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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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이슬람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즉 기원후 7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역사를 말이다. 이때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에 기반한 이슬람 대제국들이 세계정세를 좌우했다." "모든 아랍인은 이 때를 자신들이 세계의 주역이었던 시절로 회고한다. 아랍인이 이슬람 신앙을 가장 충실히 지켰을 때, 가장 위대했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특히 이러한 주장에 공감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대부분의 아랍 시민들은 식민지적 유산에 기반한 작은 민족주의를 근본적으로 위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랍의 웅대함을 열망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강국들 사이에서 아랍인들이 적법한 자리를 되찾는 데에 필요한 통합 목표와 임계질량은 오직 광범위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식민지 경험은 아랍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국민국가들의 군락으로 만들어놓았고, 그 결말에 아랍인들은 매우 실망했다."(15-9)


"아랍 세계가 지난 5세기 동안 겪은 일들의 대부분은 지구촌 사람들이 경험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주의, 제국주의, 혁명, 산업화, 도농 간의 이동, 여권 투쟁 등 근대 인류사의 위대한 모든 주제들이 아랍 역사에서도 전개되었다. 또한 아랍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도 많이 존재하는데, 도시의 형태, 음악, 시, 선택받은 무슬림으로서의 특별한 지위(『쿠란』은 알라가 그의 마지막 계시를 인류에게 아랍어로 주었음을 최소 10번은 강조한다), 모로코에서부터 아라비아까지 뻗어 있는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언어와 역사에 기반한 공통의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아랍인들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서 더욱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한 민족인 동시에 여러 민족이기도 하다. 즉 정부 형태나 경제 활동 유형, 방언, 서법(書法), 풍경, 건축, 요리법 등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아랍 세계의 이 모든 사람들은 개별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의 아랍 역사에 의해서 자신들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23-4)


1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1516년 8월 24일 다비크 평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시작된─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슬람 최초의 왕조인 우마이야는 기원후 661년에서 750년 사이에 다마스쿠스에서 빠르게 팽창하던 제국을 통치했다. 아바스 칼리프 제국(750-1258)은 당대 최고의 이슬람 제국을 바그다드에서 통치했다. 969년에 세워진 카이로는 1250년에 맘루크 왕조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네 왕조들이 수도였다.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34)


"술탄 술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성공한 통치자 중의 한 명이었다. 46년간의 치세(1520-1566) 동안 술레이만은 아버지(셀림 1세)가 시작한 아랍 정복을 마무리했다. 그는 1533-1538년에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빼앗았는데, 수년간 시아파인 사파비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그곳의 수니파 주민들은 오스만군을 해방자로 여기며 환영했다. 이라크 정복은 전략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술레이만 1세는 아랍의 고도(古都)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시아파 교리가 수니파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술레이만 1세의 군대가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을 점령하기 위하여 1530년대와 1540년대에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지중해 서쪽에서는 북부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인 리비아와 튀니지, 알제리를 1525년에서 1574년 사이에 정복해서 조공을 바치는 가신국으로 만들었다."(44-5)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며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이러한 이질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처럼 당대의 다종족적이고 다종파적인 제국들의 공통점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오스만은 이와 같은 다양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게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60)


2 오스만 지배에 맞선 아랍의 도전


"국정운영에 관한 오스만의 개념에 따르면 훌륭한 통치는 〈형평성의 순환(circle of equity)〉으로 표현되는, 상호 연관된 네 가지 요소가 섬세하게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우선, 국가는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대군(大軍)이 필요하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국가의 유일한 고정적 재원은 세금이다.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국가는 신민의 번영을 촉진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민의 번영을 위해서 국가는 반드시 정의로운 법을 보장해야 한다. 이렇듯 한 바퀴를 돌면 다시 국가의 책무라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제국의 표준화된 관행에 따라서 18세기의 다마스쿠스도 이스탄불의 술탄이 위임하여 파견한 오스만 튀르크인이 아닌 지역명문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즘(Azm) 가문은 17세기에 중부 시리아의 하마 인근에서 모은 광대한 농지를 통해서 부를 쌓았다. 아즘 가가 자신들의 왕국을 건립하기 시작한 결과 〈형평성의 순환〉은 깨졌고, 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했다."(62-3)


"오스만 치세 초기에는 데브쉬르메, 즉 〈소년 징집〉을 통해서 모집된 노예 엘리트들이 독점했던 고위직에서 자유민 무슬림이었던 아랍인들은 배제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많은 지역 명사들이 지방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고 〈파샤(pasha: 재상이나 군사령관, 총독 같은 고위 관료)〉라는 직함을 받게 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아즘 가문의 예는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과 마운트 레바논을 지나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던 광범위한 현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지역 통치자의 등장으로 많은 세금이 지역 군인들이나 총독의 건축 사업에 소요되었기 때문에, 아랍 지역에 대한 이스탄불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아랍 지역 곳곳으로 확산되고 누적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전은 점점 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지역 통치자들이 급증하면서 18세기 후반에 아랍 지방 곳곳에서 이스탄불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67)


"그러나 아랍 지역은 이스탄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소소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군대나 자원을 할애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스탄불은 다마스쿠스나 카이로의 통치자들이 일으킨 문제보다는 빈이나 모스크바의 도전을 더 우려했다.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방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문제보다는 유럽 이웃 국가들의 위협에 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는 오스만의 정복 이전 상태로 유럽을 되돌려 놓고 있었다. 1683년까지 오스만이 빈의 관문에서 압박을 가했었다. 하지만 1699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을 격퇴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오스만은 처음으로 영토 상실을 경험했다─을 통해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폴란드의 일부를 보상받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흑해 지역과 코카서스에서 오스만을 압박했다.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의 지역 명사들의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제기한 엄청난 위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68)


"아랍 세계에서 오스만 통치에 대한 진정한 다음 도전은 제국의 경계 너머, 중앙 아라비아 한가운데에서 제기되었다. 이념적인 순수성으로 인해서 더욱 더 위협적이었던 이 운동은 이라크에서 시리아 사막을 지나 히자즈의 메카 및 메디나 성도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오스만 통치권을 위협했다. 자히르 알 우마르나 알리 베이와 달리 이 운동의 지도자는 지금도 중동과 서구에서 유명 인사로서 영예를 누리고 있다. 바로 와하비 개혁운동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 와하브가 그 주인공이다." "와하비즘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신의 독특한 성질, 즉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신의 단일성〉이다. 하찮은 존재와 신을 결합시키려는 그 어떤 행위도 다신교(아랍어로는 〈shirk)〉라고 비난했는데, 왜냐하면 신이 협력자나 대리인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의 신 이상을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스만 이슬람의 많은 요소들을 다신교로 규정한 와하비는 오스만 당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83-5)


"오스만은 와하비의 도전을 분쇄하는 데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개혁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변경인 아랍 지방 너머 중앙 아라비아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아나톨리아에서부터 나지드 국경까지 수개월간을 행군해야만 했다. 바그다드의 총독이 이미 경험했듯이, 와하비들과 그들의 영토에서 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적지에서 대군에게 음식과 물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만으로도 오스만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결국 오스만 정부는 와하비의 침략을 저지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와하비를 격퇴하고 히자즈를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와하비 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의 능력과 야심은 곧 오스만 국가를 배신했다. 실제로 1805년부터 이집트 총독을 지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아랍 지방에 대한 이스탄불의 통치권에 도전한 지역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87-90)


3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제국


"1805년 6월 18일, 이집트 총독에 오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이집트의 국부(國富)를 독점하여 강력한 군대와 관료 국가 건설에 그 세입을 사용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며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 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 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치세 말기에는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무함마드 알리 가문의 세습 통치권이 성공적으로 안착되었다. 그의 왕조는 1952년에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질 때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다."(100)


"무함마드 알리의 큰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1817년 초 아라비아에서 와하비와 무자비한 전쟁을 벌였다. 와하비들을 중앙아라비아의 나지드 지역으로 몰아내기에 앞서서 우선 홍해 지방의 히자즈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비록 나지드가 오스만 영토 밖에 있었지만, 이브라힘 파샤는 와하비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적들을 와하비의 수도인 디리야로 몰아냈다." "1818년 9월, 수세에 몰린 와하비는 절멸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지금까지 중앙아라비아에서 어떤 오스만 총독이나 사령관도 해내지 못했던 전쟁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해냈다."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축출되고 와하비 운동도 격퇴됨에 따라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아랍 세계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입지를 위협하던 가장 심각한 도전들을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의 승리를 이끈 이집트 총독 본인이야말로 마흐무드 2세에게 더 큰 위협이 될 터였다."(103-4)


"처음으로 와하비와의 전쟁에 나서기로 동의했던 1811년 이래로 무함마드 알리는 시리아 통치를 열망해왔다. 실제로 그는 1839년 6월 24일 벌어진 네지브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물리치고 시리아 점령을 거의 실현했다. 그러나 동부 지중해가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유럽 연합국은 그의 야망을 무력으로 저지했다." "영국이 보기에, 레반트에서의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유럽 열강 간의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1840년 런던 의정서에 비밀리에 첨부된 부록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정부는 〈다른 모든 나라의 국민이 공평하게 획득할 수 없다면, 자국민만을 위한 어떤 영토 확장이나 독점적인 영향력 확보 또는 상업적인 이권 추구를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서약을 했다. 자기부정적인 이 의정서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영토에 대한 유럽의 구상으로부터 약 40년 동안 제국을 더 지켜낼 수 있었다."(120)


"오스만 정부로부터 지역 자치를 얻어내려는 시도 속에서 아랍 지역의 민중들은 너무도 큰 대가를 치렀고, 야심찬 지역 통치자들이 일으킨 전쟁과 인플레이션, 정치 불안, 수많은 부당한 처사로 큰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평화와 안정을 원했다. 오스만 역시 체제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도전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외세의 위협과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떤 오스만도 아랍 지역을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다." "유럽 열강의 개입이 없었다면 무함마드 알리는 제2차 이집트 위기 때 오스만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오스만 정부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행정기관들을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체제를 완전히 분해하여 수리하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오스만 개혁가들은 고유의 문화적 고결함과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유럽의 사상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 분투해야만 했다."(121-2)


4 위험한 개혁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1839년 11월 3일, 이스탄불에서 오스만의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가 오스만과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압둘메지드 1세를 대신해 개혁 칙령을 낭독했다. 그날부터 오스만 제국은 행정 개혁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1839년부터 1876년까지 선출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제로 국가 체제를 변화시켰다. 이 시기는 탄지마트(Tanzimat, 〈재정비〉라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다." "이제 술탄은 국가 수장으로서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1876년의 헌법 제정으로 마무리되었고, 여전히 술탄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의회가 설립되면서 의회의 정치적 참여가 확대되었다. 37년의 시간 동안 오스만의 절대주의 체제는 서서히 입헌군주제로 대체되어 갔다."(128-30)


"19세기 내내 유럽 열강은 오스만 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 소수 집단의 권익 문제를 구실로 삼았다. 러시아는 오스만 기독교 공동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방정교회로 자신의 보호범위를 넓혔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마운트 레바논의 마론파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19세기에는 오스만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의 공식적인 후원자임을 자처했다. 영국은 이 일대의 어떤 교회와도 역사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드루즈파, 그리고 아랍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주위로 모여드는 작은 규모의 개종자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오스만 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소수 집단의 권익 문제는, 때로는 (크림 전쟁 같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열강이 오스만에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131)


"크림 전쟁의 여파 속에서 오스만 정부는 제국의 비무슬림 소수 공동체들의 안전을 빌미로 유럽이 또다시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자국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위험까지도 무릅썼다. 1856년 개혁 칙령의 조항 대부분은 오스만의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의 권리 및 의무에 관한 것이었다. 칙령은 처음으로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오스만 신민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했다." "1856년의 칙령이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그 어떤 개혁도 무슬림이 문자 그대로 영원한 신의 말씀으로 숭상하는 『쿠란』을 직접적으로 위배한 경우는 없었다. 『쿠란』에 반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거역을 의미했기 때문에 칙령이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낭독되었을 때, 신실한 무슬림들이 분노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을 위험지대로 밀어넣었다. 주민 대다수의 종교와 가치에 위배되는 개혁을 정부가 단행함으로써 개혁의 진행 과정은 정부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과 신민들 간의 폭력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132-3)


"오스만은 탄지마트를 대중이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과 혜택이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금을 더 잘 거두고 서구식 병역에 필요한 군인을 더 효율적으로 징집하기 위한 관료제의 확대로부터 대다수의 주민들은 얻을 것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정치적 사고 및 관행에 더욱 잘 부합하기 위해서 단행한 모든 사법적 변화들도 평범한 오스만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변화를 신민들이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 경제와 사회 복지 향상을 위한 정부의 투자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가스등이나 증기 연락선, 전기 전차와 같이 대중에게 술탄 정부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를 심어준 대규모 사업들은 개혁 정부를 향한 지지도를 높여주었다." "19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건설 및 토목 사업에 광범위한 정부 투자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세계가 세계 경제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점점 더 다양한 산업 제품과 상품들이 아랍 시장으로 유입되었다."(141)


5 식민주의의 첫 번째 물결 : 북아프리카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아랍 지역은 오스만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18-19세기 동안 이스탄불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졌다. 반면 오스만 중심부에 가까웠던 중동의 아랍 지역들─대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반도─은 19세기 개혁기(1839-1876) 동안 이스탄불의 지배 아래 더욱더 통합되었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가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다면, 튀니지나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가신국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자율성을 강화시킨 국면들─독립적인 정부를 지향하는 특정 지배 가문의 등장─이야말로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유럽의 점령에 취약해진 주요 요인이었다. 더욱이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남유럽─에스파냐와 프랑스, 특히 이탈리아─과 거리가 가까웠다.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먼 변경이었지만 유럽에게는 가까운 외국이었던 것이다."(155-8)


# 1830년 알제리(부족들의 저항 운동을 완전히 종식시킨 것은 1847년, 프랑스), 1881년 튀니지(프랑스), 1882년 이집트(영국), 1911년 리비아(이탈리아), 1912년 모로코(프랑스-에스파냐 보호령) 식민지화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이집트 국경 저 너머에서도 대격변을 초래했다. 나폴레옹 시절부터 프랑스의 중요한 피보호국이었던 이집트에 경쟁 국가인 영국이 영구적인 제국주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자 프랑스의 당혹감이 적대감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집트는 프랑스의 군 자문가들에게 의존해왔고, 가장 큰 규모의 교육 파견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프랑스의 산업 기술을 수입해왔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회사도 프랑스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이집트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랑스는 기어이 〈배반자 앨비언〉(Albion, 영국 혹은 잉글랜드)에게 원한을 갚고자 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전략 지역을 손에 넣음으로써 앙갚음을 했는데, 이는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영국의 해외 기업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곧 이어서 포르투갈과 독일, 이탈리아가 가담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제국을 상징하는 색깔로 아프리카 지도를 칠하게 되는 〈아프리카 쟁탈전〉이 벌어졌다."(188)


"정치적 단위로서 〈민족〉─자치를 열망하는 특정 영토에 기반한 공동체─이라는 개념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동안 중동에 뿌리를 내리게 된 유럽 계몽주의 사상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초만 해도 대다수의 아랍인은, 대개 유럽의 지지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던 발칸의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된 민족주의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군인들은 술탄의 부름을 받고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발칸의 민족주의 운동과 싸웠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오스만 세게와 단절되자, 민족주의는 외세의 지배에 맞서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부상했다. 실제로 제국주의는 북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의 구성요소를 제공했다. 해방될 민족 영토의 경계를 명시한 국경선과 공동의 해방 투쟁으로 주민을 결집시킬 공동의 적이 바로 그것이다."(197-8)


"알 사이드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1839-1897)와 셰이크 무함마드 압두(1849-1905)는 20세기에도 이슬람과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칠 이슬람 개혁 의제를 만들어낸 공동 작업자이다." "알 아프가니는 이슬람이 근대 세계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무슬림이 오늘날의 문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갱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재의 무슬림들이 종교 원리에 따라 산다면, 그들의 나라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고 유럽이 제기한 외부적인 위협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압두는 역설적이게도 진보적인 이슬람을 주창하면서도 초기의 이슬람 공동체─아랍어로는 살라프(salaf, 즉 선조)로 알려진,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를 역할 모델로 삼았다. 그 결과, 압두는 살라피즘(Salafism)─오늘날 이 용어는 오사마 빈 라덴과 가장 급진적인 이슬람 반서구 행동파를 연상시킨다─이라고 불리게 될 새로운 계열의 개혁 사상의 창시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199-201)


6 분할통치 :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


"청년 튀르크인들은 1876년의 헌법 복원과 의회의 재소집을 술탄에게 요구하며 혁명을 일으킨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청년 튀르크인들이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소속감을 강화하고자 단행했던 정책들─제국의 공식 언어로 터키어를 지정하는 식의─은 오히려 신생 민족주의 운동을 초래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거의가 극복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오스만 정부의 감시는 어디에나 존재했고, 비합법적인 정치 활동은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했다. 아랍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들도 부족했다. 무함마드 알리처럼, 아랍 지방에서 실력자가 봉기하여 오스만군을 패퇴시키던 시대는 지나갔다. 19세기의 오스만 개혁 성과 중의 하나는 중앙정부를 강화시켜 아랍 지역을 이스탄불의 지배에 더욱더 종속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아랍 세계에 대한 오스만의 장악력을 뒤흔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격변이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 격변이었다."(208-9)


"1918년 가을 이후, 오스만의 전선은 와해되었다. 영국군이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아랍 반란을 일으킨 협력자들의 도움으로─에 대한 정복을 완수했다. 오스만군은 아나톨리아로 퇴각했고 다시는 아랍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18년 10월에 마지막 튀르크군이, 〈냉혹한〉 셀림이 402년 전에 아랍의 영토 정복을 시작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알레포의 북쪽 국경을 넘었다. 이렇게 지난 400년 동안 계속되었던 오스만의 아랍 통치가 돌연히 끝나버렸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영국의 이집트 지배가 가져온 고난을 신문에서 읽은 다른 지역의 아랍인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외국의 지배를 피하고자 결의를 다졌다. 1918년 10월부터 1920년 7월까지 짧지만 들뜬 이 시간 동안 아랍의 독립은 곧 달성될 듯이 보였다. 하지만 영토를 둘러싼 승전국들의 야욕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랍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211-2)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진행된 이집트와 영국과의 협상 사이사이에 시민소요가 발생하곤 했다. 결국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이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뿐인 독립이 전부였다. 이집트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 영국은 1922년 2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보호령 종식을 선언하고 〈대영제국의 핵심적인 이권과 관련된〉 4개 주요 영역─제국의 통신 안보, 이집트 방어, 외국인의 이권 및 소수 집단의 권리 보호 그리고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영국이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이집트를 독립 주권 국가로 인정했다. 영국이 군사 기지를 보유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며 보호령 시절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이집트 국내 문제에 번번이 간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들을 전제로 한, 이 독립의 한계를 양측 모두 잘 인지하고 있었다. 향후 32년 동안 주권을 찾으려는 이집트와 제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 했던 영국은 식민지적 관계를 재규정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타협에 나서야만 했다."(238)


"1918년, 메소포타미아에 정치질서를 도입하는 작업은 2003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을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1920년경이면 이라크인들도 영국이 이라크를 식민통치에 종속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9년의 이집트 혁명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다마스쿠스의 파이살 정부를 버리고 프랑스의 식민지 점령을 위한 길을 열어주려고 시리아 및 레바논에서 군을 철수하자 점점 더 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 지역의 독립을 부정하고 자기들끼리 이 영토들을 나누어 가지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이라크에서 〈1920년 혁명〉으로 언급되는 1920년 봉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수세대 동안 이라크 학생들은 민족의 영웅들이 이라크의 렉싱턴과 콩코드라고 할 수 있는 팔루자와 바쿠바, 나자프에서 외국군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웠는지를 배우며 성장했다."(239-44)


7 중동의 대영제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은 홍해와 페르시아 만 양안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 지배 세력의 부상보다 아라비아에서 여러 국가들이 상호 견제를 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점점 강력해지고 있던 사우디 정권에 대한 완충제로 하심 가를 이용하는 것이 대영제국의 이해관계에는 더 잘 부합했다." "1921년 7월부터 9월까지 T. E. 로렌스는 전후 협상이 가져온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후세인 왕을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로써 후세인은 이븐 사우드가 히자즈 정복을 위해서 전투를 개시하려는 때에 더 이상 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븐 사우드는 영토를 계속 확장했고, 1932년에 왕국의 이름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개명했다.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왕권을 수립했으며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지배로부터도 독립을 지켜냈다. 이는 영국의 중요한 오판 덕분이었다. 영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 석유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256-7)


"식민 장관 윈스턴 처칠은 1921년 6월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자신은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의 왕으로 후세인의 아들들을 앉힘으로써 하심 가에게 했던 영국의 깨진 약속을 이행하는 데에 기여하는 동시에 아랍 지역에 헌신적으로 의존적인 통치자들을 영국이 보유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이다." "처칠과 로렌스는 1921년 3월에 예루살렘 회의로 아미르 압둘라를 초청하여 중동에 관한 대영제국의 최신 구상안을 알려주었다. 그 안에 의하면 파이살은 프랑스가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다마스쿠스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대신 이라크의 왕이 될 것이었다. 한편 압둘라에게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은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신생국의 수장 자리였다. 육지로 둘러싸인 트란스요르단─이 당시 영토에는 홍해의 아카바 항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은 압둘라의 야심을 만족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트란스요르단에서 〈샤리프의 해결안〉은 대영제국의 현실이 되었다."(258-9)


"트란스요르단이 영국의 중동 영토 중에서 가장 지배하기 쉬웠지만, 이라크도 한동안은 가장 성공한 위임통치령으로 생각되었다. 파이살 왕은 1921년에 취임했고 제헌의회가 1924년 초에 선출되었으며 영국과 이라크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약이 그해 후반에 비준되었다. 1930년에 이라크가 안정적인 입헌군주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위임통치국으로서의 영국의 역할은 완수되었다." "이라크는 국제연맹의 26년의 역사 동안 정회원이 된 유일한 위임통치령이었다. 이라크는 여전히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아랍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이라크가 달성한 성과, 즉 독립을 이루어서 국제연맹의 회원국이 되는 것은 아랍 세계의 민족주의자들의 목표가 되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인 대다수는 자신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국의 지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은 1920년의 봉기로 끝나지 않았고, 이라크에서의 영국의 계획을 끝까지 방해했다."(263-4)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집트는 아랍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다당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1923년의 헌법 제정으로 정치적 다원주의와 양원제를 위한 정기적인 선거, 성인 남성의 참정권, 언론의 자유가 도입되었다. 많은 신당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선거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언론인들도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활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시대는 이집트 정치의 황금기로서보다는 분열적인 당파주의 시기로 더 자주 기억되곤 한다. 뚜렷이 구별되는 세 개의 세력이 이집트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영국과 군주, 의회를 통한 와프드당이 바로 그들이다. 이 삼자 간의 경쟁으로 이집트의 정치는 커다란 분열을 겪었다." "1930년대의 경험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 정당정치에 환멸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시디키의 독재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와프드당이 달성한 결과에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독립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은 한 세대 동안이나 더 계속되었다."(270, 277)


8 중동의 프랑스 제국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아랍 세계에 자신들의 제국을 구축하기 위하여 대(大)시리아─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탐해왔었다. 프랑스는 이집트 협력자를 통해서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할 요량으로 1830년대에는 시리아를 침략한 무함마드 알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집트가 1840년에 시리아에서 철수하자, 프랑스는 시리아의 토착 가톨릭 공동체들, 특히 마운트 레바논의 마론파와의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는 마침내 시리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이루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에 대한 영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알제리와 튀니지, 모로코를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아랍인들을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와 경험이 있다고 자신했다."(299)


"레바논 정치계에는 마운트 레바논의 지위에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명하는 흐름이 있었다. 트리폴리와 베이루트, 시돈, 티레 같은 해안 도시들의 수니파 무슬림들과 그리스 정교도들은 시리아의 주류 정치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기독교도가 지배하는 레바논 국가에서 소수자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의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난 베이루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더 큰 아랍 제국의 일원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파이살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마론파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의 기술적인 도움과 정치적인 지지를 원하면서도 어찌 되었든 간에 프랑스가 제국주의적인 이기심보다는 이타주의를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레바논에 대한 위임통치 준비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의 군 행정가들은 마운트 레바논의 행정자문위원회에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운트 레바논의 정치인들도 국가 건설에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303-5)


"프랑스는 시리아를 점령한 초기부터 도시와 지방 모두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파우지 알 카우크지는 일격을 가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하마에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프랑스에 맞서서 일어났던 이전의 시리아 반란들이 끓어올랐다가 주저앉은 것을 그동안 쭉 지켜본 그는 1925년의 상황은 다르다고 판단했다. 드루즈인과 다마스쿠스인 그리고 하마의 자신의 당 사이에서 프랑스에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는 다마스쿠스의 반란을 물리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폭력을 동원했다. 요새에서 무차별적으로 다마스쿠스 지역을 대포로 포격했다. 이후 수일간의 공중 폭격이 이어졌다." "결국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권은 협상과 비폭력 저항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목표를 추구하며 무장 투쟁을 멀리했던 도시 엘리트들로 구성된 새로운 지도부로 넘어갔다. 하지만 1936년까지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다."(326-30)


"아랍 민족주의가 싹트던 시기에 알제리는 오히려 제국주의를 포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알제리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육받은 대다수의 엘리트들은 프랑스를 쫓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30년까지도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온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민족주의 대신 시민권 운동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법은 알제리의 유럽인과 무슬림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1865년에 프랑스 상원은 알제리의 모든 무슬림이 프랑스인이라고 공포했다. 하지만 그들이 군과 행정기관에서 일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프랑스의 '시민'은 아니었다. 알제리 원주민이 프랑스 시민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무슬림으로서의 신분을 포기하고 프랑스의 가족법 아래에서 사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결혼과 가족법, 유산 분배 모두가 이슬람법으로 정확히 규정되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무슬림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과 같았다."(333-4)


9 팔레스타인 재앙과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더 이상 버틸 여력도 의지도 상실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이견은 해소가 불가능했다. 영국은 유대인에게 양보를 할 경우 1936-1939년처럼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반대로 아랍에게 양보를 한다면 유대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1946년 7월 22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같은) 이제 분명해졌다. 1946년 9월에 런던에서 아랍과 유대 지도부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영국의 노력은 양측의 참석 거부로 실패했다. 그리고 1947년 2월에 런던에서 열린 양자 회담도 국가 설립을 놓고 아랍과 유대인 측의 요구가 엇갈리면서 좌초되었다. 영국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벨푸어 선언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기존의 팔레스타인 비유대인 공동체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민족향토〉를 건설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7년 2월 25일에 영국은 국제연합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위임했다."(356)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은 영국을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도록 만들겠다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테러 전법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을 괴롭히고 있는 위험한 선례를 역사에 남겼다." "한편 UN이 구체화한 분할안(Partition Resolution)은 팔레스타인을 바둑판 모양으로 여섯 구역으로 나눈 후 3개의 아랍지역과 3개의 유대지역으로 지정했고, 예루살렘은 국제적인 신탁 통치 지역으로 정했다. 이 안은 유대 국가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약 55퍼센트를 할당했는데, 하이파에서 야파로 이어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중해 해안과 아카바 만까지의 아라바 사막은 물론 이 나라의 북동쪽에 위치한 좁고 긴 갈릴리 전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훗날 〈이 당시 내가 느낀 중압감과 백악관을 겨냥한 (시오니스트 활동가들의) 맹렬한 선전 활동〉은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고 떠올렸다. 1947년 11월 29일에 분할안이 기권 10표와 찬성 33표, 반대 10표로 통과되었다."(359)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1948년은 알 나크바(al-Nakba, 대재앙)로 기억되었다. 내전과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피난민들이 팔레스타인의 겨우 남은 아랍 영토와 레바논, 시리아, 트란스요르단, 이집트로 밀려들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만이 간신히 아랍인들의 수중에 남았다. 가자 지구는 이름만 자치 지역일 뿐 이집트의 신탁 통치를 받게 되었다. 서안 지구를 트란스요르단에 합병하면서 이제 요르단 강 양안(兩岸) 모두를 차지하게 된 트란스요루단은 요르단으로 국명을 고쳤다.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지도상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외국의 점령 아래 또는 이산(離散)의 상태로 살고 있는, 뿔뿔이 흩어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국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역사의 남은 시간을 싸우는 데에 써야만 했다."(382)


"팔레스타인 재앙은 아랍 정치에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신생 독립국가들의 희망과 염원에는 1948년의 패배로 인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패배의 여파로 아랍 세계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동요를 목격했다.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4개국은 정치적 암살과 쿠데타, 혁명으로 침몰했다. 구엘리트들이 젊은 세대의 군인들에 의해서 타도되면서 대대적인 사회 혁명이 발생했다. 구 정치인들이 자국의 국경 내에서 민족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면, 열정적인 자유장교단은 범아랍적인 단결을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구세력'이 유럽의 언어를 구사했다면, 새로운 지도자들은 거리의 언어로 말했다. 팔레스타인 재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후 2등 국가로 전락했다. 이렇게 제국은 물러났고 새로운 강국들이 국제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392-3)


10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


"1952년 이집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정부의 전복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고 있던 이들은 정작 소수의 군장교들뿐이었다. 자유장교단(Free Officers)이라고 자칭했던 그들의 지도자는 가말 압델 나세르라는 젊은 대령이었다. 자유장교단은 이집트의 군주와 의회 정부가 나라를 망쳤다는 확실한 신념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쿠데타 성공 이후 이집트 대중의 지지 속에서 군인들은 대담해졌고, 정치에도 더욱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군인들은 재빠르게 이집트 정치에서 다당제를 추방했다. 1953년 1월에 와프드당과 무슬림 형제단의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혁명평의회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정당 자금을 국고로 환수했다." "독립 수호에 열성적이었던 이집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권의 침해 없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장교단은 타협 없이 전 세계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곧 깨닫게 되었다."(400, 406-7)


"주목할 만한 계속된 성공으로 나세르는 아랍 세계에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반제국주의자로서의 이력과 아랍 단결을 향한 호소로 그는 중동 전역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투사가 되었다." "나세르는 라디오를 통해서 아랍 세계를 정복했다. 〈아랍의 소리〉를 통해서 아랍 정부의 수장들을 제치고 그들의 시민들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다른 아랍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규칙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집트의 대통령이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아랍 연대에 대한 나세르의 호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시리아 정부는 카이로로의 길을 택했고, 1958년 2월 1일에 이집트와 통합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혁명적인 해의 시작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은 아랍 통합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정점에 도달한 나세르의 입지는, 다른 아랍 국가 수장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432-3, 438)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UAR)으로 통합된 1958년에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이 연합은 아랍 세계 전역에 충격을 몰고 왔고, 이웃의 레바논과 요르단의 유약한 정부를 거의 쓰러뜨릴 뻔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요르단과 레바논 양국이 통일아랍공화국에 가담하기를 기대하며 요르단의 하심 가 군주정과 레바논의 친서방적인 기독교 정부의 붕괴 가능성에 기뻐했다. 한편 바그다드의 하심 가 군주정을 타도한 1958년의 이라크 혁명은 이집트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합시켜서 진보적인 통일 아랍 강대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새로운 아랍 질서의 전조처럼 보였다." "그러나 통일아랍공화국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이라크의 결정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카이로,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간의 연대 가능성은 사라졌다. 1950년대에 성공의 정상에 도달했던 나세르는 연속적인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패배의 1960년대를 보내야 했다."(450-1)


11 아랍 민족주의의 쇠퇴


"놀랍도록 계속되던 나세르의 성공 가도는 1960년대에 중단되었다. 시리아와의 통합이 1961년에 깨졌다. 이집트군은 예멘 내전의 수렁에 빠졌고, 나세르는 이집트와 아랍 동맹국들을 1967년에 발발한 이스라엘과의 재앙적인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오래된 약속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뿐만 아니라 남은 팔레스타인 영토마저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더욱더 요원해졌다. 1960년에 아랍 세계가 품었던 희망은 닳고 닳아서 나세르가 사망한 1970년에는 환멸과 냉소로 바뀌었다. 1960년대의 사건들은 아랍 세계에 과격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점점 과거의 일이 되어갔지만 이제 아랍인들은 냉전의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아랍 국가들은 친서방 진영과 친소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냉전의 영향은 소련군과 미군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된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랍의 분할통치는 계속되는 듯이 보였다."(452)


"1962년부터 나세르가 주창하기 시작한 아랍 사회주의는 아랍 세계를 분열시켰다. 이집트의 정치 언어는 갈수록 교조적으로 변했다. UAR의 해체 이후, 나세르는 아랍 민족의 이해관계보다는 편협한 국가적 이기심을 앞세우는 〈반동주의적〉 자산가들을 주로 비판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서구의 지원을 받는 아랍 국가들─모로코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보수적인 군주국들과 튀니지, 레바논과 같은 자유 공화국들─도 〈보수반동적인〉 국가(서구에서는 〈온건한〉 국가로 알려졌지만)로 일축되었다. 혁명적인 아랍 국가들은 모두 모스크바와 제휴했고 소련의 사회 경제적 모델을 따랐다. 그들은 아랍 세계에서 〈진보적인〉(서구에서는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로 경멸되었다) 국가들로 알려졌다. 진보적인 국가들의 숫자는 초기에는 매우 적었지만─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그 대열은 알제리와 예멘, 리비아에서 발발한 성공적인 혁명의 결과로 점점 길어졌다."(455-6)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의 패배로 아랍 정치는 급진적인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패전과 더불어 아랍 대중을 고의적으로 기만한 사실은 아랍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를 땅에 떨어뜨렸다." "1948년의 전쟁 이후와 마찬가지로 아랍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혁명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라크의 대통령 압드 알 라흐만 아리프는 1968년에 바트당이 주도한 쿠데타로 쫓겨났다. 리비아의 왕 이드리스는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이끈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타도되었고, 야파르 알 누마이리는 1969년에 수단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1970년에는 시리아 대통령 누르 알 딘 아타시가 하피즈 알 아사드의 군사 쿠데타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각국의 정부들은 급진적인 아랍 민족주의 강령을 자신들의 적법성의 기초로 삼았고, 이스라엘의 파괴와 팔레스타인 해방, 제국주의─이제는 미국이 그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의 극복을 주창했다."(483-4)


"아랍 민족주의는 나세르 (사망) 이전에 이미 소멸한 상태였다. 통일아랍공화국으로부터의 시리아의 분리, 예멘에서의 아랍 국가 간의 경쟁, 1967년의 대패, 팔레스타인 전역의 상실로 인해서 범아랍주의를 향한 염원은 결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연속적인 타격을 입었다. 검은 9월의 사건으로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냉전 노선에 따라서 미국의 우방국이 되거나 소련의 열성 당원이 된 아랍 국가들을 가르는 단층선을 나세르 외에는 그 누구도 넘나들 수 없었다. 1970년에 아랍 세계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진 별개의 국가들로 확실히 분열되어 있었다. 1970년 이후에도 통합안이 등장했지만, 그 어느 것도 관련국의 보위(保衛)를 위협하지 않았으며 지속되지도 않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통합안들은 아랍 민족주의가 여전히 자국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랍 정부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고안한 선전활동에 지나지 않았다."(503)


# 검은 9월의 사건 :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 자신들의 테러 활동(특히 비행기 납치) 무대로 요르단 영토를 활용하자 이에 격분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충돌한 사건


12 석유의 시대


"자연은 아랍 국가들에게 석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위대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수천 년 동안 거대한 농업 인구를 부양했던 이라크 외에는,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아랍 국가들─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그 외의 페르시아 만 국가들, 리비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가장 많은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었다. 현지의 수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의 석유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서도 발견되었다." "산유국들은 자력으로 개발 목표를 실현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아랍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해야만 했다. 국가가 없던 팔레스타인은 물론 튀니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예멘이 아랍의 노동력 수출에 적극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이집트가 가장 많은 노동력을 수출했다. 1970년대 동안 산유국으로 향한 아랍 이주 노동자의 숫자는 1970년의 약 68만 명에서 1973년 석유 금수조치 이후에는 130만 명으로, 1980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증가했다."(504, 560-1)


"산유국의 이집트 노동자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10년 동안 무려 200배가 증가했다. 이집트 사회학자 사드 에딘 이브라힘은 산유부국과 산유빈국 간에 이루어진 노동력과 자본의 교환 속에서 기인한 〈새로운 아랍 사회질서〉를 발견했다. 깊은 정치적 분열의 시기에 오히려 아랍인들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점점 더 상호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는 아랍 국가들 간의 적대감을 넘어설 만큼 유연성이 뛰어났다. 이집트가 리비아와 전쟁에 돌입한 1977년 여름에 40만 명의 이집트 노동자 중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강화를 맺기 위해서 아랍 대열에서 이탈했을 때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집트 인력에 대한 산유국들의 수요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이브라힘의 결론처럼 석유는 아랍 현대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1970년대 말에 아랍 세계를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561)


"뜻밖에도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산유국조차 신생 이슬람 정치 세력에게는 취약한 듯이 보였다. 더 이상 아랍 민족주의적 수사를 믿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아랍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는 아랍의 왕과 대통령들이 부정부패로 궁전을 짓고, 아랍의 공익보다 개인의 권력을 우선시 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소련의 공산주의나 무신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을 아랍 국가들 간의 분할통치를 추구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보다는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를 독려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란 혁명에서 얻은 교훈은 이슬람이 모든 적들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슬람의 불멸의 진리를 따라서 연대한다면, 전제 군주를 타도하고 초강대국에게도 용맹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무슬림들은 생각했다. 아랍 세계는 이슬람의 힘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정치와 사회적 변화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562-3)


13 이슬람의 힘


"1981년 10월 6일의 열병식에서 〈나는 파라오를 죽였다〉라고 외쳤을 때,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는 종교보다 인간의 법을 앞세운 세속적인 통치자로서 사다트를 비난한 것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무슬림 사회는 『쿠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지혜, 이슬람 신학자들의 판결기록에서 추론된 이슬람법의 요체이자 총체적으로 샤리아(sharia)로 알려져 있는 〈신의 법〉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속정부를 적으로 보았고, 통치자를 〈파라오〉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처럼 『쿠란』도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신의 율법보다 인간의 법을 권장한 전제군주로 묘사하며 매우 비판적이었다.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랍 세계를 지배하는 현대판 파라오에게 맞선 폭력 사용을 세속정부를 전복하여 그 자리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처라며 옹호했다.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고, 쓰러진 대통령을 파라오라 비난하며 사다트 암살을 정당화했다."(565-6)


"카리스마적인 이집트 사상가 사이드 쿠트브는 자신의 저작 『이정표』에서 현대를 규정하는 사회정치적 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과학과 지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는커녕, 신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 즉 자힐리야(jahiliyya)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이 단어는 이슬람 이전의 암흑시대를 일컫는 것이었기에 특히 이슬람에서는 그 반향이 컸다. 20세기의 자힐리야는 〈가치를 창조하고 집단행동의 원칙을 규정하며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는 신이 규정한 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형식을 취한다〉라고 쿠트브는 주장했다. 함축적으로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전은 인류를 현대로 이끌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의 영원한 메시지의 포기는 이 사회를 6세기로 되돌려 놓았다." "쿠트브는 인류를 위한 신의 질서를 완벽하게 진술하고 있는 이슬람이야말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진정한 해방신학이라고 생각했다."(570-1)


"이집트 정부는 반체제 이슬람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고문하고 선별적으로 처형했던 반면, 시리아 정권은 대량 말살 정책을 동원했다. 따라서 그 반대급부로 고강도의 훈련과 계획, 규율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요구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암살이나 전복으로 무너뜨리기에는 아랍 정부들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세속 정권을 전복하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하던 이슬람주의자들은 다른 곳을 찾아야만 했다. 레바논 내전의 갈등은 이슬람주의 일당들에게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상적인 미래상을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도 또다른 선택지가 되었다. 두 지역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일당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국제무대로 옮겼고, 그 범위를 넓혀서 이스라엘과 미국, 소련과 같은 중동 지역 및 세계의 초강대국들과 싸웠다. 개별 국가들의 국내 안보 투쟁으로 시작된 일이 세계적인 안보 문제로 비화된 것이었다."(581-2)


"이슬람주의자들은 1979년 이란 혁명의 성공과 이슬람 이란 공화국의 창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는 한 분파 조직이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하피즈 알 아사드가 이끄는 바트주의 정부와의 내전을 시작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레바논 시아파의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았고, 레바논에서 양국에게 대대적인 일격을 가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지하드는 내부와 외부의 적 모두를 향한 것이었는데, 소련 점령군과 공개적으로 이슬람을 적대시하던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이 그 대상이었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 정부 아래 팔레스타인을 이슬람 세계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유대 국가에 대항하는 장기적인 지하드를 주창했다." "그러나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과 아프가니스탄 모두 외부의 적이 퇴각한 이후, 장기 내전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622-3)


14 냉전이 끝나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국제 외교에서 소련과 미국이 협조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역사상 처음으로 안전보장 이사회는 냉전 시대의 정치 논리에 구애받지 않고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8월 2일에 결의안 660호가 신속하게 통과된 이후, 4개월 동안 안전보장 이사회는 거부권의 행사로 인해서 부결될 걱정 없이, 총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랍 정치인들─특히 이라크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소련의 태도였다. 아랍 세계는 소련이 쇠약해진 상태이며 워싱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걸프 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고려했을 때, 소련은 자신들이 미국을 지지하거나 또는 미국과 대치할 수는 있어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을 힘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립해본들 얻을 이득이 없었던 소련은 미국에 협조하기로 결정했고, 한때 우방국이었던 이라크를 철저히 외면했다."(639-40)


"미국과 소련이 전례가 없는 협력의 시간을 즐겼던 반면 아랍 세계는 극심한 분열을 겪었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에게는 미국의 개입이 초래할 위협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보다 더욱더 심각하게 여겨졌다. 리비아와 수단, 요르단, 예멘, PLO 지도자들은 모두 알제리 대통령 벤제디드의 우려에 공감을 표했고,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랍의 일치단결을 촉구했다." "카이로 정상회담의 최종 결의안에 대한 투표 결과는 아랍 세계의 분열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결의안은 침공을 비난했고, 이라크의 합병을 부정했으며, 쿠웨이트에서 모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또한 자국 영토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아랍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요청도 승인했다. 무바라크는 딱 2시간 만에 결의안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고 전문을 투표에 부쳤는데, 10개국은 최종안에 찬성했고 9개국은 반대했다. 아랍 세계는 첨예하게 분열된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다."(640-1)


"1993년 8월, 이스라엘과 PLO가 가자와 예리코(서안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를 합의했다고 공표하자, 세계는 놀랐고 예상했던 대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클린턴 행정부는 아랍-이스라엘의 화해 조정에 실패한 미국을 대신해서 노르웨이가 거둔 성공에 매우 당황해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야당인 리쿠드당이 라빈 정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정권을 다시 잡으면 이 합의를 무효화할 것을 약속했다. 아랍 세계는 PLO가 비밀리에 이스라엘과 거래해서 아랍의 대오를 무너뜨렸다고 비난했다." "반면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에서 유례없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일단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단독협상을 체결하자 다른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운동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도 이스라엘과 자국의 이해관계를 자유롭게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지쳐 있던 대다수의 아랍 국가들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673-5)


15 21세기의 아랍인들


"아랍 국가들은 9/11 이후 해소 불가능한 압박감을 받게 되었다. 만약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할 경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에게 경제적 고립에서부터 정권 교체라는 노골적인 요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재를 받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의 편을 든다면, 빈 라덴의 사례에 고무된 현지의 지하드 조직의 공격 위협에 자국 영토를 노출시키는 격이었다. 2003년 5월부터 11월까지 자국의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수차례의 폭탄 공격으로 125명의 사망자와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모로코, 터키의 도시들이 요동쳤다. 아랍 세계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에 굉장히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미국과 아랍이 소원해진 만큼 이스라엘과 미국은 더욱 가까워졌다." "이스라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이슬람주의 단체의 자살 폭탄 공격 시도는, 부시 대통령이 미국과 유대 국가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693)


"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 침공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부시 행정부는 연합군 임시 행정처(CPA)라는 관리기관을 설립했다. CPA가 2003년 5월에 내린 두 건의 초기 결정으로, 전후 이라크의 혼돈은 미국 통치에 맞선 무장 폭동으로 변했다. 첫 번째 결정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바트당을 불법화하고 전(前) 바트 당원들을 공직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것은 5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군과 정보부를 해체한다는 결정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탈바트화(de-Ba'thification)〉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CPA의 조치는 잘 무장된 수많은 군인을 일자리에서 내쫓았고, 이라크의 수니파 무슬림 정치 엘리트들은 나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 무슬림들이 득세해가는, 미국이 건설한 새로운 민주국가 이라크에 협력할 이유를 상실했다. 미국의 점령에 맞선 반란과 이라크 지역 사회 내의 종파적 갈등이 잇따랐다. 이라크는 곧 반미, 반서구 활동가들의 보급지가 되었다."(697)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정치적 배당금을 챙겼다. 실제로 유대 국가에 과감한 일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넓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슬람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싸우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라고 믿었다. 2006년 여름에 양 정당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올렸고, 이는 가자 지구와 레바논 모두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2006년의 충돌은 미국의 아랍 민주주의에 대한 지원의 한계 및 이스라엘에 대한 무한 지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사실상 부시 행정부는 친서방 정당이 정권을 잡은 선거 결과만 인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테러와 연계된 정당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아무리 부적절해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성토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정당들의 국내적 입지는 더욱더 공고해졌다."(702-4)


"2011년 1월과 2월에 발생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혁명은 아랍의 봄을 만들었다. 아랍의 봄 봉기에 참여한 각국의 시민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위대가 성취한 성공을 (자신들도) 거듭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모든 아랍 국가는 동질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혁명 모델이 모두에게 들어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랍의 봄이 낳은 착각이었다. 국가 기관이 거의 부재했던 카다피의 리비아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문제를 가지고 있던 바레인과 완전히 달랐고, 지역주의의 오랜 역사를 가진 예멘과도 달랐으며, 알라위파라는 소수 종파의 지배하에 있던 시리아와도 달랐음이 곧 명백해졌다. 내부적인 제약과 역내 강국들의 간섭은 2011년 혁명을 경험한 6개국 각각에게 매우 다른 결과들, 즉 반혁명과 내전, 지역 갈등, 초국가적 칼리프 국가의 출현을 가져왔다. 해방 운동으로 시작된 행동이 오늘날 중동을 괴롭히는 최악의 정치적, 인도주의적 위기로 빠르게 악화된 것이다."(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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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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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오스만 제국사를 공부하는가?


"오스만 제국은, 우연히 근대에 세계를 지배하게 된 여러 서유럽 국가들에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자리 잡았던 까닭에 긴 세월 동안 유럽의 군사·정치·이데올로기적 팽창의 직접적인 예봉에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근접성은 오스만 측과 유럽 모두의 정체성 형성에서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양측의 근접성은 거부와 끌림의 과정을 거치면서 복합적인 정체성 형성을 구축했다. 오스만 제국은 초창기부터 이후에 유럽이 된 지역의 일상생활, 종교, 정치와 서로 얽혀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처럼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리에 반비례한다. 어쨌든 한 인간은 자신을 특별하고 독특한 성격을 가진 뚜렷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할 때,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마찬가지로 무엇이 아닌지 정의하는 데 자주 '타자(他者)'를 잣대로 이용한다. 비잔티움, 발칸, 동부와 서부 유럽들을 상대하면서, 오스만인들은 간혹 (어쩌면 힌두교도를 적으로 대했던 무굴인들처럼) 이슬람교를 수호하는 무슬림 전사들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30-2)


"오스만인들은 유럽인의 상상의 방앗간에 수많은 곡식을 제공했다. 종교 개혁기와 17세기 프랑스의 공상문학에서 적그리스도와 강적의 이미지는 오스만 왕조의 군사적 위축기를 거치면서 보다 단순한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18세기의 예니체리 음악과 튀르크 풍을, 그 다음에는 어디에나 있는 동방의 카펫과 영화관에 따라붙어 있는 19세기의 이국풍과 에로티시즘을 볼 수 있다. 비록 오스만 제국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유럽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화 세계에서는 그 문화적 유산들이 남아 있다. 말기의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점유했던 서유럽 제국주의의 절정기를 버텨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대륙의 바깥에 겨우 한 줌밖에 안 되는 독립국가만 있었을 뿐이다. 중국, 일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은 그나마 힘을 가지고 살아남은 대단히 중요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독립국가로서 그들은,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식민화된 여러 민족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37-8)


2 오스만 제국의 기원에서 1683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즈음해 소아시아라고도 불리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쪽 귀퉁이에서 태동했다. 15세기 중엽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잔티움 제국과 비잔티움 봉건 영주들 치하의 정주민들의 삶은, 홍수처럼 밀려와 나름대로 작은 국가를 형성한 튀르크인 유목민들 사이에 놓여 있는 '섬'에 비유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튀르크멘 소공국들이 흥기했다 사라졌고, 비잔티움의 통제력에도 기복이 있었다. 아나톨리아는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는 작은 튀르크멘 또는 비잔티움 공국들과 소국들로 이루어진 조각 이불이 되었다. 간혹 비잔티움의 저항은 제국적 수준이든 봉건 영주의 수준이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기독교 영토에서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한 아나톨리아는 불가피하게 장기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과 혼돈의 분위기는 오스만 국가의 출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4-5)


# 오스만 제국 탄생의 배경

1. 소아시아에서 비잔티움 중앙 정부의 통치를 무너뜨린 튀르크 유목민들의 침입

2. 변방에 혼란과 인구압을 가져온 몽골의 중동 침입

3. 종교와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다수의 지지자를 모았던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들

4. 유목민들의 발칸 반도 접근을 통제하여 더 많은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지리적 위치


"오스만 1세는 그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의 개창자이지만, 변방에 있는 여러 튀르크멘 집단 가운데 한 지도자였을 뿐 가장 세력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었다." "1300년 당시 그런 튀르크멘 공국들은 수십 개에 달했으며, 이 모든 것은 튀르크멘 유목민들이 아나톨리아의 해안선을 압박하여 마침내 평야지대를 점령했던, 보다 광범위한 과정의 일부였다.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스만 왕조가 승리를 거두었고, 나머지는 이내 사라졌다." "국가 형성에 성공한 것은, 물론 오스만인들의 특별한 유연성, 즉 변화하는 조건에 실용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췄기 때문이다. 이 떠오르는 왕조는, 부계에 따른 혈통의 기원은 튀르크계였고, 기독교도와 무슬림, 튀르크어와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상당히 뒤섞인 지역에서 태동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모두 아나톨리아와 그 너머에서부터 오스만의 깃발 아래로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익(은 물론이고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고 모여들었다."(46-7)


"1300년경에서 1683년 사이에 오스만 국가는 형태와 행정 기구 안에서의 권력 집중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급격한 진화를 겪었다. 이 기간의 앞부분인 1300년에서 1453년 사이에 엘리트는 변방의 영주(베이[bey])들, 튀르크멘 지도자들, 왕자들이었고, 이러한 지도자들은 오스만 군주를 동등한 권력자들 가운데 제일인자(primus inter pares)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수행원, 군대 그리고 술탄에게서 독립적인 지지자들을 이끌고 오스만 국가에 봉직하게 된 이 엘리트들은 오스만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얻었기 때문에 오스만 국가를 따랐다. 술탄은 이처럼 거의 동등한 엘리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했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고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군주의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67-8)


"메흐메드 2세(재위 1451~1481)와 쉴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의 재위 기간 사이의 1세기 중 어느 시점에선가 아마도 관료들과 신민들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져나갔던 듯싶다." "가장 기본적으로, 강역 내의 사람들은 적들로부터 술탄의 보호를 받았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공격을 받았다. 나아가 오스만 국가 내에 존재한다는 의식은 부분적으로 술탄이 신민들의 충성을 강화하려 한 무수한 행위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세금의 정규화와 오스만 관료들이 지방을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 또한 신민들이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의식을 강화시켰다. 더욱이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은 신민들의 행동에 대한 술탄의 기준과 규법을 규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그리하여 공통된 법 체제, 세금 그리고 모든 신민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공통의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통된 '오스만' 국가 정책에 동참한다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68-9)


"일반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의 단절 없이 이어져온 전사 군주는 술탄 쉴레이만 대제의 재위 기간에서 끝났다. 이 시기의 성숙한 제국에서는 정복전이 차츰 주춤해짐에 따라, 이제는 전쟁하는 술탄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술탄이 필요했다." "이제 술탄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로서 관료적 명령을 정당화해주되 자신은 정책을 입안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세기 절반의 기간(1656~1691) 동안 유명한 쾨프륄리 가문이 사실상 국정을 좌우했고 가끔 대재상(vezir, 재상 또는 장관을 의미)으로 봉직했다." "새로운 집단지도 체제, 즉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이 새로운 관례들로 대체되었지만, 술탄들은 표면적으로 연속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앙 정부는 실제로 통치권을 여전히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69-71)


3 1683년에서 1789년까지의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이 과거보다 훨씬 더 불운했던 이 시기의 특징은 군사적 패배와 영토 축소였다. 18세기 오스만의 패배와 영토 상실은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경쟁이 없었다면 더욱 심각해졌을 껏이다. 유럽 외교관들이 전후 협상에서 경쟁자들이 너무 많은 이권을 차지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수차례에 걸쳐 오스만의 편을 들어 개입함으로써 패배한 오스만인들이 잃어버릴 뻔했던 영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쐐기를 마련해주었다." "패전의 시기는 1683년 빈에서 시작하여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침공과 함께 끝났다. 1683년 빈 포위의 실패로 오스만군은 패배하여 도망쳐야 했으며, 잇달아 이스탄불 정권에 끔찍한 재난을 안겨준 사건들이 일어났다." "1798년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은 나일 강 유역의 요지이자 부유한 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고 결국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그의 후손들 치하에서 별도의 국가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74-9)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술탄은 대개의 경우 상징적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 부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변화 또는 행동들을 추인하기만 했다." "술탄들이 국내의 정치적 우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패배함에 따라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와 기술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초부터 중앙 정부는 그 자체의 정통성을 고양하고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성지 메카와 메디나로 가는 순례로를 재정비했다. 이른바 튤립의 시대(1718~1730) 동안의 변화는 술탄들이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련된 방법들을 더욱 확실하게 설명해준다." "루이 14세의 궁정처럼 당시 튤립 시대의 오스만 조정은 엄청난 소비의 현장이었다. 술탄 아흐메드와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는 이스탄불 엘리트들을 소비면에서 선도하느라 애썼고, 모방 대상으로서의 그들 자신의 입지를 사교 생활의 중심에 확립했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지위와 정통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82-4)


"중앙의 이스탄불과 기타 오스만 도시들에서는 엘리트 내부의 정치적 우위를 위한 경쟁뿐만 아니라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투쟁도 있었다. 이 투쟁에서 그 유명한 예니체리 군단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예니체리의 무기와 훈련은 너무도 급격하게 퇴조하여 크림 타타르와 기타 지방 군사력이 그들을 대신하여 군의 전투에 중심이 되었다. 한때 화약무기로 무장한 엘리트 보병이었던 이들의 상징인 기율과 엄격한 훈련이 1700년경에 이르러 사라졌고, 이리하여 예니체리 군단은 외적의 공포의 대상에서 술탄의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엘리트적이면서도 민중적인─민중 계층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엘리트에 연결되는─예니체리의 정체성은 그들에게 국내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그들은 반복해서 술탄을 즉위시키고 또 폐위시켰으며, 대재상과 기타 관료들을 임명하고 해직시켰는데, 이는 엘리트 내부의 투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지만 가끔 민중을 대변하기도 했다."(85-7)


# 데브시르메 :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의 기독교인 마을들과 보스니아의 무슬림 집단에서 소년들을 선발하여 예니체리의 일원으로 키우는 어린이 공납제도


"중앙에서의 정치 권력의 중심 이동─술탄에서 술탄의 가문으로, 다시 베지르와 파샤 가문들로, 다시 또 거리로─은 지방 정치의 중요한 변동과 궤를 같이했다. 전체적으로 17~18세기에는 지방정치 권력이 중앙의 통제에서 보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지방 명사들은 그들이 중앙의 임명에서부터 유래했든, 오스만 이전 시대의 엘리트 출신이든, 맘루크 출신이든 일반적으로 지역 내의 상인과 지주들뿐만 아니라 종교학자 집단인 울레마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지방 명사 가문의 권위 확립은 대개 오스만 중앙 권위에 대한 반란이 아니었다(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은 달랐다)." "지방 명사들은 나름대로 중앙 정부와 술탄이 정치 권력과 공무상의 조세 수입원에 대한 공식 승인을 해줌으로써 명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리 확보 경쟁을 중재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들은 '지방의 오스만인'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오스만 체제의 일부가 되고자 했으며, 그 체제의 일부였다."(87-90, 93)


4 19세기


"제국 내에서는 많은 지방 명사들이 18세기에 등장하여 오스만 왕조와 국가의 기본적인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반란자들은 오스만 제국을 파괴하거나 분리 독립하려고 시도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반란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개 체제 안에서 움직였으며, 반란의 목표는 세금 면제나 정의의 보장 등으로, 오스만 세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부터 특정 지역을 분리시켜, 독립적이고 그 어떠한 상위의 정치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국가를 세우려는 적극적인 움직임들이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아랍 지역에서 모두 나타났다. 더욱이 거의 모든 경우에 열강 가운데 어느 한 세력이 19세기의 반란을 지원했으며, 그 열강의 도움은 실제로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반란은 오스만 신민들의 통치자에 대한 반란이었으며, 많은 영토 상실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이전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99)


# 오스만 제국의 주요한 영토 상실

1.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장악(1805)과 독립 시도(1832~1838, 유럽 연합군의 저지로 실패)

2. 세르비아인의 반란(1804)과 이에 따른 세르비아인 군주의 세습 통치 승인(1817)

3. 그리스 독립전쟁(1821~1830)을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승인하면서 그리스 독립 쟁취

4. 오스만-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맺어진 베를린 조약의 결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공식적으로) 독립,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로 편입

5.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의 이라크·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 지역은 영국으로, 시리아·레바논 지역은 프랑스로 편입,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탄생(1932)


"예전의 관점에서는, 민족주의─독자성, 우월감 그리고 독립을 주장하는 감정들─는 국가보다 우선했으며 마침내 국가를 탄생시켰다. 각 개인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정치적·문화적 권리를 빼앗겼고, 여전히 빼앗기고 있는 억압된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스만의 지배에서부터 독립한 국가의 권리를 요구했다. 근래의 학설에서는, 국가가 먼저 존재했고 민족주의는 그 뒤에 나타났다고 한다. 즉, 새로운 국가가 그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국경 안에서 민족적 정체성 형성을 지원하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리 직전의 발칸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쇠퇴한 것이 아니라 번영했다. 그러나 그 후의 신생국가들이 무모한 토지 재분배 계획 같은, 정치적으로는 인기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파괴적인 정책들을 펼치면서 결과적으로 독립 후의 경제가 독립 전보다 악화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적 쇠퇴로는 분리주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121-2)


5 오스만인들과 그 주변 세계


"일반적으로 18세기까지는 그 어떤 국가도 오스만 제국과 동등하게 교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606년 시트바 토록 조약에서 술탄이 여느 때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군주를 동등한 자격으로 대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오스만 국가는 주위에 동등한 국가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체제는 한 세기가 더 지날 때까지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 이처럼 '전근대적' 외교에서 국가들 간의 전쟁이라는 조건은 구체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선언한 경우가 아니면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평화라고 인정한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전쟁의 중지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술탄은 경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만 세계에서는 이러한 영구적인 전쟁의 관념은, '전쟁의 영역'과 '이슬람의 영역'이라는 분할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와 똑같은 영구적인 전쟁 개념은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지배적이었고 그곳에서는 법적인 정당화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130)


"이른바 카피툴레이션이라는 것도 오스만 제국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술탄의 영토에서 얼마 동안을 살든 거류 외국인들의 대우에 관한 규정이었다. 자국에 외부인들이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격조 높은 독특한 법이 있다는 생각에 따른 카피툴레이션의 관념은 오스만 측의 개념일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 예를 들어 중국에서도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오스만 신민들만이 오스만 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오스만] 군주는 카피툴레이션을 외국인에게 일방적이고 비상호적인 방식으로 하사했다." "카피툴레이션은 제국 내의 외국인들을 법적으로 보호했다. 카피툴레이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오스만 제국의 세금과 관세에서 완전히 면제를 받았다. 당연히 카피툴레이션은 인기가 높아, 프랑수아 1세 이후 다른 군주들이 요청해올 정도였다. 카피툴레이션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힘이 강했을 때는 전혀 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 후에는 오스만 주권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131-2)


# 카피툴레이션capitulation : 오스만 제국이 유럽 국가들과 체결한 시혜적인 통상조약으로, 유럽 세력이 커진 18세기 말 이후에는 그 성격이 불평등 조약으로 변모했다. 


"국제관계와 외교 수행을 규정하는 또 다른 형태가 르네상스 말에 등장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 서유럽과 중유럽으로, 그 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근대적'이라고 불린 이 양식은 국제관계와 외교 방식이 지속적이고 상호적이며, 호혜·치외법권·주권 평등 등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었다. 약하든 강하든 각각의 국가는 국제관계에서 만날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했다. 오스만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이러한 개념들의 채택이 점차 늘어났고, 외교는 오스만 제국의 생존을 위한 무기창고에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재위 1808~1839)는 외무부를 공식적으로 설치했고, 1834년 외국으로 영구적인 사절단을 보내기 위한 외교 기구를 승인했다. 이 시기는 아주 절묘했으니, 이스탄불이 1829년 러시아인들의 점령과 1833년 무함마드 알리 파샤 군대의 점령을 겨우 피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서 군대는 국가를 구하는 데 실패했고, 이제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외교뿐이었다."(132-5)


"오스만인들은 외교를 수행할 때 칼리프 위(位)라는 독특한 도구를 갖고 있었다. 칼리프 위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7세기에 새로운 이슬람 국가에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000년에서 1258년 사이, 누가 정치적 실권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칼리프는 매우 권위 있지만 주로 상징적인 인물로서 무슬림 공동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오스만 시대에 술탄들이 칼리프 칭호를 간혹 사용했지만, 이 칭호는 실제로 그 어떤 중요성도 띠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르러 인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수많은 무슬림들이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술탄은 그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의 신민들에게 칼리프로서 호소했으며 저항과 충성을 위한 구심점이 되었다. 칼리프라는 개념은─그 역사적 권위, 명예, 그리고 더 좋았던 과거의 이슬람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았으므로─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무슬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138-9)


6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법


"18세기에 오스만 정권은 전에 없이 무슬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18세기 전반에 술탄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성스러운 도시들(메카와 메디나)로 이어지는 순례로를 보호함과 동시에 강화하려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그러한 목적으로 요새들과 이를 보완하는 군사 주둔지들을 세웠다. 18세기에 아라비아의 와하비 반군들은 오스만 왕조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순례 여행을 교란시켰으며 1803년에는 메카를 정복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군단을 요청해 와하비 세력을 일시적으로 제압했다. 압뒬하미드 2세는 칼리프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순례자들의 여행을 편리하게 하고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을 중앙에 귀속시키기 위해 19세기 말 히자즈 철도를 개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영국이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하자즈 철도를 끊으려고 한 것은, 와하비들의 공격처럼 전 이슬람 세계에서 오스만 왕조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161)


"그런데도 오스만 술탄으로서 통치 기간 중에 성스러운 도시들을 순례한 술탄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왕실의 일원으로서 순례한 사람은 대여섯 명도 채 안 된다." "신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모든 무슬림의 기본적 의무인 순례를 오스만 왕조가 등한시했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술탄 오스만 2세 시대에 울레마는, 술탄은 순례에 가기 위해 수도를 비우기보다는 남아서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종교적 의견서(파트와[fatwa]. 법률자문역 무프티의 의견서로, 구속력은 없지만 경우에 따라 상당한 권위를 가진다)에서 말했다. 당시 울레마는 오스만 2세의 통치에 적대적이었고, 오스만 2세가 순례를 계획하면서 비밀리에 다른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했다(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군을 대폭 개혁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처럼 술탄이 순례를 가지 못하도록 한 이 의견서는 상당히 특수한 것이다. 결국 오스만 왕조가 순례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161-2)


7 오스만 경제: 인구·교통·무역·농업·제조업


"오스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이주(移住)는 언제나 인구 분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이주는 정치적·경제적인 여러 이유로 발생했다. 경제적 이주의 사례 가운데 하나는 항구 도시들의 성장이다. 19세기 동안, 당시 제국에서 성장하고 있던 국제 무역과 관련된 항구 도시들의 발전에 따라 (내륙 인구는 감소하고) 해안 지역에 그나마 인구가 밀집되었다. 이러한 항구 도시에 경제적인 이유로 내륙의 오스만 신민들이 이주했으며, 이즈미르의 경우에는 인접해 있는 에게 해의 섬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즈미르, 베이루트, 알렉산드리아, 살로니카에는 오스만 내륙의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건너온 말타·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 출신의 이주민들도 있었다. 그들에 힘입어 항구 도시들은 세계 시민적이고 다언어적인 '레반트'(레반트[Levant]란 동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는 특별히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지중해 세계의 일부였다."(188)


"경제적인 이주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주들은 극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해당 지역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합스부르크-오스만 전쟁의 인구학적 영향을 예로 들어보자.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 신도들은 코소보 인근의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간헐적인 이주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때까지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나 알바니아인들이 점차 이주해와 그 공백을 메웠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동부로 이주했는데, 그 결과 그곳에서 다수를 이루던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내주었다. 또 어떤 세르비아인들은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여 합스부르크 영토로, 예를 들어 1736~1739년 전쟁에서 오스만 측이 승리한 이후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이주민을 내보낸 사회나 받아들인 사회나 모두 종교적으로 더욱 동질화되었다. 이것이 1990년대의 보스니아와 코스보 위기에 관한 오스만 시대의 배경이다."(189)


8 오스만 사회와 민간 문화


"일찍부터 국가와 신민들 모두 인정했던 복장 규제법은 사회 이동의 중요한 지표로 작용했고, 관료들 사이 또는 관료와 신민 사이, 그리고 신민 계층들 사이의 차이를 표시해주었다. 각각의 특정한 위계에 있는 사람들의 특정 모자와 겉옷이 법으로 규정되었고, 그 가운데 모자가 특히 강조되었지만 옷, 구두, 허리띠 등등의 색과 유형으로도 구별했다. 이러한 법은, 특정 복장으로 사람들을 각각 분리된 집단으로 나누고, 그런 특정 복장에 따라 모두 자기 분수를 알고 명사들에게 존경을 표하도록 하는 의도를 띠었다." "사회적 변화와 신분 상승이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너무나도 국가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부분이라 1829년 술탄 마흐무드 2세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복장에 기반한 오래된 사회적 소속의 표지들을 폐지해버렸다. 그 대신 새로운 규정들을 내세워, 모든 관료들은 페즈를 똑같이 쓰라고 명령했다. 각기 다른 다양한 터번과 명예로운 예복들이 모두 사라졌다(종교 계층은 예외였다)."(227, 232)


"상당수의 사람들이, 왜곡되고 결국 무너져버린 케케묵은 복식상의 표지가 마침내 사라진 것을 환영했다. 이제는 법적인 제약이 없어졌으므로 주로 비무슬림들이었던 많은 부유한 상인들은 의복의 차이로 간혹 벌어졌던 차별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새로운 의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오스만 신민들은 통일된 복장으로 새로운 사회적 표상을 세우려는 노력을 거부했다. 사회적 위계에서 가장 끝부분에 있었던 근로자들은 무슬림이든 비무슬림이든 페즈를 거부하곤 했다. 이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수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근로자들이 계층적 차이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며, 길드의 특권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보호자였던 예니체리를 없애버리고 또한 오래도록 길드에 속한 근로자들에게 특혜와 보호를 제공해준 경제 정책들을 해체하고 있던 국가에 반발하는 연대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많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근로자들은, 그들을 특별 집단으로 표시해주었던 모자를 계속 고집했다."(233-4)


9 집단 간의 협동과 갈등


"온갖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선입견 속에서도 오스만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집단 간의 관계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수세기 동안 오스만 영토에서 소수자들은 프랑스 왕국의 땅이나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에 있는 소수자들보다 온전한 권리와 더 많은 법적 보호를 누렸다." "지금까지 정형화된 인식은, 오스만 신민들이 15세기 이래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서로 침투 불가능한 '밀렛'이라는 종교 집단들로 서로 분리되어 살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부정확한 관점에 따르면, 각각의 집단들은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고립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맺힌 증오가 널리 퍼져 있었다. 최근 학술 연구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거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오스만의 비무슬림들을 '밀렛'이라고 부른 것은 먼 옛날이 아니라 19세기 초 마흐무드 2세의 치세 당시부터였다. 그 이전에 밀렛은 제국 내의 무슬림들이나 제국 '바깥'의 기독교인들을 의미했다."(267-8)


"물론 오스만 세계의 사람들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차이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무슬림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슬림들은 이미 오스만 왕조와 오스만 국가 기구를 이루는 대부분의 성원과 종교적 믿음을 공유했다. 국가 자체에 여러 가지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슬람 국가라고 일컬었고, 많은 술탄들은 그들의 칭호 가운데 '가지', 즉 이슬람 신앙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특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택받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되는 '고임'(goyim)─비유대인, 타자─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무슬림들에게, '딤미'(dhimmi)라는 개념은 차이에 대해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 경우 무슬림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무함마드 이전에 신의 계시를 받았던 까닭에 불완전한 '경전의 사람들'(즉, 딤미)로 생각했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일부만 받았기 때문에 무슬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무슬림보다 열등했다."(270-1)


"점차 늘어가는 서구의 경제·정치·사회·문화적 힘이 오스만 제국의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는 변화를 촉발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세기 동안 세 가지의 사회적 위계 질서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존재했고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위계 질서로, 이는 비무슬림 위에 무슬림들을 정치적·법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외국 기업의 모델로, 외국인들을 정상에, 두 번째 등급에 비무슬림들을, 그리고 무슬림들을 바닥에 놓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주의적 모델로, 이는 모든 종교적·종족적 집단들에서 충원된 국가 행정 관료계가 통치하며, 법과 국가 앞에서 모든 성원들을 평등한 사회로 통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의 옛 질서는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9세기 오스만 사회는 진화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변화는 1922년 제국의 붕괴로 미완성으로 남았다."(284-5)


"튀르크인들이 타민족의 혐오와 민족주의로 비난받는 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부분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은 강제로 제국을 분할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지역들을 그들끼리 나눠가졌고, 국제연맹 체제에서 위임통치 정권을 수립하여 그들의 감독 아래 두었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가며 통치를 계속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큰 덩어리를 아테네에 있는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넘겨주고 알맹이 빠진 오스만 제국을 남겨두려고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저항 세력이 집결했고, 제국을 재건할 수 없었던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나머지 땅에 제국보다 작은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나중에 튀르크 민족국가(즉, 터키 공화국)가 되었다. 아랍과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잔해 속에서 국가를 창설하여 민족을 일으키는 데 전력했다. 특히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그러한 예이다."(294)


"튀르크 민족주의자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각각의 민족주의적 정체성들을 창안하고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들 각각은 오스만 후기에 튀르크 민족주의의 요소를 고안해내고, 찾아내고 또 확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긍정했던 튀르크 국가와 민족의 건설자들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튀르크 국가를 정당화하고 역사적 뿌리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랍 국가와 민족의 건설자들에게는, 튀르크인들의 악행이 그들의 분리된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고 정당화해주었으며, 아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벌어졌던 열강의 점령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반튀르크적 해석은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제국 파괴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따라서 1918년 이전에 의미 있는 튀르크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영국, 프랑스, 터키, 그리고 독립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던 아랍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많은 문제들을 조장했다."(294-5)


10 오스만 제국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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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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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이것은 혁명일까


"후성유전학은 우리의 DNA '위에' 혹은 DNA에 달라붙은 뭔가가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이 DNA가 기능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epigenesis 과정은 우리의 거의 모든 특징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은 과학자들이 후성유전적 표지에 관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단계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획기적이다. 경험(그리고 우리가 처한 환경 속 여러 상황)이 일부 후성유전적 표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차이,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어머니의 행동이 성인이 된 자녀의 스트레스 상태에 미치는 영향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을 후성유전적 표지로 설명할 수 있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들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뿌리째 뒤흔드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후성유전적 사건들은 DNA와 환경의 접점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알면 우리의 특징들이 언제나 본성과 양육 '두 가지 모두'의 결과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17-8)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형질은 우리가 한 개체로서 발달하고 생을 살아가는 동안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유전자들, 즉 DNA의 분절된 단위들은 항상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최종적으로 그것이 나타내는 표현형 사이에 절대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다. 형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비유전적 요인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마주한 맥락의 '결과'이다. 의사가 우리 유전자의 구성 방식을 살펴보고 특정 질병이 발생할지 아닐지 '확률' 이상을 알려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지가 삶에서 어떤 결과가 생길지에 언제나 일부 역할을 담당하므로, 유전자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할 수 없다."(28-9)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쓰는 정의에 따르면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유전자(의 작용)을 바라보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 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하며, 딱 맞는 열쇠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33-4)


"일반적으로 어떤 개인의 유전체genome, 즉 그 사람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유전 물질의 총합은 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우리가 수정될 때 받은 DNA 염기서열 정보는 죽을 때 몸속에 있는 정보와 똑같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물학자들은 '발달'이란 유전체가 아닌 유기체의 특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일단 DNA의 일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우리의 유전체가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유전체가 기능하는 방식의 차이가 DNA의 화학적 구조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즉 사람의 유전체가 살아가는 동안 확실히 변화한다는 점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개인의 몸속에 있는 유전 물질이 평생 변화하지 않는다는 기존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발달 중인 유전체', 주위 환경이 맥락에 반응하여 변화하는 유전체를 가지고 태어난다."(35-6)


"고전적 개념의 분자 유전자란, 세포질 안에서 물리적으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세포소기관에게 염기서열 정보를 제공하는 DNA 분절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DNA 안에는 〈OO단백질을 부호화하는 분자 유전자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별개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전자라는 말을 쓸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단백질(또는 어떤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산물)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서열 정보를 품고 있는 DNA의 분절 혹은 분절들이다. 현대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야기할 때는 어느 특정한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며, 유전자는 근본적으로 가설상의 개념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우리 내부에는 신체와 정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안내서, 이를테면 '청사진'이나 '조리법' 비슷한 것이 들어 있다는 흔한 믿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틀렸다. 오히려 DNA 분절에는 많은 경우 모호한 정보가 담겨 있으며, 이런 정보를 사용하려면 먼저 맥락에 따른 편집과 재배열을 거쳐야 한다."(56-7)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배아가 발달함에 따라 배아의 세포들이 분화한다는 것, 즉 그 세포들로부터 여러 성숙한 세포들에 전형적인 변별적 특징들이 발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분화가 끝난 정상적 세포들은 다능성을 잃는다. 뉴런이 된 세포는 계속 뉴런으로 남으며, 저절로 간세포나 다른 어떤 세포로 변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잠재력을 상실하는 이유에 관한 한 가지 설명은, 세포들이 성숙하고 분화하는 동안 다른 종류의 세포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58년에 프레더릭 스튜어드가 성숙한 식물에서 채취한 뿌리 세포 하나로부터 새로 완전한 식물이 생성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식물, 그리고 이후 밝혀진바 모든 생물의 분화된 세포들은 원래의 정보를 전혀 잃지 '않는다'. 이리하여 생물학자들은 우리 서재의 읽지 않은 책들 속 정보처럼, 모든 종류의 세포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분화된 세포들 속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7)


"염색체가 비활성화될 수 있다는 발견은 다능성과 분화의 수수께끼에 해답을 제시하는 듯했다. 특히 만약 염색체 중에서 (분자 전체가 아니라) 일부 '분절'만 비활성화될 수 있다면 말이다. 실제로 이는 자연이, 동물이 진화에서 생겨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 바로 다세포 동물의 성체가 자신이 살면서 발달시켰던 다양한 세포 유형을 자식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낸 방식이었다." "자연은 우리가 단 하나의 다능성 세포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 세포의 세포핵 속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는 정보의 다양한 조각들을 사용하여 모든 세포 유형을 '발달시킬' 수 있게 했다. 일단 어떤 유전자들은 활성화하고 또 다른 유전자들은 비활성화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 일부 줄기세포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줄기세포는 저런 방식으로 발달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X-비활성화를 연구함으로써 유전자 발현 '조절'이 발달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79-80)


2부 후성유전학의 기본 개념들


"일란성monozygotic(MZ) 쌍둥이는, 정자 하나와 난자 하나가 수정되어서 생기는 하나의 수정란(접합자)에서 발달하기 때문에 백 퍼센트 동일한 DNA를 공유한다."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이 후성유전적 상태도 서로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거가 보였다. 즉,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112-4)


# DNA 메틸화 :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을 가리키며, 유전자 발현을 중단시키는(다른 말로 하면, RNA 전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 히스톤 아세틸화 :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을 가리키며, 유전자를 '침묵'시키기도 하고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다만 차이를 만드는 것이 환경 요인일 때 '어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 속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 상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 표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119)


"환경이 후성유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발견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바로 환경 요인이 어떻게 '우리 내부로' 들어와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질문이다. 꿀벌의 경우 로열젤리 속 특정 단백질이 꿀벌의 몸속 호르몬 농도를 높인다. 이와 비슷하게 포유류의 경험, 그러니까 우리의 경험은 몸속 호르몬 방출을 부추기고, 그 호르몬 분자들이 DNA 근처로 이동해 후성유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환경은 감각기관을 자극함으로써 우리 내부 상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둘 다 우리 몸 속에 후성유전적 효과를 이끌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환경에서 생겨난 자극은 감각기관의 뉴런, 혈류 속 호르몬, 세포핵 속 유전자 등 여러 측면에서 생물학적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몸, 세포, 기관, 유전자가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가다."(122-3)


"아동기의 방임이 성인기의 불안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방임이 '어떻게' 불안으로 이어지는지 안다면 그 외에도 의지할 수단들이 많을 것이다. 발달상 결과의 '기계적' 원인을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N(방임)이라는 조건이 A(불안)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와 연관된다는 것을 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N에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N이 D를 초래하고, D는 W를 초래하며, W는 P를 초래하고, 이것이 A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앞선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개입하더라도 그 좋지 않을 결과를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식의 연쇄적 인과, 그러니까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초래하며 아주 긴 연쇄를 이루는 일은 생물계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에게는 이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바로 '캐스케이드cascade'다."(152)


"우리가 후성유전에 관해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세포마다 후성유전적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후성유전 메커니즘은 자연이 분화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마련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볼 안쪽에서 면봉으로 채취한 볼세포(협측 세포)의 DNA를 살펴봄으로써 인간 유전체를 검토했다. 우리의 모든 세포에는 동일한 유전정보가 들어 있으므로 유전정보에 접근하고 싶다면 '아무' 세포나 들여다보면 된다. 하지만 '후성유전정보'에 관해서 만큼은 볼 안쪽에서 가져온 세포와 뇌에서 가져온 세포가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포가 경험의 후성유전적 영향을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답은 뻔할 수도 있다. 이전 경험에 반응하여 자체의 구조와 기능을 변경함으로써 경험을 '학습할' 수 있는 세포일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세포에 이런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클까? 바로 뉴런이다. 어쨌든 학습에 관해서라면 뇌가 가장 좋은 출발점 아니겠는가."(180-1)


"2009년에 미니 연구실의 패트릭 맥가윈과 동료들은 세 범주의 사람들의 뇌에서 추출한 DNA 연구에 관해 보고했는데, 그 세 범주는 어렸을 때 학대(성적 접촉, 심한 신체적 학대 그리고/또는 심한 방임)를 경험한 자살자들과, 아동기에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자살자, 학대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으며 자살이 아닌 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대조군이었다. 중요한 것은 맥가윈과 동료들이 해마 세포를 검토했다는 점인데, 해마는 쥐들이 갓 태어난 시기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받는 경험이 영향을 미치는 바로 그 뇌 영역이다." "이 연구를 통해 생애 초기 경험이 사람의 후성유전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동기에 학대받은 자살자들은 사망 원인과는 무관하게 학대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GR 촉진유전자가 심하게 메틸화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오래전 나쁜 양육을 경험한 사람들은 뇌에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단백질들이 덜 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183)


"공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논리적으로 조립되고 용도에 딱 들어맞는 요소들을 갖췄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만약 어떤 생물학적 특징이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기능을 했을법한 잡동사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바로 자연선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기억이기 때문이다. 분화된 세포가 다른 세포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 이유는 후성유전 상태가 반영된 특유의 유전자 발현 프로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세포들이 분열할 때는 항상 그 특유의 후성유전 상태를 각자의 '딸세포'에게 전달함으로써 딸세포들도 모세포와 동일한 '유형'의 세포가 되도록 한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 세대 세포 속에 존재했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209-10)


"물론 후성유전적 표지가 운반하는 세포 '기억'과, 우리 뇌가 사실 정보와 자전적 정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심리적 기억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아마추어 실험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연선택은 세포분열의 맥락에서 정보를 보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잘 활용해 다른 맥락에도 그 시스템을 가져다 쓸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략은 자연선택에서는 워낙 전형적이어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 전략에 따로 굴절적응exaptatio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210-1)


"음식 섭취가 후성유전 상태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DNA를 메틸화하는 메틸기를 우리 몸이 어디서 얻는지 생각해보면 명백해진다. 메틸기는 바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온다. DNA 메틸화가 진행되는 동안 메틸기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은 s-아데노실메티오닌, 일명 SAM이라는 분자다. 궁극적으로 SAM은 메틸기 대부분을, 그러니까 DNA 메틸화 동안 DNA에게 내어주는 바로 그 메틸기들을 비타민 B2, B6, (엽산 또는 폴산이라고도 하는) B9, B12 그리고 콜린을 함유한 식품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섭취하는 식품에 이 영양소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메틸기 공급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 영양소들은 그 화학적 조성에 힘입어 몇 가지 생물학적 과정에 필요한 원재료를 공급하는데, 시리얼에 이 영양소들이 보충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콜린이나 엽산을 충분히 먹지 않으면 SAM 농도 저하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DNA와 히스톤 모두의 메틸화를 감소시킬 수 있다."(249-50)


"한 연구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겨울 기근에 노출된 사람들을 살펴보고 임신기를 전후해 일어난 후성유전적 사건이 그 인구 집단 내에 불균형한 비만율에 원인을 제공했을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태아의 성장을 촉진하는 특정 호르몬 생산에 관여하는 DNA 분절 하나를 분석했다. 기근기에 태내에 있었던 이들은 태아기에 기근에 노출되지 않은 동성의 형제자매와 비교해 이 DNA 분절의 메틸화가 상당히 감소해 있었다. 흥미롭게도 태아기 후반에 기근에 노출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형제자매들과 유사한 메틸화 프로필을 보였으므로 기근의 영향은 수정 시기와 가까운 더 이른 때에 확립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연구가 2000년대 중반에 실시되었으니 기근 노출은 그로부터 6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러니까 수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경험의 영향이 60세 정도 된 사람들에게서 감지되었다는 말이다(물론 영양 이외의 스트레스 요인들도 비만의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253-4)


3부 대물림의 의미와 메커니즘


"1880년대에는 (획득형질이 세대간에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이 널리 존중받고 있었는데, 이 무렵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이라는 독일의 한 생물학자가 대물림이 일어나는 '방식'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주장은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세포(정자/난자)와 체세포(우리 몸을 구성하는 나머지 모든 세포)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경계선을 뜻하는 '바이스만 장벽'이라는 개념으로 고이 모셔졌다. 이 장벽은 체세포에 생긴 변화가 장벽 너머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는 일을 방지함으로써, 획득된 형질이 유전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의 유전'의 예가 되려면 연습을 통해 커진 역도선수의 '근육'세포가 그 선수의 아들이 어떤 경험을 하든 상관없이 큰 근육을 갖게 만드는 방식으로 선수의 '정자'세포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바이스만이 보기에, 연습을 통해 누군가의 체세포에 일어난 영향이 그 사람의 생식세포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획득 형질의 유전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287-9)


"유전 물질은 경험 요인에서 영향받을 수 없다는 이 개념은 '경성' 유전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표현형은 반드시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널리 퍼진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개념은 20세기 초기 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 개념에, 새롭게 등장한 유전학 개념들을 끼워 맞춘 이른바 현대 종합설modern synthesis의 중심 믿음이다." "유전자 결정론이 불완전한 관념인 이유는 유전자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형은 유전자들이 더 넓은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 주변의 비유전적 요인들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전개된다." "적응에 유리한 특징은 언제나 특정 맥락 안에서 발달하므로, 맥락과 무관하게 자연선택이 독립적으로 유전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연선택은, 어떤 동물을 번식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 동물로 만드는 유전자-환경의 '조합'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세대는 조상이 물려준 원재료(발달 자원)로 그 형질들을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다."(290-3)


"적응에 유리한 형질들은 특정 환경 안에서만 발달한다. 한 번 생겨난 그 형질들은 이후 후손에게도 한결같이 정상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 '둘 다'의 세대 간 이동(세대 간 대물림)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의심의 여지없이 도움을 주므로 적응에 유리한 능력인 언어 능력을 생각해보자. 야생에서 자라 의사소통의 고립 상태에서 성장한 탓에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일부 아이들의 비극적인 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언어 능력은 의사소통할 줄 아는 타인이 존재하는 맥락 안에서만 발달한다. 따라서 이 능력의 발달은 경험 의존적이다. 그러나 평범한 환경에서는 언어 능력에 세대마다 한결같이 나타난다. 보통 아이는 언제나 언어적 상호작용을 제공하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길러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달기에 언어 능력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세대가 그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필요한 DNA와 사회적 요인 모두를 정상적으로 제공받기 때문이다."(295)


# 이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형질은 '획득 형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내장 속에 사는 어떤 미생물들은 건강 유지를 위한 비타민을 합성하고 지방 저장 방식을 조절하거나 채소의 어떤 성분을 분해한다. 또 병을 앓은 후 회복을 돕는 화학물질을 만들어준다고 알려진 미생물도 있다. 우리를 돕는 이런 세균들을 우리는 기생충이 아니라 '공생자symbiont'라 부른다." "이 생물들은 4만 종이나 되며 모두 합하면 수백만 개의 유전자를 품고 있어서 2만 개 정도인 '우리 자신'의 세포 속 유전자보다 훨씬 더 많다." "이 밀항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생리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외래 생물들이 소화계의 정상적 발달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실제로 우리의 내장과 장내 미생물은 함께 진화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세균 공생자들은 일부 내장 세포 속 '우리의' 유전자를 발현시키고, 내장 발달을 돕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미생물들은 우리의 DNA를 메틸화하거나 히스톤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후성유전적'이라고 간주해야 마땅하다."(301-2)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컷 쥐(즉 높은 LG[licking/grooming]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핥기와 털 고르기를 많이 받은 쥐들의 뇌 영역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만드는 DNA에 메틸화가 상대적으로 덜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핥기와 털 고르기는 암컷 새끼 쥐들에게 뇌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 수를 증가시키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증가한 수용체는 이 새끼 쥐들이 어미 쥐가 되었을 때 '자기 새끼'를 더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게 유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높은 LG 표현형은 다음 세대로 효과적으로 전달됐다."(308-9)


4부 숨은 의미 찾기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다른' 형태의 결정론들을 부추기는 마뜩찮은 방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행동 후성유전학과 관련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 발견 가운데 몇 가지가 생애 초기 경험의 장기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에, 아기가 초기에 한 경험이 반드시 그들의 특징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암시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 '접종'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경계해야 한다. 영양이 풍부한 섭식과 질 좋은 환경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의 발달은 결정론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성숙한 상태에서 우리가 지니는 특징들을 유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듯 후성유전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후성'유전적 결정론, 다시 말해 한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정론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362)


"오늘날 후성유전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연구 대상은 아마 암일 것이다. 이는 현재 과학자들이 암세포의 DNA가 일반적으로 정상 세포의 DNA에 비해 메틸화가 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생쥐를 이용한 여러 연구에서 비정상적으로 낮은 DNA 메틸화 정도가 종양을 일으키는 일과 과련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앤드루 파인버그에 따르면 후속 연구들은 〈줄기세포의 후성유전 상태 이상이〉 암의 원인을 설명하는 〈통합적 공통 주제〉이며, 유전체의 메틸화 변화는 〈암 초기의 모든 암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이 DAN '저'메틸화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직관과 반대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메틸화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DNA 분절이 메틸화되는가이다. 암과 관련해 말하자면, 우리 세포 속에는 과다 발현될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세포 증식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들어 있다. 이런 유전자들이 탈메틸화되는 것은 악성종양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377)


# 행동 후성유전학의 핵심 교훈

1. DNA 혼자 형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생물학적, 물리적, 문화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다).

2.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수정되어야 한다.

3. 후성유전 상태는 역동적이다(생물학적/정서적 경험 및 환경 요인과 상호작용한다).

4. 유전자에 관한 은유는 부정확하다(가령, 유전체는 청사진/조리법/컴퓨터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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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2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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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탄화수소 시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사용한 석유의 90%를 생산해야 했지만, 이것은 곧 미국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출국으로 남아 있을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유정 상당수를 폐쇄하는 동안, 이 지역의 잠재성을 아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생산될 석유가 향후 시장에 미치게 될 영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전후 페르시아 만에서 값싼 석유가 유입되면 1930년대 초 텍사스 동부의 석유 분출만큼이나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동시에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내 석유의 고갈을 우려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쟁 전의 규제를 타파하고, 특히 사우디를 위시한 중동에서 최대한 생산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런 방식은 공급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유럽은 미국을 포함한 서반구가 아니라 중동에서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미국의 매장량은 미국 자체의 수요와 안보용으로 보전된다는 의미다."(22-3, 32)


# 미국(&영국) 석유회사들의 행보

1. 소칼, 텍사코, 뉴저지, 소코니로 구성된 100% 미국계(영국의 영향력을 우려한 이븐 사우드 국왕의 의사도 반영된) 회사들로 아람코 합병 완결(1948. 12) → 적선협정 폐지

2. 걸프사(쿠웨이트 석유회사의 지분 절반 소유)는 유럽을 위시한 동반구 지역의 판매망 확보를 위해 로열더치 쉘(사실상 미국의 석유 이권 파트너가 된)과 장기 구매 협정 체결

3. 이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석유 이권 확보를 함께 추진하는 소련에 맞서 미국과 영국 정부가 협력. 앵글로-이란과 뉴저지, 소코니 간에 장기 공급계약 체결(1947. 9)


"중동의 석유는 전후 황폐화된 유럽을 복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였다. 석탄 생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저조했고 노동 인력마저 와해되었다." "가격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가가 1948년 전후 최고치를 기록하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중동산 석유는 미국의 걸프 만 표준가격 이하로 인하되었다. 이는 20년 전 아크나캐리 성의 가격 회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고, 전쟁 전 '현상유지' 체계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비록 그때까지는 유럽 경제가 석탄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에너지 수요 증가에 따라 석유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중동의 석유 생산량이 더욱 크게 느껴진 것이다. 1946년에는 유럽에 공급된 석유의 77%가 서반구에서 수입되었으나, 1951년에는 80%가 중동에서 수입될 것으로 에상되었다. 유럽의 수요와 중동 석유의 개발이 시기적으로 일치함으로써 강력하고도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졌다."(66-70)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에 걸쳐 석유회사의 산유국 정부는 결제 조건을 둘러싸고 수차례 교섭했고 그 결과 전후 석유 질서가 만들어졌다. 문제의 핵심은 자원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 즉 '렌트Rent'(지대)를 배분하는 데 있었다. 교섭의 성격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 동기는 동일했다. 석유회사와 석유회사에 세금을 부과하는 소비국 정부들만 이익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산유국에도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산유국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전부는 아니었다. 지배권도 똑같은 문제였다." "1950년 12월 30일, 아람코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새로운 협정에 조인했다. 핵심은 베네수엘라와 같은 '이익반분(50:50)'의 원칙이었다. 이후 걸프 석유는 쿠웨이트 석유의 동업자인 앵글로-이란의 회장 프레이저 경의 완강한 반대를 무마하고, 쿠웨이트에도 이익의 절반을 주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라크에서도 1952년 이익 반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란에서는 사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았다."(80, 106-7)


"1940년대 말, 이란은 경제 파탄으로 심한 빈곤과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 국민이 화합할 수 있는 대상은 외국인들, 특히 영국인에 대한 증오였다. 영국은 이란의 국토를 지배·착취하는 초자연적인 악마로 규정되었다. 이란 정치가들은 파벌에 관계없이 정적이나 반대자들을 비난할 때 영국의 첩자라고 매도했다. 집중적인 증오의 대상은 현대화 된 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였다." "1951년 4월 28일, 의회는 국유화법을 시행하라는 민중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앵글로-이란의 최고 반대 세력인 모사데그를 새로운 수상으로 선출했다. 국유화 법안은 국왕의 서명을 받아 5월 1일부로 효력이 발생했다." "1951년 9월 25일, 모사데그는 아바단 섬에 남아 있는 영국인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아바단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년간 대영제국의 기반 쇠퇴 중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동 지역 최초의 석유 이권이 최초로 무효화되었다."(112, 118-9, 131-2)


"1952년 말, 영국 정부는 이란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공동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미국에 타진했다. 방법은 쿠데타였다." "1953년 8월 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고, 모사데그는 체포되었다." "이란에서 운영될 컨소시엄 설립은 의미가 큰 전환점이었다. 외국인이 소유한 석유 이권이 교섭과 상호 합의에 의해 산유국으로 되돌려진 최초의 사례였다. 멕시코의 경우가 일방적인 국유화 조치였다면, 이란에서는 관게자 모두가 석유자원은 원칙적으로 이란 소유라는 것을 인정했다. 새로운 계약은 이란 국영 석유회사가 이란 내의 석유자원과 시설을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컨소시엄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이란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생산된 석유를 구입하는 일은 계약대로 컨소시엄이 맡았다." "한편 국왕은 석유 수입이 늘어나자 확고부동한 이란 국왕으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세계를 향한 야심을 가진 독선적인 군주로 변신했다."(138, 142, 152-5)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답은 석유다. 1956년 7월, 나세르의 운하 점거로, 석유 부족 사태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세브레에서 합의한 대로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고, 10월 30일 런던과 파리는 최후통첩을 내리고 운하 지대의 점거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소련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영국 공군이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했고, 이집트군은 황급히 시나이 반도를 거쳐 철수하기 시작했다. 수에즈 작전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선거 캠페인 때문에 남부 지역을 순회하던 중 이 소식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했다. 이든이 그를 배신하고, 동맹국들은 그를 교묘하게 속인 것이다. 그들의 경솔한 행동이 소련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포함한 광범한 국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이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로 들끓고 있는 중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166, 174-5)


"나세르가 운하를 봉쇄할 경우 발생할 석유 공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공동 계획을 수립하던 수개월 동안, 영국은 미국이 석유를 공급해줌으로써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든 긴급 석유 지원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석유는 워싱턴이 서유럽 동맹국을 단죄하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수에즈 위기가 영국의 쇠퇴를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영국은 더 이상 열강이 아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 따른 상처와 국내의 분열이 재정을 악화시켰고 신뢰감과 정치적 의지력을 잃게 만들었다. 이든은 수에즈 위기에 제대로 대처했다고 믿었다. 수년 후 「런던 타임스」는 앤서니 이든에 대해 '그는 영국이 강대국이라고 믿은 마지막 수상이자, 영국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님이 드러나는 위기에 대처한 최초의 수상이었다'라고 썼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묘비명인 동시에 대영제국의 묘비명이기도 했다."(175-6, 184-5)


"석유는 떠오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최고 관심사였다. 1950년대 초반 이래 중동에서는 '아랍 석유 전문가'의 모임이나 접촉이 수없이 시도되었다. 초창기 주요 의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제재였다.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석유 봉쇄부터 블랙리스트 공개, 협박 및 이권 몰수의 위협에 의한 국제 기업들에 대한 제재가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의제의 범위는 넓어졌다. 이집트는 석유 수출국이 아니었지만 나세르는 그 모임을 석유 정책 수립과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데 활용했다. 그는 주권 문제와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을 무기로 여론을 결집했고 석유와 페르시아 만 연안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1957년 봄, 이집트에서 열린 아랍석유전문가회의에서 대표들은 국내 정제 능력의 증강과 지중해로 가는 아랍 유조선단 및 파이프라인의 설치를 제안했다. 또한 중동 석유 생산을 관리해 수입을 증가시키고, 해외 석유 기업들에 맞설 수 있는 아랍 '국제기구' 혹은 '국제 컨소시엄'의 창설을 논의했다."(205)


"소련이 가격 인하 및 구상 거래 등으로 서방에 대한 석유 판매에 박차를 가하며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한 결과, 석유의 과잉 공급 사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소련은 농산품과 산업용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달러와 다른 서방국의 화폐가 필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석유 수출품은 그들이 서방에 판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경제적 조건만으로 소련의 석유 가격을 쉽게 제한할 수 없었다." "1959년처럼 기업들이 전체 공급 과잉과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격 인하라는 경쟁적 대응이었다. 그런데 무슨 가격이냐가 문제였다. 만약 시장가격만 인하한다면 석유업체들이 전체 손실을 흡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공시가격을 다시 인하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힘들었다. 처음 공시가격을 인하했던 1959년 2월, 아랍석유회의는 분기탱천했고 이에 따라 신사협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제 다시 그렇게 대응한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몰랐다."(221-2)


"1960년 8월 9일, 뉴저지는 수출국에 통고도 없이 중동산 원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14센트까지, 약 7%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산유국의 반응은 '유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 갑자기 자신들의 수입을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재정 상태와 국가 위신을 상당히 손상시키는 결정을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버렸다." "분노와 격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는 정치적 기회를 포착했다. 압둘 카림 카셈 혁명정부는 이라크가 중동 내에서 나세르의 질서에 종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공시가격 인하는 나세르가 여러 아랍위원회 및 아랍리그를 지배함으로써 석유 정책을 좌지우지해온 영향력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라크는 이번 사태를 비아랍 국가인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석유 수출국만의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는 촉매제로 이용하고자 했다." "9월 14일, 마침내 국제 석유회사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바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설립되었다."(225-7)


"석유가 석탄을 압도한 이유 중 하나는 환경 문제였다. 런던은 석탄에 의한 환경오염, 특히 가정의 개방식 연소에 의해 발생한 '살인적 안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짙은 나머지, 집으로 가는 길조차 찾을 수 없었던 운전자들은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잔디밭으로 차를 몰기도 했다. 안개가 수그러질 때면 런던의 병원들은 급성 호흡기 질환에 걸린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가정 난방용으로 석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연 지역'이 지정되었고, 의회에서는 석유 사용을 고무하는 '청정 대기법'이 입법되었다. 하지만 석유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가격이었다. 석유 가격은 계속 하락했으나 석탄 가격은 꿈쩍하지 않았다. 1958년 후로는 산업용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것이 석탄보다 저렴했다. 각 가정은 석유에서 전력으로, 그 후에는 천연가스로 연료를 바꾸었다. 석탄산업은 '생활의 불'이라는 콘셉트의 대대적 광고 전략으로 대응했지만, 석탄의 불씨는 식어가고 있었다."(260)


"1967년 6월 5일, 제3차 중동 전쟁인 '6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랍 국가들 간에는 석유를 무기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10년 이상이나 진행되어왔다. 이제 그 기회가 왔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6월 6일, 아랍국의 석유장관들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왔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리비아 및 알제리가 미국, 영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서독에 대해서도 수출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엄청난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6일전쟁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67년 7월, '아랍의 석유 무기화'와 '적대국가에 대한 석유 공급'이 원활해졌다.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쪽은 금수조치를 내린 국가들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석유 수익을 포기했지만 아무 효과도 얻지 못했다." "석유 부족 위험은 다소 쉽게 해결되었지만, 미 국무부는 위기관리를 주제로 한 보고서에서 공급원 다양화와 수송 능력 확충을 지적했다."(294, 297-8)


5장 주도권 쟁탈전


"1960년대 영국은 경제 불황에 빠졌다. 전후 영국의 최대 과제는 '대영제국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였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의 위상을 지켜주었던 것은 6,000여 명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 부대였다. 이를 유지하는 데는 연간 1,200만 파운드가 들었다. 영국의 석유회사들이 그 지역에 해놓은 엄청난 투자를 생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액수의 보험료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힐리를 움직인 것은 경제적 필요성만이 아니었다. 중동의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중동에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영국은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설립을 지원했는데, 이는 작은 나라들 몇 개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그들에게 방위수단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업이 끝나자, 영국은 1971년 완전히 짐을 싸서 페르시아 만을 떠났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르시아 만의 가장 근본적 변화이자, 1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안보 체계의 종식을 의미했다."(309-10)


"1969년 9월 1일,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한 후 마침내 석유산업에 손을 뻗쳤다." "리비아는 리비아 외에는 대안이 없는 옥시덴탈을 공략했다. 그들은 그 회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옥시덴탈은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긴 협의 끝에 리비아인들은 로열티와 세금 20% 증액이란 성과를 얻어냈고, 옥시덴탈은 계속 리비아에 남아 사업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저하던 다른 회사들도 9월 말까지는 모두 승복했다. 그러나 공시가격의 30% 인상과 리비아가 챙기는 이윤이 50%에서 55%로 증액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리비아의 계약은 산유국 정부와 석유회사 사이의 역학 관계를 결정적으로 역전시켜버렸다. 석유 수출국에는 리비아가 거둔 승리가 아주 고무적이었다. 석유의 실질적 가격 하락을 순식간에 반전시켰으며, 동시에 석유 수출국들이 주권과 주도권 장악을 위한 행동을 다시 추진하도록 자극한 것이다."(331-4)


# 산유국과 석유회사 간의 새로운 협의

1. 테헤란 협의(1971. 2. 14) : 산유국 정부의 최소 몫을 55%로 정하고, 석유 1배럴의 가격을 35센트 인상한다.

2. 트리폴리 협의(1971. 4. 2) : 석유 1배럴의 가격을 90센트 인상한다.


"곧이어 산유국들의 '소유권 참여' 문제가 불거졌다. 1972년 10월, 페르시아 만 국가들과 석유회사들 간에 '소유권 참여 협약'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현재 25%의 참여 비율에서 1983년까지 51%에 이르도록 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소유권 참여를 통해서든 전면적 국유화에 의해서든, 석유회사를 강력하게 통제하게 되면서 수출국들은 가격보다 더 큰 힘을 얻었다. 회사들은 새로운 공동전선을 구축할 능력이 없었다. 각 회사의 모국 정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미국에게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기보다 협조를 구하고, 그 나라들이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할 동기가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진적 반역 세력의 제압을 지원해달라는 오만의 요청에 주의를 기울인 채 지역 경찰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비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상승하는 석유 가격과 페르시아 만의 새로운 안보 체계라는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342-4)


"1973년 10월 6일은 유태교 최고의 신성한 축제일인 속죄일이었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킬 무렵, 이집트군 제트기 222대가 일제히 발진했다. 공격 목표는 수에즈 운하 동안東岸과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이스라엘 군사령부와 군사기지였다. 수분 후 국경 전역에 걸쳐 3,000문이 넘는 야포가 불을 뿜었다. 같은 시각, 시리아군 전투기가 이스라엘 북부 국경 지대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대포 700문이 포문을 열어 포탄을 퍼부었다. 제4차 중동전쟁, 소위 '10월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전쟁은 중동 전쟁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격전이었고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양 진영의 무기는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공급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중동만의 특성인 '석유'였다. 석유는 생산 삭감과 금소조치라는 형태로 무기화되었다." "당시 석유는 세계 산업 경제의 활력소가 되었고, 채굴되는 즉시 남김없이 송출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약간의 추가적인 수요 압박만 있어도 세계적인 위기가 닥칠 상황이었다."(348-9)


"10월 16일, 걸프 지역 국가(아랍 국가 5개와 이란)의 대표들은 쿠웨이트 시에서 만나, 비엔나의 야마니 숙소에서 끝내지 못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들은 석유회사의 답변을 더 이상 기다릴 태세가 아니었다. 그들은 조치를 취했다. 공식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된 5.11달러로 높여, 광분하고 있는 현물시장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하나는 가격 인상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가격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수출국이 석유회사와 협상하는 것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이제 수출국이 석유 가격을 결정했다. 석유회사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수출국은 기껏해야 거부권을 가지던 체제에서 수출국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지니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완료된 것이다. 가격 결정 후, 야마니는 쿠웨이트 시에 있던 다른 대표단의 한 사람에게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품에 대한 주인이 되었다〉라고 말했다."(378)


"10월 19일, 닉슨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 발표는 사전에 몇몇 아랍 국가들에게 전해졌기에 그들은 별다른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어느 쪽도 우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끝낼 수 없으므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리비아는 미국으로 가는 모든 석유 공급선을 차단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 원조에 대한 보복으로 점진적 삭감안을 철회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전면적 공급 중단을 의미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미 했거나 하고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석유가 하나의 무기로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경우 길거리의 폭도들에 의해 통치 기반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원이 공개됨으로써, 강경파 아랍 국가들이 미국에 행동을 취할 충분한 구실이 생긴 것이다."(383-4)


"1973년 12월 말, 테헤란에 모인 석유장관들은 격론을 벌인 끝에 이란 국왕의 (가격 인상) 입장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가격은 11.65달러가 될 것이고, 이 가격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식가격은 1970년 1.85달러에서 1971년 2.18달러, 1973년 중순에 2.90달러, 1973년 10월에 5.12달러, 그리고 이제 11.65달러로 인상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친 인상으로 가격은 4배가 되었다." "아랍 산유국의 석유 금수조치가 촉발한 석유 가격의 급등과, 석유 가격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산유국들의 인식은 세계 경제의 구석구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석유 수출국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1972년에 230억 달러이던 것이 1977년에는 1,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서방 공업국들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가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들은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높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무기 판매에 적극 공세를 펼쳤다."(410, 425)


"1970년대 초, 닉슨과 키신저는 '백지수표' 정책을 통해 이란 국왕이 원하는 대로 미국산 무기를 마음껏 살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핵무기가 아니라면 최신형 무기도 구매 대상에 포함되었다. 영국이 걸프에서 철수한 이후, 그 지역의 안전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지주支柱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지주에 해당했다. 미국 관리의 말대로라면, 두 국가 중 이란이 최대 지주였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해외 무기 판매의 절반을 이란이 차지했다."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는 하나의 통일된 기조가 있었다. 이란은 중동에서 주요한 안보 역할을 하는 동맹국이므로 국왕의 명예와 영향력을 손상시키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닉스, 포드, 키신저는 전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국왕을 편애했다. 1973년 국왕이 미국에는 석유 금수를 하지 않았고, 이란이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도 했다."(441-2)


"한편 열광과 도취, 오일 달러의 홍수, 석유 붐은 이란의 경제와 사회 체계를 파멸시키고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명백했다. 혼돈, 낭비, 인플레이션, 타락, 정치적·사회적 긴장의 심화, 그리고 이들로 인한 반체제 분위기의 확산이었다." "1976년 말, 국왕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를 직시했다. 이제 그는 돈이 구제책이 아니라 그의 제국이 안고 있는 많은 병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가격 온건 노선을 취했다. 1974년에서 1978년까지 OPEC은 소폭의 가격 인상을 두 차례 단행했다. 1973년 10.84달러에서 1975년 11.46달러로 올랐고, 1977년 말 12.7달러로 다시 올랐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므로 실질 가격은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978년의 석유 가격은 수출 금지 직후인 1974년에 비해 10% 하락했다. 석유는 더 이상 가격이 가격이 낮아질 수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만큼 치솟지도 않았다."(443-5)


"처음에 석유회사들은 공급 계약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쿠웨이트에 있던 그들의 과거 이권과 어느 정도 연계되었지만, 수출국과 수입국 정부의 다각화 정책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 고리는 약화되었다." "석유회사들은 이제 더 이상 지하 석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이권 소유자'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발견한 석유를 생산 출하하는 과정 중 일부의 권리를 받는 '생산 분배' 계약을 통해 단순한 '계약자'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계약은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와 칼텍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석유 탐광, 생산, 판매에 대한 '기술 및 인력 제공'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를 반영해 관련 기술용어들은 영어에서 산유국 언어로 바뀌었다. 산유국의 주권은 각국의 국내 정치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인정되었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물은 사라졌고, 석유회사들은 단순히 고용된 인부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생산 분배 계약이 세계 도처에서 일반화되었다."(454-5)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OPEC은 1970년대에도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했다. 1973년에는 자유세계 석유 생산의 65%를 점유했고, 1978년에는 62%를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지만 OPEC의 결속력이 약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 동기 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물가 상승 불안, 엄청나게 확대된 통화량, 투자가들의 열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적 석유 확보 사냥에 열광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 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던 곳들이다."(476-7)


"1970년대 중반, 이란은 석유 수입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일 달러는 터무니없는 현대화 계획에 남용되면서 낭비와 타락을 조성했고 경제 혼란과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불러왔다. 지방에서 도시로 인구 유입이 계속되어 농업 생산은 저하되고 식료품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물가 상승으로 국민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테헤란에 거주하는 중간 관리나 공무원은 월급의 70%를 주택 임차료로 지출해야 했다. 이란의 주요 기간시설들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개발이 지연된 철도는 마비 상태에 빠졌고, 도로는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국가 송전망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데다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테헤란 일부와 몇 개 도시는 정기적으로 단전되기도 했다. 단전은 산업 생산과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국민들의 분노와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이란 국민들은 국왕 체제와 성급한 현대화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힘을 얻은 주인공은 호메이니였다."(490)


# 1979년 1월 6일, 국왕의 해외 망명으로 팔레비 왕조 마감


"새로운 석유 파동의 1단계는 이란이 석유 수출을 중단한 1978년 12월 말 시작되어 1979년 가을에 끝났다. 이란의 생산 감소분은 다른 지역의 증산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세계 석유 수요를 일일 5,000만 배럴로 계산해도 부족분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 4~5%의 부족분이 어떻게 150%의 가격 상승을 초래했을까?" "이는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였다. 의심, 불안, 혼란, 공포, 비관 등의 감정이 혼란기의 행동을 지배했다. 사태가 완료된 후, 과거의 수치들을 정리해 수급 균형을 분석해보니 그러한 감정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백한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세계 석유 체계 전체가 붕괴된 것처럼 인식되었다. 실제로 제어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열정적 민족주의와 결부된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란 혁명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중 하나가 서구와 현대 세계에 대한 거부였음은 명백했다."(506-9)


# 2단계는 이란의 미대사관 점령 사태와 인질극(1979. 11. 4)이 야기한 석유 공급망 혼란 사태, 3단계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1) 발발에 따른 석유 수출 급감이다.


"이제 석유시장에서는 두 가지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생산자들끼리 가격을 서로 올리는 '추월'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요자들 간에 공급 확보를 위한 '쟁탈' 경쟁이었다. 공급을 중단당한 회사들, 즉 석유 구매자, 정제업자, 정부, 새로운 부류의 무역상, 메이저 회사들은 수출국들의 환심을 사려는 경쟁 속에서 서로를 해롭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도 새로운 공급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경쟁 심화로 가격만 상승할 뿐이었다." "서구 제국은 수요를 절감해 가격 상승을 막으려고 했지만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각국 정부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본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저가의 석유 확보였고, 다른 하나는 가격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급 확보였다. 한때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가지 목표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각국 정부는 저가격 확보를 정책 방향으로 삼다가, 국내 수요가 증가하면 안정 공급으로 선회했다."(514-7)


"드디어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다. OPEC은 1977년 말까지 자유세계 석유의 3분의 2 이상을 생산해왔다. 1982년 처음으로 비OPEC 국가가 OPEC의 산유량을 따라잡았다. 실제로 일일 100만 배럴 이상 앞섰고 이런 추세는 계속 증가했다. 심지어는 소련까지 유가 상승을 이용해 국내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탈피하기 위해 서방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계속 증가시켰다. 새로 개발된 석유, 특히 북해산 석유가 현물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체 석유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OPEC은 그들의 가격 구조 붕괴와 그에 따르는 더 큰 경제적·정치적 손실, 즉 권력과 영향력의 감소를 우려해서 가격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가격을 지키려면 생산 수준을 감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요는 회복되지 않았고, 비OPEC 생산량은 계속 증가했고, 현물시장 가격은 또다시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생산량 쿼터에도 불구하고 OPEC은 여전히 과잉 생산 상태였으며, 게다가 가격은 높았다."(562-4)


"1985년 독일의 본에서 열린 경제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각국 정상의 최고 관심사는 선진국들 간의 통상에서 문제가 되는 보호무역주의, 달러화의 가치, 일본의 경제 도전에 대한 대응 등이었다. 한마디로 '서-서西-西' 문제였다. 석유와 에너지 문제, 남북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960년대처럼 석유와 에너지는 더 이상 세계 경제 성장의 제약 요인이 되지 못했다. 전 세계의 석유 공급은 일일 1,000만 배럴 초과 상태로, 이는 자유세계 총소비의 20%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게다가 미국, 독일, 일본은 상당한 양의 전략 석유를 비축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안정 공급분'이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정상회담에서 석유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난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지도자들은 에너지 문제를 정상회담의 주요 주제에 포함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603-4)


"1986년 12월, 제네바에서 회합을 가진 OPEC 회원국들은 마침내 '진땀' 나는 상황에서 해방되었다. 석유 수출국들은 몇 개 유종의 복합 가격에 근거해 설정된 '기준 가격' 18달러에 동의했다." "비록 시장으로부터 반복적이면서 때때로 강도 높은 압력이 있었지만, 상당한 조정을 통해 합의된 내용은 1987년부터 89년까지 놀라울 정도로 잘 지켜졌다. OPEC의 가격은 정확하게 18달러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15달러에서 18달러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가격은 불안정해서 때로는 다시 급락할 듯 보이기도 했으며, 몇 번에 걸쳐 쿼터량 준수가 파기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기로에 직면할 때마다 산유국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OPEC 회원국들은 '진땀'의 고통을 잊지 않았고, 그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낮은 수준으로 구성된 새로운 석유 가격은 4년 전 시작된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동시에 물가 수준을 낮춰주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오랜 위기는 확실히 종식되었다."(637-8)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경제 제재 조치로 인해 세계 석유시장에서 400만 배럴의 원유 부족 사태가 발생했는데, 1873년과 1879년 석유 위기 시에 발생했던 부족분과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석유 가격의 급등은 공급 감소 때문만이 아니라 분쟁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었다. 후세인이 사우디의 석유 공급 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던 1990년 9월 말, 석유의 선물거래 가격은 배럴당 40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는 위기 발생 이전 가격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석유 위기와는 달리, 미국은 석유시장을 규제하지 않았고 공급 상의 왜곡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유국에 대해 증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 12월경에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생산 감소분만큼 증산이 이루어져 석유시장의 수급은 다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경기 침체로 석유 소비가 감소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654-5)


에필로그


"1990년대를 통해 석유는 대형 전략적 이슈로서의 의미가 약화되었다. 공급은 넘쳐났고, 가격은 떨어졌다.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고,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서서히 부상했다. 그러나 1997~98년, 통화의 흐름과 부동산 투기로 확대된 아시아 경제는 과열로 이어지더니 태국에서 발화한 경제 위기로 폭발했다. 결국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치명적인 결과를 전염시켰다." "국내총생산의 붕괴는 석유 수요의 급락으로 이어졌다. 석유 저장 탱크는 석유를 추가로 더 보관할 곳이 없을 때까지 가득 채워졌다. 1986년처럼 다시 한 번 석유 가격은 배럴당 10달러를 향해 추락했고 일부는 더 낮은 가격으로 곤두박질쳤다. 석유 수출국들은 1986년과 같은 혼란 상태에 다시 한 번 내던져졌다. 석유 가격의 붕괴는 독립국이 된 지 겨우 7년째 되는 러시아를 채무 불이행과 파산 상태로 이끌었다. 또한 외국과의 관계에서 고통스러운 재평가 과정을 거치도록 몰아갔다."(669-70)


"신경제와 인터넷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석유를 다시 중요하게 만들었다. 2003년에서 2007년 사이의 기간은 매우 의미 깊은데, 한 세대에서 최대의 경제 성장이 목격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인도, 중동 및 기타 신흥국의 높은 경제 성장과 괄목할 만한 소득 증가는 산업에 동력을 제공했고, 전기를 생산하고, 자동차와 트럭 등 급격하게 증가하는 운송수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급격한 석유 수요의 증가는 소비국들뿐 아니라 세계 석유산업 자체에도 놀라움을 선사했다. 앞서 수십 년간 석유 수요가 더디게 증가하자 석유산업은 새로운 석유와 가스 공급 시설에 대한 투자 수준을 상대적으로 낮추었다. 1990년대 후반과 21세기 초반 수 년 동안, 월스트리트는 석유산업에 대해 '제어되어야' 하고, 투자에는 매우 조심스럽거나 자제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석유산업은 늘어난 수요에 맞추어 새로운 생산 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674-5)


"효율성 문제는 석유와 기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중요하고도 공통적인 정책 목표다. 20세기를 이끈 산업사회는 현재 1970년대보다 두 배나 높은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고 있다. 미래 효율성 증대의 잠재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성장, 소득 증가, 인구 증가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많은 석유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다음 사반세기 동안에는 40% 혹은 그 이상의 석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술혁신이 그 숫자를 감소시킬 수 있는데, 그 답은 연구 개발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정책과 기술 거래 시장에 달려 있다(기술 혁신이 에너지 사용량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술로 인하여 2040년에는 2015년 대비 1백만 배 이상의 정보량을 처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이 높거나 낮거나 중간 어디쯤에 있거나에 관계없이, 석유는 앞으로도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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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샘 1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1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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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석유의 창세기


"본격적인 석유 비즈니스의 기원은 석유산업 탄생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조지 비셀이라는 사람의 우연한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비셀은 석유가 두통, 치통, 귀머거리의 치료부터 위경련, 기생충, 류머티즘, 수종증의 치료에 이르기까지 의약품 및 민간요법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말과 노새의 등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약은 '세네카 오일'이라고 불렸는데, 그 치료법을 백인들에게 전파했다고 알려진 레드 자켓이라는 세네카 인디언족의 추장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비셀은 이 검고 끈끈한 액체가 가연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석유 샘플을 보는 순간, 그는 이것이 의약품이 아니라 광원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상품화함으로써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셀은 다른 투자가들을 설득해 투자 그룹을 만들었고, 1854년 말에 예일 대학의 실리만 교수에 석유를 광원이나 윤활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 분석해달라고 의뢰했다."(30-2)


"실리만은 석유 분석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연구가 당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이라 약속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힘으로써, 투자가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보고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3개월 후 연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석유 증류 제품을 광원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예기치 못했던 성공적 결과'를 보고서에 담았다." "어느 역사가가 평가했듯이, 실리만의 연구는 석유산업의 태동기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석유의 새로운 용도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일소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석유는 서로 다른 끓는점에서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다양한 물질로 분류分溜될 수 있고, 이 분류 물질 중에는 램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기름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당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간단하고 값싼 공정을 거쳐 아주 가치 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원료 물질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해주는 많은 발견했다〉고 언급했다. 이제 다음 단계의 과제는 과연 석유가 충분히 존재하는지의 문제였다."(33-4)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어나 1860년 45만 배럴에서 1862년에는 300만 배럴에 이르렀다. 그러나 판로는 빨리 개발되지 않아, 1861년 1월에 배럴당 10달러였던 석유 가격이, 1861년 말에는 10센트로 폭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실베이니아산 석유는 싼값 덕분에 램프용 연료 시장에서 석탄유와 다른 램프용 연료를 몰아내고 단기간에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에도 불구하고 석유 붐은 멈출 줄 몰랐고, 오히려 석유산업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지방의 송진 공급이 중단되자 송진에서 추출하는 값싼 램프용 연료인 캄펜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산 석유로 만든 등유는 재빨리 그 자리를 대체했고, 북부의 석유시장은 훨씬 더 빨리 발전했다. 전쟁은 이보다 훨씬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남부가 분리되자 북부는 더 이상 면화 수출로 외화를 벌 수 없었는데, 유럽으로의 석유 수출이 늘어나 손실을 보전하게 된 것이다."(47)


"미국에서 초창기 석유산업의 골격을 형성하고 석유 생산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영국 관습법에 기초를 둔 '포획법규'였다. 사냥 중 사냥감이 타인 소유지로 옮겨 갔을 때, 그 땅의 소유자만이 잡을 권리가 있다는 규정이다. 같은 논리로 땅의 소유자는 그 땅 아래에 있는 무엇이라도 파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동일한 유전지대에 있는 땅 소유자들은 석유를 많이 생산해서 인근 유정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의해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을 단시간에 퍼 올리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생산량과 가격이 불안정해졌다. 석유는 사냥감이 아니었다. 포획법규는 유전의 궁극적 생산량을 감소시키는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 규칙의 이면에는 다른 효과가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석유산업에 참여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한 것이다. 또 생산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더 넓은 판로가 개척되었다."(50-1)


"'새로운 불빛'인 등유를 구입하려는 외국의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석유를 유럽 지역으로 수송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수송 도중에 등유가 폭발하거나 화재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두려워했다. 1861년 마침내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선주가 간신히 선원을 모집해 석유를 선적한 배를 출항시켰다. 그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함으로써 석유의 국제교역 시대가 시작되었고, 미국의 석유는 빠른 속도로 세계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석유산업은 초기부터 국제적 비즈니스로 자리 잡았다. 해외시장을 개척하지 못했다면 미국의 석유시장은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은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연료로 사용하던 동물성 유지나 식물성 기름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 세대 이상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산 석유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미국의 등유 수출량은 전체 석유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달했고 전체 수출품 중 4위를 차지했다."(88-9)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은 전기 조명 개발에 착수했고, 2년 만에 내열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전기는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전력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석유산업을 위협했고 특히 '올드 하우스'(스탠더드 오일의 별칭)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생산, 정제, 파이프라인, 저장 시설 등에 엄청나게 투자했던 스탠더드오일은 석유의 주요 시장이던 조명 시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조명 시장이 석유 수요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갈 무렵, 석유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났다. 일명 '말 없이 달리는 마차'라 불린 자동차의 출현이었다." "1905년,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증기기관차와 전기기관차와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석유산업은 휘발유 시장뿐 아니라 공장, 기차, 선박 등에서 사용되는 보일러용 연료 소비 증가로 또 하나의 시장을 갖게 되었다. 석유의 미래를 우려했던 문제점들은 매우 빠르게 해결되었다. 오히려 '늘어나는 석유 수요를 공급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126-9)


"한편, 걸프 연안과 미국 중부에서 유전들이 속속 발견됨에 따라,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스탠더드오일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료유와 휘발유의 지속적인 소비 증가와 속속 발견되는 유전 덕분에, 윌리엄 멜론처럼 어떤 다른 회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경쟁자들이 생겨났다. 물론 스탠더드오일의 판매량도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더드오일의 시장점유율은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1880년에는 미국 전체 정제 능력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1911년에는 60~65% 수준으로 축소됐다. 멕시코 만 연안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미국 원유 시장에 대한 스탠더드오일의 지배력과 가격 결정자로서의 역할도 대폭 축소되었다. 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전이 발견됨에 따라 국제시장의 지배력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전역에서 스탠더드오일과 그의 무자비한 사업 관행에 반대하는 정치적·사법적 공세가 진행되고 있었다. 스탠더드오일은 사면초가에 처했다."(151-3)


"1911년 7월 말, 드디어 스탠더드오일은 몇 개의 사업 주체로 분할되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지주회사였던 뉴저지 스탠더드오일로, 총 순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나중에 엑슨Exxon이 되어 계속 주도권을 행사했다. 두 번째로 큰 것이 순자산의 9%를 보유한 뉴욕 스탠더드오일로, 나중에 모빌Mobil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은 쉐브론Chevron이 되었고, 오하이오 스탠더드오일은 소하이오Sohio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영국 석유BP의 미국 판매회사가 되었다. 또한 인디애나 스탠더드는 아모코Amoco가 되었고, 콘티넨털오일은 코노코Conoco가 되었으며, 애틀랜틱은 아르코ARCO의 일불가 되었다가 훗날 선Sun사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들은 분리 독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서로의 상권을 존중했고 옛날의 영업 관계를 지속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선에서 뛰던 사람들은 회사 분할로 인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177-8)


"이에 앞선 1907년, 쉘과 로열더치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져 로열더치 쉘 그룹이 탄생했다. 4년 전에 설립한 최초의 공동판매 회사는 '브리티시'를 앞에 넣어 '브리티시 더치'라 불렸는데, 이제는 '로열더치'라는 이름이 앞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로열더치의) 디터딩이 마침내 승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1907년에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스탠더드오일이 지배해왔던 세계 석유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로열더치 쉘이 거대한 회사로 부상해 스탠더드오일의 시장 지배력을 위협했다. 1910년 디터딩은 〈스탠더드오일이 3년 전에 우리를 쓰러뜨리려 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스탠더드오일은 가격 인하와 더불어 남부 수마트라에서 석유 이권을 따내기 위해 네덜란드 자회사를 설립했다. 로열더치 쉘이 스탠더드오일에 반격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으로!'였다. 이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로열더치 쉘의 슬로건이 되었다."(204-7)


"쉘과 로열더치의 통합으로 경영권을 잃은 마커스 새뮤얼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곧 양사의 통합이 러시아 석유에 크게 의존했던 쉘에 매우 다행스러운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03년 바쿠에서 석유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했는데, 이는 러시아 전체를 뒤흔들었고 결국 러시아의 첫 번째 총파업이 될 노동쟁의의 물결을 일으켰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정부는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산 석유에 크게 의존하던 새뮤얼과 로스차일드사, 다른 기업들의 걱정은 당연했다. 러시아 정부는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를 느꼈고, 다른 많은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국외에서 기회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국론을 통일시키고 통치자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나라 밖에서 공동의 적을 설정했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그들도 적을 잘못 선택했다. 일본을 선택한 것이다."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고,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몰살당하면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208-11)


"러시아 석유산업에 타격을 준 것은 정치적 혼란이나 인종 문제, 노동운동으로 인한 긴장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산 석유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대규모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뒤떨어진 굴착 시설과 생산 설비는 생산 능력을 저하시키고 바쿠 주변의 유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으며 결국 고갈을 재촉했다. 이는 급격한 가격 상승을 야기했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신규투자 축소로 이어졌다. 러시아 정부는 비어가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어리석게도 국내 수송 요금을 올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세계 시장에서 러시아산 석유의 가격이 더 올라갔고 그 결과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바뀌면서, 러시아산 석유는 다른 나라의 석유 공급에 문제가 있을 때만 필요한 잉여 생산물로 전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석유산업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에서 새로운 석유 공급원이 출현했으니 바로 루마니아였다."(214)


"러시아는 186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합병에 나섰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인접국들을 정복해 부동항을 얻고자 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인도와 통하는 요로要路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영국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페르시아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갈 상황에 처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페르시아와의 관계에서 경제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열강들을 배제하고 페르시아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다아시와 그의 석유탐사 계획은 영국의 정책을 돕는 역할을 했다. 영국이 석유 이권을 차지한다면 러시아와 세력 균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영국은 이 사업을 지원했다." "1901년 5월 28일, (뇌물에 넘어간) 페르시아 국왕 무자파 알딘은 역사적인 계약에 서명했다. 다아시는 페르시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 60년 동안 석유 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221-3)


"영국 정부 내에서는 다아시가 외국 자본에 사업 전체를 팔아넘기거나 이권 전체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열강들 사이에서 자국의 위상과 같은 전체적 전략과 고도의 정치적 문제였다. 외무부가 가장 우려한 것은 러시아의 확장주의와 인도의 안전보장 문제였다." "해군부가 안고 있는 문제는 좀 더 구체적이다. 즉 영국 함대의 연료로 쓸 중유 공급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 해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전함들은 당시 석탄을 사용했고, 석유는 작은 선박에만 사용되었다. 석유가 소량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의 부존량이 영국 해군력 유지에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석유가 충분하게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시 석유 연료를 선호한 해군부의 인사들조차 석유가 대규모로, 또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까지는 보조 연료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다아시의 페르시아 사업은 지원 받을 가치가 있었다."(229)


"1907년 영·러 협정의 일환으로 영국과 러시아 양국은 페르시아를 분할해 각기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합의했다. 이런 합의는 양측 모두에게 이유가 있었다. 즉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와 1905년 혁명의 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있어서 영국과 화해하기를 희망했다. 영국은 인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우려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독일의 중동 진출을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 1907년 협약에 따라 페르시아 북부는 러시아 영향권 아래에, 남부는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중부는 중립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중부 지역에 새로운 굴착 현장이 있었다. 테헤란 주재 신임 영국 공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페르시아를 양분한 이 협약은 '외국인에 대한 기존의 반감에 더욱 불을 댕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페르시아 분할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 간에 결성된 '3국 협상'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3국은 그로부터 7년 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터키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237-8)


"피셔 제독의 제일 목표는 영국 해군을 현대화해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산업화를 이루며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제국이 자신들의 적이 될 것임을 누구보다 먼저 확신했다. 그는 독일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경우, 석유 연료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석탄은 선원의 4분의 1이 동원되어 연료를 선적해야 하지만, 석유는 이런 인력의 투입 없이도 공해상에서 연료 재충전이 가능했다. 게다가 석유는 석탄 사용에 따른 피로감, 시간, 배출 가스, 불편성을 상당 부분 줄여주었고, 회부의 수를 절반 이상 줄여주었다. 석유의 장점은 가장 위험한 순간인 전투 중에 가장 잘 발휘되었다. 〈석탄 함정에서는 석탄이 소진되어가면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심지어 함포 요원까지 투입되어 석탄을 창고에서 화로로 옮겨야 했다. 전투 중 가장 위험한 순간에 전투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처칠은 회고했다. 석유는 모든 함정의 화력을 증강하고 속력을 높여 주었다."(247-8, 254)


"영국의 '운명을 건 돌진'은 당연히 로열더치 쉘과 앵글로-페르시안의 극심한 경쟁을 야기했다. 물론 앵글로-페르시안이 명백하게 불리했다. 재정 기반이 약한 앵글로-페르시안이 쉘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파트너는 영국 해군부였다. 그린웨이는 해군부에 20년간의 연료 공급 계약을 신청하고 재정적 위기에서 회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린웨이가 피셔의 위원회와 영국 정부에 증언한 것은, 정부의 도움 없이는 앵글로-페르시안이 쉘에 흡수되어 소멸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쉘은 독점적 위치에 설 것이고 영국 해군에게 독점가격을 요구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새뮤얼이 유태인이고 디터딩이 네덜란드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쉘이 로열더치에 의해 관리되고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기 쉽다는 것이다." "여러 부처들이 그린웨이의 주장에 지지를 보냈다. 쉘의 위협과 앵글로-페르시안의 애국심에 대한 그린웨이의 반복적인 주장에, 외무부는 찬성 입장을 고수했다."(258-60)


"적당한 가격에 필요한 양을 확보하기 위해서, 해군부는 석유 공급원을 소유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석유를 비축하면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시장 관리 능력도 커질 것이다. 또한 해군부는 원유 정제 능력을 갖추고 잉여분을 처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처칠은 〈석유의 품질, 정제, 도입선, 도입 경로 및 유전에 있어 어느 것 하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석유 공급을 위한 관건은 사업의 다양화다〉라고 말했다." "1914년 6월 17일, 처칠이 하원에 제출한 의안은 두 가지 대목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정부가 앵글로-페르시안에 220만 파운드를 투자하고 대신 주식의 51%를 소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의 이사회에 이사 두 명을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민간 기업의 정부 소유를 주장한 처칠의 제안은,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를 매입했던 것을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석유 의안은 의회 내부의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차이로 통과되었다."(261-5)


2장 세계의 세계에 대한 투쟁


"1915년까지는 영국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받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1916년 초에 변화가 생겼다." "영국에서 석유 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선박에 의한 수송이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의해 영국 본토로 들어오는 모든 석유와 식량은 물론 기타 원자재의 공급이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유 위기를 초래한 또 다른 원인은 석유 수요 급증이었다. 전시에는 전방이나 후방이나 석유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유 부족을 우려한 영국 정부는 일종의 배급제를 도입했으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석유 위기가 다가오자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들은 이미 석유 공급 체계를 긴밀하게 통합해놓았다. 1918년 2월에는 연합국 석유회의가 발족되고 공동출자를 통해 석유 공급과 유조선 운행을 일원화해서 관리했다. 회원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이었다. 이로써 연합국과 그들의 군대에서만큼은 보급물자 배분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285-8)


"1918년 11월 11일,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지만, 이제 석유는 전후 국제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새로운 유전을 얻기 위한 경쟁은,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며 덤벼드는 기업가나 진취적인 사업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석유는 국가전략의 핵심요소로 등장했다. 따라서 정치가들과 관리들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 이상으로 싸움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전후 세계는 경제적 번영과 국력 신장을 위해 방대한 석유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갈등의 초점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집중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에 자극받아, 메소포타미아는 석유 이권을 따내려는 국가들과 석유 사업가들의 복잡한 외교적, 상업적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수입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터키제국 때문에 싸움은 더욱 격해졌다."(299-300)


"중동에서 석유 이권을 기대했던 것은 유럽계 회사들만이 아니었다. 미국계 회사들도 전 세계에 걸쳐 새로운 유전 개발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도 중동으로 눈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석유가 갑작스럽게 고갈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실질적인 강박관념으로 변해, 미국의 석유업계와 정부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1920년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휘발유 없는 일요일', 전쟁 중에 부각된 석유의 엄청난 중요성 등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석유 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영국과의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미국 정부와 석유업계는 미국이 재빨리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영국이 공격적 정책을 추진해 세계 도처의 석유자원을 선점할 것이라 믿었다. 정부는 서둘러서 미국 내 석유회사가 해외의 공급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은 '문호 개방', 즉 미국의 자본과 기업에 대해 동등한 진입을 허용하라는 것이었다."(315-7)


# 적선협정赤線協定(1928. 7. 1)

페르시아와 쿠웨이트를 제외한 중동의 모든 유전 개발을 동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수행하기로 한 협정. 동업자로서 로열더치 쉘, 앵글로-페르시안, 프랑스(CFP), 미국(근동개발회사)가 각각 23.75%, 터키 석유회사의 굴벤키안이 5%의 지분을 부여받았다.


"자동차 시대의 초창기, 많은 미국인들은 휘발유라는 '새로운 연료'가 바닥나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1917년부터 1920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새로운 유전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권위 있는 지질학자들은 미국의 석유 생산이 머지않아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을 했다. 석유 정제업자들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요 증가로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공급 부족이 예상되면서 가격 상승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석유탐사 기술도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 이전까지 석유산업에 적용되는 지질학은, 지표 상에 관측되는 지형의 지도를 작성해 유전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내는 '지표지질학'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0년 무렵에는 '지표지질학'으로 찾아낼 만한 유전이 거의 없었다. 즉 눈에 보이는 유전 후보지는 이미 모두 발견되었던 것이다. 유전 탐사자들은 지표 아래의 지질 구조를 통해 석유 부존 가능성을 알아내야 했다. 새로 등장한 학문인 '지구물리학'이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355)


"20세기 초, 미국을 제외한 서반구의 석유탐사는 대부분 멕시코에 집중되었고, 멕시코는 곧 세계 석유시장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갈등은, 후에 세계 각지의 정부와 석유회사 간에 벌어진 본질적이고도 장기적인 싸움의 한 표본이었다. 쟁점은 두 가지로, 합의의 안정성과 주권 및 소유권의 문제였다. 누가 석유의 이익을 차지할 것인가? 멕시코 측은 오랫동안 잊혔던 원칙을 재차 주장했다. 이 나라에서는 1884년까지 지하 부존자원은 모두 군주에 귀속되며,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국가가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혁명이 추구한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지하자원을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1917년 헌법 27조에 명문화되었는데,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다. 멕시코 측은 석유의 소유권을 되찾았지만 외국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개발하고 판매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투자자들은 안전한 계약과 수익 전망 없이는 개발 위험과 비용을 부담할 의사가 없었다."(395)


"한 석유회사는 멕시코 내에 있는 미국 소유의 석유 매장 지역을 보존하기 위해 본국 정부에 군사적 개입을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멕시코가 외국 부채를 갚기 위해 수입을 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어서,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미국의 주요 은행들은 멕시코의 석유 수입이 늘어나 자신들의 부채를 상환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은행가들은 미국 석유회사에 대항하는 멕시코 측을 지원했고, 석유회사들이 요구하는 군사적 개입과 응징조치에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멕시코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한 장소, 야만적으로 무질서한 계약을 꾸미는 나라, 전략적인 자원 유입에 위협을 주는 나라였다. 반면 멕시코가 미국과 미국의 석유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외국 세력의 착취와 침략, 주권 침해의 고착화, 강한 힘을 가진 '양키제국주의'였다. 석유 회사들이 불안과 위기를 느끼면서 기업 활동이 빠른 속도로 후퇴했고, 멕시코는 곧 세계 석유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395-6)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은 석유사업가들이 대거 베네수엘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멕시코와는 달리 베네수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었는데, 후안 비센테 고메스 장군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교활하며 탐욕스러웠던 이 지배자는 27년 동안 베네수엘라를 통치하며 자신의 재산을 불려나갔다." "고메스 정권 아래의 베네수엘라는, 멕시코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정치적 예측 가능성, 행정적·재정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전 개발은 맹렬한 속도로 추진되었다. 1920년 140만 배럴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1929년에 이르러 1억 3,700만 배럴에 달했고, 총생산량 측면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해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76%에 달했으며, 정부 세수의 절반을 차지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로열더치 쉘의 가장 큰 단일 석유 공급원이었다. 또한 1932년에는 페르시아와 미국을 제치고, 영국의 단일 최대 공급원이 되었다."(396-7, 400-1)


"아크나캐리 회담이 열린 때는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대공황이 시작되기 1년 전이었고, 대드 조이너가 동부 텍사스에서 석유를 발견하기 2년 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세계 석유시장은 미국, 베네수엘라, 루마니아, 러시아에서 유입되는 석유로 넘치고 있어서 '파멸을 초래하는 경쟁'이 벌어질 징후가 보였다. 특히 러시아 석유가 범람하자 석유업자들은 즉시 아크나캐리로 몰려왔다." "아크나캐리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었다. 산업 합리화, 효율성, 중복 배제 등은 유럽과 미국에서 그 시대의 가치로 여겨지고 목표가 되었다." "존 록펠러와 헨리 플래글러 시대에는 '자유로운 경쟁'이 싸워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독점함으로써 상업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젠 다른 회사를 항복으로 몰고갈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회사도 없고, 정치 현실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따라서 아크나캐리에 모인 석유업자들의 목적은 정복보다는 협약이었다."(442-3)


"아크나캐리 문서의 핵심은 '현상유지As-Is' 협약이다. 이 협약에 가담한 석유업체들은 각 회사의 1928년도 시장점유율에 입각해, 총수요를 백분율로 나눈 값으로 시장별로 자신의 몫을 할당받았다. 총수요가 증가하면 업체들도 실제 생산량을 바로 증가시킬 수 있었지만, 백분율로 나눈 몫은 항상 똑같이 유지해야 했다. 이 외에도 각 업체는 비용 절감을 위한 설비 시설 공유에 동의하고, 새로 정유소와 그 외 시설들을 설립할 때에는 신중히 검토하기로 했다. 또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업체가 시장에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판매 가격은 미국 걸프 연안의 가격에 수송비를 합산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초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런 공급 방식은 추가 이윤을 의미했다." "몇 달 후, 이 협약의 주체들은 석유 생산량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하는 데 동의했다. 협약 업체들이 배당된 시장 지분 이상으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경우는, 가외 생산량을 타 연합 업체에 팔 수 있을 때뿐이었다."(446-7)


"'현상유지' 협정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석유 공급 과잉에 이어진 공황에 맞서기 위해서뿐 아니라 유럽과 그 밖의 지역(대표적으로 소련을 겨냥한)에서 출현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에 맞서자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1930년대 석유업계에 미치는 정치적 압력의 형태는 다양했다. 정부는 수입 할당을 매기고, 가격을 정하고, 외환 거래에 제한을 가했다. 또 업계가 잉여 농산물에서 뽑은 알코올을 자동차 연료에 혼합하도록, 또 기타 석유 대체품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정부는 막대한 신규 조세를 부과했고, 상호 무역 협정과 보다 큰 정치적 목적을 연계하기 위해 석유 수출입 거래를 통제하는 데 개입했다. 정부는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한 국내 시설에 투자하도록 강압하면서 이윤 송금을 봉쇄했고, 업계에 대해 일정한 재고분을 유지하라고 주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1930년 후반기는 공황시대의 끝인 최악의 시기였기에, 주요 석유업체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정부 개입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454-5)


"한편, 경기 침체의 수렁 속에서 '석유는 더 이상 황금이 아니다'란 사실을 깨달은 페르시아의 레자 팔레비는 격노했다. 앵글로-페르시안의 석유 로열티는 수출 소득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정부 수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인해 앵글로-페르시안이 내는 로열티가 1917년 이래 최저로 떨어졌다. 1932년 11월 6일의 각료회의에서 팔레비 왕은 돌연 앵글로-페르시안의 석유 이권을 일방적으로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1933년 4월 말, 마침내 영국 정부와 국왕 간에 협약이 이루어졌다. 석유 이권은 4분의 3으로 감소되었고, 페르시아가 유가 변동과 관계없이 톤당 4실링의 고정 로열티를 보장받았다. 동시에 페르시아는 이 회사의 주주들에게 실질적으로 지급되어 왔던 타 지역 이윤의 20%를 받게 되었고, 다른 사태와 무관하게 연간 최소한 75만 파운드의 보상을 약속받았다. 한편 석유 이권 인가 기간은 1961년에서 1993년으로 연장되었다. 결국 앵글로-페르시안의 본질적인 입지는 유지되었다."(455-9)


"1939년 9월, 유럽의 전쟁 발발 이후 몰수당한 미국의 석유회사 측과 미 정부 간의 이해는 심하게 엇갈렸다. 루스벨트 행정부에게는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나 기타 미국 회사들에 대한 자산 보상보다는 국가 안보가 중요했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를 반구형 방어 체계에 묶어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멕시코산 석유 공급에만 관심을 가졌지, 실질적으로 누가 이곳의 공급권을 쥐고 있는지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멕시코의 석유 자산 몰수는 볼셰비키 혁명이나 1911년 스탠더드 트러스트 해체 이후 업계가 겪었던 고통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외국 회사와 멕시코 정부의 타협 과정은 협상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었다. 1938년 국유화는 혁명이 얻어낸 커다란 승리였다. 멕시코는 석유산업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게 되었고, 멕시코 석유회사는 국영 석유회사 중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회사로 부각되었다. 멕시코가 미래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468-70)


"쿠웨이트에서의 석유탐사는 1935년에 시작되었고, 1936년 들어서야 비로소 지질 관측이 실시되었다. 쿠웨이트 동남부 버간은 가장 유망한 지역으로 관측되었고, 1938년 2월 23일 놀랄 만한 양의 석유가 발견되었다." "반면 이웃 사우디아라비아의 탐사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놀랄 만한 뉴스가 터졌다. 담맘 지역 7호 시추정의 지하 4,727피트 지점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담맘에서 시추를 시작한 이래 거의 3년 만의 일이었다. 사우드 국왕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돈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이제 왕국의 존속은 순례자 수의 변동과는 무관해졌다." "1933년 협정의 부속 비밀문서에 따라 카속사는 1939년 5월 31일 우선권을 행사하여 44만 제곱마일에 달하는 절대적 이권 지역을 확보했다. 무려 미국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물론 그만한 대가가 지불되었다. 사우디의 재정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소칼은 거듭해서 차관을 공여했는데, 총규모가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504-5)


# 카속사(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mpany)는 미국 텍사코와 소칼의 합작 기업으로,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 기업인 아람코의 전신이다.


3장 전쟁과 석유


"1930년 후반 일본의 석유 생산은 국내 소비량의 불과 7% 정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수입에 의존했는데 80%는 미국에서, 10%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수입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직후인 1930년대 초, 일본 정부는 국책 수행에 협조하도록 석유산업을 통제하기로 했다. 1934년 일본 군부는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던 국내 업자들의 지지를 얻어 '석유산업법'을 통과시켰다. 외국 기업은 의무적으로 정상 영업에 필요한 재고 수준을 넘어서는 6개월분을 비축해야 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국내 자본으로 석유 정제 사업을 육성하고, 외국 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식민지인 만주에서 석유사업을 독점할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그 목적은 구미 기업의 배제였다." "워싱턴과 뉴욕, 런던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면적인 혹은 부분적인 대일 금수조치를 취하고 일본에 원유 공급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514-6)


"진주만 공격을 계획한 야마모토는 러일전쟁 당시, 즉 1904년 뤼순 항 기습에서 공격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진주만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이 전쟁을 결의한 최대의 동기는 석유였다. 그런데 하와이 작전에는 석유가 빠져 있었다. 야마모토와 참모들도 석유에 관한 한 미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오하우 섬에 있는 석유 저장 기지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석유 기지에 대한 공격은 작전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심각한 반격을 유발할 수 있는 전략적 실패였다. 하와이에 있는 석유는 전부 미국 본토에서 운반된 것이었다. 일본군이 미국 함대의 석유 비축 기지와 저장 탱크를 파괴했다면 미국 태평양 함대의 모든 선박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진주만에서 격침된 군함에 그쳤다. 만약 석유 비축 기지가 파괴되었다면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 석유를 공수해야 했다."(545-6)


"1937년에서 1938년, 이 게 파르벤은 하나의 독립된 기업이라기보다는 독일 산업의 한쪽 팔이었다. 게다가 철저히 나치화 되어 있었다. 회사의 3인자를 포함해 모든 유태계 임직원들이 제거되었고, 반反나치의 칼 보쉬 회장도 물러났다. 반면 나치당에 속해 있지 않던 여타 이사들은 서둘러 입당원서에 서명했다. 4개년 계획의 야심찬 공약들은 매우 웅대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내실 있는 합성연료 산업을 완성하지 못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9월 1일까지, 수소첨가법 설비 14개가 완전 가동 중이었고 6개가 추가로 건설되고 있었다. 1940년 합성연료 생산량은 하루 7만 2,000배럴에 달하여 총석유 공급량의 46%를 차지했다. 합성연료는 군사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의미심장했다. 베르기우스법이라고 불리는 수소첨가법으로 생산된 합성연료는 독일의 전체 항공 휘발유 수요의 95%를 점했다. 만약 합성연료가 없었다면 독일 공군은 비행기를 띄울 수 없었을 것이다."(556)


"파르벤은 소위 '자유노동자'와 '노예노동자'를 동시에 사용했다. 노예 노동자에 대해서는 성인에게는 기술에 따라 3~4마르크, 어린이에게는 그 절반을 지급했다. 물론 그 돈은 히틀러 친위대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1944년 독일 합성연료 산업의 전체 노동력 중 3분의 1은 노예 노동력이었다. 파르벤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친위대와의 합작사업에 점점 깊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양측은 여러 가지로 교류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아우슈비츠에 상주하는 파르벤의 관계자는 지역 친위대 사람들과 휴일 사냥에 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토끼 203마리와 여우 1마리, 살쾡이 1마리를 잡았다. 파르벤의 산업단지 건설 책임자가 여우 1마리와 토끼 10마리를 잡아 사냥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의 사냥 기록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구역에서 올해 달성한 성과 중 가장 좋았다. 이 기록은 조만간 강제수용소에서 있을 사냥 기록만이 깰 수 있을 것이다.〉"(575-7)


"영국의 입장에서 전쟁에 필요한 석유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의 발발은 필요한 석유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을 의미했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세계 석유 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미국뿐이었다. 영국 정부와 쉘-멕스 하우스에 있는 석유 관계자들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외환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영국에 지불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워싱턴에 있었다. 1940년 12월,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참고'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해 3월에는 무기대여법이 제정되어 영국에 물자 공급을 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자금 문제가 해소되었다. 루스벨트가 언급한 바와 같이 '멍청하고 우둔하고 낡은 달러 사인'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상환 시기를 명기하지 않은 채 대출한 물자 중에는 석유도 있었다. 선박을 이용해 석유를 영국으로 수송하는 데 장애가 되던 중립법도 완화되었다."(614)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은 석유 공급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육군은 석유 소비량에 관한 기록조차 보유하지 않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가 참호전이었다면 후자는 기동전이었다(전쟁 중에 처칠과의 만찬회 자리에서 스탈린은 〈이번 전쟁은 엔진과 옥탄가의 싸움이다. 미국의 석유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위해 건배하자〉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막대한 양의 석유를 소비했다. 유럽에 파견된 미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100배나 되는 휘발유를 사용했다. 미 육군 1개 사단의 기계력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4,000마력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8만 7,000마력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운송된 물자의 절반이 석유였다. 미군 병참부대의 추산에 따르면, 미군 병사 1명이 해외에 파견되는 경우 67파운드의 장비와 보급물자가 필요했는데, 그중 절반이 석유제품이었다."(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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