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개정판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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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한국의 고유 종교인 무교(巫敎)는 미신인가?


▷ 무교는 어떤 종교? 


"누구에게 확인할 것 없이, 대부분의 한국인은 무교(무당종교)를 두고, 종교가 아닌 '무속'에 불과하며 게다가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무당 종교를 지칭할 때도 '교'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속'이라는 낱말을 써서 '무속'이라고 부른다. 무속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에 사대부 같은 기득권 세력이 무교를 폄하하여 야속(野俗)하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미신과 소위 '정신(正信)'을 구별하지 않는 종교학에서는 무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만일 불교나 그리스도교를 불속(佛俗) 혹은 기독속(基督俗)이라고 부르자고 하면 그게 가당하기나 한 생각이겠는가?" "통상 한국인은 무당을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한참 덜떨어진 기괴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족속으로 여긴다. 그러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 대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은 다 던져버리고 무당에게 달려가지만 말이다. 한국인이 무당에 대해 갖는 생각과 태도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21-3)


"무교는 크게 볼 때 '신령과 무당과 신도'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 요소는 굿이라는 무교의 고유한 의례에서 만나게 된다." "이 구조에서 무교는 신도가 무당이라는 특수한 사제 계급의 중개로 신령을 만나 도움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말에 선교사로 활약하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빠질 때는 영혼 숭배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한국인이 평소에는 유교나 불교적으로 살지만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게 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떻든 이러한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무당에게 가면 무당은 신령과 교통할 수 있는 자신의 신묘한 능력으로 신령에게 해결책을 구한다. 그러면 신령은 각 사안의 경중에 따라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신도가 신령과 교통하려면 반드시 무당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사제를 통해서만 신에게 다다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구조이다."(31-3)


"나는 무당을 '민간 사제'라고 부르는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무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내림굿을 받는 것이다. 내림굿을 받기 전에는 누구도 무당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내림굿이란 '사제 서품식' 혹은 '목사 안수식'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당은 정확히 말하면 내림굿을 받은 후부터 비로소 신자들과 신령을 중재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전에도 여러 신령들과 교통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신령들의 도움을 받아 점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쳇말로 하면 아직 영계에는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다. 아직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점방(店房)을 낼 수도 없다. 상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내림을 받아야만 그 신의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고 정식으로 점보는 일 같은 무업을 할 수 있다."(36-7)


"그런데 무당이 굿을 주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모시는 신령, 즉 몸주신(Lord Spirit)을 모셔야 한다. 무당이 신령계와 통하게 되는 것은 이 몸주신을 통해서이다. 몸주신을 받는 것은 무당이 신령계와 통하기 위해 자신만의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령계에는 신령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만의 신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당은 영계에서 헤맬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무당이 모시는 몸주신은 일종의 영계 가이드인 셈이다." "내림굿을 받지 않았으면서 신점(神占)을 치는 사람들도 신을 모시기는 한다. 그러나 정식으로 내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신은 신령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런 점쟁이들은 사제가 아니라 술사(術士)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무당들은 '오구굿' 같은 사령제(死靈祭)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이런 것이 바로 무당의 사제 기능이다."(37-9)


"무당 후보자들은 왜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신병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당 후보자도 무당이 되기 전에는 속된 인간이다. 이 속된 인간이 성스러워지려면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이전의 속된 인간을 벗어던지고 환골탈태(換骨脫胎)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뼈를 깍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이전의 속된 찌꺼기나 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더구나 무당 후보자가 내림굿을 받은 뒤에 무당이 되면 그다음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큰 문제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온갖 고통과 번민이 가득 차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무당은 자아가 매우 강해야 한다." "그래서 무당은 그 형용할 길이 없는 고통을 먼저 겪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고통을 나눔으로써 가볍게 해 주려는 사람은 거의 이러한 과정을 겪는다."(43-6)


▷ 굿은 어떻게 하나 


"별달리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기 위해 무당을 찾아간다. 이때 무당과 신령 사이에 어떤 식으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알던 만신은 이렇게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일반인들은 자기네들이 점을 칠 때 신령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실제의 경우에는 신령이 내담자의 상황에 대해 시시콜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두세 마디의 단어로만 아주 짧게 알려 준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단어 대신 냄새를 풍겨주는데, 무당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내담자의 상황을 탐문해 간다. 이 경우 제일 좋은 것은 신령이 내담자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신령이 아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면 무당은 유도신문과 같은 질문법으로 내담자의 상황을 염탐해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당히 넘겨짚어야 한다.〉"(57-8)


# 신령의 처방 수위

점괘 〉 부적 〉 치성(약식 굿) 〉 정식 굿


"굿이란 보기에 따라 노래와 춤이 그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뮤지컬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판소리를 '1인 오페라'라고 하듯이 굿도 '1인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굿은 그냥 뮤지컬이 아니라 신과 교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성한 뮤지컬이다. 그런데 온종일 하는 뮤지컬을 혼자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의상을 입고 노래만 하는 판소리와는 달리, 굿은 거리마다 의상을 바꿔 입고 다른 춤을 춰야 한다. 그래서 세명(주 무당 한명, 보조 무당 2명)이 하는 것인데 그래도 버거운 것임은 틀림없다. 악사의 경우는 조금 융통성이 있다. 굿을 부탁한 신도가 돈을 많이 내면 정식에 해당하는 3인조 악사를 부를 수 있다. 이 밴드의 악기 구성을 보면 젓대(민속 대금)와 피리, 그리고 해금으로 구성되는데 이렇게 악기를 셋 '잡히면' 제일 규모 있게 하는 굿이다. 굿을 부탁한 신도가 돈이 없으면 악사는 아예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무당들이 돌아가면서 장구와 제금을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64)


"각 거리의 기본 구조를 보면, 대체로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신을 초치하고(청신, 請神), 타령이나 노랫가락, 춤 등으로 신을 즐겁게 해서 공수(계시)를 받고(오신, 娛神), 신을 다시 본래 자리로 보내는(송신, 送神) 세 단계이다. 이 세 단계에서 무당은 노래와 춤으로 신령을 모신 다음 즐겁게 해주고 다시 보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거리마다 무당은 격렬한 춤을 춤으로써 엑스터시(망아경, 忘我境) 상태로 들어가 신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신의 말을 전하는데 이것이 굿의 핵심이다. 이때, 각 거리에는 불러야 할 노래나 추는 춤, 그리고 의상 등이 모두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굿 중에서도 이런 형식이 가장 잘 잡혀 있는 굿은 무당이 자기 자신(그리고 자기가 모시는 신령)을 위해서 하는 '진적굿'이다. 이 굿은 무당이 1~2년에 한 번씩 자기가 모시는 신령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서 하는데, 자기의 몸주신을 위해 하는 것인 만큼 아주 격식을 잘 갖추어 굿을 한다."(75-6)


▷ 한국인의 근원 신앙인 무교 


"굿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좋은 운이 들어오게 하는 '재수굿'과 대표적인 사령제(死靈祭)인 '오구굿'이 가장 많이 연행된다. 이 외에도 진적굿이 있고, 병 고칠 때 하는 병굿, 그리고 환갑이나 결혼식처럼 집안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하는 여탐굿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만큼 굿 종류는 많다. 이 가운데 병굿은 상류층에서는 우환굿이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불리고, 기층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푸닥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굿들이 개인이나 가족에게 한정된 것이라면 마을 단위로 하는 굿도 많다. 강릉 단오제나 은산 별산굿, 하회 별신굿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모두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하는 굿이다. 이런 굿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며칠에 걸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은산 별산굿(제)은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복신과 도침을 기리기 위해 하는 굿으로, 일반적으로 3년에 한 번씩 한다. 굿을 하는 전 기간이 15일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 만하겠다."(84-5)


"사람이 죽었을 때 가족들은 경황이 없어 그 영혼과 제대로 이별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항상 불효한 것 같아 감정의 찌꺼기가 남기 마련이다. 오구굿은 이런 경우에 하는 것이다. 부모의 혼을 불러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이 굿을 하는 것이다. 이 굿의 하이라이트는 부모의 혼이 무당에게 들어왔을 때이다."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로 분한 무당에게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와 같은 식으로 용서를 청하면 그 무당은 부모를 대신해서 〈아니다, 네 덕에 난 이생 잘 살았다.〉라고 답하는데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식들은 죄의식에서 면책되는 것이다. 이런 '짜임새'는 매우 훌륭하다. 오구굿은 아주 상징적인 순서로 끝나는데 그것은 부모의 넋을 넋전 상자에 싣고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 이 부모의 혼을 데리고 가는 신령은 그 유명한 '바리공주'이다. 이렇게 해서 굿이 끝나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질서가 잡히고 모두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86-7)


"한국 무교의 신령들은 선악 개념이 불분명하다. 굿을 할 때 보면, 자신을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고 진노한 신령이 금세라도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처럼 외치다가도 신도들이 싹싹 빌면 곧 관대한 신으로 바뀐다." "한국 무교의 신령들 사이에 위계적인 질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것도 한국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무교의 신령들은 단독으로 움직이며 자기를 몸주로 하는 무당을 매개로 현현하기 때문에, 신령들 간에 소통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냥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자기를 섬기는 거리에 나타난 굿 한번 받아먹고 가면 끝이다. 잡신들은 하위 신령들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예 격외로 치지만, 무당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정신(正神)들은 대체로 동등한 위계 구조에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무교에서 인기 있는 신 가운데 한이 많은 신령들이 대표급 신령으로 인정되는 것도 한국적인 특징이라 하겠다."(95-7)


Ⅱ. 왜 한국은 무교의 나라인가?


▷ 한국 무교 약사 


"한국이나 일본이 가장 중국적인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양국에 이미 그 이전부터 토착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교가 맡아서 하는 기능을 한국에서는 무교가, 일본에서는 신도가 한 것이다. 도교와 무교, 그리고 신도는 세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 그 외양은 다르지만 작은 신들(lesser gods)을 신봉해서 재물과 건강 같은 세속적인 행복을 기구(祈求)한다는 점에서 그 속성이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아 3국 가운데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들의 기층 종교를 인정하고 양성화한 반면, 한국은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하고 미신으로 매도하여 결과적으로 음성적 문화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본성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전통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무교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뿌리를 무시한 것이다. 자신들의 정신적인 뿌리를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불교, 유교, 기독교)의 관점에서 스스로 폄하한 것이다."(117-8)


"무교와 신라 문화가 관계된 항목 가운데 화랑이나 처용을 무교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처용이 역신을 쫓아냈다는 의미에서 남자 무당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등이 그것인데, 이는 단지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로 내려오면 서서히 무당을 억압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아직 주자학이 발흥되기 전일 뿐만 아니라 국교로도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무교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지는 않았다." "고려조에도 어김없이 무교가 성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을 직접 기술한 것이 잘 발견되지는 않지만 편린적인 기록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종 때 궁궐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무당 300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번에 이 정도의 숫자가 동원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숫자의 무당이 저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그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26-8)


"조선조 때에는 무교를 탄압하기 위해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우선 불교 승려와 더불어 무당은 천민 계급으로 강등되고 도성 출입이 금지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당들을 도성에서 쫓아냈다는 기사가 쉬지 않고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도성 안으로부터 무당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무당들은 왕십리나 구파발같이 도성 바로 바깥에 자기네들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사실은 일반 국민만 무당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도 무당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유교는 종교적인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기우제 같은 종교적 의례를 행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무당이 필요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병이 삿된 영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해 병을 치료할 때도 무당에게 퇴마하는 일을 맡겼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성수청(星宿廳)과 활인서(活人署) 같은 기관에 무당을 소속시켜 각각 제사를 관장하게 하고 병자를 치유하도록 했다."(130-1)


▷ 무교의 현재 


"다른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조에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무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에게는 이 무교가 절대적인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 지배층 남성들은 종교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무교를 그들의 중심 종교로 삼아 종교적 욕구를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굿판은 한마디로 여성들을 위한 장이자 해방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굿판에서만큼은 일상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풀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조 때 여성들이 시집을 오면 친정 부모에 대한 제사가 용인되지 않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을 시가에 전적으로 예속시키기 때문에 여성과 관계되는 것은 대부분 억눌리고 그 권리가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렇게 엄중한 가부장제에서도 굿은 예외였다. 주부(며느리/딸)가 죽은 자기 친정부모를 위해 오구굿만큼은 할 수 있었다. 굿만이 조선조의 여성들이 친정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의례였는지 모른다."(137, 140)


"유교 사회에서 주부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대상을 보면, 우선 남편 집안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남자이면서 결혼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도 죽을 수 있고 결혼하지 못한 딸(그리고 아들)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유교 사회에서는 주변인이라 할 수 있다." "유교 교리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조선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그저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찌 무시와 외면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조선조에 이런 영혼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의례는 굿밖에 없었다. 무당이 나서서 이 갈가리 찢어진 부모의 마음을 보듬어 주어야 했다. 무교가 여성과 같은 사회 주변인에 의해 지탱되었던 만큼 무교는 이러한 주변인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무교가 보전되어 내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142-3)


"일제 때도 어김없이 무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수천 년을 내려온 무교가 그리 쉽게 사그라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무당들의 활동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탄압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다음에 비록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무당들에게 좋은 시절이 바로 오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나 서양 세력의 쓰나미 같은 유입과 이른바 '조극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무교는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에게 무교는 미신의 대명사일 뿐이었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무교 같은 저급한 신앙은 없었다는 듯이 무시의 대상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 결과 수십 개에 달하던 서울 지역의 굿당들이 몇 안 남고 다 없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무당들에게 재충전의 성지였던 계룡산의 수많은 기도처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정화(?) 작업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무교는 더 밑으로, 더 주변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145-8)


▷ 한국인의 근본 종교는 무교! 


"한국인들은 왜 노래를 그다지도 좋아하는 것일까? 한국 무당들에게 춤과 노래는 무엇일까? 이를 심증적으로 무교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굿을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노래와 춤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당들의 가무는 놀이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교통하기 위한 종교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무당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망아경 속에 빠져 신을 받는 것이다. 다시금 망아경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무교와 관련해서 말해보면, 한국인들은 술을 통해 낮은 수준의 망아경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라는 뜻의 '음주가무'라는 한 단어로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다. 술만 먹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격렬하게 흔드는 것이 훨씬 망아경 속으로 들어가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들은 밤마다 무당들이 하던 고대의 엑스터시 항연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161)


Ⅲ. 한국인의 종교적인 내면 세계


▷ 무교에서 바라본 불교와 그리스도교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의례가 아니더라도 특히 개신교인들은 교회서든 집에서든 기도를 많이 한다. 이들은 어떤 때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기도를 '빡세게' 해달라고 서로에게 요청한다. 밥 먹을 때에도 그야말로 밥 먹듯이 기도를 한다. 이렇게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그들이 믿는 신께 '무엇을 해 달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불교는 그리스도교처럼 그렇게 대놓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대신 승려가 사제가 되어 불상 앞에서 신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축원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찌 됐든 기도를 받는 대상이 있고 그 행위를 하는 인간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 하겠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앞에서 본 무교의 구조, 즉 '신령↔(무당)↔신도'의 구조와 다를 바가 없다. 무교의 구조에서도 신도가 직접 신령께 정성을 올릴 수 있고 무당이 대신 그 정성을 올릴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왜 그리스도교나 불교는 미신이 아니고 무교만 미신이라고 하는 걸까?"(171-4)


"무교에 대한 여러 비판 가운데, '무당이 신령께 정성을 바친다고 잔뜩 제물을 차려 놓고 굿을 하는데 그게 정말로 신령께 전달되는 것인가?' 하고 따지는 것이 있다. 신령이란 문자 그대로 신이라 육체를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인간들이 먹는 음식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무당들은 신령은 기쁘게 하고 그들과 교통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하는데 그게 신령에게 정말로 전달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다. 그리고 굿을 해서 어떤 일이 뜻대로 되었다면 그게 정말 굿을 해서 그런 건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내 기도가 정말로 신에게 전달되는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현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지, 과학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자기 믿음을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존중받으려면 무당들이 신령들에게 기도하는 것도 응당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191-3)


▷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같다 


"무교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권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무교는 계속해서 권력과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미신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나 유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기 전까지 무교는 미신으로 천대받은 적이 없다. 아니 무교는 오히려 당시의 보편 신앙이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 같은 수입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무교는 미신'이라는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다수가 이 종교들을 믿게 되면서 또 그 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종교적 신념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권력을 잡은 많은 사람들이 힘으로 밀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무교는 '어떤 중심 교리를 믿는다'와 같은 확실한 교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무당들과 신도들의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나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는 만일 조직이 없다면 그것은 힘이 없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208-11)


"가령, 무당 중에 걸출한 이가 나와 교리를 이론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고 온갖 수를 써서 정치권과 결탁했을 뿐만 아니라 큰 종교 조직도 만들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런 무교가 사회에서 정통 신앙으로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이것은 공연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예가 있어 하는 소리이다. 일본의 신도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신도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무교와 다를 게 없는 원시신앙에 가까운 종교이다. 이렇다 할 교리도 없고 경전도 없다. 그냥 신령 잘 모셔서 복 받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도는 일본의 정치권과 결탁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대표 종교가 되었다. 지금 세계 종교계에서 일본의 신도를 미신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신사에서 근무하는 궁사(宮士)들도 우상숭배자라고 지탄받기는커녕 사회에서 나름대로 존경받는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인들이 신도를 그네들의 정통 신앙으로 인정해 체제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222-4)


마치며


"서사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굿을 한국 문화의 보고라고 주장한다. 무당들의 노래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리공주 무가 하나만 해도 서너 시간을 구송하는 것이니 그 안에 탐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가 하면 남도의 시나위 굿판에서 태동한 시나위 음악은 한국 민속 음악의 백미 아닌가? 그리고 거기서 파생한 산조 음악은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예처럼 예술성이 뛰어나다." "춤도 마찬가지이다. 굿판에서 연주되는 곡은 모두 무용 반주 음악이기도 하다. 시나위 음악에 맞춰서 추던 춤이 바로 세계적인 춤인 살풀이다." "그런가 하면 굿판은 한마디로 즉흥 연극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큰 틀은 있지만 각본은 정형화되지 않은 연극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인 연극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굿판이 매력적인 일차 자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이다. 따라서 종교학적으로도 많은 함의를 갖고 있을 터이니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2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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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무지란 무엇인가?


# 무지의 여러 분류들

1. How에 대한 무지 : 런던(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안다.

2. What에 대한 무지 : 런던이라는 도시를 안다.

3. 의식적 무지 : 시칠리아 주민들이 마피아를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

4. 무의식적 무지 :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인지하지 못한다.

5. 자발적(고의적) 무지 : 타조가 모래밭에 머리를 박고 있다.

6. 비자발적 무지 :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교도를 비난할 수 없다.

7. 능동적 무지 : 새로운 이주민들이 원주민의 존재와 영토 소유권을 무시한다.

8. 수동적 무지 : 특정 분야나 행동에 필요한 지식을 활용하지 못한다.


2장 무지에 관한 철학자들의 견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론적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고 해당 지식의 신뢰성 여부를 판단하는지를 다룬다. 반면에 무지의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왜 무지에 머물러 있는지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피론을 필두로 한 회의주의학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대상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동일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같은 물체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회의주의자들은 (회의懐疑, skepsis의 본뜻인) '조사照查, investigation'를 믿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믿음이나 확신을 두고, 이를 뒷받침하거나 위배하는 사례를 분석하며 지식을 얻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회의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확신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 그것조차 확신하지 않는 반사적反射的 회의주의다."(36-7)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회의론자이자 16세기 고대 회의주의 부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미셸 드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시절 가톨릭과 개신교 간 전쟁을 몸소 겪었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저서 《방법서설》(1637)에서 몽테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에게 답하는 방식을 통해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방법론적 무지를 구현했다." "17세기 회의주의는 외양과 현실 간 격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로크 시대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18세기 대표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나 데이비드 흄은 둘 다 지식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던 17세기의 전통을 이어 갔다." "카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노동자 계급의 허위의식 등 지식 습득을 방해하는 사회적 장애물에 대해 논의했고, 프로이트는 지식에 무의식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심리적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했다."(37-9)


3장 집단의 무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상류층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 계급이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층민에게 정보를 아예 주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는 방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도록 '환상에 불과한 행복'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지적, 도덕적, 정치적 헤게모니' 개념을 제시한 그람시는 지배 계급이 단지 힘만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설득, 강요, 동의를 결합해 통치한다고 보았는데, 설득은 일부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피지배 계급 또는 하위 계급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법을 배운다. 이후 미셸 푸코는 이들의 지식을 가리켜 '예속된 지식savoirs assujettis'이라 했다. 이들에 따르면 하위 계급은 자신들만의 표본이 없기 때문에 지배 집단의 표본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43-5)


"인식론의 사회적 전환에 큰 자극을 준 것은 철학 외부에서 부상한 페미니즘이었다. 남성은 '내가 모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라는 원칙에 따라 여성의 지식과 신뢰성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왔다. 고대 로마에서 근대 초기 유럽에 이르기까지 신뢰할 수 없는 지식을 가리켜 '노파의 이야기aniles fabulae'라고 치부했을 정도다." "18세기 여성의 무지를 논한 저서는 '소피아'라는 필명으로 출판된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은 여성》(1739)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가 있다. 소피아는 여성 무지의 책임이 '미신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남성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시민정부의 헌법 자체가 여성의 이해력 증진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며 '오늘날의 여성은 무지로 인해 어리석거나 사악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이 '순수라는 허울뿐인 명분 아래 계속 무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46, 49)


"19세기와 20세기 여성 학자와 과학자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남성이 여성의 성과를 끈질기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공동 작업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성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한 불운한 여성 과학자에는 메리 애닝, 리제 마이트너, 로절린드 프랭클린 등이 있다. 메리 애닝은 지금도 주로 화석 수집가이나 중개인으로 소개된다. 이 때문에 19세기 전반기에 도싯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해 고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묻히기 일쑤다.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는 1930년대에 오토 한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했지만,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주인공은 남성 동료인 오토 한뿐이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암흑 여인'으로 불린다. DNA를 발견해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이 그녀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용 기억상실' 중 하나에 해당한다."(50-1)


4장 무지의 연구 


"우리는 보통 초기 역사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무지의 시대라고 해야 겸손할 뿐 아니라 정확할 것이다.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지난 두 세기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집단 지식이 대다수 개인의 지식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조상보다 조금 더 알 뿐이다. 둘째, 새로운 지식이 확산되면 다른 지식은 사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등 세계적 언어를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언어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또한 개념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는 (전환 과정에서 과거의 지식 일부가 손실되는) '쿤 손실'이 발생한다." "셋째, 최근에 정보의 양이 급속하게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엄연히 지식의 증가와는 다르다. 지식 증가는 정보와 달리 검증, 소화, 분류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57-8)


"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초기 무지 연구에 기여했지만 각자 몸담은 분야가 달라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후 무지에 관한 책과 논문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사회학자들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제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는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무지 연구에 대한 관심이 지난 40여 년 동안 특히 왕성하게 일어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구 그 자체의 발달이다. 특정 문제를 연구할 때 그것을 뒤집거나 반대로 돌려 상반된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제 기억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망각으로 눈을 돌렸고, 언어를 연구하는 학생들은 침묵을 연구하고 있다. 성공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학자들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도 연구한다. 또한 지식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데 힘입어 학자들 사이에 지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그에 따라 무지 연구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64-5)


5장 무지의 역사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없음'을 어떻게 연구하느냐 하는 점이다." "다소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무지의 개념을 시대별로 살펴보는 것이다. 해당 사례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학자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자신의 무지와 다른 많은 이의 무지에 관하여〉라는 편지가 자주 언급되어 왔다. 페트라르카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자신은 '모른다는 점을 안다'고 하면서, 그가 무지하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젊은 베네치아인에 맞서 자신을 변호했다." "무지의 역사를 알기 위해 최근에는 그림자를 보고 누군가를 추적하는 것과 같은 간접적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후향적 방식'으로, 지식의 증가에서 무지의 점진적 감소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셜록 홈즈가 하는 것처럼 이른바 '설득력 있는 부재'를 연구하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비교를 통해 중대한 부재를 드러낼 수 있다."(71-2)


# 셜록 홈즈는 경주마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중 경비견이 그날 밤에 짖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경비견과 친밀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넬 치얼라인은 서구인들이 근대 초기 레반트(동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아랍의 위대한 역사학자 이븐 할둔의 저서를 비롯한 일부 도서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특정 정보 역시 도서관 소장 도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은 '빈 역사'라고 부르며, 기록 보관소에 특정 자료가 없는 것을 중요한 현상으로 본다." "세 번째 방식은 기존의 승리주의 서사를 뒤집어 무지의 감소 대신 무지의 증가, 혹은 무지의 폭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에서는 언어의 소멸, 책의 소각, 도서관 파괴, 발견의 집단적 망각, 지식인의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승자보다는 패자, 성공보다는 실패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의 가치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편향성, 즉 역사학자들이 흔히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방식만 활용할 경우)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찬가지로 편향적일 수 있다."(72-3)


6장 종교의 무지 


"무지는 종교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부정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어떤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으며(예를 들면 '신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신이 무한한 존재'임을 설파한다), 무지를 통해 신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종 야훼, 하나님, 알라의 의도를 안다고 자신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의 믿음을 자신과 다른 지식으로 여기기보다 지식의 부재라 단정 짓고, 무지를 비난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전도해야 했지만, 본국의 동료들에 비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그들이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쓴 글을 보면 신도들을 무지하다고 여긴 경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개종한 이들 스스로도 그 같은 견해를 받아들였다."(77, 83)


"개인 차원이든 집단 차원이든 타 종교에 대한 무지는 숨기거나 위장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을 때 더욱 그렇다. 신대륙에 끌려와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토착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 종교에 박해가 이루어지는 한 위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지지하면서 실제로는 그와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시아파가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시행해온 위장을 아랍어로 '타키야taqiyya'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신중함'의 뜻도 담겨 있다."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이 가톨릭교, 루터파, 칼뱅파 지역으로 분열되면서 '그릇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위장이라는 관행을 따랐다. 이 위장은 당시 장 칼뱅 등이 니코데미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니코데미즘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코데모가 남몰래 밤을 틈타 그리스도를 만나러 간 것에서 유래했다."(93-5)


"'불가지론자agnostic'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영적 지식gnosis의 부족을 의미한다. 기록상 최초의 불가지론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로, 그는 '어떤 사람도 신에 관한 분명한 진실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독실한 불가지론'은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이사야 45장 15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유대인 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적 속성을 제외한 채 창조주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신론자야말로 논의에 포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18세기 이신론자들이 믿었던 신은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시계 장인이 만든 시계가 스스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냈다. '신을 살피려고 들지 말라. 인간의 적절한 연구 대상은 인간이다.'"(95-7)


7장 과학의 무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과학을 점차 커지는 구체球體로 상상했다. 표면에 추가되는 모든 것은 주변의 무지와 더 광범위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었다. 특정한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또 다른 문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과학자들의 시선은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일단 안개가 걷히면 과학자들은 선택적 무지를 실천한다. 특정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택을 무지의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선택이 잘못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미국 철학자 존 듀이가 말한 '진정한 무지'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무지는 겸손, 호기심, 열린 마음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 유익하다. '예상치 못한 무지'는 연구 과정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발견을 뜻한다. 무지는 놀라움으로 이어지는데, 놀라움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게끔 만들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지식의 창을 열어 준다."(104-5)


"무지의 주요 유형 중 하나는 알고 싶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의도적 무지다. 이는 특정 아이디어, 특히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칼 포퍼가 말한 적극적 무지와도 연관된다." "이 같은 의도적인 맹목 사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파스퇴르의 미생물 발견, 멘델의 유전 법칙,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 등에 대한 저항이 있다. 플랑크가 '과학은 장례식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진보한다'는 쓴소리를 남긴 것은 양자론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감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의 뜻은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해 깨닫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마침내 죽고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 중에는 자신의 전문적 자본을 투자한 이론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만,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07-8)


8장 지리학의 무지 


"영국의 지리학자 브라이언 할리는 지도의 '침묵'(그가 공백보다 선호한 용어) 연구에서 지도가 지리적 지식을 널리 확산시키던 시기에 일부 국가의 왕들이 자국의 자원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자국 지도를 비밀에 부친 사실에 주목했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역시 인도, 중국, 아프리카, 브라질에 무역 기지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면서도 지도를 포함한 자국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1504년 마누엘 1세는 지도 제작자들이 콩고 너머의 서아프리카 해안을 지도에 표시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 지도까지 검열하도록 했다."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 제국에 대한 지식을 철저히 통제해 항해사 수업을 담당하는 학자들은 외국인들에게 지식을 전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대공국에 살던 네덜란드 상인은 그 지역의 지도를 구할 수 없었는데, 지도를 유출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밀주의는 유럽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146-7)


"환경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는 이제 대중이 주목하는 사안이다. 2014년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출간해 최근의 생물 다양성 감소를 지구 역사상 발생한 다섯 번의 대멸종 이후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보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지식은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스웨덴 물리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1896년에 이미 지구 온난화를 예측했다(독자 여러분의 짐작대로 당시 선배 학자들은 그의 예측을 무시하고 넘어갔다). 1938년 영국 공학자 가이 캘런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온난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자연적인 주기로 일어난 게 아니라 화석 연료를 태워 생긴 온실 효과 때문이라 알고 있었다. 나쁜 소식이 대개 그렇듯 과학자들의 이 같은 발견은 (꽤 오랫동안) 거의 무시되거나 깡그리 부정당했다."(155-6)


2부 무지의 결과


9장 전쟁의 무지 


"전쟁에서 군사 작전은 다른 무엇보다 무지와 지식 간의 싸움이다. 아군의 계획을 적군이 모르게 철저히 관리하는 한편, 적군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웰링턴 공작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전쟁의 모든 기술은 언덕 저편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에 실패할 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쟁은 적의 움직임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양쪽 진영 모두 무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그나마 정보를 좀 더 확보해 중대한 실수를 적게 한 쪽이 승자로 등극한다." "무지 중에서도 지휘관의 무지는 문제가 된다. 일반 병사들은 보통 자신들이 다음으로 공격하고 후퇴할 시간과 장소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공백은 소문으로 채워진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참호 안에 나돌았던 가짜 뉴스를 주제로 선구적인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160-2)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무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깁슨은 베트남전을 다룬 책에서 지식의 부재가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공백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한 데  따른 공백도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는 효율성으로 평가받는데, 민간 사상자에 신경 쓰는 것은 여기에 방해만 되기 때문에 군 관료들은 ··· 민간 사상자 수를 집계하는 데 무관심했다'고 깁슨은 설명했다." "침략자들이 군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최대 약점은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국가의 언어, 관습, (열대 기후를 포함한) 지형에 대부분 무지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무지는 미국인 대다수가 이른바 베트남의 같은 편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외부 개입이 혁명에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불을 더욱 지핀다'는 정보의 속뜻은 무시했다."(173-5)


10장 비즈니스의 무지 


"비즈니스에서 특정 무지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매에서는 입찰자들이 서로 얼마까지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판매자가 이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거래 당사자들의 '대칭적 무지'는 거래 이윤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흔한 것은 '비대칭적 무지'다. 이와 관련해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가 제시한 '레몬 시장의 법칙'은 유명하다. 이 법칙에 따르면 중고차 시장에서는 불량 중고차(레몬)가 좋은 중고차를 몰아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정보를 사고파는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애로의 역설은 자신이 구매하려는 상품에 대해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고객의 욕구와 돈을 받기 전 정보를 완전히 누설하지 않으려는 판매자의 욕구가 상충하는 점을 지적한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핵심은 상대적 무지다. 모든 참가자가 어느 정도 무지하지만, 그나마 덜 무지한 참가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183-4)


# 레몬 시장의 법칙 : 판매자는 자신이 파는 중고차의 좋지 않은 상태를 잘 알고 있지만 밝히지 않고, 구매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차를 사게 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무지를 비대칭적 무지라 한다.


"위장 혹은 특정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숨기는 '전략적 무지'에 의존하는 불법 비즈니스에는 알코올, 마약, 위조품 같은 금지 물품, 물품의 운송(밀수)과 판매(암시장)뿐 아니라 성매매, 청부살인 같은 불법 행위도 포함된다." "여기서 무지한 자는 세관/과세 공무원, 경찰이다. 실제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정부 고위직을 포함해 많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 아는 이들은 적다. 어떤 경우에든 무지 자체는 아니더라도 위장된 무지는 유지되어야 한다." "1958~1962년 대기근이 발생한 중국에서는 비공식 배급 시스템이 생겨나거나 훨씬 중요해졌다. 당원들은 끝도 없이 교활한 방법으로 국가를 속였고, 물물 교환과 위조 허가증 사용을 포함한 병행 경제parallel economy가 발전했다. 생산자 집단에서 배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노동자 수를 부풀림에 따라 '죽은 영혼의 거래'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스템은 회색, 비공식, 병행(평행) 대안, 그림자 경제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200-2)


11장 정치의 무지 


"독재자가 국민들의 무지를 조장한다면 민주주의 세력은 불안해지게 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문명화된 국가가 무지하면서도 자유로운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는 자신이 수백만 유권자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정보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합리적 무지'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한 수많은 유권자의 무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린다 알코프는 그들의 무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의 무지는) 지식 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공동의 노력, 의식적인 선택, 일련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특정 뉴스 기사나 뉴스 소스를 회피하고, 특정 대학 과정을 멀리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날 뉴스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예다.〉"(215-8)


"18세기 후반 독일어권 대학에 행정학이 개설되었다. 당시에 국가에 대한 지식을 독일어로 '통계학Statistik'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단어 '통계학Statistics'이 유래했다. 이 같은 단어의 의미 변화는 정부가 공장과 학교, 빈곤과 위생을 조사하는 데 점점 관심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정보는 19세기부터 막대 그래프, 그래프, 원형 차트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무지에 대한 지식의 승리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모든 승리가 그렇듯 이 과정에서 얻은 것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다 소화하기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국가 차원의 조사와 지도 작성처럼 지식의 추가가 분명한 행위도 오히려 무지를 조장할 수 있다. 특히 제임스 스콧이 '빈약한 단순화'라고 표현한 지도와 통계표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때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도와 통계는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에 무지하게 만든다."(234-5)


12장 놀라움과 재앙 


"역사적으로 위험 징후를 무시하다가 자연재해를 입은 사례는 너무도 많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어 발생한 뉴올리언스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재난 연구에서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대응 실패가 드러났다. 관리청은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임시 거처로 이동식 주택과 텐트를 제공했지만, 호텔에 수용하는 것은 꺼렸다. 의료 시스템은 재난에 대비하지 못했다. 허리케인이 매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탓에 대비 부실 문제가 늘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부분인 빈곤층은 가진 게 적고 홍수에 더 취약한 저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이른바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냈다. 도시 취약 지대에 사는 빈곤층은 홍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안전하고 비싼 지역에 거주하는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위협해 가며 현장 지식을 무시했다."(247-8)


13장 비밀과 거짓말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문과 구두 소통은 당연히 신문보다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소련에서는 오랫동안 그 반대였다. 또한 소련의 지도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거나(교회 등) 대중에게 숨기고자 하는 것(강제 수용소 등)들을 누락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었다.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과학 도시 나우코그라드도 지도에서 누락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강제 수용소 죄수들에 의해 건설됐다. 핵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1968년 소련 내부에서 쓴 글에 따르면, 소련은 여행이나 정보 교환의 자유 없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사하로프와 같은 반체제 인사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은 해외에서 출판한 책이나 비밀리에 직접 손으로 만든 출판물인 사미즈다트samizdat(러시아어 '스스로'와 '출판'의 합성어)를 통해 정보를 유포하는 것이 전부였다."(270)


"정부가 대중을 무지하게 만드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대형 재난을 은폐하는 것이다. 1943년 벵골 대기근 당시 정부는 '기근'이라는 용어 사용을 금지했다. 또 다른 악명 높은 사례는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인 홀로도모르Holodomor 사건으로, 당시와 이후 소련 정부의 입장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989년 6월 4일 사건'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알려진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규제해 6월 4일에는 인터넷에서 '오늘' 또는 '그해' 등 민감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금지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성인일 때 목격하고 이제 노인이 된 사람들은 개인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무지를 가장한 정권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은 알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지식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한다면, 공식적인 억압은 비공식적인 진실 억제에 의해 강화된다."(273, 276)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조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된 경우가 많다. 탈진실 시대에 관한 책은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이 단어는 그보다 12년 전인 199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스핀 닥터spin doctor'(주로 정치인이나 공인들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기 위해 고용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는 문구는 1940년대 〈뉴욕타임스〉에서 사용되었다. 가짜 뉴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어 '포스 누벨fausses nouvelles'은 영어의 '페이크 뉴스'와 같은 전통적인 표현이다. 또 하나의 전통적인 용어는 '카나르canard'(허위 보도 또는 유언비어를 뜻한다)로, 이는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가 당시 파리의 언론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사용했다. 노련한 기자가 신참 기자에게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자들에게 뉴스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를 우리는 카나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미디어는 고의적인 허위 정보뿐만 아니라 무지 또는 부주의의 결과인 오보도 퍼뜨린다."(298-9)


14장 불확실한 미래 


"불확실성은 미래에 대한 무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비즈니스, 정치, 전쟁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중요한 결정들은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근거해 내려졌다.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예상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결과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과거의 트렌드를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때의 추정은 우리가 항상 하는 행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트렌드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 스완'이라고 이름 붙인 대공황이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같이 극단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이 말했듯이 예측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예측이 얼마나 자주 틀리는가이다. 실제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는 것뿐이므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것을 예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302, 308-9)


"한 세기 전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측정이 가능한 리스크와 측정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구분했다. 나이트는 경제 행위자들의 '실질적 전지전능'을 가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의 요소를 강조했다. 몇 년 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불확실하며, 20년 후의 구리 가격과 이자율, 새로운 발명품의 구식화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들에 예측 가능한 확률을 도출할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이다〉라고 했다. 불확실성과 무지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비슷한 강조는 요제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변화를 무시하는가 하면 경제 행위자들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한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완전경쟁(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주어진 가격으로 자유롭게 사고파는 상태)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312)


15장 과거에 대한 무지 


"역사가들이 여전히 편향bias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관점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는 1920년대 사회학자 칼 만하임과 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논의한 것처럼, 적어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자 라 모트 르 베이예는 만약 우리가 카르타고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만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물었다. 카이사르가 아닌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신의 회고록을 썼다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베이예는 역사가의 작업을 요리사에 비유해 '역사는 부엌의 음식처럼 취급된다. ··· 모든 국가, 종교, 종파가 동일한 날것의 사실을 취하고 ··· 자기 입맛에 따라 양념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베이예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역사서를 읽은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 국가와 집단에서 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특정 역사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편견prejudice 때문이었다."(321)


"장기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의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적 무지'의 발견, 특히 역사가 대부분 엘리트에 의해, 엘리트를 위해, 엘리트에 관한 내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1820년대에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예멜리안 푸가초프가 이끈 농민 반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에게 〈푸가초프 같은 자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말했다." "1960년대에 에드워드 톰슨과 에릭 홉스봄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제로 쓴 책들은(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홉스봄의 《원초적 반란자들》) 지도자들보다는 피지배층인 일반 대중의 삶과 고통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도 중점을 두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노동계급 남성들로 시작되었지만, 거기에는 곧 여성의 역사도 포함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은 과거의 무지를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해주었다. 노동 계급, 농민, 여성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최근에는 환경에 대한 무지로까지 인식이 확장되었다."(323-5)


맺으며_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무지


"이 책은 수세기에 걸쳐 새로운 지식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무지의 부상을 수반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집단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개인으로 본다면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 지식과 무지를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생각해야 하며, 일반 지식이나 통념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리엄 솔로몬이 말했듯이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무지를 가능케 한다.' C. S. 루이스의 말을 빌린다면 〈모든 새로운 학습으로 그에 따른 새로운 무지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개인, 문화, 시대의 무지를 언급하기 전에 항상 두 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무지하다. 다만 무지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지식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335,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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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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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대중운동의 매력


"거대한 변화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프랑스 혁명을 이루어낸 세대에는 인간의 이성이 전능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이 무한하다는 과장된 의식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혼돈 속으로 무모하게 뛰어든 레닌과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전능함을 맹신했다." "어떤 거대한 변화 임무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극렬한 불만을 느끼지만 극빈 상태는 아니어야 하며, 어떤 강력한 강령이나 절대적인 지도자 혹은 어떤 신기술을 얻을 때 압도적인 힘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네가 떠맡은 그 거대한 임무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전혀 알지 못해야 한다. 이들에게 경험은 장애가 된다. 프랑스혁명을 시작한 사람들은 정치적 경험이 전무했다. 볼셰비키와 나치,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혁명들도 마찬가지다. 경험자들은 늦게 개입한다. 잉글랜드인들이 대중운동에 소심한 것도 어쩌면 앞선 정치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23, 27-8)


"대중운동의 호소력과 실제적 조직의 호소력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실제적인 조직은 자기향상의 기회가 되며, 그 필요성은 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나온다. 반면에 대중운동은 특히나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단계에서는 소중한 자신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을 몰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대중운동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깊숙한 열망은 어떤 숭고한 대의와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삶─갱생─을 사는 것이며, 혹은 이것에 실패하더라도 자부심, 자신감, 희망, 목적의식,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 등 새로운 본령을 획득할 기회를 좇는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29-30)


"사람들이 어떤 대중운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강령이나 사업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적인 운동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히틀러 이전 독일의 불안한 젊은이들은 흔히 동전 던지기로 공산당에 가입할 것이냐 나치에 가입할 것이냐를 정했다. 제정 러시아의 인구 과밀 지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대 집단은 혁명과 시온주의, 어느 쪽으로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가족 안에서 한 사람이 혁명파에 가담하면 또 한 사람은 시온파에 가담했다." "전향을 권유하는 우리 시대의 대중운동은 라이벌 집단의 가장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잠재적 전향자로 주목하는 듯하다. 모든 대중운동이 같은 인간의 속성에서 추종자를 끌어내며 같은 심리에 호소하므로 ① 모든 대중운동이 경쟁을 벌이며, 한 운동이 세를 얻을 때 나머지 다른 운동들은 세를 잃는다. ② 모든 대중운동은 호환된다. 하나의 대중운동은 언제든 다른 대중운동으로 변형될 수 있다."(36-8)


2 잠재적 전향자


"가난한 사람이라고 전부 불만을 품는 것은 아니다. 도시 빈민가에 갇힌 채 자신의 쇠락을 뽐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익숙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친다. 건실한 사람들조차 가난이 길어지면 타성에 젖는다. 그들은 변치 않는 세계의 질서에 위압된다. 어떤 격변─침략이나 전염병 혹은 다른 어떤 공동체의 재앙─이나 일어나야 그 '부동의 질서'도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에 눈뜬다.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 피가 끓는다. 물려받은 것, 가진 것을 다 빼앗긴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반응한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에 성공을 안긴 것은 신빈곤층이었다." "오늘날(1951년) 서구 세계의 노동자들은 실직을 강등으로 느낀다. 그들은 부당한 세계 질서가 자기네를 박탈하고 상처 입혔다고 느끼며, 그렇기에 언제든 거대한 변혁의 외침에 귀 기울인다."(48-50)


"불만은 비참함을 견딜 만할 때, 상황이 개선되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 "기세등등한 대중운동은 희망이 눈앞에 있음을 설교한다. 이는 지지자들에게 행동을 고무하기 위한 것으로, 이 '모퉁이 바로 뒤에 있는' 희망이 대중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의 종말과 천국이 임박했음을 설교하며, 무함마드는 신도의 눈앞에 전리품을 흔들었고, 자코뱅당은 자유와 평등의 즉각 실현을 약속했으며, 초기 볼셰비키는 빵과 토지를 약속했고,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속박을 즉각 종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할 것을 만인 앞에 약속했다. 이 운동이 세력을 얻으면 역점은 미래의 희망으로 바뀐다. '성공한' 대중운동은 현재의 보존에 몰두하며, 즉발적 행동보다는 복종과 인내를 치하하며 말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51-4)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나치 평당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극악 범죄에 대해 무고하다고 선언한 것도 순전한 허위 주장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명령 복종의 의무를 짊어진 것은 중상당하고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광신자들은 학대보다 자유를 더 두려워한다. 신흥운동의 지지자들은 교조와 명령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공기 속에 살며 숨쉴지라도 강한 자유 의식을 갖고 있다. 이 자유 의식은 용인할 수 없는 개인 실존에 대한 책임과 공포, 절망감에서 도피한 결과다. 이 도피를 그들은 구원과 해방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변화가 엄격한 규율의 틀 속에서 성취한 것일지라도,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 또한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55-6)


"한 사회에서 대중운동의 기회가 무르익었는지 보여주는 척도로, 해소되지 못한 권태의 만연보다 신뢰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떤 대중운동이 되었건 발생하기 전 단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권태가 만연한 분위기가 감돌며, 대중운동 발생 초기에는 권태로운 사람들이 수탈과 압제에 고통 받는 사람들보다 운동에 더 공감하고 더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곤 한다. 대중 봉기를 꾀하는 선동자에게는 사람들이 좀이 쑤실 정도로 지루해한다는 보고가 적어도 경제적 수탈이나 정치적 학대로 대중이 고통 받고 있다는 보고만큼이나 고무적인 신호다.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권태를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시시하고 의미 없는 존재라는 자각은 권태의 주된 원천이다." "자율적인 삶을 누리며 형편이 나쁘지 않지만 창조적 작업이나 유익할 활동을 할 능력 또는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기 위하여 어떤 무모하고 기상천외한 수단에 의지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83-4)


3 단결과 자기희생


"사람이 자기를 희생할 수 있으려면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는 더 이상 조지나 한스, 이반 또는 다다오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서 독립성을 제거하는 일은 철저해야 한다. 개인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일련의 의례를 통하여 집단이나 부족, 당 따위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기쁨과 슬픔, 자부심과 자신감은 자기 자신의 전망과 능력이 아닌 집단의 운과 역량에서 샘솟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인은 절대로 혼자라고 느끼면 안 된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집단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 집단에게 버려진다는 것은 생명이 잘려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확실히 존재의 원시적 단계이며, 가장 완벽한 표본은 원시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운동은 이 완벽한 원시적 상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며, 당대 대중운동의 반개인주의적 경향에서 우리가 원시시대로 역행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고 해도 망상이 아니다."(96-8)


"죽음과 죽임이 어떤 의례나 의식, 연극 공연이나 놀이의 일부일 때는 쉽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상의 장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꿔도 될 것은 없다. 오직 자신을 무대 위의 (따라서 실제가 아닌 가상의) 배우로 여길 때 죽음은 공포와 최후라는 의미를 잃고 가상의 행위, 하나의 연극적 몸짓이 된다. 추종자들에게 죽음과 죽임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어떤 숭고한 장면, 엄숙한 혹은 유쾌한 연극 공연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대중운동의 지도자가 해야 할 주요 임무 중 하나다." "대중운동의 행렬과 행진, 의식, 전례 등의 행사는 의심할 바 없이 대중의 가슴에 어떤 공명을 일으킨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잃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적 행위로써 타인의 견해와 상상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남기 위해 실제하고 유한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한다."(102-5)


"자신의 경험과 사고에서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순교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자가희생은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면밀한 탐구와 숙고의 결과물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실천적인 대중운동은 추종자들과 현실 세계 사이에 사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할 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하여 대중운동은 궁극의 절대 진리가 강령 안에 포함돼 있으며 강령 이외에는 어떤 진리도 확실성도 없음을 주장한다." "의식과 이성의 근거에 의존하는 것은 이단이요 대역죄다. 맹신은 무수한 불신을 통해 검증된다." "보거나 들을 가치가 없는 사실에 '눈 감고 귀 막는' 능력이야말로 맹신자들이 지닌 불굴의 결단력과 충성심의 원천이다. 그들은 위험이 닥쳐도 겁내지 않고 장애에 기죽지 않으며 반박에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은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산을 옮기는 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119-20)


"강령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굳게 믿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머리로 이해한 강령은 그 위력이 삭감되게 마련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받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시작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영구불변의 확신을 갖기가 힘들다.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어김없이 그것의 효력과 확실성은 약해진다. 믿음이 두터운 자들은 절대적 진리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대중운동이 강령에 대한 설명을 붙이면서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운도으이 활기찬 시기는 끝나고 안정을 중시하는 시기에 돌입했다는 뜻이다. 체제가 안정되려면 지식인들의 충성이 필요한데, 강령을 이해시키는 일은 대중의 자기희생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식인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121-2)


"광신자는 두말할 여지 없이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영원히 그 하나뿐─만세반석─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그의 자신감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에서 나온다. 그가 어떤 대의를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하며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로 광신자는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까닭에 자신이 받아들이는 모든 대의가 전부 숭고한 대의가 되어버리곤 한다. 광신자는 그의 논리나 도덕 의식을 자극해봐야 그 대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숭고한 대의의 중요성과 정당함을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갈등 없이 갑자기 열광적으로 다른 대의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에게 설득이란 없으며, 가능한 것은 오로지 전향 혹은 개종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신봉하는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다."(127-8)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쁘기만 적보다는 장점이 많은 적을 증오하는 편이 쉽다. 경멸스러운 상대를 증오하기는 어렵다." "증오심 속에 숨어 있는 부러움은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을 따라하는 경향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모든 대중운동은 그 운동이 적으로 삼은 바로 그 악마의 형상을 따라가게 된다. 정점의 기독교는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구체화시켰다. 자코뱅당은 자신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대상인 전제군주의 모든 악덕을 스스로 행했다. 소련은 독점자본주의의 가장 순수하고 거대한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히틀러는 증오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부러움을 알아차리고서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국가사회당이 맹렬한 증오를 받을 만한 적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한 증오는 국가사회당의 신념이 우월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에, 〈국가사회당이 견지하는 태도의 가치, 신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의지력을 잴 수 있는 최상의 잣대는 그가 적······으로부터 받는 적개심의 정도다.〉"(143-5)


"지도자가 무에서 운동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니다. 추종하고 복종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강렬한 불만이 있어야 비로소 운동과 지도자가 나타날 수 있다. 조건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잠재적 지도자에게 아무리 재능이 있고 그가 주창하는 대의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만반의 태세가 갖춰지고 나면 걸출한 지도자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요건이 된다. 그런 지도자 없이는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저절로 대중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흐름을 볼셰비키 혁명으로 몰아가게 만든 것은 레닌이었다. 그가 스위스나 1917년 러시아로 들어가는 길에 죽었더라면 다른 탁월한 볼셰비키들이 연정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부르주아들이 운영하는 자유주의 공화국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경우에는 징후가 더더욱 결정적이다. 즉, 그들 없이는 파시즘도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다."(164-6)


4 시작과 끝


"대중운동은 대개 지배 체제가 불신받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불신은 권력자의 실책이나 학정의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불만 있는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다. 불만이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거나 불만이 없을 때는 저절로 쓰러져 무너지지 않는 한 아무리 무능하고 타락한 지배 체제라도 권력을 유지한다." "대중의 눈에 광신적 극단주의자는 아무리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을 사로잡아봤자 위험하고 음모적이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지식인은 사정이 다르다. 대중이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그의 말이 아무리 긴박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곧장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를 무시하든가 극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의 입을 막든가 한다. 이렇듯 지식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기존 체제의 토대를 잠식해 들어가며 권좌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믿음과 충성심을 무너뜨려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위한 기반을 닦는다."(191-3)


"어떤 유형이 되었든 거의 모든 지식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뿌리 깊은 갈망이 있는데, 이것이 지배 질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사회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높은, 두드러진 지위에 대한 갈망이다." "사회비판적인 지식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일생에 한 번쯤은 권력자가 보내는 경의나 회유의 제스처에 넘어가 그들 편에 서는 순간이 있다. 어떤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시류에 기꺼이 영합하는 아첨꾼이 된다." "저항하는 지식인이 아무리 자신은 짓밟히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믿어도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분노는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다. 그의 연민은 대개 군림하는 권력을 향한 증오심에서 나온다. 그러다가도 약자를 버리고 강자 편에 설 때에는 온갖 고상한 이유가 다 떠오른다. 〈자신과 관계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반 대중의 불행과 고통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류애를 지닌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소수의 사람들뿐이다.〉"(194-6)


"진정한 지식인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를 진리 자체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 그는 생각의 충돌과 주고받는 논쟁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지식인이 하나의 철학과 행동 강령을 창안했다면, 그것은 행동 방침과 신조라기보다는 빼어난 논리 능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허영심으로 인해 가혹한 언어를 구사하며 심지어는 독설을 쏟아붓기도 한다. 그는 대개 믿어달라고 호소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은 그의 주장에 성서와 같은 확신을 부여할 것이며, 그것을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빈정대는 지식인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을 때,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었고, 악한 자들은 강렬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틀림없이 어떤 계시가 임박했다. 틀림없이 재림이 임박했다.〉 이제 광신자들은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204-5)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할 자유가 아니라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공포스러운 부담〉으로부터의 자유, 무능한 자기를 실현하며 그 결과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곤란한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확신─맹목적인, 권위에 대한 확신─이다." "대중운동의 산파였던 지식인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비극적 운명을 맞는 이유는 아무리 단결된 노력을 역설하고 찬미한들 본질적으로 그들이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206-7)


"행동가는 대중운동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나 행동가의 등장은 대개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동가의 목표는 세계 개혁이 아니라 소유다." "그는 주로 훈련과 강압에 의존한다. 그는 사람은 다 멍청이라는 말보다는 다 겁쟁이라는 말을 더 신뢰하며, 존 메이너드의 말을 빌리자면 새 질서를 사람들의 가슴이 아니라 목 위에 수립하려 든다." "그는 주로 힘의 설득력에 의지하더라도 새 체제 안에 신념이 주는 감동의 요소를 보존하며 격정적인 선전선동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의 명령은 경건한 어휘로 이루어지며, 그의 입술에서는 옛 신조와 선전 문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강압의 철권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기계적 훈련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충성스런 분위기와 격정적인 선전선동은 강압을 설득처럼 받아들이게 만들며, 자발성과 유사한 습성을 정착시킨다."(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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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3
폴 카틀리지 지음, 이상덕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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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고대에 '그리스'라는 도시국가는 없었다. 다만 그리스 도시들과 여타 공동체들이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을 통해 표현된 공통 문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최초의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웅변가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다움'을 정의했다. 〈······아테나이인들이 그리스인들을 배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한 핏줄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과 함께 신전들을 세웠고 신들에게 희생제사도 지내는데다 같은 생활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8.144)〉 헤로도토스가 창작해낸 이 연설은 정치적 행위에서 거의 실현된 적 없는 통일성을 암시하고 있다(문화적 행위는 또다르다). '범헬레네스'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정치적 통일성이 빠져 있다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 문명에 특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민족국가의 부재, 좀더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리스 폴리스들의 개별적인 면모다."(20-1)


2 크노소스


"청동기시대 크레테에 관한 한 '신화적 역사(myth-history)'를 통하는 것이 최선이다." "후기 청동기시대 크레테 궁전은 정치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최고 권위자, 지배자, '빅맨'(여왕이었을 확률은 낮다. 그리스 체제하에서는 이들을 아낙스anax 혹은 '우두머리'라고 불렀다)의 자리 혹은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궁전 주변에는 궁전만큼이나 아름답게 장식되고 훌륭한 석공 기술로 지은 '대저택'에서 특별한 지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근 3000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기후 덕분에 가능했던 근본적 농경국가의 중심에는 '지중해 3종' 작물이 있었다. 곡물(가뭄에 강한 보리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다양한 종의 밀과 수수 같은 부수작물 역시 재배되었다), 포도주, 올리브유(크레테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와 올리브 재베에 안성맞춤이다)가 그것이다." "또한 국내 생산은 복잡한 해외무역과 연결되어 남으로는 이집트로, 북으로는 키클라데스제도와 펠로폰네소스반도 남부로, 그리고 레반트로 수출되었다."(31-2)


"크레테가 원주민 지배에서 외세 지배로 전환되면서 기원전 1450년대에 집중적으로 폭력이 발생한 것은 (청동 무기가 매장된) '전몰자 무덤'으로 알 수 있는데, 이는 이곳의 평화주의적 배경(이란 단어를 만들 수 있다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궁전 크레테의 최후'라고 알려진 것은 정복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으며 (선형문자 B 서판의 언어와 문장으로 보았을 때) 침략자들은 그리스어를 하는 그리스 본토 사람들, 특히 펠로폰네소스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듯하다." "크노소스와 크레테의 정치적 전성기는 분명 선사 청동기시대였다. 그러나 암흑기와 상고기(각각 기원전 11~9세기와 기원전 7~6세기)의 크레테 역시 결코 완전한 문화적 공백 상태는 아니었다. 이 섬은 전통적으로 초기 폴리스 건설이 활발하였으며, 한편 이 섬의 또다른 전통은 입법자와 법의 땅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드레루스의 아고라와 기원전 7세기 말의 법이 새겨진 청동 판을 들 수 있다."(34-5)


3 미케나이


"'미노스' 문명이 평화로워 보였던 것, 최소한 내부적으로 조화로워 보였던 것과 달리 미케나이와 그리스 본토의 코린토스 지협(테바이, 이올코스, 필로스 등) 남쪽과 북쪽 미케나이 문명 중심지들의 성채에 기반을 둔 통치자들은 전쟁을 선호했고 큰 성벽(두께가 6미터에 달했다)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통치자들이 글을 읽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은 선형문자 B라고 알려진 원시적 관료제의 그리스 문자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어 문자를 썼다고는 하나 미케나이 문명은 기본적으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중심을 둔 중동 문화의 지방 거점이었다. 성채 입구의 인상적인 '사자문'은 히타이트의 하투샤를 연상시킨다. 또한 아트레우스(Atreus, 아가멤논의 아버지)의 보고(寶庫)나 아이기스투스(Aegisthus,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정인)의 내쌓기와 메쌓기로 만든 벌집형 무덤은 사후세계를 암시하여 이집트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40)


"청동기 이후 역사시대의 가난한 미케나이인들은 (호메로스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서사시 낭독을 지겹도록 들으면서 그들이 절실히 믿고 아가멤논 신전에 자주 찾아가기만 하면, 혹은 페르세우스에게 헌정물을 바치기만 하면 아가멤논의 기운이 그들에게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했다." "영광스러운 미래(혹은 다른 어떤 미래라도)를 향한 역사시대 미케나이인들의 희망은 '뱀 기둥'에 미케나이가 포함되면서 더욱 커졌다. 이 기둥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함께 막아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독립적인 미케나이인들은 늘 스파르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웃한 아르고스(스파르테와 적대관계에 있었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기원전 468년에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를 전멸시켰고, 이 작은 폴리스는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46-7)


4 아르고스


"도시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로부터 거의 정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라리사(Larissa)와 아스피스(Aspis, '방패'라는 뜻)라는 두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그리스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온 곳이지만, 기원전 11세기 암흑기로부터 빠져나와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는 새로운 아르고스였다. 단지 지형학적·건축학적으로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의미에서도 새로웠다. 새롭게 진화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도리스인이라고 칭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중부에서 이주해왔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아르고스를 차지하여 펠로폰네소스의 세 거점 중 하나로 삼았다. 다른 두 곳은 스파르테와 메세네였다. 도리스인들은 남쪽으로 크레테까지 진출하였고(역사시대에 크노소스는 도리스계 도시가 되었는데 어쩌면 실제로 아르고스인들이 기초를 닦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에게해를 건너 동쪽으로 현재의 터키 서남부와 로도스 같은 그리스 섬까지 진출하였다."(51-2)


"도리스화란 같은 방언의 사용 외에도 같은 제도(세 지역은 똑같이 가상-친족 부족명을 사용하였다)와 종교 관습(아폴론을 위한 카르네이아Carneia 축제를 매년 열었다)을 말했다. 아르고스의 도리스인들은 같은 도리스계인 메세네(아르테미스)나 스파르테(아테나)와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 여신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기원전 8세기 아르고스인들의 확장에 따라 점차 아르고스 평원 대부분이 잠식되었고, 이들은 청동기시대의 주요 거점인 미케나이와 티린스가 포함된 이 아르골리스 지역의 실질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때때로 해안도시 아시네와 같은 이웃 도시의 정복이나 축출이 일어났으며, 이곳에는 모도시가 파견한 정착민들이 자리잡았다. 이는 그리스 내부 식민화의 한 형태로 아르고스의 해외 식민시 건설 필요성을 나타내었는데, 아르고스보다 훨씬 가난했던 내륙의 코린토스가 겪은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이주 필요성과는 대조된다."(54-5)


5 밀레토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로 불리던 지역(아나톨리아 서부, 즉 에게해 연안 중부)의 주요 도시였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그리스인들의 이주와 식민시 건설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 그 영향력이 넓게 퍼진 도시였다." "기원전 8세기 훨씬 전에도 밀레토스에는 사람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크레테에서 온 미노스인들과 그리스 본토의 미케나이인들이 이곳에 출몰하였다." "기원전 1210년에서 1190년까지 이 지역에 대변동이 일어난 후, 본토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2~11세기 동안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로 이주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흔히 '이오니아인의 이주'라고 부른다." "아나톨리아 해안의 정착민들과 그리스 본토의 에우보이아 사람들은 동방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알파벳,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살던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수학, 그리고 (기원전 6세기 전반 리디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화폐 등이 있다."(63-4)


"기원전 520년대 말 그리스인들은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어떻게 느꼈든 간에 조용히 다리우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20년 후에 이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리스인들은 에게해 연안에서 키프로스 섬까지 일제히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흔히 '이오니아 반란'이라고 한다."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6년(기원전 499~494년)이 걸렸다. 마지막 싸움은 밀레토스 근해 라데섬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도시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만한 것이 없었다. 다리우스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생존자들을 티그리스강 하구의 암페로 강제 이주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동료 이오니아인인 아테나이인들에게 밀레토스의 멸망은 여러 면에서 비극이었다." "밀레토스는 다른 도시(테바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파괴 이후에 꽤 일찍 재건되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재건된 도시는 아테나이 제국의 역사, 그리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관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74-6)


6 마살리아


"이제는 '그리스 동부'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황금빛 서부'라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서쪽으로 이동하자, 이 지역은 시킬리아로부터 메시나해협을 지나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이키아, 라틴어로 '대그리스')에 이르는 지역과 프랑스 남부, 스페인 동해안을 포함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미디(Midi)로, 어떤 이들에게는 프로방스 해안으로 알려진 곳이다." "프로방스 해안의 몇몇 도시들은 이름만 봐서는 그리스 기원임을 알 수 없다. 앙티브(Antibes)는 원래 안티폴리스('반대도시')였고, 니스(Nice)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을 딴 니카이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르세유인데, 옛 이름 마살리아는 그리스어가 아닌 페니키아어로 '정착지'라는 뜻이다. 기원전 600년경 밀레토스에서 탈레스가 명성을 떨치고 있을 무렵, 밀레토스와 함께 이오니아에 속해 있던 포카이아(현재 터키 서부의 포싸)의 그리스인 한 무리가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마르세유의 역사는 이 결정과 함께 시작된다."(80-2)


"마살리아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고 스페인 동북부의 엠포리온(현재의 암푸리아스) 같은 자도시를 건설할 만큼 성장하였다." "다양한 그리스산 상품들이 에게 해안으로부터 마살리아를 통해 내륙 원주민들에게 전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빅스 크라테르(Vix Krater)라고 불리는 커다란(높이 1.64미터, 무게 208킬로그램, 부피 1.1리터) 포도주 희석용 청동 항아리인데 기원전 530년경 스파르테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도주는 어디서 생산되었을까? 빅스 크라테르에 담겼을 희석한(혹은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살리아의 그리스인들이 그보다 한두 세대 전 프로방스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주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부터 1500여 년간의 포도 생산은 그리스 농업의 원천적 특징이 된다." "마살리아는 포도주 무역 도시로 자리잡게 되자 주요 기착지로서의 핵심 상품으로 자체 상표를 내건 포도주 항아리를 생산하고 수출하였다."(85-8)


7 스파르테


"스파르테를 특별한 그리스 도시국가로 변화시키는 개혁은 리쿠르고스(Lycurgus, '늑대-일하는 자')라는 전설적인 입법자가 단행했다고 전해진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경제, 정치-군사, 사회 세 분야에 대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이는 새로 획득한 메세니아 땅에 관한 것이었는데, 모든 스파르테인은 최소 얼마간의 토지를 받았다(클라로스klaros, '몫'을 의미). 공동 소유지와 거기서 일할 헤일로테스들도 있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모든 스파르테인들이 전사 의회의 회원으로서 평등한 투표권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표가 아닌 함성으로 의결했고, 의회 위에는 30명의 연장자로 구성된 귀족주의 원로원(게루상Gerousia)이 존재했다. 두 명의 스파르테 왕(항상 동일한 두 귀족 가문에서 나왔다)은 은퇴하면 원로원 회원이 되었다." "스파르테의 사회구조는 군대와 완전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스파르테 소년은 7세부터 중앙 도시국가의 주도 아래 공동으로 '교육받았다'."(98-101)


"기원전 8~7세기에 부상한 사프라테는 강한 전사 공동체였다. 그들의 힘과 8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그들의 영토는 그리스에 가장 컸다. 두번째인 시라쿠사이의 영토는 4000제곱킬로미터였다)는 그리스인을 헤일로테스, 즉 '포로'라고 부르며 반노예로 착취하고 스파르테 남성들에게 아주 어린(그렇다고 절대 연약하진 않았지만) 나이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시기는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상고기 내내 스파르테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테인들은 도시국가를 군사 기지화했다. 그 보상은 물론 매우 컸다. 스파르테는 기원전 7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4세기 초까지 단일 도시국가로는 그리스 전체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보병을 가졌으며, 기원전 480~479년에는 전 그리스와 서구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결코 이기적이라고도 비열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도시국가 자체는 '상고기적'이었으나, 이들로 인해 그리스 전체에 고전기가 꽃피게 되었다."(103, 107)


8 아테나이


"부유한 귀족이었던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아주 어려운 정치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이 싸움은 구식 복고주의 귀족과 솔론 자신과 같은 진보적 귀족, 그리고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계층 사람들과 아테나이의 가난한 시민들(솔론은 그의 시에서 이들을 데모스demos라고 불렀다) 사이에서 벌어졌다." "솔론의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제한적 권한 이양과 기원전 508/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더 급진적이고 실로 민주적인(데모크라티아는 '데모스의 권력'이라는 뜻이다) 권한 이양 사이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Pisistratus, 기원전 527년 사망)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참주 살해자'들에 의해 그의 동생이 죽은 지 4년 만인 기원전 510년에 타도당했다)의 참주제가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이 이룬 것은 솔론의 정치경제 개혁을 바탕으로 아테나이의 문화 통일과 증가하는 인구의 정치 참여 독려였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정치 지형 변화는 이들이 기반을 닦아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17-9)


"해안에서 8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와 있던 고전기 아테나이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져 번성하기 이전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복잡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도시는 세 도시가 하나로 통합된 형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아테니아가 '단순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정치 독립체로서의 아테나이, 즉 폴리스 아테나이가 있다. 이는 도심과 약 2400제곱킬로미터의 교외(코라)인 아티케(Attike, '아테나이인들의 땅'이라는 뜻)를 뜻한다." "둘째로 아크로폴리스, 즉 '높은 도시'가 있다. 때로는 그냥 '폴리스'로 불린 이곳은 상징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셋째로 아테나이는 그리스 폴리스 중 유일하게 영토 안에 페이라이에우스라는 제2의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민주정과 예술성, 철학적 고찰 등을 통해 '고전기' 그리스의 '황금기'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도시국가는 독립국가 '헬라스(Hellas)'의 영원한 수도가 되었다."(111-3, 134)


9 시라쿠사이


"시킬리아의 여러 도시에 정착한 그리스 이주민들 중 가장 성공한 부류는 시라쿠사이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시라쿠사이는 시킬리아의 그리스 도시 중 가장 크고 부유하며 강성한 도시로 성장했다. 영토는 모든 그리스 도시 중 두번째로 컸다. 스파르테계였던 도시민들은 대규모 원주민이었던 시켈(Sicel)족을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켜 킬리리(Cilyrii, 혹은 칼리키리Callicyrii)라고 불렀다. 시킬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시켈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밖에 그리스 이주민과 여러모로 유사했던 시킬리아 서쪽 끝의 페니키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를 건설했고, 그리스인들이 오기도 전에 스페인 동부와 사르데냐에 정착한 그들의 동족처럼 이미 도시 건설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이들이 건설한 도시로는 파노르모스(현재의 팔레르모)와 모티아(혹은 모지아) 등이 있다.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정착민 사이의 전투들은 시킬리아 고전기 역사의 주요 사건을 이루며 섬의 운명을 좌우했다."(137-8, 142-3)


"시킬리아 민주주의의 뿌리를 시킬리아섬에서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란 아테나이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시라쿠사이에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아테나이로부터 들어온 외래문화였는데, 신기하게도 이 외래문물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빠르게 정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시라쿠사이와 아테나이는 처음엔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길을 갔다. 시라쿠사이는 더욱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갔고, 아테나이는 두 차례의 과두정 반동을 겪고 마침내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테에 패하고 말았다." "아테나이에서는 기원전 413년부터 근본적인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던 터였다. 과연 민주주의가 제국을 통치하고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 기원전 404년의 답은 분명히 '아니요'였다. 시라쿠사이 역시 군사적 실패 이전에 민주주의 세력이 치명적인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다. '민주주의 막간극'은 기원전 405년 카르타고의 위협이 높아지면서 끝나버렸다."(148, 151-2)


10 테바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신실한 동맹이 되면서 테바이는 권력을 한층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테바이는 과두정에 대한 스파르테의 지원이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에는 스파르테의 지원으로 테바이의 오랜 숙원이 달성되었다. 그들은 보이오티아 민족이던 플라타이아인들이 아테나이와의 동맹(이 동맹은 기원전 519년으로 거슬러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었으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의 군사 협력을 기억하는 것이었다)을 파기하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도시 자체를 정복해야 했다. 또한 이 목적이 달성된 지 몇 년 후 그들은 아테나이 쪽으로 기울어 있던 테스피아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정복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기원전 413~404년)에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테바이였다. 그들은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 경계에 차린 스파르테 진영의 보호 아래 아테니아 외곽을 유린하였고, 아테나이의 은광에서 도주한 노예 수천 명을 싼값에 사들였다."(160-1)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의 훌륭한 지도력 덕분에 테바이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직접 메세네(기원전 369년)와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를 독립시키면서(기원전 368년) 쇠약해진 스파르테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테바이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기원전 368년에서 365년까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자가 테바이에 인질로 가택 연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기원전 360년대에 일시적으로 테바이의 힘이 강해지자 민주주의 아테나이와 과두주의 스파르테는 테바이의 위협에 대응하고자 다시 한번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 협력은 없었다. 기원전 362년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연합군은 만티네아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 자신은 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다." "테바이는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이후 기원전 316년부터 훨씬 작은 규모로 재건되었다."(164-5, 168)


11 알렉산드리아


"처음에는, 즉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동안과 사후 몇 년간은 알렉산드리아가 제국 속주의 새로운 수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의 연줄을 개인적 목적이나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멤피스의 파라오라고 선언했다." "기원전 305년경,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성공적인 마케도니아 장군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프톨레마이오스(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속주 총독으로 지명하였다)는 자신이 이 지역의 '왕'이라 선언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심지어 왕조를 개창하기까지 했다. 그후로 약 300년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승계 왕국이 되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문화적·행정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는 새로운 박물관과 도서관 덕분에 알렉산드리아가 전 그리스 세계의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유클리드 학자들과 수학 천재들, 에라토스테네스, 아르키메데스, 칼리마코스, 테오크리토스 같은 지성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177-9)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기원전 30년에 독립 정치체로서의 운은 다했다 할지라도 지적·문화적 운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로마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에도 헬레니즘 시대 못지않은 지성인들이 있었다. 또다른 프톨레마이오스인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로 146~1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여성 수학자는 판드로시온으로, 아마도 처음으로 세제곱근을 만드는 기하학 구성을 발명한 인물일 것이다. 히파티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수학자 테온의 딸이었다. 히파티아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천문관측 장치])와 수중투시경(hydroscope)을 제대로 사용하였다. 그녀가 기억되는 이유는 똑똑한 두뇌나 수려한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안타깝게도 그녀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순교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415년 키릴 주교의 명을 받은 기독교 군중에게 이교도로서 살해당했다. '고전기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187, 190)


12 비잔티온


"비잔티온은 (기원전 688년 혹은 657년) 건설된 후 별다른 정치적 사건이 없다가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일부로 페르시아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비잔티온은 다행히도 반란의 주축이던 밀레토스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를 (또다른 배다리로) 건너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했을 때는 그들의 요구대로 병력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는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와 미칼레에서 그리스인들이 거둔 승리는 비잔티온 해방의 전조가 되었다. 스파르테가 아시아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동안 비잔티온이 동맹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테가 파우사니아스 장군을 소환하면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비잔티온은 아테나이의 많은 동맹국 중 하나가 되어 1년에 은 15탈란톤이라는 비싼 공납금을 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95-6)


"아테나이에 비잔티온이 중요했던 이유는 이 도시에 매년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크리미아 등의 흑토지대로부터 아테나이와 그 밖의 에게 해안 지역들로 밀과 주요 식료품을 실어 오는 배를 관리하고 세금을 부과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잔티온은 아테나이 제국 네트워크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미에서 그 직후까지(이때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마침내 괜찮은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비잔티온이 가장 중요한 전쟁 목표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테인들의 승리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테나이 제국의 해체와 최대 300척에서 1200척까지 되던 엄청난 규모의 아테나이 함대가 감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테인들은 제국 자체엔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새롭게 확장한 에게해 제국이 작동하도록 외부에 하르모스트(harmost, '관리자')라는 사무소를 세웠다. 가장 중요한 관리들은 자연스럽게도 비잔티온에 자리잡았다."(196-7)


13 에필로그


"영어의 정치(politics)는 고대 그리스어의 중성 복수 형용사 폴리티카(politika)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폴리스와 연관된 일'(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속 용례가 가장 유명하다)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는 무대 중앙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앙으로(es meson)'라고 표현했다. 공적인 일은 그저 시민들의 걱정거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중앙으로' 모여 논의하고 논박했으며 옳든 그르든 그들이 공공선이라고 믿는 것, 도시와 시민의 공공 이해라고 믿는 것을 철저히 검토하였다. 물론 여성은 공동 정치 사업에서 의사 결정의 주체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노예와 비슷한 신분의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 안팎에서 일하며 도시 내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여가(스콜레skhole, 영어의 '학교school'의 유래)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테나이같이 급진적 민주정이 이루어지던 곳에서만 대부분의 가난한 남성 시민들이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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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7
미셸 배들리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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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학과 행동


"행동경제학은 우리의 결정이 비용·편익의 합리적 계산과 더불어 사회적·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사람이 (선택의 금전적 비용과 편익을 쉽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일종의 계산기이며 주위 사람들이 뭘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경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개개인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과 이를 떠받치는 제도의 실패 때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통 경제학자들은 제약에서 합리성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으나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이 초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의 한계에 주목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대체로는 합리성이 변화 가능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에 좌우된다고 인정한다. 좋은 정보를 접할 수 없을 때, 서둘러야 할 때, 인지 제약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경험할 때─이럴 때 우리는 시간과 정보가 충분한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내리지 않았을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12-6)


2 동기와 유인


"외적 동기는 우리 개개인의 바깥에 있는 유인과 동기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우리로 하여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도록 세상과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는 경우다. 그러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흔하고 강력한 외적 유인은 돈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외적 유인으로는 신체적 위협이 있다. 하지만 외적 동기는 비금전적 유인─이를테면 인정과 성공 같은 사회적 보상─에서 올 수도 있다. 임금 인상, 좋은 시험 성적, 상장과 부상, 남들의 인정 등은 모두 외적 보상이다. 내적 동기는 우리의 내적 목표와 태도가 미치는 영향을 일컫는다. 내적 반응은 이따금 우리가 노력하도록 독려한다. 우리는 외적 보상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직업적 자부심이든 의무감이든 대의에 대한 충성심이든 수수께끼를 푸는 즐거움이든 신체 활동의 쾌감이든, 우리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내적으로 동기가 부여되면 외적 유인은 없어도 된다."(26-7)


"유인과 동기는 내적(intrinsic)인지 외적(extrinsic)인지를 불문하고 우리의 직장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 직장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적 영향과 외적 영향의 상호 작용이다. 외적 유인과 동기의 사례로는 우리가 받는 임금과 고용되었을 때 얻는 사회적 인정─특히, (의료계나 교육계처럼) 가치를 인정받는 직업일 경우─이 있다. 일에는 내적 동기도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우리는 도전을 즐기거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거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임금 인상이 노동자에게 노동자에게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금전적 혜택 때문만이 아니다. 좋은 대우가 직원의 신뢰와 충성에 미치는 영향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보상과 유인 때문이기도 하다."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는 금전 교환이 전부가 아니다. 충성, 신뢰, 보답 등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유인과 동인도 작용한다. 조지 애컬로프 연구진은 이를 일종의 '선물 교환(gift exchange)'이라 일컫는다."(35-7)


3 사회적 삶


"행동경제학에서 신뢰와 보답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공평한 결과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으며 남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면, 신뢰하고 보답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이 핵심 요소는 공정에 대한 선호를 남들과의 비교와 짝짓는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나거나 못난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불공평한 결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 선호를 '불평등 회피(inequity aversion)'라고 부른다." "공정함의 선호는 자원봉사나 기부 같은 이타주의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베풀면 즐겁고 이따금 마음이 따스해지기 때문이다. 몇몇 실험에 따르면 이것이 언제나 순수한 이타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임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일 때도 있다."(44-5)


"사회적 본성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군중을 모방하고 따르려는 경향이다. 딴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말이 된다. 군중을 따르는 것은 합리적인 사회적 학습 장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충동적으로 군중을 따를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무심코─아마도 우리에게서 진화한 군집 본능을 따라─그렇게 한다." "군집 행동을 설명하는 한 가지 해석은 모든 결정을 백지 상태에서 내려야 할 때의 시간과 인지적 노력을 절약하게 해주는 빠른 의사 결정 도구─행동경제학자들이 어림짐작(heuristic,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 것─라는 것이다." "어림짐작의 문제는, 빠르고 편리하고 종종 충분히 훌륭하게 작동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인 행동 편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과 친구를 모방하는 것은 귀중한 사회적 정보를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군집 행동은 여러 어림짐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54-6, 63)


4 빠른 판단


"정보에 짓눌리면 빨리 결정하기가 힘들다. 이때 우리는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가 걸렸다고 말한다. 선택에 짓눌렸을 때에도 빠르고 정확하게 결정하기가 힘든데, 이것을 선택 과부하(choice overload)라 한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선택이 좋은 것이며 선택지가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들어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우리의 복리가 커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해서 결과가 나아지지는 않는 듯하다." "현대에는 선택 과부하의 문제가 유난히 심각하며 정보 과부하도 이를 부채질한다. 선택 과부하를 맞닥뜨리면 소비자는 빨리 결정을 내린다. 이를테면 제시된 모든 선택지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첫째 항목을 선택한다. 선택이 너무 복잡하면, 특히 눈에 보이고 즉각적인 이익이 없는 '지루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69-70)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특히, 서두를 때─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접근하고 끄집어내고 회상하기 쉬운 정보를 이용한다. 이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종종 현재 상태을 기준점으로 삼아 기존 상황에서 멀어지는 변화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과 친숙함 편향(familiarity bias)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하기도 하고, 사건을 현재 상황과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판단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판단은 결정이 우리를 현재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지게 할 것인가를 바탕으로 삼는다. 새 일자리를 찾거나 집을 팔 때 적정 임금이나 적정 주택 가격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지금 벌고 있는 금액, 이 집을 샀을 때 지불한 가격, 이웃이 자기집을 팔면서 받은 가격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문제는 이 판단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힘과 거의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73, 84)


5 위험이 따르는 선택


"기대 효용 이론가들은 사람들이 결정에 관련되고 가용한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활용한다고 가정한다. 또한 우리가 비교적 복잡한 수학 도구를 이용하여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의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사람들이 위험이 따르는 상황에서 선택할 때 종종 변덕을 부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명한 행동 역설 중 하나가 바로 알레 역설(Allais Paradox)이다. 알레 역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험이 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안정적이고 꾸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결과가 확실한 선택지를 위험이 따르는 일련의 선택지와 함께 제시하면 사람들은 확실한 결과를 선호한다(어떤 전망들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지만).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이 효과를 확실성 효과(certainty effect)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운을 시험하고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하지만, 확실한 결과를 제시받으면 더 높은 보상을 위해 추가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94-5, 99)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손실을 피하려 할 때는 위험을 더 감수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도박할 때는 위험을 덜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손실에 직면했을 때 위험 감수를 선호하는 현상이 이익의 맥락에서 위험 회피를 선호하는 현상의 거울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영 효과(reflection effect)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고립 효과(isolation effect)라는 셋째 효과도 발견했다. 이것은 제시된 대안 중에서 중요한 요소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모든 관련 정보를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보 조각들을 떼어내 판단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통찰을 종합한 '전망 이론 가치 함수'로 우리의 주관적 가치 인식을 표현한다." "일정한 양의 손실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손상시키는 정도는 같은 양의 이득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훨씬 크다. 100파운드를 얻는 기쁨보다는 100파운드를 읽는 속상함이 훨씬 큰 법이다."(104, 107, 114-6)


6 시간


"표준 경제학에서는 어떤 사람이 오늘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미래의 같은 기간에 대해서도 같은 조바심을 나타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시간 일관성(time consistency)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에서 얻은 증거를 토대로 표준 경제학적 접근법에서 가정하는 시간 선호의 일관성이 사람(또는 그밖의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인내심이 '불비례적으로(disproportionately)' 약하지만, 미래를 계획할 때는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 이것이 시간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이다. 즉, 지연된 결과에 대한 선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시간 선호는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편향(present bias)을 겪는데─나중의 큰 보상보다 당장의 작은 보상을 불비례적으로 선호한다─이것은 내재된 시간 비일관성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한다."(123-5)


"우리가 먼 미래를 계획할 때 더 인내심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콧 릭과 조지 로웬스타인은 이것을 편익 대 비용의 상대적 실질성(tangibility)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오늘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다. 유혹을 거부하는 데는 실질적인 단기적 비용이 들며,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다이어트, 운동, 금연 등 예는 수없이 많다. 초콜릿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즉각적인 실질적 쾌락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할 때처럼 당장 번거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미래의 목표는 멀고 덜 실질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오늘 자제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누구나 한 가지씩 미루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헬스장에 가는 일을 미룬다. 진득한 자아는 미래에 운동 부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성급한 자아는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소파에 앉아 초콜릿칩을 먹는 것을 선호한다. 이로 인한 순(純)효과는 어느 자아가 지배적인지에 달렸다."(127-9)


7 성격, 기분, 감정


"성격은 많은 경제적·재무적 의사 결정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의사 결정을 하려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가 많은데, 성격 특질은 인지 능력을 결정하며 인지를 통해 선택을 좌우한다. 이로 인해 학업 성취, 직무 성과, 사회적 기술이 결정되기에 그 결과는 종종 일생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성격 특질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믿음직한 동료를 대체로 선호한다. 파티에서는 유머 감각이 있는지 여부가 관심사일 것이다. 성격 특질에 맞는 직업도 다르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찾아가고 싶은 의사는 공감 능력이 있고 인지 능력이 뛰어나서 증상과 진단을 쉽고 정확하게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레스토랑에 갈 때 우리가 원하는 주방장은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이다. 심지어 주방장이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울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거라 맏기도 한다.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의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151-2)


"섬(insula)은 통증, 굶주림, 목마름, 분노, 혐오 같은 부정적 정서 상태를 처리한다. 변연계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뇌 속 깊숙한 곳에 들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섬은 충동적이고 자동적인 의사 결정 유형에 관여한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섬은 컴퓨터의 부당한 제안보다는 사람의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심하게 활성화되었으며, 제안이 부당할수록 섬 반응이 커졌다. 참가자들의 섬 활성화에는 예측력도 있었다. 섬이 많이 활성화되는 참가자들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비율이 훨씬 컸다. 산피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부당한 제안에 반응하는 기전이 악취에 반응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대우는 분노와 더불어 '도덕적' 유형의 혐오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전전두피질은 나중에 수용된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며 이를 거부하려는 정서적 충동을 극복하려면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68)


8 거시경제에서의 행동


"기존 거시경제학은 모든 노동자와 모든 기업이 같고 결정도 똑같은 방식으로 내린다고 가정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완벽히 합리적이기에, 어떤 사람들이 거시경제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묘사하는 일도 비교적 수월하다. 표준 거시경제학 이론에서 묘사하는 것은 한 개인─대표적 행위자(representative agent)─으로, 그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많은 표준 경제학 이론에서 대표적 행위자는 모든 기업이나 모든 노동자의 행동을 대표한다. 대표적 행위자의 행동을 곱하면 거시경제 모형이 된다." "하지만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대표적 행위자라는 수단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 있게 종합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성격과 감정의 차이, 행위자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행동경제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는 대표적 행위자가 단 한 명도 없다.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그 대신 총체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184-5)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금융과 금융 불안정에 미치는 영향에도 주목한다. 역사에 기록된 투기적 거품들은 냉철한 합리적 행위자가 자산 매입의 상대적 비용과 편익을 평가할 때 신중한 수학적 계산을 한다는 표준 경제학의 시각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먼 민스키는 이러한 금융 불안정을 설명하기 위해 신용 순환 이론을 발전시켰다. 케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취약한 금융 체계와 이 취약성이 거시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민스키의 분석에서는 정서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스키는 공포와 공황의 순환이 경기순환을 추동하고 금융 체계의 취약함이 극단적 변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기순환은 처음에 투기적 도취와 기업가의 지나친 낙관주의라는 물결에 휩쓸린다. 은행은 대출을 지나치게 늘리고 기업은 차입을 지나치게 늘린다. 결국 이 호황에 탄탄한 토대가 없음을 누군가 깨닫고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고, 야단스럽게 불황 국면이 찾아온다."(186-8)


9 경제적 행동과 공공 정책


"전통적으로 조세와 보조금은 정부와 정책 입안자가 시장의 기능을 개선하려고 이용하는 주된 정책 수단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례로 흡연이 있다. 흡연이 공중 보건 체계를 압박하여 납세자에게 비용을 발생시키면 담배에 과세하는 것이 유익하다. 흡연의 유인을 줄일 뿐 아니라 정부가 보건 체계에 투여할 세입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특정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하고 있다면 보조금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경제 활동을 증진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위적 시장 시스템은 '시장 부재(missing market)'를 대체한다. 오염은 단순한 사례다. 기업이 기업이 공기나 물을 오염시킬 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기업은 공짜 오염 허가를 얻은 셈이 된다. 오염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도 보상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에 오염에 대한 시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로널드 코스의 통찰에 근거한 해결책은 인위적 시장(배출권 거래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99-200)


"행동공공정책은 시장 실패에 주목하기보다는 행동 변화(behaviour change)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을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의사 결정으로 유도하여 사람들이 일상적인 결정과 선택을 내리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넛지』의 저자들인 세일러와 선스타인은 정책 입안자들이 효과적인 정책 수단을 설계하려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어림짐작과 편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 구조를 재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을 바탕으로 두 사람은 이른바 우리의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를 규명하면서, 넛지를 일종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라고 표현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단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 점화와 넛지를 설계하여 사람들의 결정을 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좋은' 결정이 강화되고 '나쁜' 결정이 억제되도록 자주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이 모든 전략은 행동공공정책 입안자의 도구로 쓰인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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