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오늘의 이스라엘 - 7가지 키워드로 읽는
최용환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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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익숙하지만 낯선 나라, 이스라엘


1장 시오니즘과 분쟁


1917년 영국군이 오스만제국의 군대를 격파한 이후부터 30여 년 동안 국제연맹의 결의에 따라 영국이 이 지역을 위임통치하였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제연맹을 이은 유엔은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과 아랍인이 각각 그들의 개별국가를 건설토록 하는 이른바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안1947 Partition Plan’을 채택했다. 이 분할안에서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에 대해 내린 결정이었다.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안은 예루살렘을 직접 관할할 수 있는 ‘코르푸스 세파라툼Corpus Separatum’이라는 지위를 유엔에 부여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앞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될 유대 국가나 아랍 국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별도로 분리된 지역이라는 뜻이다. 1947년 유엔 ‘영토 분할안’에서 예루살렘은 UN이 직접 관할하는 특별지역으로 규정되었지만, 1949년 휴전협정에서는 예루살렘의 동쪽 부분은 요르단이, 서쪽 부분은 이스라엘이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것으로 양측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19)


# 코르푸스 세파라툼Corpus Separatum. ‘따로 분리된 독립체(separated body)’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다.


예루살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시가지(올드시티) 구역은 당시 이스라엘이 장악하지 못한 채 요르단의 관할구역으로 남았다. 그 이후 거의 20년 동안은 그린라인(제1차 중동전쟁 때 그어진 1949 휴전선1949 Armistice Line)이 양측 간에 실질적인 국경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일명 ‘6일 전쟁’)에서 마침내 요르단이 장악하고 있던 올드시티 등 동예루살렘 지역마저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예루살렘 전역에 대한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상태는 오늘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을 나누고 있던 그린라인은 1949년에 그어졌지만, 국제정치적 관점에서는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중요하다. 현재 이스라엘은 그린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동과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도시이며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는 주장이다. 이미 예루살렘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동예루살렘을 포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0)


 ‘욤 하지카론Yom HaZikaron’이라고 부르는 이스라엘의 현충일은 독립기념일 바로 하루 전날이다. 유대력으로 ‘이야르Iyar’달 4일이다. ‘욤 하츠마우트Yom Haatzmaut’라고 부르는 이스라엘의 건국기념일(독립선언일)은 양력 기준으로 1948년 5월 14일이다. 유대력으로는 ‘이야르달’ 5일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력에 따라 각종 기념일을 경축하기 때문에 독립기념일 역시 양력으로는 매년 날짜가 달라진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독립기념일 다음 날인 5월 15일을 ‘알 나크바Al Nakba’, 즉 ‘나크바(재앙)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다음 날인 5월 15일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에레츠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라를 세운 것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이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재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3-4)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상시적이고 현재 진행형이다. 언제 어디서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는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공항이나 항만이 없다. 두 개로 나누어진 영토 역시 이스라엘 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 출입 문제에서부터 국제기구가 관장하는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서의 각종 인도적 지원사업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과 외부세계를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데 있어 이스라엘 당국의 협조를 얻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면서 또한 필수적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각종 비군사적・행정적 업무를 조정・통제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코가트COGAT’라는 조직이다. 국방부 산하 조직으로 ‘Coordinator of Government Activities in the Territories’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점령지 민정조정관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코가트의 책임자는 현역 육군 소장이 맡고 있다.  45-6)


2장 디아스포라와 이민


# 유대교 공동체 구분

1. 하레디 : 유대율법에 가장 충실한 초정통파 그룹

2. 다티 : 근대화된 성향의 종교적 시오니스트 그룹

3. 마소르티 : 전통적 가치를 따르면서도 현대적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그룹

4. 힐로니 :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 세속적 성향의 그룹


# 출신 지역별 구분

1. 아시케나지 : 독일 지역

2. 세파르디 : 스페인 지역

3. 미즈라히 :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


오늘날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출신 지역 그룹은 ‘아시케나지Ashkenazi’ 그룹이다. 아시케나지는 과거 독일 지역을 가리키는데 9~10세기경 라인강 유역의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던 유대인 그룹을 지칭한다. 현재 지도에서 보자면 주로 독일 서부와 프랑스 북부 일부 지역이 그들의 주요 거주지였다. 이들은 수세기에 걸쳐 동부 유럽 지역인 오늘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지로 이주했다. 이들은 동유럽과 러시아 등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가해지던 시기에는 서유럽과 미국 등지로 다시 옮겨가기도 했다. 이들은 독일어를 바탕으로 히브리어 문자가 결합된 ‘이디시Yiddish’라는 언어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아시케나지 그룹이다. 하레디 종교정당인 UTJ를 구성하는 ‘아구닷 이스라엘Agudath Israel’과 ‘데겔 하토라Degel HaTorah’도 모두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64)


또 하나의 대표적 그룹은 ‘세파르디Sephardi’ 그룹이다. 세파르디는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뜻하는 ‘세파라드’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주로 거주해 오던 유대인 집단이다. 이들은 중세를 거쳐 15세기까지 무슬림이 지배하던 시기에 자신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상당한 지위와 영향력을 누리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15세기 말 기독교를 믿는 정치세력이 맹위를 떨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이베리아반도가 기독교인들의 치하에 들어가자 무슬림은 세력을 잃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당하며 시련을 겪었다. 세파르디 그룹 유대인들이 주로 이주한 북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는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미즈라히Mizrahi’ 그룹이라고 부른다. 유럽 중심의 아시케나지와 구분하는 차원에서 지중해 주변 지역 중심의 유대인들을 통칭하여 모두 세파르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레디 종교 정당 중 '샤스'당은 이들 세파르디가 중심이다. 65)


종교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최고랍비공의회는 아시케나지와 세파르디 두 그룹을 각각 대표하는 최고 랍비가 모인 2인 협의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 이스라엘 현지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유대인인 ‘사브라’들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에 비해 조상의 출신 지역이나 인종적 배경에 따른 구분 의식이 별로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브라들이 해외에서 태어나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올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들 사브라들이 이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만큼 그동안 존재해 왔던 아시케나지와 세파르디 집단 간의 갈등은 이미 상당히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자유분방한 세속적 힐로니 그룹 내에서는 실제로 아시케나지 출신과 세파르디 출신 간의 결혼도 흔한 편이다. 하지만 초정통파 그룹 내에서는 아시케나지 출신과 세파르디 출신 간 결혼은 여전히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66)


이스라엘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장 외모가 두드러져 보이는 이들은 피부색이 어두운 유대인들이다. 이들을 ‘이스라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타 이스라엘’ 또는 그들의 출신 지역을 따서 ‘에티오피아 유대인’이라고도 한다. 이들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오랜 기간 유럽 중심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거의 잊힌 존재로 남아 있었다. 대다수는 교육이나 소득 수준이 높지 않고, 그만큼 사회적으로도 낮은 계층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의 슈퍼마켓에 가면 계산대에서 일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유대인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소득 수준은 이스라엘 전체 직장인의 월평균 소득보다 20~40% 정도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보다 여성의 급여가 더 낮다. 이들도 똑같은 유대인이지만 아랍계 국민과 비슷한 소득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 등을 중심으로 피부 색깔에 따른 차별적 대우 때문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66-7)


아이러니하게도 아랍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분쟁을 치른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인이 많이 있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이미 이스라엘의 영토로 선언된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온 아랍인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치러진 독립전쟁 중에도 살던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계속 버텨왔던 아랍인들이다. 이들을 ‘48 아랍인’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건국 연도인 1948년 당시에 이미 그곳에 살던 아랍인들이라는 뜻이다. 이들 48 아랍인들에게는 1952년 제정된 국적법에 따라 모두 이스라엘 국적이 주어졌다. 이들과 그 자녀들은 오늘날 이스라엘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종교적으로 보면 이들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물론 일부 크리스천도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자신들의 조국(이스라엘)과 민족(팔레스타인)의 갈등인 셈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69)


드루즈Druze는 아랍어를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슬람의 한 분파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계 아랍인과는 다른 특유의 종교와 생활방식으로 인해 그들은 통상적으로 별도 민족으로 분류된다. 이스라엘의 드루즈는 약 15만 명 정도로 전체 이스라엘 인구의 2%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미미한 수준이다. 이들은 비록 아랍어를 구사하고 이슬람에서 파생된 신앙을 갖고 있으나 이슬람과는 다른 독자적 신앙체계를 갖고 있다. 드루즈가 유대인 중심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관심을 끄는 이유는 유대인이 아닌 드루즈 남성에게 이스라엘 군대에 복무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아랍세력으로부터 박해를 경험해 온 드루즈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적지 않은 남성들이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아랍권을 상대로 싸웠다. 드루즈의 미래를 위해서는 아랍 민족주의보다는 유대 시오니즘에 동조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74)


드루즈가 주로 팔레스타인 북부에 거주해 온 반면 베두인Bedouin은 수천 년 전부터 남쪽 시나이 반도와 네게브 사막 지역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해 오던 아랍 민족이다. 언어도 주로 아랍어를 사용하고 종교도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스라엘 내 베두인의 인구는 약 25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약 3%에 육박한다. 1970년대부터 이스라엘 정부는 네게브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베두인들을 지정된 마을들로 이주해 살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강제 이주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으나, 베두인의 상당수는 정부가 지정한 마을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 베두인의 일부는 아직도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적 행정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무허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일반인들은 캠핑조차 하기 어려운 네게브 광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들만의 마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 국민을 사회계층으로 나눌 때 네게브 지역 무허가 주택에 거주하는 베두인이 최하층민이라고 할 수 있다. 75-6)


3장 유대 국가와 유대 정체성


귀환법이나 시민권법에서는 법률적인 의미에서 누가 유대인인가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이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유대 종교법 ‘할라카’에 따라 어머니 쪽 혈통을 따른다. 즉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유대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20년 만인 1970년에 귀환법을 개정하면서 이스라엘로 이주할 수 있는 유대인의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개정된 법에서는 유대인의 손자녀(친가든 외가든 조부모중 한 사람만이라도 유대인인 경우), 유대인의 배우자, 유대인의 자녀의 배우자까지 범위를 확대해 이들에게도 이스라엘 이주와 자동적인 국적취득을 허용한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지만 신앙으로서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대교를 믿지 않더라도 다른 종교로 개종만 하지 않았다면 귀환법의 적용대상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와는 반대의 경우였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다른 종교로 개종했다면 이주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87-8)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 대해 유대교로 개종을 허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랍비가 재판관을 맡는 종교법원의 배타적 권한에 속한다. 이 종교법원은 초정통파 ‘하레디’ 그룹의 랍비들이 장악하고 있다. 2021년 3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이방인의 유대교 개종과 관련하여 역사적인 판결을 했다. 초정통파 소속이 아닌 개혁파 랍비의 주관으로 개종한 이방인도 귀환법의 적용대상이 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한 것이다. 이 같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초정통파 측에서는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기존 방식대로 초정통파가 규정하는 절차를 거친 개종자에게만 귀환법을 적용하도록 대못을 박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대법원의 획기적 판결에 따라 이들의 이스라엘 이주와 국적취득은 허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유대 종교법상의 유대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귀환법에 따라 귀환 이주해 국민의 자격을 얻는 것과 종교법상의 유대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90)


유대인 중에서 유대교의 일반적인 교리와는 다르게 예수(히브리어로 ‘예수아’)가 곧 메시아(구세주)이며 그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메시아닉 유대인Messianic Jews’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크리스천이 아니라 역시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 스스로의 생각과는 달리 초정통파 유대인 그룹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유대교에서 이탈한 이교도인 크리스천일 뿐이라는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모계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알리야의 권리를 주지 않는다. “유대인이었다가 자발적으로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람은 예외로 한다”는 귀환법의 예외 규정에 따르면,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타종교로 개종한 사람(크리스천)일 뿐이다. 이스라엘 대법원도 1989년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90-1)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에서 하레딤이 장악한 의석은 2022년말 현재 18석에 이른다. 하레딤을 배경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종교정당들은 크게 11석을 가진 ‘샤스SHAS당’과 7석을 갖고 있는 UTJ 즉, ‘토라 유대교 연합’United Torah Judaism이라는 정당으로 크게 대별된다. 이들 초정통파 종교인들로 구성된 종교정당들은 의회총선에서 매번 15석 안팎의 의석을 확보한다. 정부 구성을 위해서는 정당 간 연합이 불가피한 이스라엘 정치체제의 특성상 이들 종교정당들은 지난 수십 년간 우파 연립내각에 빈번하게 참여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각료직을 배분받아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율법을 실천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부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여타 집단들과의 갈등과 충돌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93)


종교로서의 유대교와 현실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시오니즘을 결합한 것이 종교적 시오니즘이다. 종교적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들이 에레츠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인의 나라를 건국하려는 시오니즘을 적극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유대교의 정체성을 지키며 토라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토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세속적 시오니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또한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유대교의 근본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강경하다.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지聖地는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정치적으로 극우의 입장에 서 있다. 극우성향을 가진 종교적 시오니스트 그룹은 2022년 가을 총선에서 14석이나 차지할 정도로 약진했다. 하레디 종교정당과 종교적 시오니스트 그룹의 의원들을 합치면 32석이나 된다. 2022년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의 연합 정부는 역사상 가장 강경한 우파 정권으로 간주되고 있다. 93-4)


초정통파 하레디 그룹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약 12~13%에 달한다. 그런데 이들 하레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하레디 공동체를 떠나 독자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요침’이라 부른다. 히브리어로 ‘떠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요침의 상당수는 자신이 살던 집이나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배척을 당하면서 관계의 상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배신자나 배교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미혼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비난이 덜하겠지만 결혼한 남성이 공동체를 벗어나면 그야말로 가족을 저버린 ‘나쁜 가장’으로 최악의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하레디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보다 궁핍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같이 하레디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모험에 가까울 정도로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요침의 규모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99-100)


4장 작은 나라 강한 군대의 비밀


건국 직후부터 최근까지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전쟁국가' 이스라엘에서 국방력을 담당하는 군을 히브리어로 ‘짜할Zahal’이라고 부른다. 영문 약칭으로는 IDF 즉 ‘이스라엘 방위군Israel Defense Force’이다. ‘짜할’은 이스라엘이 독립선언을 한 직후 정식으로 창설되었지만 그 뿌리는 건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짜할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던 시절 아랍인으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던 최대 규모의 유대인 무장조직 ‘하가나’를 모체로 하고, 다른 유대인 시오니스트 무장단체인 ‘이르군’ 등을 흡수하여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군의 병력 규모는 17~18만 명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현역 병력 못지않게 중요한 병력이 약 46~47만 명 정도에 달하는 예비군이다. 예비군은 40세(장교는 45세)가 될 때까지 연간 약 한 달 정도 훈련에 소집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부대별로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진다. 그간 이스라엘이 치렀던 수차례의 전쟁에서 예비군은 상당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4)


이스라엘의 강력한 국방역량 배경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것이 독특한 군 간부양성 프로그램이다. 그중에서도 ‘탈피오트Talpiot 프로그램’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엘리트 양성 방식이다. 탈피오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난공불락의 망대(파수대)’라는 뜻이다. 이들 탈피온은 중위로 임관해 주로 첨단장비 연구개발 부대, 컴퓨터 통신부대, 사이버 부대, 정보기관 등에 배속되어 6년간 복무하면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스라엘이 자랑할 만한 최고 수준의 첨단무기를 새롭게 개발하거나 작전에 배치되어 활용 중인 기존 무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작업도 이들의 몫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하게 되면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는다. 이들이 군 복무 기간 중 습득한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선후배 간에 맺은 인연은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취업으로 연결된다. 탈피오트 프로그램은 군과 학교 및 기업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115-6)


다양한 형태의 전문 특수부대들도 이스라엘의 국방안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먼저 탈피오트 프로그램보다 훨씬 앞서 통신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활용해 온 특수부대 ‘쉬모네 마타임’이 있다. ‘쉬모네’는 히브리어로 숫자 ‘8’을 뜻하고 ‘마타임’은 숫자 ‘200’을 뜻한다. 그래서 ‘8200(8-200)’ 부대로도 알려져 있다. 8200부대는 독립전쟁이 끝난 직후에 통신정보수집과 비밀암호 해독 등을 위해 공식 창설된 특수부대이다. 인터넷이나 사이버 분야의 정보수집과 그에 대한 대응 활동도 같이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국NSA이나 영국의 정보통신본부GCHQ등과 비슷한 기능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8200부대 출신들은 전역 이후에도 그들만의 모임을 만들어 창업이나 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8200부대는 IT 분야의 엘리트 양성조직이면서 전역 이후에도 사회적인 인정과 적절한 보상이 거의 보장되기 때문에 군 복무를 앞둔 고교생들 간에 엄청난 선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116-7)


8200부대와 더불어 유명한 군 정보부대 중의 하나로 9900부대가 있다. 9900부대는 위성이나 드론 등을 이용하여 수집한 영상을 판독・분석하여 지리정보를 제작해 정책결정권자나 지상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에 배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특수부대이다. 미국 국가지형정보국NGA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013년부터는 이 부대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청년들을 특별 채용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부대는 특정 사물을 집중적으로 탐색하거나 시각적인 관찰을 반복적으로 즐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의 독특한 능력을 영상정보 분석이라는 업무에 활용한다. 그 외에도 팔레스타인 주민과 유대인 정착촌이 공존하는 동부의 서안지역, 무장정파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남부의 가자지역, 구릉과 산악이 많은 북부의 레바논 인접 지역 등에는 각 지역별로 특화된 부대들이 있다. 또한 지리적 특성에 따라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특수전 부대도 함께 운영되고 있다. 117)


이스라엘에는 국가 차원에서 크게 세 종류의 정보・보안기관이 있다. 해외에서의 정보수집과 비밀공작을 담당하는 ‘모사드Mossad’, 국내에서의 보안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신베트Shinbeit(일명 샤박)’, 국방부 산하에서 군사정보를 취급하는 ‘아만Arman’이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정보기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모사드는 ‘기관’, ‘연구소’, ‘협회’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 공식 명칭은 ‘이스라엘 비밀정보부Israel Secret Intelligence Service’이며, 약칭으로 ‘ISIS’라고 부른다. 모사드는 이스라엘이 건국하기 전부터 있었던 ‘하가나Haganah’ 산하의 비밀조직들을 그 모태로 한다. 모사드의 모토는 《성경》 구절로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리라Where no wise direction is, the people fall, but in the multitude of counselors there is safety, 잠언 11:14”가 그것이다. 모토에서 보듯이 모사드는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안보는 정보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28)


5장 창업 정신과 후츠파


이스라엘 국민의 특성을 보여주는 표현 중에 ‘후츠파Chutzpah’라는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 ‘후츠파’는 ‘무례함’, ‘당돌함’, ‘건방짐’, ‘뻔뻔함’, ‘독선적임’, ‘남을 배려할 줄 모름’, ‘후안무치함’ 등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같이 부정적 의미로 가득 차 있던 후츠파가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의 성공 비결이자 발전의 원동력으로 변모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소멸되지 않고 주변의 안보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아 계속 성장 발전하는 것은 후츠파 덕분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강한 유대인의 특성이 원래 부정적이던 단어의 의미조차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그대로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만나는 유대인에게 후츠파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후츠파 정신이라는 찬사에 멋쩍어하거나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칭찬의 뜻으로 사용한 말 한마디가 오히려 심기를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현지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141-3)


이스라엘은 물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사막 지역이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척박하다. 아직 인구 규모가 1천만 명이 안 되고 다른 환경도 상당히 열악한 편이다. 당연히 경제발전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농업이나 제조업보다 부가가치가 큰 다이아몬드 가공이나 기술집약적 또는 지식기반형 산업의 비중이 훨씬 높은 편이다. 많은 국가에서 T&T를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로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네타냐후 총리가 자주 사용하던 표현인데 ‘Terror(테러) 대응 경험’과 ‘Technology(기술)’가 바로 그것이다. 그만큼 기술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국가경제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사실 이스라엘 영토에는 석유가 거의 나지 않는다. 당연히 필요한 석유의 전량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리바이어던’, ‘타마르’ 등 대규모 가스전이 개발되고 2013년부터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이제는 요르단과 이집트로 가스를 수출하는 에너지 수출국으로 변모했다. 143-4)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을 떠나는 것을 ‘예리다yerida’라고 하며, 이를 감행한 유대인들을 ‘요르딤yoredim’이라고 부른다. 이 ‘요르딤’ 중에는 특히 의사, 과학자, 이공계 교수, 하이테크 분야 엔지니어 등이 상당히 많은 분포를 차지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고학력 요르딤은 이스라엘에서의 삶의 질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불만이다. 요르딤들은 특히 자신들이 감당해야 하는 세금이 계속 증가하는 것에도 불만이 크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경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초정통파 하레딤이나 빈곤층 아랍계 등 국가 경제에 별로 기여를 못하는 집단을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을 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종교적으로 세속적 그룹인 세큘라들이 많다. 이에 더해 끝이 보이지 않는 하마스와의 무력 분쟁 등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안보 상황 역시 이스라엘에서의 행복을 해치는 큰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48-50)


6장 조약 없는 영혼의 동맹 미국


이스라엘 임시정부는 1948년 5월 14일을 자정을 기해 독립을 선언하고 건국을 선포했다. 이 독립국가 건설의 선언에 가장 먼저 반응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선언이 있던 날 자정이 지나고 겨우 11분 만에 미국은 이를 전격 승인했다. 물론 당시 미국의 승인은 ‘사실상의 승인De facto recognition’이었다. 이처럼 미국과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양국은 서로를 ‘동맹allianc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양국 간에는 그 흔한 ‘동맹조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와 미국 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다. 미국과 일본 간에도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은 그 같은 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 이처럼 양국 간에 공식적인 동맹조약이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양국의 관계를 일반적인 동맹관계와는 다른 ‘특별한 동맹special alliance’, ‘문서 없는 동맹unwritten alliance’ 또는 ‘인지적 동맹cognitive alliance’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54, 156)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유대인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신앙적 관점에서 현대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시오니즘에 입각한 세속국가로 비판하는 일부 초정통파 그룹이며, 다른 하나는 국제사회로부터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인권 탄압 문제를 지탄받는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하는 그룹이다. 하레디 그룹 중에는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은 불경스러운 선택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죄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시오니스트들은 2천 년간 지속된 디아스포라의 고통에서 벗어나 유대인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이와 달리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초정통파 하레딤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반드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시오니즘이 민족적인 차원에서 유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세속적인 정치운동인 데 반해 이들은 종교적 차원에서 하느님이 다스리는 진정한 유대 국가 건설을 염원하는 것이다. 158-9)


미국 내 유대인 중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군사적 점령과 반인권적 분리 정책을 펴는 이스라엘 정부에 비판적인 그룹이 존재한다. 이들은 주로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유대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에서 배운 대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소수자 보호 등 사회적 정의를 지향하는 진보적 색채가 강한 편이다. 이들은 그간 정신적 조국으로 지지해 온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군사적 강경 조치로 일관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일종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들 미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아직도 남녀가 함께 기도하지 못하도록 한다든가 전 세계 유대공동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랍계 국민을 배려하지 않는 ‘유대민족국가기본법’ 제정을 강행한다든가 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정치적, 종교적 차별조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부 강경한 진보성향의 유대인은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해 모금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159-60)


이 부분에서 오랜 기간 미국에 살면서 누구보다 미국을 잘 알았던 이스라엘 고위 외교관의 주장은 대단히 흥미롭게 들린다. 그는 미국 전체 인구 중에서 유대계 미국인은 겨우 2%에 불과한데, 그들 중 대부분은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따라서 이스라엘로서는 이들 미국 유대인보다 오히려 훨씬 숫자가 많은 미국 내 복음주의 기독교인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전체 미국인의 25%를 웃돌 정도로 숫자가 많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은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를 넘어서는 이스라엘의 현실 인식은 아랍권과의 관계 변화 속에서 미묘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계속 확대해 나간다면 이슬람에 적대적인 미국 내 일부 강성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에 과연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162-3)


아랍권 국가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수교한 나라는 현재 모두 6개국이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지난 30여 년간의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아랍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이집트와 수교한 것이었다. 이어 1994년에는 요르단과 두 번째로 수교했다. 두 나라 모두 이스라엘과 남쪽 및 동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며, 상호 대사관을 설치해 운영 중이다. 2020년에 와서는 걸프만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진전이 보이면서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 및 바레인과 수교한 데 이어 수단 및 모로코 등과도 연이어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들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아랍 에미리트UAE가 2021년 7월 마침내 이스라엘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UAE 대사관이 개설된 지역은 대다수 국가의 대사관이 있는 텔아비브 지역이다. 이는 아랍권 국가로서는 세 번째로 이스라엘 영토 안에 대사관을 개설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71)


7장 젊은 나라 속의 오랜 율법


이스라엘에는 결혼과 관련한 법률적인 문제를 다루는 두 개의 법원이 있다. 하나는 랍비청이 주관하는 종교법원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법원(가정법원)이다. 히브리어로 ‘베이트 딘Beit din’이라고 부르는 유대교 종교법원은 유대 종교법에 정통한 초정통파 랍비가 재판관을 맡는다. 그런데 유대인의 결혼이나 이혼의 허가 여부는 전적으로 종교법원의 독점적 권한에 속한다. 가정법원은 유대인의 결혼이나 이혼에 대한 법률적 판단 권한을 갖지 못한다. 결혼문제와 관해서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정교일치 국가라고 할 수도 있다. 결혼에 앞서 유대인은 랍비청에 자신이 유대인임을 입증하는 서류, 예컨대 유대인인 모친에게서 출생한 증명서나 종교법원으로부터 발급받은 유대교 개종 증명서 등을 제출하고 결혼허가 신청을 한다. 그런 다음 제출서류에 문제가 없으면 종교법상 권한을 갖춘 랍비의 주관하에 결혼 절차를 밟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친 경우에만 합법적 결혼으로 인정을 받는다. 180-1)


하레디 가정의 초정통파 여성들은 결혼식 전날 밤 몸을 정결하기 위해 ‘미크베’에 들어간다. 미크베는 일종의 욕탕이다. 그러나 씻고 휴식을 취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보다 몸을 정결한 상태로 되돌린다는 의식적인 목적이 강하다. 육체적인 정결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정결함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미크베는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처럼 유대공동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시설의 하나로 간주된다. 결혼에 있어서 또 하나의 이슈는 랍비와 관련된 문제이다. 결혼문제에 대한 최종 권한은 랍비청이 가진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초정통파 랍비가 아닌 개혁파 랍비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적 신념이 개혁적이라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모계 유대인 신분을 입증하지 못해 초정통파 랍비청으로부터 결혼을 거부당할 때 비정통파 랍비들에게 주례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81)


히브리어 ‘아구나Agunah’는 결혼한 여성이 여러 가지 이유로 혼인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지만 혼인이라는 굴레에 속박당한 채 살아가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 종교법상 결혼한 여성은 남편이 이혼에 동의하거나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한해서 혼인관계가 종료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재혼도 할 수 있다. 남편이 이혼에 동의한다면 “이제 다른 남자가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게트’(일종의 이혼선언서)를 작성해 아내에게 전달하게 되는데 부인이 이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이혼이 성립하고 혼인관계도 끝나는 것이다. 성경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증서(게트)를 주고 집에서 내보내면 그 여자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다. 두 번째 남편도 그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주거나 또는 사망한다면, 그 여자를 내보냈던 첫 번째 남편은 그 여자를 다시 맞이해서는 안 된다”(구약 신명기 24장)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을 두고 유대 종교법에서는 이혼증서를 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남편에게만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183-4)


‘샤밧Shabbat’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다. 샤밧은 양력 토요일로, 금요일 저녁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까지이다. 대부분의 관공서와 직장은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간 휴무한다. 일요일은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는 날로 평일이며 일하는 날이다. 물론 오늘날 세속적 성향의 세큘라 유대인은 샤밧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초정통파 하레딤은 여전히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이들은 샤밧에 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TV 시청이나 자동차 운전 등도 금기시한다. 이들은 꼭 필요한 경우 이방인에게 샤밧 동안 율법상 금지된 행동을 대신 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샤밧 기간 동안 유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이러한 비유대인을 ‘샤밧 고이’라고 부른다. ‘고이’는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에서 체류했던 한 유학생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인 초정통파 유대인으로부터 샤밧에 집 안의 전등 스위치를 대신 눌러 달라든지 냉장고를 대신 열어 달라는 등의 부탁을 받았다는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190)


유대인들이 기리는 명절에는 봄철의 유월절逾越節, 초여름철의 칠칠절七七節, 가을철의 초막절草幕節 등이 있다. 히브리어로 ‘페사흐’라고 부르는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유대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안전하게 탈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다. 칠칠절은 히브리어로 ‘샤부오트’라고 부르는데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동시에 첫 수확의 기쁨을 감사하는 날이다. ‘수코트’라고 부르는 초막절은 유대민족이 40년간 광야에서 초막을 지어놓고 생활할 때 하느님께서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는 축제의 날이다. 일주일간 진행되는 유월절 기간에는 누룩이 들어있는 발효식품인 ‘하메츠’를 갖고 있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은 대신에 누룩이 들어 있지 않아 맛이 없고 딱딱한 ‘마짜’를 먹게 된다. 《성경》에 ‘무교병無酵餠’이라고 나오는 것으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이나 과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부른다. 198)


에필로그 닮은꼴의 나라, 이스라엘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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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빵과 서커스 - 2,000년을 견뎌낸 로마 유산의 증언
나카가와 요시타카 지음, 임해성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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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로마제국이 남긴 유산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Anima Sana In Corpore Sano)”라는 어록으로 유명한 로마의 시인 유웨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 60~130)는 이렇게 탄식했다. “시민들은 로마가 제정이 되면서 투표권이 사라지자 국정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과거에는 정치와 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의 원천이었던 시민들이 이제는 오매불망 오직 두 가지만 기다린다. 빵과 서커스를.” 그는 포식과 오락만을 추구하는 로마의 쇠퇴가 멀지 않았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작성된 시점을 기원후 100년경으로 산정하더라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까지 무려 376년간이나 대제국은 유지됐다. 그러나 확실히 포식과 오락에 빠진 사람들은 힘들고 귀찮은 일을 싫어하게 된다. 로마는 이런 문제들에 나름대로 대처하면서 370여 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종류의 문제를 고대 로마제국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쓴 목적 중 하나다. 15)


제2장 도시의 완성, 장벽과 상하수도


로마인들에게는 상수원에 대한 일종의 ‘샘 신앙’이 있었다. 상수원은 아무리 멀더라도 반드시 샘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을 햇볕과 비에 노출되지 않고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터널과 다리로 도시 성벽까지 끌어온 뒤 도시 안에서는 연관 등을 이용해 지하로 물을 흘려보내 최종적으로 저수조나 음수대까지 공급했다. 로마에는 기원전 312년 아피아(Appia) 수도를 비롯한 11개의 간선 수도가 226년까지 순차적으로 계속 만들어졌다. 합치면 길이만 504킬로미터였다. 기원전 140년 완공됐고 가장 길었던 마르키아(Marcia) 수도는 91킬로미터나 된다. 2,100년 전의 91킬로미터는 굉장히 먼 거리다. 그런데 그중에 터널이 80킬로미터였고 교량은 10킬로미터였다. 그 엄청난 난공사를 불과 5년 만에 해냈다. 시멘트 발명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대단한 것은 카르타고의 수도인데,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수도교 등으로 132킬로미터나 끌어왔다. 고도의 건설 기술이 없으면 실현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30-1)


고대 로마의 상수도 시스템은 상수원인 샘이나 댐에서 취수한 깨끗한 물을 산에는 터널을 뚫고 얕은 계곡에는 수도교를 놓고 깊은 계곡에는 역(逆) 사이펀(siphon, 연통관)을 설치해 도시의 성벽까지 옮겼다. 펌프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수원지에서 도시의 간선 수도 말단까지는 내리막 기울기로 시공하지 않으면 안 됐다. 클라우디아(Claudia) 수도교처럼 길이가 14킬로미터나 되는 수도교가 건설된 것도 이 때문이다. 로마 시의 간선 수도는 기원전 312년부터 기원후 226년 사이에 지어졌다. 11개의 수도 중 율리아(Julia) 수도는 아그리파(Agrippa) 욕장에, 알시에티나 수도는 아우구스투스 모의 해전장에, 트라야나(Traiana) 수도는 트라야누스 모의 해전장과 욕장에, 안토니니아나(Antoniniana) 수도는 카라칼라(Caracalla) 욕장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1개 중 4개의 수도가 오락과 휴식 시설에 사용됐으며, 이 목적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던 것이다. 또한 11개 수도 중 8개 수도의 상수원이 샘물이다. 33)


급수관로는 기원전 1세기경 위트루위우스(Vitruvius, 비트루비우스, 기원전 80?~?)의 《건축십서(De Achitectura)》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납관은 납중독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위험시됐으나, 기원후 1세기 말 프론티누스의 《로마 수도론》이 출간된 시기에는 납관이 많이 사용됐다. 납중독 문제를 방출구를 통해 물을 흘려보내는 유수방식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납관은 납을 녹여 납작하게 한 뒤 둥그렇게 구부린 납판자를 접합해 사용했다. 수도관을 목재로 만들면 훨씬 편했겠지만 내구성 때문에 배제됐다. 그런데 납관을 사용한 이유가 비단 내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접한 납관을 사용하면 내부 유수에 압력을 가해서 높은 곳에 급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우물에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그래서 고대 로마인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납관을 선택한 것이다. 납관보다 뛰어난 주철관이 출현한 때는 주철이 대포에 사용된 14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41-2)


그렇다면 성곽 도시 로마의 하수도는 위생적인 관점에서 어땠을까? 고대 로마에서는 그보다 앞선 시기의 에게(Aege) 문명에서처럼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다. 풍부한 상수도의 잉여수를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로마에서 수세식 변기나 하수도를 이용하지 않고 분뇨를 말 등에 실어 성벽 밖의 밭에 내다 버리는 방식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인간이 배출하는 하루 분뇨량은 1킬로그램 정도로 알려져 있다. 100만의 로마 시민들의 분뇨를 말 등에 실어 짐(100킬로그램으로 가정)으로 운반한다면 1일 1만 마리의 운반용 말이 필요하다. 결코 위생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다. 수세식 변기에서 지하의 암거(暗渠)를 통해 한 번에 티베리스 강으로 방출해버리면 위생적이기도 하고 혼잡한 로마 시내의 교통 완화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다만 티베리스 강의 오염 수준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은 중세 유럽에 비해 콜레라의 발생 빈도가 현저히 낮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32)


클로아카는 돌과 벽돌을 아치 형태로 쌓은 하수용 암거를 말한다. 정화의 여신 클로아카가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클로아카 막시마는 대하수도, 거대한 하수도라는 뜻이다. 로마의 하수도는 수많은 지선을 갖고 있으며 공공 욕장, 공공 화장실, 기타 공용 시설, 개인 주택 등의 폐수와 빗물을 티베리스 강으로 방류했다. 개인 주택의 폐수는 도로를 따라 건설된 지하 배수로에 투입돼 클로아카로 흘러들었다. 이 시대에는 상·하수도 모두 자연 유하 방식이었으므로 2층 이상에는 수도가 연결되지 않았고, 식수 등은 단지 등의 용기를 이용해 담아 옮겼다. 위층에서 사용한 폐수와 분뇨는 항아리 등을 이용해 지하 배수로에 투입했다. 따라서 고층 집합 주택 인술라(insula)는 1층이 조건이 좋아 임대료가 높았다. 반대로 고층으로 올라가면 상·하수도도 없고 방화도 여의치 않아 임대료가 저렴했다. 하지만 법으로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층 주택에서는 사용한 폐수와 분뇨 등을 창밖으로 투기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49-50)


제3장 모든 길을 통하게 만든 로마 가도


엄밀히 말하면 도로 시스템이 고대 로마인들의 발명품은 아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기원전 522~486)와 중국의 진시황(始皇帝), 즉 진나라 시황제(秦始皇, 재위 기원전 246~210)는 이미 훌륭한 도로 시스템을 구축한 바 있다. 기원전 550년~33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es) 제국 최전성기의 왕 다리우스 1세는 수도 수사(Susa)에서 에게 해와 가까운 사르디스(Sardis)를 연결하는 총길이 2,500킬로미터에 폭 약 6미터의 이른바 ‘왕의 길’을 만들었다. 이 왕의 길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즉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을 가능케 했다. 이와 비슷하게 진시황도 도로 시스템을 만든 바 있다. 진·한 시대의 황제 전용 도로 치도(馳道) 정비와 수레 및 마차 바퀴 폭을 통일한 동궤(同軌)가 그것이다. 진시황이 정비한 도로망은 총길이 1만 2,000킬로미터에 이른다. 치도의 주된 목적은 통일 과정에서 멸망시킨 여섯 나라 귀족층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58-9)


고대 로마의 도로 시스템은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에서 시작된다. 로마 제1호 수도인 아피아 수도가 만들어진 때와 같은 해에 아피아 가도도 완공됐다. 로마 시와 브린디시움(Brundisium, 브린디시)을 연결하는 도로였고 오늘날의 이탈리아 7번 국도다. 참고로 1번 국도는 로마 시와 제노바를 연결하는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가 근간이 됐다. 아피아 가도의 건설 목적은 군사 병참 보급로의 복선화였다. 견고한 로마 가도를 만들기 위한 설계 지침이 위트루위우스의 《건축십서》에 기록돼 있다. 표층을 석판 등으로 마무리한 5층의 적층 구조로 두께는 약 1.5미터였다. 이는 현대의 도로 국제 규격과 거의 다르지 않다. 더욱이 기원전 451년~450년에 제정된 ‘십이표법(lex duodecim tabularum)’에 따르면 도로 폭도 2.4미터(곡선 구간은 4.8미터)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도로 양측의 토지 소유자가 해당 구간의 도로를 관리하라는 조항도 있었다. 이렇게 제국의 곳곳에 연결된 로마 가도는 통일되고 규격화돼 있었다. 66-8)


1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 가도는 신속한 군사 행동과 정보 전달을 가능케 하고, 넓은 영토를 소수의 군단병으로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다시 말해 보다 적은 세금으로도 효율적인 영토 방위가 가능했다. 나아가 교역과 여행도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는 제국 내에 산재된 도시(군단 기지 및 식민 도시)가 중앙의 뜻을 받들어 도로 시스템을 완비한 덕분이다. 그러나 제국 말기 중앙 권위가 속주에 미치지 못하게 되자 게르만족과 같은 이민족 침략과 이동이 빈번해졌다. 침략이든 이동이든 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경무장이 아니라 중병기로 무장한 채 식솔들을 이끌고 가재도구까지 챙겨서 벌이는 이동이었다. 그러자면 짐마차 등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차 등으로 이동할 때는 정비되지 않은 비포장도로에서는 고생이 막심하다. 그래서 잘 정비된 포장 도로망이 게르만족의 이동에 이용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로마 가도는 로마제국의 번영을 가속화한 동시에 쇠망도 가속화시킨 양면성을 띠었다. 74)


제4장 빵과 서커스 ①: 식량과 바닷길


당연한 말이지만 군단병이 건재하지 않으면 로마의 패권은 성립할 수 없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영토를 대폭 확대했고 지중해를 내해로 삼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승리가 군단병의 생활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군의 주력 전력은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자작농이었다. 포에니 전쟁은 결과적으로 자작농들에게 가혹한 운명을 초래했다. 첫째,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오랫동안 싸워야 했다. 그 결과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진 농지가 황폐화됐다. 둘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획득한 시킬리아(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셋째, 정복전에서 얻은 노예를 이용한 귀족들의 대농장이 확대됐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밀 가격은 폭락했다. 가격 폭락에 대응할 수 없는 중소 자작농들은 계속해서 몰락했다. 결국 이들은 토지를 버리고 로마 시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군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76)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tribunus)이 되어 대토지 소유제 라티푼디움(Latifundium)을 제한하고 몰락한 자작농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했다. 그가 주창한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의 주요 내용은 국유지 점유를 인당 500유게라(125헥타르 이하), 전체 점유지 면적을 1,000유게라 이하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임차지의 상속권은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23년 호민관에 당선돼 곡물법을 시행하면서 빈민 구제를 꾀했다. 그라쿠스가 제출한 법안은 국가가 일정 물량의 밀을 사들여 시가의 약 절반, 즉 로마 시민에게는 한 달에 5모디우스(modius, 1모디우스는 약 7킬로그램)까지 1모디우스당 동화 6아스(as)에 배급한다는 것이었다. 대상은 모든 로마 시민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정책은 훗날 포퓰리즘의 효시가 된다. 이들은 곡물의 안정적인 수급이 국가 발전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77)


이 곡물법은 가이우스의 사후에도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폐기되지 않고 이어졌다. 이른바 '빵과 서커스'의 시작이었다. 고대 로마의 위정자들은 로마군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식량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무척 열심이었다. 215년경 로마의 군사비 비중은 74퍼센트로 매우 높다. 참고로 2016년 기준 한국의 국방비는 38.8조 원인데, 세출이 356.2조 원이므로 국방비 비중은 10.9퍼센트다. 이와 비교해보면 고대 로마의 군사비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속주의 시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10퍼센트의 저율이라서 세수가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식량 부족에 따른 반란이 일어나면 ‘군대 출동―군사비 증대―증세―불평불만에 의한 반란’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위정자들은 이런 악순환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데 온 신경을 쓴 것이다. 항만 시설 건설과 유지 관리, 선박 확보, 해적 소탕 등의 모든 노력을 다했다. 81)


로마 시의 외항 오스티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티베리스 강 하구에 건설됐다. 그때까지는 네아폴리스 근교의 푸테올리가 주항이었고, 푸테올리로부터 로마까지는 연안 항로를 이용해 운반했다. 그러다가 제국이 커지고 수도 로마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직접 로마 시로 물품을 반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계절풍을 이용한 범선을 이용했으므로 수확이 끝난 밀을 실은 배가 초여름에 아프리카의 남풍을 타고 이탈리아 반도로 향했다. 그런 뒤 7월~8월에 북풍을 타고 아프리카 등지로 귀항했다. 11월부터 3월의 겨울 동안 지중해는 바람과 비의 계절이다. 나침반도 없던 시대에 비가 시야를 가리면 항해는 매우 위험해진다. 이런 이유로 선주는 연안의 단거리 항해는 몰라도 장거리는 원치 않았다. 어느 경우든 간에 원양 항해가 힘들던 시대였다. 따라서 오스티아, 푸테올리, 카르타고 등의 주요 항구는 외항선이 배를 댈 수 있는 대수심 암벽 그리고 많은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정박지가 필요했다. 82)


오스티아 항은 하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티베리스 강의 퇴적토로 메워지고 있었다. 41년 심각한 기근이 로마 시를 덮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시민들에게 위협을 받는 사태에 이른 뒤 그는 신항 건설을 결의한다. 오스티아에서 북서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해안을 조성하고 항구를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이곳이 클라우디우스 항구다. 클라우디우스는 우선 바다 쪽으로는 제방을 쌓고 티베리스 강의 오른쪽 연안을 깎아서 새로운 항구와 연결되도록 운하를 건설했다. 80헥타르의 정박 수역을 굴착한 다음 길이 2,300미터에 너비 1,100미터로 300척의 화물선이 한 줄로 정박할 수 있는 규모의 부두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오벨리스크(obelisk)를 운반하던 대형 선박에 콘크리트를 채워 바다에 가라앉힌 뒤 그 위에 높이 60미터의 등대용 방파제를 만들었다. 이 운하는 50년 뒤인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조해 트라야누스 운하로 불리게 된다. 83)


제5장 빵과 서커스 ②: 오락과 휴식


고대 로마인들은 유독 목욕을 좋아했다. 수도 로마에는 대형 종합 레저 센터 격인 대형 공공 욕장이 11곳, 소형 공공 욕장이 900곳 있었다. 대형 욕장이 수도에만 있었느냐 하면 브리탄니아의 공공 숙소와 같은 로마 가도상의 숙박 시설에조차도 80제곱미터 규모의 대형 욕장을 갖추고 있었다. 질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모두가 수도 로마와 같은 수준이었다. 공공 욕장의 목욕 요금은 25아스(현재 한화 기준 약 250원)로 매우 저렴했다. 서민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비도 안 되는 수준으로 요금을 책정한 것이다. 황제나 귀족은 물론이고 시민들 나아가 노예들도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욕장의 영업 개시 시간은 오전 일과가 모두 끝난 오후 2시경이었다. 저녁 7시 또는 8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단돈 25아스로 하루의 마무리를 즐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25아스로 공공 욕장의 유지·관리비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부족분은 국가가 부담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민들의 불평불만을 막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본 것이다. 89-90)


욕장의 부속 시설로는 우선 운동 시설로 ‘그시스툼(xystum)’이라 부른 150미터×30미터 정도 규모의 경기장이 있었다. 100미터 경주를 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다. 또한 90미터×20미터 규모의 구기장 ‘스파이리스테리움(sphaeristerium)’과 체조나 레슬링 등을 즐길 수 있는 50미터×25미터 크기의 체육관 ‘팔레스트라(palestra)’도 두 곳씩 마련돼 있어 목욕 전에 운동을 통해 땀을 낼 수 있었다. 강당이나 교실로 추정되는 시설도 각각 두 군데에 있어서 교육 문화 활동도 이뤄졌다. 38미터×22미터 공간의 도서관도 있었는데 2개의 방으로 나뉘어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이 소장돼 있었다. 목욕 후 산책 및 담소 공간으로 외측 구조물과 내부 욕장 사이 100미터×300미터 크기의 대광장에 포르티쿠스(porticus, 주랑)와 조경수를 심고 곳곳에 벤치가 설치됐다. 이런 시설이 가까이 있다면 매일이라도 가고 싶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료에 가까운 요금이지 않은가. 공공 욕장은 로마 시민들이 향락에 빠지게 된 원흉으로 자주 거론된다. 91-2)


로마에 현존하는 마르켈루스 극장의 수용 인원은 1만 5,000명이다. 역대 최대급인 에페수스의 원형 극장은 수용 인원 2만 4,000명으로 엄청나게 크다. 위트루위우스의 《건축십서》에서 당시의 음향에 관해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목소리도 이처럼 원 모양으로 움직이는데, 물에서 원은 수평으로만 움직이는 데 비해 목소리는 옆으로 퍼져나가는 동시에 높은 쪽으로도 계단식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물결 모양의 객석으로 건설하면 같은 목소리라도 제1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을 경우 제2파나 그 후속파도 흩어짐 없이 맨 아래 사람의 귀와 맨 위 사람의 귀에 도달한다.” 공명 원리를 응용해 좌석 밑에 무대를 향해 청동제 항아리를 설치했다. 소형 극장에서는 화음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관람석인 ‘카베아(cavea)’ 중앙에 한 줄로 13개의 항아리를 묻었다. 대형 극장에서는 관람석을 상하 3단으로 나눠 각각 13개의 항아리를 묻었다. 이것들이 공명기의 역할을 수행했다. 마르켈루스 극장에는 40개 이상의 공명기가 있었다. 98-9)


콜로세움의 구조는 반원 2개가 마주보는 듯한 타원형이다. 그리스의 극장에서 보듯이 경사진 지형을 이용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지에 건설됐고 아치나 반원통 모양의 벽으로 관객석을 지탱했다. 1층은 도리스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이며, 콜로세움의 3층은 코린트 양식이다. 수용할 수 있는 관중은 5만 명~7만 5,000명으로 추정된다. 1층~3층은 각각 80개의 아치가 있고 그중 장식문이 4개다. ‘포트 프리움팔리스(Port Triumphalis)’라고 부른 북서쪽 문은 검투사들이 입장하는 문이다. 남동쪽 문은 죽은 자가 나가는 ‘포트 리비티넨시스(Port Libitinensis)’다. 죽음의 여신의 문이다. 패자가 이 문으로 실려 나갔다. 동북 방향은 황제 및 가족용 통로, 남서쪽은 원로원 의원 등 귀빈 통로였다. 4개의 장식문 외에 76개의 아치는 1~76의 번호가 새겨져 있다. 5만 여명의 관중이 입장할 때 혼잡을 피하려고 입장권에 적힌 번호의 아치로부터 안으로 들어갔고, 그에 맞추어 좌석으로 연결되는 승강 계단도 배치됐다. 124)


콜로세움은 평면적으로 바깥지름 188미터×156미터, 안지름 76미터× 44미터의 타원형이며, 높이는 48.5미터다. 내부의 76미터× 44미터 공간은 검투사가 경기를 한 장소로,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가 깔렸고 피로 더러워지면 교체됐다. 이 모래밭을 ‘아레나(arena)’라고 불렀는데 이후 원형 경기장을 일컫는 단어가 된다. 1층 부분의 폭은 56미터다. 맹수 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아레나보다 3.6미터 높은 위치에서부터 관중석이 시작되며 약 37도의 경사로 배치됐다. 콜로세움 외벽은 수직이 아니라 약간 안쪽으로 기울여 원기둥 방향으로 압축력이 걸리도록 설계됐다. 현명한 설계다. 또한 외벽의 연속성을 높이기 위해 트래버틴과 트래버틴을 300톤에 달하는 철제 클램프(clamp, 고정 쇠)로 결합했다. 볼트의 콘크리트는 골재 중에서 비중이 가벼운 응회암을 사용해 경량화를 꾀했다. 설계도 놀랍지만 시공 기술은 더욱 놀랍다. 이 덕분에 지진국 이탈리아에서 2,000년 동안이나 쓰러지지 않고 버텨온 것이다. 124-5)


제6장 만신전에서 유일신전으로


현대인들에 비해 고대 로마인들은 신앙심이 매우 두터웠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이전에는 다신교라서 여러 신들이 각지에 있고 그들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기독교 국교화가 이뤄지자 기존의 신전들은 파괴됐고 가톨릭 성당이 많이 건설됐다. 또한 신앙심이 두터운 로마인들은 조상에 대한 존숭 때문에 무덤이나 분묘도 많이 만들었다. 4세기 초 로마제국 내 기독교 포교와 이교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중해 연안과 이탈리아, 발칸 반도, 소아시아를 제외하고는 기독교 포교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밖의 지역은 토착 이교 신앙이 많았다. 이교 신앙이란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켈트족의 드루이드(Druid), 인도의 쿠베라(Kubera), 페르시아의 미트라, 이집트의 이시스(Isis)와 같은 토착 신앙을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믿는 신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만신전인 판테온을 세워 모든 신들을 달랬다. 150)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아타나시우스파 교리가 로마 가톨릭 정통 교리가 된다. 사실상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셈이다. 이때 가정의 수호신을 포함한 종래의 다신교는 이교라고 규정된다. 1년 뒤인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해 아타나시우스파의 정통성을 강화시킨다. 아울러 비기독교 신에게 바치는 희생을 금지하고 이교의 조각상들도 우상으로 여겨 숭배를 금지했다. 또한 이교도 신전 파괴와 해당 건축 자재를 교회 건축에 전용하도록 허락하고 장려했다. 로마 건국 때부터 이어져온 웨스타의 성화가 꺼졌으며, 황제권보다 주교권이 점점 중시됐다. 391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미 380년 사실상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삼았던 것을 완전히 결정짓는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은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로 변모한다. 393년에는 올림피아 체육 제전, 즉 올림픽이 중지된다. 기원전 776년부터 이어져온 고대 올림픽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51-2)


판테온은 만신전으로서 신들에게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25년 아그리파가 건설한 신전이었지만, 소실됐다가 12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됐다. 정면 기둥 위에는 아그리파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라틴어 대문자 M. AGRIPPA L. F. COS TERTIUM FECIT(“루키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짓다”)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다. 무근(無根, plain) 콘크리트제 돔으로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 규모의 신전이다. 연약 지반에 대한 대책으로 6미터 깊이까지 원통형 기초를 설치했다. 돔은 벽 두께를 6미터에서 1.5미터로 변화시키고 경량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천정에는 지름 6미터의 구멍(오라클)을 설치하는 등 설계부터가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다. 그 거룩함에 매료돼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자신의 무덤을 이곳에 만들어달라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Santa Maria ad Martyres) 대성당으로 전용돼 약 2,000년 동안 우뚝 솟아 있다. 153-4)


제7장 시민의 교양


로마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노예를 시켜 원본을 소리 높여 낭독하게 한 뒤 필사생들이 이를 일제히 받아쓰는 방식으로 책을 대량 복제했다. 이런 덕분에 마르쿠스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라마타(Epigrammata)》나 웨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 몇 데나리온만 주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시민들의 독서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자 필사생들의 조합도 조직됐다. 이들은 일정 노임을 받고 책을 베껴줬다. 노예 노동이 임금 노동으로 바뀌면서 책값이 다소 오르긴 했지만 기하급수적인 지식의 확대 재생산이 이뤄졌다. 2세기 말 로마 시에는 25개소의 공공 도서관이 있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28개로 늘었다. 각 도서관에는 사서 업무를 총괄하는 도서관장으로서 국가가 임명하는 장관급 관리자를 뒀다. 지식을 정책적으로까지 육성하려는 로마인들의 ‘앎’을 향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380년 이교 배척으로 신전 파괴가 이뤄지면서 도서관도 함께 파괴된다. 기독교 이외의 것들에 대한 배척 때문이었다. 166-7)


제8장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


로마 제국 멸망의 기미가 나타난 지점부터 간략히 정리해보면, 나는 그 시발점을 313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시점이라고 본다. 이때 아리우스파의 추방이 결정했다. 아리우스파 신도들은 이민족의 땅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아타나시우스파)과 이민족(아리우스파) 사이에 종교적 대립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후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고 이교와 이민족 멸시 정책을 펼쳤다. 391년에는 아타나시우스파 외의 신앙을 금지시켰다. 불관용이 더욱 심화됐다. 그리고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평행을 이루면서 로마는 로마대로 계속해서 타락했다. 사치와 방탕이 속주 도시에까지 팽배해졌다. 로마 군단의 정규군은 어느덧 이민족 출신들이 주력이 됐다. 로마군으로 편입된 이민족들이 제국 방위의 주축 세력이 되면서 종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가 대다수였다. 로마군 내의 규율 확보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179)


호노리우스는 402년 서고트족이 침입해오자 수도를 라웬나로 천도하고 이후 그곳에만 틀어박혀 국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황제였다.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유린하는 동안에도 황궁이 있는 라웬나는 철저히 방어되고 있었다. 선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유지를 받들어 서로마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의 후견을 맡은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군을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그가 두려워서 차마 진격을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던 알라리크군이었다. 그런데 그 스틸리코를 죽였다. 스틸리코의 처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로마 출신 장교와 병사 대부분이 알라리크의 휘하로 들어갔다. 유능한 장군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충격적인데 그를 대신해 능력 없는 로마 장군이 군대를 이끌게 됐다. 패전은 불을 보듯 빤했다. 동요한 장교와 병사들이 너도나도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08년까지 브리탄니아는 서로마제국 영토였지만 스틸리코가 처형된 후 409년 알라리크군에 함락된다.  179-80)


그 뒤 마찬가지로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 플라위우스 아에티우스가 426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했다. 이런 위업으로 서로마제국의 군사령관과 집정관이 된다. 그의 가장 큰 위업은 451년 훈족의 아틸라군을 상대로 카탈라우눔(Catalaunum) 전투에서 승리한 일이다. 게르만족 대이동의 원인이기도 한 훈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당시 아틸라(Atilla, 재위 443~453) 왕 휘하 훈족의 대군은 전유럽을 유린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했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그 기세가 꺾이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공적을 두려워한 왈렌티아누스(Valentianus, 재위 424~455)에 의해 454년 아에티우스는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때 원로원 의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 430~489)가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저는 폐하의 의사나 분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폐하께서 당신의 왼손으로 당신의 오른손을 잘라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180)


이제 로마 군단에서 대부분의 이민족 출신들은 더 이상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됐다. 그렇게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용병 오도아케르가 어린 황제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단 한 번의 전투도 겪지 않고 로마군은 소멸했으며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문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이교 탄압 등에 의해 로마 지식인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지식의 쇠퇴도 급속히 일어났다. 그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빵과 서커스’의 소비 시대가 끝나고 초기 기독교의 청빈 사상이 부각되면서 ‘소비는 악’이라는 정서가 만연했다. 소비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제국이 몰락하자 통일된 영토는 소국(小國) 난립 상태로 변화했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삶 역시 피폐해졌다. 로마제국을 이어주던 공급망과 인프라가 기능을 멈췄다. 대항해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로 피렌체나 베네치아 등의 도시 국가가 융성해질 때까지 유럽은 무려 1,000년을 기다려야 했다.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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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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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다중인격은 여러 방식으로 지식의 대상이 되었다. 사진은 다중성의 초기(1870~1880년대) 수사법 중 하나였다. 이 책의 종장으로 가면서 내가 초점을 맞춘 주제는, 기억에 관한 지식으로 알려진 새로운 과학이 영혼을 세속화하기 위해 어떻게 철저히 의도적으로 창조되었는지가 될 것이다. 그전까지 과학은 영혼의 연구에서 배제되어왔다. 기억에 관한 새로운 과학들은 서구의 사상 및 실천에서 그 질긴 정수精髓를 정복하기 위해 출현했다. 그것이 내가 언급한 서로 다른 모든 지식과 수사를 '기억'이라는 주제 아래에 연결시키는 결속체이다. 가족이 붕괴할 때, 부모가 아이를 학대할 때, 근친강간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려 할 때, 우리는 영혼의 결함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영혼을 지식으로, 과학으로 대체할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인 전쟁은 영혼이라는 명시적 영역 안에서가 아니라,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전제된, 기억의 영역에서 벌어진다."(23-4)


#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영혼은 불멸하는, 본질적인 단 하나의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존재하는 여러 측면(품성, 이해, 사랑, 열정, 시기, 후회 등)의 이상한 혼합물을 말한다.


1장 다중인격은 실재하는가? 


"다중인격은 실재하는가, 아닌가?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독자들 누구도 이 질문은 하고 싶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개념들의 이러한 설정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 관습, 과학을 만들고 주형하기에 이르렀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두 가지는 여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억과 정신적 고통이다. 이 질환이 하나 이상의 인격들과 관련되건 아니면 하나보다 적은 인격의 파편들이건 간에, 또 해리든 와해든 간에, 이 장애는 어린 날의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으로 추정된다. 그때의 잔혹함의 기억은 숨어 있지만, 인격의 진정한 통합과 완치를 위해서는 기억해내야만 한다. 다중인격과 그 치료법은, 기억의 본질에 관한 축적된 지식을 통해서 그 괴로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다중인격에 대한 신념을 의문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옹호자와 반대자 모두가 기억이 영혼의 열쇠라는 가정을 왜 당연시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40-1, 46)


2장 다중인격이란 어떠한 걸까? 


"많은 다른 인격들은 본 인격 안에 또 다른 인격들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치료를 시작할 때 자신이 다중인격임을 부인하는 본 인격이 더욱 그러하다. 반면 어떤 다른 인격은 다른 인격들의 존재를 알고, 서로 잘 알기도 하고, 말도 나누고, 합동해서 활동하기도 한다. 이는 공共의식 혹은 공재共在의식이라고 불린다. 다른 인격들은 서로 말싸움하고 으르렁거리거나 서로 위로하기도 한다. 한 다른 인격이 등장하면 또 다른 인격은 왼쪽 귀에서 저 인간은 얼마나 얼간이 같은지 모르겠다고 투덜댄다. 많은 치료사들은 여러 다른 인격들이 서로를 다 아는 완전한 공존은 통합에 필요한 단계이므로 다른 인격들을 서로 소개시키려 노력한다. 진단을 받자마자 다른 인격들이 튀어나온다는 말은 아니다. 한 임상가가 말하기를, 다중인격을 치료하는 일은 담요 아래에 숨어 있는 고양이들이 싸움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많은 소리와 움직임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하나하나를 알아보기는 어렵다고."(57)


3장 다중인격운동 


"다중인격운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동학대에 관한 미국의 강박과 그에 대한 감응, 혐오, 분노,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다중인격운동의 일대기를 연 것은 바로 1973년에 출간된 《시빌》이다. 《시빌》은 코넬리아 윌버가 시빌을 치료한 사례보고이다." "윌버의 작업은 아동기의 트라우마를 적극적으로 찾으려 했다는 것에서 다중인격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빌의 다중성을 어머니의 심술궂고 징벌적인 그리고 흔히 성적인 폭력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갔다. 아동학대와 가정 내의 변태적 성생활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시빌의 어머니의 행동은 학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물론 집안에서 발견된 고문 도구라는 것이, 당시에는 가정집에 흔히 비치되는 잡화라서 그 물건의 존재만으로 가학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이 출간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후에는 그 실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76, 79-82)


"돌이켜보면, 랠프 앨리슨은 최초로 다중인격장애 치료계획안을 고안한 명예로운 선구자로서, 이는 과학적으로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다중인격운동을 점화시킨 것은 바로 그가 행한 홍보활동이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정신의학협회 연례총회에서 다중성 워크숍을 기획하고, 본 프로그램에서 발표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였다. 그는 다중인격 정신치료를 위한 두 가지 소책자를 유포했다. 그가 제안한 내재적 자아 조력자Inner Self Helper(ISH)라는 개념은 적어도 초기에는 일부 주류 정신과의사들에게 신중하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말한 개념에서, 조력자는 현대 다중인격이론이 그려낸 다른 인격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어린 날 트라우마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조력자는 증오할 줄을 모른다. 조력자는 오직 사랑만 느끼고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앨리슨은 ISH란 〈실제로는 양심〉이라고 했다. 그는 환자에 관해 더 잘 알기 위해 조력자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87-8)


# 차후에 앨리슨은 잔혹한 강간-살해 범죄를 저지른 마크를 연구한 후 '선한 내재적 조력자 가설'을 폐기한다. 


4장 아동학대 


"아동학대는 다중성을 이해가 될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최근의 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다중인격은 어린아이일 때 해리dissociation가 시작된다. 이 원인론이 임상경험으로 충분히 확인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의 신념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아동학개 개념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즉시 이해되는 명료한 개념도 아니고, 사례에 주목해도,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봐도 그렇듯 명료하게 떠오르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피해자 쪽에서는, 학대 경험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사건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이었을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의식이 고취된 뒤에야 비로소 '아동학대'로서 경험되고 기억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과거의 행위를 새롭게 해석할 새로운 서술의 발명과, 커다란 사회적 동요다.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와 회복》에 적혀 있듯이, 〈트라우마는 정치적 운동과 동맹을 맺어왔다.〉"(100-1)


"의료화는 성, 계급, 사악함보다는 덜 흥미를 끌었지만,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는 아동학대 개념의 증명서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예컨대 아동학대 가해자, 피학대아동 같은─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런 이들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 지식이 온전하다면, 온갖 종류의 학대행위, 가해자, 피해자는 다양한 유형의 의학적, 정신의학적, 통계적 법칙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들 법칙은 아동학대를 어떻게 개입하고 예방하며 개선할지를 알려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중인격은 아동학대를 발판으로 해서 '지식의 대상'으로 발돋움했다." "원인 규명은 지식의 대상이다. 만일에 아동학대가 소위 자연종이라 불리는, 오직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한 종류이자 자연법칙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사건과도 엮여 있는 그러한 것이라면, 아동학대는 어떤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동학대에 관한 의학지식은 사건의 종류와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는 법칙에 관한 지식이다. 일련의 새로운 지식체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106-7)


"전통적인 근친강간의 금기는 성교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근친강간과 아동학대가 동일선상에 놓이자 근친강간의 개념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 사건들은 엄청난 해방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여자들 그리고 점차로 많은 남자들이 혈연관계 안에서, 혹은 결혼관계나 편의적 관계 안에서 대개는 남자들에게 당했던 처참한 경험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 사촌, 계부, 남자친구, 동료, 애인, 사제가 그 남자들이었다. 어머니와 이모나 숙모와 강요된 성관계를 가진 기억도 있었다. 그 일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카타르시스였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순간의 폭력이나 다시 다가올 폭력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계속 붕괴되어가는 인격과, 어떤 인간과도 애정과 신뢰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어간다는 데에 있다. 성적 반응이 왜곡될 뿐만 아니라, 애정에 대한 반응 또한 일그러져간다. 구타당한 아기들이 아니라 구타당한 삶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다중인격 임상가들이 밝히려 했던 것이었다."(112)


5장 다중인격의 젠더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여자들이 다중인격으로 진단되는 것은 왜인가? 네 가지의 설명이 제시되는데, 모두가 다중인격의 배경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첫째로, 범죄 가설이 있다. 잠재성 남성 다중인격은 폭력적이어서 의사보다는 경찰의 손에 잡힌다. 둘째로, 다중인격은 은연중에 자신이 속한 문화적 환경에 어울리는 선택을 한다는 견해가 있다. 해리 행동은 여자들이 선호하는 스트레스의 언어다. 심지어 도피 수단일 수도 있다." "남자들이 선택하는 스트레스 표현방식은 알코올이나 폭력 등이다. 셋째는 인과적 설명이다. 다중성은 어린 날의 반복적인 아동학대, 특히 성학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다. 소녀들이 소년보다 훨씬 더 자주 학대의 대상이 된다고 간주된다." "넷째는 암시의 요소를 강조하는 설명이다. 북미에서 치료과정에 있는 여자들은, 심지어 전형적인 권력구조를 피하려 적극 애를 쓰는 여자일지라도, 같은 상황에 있는 남자들보다는 더 쉽사리 치료적 기대치에 협조한다."(127-8)


"학대를 강조하는 일은 흔히 힘을 부여하는 동기가 된다고 말해왔으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는 루스 레이스의 분석인데, 그녀는 드물게 다중인격을 정면으로 다룬 페미니스트 학자다." "레이스의 글에 따르면, 로즈는 〈캐서린 매키넌, 제프리 마송 등이 무의식적 갈등의 개념을 배척하고, 대신 내부/외부라는 경직된 이분법을 수용해서, 폭력이란 전적으로 그 개인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여성은 완전히 수동적인 피해자라는 퇴행적인 정치적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결론 중 하나로서 이런 종류의 분석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학대, 트라우마, 해리에 관한 현재의 이론들은 또 다른 여성 억압의 순환고리 중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전보다 더 위험한 이유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편이라고 자칭하는 이론가와 임상가들이 그것을 이유로 환자를 자율적인 한 개인이 아니라 무력한 자로 구성해내기 때문이다."(131-2)


6장 원인 


"인과적 일반화는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한다. 한 극단에는 엄격한 보편성이 있다. K 종류의 하나의 사건 또는 조건마다 J 종류의 하나의 사건 또는 조건이 결과로 나타난다. 옛날 물리학은 그런 법칙을 선호했다. 다른 한 극단에는 상당한 필요조건fairly necessary conditions이라는 실로 조심스러운 설명이 있다. K 종류의 사건 또는 조건이 없이는 J 종류의 사건 또는 조건이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 그 사이에 개연성과 경향이 있다. 〈정신의학 역사상 주요 질환의 특수 병인에 관해 이렇게 잘 알게 된 적이 없었다〉라고 로웬스타인은 말했다. 이를 주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 주요 질환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인과적 설명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엄격한 보편성처럼 엄중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당한 필요조건이면 충분하다. 로웬스타인이 의미했던 상당한 필요조건이란, 〈어린 시절의 극심하고 반복적인, 전형적으로 성적인 트라우마가 없이는 다중인격이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일 것이다."(141-2)


"'상당한 필요조건'은 다중인격의 특성화와 함께 진화했다. 코넬리아 윌버와 리처드 클러프트가 했던 이 신중한 말을 생각해보라. 〈다중인격장애를 가장 편협하게 이해하자면, 아동기에 발병하는 외상후해리장애이다.〉 여기에서 아동기의 발병시기와 트라우마의 존재 여부는 경험주의적 귀납이나 통계적으로 확인 가능한 '상당한 필요조건'의 일부가 아니다. 그건 그 말을 한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고, 그들이 'MPD(Multi Personality Disorder)'라고 칭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틀린 것은 없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양쪽 방식을 합쳐서 하는 말뿐이다. 이는 (a)'다중인격장애'(혹은 해리성정체감장애) 개념을 초기 아동기의 트라우마로 정의하려는 경향과 (b)이를 발견된 것처럼 단언하는 것, 즉 다중인격이 어린 날의 트라우마로 발생한다고 단언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그 장애가 무엇인지 먼저 정의한 다음에 그 원인을 발견했다고 우리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안 된다."(142)


"반복적 아동학대가 다중인격의 원인이라고 정신의학이 발견한 건 아니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 행동과 그 기억 모두가 치료사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내가 주장하는 논지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으로서, 말하자면, 바로 그 인과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의 주조 방식이다. 일단 그 개념을 얻게 되면, 우리는 인간을 만드는making up people, 또는 우리 자신을 만드는 실로 강력한 도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현재의 자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모델에 따라 우리가 끊임없이 구성하고 있는 영혼을 우리는 구성한다." "다중성의 인과론에는 두 부분이 있다. 아동학대라는 기회원인occasioning cause이 한 부분이다. 다른 부분은, 어떤 아이들은 더 큰 해리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고, 이 해리능력은 측정할 수 있기에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161-2)


7장 해리의 양적 측정 


"설문지는 다중인격이 객관성과 정당성을 갖추게 만드는 방법이며, 치료사들로 하여금 자신은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한 인류학자는 설문지의 일차적 목적이 정신과 입원이나 클리닉에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해리장애에 관한 지식의 객관성을 구축하기 위함이라는 의견을 냈다. 해리 경험 설문지는 자격을 갖춘 전문가의 진단과 채점된 점수를 비교해서 확인되고 기준치가 조정된다. 그 과정에 부차적이기는 하나 필요한 확인 절차가 있다. 처음에 정상으로 채점된 사람이 몇 개월 후 다시 두 번째로 설문지에 답할 때에도 대략 같은 식으로 반응하는가? 계속 설문지가 개발되어가면서 새로운 설문지의 기준치 조정에 사용되는 것은 이전의 설문지 결과 및 이후의 임상적 판단이다. 그리하여 상호 일치하고 자기확증적인 검사도구의 네트워크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뷰 설문지 결과를 자기기입식 설문지 결과와 비교하고, 이 둘은 전문가의 임상적 판단과 비교한다는 식이다."(169)


"해리 설문지의 기준치 조정에는 표면적이지만 실은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다. 기준치 조정은 어떤 동의된 판단에 비추어야 하는가? 해리장애 분야에는 어떤 합의된 판단도 없다. 많은 선도적 정신과의사들은 그런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관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그 병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판단에 비추어서 기준치 조정이 된 해리척도가 아니다. 그 해리척도는, 그보다는, 정신의학 내에 있는 다중인격운동의 판단에 비춰서 조정된 것이다. 그들의 판단이 과학 수치처럼 객관적이라고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기준치 조정 과정은 여타 분야에서 사용되는 방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설문지들이 독립적 기준에 비춰 조정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일단 내적 일관성이 충분한 통상적 통계비교검사법 일습을 다 적용했다면, 충분한 수의 도표와 도식을 다 만들어냈다면,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했다면, 마침내 전체 구조는 객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169-71)


8장 기억 속의 진실 


"1982년 의식적이고 악마숭배적인 아동학대가 대중의 인화점을 건드렸을 때, 괴이한 고발이 잇따라 제기되었다. 악마는 미국 TV 토크쇼의 스타가 되었다." "이런 소란은 다중인격운동을 곤혹스럽게 했다. 다중인격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의식 고취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그 원인론으로 정당성을 획득했다. 악독하게 학대받았다는 주장이 점차 신용을 얻어가던 운동 초기에는 입증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환자들이 근친강간을 기억해내자 그 말을 믿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주기까지 했다.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치료법이 개발되고, 그 치료법은 기억을 끌어올리고 아동학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인격들을 유도해냈다. 트라우마는 가공된 상상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실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어서 아동학대운동이 이교의례 학대로 영역을 넓히자, 환자들은 점차로 이교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이야기는 점차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것으로 변모해갔다."(189-91)


"이 일에 관해 체계적인 공식 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오직 영국뿐이다. 해당 위원회는 3년이 넘게 정보를 수집했고 그 결과가 1994년 6월 출판되었다. 고문, 강제 낙태, 인간 제물, 식인, 수간이 포함된 악마숭배의례를 〈규정하는 특징〉은 〈성적·신체적 아동학대가 주술적 혹은 종교적 목적을 지향하는 의례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위원회는 악마숭배의례 학대를 공개적으로 주장한 사례 84명을 조사했으나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위원회는 많은 사례에서 어린이들이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학대받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악마 음모론이라는 우화에 대해서는 엄밀히 말해서 믿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유용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음모론과 마녀사냥은 그 설명에 관한 한 서로의 거울 이미지다. 사악한 이교의례가 항상 주변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비슷한 사건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대중적 촌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196-7)


9장 정신분열증 


"오이겐 블로일러(1857~1939)는 20세기 초에 진단범주로서의 정신분열증을 창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정신증의 주요 분류는 에밀 크레펠린(1856~1926)에 의해 확립되었다. 한쪽에는 조울증manic-depressive illnesses이 있고, 다른 쪽에는 청소년기에 발병해서 치매에 빠진다고 하여 조기치매라 불리는 게 있었다. 1908년, 블로일러는 몇 년간 자신의 조교들을 교육하던 내용을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크레펠린이 발병시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틀렸다고 했다. 그 어떤 기존 명칭도 이 수수께끼 질병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블로일러는 '분열된 뇌의 질병'의 의미로 그리스어에서 따온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는 명칭을 정했다. 그가 말한 것은, 이중의식의 원형처럼 인격들이 분열하여 한 개인을 번갈아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 기능의 '분열'〉을 지적한 것이었다. 아주 단순화하면, 주변을 인식하는 기능과 그걸 느끼는 기능이 분열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성과 감성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214-5)


10장 기억의 과학이 출현하기 전 


"프랑스 역사가 알랭 부로는, '슬리퍼sleepers'가 중세 절정기인 12세기 말과 13세기에 의미심장한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후일 몽유증이라고 불리게 될 일종의 몽환 상태에 빠진 개인들로 보인다. 슬리퍼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지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실질적으로 신학적 문제를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특성과 스타일로, 때로는 폭력적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금지된 행위를 했다. 그 상태가 끝나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토마스주의자들은 하나의 육체에는 오직 하나의 영혼만 있다고 주장했다. 스콜라 신학 심리학에서 영혼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다. 소수의 반토마스주의자들이, 슬리퍼와 같은 인간에게는, 각 상태에 하나씩 두 개의 실체적 형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알랭 부로는 말했다. 이는 책임과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였다. 소수파는 패했다. 따라서 슬리퍼들은 주변화되고 뒤이어 병리화되었다."(240-1)


"다중인격의 전신前身에는 두 개의 증상언어가 있었다. 하나는 주로 유럽대륙에서 쓰이던 자연적 몽유증이라는 언어로서, 인위적 몽유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증상언어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것으로, 이중의식의 언어였다." "1816년 메리 레이놀즈는 〈여자에게 나타난, 매우 특별한 이중의식 사례〉라고 기술되었다. 여기서 '이중'은 두 개를 의미하므로, 두 개 이상의 인격이 교차하는 상태는 아닐 터이고, 오늘날과 같이 17개 혹은 100개의 인격 파편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단어는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그건 수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작용이나 상호작용의 의미도 없고, 완숙한 인격을 암시하는 것도 없다." "그녀에 관한 최초의 짤막한 기술은 그 제목이 〈이중의식 혹은 동일한 개인에게 들어 있는 인간의 이중성duality〉이었지만, 〈인간의 이중성〉은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중의식은 인기를 얻었고, 19세기 거의 내내 잉글랜드에서 의학적 진단범주에 들어갔다."(245-6)


11장 인격의 이중화 


"이폴리트 텐은 절충주의 유심론자들이 말하는 자율적이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아self 또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 〈유일하고, 지속적이며, 항상 동일한 나I or me, [그리고] 다양하고 일시적인 나의 감각, 기억, 심상, 생각, 지각, 이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배척했다. 그는 자유의지 문제에 관한 칸트식 해법, 즉 '나'는 현상계의 인과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본체적 자아라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자아란 역사를 지닌 헤겔적 존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자아는 로크식의 개인으로, 의식, 감각, 기억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다. 따라서 1876년 이중화된 인격이 신문 1면에 등장했을 때 그는 무척 기뻐했다. ('이중화된 인격'에서 주목할 점은, 나눠진 것이 수동적인 성질의 의식이 아니라 인생, 인격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몸 안에서 교차하는 두 개의 자아는 각각의 인식과 일련의 기억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텐은 생각했다. 거기에는 초월적 영혼도, 본체적 자아도 없다."(267)


12장 최초의 다중인격 


# 파리의 남성 정신병원 비세트로의 수석의사인 쥘 부아쟁이 자신의 담당 환자 루이 비베─인격 분열을 동반하는 대大히스테리아 사례로 제시된─에 대해 설명한 날인 1885년 7월 27일부터 '다중인격'이 존재하게 되었다. 


13장 트라우마 


"샤르코는 히스테리아가 신체적 트라우마로 생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기억상실 등의 증상을 일으킨 정신적 트라우마도 있었다. 더 큰 관심을 받은 연구는 직접적 두부외상이 야기하는 기억상실이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두부외상은 항상 존재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기억상실을 일으켰지만, 이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1870년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심리적 트라우마, 회복된 기억, 정화abreaction에 관한 학설은 진실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 학설을 개척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인 프로이트와 자네는 정반대 방식으로 위기를 마주했다. 자네는 거짓말과 만들어진 거짓기억으로 환자들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다면 거짓을 말하는 데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었다. 프로이트에게는 진리가 절대적이었다. 프로이트는 진정한 이론Theory을, 다른 모든 것이 종속되어야 할 거대이론을 목표로 했고, 자신의 환자도 그들 자신의 진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믿었다."(306-7, 318)


"잃어버린 기억과 회복된 기억에 관한 한, 우리는 프로이트와 자네의 후계자들이다. 한 사람은 진리를 위해 살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자신을 기만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심지어는 자기 기만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훨씬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며, 환자에게 거짓을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다른 숭고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았다." "트라우마의 심리화는 오랫동안 존재론에 공헌해왔던 영혼의 영적 고통이 이제는 숨겨진 심리적 고통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고통은 우리 안에 내재된 유혹에 의해 생긴 죄악의 결과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유혹한, 죄지은 자가 일으킨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트라우마를 축으로 그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트라우마는 자네가 심리적 트라우마에 관한 최초의 통찰을 《철학비평》에 발표한 1887년 이후부터 심리화가 되었다. 바로 그해에 유럽의 다른 한쪽에서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탈고했다."(319-20)


14장 기억의 과학들 


"1861년이 되어서야 해부학자들은 두개골을 열어볼 수 있었고 정신기능의 손실에 해당하는 뇌의 손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폴 브로카(1824~1880)가 그러했다. 〈이 사례에서, 전두엽의 병변이 언어기능 상실의 원인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뇌의 운동성 언어중추인 브로카 영역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1879년 헤르만 에빙하우스(1850~1909)는 심리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했다. 에빙하우스는 다른 종류의 지식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기억을 연구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무의미한 음절을 기억해내는 실험을 했다." "에빙하우스의 업적이 중요한 점은 연구자료의 통계처리법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기억은 일련의 무의미한 음절을 기억해내는 능력의 맥락에서 조사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에는 이 기억해내는 능력의 통계분석을 고안해야 한다고 했다. 에빙하우스는 전형적 인간인 자신을 대상으로 연구에 착수했지만, 그 행동은 오직 통계적 정밀 검토를 통해서만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329-31)


"리보는 자신의 책에 스코틀랜드 학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적을 정도로 영국의 연합주의 심리학─관념 간의 연합association에 의해 인간의 의식이 형성된다는─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유익하게도, 그는 기억이 마치 하나의 능력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며, '기억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기술, 지식 등 습득된 여러 다른 종류의 능력이 뇌의 다른 부위에 저장된다는 데에서 연역해낸 추론에 불과하다. 리보는, 마음과 뇌의 관계는 당대 대부분의 실증주의자나 과학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으로 연관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사실이고, 우발적으로만 심리적 사실이 된다〉고 적었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추론적인 신경생리학의 한 부분으로 그렇게 적었을 뿐이다. 의식은 신경계통에서 일정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특정 사건(당시 용어로는 '방출')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사건이지만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것은 무의식이다."(334-5)


"리보와 그의 동료 연구자들의 중요성은 그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을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기억에 관한 진정한 지식, 과학적 법칙으로, 지금도 〈리보의 법칙〉이라 불린다. 그가 그 법칙에 붙인 이름은 퇴행regression 또는 복귀reversion의 법칙이다. 어떤 병리에 의해서든 간에 〈기억의 점진적 파괴는 논리적 순서, 즉 법칙을 따라 진행된다. 불안정한 기억에서부터 안정된 기억으로 점차적으로 진행되어간다.〉" "우리의 관심은 이 법칙이 어떤 종류의 법칙이고자 하는지에 있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이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사실이라는 것은 병리학적 정신의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상실, 망각에 관한 법칙이다. 그 법칙은 신체적 손상에 의한 망각과 정신적 쇼크로 인한 망각을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그것은 옛 의미의 트라우마와 앞으로 나오게 될(리보의 시점은 1881년이다) 트라우마의 의미를 모두 설명한다."(337-8)


15장 기억-정치 


"잠시 인류학적 관점으로 생각해서, 집단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집단정체성과 차별성을 견고히 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보면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홀로코스트 기억의 정치는 인간사회의 오래된 관행 중 하나다. 개인적 기억의 정치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물론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 사이에 상호연관이 있음을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확실한 연결고리 하나는 트라우마다. 트라우마성 스트레스의 과학으로부터 알게 된 것에는, 강제수용소 생존자 자신 및 그 자손들은 아동학대 피해자만큼 심리적으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한 방향으로만 투영해서 본 것 같다. 이 말은, 홀로코스트 기억은, 트라우마학學이 존재한 적이 없다 할지라도, 또 기억의 과학들이 19세기 말에 출현하지 않았더라도, 집단기억의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고 그와 연관된 정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개인적 기억의 정치는 이들 과학이 없었더라면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342)


"개인적 기억의 정치는 특정한 유형의 정치이고, 지식을 둘러싼, 혹은 지식에 관한 권리를 둘러싼 세력다툼이다. 그 정치는 특정 종류의 지식이 존재할 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개인에 관한 사실의 주장과 반박이 끝없이 이어지고, 이 환자에 대한, 저 치료사에 대한 주장이 악덕과 미덕에 관한 사회적 관점과 결합된다. 표층지식을 두고 경쟁하는 주장들의 저변에는 심층지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심층지식은 참-또는-거짓을 확인해줄, 기억에 관한 사실들의 존재에 관한 지식이다. 과학으로 알려주는 기억의 지식에 관한 가정이 없다면, 이런 종류의 정치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하는 진영들은 각 표층지식의 기반 위에서 세력다툼을 하지만, 심층지식이 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각 진영은 서로에게 반대하고, 자기들이 더 나은, 더 정확한, 최고의 근거와 방법론에서 끌어낸 표층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트라우마의 기억을 기억해낸 자와 그것에 의문을 품은 자 사이의 대결이다."(343)


16장 마음과 몸 


"서구 역사에서 다중인격의 진행과정이 알려주는 것은, 보통 사람이나 전문가가 무엇을 말할 태세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불안한 마음의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소통하려 들지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마음을 연구하는 모든 철학자가 주목해야 할, 마음의 다른 상태가 있을 가능성을 자연의 실례로부터 찾지 못한다." "다중인격은 마음에 관해서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말은, 마음(혹은 자아 등등)에 관한 실질적 철학의 주제를 다룰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현상은 분명 그 현상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이유를 가진 마음에 관한 어떤 주장을 예시해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 현상은 철학적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가 아닐까? 아니다. 다중현상은 단지 색채를 더해줄 뿐이다. 다중인격에 현실적 삶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때로 근거처럼 보이지만, 예시되는 학설은 다중인격과 상관없는 원칙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다중인격의 존재로써 입증되지도 않는다."(359-60)


17장 과거 속의 불확정성 


"나는 인간 유형의 고리 효과에 대해 종종 말해왔다. 고리 효과란, 한쪽에는 사람들이, 다른 한쪽에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을 분류하는 방식이 있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말한다. 특정 유형의 사람이라고, 또는 특정 행위를 한다고 간주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다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새 분류방식이 그렇게 분류된 사람에게 조직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그렇게 분류된 사람들이 지식을 가진 자, 분류하는 자, 분류의 과학에 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분류된 자들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에 관한 지식을 다시 변화시킨다(되먹임 효과). 여기에 변수를 더해보자. 사람과 행동을 분류할 새로운 분류법이 발명되고 새로 주조되면, 좋든 나쁘든 간에 한 사람의 개인이 되는 새로운 방식이 창조되고, 새로운 선택의 길이 열린다. 새로운 서술이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서술하의 행위가 출현한다. 실질적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관점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385-6)


"이는 옛 행위를 재서술하는 것, 특히 새롭게 만든 서술형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서술하에 놓인 옛 행위는 기억 속에서 재경험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 서술이 정말로 새로운 서술이고, 기억된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에 그 서술이 가능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제 기억 속에서 경험되는 무언가는 어떤 의미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행위는 있었지만, 새로운 서술하의 그 행위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 사건이 이렇듯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될 것이라고는 확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미래에 새로운 서술이 출현할지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말은 확실하게 되풀이해야겠다. 억제된 기억이든 억압된 기억이든 간에, 완전히 확정되어 있는, 끔찍한 사건에 대한 똑바른 기억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탐색하는 기억은 그러한 것의 주변에 있는 것이고, 더 직접적인 회상과는 다른 정신적 기전으로 인해 야기되는 기억이다."(400-1)


"기억을 서사로 간주해야 한다는 신조는 기억-정치의 한 측면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들어냄making-up으로써, 즉 우리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구성해낸다. 우리가 자신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 또 자신에게 말해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했고 어떻게 느꼈는지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세상과 맞물려야 하고, 적어도 외견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짜 역할은 하나의 삶, 어떤 개성, 하나의 자아를 창조하는 일이다. 기억을 서사로 보는 시각은 흔히 인도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반反과학적이라고 제시된다. 이는 기억을 신경학적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는 시각과 분명 상충된다." "그럼에도 기억-정치는 바로 실증주의 심리학의 과학적 배경에서 생겨났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동기는 영혼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대체하려는 세속적 욕구였다."(403-4)


18장 거짓의식


"내가 거짓의식으로 의미하려는 것은 아주 평범한 것이다. 즉 자신의 특성과 과거에 관해서 종요롭게 거짓믿음을 형성해온 사람들의 상태이다. 거짓의식은 그 상태에 빠진 당사자에게 책임이 없을지라도 당사자에게 유해한 상태라고 나는 논증하겠다. 거짓기억은 거짓의식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보통 '거짓기억증후군'은 그 개인에게 결코 일어난 적이 없던 사건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기억 패턴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대개가 그렇듯이) 부정확하게 기억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들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실, 소위 거짓기억증후군은 반대-기억증후군contrary-memory syndrome으로도 불리는데, 진짜 기억처럼 보이는 그 기억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원형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가 했던 말을 취하한〉 어떤 사람은, 삼촌이 자신을 자주 강간했다고 기억한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을 이제 깨달았다고 말한다."(416)


"금방 예로 든 반대-기억과 대체로 비슷한, 단지 사실이 아닌 기억인 단순-거짓-기억merely-false-memory에서는 삼촌이 진짜 가해자인 아버지의 가림막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기억은 현실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거는 근본적으로 다시 주조된 것이다." "기억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에는 잘못된-망각wrong-forgetting이 있다. 자신의 성격이나 성질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과거의 핵심 사항을 억제suppression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억압repression이 아니다. 억압은 사건이 의식적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고, 욕동drive과 성향도 의식적 욕구desire에서 사라지는 가설적 기전이다. 그 가설에서는, 억압 자체는 도덕적 주체의 자리에서 행하는 고의적이거나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기억이 의도적으로 억제되어 있다면, 거짓의식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이들 세 가지와 그 외의 가능성 있는 것들을 한데 묶어 기만적-기억deceptive-memory의 표제로 분류하려 한다."(416-7)


"자신만만하고 노골적인 회의론자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가볍게 털어내지만, 덜 오만하고 더 성찰적인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환자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다중인격 치료가 거짓의식으로 이끌지 모른다고 경계한다. 아동학대의 기억처럼 보이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이라거나 왜곡되었다는 노골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 기억은 충분히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온전한 개인이 되려는 목적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조된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경계를 하는 것이다. 그건 자기 인식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흉내내는 소란스러운 재잘거림으로 더 악화된 개인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도 이와 같은 도덕적 판단을 공유한다. 너무 잦은 다중인격 치료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자기 이야기를 소급해서 창조해내고, 여성은 스스로는 인생을 버텨나갈 수 없는 수동적 존재라는 옛 남성 모델을 암묵적으로 확인시켜준다고, 그들은 덧붙인다."(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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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 한 개인의 역사에서 모두의 역사로
이동해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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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산 지주 집안의 왜정살이


1장 ‘천석꾼’ 내력 


"원래 조선인은 호적에 '본관+성+명'의 이름 체계를 기재했다.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 엄마 봉미선의 본관이 경주라고 가정한다면, 호적부 본관란에는 경주, 성명란에 봉미선이라고 적는 식이다. 여기서 본관인 '경주'와 성인 '봉'은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것으로, 부계 혈통을 나타내며 변하지 않는다. 짱구의 아버지 신영식과 결혼했더라도 호적부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본관과 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반면 일본인은 '씨+명'의 이름체계를 사용했다. 여기서 씨는 '가家'를 표현하는 식별부호로, 같은 호적에 등재된 사람은 모두 동일한 씨를 사용한다. 만약 여자로 태어난다면 결혼 전 아버지 가에 속했을 때의 이름, 결혼 후 남편 가에 속했을 때의 이름이 다르다. 봉미선의 일본 버전 이름은 고야마 미사에, 노하라 미사에 이렇게 두 개다. 고야마 미사에는 결혼 전 이름으로 고야마 가에 속한 미사에라는 의미다. 하지만 노하라 히로시와 결혼하고는 노하라 가에 소속되면서 호적에 기재한 이름도 노하라 미사에로 바뀐다."(44)


"따라서 '성'과 '씨'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성을 바꾸라는 뜻의 개성改姓이 아니라, 씨를 새롭게 만들라는 뜻에서 창씨創氏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도 총독부는 호적에 '본관'과 '성'을 남겨두도록 했다. 다만 씨를 새로이 만들어 '씨+명'을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할 뿐이라고 홍보했다. 또한 창씨는 강제적이었지만 개명은 선택사항이었다. 심지어 1인당 50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재판소에 신청 이유를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창씨개명은 '일본식 씨를 새롭게 설정해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한 일'로 이해해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개명은 선택사항이니 '창씨'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창씨 신고는 일본 진무천황 즉위 2,600년 '기원절'에 맞춰, 1940년 2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모든 것을 일본 스타일로 바꾸려 했다. 창씨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의 가家제도를 조선에 뿌리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엔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를 이식한다는 의미도 담겼다."(45)


2장 식민지 농촌 지주가 사는 방식 


"넓은 땅을 갖고 소작을 나눠 주는 지주제가 한반도에 정착한 건 16세기 후반이다. 토지에 부과된 조세를 벼슬아치가 직접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이 소멸되자, 일정량의 녹봉에만 의지할 수 없던 관료층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토지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거래되었고 널따란 땅을 가진 지주가 등장했다. 지주제는 일본 식민 당국의 토지조사사업과 등기제도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이에 따라 대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받는 일은 식민지 조선에서 안정적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표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건물주'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소작료를 받는 방식은 세 가지로 나뉜다. ①소작료 액수를 고정하는 정조定租, ②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량을 어떤 비율로 나눌지 정하는 타조打租, ③수확 직전에 지주와 소작인이 함께 혹은 지주가 혼자 작황을 보고 어떻게 분배할지 정하는 집조執租다. 1930년 통계를 보면 타조가 44.4퍼센트로 가장 많고, 집조 28.2퍼센트, 정조 19.2퍼센트순이다."(54-5)


"짚으로 싸서 쌀을 담는 가마니, 가마. 우리에게 친숙한 이 말은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됐다. 원래 조선에서는 홉(0.18리터), 되(1.8리터), 말(18리터), 섬 혹은 석(180리터)이란 단위를 사용했다. 그리고 짚으로 짠 '섬'에 곡식을 담아 숫자를 매겼다. 곡식 천 석을 거두는 부자란 뜻의 천석꾼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가마니가 등장한 걸까? 한 가마는 한 석의 절반에 해당한다. 19세기 말, 조선의 시장이 개방되자 일본은 막대한 양의 미곡을 사들인다. 이때 일본 상인들에게 고민이 생긴다. 첫째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포장재인 '섬'이 일본 시장에 통용되는 '가마니'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섬으로 산 쌀을 일본의 소비자가 선호하는 가마니에 다시 포장해야 했다. 둘째는 섬이 가마니에 비해 헐거웠다는 점이다. 조선의 경우 껍질 채인 벼 상태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치밀하게 짜지 않은 섬을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 상인은 현미나 백미로 가공해 쌀을 유통했기에 보다 촘촘한 가마니를 선호했다."(64-5)


2부 몰락 속의 해방 전후


1장 ‘황금광’ 열풍에 뛰어들다 


"1930년대에 연이어 벌어진 전쟁은 '국방 자재'와 '생산력 확충 자재' 수입 확대를 불렀고, 결제 수단인 금이 보다 절실해졌다. 또한 대공황 극복을 위해 통화 발행을 크게 늘린 탓도 있었다. 통화 가치가 폭락하지 않도록, 보험 격인 금을 상당량 확보해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에 돌입하자 이젠 더 많은 생산을 넘어 통제까지 하기에 이른다. 9월 총독부는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을 제정한다. 금제품 제조에 까다로운 규제를 두는 한편, 금을 직접 매입해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금을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은행의 금은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달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정세에 맞춰 금 가격도 뛰어올랐다. 1911년 1돈에 2.95원이던 금값은 1937년에는 18원, 1939년에는 30원까지 오른다. 게다가 당국에서는 금을 시가로 매입했다고 하니, 금을 캐기만 하면 무조건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금광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황금에 미친 '황금광黃金狂 시대'가 된 것이다."(75-6)


# 진주만 공격(1941. 12) 이후 일본의 금은 대외결제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1943년부터 수많은 금광이 총독부의 손길 아래 정리된다.


2장 태평양전쟁기 조선인 가정의 생활상 


"일제가 시행한 황민화 정책에서 학생의 자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든 국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어로 소통이 가능해 빠르고 정확하게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먼저 학생의 조선어 사용을 억제했다. 1938년 시행한 '제3차 조선교육령'은 필수과목이던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꾼다. 강제는 아니지만 승진 평가나 학교 운영에 영향을 주다 보니 각 학교는 조선어 수업을 대폭 줄이게 된다. 1941년엔 초등학교 이수 학생을 위한 황민화 종합 대책, '국민학교규정'을 발표한다. 서양의 영향을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 일본의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이었다. 〈국체에 대한 신념을 견고히 하며 황국신민임을 철저히 자각하는 일에 힘쓴다〉고 명시돼 있었다. 1938년부터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꿔 불렀는데,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는 6년제 국민학교로 개편된다. 이어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아예 학교를 징병제를 위한 군대의 보조기관으로 설정하고 노동력 공급원으로 활용한다."(90-1)


3장 해방 직후 아산의 이모저모 


"1945년 10월 5일, 미군정은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공포한다. 이로써 일제가 시행한 각종 식량 통제는 해제된다. 그러면 왜곡된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와 저렴한 가격으로 쌀이 유통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해외로 나갔던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38도선을 넘어 내려오는 월남인이 다수 발생했으며, 일제 말 화폐의 대량 발행과 물자 부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됐다. 쌀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자 사람들은 선뜻 판매하려 하지 않았다. 매점매석이 판을 쳤지만 행정이 완비되지 못해 단속에 어려움을 겪었다. 쌀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러다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하리라 판단한 미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미곡의 자유 거래가 허용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은 법령 제45호 '미곡수집령'을 발표해 공출에 착수한다. 미군정 주도의 미곡 시장 통제 시스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57년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졌다."(105-6)


"1947년 말의 한 기사를 보자. 〈아산군 온양리 국민학교 교원 중에는 일부 적색 악질분자가 있어서 아동들에게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게 하는 등 악질행위를 계속하여 오던 중 학무과에서는 일부 숙청을 목적으로 그들 악질 교원에게 임시 전근을 명하였는데 도리어 그들은 밀의한 끝에 책임을 교장에게 전가시키며 모욕을 주다가 교장에게 사임을 권고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학부모들의 알선으로 아동 지도의 지장이 없도록 양력兩力 일단 간정은 되었으며 (···) 〉" "'민중의 기旗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영국의 사회주의자가 독일 민요의 음에 가사를 붙여 〈더 레드 플래그The Red Flag〉라고 이름 붙인 게 시초다. 1920년대 일본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소개되었고 곧 조선으로 유입된다."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치닫는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은 학부모의 반응이다. 일단은 〈아동 지도에 지장이 없도록〉 학부모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이념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108-9)


3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1장 2주 만에 점령된 아산 


"'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살자'는 사회주의의 간단한 메시지는 빈곤을 겪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7년 하반기, 좌익은 활발한 지하 활동과 폭력투쟁을 벌였는데 아산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확인된다. 1947년 11월, '민주애국청년동맹' 아산 지역 책임자 이병학과 남조선노동당 당원 홍태식이 청년층 세력 확장을 목적으로 여러 직장과 단체에 사람을 잠입시켰다가 경찰에 검거된 바 있었고, 5·10총선거 직전인 1948년 5월 8일에는 사이렌을 신호로 경찰지서, 경찰 가족, 입후보자의 살해 및 방화를 계획한 17명이 염치면에서 체포되었으며, 9일엔 신창면의 전신주 2개를 파괴한 남로당원이 체포되었다. 우익의 시각에서 〈전쟁 나기 전에도 공산당이 많이 보였어〉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인민군의 진주 소식을 접한 뒤 재빨리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이들은, 인민군과 함께 진주한 민족보위성 정치국 산하 '군정 부대'로부터 마을을 인계 받아 북한 내무성 아래에 편재되었다. '인공 치하'가 시작된 것이다."(137-9)


2장 북한 당국의 점령 정책 


"북한 당국이 시행한 대표적인 점령 정책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주민의 의식화다. 주민의 대부분은 전쟁 전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당연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북한은 문화선전성을 중심으로 각종 의식화 사업을 거의 매일 밤 실시했다." "둘째는 토지개혁이다. 북한 당국은 1946년에 이미 북한에서 실시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급진적인 경험을 살려, 농민의 지지를 이끌려고 했다. 한 가지 알아 둘 점은 남한도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1950년 3월이 되면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안을 확정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세제개혁이다. 1950년 8월 18일 '공화국 남반부에 있어서 농업현물세를 실시함에 관한 결정서'를 공포하며 '농업현물세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해 보급 상황이 열악해지자 '애국미', '감사의 쌀', 성금 헌납을 요구했고, '현물세 조기 납부운동'을 벌였다. 따라서 실제 현물세율은 훨씬 높았다고 볼 수 있다."(141-3)


3장 반동으로 찍힌 허홍무 일가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1월 여기저기 난립한 우익 청년단체들을 통합하기로 결정한다. 미군정 시절 좌익 탄압에 일조한 이들이었지만, 그동안 커진 영향력을 견제하는 한편, 청년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활용하려는 심산이었다. 12월 19일, 국민회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40여 개 단체가 모여 결성식을 가졌다. 통합된 단체의 이름은 대한청년단이었다. 〈우리는 총재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 적구도배赤狗徒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 버리기를 맹세한다〉라는 선언문 내용에서 이 단체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를 赤狗, 즉 '붉은 개'라 부르며 말살을 다짐하는 대한청년단은, 북한이 보기에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게다가 일부는 경찰과 함께 보도연맹 학살에 투입되기도 했던 이들이었다. (허홍무의 아버지) 허용은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한 허창성, 허규의 형이라는 이유로 숙청 명단에 오른 듯하다."(154-5)


"허홍무가 굴에 숨어 있던 기간은 9월 초부터 말까지였다. 밖으로 나올 수 있던 것은 전세가 역전돼 인민군이 후퇴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만약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허홍무는 기약 없이 굴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자꾸만 음식을 갖고 방공호에 오르는 고모를 누군가 수상히 여겨 발각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한 맥아더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굳이 인천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고 강조한 이유다." "북한은 인천 상륙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박태균은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이 유엔군에 뚫릴 경우 인민군이 급격한 궤멸 상태를 당할 것을 더 두려워한 것 같다.〉 낙동강 전선 약화를 감수하고 병력을 빼 해안 방어를 강화하거나, 모든 역량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재빨리 한반도 점령을 완수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야 했다. 보급선은 너무 길고 제공권은 미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둘 다는 불가능했다. 후자를 선택한 결과는 인민군의 패퇴였다."(159-60)


4장 유혈이 낭자한 수복 광경 


"〈미 24사단 소속 일부 병력과 협동, 9월 29일에 전주에 진주한 나는 죽창 등을 가진 지방 청년들이 벌써 2,000여 명의 부역자를 체포해 놓고 있는 놀라운 광경에 직면하였다. 이런 때 대개 미숙한 경찰의 약식 신문을 거쳐 사찰주임 등이 등급을 대충 구분하여 놓으면 순회하는 법무장교가 왔을 때 '1열 사형, 2열 무기, 3열 15년 징역 ······' 등으로 즉결되는 것이 당시 수복지구의 비상조치령 운용 실태였으며 관官측 형편은 그때로서는 별무도리別無道理였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부역자 수는 부지기수이니 한정된 유치장이나 경찰 양식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판검사 수속만 기다릴 수는 전후戰後 좌우에 패잔 인민군이 우글우글한 판국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병배 전 전주경찰서장의 회고는 열악한 여건 속에 '비상조치령'이 얼마나 파행적으로 시행되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형식적이더라도 절차를 밟았다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 못하고 즉결처분된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168-9)


4부 1954~1959년 사이의 전후 풍경


1장 배움 찾아, 촌사람의 서울살이 


"정전 조인식이 거행된 1953년 말,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국군 증강을 강조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항시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항상 자체 강화에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국군 증강을 위하여 만전을 기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장기간 복무한 병사를 제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전쟁 중 병력으로 충원된 인원은 77만 명에 달했다. 전시에 입대한 병사들은 '병역법'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기한 연장된 상태였다. 4년 넘게 장기 복무한 사람도 많았다. 제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열악한 급여, 복지를 버티다 못한 군인들이 탈영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결국 정부는 1954년 4월 1일부터 사병이 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씩. 병력 수는 유지해야 하는데, 병사들 제대는 시켜야 했다. 고민 끝에 정부가 내린 선택은 입대 연령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954년 1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기존의 만 19~28세였던 징소집 연령을 위아래로 한 살씩 늘려 만 18~29세로 바꿀 것을 의결한다."(187)


"전쟁 통에 군인이 된다는 건 크나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지금 누리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병역 기피 방법은 다양했다. 군인 신분증을 위조해 군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도끼로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있었다. 호적 담당 공무원을 매수해 생년월일을 변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처럼 꾸미다 걸린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정부는 당연히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기피자 색출에 나섰다. 이러한 배경 속에 등장한 게 가두街頭 검색이다. 길거리에서 경찰, 헌병이 지나가는 젊은 남성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확인했다. 징소집을 회피한 자, 전출·전입 수속을 하지 않고 무단 여행한 자로서 걸린 사람은 그 즉시 입대시킨다는 방침이었다. 전출·전입 수속을 하지 않고 무단 여행한 자, 바로 허홍무였다. 〈병적증명서〉에 따르면 입대일은 1954년 7월 12일이다."(188-90)


2장 ‘쌍팔년도’의 군 생활 


"〈훈련소에서 도망가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 울타리로 막 뛰어 나갔어. 그때 전방에서 군인들이 막 싸웠으니까. 전방 가면 다 죽는다, 이래 가지고, 도망가는 놈들이 다 전라도 놈들이었어. 전부가 전라도 사람.〉" "예전부터 들어온 전라도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그 뿌리를 밝히긴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다만 분명한 점은 1950년대 들어 전라도에 대한 편견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바로 전라도를 비하하는 뜻의 '하와이'라는 단어를 통해서였다. 배신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담긴 '하와이'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확산했다. 징병을 기피하고 탈영하는 사람 중 전라도 출신이 많은 것을 본 미 고문관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서도 하와이 출신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다고 얘기한 것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분명 허홍무의 편견과 맞물려 탈영병 '전부가 전라도 사람'이란 기억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192-5)


"허홍무의 마지막 근무지는 충청남도 성환이었다. 그곳에서 탄약고 경비를 보다가 1958년 5월 30일에 제대한다. 46개월의 길고 긴 군 생활이었다. 〈거주표〉를 보면 허홍무는 1954년에 일등병으로, 1955년 12월 1일 하사로, 1957년 10월 1일 병장으로 진급했다. 뜬금없이 웬 하사냐고? 이때는 하사가 부사관이 아닌 병사 계급이었다. 1957년 초, '병진급령' 개정으로 이등병→일등병→하사였던 병사 진급체계가 이등병→일등병→상등병→병장으로 변경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홍무는 하사가 아닌 병장으로 제대한다. 그런데 제대 기한이 없었다니? 입대 첫날부터 남은 날짜를 계산했던 나로서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허홍무는 말 그대로 제대 자체가 없었다. 전쟁 발발 시점부터 입대한 모든 장병은 '병역법'의 전시하 복무 기간 연장 조항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한대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70여 만 대군은 그렇게 제대 없이 입대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214-5)


3장 그 시절의 연애와 결혼 


"1950~1960년대, 오랜 세월 지켜 온 전통과 새로 유입된 서양문화가 충돌하는 가운데 한국인의 결혼관은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정혼定婚에서 연애결혼으로 한창 변화 중이었다. 1958년 7월부터 1년간 서울대와 이화여대가 서울 시내 300가구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2퍼센트가 부모의 결정에 의해 결혼했지만 자녀가 결혼할 때는 적어도 자녀의 의사를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정혼과 연애결혼을 절충해, 중매인에게 먼저 결혼 상대를 소개받은 뒤 사귀어 보고 뜻이 맞으면 결혼하는 '중매 연애'라는 새로운 풍조도 등장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 허용은 아들의 의견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정혼은, 자신도 그랬고 자신의 아버지도 그랬듯 '당연한 것'이었다. 그저 예전부터 하던 대로 할 뿐이었다." "허홍무는 아버지의 말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효는 양반의 도리에 어긋나는 너무나도 큰 죄였다. 그는 끝내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228-9)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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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페이 바운드 알베르티 지음, 서진희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12월
평점 :
절판


서론 _ ‘현대의 유행병’ 외로움 • 19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한 '외로운lonely'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1. 친구나 함께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슬픈, 동반자가 없는, 고독한. 2. (장소) 인적이 드물고 외진'. 이 가운데 '인적이 드물고 외진 장소'라는 두 번째 뜻만 1800년경 이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보다 전에는 '외로움loneliness'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고립된 공간에 대한 물리적인 묘사와 함께 종교적 계시 그리고 인간의 죄악에 대한 도덕적인 설명과 관련되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외로움이란 단어는 〈예수가 외진 곳으로 물러나 기도했다〉(누가복음 5장 16절)와 같이 '다른 이들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새뮤얼 존슨조차 그의 《영어사전》에서 '외로움'을 순전히 홀로 있는 상태('홀로 있는' 여우) 혹은 동떨어진 장소('후미진 바위')로 묘사했다. 이 단어에는 (신체적인 상태 외에) 그 어떤 감정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46-7)


"인구학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외로움이 고도로 발달하고 세계화된 세속적인 후기 근대 사회에서 생겨난 직접적이고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았다. 역사학자 키스 스넬은 외로움의 가장 의미 있는 원인이 대개 가족이 사망한 후 혼자 사는 데 있다고 했다." "사회적인 인구 이동이 외로움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외로움'이 모두가 느끼는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점 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 되고 소외감을 느낄 만한 여러 가지 또 다른 중요한 요소들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에는 몸과 마음에 대한 근대의 과학적인 믿음 그리고 영혼을 어떤 해석의 근거로 삼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 또한 포함된다." "찰스 다윈의 연구와 진화 생물학의 출현은 다양한 허구의 이야기와 사회적 메타포를 통해 표현되고 소통되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개인이 사회보다 중요해지고 사회와 대립하게 되었다."(58-60)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무정하고 기계적인 산업 사회를 배경으로 외로움을 겪는 여러 유형, 특히 어린아이들을 그리곤 했다. 따라서 디킨스 소설의 남녀 주인공들(예컨대 《위대한 유산》의 핍, 혹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은 자신을 황량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이며 버림받고 친구도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19세기 산업에 대한 메타포 안에서 심리적인 모순점에 사람들의 이목을 의도적으로 집중시킬 때가 많았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작업해야 했으며 이는 형편없이 야만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실수나 나약함 때문이든 냉혹한 사회 구조나 불운으로 인한 것이든 사회 밖으로 내몰린 외로운 개인에 대한 시적인 묘사는 진화생물학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초기 정신의학의 대상인 개인(불가분의 실체이며 한계가 있는 인간이 세상과 맞서는)의 출현과도 잘 맞아떨어진다."(62)


2장 _ 피에 새겨진 질병? 


"혼자가 아닌데도 외롭다고 느껴서 생기는 불안은 고독과 외로움의 근본적인 차이와 관련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이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플라스는 일기장에 외로움이 마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면서 외로움이 '마치 혈액에 생긴 병처럼 자기 안의 불명확한 중심'에서 비롯됐으며, 너무 온몸에 퍼져 있는 바람에 정확히 어디부터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외로움은 감염되는 '전염병' 같았으며, 이 용어들은 외로움을 유행병으로 개념화하는 데 자주 쓰이게 되었다. 플라스에게 외로움과 향수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향수병은 플라스가 자신을 지배하는 '쓰라린 감정'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이 되었다. 향수병에는 외로움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고, 사람들이 동조할 가능성도 훨씬 컸기 때문이다."(85-6)


"플라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종종 언급하며 관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21세기 외로움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플라스의 글에는 특히 성별이나 여성과 관련 있는 생식력을 나타내는 은유가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기형인 아이들을 낳고, 강간당하고 폭행당하는 내용을 썼는데, 이런 폭력적인 이미지는 플라스의 개인적인 편지에서도 그렇고 창작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결혼했든 안 했든, 바쁘고 창의적이고 행복하고 현실에 만족해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자신은 정도에서 벗어난, '사랑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여자라고 느꼈다. 마음속으로는 늘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행동은 외로운 이들에게 뚜렷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이 강한 인맥을 지닌 이들보다 사회성 점수가 더 낮은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인기 있고 사회 참여도 잘하며 더 행복하다는 믿음은 외로운 이들이 하는 '혼잣말'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89-91)


"플라스는 외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내향성과 신경증 사이에 부정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스는 삶을 함께할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것이 그 판단에 달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임(남자들이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때문에 억눌리고 확신이 없었으며 그러한 문화에 스며들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간절히 글을 쓰고자 하면서 어떻게 엄마와 아내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외로움은 이렇게 사회적 기대와 자기 정체성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은 성인이 되고 노년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과 똑같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창의성과 정신질환이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영국 문학과 문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상실감 또한 내포되어 있다. 상실감은 21세기의 가장 심오한 외로움의 지표로, 외로운 마음과 사랑의 추구가 바로 그것이다."(94-5, 100)


3장 _ 외로움과 결핍 


"'영혼의 동반자soulmate'라는 단어를 문헌에 처음 사용한 이는 낭만주의 시인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였다. 《젊은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1822)에서 콜리지는 결혼이 여성들에게 '자살과 같은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콜리지는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집이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짝'이 아니라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구에서 '진정한 사랑'의 전형이자 척도가 된 영혼의 동반자라는 개념의 함정은 분명하다. 모든 이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있고 자신의 온전함이 그 사람을 찾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다. 또한 이로 인해 인지와 현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며 그 유일한 '한 사람'을 찾지 못한 이들의 경우 실패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이 공동체 의식을 증진하는 것도 아니다. 단 한 명의 '상대'를 찾아야 하는 거라면 로맨틱한 사랑은 특히 진화생물학이나 애인이나 배우자 탐색과 연관된 개인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다."(110-2)


"《폭풍의 언덕》과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모두 여성이 '영혼의 동반자'나 의미 있는 상대를 찾으며 그 상대 없이는 외로워진다는 설정이다(한편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상적인'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두 소설 모두 자연의 속성과 가깝거나 그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이기도 한 위험스러울 정도로 관능적이며 음울하고 위협적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인 캐서린과 벨라는 모두 사회 관습과 개인적인 바람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선택은 성적이고 정서적인 만족 그리고 무감동하나 순응적인 삶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러한 선택은 눈에 보일 것인가 말 것인가, 위험에 처할 것인가 안전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강렬하고 로맨틱한 이상형이 매력 있고 (그리고 확실히 '유일한') 투쟁할 만한 사랑의 형태라는 생각을 내면화하고 불멸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만족이 결여되거나 이상형을 잃으면 감정적으로 황량하고 외로워지는 것이다."(116-7)


4장 _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 


"노인들, 특히 80이 넘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 빈번해지는 '초고령 노인들'에게는 상실로 인한 고통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외로움과 관련된 물건(의자뿐 아니라 슬리퍼나 찬장, 사진, 그릇이 될 수도 있다)은 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된 물건들이 그들이 겪은 상실 혹은 애석하게도 잃어버린 사회적 정체성을 연상시키는 기념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그리움과도 연결된다. 그리움에는 상실한 것에 대한 애도가 포함되며, 한때는 삶의 핵심이 되었던 사람들(친구, 아이들, 배우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 또한 들어간다. 하지만 그리움이 꼭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라 해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관계의 조합을 통해 현재의 사회적 단절감을 조금은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년 동안 이어지는 만성적인 외로움의 문제 중 하나는 이렇게 마음으로 그리는 관계를 회복시켜줄 기능이 없다는 데 있다."(139-40)


5장 _ 우울한 인스타그램 너무


"전보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모든 새로운 형태의 통신에는 그 사용과 남용, '오래된 사교의 방식'이 위협받는 것 아닐까 하는 불확실성과 공포가 늘 뒤따라왔다. 그러므로 좋거나 나쁜 영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셜미디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지지와 영향력 행사, 다른 이들에게 배려받고 그들과 연결된 기분(이런 모든 것이 외로운 상태와 반대로 여겨진다)과 같은 긍정적인 유대감을 경험한 사용자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그러한 유대감을 경험한다. 따라서 페이스북을 기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하는 것이 얼굴을 맞대는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의 도피용일 때보다 더 유익할 것이다. 소셜미디어 사용을 통해 원치 않는 외로움과 같이 감정적인 고초를 겪는 경우는 온라인 세계가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 보조적이거나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관계를 넘어서고 대체할 때다."(195-6)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영국에서 18세기 이후 사교 모임을 가지며 개인을 상업화하는 것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그 결과 외로움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소비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만들고 네트워킹에서의 성공을 개인의 재산이라 여기는 소셜미디어의 몇몇 형태는 소외된 현대 개인주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내가 외로움과 소셜미디어가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소셜미디어 자체를 부정적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디지털 세계에 개인과 사회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커뮤니티 내의 결속에 대한 사회학적인 논의는 '정체성을 통한 결속identity bonds'과 '유대감에 기반한 결속bond-based attachment'을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외로움에 대한 개입에서 시급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떻게 소셜미디어를 성공적이고 협조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느냐, 즉 '정체성'이 아니라 '유대감'을 토대로 활용하느냐가 될 것이다."(202-5)


6장 _ 똑딱거리는 시한폭탄? 


"노화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역사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초반의 외로움에 관한 정신적 공포에 속하는 것으로 문화적인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다. 노인의 신체, 정체성, 성생활, 경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노화에 관한 문제는 최근에서야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인층의 외로움에 관한 사료가 적다는 것도 그리 새삼스럽진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은 노년에 대해 정서적인 부담이나 고립의 측면이 아닌 신체 건강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주로 썼다. 즉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돌보고, 지나친 격정은 자제하며, 노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향한 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젊음에 집착하고 가능하면 오랜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서사를 지녔던 서양의 후기 근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노년을 '준비'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226-7)


"노년의 외로움이 보편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개인, 가족, 사회가 겪는 경험의 특성뿐 아니라 노화와 사회 복지에 대한 지배적인 사고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언했듯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외로운 이보다는 '외롭지 않은' 사람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노년에 외롭지 않은 상태에 주목한다면, 개별적인 차이점을 고려하는 한편 의료 보기 차원에서 적절한 개입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어떤 자료를 비교해보더라도 노화가 일어나는 것은 개인의 선택권이 없어지는 상황에 놓일 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는 외로움과 노년의 병약함까지 생길 수 있다." "노인들을 요양원이나 다과회, 댄스파티에 모아두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이득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노인들의 외로운 감정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노년의 외로움에 대한 접근법을 개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그 다양성을 더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을 것이다."(234-6)


7장 _ 노숙자와 난민 


"노숙자들을 박애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21세기 이후부터였다. 1980년대 영국에서는 노숙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주택가격 인플레이션, 임대주택 매각, 실업률 상승, 정신 건강 및 약물 관련 문제 증가, 16~17세 청소년의 주택수당 요구 금지 등의 이유로 거리에 나앉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1980년대 즈음에는 빠른 도시화의 결과로 노숙자 문제가 정치적으로도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노숙자는 사회와 가족의 지원과 유대가 부족한 상황과 관련 있으며, 이것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사항 중 가장 핵심이다. 노숙에는 그에 수반되는 우울, 불안, 외로움, 박탈감, 가난, 학대의 반복과 함께 단순히 집이 없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록 일반적인 주택에 대한 논의에서도 암묵적으로 노숙에 대해 그저 집이 없는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약물 중독, 정신질환, 외로움이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 등 노숙자 문제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50-3)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과 함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유별난 집단이 되어버리기 쉽다. 또한 세계적인 분쟁과 기후 변화 덕에 점차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집단이 되었다." "난민들은 집과 가족, 친숙한 환경, 집과 연결된 감각적인 경험(풍경, 소리, 향)에서 동떨어져 있다. 물질문화는 개인의 정서 생활과 외로움을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정체성이 담긴 이러한 물질의 상실은 공동체 인식의 결여와 함께(또한 심지어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는 상태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꽤 치명적일 수 있다. 소외된 기분에서 생기는 외로움은 구체적으로 젊은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 특히 다른 이들에게서 고립된 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된다. 웰빙이나 사회관계, 외로움보다는 외상과 실질적인 고려사항에 더 초점을 두는 보건 복지 서비스 차원에서는 난민과 망명신청자의 외로움과 같은 문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다."(258-9)


8장 _ 결핍 채우기 


"자기 정체성과 역사, 세상에서의 위치, 다른 이들과의 관계(과거, 현재, 미래에서의)는 음식, 책, 시계 무브먼트, 옷, 사진, 가구, 건물, 커텐, 일회용품 등과 같은 물질적인 제품들을 통해서 구조화된다. 말이나 몸짓과 더불어 사물은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정서적인 체험을 드러내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사물 즉, 물질적인 대상은 우리가 누구이며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나타낼 수 있으며, 특히 우리의 정체성이 손상되고 표류하게 될 때(이를테면 난민이나 이주민들의 경우처럼) 그 의미가 가진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신경과학자 존 카시오포와 패트릭 윌리엄은 외로움을 개인이나 집단이 생존을 위해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표시인 일종의 배고픔과 비교했다. 신체적인 배고픔은 실제 체험이라는 물질적인 특성뿐 아니라 개인의 몸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생활 습관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268-9)


"외로움은 물질주의로 인한 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질주의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외로움과 물질주의 간에 위험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많은 소비재를 갈망하고 손에 넣을수록 사회적인 유대감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유대감을 덜 경험할수록 소비재를 더 원하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와 연결에 대한 기본 욕구가 있으며, 물질적인 상품들로 귀결되는 욕구 또한 인간적인 관계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기 표현이 아닌 사회 결속을 추구할 때도 소비 행위가 일어난다. 사회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물건의 소유욕은 자신들의 공통된 뿌리와 유산을 공고히 하고 기념하기 위해 특정 물건의 소유에 의존하는 이주민 집단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가족'이나 지인, 전통 또는 개인의 삶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해주는 특정한 물질적인 대상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기도 하는 것이다."(275-7)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과 인지적인 맥락은 모든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모욕으로 인한 노여움에 굴욕감과 슬픔이 함께 물들 수도 있고, 상대 운동선수에 대한 질투가 실망과 분노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감정 상태도 그대로 변함없이 인식과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외로움은 다른 대부분의 감정 상태와 달리 사회적으로 이해될 만한 몸짓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드러내는 몸과 관련된 자세나 행동은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제 기능을 못 하는 코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짓 언어를 읽고 파악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기술이다. 강제적으로 고독한 상태에 있었거나 사회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까 봐(혹은 거부당할까 봐) 긴장하거나 걱정할 때 정서적인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294-5)


9장 _ 쓸쓸한 구름과 빈 배 


"낭만주의적인 개인주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 외로움은 사회로부터의 의식적인 분리와 고독을 통해 성스러운 자연과의 교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본질적으로 비사교적이거나 영원히 고독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런 생각이 널리 퍼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워즈워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자기 경험을 다시 생각해보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시인들이나 작가들과 함께 어울리고 도시의 흥겨움을 즐길 때는 무척 사교적이기도 했다. 사실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글 쓰는 행위는 개인적·영적인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기계화, 도시화, 산업 혁명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하는 '어둡고 사악한 공장들'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잔혹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개인의 물음에 도움이 될 만한 답을 찾는 일인 것이다."(305-8)


"버지니아 울프에게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이긴 하지만 창작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외로움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늘 어떤 공포가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의 번잡한 소리와 친구들, 지인들에 둘러싸인 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진실'을 느끼고 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울프는 많은 작품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글을 썼으며, 창작을 위해 홀로여야 하는 내적인 필요와 함께 '외적으로' 사회적인 면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울프가 시간의 흐름에 집착하는 것(그녀의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가장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제대로 검토된 적 없는 시간과 외로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행동일 수 있다. 시간은 우리가 행복할 때보다 지루하거나 슬플 때 혹은 고통스러울 때 더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인 경험은 외로움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312, 315-6)


"창의력을 추구하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내향성과 고독은 대체로 필수적인 요소다. 고요함과 고독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외로움이 파괴적인 반면 회복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일 경우에 한정된 것이다." "고독, 심지어 외로움의 추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회복 혹은 창작을 위해 사회에서 물러나 있는 행동은 개인적인 집중과 심리적·예술적인 어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필수적이지만, 그렇다고 영구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21세기에 넘쳐나는 '마음챙김' 앱과 점심시간을 이용한 명상과 관련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단기간의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혹은 고독이) 매일 이어지는 들리는 거라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없는 강제적인 고립과 과연 같을 수 있겠는가?"(323-5)


결론 _ 신자유주의 시대와 외로움의 재구성 • 327


"개인주의적인 사고, 세속주의, 과학과 의학 사이의 경쟁, 철학, 경제적 담론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외로움'이라는 용어는 1800년대 세계적인 대변화로 인한 소외의 특성뿐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감정 체험의 출현을 반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아는 자애로운 신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경쟁적인 개인주의가 끈질기게 확산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의 빈 공간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개인은 홀로 고립되었으며, 가족 또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소셜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신에서부터 천사와 왕을 거쳐 농부와 땅에 이르는 모든 개체에 대하여 위계적인 질서가 세워져 있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을 만족스러운 상태라고 여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대에는 '공공의 복지'가 우선시되었으며, 책임이 중요시되었다. 또 개인 또한 타인과 체제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초자연적 힘에 대한 유대감을 얻을 수 있었다."(336-7)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서 확실한 한 가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와 그에 따른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염병으로 규정된 외로움은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전염이라는 말은 (감염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는 매혹적이지만(강력하고 쉽게 은유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정치적·도덕적인 차원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 '오염'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뜻이 연상된다면, 전염이라는 용어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민자들을 아주 몹쓸 질병으로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물이 있다고 해보자. 그 건물에 담긴 감정적인 언어는 소수민족을 바라보는 태도에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킬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유행병' 같은 표현 역시 부정적인 사회적 반응을 유발한다. 유행병이란 말로 인해 사람들이 생물학적인 불가피성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외로움이 문화와 환경의 산물이며 불가피한 인간 조건의 일부가 아니란 사실이 도외시될 수 있다."(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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