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휴가 갈 땐, 주기율표 - 일상과 주기율표의 찰떡 케미스트리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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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소와 매실주 H


수소 원자는 ⊕전기를 띠기 쉽다. 그런데 수소 원자는 그냥 깔끔하게 ⊕전기를 띠는 상태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짝 ⊕전기를 띠는 듯 마는 듯한 느낌으로 ⊖전기를 띠기 쉬운 다른 물질을 약간만 끌어당기는 묘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상태로 수소 원자가 ⊖전기를 띠기 쉬운 다른 물질을 슬쩍 잡아당기는 현상을 수소결합hydrogen bond이라고 한다. 수소결합은 그다지 힘이 세지 않다. 그러다 보니 수소결합으로 연결된 부분은 어떨 때는 살짝 붙어 있다가, 어떨 때는 다른 힘을 못 이겨 떨어지기도 한다. 즉, 여러 가지 다양한 경우가 생긴다. 이 같은 성질 덕분에 수소는 갖가지 복잡하고 이상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온갖 물질이 별별 복잡한 형태로 다채로운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하는 생명체의 몸속에서 수소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생명체가 복잡한 이유의 근원은 수소결합의 힘이 애매한 정도라서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갖고 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0-1)


수소결합, 즉 수소 원자가 ⊖전기를 띠기 쉬운 물질을 적당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이 이상한 특징은 생명체가 유전 받은 대로 자기 몸을 키워 나가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가 들어 있는 DNA는 자기와 똑같은 DNA를 복사해서 한 벌 더 만들어 내거나, 짝이 맞는 RNA를 만들어 내는 등의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 화학반응에서 DNA가 서로 끌어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수소결합이다. 이런 화학반응은 생명체가 선대로부터 유전된 그대로 자신의 몸을 만드는 현상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에서 수소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수소가 흔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단, 지구를 기준으로 보면 오직 수소 원자만 모여서 생긴 수소 기체는 그리 흔치 않다. 수소 기체는 지구에 드물지만 다른 원자 옆에 붙어 있는 수소 원자는 흔한 편이다. 물에는 산소 원자와 함께 수소 원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바다는 수소 원자를 가득 품은 거대한 저장고다. 11-2)


2. 헬륨과 놀이공원 He


사실 태양은 전체 무게의 70% 이상을 수소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거대한 수소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소 원자들은 엄청나게 높은 온도와 압력에서 몇 단계에 걸쳐 서로 합쳐져 헬륨 원자로 변하는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을 원자의 핵끼리 서로 붙는다고 해서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태양이 강한 빛과 열을 사방으로 내뿜는 것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환하고 따뜻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 헬륨이 쓸모가 많은 까닭은 특이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헬륨은 아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서 유용하다. 헬륨은 불을 댕겨도 타오르지 않고, 금속을 헬륨 속에 놓아두어도 녹슬지 않는다. 한마디로 헬륨은 아무 성질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질인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헬륨과 같은 열에 있는 네온, 아르곤 같은 물질들은 다들 이렇게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물질들을 묶어서 비활성기체noble gas라고 부른다. 20-2)


매우 정밀한 가공작업을 하거나 높은 열을 가해야 하는 작업장을 생각해 보자. 세밀하게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화학반응을 잘하는 물질이 주변에 나돌고 있으면 불필요한 화학반응이 일어나 재료가 손상될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제조 시설에 헬륨을 불어 넣어 주면 주위가 헬륨으로 가득 차 불필요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대상이 아예 없는 깨끗한 환경이 마련된다. 당연히 불이 붙지도 않는다. 헬륨은 워낙에 아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질을 띤 까닭에 자기들끼리도 잘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액체로 만들기가 어렵다. 평범한 1기압에서 날아다니던 헬륨 원자들이 서로 들러붙어 액체가 되게 하려면 온도를 영하 269℃까지 낮추어야만 한다. 액체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온도를 낮춰야 하는 물질이다 보니, 일단 액체로 만든 헬륨을 뿌리면 주변 온도 역시 아주 낮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헬륨은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재료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지 않고 냉각 작업에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23-5)


3. 리튬과 옛날 노래 Li


리튬 원자는 전자를 잃고 ⊕전기를 띠는 상태로 쉽게 변하는 성질이 있다. 리튬 배터리는 간단히 말해 리튬 원자가 ⊕전기를 잘 띤다는 점을 이용해서 그 전기를 뽑아 쓰는 장치라고 보면 된다. 리튬은 세상 모든 원자 중에 수소, 헬륨 다음으로 평균 무게가 적게 나가는 원자다. 가볍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수소, 헬륨, 리튬은 모두 성질이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원자들의 차이는 원자핵에 양성자가 몇 개 있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 양성자가 한 개만 있으면 수소 원자가 되어 불에 잘 타는 물질이 되기 쉽지만, 똑같은 양성자인데도 두 개가 꼭 붙어 있으면 헬륨 원자가 되어 아무런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질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소 원자를 이루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양성자가 한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달라붙어 있으면 리튬 원자가 되는데, 이번에는 금속 덩어리가 되기 쉽다.  100종이 넘는 세상 모든 원소 간의 차이는 원자의 핵에 양성자가 몇 개 들어 있는지 그 개수의 차이밖에 없다. 29-31)


주기율표에서 리튬은 소듐의 바로 위 칸에, 포타슘은 소듐의 바로 아래 칸에 써넣는 원소다. 즉, 세 가지 원소는 주기율표의 같은 열에 주르륵 적혀 있다. 이는 현대의 화학자들이 리튬, 소듐, 포타슘을 성질이 비슷해 하나로 묶을 만하다고 본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원소들은 다들 원자가 ⊕전기를 잘 띠고, 화학반응을 잘하며, 한데 뭉쳐 있을 때는 쇳덩어리 비슷한 모양을 이룬다. 주기율표에서는 이들 모두 맨 첫 번째 열에 나열돼 있어서 1족 원소group 1 family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튬을 주원료로 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물질들의 화학반응이 잘 일어나도록 돕느라 리튬을 쓰는 일도 있다. 가만히 두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물질들에 적당한 촉매catalyst를 섞어 주면 그때부터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촉매 자신은 거의 변하지 않으면서 다른 물질은 계속 빠르게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변화하도록 도와준다. 이 때문에 많은 화학 회사에서는 적합한 촉매를 개발하는 일을 핵심 기술로 여긴다. 34-6)


4. 베릴륨과 보물찾기 Be


우라늄은 중성자neutron와 충돌하면 원자핵이 둘로 나뉘어 다른 원자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원자핵이 쪼개지는 현상을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고 하며, 핵분열 현상이 일어날 때는 강한 열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과정을 유지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성자들이 원자로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계속 우라늄 사이를 돌아다니도록 무엇인가로 막아 주어야 한다. 중성자는 이름 그대로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 상태의 입자다. 그래서 딱히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키지도 않고, 서로 밀고 당기는 일도 거의 없다. 유령 같은 중성자를 원자로 안에 가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중성자는 다른 원자의 중심부인 핵 근처에서 그 핵을 이루는 양성자 또는 중성자에 이끌릴 수 있다. 그러니까 중성자는 대체로 다른 물질들을 그냥 통과하는 편이지만, 가끔 다른 원자의 정중앙 근처를 지나게 될 때는 그 원자핵에 들어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에 이끌려 붙잡히거나 진행 방향이 바뀔 수 있다. 42-3)


베릴륨은 세상의 모든 원자 중에 평균 무게가 네 번째로 가볍고, 그만큼 원자 자체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베릴륨의 원자핵은 대개 양성자 네 개와 중성자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다. 주기율표에서 수소, 헬륨, 리튬에 이어서 네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이 바로 양성자가 네 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성자가 베릴륨의 원자핵 근처를 지나갈 때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오묘한 수준의 힘에 이끌린다. 그리고 이 힘 때문에 중성자의 진행 방향이 꺾여서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이 연달아서 일어나면 마치 중성자가 베릴륨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즉, 베릴륨이 중성자를 튕겨내는 반사재reflector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원자로 안에 베릴륨을 넣어 그릇처럼 만들고, 그 안에 중성자와 우라늄을 넣어 반응을 일으킨다. 이렇게 하면 제아무리 유령 같은 중성자라도 베릴륨에 가로막혀 계속해서 튕겨 나가고, 원자로 안에서는 연쇄반응이 꾸준히 일어난다. 43)


5. 붕소와 애플파이 B


유리는 규소와 산소 원자들이 서로 붙어 있는 물질을 주재료로 만든다. 특별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여기에 소듐과 칼슘 원자도 약간 섞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유리는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약하다. 특히 유리를 뜨겁게 하면 유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떨린다. 사실 어떤 물체가 ‘뜨겁다’거나 ‘온도가 높다’는 말 자체가 그 물체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리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원자가 빠르게 떨리다 보면 규소 원자와 산소 원자 사이에 끼어든 소듐 원자 근처에 틈이 생길 수 있다. 원자들 사이에 틈이 생기면 유리의 강도가 약해진다. 다행히 요즘 주방에서 사용하는 유리 제품들은 제법 높은 열에도 잘 견디는 것들이 있다. 유리를 만들 때 붕소 성분을 약간 넣기 때문이다. 규소 원자와 산소 원자 사이에 섞여 있는 소듐 원자 때문에 틈이 생길 만한 자리마다 붕소 원자가 끼어들게 해서 그 틈을 메워 버리는 것이다. 붕소 원자의 크기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 꼭 맞다. 49-50)


붕산boric acid은 황산이나 염산, 질산처럼 다른 물질을 무시무시하게 녹이지는 않는다. 그런 대표적인 산성 물질에 비하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정도도 훨씬 덜하다. 붕산은 이처럼 어중간한 산성을 띠는 덕분에 살충제로 요긴하게 쓰인다. 붕소는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재료다. 반도체의 주재료는 규소인데, 순수한 규소에는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규소와 성질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붕소를 불순물처럼 아주 조금 넣어 주면 훌륭한 반도체가 된다. 규소에 붕소를 살짝 뿌려 주는 이 작업을 도핑dopping이라고 한다. 도핑 작업을 거치면 규소와 붕소의 비슷한 듯 다른 듯한 미묘한 성질 차이 때문에 어떤 때는 전기가 흐르고 어떤 때는 흐르지 않는 반도체의 특징이 생겨난다. 베릴륨이 중성자를 잘 튕겨 내서 핵분열을 부채질하는 것과 반대로 붕소는 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래서 핵분열이 과도하게 일어나서 원자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 같으면 붕소를 넣어 핵분열을 줄인다. 52-3)


6. 탄소와 스포츠 C


탄소를 이용하면 다양한 물질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내기가 무척 편리하다. 아주 단순한 것부터 별 희한한 성질을 띠는 복잡한 물질까지, 탄소 원자를 이리저리 조합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탄소가 이렇게나 다양한 물질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탄소 원자 한 개가 다른 원자 네 개와 결합하려는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탄소 원자 하나에 다른 원자를 붙잡을 수 있는 갈고리가 네 개 달렸다고 상상하면 적당하겠다. 갈고리가 네 개나 있는 탄소를 이리저리 붙여 가면서 뭔가를 만든다면 다른 원소를 재료로 삼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탄소 원자가 다른 원자와 달라붙는 힘은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다.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느냐에 따라 아주 튼튼하게 달라붙을 수도 있고, 조건이 바뀌면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쉽게 떨어지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탄소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도 원자끼리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56)


지구에 사는 모든 유기체, 즉 생명체의 몸에는 탄소가 많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탄소는 모두 어디서 왔을까?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구의 공기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별로 없다. 지구의 공기는 질소가 78%, 산소가 21%를 차지하고, 생명체를 이루는 재료인 이산화탄소는 고작 0.04%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금방 바닥나는 일은 없다. 생명체가 죽으면 곰팡이와 세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유해를 썩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명체의 몸은 다시 이산화탄소로 변해서 공기 중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지상의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요약하면 공기 중에 0.04%밖에 없는 이산화탄소 중 일부가 화학반응을 거치며 탄수화물이 되고, 단백질과 지방의 재료로도 활용되어, 마침내 생물의 몸이 되었다가, 생명 활동을 마친 뒤 분해되어 다시 이산화탄소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58-60)


7. 질소와 목욕 N


사람 몸은 단백질로 이루어졌는데, 단백질은 아미노산amino acid이라는 물질이 수없이 붙어 있는 덩어리다. 그런데 여기서 아미노amino라는 말은 질소가 들어 있는 대표적인 물질 암모니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공기를 들이마셔도 그 속에 있는 질소를 아미노산과 단백질의 재료로 활용할 수가 없다. 생명체가 질소 기체를 몸속에서 단백질 재료로 바꾸지 못하는 것은 질소 원자 특유의 성질 때문이다. 질소 원자 자체는 화약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다른 원자들에 달라붙으며 화학반응을 잘한다. 그런데 같은 질소 원자 둘이 달라붙을 때는 갈고리 역할을 하는 세 전자가 모두 한꺼번에 서로서로를 이끌어 붙이는 갈고리 역할을 해서 질소 원자 둘이 아주 야무지게 붙어 있게 한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질소가 삼중결합을 했다고 표현한다. 이 때문에 생명체가 질소 기체를 아무리 들이마셔 봤자 어지간해서는 질소 원자 두 개를 서로 떼어 낼 수가 없고, 당연히 질소 원자를 재료 삼아 다른 물질을 만들 수도 없다. 66-8)


그렇다면 동식물이 몸속에서 질소 원자를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소 기체가 아닌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질소 원자를 흡수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질소 기체의 삼중결합을 끊어서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물질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동식물이 그 물질 속에 있는 질소 원자로 몸에 꼭 필요한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행히도 지구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런 일을 해 온 특별한 생물이 있다. 다름 아닌 세균들이다. 수많은 세균 중 몇몇 종류가 공기 중의 질소 기체를 흡수해서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형태의 물질로 바꾼다. 식물은 땅속 세균들이 바꿔 놓은 물질을 뿌리로 빨아들여 그 속에 든 질소 원자를 이용해 단백질 등 여러 가지 필요한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동물들은 바로 그 식물을 먹는다. 질소 기체의 삼중결합을 끊어 생명체가 활용하기 좋은 질소 원자로 바꿔 주는 이 세균들이 없다면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동물도 살아갈 수 없다. 68)


8. 산소와 일광욕 O


지구 상공에는 자외선을 흡수하는 보호막이 있다. 바로 지구를 감싸고 있는 오존층ozone layer이다. 오존층은 오존ozone이 많이 모여 있는 공기층을 일컫는 말로, 지상에서 대략 20~25km 높이에 해당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상의 생명체들을 위해 오존층을 선물로 준 것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바로 세균, 그중에서도 남세균 종류다. 수십억 년 전에 전 세계 바다에 나타난 남세균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광합성을 하면서 산소oxygen 원자가 두 개씩 붙은 산소 기체를 공기 중에 내뿜었다. 이 세균들이 수억 년 동안 줄기차게 산소 기체를 내뿜자, 지구는 산소 기체가 풍부한 행성으로 변했다. 지구 대기에 산소 기체가 풍부하다 보니, 자외선이 쏟아지는 저기 하늘 높은 곳에서는 산소 기체가 자외선을 맞고 오존으로 변한다. 산소 원자가 두 개씩 서로 짝지어 있는 것이 보통 산소 기체의 모습인데, 그러다 자외선을 맞으면 원자들이 떨어지고, 이내 세 개씩 다시 들러붙어 새로운 물질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오존이다. 75-6)


남세균이 지구에 산소 기체를 이만큼이나 공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산소는 화학반응을 무척 잘하는 원소다. 어쩌다 산소 원자 두 개가 달라붙어 산소 기체가 되더라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뭔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즉, 산소 기체가 자꾸 다른 물질로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공기 중 산소 기체의 양을 넉넉하게 유지하려면 다른 물질로 변해서 없어지는 것을 보충하고도 남을 정도로 남세균들이 계속해서 산소 기체를 내뿜어야 한다. 그러니 남세균은 그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것이고, 대단히 긴 시간 동안 꾸준히 광합성을 했을 것이다. 산소를 이용하는 다른 생물들은 남세균이 만든 산소 기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호흡으로 산소 기체를 들이마시는 수많은 동물 역시 산소 기체가 화학반응을 잘한다는 점을 활용해 살아간다. 사람 역시 호흡으로 산소 기체를 들이마시고 있으니, 산소 기체의 화학반응 능력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76)


9. 플루오린과 아이스크림 F


물 같은 액체 상태의 물질이 마르면서 기체 상태로 변할 때, 주변의 열을 가져가면서 시원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서 가져가는 열을 기화열heat of vapor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냉장고 정도의 냉각 효과를 내려면 아주 쉽게 기체로 변하는 물질이 유리하고, 기왕이면 재활용하기 위해 기체로 변한 뒤에 액체로 되돌리기 편리한 것이 좋다. 이런 용도로 이용하는 물질을 냉매refrigerant라고 한다. 염소chlorine, 플루오린fluorine, 탄소carbon 원자를 조합해 만든 냉매 물질을 각 원소 이름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CFC라고 부르는데, 이 물질의 상품명인 프레온Freon이 유명해져서 흔히 프레온가스라고 한다. 그런데 CFC가 공기 중으로 빠져나오면 하늘 높이 올라가서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CFC 대신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HFC라는 물질을 쓰기도 한다. HFC는 수소, 플루오린, 탄소 원자 등을 성분으로 만드는 물질이므로, 여기에도 플루오린은 들어간다. 82-4)


플루오린은 예전에 플루오르fluor 또는 불소라고도 불렀던 물질이다. 플루오린은 화학반응을 극히 잘 일으키는 물질이어서 도저히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물질을 건드려 끝내 화학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수소와 플루오린이 연결된 물질을 플루오린산fluoric acid, 혹은 불산불화수소산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불산은 산성을 띤다. 아주 강한 산성은 아니지만, 다른 물질과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자꾸 스며들고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 피부나 다른 생물에 닿으면 위험하다.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작은 칩 위에 수없이 많은 부품이 연결된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반도체 부품은 크기가 1만 분의 1mm, 10만 분의 1mm 정도로 매우 작다. 이렇게 작은 부품을 아주 정밀하게 만들려면 재료를 세밀하게 깎아야 한다. 그 작은 부품을 조각칼 같은 도구로 깎을 수는 없으므로, 적절한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불필요한 부분이 삭게 한다. 바로 이 공정에 불산을 쓴다. 85, 88-9)


10. 네온과 밤거리 Ne


가이슬러관에 기체를 넣고 강한 전기를 걸면, 기체 원자 속에 있던 전자가 전기의 힘 때문에 튀어나온다. 전자는 ⊖전기를 띠므로 전자를 잃은 기체 원자는 ⊕전기를 띠게 된다. 이렇게 전기를 띤 상태로 돌아다니는 기체 원자를 요즘에는 플라스마plasma라고 부른다. 플라스마, 그러니까 ⊕전기를 띤 기체 원자는 자연히 ⊖전기 쪽으로 이끌려 날아간다. 플라스마가 유리관 안에서 다른 기체 원자들과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전기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다 보면 다른 원자 안에 들어 있는 전자들과 부딪히거나 서로 이끌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전자들은 힘을 받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전자가 갑자기 속도를 잃을 때는 전자파를 내뿜는다.  따라서 가이슬러관에 넣은 기체의 종류와 양, 압력을 잘 조절하면 전자파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전자파의 주파수도 조절할 수 있다. 만약 플라스마가 내뿜는 전자파의 주파수를 4억~8억 MHz 정도로 유지할 수 있으면, 그 전자파는 사람 눈에 감지되어 빛으로 보인다. 94-5)


주기율표에서 네온은 헬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 같은 열에 배치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네온은 헬륨과 성질이 비슷하다.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지 않는 비활성기체이며, 헬륨처럼 우주 전체로 보면 비교적 흔하지만, 지구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질이다. 1871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y Mendeleev가 대체로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 순서로 원소 이름을 써넣으면서, 성질이 비슷한 것들은 세로로 같은 줄에 오도록 배치한 것이 주기율표다. 그런데 이 원칙대로 정리했더니 어떤 칸에는 써넣을 것이 없었다. 빈칸이 생겼으니 주기율표를 만드는 원리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주기율표가 틀린 것이 아니라 빈칸에 들어갈 원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물질이 발견되어 그 자리를 채울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1898년에 네온이라는 새로운 물질이 공기 중에 0.002% 정도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물질이 주기율표의 빈칸을 채우게 됐다. 99)


11. 소듐과 냉면 Na


소듐은 ⊕전기를 띠려는 성질이 강하다. 소듐의 전기적인 특성을 이용하면 독특한 노란색 빛을 내는 전등을 만들 수도 있다. 나트륨등은 유리관에 소듐을 넣고 전기를 걸어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아내리고 끓어오르게 해서 기체 상태로 유리관 안을 떠다니며 빛을 내뿜게 만든 것이다. 순수한 소듐 덩어리를 물에 던지면 빠르게 폭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듐이 그만큼 격렬하게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증거다.  가성소다는 가혹한 성질을 지닌 소듐 물질이라는 뜻으로, 가성소다가 동물의 살갗에 닿으면 피부에 해를 입는다. 하지만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성질을 적당히 이용하면 가성소다로 세탁물의 찌든 때를 녹여 없앨 수 있다.  양잿물이 바로 가성소다, 즉 수산화소듐을 말한다. 가성소다가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까닭은 이 물질이 대표적인 염기base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소듐과 염소 원자가 규칙적으로 붙어 있는 덩어리다. 그래서 염화소듐sodium chloride 또는 염화나트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03-5)


우리 몸에서 소듐이 꼭 필요한 곳은 신경이다. 사람과 동물은 온몸에 신경이 퍼져 있다. 거대한 신경 덩어리라고도 할 수 있는 뇌에서 몸을 어떻게 움직이라고 보내는 신호가 신경을 통해 해당 부위에 전달돼야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고 여러 가지 감각도 느낄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신호는 전기신호다. 그리고 신경을 통해 전달할 전기신호를 만들기 위해 인체가 사용하는 물질이 바로 ⊕전기를 잘 띠는 소듐과 포타슘이다. 사람의 신경에는 가까이 있는 물질 중에서 ⊕전기를 띤 소듐만 골라서 한쪽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위가 있다. 소듐통로sodium channel와 소듐-포타슘 펌프Na+ K+ pump라고 부르는 부위인데, 소듐통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기를 띤 소듐이 한곳으로 모이는 바람에 상당한 전기가 걸린다. 그러니 몸속에 소듐이 전혀 없다면 신경에서 전기를 일으킬 수가 없고, 신경을 통해 신호가 전달되지 않으면 온몸이 한마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소듐이 없으면 몸은 뇌와 연결되지 못한다. 106)


12. 마그네슘과 숲 Mg


식물에서 초록색을 내는 화학물질을 엽록소chlorophyll라고 한다. 엽록소를 커다랗게 확대해서 보면 핵심이 되는 부분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금속으로 분류되는 마그네슘 원자가 자리 잡고 있다. 즉, 엽록소라는 물질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마그네슘계 유기화학물질을 이용한 광화학반응 목적의 색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싱그러운 숲의 초록빛을 정확하게 일컫는 말이다. 곡식이나 과일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 관점에서 보면, 광합성은 식물이 햇빛 속의 힘을 흡수해서 영양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엽록소의 중심에 있는 마그네슘 관점에서 보면, 마그네슘 원자와 다른 원자들이 이어진 아주 작은 회로가 햇빛의 힘을 받아 작동하면서 전자로 만든 광선 검 같은 장치가 가동되어 물 분자를 조각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각난 물 분자의 파편인 수소가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화학반응을 일으킨 결과로 다른 동물들이 원하는 당분 같은 물질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111-3)


⊕전기를 잘 띠는 마그네슘의 특징을 이용하면 다른 금속이 녹슬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 금속의 전자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 즉 녹스는 현상은 주위에 있는 무엇인가가 금속에서 전자를 떼어 내 가져가려고 하니까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금속의 전자를 가져가려고 하는 물질이 나타날 때마다 금속보다 먼저 나서서 전자를 던져 주는 장치가 있다면 보호하고자 하는 금속 안에 있는 전자는 뜯겨 나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면 마그네슘으로 금속이 녹슬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 장치는 간단하다. 보호하고 싶은 금속과 마그네슘 덩어리를 전선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보호하려는 금속에서 전자가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마그네슘이 재빨리 자기 전자를 떼어서 전선을 통해 전달해 준다. 이렇게 해서 마그네슘은 하나둘 전자를 잃어 ⊕전기를 띠는 상태로 변한 뒤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삭아 가고, 반대로 보호하고자 했던 금속은 마그네슘 덕분에 전자를 잃지 않아서 녹슬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116-7)


13. 알루미늄과 콜라 Al


지표면의 돌과 모래를 이루는 원자를 분석하면 산소와 규소 원자가 매우 많은 편이고, 바로 그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알루미늄이다. 사람들은 흔히 쇳덩어리라고 하면 철을 떠올리는데, 이는 철이 지구에 흔한 금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루미늄은 철보다 더욱 흔하다. 지표면을 이루는 원자의 8% 정도가 알루미늄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렇지만 돌이나 흙에서 알루미늄 원자만을 골라내서 금속 덩어리로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초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은 (베릴륨을 발견하고 요소를 합성한) 독일의 위대한 화학자 프리드리히 뵐러였다. 뵐러는 화학반응을 아주 잘 일으키는 물질인 포타슘을 염화알루미늄aluminium chloride과 반응시키는 과정을 이용해서 상당히 순수한 알루미늄 가루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알루미늄을 뽑아내는 방법이 점점 더 발전해서, 힘들긴 해도 알루미늄 원자가 들어 있는 돌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 조금씩 덩어리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24-5)


그래도 초창기에는 알루미늄 덩어리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연-알루미늄-술에 결국 성공한 인물로는 보통 프랑스의 폴 에루Paul Héroult와 미국의 찰스 마틴 홀Charles Martin Hall이 손꼽힌다. 1880년대 후반, 두 사람이 각자 발견한 기술은 알루미늄을 뽑아낼 수 있는 재료에 전기를 걸어 주는 독특한 화학반응을 통해 알루미늄을 녹여낸 뒤에 다시 훑어 내는 방법이었다. 요즘에는 주로 보크사이트bauxite라는 돌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며,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된 기술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데는 전기가 많이 든다. 다행히 요즘은 돌에서 뽑아내지 않아도 알루미늄을 얻을 방법이 있다. 바로 재활용이다. 게다가 알루미늄을 재활용하면 돌에서 직접 알루미늄을 뽑아낼 때보다 전기를 훨씬 절약할 수 있다. 재생 작업에 소모하는 전기는 돌에서 직접 뽑아낼 때 소모하는 전기의 2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 알루미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널리 쓰이고 있다. 126, 128, 130)


14. 규소와 선글라스 Si


유리와 수정의 재료가 되는 물질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규소silicon 원자에 산소 원자가 둘씩 달라붙은 이산화규소silicon dioxide에서 출발하는 물질이다. 이산화규소를 이루는 산소와 규소는 둘 다 지구에 흔한 원소다. 지표면을 이루는 원자 중에 산소와 규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75% 가까이나 된다. 한반도에서는 또 다른 물질이 유리를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이산화규소 덩어리였던 유리와 달리 그 새로운 물질은 규소를 중심으로 알루미늄이나 철 등 여러 원자가 다양하게 섞인 것이었다. 그 물질은 다름 아닌 도자기다. 여기에 현대의 기술을 더해 규소 원자가 이루는 모양을 적절히 조절하면 더 튼튼하고 더욱 쓰기 좋은 재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원리로 만들어 낸 도자기 계통의 재료를 흔히 세라믹ceramic이라고 한다. 고대의 유리구슬부터 중세의 도자기에 이어 현대의 세라믹까지, 이 모든 것에는 규소가 있고, 규소를 어떻게 녹이고 굳히느냐에 따라 제품의 품질이 달라진다. 134, 137-8)


1950년대의 학자들은 전기가 잘 흐르는 도체와 그렇지 않은 부도체의 중간 성격을 띠는 어중간한 물질을 잘만 이용하면 원하는 경우에만 전기가 흐르게 조절할 수 있는 전자부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물질을 반도체semiconductor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강대원과 아탈라는 규소를 주재료로 삼고 다른 화학물질들을 조금씩 이용해 정말로 이렇게 동작하는 전자부품을 만들어 냈다. 이 부품을 금속산화물 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metal oxide semiconductor field effect transistor라고 한다. 보통은 줄여서 MOSFET로 쓰고, ‘모스펫’이라고 읽는다. 1979년에 나온 모스펫 2만 9,000개짜리 장치가 바로 최초의 IBM PC 핵심 부품이었던 8088 CPU였다.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뿜도록 반도체를 만들면 LED가 된다. 반대로 빛을 받으면 전기를 내뿜는 반도체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만든 장치는 태양광발전소가 된다. 태양광발전 장치를 만들 때도 역시 규소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140-1)


15. 인과 기차 여행 P


화재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가루가 바로 난연제flame retardant라는 물질이다. 그리고 그 난연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phosphorus 원자가 들어 있는 성분이다. 난연제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에 섞어 넣어 불이 잘 붙지 않게 하는 약품을 말한다. 보통은 불이 잠깐 붙었다가도 번져 나가지 않고 그냥 사그라들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들이 많다. 만약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푹신한 가죽 소파 같은 느낌이 나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가죽과 같은 질감의 플라스틱에 난연제를 섞어 소파를 만들면 되고, 불에 안 타는 벽지가 필요하다면 종이와 같은 질감의 플라스틱을 벽지 모양으로 가공한 다음 난연제를 섞어 두면 된다. 난연제는 화재 위험을 낮추고 싶은 그 어디에나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전자제품이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날까 봐 걱정된다면, 난연제를 첨가한 플라스틱으로 제품을 만들면 된다. 난연제 덕택에 플라스틱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값도 싼 환상적인 재료가 되었다. 146-7)


꼭 난연제가 아니어도 인 원자를 이용한 화학물질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과 수소, 산소가 붙어 있는 물질인 인산phosphoric acid이다. 인이 들어 있는 물질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내는 이유는 이 물질이 비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인 원자가 들어 있는 비료를 뿌려 줘야만 농작물이 잘 자란다. 인이 있어야 잘 자라는 것은 농작물이나 식물만이 아니다. 사실은 세상 모든 생물이 자라는 데 인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사는 데도 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인 원자가 들어 있는 물질인 아데노신삼인산adenosine triphosphate이 모든 생물의 몸이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핵심 연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데노신삼인산이 아데노신이인산adenosine diphosphate으로 바뀌는 화학반응을 일으켜 몸 곳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에 활용한다. 몸속에서는 워낙에 별별 곳에 다 사용되는 물질이라 아데노신삼인산이라는 긴 이름 대신 ATP라고 줄여서 표기하는 일이 많다. 147-8) 


16. 황과 긴 산책 S


생명체에서 뽑아낸 다른 많은 물질처럼 고무나무에서 뽑아낸 고무에도 탄소 원자가 주로 많이 들어 있다. 고무 속의 이 많은 탄소 원자는 대개 서로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기다란 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황 원자는 다른 원자 두 개와 잘 결합하려는 성질이 있다. 갈고리가 두 개 달린 원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래서 고무에 황을 넣어 주면 이쪽과 저쪽 탄소 가닥 사이에 황이 끼어들어 양쪽으로 갈고리를 걸고 붙어 버린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는 실 가닥 같은 물질들 사이사이에 황 원자가 들어가서는 접착제처럼 탄소 실 가닥 곳곳을 붙여 버린다고 상상해도 비슷하겠다.  바로 이 때문에 고무에 황을 적당히 넣어 주면 탄소 가닥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고무가 더 탱탱해진다. 생물의 몸속에 있는 단백질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황은 수소결합보다 더 강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황 덕택에 단백질의 모양이 더 다양해질 수 있고, 생명체는 더욱 다양한 단백질을 이용하며 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158)


술파제sulfa drug는 세균의 몸 속에 들어가면 엽산folacin을 만들 때 쓰이는 원료처럼 반응한다. 지구의 생명체들은 모두 DNA와 단백질로 몸을 만들어 가는데, 몸속에서 각종 영양분을 활용해 DNA와 단백질을 만들 때 조금이지만 엽산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균은 몸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스스로 엽산을 만든다. 그런데 세균 몸에 술파제가 들어가면 세균은 술파제를 이용해 엽산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면 오류가 발생해 엉뚱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아마도 술파제에 붙어 있는 황과 다른 원자들의 모양과 성질이 원래 세균에게 필요했던 물질과 묘하게도 비슷해서 혼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엽산이 없으면 DNA와 단백질도 제대로 만들 수 없으므로 결국 세균은 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죽는다. 이와 달리 사람 몸에는 애초에 엽산을 만드는 능력이 없다 보니 술파제의 방해를 받을 일도 없다. 술파제가 등장한 뒤로 인류는 드디어 몸속에 감염된 세균을 제대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164)


17. 염소와 수영장 Cl


염소는 바닷물 속에 ⊖전기를 띤 상태로 넉넉히 녹아 있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이 바로 소듐 원자와 염소 원자가 한 개씩 쌍쌍이 붙어 있는 물질이다. 수영장 냄새는 염소chlorine로 물을 소독해서 나는 냄새다. 염소 원자 둘이 붙어 있는 물질인 염소 기체를 직접 물에 섞어 소독하는 방법도 있고, 염소 원자를 다른 원자들과 함께 이용해 만든 소독약을 쓰는 방법도 있다. 염소는 주기율표에서 플루오린 바로 아래에 적혀 있는 만큼 플루오린과 성질이 비슷하다. 염소도 플루오린처럼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편이고, ⊖전기를 띠는 상태로 쉽게 변한다. 염소 기체를 이용해 소독할 수 있는 까닭도 염소 원자가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염소 기체는 아주 조금만 물에 넣어도 세균을 비롯해 물속에 사는 여러 미생물의 세포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미생물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꿔 버려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몸의 각 부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미생물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167-9)


염소 원자가 들어 있는 위험한 물질을 꼽자면 염산hydrochloric acid을 빼놓을 수 없다. 쇳덩이를 녹일 만큼 강한 산성 물질로 잘 알려진 염산은 염소 기체를 물에 뿌리기만 해도 물과 화학반응을 해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 독가스로 퍼트린 염소 기체를 병사들이 들이마셨을 때 해를 입는 이유 중 하나도 염소 기체가 몸속의 수분과 반응해서 염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강한 산성을 자랑하는 염산은 알고 보면 우리 몸속에도 있다. 위에서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분비하는 위액의 중요한 성분이 다름 아닌 염산이다. 특히 위액 중에서 단백질을 분해하는 펩신pepsin이라는 물질은 산성 환경에서 화학반응을 가장 잘 일으키는데, 산성 물질인 염산은 펩신이 활발하게 단백질을 분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뿐 아니라 염산은 위 속에서 산성에 버티지 못하는 세균들을 녹여서 없애는 역할도 맡고 있다. 사람 위액 속에 염산이 없었다면 입으로 세균이 조금만 들어와도 그것에 감염될 가능성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171)


18. 아르곤과 제주도 Ar


아르곤은 헬륨과 마찬가지로 다른 원자와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물질이다. 어찌나 반응을 안 일으키는지 그저 낱낱이 흩어져 기체 상태로 날아다니기만 한다. 헬륨은 지구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물질이지만, 아르곤은 공기 중에 1% 가까이 들어 있다. 공기 성분 중 질소 기체, 산소 기체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아르곤이다. 그렇다면 아르곤은 어떤 일에 쓰일까? 헬륨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재료를 보호하거나 작업장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때 아르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아르곤 용접을 들 수 있다. 쇠를 녹여 붙이는 용접 작업을 할 때는 높은 온도로 쇠붙이 주위를 녹이는데, 주변의 잡다한 물질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끼어들어 용접 부위를 더럽힐 수 있다. 공기 중의 산소만 해도 화학반응을 일으켜 쇠를 녹슬게 할 수 있고, 먼지가 타서 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아르곤을 넣어 주면 불필요한 반응을 일으킬 만한 것을 모두 날려 버리고 깨끗하게 용접할 수 있다. 179-81)


그렇다면 결코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아르곤과 무엇이든 화학반응을 일으키려고 하는 염소나 플루오린을 서로 섞어 두면 어떻게 될까? 아르곤과 플루오린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상태 중에 전기적으로 특수한 상황이 되는 것을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 또는 Ar-F 엑시머라고 한다. 세상에는 에너지를 가하면 빛을 내는 물질이 여러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은 전기를 걸면 빛을 내고, 어떤 물질은 높은 열을 가하면 빛을 낸다. 그런데 만약 빛을 쐬어 주면 그 결과로 똑같은 빛을 내는 물질이 세상에 있다면 어떨까? 이런 물질은 쐬어 준 빛을 받아서 빛을 내는데, 자기가 내뿜는 그 빛 때문에 다시 더 빛을 내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생겨난 특이하고 강한 빛을 레이저laser라고 한다.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 역시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 중 하나다.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로 만든 레이저는 일상적인 물질을 깔끔하고 정교하게 깎아 내기에 유리해서 그런 작업에 많이 쓰인다. 182-3)


19. 포타슘과 바나나 K


아랍어로 알칼리al qalīy는 원래 식물 따위를 태운 재를 뜻하는 말인데, 실제로 식물을 태운 재를 잘 골라 물에 녹이면 염기성, 즉 알칼리성 용액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전 우리 조상들도 식물의 재를 녹인 물을 잿물이라 부르고 세탁에 이용했다. 염기성을 띠는 잿물에는 단백질 등의 얼룩이나 때를 이루는 성분을 파괴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를 빨래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식물의 몸을 이루는 수많은 원자 중에 탄소, 산소, 수소 같은 원자들은 태우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낱낱이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서로 적당히 붙어서 이산화탄소와 수증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이 물질들은 기체여서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따라서 식물이 타고 남은 재에는 기체가 되어 날아가지 않는 원자들만 남게 된다. 마침 칼륨 원자는 재로 남는 쪽에 속한다. 지금처럼 정밀한 화학반응 기술이 없었던 시절에 식물을 태워서 얻은 재로 알칼리성 물질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기술은 상당히 실용적이었던 셈이다. 187-8)


사람의 신경은 전기신호를 전달하면서 제 역할을 한다. 몸의 특정 부위에서 감지한 것을 뇌에 전달하고, 정보를 받은 뇌가 다시 신체 각 부위로 명령을 전달함으로써 몸이 움직이는데, 이때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통로가 바로 신경이다. 그러므로 전자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사람 몸에서도 충전과 비슷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사람의 몸은 생명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연료로 활용하는 ATP라는 물질을 반응시켜서 충전한다. 이때, 충전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물질이 세포의 겉면에 있는데, 이름하여 소듐-포타슘(칼륨) 펌프Na+ K+ pump다. 우리가 골똘히 생각해야 할 때나 무엇인가를 느끼고 행동해야 할 때, 우리 몸은 평소에 소듐-포타슘 펌프를 가동해 모아 둔 전기를 이용해서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결국 우리가 삶을 사는 수고의 10분의 1쯤은 소듐과 포타슘을 몸속 세포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보내는 데 소모하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1-2)


20. 칼슘과 전망대 Ca


요즘 사용하는 콘크리트란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 그리고 물을 섞어 사용하는 건설 재료를 말한다. 시공할 때는 묽은 반죽 같은 상태지만 시간이 지나면 굳어서 아주 튼튼해진다. 콘크리트의 재료 중 모래와 자갈은 흙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그보다 핵심 재료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시멘트다. 시멘트는 접착제 역할을 해서 다른 재료들을 돌처럼 단단하게 붙잡아 준다. 현대 시멘트의 성분을 살펴보면 칼슘, 탄소, 산소, 알루미늄 같은 다양한 원소들이 보인다. 알루미늄이야 흙 속에 워낙 많이 있는 물질이니 이 중에 눈에 띄는 주성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칼슘과 탄소다. 특히 시멘트의 재료라고 하면 칼슘 원자 하나에 탄소 원자 하나, 산소 원자 세 개씩의 비율로 붙어 있는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 같은 것을 꼽을 만하다. 칼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몸속에 있는 뼈의 성분을 떠올릴 텐데, 우리 몸속에 있는 칼슘을 제외하고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칼슘이 아마 시멘트 속에 있는 칼슘이 아닐까 싶다. 197-8)


사람은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속에서 칼슘 성분을 다양한 화학반응에 활용하곤 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람의 뼈를 이루는 물질의 상당량은 칼슘이다. 우리가 멸치나 우유 같은 음식을 먹으면 그 속에 있던 칼슘이 물에 녹아서 흘러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서 단단하게 굳어 뼈를 이룬다. 사람의 뼈는 화학의 황제인 탄소와 인 등의 물질이 칼슘과 튼튼하게 붙어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서 가벼우면서도 아주 튼튼하다. 몸속에서 칼슘이 수시로 사용되는 현상은 뼈에 역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동물은 칼슘이 필요하면 뼈에 잔뜩 들어 있는 칼슘을 녹여서 사용한다. 사실 몸의 활동에 꼭 필요한 인 성분도 뼈에 저장되어 있던 것을 녹여서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뼈가 몸 여러 기관에 필요한 칼슘과 인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 외에도 사람이 살다 보면 뼈가 낡고 상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뼈는 항상 조금씩 없어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하면서 유지되어야 한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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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급진의 20대 - K-포퓰리즘, 가장 위태로운 세대의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김내훈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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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대 현상, 렌즈를 바꾸자


이 책은 ‘20대 현상’이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 그 해답을 찾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한다. 기존의 담론은 공론장에 새롭게 등장한 의제들 — 페미니즘 및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 에 20대 남성들이 보이는 일련의 반동을 ‘이대남 현상’으로 규정한다. 미디어와 정치권은 20대 남성의 돌출된 경향을 뚜렷한 근거 없이 20대 전반의 것으로 일반화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젠더갈등에 편승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다. 특별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페미니즘을 제외한 정부·여당발 의제에서, 20대 여성들의 입장과 태도가 남성들과 크게 다르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20대 현상’에서 젠더갈등-차이를 사고하려 할 때 발생하는 혼란은 ‘이대남 현상’의 렌즈로 20대의 보편적 여론을 검토하는 한 피할 수 없다. ‘20대 현상’을 먼저 경유해 ‘이대남 현상’을 사고해야 한다. 그렇다면 ‘20대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렌즈는 무엇일까?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12)


1. 만들어진 세대 ? 20년간의 롤러코스터


뇌는 인간이 보는 것을 능동적 추론으로 다시 구성해낸다. 요컨대 우리의 시각 경험은 눈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난다. 촉각, 청각, 후각도 마찬가지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광경, 소리, 냄새)은 직접 경험이 아니라 캄캄한 극장 안에서 펼쳐지는 전기화학적 연극이다. (…) 다양한 감각기관에서 들어오는 신호들을 비교하고 패턴을 감지함으로써 뇌는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최선의 추측을 한다.” 여기서 ‘최선의 추측’ 메커니즘이 바로 가추법적abduction 추론이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지각하는 간단한 행위에도 다분히 능동적인 주관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텅 빈 공간이지만 우리는 눈에 비치는 사물이 딱딱하고 고정된 물체라고 믿는다. 요컨대 우리가 사물을 사물로 보는 것은 착시나 환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늘 이러한 환각 속에 산다. 17)


공정을 지선至善으로 삼는 것도 아닌데 90년대생들이 그토록 공정을 문제 삼는 까닭은 무엇일까? 임명묵은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을 정서적인 것, 느낌의 문제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공정하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일종의 해열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불안감을 경감해주는 것이다. 현재는 노력하면 보상이 따라오고, 잘살 수 있다는 신화가 깨진 상태다. 남은 것은 덜 노력한 이에 대한 응징이다. 점수가 낮은 사람에게,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응분의 푸대접이 가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해야 한다는 게 90년대생 사이의 암묵적 합의다. 이들이 보기에 고용에서의 각종 할당제,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는 주관적 개입으로 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이며, 합의와 신뢰를 깨트리는 행위다. 90년대생들이 탈-가치화함으로써, 정작 90년대생들의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결집은 반反, 안티anti의 네트워크로만 이루어진다. 24-5)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2021)에서 중요하게 검토할 지점은 청년층은 상위 계층을 자임할수록 보수성이 뚜렷해진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계층으로 인식한 청년 남성에서 다른 집단들보다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도울’ 경향이 가장 높다는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착해서’ 그렇다기보다 서로 도울수록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위 계층일수록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돕는 행위, 혹은 그러한 의향을 밝히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생각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은 노력을 덜한 사람들이다. 그에 합당한 응징을 받는 것이며, 이에 온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시스템의 교란이자 위선이다. 조사에 응한 청년 남성들은 일말의 공동체적 가치도 부정한다는 눈총을 받을지언정 위선에만큼은 명확하게 거부 표시를 한 것이다. ‘안티의 네트워크’로 결집한 청년 남성 집단이 반-위선의 네트워크도 견고하게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7)


2. 혐오 ? 우울과 불안의 그릇된 방어기제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뇌의 해석이자 추론 결과다. 코나투스conatus(자기보존 능력)가 계속해서 감소하는 상태를, 뇌는 으레 우울감이라고 추론한다(질병으로서 우울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불안감은 자신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그 상태가 지속될 때 생성된다. 이런 우울과 불안에 대한 신체적 반응이 경멸이다. 자신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위안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발현된 경멸은 깎아내릴 대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는 나의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외부 존재를 자의적으로 점찍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혐오다. 그런데 (방어기제로써의) 경멸은 대개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겨냥한다. 문제를 의인화하는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내부 모델에 견고히 자리 잡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 뒤부터는 깨지기 힘든 고정관념과 편견이 타인을 대하는 판단 근거가 된다. 33)


혐오의 견고한 내부 모델을 구축한 사람은 편견을 반증하는 새로운 지각정보가 입력되어도 좀처럼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다. 반례를 한 트럭으로 접해도 예외적 경우로 치부하지, 편견을 반성하는 이는 드물다.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고, 다양성 교육을 진행하는 데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혐오에 빠진 사람에게 그 불합리함을 증명하는 온갖 데이터는 부질없는 처방이다. 난민이나 이주민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범죄 통계가 거짓이라고 설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떻게든 혐오할 이유를 다시 찾고 만들게 되어 있다. 교육의 가치와 효용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훈계와 계몽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혐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신경증 환자에게 곧이곧대로 ‘당신의 행동은 그릇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언행을 고쳐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 증세가 나아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34)


3. 포퓰리즘 ? ‘그들’과 ‘우리’의 항시적 투쟁


포퓰리즘은 어떤 사상 체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정치운동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다. “보통 이들을 포괄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단순히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정치학자 폴 태가트Paul Taggart는 포퓰리즘의 근본적 특징으로 유동성을 꼽는다. 실체라고 부를 내용이 결여되어 있기에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등에 붙어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인민주의, 대중주의, 민중주의 등으로 번역된다. 풀이하면 인민을 중심으로, 인민을 위하고 인민에게 소구하는 사상·체제·어젠다·메시지를 망라하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는 단 하나의 가치를 정해두고 그에 걸맞지 않은 이는 인민이 아닌 존재로 밀어낸다. 인민이 아닌 존재는 부패한 엘리트 집단일 수도, 하층민일 수도, 이주민일 수도 있다. 단 하나의 공동선이 존재하고 그걸 표방하는 자신들만이 인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는 포퓰리스트들은 자연히 다른 세력을 악마화한다. 자신의 당내에서조차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40-1)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포퓰리즘’이라는 명제는 포퓰리즘이 항상 민주주의와 함께 있다는 논의에서 출발한다. 정치학자 벤저민 아르디티Benjamin Arditi는 프로이트의 증상symptom 개념을 빌려와 포퓰리즘-민주주의 관계를 증상-자아 관계와 같다고 주장한다. 자아가 완전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결여하고, 무언가에 억압되어 있는 한, 증상은 자아에 내속해 있으면서 이따금 불안과 소요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포퓰리즘도 민주주의에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하면서 이따금 증상으로 나타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과 관료 등에 위임되어 있다. 그런데 인민은 대표를 직접 뽑는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이에 개입한다. 이렇듯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는 비전문가·대중의 개입이 일으키는 소요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항상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42-3)


4.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 포퓰리즘의 정치경제적 계기


자본주의가 발전한 20세기 이후 프티 부르주아는 신·구-중간계급(각각 경영관리직·전문기술직 등과 자영농)으로 나뉜다. 노동자라 할지라도 관리직이나 전문기술직에 종사할 경우 신-중간계급으로 분류된다. 정치철학자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는 비생산적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모두 중간계급으로 묶은 바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구-중간계급이 크게 감소하고 노동계급이 증가했다. 문제는 노동계급의 숫자보다는 신-중간계급의 가파른 증가에 있다. 풀란차스의 계급 범주에 따르면 후기산업사회에서 노동계급으로 분류되는 상당수 노동자들은 실은 신-중간계급일 수 있다. 계급정치에서 이들의 위상은 논쟁의 대상이다. 이념적으로 이들은 모순되는 위치에 있으며, 따라서 단일 대오로의 결집이 쉽지 않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정체성을 사회적 적대의 기본 단위로 상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늘날 한국의 계급구조는 이런 입장의 현실적 근거가 된다. 55-7)


5. 기만과 위선의 정치 ? 포퓰리즘의 문화정치적 계기


서구 선진국의 기득권 엘리트와 리버럴 세력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일환으로 PC와 정체성 정치, 페미니즘 등 자유주의적 가치를 아전인수 격으로 활용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이를 ‘깨어 있는 자본주의’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휘두르며 희화화한다.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환멸이 뿌려진다.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한국의 청년들이 PC와 정체성 정치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서구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리버럴의 위선과 자가당착이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주요 창구 중 하나는 도를 넘는 ‘관종’ 행각을 벌이고 있는 ‘사이버 렉카’다. 이들의 목적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알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과거에 내놓은 자유주의적 메시지와 그에 어긋나는 행실을 가져다 놓고 ‘내로남불’이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사이버 렉카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PC와 정체성 정치 등 자유주의적 의제와 메시지에 막연한 반감을 가지며, 점차 ‘진보=위선’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각인하게 된다. 66-7)


6. 20대의 탈-정치적 정치 ? 응징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오늘날 20대의 정치 무관심은 10여 년 전과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이른바 ‘적극적 무관심’인데, 바꿔 말하면 정치에 대한 강한 환멸과 불신이다. 과거 20대의 정치 무관심이 시큰둥하고 별생각 없는, 말 그대로의 무관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한층 공격적인 정치혐오에 가깝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도 제도권 정치(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태도가 합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연구참여자 중 한 사람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이후로 정치에 관심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경제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느냐에만 관심을 둔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히 정치 문제와 개인의 경제적 이해를 분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체로서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적극적 표현으로 보는 게 옳다. ‘함께 잘사는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으로서 정치라는 관념에 대한 회의는 공공성의 붕괴와 각자도생의 문제로 이어진다. 73)


7. 정치 불균형과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 ? 자유주의에서 극우까지의 세계


한국의 청년들 대다수는 한국의 양대 정당을 크게 다를 바 없는 집단이라고 본다. 동시에 현재 정부·여당이 극단적 좌편향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야가 ‘거기서 거기’라면서도 한쪽은 지나친 좌편향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협소해진 사회·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진보정치의 우경화가 가져온 착시다. 말하자면 청년세대에게는 보수가 중도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보통 한국인’의 정치적 상상력은 자유주의-권위적 보수주의의 박스권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익 포퓰리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목격된다. 특히 현재 20대,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가 보편화된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정치적 상상력을 넓힐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 북한 문제와 레드 콤플렉스라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겹치며 자유주의에서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나아가는 발상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79-80)


뚜렷한 지지 정당이 없는, 즉 당장이라면 어느 당에 투표하겠지만 인물과 공약을 보고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들의 선택은 결국 싫어하는 정당의 후보를 떨어뜨리는 투표로 귀결된다. 이렇듯 특정 세력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부정적 투표’ 혹은 ‘응징 투표’를 하는 사람들을 부동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중도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추정컨대 여론조사에서 특정 정당지지자임을 밝힌 20대의 상당수는 ‘응징 투표’의 일환으로 지지 정당을 그때그때 바꿀 가능성이 크다. 증가하는 부동층은 정치 무관심의 산물이며,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불신, 혐오의 적극적 표현이기도 하다. 정치 현안을 인터넷으로만 접하는 부동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극적 기사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헤드라인이 말해주지 않는 맥락과 사정을 능동적으로 살피는 경우는 드물며, 그러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치 무관심은 손쉽게 응징 투표로 이어지고, 그렇게 교체된 정권에서 또다시 실망과 응징이 반복된다. 82-3)


8. 진짜 분노를 가리는 학습된 분노 ? 사유의 외주화


디지털 큐레이션이란 그때그때 화제가 되는 이슈들을 흥미로운 것 위주로 선별하고 단숨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혹은 이해했다는 인상을 남겨주는 콘텐츠의 모음을 일컫는다. 청년들이 시사·정치 뉴스 창구로 이용하는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큐레이션 콘텐츠의 유통에 더없이 적합한 플랫폼이다. 디지털 큐레이션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 본인에게 흥미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판단을 디지털 큐레이션 제작자에게 위탁하고 외주화한다. 이들은 (특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정치 일반에 대한 피상적 인상을 쌓는다. 이 지점에서 그 어떤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클릭을 유도하는 콘텐츠와 그 제작자가 바로 사이버 렉카다. 연구참여자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그거라도 보면서 ‘소셜미디어로 시사를 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 큐레이션과 사이버 렉카의 손에서 연성화·단순화·예능화한 (더 나쁘게는) 왜곡·날조된 이슈의 편린을 접한다고 함이 더 정확할 것이다. 89-90)


분노와 경멸, 혐오는 정치와 무관하고 사이버 렉카 콘텐츠도 아닌 평범한 게시물을 통해서도 전이된다. 경로는 이렇다. 예컨대 유튜브에서 비디오 게임 콘텐츠를 찾아본 사람에게 해당 영상의 시청자들이 많이 본 또 다른 영상이 추천된다. 그런데 20대 남성 게이머들은 대개 정치적 올바름PC에 적대적이다. PC와 페미니즘의 영향에 따른 게임 캐릭터 재현과 서사 구조 변화를 자신들만의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 관련 유튜브 영상을 몇 차례 접한 이는 의도치 않게 반-PC, 반-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콘텐츠로 유인되기 쉽다. 인터넷 여론이 청년세대의 보편적 생각이 아님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단 생산된 비하·혐오 콘텐츠는 특정 커뮤니티에만 고여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렉카 계정들이 퍼뜨리는 이러한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분노 어린 댓글을 마주할수록, 천천히 그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학습하게 된다. 94)


9. 외부인의 생성 ? 공정한 차별주의자들


연구참여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전반을 공정성의 문제와 결부한다. 즉 대북 지원에 대한 이들의 반감은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및 정규직화에 대해 갖는 반감과 같은 논리를 공유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체제에서 더 가혹해진 공안정치와 수탈은 한국사회의 공공성을 붕괴시켰다. 이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존 문제가 되었다. 공공성이 실종된 사회에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펙을 쌓고,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깜깜한 미래를 대비해 일상의 소박한 즐거움은 물론 연애와 결혼, 출산까지 미루거나 포기하며 노력했다. 그렇게 확보한 한줌의 상대적 우위는 어떤 식으로라도 보상받아 마땅하다. 이들에겐 그것이 ‘공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연구참여자들은 여건이 못 되어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임금과 처우와 시선에서 응분의 푸대접을 받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까지가 본인들에게 주어진 ‘공정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98-9)


20대에게 ‘공정’은 정체성 정치를 평가할 때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남성 연구참여자 대다수는 양성 할당제 등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들은 기업이 지금까지 성별을 불문하고 능력에 따라 직원을 뽑아왔다고 믿고 있다. 설사 특정 성별을 선호하고 석연치 않은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의 행태가 있더라도 그것은 입맛에 맞는 노동자를 채용하는 기업·고용주의 권한으로, 자연스러운 시장의 논리일 뿐 정치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할당제 때문에 더 자격 있는 남성 대신 여성 지원자가 뽑힌다고 상상하며 탈락한 남성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남성 연구참여자들이 보기에 ‘남성 특권’은 최소한 자신들이 사는 한국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역차별’론으로 나아간다. 자신들을 “선행 차별에 대한 일종의 차별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어떤 과도기에 놓인 피해자 혹은 희생자로 인식한다. “이미 피해자인데 또 피해를 감수하는 (…) 가중차별을 당한다는 정서인 것이다.” 99)


10. 미래는 중단되었다 ? 부모보다 ‘가난할’ 세대로 산다는 것


연구참여자들은 자동화와 경제인구 감소의 상관관계가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기본소득 의제에 거부감을 보이던 일부 연구참여자들도, 보수우파 진영의 기본소득 프레임에는 반감이 훨씬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파 버전의 기본소득은 국가 규모를 줄임으로써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 즉 기본소득을 분배하되 국가의 사회복지 재정을 대폭 축소하고 나머지 사회보장을 개인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좌파 버전의 기본소득은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엄격한 과세로 재원을 마련해 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파 프레임을 먼저 소개한 다음 좌파 프레임을 설명하자 연구참여자들은 후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듯했다. 인간 노동력의 투입 없이 가치의 생산이 가능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자본의 정언명령의 유효기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107-8)


11. 헤게모니 전쟁 ? 2016 촛불시위와 20대 현상


2016년 촛불시위의 지상목표는 ‘박근혜 퇴진’이었다. 거창한 사회변혁이나 혁명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이 시민들에 의해 전복되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그림이었고 실현 가능한 약속이었다. 그랬기에 제각기 다른 정치 성향을 띤,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치지도 반목하지도 않고 양보를 거듭하면서 한 공간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추상적 의제는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이 빈약한 대중을 결집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프로그램을 내세웠더라면 촛불의 에너지를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보좌파 진영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할 헤게모니 전략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이 촛불의 소명을 박근혜 퇴진으로 국한시켰고, 집권 이후 이른바 ‘촛불정신’을 배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촛불은 처음부터 진보좌파의 것이 아니었다. 115)


20대 안에서 남녀는 물론이고 같은 성별끼리도 서로 다른 요구를 갖고 있지만 특정 국면마다 이들을 거대한 반-정권의 전선에 서게 만드는 헤게모니적 기표가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다.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에서 ‘공정’이란 과연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공정은 속이 빈 기표다. 따라서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도 공허하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김정희원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오늘날 공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무기가 되어weaponization’ 모든 사안에 관련한 건전한 토론과 숙의를 차단하고 ‘그들’의 배제와 ‘우리’의 투쟁을 성역화하는 데만 쓰인다. 알맹이가 없는 기표로서 공정은 그 자체로 말해주는 바가 없고 해석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특정 정치 세력에게 전유되기 쉽다. 현재 이 기표는 냉전보수 세력이 전유한 상태로, 그들의 해석에 청년들이 스스로를 동기화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진보좌파 역시 이 기표를 전유할 수 있다. 결국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일 테다. 117)


에필로그: 과격화냐 급진화냐


아주 미세한 빗겨남, 이탈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사소하다. 그러나 그로 인한 마주침들은 상호 축적-연결되며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역사의 전 궤적에 걸쳐 변화를 불러온다. 나비효과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개개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최소한의 일탈이 사회를 근간부터 뒤흔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급진적 마주침과 대중의 자연발생적 조직화의 조건은 일상의 사소한 데서부터 행하는 일탈, 즉 ‘일상의 변용’이다. 이것은 문화적 표피를 띠지만 사실은 금융화된 오늘날의 일상생활에서 등장할 수 있는 급진적 문화정치의 한 형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가 형성되는 삶의 구조가 바로 이러한 일상의 구조이며, 동시에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여태껏 익숙하게 적용해온 사고방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의 해결이 불가능한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어쩌면 유일한 저항의 방법일 수 있다. 120)


지금 이대로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20대들은 그러나 정치적 상상력이 협소한 탓에,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어떠한 변화를 지향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20대들이 지금 정치와 사회를 대하는 멘털리티는 브레히트의 잠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올바르지만 오래된 것보다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이 낫다. 그들의 상상력으로 그 새로움이란 정권교체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그 이상의 열망은 항상 남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변화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다. 이 ‘과격화’를 긍정적인 ‘급진화’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20대 현상의 표피는 헤게모니적 기표에 근간한 헤게모니적 접합의 산물이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자연스럽게 발생하기도 하고, 언론과 정치의 손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서 20대를 동원하는 기표는 보수 세력이 완전하게 전유하고 있다. 127)


20대 현상에 대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은 20대들을 무엇으로 호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부르주아지, 기득권 엘리트층을 제외한 나머지 보통 사람으로서 20대들이 공동으로 맞이하고 있고 곧 맞이할 문제, 공동으로 답해야 할 질문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노력, 경제 행위를 압도하는 불가항력의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야 한다. 나는 지속되는 일자리 감소 및 그것을 가속화하는 자동화, 불가피한 계층 하강,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등 혼돈 속에서의 실존적 위협에 놓여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을 호명하는 기표로 ‘위태로운 자들’을 제안한다. 이것을 단지 제도권 정치 차원에서 표심 공략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 바깥으로부터 내부를 재구조화할 압력으로 작용케 해야 한다.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을 벗어나 맹점에 위치한 저 몸부림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새로운 급진 정치로의 전환은 충분히 가능한, 지금 여기의 시나리오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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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리로 세상을 읽는다 - 소소한 일상에서 우주의 원리가 보이는 난생처음 물리책 나는 세상을 읽는다
크리스 우드포드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고층빌딩이 안전한 이유 - #중력 #운동법칙


우리 삶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힘, 우리 중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지구(질량이 무려 6×10의 24승kg)와 질량이 있는 모든 것 사이의 끌어당기는 힘이 증력이다. 도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마천루를 생각해보자. 빌딩이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뉴턴의 운동 제1법칙과 제2법칙에 따라, 빌딩에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제1법칙에 따르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계속 멈춰 있고, 제2법칙에 따르면 운동은 힘에 의해 시작된다.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건물은 외견상 힘을 받지 않고, 따라서 정지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건물에 매순간 중력이 작용한다는 걸 안다. 간단히 말해서 뉴턴의 말이 맞는다면 건물은 가루가 돼 지구 내부로 쓸려 들어가서 영원히 또는 지구 핵의 용광로에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중력이 건물을 땅속으로 잡아당길 때 땅이 정확히 같은 힘으로 건물을 위로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11, 14)


# 뉴턴의 제3법칙 : 힘이 물체에 작용하면 정확히 같은 크기의 다른 힘(반동)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작용・반작용의 법칙


건물 기반이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힘들의 균형이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면, 그 힘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우리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약 100가지 유형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생명의 ‘레고블록들’을 화학원소라고 부른다. 원자가 여럿 뭉쳐서 분자라는 더 큰 구조를 만든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대부분의 힘은 원자 내부와 원자 사이, 분자 내부와 분자 사이에서 비롯된다. 원자 내부는 대부분 빈 공간이다. 원자의 가장자리에는 (배터리의 음극처럼) 음전하를 띤 전자들이 일종의 성긴 ‘전자구름’을 형성한다. 한편 원자의 중심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뭉쳐서 원자핵이라고 하는 단단한 내핵을 형성한다. 원자핵은 (배터리 양극처럼) 양전하를 띤다. 원자의 음전하 부분과 양전하 부분은 원자끼리 너무 들러붙는 것을 막는다. 철근은 쥐어짜도 눌리지 않는다. 철 원자 각각을 둘러싼 음전하 전자구름들이 서로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두 자석의 같은 극처럼 음전하끼리는 서로 배척한다. 14-5)


미술관과 도서관 같은 공공건물의 명칭은 흔히 그 기관에 기부한 부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다. 미터법의 측정단위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해당 단위 뒤의 과학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 붙는다. 힘의 과학에 대한 뉴턴의 지대한 공헌도 거기 딱 맞는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현대 물리학에서 힘의 단위는 바로 N(뉴턴)이다. 1N에 얻어맞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세평에 의하면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 있다가 떨어지는 사과에 머리를 맞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사실이 아닌 건 누구나 안다). 무게가 약 100g인 사과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약 1N이다. 이제 앞서 말한 힘의 균형을 떠올려보자. 사과가 떨어지지는 것을 막으려면 1N의 힘으로 사과를 떠받쳐야 한다. 여기에 10을 곱해보자. 1kg의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약 10N이다. 즉 지구 중력은 1kg당 10N의 힘으로 물체를 잡아당긴다. 내 몸무게가 왜 75kg인지 궁금한가? 지구가 나를 750N의 힘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18)


2. 살이 찔수록 왜 계단이 싫어질까? - #에너지 #전력


과학자들이 쓰는 에너지의 단위는 ‘줄joule’이다. 최초로 에너지 측정 실험을 행한 19세기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 줄James Prescott Joule, 1818~89의 이름을 땄다. 커피 한 잔 분량의 물을 끓이는 데 약 120kJ(12만 J)이 든다. 물 한 잔을 끓이는 일(12만 J)은 오렌지 12만 개(12톤)를 1m 들어올리거나 오렌지 하나를 120km 상공(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4배)으로 던져 올리는 일과 같다. 일상의 각종 일을 수행하는 데 몇 줄의 에너지가 드는지 이론적으로 추산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이는 회계장부로 치면 ‘차변debit’, 즉 에너지의 수요(소비) 측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초콜릿칩 쿠키, 자동차 배터리, 석탄 한 덩어리에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숨어 있는지, 그걸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꽤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이는 차변에 대한 ‘대변credit’, 즉 에너지의 공급 측면이다. 줄의 업적 덕분에 우리는 이 에너지 장부가 항상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에너지 ‘대변’과 ‘차변’은 정확히 일치한다. 25)


그런데 에너지양만 알아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 하지만 관건은 그 일을 얼마의 시간 내에 해내느냐다. 예를 들어 틈틈이 쉬면서 전망을 감상해가며 8시간에 걸쳐 슬렁슬렁 한가롭게 올라간다 치자. 그렇게 분당 네 계단씩 올라간다면 지루하긴 하겠지만 딱히 몸이 힘들지는 않다. 이번에는 꼭대기까지 30분 만에 주파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워보자. 목표를 달성하려면 1초에 한 계단씩 헉헉대며 올라야 하고, 이건 비교할 수 없이 힘들다. 이렇게 에너지에 시간을 더한 개념이 일률power이다. 일률은 에너지 소비율이나 생산율(에너지양을 그것을 사용하거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에너지처럼 일률도 측정 방법을 알면 개념이 잡힌다. 일률을 측정하는 단위를 와트watt, W라고 한다. 1초에 1J의 일을 할 때의 일률이 1W다. 100W 전등은 1초에 100J의 에너지를 쓰는 전등이다. 26-7)


무슨 일이든 거기 드는 에너지양은 항상 같지만, 더 높은 전력을 사용하면 더 쉽고 빠르게 작업을 마칠 수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까지 어떤 방법으로 올라가든 내 체질량body mass을 같은 거리만큼 끌어올려야 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항상 같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전기모터가 내가 내 몸을 옮기는 것보다 훨씬 빨리 내 몸을 위로 옮겨준다. 전기포트, 가스레인지, 모닥불, 또는 숟가락으로 열심히 젓기(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이것들 모두 결국에는 물을 끓게 하겠지만, 각기 다른 일률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각기 다른 전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걸리는 시간은 각기 다르다. 3kW급 고성능 전기포트를 쓰면 1kW급 여행용 포트를 쓸 때보다 세 배 빠르게 물을 끓일 수 있다. 정확히 같은 양의 에너지를 세 배 빠르게, 즉 세 배의 전력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전력의 전기포트를 쓰든 에너지 소비량, 즉 킬로와트시는 같다. 29-30)


돈은 뜬금없이 내 은행계좌에 나타나거나 이유 없이 내 지갑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남들과 끝없이 거래하면서 돈을 벌고 또 소비한다. 에너지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너지를 원하면 (음식을 먹거나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식으로) 어디선가 에너지를 ‘벌어야’ 한다. 뭔가 원하는 걸 하려면 가진 에너지를 어느 정도 ‘소비해야’ 한다. 돈을 찍어내거나 위조하는 등 없던 돈을 난데없이 만들어내 금융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별짓을 다해도 에너지에는 이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제로섬 방식의 거래를 하는 것뿐이다. 즉 어딘가의 에너지 획득은 다른 어딘가의 에너지 손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물리법칙이다. 이것을 에너지 보존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Energy이라고 한다. 흔히 에너지 절약의 의미로 쓰이는 에너지 보존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30)


3. 슈퍼히어로 되는 법 - #지레 #빗면


지레는 모든 기계의 아버지다. 도구 대부분이 지레의 원리에 기반한다. 지레는 막대의 한 지점을 받치고 그 받침점에 작용하는 회전력torque을 이용해 물체를 움직이는 도구다. 지레가 길수록 거기에 가하는 힘을 더 많이 늘려준다. 이 원리를 터무니없이 극단화한 것이 아르키메데스의 지구 행성 들어올리기 비유다. 렌치, 스패너, 크로바가 지레의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손잡이, 스위치, 심지어 두루마리 화장지를 포함한 다양한 물건 또한 지레의 원리에 기반한다. 지레는 두 가지 상반된 방식으로 내가 가하는 힘이나 속도를 증강한다. 지레의 끝을 돌리는 것은 뻑뻑한 너트를 스패너로 돌리는 것과 같다. 지레의 끝을 밀어서 원을 그리며 돌리면 원 중심부에는 더 느리지만 더 강한 회전력이 발생한다. 반대로 지레의 반대쪽 끝(원 중심부)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도끼를 휘두를 때다. 원의 중심에서 어깨가 회전할 때 원의 끝에서 도끼자루가 길게 회전하면서 속도가 붙고, 무거운 도끼머리가 나무를 반으로 쪼갠다. 38)


바퀴의 두 가지 작동 원리 중 간단한 것부터 짚어보자. 일단 바퀴는 지레처럼 작동한다. 바퀴가 커질수록 지레 효과도 커진다. 바퀴 림을 일정량의 힘으로 돌리면, 바퀴 허브(지레의 중심점)는 더 느리지만 더 강한 힘으로 돌게 된다. 이것이 파워핸들이 대중화되기 전 트럭과 버스의 핸들이 그토록 거대했던 이유다. 바퀴의 작동 원리가 한 가지 더 있다. 수레가 있으면 무거운 짐을 옮길 때 편리하다. 바퀴는 어떤 원리로 짐 운반을 쉽게 만들까? 모든 것은 힘의 작용, 다시 말해 바퀴들이 차축이라는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방식과 관계있다. 바퀴는 마찰을 차축으로 전달해 마찰을 줄인다. 아직 약간의 마찰은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수레를 옮기는 데 여전히 힘이 좀 들어가지만 이제는 걱정이 대폭 줄었다. 여기에 바퀴의 레버리지까지 거든다. 수레를 뒤에서 밀면 바퀴들이 지레 역할을 해서 미는 힘을 배가시키고, 결과적으로 바퀴가 더욱 원활하게 차축을 돌면서 남은 작은 마찰을 극복한다. 39-41)


에너지를 생각하면 빗면의 원리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0kg의 자갈을 들어서 땅에서 1m 높이의 트럭에 싣는다 치자. 자갈을 트럭에 어떻게 싣든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거기 드는 에너지의 양은 같다. 이때 필요한 최소 에너지양은 2,000J이다. 자갈을 자루에 채워 똑바로 들어올리는 경우 2,000W의 일률로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전기포트나 전기토스터만큼 빡세게 일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갈을 수레에 담아서 완만한 경사로로 약 4초에 걸쳐 밀어올리는 경우는 똑같은 2,000J의 에너지를 네 배 느리게, 즉 500W의 일률로 쓰게 된다. 단점이 있다면 수직으로 들어올릴 때보다 긴 거리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힘을 긴 거리에 걸쳐 분배한다고 할까. 빗면의 경사가 완만할수록 힘이 적게 들지만 거리는 더 길어진다. 이는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같은 양의 에너지를 써야 함을 의미한다. 힘은 4분의 1만 들지만 대신 네 배 오래 일해야 한다. 41-2)


4. 자전거와 빵 반죽의 공통점 - #바퀴 #마찰


자전거 바큇살은 구부리기 쉽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잡아 늘릴 수는 없다. 이것이 자전거 바퀴의 작동 비결이다. 하중의 압박을 받는 수레바퀴와 달리, 자전거 바큇살들은 오히려 팽팽히 당겨진다. 즉 인장력을 받는다. 바이올린의 현처럼. 거미집의 줄처럼. 허술해 보이는 바큇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큇살이 허브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양상이다. 수레바퀴와 달리 자전거 바큇살은 림에서 허브까지 똑바로 이어져 있지 않다. 대신 각각의 바큇살이 허브 옆으로 조금씩 비껴서 뻗어 있는데, 이것을 탄젠트 연결tangential connection이라고 한다. 바퀴 허브가 꽤 넓다보니 바큇살의 일부는 한쪽으로, 나머지는 다른 쪽으로 치우쳐서 연결된다. 탄젠트 바큇살은 자전거의 전체 하중이 고르게 분산되는 일종의 팽팽한 철망을 형성해 바퀴가 자전거와 탑승자의 무게를 견디게 해줄 뿐 아니라, 고속으로 방향을 틀거나 커브길에서 기울어질 때 받는 전단력shearing force과 비틀림을 견디게 해준다. 51-2)


간단히 말해 기어(톱니바퀴)란 가장자리에 돌기가 있어서 서로 맞물리며 도는 바퀴를 말한다. 한 쌍의 기어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기계의 속도를 높이는 대신 기계의 힘을 줄이거나, 또는 그 반대로 한다. 즉 기어는 속도 또는 힘을 높일 뿐 두 가지를 동시에 높이지는 못한다.  뒷바퀴와 페달바퀴는 신축성 있는 체인으로 연결돼 있고, 양쪽에는 필요에 따라 골라 쓸 다양한 크기의 톱니바퀴가 장착돼 있어서, 변속 레버를 이용해 체인에 걸리는 톱니바퀴 쌍을 바꿀 수 있다. 다시 말해 맞물리는 톱니바퀴들의 상대적 크기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 교묘한 기계적 변속장치를 디레일러dérailleur라고 한다. 디레일러 덕분에 자전거 주행 중에, 심지어 톱니바퀴들과 체인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중에도 변속이 가능하다. 고속 기어에서는 뒷바퀴가 페달바퀴보다 빠르게 회전해서(빠르고 약함) 평지를 질주하기 좋다. 저속 기어는 이와 반대다. 뒷바퀴가 더 느리게 회전하는 대신 페달의 힘을 증대해서 언덕을 수월하게 오르게 해준다. 54-6)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에너지를 소비하는(잃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비비고, 바람을 가르고, 치대느라 잃는다. 이를 전문 용어로 각각 마찰friction, 항력drag, 구름저항rolling resistance이라고 한다. 마찰로 잃은 에너지는 그냥 손실이다. 브레이크와 바퀴로 빠진 열은 다시 주워서 쓸 방법이 없다.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 중 하나는 얼굴에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에너지를 잃는 또 하나의 경로다. 이렇게 물체가 유체fluids 내에서 운동할 때 받는 저항을 항력이라고 한다. 빨리 달릴수록 공기저항(항력)이 커지고, 공기저항이 셀수록 사람의 에너지 낭비도 커진다. 구름저항은 타이어가 노면을 구르며 받는 저항을 말한다. 자전거 타기는 타이어를 변형시키지 않고 다만 (타이거 안의 공기를) 끝없이 당겼다 풀었다 하며 에너지를 열과 약간의 소음으로 전환한다. 두툼하고 넓은 산악자전거 타이어는 얇고 좁은 경주용 자전거 타이어보다 구름저항을 많이 받는다. 57-9)


5. 볼 수 있는 전부이자 결코 볼 수 없는 것 - #빛 #전자


빛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특별하다. 우선, 우리 대부분에게 빛은 주요한 정보원이다. 대뇌피질의 1/3에서 1/2이 우리 눈이 세상에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할애된다. 한편 물리학에서는 빛이 이와는 매우 다른 이유로 중요하다. 아인슈타인 이후 학계는 세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빠른 속도인 광속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 흥미롭게도 광속은 시각과 하등 관계없는 물리방정식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E=mc2이다. 이 방정식은 에너지와 질량은 결국 같은 것이며 빛에 의해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준다. 그렇다 해도 빛을 우리의 편의를 위해 우주와 세계의 어둠을 밝혀주는 거대 우주 손전등의 출력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무식과 안이함의 소치다. 빛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로 존재하며, 동물의 시각이란 진화 과정에서 거기 편승해 우연찮게 얻은 능력일 뿐이다. 65)


빛에 대해 알수록 인간이 보는 세계가 다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적외선은 우리 눈이 감지하기에 너무 빨갛고 자외선은 너무 파랗다. 그런데 만약 빛의 파동(light waves, 광파)을 계속 잡아 늘리면 어떻게 될까? 적외선을 더 붉게 만들면? 파장이 550nm(나노미터, 대략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0분의 1)인 광파를 수십만 배 늘려보자. 마이크로파(극초단파)가 된다. 음식을 조리하고 휴대폰 통화를 이어주는 바로 그거다. 마이크로파를 다시 수십만 배 잡아 늘리면,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우리 집으로 전송해주는 라디오파(전파)가 된다. 이번엔 스펙트럼의 반대편으로 가서, 자외선을 더 파랗게 만들어보자. 자외선을 미세 죔쇠로 최대한 세게 압착하자. 그렇게 원래 파장의 1,000분의 1로 찌그러뜨리면 그게 엑스선이다. 그걸 더 압축하면 감마선gamma rays이 된다. 따라서 감마선은 사실상 초고에너지 엑스선이다. 이들의 차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다. 즉 파동의 크기와 거기 실린 에너지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66)


빛은 1초에 30만 km(지구를 일곱 번 도는 거리)를 주파한다. 따라서 빛이 태양에서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몇 분밖에 안 걸린다. 이것이 우리가 빛의 파동을 바다의 파도를 보듯이 볼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빛이 몹시 작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시광선의 경우 각각의 파장이 수백 나노미터(원자 크기의 수천 배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빛 파동을 볼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빛을 파동으로 보지 않고 입자로 볼 때는? 빛을 파동으로 볼 때는 빛은 전자기파라고 말하고, 빛을 입자로 볼 때는 빛이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광자는 왜 볼 수 없는 걸까? 여기서 우리는 초현실적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 양자이론quantum theory의 세계로 들어간다. 양자이론은 물질이 원자 규모에서 어떻게 거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괴이한 개념들의 묶음이다. 광자도 미치게 작아서 질량조차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광자는 순수한 에너지다. 67-8)


6. 봉화에서 스마트폰까지 - #전자기파 #광속


스코틀랜드 출신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79은 전기와 자기를 네 개의 간단한 수학 방정식으로 멋지게 엮어서 1873년 최초로 전자기이론을 확립했다. 전자기이론의 기본 개념은 전기와 자기가 완전히 분리된 두 가지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이다. 전기가 앞뒤로 진동하면 자기가 발생한다. 나침반을 전선 근처에 놓으면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는 마법을 다들 한번쯤은 봤을 거다. 사실 바늘을 움직이는 것은 마법이 아니라 전선을 타고 앞뒤로 쇄도하는 전류다. 전류가 주변에 생성한 자기장이 바늘을 돌아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요동할 때도 전기가 발생한다. 다이너모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바퀴를 돌릴 때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은 전선 코일을 자석 안에서 회전시키는 것이다. 전선의 자기장이 끝없이 요동하면서 전기를 만들어 자전거 램프에 불이 들어온다. 태양에너지를 제외하고 우리가 생산하는 전기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전자기 발전기에서 나온다. 81-2)


광파처럼 라디오파도 직선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라디오 송신기는 등대 수준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직진만 가능했다면 라디오파 신호가 그냥 우주로 날아가버려 메시지를 15~30km 이상 전송하는 데는 무용지물이었을 거다. 다행히 라디오파는 둥근 지구를 따라 쉽게 휘어지고, 덕분에 편리한 통신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비법이 있다. 첫째, 높다란 라디오 안테나를 땅에 세우면(지구와 연결하면) 지구 자체가 안테나의 하반부처럼 작동한다. 물이 완전히 정지해 있는 호수 위에 안테나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옆에서 보면 안테나가 물에 비쳐서 두 배로 길어 보인다. 호수에 비친 자기 이미지 위에 서 있는 안테나. 같은 현상이 땅에 접한 라디오 안테나에도 일어난다. 즉 지구가 전기를 전도해서 안테나에 이어진 거울 이미지로 작용한다. 그래서 라디오파가 안테나에서 퍼져나갈 때 지구의 윤곽을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진다. 이것을 지상파ground wave라고 한다. 83)


두 번째 비법은 더욱더 신통하다. 많이들 알다시피 밤에 AM(중파) 라디오를 켜면, 낮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온갖 외국 라디오 방송국들의 치직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지구 대기의 전리권ionosphere이 부리는 조화다. 전리권은 지표로부터 60~500km 떨어진 구간을 말한다. (제트기 비행 고도보다 여섯 배 이상 높다.) 여기서는 분자들이 태양에너지로 인해 이온화된다. 즉 전자를 잃고 양전하를 띠는 원자들과 자유 전자들로 분리돼 있다. 그 때문에 전리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즉 전리권은 전기가 잘 통한다. 전리권은 태양복사(태양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의 영향을 극적으로 받기 때문에 낮과 밤의 거동이 급격하게 변한다. 낮 동안은 전리권의 최하층이 지상에서 발사한 라디오파를 흡수해서 라디오파가 아주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 현상이 줄어든다. 밤에는 전리권의 상층이 라디오파를 거울처럼 반사해서, 다른 때라면 우주로 빠져나갈 신호를 다시 지표로 내리쏜다. 84)


# 통신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거울이 하늘에 실제로 있다면? 이것이 통신위성communications satellite을 낳은 기본 발상이다.


전자기복사(electromagnetic radiation, 파장이 짧은 감마선부터 파장이 긴 라디오파까지를 포함하는 에너지)가 형태만 여럿일 뿐 모두 같은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통신에 예를 들어 엑스선이나 감마선이 아니라 굳이 라디오파를 이용하는 걸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전자기복사의 파장은 주파수와 반대다. 수학적 표현으로는 반비례관계다. 즉 파동이 길수록 주파수(와 에너지)는 작아진다. 감마선과 엑스선의 경우 파동은 작고(파장이 원자 수준으로 극소하다) 주파수는 끝내주게 높다. 여기에 다량으로 노출되면 건강에 해롭다. 치명적 원자방사선이 자기 집에 비처럼 퍼붓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통신에 라디오파를 쓰는 두 번째 이유는 라디오파가 더 멀리 가기 때문이다. 라디오파의 파장은 하늘을 껑충껑충 가로지르는 거인의 걸음처럼 크기 때문에 신호 손실이 거의 없이 빌딩과 집, 나무와 자동차를 피해 날아갈 수 있다. 또한 건물 안이나 차 안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라디오 방송국의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 86-7)


7. 난방은 쉬워도 냉방은 어렵다 - #열역학 #엔트로피


열은 물체 내부에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요동하는 원자나 분자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의 한 종류다. 뜨거운 것일수록 내부 요동이 더 심하다. 수증기가 물보다 뜨거운 것은 내부에 운동에너지가 더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얼음보다는 물이 운동에너지가 더 크고 따라서 더 온도가 높다. 기체를 가열하면 그 안에 있는 원자나 분자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요동이 심해져서 서로 더 많이 더 심하게 충돌한다. 이렇게 물체 속 열을 원자들의 범퍼카 게임처럼 묘사하는 이론을 분자운동이론kinetic theory이라고 한다. 뜨거운 커피 한 잔과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거대 빙산을 비교해보자. 커피는 그래봤자 물 한 컵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은 분자를 함유하고 또 그 분자들의 평균 에너지가 높다 해도(얼음보다는 물이 뜨거우니까), 커피의 열에너지 총량은 대단치 않다. 이에 비해 빙산은 온도는 훨씬 낮지만 동시에 훨씬 크다. 여기서 관건은 크기다. 커피가 더 뜨겁지만, 열에너지는 빙산이 평균적으로 약 2억 배 더 많다. 92-3)


에너지는 마법과 거리가 멀다. 뭔가가 에너지를 잃으면 다른 뭔가가 반드시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 교환은 늘 제로섬 게임이다. 이처럼 누가 잃고 누가 얻든 에너지 총량은 결국 변함없이 보존된다는 법칙이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First Law of Thermodynamics)이다. 열 이동에 대한 다른 법칙도 있다. 이번 것은 훨씬 미묘하다. 커피를 빙산에 탁 내려놓으면 커피는 식고 얼음은 따뜻해지지만 절대 그 반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열역학 제2법칙Second Law of Thermodynamics이 있어서 그런 경우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제2법칙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 열은 항상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흐를 뿐 (외부의 힘이 개입하지 않는 한) 결코 그 반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자연현상의 비가역적 방향성을 말한다. 이렇게 열에너지가 흩어지는 현상을 ‘엔트로피entropy 극대화 경향’이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해 우주는 자연적으로 질서에서 혼돈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93-4)


열에너지가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전도conduction, 대류convection, 복사radiation라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전도는 뜨거운 것에 차가운 것이 접촉해서 열이 분자 간의 직접 충돌로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뜨거운 물체의 활발한 분자들이 자기 에너지의 일부를 차가운 이웃 분자들에게 직접 전달한다. 대류는 기체나 액체처럼 유동성 물체에서 일어나는 열전달 방법이다. 기체나 액체의 소용돌이나 상승과 하강을 통해 열이 전달된다. 예를 들어 냄비 안의 수프를 가열할 때, 불에 가까운 냄비 바닥의 수프가 먼저 따뜻해져 밀도가 낮아지고, 따라서 슬슬 위로 올라가며 위쪽의 차가운 수프를 있던 자리에서 밀어내 아래로 보낸다. 위로 올라간 수프는 식어서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던 수프가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상승과 하강 패턴이 냄비 안의 열에너지를 천천히 순환시킨다. 세 가지 중 마지막 방법인 복사는 열에 들뜬 원자들이 비가시적 광선의 형태로 공기나 허공으로 열을 방출하는 것을 말한다. 97)


무언가를 가열하고 냉각하는 것이 등가일 수는 있지만 결코 반대는 아니다. 에어컨은 방에서 열기를 ‘빨아들여’ 밖으로 배출한다. 냉각수(끓는점이 낮은 휘발성 액체)로 채운 파이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냉장고와 비슷하고, 공기를 흡입했다가 토해내는 점에서는 선풍기와 비슷하다. 에어컨의 기본 작동 원리는 이렇다. 냉각수가 실내의 열을 흡수해서 가열되고, 파이프를 통해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열을 방출해서 다시 냉각돼 돌아오는 순환 과정이 이어진다. 에어컨이나 냉장고는 열을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물리법칙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에어컨과 냉장고가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다 전기를 주입해서 억지로 그 역행을 만든 것뿐이다. 전기에너지가 뜨거운 것을 더 뜨겁게, 차가운 것을 더 차갑게 하는 비정상적 사이클을 가동해서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마땅히 없어져야 할 집 안팎의 온도차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다. 98-9)


8. 다이어트의 과학 - #칼로리 #연소


우리가 먹은 음식은 복잡한 소화 과정을 통해 포도당(화학에너지)으로 바뀐다. 위와 간이 몸에 들어온 음식을 즉시 사용 가능한 당분으로 저장했다가 느긋하게 사용할 지방으로 변환한다. 우리는 호흡이라는 단어를 숨쉬기의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사실 호흡은 체내에 저장된 연료를 공기에서 들어온 산소를 이용해 다시 가용에너지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호흡은 오히려 광합성(식물이 빛에너지를 이용해 이산화탄소와 물로 스스로 양분을 만드는 과정)의 역방향 버전과 비슷하고 자동차에서 일어나는 연소와 유사하다. 먹은 칼로리를 저장해두는 인체의 능력 때문에 입에 들어가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즉각 연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몸은 기름이 바닥난 자동차나 배터리가 다 된 시계처럼 그렇게 갑작스런 양분 고갈을 겪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물리법칙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생존 가능 기간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으며, 이 한계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의 에너지 함량으로 결정된다. 108)


인체도 음식으로 얻은 화학에너지를 실현하는 능력이 형편없다. 일반적으로 우리 몸은 20~25%의 기계적 효율을 낸다. 다시 말해 호흡을 통해 100kJ의 에너지가 풀려도 그중에서 근육이 몸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분량은 그중 겨우 20~25kJ에 불과하다.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갈까? 무려 60~70%는 우리 몸이 하는 일 없이 공회전하는 데 들어가고 남은 10%는 ‘간접관리비’, 즉 우리가 먹은 음식을 처리하는 데 들어간다. 왜 우리는 단백질도 탄수화물도 아닌 지방을 저장할까? 같은 무게일 때 체지방의 에너지 함유율이 두 배이기 때문이다. 즉 체내에 지방 0.5kg을 저장하는 것이 동량의 단백질을 저장하는 것보다 가용 잠재에너지를 두 배 더 확보하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10억 대의 화석연료 자동차로 굴러간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가 가진 놀라운 에너지 함유율 때문이다. 체지방은 에너지 밀도가 휘발유와 비슷하고, 다른 일상의 에너지원들(석탄, 목재, 천연가스, 배터리)보다 높다. 110, 113) 


하버드대학교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이론은 매우 독창적이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즉 인간의 진화적 성공은 결국 요리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식료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에너지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확보하게 됐고, 두뇌로 더 많은 에너지를 보내게 됐으며, 덕분에 수렵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더 흥미롭고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하게 됐다. 조리가 식료에게 하는 일은 두 가지다. 식료의 에너지 밀도를 즉각적으로 높이고(간단한 예로 뜨거운 음료는 차가운 음료보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체온 유지의 부담을 덜어준다), 식료를 소화하기 쉽게 만들어 신진대사를 돕는다. 랭엄이 말했듯 단백질을 조리하면 단백질 분자의 변성이 일어나 소화하기 쉬워지고 같은 양을 먹어도 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가 음식을 꼭꼭 씹도록 진화한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씹는 데 에너지가 좀 들어가지만 음식을 더 잘게, 더 소화하기 쉬운 입자들로 부수면 음식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회수할 수 있다. 114-5) 


9. 달리는 페라리에 왜 먼지가 쌓일까? - #기류 #유체역학


먼지를 입으로 불어도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먼지 입자는 놀랄 만큼 미세하다. 이렇게 해로운 미세먼지 입자들을 PM10으로 지칭한다. 입자의 지름이 10μm(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 인간의 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분의 1)이하인 대기오염물질을 뜻한다. 작고 가벼운 물질일수록 정전기의 접착력에 의해 물체 표면에 붙들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먼지가 들러붙는 건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지면의 풍속이 0이라는 것이다. 이때 지면이라 함은 말 그대로 지표에서 원자 몇 개 높이 이내를 말한다. 풀잎은 미풍에도 흔들린다. 하지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지표에는 어떠한 공기 움직임도 없다. 선풍기 날개는 분당 수백 번씩 공기를 가르는데 왜 그렇게 먼지 더께가 앉는 걸까? 날개 바로 옆의 공기는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공기 움직임이 없을 뿐 아니라 공기와 플라스틱 사이의 끝없는 마찰로 정전기가 발생해 먼지가 더욱 달라붙는다. 121-3) 


페라리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면 미끈하게 빠진 차체의 표면을 타고 공기가 미끄러지듯 흐른다. 이처럼 공기가 물체 표면의 저항을 받지 않고 쉽게 흐르도록 간소화한 형상을 유선형streamline이라고 한다. 공기역학적으로 이상적인 자동차는 전진할 때 공기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서 차량 후방에 발생하는 공기흐름이 차량 전방의 공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 즉 공기가 방해를 적게 받아 흐트러짐 없이 평행선들처럼 미끄러진다. 이것을 층흐름laminar flow이라고 한다. 전방이 절벽처럼 솟아오른 트럭은 트럭 앞면이 공기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평행하게 흐르던 공기층들의 일부를 막거나 늦춘다. 반대로 트럭 영향권 밖의 공기층들은 곧장 쌩 지나간다. 그 결과 공기층들이 마구 뒤섞여 소용돌이 공기가 생긴다. 이것을 난기류turbulence라고 한다. 난기류는 무질서하게 엉켜 있어서 그걸 뚫고 통과하려는 물체에 엄청난 저항을 만들어낸다. 난기류는 트럭에서 에너지를 얻고 이 때문에 트럭의 속도가 느려진다. 123-5)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꼭지를 돌리면 물이 쏟아진다. 꼭지를 서서히 잠그면 물줄기가 줄어든다. 이때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넓다. 왜 그럴까? 물을 더 작은 공간에 욱여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1초 동안 수도꼭지를 떠난 물의 양과 싱크대 바닥에 도달하는 물의 양은 정확히 같다. 그런데 중력 때문에 떨어지는 물에 가속도가 붙는다. 다시 말해 물줄기의 끝 지점이 시작 지점보다 유속이 높고, 따라서 계산이 맞으려면 물줄기의 끝 부분이 시작 부분보다 얇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도꼭지를 떠난 물보다 싱크대 바닥에 도달하는 물이 많다는 건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를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이라고 한다. 유체역학 버전의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주어진 시간에 흐르는 물의 양은 어느 지점에서나 동일하다는 뜻이다. 같은 이치로 액체나 기체가 갑자기 좁은 공간(주사기나 고압세척기 같은)을 통과하려면 속도를 높여야 한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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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 소소한 일상에서 만물의 본질이 보이는 난생처음 화학책 나는 세상을 읽는다
크리스 우드포드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세상 모든 것의 재료 - #원자 #금속


어떠한 예외도 없이 지구상 모든 것은 미세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100여 종의 성분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을 생명의 레고 블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탄소, 수소, 질소, 산소만 있어도 생물 대부분과 엄청나게 많은 무생물을 지을 원재료를 갖춘 셈이다. 물질과 물질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안에 있는 원자들만이 아니다. 원자들이 결합 방식에 따라서도 물질이 갈린다. 대표적인 예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필수적인 물질, 바로 물이다. 원자가 (금과 은 같은) 화학원소의 기본 단위인 것처럼 분자는 보다 복잡한 물질의 기본 구성요소다. 둘 이상의 원자를 붙이면 분자가 된다. 이제 원자 쪼개기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이 됐다. 러더퍼드 ‘입자가속기’의 현대판 후손들이 원자를 입자들로, 그 입자들을 더 작은 입자들로 쪼개왔다. 오늘날은 원자에 수십 개의 하위 입자가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아원자 입자들은 이제 구닥다리가 된 양성자와 중성자부터 비교적 최근에 인지된 힉스입자Higgs boson까지를 아우른다. 9, 14)


철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은 똑같은 크기의 구슬 수백 수천 개가 빼곡히 들어찬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과 비슷하다. 각각의 구슬은 각각의 철원자에 해당한다. 이 원자들이 나란히 줄지어 그리고 층층이 쌓여 있다. 철은 망치로 두들겨 더 나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원자의 층층들이 서로를 행복하게 미끄러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리와 달리 철은 원자들이 위치 이동을 꺼리지 않기 때문에 모양을 잡을 때 구부러진다. 반면 유리는 원자들이 전체 구조를 허물지 않고는 새 장소로 이동하지 못해 산산이 부서진다. 또한 철은 전기를 잘 유도한다. 원자들이 밀집한 구조에서는 각 원자의 외곽을 도는 전자들이 서로 맞물려 전체 구조를 아우르며 앞뒤로 출렁이는 일종의 흐릿한 바다를 형성해서 전기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열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철을 타고 흐른다. 철을 충분히 가열하면 벌겋게 달아오른다. 원자들이 열에너지를 흡수해서 (붉은)빛의 형태로 내놓기 때문이다. 16)


쇳덩어리는 철원자로 돼 있지만 플라스틱 덩어리는 플라스틱 원자로 돼 있지 않다. 플라스틱은 대개 폴리머(polymer, 다량체)라고 부르는 고분자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폴리머는 대개 탄소, 수소, 산소, 질소를 기반으로 한다. 폴리머는 모노머(monomer, 단량체)라고 부르는 단순한 분자를 긴 사슬처럼 끝없이 중첩시켜 만든 것이다. 플라스틱은 수명은 억세게 길지만 부드럽고 유연하다. 폴리머 사슬이 꽤 약한 결합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자유전자의 바다가 출렁이며 전기와 열을 전달하는 금속과 달리, 플라스틱의 전자는 모두 원자 안에 안전하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열과 전기가 플라스틱 물질은 쉽사리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나일론의 가까운 친척인 인조섬유 케블라Kevlar는 같은 무게일 때 강철보다 무려 다섯 배나 강하다. 케블라 섬유를 30겹 맞대면 1,500km/h 이상의 속도로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는 두툼한 방탄 이불이 만들어진다. 18-9)


2. 스파이더맨의 정체 - #접착 #마찰


자석이 냉장고에 붙어 있다. 자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금속과 금속을 꽉 들러붙게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접착제는 보이지 않는다. 접착제가 있든 없든 모든 종류의 끈적거림과 미끄러움에는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뭔가가 다른 뭔가에 달라붙을 때는 반드시 그것들을 한데 붙드는 힘이 있다. 그것들이 달라붙지 않거나 미끄러질 때도 대개는 같은 힘이 있다. 다만 둘을 묶기에는 힘이 모자랐을 뿐이다. 눈에 띄게 아름답지만 다소 무거운 벽지를 붙이는데, 벽지가 붙어 있지 않고 자꾸 다시 떨어진다고 치자. 무슨 연유일까? 겉보기에는 단순히 중력(벽지를 벽에서 벗겨지게 하는 벽지의 무게)과 풀(벽지를 벽에 붙여두는 힘) 사이의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보기보다 복잡하다.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접착성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첫째, 풀이 벽지에 붙어 있어야 한다. 둘째, 풀의 반대편이 벽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흔히 간과되는 세 번째는 풀도 스스로 뭉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


보다 면밀히 살펴보면 앞의 세 가지 접착성은 사실상 두 종류다. 자기들끼리 달라붙느냐, 다른 것들에 달라붙느냐. 이 두 가지 유형의 힘을 응집력cohesion과 접착력adhesion이라고 한다. 풀이 정말로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강력한 응집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중간에서 쪼개지지 않는다. 접착력과 응집력이 나란히 작용하는 가장 친숙하고 가장 주목할 만한 예가 바로 물이다. 진정한 응집력의 대명사인 물 분자들은 심지어 근처에 움켜잡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있을 때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이것이 비가 방울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물은 접착력보다는 응집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이 빗방울이 퍼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잎사귀 위에 진주처럼 영롱하게 맺힐 수 있는 이유다. 물은 끼리끼리 뭉치는 데는 명수지만 다른 것에 달라붙는 데는 영 젬병이다. 그래서 물을 제대로 퍼지게 하고 물건을 완전히 적시기 위해서는 세제(계면활성제)를 사용해야 한다. 22)


모든 물질은 원자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억하겠지만 원자들은 우리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부르는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양성자는 미소량의 양전하를, 전자는 미소량의 음전하를 가진다. 원자 내부에는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가 있어 서로를 상쇄하기 때문에 원자 자체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원자가 같지는 않다. 어떤 원자는 다른 원자보다 탐욕스럽다. 두 가지 물질을 밀착시켜 반복적으로 문지르면 이쪽 원자들이 저쪽 원자들로부터 전자를 ‘강도질해 온다.’ 이것이 스웨터에 풍선을 비볐을 때 생기는 일이다. 강도(스웨터)는 전자가 늘어 음전하를 띠게 되고, 불쌍한 피해자(풍선)는 전자를 잃어 양전하를 띠게 된다. 그러면 둘은 자석의 양극과 음극처럼 서로 끌어당긴다. 이것이 스웨터에 풍선이 달라붙는 이유다. 0.1g의 굵은 물방울 하나에만 해도 약 30억조 개의 분자가 들어 있다. 이것이 정전기처럼 일견 보잘것없는 힘을 이용해 초강력 접착제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24)


우리가 서둘러 걸을 때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마찰이다. 마찰이 없다면 걷기는 불가능하다. 발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냥 미끄러져 발라당 넘어지게 된다. 운전도 불가능하다. 정지마찰traction 없이는 자동차 바퀴가 헛돌기만 할 뿐 전진하지 못한다. 마찰은 발이나 바퀴가 새로운 위치로, 앞으로 약간 이동할 만큼만 바닥에 붙어 있게 하는 일종의 일시적 접착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거동의 핵심이다. 마찰은 정전기 접착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두 개의 면이 접해서 이쪽 원자들이 저쪽 원자들과 타격 가능 거리(약 원자 다섯 개 길이)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두 표면이 잠시나마 붙어 있다. 그런데 마찰이 접착제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면서 어째서 영구적 접착성은 없는 걸까? 모두 규모의 문제다. 차가 주차돼 있을 때 고무 타이어와 노면 사이의 마찰력은 중력(자동차 무게)이나 바람 등 차에 자연적으로 미치는 힘을 이길 만큼 크다. 그래서 주차한 차는 길에 딱 붙어 있다. 26)


3. 유리가 맑고 투명한 이유 - #유리 #결정구조


금속은 밀집 결정구조지만 원자들이 어느 정도는 이동이 가능하다. 금속을 망치로 때려서 모양을 잡는 것은 원자들의 행과 열을 후려쳐서 새로운 위치로 밀어내는 것이다. 원자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망치 타격이 공급하는 에너지를 쉽게 흡수한다. 반면 유리는 유난스럽다. 유리는 열린 비정형구조라서 원자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지 않고 보다 느슨하게 무작위로 연결돼 있다. 유리는 총을 맞으면 원자들이 재빨리 대오를 정비할 방법이 없고 총알의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소멸시킬 도리도 없기 때문에 전체 구조가 붕괴한다. 이것이 유리가 약간의 압박에도 쉽게 금이 가는 이유다. 요리 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유리컵을 박살내기 위해 반드시 내리치거나 총을 쏠 필요는 없다. 뜨거운 유리컵을 차가운 물에 넣으면 유리가 짝! 갈라진다. 아주 깔끔하게. 왜 그럴까? 역시나 문제는 유리의 비정형구조는 신속한 재배열로 에너지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때의 에너지는 열이다. 35)


물질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은 빛이 그것을 통과하려 할 때 그것이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달려 있다. 금속은 광자photon라고 부르는 빛 입자뿐 아니라 엑스선처럼 빛과 비슷한 것까지 모두 쭉쭉 흡수한다. 금속의 원자들은 자유전자들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이것이 광자를 쉽게 흡수했다가 쉽게 분출한다. 광자를 공처럼 잡아서 왔던 방향으로 다시 던져버린다. 알루미늄과 은처럼 반짝이는 금속은 모든 종류의 광자(온갖 색의 빛)를 몽땅 잡아서 다시 던진다. 유리의 전자들은 괴상한 비정형구조의 원자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붙들고 있느라 바빠서 가시광선의 광자들을 금속처럼 착착 포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광자들 대부분 유리의 한편으로 들어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유리 원자들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자외선은 얘기가 다르다. 자외선의 광자는 가시광선의 광자보다 에너지가 넘쳐서 유리가 흡수하기에 좋다. 이것이 유리가 순수한 자외선 속에서 불투명해 보이는 이유다. 37)


열은 적외선 복사infrared radiation 형태로 허공을 돌진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광대한 진공 공간도 그렇게 가로지른다. 열은 일정한 속도(초속 30만 km)로 질주한다는 점에서 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열(적외선)과 가시광선의 실질적 차이는 열을 전달하는 파동이 살짝 더 길다는 것뿐이다. 무지개(가시광선)의 빨강(바깥쪽)에서 파랑(안쪽)까지의 스펙트럼을 생각해보자. 적외선은 빨간색 바로 너머에,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색들 바로 밖에 있다. 열이 빛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열이 유리창을 곧장 통과하는 것이 하등 신기할 게 없다. 빛이 갈 수 있는 곳은 열도 따라간다. 이걸 막을 해법은 간단하다. 유리에 금속이나 (이산화티타늄 같은) 금속산화물을 얇게 입혀서 부분적 거울로 만드는 것이다. 원자 몇 개 두께의 초박막 코팅은 빛은 투과시키고 열은 차단한다. 타는 듯이 더운 여름날에는 이 보이지 않는 코팅이 바깥의 열을 반사해서 집 안을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유지해준다. 38-9)


4. 모든 물질은 늙는다 - #탄성 #부식


‘엘라스틱’은 물질의 성질이지 물질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탄성은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탄성이란 원상회복이 가능한 신축성을 말한다.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원래 크기(길이)와 모양으로 돌아간다. 어느 집이든 고무줄과 고무장갑, 탄성 붕대와 탄성 반창고, 늘어나는 팔찌와 시곗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엘라스틱’이란 물질은 없다. 다만 신축성 있는 소재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것에 신축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도 바람에 최대 1m 폭으로 흔들린다. 마천루처럼 세상 뻣뻣해 보이는 것조차 신축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지않았다간 빌딩이 뚝 부러진다.) 탄성 있는 물질, 이른바 ‘엘라스틱’의 제대로 된 명칭은 엘라스토머(elastomer, 탄성중합체)다. 그중에서도 천연 엘라스토머인 고무가 대표적이다. 엘라스토머는 커다란 분자들이 엉켜 있는 고분자 물질로, 잡아당기면 고분자들이 쭉 펴지며 길어지고, 손을 놓은 순간 튕겨오르며 다시 뒤엉킨다. 45-6)


‘엘라스틱’이 ‘탄성재료’의 대체어로 쓰이듯 ‘플라스틱’은 ‘소성재료plastic material’의 대체어로 쓰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막연히 세숫대야와 칫솔을 만드는 데 쓰는 형형색색의 물질로 생각하지만, 과학적으로 소성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소성은 외부에서 힘을 받아 형태가 바뀐 뒤 그 힘이 없어져도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이다. 따라서 소성재료는 우리 주위의 플라스틱이 아니라 그 플라스틱의 원료를 말한다. 외력으로 변형된 투명 플라스틱 조각을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하면, 광탄성photoelasticity이라는 현상이 만든 놀라운 무지개 패턴을 볼 수 있다. 소성재료는 탄성재료와 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소성재료에 계속 힘을 가하면 변형되다가 결국은 뚝 부러지고 만다. 또한 플라스틱은 비틀거나 부러뜨리면 불쾌한 냄새가 난다. 변형에 따른 열로 인해 내부의 플라스틱 폴리머에서 기체가 방출돼서 그렇다. 46)


엘라스틱(탄성재료)이 갑자기 또는 서서히 플라스틱하게 변하는 고약한 버릇은 다분히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고무는 계속 늘어나다가 탄성한도elastic limit를 넘어버리면 외부의 힘이 없어져도 본래 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변형된 상태로 남는다. 이걸 소성

변형plastic deformation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금속도 엘라스틱하다. 금속에 탄성이 없다면 주행의 여파로 자동차 차체와 엔진과 그 안을 채운 너트들과 볼트들에 결국 영구적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탄성재료는 한계를 넘어서면 갑자기 끊어진다. 하지만 서서히 망가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고무줄을 당겼다가 놓을 때마다 에너지를 받아 늘어났던 분자들이 모두 정확히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정확히 같은 에너지를 다시 내놓지는 않는다. 고무줄을 몇 번 빠르게 당겼다가 입술에 대보면 고무줄이 좀 뜨뜻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고무줄에 투입한 에너지의 일부가 열로 낭비된 것이다. 이렇게 날아간 에너지는 되찾을 수 없다. 47-8)


직물은 왜 색이 빠질까? 색이 바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염색을 했기 때문이고, 기본적으로 염료는 직물 섬유에 주입된 화학약품이다. 볕을 쬐면 색이 바래는 주된 이유는 햇빛에 있는 자외선 때문이다. (맞다. 우리 얼굴을 태우는 바로 그 고에너지, 고주파 광선을 말한다.) 자외선이 염료 분자들을 때리면 광퇴화photo-degradation가 일어난다. 즉 분자들이 다른 형태로 재배열되는 바람에 전과 같은 방식으로 빛을 반사하지 않게 된다. 플라스틱이 누렇게 되는 것은 내부의 분자들에 변형이 와서 빛의 일부만 보내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다. 보내주는 빛이 빨강과 녹색 계열이라서 오래된 플라스틱은 우리가 아는 누런색을 띠게 된다. 부작용도 있다. 변색과 함께 플라스틱 구조도 취약해져서 갈라지고 부서질 가능성이 대폭 높아진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사실 광퇴화는 플라스틱을 환경에서 분해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광퇴화 같은 자연 효과의 도움이 없으면 플라스틱은 영원히 우리 주위에 뭉개고 있어야 한다. 51-2)


5. 배수구와 만년필의 공통점 - #물 #열


물의 비열용량specific heat capacity은 엄청나다. 물은 다른 물질에 비해 1kg(약 1ℓ)의 온도를 1°C 올리는 데 많은 에너지(4,200J)를 요한다. 물 분자는 매우 가벼운 원자들(수소는 원자 중 가장 가볍고 산소는 여덟 번째로 가볍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물 1kg에는 동량의 다른 물질보다 더 많은 분자가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자는 진동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일정량의 열을 흡수한다. 다시 말해 물이 열을 흡수하는 힘의 원천은 압도적인 분자 수에 있다. 주전자에 물 1ℓ를 채우고, (만약 가능하다면) 철 덩어리로 주전자 모형을 만든다. 이제 두 주전자를 레인지에 올리고 동일한 시간 동안 가열해 각각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흡수하게 한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른다. 그럼 철 덩어리는 어떻게 될까?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엄청나게 뜨거워진다. 철의 온도는 700°C까지 무시무시하게 상승한다. 물의 온도를 높이는 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든다는 사실이 물을 완벽한 열 운반체로 만든다. 59)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는 집을 덥힐 수 없다. 요점은 열에너지와 온도의 차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뜨거운 것에 열에너지도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물체의 온도(얼마나 뜨거운가)와 그것이 얼마의 열에너지를 함유하는가의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차가운 빙상이 엄청난 열을 함유한 이유다. 모든 것은 물이 가진 높은 비열용량으로 귀결된다. 물에 빽빽이 들어찬 분자들 덕분에 물은 놀라운 열 유지 능력을 가진다. 철의 비열용량은 물의 약 9분의 1이다. 다시 말해 철이나 강철 1kg의 온도가 10℃ 내려갈 때 내놓는 열에너지는 물 1ℓ(즉 1kg)가 같은 정도로 식을 때 발산하는 열에너지의 9분의 1에 불과하다. 중앙난방시스템의 물은 보일러에서 흘러나와 각 방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보일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계속 식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열을 발산한다. 거기다 물은 매우 유동적인 액체라서 신속히 회수돼 열을 다시 공급받아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60-1)


파이프 안을 쉽게 흘러다니는 물의 특성도 열을 붙들고 늘어지는 특성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약 물이 더 걸쭉한(점성이 더 강한) 액체라면, 그래서 줄줄 흐르지 않고 진득하게 흐른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물을 많이 사용하지 못했을 거다. 물이 시럽의 속도로 움직이면 샤워하고 변기물을 내리고 설거지하고 옷을 세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상상해보라. 시럽 같은 물로 구동되는 중앙난방은 작동은 하겠지만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찐득한 물도 방에서 방으로 흐르며 같은 방식으로 식겠지만, 잽싸게 보일러로 돌아가 잃은 열을 신속히 보충하지 못한다. 배관은 물의 속성, 그중에서도 압력과 중력에 밀려 줄줄 흐르는 속성에 의지한다. 이 때문에 도시의 급수장과 저수탑은 열이면 열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수도를 틀 때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은 물탱크가 높은 곳(주로 위층이나 옥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배관 설비는 첨단 기술 없이도 놀랄 만큼 효과적이다. 61-2)


6. 빨래의 과학 - #오염 #용해


옷은 동시에 양방향에서 더러워진다. 바깥쪽에서(예를 들어 케첩이 묻었을 때), 그리고 안쪽에서(땀을 비롯한 각종 체액의 분비). 왜 옷은 때가 탈까? 우리가 입고, 신고, 걸치는 것들은 우리의 체온 유지를 위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집을 벽돌로 짓는다면, 옷은 모와 면(천연섬유),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합성섬유)을 꼬고, 짜고, 떠서 만든 실과 직물로 짓는다. 새끼양의 양털은 약 5,000만 개의 섬유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양모 스웨터 한 벌에는 족히 수백만 개의 섬유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스웨터는 원산지가 양의 등이든 유전이든(합성섬유는 석유로 만든다)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고 같은 목적을 수행한다. 즉 촘촘히 얽힌 섬유들이 공기를 가둬서 우리의 체열을 유지한다. 하지만 수많은 미세 섬유가 너무 빡빡하게 엉켜 있으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부작용이 난다. 뭔가가 달라붙을 표면적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데다, 섬유가 워낙 작아서 때와 땀이 원자 단위로 자연스럽게 달라붙는다. 70)


물 분자는 수소원자 두 개가 산소원자 하나에 붙어서 삼각형을 이루는데 수소 끝은 약한 양전하를 띠고, 산소 끝은 약한 음전하를 띤다. 물 분자는 이렇게 자석처럼 두 개의 상반된 ‘극’을 가진 까닭에 극성 분자polar molecule라고 불린다. 그리고 정말 자석처럼, 때 같은 것에 달라붙어서 때를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 그렇지만 물이 모든 것에 달라붙지는 않는다. 첫째, 물 분자는 자기들끼리 더 잘 달라붙는다. 이것이 물이 방울지고, 연못 수면에 소금쟁이가 떠 있을 막을 형성하는 이유다. 물이 뭔가를 제대로 적시려면 물의 이 표면장력surface tension부터 깨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극성 분자는 다른 극성 분자에게 달라붙어 그것을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 이 말은 물이 소금(역시 극성 분자) 같은 물질을 쉽게 용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껌, 접착제, 잉크, 또는 극성 분자를 끌어당길 음극과 양극이 없는 (탄소기반) 유기화학물질로 이루어진 옷 얼룩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비누와 세제다. 70-1)


대부분은 물을 증발하는 방법으로 옷을 말린다. 다시 말해 액체 상태의 물을 수증기로 바꾼다. 그러나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무조건 열이 필요한 건 아니다. 냄비에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 때 우리는 꾸준한 열에너지 공급으로 물 분자들의 활동성을 키워 그것들이 액체 상태에서 벗어나 증기가 되게 한다. 이때는 열이 증발의 동력이다. 이와 달리 추운 데서 옷을 말릴 때는 지나가는 공기에 의지한다. 공기가 불어서 물 분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따라서 이때는 꾸준히 부는 건조한 바람이 마법의 요소다. 여기서 ‘건조’가 중요한 단어다. 빨래에서 물기가 얼마나 빨리 없어질지(또는 없어지기는 할지)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이 바로 습기(주변 공기에 이미 잠복해 있는 수증기의 양)이기 때문이다. 열대우림 한가운데 사는 사람은 빨래를 밖에 널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물이 젖은 빨래를 떠나 젖은 대기로 들어갈 가능성은 낮다. 습도가 낮으면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빨래가 밖에서 잘 마른다. 75)


7. 스웨터는 왜 따뜻할까? - #발열 #통기성


우리는 어떤 경로로 열을 잃을까? 몸의 심부에서 피부조직과 옷까지는 직접 전도로, 피부에서는 증발로, 옷의 표면에서는 대류와 복사로 열을 잃는다. 운동할 때는 체열의 약 절반이 땀의 증발로 잃고, 10%는 복사로 날아가고, 3분의 1 조금 넘게는 전도와 대류로 사라진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날씨에 달려 있다. 쌀쌀하고 바람 부는 날, 또는 달리거나 자전거를 탈 때 차가운 공기가 계속 몸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대류 작용으로 체열을 절반까지 빼앗아가기 때문에 바람막이용 겉옷을 입는 게 최선의 방어다. 반대로 덥고 습한 날에는 주변 공기가 이미 포화상태여서 증발로 열을 잃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시원함을 유지하려면 부채질을 해서 일부러 대류를 일으켜야 한다. 춥고 건조하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복사가 체열 손실의 주범이다. 따라서 옷을 겹겹이 입는 것이 몸의 심부에서 옷의 겉면으로 열전도가 일어나 열이 밖으로 복사되는 것을 줄이는 최선의 전략이다. 80-1)


통기성과 방수성은 모순처럼 들린다. 어떻게 천이 밖에서 물이 스미는 건 막으면서 내부의 땀은 밖으로 내보낸단 말인가? 모든 것은 비의 물방울과 땀이 기화한 증기의 과학적 차이로 설명된다. 빗방울의 물 분자들은 수십억조 개가 뭉쳐 있는 데 반해, 수증기 분자들은 서로 분리돼 자유롭게 떠다닌다. 다시 말해 빗방울은 물 분자보다 비교가 불허하게 크다. 고어텍스 같은 통기성 방수 직물은 이 차이를 이용한다. 고어W.L. Gore & Associates사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고어텍스는 미세 기공이 무수히 뚫린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멍은 물 분자보다 700배 커서 습기는 쉽게 빠져나가는 반면 빗방울보다 2만 배 작아서 비는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소재가 방수성과 통기성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갖게 됐다. 정말 더워서 땀이 많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수증기의 일부는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식어서 응축되고, 그렇게 형성된 물방울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84)


양말과 셔츠부터 드레스와 코트까지 모든 의류에는 공통점이 있다. 날실과 씨실의 패턴. 이는 금속 막대 같은 고체의 내부조직, 즉 원자들이 가로세로로 정렬한 양상과 비슷하다. 다만 금속 막대는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게 강한 반면(이를 전문용어로 등방성isotropic이라고 한다) 직물은 특정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강하다(이를 비등방성anisotropic이라고 한다). 즉 날실이나 씨실과 평행한 방향보다 대각선 방향으로 더 많이 늘어난다. 대각선 방향의 저항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단사들은 날실과 씨실이 대각선이 되도록 직물을 45도 돌려놓고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옷이 해지기 시작하면 끝장은 순식간이다. 청바지 무릎의 작은 마모가 금세 뻥 뚫린 구멍이 된다. 왜 그럴까? 직물에 결함이 생기면 나머지 실들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전보다 커져서 견디다 못한 실들이 차례차례 뜯겨나가기 때문이다. 구멍이 번질수록 남은 섬유에 미치는 인장력이 세져 구멍이 더 퍼져나갈 가능성도 커진다. 86-7)


8. 휘발유부터 전기차까지 - #에너지 #배터리


자동차 운전의 진정한 단점은 어디른 가든 쇳덩이를 차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휘발유 자동차는 우리가 피할 길 없는 비효율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 하지만 이건 새 발의 피다. 실질적인 비효율성은 따로 있다. 자동차의 근본적인 문제는 휘발유에 갇혀 있는 에너지의 단 15%만이 실제로 도로를 달리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실린더의 열 손실, 기어의 마찰, 엔진이 내는 소리, 차의 전기 설비로 가는 동력 등 다양한 경로로 낭비된다. 만약 자동차가 100% 효율적이라서 휘발유에 내장된 에너지가 남김없이 도로를 내달리는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면 동량의 연료로 적어도 5~10배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다. 차에 사람을 많이 태울수록 차량의 무게 대비 실제로 운반할 유효 하중이 커지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높아진다. 이것이 트럭, 버스, 열차 같은 차량이 훨씬 크고 무거운 디젤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데도 효율성 높은 운송 수단에 속하는 이유다. 92-3)


휘발유 자동차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도시 주행에 따르는 스톱스타트 운전 행태다. 뭐라도 하려면 에너지가 든다. 고장 난 차를 밀어봤다면 자동차의 관성(inertia,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상태 또는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깨는 것만도 얼마나 등골 빠지게 힘든지 알 것이다. 무게 1.5톤(1,500kg), 주행 속도 65km/h의 자동차는 상당한 운동에너지를 보유한다. 계산해보면 약 240kJ(킬로줄, kilojoule)인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올라가기에 충분한 에너지양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축구공을 따라 도로에 튀어나오는 아이들이나 교통안전 수칙을 모르는 고양이를 피해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이 240kJ의 에너지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브레이크 패드가 브레이크 디스크와 만나 자동차가 정지할 때 운동에너지는 타이어의 끼익 하는 비명과 풀썩 피어오르는 연기로 사라진다. 주행 중에 이렇게 끔찍히 소모적인 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95-6)


모터로 구동되는 전기차는 그런 면에서 크게 유리하다.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전기모터는 원통형 자석 안을 빙빙 도는 구리 코일이다. 코일은 구리선을 촘촘히 감은 것이다. 구리선에 전기를 주입하면 임시 자기장이 발생해 자석의 자성을 밀어낸다. 이 때문에 구리심이 뱅뱅 도는데, 이 현상을 이용해 진공청소기부터 고속열차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에도 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 전기모터의 위대한 점은 이 과정을 역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터는 발전기가 된다. 전기차가 주행할 때는 배터리가 전선을 통해 동력을 모터에 주입해서 바퀴를 회전시킨다. 그러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전류가 끊기지만 자동차의 모멘텀이 바퀴를 계속 돌린다. 이때 모터도 계속 회전하기 때문에 전기가 발생하고, 이 전기가 다시 배터리에 저장되면서 자동차가 감속한다. 전기차는 브레이크를 잡을 때 에너지를 홀랑 날리는 대신 일부를 다시 잡아서 배터리를 재충전한다. 이를  회생 제동regenerative braking이라고 한다. 96)


9. 디지털이 세상을 바꾸다 - #디지털 #비트


휴대폰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지털 기기의 핵심은 (연속적으로 변하는) 아날로그 신호를 (0 또는 1로 표현하는) 디지털 신호로, 다시 반대로 변환하는 기술에 있다. 이 과정을 샘플링이라고 한다. 정보 뭉치를 작은 덩어리들로 나누고, 각각의 덩어리를 측정하고, 그 측정값을 숫자로 바꾸고, 그 숫자들을 모두 줄줄이 엮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법으로 <모나리자>를 예컨대 1,000개의 행과 1,000개의 열로 또는 100만 개의 사각형으로 나누고, 각 사각형의 평균 색상과 밝기를 측정해서 (둘 다에 숫자를 부여한 후) 그 측정값들을 상하좌우로 차례대로 배열한다. 즉 한 장의 사진을 200만 개 숫자로 구성된 하나의 패턴으로 (또는 200만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하나의 숫자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미지를 컴퓨터에 저장하거나 휴대폰으로 보내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이렇게 아날로그 사진을 온-오프 이진법 숫자(비트)의 격자 패턴으로 만드는 포맷(저장방식)을 전문용어로 비트맵bit map이라고 한다. 104)


구식(아날로그) 카메라에는 렌즈와 셔터가 있다. 이것이 짧게 여닫히면서 밀폐된 카메라 내부로 빛이 들어와 은 기반 화학물질로 코팅된 플라스틱 필름이 빛에 ‘노출’된다. 빛은 이 물질을 미세한 은조각들로 바꾸고 조각들이 한데 뭉친다. 그래서 피사체의 밝은 부분은 필름에 어둡게, 어두운 부분은 밝게 맺힌다. 다시 말해 사진은 명암이 반전된 상태로 시작한다. 이 원본 필름을 우리는 ‘네거티브’라고 한다. 네거티브 필름을 인화하면 피사체의 명암이 다시 반전되고, 따라서 ‘포지티브’ 필름에는 피사체가 원래대로 나온다. 디지털카메라는 전하결합소자charge-coupled device, CCD라는 빛에 민감한 칩을 이용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라스틱 필름이 빛에 노출돼 물체의 연속적 아날로그 표현을 만드는 것과 달리, CCD는 픽셀(pixel, 화소)이라 불리는 수백만 개의 감광 ‘칸’으로 나뉘어 있고 각 칸이 떨어지는 빛을 측정해서 숫자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아날로그 이미지를 디지털 사진으로 자동 변환한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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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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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기원 - 어떻게 로마는 세상을 정복했는가


문명이란 홀로 성장할 수 없기에, 성장과 동시에 더 큰 문명에 의해 잠식당할 운명에 처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레타는 그리스 문명은 받아들이면서도 이집트, 그리스, 디아도키로 이어지는 다른 문명들의 침략과 페르시아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결국 미케네 문명에 의해 사라지기는 했으나 무역을 하기에 용이하면서도 전쟁을 하기에는 먼 위치 덕분에 수백 년 동안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비니Sabini, 움브리아Umbria, 에트루스카Eetrusca 등 주변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그만큼 많았던 덕분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문명은 에트루스카로, 그리스 문명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민족이었다. 남부에 있는 캄파니아Campania에는 그리스 식민지들이 있었다. 캄파니아의 나폴리는 당시 네아폴리스Neapolis로 불렸으며 그 자체가 신도시, 즉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지은 신도시를 의미했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Carthago가 정복하고 있었다. 43)


로마는 이탈리아를 장악했으나 아직 슈퍼 파워는 아니다. 당시의 지중해 해상 무역은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레반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인도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베리아, 지금의 스페인 지역까지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물리치지 않으면 로마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가 카토Marcus Porcius Cato가 원로원에서 어떤 연설을 하든 마지막에는 항상 “카르타고는 사라져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는 경고를 덧붙였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다. 그렇게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이르는 포에니Poeni 전쟁을 치르게 되고,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 로마는 전 세계를 정복한 후 그들 자신의 승리 비결을 용맹함과 전투력에 있었다고 착각하지만 로마의 진정한 승리 비결은 시스템, 무기, 전술 이 세 가지에 있었다. 질서에는 무질서로, 무질서에는 질서로 대응하면서 상황에 맞게 무기를 적절하게 변형한 로마는 전 세계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45, 48)


로마가 전쟁을 통해 강대 문명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사회 인프라에 있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넘어갈수록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게르만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경우 식량 조달이 어려워 연이어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고 부상을 입어도 병원에 갈 수 없었지만 로마는 달랐다. 로마는 정비된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무기와 식량을 조달했고 발달된 의료 환경을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로마에는 ‘파브리케fabricae’라고 불리는 무기 공장이 따로 갖춰져 있어 대량의 무기 생산이 가능했는데, 이는 무기의 길이나 무게 등의 단일화를 의미했다. 누구나 특별한 연습 없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처음에는 로마에 대항하던 민족들도 점차 로마인이 되어갔다. 단 한 민족만 빼고 말이다. 바로 문명의 기원, 고대 레반트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간직하던 유대인들만은 결코 로마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돌게 된다. 50)


그러나 광대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사실상 당시 기술로는 다스릴 수 없는 규모였다. 국경선 또한 너무 길었다. 선택과 집중이 절실했다. 결국 각 3000~5000명 병력으로 구성된 로마 제국의 총 30개 정도의 군단legion 중 반 정도는 게르만 야만족들로 득실거리는 독일 라인강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변을 지키고, 나머지 반은 레반트 지역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대결하게 된다. ‘전방 지역 방어’라 불릴 수 있는 이 전략은 그러나 로마 제국 멸망의 단초가 된다. 야만족들과 문명을 구분 짓는 것은 오로지 잘 훈련된 로마 군단들이 지키는 국경선밖에 없기에, 일단 국경선 안으로만 들어오면 그 안에서는 누구든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국경선이 뚫렸다는 소식이 로마까지 오는 데만 해도 몇 주가 걸렸다. 제압할 군인들이 가는 시간 동안 야만족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고, 때문에 그들을 잡는 데만 몇 년이 소요될 정도였다. 53-4)


2부 멸망 - 왜 위대한 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졌는가


당시에 모든 전쟁은 가을 수확 전에는 반드시 끝나야 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전쟁에 나가 가을에 수확하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이는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합의된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 공화정 초기까지는 잘 지켜졌다. 그런데 로마의 팽창이 가속화되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당시는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에 영국까지 출정할 경우 같은 해에 이탈리아로 돌아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가령, 집안의 장성한 남성이 5~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할 경우 당장의 생계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기계 없이 온전히 인력으로 일해야 했기에 그 빈자리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은 가족들은 상당한 이율로 세넥스에게 부채를 질 수밖에 없었다. 훗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남은 것은 가족들이 모두 노예가 되어 있는 현실뿐이다. 이렇게 로마 공화정의 핵심이었던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빚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다. 60)


동시에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수백 만 명의 노예가 생기는데, 이들 또한 전쟁 시 세금을 가장 많이 냈던 세넥스의 차지가 된다. 문제는 중산층 누구도 노예보다 더 저렴하게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제 로마의 중산층은 직업조차 찾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공화정 마지막 시기에 로마의 실업률은 70~8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였다. 단순한 노동은 모두 노예의 차지고, 고차원적인 일은 교육을 훨씬 많이 받은 세넥스의 후손만이 할 수 있으니 중산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들을 보호할 사회 보장 제도 또한 전혀 없었다. 로마 공화정에 상상을 초월할 수준의 불평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세넥스들의 삶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처음에만 해도 조금 부유한 수준이었지만 중산층으로부터 거둬들인 이자에 농가, 토지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세넥스들의 토지 소유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오늘날 도시 하나 정도의 토지를 몇몇 갑부 세넥스 가문들이 소유하기도 했다. 60-1)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재위 117~138)는 21년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제국을 돌아다녔는데, 그 결과 로마가 도저히 통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영원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제국의 팽창이 아닌 제국의 보존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상당히 현명한 결정 같지만 추후에 큰 문제가 된다. 로마 직업 군인들의 급여와 나라 전체의 생산력 저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직업 군인들의 급여 문제가 대두한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급여를 미룬다는 것은 군인들에게 반란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애국심과 명예를 위해 싸우던 시민 군인과 달리, 직업 군인 유지에는 막강한 국가 예산이 필요했다. 이에 처음에 로마 황제들은 직업 군인으로서의 20년의 임기를 마친 후 퇴역할 때 퇴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군인들이 퇴직을 하게 되어 재정에 상당한 문제가 생기고 만다. 75)


결국 로마 황제들은 퇴직금을 토지로 주겠다는 묘책을 다시 짜낸다. 군인들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는 결정이었다. 당시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니 40세 정도에 은퇴한 후 농부가 되는 것은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콜로니아Colonia 도시를 만들어주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면 연금 문제와 노예들의 반란 문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가 제국의 팽창을 중단하면서 은퇴한 군인들에게 지급할 새로운 땅이 더 이상 창출되지 않기 시작한다. 퇴역 군인들에게 줄 만한 새 토지가 모자라고, 퇴직금 대신에 농사가 불가능한 황무지나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급락할 화폐를 받은 군인들의 불만은 상상하기 쉽다. 새로운 자금이 필요해진 로마 제국의 직업 군인들. 그들은 추후 황제의 암살과 새 황제의 대관이 바로 그들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보호주의는 그렇게 퇴역 군인의 처우 문제와 맞물려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이끄는 요인이 된다. 7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황제들 중 최초로 로마 위기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매우 파격적인 해결책 세 가지를 찾아낸다. 첫째, 로마 제국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한다. 하드리아누스처럼 디오클레티아누스 또한 로마 제국의 방대한 영토가 정보 교환이나 야만족들과 관련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둘째, 후계자 선정 절차를 규정화한다. 로마는 왕정이 아니기에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할 수도 없고, 공화정도 아니었으므로 투표를 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다시 로마 제국의 초창기처럼 양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되 이를 규정화하는 방식을 적용한다. 그전까지는 특별한 기준 없이 황제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이제 황제를 네 명으로 나눠 이를 시스템화하자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명의 황제들이 통치하는 4두頭 정치, 즉 테트라키tetrarchy다. 셋째,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가격을 통제한다. 그러나 이를 권력으로 통제하려고 한 결과는 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재정 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85-7)


3부 복원 - 무엇이 로마의 역사를 이어지게 하는가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로마인들은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제국 그 자체가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과 숙명론은 과거에 대한 로망을 키운다. 4~5세기 로마의 현실은 패배와 재난의 반복이지만 그들에게는 찬란한 과거의 로마가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로마는 절망스러웠지만, 상상의 로마는 아름답고 영원했다. ‘로마’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제국이 아닌, 유럽인들이 여전히 꿈꾸고 갈망하는 ‘영원한 제국’으로 탈바꿈한 이유다. 황제도 세나투스도 사라지고, 이제 홀로 그들의 역할을 해야 하는 로마의 주교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만 남은 제국에서 로마인들은 믿기 시작한다: 전쟁과 침략 때문에 후퇴하고 투박해진 단순함은 어쩔 수 없는, 지금 이 세상과의 타협이지만 진정한 화려함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가엾은 로마인들을 영원히 위로할 하나님의 세상에서만 가능하다고. 개인의 자유와 주도가 중심이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이 사라지고, 신의 믿음이 중심인 된 중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09-10)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된 후 서유럽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세 가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행운은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기술자, 지식인, 부호들이 모두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이주는 단순히 영토 간 이동이 아닌,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유럽으로의 이전을 의미했다. 또한 8~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알 안달루스Al-Andalus가 스페인을 떠나고 가톨릭이 스페인 남부를 차지하자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로 이주한다. 이는 이슬람의 과학 문명에 그들이 흡수한 그리스 로마의 찬란한 문명까지 함께 전파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명의 이식이 콘스탄티노플과 스페인 두 곳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행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대규모의 새로운 시장이 창출된 것에 더해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발명으로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23)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미술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기후나 환경 덕분에 색감은 밝으나 여전히 생동감 없는 조각 같은 표현을 했다면, 독일은 생동감은 있으나 색감 자체가 매우 어둡고 다소 잔인한 표현을 했다. 그런데 이때 색감의 사용과 생동감의 표현,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잘 융합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바로 플랑드르, 네덜란드 화가들이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를 통해 그림의 주제는 성경을 벗어나 훨씬 다채로워진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더 이상 종교나 신화가 아닌 조금 더 일상의 삶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이는 화가 크벤틴 마시스Quentin Matsys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더 이상 하늘과 천국이 아닌,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기에 ‘저 세상’에 있었던 시선이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은 피터르 브뤼헐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유럽, 특히 네덜란드는 점차 실용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27, 133-5)


흔히 일본의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꼽지만 그보다 앞선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에 발을 내디딘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다. 1613~1615년까지 이어진 그의 행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대서양을 넘어 스페인과 로마까지 이어진다. 이때 그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라는 배를 타고 갔는데, 포르투갈의 갈레온선galleon을 역공학해 직접 건조한 배였다. 지금은 그 모사품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기독교 신자였던 쓰네나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일본은 쇼군이 바뀌고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져 있었다. 일본은 무역을 통해 얻은 배와 총까지도 모두 폐기하고 그렇게 고립을 자초한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모든 나라에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이다. 물론 15세기의 유럽처럼 그리스 로마 지식의 이식,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인쇄 기술의 발명이라는 세 가지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이는 분명 행운이었다. 138-9)


4부 유산 - 누가 로마 다음의 역사를 쓸 것인가


국가의 기원에 관해 현재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론이다. 베버에 의하면 국가의 역할은 폭력성의 독점화다. 쉽게 말해 인간이란 원래 폭력적인 존재이기에 가만히 두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므로, 이를 국가가 독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 간의 갈등을 무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국가만이 유일하게 폭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했을 때 단순한 싸움으로 끝났을 문제가 독점이 무너지면 전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가 정당성의 문제가 생긴다. 도대체 국가가 무엇인데 폭력을 독점하느냐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국가를 세운 후에 권력을 부여받은 왕이 이를 멋대로 휘두르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가 독점한 폭력성이 개인들의 폭력성을 모두 합한 것보다 낮을 때에야 국가는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51-2)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은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한 문제를 권력과 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권력은 부에서 나오기에 부의 확률분포가 다르면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은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 위해 부의 소유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부가 특정한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소유는 도둑질이다Property is Theft!』에서 처음으로 공유 경제를 제안하기도 한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신과 국가에서God and the State』를 통해 소유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가 개인의 소유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에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사라지면 유토피아가 된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관점은 앞서 개인의 폭력성 제거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았던 것의 반대편에 자리한 시각이다. 156-7)


지금까지 인류가 설계했던 다양한 국가 시스템 중에서 여전히 잘 지탱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민주주의 하나뿐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완벽하다고 여겨지면 그것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닌 종교가 돼버린다. 이데올로기를 숭배하게 되면 그 절대성을 두고 결국 반목과 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가설에서 시작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보장되는 사회적인 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확장되는 모양새를 띤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성, 아이, 성소수자LGBT들에게는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universal human right가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확장성은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권리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축소되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는 파괴되고 만다. 162-4)


현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경쟁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가장 큰 핵심은 애니웨어 피플anywhere people과 섬웨어 피플somewhere people의 싸움이다. 세계화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므로, 그만큼 세계화에 적합한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영어에 능통하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여행을 다니며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즉 지식이나 경험,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세계화에서 훨씬 큰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세계화 덕분에 어디에서도 살 수 있고 사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애니웨어 피플이라 한다. 반면 오히려 세계화로 경쟁이 많아지는 사람들, 본인의 경험과 지식과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인 사람들을 섬웨어 피플이라 한다. 이들은 자신의 민족, 국가, 도시를 떠나는 순간 경쟁력을 잃고 만다. 170-1)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노터데임대학교 교수인 미국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Patrick Deneen은 조금 더 거시적인 질문을 한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실패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 2.0에는 아주 본질적인 오류가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자유, 불평등, 지니계수를 중심으로 보면 민주주의 2.0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불평등이 늘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사람은 더 똑똑한 사람과 덜 똑똑한 사람,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덜 열심히 일하는 사람 등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 자체로 서로 다르다. 만약 이를 막는다면 자유롭지 않은 것이기에, 자유가 늘어나면 불평등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자유는 커지면서 불평등은 막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에 대한 답이다. 애석하게도 드닌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 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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