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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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이전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수도 모스크바와 50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나토 회원국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 여부는 자신들이 선택할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 나라 일부로 여깁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도 하지 않고 ‘특수 군사 작전’을 펼친 거라고 주장합니다. 형제 또는 러시아 일부로 여기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번 침공도 ‘버릇없는 동생’을 벌주려는 것이지 타국을 침공한 전쟁이 아니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금지하고 새로운 나토 회원국에 배치한 군대와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2014년에 체결한 민스크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면 거부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도 나토 가입 의사를 철회하지 않아서 결국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14)


민스크협정은 벨라루스 수도인 민스크에서 돈바스Donbass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러시아 분리주의 집단 간에 맺은 국제 협정이에요.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에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죠. 우크라이나에서 분리하고 싶다는 겁니다. 돈바스 지역엔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데 정부 정책에서 자신들이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거예요.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이들을 진압하죠. 한동안 두 세력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민스크협정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의 자치권을 인정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협정 내용 중 핵심이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애초에 민스크협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면 전쟁까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지적입니다. 미국은 이보다 더 큰 비판을 받고 있죠. 전쟁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15)


2장.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올까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 체제도 무너집니다.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 결과물이 1993년에 맺은 ‘오슬로 협정’인데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주권 국가로 독립해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이른바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죠. 협상 장소가 노르웨이 오슬로여서 오슬로 협정으로 부르게 되었죠. 14차례 비밀 협상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건국을 했고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영토도 더 확장했기 때문에 오슬로 협정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허용하고 가자 지구 등 점령지도 돌려주라는 것이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더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하지 말고요. 2국가 해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돌려줘야 합니다. 25)


오슬로 협정으로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마침내 수립되었고,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일부 지역에서 철수합니다. 아라파트 의장이 자치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죠.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모두 축출하려는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1996년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죠. 팔레스타인도 2006년 총선에서 강경파 하마스가 압승합니다. 하마스 역시 근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모두 축출하고 싶어 합니다. 강 대 강이 맞서니, 합의는 힘을 잃고 분쟁만 살아남았습니다. 2국가 해법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이 원하는 국경선과는 일치하지 않아 국경선 설정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은 1947년 유엔의 분할안대로 국경선이 정해지길 바라지만, 이스라엘은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국경선이 바뀔 때마다 그 안쪽에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늘리는 속칭 알박기를 하고 있습니다. 26-7)


이스라엘 사회가 우경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구성의 변화에 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건국 초에는 유럽 중동부 출신의 유대인 즉 아슈케나지Ashkenazi가 많았습니다. 아슈케나즈는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하니, 아슈케나즈 유대인은 ‘독일 유대인’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금융, 무역업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유대인 즉, 세파르디Sephardi가 대거 들어왔습니다. 세파르디는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뜻하는 ‘세파라드’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세파르디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을 말하죠.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류층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삶의 기반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와 겹쳤죠.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이들은 진보 세력의 점령지 반환 정책에 반대합니다. 여기에 1991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계 유대인 70만 명까지 유입되면서 극우 세력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이죠. 29-30)


3장.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무관심해졌을까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른 최초의 서구 열강은 영국입니다. 3차례나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끝내 지배하지 못합니다. 2차 대전 이후 아프가니스탄 왕국(1926~1973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왕국)은 중립을 표방합니다. 서구 근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부동항을 포기하지 못한 소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조용히 실리를 추구해 나간 거죠. 아프가니스탄은 한동안 평화롭게 근대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덜 방법으로 소련과 군사적으로 깊게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맙니다. 소련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며 세력을 형성한 것이죠. 이들의 반대편에는 부족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이란 종교를 중심으로 뭉쳤고 서구화는 물론이고 소련식 공산주의에도 반발했습니다. 그 결과 소련의 영향을 받은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반정부 세력이 대립하게 됩니다. 33)


1978년 좌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뒤를 이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죠. 부족들은 반발했고, 급기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Mujahideen,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이라는 반정부군이 조직됩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서막이었죠. 소련은 정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갑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납니다. 소련은 긴장합니다. 소련의 남부 지역인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이슬람권 공화국들에서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까 봐 겁을 먹은 거죠. 곧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무려 10년이나 이어집니다. 막대한 군사비에 소련 경제가 휘청입니다. 소련 붕괴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죠. 결국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곰의 덫The Bear Trap이라며 철수합니다. 그리고 1992년 4월, 탈레반 정부가 들어서죠. 33-4)


2001년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알카에다를 보호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죠. 두 달 만에 성공합니다. 탈레반이 쫓겨난 자리에 친미 정부를 세웁니다. 처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때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국을 공격한 이들을 처단한다는 것에 세계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미국은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내죠. 바로 북한을 필두로 몇몇 나라를 ‘악의 축’이라며 새로운 적으로 삼은 겁니다.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과 악의 축 국가들은 세계 질서를 위협하니 세계 평화를 위해 앞으로도 이들에게 맞서겠다고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탈레반이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계획이 틀어집니다. 결국 미국은 2021년 8월 도망치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합니다. 그러자 친미 정부의 대통령(아슈라프 가니)도 곧 탈레반에 항복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달아납니다. 20년 만에 탈레반은 정권을 되찾죠. 35)


4장. 대만은 왜 국기가 없을까 : 중국 —대만의 갈등


중국은 대만을 전쟁에 패한 장제스가 세운 괴뢰정부로, 대만은 중국을 쿠데타를 일으킨 공산당 세력으로 봅니다. 상대를 무력 통일의 대상으로 여기죠. 우려는 현실이 됩니다. 1954년 대만 해협의 진먼섬에서 중국과 대만이 무력 충돌을 했기 때문이죠. 진먼섬은 대만보다 중국에 더 가깝지만, 대만이 점령한 곳이었어요. 대만으로서는 최전선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곳에 군대를 많이 파견했습니다. 이를 중국은 좌시하지 않았고요. 1955년 미국이 개입해 휴전 상태로 접어듭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쓸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중국이 물러선 거죠. 이 사건으로 미국과 대만은 방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중국은 미국과 서유럽이 중동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다시 진먼섬을 공격합니다. 무려 50만 발의 포탄을 44일간 쏟아붓죠. 그 바람에 대만 해협 바닷길이 봉쇄되기까지 합니다. 극한의 대치 상황은 미국과 중국이 기습적으로 수교를 맺은 1979년에야 끝이 납니다. 42)


1970년대부터 데탕트 시대로 접어들죠. 대만은 이런 분위기가 영 마뜩잖습니다. 중국을 탈환할 날도 멀어 보이는데 자기편인 줄 알았던 미국까지 중국과 가까워졌으니 불쾌했습니다. 곧이어 이 감정은 깊은 배신감으로 변합니다. 1971년 미국이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선언했기 때문이죠. 물론 미국은 중국이 대표 국가가 되는 대신 대만은 일반 회원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완강히 반대했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대만은 화가 나서 유엔에서 탈퇴해 버립니다. 미국은 1972년 중국이 주장해 온 ‘하나의 중국’ 원칙에도 동의합니다. 하나의 중국이란 중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대만이 격하게 항의하자 미국은 결국 1978년 12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합니다. 미국의 보복으로 인해 대만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 줄줄이 쫓겨나고 국제무대에서도 지워집니다. 43-4)


2025년 3월 현재까지 대만은 친미 성향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입니다. 차이잉원 전 총통은 2021년 10월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파장을 일으켰죠. 비공식적이었던 내용을 당국자가 처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대만은 중국의 영토니,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대만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연설에서 중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되 무력 사용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무력 행사 대상은 중국 통일에 간섭하는 ‘외부 세력’과 ‘일부 독립 세력’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한마디로 미국에 내정 간섭을 그만두라고 경고한 거죠. 하지만 미국은 시진핑이 계속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고, 그 경우 대만은 무력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중국을 계속 자극하고 있습니다. 47-8)


5장. 중국군과 인도군은 왜 몸싸움을 벌였을까 : 중국—인도 분쟁


중국과 인도가 국경선을 놓고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한 건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하면서입니다. 유엔이 한국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마오쩌둥은 티베트를 기습해 손쉽게 점령해 버립니다. 건국 1년 만에 중국은 왜 서둘러 이런 전쟁을 벌였을까요? 윈난성·쓰촨성과 접한 티베트 지역이 혹시라도 인도 쪽으로 돌아서면 북서부의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죠. 티베트는 중국 영토의 8분의 1에 해당할 만큼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 조공을 바치던 나라니 자국 땅이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죠.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당하자 티베트 불교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추종자들은 1959년 인도로 망명합니다. 인도가 망명 정부를 받아들이자 중국은 분노합니다. 인도가 미국이나 영국 등 서유럽과 연대해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티베트 망명 정부를 허락한 이후로 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집니다. 그리고 1959년 가을부터 국경선을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죠. 55-6)


1962년에 두 나라는 크게 부딪칩니다. 중국이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 근거해 인도 북서부 라다크 지역(악사이 친)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지역을 자기네 땅으로 편입하려고 했거든요. 티베트는 오랫동안 청나라 지배를 받다 1914년에 독립합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였죠. 독립 당시 인도를 실제로 지배했던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그은 국경선이 맥마흔 라인입니다. 1962년 전쟁 이후에도 두 나라의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대표적인 두 분쟁 지역을 하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참고 있는 중이죠. 인도는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갖고, 중국은 악사이 친을 갖는 식이었죠. 1996년에서야 두 나라는 가까스로 협정을 맺고 두 지역에 실질 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이라는 완충 지대를 설정했습니다. 실질 통제선은 국제법에 따르면, 확정된 국경선은 아닙니다. 양측이 군대를 배치하고 있으니 순찰 중 언제든지 무력 충돌로 확장될 위험이 있죠. 56-7)


중국은 1960년대만 해도 점령한 악사이 친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지금은 이 지역에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대규모로 투자한 결과 이제는 신장·위구르를 활용해 파키스탄이나 중동과 교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객관적으로 보면 인도가 약간 불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 역시 조급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갈등을 국내 정치에 활용합니다. 외부의 적, 그중에서도 중국처럼 큰 적이 존재하면 내부를 결집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죠. 물론 중국도 인도와의 국경 분쟁을 국내 정치에 잘 활용합니다. 특히 민족주의가 통치 전략인 시진핑에게 국경 분쟁만큼 애국심을 고취하기 좋은 소재는 없으니까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지율만 떨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방법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59-60)


6장. 이웃과 왜 싸우게 되었을까 : 인도 —파키스탄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 지역은 카슈미르 계곡을 중심으로 히말라야산맥과 피르 판잘Pir Panjal 산맥 사이에 위치한 고산 지대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상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히말라야산맥을 비롯해서 관광 자원이 아주 많은 곳이죠. 무굴제국 때부터 유명한 관광지였습니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땅도 비옥해 벼농사뿐 아니라 농작물 재배도 잘되는 데다 루비 등의 지하자원도 풍부하죠. 직조업도 발달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캐시미어의 본고장이기도 합니다. 16~19세기 중반까지는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무굴제국의 땅이었죠. 무굴제국이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인도제국이 되었고요. 이후 인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무슬림)가 극심하게 갈등합니다. 그 결과 힌두교는 인도, 이슬람교는 파키스탄이란 국가로 나뉩니다. 카슈미르 지역도 인도 땅과 파키스탄 땅으로 나뉘고요. 훗날 인도령 일부인 악사이 친을 중국이 차지하면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나뉩니다. 64)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부각해 두 종교인들 간에 적대감을 품게 했고 이런 감정은 독립한 이후에도 사람들을 지배했죠.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이런 감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국은 분할 통치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약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힌두교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켰죠. 영국은 힌두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 세력도 동시에 지원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은 인도를 떠나기로 했고 인도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갈등합니다. 간디는 “분단은 곧 인도를 생체로 해부하는 것”이라며 통일된 인도를 간절히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대표가 만나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거죠. 이를 지켜보던 영국은 제 마음대로 1947년 8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인도를 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3국으로 분할해 버립니다. 65)


특히 벵골주와 펀자브주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습니다. 벵골주 서쪽과 펀자브주 동쪽은 인도, 그 반대편은 파키스탄이 되었으니까요. 이 중 펀자브주 국경 분쟁은 인접한 카슈미르 지역으로 확산됩니다.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카슈미르 지역의 대부분 주민은 이슬람교도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들 땅이 무슬림이 많은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카슈미르의 지배층은 힌두교도였습니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대다수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인도에 편입해 버립니다. 파키스탄은 반발했고, 이 문제로 1948년 인도와 전쟁을 벌입니다. 1949년 유엔의 중재로 전쟁이 중단되었고,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잠무 카슈미르Jammu and Kashmir와 라다크Ladakh 지역)과 파키스탄령(아자드 카슈미르Azad Kashmir와 길기트‒발티스탄Gilgit-Baltistan 지역)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더 커지죠. 인도령을 침공해 악사이 친 지역을 점령해 버렸거든요. 66-7)


서벵골은 인도, 동벵골은 파키스탄 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동벵골 지방의 무슬림들이 동파키스탄을 세우긴 했지만, 정치적 실권은 모두 서파키스탄(오늘날의 파키스탄)이 장악했습니다. 1970년 태풍 피해로 동파키스탄 국토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50만여 명이 사망하자 동파키스탄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것은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정부군이 이들을 탄압하자 많은 동파키스탄인이 인도로 넘어갑니다. 당시 인도는 이 난민들을 받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죠. 동파키스탄 정부와 인도 사이에 전쟁이 터집니다. 인도가 승리해 동파키스탄은 인도가 바라던 대로 1971년 2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독립합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도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계속 충돌합니다. 1999년에는 카르길Kargil 분쟁도 일어나죠. 두 나라는 2004년부터 평화의 길을 모색합니다. 잦은 전쟁과 무력 대치로 인해 서로 경제적인 타격만 입기 때문이죠. 67-8)


7장. 왜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울 수 없었을까 : 튀르키예—쿠르드 분쟁


쿠르드족은 ‘국가 없는 최대 단일 민족’, ‘중동의 집시’로 불립니다. 튀르키예·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3천만여 명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채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중동에서 아랍인, 이란인, 튀르키예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민족임은 분명하죠. 이 중 절반이 튀르키예에 삽니다. 쿠르드족은 인종, 역사적으로 이란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란계 산악 민족이죠. 그래서 이란과 접경 지역인 튀르키예 동부에 많이 거주합니다. 이곳을 주 투쟁 근거지로 삼고요. 역사에 처음 등장한 쿠르드족은 12세기에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Saradin 이집트 술탄입니다.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해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에 대제국을 건설했죠. 1250년 아이유브 왕조가 망한 이후 쿠르드족은 셀주크제국과 그 후 들어선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쿠르드족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자치 지역이나 국가를 원하는 겁니다. 거주하는 국가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죠. 77-8)


1880년대 오스만제국 내 쿠르드 족장 셰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eydullah는 당시 이란(카자르 왕조)이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틈을 타 이란 서부의 쿠르드족을 규합해 들고일어납니다. 초반에는 이기다가 결국 오스만제국과 이란 연합군에 패합니다. 그럼에도 우베이둘라의 봉기는 이후 쿠르드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죠.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독립을 다시 염원합니다.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제국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보면,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주기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23년에 로잔 조약을 다시 체결합니다. 이 조약에서는 쿠르드족 얘기가 아예 빠지죠. 이렇게 된 것은 영국 탓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땅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땅을 영국령으로 편입해 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연합국은 오스만제국이 해체된 후 쿠르드족이 세운 국가를 무효화해 버립니다. 78-9)


소련도 쿠르드족을 이용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이란 북부를 점령하고 쿠르드족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1946년 1월 22일~1947년 3월 31일)을 세웁니다. 소련은 이란과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잠시 도운 척했을 뿐이죠. 마하바드 공화국은 불과 1년여 뒤 소련이 이란과 협정을 맺고 철수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1972년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돕겠다는 이란과 미국의 약속을 믿고 이라크와 3년 동안 싸웁니다. 이 전쟁 역시 미국과 이란에 이용당한 경우입니다. 당시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친미 정부였고, 이라크와 국경 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을 이용한 것이죠.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부터 이란과 전쟁 중이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울 것을 염려해 1988년 안팔(Anfal, ‘성스러운 전쟁의 전리품’이란 뜻)이라는 비밀 작전을 펼칩니다.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학살하고 마을도 파괴해 버리죠. 80)


1920년대 초기에 튀르키예는 세속주의를 내세워 쿠르드족 고유의 언어, 의복 등을 금지합니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자국의 모든 민족이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당연히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했죠. 튀르키예가 세속주의를 내세우자 쿠르드족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1978년 PKK를 조직합니다. PKK는 쿠르드족 독립을 주장하며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시위도 벌였습니다. 그로 인해 튀르키예에서 반쿠르드 감정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2013년 튀르키예와 쿠르드족은 휴전 협정을 맺지만, 이후에도 무력 충돌은 계속됩니다.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가 쿠르드족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자원이 많기 때문이에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와 인근 아랍 국가 등이 서로 그 자원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죠. 82)


8장. 시리아에서 전쟁은 끝난 걸까 : 시리아 내전


내전의 발단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다라Daraa에 사는 10대들이 학교 담벼락에 “의사 선생님, 이젠 당신 차례야”라고 쓴 사건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2007년 7월 집권한 바샤르를 말하죠. 안과 의사였거든요. 당시 중동에서는 2010년부터 튀니지를 시작으로 훗날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정권을 향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거죠. 아이들은 이번 차례는 시리아 독재자라고 썼던 겁니다. 경찰은 아이들을 체포했고, 배후를 밝히라며 혹독하게 고문합니다. 정부가 군용기, 탱크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학살하자 군대 안에서도 반감을 품는 군인이 늘어납니다. 결국 이들은 정부군에 등을 돌리고 시민군에 합류하죠. 대표적인 사람이 공군 대령 리야드 알아사드Riad al-Assad입니다. 그는 탈영병과 시위대를 모아 시리아 자유군SFA, Syria Free Army을 만듭니다. 이제 반정부군도 무장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죠. 그리고 민주화 운동은 내전으로 전환됩니다. 86-7)


그런데 내전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아랍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파 분쟁으로 번진 거지요.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으로 말입니다. 시리아는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수니파인데 집권층은 시아파였습니다. 지배받는 수니파가 지배하는 시아파에 맞서는 구도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 내전은 민주화 운동과 종교 전쟁이 섞이는 성격을 띠게 됩니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돕고, 반정부군은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합니다. 여기에 아사드의 오랜 우방국 러시아까지 가세하죠. 수니파 테러 조직인 IS가 내전을 틈타 시리아 북동부를 점령하면서 반정부군 진영에 끼어들고요. 미국은 아랍의 민주화 운동 지원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시리아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민주군SDF, Syria Democracy Force을 지원합니다. 미국이 SDF를 지원한 이유는 IS 때문입니다. 비록 IS가 시리아에선 반정부군 진영에 속해도 미국에게는 격퇴 대상이니 SDF를 이용해 물리치려고 한 것이죠. 87)


또 시리아 내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입니다. 먼저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가장 큰 이유는 쿠르드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2011년 7월부터 튀르키예는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자유군SFA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2017년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완전히 발을 뺌으로써 쿠르드족과 SDF는 궁지에 몰리죠. 튀르키예는 미국과 러시아의 묵인 아래 쿠르드족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틈만 나면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했습니다. 시리아가 헤즈볼라를 비롯한 반이스라엘 무장 조직들에게 거점을 제공하고 있었으니 반감이 늘 있었죠. 이런 데다 3차 중동 전쟁의 결과로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정부군이 승리할 경우, 이곳이 위협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이 길어지길 바랐겠죠. 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이 전부 약해지는 것을 최고의 시나리오로 생각했을 겁니다. 88)


러시아는 아사드 부자와 오래 동맹을 맺었고 이들에게 무기도 지원했습니다. 푸틴이 시리아 정부를 도운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타르투스항에 해군 기지를 두었습니다. 타르투스항은 러시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갖고 싶어 한 부동항인 데다 중동과 지중해를 넘볼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한 시리아에서 반정부군이 정권을 잡을 경우 유럽으로 가스관을 연결할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되면 러시아 ‒ 유럽의 가스 공급망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국제 사회에는 IS 격퇴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말이죠. 미국은 오바마 정부 이래 고립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약해지고 그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졌습니다. 물론 미국과 서유럽이 시리아 내전에서 한발 물러난 데에는 IS 영향도 있습니다. 반정부군을 돕는 것이 IS를 키우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89-90)


9장. 군부가 계속 집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미얀마 내전


미얀마는 인구의 70퍼센트가 버마족이고 샨족·친족·몬족·카친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3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서로 언어와 문화도 크게 달라 종족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얀마는 1824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942년부터 45년까지는 일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2차 대전에서 패한 일제가 물러난 뒤에 다시 영국이 지배했고요. 그러니까 미얀마는 거의 12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죠. 당시 미얀마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아웅산 장군은 독립 후 국가 재건을 준비하던 중에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아웅산이 주축이 돼 만든 정당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 Anti 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이 총선거에서 승리해 서구식 민주 정부가 들어서죠. 하지만 2차 대전 후 탄생한 대다수 신생 국가들처럼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하고 소수민족끼리 갈등하면서 경제 혼란까지 겪습니다. 그러다 1962년 네윈Ne Win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나긴 군부 시대로 들어섭니다. 96)


네윈 군부는 1988년까지 26년간 집권합니다. 네윈은 주요 기업과 자원을 국유화해 시민의 몫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었죠. 폐쇄적인 경제 정책 결과, 세계 경제에서 고립되고요. 당연한 귀결처럼 결국 경제는 무너지고, 지하경제와 암시장만 활성화됩니다. 독재와 경제난으로 국민의 분노는 점점 깊어졌죠. 마침내 1988년 8월 8일, ‘8888항쟁’이 일어납니다. 학생과 승려들을 주축으로 수많은 시민이 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합니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첫 민주 항쟁이었죠. 하지만 군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대를 바꿔 가며 독재를 유지했죠. 8888항쟁 당시 정부는 저항하지 않는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학살했습니다. 수천 명이 죽습니다. 군인이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항쟁 결과 네윈은 물러나지만, 군인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쥐죠. 군부는 더 악랄해집니다. 아웅산수치도 집 밖으로 못 나오게 가택연금을 해 버리죠. 수치는 20여 년 만인 2010년에야 풀려납니다. 97-8)


2007년 8월 다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샤프란 혁명’이죠. 샤프란은 승복 색인데, 이 색을 떠올릴 정도로 승려들이 주축이 된 투쟁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미얀마는 국민의 약 90퍼센트가 불교도입니다. 샤프란 혁명은 군부가 연료 판매 가격 보조금을 폐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군부가 연료의 유일한 공급자였는데, 보조금을 주지 않으면서 버스용 압축 천연가스 가격을 비롯해 가스 가격이 폭등한 것이죠.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군부도 한발 물러납니다. 2008년부터 자유선거를 실시합니다. 무늬만 자유선거지, 실제로는 부정선거였지요. 군부가 지지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이 압승합니다. 하지만 군부도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08년 새 헌법을 만들죠. 대통령 간선제, 시장경제 체제, 정당제 민주주의 등을 표방합니다. 그런데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에 자동 할당하게 돼 있어 그 외의 내용은 사실 치장에 불과했습니다. 98)


아웅산수치는 2010년 연금에서 해제되었고, 2012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합니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군부가 이를 인정하고 정권을 이양합니다. 군은 2020년 11월 총선에서도 패배하자 다시 움직입니다. 수치는 군에 유리하게 돼 있던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이 자동으로 갖게 돼 있기 때문이죠. 개헌안이 통과될 경우, 군의 영향력은 약해지겠죠. 그러자 2021년 2월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구금합니다.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더는 평화 시위가 어려워지자 시민들은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시민들은 4번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군부를 끝낼 방법은 무장 투쟁밖에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99-100)


10장.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학살자가 되었을까: 에티오피아 내전


에티오피아는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80개의 크고 작은 종족으로 이루어진 연방제 국가였죠. 각 종족은 자치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1974년 9월, 공산주의자인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제국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군부는 1987년 군정을 폐지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공화국을 선포하죠. 제1대 대통령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입니다. 그는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했습니다. 무늬만 공화국이지 멩기스투 정권의 폭정은 계속됐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이들이 반정부군을 조직해 들고일어납니다. 멩기스투 정권은 1991년에 무너집니다. 2대 대통령은 대표적인 반정부군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되었습니다. 멜레스 제나위 총리 시절엔 그가 소속된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이 집권당이었습니다. 109-10)


2019년 12월 EPRDF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인 번영당PB, Prosperity Party을 만듭니다. TPLF를 제하고 나머지 3개 정당만으로 꾸린 거죠. 왜 TPLF를 제외했을까요? 멜레스 제나위가 총리가 되면서 TPLF는 집권당이 됩니다. 이들이 정치를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멜레스 역시 독재자로 변질됩니다. TPLF는 멜레스가 2012년 사망하고 2018년 실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독재를 합니다. 결국 총리(2대 총리 하일레마리암 데살렌)가 물러났고, 2018년 번영당을 주도한 아비 아머드 알리(Abiy Ahmed Ali, 오로모족 출신)가 3대 총리가 됩니다. 아비 총리는 TPLF를 배제했습니다. 그러자 TPLF가 들고일어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죠. 아비 총리는 국경을 두고 오랫동안 분쟁해 온 에리트레아를 설득해 평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지요. 하지만 TPLF 본거지인 티그라이주는 이 협상에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자기들 땅이었던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로 넘겨주었기 때문이죠. 110-11)


정부와 TPLF 간의 갈등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폭발합니다. 아비 정부는 보건 안전을 위해 전국 지방선거를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는데 TPLF가 반발하며 독자적인 선거를 치르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2020년 9월 티그라이주는 따로 선거를 치릅니다. 아비 정부는 티그라이주 정부를 불법 군사정부로 규정하고, 재정 지원을 끊는 맞불을 놓습니다. 인터넷과 전화까지 모두 차단해 티그라이족들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11월 정부군을 투입해 티그라이주의 주도 메켈레Mekelle를 점령합니다. 이후로도 내전은 계속됩니다. 에티오피아는 2021년 5월 총선을 치르고, 석연찮지만 번영당이 압승해 아비 총리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합니다. 2022년 아비 정부와 TPLF는 내전 중단에 합의합니다. 하지만 티그라이족은 이후로도 계속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11-2)


후기


심리학 개념 중에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보다는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더 쉽게 털어놓는 경향을 말합니다. 낯선 사람과는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없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낯선 사람 효과는 분쟁이나 전쟁을 해결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분쟁 당사국들은 서로 적대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아예 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제3의 중재자가 등장하면 대화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당사국들이 공식적으로 말하기 힘든 조건들을 상대국에 대신 전하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런 존재들을 피스메이커Peacemaker라고 하지요. 2024년 12월 타계한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표적입니다. 국제 사회는 이런 피스메이커들에게만 기댈 것이 아니라 분쟁이나 전쟁 등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 갈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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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추리소설 읽는 법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양자오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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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추리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은 최후의 답안, 그 합리적이고 유일한 해석에 흥미를 느끼고 집착한다. 그렇지 않은가? 탐정추리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면 더는 당장 손에 쥔 책을 읽기만 하지 않는다. 책 뒤에 자리한 장르문학의 미궁으로 들어가, 손에 쥔 책의 수수께끼를 푸는 동시에 미궁의 출구를 찾는 놀이를 하게 된다. 시체, 단서, 밀실, 명탐정, 알리바이 증명, 범죄 심리, 주고받는 대화 속 두뇌 대결, 나아가 궁극의 추리논리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은 과거의 저 소설(들)을 계승하거나 저 소설(들)에 도전하고, 이에 따라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고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훼방을 놓는다. 6-7)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 책을 선정했다. 첫째, 탐정추리소설이 가진 ‘장르’ 특성으로 돌아가, 장르에서 선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을 골랐다. 바꿔 말하면, 이후에 수많은 모방작이 나온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 탐정추리소설의 규칙이 이루어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해할 수 있고, 독자는 추리소설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기초를 재빨리 닦을 수 있다. 둘째,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찾았다. 분량은 많을수록 좋았는데, 그러면 다시 읽기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좀 더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작품 안팎의 텍스트에 일정 정도 복잡함이 있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내부 텍스트가 충분히 복잡해야 자세히 분석할 만하고, 겉으로 봐서는 한눈에 알 수 없는 깊거나 모호한 정보를 캐내는 맛이 있다. 외부로 연장된 복잡함은 한 시대, 한 사회의 특징과 연결 지을 수 있으며 다른 수많은 책, 다른 문화 현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9)


1 호기심의 시작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죄’는 ‘이 세상’에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사회의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 19세기에 완성된 거대한 변화였다.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14)


# 추리소설의 3대 요소 : 탐정, 미스터리(수수께끼), 추리


초기의 탐정추리소설은 범인을 찾고 범죄 과정,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수법을 설명하고 나면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쳤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누가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왜 했는가’에도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기를 조사하고 범죄 동기에서 범죄에 대한 정보, 나아가 범죄가 일어난 사회와 관련된 정보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범죄는 매일 일어나고 그중에는 기이하고 다채로운 사건이 넘쳐난다. 만약 매체의 요란한 기사만을 본다면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을지언정 그 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사건은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이 벌인 이상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추리소설은 독자가 범죄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도록 두지 않는다. 범죄 현상을 꿰뚫고, 범죄 행위를 해석하는 것은 보편적인 논리와 이치이며,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일상 행동을 관할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와 이치다. 19)


코넌 도일은 장장 몇십 년간 수십 가지 이야기 속에 허구의 인물 한 명을 묘사하면서, 강한 인내심과 의지로 홈스의 일관성을 지켰다. 홈스의 외모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어떤 사건의 의뢰자나 용의자를 만나든 홈스의 생각, 태도, 반응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홈스는 겉으로 보면 논리만 보고 이치만 믿는 추리 기계 같다. 그는 감정이 일처리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왓슨은 자기가 기껏 머리를 굴려 답이라고 말한 내용을 홈스가 비웃자 의기소침해한다. 홈스는 왓슨이 한 추리의 빈틈을 지적하지 않고 그가 감정적으로 구는 부분을 질책한다. 그러나 코넌 도일은 소설에 홈스의 부드러운 내면이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자잘한 일화를 여기저기에 수없이 장치해 둔다. 홈스를 묘사하는 내용을 스무 번, 서른 번, 쉰 번 읽고 나면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큼 홈스에 대해 훤히 알게 된다. 홈스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일관성이다. 26-7)


코넌 도일의 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소설 서사는 전지적 시점이었다. 신처럼 모든 일을 다 아는 인물이 소설 속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에는 문제가 있다. 객관적인 묘사와 서술로는 독자가 서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화자에게 이입하기 쉽지 않아서 공감하고 느낄 상대가 분명하지 않다. 일인칭 시점에도 한계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홈스 같은) 극도로 특이한 인물에게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왓슨은 코넌 도일의 또 다른 돌파구이자 성과다. 코넌 도일은 추리소설뿐 아니라 소설의 역사에 독특한 서사 방식을 창조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골라 주인공 곁에서 이야기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소설의 문장과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28)


왓슨이 있기에, 홈스는 우리에게 그의 모험이 얼마나 놀랍고 위험했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더 놀라고 더 위험하게 느끼고 더 대단하게 여기게 된다. 홈스가 있으면 왓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없이 대비가 일어난다. 왓슨이 스스로 보기에 뭔가 끝내주는 해결책을 생각해 냈거나 더 이상 합리적일 수 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해결책은 달랑 두세 쪽이면 뒤집히고 아이디어는 오류임이 증명된다. 하지만 왓슨은 절대 광대 역할이 아니다. 코넌 도일도 일부러 왓슨에게 황당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떠맡기는 게 아니다. 아니 왓슨의 생각은 대체로 우리가 떠올릴 법한 생각이기도 하다.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왓슨의 입장에 선다. 그러다 이따금 왓슨보다 훨씬 빨리 사건의 단서를 파악했거나 홈스가 입을 열기 전에 왓슨의 추리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왓슨과 홈스의 사이에 서게 되고, 그 순간 색다른 재미와 만족을 얻는다. 33)


우리가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한두 편이 아닌 전편을 모두 읽었을 때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 중 하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나의 친구 홈스’의 모습이다. 우리는 홈스를 알게 될수록 왓슨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게 탄복하고, 이 사람을 좋아하고, ‘나의 친구’로 여기게 된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홈스가 쓴 추리 수법은 기본적이고 일반적이다. 코넌 도일에게 추리의 기본 게임 규칙을 세울 자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나중에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모두 코넌 도일이 세운 규칙을 지키는 한편 추리 수법에서 홈스를 뛰어넘을 아이디어를 궁리해야 했다. 따라서 이후의 추리소설에는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어떤 단순함을 담기 어려웠다. 그 단순함이란 일반 과학 원칙과 경험 법칙에 의지하며,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연막탄을 피울 필요가 없고, 이야기의 흐름이 간결하며, 작가가 스스로 생각한 수수께끼에 의기양양함이 없고, 작가가 독자를 도발하거나 조롱할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37)


2 그리하여 그는 영웅이 된다


‘hard-boiled’는 보통 달걀을 익힐 때 쓰는 말로, 완숙 계란을 뜻한다. 달걀을 삶아도 삶은 달걀의 본질은 여전히 달걀이다. ‘하드보일드 맨’으로 번역되는 중국어 ‘硬漢’은 무척 억세고 강해서 사람을 때려 길바닥에 쓰러뜨릴 정도의 건장한 사나이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hard-boiled’라는 단어를 보면, 특히 달걀을 생각해 보면 ‘하드보일드 맨’의 강함은 그런 강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벽과 비교하면 ‘hard-boiled egg’는 여전히 약한 달걀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는 척한다는 것이다. 날달걀과도 다르고 다른 알과도 다르다. ‘hard-boiled egg’는 벽에 부딪힌 순간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쏟아내 참담하게 패배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벽에 대항할 수 있고 벽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꽤 단단하다고 여겨 이따금 벽처럼 단단한 상대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앞에서 ‘hard-boiled egg’는 여차하면 강한 척하는 달걀로 돌아갈 뿐이다. 45-6)


‘하드보일드 맨’, 그중에서도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은 모두 ‘말수가 적다.’ 딱히 떠들 만한 것 없음. 헤밍웨이가 해밋과 챈들러에게 물려준 ‘하드보일드 맨’ 스타일이다. 우리는 이 딱히 떠들 만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며 그가 뽐내지 않으려 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에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하며 웃고 울 만한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고 추측하게 된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 우리와 말로의 관계에는 챈들러가 드러낸 부분 외에 우리가 상상하여 참여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런 상상력을 갖추었거나 상상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가 독자가 챈들러의 소설에 들어갈 수 있는지,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른다. 헤밍웨이에서 해밋에 이르면서 ‘하드보일드 맨’은 ‘하드보일드 탐정’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사이의 아이러니를 기억해야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55)


챈들러는 설령 소설에서라도 한 사람의 죽음이 기록될 만하고 대답을 구해야 할 일이라면, 그 죽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만한 문명의 의제에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는 구원의 성격이 있다. 만약 수준 높은 비극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비극일 것이며, 연민과 풍자가 있을 수 있고, 거친 남자의 왁자한 웃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남자는 비열하지 않고 오염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 속의 탐정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며, 모든 것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며, 보통 사람인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상상의 문학, 고상한 문학은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쓸 수 있지만 만약 실제 거리, 실제 세상을 쓰려고 한다면 다른 전략을 써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써야 한다. 이 주인공은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하며, 진실한 동시에 이상적이어야 한다. 57)


헤밍웨이에서 해밋과 챈들러까지, 그들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했다. 챈들러는 특히 진지하게 탐색했다.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웅이란 무엇인가?’ 챈들러는 영웅을 그리고자 했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영웅,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 아닌 로스앤젤레스 거리의 영웅,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후반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영웅을 말이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실재하는 환경에서 산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읽은 후 이 복잡하고 시끄럽고 실재하는 주변 환경에서 따뜻함, 안전한 느낌, 신뢰감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낀다. 아, 이런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이러한 설정에서 우리는 말로가 ‘슈퍼맨’이 아니며 ‘홈스’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홈스를 베이커 거리에서 1930년대의 로스앤젤레스로 데려온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59)


챈들러는 말로가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말로에게는 좋은 사람이 보통 갖고 있는 기질이 있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가 가진 원칙의 마지노선은 상황이 다르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다채롭고 기이한 환경에서 사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그 다채롭고 기이하며 비상식적인 환경에서 그저 평범하게 좋은 사람으로 계속 사는 데에는 영웅 같은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영웅이 되어야 한다.” 사립 탐정인 말로는 사건이 얼마나 위험하든 조사가 얼마나 어렵든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걸려 있든 언제나 고객에게 하루에 이십오 달러를 지급하라고, 추가로 필요한 금액은 결산 때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얼마가 나가든 일당 이십오 달러만 받는다. 사건을 맡기로 하면, 그는 나중에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64)


챈들러는 또한 그의 이전에 형성된 탐정소설의 클리셰를 거부한다. 즉 소설의 끝부분에서 탐정이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연이어 무엇을 찾아냈는지, 저기에서 무엇을 조사했는지, 마지막으로 결국 누가 어떤 수법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 감췄는지 같은 사건의 추리 과정을 경찰이나 피해자에게, 범인에게, 그리고 실제로는 덜 똑똑한 독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챈들러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말로가 만나는 일들을 독자가 따라가다 마지막에 스스로 단서를 이어 추리 과정을 풀길 기대한다. 단순한 세부 사항은 독자에게 넘겨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하도록 해도 된다. 전체 줄거리란 결국 일련의 범죄를 일으킨 은혜와 원한과 애정과 복수이고, 이 부분은 말로가 분명하게 밝힌다. 사실상 인간관계와 동기에 대한 통찰에 기대어서야 말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고, 말로와 그 배후에 있는 챈들러라 할지라도 반드시 범죄 과정의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71-2)


3 탐정추리의 곤경을 돌파하다


『장미의 이름』 이전의 에코는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약간 이름 있는 기호학자이자 중세사가였다. 현대 기호학은 기독교 신학의 성상학聖像學, iconography에서 연원한 부분이 있다. 기독교 문화에는 수많은 성상聖像, icons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것이 십자가 위의 예수와 성모상이라는 사실은 우리도 안다. 그러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의 옛 교회를 한 바퀴 돌다 보면 다양한 그림과 장식 문양, 각종 형태의 기물이 깊은 인상을 주어 절로 발을 멈추게 한다. 이 모두가 넓은 의미의 ‘성상’이며, 각각 대표하는 의미가 있다. 바꿔 말하면 모두 의미를 지닌 기호다. ‘성상학’은 성상에 담긴 상징 의미, 역사와 변화, 상징과 상징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에코는 이런 학문 기초를 가지고 자신의 탐정추리소설을 14세기인 1320년대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 역사상 ‘대분열’의 재난이 일어났던 시기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서로 싸우는 기괴한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였다. 91)


소설은 우리에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윌리엄이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에 간다고 말한다. 이 설정은 소설의 시작부터 충돌과 긴장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낸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클뤼니 개혁’ 이후 수도원 규율을 명확히 세운 조직이다.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사의 생활, 예컨대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성서를 읽고, 몇 시에 노동을 하고, 묵상을 하는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그리하여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유럽 각지에 방대한 수도원 체계를 형성했다.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를 계승하며, 이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세속의 모든 재산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 베풀며 전도했고 일생의 거의 대부분 동안 회색 수도복 한 벌 외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그가 보인 생활상의 모범이 당시 기독교회를 놀라게 하면서 성인의 자리에 올랐다.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는 윌리엄처럼 사방을 떠도는 생활을 했다. 93-4)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한 명이 웅장한 건물, 수도원 소유의 장원莊園, 안정된 식량 공급과 전속 공인, 하인이 있는 대규모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은 윌리엄에게 재부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윌리엄이 속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념에 은근히 도전하고, 그들이 세속의 아름다운 사물을 거부하는 태도를 물으며, 그들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신의 가장 정밀하고 신묘한 뜻과 권위를 교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도원이 보유한 재산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진귀하며 유명한 것이 책, 커다란 장서관에 보관된 신화와도 같은 풍부한 장서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들을 소장함으로써 스스로 기독교의 지식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윌리엄은 14세기의 진보적 인물이다. 그는 윌리엄 오컴, 로저 베이컨 등을 통해 새로 발전하는 논리 사고를 읽고 받아들이며, 여기에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남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94)


수도원의 도서관은 악령이 지키는 듯 금지된 곳이다. 왜 이런 도서관이 있는 걸까? 도서관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윌리엄의 믿음과 반대된다. 그들은 책 속에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진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책을 통해 신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은 믿지만 사람에게 책의 지식과 진리를 평가할 능력과 자격이 있음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 책에 기록된 것이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현실의 현상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믿는다. 한쪽에는 지식이 세계에 대한 조사, 연구, 탐색, 귀납에서 온다고 보는 윌리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수도원 정신이 있다. 그들은 지식이 신에게서 오고, 책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본다. 뒤집어 보면, 잘못된 지식이나 잘못된 방식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영혼은 타락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이 반드시 엄중하게 관리되어야 하고 쉽게 개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95)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쓸 무렵 기호학은 서구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기호학과 밀접하게 호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도 나타났다. 기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은 기표와 기의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여, 기표와 기의를 우연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으로 약속된 관계로 환원하는 데 있다. 우리가 ‘개’라고 말하는 동물과 ‘개’라는 이름 사이에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개’라는 동물에 다른 이름을 붙이며, 우리도 ‘개’를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로 가득하다. 우리는 기표를 기의로 오해하고 이름을 본질이라고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런 오해를 운용하고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형식과 내용을 나누고 우리에게 형식에 속지 말라고 알려 주다가도 어떨 때는 우리가 어떻게 형식이 오도한 함정으로 빠지는지 작정하고 비웃기도 한다. 98)


『장미의 이름』의 「서문」을 쓴 작가는 현대인(우리는 당연히 저자 에코라고 추측한다)의 말투로 어떻게 1968년에 오래된 수고手稿를 찾았는지 말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인이 원고를 가져가 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통로를 통해 원고의 내용을 손에 넣는다. 이 「서문」은 대단히 꼼꼼하게 쓰여서 진짜처럼 느껴지며, 이어지는 14세기 이야기와 현재의 작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틀’을 잡아 주는 작용을 한다. 「서문」은 우리가 읽을 글이 소설가의 손끝에서 나온 허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졌으나 이제야 겨우 빛을 본 옛 수고라고 믿도록 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엄격한 학술 규칙에 맞춰 인용한 옛 문헌은 모두 에코가 지어낸 가짜다. 수고 역시 에코가 지은 이야기이고, 수고에서 옮겨 적은 척한 윌리엄의 사건 수사 과정 또한 당연히 에코의 창작이다. 빈 것은 채우고 찬 것은 비워, 우리가 기호에 대해 당연히 연상하는 것을 부수고 뒤집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사고다. 98)


4 추리소설 그 이상을 보여 주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의 개조開祖이자 오늘날까지 추격당해 본 적이 없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 일본 탐정소설의 추리 수법을 가져와 전쟁 후의 사회소설에 도입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태어나고 자라 전쟁의 광기와 잔혹을 겪었고, 전쟁이 가지고 온 파괴와 빈곤을 견뎌 냈다. 그는 날카롭게 전쟁 전후의 변화를 체득했다. 전쟁 전의 일본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저 부평초처럼 떠돌며 지낼 뿐 어떤 발전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일어나는 사회에서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전쟁 후 일본의 혼란과 모색 사이에서 일어난 사람으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느꼈으며, 사회파 추리소설을 창조해 시대가 그에게 준 것에 구체적으로 보답했다. 그는 추리를 미끼로 삼아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엄숙한 사회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심지어 강요했다. 115)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 범죄 동기는 범죄 사실과 똑같이 중요하며, 심지어 범죄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다. 추리에는 추측과 조사가 필요하고, 그에 따라 범죄 사건의 경과뿐 아니라 범인이 누구고 어떤 수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에서 도망치는지, 더욱 중요하게는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 추론해 내야 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올곧게 사건의 동기를 밝히는 길로 나아가며 그렇게 하고 나서야 사건을 종결짓는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발전한 특수한 서사 방식이 이후 사회파 추리소설에 전면적으로 계승되는데, 그 방식은 바로 사건 해결의 열쇠를 종종 범인의 동기에 숨겨 두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이 범인과 피해자의 일일 뿐이라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보내고 살아온 시대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의 소설로 일본인이 고개를 돌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압도적으로 몰아붙였다. 진정으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117)


미야베 미유키가 수십 권의 작품을 출간하기는 했어도 ‘국민 작가’로서의 정도를 보려면 『모방범』이 가장 훌륭하고 표준이 될 수 있겠다. 원서 단행본 기준 1,400여 쪽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 43명. 『모방범』을 읽고 토론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숫자다. 1,400여 쪽에 이르고, 43명의 인물이 움직이는 소설은 분명 한 가지 사건과 해결 과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 속의 놀라운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면모를 설명하고 묘사하고자 했다. 『모방범』은 전통 일본 사회에는 없었던 ‘거품 경제 이후’에야 나타난 새로운 현상, 전혀 다른 정신 상태에 대해 말한다. ‘거품 경제 이후’의 일본 사회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젊은이에게 어떤 준비도 시키지 못했다. 이 정신 상태의 출현은 거품 경제의 붕괴, 그러니까 오래 지속되리라 예측했던 번영의 급작스러운 정체 및 쇠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방향을 상당한 수준에서 주재했다. 122)


소설 『모방범』에서는 전지적 관점이 자주 쓰인다. 주요 등장인물 43명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에 43명의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43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보조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43명의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시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소설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분노하는지 보여 준다.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가 편하고 쉽게 얻은 수수께끼 풀이의 성취를 이후의 무거움으로 뒤집는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독자의 부담은 커진다. 미야베 미유키가 마쓰모토 세이초와 닮은 부분이다. 두 작가는 독서를 마친 독자가 산뜻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독자는 자신이 명탐정만큼 똑똑하다고 자축할 수 없고, 법망이 성글지만 촘촘하다는 단순한 믿음을 강화할 수 없다. 소설에는 결국 끝이 있으나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근심한다. 이 사건이 해결될까? 끝과 해결은 다른 문제다. 132)


그토록 많은 주요 인물이 병존한다는 말은 이 소설에 일반적인 의미의 ‘주인공’이 없다는 뜻과 같다. 『모방범』의 놀라운 특색은 이 작품이 주인공 없는 소설, 특히 추리하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추리소설에는 ‘추리로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주인공을 맡는다. 초기에는 홈스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똑똑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나중에는 말로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운이 없고 백배는 고통스러운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또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사건 조사와 추리가 자신의 일인 형사, 검사 혹은 검시관이 주인공을 맡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적당한 때에 나타나 우리에게 사건의 진상과 추리 과정을 알려 준다. 『모방범』에는 이런 주인공이 없다. 억지로라도 주인공을 찾자면, 범인이 탐정의 자리를 대신해 소설에서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 135)


미야베 미유키는 일부러 독자가 아미카와 고이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떤 악은 일정 정도에 이르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해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해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지 않음은 하나의 가치 태도다. 악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지만 어떤 행위의 한계선은 해석과 합리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 거부하도록 한다. 우리가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해석을 하면 이 사건 나름의 논리가 가진 의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경악과 혐오와 비난 또한 감소하게 된다. 아미카와 고이치가 지나온 삶의 역정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그가 어떻게 한 개인에서 악인으로 변했는지 쓰지 않은 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악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유지하고자 했고, 악이 가져온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다른 무엇에 섞이고 바래는 일 없이 똑똑하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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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기후적응 시대가 온다 - 종말로 치닫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김기범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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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구는 인류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은 지구가 아닌 인류 자신을 위한 행동이자 우리를 살리기 위한 행동일 뿐 지구를 위한 것도, 지구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더 이상의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전 세계적인 공조 체제를 마련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것. 둘째, 이미 온도가 올라간 상황에서 근미래에 닥쳐올 기후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적응 정책’을 펼치는 것. 이 책은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포함해 인류가 지금껏 노력을 기울여온 첫 번째 방향의 대응이 성공적이었는지 살펴본 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두 번째 방향의 대응책을 점검한다. 폭염, 해수면 상승, 전염병 발발 등 지금껏 우리가 마주해온 각종 기후재난의 형태를 실감 나게 소개하면서도, 우리가 왜 이러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크게 조명받지 못했던 기후적응 정책의 실태를 우리의 현실에 맞게 풀어내고자 한다. 14-5)


1부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인가


국제 연구 단체인 세계 탄소 프로젝트Global Carbon Project가 2023년 12월 5일 발표한 <2023년 세계 탄소 예산 보고서>에는 2023년 화석 연료 사용으로 배출된 온실가스가 2022년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세계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22년보다 1.1% 증가했고, 인간 활동으로 인한 총 온실가스 배출량은 409억t으로 분석됐다. 기상청이 2023년 6월에 발간한 <2022 지구 대기 감시 보고서>에 의하면 충남 태안군 안면도 기후변화감시소의 이산화탄소 배경농도는 425.0ppm을 기록했다. 2021년보다 1.9ppm 늘어난 수치다. 미국해양대기청NOAA이 측정한 2022년 전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배경농도도 417.06ppm으로 2021년 대비 2.13ppm 증가하며 역대 최고 농도를 기록했다. 불과 10~20년 전의 지구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빠르게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 중인지 짐작할 수 있다. 20-1)


최근 공개되는 시나리오들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예상보다 더욱 암울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2023년 12월 초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비영리 기후단체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이 공개한 전 세계 도시의 수몰 이미지가 그 사례다. 이 단체는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예측 결과와 지역별 고도 등을 종합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이하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에 따라 달라지는 각 도시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클라이밋 센트럴은 인류가 탄소 배출량을 급격히 줄여 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했을 때 각 도시의 모습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이 3도에 달했을 때 상승한 해수면은 많은 도시를 집어삼킬 것으로 예상했다. 안타깝게도 3도 상승폭은 이번 세기말 인류가 맞이할 수 있는 미래 가운데 비교적 밝은 미래, 장밋빛 전망에 속하는 편이다. 23)


<호주 보고서>는 특히 ‘찜통지구 Hothouse Earth’에 진입하는 문턱이 사실 2도보다 낮은 수치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찜통지구란 인류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더라도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를 배출해 기후변화를 증폭시키는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찜통지구’ 시나리오가 현실화된 상황에서도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은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는 인류가 예측했던 온난화 수준 이상의 상태를 향해 변화한다. 지구 지표면의 30% 이상에서는 극심한 건조지대화 현상이 발생한다. 남아프리카, 지중해 남부, 서아시아, 중동, 호주 내륙, 미국 남서부 전역 등에서는 극심한 사막화가 일어난다. 2도 상승폭의 온난화로도 10억 명 이상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되고, 인류 문명은 종말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10억 명이 기후난민이 된다는 것은 인류 사회의 상당 부분이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26-8)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내놓는 기후변화의 증거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을까?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생물종의 급격한 감소다. 인위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2024년 2월 12일 UN환경계획UNEP 산하 이동성야생동물보호협약(CMS)은 제14차 당사국총회를 열고 <이동성 야생동물의 세계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이동성 야생동물 중 44%가량의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성 야생동물이란 철새나 고래처럼 나라와 나라, 대륙과 대륙을 오가는, 이동 범위가 넓은 동물을 말한다. 보고서에는 이 협약에 등록된 1,189종 중 260종(22%)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520종(44%)은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분류군별로 가장 심각한 상태에 처한 것은 어류였다. 이동성 어류의 약 97%가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성 파충류의 멸종위기 비율도 70%에 달한다. 49-50)


2부 지구와 인간의 병적 증상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 저감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텍사스A&M대학 연구진은 2020년 5월 한민족과학기술자네트워크KOSEN의 《KOSEN리포트》 에 기고한 <코로나19와 기후변화> 보고서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증하는 ‘리바운드rebound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고, 이 예측은 실현되고 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인간 활동만을 중지함으로써 자연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더러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멸종위기를 맞은 동식물들을 방치하는 것은 인류가 저지른 원죄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일일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생태계와 우리 인류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향에 있어 자연의 회복력을 과신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이 스스로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자연 훼손을 줄이는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서 자연 스스로 회복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78-9)


과학자들은 인간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이용이 앞으로도 더 큰 위험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바이러스의 저수지’라는 별명을 얻은 박쥐의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 인간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 연구진은 2020년 국제학술지인 《이라이프eLife》 에 박쥐가 바이러스를 지니고도 생존할 수 있는 메커니즘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에는 인간의 박쥐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 박쥐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고, 이는 다른 동물들을 감염시킬 수 있는 분비물이나 배설물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추정도 포함돼 있다. 즉 인간이 동굴을 훼손하는 등의 교란 행위를 하면서 박쥐가 위협을 받게 되면 인간도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수공통감염병 역시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훼손하고, 해당 동물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된 사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직까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88-9)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미세플라스틱을 ‘크기가 100nm(나노미터, 머리카락 굵기의 500분의 1 정도) 이상, 5mm 미만인 플라스틱’으로 정의한다. 1차 미세플라스틱은 의도적으로 만든 미세플라스틱이다. 치약, 세안제, 화장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알갱이가 대표적이다. 2차 미세플라스틱은 플라스틱 제품과 파편이 풍화·마모되며 생긴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미세플라스틱 대부분은 2차 미세플라스틱이다. 자연 환경에 있는 2차 미세플라스틱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형태는 미세섬유다. 해양 심층수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미세플라스틱 쓰레기 역시 미세섬유다. 북극의 한대수역 심해에서 채취한 시료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의 대부분(약 95%)은 미세섬유였다. 비닐을 뜯거나 플라스틱 병의 뚜껑을 여는 매우 사소한 행동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류 모두는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시키는 문제에 있어 서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103-6)


미세플라스틱의 생태계 영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미세플라스틱 입자 자체가 미치는 물리적 영향이다. 대표적으로 미세플라스틱 섭취로 인한 영양 감소, 내부 장기 손상, 염증 반응 등이 있다. 체내에 들어온 미세플라스틱은 소화기 내부에 상처를 입히고, 소화 작용을 약화시켜 질병 발생률과 사망률을 높일 우려가 있다. 플라스틱 입자가 작을수록 더 위험하다. 입자가 작을수록 생체조직의 장벽을 통과해 혈관이나 모세혈관에 침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미세플라스틱의 화학적 영향이다. 미세플라스틱에 포함된 첨가제가 침출되면서 생물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플라스틱에 포함된 첨가제 중 비스페놀A, 프탈레이트 등은 대표적인 내분비계교란물질(환경호르몬)이다. 비스페놀A는 갑상선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고, 생식 독성과 발달장애 및 심혈관계질환을 유발하며 유방암과 전립선암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프탈레이트는 생식계 발달장애, 기형 등 다양한 인체 질환을 유발한다. 107)


현재 북극권에서는 세계 평균에 비해 적어도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기후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해빙, 즉 바다의 얼음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로, 해빙이 줄어든 만큼 늘어난 바다의 면적은 약 260만km2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태양광을 반사하는 얼음과 눈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북극권의 물과 토지가 흡수하는 태양에너지는 증가하고, 이에 따라 기온이 상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 ‘얼음-알베도 피드백ice-albedo feedback’이라고 부른다. 알베도는 지표면에서 반사되는 태양에너지의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북극권에서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영구동토永久凍土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북극권 해빙이 녹고 주변 지역을 덮은 눈이 사라지면서 태양열을 흡수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뿐 아니라, 광대한 넓이의 영구동토가 사라지면서 온실가스 중 하나인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114-5)


3부 피할 수 없다면 적응하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 역시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고, 적응의 필요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발표한 ‘주요 작물의 재배 한계선’을 살펴보면, 1980년대 대구에서 재배된 사과는 21세기 들어 경기 포천이나 강원 북부에서도 재배된다. 같은 기간 동안 녹차는 전남 보성에서 강원 고성으로, 무화과는 전남 영암에서 충북 충주로, 복숭아는 경북 청도에서 경기 파주로 재배지가 북상했다. 해수면 온도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따뜻한 바다에 살던 난류성 어류가 북상함에 따라 바다 생태계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난류성 어류인 전갱이는 월동지인 동중국해로 가지 않고 겨울에도 남해 연안에 머문다. 난류를 따라 남해에서 잡히던 멸치는 울릉도 근해에서 어획되고, 일본 혼슈 이남에 살던 다랑어는 울산 앞바다에서도 꾸준히 잡히게 됐다. 반대로 과거 서민들의 찌개거리였던 한류성 어류 명태는 1990년대 이후 남한 수역에서 ‘씨가 말라버린’ 어종이 되었다. 123-5)


유럽에서는 여름철 낮 최고기온이 35도에 이르는 이상고온을 ‘열파heat wave’라고 부른다. 영국의 비정부기구 영파운데이션Young Foundation의 보고서 <열파: 노인 복지에 있어 2003년 프랑스 열파의 영향>은 “노동인구가 휴가를 떠나고 사람이 없는 곳처럼 변한 마을에서 휴가를 갈 경제적 수단이 없는 이들, 특히 갈 곳이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을 폭염의 최대 피해자로 언급했다. 기후적응을 한답시고 무턱대고 에어컨을 사용하면 온실가스가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무더위쉼터’와 같은 사례는 도시의 각 가정이나 매장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사회복지 시스템의 차원에서 농어촌 지역이나 빈민·노인 등 사회적 약자층에 집중된 정책임을 감안해야 한다. 즉 인구가 밀집된 도시 공간에서는 에어컨 사용을 적극적으로 줄이면서 폭염의 직격탄을 맞는 농어촌 지역의 노인들에게는 에어컨 사용을 권장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잡힌 기후적응 정책의 방향일 것이다. 136-8)


기후변화로 인해 전 지구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당장 몰려오는 바닷물을 막을 방법은 제방밖에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상승하는 해수면이 언젠가는 제방의 높이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방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자연의 변화에 무리하게 맞서는 대신, 바닷물이 그대로 육지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는 역발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된 갯벌로 유명한 덴마크에서의 ‘바닷물 침수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연구진은 바닷물이 자연스럽게 해안 지역을 바꾸도록 두는 경우 제방을 쌓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물다양성이나 자연자원 측면에서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물에 잠긴 토양은 기후변화의 주원인인 탄소를 저장하는 기능도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해당 지역은 계속해서 자연적인 석호로 변해가고 있으며 더 많은 생물종이 나타나고 있다. 133-4)


물론 이 연구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뀔 위험이 높은 태평양이나 인도양의 섬나라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일명 ‘도서국가(모든 영토가 섬으로만 구성된 국가)’로 불리는 곳들은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도 선진국에게 강도 높은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요구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이 빨라지고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저지대 산호초섬에 인간이 살 수 없게 되는 시점이 60~70년 뒤인 21세기 말이 아닌 20~30년 뒤인 21세기 중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 하와이대학 마노아캠퍼스 등 공동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어드밴스》 에 2018년 4월 25일 게재한 논문에서 태평양 등 저지대 산호초섬 전체가 바닷물에 잠기지 않더라도 민물인 지하수에 바닷물이 섞여 들어가면 인간의 식수원이 사라질 것이라 내다봤다. 136)


뉴욕 맨해튼의 대규모 전시장 재비츠 컨벤션센터(이하 재비츠센터) 옥상에는 7ac(2만 8,328m2)에 달하는 옥상농장이 조성돼 있었다. 옥상농장에서 재배한 농작물은 재비츠센터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의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고, 주변 주민들에게 판매되기도 한다. 재비츠센터는 한국으로 치면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전시장 역할을 하는 건물로, 뉴욕 34~40번가 허드슨강 인근 6개 블록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런 거대한 건물의 옥상이 농장과 태양열발전시설로 탈바꿈한 때는 2014년이다. 옥상농장을 만든 결과 재비츠센터는 여름철엔 5~6도 정도 시원해졌고, 겨울철에도 5~6도 정도 따뜻해졌다. 그만큼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 옥상농장은 막대한 양의 빗물을 저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농장의 토양과 빗물탱크 등에 저장되는 빗물의 양은 연간 700만gal(2,649만 7,882L)에 달한다. 옥상농장이 많은 양의 물이 우수관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146)


4부 이미 닥쳐온 파국 앞에서


기온이 높고 습도는 낮은 경우나 습도가 높고 기온은 낮은 경우에 비해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인간의 생존률은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MIT 연구진은 2018년 7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에 빠르면 2070년쯤 중국 북부 화베이평원 지역의 습구온도가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연구진은 인류가 현재 추세대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경우를 뜻하는 ‘RCP 8.5 시나리오’를 적용할 경우 화베이평원의 평균 습구온도가 빠르면 2070년쯤 32.6도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칭타오, 상하이, 항저우 등의 습구온도는 35도까지 오를 수 있다고도 추측했다. 습구온도 35도는 건강한 사람도 야외에서 6시간 이상 버티기 힘든 수준이다. 미국 럿거스대학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계속 진행된다면 2100년쯤에는 약 12억 2,000만 명이 33도 이상의 ‘습구흑구온도WBGT 지수’에 노출될 것이라는 논문을 2020년 3월 학술지 《환경연구회보》 에 게재했다. 157)


# ‘습구온도’란 온도계를 증류수에 적신 수건으로 감싼 상태에서 측정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온’은 건구온도로 마른 상태의 온도계로 측정한다.


습구흑구온도 지수는 온열질환을 유발하는 4가지 환경 요소인 기온, 습도, 복사열, 기류를 반영한 수치다. 습구흑구온도가 33도가 넘으면 건강한 사람도 온열질환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연구진은 40개의 기후 시뮬레이션을 분석해 온난화된 지구에서 고온다습한 환경이 얼마나 증가할지 추정했다. 연구진의 추산에 따르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가 1.5도 상승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받는 인구는 약 5억 800만 명, 2도 상승할 경우는 7억 8,900만 명, 3도 상승할 때는 12억 2,000만 명에 달했다. 2020년 습구흑구온도가 33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환경에서 거주하는 세계 인구는 약 2억 7,500만 명이다. 고온다습한 날씨는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특히 폭염은 자살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진은 2018년 7월 《네이처》 자매지인 《네이처 클라이밋체인지》 에 폭염이 자살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57-8)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기후악당’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은 2016년의 일이다. 2016년, 모로코에서의 당사국총회(COP22) 개막을 하루 앞두고 국제연구기관인 기후행동추적은 한국을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기후악당Climate Villain’ 국가라고 지목했다. 여기서 기후악당 국가는 기후변화 대응에 무책임하고 게으른 국가를 의미한다.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노력은 ‘기후변화대응지수 CCPI’에서도 최하위권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기후변화대응지수는 온실가스 배출, 재생에너지, 에너지 소비, 기후정책 등 4가지 부문으로 나눠 평가하고, 점수를 합산해 국가별 종합점수를 매긴다. 한국의 순위는 2016년에는 조사 대상 58개국 가운데 54위, 2020년에는 61개국 가운데 58위, 2021년에는 60위, 2022년에는 57위라는 매우 낮은 순위를 차지했다. 가장 최근 평가인 2023년에는 전체 평가 대상 67개국 중 64위로 순위가 4단계 하락했을 뿐더러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산유국뿐이었다. 160-1)


지금의 몽골을 상징하는 드넓은 초원과 사막은 사실 과거에는 겨울철마다 많은 눈으로 뒤덮이고, 끝도 없는 설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보통 10월 말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12월에는 초원과 사막 대부분에 눈이 쌓였다. 이 눈은 황사의 발생을 막아주고, 녹은 뒤에는 유목민과 가축의 소중한 식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평균보다 적은 양의 눈이 내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특히 고비사막이 있는 몽골 남부 지역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눈이 쌓이지 않거나 1.0~5.0cm 정도의 적은 양만 쌓였다. 이렇게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겨울은 다수의 몽골 유목민을 환경난민으로 만들고 있다. 눈이 내리지 않으면 가축에게 먹일 풀과 물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소, 양, 말 등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잦아진다. 가축이 전 재산인 유목민들은 살 길을 찾아 도시로 갈 수밖에 없다. 전 재산을 잃은 수십만 명의 유목민이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에 모여 일종의 빈민가인 게르촌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다. 166-7)


몽골이 겪고 있는 기후변화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모래폭풍이다. 몽골에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어나면 높은 확률로 황사가 한반도를 덮치게 된다. 황사는 발원지인 몽골에서 고온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눈 덮인 면적이 작을 때 발생한다. 여기에 저기압이라는 조건까지 갖춰지면 모래먼지가 상승기류를 타고 3~5km 상공으로 올라간 후 북서풍을 타고 한반도로 날아오게 된다. 황사 자체는 모래먼지일 뿐이지만 황사가 이동할 때 중국 북부의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중금속과 미세먼지 등 오염물질을 머금게 되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국립환경과학원 자료를 보면 2009~2011년 한국에 온 28차례의 황사 중 13차례(46.4%)는 중국 공업지대를 지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오염물질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의 황사는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확인될 만큼 오래된 자연현상이다. 황사가 불어올 때는 흔히 ‘PM10(지름 10㎛ 이하)’이라고 부르는 미세먼지 농도가 크게 상승하게 된다. 168)


에필로그: 아직 희망은 있다


오존은 산소 원자 3개로 이뤄진 기체다. 지상 20~25km 상공의 성층권에 형성돼 있는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을 차단해 생태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반면 지표에서 오존은 건강에 해를 끼치는 물질이 된다). 오존층이 감소하고,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늘어나면 피부암, 백내장 등의 발병률이 높아진다. 미국 환경보호청의 연구 결과 오존이 1% 감소하면 백내장 환자가 최대 0.6%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존층 파괴의 원인 물질로는 1985년 당시 냉장고와 에어컨, 헤어스프레이 등에 널리 사용되던 냉매인 염화불화탄소(프레온)CFC가 지목됐다. 자외선과 염화불화탄소가 만나 발생하는 광화학 반응으로 염화불화탄소가 분해되면서 염소 원자가 생기고, 이 염소 원자가 오존 분자를 분해시키면서 오존층이 파괴되는 것이다. 염소 원자 하나는 오존과 반응한 뒤 원상태로 돌아와 다른 오존 분자들을 산소 원자로 분해시킨다. 염소 원자 1개는 오존 분자 10만 개를 파괴한다. 183)


충격을 받은 국제사회는 발 빠르게 움직여 2년 뒤인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를 채택해 염화불화탄소 생산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몬트리올 의정서’ 체결을 통한 오존층 회복 노력은 국제사회가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몬트리올 의정서’에는 세계 197개국이 가입했으며 한국은 1992년 2월 가입했다. 이처럼 전례 없는 국제사회 전체의 환경 보존을 위한, 실은 인류 생존을 위한 노력 덕분에 극지방의 오존구멍은 점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 WMO는 2018년 11월 남극과 북극의 오존구멍이 2060년쯤에는 완전히 복원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오존구멍이 2000년대 들어 회복되고 있으며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약 40년 뒤에는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반구와 중위도의 오존구멍은 이보다 빠른 2050년쯤이면 완전히 복원될 것으로 예상했다. 183-4)


오존층 회복에 대해 밝은 전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염화불화탄소 외에도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질의 배출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염화불화탄소의 불법 배출도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18년 6월에는 국제사회가 꾸준히 저감 노력을 기울여온 염화불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가 크게 늘어나는 일도 발생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중국 산둥성 싱푸 지역의 공장들에서 염화불화탄소를 사용 및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세계기상기구 역시 2018년 11월 오존층 회복 전망을 내놓으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염화불화탄소 가운데 삼염화불화탄소CFC11의 불법적인 배출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MIT 연구진은 클로로포름에 대한 연구 결과가 인류의 오존층 회복을 향한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경고라고 강조했다. 오존층 회복을 늦출 수 있는 클로로포름 같은 물질들에 대한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85-6)


오존층 파괴로 인류 일부와 생태계가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인류 전체의 노력으로 오존층이 회복되긴 했지만, 염화불화탄소와 클로로포름이 여전히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지구 전체에서 시기가 빠르든 늦든, 기후위기는 이전에 없었던 재난을 일으킬 것이고, 또 일으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은 —‘완화’와 ‘적응’을 모두 포함해서 —너무 느리고, 부족해 보인다. 인류 전체를 위협할 재난이 더 자주 일어나고, 더 큰 피해를 입힐 때 인류는 결국 전시 동원 체제에 준하는 ‘기후위기 동원 체제’를 가동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장밋빛 전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대책이 시행됐을 때, 인류 전체의 노력은 오존층 회복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예상보다 더 빠른 성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십 년 후를 향한 이 작은 외침이, 조용한 경고가 오늘의 인류와 미래 세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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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 근대의 빛과 그림자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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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카트린 드 메디시스, 프랑스 흑역사의 주인공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았던 카트린은 신교도들에게 정치적 관용을 허락하는 내용의 생 제르맹 칙령을 반포했다(1562). '소위 새로운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여, 공개된 장소가 아닌 실내에서 예배를 보는 것은 허락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칙령을 공식화하려면 파리 고등법원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 기관을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접한 가톨릭 측의 공분을 샀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푸아시 콜로키움이 개최되고 몇 달 후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가톨릭 측에 의한 신교도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기즈 가문의 지도자인 프랑수아 공의 군사가 샹파뉴의 바시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수십 명의 신교도를 발견하고 살해한 것이다. 그전에 신교도들이 기즈 공을 비난했던 게 화근이었다. '바시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대개 첫 번째 종교전쟁으로 본다."(32-3)


# 1572년 8월 24일, 〈생 바르텔레미 학살〉 발생


"1589년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는 법률상으로 국왕이 되었지만 국민 대다수가 그를 완강히 거부한 탓에 파리 입성을 호시탐탐 노리며 근교를 배회했다." "그가 선택한 최후의 결정타는 자신의 개종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인 데 반해 신교도 왕이라는 게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국왕은 승리를 거두고 일단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 신교도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수습한 것이 1598년 반포된 낭트 칙령이다. 이 칙령은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되 신교도들은 예배의 자유를 누리며, 그들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왕국 내 일부 신교도시들을 안전지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신·구교 모두 이 칙령에 대해 불만이 컸지만, 그렇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앙리 4세는 카트린의 정책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왕이 된 후 선정을 펼쳐 프랑스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왕이 된 앙리 4세도 결국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했다."(53-4)


2장 침묵공 빌렘, 네덜란드 독립의 영웅


"정치적인 면에서 네덜란드는 아직 중세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든지 찬성하지만 나라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넘어 전국 단위로 사고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근대국가로 발전해 나아가려던 이 시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지지하는 '전국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바로 빌렘이었다." "그가 설파한 것은 국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평화였다. 즉, '가톨릭' 강요에 저항해 '신교'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가톨릭만 강요하는 '편협성'에 저항해 '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 마르가레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만일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펠리페 2세에게는 빌렘과 같은 사고의 유연성이 없었다. 신교에 대한 용인은 비겁한 짓이며, 이단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73-4)


"1581년 전국의회는 '철회령'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각 주의 위원회가 주권을 가지며 주의 통치자는 주에서 부여한 권한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연맹에 대한 충성 서약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신민이 자기들까리 협의하여 국왕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지배자가 아니니 우리의 충성을 철회하노라'고 선언한다는 것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들은 나중에 미국 독립선언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 세력이 오라녀 가문을 열렬히 찾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냐는 오라녀 공 빌렘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를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1584년에 발타자르 제라르라는 프랑슈-콩테 출신의 가톨릭 광신도가 빌렘을 암살했다. 빌렘은 세계 최초로 총으로 암살된 정치인이 되었으니, 말하자면 암살도 점차 근대화되고 있었다."(89-90)


3장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주의 실체를 파고든 불굴의 과학자


"1604년 10월 15일,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초신성이 발견된 것이다. 사실 1572년에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같은 현상을 확인했었다. 이 현상은 고전적인 우주 모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체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천체는 어디서 보더라도 시차視差, parallax(관측 위치에 따른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가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현상이 달과 같은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일어났다는 의미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의 낙하운동만이 아니라 우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론이 아닌 실제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광활하고 먼 우주 공간을 맨눈으로 본들 얼마나 관찰하겠는가. 바로 이때 등장한 결정적 도구가 망원경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처음으로 우주의 속살을 들여다본 인간이 되었다."(104-5)


"갈릴레오는 1625~1630년에 걸쳐 쓴 《밀물과 썰물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만큼이나 그럴듯하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1633년에 열린 종교재판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그는 일곱 명의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지동설이라는 이단의 주장을 편 것을 철회한다는 참회의 말을 했다." "갈릴레오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으나 감옥 대신 그의 친구이자 시에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의 집에서 머물도록 허락해주었다. 대주교는 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가끔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1633년 12월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판시했다. 말하자면 가택연금으로 최종 결정난 것이다." "갈릴레오는 생의 마지막 시기까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라고 주장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과학과 종교는 표면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나 사실은 같은 진리의 두 측면이라는 게 그가 줄곧 견지한 태도였다."(126, 129)


4장 독일의 악마들, 마녀사냥 이야기


"악마론에 정통했던 프리드리히 푀르너는 역사 연구에 매진한 후 매우 특이한 결론을 내렸다. 사악한 마법을 옹호하고 또 마녀 색출을 방해하는 중요한 세력이 신교도라는 것이다. 루터파와 칼뱅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방에서 악마의 추종자들이 날뛰고 있으며, 갈수록 그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마녀사냥을 가톨릭과 신교 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의 적을 깨부수면 곧 그보다 더 사악한 적이 등장하여 지금의 정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금이 신과 악마 사이에 마지막 대결이 펼쳐지는 최후 단계다. 그러니 시 당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맡긴 사명에 따라 세상을 파괴하는 암흑의 세력들을 척결하는 데에 주저 없이 나서야 한다. 마녀는 말세에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인류의 구원을 저해하는 악마의 편이며, 더 이상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이같은 주장은 가공할 고문과 처형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맞물려 정당화되었다."(155-6)


"마녀사냥이 종식된 결정적 계기는 사법개혁이었다. 마녀재판도 엄연히 사법재판의 한 종류다. 그러니 더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재판 제도가 자리 잡으면 마녀재판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비판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프리드리히 슈페는 고문을 비판하는 책 《범죄의 담보》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힘의 흐름을 이어받아 결정적으로 마녀재판을 끝장낸 동력은 근대 국가의 발전에서 나왔다. 예컨대 파리 고등법원은 지방법원에서 마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의 항소심에서 형을 감면하거나 아예 무죄판결을 내렸다. 무지몽매하거나 광기에 찬 지방 권력자가 저급한 수준의 사법 제도를 악용해 극단적 힘을 행사하려 할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전국 단위의 사법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훨씬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해가는 중앙의 사법 제도가 지방의 사법 제도를 통제하면서 마녀사냥의 광기도 수드러들었다."(165-7)


5장 루이 14세, 세상을 암울하게 만든 태양왕


"(마자랭 혹은 콜베르 같은) '재정가financier'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사적인 방식으로 조달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귀족, 성직자 등 지방 유지들에게서 거액을 모아 국가에 융통해주었다. 중앙정부로서는 세금을 거두는 게 워낙 힘든 상황에서 당장 거액을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그 대신 재정가들은 국가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리를 부여받아 빌려준 돈보다 더 큰 액수의 돈을 거둠으로써 고수익을 얻었다. 국가재정 체계를 이용한 짭짤한 돈벌이였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관료제가 정착된 듯했지만, 실제로는 사당私黨 혹은 파벌 싸움에 좌우되었다." "권력자는 자신의 부하들을 지켜주고 부하들은 권력자에게 충성을 바친다. 국사國事의 중요한 부분이 이런 사적 관계망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절대주의 국가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국왕이 나라 전체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고 지방의 신민들이 철저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협력과 균형을 특징으로 지녔다."(181)


"루이 1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1664년부터 일부 지방에서 귀족 조사 사업을 시작했고, 곧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자신이 진짜 귀족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귀족의 서열과 작위를 체계화했다. 왕실 직계가족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그다음은 방계가족, 그다음은 공작 등의 순으로 서열화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국왕의 인증을 받아야 진짜 귀족이고, 국왕의 재정에 기꺼이 돈을 대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정에 줄을 대면 고위직을 얻게 된다. 모두 국왕을 흠모하고 국왕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태양왕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어갔다. 누구나 태양왕이 거처하는 베르사유궁으로 가서 한 자리 잡고 한 줄기 햇빛을 쬐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국왕은 지상 최고의 권력자처럼 행세하고, 입궐을 허락받은 귀족은 그런 국왕을 마치 신처럼 떠받는 척했다. 베르사유궁은 절대주의를 표현하는 종합 예술 무대였다."(186-7)


"점차 통치에 자신감이 붙은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7일,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내용의 퐁텐블로 칙령을 공포했다. 남아 있던 신교 교회를 파괴하고, 신교 예배를 금지했다. 목사들에게는 15일 내에 국외로 떠나라고 명령했고, 이를 위반하면 갤리선에 태워 노를 젓게 했다. 목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변호사 자격증을 주는 유인책도 썼다. 신교도들이 재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도 금지했다. 해외로 가되 재산은 남겨놓고 떠나라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압박을 견디다 못해 랑그도크, 푸아투, 베아른 등지에서 신교도들이 가톨릭으로 집단 개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85만 명 정도(당시 프랑스 인구 2,200만 명 중 3.8퍼센트)였던 신교도들 중 많은 수가 신교 국가로 이주했다. 특히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로 많이 갔고, 그다음으로는 스위스와 브란덴부르크 등지로 이주해갔다. 이것이 프랑스 경제를 결정적으로 망친 요인이라고 하면 지나친 속단이겠으나,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198-9)


6장 레오폴트 1세와 카를로스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지도를 바꾸다


"1683년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를 거쳐 빈을 침공했다. 남부 오스트리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가공할 대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레오폴트 황제는 멀리 파사우로 몸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황제가 몸을 피한 건 잘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주도하여 주변 국가들이 참전을 결정했다. 폴란드의 소비에스키가 2만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왔고, 그 밖에 작센, 바이에른, 바덴 등도 참여했다. 훗날 신성동맹이라 불리는 연합군 전원이 말을 타고 돌진한 역사상 최대의 기병 공격으로 오스만군이 무너졌다." "결정적 패배를 겪은 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지역은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군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격렬하게 싸우는 격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몇 차례에 걸쳐 유럽에 패배한 걸 보면, 군사적으로 정점을 지나 쇠락기로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중동부 유럽은 점차 합스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229-32)


"1700년 11월 1일,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이제 합스부르크 세력은 유럽 전체를 제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중세적 꿈을 영원히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지역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서쪽의 유럽 중심부로 확대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남동쪽으로 세를 키워갔다.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와 슬라보니아를 차지하고,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와 펠로폰네소스를, 폴란드는 포돌리아를 회복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얻은 땅이 합쳐지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규모는 두 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핵심 지역은 이제 서쪽의 콘스탄츠 호수에서 동쪽의 군사 변경 지역까지 거의 5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 다양성이 커졌다. 루터파 작센인, 유대인, 칼뱅파 헝가리인, 정교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이 신성로마제국 안에 공존했고, 또 보스니아와 트라키아에 학살에서 살아남은 상당수의 무슬림이 남았다."(246) 


7장 베르니니, 영원의 도시 로마를 조각한 예술가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여, 베르니니에게 교황청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무를 맡겼다. 베르니니는 1629년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성당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종교개혁으로 신·구교 간 갈등이 극심하자, 가톨릭 측은 자체의 개혁('가톨릭 종교개혁' 혹은 예전 용어를 빌리면 '반동 종교개혁')을 통해 스스로 교리와 조직을 정비했고, 17세기에 이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였다. 바로크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단(신교)'이 패배하고 가톨릭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이를 장대하게 확인하는 예술이다. 여기에서 신교와 가톨릭 예배 장소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신교의 경우 원칙적으로 기도와 설교의 공간이어서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하다. 반면에 가톨릭은 천상의 세계를 재현해보이려는 듯 지극히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17세기 로마는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였고, 그 선두에 베르니니가 있었다."(259-61)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북유럽을 호령했다. 그의 치세에 스웨덴은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다섯 살 때 부왕이 전사하여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어서, 여장부 스타일인 크리스티나는 14세부터 각료회의에 참석하더니, 18세에 섭정을 끝내고 정식으로 즉위했다. 정치와 외교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외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 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중 한 명이 데카르트다. 그러던 그녀가 27세에 갑자기 양위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비밀이 하나 있으니 그녀가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유럽 최강의 신교 국가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의 양위는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가톨릭 신앙의 승리로 해석했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온 크리스티나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중에는 스카를라티와 코렐리 같은 음악인들도 있지만, 이들보다 더 사랑은 받은 이는 베르니니였다."(277-9)


8장 존 로, 탐욕과 부패의 거품을 일으키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했다.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은 참담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프랑스 재정은 문자 그대로 파산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보자는 심경으로 존 로를 불러들였다." "그의 사업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그가 늘 견지해온 생각대로 토지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금고 안에 보관한 귀금속의 가치만큼 화폐를 발행하면 너무 제한적이다. 화폐량을 늘리려면 다른 재원이 필요한데,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토지다. 다만 예전 주장과 다른 점은 국내 토지가 아니라 해외 토지를 개발하여 담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것은 앙투안 크로자라는 사람이 설립했다가 현재는 지지부진한 루이지애나 회사였다. 1717년 9월 5일, 존 로는 북미 지역의 토지 개발에 관한 특권과 캐나다 비버 가죽 거래의 특권을 가진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일명 '서양회사Compagnie d'Occident'라고 했는데 세간에서는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라고 불렀다."(297-9)


"두 번째는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회사의 자본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존 로의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사기성 높은 아이디어가 빛나기 시작한다. 한 주에 500리브르인 주식 20만 주를 발행하여 1억 리브르의 자본금을 모으되, 투자자들은 현찰이 아니라 정부 채권으로만 이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액면가의 4퍼센트 이익을 보장했다. 당시 국채는 액면가의 약 30퍼센트로 거래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액면가 100만 원이던 국채가 '똥값'이 되어 실제 시세는 30만 원밖에 안 되는데, 이것으로 새로 설립하는 회사 주식을 사면 100만 원 제값을 다 쳐주고, 게다가 매년 4만 원의 이익까지 보장한다! 사람들은 귀가 솔깃했다. 울화통 터지는 국채를 하루빨리 처분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국채 소유자들이 대거 주식으로 갈아탔고, 그 결과 루이 15세 정부가 갚아야 할 부채의  20퍼센트가 정리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299-300)


"존 로는 거침없이 사업 규모를 확대해갔다. (동인도와 서인도 지역 회사를 합병한) 소위 '인도회사'는 1719년 6월에 두 번째 주식 발행을 했다. 한 주당 500리브르의 주 5만 주를 10퍼센트 프리미엄을 붙여 모집했다. 이번에는 1차 모집 때와 달리 채권이 아니라 금이나 은행권으로만 투자할 수 있었고, 게다가 매우 특이한 투자 방식을 규정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 100단위를 산 사람이 새 회사 25단위의 주식 매입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 회사의 4주를 가지면 '딸' 회사의 한 주를 살 수 있다. 욕심에 눈먼 투자자들은 기꺼이 '어머니'와 '딸'에 투자했다." "더구나 주식 매입 대금을 20개월에 걸쳐 분할하여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소액만 가지고 주식 매매에 뛰어든 사람도 많았다. 주가가 오르자 투자자들은 큰 수익을 올렸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 함부르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사람들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버블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305-6)


"마침내 버블이 터졌다. 주식을 팔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주식 가치와 화폐 가치가 동시에 급락했다. 1720년 7월에 왕립은행에서 은행권을 정화로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리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비비엔 거리에 위치한 은행 앞에 1만 5,000명이 운집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10여 명이 압사하는 일도 있었다. 11월에 지폐 유통이 중단되었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특히 단기 투기 수익을 노리고 '단타 매매'를 하느라 회사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사람들은 주식을 몰수당했다." "존 로 체제의 실패는 많은 투자자의 돈을 날린 단기간의 피해로 끝난 게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주식이니 은행이니 하는 것에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오랫동은 금융 제도의 발달을 지연시킴으로써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은행과 주식 제도 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가. 사회·경제 전체가 신용을 잃었으니 경제성장에 이보다 더 큰 악재는 없었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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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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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잔 다르크, 성녀인가 마녀인가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힌 잔 다르크는 매우 불리한 법정 싸움을 해야 했다. 잔다르크는 스스로 자신이 이단과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피고는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중세 신학에 어두운 우리야 언뜻 문제의 성격조차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은 웬만한 신학자라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난제다. 만일 자신이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답하면 종교적 오만의 죄에 걸려 이단 판정을 받는다. 신학적으로 누구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는 것이 된다. 잔 다르크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그야말로 멋진 신의 한 수를 보였다. 〈만일 내가 신의 은총 안에 있지 않다면 신께서 내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만일 내가 신의 은총 안에 있다면 계속 그 상태로 남게 해 주소서.〉 이 대답을 듣고 재판정 전체가 〈지극히 놀랐다multum stupefacti〉라고 기록하고 있다."(44-6)


"잉글랜드는 샤를 7세가 이단으로 화형 당한 여자에게 이끌려 대관식을 치렀으니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1431년 12월 16일 10세의 헨리 6세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데리고 가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운 뒤였다. 1435년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 대신 프랑스 왕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군은 1437년 파리, 1449년 루앙을 회복했고, 1453년 백년전쟁을 종결지었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잔 다르크의 복권 작업이 이루어졌다. 1456년 재심 재판을 하여 잔 다르크가 이단이라는 이전 판결을 뒤집었다. 첫 번째 재판이 정치적이었듯이 이번 재판도 당연히 정치적이었다. 마녀의 도움으로 프랑스 왕이 대관식을 치렀다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19세기에 이르러 민족주의가 불타오르면서 프랑스 교회가 잔 다르크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 노력이 20세기에 결실을 거두어 1920년 5월 9일 교황 베네딕트 15세가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축성했다."(50-1)


2장 부르고뉴 공작들, 유럽판 무협지


"백년전쟁 당시 3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오가면서 변화무쌍한 정치와 외교를 벌였다. 책략의 대가인 선량공은 1435년에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왕실로 동맹을 바꿔 아라스 조약을 맺고 국왕에게 파리를 내주었다. 그는 샤를 7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 대신 샤를 7세는 (선량공 필리프의 아버지인) 용맹공 장의 암살자들을 처벌하기로 약속했다. 필리프는 프랑스 왕실과 다투기보다는 네덜란드 방면으로 영지를 확대하는 것이 더 긴급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마무리되었다. 국왕이 정치력을 되찾고 군대를 정비하면서 그동안 내내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군이 도시를 하나하나 탈환해갔다.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서남부의 가스코뉴 지역을 상실한 후 이를 되찾기 위해 벌인 카스티용 전투(1453)가 사실상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다. 잉글랜드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대륙 내 영토를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꿈을 사실상 접어야 했다."(75)


"왕이 되기를 욕망했던 4대 부르고뉴 공작 담대공 샤를의 문제는 자신의 영토들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과제는 로렌 지방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샤를은 1475년 한때 로렌 공작령의 수도인 낭시를 얻었지만 다음 해에 스위스로 진군했다가 스위스군에 연이어 패배했다. 우선 그랑송에서 패배하여 대포와 거대한 재산(그중에는 은으로 만든 욕조도 포함되어 있다)을 버리고 도주했다. 다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뮈르텐(모라)을 공격했으나, 로렌의 기병과 스위스 보병에게 또 패배했다. 그해 10월에는 낭시를 다시 잃었다. 4대 선친부터 꿈꿔왔고 샤를 자신으로서도 필생의 과업인 영토 통합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낭시를 차지해야만 했기에 겨울 혹한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행군하여 낭시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것이 마침내 파국을 몰고왔다.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는 목숨을 잃었다. 독립왕국을 건설하려던 부르고뉴 가문의 4대에 걸친 야심은 이로써 종말을 고했다."(86-7)


3장 카를 5세, 세계제국을 꿈꾸다


"카를은 친할아버지가 황제이니 합스부르크 왕실이 소유한 중동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게 되고, 친할머니는 부르고뉴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부르고뉴의 마리)여서 유럽 중심부의 알짜배기 땅들을 받게 된다. 외가 쪽으로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가 외조부모이므로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광대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물려받는다. 이 모든 유산이 한 인물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로마 제국을 넘어서는 세계 제국 건설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자면 우선 프랑스를 복속시켜야 한다. 물론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도 차지해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루터파 등 신교 세력을 억압하여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고 나서 힘을 모아 기독교 신앙의 적인 오스만 제국을 누르고, 더 나아가서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식민지를 굳건히 한 뒤 나머지 세계를 마저 복속시켜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꿈인가. 그리고 얼마나 허황된 계획인가."(99-100, 109)


"신은 카를 황제에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는 않은 것 같다. 1550년 새 교황 율리우스 3세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문제도 다시 혼란에 빠졌다. 독일에서는 루터파에 대한 호의가 늘어나던 반면에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에 대한 저항은 커져갔다.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로렌 쪽으로, 오스만 제국의 육군은 크로아티아 방면으로, 해군은 이탈리아 연안으로 공격해왔다. 카를 5세는 마지막 힘을 모아 메스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운명의 여신도 여자야. 늙은이는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는 이렇게 자조했다. 이제 그의 나날은 확실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종교적 타협안도, 신·구교 양측이 모두 반대해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어정쩡한 타협에 이르는 데 그쳤다. 각 지역 영주가 가톨릭이든 루터파든 하나를 정하면 그곳 신민들은 영주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을 옹호하겠다는 황제의 평생의 종교정책 역시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27-8)


4장 헨리 8세, 근대 영국을 출범시킨 호색한


"치세 전반기의 헨리는 '르네상스 군주'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예술과 문예를 보호하고, 여러 악기 연주에 능했으며, 용맹한 기사를 자처하며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헨리의 대외 정책은 유럽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대립이 근대 유럽의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인데, 이때 잉글랜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처럼 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맞추는 것이 영국 정책의 큰 흐름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헨리는 처음에는 카를 5세 편을 들었으나, 파비아 전투(1525)에서 프랑수아 1세가 포로가 되고 전세가 신성로마제국 쪽으로 기울어지자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 후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자(1527) 이번에는 교황을 편들고 나섰다. 이 마지막 일은 균형외교 정책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상 문제도 고려한 결과였다."(141-3, 148)


# 헨리 8세의 신상 문제 : 헨리는 1528년부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려 했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수장령首長令, 1534년)이 되어 성공회를 만든다.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국왕 개인의 존재가 결정적 비중을 차지한 인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은 루이 14세보다도 헨리 8세에게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실제로 루이 14세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우선 국왕 자신이 엄청난 위엄을 과시했다. 국왕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나 토머스 크롬웰처럼 강력한 재상을 앞세우고 주요 인사들을 소집해 조언을 들었지만, 모든 중요한 결정은 최종적으로 자신이 내렸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의 노력 덕분에 잉글랜드는 침략과 종교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튜더 왕조 이전의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국으로서 기껏해야 양이나 쳐서 양모를 대륙에 파는 가난한 국가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잉글랜드는 일취월장하여 18~19세기가 되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중심국가로 떠오른다. 잉글랜드가 그 찬란한 발전의 도상에 오르게 한 선구자가 폭군이자 편집증 환자이자 호색한인 헨리 8세다."(166-9)


5장 콜럼버스, 에덴동산의 꿈으로 근대를 열다


"독학으로 세계관을 형성해 나간 콜럼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이마고 문디Imago Mundi》('세계의 이미지' 또는 '세계의 상像')다. 《이마고 문디》에서 콜럼버스를 매료시킨 내용이 바로 〈지구가 굉장히 작다〉는 것,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비율이 6대 1〉이라는 것이다. 육지가 6이고 바다가 1이라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바다가 매우 작을 테고, 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 될 터이다. 그는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에서 읽은 내용으로 이 주장을 보충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기록을 따라가보면 유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아시아 대륙이 아주 크다는 뜻이고, 바꿔 말하면 반대 방향에서 유럽을 출발해 아시아로 가는 항해 거리가 짧다는 의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아시아에 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다. 자기가 원래 아시아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188-9)


"콜럼버스는 말년에 《예언서》를 쓰는 데 전념했는데, 이 자료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가히 점성술적이라는 점이다." "콜럼버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이제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조만간 마지막 황제가 나타나서 이 세상의 마지막 전투, 즉 이슬람과의 최종 전투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군대를 키우기 위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것은 구약성서에서 언급된 솔로몬의 금광에서 얻게 될 것이다. 이 금광은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마지막 시대가 되면 드디어 하느님이 선지자들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과연 하느님이 약속하신 금은 누가 발견하게 될까? 바로 콜럼버스 자신이다! 〈내가 하느님이 선택하신 도구〉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바로 자신이 못 배우고 미천하되 신의 선택으로 '영적 이해력'을 얻었으며(이에 대해 자신의 내부에 '불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진리를 꿰뚫어 알게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202-4)


6장 코르테스와 말린체, 구대륙과 신대륙의 폭력적 만남


"말린체는 적에게 바쳐진 공물 같은 처지로 에스파냐인들을 처음 만났지만, 중립적인 통역 역할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신이 알게 된 정보를 코르테스에게 전해준 것이 때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 내 부족들이 아스테카 제국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코르테스는 이를 이용해 여러 부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멕시코 지역에서는 수많은 부족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그중 세 부족이 동맹을 맺어 다른 부족들을 지배했다. 코르테스가 찾아왔던 당시에는 틀라코판·테츠코코·테노치티틀란 동맹이 가장 크고 강력했다. 피지배 부족들은 때로 끔찍한 살상과 가혹한 착취를 겪었다. 우리가 아스테카 제국이라 부르는 이 지역의 실상은 깊은 원한을 가진 피지배 부족들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느슨한 동맹에 불과했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 여러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 코르테스가 성공을 거둔 핵심 요인이었다."(221-4)


"아메리카 문명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인신공희 관행에는 심오한 종교 철학이 있다. 이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태양과 달이 돌고 계절이 바뀌는 따위의 모든 우주적인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시간이 가면 에너지가 줄어들고 결국 우주는 종말을 맞는다. 우주의 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우주에 공급하는 것이다. 힘이 떨어진 태양과 대지는 기근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 지역에 널리 퍼진 유명한 표현을 옮기면 〈신은 피에 목말라 있다.〉 그래서 사람의 심장을 꺼내 태양신께 바치고 대지에 피를 흘려주는 것이다." "아스테카 유적의 꽃 그림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 우주를 살리기 위한 '꽃 같은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의 목숨을 바쳐 우주를 살린다는 의미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아메리카 거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던 기본적인 종교 철학이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을 지켜본 말린체는 사람의 피를 요구하지 않는 에스파냐의 신이 더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231-3)


7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사와 악마를 품었던 천재


"다빈치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그의 노트가 있다. 그는 늘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중요한 정보다 싶으면 바로 적어두었다. 심오한 통찰의 조각들도 여기에 다 모아놓았다. 이 중 일부는 완성된 작품으로 발전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노트는 미완성 작품을 위한 임시 텍스트 모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미완성'을 창조적 천재성의 특징으로 파악했다. 언제 어떤 영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각 분야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솟아나오니 그런 것들을 일단 붙잡아두어야 했다." "또 한 가지 이 천재의 작업이 가진 특징은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한 이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미친 듯 일하고는, 그 후 며칠 동안은 손을 놓고 명상을 하다가 다른 작업에 손을 대는 식이다. 천재는 꼭 의무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창의적 게으름을 누리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없이 느리게 일하는 것이다."(261-2)


"16세기 말에 조각가 레오니는 다빈치가 죽기 전에 멜치에게 남긴 수천 쪽에 달하는 노트를 '기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이로 인해 다빈치의 이미지가 많이 왜곡되었다. 예술사가는 그림에만 몰두하고 엔지니어는 그의 기술적 근대성만 보려 한다. 파노프스키의 말대로 르네상스의 특징은 지식의 벽 깨기였고, 다빈치는 그런 정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었던가. 그는 천사와 악마를 두루 경험한 후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모순을 갈무리하여 지극히 높은 수준에서 관조하고 표현했다. 미슐레의 말대로 다빈치는 '파우스트의 이탈리아 형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공부하며, 밀라노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또 로마와 앙부아즈에서 궁정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계속 배워나갔다. 스스로 말하듯 '경험의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시대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경험이 가장 천재적으로 꽃핀 시대였다."(283)


8장 루터, 세상을 바꾼 불안한 영혼


"1514~1515년 사이 루터는 〈로마서 1:17〉에 나오는 내용(〈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을 깊이 생각하다가 '하느님의 의iustitia dei'라는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의'란 하느님의 정의justification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후에 하느님의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텐데, 하느님이 보실 때 인간이 어찌 완전하겠는가. 분명 사악함 덩어리인 불완전한 죄인에게 하느님의 가공할 처벌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성경 구절을 홀연 다르게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의는 벌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그 선물을 통해 우리는 즉시 의로움을 갖추게 되리라. 따지고 보면 우리말로 '용서'라고 번역하는 'pardon'은 원래 뜻이 '전부par 준다don'는 것이다. 절대 결핍의 존재인 인간에게 하느님이 생명과 은총을 채워주는 것이 'pardon'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오직 믿음으로써sola fide 가능하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믿음을 원할 뿐이다."(294-5)


"중세 말 가톨릭 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하고, 걸핏하면 종교재판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해왔기 때문에 농민들은 가톨릭 교회를 두렵고 부담스러운 조직으로 여겼다. 루터가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영적 자유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면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세세한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들로서는 단지 이전의 종교적 억압을 벗어던진 것으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둔 대상은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루터파만 아니라 다른 신교 교파들과 종래 가톨릭 역시 주입식 교육이나 체벌 같은 강제수단을 이용해 '사회규율화'를 추진하게 된다. 결국은 종교와 권력이 서로를 강화하다가 국교國敎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특정 종교가 결탁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그렇게 조직된 교파들끼리 피 튀기는 전쟁도 불사하리라. 그런 갈등의 씨앗이 16세기에 싹트고 있었다."(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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