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 한 개인의 역사에서 모두의 역사로
이동해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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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산 지주 집안의 왜정살이


1장 ‘천석꾼’ 내력 


"원래 조선인은 호적에 '본관+성+명'의 이름 체계를 기재했다.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 엄마 봉미선의 본관이 경주라고 가정한다면, 호적부 본관란에는 경주, 성명란에 봉미선이라고 적는 식이다. 여기서 본관인 '경주'와 성인 '봉'은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것으로, 부계 혈통을 나타내며 변하지 않는다. 짱구의 아버지 신영식과 결혼했더라도 호적부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본관과 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반면 일본인은 '씨+명'의 이름체계를 사용했다. 여기서 씨는 '가家'를 표현하는 식별부호로, 같은 호적에 등재된 사람은 모두 동일한 씨를 사용한다. 만약 여자로 태어난다면 결혼 전 아버지 가에 속했을 때의 이름, 결혼 후 남편 가에 속했을 때의 이름이 다르다. 봉미선의 일본 버전 이름은 고야마 미사에, 노하라 미사에 이렇게 두 개다. 고야마 미사에는 결혼 전 이름으로 고야마 가에 속한 미사에라는 의미다. 하지만 노하라 히로시와 결혼하고는 노하라 가에 소속되면서 호적에 기재한 이름도 노하라 미사에로 바뀐다."(44)


"따라서 '성'과 '씨'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성을 바꾸라는 뜻의 개성改姓이 아니라, 씨를 새롭게 만들라는 뜻에서 창씨創氏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도 총독부는 호적에 '본관'과 '성'을 남겨두도록 했다. 다만 씨를 새로이 만들어 '씨+명'을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할 뿐이라고 홍보했다. 또한 창씨는 강제적이었지만 개명은 선택사항이었다. 심지어 1인당 50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재판소에 신청 이유를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창씨개명은 '일본식 씨를 새롭게 설정해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한 일'로 이해해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개명은 선택사항이니 '창씨'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창씨 신고는 일본 진무천황 즉위 2,600년 '기원절'에 맞춰, 1940년 2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모든 것을 일본 스타일로 바꾸려 했다. 창씨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의 가家제도를 조선에 뿌리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엔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를 이식한다는 의미도 담겼다."(45)


2장 식민지 농촌 지주가 사는 방식 


"넓은 땅을 갖고 소작을 나눠 주는 지주제가 한반도에 정착한 건 16세기 후반이다. 토지에 부과된 조세를 벼슬아치가 직접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이 소멸되자, 일정량의 녹봉에만 의지할 수 없던 관료층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토지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거래되었고 널따란 땅을 가진 지주가 등장했다. 지주제는 일본 식민 당국의 토지조사사업과 등기제도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이에 따라 대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받는 일은 식민지 조선에서 안정적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표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건물주'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소작료를 받는 방식은 세 가지로 나뉜다. ①소작료 액수를 고정하는 정조定租, ②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량을 어떤 비율로 나눌지 정하는 타조打租, ③수확 직전에 지주와 소작인이 함께 혹은 지주가 혼자 작황을 보고 어떻게 분배할지 정하는 집조執租다. 1930년 통계를 보면 타조가 44.4퍼센트로 가장 많고, 집조 28.2퍼센트, 정조 19.2퍼센트순이다."(54-5)


"짚으로 싸서 쌀을 담는 가마니, 가마. 우리에게 친숙한 이 말은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됐다. 원래 조선에서는 홉(0.18리터), 되(1.8리터), 말(18리터), 섬 혹은 석(180리터)이란 단위를 사용했다. 그리고 짚으로 짠 '섬'에 곡식을 담아 숫자를 매겼다. 곡식 천 석을 거두는 부자란 뜻의 천석꾼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가마니가 등장한 걸까? 한 가마는 한 석의 절반에 해당한다. 19세기 말, 조선의 시장이 개방되자 일본은 막대한 양의 미곡을 사들인다. 이때 일본 상인들에게 고민이 생긴다. 첫째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포장재인 '섬'이 일본 시장에 통용되는 '가마니'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섬으로 산 쌀을 일본의 소비자가 선호하는 가마니에 다시 포장해야 했다. 둘째는 섬이 가마니에 비해 헐거웠다는 점이다. 조선의 경우 껍질 채인 벼 상태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치밀하게 짜지 않은 섬을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 상인은 현미나 백미로 가공해 쌀을 유통했기에 보다 촘촘한 가마니를 선호했다."(64-5)


2부 몰락 속의 해방 전후


1장 ‘황금광’ 열풍에 뛰어들다 


"1930년대에 연이어 벌어진 전쟁은 '국방 자재'와 '생산력 확충 자재' 수입 확대를 불렀고, 결제 수단인 금이 보다 절실해졌다. 또한 대공황 극복을 위해 통화 발행을 크게 늘린 탓도 있었다. 통화 가치가 폭락하지 않도록, 보험 격인 금을 상당량 확보해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에 돌입하자 이젠 더 많은 생산을 넘어 통제까지 하기에 이른다. 9월 총독부는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을 제정한다. 금제품 제조에 까다로운 규제를 두는 한편, 금을 직접 매입해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금을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은행의 금은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달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정세에 맞춰 금 가격도 뛰어올랐다. 1911년 1돈에 2.95원이던 금값은 1937년에는 18원, 1939년에는 30원까지 오른다. 게다가 당국에서는 금을 시가로 매입했다고 하니, 금을 캐기만 하면 무조건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금광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황금에 미친 '황금광黃金狂 시대'가 된 것이다."(75-6)


# 진주만 공격(1941. 12) 이후 일본의 금은 대외결제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1943년부터 수많은 금광이 총독부의 손길 아래 정리된다.


2장 태평양전쟁기 조선인 가정의 생활상 


"일제가 시행한 황민화 정책에서 학생의 자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든 국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어로 소통이 가능해 빠르고 정확하게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먼저 학생의 조선어 사용을 억제했다. 1938년 시행한 '제3차 조선교육령'은 필수과목이던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꾼다. 강제는 아니지만 승진 평가나 학교 운영에 영향을 주다 보니 각 학교는 조선어 수업을 대폭 줄이게 된다. 1941년엔 초등학교 이수 학생을 위한 황민화 종합 대책, '국민학교규정'을 발표한다. 서양의 영향을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 일본의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이었다. 〈국체에 대한 신념을 견고히 하며 황국신민임을 철저히 자각하는 일에 힘쓴다〉고 명시돼 있었다. 1938년부터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꿔 불렀는데,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는 6년제 국민학교로 개편된다. 이어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아예 학교를 징병제를 위한 군대의 보조기관으로 설정하고 노동력 공급원으로 활용한다."(90-1)


3장 해방 직후 아산의 이모저모 


"1945년 10월 5일, 미군정은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공포한다. 이로써 일제가 시행한 각종 식량 통제는 해제된다. 그러면 왜곡된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와 저렴한 가격으로 쌀이 유통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해외로 나갔던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38도선을 넘어 내려오는 월남인이 다수 발생했으며, 일제 말 화폐의 대량 발행과 물자 부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됐다. 쌀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자 사람들은 선뜻 판매하려 하지 않았다. 매점매석이 판을 쳤지만 행정이 완비되지 못해 단속에 어려움을 겪었다. 쌀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러다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하리라 판단한 미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미곡의 자유 거래가 허용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은 법령 제45호 '미곡수집령'을 발표해 공출에 착수한다. 미군정 주도의 미곡 시장 통제 시스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57년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졌다."(105-6)


"1947년 말의 한 기사를 보자. 〈아산군 온양리 국민학교 교원 중에는 일부 적색 악질분자가 있어서 아동들에게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게 하는 등 악질행위를 계속하여 오던 중 학무과에서는 일부 숙청을 목적으로 그들 악질 교원에게 임시 전근을 명하였는데 도리어 그들은 밀의한 끝에 책임을 교장에게 전가시키며 모욕을 주다가 교장에게 사임을 권고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학부모들의 알선으로 아동 지도의 지장이 없도록 양력兩力 일단 간정은 되었으며 (···) 〉" "'민중의 기旗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영국의 사회주의자가 독일 민요의 음에 가사를 붙여 〈더 레드 플래그The Red Flag〉라고 이름 붙인 게 시초다. 1920년대 일본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소개되었고 곧 조선으로 유입된다."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치닫는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은 학부모의 반응이다. 일단은 〈아동 지도에 지장이 없도록〉 학부모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이념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108-9)


3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1장 2주 만에 점령된 아산 


"'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살자'는 사회주의의 간단한 메시지는 빈곤을 겪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7년 하반기, 좌익은 활발한 지하 활동과 폭력투쟁을 벌였는데 아산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확인된다. 1947년 11월, '민주애국청년동맹' 아산 지역 책임자 이병학과 남조선노동당 당원 홍태식이 청년층 세력 확장을 목적으로 여러 직장과 단체에 사람을 잠입시켰다가 경찰에 검거된 바 있었고, 5·10총선거 직전인 1948년 5월 8일에는 사이렌을 신호로 경찰지서, 경찰 가족, 입후보자의 살해 및 방화를 계획한 17명이 염치면에서 체포되었으며, 9일엔 신창면의 전신주 2개를 파괴한 남로당원이 체포되었다. 우익의 시각에서 〈전쟁 나기 전에도 공산당이 많이 보였어〉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인민군의 진주 소식을 접한 뒤 재빨리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이들은, 인민군과 함께 진주한 민족보위성 정치국 산하 '군정 부대'로부터 마을을 인계 받아 북한 내무성 아래에 편재되었다. '인공 치하'가 시작된 것이다."(137-9)


2장 북한 당국의 점령 정책 


"북한 당국이 시행한 대표적인 점령 정책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주민의 의식화다. 주민의 대부분은 전쟁 전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당연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북한은 문화선전성을 중심으로 각종 의식화 사업을 거의 매일 밤 실시했다." "둘째는 토지개혁이다. 북한 당국은 1946년에 이미 북한에서 실시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급진적인 경험을 살려, 농민의 지지를 이끌려고 했다. 한 가지 알아 둘 점은 남한도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1950년 3월이 되면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안을 확정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세제개혁이다. 1950년 8월 18일 '공화국 남반부에 있어서 농업현물세를 실시함에 관한 결정서'를 공포하며 '농업현물세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해 보급 상황이 열악해지자 '애국미', '감사의 쌀', 성금 헌납을 요구했고, '현물세 조기 납부운동'을 벌였다. 따라서 실제 현물세율은 훨씬 높았다고 볼 수 있다."(141-3)


3장 반동으로 찍힌 허홍무 일가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1월 여기저기 난립한 우익 청년단체들을 통합하기로 결정한다. 미군정 시절 좌익 탄압에 일조한 이들이었지만, 그동안 커진 영향력을 견제하는 한편, 청년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활용하려는 심산이었다. 12월 19일, 국민회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40여 개 단체가 모여 결성식을 가졌다. 통합된 단체의 이름은 대한청년단이었다. 〈우리는 총재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 적구도배赤狗徒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 버리기를 맹세한다〉라는 선언문 내용에서 이 단체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를 赤狗, 즉 '붉은 개'라 부르며 말살을 다짐하는 대한청년단은, 북한이 보기에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게다가 일부는 경찰과 함께 보도연맹 학살에 투입되기도 했던 이들이었다. (허홍무의 아버지) 허용은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한 허창성, 허규의 형이라는 이유로 숙청 명단에 오른 듯하다."(154-5)


"허홍무가 굴에 숨어 있던 기간은 9월 초부터 말까지였다. 밖으로 나올 수 있던 것은 전세가 역전돼 인민군이 후퇴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만약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허홍무는 기약 없이 굴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자꾸만 음식을 갖고 방공호에 오르는 고모를 누군가 수상히 여겨 발각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한 맥아더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굳이 인천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고 강조한 이유다." "북한은 인천 상륙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박태균은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이 유엔군에 뚫릴 경우 인민군이 급격한 궤멸 상태를 당할 것을 더 두려워한 것 같다.〉 낙동강 전선 약화를 감수하고 병력을 빼 해안 방어를 강화하거나, 모든 역량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재빨리 한반도 점령을 완수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야 했다. 보급선은 너무 길고 제공권은 미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둘 다는 불가능했다. 후자를 선택한 결과는 인민군의 패퇴였다."(159-60)


4장 유혈이 낭자한 수복 광경 


"〈미 24사단 소속 일부 병력과 협동, 9월 29일에 전주에 진주한 나는 죽창 등을 가진 지방 청년들이 벌써 2,000여 명의 부역자를 체포해 놓고 있는 놀라운 광경에 직면하였다. 이런 때 대개 미숙한 경찰의 약식 신문을 거쳐 사찰주임 등이 등급을 대충 구분하여 놓으면 순회하는 법무장교가 왔을 때 '1열 사형, 2열 무기, 3열 15년 징역 ······' 등으로 즉결되는 것이 당시 수복지구의 비상조치령 운용 실태였으며 관官측 형편은 그때로서는 별무도리別無道理였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부역자 수는 부지기수이니 한정된 유치장이나 경찰 양식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판검사 수속만 기다릴 수는 전후戰後 좌우에 패잔 인민군이 우글우글한 판국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병배 전 전주경찰서장의 회고는 열악한 여건 속에 '비상조치령'이 얼마나 파행적으로 시행되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형식적이더라도 절차를 밟았다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 못하고 즉결처분된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168-9)


4부 1954~1959년 사이의 전후 풍경


1장 배움 찾아, 촌사람의 서울살이 


"정전 조인식이 거행된 1953년 말,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국군 증강을 강조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항시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항상 자체 강화에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국군 증강을 위하여 만전을 기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장기간 복무한 병사를 제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전쟁 중 병력으로 충원된 인원은 77만 명에 달했다. 전시에 입대한 병사들은 '병역법'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기한 연장된 상태였다. 4년 넘게 장기 복무한 사람도 많았다. 제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열악한 급여, 복지를 버티다 못한 군인들이 탈영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결국 정부는 1954년 4월 1일부터 사병이 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씩. 병력 수는 유지해야 하는데, 병사들 제대는 시켜야 했다. 고민 끝에 정부가 내린 선택은 입대 연령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954년 1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기존의 만 19~28세였던 징소집 연령을 위아래로 한 살씩 늘려 만 18~29세로 바꿀 것을 의결한다."(187)


"전쟁 통에 군인이 된다는 건 크나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지금 누리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병역 기피 방법은 다양했다. 군인 신분증을 위조해 군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도끼로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있었다. 호적 담당 공무원을 매수해 생년월일을 변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처럼 꾸미다 걸린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정부는 당연히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기피자 색출에 나섰다. 이러한 배경 속에 등장한 게 가두街頭 검색이다. 길거리에서 경찰, 헌병이 지나가는 젊은 남성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확인했다. 징소집을 회피한 자, 전출·전입 수속을 하지 않고 무단 여행한 자로서 걸린 사람은 그 즉시 입대시킨다는 방침이었다. 전출·전입 수속을 하지 않고 무단 여행한 자, 바로 허홍무였다. 〈병적증명서〉에 따르면 입대일은 1954년 7월 12일이다."(188-90)


2장 ‘쌍팔년도’의 군 생활 


"〈훈련소에서 도망가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 울타리로 막 뛰어 나갔어. 그때 전방에서 군인들이 막 싸웠으니까. 전방 가면 다 죽는다, 이래 가지고, 도망가는 놈들이 다 전라도 놈들이었어. 전부가 전라도 사람.〉" "예전부터 들어온 전라도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그 뿌리를 밝히긴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다만 분명한 점은 1950년대 들어 전라도에 대한 편견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바로 전라도를 비하하는 뜻의 '하와이'라는 단어를 통해서였다. 배신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담긴 '하와이'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확산했다. 징병을 기피하고 탈영하는 사람 중 전라도 출신이 많은 것을 본 미 고문관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서도 하와이 출신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다고 얘기한 것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분명 허홍무의 편견과 맞물려 탈영병 '전부가 전라도 사람'이란 기억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192-5)


"허홍무의 마지막 근무지는 충청남도 성환이었다. 그곳에서 탄약고 경비를 보다가 1958년 5월 30일에 제대한다. 46개월의 길고 긴 군 생활이었다. 〈거주표〉를 보면 허홍무는 1954년에 일등병으로, 1955년 12월 1일 하사로, 1957년 10월 1일 병장으로 진급했다. 뜬금없이 웬 하사냐고? 이때는 하사가 부사관이 아닌 병사 계급이었다. 1957년 초, '병진급령' 개정으로 이등병→일등병→하사였던 병사 진급체계가 이등병→일등병→상등병→병장으로 변경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홍무는 하사가 아닌 병장으로 제대한다. 그런데 제대 기한이 없었다니? 입대 첫날부터 남은 날짜를 계산했던 나로서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허홍무는 말 그대로 제대 자체가 없었다. 전쟁 발발 시점부터 입대한 모든 장병은 '병역법'의 전시하 복무 기간 연장 조항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한대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70여 만 대군은 그렇게 제대 없이 입대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214-5)


3장 그 시절의 연애와 결혼 


"1950~1960년대, 오랜 세월 지켜 온 전통과 새로 유입된 서양문화가 충돌하는 가운데 한국인의 결혼관은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정혼定婚에서 연애결혼으로 한창 변화 중이었다. 1958년 7월부터 1년간 서울대와 이화여대가 서울 시내 300가구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2퍼센트가 부모의 결정에 의해 결혼했지만 자녀가 결혼할 때는 적어도 자녀의 의사를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정혼과 연애결혼을 절충해, 중매인에게 먼저 결혼 상대를 소개받은 뒤 사귀어 보고 뜻이 맞으면 결혼하는 '중매 연애'라는 새로운 풍조도 등장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 허용은 아들의 의견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정혼은, 자신도 그랬고 자신의 아버지도 그랬듯 '당연한 것'이었다. 그저 예전부터 하던 대로 할 뿐이었다." "허홍무는 아버지의 말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효는 양반의 도리에 어긋나는 너무나도 큰 죄였다. 그는 끝내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228-9)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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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페이 바운드 알베르티 지음, 서진희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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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_ ‘현대의 유행병’ 외로움 • 19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한 '외로운lonely'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1. 친구나 함께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슬픈, 동반자가 없는, 고독한. 2. (장소) 인적이 드물고 외진'. 이 가운데 '인적이 드물고 외진 장소'라는 두 번째 뜻만 1800년경 이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보다 전에는 '외로움loneliness'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고립된 공간에 대한 물리적인 묘사와 함께 종교적 계시 그리고 인간의 죄악에 대한 도덕적인 설명과 관련되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외로움이란 단어는 〈예수가 외진 곳으로 물러나 기도했다〉(누가복음 5장 16절)와 같이 '다른 이들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새뮤얼 존슨조차 그의 《영어사전》에서 '외로움'을 순전히 홀로 있는 상태('홀로 있는' 여우) 혹은 동떨어진 장소('후미진 바위')로 묘사했다. 이 단어에는 (신체적인 상태 외에) 그 어떤 감정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46-7)


"인구학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외로움이 고도로 발달하고 세계화된 세속적인 후기 근대 사회에서 생겨난 직접적이고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았다. 역사학자 키스 스넬은 외로움의 가장 의미 있는 원인이 대개 가족이 사망한 후 혼자 사는 데 있다고 했다." "사회적인 인구 이동이 외로움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외로움'이 모두가 느끼는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점 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 되고 소외감을 느낄 만한 여러 가지 또 다른 중요한 요소들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에는 몸과 마음에 대한 근대의 과학적인 믿음 그리고 영혼을 어떤 해석의 근거로 삼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 또한 포함된다." "찰스 다윈의 연구와 진화 생물학의 출현은 다양한 허구의 이야기와 사회적 메타포를 통해 표현되고 소통되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개인이 사회보다 중요해지고 사회와 대립하게 되었다."(58-60)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무정하고 기계적인 산업 사회를 배경으로 외로움을 겪는 여러 유형, 특히 어린아이들을 그리곤 했다. 따라서 디킨스 소설의 남녀 주인공들(예컨대 《위대한 유산》의 핍, 혹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은 자신을 황량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이며 버림받고 친구도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19세기 산업에 대한 메타포 안에서 심리적인 모순점에 사람들의 이목을 의도적으로 집중시킬 때가 많았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작업해야 했으며 이는 형편없이 야만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실수나 나약함 때문이든 냉혹한 사회 구조나 불운으로 인한 것이든 사회 밖으로 내몰린 외로운 개인에 대한 시적인 묘사는 진화생물학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초기 정신의학의 대상인 개인(불가분의 실체이며 한계가 있는 인간이 세상과 맞서는)의 출현과도 잘 맞아떨어진다."(62)


2장 _ 피에 새겨진 질병? 


"혼자가 아닌데도 외롭다고 느껴서 생기는 불안은 고독과 외로움의 근본적인 차이와 관련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이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플라스는 일기장에 외로움이 마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면서 외로움이 '마치 혈액에 생긴 병처럼 자기 안의 불명확한 중심'에서 비롯됐으며, 너무 온몸에 퍼져 있는 바람에 정확히 어디부터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외로움은 감염되는 '전염병' 같았으며, 이 용어들은 외로움을 유행병으로 개념화하는 데 자주 쓰이게 되었다. 플라스에게 외로움과 향수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향수병은 플라스가 자신을 지배하는 '쓰라린 감정'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이 되었다. 향수병에는 외로움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고, 사람들이 동조할 가능성도 훨씬 컸기 때문이다."(85-6)


"플라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종종 언급하며 관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21세기 외로움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플라스의 글에는 특히 성별이나 여성과 관련 있는 생식력을 나타내는 은유가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기형인 아이들을 낳고, 강간당하고 폭행당하는 내용을 썼는데, 이런 폭력적인 이미지는 플라스의 개인적인 편지에서도 그렇고 창작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결혼했든 안 했든, 바쁘고 창의적이고 행복하고 현실에 만족해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자신은 정도에서 벗어난, '사랑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여자라고 느꼈다. 마음속으로는 늘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행동은 외로운 이들에게 뚜렷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이 강한 인맥을 지닌 이들보다 사회성 점수가 더 낮은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인기 있고 사회 참여도 잘하며 더 행복하다는 믿음은 외로운 이들이 하는 '혼잣말'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89-91)


"플라스는 외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내향성과 신경증 사이에 부정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스는 삶을 함께할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것이 그 판단에 달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임(남자들이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때문에 억눌리고 확신이 없었으며 그러한 문화에 스며들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간절히 글을 쓰고자 하면서 어떻게 엄마와 아내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외로움은 이렇게 사회적 기대와 자기 정체성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은 성인이 되고 노년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과 똑같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창의성과 정신질환이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영국 문학과 문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상실감 또한 내포되어 있다. 상실감은 21세기의 가장 심오한 외로움의 지표로, 외로운 마음과 사랑의 추구가 바로 그것이다."(94-5, 100)


3장 _ 외로움과 결핍 


"'영혼의 동반자soulmate'라는 단어를 문헌에 처음 사용한 이는 낭만주의 시인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였다. 《젊은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1822)에서 콜리지는 결혼이 여성들에게 '자살과 같은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콜리지는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집이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짝'이 아니라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구에서 '진정한 사랑'의 전형이자 척도가 된 영혼의 동반자라는 개념의 함정은 분명하다. 모든 이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있고 자신의 온전함이 그 사람을 찾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다. 또한 이로 인해 인지와 현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며 그 유일한 '한 사람'을 찾지 못한 이들의 경우 실패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이 공동체 의식을 증진하는 것도 아니다. 단 한 명의 '상대'를 찾아야 하는 거라면 로맨틱한 사랑은 특히 진화생물학이나 애인이나 배우자 탐색과 연관된 개인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다."(110-2)


"《폭풍의 언덕》과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모두 여성이 '영혼의 동반자'나 의미 있는 상대를 찾으며 그 상대 없이는 외로워진다는 설정이다(한편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상적인'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두 소설 모두 자연의 속성과 가깝거나 그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이기도 한 위험스러울 정도로 관능적이며 음울하고 위협적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인 캐서린과 벨라는 모두 사회 관습과 개인적인 바람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선택은 성적이고 정서적인 만족 그리고 무감동하나 순응적인 삶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러한 선택은 눈에 보일 것인가 말 것인가, 위험에 처할 것인가 안전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강렬하고 로맨틱한 이상형이 매력 있고 (그리고 확실히 '유일한') 투쟁할 만한 사랑의 형태라는 생각을 내면화하고 불멸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만족이 결여되거나 이상형을 잃으면 감정적으로 황량하고 외로워지는 것이다."(116-7)


4장 _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 


"노인들, 특히 80이 넘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 빈번해지는 '초고령 노인들'에게는 상실로 인한 고통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외로움과 관련된 물건(의자뿐 아니라 슬리퍼나 찬장, 사진, 그릇이 될 수도 있다)은 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된 물건들이 그들이 겪은 상실 혹은 애석하게도 잃어버린 사회적 정체성을 연상시키는 기념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그리움과도 연결된다. 그리움에는 상실한 것에 대한 애도가 포함되며, 한때는 삶의 핵심이 되었던 사람들(친구, 아이들, 배우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 또한 들어간다. 하지만 그리움이 꼭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라 해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관계의 조합을 통해 현재의 사회적 단절감을 조금은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년 동안 이어지는 만성적인 외로움의 문제 중 하나는 이렇게 마음으로 그리는 관계를 회복시켜줄 기능이 없다는 데 있다."(139-40)


5장 _ 우울한 인스타그램 너무


"전보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모든 새로운 형태의 통신에는 그 사용과 남용, '오래된 사교의 방식'이 위협받는 것 아닐까 하는 불확실성과 공포가 늘 뒤따라왔다. 그러므로 좋거나 나쁜 영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셜미디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지지와 영향력 행사, 다른 이들에게 배려받고 그들과 연결된 기분(이런 모든 것이 외로운 상태와 반대로 여겨진다)과 같은 긍정적인 유대감을 경험한 사용자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그러한 유대감을 경험한다. 따라서 페이스북을 기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하는 것이 얼굴을 맞대는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의 도피용일 때보다 더 유익할 것이다. 소셜미디어 사용을 통해 원치 않는 외로움과 같이 감정적인 고초를 겪는 경우는 온라인 세계가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 보조적이거나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관계를 넘어서고 대체할 때다."(195-6)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영국에서 18세기 이후 사교 모임을 가지며 개인을 상업화하는 것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그 결과 외로움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소비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만들고 네트워킹에서의 성공을 개인의 재산이라 여기는 소셜미디어의 몇몇 형태는 소외된 현대 개인주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내가 외로움과 소셜미디어가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소셜미디어 자체를 부정적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디지털 세계에 개인과 사회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커뮤니티 내의 결속에 대한 사회학적인 논의는 '정체성을 통한 결속identity bonds'과 '유대감에 기반한 결속bond-based attachment'을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외로움에 대한 개입에서 시급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떻게 소셜미디어를 성공적이고 협조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느냐, 즉 '정체성'이 아니라 '유대감'을 토대로 활용하느냐가 될 것이다."(202-5)


6장 _ 똑딱거리는 시한폭탄? 


"노화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역사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초반의 외로움에 관한 정신적 공포에 속하는 것으로 문화적인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다. 노인의 신체, 정체성, 성생활, 경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노화에 관한 문제는 최근에서야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인층의 외로움에 관한 사료가 적다는 것도 그리 새삼스럽진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은 노년에 대해 정서적인 부담이나 고립의 측면이 아닌 신체 건강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주로 썼다. 즉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돌보고, 지나친 격정은 자제하며, 노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향한 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젊음에 집착하고 가능하면 오랜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서사를 지녔던 서양의 후기 근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노년을 '준비'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226-7)


"노년의 외로움이 보편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개인, 가족, 사회가 겪는 경험의 특성뿐 아니라 노화와 사회 복지에 대한 지배적인 사고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언했듯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외로운 이보다는 '외롭지 않은' 사람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노년에 외롭지 않은 상태에 주목한다면, 개별적인 차이점을 고려하는 한편 의료 보기 차원에서 적절한 개입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어떤 자료를 비교해보더라도 노화가 일어나는 것은 개인의 선택권이 없어지는 상황에 놓일 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는 외로움과 노년의 병약함까지 생길 수 있다." "노인들을 요양원이나 다과회, 댄스파티에 모아두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이득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노인들의 외로운 감정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노년의 외로움에 대한 접근법을 개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그 다양성을 더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을 것이다."(234-6)


7장 _ 노숙자와 난민 


"노숙자들을 박애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21세기 이후부터였다. 1980년대 영국에서는 노숙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주택가격 인플레이션, 임대주택 매각, 실업률 상승, 정신 건강 및 약물 관련 문제 증가, 16~17세 청소년의 주택수당 요구 금지 등의 이유로 거리에 나앉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1980년대 즈음에는 빠른 도시화의 결과로 노숙자 문제가 정치적으로도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노숙자는 사회와 가족의 지원과 유대가 부족한 상황과 관련 있으며, 이것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사항 중 가장 핵심이다. 노숙에는 그에 수반되는 우울, 불안, 외로움, 박탈감, 가난, 학대의 반복과 함께 단순히 집이 없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록 일반적인 주택에 대한 논의에서도 암묵적으로 노숙에 대해 그저 집이 없는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약물 중독, 정신질환, 외로움이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 등 노숙자 문제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50-3)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과 함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유별난 집단이 되어버리기 쉽다. 또한 세계적인 분쟁과 기후 변화 덕에 점차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집단이 되었다." "난민들은 집과 가족, 친숙한 환경, 집과 연결된 감각적인 경험(풍경, 소리, 향)에서 동떨어져 있다. 물질문화는 개인의 정서 생활과 외로움을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정체성이 담긴 이러한 물질의 상실은 공동체 인식의 결여와 함께(또한 심지어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는 상태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꽤 치명적일 수 있다. 소외된 기분에서 생기는 외로움은 구체적으로 젊은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 특히 다른 이들에게서 고립된 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된다. 웰빙이나 사회관계, 외로움보다는 외상과 실질적인 고려사항에 더 초점을 두는 보건 복지 서비스 차원에서는 난민과 망명신청자의 외로움과 같은 문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다."(258-9)


8장 _ 결핍 채우기 


"자기 정체성과 역사, 세상에서의 위치, 다른 이들과의 관계(과거, 현재, 미래에서의)는 음식, 책, 시계 무브먼트, 옷, 사진, 가구, 건물, 커텐, 일회용품 등과 같은 물질적인 제품들을 통해서 구조화된다. 말이나 몸짓과 더불어 사물은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정서적인 체험을 드러내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사물 즉, 물질적인 대상은 우리가 누구이며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나타낼 수 있으며, 특히 우리의 정체성이 손상되고 표류하게 될 때(이를테면 난민이나 이주민들의 경우처럼) 그 의미가 가진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신경과학자 존 카시오포와 패트릭 윌리엄은 외로움을 개인이나 집단이 생존을 위해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표시인 일종의 배고픔과 비교했다. 신체적인 배고픔은 실제 체험이라는 물질적인 특성뿐 아니라 개인의 몸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생활 습관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268-9)


"외로움은 물질주의로 인한 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질주의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외로움과 물질주의 간에 위험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많은 소비재를 갈망하고 손에 넣을수록 사회적인 유대감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유대감을 덜 경험할수록 소비재를 더 원하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와 연결에 대한 기본 욕구가 있으며, 물질적인 상품들로 귀결되는 욕구 또한 인간적인 관계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기 표현이 아닌 사회 결속을 추구할 때도 소비 행위가 일어난다. 사회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물건의 소유욕은 자신들의 공통된 뿌리와 유산을 공고히 하고 기념하기 위해 특정 물건의 소유에 의존하는 이주민 집단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가족'이나 지인, 전통 또는 개인의 삶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해주는 특정한 물질적인 대상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기도 하는 것이다."(275-7)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과 인지적인 맥락은 모든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모욕으로 인한 노여움에 굴욕감과 슬픔이 함께 물들 수도 있고, 상대 운동선수에 대한 질투가 실망과 분노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감정 상태도 그대로 변함없이 인식과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외로움은 다른 대부분의 감정 상태와 달리 사회적으로 이해될 만한 몸짓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드러내는 몸과 관련된 자세나 행동은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제 기능을 못 하는 코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짓 언어를 읽고 파악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기술이다. 강제적으로 고독한 상태에 있었거나 사회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까 봐(혹은 거부당할까 봐) 긴장하거나 걱정할 때 정서적인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294-5)


9장 _ 쓸쓸한 구름과 빈 배 


"낭만주의적인 개인주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 외로움은 사회로부터의 의식적인 분리와 고독을 통해 성스러운 자연과의 교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본질적으로 비사교적이거나 영원히 고독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런 생각이 널리 퍼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워즈워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자기 경험을 다시 생각해보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시인들이나 작가들과 함께 어울리고 도시의 흥겨움을 즐길 때는 무척 사교적이기도 했다. 사실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글 쓰는 행위는 개인적·영적인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기계화, 도시화, 산업 혁명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하는 '어둡고 사악한 공장들'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잔혹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개인의 물음에 도움이 될 만한 답을 찾는 일인 것이다."(305-8)


"버지니아 울프에게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이긴 하지만 창작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외로움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늘 어떤 공포가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의 번잡한 소리와 친구들, 지인들에 둘러싸인 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진실'을 느끼고 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울프는 많은 작품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글을 썼으며, 창작을 위해 홀로여야 하는 내적인 필요와 함께 '외적으로' 사회적인 면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울프가 시간의 흐름에 집착하는 것(그녀의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가장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제대로 검토된 적 없는 시간과 외로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행동일 수 있다. 시간은 우리가 행복할 때보다 지루하거나 슬플 때 혹은 고통스러울 때 더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인 경험은 외로움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312, 315-6)


"창의력을 추구하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내향성과 고독은 대체로 필수적인 요소다. 고요함과 고독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외로움이 파괴적인 반면 회복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일 경우에 한정된 것이다." "고독, 심지어 외로움의 추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회복 혹은 창작을 위해 사회에서 물러나 있는 행동은 개인적인 집중과 심리적·예술적인 어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필수적이지만, 그렇다고 영구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21세기에 넘쳐나는 '마음챙김' 앱과 점심시간을 이용한 명상과 관련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단기간의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혹은 고독이) 매일 이어지는 들리는 거라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없는 강제적인 고립과 과연 같을 수 있겠는가?"(323-5)


결론 _ 신자유주의 시대와 외로움의 재구성 • 327


"개인주의적인 사고, 세속주의, 과학과 의학 사이의 경쟁, 철학, 경제적 담론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외로움'이라는 용어는 1800년대 세계적인 대변화로 인한 소외의 특성뿐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감정 체험의 출현을 반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아는 자애로운 신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경쟁적인 개인주의가 끈질기게 확산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의 빈 공간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개인은 홀로 고립되었으며, 가족 또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소셜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신에서부터 천사와 왕을 거쳐 농부와 땅에 이르는 모든 개체에 대하여 위계적인 질서가 세워져 있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을 만족스러운 상태라고 여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대에는 '공공의 복지'가 우선시되었으며, 책임이 중요시되었다. 또 개인 또한 타인과 체제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초자연적 힘에 대한 유대감을 얻을 수 있었다."(336-7)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서 확실한 한 가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와 그에 따른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염병으로 규정된 외로움은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전염이라는 말은 (감염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는 매혹적이지만(강력하고 쉽게 은유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정치적·도덕적인 차원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 '오염'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뜻이 연상된다면, 전염이라는 용어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민자들을 아주 몹쓸 질병으로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물이 있다고 해보자. 그 건물에 담긴 감정적인 언어는 소수민족을 바라보는 태도에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킬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유행병' 같은 표현 역시 부정적인 사회적 반응을 유발한다. 유행병이란 말로 인해 사람들이 생물학적인 불가피성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외로움이 문화와 환경의 산물이며 불가피한 인간 조건의 일부가 아니란 사실이 도외시될 수 있다."(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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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로레인 대스턴 지음, 홍성욱.황정하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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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규칙의 숨겨진 역사 


"알고리즘은 산술 연산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규칙과 양적 정확성이 연관되기 시작한 역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은 고대 지중해 세계로부터 유래한 지적 전통에서 규칙의 주요 의미에 해당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심지어 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알고리즘 제국은 19세기 초까지는 규칙의 개념 지도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인구조사 등의 사업에 필요한 대규모 계산 같은 국가적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의 물리학자 하워드 에이킨 등의 선구자들조차도 계산과 관련된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알고리즘을 정의했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러한 알고리즘의 극적인 성공 역사에서 중요한 초기 사례들을 조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 알고리즘이 어떻게 산업혁명 시기의 정치경제와 교차하게 되었는지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노동과 기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20-2)


2 고대의 규칙 : 직선 자, 모델, 그리고 법률 


"지중해의 습지와 중동의 사구沙丘 지역에는 나무처럼 키가 크고 화살처럼 곧게 뻗은 거대한 지팡이 식물인 물대가 자란다. 수천년간 이 지역에서는 물대의 꼿꼿한 줄기로 바구니, 피리, 저울대, 막대 자를 만들었다. 〈규칙〉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 단어인 카논kanon은 이 식물을 가리키는 셈족 언어에서 유래했고(고대 히브리어 카네qaneh와 동음이의어이다), 초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막대를 가리켰다가 이후에는 직선 자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카논과 동일한 고대 라틴어에 해당하는 레굴라regula는 곧은 판자, 지팡이라는 의미와 연관이 있으며, 더 은유적으로는 (〈통치하다regere〉 또는 〈왕rex〉에서와 같이) 유지하고 지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영어 단어 ruler의 뜻에서는 여전히 두 의미의 공존을 발견할 수 있다." "카논kanon으로부터 세 가지의 주요한 의미론적 범주가 가지처럼 파생되었다. 첫째, 꼼꼼하고 주로 수학적인 정확성, 둘째, 복제를 위한 모델 혹은 패턴, 그리고 셋째 법률 혹은 법령이다."(41-4)


"재량은 판단의 한 형태이며, 규칙의 엄격성을 언제 완화해야 할지를 아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여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각, 사리 분별, 통찰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재량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는데, 하나는 인지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적 측면이다. 작지만 중요한 세부사항의 차이를 지니는 사례들을 구별하는 능력은 단순한 분석적 예리함을 넘어서는 능력인 재량의 인지적 측면의 본질이다. 또한 재량은 경험의 지혜를 추가적으로 활용하여 어떠한 구별이 원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실질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파악한다." "재량은 규칙이 전제하는 범주적 체계를 보존하면서도 그러한 범주들 내부에 유의미한 구분선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재량은 또한 인지적 능력을 뛰어넘는다. 재량의 수행적 측면은 재량의 인지적 측면에서의 통찰력을 실현할 자유와 힘을 포함한다. 재량은 마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57-60)


"모방과 재량은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능력이다. 수도원장을 모방하는 수도사나 조각상 「도리포로스」를 모방하는 예술가는 모방하는 모델의 세세한 부분까지 단순히 복제하기보다는, 유추를 통해서 그러한 모델의 교훈을 번역하여 새로운 사례에 적용한다. 모방은 모사가 아니다." "재량과 모방은 모두 유추에 의한 추론을 포함하는 행위이며, 이는 유사점뿐 아니라 중요한 차이점까지 식별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분별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필요한 부분만 약간 수정하는 방식의 추론을 의미한다." "원칙과 모델 모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명시적 규칙과는 다르며 판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둘을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델을 모방하는 데에는 원칙이 따르는 것과 다른 방식의 판단이 동원된다. 원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지만, 모델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모델을 모방하는 경우, 판단은 유추를 통해 그 경로를 도식화하면서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이동한다."(63-5)


"현대의 규칙은 논리적인 추론법이나 과학적인 자연법칙까지를 포함해서 의미하지만, 원래 규칙의 범주는 그리스어로 테크네technê, 라틴어로 아르스ars라고 알려진 분야에 적용되었다. 의학, 수사학, 항해술처럼, 계율에 따르되 실제로 행할 때의 상황에 적절히 맞추는 것이 중요한 분야들 말이다. 그리스어로 에피스테메epistêmê, 라틴어로 사이언티아scientia라고 불린 것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실을 다루었다면, 기술은 특수하고 우연적인 것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스테메가 때때로 불변하는 형상만이 아니라 가변적인 질료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것의 보편성을 〈항상 또는 대부분의 경우 발생하는 것〉으로 완화한다. 한편 그는 에피스테메의 확실성의 의미를 희석시킨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테크네의 확실성의 의미를 강화시킨다. 우연과 사고의 발생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네는 원인으로부터의 추론과 어느 정도의 일반성의 달성을 포함한다."(69-71)


3 기술의 규칙 : 하나 된 머리와 손 


"1525년 뉘른베르크에서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화가, 금세공인, 조각가, 석공, 목수, 그리고 〈측량법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하학 서적을 저술했다. 저명한 고전 학자들에 대한 헌사와 잃어버린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기술〉에 대한 언급은 수공예의 원칙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기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뒤러의 야망을 보여준다." "공예 지식을 규칙으로 형식화하는 것은 그 지식에 목소리와 존엄성을 부여하자는 것이지, 이를 공방에서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의 초심자를 장인의 비법의 세계로 인도한 대부분의 기예서(쿤스트뷔휠라인)와 비법서들은 독자가 규칙과 비결을 읽고 그 과정을 실제로 반복적으로 시도할 것을 상정했다." "그러나 실행을 규칙으로 환원하는 것이 반드시 규칙을 이론으로 한 번 더 환원하는 작업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수공예와 과학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니게 부유하는 기술 자체의 중간적 지위처럼, 규칙도 손과 머리 사이를 맴돌았다."(75-9)


"실천을 기술로 환원하려는 근대 초기 문학에서는 항상 우연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일에 관한 주제가 등장한다. 실용 의학이나 점성술 같은 〈저급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술과 공예의 수행자들은 형상의 고분고분한 규칙성만이 아니라, 물질적 질료의 다루기 힘든 특이성도 마주했다. 의학, 목공예, 축성에서 특수성이 우세했던 이유는 동일하다. 질료가 형상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군사공학자 보방은 분명 세부사항의 귀재였지만, 그는 선험적인 체계주의자도 아니었고 지나칠 정도로 정확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보방은 전투의 열기 속에서는 요새를 정교하게 측량하는 일이 위험한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부사항을 광적으로 명시한 표조차도 문자 그대로 따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주로 보조자료나 확인해야 할 사항을 적어둔 목록의 역할을 했다. 규칙과 표는 기억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특정한 상황에 따라 독창성과 판단력을 발휘할 정신적 자유를 주었다."(95-7)


"실행의 성공과 실패는 세부사항에 의해서 너무나도 크게 좌우되고 그러한 세부사항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대 초기 기술에서의 실행은 거친 통계적 방법론,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보편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얇은 규칙을 적용하기에 근대 초기 실무자들의 세계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너무도 세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설명이나 제한조건이나 예시를 제공하는 세부사항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두꺼운 규칙도 모든 세부사항을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두꺼운 규칙은 실무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세부사항들과 더불어, 당면한 사례에 맞게 규칙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두꺼운 규칙은 대부분 민첩성과 판단력이 얼마나 필요할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자극을 주었다. 모든 사례들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리고 몇 가지 해결책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머지는 경험에 맡길 일이었다."(98-9)


"기계적 기술은 머리와 손, 이해와 손재주 사이의 중간적이고 모호한 지점에 존재했다.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암묵적 지식과 명시적 지식 사이에 자리했던 기술의 규칙은 항상 이 둘 사이를 오가는 지렛대의 역할을 했다. 고대로부터 시작된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철학적 대립은, 일반적인(그러나 보편적이지는 않은) 규칙과 특수한(그러나 단일하지는 않은) 사례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해 보인다. 그러나 시소의 끝이 위쪽이나 아래쪽에 머물러 있지 않듯이, 기술의 규칙의 목적은 한 극이나 다른 극에 이끌려 가서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의 규칙은 중간 정도의 일반화를 통해서 패턴과 유추에 대한 실행자의 안목을 가다듬도록 하고 규칙의 주요 용어를 기억에 남게 하는 특징적인 사례들을 가르쳤다. 일반화는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예시와 예외도 완전한 변칙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꺼운 규칙을 완전히 흡수한 독자는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의 한계도 배우게 되었다."(112)


4 기계적 계산 뒤의 알고리즘 


"현대적 의미에서 이상적인 규칙인 일반 규칙은 예시와 예외에 구애받지 않고, 구체적인 것을 규칙 안으로 들이지 않으며, 구체적인 맥락에 속하지 않고 그 위에 있다. 두꺼운 규칙은 계율과 수행 사이를 오가고, 계율과 수행은 서로를 다듬고 정의한다. 반대로 얇은 규칙은 자족적이고 명료한 것을 지향한다. 원칙적으로 보면 얇은 규칙은 분명하게 해석될 수 있다. 얇은 규칙은 설명을 멀리하며 해석학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또한 얇은 규칙은 여러 사례들을 구분하거나 특정한 상황에  따라 재량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다. 얇은 규칙의 일반성은 그 규칙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가 명확하고, 규칙이 적용된다고 분류된 사례들이 모두 동질적이며, 사례 간의 동질성이 영원이 유지될 것을 전제로 한다. 컴퓨터 알고리즘이나 산술 계산이 여러 쪽에 걸쳐 작성되기도 하듯이, 얇은 규칙이 간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호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이면서도 명확한 언어인 대수학은 얇은 규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130)


"알고리즘에서 기술과 예시 사이의 경계는 종종 모호해진다. 수학이 기본적인 산술 연산부터 시작하여 역수 찾기, 분수를 공통분모로 통분하기, 삼각형의 면적 계산하기 등 좀더 복잡한 기술로 확장되듯이, 거의 모든 알고리즘은 다른 알고리즘으로부터 구축된다. 고대 그리스 수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전근대적 수학 문헌들이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이 정의, 공리, 가정으로 구성된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적어도 암묵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기본 연산과 등식의 형태로 기초가 먼저 마련되고, 그다음의 단계들이 겹겹이 쌓이는 식이다. 어떤 교과서가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내는 확실한 방법은 설명되지 '않은' 내용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작곡가가 기존 음악에서 주제 악상이나 일부 선율을 재사용하는 것처럼, 알고리즘의 탑의 낮은 층에서 제시되는 예제들은 높은 층에서 제시되는 조금 더 복잡한 알고리즘의 〈계산 모듈〉이나 〈서브루틴〉으로 재사용될 수 있다."(138-9)


"중세의 일부 아시아 지역과 16세기 유럽의 천문대에서 수행된(19세기부터는 보험국과 통계청에서도 수행된) 대규모 계산의 유일한 공통점은 천문 관측값을 정리하고, 기대 수명을 산출하고, 범죄에서 무역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통계를 기록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대규모의 계산이 말 그대로 노동이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서 엄격한 관리감독을 받았던 18세기 중반의 제조 체계가, 증기로 작동하는 베틀이 도입되기 훨씬 전의 가족 단위의 방직 공방을 대체했던 것처럼, 막대한 계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의 발전도 알고리즘이 기계에 의해서 안정적으로 계산되는 반세기 전에 비슷한 길을 걸었다." "프랑스 기술자 가스파르 리슈 드 프로니(1755-1839)는 분업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설명을 읽고 〈핀을 제조하듯 나의 로그 계산을 제조하겠다〉고 결심했고,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1791-1871)는 로그 계산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노동을 기계화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147, 149, 153)


"학생이든 실직한 장인이든 여성이든 간에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있던 저임금 컴퓨터는 최소한 한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근대 이전에 알고리즘을 배우던 학생들과 달랐다. 저임금 컴퓨터는 더는 과거의 응용 사례와 새로운 응용 사례를 연결하는 유비 추론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절차를 세분화하고 표준화한 덕분에 그들은 문제와 해답을 미리 포장된 형태로 받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 이전의 알고리즘 문헌들처럼 세부적인 것에서 세부적인 것을 귀납해내지 않아도 되었고, 초기 수학자들이 수행했던 알고리즘을 분류별로 구분해 일반화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사전에 이미 다 분류되어 있었으며 풀이 절차에 관해서도 세부적인 사항이 지정되어 있었다. 어떤 컴퓨터도 이 문제가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 혹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어떤 알고리즘이 필요한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알고리즘에 대한 이들의 경험은 근대 이전에 계산을 하던 사람들의 경험과 확실히 달랐다. 이들의 규칙은 매우 얇았다."(163)


# 가스파르 드 프로니의 피라미드형 로그 작업장은 고도로 숙련된 소수의 수학자, 분석적 지식을 갖춘 7-8명의 계산원,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70-80명의 노동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5 계산기계 시대의 알고리즘 지능 


"제4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를 모두 지녀왔다. 원래 의미에 해당했던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은 0, 1, 2, 3, 4 같은 인도 숫자로 수행되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산술 계산을 의미했다. 현대적 의미의 더욱 가까운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은 계산 혹은 문제 해결에 사용되는 모든 단계별 절차를 포괄한다. 알고리즘 지능의 역사에서는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과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제 자체는 숫자 계산과 같은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에 해당했다. 그러나 복잡한 작업을 정밀하게 정의된 입출력을 지닌 작은 단계들의 유한하고 명확한 순서로 구분하는 것처럼 계산을 특정한 절차와 작업의 흐름으로 변환하는 방식도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에 해당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루어진 계산기계의 도입과 확산은 계산을 한다는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과 계산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는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을 모두 변화시켰다."(170-1)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계산기계들은 각각 설계, 재료, 성능, 신뢰성에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인간 지능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겠다고 약속했다. 기계가 지능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일부 지능은 무의식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기계적이라는 추론이 기계의 계산 능력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무의식은 주의 집중력과 기억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특이한 종류의 무의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계산 영재와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기계 조작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학 연구의 흐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계산 영재와 계산기계 조작자는 한때 서로 스펙트럼의 양 끝에 위치한다고 가정되고는 했다. 즉, 각각 숫자 천재와 숫자 부진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자 심리학자와 수학자들은 이러한 사례가 비정상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위대한 수학자는 대개 계산 천재가 아니었고, 계산 천재가 위대한 수학자인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181-2)


"인간 계산원과 기계적 계산기의 상호작용은 지능을 더욱 미묘한 방식으로 변형시켰다. 계산이 지적 성취로 이해되었든 아니면 고된 노동으로 이해되었든, 계산이 왕실 천문학자에 의해 수행되었든 아니면 학생 컴퓨터에 의해서 수행되었든, 계산은 지루할 정도로 정신 소모적인 일이었다." "주의력과 정확한 계산 사이의 연결고리는 너무나도 강력해서 프로니는 지능이 가장 낮고 가장 〈자동화된〉 계산원이 가장 적은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나 더 신뢰할 만한 계산기계가 보급되자 지성과 정확성 사이의 연관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자동화는 오류 없는 계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이를 보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수작업으로 결과를 확인해야 할 만큼 오류를 범하던 계산기계의 오랜 역사를 뒤집은 기계 설계, 재료, 구조의 발전은 1920년대에 이르면 〈자동화된 계산〉과 〈정확한 계산〉을 동치로 만들었다."(193-4)


"계산기계를 통해서 인간 지능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는데, 그것이 인공 지능의 탄생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을까? 계산기계가 기계의 내부 구조 구성부터 기계와의 세심한 상호작용을 위한 작업의 조직에 이르는 대규모의 계산 수행의 모든 단계를 최적화하는 방법을 재고해보도록 함으로써 알고리즘의 영역을 확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준화된 단계적 절차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계산을 알고리즘적으로 만드는 것은 지능을 알고리즘으로 만드는 것과 거리가 멀다. 지능을 알고리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능을 계산의 한 형태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바람직해 보여야 한다." "인공 지능 혹은 기계 지능을 모순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계산〉과 〈지능〉 모두를 완전히 다시 개념화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학자들이 수학적 논리를 발전시켰던 방향이며, 이는 사무실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대규모 계산의 수행보다는 수학의 논리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195-6)


6 규칙과 규정 


"법law, 규칙rule, 규정regulation 간의 관계는 유동적이지만 중요한 노동의 분업에 의해서 관리되어왔다. 계층 구조의 정점에는 〈법〉이 있었는데, 법은 형식의 차원에서는 일반적이었고 관할 범위는 넓었으며 막강한 권위를 지녔다. 17-18세기에 가장 보편적이고 권위 있던 법은 자연철학자 아이작 뉴턴이 공식화한 자연법칙과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 사무엘 푸펜도르프(1632-1694) 같은 법학자들이 국제적으로 유효한 행위 규칙을 찾아서 체계화시킨 자연법이었다." "계층 구조의 그다음 수준에는 자연과 인간의 왕국 모두에 적용되는 〈규칙〉이 위치했다. 여름은 일반적으로 겨울보다 덥다는 날씨의 규칙이나, 유언장이 없을 때 상속인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분할해야 하는지에 관한 법적 규칙 같은 것들이었다. 규칙은 법률보다 더 구체적이고 관할 범위는 더 제한적이었다. 계층 구조의 가장 아래 수준에는 〈규정〉이 위치했는데, 이들의 관할 범위는 더 제한적이고 개수는 훨씬 더 많으며 극도로 구체적이었다."(201-2)


"〈법치주의〉라는 문구처럼 법이 규칙의 가장 위엄 있고 고상한 측면을 보여준다면, 규정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장에서 일을 직접 처리하는 규칙에 가깝다. 법은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별에 초점을 맞추는 규칙이고, 규정은 현미경으로 근시적인 세부사항에 초점을 맞추는 규칙이다. 이상적으로 법은 비교적 수가 적고 거의 변경되지 않지만, 규정은 수가 많고 지속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법은 보편성을 지향하며, 규정은 세부사항에 주목한다. 한편, 규칙의 의미는 둘 모두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법이 권위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규정은 일상적인 경험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모든 정부 행위를 법치주의와 연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모기 떼처럼 많고 귀찮은 규정과 연관해서 논한다. 이러한 측면은 일상생활에서 규정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법과 규정 사이의 의미 스펙트럼에서 규칙의 의미가 규정에 가까운 쪽으로 옮겨졌음을 보여준다."(202-3)


"규정은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규칙이다. 우주를 질서대로 움직이는 장엄한 자연법칙부터 특정한 분야에만 적용되는 세세한 규칙에 이르는 스펙트럼에서, 규정은 후자에 가까이 놓여 있다." "따라서 규정은 작은 범위 안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는 것의 한 사례이다. 규정은 시공간의 규모뿐 아니라 복잡성과 밀도에 따라서도 급증한다. 넓은 영역에 촘촘하게 짜인 무역망은 엄청난 부와 상품을 창출하여 상업도시에서 사치 금지법을 만들어냈고, 인구 급증과 취약한 기반시설에 대한 요구사항들은 계몽주의 시대 대도시에서 교통 및 위생 규정을 만들었으며, 문해율 상승과 인쇄술의 보급은 철자법을 규칙화하려는 노력을 촉진했다. 볼로냐의 결혼식에서든 파리의 길거리에서든 인쇄된 책의 종이에서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속화된 속도로 확장되고 강화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규칙은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행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등장했다."(273-4)


"규정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얇은 규칙이 되기에는 너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규정은 규칙의 공포에 의한 엄격성과 영원히 지속될 새롭고 개선된 질서를 실현하려는 야망을 지닌다는 점에서, 얇은 규칙을 지향한다고 설명될 수 있다." "규정의 세부성은 규정의 수를 증가시킨다. 세부화할 세부사항은 항상 많고, 막아야 할 허점은 항상 많으며, 저지해야 할 예외와 회피는 항상 많다. 원칙적으로 규정은 만약의 경우나 부가적인 경우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규칙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구체적이라고 해도 예외의 발생을 방지하거나 재량권을 발휘할 필요가 없을 수는 없다. 재량권이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집행하는 사람을 위한 일방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더 많고 더 세부적인 규정은 종종 자멸적인 결과를 낳았다. 너무 많은 규정은 아무 규정도 부과되지 않은 것만큼이나 시행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276-8)


7 자연법과 자연법칙 


"모든 법은 위반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애초 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규칙성을 설명하는 데에 왜 〈법칙〉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까?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대부분의 무생물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어길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은 은유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러한 은유는 약간 어색한 것이 맞다. 자연법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한 법을 제정하는 〈자연〉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모든 인간 종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인간 본성이라면, 왜 자연법은 항상 매우 가변적인 실정법에 의해서 보충되며 때로는 모순될까? 특히 인간의 행동과 문화의 영역에서 법이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준수될 때, 자연이 가지는 입법 권한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진다. 자연법칙의 물리적 필연성과 자연법의 도덕적 권위 사이의 오락가락하는 움직임은 이 구성 요소들인 〈법칙〉과 〈자연〉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긴장 상태를 보여준다."(280-1)


"법과 자연의 모순이 가장 두드러졌던 17세기 바로 그 시대에, 그때까지 뚜렷이 구분되었던 자연법과 자연법칙의 전통이 가장 크게 공명했다. 이때가 바로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서로 맞물리며 등장한 순간으로, 이 두 가지 개념은 법조인으로 훈련을 받고 새로운 토대 위에 자연철학과 법률을 확립하고자 했던 프랜시스 베이컨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같은 인물들의 저서에서 함께 등장했다. 이들의 저서에 더해 자연법 이론가인 후고 그로티우스, 토머스 홉스, 사무엘 푸펜도르프,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와 자연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로버트 보일, 아이작 뉴턴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보편적 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와 가장 멀리 있는 별에까지 적용되는 규칙, 인간의 정신과 사물의 질서에 영구히 새겨진 규칙,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변화하거나 예외에 굴복하지 않는 규칙, 모든 규칙 중 가장 위대한 규칙이었다."(281-2)


"불변하는 보편적 적법성에 대한 견해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날씨와 같이 변화무쌍한 현상의 변덕스러움을 연구한 박물학자들은 기껏해야 지역적 〈규칙〉들을 발견했을 뿐, 결코 안정적인 법칙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보편적인 예측이 특정 상황에서의 정의로움과 너무 자주 어긋났던 인간 세계에서는 항의가 넘쳐났다." "몽테스키외도 1748년에 발표한 『법의 정신』에서 보편법 개념에 강력히 저항하며, 법의 문자와 법의 정신 사이에서 대립하는 성 바울로의 변화를 언급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기후, 토양, 생활 방식, 종교, 부, 도덕, 예의범절에 어울리는 법이 필요했다." "몽테스키외는 자연법과 자연법칙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했다. 자연법칙은 물리적 필연성에 의해서 준수되는 반면, 자연법은 인간 이성의 동의에 의해서만 준수된다는 점이다." "18세기에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자연법과 자연법칙 사이의 유비는 더욱 약화되었다."(308-9)


"그러나 두 영역을 분리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조차도 이런 유비를 고수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이 준수할 법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들의 왕국인 〈목적의 왕국〉과, 철두철미한 자연법칙에 따라 자연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인과의 왕국〉을 형이상학적, 도덕적으로 구분했다. 인간은 두 왕국 모두에 살면서 모든 것을 양쪽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첫째로 자연법칙(타율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감각의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둘째로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선험적이고 이성(자율성)에 근거하는 지적인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법과 자연법칙을 거의 분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가장 위대한 규칙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밝혀준 보편적 적법성의 은유는 유지했다. 칸트의 정언명령, 즉 실천 이성의 궁극적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들에게 권고한다. 〈당신의 행동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310)


8 규칙의 변용과 파괴 


"원래 결의론은 주로 목회자의 목적에서 『성서』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교회법, 학자들의 의견을 특정 사례에 적용하여 해석하는 것을 가리켰는데, 13세기부터 가톨릭 교회 전체에서 고해 신부들이 이를 수행해왔다. 이들은 모두 일반적인 규칙이나 원리로부터 문제가 되는 특정 사건으로 추론해 내려가는 대신에, 사건 자체에서부터 추론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주의는 특정한 사례에서 보편적 규칙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찰, 실험, 통계 조사와 같은 경험주의와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 "사례는 서로 다른 규칙과 원칙을 경쟁하게 하고, 〈규범과 규범의 대결〉 상태를 만든다. 즉, 오히려 규칙이 사례에 종속되는 것이다." "수많은 세부사항과 원칙 사이의 경쟁에서, 결의론자들은 확정적인 판단 대신에 그럴듯한 판단만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결국에는 어떤 규칙이 다른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선택되었지만, 이는 다양한 규칙들 간의 경쟁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318-21)


"형평성은 법과 정의가 어긋날 때 이 둘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며,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서 법을 변용하는 관행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입법자가 예측할 수 없고 법의 엄격한 적용이 부정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사레에 법의 엄격성을 완화하기 위해서 친절함, 관용, 적절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를 사용했다. 로마의 치안판사들은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임시로 법을 변용하고 보완하는 관행을 제도화했다. 중세의 로마법 주석가는 형평성 개념을 공정성의 원칙에 관한 것에서 관련 법규 뿐 아니라 『로마법 대전』 전체를 고려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결의론이 규칙과 원칙을 서로 대립시켰다면, 형평성이 논의되는 경우에는 어떤 법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형평성의 이름이 시험하는 것은 법의 엄격성을 특정한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더 큰 정의에 부합하는지의 문제였다. 형평성은 법을 변용하기는 했지만 부숴버리지는 않았다."(326-8)


"근대 초기 공화주의자들은 통치자의 권력과 그 남용의 위험을 강조한 반면, 자연법 이론가들은 통치자의 지혜와 명령을 강조했다." "17세기 전반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의 일방적인 세금 부과와 찰스 1세(재위 1625-1649)의 죄 없는 투옥 명령 등 대권행위를 둘러싼 갈등은 왕의 특권이 〈법의 지붕 아래 놓기에는 너무 높다〉고 주장한 사람들과 국민이 〈무한한 자의적인 권력 아래에 노출될 것이며 그로 인해 복종이 끝나지 않게 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촉발했다." "어떤 입법자도 미래의 모든 상황을 예견할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모든 법은 예외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행적 특권은 형평성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형평성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개입하여 법원이 불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구했듯이, 특권은 일반적인 비상 상황에 개입하여 정치체를 재난으로부터 구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규칙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은 규칙을 변용하거나 파괴하는 조치를 필요로 했다."(340-2)


"모델이나 지침으로 여겨지는 규칙들은 형식화된 규칙 자체에 가변성을 내포한다. 예시, 경험, 예외는 이러한 규칙의 계율을 더욱 두껍게 만들고 실제로 집행될 때에는 더욱 유연해지게 만든다. 변동성이 크고 예측 가능성이 낮은 세상에서 예외는 모든 면에서 규칙과도 같았다. 예외는 규칙이 예외를 포함해야 했을 정도로 너무나도 자주 발생했다. 상황에 대응하여 즉흥적으로 결정을 하거나, 규칙을 조정하거나, 상황에 적응시키는 일은 당연한 작업으로 여겨졌다. 규칙을 만드는 기술이란 예측할 수 있는 상황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모두 수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규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어떤 규칙도 재량의 필요성을 완전히 없앨 정도로 얇거나 엄격하지는 않다. 가장 얇은 규칙인 컴퓨터 알고리즘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엣 알고리즘의 오류와 과잉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많은 익명의 인간 감독자를 필요로 한다. 모든 얇은 규칙 뒤에는 그것을 따라다니면서 청소 작업을 해주는 두꺼운 규칙들이 존재한다."(346-8)


에필로그 | 따르기보다는 깨는 편이 명예가 되는 규칙들


"규칙의 적은 규칙이 부과하는 제한 때문에 종종 고난에 처한다. 분별은 모든 면에서 부정되고, 새롭고 더 나은 업무 방식은 관료주의로 인해 묵살되며, 실제 기계가 시행하는 기계적 규칙은 인간과 상황의 자연스러운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엄격하든 얼마나 완고하든 상관없이, 모든 규칙은 은밀한 규칙 추론을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어떤 규칙을 따르거나 위배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명시적 규칙이 추방한 능력인 판단, 재량, 유추의 능력─모호하지만 필수적인─을 갈고닦게 된다. 이 상황에 어떤 규칙이 잘 들어맞을까? 규칙을 상황에 더 잘 맞게 조정해야 할까? 규칙의 정신이 우선해야 할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의 규칙을 우선해야 할까? 평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확실하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규칙서 없이 규칙 위반의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규칙에 대해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규칙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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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사람이 사라진다 - 새로 쓰는 대한민국 인구와 노동의 미래
이철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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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안개 속에 싸인, 가리어진 길


"최근 발표된 2023년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의 중위 전망이 실현되는 경우, 한국의 인구는 2072년까지 약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한 국가의 인구는 어느 정도 규모면 충분할까? 경제학이나 경제지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존자원, 자본량, 기술수준 등이 주어져 있을 때 1인당 소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구 규모로 '최적 인구'를 정의한다.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 크기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목표로 하는 바를 1인당 소득이 아닌 국민의 종합적인 후생으로 설정한다면, 최적 인구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향후 60년 이내에 인구가 3,500만 명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장래 인구 전망에서 더 우려되는 부분은 3,500만이라는 '규모'보다 60년 이내라는 기간이 나타내는 '속도'이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면, 특정한 인구 규모에 맞추어진 한 국가의 여러 시스템에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하고, 이로 말미암아 막대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26-30)


"한 국가의 각종 제도는 대체로 매년 태어나는 인구 규모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공적연금제도가 태동할 때 연금의 기여율과 소득대체율은 장래의 특정한 연령별 인구수를 가정하여 결정되었다.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 병원과 의사 수, 보육시설과 학교의 교사 수, 군대의 징집 인원과 총 병력 규모, 특정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의 공급량 등도 나이에 따른 인구 규모와 무관할 수 없다." "노동시장도 인구구조 변화가 초래하는 불균형 문제를 비켜 가지 못할 것이다.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평균적인 생산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실질적인 노동 투입량의 감소 규모는 더 클 수 있다. 인구변화는 직종 혹은 산업 간 노동 수급 불균형을 불러올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각 부문에 취업해 있는 사람들의 나이, 학력, 숙련도 등이 다르고, 이질적인 성격의 인력은 서로 쉽게 대체되기 어렵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34-5)


2장 인구변화는 노동인구절벽으로 이어질까?


"현대의 노동시장에서 생산연령인구(15~64세 인구) 규모는 일하는 사람의 수를 어림잡을 수 있는 유용한 지표이다. 하지만 생산연령인구는 실제 노동인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생산연령인구 가운데 (학생이나 조기 은퇴자를 제외한) 일부만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인구변화가 노동인구 규모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전망하기 위해 생산연령인구보다 경제활동인구의 변화를 살펴보는 편이 타당하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중위 전망이 실현되는 경우, 전체 경제활동인구 규모는 2022년 약 2,938만 명에서 2072년 1,635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현재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유지되는 경우, 노동인구가 향후 50년 동안 현재의 약 56%로 감소할 것임을 보여준다. 매우 빠른 감소이지만 적어도 15~64세 생산연령인구의 감소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느린 감소 추세이다. 그리고 15년 후인 2030년대 후반까지는 그다지 큰 폭의 감소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48, 52)


"한국은 서구 선진국과 비교할 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매우 압축적으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경험했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현재 한국에는 부모와 자식 세대는 물론이고 불과 10년 터울의 선배와 후배 사이에도 평균적인 건강과 인적자본 수준이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고령층에 진입하는 세대는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혜택에 힘입어 과거와 현재의 고령자에 비해 더 건강하고 생산적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에서 인구 고령화가 가져올 미래의 변화를 전망할 때, 나이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나이 효과(age effect)뿐만 아니라 태어난 시기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통상적인 가정을 대입하면 인구 고령화의 부정적인 영향이 과대평가될 수 있다." "여기에 고령층에 진입하는 출생 코호트의 교육 수준 개선은 노동인구의 고령화로 말미암은 생산성 감소를 어느 정도 완화할 것이다."(57, 60)


3장 인구변화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질까?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높아졌지만 비교 대상으로 설정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북서부 유럽 국가들에 비해 20~30%p나 낮고, 이웃 국가인 일본에 비해서도 줄곧 10%p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이 장차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다른 국가들의 경험을 따라가리란 보장은 없지만, 지난 40년간 추세와 여성 고용을 증진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높아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장년여성 경제활동참가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현재 비교 대상이 된 국가 가운데 한국보다 참가율이 낮은 국가는 프랑스뿐이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조기퇴직 경향이 강했던 영국과 독일 같은 국가들이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보다 낮은 참가율을 보였으나, 현재는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일본 장년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한국보다 월등하게 높다."(68-70)


"현재의 한국은 노동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노동시간당 부가가치로 정의한 노동생산성 지표에서 2022년 한국은 OECD 38개국 중 33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빠르게 개선될 수 있을까?" "먼저 여성의 생산성 변화 가능성을 살펴보자. 임금을 생산성 지표로 볼 때, 한국 여성 취업자의 생산성은 남성에 비해 낮으며, 이러한 여성의 불리함은 다른 국가보다 훨씬 더 크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이에 관한 연구들은 노동시장에서 한국 여성들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불리함, 특히 결혼이나 출산으로 발생하는 불리함을 심각한 성별 임금격차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렇게 볼 때,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고 일터에서 여성이 직면하는 불리함을 없앨 수 있는 정책(보육 지원, 노동조건 개선, 각종 차별 금지 등)은 여성 고용을 확대하는 데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75-9)


"한국의 빈곤율이 아동과 청년층에서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지만 50대를 넘어서며 빠르게 높아져 고령층에 이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임금으로 측정한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감소할까?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많은 사람이 50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오랜 기간 일해온 주된 일자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소수의 퇴직자는 이전 직장과 비슷한 일자리를 얻어서 높은 급여를 받으며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이전보다 질이 낮은 일자리 혹은 해오던 일과 관련이 적은 직종에 재취업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나이 들어도 건강과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 건강관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전직 및 재취업 지원 시스템을 강화하여 개인의 역량과 선호에 맞는 일자리 이동을 쉽게 만든다면, 고령자의 고용이 확대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다."(79-82)


4장 인구변화로 노동시장에 어떤 불균형이 발생할까?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나이 든 인력은 늘어나는 반면 젊은 취업자는 줄어든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인적자본의 특성과 노동시장에서 주로 맡는 일의 성격이 다르다. 각 일자리가 필요로 하는 인력의 유형도 다르다. 주로 젊은 인력에 의존하는 일자리도 있고 나이 든 사람에게 적합한 일자리도 있다. 따라서 노동인구의 나이 구성이 빠르게 바뀌면 인력 수급에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보건업, 음식점 및 주점업, 기타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스포츠 및 오락 관련 서비스업 같은 업종은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 노동인력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농림업, 광업, 부동산업, 운송업 같은 업종에는 젊은 노동인력이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인구구조 변화로 젊은 노동인력 비중이 줄어들면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산업의 노동 공급이 더 폭으로 감소할 것이다. 반면에 나이 든 취업자가 계속 일할 수 있는 부문에서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노동 공급 감소 효과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100-2)


"2031년까지 인구변화로 노동 공급이 가장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은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운송업으로, 그 감소 규모는 3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직별 공사업과 자동차를 제외한 소매업에서는 20만 명 이상, 음식점 및 주점업과 농림업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노동 공급 감소가 예상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부동산업, 공공행정·국방·사회보장·국제기관·외국기관, 사회복지서비스업, 교육서비스업 등에서는 노동 공급이 오히려 10만 명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직업별로 보면, 운전 및 운송 관련직에서는 약 26만 명의 노동인력 감소가 예상된다. 조리 및 음식 서비스직, 운송 관련 단순 노무직, 제조 관련 단순 노무직, 건설 및 채굴 관련 기능직 등에서도 10만 명 이상의 노동력 감소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교육 전문가 및 관련직, 법률·행정·경영·금융 전문가 및 관련직, 경영 및 회계 관련 사무직 등의 직종에서는 인구변화로 오히려 노동 공급이 10만 명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105-8)


# 이상의 결과는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을 때 인구변화가 각 부문의 노동공급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 취업자 변화를 예측해주지는 않는다. 가령, 사회복지서비스업은 인구변화로 노동 공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보다 훨씬 가파르게 노동 수요가 증가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5장 누가 우리를 치료하고 돌볼 것인가?


"인구변화로 인한 전반적인 의료서비스 수요 증가는 장차 이 분야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의료서비스 수급 불균형 문제의 핵심은 의사 수의 부족 문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다른 의료인력이나 시설·장비에 비해 한국의 의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한의사를 포함한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6명으로 OECD 평균인 3.7명보다 훨씬 적고, 2.5명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반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 MRI, CT 수는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둘째, 의료서비스를 구성하는 다른 인적·물적 투입 요소에 비해 의사의 공급이 매우 경직적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신규 의사 수는 의대 정원에 의해 결정되는데, 2000년 3,507명이었던 의대 정원은 2006년까지 3,058명으로 감축된 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의료인력 시장에 의사에 대한 수요가 늘더라도 이것이 공급 증가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130-2)


"전체 의사 인력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의사는 비교적 동질적인 직업군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다양한 전문 과목이 있으며, 다른 과목 의사는 이질적인 지식과 숙련을 보유한다. 특히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의 치료는 해당 분야의 전문의만 담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사 인력에 대한 총량적인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더라도 전문 과목 간 수급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인구변화는 전체 의료서비스뿐 아니라 전문 과목별 서비스 수급에도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인구변화로 인한 의료서비스 수요 변화가 전문 과목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출생아 수 감소는 산부인과를 찾는 임산부 수를 줄일 것이다. 또한 아동·청소년 수가 점점 줄면서 이들이 많이 방문하는 소아청소년과나 이비인후과 환자도 감소할 것이다. 반면 고령자가 많이 걸리는 각종 만성질환을 주로 다루는 신경과, 신경외과, 외과, 흉부외과 등을 찾는 환자는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136-8)


"인구 및 가구 구조 변화로 인해 가까운 장래에 고령자에 대한 돌봄서비스 수요는 매우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돌봄이 필요한 노인 가운데 공식 돌봄을 받는 노인의 비중은 매우 낮고 어떤 돌봄도 받지 못하는 고령자 비율이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여건을 고려할 때, 고령자에 대한 공식돌봄서비스 수요는 전체 수요에 비해 더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저출산 추이가 이어지면 아동 수는 장기적으로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고 이에 따라 맞벌이 가구 비중이 높아지면서 보육시설 돌봄과 개인 양육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가할 개연성이 크다." "심각한 전문 과목별 의사 인력 수급 불균형이 예상되는 의료 분야에 비해서는 덜하겠지만, 돌봄서비스에서도 돌봄 유형 간 불균형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다양한 유형의 돌봄서비스를 담당할 인력이 서로 완전하게 대체적이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유형 간 수급 불균형 문제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152-3)


6장 일터에서 젊은이가 사라진다


"청년 경제활동인구 감소는 일반적인 노동인력 감소와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이는 최근 학교교육을 받아서 현재의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는 최신의 지식과 숙련을 보유한 노동인력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학습 능력, 적응력, 지리적·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집단의 비중이 축소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년인력 감소는 같은 규모의 평균적인 노동인구 감소보다 노동시장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노동시장의 기본 기능은 특정한 인적자본을 가진 노동력을 동원하여 해당 인력이 필요한 부문 혹은 지역에 탄력적으로 재배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동원과 재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각 개인은 자신이 가장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개별 산업의 경쟁력과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노동의 이동성은 새로운 산업과 지역의 성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169-70)


"청년인력 감소가 노동시장에 일으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교육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교육 시스템을 개선해 노동시장 수요에 잘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현재 약 60만 명의 청년이 맡고 있는 역할을 그 절반 혹은 3분의 1 규모의 청년이 해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둘째,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훈련 프로그램 개선을 통해 다른 부문 및 유형의 인력 사이 대체 가능성을 높이고, 청년인력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다른 인구집단의 고용을 확대하는 방안이다." "인구변화가 노동시장에 불러올 충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줄어드는 청년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낭비'되지 않도록 고등교육을 제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선호와 여건에 따른 선택과 진로 변경의 기회를 거듭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역량을 전 생애에 걸쳐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너그러운 교육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178-9, 182)


"청년인력 감소가 가져올 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문 간, 직장 간 이동이 효율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줄어드는 청년인력이 이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일자리로 재배치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여 다른 유형의 인력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출생아 수가 40만 명대로 떨어진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젊은 신규 취업자가 빠르게 감소하면 기업은 더 이상 신규 채용에 의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청년인력 감소로 말미암아, 이미 중소기업이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신규 인력 확보의 어려움은 점차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 변화에 대응하여, 기업은 기존 직원의 재교육·훈련이나 타 분야 출신 인력의 채용과 교육 등을 통해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노력을 늘려야 할 것이다."(182-3)


7장 노인을 위한 나라, 노인이 없는 사회


"미래의 고령인구는 그 수가 많아질 뿐, 현재의 고령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미래의 고령자는 현재의 고령자와는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고려할 때, 일찍 태어난 현재의 고령자보다 늦게 태어난 미래의 고령자가 평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보유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육수준의 개선일 것이다." "65세 이상 대졸 인구는 상대적으로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집단이 될 것이다. 대졸 고령인구는 현재 전체 인구의 5% 미만이지만, 2072년이 되면 15세 이상 인구의 약 3분의 1이 65세 이상 대졸자로 구성될 것이다. 여기에 55~64세 대졸 인구를 포함하면 50년 후에는 대학을 졸업한 55세 이상 장년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전망이다." "이처럼 미래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령인구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고학령 고령인력은 전체 노동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192-7)


"게다가 미래의 고령자는 현재의 고령자보다 더 건강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상태 개선은 학력 신장과는 별도의 경로로 이들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학력자는 일반적으로 저학력자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위험한 행위를 덜 하며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의료기술을 더 잘 이해하고 의료서비스를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도 하다." "건강 개선에 힘입어 미래의 고령자는 더 오래,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 악화는 중년을 넘긴 노동자가 일을 그만두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각종 질환과 건강 악화는 중고령자의 고용뿐만 아니라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을 낮추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건강이 더 나아지는 미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용인구에 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고 생산성이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197-8)


# 한국 노동시장에서 정년 연장이 효과적인 방안이 아닌 이유

1. 향후 10~20년은 노동력 총량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모든 유형의 고령자의 양적 확대는 필요하지 않다.

2.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예상되는 산업(사회복지서비스 등)은 대체로 정년의 의미가 크지 않은 업종들이다.

3. 정년 연장으로 장년층 고용 확대가 예상되는 산업과 청년인력이 급감하는 부문이 그다지 겹치지 않는다.

4. 인력 부족 문제는 중소기업에서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년연장의 혜택은 주로 대기업 중심이다.

5. 정년 연장은 '평균'을 고려하여 추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파워 시니어를 충분히 잘 활용하기 어렵다.


"산업과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노동시장에 파워 시니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장차 고령인구가 생산 역량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게 하려면 고령 친화적인(age-friendly) 작업환경과 노동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의 한 연구는 고령자가 선호하는 일자리 특성으로 높은 자율성과 유연성, 낮은 스트레스와 신체적·인지적 난이도, 재택근무 가능성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고령자가 이러한 성격의 일을 하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임금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도 보였다." "흥미로운 결과는 여성과 젊은 고학력자의 고용도 고령 친화적인 일자리의 증가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도 자율성과 유연성이 높은 일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감지된다. 미래에는 이 세대가 고령층에 진입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고령 친화적으로 바꾸는 작업은 베이비 붐 이후 세대, 더 나아가 지금의 젊은 세대가 나이 든 후에도 생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218-20)


8장 ‘이민자의 나라’가 우리의 미래일까?


"한국에는 어떤 특성의 외국인이 유입되고 있고 주로 어떤 부문에 취업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통계청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원자료를 이용하여 근래 외국인과 내국인의 특성을 비교하였다." "근래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은 내국인과 비교하여 평균적으로 약 7년 정도 젊고, 대졸 이상 학력 비율이 절반 수준이었으며, 남성 비중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국인 취업자는 내국인 취업자와 비교해 시간당 임금이 약 25% 낮았고 근로시간이 약 18% 길었다. 유배우자 비율과 상용직 비율은 내외국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결과는 외국인이 평균적으로 젊지만 교육수준이난 시간당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 면에서 내국인에 뒤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들 중 전문인력 비자를 받아서 들어온 외국인은 전체의 5% 미만에 불과하다. 이처럼 지금은 외국인의 절대 다수가 비전문인력 및 이와 가까운 체류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235-6)


"미래에 한국 노동시장이 필요로 할 외국인력은 과거와 현재의 수요를 충족시켜준 외국인력과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장래의 노동력 부족 부문은 외국인력 집중도가 높은 부문과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는다. 가까운 장래에 노동력 부족이 가장 심각하리라 예상되는 5개 산업은 사회복지서비스업, 음식점 및 주점업, 전문직별 공사업,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운송업, 소매업(자동차 제외) 등이다. 반면 현재 외국인력은 주로 일부 제조업, 건설업, 숙박 및 음식점업, 농업 등에 집중되고 있다. 장래의 심각한 인력 부족 사태를 경고한 의료 및 돌봄 분야도 간병인 같은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외국인력 집중도가 낮다." "이처럼 현재와 같은 외국인력 도입 시스템은 인구변화가 초래할 장래의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 대응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인구변화의 충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여건과 수요에 부합하는 새로운 외국인력 도입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241, 244)


# 외국인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책

1. 숙련 유형 및 수준에 따라 명확하게 구분된 비자체계 수립(현재는 전문인력과 비전문인력으로 단순 이분화)

2. 국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숙련을 보유한 외국인력을 국외에서부터 식별하고 채용할 수 있는 시스템 도입

3. 비전문 외국인력을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문으로 배분(필요한 사업체 위주로 배정점수제 개선)

4. 외국인력의 이동성을 제약하고 노동환경 개선을 저해하는 외국인 비전문인력의 고용주 변경 제약 완화

5.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유학생은 젊고 학력이 높고 해당 국가의 문화에 더 익숙하므로 적극적으로 영입

6.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여 국내 노동시장 동화를 촉진함으로써 최대의 생산 역량 유도

7. 숙련도가 높은 외국인력이 한국에 더 오래 머물며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배우자 취업, 자녀 교육 지원 등)


"현재까지의 외국인 정책은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면 외국인력이 탄력적으로 공급될 것임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인구변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외국인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 역시 과거에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줄곧 한국에 오려는 외국인이 충분히 많을 것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정이 현실과 크게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 첫째, 한국과 주된 이민 송출국을 공유하는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유치하려는 정책적 노력을 강화하면서 외국인력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강화되고 있다." "둘째, 한국에 인력을 보내고 있는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경험하면서 장기적으로 인력 송출국에서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한국에 인력을 송출하는 국가들의 인구변화도 이 국가들이 인력 송출국에서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앞당길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상대적 임금 우위가 감소하면 외국인력을 확보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258-60)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첫째, 한국을 외국인이 선호하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다. 임금 우위만으로 외국인력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 이외의 조건들을 매력적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임금을 지급할 때, 굳이 한국을 택할 이유를 제공해야 한다. 우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사회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외국인 권익과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외국인 정책의 기본적인 제약 조건으로 설정해야 한다. 이는 도덕적 책무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위신을 지키고 장기적으로 우수 외국인력을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둘째, 외국인력 도입을 인구문제 해소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는 편이 좋다." "모든 고통을 깨끗하게 없애면서 부작용도 없는 마법의 약은 없다. 먼 훗날까지 지속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현재의 고통과 비용을 감내하는 길이 더 현명할 것이다."(261-3)


9장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인구변화의 미래를 위해


"인구변화의 미래에 적합한 사회의 비전을 모색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연구 결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람을 보는 사회'이다. 나이, 성별, 출신지, 외모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수적 특성이 아닌 역량, 성과, 경력, 잠재력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여 누구를 어떤 자리에 어떤 조건으로 쓸지 결정하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는 '사람에게 맞추는 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량과 선호에 맞추어 적합한 일을 적당한 만큼 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는 '기회를 주는 사회'이다.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서 자신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거듭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마지막은 '사람을 보호하는 사회'이다. 인구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사회는 이동성이 높은 사회이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질 때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한 모험에 나설 것이다."(272-4)


"정책 우선순위는 먼저 인구변화로 특정한 형태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시기를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부문 및 유형 간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는 총량적인 노동력 부족 문제보다 더 가까운 장래에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전체 노동인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보다는 미시적인 노동시장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인구변화의 충격이 다가오는 사안도 사회적 합의와 제도 개혁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한발 앞선 대응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앞으로 4~5년 후부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인력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 간 잠재적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나 필요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정치적 과정의 험난함을 고려할 때, 교육혁신과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는 일은 지금 시작해도 결코 이르지 않다."(277-8)


"저출산 완화 정책에 대한 한 갈래의 비판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합계출산율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정책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책의 효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없었을 경우 나타났을 결과를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하고 적절한 지표를 이용하여 분석한 연구들은 현금지원, 보육의 질 개선과 보육비 지원, 육아휴직 지원 등의 정책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갈래의 비판은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니 저출산·고령화 추이를 미래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비하는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인구문제의 핵심은 출생아 수 감소 자체보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사실이다. 출생아 수 감소 추이를 반전시키지 못해도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인구변화의 충격을 완화하고 대응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81-3)


"인구문제는 여러 면에서 금융위기, 안보위기, 감염병 위기 등 다른 국가적 위기와는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첫째, 인구변화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 감소도 해가 바뀌어야 비로소 체감된다. 그리고 인구문제에 대응한 정책의 효과 역시 장기간에 걸쳐 느리게 나타난다. 둘째, 다수의 국민에게 인구문제는 당장 절실한 나의 문제가 아니다. 훗날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쉽다. 셋째, 인구변화의 영향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구가 줄면 오히려 삶의 질이 개선되리라는 의견도 있다. 넷째, 인구문제는 다양한 분야와 정부 기관의 업무영역에 걸쳐 있다." "인구변화에 대한 대응은 마라톤에 가깝다. 해결을 위해 애쓴 사람이 그 자리에서 결실을 얻고 공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과 국민의 삶을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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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개정판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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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한국의 고유 종교인 무교(巫敎)는 미신인가?


▷ 무교는 어떤 종교? 


"누구에게 확인할 것 없이, 대부분의 한국인은 무교(무당종교)를 두고, 종교가 아닌 '무속'에 불과하며 게다가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무당 종교를 지칭할 때도 '교'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속'이라는 낱말을 써서 '무속'이라고 부른다. 무속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에 사대부 같은 기득권 세력이 무교를 폄하하여 야속(野俗)하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미신과 소위 '정신(正信)'을 구별하지 않는 종교학에서는 무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만일 불교나 그리스도교를 불속(佛俗) 혹은 기독속(基督俗)이라고 부르자고 하면 그게 가당하기나 한 생각이겠는가?" "통상 한국인은 무당을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한참 덜떨어진 기괴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족속으로 여긴다. 그러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 대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은 다 던져버리고 무당에게 달려가지만 말이다. 한국인이 무당에 대해 갖는 생각과 태도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21-3)


"무교는 크게 볼 때 '신령과 무당과 신도'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 요소는 굿이라는 무교의 고유한 의례에서 만나게 된다." "이 구조에서 무교는 신도가 무당이라는 특수한 사제 계급의 중개로 신령을 만나 도움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말에 선교사로 활약하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빠질 때는 영혼 숭배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한국인이 평소에는 유교나 불교적으로 살지만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게 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떻든 이러한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무당에게 가면 무당은 신령과 교통할 수 있는 자신의 신묘한 능력으로 신령에게 해결책을 구한다. 그러면 신령은 각 사안의 경중에 따라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신도가 신령과 교통하려면 반드시 무당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사제를 통해서만 신에게 다다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구조이다."(31-3)


"나는 무당을 '민간 사제'라고 부르는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무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내림굿을 받는 것이다. 내림굿을 받기 전에는 누구도 무당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내림굿이란 '사제 서품식' 혹은 '목사 안수식'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당은 정확히 말하면 내림굿을 받은 후부터 비로소 신자들과 신령을 중재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전에도 여러 신령들과 교통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신령들의 도움을 받아 점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쳇말로 하면 아직 영계에는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다. 아직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점방(店房)을 낼 수도 없다. 상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내림을 받아야만 그 신의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고 정식으로 점보는 일 같은 무업을 할 수 있다."(36-7)


"그런데 무당이 굿을 주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모시는 신령, 즉 몸주신(Lord Spirit)을 모셔야 한다. 무당이 신령계와 통하게 되는 것은 이 몸주신을 통해서이다. 몸주신을 받는 것은 무당이 신령계와 통하기 위해 자신만의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령계에는 신령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만의 신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당은 영계에서 헤맬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무당이 모시는 몸주신은 일종의 영계 가이드인 셈이다." "내림굿을 받지 않았으면서 신점(神占)을 치는 사람들도 신을 모시기는 한다. 그러나 정식으로 내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신은 신령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런 점쟁이들은 사제가 아니라 술사(術士)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무당들은 '오구굿' 같은 사령제(死靈祭)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이런 것이 바로 무당의 사제 기능이다."(37-9)


"무당 후보자들은 왜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신병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당 후보자도 무당이 되기 전에는 속된 인간이다. 이 속된 인간이 성스러워지려면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이전의 속된 인간을 벗어던지고 환골탈태(換骨脫胎)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뼈를 깍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이전의 속된 찌꺼기나 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더구나 무당 후보자가 내림굿을 받은 뒤에 무당이 되면 그다음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큰 문제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온갖 고통과 번민이 가득 차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무당은 자아가 매우 강해야 한다." "그래서 무당은 그 형용할 길이 없는 고통을 먼저 겪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고통을 나눔으로써 가볍게 해 주려는 사람은 거의 이러한 과정을 겪는다."(43-6)


▷ 굿은 어떻게 하나 


"별달리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기 위해 무당을 찾아간다. 이때 무당과 신령 사이에 어떤 식으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알던 만신은 이렇게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일반인들은 자기네들이 점을 칠 때 신령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실제의 경우에는 신령이 내담자의 상황에 대해 시시콜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두세 마디의 단어로만 아주 짧게 알려 준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단어 대신 냄새를 풍겨주는데, 무당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내담자의 상황을 탐문해 간다. 이 경우 제일 좋은 것은 신령이 내담자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신령이 아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면 무당은 유도신문과 같은 질문법으로 내담자의 상황을 염탐해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당히 넘겨짚어야 한다.〉"(57-8)


# 신령의 처방 수위

점괘 〉 부적 〉 치성(약식 굿) 〉 정식 굿


"굿이란 보기에 따라 노래와 춤이 그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뮤지컬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판소리를 '1인 오페라'라고 하듯이 굿도 '1인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굿은 그냥 뮤지컬이 아니라 신과 교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성한 뮤지컬이다. 그런데 온종일 하는 뮤지컬을 혼자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의상을 입고 노래만 하는 판소리와는 달리, 굿은 거리마다 의상을 바꿔 입고 다른 춤을 춰야 한다. 그래서 세명(주 무당 한명, 보조 무당 2명)이 하는 것인데 그래도 버거운 것임은 틀림없다. 악사의 경우는 조금 융통성이 있다. 굿을 부탁한 신도가 돈을 많이 내면 정식에 해당하는 3인조 악사를 부를 수 있다. 이 밴드의 악기 구성을 보면 젓대(민속 대금)와 피리, 그리고 해금으로 구성되는데 이렇게 악기를 셋 '잡히면' 제일 규모 있게 하는 굿이다. 굿을 부탁한 신도가 돈이 없으면 악사는 아예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무당들이 돌아가면서 장구와 제금을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64)


"각 거리의 기본 구조를 보면, 대체로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신을 초치하고(청신, 請神), 타령이나 노랫가락, 춤 등으로 신을 즐겁게 해서 공수(계시)를 받고(오신, 娛神), 신을 다시 본래 자리로 보내는(송신, 送神) 세 단계이다. 이 세 단계에서 무당은 노래와 춤으로 신령을 모신 다음 즐겁게 해주고 다시 보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거리마다 무당은 격렬한 춤을 춤으로써 엑스터시(망아경, 忘我境) 상태로 들어가 신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신의 말을 전하는데 이것이 굿의 핵심이다. 이때, 각 거리에는 불러야 할 노래나 추는 춤, 그리고 의상 등이 모두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굿 중에서도 이런 형식이 가장 잘 잡혀 있는 굿은 무당이 자기 자신(그리고 자기가 모시는 신령)을 위해서 하는 '진적굿'이다. 이 굿은 무당이 1~2년에 한 번씩 자기가 모시는 신령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서 하는데, 자기의 몸주신을 위해 하는 것인 만큼 아주 격식을 잘 갖추어 굿을 한다."(75-6)


▷ 한국인의 근원 신앙인 무교 


"굿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좋은 운이 들어오게 하는 '재수굿'과 대표적인 사령제(死靈祭)인 '오구굿'이 가장 많이 연행된다. 이 외에도 진적굿이 있고, 병 고칠 때 하는 병굿, 그리고 환갑이나 결혼식처럼 집안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하는 여탐굿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만큼 굿 종류는 많다. 이 가운데 병굿은 상류층에서는 우환굿이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불리고, 기층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푸닥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굿들이 개인이나 가족에게 한정된 것이라면 마을 단위로 하는 굿도 많다. 강릉 단오제나 은산 별산굿, 하회 별신굿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모두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하는 굿이다. 이런 굿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며칠에 걸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은산 별산굿(제)은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복신과 도침을 기리기 위해 하는 굿으로, 일반적으로 3년에 한 번씩 한다. 굿을 하는 전 기간이 15일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 만하겠다."(84-5)


"사람이 죽었을 때 가족들은 경황이 없어 그 영혼과 제대로 이별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항상 불효한 것 같아 감정의 찌꺼기가 남기 마련이다. 오구굿은 이런 경우에 하는 것이다. 부모의 혼을 불러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이 굿을 하는 것이다. 이 굿의 하이라이트는 부모의 혼이 무당에게 들어왔을 때이다."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로 분한 무당에게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와 같은 식으로 용서를 청하면 그 무당은 부모를 대신해서 〈아니다, 네 덕에 난 이생 잘 살았다.〉라고 답하는데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식들은 죄의식에서 면책되는 것이다. 이런 '짜임새'는 매우 훌륭하다. 오구굿은 아주 상징적인 순서로 끝나는데 그것은 부모의 넋을 넋전 상자에 싣고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 이 부모의 혼을 데리고 가는 신령은 그 유명한 '바리공주'이다. 이렇게 해서 굿이 끝나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질서가 잡히고 모두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86-7)


"한국 무교의 신령들은 선악 개념이 불분명하다. 굿을 할 때 보면, 자신을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고 진노한 신령이 금세라도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처럼 외치다가도 신도들이 싹싹 빌면 곧 관대한 신으로 바뀐다." "한국 무교의 신령들 사이에 위계적인 질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것도 한국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무교의 신령들은 단독으로 움직이며 자기를 몸주로 하는 무당을 매개로 현현하기 때문에, 신령들 간에 소통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냥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자기를 섬기는 거리에 나타난 굿 한번 받아먹고 가면 끝이다. 잡신들은 하위 신령들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예 격외로 치지만, 무당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정신(正神)들은 대체로 동등한 위계 구조에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무교에서 인기 있는 신 가운데 한이 많은 신령들이 대표급 신령으로 인정되는 것도 한국적인 특징이라 하겠다."(95-7)


Ⅱ. 왜 한국은 무교의 나라인가?


▷ 한국 무교 약사 


"한국이나 일본이 가장 중국적인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양국에 이미 그 이전부터 토착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교가 맡아서 하는 기능을 한국에서는 무교가, 일본에서는 신도가 한 것이다. 도교와 무교, 그리고 신도는 세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 그 외양은 다르지만 작은 신들(lesser gods)을 신봉해서 재물과 건강 같은 세속적인 행복을 기구(祈求)한다는 점에서 그 속성이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아 3국 가운데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들의 기층 종교를 인정하고 양성화한 반면, 한국은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하고 미신으로 매도하여 결과적으로 음성적 문화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본성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전통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무교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뿌리를 무시한 것이다. 자신들의 정신적인 뿌리를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불교, 유교, 기독교)의 관점에서 스스로 폄하한 것이다."(117-8)


"무교와 신라 문화가 관계된 항목 가운데 화랑이나 처용을 무교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처용이 역신을 쫓아냈다는 의미에서 남자 무당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등이 그것인데, 이는 단지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로 내려오면 서서히 무당을 억압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아직 주자학이 발흥되기 전일 뿐만 아니라 국교로도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무교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지는 않았다." "고려조에도 어김없이 무교가 성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을 직접 기술한 것이 잘 발견되지는 않지만 편린적인 기록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종 때 궁궐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무당 300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번에 이 정도의 숫자가 동원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숫자의 무당이 저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그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26-8)


"조선조 때에는 무교를 탄압하기 위해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우선 불교 승려와 더불어 무당은 천민 계급으로 강등되고 도성 출입이 금지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당들을 도성에서 쫓아냈다는 기사가 쉬지 않고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도성 안으로부터 무당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무당들은 왕십리나 구파발같이 도성 바로 바깥에 자기네들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사실은 일반 국민만 무당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도 무당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유교는 종교적인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기우제 같은 종교적 의례를 행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무당이 필요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병이 삿된 영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해 병을 치료할 때도 무당에게 퇴마하는 일을 맡겼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성수청(星宿廳)과 활인서(活人署) 같은 기관에 무당을 소속시켜 각각 제사를 관장하게 하고 병자를 치유하도록 했다."(130-1)


▷ 무교의 현재 


"다른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조에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무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에게는 이 무교가 절대적인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 지배층 남성들은 종교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무교를 그들의 중심 종교로 삼아 종교적 욕구를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굿판은 한마디로 여성들을 위한 장이자 해방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굿판에서만큼은 일상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풀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조 때 여성들이 시집을 오면 친정 부모에 대한 제사가 용인되지 않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을 시가에 전적으로 예속시키기 때문에 여성과 관계되는 것은 대부분 억눌리고 그 권리가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렇게 엄중한 가부장제에서도 굿은 예외였다. 주부(며느리/딸)가 죽은 자기 친정부모를 위해 오구굿만큼은 할 수 있었다. 굿만이 조선조의 여성들이 친정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의례였는지 모른다."(137, 140)


"유교 사회에서 주부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대상을 보면, 우선 남편 집안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남자이면서 결혼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도 죽을 수 있고 결혼하지 못한 딸(그리고 아들)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유교 사회에서는 주변인이라 할 수 있다." "유교 교리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조선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그저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찌 무시와 외면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조선조에 이런 영혼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의례는 굿밖에 없었다. 무당이 나서서 이 갈가리 찢어진 부모의 마음을 보듬어 주어야 했다. 무교가 여성과 같은 사회 주변인에 의해 지탱되었던 만큼 무교는 이러한 주변인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무교가 보전되어 내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142-3)


"일제 때도 어김없이 무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수천 년을 내려온 무교가 그리 쉽게 사그라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무당들의 활동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탄압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다음에 비록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무당들에게 좋은 시절이 바로 오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나 서양 세력의 쓰나미 같은 유입과 이른바 '조극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무교는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에게 무교는 미신의 대명사일 뿐이었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무교 같은 저급한 신앙은 없었다는 듯이 무시의 대상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 결과 수십 개에 달하던 서울 지역의 굿당들이 몇 안 남고 다 없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무당들에게 재충전의 성지였던 계룡산의 수많은 기도처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정화(?) 작업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무교는 더 밑으로, 더 주변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145-8)


▷ 한국인의 근본 종교는 무교! 


"한국인들은 왜 노래를 그다지도 좋아하는 것일까? 한국 무당들에게 춤과 노래는 무엇일까? 이를 심증적으로 무교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굿을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노래와 춤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당들의 가무는 놀이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교통하기 위한 종교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무당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망아경 속에 빠져 신을 받는 것이다. 다시금 망아경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무교와 관련해서 말해보면, 한국인들은 술을 통해 낮은 수준의 망아경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라는 뜻의 '음주가무'라는 한 단어로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다. 술만 먹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격렬하게 흔드는 것이 훨씬 망아경 속으로 들어가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들은 밤마다 무당들이 하던 고대의 엑스터시 항연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161)


Ⅲ. 한국인의 종교적인 내면 세계


▷ 무교에서 바라본 불교와 그리스도교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의례가 아니더라도 특히 개신교인들은 교회서든 집에서든 기도를 많이 한다. 이들은 어떤 때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기도를 '빡세게' 해달라고 서로에게 요청한다. 밥 먹을 때에도 그야말로 밥 먹듯이 기도를 한다. 이렇게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그들이 믿는 신께 '무엇을 해 달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불교는 그리스도교처럼 그렇게 대놓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대신 승려가 사제가 되어 불상 앞에서 신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축원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찌 됐든 기도를 받는 대상이 있고 그 행위를 하는 인간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 하겠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앞에서 본 무교의 구조, 즉 '신령↔(무당)↔신도'의 구조와 다를 바가 없다. 무교의 구조에서도 신도가 직접 신령께 정성을 올릴 수 있고 무당이 대신 그 정성을 올릴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왜 그리스도교나 불교는 미신이 아니고 무교만 미신이라고 하는 걸까?"(171-4)


"무교에 대한 여러 비판 가운데, '무당이 신령께 정성을 바친다고 잔뜩 제물을 차려 놓고 굿을 하는데 그게 정말로 신령께 전달되는 것인가?' 하고 따지는 것이 있다. 신령이란 문자 그대로 신이라 육체를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인간들이 먹는 음식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무당들은 신령은 기쁘게 하고 그들과 교통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하는데 그게 신령에게 정말로 전달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다. 그리고 굿을 해서 어떤 일이 뜻대로 되었다면 그게 정말 굿을 해서 그런 건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내 기도가 정말로 신에게 전달되는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현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지, 과학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자기 믿음을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존중받으려면 무당들이 신령들에게 기도하는 것도 응당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191-3)


▷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같다 


"무교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권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무교는 계속해서 권력과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미신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나 유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기 전까지 무교는 미신으로 천대받은 적이 없다. 아니 무교는 오히려 당시의 보편 신앙이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 같은 수입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무교는 미신'이라는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다수가 이 종교들을 믿게 되면서 또 그 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종교적 신념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권력을 잡은 많은 사람들이 힘으로 밀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무교는 '어떤 중심 교리를 믿는다'와 같은 확실한 교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무당들과 신도들의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나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는 만일 조직이 없다면 그것은 힘이 없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208-11)


"가령, 무당 중에 걸출한 이가 나와 교리를 이론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고 온갖 수를 써서 정치권과 결탁했을 뿐만 아니라 큰 종교 조직도 만들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런 무교가 사회에서 정통 신앙으로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이것은 공연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예가 있어 하는 소리이다. 일본의 신도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신도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무교와 다를 게 없는 원시신앙에 가까운 종교이다. 이렇다 할 교리도 없고 경전도 없다. 그냥 신령 잘 모셔서 복 받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도는 일본의 정치권과 결탁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대표 종교가 되었다. 지금 세계 종교계에서 일본의 신도를 미신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신사에서 근무하는 궁사(宮士)들도 우상숭배자라고 지탄받기는커녕 사회에서 나름대로 존경받는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인들이 신도를 그네들의 정통 신앙으로 인정해 체제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222-4)


마치며


"서사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굿을 한국 문화의 보고라고 주장한다. 무당들의 노래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리공주 무가 하나만 해도 서너 시간을 구송하는 것이니 그 안에 탐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가 하면 남도의 시나위 굿판에서 태동한 시나위 음악은 한국 민속 음악의 백미 아닌가? 그리고 거기서 파생한 산조 음악은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예처럼 예술성이 뛰어나다." "춤도 마찬가지이다. 굿판에서 연주되는 곡은 모두 무용 반주 음악이기도 하다. 시나위 음악에 맞춰서 추던 춤이 바로 세계적인 춤인 살풀이다." "그런가 하면 굿판은 한마디로 즉흥 연극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큰 틀은 있지만 각본은 정형화되지 않은 연극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인 연극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굿판이 매력적인 일차 자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이다. 따라서 종교학적으로도 많은 함의를 갖고 있을 터이니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2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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