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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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디세우스의 흉터


"호메로스의 시 작품 속에서 서스펜스의 요소는 극히 희박하다. 시의 스타일 전체를 통해서 독자나 청중의 숨을 죽이게 하도록 피해진 것은 없다. 샛길로 접어든 이야기─가정부 에우리클레이아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흉터를 알아보는 순간, 흉터의 기원을 서술하는 대목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독자에게 서스펜스를 일으키기보다는 긴장을 완화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줄거리의 진행을 늦춤으로써 서스펜스를 증가시키려는 삽화는 이야기의 현재를 완전히 채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해결이 기다려지고 있는 위기를 완전히 독자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서 서스펜스 자체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위기와 서스펜스는 계속되어야 하며 배경에서 줄곧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배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그때그때 유일한 현재이고 그것이 무대와 독자의 마음을 완전히 채우고 있다."(45)


"오디세우스의 흉터의 기원에 관한 탈선적 객담은 새로 등장한 인물이나 새로 나타난 물건이나 도구조차 비록 싸움이 한창일 때라도 그 성질이나 기원 등을 서술하는 많은 대목들과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혹은 한 장면이 등장할 때 그가 그전까지 어디 있었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고 어떤 경로로 해서 그 자리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는 대목과도 다를 바가 없다." "호메로스의 느낌은 흉터가 조명되지 아니한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나타나는 대로 허용해 두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환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와 함께 주인공의 소년시절의 일부도 드러나야만 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호메로스 문체의 기본적 충동에 놓여 있었음에 틀림 없다. 즉 현상을 충분히 구체화된 형태로 묘사하고, 모든 부분이 뚜렷하게 보이고 감촉할 수 있도록, 또 시간 관계나 공간 관계를 완전히 고정시켜서 묘사하려는 충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심리 과정에서도 숨겨져 있거나 표현되지 아니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47)


"호메로스 문체의 특질은 이와는 다른 형식의 세계에 속하지만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 문체인 다른 보기와 비교해 보면 명백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말하였다. 아브라함! 하고 그는 말씀하셨다.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22:1) 호메로스를 읽고 난 후 이삭의 희생 이야기를 읽으면 이 서두조차 우리를 놀라게 한다. 두 존재의 대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들이 지상의 어느 한곳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점 역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사실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 말로는 〈나를 보십시오〉 정도의 뜻일 뿐이다." "즉 그를 부른 신에게 '여기서 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49-51)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인 이들 두 개의 문체보다 더욱 대조적인 문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쪽으로는 구체화되고 균등하게 조명되었으며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늘상 전경 속에서 아무런 틈서리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현상들이 있다. 생각과 감정은 완전히 표현되어 있으며 사건은 서스펜스 없이 느릿느릿 일어난다.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현상만이 구체화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만이 강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간과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해석을 필요로 한다. 생각과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침묵과 단편적인 대화에 의해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중층적이며 훨씬 착잡히 얽혀 있다. 몹시 긴박한 서스펜스로 차 있고 단일한 목표(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는 훨씬 통일적인)를 지향하고 있는 전체는 불가사의하고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55-6)


2 포르투나타


"호메로스의 스타일과 다른 특징, 페트로니우스의 잔치의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을 살펴보자.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온 어떤 것보다 이 글이 사실적 묘사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렇다는 것은 소재의 비속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회 환경을 정확하고 완전히 비도식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리말키오의 잔치에 모인 손님들은 1세기 남부 이탈리아의 속량된 신흥 부자들이다. 그들의 견해는 이런 부류의 전형적인 견해이고 그들의 언어는 거의 아무런 문학적 세련을 가하지 않은 시정의 언어 그대로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다른 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페트로니우스의 문학적 야심은, 현대 사실주의 작가들처럼, 무작위적이고 일상적인 당대의 생활 환경을 사회 배경 속에서 그려 내며 등장인물로 하여금 문체의 유형화 없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대 리얼리즘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극한점을 이룬다."(79-80)


"고대 저작과 초기 기독교 저작 사이에 존재하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이들 저작의 관점과 대상 독자가 다르다는 사실에 의하여 규정된다. 여러 가지 점에서 페트로니우스와 타키투스는 서로 다른 필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타키투스는 사건과 일의 전폭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에 서서 글을 쓴다. 그는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높은 교양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들을 분류하고 판단한다. 그가 무미건조하고 비시각적인 데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천재 때문만이 아니고 고대 자체가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더없이 성공적으로 도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대상 독자로 삼았던, 그에 대등한 지위의 사람들은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라도 오랜 전통이 고상한 취미라고 정해 놓은 것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했다. 페트로니우스도 자기가 그리고 있는 세계를 위로부터 내려다본다. 그의 책은 가장 높은 교양의 소산이다."(100)


"이에 대하여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 대체로 『신약 성서』 거의 전부는 바야흐로 대두되는 성장의 복판으로부터 직접 보통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여기에는 넓은 조망도 없고 조리에 맞는 구성도 없고 예술적 의도도 없다. 여기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은 의식적인 모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완전히 형상화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야기되어야 하는 사건에 붙어 있는 것이기에, 크게 동요된 사람들의 몸짓과 말에 드러나기에 그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하게 손질하는 데 노력할 필요가 없다." "타키투스와 페트로니우스는 감각적 인상을, 전자는 역사 사건의, 후자는 특정한 사회 계층의 감각적 실감을 주려고 노력하며 그런 가운데 특정한 심미 전통의 한계를 존중한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고 그러한 전통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별 노력 없이 순전히 자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의 내적인 움직임만을 통해서 이야기가 시각적인 구체성을 띠는 것이다."(101-2)


"유대인 세계의 독자나 청자는 실제 일어난 감각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그 의미를 생각하고록 요구받았다. 가령, 아담이 잠든 사이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최초의 여자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한 병사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주석을 통해 맺어져서, 아담의 잠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잠의 상징이고, 아담의 옆구리 상처로부터 육신으로 본 인류의 원초적 어머니인 하와가 태어났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정신으로 본 모든 사람의 어머니인, 교회가 태어난다는 교의가 될 때, 감각적 사건은 상징적 의미의 세력 앞에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에 비해 그리스 로마의 실례들을 보면, 역사관이 제한된 채로 그 감각적 실체성은 완전한 것이 되어 있다. 이들은 감각적 외양과 의미의 갈등을, 초기 기독교의 현실관, 아니, 기독교 전체의 현실관에 배어 있는 이 갈등을 알지 못한다."(102-3)


3 페트루스 발보메레스의 체포


"제정 시대의 첫 번째 세기말로부터 갑갑하고 편편치 못한 것, 생활 분위기의 암흑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세네카 속에 의심할 바 없이 나타나 있으며 타키투스의 역사책의 암울한 가락은 곧잘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에게서는 이 과정이 불가사의하고 감각적인 비인간화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음산하다. 그것은 미신과 피비린내 나는 광란과 탈진과 죽음의 공포,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하게 뻣뻣한 동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상쇄하려는 것으로는 한결 더 어렵고 한결 더 절망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똑같이 음산하고 측은한 결의, 즉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제국을 보호하려는 결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결의는 암미아누스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에게도 유연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련적인 초인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예컨대 그가 율리아누스의 말이라고 전하는 '선 채로 죽는다'란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107, 111-2)


"고전 문학의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 문체는 과도히 세련되고 과도히 감각적이다. 그 효과는 강력하지만 왜곡되어 있다. 그 효과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왜곡되어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 세계의 희화(戱畵)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악몽과 같은 경우도 허다하다. 단순히 그 속에서 반역, 고문, 박해, 고발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삶이 한결 견딜 만한 시대란 그리 흔치 않은 법이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를 그렇듯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들을 상쇄하고 균형을 유지할 그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끔찍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것이 언제나 정반대되는 것을 낳으며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에도 인간 정신의 위대한 생명력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16-7)


"이목을 끄는 회화적 리얼리즘이 숭고한 문체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암미아누스에게서 볼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고전 문학의 스타일 분리 법칙을 점차로 와해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잠식은 기독교 저자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특히 철학과 수사학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교부들에게서도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현실 묘사의 혼합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특히 히에로니무스는 이 점에 있어서 극단적인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다.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를 뺨치는 그의 풍자적 희화는 지극히 회화적이다. 스스로에게 예의나 관습에 대한 경의를 조금도 과하지 않고 먹기와 마시기, 신체의 돌봄(혹은 소홀함)과 성적 절제에 이르는 사소한 사항까지도 세세히 다루고 있는 금욕적 격언을 적고 있는 대목에서는 특히나 더욱 회화적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서정의 높이에까지 올라가게 할 수 있었던 히에로니무스의 희망조차도 현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불꽃도 음산한 불꽃이다."(121-4)


"당대 현실의 암울한 특징을 아무리 많이 드러내 보인다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절은 암미아누스의 작품이나 히에로니무스의 구절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첫눈에 다른 원전과 구별이 가는 것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인간의 투쟁의 열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인간 생활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직접적으로 그려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눈앞에 살아 있다." "〈그는 이제 들어올 때의 그가 아니었으며 그가 섞여 있게 된 군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고전 고대의 산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문장이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갈등을 보이면서 한편 연합되어 있는 내면의 제력(諸力)이란 현상, 그 제력의 관계와 결과에 있어서의 대립과 종합의 교체를 그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추구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128-30)


4 시카리우스와 크람네신두스


"로마 제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땅 위의 모든 소식이 국가적인 의의에 따라서 수납, 분류, 정리되는 그러한 장소에 있지 않다. 그는 일찍이 존재했던 뉴스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뉴스가 보고되는 방법을 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는 갈리아 지방 전체를 개관하지 않는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이것이 가장 값있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자기의 교구 내에서 직접 본 것이거나 이웃 지역에서 전해 들은 것을 담고 있다. 그의 자료는 근본적으로 그의 눈앞에 가져와진 일에 한정된다. 그는 옛 의미의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정치적인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이해관계의 관점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저술이 그 전체성을 불가피하게 드러내게 될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의 총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다."(144-5)


"그레고리우스의 언어는 사실을 조직화하는 데에는 불충분한 준비밖에 없는 언어이다. 복합적인 사건이 일정한 단순의 도를 넘어서면, 그는 이를 일관성 있게 기술하지 못한다. 언어를 졸렬하게 조직화하거나 또는 전혀 조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사건의 구체적 측면에 살고 사건 속의 인물들과 말하고 그들 속에서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즐거움, 고통, 경멸, 분노 또는 그때그때 그들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각종의 격정에 표현을 준다." "그레고리우스는 부릴 수 있는 연장이 문법적으로 혼란스럽고 구문상에 있어서 빈약해진, 거의 초보적인 라틴어밖에 없다. 그는 특별 효과를 낼 만한 재간도 없고 신기한 자극제나 문체상의 변주로 관심을 끌 만한 독자층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토착방언으로 듣는다." "그가 전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의 유일한 세계이다. 그에게 그 밖의 다른 세계는 없으며, 그는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151-2)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6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활동은 실제적인 일과 조직에 관계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변화는 그레고리우스에 의하여 생생하게 예시되어 있다. 그는 수사학적 소양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교리 논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교리 회의의 결정은 한번 정해진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 즉 상상력의 밥이 되어 줄 성인의 전설, 유물, 이적, 폭력과 압제에 대하여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잇는 것들, 미래에 있을 보상을 내걸어 쉽게 받아들여지게 한 소박한 도덕적 교훈, 이런 모든 것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함께 살고 있던 민중들은 교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믿음의 신비에 대해서는 극히 조잡한 관념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탐욕과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것들은 서로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공포심에 의해서만 다소 제어되는 것이었다."(153)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무서운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반, 폭력, 살인은 항다반사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보여 주는 소박하고 실제적인 활달성은 후기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느껴지는, 그리고 기독교의 저술가들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울적한 분위기의 형성을 막아 준다. 그레고리우스가 붓을 들었을 때, 이미 파국은 일어났고, 로마 제국은 붕괴하고, 그 조직은 와해되고, 고대 문화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긴장은 이미 해소된 다음이었다. 이제 해낼 수 없는 과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없는 과대한 야심에 괴롭힘을 당함이 없이, 그레고리우스의 영혼은 좀 더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실제적인 삶을 영위할 용의를 갖추고 살아 있는 현실을 마주보았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문학적인 라틴어를 써 보겠다는 그레고리우스의 야심 속에 옛 전체의 자취가 남아 있을 뿐이다. 토착 방언은 아직은 활용할 수 있는 문학의 매체가 되지 못했다."(157-8)


5 롤랑 대 가늘롱


"〈신이 빛이 있으라 하였다. 하니 빛이 있었다.〉(창 1:3) 이 문장 속의 숭고성은 기복 진 도미구문의 장엄함이나 풍부한 비유의 화려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인 간결성 속에 담겨 있다. 이 인상적인 간결성은 그 무한한 내용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듣는 자에게 섬뜩한 외경심을 불어넣어 주는 모호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인과 관계의 연결사가 없이 일어난 일을 수식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이 이 문장에 숭고함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롤랑의 노래』의 주제는 협소하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어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그 어떠한 것도 문제성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세와 내세의 모든 범주는 경직하게 규정되어 있어 모호함이 없이 딱 고정되어 있다. 합리적 이해가 그들에게 직접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관찰일 뿐, 이 시와 당대의 청중들은 이러한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경직하고 협소한 기정 질서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산다."(175-6)


# 도미문掉眉文 : 주절의 완결을 끝에 둠으로써 서스펜스의 효과를 내는 문장


"『알렉시우스의 노래』 같은 11세기의 로맨스어 종교 원전에서 우리는 이와 똑같이 한정되어 있고 확고하게 굳어 있는 우주와 마주치게 된다." "『롤랑의 노래』에서와 같이 봉건 제도라고 하는 동일한 사회 구조와 동일한 기풍이 기독교도 사이에서건 이교도 사이에서건 한결같이 지배적이다. 세계는 아주 작아지고 좁아졌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의문을 두고 경직되어 있고 변함없이 회전하고 있다. 그 의문은 미리 대답이 주어졌고 그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그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에게 열린 길은 하나가 있을 뿐이며 딴 길은 없다. 그는 또한 자기가 세 거리 갈림길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혹자가 왼쪽으로 가라고 꾈지라도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과 형태와 계층을 지니고 있는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의 광막한 무한 전체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177-9)


"경직하고 협소하고 문제성이 없는 도식화는 원래 기독교의 현실관에는 생소한 것이다. 현실 사건의 비유적 해석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전파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 갔으며 실제 사건을 취급할 때 그 현실적 내용을 용해시켜 그 의미 내용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기독교 교의가 확립되고 교회의 소임이 점점 더 조직의 사항이 되며, 기독교의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설복하는 것이 문제가 됨에 따라 비유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단순하고 경직된 도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직화 과정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보다 깊은 곳에 미쳐 있다. 그것은 고대 문화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경직화 과정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경직화 과정으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그것이 구현하고 있던 질서의 원리가 붕괴함에 따라 전 세계의 내적 일관성도 무너졌다. 새 세계는 그 분할과 산산조각으로부터만 재건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젊은 세대와 노년 사이의 충돌이었다."(187)


"무공시 특히 『롤랑의 노래』는 인기 있었다. 무공시들이 봉건 사회 상류 계층의 공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민중에게 또한 호소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13세기의 청중들에게 있어 영웅 서사시는 역사였다. 그 속엣는 지난 시대의 구전 역사가 살아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청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구전도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지방어 연대기는 1200년경에 이르러 비로소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기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대 사건의 목격자의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사시 문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사실 영웅 서사시는 역사이다. 적어도 그것이 실제의 역사 상황을 상기시키고(아무리 그것을 왜곡하고 단순화한다 하더라도) 그 등장인물들이 역사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요소를 궁정 소설은 방기해 버린다. 그 결과 그것은 객관적 현실 세계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190-1)


6 궁정 기사의 출정


"궁정 사실주의는 한 계층─당대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다른 계층으로 하여금 때로 다채로우면서도 기껏해야 희극적이거나 괴이한 장식물로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하나의 계층의, 극히 화려하고 풍미 있는 생활도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한쪽으로 중요한 것, 의미 있는 것, 높은 것과 다른 한쪽으로, 낮고 기괴하고 희극적인 것 사이의 계급적 구분은 소재에서 엄격하게 유지되어 있다. 앞쪽의 범위에 들어선 것은 봉건 계층뿐이다." "궁정 로맨스의 리얼리즘의, 계급적 제약보다 더 큰 제약은 그 동화적 분위기에서 온다. 궁정 로맨스의(특히 브르타뉴 연속물의) 성과 궁성과 싸움과 모험은 동화 세계의 것들이다. 그 결과 당대 현실의 다채롭고 생생한 그림은 땅에서 솟아난 듯, 즉 동화의 땅에서 솟아난 듯 나타난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 정치적 바탕을 결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는 결코 설명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매개됨이 없이 동화와 모험에서 직접 나온다."(202-3)


"알려진 세계를 넘어서 먼 미지의 땅으로 방황해 들어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경이로운 일과 위험의 환상적 묘사는 옛날부터 있었다. 지리적으로 알려진 세계 안에서도 신들과 귀신과 요괴와 또다른 마술적 세력들의 작용을 통하여 사람을 위협하는 신비스러운 위험에 대한 표상과 이야기도 있었다. 궁정 문화 훨씬 이전에도 힘, 덕, 꾀, 신의 도움으로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고 다른 사람들을 구출해 낸, 두려움 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에 있는 한 계층 전체가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는 일을 그들의 고유한 임무, 이상의 관점에서 배타적인 임무로 생각한다는 것, 이 계층이 여러 전설의 유산, 그중에도 브르타뉴의 전설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그들을 위한 기사적 경이의 세계를, 마치 어셈블리 라인에서 공급되어 나오듯 환상적 해후와 위험('아방튀르'(aventure)라고 불리는 모험)이 기사를 향해서 줄지어 나오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러한 사태는 궁정 로맨스의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다."(205-6)


"궁정 로맨스는 기능적인 것, 역사적·현실적인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을 묘사하는 경우, 단지 현란한 표면만이 묘사될 뿐이다. 피상적이 아닐 때는 시의 대상과 목표는 현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을 받은 계급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 개의 특징에 기초한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모든 세간적인 우연성을 넘어서는 절대성과 그것에 승복하는 사람들에게 선택된 자의 공동체, 즉 다수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공동 집단에 속한다는 귀속감이다. 그리하여 봉건 윤리, 완전한 기사에 대한 이상화된 표상은 매우 크고 오래 지속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기사와 더불어 생겨난 이상들, 즉 용기, 명예, 충성, 상호 존중, 귀족적 예의, 여성 존중 등은 문화가 전혀 달라진 시기의 사람들까지도 사로잡았다. 훗날의 도시 부르주아 계층은, 이것이 계급적이고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을 채택하였다."(207-8)


"궁정 로맨스에 있어서 사랑은 영웅적 행위를 위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통한 행동의 동기 부여가 없는 마당에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기사적 완성의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서의 사랑은 여기에 결여되어 있는 다른 동기 가능성에 대한 대처물이 된다. 이와 더불어, 귀부인의 총애를 위하여 벌어지는 허구적인 사건이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의 배열 질서가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동시에 유럽 문학에 있어서 사랑이 시적인 소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중요한 관습이 여기서 시작된다. 고대 문학은 사랑을 기껏해야 중간 정도의 값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비극에 있어서나 대서사시에 있어서나 사랑은 소재로서 지배적인 것이 아니었다. 궁정 문화에 있어서의 사랑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치는 유럽의 지방어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높은 스타일의 원형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랑의 승화 작용이 비롯되고, 이것은 신비주의와 여성 숭배의 예절로 나아간다."(213-4)


7 아담과 이브


"기독교 구제극(救濟劇)은 작자와 관중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숭고한 주제이다. 그러나 연출은 민중의 취향에 맞기를 희구한다. 옛적의 숭고한 사건은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고 모든 관중이 상상할 수 있고 친숙한 당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대 프랑스인 누구나의 마음과 심정 속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담은 자신이나 혹은 이웃 사람의 집에서 친숙한 투로 말하고 행동한다. 강직하기는 하나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남편이 파렴치한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허영심 많고 야심 많은 아내 때문에 어리석고 운명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만 어떤 시민의 집안이나 농부의 집안에서 일어나듯이 꼭 그렇게 매사가 진행된다. 아담과 이브 사이의 대화, 즉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이 최초의 남녀 사이의 대화는 가장 단순한 일상 현실의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 숭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고 격이 낮은 문체로 이루어진 장면이 되는 것이다."(225)


"숭고와 겸손의 대조적 융합은 성서의 특징으로서 일찍이 교부 시대부터 강조되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은 신이 이러한 것을 지혜롭고 신중한 이들에게 숨기고 어린이들에게 제시했다는 성서의 원문(마태 11:25, 누가 10:21)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위와 학문 있는 이들보다는 어부나 세금징수원이나 그같이 지체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사실(고전 1:26 이하)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자기네 안목으로는 말할 수 없이 조야한 언어로 양식상의 범주에 전혀 무지한 채 쓰인 글 속에 가장 높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주장에 대경실색하였다." "바로 이 같은 비판은 성서의 특징이 되어 있는 참다운 위대함에 교부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즉 성서가 일상적인 것과 격이 낮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종류의 숭고성을 창조하여 내용이나 문체에 있어 가장 격이 높은 것과 가장 격이 낮은 것을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227-8)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완전히 이 전통에 속해 있다. 본래 연극적 요소를 지니고는 있으나 예배 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서의 일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소박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숨어 있는 진실로 이들을 인도하려 하였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벌어지는 장면은 겸손한 문체로 마음이 가난한 소박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된다. 숭고한 사건을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집어넣어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가 숭고한 것임을 잊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현실로부터 직접 가장 드높고 가장 은밀한 신과 관계되는 진실로 옮아간다." "이들 장면을 에워싸고 있는 틀의 정신은 역사의 비유적 해석의 정신이다. 이것은 일상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동시에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과 관련된 세계사적 맥락의 일부이며 따라서 항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초시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0-1)


8 파리나타와 카발칸테


"중세에 지방어로 쓴 저작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는 오늘날 약간의 재능이라도 있는 저작자뿐만 아니라 약간의 언어적 훈련을 받은 서간문 필자라면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문장 구조를 끌어내어, 구태여 특출한 것으로서 추켜세우는 것에 의아한 마음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단테 이전의 저술가로부터 출발하여 본다면, 단테의 언어는 거의 불가해한 기적이다. 그들 중에는 대시인도 있었건만, 이들에 비교해 볼 때 단테의 언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부성, 실감, 힘,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어형을 사용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사상과 내용을 비교할 수 없이 확실한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새로 발견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저런 표현 형식이 나왔는가 하는 것은 증명되거나 추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이나 추정은 그의 언어 능력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을 높일 뿐이다."(264-5)


"대체로 『신곡』의 스타일상의 의도가 숭고미를 겨냥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시의 모든 행에서, 구어적인 시행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모델을 제공해 준 것이 고대의 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테의 숭고미의 개념이, 언어 표현에서나 소재에 있어서 고대의 귀감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곡』이 보여 주는 소재와 사상들은 고대의 관점에서는 기괴하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높은 것과 낮은 것을 뒤섞어 놓고 있다. 그의 등장인물에는 조금 앞 시대나 당대의 역사에서 나온, 그리하여 흔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자의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낮은 현실의 일상 세계에서의 모습 그대로 가차 없이 묘사된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단테는 일상적이고 기괴하고 불쾌한 것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어떤 한계를 두지 아니한다. 고대적 의미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 단테의 손에 의하여 숭고한 것이 된다."(266-7)


"프로방스의 시인들과 '신체시'의 시인들에게는 지고의 사랑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테마였다. 단테는 『지방언어론』에서 세 가지 테마(무공(salus), 사랑(Venus), 덕(virtus))를 들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테마는 대부분의 서정시(canzoni)에서 사랑의 테마에 종속되었거나 사랑의 알레고리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신곡』에서도 이 틀은 베아트리체의 존재와 기능을 통해서 유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틀은 굉장히 범위를 포괄한다. 『신곡』은 무엇보다도 백과사전적인 교훈시로서, 물리적, 우주론적, 윤리적, 역사적, 정치적 세계 질서를 묘사한다. 나아가 그것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현실의 구역을 다 나타내고 있는, 현실 묘사의 예술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숭고한 장대성과 낮은 통속성, 역사와 전설, 비극과 희극, 인간과 지리가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신곡』은 개체적 인간의, 즉 단테 자신의 발전사이며 구원의 역사이다. 그럼으로써 또 인간 일반의 구원에 대한 비유가 된다."(272)


"단테는 그의 역사성을 피안에까지 가지고 간다. 그의 죽은 자들은 현세의 현재성과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있지만, 추억과 뜨거운 참여는 그들을 너무나 강하게 충동하여 피안의 세계는 그것으로 가득 찬다. 연옥과 천국에서는 이것이 그처럼 강하지는 않다. 거기에서는 눈길이 지옥에 있어서처럼 뒤를 돌아보며 현세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앞과 위로 향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는 현세적 생존을 신을 향하는 종착점과 더불어 보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상의 삶은 살아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신의 심판과 영원한 영혼의 상태의 기초가 된다. 이 영혼의 상태는 참회자나 복자의 특정한 집단에 배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지상적 삶의 본질과 하느님의 구도 가운데 그것이 차지하는 일정한 자리를 의식 속에 새기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전생의 지상적 삶의 성격을 완전히 연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심판을 이루는 것이다."(277-8)


9 수사 알베르토


"감각적 현상의 세계가 최초로 정복되고 의식적인 예술적 구상에 따라서 조직되고 언어로 포착된 것은 보카치오에게서이다. 그의 타고난 성향은 자연스럽게 감각적이었고 관능성에 차 있는 우아하고도 매력있게 움직이는 형식을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숭고한 문체보다는 중간적 문체가 어울렸다. 고전 고대 이후 최초로 그의 『데카메론』은 당대의 생활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품위 있는 소일거리가 될 수 있는 특정한 문체 수준을 고정시켜 놓았다. 이야기가 이제 도덕적 범례 구실도 하지 않게 되고 또 웃고 싶다는 평민들의 소박한 욕망에 보비위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야기와 설화는 이제 삶의 관능적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고 감각과 취향과 판단력을 지닌 신사 숙녀와 상층 계급의 행실 좋은 젊은이들에게 즐거운 소일거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보카치오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액자'를 창조해 낸 것은 그의 설화 문학의 이러한 목적을 공표하기 위해서였다."(307-9)


"보카치오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관찰력이나 표현력이 아니다. 이러한 품성은 보카치오가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단테의 그것과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보카치오의 관심은 단테가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현상과 감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자기의 재능을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지가지 인물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정한 조건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한 단테의 역량이 보카치오로 하여금 그의 등장인물을 위해 똑같은 결과를 성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세계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공존하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적 해석 없이 모든 현상에 제각기 특정한 그리고 세밀히 구별된 도덕적 가치를 배당하는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시각의 비판 의식이다. 이 비판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현상들 자체로부터 솟아나게 하는 종류의 것이다."(313-4)


"보카치오의 책은 중간적 문체로 되어 있는데 그 경박스러움과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확고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데카메론』에 반영되어 있는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태도, 중세 기독교적 윤리에 정반대되는 것은 비록 가벼운 어조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차 있는 사랑과 자연의 교의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그 삶의 형태에 대한 근대인의 반향이 성도덕의 영역에서 그 실천력과 선전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와 그 본질적 성격에 뿌리박고 있다. 성도덕의 영역에서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와 삶의 기독교적인 묵인 사이의 갈등은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가 자의식을 성취하면서부터 날카로워진다." "『데카메론』은 사랑할 수 있는 권리에 뿌리박은 완전히 실제적이고 세속적이며 확연한 도덕률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교의적 타당성에 대한 강력한 주장 없이 우아하게 제시되어 있다."(321-3)


10 마담 뒤 샤스텔


"리얼리즘의 발전은, 중세 말엽에 특히 북부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 강하게 대두한 대(大)부르주아 문화의 융성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 문화는 아직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현실 관계에 상응하는 '제3계급'이 이론적으로 분화될 때까지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다). 이 계급은 그 상당한 부와 힘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와 생활 양식에 있어서 오랫동안 대부르주아적이기보다는 소부르주아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방 예술에 신변적이고 가정적인 모티프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문제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실내 공간의 모티프가 가능해졌다. 사사로운 삶의 가정적이고 신변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봉건적, 귀족적, 군주적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상황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리하여 예술과 문학은, 봉건적 의식의 화려함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중세 초기보다 한결 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346)


"어쨌든 중세 말기의 몇 세기에 구조적 이론적 사고의 피폐와 불모가, 특히 실제적 삶의 질서와의 관련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기독교적 인간학의 육신적, 인간적 측면, 번뇌와 무상에 내던져져 있는 측면이 조잡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강조되어 나타나게 된다. 고대적, 고전적 인간상에 날카롭게 대조되는 이 극단적으로 육신적인 인간상의 특징은 세간적 신분의 의상에 많은 존경심을 보이면서도 그 의상을 벗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존경심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신분의 의상 밑에는, 나이와 병이 상하게 하고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체 이외에 아무 다른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인간 평등론인데, 적극적이고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모든 인생의 가치 절하라는 의미에서의 평등론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전혀 의미 없다. 그의 본능이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현세적 삶에 집착하게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격도 없다."(347)


"이 문화권의 어떤 작가도 단테가 하였듯이 또는 보카치오 정도로도, 그 시대의 세계 현실 전체를 조감하고 제어하지 못한다. 각자가 각자의 영역을 알 뿐이다. 이 영역은, 앙투안 드 라살과 같이 여행을 많이 한 사람과 경우에도 매우 좁다. 어린 샤스텔의 죽음이나 왕자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은 젊음과 기구한 사연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구체적 경험 이상의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이 끝났을 때, 독자에게 남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감각적인, 거의 육감적인 경악뿐이다. 작자는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중요한 판단도 관점도 의도도 없다. 나아가 때로는 매우 강력하게 직접적이고 특수한 것에 초점을 맞춘 심리 묘사까지도 개체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육신적, 인간적이다. 이들 작가들은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넘어가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각자의 인생권은 육신적, 인간적 운명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했던 것이다."(357)


11 팡타그뤼엘의 입 안의 세계


"라블레는 그의 거인의 나라를 처음 유토피아(Utopia)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16년 전에 나왔던 토마스 모어의 책에서 빌린 것이다. 이 주제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잇는 2세기 간의 모티프의 하나로서 정치, 종교, 경제, 철학상의 혁명에 지렛대 구실을 했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첫째, 작가가 줄거리를 아직도 태반은 미지로 남아 있는 신세계에 배치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유럽의 환경보다 한결 순수하고 한결 원시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국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통쾌하게 은밀한 방법을 제공하는 하나의 방책이 된다. 또 하나는 생소한 이방인을 유럽 세계에 데려와 유럽의 기성 질서에 대한 비판이 그의 순박한 놀라움과 그가 구경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으로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경우든 이 주제는 기성 질서를 뒤흔들고 그것을 보다 넓은 맥락 속에 배치하여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367)


"조야한 우스개 농담, 인간 육체의 동물적 파악, 성 문제에 있어서 절도와 유보의 결여, 리얼리즘과 풍자적 교훈적 내용의 혼합, 다루기 어렵고 때로는 난해한 박학의 어마어마한 축적, 우의적 비유의 사용 등과 이외의 많은 것이 중세 후기에 발견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이들을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 내는 데 힘쓴다."(375)


"라블레에게서 동물적 리얼리즘은 육체와 그 기능의 활력론적, 역동적 승리라는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에게는 벌써 원죄나 최후의 심판이 없으며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포도 없다.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은 자기의 숨쉬는 삶, 신체의 기능, 지적 능력을 즐기며 자연 속의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인간과 자연의 숨쉬는 삶은 온통 라블레의 사랑, 지식에 대한 갈증 그리고 언어를 통한 표현 능력을 불러들여 사용한다. 그것은 그를 시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며 비록 감정은 결여되어 있으나 진정 서정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얼리스틱하고도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미메시스를 야기시키는 것은 의기양양한 현세의 생활이다. 그리고 그의 미메시스는 완전히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중세 말의 동물적 리얼리즘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사고의 범위와 아주 반대되기 때문에 라블레의 중세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바로 문체의 중세적 특징 속에서이다."(376)


12 인간 조건


"몽테뉴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실천적 도덕적 요청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 요청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도, 아무런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아 인식의 우선적 위치는 인간의 도덕적 연구에서만 적극적으로 인식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임의적인 자신의 삶을 탐구함에 있어서 몽테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 조건 일반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의 행동이든 또는 멀리 있는 정치적 역사적 영역의 행동이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분별 있게 또는 무분별하게, 항시 사용하는 방법적 원칙을 그는 여기에서 드러내 보여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이 제시해 주는 척도를 적용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간 이해, 역사 이해는 우리의 자아 인식의 깊이와 우리의 도덕적 지평의 넓이에 의존하게 된다."(408-9)


"과학적 작업에는, 중세에 보다 훨씬 더 전문화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 전면적이고 고르게 완성된 인간의 이상적 표상이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직업적 목표를 갖지 않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적(사교적)이고 유행적인 형식의 일반 지식이다. 그것은 물론 백과사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 지식의 발췌, 그중에도 문학적이며 일반적으로 취미적인 것을 선호하는 발췌였다. 인문주의(Humanismus)는 바로 그 대부분의 자료들을 모아다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나중에 '교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에게는 전문 분야에 묶여 있는 전문지식인, 직업에 묶여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전문 분야의 사실적 지식에 빠져 있으면서 그의 행동과 말씨에 있어서 그것이 드러나는 사람은 희극적이고, 열등하며 비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태도가 완전히 발전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의 절대주의 시대에서이다."(417-8)


"이러한 전개에 있어서, 몽테뉴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능한 사람〉, 〈무지할 때까지도 어느 면에서나 능한〉 사람은, 몰리에르의 연극의 후작들처럼, 일체의 것에 확실한 시체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배울 필요가 없었던, 저 〈신사〉의 선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몽테뉴는 방금 이야기한 교양인층을 위하여 글을 쓴 최초의 저술가이다. 『에세』의 성공을 통하여 교양 독자가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몽테뉴는 어떤 특정 신분층, 어떤 특정 전문 영역, '민중'(das volk), 기독교도들을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어떤 정파를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는 최초의 세속적인 자기 성찰의 책을 쓴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 자기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으로 느낀 사람들, 남녀가 나타난 것이다. … 그리하여 그가 저 최초의, 아직도 귀족적인, 아직도 전문화된 일을 강요받지 않은 교양인층에 알맞는 표상들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418-9)


13 지쳐 빠진 왕자


"중세의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비극적인 것의 개념은 밋밋하게 발전하지를 못하였다. 이것은 고대의 비극 작품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 고대의 이론이 잊혀졌거나 오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전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러한 사실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기독교의 비유적인 인간 생활관이 비극적인 것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지상의 삶의 사건이 아무리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라 해도 그 위로는 예수의 출현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위엄 있는 단일한 사건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마침내는 흘러 들어가게 마련인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즉 타락과 예수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최후의 심판 등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중심(重心)이 지상의 삶으로부터 저 건너 세상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비극이 이 세상에서 끝을 맺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31-2)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비유적인 도식(圖式)이 거의 유럽 전역에서 뒤흔들리게 되었다. 저세상에서의 결말은 완전히 저버려지지는 않았으나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고대의 모범과 고대 이론이 뚜렷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고대에선 인생의 극적 사건들이 주로 사람의 바깥쪽에서 위로부터 달겨드는 행운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비극의 최초의 근대적 형태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개인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보다 큰 역할을 한다." "고대 비극의 경우 운명은 주어진 비극의 복합체, 즉 특정한 시기에 특정 인물이 말려 들어간 당면한 사건의 그물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추이는 비극적 갈등이 사건 추이만을 다루지 않고 즐거리가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대화나 장면이나 등장인물 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기서의 운명은 주어진 갈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432-4)


"셰익스피어의 윤리적 지적 세계는 고대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동요되고 층이 많으며 어떤 특정한 극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훨씬 극적이다.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사건이 일어나는 기반 자체가 한결 불안정하고 내적인 동요로 말미암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으로서의 안정된 세계가 없고 갖가지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고대 비극에서는 철학적 사색의 말은 극에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격언 같고 아포리즘에 가깝고 줄거리에서 추상되어 일반화되어 있고 등장인물이나 그의 운명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셰익스피어 극에서 철학적 사색의 말은 사사로운 것이 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당장의 상황에서 직접 나온 것이며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건에서 얻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며 사이를 두고 벌어지는 대화 속의 재치 있는 대답도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적절한 방식이나 순간을 찾거나 그러한 것을 찾아낼 가능성을 의심하는 극적인 자기 검토이다."(440-1)


14 마법에 빠진 둘시네아


"돈키호테는 아마디스도 롤랑도 아닌 정신 나간 시골의 작은 신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감정은 진실하고 깊다. 둘시네아는 진정 그가 사모하는 아씨이다. 그는 스스로 인간의 최고의 의무라 여기고 있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진정 진실하고 용감하며 일체를 희생할 차비가 되어 있다. 이렇듯 절대적인 감정, 이렇듯 절대적인 결심은 비록 어리석은 환상에 비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탄복을 자아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탄복을 거의 모든 독자가 돈키호테에게 아끼지 않아 온 것이다. 위대한 이상이란 생각을 돈키호테와 함께 연상하지 않는 문학 애호가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황당하며 그로테스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상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웅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아니었다는 문헌학적 비평의 모든 기도를 물리치고 있다."(462-4)


"난점(難點)은 돈키호테의 고정관념 속에서 고상한 것, 무구(無垢)한 것, 취할 만한 것이 형편없는 어리석음과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소망스러운 것을 위한 비극적인 투쟁은 무엇보다도 실제 현실 속에 뜻 깊게 개입해서 그것을 뒤흔들어 놓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뜻 깊은 이상은 타성이나 째째한 심술, 질투 혹은 보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나온 똑같이 뜻 깊은 저항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이상주의는 현세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고정관념의 이상주의가 그를 사로잡자마자 그 이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현존 세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희극적인 혼란을 낳을 뿐이다. 그것은 성공할 가망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현실과 접하는 바도 없고 그저 진공(眞空) 속에 널려 있을 뿐이다."(464)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세르반테스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교훈적인 목적의식도 아니다. 몽테뉴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처럼 인간 존재의 불확실함이나 운명의 힘에 의해서 동요되고 있는 실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용감성과 마음의 평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의 태도(세계에 대한, 곧 자기 예술의 주제에 대한 태도)이다. 다채로운 감각의 희롱에서 그가 감득하게 되는 기쁨 말고도 그에게는 어떤 남국적인 과묵함과 오기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그 희롱을 아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게 된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형성한다. 그는 그것을 재미나 한다. 그것은 또한 독자들에게 세련된 지적 재미를 주게끔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는 중립이다. 그가 심판하지 않으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재판을 하는 법도 없고 심문을 하지도 않는다."(480)


"세르반테스에게는 훌륭한 소설은 세련된 오락, 정직한 오락(honesto entretenimiento) 이상의 것이 아니다." "소설(小說)의 스타일이 그것이 최고의 소설이라 할지라도 우주의 질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염두에는 떠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작가로서의 자기 직업에 관계되는 문제에 한해서 판단을 내리려 든다. 세속 세계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악을 벌하고 선을 포상하는 것은 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곳 지상에서는 개관할 수 없는 현상의 질서는 놀이나 희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현상을 개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미쳐 버린 라만차의 기사 앞에서 그것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혼란의 춤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일상의 현실을 그림에 있어서, 그렇듯이 보편적이고 다층적이며, 그렇듯이 무비판적이고 문제성이 없는 유쾌함이 시도된 일은 유럽 문학에서는 다시는 없었다. 언제 또 어디에서 시도될 수도 있었을까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483-5)


15 가짜 독신자


"라신의 비극 「베레니스」와 「에스더」의 인물들은 자신의 왕공으로서의 신분을 너무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도 그 신분을 떠나는 일이 없다. 가장 깊은 불행, 가장 격렬한 감정 속에 있을지라도 라신의 비극적 인물은 그들의 신분을 통해서만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은 〈불쌍한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공자(公子) 나!〉라고 말한다." "에스더는 기절하는 순간 〈딸들아, 너희의 죽어 가는 여왕을 부축해 다오······.〉하고 외친다. 이 비극적 인물들의 왕공으로서의 지위와 그에 따르는 고양화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인격에서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느님이나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타고난 왕공으로서의 자세를 지킨다. 이것은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서 보는 태도와는 전혀 대조되는 인간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낭만주의자들이 때로 그랬듯이 이들에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505)


"비극적 인간과 언어적 표현에 대한 고전주의의 이념은, 지극히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어떤 시대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것 없이 일상생활로부터 초연하게 있는 심미적 세련화의 소산이다." "17세기가 라신의 예술을 거장적인 솜씨와 강력한 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이며 상식적이며 자연스럽고 그럴싸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당대인들은 라신 이전의 작가들이 이상한 모험적인 사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던 데 대하여 라신의 비극은 단순하고 분명한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관찰하였다. 또 바로 앞 세대의 유행이 지나치게 영웅적이고, 미묘하고 황당무계한 갈등(코르네유의 영향이 컸다)과 '화사파'의 영향으로 과도하게 감상적이고 현학적인 로망스를 즐겼던 데 대하여 라신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심리 상황과 갈등은 모범이 될 만하게 일반적인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518-9)


# 화사파 : 17세기 초 화사한 수사와 세련된 예의에 주력한 문학과 사회의 한 경향을 나타낸 사람들


"무엇이 가장 자연스러운가에 대하여 라신 시대는 나중 시대하고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문명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 문화, 순수한 민중성, 탁 트이고 막힘 없는 들판으로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은 행동을 우아하게 가지며 사회생활의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도 거기에 쉽게 맞아 들어갈 수 있는 교육 있고 닦인 인간형과 일치시켜 생각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양이 많은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높이 이야기하는 경우에 비슷한 것이다. 어떤 것을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치에 맞는다 하고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조화, 이성, 자연스러운 품성의 함양의 요소를 크게 가졌던 고대 문명의 황금기에 17세기는 스스로 대응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루이 14세 아래의 프랑스인들은 대담하게 그들의 문화가 고대인들의 문화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본보기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견해를 유럽 전체에 부과하였다."(520-1)


16 중단된 만찬 1 ─계몽주의 시대의 리얼리즘


"18세기 문학에서는 눈물이 그 전엔 한 독립된 모티프로서 지니지 못하였던 중요성을 지니게 되기 시작한다. 영혼과 감각의 경계에서 눈물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활용되었고 또 당시 유행했던 정감과 에로티시즘이 뒤섞인 감흥을 만들어 내는 데 각별히 효험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미술과 문학에서 점점 인기가 있게 된 것은 특히 쉽게 감동되고 쉽게 정열이 타오르는 미녀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거나 혹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이를테면 하나나 지켜보는 대상이요 또 맛보는 대상이었다." "18세기에는 또한 여성의 옷차림의 '어지러움'이 이전보다 강조되고 있다. 훼방받은 목가(牧歌), 갑작스러운 바람, 넘어짐, 뛰어오름, 그리고 그 사이 여체(女體)의 가리운 부분이 드러나거나 흔히 '매력적인 어지러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제 색정적이고 감상적, 친밀함이 뒤섞여 색정적인 요소는 철학 및 과학의 계몽주의가 남긴 삽화에조차 나타나게 된다."(530-1)


"여기서 미덕이라는 것은 색정적 감정의 장치 전체와 떼어 놓고 생각될 수가 없다." "성적 자극은 항시 감상적이고 윤리적인 언어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것이 환기하는 훈기는 감상적인 윤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이러한 혼합은 18세기에 자주 발견된다. 디드로의 윤리적 태도는 색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열띤 감상성 속에 뿌리 박고 있으며 루소조차도 그 흔적을 여전히 보여 주고 있다. 점증하는 사회의 시민적 경향, 18세기 내내 유지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안정, 중간 계층 및 부유층의 안온한 생활, 이에 따라 이러한 사회 계층의 젊은 세대 사이에 정치상·직업상의 근심이 없어지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당대의 많은 글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미적 형식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무너졌을 때 그 문제성 있는 성격이 누구에게나 분명해졌지만 새로이 형성된 혁명적인 사상은 시민층의 감상주의를 흡수했고 이 감상주의는 그대로 남은 채 19세기로 넘어 들어갔다."(534)


"계몽주의의 선전 목적에 봉사하는 리얼리스틱한 구절의 스타일 수준은 생판 다르다. 그러한 보기는 섭정 시대 이후에 눈에 띄고, 더욱 빈번해지고 또 점점 논쟁적이며 공격적이 된다." "선전 방책으로 애용되는 '탐조등 수법'은 폭넓은 복합체의 한 작은 부분을 과도하게 조명하는 한편 강조된 부분을 설명하고 그 근원을 밝히고 또 균형이 잡히도록 나머지 부분을 보충할 만한 다른 모든 것을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그 결과 진실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말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왜곡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전면적인 진실과 함께 여러 요소의 적절한 상호 관련을 갖추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생활 형식이나 사회 집단이 생명을 다했거나 혹은 그저 애호나 지지를 잃어버렸을 때 선전가들이 그것을 부당하게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의 부당성은 사실대로 부당한 것으로 반(半)의식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나 사람들은 그것을 가학적인 희열을 느끼며 환영한다."(535-8)


"선전상의 방책으로 더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모든 문제의 극단적인 단순화이다. 이 단순화는 우선 문제를 정반대되는 하나의 대조로 좁혀 놓음으로써 성취된다. 그리고 이 대조는 검정과 하양, 이론과 실천 등등이 분명하고 단순하게 대립되어 있는 어지럽고 실속하고 기운찬 얘기 속에 제시되어 있다." "날카로운 대조법에 의한 문제의 단순화, 문제를 삽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어지럼증 나는 급한 속도와 함께 소설 「캉디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연이어서 불행이 일어나는데 이 불행은 필요한 것이며 그럴 만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고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에 값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설명되어 있다. 이리하여 냉정한 성찰은 웃음 속이 파묻히고 말아 흥이 난 독자는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논의나 형이상학적인 우주조화관 전반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게 되더라도 가까스로 겨우 보게 되는 것이다."(541-2)


17 중단된 만찬 2 ─18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루이 드 생시몽 공작은 17세기보다는 그가 실지로 회고록을 썼던 시대(18세기)에 분명히 소속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궁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는 되풀이해서 17세기 사람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말이다. 그것도 60년대나 70년대의 궁정이 아니라 90년대의 궁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침투해 들어갔던 90년대도 그가 글을 썼을 때는 이미 머나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18세기의 전반은 많은 뒷날의 발전을 예고하고 그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독보적인 개인과 사상과 운동의 수많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누가 비코를 17세기에 집어넣을 것이겠는가? 비코는 생시몽(1675년생)보다 7년 앞서 태어났고 그의 주요 작품도 몇해 앞서서 써내었다. 비코는 반(反)데카르트파였다. 마찬가지로 생시몽은 위대한 국왕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동시대인들에게는 외관상으로가 아닌 보다 더한 유사성이 있다. 취향이나 정신 성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살아생전에 벌써 낡아져 버린 과거로 되돌아간다."(572)


"두 사람 모두 절박한 내적 충동이 그들의 언어에 무엇인가 비범한 것, 때로는 사납고 지나치리만큼 표현적인 것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당대의 취향에 호소했던 쉬움과 쾌적함과는 상극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인간을 그리는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역사 진행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사변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들 두 사람은 인간이 그의 존재의 역사적 사실 속에 깊숙이 뿌리 박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당대의 합리주의적이고 비역사적 태도와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생시몽이 회고록을 쓰고 있을 당시에 최초의 흐릿한 싹이 보이고 있었던 역사주의가 설정하였던 종류의 역사 이론의 흔적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을 넘어서 있으면서도 개성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힘은 생시몽의 원근법 밖에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살아 있는 역사는 순전히 행동하는 개인과 특수한 심리 및 이에 따라 생겨난 여러 관계와 대립에 대한 통찰이다."(573)


18 음악가 밀러


"'중산 계급의 비극'이라는 장르는 사사로운 일, 가정사, 애처로운 일, 감상적인 것에 묶여 있어서, 이런 것들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 따르는 어조와 스타일로 하여 사회 무대를 확대하고 일반적인 정치 사회 문제를 포함시키는 데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와 사회 일반의 문제에로의 새로운 진로가 트였다. 이제는 애처롭고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사랑의 관계가 비협조적인 일가, 부모, 보호자 또는 사사로운 도덕적 장애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敵), 사회의 부자연스런 계급 구조와 부딪치게 된 것이다." "'질풍노도' 시대의 혁명가들은 루소의 선례를 따라, 관능적이고 애처롭고 감상적인 상태의 사랑에 가장 높은 비극적 위엄을 부여하면서도 부르주아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감상적인 요소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무릇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감정으로 생각되고 어떤 인생, 어떤 상황에서도 숭엄한 것이 되었다."(582)


"당대 독일의 상황은 넓게 사실적인 묘사를 쉽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상은 잡다한 것이었다. 삶은, 지배 군주주의 혈통과 정치적인 사정의 우연으로 하여 생겨난 '역사적 영토' 속의 혼란된 무대에서 영위되었다. 이 작은 영토 내에서 억압적이고 때로는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공손한 순종과 역사적인 전통성의 수용과 병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태는 사변, 내성(內省), 명상 그리고 지방적인 기벽(奇癖)의 발달을 조장하는 데 적당한 것이지, 보다 넓은 관련과 넓은 영역을 의식하면서 단호하게 행동과 현실을 겨누는 데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 역사주의의 기원은 그 형성기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헤르더는 역사를 가장 넓고 일반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깊은 특수성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역사 이해에는 구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들의 저작은 독일의 역사주의가 오래 지니게 될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586-7)


"즉, 한편으로는 특수주의와 민중적 전통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변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다 같이 구체적인 미래의 가시적인 징후들보다는 초시간적인 역사의 정신, 현재의 완전한 진화 완성에 그 관심의 초점을 둔다. 카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게 유지된 데에는, 18세기 말엽부터 점점 거스릴 수 없게 국외에서 밀려오는 구체적인 미래가 지도적인 독일인 대부분에게 가공할 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힘입은 바 있다. 프랑스 혁명이 그 영향력을 확산하고 뒤이어 사회적 격변을 가져오고 모든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새 사회 구조의 조짐들을 가져오는 동안, 독일은 혁명에 대하여 수동적이거나 수세적이거나 무반응의 태도만을 보여 주었다. 혁명을 적대시한 것은 위협을 당한 수구 세력만이 아니었다. 보다 젋은 지식인의 운동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괴테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587)


19 라 몰 후작댁 1 ─스탕달의 비극적 리얼리즘


"스탕달의 리얼리스틱한 문학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세계에서의 그의 편편치 못함, 자기가 그 세계에 소속해 있지 않으며 그 속에 자기 자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나왔다. 주어진 세계 속에서의 편편치 못함,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는 무력은 확실히 루소 류의 낭만주의의 특색이다. 스탕달은 '폭풍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또 자기 배를 위한 적절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기 설명의 지점, 리얼리스틱한 문학의 지점에 도달하였다. 지쳐 빠졌거나 낙심해 있는 것은 아니나 젊은 날의 성공적인 이력이 이제 먼 옛일이 되어 버린 가난하고 외로운 40의 사나이로 자기가 아무 데도 소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사회 현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 그때까지는 별 고통 없이 자랑스럽게 지녀 왔던 느낌이 이제 그의 의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고 마침내는 그의 문학 활동의 되풀이되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605)


"그러나 루소와는 달리 스탕달은 실제적인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삶의 관능적 향락을 열망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또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을 전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정복하려고 하였고 처음엔 이에 성공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성공과 향락이 그의 소망이었다." "스탕달의 관심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관심은 있을 수 있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상적으로 주어진 사회 속의 변화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시간적 원근법은 그가 시야에서 잃어버린 일이 없는 요소이며 삶의 형태와 양식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은 그의 사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건의 세계를 포착하고 그것을 내적 연관과 함께 묘사하려는 스탕달의 태도에는 역사주의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주의는 당시에 벌써 프랑스로 침투해 갔으나 스탕달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605-8)


"우리는 그에게서 합리주의적 경험적 관능적 모티프를 보지만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의 모티프는 거의 볼 수 없다. 절대주의, 종교, 교회, 신분의 특권을 그는 여느 계몽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미신, 속임수, 그리고 책략 등이 얽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체로 교묘하게 꾸며진 음모가 정열과 함께 그의 작품 구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 있는 역사의 동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정치적 관점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정치적 관점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낭만주의적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샤토브리앙 같은 작가들의 과장된 양식에 그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한편 그의 정치관에 따르면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사회 계급조차도 극히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낭만주의가 민중이란 말에 첨가해 놓은 감정적 가치를 추호도 섞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의 '공화주의적 미덕'에는 몸서리를 친다."(609)


"루소의 사상과 이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는 현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성공적인 저항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 버린 새 세계에서 편편치 못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가장 강렬하게 루소에게 매혹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세계에 반대하고 나서거나 외면하거나 하였다. 그들은 루소에게서 내부의 분열, 사회에서 도망치려는 경향, 물러나서 혼자 있으려는 요구를 물려받았다. 루소의 다른 측면, 즉 혁명적 전투적 측면을 그들은 잃어버렸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지적 생활의 통일과 문학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파괴하였던 외적 상황도 이러한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기까지의 시기에 나온 중요한 문학 작품 가운데서 당대 현실에서 도망하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다." "루소주의 운동이 겪은 엄청난 환멸로 인해, 이제 역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포착되지도 않은 18세기 류의 삶의 묘사는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613-4)


20 라 몰 후작댁 2 ─두 개의 리얼리즘


"발자크는 스탕달처럼 그의 이야기의 인간들을 정확하게 규정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 정립할 뿐만 아니라 이 연계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게는 모든 환경은 정신적 물리적 분위기가 되어 풍경과 주거 그리고 가구, 연장, 의복, 체격, 성격, 생활 주변, 생각, 활동, 운명에 삼투해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일반적인 역사의 상황은 여러 다른 환경들을 감싸는 대기가 된다(발자크의 분위기의 리얼리즘). 그가 이러한 묘사의 솜씨를 가장 능숙하게 또 진실되게 발휘한 것은 파리의 중간 또는 하류의 부르주아지나 지방의 사회를 묘사할 때였다. 그런 데 대하여 상류 사회의 묘사는 흔히 멜로 드라마적이고 사실에 어긋나고 또 작자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희극적인 것이었다. 다른 데에 멜로 드라마의 억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중간이나 하류층을 그릴 때에는 이것이 전체적인 진실을 손상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발자크는 상류 사회의 분위기 또 지성 사회의 분위기를 진실되게 그리지는 못했다."(620)


"스탕달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시대에 대항하며 생각하고 느낀다. 그들은 경멸을 가지고 나폴레옹 이후 시대의 권모술수의 세계에 내려간다. 구식의 관점으로 보면 희극적인 특성을 지닌 요소들이 언제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스탕달이 비극적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의 독자에게 그러한 공감을 요구하는 인물은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과 정열을 지닌 진짜 영웅이어야 했다." "발자크는 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시대의 제약적인 조건 속으로 보다 깊이 뛰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발달하게 된바, 현대의 현실을 객관적인 심각성을 가지고 대하는 관점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무것이나 얼크러진 사건이면 비극이고 또 아무 충동이나 위대한 정열이라고 허세적으로 마구 덤비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생 도처에 악마적인 세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언어 표현을 멜로 드라마로 과장하는 것은 발자크의 격정적이고 비판할 줄 모르는 기질과도 맞고 낭만주의적인 인생 태도와도 맞는 것이었다."(631)


"플로베르의 서술법을 스탕달과 발자크의 서술법과 비교해 보면, 서론적으로 현대 리얼리즘의 두 특징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스탕달과 발자크에서 우리는 작자가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끊임없이 듣는다. 때로 발자크는 그의 이야기에 계속적인 감정적, 풍자적, 윤리적, 역사적, 경제적 주석을 붙인다. 또 흔히 우리는 등장인물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듣게 되고 이런 경우 작자는 인물 자체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두 가지 면은 플로베르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플로베르에게 작자의 기능은 사건을 고르고 이것을 언어로 옮기는 일에 한정된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든지 순정하고 완전하게 표현되기만 하면, 거기에 붙여지는 어떠한 의견이나 판단보다도 사건과 거기에 관련된 인물을 보다 훌륭하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 책임과 솔직과 주의를 가지고 사용한 언어가 진실을 나타낸다는 깊은 믿음 위에 플로베르의 전 예술이 기초해 있다."(636-7)


"이렇게 하여 소재는 완전히 작자를 사로잡는다. 작자는 몰아 상태가 되어 그의 마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작용을 할 뿐이다. 가열한 참을성으로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면 그때그때의 소재를 작자는 완전하게 흡수하게 되고 여기에 따라 그것을 저울질하는 완전한 표현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소재는 마치 하느님이 내려다 보듯이, 그 참다운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된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소재나 본질적으로 심각한 면과 희극적인 면, 위엄과 저속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재현한다면 그것에 알맞는 스타일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다. 소재를 그 위엄의 정도에 따라서 구분하는 '스타일의 높이'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도 필요 없고 바른 이해와 정확한 분류를 위한 사후적 분석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 소재 자체를 묘사하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이 연유되어 나올 수 있다─플로베르의 생각은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637-8)


"플로베르의 스타일은 간단히 '객관적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심각성은 인간 생활의 격정과 얼크러짐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감동하지 않고 또는 감동한다는 표시를 드러내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한다." "삶은 밀어 올라오고 부글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느리게 흐르는 것이다. 당대의 평범한 삶의 핵심은 플로베르에게 질풍노도의 행동과 격정,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과 세력, 이런 것에 있지 않고 거죽은 공허한 일상번사지만 밑에는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전반적이고 만성적인 상태 속에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표토는 비교적 안정된 것 같으면서 실상은 터질 것 같은 긴장으로 차 있다. 사건들은 거의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플로베르가 그려 내는 개인적 사건과 시대 전체의 모습의 구체적인 결에는 무엇인가 숨은 위협이 드러난다. 시대에는 폭탄 장치처럼 어리석은 밀폐가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642-3)


21 제르미니 라세르퇴 1 ─없는 사람들과 심미주의


"19세기의 최초의 위대한 리얼리스트들, 스탕달과 발자크 그리고 플로베르에게서조차 하층 계급, 즉 본래의 민중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터전 위에서나 그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포착되지 않고 위쪽에서 바라본 대로 그려져 있다. 플로베르에게 있어서조차도 민중은 대체로 하인이나 배경 인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탕달과 발자크가 도입한 리얼리즘의 스타일의 혼합은 제4계급 앞에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은 당대 문명의 현실 전체를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시민 계급이 지배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대중들도 그들 자신의 힘과 기능을 더욱 의식하게 됨에 따라서 위협적으로 밀고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하층 계급 사람들은 진지한 리얼리즘의 주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쿠르 형제의 말은 옳았고 그들의 정당성은 증명되었다."(650)


# 공쿠르 형제 에드몽과 줄르는 1864년에 간행한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퇴」 서문에서, 문학의 대상이 되기에 너무나 저속한 불행의 형태는 없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제4계급 권리의 최초의 옹호자들은 거의 모두가 제4계급 사람이 아니고 시민 계급에 속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4계급에게 연결해 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소설은 거의 모두 그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했다. 이들 소설 속에는 하층 계급의 환경뿐 아니라 상류 시민 계급, 대도시의 암흑가, 갖가지 예술인 집단의 환경도 등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이든 간에 취급된 주제는 언제나 기이하고 예외적인 것이며 병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여행, 당대의 예술가, 18세기의 여성과 미술, 일본 예술 등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인상 특히 기이함이나 신기함을 위해 가치 있는 감각의 인상을 수집하고 묘사하였다. 그들은 흔하디 흔한 것에 식상한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미적 경험, 특히 병적인 미적 경험을 발견하고 재발견하는 직업인이었다. 하층 계급이 문학의 주제로서 그들의 흥미를 끈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였다."(650-1)


"이제 당대의 실제적인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도덕적, 정치적, 그렇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향을 회피하며, 유일한 의무라고는 문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문학관, 문학 이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학관이나 문학 이상은 취급된 주제가 감각적 생기를 띠고 뚜렷한 특성을 보여 주는 새롭고 낡아 빠지지 않은 형태 속에 나타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태도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 즉 완벽하고 독창적인 표현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며 상충되는 철학이나 이론의 충돌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신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 일반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들은 숭배의 대상, 거의 종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본래 표현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이었던 쾌락은 너무나 높은 지위를 떠맡게 되어 쾌락(delectation)이란 말(아주 하찮고 쉽게 이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은 이제 충분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658)


"물론 처음부터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미적 향락을 위해서 인상과 그 예술적 재구성에 완전히 몰두하는 파괴적인 자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단계가 있지만 이런 태도는 19세기 후반기에 계속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당대의 문명과 당대의 사회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는 속절없는 무력감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로 하여금 당대한 문제를 외면하도록 강력히 작용하였다." "본능적인 혐오와 불가피한 밀착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있으나 동시에 의견의 영역, 가능한 주제 선택, 생활과 표현의 형태 면에서 개인의 특이성을 발전시키는 일 등에 있어서는 거의 무질서한 자유를 누리면서 오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의 수요가 많고 또 벌이가 좋은 대중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작가들은 순수 미학의 영역에서 고집불통의 독불장군이 되거나 혹은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실제로 개입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659)


22 제르미니 라세르퇴 2 ─졸라와 그의 동시대인들


"에밀 졸라는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어깨를 밟고 서 있으며 그들과 공통점이 많다. 그도 또한 신경쇠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심미적 리얼리스트의 무리 가운데서 뚜렷하게 달라 보인다." "졸라 예술을 혐오스럽고 누추하고 외설스럽다고 하면서 몹시 분격하였던 그의 적수들 가운데엔 전 시대의 가장 거칠고 상스러운 형태의 그로테스크하며 희극적인 리얼리즘조차를 태연히 때로는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았다. 그들을 그토록 분격시켰던 것은 졸라가 자기 예술을 '저속한 스타일'의 것이기는커녕 희극적인 것으로도 내세우지를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적었던 모든 글줄은 모든 것이 가장 진지하고 또 도덕적으로 의도되었음을 나타내었다. 그의 글의 총계(總計)는 오락이나 예술적 실내 유희가 아니라 졸라가 본 대로의 그리고 독자들이 작품 속에 보도록 촉구된 당대 사회의 참다운 초상이었다."(662, 665-6)


"거칠고 참담한 쾌락, 이른 나이의 타락과 급속히 닳아 없어지는 육체, 방탕한 성생활, 성교가 돈이 안 드는 유일한 낙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생활 조건에 비해 너무 높은 출산율, 이러한 모든 것의 배후에서 적어도 가장 정력적이고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하려는 혁명적인 적개심, 이러한 것이 소설 「제르미날」(1888)의 주제이다. 이들은 서슴없이 감각적인 말로 번역이 되었고 가장 뚜렷한 말이나 가장 추악한 장면 앞에서도 주저할 줄 모른다. 이 스타일의 기술은 인습적인 의미로서의 즐겁게 하는 효과를 낳을 것을 전적으로 포기하였다. 반대로 그것은 불쾌하고 답답하고 볼품없는 진실에 봉사한다. 그러나 이 진실은 동시에 사회 개혁을 위한 행동에의 소환장이기도 하다." "졸라는 스타일의 혼합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앞 세대의 순수하게 심미적인 리얼리즘을 넘어섰다. 그는 시대의 대문제(大問題)를 재료로 작품을 창조하였던 극소수의 19세기 작가의 한 사람이다."(667-8)


"러시아인들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진지하게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저속한' 것이란 문학상의 범주를 진지한 문학적 취급에서 제외해 버리는 고전주의 미학은 러시아에서 단단히 뿌리박지도 못했던 것 같다. 또 러시아 리얼리즘이 19세기에야 그것도 19세기 후반기에야 비로소 본때를 보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사회적 지위나 계급과 관계없이 모든 개개 인간이 신(神)의 창조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기독교적이며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근대 서양의 리얼리즘보다는 고대 기독교의 리얼리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및 지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활동적이고 개명(開明)된 시민 계급은 러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시민 계급은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속에서조차 발견할 수 없다."(678-9)


"이 크나큰 민족의 집안에서 19세기 동안 줄곧 가장 강력한 성질의 내면 운동이 크게 퍼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산출된 문학 작품을 보면 틀림없이 확인된다." "러시아 리얼리즘 속에 드러나 있는 내면 운동의 본질적인 특징은 묘사된 작중 인물들의 절대적이며 무한하고 격정적인 경험의 강렬성이다. 그것이 서구 독자들이 받는 가장 강력한 인상인데 누구보다도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 그렇지만 톨스토이나 기타 작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인들은 19세기의 서구 문명에서는 희귀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경험의 직접성을 유지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실제적, 윤리적, 혹은 지적인 충격은 즉각 그들의 본능의 깊은 부분에서 그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조용하고 거의 식물적인 존재로부터 실제적인 혹은 정상적인 문제에서 무시무시한 극단으로 옮아간다. 그들의 활력, 행동, 사고, 감정의 그네추는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폭넓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680-1)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심하지만 다른 작가에서도 발견되는 사랑에서 미움, 다소곳한 헌신에서 짐승스러운 잔학성, 진리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쾌락에 대한 가장 속된 욕정, 경건한 순진성에서 잔인한 시니시즘에로의 변화에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요소가 있다. 이러한 변화가 흔히 동일 인물 속에서 과도기도 없이 어마어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진동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인물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의 말과 행위는 과학적 초월, 형태 감각, 예의 범절에 대한 경의 때문에 서구 제국의 작가들이 가차 없이 표현할 수가 없었던 종류의 혼돈스러운 본능의 심층을 드러내 보여 준다.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중구(中歐) 및 서구(西歐)에서 알려지게 되었을 때, 놀란 독자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어마어마한 정신의 잠재 가능성과 표현의 직접성은 리얼리즘과 비극의 혼합이 마침내 그 진정한 완성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681)


23 갈색 스타킹─새로운 리얼리즘과 현대 사회


# 새로운 리얼리즘의 특징 : 의식의 다인적(多人的) 묘사, 시간층의 개념, 외부적 사건의 비연속성, 관점의 이동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를 향하여」(1927)에는 몇 개의 중요한 스타일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화자라는 자격의 저자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거의 모든 진술은,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의 과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램지 일가의 여름 별장이나 스위스인 하녀의 경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작가적 상상력의 대상인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소설의 등장인물 램지 부인이, 어떤 특정한 순간, 사람, 물건 또는 상황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 또는 느끼게 된 것의 묘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가 램지 부인의 인물됨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전연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소설 가운데 나오는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그 여자의 인상과, 그들에게 끼치는 그 여자의 영향을 통하여서만 얻어진다."(699)


"한 방울의 눈물에 대하여, 어떤 가정들을 설정하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존재들,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추측하는 인간들, 그리고 뱅크스 씨 등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의 현실 말고도 또다른 객관적 현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우리는 거기에서 받게 된다. 그런 객관적 현실에 대한 표시는, 기껏, 어떤 행위의 외부적 틀에 대한 짤막한 언급, 즉 〈램지 부인은 눈을 들면서 말했다〉 라든가, 〈언젠가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뱅크스 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1부 5장의) 마지막 문단에 이르면, 우리는 저자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중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이 그 여자의 상황 그리고 그 여자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가질 법한 그런 의심증과 궁금증 같은 것을 가지고 램지 부인을 관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699-700)


"프루스트는 객관성을 목표로 하며,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써, 그는 그 자신의 의식을 길잡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은 특별한 종류의 의식이다. 그것은 아무 때나 움직이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을 기억할 때 작용하는 그런 의식만을 가리킨다. 그것은 과거의 현실들을 모두 살아나게 하는 힘을 가진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그러한 현실들의 현장이었던 과거에 그것이 처해 있던 상태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으며 이 새로운 상황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면서 새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이 의식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식과 현저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단히 과거의 일들을 서로 대면도 시키고, 또 그것들이 일어났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때의 한계 내에서 그것들이 가졌던 편협한 의미, 또는 그것들의 내부적 시간의 연속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710-1)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에서 외부적으로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 또는 큰 재난 같은 것은 마치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들인 것처럼, 인물들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자격이 없는 사실들인 것처럼 취급된 반면,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어떤 단편적 시간은 인간의 전 인생을 포용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펼쳐 보여 줄 능력을 가진 것으로, 즉 신용할 만한 정보의 출처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 즉 일상의 소재들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순에 따라, 외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든가 사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인생의 큰 전환점 같은 것에 큰 강조를 주며 충실하게 설명하려 드는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점은 일상이 소재의 통합적인 묘사의 표현력을, 외부적인 사건이나 사실 중심인 연대 순서 표시의 표현력보다 더 신용하고 있다는 말이다."(718-9)


"사실상 나의 이 저서도 이런 방법을 예증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다. 나는, 가령 유럽에 있어서의 사실주의 발달사 같은 것은 도저히 쓸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방대한 자료 속에서, 나는 이런저런 시대의 한계를 정하는 일, 또 그 각 시대에 이런저런 작가들을 배치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 등에 관한 끝없는 논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내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별도로 그런 문제를 다룬 자료들을 읽음으로써 급작스런 지식과 정보를 거두어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방법, 즉 오랜 시일을 두고 특별한 목적이 없이 발견해 낸 몇 개의 모티프로 하여금 나를 이끌게 하고, 이것들을 내가 평소에 자연스러운 연구 활동을 통하여 친숙히 알게 되고 의미 깊게 생각하게 된 원전(原典)과 배합시켜 보는 방법은 성공과 소득의 전망을 가진 것으로 나는 본다."(7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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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조건 - 근대 미학의 경계 근대 미학 3부작
오타베 다네히사 지음, 신나경 옮김 / 돌베개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서문


"근대 미학의 확립은, '예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창조', '독창성' 같은)의 확립을 수반하며, 이 개념들이 미학을 내부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미학으로 몰리게 한 동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제도로서 확립된 '미학'의 내부에서는 그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미학'의 외부에 있는 것이 '배경'(地)이 되어, '미학'이 '형상'(圖)으로서 성립하는 것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이 표제에 '조건' 내지 '경계'라는 말을 사용한 데는 그 내부와 외부, 혹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주제로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서는 다양한 '배경'이 미학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부각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면서 배경과 형상의 교차에 근거하여 미학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 혹은 다양한 문맥에 속하는 논의 가운데서 '하나의' 미학사를 읽어내려 하는 학문적 관심 그 자체를 반성하고, 제도로서의 '미학'을 내부로부터 외부로 개시하는 것, 이것을 목표로 한다."(5-6)


프롤로그 중심의 상실


"괴테는 『문학상의 상퀼로트주의』(1795)에서 '중심의 상실'을 언급한다." "괴테에 의하면, '고전적인 국민 작가'가 가능한 상황은 '자국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건과 그 결과'가 '훌륭하고 의미 깊은 통일'을 갖춘 경우이다. 그러나 당대의 독일에는 이런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사회적·문화적으로 하나로 결합하는 '보편적인 국민 문화'라는 '중심점'의 결여야말로, 현대에 이르러 고전성이 결여된 원인이다." "반反상퀼로티즘을 표방한 괴테는, 자신의 논의가 지닌 비정치성(이라는 정치성)을 관철하여, 18세기 후반의 독일 작가들이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학교'에서 '보편적인 국민 문화'가 성립되었다고 말한다. 즉, '고전적 작가'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점'은 독일 작가들이 '노력'한 결과로 이제야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테의 논의는, 미학 이론상으로도, 비정치적 정치성으로도 확실히 '고전주의'적이다. 그럼에도 괴테의 바로 이런 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낭만주의' 운동의 한 출발점이 된다."(21-3)


"이 역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인물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문학에 관한 대화』(1800)에서 루도비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신화를 획득하거나, 혹은 차라리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진지하게 협력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이전에 존재했던 신화의 부활 내지 복고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신화'를 의미한다. '오래된 신화'와 '새로운 신화'는 대조적인 방식으로 성립한다. '오래된 신화'는 〈감성적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것, 생동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형성〉된 자연적 신화이다. 그에 반해 '새로운 신화'는 〈정신의 가장 심원한 깊이에서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출처가 있다. 도대체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감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부로 회귀하는 교체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에 있다. 이 정신의 힘에 의해서만, '인류'는 〈자신의 잃어버렸던 중심점을 다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25)


"『아테네움』(1798) 제116단장斷章의 말을 상기해보자. 〈낭만적 문학은 어떤 실재적 관심에서도 관념적 관심에서도 자유로이, 시적 반성의 날개에 올라타고 양자의 중간에 떠다니며, 늘 이 반성을 거듭하여 무한한 계열의 거울과 같이 이 반성을 다수화한다.〉 이 반성의 과정 속에서만 '낭만적 문학'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낭만적 종류의 문학은 여전히 생성 중에 있다. 아니, 영원히 생성할 수 있을 뿐이므로 결코 완성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 고유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 문학'은 '발전적=전진적progressiv'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발전성 내지 전진성은 단순히 한 장르로서 '낭만주의' 문학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 일반의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문학은 낭만적이며 혹은 낭만적이어야 한다.〉" "슐레겔에서 '중심점'의 결여는 근대적 정신의 (편파적인) 관념성에서 유래한다. 이 관념적 원리의 편파성을 '정신의 본질'에 근거하여 전진적 내지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주의의 과제이다."(26-7)


"그리스·로마의 고전기를 이상으로 하는 '고전주의'도, 중세를 이상으로 하는 '낭만주의'도, 역사상의 어떤 과거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추구하여,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모방하여 현재 상태의 예술을 쇄신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그런 의미에서 양자 모두, 반동적인 동시에 혁신적이다)." "여기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전통'을 사후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창조적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동시에 '전통'이 그 자체로서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에 '중심'이 부재함을 인정하고 '전통'의 (새로운) 해석=구성이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전통'인가 '투기'인가 하는 양자택일 대신에 '전통'과 '투기'의 역설을 역설로서 긍정하고, '전통'과 '투기' 사이에 열려 있는 중심 없는 공간 속에 감히 머무르는 것이다."(33-7)


# 투기投企=계획에 대한 감각 : '투기=계획'이란 계속 생성하고 있는 실재적인 것의 관념적 싹이며, 이 싹은 '장래로부터의 단편'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은 '발전적=전진적'인 '방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제1장 소유


"고전주의적 이론에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이 있다. 그것은 규범이라 할 고대의 예술가를 모방하는 것이야말로, 후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에드워드 영은 '독창성'이라는 개념을 확산시킨 계기가 된 『독창적 작품에 대한 고찰』(1759)에서 이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고전주의적 이론에 의하면, 예술가가 의거해야 할 규범은 고대의 예술가 내부에 있다." "이러한 고전주의적 이론에 대하여 영은 오히려 타고난 것의 의의를 강조한다. 영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소유한 것'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 토지, 즉 타고난 능력이다.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은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소유한 것'을 '경작'하는 데서 멀어져, '학식'이라는 타자에게서 '차용해온 지식'에 만족하게 하는 결점이 있다. 이와 같이 영의 독창성 이론의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차용물─자기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대개념이다. '차용해온 지식'이란 바로 공유화된 그리스-라틴의 고전전 전통이다."(47-8)


"소유권과 예술의 관련성에 관한 유럽의 전통적 논의에서, 그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호라티우스의 『시학』이다. 그 한 구절은 18세기 중엽까지 효과를 유지했으며, 그것은 전통적 예술관에서 예술가 내지 작가가 하는 역할을 명백하게 진술한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항을 최초로 제시하기보다는,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편이 좋다. 공공적인 소재publica materies도 당신 자신의 것privati juris이 될 것이다.〉" "고대인의 '권위'에 따르는 한, 사람들은 '차용물의 풍부함' 내지 '수입품'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갈고 닦음으로써 스스로 작품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타고난 능력의 경작(즉 도야)이야말로 풍부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때 처음으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예술가야말로, '권위'authority에서 자기를 해방하고 작품을 스스로 창조하는 '작가'author가 된다."(43, 48-9)


"독창성의 이론은, 개인의 정신적 개체성·유일성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개인이 스스로 창출한 작품에 대하여 배타적 소유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독창성의 이론을 격렬하게 비판한 괴테는 각각의 예술가를 고립된 자로 바꾼 독창성 이론을 예술가의 집합성으로 대치한다. 본래, 만약 '내'가 '나 자신의 내부에서 획득'한 것만이 '나의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나'라고 믿어버린 것 가운데서, 과연 어느 정도가 정말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타자에게서 얻은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나 자신의 내부에서 얻은 것만을 '나'로 간주하는 일종의 순수주의도 하나의 방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타자에게서 얻은 것을 포함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항상 독창성에 관해 말하는데, 대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내가 위대한 선행자나 동시대인에게 빚진 것을 모두 병기한다면, 거기서부터 남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독창성 이념에 대한 비판은 전통의 복권과 결합한다."(67-8)


"독창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면, 독창적인 예술작품이란 그것은 창출한 독창적인 예술가의 배타적 점유물, 양도 불가능한 사유물이 아니라, 선행하는 예술가와 후속하는 예술가에게로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지적 소유권의 옹호자가 의도에 반해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약 티텔이 말했듯이 '정신적 소유권'이 〈영원히 나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으로 계속 존재하여, 결코 타자의 것으로는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본디 이러한 정신적 소유권은 '저작권' 등의 법제도를 통해서 옹호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라는 법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신적 소유권이 어떤 정신적 소산을 '창출한 개성적이며 정신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법제도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는 사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양도되지 않는 저자의 권리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작권법이 저자의 정신적 소유권을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다."(70-1)


"그러나 이상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독창적인 저자'라는 것이 정신적 소유권을 둘러싼 법제도가 만든 단순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독창적인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까닭은, 그것을 향수하고 해석하는 사람들─나아가서는 이 작품에 자극되어 창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위임되어 이른바 공공적인 것, 즉 공유물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유물은 '고대인의 모방'을 논하기 이전의 고전주의자들이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의 규범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어버린 사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작품의 공공성이란, 그 작품의 해석이라는 개별적인 작업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라서 단순히 '물품'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작품이 장수한다는 것은 그 예술작품이 매번 새로운 독창적 해석(혹은 창작)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변모하여 공유물이 되기 때문이다. 공유물은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71-2)


제2장 선입견


"애디슨은 '인위적 취미'artificial taste와 '자연적 취미'natural taste를 대비한다. 〈인간의 자연 본성은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 본성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든 경우, 모든 신분의 독자들에게 칭송될 것이다.〉" "'자연적 취미'에 기초하는 작품은 〈통상적인 일반적 감각[상식]을 가진 독자〉라면 '경우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누구라도 향수할 수 있다. 애디슨에 의하면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장엄한 단순함'으로 충만된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 가요 내지 민요' 또한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 "애디슨에 의하면, 고대에서 근대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간의 자연 본성은 기교나 고상함refinement 속으로 숨어, ······ 결국에는 예의 바름 속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그 원인은 '자연적 취미'에 기초한 작품을 '기교', '고상함', '예의 바름'이라는 근대의 인위적 이상으로 단죄하려 하는, 바로 근대인의 '선입견'에서 찾아야 한다."(79-80)


"데이비드 흄은 우선 취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입장─모든 종류의 미와 추에 관해 흔히 사람들의 감정은 매우 다르다는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덧붙인다. 물론, '작문'이나 '시'가 따라야 할 '취미'의 '기초'를 (마치 '기하학적 진리'와 같이) '선험적인 추론'으로써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취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취미의 '기초'는 우리의 '경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모든 나라에서 모든 시대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간주되어온 것[=이른바 고전적 문학작품]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시'가 따라야 할 '기술의 규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규칙의 보편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기술의 보편적 규칙 모두가 단지 경험에, 즉 인간의 자연 본성에 공통된 감정의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같이 흄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공통성이 있다는 데 의거하여, 취미의 기준이 갖는 보편성에 근거를 부여한다."(84)


"버크는 '감관'과 '상상력'에 관계하는 '취미'를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다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수한 의미에서 취미라고 불리는 것'(즉 '판단력'이 관여하는 '취미')은 비자연주의적인 것이라고 논의를 전개한다." "버크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의 지각가능한 성질'이나 (회화 속에) '정념'의 '묘사'를 지각하는 한에서, 그 쾌는 단지 '감관'과 '상상력'에 의거할 뿐이다. 그러한 한에서 우리의 '취미'는 '자연 본성적'으로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수많은 예술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것은 단지 '지각 가능한 대상'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며, 사람들이 엮어 넣은 '도덕'적 세계이다.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 '감관'과 '상상력'을 초월한 '판단력'이다. 또한 '판단력'에 의한 판정은 판단력의 자연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반복된 훈련'을 통한 '이성적 추론의 습관'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버크는 이와 같은 훈련을 통한 '보다 세련된 판단력'이야말로 바로 '탁월한 의미에서 취미라 불리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91-2)


"버크는 취미가 '감관', '상상력', '판단력'이라는 삼자의 복합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취미의 '토대'가 '감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함으로써 취미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한다." "애디슨, 흄, 버크의 이론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18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친 '취미론'은 자연주의적 취미론의 아포리아와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소한다. 자연주의적 취미론을 지탱하는 것은, '개별'에는 '보편'이 자연 본성적으로 내재한다는 확신이며,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개별'과 '보편'이 무매개적=직접적으로 결부된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취미론은 동시에,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선입견'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입견'이란 '개별'과 '보편'의 중간에서, 문화적, 역사적으로 상대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취한다. 자연주의적 취미론은, 이러한 '특수'한 차원에 위치한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스스로의 근본적 전제 때문에 그것을 굳이 무시한다. 여기에 자연주의적 취미론의 아포리아가 있다."(93-4)


"레이놀즈는 『회화에 대한 강연』(1769~1790)의 제7강연에서 회화의 본질에 관계하는 '긍정적이며 실체적인 미'와, 회화의 비본질적인 측면에 관계하는 '장식'을 구별한다." "레이놀즈에 의하면 '장식'은 확실히 '일반적 원칙'에 기초하는 '긍정적이며 실체적인 미'에 비하면 비본질적이며 부차적인 '지위'를 점할 뿐이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장식'을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장식을 무시해야 한다고 하는 엄숙주의rigorism는 '자연과 이성'에, 즉 인간이 단지 원칙에 근거하는 이성적 존재일 뿐 아니라, 감성적 측면과도 결부된 존재라는 인간의 자연 본성에 위배된다. 레이놀즈는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완벽한 취미'를 '형성'하려면 '두 번째 종류의 진리'에 근거한 '장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논한다. 또한 그는 이 '두 번째의 진리'에 근거한 '장식'에서 '국민적 취미'를 변별하는 특징을 추구한다. 이제 '지역적'인 특징은 단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되어야 할 것으로 다시 파악된다."(99-100)


"즉 예술은 (반 다이크 초상화의) '의복'에 보이는 바와 같이 항상 '가변적 원리'와 관계하는 측면, 즉 '장식'적 측면도 가진다. 18세기 잉글랜드의 조상이나 초상화에 그리스·로마풍의 의복이나 17세기 전반에 반 다이크가 그렸던 의복을 걸친다고 하는 사태는 '선입견', '통념'에 근거한 '두 번째 종류의 진리'에 관계하므로 '자의적'이며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의 측면은 이미 사실상 '권위'가 됨으로써 '진리로서 기능'하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권위'가 타당하다는 것은 일정한' 선입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구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국민'(특히 그 엘리트층)─에게 한정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상상력'에서는, '선입견'에 근거하는 '습관'에는 본래의 '자의적'이며 '자연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것을 '자연적인' 것─즉 '제2의 자연'─으로 전환하는 힘이 있다. 여기서 '국민적 취미'가 성립하게 된다."(103-4)


제3장 국가


"루소의 사회계약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계약자의 특수한 인격을 대신하여, 하나의 정신적 집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개인이 일반의지 아래 일치하여 사회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이미 '사회적 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 '사회적 정신'이란 '사회계약'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할 것이다. 즉, 두 번째 문제는 원인이 소산(결과)을 전제로 하는 순환이다. 이 순환을 두고 루소가 제기하는 해결책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 루소는 〈입법자는 ······ 논증하지 않더라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종교적]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라고 언급하며, '종교'의 권위에 호소한다. 두 번째로 루소는 〈이 지상에는 광채를 발하면서도 법률에 견디지 못했던 국민들이 많다. ······ 개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국민도 또한 그 청년기에만 순종적이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교정하기 힘들어진다. 일단 관습이 확립되고 선입견이 뿌리를 내리면, 그들을 개혁하려는 것은 위험하며 무익한 시도가 된다〉라고 주장한다."(120-1)


"'학문'과 '예술'이 사치나 허영심을 초래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추락시킨다고 비판한 것은 루소의 『학문예술론』이다. 칸트 역시 그러한 '해악'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학문'과 '예술'(혹은 '취미')을 단지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거기에 작용하는 '자연의 목적'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예술'과 '학문'이 그 '해악'을 통해서 인간이 도덕성을 지니도록 '준비'하게 한다는 목적론적인 사태이다. 『인간론』의 말을 빌리자면, '취미'란 〈인간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형성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러나 사회적 상황에서 타자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한다.〉 『판단력 비판』 제83절에서, '예술'과 '학문'은 그것이 〈의지를 욕망의 폭군적인 지배력에서 해방한다〉라는 점에서 〈훈련(규율)에 의한 도야陶冶[문화]〉라고 말한다." "이처럼 칸트의 역사철학은 '문화'라는 시점에서 '취미' 내지는 '미적 판단'(이라는 '반성적 판단력'의 작용)을 그 구성에 포함한다."(127-8)


"'국가의 창설'도 '국가 연맹'의 확립도 다같이 '자연의 기계적 과정'에 속한다고 간주하여 루소의 '순환'을 부정하는 칸트와는 달리, 실러는 오히려 이 '순환'을 계승하여 미학적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실러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개개의 부분(즉 구성원)이 각각 자립적 전체성을 유지하면서 협동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그에 반해 근대의 국가는 개개의 구성원이 전체성을 상실하여 단순한 단편이 되고, 그것에 대응하여 전체로서 국가도 또한 유기성을 잃고 부분들의 기계적 결합이 된다." "'유기적 생명'을 갖지 않고 기계적 편제를 취하는 근대 국가에서, 근대적 인간은 전체에서 분리된 개인=고독한 인간이고 또한 이 고독한 개인은 자기의 전체적 조화를 결여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해서 근대 국가는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과 구별되어, 개개의 구성원을 외적으로 지배하는 '추상적 존재'가 된다. 이렇게 부분과 전체가 서로 '소원'해지고 개인의 '도덕'과 국가의 '법'이 분리된다."(132-4)


"실러는 근대적 국가관과 대조적으로 국가이론의 내부에 '기계적-유기적'이라는 대개념對槪念을 도입한다." "〈국가가 개인들의 내면에 자기를 주장하는 방식은, (1)순수한 인간이 경험적 인간을 억압하여, 국가가 개인들을 지양할 것인가, 혹은 (2)개인이 국가가 되어, 시간 속의 인간이 이념 속의 인간으로 자신을 고귀하게 할 것인가이다.〉" "(1)과 (2) 둘 다 '이성의 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라는 점에는 공통한다. 그러나 (1)이 단지 인간의 이성적 조건만을 고려한 데 반해, (2)는 인간의 감성적 조건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 (1)에서는 인간의 감성적 측면이 이성적 측면에 억압되고, 그것과 대응하여 개인이 국가에 억압된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2)에서는 인간의 감성적 다양성이 그 다양성을 유지한 채로 이성적 통일성과 조화하고, 그것과 대응하여 개개인은 자기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 국가 속에서 자신을 체현한다. 여기에 실러가 추구하는 유기적인 이상 국가가 성립한다."(135-7)


"프랑스혁명 시대에 실러는 〈내적 인간에게서 분열이 다시 지양되기까지는 어떠한 국가 변혁의 시도도 시기상조이다 ······ 라고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프랑스혁명 이후의 시대로 시선을 돌린다. 실러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정치상의 모든 개선은 [개인의] 성격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서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조야한 국가체제의 영향 아래서는 성격이 고귀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격의 고귀화라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국가가 부여한 적이 없는 도구를 찾아내야 한다.〉 도대체 이 '국가가 부여한 적이 없는 도구'란 무엇인가? 실러는 '이 도구야말로 예술'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실러와 칸트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연적'인 것이 도덕성의 실현을 외적으로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칸트에 반해, 실러는 '자연적'인 것은 〈사회의 유지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라고 주장하고, 루소의 '순환'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미적 교육'에 의해서 해소하고자 한다."(140-2)


"감성적 욕구란 완전히 사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사람들을 통합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반면, 이성적·정신적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사람들을 통합하는 원리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을 처음부터 배제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개인들은 이성적 원리에 의한 통합에 관여할 수 없으며, 그 통합은 추상성을 피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인간의 감성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의 조화를 초월론적 조건으로 하는 미의 향수에서는, 감성적 욕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성적 원리에 기초하는 단순한 부류도 아니며, 개체적인 동시에 유적 존재, 즉 전체성을 담당한 개인이다. 그리고 미를 향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야말로 개개인의 다양한 독자성을 억압하지 않는 관계, '평등의 이상'이 성립한다. 실러는 취미를 통해서 자기의 개인적 감정을 보편적으로 서로 전달하는 사람들의 집합을 '미적 국가' 내지는 '미적 가상의 국가'라고 부른다."(149)


인테르메초 중심의 편재


# 인테르메초 :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대응하여 막간에 배치한 극을 지칭하며, 저자가 '중간 고찰'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노발리스는 『잡록집』 제122단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온건한 정치 형태[즉 군주제와 민주제라는 양극의 중간에 위치하는 절충적 국가체제]는 반은 국가이고 반은 자연 상태이며, 인위적이고 지극히 부서지기 쉬운 기계Maschine〉이다. '기계'로서의 국가,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이기적 욕구를 국가의 원리로써 조정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원칙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과제이다. '조야한 이기심'은 '전혀 헤아릴 수 없이 반反체계적'이며 '결코 제약되지 않는' 것이지만, '국가 체계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이기심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기계가 살아 있는 자율적 존재로 전환한다면, 큰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민주제의] 자연적 자의恣意와 [군주제의] 인위적 강제는 정신의 내부에서 해소될 때 서로 침투한다. 정신은 양자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정신은 항상 시적이다. 시적 국가야말로 진실로 완전한 국가이다.〉 여기서는 '기계'로서의 국가에서 '정신'으로서의 국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160-1)


"『잡록집』 제122단장에서 보이는 '기계'와 '정신'의 대립은 『신앙과 사랑』에서 다시 '문자'와 '정신'의 대립으로도 묘사된다." "노발리스는 단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전도된' 것으로서 부정하면서, 국가의 근저에 존재하는 '헌법', '법률'이라는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인격 속에 구현될 필요성이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추상적인 것과 그 구체적 상像과의 관계를 '이념'과 '상징'의 관계와 비교한다. 즉 노발리스에 의하면, 법률이라는, 그 자체로서는 완전히 추상물인 것을 구현한 (허구의) 국왕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법률에 대한 애착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애착의 대상이 되는 국왕은 '상징'으로서 '신비한 군주'(이성적 국가 체제)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제 〈통치자는 무한하게 다양한 연극을 상영한다. 그곳에서는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된다.〉 국민은 정치적 통치가 구체적으로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치자와 일체화하면서 이 정치적 통치에 참가한다."(162, 166-7)


"〈단지 몰沒정신적인 사람만이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의 제한이나 제약으로 인해) 부담이나 억제를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제한과 제약'이란,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의 피제약성(구체적으로는 실제의 국왕이 가지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얼핏 보면, '상징'으로서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중요한 듯이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 단장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상징'에 '자극'되어 '신비적 군주'를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여기서는 '정신'으로 불린다. 거꾸로 '정신'이 결여된 사람은 '상징'을 '상징'으로서, 즉 어떤 '이념'을 가리키는 '허구'로서 파악할 수 없고, 오히려 현실의 군주가 가진 피제약성에 의해서 억압당한다. 이와 같이 노발리스는 한편으로는 '상징' 군주제가 억압적으로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극'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힘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단장 모음집 『신앙과 사랑』을 '수수께끼 언어' 속에 엮어 쓰는 것이다."(168)


"노발리스는 어떻게 이와 같은 '상징' 이론에 도달했을까? 이 의문에 답할 열쇠가 『잡록집』 제73단장 속에 있다. 〈진정한 종교성에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신과 연결하는 매개항[=중간항]Mittelglied이다. 인간은 직접적[=비매개적]으로는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노발리스는 먼저 종교의 본질적 구조로서 '인간-매개자-신'이라는 삼자관계를 제기한다." "노발리스에 의하면,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자로서 선택되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선택들이 얼마나 서로 상대적인가? 사람들은 즉각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종교의 본질은 매개자의 성상性狀에 의존하지 않고 매개자에 관한 견해 속에, 매개자에 대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이념에 도달할 것이다.〉 즉 종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 어느 대상을 매개자로서 파악함으로써 신과 관계하는 것이며,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개자로 간주된 대상 그 자체의 특질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168-70)


"『잡록집』 제73단장의 종교론을 정치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는 '국민-매개자-국가'라는 삼자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어서, 매개자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과 국가의 직접적 관계를 주장하는 입장도, 매개자를 그대로 국가와 등치하는 입장도 동시에 부정된다고." "그렇다면 정치에서 무엇이 '매개자'가 될 수 있을까? 『신앙과 사랑』의 단장 18에서 노발리스는 〈모든 인간은 왕좌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sollen〉라고 말한다. 노발리스에 의하면 단지 한 사람의 군주만이 '국가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국가의 매개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일신론과 정치적 범신론의 결합이 의미하는 바다. 확실히 군주가 국가의 '중심점'Mittelpunkt을 이루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들도 또한 '중심점'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위치해야 한다. 세계는 '일자'一者에서 유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개체 속에 '일자'가 내재하며, 세계는 모든 곳에서 유출한다. 중심점은 편재하는 것이다."(173-5)


제4장 방위


"에티엔 콩디야크는 『인간 인식 기원론』 제2부 제1장 '언어의 기원과 진보에 관하여'에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라는 역사적 전개과정을 상정하고 이 역사적 과정을 두 시점으로 파악했다. 즉, 한쪽은 언어의 음악성과 생동성이라는 관점인데, 그것에 입각할 때 고대 언어 즉 동방 내지는 남방의 언어야말로 그 이상을 체현한 것이 되고, 북방의 언어는 쇠퇴 내지는 퇴락으로 간주된다. 다른 시점은, 언어의 정확성이라는 시점인데 그것에 입각할 때 북방의 언어인 근대 프랑스어야말로 그 이상을 체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콩디야크는 이중적 사고에 의해 이른바 신구논쟁에 관하여 일방적으로 고대인파 또는 근대인파의 입장에 서지 않고, 북방적 근대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북방적 근대는 인간에게서 상상력의 의의를 무시하고, 인간을 분석력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의 새로운 종합이 요구되며,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어이다."(195-6)


"헤르더는 『셰익스피어론』(1773)에서 '그리스'와 '북방'(즉 잉글랜드)을 대비적으로 파악한다. 양자는 지리적 대립인 동시에 역사적 대립이기도 하다. 그가 이러한 대립을 제기한 까닭은, 그동안 사람들이 이 대립을 자각하지 못하여 '고전적' 척도로 셰익스피어를 읽고서 〈셰익스피어가 소코플레스, 에우리피데스, 코르네유, 볼테르와 같은 고전적인 비극시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미(美點)를 규칙 위반과 비교하는〉 것으로 셰익스피어를 '옹호'할 것인가 하는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택일 상황에 있는 한,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시점을 바꾸어', 셰익스피어를 고전적 연극과 다른 척도에 입각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그랬듯 남방적 원리에 기초해서 셰익스피어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북방적 원리에 기초하여 〈셰익스피어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감수感受하는〉 것이 필요하다."(210)


"남방과 북방의 관계에 새로운 이론을 제기한 이들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초기 낭만주의자들이다. '남방 문학'과 '북방 문학'이라는 대개념을 제기한 슈타엘 부인은 〈우울, 즉 천재의 작품에 풍부하게 보이는 이 감정은, 거의 가 북방의 풍토에만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 우울한 시는 철학에 가장 적합한 시이다〉라고 썼다." "콩디야크도 북방을 철학적이라고 간주했는데, 그것은 철학이 분석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적 기질을 '우울' 기질에서 찾는 슈타엘 부인에게서 북방은 철학과 결부되기는 하나 그 경우 철학은 보다 내성적이고 냉정한 분석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념의 강한 작용을 전제로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람들은 북방보다 남방 쪽이 정념이 격렬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는 오류로 느껴진다〉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념이란 신체적으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 정신적 정념이며, 그것은 북방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215-7)


"A. W. 슐레겔이 보기에, 고전적 예술에서는 감성적 현상이 그 자체로 긍정된다. 고전적 예술은 '감성적인' 혹은 유한한 세계에서 인간의 '자연적 조화'가 표현된 것이란 점에서 완성의 범위에 도달해 있고, 고전적 인간은 이와 같은 예술에 의해 표현되는 감성적 세계를 초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전적 시는 고전적 인간이 스스로 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소유'했던 조화로운 세계를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바로 '소유의 시'이다. 그러나 근대정신은 감성적 세계에서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그리스적 이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적 분열'을, 또 감성적 세계에서 현상하는 법이 없는 '무한한 것'을 의식한다." "즉 이러한 분열을 전제로 정신적 세계와 감성적 세계 사이에 고차적인 유화를 초래하려는 것에 근대 예술의 특질이 있다. 이 때문에 근대의 시는 '동경의 시'가 된다. 슐레겔이 고대의 '고전적' 예술과 대비해서 '낭만적'이라고 특징지은 것은 이와 같은 근대의 예술이다."(220-1)


# 유화宥和 : 상대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냄


"그렇지만 낭만적 예술은 서로 배타적이라는 의미에서 고전적 예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예술이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대립 및 유화 속에 성립한다는 것은, 유한한 것의 표현으로서 고전적 측면을 내부에 포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인 것은 고전적인 것처럼 〈이종異種의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종적인 것'의 '뒤섞임'을 추구한다. 이것은 슐레겔에 의하면 원래 '낭만적'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간취할 수 있다. 〈이 낭만적이라는 말은 로망스romance, 즉 라틴어와 옛 독일어 방언들이 뒤섞임으로써 성립된 민중어들을 나타내는 명칭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마치 근대의 교양이 북방에서 유래한 것과 고대의 단편이라는 이질적인 구성요소가 융합되어 성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해, 고대인의 교양은 훨씬 단일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적 정신은 원래 상이한 요소로 이루어진 혼성물이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낭만적 예술이다."(222)


"예전에 '북방'은 '고전주의'라는 이름 아래, 남방 예술의 '이식'을 도모하고, 자신을 무리하게 남방의 '식민지'로 변화시켰지만(빙켈만), 식민지 해방 전쟁에 승리한 '북방'은 '낭만주의'라는 명칭 아래 '토착의 것'을 중시하게 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의 확립과 함께 '방위'가 내포한 표상이 해체되는 과정을 간취할 수 있다. 첫째로 문학의 자생성, 토착성의 주장은 결코 북방적, 낭만적 문학을 특징짓는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남방 그리스 문학에도 똑같이 타당하다. 둘째로, 국민 문학이라는 이념은 동일한 북방 문학 내지 근대 문학 안에 국민성에 따른 차이를 초래한다. 남방적, 고전적 원리에서 자신을 해방한 '북방'의 예술은 오히려 국민 문학이라는 새로운 이념 아래 분산된다. 국민 국가의 진전과 함께 남북 내지 동서라는 풍토적 요인과 밀접하게 결부된 구분의 중요성이 상실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국민 문학이라는 이념이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225-6)


제5장 역사


"'체계'와 '역사'의 관계를 묻는 일, 이것은 역사철학의 과제일 것이다. 실러는 한편으로 칸트의 비판철학 구상을 계승하면서 '역사의 소재'인 역사적인 사실들과, '체계'인 '보편적 세계사' 내지 '보편사'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밝히려 했다." "이때 연속적 과정인 '세계의 추이'에 반해, (자료가 결여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세계사'는 '단편의 집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세계사'가 단지 '단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학문의 명칭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러에 따르면 이러한' 결여'를 보충하고 '단편의 집합'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행하는 것이 '철학적 지성'이다. 〈철학적 지성은 이들 단편을 인공적인 결합의 고리로 연관시킴으로써 집합Aggregat을 체계System, 즉 이성적인 방식으로 관련된 하나의 전체로 고양한다.〉 여기서 '철학적 지성'의 작용은, 역사 속에 일종의 '가설'을 두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인 여러 사상을 하나의 체계 내지 전체로 통합한다."(247-9)


"세계사를 어떤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할 때, 즉 개개의 사건을 체계로서의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파악할 때, 세계사를 파악하는 각 개인 또한 자기가 속하는 시대나 민족을 초월한 '인류'로 고양될 것이라고 실러는 주장한다. 즉, 실러의 역사철학은 고찰 대상인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고찰하는 주체인 개별을 보편과 연관시킨다. 이 이중의 연관이, 1789년 취임 강연에 나타난 실러의 역사철학을 지탱했다." "그런데 보불전쟁Napoleonic War의 패배를 눈앞에 두고 쓰인 미완의 산문시 『독일의 위대함』(1797 혹은 1801)은 1789년의 그것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있다." "『독일의 위대함』의 특징은 본래는 '개인'을 '인류'로 고양하여 연결해야 할 '세계사'에 '특수'로서, '국민'이 이른바 불쑥 끼어들고, 이 '특수'가 그 특수성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의 담당자 내지 대표로서만 평가되어 정당화되었다는 점이다. 즉 '세계사'란 하나의 보편성을 겨루는 다양한 특수가 분쟁하는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251-5)


"이와 같이 실러는 미학에 '역사적' 사고를 도입하더라도, 있어야 할 예술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즉 실러가 주제화한 '특수'란 보편적 가치의 담당자로서 특수이며, 이 '특수'는 보편적 가치 그 자체의 역사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완전히 똑같은 시기에 예술의 이론이 예술의 역사와 불가분하게 관계한다는 주장이 슐레겔 형제에 의해서 제기된다. '역사적' 사고가 미학의 중추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동생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문학사 구상을 가장 빠른 단계로, 동시에 총괄적으로 나타낸 것은 그가 1800년에 출판한 『문학에 관한 대화』이다. 이 논고는 7인의 대화 형식으로 쓰였는데 그중에서 안드레아스가 행한 강의, '문학의 시대들에 관해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술의 학문은 예술의 역사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결코 비역사적으로 답할 수 없고 단지 문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256-7)


"그렇다면 철학과 역사라는 얼핏 보기에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연관시켜 보편타당한 것과 특수한 것의 혼합을 사고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슐레겔은 여기서 '비평'의 역할을 발견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그가 1804년에 공개한 일련의 레싱론이 시사적이다. 〈비평이란, 역사와 철학의 중간항이며, 그것은 양자를 결부하여 양자를 새로이 제3의 것으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역사와 철학의 중간항'인 '비평'이 하는 일은 어떤 사항의 '특성 묘사'이며, 그것은 그 사항의 역사적 전개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하는 것, 혹은 반대로 이 개념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역사적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이란 결코 무시간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에 고유한 '내적 역사'를 가지는 것으로, 이 결합을 표면화할 때 역사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비평'이 성립한다고 슐레겔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문학사도 또한 본질적으로 '비평'으로서만 가능해진다."(259-60)


"슐레겔에게 전체[역사]와 부분 간의 상호적 관계는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으로서 파악된다. 전체와 부분 간의 상호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그것은 그가 말하는 의미에서 '비평'에 다름없다─은 현존하는 불완전한 전체에서, 있어야 할 완전한 전체를 상상함과 동시에, 이 있어야 할 전체를 선취하여 그에 어울리는 부분을 만들어낸다는 두 가지 계기를 불가분한 것으로 포함한다." "과거가 우리에게 '단편'으로만 부여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과거에 보완적으로 관계할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단편'으로 부여되어 있는 과거를 '메움'으로써 비로소 실현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보완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과거의 작품에 관계되는 비평과, 미래의 있어야 할 작품에 관계되는 비평은 뜻을 같이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발견'과 '미래의 구상'은 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비평'은 '예견적'이다."(262-4)


에필로그 중심의 비판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1908)에 입각하여 종래의 미학 이론─테오도어 립스의 심리학적 미학─이 예술에서 유일한 원리로 간주했던 '감정이입' 충동에 대해서, 그와 다른 한 원리로서 '추상' 충동을 대치했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로마 및 서양 근대'의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간주하는 '감정이입'형의 고전주의적 예술관─즉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 중심주의적'인 예술관─에 반론을 제기하고, '추상' 충동에 기초한 예술, 구체적으로는 고대 이집트나 중세 고딕 예술을 심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와 깉이 그의 양식심리학적인 미학 이론은 과거의 예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예술사·미술사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 책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경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당시 최신 예술운동이었던 추상회화 혹은 표현주의 예술을 담당하던 사람들('뮌헨분리파' 혹은 '청기사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283)


"보링거는 이런 동시대의 예술가·예술운동에 촉구되어 1910년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현대 예술(특히 표현주의 운동)의 이론화를 시도했다. 거기서, 현대 예술에 관한 관심이 예술사 연구와 결부되고, 나아가서는 과거 예술의 의의에 관한 미학적 이론을 변모시키는 과정을 읽어낼 수 있다. 고딕과 표현주의의 만남이 초래한 것은 예술에서 '게르만적인 것=독일적인 것'의 찬양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에 걸쳐서 표현주의 운동이 쇠퇴하자, 그것에 호응하는 형태로 그의 미학적·예술사적 이론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고딕을 '게르만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자신의 기본적 입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고딕의 프랑스성性을 예술사적인 연관성 속에서 정당화한다. 이것은 그 자신이 고전주의로 회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표현주의는 오히려 비유럽적인 것으로, 즉 독일인이 자신의 유럽성을 망각한 데서 생겨난 오류라고 비판적으로 파악하게 된다."(283-4)


"보링거에게 이론이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으로 다시 부여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용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사용하는 개념 그 자체를 역사 현상과의 상호응답을 통해서 다시 단련하는 것, 즉 개념의 비판적인 형성이었다." "어떠한 미학사 연구도 동시에 미학사 비판일 수 있다. 즉 그것은 현재 부여되어 있는 (다양한) 미학사 기술을 재고하고, 이른바 이러한 미학적 기술에 의해 지워진 다른 (다양한) 미학사를 간파하고, 그렇게 해서 미학사를 다시 기술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시선을 단순히 과거로 향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예술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는 다양한 미학적 개념을 그 성립 과정에 조응하여 음미하면서 이러한 개념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상대화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러한 개념의 의미 내용을 이른바 장래를 향해 비판적으로 형성하는 (혹은 재형성하는) 것이다."(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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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역설 - 근대 미학의 성립 근대 미학 3부작
오타베 다네히사 지음, 김일림 옮김 / 돌베개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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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예술의 탄생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을 포괄적이며 배타적으로 지시하는 개념 혹은 술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술'이라는 개념은 다름 아닌 '근대'의 소산인 것이다. 더불어 '예술'이라는 개념이 확립되는 양상은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개념─즉, 근대적인 의미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필요불가결한 '예술가', '예술작품', '예술 창조', '독창성' 등의 개념─의 확립, 그리고 이들 개념을 다루는 근대적인 학문인 '미학'의 성립 혹은 전개 양상과 어우러져 넓은 의미에서 '근대'의 본질적인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근대적인' 예술관을 가능케 한 다양한 이론적 조건을 개념사적 혹은 사상사적으로 논하고, 이를 통해 '근대적인' 예술관의 의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는 간접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지금도 여전히 그 내부에 머물러 있는 이론적 틀에 비추어보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가 '근대적인' 예술관에 대해 지니고 있는 표상 그 자체에 변용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17-8)


"전통적인 예술론은 예컨대 시학이 ars poetica[시작술]라고 불린 데서 알 수 있듯 '기술'에 속한다. 이러한 예술론(혹은 창작술)은 '변론술, 시작술, 음악술 등'과 같이 일찍이 개별 장르에 한정되어 있었다. 바움가르텐(1735)은 장르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예술론 일반을 ars aesthetica라고 부르고, 더 나아가 종래의 '기술'로서의 예술론─즉, ars aesthetica─을 '학문 형식으로 정비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 기술에서 학문으로까지 격상된 예술론 일반이야말로 그가 aesthetica(미학)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상은 기술(나아가서는 학문)을 하비투스로서 파악하는 고전적 전통에 의거하고 있다. 바움가르텐이 예술 창작이라는 기술은 '질서 있게 배열된 여러 규칙의 총체complex regulaum'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여러 규칙'을 '명확하게, 그리고 지적 명료성을 갖추어 파악'함으로써 종래의 기술이 '학문 형식으로 격상'된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고전적 전통에 의거한 것이다."(22-4)


"달랑베르(1751)에 의하면 예술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자유로운 기술'과 구별된다. 첫째로 예술의 종차는 그것이 '자연의 모방'을 시도하고 '쾌'를 불러일으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달랑베르가 예술을 여타 '자유로운 기술'과 구별한 두 번째 논거이다. 기술은 본래 '실정적positif이고 불변하는 법칙'에 기초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점에서는 문법학, 논리학, 도덕학 등의 '자유로운 기술[자유학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술에서 본질적인 부분은 기계적인 부분─구체적으로 말하면 선행한 '발견'을 손 혹은 신체를 통해 단순히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비非기계적 부분, 즉 실행에 앞서는 '발견'이며 거기에 '확정된 부동의 여러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랑베르가 '발견'의 근간이 되는 법칙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의 법칙이란, 결코 다른 기술의 근간이 되는 '법칙'과 같이 그 기술을 배우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전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천재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규정된다."(28-9)


"그러므로 '불변하는 각종 규칙'을 기술의 요건으로 한다면 예술은 기술이면서 기술을 능가하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동시에 예술의 본질은 그것이 기술을 넘어서는 점에 있다. 예술에서 기술성은 단지 그 '기계적인 부분'에 결부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은, 하비투스로서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을 넘어선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고전적 예술 이론에서도 '타고난 천재성'의 중요성은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단지 자신의 좋은 자연 본성에 따르고자 하는 이는 실수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했듯, 고전적 예술 이론은 '자연 본성'이 '여러 규칙' 아래 포섭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에 반해 달랑베르가 말한 예술의 탈하비투스화는, 시를 '시가 따라야 할 여러 규칙의 총체'에서 해방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ars의 체계는 18세기 중엽에 기술의 탈하비투스화의 경향과 함께 해체되었고, 그러한 해체를 배경으로 근대적인 예술관이 움트기 시작했다."(29-30)


제1장 창조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창조한다'creare라는 술어는 오직 신에게만 귀속되었으며, 인간에게는 창조하는 능력이 부정되고 단지 '제작하는'facere 능력만이 인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이 어떤 것을 제작할 경우 항상 '질료인'을 전제로 하지만, 창조란 이러한 질료인을 전제로 하지 않고, '무無에서 ex nihilo 무언가를 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할 수 없〉으며 〈창조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고유한 활동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18세기에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점은 크리스티안 볼프가 저서 『형이상학』(1720)에서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창조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서술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창조의 주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예술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신과 유비類比적인 존재로서 파악될 필요가 있었다는 예상이 일단 성립할 것이다."(35-6)


"예술이란 그 자체에 의해 기초가 다져지는 자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자연만이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고 예술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만드는 것은 모두 '자연 속에 근거를 갖도록' 요청되며 '자연에서 일탈한 모상模像' 제작은 부정된다. 예술가가 자연을 '모방'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자연의 규범성, 범례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규범성은 무엇에 기초해 있을까? 〈자연은, 혹은 자연 속에서 또는 자연을 통해 활동하는 창조자는 모든 가능적 세계 속에서 현재의 세계를 골라서 그것을 현실성의 상태로 가져왔으나, 그것은 창조자가 자신의 어긋나는 법 없는 통찰로 현재의 이 세계를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으로 간주하고, 또 자기 목적Absicht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볼프의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여 이를 예술 이론으로 확장한 요한 보드머와 요한 브라이팅거는,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최선관(optimisme)을 계승하고, 바로 여기에 자연모방설의 기초를 세웠다."(39-40)


"라이프니츠는 『변신론』辯神論(1710)에서, 볼프는 『형이상학』에서 각각 '가능적 세계'를 설명할 때 '소설'을 예로 들었다. 즉 소설은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제시하므로 '다른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규정된다. 그러나 소설은 단지 가능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것에 불과하며 라이프니츠도, 볼프도 가능적 세계론에 의해 예술작품을 논리적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그들을 계승한 볼프학파의 이론가는 가능적 세계라는 개념을 예술 이론에 도입한다." "시인(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존재 의의는 현실적 세계의 우연성을 앞에 두고,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모방의 대상을 넓히는 데 있다. 예술가 고유의 창작력이 활동하는 장場은 가능적 세계에 있다." "브라이팅거(1740)는 시인은 신의 위치에서, 신이 실제로 창조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창조할 수는 있었던 가능적 세계를 예술작품이라는 가상假象 속에 이른바 현실화한다고 생각했다."(43-5)


"칸트는 『판단력 비판』(1790)에서 예술가의 창조성을 구상력構想力의 측면에서 논한다. 비록 예술가의 구상력이라도 전혀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표상을 생산할 수는 없으며, '현실의 자연에서 얻은 소재'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것은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가의 구상력은 자신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자연을 '가공'하고, 오성에 대해 '오성이 자신의 개념 속에 고려하지 않았을' 풍부한 '소재'를 '주고', 이 개념을 '미적[직감적]으로 확장'한다. 그 결과 오성과 구상력은 〈서로 생기를 북돋아주고〉 서로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를 위한 힘을 스스로 강화하는 활동〉을 수행한다. 이 '연상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 예술가는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소재를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즉 자연을 넘어선 것으로 가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예술가의 '구상력'에 창조성이 성립힌다. 이와 같이 논함으로써 칸트는 예술가의 행위를 자연의 규범성에서 해방한다."(60)


"A. W. 슐레겔의 자연모방설 비판(1801)의 요점은, 예술의 본질이 자연에서 얻은 소재를 형성하고 개조하는 그 자체에 있으며 결코 〈범례적 대상을 단순히 불완전한 방식으로 작품 속에 거두어들이는 데〉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슐레겔이 자연모방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예술의 범례가 자연 속에 이미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슐레겔에 의하면 예술가가 모방해야 할 것은 '창조적 자연'의 창조 과정이다. 창조적 자연은 타자에 의해 움직이는 단순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고 그 자체로 완결된 유기적 작품을 창조하는데, 예술가도 바로 이러한 창조적 자연을 모방해서 예술작품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와 창조적 자연은 유비 관계에 놓인다." "슐레겔의 논의를 볼프학파의 이론과 구별하는 독자성은, 예술가가 창조적 자연을 찾는 방도와 결부된다. 즉 슐레겔은 예술가가 '외적 자연'만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도 창조적 자연을 찾아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62-4)


"프리드리히 슐레겔도 『문학에 대한 회화會話』(1800)에서 예술을 창조적 자연의 모방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떠올려야 할 것은 바움가르텐의 신화적 세계의 이론이다. 바움가르텐에게는 '미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미 확증된 세계'인 전통적인 신화의 세계야말로 예술의 창작과 향수를 가능케 하는 전제였다. 그에 반해 슐레겔에 의하면 예술가에게 '중심점'을 이루어야 할 이러한 신화의 결여야말로 '우리 [근대] 문학'의 출발점을 이룬다. 신화에 관한 이러한 견해의 차이야말로 바움가르텐의 『미학』(제1권)이 간행된 1750년과 슐레겔의 『문학에 대한 회화』가 간행된 1800년을 가로막는 것이며, 이 간극이 우리에게 근대적인 예술관의 성립 지점을 보여준다. 슐레겔에 의하면, '근대의 시인'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모두 '내면에서 만들어내야 하고', '각각의 작품'은 '무無에서 시작된 새로운 창조'가 된다. 같은 시기의 단편 『이덴』(1800)의 문구를 빌리자면, 〈예술가란 자기 안에 중심Zentrum을 가진 자이다.〉"(66-8)


제2장 독창성


"예술과의 관계에서 original이라는 말은 먼저 복제copy나 번역과 대비해서 '원작'을 의미하며, 두 번째로 예술이 모방해야 할 대상을 의미했다. 두 경우 모두 original한 것은 예술가의 행위에 앞서 존재하며, 예술가의 행위에 있어서 일종의 규범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확실히 첫 번째 경우에서 original한 것은 예술가에 의해 생기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뒤따르는 예술가가 그것을 복제하거나 번역할 때 그 행위를 규제하는 모범의 위치에 있으며, 그 범위에서 두 번째 경우에 마찬가지로 규범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18세기 중엽 이후 예술가의 독창성originality이 강조된다는 것은 original한 것이, 예술가의 창작에 선행해 주어진 모범에서 예술가 자신으로 이행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독창성 개념의 성립 과정은 예술가가 자신에게 앞서는 규범에서 자기를 해방하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서 일종의 규범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79)


"18세기에 독창성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은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비유를 써서, 미지의 영역을 발견하고 세계를 화장하는 데서 독창성의 발로를 찾아냈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비유가 현실 세계에 한정되지 않고 '허구' 세계에서도 타당하다는 점이다. 윌리엄 더프(1767)에 의하면 〈진정으로 독창적인 천재성을 지닌 시인의 상상력은, 가시적인 피조 세계the visible creation의 그 어떠한 대상도 충분히 경이적이고 새로운 것으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에 ······ 한층 놀라움과 경탄으로 가득 찬 정경scenes을 탐구하면서 자연스레 관념적 세계ideal world로 돌진한다.〉" "지리상의 발견은 고대의 권위가 가능성의 한계라고 간주했던 것의 바깥으로 근대인을 해방했으나, 마찬가지로 그것은 비유로서도 또한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명법Imperative에 의해 설정되었던 한계를 넘어서는 독창적 창작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때의 독창성은 무엇에서 유래할까?"(83-5)


# 명법Imperative : 의지 일반의 객관적 법칙이 인간 의지의 주관적 불안정성에 대해 지니는 관계를 표현하는 정식定式이다. 의지를 도덕법칙에 적합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강제Zwang이며, 도덕법칙은 그것이 의지에 대해서 강제적인 한에서 이성의 명령Gebot이라 불린다. 이러한 명령의 정식이 '명법'이다. 칸트는 명법을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으로 나눈다. 


"앨릭잰더 포프(1725)는 다름 아닌 자연모방설에 따라 셰익스피어의 originality를 칭송했다. 자연이라는 원천에서 직접 자신의 기술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가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며, 자연이야말로 바로 예술가의 originality의 origin이다. 그러나 자연의 원천에서 퍼 올리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다른 예술가를 모방해 버리고 자연의 근원을 직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방적 예술가가 낳은 등장인물은 서로 유사해져서 개성이 없어진다. 즉 모방적 예술가는 자연을 이른바 전통이라는 틀로 덮어씌워서 자연의 다양성과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추상화, 일반화된 인물의 [재생산적] 창작에 만족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에 반해 original한 예술가인 셰익스피어는 그야말로 자연이라는 원천에서 직접 퍼올리기 때문에 자연의 다양성을 작품 내부에 그대로 반영한다. 이와 같이 개인을 묘사하는 것을 평가하는 관점은 고전적 전통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것이다."(86-7)


"그러나 '자연'이라는 개념은 단지 모방되는 자연일 뿐 아니라 동시에 모방하는 예술가의 자연 본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느 예술가가 타자의 작품을 모방한다면, 그 작품은 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작품은 예술가의 '자연 본성'에서 생긴 경우에 한해서, 즉 그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결과'에 한해서 original이라고 간주된다. 예술가는 타자에게 빌린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는 자질에 바탕을 두고 창작해야 하는 것이다." "레너드 웰스테드(1724)는 '신체의 타고난original 성향'이 무용에서 고상한 모습을 만들어내듯 예술가의 '자연 본성'이 originals[비非모방적 작품]를 만들어낸다는 비례 관계를 인정하는데, 여기부터는 예술가의 '타고난 성향'이 originals를 낳는다는 데 귀결한다. 예술가의 타고난 특질이야말로 originals의 원천이다. Originality의 원천은 대상적 자연이 아니라 예술가의 자연 본성에서 구해진다."(93-4)


"그렇다면 근대에 과연 개성과 규범성(혹은 범례성)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을까?"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상호 관계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즉 독창적 예술가들의 상호영향 관계란 후속 예술가가 선행하는 예술가를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행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후속 예술가가 '자신의 고유한 독창성에 눈뜬다'는 점에 있다. 즉 어느 독창적인 천재가 그것과는 다른 별개의 독창적 천재를, 이른바 눈뜨게 하는 방식으로 예술은 계승된다. 그것은 뒤를 잇는 천재가 선행하는 천재의 작품에서, 일정한 규칙을 벗어난 자유로운 실천을 간파하고 이러한 자유의 가능성을 자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 예술가들의 상호 관계는 비非연속성을 띤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타고난 생산능력'인 '타고난 재능' 속에 그 '원천'을 지닌 독창성은 범례적이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매번 새로운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끊는 비연속성이야말로 예술가의 독창성을 나타내는 증표가 된다."(101-4)


"헤르더(1785)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산출한다는 환상, 다시 말해 '[자신은]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현재 혹은 자신이 되었다'는 환상을 품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발성의 감정'이 수반되어 있어서 타자에 대한 의존을 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자에 대한 의존은 단지 우리의 '어린 시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평생 지속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통을 필요로 하며 그 타고난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전통이란 결코 단순히 수동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모방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수용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고 적용하는가, 이것은 다만 그 사람, 즉 수용자의 힘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헤르더에게는 영의 독창성 이론이 간과한 것─즉 전통의 움직임 혹은 수용자가 전통을 바꾸면서 계승한다는 동적인 과정─에서야말로 진정한 독창성이 성립한다."(121)


제3장 예술가


"18세기에 예술을 파악하는 지배적인 방법은 '원상-모상' 관계를 기초로 한 일루저니즘Illusionism이었다. 일루저니즘의 미학을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뒤 보스에 의거해 그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은 원상과 모상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원상과 모상은 모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투명한 매체로서 원상을 '표상'하는 관계에 선다. 두 번째로 예술의 '매력'은 향수자에게 관심을 끌 만한 원상을 모방한 데 있으며, 원상과 비교하면 모방자의 기技나 예술가의 기량은 2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즉 〈시와 회화의 주요한 매력, 우리를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는 두 장르의 힘은, 이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상을 모방한 데서 유래하기〉 때문이며 '모방자의 기技(Art)'나 '예술가의 기량(adresse)' 그 자체는 결코 우리를 감동시킬 수 없다. 더 나아가 세 번째로 모상 그 자체가 원상을 표상하는 것이지, 향수자가 모상을 매개로 해서, 예컨대 예술가의 의도나 개성을 거기서 찾는 것은 아니다."(126-7)


"모방은 예술가의 기량과 결부된다. 즉 원상 자체는 관심을 끌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탁월한 기량에 의해 모방될 경우 향수자는 모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방자의 기량에 찬탄한다. 향수자에게 원상은 이른바 배경으로 물러나고, 모상이 모방자의 기량 덕에 전면으로 부상한다. 버크가 예로 든 것은 '몹시 투박하고 흔해빠진 부엌의 기구'를 그린 정물화다." "그와 대조적으로 공감이란 향수자가 예술작품의 표상 혹은 모방한 대상 자체의 품질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며, 대상에 대한 공감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모상이 이른바 투명해지고 원상이 전면에 나온다. 이것이 바로 18세기에 '일루전'Illusion이라 불린 사태다. 예술이 향수자에게 부여하는 힘은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 그 자체의 자연본성에 의한' 것이며, 여기서 모상이 부여하는 효과는 원상이 부여하는 효과 속에 흡수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경우에는 예술가가 '어떻게' 모방했는가가 문제가 되고, 두 번째 경우에는 예술가가 '무엇을' 모방했는가가 중요해진다."(135-6)


"버크는 『숭고와 미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1757) 제5편에서 이렇게 논한다. 언어는 회화처럼 어떤 사물과 유사한 상을 나타낼 수 없고, 단지 '습관'에 의해 그 사물의 '치환'이라 간주되는 '음향'을 낼 뿐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관념의 결합은 일반적으로 유사성이 아니라 단지 습관을 바탕으로 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이 결합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의적이고 약정적으로 성립한다. 그 때문에 언어에 관해서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모방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버크 자신이 서술했듯 〈엄밀히 말하자면 시를 모방의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하여 원상-모상 이론으로 시를 논하는 것도 부정된다." "이러한 언어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버크는 제2편 제4장에 〈나는 [언어에 의한] 묘사에 의해, 최고의 회화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강한 정동情動(emotion)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이는 버크가 언어의 '세 번째 효과'라 부른 것에 대응한다."(143-4)


"언어가 부여하는 세 번째 효과란 '혼의 정념情念'이다." "버크에 따르면, 명석한 표현clear expression이란 대상을 정확히 표상하는 것이 목표이며, 대상을 분석하는 지성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언어의 두 번째 효과인 표상 환기 기능을 추구한다. 그에 반해 강력한 표현strong expression은 언어의 정념 환기 기능과 결부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강력한 표현에는 말하는 주체가 관여한다는 점이다. 물론 명석한 표현에도 말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하는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을 지향한다." "반면 강력한 표현의 경우 어느 대상에 대해 말하는 이는 자신이 그것을 '느끼는' 대로, 그 대상이' 느껴지는' 경우에 한해 말한다." "그러므로 명석한 표현에서는 '말하는 이'(더 나아가서는 '듣는 이')가 무시되고, 그 표현의 초점이 기술된 '대상'에 있는 데 반해 강력한 표현의 초점은 '말하는 이'가 느끼는 방식에 있으며, 대상은 단지 '말하는 이'의 이러한 개별적인 시점을 통해서만 기술된다."(144-5)


"버크는 제1편에서는 원상-모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쾌快의 하위 분류로 모방과 공감이라는 대對개념을 제기했지만, 제5편에서는 원상-모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예술의 작용을 모방과 결부하고, 공감을 그에 대치한다. 제5편에 따르면 공감은, 예술가가 어느 대상을 자기가 느낀 대로 말하고, 또 향수자도 예술가에 의해 '느껴진 대로' 그 대상을 향수할 때 가능해진다." "버크는 원상-모상 이론의 타당한 범위를 예술 일반에서 회화로 한정한 데 그쳤고, 결코 이 이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버크가 원상-모상의 투명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를 명시함으로써, 모방과는 다른 새로운 예술 이념을 고했다는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원상-모상의 투명한 관계 해소와 함께 대상을 '느껴지는 대로' 말하는 화자가 나타난다. 표상 환기 기능의 측면에서는 '회화'에 뒤떨어진다는 시의 부정적 특질에서, 예술작품을 총괄하는 주체, 향수자가 자신의 시점을 대입할 주체인 예술가라는 이념이 탄생하는 것이다."(148-9)


"모제스 멘델스존은 『랩소디』(1771)에서, 종래의 이론이 '표상'과 '표상의 대상'과의 '객체적 관계'에만 주목한 채 '표상'과 '사고하는 주체'와의 '주체적 관계'를 무시한 점을 지적하고, 여기서 종래 이론의 오류를 찾는다. 확실히 표상은 그 대상의 '상Bild이거나 각인'이며 표상과 그 대상은 한없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사고하는 주체'에게는 표상과 표상의 주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나쁜 것의 표상도 표상으로서, 즉 혼의 인식이나 욕구의 여러 능력을 움직이도록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상이라고 본다면, 완전성의 어떤 요소이자 어떤 쾌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래의 이론이 표상과 표상의 대상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표상이 '사고하는 주체'와 관계하는 것을 시야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대응하여 종래의 이론이 '완전성'을 객체의 완전성에 한정했던 오류가 지적되어 표상에는 객체적인 완전성과 함께 주체적인 완전성이라는 두 종류의 완전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다."(160-1)


"다음으로 예술가의 위치에 대해 고찰해보자. 멘델스존은 『여러 예술에서의 숭고한 것과 소박한 것』(1758)에서 숭고를 두 종류로 나눈다. 첫 번째 종류는 〈표상되어야 할 대상이 그 자체로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성질을 지니는〉 경우이며 이는 '객체적 숭고'라 불린다. 여기서는 〈기호 표시되는 사상事象이 기호보다 훨씬 위대하다.〉 즉 기호 표시되는 원상이 너무 숭고하므로 원상과 모상 사이에 균형이 성립하지 않는다." "두 번째 종류의 숭고, 즉 '주체적 숭고를 분별한 점에 멘델스존 논의의 독자성이 있다. 주체적 숭고란 멘델스존에 의하면 〈원상이 그 자체로는 결코 찬탄할 만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그렇기는커녕 〈그 자체는 아주 하잘것없는 대상〉이라도─이 원상이 〈예술가의 천재성Genie의 힘에 의해 숭고하게 보이고, 찬탄할 만한 것이 될〉 때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찬탄은 원상보다는 모상으로 ······ 표상되는 것보다 오히려 표상하는 방식Kunst der Vorstellung으로 향해진다.〉"(165-6)


"즉 두 번째 종류의 숭고에서도 원상과 모상(기호 표시되는 것과 기호)의 균형은 결여되었지만, 그 관계는 첫 번째 종류의 숭고의 경우와 역전된다. 대상은 비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술가에 의해 숭고한 대상으로 변화된다. 향수자는 이 두 가지 대상을 비교하고, 양자의 격차는 원상을 모상으로 변환하는 예술가에게 의존한다고 판단하고, 이 예술가의 '천재성'을 찬탄한다. 즉 낯익은 대상을 숭고한 대상으로 변환하면서 표상하는 예술가의 방법 그 자체가 향수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므로 두 번째 종류의 숭고를 성립시키는 것은 표상되는 대상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예술 고유의 차원이다. (1771년 판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이러한 견해가 일루저니즘 미학의 근본적인 전제에서 벗어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상(표상)은 원상(표상되는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자립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이 모상(표상)은 자신의 자립성을 가능케 한 예술가를 가리키게 된다."(166-7)


"실러에게 '소박 문학'과 '정감 문학'이라는 대對개념은 일종의 유형 개념인 동시에 역사 철학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그 점에서도 일종의 '고대인-근대인 논쟁'의 변주이다." "('자연의 은총'을 입었기에, '자연스러운') 소박 시인은 아직까지 〈감성과 이성······이 그 작업에 관해 구별되지 않은〉 시대(전형적으로는 고대 그리스로 대표되는 시대)에 있으며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조화라는 목표에 도달해 있다. 그리하여 소박 시인은 〈현실을 가능한 한 완전히 모방하는 것〉으로 인간 본성을 표현할 수 있다. 만일 묘사 대상을 내용, 그것을 다루는 방식을 형식이라고 부른다면 형식은 내용에 몰입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묘사되는] 객체Objekt가 시인을 완전히 점유하고 있다.〉 그와 대응해 작품의 향수자는 작품에서 그것을 형성한 저자의 주체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향수자에게는 〈시인이 작품이며 작품이 시인〉이라는, 작품과 시인의 동일화가 성립한다."(171-4)


"'반성적 지성'reflektieren der Verstand이 특징을 이루는 근대의 '정감적' 예술은 잃어버린 자연을 추구해야 하지만 추구되어야 할 자연은 결코 사실의 자연, 즉 여전히 유한성과 결합된 자연이 아니라 '이상'理想의 자연이다." "근대에는 더 이상 〈[묘사되는] 객체Objekt가 시인을 완전히 점유〉하는 일 없이, 오히려 거꾸로 시인의 '반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야말로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또 이와 대응해 향수자는 어느 작품에 그려진 내용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시인에 의해 매개된 경우에 한해서 수용하는 동시에 이 매개를 의식하고 있다. 즉 향수자는 〈작품 속에서 우선 시인을 탐구하여 시인의 심정Herz과 마주하고, 시인과 함께 시인이 그리는 대상에 대해 반성하는 것reflekieren, 즉 [시인에 의해 묘사되어 있는] 객체Objekt 속에서 [시인이라는] 주체Subjekt를 직관한다.〉 이리하여 소박 문학에서 확인되었던 '원상-모상'의 이항관계는 '예술가-예술작품-향수자'라는 삼자관계로 변용된다."(175-6)


제4장 예술작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기술관은 다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진다. '기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라는 명제에서 알 수 있듯, 먼저 자연과 기술 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주장된다. 그 유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으며, 기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자연과 마찬가지로 합목적적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기술과 자연의 관계는 그야말로 모방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까닭에 양자 사이에서는 공통성과 함께 상이함도 인정해야 한다. 확실히 어떤 소산을 합목적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기술과 자연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에 내재된 이 생산의 원리(형상인形相因)는, 인위적인 것에는 내재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 안에 존재한다." "이와 같이 기술에서 질료와 형상은 서로 외적이며 또한 작용인作用因(제작자)은 질료의 외부에 존재한다. 그에 반해 자연의 경우에 질료와 형상은 동일한 실체를 이루고 작용인은 이 실체에 내재한다."(185-6)


"근세 초기의 기계적인 기술의 전개는 새로운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 기술관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움직임을 대표하는 것이 베이컨과 데카르트다." "물론 베이컨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자연의 소산과 기술의 소산에서는 그 '작용인=작용자'가 다르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베이컨은 자연과 기술, 혹은 자연의 소산과 기술의 소산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연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자연에 작용하는 것이야말로 기술의 작업이라고 생각한 베이컨에게, 기술이란 결코 사물에 단순한 '외적 형상'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의 확인을 통해 직접 자연에 '작용하면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연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이컨에 의하면 '각종 기술지'(historia artium)는 '자연지(historia naturalis)의 일부분' 간주되어야 한다."(187-8)


"기술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베이컨의 생각은 그가 자연 그 자체를 기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자연지'가 자기 안에 '기계적인 기술의 시도'를 포함하려면 자연의 작업 자체가 기계적인 기술의 작업과 등질等質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계론적 자연관이야말로 기술과 자연의 동형성同型性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 또한 기계학을 자연학의 일부 혹은 일종으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기계학의 이론은 모두 자연학에도 타당하다고 논한다. 기계론적 자연관을 표방하는 데카르트에게 자연적인 물체(생명체를 포함하는)와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 사이의 본질적인 상이함은 인정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난 데카르트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기계적인 기술을 하나의 모델로 해서 생명체까지 포함하는 자연적인 세계 전체를 파악하고자 한다. 여기서 이른바 신체 기계론 혹은 동물 기계론이 등장한다."(188-90)


"라이프니츠는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기계론적 자연관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의 차이를 강조한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자연의 기계'와 '우리의 기계'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이함에 있다." "인간이 만드는 기계는, 일정한 부분 혹은 요소를 전제로 하여 거기서 형성된 복합물 혹은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자연적인 사물의 경우 언뜻 보면 그 최소의 요소라 여겨지는 것도, 실제로는 여러 부분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여러 부분 자체도 말하자면 프랙탈Fractal과 같은 상태로, 여러 부분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이리하여 라이프니츠는 〈자연의 여러 기계, 즉 살아 있는 신체는 가장 작은 부분에서도 기계이며 그것은 무한히 나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자연과 기술, 즉 신의 기술과 우리 기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라고 결론짓는다. 즉 자연의 기계와 인간의 기계 혹은 양자를 만들어내는 신의 기술과 인간의 기술은, 무한성과 유한성이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이다."(192-4)


"버크가 자연의 소산과 기술의 소산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논의한 것은, 그가 기계론적 자연관에 기초해 기술과 자연의 동형성을 주장한 베이컨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자연의 소산은 바로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진 매우 유능한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크는 동시에 기술의 소산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것은 인정하면서 그것이 일정한 조건 아래서 자연의 소산에 적합한 '무한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버크는 (암묵적으로) 기술의 소산과 자연의 소산이라는 대상 영역의 구분과 결부되는 논의를, 대상을 파악할 때의 관점의 상이점─즉 동일한 대상을 기술의 소산으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비非기술적인 것(혹은 자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는가─과 결부되는 논의와 교차시키고 있다. 자연적인 소산이나 모두 기술(즉 신 혹은 인간의 기술)의 소산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쾌'를 주는 경우에 한해서 양자는 기술의 소산으로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14-5)


"보통 기술자의 작업은 '미리 책정된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다. 그러나 칸트(『판단력 비판』(1790))에 따르면 예술가는 미리 책정된 목적을 수행할 때 '합목적성'을 잃는 일 없이, 그러나 동시에 이 목적 그 자체에서는 연역적으로 도출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소재'를 주고, 그것을 '표현한다.' 예술가는 이 점에서 여타 기술자와 구별되므로, 예술가의 작업은 '규칙에 의한 교시에서 자유롭고' 예술가 자신도 자기의 행위를 미리 통찰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해서 자신이 자기의 소산을 만들어내는지, 기술記述하거나 학문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도를 넘어선 풍요로움을 만들어내는 천재란 더 이상 예술가의 의식적인 측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속하는' 것, '[예술가라는] 주체의 자연'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작품이 의미를 전부 퍼 올릴 수 없는 풍요로움과 충만함을 보여주는 까닭은, 예술 창작이 의도와 '주체의 자연'이 교차할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218)


"예술이 예술의 이름에 걸맞은 때는, 그것이 예술가의 기계적인 기술이 빚어내는 유한한 의도에 의한 속박을 벗어나 '유한한 오성'에 의해서는 '전개'될 수 없을 법한 '무한성'을 제시할 때이다. 그것이 가능한 경우는 예술가의 활동이 단순히 '의식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동시에 '몰의식적'일 때이다. 예술 창작 그 자체는 예술가 자신도 완전하게는 통찰할 수 없는 과정, 예술가 자신을 이른바 '본능적'으로 부추기는 과정이며, 이러한 창작 활동에서야말로 예술가는 〈스스로 의지하는 일 없이 자기 작품 속에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를 넣어둘〉 수 있다. 그렇다면 무한성을 나타내는 예술작품─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갖는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의식, 고찰, 반성'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자유로운 은총'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셸링은 이와 같이 인위성과 자연성의 교차야말로 예술작품을 여타 기술의 소산과 구별하는 무한성을 가능케 한다고 논했다."(220-1)


제5장 형식


"루소에 따르면, 감각은 '단지 감각으로서 작용하는' 한, 감관이라는 '자연적인 것'에 속하고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감각은 동시에 정신적인 것을 지시하는 '기호' 혹은 '닮은 상'으로도 작용한다. 이 경우 감각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효과'인 정념을 일으키지만, 이러한' 정신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즉 그 원인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에 의해 표현, 표상 혹은 모방되는 것, 다시 말해 감각이 '기호'로서 지시하는 것 안에 있다." "그러므로 루소가 보기에 감각을 '기호'나 '모상'으로 변화시킬 때의 '선묘'야말로 회화의 본질을 이룬다. 물론 선묘라 해도 색채가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 루소 자신이 말하듯 〈선묘란 다름 아닌 색채의 배열이기〉 때문이다. 색채와 선묘는 이른바 그 소재(질료)에 입각하는 한 구별되지 않는다. 양자의 상이점은, 이 질료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을 지시하는 기로호서 기능하는 가에 있다."(226-7)


"루소가 비판하는 예술관이란 예술에서 감각적인 것을,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에서 자립시켜서 탈기호화하고, 감각적인 여러 요소들의 '결합'combinaison이나 '관계'rapport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간파하려는 입장, 즉 형식주의적 예술관이다. 루소가 비판하는 형식주의적 미학─즉 비非모방적인 회화를 범례로 하는 예술관─은 형태에 대해 색채의 우위를 설명하는 입장과 결부되어 있다. 즉 형식주의란 회화의 형태(라는 '형식적인 것')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색채(라는 '질료적인 것')의 의의에 착목한다. 그렇다면 형식주의란 '형상-질료'라는 전통적인 질서를 이른바 변용 혹은 해체하면서 그것을 통해 '질료적인 것'을 예술에서 고유한 매체로서 (어떤 독자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칸트는 회화술에서 '색채술'Farbenkunst을 선별하고, 이를 '음악'과 함께 어떤 것도 '묘사=표상vorstellen'하지 않는 '감각이 유동하는 예술'에 포함시킨다."(230-1)


"애덤 스미스는 『모방적인 기술론』에서 예술적인 모방을 규정하면서 원상과 모상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조각에서 모방 매체는 모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3차원적 입체이며, 양자 사이의 거리는 좁기 때문에 '모방하는 것' 자체가 달성하는 역할은 한정된다. 조각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모방되는 대상의 가치'로 환원되기 때문에 '모방되는 것' 자체가 '매우 아름답거나 관심을 끄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 반해 회화에서는 '모방하는 것'[예술작품, 모상]과 '모방되는 것'[원상]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모방되는 것 그 자체가 달성하는 역할이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그에 따라 모방하는 것의 의의가 커진다. 즉 회화에서는 '모상의 가치'가 증대하므로 회화의 가치는 '모방되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고, 모방하는 것은 모방되는 것에서 일종의 자립성을 획득한다. 이 가치는 모방되는 것 그 자체에는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모방되는 것은 '관심을 끌지 않는 것indifferent', 더 나아가 '불쾌한 것'offensive이어도 된다."(246-7)


# 원제는 『모방적인 기술이라 불리는 것에서 생기는 모방의 본성에 대해서』


"스미스에 의하면 조각과 회화는 모두 설사 그 모델이 자연에서는 발견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지라도, 자연에서 발견되는 '갖가지 미를 모아놓은' 것 이상은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조각과 회화에서 모상의 미가, 전체로서 자연의 미를 능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음악(성악)도 '감정이나 정념'을 표현 혹은 모방하지만, 음악은 그것을 모방할 때 모방 대상을 '자신의 박자에 맞춰 굴곡bend'시킨다." "음악 그 자체에 구비된 형식적 요소인 '박자'가, 대상을 자신의 형식적인 요소에 맞게 변환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회화에서는 아직 형태와 색채가 대상적 세계에 종속해 있으며, 그 독자적인 구성 원리를 구비하지 않은 데 반해 음악에서는 '선율과 화성'이 고유한 구성 원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모방 대상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각에 대해 회화가 경향성으로 지니고 있던 모상의 자립성은, 음악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음악이 '그 자체에서 유래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250-1)


"스미스는 예술작품을 향수할 때 환기되는 감정은, 예술이 모방적인 장르인지 여부에 따라 구별된다고 말한다. 원상-모상 관계가 성립되는 모방적인 장르(성악, 회화, 무용)는 하나같이 어떤 인물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원상이 되어야 할 '타자'가 전제된다. '기쁨'이라는 감정을 예로 든다면, 기뻐하는 것은 원상인 타자이지 모상이 아니다. 이처럼 모상인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의 이 감정은 모방을 통해 원상인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특징은 '공감적인 감정'이다. 그에 반해 기악에서는 이러한 원상-모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어느 타자를 모방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기분 좋은 대상으로서 기악곡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기쁨'이라는 감정을 예로 든다면, 기악 그 자체가 즐거운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어떤 원상과 결부된 '공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인 것이다."(255-6)


에필로그 예술의 종언


"서양의 예술 이론에서 '예술의 역사'를 처음 고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 본성'이야말로 '종극[목적]終極'(telos)이며, 〈생성이 그 종극[목적]에 도달했을 때 각 사물이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각 사물의 자연 본성이라고 부른다〉라는 것이므로, 어떤 사물이 그 '자연 본성을 가진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그 생성의 '종극'에 도달하여 그 '형상을 취득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밝혀지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성장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목적론적 생성 과정을 '비극'의 전개 과정에 적용하여, 마치 생성이 그 성장을 통해서 종극에 이르듯 '비극' 또한 그 발전을 통해서 종극에 이른다고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의 '종언' 이후에 씌어진 저서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이미 '종언'을 맞이해 그 '자연 본성을 획득했다'고 간주함으로써 『시학』에서 말한 비극의 본질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85-6)


"그리스 로마 시대에 '예술 종언론'의 전형적인 예는 전傳롱기노스의 『숭고에 대해서』(기원후 1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민주제야말로 〈위대한 것을 키워낸 좋은 부모〉이며, 거기서만 담론에 유능한 사람들이 번영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노예인 것이 정당하다고 아이 때부터 배웠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가장 결실 풍부한 담론의 원천인 자유eleutheria를 맛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담론에 유능한 사람들도 사멸했다.〉" "이 철학자의 견해에 대해서 저자인 '나'는, 우리들을 노예로 한 것은 정치적 자유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금전욕과 향락욕'이라는 〈우리 모두가 이미 걸려 있는 병〉이고, 이 병에 의해서 〈정신적 위대함이 쇠퇴하고phthinein, 사멸한다katamarainesthai〉라고 응답한다." "'철학자'의 견해도, 저자인 '나'의 견해도 필시 플라톤의 『법률』에 나타난 논의에 입각한 것인데 정신적 악덕이 폴리테이아의 쇠퇴를 부른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286-8)


"이상의 검토를 통해 '예술 종언'의 이중적인 의미가 확실해졌다. 즉 예술의 '목적 달성' 혹은 '완성'이라는 의미의 종언Ende=Zweck, 그리고 예술의 '쇠퇴'라는 의미의 종언Ende=Untergang이다. 이 두 가지 의미의 종언론이, 조르조 바사리에서 빙켈만에 이르는 근대 예술사 기술記述의 근간이 된다. 예를 들어 바사리는 『열전』(1550) 제1부 서론의 끝부분에서 조각술과 회화술의 '자연 본성'을 〈인간의 신체처럼 탄생, 성장, 노쇠, 죽음을 지니는 여타 모든 것의 자연 본성〉이라고 유비적으로 파악하고, '최고의 정점'까지 도달한 예술은 〈그 고귀한 단계에서 극단적인 붕괴ruina estrema로 전락한다〉라고 논한다. 또한 빙켈만도 마찬가지로 『고대 미술사』(1764)에 〈예술의 역사는 예술의 기원, 성장, 변화, 몰락을 교시敎示해야 한다〉라고 서술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역사는 '재생' 혹은 '순환'하는 과정이고, 그로 인해 예술사는 예술이 탄생에서 완성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반복으로 기술된다."(288)


"헤겔의 (근대적) '예술 종언론'은 첫째로, 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도교 세계로 이행하면서 일어난 절대자의 변용이 절대자를 표현하는 예술을 '과거의 것'으로 했다는 의미이다. 고전적인 예술이 확실히 '미의 왕국의 완성', '미의 정점'이더라도 〈그리스 예술의 아름다운 나날은 ······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며, 그것을 현대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 종언론'을 구성하는 두 번째 논점은 근대에 있었던 '낭만적인 예술의 붕괴'와 결부되어 있다. 낭만적인 예술은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가 특색인데, 그것은 감성적인 세계에서 현상現象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적 절대자를 '암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낭만적인 예술이 진전함에 따라 예술가는 본래 표현해야 할 내용을 잊고 단지 자연적인 우연성을 묘사하는 데 전념하게 된다." "이처럼 종교에 봉사했던, 혹은 종교 그 자체였던 예술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를 그만둔다. 원래 수단이었던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는 일종의 자기목적성을 예술은 갖추게 된다."(290-1)


"'근대적인 예술 종언론'은 여러 가지로 형태를 바꾸면서, 헤겔 이후의 많은 이론가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 〈이야기하는 기술技術은 종언으로 향하고 있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죄르지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1920)에서 고대의 서사시와 근대의 소설을 대비적으로 파악하고, 소설은 인간이 '바깥 세계에 소원疎遠'해지고, 또한 '인간을 서로 구별하는 요소가 서로 이어질 수 없이 멀어져버린' 시대에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고 논하고, 소설의 특질을 '초월론적 고향상실' 속에서 찾았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람들의 생활이 민중 혹은 공동체 속에 묻혀 있던 시대에 성립한 예술 형식이 '서사시' 혹은 '이야기'였다면, 이러한 민중에서 '개인=고독한 사람'이 분리되어 개개인이 타자와는 '통약 불가능함'을 자각한 시대의 고유한 예술 형식은 '소설'로 규정된다." "범례성의 결여는 서로 '통약 불가능한 것'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시대의 특징이다."(293-5)


"독창성 이념은 예술가에 대해서, 예술가가 항상 기존의 것과는 다른 것을 창조하고, 개개의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와는 다른 '개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독창성 이념은 확실히 예술을 기존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예술로서의 예술'을 실현한다는 기능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으나, 또한 동시에 예술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첫째로 자기의 독창적인 개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개개의 예술가는 모든 기존의 문맥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항상 '예술사'를 쇄신하고자 하는데, 그 때문에 예술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것은 개개의 예술가가 이른바 자기 고유의 '언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만들어내도록 강요당했다고 해도 좋다)." "두 번째로 신예술에 의해 기존의 것(구예술)이 부정된다는 사실은, 더 나아가 신예술 자체에도 마찬가지이므로, 예술은 항상 자기부정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정의 변증법은 결국 자기 부정의 반복에 의해서 그 변증법적 힘을 잃고 만다."(297-9)


"역사를 부정하고자 하다가 오히려 역사에 구속되어버린 1970년대 신예술의 위기에 직면하여, 단토는 1980년대에 예술의 종언을 제창하는 이론을 제기한다." "단토의 예술 종언론에는 그의 고유한 '역사'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 단토에 의하면 예술사 기술記述에는 세 가지 모델이 존재한다. 첫 번째 모델은 바사리가 제기한 것으로, '재현'representation 즉 '[실제의] 지각적인 경험과 등가等價한 것의 생산'을 예술의 목표로 한다. 이 모델이 타당한 부분은 재현 예술, 특히 회화와 조각인데, 영화 기술의 전개와 함께 재현을 수행한다는 〈예술의 임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서 회화와 조각의 활동에서 영화의 활동으로 이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예술사, 적어도 [재현하는 것이라고] 간주되기만 했던 회화의 역사는 실제로 종언을 맞이했다.〉 재현의 예술이 종언을 맞이하면, 예술가는 〈자신들이 아직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300)


"여기에 새로운 예술사의 모델이 요청되는데, 단토에 의하면 두 가지 응답을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 응답은 예술의 본질을 '표현'에서 찾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야수주의 시기의 앙리 마티스가 그린 〈초록 줄무늬〉(1905)에서, 이론적으로는 베네데토 크로체가 1902년에 출간한 『표현 및 일반 언어의 학문으로서의 미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델은 음악과 같은 비非재현적 예술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앞의 재현 모델보다도 포괄적이다. 그러나 '표현'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어서 서로 통약通約이 불가능하므로, 예술의 본질을 표현에서 추구하는 한 〈예술사는 진보의 패러다임에 의해 측정할 수 있는 종류의 장래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개개의 지속적인 작업의 연속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이 모델에 따르면 예술에는 '진보'도 '종언'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입장에서 예술사를 통약 불가능한 '여러 패러다임의 연속'으로 파악한 것이 어윈 파노프스키의 저서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1927)이다."(300-1)


"두 번째 응답은 '역사에 대한 헤겔식 모델'─즉 〈역사란 자기 의식과 함께,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자기 인식의 도래와 함께 종언한다〉라는 『정신현상학』에 나타나는 역사관─에 의거한다. 이 역사관은 '교양소설'에서 전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지닌다. 자기 동일성의 위기에 직면한 근대 예술은 〈그 위대한 철학적 단계, 즉 약 1905년부터 약 1964년까지의 단계에서 자기 자신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대규모의 탐구를 시도했던〉 것이며, 동시에 팝 아트가 이 〈예술의 본성을 둘러싼 철학적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은 팝 아트가 〈왜 이것이 예술이며 그것과 꼭 닮은 것─보통의 브릴로 박스나 흔해빠진 스프 캔─은 예술이 아닌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바로 예술을 통해서 제기했기 때문이다." "즉 교양소설이 주인공의 자기 인식을 정점으로 하고 끝을 맞이하듯, 자기 정의 혹은 본질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20세기의 예술은 1960년대에 예술로서 임무를 다했다는 것이다."(301-2)


"단토의 1960년대의 '예술 종언론'에 대해, 1970년대 이후에도 예술은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이 반론에 대해서 단토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물론 예술 제작은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 제작자는 내가 예술의 역사 이후적post-historical이라고 부르고 싶은 단계에 살고 있으며, 그 제작자가 낳은 작품에는 우리가 [예술에 대해서] 오랫동안 기대해 온 듯한 역사적 중요성 혹은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즉 예술의 종언이란 예술을 둘러싼 〈어느 한 이야기의 종언〉이며, 그러므로 예술이 종언 후에 존속하더라도 '예술의 종언' 이후의 예술은 더 이상 '역사적 중요성'을 띠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이야기'가 종언한 뒤에도 등장인물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지만, 그 자체는 이야기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의 종언'이란 그러므로 역사적 의미를 담당한 '예술'의 종언, 즉 '예술사의 종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술의 죽음'은 아니다."(302-3)


"단토에 의하면 '예술의 종언'이란 예술에 대한 '어떤 하나의 이야기의 종언'인데, 이 명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단토의 이 명제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일정한 '역사적 발전의 목표'를 지향하는 예술 자체의 종언, 즉 어떤 일정한(동시에 단일한) '이야기'narrative를 역사 안에 체현하는 예술 그 자체의 종언이다." "그때 종언한 것은 어떤 일정한 목표 혹은 규범을 목표로 진보한 근대의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근대의 예술을 그와 같이 파악해온 규범주의적인 예술관 혹은 예술사관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예술을 '역사적' 단계와 '역사 이후적 단계'로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는 근대를 이미 지나가버린 하나의 시대로 확정하고 그와 같은 근대에 대비하여 '근대 이후'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범주의적인 예술(사)관에 얽매이는 일 없이 '근대'와 '예술세계'의 다양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부에서 여러 가지 문맥을 더듬어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310-1)


"기존의 문맥 아래에 머무를 것인지 혹은 기존의 문맥을 부정할 것인지의 양자택일은 '문맥'을 너무 고정적으로 (일종의 사물로) 파악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문맥이 고정된 사물이자 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맥이란 새로 해석하고, 더 나아가 재편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문맥의 가변적인 힘이야말로 예술 창조의 근간이다. 그리고 '독창성'이란 이 문맥이 지니는 잠재적인 힘을 파악하고, 그것에 응답하면서 문맥을 바꾸고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낼 때 성립한다. 동시에 문맥의 재편 가능성은 예술의 수용자에게도 열려 있다. 동일한 작품도 동시에 여러 개의 문맥 아래 놓여져 갖가지 시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문맥의 발견은 어떤 작품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어느 예술작품에 '공민권을 제공하는' 이론을 제기할 권리는 결코 그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가 배타적으로 점유하지 않는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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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3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8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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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국가 (최소정부, 통치자의 업적, 미래의 철창)


"정치권력 조직의 역사에서 19세기는 다양성에서 단순성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또한 19세기는 20세기에 들어와 세계적 추세를 형성하게 되는 네 가지 주요 발전과정─국가의 형성, 관료화, 민주화, 복지국가의 출현─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적 시각으로 회고해보면 19세기는 국가발전의 황금시대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국가와 공공복지의 원칙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국가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국가는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14년 이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군사적 잠재력의 증가를 억제했다. 요컨대, 국가는 이전에 경험한 바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정치형태─폭정과 무정부상태─의 출현을 막아냈다." "이런 추세가 모두 유럽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현대적 입헌국가는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났고, 군주제 이후의 독재통치는 남아메리카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1585-6)


"물리력의 독점은 '근대' 국가를 정의하는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시도하여 획득한 역사발전의 예외적 상황일 뿐이다. 혁명의 시대에 폭력의 독점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18세기 내내 중국정부는 민중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또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태평천국혁명 시기에 수백만 명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청조정에 저항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무기를 드는 일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중앙정부가 호전적인 엘리트와 대다수 민중에게 법과 질서를 지켜낼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을 때 폭력의 독점은 유지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폭력의 시장이 열리고 사유화된 폭력이 사회화된 폭력을 빠르게 대체한다." "국가는 언제나 이성과 객관성을 향해 발전해간다는 믿음은 극히 왜곡된 이상일 뿐이다. 국가는 사회를 만들어 내고 동시에 국가도 혁명과 전쟁에 의존하고, 재력을 생산하는 경제에 의존하고, '하인'의 충성에 의존한다."(1587-8)


# 1900년 무렵에 존재한 정치질서의 유형들

1. (개인) 전제정체 : 차르 통제하의 러시아, 오스만제국

2. 독재정체 : 호앙 카를로스의 포르투갈,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멕시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아르헨티나

※ 독재정은 전제정과 비교해 전통, 왕조의 합법성, 종교적 축성(祝聖) 같은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3. 입헌군주제 : 독일제국,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4. 의회책임제 :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제3공화국

5. 충성관계 또는 후견관계 : 유럽 식민주의에 복속된 여러 지역의 정치체제들


"프랑스대혁명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세기 중반에도 군주제는 여전히 세계적인 범위에서 주류 국가형식이었다. 유럽에서 근대초기와 혁명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공화국은 '군주화'의 마지막 물결과 함께 사라졌다." "1815년 직후 스위스는 유럽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유일한 비군주국이었다. 군주제에 대한 호의적인 정서는 머나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퍼져 있었다." "'군주제' 또는 '왕국'이란 표지의 배후에는 수많은 정치조직의 형식이 숨겨져 있었다. 조직구조가 비슷한 정체라 할지라도 군주제 문화의 침투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로마노프왕조가 종결될 때까지 전제적인 통치를 해온 러시아의 차르는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민중에게 종교적인 수준의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왕에게 1830년 이후로 남은 것은 부르주아 국왕으로서 일상적인 역할 뿐이었다."(1597-8)


"군주제와 민족국가의 결합은 19세기의 세계적 추세 가운데 하나였다. 일부 국가는 군주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는 사실상 1805년에 수립되었으나 왕위의 세습을 인정하는 이스탄불 술탄의 칙령은 1841년에 반포됨으로써 비로소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근대 샴(태국)을 만든 사람도 개명 전제군주 출라롱코른(라마 5세라고도 불렀다)이었다." "확장 중인 제국이든(러시아) 판도가 축소되는 제국이든(합스부르크제국, 오스만제국) 다민족국가의 통치자들은 분리주의에 맞서 민족과 국가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내야 하므로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군주와 국가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현상은 원래 유럽이 아니라 일본에서 나왔다. 메이지 천황의 손자인 쇼와 천황(1926-89년 재위) 통치하에서 군주와 국가는 혼연일체가 되었고 이러한 결합은 2차 대전 동안에 아시아에 재난을 가져왔다."(1619-20)


"1900년 무렵의 세계에서 백 년 전에 비해 더 많은 민중이 정치적 운명의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서유럽과 미국의 상황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했겠지만 식민주의로 인한 계량화할 수 없는 정치적 참여의 제약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의지는 어떤 제약도 없이 표현되어야 하며, 원칙적으로 인민은 어떤 형태의 정부든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1623-4)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징세정책의 혁신 가운데 하나는 소득에 대한 직접적인 정률 소득세였다. 영국은 1842년 이후로 줄곧 이 세수정책을 시행해왔는데, 중상층 소득집단의 부의 증가분을 조심스럽게 재분배하는 효과가 입증되었다. 1861-1900년, 많은 유럽 국가가 이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영국의 소득세는 사회복지를 개혁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의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새로운 정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자유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관세를 폐지함으로써 생긴 세수 손실을 소득세라는 새로운 세목을 설치해 보완했고 반대로 자유무역은 소득의 증가를 촉진했다. 세수제도, 특히 서방과 일본의 세수제도는 그 현대성이 최소한 평화시에는 납세자들이 국가의 갑작스럽고 자의적인 특별세 징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최종적으로 구현되었다. 법률이 적용되는 지역과 시간의 범위는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와 법치는 상호 보완관계였다."(1663-4)


"19세기 유럽에서 국가는 일찍부터 요란스러운 공개 처벌을 피했다. 국가는 더 이상 처형 의식으로 공포의 무대를 연출하지 않았다. 인도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이런 방식은 점차로 용납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에서 이런 행위는 자취를 감추었다(독일민족의 국가에서는 1863년 이후로, 영국에서는 1868년 이후로). 숙련 장인이자 연예인으로서 직업적 사형집행인이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처형장면이 증오의 대상이 된 데는 시장의 요인도 작용했다. 많은 도시에서 형장 가까운 곳에 산다면 상승세에 있던 주택가격이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비치명적 국가폭력이 존재한 시간은 좀더 길었다. 1845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채찍형의 공개적인 집행을 금지시켰지만 실제로는 인도주의자와 (문명국으로서의 러시아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 민족주의자들이 요란스럽게 항의하기 시작한 세기 말까지 널리 행해졌다."(1669-70)


"사회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치안기관은 노골적인 위협 수단과는 다른 권력의 도구였다. 경찰제도는 19세기에 창설되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중앙정부가 관할하는 전문 경찰기구를 설치한 국가이며 그 시기는 17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829년부터 경찰제도를 갖게 되었고, 베를린 경찰은 1848년부터 제복을 지급받았다." "일본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찰의 직업화와 훈련을 중시했다. 경찰은 메이지시대의 각종 개혁을 관철시키는 가장 중요한 국가기구였다." "19세기에 거의 모든 유럽 식민지에 최소한 가장 기본적인 현대 경찰체계가 (특히 도시지역에) 도입되어 있었다." "영국의 많은 보수파는 영국 정부도 민주화를 주장하는 논조와 행동에 대해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해 좀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주의는 줄곧 종주국 수도의 자유주의 사상에 도전했고 더 강한 경찰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반복적으로 들려왔다."(1670-3)


"미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전국적인 경찰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경찰력 분포의 편차가 컸다. 사설 탐정기구가 그 빈틈을 메웠다. 가장 유명한 사설탐정 회사는 1850년에 앨런 핑커튼이 세운 회사였다. 핑커튼 탐정회사의 첫 번째 업무는 철도와 우편마차를 경호하는 것이었으나, 1890년대가 되자 노동자 파업 진압으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을 제외하면 국가의 불완전한 폭력독점 때문에 사법적 감독이 쉽지 않은 사설 경찰력에 그토록 넓은 업무공간을 남겨준 나라는 없었다. 미국에 경찰은 '국가'기관의 위계 안에 포함되는 기관이 아니라 지방자치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프랑스나 일본의 제도와는 정반대였고 영국의 제도와도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19세기 말의 영국 경찰은 자신이 보통법과 비성문 헌법을 대표한다고 인식했다. 반면에 미국 경찰은 자신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정의를 대표한다고 인식했다. 미국 서부의 '보안관'(marshall)은 이런 유형의 명백한 화신이었다."(1674)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유럽에서는 '세 가지 복지국가 모형'이 등장했다. 첫째, 스칸디나비아반도 모형은 소득의 재분배를 통해 조성된 재원으로 사회안전을 보장했다 둘째, 영국 모형은 세수에 의존하여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유지함으로써 빈곤을 해소했다. 셋째, 유럽대륙 모형은 개별적인 보험료를 통해 재원을 마련했는데 앞의 두 모형과 대비되는 점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보험료의 액수가 다르게 정해진다는 것이었다(예컨대, 공무원은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복지제도를 수립한 경로는 다르지만 세계에서 유럽,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사회단체, 자선기관, 교회, 정부의 빈민구제 활동이 자체 동력이 되어 국가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전환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미국에서는 개인의 기부는 선행으로 찬양받았지만 빈민구제에 투입되는 세금은 낭비로 인식되었다. 1947년에야 실업보험 제도를 도입한 일본은 이 제도를 실시한 마지막 공업대국이었다."(1679-80)


제3부 주제


12장 에너지와 공업 (누가, 언제, 어디서 프로메테우스를 풀어놓았는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한, 특히 중요한 요인들을 꼽아보자면, 첫째, 18세기를 통틀어 영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국내시장에서는 생활필수품과 사치품 사이에 끼어 있는 '비교적 고품질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점진적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소비의 주력군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런 소비층이 아직도 귀족계급과 상업 엘리트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둘째, 18세기 초, 영국은 어떤 나라보다도 강성했고 해외 무역량은 네덜란드를 초과했다. 생산량이 늘어나는 상품을 영국 국내시장에서 소화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특히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가 중요한 소비시장이 되었다." "셋째, 영국에서는 '이론가' 집단과 '실천가' 집단이 더 활발하고 긴밀하게 접촉했다. 이렇게 영국에서 처음으로 산업화 개념의 또 하나의 표지가 등장했다. 그것이 기술혁신의 표준화였다. 이전 시기와 다른 점은 이때의 혁신 물결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739-40)


"사람들은 산업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월한 자연조건 이외에 다른 요소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농민을 비경제적 요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또 하나는 '인력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였다. 교육사업은 문맹퇴치 운동에서부터 국가연구기관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양호한 교육을 받은 노동력은 토지와 광물자원의 부족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한 몇몇 유럽 국가와 일본은 19세기 말의 수십 년 동안에 모범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산업화 생산방식의 큰 장점은 최소한 어느 면에서는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하나의 공장에 집중되는 대기업은 당시 세계에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대량생산 방식이 여러 분야로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탄력적 생산'이라 불리는 생산방식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집중 방식과 분산 방식이 결합된 곳에서는 산업화의 성과가 탁월했다."(1746-7)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1870년 이후로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물리학을 흉내 내어 에너지원의 개념을 대대적으로 차용했다. 동물이 신체를 이용하여 얻어낸 에너지가 경제적인 의미를 잃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얄궂게도 인체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노동력'이란 표현은 열역학의 영향을 받아 '인체발동기'로 바뀌었다. 근육과 신경의 결합체인 인체발동기는 계획적인 작업 과정에 응용될 수 있었고 에너지의 투입-산출 비용은 실험을 통해 정확하게 계량될 수 있었다."(1755)


"광물에너지원을 기초로 한 에너지경제가 수립된 유럽은 비서구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 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의 인종주의는 피부색만을 따지지 않았고, 인간의 '종류'를 육체적 에너지와 지적 에너지의 잠재적인 크기에 따라 구분했다. 그러므로 세기가 바뀔 무렵 비유럽 세계는 서방의 전형적인 특징은 '젊다는 것'이지만 비유럽 세계 자신의 전통과 통치자는 '늙고' 수동적이며 무기력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1764-5)


"사회구조('카스트'제도)와 국민성 또는 종교적 성향('힌두교는 노동을 적대시한다')이 인도의 자주적 발전과 외부세계로부터의 학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는 문화결정론의 논조는 서방 사회학계에서 오랫동안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인도가 보여준 첨단기술 분야의 성공은 이런 주장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마찬가지로, 이익을 좇지 않는다는 '유교사상'의 경제관이 19세기와 그 이전 세기에 중국의 '정상적인' 경제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 싱가포르, 타이완 등 중국어 사용권 국가─최소한 간접적으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본과 한국을 포함하여─와 지역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성과를 보여준 뒤로 이런 낡은 논조는 조용히 사라졌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인도와 중국 같은 나라는 왜 '당연히' 따랐어야 할 모형대로 발전하지 않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1777)


13장 노동 (문화의 물질적 기초)


"구체적인 노동자와 노동과정은 사회 계층의 특징을 대표한다. 권력과 지배의 관계가 노동의 자율성과 타율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노동과정의 표준화와 기본적으로 노동을 통해 정의되는 의식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결과가 '직업'이다. 직업에서 정체성을 찾는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인정받기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직업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집단적으로 정의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직업의 영역을 통제하거나 때로는 독점한다. 그들은 〈시장을 우회하여〉 진입을 제한하고 흔히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이런 방식을 통해 생겨난 폐쇄적 직업조직(장인조합, 동업조합 등)은 그 자체가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이 된다." "모든 (또는 대부분의) 문명에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노동에 대한 관념은 기대치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은 노동자를 어떻게 '공정하게' 대우하느냐와 관련이 있다."(1820-2)


"19세기에 농업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취업영역이었다. '윤리적 경제'의 관점에 따르면 농민은 자급자족적이고 시장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으며, 집단소유제와 개인소유제 사이에서 집단소유제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으로서 농민의 대외적 행위는 방어형과 위험 회피형이다. 그들의 이상은 전통의 틀 안에서의 정의와 상호부조─후원자로서의 지주와 수혜자로서의 소작인의 관계를 포함하여─이다. 이때 토지의 매각은 최후의 수단(umtima ratio)이 된다. '합리적 선택'의 관점에 따르면 농민은 최소한 잠재적인 소규모 기업가다. 농민은 반드시 이윤의 최대화를 목표로 하지는 않으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존의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집단의 단결과 상호부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위해 시장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알고 있다. 또한 이 학파는 자본주의가 전파되면서 애초에는 동일한 사회적 상황에 처해 있던 농민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1825)


# 19세기까지 존속한 농촌생산(생활) 방식

1. 장원경제(자급자족 노동과 영주에게 제공되는 무상 노동이 결합된 형태)

2. 가족 임차영농(지대를 수취하는 지주와 농민의 대립)

3. 비교적 안정적인 소유권을 가진 소규모 가족영농

4. 플랜테이션(비현지 노동력을 사용하여 자본집약적 작물을 생산하는 형태)

5. 대규모 자본주의 영농(토지 소유주가 임금노동자를 고용)


"운하공사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운하건설은 새로운 시장이자,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활동이었다. 지구는 더 이상 농민과 광산노동자의 세상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동맥이 지구 곳곳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하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1849)


"수십만 명의 아랍 노동자들이 사막에서 삽으로 운하를 파고 있을 때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철도 궤도가 놓이고 기차역이 세워지고 있었다." "철도부설에는 운하건설과 마찬가지로 삽, 도끼, 쟁기를 사용하는 원시적 육체노동은 물론이고 증기 크레인 같은 현대적 장비도 필요했다. 미국의 동서횡단 철도는 수에즈 운하가 완공된 1869년에 완공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대형 철도공사는 다국적 성격이었다. 1860년 이전에는 철도건설에 참여한 자본은 영국과 프랑스 자본이 주류였다. 1860년 이후로는 보조적이었던 민족자본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 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이 필요했다."(1854-7)


"19세기 경제학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은 노동은 자유로우며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인간을 노동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인간은 '동기부여'가 있을 때 노동한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노동은 노동자의 시민으로서의 자유 또는 신체적 자기결정권이 제약받지 않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19세기 전반에─서구 일부 국가에서는 그 기간이 더 길었다─수백만 명의 노동조건은 같은 시기에 자유주의가 찬양하던 도덕적·경제적 이상인 '자유로운' 노동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노동한 부문은 각 국가의 경제에서 원시적이고 낙후한 부문이 아니었다. 이미 증명되었듯이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기 직전의 카리브해 지역이건 아니면 내란이 일어나기 전의 미국 남부의 각 주이건 노예제 플랜테이션은 모두가 효율성과 수익성이 높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생산방식이었다."(1865-70)


"사회발전은 새로운 보편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농노제(특히 17세기에 새로 건설된 동유럽의 '2차' 농노제)는 신대륙의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노동력 결핍에 대한 반응이었다. 19세기 유럽 인구의 빠른 증가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시에 도시발전과 초기 산업화가 농촌에서 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취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노동시장은 더 유연해지고 반면에 강압적인 노동안정은 이념적으로 점점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농민해방으로 유럽의 농민은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유농민이 되지는 않았다. 유럽의 농민이 영주와의 관계에서 누리던 '옛' 자유는 농촌에서 사라지고 19세기의 '새로운' 자유는 국가가 설정한 틀을 깰 수 없었다. 가장 강인한 자유주의자도 그 어떤 시장보다도 농업시장이 정책적 통제와 개입을 요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농업정책이 탄생했다. 유럽 농민의 생존은 이때부터 이 정책에 의존해왔다."(1879-80)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 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 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농촌에서도 '자유로운 임금노동'은 의심스러운 개혁이었다. 그에 따른 '무산계급화'는 사회적 지위의 하락이었다. 산업부문은 달랐지만 비대칭적 노동시장에서 완벽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뿐만이 아니었다."(1885-7)


14장 네트워크 (작용범위, 밀도, 틈)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은 19세기의 새로운 진전이었다. 17세기에 영국의 윌리엄 하비가 인체는 하나의 순환계통이란 사실을 발견했고, 18세기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케네가 이 모형을 경제와 사회현상에 응용했다. 그다음 단계가 네트워크였다. 1838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전국적인 철도교통망인 '전국운수체계'를 설계했다. 이것은 미래를 내다본 대담한 구상이었다. 1850년 이전에는 유럽대륙의 어떤 국가도 진정한 의미의 철도망을 갖추지 못했다. 리스트를 이 구상을 실행할 기초 설계도를 확정했다. 철도가 완공되고 실제 운행에 들어가자 비판자들이 철도망을 상징하는 거미줄 그림을 보여주며 철도를 곤충을 질식시켜 죽이는 거미에 비유했다. 그 뒤로부터 거미줄은 '미로', (특히 미국에서) '격자'(格子, grid)와 함께 도시의 모습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다. 사회의 자기 이미지로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19세기에 시작되었다."(1910-1)


"범선과 비교했을 때 증기선은 환경적 요소의 제약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연안, 풍랑이 없는 내륙호수, 하천, 운하 항행에 적합했다. 더 이상 변화무쌍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자 역사상 처음으로 항행시각표를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고 수로 운수의 네트워크화는 새로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각종 관계는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예측 가능해졌다." "새로운 수송능력과 새로운 새로운 운송수요는 상호작용을 했다. 예컨대,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의 증기선 운수의 확장은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플랜테이션의 면화생산 확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전반의 빠른 기술진보 덕분에 19세기 중반 이후 증기선으로 브리스톨에서 뉴욕까지 가는 데는 14일이면 충분했고 이 항행시간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번 크게 단축되었다. 대규모 이민의 물결이 신대륙을 향해 흐르기 시작하면서 전례 없는 규모의 여객운송 수요가 생겨났다."(1915-7)


"해저케이블이 세계를 이어주면서 19세기의 세 번째 사반세기에 세계를 포괄하는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사용자의 개인생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면에서 보자면 전보는 그 뒤에 등장한 전화나 인터넷에 비해 영향력이 적었지만 상업, 군사, 정치적 활동에서 전보의 중요성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정치적 영향도 피할 수 없었다. 전보는 해외 현지에 나가 있는 외교관은 물론이고 내각과 수도의 의사결정 기구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국제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반응속도는 더 빨라졌고 대형 회의의 회기는─꼭 이 원인 때문만은 아니지만─단축되었다. 암호를 사용한 전보는 해독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거나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염려와 공포는 통신의 광채를 가렸고 검열이라는 새로운 기회가─때로는 실행하기 어려웠지만─열렸다."(1926-3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 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 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과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1839-42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은 문제였다." "중국의 조처는 단순히 영국이 중국 인민에게 끼치는 해독에 대한 대응 이상의, 더 넓은 세계경제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과 차 수출시장이 위축되면서 1820년 이후로 중국의 은 유입량이 줄어들었고 동시에 남아메리카의 은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은의 국제가격이 올라갔다. 두 요인이 합쳐져 중국 은의 대외 유출을 자극했던 것이다."(1951-3)


"정부와 투자자들은 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금을 사들였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영국정부는 금본위제 시행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영국이 유일하게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모든 국가에서 금본위제의 실시여부를 두고 대토론이 벌어졌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생긴 곳은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1879년부터 (논란이 많은) 금본위제를 시행했지만 의회가 정식으로 승인한 때는 1900년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다량의 불태환화폐를 발행했던 러시아는, 1897년에 금본위제의 실시를 선언했다. 일본은 1895년에 중국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전쟁배상금으로 중앙은행의 비축 금을 확충한 그 해에 바로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당시 일본의 여러 정책이 그러했듯이 이 조처는 '문명세계'에 합류하려는 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금본위제의 채택은 국제사회에서의 존경을 의미했고 서구식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의사표시였다."(1954-5)


# 불태환화폐(Fiat currency) : 발행한 정부가 그 가치를 보증하는 명목화폐


"우리는 영국 중심의 이 체계의 내재적인 위험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는 물론이고 세계경제의 비식민지 주변부도 이 체계에 (간접적으로든 미약한 정도로든) 통합되지 않았다. 금본위제는 일종의 도덕적 질서였다. 금본위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자기책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신뢰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경제활동 환경,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부─를 전파했다. 금본위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참여국이 이런 규범을 지키고 이 규범의 바탕이 되는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뒤집어 말한다면 성공적인 금유질서는 자유주의 세계관이 생활의 실제적 목표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금본위제는 자연적(경제적) 요인에 종속적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이전의 조건에서 수립되었다. 1848년 이후 세 대륙의 프런티어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이 제도의 최종적인 형태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1959)


"자본흐름의 기존 구조를 네트워크로 상상한다면 실상을 오해할 수 있다. 무역과 달리 이 영역은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자본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전되었다. 채무국과 투자 목적국에서 돌아 나오는 자금은 대출자본이 아니라 이윤으로서 자본 점유자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 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 일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한 세기 가까이(1820-1914) 국제 금융네트워크에는 개입을 통해서도 복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신용의 붕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붕괴는 20세기의 특징적 현상이었다."(1962, 1970-1)


15장 등급제도 (사회적 공간의 수직적 차원)


"19세기는 가장 오래된 사회집단인 귀족이 중요한 역할을 한 마지막 시대였다. 18세기에 유럽 귀족의 〈사회적 지위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였으나 1920년 무렵에는 그런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귀족에게 튼튼한 정치적 세력이나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럽 귀족의 몰락은 한편으로는 18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혁명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와 권위의 원천이던 토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귀족이란 사회제도가 유럽에서 쇠락한 것은 대체로 1789-1920년의 비교적 짧은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귀족의 세력이 직선으로 하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라인강 이동지역의 귀족정치의 상황은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19세기도 귀족에게는 여전히 '좋은 시절(belle epoque)'이었다."(1997-8)


"영국의 귀족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귀족과는 분명히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계층이었다. 그들이 가진 법률상의 특권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정치와 사회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다. 계승법에 규정된 장자계승권은 부의 집중을 보장했다." "그러나 영국 귀족이 가진 특권은 많지 않았다. 법률로 규정된 가장 명확한 특권은 세습귀족으로서 의회에서 상원의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상층 귀족이 차지한 상원 의석수는 1830년 무렵 300여 개, 1900년 무렵에는 500여 개였다." "영국귀족은 왕실에 의존하지 않았다. 빅토리아시대에 궁정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사회영역에서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복종을 누렸다." "영국이 다른 국가와 대비되는 점은 귀족은 확정된 법률상의 지위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기질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끄는 자신감이었다."(2002-3)


"중국의 신사(紳士, gentry)는 유럽과 일본의 군사귀족과는 달랐다. 신사는 혈통이 아니라 재능 덕분에 관리로 선발되었다. 개별 집안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한 집안이 흥했다 쇠퇴하는 과정이 단지 몇 세대 안에 일어났다." "유럽 귀족과 마찬가지로 신사는 비교적 평온하게 19세기를 넘겼다. 1864년에 태평천국의 위협이 지나간 후 그들이 사회 내부에서 직면했던 경쟁은 유럽에 비해 적었다. 중국 신흥 중산계층이 신사가 지닌 통치지위에 도전했지만, 이는 유사한 상황에서 유럽이 보여준 격렬함에 훨씬 못 미쳤다. 중국에서 위협의 주요 출처는 농민혁명과 외국 자본주의였다. 프랑스 귀족이 종점에 도달한 때는 1790년이었고, 일본 사무라이의 경우는 1873년, 독일 귀족은 1919년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신사계층이 종점에 도달한 때는 1905년이었다. 신사는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몰락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엘리트 계층이자 세계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엘리트 계층이었다."(2014)


"부르주아는 토지와 혈통에 의존하여 신분을 획득한 봉건영주가 아니며, 종속적 지위의 육체노동자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범주는 어떤 사회적 개념보다 넓다." "'부르주아계층'이란 개념의 기만성은 부르주아계층의 생활방식에서 나왔다. 부르주아는 (계층) '상승'을 추구하면서 그 반대─빈곤 속에 떨어지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의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지만 몰락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낙오자일 뿐이다. 성공한 부르주아는 자립심과 자기노력으로 지위를 획득했다고 인정받는다. 그에게는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부르주아에게 사회란 사다리다. 부르주아는 그 사다리의 중간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비부르주아 엘리트가 존재하는 한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라도 사회 등급의 최정상에 설 수 없다."(2018-9)


"귀족은 명예를 중시했고 전형적인 부르주아는 사회적 존경에 집착했다." "〈존경받을 만한 품성〉은 영국 신사의 성격 모형에서 보듯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학습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이상이었다. 예컨대, 19세기 남아프리카의 도시에서 백인과 흑인 중산계층은 사회적 존중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정서적으로 서로 근접해 있었다(인종주의가 고개를 들면서부터는 이런 동질성이 발전하기는 점차 어려워졌지만). 아랍, 중국, 인도의 상인도 육체노동을 멀리하고, 가정 내부의 미덕을 중시했다(일부다처제에서도 특수한 방식으로 이 미덕을 실천했다). 또한, 행동할 때 통찰력을 중시했으며 그 명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했다. 따라서 20세기의 마지막 1/3세기에 일본, 인도, 중국, 터키에서 등장한 수억을 헤아리는 중산계급을 서방 사회형태의 수입품이라고만 설명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현지의 기반이 없이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가 없다."(2024-5)


"이 지점에서 세계사회사 연구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분명히 부르주아와 부르주아적 가치는 근대 초기 서유럽 도시문화와 장거리 무역의 산물이며 19세기에 산업자본주의와 혁명적 평등사상의 영향 아래서 한걸음 더 진화한 모습이 되었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과 실현된 현실의 일부는 (서)유럽 근대사의 특수한 경로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면이기도 하다." "많은 아시아 국가의 (준) 부르주아계급과 정부의 친밀도는 서유럽보다 높았다. 그렇기에 이들 부르주아계급은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관점을 지지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 뒤에는 독자적인 상업적 성공의 역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오스만제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정부의 보호와 지지를 받는 소규모의 상업집단이었다. 19세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민간시장이 조절하는 자주적인 체계가 수립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2026-30)


16장 지식 (증가, 농축, 분포)


"'지식'은 특별히 생명이 짧은 실체다.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철학적 정의와는 별도로 사회적 요소로서 지식은 역사가 백 년도 채 안되는 지식사회학이란 학문의 발명품이다. 지식사회학은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정신'(Geist)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회의 중심에 놓고 실제 생활이나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킨다. 온갖 것을 포괄하는 '문화'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지식'의 외연은 상대적으로 좁다. 이때의 지식은 종교와 예술을 포함하지 않으며, 현실세계에서 문제해결과 생활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이용되는 인지자원을 가리킨다." "지식은 당연히 유용해야 한다. 지식은 대자연을 지배하는 인류의 능력을 높여주어야 하고 기술 운용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켜주어야 하며, 사람들의 세계관을 미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요컨대 지식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어야 한다. 유럽 엘리트의 눈에 진보는 시대의 표지였고, 지식의 확대와 증가만큼 인간의 진보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척도는 없었다."(2079)


"읽고 쓰는 데 통달한 사람만 고상한 문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해력의 보급은 농민을 위한 역서(曆書)에서부터 싸구려 소설에 이르기까지 통속적인 서적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엘리트들이 문해력 보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읽기와 모범적인 문화생활을 통해 '보통사람'을 계몽시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위로부터의 '문명화'와 근대화의 실천방식이며 민족통합의 촉진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문화의 해방에 대한 의심과 염려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중문화의 해방은─얼마 안 가 노동자 단체가 보여주었듯이─동시에 대중의 사회적·정치적 지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권력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이런 불신은 현실적인 근거가 없지 않았다. 읽고 쓰는 능력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명예와 권력의 등급질서의 변혁을 유발하거나 현존질서를 건드릴 수 있었다."(2098-9)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사람들은 사회 내부의 지식학습과 도덕교화에 관련된 모든 형식을 교육체계로 인식하고 실제 교육체계로 조직해냈다." "국가가 청년의 공식교육을 독점적으로 통제한다는 구상은 19세기의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사회저층과 중산계층의 자녀들이 처음으로 차별 없이 국립학교 입학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가정교사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갈수록 줄었으며 학교에 등교하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다이는 독일 제후국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국가는 '학교국가'(Schulstaat)가 되었고 사회는 '학교사회'(Schulgesellschaft)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공공교육을 확대하는 정책을 수립하면서 각자의 목표와─민중에 대한 기율교육, '모범국가'를 만들기 위한 '모범시민'의 양성, 군사적 효율성의 제고, 균질적인 민족문화의 창조, 제국의 문화적 통합, '인력자본'의 소질과 기능의 배양을 통한 경제발전 촉진 등─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2108-9)


"야망과 열정이 가장 적은 곳이 식민정부였다. 식민정부는 교육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거나 교육에 관해서는 완전히 선교사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었다. 1960년대 비식민화가 시작되었을 때 콩고자유국(1908년 이후로 벨기에령 콩고)에는 80년 동안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후에도 유럽식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엘리트계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1851/62년부터 영국이 통치)와 세네갈(1817년부터 프랑스가 통치)의 상황은 이보다는 나았지만 지속적인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학교는 매우 드물었다." "인도의 식민정부는 1차 대전 이전부터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지원했지만, 각 대학에서는 '인문학'(즉, 유럽의 고상한 문화)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영국인의 교육 목표는 식민행정에 동원할 수 있는 문화적으로 영국화된 인도인 계층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소수의 개혁파 인사들이 수십 년 동안 대다수 관리들의 '인문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맞서 싸웠다."(2110-1)


"긴 19세기 동안 전 세계 지식 유통의 경로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더 일방통행이었다. 서방의 자연과학은 세계 기타 지역의 자연과 관련된 지식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쌍방향으로 이동한 것은 미학과 종교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이며, 검증 가능한 연구와 과학적 비판과정을 거쳐 이미 입증된 지식이 아니라 영성과 새로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찾는 서방에게 보여준 아시아(훗날에는 아프리카)의 반응이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와 자연과학의 이성적 세계관이 다 같이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고 있을 때 마르지 않는 '동방의 지혜'가 그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지혜를 응용하여 서방이 공급한 정신적 자양분에 맞섰다." "아무런 구분 없이 구원종교의 발생지(fons et origo)로 인식되던 '아시아'는 이렇게 비이성주의의 상징이 되어 서방의 이성주의와 논쟁적으로 맞서게 되었다."(2139-43)


17장 문명화와 배제


"'문명'은 그 대립물인 '야만'이 있어야 존재가 부각된다. 세상에서 '야만'이 사라진다면 자만심에 빠진 문명인이 타인을 공격할 때 또는 조잡함과 쇠락에 빠진 우월한 문명의 운명을 한탄할 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막이 없어진다. 문명의 대극장에서 문명의 정도가 비교적 낮은 집단은 관중의 입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문명인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되도록이면 찬양과 존경 그리고 암묵적인 감사의 형식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집단의 선망과 질투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동기가 '문명포교'(Zivilisierungsmission)의 자양분이 된다. 여기서 '포교'(Mission)는 반드시 종교적 신앙의 전파를 가리키지는 않으며 자신의 규범과 제도를 타자에게 주입하려고─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타자가 받아들이도록 강압하려고─자임한 사명감을 일컫는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자신의 생활방식이 우월하다는 문명인의 확신이다."(2187-8)


"'문명화'의 개념은 19세기에 사회 내부에도 적용되었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남아 있던 고대 씨족사회 구조의 잔재는 남쪽에서 온 관광객 눈에는 민속으로 비쳤다. 18세기 7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발견이 북방의 아프리카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고 한다면 런던에서 세계 박람회가 열린 1851년에 스코틀랜드는 야외 사회사박물관이 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메초죠르노를 바라보는 눈길은 영국인이 스코틀랜드를 바라보는 눈길보다 더 냉혹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북부 이탈리아는 변경지역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이에 실망을 느낄수록 변경지역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은 아프리카를 언급할 때 드러나는 인종주의적 논조에 가까웠다. 공업화된 대도시의 사회 저층도 외래 '종족',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시장, 개인적인 자선행위, 종교적 설득을 통해 최소한의 문명화된 행동방식, 다시 말해 시민계급의 행동방식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2191-2)


"시장경제, 법률, 종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영국의 문명포교 사업을 떠받친 세 개의 기둥이었다. 프랑스식의 문명포교는 여기에다 식민국가의 고급문화를 동화시킨다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집단 생활방식의 개혁 사업으로서 문명포교는 두 가지 극단적인 불간섭주의의 중간에 자리했다. 한쪽에는 유럽 인도주의의 도덕적 태도와 함께 '야만인'은 멸종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숙명론자의 냉정하고 오만한 태도가 병존하고 있었다." "1846-50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지나치게 고집스러운 경제학자들은 불가피한 적응성의 위기라고 해독했다. 다른 한쪽에는 모든 유럽 식민세력이 특수한 조건하에서 기꺼이 실행한 간접통치─달리 말해 현지 사회의 구조에 깊이 개입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정책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구조와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개조하려는 문명포교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권력균형과 문화적 타협을 교란할 뿐이었다."(2201-3)


"노예제 폐지는 아이티혁명으로 촉발된 충격파가 서방 식민지 세계를 덮친 지연된 도미노효과였다. 영국이 선구적 행동을 보인 후 '문명국'으로 비치기를 원했던 유럽국가 가운데서 어느 나라도 노예제 폐지운동 흐름의 바깥에 머물 수가 없었다. 러시아의 1861년 농노해방도 전체 유럽의 발전 추세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보기에 농노제는 러시아의 국제적 위신을 손상시키는 오점이자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제도였다." "노예제도를 제외하면 역사에는 단지 세 차례의 가혹한 인종차별 제도가 존재했다. 19세기 90년대부터 20세기 2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남부, 1948년 이후의 남아프리카, 1933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기간의 독일 점령지가 그것이다." "20세기 들어 미국과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노예제는 백인 우월주의로 대체되었고, 피부색 하나만으로 규정된 집단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폭력과 비국가 폭력이 동원되었다."(2221, 2235)


"서구에서 노예제 폐지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기독교와 인도주의 사상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시장이란 조건하에서 해방노예들이 긍정적인 자극에 반응할 것이며 수출농업 분야에서 예전만큼 생산적으로 일할 것이란 희망이었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노예해방을 거대한 실험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중산계급 개혁가들은 해방노예들이 반드시 중산계급의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실망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흑인은 시장의 합리적인 수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학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개인적인 생활방식도 '문명'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이것이 인종주의의 근원은 아니었지만 인종주의의 추세를 강화시켜주었다. 노에해방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주도한 자유주의자들이 품었던 환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희망의 큰 부분은 실현되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2239-40)


"1900년 무렵, '인종'이란 단어는 세계의 수많은 언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였다. 세계 각지 여론의 분위기는 인종주의로 넘쳐났다." "1900년 무렵, '인종'은 '백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핵심 화제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지배자의 지위에 있던 소수 '백인'은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열등' 인종이 백인의 절대적인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일본과 중국에서 지식인 집단이 유럽의 '인종학'(Rasselehre)이란 용어를 학습하고 응용하고 있었다. '인종'은 진지한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졌다. 이 용어는 일부 인접 학파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생물학자와 민족학자들이 '인종'이란 용어를 빈번하게 언급했다. 인접 학과에서 '인민'(Volk, 영어의 people)이라고 할 때는 수십 년 전에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민중'(demos)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갈수록 생물학적인 공통의 혈연집단으로서의 '인종'(ethnos)을 가리키는 경향이 강해졌다."(2241-2)


# 인종주의의 종류

1. 하층계급을 만들어내는 '억압형 인종주의'

2. 제한구역을 만들어내는 '격리형 인종주의'

3. 국가의 국경을 봉쇄하는 '배척형 인종주의'

4. 특정 집단을 '적'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는 '멸종형 인종주의'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에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과학적 연구방법으로서 분류와 비교가 유행했다. 인류를 '유형'으로 분류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기에 비교해부학과 두개골 용량의 측량으로 인종의 지적 수준을 추론하는 골상학이 과학의 색채를 덧씌워 주었다." "18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인종분류는─'황인종'(yellow race), '흑인'(negro), '코카서스인'(Kaukasier)─완고하게 유지되었다." "19세기의 인종학은 혁명 이후 시대의 특징을 띠고 있었다. 기독교의 구속력은 느슨해졌고 등급제도는 신의 질서 또는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인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형성된 인종학은 영국보다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모습을 더 많이 드러냈다. 영국의 정치사상은 평등을 강조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느끼는 이론상 약속된 평등과 현실에서의 불평등 사이의 괴리는 독립선언과 인권선언을 발표한 국가에서 느끼는 만큼 강렬하지 않았다."(2246-7)


"대략 1815년 이후 새로운 인종학의 생성이 가능해졌다. 거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었다. 하나는, 환경조건이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인체의 표현 형질의 변화에도 항구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환경론과의 결별이었다. 이때 인종학 사상에서 '개량'의 관념은 사라졌다가 그 세기의 마지막 1/3세기에 우생학이란 생명공학으로 모습을 바꾸어 돌아왔다. 이때부터 인종학은 문명포교의 주장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전제는, 계몽운동 말기의 자연과학자와 비교할 때 새로운 인종이론가들은 명성을 좇았다는 것이다. '인종'은 역사철학의 핵심 범주로 떠올랐고, 역사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되었으며, '계급' '국가' '종교' 또는 '민족정신' 등과 직접 경쟁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인종사상의 특징은─토크빌은 그것을 일찍부터 인식한 인물이었다─결정론에 대한 강한 경향성, 그로 인한 정치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역사의 주변화였다."(2247-8)


"왕조시대의 중국은 각종 '야만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익숙하게 알고 있었고 제국의 변경에서 만나는 여러 유형 인종의 외모 특징을 기록해두었다. 중국인은 야만인이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은 개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며, 그러므로 야만인은 교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전통 중국사상에서는 문화가 다르면 반드시 인종도 다르다는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19세기 말이 되자 서방과의 접촉으로 상황이 변했다."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새로운 위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찾는 과정에서 지식인 사회의 선두 집단은 인종 간의 투쟁이란 관점에 매료되었고 유럽을 모방하여 인종등급표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확산의 전제는 인종주의 담론이 범람했던 세기 말의 특수한 여론 분위기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와 (전형적인) 범아프리카주의자도 자동적으로 인종적 차이의 관점에서 사고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안으로서 '흑인종'의 단결을 고취했다."(2257-9)


18장 종교


"19세기는 흔히 '세속화'의 시대─특히 서유럽에서─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세속화가 종교적 상징물을 공공의 공간으로부터 치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최소한도라도 종교적 승인에 의지하는 군주정체가 존재하는 한 국가적 의례는 종교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 군주통치를 소멸시킨 곳이라면 이런 유형의 권력신성화도 종말을 고했다. 1912년 이후로 중국에서는 황제가 천단(天檀)에서 거행하는 제사의식은 없어졌다. 술탄 칼리파의 통치가 종결된 후 케말주의 공화국 정권의 세속주의 상징이 지난 왕조의 종교적 표현을 대체했다." "1826년 이후 오스만 개혁으로 실제로 시작된 국가의 세속화가 이슬람세계의 핵심 화제가 되었다. 케말 아타튀르크 치하의 터키공화국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이후 시대의 국가는 20세기에 대부분 세속주의 정권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1979년의 이란혁명(호메이니 혁명)은 이 과정이 역전될 수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2312-3)


"대혁명 이후 (최소한 개신교 국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경건함과 기독교 도덕문화는 중산계급의 특징이었고, 그 부산물 가운데 하나가 성공적인 반노예제 운동이었다. 이러한 추세의 선봉인 영국에서 등장한 종교적 역동성은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던) 국교인 성공회 밖에서 개신교 복음파의 혁신운동으로 집약되었고 뒤에 가서는 성공회 내부의 반대파도 여기에 합류했다." "19세기 초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은 북아메리카인의 대규모 기독교 귀의로 발전했다. 유럽과는 달리 이 운동은 공식적인 교회조직으로 진화하지 않았고 시종 유동적인 교회와 교파의 형태로 역동성을 유지했다. 1780-1813년에 미국 인구가 8배로 증가하는 동안에 기독교 교구는 2,500개에서 5만 2,000개로 21배 발전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영속적인 부흥운동은 미국을 기독교 신앙이 깊고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이미 '문명국'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는 국가로 바꾸어놓았다."(2313-5)


"일본의 신도(神道)는 메이지시대 민족통합의 도구로서, 국가가 규정한 신흥종교였다. 신도는 추종자의 신앙이나 '경건함'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을 통해 밝혀지는 올바른 신념(Orthodoxy)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올바른 행동(Orthopraxy)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도는 대각성 운동과는 정반대로 종교적 감성을 냉각시키는 데 적합했다. 다른 한편으로 신도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또는 '세계종교')가 아니라 일본의 국교였기 때문에 현대종교의 다양성 개념과 충돌했다. 국가목표에 완전히 종속된 신도는 종교는 개인의 신앙문제이며 여러 사회영역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의 반면(反面)이었다. 이러한 일본과 중국을 대비해보면, 청제국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에 중국이 종교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1949년 이후의 30여 년 동안 국가마르크스주의(또는 '마오쩌둥주의')가 기능적인 면에서 국가신도와 대등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2320)


"언제나 제국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식민지의 종교지형과 등급제도에 개입해왔지만 근본적으로 이를 변화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의 식민지가 아닌 지역에서, 종교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현지 기독교도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경우는 흔히 고의적인 도발의 핑계였다. 러시아는 오스만제국 내 그리스인을, 프랑스는 레바논 산악지역의 기독교도를 보호한 적이 있지만(반대로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기독교도 통치하에 있는 모든 무슬림의 보호자임을 선포했다) 두 경우 모두 국제분쟁과 전쟁을 유발했다. 적대적인 제국이 서로 상대 내부의 종교적 소수파, 소수민족, 또는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소수파 인구를 상대로 벌이는 선동공작은 1차 대전 중에 독일이 영국제국을 겨냥한, 영국제국이 오스만제국을 겨냥한 전략─『아라비아의 로렌스』─으로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략은 19세기의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이미 실전응용을 마쳤다."(2324-5)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라고도 불리는 모르몬교는 1830년에 미국의 한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창설했다." "태평천국의 주장을 『성경』의 원래 뜻과는 멀리 떨어졌지만 현지화된 기독교 교리라고 해석한다면 창시자가 기록한 자기들만의 성서를 가진 모르몬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리가 현지화 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르몬교를 '기독교'로 분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이 있다. 일부다처제의 특징 때문에 모르몬교는 창설되던 시대의 동시대인에게는 '미국의 이슬람교'처럼 낯선 종교였다. 그러나 모르몬교는 『성경』에는 왜 미국이 언급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모르몬교는 구약시대에 미국을 목적지로 하는 대규모 이민이 있었으며 그것은 미국 땅을 구원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성서적 계획이라는 대담한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르몬교는 미국의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종교다."(2337)


"이란 시아파의 한 이단 분파인 바브운동은 『쿠란』의 가르침을 대체하는 전능자와의 직접 교류를 기본교리로 삼았다. 창시자인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 쉬라지는 신이 선택한 선지자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신성한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주장했고 끝내는 자신이 선지지라고 주장했다. 창시자가 1850년에 총살형으로 처형된 후에는, 알리 누리(일명 바하올라)가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는 때때로 세계의 구세주, 다시 태어난 예수와 마디와 조로아스터가 한 몸으로 합쳐진 존재로 자처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종파의 교리를 현대세계의 표현에 맞추어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189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창시자가 내세웠던 시아파 메시아주의는 현대적인 바하이(Bahai)교로 발전해 있었다. 1910년 이후로 이 종교는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지금은 그 정신적 조직적 중심지가 이스라엘의 하이파이다. 이 종교는 19세기에 타생한 종교 가운데서 모르몬교, 인도의 시크교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종교다."(2339)


맺음말


"단순히 유럽에 대한 관찰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19세기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19세기는 18세기 80년대부터 1차 대전까지 이어지는 긴 세기라는 관점이 유익한 가설이자 보조적인 구상이기는 해도 당연하거나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역사형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시원스럽게 1789년과 1914년을 유럽의 19세기의 시작과 끝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몇몇 국가와 지역의 역사는 이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례로, 중국의 정치사에서 건륭황제가 퇴위한 1796년과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사이의 시기는 긴 19세기라는 구분방식과 시간적으로는 어느 정도 일치하지만 내부 발전의 결과일 뿐이지 유럽이 동아시아에서 벌인 활동과 연관시킬 수는 없다. 일본의 경우 1853년의 문호개방과 1945년 제국의 붕괴 사이의 시기는 완전한 하나의 역사주기를 구성한다. 더 많은 국가가 다른 시대구분법을 따르고 있다."(2364-5)


"그래도 이 책이 서술하는 여러 가지 내용과 단서를 하나로 모으면 몇 가지 현실적인 답안이 나온다. 18세기 60년대, 전체 대서양지역의 복합적인 정치위기,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 새로운 생산기술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렸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1차 대전의 각종 결과가 드러나고(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도 좋은 결과가 나왔다) 세계의 모든 식민지와 서방으로부터 기타 형태의 압박을 받는 지역에서─아프리카 열대지역 제외─민족독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시대는 종결되었다. 세계혁명을 추구하던 소비에트정권이 새로운 소련제국으로 변한 것도 영향력이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광활한 영토 위에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실비판 정신을 담은 사상인 사회주의가 싹을 틔워 역사에 전례가 없는 기이한 제도를 실현함으로써 세계정치 무대에 새로운 극(極)이 등장했고, 이 체제는 초기에는 새로운 세계혁명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2366)


# 긴 19세기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1. 19세기는 생산효율─노동생산성, 기술혁신, 농업혁명(토지개발), 군사혁신, 국가관료기구의 행정력 확대 등─이 '비대칭적으로 상승한' 시대였다.

2. 19세기는 유동성─급격한 인구이동, 생산량 증가를 초월하는 세계무역, 국제자본시장, 모든 형태의 이동수단의 기술혁신 등─이 증가한 시대였다.

3. 19세기는 상호관계 강화의 비대칭성─외부지향성이 양적으로 늘어났고, 서방이 세계의 표준문화로 단극화(單極化) 되는─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4. 19세기는 평등─각종 차별의 제거와 법률상 평등의 실현─과 등급제도─유럽 5대 강국이 국제무대를 좌우하는 체제 성립─가 대립한 시대였다.

5.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해방─(민족)국가들의 독립, 노예제 폐지, 농민 처지 개선, 노동자 권리(선거권 포함) 쟁취, 여성해방은 물음표─의 시대였다.


"19세기는 1914년 8월에 갑자기 끝나지 않았고, 1916년 베르됭전투 이전에 끝나지도 않았고,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도착한 1917년 4월에 끝나지도 않았다. 역사는 막이 갑자기 내려오는 연극무대가 아니다. 그러나 1918년 가을에 많은 사람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제의 세계'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19세기는 1914년 이후 발생한 재난을 위해 길을 닦아 놓았다. 한나 아렌트 등은 19세기는 이 때문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받들었던 일부 전통과 사상, 예컨대 자유주의, 평화주의, 노동조합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1945년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았고 또한 추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1950년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1910년─버지니아 울프는 인류의 본성이 바뀐 해라고 탄식했다─은 아득히 먼 시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본다면 1910년은 가장 최근에 겪은 전쟁의 공포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었다."(2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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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2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7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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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도시 (유럽 모형과 세계적 특색)


"19세기 중엽부터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잇따라 등장한 대도시는 기왕의 도시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은 대도시는 '사회'가 결집되고 사회적 기준이 형성되는 곳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대도시는 경제순환의 동력원으로서, 사회적 유동성의 증폭기로서 기능했다. 대도시에서 가치는 (농촌에서처럼) 오로지 생산을 통해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증가했다. 상품의 신속한 회전이 부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근대적 대도시의 본질은 순환, 다시 말해 교통기술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주변지역 사이의 사람, 가축, 교통수단, 상품의 이동이란 점을 점차 깨달아갔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대도시 생활의 빠른 속도에 대해 끝없이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냈지만 반대로 도시의 개혁자들은 근대도시의 핵심인 원활한 순환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구상했다."(765)


"도시의 급격한 양적 성장과 급속한 현대화가 같은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탈도시화'가 (더러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위기와 정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18세기 공업화 시초 단계에서 대도시 인구의 외부유출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로 탈도시화는 1800년 이전 유럽의 여러 지역, 예컨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남유럽 도시의 쇠락은 유럽 도시문화의 중심이 남쪽에서 북쪽과 대서양으로 옮겨가는 추세의 반영이었다. 1840년 무렵이 되어서야 남쪽 옛 도시의 쇠락이 멈추었다. 발칸은 하나의 예외였다. 경제발전 수준이 비슷한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발칸의 도시화 정도는 꽤 높았다. 이것은 19세기 특유한 발전 추세의 결과가 아니라 오스만제국의 도시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존중과 각 요새도시의 중요한 지위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가 끝난 후 많은 발칸 국가가 탈도시화의 과정을 경험했다."(787)


"동아시아에서 탈도시화는 다른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 대략 1750년 이후 상업이 번성하면서 각지의 도시가 빠르게 팽창했다. 19세기 초, 방콕의 인구는 태국 전체 인구의 1/10을 넘어섰다. 버마와 말레이시아 각 주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1850년대 쌀 경작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농촌화' 현상이 나타났고 농촌인구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1815-90년에 자바에서는 주민 2,000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중이 7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떨어졌다. 이것은 현지의 경제가 수출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생긴 직접적인 결과였다." "식민통치가 도시화를 촉진하는지, 방해하는지 또는 후퇴시키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해나가던 1765-1818년 현지에 원래 있던 도시체계를 보존하고 유지시켰다. 이런 방식은 식민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식민전쟁 중에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기간시설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유명한 인도의 국도가 여기에 포함되었다."(788-9)


"미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운하와 철도의 역할은 유럽의 경우보다 훨씬 컸다. 콜로라도주 덴버시는 수로로는 연결되지 않는 도시였지만 순전히 철도 덕분에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철도산업 덕분에 고립된 개별 도시의 기초 위에서 종횡으로 연결된 도시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식민지시대 초기에 형성된 대서양 연안의 정착지가 집결된 동북부지역에서 철도망이 확산되자 새로운 도시가 잇달아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종횡으로 확장된 도시체계가 나타났다. 미국 서부에서는 이러한 도시체계가 19세기 중엽에 갑자기 형성되었다. 그 첫 번째가 시카고였다. 이 도시의 인구는 불과 40년 만에 (1850년의) 3만 명에서 110만 명으로 폭증했다. 시카고와 중서부 지역의 기타 도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변경이 서부로 확장되면서 하나씩 생겨난 도시는 유럽의 모형을 따르지 않고 주변지역이 농업지역으로 개발되기 전에 기반을 잡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발전해나갔다."(791-2)


# 단일 기능의 도시 유형들 : 성지(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인도의 바라나시 등) 도시, 휴양지(벨기에의 스파Spa, 프랑스의 비쉬, 크리미아의 얄타 등) 도시, 광산(볼리비아의 포토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미국 콜로라도주의 애스펀Aspen 등) 도시


"19세기에 경제적 성공은 내부적으로는 통합되면서도 등급이 분명하고 외부적으로는 개방된 도시체계를 갖춘 나라에서 나타났다. 민족국가에서는 도시체계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도시는 제대로 작동하는 민족국가의 틀에 반드시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가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산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성장 잠재력이 높은 도시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가 나선 조정(調整)은 법적·재정적 통일성을 높였고, 교환과 통신의 표준을 제시했다. 또한, 공공 목적의 도시 기반시설을 설계할 때 기준을 제시했으며 건설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체계의 형성과 건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민족국가시대'에도 개별 국가가 반드시 대도시보다 '강대'하지는 않았다. 대도시는 (국가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795-6)


"1870년 무렵에 기차를 타고 유럽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도시에 오기까지는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는 기술을 이용했지만 일단 도시의 기차역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말이 끄는 운송수단에 의존해야 했다." "걸어 다녀야 하는 도시에서 일터와 집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수는 없었다. 주거 밀도가 높은 빈민가가 형성된 이유가 이것이었고 빈민가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또한 이것이었다. 저소득 인구도 감당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을 찾아내는 일은 도시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다. 공업화 시대 이전의 교통기술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공업시대'로 진입한 뒤에도 전통적 교통수단이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마차는 도시교통에서 중요한 초기의 발명품이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가격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는 미국인의 발명품이었고 1832년에 처음으로 뉴욕 거리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도시 여객마차가 파리의 거리에 등장했다."(878-9)


"마차와 마차철도는 사회공간의 분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차버스의 요금과 교통노선 주변의 지가 상승을 감당할 수 있는 중산계급은 일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옮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사회학에서 말하는 작업장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마차교통은 철도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시 교통의 여러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은 궤도전차가 도입된(1888년 미국) 뒤의 일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전차는 전기적 에너지를 회전구동력으로 전환시킨 기계장치였다. 궤도전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내 교통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왔다. 궤도전차의 속도는 마차철도보다 두 배나 빠르면서도 요금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전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운임 하락의 파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십 년 전에 대서양을 건너는 우편 증기선의 운임이 떨어졌을 때와 거의 같았다."(880-3)


"단거리 대중교통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은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이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은 런던이었다. 지하철은 철도기술과 하수도 공사를 통해 터득한 터널기술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1860년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고, 3년 뒤에 첫 번째 지하철 노선─길이 6킬로미터의 '메트로폴리스 라인'(Metropolis Line), 세계적으로 지하철의 통칭인 '메트로'(Metro)가 여기서 나왔다─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깊이 15-30미터의 지하에 건설되었는데 진정한 의미의 지하터널(tube) 방식은 아니었다. 지하 굴착기술이 성숙한 1890년에 이르러서야 터널방식의 지하철이 등장했다. 이때부터 지하철 역이 땅속 더 깊은 곳에 설치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지하철의 동력도 전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하철 노선망의 점진적 확대는 도시의 통합과 교외지역의 개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지하철 운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운영자의 입장에서도 지하철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885-6)


7장 프런티어 (공간의 정복, 유목생활에 대한 침입)


"19세기에 들어온 이후로 도시에 대칭되는 극단은 더는 '농촌'(토지에 의존하는 농민의 생활권)이 아니라 '프런티어'(자원개발 과정에서 이동하는 영역)이다. 프런티어는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확산된다. 프런티어는 확장자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말하듯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동영역이 자기 쪽으로 접근하여 오는 모양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는 침략자의 창끝이다." "도시와 프런티어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도시도 프런티어도 19세기 인구이동을 끌어당긴 거대한 자석이었다. 그곳은 꿈의 실현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시와 프런티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사회적 조건의 삼투성(渗透性)과 가소성(可塑性)이다. 가진 것이 재능뿐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었다. 기회가 많다는 것은 동시에 위험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런티어에서 카드의 패는 다시 뒤섞여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945)


"프런티어의 식민화 과정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토지침탈의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비유럽 민족이 침입에 저항하여 일정 정도의 승리를 거둔 소수의 사례─예컨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Maoris)─가 있기는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원시 생존방식에 대한 공격은 거의 모두 원주민의 패배로 마감되었다. 토착사회는 전통적인 생존의 기반을 상실했고 동시에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땅에 등장한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 뿌리내릴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다.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피한 원주민일지라도 '문명화'와 개조 과정은 피해갈 수 없었다. '문명화'의 근본 내용은 토착문화에 대한 완벽한 멸시였다." "피해자인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의 외부세계의 점진적인 인정은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생활방식의 주변화란 기본적인 사실은 바꿀 수가 없었다."(948-9)


"프런티어에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제국의 경계가 전형적인 프런티어이다. 제국이 확장을 멈추는 순간 프런티어도 더 이상 잠재적인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 외부 위협을 막아내는 노출된 측면으로 바뀐다. 프런티어는 제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는 통제되지 않는 공간, 마지막 초소 넘어 저쪽의 게릴라와 비적(bandit)이 수시로 출몰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된다." "프런티어에 대한 제국의 태도는 구조적으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프런티어는 지속적으로 혼란스러우므로 제국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위협이다. 정복을 완성한 후 제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기를 지니고 순종하지 않는 개척민은 (식민지를 포함하여) 근대국가가 추구하는 무력의 독점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식민지의 변경에 위치한 프런티어는 그러므로 '임시적인'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곳은 '아직' 제국에 병합되지 않았거나 '머지않아' 제국에서 이탈할 지역이다."(955-6)


"미국의 프런티어는 언뜻 보기에 토지를 끝없이 공급해줄 것 같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비교적 평등한 분배와 보편적 번영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하층계급이 없는 위대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이 지점에서 미국을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와 비교해보면 하나의 의미 있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에서 프런티어의 토지는 처음에는 공공의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유동성이 높고 모험심이 강한 소농이 국가가 공급하는 토지를 흡수했고 그래서 투기는 초기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토지는 대지주의 손에 떨어졌다. 대지주가 소작인에게 좋은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런티어의 균등주의 정신을 믿었던 사람들은 절망의 제물이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의 하나는, 아르헨티나 정부는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추구했지만 캐나다는 균형 잡힌 사회질서를 중시한 차이였다."(960-1)


"전쟁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다. 교전 쌍방의 살육행위와 방어수단이 없는 평민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과 학살은 구분되지 않았다. 쌍방은 무장하고 있었고 폭력은 프런티어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18세기 말에 벌어진 식민전쟁이 남긴 유산이었다. 다른 문명 사이의 폭력사용과 프런티어 사회의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폭력이 뒤엉켜 있었다. 생활 속의 분쟁을 권총이나 소총으로 해결하는 '거친 서부'의 개척민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무장을 갖춘 집단이었다. 내전시기에나 통하던 '총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평화시의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폭력은 남성의 명예를 지키는 궁극적인 방식이었다. 미국 동부의 도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이 방식은 충돌을 완화하기보다는 격화시켰다('비후퇴의 의무'). 서부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자살형 '용기'를 숭배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980-1)


# 비후퇴의 의무(No Duty to retreat)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성(castle), 즉 보호구역이 있고 그곳에 침입해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미국 형법의 원칙


"서부의 중요한 특징은 자경단주의(vigilantism)였다. 법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때 혁명적인 무력으로서 자경단이 등장하여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거칠게 해석된 자위권 사상과 인민주권(Popula sovereignty)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처드 브라운의 분석에 따르면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자경단은 정규적인 법체계에 비해 인력소모는 많아도 비용은 적게 드는 방식이다. 1865년에 내전이 끝난 뒤로 약 40년 동안 권총을 든 영웅들이 만들어낸 공포의 심각성과 보편성은 정점에 다다랐다. 브라운은 이런 상태를 일종의 소규모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200-300 명의 악명 높은 전문살인자들(여기에 더하여 이보다 지명도가 낮은 수많은 전문살인자들)이 대지주의 지시를 받고 소규모 목장주와 자경농민을 상대로 대지주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이들은 정의감이 강하고 보통사람을 돕는 협객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상층부의 대리인이었다."(981)


"1874년 특허를 획득한 철조망이 대규모 생산을 통해 보급되자 '열린 서부'에서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분명한 선으로 표시되었다. '황야'는 분할되고 식민화되었으며 '유랑하는 야만인'(이것은 당시의 표현이다)은 생존공간을 잃어버렸다. 단일한 측량방식이 미국영토 전체에 적용되었고 프런티어를 넘나드는 생존방식은 불가능해졌다. 전술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은 최후의 패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인디언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은 인디언조차도 〈지금까지의 존재양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다른 존재로 바뀌라는 끊임없는 압력에 포위당한 종족이 되었다.〉 19세기 80년대에 마지막 전투적인 인디언 부족이 무장해체를 당하고 국가의 피보호자 신세로 전락했다. 1871년 정부는 앞으로 인디언과는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때부터 인디언국가는 더 이상 담판의 대상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988)


"남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의 발전사에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이 많았다. 두 곳에서 유럽이민과 토착민 사이의 첫 번째 접촉은 모두 17세기에 발생했고, 두 나라에서 19세기 30년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부의 인디언을 축출하는 정책을 펼쳤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보어인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독특한 점은 영국인이 희망봉을 점령한 뒤 백인집단이 분열했다는 것이다.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인 보어인 외에는 비교적 적은 숫자의 영국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영국인 공동체는 영국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독점했다." "보어인은 두 개의 공화국을 세웠다(트란스발 공화국(1852)과 오렌지자유주(1854))." "그러므로 19세기의 남아프리카에는 미국정부의 연방 '인디언정책'과 상응하는 '흑인정책'을 수립할만한 통일된 국가가 없었다."(1000-2)


"북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에서도 프런티어의 핵심집단은 자급자족의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무장한 개척민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에서는 수출수요를 겨냥한 대기업형 생산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8세기에 담배와 면화 플랜테이션이─대부분이 프런티어 지역에 있었다─광역 무역망의 일부를 형성했다. 19세기를 통틀어 프런티어는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현상으로 변해갔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은 내륙으로의 대이주 후에 이전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멀어졌다. 보어인들이 세운 두 개의 공화국에서 국가기구의 기능은 온전하지 못했고 재정은 불안정했다. 교회를 제외하고는 '시민사회'를 통합할 시스템은 없었다. 그러나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의 영토 안에서 19세기 60년대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금광이 발견되자 자족형 농업과 병행해 (세계시장으로 연결된) 광업 프런티어가 형성되었다."(1002-3)


"남아프리카의 지배층은 특정한 구역을 흑인(프롤레타리아)의 집중주거지로 지정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거주구역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homelands)이란 명칭을 붙인 흑인 보호구역은 인디언 보호구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뒤에 생겨났고(1951년 이후), 경제적인 기능을 상실한 인구집단을 격리시킬 목적에서 만든 야외감옥이라기보다는 흑인 노동력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경제 분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흑인 보호구역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세워졌다. 하나는 보호구역 내의 모든 흑인 가정이 경작을 통해 자급자족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하여 물리적 재생산 비용이 최소 수준에 머물게 된) 남성 노동자를 신흥 경제영역으로 유입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아직도 존재한다. 남아프리카의 '고향'은 지도 위에서 이미 사라졌고 다만 토지소유권의 분배에서는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1004-5)


"미국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중앙집권적인 계층제 구조의 제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체제였다. 제국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마 유목민이 통치하며 주변의 정주형 농업사회에 기생적인 초원 제국이다. 다른 하나는 자국 농민으로부터 직접 징세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제국이다. 두 유형 사이에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초기에는 구조적으로 몽고제국과 유사하게 군사지도자 사이에 맺어진 느슨한 연맹으로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제국으로 변했다." "청제국은 1760년대까지 거침없이 성장하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확장하는 러시아제국을 만나게 되었다." "18세기 말, 한때는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유목민이 세운 오래된 나라들이 모두 대제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런 상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끝이 났다."(1015-6)


"프런티어는 파멸의 장소이면서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장소다. 파괴와 건설은 흔시 변증법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프런티어는 폭력적 무정부주의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현대 정치와 사회의 요람이었다." "20세기초,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과잉에 따른 자원부족의 위험을 피할 충분한 '생존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열등한 민족이 적절치 못하게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는 것은 강대국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주장이 극우단체와 여론 주도층 내부에 자리 잡았다. 이런 생존공간 전략을 실행한 나라는 대부분 20세기 30년대에 일어선 신흥제국─이탈리아 파시스트정권은 리비아에서(에티오피아도 점령했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일본은 1931년 이후 만주에서,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때 단명으로 끝난 동부제국(Drang nach Osten)에서─이었다. 이 세 가지 사례는 프런티어전쟁을 통해 민족의 세력을 증명하고, 토지약탈을 통해 민족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1033-4)


8장 제국과 민족국가 (제국의 지구력)


"국제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는 전쟁과 평화─전쟁의 부재상태─이며, 전쟁을 피하는 것은 지고의 선이었다. 19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관계가 탄생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양극' 핵 대치상황이 종결되면서 냉전과 양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가지 전쟁방식과 국제관계의 행태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런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국제관계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945년 이후로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발동하는 전쟁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침략전쟁은 더는 합법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이미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19세기와는 달리,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이상 '현대성의 증명'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아시아 국가의 핵무기 보유의 상징적 의미는 다른 범주의 얘기다."(1098-9)


# 19세기에 이루어진 국제관계의 발전과 변화 양상

1. 국민개병제 확립 : 군대는 더 이상 통치자의 도구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정치적 의지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2. 국가이익 지상주의 : 통치자나 왕실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인 '(민족)국가'의 이익이 국제정치에서 핵심이 되었다.

3. 기술발전 : 민족국가들은 기술 발전 덕분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파괴 능력을 확보되게 되었다.

4. 산업생산력 증대 :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산업생산력의 격차가 확대되고 이는 군사기술상의 격차로 이어졌다.

5. 국가체제의 세계화 : 유럽 제국주의와 비유럽 강대국(미국 및 일본)의 부상은 세계적 국가체제를 정착시켰다.


"19세기의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제국이 더 많고 민족국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1900년 무렵에 제국의 시대가 머지않아 끝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3대 제국─오스만, 호엔촐레른, 합스부르크의 세 다민족국가─은 사분오열되었지만 그래도 제국의 시대는 계속되었다. 서유럽의 모든 식민제국은 물론이고 필리핀 한곳만 식민지로 갖고 있던 소형 식민제국 미국은 흔들림이 없었다. 종주국 자신의 발전상을 보자면 20세기 20, 30년대에 이들 제국은 경제와 정신면에서 최고점에 도달했다. 신생 소비에트정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러시아제국 말기에 정복했던 카프카스지역과 중앙아시아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 일본, 이탈리아, (단명했던) 나치독일은 옛 제국을 모방해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일어난 뒤에야 (1956년의 수에즈운하 위기에서부터 1962년의 알제리전쟁 종결까지) 제국의 시대는 종말을 향해 다가갔다."(1123)


"19세기가 '민족국가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19세기에 하나의 새로운 사유체계와 정치적 신화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강령과 정책으로서 받들어졌고 민중의 정서를 자극해 동원하는 도구로서 작용했다. 민족주의는 시발점에서부터 강력한 반제국주의의 색채를 드러냈다. 나폴레옹시대에 프랑스의 '이민족통치'를 받은 경험이 독일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여러 곳에서─러시아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만제국, 아일랜드를 가릴 것 없이─새로운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목표가 예외 없이 민족국가 수립은 아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서구에 맞서 생겨난 '반식민침략운동' 역시 독립된 민족국가 수립이 목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에 진입한 후, 엘리트들이 민족해방이란 명분의 동원능력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이차적 저항'이 일어났다."(1123-4)


"19세기 유럽에서 제국의 세계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새로운 민족국가의 수는 손가락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된 정치적 실체의 숫자는 역사에 전례가 없는 속도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8세기 중엽, 아프리카, 무굴제국이 해체된 뒤의 인도, 자바섬, 말레이반도에서 각종 형태의 정치체제─왕국, 토후국, 술탄국, 부족연맹, 도시국가 등─는 그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분명한 것은 1800년 무렵 여전히 수천 개를 헤아리던 정치적 실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등이 통치하는 40개 가까운 식민지로 정리되었다. 식민지 열강의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은 아프리카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반대였다. 그것은 분할이 아니라 통치지역의 강제적인 합병과 집중, 떠들썩한 정치 기반의 대청소였다. 당시 아프리카 전체에서 민족국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1149-50)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안정된 민족국가 대 불안정한 제국'이란 관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념의 뿌리는 민족은 자연스러우며 본원적이지만 제국은 인위적인 권력관계로서 민족이 이탈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사상이다. 고대의 중국과 서방 양쪽에서 제국의 흥망성쇠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표면현상의 착각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은 승리자의 자세로, 멸시와 애석함의 감성으로 아시아 대륙 제국의 쇠락에 대해 예언을 쏟아냈다. 그들은 국제적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아시아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만제국의 해체는 최종적으로 1차 대전 이후에야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에 왕조제도가 붕괴했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혼란을 경험한 뒤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제국의 재건을 성공적으로 실현했다."(1152-3)


"다른 제국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는 식민지란 개념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이 제국에는 심지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처럼) 차별받는 '내부' 식민지도 없었다." "이 제국은 통일성이 결여된 다민족 제국, 역사적 연원이 다른 많은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독자성이 강한 지역과 민족은 헝가리였다. 1867년, 헝가리는 반(半)자치왕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헌법체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중군주제' 제국에 합병되었다. 헝가리는 자신의 양원제 의회와 정부를 가졌다. 이중제국에서 헝가리의 지위는 영국제국 내에서 캐나다 자치령의 지위와 대체로 동일했다(캐나다 자치령도 1867년에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내부통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은 문화를 통일시키고 동질감을 강화하기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수평방향의 사회통합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제국의 단결은 군주란 상징과 다민족 장교단을 통해 최고 계층에서만 유지되었다."(1180-1)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제국은 제국의 가장 전형적인 두 가지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폴레옹은 짧은 시간 안에 제국의 우수한 엘리트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들을 각지로 파견했고 순환근무제를 통해 이들을 관리했다." "나폴레옹제국은 극도로 국가통제주의적인 정치체제였으며,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현대적 직능을 갖추었으나 신민에게는 제도화된 발언이나 정치참여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제국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제국도 피정복 사회의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토착 지배자와 토착 엘리트와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영국 모델에서는 허용된) 최저한도의 형식적인 대표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폴레옹의 확장계획 전체가 강렬한 문화적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우월감의 바탕에는 혁명시대 이후 세속화된 프랑스 사회가 계몽사상과 문명의 정점을 대변한다는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1184-5)


"1900년 무렵, 식민행동의 방식에 변화가 발생했다. 세기가 교체될 무렵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복은 기본적으로 완결되었다. 평화의 시기에 식민열강은 식민통치의 체계화, 비교적 폭력을 적게 사용하는 식민정책의 단계를 열어갔다. 목표는 하나, 프랑스의 식민 이론가가 말한 '가치안정화'(mise en valeur)였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제국에서,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1905년 이후의 시기를 당시의 식민상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데른부르크시대'라고 부른다." "같은 시기에 '가치안정화'가 가장 철저하게 시행되어서 다른 식민열강의 모방의 대상이 된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모든 식민세계가 그렇듯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식민정부는 현지 민중의 교육과 훈련을 중시하지 않았고 1901년 이후의 개혁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력자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은─'부족'이란 유럽과 비교했을 때의 표현이다─어쩌면 유럽 식민주의의 최대의 죄악인지 모른다."(1196-8)


"대형 플랜테이션과 특허 회사의 활동 지역은 통상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일종의 '사적인 제국'에서는 엘베강 동쪽의 융커의 장원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법률은 간접적으로만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심지어 법률로 보호받는 영지를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허회사가 아시아에서 철저하게 몰락한 뒤로(1858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아시아에는 새로운 반(半)관영 식민 대리기구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남만철, SMR)였다. 남만철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만주의 남단(요동반도)과 러시아가 부설한 현지 철도의 남단을 부분 소유했다. 이 회사는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는 식민권력이 되었다. 이 회사가 세운 유사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철도 식민지가 중국 동북의 경제 핵심지역이었으며 이곳은 또한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공업 기지이기도 했다."(1201)


"19세기에 영국제국은 영토의 면적이나 인구의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큰 제국이었다. 영국제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제국과 달랐다. 영국은 제국형 민족국가라 할 수 있었다. 내부 상황을 보더라도 제국시대 이전부터 영국은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확정된 영토를 가진 민족국가였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민족의 이익을 제국의 이익으로, 또는 제국의 이익을 민족─네 개의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이기는 하지만─의 이익으로 정의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가 없는 민족국가였다. 영국은 제국적 민족주의라는 역설로 가득하다." "19세기를 통틀어 영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는 문명의 전파자라는 강렬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전제적인 권력의 압박을 받으면서 미신에 휘둘리고 있는 비기독교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같은 관용적인 수사(修辭)는 언제나 수많은 지지자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1213-5)


"영국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이념의 출생지였다. 영국인─특히 존 스튜어트 밀─이 만들어낸 인권문제에 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제로서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이고 중요한 사례가 바로 노예무역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투쟁이었다. 1807년, 노예제 폐지파는 영국 의회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그 뒤 30년 동안 제3국의 노예운반선을 나포하여 실려 가는 노예를 석방하는 일이 영국 해군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포괄적 개입주의는 영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부대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슘페터는 영국의 목적은 해상 패권의 쟁취가 아니라 〈해상의 교통경찰〉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이 세계를 향해 지니고 있던 태도의 이념적 핵심은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었다. '문명화의 사명'은 유아독존적 광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수단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졌다."(1215)


"영국제국이 로마제국·18세기 청제국과 다른 점은 문명 세계 전체(orbis terrarum)를 통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영국은 어떤 대륙에도 대적할 자가 없는 독점적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영국은 기타 강대국의 도전과 경쟁을 마주해야 했다. 영국제국은 동질적인 영토적 집합이 아니라 중추형밀집점(中樞形密集点)과 통제하기 어려운 중간지대가 함께 어우러져 구성된 체제였다. 2차 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미국과 다른 점은 미국은 기술적으로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폐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19세기의 영국제국은 지구의 어느 곳이든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군사적 개입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1849년, 영국의 일부 민중이 헝가리혁명을 돕기 위해 개입하라고 호소했으나 당시로서는 개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은 어느 정도는 해상의 헌병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찰'이 될 수 없었다."(1232)


9장 강대국체제, 전쟁, 국제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19세기 말에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모든 국제관계는 단일한 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유럽 정치와 주변부를 개념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전부터 내려오는)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여러 장소─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심지어 1902-1903년 겨울에는 베네수엘라─에서 부딪쳐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국의 충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었거나 그 영향이 충분히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이 불문율인 '놀이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 '놀이규칙'이란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이 좌절되었을 때 그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보상'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용인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충돌과 대립은 유럽 각국 사이에 항구적인 불신감을 낳았지만 어떤 충돌도 유럽에 주는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촉발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1291)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국제체제가 흔들린 것은 외부 영향 때문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쉬더는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다섯 강대국으로 구성된 유럽의 국제체제가 하나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패권'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해외 이익의 균형은 모두가 예외 없이 쌍방의 협조하에 실현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집단행동은 오직 한 차례뿐이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의화단에게 포위된 공사관 구역을 포위망을 뚫고 구조했다. 연합군 군대 가운데서 일본과 미국 군대가 주도 작용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참여는 이 제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가장 야심찬 외교행동이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제국주의는 개별 제국주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5대 강국이 대륙을 초월한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강국으로서 등장했을 때 유럽의 국제체제는 5대 강국 사이에서 작동했다.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1291-2)


"남아메리카에서 각국이 독립한 뒤에도 정치지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역 전체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국가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로서의 위상을 찾고 있었다. 어느 국가도 (포르투갈 배경을 갖고 있어서 다른 나라와는 구분되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패권국가로 올라설 능력이 없었다." "열강과 이들 국가 중의 개별국가는 후견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것이 좀더 넓은 범위의 질서로 발전하여 패권적 지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지나간 독립전쟁 시기에 지녔던, 미국의 모형을 본받아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연방을 만들겠다던 꿈을 기억하고 다시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틴아메리카 세계에 진정한 강대국이 없었다는 것은 약점이라기보다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라틴아메리카 세계에는 (세기말에) 점차 강대해지고 있던 미국에 맞설 군사적 능력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1298)


"중국제국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를 정치적으로 효율적으로 운용해왔다. 이 세계질서는 근대 유럽이 다중심 국제체제와는 달리 고도로 발달한 단일중심체였다." "이 세계질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구성원과 구성원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명확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질서는 광의의 국제체제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전체 배치가 완전히 중국 조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국제체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개별 구성원은 주권과 평등한 관계를 제약 없이 누린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등급의식은 중국인의 국가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 종주국-속국 관계를 관리하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인도인, 말라야인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은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1303-4)


"20세기 후반과 비교할 때 19세기에 강대국의 지위와 군사적 성취는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일본처럼 경제적 거인이 사실상 군사적 비중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1900년 무렵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내전이 끝나고 경제가 빠르게 발전할 때에 외교적 위신이 크게 올라갔지만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강대국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95년의 전쟁에서 중국을 이기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역적 강국으로서 존중받았지만 1905년 러시아를 꺾은 뒤에야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문화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던 독일은 1871년에 들어와 갑자기 강대국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와는 반대로, 중국, 오스만제국, 스페인은 군사적 재난을 겪은 후 세계로부터 존경받던 강대국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렇게 세계를 선도하던 국가의 명단에 변화가 생긴 배후에는 조직된 폭력의 역사의 보편적 추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1307-8)


"19세기 유럽의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이론 중의 하나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하의 세계평화란 관념에 뿌리를 둔 좀더 오랜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기적 이성의 원칙에 뿌리를 둔 이론이었다. 1814-15년의 빈체제는 이 두 가지 논리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국제체제 안에서 상호 합의된 충돌 억제절차를 통해 개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세기 유럽의 확장 과정에는 영국의 '보호국' 법제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보호국 제도란 한 국가가 종주국에게 외교관계의 후견인 역할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 식민과정에서 보호국의 설치는 〈일종의 은폐된 형식의 병합〉이었다. 이런 법률형식이 환영받은 이유는 종주국으로서는 각종 경로를 통해 보호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면서도 피점령국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은 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3국(즉, 다른 하나의 종주국)이 보호국 관계의 수립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면 국제법상 장애는 아무것도 없었다."(1327, 1343)


"1815-70년이란 시기는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좁은 범위의 귀족 엘리트 전문가 집단이 독점한 고전적인 권력 개입의 시기였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전에는 왕조의 이익이 '현실주의' 외교정책의 길목을 막고 있었고 외교의 전문직업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그 후에는 신문매체와 유권자의 정서가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정서를 조작하는 위기를 조성하고 식민지(베트남)를 점령함으로써 국내의 사기를 높였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누구의 간섭과 비평도 허락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도 때로는 대중동원이란 카드를 사용했다. 예컨대,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프로이센을 상대로 한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에게 애국주의의 이름을 빌려 독일인을 단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민족주의와 언론매체가 개입하는 상황에서 대중의 정서적 반응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갔다."(1344-5)


10장 혁명 (필라델피아로부터 난징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19세기의 정치는 혁명적 정치였다. 19세기의 정치는 '오래된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으며, 미래를 바라보며 국부적인 이익(특수 '계층' 혹은 계층 연맹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 또는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이익으로 끌어올렸다 유럽에서 '혁명'은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이념이 되었으며 처음으로 '좌익'과 '우익'을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 '긴' 19세기 전체가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이 태어난 1783년은 국가의 새로운 형태의 초석이 놓인 해였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혁명의 물결은 일찍이 18세기 60년대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본질을 말하자면 혁명의 시대는 바로 이때 막을 열었다. 그렇다면 19세기는 한 차례의 혁명이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을까 아니면 여러 차례의 혁명이 발생한 시대였을까. 어느 쪽 해석도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역사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관점은 단수의 혁명을 선호하고 구조를 중시하는 관점은 복수의 혁명을 지지한다."(1389-90)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경험했거나 주도한 사람은 새로운 혁명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1776년과 1789년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13개 주가 영국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민제헌의회를 구성했다. 이렇게 역사는 전례가 없는 연동상태를 연출했다. 이전의 폭력적 변혁이 새로운 병에 오래된 술을 담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결국 이전으로의 복귀였다고 한다면,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시대의 경계를 부수고 직선형 진보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혁명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지역적 사건이다. 더 나아가 1776년과 1789년의 혁명이 우연히 발생했기 때문에 혁명이념이 태어났다. 이후의 모든 혁명은 이러한 이념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라났다. 달리 말해 혁명은 모두가 모방이었다."(1390-1)


"혁명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정의는 협소한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의 목적과 그 철학적 근거를 따지거나 역사철학에서 말하는 '대혁명'의 특수한 작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실제적인 결과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혁명을 만날 수 있다. 혁명은 특수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인 항의 사건이며 이전 정권의 집권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제도의 변경이다. 사회과학자의 신중한 표현을 빌려서 정의한다면 혁명은 〈신엘리트가 성공적으로 구엘리트를 전복시키고(통상적으로 상당한 폭력과 대중 동원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후 사회구조와 함께 권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다. 이 정의는 역사철학의 시각에서 혁명을 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 근대성의 열정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어느 시기에나 이런 의미의 혁명은 있었다."(1391-2)


"역법 상의 19세기(1800-1900년)는 통상적인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세기에 북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혁명의 성과가 나타났지만 '대'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1800년 무렵 혁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영웅적인 시작의 모방이거나 무기력한 복습이었다. 또는 비극이 끝난 뒤의 광대극이거나 1789-94년에 진행되었던 위대한 봉기를 소란스러운 소규모로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역사는 1917년 러사이에서 다시 한번 전례가 없는 극을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라기보다는 반항의 세기였다. 19세기에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라는 정치무대에서 임계점을 넘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1849-1904년(즉, 1차 러시아혁명 기간)에는 유일한 예외인 1871년의 실패한 파리 코뮌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혁명적 상황'은 결국 '혁명적 행동'으로 전환되지 못했다."(1394)


"그러나 19세기에는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히 존재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은 가장 급진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적 실험이면서 혁명이란 명칭을 거부했다." "메이지유신은 대다수 유럽 정치평론가들의 시야 밖에서 일어났고, 그와 관련된 지식은 유럽인의 혁명과 개혁에 관한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천황 직접통치의 외피를 걸친 정치체제 개혁을 합법화하기 위해 현실에서 현존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려는 일련의 조처를 '유신' 또는 '회복'으로 위장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예방하거나 보편적인 원칙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빠른 시간 안에 효율을 높이려는 혁신 방식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각자의 발원지에 미친 영향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불공정과 언론자유 결핍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통해 전 지구적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성장 중인 국가의 목표였다."(1397)


"대략 1765-1830년 무렵에는 몇몇 지역에서 혁명적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를 혁명 밀집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건의 여파는 모든 대륙에 미쳤다. 이처럼 상호 영향을 미치는 혁명의 발원지는 미국과 유럽대륙에 있었다. 그래서 '혁명적인 대서양지역'이란 개념이 합당한 것이다. 혁명이 두 번째로 집중적으로 발생한 때는 1847-65년이었고 이 기간 중에 유럽혁명(1848-51년), 중국의 태평천국운동(1850-64년), 인도의 민족봉기(1857년), (특별한 사례로서) 미국의 내전(1861-65년)이 있었다." "세 번째 혁명의 물결─1905년 러시아, 1905년 이란, 1908년 터키, 1911년 중국─이 유라시아대륙을 휩쓴 때는 세기가 바뀐 뒤였다. 1917년 2월에 세계대전이란 특수한 형세에서 태어난 제2차 러시아혁명도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세기 중반과 비교할 때 이 시기 개별 사건 사이의 상호 영향은 좀더 커졌다."(1402-3)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포한 아이티혁명은 자료도 부족한 데다 화제가 될 만한 극적인 사건도 알려진 게 없어서 오랫동안 혁명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예해방 주장을 제외한다면 아이티혁명에서 비롯된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정치사상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령 카리브해 지역이 처음부터 전체 대서양 지역의 혁명담론인 자유란 주제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일부는 계속 노예를 소유했고, 1787년의 미국 헌법은 물론이고 그 후 헌법수정안에서도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완고한 착취제도의 피해자로서 흑인과 유색인종은 프랑스대혁명의 관념, 이상, 상징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1794년의 선언이 밝힌 대로 '피부색을 나누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서 시민의 신분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1422-3)


"1778년 이후의 북아메리카 반란자들과는 달리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자유투사들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얻을 수 없었고 미국의 지지도 없었다. 아이티혁명 과정에 있었던 일시적인 외부 강대국의 직접적인 개입도 없었다. 대서양 해역 전체를 장악한 영국 해군이 보호막의 역할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다른 혁명과는 달리 크레올인과 복원된 스페인 왕조 대표 사이의 결정적인 군사적 충돌에 제3자의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가볍게 보아서 안 될 것은, 처음(즉, 1810년 무렵)에 프랑스가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스페인 왕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꺼이 나폴레옹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라틴아메리카인은 없었다. '개인적인' 지지가 중요한 군사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해적은 정부의 묵인하에 스페인 함선을 공격했다. 영국 상인은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였다."(1430-1)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끝나자 곧바로 1830-31년의 유럽혁명이 이어졌다. 혁명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과거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혁명시대의 종결로 분류된다고 한다면 1830-31년의 유럽혁명은 혁명시대의 한 부분으로 분류된다. 1830년 7월 말 파리에서 발생한 수공업자들의 폭동으로부터 촉발된 혁명적인 상황이 프랑스 전역, 네덜란드 남부(이 사건이 끝난 후 이 지역은 독립국 벨기에가 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연방의 일부 가맹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유럽에서 상승세를 탄 왕정복고 세력은 1815년 이후 각처에서 약화되었으나 정치적으로 패배한 곳은 프랑스뿐이었다. 그런 프랑스에서조차도 정치적 활동공간을 넓힌 주요 사회세력은 '저명인사'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집단이었으며 이들이 7월혁명 이전 엘리트계층의 핵심을 형성했다."(1433-4)


"영국도 1830년의 유럽혁명운동에 참여했다. 1830년 여름, 국왕 조지 4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 프랑스로부터 7월혁명의 소식이 들려왔다. 1832년 7월, 극단적으로 대립을 겪으면서 의회는 일련의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시기에 영국은 19세기 이래 가장 심각한 내정의 위기를 경험했다. 영국이 혁명 앞에서 가장 취약했던 시기는 1790년대나 1848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이 종결된 뒤의 15년 동안이었다. 나폴레옹전쟁이 남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초기 공업화의 후유증이 현행 체제에 대한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최종적으로 휘그당 출신의 찰스 그레이 수상이 웰링턴 공작의 도움을 받아 통과시킨 개혁 법안은 남성 투표권자의 범위를 조심스럽게 확대하고 신흥 공업도시의 의석수를 늘렸다. 그러나 법안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먼저 발생했던 것이다."(1440-1)


"경제사학자들이 공업화의 시대를 19세기까지 연장한 뒤로 혁명의 시대는 거대한 역설을 보았다. 에릭 홉스봄이 앞장서서 퍼뜨린 이중혁명─프랑스의 정치혁명,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치적 근대는 혁명시대의 위대한 문건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1776), 미국의 「헌법」(1787),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제 폐지법령(1794), 볼리바르의 앙고스투라─앙고스투라 회의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독립전쟁 중에 시몬 볼리바르가 소집하여 1819년 2월 15일에 앙고스투라(현 베네수엘라의 시우다 볼리바르)에서 열린 회의다─연설(1819)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건들이 등장했을 때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아직 혁명적인 충격을 주고 있지도 않았다. 대서양혁명의 동력은 공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충돌이 아니았다. 대서양혁명이 '부르주아'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특징은 공업화와는 무관한 것이다."(1444)


"1900년 이후 유라시아에서 발생한 네 혁명의 목표는 서유럽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는 구식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러시아와 아시아에는 법률로서 권력을 제한하는 전통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서유럽과 비교할 때 이 지역 국가에서 그런 전통의 발전은 매우 빈약했다. 귀족과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집단의 세력은 서유럽(또는 일본) 봉건제도처럼 통치자의 절대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적이 없었다. 이 지역 각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군주의 지위는 루이 16세나 영국의 조지 3세보다 더 굳건했다. 본질적으로 이 지역 국가의 정치체제는 통치자가 신분대표회의나 의회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 없이 최종적인 발언권을 갖는 전제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통치자가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때 언제나 독단으로 전횡하지는 않았다. 다른 체제와 비교할 때 이런 체제에서 권력의 행사는 많은 부분이 왕좌에 앉은 인물의 개인적 품성과 소양에 따라 결정되었다."(1482)


# 유라시아의 네 혁명

1. 러시아 혁명(1904-07)

2. 헌정(憲政)혁명이라 불리는 이란혁명(1905-06)

3. 청년터키당이 주도한 오스만제국혁명(1908)

4. 중국의 신해혁명(1911)


"혁명가들이 현행 통치제도에 맞설 때 사용하는 무기─또한 각국 혁명가들의 공통자산─는 입헌주의 사상이었다." "네 혁명은 각자의 성문헌법을 만들어냈다. 서방의 표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본국 정치문화의 특성에 맞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입헌제는 결코 유럽에 대한 단순하고 기회주의적인 모방이 아니었다." "널리 찬양받는 표본은 1889년에 제정된 일본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외국의 경험을 참조하고 본국의 현상을 결합한 표본적인 헌법이었다. 일본은 한 국가가 흥기하는 과정에서 헌법이 국가통일의 정치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헌법은 국가기구의 조직체계에 관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인민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문화적 성취이기도 하다. 일본은 헌법 내용에서 유럽의 인민주권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럽과 흥기하는 아시아 국가의 새로운 헌법전통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었다."(1484-5)


"네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고, 중국은 1900년 의화단운동으로 8국 연합군의 침입을 맞고 있었고, 오스만제국은 발칸지역에서 다시 좌절을 겪고 있었고, 이란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 영토 안에서 각자 세력권을 넓히고 있었다. 이들 네 나라는 다 같이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나머지 세 나라와 비교할 때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던 것이다."(1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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