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1부 기원 - 어떻게 로마는 세상을 정복했는가


문명이란 홀로 성장할 수 없기에, 성장과 동시에 더 큰 문명에 의해 잠식당할 운명에 처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레타는 그리스 문명은 받아들이면서도 이집트, 그리스, 디아도키로 이어지는 다른 문명들의 침략과 페르시아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결국 미케네 문명에 의해 사라지기는 했으나 무역을 하기에 용이하면서도 전쟁을 하기에는 먼 위치 덕분에 수백 년 동안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비니Sabini, 움브리아Umbria, 에트루스카Eetrusca 등 주변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그만큼 많았던 덕분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문명은 에트루스카로, 그리스 문명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민족이었다. 남부에 있는 캄파니아Campania에는 그리스 식민지들이 있었다. 캄파니아의 나폴리는 당시 네아폴리스Neapolis로 불렸으며 그 자체가 신도시, 즉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지은 신도시를 의미했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Carthago가 정복하고 있었다. 43)


로마는 이탈리아를 장악했으나 아직 슈퍼 파워는 아니다. 당시의 지중해 해상 무역은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레반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인도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베리아, 지금의 스페인 지역까지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물리치지 않으면 로마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가 카토Marcus Porcius Cato가 원로원에서 어떤 연설을 하든 마지막에는 항상 “카르타고는 사라져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는 경고를 덧붙였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다. 그렇게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이르는 포에니Poeni 전쟁을 치르게 되고,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 로마는 전 세계를 정복한 후 그들 자신의 승리 비결을 용맹함과 전투력에 있었다고 착각하지만 로마의 진정한 승리 비결은 시스템, 무기, 전술 이 세 가지에 있었다. 질서에는 무질서로, 무질서에는 질서로 대응하면서 상황에 맞게 무기를 적절하게 변형한 로마는 전 세계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45, 48)


로마가 전쟁을 통해 강대 문명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사회 인프라에 있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넘어갈수록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게르만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경우 식량 조달이 어려워 연이어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고 부상을 입어도 병원에 갈 수 없었지만 로마는 달랐다. 로마는 정비된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무기와 식량을 조달했고 발달된 의료 환경을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로마에는 ‘파브리케fabricae’라고 불리는 무기 공장이 따로 갖춰져 있어 대량의 무기 생산이 가능했는데, 이는 무기의 길이나 무게 등의 단일화를 의미했다. 누구나 특별한 연습 없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처음에는 로마에 대항하던 민족들도 점차 로마인이 되어갔다. 단 한 민족만 빼고 말이다. 바로 문명의 기원, 고대 레반트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간직하던 유대인들만은 결코 로마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돌게 된다. 50)


그러나 광대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사실상 당시 기술로는 다스릴 수 없는 규모였다. 국경선 또한 너무 길었다. 선택과 집중이 절실했다. 결국 각 3000~5000명 병력으로 구성된 로마 제국의 총 30개 정도의 군단legion 중 반 정도는 게르만 야만족들로 득실거리는 독일 라인강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변을 지키고, 나머지 반은 레반트 지역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대결하게 된다. ‘전방 지역 방어’라 불릴 수 있는 이 전략은 그러나 로마 제국 멸망의 단초가 된다. 야만족들과 문명을 구분 짓는 것은 오로지 잘 훈련된 로마 군단들이 지키는 국경선밖에 없기에, 일단 국경선 안으로만 들어오면 그 안에서는 누구든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국경선이 뚫렸다는 소식이 로마까지 오는 데만 해도 몇 주가 걸렸다. 제압할 군인들이 가는 시간 동안 야만족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고, 때문에 그들을 잡는 데만 몇 년이 소요될 정도였다. 53-4)


2부 멸망 - 왜 위대한 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졌는가


당시에 모든 전쟁은 가을 수확 전에는 반드시 끝나야 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전쟁에 나가 가을에 수확하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이는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합의된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 공화정 초기까지는 잘 지켜졌다. 그런데 로마의 팽창이 가속화되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당시는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에 영국까지 출정할 경우 같은 해에 이탈리아로 돌아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가령, 집안의 장성한 남성이 5~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할 경우 당장의 생계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기계 없이 온전히 인력으로 일해야 했기에 그 빈자리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은 가족들은 상당한 이율로 세넥스에게 부채를 질 수밖에 없었다. 훗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남은 것은 가족들이 모두 노예가 되어 있는 현실뿐이다. 이렇게 로마 공화정의 핵심이었던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빚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다. 60)


동시에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수백 만 명의 노예가 생기는데, 이들 또한 전쟁 시 세금을 가장 많이 냈던 세넥스의 차지가 된다. 문제는 중산층 누구도 노예보다 더 저렴하게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제 로마의 중산층은 직업조차 찾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공화정 마지막 시기에 로마의 실업률은 70~8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였다. 단순한 노동은 모두 노예의 차지고, 고차원적인 일은 교육을 훨씬 많이 받은 세넥스의 후손만이 할 수 있으니 중산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들을 보호할 사회 보장 제도 또한 전혀 없었다. 로마 공화정에 상상을 초월할 수준의 불평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세넥스들의 삶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처음에만 해도 조금 부유한 수준이었지만 중산층으로부터 거둬들인 이자에 농가, 토지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세넥스들의 토지 소유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오늘날 도시 하나 정도의 토지를 몇몇 갑부 세넥스 가문들이 소유하기도 했다. 60-1)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재위 117~138)는 21년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제국을 돌아다녔는데, 그 결과 로마가 도저히 통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영원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제국의 팽창이 아닌 제국의 보존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상당히 현명한 결정 같지만 추후에 큰 문제가 된다. 로마 직업 군인들의 급여와 나라 전체의 생산력 저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직업 군인들의 급여 문제가 대두한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급여를 미룬다는 것은 군인들에게 반란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애국심과 명예를 위해 싸우던 시민 군인과 달리, 직업 군인 유지에는 막강한 국가 예산이 필요했다. 이에 처음에 로마 황제들은 직업 군인으로서의 20년의 임기를 마친 후 퇴역할 때 퇴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군인들이 퇴직을 하게 되어 재정에 상당한 문제가 생기고 만다. 75)


결국 로마 황제들은 퇴직금을 토지로 주겠다는 묘책을 다시 짜낸다. 군인들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는 결정이었다. 당시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니 40세 정도에 은퇴한 후 농부가 되는 것은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콜로니아Colonia 도시를 만들어주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면 연금 문제와 노예들의 반란 문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가 제국의 팽창을 중단하면서 은퇴한 군인들에게 지급할 새로운 땅이 더 이상 창출되지 않기 시작한다. 퇴역 군인들에게 줄 만한 새 토지가 모자라고, 퇴직금 대신에 농사가 불가능한 황무지나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급락할 화폐를 받은 군인들의 불만은 상상하기 쉽다. 새로운 자금이 필요해진 로마 제국의 직업 군인들. 그들은 추후 황제의 암살과 새 황제의 대관이 바로 그들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보호주의는 그렇게 퇴역 군인의 처우 문제와 맞물려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이끄는 요인이 된다. 7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황제들 중 최초로 로마 위기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매우 파격적인 해결책 세 가지를 찾아낸다. 첫째, 로마 제국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한다. 하드리아누스처럼 디오클레티아누스 또한 로마 제국의 방대한 영토가 정보 교환이나 야만족들과 관련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둘째, 후계자 선정 절차를 규정화한다. 로마는 왕정이 아니기에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할 수도 없고, 공화정도 아니었으므로 투표를 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다시 로마 제국의 초창기처럼 양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되 이를 규정화하는 방식을 적용한다. 그전까지는 특별한 기준 없이 황제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이제 황제를 네 명으로 나눠 이를 시스템화하자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명의 황제들이 통치하는 4두頭 정치, 즉 테트라키tetrarchy다. 셋째,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가격을 통제한다. 그러나 이를 권력으로 통제하려고 한 결과는 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재정 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85-7)


3부 복원 - 무엇이 로마의 역사를 이어지게 하는가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로마인들은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제국 그 자체가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과 숙명론은 과거에 대한 로망을 키운다. 4~5세기 로마의 현실은 패배와 재난의 반복이지만 그들에게는 찬란한 과거의 로마가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로마는 절망스러웠지만, 상상의 로마는 아름답고 영원했다. ‘로마’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제국이 아닌, 유럽인들이 여전히 꿈꾸고 갈망하는 ‘영원한 제국’으로 탈바꿈한 이유다. 황제도 세나투스도 사라지고, 이제 홀로 그들의 역할을 해야 하는 로마의 주교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만 남은 제국에서 로마인들은 믿기 시작한다: 전쟁과 침략 때문에 후퇴하고 투박해진 단순함은 어쩔 수 없는, 지금 이 세상과의 타협이지만 진정한 화려함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가엾은 로마인들을 영원히 위로할 하나님의 세상에서만 가능하다고. 개인의 자유와 주도가 중심이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이 사라지고, 신의 믿음이 중심인 된 중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09-10)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된 후 서유럽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세 가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행운은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기술자, 지식인, 부호들이 모두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이주는 단순히 영토 간 이동이 아닌,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유럽으로의 이전을 의미했다. 또한 8~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알 안달루스Al-Andalus가 스페인을 떠나고 가톨릭이 스페인 남부를 차지하자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로 이주한다. 이는 이슬람의 과학 문명에 그들이 흡수한 그리스 로마의 찬란한 문명까지 함께 전파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명의 이식이 콘스탄티노플과 스페인 두 곳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행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대규모의 새로운 시장이 창출된 것에 더해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발명으로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23)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미술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기후나 환경 덕분에 색감은 밝으나 여전히 생동감 없는 조각 같은 표현을 했다면, 독일은 생동감은 있으나 색감 자체가 매우 어둡고 다소 잔인한 표현을 했다. 그런데 이때 색감의 사용과 생동감의 표현,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잘 융합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바로 플랑드르, 네덜란드 화가들이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를 통해 그림의 주제는 성경을 벗어나 훨씬 다채로워진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더 이상 종교나 신화가 아닌 조금 더 일상의 삶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이는 화가 크벤틴 마시스Quentin Matsys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더 이상 하늘과 천국이 아닌,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기에 ‘저 세상’에 있었던 시선이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은 피터르 브뤼헐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유럽, 특히 네덜란드는 점차 실용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27, 133-5)


흔히 일본의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꼽지만 그보다 앞선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에 발을 내디딘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다. 1613~1615년까지 이어진 그의 행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대서양을 넘어 스페인과 로마까지 이어진다. 이때 그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라는 배를 타고 갔는데, 포르투갈의 갈레온선galleon을 역공학해 직접 건조한 배였다. 지금은 그 모사품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기독교 신자였던 쓰네나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일본은 쇼군이 바뀌고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져 있었다. 일본은 무역을 통해 얻은 배와 총까지도 모두 폐기하고 그렇게 고립을 자초한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모든 나라에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이다. 물론 15세기의 유럽처럼 그리스 로마 지식의 이식,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인쇄 기술의 발명이라는 세 가지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이는 분명 행운이었다. 138-9)


4부 유산 - 누가 로마 다음의 역사를 쓸 것인가


국가의 기원에 관해 현재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론이다. 베버에 의하면 국가의 역할은 폭력성의 독점화다. 쉽게 말해 인간이란 원래 폭력적인 존재이기에 가만히 두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므로, 이를 국가가 독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 간의 갈등을 무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국가만이 유일하게 폭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했을 때 단순한 싸움으로 끝났을 문제가 독점이 무너지면 전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가 정당성의 문제가 생긴다. 도대체 국가가 무엇인데 폭력을 독점하느냐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국가를 세운 후에 권력을 부여받은 왕이 이를 멋대로 휘두르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가 독점한 폭력성이 개인들의 폭력성을 모두 합한 것보다 낮을 때에야 국가는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51-2)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은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한 문제를 권력과 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권력은 부에서 나오기에 부의 확률분포가 다르면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은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 위해 부의 소유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부가 특정한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소유는 도둑질이다Property is Theft!』에서 처음으로 공유 경제를 제안하기도 한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신과 국가에서God and the State』를 통해 소유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가 개인의 소유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에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사라지면 유토피아가 된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관점은 앞서 개인의 폭력성 제거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았던 것의 반대편에 자리한 시각이다. 156-7)


지금까지 인류가 설계했던 다양한 국가 시스템 중에서 여전히 잘 지탱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민주주의 하나뿐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완벽하다고 여겨지면 그것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닌 종교가 돼버린다. 이데올로기를 숭배하게 되면 그 절대성을 두고 결국 반목과 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가설에서 시작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보장되는 사회적인 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확장되는 모양새를 띤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성, 아이, 성소수자LGBT들에게는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universal human right가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확장성은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권리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축소되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는 파괴되고 만다. 162-4)


현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경쟁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가장 큰 핵심은 애니웨어 피플anywhere people과 섬웨어 피플somewhere people의 싸움이다. 세계화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므로, 그만큼 세계화에 적합한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영어에 능통하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여행을 다니며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즉 지식이나 경험,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세계화에서 훨씬 큰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세계화 덕분에 어디에서도 살 수 있고 사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애니웨어 피플이라 한다. 반면 오히려 세계화로 경쟁이 많아지는 사람들, 본인의 경험과 지식과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인 사람들을 섬웨어 피플이라 한다. 이들은 자신의 민족, 국가, 도시를 떠나는 순간 경쟁력을 잃고 만다. 170-1)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노터데임대학교 교수인 미국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Patrick Deneen은 조금 더 거시적인 질문을 한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실패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 2.0에는 아주 본질적인 오류가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자유, 불평등, 지니계수를 중심으로 보면 민주주의 2.0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불평등이 늘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사람은 더 똑똑한 사람과 덜 똑똑한 사람,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덜 열심히 일하는 사람 등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 자체로 서로 다르다. 만약 이를 막는다면 자유롭지 않은 것이기에, 자유가 늘어나면 불평등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자유는 커지면서 불평등은 막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에 대한 답이다. 애석하게도 드닌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 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살아남고 진화하기 위해서


처음 동물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경쟁적 속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의사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동물뿐 아니라 우리의 인지 발달에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대를 조종하는 기술, 속이는 기술의 향상이 동물계의 진화적 적응력을 설명해주는 근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똑똑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감정은 보람차거나 고통스럽다거나 매력적이라거나 혐오스럽다고 느낄 때 아주 큰 역할을 수행한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를 선호하는 성향은 연산능력 같은 인지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18)


# 자기가축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도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


사람(이 책에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를 뜻한다)은 네안데르탈인처럼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지면서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무리로 전환되었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19)


1 생각에 대한 생각


우리에게는 '마음이론' 능력이 있어서 지구에서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타인과 협력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마음이론이 중대하게 작용한다. 이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언어는 중요한 능력이지만 듣는 이가 우리가 하는 말을 모른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능력은 또한 우리 존재의 정수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추론할 능력이 없다면 사랑도 그림책에서 오려낸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마음이론, 즉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는 확신이 들 때 증오는 더 뜨겁게 불타오른다. 모든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렌즈를 통해서 더 크게 자라난다. 감정은 우리의 가슴에, 육감에, 손끝에 있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에 있으며 대개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나의 추측과 추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23-4)


사람 아기의 경우에는 백이면 백이 아주 초기에, 같은 월령에, 그리고 말을 배우거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기 전인 어느 순간 갑자기 손을 사용하는 능력에 번쩍 불이 붙는다. 한쪽 팔과 집게손가락을 뻗는 이 단순한 동작은 생후 9개월이면 시작되고, 사라진 장난감이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아름다운 새를 가리키는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는 능력(침팬지는 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 협력적 의사소통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능력인데, 침팬지의 마음이론 별자리에는 이 능력이 없다. 사람 아기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안다. 우리가 기쁠 때 타인은 슬퍼할 수 있으며 역으로 타인이 기쁠 때 우리가 슬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하고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부터,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습득한다. 25)


사람 아기의 특별한 점은 우리가 몸짓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틀림없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동작이든 가능했다. 토마셀로는 사람 엄마와 아기를 대상으로 아기의 엄마에게 컵에 블록을 하나 넣으라고 했다. 아기들은 엄마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히 자기를 도와주려는 행동이라고 추측하고 블록이 담긴 컵을 선택했다. 같은 놀이를 개와 했을 때, 개도 똑같이 행동했다. 사람 아기와 똑같이 내가 그들을 도와주려 한다고 이해했으며, 어떤 새로운 동작이든 선의로 받아들였다. 개와 사람 아기 모두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낼 때 더 주의를 집중하는 듯했다. 심지어 둘 다 목소리의 방향까지 이용할 줄 알았다. 사람 아기는 첫돌 무렵이면 목소리의 방향을 인식하고, 낱말이 특정 물건과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부 개가 새로운 낱말이 주어졌을 때 시행착오 없이 바로 그 의미를 유추해내는 이유일 수도 있다. 29)


2 다정함의 힘


내 지도교수인 리처드 랭엄은 개와 닮은 러시아 여우에 관한 내 이야기에서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찾아냈다. 원래는 겁 많고 호전적이던 어떤 여우 개체군을 오로지 사람에게 친화적인 태도 하나를 기준으로 선택 번식시켰는데, 단 몇 세대 만에 다른 형질에도 우발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인지기능의 변화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펄럭이는 귀나 동그랗게 말린 꼬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를 읽어내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사람 아기가 가진 마음이론 능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협력적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읽어내는 개가 이 기술을 새끼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능력도 얼룩무늬 털처럼 후대에 유전되는 형질일까? 지금까지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실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직접 시베리아로 가서 여우를 대상으로 테스트해보라는 랭엄의 제안에 설득되었다. 38-9)


만약 사람이 개를 선택한 것이 그들의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 때문이었다면, 친화력만을 기준으로 선택된 이 여우들은 내 손짓에 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우들에게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있었다. 강아지들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한 수 위였다. 랭엄의 생각이 옳았다. 이런 유형의 놀이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친화력 좋은 여우들은 우리의 손짓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반면에 보통 여우들은 몇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사회화 훈련을 받았는데도 우리의 손짓에 응한 확률이 겨우 절반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증진되었지만, 반면 인지기능에 관해 예상했던 가설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인지기능 같은 사회적 지능은 두려움이 친화력으로 대체될 때 우발적으로 발생한 또 다른 능력이었다. 여우 실험은 우리가 개에게서 관찰한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가축화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어주었다. 40-1)


우리는 또한 개에게서 발견했던 이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단순히 성견이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사람과 상호작용해 생긴 결과물이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각기 다른 양육 환경과 각기 다른 월령의 강아지들을 테스트하면서 우리는 심지어 가장 어린 강아지가 손짓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생후 6주에서 생후 9주 사이의 강아지들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기본 손짓은 물론, 전에는 본 적 없는 새로운 손짓과 몸짓 실험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 결과가 인상적인 이유는 생후 6주인 강아지는 아직 뇌가 완전히 발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걷기를 배우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강아지들은 시각적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섰다. 강아지들은 사람의 목소리 방향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을 줄도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해 먹이를 찾는 능력은 심지어 성견보다 나았다. 즉, 개의 모든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은 강아지 때부터 이미 존재하며, 사람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욱 향상된다. 41)


3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사촌


보노보 집단에서는, 야생에서건 사육소에서건, 수컷 우두머리가 없다. 그 결과 많은 과학자는 암컷이 보노보 무리의 대장이라고 생각했다. 아기 보노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기 침팬지는 모르는 누군가가 주는 음식을 함부로 받아먹지 않으며, 덩치 큰 수컷은 특히 더 경계한다. 따라서 침팬지 무리 구성원들의 서열을 평가할 때는 아기 침팬지의 반응을 고려해봤자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보노보들은 행동과 상호작용 면에서 침팬지들과 달리 타고난 무언가가 있었다. 놀랍게도 아기 보노보가 근처에 앉아 있을 때 보노보 성체 수컷들이 먹이를 외면하고 달아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눈에 띄었다. 서열상 상위에 속하는 보노보 중에는 무리 안에 어미가 있는 아기들도 있었다. 롤라 야 보노보에서 어미 보노보가 키우는 아기 보노보들은 일부 수컷 성체보다 서열이 높았다. 또, 아기 보노보보다 서열이 높은 수컷 성체라도 아기가 주위에 있을 때는 항상 행동을 조심했다. 50)


랭엄은 보노보 집단이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이유를 이들이 서식하는 콩고강 남부가 자원이 풍부하여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연구는 보노보 서식지의 열매와 초본이 풍부함을 시사한다. 보노보 암컷은 서열과 상관없이 모두 일일 필요 열량을 충족할 수 있지만, 침팬지는 서열이 높은 암컷들에게만 매일 충분한 먹이가 보장된다. 보노보 암컷은 암컷 친구를 챙길 여력이 있지만 침팬지 암컷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친화력 좋은 보노보 암컷들은 서로 돕고 살 수 있어 수컷의 공격성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또한 공격성이 가장 낮은 수컷과 짝짓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컷 보노보에게도 친화력은 승리의 전략이었다. 암컷의 승리가 어느 정도로 완전하냐면, 수컷이 암컷을 만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어머니를 통하는 것일 정도다. 이는 암컷의 다정한 수컷 선호가 다정한 사회의 진화를 야기하는 선택압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51-2)


보노보에게는 자기가축화 징후에 속하는 일부 외형적 특징이 있다. 하지만 보노보가 정말로 자기가축화되었다면 다음의 특성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1. 보노보는 같은 무리의 구성원들에게 침팬지보다 더 큰 관용을 보여야 하며,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그래야 한다. 2. 보노보에게는 공격성을 방지하는 생리적 기제가 있어야 한다. 3.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더 유연한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있어야 하며, 이는 관용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생리적 기제의 부산물이어야 한다. 우리의 실험에서 보노보는 낯선 이에게 공격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더 끌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훨씬 더 큰 포용력을 지닌 종인 셈이다. 동물 가축화 실험에서 친화력이 상승할 때 가장 초기에 변화를 보이는 것이 세로토닌의 농도다. 이것은 보노보에게 공격성을 방지하고 친화력을 증진시키는 생리적 기제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가축화된 모든 동물에게서 매우 흡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53-4)


4 가축화된 마음


우리나 호모 속 다른 사람 종의 식단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 50만 년 동안 살았던 모든 사람 종이 불을 다루고 조리한 음식을 먹고 장거리를 달리고 도구를 사용해 동물을 죽이고 도살했을 것이다. 뇌 크기나 신경세포 밀도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사람 종들에게도 우리의 범주에 속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어쩌면 우리와 비견되는 언어능력도 지녔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의 기술 수준이 다른 사람 종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와 나머지 사람 종 사이에 중요한 한 가지 다른 점이 남는다. 약 5만 년보다 조금 더 전 쯤에 우리 종이 사회연결망의 급속한 확장을 경험했다는 점 말이다. 사회연결망은 무엇보다 기술 발전에 필수 요소다. 더 큰 사회연결망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구 집단은 그저 기술의 진보가 멈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단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영장류 학자 토마셀로는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는 침팬지와 아주 흡사한 문화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63)


사회연결망이 확장되면 강력한 피드백 순환 고리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갖게 된다. 개선된 기술로 더 많은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더 밀도 높은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환 고리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건 무엇이었을까? 인구밀도가 높으면 혁신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희소해진 자원을 놓고 싸워야 하므로 폭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기술이 인간 사회의 욕구를 따라잡는 동안 이 모순에 제동을 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현상이 어째서 우리 종과 비슷한 뇌 크기를 가지고 나름의 문화를 만들었던 다른 사람 종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플라이스토세 시기에 나타났던 친화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기술혁명에 불을 붙인 불꽃이라고 주장한다. 64)


더러 백색증 같은 색소 이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사람은 대체로 고른 피부색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 가운데 단 한 부분의 변화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다. 사람과 가축화된 동물의 동공만 연령, 성별과 무관하게 일생에 걸쳐 다양한 색 변화가 나타난다. 우리의 다채로운 홍채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독특하게도 흰색 화포인 공막 위에 홍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막은 색소가 없어 하얗다.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롯한 모든 다른 영장류는 색소가 공막을 짙게 만들어 홍채와 뒤섞여 보인다. 이 경우 홍채와 공막의 색 대비가 낮아져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또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려워진다. 우리의 눈은 협력적 의사소통에 이바지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람 아기는 부모의 의도와 기분과 생각을 처음 인식할 때 부모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눈빛은 무엇을 향해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생애 초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 경험들은 이때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68-9)


우리의 눈은 분명하고 유일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기도 하다. 사람은 피부, 머리, 심지어는 손톱까지 다양한 색을 띤다. 홍채도 초록색, 회색, 파란색, 갈색에 검은색까지 다채로운 색이 있다. 하지만 공막은 모두 똑같이 하얀색이다. 하나의 형질이 이렇게 절대적인 단일성을 보이는 건 아주 이례적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서 하얀 공막이 보이면 사람이라고 혹은 사람 같다고 판단한다. 미키마우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 시절에는 그냥 새까만 큰 점으로 그렸던 눈을, 〈마법사의 제자The Sorcerer’s Apprentice〉에서 검은 눈동자에 흰자위의 커다란 눈으로 바꾸고 나서였다. 흥미롭게도, 누군가의 인간성을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은 눈을 까맣게 칠해버리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는 흰자위만 남은 눈이 거의 필수 요소다. 누군가의 눈동자 색이 살짝만 달라도 우리는 이미 불편해진다. 하얀 눈자위의 귀여운 모과이가 눈이 새빨간 그렘린으로 변했을 때처럼. 70)


5 영원히 어리게


신경능선세포는 모든 척추동물의 배아에 잠깐 나타난다. 이 세포들은 신경관 표피에서 떨어져나와 독립된 세포 집단을 형성하며, 여기에서 뇌와 척수가 형성된다. 신경능선세포는 줄기세포로, 이는 배아가 발생할 때 다양한 유형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신경능선세포는 이동 능력이 있어, 목적에 따라서 전신에 걸쳐 옮겨 다닐 수 있다. 줄기세포가 어떤 유형의 세포가 될지,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결정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군의 사서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축화의 중심 특성은 두려움과 공격성 감소인데, 신경능선세포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부신수질 발달에 관여한다. 가축화된 동물의 부신은 야생의 친척 종들의 부신보다 작다. 부신이 더 작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적게 분비된다는 뜻이다. 신경능선세포는 또한 친화력 선택과 연관된 모든 세포 조직 발달에도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는 이개연골, 피부 색소, 주둥이(또는 얼굴) 뼈와 치아가 포함된다. 77)


다른 동물들은 태어난 직후 뇌의 성장이 멈추지만 우리는 태아기의 뇌 성장 속도가 출생 후 2년까지 유지된다. 출생 후 뇌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특히 정수리 뒷부분에 영향을 주어 머리가 풍선 형태가 된다. 뇌 상단 뒤쪽인 두정부에는 마음이론 신경망이 모이는 두 중심점, 측두두정연접부와 설전부가 있다. 이곳이 아기가 타인의 시선과 제스처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다. 이 발달과정에서 시냅스 가지치기가 일어난다. 우리의 뇌는 성장할 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더 많이 사용되는 신경망일수록 신경세포의 개수가 더 많아지고 정보처리도 더 능숙해지면서 신경세포 간의 신호를 전달하는 시냅스의 연결이 간소화된다. 우리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썼듯이 “나약하게 알몸으로 빽빽 울면서” 태어나 몇 해 동안 이 상태로 지낸다. 하지만 사회적 인지능력이 일찍 발현되는 덕분에 타인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다. 80-1) 


우리 종에게 일어난 친화력 선택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우리 종이 보노보처럼 전반적인 포용력만 강화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종은 집단 구성원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익숙함을 토대로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집단 구성원은 자신이 사는 영토 안에서 자신의 무리와 함께 사는 누군가다. 그 나머지는 전부 남이다. 침팬지는 이웃 무리의 침팬지를 보거나 그들에 관해 들은 적이 있더라도 그들과 마주쳤을 때 거의 항상 적대적 반응을 보이며 오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편 보노보는 낯선 보노보에게 훨씬 더 우호적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그 사람이 우리 집단인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보노보나 침팬지와 달리 집단 구성원을 지리적 가까움이 아닌 더 넓은 범위의 정체성으로 정의한다.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도 나타났는데, 바로 집단 내 타인이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도 우리 집단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82)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집단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끌리도록 태어났지만, 그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사회장'의 영향을 받아 달라진다. 아기에게조차 집단 정체성은 친숙함 이상을 뜻한다. 어떤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지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바뀔 수 있다. 옷차림, 종교, 신체 특성, 정치 성향, 출신지, 응원하는 스포츠팀 등등. 사람은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집단 정체성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무엇이 이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인류학자 조지프 헨릭Joseph Henrich은 이 가소성이 사회규범의 출현에 결정적 인자라고 주장했다. 사회규범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규칙이다. 사회규범은 각종 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중추가 되며, 사람이 자기가축화된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규범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일가친척 이외의 사람들까지 포용하여 같은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83) 


# 사회장social force. 사회심리학의 창시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사회·문화의 복합적인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사회적 행동 또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사회적 합의를 가리킨다.


친화력이 우리 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하나의 종으로서의 우리가 더 똑똑해졌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두 생각 사이에 놓여 있는데,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면서 인지능력, 특히 의사소통 및 협력과 관련한 기능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람을 길들이는 것은 새나 늑대를 길들이는 것과 같지 않았으며 유인원의 경우와도 달랐다. 신경세포로 빽빽하게 채워져 다양한 인지능력과 더불어, 유례없이 강한 자제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거대한 뇌를 지닌 것은 사람뿐이다. 이 친화력 선택을 거치면서 집단 내 타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가 만들어졌다. 이 범주는 산모가 아기를 분만할 때 범람하는 그 옥시토신에 의해 촉발되고 유지되었다. 옥시토신이 충만하면,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다가오는 낯선 사람에게서 친절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편임을 알 수 있다. 행동이 가져올 결과까지 고려하여 판단하는 능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큰 이점이 되었다. 85-6)


6 사람이라고 하기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을 느낄 때 양쪽 집단 모두 어두운 면을 드러내게 된다. 힘이 더 센 쪽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고 공격당한 집단은 보복에 나설 수 있다. 자기가축화는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악의 공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개와 보노보는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을 강화했지만, 두 종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을 발달시켰다. 개는 자기가 사는 사람의 집에 낯선 자가 다가오면 공격적으로 짖어댄다. 보노보 암컷의 경우에는 방어적 모성이나, 암컷 간의 유대로 오히려 보노보 수컷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띠곤 하는데 이는 침팬지 암컷과 비교해보아도 더 공격적이다.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를 분만할 때 흘러넘치기도 하지만 누군가 자기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솟구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92-3)


사회과학자들은 이 경향을 ‘편견’이라고 불러왔는데, 편견의 일반적 정의는 한 집단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이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가설은 모든 사람의 뇌에는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94-5)


자신들이 누리던 자원이나 특권 혹은 어떤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집단이 나왔다면,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정치적 이념 대결이나 혹은 한 사회 내 다른 집단의 상대적 지위가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테일리가 연구에서 얻은 결론은,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Reciprocal Dehumanization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 참가자들에게 허구로 작성한 “이슬람 국가 대부분이 미국인을 짐승으로 여긴다”는 제목의 〈보스턴글로브〉 ‘기사’를 제시하자 무슬림에 대한 비인간화 정도가 2배 더 상승했다. 이 기사는 이 내용이 무슬림 주류의 관점임을 시사하고 있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집단과 문화권에서는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동일한 패턴을 보였다. 100)


7 불쾌한 골짜기


로봇 연구가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인체형 로봇이 점점 더 사람의 모습과 흡사해질수록 우리는 로봇에게 더 호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거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으스스한 느낌을 주면서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말했다. 모리는 이 현상을 ‘불쾌한 골짜기The uncanny valley’라고 불렀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대형 유인원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불쾌한 골짜기’일 것이다. 그들은 대형 유인원에게 매료되는 동시에 유인원들이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 즉 타락한 인간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인 양 난폭한 성욕을 지니고 파괴를 즐기는 기괴한 존재로 기술했다. 사람을 유인원이나 원숭이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비인간화 방식이다. 대형 유인원은 쥐나 돼지나 개 같은 다른 동물과 달리, 불편함과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골짜기’의 범주에 딱 들어맞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4-5) 


유럽의 과학자들은 애초부터 잘못 구성한 진화의 사다리에서 대형 유인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인을 최상단에 놓은 그들에게 사람과 대형 유인원이 현저하게 닮았다는 사실은 린네와 다윈의 주장대로 사람과 유인원을 같은 ‘호모’ 속으로 묶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귀결이라는 뜻이었다. 계급 구분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용인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사람과 대형 유인원의 관계를 좀 더 받아들이기 쉽도록 19세기 인류학자들은 이 사다리에 또 하나의 가로장을 끼워 넣었다. 유인원이 사람과 동물의 중간 단계였다면, 흑인은 백인과 유인원의 중간 단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과 상류층 지식인들의 도덕적 딜레마까지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었다. 삶과 자유, 행복을 누릴 권리가 만인에게 적용되는 천부인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흑인으로부터는 이 권리를 박탈하려는, 도덕적으로 모순을 정당화하는 데 유인원 비유만 한 처방이 없었던 것이다. 105-6)


심리학자 필립 고프Philip Goff가 “태도와 불평등의 부조화”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이른바 인종차별주의 이후 시대에서 살아가는 인종적 소수 집단은 여전히 고용, 교육, 주택, 소득, 건강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불평등을 겪고 있다. 이런 부조화를 학자들은 전통적 편견(제노사이드로 발전할 수 있는 유형의 편견)이 신종 편견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적 형태의 인종 편견’을 더 현대적 형태의 편견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학자들 간에 일치되는 의견”이다. 현재의 인종차별은 ‘교묘하고’ ‘산발적으로 퍼져 있으며’ ‘경로의존적’인 성격을 띤다. 현재의 인종차별은 인종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견이 신념화된, ‘상징적’ 혹은 ‘일차원적’ 인종차별, 다른 인종 집단과 접촉을 피함으로써 혐오를 실행하는 형태의 ‘기피적’ 인종차별, ‘암묵적’ 인종차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처럼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출범한 학문이 사회심리학이었다. 108-9)


# 현재의 인종 차별의 세 가지 중심 요인 : 편견, 순응 욕구, 권위에 대한 복종


8 지고한 자유


대안우파를 느슨하게 정의하자면, 주류 보수주의를 거부하는 극우 이데올로기 추종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지배 성향'이나 '우파 권위주의 성향'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다.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적자생존’이라는 통념을 신봉한다. 그들은 “사회에는 다른 집단들보다 열등한 집단이 있다”고 믿으며 “이상적 사회라면 일부 집단이 상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집단들이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 둘 다 타인 혹은 타 집단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극도의 편협함을 보이지만 두 집단의 이념은 상당히 다르다.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외부자를 위협으로 인식하지만,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외부자를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권위에 순응하지만,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주도권을 갖기를 원한다. 126)


# 사회지배 성향Social Dominance Orientation·SDO. 사회 체제 내 위계질서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와 낮은 지위 집단에 대한 지배 성향를 나타내는 척도다.


# 우파 권위주의 성향Right Wing Authoritarianism·RWA. 천성적으로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정도, 사고와 행동의 순응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다.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연구 결과는 교육이 그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애슐리 자디나가 설문조사에 참여한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수감과 사형 집행에서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이미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던 사람들은 흑인을 더 비인간화하게 되고 흑인에 대한 징벌 정책을 더 지지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앎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이미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문화 감수성 훈련이 본래 자리잡고 있던 불관용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128-9)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에 국한해서 보자면 시민담론의 부재, 편의주의적 선거구 개편 문제, 초당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호한 의회 규칙(예를 들면 하스터트 규칙), 유권자 통제, 규제 없는 사적 정치자금 모금을 통한 선거 비리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이제 병이 무엇인지 알아냈으니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비인간화 백신이 실로 존재하며, 그 백신이 실로 효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131-2)


# 하스터트 규칙. 공화당 의원 과반수의 동의가 없으면 법안을 표결에 붙이지 않도록 하는 공화당 지도부의 불문율이다.


# 유권자 통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특정 인구 집단 유권자들의 투표를 좌절시키거나 막는 전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교전 중인 국경 지대와 이웃한 민족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장기간의 분쟁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다른 집단 간의 접촉이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음식을 같은 방식으로 먹는 이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 안에서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학자들은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접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갈등을 완화하는 최상의 방법은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불안이 낮은 상황에서 여러 집단이 함께할 수 있다면 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 불안을 감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키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위협받는다는 느낌이 우리 뇌에서 마음이론 신경망의 활동을 꺼버린다면, 위협 없는 접촉은 이 스위치를 다시 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132-3)


어떤 외부 집단에 대해서 인간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말하는 정도만으로도 그 사람들과 접하거나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따라서 가상의 인물을 만나는 경험으로 사고가 변하는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제 폐지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르완다에서는 텔레비전 연속극 하나가 대학살 이후 종족 간에 굳어진 편견과 갈등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야기는 첨단기술이 아닐뿐더러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외집단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을 향한 공감을 향상시키는 효과적 방법으로 입증되어왔다. 무엇보다도, 가장 배타적인 사람들이 접촉의 효과를 가장 크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Gordon Hodson은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동성애자, 흑인 재소자, 이민자, 노숙자,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고정관념에 의해 차별받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크게 영향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34-5)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증오에 대해 명쾌한 예측을 제시한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외집단을 비인간화할 때, 즉 외집단 구성원을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말하는 것이 이를 듣는 상대방에게 최악의 폭력 행위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또한 사람을 동물이나 기계에 비유하거나, ‘쓰레기’ ‘기생충’ ‘체액’ ‘오물’ 등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형태의 증오언설이라고 본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언어를 제재하는 강력한 문화적 규범을 조성할 수 있다. 텔레비전, 신문 같은 언론 매체나 사회적 소통 매체에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인간 이하로 말한다면 우리 내부에서부터 경보기를 울려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절대로 증오언설을 표준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잠바티스타 바실레Giambattista Basile가 썼듯이, “뼈 없는 혀가 척추를 부러뜨리는 법”이다. 142)


9 단짝 친구들


동물에게 친절한 태도가 정말로 타인에 대한 친절함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학자들은 사람과 동물을 연관시키는 개념에는 꾸준히 저항해왔다. 그것은 우리 종이 특별하고 동물들과 다르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15개 항목 가운데에는 편견과 비인간화의 가장 주요한 동력이 무엇인지를 묻는 항목도 있었다. 다수는 무지, 닫힌 마음, 매스미디어, 부모의 영향, 문화적 차이를 원인으로 돌렸다. 반면에 동물에 대한 시각은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과 크리스토프 돈트Kristof Dhont는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람 중에서도 우월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높게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사람을 동물과 다르다고 여기는 태도나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민자나 흑인이나 소수 민족 등 사람 외집단을 동물로 비유하는 비인간화에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49-50)


개에게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다른 사랑만 못하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등한 사상이다. 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가 될지 예상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석기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이던 시기에 그들은 송곳니 매서운 육식동물에서 개로 진화했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충분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 오레오와 나눈 우정과 사랑으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1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세와 타협 -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1
김경태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1부 전쟁 전야 


1. 임진왜란과 사람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투 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일본 장악으로 이끈 힘 중 하나였다. 또한 히데요시는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교섭으로 전환하는 속도도 빨랐다." "'일본 통일'을 완수한 히데요시는 일본의 생산 체제를 새로운 기준으로 편성하였다. 동일한 기준 척도를 사용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각 토지의 생산량을 확정하는 동시에, 해당 토지를 경작할 사람도 정하였다. 토지 경작자인 농민층은 토지 소유자인 다이묘에게 직속되었고, 따라서 그 사이에 있던 중간층의 수탈을 배제되었다. 배제된 중간층은 농민이 되거나 다이묘에 속하는 무사가 되어야 했다. 다이묘는 히데요시가 명령하면 확정된 생산량에 따라 군사를 동원해야만 했다. 히데요시가 생산 체제를 급격히 재편한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단기간에 대규모의 침략군을 편성하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은 그의 의도에 따라 침략 체제의 길을 착실히 밟아 가고 있었다."(18-20)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의 해결은 선조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명나라의 법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이던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고려 말에 명으로 도망친 윤이와 이초의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이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명에서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루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수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1588년 유홍이 개정된 『대명회전』 한 질을 가지고 오면서 최종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선조는 신하들의 요청으로 '정륜입극 성덕홍렬正倫立極 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200년간 각고의 노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윤리를 바로 세운 커다란 공'을 다름 아닌 선조가 세운 것이다." "후대에 선조가 재위한 시기를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칭송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선조의 시기는 티끌 하나 없는 융성한 시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22-4)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였던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에게는 '태업한 황제'라는 오명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른 별명이 있다. 바로 '고려 황제'다. 황제의 업무를 거부하던 신종이 유독 열성을 다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조선은 명의 구원병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신종을 칭송하였고, 신종은 자신의 언행에 열렬히 반응해주는 조선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선물을 내려 주었다. 국내의 정치는 상관하지 않고 조선의 일에 팔을 걷고 나서는 신종을 두고, 중국인들은 '고려 황제'라며 비꼬았다. 신종은 선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유능한 스승들을 만나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는 점과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흔들림 없이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강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조가 신하들 사이의 정치 분쟁에 개입하면서 자신에게 권위가 집중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한 반면, 신종은 정치를 외면해 버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27-8)


2. 전쟁 전 세 나라는 어떤 관계였을까 


"본래 조선인이 외국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라의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사절만이 외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그리고 '익숙한' 외국은 명이었다." "사행원들은 정해진 길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 후에도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신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었다. 대개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를 명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북경의 지정된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명 황제의 조회에 참석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명 황제의 회답을 받아 돌아가는 임무 외에 개인적인 행동은 허가되지 않았다." "한편 명에서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조선의 사절과 같이 정기적인 형태는 아니었으며 규모도 크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책봉이나 명나라의 중요한 일을 전하기 위한 사절들이 조선을 방문하곤 했다. 그렇다면 명나라 사람들은 실제의 조선을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조선 사람이든 명나라 사람이든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을 보고자 했다는 사실이다."(31-4)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587년에 쓰시마對馬의 소씨宗氏에게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으로 항복하러 오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의 한 면을 보여 준다. 그는 조선이 쓰시마 옆의 어느 지역 정도이며 자신의 명령에 쉽게 따를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인식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1590년 조선 국왕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이다. 그중에서 자신이 명을 침략할 예정이니 그때가 되면 협조하라는 대목에 주목해 보자. 이는 조선과 명이 맺고 있던 관계, 곧 '명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거나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전쟁이 시작된 후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들은 조선이 매우 넓고, 조선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며,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해적'이라고 여기며 도망치거나 공격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세 나라 모두 자신이 인식하고자 하는 모습으로만 남을 인식하고 있었다."(35-9)


3. 침략의 서막 


"1590년, 조선에서는 통신사행단을 구성하였다. 정사正使에 황윤길, 부사副使에 김성일, 서장관書狀官에 허성이 임명되었다. 이들이 들고 간 조선 국왕의 국서는 '일본 국왕'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앞으로 신뢰 관계를 맺어 우호를 유지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이때 오다와라 지역의 호조씨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한 상태였다. 다른 나라의 사신을 불러 놓고 자리를 뜬 데다가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한 행위, 그 자체가 외교 관계에서 있어서는 안 될 무례한 행위였다. 물론 히데요시는 통신사 일행을 항복 사절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러한 행위를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은 히데요시가 내놓은 답서에서 〈나의 소원은 세 나라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라는 부분은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일면을 보여준다. 히데요시의 야망은 그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이제 조선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 되었다."(42-4)


2부 전쟁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1. 벽에 부딪힌 전쟁, 협상의 시작 


"일본군의 요구는 표면적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구한 대로 길만 비켜 주면 일본군은 조선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 조용히 명으로 향했을까? 국왕을 데리고 여기를 피하라는 요구는 히데요시의 말과 같이 조선에서 통치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따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초부터 히데요시는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나라로 보고 협조를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고 할지라도 조선이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 온 나라인 명을 '배반'하고 일본에 협조할 리가 없었다. 이덕형을 답을 듣고 저들은 〈명 침략에 협조해 달라〉는 명분은 물론 〈명 침략을 위한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일본에서 교섭을 전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쓰시마 측 인물들은 이후 더 이상 조선에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후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서 보낸 교섭자 심유경과의 대화에서 전혀 다른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58-9)


"명은 복잡한 관료 체계와 지방 조직을 갖춘 큰 나라였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파견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따라서 그 전에 조선이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하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이 목적으로 선발되어 조선으로 왔으며 이후의 강화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심유경이다." "1592년 8월 17일에 의주에서 선조와 만난 후 곧장 평양성으로 향한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만나 50일간의 휴전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편지도 하나 얻어냈는데 다만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원할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앞서 조선과의 교섭에서는 명을 침략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명과 교섭하는 자리에서 명을 침략하겠다는 말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것이다. 교섭 상대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제시한 후 유리한 지점을 찾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68-9)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심유경을 붙잡은 채로 12월 25일 의주에 들어왔고, 평양성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은 휴전 기간 동안 안심하며 심유경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의 대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명군은 심유경의 이름을 사칭하여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불러내어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성 전투가 재개되었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셌다. 현재 전해지는 〈평양성탈환도平壤城奪還圖〉 등에도 나타나 있듯이 일본군은 성벽에 빼곡히 늘어서서 창을 들이밀거나 조총을 쏴대어 명군과 조선군이 접근하기 어렵게 하였다. 성안에는 여러 겹의 방어 구역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나 명군은 이전의 패배를 통해 배운 점이 있었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 대포 등의 무기를 준비해 온 것이다. 병력도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한성으로 모여들었다. 1593년 1월의 일이었다."(71)


2. 협상의 조건, 허세와 타협 


"원래 히데요시가 조선에 직접 건너와 일본군을 지휘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으로 오지 않았고, 모친의 사망 등으로 나고야를 떠나 있는 기간이 생기면서 조선 현지 사정의 전달과 명령의 하달 사이에 시간차가 크게 발생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히데요시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1593년 1월 23일에 일본군은 명군에 밀려 한성으로 후퇴했다는 사실과 군량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히데요시가 이 서신을 받은 것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4월 12일에 구체적인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한성에서 퇴각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진주성을 남김없이 섬멸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빠졌음을 깨달은 이후 히데요시의 전략적 전환은 매우 빨랐다."(83-5)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 강화 조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①명나라와 일본의 혼인, ②무역 재개, ③화친 서약, ④조선 4도의 할양, ⑤조선 왕자와 신하를 인질로 요구, ⑥조선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의 송환, ⑦조선의 서약서 작성이다." "교섭이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릴 수는 없었다. 타협 지점을 찾아야 했고, 마지막으로 히데요시는 본심을 내비쳤다. 히데요시는 사실 영토나 보물과 같은 실물을 요구하지 않겠으며, 무엇보다 명예가 중요하니 영토를 줄 수 없다면 이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달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그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입장에서 손에 쥔 것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였다. 협박과 허세, 회유와 설득을 함께 사용하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한 것은 혼례(인질=명예)와 영토(실물)였고, 그중에서 좀 더 중요시한 것은 명예였다. 협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히데요시는 매우 현실적인 교섭가였다. 그는 시세의 변화에 대한 적응이 매우 빨랐다."(86, 95-6)


"1593년 6월 말, 부산에 머물러 있던 심유경이 한성으로 출발하였다. 당초에 '히데요시의 7개 조건'을 최초로 전달받은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상의하여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혼례와 조선 영토 할양은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고안한 방법은, 고니시 조안 등 '일본 사신' 일행을 명나라 조정에 보내 사죄의 뜻을 표하고 명나라의 고위 관료를 일본으로 파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칙사의 화려한 행렬이 교토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하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히데요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1593년 8월 이후, 명군은 무장 유정을 지휘관으로 하는 일부 병력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일본군도 울산에서 거제, 김해 지역에 이르는 일부 지역을 지킬 병력만 두고 나머지는 철수하였다. 전쟁이 강화 교섭기로 접어들었다."(101-2)


3. 조선과 명, 명과 명, 일본과 일본의 갈등 


"조선이 판단하기에 명군 지휘부는 교섭을 추진하는 절차를 지키지 않을 뿐더러 교섭의 내용도 거짓투성이였다. '히데요시는 명 침략의 야욕을 가졌던 자이며 지금도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은데 그가 책봉과 조공을 바란다니 이는 심유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결국 교섭은 파탄이 나고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이 강화 교섭 자체에 반대하고 전쟁만을 우선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 명군 지휘부의 강화 교섭 방식을 불신한 것이었다. 게다가 강화 교섭이 진행되면서 송응창의 조선 비난과 권한 남용이 심해지자 조선의 저항감이 높아져 갔다. 이대로 명군 지휘부에 끌려다니다가는 후일 교섭이 파탄 나고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명나라가 더 이상 조선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1594년 2월, 마침내 조선 사신 김수가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성곽을 늘리고 있으며 도발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명을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 등을 보고하였다."(108-9)


"1595년 5월 22일, 히데요시는 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명·조선과 일본의 화평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조건은 조선의 왕자다. 그런데 영토에 대한 규정이 여전히 흥미롭다. 조선의 8개 도 중에서 일본이 4개 도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명과 조선은 인정하지 않았던 전제조건이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전제를 근거로 조선의 왕자가 인질로 온다면 그의 영지로 내리는 형식을 취하여 '일본이 가지고 있는' 4개 도를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명과 조선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심유경이 조선의 왕자(인질)를 데리고 웅천 왜성에 온다면 일본이 만든 왜성 중 10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칙사, 즉 명나라 사신에 대한 부분이다. 명나라에서 파견한 사절의 행렬이 자신에게 오는 장면이 실현된다면 '명나라가 사죄를 하였다'라며 선전할 수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양보'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히데요시의 양보가 조선의 입장에서는 전혀 양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124-7)


3부 협상 결렬, 다시 시작된 전쟁 


1. 1596년 9월, 오사카에서 벌어진 일 


"마침내 9월 1일 책봉사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났고 대화를 나누었다. 9월 3일 책봉 의례가 행해졌다. 히데요시는 기쁘게 책봉을 받았고 이로써 '일본 국왕'이 되었다. 강화 교섭에 공로를 세운 이들도 함께 명나라의 관직과 그에 상응하는 관복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의 통신사에 대해서는 전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책봉 의례가 끝난 후 며칠 동안 심유경이 직접 히데요시와 만나 이야기하고 서신도 전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히데요시는 〈명은 자신을 책봉해 주었으니 적대시하지 않겠으나 조선은 무례하니 화친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책봉사와 통신사에게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조선을 다시 침략할 의지를 밝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하였으나 공통된 부분은 〈명과는 적대하지 않겠다〉, 〈조선은 무례하니 다시 침략하겠다〉였고, '무례'의 근거는 〈명과 일본의 교류를 방해〉했으며 〈통신사가 늦게 옴〉 그리고 〈왕자가 오지 않았다〉였다."(136-8)


"히데요시는 왕자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책봉사와 통신사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책봉사의 책임자였던 이종성이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통신사가 책봉사보다 늦게 온 데다가 관직이 높지 않은 자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책봉 의례를 마친 후, 그는 책봉사 일행과 담판을 하여 조선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약속을 받고자 하였다. 그는 명나라를 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은 이미 책봉사를 보냈기에 더 이상 받아 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조선에 집중하였다. 책봉사는 그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명나라가 종주국이 되어 책봉까지 해주었는데 무엇을 더 바란다는 것인가. 같은 국왕의 나라인 조선과 '화해'하고 전쟁을 끝내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쟁 위협을 가해서 혹은 정말로 다시 전쟁을 일으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했다. 교섭 결렬 선언 후 히데요시의 요구는 단순해졌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140-1)


2. 새로운 전쟁과 협상의 재개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 여러 부분에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1597년 2월 21일 일본군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서에서 그 일면을 살펴보자. 총 21개 항목 중에서 열일곱 번째는 〈전라도는 철저히 공략하고 충청도와 그 외의 지역은 가능한 만큼만 공격할 것〉, 열아홉 번째는 〈군사 행동이 끝난 후에는 성을 지을 장소를 논의하고 다수결로 성을 지킬 장수를 정한 뒤, 일본으로 돌아오기로 결정된 장수들이 성을 쌓을 것〉이다. 이는 곧 이 전쟁이 명나라를 침략하거나 조선 전역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일본군은 실제로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북상하여 전투를 치른 후 남하하여 남해안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백성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고 가거나, 코와 귀를 베어 가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 전쟁은 영토를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었기에 조선인 납치를 허락하거나 코와 귀를 증거로 포상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147-51)


3. 전쟁의 종결 - 전쟁과 평화, 전투와 강화 교섭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공식적인 철수 명령은 그의 사후 당분간 히데요리를 보좌하여 공동으로 정권을 담당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다이로大老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고민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은 무조건 철수해야 했다. 전쟁의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 전쟁을 일으킨 자도 죽었다. 일본군을 최대한 안전하게 귀국시킨 후, 하루라도 빨리 일본을 안정시켜야 했다." "일본 측은 조선에 왕자는커녕 자그마한 공물을 요구할 상황도 아니었다. 몸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일본군의 교섭은 오직 무사 철수를 목표로 할 뿐이었다. 이는 일본군과 대치 상태에 있으면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명군의 이해 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한편 진린은 이순신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었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수군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수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160-3, 166)


"〈이슬로 왔다가 이슬로 사라지는 삶인가. 나니와(오사카)의 영광은 꿈속의 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남긴 시다. 오로지 서정적이고 몽환적이기만 하다. 이 시처럼 히데요시는 자신의 영광스럽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자식에 대한 걱정만을 지닌 채 영원한 잠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의 행위가 가져온 참혹한 전쟁을 기억해야만 한다. 명의 황제 신종 만력제는 1620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황제는 여전히 국내 정치 문제의 해결에 관심이 없었다. 후계 구도에 대해서도 손을 놓았다. 신종 만력제의 사후 명나라는 약 24년을 더 지탱하다 멸망하고 말았다. 선조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왕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다. 신하들의 경쟁 구도를 교묘히 이용하여 정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고, 광해군 책봉 문제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오히려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왕권은 약해지지 않았다."(167-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전 정권의 전쟁을 반성하며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명당 유정이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 이에야스의 의도를 알기 위해 일본까지 파견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오랜 교섭 끝에 조건을 정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국왕으로 일본을 장악하고 있으며 국교를 요청한다는 국서를 보낼 것, 그리고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범릉적犯陵賊)을 잡아 보내라는 것이었다. 국서는 이에야스가 정권의 담당자로서 공식적으로 국교를 요청한다는 증명이었고, 범릉적의 송환은 조선에 행한 범죄를 반성하라는 요구였다. 절차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의 조건이었다. 조건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었다. 이후 국서는 수정 과정을 거쳐야 했고, 범릉적은 진범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은 국서를 받아들이고 범릉적을 처형함으로써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1607년 조선에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는 에도 막부가 멸망하기까지 250여 년이나 이어졌다."(17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이전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수도 모스크바와 50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나토 회원국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 여부는 자신들이 선택할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 나라 일부로 여깁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도 하지 않고 ‘특수 군사 작전’을 펼친 거라고 주장합니다. 형제 또는 러시아 일부로 여기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번 침공도 ‘버릇없는 동생’을 벌주려는 것이지 타국을 침공한 전쟁이 아니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금지하고 새로운 나토 회원국에 배치한 군대와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2014년에 체결한 민스크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면 거부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도 나토 가입 의사를 철회하지 않아서 결국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14)


민스크협정은 벨라루스 수도인 민스크에서 돈바스Donbass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러시아 분리주의 집단 간에 맺은 국제 협정이에요.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에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죠. 우크라이나에서 분리하고 싶다는 겁니다. 돈바스 지역엔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데 정부 정책에서 자신들이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거예요.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이들을 진압하죠. 한동안 두 세력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민스크협정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의 자치권을 인정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협정 내용 중 핵심이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애초에 민스크협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면 전쟁까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지적입니다. 미국은 이보다 더 큰 비판을 받고 있죠. 전쟁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15)


2장.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올까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 체제도 무너집니다.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 결과물이 1993년에 맺은 ‘오슬로 협정’인데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주권 국가로 독립해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이른바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죠. 협상 장소가 노르웨이 오슬로여서 오슬로 협정으로 부르게 되었죠. 14차례 비밀 협상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건국을 했고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영토도 더 확장했기 때문에 오슬로 협정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허용하고 가자 지구 등 점령지도 돌려주라는 것이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더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하지 말고요. 2국가 해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돌려줘야 합니다. 25)


오슬로 협정으로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마침내 수립되었고,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일부 지역에서 철수합니다. 아라파트 의장이 자치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죠.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모두 축출하려는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1996년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죠. 팔레스타인도 2006년 총선에서 강경파 하마스가 압승합니다. 하마스 역시 근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모두 축출하고 싶어 합니다. 강 대 강이 맞서니, 합의는 힘을 잃고 분쟁만 살아남았습니다. 2국가 해법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이 원하는 국경선과는 일치하지 않아 국경선 설정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은 1947년 유엔의 분할안대로 국경선이 정해지길 바라지만, 이스라엘은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국경선이 바뀔 때마다 그 안쪽에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늘리는 속칭 알박기를 하고 있습니다. 26-7)


이스라엘 사회가 우경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구성의 변화에 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건국 초에는 유럽 중동부 출신의 유대인 즉 아슈케나지Ashkenazi가 많았습니다. 아슈케나즈는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하니, 아슈케나즈 유대인은 ‘독일 유대인’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금융, 무역업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유대인 즉, 세파르디Sephardi가 대거 들어왔습니다. 세파르디는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뜻하는 ‘세파라드’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세파르디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을 말하죠.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류층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삶의 기반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와 겹쳤죠.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이들은 진보 세력의 점령지 반환 정책에 반대합니다. 여기에 1991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계 유대인 70만 명까지 유입되면서 극우 세력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이죠. 29-30)


3장.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무관심해졌을까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른 최초의 서구 열강은 영국입니다. 3차례나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끝내 지배하지 못합니다. 2차 대전 이후 아프가니스탄 왕국(1926~1973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왕국)은 중립을 표방합니다. 서구 근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부동항을 포기하지 못한 소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조용히 실리를 추구해 나간 거죠. 아프가니스탄은 한동안 평화롭게 근대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덜 방법으로 소련과 군사적으로 깊게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맙니다. 소련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며 세력을 형성한 것이죠. 이들의 반대편에는 부족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이란 종교를 중심으로 뭉쳤고 서구화는 물론이고 소련식 공산주의에도 반발했습니다. 그 결과 소련의 영향을 받은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반정부 세력이 대립하게 됩니다. 33)


1978년 좌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뒤를 이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죠. 부족들은 반발했고, 급기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Mujahideen,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이라는 반정부군이 조직됩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서막이었죠. 소련은 정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갑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납니다. 소련은 긴장합니다. 소련의 남부 지역인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이슬람권 공화국들에서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까 봐 겁을 먹은 거죠. 곧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무려 10년이나 이어집니다. 막대한 군사비에 소련 경제가 휘청입니다. 소련 붕괴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죠. 결국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곰의 덫The Bear Trap이라며 철수합니다. 그리고 1992년 4월, 탈레반 정부가 들어서죠. 33-4)


2001년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알카에다를 보호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죠. 두 달 만에 성공합니다. 탈레반이 쫓겨난 자리에 친미 정부를 세웁니다. 처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때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국을 공격한 이들을 처단한다는 것에 세계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미국은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내죠. 바로 북한을 필두로 몇몇 나라를 ‘악의 축’이라며 새로운 적으로 삼은 겁니다.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과 악의 축 국가들은 세계 질서를 위협하니 세계 평화를 위해 앞으로도 이들에게 맞서겠다고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탈레반이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계획이 틀어집니다. 결국 미국은 2021년 8월 도망치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합니다. 그러자 친미 정부의 대통령(아슈라프 가니)도 곧 탈레반에 항복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달아납니다. 20년 만에 탈레반은 정권을 되찾죠. 35)


4장. 대만은 왜 국기가 없을까 : 중국 —대만의 갈등


중국은 대만을 전쟁에 패한 장제스가 세운 괴뢰정부로, 대만은 중국을 쿠데타를 일으킨 공산당 세력으로 봅니다. 상대를 무력 통일의 대상으로 여기죠. 우려는 현실이 됩니다. 1954년 대만 해협의 진먼섬에서 중국과 대만이 무력 충돌을 했기 때문이죠. 진먼섬은 대만보다 중국에 더 가깝지만, 대만이 점령한 곳이었어요. 대만으로서는 최전선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곳에 군대를 많이 파견했습니다. 이를 중국은 좌시하지 않았고요. 1955년 미국이 개입해 휴전 상태로 접어듭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쓸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중국이 물러선 거죠. 이 사건으로 미국과 대만은 방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중국은 미국과 서유럽이 중동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다시 진먼섬을 공격합니다. 무려 50만 발의 포탄을 44일간 쏟아붓죠. 그 바람에 대만 해협 바닷길이 봉쇄되기까지 합니다. 극한의 대치 상황은 미국과 중국이 기습적으로 수교를 맺은 1979년에야 끝이 납니다. 42)


1970년대부터 데탕트 시대로 접어들죠. 대만은 이런 분위기가 영 마뜩잖습니다. 중국을 탈환할 날도 멀어 보이는데 자기편인 줄 알았던 미국까지 중국과 가까워졌으니 불쾌했습니다. 곧이어 이 감정은 깊은 배신감으로 변합니다. 1971년 미국이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선언했기 때문이죠. 물론 미국은 중국이 대표 국가가 되는 대신 대만은 일반 회원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완강히 반대했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대만은 화가 나서 유엔에서 탈퇴해 버립니다. 미국은 1972년 중국이 주장해 온 ‘하나의 중국’ 원칙에도 동의합니다. 하나의 중국이란 중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대만이 격하게 항의하자 미국은 결국 1978년 12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합니다. 미국의 보복으로 인해 대만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 줄줄이 쫓겨나고 국제무대에서도 지워집니다. 43-4)


2025년 3월 현재까지 대만은 친미 성향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입니다. 차이잉원 전 총통은 2021년 10월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파장을 일으켰죠. 비공식적이었던 내용을 당국자가 처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대만은 중국의 영토니,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대만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연설에서 중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되 무력 사용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무력 행사 대상은 중국 통일에 간섭하는 ‘외부 세력’과 ‘일부 독립 세력’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한마디로 미국에 내정 간섭을 그만두라고 경고한 거죠. 하지만 미국은 시진핑이 계속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고, 그 경우 대만은 무력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중국을 계속 자극하고 있습니다. 47-8)


5장. 중국군과 인도군은 왜 몸싸움을 벌였을까 : 중국—인도 분쟁


중국과 인도가 국경선을 놓고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한 건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하면서입니다. 유엔이 한국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마오쩌둥은 티베트를 기습해 손쉽게 점령해 버립니다. 건국 1년 만에 중국은 왜 서둘러 이런 전쟁을 벌였을까요? 윈난성·쓰촨성과 접한 티베트 지역이 혹시라도 인도 쪽으로 돌아서면 북서부의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죠. 티베트는 중국 영토의 8분의 1에 해당할 만큼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 조공을 바치던 나라니 자국 땅이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죠.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당하자 티베트 불교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추종자들은 1959년 인도로 망명합니다. 인도가 망명 정부를 받아들이자 중국은 분노합니다. 인도가 미국이나 영국 등 서유럽과 연대해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티베트 망명 정부를 허락한 이후로 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집니다. 그리고 1959년 가을부터 국경선을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죠. 55-6)


1962년에 두 나라는 크게 부딪칩니다. 중국이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 근거해 인도 북서부 라다크 지역(악사이 친)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지역을 자기네 땅으로 편입하려고 했거든요. 티베트는 오랫동안 청나라 지배를 받다 1914년에 독립합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였죠. 독립 당시 인도를 실제로 지배했던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그은 국경선이 맥마흔 라인입니다. 1962년 전쟁 이후에도 두 나라의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대표적인 두 분쟁 지역을 하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참고 있는 중이죠. 인도는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갖고, 중국은 악사이 친을 갖는 식이었죠. 1996년에서야 두 나라는 가까스로 협정을 맺고 두 지역에 실질 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이라는 완충 지대를 설정했습니다. 실질 통제선은 국제법에 따르면, 확정된 국경선은 아닙니다. 양측이 군대를 배치하고 있으니 순찰 중 언제든지 무력 충돌로 확장될 위험이 있죠. 56-7)


중국은 1960년대만 해도 점령한 악사이 친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지금은 이 지역에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대규모로 투자한 결과 이제는 신장·위구르를 활용해 파키스탄이나 중동과 교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객관적으로 보면 인도가 약간 불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 역시 조급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갈등을 국내 정치에 활용합니다. 외부의 적, 그중에서도 중국처럼 큰 적이 존재하면 내부를 결집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죠. 물론 중국도 인도와의 국경 분쟁을 국내 정치에 잘 활용합니다. 특히 민족주의가 통치 전략인 시진핑에게 국경 분쟁만큼 애국심을 고취하기 좋은 소재는 없으니까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지율만 떨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방법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59-60)


6장. 이웃과 왜 싸우게 되었을까 : 인도 —파키스탄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 지역은 카슈미르 계곡을 중심으로 히말라야산맥과 피르 판잘Pir Panjal 산맥 사이에 위치한 고산 지대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상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히말라야산맥을 비롯해서 관광 자원이 아주 많은 곳이죠. 무굴제국 때부터 유명한 관광지였습니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땅도 비옥해 벼농사뿐 아니라 농작물 재배도 잘되는 데다 루비 등의 지하자원도 풍부하죠. 직조업도 발달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캐시미어의 본고장이기도 합니다. 16~19세기 중반까지는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무굴제국의 땅이었죠. 무굴제국이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인도제국이 되었고요. 이후 인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무슬림)가 극심하게 갈등합니다. 그 결과 힌두교는 인도, 이슬람교는 파키스탄이란 국가로 나뉩니다. 카슈미르 지역도 인도 땅과 파키스탄 땅으로 나뉘고요. 훗날 인도령 일부인 악사이 친을 중국이 차지하면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나뉩니다. 64)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부각해 두 종교인들 간에 적대감을 품게 했고 이런 감정은 독립한 이후에도 사람들을 지배했죠.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이런 감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국은 분할 통치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약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힌두교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켰죠. 영국은 힌두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 세력도 동시에 지원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은 인도를 떠나기로 했고 인도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갈등합니다. 간디는 “분단은 곧 인도를 생체로 해부하는 것”이라며 통일된 인도를 간절히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대표가 만나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거죠. 이를 지켜보던 영국은 제 마음대로 1947년 8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인도를 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3국으로 분할해 버립니다. 65)


특히 벵골주와 펀자브주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습니다. 벵골주 서쪽과 펀자브주 동쪽은 인도, 그 반대편은 파키스탄이 되었으니까요. 이 중 펀자브주 국경 분쟁은 인접한 카슈미르 지역으로 확산됩니다.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카슈미르 지역의 대부분 주민은 이슬람교도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들 땅이 무슬림이 많은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카슈미르의 지배층은 힌두교도였습니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대다수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인도에 편입해 버립니다. 파키스탄은 반발했고, 이 문제로 1948년 인도와 전쟁을 벌입니다. 1949년 유엔의 중재로 전쟁이 중단되었고,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잠무 카슈미르Jammu and Kashmir와 라다크Ladakh 지역)과 파키스탄령(아자드 카슈미르Azad Kashmir와 길기트‒발티스탄Gilgit-Baltistan 지역)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더 커지죠. 인도령을 침공해 악사이 친 지역을 점령해 버렸거든요. 66-7)


서벵골은 인도, 동벵골은 파키스탄 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동벵골 지방의 무슬림들이 동파키스탄을 세우긴 했지만, 정치적 실권은 모두 서파키스탄(오늘날의 파키스탄)이 장악했습니다. 1970년 태풍 피해로 동파키스탄 국토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50만여 명이 사망하자 동파키스탄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것은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정부군이 이들을 탄압하자 많은 동파키스탄인이 인도로 넘어갑니다. 당시 인도는 이 난민들을 받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죠. 동파키스탄 정부와 인도 사이에 전쟁이 터집니다. 인도가 승리해 동파키스탄은 인도가 바라던 대로 1971년 2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독립합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도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계속 충돌합니다. 1999년에는 카르길Kargil 분쟁도 일어나죠. 두 나라는 2004년부터 평화의 길을 모색합니다. 잦은 전쟁과 무력 대치로 인해 서로 경제적인 타격만 입기 때문이죠. 67-8)


7장. 왜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울 수 없었을까 : 튀르키예—쿠르드 분쟁


쿠르드족은 ‘국가 없는 최대 단일 민족’, ‘중동의 집시’로 불립니다. 튀르키예·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3천만여 명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채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중동에서 아랍인, 이란인, 튀르키예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민족임은 분명하죠. 이 중 절반이 튀르키예에 삽니다. 쿠르드족은 인종, 역사적으로 이란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란계 산악 민족이죠. 그래서 이란과 접경 지역인 튀르키예 동부에 많이 거주합니다. 이곳을 주 투쟁 근거지로 삼고요. 역사에 처음 등장한 쿠르드족은 12세기에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Saradin 이집트 술탄입니다.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해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에 대제국을 건설했죠. 1250년 아이유브 왕조가 망한 이후 쿠르드족은 셀주크제국과 그 후 들어선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쿠르드족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자치 지역이나 국가를 원하는 겁니다. 거주하는 국가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죠. 77-8)


1880년대 오스만제국 내 쿠르드 족장 셰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eydullah는 당시 이란(카자르 왕조)이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틈을 타 이란 서부의 쿠르드족을 규합해 들고일어납니다. 초반에는 이기다가 결국 오스만제국과 이란 연합군에 패합니다. 그럼에도 우베이둘라의 봉기는 이후 쿠르드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죠.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독립을 다시 염원합니다.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제국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보면,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주기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23년에 로잔 조약을 다시 체결합니다. 이 조약에서는 쿠르드족 얘기가 아예 빠지죠. 이렇게 된 것은 영국 탓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땅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땅을 영국령으로 편입해 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연합국은 오스만제국이 해체된 후 쿠르드족이 세운 국가를 무효화해 버립니다. 78-9)


소련도 쿠르드족을 이용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이란 북부를 점령하고 쿠르드족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1946년 1월 22일~1947년 3월 31일)을 세웁니다. 소련은 이란과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잠시 도운 척했을 뿐이죠. 마하바드 공화국은 불과 1년여 뒤 소련이 이란과 협정을 맺고 철수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1972년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돕겠다는 이란과 미국의 약속을 믿고 이라크와 3년 동안 싸웁니다. 이 전쟁 역시 미국과 이란에 이용당한 경우입니다. 당시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친미 정부였고, 이라크와 국경 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을 이용한 것이죠.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부터 이란과 전쟁 중이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울 것을 염려해 1988년 안팔(Anfal, ‘성스러운 전쟁의 전리품’이란 뜻)이라는 비밀 작전을 펼칩니다.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학살하고 마을도 파괴해 버리죠. 80)


1920년대 초기에 튀르키예는 세속주의를 내세워 쿠르드족 고유의 언어, 의복 등을 금지합니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자국의 모든 민족이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당연히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했죠. 튀르키예가 세속주의를 내세우자 쿠르드족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1978년 PKK를 조직합니다. PKK는 쿠르드족 독립을 주장하며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시위도 벌였습니다. 그로 인해 튀르키예에서 반쿠르드 감정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2013년 튀르키예와 쿠르드족은 휴전 협정을 맺지만, 이후에도 무력 충돌은 계속됩니다.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가 쿠르드족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자원이 많기 때문이에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와 인근 아랍 국가 등이 서로 그 자원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죠. 82)


8장. 시리아에서 전쟁은 끝난 걸까 : 시리아 내전


내전의 발단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다라Daraa에 사는 10대들이 학교 담벼락에 “의사 선생님, 이젠 당신 차례야”라고 쓴 사건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2007년 7월 집권한 바샤르를 말하죠. 안과 의사였거든요. 당시 중동에서는 2010년부터 튀니지를 시작으로 훗날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정권을 향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거죠. 아이들은 이번 차례는 시리아 독재자라고 썼던 겁니다. 경찰은 아이들을 체포했고, 배후를 밝히라며 혹독하게 고문합니다. 정부가 군용기, 탱크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학살하자 군대 안에서도 반감을 품는 군인이 늘어납니다. 결국 이들은 정부군에 등을 돌리고 시민군에 합류하죠. 대표적인 사람이 공군 대령 리야드 알아사드Riad al-Assad입니다. 그는 탈영병과 시위대를 모아 시리아 자유군SFA, Syria Free Army을 만듭니다. 이제 반정부군도 무장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죠. 그리고 민주화 운동은 내전으로 전환됩니다. 86-7)


그런데 내전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아랍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파 분쟁으로 번진 거지요.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으로 말입니다. 시리아는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수니파인데 집권층은 시아파였습니다. 지배받는 수니파가 지배하는 시아파에 맞서는 구도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 내전은 민주화 운동과 종교 전쟁이 섞이는 성격을 띠게 됩니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돕고, 반정부군은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합니다. 여기에 아사드의 오랜 우방국 러시아까지 가세하죠. 수니파 테러 조직인 IS가 내전을 틈타 시리아 북동부를 점령하면서 반정부군 진영에 끼어들고요. 미국은 아랍의 민주화 운동 지원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시리아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민주군SDF, Syria Democracy Force을 지원합니다. 미국이 SDF를 지원한 이유는 IS 때문입니다. 비록 IS가 시리아에선 반정부군 진영에 속해도 미국에게는 격퇴 대상이니 SDF를 이용해 물리치려고 한 것이죠. 87)


또 시리아 내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입니다. 먼저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가장 큰 이유는 쿠르드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2011년 7월부터 튀르키예는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자유군SFA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2017년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완전히 발을 뺌으로써 쿠르드족과 SDF는 궁지에 몰리죠. 튀르키예는 미국과 러시아의 묵인 아래 쿠르드족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틈만 나면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했습니다. 시리아가 헤즈볼라를 비롯한 반이스라엘 무장 조직들에게 거점을 제공하고 있었으니 반감이 늘 있었죠. 이런 데다 3차 중동 전쟁의 결과로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정부군이 승리할 경우, 이곳이 위협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이 길어지길 바랐겠죠. 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이 전부 약해지는 것을 최고의 시나리오로 생각했을 겁니다. 88)


러시아는 아사드 부자와 오래 동맹을 맺었고 이들에게 무기도 지원했습니다. 푸틴이 시리아 정부를 도운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타르투스항에 해군 기지를 두었습니다. 타르투스항은 러시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갖고 싶어 한 부동항인 데다 중동과 지중해를 넘볼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한 시리아에서 반정부군이 정권을 잡을 경우 유럽으로 가스관을 연결할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되면 러시아 ‒ 유럽의 가스 공급망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국제 사회에는 IS 격퇴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말이죠. 미국은 오바마 정부 이래 고립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약해지고 그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졌습니다. 물론 미국과 서유럽이 시리아 내전에서 한발 물러난 데에는 IS 영향도 있습니다. 반정부군을 돕는 것이 IS를 키우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89-90)


9장. 군부가 계속 집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미얀마 내전


미얀마는 인구의 70퍼센트가 버마족이고 샨족·친족·몬족·카친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3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서로 언어와 문화도 크게 달라 종족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얀마는 1824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942년부터 45년까지는 일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2차 대전에서 패한 일제가 물러난 뒤에 다시 영국이 지배했고요. 그러니까 미얀마는 거의 12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죠. 당시 미얀마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아웅산 장군은 독립 후 국가 재건을 준비하던 중에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아웅산이 주축이 돼 만든 정당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 Anti 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이 총선거에서 승리해 서구식 민주 정부가 들어서죠. 하지만 2차 대전 후 탄생한 대다수 신생 국가들처럼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하고 소수민족끼리 갈등하면서 경제 혼란까지 겪습니다. 그러다 1962년 네윈Ne Win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나긴 군부 시대로 들어섭니다. 96)


네윈 군부는 1988년까지 26년간 집권합니다. 네윈은 주요 기업과 자원을 국유화해 시민의 몫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었죠. 폐쇄적인 경제 정책 결과, 세계 경제에서 고립되고요. 당연한 귀결처럼 결국 경제는 무너지고, 지하경제와 암시장만 활성화됩니다. 독재와 경제난으로 국민의 분노는 점점 깊어졌죠. 마침내 1988년 8월 8일, ‘8888항쟁’이 일어납니다. 학생과 승려들을 주축으로 수많은 시민이 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합니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첫 민주 항쟁이었죠. 하지만 군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대를 바꿔 가며 독재를 유지했죠. 8888항쟁 당시 정부는 저항하지 않는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학살했습니다. 수천 명이 죽습니다. 군인이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항쟁 결과 네윈은 물러나지만, 군인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쥐죠. 군부는 더 악랄해집니다. 아웅산수치도 집 밖으로 못 나오게 가택연금을 해 버리죠. 수치는 20여 년 만인 2010년에야 풀려납니다. 97-8)


2007년 8월 다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샤프란 혁명’이죠. 샤프란은 승복 색인데, 이 색을 떠올릴 정도로 승려들이 주축이 된 투쟁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미얀마는 국민의 약 90퍼센트가 불교도입니다. 샤프란 혁명은 군부가 연료 판매 가격 보조금을 폐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군부가 연료의 유일한 공급자였는데, 보조금을 주지 않으면서 버스용 압축 천연가스 가격을 비롯해 가스 가격이 폭등한 것이죠.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군부도 한발 물러납니다. 2008년부터 자유선거를 실시합니다. 무늬만 자유선거지, 실제로는 부정선거였지요. 군부가 지지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이 압승합니다. 하지만 군부도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08년 새 헌법을 만들죠. 대통령 간선제, 시장경제 체제, 정당제 민주주의 등을 표방합니다. 그런데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에 자동 할당하게 돼 있어 그 외의 내용은 사실 치장에 불과했습니다. 98)


아웅산수치는 2010년 연금에서 해제되었고, 2012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합니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군부가 이를 인정하고 정권을 이양합니다. 군은 2020년 11월 총선에서도 패배하자 다시 움직입니다. 수치는 군에 유리하게 돼 있던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이 자동으로 갖게 돼 있기 때문이죠. 개헌안이 통과될 경우, 군의 영향력은 약해지겠죠. 그러자 2021년 2월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구금합니다.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더는 평화 시위가 어려워지자 시민들은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시민들은 4번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군부를 끝낼 방법은 무장 투쟁밖에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99-100)


10장.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학살자가 되었을까: 에티오피아 내전


에티오피아는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80개의 크고 작은 종족으로 이루어진 연방제 국가였죠. 각 종족은 자치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1974년 9월, 공산주의자인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제국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군부는 1987년 군정을 폐지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공화국을 선포하죠. 제1대 대통령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입니다. 그는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했습니다. 무늬만 공화국이지 멩기스투 정권의 폭정은 계속됐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이들이 반정부군을 조직해 들고일어납니다. 멩기스투 정권은 1991년에 무너집니다. 2대 대통령은 대표적인 반정부군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되었습니다. 멜레스 제나위 총리 시절엔 그가 소속된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이 집권당이었습니다. 109-10)


2019년 12월 EPRDF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인 번영당PB, Prosperity Party을 만듭니다. TPLF를 제하고 나머지 3개 정당만으로 꾸린 거죠. 왜 TPLF를 제외했을까요? 멜레스 제나위가 총리가 되면서 TPLF는 집권당이 됩니다. 이들이 정치를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멜레스 역시 독재자로 변질됩니다. TPLF는 멜레스가 2012년 사망하고 2018년 실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독재를 합니다. 결국 총리(2대 총리 하일레마리암 데살렌)가 물러났고, 2018년 번영당을 주도한 아비 아머드 알리(Abiy Ahmed Ali, 오로모족 출신)가 3대 총리가 됩니다. 아비 총리는 TPLF를 배제했습니다. 그러자 TPLF가 들고일어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죠. 아비 총리는 국경을 두고 오랫동안 분쟁해 온 에리트레아를 설득해 평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지요. 하지만 TPLF 본거지인 티그라이주는 이 협상에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자기들 땅이었던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로 넘겨주었기 때문이죠. 110-11)


정부와 TPLF 간의 갈등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폭발합니다. 아비 정부는 보건 안전을 위해 전국 지방선거를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는데 TPLF가 반발하며 독자적인 선거를 치르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2020년 9월 티그라이주는 따로 선거를 치릅니다. 아비 정부는 티그라이주 정부를 불법 군사정부로 규정하고, 재정 지원을 끊는 맞불을 놓습니다. 인터넷과 전화까지 모두 차단해 티그라이족들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11월 정부군을 투입해 티그라이주의 주도 메켈레Mekelle를 점령합니다. 이후로도 내전은 계속됩니다. 에티오피아는 2021년 5월 총선을 치르고, 석연찮지만 번영당이 압승해 아비 총리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합니다. 2022년 아비 정부와 TPLF는 내전 중단에 합의합니다. 하지만 티그라이족은 이후로도 계속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11-2)


후기


심리학 개념 중에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보다는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더 쉽게 털어놓는 경향을 말합니다. 낯선 사람과는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없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낯선 사람 효과는 분쟁이나 전쟁을 해결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분쟁 당사국들은 서로 적대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아예 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제3의 중재자가 등장하면 대화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당사국들이 공식적으로 말하기 힘든 조건들을 상대국에 대신 전하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런 존재들을 피스메이커Peacemaker라고 하지요. 2024년 12월 타계한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표적입니다. 국제 사회는 이런 피스메이커들에게만 기댈 것이 아니라 분쟁이나 전쟁 등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 갈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1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추리소설 읽는 법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양자오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는글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추리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은 최후의 답안, 그 합리적이고 유일한 해석에 흥미를 느끼고 집착한다. 그렇지 않은가? 탐정추리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면 더는 당장 손에 쥔 책을 읽기만 하지 않는다. 책 뒤에 자리한 장르문학의 미궁으로 들어가, 손에 쥔 책의 수수께끼를 푸는 동시에 미궁의 출구를 찾는 놀이를 하게 된다. 시체, 단서, 밀실, 명탐정, 알리바이 증명, 범죄 심리, 주고받는 대화 속 두뇌 대결, 나아가 궁극의 추리논리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은 과거의 저 소설(들)을 계승하거나 저 소설(들)에 도전하고, 이에 따라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고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훼방을 놓는다. 6-7)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 책을 선정했다. 첫째, 탐정추리소설이 가진 ‘장르’ 특성으로 돌아가, 장르에서 선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을 골랐다. 바꿔 말하면, 이후에 수많은 모방작이 나온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 탐정추리소설의 규칙이 이루어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해할 수 있고, 독자는 추리소설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기초를 재빨리 닦을 수 있다. 둘째,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찾았다. 분량은 많을수록 좋았는데, 그러면 다시 읽기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좀 더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작품 안팎의 텍스트에 일정 정도 복잡함이 있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내부 텍스트가 충분히 복잡해야 자세히 분석할 만하고, 겉으로 봐서는 한눈에 알 수 없는 깊거나 모호한 정보를 캐내는 맛이 있다. 외부로 연장된 복잡함은 한 시대, 한 사회의 특징과 연결 지을 수 있으며 다른 수많은 책, 다른 문화 현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9)


1 호기심의 시작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죄’는 ‘이 세상’에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사회의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 19세기에 완성된 거대한 변화였다.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14)


# 추리소설의 3대 요소 : 탐정, 미스터리(수수께끼), 추리


초기의 탐정추리소설은 범인을 찾고 범죄 과정,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수법을 설명하고 나면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쳤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누가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왜 했는가’에도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기를 조사하고 범죄 동기에서 범죄에 대한 정보, 나아가 범죄가 일어난 사회와 관련된 정보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범죄는 매일 일어나고 그중에는 기이하고 다채로운 사건이 넘쳐난다. 만약 매체의 요란한 기사만을 본다면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을지언정 그 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사건은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이 벌인 이상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추리소설은 독자가 범죄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도록 두지 않는다. 범죄 현상을 꿰뚫고, 범죄 행위를 해석하는 것은 보편적인 논리와 이치이며,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일상 행동을 관할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와 이치다. 19)


코넌 도일은 장장 몇십 년간 수십 가지 이야기 속에 허구의 인물 한 명을 묘사하면서, 강한 인내심과 의지로 홈스의 일관성을 지켰다. 홈스의 외모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어떤 사건의 의뢰자나 용의자를 만나든 홈스의 생각, 태도, 반응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홈스는 겉으로 보면 논리만 보고 이치만 믿는 추리 기계 같다. 그는 감정이 일처리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왓슨은 자기가 기껏 머리를 굴려 답이라고 말한 내용을 홈스가 비웃자 의기소침해한다. 홈스는 왓슨이 한 추리의 빈틈을 지적하지 않고 그가 감정적으로 구는 부분을 질책한다. 그러나 코넌 도일은 소설에 홈스의 부드러운 내면이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자잘한 일화를 여기저기에 수없이 장치해 둔다. 홈스를 묘사하는 내용을 스무 번, 서른 번, 쉰 번 읽고 나면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큼 홈스에 대해 훤히 알게 된다. 홈스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일관성이다. 26-7)


코넌 도일의 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소설 서사는 전지적 시점이었다. 신처럼 모든 일을 다 아는 인물이 소설 속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에는 문제가 있다. 객관적인 묘사와 서술로는 독자가 서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화자에게 이입하기 쉽지 않아서 공감하고 느낄 상대가 분명하지 않다. 일인칭 시점에도 한계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홈스 같은) 극도로 특이한 인물에게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왓슨은 코넌 도일의 또 다른 돌파구이자 성과다. 코넌 도일은 추리소설뿐 아니라 소설의 역사에 독특한 서사 방식을 창조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골라 주인공 곁에서 이야기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소설의 문장과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28)


왓슨이 있기에, 홈스는 우리에게 그의 모험이 얼마나 놀랍고 위험했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더 놀라고 더 위험하게 느끼고 더 대단하게 여기게 된다. 홈스가 있으면 왓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없이 대비가 일어난다. 왓슨이 스스로 보기에 뭔가 끝내주는 해결책을 생각해 냈거나 더 이상 합리적일 수 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해결책은 달랑 두세 쪽이면 뒤집히고 아이디어는 오류임이 증명된다. 하지만 왓슨은 절대 광대 역할이 아니다. 코넌 도일도 일부러 왓슨에게 황당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떠맡기는 게 아니다. 아니 왓슨의 생각은 대체로 우리가 떠올릴 법한 생각이기도 하다.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왓슨의 입장에 선다. 그러다 이따금 왓슨보다 훨씬 빨리 사건의 단서를 파악했거나 홈스가 입을 열기 전에 왓슨의 추리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왓슨과 홈스의 사이에 서게 되고, 그 순간 색다른 재미와 만족을 얻는다. 33)


우리가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한두 편이 아닌 전편을 모두 읽었을 때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 중 하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나의 친구 홈스’의 모습이다. 우리는 홈스를 알게 될수록 왓슨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게 탄복하고, 이 사람을 좋아하고, ‘나의 친구’로 여기게 된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홈스가 쓴 추리 수법은 기본적이고 일반적이다. 코넌 도일에게 추리의 기본 게임 규칙을 세울 자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나중에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모두 코넌 도일이 세운 규칙을 지키는 한편 추리 수법에서 홈스를 뛰어넘을 아이디어를 궁리해야 했다. 따라서 이후의 추리소설에는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어떤 단순함을 담기 어려웠다. 그 단순함이란 일반 과학 원칙과 경험 법칙에 의지하며,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연막탄을 피울 필요가 없고, 이야기의 흐름이 간결하며, 작가가 스스로 생각한 수수께끼에 의기양양함이 없고, 작가가 독자를 도발하거나 조롱할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37)


2 그리하여 그는 영웅이 된다


‘hard-boiled’는 보통 달걀을 익힐 때 쓰는 말로, 완숙 계란을 뜻한다. 달걀을 삶아도 삶은 달걀의 본질은 여전히 달걀이다. ‘하드보일드 맨’으로 번역되는 중국어 ‘硬漢’은 무척 억세고 강해서 사람을 때려 길바닥에 쓰러뜨릴 정도의 건장한 사나이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hard-boiled’라는 단어를 보면, 특히 달걀을 생각해 보면 ‘하드보일드 맨’의 강함은 그런 강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벽과 비교하면 ‘hard-boiled egg’는 여전히 약한 달걀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는 척한다는 것이다. 날달걀과도 다르고 다른 알과도 다르다. ‘hard-boiled egg’는 벽에 부딪힌 순간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쏟아내 참담하게 패배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벽에 대항할 수 있고 벽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꽤 단단하다고 여겨 이따금 벽처럼 단단한 상대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앞에서 ‘hard-boiled egg’는 여차하면 강한 척하는 달걀로 돌아갈 뿐이다. 45-6)


‘하드보일드 맨’, 그중에서도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은 모두 ‘말수가 적다.’ 딱히 떠들 만한 것 없음. 헤밍웨이가 해밋과 챈들러에게 물려준 ‘하드보일드 맨’ 스타일이다. 우리는 이 딱히 떠들 만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며 그가 뽐내지 않으려 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에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하며 웃고 울 만한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고 추측하게 된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 우리와 말로의 관계에는 챈들러가 드러낸 부분 외에 우리가 상상하여 참여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런 상상력을 갖추었거나 상상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가 독자가 챈들러의 소설에 들어갈 수 있는지,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른다. 헤밍웨이에서 해밋에 이르면서 ‘하드보일드 맨’은 ‘하드보일드 탐정’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사이의 아이러니를 기억해야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55)


챈들러는 설령 소설에서라도 한 사람의 죽음이 기록될 만하고 대답을 구해야 할 일이라면, 그 죽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만한 문명의 의제에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는 구원의 성격이 있다. 만약 수준 높은 비극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비극일 것이며, 연민과 풍자가 있을 수 있고, 거친 남자의 왁자한 웃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남자는 비열하지 않고 오염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 속의 탐정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며, 모든 것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며, 보통 사람인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상상의 문학, 고상한 문학은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쓸 수 있지만 만약 실제 거리, 실제 세상을 쓰려고 한다면 다른 전략을 써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써야 한다. 이 주인공은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하며, 진실한 동시에 이상적이어야 한다. 57)


헤밍웨이에서 해밋과 챈들러까지, 그들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했다. 챈들러는 특히 진지하게 탐색했다.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웅이란 무엇인가?’ 챈들러는 영웅을 그리고자 했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영웅,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 아닌 로스앤젤레스 거리의 영웅,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후반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영웅을 말이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실재하는 환경에서 산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읽은 후 이 복잡하고 시끄럽고 실재하는 주변 환경에서 따뜻함, 안전한 느낌, 신뢰감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낀다. 아, 이런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이러한 설정에서 우리는 말로가 ‘슈퍼맨’이 아니며 ‘홈스’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홈스를 베이커 거리에서 1930년대의 로스앤젤레스로 데려온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59)


챈들러는 말로가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말로에게는 좋은 사람이 보통 갖고 있는 기질이 있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가 가진 원칙의 마지노선은 상황이 다르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다채롭고 기이한 환경에서 사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그 다채롭고 기이하며 비상식적인 환경에서 그저 평범하게 좋은 사람으로 계속 사는 데에는 영웅 같은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영웅이 되어야 한다.” 사립 탐정인 말로는 사건이 얼마나 위험하든 조사가 얼마나 어렵든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걸려 있든 언제나 고객에게 하루에 이십오 달러를 지급하라고, 추가로 필요한 금액은 결산 때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얼마가 나가든 일당 이십오 달러만 받는다. 사건을 맡기로 하면, 그는 나중에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64)


챈들러는 또한 그의 이전에 형성된 탐정소설의 클리셰를 거부한다. 즉 소설의 끝부분에서 탐정이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연이어 무엇을 찾아냈는지, 저기에서 무엇을 조사했는지, 마지막으로 결국 누가 어떤 수법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 감췄는지 같은 사건의 추리 과정을 경찰이나 피해자에게, 범인에게, 그리고 실제로는 덜 똑똑한 독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챈들러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말로가 만나는 일들을 독자가 따라가다 마지막에 스스로 단서를 이어 추리 과정을 풀길 기대한다. 단순한 세부 사항은 독자에게 넘겨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하도록 해도 된다. 전체 줄거리란 결국 일련의 범죄를 일으킨 은혜와 원한과 애정과 복수이고, 이 부분은 말로가 분명하게 밝힌다. 사실상 인간관계와 동기에 대한 통찰에 기대어서야 말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고, 말로와 그 배후에 있는 챈들러라 할지라도 반드시 범죄 과정의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71-2)


3 탐정추리의 곤경을 돌파하다


『장미의 이름』 이전의 에코는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약간 이름 있는 기호학자이자 중세사가였다. 현대 기호학은 기독교 신학의 성상학聖像學, iconography에서 연원한 부분이 있다. 기독교 문화에는 수많은 성상聖像, icons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것이 십자가 위의 예수와 성모상이라는 사실은 우리도 안다. 그러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의 옛 교회를 한 바퀴 돌다 보면 다양한 그림과 장식 문양, 각종 형태의 기물이 깊은 인상을 주어 절로 발을 멈추게 한다. 이 모두가 넓은 의미의 ‘성상’이며, 각각 대표하는 의미가 있다. 바꿔 말하면 모두 의미를 지닌 기호다. ‘성상학’은 성상에 담긴 상징 의미, 역사와 변화, 상징과 상징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에코는 이런 학문 기초를 가지고 자신의 탐정추리소설을 14세기인 1320년대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 역사상 ‘대분열’의 재난이 일어났던 시기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서로 싸우는 기괴한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였다. 91)


소설은 우리에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윌리엄이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에 간다고 말한다. 이 설정은 소설의 시작부터 충돌과 긴장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낸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클뤼니 개혁’ 이후 수도원 규율을 명확히 세운 조직이다.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사의 생활, 예컨대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성서를 읽고, 몇 시에 노동을 하고, 묵상을 하는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그리하여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유럽 각지에 방대한 수도원 체계를 형성했다.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를 계승하며, 이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세속의 모든 재산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 베풀며 전도했고 일생의 거의 대부분 동안 회색 수도복 한 벌 외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그가 보인 생활상의 모범이 당시 기독교회를 놀라게 하면서 성인의 자리에 올랐다.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는 윌리엄처럼 사방을 떠도는 생활을 했다. 93-4)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한 명이 웅장한 건물, 수도원 소유의 장원莊園, 안정된 식량 공급과 전속 공인, 하인이 있는 대규모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은 윌리엄에게 재부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윌리엄이 속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념에 은근히 도전하고, 그들이 세속의 아름다운 사물을 거부하는 태도를 물으며, 그들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신의 가장 정밀하고 신묘한 뜻과 권위를 교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도원이 보유한 재산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진귀하며 유명한 것이 책, 커다란 장서관에 보관된 신화와도 같은 풍부한 장서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들을 소장함으로써 스스로 기독교의 지식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윌리엄은 14세기의 진보적 인물이다. 그는 윌리엄 오컴, 로저 베이컨 등을 통해 새로 발전하는 논리 사고를 읽고 받아들이며, 여기에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남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94)


수도원의 도서관은 악령이 지키는 듯 금지된 곳이다. 왜 이런 도서관이 있는 걸까? 도서관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윌리엄의 믿음과 반대된다. 그들은 책 속에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진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책을 통해 신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은 믿지만 사람에게 책의 지식과 진리를 평가할 능력과 자격이 있음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 책에 기록된 것이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현실의 현상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믿는다. 한쪽에는 지식이 세계에 대한 조사, 연구, 탐색, 귀납에서 온다고 보는 윌리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수도원 정신이 있다. 그들은 지식이 신에게서 오고, 책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본다. 뒤집어 보면, 잘못된 지식이나 잘못된 방식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영혼은 타락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이 반드시 엄중하게 관리되어야 하고 쉽게 개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95)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쓸 무렵 기호학은 서구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기호학과 밀접하게 호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도 나타났다. 기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은 기표와 기의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여, 기표와 기의를 우연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으로 약속된 관계로 환원하는 데 있다. 우리가 ‘개’라고 말하는 동물과 ‘개’라는 이름 사이에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개’라는 동물에 다른 이름을 붙이며, 우리도 ‘개’를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로 가득하다. 우리는 기표를 기의로 오해하고 이름을 본질이라고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런 오해를 운용하고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형식과 내용을 나누고 우리에게 형식에 속지 말라고 알려 주다가도 어떨 때는 우리가 어떻게 형식이 오도한 함정으로 빠지는지 작정하고 비웃기도 한다. 98)


『장미의 이름』의 「서문」을 쓴 작가는 현대인(우리는 당연히 저자 에코라고 추측한다)의 말투로 어떻게 1968년에 오래된 수고手稿를 찾았는지 말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인이 원고를 가져가 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통로를 통해 원고의 내용을 손에 넣는다. 이 「서문」은 대단히 꼼꼼하게 쓰여서 진짜처럼 느껴지며, 이어지는 14세기 이야기와 현재의 작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틀’을 잡아 주는 작용을 한다. 「서문」은 우리가 읽을 글이 소설가의 손끝에서 나온 허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졌으나 이제야 겨우 빛을 본 옛 수고라고 믿도록 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엄격한 학술 규칙에 맞춰 인용한 옛 문헌은 모두 에코가 지어낸 가짜다. 수고 역시 에코가 지은 이야기이고, 수고에서 옮겨 적은 척한 윌리엄의 사건 수사 과정 또한 당연히 에코의 창작이다. 빈 것은 채우고 찬 것은 비워, 우리가 기호에 대해 당연히 연상하는 것을 부수고 뒤집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사고다. 98)


4 추리소설 그 이상을 보여 주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의 개조開祖이자 오늘날까지 추격당해 본 적이 없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 일본 탐정소설의 추리 수법을 가져와 전쟁 후의 사회소설에 도입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태어나고 자라 전쟁의 광기와 잔혹을 겪었고, 전쟁이 가지고 온 파괴와 빈곤을 견뎌 냈다. 그는 날카롭게 전쟁 전후의 변화를 체득했다. 전쟁 전의 일본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저 부평초처럼 떠돌며 지낼 뿐 어떤 발전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일어나는 사회에서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전쟁 후 일본의 혼란과 모색 사이에서 일어난 사람으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느꼈으며, 사회파 추리소설을 창조해 시대가 그에게 준 것에 구체적으로 보답했다. 그는 추리를 미끼로 삼아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엄숙한 사회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심지어 강요했다. 115)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 범죄 동기는 범죄 사실과 똑같이 중요하며, 심지어 범죄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다. 추리에는 추측과 조사가 필요하고, 그에 따라 범죄 사건의 경과뿐 아니라 범인이 누구고 어떤 수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에서 도망치는지, 더욱 중요하게는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 추론해 내야 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올곧게 사건의 동기를 밝히는 길로 나아가며 그렇게 하고 나서야 사건을 종결짓는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발전한 특수한 서사 방식이 이후 사회파 추리소설에 전면적으로 계승되는데, 그 방식은 바로 사건 해결의 열쇠를 종종 범인의 동기에 숨겨 두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이 범인과 피해자의 일일 뿐이라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보내고 살아온 시대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의 소설로 일본인이 고개를 돌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압도적으로 몰아붙였다. 진정으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117)


미야베 미유키가 수십 권의 작품을 출간하기는 했어도 ‘국민 작가’로서의 정도를 보려면 『모방범』이 가장 훌륭하고 표준이 될 수 있겠다. 원서 단행본 기준 1,400여 쪽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 43명. 『모방범』을 읽고 토론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숫자다. 1,400여 쪽에 이르고, 43명의 인물이 움직이는 소설은 분명 한 가지 사건과 해결 과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 속의 놀라운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면모를 설명하고 묘사하고자 했다. 『모방범』은 전통 일본 사회에는 없었던 ‘거품 경제 이후’에야 나타난 새로운 현상, 전혀 다른 정신 상태에 대해 말한다. ‘거품 경제 이후’의 일본 사회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젊은이에게 어떤 준비도 시키지 못했다. 이 정신 상태의 출현은 거품 경제의 붕괴, 그러니까 오래 지속되리라 예측했던 번영의 급작스러운 정체 및 쇠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방향을 상당한 수준에서 주재했다. 122)


소설 『모방범』에서는 전지적 관점이 자주 쓰인다. 주요 등장인물 43명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에 43명의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43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보조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43명의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시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소설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분노하는지 보여 준다.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가 편하고 쉽게 얻은 수수께끼 풀이의 성취를 이후의 무거움으로 뒤집는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독자의 부담은 커진다. 미야베 미유키가 마쓰모토 세이초와 닮은 부분이다. 두 작가는 독서를 마친 독자가 산뜻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독자는 자신이 명탐정만큼 똑똑하다고 자축할 수 없고, 법망이 성글지만 촘촘하다는 단순한 믿음을 강화할 수 없다. 소설에는 결국 끝이 있으나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근심한다. 이 사건이 해결될까? 끝과 해결은 다른 문제다. 132)


그토록 많은 주요 인물이 병존한다는 말은 이 소설에 일반적인 의미의 ‘주인공’이 없다는 뜻과 같다. 『모방범』의 놀라운 특색은 이 작품이 주인공 없는 소설, 특히 추리하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추리소설에는 ‘추리로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주인공을 맡는다. 초기에는 홈스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똑똑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나중에는 말로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운이 없고 백배는 고통스러운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또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사건 조사와 추리가 자신의 일인 형사, 검사 혹은 검시관이 주인공을 맡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적당한 때에 나타나 우리에게 사건의 진상과 추리 과정을 알려 준다. 『모방범』에는 이런 주인공이 없다. 억지로라도 주인공을 찾자면, 범인이 탐정의 자리를 대신해 소설에서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 135)


미야베 미유키는 일부러 독자가 아미카와 고이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떤 악은 일정 정도에 이르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해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해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지 않음은 하나의 가치 태도다. 악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지만 어떤 행위의 한계선은 해석과 합리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 거부하도록 한다. 우리가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해석을 하면 이 사건 나름의 논리가 가진 의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경악과 혐오와 비난 또한 감소하게 된다. 아미카와 고이치가 지나온 삶의 역정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그가 어떻게 한 개인에서 악인으로 변했는지 쓰지 않은 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악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유지하고자 했고, 악이 가져온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다른 무엇에 섞이고 바래는 일 없이 똑똑하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13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