937~40년에는 성과주의적 기계-인간 합생론이 의미화의 축이었다. 아른홀트는 대단한 사상가가 아니었음은 물론 고유하게 사유하는 기술인도 아니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1925년에는 우익 기업가 진영의 입장을 대변했고, 1930년에는 운동 국면의 나치즘에 영합했으며, 1936년에는 노동전선의 초기 입장을, 1937년 이후에는 전쟁 준비에 돌입한 나치즘을 대변했다. 아른홀트는 해당 국면의 나치즘을 드러낸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기에 도착한 그의 감정 레짐, 즉 성과에 진력하되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는 인간이 그 시기 나치즘의 감정 레짐이었다고 할 것이다."(338, 343)


7장. 나치 독일의 '독서의 기쁨'


"나치가 금서목록을 체계화하기 시작한 때는 1935년이다. 그 시점에 괴벨스가 금서에 관해서도 독점적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국문필국은 1938년에서야 비교적 정리된 목록을 완성했는데, 그때 책 4,175종 저자 565명이 블랙리스크에 올랐다. 대부분 유대인, 공산당, 사민당, 자유주의 망명 지식인, 모더니즘 저자들이었다. 기묘하게도 문필국은 목록을 사정 당국들과 공유했을 뿐 출판사와 서점에게는 〈엄격히 비밀〉에 부쳤다. 더욱이 문필국은 사전검열을 거부했다. 저자와 출판사와 서점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게 상황이 모호하면 작가와 출판사는 짐작만으로 쓰고 출간해야 하고, 그 현실적 결과는 자기 검열이다." "여기에 더해 수준 높은 작가들 다수가 망명을 떠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현명한 독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썼기에, 새로 발간되는 도서는 압도적으로 2급 작가들의 책이었다. 나치의 문학정책은 문학시장을 파괴하지는 않고 왜곡했으나 독일 문학의 수준을 추락시켰던 것이다."(379-80)


"한스 쉐퍼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나치의 영화, 연극, 소설 등에서 오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인민 동원이 정신적인 휴식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괴벨스의 원칙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괴벨스의 정책이 나치 독일인들을 '사생활로 후퇴시킨' 것이다." "슈푀를의 코미디 소설에 대한 괴벨스의 촌평은 괴벨스 문화정책이 인민의 정신적 휴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해석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슈푀를의 소설이 나치 지배권력의 일상적 작동을 방어하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즘 하에서 독서는 고도로 정치화된 사적인 기쁨이었다〉는 라빈바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반면 슈푀를의 소설에는 라빈바흐가 향토소설과 달리 인종주의가 등장하지 않는다. 슈푀를의 소설이 정치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인종주의와 그 속에 함축된 〈용기와 의지와 독립성과 주인적인 가치〉가 아니라, 도덕과 물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나치의 지배 기술에 순응해가는 일상의 독일인들이다."(392-3)


"슈푀를의 소설 《가스검침관》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노동 담론과 마찬가지로 열광이 아니라 차분함이다. 주인공을 빼고는 아무도 흥분하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태평스러움을 가장하려 한다." "뻔뻔스러움이든 차분함이든 내적인 격정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똑같지만, 차분함이 적절한 또 다른 이유는 소설에 그 감정의 이면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푀를이 뜻밖에도 1930년대 나치 독일사회의 본색을 제대로 형상화했음을 볼 수 있다. 나치 독일은 개별화된 사회였다. 그리고 개별화되는 와중에 노동자들은 회사에 틈입한 온갖 나치 기관원들에게 줄을 서야 했다." "개별화는 자본에 대하여 개인을 약화시키고, 약화된 개인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그 개인은 공포를 드러내지 않고 차분해야 한다. 순환적이다. 차분함은 공포로 이어지면서 공포를 강화하고, 그 공포를 또다시 차분함 뒤에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394, 397-9)


"공포가 지배 기술에 속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나치가 원하는 독일인은 공포에 찌든 인간이 아니었다. 공포는 인간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가스검침관은 나치가 원하던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야심에 괴로워하는 도덕적인 인간이고, 일확천금을 했지만 가스 검침이라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소홀함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며, 국가에게 공포를 느껴 나치 독재의 작동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하고 주장하는 인간이다. 하기야 합리화에 의해 개별화된 독일인들이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고도의 성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필수적인 전제가 바로 그 자기주도성이었다. 그리고 가스검침관에게 쏟아진 돈다발은 그런 인간에게 미구에 닥칠 나치 소비 천국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괴벨스가 그 소설을 마땅히 영화화해야 한다고 평한 것은 지당하다. 나치 치하 독일인들이 정신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하여 읽던 소설은 나치 정치 이념을 유쾌하게 형상화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이었다."(400-2)


"유대인과 관련된 나치의 텍스트는 강도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나치당 기관지 《민족의 파수꾼》은 1942년 12월 11일의 머리기사에서 미국의 유대인들이 영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50만 명의 젊은 독일인들을 살해할 사디즘의 잔치〉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홀로코스트가 개시되고 최소 1년 이상이 지난 때다. 1943년 10월 13일 머리기사는 연합군이 전후에 〈독일인 수백만 명을 소련에 강제노동자로 보내서 절멸시키려고 한다〉고 외쳤고, 같은 달 21일에는 강제노동의 대상을 독일의 모든 남자로 확대했다. 그 시점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단순 학살로부터 한발 물러나 '노동을 통한 절멸'로 되돌아간 때였다. 1944년 9월 26일에는 미국의 재무장관 모겐소가 〈독일인 4천만명을 퀘벡에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나치가 유대인을 동유럽 학살수용소에 끌어내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는 '죽음의 행진'으로 내몬 시점이었다."(405-6)


"1943년 봄 이후 나치는 민간인 지역까지 타격하던 영국군과 미군의 폭격을 〈유대인의 테러공격〉으로 표상했다. 그것은 민간인 지역의 폭격과 유대인을 병렬시킴으로써 폭격의 부도덕성을 이중으로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폭격의 주체가 연합군 뒤에 숨은 유대인이고, 그 유대인이 〈혐오스러운 세균〉이라면, 공포는 더욱 용이하게 분노로 전환되지 않겠는가. 또한 연합군의 배후가 유대인일 뿐이라면, 날이 갈수록 폭격이 강해지고 독일군이 퇴각하고 있다고 하여도, 전쟁의 그 본질에 대하여 연합국을 설득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버텨내기만 하면, 연합군에 대한 계몽이 성공하여 결국은 연합군의 공세가 멈추지 않겠는가. 《민족의 파수꾼》이 연합국 〈국민들〉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계속 선전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실상 나치 독일이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바깥세상을 판단하고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지고 말았다는 예증이기도 하다."(408-9)


"폭격으로 사망한 독일인은 약 42만 명이다. 일부 독일인들은 폭겨과 고통을 독일의 범죄 탓으로 돌리면서도, 그 고통을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희생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종전 이후 서독에 구축되는 피해자 정체성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1945년 초에도 독일인들이 '공포의 운명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나치 국가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것 같다. 재난사회학을 참조하면 사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 연구들은 재난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재난이 초래한 위험을 경감시키는 가장 중요한 힘은 지역공동체의 노력과 주민들의 참여이고, 그다음이 국가의 지원이다.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인지는 부차적이다." "동시에 패전에 직면한 재난사회의 삶은 우연적이었다. 삶이 우연적일수록 사회적 지평은 좁아지고,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것에 집중하게 마련이다."(410-2)


"독일인들은 더욱더 가족에게 매달렸고, 빵 한 덩어리라도 더 얻기 위하여 나치 당국에 호소하는 동시에 이웃을 무자격자로 밀고했다." "재난사회의 작동은 폭력의 지역화로도 나타났다. 1944년 가을 안보 문제가 각 지역 게슈타포 분소로 넘어오자 지역의 친위경찰은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일말의 흐트러짐도 처형으로 처벌했다. 그리하여 연합군의 루르 지역 포위망이 좁혀지던 1945년 3월 그 지역 노동수용소 곳곳에서 수십 명을 단번에 총살하는 마구잡이 학살이 벌어졌다. 강제노동자들이 학살을 피해 탈출하여 도심으로 들어오거나 친위경찰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리자, 독일인들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그들을 보았다. 그 현실이 마치 처음이기라도 한 양, 독일인들은 처벌 공포와 죄의식에 몸을 떨었다. 사회적 지평의 수축, 처벌 공포, 죄의식, 상호 불신, 나치에 대한 부인, 망각에의 의지, 정상성에의 강박, 가족에 대한 애착, 독일인들은 그 모든 것을 안고 승전국 군대를 맞았다."(412-3)


8장. 서독인들의 공포와 새로운 감정 레짐


"지금 돌아보면, 독일인들을 처벌 혹은 재교육시키려던 점령군의 탈나치화 작업은 솜방망이였고 실효성도 없었다. 유럽 어느 나라에도 과거청산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인들은 그 미래를 몰랐다. 초기에 그 작업은 무서웠다." "모니카 블랙은 전쟁과 포스트워 시기가 독일인들에게 〈일상적 삶에 대한 일상적인 지식〉에 〈인간학적 쇼크-인간 그 자체의 쇼크〉를 일으켰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일상적 〈현실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당연한 구분〉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걸어 다니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점은 세계가 그들에게 알 수 없는 것,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그 세계는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가 개시했던 필름누아르의 세계, 흑백의 교차로 반짝이는 표면 밑에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버티고 있는 세계와 닮았다고, 그리하여 독일인들의 고단하지만 범속한 일상 아래 전쟁과 살인의 기억이 버티고 있었다고 강조한다."(420-2)


"전후 독일인들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미군과 아렌트의 해석은 정확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릇된 것 같지는 않다. 공포를 감추려는 독일인들의 표면이 무감동 외에 달리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1930년대 중후반 이래 독일의 노동 담론과 코미디 소설에서 확인했던 감정문화이다. 내용을 떠나 형식만 보자면, 공포와 차분함의 결합은 바로 나치 감정 레짐이었다. 놀랍게도 그 감정 레짐이 종전 직후의 독일에서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감정 레짐이 놓인 역사적 맥락은 전혀 달랐고, 따라서 감정 실천에 의해 느껴지는 감정 경험도 아주 달랐다. 전쟁 이전에는 성과주의 시스템이 발휘하는 압력이 문제였다면, 폭격 이후에는 전쟁의 상처와 전쟁범죄가 문제였다. 앞선 감정 경험이 사회적 상승 의지의 표현이라면, 뒤의 경험은 벌거벗은 생존과 고통스런 자아 정립에 병행한 처벌 공포와 죄책감, 그리고 추후 드러나듯 자기변명이었다."(429)


"비상사태법은 국가가 외부 공격의 목전에 있거나 실제로 공격을 받는 외적인 비상사태와 자유 민주적인 기본 질서가 위협받는 내적인 비상사태가 닥치면,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와 파업권을 제한하고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를 약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60년에 그 내용이 알려지자 사민당과 노동조합,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거칠게 비판에 나섰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독일의 과거, 즉 히틀러국가가 목전에 있다고 말했다." "1961년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정당〉이 〈탈정치화의 베일〉로 은폐되어 있지만, 곧 〈무관심한 대중〉이 〈강력한 권위적 국가의 지휘〉에 동원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전체주의를 우려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경고에서 독일이 얼마나 히틀러국가의 망령에 쫓기고 있었는지 드러나거니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독일의 일급 지식인들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이다."(436-8)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독일의 범죄를 본격적으로 대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판사들은 친위경찰은 물론 증인으로 나선 생존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초연한 거리'를 유지했다.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때의 홀로코스트 재판은 형법에 따라 개개인의 범죄 행위와 〈저열한〉 동기를 확인하려 했을 뿐 범죄의 체제적 성격을 심문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타가 개별적인 일탈로 의미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평범한 학살자' 유형과 '사디스트 학살자' 유형 두 가지를 부각시켰다. 그 두 가지 유형은 교차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고문으로 악명 높던 인물이 서독에서는 흠결 없는 시민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섭게 섬뜩한 것이었다." "프랑크 비스는 이 지점에서 절묘해진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학살에 대한 '나의 책임'을 주제화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학살자 유형은 비판적 시선을 인간 주체의 내면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440)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생활·주거 공동체의 최소한의 공통점은, 그들이 그곳에서 개별적인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적·감정적·물질적 결속을 얻고, 출신 성분과 무관한 평등한 사회적 접촉을 실천하며, 그럼으로써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다. 사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관성과 공동체를 결합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고, 정신분석학에 침윤되지 않은 사람조차 사회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내적인 해방감과 진실된 감정 및 새로운 감정적 교류를, 요컨대 새로운 감정적 사회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감정은 신좌파의 이론과 실천 모두의 중핵이었다. 디터 둠의 《자본주의 소의 공포》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이 부정적 감정의 생산이라고 믿었고, 유아기의 억압에서 벗어나면 진실된 감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1970년대 신좌파는 감정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했던 것이다."(450-1)


"그 대안문화 전체에서 지배적인 것은 마르쿠제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감수성〉이요, 라이하르트의 조사로는 〈따스함〉이었다. 조심할 점은 따스함이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좌파 스스로가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고통스러운 정신분석적 작업을 통과해야만 따스함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생활·주거 공동체의 현실이 따스함을 생산하기는 커녕 그들이 적대시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이다! 코뮌1은 평등한 논의의 장이 되고자 열심히 토론했다. 그러나 토론이 평등할 수는 없었다. 승자가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대안 유치원에서도 '무지한 스승'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안 유치원의 현실은 권위와 명령이었다." "공동체적 감정이 지속되지도 못했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진부해져간 것이다. 결국 혁명적 주체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공동체일수록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거리 두기, 차가움, 고립감이 나타났다."(452-3)


에필로그


"500년이 넘는 그 오랜 시기의 대표적인 감정 담론들을 분석하면서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감정은 도덕공동체 구축의 핵심 기제'라는 것이다. 감정은 나만의 비밀에 속하기에 도덕공동체와 연결된다는 단언이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사회와, 그리고 사회를 견지하는 도덕과 연결된다. 이는 감정이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이기에 도덕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압해야 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감정은 그 자체로 언제나 도덕감정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늘 부도덕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조차 감정의 도덕성을 전제한다." "우리가 도덕감정을 통하여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의 결론은, 감정에 역사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도덕적인 감정공동체를 구축한다는 목표는 언제나 같았으나, 감정에 대한 평가, 문제적인 대표 감정,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방식, 그 모두에 깔려 있는 인간학적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459, 467)


"감정은 원체 포괄적인 동시에 모호하기에 존재의 불확실성과 잘 어울린다. 감정은 합리적 인지에 선행하는 인지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과 낙관적 인간은 같은 대상을 완전히 다르게 인지한다. 그리고 그 인지는 때로는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시킨다. 따라서 공감이 요청된다고 말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공감이야말로 자아에 몰두하는 개인을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감에의 호소가 개별화되고 불확실해진 자아에게 잘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감정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말해지면 말해질수록 불확실한 개인은 공감보다는 자아의 내적 격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공감이 아니라 혐오가 작렬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감정의 역사는 현재 나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해준다. 이를 통해 나의 사회성을 깨닫고 나의 자아실현을 재차 성찰하게 해준다. 자아는 실현하는 것이되, 성찰되는 것이다."(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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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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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디세우스의 흉터


"호메로스의 시 작품 속에서 서스펜스의 요소는 극히 희박하다. 시의 스타일 전체를 통해서 독자나 청중의 숨을 죽이게 하도록 피해진 것은 없다. 샛길로 접어든 이야기─가정부 에우리클레이아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흉터를 알아보는 순간, 흉터의 기원을 서술하는 대목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독자에게 서스펜스를 일으키기보다는 긴장을 완화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줄거리의 진행을 늦춤으로써 서스펜스를 증가시키려는 삽화는 이야기의 현재를 완전히 채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해결이 기다려지고 있는 위기를 완전히 독자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서 서스펜스 자체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위기와 서스펜스는 계속되어야 하며 배경에서 줄곧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배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그때그때 유일한 현재이고 그것이 무대와 독자의 마음을 완전히 채우고 있다."(45)


"오디세우스의 흉터의 기원에 관한 탈선적 객담은 새로 등장한 인물이나 새로 나타난 물건이나 도구조차 비록 싸움이 한창일 때라도 그 성질이나 기원 등을 서술하는 많은 대목들과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혹은 한 장면이 등장할 때 그가 그전까지 어디 있었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고 어떤 경로로 해서 그 자리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는 대목과도 다를 바가 없다." "호메로스의 느낌은 흉터가 조명되지 아니한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나타나는 대로 허용해 두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환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와 함께 주인공의 소년시절의 일부도 드러나야만 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호메로스 문체의 기본적 충동에 놓여 있었음에 틀림 없다. 즉 현상을 충분히 구체화된 형태로 묘사하고, 모든 부분이 뚜렷하게 보이고 감촉할 수 있도록, 또 시간 관계나 공간 관계를 완전히 고정시켜서 묘사하려는 충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심리 과정에서도 숨겨져 있거나 표현되지 아니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47)


"호메로스 문체의 특질은 이와는 다른 형식의 세계에 속하지만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 문체인 다른 보기와 비교해 보면 명백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말하였다. 아브라함! 하고 그는 말씀하셨다.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22:1) 호메로스를 읽고 난 후 이삭의 희생 이야기를 읽으면 이 서두조차 우리를 놀라게 한다. 두 존재의 대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들이 지상의 어느 한곳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점 역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사실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 말로는 〈나를 보십시오〉 정도의 뜻일 뿐이다." "즉 그를 부른 신에게 '여기서 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49-51)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인 이들 두 개의 문체보다 더욱 대조적인 문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쪽으로는 구체화되고 균등하게 조명되었으며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늘상 전경 속에서 아무런 틈서리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현상들이 있다. 생각과 감정은 완전히 표현되어 있으며 사건은 서스펜스 없이 느릿느릿 일어난다.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현상만이 구체화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만이 강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간과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해석을 필요로 한다. 생각과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침묵과 단편적인 대화에 의해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중층적이며 훨씬 착잡히 얽혀 있다. 몹시 긴박한 서스펜스로 차 있고 단일한 목표(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는 훨씬 통일적인)를 지향하고 있는 전체는 불가사의하고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55-6)


2 포르투나타


"호메로스의 스타일과 다른 특징, 페트로니우스의 잔치의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을 살펴보자.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온 어떤 것보다 이 글이 사실적 묘사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렇다는 것은 소재의 비속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회 환경을 정확하고 완전히 비도식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리말키오의 잔치에 모인 손님들은 1세기 남부 이탈리아의 속량된 신흥 부자들이다. 그들의 견해는 이런 부류의 전형적인 견해이고 그들의 언어는 거의 아무런 문학적 세련을 가하지 않은 시정의 언어 그대로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다른 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페트로니우스의 문학적 야심은, 현대 사실주의 작가들처럼, 무작위적이고 일상적인 당대의 생활 환경을 사회 배경 속에서 그려 내며 등장인물로 하여금 문체의 유형화 없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대 리얼리즘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극한점을 이룬다."(79-80)


"고대 저작과 초기 기독교 저작 사이에 존재하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이들 저작의 관점과 대상 독자가 다르다는 사실에 의하여 규정된다. 여러 가지 점에서 페트로니우스와 타키투스는 서로 다른 필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타키투스는 사건과 일의 전폭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에 서서 글을 쓴다. 그는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높은 교양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들을 분류하고 판단한다. 그가 무미건조하고 비시각적인 데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천재 때문만이 아니고 고대 자체가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더없이 성공적으로 도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대상 독자로 삼았던, 그에 대등한 지위의 사람들은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라도 오랜 전통이 고상한 취미라고 정해 놓은 것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했다. 페트로니우스도 자기가 그리고 있는 세계를 위로부터 내려다본다. 그의 책은 가장 높은 교양의 소산이다."(100)


"이에 대하여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 대체로 『신약 성서』 거의 전부는 바야흐로 대두되는 성장의 복판으로부터 직접 보통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여기에는 넓은 조망도 없고 조리에 맞는 구성도 없고 예술적 의도도 없다. 여기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은 의식적인 모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완전히 형상화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야기되어야 하는 사건에 붙어 있는 것이기에, 크게 동요된 사람들의 몸짓과 말에 드러나기에 그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하게 손질하는 데 노력할 필요가 없다." "타키투스와 페트로니우스는 감각적 인상을, 전자는 역사 사건의, 후자는 특정한 사회 계층의 감각적 실감을 주려고 노력하며 그런 가운데 특정한 심미 전통의 한계를 존중한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고 그러한 전통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별 노력 없이 순전히 자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의 내적인 움직임만을 통해서 이야기가 시각적인 구체성을 띠는 것이다."(101-2)


"유대인 세계의 독자나 청자는 실제 일어난 감각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그 의미를 생각하고록 요구받았다. 가령, 아담이 잠든 사이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최초의 여자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한 병사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주석을 통해 맺어져서, 아담의 잠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잠의 상징이고, 아담의 옆구리 상처로부터 육신으로 본 인류의 원초적 어머니인 하와가 태어났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정신으로 본 모든 사람의 어머니인, 교회가 태어난다는 교의가 될 때, 감각적 사건은 상징적 의미의 세력 앞에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에 비해 그리스 로마의 실례들을 보면, 역사관이 제한된 채로 그 감각적 실체성은 완전한 것이 되어 있다. 이들은 감각적 외양과 의미의 갈등을, 초기 기독교의 현실관, 아니, 기독교 전체의 현실관에 배어 있는 이 갈등을 알지 못한다."(102-3)


3 페트루스 발보메레스의 체포


"제정 시대의 첫 번째 세기말로부터 갑갑하고 편편치 못한 것, 생활 분위기의 암흑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세네카 속에 의심할 바 없이 나타나 있으며 타키투스의 역사책의 암울한 가락은 곧잘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에게서는 이 과정이 불가사의하고 감각적인 비인간화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음산하다. 그것은 미신과 피비린내 나는 광란과 탈진과 죽음의 공포,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하게 뻣뻣한 동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상쇄하려는 것으로는 한결 더 어렵고 한결 더 절망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똑같이 음산하고 측은한 결의, 즉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제국을 보호하려는 결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결의는 암미아누스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에게도 유연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련적인 초인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예컨대 그가 율리아누스의 말이라고 전하는 '선 채로 죽는다'란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107, 111-2)


"고전 문학의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 문체는 과도히 세련되고 과도히 감각적이다. 그 효과는 강력하지만 왜곡되어 있다. 그 효과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왜곡되어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 세계의 희화(戱畵)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악몽과 같은 경우도 허다하다. 단순히 그 속에서 반역, 고문, 박해, 고발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삶이 한결 견딜 만한 시대란 그리 흔치 않은 법이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를 그렇듯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들을 상쇄하고 균형을 유지할 그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끔찍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것이 언제나 정반대되는 것을 낳으며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에도 인간 정신의 위대한 생명력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16-7)


"이목을 끄는 회화적 리얼리즘이 숭고한 문체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암미아누스에게서 볼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고전 문학의 스타일 분리 법칙을 점차로 와해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잠식은 기독교 저자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특히 철학과 수사학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교부들에게서도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현실 묘사의 혼합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특히 히에로니무스는 이 점에 있어서 극단적인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다.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를 뺨치는 그의 풍자적 희화는 지극히 회화적이다. 스스로에게 예의나 관습에 대한 경의를 조금도 과하지 않고 먹기와 마시기, 신체의 돌봄(혹은 소홀함)과 성적 절제에 이르는 사소한 사항까지도 세세히 다루고 있는 금욕적 격언을 적고 있는 대목에서는 특히나 더욱 회화적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서정의 높이에까지 올라가게 할 수 있었던 히에로니무스의 희망조차도 현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불꽃도 음산한 불꽃이다."(121-4)


"당대 현실의 암울한 특징을 아무리 많이 드러내 보인다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절은 암미아누스의 작품이나 히에로니무스의 구절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첫눈에 다른 원전과 구별이 가는 것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인간의 투쟁의 열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인간 생활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직접적으로 그려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눈앞에 살아 있다." "〈그는 이제 들어올 때의 그가 아니었으며 그가 섞여 있게 된 군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고전 고대의 산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문장이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갈등을 보이면서 한편 연합되어 있는 내면의 제력(諸力)이란 현상, 그 제력의 관계와 결과에 있어서의 대립과 종합의 교체를 그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추구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128-30)


4 시카리우스와 크람네신두스


"로마 제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땅 위의 모든 소식이 국가적인 의의에 따라서 수납, 분류, 정리되는 그러한 장소에 있지 않다. 그는 일찍이 존재했던 뉴스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뉴스가 보고되는 방법을 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는 갈리아 지방 전체를 개관하지 않는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이것이 가장 값있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자기의 교구 내에서 직접 본 것이거나 이웃 지역에서 전해 들은 것을 담고 있다. 그의 자료는 근본적으로 그의 눈앞에 가져와진 일에 한정된다. 그는 옛 의미의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정치적인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이해관계의 관점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저술이 그 전체성을 불가피하게 드러내게 될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의 총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다."(144-5)


"그레고리우스의 언어는 사실을 조직화하는 데에는 불충분한 준비밖에 없는 언어이다. 복합적인 사건이 일정한 단순의 도를 넘어서면, 그는 이를 일관성 있게 기술하지 못한다. 언어를 졸렬하게 조직화하거나 또는 전혀 조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사건의 구체적 측면에 살고 사건 속의 인물들과 말하고 그들 속에서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즐거움, 고통, 경멸, 분노 또는 그때그때 그들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각종의 격정에 표현을 준다." "그레고리우스는 부릴 수 있는 연장이 문법적으로 혼란스럽고 구문상에 있어서 빈약해진, 거의 초보적인 라틴어밖에 없다. 그는 특별 효과를 낼 만한 재간도 없고 신기한 자극제나 문체상의 변주로 관심을 끌 만한 독자층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토착방언으로 듣는다." "그가 전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의 유일한 세계이다. 그에게 그 밖의 다른 세계는 없으며, 그는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151-2)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6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활동은 실제적인 일과 조직에 관계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변화는 그레고리우스에 의하여 생생하게 예시되어 있다. 그는 수사학적 소양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교리 논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교리 회의의 결정은 한번 정해진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 즉 상상력의 밥이 되어 줄 성인의 전설, 유물, 이적, 폭력과 압제에 대하여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잇는 것들, 미래에 있을 보상을 내걸어 쉽게 받아들여지게 한 소박한 도덕적 교훈, 이런 모든 것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함께 살고 있던 민중들은 교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믿음의 신비에 대해서는 극히 조잡한 관념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탐욕과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것들은 서로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공포심에 의해서만 다소 제어되는 것이었다."(153)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무서운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반, 폭력, 살인은 항다반사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보여 주는 소박하고 실제적인 활달성은 후기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느껴지는, 그리고 기독교의 저술가들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울적한 분위기의 형성을 막아 준다. 그레고리우스가 붓을 들었을 때, 이미 파국은 일어났고, 로마 제국은 붕괴하고, 그 조직은 와해되고, 고대 문화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긴장은 이미 해소된 다음이었다. 이제 해낼 수 없는 과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없는 과대한 야심에 괴롭힘을 당함이 없이, 그레고리우스의 영혼은 좀 더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실제적인 삶을 영위할 용의를 갖추고 살아 있는 현실을 마주보았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문학적인 라틴어를 써 보겠다는 그레고리우스의 야심 속에 옛 전체의 자취가 남아 있을 뿐이다. 토착 방언은 아직은 활용할 수 있는 문학의 매체가 되지 못했다."(157-8)


5 롤랑 대 가늘롱


"〈신이 빛이 있으라 하였다. 하니 빛이 있었다.〉(창 1:3) 이 문장 속의 숭고성은 기복 진 도미구문의 장엄함이나 풍부한 비유의 화려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인 간결성 속에 담겨 있다. 이 인상적인 간결성은 그 무한한 내용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듣는 자에게 섬뜩한 외경심을 불어넣어 주는 모호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인과 관계의 연결사가 없이 일어난 일을 수식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이 이 문장에 숭고함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롤랑의 노래』의 주제는 협소하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어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그 어떠한 것도 문제성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세와 내세의 모든 범주는 경직하게 규정되어 있어 모호함이 없이 딱 고정되어 있다. 합리적 이해가 그들에게 직접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관찰일 뿐, 이 시와 당대의 청중들은 이러한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경직하고 협소한 기정 질서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산다."(175-6)


# 도미문掉眉文 : 주절의 완결을 끝에 둠으로써 서스펜스의 효과를 내는 문장


"『알렉시우스의 노래』 같은 11세기의 로맨스어 종교 원전에서 우리는 이와 똑같이 한정되어 있고 확고하게 굳어 있는 우주와 마주치게 된다." "『롤랑의 노래』에서와 같이 봉건 제도라고 하는 동일한 사회 구조와 동일한 기풍이 기독교도 사이에서건 이교도 사이에서건 한결같이 지배적이다. 세계는 아주 작아지고 좁아졌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의문을 두고 경직되어 있고 변함없이 회전하고 있다. 그 의문은 미리 대답이 주어졌고 그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그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에게 열린 길은 하나가 있을 뿐이며 딴 길은 없다. 그는 또한 자기가 세 거리 갈림길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혹자가 왼쪽으로 가라고 꾈지라도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과 형태와 계층을 지니고 있는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의 광막한 무한 전체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177-9)


"경직하고 협소하고 문제성이 없는 도식화는 원래 기독교의 현실관에는 생소한 것이다. 현실 사건의 비유적 해석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전파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 갔으며 실제 사건을 취급할 때 그 현실적 내용을 용해시켜 그 의미 내용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기독교 교의가 확립되고 교회의 소임이 점점 더 조직의 사항이 되며, 기독교의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설복하는 것이 문제가 됨에 따라 비유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단순하고 경직된 도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직화 과정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보다 깊은 곳에 미쳐 있다. 그것은 고대 문화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경직화 과정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경직화 과정으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그것이 구현하고 있던 질서의 원리가 붕괴함에 따라 전 세계의 내적 일관성도 무너졌다. 새 세계는 그 분할과 산산조각으로부터만 재건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젊은 세대와 노년 사이의 충돌이었다."(187)


"무공시 특히 『롤랑의 노래』는 인기 있었다. 무공시들이 봉건 사회 상류 계층의 공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민중에게 또한 호소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13세기의 청중들에게 있어 영웅 서사시는 역사였다. 그 속엣는 지난 시대의 구전 역사가 살아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청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구전도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지방어 연대기는 1200년경에 이르러 비로소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기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대 사건의 목격자의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사시 문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사실 영웅 서사시는 역사이다. 적어도 그것이 실제의 역사 상황을 상기시키고(아무리 그것을 왜곡하고 단순화한다 하더라도) 그 등장인물들이 역사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요소를 궁정 소설은 방기해 버린다. 그 결과 그것은 객관적 현실 세계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190-1)


6 궁정 기사의 출정


"궁정 사실주의는 한 계층─당대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다른 계층으로 하여금 때로 다채로우면서도 기껏해야 희극적이거나 괴이한 장식물로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하나의 계층의, 극히 화려하고 풍미 있는 생활도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한쪽으로 중요한 것, 의미 있는 것, 높은 것과 다른 한쪽으로, 낮고 기괴하고 희극적인 것 사이의 계급적 구분은 소재에서 엄격하게 유지되어 있다. 앞쪽의 범위에 들어선 것은 봉건 계층뿐이다." "궁정 로맨스의 리얼리즘의, 계급적 제약보다 더 큰 제약은 그 동화적 분위기에서 온다. 궁정 로맨스의(특히 브르타뉴 연속물의) 성과 궁성과 싸움과 모험은 동화 세계의 것들이다. 그 결과 당대 현실의 다채롭고 생생한 그림은 땅에서 솟아난 듯, 즉 동화의 땅에서 솟아난 듯 나타난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 정치적 바탕을 결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는 결코 설명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매개됨이 없이 동화와 모험에서 직접 나온다."(202-3)


"알려진 세계를 넘어서 먼 미지의 땅으로 방황해 들어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경이로운 일과 위험의 환상적 묘사는 옛날부터 있었다. 지리적으로 알려진 세계 안에서도 신들과 귀신과 요괴와 또다른 마술적 세력들의 작용을 통하여 사람을 위협하는 신비스러운 위험에 대한 표상과 이야기도 있었다. 궁정 문화 훨씬 이전에도 힘, 덕, 꾀, 신의 도움으로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고 다른 사람들을 구출해 낸, 두려움 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에 있는 한 계층 전체가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는 일을 그들의 고유한 임무, 이상의 관점에서 배타적인 임무로 생각한다는 것, 이 계층이 여러 전설의 유산, 그중에도 브르타뉴의 전설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그들을 위한 기사적 경이의 세계를, 마치 어셈블리 라인에서 공급되어 나오듯 환상적 해후와 위험('아방튀르'(aventure)라고 불리는 모험)이 기사를 향해서 줄지어 나오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러한 사태는 궁정 로맨스의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다."(205-6)


"궁정 로맨스는 기능적인 것, 역사적·현실적인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을 묘사하는 경우, 단지 현란한 표면만이 묘사될 뿐이다. 피상적이 아닐 때는 시의 대상과 목표는 현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을 받은 계급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 개의 특징에 기초한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모든 세간적인 우연성을 넘어서는 절대성과 그것에 승복하는 사람들에게 선택된 자의 공동체, 즉 다수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공동 집단에 속한다는 귀속감이다. 그리하여 봉건 윤리, 완전한 기사에 대한 이상화된 표상은 매우 크고 오래 지속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기사와 더불어 생겨난 이상들, 즉 용기, 명예, 충성, 상호 존중, 귀족적 예의, 여성 존중 등은 문화가 전혀 달라진 시기의 사람들까지도 사로잡았다. 훗날의 도시 부르주아 계층은, 이것이 계급적이고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을 채택하였다."(207-8)


"궁정 로맨스에 있어서 사랑은 영웅적 행위를 위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통한 행동의 동기 부여가 없는 마당에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기사적 완성의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서의 사랑은 여기에 결여되어 있는 다른 동기 가능성에 대한 대처물이 된다. 이와 더불어, 귀부인의 총애를 위하여 벌어지는 허구적인 사건이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의 배열 질서가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동시에 유럽 문학에 있어서 사랑이 시적인 소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중요한 관습이 여기서 시작된다. 고대 문학은 사랑을 기껏해야 중간 정도의 값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비극에 있어서나 대서사시에 있어서나 사랑은 소재로서 지배적인 것이 아니었다. 궁정 문화에 있어서의 사랑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치는 유럽의 지방어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높은 스타일의 원형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랑의 승화 작용이 비롯되고, 이것은 신비주의와 여성 숭배의 예절로 나아간다."(213-4)


7 아담과 이브


"기독교 구제극(救濟劇)은 작자와 관중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숭고한 주제이다. 그러나 연출은 민중의 취향에 맞기를 희구한다. 옛적의 숭고한 사건은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고 모든 관중이 상상할 수 있고 친숙한 당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대 프랑스인 누구나의 마음과 심정 속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담은 자신이나 혹은 이웃 사람의 집에서 친숙한 투로 말하고 행동한다. 강직하기는 하나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남편이 파렴치한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허영심 많고 야심 많은 아내 때문에 어리석고 운명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만 어떤 시민의 집안이나 농부의 집안에서 일어나듯이 꼭 그렇게 매사가 진행된다. 아담과 이브 사이의 대화, 즉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이 최초의 남녀 사이의 대화는 가장 단순한 일상 현실의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 숭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고 격이 낮은 문체로 이루어진 장면이 되는 것이다."(225)


"숭고와 겸손의 대조적 융합은 성서의 특징으로서 일찍이 교부 시대부터 강조되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은 신이 이러한 것을 지혜롭고 신중한 이들에게 숨기고 어린이들에게 제시했다는 성서의 원문(마태 11:25, 누가 10:21)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위와 학문 있는 이들보다는 어부나 세금징수원이나 그같이 지체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사실(고전 1:26 이하)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자기네 안목으로는 말할 수 없이 조야한 언어로 양식상의 범주에 전혀 무지한 채 쓰인 글 속에 가장 높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주장에 대경실색하였다." "바로 이 같은 비판은 성서의 특징이 되어 있는 참다운 위대함에 교부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즉 성서가 일상적인 것과 격이 낮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종류의 숭고성을 창조하여 내용이나 문체에 있어 가장 격이 높은 것과 가장 격이 낮은 것을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227-8)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완전히 이 전통에 속해 있다. 본래 연극적 요소를 지니고는 있으나 예배 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서의 일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소박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숨어 있는 진실로 이들을 인도하려 하였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벌어지는 장면은 겸손한 문체로 마음이 가난한 소박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된다. 숭고한 사건을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집어넣어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가 숭고한 것임을 잊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현실로부터 직접 가장 드높고 가장 은밀한 신과 관계되는 진실로 옮아간다." "이들 장면을 에워싸고 있는 틀의 정신은 역사의 비유적 해석의 정신이다. 이것은 일상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동시에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과 관련된 세계사적 맥락의 일부이며 따라서 항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초시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0-1)


8 파리나타와 카발칸테


"중세에 지방어로 쓴 저작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는 오늘날 약간의 재능이라도 있는 저작자뿐만 아니라 약간의 언어적 훈련을 받은 서간문 필자라면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문장 구조를 끌어내어, 구태여 특출한 것으로서 추켜세우는 것에 의아한 마음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단테 이전의 저술가로부터 출발하여 본다면, 단테의 언어는 거의 불가해한 기적이다. 그들 중에는 대시인도 있었건만, 이들에 비교해 볼 때 단테의 언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부성, 실감, 힘,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어형을 사용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사상과 내용을 비교할 수 없이 확실한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새로 발견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저런 표현 형식이 나왔는가 하는 것은 증명되거나 추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이나 추정은 그의 언어 능력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을 높일 뿐이다."(264-5)


"대체로 『신곡』의 스타일상의 의도가 숭고미를 겨냥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시의 모든 행에서, 구어적인 시행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모델을 제공해 준 것이 고대의 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테의 숭고미의 개념이, 언어 표현에서나 소재에 있어서 고대의 귀감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곡』이 보여 주는 소재와 사상들은 고대의 관점에서는 기괴하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높은 것과 낮은 것을 뒤섞어 놓고 있다. 그의 등장인물에는 조금 앞 시대나 당대의 역사에서 나온, 그리하여 흔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자의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낮은 현실의 일상 세계에서의 모습 그대로 가차 없이 묘사된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단테는 일상적이고 기괴하고 불쾌한 것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어떤 한계를 두지 아니한다. 고대적 의미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 단테의 손에 의하여 숭고한 것이 된다."(266-7)


"프로방스의 시인들과 '신체시'의 시인들에게는 지고의 사랑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테마였다. 단테는 『지방언어론』에서 세 가지 테마(무공(salus), 사랑(Venus), 덕(virtus))를 들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테마는 대부분의 서정시(canzoni)에서 사랑의 테마에 종속되었거나 사랑의 알레고리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신곡』에서도 이 틀은 베아트리체의 존재와 기능을 통해서 유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틀은 굉장히 범위를 포괄한다. 『신곡』은 무엇보다도 백과사전적인 교훈시로서, 물리적, 우주론적, 윤리적, 역사적, 정치적 세계 질서를 묘사한다. 나아가 그것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현실의 구역을 다 나타내고 있는, 현실 묘사의 예술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숭고한 장대성과 낮은 통속성, 역사와 전설, 비극과 희극, 인간과 지리가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신곡』은 개체적 인간의, 즉 단테 자신의 발전사이며 구원의 역사이다. 그럼으로써 또 인간 일반의 구원에 대한 비유가 된다."(272)


"단테는 그의 역사성을 피안에까지 가지고 간다. 그의 죽은 자들은 현세의 현재성과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있지만, 추억과 뜨거운 참여는 그들을 너무나 강하게 충동하여 피안의 세계는 그것으로 가득 찬다. 연옥과 천국에서는 이것이 그처럼 강하지는 않다. 거기에서는 눈길이 지옥에 있어서처럼 뒤를 돌아보며 현세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앞과 위로 향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는 현세적 생존을 신을 향하는 종착점과 더불어 보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상의 삶은 살아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신의 심판과 영원한 영혼의 상태의 기초가 된다. 이 영혼의 상태는 참회자나 복자의 특정한 집단에 배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지상적 삶의 본질과 하느님의 구도 가운데 그것이 차지하는 일정한 자리를 의식 속에 새기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전생의 지상적 삶의 성격을 완전히 연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심판을 이루는 것이다."(277-8)


9 수사 알베르토


"감각적 현상의 세계가 최초로 정복되고 의식적인 예술적 구상에 따라서 조직되고 언어로 포착된 것은 보카치오에게서이다. 그의 타고난 성향은 자연스럽게 감각적이었고 관능성에 차 있는 우아하고도 매력있게 움직이는 형식을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숭고한 문체보다는 중간적 문체가 어울렸다. 고전 고대 이후 최초로 그의 『데카메론』은 당대의 생활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품위 있는 소일거리가 될 수 있는 특정한 문체 수준을 고정시켜 놓았다. 이야기가 이제 도덕적 범례 구실도 하지 않게 되고 또 웃고 싶다는 평민들의 소박한 욕망에 보비위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야기와 설화는 이제 삶의 관능적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고 감각과 취향과 판단력을 지닌 신사 숙녀와 상층 계급의 행실 좋은 젊은이들에게 즐거운 소일거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보카치오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액자'를 창조해 낸 것은 그의 설화 문학의 이러한 목적을 공표하기 위해서였다."(307-9)


"보카치오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관찰력이나 표현력이 아니다. 이러한 품성은 보카치오가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단테의 그것과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보카치오의 관심은 단테가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현상과 감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자기의 재능을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지가지 인물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정한 조건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한 단테의 역량이 보카치오로 하여금 그의 등장인물을 위해 똑같은 결과를 성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세계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공존하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적 해석 없이 모든 현상에 제각기 특정한 그리고 세밀히 구별된 도덕적 가치를 배당하는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시각의 비판 의식이다. 이 비판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현상들 자체로부터 솟아나게 하는 종류의 것이다."(313-4)


"보카치오의 책은 중간적 문체로 되어 있는데 그 경박스러움과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확고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데카메론』에 반영되어 있는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태도, 중세 기독교적 윤리에 정반대되는 것은 비록 가벼운 어조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차 있는 사랑과 자연의 교의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그 삶의 형태에 대한 근대인의 반향이 성도덕의 영역에서 그 실천력과 선전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와 그 본질적 성격에 뿌리박고 있다. 성도덕의 영역에서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와 삶의 기독교적인 묵인 사이의 갈등은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가 자의식을 성취하면서부터 날카로워진다." "『데카메론』은 사랑할 수 있는 권리에 뿌리박은 완전히 실제적이고 세속적이며 확연한 도덕률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교의적 타당성에 대한 강력한 주장 없이 우아하게 제시되어 있다."(321-3)


10 마담 뒤 샤스텔


"리얼리즘의 발전은, 중세 말엽에 특히 북부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 강하게 대두한 대(大)부르주아 문화의 융성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 문화는 아직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현실 관계에 상응하는 '제3계급'이 이론적으로 분화될 때까지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다). 이 계급은 그 상당한 부와 힘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와 생활 양식에 있어서 오랫동안 대부르주아적이기보다는 소부르주아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방 예술에 신변적이고 가정적인 모티프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문제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실내 공간의 모티프가 가능해졌다. 사사로운 삶의 가정적이고 신변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봉건적, 귀족적, 군주적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상황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리하여 예술과 문학은, 봉건적 의식의 화려함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중세 초기보다 한결 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346)


"어쨌든 중세 말기의 몇 세기에 구조적 이론적 사고의 피폐와 불모가, 특히 실제적 삶의 질서와의 관련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기독교적 인간학의 육신적, 인간적 측면, 번뇌와 무상에 내던져져 있는 측면이 조잡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강조되어 나타나게 된다. 고대적, 고전적 인간상에 날카롭게 대조되는 이 극단적으로 육신적인 인간상의 특징은 세간적 신분의 의상에 많은 존경심을 보이면서도 그 의상을 벗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존경심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신분의 의상 밑에는, 나이와 병이 상하게 하고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체 이외에 아무 다른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인간 평등론인데, 적극적이고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모든 인생의 가치 절하라는 의미에서의 평등론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전혀 의미 없다. 그의 본능이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현세적 삶에 집착하게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격도 없다."(347)


"이 문화권의 어떤 작가도 단테가 하였듯이 또는 보카치오 정도로도, 그 시대의 세계 현실 전체를 조감하고 제어하지 못한다. 각자가 각자의 영역을 알 뿐이다. 이 영역은, 앙투안 드 라살과 같이 여행을 많이 한 사람과 경우에도 매우 좁다. 어린 샤스텔의 죽음이나 왕자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은 젊음과 기구한 사연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구체적 경험 이상의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이 끝났을 때, 독자에게 남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감각적인, 거의 육감적인 경악뿐이다. 작자는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중요한 판단도 관점도 의도도 없다. 나아가 때로는 매우 강력하게 직접적이고 특수한 것에 초점을 맞춘 심리 묘사까지도 개체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육신적, 인간적이다. 이들 작가들은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넘어가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각자의 인생권은 육신적, 인간적 운명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했던 것이다."(357)


11 팡타그뤼엘의 입 안의 세계


"라블레는 그의 거인의 나라를 처음 유토피아(Utopia)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16년 전에 나왔던 토마스 모어의 책에서 빌린 것이다. 이 주제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잇는 2세기 간의 모티프의 하나로서 정치, 종교, 경제, 철학상의 혁명에 지렛대 구실을 했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첫째, 작가가 줄거리를 아직도 태반은 미지로 남아 있는 신세계에 배치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유럽의 환경보다 한결 순수하고 한결 원시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국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통쾌하게 은밀한 방법을 제공하는 하나의 방책이 된다. 또 하나는 생소한 이방인을 유럽 세계에 데려와 유럽의 기성 질서에 대한 비판이 그의 순박한 놀라움과 그가 구경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으로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경우든 이 주제는 기성 질서를 뒤흔들고 그것을 보다 넓은 맥락 속에 배치하여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367)


"조야한 우스개 농담, 인간 육체의 동물적 파악, 성 문제에 있어서 절도와 유보의 결여, 리얼리즘과 풍자적 교훈적 내용의 혼합, 다루기 어렵고 때로는 난해한 박학의 어마어마한 축적, 우의적 비유의 사용 등과 이외의 많은 것이 중세 후기에 발견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이들을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 내는 데 힘쓴다."(375)


"라블레에게서 동물적 리얼리즘은 육체와 그 기능의 활력론적, 역동적 승리라는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에게는 벌써 원죄나 최후의 심판이 없으며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포도 없다.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은 자기의 숨쉬는 삶, 신체의 기능, 지적 능력을 즐기며 자연 속의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인간과 자연의 숨쉬는 삶은 온통 라블레의 사랑, 지식에 대한 갈증 그리고 언어를 통한 표현 능력을 불러들여 사용한다. 그것은 그를 시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며 비록 감정은 결여되어 있으나 진정 서정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얼리스틱하고도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미메시스를 야기시키는 것은 의기양양한 현세의 생활이다. 그리고 그의 미메시스는 완전히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중세 말의 동물적 리얼리즘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사고의 범위와 아주 반대되기 때문에 라블레의 중세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바로 문체의 중세적 특징 속에서이다."(376)


12 인간 조건


"몽테뉴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실천적 도덕적 요청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 요청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도, 아무런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아 인식의 우선적 위치는 인간의 도덕적 연구에서만 적극적으로 인식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임의적인 자신의 삶을 탐구함에 있어서 몽테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 조건 일반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의 행동이든 또는 멀리 있는 정치적 역사적 영역의 행동이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분별 있게 또는 무분별하게, 항시 사용하는 방법적 원칙을 그는 여기에서 드러내 보여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이 제시해 주는 척도를 적용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간 이해, 역사 이해는 우리의 자아 인식의 깊이와 우리의 도덕적 지평의 넓이에 의존하게 된다."(408-9)


"과학적 작업에는, 중세에 보다 훨씬 더 전문화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 전면적이고 고르게 완성된 인간의 이상적 표상이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직업적 목표를 갖지 않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적(사교적)이고 유행적인 형식의 일반 지식이다. 그것은 물론 백과사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 지식의 발췌, 그중에도 문학적이며 일반적으로 취미적인 것을 선호하는 발췌였다. 인문주의(Humanismus)는 바로 그 대부분의 자료들을 모아다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나중에 '교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에게는 전문 분야에 묶여 있는 전문지식인, 직업에 묶여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전문 분야의 사실적 지식에 빠져 있으면서 그의 행동과 말씨에 있어서 그것이 드러나는 사람은 희극적이고, 열등하며 비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태도가 완전히 발전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의 절대주의 시대에서이다."(417-8)


"이러한 전개에 있어서, 몽테뉴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능한 사람〉, 〈무지할 때까지도 어느 면에서나 능한〉 사람은, 몰리에르의 연극의 후작들처럼, 일체의 것에 확실한 시체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배울 필요가 없었던, 저 〈신사〉의 선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몽테뉴는 방금 이야기한 교양인층을 위하여 글을 쓴 최초의 저술가이다. 『에세』의 성공을 통하여 교양 독자가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몽테뉴는 어떤 특정 신분층, 어떤 특정 전문 영역, '민중'(das volk), 기독교도들을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어떤 정파를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는 최초의 세속적인 자기 성찰의 책을 쓴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 자기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으로 느낀 사람들, 남녀가 나타난 것이다. … 그리하여 그가 저 최초의, 아직도 귀족적인, 아직도 전문화된 일을 강요받지 않은 교양인층에 알맞는 표상들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418-9)


13 지쳐 빠진 왕자


"중세의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비극적인 것의 개념은 밋밋하게 발전하지를 못하였다. 이것은 고대의 비극 작품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 고대의 이론이 잊혀졌거나 오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전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러한 사실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기독교의 비유적인 인간 생활관이 비극적인 것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지상의 삶의 사건이 아무리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라 해도 그 위로는 예수의 출현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위엄 있는 단일한 사건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마침내는 흘러 들어가게 마련인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즉 타락과 예수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최후의 심판 등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중심(重心)이 지상의 삶으로부터 저 건너 세상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비극이 이 세상에서 끝을 맺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31-2)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비유적인 도식(圖式)이 거의 유럽 전역에서 뒤흔들리게 되었다. 저세상에서의 결말은 완전히 저버려지지는 않았으나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고대의 모범과 고대 이론이 뚜렷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고대에선 인생의 극적 사건들이 주로 사람의 바깥쪽에서 위로부터 달겨드는 행운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비극의 최초의 근대적 형태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개인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보다 큰 역할을 한다." "고대 비극의 경우 운명은 주어진 비극의 복합체, 즉 특정한 시기에 특정 인물이 말려 들어간 당면한 사건의 그물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추이는 비극적 갈등이 사건 추이만을 다루지 않고 즐거리가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대화나 장면이나 등장인물 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기서의 운명은 주어진 갈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432-4)


"셰익스피어의 윤리적 지적 세계는 고대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동요되고 층이 많으며 어떤 특정한 극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훨씬 극적이다.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사건이 일어나는 기반 자체가 한결 불안정하고 내적인 동요로 말미암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으로서의 안정된 세계가 없고 갖가지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고대 비극에서는 철학적 사색의 말은 극에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격언 같고 아포리즘에 가깝고 줄거리에서 추상되어 일반화되어 있고 등장인물이나 그의 운명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셰익스피어 극에서 철학적 사색의 말은 사사로운 것이 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당장의 상황에서 직접 나온 것이며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건에서 얻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며 사이를 두고 벌어지는 대화 속의 재치 있는 대답도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적절한 방식이나 순간을 찾거나 그러한 것을 찾아낼 가능성을 의심하는 극적인 자기 검토이다."(440-1)


14 마법에 빠진 둘시네아


"돈키호테는 아마디스도 롤랑도 아닌 정신 나간 시골의 작은 신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감정은 진실하고 깊다. 둘시네아는 진정 그가 사모하는 아씨이다. 그는 스스로 인간의 최고의 의무라 여기고 있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진정 진실하고 용감하며 일체를 희생할 차비가 되어 있다. 이렇듯 절대적인 감정, 이렇듯 절대적인 결심은 비록 어리석은 환상에 비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탄복을 자아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탄복을 거의 모든 독자가 돈키호테에게 아끼지 않아 온 것이다. 위대한 이상이란 생각을 돈키호테와 함께 연상하지 않는 문학 애호가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황당하며 그로테스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상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웅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아니었다는 문헌학적 비평의 모든 기도를 물리치고 있다."(462-4)


"난점(難點)은 돈키호테의 고정관념 속에서 고상한 것, 무구(無垢)한 것, 취할 만한 것이 형편없는 어리석음과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소망스러운 것을 위한 비극적인 투쟁은 무엇보다도 실제 현실 속에 뜻 깊게 개입해서 그것을 뒤흔들어 놓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뜻 깊은 이상은 타성이나 째째한 심술, 질투 혹은 보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나온 똑같이 뜻 깊은 저항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이상주의는 현세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고정관념의 이상주의가 그를 사로잡자마자 그 이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현존 세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희극적인 혼란을 낳을 뿐이다. 그것은 성공할 가망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현실과 접하는 바도 없고 그저 진공(眞空) 속에 널려 있을 뿐이다."(464)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세르반테스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교훈적인 목적의식도 아니다. 몽테뉴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처럼 인간 존재의 불확실함이나 운명의 힘에 의해서 동요되고 있는 실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용감성과 마음의 평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의 태도(세계에 대한, 곧 자기 예술의 주제에 대한 태도)이다. 다채로운 감각의 희롱에서 그가 감득하게 되는 기쁨 말고도 그에게는 어떤 남국적인 과묵함과 오기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그 희롱을 아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게 된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형성한다. 그는 그것을 재미나 한다. 그것은 또한 독자들에게 세련된 지적 재미를 주게끔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는 중립이다. 그가 심판하지 않으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재판을 하는 법도 없고 심문을 하지도 않는다."(480)


"세르반테스에게는 훌륭한 소설은 세련된 오락, 정직한 오락(honesto entretenimiento) 이상의 것이 아니다." "소설(小說)의 스타일이 그것이 최고의 소설이라 할지라도 우주의 질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염두에는 떠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작가로서의 자기 직업에 관계되는 문제에 한해서 판단을 내리려 든다. 세속 세계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악을 벌하고 선을 포상하는 것은 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곳 지상에서는 개관할 수 없는 현상의 질서는 놀이나 희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현상을 개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미쳐 버린 라만차의 기사 앞에서 그것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혼란의 춤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일상의 현실을 그림에 있어서, 그렇듯이 보편적이고 다층적이며, 그렇듯이 무비판적이고 문제성이 없는 유쾌함이 시도된 일은 유럽 문학에서는 다시는 없었다. 언제 또 어디에서 시도될 수도 있었을까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483-5)


15 가짜 독신자


"라신의 비극 「베레니스」와 「에스더」의 인물들은 자신의 왕공으로서의 신분을 너무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도 그 신분을 떠나는 일이 없다. 가장 깊은 불행, 가장 격렬한 감정 속에 있을지라도 라신의 비극적 인물은 그들의 신분을 통해서만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은 〈불쌍한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공자(公子) 나!〉라고 말한다." "에스더는 기절하는 순간 〈딸들아, 너희의 죽어 가는 여왕을 부축해 다오······.〉하고 외친다. 이 비극적 인물들의 왕공으로서의 지위와 그에 따르는 고양화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인격에서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느님이나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타고난 왕공으로서의 자세를 지킨다. 이것은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서 보는 태도와는 전혀 대조되는 인간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낭만주의자들이 때로 그랬듯이 이들에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505)


"비극적 인간과 언어적 표현에 대한 고전주의의 이념은, 지극히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어떤 시대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것 없이 일상생활로부터 초연하게 있는 심미적 세련화의 소산이다." "17세기가 라신의 예술을 거장적인 솜씨와 강력한 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이며 상식적이며 자연스럽고 그럴싸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당대인들은 라신 이전의 작가들이 이상한 모험적인 사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던 데 대하여 라신의 비극은 단순하고 분명한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관찰하였다. 또 바로 앞 세대의 유행이 지나치게 영웅적이고, 미묘하고 황당무계한 갈등(코르네유의 영향이 컸다)과 '화사파'의 영향으로 과도하게 감상적이고 현학적인 로망스를 즐겼던 데 대하여 라신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심리 상황과 갈등은 모범이 될 만하게 일반적인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518-9)


# 화사파 : 17세기 초 화사한 수사와 세련된 예의에 주력한 문학과 사회의 한 경향을 나타낸 사람들


"무엇이 가장 자연스러운가에 대하여 라신 시대는 나중 시대하고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문명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 문화, 순수한 민중성, 탁 트이고 막힘 없는 들판으로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은 행동을 우아하게 가지며 사회생활의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도 거기에 쉽게 맞아 들어갈 수 있는 교육 있고 닦인 인간형과 일치시켜 생각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양이 많은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높이 이야기하는 경우에 비슷한 것이다. 어떤 것을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치에 맞는다 하고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조화, 이성, 자연스러운 품성의 함양의 요소를 크게 가졌던 고대 문명의 황금기에 17세기는 스스로 대응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루이 14세 아래의 프랑스인들은 대담하게 그들의 문화가 고대인들의 문화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본보기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견해를 유럽 전체에 부과하였다."(520-1)


16 중단된 만찬 1 ─계몽주의 시대의 리얼리즘


"18세기 문학에서는 눈물이 그 전엔 한 독립된 모티프로서 지니지 못하였던 중요성을 지니게 되기 시작한다. 영혼과 감각의 경계에서 눈물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활용되었고 또 당시 유행했던 정감과 에로티시즘이 뒤섞인 감흥을 만들어 내는 데 각별히 효험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미술과 문학에서 점점 인기가 있게 된 것은 특히 쉽게 감동되고 쉽게 정열이 타오르는 미녀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거나 혹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이를테면 하나나 지켜보는 대상이요 또 맛보는 대상이었다." "18세기에는 또한 여성의 옷차림의 '어지러움'이 이전보다 강조되고 있다. 훼방받은 목가(牧歌), 갑작스러운 바람, 넘어짐, 뛰어오름, 그리고 그 사이 여체(女體)의 가리운 부분이 드러나거나 흔히 '매력적인 어지러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제 색정적이고 감상적, 친밀함이 뒤섞여 색정적인 요소는 철학 및 과학의 계몽주의가 남긴 삽화에조차 나타나게 된다."(530-1)


"여기서 미덕이라는 것은 색정적 감정의 장치 전체와 떼어 놓고 생각될 수가 없다." "성적 자극은 항시 감상적이고 윤리적인 언어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것이 환기하는 훈기는 감상적인 윤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이러한 혼합은 18세기에 자주 발견된다. 디드로의 윤리적 태도는 색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열띤 감상성 속에 뿌리 박고 있으며 루소조차도 그 흔적을 여전히 보여 주고 있다. 점증하는 사회의 시민적 경향, 18세기 내내 유지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안정, 중간 계층 및 부유층의 안온한 생활, 이에 따라 이러한 사회 계층의 젊은 세대 사이에 정치상·직업상의 근심이 없어지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당대의 많은 글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미적 형식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무너졌을 때 그 문제성 있는 성격이 누구에게나 분명해졌지만 새로이 형성된 혁명적인 사상은 시민층의 감상주의를 흡수했고 이 감상주의는 그대로 남은 채 19세기로 넘어 들어갔다."(534)


"계몽주의의 선전 목적에 봉사하는 리얼리스틱한 구절의 스타일 수준은 생판 다르다. 그러한 보기는 섭정 시대 이후에 눈에 띄고, 더욱 빈번해지고 또 점점 논쟁적이며 공격적이 된다." "선전 방책으로 애용되는 '탐조등 수법'은 폭넓은 복합체의 한 작은 부분을 과도하게 조명하는 한편 강조된 부분을 설명하고 그 근원을 밝히고 또 균형이 잡히도록 나머지 부분을 보충할 만한 다른 모든 것을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그 결과 진실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말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왜곡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전면적인 진실과 함께 여러 요소의 적절한 상호 관련을 갖추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생활 형식이나 사회 집단이 생명을 다했거나 혹은 그저 애호나 지지를 잃어버렸을 때 선전가들이 그것을 부당하게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의 부당성은 사실대로 부당한 것으로 반(半)의식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나 사람들은 그것을 가학적인 희열을 느끼며 환영한다."(535-8)


"선전상의 방책으로 더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모든 문제의 극단적인 단순화이다. 이 단순화는 우선 문제를 정반대되는 하나의 대조로 좁혀 놓음으로써 성취된다. 그리고 이 대조는 검정과 하양, 이론과 실천 등등이 분명하고 단순하게 대립되어 있는 어지럽고 실속하고 기운찬 얘기 속에 제시되어 있다." "날카로운 대조법에 의한 문제의 단순화, 문제를 삽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어지럼증 나는 급한 속도와 함께 소설 「캉디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연이어서 불행이 일어나는데 이 불행은 필요한 것이며 그럴 만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고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에 값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설명되어 있다. 이리하여 냉정한 성찰은 웃음 속이 파묻히고 말아 흥이 난 독자는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논의나 형이상학적인 우주조화관 전반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게 되더라도 가까스로 겨우 보게 되는 것이다."(541-2)


17 중단된 만찬 2 ─18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루이 드 생시몽 공작은 17세기보다는 그가 실지로 회고록을 썼던 시대(18세기)에 분명히 소속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궁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는 되풀이해서 17세기 사람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말이다. 그것도 60년대나 70년대의 궁정이 아니라 90년대의 궁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침투해 들어갔던 90년대도 그가 글을 썼을 때는 이미 머나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18세기의 전반은 많은 뒷날의 발전을 예고하고 그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독보적인 개인과 사상과 운동의 수많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누가 비코를 17세기에 집어넣을 것이겠는가? 비코는 생시몽(1675년생)보다 7년 앞서 태어났고 그의 주요 작품도 몇해 앞서서 써내었다. 비코는 반(反)데카르트파였다. 마찬가지로 생시몽은 위대한 국왕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동시대인들에게는 외관상으로가 아닌 보다 더한 유사성이 있다. 취향이나 정신 성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살아생전에 벌써 낡아져 버린 과거로 되돌아간다."(572)


"두 사람 모두 절박한 내적 충동이 그들의 언어에 무엇인가 비범한 것, 때로는 사납고 지나치리만큼 표현적인 것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당대의 취향에 호소했던 쉬움과 쾌적함과는 상극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인간을 그리는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역사 진행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사변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들 두 사람은 인간이 그의 존재의 역사적 사실 속에 깊숙이 뿌리 박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당대의 합리주의적이고 비역사적 태도와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생시몽이 회고록을 쓰고 있을 당시에 최초의 흐릿한 싹이 보이고 있었던 역사주의가 설정하였던 종류의 역사 이론의 흔적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을 넘어서 있으면서도 개성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힘은 생시몽의 원근법 밖에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살아 있는 역사는 순전히 행동하는 개인과 특수한 심리 및 이에 따라 생겨난 여러 관계와 대립에 대한 통찰이다."(573)


18 음악가 밀러


"'중산 계급의 비극'이라는 장르는 사사로운 일, 가정사, 애처로운 일, 감상적인 것에 묶여 있어서, 이런 것들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 따르는 어조와 스타일로 하여 사회 무대를 확대하고 일반적인 정치 사회 문제를 포함시키는 데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와 사회 일반의 문제에로의 새로운 진로가 트였다. 이제는 애처롭고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사랑의 관계가 비협조적인 일가, 부모, 보호자 또는 사사로운 도덕적 장애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敵), 사회의 부자연스런 계급 구조와 부딪치게 된 것이다." "'질풍노도' 시대의 혁명가들은 루소의 선례를 따라, 관능적이고 애처롭고 감상적인 상태의 사랑에 가장 높은 비극적 위엄을 부여하면서도 부르주아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감상적인 요소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무릇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감정으로 생각되고 어떤 인생, 어떤 상황에서도 숭엄한 것이 되었다."(582)


"당대 독일의 상황은 넓게 사실적인 묘사를 쉽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상은 잡다한 것이었다. 삶은, 지배 군주주의 혈통과 정치적인 사정의 우연으로 하여 생겨난 '역사적 영토' 속의 혼란된 무대에서 영위되었다. 이 작은 영토 내에서 억압적이고 때로는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공손한 순종과 역사적인 전통성의 수용과 병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태는 사변, 내성(內省), 명상 그리고 지방적인 기벽(奇癖)의 발달을 조장하는 데 적당한 것이지, 보다 넓은 관련과 넓은 영역을 의식하면서 단호하게 행동과 현실을 겨누는 데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 역사주의의 기원은 그 형성기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헤르더는 역사를 가장 넓고 일반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깊은 특수성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역사 이해에는 구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들의 저작은 독일의 역사주의가 오래 지니게 될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586-7)


"즉, 한편으로는 특수주의와 민중적 전통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변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다 같이 구체적인 미래의 가시적인 징후들보다는 초시간적인 역사의 정신, 현재의 완전한 진화 완성에 그 관심의 초점을 둔다. 카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게 유지된 데에는, 18세기 말엽부터 점점 거스릴 수 없게 국외에서 밀려오는 구체적인 미래가 지도적인 독일인 대부분에게 가공할 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힘입은 바 있다. 프랑스 혁명이 그 영향력을 확산하고 뒤이어 사회적 격변을 가져오고 모든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새 사회 구조의 조짐들을 가져오는 동안, 독일은 혁명에 대하여 수동적이거나 수세적이거나 무반응의 태도만을 보여 주었다. 혁명을 적대시한 것은 위협을 당한 수구 세력만이 아니었다. 보다 젋은 지식인의 운동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괴테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587)


19 라 몰 후작댁 1 ─스탕달의 비극적 리얼리즘


"스탕달의 리얼리스틱한 문학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세계에서의 그의 편편치 못함, 자기가 그 세계에 소속해 있지 않으며 그 속에 자기 자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나왔다. 주어진 세계 속에서의 편편치 못함,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는 무력은 확실히 루소 류의 낭만주의의 특색이다. 스탕달은 '폭풍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또 자기 배를 위한 적절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기 설명의 지점, 리얼리스틱한 문학의 지점에 도달하였다. 지쳐 빠졌거나 낙심해 있는 것은 아니나 젊은 날의 성공적인 이력이 이제 먼 옛일이 되어 버린 가난하고 외로운 40의 사나이로 자기가 아무 데도 소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사회 현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 그때까지는 별 고통 없이 자랑스럽게 지녀 왔던 느낌이 이제 그의 의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고 마침내는 그의 문학 활동의 되풀이되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605)


"그러나 루소와는 달리 스탕달은 실제적인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삶의 관능적 향락을 열망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또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을 전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정복하려고 하였고 처음엔 이에 성공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성공과 향락이 그의 소망이었다." "스탕달의 관심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관심은 있을 수 있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상적으로 주어진 사회 속의 변화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시간적 원근법은 그가 시야에서 잃어버린 일이 없는 요소이며 삶의 형태와 양식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은 그의 사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건의 세계를 포착하고 그것을 내적 연관과 함께 묘사하려는 스탕달의 태도에는 역사주의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주의는 당시에 벌써 프랑스로 침투해 갔으나 스탕달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605-8)


"우리는 그에게서 합리주의적 경험적 관능적 모티프를 보지만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의 모티프는 거의 볼 수 없다. 절대주의, 종교, 교회, 신분의 특권을 그는 여느 계몽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미신, 속임수, 그리고 책략 등이 얽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체로 교묘하게 꾸며진 음모가 정열과 함께 그의 작품 구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 있는 역사의 동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정치적 관점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정치적 관점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낭만주의적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샤토브리앙 같은 작가들의 과장된 양식에 그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한편 그의 정치관에 따르면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사회 계급조차도 극히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낭만주의가 민중이란 말에 첨가해 놓은 감정적 가치를 추호도 섞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의 '공화주의적 미덕'에는 몸서리를 친다."(609)


"루소의 사상과 이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는 현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성공적인 저항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 버린 새 세계에서 편편치 못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가장 강렬하게 루소에게 매혹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세계에 반대하고 나서거나 외면하거나 하였다. 그들은 루소에게서 내부의 분열, 사회에서 도망치려는 경향, 물러나서 혼자 있으려는 요구를 물려받았다. 루소의 다른 측면, 즉 혁명적 전투적 측면을 그들은 잃어버렸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지적 생활의 통일과 문학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파괴하였던 외적 상황도 이러한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기까지의 시기에 나온 중요한 문학 작품 가운데서 당대 현실에서 도망하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다." "루소주의 운동이 겪은 엄청난 환멸로 인해, 이제 역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포착되지도 않은 18세기 류의 삶의 묘사는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613-4)


20 라 몰 후작댁 2 ─두 개의 리얼리즘


"발자크는 스탕달처럼 그의 이야기의 인간들을 정확하게 규정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 정립할 뿐만 아니라 이 연계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게는 모든 환경은 정신적 물리적 분위기가 되어 풍경과 주거 그리고 가구, 연장, 의복, 체격, 성격, 생활 주변, 생각, 활동, 운명에 삼투해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일반적인 역사의 상황은 여러 다른 환경들을 감싸는 대기가 된다(발자크의 분위기의 리얼리즘). 그가 이러한 묘사의 솜씨를 가장 능숙하게 또 진실되게 발휘한 것은 파리의 중간 또는 하류의 부르주아지나 지방의 사회를 묘사할 때였다. 그런 데 대하여 상류 사회의 묘사는 흔히 멜로 드라마적이고 사실에 어긋나고 또 작자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희극적인 것이었다. 다른 데에 멜로 드라마의 억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중간이나 하류층을 그릴 때에는 이것이 전체적인 진실을 손상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발자크는 상류 사회의 분위기 또 지성 사회의 분위기를 진실되게 그리지는 못했다."(620)


"스탕달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시대에 대항하며 생각하고 느낀다. 그들은 경멸을 가지고 나폴레옹 이후 시대의 권모술수의 세계에 내려간다. 구식의 관점으로 보면 희극적인 특성을 지닌 요소들이 언제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스탕달이 비극적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의 독자에게 그러한 공감을 요구하는 인물은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과 정열을 지닌 진짜 영웅이어야 했다." "발자크는 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시대의 제약적인 조건 속으로 보다 깊이 뛰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발달하게 된바, 현대의 현실을 객관적인 심각성을 가지고 대하는 관점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무것이나 얼크러진 사건이면 비극이고 또 아무 충동이나 위대한 정열이라고 허세적으로 마구 덤비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생 도처에 악마적인 세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언어 표현을 멜로 드라마로 과장하는 것은 발자크의 격정적이고 비판할 줄 모르는 기질과도 맞고 낭만주의적인 인생 태도와도 맞는 것이었다."(631)


"플로베르의 서술법을 스탕달과 발자크의 서술법과 비교해 보면, 서론적으로 현대 리얼리즘의 두 특징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스탕달과 발자크에서 우리는 작자가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끊임없이 듣는다. 때로 발자크는 그의 이야기에 계속적인 감정적, 풍자적, 윤리적, 역사적, 경제적 주석을 붙인다. 또 흔히 우리는 등장인물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듣게 되고 이런 경우 작자는 인물 자체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두 가지 면은 플로베르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플로베르에게 작자의 기능은 사건을 고르고 이것을 언어로 옮기는 일에 한정된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든지 순정하고 완전하게 표현되기만 하면, 거기에 붙여지는 어떠한 의견이나 판단보다도 사건과 거기에 관련된 인물을 보다 훌륭하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 책임과 솔직과 주의를 가지고 사용한 언어가 진실을 나타낸다는 깊은 믿음 위에 플로베르의 전 예술이 기초해 있다."(636-7)


"이렇게 하여 소재는 완전히 작자를 사로잡는다. 작자는 몰아 상태가 되어 그의 마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작용을 할 뿐이다. 가열한 참을성으로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면 그때그때의 소재를 작자는 완전하게 흡수하게 되고 여기에 따라 그것을 저울질하는 완전한 표현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소재는 마치 하느님이 내려다 보듯이, 그 참다운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된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소재나 본질적으로 심각한 면과 희극적인 면, 위엄과 저속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재현한다면 그것에 알맞는 스타일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다. 소재를 그 위엄의 정도에 따라서 구분하는 '스타일의 높이'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도 필요 없고 바른 이해와 정확한 분류를 위한 사후적 분석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 소재 자체를 묘사하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이 연유되어 나올 수 있다─플로베르의 생각은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637-8)


"플로베르의 스타일은 간단히 '객관적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심각성은 인간 생활의 격정과 얼크러짐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감동하지 않고 또는 감동한다는 표시를 드러내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한다." "삶은 밀어 올라오고 부글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느리게 흐르는 것이다. 당대의 평범한 삶의 핵심은 플로베르에게 질풍노도의 행동과 격정,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과 세력, 이런 것에 있지 않고 거죽은 공허한 일상번사지만 밑에는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전반적이고 만성적인 상태 속에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표토는 비교적 안정된 것 같으면서 실상은 터질 것 같은 긴장으로 차 있다. 사건들은 거의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플로베르가 그려 내는 개인적 사건과 시대 전체의 모습의 구체적인 결에는 무엇인가 숨은 위협이 드러난다. 시대에는 폭탄 장치처럼 어리석은 밀폐가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642-3)


21 제르미니 라세르퇴 1 ─없는 사람들과 심미주의


"19세기의 최초의 위대한 리얼리스트들, 스탕달과 발자크 그리고 플로베르에게서조차 하층 계급, 즉 본래의 민중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터전 위에서나 그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포착되지 않고 위쪽에서 바라본 대로 그려져 있다. 플로베르에게 있어서조차도 민중은 대체로 하인이나 배경 인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탕달과 발자크가 도입한 리얼리즘의 스타일의 혼합은 제4계급 앞에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은 당대 문명의 현실 전체를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시민 계급이 지배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대중들도 그들 자신의 힘과 기능을 더욱 의식하게 됨에 따라서 위협적으로 밀고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하층 계급 사람들은 진지한 리얼리즘의 주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쿠르 형제의 말은 옳았고 그들의 정당성은 증명되었다."(650)


# 공쿠르 형제 에드몽과 줄르는 1864년에 간행한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퇴」 서문에서, 문학의 대상이 되기에 너무나 저속한 불행의 형태는 없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제4계급 권리의 최초의 옹호자들은 거의 모두가 제4계급 사람이 아니고 시민 계급에 속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4계급에게 연결해 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소설은 거의 모두 그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했다. 이들 소설 속에는 하층 계급의 환경뿐 아니라 상류 시민 계급, 대도시의 암흑가, 갖가지 예술인 집단의 환경도 등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이든 간에 취급된 주제는 언제나 기이하고 예외적인 것이며 병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여행, 당대의 예술가, 18세기의 여성과 미술, 일본 예술 등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인상 특히 기이함이나 신기함을 위해 가치 있는 감각의 인상을 수집하고 묘사하였다. 그들은 흔하디 흔한 것에 식상한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미적 경험, 특히 병적인 미적 경험을 발견하고 재발견하는 직업인이었다. 하층 계급이 문학의 주제로서 그들의 흥미를 끈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였다."(650-1)


"이제 당대의 실제적인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도덕적, 정치적, 그렇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향을 회피하며, 유일한 의무라고는 문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문학관, 문학 이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학관이나 문학 이상은 취급된 주제가 감각적 생기를 띠고 뚜렷한 특성을 보여 주는 새롭고 낡아 빠지지 않은 형태 속에 나타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태도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 즉 완벽하고 독창적인 표현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며 상충되는 철학이나 이론의 충돌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신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 일반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들은 숭배의 대상, 거의 종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본래 표현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이었던 쾌락은 너무나 높은 지위를 떠맡게 되어 쾌락(delectation)이란 말(아주 하찮고 쉽게 이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은 이제 충분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658)


"물론 처음부터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미적 향락을 위해서 인상과 그 예술적 재구성에 완전히 몰두하는 파괴적인 자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단계가 있지만 이런 태도는 19세기 후반기에 계속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당대의 문명과 당대의 사회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는 속절없는 무력감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로 하여금 당대한 문제를 외면하도록 강력히 작용하였다." "본능적인 혐오와 불가피한 밀착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있으나 동시에 의견의 영역, 가능한 주제 선택, 생활과 표현의 형태 면에서 개인의 특이성을 발전시키는 일 등에 있어서는 거의 무질서한 자유를 누리면서 오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의 수요가 많고 또 벌이가 좋은 대중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작가들은 순수 미학의 영역에서 고집불통의 독불장군이 되거나 혹은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실제로 개입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659)


22 제르미니 라세르퇴 2 ─졸라와 그의 동시대인들


"에밀 졸라는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어깨를 밟고 서 있으며 그들과 공통점이 많다. 그도 또한 신경쇠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심미적 리얼리스트의 무리 가운데서 뚜렷하게 달라 보인다." "졸라 예술을 혐오스럽고 누추하고 외설스럽다고 하면서 몹시 분격하였던 그의 적수들 가운데엔 전 시대의 가장 거칠고 상스러운 형태의 그로테스크하며 희극적인 리얼리즘조차를 태연히 때로는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았다. 그들을 그토록 분격시켰던 것은 졸라가 자기 예술을 '저속한 스타일'의 것이기는커녕 희극적인 것으로도 내세우지를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적었던 모든 글줄은 모든 것이 가장 진지하고 또 도덕적으로 의도되었음을 나타내었다. 그의 글의 총계(總計)는 오락이나 예술적 실내 유희가 아니라 졸라가 본 대로의 그리고 독자들이 작품 속에 보도록 촉구된 당대 사회의 참다운 초상이었다."(662, 665-6)


"거칠고 참담한 쾌락, 이른 나이의 타락과 급속히 닳아 없어지는 육체, 방탕한 성생활, 성교가 돈이 안 드는 유일한 낙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생활 조건에 비해 너무 높은 출산율, 이러한 모든 것의 배후에서 적어도 가장 정력적이고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하려는 혁명적인 적개심, 이러한 것이 소설 「제르미날」(1888)의 주제이다. 이들은 서슴없이 감각적인 말로 번역이 되었고 가장 뚜렷한 말이나 가장 추악한 장면 앞에서도 주저할 줄 모른다. 이 스타일의 기술은 인습적인 의미로서의 즐겁게 하는 효과를 낳을 것을 전적으로 포기하였다. 반대로 그것은 불쾌하고 답답하고 볼품없는 진실에 봉사한다. 그러나 이 진실은 동시에 사회 개혁을 위한 행동에의 소환장이기도 하다." "졸라는 스타일의 혼합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앞 세대의 순수하게 심미적인 리얼리즘을 넘어섰다. 그는 시대의 대문제(大問題)를 재료로 작품을 창조하였던 극소수의 19세기 작가의 한 사람이다."(667-8)


"러시아인들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진지하게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저속한' 것이란 문학상의 범주를 진지한 문학적 취급에서 제외해 버리는 고전주의 미학은 러시아에서 단단히 뿌리박지도 못했던 것 같다. 또 러시아 리얼리즘이 19세기에야 그것도 19세기 후반기에야 비로소 본때를 보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사회적 지위나 계급과 관계없이 모든 개개 인간이 신(神)의 창조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기독교적이며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근대 서양의 리얼리즘보다는 고대 기독교의 리얼리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및 지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활동적이고 개명(開明)된 시민 계급은 러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시민 계급은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속에서조차 발견할 수 없다."(678-9)


"이 크나큰 민족의 집안에서 19세기 동안 줄곧 가장 강력한 성질의 내면 운동이 크게 퍼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산출된 문학 작품을 보면 틀림없이 확인된다." "러시아 리얼리즘 속에 드러나 있는 내면 운동의 본질적인 특징은 묘사된 작중 인물들의 절대적이며 무한하고 격정적인 경험의 강렬성이다. 그것이 서구 독자들이 받는 가장 강력한 인상인데 누구보다도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 그렇지만 톨스토이나 기타 작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인들은 19세기의 서구 문명에서는 희귀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경험의 직접성을 유지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실제적, 윤리적, 혹은 지적인 충격은 즉각 그들의 본능의 깊은 부분에서 그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조용하고 거의 식물적인 존재로부터 실제적인 혹은 정상적인 문제에서 무시무시한 극단으로 옮아간다. 그들의 활력, 행동, 사고, 감정의 그네추는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폭넓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680-1)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심하지만 다른 작가에서도 발견되는 사랑에서 미움, 다소곳한 헌신에서 짐승스러운 잔학성, 진리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쾌락에 대한 가장 속된 욕정, 경건한 순진성에서 잔인한 시니시즘에로의 변화에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요소가 있다. 이러한 변화가 흔히 동일 인물 속에서 과도기도 없이 어마어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진동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인물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의 말과 행위는 과학적 초월, 형태 감각, 예의 범절에 대한 경의 때문에 서구 제국의 작가들이 가차 없이 표현할 수가 없었던 종류의 혼돈스러운 본능의 심층을 드러내 보여 준다.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중구(中歐) 및 서구(西歐)에서 알려지게 되었을 때, 놀란 독자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어마어마한 정신의 잠재 가능성과 표현의 직접성은 리얼리즘과 비극의 혼합이 마침내 그 진정한 완성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681)


23 갈색 스타킹─새로운 리얼리즘과 현대 사회


# 새로운 리얼리즘의 특징 : 의식의 다인적(多人的) 묘사, 시간층의 개념, 외부적 사건의 비연속성, 관점의 이동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를 향하여」(1927)에는 몇 개의 중요한 스타일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화자라는 자격의 저자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거의 모든 진술은,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의 과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램지 일가의 여름 별장이나 스위스인 하녀의 경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작가적 상상력의 대상인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소설의 등장인물 램지 부인이, 어떤 특정한 순간, 사람, 물건 또는 상황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 또는 느끼게 된 것의 묘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가 램지 부인의 인물됨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전연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소설 가운데 나오는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그 여자의 인상과, 그들에게 끼치는 그 여자의 영향을 통하여서만 얻어진다."(699)


"한 방울의 눈물에 대하여, 어떤 가정들을 설정하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존재들,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추측하는 인간들, 그리고 뱅크스 씨 등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의 현실 말고도 또다른 객관적 현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우리는 거기에서 받게 된다. 그런 객관적 현실에 대한 표시는, 기껏, 어떤 행위의 외부적 틀에 대한 짤막한 언급, 즉 〈램지 부인은 눈을 들면서 말했다〉 라든가, 〈언젠가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뱅크스 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1부 5장의) 마지막 문단에 이르면, 우리는 저자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중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이 그 여자의 상황 그리고 그 여자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가질 법한 그런 의심증과 궁금증 같은 것을 가지고 램지 부인을 관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699-700)


"프루스트는 객관성을 목표로 하며,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써, 그는 그 자신의 의식을 길잡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은 특별한 종류의 의식이다. 그것은 아무 때나 움직이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을 기억할 때 작용하는 그런 의식만을 가리킨다. 그것은 과거의 현실들을 모두 살아나게 하는 힘을 가진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그러한 현실들의 현장이었던 과거에 그것이 처해 있던 상태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으며 이 새로운 상황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면서 새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이 의식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식과 현저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단히 과거의 일들을 서로 대면도 시키고, 또 그것들이 일어났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때의 한계 내에서 그것들이 가졌던 편협한 의미, 또는 그것들의 내부적 시간의 연속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710-1)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에서 외부적으로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 또는 큰 재난 같은 것은 마치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들인 것처럼, 인물들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자격이 없는 사실들인 것처럼 취급된 반면,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어떤 단편적 시간은 인간의 전 인생을 포용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펼쳐 보여 줄 능력을 가진 것으로, 즉 신용할 만한 정보의 출처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 즉 일상의 소재들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순에 따라, 외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든가 사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인생의 큰 전환점 같은 것에 큰 강조를 주며 충실하게 설명하려 드는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점은 일상이 소재의 통합적인 묘사의 표현력을, 외부적인 사건이나 사실 중심인 연대 순서 표시의 표현력보다 더 신용하고 있다는 말이다."(718-9)


"사실상 나의 이 저서도 이런 방법을 예증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다. 나는, 가령 유럽에 있어서의 사실주의 발달사 같은 것은 도저히 쓸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방대한 자료 속에서, 나는 이런저런 시대의 한계를 정하는 일, 또 그 각 시대에 이런저런 작가들을 배치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 등에 관한 끝없는 논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내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별도로 그런 문제를 다룬 자료들을 읽음으로써 급작스런 지식과 정보를 거두어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방법, 즉 오랜 시일을 두고 특별한 목적이 없이 발견해 낸 몇 개의 모티프로 하여금 나를 이끌게 하고, 이것들을 내가 평소에 자연스러운 연구 활동을 통하여 친숙히 알게 되고 의미 깊게 생각하게 된 원전(原典)과 배합시켜 보는 방법은 성공과 소득의 전망을 가진 것으로 나는 본다."(7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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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조건 - 근대 미학의 경계 근대 미학 3부작
오타베 다네히사 지음, 신나경 옮김 / 돌베개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서문


"근대 미학의 확립은, '예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창조', '독창성' 같은)의 확립을 수반하며, 이 개념들이 미학을 내부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미학으로 몰리게 한 동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제도로서 확립된 '미학'의 내부에서는 그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미학'의 외부에 있는 것이 '배경'(地)이 되어, '미학'이 '형상'(圖)으로서 성립하는 것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이 표제에 '조건' 내지 '경계'라는 말을 사용한 데는 그 내부와 외부, 혹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주제로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서는 다양한 '배경'이 미학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부각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면서 배경과 형상의 교차에 근거하여 미학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 혹은 다양한 문맥에 속하는 논의 가운데서 '하나의' 미학사를 읽어내려 하는 학문적 관심 그 자체를 반성하고, 제도로서의 '미학'을 내부로부터 외부로 개시하는 것, 이것을 목표로 한다."(5-6)


프롤로그 중심의 상실


"괴테는 『문학상의 상퀼로트주의』(1795)에서 '중심의 상실'을 언급한다." "괴테에 의하면, '고전적인 국민 작가'가 가능한 상황은 '자국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건과 그 결과'가 '훌륭하고 의미 깊은 통일'을 갖춘 경우이다. 그러나 당대의 독일에는 이런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사회적·문화적으로 하나로 결합하는 '보편적인 국민 문화'라는 '중심점'의 결여야말로, 현대에 이르러 고전성이 결여된 원인이다." "반反상퀼로티즘을 표방한 괴테는, 자신의 논의가 지닌 비정치성(이라는 정치성)을 관철하여, 18세기 후반의 독일 작가들이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학교'에서 '보편적인 국민 문화'가 성립되었다고 말한다. 즉, '고전적 작가'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점'은 독일 작가들이 '노력'한 결과로 이제야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테의 논의는, 미학 이론상으로도, 비정치적 정치성으로도 확실히 '고전주의'적이다. 그럼에도 괴테의 바로 이런 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낭만주의' 운동의 한 출발점이 된다."(21-3)


"이 역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인물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문학에 관한 대화』(1800)에서 루도비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신화를 획득하거나, 혹은 차라리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진지하게 협력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이전에 존재했던 신화의 부활 내지 복고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신화'를 의미한다. '오래된 신화'와 '새로운 신화'는 대조적인 방식으로 성립한다. '오래된 신화'는 〈감성적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것, 생동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형성〉된 자연적 신화이다. 그에 반해 '새로운 신화'는 〈정신의 가장 심원한 깊이에서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출처가 있다. 도대체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감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부로 회귀하는 교체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에 있다. 이 정신의 힘에 의해서만, '인류'는 〈자신의 잃어버렸던 중심점을 다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25)


"『아테네움』(1798) 제116단장斷章의 말을 상기해보자. 〈낭만적 문학은 어떤 실재적 관심에서도 관념적 관심에서도 자유로이, 시적 반성의 날개에 올라타고 양자의 중간에 떠다니며, 늘 이 반성을 거듭하여 무한한 계열의 거울과 같이 이 반성을 다수화한다.〉 이 반성의 과정 속에서만 '낭만적 문학'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낭만적 종류의 문학은 여전히 생성 중에 있다. 아니, 영원히 생성할 수 있을 뿐이므로 결코 완성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 고유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 문학'은 '발전적=전진적progressiv'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발전성 내지 전진성은 단순히 한 장르로서 '낭만주의' 문학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 일반의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문학은 낭만적이며 혹은 낭만적이어야 한다.〉" "슐레겔에서 '중심점'의 결여는 근대적 정신의 (편파적인) 관념성에서 유래한다. 이 관념적 원리의 편파성을 '정신의 본질'에 근거하여 전진적 내지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주의의 과제이다."(26-7)


"그리스·로마의 고전기를 이상으로 하는 '고전주의'도, 중세를 이상으로 하는 '낭만주의'도, 역사상의 어떤 과거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추구하여,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모방하여 현재 상태의 예술을 쇄신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그런 의미에서 양자 모두, 반동적인 동시에 혁신적이다)." "여기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전통'을 사후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창조적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동시에 '전통'이 그 자체로서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에 '중심'이 부재함을 인정하고 '전통'의 (새로운) 해석=구성이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전통'인가 '투기'인가 하는 양자택일 대신에 '전통'과 '투기'의 역설을 역설로서 긍정하고, '전통'과 '투기' 사이에 열려 있는 중심 없는 공간 속에 감히 머무르는 것이다."(33-7)


# 투기投企=계획에 대한 감각 : '투기=계획'이란 계속 생성하고 있는 실재적인 것의 관념적 싹이며, 이 싹은 '장래로부터의 단편'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은 '발전적=전진적'인 '방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제1장 소유


"고전주의적 이론에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이 있다. 그것은 규범이라 할 고대의 예술가를 모방하는 것이야말로, 후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에드워드 영은 '독창성'이라는 개념을 확산시킨 계기가 된 『독창적 작품에 대한 고찰』(1759)에서 이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고전주의적 이론에 의하면, 예술가가 의거해야 할 규범은 고대의 예술가 내부에 있다." "이러한 고전주의적 이론에 대하여 영은 오히려 타고난 것의 의의를 강조한다. 영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소유한 것'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 토지, 즉 타고난 능력이다.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은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소유한 것'을 '경작'하는 데서 멀어져, '학식'이라는 타자에게서 '차용해온 지식'에 만족하게 하는 결점이 있다. 이와 같이 영의 독창성 이론의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차용물─자기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대개념이다. '차용해온 지식'이란 바로 공유화된 그리스-라틴의 고전전 전통이다."(47-8)


"소유권과 예술의 관련성에 관한 유럽의 전통적 논의에서, 그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호라티우스의 『시학』이다. 그 한 구절은 18세기 중엽까지 효과를 유지했으며, 그것은 전통적 예술관에서 예술가 내지 작가가 하는 역할을 명백하게 진술한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항을 최초로 제시하기보다는,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편이 좋다. 공공적인 소재publica materies도 당신 자신의 것privati juris이 될 것이다.〉" "고대인의 '권위'에 따르는 한, 사람들은 '차용물의 풍부함' 내지 '수입품'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갈고 닦음으로써 스스로 작품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타고난 능력의 경작(즉 도야)이야말로 풍부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때 처음으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예술가야말로, '권위'authority에서 자기를 해방하고 작품을 스스로 창조하는 '작가'author가 된다."(43, 48-9)


"독창성의 이론은, 개인의 정신적 개체성·유일성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개인이 스스로 창출한 작품에 대하여 배타적 소유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독창성의 이론을 격렬하게 비판한 괴테는 각각의 예술가를 고립된 자로 바꾼 독창성 이론을 예술가의 집합성으로 대치한다. 본래, 만약 '내'가 '나 자신의 내부에서 획득'한 것만이 '나의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나'라고 믿어버린 것 가운데서, 과연 어느 정도가 정말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타자에게서 얻은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나 자신의 내부에서 얻은 것만을 '나'로 간주하는 일종의 순수주의도 하나의 방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타자에게서 얻은 것을 포함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항상 독창성에 관해 말하는데, 대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내가 위대한 선행자나 동시대인에게 빚진 것을 모두 병기한다면, 거기서부터 남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독창성 이념에 대한 비판은 전통의 복권과 결합한다."(67-8)


"독창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면, 독창적인 예술작품이란 그것은 창출한 독창적인 예술가의 배타적 점유물, 양도 불가능한 사유물이 아니라, 선행하는 예술가와 후속하는 예술가에게로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지적 소유권의 옹호자가 의도에 반해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약 티텔이 말했듯이 '정신적 소유권'이 〈영원히 나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으로 계속 존재하여, 결코 타자의 것으로는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본디 이러한 정신적 소유권은 '저작권' 등의 법제도를 통해서 옹호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라는 법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신적 소유권이 어떤 정신적 소산을 '창출한 개성적이며 정신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법제도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는 사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양도되지 않는 저자의 권리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작권법이 저자의 정신적 소유권을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다."(70-1)


"그러나 이상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독창적인 저자'라는 것이 정신적 소유권을 둘러싼 법제도가 만든 단순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독창적인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까닭은, 그것을 향수하고 해석하는 사람들─나아가서는 이 작품에 자극되어 창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위임되어 이른바 공공적인 것, 즉 공유물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유물은 '고대인의 모방'을 논하기 이전의 고전주의자들이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의 규범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어버린 사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작품의 공공성이란, 그 작품의 해석이라는 개별적인 작업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라서 단순히 '물품'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작품이 장수한다는 것은 그 예술작품이 매번 새로운 독창적 해석(혹은 창작)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변모하여 공유물이 되기 때문이다. 공유물은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71-2)


제2장 선입견


"애디슨은 '인위적 취미'artificial taste와 '자연적 취미'natural taste를 대비한다. 〈인간의 자연 본성은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 본성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든 경우, 모든 신분의 독자들에게 칭송될 것이다.〉" "'자연적 취미'에 기초하는 작품은 〈통상적인 일반적 감각[상식]을 가진 독자〉라면 '경우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누구라도 향수할 수 있다. 애디슨에 의하면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장엄한 단순함'으로 충만된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 가요 내지 민요' 또한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 "애디슨에 의하면, 고대에서 근대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간의 자연 본성은 기교나 고상함refinement 속으로 숨어, ······ 결국에는 예의 바름 속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그 원인은 '자연적 취미'에 기초한 작품을 '기교', '고상함', '예의 바름'이라는 근대의 인위적 이상으로 단죄하려 하는, 바로 근대인의 '선입견'에서 찾아야 한다."(79-80)


"데이비드 흄은 우선 취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입장─모든 종류의 미와 추에 관해 흔히 사람들의 감정은 매우 다르다는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덧붙인다. 물론, '작문'이나 '시'가 따라야 할 '취미'의 '기초'를 (마치 '기하학적 진리'와 같이) '선험적인 추론'으로써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취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취미의 '기초'는 우리의 '경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모든 나라에서 모든 시대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간주되어온 것[=이른바 고전적 문학작품]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시'가 따라야 할 '기술의 규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규칙의 보편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기술의 보편적 규칙 모두가 단지 경험에, 즉 인간의 자연 본성에 공통된 감정의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같이 흄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공통성이 있다는 데 의거하여, 취미의 기준이 갖는 보편성에 근거를 부여한다."(84)


"버크는 '감관'과 '상상력'에 관계하는 '취미'를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다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수한 의미에서 취미라고 불리는 것'(즉 '판단력'이 관여하는 '취미')은 비자연주의적인 것이라고 논의를 전개한다." "버크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의 지각가능한 성질'이나 (회화 속에) '정념'의 '묘사'를 지각하는 한에서, 그 쾌는 단지 '감관'과 '상상력'에 의거할 뿐이다. 그러한 한에서 우리의 '취미'는 '자연 본성적'으로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수많은 예술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것은 단지 '지각 가능한 대상'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며, 사람들이 엮어 넣은 '도덕'적 세계이다.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 '감관'과 '상상력'을 초월한 '판단력'이다. 또한 '판단력'에 의한 판정은 판단력의 자연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반복된 훈련'을 통한 '이성적 추론의 습관'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버크는 이와 같은 훈련을 통한 '보다 세련된 판단력'이야말로 바로 '탁월한 의미에서 취미라 불리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91-2)


"버크는 취미가 '감관', '상상력', '판단력'이라는 삼자의 복합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취미의 '토대'가 '감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함으로써 취미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한다." "애디슨, 흄, 버크의 이론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18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친 '취미론'은 자연주의적 취미론의 아포리아와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소한다. 자연주의적 취미론을 지탱하는 것은, '개별'에는 '보편'이 자연 본성적으로 내재한다는 확신이며,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개별'과 '보편'이 무매개적=직접적으로 결부된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취미론은 동시에,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선입견'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입견'이란 '개별'과 '보편'의 중간에서, 문화적, 역사적으로 상대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취한다. 자연주의적 취미론은, 이러한 '특수'한 차원에 위치한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스스로의 근본적 전제 때문에 그것을 굳이 무시한다. 여기에 자연주의적 취미론의 아포리아가 있다."(93-4)


"레이놀즈는 『회화에 대한 강연』(1769~1790)의 제7강연에서 회화의 본질에 관계하는 '긍정적이며 실체적인 미'와, 회화의 비본질적인 측면에 관계하는 '장식'을 구별한다." "레이놀즈에 의하면 '장식'은 확실히 '일반적 원칙'에 기초하는 '긍정적이며 실체적인 미'에 비하면 비본질적이며 부차적인 '지위'를 점할 뿐이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장식'을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장식을 무시해야 한다고 하는 엄숙주의rigorism는 '자연과 이성'에, 즉 인간이 단지 원칙에 근거하는 이성적 존재일 뿐 아니라, 감성적 측면과도 결부된 존재라는 인간의 자연 본성에 위배된다. 레이놀즈는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완벽한 취미'를 '형성'하려면 '두 번째 종류의 진리'에 근거한 '장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논한다. 또한 그는 이 '두 번째의 진리'에 근거한 '장식'에서 '국민적 취미'를 변별하는 특징을 추구한다. 이제 '지역적'인 특징은 단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되어야 할 것으로 다시 파악된다."(99-100)


"즉 예술은 (반 다이크 초상화의) '의복'에 보이는 바와 같이 항상 '가변적 원리'와 관계하는 측면, 즉 '장식'적 측면도 가진다. 18세기 잉글랜드의 조상이나 초상화에 그리스·로마풍의 의복이나 17세기 전반에 반 다이크가 그렸던 의복을 걸친다고 하는 사태는 '선입견', '통념'에 근거한 '두 번째 종류의 진리'에 관계하므로 '자의적'이며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의 측면은 이미 사실상 '권위'가 됨으로써 '진리로서 기능'하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권위'가 타당하다는 것은 일정한' 선입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구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국민'(특히 그 엘리트층)─에게 한정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상상력'에서는, '선입견'에 근거하는 '습관'에는 본래의 '자의적'이며 '자연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것을 '자연적인' 것─즉 '제2의 자연'─으로 전환하는 힘이 있다. 여기서 '국민적 취미'가 성립하게 된다."(103-4)


제3장 국가


"루소의 사회계약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계약자의 특수한 인격을 대신하여, 하나의 정신적 집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개인이 일반의지 아래 일치하여 사회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이미 '사회적 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 '사회적 정신'이란 '사회계약'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할 것이다. 즉, 두 번째 문제는 원인이 소산(결과)을 전제로 하는 순환이다. 이 순환을 두고 루소가 제기하는 해결책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 루소는 〈입법자는 ······ 논증하지 않더라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종교적]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라고 언급하며, '종교'의 권위에 호소한다. 두 번째로 루소는 〈이 지상에는 광채를 발하면서도 법률에 견디지 못했던 국민들이 많다. ······ 개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국민도 또한 그 청년기에만 순종적이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교정하기 힘들어진다. 일단 관습이 확립되고 선입견이 뿌리를 내리면, 그들을 개혁하려는 것은 위험하며 무익한 시도가 된다〉라고 주장한다."(120-1)


"'학문'과 '예술'이 사치나 허영심을 초래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추락시킨다고 비판한 것은 루소의 『학문예술론』이다. 칸트 역시 그러한 '해악'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학문'과 '예술'(혹은 '취미')을 단지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거기에 작용하는 '자연의 목적'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예술'과 '학문'이 그 '해악'을 통해서 인간이 도덕성을 지니도록 '준비'하게 한다는 목적론적인 사태이다. 『인간론』의 말을 빌리자면, '취미'란 〈인간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형성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러나 사회적 상황에서 타자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한다.〉 『판단력 비판』 제83절에서, '예술'과 '학문'은 그것이 〈의지를 욕망의 폭군적인 지배력에서 해방한다〉라는 점에서 〈훈련(규율)에 의한 도야陶冶[문화]〉라고 말한다." "이처럼 칸트의 역사철학은 '문화'라는 시점에서 '취미' 내지는 '미적 판단'(이라는 '반성적 판단력'의 작용)을 그 구성에 포함한다."(127-8)


"'국가의 창설'도 '국가 연맹'의 확립도 다같이 '자연의 기계적 과정'에 속한다고 간주하여 루소의 '순환'을 부정하는 칸트와는 달리, 실러는 오히려 이 '순환'을 계승하여 미학적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실러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개개의 부분(즉 구성원)이 각각 자립적 전체성을 유지하면서 협동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그에 반해 근대의 국가는 개개의 구성원이 전체성을 상실하여 단순한 단편이 되고, 그것에 대응하여 전체로서 국가도 또한 유기성을 잃고 부분들의 기계적 결합이 된다." "'유기적 생명'을 갖지 않고 기계적 편제를 취하는 근대 국가에서, 근대적 인간은 전체에서 분리된 개인=고독한 인간이고 또한 이 고독한 개인은 자기의 전체적 조화를 결여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해서 근대 국가는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과 구별되어, 개개의 구성원을 외적으로 지배하는 '추상적 존재'가 된다. 이렇게 부분과 전체가 서로 '소원'해지고 개인의 '도덕'과 국가의 '법'이 분리된다."(132-4)


"실러는 근대적 국가관과 대조적으로 국가이론의 내부에 '기계적-유기적'이라는 대개념對槪念을 도입한다." "〈국가가 개인들의 내면에 자기를 주장하는 방식은, (1)순수한 인간이 경험적 인간을 억압하여, 국가가 개인들을 지양할 것인가, 혹은 (2)개인이 국가가 되어, 시간 속의 인간이 이념 속의 인간으로 자신을 고귀하게 할 것인가이다.〉" "(1)과 (2) 둘 다 '이성의 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라는 점에는 공통한다. 그러나 (1)이 단지 인간의 이성적 조건만을 고려한 데 반해, (2)는 인간의 감성적 조건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 (1)에서는 인간의 감성적 측면이 이성적 측면에 억압되고, 그것과 대응하여 개인이 국가에 억압된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2)에서는 인간의 감성적 다양성이 그 다양성을 유지한 채로 이성적 통일성과 조화하고, 그것과 대응하여 개개인은 자기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 국가 속에서 자신을 체현한다. 여기에 실러가 추구하는 유기적인 이상 국가가 성립한다."(135-7)


"프랑스혁명 시대에 실러는 〈내적 인간에게서 분열이 다시 지양되기까지는 어떠한 국가 변혁의 시도도 시기상조이다 ······ 라고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프랑스혁명 이후의 시대로 시선을 돌린다. 실러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정치상의 모든 개선은 [개인의] 성격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서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조야한 국가체제의 영향 아래서는 성격이 고귀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격의 고귀화라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국가가 부여한 적이 없는 도구를 찾아내야 한다.〉 도대체 이 '국가가 부여한 적이 없는 도구'란 무엇인가? 실러는 '이 도구야말로 예술'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실러와 칸트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연적'인 것이 도덕성의 실현을 외적으로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칸트에 반해, 실러는 '자연적'인 것은 〈사회의 유지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라고 주장하고, 루소의 '순환'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미적 교육'에 의해서 해소하고자 한다."(140-2)


"감성적 욕구란 완전히 사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사람들을 통합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반면, 이성적·정신적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사람들을 통합하는 원리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을 처음부터 배제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개인들은 이성적 원리에 의한 통합에 관여할 수 없으며, 그 통합은 추상성을 피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인간의 감성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의 조화를 초월론적 조건으로 하는 미의 향수에서는, 감성적 욕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성적 원리에 기초하는 단순한 부류도 아니며, 개체적인 동시에 유적 존재, 즉 전체성을 담당한 개인이다. 그리고 미를 향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야말로 개개인의 다양한 독자성을 억압하지 않는 관계, '평등의 이상'이 성립한다. 실러는 취미를 통해서 자기의 개인적 감정을 보편적으로 서로 전달하는 사람들의 집합을 '미적 국가' 내지는 '미적 가상의 국가'라고 부른다."(149)


인테르메초 중심의 편재


# 인테르메초 :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대응하여 막간에 배치한 극을 지칭하며, 저자가 '중간 고찰'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노발리스는 『잡록집』 제122단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온건한 정치 형태[즉 군주제와 민주제라는 양극의 중간에 위치하는 절충적 국가체제]는 반은 국가이고 반은 자연 상태이며, 인위적이고 지극히 부서지기 쉬운 기계Maschine〉이다. '기계'로서의 국가,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이기적 욕구를 국가의 원리로써 조정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원칙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과제이다. '조야한 이기심'은 '전혀 헤아릴 수 없이 반反체계적'이며 '결코 제약되지 않는' 것이지만, '국가 체계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이기심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기계가 살아 있는 자율적 존재로 전환한다면, 큰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민주제의] 자연적 자의恣意와 [군주제의] 인위적 강제는 정신의 내부에서 해소될 때 서로 침투한다. 정신은 양자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정신은 항상 시적이다. 시적 국가야말로 진실로 완전한 국가이다.〉 여기서는 '기계'로서의 국가에서 '정신'으로서의 국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160-1)


"『잡록집』 제122단장에서 보이는 '기계'와 '정신'의 대립은 『신앙과 사랑』에서 다시 '문자'와 '정신'의 대립으로도 묘사된다." "노발리스는 단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전도된' 것으로서 부정하면서, 국가의 근저에 존재하는 '헌법', '법률'이라는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인격 속에 구현될 필요성이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추상적인 것과 그 구체적 상像과의 관계를 '이념'과 '상징'의 관계와 비교한다. 즉 노발리스에 의하면, 법률이라는, 그 자체로서는 완전히 추상물인 것을 구현한 (허구의) 국왕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법률에 대한 애착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애착의 대상이 되는 국왕은 '상징'으로서 '신비한 군주'(이성적 국가 체제)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제 〈통치자는 무한하게 다양한 연극을 상영한다. 그곳에서는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된다.〉 국민은 정치적 통치가 구체적으로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치자와 일체화하면서 이 정치적 통치에 참가한다."(162, 166-7)


"〈단지 몰沒정신적인 사람만이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의 제한이나 제약으로 인해) 부담이나 억제를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제한과 제약'이란,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의 피제약성(구체적으로는 실제의 국왕이 가지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얼핏 보면, '상징'으로서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중요한 듯이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 단장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상징'에 '자극'되어 '신비적 군주'를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여기서는 '정신'으로 불린다. 거꾸로 '정신'이 결여된 사람은 '상징'을 '상징'으로서, 즉 어떤 '이념'을 가리키는 '허구'로서 파악할 수 없고, 오히려 현실의 군주가 가진 피제약성에 의해서 억압당한다. 이와 같이 노발리스는 한편으로는 '상징' 군주제가 억압적으로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극'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힘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단장 모음집 『신앙과 사랑』을 '수수께끼 언어' 속에 엮어 쓰는 것이다."(168)


"노발리스는 어떻게 이와 같은 '상징' 이론에 도달했을까? 이 의문에 답할 열쇠가 『잡록집』 제73단장 속에 있다. 〈진정한 종교성에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신과 연결하는 매개항[=중간항]Mittelglied이다. 인간은 직접적[=비매개적]으로는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노발리스는 먼저 종교의 본질적 구조로서 '인간-매개자-신'이라는 삼자관계를 제기한다." "노발리스에 의하면,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자로서 선택되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선택들이 얼마나 서로 상대적인가? 사람들은 즉각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종교의 본질은 매개자의 성상性狀에 의존하지 않고 매개자에 관한 견해 속에, 매개자에 대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이념에 도달할 것이다.〉 즉 종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 어느 대상을 매개자로서 파악함으로써 신과 관계하는 것이며,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개자로 간주된 대상 그 자체의 특질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168-70)


"『잡록집』 제73단장의 종교론을 정치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는 '국민-매개자-국가'라는 삼자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어서, 매개자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과 국가의 직접적 관계를 주장하는 입장도, 매개자를 그대로 국가와 등치하는 입장도 동시에 부정된다고." "그렇다면 정치에서 무엇이 '매개자'가 될 수 있을까? 『신앙과 사랑』의 단장 18에서 노발리스는 〈모든 인간은 왕좌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sollen〉라고 말한다. 노발리스에 의하면 단지 한 사람의 군주만이 '국가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국가의 매개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일신론과 정치적 범신론의 결합이 의미하는 바다. 확실히 군주가 국가의 '중심점'Mittelpunkt을 이루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들도 또한 '중심점'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위치해야 한다. 세계는 '일자'一者에서 유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개체 속에 '일자'가 내재하며, 세계는 모든 곳에서 유출한다. 중심점은 편재하는 것이다."(173-5)


제4장 방위


"에티엔 콩디야크는 『인간 인식 기원론』 제2부 제1장 '언어의 기원과 진보에 관하여'에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라는 역사적 전개과정을 상정하고 이 역사적 과정을 두 시점으로 파악했다. 즉, 한쪽은 언어의 음악성과 생동성이라는 관점인데, 그것에 입각할 때 고대 언어 즉 동방 내지는 남방의 언어야말로 그 이상을 체현한 것이 되고, 북방의 언어는 쇠퇴 내지는 퇴락으로 간주된다. 다른 시점은, 언어의 정확성이라는 시점인데 그것에 입각할 때 북방의 언어인 근대 프랑스어야말로 그 이상을 체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콩디야크는 이중적 사고에 의해 이른바 신구논쟁에 관하여 일방적으로 고대인파 또는 근대인파의 입장에 서지 않고, 북방적 근대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북방적 근대는 인간에게서 상상력의 의의를 무시하고, 인간을 분석력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의 새로운 종합이 요구되며,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어이다."(195-6)


"헤르더는 『셰익스피어론』(1773)에서 '그리스'와 '북방'(즉 잉글랜드)을 대비적으로 파악한다. 양자는 지리적 대립인 동시에 역사적 대립이기도 하다. 그가 이러한 대립을 제기한 까닭은, 그동안 사람들이 이 대립을 자각하지 못하여 '고전적' 척도로 셰익스피어를 읽고서 〈셰익스피어가 소코플레스, 에우리피데스, 코르네유, 볼테르와 같은 고전적인 비극시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미(美點)를 규칙 위반과 비교하는〉 것으로 셰익스피어를 '옹호'할 것인가 하는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택일 상황에 있는 한,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시점을 바꾸어', 셰익스피어를 고전적 연극과 다른 척도에 입각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그랬듯 남방적 원리에 기초해서 셰익스피어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북방적 원리에 기초하여 〈셰익스피어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감수感受하는〉 것이 필요하다."(210)


"남방과 북방의 관계에 새로운 이론을 제기한 이들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초기 낭만주의자들이다. '남방 문학'과 '북방 문학'이라는 대개념을 제기한 슈타엘 부인은 〈우울, 즉 천재의 작품에 풍부하게 보이는 이 감정은, 거의 가 북방의 풍토에만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 우울한 시는 철학에 가장 적합한 시이다〉라고 썼다." "콩디야크도 북방을 철학적이라고 간주했는데, 그것은 철학이 분석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적 기질을 '우울' 기질에서 찾는 슈타엘 부인에게서 북방은 철학과 결부되기는 하나 그 경우 철학은 보다 내성적이고 냉정한 분석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념의 강한 작용을 전제로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람들은 북방보다 남방 쪽이 정념이 격렬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는 오류로 느껴진다〉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념이란 신체적으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 정신적 정념이며, 그것은 북방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215-7)


"A. W. 슐레겔이 보기에, 고전적 예술에서는 감성적 현상이 그 자체로 긍정된다. 고전적 예술은 '감성적인' 혹은 유한한 세계에서 인간의 '자연적 조화'가 표현된 것이란 점에서 완성의 범위에 도달해 있고, 고전적 인간은 이와 같은 예술에 의해 표현되는 감성적 세계를 초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전적 시는 고전적 인간이 스스로 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소유'했던 조화로운 세계를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바로 '소유의 시'이다. 그러나 근대정신은 감성적 세계에서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그리스적 이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적 분열'을, 또 감성적 세계에서 현상하는 법이 없는 '무한한 것'을 의식한다." "즉 이러한 분열을 전제로 정신적 세계와 감성적 세계 사이에 고차적인 유화를 초래하려는 것에 근대 예술의 특질이 있다. 이 때문에 근대의 시는 '동경의 시'가 된다. 슐레겔이 고대의 '고전적' 예술과 대비해서 '낭만적'이라고 특징지은 것은 이와 같은 근대의 예술이다."(220-1)


# 유화宥和 : 상대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냄


"그렇지만 낭만적 예술은 서로 배타적이라는 의미에서 고전적 예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예술이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대립 및 유화 속에 성립한다는 것은, 유한한 것의 표현으로서 고전적 측면을 내부에 포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인 것은 고전적인 것처럼 〈이종異種의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종적인 것'의 '뒤섞임'을 추구한다. 이것은 슐레겔에 의하면 원래 '낭만적'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간취할 수 있다. 〈이 낭만적이라는 말은 로망스romance, 즉 라틴어와 옛 독일어 방언들이 뒤섞임으로써 성립된 민중어들을 나타내는 명칭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마치 근대의 교양이 북방에서 유래한 것과 고대의 단편이라는 이질적인 구성요소가 융합되어 성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해, 고대인의 교양은 훨씬 단일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적 정신은 원래 상이한 요소로 이루어진 혼성물이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낭만적 예술이다."(222)


"예전에 '북방'은 '고전주의'라는 이름 아래, 남방 예술의 '이식'을 도모하고, 자신을 무리하게 남방의 '식민지'로 변화시켰지만(빙켈만), 식민지 해방 전쟁에 승리한 '북방'은 '낭만주의'라는 명칭 아래 '토착의 것'을 중시하게 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의 확립과 함께 '방위'가 내포한 표상이 해체되는 과정을 간취할 수 있다. 첫째로 문학의 자생성, 토착성의 주장은 결코 북방적, 낭만적 문학을 특징짓는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남방 그리스 문학에도 똑같이 타당하다. 둘째로, 국민 문학이라는 이념은 동일한 북방 문학 내지 근대 문학 안에 국민성에 따른 차이를 초래한다. 남방적, 고전적 원리에서 자신을 해방한 '북방'의 예술은 오히려 국민 문학이라는 새로운 이념 아래 분산된다. 국민 국가의 진전과 함께 남북 내지 동서라는 풍토적 요인과 밀접하게 결부된 구분의 중요성이 상실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국민 문학이라는 이념이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225-6)


제5장 역사


"'체계'와 '역사'의 관계를 묻는 일, 이것은 역사철학의 과제일 것이다. 실러는 한편으로 칸트의 비판철학 구상을 계승하면서 '역사의 소재'인 역사적인 사실들과, '체계'인 '보편적 세계사' 내지 '보편사'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밝히려 했다." "이때 연속적 과정인 '세계의 추이'에 반해, (자료가 결여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세계사'는 '단편의 집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세계사'가 단지 '단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학문의 명칭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러에 따르면 이러한' 결여'를 보충하고 '단편의 집합'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행하는 것이 '철학적 지성'이다. 〈철학적 지성은 이들 단편을 인공적인 결합의 고리로 연관시킴으로써 집합Aggregat을 체계System, 즉 이성적인 방식으로 관련된 하나의 전체로 고양한다.〉 여기서 '철학적 지성'의 작용은, 역사 속에 일종의 '가설'을 두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인 여러 사상을 하나의 체계 내지 전체로 통합한다."(247-9)


"세계사를 어떤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할 때, 즉 개개의 사건을 체계로서의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파악할 때, 세계사를 파악하는 각 개인 또한 자기가 속하는 시대나 민족을 초월한 '인류'로 고양될 것이라고 실러는 주장한다. 즉, 실러의 역사철학은 고찰 대상인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고찰하는 주체인 개별을 보편과 연관시킨다. 이 이중의 연관이, 1789년 취임 강연에 나타난 실러의 역사철학을 지탱했다." "그런데 보불전쟁Napoleonic War의 패배를 눈앞에 두고 쓰인 미완의 산문시 『독일의 위대함』(1797 혹은 1801)은 1789년의 그것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있다." "『독일의 위대함』의 특징은 본래는 '개인'을 '인류'로 고양하여 연결해야 할 '세계사'에 '특수'로서, '국민'이 이른바 불쑥 끼어들고, 이 '특수'가 그 특수성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의 담당자 내지 대표로서만 평가되어 정당화되었다는 점이다. 즉 '세계사'란 하나의 보편성을 겨루는 다양한 특수가 분쟁하는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251-5)


"이와 같이 실러는 미학에 '역사적' 사고를 도입하더라도, 있어야 할 예술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즉 실러가 주제화한 '특수'란 보편적 가치의 담당자로서 특수이며, 이 '특수'는 보편적 가치 그 자체의 역사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완전히 똑같은 시기에 예술의 이론이 예술의 역사와 불가분하게 관계한다는 주장이 슐레겔 형제에 의해서 제기된다. '역사적' 사고가 미학의 중추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동생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문학사 구상을 가장 빠른 단계로, 동시에 총괄적으로 나타낸 것은 그가 1800년에 출판한 『문학에 관한 대화』이다. 이 논고는 7인의 대화 형식으로 쓰였는데 그중에서 안드레아스가 행한 강의, '문학의 시대들에 관해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술의 학문은 예술의 역사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결코 비역사적으로 답할 수 없고 단지 문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256-7)


"그렇다면 철학과 역사라는 얼핏 보기에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연관시켜 보편타당한 것과 특수한 것의 혼합을 사고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슐레겔은 여기서 '비평'의 역할을 발견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그가 1804년에 공개한 일련의 레싱론이 시사적이다. 〈비평이란, 역사와 철학의 중간항이며, 그것은 양자를 결부하여 양자를 새로이 제3의 것으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역사와 철학의 중간항'인 '비평'이 하는 일은 어떤 사항의 '특성 묘사'이며, 그것은 그 사항의 역사적 전개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하는 것, 혹은 반대로 이 개념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역사적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이란 결코 무시간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에 고유한 '내적 역사'를 가지는 것으로, 이 결합을 표면화할 때 역사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비평'이 성립한다고 슐레겔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문학사도 또한 본질적으로 '비평'으로서만 가능해진다."(259-60)


"슐레겔에게 전체[역사]와 부분 간의 상호적 관계는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으로서 파악된다. 전체와 부분 간의 상호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그것은 그가 말하는 의미에서 '비평'에 다름없다─은 현존하는 불완전한 전체에서, 있어야 할 완전한 전체를 상상함과 동시에, 이 있어야 할 전체를 선취하여 그에 어울리는 부분을 만들어낸다는 두 가지 계기를 불가분한 것으로 포함한다." "과거가 우리에게 '단편'으로만 부여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과거에 보완적으로 관계할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단편'으로 부여되어 있는 과거를 '메움'으로써 비로소 실현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보완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과거의 작품에 관계되는 비평과, 미래의 있어야 할 작품에 관계되는 비평은 뜻을 같이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발견'과 '미래의 구상'은 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비평'은 '예견적'이다."(262-4)


에필로그 중심의 비판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1908)에 입각하여 종래의 미학 이론─테오도어 립스의 심리학적 미학─이 예술에서 유일한 원리로 간주했던 '감정이입' 충동에 대해서, 그와 다른 한 원리로서 '추상' 충동을 대치했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로마 및 서양 근대'의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간주하는 '감정이입'형의 고전주의적 예술관─즉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 중심주의적'인 예술관─에 반론을 제기하고, '추상' 충동에 기초한 예술, 구체적으로는 고대 이집트나 중세 고딕 예술을 심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와 깉이 그의 양식심리학적인 미학 이론은 과거의 예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예술사·미술사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 책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경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당시 최신 예술운동이었던 추상회화 혹은 표현주의 예술을 담당하던 사람들('뮌헨분리파' 혹은 '청기사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283)


"보링거는 이런 동시대의 예술가·예술운동에 촉구되어 1910년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현대 예술(특히 표현주의 운동)의 이론화를 시도했다. 거기서, 현대 예술에 관한 관심이 예술사 연구와 결부되고, 나아가서는 과거 예술의 의의에 관한 미학적 이론을 변모시키는 과정을 읽어낼 수 있다. 고딕과 표현주의의 만남이 초래한 것은 예술에서 '게르만적인 것=독일적인 것'의 찬양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에 걸쳐서 표현주의 운동이 쇠퇴하자, 그것에 호응하는 형태로 그의 미학적·예술사적 이론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고딕을 '게르만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자신의 기본적 입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고딕의 프랑스성性을 예술사적인 연관성 속에서 정당화한다. 이것은 그 자신이 고전주의로 회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표현주의는 오히려 비유럽적인 것으로, 즉 독일인이 자신의 유럽성을 망각한 데서 생겨난 오류라고 비판적으로 파악하게 된다."(283-4)


"보링거에게 이론이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으로 다시 부여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용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사용하는 개념 그 자체를 역사 현상과의 상호응답을 통해서 다시 단련하는 것, 즉 개념의 비판적인 형성이었다." "어떠한 미학사 연구도 동시에 미학사 비판일 수 있다. 즉 그것은 현재 부여되어 있는 (다양한) 미학사 기술을 재고하고, 이른바 이러한 미학적 기술에 의해 지워진 다른 (다양한) 미학사를 간파하고, 그렇게 해서 미학사를 다시 기술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시선을 단순히 과거로 향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예술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는 다양한 미학적 개념을 그 성립 과정에 조응하여 음미하면서 이러한 개념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상대화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러한 개념의 의미 내용을 이른바 장래를 향해 비판적으로 형성하는 (혹은 재형성하는) 것이다."(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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