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 창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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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계급이란 개념에는 역사적 관계란 개념이 뒤따른다. 관계라고 하면 으레 다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관계란 것도 우리가 만일 그것을 어느 특정 순간에 죽은 것으로 고정시켜놓고서 그 구조를 해부하려 든다면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다. 제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 사회학적 이론의 틀을 가지고서도 계급의 순수한 표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의식이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7)


제1부 자유의 나무


1장 제한 없는 회원수


"'우리 회원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이것은 런던교신협회(London Corresponding Society, 1792년 창립)의 정관 제1조이다. 이 조항이야말로 역사가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환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배타성을 고수하려는 그 어떤 발상, 정치활동을 특정한 세습적 엘리뜨집단 혹은 재산소유집단의 전유물인 양 생각하는 그 어떤 발상에도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이 정관 조항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런던교신협회가 정치적 권리와 재산권을 동일시하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으며, 또한 '폭도'들이 그 자체의 목적 추구를 위해 스스로 조직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파 세력을 강화하고 당국의 간담을 서늘케 할 목적을 띤 파당의 단속적(斷續的)인 행동으로 치닫는 시절이었던 '윌크스와 자유' 시절의 급진주의에도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무제한의' 방식으로 선전과 선동에 문을 활짝 연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뜻하는 것이었다."(30)


# 단속적(斷續的) :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2장 크리스천과 아폴리언(Apollyon, 마왕)


"양심의 자유는 허용받았지만 '심사법 및 단체법'(Test and Corporations Acts) 때문에 공적 생활에서는 여전히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던 반국교도들은 18세기 내내 여러 시민적·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교육받은 젊은 세대 목사들 다수가 자기네의 관대한 합리적 신학을 자부하고 있었다. 박해받은 분파 특유의 깔뱅주의적 독선은 버리고 그들은 아리우스파 및 쏘치누스파 '이단'을 거쳐 유니테리언주의로 기울어졌다." "'솔직담백함'을 좋아하고 '열광'을 불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던 유니테리언파의 합리적 기독교는 런던의 일부 직종인과 상점주들 그리고 대도시의 이 비슷한 집단들 사이에서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나 농촌의 빈민들에게 이야기가 먹히기에는 이 교리는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멀고 지나치게 세련되었으며 유복한 계급의 안락한 가치들과 지나치게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다. 이 교파의 어법 및 어조 자체가 장벽이 되고 있었다."(37-41)


# 쏘치누스파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인간의 원죄 등을 부정한 16세기 이딸리아의 신학자 쏘치니의 교의를 따르는 일파


"일부 사람들은 공화국시절 수평파의 패배에까지 소급해서 이 이유를 찾곤 한다. 성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오리라는 천년왕국적 희망이 박살나버리자 빈민들의 청교주의(Puritanism) 내에서도 현세적 열망과 영적 열망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그어지게 되었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 전인 1654년에 이미 총회파 침례교도(General Baptist) 총단은 (그들 중의 제5왕국설 신봉자들을 겨냥하여) 자기들이 보기에는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 전까지는 〈성자들 자신이 세상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그들 수중에 두어야 한다고 기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천명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는 〈어느 곳에선가 세속 정부의 지배권을 얻기보다는 ··· 참을성있게 세상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성자들의 몫이었다." "이같은 물러섬─청교주의의 적극적 활력과 반국교도의 자기보존적 후퇴의 공존─에 대한 이해는 18세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42-3)


"크리스천은 현실의 세상에서 아폴리언과 싸운다. 그러나 패배와 대중적 무관심의 시절에는 빈민들의 숙명론을 강화시키면서 은둔주의가 우세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빈민들'에게 가장 충실하고자 하던 바로 그 종파들이 1750년 경에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가장 냉담하였으며, 또 기질적으로도 복음전도에 가장 미온적이었다. 반국교주의는 두 가지 대립되는 경향 사이에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이 양자는 다 어떠한 민중적 호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 하나는 합리적 인도주의와 세련된 설교를 중시하는 경향으로서 빈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지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또다른 편에 있는 것은 엄격한 선민들로서 그들은 교회 외부의 사람들과는 통혼을 해서도 안되었으며, 모든 교리위반자와 이단을 내쫓으면서 지옥에 떨어지기로 예정된 '타락한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전자의 깔뱅주의는 해체되고 있었고, 후자의 깔뱅주의는 돌처럼 경직되어가고 있었다〉고 알레비는 지적한 바 있다."(49)


"산업혁명이 진행된 전기간 동안 감리교는 권위주의적 경향과 민주주의적 경향 사이의 이같은 긴장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민주적 추진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 것은 분리해나온 종파들─신종파 및 (1806년 이후에는) 초기 감리교도들─사이에서였다. 더구나 홉스봄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감리교가 전파된 곳이면 어디서나 이 교파는 기성 국교회와 손을 끊음으로써 19세기 프랑스에서 반(反)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해냈던 기능과 유사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단 이 긴장이 폭발하면 때에 따라 세속 지도자들은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을 도덕적 정열로 휩싸이곤 하였다. 사탄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또한 어느 계급이 사탄의 편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한, 감리교는 일종의 도덕적 내전─즉 반국교파 예배당과 선술집 간의, 사악한 자와 속죄받은 자 간의, 멸망에 빠진 자와 구원받은 자 간의 내전─을 근로인민의 운명으로 못박아 설정하였다."(66)


3장 '사탄의 요새들'


"자칫하면 산업혁명기의 민중을 교회에 등록된, 즉 예배당에 다니는 선한 자와 방종한 악한 자로 그릇되게 구분하기 쉽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사실들은 흔히 쎈세이셔널한 형태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비난하기 위한 의도에서 정리되곤 하였다." "여러 수치들은 무산자들의 실제 범죄적 행동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겠지만, 지속적인 일자리가 없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산계급인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유산계급 남녀들은 빈민들의 질서를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치유책으로 제시된 것들은 제각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의 추진동기는 거의 다 똑같은 것이었다. 노동빈민들에게 줄 메시지는 단순한 것으로서, 기근의 해였던 1795년에 버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인내, 노동, 절제, 절약, 그리고 종교가 그들에게 권장되어야 한다. 그외의 모든 것은 순전히 사기일 뿐이다.〉"(79-82)


"유산계급들이 보인 그같은 성향은 술집들, 정기시(定期市)들, 일체의 대규모 집회 등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권력소유자들의 타고난 경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증거를 '날조'하는 이같은 전반적인 경향은 18세기 말에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부추겨졌다. 첫째는, 신흥 제조업자(manufacturer) 계급의 공리주의적 태도를 들 수 있다. 공장도시들에 작업규율을 부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 계급은 수많은 전통적 오락 및 기분전환거리들에 대해 적대적이 되었다. 둘째는, 자책하는 죄인들의 끝없는 행렬을 만들어내면서 인쇄소에서 신앙고백식 전기(傳記)들을 쉴 새 없이 펴내고 있던 감리교도들의 압력 자체를 들 수 있다." "세번째 요인은 운동의 첫 세대 지도자들 및 그 역사의 기록자들 가운데 몇몇은 독학한 노동자들로서, 그들은 흥청망청식의 술집세계에 등을 돌리는 자기수련의 노력에 힘입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계층 내에서 계몽과 질서, 절제를 뿌리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83-4)


"도시의 공동체에서도, 농촌의 공동체에서도 소비자의식이 다른 형태의 정치적 혹은 산업적 적대관계의 형태들보다 우선하였다. 임금이 아니라 빵가격이 민중 불만의 가장 민감한 지표였다. 장인들, 자영 수공업기술자(craftsman)들, 혹은 콘월 지방의 주석광산 노동자들(이곳에서는 '자유로운' 광부의 전통이 19세기까지 그들의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집단들은 자기네 임금이 관습에 의해 혹은 그들 자신의 교섭에 의해 조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식료품을 응당 자유로운 시장에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물자부족의 시기에도 여전히 물가가 관습에 의해 조절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같은 '폭동들'은 민중의 입장에서는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지도자들은 영웅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폭동은 관습가격 혹은 프랑스식 '민중 지정가격'(taxation populaire)과 유사한 민중가격으로 식료품을 팔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곤 했다."(91-4)


"1780년대에 들어서면, 우리는 배후조종을 받고 있던 폭도와 혁명적 군중의 혼합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1780년대의 민중은 그들의 무절제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항하는 평형추라고 여기고 있던 자유지향적 휘그파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버크는 폭동진압을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그런가 하면 폭스는 자기는 〈상비군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폭도의 지배를 받는 게 훨씬 낫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그 어떤 휘그파 정객도 그처럼 위험한 사회세력과 결탁할 엄두를 내지 않았으며, 또한 그 어떤 씨티 원로도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또 개혁운동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직화된 여론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하였으며, 폭도를 풀어놓는 수법을 경멸하였다. '기동성'(mobility)이라는 말은 19세기 급진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자기네의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붙인 표현이었다."(104)


4장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1780년의 고든 폭동 가담자들과 1791년 버밍엄의 (군중에 맞선) '교회와 국왕'파 폭동 가담자들은 '독립', 애국심, 잉글랜드인의 '생득권' 등에 대한 견해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그들의 '생득권'을 위협하는 낯선 분자들에 맞서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폭동 가담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free-born Englishman)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을 터이다. 애국심, 민족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맹신이나 박해까지도 모두 자유라는 수사(修辭)의 옷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는 '낡은 부패세력'조차도 영국식 자유를 찬미하고 있었다. 민족적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자유가 귀족문벌파, 선동정치가 그리고 급진주의자들 모두의 표어였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규탄한 것도, 페인이 프랑스혁명을 옹호한 것도 모두 자유의 이름으로였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개시되면서부터(1793)는 애국심과 자유가 모든 엉터리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112)


"보통의 잉글랜드인의 입장은 첫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기보다 반反절대주의적인 것이었다. 둘째, 스스로 확고한 권리는 거의 가지지 못했지만 법률에 의해 자의적 권력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개인주의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셋째,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명예혁명이 억압에 맞서는 저항으로서의 폭동권에 대한 입헌적 선례를 제공해주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로크가 보기에 통치의 주요 목적은 국내평화의 유지와 인신 및 재산의 안전보장에 있었다. 사리사욕이나 편견에 의해 희석될 때 그같은 이론은 곧 유산계급에게 재산권의 침범자들을 처벌하는 가장 피비린내나는 법전을 인가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인신적 혹은 재산적 권리들을 침범하고 법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그런 자의적(arbitrary) 권력을 인가해주지는 않았다. 피비린내나는 형법이 관대하고(liberal) 때로는 꼼꼼하기까지 한 행정 및 법률해석과 공존한다는 역설적 상황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4-5)


"1818년 의회 위원회는 경찰부 설치를 주장하는 벤담의 제안을 〈모든 집의 모든 하인으로 하여금 주인의 행동을 살피는 스파이가 되게 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계급들을 정탐하게끔 만들게 될 안〉이라고 판단하였다. 토리파는 지방교구의 특권적 권리 그리고 지방 치안판사의 권한 등이 억압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고, 회그파는 국왕 혹은 정부의 권한이 증대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버뎃이나 카트라이트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 혹은 가옥보유주들의 윤번제 경비근무라는 이념을 더 좋게 평가하였다. 그런가 하면 급진적 민중은 차티스트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경찰도 억압의 기구로 여겼다." "중앙권력의 그 어떤 권한 증가도 증오하는 이같은 태도 속에서 우리는 지방자치를 고수하려는 방어적 입장, 휘그적 이론, 그리고 민중적 저항의 기묘한 혼합을 보고 있다. 젠트리층과 일반민중 모두 지방적 권리와 관습들을 소중히 여겼다."(117-8)


"그러나 우리는 우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20년 동안 종래의 헌법상의 절차들에 새로운 차원이 '실제로' 부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이미 국왕과 상하 양원으로부터 독립된, 불특정한 권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은 또한 강령단체(platform)─다소 제한된 목표를 위해 선전활동을 벌이며 출판물, 대규모 집회, 청원 등을 이용하여 '장외에서' 여론을 불러일으키던 '재야' 압력집단─가 대두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윌버포스나 위빌로서는 자기들의 선동을 젠트리 혹은 자유토지보호자(freeholder)들에게 국한시키고자 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를 통해 선례들이 확립되었으며, 이 실제 사례들은 광범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헌법의 복잡한 장치에 새로운 톱니바퀴가 추가되었다. 어스킨과 위빌은 견제와 균형이라고 하는 잘 알려진 공학적 비유법을 사용하면서, 〈인민의 운동에서 시계의 작동과 같은 규칙성〉을 요구하였다."(121)


"프랑스혁명은 좀더 원대한 성격의 선례를 마련해주었다. 이성의 빛에 의해, 그리고 '빈약하고 진부하고 소름끼치는 관습, 법률법규의 방식들'을 그늘 속으로 던져넣은 근본 원칙들에 입각하여 작성된 새로운 헌법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입헌주의적 논거의 지반을 처음으로 대폭 제거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페인이 아니라 버크였다." "버크는 전통에 대한 숭상으로 헌법에 대한 숭상을 보완하였다." "버크에게 크나큰 우려를 안겨준 것은 부패한 귀족층의 도덕적 본성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곧 '돼지 같은 떼거리'의 본성이었다. 버크는 역사를 하나의 '자연의 과정', 곧 너무나 복잡하고 꾸물거림이 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혁신도 늘 예기치 못한 위험들로 가득 찰 수 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과정으로 파악했다. 페인은 버크의 경고를 무시한 점에서는 잘못이었을지 몰라도 버크의 특수한 논지에 가로놓여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의 관성을 폭로한 점에서는 옳았다."(127-8)


"페인의 『인간의 권리』는 잉글랜드 노동계급 운동의 원천을 이루는 저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논거와 어조를 좀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 책을 쓸 때 페인은 이미 15년 가까이나 되는 세월을 실험과 입헌주의적 우상파괴의 팔팔한 풍토 속에서 살아온, 국제적 명성을 지닌 미국인이었다. 그는 제2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잉글랜드의 관례와는 다른 사고방식 및 표현방식으로 씌어진 한 저작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입헌주의적 논거의 틀을 초두부터 거부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문서에 씌어진 죽은 자의 권위에 의해 이 권리들이 상속되지 못하고 통제되고 흥정거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싸운다.〉 버크는 〈후손의 권리를 곰팡내나는 양피지 문서의 권위에 영원히 의탁할 것〉을 바랐던 반면, 페인은 각각의 세대마다 자신의 뭇 권리와 정부형태를 새로이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0)


"대의제 기관들에 대한, 이성의 힘에 대한, (페인의 말을 빌리자면) 일반민중 사이에 〈잠자는 상태로 누워 있는 지각(知覺)의 덩이〉에 대한, 그리고 〈인간은 정부에 의해 타락하지 않는 한 천성적으로 인간의 벗이며, 인간본성은 그 자체로서 사악한 것이 아니다〉라는 믿음에 대한 무한한 신뢰야말로 페인의 낙관주의를 지탱하는 전제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통 및 교육기관들에 대한 독학한 사람 특유의 불신(〈그는 자기 자신의 서술은 송두리째 외우고 있었으며 그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것이 페인을 잘 아는 한 사람의 평이었다)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경험주의를 단도직입적으로 밀고 나아가고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복잡한 이론문제들을 회피해버리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내면서, 비타협적이고 당돌하고 심지어 독단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서는 이같은 낙관주의의 강점과 약점이 모두 몇번씩이고 되풀이하여 나타났다."(136-7)


"페인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모든 세습적 영예와 특권들의 철폐를 바라고 있었으나, 경제적 평등 실현을 지지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시민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사회 내에서 모든 사람은 당연히 고용주 혹은 피고용자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는 한쪽 편의 자본문제나 다른 쪽 편의 임금문제에 간여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권리』와 『국부론』은 서로를 보완하고 장려해주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또한 19세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주된 전통은 페인으로부터 그 특징을 취하고 있었다. 오웬파의 영향 및 차티스트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전통들이 우세한 적도 몇번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한번씩 퇴조를 겪고 나서 보면 언제나, 저류에 흐르는 페인주의적 주장들은 손상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곤 하였다. 1880년대까지 노동계급의 급진주의는 대체로 이 테두리 내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137-8)


5장 자유의 나무를 심기


"1792년 초에만 하더라도 영국 수상 피트는 확신을 가지고 '15년간'의 평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6개월이 더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영국이 중립을 유지하면서 프랑스에서의 소란한 사태로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792년 5월의 포고령은 페인주의 선전의 확산에 대해 정부측이 최초의 심각한 우려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도 순전히 국내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세 가지 요인이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그 첫째는 9월학살 이후 프랑스혁명이 급속도로 과격해진 것이다. 두번째는 신생공화국의 팽창주의적 열기로 인해 영국의 이익과 유럽의 외교적 균형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된 일이다. 세번째로는 프랑스의 혁명적 열기와 국내의 성장하는 자꼬뱅운동이 합류할 위험스러운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개혁운동가 위빌은 〈인민 가운데 최하층계급들에게 폭력과 불의의 행위를 선동하는〉 경향이 있는 페인의 〈유해한 영향〉을 개탄하였다."(151-2, 156)


# 9월학살 : 1792년 9월 2~6일 파리에서 급진파가 왕당파를 비롯한 수감자들을 학살한 사건


"국내의 탄압은 물론이요, 나라 밖 사태들도 잉글랜드 자꼬뱅들의 활동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였다. 처음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대(對)프랑스전쟁이 민중들 사이에서 전통 깊은 반프랑스적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아주 상세하게 보도가 되곤 하였던 새로운 처형사건들(9월학살, 국왕과 마리 앙뚜아네뜨의 처형)도 하나하나가 다 이같은 감정을 부채질하였다. 1793년 9월에는 페인의 친구들인 지롱드파가 국민공회로부터 밀려나고 그 지도자들이 단두대로 보내졌으며, 이 해 마지막 주에는 페인 자신도 뤽쌍부르 궁에 유폐되었다. 이같은 경험들은 지나치게 열렬하고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으로 자기네 신념을 프랑스의 대의명분과 동일시하였던 지식인세대에 저 깊디깊은 환멸의 첫 단계를 초래하였다. 1792년에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지식인 개혁운동가들과 평민 개혁운동가들 사이의 통합은 결코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162-3)


"민중단체들은 그들에게 닥친 이 첫번째 폭풍우를 이겨냈다. 그러나 시련을 거치는 가운데 이들 단체는 강조점과 어조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페인의 이름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그의 공공연한 공화주의적 어조도 헌법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새로운 강조점에 밀려났다. (런던교신협회는 이를 1688년 협정의 맥락에서 규정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은 수정은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그 어떤 수사적 용어도 고발대상으로 삼겠다는 당국의 명백한 의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을 뿐이며 다른 면에서는 박해로 인해 협회들은 오히려 급진화되었다." "1793년에 단체들에 가입해 있던 개혁운동가들의 대다수는 이제 장인, 임금노동자, 소마스터 및 소직종인(small tradesman) 등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개의 새로운 테마가 아주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경제적 불만 및 사회적 치유책이 그 한가지이고, 조직 몇 연설 형태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모방하는 것이 다른 한가지이다."(174)


"당국의 곤경은 입헌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생겨났다. 지방의 치안관이 즉결심판을 내리는 데 필요한 법은 충분히 있었지만, 중앙의 사법관리들은 중요한 사안의 기소에 관해서는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치안교란에 관한 법률은 내용이 모호했으며, 그래서 검찰총장은 대역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기소해야 할지 치안교란적인 중상모략 행위라는 비교적 가벼운 죄목으로 고발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에서 정부는 모호한 법률, 배심제도(대니얼 이튼을 두 번, 토머스 워커를 한 번 무죄방면하여 당국에 굴욕을 안겨주었다), 토머스 어스킨(그는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 변론을 폈다) 같은 뛰어난 변호인들을 포함하는 비록 소수이지만 쟁쟁한 폭스파 야당세력, 입헌주의적 어법이 그야말로 체질적으로 배어 있어 개인적 자유가 침해받는다 하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튀어일어나 방어할 태세가 되어 있는 공공여론 등 일련의 장애에 부딪혔다."(175-6)


"잉글랜드 자꼬뱅들은 지금까지 인정되어온 것보다 수적으로 더 많고, 프랑스혁명을 만들어낸 '평민대중'과 더 비슷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프랑스) 자꼬뱅을 닮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열광적인 평등주의로 1793~94년 로베스삐에르의 혁명적 독재를 떠받쳐주었던 저 빠리'구'(區, section)의 쌍-뀔로뜨들과 더 비슷하다." "공화력 2년 빠리에서도 그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화공들은 항상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이 장인들은 페인의 교리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곧 그것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군주정, 귀족정, 국가 및 세금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열광의 시대에 이들 제화공들은 한편으로는 수천명의 소상점주, 인쇄공 및 서적판매상, 의료인, 교사, 판화공, 소마스터 및 반국교파 성직자들의 지지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짐꾼, 석탄운반부, (막)노동자, 육군병사와 수병들의 지지를 모아들인 저 운동의 단단한 핵심세력이었다."(221-2)


"1797년에 이르면 초강경파 자꼬뱅들 가운데 일부는 입헌주의 운동에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걸지 못하게 되었음이 명백하다. 이때부터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런던의 민주주의자들 중에는 쿠데타─아마도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을─외에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지 않는 (스펜스주의자 내지 공화파) 소수집단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진지했지만, 그들식의 음모결사는 당대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생경함을 띠고 있었으며, 추상적인 공화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오코일리의 처형, 아일랜드 반란의 진압, 그리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의 지도적 인물들의 체포 등과 아울러 비밀결사 음모는 더이상 '전국적' 존재기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이같은 지하조직이 존재했던 경우라 하더라도 이들 조직은 고립되어 시들어버리거나 아니면 그 자체의 공업적 상황에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45-6)


"혁명적 충동은 아주 초기에 질식당해버렸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결과는 쓰라림과 절망이었다. 지배계급의 반혁명적 공포는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곧 동직조합, 민중의 교육, 민중의 스포츠와 풍속, 민중의 출판물과 단체들, 그리고 민중의 정치적 권리 등에 대한 태도에서 표현되고 있다." "잉글랜드는 반혁명적 감정 및 규율의 밀물이 산업혁명의 밀물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였다는 점에서 유럽이 다른 나라들과 구분된다. 새로운 기술과 공업조직의 형태들이 발전할수록 정치적·사회적 권리들은 후퇴하였다. 조급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산업부르주아지와 막 형성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자연스러운' 동맹은 성립하자마자 깨져버렸다." "이 두 세력이 행동의 일치를 보인 것은 1792년의 몇달 동안 뿐이었다." "1790년대 잉글랜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감리교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졌던 유일한 동맹이 와해되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251-2)


제2부 아담에 대한 저주


6장 착취


"1790년대의 모든 급진적인 현상들은 1815년 이후에는 거의 열 배로 재생산되었다. 몇개 안되던 자꼬뱅 신문들은 20여 개의 초급진적이고 오웬주의적인 정기간행물들을 낳았다. 대니얼 이튼이 페인의 책을 출판한 죄로 구금당했다면, 리처드 칼라일과 그를 따르는 노동자들은 동일한 죄로 도합 200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교신협회가 20여 개의 도시에서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던 데 반해, 전쟁 이후 햄프든 클럽과 정치동맹들은 작은 공업 촌락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운동이 면직공업에서 큼직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양자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면방직공장은 더욱 많은 상품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그 자체를 생산해낸, 산업혁명만이 아닌 사회혁명의 주역으로도 간주된다. 요컨대 어떤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무엇을 설명해주는 말이 된 것이다."(268-9)


"확실히 면직공업은 산업혁명의 선도공업이었고 면방직공장은 공장제도의 탁월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성장의 역학과 사회적·문화적 삶의 역학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접적으로 일치된다고 상정해서는 안된다. (1780년경의) 면방직공장의 '비약적인 발전' 이후의 반세기 동안에도 공장노동자는 면직공업에 종사하는 성인노동자 중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830년대 초에 면수직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면직, 모직, 견직 방적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남녀 노동자보다도 여전히 그 수가 더 많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1830년대에도, 성인남자 면방적공은 그 실체가 도무지 잡히지 않는 이른바 전형적인 '평균 노동자'(average working man)가 아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면방직공장의 새로움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노동계급 공동체(working-class community)들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 전통의 연속성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2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두드러진 사실은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이것은 첫째, 계급의식의 성장에서, 즉 이 다양한 모든 노동대중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하고 타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의식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둘째,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산업적 조직형태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1832년에 이르면 토대가 굳건하고 자기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제도들─노동조합, 공제조합, 교육 및 종교 운동, 정치조직, 정기간행물들─노동계급의 지적 전통,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패턴, 노동계급의 감정구조가 있었다." "노동계급의 형성은 공장제도의 자동생산물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변화하는 생산관계와 노동조건들은 원료에 작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 그러니까 페인이 버리고 떠났으며 또 감리교도들이 그 틀을 만들어낸 바로 그 '자유인으로 태어난 잉글랜드인'에게 작용하였다."(272-3)


"결국, 노동계급의 의식과 제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증기기관 못지않게 정치적 맥락이었다." "프랑스를 보고 놀라 전쟁의 애국적인 열정에 휩싸인 귀족과 제조업자들은 제휴하였다. 잉글랜드의 구체제는 국정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나날이 번성해가는 공업도시들을 잘못 통치해온 낡은 단체들을 온존시킴으로 해서 새롭게 수명을 연장하게 된 것이다. 그 협력의 대가로 제조업자들은 중요한 양보를 얻어냈다. 그것들은 도제제도, 임금규제, 공업에서의 노동조건들을 다루어온 '온정주의'적인 법률들의 취소 내지 철폐였다. 귀족들은 민중의 자꼬뱅적 '음모'를 탄압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제조업자들은 임금상승을 위한 '음모'를 무산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사태가 프랑스혁명과 함께, 점증하는 의식화와 더욱 광범위해진 욕구와 함께, (런던과 공업지구의) 인구증가와 함께, 그리고 더욱 지독하고 더욱 노골적인 형태의 경제적 착취 등과 함께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276-7)


7장 농업노동자들


"인클로우저를 지지하던 자들은 흔히 에이커당 생산성과 지대가치가 높아졌다는 말로 그들의 주장을 대신한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서 인클로우저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서 겨우 먹고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를 파괴하였다. 자기의 권리에 대한 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영세농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인클로우저는 (그것에 대한 온갖 궤변적인 수식어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경우) 재산 소유자들과 법률가들의 의회가 제정한 재산에 관한 공정한 규칙과 법에 따라 행해진 계급적 강탈행위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인클로우저는 자본주의적 재산관계 면에서는 '지극히 적절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촌락의 관습과 권리라는 전통적인 외피를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인클로우저의 사회적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재산 개념을 촌락에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부과한 데 있었다." "실로, 인클로우저는 농업적 생산수단에 대한 인간의 관습적인 관례들을 파괴한 수백년에 걸친 긴 과정의 정점이었다."(301-3)


"이렇게 지주와 농장주들의 부가 증가하고 있을 때, 노동자가 지독한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대답을 이 시대 전체에 걸친 전반적인 반혁명적 분위기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임금을 낮추기 위해 전쟁을 희망한다'는 것은 1790년대 북부지방 일부 젠트리의 구호였다. 전쟁은 도시의 개혁가들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위빌이 대표하는 인도주의적인 젠트리의 쇠퇴도 가져왔다. 전반적인 인클로우저의 원인이 탐욕이라는 주장에 덧붙여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주장이다. '지나간 시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인 공유지는 이제 무질서의 위험한 온상으로 간주되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이데올로기가 덧붙여진 것이다. 젠틀먼이 영세농들을 공유지에서 제거하고, 그들의 노동자들을 예속상태로 떨어뜨리고, 부수적 소득을 깎아내리고, 소토지보유농을 쫓아내는 것이 공적인 성격을 지닌 정책사항이 되었다."(306-7)


"인클로우저─특히 전쟁기간 중의 남부와 동부 경작지에서의─는 전반적인 농촌인구의 감소를 초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물결치듯 마을에서 도시로, 그리고 주에서 주로─이주하였지만 전반적인 인구증가는 감소된 인구를 메우고도 남았다. 전쟁이 끝나 곡가가 하락하고 그래서 농장주들이 더이상 〈우리의 젊은이들을 육군이나 해군에 내보낼 수 없게 되자〉(이는 지방의 치안관 수중에 있던 편리한 징계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잉여인구' 문제를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1834년 신빈민법이 시행된 이후에, 여러 촌락에서 떠들어댄 이러한 '잉여'는 허위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촌락에서 노동의 대가는 대부분 구빈세로 충당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며칠 혹은 반나절만 고용되었다가 교구로 되돌려졌다. 우천시에는 노동자들이 '남아돌고' 추수 때는 '모자랐다'." "이 시스템은 자신의 임금이나 노동생활에 대해 노동자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통제력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313-4)


8장 장인과 그밖의 노동자들


"19세기 초, 숙련된 수공업기술자의 임금은 흔히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관습'이라는 관념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관습적인 임금규정은 농촌 수공업기술자들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된 신분으로부터 대도시에서 시행되던 복잡한 제도적 규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고려대상에 넣고 있었다." "농촌의 수공업기술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다재다능하였으며, 그들이 (자신의 관습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도시노동자들과 접촉했을 때 도시노동자들─직조공, 양말제조공 혹은 광부─보다는 자기들이 '훨씬 높다'고 느끼고 있었다." "수공업기술직이라는 관습적인 전통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공정'가격과 '정당한' 임금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유지되고 있었다.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들 즉 생계, 자존심, 일정한 수준의 솜씨에 대한 자부심, 기술의 등급에 따른 관습적인 보수 등은 초기의 동직조합 분규에 있어서 순전히 '경제적'인 요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구들이었다."(329-31)


"그런데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시기에 숙련기술을 지닌 장인을 가리킬 때 '귀족'(aristocracy)이라는 용어를 일찍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노동귀족'(labour aristocracy)이라는 현상은 흔히 1850년대와 1860년대에 활발했던 숙련공들의 노동조합주의에 수반되거나─심지어는 제국주의의 결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1800~1850년 시기에 노동귀족이라고 할 만한 신·구 엘리뜨 노동자가 있었다. 구엘리뜨는 자기 스스로를 마스터, 상점주, 전문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던 장인 마스터(master-artisan)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부 공업에서 수공업기술자의 특권적 지위는 관습의 힘을 통해서, 혹은 결사와 도제직의 규제를 통해서, 혹은 수공업이 고도로 숙련되고 전문화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사치품 제조 부문 같은─작업장과 공장생산에서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새로운 엘리뜨는 철강업, 금속기계작업, 제조공업에서의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등장했다."(332-3)


"장인과 (막)노동자 간의 구별─신분, 조직 그리고 금전적인 보수에 있어서─은 나볼레옹전쟁 기간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헨리 메이휴가 묘사한 1840년대와 1850년대의 런던에서도 엄청나게 심했다. 〈런던 서쪽 끝의 숙련된 직공들로부터 동부지구의 미숙련노동자들에게로 옮겨가보면, 도덕적 그리고 지적 변화가 너무도 커서 우리는 마치 새로운 땅에 들어온 것과 같은, 그리고 다른 종족 속에 끼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고 메이휴는 말했다. 남부지방에서 공제조합 회원 규모가 가장 크고, 동직조합 조직이 아주 지속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교육 및 종교 운동이 번창하고, 오웬주의가 굳게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장인들 사이에서였다." "그런데 자신의 수공업과 동직조합의 보호가 박탈될 경우, 장인은 메이휴시대의 런던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가난에 찌든 숙련직인들은 (부랑자들과는 전혀 다른 계급이었기에) 마지막 절망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구빈원으로 향했다."(337-8)


"우리가 낡은 기술이 쇠퇴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과정을 고찰할 때, 낡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이 거의 언제나 각기 다른 사람들의 차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19세기 전반의 제조업자들은 매번 기술혁신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러한 기술혁신은 성인남자 수공업기술자를 여자나 미성년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낡은 기술이 과거와 마찬가지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기술을 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한 노동자들이 이전 기술에서 다음 기술로 혹은 가내생산에서 공장생산으로 이전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기계와 기술혁신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불안정성과 적대감은, 단지 편견과 (그당시 당국이 주장하는 대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장인들은 새로운 기계가 그들의 자식이나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에게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346-7)


"선대제 노동자와 장인 모두에 관련된 몇가지 일반적인 사항이 있다. 첫째, 직조공이나 〈싸구려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기계화 과정에 의해 대체된 재래식 직종 몰락의 본보기〉로서 설명해치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임금이 최저수준이었던 것은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그 전통과 방법이 18세기에 속했던 가내노동자들이었다〉라는 경멸조의 진술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진술들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산업혁명의 진정한 추진력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즉, 그들은 '낡은' 전(前)공업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의 진정한 면모는 증기기관, 공장노동자, 그리고 고기를 먹는 엔지니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780년~1830년 사이에 선대제 노동을 이용하는 공업에 고용된 사람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종종 '증기기관과 공장이 선대제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킨 주범이었다.'"(362-3)


"농업노동자들이 토지를 갈망했다면, 장인들은 '독립'을 염원했다. 이러한 염원은 초기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역사 도처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런던에서 소마스터가 되는 꿈(1790년대에 여전히 강했고, 버밍엄에서는 183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던 꿈이다)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자택' 혹은 '다락방' 마스터들이 겪은 경험─즉, 일주일 내내 기성품 도매상이나 기성품 제조업체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독립'─에 직면했을 때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1820년대 말에 오웬주의에 대한 지지의 물결이 왜 갑자기 높아졌는가를 설명해준다. 동직조합의 전통들과 독립에 대한 갈망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 즉 '집단적' 독립이라는 사상 속에서 하나로 엮여졌다. 오웬주의적 실험이 대부분 실패했을 때에도 런던의 장인은 자신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런던에서 태어난 장인들은 공장의 작업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일개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364-5)


9장 직조공들


"직조공들의 처지를 악화시킨 원인을 역직기에만 돌린다면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직조공의 직위는 1813년에 이르면 이미 산산이 무너져내려가 있었는데, 이때 영국의 역직기는 총 2,400대로 추산되었고 손과 동력 간의 경쟁은 대체로 심리적인 것이었다." "기계의 발명과 직조업에 대한 자본 투자를 '지연시킨' 것은 오히려 수직기 노동이 남아 돌아가고 값쌌기 때문이다. 직조공들의 신분하락은 지체가 낮은 장인 직종 노동자들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의 처지는 그들의 임금이 낮아질 때마다 점점 더 무방비상태로 되어갔다. 직조공들은 이제 더 적은 돈을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오래 일을 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이 실직되는 기회를 증가시켰다.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신봉자들조차도 아연실색하였다. 〈애덤 스미스 박사가 그와 같은 사태를 생각해보기나 했을까?〉라고 한 인도주의적인 고용주는 외쳤는데, 그의 고결한 사업방식은 그 자신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389)


"직조공들은 도시의 장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황금기'에 대한 기억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만큼 신분적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장인보다도 더 뿌리깊은 사회적 평등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호시절에 그들의 생활방식은 지역공동체에 의해 공유되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도 지역공동체 전체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위가 매우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경제적·사회적 보호장벽을 쳐야 할 그들보다 낮은 미숙련공이나 일용노동자들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들의 저항─그 저항이 오웬의 언어로 표현되든 성경적인 언어로 표현되든 상관없이─은 각별한 도덕적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파당적인 이익에 호소하기보다는 기본권과 인간의 우애와 행동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에 호소했다." "그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즉 그들이 생산한 것을 마스터와 중간업자들에 의한 왜곡 없이 교환하는 독립적 소생산자의 공동체였다."(410-1)


"직조공들의 공장제 반대에는 그들의 지역공동체의 '가치체계'가 담겨 있다. 우리는 1830년대의 잉글랜드에서 서로 다른 전통과 규범과 기대를 가지고 서로 충돌하는 공장, 직조, 농촌의 공동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다원사회'(plural society)를 볼 수 있다. 1815년에서 1840년까지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앞의 둘(즉, 공장과 직조 공동체들)이 공통의 정치운동(급진주의, 1832년의 개혁, 오웬주의, 10시간 운동, 차티스트 운동)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이야기이다. 반면, 차티스트 운동의 마지막 단계는 부분적으로 이 양자가 불편한 공존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는 결렬되는 이야기이다. 수직공들이 장인들과 여러 전통을 공유하고 그들과 통혼하고, 자녀들을 일찍부터 공장에 보냈던 맨체스터나 리즈 같은 대도시에서는 양자간의 차이가 가장 적게 나타났다. 고지대에 있는 직조업 촌락의 지역공동체들은 훨씬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도회지 사람들'─온통 '쓰레기조각과 부글대는 것들'로 이루어진─을 경멸하였다."(428-9)


"입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경제적 힘들이 사회의 일부 사람들을 해쳐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낡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아직도 온존되고 있는 자유의 신화이다. 역직기는 국가와 고용주 모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입증해주는 확고한 알리바이를 마련해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직조공들의 이야기를 또한 산업혁명기에 벌어진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직조공의 역사에서 우리는 노동조합이라는 자체 방어수단을 가지지 못한 일부 노동자들에게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가 행한 행동의 하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정부는 그들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일랜드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뻔뻔스러운 방법으로 자본의 자유라는 부정적 도그마를 직조공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러한 도그마의 유령은 오늘날까지도 떠돌아다닌다."(434)


"일부 경제사가들은 (아마도 인간의 진보를 경제성장과 동일시하는 숨겨진 '진보주의' 때문에) 산업혁명기의 기술혁신이 철도시대 이전까지는 (금속공업을 제외하고는) 성인 숙련노동을 일자리에서 쫓아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쫓겨난 노동은 이 시대 내내 넘쳐흐른, 순전히 인간의 근육만을 사용하는 고된 작업에 값싼 노동력을 무한정 공급하였다. 광산, 부두, 벽돌 쌓는 작업, 가스작업, 건축, 운하 및 철도 건설, 짐마차 운반과 인력 운반 등에서는 기계화가 거의 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외적인 것은 숙련을 요하는 직종들이고, 그래서 미숙련 육체노동이나 선대제 노동 공업들의 상태는 '특별히 불행했던 것'이기는커녕, 온갖 방법으로 임금을 깎아내리기 위해 고용주들과 입법자들과 이데올로그들이 고안해낸 한 체제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노동조건들이 급속이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 직물업이 과잉공급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으로 확인시켜준다."(435)


10장 생활수준과 실제의 경험들


"산업혁명기 민중의 식생활에 관한 논의는 곡물, 육류, 감자, 맥주, 설탕 및 차 소비를 주로 문제삼는다. 이 모든 것들은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기록이다. 50년에 걸친 산업혁명기에, 국민생산 가운데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몫이 재산소유계급과 전문직업인 계급이 차지하는 몫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국부(national wealth)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를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고, 또 그 자신의 노동산물임이 분명한 국부의 대부분이 역시 분명한 방식으로 고용주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평균' 노동자는 최저생계 수준에 아주 가까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그것은 생활수준의 저하와 다름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경제적 진보의 혜택' 가운데서 그가 차지한 몫은 고작 더 많은 감자, 그의 가족을 위한 몇 벌의 면직의류, 비누와 초, 약간의 차와 설탕, 그리고 『경제사평론』에 실린 그 엄청난 수의 논문들뿐이었다."(442)


"슬럼가, 악취가 풍기는 강물, 자연파괴, 형편없는 건축물 등은 모두가 높은 인구 압력 아래서 계획도 사전경험도 없는 가운데 급속히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모두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가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흔히 빈곤의 원인은 탐욕이라기보다는 무지였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명백히 양자 모두가 원인이었다. 그런 주장은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한데, 즉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의사들과 위생개혁가들, 벤담주의자들과 차티스트들이 재산소유자들의 타성과 '값싼 정부'를 외치는 납세자들의 선동에 대항하여 개량을 위한 끈질긴 싸움을 계속하던 1830년대 혹은 184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만 타당하다. 이 시기에 이르면 노동자들은 사실상 악취가 나는 '별개의 지역들'(enclave, 다른 나라 땅으로 둘러싸인 영토)에 격리되어 있었고, 중간계급들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리할 만큼 그 지역과 멀리 떨어짐으로써 공업도시에 대한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냈다."(446)


"인구학자들은 인구폭발의 주요 원인으로 사망률 감소보다는 출생률 증가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이 가외수입을 얻거나 구호금을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많은 자식들을 가지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출생률의 증가는 지역공동체와 전통적인 가족생활 패턴의 파괴(스피넘랜드 제도와 공장은 조혼과 '무분별한' 결혼을 금지해온 터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주인집에서 먹고 자는 농장의 하인과 도제 수의 감소, 전쟁의 영향, 신도시로의 인구집중, 심지어는 다산형질의 유전학적인 선택 등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출생률의 증가를 생활수준 향상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무분별한' 자들이 가족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19세기 초반의 관찰자들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테마였고, 한편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농민의 결혼패턴 전체가 바뀐 것은 대기근의 뼈저린 경험을 겪고나서부터였다."(449)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인도주의적인 대의명분을 어느정도 지지했던 수십명의 젠틀먼과 전문직업인들은, 1820년대에는 인구가 밀집된 제조업지역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들이 사는 집의 대문에서 불과 100~200야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폐들을 알지 못했다. 어린이노동을 하는 소녀들이 반벌거숭이 상태로 갱도에서 나왔을 때, 허더스필드 지역의 유지들은 참으로 놀랐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악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가난이 스스로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난을 지켜보면서도 어느 정도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잊어버린다. 1790년과 1830년 사이의 부자들의 눈에 공장의 어린이들은 '바쁘고' '부지런하고' '유용했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정원과 과수원 밖에 머물러 있었고 또 값이 쌌다.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가책은 대개 종교적인 반성이 잠재울 수 있었다."(472-3)


11장 개조하는 힘을 지닌 십자가


"나뽈레옹전쟁 기간에 감리교 신도의 수는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 전쟁 기간은 또한 모든 비국교 교파 사이에서 (알레비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퇴조하는〉 시기였다. 전쟁 기간 중의 감리교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특히 놀랍다. 첫째, 새로운 공업 노동계급 사이에서 그 수가 가장 많이 늘었다. 둘째, 웨즐리 사망 후 몇년 사이에 목사들의 새로운 관료화가 강화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들의 복종심을 조작하는 것과 교회의 권위를 모욕할 수 있는 모든 일탈현상의 출현을 제재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여겼다. 이 점에서 그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수세기 동안 복종의 의무를 빈민들에게 설교해온 것은 국교회였다. 그러나 국교회는 빈민들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 적어도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분명히' 빈민이었다. 감리교 지방설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누가 말했듯이) 〈나의 제니 방적기 뒤에서〉 연설문안을 궁리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484-5)


"감리교가 일요학교를 통해 최소한 어린이와 성인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했던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흔히 감리교의 죄악을 어느 정도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다 큰 채탄부 녀석들과 그들의 누이들이' 또 위틀, 보울러, 점보 및 화이트 모스에서 온 직조공과 노동자의 아이들이 다니는 1790년대 말 미들턴 학교의 행복한 정경을 그린 뱀퍼드의 그림을 때때로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 웨즐리파를 주도한) 제비즈 번팅이 용서할 수 없었던 초기 감리교도들의 느슨함을 보여주는 바로 '이러한' 정경이다. 그는 1808년 셰필드의 목사로 재직시 일요학교의 아동들이 '글쓰기'를 배우고 있는 것을 목도했을 때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안식일의 끔찍스런 악용'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부당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어린아이들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은 '영적인 선행'이지만, 글쓰기는 그로부터 '세속적 이익'이 생길 수도 있는 '세속적인 기교'였기 때문이다."(488-9)


"우리는 번팅과 그의 동료들에게서 그들이 어린이노동을 용인한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기형적 신체와 짝을 이루는 그들 자신의 기형적 감각을 보게 된다. 공업중심지(1804~15년의 맨체스터, 리버풀, 셰필드, 핼리팩스, 리즈)에서 그가 초기 목사직을 수행할 때의 수많은 통신문을 살펴보면 끊임없는 교파간의 사소한 분쟁과 도덕적인 속임수와 또 젊은 여성의 개인적 품행에 관한 시시콜콜한 신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중에도 번팅이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 하나 산업주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젊은 감리교 지도자들은 태만으로 어린이노동이라는 범행에 공모하는 죄만 지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빈민들에게 복종이란 활성분(活性分)을 주입시킴으로써 빈민들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켰다. 그리고서 그들은 기업가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업규율이라는 심리적 성분의 조성에 가장 적합한 요소들을 감리교 안에서 길러냈던 것이다."(489-90)


"감리교는 어떻게 해서 이렇듯 놀라운 활력을 가지고 이 이중의 직분─부르주아의 종교이자 프롤레타리아의 종교라는─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앤드류 유어 박사의 『매뉴팩처들의 철학』에서 하나의 완벽한 선례를 볼 수 있다." "공장제는 인간성의 개조를 요구한다. 장인이나 선대제 노동자의 '발작적인 노동행태'(working paroxysms)는 인간이 기계의 규율에 적응할 때까지 규격화(methodized)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규율을 지키는 미덕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감독관이 되지 않는 한) 전혀 세속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을 때, 어떻게 그 미덕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은 마땅히 그의 으뜸가는 행복을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에 기약해야 한다는 ···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교훈〉이 주입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동은 반드시 〈초월적 존재의 사랑에 의해 ··· 우리의 의지와 애정 위에 고취된 ··· 하나의 순수한 '덕행'〉으로서 수행되어야만 한다."(498-9)


"〈그렇다면 인류는 이 개조하는 힘(transforming power)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이다. 죄를 범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십자가)의 희생이며, 죄에 끌리는 마음을 없애는 것은 그 동기이다. 십자가는 그와 같은 끔찍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비열한 죄가 씻기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죄를 극복한다. 십자가는 불복종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순종을 고무하며, 순종하는 힘을 얻게 해주며, 순종을 실행 가능케 하며, 순종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십자가는 순종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순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십자가는 순종을 부추기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기본틀(pattern)이다.〉" "웨즐리파는 은총의 보편성 교의를 설파했다. 적어도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죄와 은총의 기회는 평등하다. 그리고 지식의 종교이기보다 '마음'의 종교로서, 아무리 소박하고 아무리 교육받지 못한 자라도 은총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499-501)


"그러나 이 교리에는 좀더 복잡한 점들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구원은 신의 전권(prerogative)이었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속죄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은총을 확신하고, 일단 감리교의 형제애 안에 철저하게 들어오면 노동하는 남자나 여자나 '교리를 어기는 것'(backsliding)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친 산업세계에서 그들이 아는 유일한 공동체 집단으로부터 축출당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부자는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특히 예배당을 지음으로써) 은총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육신의 욕망, 눈의 욕망, 그리고 자만심'의 유혹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은총을 입고 있을 가능성이 한결 많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소명'(직업) 때문이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backslide) 유혹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502-3)


"그러나 감리교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종교'라는 것이 웨즐리의 주장이었다. 감리교가 예전의 청교도 분파들과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그 '열광'과 감정적인 황홀경에 있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전(前)산업기의 저항적인 노동자나 장인의 성격구조가 공업노동자의 순종적인 성격구조로 난폭하게 재주조되는 영적 시련을 볼 수 있다. 실로 여기에 유어가 말한 '개조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성의 바로 원천에 침투하여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려는 악마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억압'이란 잘못된 낱말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표출은 금지되었다기보다는,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지 않고 오직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징발되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궤짝 같은 예배당이 마치 인간의 영혼을 채가려는 커다란 덫처럼 공업지대에 서 있었다. 바로 그 교회 안에는 신앙을 버린 자, 고해, 사탄에 대한 공격, 길 잃은 양들로 이루어진 감동적인 드라마가 끊임없이 존재하였다."(503-7)


"감리교는 늘 교회 문을 열어둠으로써 산업혁명기에 뿌리뽑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라져가고 있던 예전의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대신할 만한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제공했다." "사실 이 시기의 많은 사람에게 감리교회의 교우라는 '티켓'은 주술적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철  따라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길 때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될 수 있었다. 이 종교공동체 내에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자체의 드라마, 자체의 지위와 비중의 등급, 자체의 화젯거리가 있었으며 많은 상부상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목사는 별로 없었지만 약간의 사회적 신분이동도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렇지 않으면 적대적이기만 한 이 세상에서도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필경 그들이 지닌 소박함, 정결함 또는 경건함 때문에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521-2)


12장 공동체


"18세기 잉글랜드의 도시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한층 더 (이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농촌적'이었던 반면, 농촌문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요로웠다. 〈사람들이 늘 한곳에 그대로 있으면 어리석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코벳은 주장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신흥 공업도시들은 농촌을 밀어냈다기보다 농촌 '위에서' 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가장 일반적인 공업배치 상황을 보면, 흩어져 있는 공업 촌락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상업과 제조업 중심지가 그 원의 중심축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촌락들이 교외지대가 되어가고 농토들이 벽돌로 뒤덮여감에 따라 19세기 후기의 대규모 도시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랜 전통의 해체를 가져올 만큼 난폭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부 랭커셔, 포터리즈, 웨스트 라이딩과 블랙 컨트리의 고유한 관습과 미신과 방언들은 단절되지도 않았고 딴 곳으로 옮겨지지도 않았다."(558)


"지방색을 띤 이러한 전통들은 예전의 생활방식이 사라지는 데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고 또 그것은 빈번하게 정치적 급진주의와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예전 생활방식의 사라짐에서 중요했던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공유지와 '놀이터'의 사라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겼던 여가의 상실이었으며 놀고 싶어하는 충동의 억압이었다. 번연이나 벡스터의 청교도적 가르침이 웨즐리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옥의 불을 피하듯이 모든 경박한 짓을 피하라. 그리고 욕하고 거짓 맹세 하는 것을 피하듯이 어리석은 짓을 피하라. 여자에 손대지 말라.〉 카드놀이, 색깔 있는 옷, 장신구, 연극─이 모든 것이 감리교의 금기사항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속한' 노래와 춤을 반대하는 소책자들이 씌어졌으며 경건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문학과 예술은 아주 수상쩍게 생각되었다. 끔찍스러운 '빅토리아 시대의' 안식일이 빅토리아 여왕이 출생하기도 전에 강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561-2)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 공동체는 온정주의나 감리교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고도로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맨체스터나 뉴카슬에서는 자체 규율과 공동체적 목적을 강조하는 노동조합과 공제조합의 전통이 멀리 18세기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공제조합들은 중간계급 회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공제조합 회원은 사무원이나 소직종인 이상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이 장인들이었다. 모든 동료가 조합기금의 출자자였기 때문에 회원수가 안정되어 있었고 또 주의 깊고 열성적인 자치 참여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공제조합의 비밀주의 안에서, 그리고 상층계급의 탐색적인 눈초리 아래서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불투명성 안에서 독자적인 노동계급 문화와 제도의 성장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를 본다. 이같은 기층문화로부터 아직은 그리 튼튼하지 못한 노동조합들이 성장한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양성된 것이다."(571-6) 


"1830년께면 대부분의 노동계급 구역에서 국교회의 부활뿐 아니라 감리교의 부활이 자유주의 사상가, 오웬주의자, 비종파 그리스도 교인들로부터 날카로운 반대를 받았다. 런던, 버밍엄, 남동부 랭커셔, 뉴카슬, 리즈 및 기타 도시들에서 칼라일이나 오웬의 이신론자들은 대단히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감리교도들은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으나 점점 더 직종인들과 특권적인 노동자집단을 대변하는 경향을 띠었고 윤리적으로 노동계급의 공동생활에서 떨어져나갔다. 부흥운동의 일부 옛 중심지는 '이교(異敎)'로 빠져들었다. 한때는 〈술 마시기 못지않게 기도 드리기로, 욕하기 못지않게 찬송가 부르기로 눈길을 끌었던〉 뉴카슬의 쌘드게이트에서 감리교도들은 1840년대에 이르자 가난한 이들 사이에 있던 추종자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랭커셔의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 직공들과 마찬가지로 직조업 지역공동체들도 예배당에서 대거 이탈하여 오웬주의와 자유사상의 물결에 휩쓸렸다."(584)


"아일랜드 이민이 (노동시장에) 미친 영향은 양면적이며 또 흥미롭다. 역설적이게도 공업적 노동규율로 인해 어떤 틀에 박힌 것이 아닌 보충 노동력을 필요하게 만든 것은, 여러 압력들이 작용하여 잉글랜드 노동자의 성격구조를 바꾸어놓는 데 성공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한마디로 숙련 또는 반숙련 고용에서는 (근면, 금주, 사려 깊음, 계약 준수 같은) 에너지 지출의 조절이 필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산업사회 밑바닥에 있는 무거운 육체노동직은 순전한 육체적 에너지를 마구 써댈 것을 요구했고, 전(前)산업노동 리듬에 속하는 강도 높은 노동과 질탕한 휴식의 교대가 필요했는데 잉글랜드의 장인이나 직조공은 그의 약화된 육체적 힘과 청교도적 기질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이같은 노동에는 적합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일랜드의 노동력이 산업혁명에 불가결했던 거은 오직 그것이 '값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농민층이 백스터와 웨즐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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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과 기계문명
양동휴 외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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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산업혁명


# 산업혁명이 시작된 핵심 계기

1. 사회적 변화설(토인비) : 재화와 용역의 생산 및 분배, 생산요소들의 배분이 중세적 규제에서 벗어나 시장기구에 의해 운행되기 시작한 시점

2. 산업조직설(마르크스) : 기능공 중심의 선대제 생산이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전환되고, 유동자본보다 고정자본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한 시점

3. 기술진보설(란데스) : 석탄을 비롯한 에너지원의 혁신, 각종 기계의 발달, 합성원자재의 등장 등 넓은 의미의 복잡한 기술진보가 시작된 시점

4. 거시경제설(쿠즈네츠, 로스토우) : 수량경제사가들의 관점으로 국민소득, 자본형성, 노동공급의 양적 성장이 급속히 가속되기 시작한 시점

※ 산업혁명의 '혁명성'은 변화의 속도보다는, 그 변화의 결과가 지역적·미시적 분야에서 (기존의 견해보다는 완만하지만) 가속적이고 불가역적으로, 그리고 누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3 산업혁명의 재현


"본격적인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이었던 18세기에는 영국인의 대부분이 시골에서 살았지만, 가시적인 환경 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종획운동(Enclosure)으로 인한 농지의 전환, 공유지의 철폐 등과 함께 식량증산을 위한 농지개량, 대규모 관개 및 배수 시설의 확장, 도로건설 등이 이미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인이 과학적·기술적 발전의 결과를 피부로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가 본격화된 18세기 말 이후였고, 특히 19세기 초 증기기관의 등장에 이어 1840년대 이후 철도의 보편화는 당대인에게 역사의 변화를 추상적 경험에서 구체적 실체로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값싼 수송수단의 출현은 도시의 인구유입을 원활하게 해서 거대도시의 출현을 촉발하였으며, 지리적 제약을 벗어나 전국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을 수 있어 공업 및 상업의 비약적 확대를 가져왔고, 동시에 런던의 신문이 전국으로 배달되는 등 정보 및 통신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다."(64-5)


"빅토리아조 영국인들에게 철도가 도시를 공간적으로 이분하며 질주하듯이 시간적으로도 과거와 현재를 이분하는 이미지로 인각되었다." "철도와 증기기관이 가진 흡입력과 거부감은 이미 낭만주의 작품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낭만주의 문학은 전자에 대해서는 치열한 대응을 하였으나 산업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도시화 및 기술적 발전 등의 당대적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낭만주의 시인들이 현실정치에서 실망하고 자연 속에 내재하는 초월적 존재양식으로 관심을 돌렸을 때, 도시나 증기기관 등을 자연의 초월성과 평온함을 파괴하는 추상적 합리주의의 등가물로 인식하였다. 워즈워드는 도시를 시골과 대비시켜 정상적인 주거공간으로 보기를 거부했다. 즉, 근대기술문명의 도래를 변화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때도, 진보에 대한 들뜬 찬양이 아니라 오히려 착잡한 심정이 주조음으로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65-7)


"낭만주의자들에 비해 빅토리아조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바로 철도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시대에 속한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구스타프 도레의 「러드게이트 언덕」에서 철도용 구름다리는 화면을 수평으로 이분하고 있는데, 다리 밑으로는 수많은 마차, 행인들, 행상들이 서로 뒤섞여 질주하고 있으며, 다리 위로는 평온한 풍경 속에 저멀리 르네상스 양식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우아한 돔이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 화폭은 흡사 단테의 작품에 나오는 지옥과 천국을 연상시키는 아비규환과 정온함의 대립으로 이분되는데, 화면을 지옥과 천국으로 이분하는 다리 위로 증기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로 변화의 속도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아놀드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아래쪽은 속도에 취한 당대의 〈구역질나는 성급함〉의 정서이고, 위쪽은 자본주의적 분업이 도래하기 이전 인간다움이 보장된 사회라고 믿었던 빅토리아 인들이 동경한 중세에 대한 향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68-9)


"동시대인들에게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가장 총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은 〈공장도시(factory town)〉들이었다." "공장도시는 지리하고 반복적인 노동규율에 지배받는 거대한 공장들과 그 주위에 널려 있는 피폐한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으로 양분되는 단순화된 사회공간이었다." "문제는 진보와 개량의 정신이 함축한 합리성의 성격이다.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이끄는 합리적 개량의 정신이 작업장 내의 기계들에는 넘쳐 흐를지는 몰라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이 모순적 합리성은 대표적인 공장도시인 맨체스터에 대한 토크빌의 다음과 같은 단평이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결한 하수구에서 지극히 막대한 인간 근로의 물줄기가 흘러나와서 전세계를 비옥하게 한다. 이 더러운 하수구에서 순금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인간은 가장 완벽한 발전 상태와 가장 야만적인 상태에 이른다. 여기서 문명은 기적을 이루나 문명인은 거의 야만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72-7)


"산업혁명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재현은, 비유를 통해 대상을 변형시키거나 아니면 추상화된 형용어에 의존한 딱딱한 사무적 기술을 하는 양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노골적으로 산업자본주의를 옹호했던 유어처럼 특별히 산업혁명의 옹호자로 나서지 않는 한, 대부분이, 한편으로는 유기적 세계관을 견지한 입장에서 기계화의 비인간성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기술적 발전과 산업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산력에 대해서는 경이로움이 섞인 찬탄을 보내는 이중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숭고미는 엄청난 기계문명의 위세뿐만 아니라 거기에 따른 인간 노동자의 극한적 피폐함의 광경에서도 나온다. 산업혁명의 생산물들을 전세계로 실어 나르고 또 거대한 양의 원료를 수입해 들여오는 중심항구인 런던 부두 그 주변에서 매일 일을 따내어 일당으로 생계를 잇는 일용잡직 부두 노동자들의 거처를 방문한 헨리 메이휴의 『런던 노동자와 런던 빈민』에는 또다른 종류의 숭고미가 담겨 있다."(85-7)


"메이휴가 목도한 궁핍의 장엄미라는 극단적 미적 체험에 잠재되어 있는 사회적 가능성은, 감성이나 오성을 초월하는 이성을 동원하여 주체를 압도하는 대상을 파악하는 것, 즉 사회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다. 이것이 눈앞에 놓인 〈바다만큼이나 무한한〉 대상의 총체적 의미를 감지한다는 점에서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대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꼭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을 지향할 이유야 없겠으나 이러한 장엄미의 체험이 사회주의적 입장을 포함한 다양한 문명비판적 담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아가 장엄미의 체험이 이 경우 단순히 주체와 주체를 압도하는 객체간의 괴리가 아니라,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괴리, 즉 〈부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장엄미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분명히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결핍도 그만큼 헤아릴 수 없고 그만큼 장엄하다〉는 모순이 문제된다는 점에서, 반역의 가능성, 즉 산업혁명의 정치혁명화의 가능성이 근접한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88)


4 기계의 철학과 기계문명의 이상


"유어의 저작 『제조의 철학 또는 대브리튼 공장체제의 과학적·도덕적·상업적 경제의 해설』은 산업자본주의의 이해관계에 가장 충실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가장 완전한 〈제조(manufacture)〉는 〈손으로 하는 노동을 완전히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제조의 철학이란 따라서 생산활동이 스스로 행동하는 기계들에 의해 이끌리는 일반적 원리들을 해설하는 것이다.〉 생산의 인간적 주체의 자리를 빼앗은 스스로 행동하는 기계들은 사람으로 의인화되어 제시된다. 증기력은 인간 조무라기들을 주위에 거느린 거대한 거인으로 변신한다." "나아가, 이것은 하나의 신학적인 의의마저 갖는다. 〈노동자의 절대로 변함없는 친구, 증기기관〉은 〈'네 얼굴의 땀이 흘러야 네가 식물을 먹으리라'는 인간의 노동에 내려진 원초적 저주를 가볍게 하고 어느 정도 폐지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기계에 의한 '노동의 종말'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유토피아적 가능성까지도 함축하게 된다."(91-3)


"그러나 산업혁명의 자비와 축복은 인간을 열등한 기계의 부품으로 변화시키는 비인간화를 수반한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공장의 기계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조직이라는 시각이다." "유어는 〈공장체제〉 자체를 〈다양한 기계적·지능적 기관들로 구성된 거대한 자동인형이 공통의 목적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 모든 기관들이 스스로 제어하는 동력에 복속된 채, 간단없이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자동화된 기계 생산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의 변덕스런 작업 습성을 포기하고, 복잡한 자동기계의 변함없는 규칙성과 자기를 동일시하도록 하는 일〉이고, 따라서 산업혁명의 선구자로 칭송되는 아크라이트의 〈헤라클레스적 과업이자 그의 고귀한 성취〉는 바로 〈공장의 근면의 필요에 맞춘 성공적인 공장 규율을 고안해 내고 관리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제조의 철학이 약속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오히려 보다 강화된 노동의 속박을 그 실체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93-4)


"제조의 철학이 제시하는 기계화와 산업자본주의의 영웅적인 혁명성은 정반대 입장에서 〈자본의 부름에 응한 과학〉에 대항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온갖 재앙의 근원으로 비춰졌다." "〈증기의 자비로운 힘〉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자비롭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힘 자체도 인간노동에 근거해 있고 거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제조의 철학〉의 〈제조〉란 말에 담긴 인간노동의 언어적 찬탈과 그 철학적 추상화의 근저에서는 여전히 노동자 대중에게 내려진 〈네 얼굴의 땀이 흘러야 네가 식물을 먹으리라〉는 〈원초적 저주〉가 지속되었다. 그만큼 그 저주에 근거한 정치적 잠재력이 견지되었던 것인데, 그것은 산업생산의 가장 근저에 깔린 노동의 힘이 언제나 산업자본주의의 질서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동의 힘이 강해질수록 제조의 철학은 보다 강하고 지능적인 〈철인〉 기계를 통해서 인간노동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데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96-7)


"쌩씨몽의 과학기술주의는 산업혁명의 사회적 변화, 특히 공장도시 등의 생활공간이나 생산관계의 변화를 배제한 채 그 생산력의 기술적 발전에만 주목한다는 면에서 유어의 〈제조의 철학〉과 일치한다. 다만 거기에 담겨 있는 진지한 이상주의는 산업자본주의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합리화가 아닌 하나의 기계문명의 이상, 기계의 이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 형태가 되도록 만드는 점이 특이하다." "유어의 시각에서 보면 산업혁명은 바로 노동자의 지적인 능력을 대치할 지각 있고 말 잘 듣는 기계의 도래가 중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쌩씨몽의 과학기술 혁명의 대상은 〈임의적이고 신학적인 제도들〉로 이것들을 〈자유롭고 산업적인 관념들과 제도들〉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봉건질서가 붕괴되면서 와해된 사회의 유기적 관계에 맞서서, 오직 〈산업의 관념〉이 〈필수적이고 유기적인 사회적 유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98-9)


"로버트 오웬의 이상주의는 온정주의나 복고주의 또는 추상적인 휴머니즘과 구분되는 보다 구체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명백한 것은 노동자들을 중요하고도 섬세한 〈기계〉로 대우하자는 오웬의 제안은 단적으로 유어가 고전적으로 대변한 〈제조의 철학〉의 반노동자적 시각과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뉴 라나크 체험이 입증하는 바는 환경의 개선과 교육에 의한 인간 개조의 가능성이었다. 오웬은 보다 실질적으로 인간을 제조 및 개조가 가능한 하나의 섬세한 기계로 파악한다." "산업혁명의 진정한 혁명적 가능성은 따라서 얼마나 더욱 더 고도의 기계화된 생산을 성취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산업혁명으로 마련된 새로운 공장체제를 인간 개조에 활용할 것인가, 즉 〈새로운 체제〉 속에서 〈자라나는 세대에 있어서는 우리와 우리의 조상들이 경험한 악과 불행들의 전부는 못 한다 해도 거의 모두를 예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108-9)


"맬서스가 보기에, 산업혁명이 인류역사에 기여하는 것은 기계적 발명에 의해 삶의 질을 높여 준다는 면이 아니라, 산업화에 수반되는 열악하고 유해한 생활조건을 지속시켜서 인구증가를 제약한다는 부정적인 면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그 관념적인 단순함을 걷어내고 나면, 산업혁명이 인간번식의 기본단위로서 가족구조에 미친 변화라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맬서스의 생각대로 단순히 공장이 시골의 직업보다 〈덜 건강하다〉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면에서, 산업생산의 기계화에 의해 성인남자 노동력이 여성 노동력으로 대치되는 과정은 '인구'에 대한 하나의 '억제'로 볼 수 있다.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노동계급의 경우, 인구증가의 기본이 되는 여성의 모성적 기능과 그러한 '모성'에 근거한 가족구조가 급격히 도전을 받았다. 이 부분은 산업혁명의 폐해에 주목했던 중산층 지식인들, 가령 디즈레일리 같은 지식인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문제였다."(116-7)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산업혁명의 가장 부정적이고 위험한 결과인 노동운동도 전통적 가정의 붕괴가 야기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가정의 붕괴에서 산업자본주의의 노사갈등이 야기된다면, 마찬가지 논리로 사적인 가정생활은, 캐서린 갤라거의 말대로, 〈사회적 세계에서 해소될 수 없는 대립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쳐 둔 영역〉으로 남는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중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과 가정, 특히 메리 푸비가 지적하듯이, 모성의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통념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메리 바튼』에서는, 전통적인 어머니 겸 아내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버지와 공장에 다니는 딸 메리 바튼의 '결손가정'이 중심이 되고, 더욱이 아버지의 정치활동으로 인해서 딸 메리의 직업이 가정의 주된 수입원이 되는 상황으로 변한다. 어느 면에서 산업혁명의 가장 혁명적인 효과는 바로 이처럼 여성을 전통적 모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118-9)


5 산업사회에 대한 인문적 대응─〈문화와 사회〉 전통


"19세기 영국의 지성은 미증유의 사회적 분열과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양적 가치 개념을 도입하여, 종교 및 윤리가 중심이었던 당시의 일반적 담화양식을 부인한 공리주의는 큰 영향을 발휘했으나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공리주의적 정신에 맞선 지적 사조로 중요한 것만 열거한다면, 우선 공리주의적 인간관과 대척점에 서 있는 복음주의적 기독교 정신, 공화주의적 혁명정신과 함께 산업화의 인간성 파괴에 대한 분노를 담지한 낭만주의 정신, 그리고 19세기 초에 오웬에서 싹을 피워 차티스트운동을 거쳐 윌리엄 모리스에 이르러 하나의 뚜렷한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한 사회주의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서로 결합 혹은 반목하면서 19세기의 특정한 정신세계를 구성해 나간다. 그 중에서도 '문화와 사회의 전통'은 합리주의적 이기심을 긍정하는 근대적 태도에 대한 낭만주의의 반발과 복음주의적 구원 의지 및 빅토리아 중기의 사회주의 운동이 접목한 당대의 대안적 지적 전통으로 거칠게 정의할 수 있다."(130)


"윌리엄즈에 따르면, 당대의 '문화와 사회의 전통'은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버크의 보수적 정치관이 아니라 그가 산업주의의 폐해에 대항하여 〈유기적 공동체〉 및 〈완전한 인간의 대리인으로서의 국가〉라는 두 가지 대안적 개념을 제시한 부분에 주목한다. 전자는 인간 활동의 상호연관성 및 계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산업혁명으로 분열된 사회적 분열을 비판하는 준거점을 마련한 것이며, 후자는 분열된 사회에서 불평부당한 판단의 대법관 역할을 하는 사회적 기관을 이미 계급적 이해관계로 인해 찢겨진 사회 밖(버크에게는 국가)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을 말한다. 버크가 제시한 인간활동의 유기성 및 완전성은 모두 낭만주의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적 합리성을 '추상적·도구적 합리성'으로 격하시키고, 기계적 대 유기적, 알레고리 대 상징, 파편과 전체, 공상과 상상력, 오성과 이성 및 존재와 생성 같은 일련의 이항대립적 개념을 통해 산업문명에 대한 대안적 전망을 형성해 나간다."(131-2)


"콜리지는 『교회와 국가의 구성』에서 이 일련의 미학적 이항대립에 문명과 문화(〈civilization〉과 〈cultivation〉)의 이분법을 등치시켰다. 콜리지에 의하면, 당대의 산업사회에서 국가란 '영원불멸'과 '진보'의 두 대립적 이념의 균형에 의해 유지된다. 이때, '영원불멸'한 요소는 계급적으로는 토지귀족에 의해 대변되는 부분이고, 진보적 요소는 상업, 제조업 같은 전문직종 종사자, 즉 '시민계급'에 의해 구성된다. 콜리지는 국가가 결코 양자간에 균형을 취하지 못하고 토지귀족의 이해관계에 지배되고 있다는 점을 당대 국가의 문제점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콜리지에게 이보다 더 큰 국가의 본질적 문제점은 귀족과 시민계급에 대항할 수 있는 제3계급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진보는 오직 '돈버는 기계'와 가난의 극단적 대립을 초래했을 따름이며, 콜리지는 이와 맞서 '인류를 특징짓는 여러 특질과 능력의 조화로운 발전(즉, 〈cultivation〉)의 달성'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제3계급의 존재의 당위성을 주장한다."(133-4)


"콜리지에서 보이는 낭만주의적 문화 개념의 이중성─한편으로는 이기심을 부추기는 추상적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 측면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대안으로 현실에서 초연한 지식인집단의 창출을 제시하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는 국가가 사심 없는 판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상정하는 보수성의 결합─은 빅토리아 중기에 오면 매슈 아놀드의 문화 개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놀드는 자신의 시대는 변화의 시대이기에 모두 수심과 피곤에 노출되어 있고, 오랜 전통과 공동체적 윤리가 붕괴된 시대이기에 고립, 상실, 소외의 병적 정서에 탐닉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자신의 시대에 대한 아놀드의 자신감 상실은 고전 그리스시대에 개화한 가치들, 즉 '고요함과 활달함, 사심 없는 객관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아닌 '문화'이며, 아놀드는 '문화'를, 관조하는 정신에 적대적인, 무질서한 시대에 대항할 수 있는 정신적 특질로 부각시킨다."(136)


"콜리지나 칼라일이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추동력인 시민계급의 공리주의의 한계를 목격하고 문화의 담당자로 각각 국가의 일부로 제도화된 승려집단과 중세적 귀족계급을 지목했듯이, 아놀드도 시민계급의 특징을 '속물근성'으로 규정하고 거부감을 표시하고, 또한 문화적 실천의 주체를 이들처럼 기존의 특정 사회적 계급에서 찾기를 포기한다. 당대 사회는 귀족계급, 중산계급, 노동계급으로 삼분되어 있는데, 귀족계급은 야만인들(Barbarians)로 물질화되어 있고, 중산계급은 속물들(Philistines)이라 천박한 정신상태로 전락했고, 노동계급은 야수처럼 폭력적 우중(Populace)이기에 이들은 당대의 혼란에 맞설 수 있는 '조요한 객관성'을 결코 달성할 수 업다. 아놀드는 대신 문화의 실천자로 국가를 내세운다. 아놀드는 인간의 완벽함을 현실화하기 위해 이처럼 각 계급 내에서 계급적 편견을 극복한 '국외자'로 구성된 국가를 제시하지만, 이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국가의 구체적 구성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137-8)


"모리스도 애초에는 도피주의적 낭만주의에 침윤된 시인이었으며, 대중적 성공과 명성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나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예술활동은 단순한 미학적 실천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가 참여하는 사회적 실천과정으로 파악하고, 특정 시대의 예술품은 바로 그 시대의 사회적 구조와 정신상태에 대한 증언이라고 주장한다." "모리스도 러스킨처럼 예술성과 반예술성의 기준을 노동과정에서 파악하고 노동을 두 가지, '유용한 노동'과 '쓸모없는 노고'로 양분한 다음 이를 미학과 연결한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예술가는 고급문화를 담당하고 장인은 상품생산에 투입되는 분업현상에 주목하고, 예술가는 부자들을 위해 존재하며 장인은 미숙련노동자로 전락함으로써 양자 모두 예술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인간 전 존재의 축복스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파악한다." "이렇게 당대의 문명을 온통 부정한 극단주의의 결과 그는 부르주아 지식인 전통이 지니는 긍정적 요소까지 부정하게 된다."(146-9)


"그 결과, 그는 퇴폐주의적 낭만주의의 영향에서 쓴 초기시를 제외하면 그의 문학은 미학을 정치에 종속시킨 대중선동시이거나, 훗날 리얼리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한 상태에서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과 같은 유토피아적 장르로 나아간다. 엘리뜨적 고급예술에 대한 지독한 혐오, 그리고 예술을 일상적 노동에서 유래하는 기쁨과 연결시킨 민중성에 대한 강조는 '군소 예술들'의 가치를 강조하였고 복잡성과 장식적 요소에 맞서 단순성을 미래 예술의 근본원리로 제시한다. 그러나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당대 인상주의나 표현주의의 비판적 맥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영국 지성사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모리스는 칼라일, 아놀드와 비교해서는 물론이고 러스킨과 비교해서도 훨씬 주변적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부르주아 지식인의 비판적 전통은 오히려 당대의 주도적 전통에 반발하는 중산층 출신의 모더니즘 계열 지식인인 T.S. 엘리엇 및 F.R. 리비스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다."(149-50)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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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역사 -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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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공장으로의 귀환


"20세기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대공장들이 사회를 지탱한 시대였다. 포디즘이 단순히 새로운 생산조직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 20세기 자본주의, 즉 '무거운 근대성', 또는 달리 말해서 '중후장대重厚長大식 근대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된 것은 근거가 있다." "사실 '무거운 근대성'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그들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켰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본에 의존하는 임노동자의 지위에 길들여졌고, 기업가 또한 자본의 재생산과 성장을 위해 임노동에 기댔다. 그들의 모임에는 고정된 장소가 있었다. 양측의 어느 쪽도 쉽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대공장의 벽은 두 당사자들을 감옥처럼 둘러쌌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종신서약한 부부처럼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공장은 그들 공동의 거주지였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든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거양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법, 담합구조, 복지국가 모델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된다."(10-1)


1부 전前시대의 유산


"수공업길드의 발젼은 도시화와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일단 생산의 전문화에 걸맞게 직종별 길드도 분화하기 시작했다." "조합원 모두를 서로 규제하는 길드 조직의 근본적인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길드의 본질은 〈살그머니 앞질러 나가는 것〉에 제동을 가하는 데 있었다. 수공업길드 조례는 수호성인에 대한 종교적 헌신과 상호부조에 관한 내용 이외에, 은밀히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특정한 시간 전후의 판매를 금지하고 가격경쟁이나 덤핑행위 또는 저가매수 자체를 막았다. 즉 시장을 둘러싼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약화시킴으로써 조합원 자신이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하기만 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는 고도의 정태적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길드제도의 극단적인 평등주의는 그 대신 경제활동의 심각한 예속을 대가로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시사회에 변화의 요인이 작용할 경우 쉽게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32-3)


"길드제도 아래서 마스터가 몇 명의 직인과 도제를 데리고 영업하는 전형적인 영업장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형태를 확대가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혈연적 친족가족의 외피에 직인과 도제 또는 한 두 명의 하녀를 포함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비록 길드제도가 도제-직인-마스터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하더라도 마스터로 상승하는 것은 대다수 도제들에게는 〈비현실적 전망〉에 지나지 않았다. 길드제 자체의 배타적인 속성 때문에 영업장 개설 허가를 받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업장 개설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한 숙련공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선대상인이 생산을 주도하면서 독립적인 영업장을 운영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직인 가운데 상당수는 선대상인의 하청을 받아 생산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더욱이 선대상인들이 대량수요에 발맞추어 직인들에게 특정 공정에 해당하는 일거리만을 주문하면서, 완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조차 점차 사라졌다."(36)


"수요 증가가 당시 원산업화proti-industry 지역의 수공업생산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수요의 자극을 받은 원산업노동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전의 생활과 다른 노동윤리를 발전시켰고, 기본 생산단위인 가정에서 생산자원을 재배치함으로써 생산 증가를 꾀했다. 적어도 18세기 후반 랭커셔 면업지대에 관한 한, '근면혁명'과 비슷한 변화가 가내수공업자들의 삶과 노동세계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장 드브리스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원산업화 지역의 생활태도 또는 삶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드브리스는 특히 18세기 가내경제가 전통적인 생활수준을 지향하면서도 일단 그 수준에 도달하면 더 심한 노동보다는 여가를 선택하는 전산업적 패턴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과 달리 가내노동자들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채우기 위해 과외소득을 올리려 하고,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시기에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61-2)


2부 산업혁명과 공장의 원형


"18세기 말 이래 증기기관은 사회를 극적으로 변모시켰다. 사실 회전굴대엔진이 처음 출현했을 때 기술적 호응을 얻은 것은 탄광이었다. 이전에 뉴코맨 식 엔진을 사용해온 분야에서는 와트의 방식이 매우 효율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력에 익숙해 있던 섬유 분야에서는 도입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와트의 기관어 얼마나 효율적인지 비교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증기력의 사용을 일반인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것은 증기기관차의 출현이다." "눈으로 직접 보는 증기기관차며 증기선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 원동력이 증기기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아마 우리는 1830~40년대에 이루어진 영국 철도망의 발전에서 증기력 시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836년 당시 철도망은 보잘 것 없었지만 10여 년이 지난 후 철도망은 영국인의 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101-4)


"18세기 말 이래 공장형태의 주류가 수력방적공장에서 증기력공장으로 급속하게 바뀌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산업혁명사 연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면업 분야에서는 특히 동력 뮬 방적기가 도입되면서 증기기관을 설치한 방적공장이 급증한다." "증기력의 승리는 한 세대라는 짧은 시기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증기동력을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방적기에 연결하는 과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증기기관 자체의 진동이 컸고, 그 진동을 견딜 수 있는 방적기를 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18세기 말 수력방적공장은 기술적으로 매우 정교한 동력 전달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수량이 풍부할 경우 수차와 동력 전달장치와 방적기를 연결한 공장 시스템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가동되었으며, 고품질의 면사를 생산했다." "증기력과 수력 겸용 공장의 상당수가 사실상 수력공장의 전통을 잇는 형태라고 가정할 경우 증기력의 결정적인 승리보다는 점진적인 우위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113-6)


"산업혁명 초기에 공장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곳이 아니었다. 공장은 빈민원이나 감옥과 같은 혐오스러운 곳이었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특히 아크라이트 식 공장은 수력을 이용할 수 있는 강변이나 계곡 외딴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노동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수력방적공장이 외진 곳에 세워진 것은 한편으로는 물길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낌 없는 공장활동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후에는, 연소자나 어린이의 수요가 늘었다. 공사장 노동자들 중에서 미혼이거나 식구가 단출한 가장은 또 다른 공사판으로 옮겨갔지만 여러 자녀가 딸린 사람들은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수력방적공장에서 연소자와 어린이는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사실, 이들을 광범하게 고용하는 것은 수력공장뿐만 아니라 그 이후 다른 형태의 면공장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130-1)


"우리는 산업혁명기의 경제를 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기계와 증기력에 개방적이고 그 영향으로 빠른 성장을 계속했을 것이다. 반면, 후자는 점차로 또는 급속하게 쇠락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동시대 문헌은 대부분 이 전통적 부문의 쇠퇴와 조락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시대인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인상은 번영보다는 쇠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앞에 클로즈업 된 산업화의 풍경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탈락한 수공업자, 생활수단을 상실한 농민,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도시 슬럼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빈민의 행렬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공업도시와 공장은 사람들의 삶에 낙관적인 전망보다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칼라일은 기계화와 공장제도의 도입을 단지 생산의 영역에만 국한해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기계와 공장제도는 사람들의 행동양식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 양식마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148-9)


"(반反공장주의를 표방한) 토리주의적 정서는 산업화 이전의 노동세계를 이상화하고 있다. 그 노동세계는 주로 토지와 공동체와 교회와 계서제에 기초를 둔 농촌사회를 가리키지만, 가내수공업의 경우에도 인간과 자연, 노동과 여가, 자립과 도덕이 조화를 이룬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전산업사회의 가내수공업자들이 누렸던 독립적인 생활과 산업화 이후 공장노동자들의 신체적·도덕적 전락을 대비하는 반산업적 감정은 특히 개스컬의 《장인과 기계》(1836)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개스컬이 보기에, 증기력과 기계는 건강하고 도덕적인 노동자집단을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에 그들 못지않은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지닌 집단을 창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개스컬이 가장 개탄한 것은 노동자들의 가난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동자가족이 미숙련노동자로 공장에 진출함으로써 야기되는 가족적 가치의 파괴와 도덕의 타락을 우려했다. 공장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앗아가는 해악이었다."(154-5)


"1830년대 초 방적공 지도자들이나 급진파 인사들은 기계에 관해 토리-래디컬과 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우선, 방적공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오언주의자들은 기계와 공장이 초래한 병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경쟁이라는 사회관계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구성원들이 경쟁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기계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악덕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경쟁을 의식해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계와 노동자는 영원한 적대자다. 그러나 경쟁을 지양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들 모두 포함하는 단일한 생산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기계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라 협동으로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 기계가 노동자를 내쫓고 실업자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자본주의에만 들어맞는다. 협동사회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오히려 노동자의 작업을 쉽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언주의자들은 (여가시간을 늘려주는) 기계의 유용성에 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224)


"1830년대 공장 관련 문헌을 저술한 배비지와 유어는 오랫동안 그저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4편의 각주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유령과 같은 인물〉이었을 뿐이다. 배비지와 유어는 기계의 도입과 공장제의 발전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갖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향이 가져올 '생산력'의 발전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과학의 이용을 강조하면서 나아가 작업장 조직과 과학기술의 결합을 내세웠다. 그들의 저술은 공장의 기계적 원리와 공장운영에 관한 경제의 원리를 종합한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과 정치경제학의 기본원리를 실제 노동의 공간이자 생산의 산실인 공장의 분석에 원용함으로써 얻은 일련의 지식체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장제가 노동자의 삶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무시하거나,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들의 저술은 (당대의) 공장에 대한 비판적인 사회여론에 대응하는, 이른바 공장제 옹호론이기도 했다."(171-4)


"공장제에 관심을 가진 당대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성공이 어느 정도 생산 공정을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통제는 기계 자체의 질서와 정확성과 '규모의 경제' 등을 통해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배비지는 기계를 사용함에 따라 대공장으로 이행하는 경로를 강조하면서, 생산비의 최소화 문제를 중시한다." "배비지가 기계의 생산 통제를 염두에 둔 것과는 달리, 유어는 기계의 통제를 넘어 자본가의 생산 통제 가능성을 바라보았고 이를 위해 중앙집중적인 자동화공장의 전망을 내놓았다." "배비지와 유어가 공장에 대해 서로 다른 전망을 제시한 것은 두 사람이 생각한 공장생산 및 운영의 기본원리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배비지가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기 위한 공장생산의 원리로서 스미스 식의 분업론에 집착했다면, 유어는 그의 자동장치의 개념─기계가 작업의 주체가 되어 노동자를 지배하게 된다는─에서 보듯이 자본가의 노동자 통제를 중요하게 여겼다."(184-8)


"배비지가 새로운 공장 모델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연대와 공동 이해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유어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완벽한 통제와 지배에서 오히려 노동자의 안정과 발전 가능성을 찾는다." "유어는 공장 어린이의 과도노동이 주로 숙련노동자의 비도덕성에서 비롯했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자동장치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비도덕적인 숙련노동자의) 노동력을 쫓아낼 근거를 마련했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좀 더 유순하고 순응하는 사람들로 교체한 이후에는 자동장치는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 인간 전체를 통제하는 지배자로 군림한다. 유어가 자동장치automat를 경우에 따라서는 전제군주autocrat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유어는 어떠한 일탈도 없이 거의 완벽하게 기계적 리듬에 따라 작동하는 상태를 공장의 질서이자 유토피아로 인식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장의 질서가 인간의 질서로 전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즉, '생산성에 대한 압력'이 유토피아적 전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196-7)


"한편, 대공장주가 공장아동의 규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공장법을 지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마벨은 1833년 공장법이 중소자본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대자본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에 따르면, 1833년 입법의 목적은 〈많은 중소 섬유공장의 생산비를 높여 그들의 생산을 감축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섬유류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공장법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자본의 준지대準地代가 증가할 것이다. 피해를 입을 부류는 농촌의 수력 공장주, 그에 따른 반사적 이득은 증기력 공장주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력공장은 증기력공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동 고용의 비율이 높았으므로 1833년 공장법의 아동고용 제한 및 보호규정은 특히 수력공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터였다. 이 법의 제정을 반대한 자본가들의 주류는 바로 중소 수력 공장주였다." "결국, 1833년 공장법은 대자본과 중소자본의 이해관계 대립을 암묵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212-3)


"인간의 생체리듬에 들어맞지 않는 가혹한 공장노동에 대한 항의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항의는 주로 개량방적기 그 자체를 향한 것이었다. 1820년대부터 주기성을 띠며 나타난 경기변동과 그에 따른 실업을 겪으면서, 그리고 단조로운 공장노동의 변화(실질적 종속 경향)를 감지하면서 방적공들의 항의는 기계라는 적대자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향해 조직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0년대 방적공의 정치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와 달리 급진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방적공의 시간단축운동은 그것이 보여준 격렬함과는 상관없이 조만간 '표준노동일'을 지향하는 대자본의 이해와 맞부딪쳐 상쇄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운동의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1830년대 방적공들은 시간단축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들 나름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그 운동을 통해 의식의 고양과 함께 더 활성화된 대중적 조직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226-7)


3부 무거운 근대성과 공장제도


"테일러의 담론은 공리주의 전통이 깊고 자본주의 시장이 한층 팽창하던 세기 전환기 미국 경제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생산증대를 필요로 하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었다. 그것은 특히 미국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분위기였다. 세기 전환기 미국은 대불황 이후 촉발된 새로운 이민 물결로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함과 동시에 시장팽창을 겪고 있었다. 인구증가뿐만 아니라 급격한 도시화 또한 시장팽창을 더욱 자극했다. 이러한 팽창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공장생산의 대규모화를 넘어서 새로운 조직 원리를 필요로 했다. 테일러는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는 사측의 입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생산증대를 가져올 새로운 조직화가 두 세력의 상호적대를 완화할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생산성 증대가 한쪽에는 고임금을, 다른 한쪽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비용을 허락해주기 때문이다."(260-1)


"테일러의 '과학적' 접근은 결국 노동과정에서 '시간'과 '동작'의 문제로 귀결된다. 테일러는 시간과 동작 연구에서 직접 생산증대를 지향하기보다는 피로를 경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생산증대를 목표로 할 경우 오히려 여러 부작용이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의 동작에서 기본적인 것은 속도가 아니라 리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전제 아래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불필요한 동작'이 '불필요한 시간' 또는 '게으른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설파했다. 노동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이런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노동자 개인의 욕망, 정체성, 성별 등 다양한 차원을 무시하고 인간을 단지 연구대상으로 객관화하는 것을 뜻한다. 과학적 관리에서 노동자의 개인적 차이는 무시된다. 이것이 테일러가 권장하는 접근방식이다. 테일러는 개별 노동자의 동작과 작업을 분석할 때 그 사람을 감정과 이성을 가진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작업수단으로 인식했다."(263)


"자동차생산 분야에서 시작되어 내구소비재 일반뿐만 아니라 공장생산의 성격을 크게 변모시킨 이른바 포디즘 생산방식은 20세기의 성격을 규정짓는 의미로 사용된다. 대량생산─대량소비가 가능한 시장을 전제로 하는─은 포디즘 생산방식에 의거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포디즘은 일단 〈일관작업 생산방식, 기술적 분업, 부품 및 생산물의 표준화에 바탕을 둔 대규모 경제 추구〉로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부연 설명하면 그것은 수직적 통합과 공간적 집중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챈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드 사는 세계에서 가장 잘 통합된 자동차회사였다. 거대한 공장 설비를 통해 끊임없이 가장 절절하게 계획된 물류를 이루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포드는 철강, 유리, 부품, 보조제품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이와 함께 고임금을 제공해 노동자에게 안정된 소비 패턴의 기회를 제공했다. 포디즘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계급 소비의 규범을 만들었던 것이다."(268-73)


"영국 기업가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조직화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 초기 군수물자의 차질 없는 생산이 필요했던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1915년 6월 군수물자부를 신설하고 군수물자법을 입안한 후에 정부는 직영 군수공장과 조선소는 물론, 재정 지원을 계속하는 기업들에 대해 〈기술 및 관리 면에서 최신의 이론〉을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자동 및 반자동 기계설비를 도입하고 제품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뜻했다. 이미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된 테일러주의 또는 과학적 관리의 방식을 통해 이전의 구태의연한 경영관행을 타파하려는 취지였다. 군수물자부는 무엇보다 전시에 생산성 제고와 노사 평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경제적 재건은 자본과 노동의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생산 증가와 노동조건 개선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289-90)


"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자동차기업과 비교할 경우 영국 기업의 특이성은 한 기업이 자동차 제작에 필요한 전 부품을 자체 조달하려 했다는 점이다. 미국 자동차회사는 조립생산자로 출발했다. 상당수 부품을 외부에서 공급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났을까? 당시 영국 자동차공장 숙련공들은 오랫동안 금속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로서 금속 가공에 관련된 다양한 기계를 능숙하게 다뤘다. 따라서 그들은 한 작업장 안에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생산방식에 더 적합했고, 한 사람이 여러 공정에 참여할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노사관계에서도 다른 관행을 낳았다. 영국 자동차회사는 조립라인 위주의 미국 회사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자체 생산단위와 더 많은 노동자집단을 조절해야 했다. 노사관계의 평화가 자동차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특이성은 1920년대 영국 기업들이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다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297-8)


"비교적 신사업 분야였기 때문에 자동차회사 노동자들은 다른 철강, 조선, 탄광 분야에 비해 조직 결속력이 약했다. 점차 미숙련노동자의 고용비율도 높아졌다." "미숙련공을 충원하는 추세가 일반화될수록 노동조합의 성장에 장애가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국 자동차공장에서 기업주의 반노조 성향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산업 분야의 노동조합은 전투적인 성향은 덜했지만, 그럼에도 사용자측과 협상파트너로서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었고 그에 상응하는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그들은 임금 인센티브제나 보너스제도 등 다양한 성과급제도를 통해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은 자본측의 경영전략이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식 포디즘체제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대량생산을 지향하면서도 노동자와 타협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동차회사들간의 경쟁과, 그리고 영국 시장의 특성상 무제한의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302-3)


"포디즘 생산조직 자체는 부품 표준화와 일관작업생산으로 상징되지만, 노사관계의 측면에서는 관리자층에게 막강한 권위를 부여해 노동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는 체제다. 여기에는 청원경찰을 통한 노동자 감시, 위법에 대한 즉각적인 해고, 무급휴업,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이것이 미국식 포디즘이다. 포디즘 생산방식은 처음 등장했을 때, 생산과정을 마치 〈천체가 일렬로 정돈된 것 같은 상황〉으로 만들었다." "톨리데이의 표현을 빌리면, 포디즘에서 진정 혁신적인 내용은 〈숙련노동의 적절한 공급이 없는 상태에서도 생산량 및 생산성의 급속한 증대〉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에서 포디즘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민노동자층의 공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유럽 여러 나라들이 도입하려 했을 때 기존 공장에서 노동자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노동과정 통제, 조직노동운동과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304-5)


"과연 영국 기업가들은 노동자 저항에 직면해 새로운 생산시스템을 포기할 것인가. 영국 기업가들의 전략은 오히려 영국의 협소한 자동차시장과 조직노동운동의 전통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자의 노동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성과급 체제를 정착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궤도 위를 이동하는 차체에 단계별로 작업을 시행하는 조립생산라인을 도입하면서도 조립과정 자체는 반자동기계보다는 훈련된 노동인력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포디즘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1920년대에 확립된 영국식 생산체제는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토대로 둘 사이의 안정된 동거양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거운 근대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기에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전후에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모델을 구체화한 것은 바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무거운 근대성이 널리 퍼져나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308-11)


4부 탈공장의 시대


"산업 자본가들의 전통 지향적 태도는 위너의 《영국문화아 산업정신의 쇠퇴》(1981)가 출간된 후 영국 학계에서 열띤 논란거리가 되었다. 위너는 영국의 쇠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사문화가 기업정신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검토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영국의 신사문화는 원래 반산업적 특징을 지녔는데, 이런 경향이 사립학교를 비롯한 제도교육을 통하여 기업가 2세들에게 전수되었고 이들이 지주층에 동화됨으로써 기업활동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위너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19세기에 부르주아적 가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토지귀족은 강력했고 그러면서도 부를 축적한 기업가라면 신사층gentry의 대열에 쉽게 합류할 수 있는 길이 뚫려 있었다. 전통적 지배세력은 역사적 사형선고를 모면하고 그들의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를 다시 확보했으며, 나아가 중간계급을 자신의 모습대로 주조할 수 있었다. 영국의 근대화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다."(362-3)


"영국 제조업 분야에서 거대기업의 성장은 주로 기계·전기·화학 분야의 기술 진보가 주도했다. 전기 기기를 주로 생산하던 회사들은 전기설비뿐만 아니라 항공기, 선박엔진, 운송설비, 중장비 기계류까지 생산 분야를 넓혔다. 전기에서 기계까지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달성한 것이다." "요컨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해 1950년대 영국의 산업구조는 소수의 거대기업이 특정 산업 분야의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는 과점적 성격이 좀 더 뚜렷해졌으며, 산업별 전문화 대신에 그 경계를 넘나드는 다종생산 기업이 등장했다. 거대기업간의 합병과 상호투자도 잇달았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기업가나 노동자, 정책 결정을 담당하는 관료와 정치인에게 이르기까지 불과 10여 년 후에 영국 제조업이 파국적인 결말을 맞으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번영의 시대에 영국 제조업은 여전히 상당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었다. 1970년대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해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370-1)


"일례로, 1950년대 철강업계는 비교적 호황을 누렸다. 승용차 및 건축 분야의 호황으로 철강재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이 전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후 수년간 영국 철강업계는 유럽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이래 영국 철강산업은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영국 철강업의 침체는 새로운 기술혁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1950년대 세계 철강업계는 '염기성 순산소제강법'을 개발,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 공법은 선철을 강철로 정련하는 과정에서 공기 대신 순수한 산소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순산소제강법은 거대한 설비 투자를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했다. 이 개량공법의 도입과 더불어 중소 고로 위주의 소규모 기업들은 갱쟁력을 갖추기 어려웠다. 전후에 새로운 설비투자를 단행한 독일과 일본 등은 후발성의 이점을 살려 새로운 제조공정을 도입했다." "중소 고로시대가 저물면서 영국의 철강회사들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372-3)


"이 주장은 독일과 일본은 순산소제강법을 응용한 새로운 설비를 비교적 손쉽게 도입할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이나 영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발성의 이점만으로 한 산업 분야의 쇠퇴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은 새로운 공법 도입은 정책적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영국 철강산업은 혁신을 뒤로 미룬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도입된 고율의 보호관세,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가입 거부 등이 이 산업 분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67년 국유화 조치는 신공법을 도입할 만한 투자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이 속출했기 때문에 부득이 단행한 조치였다. 사실 국유화는 철강산업의 군살을 빼고 구조조정을 통해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반대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국유화 없이 정부 지원 아래 사기업들의 경쟁구조를 유지하면서 혁신을 추구할 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74-5)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한편으로는 영국 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생산체제의 황금시대가 종국을 맞은 1970년대 초부터 나타난 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량생산체제의 무게중심은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된 국가에서 새로운 산업국가로 이동하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공생관계가 굳건한 나라에서 그 징후는 아직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스미스-유어-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대량생산의 성장담론이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점을 일깨운다."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대량생산의 원리가 장인생산을 모두 구축하지는 않았다. 독일과 일본에서 광범하게 뿌리를 내린 소기업주의는 장인생산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집중화된 영국 제조업이 쇠퇴한 반면, 일본이나 독일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의 대안으로서 장인생산의 원리를 다시 성찰할 필요성을 느낀다."(381-3)


"(현대자본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물신적 성격, 이윤추구의 비인간적 속성만을 주목하고 비판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지속되었으며 그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활동 안에는 전자본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어떤 속성이 있는 법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특히 산업사회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작동기제 아래 움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윤추구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성향들, 이를테면 노동의 습관,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기꺼이 참으려는 태도, 상호신용의 관습과 성취 등 전자본주의 세계에서 유래한 여러 성향들에 의존했다. 좀 더 넓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권리와 상호의무, 선행, 희생과 양심 등 일반적인 도덕률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왔다.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자본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이다."(386-7)


"일례로, 루터와 칼뱅이 가르친 기존 사회의 종교적 전통, 즉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직업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관련이 없으면서도 그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어떤 임계선을 넘어 팽창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차로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서 전자본주의적 도덕률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원래 자본주의는 삶을 둘러싼 모든 사물과 모든 조건들을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 아래서는 전통적인 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해체된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구현체라고 할 수 있는 대량생산사회의 불안정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상은 바로 이 전자본주의적 성향들의 급속한 쇠퇴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공기가 희박해졌을 때 생명과 공기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전자본주의적 성향들이 약화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387-8)


종장 탈공장의 시대와 인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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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사회 -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9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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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스코틀랜드 계몽운동과 근대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낳은 지적 기반은 이 지역의 대학제도에서 마련되었다. 16,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교회 자체의 개혁에서 더 나아가 대학교육을 통해 지역 젊은이들이 영적 갱신과 함께 새로운 지식과 도덕을 고양하기를 소망했다. 18세기에 에든버러대학, 글래스고대학, 애버딘대학, 세인트앤드루스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다. 다른 한편,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성취는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산업화 초기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변화의 진원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중심'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변화는 대체로 중심보다는 변두리에서 오히려 더 빨리 발견되고 또 더 분명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스미스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관점에서 국민경제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나, 퍼거슨이 시민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산업사회의 변화를 인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19)


"또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문화적 성취는 정치적 종속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대(大)브리튼의 문화 창달자임을 자부하는 이중적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아마도 현실 정치에서 잉글랜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초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화두는 근대사회 형성과 근대사회에서 인간 삶의 변화였다. 이들이야말로 '근대성' 문제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지식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퍼거슨과 스미스가 보기에, 근대 상업사회란 시장의 위력에 인간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 사회였다. 인간과 시장의 관계, 원시사회에서 상업사회까지 이르는 사회 진보의 역사와 같은 문제야말로 이들이 눈여겨본 핵심 주제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대학에서 강의한 '도덕철학'은 상업사회 아래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질문을 위한 성찰의 주 무대였다."(20-1)


제1장 에든버러, 18세기의 풍경


제2장 종교와 대학


"존 녹스는 일찍이 스코틀랜드 버윅에서 성공적으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설교자로 이름을 떨쳤다. 1550년대에 종교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망명했다가 1559년 귀국했다. 망명 시절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들과 교류하면서 장 칼뱅의 신학에 경도된 그는 에든버러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었다. 녹스와 그의 동료들은 장로교회를 사실상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가톨릭은 짧은 시일 안에 소수 종파로 전락했으며 이제 칼뱅주의자들 사이에 교회조직을 둘러싸고 장로파와 주교파가 서로 대립했다." "17세기 중앙권력의 부재라는 특이한 상황 때문에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그 권력을 대신하는 정치적·사회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즉 교구의 개별 교회에서 전국 차원의 총회까지 교회는 위계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 조직체계가 교육과 구빈 행정을 맡으면서, 장로교회가 중앙권력이 없는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60-1)


# 주교파(감독파) : 칼뱅주의 교리는 수용하되, 교회조직에 관해서는 가톨릭의 주교 제도를 따르는 영국국교회의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종파를 말한다.


"18세기에 들어와 스코틀랜드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장로교의 엄격한 교리와 생활윤리를 시대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시 장로교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로부터 '중도파'라고 불린 이 일단의 목회자들은 광신과 지나친 종교적 열광을 멀리하면서, 합리적인 사상과 풍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정치적으로는 휘그파 정부에 협조관계를 유지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영국화'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중도파는 당시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새로운 사상과 고급문화를 통해 교회를 성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의 표준적 교리와 의식은 그대로 따랐지만, 그 대신에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고 신학상의 논쟁은 가능하면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문필가로서의 활동에 관심을 갖거나 또는 문필가들을 존중했다. 아울러 현실생활에서 도덕과 윤리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종교생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66-7)


"(세속화의 문제에 전향적으로 접근한) 중도파 목회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종교와 사회의 화합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조건과 그 통치에 필수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교회와 사회의 불가분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사회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윌리엄 로버트슨, 휴 블레어를 비롯한 중도파 인사들은 세련되고 계몽된 가치, 종교적 중도와 관용, 과학 및 문학 분야의 성취 등을 존중했는데, 이는 바로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기본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일상생활에 대한 간섭을 포기했다. 이는 교회가 종래 장로교회의 전통을 넘어서 세속생활의 자율권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젊은 목회자들은 세계가 설교와 신의 징벌 때문이 아니라 일반 사회의 지적 진보 때문에 나아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종교와 계몽운동이 서로 수렴된 것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 교회와 계몽운동을 분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75-6)


제3장 정치에서 문화로


"스코틀랜드 내에 브리튼 정체성 형성을 가속시킨 것은 18세기 프랑스와 벌인 일련의 전쟁과 미국독립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이 프랑스의 가톨릭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종교적 관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일깨우는 힘이자 자신들의 자유 및 부의 원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더 강렬했다. 또한 가톨릭 프랑스와의 대립은 제국의 문제와 관련된다. 영국의 식민지무역이 활발해질수록 유럽에서 무역적자를 해속하고 경제적 활력을 배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독립전쟁도 종교적 대립구도는 아니었지만,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고, 왕정주의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백인정착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 지배계급의 통합을 이루고 통합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110-2)


"1745년의 사건─재커바이트 세력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사람들과 연합하여 스코틀랜드를 점령한 사건─은  스코틀랜드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에게 두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그들이 보기에 시대착오적인 재커바이트 운동은 오히려 문명화에 대한 당위성을 더욱더 강화시켜주었다. 존 흄과 윌리엄 로버트슨은 문명화과정이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문명화는 '영국화'와 거의 같은 의미다. 문명화 역사의 근저에는 강력한 주권국가의 형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1707년의 합병은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다. 둘째, 재커바이트 운동의 실패는 종교적으로는 가톨릭뿐 아니라 주교파와 장로교회 기존 교권주의자들 모두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 사건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갱신이 이제 시대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목회자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이 바로 신이 부여한 섭리였다."(122)


# 재커바이트(Jacobite) 운동 :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제임스 2세와 그 직계 후손을 복위시키려는 일련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이 단순히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넘어서 '영국화'를 대안으로만 삼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1745~46년 사건의 비극적 종말은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다시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천여 희생자가 발생하고 다수 스코틀랜드인들이 패퇴한 그 사건에서 스코틀랜드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은 그 비극을 다른 형태로 승화해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정치적으로 대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영국과 영국문명이 바람직하고 뒤따를 만한 이미지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그 문명은 물질적 진보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바탕을 이루어야 할 도덕과 새로운 가치체계 및 문화를 갖추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잉글랜드의 문명화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오히려 그 문명을 한 차원 더 높게 고양하겠다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122-3)


제4장 중심과 주변


"16~17세기 유럽인의 대양 진출이 활발해지고 그 결과로 유럽 경제권이 확대되었을 때 영국만이 아니라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나라들이 해외무역을 주도해나갔다. 여기에서 영국이 다른 나라와 달랐던 점은 이 나라만이 신대륙 무역과 동방 무역을 적절하게 서로 연결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에스파냐는 주로 신대륙 무역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도 및 동아시아를 포함하는 동방 무역에 집중했다. 오직 영국만이 두 무역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었다." "대니얼 디포는 당대의 세계사적 시각에서 영국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무역 네트워크를 제안한다. 아메리카 식민지 및 카리브 해 연안을 영국의 시장 확대를 위한 텃밭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이미 디포의 시대에 출현했다. 디포가 보기에, 두 무역 네트워크의 연결은 단순히 중개무역과 상품시장의 확대로 끝나지 않고, 영국의 재정과 국부 문제를 직간접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128-31)


# 대니얼 디포 : 『로빈슨 크루소』(1719~22)와 『몰 플랜더스』(1722)로 유명한 소설가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그리스 고전철학 전통의 일부를 이어받아 덕의 완성에서 행복을 찾고, 완전한 행복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의 고통과 천국의 보상을 연결함으로써 행복의 내용에 세속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잉글랜드에서 행복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시대의 일이었다.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상상력은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더 소망하는 태도를 낳았다. 르네상스시대 유토피아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그들이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실의 시간적·공간적 연장선에서 자신들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현세는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며 따라서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가 특히 칼뱅주의자들의 의도는 이처럼 현세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려는 데 있었다."(156-7)


"18세기 행복론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존 로크의 저술이다. 그는 내란기에 크롬웰을 지지했으나, 정통 칼뱅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인간오성론』(1689)에서 제시한 메타포 '백지장(tabula rasa)'은 원죄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란 원죄와 관련이 없이 기쁨과 고통의 지각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로크는 이 책 제2권에서 '행복의 추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낙하하는 돌이나 큐로 맞힌 당구공과 마찬가지로 자기 삶의 공간을 뚫고 앞으로 나가나는 추진체다. 로크는 그 추진력을 행복에의 열망에서 찾는다. 행복의 열망이 고통과 기쁨을 중력처럼 밀고 당기는 작용을 한다. 〈우리 안의 기쁨이 윌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우리 안의 고통은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인간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지고의 기쁨과 동의어가 된다. 로크는 인간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행복을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157-9)


"그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역사가들이 '감성적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삶의 태도의 출현이었다." "이런 풍조를 선도한 집단은 지식인 외에 아무래도 해외무역과 상업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상인들이었다. 물론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일탈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히 강했다. 개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과 로마, 이 모두는 급기야 멸망으로 이르지 않았는가. 계몽주의시대 영국 지식인들은 〈자아해방과 쾌락 추구〉가 〈도덕적 폐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명예혁명이야말로 군주의 전제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받은 정치적 기제이며, 시장경제 또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조화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인간의 본질이 기쁨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는 기계적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161-2)


"잉글랜드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비하면,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정체되고 후진적인 사회였지만 합병 이후에 드디어 수 세기 동안 계속된 만성적 빈곤과 후진성에서 벗어날 호기를 맞았다." "그러나 에든버러를 비롯한 동부 저지대는 글래스고의 상황과 상당히 달랐다. 이 지역에서는 대외무역과 상공업의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적었다. 결국, 합병의 혜택은 서부지역에 돌아간 셈이었다." "이와 같이 에든버러는, 중앙정치권력은 실종된 도시였지만, 최고법원과 전통 있는 교회들이 있고 에든버러대학의 평판이 갈수록 높아졌기 때문에 합병 이후에 전문가집단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18세기 중엽 법률가 수는 같은 세기 초보다 2배 늘었고,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하지 못한 채 영지에서 농업 개량에 몰두했던 지주들도 농한기를 비롯해 수시로 에든버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회자, 법률가, 교수 등 전문가집단이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직접 문필 활동을 하거나 문필가 주위를 에워싼 독서층 또는 청중을 형성했다."(170-2)


"오늘날 중심과 주변은 경제적 맥락에서, 그리고 중심부 시각에서 주로 인식된다. 주변부에서 보면 중심은 언제나 따라잡기의 무대이자 대상이지만 중심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부여되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성취는 이런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했다. 그것은 도덕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후일의 경제학과 사회학이었다. 이들 학문은 유럽사의 근대 국면, 그리고 산업혁명 직전까지 유럽 지식인과 정부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개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에게 잉글랜드의 변화는 곧 미래에 나타날 보편적 변화였다. 그들은 잉글랜드의 정부, 사회, 과학, 여론에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의 원형을 발견했다. 이를 포착하고 관찰함으로써 상업(산업)사회의 본질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가설과 검증이라는 뉴턴의 방식이 사회 관찰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175-6)


제5장 문필공화국: 명사회에서 사변협회까지


"명사회나 사변협회 같은 모임은 일종의 담론공동체였는데, 1750년대 이후 활발하게 결성되었다. 이는 이전에 지연과 학연 또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망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지식인들의 토론문화가 좀 더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활동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시기의 토론문화와 담론공동체는 계몽운동의 산물이자 동시에 계몽운동을 낳은 바탕이기도 했다. 저명한 문필가뿐만 아니라, 직접 문필 활동을 펼치지 않더라도 지식과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목사·교수·의사·변호사 등 에든버러 식자층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러한 정규모임은 엄격한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모임은 자주 공개토론이나 공개강연을 개최했다. 공개토론과 공개강연은 에든버러 시민 누구나 방청할 수 있었다. 계몽운동이 문필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독자층의 상호 관계망을 통해 전개된다고 한다면, 18세기 중엽 에든버러야말로 그 전형적인 공간, 즉 '문필공화국'이었다."(182-3)


"명사회(Select Society)는 계몽운동기 에든버러의 가장 대표적인 담론공동체였다. 이 모임이 결성된 계기는 종교 갈등이었다. 1753년 조지 앤더슨이라는 교구학교 목사가 데이비드 흄과 또 다른 저명한 법조인 헨리 흄을 비난하는 팸플릿을 발간했다. 이 책자에서 그는 이들 〈무신론자들을 신성한 일에서 자신과의 교류와 동료관계뿐 아니라 다른 주제에 관한 긴요하지 않은 모든 대화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전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로버트슨과 블레어 등 중도파 젊은 목사들은 이러한 비난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세속 지식인들과 정기적인 교류를 활성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명사회는 이를 계기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명사회는 10여 년간 에든버러 지식인운동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애덤 스미스나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외지인이 이 무렵에 에든버러에 매료당한 것도 이 도시에 자리 잡은 '학자와 사상가들의 공동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사회는 10여 년이 지난 후 점차 활력을 잃었다."(193-7)


"포커 클럽(Poker Club)은 1757년 명사회 회원 일부가 시민군법 조항을 심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진 데서 유래했다. 이들은 민주적인 시민군이 국가의 존엄에 필수적이라는 인식 아래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퍼거슨에 따르면, 상업은 시민의 덕목과 '사회적 정신'의 쇠퇴를 가져온다. 이는 전쟁술을 전문기술로 만들어 시민의 삶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전문화된 전쟁술은 결국 참여적 덕목을 위협할뿐 아니라, 그 전문화를 사회정신의 중심에까지 확대시킨다. 결국 시민적 덕목의 쇠퇴를 막을 치유책은 고대적 자유의 토대를 되살리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시민군의 전통이 그것이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상업사회에서 정치적 열정의 쇠퇴를 우려하면서도, 시민군제도가 전 시대의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에게 훈련, 복종, 용기 등의 덕목은 당대에 절실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스미스도 포커 클럽의 회원이었지만, 그의 시민군에 대한 견해는 분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과 맥락이 같다."(198-201)


"사변협회(Speculative Society)는 일단의 박식한 문필가와 전문직업인,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들이 다수 참여한 단체였다. 프랑스 계몽운동에서 상당수가 회의주의자였던 것과 달리, 사변협회는 인간·사회·세계에 관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반종교적 성향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는 목회자들의 협회 참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회원들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지식인 문화가 굳건한 도덕적·종교적 토대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윌리엄 로버트슨은 〈기독교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의 행동을 품위 있게 만든다〉고 말했다. 휴 블레어 또한 〈종교가 인류를 문명화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근대성과 기독교의 밀접한 관련을 믿었고 또 그렇게 설파했다. 개신교 전통이 강한 에든버러 사회에서 사변협회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에든버러가 지적 활력을 점차 잃어갔음에도 사변협회는 여전히 토론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206)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전 편찬자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함으로써 '대브리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백과사전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문학, 예술, 사회과학, 생물학, 의학, 화학, 지질학 등 여러 학문분야를 일련의 조직화된 학문체계로 바꿔 후대에 전수하려는 열망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지식체계를 당대의 젊은이와 후대에 전하는 교육적 사명을 중시했다. 강의와 설교와 문필을 통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의 지적 생활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백과사전의 편집자들 또한 처음부터 이 같은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했다." "백과사전은 어느덧 영국문화를 대변하는 상징물, 즉 영국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백과사전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21-5)


제6장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계몽운동기 스코틀랜드 지식인과 문필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배경은 공적 토론의 자유다. 이런 면에서 특히 에든버러의 문필가들은 동시대 어느 나라 지식인 못지않게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문필가들은 대체로 칼뱅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 자라났다. 그들은 인간 자신과 인간 사회의 불완전성을 당연시했다. 계몽지식인들은 인간의 본성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기애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과 동감을 통해 소통하고 연대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이 인간의 내면과 본성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시선은 바로 상업사회에서 살고 활동하는 독립적인 개인을 향해 있었다. 이들은 공동체와 집단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주체로서 활동하는 그 개인의 내면과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임으로써 상업사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229-30)


프랜시스 허치슨은 섀프츠베리, 존 로크, 토머스 홉스 등 17세기 잉글랜드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로크에게서 인간은 '생득관념'이 없으면 오직 경험으로부터 관념을 형성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 허치슨은 홉스의 사회관을 수용하고 있다. …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다. 허치슨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제어와 통제 없이는 자기 헌신과 희생을 할 수 없다. 허치슨은 이러한 기능을 국가만이 아니라 도덕률도 갖는다고 본다. 도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적 형성물이다. 허치슨은 도덕성의 근거를 '도덕감각'에서 찾는다. 이는 말하자마녀, 오감 이외의 다른 감각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직감적으로 선한 행위를 선으로 인식하는 도덕감각을 지녔으며, 이에 힘입어 사회의 질서와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허치슨이 보기에, 도덕감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자기애(self-love)와 다른 사람에 대한 자혜심(benevolence)이었다. 230-2)


문필가들은 '세련'으로 나아가는 진보 혹은 발전에 내포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소망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생활의 상업화를 뒤따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치, 사익 추구, 도덕적 해이, 시민적 덕목의 쇠락 등이 그런 위험에 해당했다. 정치경제학을 수립하면서, 사회이론가들은 새로운 경제에 지배되는 사회에서 도덕적 행동의 문제를 설파했다. 흄과 스미스는 시급한 경제 발전과 필수적인 사회윤리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사회적 삶의 전 부문을 포함하는 이론을 세웠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에게 시급한 것은 〈옛 윤리와 새로운 경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은 오늘날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 분야, 이를테면 인류학·사회학·심리학·경제학·역사학 등의 진정한 창조자였다. 이들 학문이 분화되기 전에 전체를 포괄하는 탐구 분야를 당대 사람들은 '도덕철학'이라 불렀다. 236-7)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도덕철학'을 원래 어의(語義)와 다르게 사용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철학 일반에 해당하며, 그 말 자체가 철학의 인식론을 탐구하는 '자연철학'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서로 분리된 존재로 이해된다. 자연은 인간이라는 인식 주체의 인식대상, 즉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인식이 영국의 지적 전통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인간본성(human nature)'이라는 영어식 표현도 그것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존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결국 도덕철학은 사회현상을 일으키는 소수의 일반원리를 밝혀내고 그 원리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학문이다. 스미스가 도덕철학을 과학이라 부른 것은 이런 의미다. 과학적 탐구로 그 원리를 밝히는 것이 도덕철학의 과제였다. 238-9)


흄은 다른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홉스와 허치슨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 그는 『인성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감(sympathy)'을 사회 성립의 또 다른 토대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바로 동감(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을 넘어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인간의 이성은 수학과 같은 학문과 지식세계에서나 엄밀하게 작용한다. 사회에서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것도 관행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합리성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승인과 부인의 문제이고, 이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직접 연결된 것이다. 자명한 도덕원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보다는 감성, 흄의 표현으로는 정념의 결과다. 242-3)


스미스는 인간의 이타적인 감정 가운데 '자혜'를 특히 중시한 허치슨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 관련된 개인의 다양한 감정을 탐색한다. 연민과 동정 같은 감정 외에도 동류의식(fellow-feeling), 동감, 단정함(politeness), 관용(generosity) 등의 감정은 다른 사람과 적극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반면에 증오나 분개 같은 비사회적 감정도 있다. 여기에서 스미스는 개인이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까지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동류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다른 사람이 직면한 상황을 연상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을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즉 자신과 상대방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 행위자와 관찰자 사이의 동감을 얻기 위한 성찰, 상호노력이라는 경험의 축적과정에서 인간 행위의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 즉 도덕의 판단기준이 성립된다는 것이 스미스의 결론이다. 248-52)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수준에 맞추려고 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에는 제각기 그와 같은 '공정한 관찰자'의 상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공정한 관찰자를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감정과 행위가 그 상상 속 관찰자의 수준에 맞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 마음속의 공정한 관찰자를 가정할 경우, 인간은 대부분 그 공정한 관찰자가 부정하는 행위를 피하고 인정하는 행위를 적극 실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된다. 스미스에 따르면, 관찰자가 부정하는 것을 회피하는 규칙이 정의이고, 인정하는 것을 적극 행하는 규칙이 자혜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바로 이들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며 이것이 바로 의무감, 곧 '도덕감'이다. 스미스에게는 이 의무감(도덕감)이야말로 사회 형성과 존립의 토대가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252-3)


제7장 사회와 역사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강조하면서도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임을 인정했지만 사회성을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사회계약론이 가설과 추측에 의존할 뿐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경험적으로도 그러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퍼거슨이 생각하기에, 홉스와 같은 이론가들은 사실(fact)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일반원리를 수립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설(hypothesis), 추측(conjecture), 상상(imagination), 운문(poetry)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데이비드 흄 또한 계약에서 비롯된 정부는 〈이 세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역사적으로나 또는 경험적으로 정당화된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사회의 기원에 대한 계약론적 설명이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면, 정부의 정당성이 개인의 동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258-60)


"애덤 퍼거슨은 근대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개인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더 넓은 장이 마련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상업사회는 개인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개인의 창발성이 높아지고 인간의 개성 또한 극대화된다. 이와 같이 상업사회는 진보, 개인의 자유, 정치적 안정, 법의 지배 등을 가져왔지만, 아울러 개인들이 무가치하고 비인간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낳아 시민적 덕목이 약화되었다. 근대사회는 오히려 개인이 전통적 덕목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이익만 쫓도록 만든다. 근대사회의 위협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열정이 정치적 열정, 즉 시민적 덕목을 앞지르기 시작할 때 비롯한다." "역설적으로, 정치적 열정의 쇠퇴는 시민사회 안에서 평화의 시기가 오래 지속되는 시기에 주로 볼 수 있다. 상업은 개성을 고양하고 시민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지만, 시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적 전통을 무너뜨린다. 근대 상업은 바로 이런 경향을 가속시킨 것이다."(275-6)


# 퍼거슨의 해결책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협약〉, 곧 법을 통해서 이기심을 제어하고 일탈을 방지하는 것이다.


"퍼거슨은 상업사회의 진보와 경제성장을 이끈 분업의 이중적 특징에 주목한다." "퍼거슨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직업의 분리가 〈기술적 개량〉을 약속하고 실제로 모든 기술적 생산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적으로 〈사회집단들〉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상업사회에서 정치적 열정을 생산적 열정이 대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기계적 기술들은 어떤 탁월한 능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감정과 이성을 완전히 억압한 상태 아래서 최상의 결과를 얻는다. 무지는 미신만이 아니라 제조업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 따라서 제조업은 정신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상상력의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작업장이 각 부분을 인간으로 채워 넣은 어떤 동력기관으로 여겨지는 그런 곳에서 가장 번영한다.〉" "스미스는 맨더빌과 마찬가지로 분업의 사회적 기여에 좀 더 비중을 둔 반면, 퍼거슨은 인간 및 인간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결과들을 깊이 성찰했다."(278-80)


"데이비드 흄은 『잉글랜드의 역사』(1754~1762)를 집필해 당대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책은 영국인의 자유의 발전에 관한 서사로 알려졌다. 여기에서 영국인의 자유는 예절, 교양, 사교, 법과 재산에 대한 존중 등을 의미하며, 이러한 자유의 발전은 영국의 상업, 기술, 과학의 발전과 동일한 궤도를 그리며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단순히 자유의 발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상업과 무역을 진흥시키며 기예와 과학을 장려한 근대적 정부와 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문명화 및 문명 개념의 확산을 중시함과 동시에, 폭력과 국제질서를 독점한 국가의 발전에 주목한다. 흄은 영국 상업사회의 발전을 국가주권의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18세기 영국 문명의 성취, 이를테면 입헌군주정, 시장의 지배, 국제무역의 헤게모니, 국민적 자유의 신장 등을 잉글랜드의 발전과정을 넘어 근대 유럽인이 지향해야 할 '근대성'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286-9)


"윌리엄 로버트슨의 역사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를 5세 시대사』(1769)다." "15세기 유럽 여러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을 봉건제도의 급속한 쇠퇴다. 이는 군주권의 강화 및 상비군의 확대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로버트슨은 이 시기에 〈유럽 체제에 속해 있는 모든 국가들 사이에 적절한 권력 배분〉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근대체제의 변화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종교적 관용 및 가톨릭 쇠퇴와 더불어 급속하게 전개된다. 이것이야말로 유럽에서 국제적 세력균형의 중심축이었다." "브루스 버컨에 따르면, 로버트슨의 역사서술은 데이비드 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경험, 귀족층의 몰락, 상업 발달, 관용과 예절의 확산, 국가 주권의 확대 등을 문명화과정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결합되었는가를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와 함께 국제적 세력균형 또한 중요한 변수의 하나다. 세력균형이야말로 유럽 문명화과정의 추진 궤도라는 것이다."(289-90)


"퍼거슨은 진보가 인류의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였지만, 그 추동력을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특히 사유재산제도의 대두, 발전 및 변화를 중시했다. 즉 사회 형태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구조와 발전에 크게 힘입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퍼거슨의 계급갈등론은 사회 진보의 동력 가운데 하나를 찾는 선에서 멈춰 있다. 퍼거슨과 마르크스 사회이론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퍼거슨은 단지 소유관계가 변화하는 방식과 발전단계를 관련짓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특정 유형의 경제활동을 기준으로 발전단계를 제시하는 스미스의 방식을 비판한다. 그 대신에 퍼거슨은 사유재산제도를 중심으로 이 제도가 없는 시대, 제도가 나타나지만 법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시대, 사적 소유의 제도화를 이룩한 시대로 구분한다. 이들 시대는 각기 미개, 야만, 문명 단계에 상응할 것이다." "퍼거슨에게 문명은 진보를 뜻하고, 그 진보야말로 근대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298-9)


# 사회갈등은 '비의도적'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


제8장 계몽과 근대성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에 관해 간결한 정의를 내린다. 〈계몽이란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미성숙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한 것은 이성 자체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계몽사상은 그 내용이 아니라 사유의 형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를 계몽하려는 의도보다는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계몽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상정할 수 있다. 계몽은 의지의 자유는 물론, 사회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칸트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공적 영역에서 토론의 자유와 인간 이성에의 의존이다."(305-8)


"'근대성'이란 근대라는 시대를 가리킨다기보다 그 시대에 형성된 삶의 양식, 문화형태 전반을 뜻하는 용어다. 근대성은 자율적, 주체적 인간(개인)과 세계에 대한 기술적 지배 욕망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또한 근대성은 기적과 불가사의와 신화의 세계를 제거하고 확실하고 실증적이며 경험적인 사실을 중시한다. 한편으로는 탈신화화 또는 신비주의로부터 해방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성/합리주의의 지배를 의미한다. 근대성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삶과 경험 모두가 역사적 시간의 맥락에서 재구성된다. 이러한 '시간의 역사화'는 궁극적으로 인류사에 대한 진보의 시각을 낳았다. 공간적으로는 자연의 해방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또는 기술 지배의 추세와 관련된다. 궁극적으로 근대성이란 근대적 인간, 즉 이성적 주체이자 욕망하는 주체인 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층적 문화형태를 일컫는 개념이다."(311-2)


"인간의 자기이익과 동감, 이 두 성향은 '이기적 정념'과 '사회적 정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사회성과 사회적 연대 및 참여는 모두 이 사회적 정념─이를테면 관용, 인간다움, 친절, 우정, 존경─등의 작용에서 비롯한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은 이 두 성향의 공존이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개인이 집단과 공동체의 외피를 쓰고 있을 때에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기존의 도덕률, 집단 또는 공동체의 규제,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제도와 관행에 의해 제약받았다. 개인이 집단의 규제에서 해방되기 시작하면서 자기이익의 추구 경향이 두드러졌고, 이는 곧 주체적 개인의 욕망을 끝없이 발산하는 과정과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헤겔은 시민사회의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시민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바라보았다. 욕망의 표출은 기본적으로 자기이익의 추구에 따른 결과다. 이와 대조적으로 퍼거슨은 욕구의 분출과 충족으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풍조에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317, 321)


제9장 계몽운동과 오리엔탈리즘


"백과사전의 '인도' 항목은 인도 자체에 관한 정보를 별로 제공하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도, 인도인의 생활과 관습도, 종교와 문화도 소개하지 않는다. 오직 고대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의 인도 진출과 지배를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인도' 항목의 필자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유럽인의 인도 진출 역사의 중요한 과정이자 완결점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인도 지배의 필연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말하자면, 고대 이래 유럽인들은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뚜렷하고도 일관된 경향을 보여왔다. 무수한 민족과 국가들이 제각기 여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았다. 중세시대에 이슬람 세력의 확대와 함께 그 움직임이 멈춰졌지만, 그것은 중세 후기에 되살아났다. 베네치아, 제노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에 뒤이어 인도 진출의 사명은 영국인의 손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인도' 항목의 필자에 따르면, 영국인은 그 사명을 완수하였고 이는 오랜 역사 과정의 마침표를 뜻하는 것이다."(352-3)


제10장 지적 전통의 마지막 세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은 민족감정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문필가들은 사거하거나 또는 문필 활동을 중지했다. 19세기 브리튼 문화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토머스 칼라일, 월터 스콧, 프랜시스 제프리, 헨리 브루엄 등은 모두 1790년대에 사변협회를 주도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과 한 세대 선배 간의 가교 역할은 듀갈트 스튜어트가 맡았다." "이 밖에도 젊은 시절 에든버러에서 지적 세례를 받고 문필가로 활동한 인물은 무수하게 많다. 이들 모두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780~90년대에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한 이력을 공유한다. 특이한 것은 전 세대의 인물들과 달리 이들은 젊은 시절을 에든버러에서 보낸 후, 기회가 닿으면 잉글랜드, 대부분 런던으로 진출했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제프리와 스콧만이 스코틀랜드를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에든버러의 지적 잠재력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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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국의 초상 -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내면을 읽는 아홉 가지 담론들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4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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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사회 연대기


"19세기 후반은 평론지review와 잡지의 황금 시대였다. 저명한 학자는 물론, 정치가와 성직자, 재능 있는 문필가들이 앞 다투어 평론지에 글을 썼다. 그리고 주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독자가 이들의 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공공 여론을 형성했다." "독자의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지식도 소개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전통적인 문필가들의 작업 외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학문 분야들이 태동하고 있었다. 각 분야에서 지적 탐구를 계속해온 학자들이 전통적인 문필가 집단에 뒤이어 새로운 기고자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성서 연구, 새로운 과학, 과거 역사에 관한 많은 논설들이 실리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의 현실 문제 또한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평론지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지성지知性誌이자 현실 문제를 예리하게 진단하고 분석하는 시사 잡지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17-8)


1부 사회와 개인


1장 민주주의에 관한 성찰


"영국 의회가 자유당과 경쟁 구도로 정착된 19세기 중엽 헌정제도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과 월터 배저트다. 우선 밀은 대의정부야말로 공공업무를 잘 수행하고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선한 정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대의정부란 주민 전부 또는 다수가 정기적으로 선출한 대표를 통해 궁극적인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뜻한다. 밀에게는 대의정부가 바로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그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인이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민주주의false democracy'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선거제에 바탕을 둔 대의제를 최선의 정부 형태로 꼽았다고 하더라도, 밀은 정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서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투표자의 견해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49-51)


"배저트는 영국의 헌정제도를 '위엄 부분'와 '능률 부분'으로 나눈다. 앞의 것은 국민의 존경과 충성심을 유발하는 왕실과 상원을 뜻하며, 뒤의 것은 실제 행정과 통치를 맡는 하원과 내각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능률 부분, 특히 내각이다. 내각제는 행정부가 입법부 의원으로 구성되는 반면, 의회 해산권을 보유해 둘이 결합되는 장점을 지닌다. 이렇게 보면 영국 헌정은 군주제를 가장한 공화정인 셈이다. 유능하고 규율 잡힌 입법부와 잘 짜인 행정부, 즉 서로 협조하는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가 바로 내각제의 산물인 것이다." "배저트는 선거권 문제에 관해서는 밀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대의제와 민주주의를 구분한다. 민주제는 하층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막기 위해 보통선거권에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었다. 밀이 여성을 포함한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면서 지식인의 역할에 가중치를 두기 위해 복수투표제를 제안한 것과 대조적이다."(51-4)


"로버트 월리스는 자신의 논설 〈자유주의의 철학〉(1881)에서 자유주의, 자유당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자유당의 정치는 보통선거권 확대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자유당의 정치는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그런 한계를 고려하면서도 인간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월리스는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신학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신학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다. 예수의 출현은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렇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간섭하고 개입한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도덕을 강조하고 불의보다는 정의, 억압보다는 자유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다."(64-5)


"1880~90년대에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논설을 기고한 지식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선거권 확대를 되돌리려 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맹목적인 선거권 확대가 초래한 정치적 혼란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사실 1886년 이후 보수당은 바로 증가한 유권자와 농촌 선거구 덕택에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질서, 제국 정책, 애국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바로 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한 것이다. 하층민의 상당수가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이끌리거나 선동에 넘어가기 쉽다는 비판은 오히려 당시 보수당의 전략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로 하층계급 유권자들에게는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적절하게 계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릇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보수당 정치의 정당화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70)


#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교육과 사회 발전을 통해 유권자들 간의 능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그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80~90년대 반민주주의 담론의 불을 지핀 것은 현실 정치에서 승리한 보수당의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논설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주의, 인간 능력에 대한 불신이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당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 이념은 인간 능력의 불평등 그리고 그에 따른 엘리트 지배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 당시의 엘리트주의는 한 세기 전 귀족적 이상과 상당한 거리를 보여준다. 엘리트란 출신과 배경에 직접 연결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연결될 뿐이다." "물론 이들 능력 있는 실세의 대다수가 전통적 지배세력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능력'이 엘리트의 외피를 장식하면서, 새로운 대중정치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제도의 성취를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제도를 통해 엘리트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여러 전략과 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73-4)


2장 경제 불황과 여론


"19세기 대부분의 문필가들은 불황과 저물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 불황이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현재이 상황을 단순한 경기변동 과정으로 바라보거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나타난 혼란으로 볼 경우에는 미래를 좀 더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었다. 반면 그 불황이 영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면, 좀처럼 쉽게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왕립위원회(이즐리 위원회)의 다수가 서명한 〈다수보고서〉는 불황을 경기 순환의 측면에서 파악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소수보고서〉는 불황을 가져온 영국 경제의 구조적인 요인에 주목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나타냈다. 1880년대의 경제 논설 또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이즐리 위원회 보고서와는 대조적으로, 1880년대의 논설에서는 낙관론이 소수이며 다수 논설은 불황의 심각성과 지속성을 강조한다."(81-2)


"패터슨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에도 인간은 자연의 힘이나 주위의 동력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자신의 노동 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기술은 더욱 더 급속하게 발전했다." "웰즈는 기계화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나타나는 기업 형태의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는 생산 증대를 가져온다. 반면 모든 생산물 가운데 가장 비싸다. 기계를 구입하고 사용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 때문에 거대 기업 또는 주식회사가 성장한다. 그것은 결합자본이 조직화된 형태다." "이러한 낙관론자들도 기술 혁신에 따른 혼란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모든 변화는 〈낡은 생산 방식의 커다란 혼란〉을 낳았으며, 개별 측면에서는 〈자본의 손실과 직업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근래의 불황은 어디까지나 혁신과 진보에 따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혼란이라는 것이다."(85-6)


"기펀은 당시의 논란이 결국 사람들의 주관적인 견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불황이 심각하지 않고 일시적인데도 사람들이 이를 깊이 느끼는 것은 이 과장된 언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기펀은 여러 통계를 동원해 지난 50년간 이루어진 부의 축적과 생활수준 향상을 입증한 후, 그럼에도 왜 불황에 관한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는가를 추적한다. 사람들은 이들 언어의 영향 아래서 불황을 체감한다. 그는 이런 언어의 대표적인 원천으로 중산계급 지식인의 사회적 양심, 노조 지도자들의 실업 항의, 다른 나라의 산업 발전에 대한 경고, 재정 위기 및 은행 파산에 대한 우려, 물가 하락으로 피해를 입은 계층의 불만 등을 차례로 언급한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불황에 관한 일반적인 언어는 과장되고 잘못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즐리 위원회와 같은 의회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불평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86-7)


# 불황의 원인에 관한 담론

1. 기술 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 및 과잉 생산

2. 해외 시장(특히 독일과 미국)의 경쟁

3. 금본위제의 부정적 영향(금 가치 상승에 따른 물가 하락)


3장 이스트 엔드, 가깝고도 먼 곳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과 부유한 사람들은 도심에서 살았고 빈민은 도시 외곽에 머물렀다. 런던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구 런던 시 서쪽 교외로 이주한 반면, 많은 노동자와 빈민이 구 런던 시 바로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19세기에 이스트 엔드의 인구 증가는 공사판, 부두 하역 작업, 이민, 고한제─sweating system, 열악한 수준의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자들을 고용한 '소규모' 생산방식으로 의류·제화·가구제조업 분야에서 등장했으며, 공장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등과 직접 연결된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9세기 숙련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뜻하는 자조나 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임금, 비정규노동, 실업 등의 문제는 항상 또는 간헐적으로 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이들이 거리의 술집이며 부랑아며 범죄자들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이스트 엔드는 단순한 지리적 실체를 넘어 빈곤을 상징하는 언어로 자리잡았다."(113-6)


"이스트 엔드를 다룬 논설들은 이 지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빈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특히 1880년대는 주기적 불황, 농업 공황, 이민, 치열한 생존경쟁이 점철된 시기였다. 음주, 조혼, 무모한 다산, 만성질환 등으로 시달리는 극빈층은 실제로는 '가망 없는 계급hopeless classe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씌어졌다. 1888년에 이 지역의 실태를 다룬 찰스 부스도 처음 사회 조사를 시작할 때에는 가난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진정한 노동계급'과 극빈층을 구별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논설들은 그 극빈층에서도 개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난, 질병, 저소득 등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인구 과잉과 조혼과 이민이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일 뿐이었다."(130)


"자선조직협회COS는 1833년 신빈민법New Poor Law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단체였다. 그들은 공적 구호와 개별적인 자선을 엄격하게 구별했으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이에 바탕을 둔 합리적 대안을 강조했다. 그들은 1870년대 이후 여기저기 난립한 개별 자선단체들이 오히려 신빈민법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적 자선은 '자선을 받을 만한' 빈민에게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자선을 받을 수 없는' 빈민pauper이 바로 공적 구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인격character'이었다. 인격을 가진 빈민은 자조를 통해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선은 그들의 자조를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바넷이나 힐과 같은 COS의 주요 인물들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적인 자선 행위, 즉 원외구호가 오히려 빈민을 더 나태와 타락으로 빠뜨리고 부도덕을 낳고 있다고 생각했다."(134)


"1880년대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을 쓴 지식인들의 언어에는 진화론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포터, 마셜, 윌리엄 부스 등이 도시 빈민을 가리키는 언어로 즐겨 사용한 '찌꺼기residuum'라는 말은 다윈의 '자연도태' 개념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1882년 앤드류 먼즈가 자신의 책 제목에 처음 사용한 이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이라는 말도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생존에 적합한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는 반면, 적합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도태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메울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을 지닌 빈곤층이 광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기묘한 현실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였다. 도태된 사람들이 생존한 것은 문명이 그들을 방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의 세계와 다른 점이었다."(134-5)


"찰스 부스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자연선택'의 구현체였다. 기업가들의 이기심이야말로 〈생산, 분배, 경영〉의 추진 동력이며, 그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박애주의나 체계적인 사회 조사를 표방한 도덕주의자들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일종의 생물학주의biologism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일 환경이 악화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이에 적응해 타락한 존재로 변모할 것이다. 타락한 환경 아래서는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결국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넷이나 힐은 국가의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135-6)


4장 유대인 문제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유대인은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17세기 중엽 이래 이들이 런던의 시티와 이스트 엔드에 홀동 및 주거 공간을 마련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당시 영국은 대륙의 다른 나라에 비해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런던에 정착했다고 해서 특별히 법적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법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다른 비국교도와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7세기 후반 런던으로 이주한 유대인 집단의 주류는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들은 런던의 상업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구 런던 시, 즉 '시티'야말로 그들이 상업적 자질을 발휘하는데 걸맞은 지역이었다. 물론 그들이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시티의 영국 상인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에 대해 여러 제약을 가했다."(145-6)


"18세기에 런던의 웨스트 엔드로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부유한 유대인들은 이스트 엔드를 떠나 좀 더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이나 스텝니에는 좀 더 가난한 새로운 유대인들이 밀려왔다. 이들은 대부분 세프라딤이 아니라 동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슈케나짐의 이민 물결은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전쟁기에 장기간 중단된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민 1세대보다 영국 태생 유대인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 이러한 인구 구성의 변화는 유대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18세기만 하더라도 부유한 세파르딤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경멸했으며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영국 출생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두 집단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더욱이 아슈케나짐계 유대인 가운데 상업 및 무역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경멸감도 사라졌다."(146)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인 논설들은 당시 유럽에 만연한 유대인 혐오증의 기원을 그들의 '종족적 배타성'에서 찾는다. 스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편협하게도 자민족 위주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 혐오증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했다. 유대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우상에 집착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민족의 기질이나 성격에 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실제로는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1880년대 이전에 영국의 지식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 문제를 다룬 공적 언어를 내놓지도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 또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잠겨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뒤바뀐다. 유대인 문제가 공적 담론의 주제로 등장하면서,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깃들어 있던 편견이 새롭게 구조화되기 시작한 것이다."(166-8)


5장 딸들의 반란?


"19세기 말 영국 식자층의 논설에서 '여성성'의 변화를 뜻하는 언어로 널리 쓰인 것은 '신여성new woman'이다. 이 말은 1894년 미국의 새러 그랜드가 처음 사용했으며, 곧바로 영국 문필가들 사이에서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관계없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에 해당하는 여성은 19세기 후반 중등교육의 확대와 더불어 나타났을 것이다. 신여성이라는 말은 박애주의적인 사회봉사에 거침없이 나서고 자신의 소득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진보적 견해를 나타내는 젊은 여성을 가리켰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신여성은 일반적으로 독립적이고 가정의 구속을 덜 받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신여성이 당시 여성성의 변화를 뜻하는 유일한 말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점진적 여성참정권론자suffragist, 급진적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 등의 말이 새롭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억센 여성'이나 '딸들의 반란'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이다."(171-2)


"19세기 중엽 중간계급의 가정생활은 기독교 복음주의의 도덕률과 산업적 경제 원리 사이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기여했다. 가정은 공사 영역 간의 〈효율적인 도덕적 균형〉을 유지하는 공간이었다. 〈고상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아내에게 부여된 사명이었다." "'억센 여성'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집안의 천사로 형상화된 중간계급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조롱하는 뜻으로 쓰였던 것 같다." "《19세기》에 '억센 여성'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린턴이 보기에, 이들은 의도적으로 여성적인 것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이다. 린턴은 특히 여성 참정권론자들을 조롱한다. 이들이 신기하게도 일반인과 다른 성징性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거뭇거뭇 털이 난 턱, 낮은 목소리, 평평한 가슴과 같은 볼품없는 모습〉이 그것이다. 린턴은 이러한 성징에서 곧바로 그들이 여성 고유의 모성maternity을 갖추지 못했다고 단언한다."(174-7)


"케어드를 비롯해 '이른바 억센 여성'의 지지자들은 기본적으로 전통 결혼 제도에 냉소적이다. 이 시기 《웨스트민스터 리뷰》에는 결혼 제도를 비판하는 여성 문필가들의 에세이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특히 신성한 배우혼과 가정생활이라는 이미지가 허구일 뿐이고, 역사 속에서는 본질적으로 '여성성의 구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이 제기된다. 케어드에 따르면, 여성을 묶어놓은 가정이라는 틀과 배우혼의 관습은 실제로 매춘과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은 방패의 앞뒷면과 같다. 여류 박물학자인 앨리스 보딩턴도 비슷한 견해를 내세운다. 가족 제도의 지속은 기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보호 감정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는 성적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여성이 남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일종의 허위의식에 바탕을 둔다. 이와 함께 여성 스스로 정숙함이라는 덕목에 지고지순의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결혼의 강제 존속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180)


"그렇다면 여성의 모성을 강조해 온 이른바 가정의 신화는 계속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상쇄하는 힘이 작용한다. 이 시기의 사회적 요인들이 가정의 신성성에 충격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충격을 완화하는 또 다른 북원 기제가 작동할 수 있었다. 바로 우생학이다. 19세기 말 제국 팽창기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출산율 하락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더욱이 보어전쟁 당시 징병 검사에서 드러난 하층 계급 젊은이들의 허약한 신체등급과 체력이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의 우생학 담론들은 건전한 모성과 가정 그리고 여성의 건강한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는 등 오히려 19세기 말 가정의 신성화에 기여했다. 그러니까 19세기 말 새로운 여성성의 도전에 직면한 전통 가정은 한편으로 약화와 해체의 위기에 접어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가정의 신성화를 복원하는 이중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200-1)


2부 지식과 시선


6장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


"영국의 초등교육은 잉글랜드 국교회와 비국교회Non-conformists 등의 종교 단체가 설립한 주간학교day school에 의해 이루어졌다. 1830년대 공장법은 13세 미만의 공장 아동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정규교육을 시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주간학교의 수요가 급증했다. 종교 단체가 설립한 주간학교들은 늘어나는 교육 수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단체 자체 재원과 기부금만으로 새로운 교육 시설을 확충하고 교사를 채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정부에서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주간학교에 교부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833년 휘그 정부는 국교회나 비국교회의 구분 없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에 잉글랜드 및 웨일스 지역 주간학교 지원액은 80만 파운드를 넘어섰다. 1858년 초등교육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주안점을 둔 것은 바로 이 증가하는 교부금의 절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210-1)


"위원회는 많은 학교에서 읽기reading, 쓰기writing, 산수arithmetic, 즉 '3R 교육'이 부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매년 시험관이 개별 학생을 대상으로 만족할 만한 학업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부금을 책정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3R에 효율적인 교육을 촉구하면서 그와 함께 납세자의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이 제안에 따라 정부는 1864년부터 교부금 지원을 받는 모든 주간학교에 대해 평가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시험은 정부 직속의 시험관들이 학년 말에 각 지역의 학교들을 방문하여 실시했다. 이들은 구술 또는 필기시험으로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평가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했다. 정부는 평가 결과에 따라 교부금 지원액을 삭감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른바 '시험 결과에 따른 지원'이 전면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시험 제도는 교부금 지원액을 적절하게 삭감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212-3)


"그렇다면 옥스-브리지 장학생시험 및 퍼블릭 스쿨 입학시험은 어떻게 도입되었는가." "중등교육에 대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한 톤튼 위원회 보고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우선 사회적 재생산의 중요한 요소로서 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지위와 비슷한 직업을 갖기를 열망한다. 다음으로, 최고 수준의 고전 교육이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퍼블릭 스쿨의 랭킹과 평판이 엘리트로 상승하는 빠른 경로를 제공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톤튼 위원회는 클러랜든 스쿨을 제외한 다른 퍼블릭 스쿨을 정확하게 평가하여 등급화함으로써, 중등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당시 일류로 분류된 학교들은 클러랜든 스쿨에 뒤이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출신과 추천에 의한 입학이 줄어들고 그 대신에 입학시험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216-7)


"《19세기》에 실린 항의서한과 뒤이은 몇 편의 논설들은 대부분 시험 제도의 폐해를 지적한다. 문제는 시험만능주의가 교육 자체를 끊임없이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지식의 파편화, 암기 위주의 학습, 개인의 창의성 억압, 대학에서의 고시 열풍, 학원 과외 성행 등이다. 특히 대학교육의 경우 기말시험과 고시 열풍이 똑똑한 범인만을 양산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엘리트는 오히려 시험 제도 아래서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교육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과서보다는 시험지가 실제 공부하는 과목이 된다. 학생들의 목표는 교사 및 교장의 내면이 아니라 시험관의 내면을, 그가 공부하는 과목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숙련을 알아치리는 데 있다. 이에 따라 또 다른 전문 집단, 학원 강사crammer가 증가한다. 그들의 일은 가르치거나 학습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에 합격하도록 하는 것이다.〉"(227-9)


"이러한 시험 제도는 전통적 관행 주위에 수재 임용이라는 새로운 보호막을 둘러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시기라면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확산되었을 것이다. 경쟁은 시장의 기본원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험 제도의 도입은 시장의 확산과 심화라고 하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일 수 있다. 특히 이를 통해 능력 있는 중간계급 출신 엘리트가 자신의 삶을 개척할 기회가 더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통적 지주 세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학벌을 토대로 경쟁하는 제도였다. 연줄(출신)-학벌-경쟁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은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유리한 것이었다. 경쟁시험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고전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험 제도보다도 시험 과목이야말로 재생산 구조의 본질을 반영한다. 적어도 19세기 후반 영국의 교육에서 연줄과 경쟁은 대립항이 아니라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다."(221)


7장 과학과 과학 지식인


"19세기에 독자들이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학 자체보다도 그 지식 체계가 기존의 종교, 기존의 신앙과 배치되며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탓이었다. 특히 다위니즘이 창조론으로 자연을 해석한 전통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학은 종교를 대신해 도덕과 사회질서를 지탱할 책무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열역학 이론 또한 진화론 못지않게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에 충격을 주었다. 힘과 에너지를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에너지는 전화할 뿐 소멸하지 않는다고 본 에너지 보존의 개념은 성서의 메시지, 이를테면 성서에 나타나는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과 같은 역사의 종말이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높은 온도를 가진 물질에서 낮은 온도의 물질로만 열이 전도될 수 있다는 제2법칙의 개념, 달리 말하면 열에너지의 비가역성 또한 종말론적 사유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243-6)


"한편, 19세기 일반 독자층의 과학 지식이 전문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입되었는가 아니면 독자 스스로 전유專有했는가라는 근래의 논의 또한 종교 문제와 관련지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의 견해는 과학 엘리트가 과학 지식의 발전을 주도하고, 문필가는 단지 이를 수동적으로 단순화해 독자에게 전달할 뿐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반면 뒤의 견해는 엘리트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 과정 이외에 대중 스스로 그 유포된 지식을 번역하여 주체적으로 변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중시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 지식은 유포 과정에서 〈암묵적인 저항〉을 포함함과 동시에 〈문화접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과학 지식과 종교의 화해를 적극 추구한 문필가들은 전유의 추세를 보여준다. 반면 과학 전문가이자 동시에 문필가로 활동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둘 사이의 화해보다는 과학 지식의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고, 자연스럽게 과학 지식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248-9)


8장 신앙의 위기


"영국사에서 18세기를 강조하는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세속주의 경향이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사회 저변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우선 종교적 관용은 기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나타났다.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성서주의scripturalism에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성경의 모든 말이 성령의 계시로 씌어졌다는 믿음〉은 〈절대자 아래서 인간 운명에 대한 좀 더 낙관적인 모델을 수반하는 새로운 합리적 신앙〉으로 바뀌었다." "종교가 이성에 종속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분석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는 이전 시대와 얼마나 달랐는가.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성과 신앙은 하나이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종교와 신앙은 이성을 통해서 분석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객관화 또는 객체화가 바로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는 주장이다."(276-7)


"정통 신앙의 옹호자들은 신학적 전거를 통해 기독교 비판에 맞섰지만, 근대 사회의 변화에 맞게 종교와 신앙 형태도 변해야 한다는 자성적인 논설들도 있었다." "라언 램지는 고대에서 근대까지 기독교를 비롯한 고등 종교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근래 신학 연구가 종교의 전통적인 토대를 오히려 무너뜨리는 현실을 인정한다. 이는 어쩌면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신학이 〈초자연을 이미지화하고 신을 해부하며 이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반면, 종교는 초자연적 존재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바라보며, 〈이상적인 것이 확대되고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램지는 절대적 의미의 종교성 대신에 종교의 변화를 당연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의 도덕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다만, 신개념 자체가 인격신이자 유일신으로서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근원적 주재자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초월적 존재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284-5)


"진화론의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헉슬리는 과학 지식을 좀 더 낯익은 사회적 언어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일례로, 그가 보기에 생명 에너지는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연에서 축장된 에너지 양에 지나지 않는다." "스펜서는 기독교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현재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 능력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종교성은 높아질 수 있다. 지적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비가시적 존재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그것을 더 정교하게 상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전제 아래 원시 사회에서 초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개념화되었는가를 고찰한다. 요컨대 1880년대에 이르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기존 종교와 신 관념을 재해석하는 경향이 저명한 문필가들의 논설에서 자주 나타났다. 이들의 문필 활동은 잡지의 전성시대에 독서층의 종교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285-8)


"매닝 추기경은 종교의 세속화가 장래의 종교와 신앙에 미칠 나쁜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초등교육의 세속화를 앞서 이룩한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미국의 경우 자력으로 자녀 교육을 책임질 수 있는 부유한 학부모도 교육세를 납부하는 것은 불공평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교육할 권리를 박탈당하며, 부모 자신의 도덕적·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매닝은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 대해서도 불길한 미래를 감출 수 없었다. 1875년 쥘 페리가 제출한 교육법 수정법안 7조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교회나 종교 단체의 교육 권리를 박탈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프랑스에서도 초등교육 세속화의 길이 열렸다." "궁극적으로 그가 우려한 것은 공교육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자원적 제도 교육을 위축시킴으로써 젊은 세대에 대한 종교 교육 일반이 타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292-3)


9장 동아시아를 보는 눈


"1880년대 당시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들은 조선의 산하가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나 도시와 농촌의 풍경에 대해서는 불쾌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서술에는 아름다운 본래의 자연과 불결한 농촌이 겹쳐 나타난다. 마을은 불결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지만 〈처마가 깊이 팬 갈색 지붕이 과수원 속이나 완만한 경사면 또는 반짝이는 냇물 둑〉에 어우러져 있는 풍경에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도시는 너무 불쾌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검게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는〉 청계천과 덕지덕지 붙은 〈가옥 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숍은 북경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서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한편, 궁핍이 서민의 일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식재료는 너무 빈약했다. 쌀이 주식이기는 하지만, 양반층에게나 해당될 뿐이고 서민은 수수나 보리 또는 콩을 주식으로 사용했다."(321)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증폭된 것은 역시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 일본에 관한 논설이나 저술을 남긴 지식인들은 무엇보다도 메이지유신 이후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본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유럽인만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역사 인식은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었다. 1868년 일본의 혁명은 지도층의 주도 아래 봉건 사회 일본을 근대 사회로 개혁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결과였다. 프랜시스 콘더는 그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일본에서] 근래 발생한 변화, 그 진보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순간 일본은 지구상의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더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봉건영주제 폐지가 일본 농민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그 조치는 농민의 생산 의욕을 고취했으며 그에 따른 국가의 세수 증대는 거의 기하급수적이었다."(327-9)


"(유럽중심주의를 내면화한) 19세기 말 영국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바로 문명을 이루지 못한 타자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조선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비극은 문명을 이루지 못한 그들의 무능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영국 문필가들은 때때로 조선 민중의 순박성과 친절함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습속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문명인이 잃어버린 원시성에 대한 동경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유순함과 인내심 같은 것은 그들의 유럽중심적 시각을 강화하는 촉매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은 부분적으로 예외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일본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하고 사회 진보를 이룩한 점에 관한 한, 영국 지식인 스스로도 예외성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본인의 문화와 습속을 다룰 때 타자의 차이를 끊임없이 확인하곤 했다."(337-8)


에필로그_한 세기의 끝에서


"사실 오랫동안 영국의 근대 사회 형성 과정은 근대화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근래의 해석들은 근대 영국 사회의 발전을 주도한 여러 계기들의 혁명적 성격을 부정함과 동시에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튜더혁명은 허구이고 영국혁명도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벌인 단순한 내란이 지나지 않았다. 농업혁명에서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국만의 특유한 개량도 아니었다. 더욱이 농업에서 상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발전 자체가 새로운 사회세력보다는 시장을 통한 자본 축적의 방식을 일찍 깨달은 전통적 지배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산업혁명도 기계와 공장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경제 전반에 걸쳐서 전통적 부문과 근대적 부문이 공존하는 불균등 발전의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다. 노동계급의 형성 또한 점진적이었고 노동운동 및 그 운동의 이념에서 핵심을 이룬 것은 전前세기의 급진적 정치이념의 전통이었다."(344)


"영국 근대사에서 이 같은 모호성을 낳은 원인은 너무 일찍 시작된 근대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근대화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서 전개되지 않았다. 전통의 지배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에서 자본주의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경제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경우 전통은 오히려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으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전통과 혁신, 지속과 변화의 야릇한 공존은 영국 근대사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야말로 영국 근대사의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시기가 아닐까 싶다. 농업 불황기 전통적 지배세력의 급속한 몰락은 그 붕괴 과정의 물살 표면에 떠오른 포말이었을 것이다. 전통의 급속한 변화 또는 조락은 19세기말 영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궁극적으로 전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온 영제국의 동요를 가져왔던 것이다."(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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