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소명으로서의 정치 정치+철학 총서 3
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 / 후마니타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9

1장. 국가 11

1. 정치란 무엇인가 11

과거든 현재든 정치적 결사체들이 다루지 않는 업무란 거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정치적 결사체들(오늘날의 표현으로는 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 근대국가 이전의 조직체들까지 포함해)만이 언제나 늘 배타적으로 수행하는 고유 업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모든 정치적 결사체와 마찬가지로 근대국가란, 국가만이 하는 고유 업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만이 가진 특수한 수단을 준거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데, 그 수단이란 곧 물리적 폭력/강권력Gewaltsamkeit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관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권력을 추구한다. 그가 추구하는 권력은 다른 어떤 목적(이상적일 수도 있고 혹은 이기적일 수도 있는)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um ihrer selbst willen일 수도 있다. 7-8)

# 베버가 말하는 ‘사회학적 관점’이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국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강한 규범성을 가진 법학에서 주로 다루어졌는데, 그와는 달리 베버는 국가 현상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행위로 보았고 그것이 갖는 의미와 과정, 결과에 주목했다. 따라서 베버가 국가, 지배, 복종, 권력, 폭력, 데마고그, 카리스마 등의 개념을 사용할 때 대부분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정치적 실재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지 좋고 나쁨의 규범적 판단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2. 권위: 지배의 정당화 15

원론적으로 보면, 어떤 지배자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성화된 관습geheiligten Sitte의 권위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를 가로지르는 영속적 존재’ewig Gestrigen로 받아들여지는 권위를 뜻한다. 다음으로 비범한 개인의 천부적 자질Gnadengabe, 즉 카리스마Charisma에 의거한 권위를 들 수 있다. 이는 신의 계시나 영웅주의 혹은 그가 가진 특출한 지도력을 근거로 사람들이 한 개인 지도자에게 완전한 헌신과 신뢰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합법성’Legalität에 의거한 지배가 있다. 이는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에 대한 신뢰,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부여된 객관적 ‘권한’Kompetenz, 그리고 법규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으로, 근대적 ‘공무원’Staatdiener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갖게 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형태를 가리킨다.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Beruf이라는 개념은 바로 '카리스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9-10)

3. 행정: 지배의 조직화 19

어떤 경우이든 [지배의 관철을 위해서는] 행정Verwaltung의 지속적 역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정당한 권력을 갖게 된 통치권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필요한 경우 통치자는 물리적 폭력/강권력 행사에 수반되는 인적・물질적 재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분제적으로’ 조직된 정치 결사체에서 군주는 자립적 기반을 가진 ‘귀족’Aristokratie의 도움으로 통치하며, 따라서 귀족과 지배를 공유한다. 반면 행정 수단을 직접 통제하는 유형의 통치자는 가내 예속인들 아니면 평민들을 활용하는데, 이들은 무산 계층이며 아무런 사회적 명예도 없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도 완전히 통치자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어떤 독자적 권력 기반도 없다. 이 유형에는 모든 형태의 가부장적이고 가산제적인 지배와 술탄적 전제정sultanistischer Despotie, 그리고 [근대의] 국가 관료제가 속한다. 고도로 합리화된 형태를 가진 근대국가의 관료제가 특히나 이 유형에 잘 맞는다. 10, 12)

4. 직업으로서의 정치 24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für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해’von [혹은 정치에 의존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이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물질적인 관심 때문에 일을 한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도 내적인innerlich 의미에서는 ‘정치에 의존하는 삶’sein Leben daraus을 산다. 그는 자기가 행사하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아니면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Sinn를 부여함으로써 내적 균형과 자긍심을 함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적 의미에서 볼 때 대의를 위해 사는 진지한 사람은 곧 이 대의에 ‘의존해’ 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위해’ 산다는 것과 정치에 ‘의존해’ 산다는 것 사이의 구별은 다른 것이 아닌 경제적 측면에 관계된 문제다. 누군가 정치를 ‘위해’ 살 수 있으려면, 일견 사소해 보이는 경제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15)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국가나 정당이 운영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지도층이 ‘금권정치적으로’plutokratische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적 재산이 없는 정치가가 정치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생계 확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 ‘대의’에는 전혀 혹은 주된 관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산가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생활의 경제적 ‘안정성’을 그의 인생 설계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을 안다. 거꾸로 재산이 없고 따라서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집단에 속하는 계층이야말로 ― 물론 이 계층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 가장 철저하고 절대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의 주창자들일 수 있다. 비정상적인 시기, 즉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러하다. 따라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한다면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16)

5. 직업으로서의 관료 34

근대적 관료층은 장기간의 예비교육을 통해 전문적 훈련을 받은 고급 정신노동자로 발전했다. 이들은 정직성과 청렴성을 강조하는 직업 의식 내지 신분적 명예심ständischen Ehre을 가진 신흥 계급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정신이나 신분적 명예심이 없었더라면 필연적으로 이들은 엄청난 부패와 저속한 속물근성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간 국가의 경제적 역할이 지속적으로 증대해 왔고, (특히 사회주의의 흥기와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증대할 것임을 고려하면 국가 관료의 부패와 속물근성은 국가 자체의 작동을 멈추게 할 정도로 위험하다. 종신직 직업 공무원이 없었던 미국의 경우 과거에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수십만 명의 관리들을 갈아치우는 약탈 정치가들의 아마추어 행정이 지배했다. 그러나 이런 아마추어 행정은 (1883년의) 공무원 제도 개혁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는 순전히 행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의 기술적인 불가피성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18)

6. 정치 주변의 직업 집단들 43

정당이 출현한 이래 서양 정치에서 변호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당정치는 극히 단순화해 말하자면 이해 당사자에 의해 정치가 운영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해 당사자인 고객에게 유리하도록 소송을 이끌어 가는 것, 이것이 곧 숙련된 변호사의 직업적 능력이다. 확실히 그들 변호사의 손에서 논리적으로 취약한 사건(이런 의미에서 ‘나쁜’schlechte 사건)도 결국에는 성공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좋게’gut 처리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논리적으로 ‘강력한’ 근거를 만들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건을 ‘유능하게’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문 관료는 데마고그가 아니며 데마고그의 기능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데마고그가 되려 한다면 대체로 그는 매우 나쁜 데마고그가 되고 만다. 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적 사명에 비춰 볼 때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비당파적 자세로) 단지 ‘행정’만 해야 한다. 24-5)

정치 지도자의 행동은 관료와는 전혀 다른, 아니 그와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책임 원칙을 따른다. 관료의 명예는,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급자가 고수할 경우, 그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관료가 이런 규율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전체 국가기구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에 반해 정치 지도자, 즉 지도적 역할을 하는 정치가의 명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 자기 책임을 거부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으며 전가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타고난 관료인 사람,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관료적 품성을 타고난 사람이야말로 나쁜 정치가일 수밖에 없으며, (책임 개념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기준으로 볼 때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저열한 정치가들이다. 25-6)

진정으로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업적은 어떤 학문적 업적 못지않게 상당한 ‘지적 정신’Geist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나 학자와는 전혀 다른 조건, 즉 지시에 따라 즉시 작성되고 또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존경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책임성 내지 책임감은 학자보다 훨씬 크며 사실 평균적으로 봐도 학자보다 좀 더 높다는 사실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언론의 무책임한 행태―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가 사람들의 뇌리에 계속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에 수반되는, 다른 직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유혹들과, 오늘날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며 부딪치는 다른 여러 조건들 때문에, 일반 대중은 언론을 경멸스러움과 비겁한 소심함이 뒤범벅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아울러 현직 저널리스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 반면 자본주의적 언론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은 꾸준히 증대하고 있다. 26-7)

2장. 정당 59

1. 명사 정당 체제 59

처음에는 정당이라는 단어가 순전히 귀족들의 추종자 집단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영국이 좋은 예이다. 어느 귀족이 어떤 이유에서든 당을 바꾸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다른 당으로 넘어갔다. [1832년] 선거법 개정 이전까지만 해도 국왕뿐만 아니라 거대 귀족 가문들도 엄청난 수의 지지자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었다. 귀족 정당과 매우 밀접한 연계를 가졌던 이 유명한 시민들의 정당, 즉 명사 정당Honoratiorenparteien은 중간계급들의 영향력 신장과 함께 나란히 발전했다. ‘교양과 재산’Bildung und Besitz을 갖춘 집단의 출현 역시 서양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는데, 이들은 지적인 인물의 리더십하에서 여러 정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계급적 이해나 가문의 전통 혹은 순전히 이데올로기가 이들 정당을 이끌었다. 이 단계에서 정당은 아직 지역적 범위를 가로질러 조직된 상설 결사체가 아니었다. 단지 의회 의원들에 의해 정당으로서의 결속은 유지되었다. 의원 후보의 공천은 지방의 명사 엘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1)

2. 지도자와 머신이 주도하는 정당 체제 65

명사들의 지배와 의원들의 주도적 역할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의회 밖에 있는 ‘전업’ 정치가들이 정당 조직을 손에 넣었다. 외형상 이 모든 것은 광범한 민주화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당원들이 모여 출마할 공직 후보를 결정하고 (전당대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급 대의기관에 보낼 대의원을 선출한다. 물론 권력은 조직 안에서 일상적으로 당무를 수행하는 자와, 조직 운영을 위해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의 손에 있다. 부유한 후원자들이나 태머니홀Tammany Hall처럼 강력한 정치적 기득 이익을 가진 권력 집단의 지도자가 대표적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인적 기구human apparatus―흥미롭게도 영어권에서는 이를 ‘머신’Maschine이라고 부른다―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 이 기구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자들이, 의회 의원들을 제어할 수 있고 상당 정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정당의 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3)

당의 추종자, 특히 당직자와 당 사업가는 그들의 지도자가 승리하면 관직의 형태로든 아니면 다른 식으로든 보상이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진부한 것들로 구성된 한 정당의 추상적 정책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보다는 (확신을 갖고 그래서 헌신하고자 하는) 어떤 한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다. 그러나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가 없을 때마다 어김없이 역전의 시도가 나타난다. 지도자가 있어도 당 명사들의 허영심과 기득 이익 때문에 온갖 종류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많은 사회민주당 인사들은 사회민주당이 바로 그런 ‘관료제화’Bürokratisierung에 굴복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 ‘관료’는 강력한 데마고그적 능력을 가진 인물에게는 비교적 쉽게 순응한다. 자신들의 물질적・이념적 이해관계가 결국엔 이 지도자를 통해 확보할 수 있을 당의 권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내적으로 좀 더 큰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34)

3. 영국의 정당 체제: 코커스 시스템 69

영국의 정당 조직은 거의 순전히 지역의 명사들로 이루어졌는데, 1868년 이후 ‘코커스’Caucus 시스템이라는 것이 발전했다. 그 계기는 선거법의 민주화에 의해 촉발되었다. 즉,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외양을 갖춘 거대한 기구를 창설해야만 했다. 동시에 각 구역마다 선거 조직을 만들고, 이런 조직을 중단 없이 가동해야 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엄격하게 관료화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점차 유급 관료가 고용되기 시작했다. 당 정책의 대표자들은 지역의 선거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는 유권자의 10퍼센트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다. 위원회를 움직이는 힘은 재정 기여의 책임을 맡은 지역 인사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어디서나 풍부한 이권 획득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방 정치에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롭게 출현한 머신은 더는 의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권력은 소수의 손에, 궁극적으로는 당의 정상에 서있는 단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36)

# 1867년 영국은 오랫동안 논란만 거듭했던 2차 선거법 개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 선거에서 새롭게 투표권을 갖게 된 유권자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때 조지프 체임벌린과 비국교회 목사인 프랜시스 슈나도스트Francis Schnadhorst는 버밍엄 자유당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선거운동을 했다.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이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코커스라고 불렀다. 이때의 코커스라는 표현은 보스가 중심이 된 미국의 지방 정당 조직인 머신을 가리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의 대중 투표제적 독재자가 의회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도자는 어떻게 선발되는 것일까? 세계 어디서나 결정적인 기준으로 간주되는 의지력을 논외로 하면, 여기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히 데마고그적 웅변의 힘이다. 현재의 상황을 우리는 ‘대중적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기초한 독재’Diktatur, beruhend auf der Ausnutzung der Emotionalität der Masse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국 의회의 매우 잘 발달된 위원회 체제이다. 그것은 지도부에 가담할 의사가 있는 모든 정치가를 위원회 활동에 합류하도록 강제한다. 위원회 활동을 보고하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중요 각료들은 지난 수십 년간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실무 훈련을 거쳤다. 이는 위원회가 실제로 유능한 지도자들을 선발하고 순전히 선동가이기만 한 사람을 배제하는 그런 교육기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37-8)

4. 미국의 정당 체제: 엽관 체제와 보스 76

그러나 미국의 정당 조직과 비교하면 영국의 코커스 제도는 약과다. 미국에서 대중 투표제적 ‘머신’이 그렇게 일찍부터 발전했던 이유는,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만, 대중 직접 투표의 원리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관직 임면권을 가진 최고 책임자이며, ‘삼권분립’에 따라 직무 수행이 의회로부터 독립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승리의 보상은 관직에 따른 봉록의 형태를 갖기 쉬웠다. 그 결과는 ‘엽관제’spoils system로서, 그것은 앤드루 잭슨에 의해 체계적으로 활용되어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승리한 후보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연방 관직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엽관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당들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신념이나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다. 선거 시에는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꾼다. 38)

대중 투표제적 정당 머신에 기초한 이런 엽관 체제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당 ‘보스’이다. 보스는 자기 부담과 자기 책임 아래 지지 표를 만들어 내는 정치 영역의 자본주의 기업가이다. 당 조직의 운영 자금 대부분을 조달하는 것도 보스다. 보스는 재계의 거물들이 내는 기부금을 직접 수령해 오는 역할을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전형적인 보스는 지극히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적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 이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는 오로지 권력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재원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막후에서 활동하는데 이것이 영국의 리더와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그가 공개 석상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보스는 어떤 확고한 정치적 [이념 내지] ‘원칙’Prinzipien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이념적] 원칙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무엇으로 표를 끌어 모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39-40)

5. 독일의 정당 체제: 관료 지배 83

지금까지 독일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들 중 첫 번째 요인은 의회의 무기력함이다. 그 결과는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어떤 사람도 의회에 긴 시간을 몸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이 두 번째 요인은 첫 번째 요인에 영향을 끼쳤는데―훈련된 전문 관료층이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관료를 가졌다. 그 결과는 전문 관료층이 단순히 전문 관료직뿐만 아니라 각료직까지도 추구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요인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념] 정당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정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정당―가톨릭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은 소수당이었고, [중앙당은 신교 국가인 독일에서 소수인 가톨릭을 내걸었고,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만 의존하려 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수당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직업정치가들은 권력도 없고 책임도 없이 저급한 명사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41-2)

6. 전망: 어떻게 할 것인가 87

달리 선택은 없다. ‘머신’에 기반한 지도자 민주주의Führerdemokratie mit ‘Maschine’ 아니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führerlose Demokratie가 있을 뿐이다. 후자는 소명이 없는 ‘직업 정치가’, 지도자의 필수 요건인 내면의 카리스마적 자질이 없는 직업 정치가들의 지배를 뜻한다. 이들의 지배는 당내 반대파들이 보통 ‘도당’Klüngels의 지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통령이 의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투표로 선출된다면 지도자에 대한 욕구를 배출할 유일한 안전밸브는 독일 대통령직이 될 것이다. 만약 대중 투표제적인 독재자plebiszitäre Stadtdiktator가 등장할 수만 있다면, 검증된 업무 수행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부각되고 선출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모든 정당―특히 사회민주당을 포함해―이 보여 주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태도로서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kleinbürgerliche Führerfeindschaft이다. 이로 인해 향후 정당 조직이 어떻게 될지,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44)

3장. 정치가 92

1.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 92

정치가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대의에 대한 헌신을 뜻하는] 열정Leidenschaft, [선의를 내세워 변명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책임감Verantwortungsgefühl, 그리고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균형적 현실 감각Augenmaß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 및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Dämon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킨다. 단지 열정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그것이 제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의’에 대한 헌신과 함께,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적 현실 감각이다. 균형적 현실 감각이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을 말한다. 46)

정치가의 인격이라 할 만한 ‘개성적 힘’Persönlichkeit의 ‘강함’Stärke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이상의 자질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정치가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스스로를 위협하는 사소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적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허영심Eitelkeit이다. 허영심은 대의에 대한 그 모든 헌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 모든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적이다. 허영심은 매우 널리 퍼져 있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속성이다.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대학과 학자들의 세계에서 허영심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경우 허영심 때문에 호감을 얻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폐해가 적다. 정치가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허영심은 정치가를 '객관성의 결여'와 (흔히 이것과 동일시되는) '책임성의 결여'라는 두 죄악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다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아주 강력한 힘이다. 47)

권력을 향한 야심은 정치가가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정치가가 권력을 추구하고 또 권력을 활용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그 대의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는 신념의 문제이다. 그가 헌신할 수 있는 목표는 국가적 대의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인류애 전반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윤리적이거나 문화적인 대의일 수도 있고, 현세적이거나 종교적인 대의일 수도 있다. 그는 ‘진보’Fortschritt에 대한 강한 믿음에 의해 열의를 발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냉정하게 판단해 이런 종류의 믿음을 거부할 수도 있다. 어떤 ‘이념/이상’Idee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이념에 헌신한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거부하면서 일상의 구체적 목표에 헌신할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항상 신념Glaube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당당한 정치적 성공이라 하더라도 이 성공에는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울 것이다. 이는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8)

2. 대의와 신념 그리고 도덕 97

산상수훈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전부 아니면 전무에 있다. [「마태복음」 19장 22절에 있는] 한 부유한 청년의 사례에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명백하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놓아라, 모든 것을 무조건’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정치가라면, 만약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요구가 아닌 한 그 명령은 부당하고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응수할 것이다. 과세, 징수, 몰수처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강제와 명령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한 윤리적 명령은 다른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이 세상을 영원한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현실도피적] 무우주론적akosmistischen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51)

3.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105

[결과를 묻지 않는 것] 그것이 결정적인 점이다.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두 원칙을 따른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gesinnungsethisch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verantwortungsethisch 원칙이다. 책임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인간이 가진 평균적 결함을 고려한다. 그는 인간의 선의와 완전함을 전제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이 ‘책임’을 느끼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에 항의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신념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대한 것뿐이다. 이 불꽃을 늘 새롭게 되살리는 것만이 그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이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본받을 만한 모범을 보인다는 가치밖에는 가질 수 없는 행동이다. 52-3)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 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위험한 수단과 부정적 결과를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언제이며, 또 어느 정도 정당화해 줄 수 있는지를 분별해 주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즉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라는 이 문제에서 신념 윤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보이는 현세에도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고 보는] 우주론적 윤리에 기초한 ‘합리주의자’Rationalist이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적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53-4)

4. 정치의 윤리적 문제가 갖는 독특함 110

[고통과 악, 죽음 등의 현상을 신의 존재에 의거해 정당화하려는] 신정론Theodizee이 안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자비롭다고 믿어지는 [신의] 힘이 어떻게, 부당한 고통과 처벌받지 않는 불의 그리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이 불합리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 힘이 전지전능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을 수 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보상과 보복의 원칙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원칙들이란 형이상학적으로나 해석 가능한 것 혹은 영원히 해석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문제, 즉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에 대한 경험이 결국 모든 종교 발전을 추동한 힘이었다. 가톨릭 윤리는 [청빈, 청결, 순명 같은] 특별한 ‘복음적 권고’consilia evangelica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피를 흘려서도 안 되고 영리 행위를 해서도 안 되는 수도사 옆에는 믿음이 깊은 기사가 있다. 그리고 그 기사에게는 전쟁과 영리 행위가 허용된다. 55-6)

5. 혁명적 상황에서의 정치 윤리 115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계급투쟁이라는 맥락에서 내적 보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추종자들의 증오심을 만족시키는 것, 복수하고자 하는 추종자들의 열망을 충족하는 것, 특히나 그들의 분개를 정당화하는 것, 혹은 일종의 사이비 윤리라 할 만한 자신들의 옳음을 정당화하는 것, 적을 비난하고 그를 이단으로 몰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그것이다. 외적 보상에는 모험, 승리, 전리품, 권력, 봉록이 있다. 지도자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인적 기구가 원활하게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의 성공 여부는 자신의 추종자와 그에게 필요한 적위대, 밀정들, 선동가들에게 앞서 지적한 보상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가능성에 달려 있다. 그런 동기들―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저열하고 저속한―을 제어하는 오로지, 지도자 자신의 인물됨과 그가 가진 대의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추종자 가운데 일부를 고무할 수 있는 동안만 가능하다. 그들 모두 혹은 대다수를 그렇게 만들 수는 결코 없겠지만 말이다. 57-8)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치가 가진 윤리적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치가는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무우주론적 박애와 자비의 위대한 대가들―이들이 [예수처럼] 나사렛에서 왔든, [성 프란체스코처럼] 아시시에서 왔든 또는 [석가처럼] 인도의 왕궁에서 왔든 상관없이―이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은 없다. 그들의 왕국은 ‘현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현세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영혼 또는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는, 이를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과업을 갖고 있는데, 이는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58)

신념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언제는 책임 윤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분명히 가려서 지시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심으로 느끼며 행동하던 한 성숙한 인간이 어떤 한 지점에 와서 [마르틴 루터가 1521년 보름스의회에 나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 뒤 최종적으로 말했듯이]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나는 다른 내가 될 수 없다! [신의 가호를, 아멘!]”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인간적이며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내적으로 깨어 있다면 언젠가 우리 자신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는 서로 절대적 대립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해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참다운 인간존재가 만들어질 것이다. 59-60)

결론. 비관적 인간 현실 속의 정치가 122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0년 후에는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을, 나는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표면적으로 어느 집단이 승리하든 상관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얼음이 뒤덮이고 어둠과 고난이 가득 찬 극지의 밤이다.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살아남게 될까? 내적으로는 어떤 마음 상태가 되어 있을까? 비분강개해 있을까, 아니면 속물근성에 빠져 세상사와 자신의 직업을 그냥 그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들 자신은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 말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소박하고 순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우애나 도모하고 그저 자신의 일상적 임무에 열심히 몰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파선과 구경꾼 - 항해로서의 삶, 난파로서의 이론 NOUVELLE VAGUE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경계 침범으로서의 항해 


"두 가지 전제가 무엇보다 먼저 항해와 난파라는 은유법의 의미 부담을 규정한다. 첫 번째는 바다란 인간의 계획이 실행되는 공간을 제한하기 위해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경계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다를 예측 불가능하고 법칙성을 벗어나 있으며 방향을 정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마계화하는 것이다. 기독교 도상학에서까지도 바다는 악이 출몰하는 곳으로, 거기에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 되가져가는 거친 물질을 대변한다는 식의 그노시스적 가필加筆이 종종 가해지기도 했다. 「요한묵시록」에 기록된 예언에 따르면, 구세주가 세상을 다스릴 때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1장 2절)]. 표류란 순수한 형태로는 힘들의 변덕의 표현으로, 그것들은 오뒷세우스에서처럼 사람이 귀향을 거부당하고 무정하게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난파하도록 만드는데,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코스모스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영지주의처럼 정반대로 평가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45)


2장 난파자에게 남겨진 것 


"생존자가 바라보는 난파는 최초의 철학적 경험의 상징이다. 스토아 학파의 시조인 키티온 사람 제논은 페니키아에서 자주색 염료를 배에 싣고 돌아오던 중 페이라이에우스항 근처에서 난파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을 계기로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난파한 것은 지금 돌이켜보니 나에겐 좋은 항해였던 것이다.〉 [기원전 1세기에 활동한] 비트루비우스는 난파당해 로도스섬 해변으로 밀려 올라간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35~356년, 북아프리카 키레네 출신의 향락가. 인생의 목적은 쾌락이며 그것이 지고선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식견과 극기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모래사장에 기하학적 도형이 그려진 것을 보고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고 보고한다. 이 보고는 그것을 돈과 쾌락에 너무 이골이 나서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들로부터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이 철학자에게 일종의 개종의 계기가 된 것처럼 기록한다."(54-5)


"설령 난파되더라도 해안으로 헤엄쳐 나올 때 휴대할 수 있는 것으로 여행에 필요한 것을 제한하는 식으로 삶을 꾸려 나가라는 고전적 조언은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 안티스테네스[기원전 445~365년경, 덕에 충실한 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했으며, 후대 학자들에 의해 견유학파의 창시자로 간주된다]가 했다고 한다. 몽테뉴는 「고독에 관해」라는 에세이에서 이 말로부터 도덕적 자족을 위해 새로운 요점을 끌어낸다. 〈분명 분별력 있는 사람은 자기를 잃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난파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입증된 것은 원할 땐 언제든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재산Besitz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발견과 자기-전유 과정을 통해 달성 가능한 침착함Selbstbesitz이다." "하지만 이 회의론자에게도 궁극적인 것은 항상 여전히 앞에 있다. 그가 발견한 실체의 견고함에 대한 시험은 단지 삶이 끝날 때만 끝날 뿐이다. 그러므로 〈충돌에 주의하라! 항구에 다다라 난파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58-60)


"비록 사적 존재는 내면의 위험으로부터의 난파를 모면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이 존재를 함께 잡아 찢을 수 있는 국가와 세계의 몰락[침몰]이라는 큰 침몰이 남아 있다. 몽테뉴의 호기심은 국가의 몰락[침몰]이라는 드라마를, 그것의 징후와 형태를 자기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사태를 방지할 수 없는 이상 구경꾼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에 만족한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일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히 드물게 그러한 비참한 사건을 보고 인생의 고통을 환기시키며 쾌감을 느낀다.〉" "몽테뉴가 즐길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난파의 구경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자기보존에 성공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즐거움─완전히 간악한 것으로 묘사된다─을 옹호한다. 그처럼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덕분에 구경꾼은 안전하게 단단한 해변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특성, 즉 구경꾼으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살아남는다."(61-4)


"니체가 항해의 은유법에 가져온 ('실존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방향전환은 〈······ 당신은 승선했다〉는 말로 파스칼이 발견했던 것이다. 몽테뉴가 항구에 머무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바 있는 회의론자의 절제는 파스칼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승선했다는 은유법은 삶이란 이미 거친 바다 위에 있으며, 거기에는 행운 아니면 난파 외의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으며, 문제 해결을 미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니체가 〈유일한 논리적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하는 파스칼은 내기 돈, 즉 무한한 이익을 절대적인 차원으로까지 올리려고 하지 않는 미온적 자기보존이라는 생각을 배제한다. 오직 그렇기 때문에만 이 〈그리스도교의 가장 교훈적인 희생자〉는 니체를 예견할 수 있었는데, 니체는 파스칼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우리는 육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뒤의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니 우리 배여, 앞을 바라보라! ······ '육지'는 이제 없다!〉"(66-7)


"이 은유의 다음 단계는 우리는 항상 이미 승선해 거친 바다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필연적인 듯 난파당한다는 것이다. 구조된 난파자에는 부동의 대지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꿋꿋이 서 있을 수 있으며, 새로운 인식을 위한 단단한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은 과학의 근본적 경험이다. 환상적 변신이나 기적을 믿었던 다른 시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로부터 떠오르고 있는 인간에게 확고한 대지가 신뢰 가능함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니체는 지복의 경지라고 부르는 것을 〈육지에 닿아, 낡고 확고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경탄하는〉 난파자의 행복에 비교한다. 단단한 대지는 구경꾼이 아니라 난파에서 구조된 사람의 장소이다. 대지의 단단함은 그러한 일은 완전히 비개연적이라는 느낌으로부터, 즉 그와 같은 것에 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부터 전적으로 경험된다."(68, 71)


3장 구경꾼의 미학과 윤리 


"대지의 경계를 넘어 바다로 나가는 은유적 사건 및 실제적 사건은 은유적 난파의 위험과 실제적 난파의 위험처럼 서로 겹친다. 인간을 거친 바다로 내모는 것은 동시에 자기의 자연스러운 욕구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내모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종족은 공연히 항상 헛되이 애쓰고, 공허한 걱정 속에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간은 소유의 목적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현실의 쾌락이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삶을 조금씩, 조금씩 깊은 바다로 데려간 것과 같은 자극이 또한 전쟁이 거세게 끓어오르도록 충동한다. 항해라는 잘난 체하는 행위를 하기로 결심한 인간은 압도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벌을 받는데, 그러한 힘에 우리를 넘겨주고, 그러한 힘을 신의 이미지로 번역하는데, 그러한 힘이 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한 힘을 어르려고 기를 쓰고 애쓰지만 소용없음을 통해 자연의 힘과 맹약을 맺을 수 없음을 즉각 깨닫는다."(85)


"그것과 정반대를 이루는 것이 다음과 같은 계몽주의의 근본 사상 중 하나일 것이다. 즉 난파라는 것은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어 세계의 모든 교역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유에서 철학에 의해 냉대 받는 정념passiones에 대한 옹호가 표현되고 있다. 요컨대 순수이성이란 잔잔한 파도를, 완전한 사리분별을 갖춘 인간의 부동의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퐁트넬은 루키아노스[120~195년경]를 모작한 『죽은 자들과의 대화』 중의 한 대화에서 에페수스 신전의 방화범 헤로스트라토스의 입을 빌려 오직 파괴만이 인간에게 영구적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는 역설로 파괴를 옹호한다.  〈(···)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항해자들은 항해가 불가능한 잔잔한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소? 또 그러기에 폭풍이 일어도 좋으니 바람이 일기를 바란다고들 하오. 사람에게 정념은 모든 것에 동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오.〉"(85-7)


"하지만 구경꾼 또한 더 이상 현실의 가장자리에 선 현자라는 예외적 실존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추동하는 동시에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저 정념 중 하나의 주창자가 된다. 구경꾼은 본인이 모험 자체에 휘말리지는 않지만 파멸과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매력에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든다. 그의 침착함은 지켜보는 자의 그것이 아니라 불타오르는 호기심의 그것이다." "사람들이 그러한 구경거리를 보러 달려가는 것은 호기심에 쫓겨서지만 호기심이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볼테르는 이 호기심 강한 무리 중 난파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공개처형이 있을 때 사람들이 창가에 모여드는 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는 저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어 즐겁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둘 중 하나다. 〈자기 처지에 비추어 보아서 아니면 ······ 오로지 호기심에서이다.〉"(94-5)


"갈리아니 신부는 난파와 구경꾼 비유를 다시 한 번 비튼다. 비록 호기심이 볼테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정념이더라도 그것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 있다는 가정을 그만큼 더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구경꾼이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운명의 드라마에 매혹당하는 것은 그저 그가 단단한 대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란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그것으로부터 물러난 후 자기 자신에게나 신경 쓰도록 강요하는 감수성이다. 따라서 갈리아니에 의하면 극장이 인간의 상황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준다. 관객에게 안전한 좌석이 지정된 후에야 비로소 눈앞에서 인간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연극의 막이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안전과 행운이 호기심의 조건이며, 호기심은 안전과 행운의 징후이다. 위험은 무대 위에서 연기되며, 안전은 처마 지붕 밑의 안전이다. 해안에서 극장 안으로 옮겨감에 따라 루크레티우스의 구경꾼도 도덕적 차원을 빼앗기고 '심미화'된다."(99-101)


"1792년에 헤르더는 『인간성의 증진을 위한 서한집』의 17번째 서한에서 독일이 이웃 국가들의 혁명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총괄하면서 난파와 구경꾼 이미지에 의존한다.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마치 낯선 공해에서 일어난 난파처럼 안전한 해변의 높은 곳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악령böser Genius이 무도하게 우리를 바다 속으로 내던지는 것과 같은 짓을 하지 않는 한 말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갈리아니가 만들어낸 난파의 은유법과 극장의 은유법 사이의 관계가 헤르더의 이 텍스트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 중인 파국은 동시에 〈위대한 세계사라는 신의 책〉 속에 적혀 있는 교훈극, 국민적 성격 덕분에 이미 특전을 부여받은 구경꾼 앞에서 상연되는 신의 섭리극이다." "보다 깊은 수준에서 난파는 '섭리'에 의해 연출되는 교훈극이다. 구경꾼의 안전은 그를 바다 속으로 내던질 수 있는 악령의 형상에 의해 위협 당한다. ─이 드라마 전체는 '섭리'와 '악령'의 그러한 이원론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109-11)


4장 생존술 


"1807년의 예나 전장의 시찰자 괴테는, 전황을 호전시킬 수만 있다면 개인적 불행쯤은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열정적 대화 상대에게 한마디의 호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 전장의 관찰자는, 역사라는 것은 항상 타인들의 역사이며 또한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로부터 자기의 역사를 보호하기 위해 고대 시인의 이미지에 호소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공포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찬양했다. 인간에게 공포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현상이며, 인간세계의 사건은 오직 자연의 일부로서 이차적으로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괴테에게 반성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도피처 자체의 거리만 존재한다. 〈······ 난파 순간에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반년 후 괴테는 벌써 자기를 난파의 구경꾼으로 비유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은 오직 자기와 자기의 세계가 겨우 몰락을 모면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121-3, 126)


"헤겔의 경우에 구경꾼 입장은 반성Reflexion에 의해 결정된다. 반성은 구경꾼에게 단순한 위로 이상의 것을 주며, 구경꾼을 〈역사의 다음 광경〉과 화해시킨다. 그리고 최고조로 높아진 반성은 〈겉으로는 불의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이는 현실을 변용시켜 합리적인 것과 화해시킨다.〉 구경꾼이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에 깊은 동정을 기울이며〉 개인을 역사 속에서 바라보고, 인간의 몰락을 자연의 소행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성의 얼마나 대단한 성취인가." "우리가 〈역사란 민족의 행복, 국가의 예지 그리고 개인의 미덕을 희생물로 해온 제물이 바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거기서 생기는 사건을 모두 단지 수단으로만 간주하려 한다면, 그러한 관점이야말로 역사철학의 모든 금언金言의 마지막에서 이성 입장에 선 구경꾼이 즐길 수 있는 진정한 안심이다. 그것은 입장이라기보다는 〈특수한 비유에서 보편적 비유로의 격상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의 길〉이다."(124-5)


"『시와 진실』 15장의 끝부분에서 괴테는 난파의 은유법뿐만 아니라 최초의 경험으로부터의 삶의 거리라는 은유도 모두 넘어선다. 그는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고 쓴다. 괴테는 그것을 위해 바다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항적이라는 은유를 떠올린다. 그가 이 은유를 갖고 가리키려고 했던 것은 끝나가고 있던 계몽주의시대가 헛되이 품고 있던 역사적 긍지, 즉 계몽주의의 성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한 번 발견된 길은 계속 이어지리라는 긍지였다." "괴테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역사와 자연의 관계였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아무 항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역사와 자연이 다르게 되는 조건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조망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불가역성이라는 신뢰성 속으로 옮겨질 수도 없다. 진보와 몰락 모두 똑같이 잔잔한 수면만 뒤에 남길 뿐이다."(131-2)


5장 구경꾼, 구경꾼 위치를 잃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면 두 위치Position, 즉 난파자 위치와 관찰자 위치에서 인간주체의 동일성이 완전히 해명된다. 그것을 위해 그는 본인의 체계를 틀로 이용하는데, 그것은 이성은 표상Vorstellung의 표상이라는, 따라서 삶의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기관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골자로 한다. 인간이 본인이 겪는 고통의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성 덕분이다. 인간은 항상 현실과의 갈등에 휘말리지만 그것을 순수하게 관찰하는 입장에 도달한다면 〈삶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 삶에서 〈인간은 단순한 방관자이자 관찰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항해의 은유법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조망하는 능력을 갖춘 점에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관계는 〈마치 해도海圖, 나침반 등에 의해 항로를 알고 대양의 그때그때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선장과 다만 파도와 하늘만 보는 무지한 선원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135-6)


"주체의 이중적 삶─헤겔의 발명품에 가까운 사고방식─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숭고함의 감정에서이다. 이 감정은 맹위를 떨치는 자연현상에 직면해 내가 위험해진다는 의식과 나를 고양시킨다는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자연의 무시무시함으로부터의 그러한 초월론적 거리두기에는 암초 해안으로부터의 거리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식으로부터의 거리두기도 포함되는데, 이 자기의식에게 이 모든 것은 자기의 표상이 된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세계의 광대함을 의식하게 되면〉 〈그러한 거짓된 불가능성에 맞서〉 웬일인지 초월론적 반항심 같은 것이 솟아난다. 이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계는 '오직' 우리 표상 속에서만, 그것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반항심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은유법에서 만약 주체가 구경꾼 입장에서 물러나 의지─이것은 주체가 자연의 위험을 마주보게 되는 대신 주체를 위험에 노출시킨다─에 의한 세계의 갈등에 휘말려들게 되면 난파당할 수 있다."(136-8)


"어쨌든 삶으로부터 물러난 관점의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가능한 이상 구경꾼이 보는 것은 자기의 과거이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또한 〈암초와 소용돌이로 가득 찬 바다〉인 삶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것으로서 미래 속에서 자기 앞에 놓여 있다. 그는 신중하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비록 〈어떻게 해서든 헤쳐 나가려고 온갖 노력과 수단을〉 쏟아부어 성공한다 해도 오히려 난파가 불가피한 지점에 보다 가까이 가버릴 뿐임을 알지만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충동과 명상으로의 이행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하기 위해 폭풍 한가운데 있는 선원을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만든다. 그가 탄 배는 살아남기 위한Überleben 그리고 삶을 초월하기 위한Über-leben 배가 되어버려 항로나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쇼펜하우어의 작은 배에 탄 선원은 지금 본인이 세계의 구경꾼이 되었거나 되려는 중이어서 더 이상 해변의 구경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40-3)


"역사가가 거리를 둔 구경꾼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견고한 관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는 시대를 전체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 없다. 이제 시대의 특징은 〈영구히 수정을 이어가는 정신〉이다. 사람들은 변화의 종결에 이르렀다고 믿고 또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1789년 이후 인류를 사로잡아왔다고 할 수 있는 폭풍이 우리도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인간사를 계속 움직이며 종종 악천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 이상 정념의 바람이 아니다. 파괴하고 동요시키고 난파를 야기하면서 모든 것을 몰고 가는 것은 동일한 폭풍이다. ─〈지구상의 이미 알려진 모든 과거와 대립〉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 속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는 역사가는 그것의 추진력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의 바람은 말할 것도 없고 분명히 그것의 거대한 낙관적 의지에 말이다. 인식의 과제는 그에게 〈어리석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으로부터 가능하면 최대한 자유로울 것〉을 요구한다."(149-50)


6장 난파로부터 배 만들기


"로렌첸은 인간적 사유의 방법론적 시작에 대한 물음은 한편으로는 칸트가 전치시킨 이후 공리公理주의적 방법론의 우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철학 쪽으로 정향된 해석학에 의해 합리성의 영역의 시야로부터 사라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딜타이로부터 유래하는 철학의 새로운 직접성은 인식은 삶의 뒤로 돌아갈[진상을 규명할] 수 없다는 명제로부터 의도치 않게 또 다른 명제를, 즉 '삶'이라는 표현 또한 사유에 부과되는 언어적 틀로 드러나는 일군의 우연적 전제를 가리킬 뿐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냈다. 논리실증주의는 이 물음을 과학적 언어를 정초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설정으로 협소화시켰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가장 명료하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통사론적 규칙을 가진 언어란 배이고 우리는 그것을 타고 있다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어떤 항구로도 입항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 말이다. 배의 수리나 개조 모두 거친 바다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161)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전에 결정적으로 주어져 있어 우리는 자연언어라는 배를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도 또 그것을 버릴 수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아래 물음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그렇게 해서 요구되는 시작을 방법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도 그와 동일한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가 물음 말이다. 로렌첸은 자연언어를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로 표상하면서 그러한 이미지를 계속 사용하지만, 그 상황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모든 기원적 물음을 넘어선 곳에 놓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도달 가능한 육지가 하나도 없다면 배는 이미 거친 바다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에 의해.〉" "바다는 분명히 이미 사용된 것과는 다른 목재를 품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 혹시 이전의 난파들에서?"(16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신질서Neuordnung는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주민들을 독일인 지배인종의 노예로 삼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류〉─유대인이지만 동방의 숱한 슬라브인, 특히 지식인층까지 포함해─를 절멸시키려는 질서였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열등인간Untermenschen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들은 생존할 권리가 없었고, 기껏해야 슬라브인 일부가 독일인 주인의 노예로서 논밭과 광산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바르샤바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을 영원히 지워버릴 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비롯한 슬라브인의 문화를 근절하고 그들에게 정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방의 번창하는 공장들을 해체해 독일로 옮기고, 주민들은 독일인을 위해 식량을 생산하도록 농업에만 종사시키고 그들 몫으로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식량만 지급할 계획이었다. 유럽 자체는 나치 지도부가 말했듯이 〈유대인이 없는〉 곳이 되어야 했다."(1611-2)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이라는 표현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나치 간부들의 어휘와 문서에서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이 무해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실제 의미를 서로에게 일깨우는 고통을 피하려 했던 듯하고, 어쩌면 언젠가 죄증이 되는 문서가 드러나더라도 이 표현으로 자신들의 죄를 얼마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최종 해결〉을 위한 성과를 가장 많이 거둔 곳은 30개 남짓한 주요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였다.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절멸수용소는 네 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인접한 소각장을 갖추어 살해 및 매장 능력에서 다른 절멸수용소들─모두 폴란드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에 크게 앞선 아우슈비츠였다. 리가, 빌뉴스, 민스크, 커우너스, 리비우에도 별도의 작은 절멸수용소들이 있었지만, 독가스가 아닌 총격으로 살했다는 점에서 주요 절멸수용소들과 구별되었다."(1655-6, 1661-2)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자체와 인접한 소각장은 근거리에서 볼 때 전혀 불길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용도가 무엇인지 밖에서 보고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 주변에는 잘 가꾼 잔디밭과 꽃밭이 있었고, 입구의 표지에는 그저 〈목욕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유대인들은 모든 수용소의 관례대로 단순히 이를 잡기 위해 목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감미로운 음악까지 들려주었다! 경음악 악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생존자가 기억하듯이, 수감자들 중에서 〈모두 흰색 블라우스와 감청색 치마를 입은 어리고 예쁜 소녀들〉로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잠시 후 치클론 B가 살포될 가스실로 들어갈 이들을 선별하는 동안, 이 독특한 합주단은 〈유쾌한 과부〉나 〈호프만 이야기〉의 즐거운 곡들을 연주했다. 베토벤의 장중하고 침울한 곡은 전혀 들려주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여정은 빈과 파리의 오페레타 못지않게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1665-6)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막강했던 추축국 군대의 잔존 병력을 1943년 5월 초 튀니지에서 생포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영국-미국 군대는 뒤이어 이탈리아 본토를 겨냥할 것이 확실했다. 병든 몸의 무솔리니는 미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겁을 먹었다. 패배주의가 이탈리아 국민과 군대 사이에 만연했다." "디노 그란디, 주세페 보타이, 그리고 치아노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반두체 지도부는 1939년 12월 이래 열리지 않았던 파시즘 대평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대평회의는 1943년 7월 24일에서 25일에 걸친 밤에 소집되었고,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국가를 재앙으로 이끈 실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대평의회는 19표 대 8표로 민주적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정의 복원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또한 군 통수권 전체를 국왕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두체는 7월 25일 저녁에 왕궁에 불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리직 해임을 통보받고 불명예스럽게 실각했다."(1707, 1710)


"1943년 9월 초의 두 사건이 총통의 계획을 발동시켰다. 9월 3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단에 상륙했고, 9월 8일 이탈리아와 서방 열강의 휴전협정(9월 3일 비밀리에 체결)이 공표되었다. 하루이틀 동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 독일군의 상황은 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연합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의 동서 해안 거의 어디서나 상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한 제해권을 활용하지도 않았고, 독일 측이 우려한 압도적인 제공권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 사단들을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고 포위하고 무장해제했을 때 독일군은 안도했다. 이것은 독일군이 로마를 쉽게 장악할 수 있고 당분간 나폴리까지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자국을 위해 무기를 생산할 공장들이 있는 북부 공업 지역을 포함해 이탈리아의 3분의 2를 손에 넣었다. 마치 기적처럼 히틀러의 수명은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 히틀러는 속이 아렸다."(1716-9)


"1943년 7월 5일, 히틀러는 소련군을 상대로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이 될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독일 육군의 정예 병력─신형 티거 중전차로 무장한 무려 17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약 50만 명─이 쿠르스크 서쪽의 넓은 소련군 돌출부로 달려들었다. 히틀러는 이 '성채 작전'으로 소련군의 정예인 100만 병력─저번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와 돈 강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던 바로 그 병력─을 에워싸는 데 더해 돈 강까지, 어쩌면 볼가 강까지 밀어붙인 뒤 남동쪽에서 북진해 모스크바를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소련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22일경 기갑전력에서 전차의 절반을 잃은 독일군은 완전히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력 우위를 확신한 소련군은 7월 중순 쿠르스크 북쪽 오렐의 독일군 돌출부를 역으로 공격해 금세 전선을 돌파했다. 이것은 2차대전에서 소련군의 첫 번째 하계 공세였으며, 이 순간부터 붉은군대는 끝까지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1726)


"1943년에 히틀러의 운세를 꺾고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대서양 전투 패배와 독일 본토 상공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화되는 치열한 공중전이었다. 1942년에 독일 잠수함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지중해로 향하던 연합국 선박 625만 톤을 격침했는데, 이는 서방 조선소들의 손실 보충 능력을 한참 상회하는 톤수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 연합군은 기술 개선, 이를테면 장거리 항공기와 항공모함, 그리고 적 잠수함에 발각되기 전에 먼저 적함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장비한 수상함 등에 힘입어 U보트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이 현대전의 공포를 실감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각자의 집 문간에서 실감했다. 영국 항공기가 야간에, 미국 항공기가 주간에 투하하는 폭탄이 이제 독일인의 집을, 독일인이 일하는 사무실과 공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일기에서 밝혔듯이,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가장 크게 손상된 것은 독일의 주택과 국민의 사기였다."(1727-31)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베를린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그 동지들은 마침내 계획을 완성했다. 공동 작전의 암호명은 '발퀴레Walküre'였다. 이는 적절한 명칭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독일 신화에서 발퀴레는 고대 전장의 상공을 맴돌다가 죽어야 할 자들을 고르는, 아름답지만 무서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죽어야 할 인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퍽 아이러니하게도 카나리스 제독은 실각하기 전에 발퀴레 아이디어를 하나의 보안 계획으로, 즉 베를린과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고되게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백만 명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예비군─신체 건강한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전선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이 이들 대도시에 대한 치안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계획으로 꾸며서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발퀴레는 군부 음모자들에게 완벽한 위장막, 즉 히틀러를 암살하자마자 국내예비군으로 베를린, 빈, 뮌헨, 쾰른 등지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대놓고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위장막이 되었다."(1770-1)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하자 베를린 음모단은 큰 혼란에 빠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군이 1944년에 상륙을 시도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믿었다. 그는 상륙 실패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토록 많은 출혈로 대가를 치른 후라면 미국과 영국 정부가 서부에서 새로운 반나치 정부와 강화를 교섭하는 데 더 열의를 보일 테고 그럴 경우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크는 이제 반나치 반란에 성공한다 해도 적군의 독일 점령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전쟁을 끝내 더 이상의 인명 손실과 조국의 파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강화를 성사시키면 소련군이 독일을 짓밟고 볼셰비키화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거사를 통해 나치 독일 외에 〈또다른 독일〉이 있음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다.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전선은 당장 행동에 나서도록 음모단을 재촉했다."(1784-5)


"7월 19일 오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라스텐부르크로 호출되었다. 와해 중인 동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국내예비군 측에서 급히 훈련시키고 있는 새로운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 사단들의 상황에 관해 히틀러에게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이튿날 7월 20일 오후 1시에 총통 본부의 첫 일일 회의에서 보고할 예정이었다." "정확히 오후 12시 42분, 폭탄이 터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병영은 마치 155밀리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굉음과 함께 연기와 화염을 내뿜으며 박살이 났다. 시체들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흥분한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에 있던 전원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의 확신과는 반대로, 히틀러는 피살되지 않았다. 브란트 대령이 견고한 참나무 받침대의 바깥쪽으로 서류가방을 옮겨놓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히틀러의 목숨을 구했다."(1794, 1801-4)


"오후 9시 직후, 좌절한 음모단은 총통이 늦은 밤에 독일 국민에게 직접 방송할 것이라는 독일방송국의 발표를 듣고서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분 후 (반란 가담에서 반란 진압으로 돌아선) 레머 소령─이제 대령─에게 운명적인 용무를 맡겼던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하제 장군이 체포되었고, 친위대의 지지를 받는 나치 장군 라이네케가 베를린 내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이제는 벤틀러슈트라세 기습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스텐부르크─거사가 벌어진 히틀러의 '늑대굴'─의 정력적인 대응 조치, 레머를 설득하고 라디오를 활용하겠다는 괴벨스의 기민한 판단, 베를린 친위대의 집결, 벤틀레슈트라세 반란파의 믿기 어려운 혼란과 무대책 등으로 인해 음모단과 한배를 타려던 찰나의, 혹은 이미 한배를 탄 상당수 장교들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음모단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 결과로 체포된 프롬 장군은 이제 기운을 냈다."(1823-4)


"반란 반대파들은 베크, 회프너,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메르츠를 프롬의 빈 집무실로 몰아넣었고, 잠시 후 프롬이 권총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프롬은 음모단을 제거하고 그들의 흔적을 지울 뿐 아니라─비록 음모에 적극 관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음모를 알고서 암살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란을 진압한 주역으로서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로 금세 마음먹었다. 나치 폭력배들의 세계에서는 너무 늦은 결심이었지만 프롬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프롬은 〈총통의 이름으로〉 〈군사재판〉을 요청했고(그가 요청했다는 증거는 없다) 네 장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알렸다. 〈참모장 메르츠 대령, 올브리히트 장군, 이제 나로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 대령[슈타우펜베르크], 그리고 이 중위[헤프텐].〉" "아래의 중정에서 군용차의 등화관제용 덮개가 씌워진 전조등이 희미하게 앞쪽을 비추는 가운데 네 장교는 총살대에 의해 금세 처리되었다."(1825-7)


"반란이 실패한 것은 그저 육군과 민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중 일부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고, 프롬과 클루게의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고비마다 음모단에 불운이 덮쳤기 때문이 아니다. 반란이 진압된 것은 장성이든 민간인이든 이 대국을 운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리고 제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혁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의 비탄과 패전 뒤 외국에 점령당할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초래한 독일과 유럽의 퇴화를 견뎌내지 못한 국가사회주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지지했으며,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구원자로 보았다. 〈[훗날 구데리안이 씀]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믿었고,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암살자가 제거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이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1850-1)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전선 전역에서 미군─북부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소모전을 벌여 안 그래도 약해져가는 방어군을 갉아먹고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 수세를 취해서는 심판의 시간만 늦출 뿐임을 깨달았다. 그의 열에 들뜬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타격을 가해 미 제3군과 제1군을 갈라놓고, 안트베르펜까지 진출해 아이젠하워로부터 주요 보급항을 빼앗고,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을 따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을 밀어붙인다는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공세를 통해 영미군을 완파하여 독일 서부 국경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소련군을 다시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군은 발칸에서는 여전히 진격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는 10월부터 비스와 강에 멈춰 있었다. 서부 공세는 지난 1940년에 대규모 돌파를 개시했던 곳이자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하기로 미군의 약한 4개 보병사단만이 방어하는 아르덴을 통해 신속하게 감행할 계획이었다."(1863)


"그러나 아르덴에서 약체 4개 사단이 괴멸된 뒤 미 제1군의 흩어진 부대들은 임시변통으로 완강히 저항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돌파된 전선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인 몬샤우와 바스토뉴를 단호히 사수하여 히틀러의 군대가 좁은 돌출부를 지나도록 만들었다. 미군의 바스토뉴 방어가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르덴에서 공세를 지속할 병력도, 알자스에서 공격에 나설 병력도 부족하다는 장군들의 항변에 히틀러는 귀를 닫았다. 〈나는 이 일을 11년간 해왔지만 ··· 모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여러분은 결코 완전하게 준비되지 않는다. 명백히 그렇다.〉 히틀러는 말하고 또 말했다.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 회의 속기록의 길이로 판단하건대, 몇 시간 동안 말했다. 〈문제는 ··· 과연 독일에 존속할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다. ···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독일 국민은 파멸할 것이다.〉 그런 다음 로마의 역사와 프로이센 7년 전쟁의 역사를 한참 논했다."(1868-70)


"비록 발칸은 빼앗기고 있었지만, 폴란드의 비스와 강과 동프로이센에서 독일군이 10월부터 굳세게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 〈지금처럼 강력한 예비 병력을 보유했던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자 구데리안은 〈동부전선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전선의 한 지점이 뚫리면 나머지 전체가 붕괴될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945년 1월 12일, 이반 코네프의 소련 집단군이 바르샤바 남쪽 비스와 강 상류 바라노프의 교두보에서 빠져나와 슐레지엔으로 향했다. 더 북쪽에서는 주코프 휘하 병력이 바르샤바 북쪽과 남쪽에서 비스와 강을 건너 1월 17일 이 도시를 함락했다. 더 북쪽에서는 소련 2개 군이 동프로이센의 절반을 짓밟고 단치히 만으로 돌격했다. 이것은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군의 최대 공세였다. 스탈린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만 기갑전력의 비중이 놀랍도록 높은 180개 사단을 투입했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1873-5)


"1월 27일 오후, 주코프의 병력이 베를린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오데르 강을 도하한 날, 이제 베를린 총리 관저로 이전했고 전쟁 종결 때까지 장소를 바꾸지 않은 총통 본부에서 흥미로운 대응 조치를 취했다. 25일, 절박한 구데리안은 리벤트로프를 찾아가 나머지 독일군이 동부의 소련군에 집중해서 대적할 수 있도록 당장 서부에서의 휴전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외무장관은 곧장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총통은 당일 저녁 구데리안을 질책하며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힐난했다. 동부의 재앙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 괴링, 요들은 서방 측에 휴전을 요청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서방 연합국이 볼셰비키 승리의 결과를 우려하여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을 겨냥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독일 측 설계자들은 결국 영국군과 미군이 독일군에 합세해 소련 침공군을 물리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1876-7)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 내 모든 상점뿐 아니라 모든 군사·산업·운송·통신 시설까지 온전한 상태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괴하라는 일반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이에 반하는 모든 지령은 무효다〉라는 단언으로 끝맺었다. 독일을 광대한 황무지로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지면 민족도 사라질 것이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민이 가장 원초적으로 존속하기 위해 필요할 법한 기반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을 파괴해버리는 편이 더 낫다. 이 국가는 약한 국가로 판명날 것이고, 미래는 오로지 강한 동부 국가[소련]의 것일 테니까. 게다가 뛰어난 자들이 살해되었으니 전후에는 열등한 자들만 남을 것이다.〉" "독일 국민이 최종 파국을 면한 것은, 그런 대규모 파괴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 외에도, 슈페어와 다수의 장교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마침내!)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1885-7)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히틀러는 몸이 엉망인 데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근접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장악하여 이제 처참한 최후가 목전에 닥친 상황임에도, 총통은,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해 가장 광적인 소수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기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4월 초 날씨 좋은 저녁에 괴벨스는 자리에 앉아 히틀러에게 총통의 애독서 중 하나인 토머스 칼라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읽어주었다. 괴벨스가 낭독한 장은 7년 전쟁 중 가장 암담했던 시절, 대왕이 진퇴유곡에 빠졌다고 생각해 각료들에게 만약 2월 15일까지 운수가 나아지지 않으면 포기하고 독약을 마시겠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의 이 시기를 고른 것은 확실히 적절했으며 괴벨스는 틀림없이 한껏 극적인 방식으로 낭독했을 것이다. 총통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라고 괴벨스는 크로지크에게 말했고, 후자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일기에 적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1893-4)


"그렇게 영국인이 쓴 책에서 기운을 얻은 두 사람은 힘러의 잡다한 '연구' 부서들에서 서류철에 보관 중이던 두 가지 별자리점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 하나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하던 날 작성한 총통의 별자리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일에 어느 이름 모를 점성술사가 작성한 공화국의 별자리점이었다. 괴벨스는 두 통의 놀라운 문서를 재검토한 결과를 크로지크에게 알렸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으니, 두 별자리점 모두 1939년에 전쟁 발발, 1941년까지 승리, 뒤이어 일련의 전세 역전, 1945년 초기 몇 달 동안, 특히 4월 초순의 가장 심한 반격을 예상했습니다. 4월 하순에 우리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 후로 8월까지 정체기일 테고 그달에 강화를 맺을 것입니다. 뒤이어 3년은 독일에 힘겨운 시절일 테지만, 1948년부터 독일은 부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4월 12일, 미군이 데사우와 베를린 사이 아우토반에 나타났다."(1894-5)


"4월 29일 새벽에 구술로 작성한 유언장에서 나치사령관은 맨 마지막까지 본인의 성격에 충실했다. 위대한 승리는 본인 덕분이었다. 패배와 최종 실패는 다른 사람들, 그들의 〈불충과 배반〉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고별사를 읊었다─이 미치광이 천재의 일생에서 기록된 마지막 말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 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너무도 위대했기에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문장은 《나의 투쟁》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정계 생활을 시작했던 히틀러는 생의 끝자락에도 그 집념에 매달렸다. 독일인 수백만 명이 죽고, 독일 가옥 수백만 채가 폭격에 무너지고, 심지어 독일 국가마저 파괴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슬라브인에게서 동방 영토를 빼앗는다는 묵표가 (도덕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튜턴족의 헛된 꿈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1931-2)


"1차대전 패전 이후 1918년에 카이저는 달아났고 군주정은 허물어졌으나 국가를 지탱하던 기존의 다른 제도들은 남아 있었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부가 그 기능을 이어갔으며, 독일 육군과 참모본부의 중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45년 봄에 제3제국은 그야말로 소멸해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바보짓─그리고 그를 너무도 맹목적으로, 너무도 열렬하게 추종한 독일인 자신의 바보짓─탓에 그 지경이 되었다. 다만 그해 가을 독일로 돌아간 나는 히틀러에게 분개하는 정서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그리고 땅이 있었다. 사람들은 멍한 상태로 피를 흘리고 배를 곯았으며, 겨울이 찾아오자 폭격으로 그들의 집이 된 오두막에서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히틀러는 다른 수많은 민족들을 말살하려 했고 전쟁에서 패하자 결국 자기네 민족까지 말살하려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독일 민족은 말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제국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1946-7)


맺음말


"뉘르베르크의 피고석에 오른 21명 중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헤스, 레더, 풍크는 종신형, 슈페어와 시라흐는 20년형, 노이라트는 15년형, 되니츠는 10년형이었다. 나머지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샤흐트와 파펜, 프리체는 석방되었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의 탈나치화 법정에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결국 아주 짧게 복역하는 데 그쳤다. 1946년 10월 16일 오후 1시 11분, 리벤트로프가 뉘른베르크 감옥 처형실에서 교수대에 올라갔고, 짧은 간격으로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허, 자이스-잉크바르크, 자우켈, 요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은 없었다. 그는 교수형 집행인을 속였다. 감방으로 몰래 들여온 독약 약병을 자기 차례가 오기 두 시간 전에 삼켰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후계를 놓고 경쟁한 하인리히 힘러와 마찬가지로, 괴링은 막판에 이승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과 함께 결딴을 낸 그 세상을."(195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4부 전쟁: 초기 승리와 전환점


제18장 폴란드 함락 


"폴란드 공군은 48시간 사이에 궤멸되었다. 폴란드 육군은 1주일 만에 패배했다. 소련 국경에 남은 한줌의 병력을 제외하고 폴란드 군은 전부 포위되었다. 이제 소련군이 전리품에서 제 몫을 차지하기 위해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쳐들어올 시간이었다." "9월 5일, 몰로토프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공격해달라는 나치의 제안에 공식 서면 회답을 보내면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비밀조항으로 합의한 폴란드 내 〈경계선〉은 엄밀히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련은, 폴란드가 소멸했고 따라서 폴란드-소비에트 불가침 조약도 소멸했다는 등, 자국의 이익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소수집단의 이익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등 비열한 핑계를 대면서 기진맥진한 폴란드를 9월 17일부터 짓밟기 시작했다. 9월 18일, 소비에트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군과 만났다. 정확히 21년 전에 신생 볼셰비키 정부가 서방 연합국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독일 육군과 가혹한 단독 강화 조건을 수락한 그 장소였다."(1084-6, 1089)


"폴란드에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쪽은 히틀러였지만, 더 큰 승자는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아도 된 스탈린이었다. 소련은 폴란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발트 국가들의 목을 조였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밀과 루마니아의 석유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지켜냈다. 독일로서는 향후 겪게 될 수도 있는 영국의 봉쇄를 견뎌내려면 두 가지 모두 절실히 필요한 물자였다. 심지어 스탈린은 히틀러가 원한 폴란드 유전 지역인 보리스와프-드로호비치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 지역의 연간 산출량만큼을 독일 측에 판매하는 데 선뜻 동의했다. 왜 히틀러는 소련 측에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을까?" "서부에서 버티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후방이 안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이후 발언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것처럼, 이것이 스탈린에게 그토록  뼈저린 거래를 허용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서부전선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총통은 소비에트 독재자의 가혹한 거래를 결코 잊지 않았다."(1095-6)


제19장 서부의 앉은뱅이 전쟁 


"서부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총성이 거의 울리지 않았다.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앉은뱅이 전쟁Sitzkrie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곧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 장군 J. F. C. 풀러의 말마따나 그곳에서는 〈세계 최강의 육군[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불과 26개 사단과 대치한 채 돈키호테처럼 용맹한 동맹국 군대가 몰살당하는 동안 강철과 콘크리트 뒤편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일군은 그것을 뜻밖이라고 여겼을까? 천만에. 육군 참모총장 할더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경우 서부의 상황이 어떠할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설 〈공산은 매우 작다〉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가 〈벨기에의 의사와 상반되게〉 벨기에를 통과하는 경로로 파병할 리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할더는 프랑스군이 수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폴란드군이 이미 파멸한 9월 7일, 할더는 벌써부터 독일군 사단들을 서부로 이송할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1097)


"그렇다면 어째서 프랑스군은(영국군의 선발 2개 사단은 10월 첫째 주까지 배치되지 않았다) 서부에서 독일 병력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면서도, 가믈랭 장군과 프랑스 정부가 문서로 약속해놓은 대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군 최고사령부, 정부, 국민의 패배주의, 1차대전에서 막대한 피를 흘린 기억과 피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살육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결의, 폴란드군이 처참하게 패한 터라 독일군이 곧 우세한 병력을 서부로 투입할 수 있고 따라서 프랑스가 초기에 어떻게 진격하든 무찔러버릴 것이라는 9월 중순의 깨달음, 무장과 공군력에서 독일이 우위에 있다는 두려움 등이 그런 이유였다. 실제로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을 전면적으로 폭격했다면 십중팔구 독일군에 재앙이었을 텐데도, 프랑스 정부는 자국 공장들이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 공군이 독일 내 표적을 폭격하는 방안에 처음부터 줄기차게 반대했다."(1100-1)


"11월 20일, 히틀러는 전쟁 수행을 위한 지령 제8호를 발령해 〈유리한 기상 조건을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분쇄하기 위한 계획을 결정했다. 그런 다음 심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대규모 전투의 전야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위해 11월 23일 정오에 사령관들과 참모본부 장교들을 총리 관저로 소집했다." "여러 면에서 1939년 11월 23일은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날 히틀러는 육군을 상대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차대전 기간에 황제 빌헬름 2세를 밀어내고 독일 최고의 군사적 권한뿐 아니라 정치적 권한까지 차지했던 그런 육군을 상대로 말이다. 그날 이래로 오스트리아의 전 상병은 정치적 판단뿐 아니라 군사적 판단에서도 자신이 장군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그들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았다─그 결과는 결국 모두에게 재앙이 될 터였다."(1136, 1141)


"1940년 2월 11일, 복잡한 무역협정이 모스크바에서 마침내 타결되었다. 첫해에 독일 측이 받은 것들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따르면 곡물 100만 톤, 밀 50만 톤, 석유 90만 톤, 면직물 10만 톤, 인산염 50만 톤, 상당한 양의 필수 원재료들, 그리고 소련이 만주에서부터 운송해준 대두 100만 톤이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자존심을 굽힌 채 독일에서는 영 인기 없는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지지하고, 소비에트 육군과 공군이 발트 삼국에 기지를 세우는 등의 위협(결국 독일이 아니면 어느 나라를 상대로 그런 기지를 사용하겠는가?)을 감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의 봉쇄를 극복하도록 돕고 있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하나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를 기회, 군사력을 서부에 집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결정타를 날리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짓밟을 기회까지 제공했다─그 후에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히틀러가 이미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었다."(1157-8)


제20장 덴마크와 노르웨이 정복 


"독일 해군은 오래전부터 북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독일은 대양으로 곧장 나갈 수 있는 진출로가 없었으며, 1차대전 당시부터 독일 해군 장교들은 이 지리적 사실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영국은 셰틀랜드 제도에서 노르웨이 해안까지 폭이 좁은 북해 전역에 대량의 기뢰와 초계정으로 촘촘히 그물을 쳐둠으로써 강력한 독일 해군을 봉쇄하고, 북대서양으로 빠져나가려는 U보트의 시도에 중대한 지장을 주고, 독일 상선의 운행을 막았다. 1차대전 기간에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로 숨통이 막혔다. 전간기에 수수한 규모의 독일 해군을 지휘한 소수의 장교들은 이 경험과 지리적 사실에 관해 숙고했고, 향후 영국과 어떤 전쟁을 치르든 간에 노르웨이에서 기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야만 북해를 가로막는 영국의 봉쇄선을 깨고, 독일의 수상함과 잠수함에 대양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고, 판을 뒤엎어 역으로 영국 제도를 효과적으로 봉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1167-8)


"전쟁의 기류가 바뀔 때까지 거의 4년 동안 일체의 저항을 포기했던 덴마크 국왕과 국민, 온화하고 교양 있고 태평한 사람들은 독일을 좀체 괴롭히지 않았다. 덴마크는 '모범 보호령'으로 알려졌다. 덴마크 군주, 정부, 왕실, 심지어 의회나 언론까지, 처음에는 정복자들로부터 놀라울 정도의 자유를 허가받았다. 덴마크에 거주하는 유대인 7000명마저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한동안은. 그러나 덴마크 국민은, 대다수 피정복 국민들보다 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전황이 악화될수록 점점 더 잔혹해지는 튜턴족 폭군들에게 〈충직한 협력〉을 바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결국 깨달았다─자존심과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키고자 한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독일이 끝내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작은 나라 덴마크가 입에 담기도 싫어한 히틀러의 신질서 안에서 속국으로 지내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항이 시작되었다."(1212-3)


"노르웨이는 처음부터 저항했다. 그렇지만 1940년 4월 9일 저녁 독일이 수도를 확실히 접수하자 마침내 기운을 끌어올린 크비슬링─1931년부터 1933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임한 뒤, 1933년 5월에 국민연합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했다. 이는 독일에서 집권한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와 전술을 차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비옥한 민주적 토양에서 나치즘은 잘 자라지 못했다─은 라디오 방송국에 들이닥쳐 자신이 새로운 정부의 수반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노르웨이인 누구든 독일에 대한 저항을 즉시 멈추라고 명령했다. 브로이어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지만─베를린 역시 알지 못했고 심지어 나중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이 반역 행위로 인해 노르웨이의 항복을 유도하려던 독일의 노력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비록 노르웨이 국민에게는 조국이 치욕을 당한 순간이긴 했지만, 크비슬링의 반역 행위는 망연자실해 있던 노르웨이 국민을 결집해 굳세게 저항하도록 했다."(1219-20)


제21장 서부전선 승리 


"제3제국은 북해 연안 저지대에 위치한 작은 두 나라의 중립을 거의 무수히 보장한 바 있었다.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1839년에 유럽 5개 열강이 '영구히' 보장했으며, 이 협약은 1914년에 독일이 위반할 때까지 75년에 걸쳐 지켜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벨기에를 상대로 결코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히틀러는 집권한 뒤 이 정책을 계속 재확인하고 네덜란드에게도 비슷한 확약을 했다." "1940년 5월 10일, 베를린 주재 벨기에 대사와 네덜란드 공사는 빌헬름슈트라세로 불려가 리벤트로프에게서 영국-프랑스 군대의 임박한 공격으로부터 두 나라의 중립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군이 그들의 영토로 진입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바로 한 달 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상대로 써먹었던 것과 똑같은 비열한 수법이었다. 독일은 공식 최후통첩을 전하며 저항하지 말라고 두 정부에 요구했다. 만약 저항한다면 유혈 사태의 책임은 〈오로지 벨기에 왕실 정부와 네덜란드 왕실 정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1234-33)


"네덜란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5일간의 전쟁이었다. 이 짧은 기간에 벨기에군, 프랑스군, 영국 원정군의 운명이 정해지고 말았다." "전투 첫날에 영국 총리직을 넘겨받은 윈스턴 처칠은 아연실색했다. 5월 15일 아침 7시 30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잠에서 깨우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칠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大프랑스의 육군이 1주일 만에 패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지난 전쟁 이후로 밀집한 고속 기갑부대의 급습이 불러온 혁명의 위력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처칠은 훗날 썼다. 그 혁명을 일으킨 것은 전차부대─서부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위치를 일거에 돌파하기 위해 한 지점에 집결한 전차 7개 사단─였다. 또한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그리고 연합군 방어선의 한참 뒤쪽이나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의 꼭대기에 강하하여 큰 혼란을 일으킨 낙하산부대와 공수부대도 있었다."(1245-6)


"약간 의문이 남긴 하지만, 히틀러가 됭케르크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것은 자신이 〈세계의 한 요인, 균형추〉라고 보았던 영국에 쓰라린 굴욕감을 주지 않음으로써 강화협정을 촉진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영국과의 강화는 히틀러의 말마따나 독일이 다시 한 번 동쪽으로, 즉 이제는 소련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강화여야 했을 것이다. 런던은 제3제국의 유럽 대륙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다음 몇 달 동안 히틀러는 조만간 그런 강화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 시점에 히틀러는 영국의 국민성을, 그 지도부와 국민이 끝까지 싸워 지켜내겠다고 결심한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와 장군들은 바다에 무지한─이후에도 무지할 터였다─탓에 바다에 이골이 난 영국이 낡아 빠진 작은 항구에서, 독일군 코앞에 있는 노출된 해변에서 30만이 넘는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1270-1)


"7월 19일 저녁, 영국에 마지막으로 강화를 제안하기 위해 제국의회에 나섰을 때 히틀러는 여전히 〈만약에 필요하면 실행하기로〉의 '만약에'를 의식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히틀러는 긴 연설 중에 역사를 거침없이 왜곡하고 처칠 개인을 마구 모욕했다. 하지만 말투는 온건했고, 자국민뿐 아니라 중립국 사람들의 지지까지 얻고 영국 대중에게도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주려는 교묘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나는 다른 여느 나라처럼 영국을 상대로도 그 이성과 양식에 다시 한 번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따른 의무라고 느낍니다. 나는 이렇게 호소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패자로서 호의를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로서 이성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연설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통했으나 영국 국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7월 22일, 헬리팩스 경은 방송에서 히틀러의 강화 제안을 정식으로 거절했다."(1301-3, 1306)


제22장 바다사자 작전: 영국 침공 좌절 


"괴링의 대규모 공습인 독수리 작전Adlerangriffe은 8월 15일, 영국 공군을 공중에서 몰아냄으로써 침공 개시의 조건 하나를 확보한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독일군은 적 전투기 파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일 평균 1천 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출격하느라 이미 지친 영국 조종사들이 용맹하게 싸우긴 했지만, 독일군의 수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영국 남부의 전투기 전진기지라 할 비행장 5곳이 중대한 피해를 입고 설상가상으로 핵심 통신본부 7곳 중 6곳이 맹폭을 당해 통신체계 전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괴링이 갑자기 전술상 잘못을 저질렀다. 영국의 전투기 방어 전력이 공중과 지상에서 손실을 입어 오래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독일 공군은 9월 7일 런던을 겨냥한 대대적인 야간 폭격으로 공세를 전환했다. 그 덕에 영국 공군의 전투기들은 위기에서 벗어났다."(1336, 1340-1)


"독일 공군은 런던 대공습의 성공에, 혹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얻어맞아 불타는 영국 수도에 대규모 주간 공습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9월 15일 일요일, 2차대전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정오 무렵 독일 폭격기 200대와 그보다 3배 많은 호위 전투기가 영불해협 상공에 나타나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 전투기 사령부는 레이더 스크린으로 공격기의 대규모 편대를 살피고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독일군은 수도에 접근하기 전에 요격당했다. 항공기 일부는 돌파했으나 대체로 흩어졌고 다른 일부는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격추되었다. 이 날의 전투는 독일 공군이 어쨌거나 당분간은 대규모 주간 공습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상륙으로 효과를 거둘 가망은 별로 없었다. 괴링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육해군 사령관들은 전황을 더 잘 알고 있었고, 결정적인 공중전 이틀 후인 9월 17일에 총통은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1347-8)


제23장 바르바로사: 소련의 차례 


"지난 몇 달간 베를린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제3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히틀러는 소련이 발트 국가들과 루마니아의 두 지방인 베사라비아 및 북부 부코비나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고, 그의 좌절감은 분노를 더욱 키우기만 했다. 독일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해야 했는데, 영국의 봉쇄 때문에 더 이상 해로를 통해서는 수입이 불가능한 독일로서는 루마니아의 석유자원에 사활이 걸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나 불가리아도 루마니아 영토의 일부를 요구했다." "결국 리벤트로프가 나서서 헝가리 및 루마니아 양측을 을러댔다. 8월 30일, 빈의 벨베데레 궁에서 양측은 추축국의 중재안을 수용했다. 이에 대해 몰로토프는 독일 정부가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는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제3조를 위반했고, 〈공동 이익의 문제〉에 관한 독일의 확약과 상충되는 방식으로 소련 측에 〈기정사실〉을 통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1379-81)


"11월 12일 진행된 양측 회담에서 꼭 짚어야 할 점은, 소비에트 독재자가, 이후에 상반된 주장을 펴긴 했지만, 이때 파시스트 진영에 가담하라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다만 베를린이 제안한 것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불렀을 뿐이다." "스탈린이 제안하는 비싼 대가는 히틀러로서는 고려해볼 여지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유럽에서 배제하려 했지만, 이제 스탈린은 핀란드, 불가리아, 두 해협에 더해 사실상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유전들─평상시 유럽이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공급한다─에 대한 통제권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인도양을 소련이 '염원'하는 중심지로서 넘겨주고 입을 막으려 했지만, 소련 측은 인도양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요구한다. 그는 냉혹한 협박범이다. 독일의 승리는 러시아에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를 되도록 일찍 굴복시켜야 한다.〉 냉혹하고 뛰어난 나치 협박범은 호적수를 만난 셈이었고, 그 깨달음에 격분했다."(1395-6)


"총통이 엉망진창인 하위 파트너를 곤경에서 구해준 곳은 발칸만이 아니었다.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이 괴멸당한 뒤, 히틀러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1개 경기갑사단과 약간의 공군 부대를 북아프리카로 파견하는 데 결국 동의했다. 프랑스 전투에서 기갑사단 지휘관으로서 수훈을 세웠던 늠름하고 지략이 풍부한 전차부대 장교 로멜은 영국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장군이었고, 뒤이은 2년간 영국군에 엄청난 곤경을 안겨주었다." "히틀러는 1941년 봄의 승리. 특히 영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기고만장했지만, 그것이 영국에 얼마나 심대한 타격이었는지, 그리고 영 제국이 얼마나 절박한 곤경에 내몰렸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하던 바로 그날, 처칠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이집트와 중동의 상실로 인한 심각한 결과를 알리고 미국의 참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영국 총리는 2차대전을 통틀어 몇 번 경험하지 않은 암담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1425-8)


"(히틀러에게는) 소련 파괴가 최우선이었다. 그 밖의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이제는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경악스러운 실책이었다. 당시 1941년 5월 말에 히틀러는 휘하 전력의 일부만 투입해도 영 제국에 강력한 일격을, 어쩌면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처칠은 이런 현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처칠은 영국이 이집트와 중동을 잃는다면 설령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전쟁의 지속이 〈힘겹고 길고 암담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런 전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맹목성을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발칸 전투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가 몇 주 연기되었고, 그리하여 작전 실행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작전 개시가 연기된 만큼 애초 계획했던 기간보다 더 짧은 기간 내에 소련 정복을 완수해야 했다. 이 작전의 기한, 즉 칼 12세나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러시아의 겨울을 변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1429-30)


제24장 전세 역전 


"개전 초에 제기된 쟁점은 간단하지만 중대했다. 독일의 세 주요 집단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당시까지 가장 성공을 거둔 보크의 중부집단군이 7월 16일에 도달한 스몰렌스크에서 320킬로미터를 더 진격해 모스크바를 공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히틀러가 지난 12월의 지령 제18호에 명시한 원래 계획대로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에서 주공을 펴는 방안을 고수해야 하는가? 달리 말하면, 주요 표적을 모스크바로 정할 것인가,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로 정할 것인가였다. 브라우히치와 할더가 이끌고 보크와 구데리안이 뒷받침하는 육군 최고사령부는 소련의 수도를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는 파탄이었다〉라고 할더는 전한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식량지대와 공업지대에, 그리고 캅카스 산맥 바로 너머에 있는 소련의 유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또한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고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합류하기를 원했다. 모스크바는 내버려두어도 괜찮았다."(1474-5)


"히틀러는 브라우히치, 할더, 보크의 끈질긴 주장에 모스크바 진격을 재개한다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창의 시기(라스푸티차Rasputitsa)에 들어선 것이다. 폭설과 영하의 기온도 일찍 찾아왔다." "러시아의 겨울은 끔찍했고 당연히 독일군보다 소련군이 겨울에 더 잘 대비하긴 했지만, 전세 역전을 이끌어낸 주된 요인은 붉은군대의 치열한 전투 자세와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그 증거로 할더의 일기나 독일 야전사령관들의 보고서는 소련군이 얼마나 격렬하게 공격하고 반격하는지에 대한 놀라움, 독일군이 얼마나 차질을 빚고 손실을 입는지에 대한 좌절감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나치 장군들은 소련 체제의 압제적인 특성이나 독일군이 첫 타격으로 입힌 재앙적인 손실을 고려할 때, 소련군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을 비롯해 다른 많은 군대들이 변명거리가 더 적은데도 맥없이 무너졌던 것과는 딴판이었다."(1479-80, 1485)


"모스크바 진공 작전의 실패의 대가는 엄청났다. 붉은군대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으나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모스크바를 공략하지 못했고,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캅카스 지역의 유전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이나 미국과 통하는 소련 북쪽과 남쪽의 생명선도 여전히 열려 있었다. 2년이 넘도록 연전연승하던 히틀러의 군대는 처음으로 우세한 적군에 밀려 퇴각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실패의 대가는 더 컸다. 할더는 적어도 훗날에 가서 그 대가를 깨달았다. 〈독일 육군의 불패 신화가 깨졌다〉라고 그는 썼다. 독일군은 다음 여름이 왔을 때 소련에서 다시금 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불패 신화를 복원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6일은 제3제국의 짧은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자, 가장 치명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당시 히틀러의 권력은 최정점에 올라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가 침략하기로 선택했던 국가들이 반격에 나섬에 따라 그 정점에서 점차 내려올 터였다."(1489-90)


"그 혹독한 겨울에 히틀러는 난타당한 독일군이 모스크바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히틀러는 퇴각을 일체 금했다.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가 굽히지 않은 이 완강한 태도의 공과에 관해, 그 태도가 육군을 완전히 재앙으로부터 구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한 대규모 손실을 오히려 더 늘렸는지에 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대다수 사령관들은 각자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후퇴할 자유가 주어졌다면 많은 인력과 장비를 구하고, 더 나은 위치에서 재정비하고, 더 나아가 반격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적시에 퇴각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법한 사단들 전체가 자주 압도적인 공격을 받거나 포위당하여 분쇄되고 말았다. 그런데 훗날 일부 장군들은 독일군의 현지 사수와 전투를 고집한 히틀러의 강철 같은 의지가 아마도 육군이 눈밭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결과를 막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시 최대 업적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1493-4)


제25장 미국의 차례 


"히틀러가 일본에 맡긴 역할은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당분간은 막아내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본이 싱가포르를 차지하고 인도를 위협할 경우 영국에 심각한 타격이 될 뿐 아니라 미국의 주의를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돌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독일에서는 히틀러도 다른 누구도 일본 측에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는 생각을 아주 늦게까지 떠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파괴하여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때까지 소련을 공격하는 방책은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대공세를 개시하는 방책까지 주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일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히틀러는 일본 측에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자신의 승리를 가로막고 있는 영국과 소련에 집중하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다. 나치 통치자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가장 우선시할 수도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1522)


"리벤트로프는 11월 28일 히틀러가 주재하는 장시간의 군사회의에 참석한 뒤 저녁에 오시마를 불렀고, 일본 대사가 즉각 도쿄에 타전했듯이 미국을 대하는 독일의 태도가 〈상당히 경직되었다〉는 인상을 풍겼다. 미국을 상대할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한다는 히틀러의 방침이 곧 폐기될 것처럼 보였다. 리벤트로프는 갑자기 일본 측에 영국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할 것을 촉구하고 제3제국의 지원을 약속하기 시작했다." "12월 1일, 긴급 호출을 받고 베를린 대사관으로 부리나케 돌아간 오시마는 조속히 독일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새로운 훈령을 받았다." "리벤트로프는 5일 오전 3시에 오시마 대사에게 일본이 요청한 조약, 즉 독일이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동참하고 단독강화를 맺지 않는다는 조약의 초안을 건넸다."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까지 떠맡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만약 히틀러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전쟁의 추이가 달라졌을 것이다."(1528-9, 1531-3, 1536)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현지 시각)에 일본군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강습했다는 천만뜻밖의 소식에 베를린은 워싱턴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히틀러가 마쓰오카에게 일본의 대미국 전쟁에 독일이 동참할 것이라고 구두로 약속했고 리벤트로프가 오시마 대사에게 또다른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직 확약에 서명하기 전이었고 일본 측으로부터 진주만에 대해 한 마디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막강한 적국 명단에 미국을 추가하는 결정을 그렇게 서둘러 내린 이유를 훗날 슈미트 박사는 콕 집어 말했다. 〈나는 위신을 바라는 히틀러가 미국의 선전포고를 예상하고서 선수를 치기를 원한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나치 통수권자는 12월 11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슈미트의 인상이 옳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타격할 것입니다〉 하고 히틀러는 환호하는 의원들을 향해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강타할 것입니다!〉"(1537, 1543)


제26장 대전환점: 1942년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2월 20일경 발트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가 시들해졌고, 3월 말에는 진흙탕 기간이 시작되면서 피투성이의 광대한 전선도 비교적 잠잠해졌다. 양측 모두 기진맥진했다. 부대들이 휴식하며 재정비하는 동안 이제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더해 육군 총사령관이기도 한 히틀러는 다가오는 여름의 공세를 계획하느라 바빴다. 전년도의 계획만큼 야심찬 계획은 아니었다. 이제 단일 작전에서 붉은군대 전체를 분쇄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에 그는 전력의 대부분을 남부에 집중 투입해 캅카스의 유전, 도네츠 분지의 공업지대, 쿠반의 밀 생산지를 정복하고 볼가 강변의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할 작정이었다." "스탈린 역시 전쟁을 이어가려면 캅카스의 석유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스탈린그라드가 중요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손에 넣을 경우, 소련 측이 유전을 보유한다 해도 카스피 해와 볼가 강을 통해 중부 러시아까지 석유를 운송하는 마지막 주요 수로가 틀어막힐 터였다."(1565-6)


"석유 말고도 히틀러는 얇아진 전열을 보충할 인력이 필요했다. 동계 전투 막바지에 병자를 제외한 총 사상자는 116만 7835명이었는데, 이 정도 손실을 메울 만한 보충병을 구할 수는 없었다." "숱한 대화 덕분에,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하계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연합'사단을 52개─루마니아 27개, 헝가리 13개, 이탈리아 9개, 슬로바키아 2개, 에스파냐 1개─로 추산했을 정도로 히틀러와 카이텔은 위성국 전체와의 교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동부전선에서의 추축국 총 병력의 4분의 1에 달했다. 독일군이 주공을 펼칠 남부전선을 증강하는 새로운 41개 사단 중에서 절반은 헝가리군(10개), 이탈리아군(6개), 루마니아군(5개)이었다. 할더와 대다수 장군들은 부드럽게 말해도 전투력이 의문스러운 '외국' 사단을 그렇게 많이 투입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체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마지못해 외국의 조력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은 머지않아 재앙이 닥치는 데 일조할 터였다."(1566, 1569)


"1942년 5월 27일, 로멜 장군은 사막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유명한 아프리카 군단(2개 기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과 8개 이탈리아군 사단(1개 기갑사단 포함)으로 신속하게 타격한 로멜은 곧 영국 사막군을 이집트 국경 쪽으로 밀어냈다." "6월 말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나일 강 삼각주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엘 알라메인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 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본 연합국은 이제 로멜이 이집트를 정복해 영국군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로멜이 증원군을 얻는다면, 북동쪽으로 쾌속 진군해 중동의 대규모 유전지대를 차지한 뒤, 이미 북쪽에서 캅카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독일군과 그 지역에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 측에는 가장 암울한 순간 중 하나, 따라서 추축국 측에는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전 지구적 전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 히틀러는 아프리카에서 거둔 로멜의 놀라운 승리를 활용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1569-70)


"최고사령관은 영미군이 배후에서 상륙할 경우 크게 위태로워질 로멜의 곤경에도,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 배후에 있는 돈 강 유역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임박했다는 최신 정보에도 개의치 않은 채, 11월 7일 점심식사 후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튿날 저녁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 기념일을 축하하러 모이는 고참 당원들 앞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당시 광범한 전선에서 사단과 연대, 심지어 대대 수준까지 지휘할 것을 고집하던 최고사령관이 하필이면 집이 막 무너지려는 순간에 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중요하지 않은 정치적 볼일을 보러 갔다는 사실은 무언가 기묘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괴링의 전철을 따라 사람이 곪아가고 퇴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때 막강했던 공군이 꾸준히 쇠퇴하고 있음에도 괴링은 자신의 보석과 장난감 기차에 점점 더 집착했고, 길어지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쟁의 추악한 현실에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1587-8)


"엘 알라메인 전투 및 영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의 대전환점이었다. 아시아와의 경계인 볼가 강까지 유럽의 대부분과, 거의 나일 강까지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던 나치 정복의 힘찬 물결은 이제 퇴조하기 시작했다. 나치군이 전차와 항공기 수천 대로 적군의 대열을 공포에 빠트리고 분쇄했던 대규모 전격전의 시기는 막을 내렸다. 분명 필사적인 국지적 공격이 있었지만─1943년 봄 하르키우와 1944년 크리스마스 시기 아르덴에서─그것은 독일군이 전쟁의 마지막 2년간 엄청난 끈기와 무용으로 수행해야 했던 방어전의 일부였다. 히틀러는 빼앗긴 주도권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미 1942년 5월 30일 야간에 영국은 비로소 천 대의 항공기로 쾰른을 폭격했고, 그 다사다난했던 여름 동안 다른 독일 도시들도 폭격했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의 독일 군인들처럼 독일 민간인들도 그때까지 자신들의 군대가 타국민에게 가했던 참화를 처음으로 겪게 되었다."(160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3부 전쟁에 이르는 길


제9장 첫 단계: 1934~1937 


"1935년 3월 16일 토요일에─히틀러의 기습은 대부분 토요일에 이루어졌다─총리는 국민개병제를 천명하고 평시 육군을 12개 군단 36개 사단(대략 50만 명)으로 편제하는 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은 끝이 났다─프랑스와 영국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히틀러의 예상대로 두 나라는 항의하면서도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실 영국 정부는 히틀러에게 아직 자기네 외무장관을 접견할 용의가 있는지 부랴부랴 물어보기까지 했다. 독재자는 정중하게 그럴 용의가 있다고 회답했다. 3월 17일 일요일은 독일에서 환호와 축하의 날이었다. 패전과 치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의 족쇄를 벗어던진 날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깡패 같은 통치를 아무리 싫어하는 독일인일지라도 공화국 내내 정부가 감히 시도조차 못해본 일을 총통이 성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독일인은 국가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 일요일은 전몰장병 추모일이기도 했다."(499-500)


"5월 21일 저녁,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또 한 차례 '평화' 연설을 했다. 히틀러는 느긋한 태도로 자신감뿐 아니라 관용적이고 유화적인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를 위한 정의에 기반하는 평화와 이해뿐이라고 확언했다. 전쟁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고, 전쟁은 참사인 동시에 무의미하고 무익한 사태라고 말했다." "〈누구든 유럽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자는 혼란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서양의 몰락이 아닌 르네상스가 실현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과업에 독일이 불멸의 기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희망이자 흔들리지 않는 신념입니다.〉 이것은 평화와 이성, 화해를 말하는 달콤한 연설이었으며, 어떤 이유에 근거해서든, 아니 이유야 어찌되었든 평화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국민과 정부는 이 달콤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502-5)


"1936년 5월 2일, 이탈리아군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고, 7월 4일에 국제연맹은 정식으로 굴복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철회했다. 얼마 후 7월 16일에 에스파냐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세 번째의 비우호적 파시스트 국가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그 결과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서유럽에서 독일의 주요 경쟁국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아비시니아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화해하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럴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총통의 대對에스파냐 정책은 처음부터 기민하고 계산적이고 먼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입수된 독일 문서들을 정독하면 히틀러의 목표 중 하나가 에스파냐 내전을 길게 끌어 서방 민주국가들과 이탈리아를 떼어놓고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로마-베를린 추축Axis을 낳았다."(522-4)


제10장 이상하고 불길한 막간: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 샤흐트의 몰락 


"1938년 2월 4일, 독일 내각이 소집되었다. 마지막 내각 소집이었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든 간에, 이제 히틀러는 육군이든 외무부든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뚫고나갈 터였다. 그날 히틀러가 내각에서 서둘러 통과시킨 뒤 자정 직전에 라디오를 통해 독일 전역과 세계에 발표한 긴급명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전군의 지휘권을 직접 넘겨받는다.〉 국가수반으로서 히틀러는 당연히 국방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지만, 이제 블롬베르크의 총사령관직까지 넘겨받는 한편 전쟁부를 폐지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창설하는 조직이 장차 2차대전 동안 익숙해질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macht, OKW이며, 육해공 삼군이 여기에 소속된다. 히틀러가 그 최고사령관이고, 그 아래에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참모장이 있었다─이 직책은 아첨꾼 카이텔에게 돌아갔는데, 용케도 최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559)


"1938년 2월 4일은 제3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전쟁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였다. 이날을 기하여 나치 혁명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히틀러가 독일의 무장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내딛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러온 길을 가로막고 있던 보수파의 마지막 세력이 이날 싹 치워졌다." "(경제장관) 샤흐트는 물러났다. (외무장관) 노이라트는 비켜섰다. (국방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는 동료 장군들의 압력에 굴복해 사임했다. 프리치는 깡패 수법의 음모에 휘말렸음에도 반항하는 시늉도 없이 해임을 받아들였다. 고위 장군 16명도 자신들의 해임─그리고 프리치의 해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교단에서 군사 반란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야기로 그쳤다. 히틀러가 죽는 날까지 지녔던 프로이센 장교 계층에 대한 경멸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외교, 경제, 군사 정책을 한손에 틀어쥐고 국방군을 직접 지휘하게 된 히틀러는 이제 자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561-3)


제11장 병합: 오스트리아 강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국제연맹은 이 중대한 순간─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강제 병합을 시도하는─에 평화로운 인접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는 또다시 정부가 부재했다. 3월 10일 목요일, 카미유 쇼탕 총리와 내각이 사임했다. 괴링이 전화로 빈에 최후통첩을 들이민 3월 11일 금요일 내내 파리에는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포한 3월 13일에야 레옹 블룸이 이끄는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2월 20일, (오스트리아 총리) 슈슈니크가 굴복하고 나서 일주일 후에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이 사임했다. 무솔리니를 계속 회유하려는 체임벌린 총리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사임의 주된 이유였다. 후임은 헬리팩스 경이었다. 이 변화를 베를린에서는 환영했다. 히틀러에게는 즐거운 소식이었다. 그는 영국과 분규를 일으키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604-5)


"1938년 3월 11일 밤, 히틀라가 심각하게 걱정한 문제는 이 침공에 대한 무솔리니의 반응뿐이었지만, 베를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도 얼마간 걱정했다." "괴링은 베를린 주재 체코 공사 보이테흐 마스트니 박사에게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입은 〈집안일에 불과〉하며 히틀러는 프라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한다고 알렸다. 그 대신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체코 측의 확답을 바란다고 했다. 마스트니 박사는 프라하의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시 돌아와 괴링에게 동원은 하지 않을 것이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 사태에 개입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안도한 괴링은 자신의 방금 전 확약을 재확인한 뒤 히틀러의 승인도 얻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두 정부의 〈속뜻〉이 그저 말뿐인 항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오스트리아의) 미클라스 대통령은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에 임명하고 그의 각료 명단을 수락했다."(607-8)


"총 한 발 쏘지 않은 채,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갖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히틀러는 제국에 국민 700만 명을 더하고 미래의 계획상 막대한 가치를 지닌 전략적 요충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삼면을 군대로 포위했을 뿐 아니라 남동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빈까지 차지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빈은 오랫동안 중부 및 남동 유럽에서 교통과 통상체제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신경중추가 이제 독일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아마도 히틀러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국도 프랑스도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의향조차 없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3월 14일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히틀러의 '기정사실'에 관해 하원에서 연설했다. 〈확실한 사실은 그 무엇도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여타의 나라들이 무력을 행사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619-20)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1938년 6월 1일, 영국 총리는 일부 비보도를 전제로 영국 기자들 앞에서 발언했고, 이틀 후 《타임스》는 체코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일련의 사설들 중 첫 번째 것을 게재했다. 그 사설은 체코 정부 측에 〈설령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의미할지라도〉 국내 소수집단들의 〈자결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고, 주데텐 주민들과 그 밖의 집단들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국민투표를 처음 제안했다." "6월 8일, 디르크젠 대사는 주데텐 지역의 분리가 주민투표 이후에 이루어지고 〈독일 측이 강제적 조치로 방해하지 않을〉 경우 체임벌린 정부가 관망할 것이라고 빌헬름슈트라세에 알렸다. 이 모든 정보는 분명 히틀러에게 희소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들려온 소식도 나쁘지 않았다. 6월 말에 소련 주재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 즉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하기 위해 출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베를린에 통지했다."(657-8)


"여름 내내 바르샤바 주재 독일 대사 한스-아돌프 폰 몰트케는 폴란드가 자국의 영토나 영공을 소련의 병력이나 항공기가 통과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는 방안을 거절할 심산일 뿐 아니라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가 체코 영토의 한 조각인 테신[폴란드명 치에신]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베를린에 보고했다. 베츠크는 그 여름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치명적인 근시안을 벌써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근시안은 결국 베츠크의 상상 이상으로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터였다." "베를린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정부는 9월 21일, 폴란든계 사람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테신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체코 정부에 요구하고 병력을 이 지역의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이튿날 헝가리 정부도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같은 날인 9월 22일 주데텐 자유군단은 독일 친위대 파견대의 지원을 받아 독일 영토 쪽으로 튀어나온 체코 국경도시 아시Aš와 에거를 점령했다."(660, 679)


"9월 27일 저녁 시점에 히틀러가 알고 있었던 것은 프라하가 저항하고, 파리가 신속히 동원하는 중이고, 런던이 강경하게 나오고, 자국민이 전쟁에 무관심하고, 독일의 주요 장군들이 개전에 단호히 반대하고, 고데스베르크 제안에 담은 최후통첩의 시한이 다음날 오후 2시라는 사실이었다. 히틀러의 서한은 체임벌린의 마음을 흔들어놓도록 절묘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온건한 어조로 자신의 제안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라거나 독일군이 분계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부인했다. 그리고 체코 측과 세부사항에 관해 협상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공식 보장할〉 의향이 있다면서 체코 측이 버티는 까닭은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유럽 전쟁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희망의 문을 열어두겠다고 했다. 결국 체임벌린은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의 책임을 히틀러가 아닌 (체코 대통령) 베니시에게 지웠다."(702-3)


"9월 30일 오전 1시 직후, 히틀러와 체임벌린,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는 차례로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독일 육군은 총통이 줄곧 입에 올려온 대로 10월 1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향해 진군을 개시하고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체임벌린은 에스파냐 내전(독일과 이탈리아의 '의용군'이 프랑코 장군 편에 서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을 끝내기 위해 더욱 협력할 것과 군비 축소, 세계 경제의 발전, 유럽의 정치적 평화, 심지어 소련 문제의 해결까지 함께 추구할 것을 제안하는 등 시무룩한 독일 독재자에게 끝도 없는 장광성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뒤, 서류 한 장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둘이서 공동으로 서명하여 즉시 공개하자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 선언서를 읽고 얼른 서명했다. 체임벌린은 크게 만족했다." "런던으로 귀환한 득의만만한 총리는 히틀러와 함께 서명한 선언서를 휘휘 흔들면서 다우닝 가로 몰려든 대규모 군중을 맞았다."(729-32)


"히틀러는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고 다시금 주목할 만한 정복을 이루어냈다. 나를 포함해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머물고 있던 그 누구도 당시 독일 국민의 환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피했다는 데 안도했다. 또한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무혈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긍심에 들떠 있었다. 그 무혈 승리를 히틀러가 불과 6개월 만에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를 정복하여 주민 1000만 명과 남동유럽을 지배할 길을 여는 방대한 전략적 영토를 제3제국에 보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게다가 단 한 명의 독일인도 잃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 역사상 보기 드문 천재의 본능으로 중유럽 약소국들의 약점뿐 아니라 서방의 두 주요 민주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약점까지 간파하여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치전政治戰'의 새로운 전략과 기법을 고안하고 구사하여 실제 전쟁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737-8)


제13장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 


"이제 체코슬로바키아 비극의 다음 막이 오르게 되었다. 프라하의 체코 정부가 그 막을 조금 일찍 올린 것은 이 역사 이야기를 가득 채우는 아이러니들 중 하나였다. 1939년 3월 초에 체코 정부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독일 정부가 조장한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의 분리주의 운동(루테니아의 경우에는 이 작은 땅을 병합하고자 갈망하던 헝가리 정부도 조장했다)은 이제 진압하지 않으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킬 지경이었다. 그럴 경우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할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체코 중앙정부가 분리주의파를 진압할 경우 총통이 그에 따른 혼란을 틈타 역시 프라하로 진격하리라는 것 역시 확실한 일이었다. 체코 정부는 사뭇 주저하고 더는 도발을 견딜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둘째 대안을 선택했다." "베를린에 그토록 굽실거리던 체코 정부의 한 차례 용기 있는 행보─슬로바키아 자치정부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는 곧 국가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되었다."(769)


"1939년 3월 15일 오전 6시, 독일군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 쇄도했다. 저항은 없었고, 저녁 무렵 히틀러는 지난 뮌헨 회담 때 체임벌린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생각한 프라하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 그는 독일 국민에게 거창한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이 끝장낼 수밖에 없었던 체코 정부의 〈난폭한 만행〉과 〈테러〉에 관한 지겨운 거짓말을 반복한 다음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누구든 《나의 투쟁》을 읽은 사람이라면, 지도를 흘낏 보고 슬로바키아 내 독일군의 새로운 배치를 확인한 사람이라면, 뮌헨 협정 이래 독일의 모종의 외교적 행보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또는 지난 12개월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혈 정복한 히틀러의 동태에 관해 숙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총통의 '약소국' 목록에서 어떤 나라가 다음 차례가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체임벌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폴란드의 차례였다."(783, 793)


제14장 폴란드의 차례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무혈 정복을 지켜본 1938년이 저물어갈 무렵, 히틀러는 또다른 정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복할 곳은 잔존 체코슬로바키아, 메멜, 그리고 단치히였다. 슈슈니크나 베네시의 콧대를 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제는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츠크의 차례였다." "독일과 국경을 접하는 가운데 길게 보아서 가장 우려스러운 나라는 폴란드였다. 그런데 폴란드만큼 독일의 위험에 둔감한 국가도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 중에 회랑지대를 확정하여 폴란드에 바다로 나갈 통로를 열어준─그리고 독일 제국과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것만큼 독일인을 분개시킨 조항도 없었다. 옛 한자동맹의 항구 단치히를 독일로부터 분리하여 국제연맹이 감독하되 폴란드가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유도시로 바꿔놓은 조치도 똑같이 독일 여론의 분노를 자아냈다. 약하고 평화로운 바이마르 공화국마저 폴란드에 의한 독일 제국의 절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798-800)


"1939년 3월 15일 히틀러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점령하고 '독립' 슬로바키아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을 때, 그 비늘은 완전히 벗겨졌다. 그날 아침 폴란드는 이미 북쪽의 포메른과 동프로이센의 국경이 독일 육군에 가로막힌 것처럼 이제 남쪽 슬로바키아 국경도 독일 병력에 가로막혔다. 폴란드의 군사 정세는 하룻밤 사이에 불안정해졌다." "각성한 폴란드 외무장관은 베네시보다 더 단호하게 베를린에 맞설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1년 전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기를 쓰던 영국 정부가 이제 폴란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로 굴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30일 저녁, 케너드는 베츠크에게 독일의 침공에 대비할 상호원조협정에 관한 영국-프랑스 제안을 제시했다. 이튿날인 3월 31일,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폴란드가 공격받아 거기에 저항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를 즉시 힘닿는 데까지 지원할 것〉이라는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803, 811-2)


"7월 23일, 프랑스와 영국은 소련의 제안에 마침내 동의했다. 군 참모 회담을 즉시 개최해 군사협약을 작성함으로써 삼국이 히틀러의 군대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구체적으로 정하자는 제안이었다." "7월의 마지막 주에 모스크바 정치회담은 주로 '간접침략'이라는 말의 정의를 놓고 합의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답보 상태에 빠졌다. 영국과 프랑스가 보기에는 소련이 '간접침략'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터라 나치의 심각한 위협이 없는 경우에도 핀란드나 발트 국가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런 해석에 적어도 런던은─프랑스는 더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7일에 영국이 만약 정치협정과 군사협정을 동시에 체결하자는 주장을 소련이 양보하고 (기왕이면) '간접침략'에 대한 영국 측 정의까지 받아들이는 데 동의한다면 그 즉시 참모 회담을 시작하겠다고 제안하며 흥정을 시도했을 때, 몰로토프는 딱 잘라 거절했다."(874-5)


"영국 외무부 기밀문서들을 보면, 8월 초에 체임벌린과 헬리팩스가 소련과의 협정 타결을 거의 포기했으면서도 모스크바에서 참모장교 회담을 지연시키면 독일 독재자가 전쟁을 향해 치명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향후 4주 동안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히틀러가 선수를 쳤던 것이다." "빌헬름슈트라세에서는 소련의 기존 방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지고 있었다. 소련이 중립국이 되고 나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고, 설령 싸우더라도 독일 측으로서는 폴란드를 재빨리 해치우고 독일 육군이 서쪽을 향해 총력으로 진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서부 방어시설에 묶어두기가 용이할 터였다.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대리 자크 타르베 드 생아르두앙은 파리에 이렇게 보고했다. 〈나치 지도부 사이에서 당혹, 주저, 임시변통, 심지어 타협의 경향을 보이던 시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877-8, 881-2)


제15장 나치–소비에트 조약 


"독일은 폴란드를 포함하는 동유럽을 소련과 나눠 가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겨뤄볼 수 없는─설령 할 수 있다 해도 분명 꺼내지 않을─승부수였다." "8월 15일 오후 8시, 슐렌부르크 대사는 몰로토프를 만나 이미 지시받은 대로 리벤트로프의 긴급 전보를 읽어주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가 양국 간의 불가침 조약에 관심이 있느냐고 몰로토프는 물었다. 또 소비에트-일본 관계를 개선하고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여기서 분쟁은 그해 여름 내내 만주-몽골 국경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진 전쟁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몰로토프는 발트 국가들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독일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렇듯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을 먼저 제안한 쪽은 소련이었다. 몰로토프의 제안은 바로 히틀러가 원하던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가 내놓으려던 그 어떤 제안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더 나아간 제안이었다."(896, 906-7)


"그러나 독일 측으로서는 일정 조정을 이루어내야만 했다. 폴란드 침공의 진행표 전체가 그 일정에 달려 있었다. 리벤트로프가 8월 26일이나 27일 이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하고 독일 측의 우려대로 소련 측이 좀 더 미적거릴 경우, 9월 1일이라는 목표일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 중대한 국면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스탈린과의 중재에 나섰다. 자존심을 굽힌 채 자신이 그토록 자주, 그토록 오랫동안 비방해온 소비에트 독재자에게 독일 외무장관을 모스크바에서 즉시 접견해달라고 몸소 간청했다." "스탈린의 회답은 8월 21일 오후 10시 30분에 베르크호프의 총통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잠시 후에 독일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국 정부와 소비에트 정부는 서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제국 외무장관이 교섭 타결을 위해 8월 23일 수요일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916, 919)


"1939년 7월 말에 스탈린은 분명 프랑스와 영국이 구속력 있는 동맹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뿐 아니라 (특히 영국이) 히틀러를 부추겨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까지 확신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과연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무를 준수했던 것 이상으로 영국이 폴란드에 대한 보장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몹시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 2년간 서방에서 일어난 모든 일도 그의 의심을 키웠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이후 또다른 침공을 막기 위해 회의를 열어 계획을 세우자는 소비에트의 제안을 체임벌린이 거절한 일, 소련을 배제시킨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달랜 일, 1939년의 운명적인 여름이 째깍째깍 지나가는 때에 체임벌린이 독일에 맞설 방어동맹을 교섭하면서 자꾸 지체하고 망설인 일 등이 그러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히틀러가 조치를 취할 때마다 머뭇거리고 비틀거리던 영국-프랑스의 외교가 이제 완전히 파탄났다는 점이었다."(943-4)


제16장 평화의 마지막 나날 


"괴벨스의 노련한 지도 하에 나치당이 일간지들을 '조정'─이는 자유언론의 파괴를 의미했다─하기 시작한 6년 전부터 독일 시민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원래 폴란드 공격 날짜로 정해두었던 8월 26일 토요일에 괴벨스의 선전 공작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일기에 몇몇 신문의 헤드라인을 적어두었다. 《B.Z.》: 〈폴란드, 극에 달한 혼란─독일인 가족, 피난하다─폴란드군, 독일 국경에 육박!〉 《12시 블라트》: 〈도를 넘는 불장난─독일 여객기 3대, 폴란드군에 격추─회랑지대 독일인 농가 다수, 불길에 휩싸이다!〉 나는 한밤중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민족의 파수꾼》 일요일판(8월 27일자)을 집어들었다. 1면 상단 전체에 걸쳐 1인치 크기로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폴란드 전역 전쟁열! 150만 동원! 국경 방면으로 계속 병력 수송! 오버슐레지엔 혼란!〉 물론 독일의 동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2주 전부터 동원하고 있었다."(978-80)


"1939년 8월 마지막 날의 오후부터 밤까지의 막판에 기진맥진한 외교관들과 극도로 긴장한 채 그 외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린 상관들의 우왕좌왕하는 행보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독일 측의 경우에는 순전히 고의적인 기만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8월 31일 오후 12시 30분에, 그러니까 헬리팩스 경이 폴란드 정부에 더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하기 전에, 립스키가 리벤트로프를 방문하기 전에, 독일 정부가 폴란드에 대한 '관대한' 제안을 공표하기 전에, 그리고 무솔리니가 중재를 시도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최종 결정을 하고 전 세계를 전에 없이 처참한 전쟁으로 밀어넣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8월 31일 정오 직후,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폴란드를 공격하라고 정식 문서로 명령했다. 아직까지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두 나라가 적대적 조치를 취한다면 그에 대응할 작정이었다."(1022-5)


제17장 제2차 세계대전 개시 


"9월 3일 정오 무렵에 나는 빌헬름슈트라세의 총리 관저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250명쯤─그 이상은 아니었다─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모두가 주의 깊게 들었다. 발표가 끝났을 때는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로, 히틀러가 자신들을 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안식일이었음에도 곧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요, 호외요'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실은 거저 나눠주고 있었다." "독일인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입증'되었을지 몰라도, 그날만 해도 영국인에 대한 악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영국 대사관 앞을 지나갈 때 헨더슨을 위시한 대사관 직원들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아들론 호텔로 옮겨가는 중이었고, 경찰관 한 명만이 대사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1067-8)


"영국의 참전 소식이 알려진 일요일 오후, 독일의 주요 인사들 중에서 가장 침울해한 사람은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대제독이었다. 그는 전쟁이 너무 일찍, 4~5년이나 먼저 벌어졌다고 보았다. 독일 해군의 Z계획은 1944~45년에 완료되어 영국군에 대적할 만한 규모의 함대를 갖출 터였다. 그러나 당시는 1939년 9월 3일이었으며, 히틀러가 제독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할지라도 레더는 영국을 상대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를 만한 수상 함정도, 심지어 잠수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오후 9시, 히틀러가 베를린을 떠나던 순간에 독일 해군은 공격에 나섰다. 경고도 없이 U-30 잠수함이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리버풀을 출발해 몬트리올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애서니아Athenia 호를 어뢰로 격침했다. 승객 1400명 가운데 미국인 28명을 포함해 112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107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