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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평점 :
1장.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이전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수도 모스크바와 50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나토 회원국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 여부는 자신들이 선택할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 나라 일부로 여깁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도 하지 않고 ‘특수 군사 작전’을 펼친 거라고 주장합니다. 형제 또는 러시아 일부로 여기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번 침공도 ‘버릇없는 동생’을 벌주려는 것이지 타국을 침공한 전쟁이 아니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금지하고 새로운 나토 회원국에 배치한 군대와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2014년에 체결한 민스크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면 거부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도 나토 가입 의사를 철회하지 않아서 결국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14)
민스크협정은 벨라루스 수도인 민스크에서 돈바스Donbass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러시아 분리주의 집단 간에 맺은 국제 협정이에요.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에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죠. 우크라이나에서 분리하고 싶다는 겁니다. 돈바스 지역엔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데 정부 정책에서 자신들이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거예요.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이들을 진압하죠. 한동안 두 세력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민스크협정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의 자치권을 인정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협정 내용 중 핵심이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애초에 민스크협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면 전쟁까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지적입니다. 미국은 이보다 더 큰 비판을 받고 있죠. 전쟁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15)
2장.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올까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 체제도 무너집니다.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 결과물이 1993년에 맺은 ‘오슬로 협정’인데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주권 국가로 독립해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이른바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죠. 협상 장소가 노르웨이 오슬로여서 오슬로 협정으로 부르게 되었죠. 14차례 비밀 협상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건국을 했고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영토도 더 확장했기 때문에 오슬로 협정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허용하고 가자 지구 등 점령지도 돌려주라는 것이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더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하지 말고요. 2국가 해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돌려줘야 합니다. 25)
오슬로 협정으로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마침내 수립되었고,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일부 지역에서 철수합니다. 아라파트 의장이 자치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죠.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모두 축출하려는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1996년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죠. 팔레스타인도 2006년 총선에서 강경파 하마스가 압승합니다. 하마스 역시 근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모두 축출하고 싶어 합니다. 강 대 강이 맞서니, 합의는 힘을 잃고 분쟁만 살아남았습니다. 2국가 해법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이 원하는 국경선과는 일치하지 않아 국경선 설정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은 1947년 유엔의 분할안대로 국경선이 정해지길 바라지만, 이스라엘은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국경선이 바뀔 때마다 그 안쪽에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늘리는 속칭 알박기를 하고 있습니다. 26-7)
이스라엘 사회가 우경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구성의 변화에 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건국 초에는 유럽 중동부 출신의 유대인 즉 아슈케나지Ashkenazi가 많았습니다. 아슈케나즈는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하니, 아슈케나즈 유대인은 ‘독일 유대인’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금융, 무역업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유대인 즉, 세파르디Sephardi가 대거 들어왔습니다. 세파르디는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뜻하는 ‘세파라드’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세파르디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을 말하죠.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류층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삶의 기반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와 겹쳤죠.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이들은 진보 세력의 점령지 반환 정책에 반대합니다. 여기에 1991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계 유대인 70만 명까지 유입되면서 극우 세력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이죠. 29-30)
3장.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무관심해졌을까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른 최초의 서구 열강은 영국입니다. 3차례나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끝내 지배하지 못합니다. 2차 대전 이후 아프가니스탄 왕국(1926~1973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왕국)은 중립을 표방합니다. 서구 근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부동항을 포기하지 못한 소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조용히 실리를 추구해 나간 거죠. 아프가니스탄은 한동안 평화롭게 근대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덜 방법으로 소련과 군사적으로 깊게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맙니다. 소련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며 세력을 형성한 것이죠. 이들의 반대편에는 부족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이란 종교를 중심으로 뭉쳤고 서구화는 물론이고 소련식 공산주의에도 반발했습니다. 그 결과 소련의 영향을 받은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반정부 세력이 대립하게 됩니다. 33)
1978년 좌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뒤를 이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죠. 부족들은 반발했고, 급기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Mujahideen,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이라는 반정부군이 조직됩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서막이었죠. 소련은 정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갑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납니다. 소련은 긴장합니다. 소련의 남부 지역인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이슬람권 공화국들에서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까 봐 겁을 먹은 거죠. 곧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무려 10년이나 이어집니다. 막대한 군사비에 소련 경제가 휘청입니다. 소련 붕괴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죠. 결국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곰의 덫The Bear Trap이라며 철수합니다. 그리고 1992년 4월, 탈레반 정부가 들어서죠. 33-4)
2001년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알카에다를 보호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죠. 두 달 만에 성공합니다. 탈레반이 쫓겨난 자리에 친미 정부를 세웁니다. 처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때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국을 공격한 이들을 처단한다는 것에 세계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미국은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내죠. 바로 북한을 필두로 몇몇 나라를 ‘악의 축’이라며 새로운 적으로 삼은 겁니다.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과 악의 축 국가들은 세계 질서를 위협하니 세계 평화를 위해 앞으로도 이들에게 맞서겠다고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탈레반이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계획이 틀어집니다. 결국 미국은 2021년 8월 도망치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합니다. 그러자 친미 정부의 대통령(아슈라프 가니)도 곧 탈레반에 항복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달아납니다. 20년 만에 탈레반은 정권을 되찾죠. 35)
4장. 대만은 왜 국기가 없을까 : 중국 —대만의 갈등
중국은 대만을 전쟁에 패한 장제스가 세운 괴뢰정부로, 대만은 중국을 쿠데타를 일으킨 공산당 세력으로 봅니다. 상대를 무력 통일의 대상으로 여기죠. 우려는 현실이 됩니다. 1954년 대만 해협의 진먼섬에서 중국과 대만이 무력 충돌을 했기 때문이죠. 진먼섬은 대만보다 중국에 더 가깝지만, 대만이 점령한 곳이었어요. 대만으로서는 최전선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곳에 군대를 많이 파견했습니다. 이를 중국은 좌시하지 않았고요. 1955년 미국이 개입해 휴전 상태로 접어듭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쓸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중국이 물러선 거죠. 이 사건으로 미국과 대만은 방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중국은 미국과 서유럽이 중동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다시 진먼섬을 공격합니다. 무려 50만 발의 포탄을 44일간 쏟아붓죠. 그 바람에 대만 해협 바닷길이 봉쇄되기까지 합니다. 극한의 대치 상황은 미국과 중국이 기습적으로 수교를 맺은 1979년에야 끝이 납니다. 42)
1970년대부터 데탕트 시대로 접어들죠. 대만은 이런 분위기가 영 마뜩잖습니다. 중국을 탈환할 날도 멀어 보이는데 자기편인 줄 알았던 미국까지 중국과 가까워졌으니 불쾌했습니다. 곧이어 이 감정은 깊은 배신감으로 변합니다. 1971년 미국이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선언했기 때문이죠. 물론 미국은 중국이 대표 국가가 되는 대신 대만은 일반 회원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완강히 반대했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대만은 화가 나서 유엔에서 탈퇴해 버립니다. 미국은 1972년 중국이 주장해 온 ‘하나의 중국’ 원칙에도 동의합니다. 하나의 중국이란 중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대만이 격하게 항의하자 미국은 결국 1978년 12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합니다. 미국의 보복으로 인해 대만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 줄줄이 쫓겨나고 국제무대에서도 지워집니다. 43-4)
2025년 3월 현재까지 대만은 친미 성향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입니다. 차이잉원 전 총통은 2021년 10월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파장을 일으켰죠. 비공식적이었던 내용을 당국자가 처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대만은 중국의 영토니,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대만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연설에서 중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되 무력 사용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무력 행사 대상은 중국 통일에 간섭하는 ‘외부 세력’과 ‘일부 독립 세력’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한마디로 미국에 내정 간섭을 그만두라고 경고한 거죠. 하지만 미국은 시진핑이 계속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고, 그 경우 대만은 무력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중국을 계속 자극하고 있습니다. 47-8)
5장. 중국군과 인도군은 왜 몸싸움을 벌였을까 : 중국—인도 분쟁
중국과 인도가 국경선을 놓고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한 건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하면서입니다. 유엔이 한국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마오쩌둥은 티베트를 기습해 손쉽게 점령해 버립니다. 건국 1년 만에 중국은 왜 서둘러 이런 전쟁을 벌였을까요? 윈난성·쓰촨성과 접한 티베트 지역이 혹시라도 인도 쪽으로 돌아서면 북서부의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죠. 티베트는 중국 영토의 8분의 1에 해당할 만큼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 조공을 바치던 나라니 자국 땅이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죠.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당하자 티베트 불교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추종자들은 1959년 인도로 망명합니다. 인도가 망명 정부를 받아들이자 중국은 분노합니다. 인도가 미국이나 영국 등 서유럽과 연대해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티베트 망명 정부를 허락한 이후로 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집니다. 그리고 1959년 가을부터 국경선을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죠. 55-6)
1962년에 두 나라는 크게 부딪칩니다. 중국이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 근거해 인도 북서부 라다크 지역(악사이 친)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지역을 자기네 땅으로 편입하려고 했거든요. 티베트는 오랫동안 청나라 지배를 받다 1914년에 독립합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였죠. 독립 당시 인도를 실제로 지배했던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그은 국경선이 맥마흔 라인입니다. 1962년 전쟁 이후에도 두 나라의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대표적인 두 분쟁 지역을 하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참고 있는 중이죠. 인도는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갖고, 중국은 악사이 친을 갖는 식이었죠. 1996년에서야 두 나라는 가까스로 협정을 맺고 두 지역에 실질 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이라는 완충 지대를 설정했습니다. 실질 통제선은 국제법에 따르면, 확정된 국경선은 아닙니다. 양측이 군대를 배치하고 있으니 순찰 중 언제든지 무력 충돌로 확장될 위험이 있죠. 56-7)
중국은 1960년대만 해도 점령한 악사이 친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지금은 이 지역에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대규모로 투자한 결과 이제는 신장·위구르를 활용해 파키스탄이나 중동과 교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객관적으로 보면 인도가 약간 불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 역시 조급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갈등을 국내 정치에 활용합니다. 외부의 적, 그중에서도 중국처럼 큰 적이 존재하면 내부를 결집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죠. 물론 중국도 인도와의 국경 분쟁을 국내 정치에 잘 활용합니다. 특히 민족주의가 통치 전략인 시진핑에게 국경 분쟁만큼 애국심을 고취하기 좋은 소재는 없으니까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지율만 떨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방법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59-60)
6장. 이웃과 왜 싸우게 되었을까 : 인도 —파키스탄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 지역은 카슈미르 계곡을 중심으로 히말라야산맥과 피르 판잘Pir Panjal 산맥 사이에 위치한 고산 지대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상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히말라야산맥을 비롯해서 관광 자원이 아주 많은 곳이죠. 무굴제국 때부터 유명한 관광지였습니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땅도 비옥해 벼농사뿐 아니라 농작물 재배도 잘되는 데다 루비 등의 지하자원도 풍부하죠. 직조업도 발달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캐시미어의 본고장이기도 합니다. 16~19세기 중반까지는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무굴제국의 땅이었죠. 무굴제국이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인도제국이 되었고요. 이후 인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무슬림)가 극심하게 갈등합니다. 그 결과 힌두교는 인도, 이슬람교는 파키스탄이란 국가로 나뉩니다. 카슈미르 지역도 인도 땅과 파키스탄 땅으로 나뉘고요. 훗날 인도령 일부인 악사이 친을 중국이 차지하면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나뉩니다. 64)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부각해 두 종교인들 간에 적대감을 품게 했고 이런 감정은 독립한 이후에도 사람들을 지배했죠.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이런 감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국은 분할 통치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약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힌두교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켰죠. 영국은 힌두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 세력도 동시에 지원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은 인도를 떠나기로 했고 인도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갈등합니다. 간디는 “분단은 곧 인도를 생체로 해부하는 것”이라며 통일된 인도를 간절히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대표가 만나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거죠. 이를 지켜보던 영국은 제 마음대로 1947년 8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인도를 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3국으로 분할해 버립니다. 65)
특히 벵골주와 펀자브주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습니다. 벵골주 서쪽과 펀자브주 동쪽은 인도, 그 반대편은 파키스탄이 되었으니까요. 이 중 펀자브주 국경 분쟁은 인접한 카슈미르 지역으로 확산됩니다.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카슈미르 지역의 대부분 주민은 이슬람교도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들 땅이 무슬림이 많은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카슈미르의 지배층은 힌두교도였습니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대다수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인도에 편입해 버립니다. 파키스탄은 반발했고, 이 문제로 1948년 인도와 전쟁을 벌입니다. 1949년 유엔의 중재로 전쟁이 중단되었고,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잠무 카슈미르Jammu and Kashmir와 라다크Ladakh 지역)과 파키스탄령(아자드 카슈미르Azad Kashmir와 길기트‒발티스탄Gilgit-Baltistan 지역)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더 커지죠. 인도령을 침공해 악사이 친 지역을 점령해 버렸거든요. 66-7)
서벵골은 인도, 동벵골은 파키스탄 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동벵골 지방의 무슬림들이 동파키스탄을 세우긴 했지만, 정치적 실권은 모두 서파키스탄(오늘날의 파키스탄)이 장악했습니다. 1970년 태풍 피해로 동파키스탄 국토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50만여 명이 사망하자 동파키스탄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것은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정부군이 이들을 탄압하자 많은 동파키스탄인이 인도로 넘어갑니다. 당시 인도는 이 난민들을 받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죠. 동파키스탄 정부와 인도 사이에 전쟁이 터집니다. 인도가 승리해 동파키스탄은 인도가 바라던 대로 1971년 2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독립합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도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계속 충돌합니다. 1999년에는 카르길Kargil 분쟁도 일어나죠. 두 나라는 2004년부터 평화의 길을 모색합니다. 잦은 전쟁과 무력 대치로 인해 서로 경제적인 타격만 입기 때문이죠. 67-8)
7장. 왜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울 수 없었을까 : 튀르키예—쿠르드 분쟁
쿠르드족은 ‘국가 없는 최대 단일 민족’, ‘중동의 집시’로 불립니다. 튀르키예·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3천만여 명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채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중동에서 아랍인, 이란인, 튀르키예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민족임은 분명하죠. 이 중 절반이 튀르키예에 삽니다. 쿠르드족은 인종, 역사적으로 이란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란계 산악 민족이죠. 그래서 이란과 접경 지역인 튀르키예 동부에 많이 거주합니다. 이곳을 주 투쟁 근거지로 삼고요. 역사에 처음 등장한 쿠르드족은 12세기에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Saradin 이집트 술탄입니다.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해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에 대제국을 건설했죠. 1250년 아이유브 왕조가 망한 이후 쿠르드족은 셀주크제국과 그 후 들어선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쿠르드족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자치 지역이나 국가를 원하는 겁니다. 거주하는 국가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죠. 77-8)
1880년대 오스만제국 내 쿠르드 족장 셰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eydullah는 당시 이란(카자르 왕조)이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틈을 타 이란 서부의 쿠르드족을 규합해 들고일어납니다. 초반에는 이기다가 결국 오스만제국과 이란 연합군에 패합니다. 그럼에도 우베이둘라의 봉기는 이후 쿠르드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죠.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독립을 다시 염원합니다.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제국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보면,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주기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23년에 로잔 조약을 다시 체결합니다. 이 조약에서는 쿠르드족 얘기가 아예 빠지죠. 이렇게 된 것은 영국 탓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땅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땅을 영국령으로 편입해 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연합국은 오스만제국이 해체된 후 쿠르드족이 세운 국가를 무효화해 버립니다. 78-9)
소련도 쿠르드족을 이용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이란 북부를 점령하고 쿠르드족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1946년 1월 22일~1947년 3월 31일)을 세웁니다. 소련은 이란과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잠시 도운 척했을 뿐이죠. 마하바드 공화국은 불과 1년여 뒤 소련이 이란과 협정을 맺고 철수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1972년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돕겠다는 이란과 미국의 약속을 믿고 이라크와 3년 동안 싸웁니다. 이 전쟁 역시 미국과 이란에 이용당한 경우입니다. 당시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친미 정부였고, 이라크와 국경 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을 이용한 것이죠.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부터 이란과 전쟁 중이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울 것을 염려해 1988년 안팔(Anfal, ‘성스러운 전쟁의 전리품’이란 뜻)이라는 비밀 작전을 펼칩니다.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학살하고 마을도 파괴해 버리죠. 80)
1920년대 초기에 튀르키예는 세속주의를 내세워 쿠르드족 고유의 언어, 의복 등을 금지합니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자국의 모든 민족이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당연히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했죠. 튀르키예가 세속주의를 내세우자 쿠르드족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1978년 PKK를 조직합니다. PKK는 쿠르드족 독립을 주장하며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시위도 벌였습니다. 그로 인해 튀르키예에서 반쿠르드 감정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2013년 튀르키예와 쿠르드족은 휴전 협정을 맺지만, 이후에도 무력 충돌은 계속됩니다.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가 쿠르드족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자원이 많기 때문이에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와 인근 아랍 국가 등이 서로 그 자원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죠. 82)
8장. 시리아에서 전쟁은 끝난 걸까 : 시리아 내전
내전의 발단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다라Daraa에 사는 10대들이 학교 담벼락에 “의사 선생님, 이젠 당신 차례야”라고 쓴 사건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2007년 7월 집권한 바샤르를 말하죠. 안과 의사였거든요. 당시 중동에서는 2010년부터 튀니지를 시작으로 훗날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정권을 향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거죠. 아이들은 이번 차례는 시리아 독재자라고 썼던 겁니다. 경찰은 아이들을 체포했고, 배후를 밝히라며 혹독하게 고문합니다. 정부가 군용기, 탱크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학살하자 군대 안에서도 반감을 품는 군인이 늘어납니다. 결국 이들은 정부군에 등을 돌리고 시민군에 합류하죠. 대표적인 사람이 공군 대령 리야드 알아사드Riad al-Assad입니다. 그는 탈영병과 시위대를 모아 시리아 자유군SFA, Syria Free Army을 만듭니다. 이제 반정부군도 무장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죠. 그리고 민주화 운동은 내전으로 전환됩니다. 86-7)
그런데 내전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아랍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파 분쟁으로 번진 거지요.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으로 말입니다. 시리아는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수니파인데 집권층은 시아파였습니다. 지배받는 수니파가 지배하는 시아파에 맞서는 구도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 내전은 민주화 운동과 종교 전쟁이 섞이는 성격을 띠게 됩니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돕고, 반정부군은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합니다. 여기에 아사드의 오랜 우방국 러시아까지 가세하죠. 수니파 테러 조직인 IS가 내전을 틈타 시리아 북동부를 점령하면서 반정부군 진영에 끼어들고요. 미국은 아랍의 민주화 운동 지원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시리아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민주군SDF, Syria Democracy Force을 지원합니다. 미국이 SDF를 지원한 이유는 IS 때문입니다. 비록 IS가 시리아에선 반정부군 진영에 속해도 미국에게는 격퇴 대상이니 SDF를 이용해 물리치려고 한 것이죠. 87)
또 시리아 내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입니다. 먼저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가장 큰 이유는 쿠르드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2011년 7월부터 튀르키예는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자유군SFA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2017년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완전히 발을 뺌으로써 쿠르드족과 SDF는 궁지에 몰리죠. 튀르키예는 미국과 러시아의 묵인 아래 쿠르드족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틈만 나면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했습니다. 시리아가 헤즈볼라를 비롯한 반이스라엘 무장 조직들에게 거점을 제공하고 있었으니 반감이 늘 있었죠. 이런 데다 3차 중동 전쟁의 결과로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정부군이 승리할 경우, 이곳이 위협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이 길어지길 바랐겠죠. 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이 전부 약해지는 것을 최고의 시나리오로 생각했을 겁니다. 88)
러시아는 아사드 부자와 오래 동맹을 맺었고 이들에게 무기도 지원했습니다. 푸틴이 시리아 정부를 도운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타르투스항에 해군 기지를 두었습니다. 타르투스항은 러시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갖고 싶어 한 부동항인 데다 중동과 지중해를 넘볼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한 시리아에서 반정부군이 정권을 잡을 경우 유럽으로 가스관을 연결할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되면 러시아 ‒ 유럽의 가스 공급망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국제 사회에는 IS 격퇴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말이죠. 미국은 오바마 정부 이래 고립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약해지고 그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졌습니다. 물론 미국과 서유럽이 시리아 내전에서 한발 물러난 데에는 IS 영향도 있습니다. 반정부군을 돕는 것이 IS를 키우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89-90)
9장. 군부가 계속 집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미얀마 내전
미얀마는 인구의 70퍼센트가 버마족이고 샨족·친족·몬족·카친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3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서로 언어와 문화도 크게 달라 종족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얀마는 1824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942년부터 45년까지는 일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2차 대전에서 패한 일제가 물러난 뒤에 다시 영국이 지배했고요. 그러니까 미얀마는 거의 12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죠. 당시 미얀마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아웅산 장군은 독립 후 국가 재건을 준비하던 중에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아웅산이 주축이 돼 만든 정당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 Anti 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이 총선거에서 승리해 서구식 민주 정부가 들어서죠. 하지만 2차 대전 후 탄생한 대다수 신생 국가들처럼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하고 소수민족끼리 갈등하면서 경제 혼란까지 겪습니다. 그러다 1962년 네윈Ne Win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나긴 군부 시대로 들어섭니다. 96)
네윈 군부는 1988년까지 26년간 집권합니다. 네윈은 주요 기업과 자원을 국유화해 시민의 몫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었죠. 폐쇄적인 경제 정책 결과, 세계 경제에서 고립되고요. 당연한 귀결처럼 결국 경제는 무너지고, 지하경제와 암시장만 활성화됩니다. 독재와 경제난으로 국민의 분노는 점점 깊어졌죠. 마침내 1988년 8월 8일, ‘8888항쟁’이 일어납니다. 학생과 승려들을 주축으로 수많은 시민이 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합니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첫 민주 항쟁이었죠. 하지만 군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대를 바꿔 가며 독재를 유지했죠. 8888항쟁 당시 정부는 저항하지 않는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학살했습니다. 수천 명이 죽습니다. 군인이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항쟁 결과 네윈은 물러나지만, 군인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쥐죠. 군부는 더 악랄해집니다. 아웅산수치도 집 밖으로 못 나오게 가택연금을 해 버리죠. 수치는 20여 년 만인 2010년에야 풀려납니다. 97-8)
2007년 8월 다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샤프란 혁명’이죠. 샤프란은 승복 색인데, 이 색을 떠올릴 정도로 승려들이 주축이 된 투쟁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미얀마는 국민의 약 90퍼센트가 불교도입니다. 샤프란 혁명은 군부가 연료 판매 가격 보조금을 폐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군부가 연료의 유일한 공급자였는데, 보조금을 주지 않으면서 버스용 압축 천연가스 가격을 비롯해 가스 가격이 폭등한 것이죠.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군부도 한발 물러납니다. 2008년부터 자유선거를 실시합니다. 무늬만 자유선거지, 실제로는 부정선거였지요. 군부가 지지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이 압승합니다. 하지만 군부도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08년 새 헌법을 만들죠. 대통령 간선제, 시장경제 체제, 정당제 민주주의 등을 표방합니다. 그런데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에 자동 할당하게 돼 있어 그 외의 내용은 사실 치장에 불과했습니다. 98)
아웅산수치는 2010년 연금에서 해제되었고, 2012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합니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군부가 이를 인정하고 정권을 이양합니다. 군은 2020년 11월 총선에서도 패배하자 다시 움직입니다. 수치는 군에 유리하게 돼 있던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이 자동으로 갖게 돼 있기 때문이죠. 개헌안이 통과될 경우, 군의 영향력은 약해지겠죠. 그러자 2021년 2월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구금합니다.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더는 평화 시위가 어려워지자 시민들은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시민들은 4번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군부를 끝낼 방법은 무장 투쟁밖에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99-100)
10장.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학살자가 되었을까: 에티오피아 내전
에티오피아는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80개의 크고 작은 종족으로 이루어진 연방제 국가였죠. 각 종족은 자치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1974년 9월, 공산주의자인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제국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군부는 1987년 군정을 폐지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공화국을 선포하죠. 제1대 대통령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입니다. 그는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했습니다. 무늬만 공화국이지 멩기스투 정권의 폭정은 계속됐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이들이 반정부군을 조직해 들고일어납니다. 멩기스투 정권은 1991년에 무너집니다. 2대 대통령은 대표적인 반정부군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되었습니다. 멜레스 제나위 총리 시절엔 그가 소속된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이 집권당이었습니다. 109-10)
2019년 12월 EPRDF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인 번영당PB, Prosperity Party을 만듭니다. TPLF를 제하고 나머지 3개 정당만으로 꾸린 거죠. 왜 TPLF를 제외했을까요? 멜레스 제나위가 총리가 되면서 TPLF는 집권당이 됩니다. 이들이 정치를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멜레스 역시 독재자로 변질됩니다. TPLF는 멜레스가 2012년 사망하고 2018년 실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독재를 합니다. 결국 총리(2대 총리 하일레마리암 데살렌)가 물러났고, 2018년 번영당을 주도한 아비 아머드 알리(Abiy Ahmed Ali, 오로모족 출신)가 3대 총리가 됩니다. 아비 총리는 TPLF를 배제했습니다. 그러자 TPLF가 들고일어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죠. 아비 총리는 국경을 두고 오랫동안 분쟁해 온 에리트레아를 설득해 평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지요. 하지만 TPLF 본거지인 티그라이주는 이 협상에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자기들 땅이었던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로 넘겨주었기 때문이죠. 110-11)
정부와 TPLF 간의 갈등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폭발합니다. 아비 정부는 보건 안전을 위해 전국 지방선거를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는데 TPLF가 반발하며 독자적인 선거를 치르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2020년 9월 티그라이주는 따로 선거를 치릅니다. 아비 정부는 티그라이주 정부를 불법 군사정부로 규정하고, 재정 지원을 끊는 맞불을 놓습니다. 인터넷과 전화까지 모두 차단해 티그라이족들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11월 정부군을 투입해 티그라이주의 주도 메켈레Mekelle를 점령합니다. 이후로도 내전은 계속됩니다. 에티오피아는 2021년 5월 총선을 치르고, 석연찮지만 번영당이 압승해 아비 총리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합니다. 2022년 아비 정부와 TPLF는 내전 중단에 합의합니다. 하지만 티그라이족은 이후로도 계속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11-2)
후기
심리학 개념 중에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보다는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더 쉽게 털어놓는 경향을 말합니다. 낯선 사람과는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없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낯선 사람 효과는 분쟁이나 전쟁을 해결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분쟁 당사국들은 서로 적대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아예 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제3의 중재자가 등장하면 대화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당사국들이 공식적으로 말하기 힘든 조건들을 상대국에 대신 전하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런 존재들을 피스메이커Peacemaker라고 하지요. 2024년 12월 타계한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표적입니다. 국제 사회는 이런 피스메이커들에게만 기댈 것이 아니라 분쟁이나 전쟁 등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 갈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