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1 대중운동의 매력


"거대한 변화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프랑스 혁명을 이루어낸 세대에는 인간의 이성이 전능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이 무한하다는 과장된 의식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혼돈 속으로 무모하게 뛰어든 레닌과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전능함을 맹신했다." "어떤 거대한 변화 임무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극렬한 불만을 느끼지만 극빈 상태는 아니어야 하며, 어떤 강력한 강령이나 절대적인 지도자 혹은 어떤 신기술을 얻을 때 압도적인 힘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네가 떠맡은 그 거대한 임무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전혀 알지 못해야 한다. 이들에게 경험은 장애가 된다. 프랑스혁명을 시작한 사람들은 정치적 경험이 전무했다. 볼셰비키와 나치,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혁명들도 마찬가지다. 경험자들은 늦게 개입한다. 잉글랜드인들이 대중운동에 소심한 것도 어쩌면 앞선 정치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23, 27-8)


"대중운동의 호소력과 실제적 조직의 호소력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실제적인 조직은 자기향상의 기회가 되며, 그 필요성은 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나온다. 반면에 대중운동은 특히나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단계에서는 소중한 자신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을 몰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대중운동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깊숙한 열망은 어떤 숭고한 대의와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삶─갱생─을 사는 것이며, 혹은 이것에 실패하더라도 자부심, 자신감, 희망, 목적의식,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 등 새로운 본령을 획득할 기회를 좇는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29-30)


"사람들이 어떤 대중운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강령이나 사업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적인 운동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히틀러 이전 독일의 불안한 젊은이들은 흔히 동전 던지기로 공산당에 가입할 것이냐 나치에 가입할 것이냐를 정했다. 제정 러시아의 인구 과밀 지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대 집단은 혁명과 시온주의, 어느 쪽으로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가족 안에서 한 사람이 혁명파에 가담하면 또 한 사람은 시온파에 가담했다." "전향을 권유하는 우리 시대의 대중운동은 라이벌 집단의 가장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잠재적 전향자로 주목하는 듯하다. 모든 대중운동이 같은 인간의 속성에서 추종자를 끌어내며 같은 심리에 호소하므로 ① 모든 대중운동이 경쟁을 벌이며, 한 운동이 세를 얻을 때 나머지 다른 운동들은 세를 잃는다. ② 모든 대중운동은 호환된다. 하나의 대중운동은 언제든 다른 대중운동으로 변형될 수 있다."(36-8)


2 잠재적 전향자


"가난한 사람이라고 전부 불만을 품는 것은 아니다. 도시 빈민가에 갇힌 채 자신의 쇠락을 뽐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익숙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친다. 건실한 사람들조차 가난이 길어지면 타성에 젖는다. 그들은 변치 않는 세계의 질서에 위압된다. 어떤 격변─침략이나 전염병 혹은 다른 어떤 공동체의 재앙─이나 일어나야 그 '부동의 질서'도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에 눈뜬다.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 피가 끓는다. 물려받은 것, 가진 것을 다 빼앗긴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반응한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에 성공을 안긴 것은 신빈곤층이었다." "오늘날(1951년) 서구 세계의 노동자들은 실직을 강등으로 느낀다. 그들은 부당한 세계 질서가 자기네를 박탈하고 상처 입혔다고 느끼며, 그렇기에 언제든 거대한 변혁의 외침에 귀 기울인다."(48-50)


"불만은 비참함을 견딜 만할 때, 상황이 개선되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 "기세등등한 대중운동은 희망이 눈앞에 있음을 설교한다. 이는 지지자들에게 행동을 고무하기 위한 것으로, 이 '모퉁이 바로 뒤에 있는' 희망이 대중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의 종말과 천국이 임박했음을 설교하며, 무함마드는 신도의 눈앞에 전리품을 흔들었고, 자코뱅당은 자유와 평등의 즉각 실현을 약속했으며, 초기 볼셰비키는 빵과 토지를 약속했고,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속박을 즉각 종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할 것을 만인 앞에 약속했다. 이 운동이 세력을 얻으면 역점은 미래의 희망으로 바뀐다. '성공한' 대중운동은 현재의 보존에 몰두하며, 즉발적 행동보다는 복종과 인내를 치하하며 말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51-4)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나치 평당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극악 범죄에 대해 무고하다고 선언한 것도 순전한 허위 주장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명령 복종의 의무를 짊어진 것은 중상당하고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광신자들은 학대보다 자유를 더 두려워한다. 신흥운동의 지지자들은 교조와 명령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공기 속에 살며 숨쉴지라도 강한 자유 의식을 갖고 있다. 이 자유 의식은 용인할 수 없는 개인 실존에 대한 책임과 공포, 절망감에서 도피한 결과다. 이 도피를 그들은 구원과 해방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변화가 엄격한 규율의 틀 속에서 성취한 것일지라도,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 또한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55-6)


"한 사회에서 대중운동의 기회가 무르익었는지 보여주는 척도로, 해소되지 못한 권태의 만연보다 신뢰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떤 대중운동이 되었건 발생하기 전 단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권태가 만연한 분위기가 감돌며, 대중운동 발생 초기에는 권태로운 사람들이 수탈과 압제에 고통 받는 사람들보다 운동에 더 공감하고 더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곤 한다. 대중 봉기를 꾀하는 선동자에게는 사람들이 좀이 쑤실 정도로 지루해한다는 보고가 적어도 경제적 수탈이나 정치적 학대로 대중이 고통 받고 있다는 보고만큼이나 고무적인 신호다.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권태를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시시하고 의미 없는 존재라는 자각은 권태의 주된 원천이다." "자율적인 삶을 누리며 형편이 나쁘지 않지만 창조적 작업이나 유익할 활동을 할 능력 또는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기 위하여 어떤 무모하고 기상천외한 수단에 의지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83-4)


3 단결과 자기희생


"사람이 자기를 희생할 수 있으려면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는 더 이상 조지나 한스, 이반 또는 다다오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서 독립성을 제거하는 일은 철저해야 한다. 개인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일련의 의례를 통하여 집단이나 부족, 당 따위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기쁨과 슬픔, 자부심과 자신감은 자기 자신의 전망과 능력이 아닌 집단의 운과 역량에서 샘솟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인은 절대로 혼자라고 느끼면 안 된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집단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 집단에게 버려진다는 것은 생명이 잘려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확실히 존재의 원시적 단계이며, 가장 완벽한 표본은 원시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운동은 이 완벽한 원시적 상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며, 당대 대중운동의 반개인주의적 경향에서 우리가 원시시대로 역행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고 해도 망상이 아니다."(96-8)


"죽음과 죽임이 어떤 의례나 의식, 연극 공연이나 놀이의 일부일 때는 쉽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상의 장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꿔도 될 것은 없다. 오직 자신을 무대 위의 (따라서 실제가 아닌 가상의) 배우로 여길 때 죽음은 공포와 최후라는 의미를 잃고 가상의 행위, 하나의 연극적 몸짓이 된다. 추종자들에게 죽음과 죽임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어떤 숭고한 장면, 엄숙한 혹은 유쾌한 연극 공연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대중운동의 지도자가 해야 할 주요 임무 중 하나다." "대중운동의 행렬과 행진, 의식, 전례 등의 행사는 의심할 바 없이 대중의 가슴에 어떤 공명을 일으킨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잃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적 행위로써 타인의 견해와 상상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남기 위해 실제하고 유한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한다."(102-5)


"자신의 경험과 사고에서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순교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자가희생은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면밀한 탐구와 숙고의 결과물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실천적인 대중운동은 추종자들과 현실 세계 사이에 사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할 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하여 대중운동은 궁극의 절대 진리가 강령 안에 포함돼 있으며 강령 이외에는 어떤 진리도 확실성도 없음을 주장한다." "의식과 이성의 근거에 의존하는 것은 이단이요 대역죄다. 맹신은 무수한 불신을 통해 검증된다." "보거나 들을 가치가 없는 사실에 '눈 감고 귀 막는' 능력이야말로 맹신자들이 지닌 불굴의 결단력과 충성심의 원천이다. 그들은 위험이 닥쳐도 겁내지 않고 장애에 기죽지 않으며 반박에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은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산을 옮기는 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119-20)


"강령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굳게 믿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머리로 이해한 강령은 그 위력이 삭감되게 마련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받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시작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영구불변의 확신을 갖기가 힘들다.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어김없이 그것의 효력과 확실성은 약해진다. 믿음이 두터운 자들은 절대적 진리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대중운동이 강령에 대한 설명을 붙이면서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운도으이 활기찬 시기는 끝나고 안정을 중시하는 시기에 돌입했다는 뜻이다. 체제가 안정되려면 지식인들의 충성이 필요한데, 강령을 이해시키는 일은 대중의 자기희생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식인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121-2)


"광신자는 두말할 여지 없이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영원히 그 하나뿐─만세반석─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그의 자신감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에서 나온다. 그가 어떤 대의를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하며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로 광신자는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까닭에 자신이 받아들이는 모든 대의가 전부 숭고한 대의가 되어버리곤 한다. 광신자는 그의 논리나 도덕 의식을 자극해봐야 그 대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숭고한 대의의 중요성과 정당함을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갈등 없이 갑자기 열광적으로 다른 대의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에게 설득이란 없으며, 가능한 것은 오로지 전향 혹은 개종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신봉하는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다."(127-8)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쁘기만 적보다는 장점이 많은 적을 증오하는 편이 쉽다. 경멸스러운 상대를 증오하기는 어렵다." "증오심 속에 숨어 있는 부러움은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을 따라하는 경향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모든 대중운동은 그 운동이 적으로 삼은 바로 그 악마의 형상을 따라가게 된다. 정점의 기독교는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구체화시켰다. 자코뱅당은 자신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대상인 전제군주의 모든 악덕을 스스로 행했다. 소련은 독점자본주의의 가장 순수하고 거대한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히틀러는 증오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부러움을 알아차리고서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국가사회당이 맹렬한 증오를 받을 만한 적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한 증오는 국가사회당의 신념이 우월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에, 〈국가사회당이 견지하는 태도의 가치, 신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의지력을 잴 수 있는 최상의 잣대는 그가 적······으로부터 받는 적개심의 정도다.〉"(143-5)


"지도자가 무에서 운동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니다. 추종하고 복종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강렬한 불만이 있어야 비로소 운동과 지도자가 나타날 수 있다. 조건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잠재적 지도자에게 아무리 재능이 있고 그가 주창하는 대의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만반의 태세가 갖춰지고 나면 걸출한 지도자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요건이 된다. 그런 지도자 없이는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저절로 대중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흐름을 볼셰비키 혁명으로 몰아가게 만든 것은 레닌이었다. 그가 스위스나 1917년 러시아로 들어가는 길에 죽었더라면 다른 탁월한 볼셰비키들이 연정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부르주아들이 운영하는 자유주의 공화국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경우에는 징후가 더더욱 결정적이다. 즉, 그들 없이는 파시즘도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다."(164-6)


4 시작과 끝


"대중운동은 대개 지배 체제가 불신받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불신은 권력자의 실책이나 학정의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불만 있는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다. 불만이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거나 불만이 없을 때는 저절로 쓰러져 무너지지 않는 한 아무리 무능하고 타락한 지배 체제라도 권력을 유지한다." "대중의 눈에 광신적 극단주의자는 아무리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을 사로잡아봤자 위험하고 음모적이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지식인은 사정이 다르다. 대중이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그의 말이 아무리 긴박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곧장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를 무시하든가 극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의 입을 막든가 한다. 이렇듯 지식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기존 체제의 토대를 잠식해 들어가며 권좌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믿음과 충성심을 무너뜨려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위한 기반을 닦는다."(191-3)


"어떤 유형이 되었든 거의 모든 지식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뿌리 깊은 갈망이 있는데, 이것이 지배 질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사회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높은, 두드러진 지위에 대한 갈망이다." "사회비판적인 지식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일생에 한 번쯤은 권력자가 보내는 경의나 회유의 제스처에 넘어가 그들 편에 서는 순간이 있다. 어떤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시류에 기꺼이 영합하는 아첨꾼이 된다." "저항하는 지식인이 아무리 자신은 짓밟히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믿어도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분노는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다. 그의 연민은 대개 군림하는 권력을 향한 증오심에서 나온다. 그러다가도 약자를 버리고 강자 편에 설 때에는 온갖 고상한 이유가 다 떠오른다. 〈자신과 관계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반 대중의 불행과 고통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류애를 지닌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소수의 사람들뿐이다.〉"(194-6)


"진정한 지식인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를 진리 자체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 그는 생각의 충돌과 주고받는 논쟁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지식인이 하나의 철학과 행동 강령을 창안했다면, 그것은 행동 방침과 신조라기보다는 빼어난 논리 능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허영심으로 인해 가혹한 언어를 구사하며 심지어는 독설을 쏟아붓기도 한다. 그는 대개 믿어달라고 호소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은 그의 주장에 성서와 같은 확신을 부여할 것이며, 그것을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빈정대는 지식인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을 때,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었고, 악한 자들은 강렬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틀림없이 어떤 계시가 임박했다. 틀림없이 재림이 임박했다.〉 이제 광신자들은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204-5)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할 자유가 아니라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공포스러운 부담〉으로부터의 자유, 무능한 자기를 실현하며 그 결과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곤란한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확신─맹목적인, 권위에 대한 확신─이다." "대중운동의 산파였던 지식인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비극적 운명을 맞는 이유는 아무리 단결된 노력을 역설하고 찬미한들 본질적으로 그들이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206-7)


"행동가는 대중운동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나 행동가의 등장은 대개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동가의 목표는 세계 개혁이 아니라 소유다." "그는 주로 훈련과 강압에 의존한다. 그는 사람은 다 멍청이라는 말보다는 다 겁쟁이라는 말을 더 신뢰하며, 존 메이너드의 말을 빌리자면 새 질서를 사람들의 가슴이 아니라 목 위에 수립하려 든다." "그는 주로 힘의 설득력에 의지하더라도 새 체제 안에 신념이 주는 감동의 요소를 보존하며 격정적인 선전선동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의 명령은 경건한 어휘로 이루어지며, 그의 입술에서는 옛 신조와 선전 문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강압의 철권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기계적 훈련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충성스런 분위기와 격정적인 선전선동은 강압을 설득처럼 받아들이게 만들며, 자발성과 유사한 습성을 정착시킨다."(2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그리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3
폴 카틀리지 지음, 이상덕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서론


"고대에 '그리스'라는 도시국가는 없었다. 다만 그리스 도시들과 여타 공동체들이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을 통해 표현된 공통 문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최초의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헤로도토스는 아테나이 웅변가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다움'을 정의했다. 〈······아테나이인들이 그리스인들을 배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한 핏줄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과 함께 신전들을 세웠고 신들에게 희생제사도 지내는데다 같은 생활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8.144)〉 헤로도토스가 창작해낸 이 연설은 정치적 행위에서 거의 실현된 적 없는 통일성을 암시하고 있다(문화적 행위는 또다르다). '범헬레네스'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정치적 통일성이 빠져 있다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 문명에 특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민족국가의 부재, 좀더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리스 폴리스들의 개별적인 면모다."(20-1)


2 크노소스


"청동기시대 크레테에 관한 한 '신화적 역사(myth-history)'를 통하는 것이 최선이다." "후기 청동기시대 크레테 궁전은 정치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최고 권위자, 지배자, '빅맨'(여왕이었을 확률은 낮다. 그리스 체제하에서는 이들을 아낙스anax 혹은 '우두머리'라고 불렀다)의 자리 혹은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궁전 주변에는 궁전만큼이나 아름답게 장식되고 훌륭한 석공 기술로 지은 '대저택'에서 특별한 지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근 3000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기후 덕분에 가능했던 근본적 농경국가의 중심에는 '지중해 3종' 작물이 있었다. 곡물(가뭄에 강한 보리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다양한 종의 밀과 수수 같은 부수작물 역시 재배되었다), 포도주, 올리브유(크레테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와 올리브 재베에 안성맞춤이다)가 그것이다." "또한 국내 생산은 복잡한 해외무역과 연결되어 남으로는 이집트로, 북으로는 키클라데스제도와 펠로폰네소스반도 남부로, 그리고 레반트로 수출되었다."(31-2)


"크레테가 원주민 지배에서 외세 지배로 전환되면서 기원전 1450년대에 집중적으로 폭력이 발생한 것은 (청동 무기가 매장된) '전몰자 무덤'으로 알 수 있는데, 이는 이곳의 평화주의적 배경(이란 단어를 만들 수 있다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궁전 크레테의 최후'라고 알려진 것은 정복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으며 (선형문자 B 서판의 언어와 문장으로 보았을 때) 침략자들은 그리스어를 하는 그리스 본토 사람들, 특히 펠로폰네소스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듯하다." "크노소스와 크레테의 정치적 전성기는 분명 선사 청동기시대였다. 그러나 암흑기와 상고기(각각 기원전 11~9세기와 기원전 7~6세기)의 크레테 역시 결코 완전한 문화적 공백 상태는 아니었다. 이 섬은 전통적으로 초기 폴리스 건설이 활발하였으며, 한편 이 섬의 또다른 전통은 입법자와 법의 땅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드레루스의 아고라와 기원전 7세기 말의 법이 새겨진 청동 판을 들 수 있다."(34-5)


3 미케나이


"'미노스' 문명이 평화로워 보였던 것, 최소한 내부적으로 조화로워 보였던 것과 달리 미케나이와 그리스 본토의 코린토스 지협(테바이, 이올코스, 필로스 등) 남쪽과 북쪽 미케나이 문명 중심지들의 성채에 기반을 둔 통치자들은 전쟁을 선호했고 큰 성벽(두께가 6미터에 달했다)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통치자들이 글을 읽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은 선형문자 B라고 알려진 원시적 관료제의 그리스 문자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어 문자를 썼다고는 하나 미케나이 문명은 기본적으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중심을 둔 중동 문화의 지방 거점이었다. 성채 입구의 인상적인 '사자문'은 히타이트의 하투샤를 연상시킨다. 또한 아트레우스(Atreus, 아가멤논의 아버지)의 보고(寶庫)나 아이기스투스(Aegisthus,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정인)의 내쌓기와 메쌓기로 만든 벌집형 무덤은 사후세계를 암시하여 이집트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40)


"청동기 이후 역사시대의 가난한 미케나이인들은 (호메로스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서사시 낭독을 지겹도록 들으면서 그들이 절실히 믿고 아가멤논 신전에 자주 찾아가기만 하면, 혹은 페르세우스에게 헌정물을 바치기만 하면 아가멤논의 기운이 그들에게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했다." "영광스러운 미래(혹은 다른 어떤 미래라도)를 향한 역사시대 미케나이인들의 희망은 '뱀 기둥'에 미케나이가 포함되면서 더욱 커졌다. 이 기둥은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함께 막아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비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독립적인 미케나이인들은 늘 스파르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웃한 아르고스(스파르테와 적대관계에 있었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기원전 468년에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를 전멸시켰고, 이 작은 폴리스는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46-7)


4 아르고스


"도시 아르고스는 미케나이로부터 거의 정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라리사(Larissa)와 아스피스(Aspis, '방패'라는 뜻)라는 두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그리스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온 곳이지만, 기원전 11세기 암흑기로부터 빠져나와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는 새로운 아르고스였다. 단지 지형학적·건축학적으로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의미에서도 새로웠다. 새롭게 진화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도리스인이라고 칭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중부에서 이주해왔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아르고스를 차지하여 펠로폰네소스의 세 거점 중 하나로 삼았다. 다른 두 곳은 스파르테와 메세네였다. 도리스인들은 남쪽으로 크레테까지 진출하였고(역사시대에 크노소스는 도리스계 도시가 되었는데 어쩌면 실제로 아르고스인들이 기초를 닦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에게해를 건너 동쪽으로 현재의 터키 서남부와 로도스 같은 그리스 섬까지 진출하였다."(51-2)


"도리스화란 같은 방언의 사용 외에도 같은 제도(세 지역은 똑같이 가상-친족 부족명을 사용하였다)와 종교 관습(아폴론을 위한 카르네이아Carneia 축제를 매년 열었다)을 말했다. 아르고스의 도리스인들은 같은 도리스계인 메세네(아르테미스)나 스파르테(아테나)와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 여신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기원전 8세기 아르고스인들의 확장에 따라 점차 아르고스 평원 대부분이 잠식되었고, 이들은 청동기시대의 주요 거점인 미케나이와 티린스가 포함된 이 아르골리스 지역의 실질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때때로 해안도시 아시네와 같은 이웃 도시의 정복이나 축출이 일어났으며, 이곳에는 모도시가 파견한 정착민들이 자리잡았다. 이는 그리스 내부 식민화의 한 형태로 아르고스의 해외 식민시 건설 필요성을 나타내었는데, 아르고스보다 훨씬 가난했던 내륙의 코린토스가 겪은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이주 필요성과는 대조된다."(54-5)


5 밀레토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로 불리던 지역(아나톨리아 서부, 즉 에게해 연안 중부)의 주요 도시였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그리스인들의 이주와 식민시 건설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 그 영향력이 넓게 퍼진 도시였다." "기원전 8세기 훨씬 전에도 밀레토스에는 사람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크레테에서 온 미노스인들과 그리스 본토의 미케나이인들이 이곳에 출몰하였다." "기원전 1210년에서 1190년까지 이 지역에 대변동이 일어난 후, 본토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2~11세기 동안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로 이주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흔히 '이오니아인의 이주'라고 부른다." "아나톨리아 해안의 정착민들과 그리스 본토의 에우보이아 사람들은 동방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알파벳,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살던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수학, 그리고 (기원전 6세기 전반 리디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화폐 등이 있다."(63-4)


"기원전 520년대 말 그리스인들은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어떻게 느꼈든 간에 조용히 다리우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20년 후에 이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리스인들은 에게해 연안에서 키프로스 섬까지 일제히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흔히 '이오니아 반란'이라고 한다."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6년(기원전 499~494년)이 걸렸다. 마지막 싸움은 밀레토스 근해 라데섬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도시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만한 것이 없었다. 다리우스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생존자들을 티그리스강 하구의 암페로 강제 이주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동료 이오니아인인 아테나이인들에게 밀레토스의 멸망은 여러 면에서 비극이었다." "밀레토스는 다른 도시(테바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파괴 이후에 꽤 일찍 재건되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재건된 도시는 아테나이 제국의 역사, 그리고 스파르테와 아테나이의 관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74-6)


6 마살리아


"이제는 '그리스 동부'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황금빛 서부'라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서쪽으로 이동하자, 이 지역은 시킬리아로부터 메시나해협을 지나 이탈리아 남부(마그나 그라이키아, 라틴어로 '대그리스')에 이르는 지역과 프랑스 남부, 스페인 동해안을 포함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미디(Midi)로, 어떤 이들에게는 프로방스 해안으로 알려진 곳이다." "프로방스 해안의 몇몇 도시들은 이름만 봐서는 그리스 기원임을 알 수 없다. 앙티브(Antibes)는 원래 안티폴리스('반대도시')였고, 니스(Nice)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을 딴 니카이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르세유인데, 옛 이름 마살리아는 그리스어가 아닌 페니키아어로 '정착지'라는 뜻이다. 기원전 600년경 밀레토스에서 탈레스가 명성을 떨치고 있을 무렵, 밀레토스와 함께 이오니아에 속해 있던 포카이아(현재 터키 서부의 포싸)의 그리스인 한 무리가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마르세유의 역사는 이 결정과 함께 시작된다."(80-2)


"마살리아는 놀랍도록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고 스페인 동북부의 엠포리온(현재의 암푸리아스) 같은 자도시를 건설할 만큼 성장하였다." "다양한 그리스산 상품들이 에게 해안으로부터 마살리아를 통해 내륙 원주민들에게 전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빅스 크라테르(Vix Krater)라고 불리는 커다란(높이 1.64미터, 무게 208킬로그램, 부피 1.1리터) 포도주 희석용 청동 항아리인데 기원전 530년경 스파르테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도주는 어디서 생산되었을까? 빅스 크라테르에 담겼을 희석한(혹은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살리아의 그리스인들이 그보다 한두 세대 전 프로방스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주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년부터 1500여 년간의 포도 생산은 그리스 농업의 원천적 특징이 된다." "마살리아는 포도주 무역 도시로 자리잡게 되자 주요 기착지로서의 핵심 상품으로 자체 상표를 내건 포도주 항아리를 생산하고 수출하였다."(85-8)


7 스파르테


"스파르테를 특별한 그리스 도시국가로 변화시키는 개혁은 리쿠르고스(Lycurgus, '늑대-일하는 자')라는 전설적인 입법자가 단행했다고 전해진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경제, 정치-군사, 사회 세 분야에 대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이는 새로 획득한 메세니아 땅에 관한 것이었는데, 모든 스파르테인은 최소 얼마간의 토지를 받았다(클라로스klaros, '몫'을 의미). 공동 소유지와 거기서 일할 헤일로테스들도 있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모든 스파르테인들이 전사 의회의 회원으로서 평등한 투표권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표가 아닌 함성으로 의결했고, 의회 위에는 30명의 연장자로 구성된 귀족주의 원로원(게루상Gerousia)이 존재했다. 두 명의 스파르테 왕(항상 동일한 두 귀족 가문에서 나왔다)은 은퇴하면 원로원 회원이 되었다." "스파르테의 사회구조는 군대와 완전하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스파르테 소년은 7세부터 중앙 도시국가의 주도 아래 공동으로 '교육받았다'."(98-101)


"기원전 8~7세기에 부상한 사프라테는 강한 전사 공동체였다. 그들의 힘과 8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그들의 영토는 그리스에 가장 컸다. 두번째인 시라쿠사이의 영토는 4000제곱킬로미터였다)는 그리스인을 헤일로테스, 즉 '포로'라고 부르며 반노예로 착취하고 스파르테 남성들에게 아주 어린(그렇다고 절대 연약하진 않았지만) 나이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시기는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상고기 내내 스파르테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테인들은 도시국가를 군사 기지화했다. 그 보상은 물론 매우 컸다. 스파르테는 기원전 7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4세기 초까지 단일 도시국가로는 그리스 전체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보병을 가졌으며, 기원전 480~479년에는 전 그리스와 서구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결코 이기적이라고도 비열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도시국가 자체는 '상고기적'이었으나, 이들로 인해 그리스 전체에 고전기가 꽃피게 되었다."(103, 107)


8 아테나이


"부유한 귀족이었던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아주 어려운 정치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이 싸움은 구식 복고주의 귀족과 솔론 자신과 같은 진보적 귀족, 그리고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계층 사람들과 아테나이의 가난한 시민들(솔론은 그의 시에서 이들을 데모스demos라고 불렀다) 사이에서 벌어졌다." "솔론의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제한적 권한 이양과 기원전 508/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더 급진적이고 실로 민주적인(데모크라티아는 '데모스의 권력'이라는 뜻이다) 권한 이양 사이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Pisistratus, 기원전 527년 사망)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참주 살해자'들에 의해 그의 동생이 죽은 지 4년 만인 기원전 510년에 타도당했다)의 참주제가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이 이룬 것은 솔론의 정치경제 개혁을 바탕으로 아테나이의 문화 통일과 증가하는 인구의 정치 참여 독려였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정치 지형 변화는 이들이 기반을 닦아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17-9)


"해안에서 8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와 있던 고전기 아테나이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져 번성하기 이전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복잡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도시는 세 도시가 하나로 통합된 형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아테니아가 '단순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정치 독립체로서의 아테나이, 즉 폴리스 아테나이가 있다. 이는 도심과 약 2400제곱킬로미터의 교외(코라)인 아티케(Attike, '아테나이인들의 땅'이라는 뜻)를 뜻한다." "둘째로 아크로폴리스, 즉 '높은 도시'가 있다. 때로는 그냥 '폴리스'로 불린 이곳은 상징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셋째로 아테나이는 그리스 폴리스 중 유일하게 영토 안에 페이라이에우스라는 제2의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민주정과 예술성, 철학적 고찰 등을 통해 '고전기' 그리스의 '황금기'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도시국가는 독립국가 '헬라스(Hellas)'의 영원한 수도가 되었다."(111-3, 134)


9 시라쿠사이


"시킬리아의 여러 도시에 정착한 그리스 이주민들 중 가장 성공한 부류는 시라쿠사이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시라쿠사이는 시킬리아의 그리스 도시 중 가장 크고 부유하며 강성한 도시로 성장했다. 영토는 모든 그리스 도시 중 두번째로 컸다. 스파르테계였던 도시민들은 대규모 원주민이었던 시켈(Sicel)족을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켜 킬리리(Cilyrii, 혹은 칼리키리Callicyrii)라고 불렀다. 시킬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시켈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밖에 그리스 이주민과 여러모로 유사했던 시킬리아 서쪽 끝의 페니키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를 건설했고, 그리스인들이 오기도 전에 스페인 동부와 사르데냐에 정착한 그들의 동족처럼 이미 도시 건설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이들이 건설한 도시로는 파노르모스(현재의 팔레르모)와 모티아(혹은 모지아) 등이 있다.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 정착민 사이의 전투들은 시킬리아 고전기 역사의 주요 사건을 이루며 섬의 운명을 좌우했다."(137-8, 142-3)


"시킬리아 민주주의의 뿌리를 시킬리아섬에서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란 아테나이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시라쿠사이에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아테나이로부터 들어온 외래문화였는데, 신기하게도 이 외래문물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빠르게 정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시라쿠사이와 아테나이는 처음엔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길을 갔다. 시라쿠사이는 더욱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갔고, 아테나이는 두 차례의 과두정 반동을 겪고 마침내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테에 패하고 말았다." "아테나이에서는 기원전 413년부터 근본적인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던 터였다. 과연 민주주의가 제국을 통치하고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 기원전 404년의 답은 분명히 '아니요'였다. 시라쿠사이 역시 군사적 실패 이전에 민주주의 세력이 치명적인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다. '민주주의 막간극'은 기원전 405년 카르타고의 위협이 높아지면서 끝나버렸다."(148, 151-2)


10 테바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의 신실한 동맹이 되면서 테바이는 권력을 한층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테바이는 과두정에 대한 스파르테의 지원이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에는 스파르테의 지원으로 테바이의 오랜 숙원이 달성되었다. 그들은 보이오티아 민족이던 플라타이아인들이 아테나이와의 동맹(이 동맹은 기원전 519년으로 거슬러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었으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의 군사 협력을 기억하는 것이었다)을 파기하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도시 자체를 정복해야 했다. 또한 이 목적이 달성된 지 몇 년 후 그들은 아테나이 쪽으로 기울어 있던 테스피아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정복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기원전 413~404년)에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테바이였다. 그들은 아테나이와 보이오티아 경계에 차린 스파르테 진영의 보호 아래 아테니아 외곽을 유린하였고, 아테나이의 은광에서 도주한 노예 수천 명을 싼값에 사들였다."(160-1)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의 훌륭한 지도력 덕분에 테바이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직접 메세네(기원전 369년)와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를 독립시키면서(기원전 368년) 쇠약해진 스파르테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테바이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기원전 368년에서 365년까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자가 테바이에 인질로 가택 연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기원전 360년대에 일시적으로 테바이의 힘이 강해지자 민주주의 아테나이와 과두주의 스파르테는 테바이의 위협에 대응하고자 다시 한번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 협력은 없었다. 기원전 362년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연합군은 만티네아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 자신은 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다." "테바이는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이후 기원전 316년부터 훨씬 작은 규모로 재건되었다."(164-5, 168)


11 알렉산드리아


"처음에는, 즉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동안과 사후 몇 년간은 알렉산드리아가 제국 속주의 새로운 수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와의 연줄을 개인적 목적이나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멤피스의 파라오라고 선언했다." "기원전 305년경,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성공적인 마케도니아 장군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프톨레마이오스(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속주 총독으로 지명하였다)는 자신이 이 지역의 '왕'이라 선언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심지어 왕조를 개창하기까지 했다. 그후로 약 300년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승계 왕국이 되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문화적·행정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는 새로운 박물관과 도서관 덕분에 알렉산드리아가 전 그리스 세계의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유클리드 학자들과 수학 천재들, 에라토스테네스, 아르키메데스, 칼리마코스, 테오크리토스 같은 지성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177-9)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기원전 30년에 독립 정치체로서의 운은 다했다 할지라도 지적·문화적 운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로마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에도 헬레니즘 시대 못지않은 지성인들이 있었다. 또다른 프톨레마이오스인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로 146~1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여성 수학자는 판드로시온으로, 아마도 처음으로 세제곱근을 만드는 기하학 구성을 발명한 인물일 것이다. 히파티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수학자 테온의 딸이었다. 히파티아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천문관측 장치])와 수중투시경(hydroscope)을 제대로 사용하였다. 그녀가 기억되는 이유는 똑똑한 두뇌나 수려한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안타깝게도 그녀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순교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415년 키릴 주교의 명을 받은 기독교 군중에게 이교도로서 살해당했다. '고전기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187, 190)


12 비잔티온


"비잔티온은 (기원전 688년 혹은 657년) 건설된 후 별다른 정치적 사건이 없다가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일부로 페르시아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비잔티온은 다행히도 반란의 주축이던 밀레토스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를 (또다른 배다리로) 건너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했을 때는 그들의 요구대로 병력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는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와 미칼레에서 그리스인들이 거둔 승리는 비잔티온 해방의 전조가 되었다. 스파르테가 아시아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동안 비잔티온이 동맹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테가 파우사니아스 장군을 소환하면서 아테나이가 페르시아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비잔티온은 아테나이의 많은 동맹국 중 하나가 되어 1년에 은 15탈란톤이라는 비싼 공납금을 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95-6)


"아테나이에 비잔티온이 중요했던 이유는 이 도시에 매년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크리미아 등의 흑토지대로부터 아테나이와 그 밖의 에게 해안 지역들로 밀과 주요 식료품을 실어 오는 배를 관리하고 세금을 부과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잔티온은 아테나이 제국 네트워크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미에서 그 직후까지(이때 스파르테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마침내 괜찮은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비잔티온이 가장 중요한 전쟁 목표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테인들의 승리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테나이 제국의 해체와 최대 300척에서 1200척까지 되던 엄청난 규모의 아테나이 함대가 감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테인들은 제국 자체엔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새롭게 확장한 에게해 제국이 작동하도록 외부에 하르모스트(harmost, '관리자')라는 사무소를 세웠다. 가장 중요한 관리들은 자연스럽게도 비잔티온에 자리잡았다."(196-7)


13 에필로그


"영어의 정치(politics)는 고대 그리스어의 중성 복수 형용사 폴리티카(politika)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폴리스와 연관된 일'(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속 용례가 가장 유명하다)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는 무대 중앙에서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앙으로(es meson)'라고 표현했다. 공적인 일은 그저 시민들의 걱정거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중앙으로' 모여 논의하고 논박했으며 옳든 그르든 그들이 공공선이라고 믿는 것, 도시와 시민의 공공 이해라고 믿는 것을 철저히 검토하였다. 물론 여성은 공동 정치 사업에서 의사 결정의 주체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노예와 비슷한 신분의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 안팎에서 일하며 도시 내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여가(스콜레skhole, 영어의 '학교school'의 유래)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테나이같이 급진적 민주정이 이루어지던 곳에서만 대부분의 가난한 남성 시민들이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2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동경제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7
미셸 배들리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경제학과 행동


"행동경제학은 우리의 결정이 비용·편익의 합리적 계산과 더불어 사회적·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사람이 (선택의 금전적 비용과 편익을 쉽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일종의 계산기이며 주위 사람들이 뭘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경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개개인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과 이를 떠받치는 제도의 실패 때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통 경제학자들은 제약에서 합리성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으나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이 초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의 한계에 주목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대체로는 합리성이 변화 가능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에 좌우된다고 인정한다. 좋은 정보를 접할 수 없을 때, 서둘러야 할 때, 인지 제약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경험할 때─이럴 때 우리는 시간과 정보가 충분한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내리지 않았을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12-6)


2 동기와 유인


"외적 동기는 우리 개개인의 바깥에 있는 유인과 동기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우리로 하여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도록 세상과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는 경우다. 그러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흔하고 강력한 외적 유인은 돈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외적 유인으로는 신체적 위협이 있다. 하지만 외적 동기는 비금전적 유인─이를테면 인정과 성공 같은 사회적 보상─에서 올 수도 있다. 임금 인상, 좋은 시험 성적, 상장과 부상, 남들의 인정 등은 모두 외적 보상이다. 내적 동기는 우리의 내적 목표와 태도가 미치는 영향을 일컫는다. 내적 반응은 이따금 우리가 노력하도록 독려한다. 우리는 외적 보상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직업적 자부심이든 의무감이든 대의에 대한 충성심이든 수수께끼를 푸는 즐거움이든 신체 활동의 쾌감이든, 우리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내적으로 동기가 부여되면 외적 유인은 없어도 된다."(26-7)


"유인과 동기는 내적(intrinsic)인지 외적(extrinsic)인지를 불문하고 우리의 직장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 직장인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적 영향과 외적 영향의 상호 작용이다. 외적 유인과 동기의 사례로는 우리가 받는 임금과 고용되었을 때 얻는 사회적 인정─특히, (의료계나 교육계처럼) 가치를 인정받는 직업일 경우─이 있다. 일에는 내적 동기도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우리는 도전을 즐기거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거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임금 인상이 노동자에게 노동자에게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금전적 혜택 때문만이 아니다. 좋은 대우가 직원의 신뢰와 충성에 미치는 영향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보상과 유인 때문이기도 하다."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는 금전 교환이 전부가 아니다. 충성, 신뢰, 보답 등을 비롯한 사회적·심리적 유인과 동인도 작용한다. 조지 애컬로프 연구진은 이를 일종의 '선물 교환(gift exchange)'이라 일컫는다."(35-7)


3 사회적 삶


"행동경제학에서 신뢰와 보답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공평한 결과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으며 남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면, 신뢰하고 보답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이 핵심 요소는 공정에 대한 선호를 남들과의 비교와 짝짓는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나거나 못난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불공평한 결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이 선호를 '불평등 회피(inequity aversion)'라고 부른다." "공정함의 선호는 자원봉사나 기부 같은 이타주의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베풀면 즐겁고 이따금 마음이 따스해지기 때문이다. 몇몇 실험에 따르면 이것이 언제나 순수한 이타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임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일 때도 있다."(44-5)


"사회적 본성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군중을 모방하고 따르려는 경향이다. 딴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말이 된다. 군중을 따르는 것은 합리적인 사회적 학습 장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충동적으로 군중을 따를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무심코─아마도 우리에게서 진화한 군집 본능을 따라─그렇게 한다." "군집 행동을 설명하는 한 가지 해석은 모든 결정을 백지 상태에서 내려야 할 때의 시간과 인지적 노력을 절약하게 해주는 빠른 의사 결정 도구─행동경제학자들이 어림짐작(heuristic,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 것─라는 것이다." "어림짐작의 문제는, 빠르고 편리하고 종종 충분히 훌륭하게 작동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인 행동 편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과 친구를 모방하는 것은 귀중한 사회적 정보를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군집 행동은 여러 어림짐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54-6, 63)


4 빠른 판단


"정보에 짓눌리면 빨리 결정하기가 힘들다. 이때 우리는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가 걸렸다고 말한다. 선택에 짓눌렸을 때에도 빠르고 정확하게 결정하기가 힘든데, 이것을 선택 과부하(choice overload)라 한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선택이 좋은 것이며 선택지가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들어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더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우리의 복리가 커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해서 결과가 나아지지는 않는 듯하다." "현대에는 선택 과부하의 문제가 유난히 심각하며 정보 과부하도 이를 부채질한다. 선택 과부하를 맞닥뜨리면 소비자는 빨리 결정을 내린다. 이를테면 제시된 모든 선택지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첫째 항목을 선택한다. 선택이 너무 복잡하면, 특히 눈에 보이고 즉각적인 이익이 없는 '지루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69-70)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특히, 서두를 때─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접근하고 끄집어내고 회상하기 쉬운 정보를 이용한다. 이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종종 현재 상태을 기준점으로 삼아 기존 상황에서 멀어지는 변화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과 친숙함 편향(familiarity bias)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하기도 하고, 사건을 현재 상황과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판단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판단은 결정이 우리를 현재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지게 할 것인가를 바탕으로 삼는다. 새 일자리를 찾거나 집을 팔 때 적정 임금이나 적정 주택 가격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지금 벌고 있는 금액, 이 집을 샀을 때 지불한 가격, 이웃이 자기집을 팔면서 받은 가격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문제는 이 판단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힘과 거의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73, 84)


5 위험이 따르는 선택


"기대 효용 이론가들은 사람들이 결정에 관련되고 가용한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활용한다고 가정한다. 또한 우리가 비교적 복잡한 수학 도구를 이용하여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의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사람들이 위험이 따르는 상황에서 선택할 때 종종 변덕을 부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명한 행동 역설 중 하나가 바로 알레 역설(Allais Paradox)이다. 알레 역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험이 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안정적이고 꾸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결과가 확실한 선택지를 위험이 따르는 일련의 선택지와 함께 제시하면 사람들은 확실한 결과를 선호한다(어떤 전망들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지만).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이 효과를 확실성 효과(certainty effect)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운을 시험하고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하지만, 확실한 결과를 제시받으면 더 높은 보상을 위해 추가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94-5, 99)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손실을 피하려 할 때는 위험을 더 감수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도박할 때는 위험을 덜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손실에 직면했을 때 위험 감수를 선호하는 현상이 이익의 맥락에서 위험 회피를 선호하는 현상의 거울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영 효과(reflection effect)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고립 효과(isolation effect)라는 셋째 효과도 발견했다. 이것은 제시된 대안 중에서 중요한 요소를 무시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모든 관련 정보를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보 조각들을 떼어내 판단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통찰을 종합한 '전망 이론 가치 함수'로 우리의 주관적 가치 인식을 표현한다." "일정한 양의 손실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손상시키는 정도는 같은 양의 이득이 우리가 인식하는 가치를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훨씬 크다. 100파운드를 얻는 기쁨보다는 100파운드를 읽는 속상함이 훨씬 큰 법이다."(104, 107, 114-6)


6 시간


"표준 경제학에서는 어떤 사람이 오늘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미래의 같은 기간에 대해서도 같은 조바심을 나타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시간 일관성(time consistency)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에서 얻은 증거를 토대로 표준 경제학적 접근법에서 가정하는 시간 선호의 일관성이 사람(또는 그밖의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인내심이 '불비례적으로(disproportionately)' 약하지만, 미래를 계획할 때는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 이것이 시간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이다. 즉, 지연된 결과에 대한 선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시간 선호는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편향(present bias)을 겪는데─나중의 큰 보상보다 당장의 작은 보상을 불비례적으로 선호한다─이것은 내재된 시간 비일관성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한다."(123-5)


"우리가 먼 미래를 계획할 때 더 인내심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콧 릭과 조지 로웬스타인은 이것을 편익 대 비용의 상대적 실질성(tangibility)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오늘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다. 유혹을 거부하는 데는 실질적인 단기적 비용이 들며,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다이어트, 운동, 금연 등 예는 수없이 많다. 초콜릿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즉각적인 실질적 쾌락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할 때처럼 당장 번거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미래의 목표는 멀고 덜 실질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오늘 자제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누구나 한 가지씩 미루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헬스장에 가는 일을 미룬다. 진득한 자아는 미래에 운동 부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성급한 자아는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소파에 앉아 초콜릿칩을 먹는 것을 선호한다. 이로 인한 순(純)효과는 어느 자아가 지배적인지에 달렸다."(127-9)


7 성격, 기분, 감정


"성격은 많은 경제적·재무적 의사 결정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의사 결정을 하려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가 많은데, 성격 특질은 인지 능력을 결정하며 인지를 통해 선택을 좌우한다. 이로 인해 학업 성취, 직무 성과, 사회적 기술이 결정되기에 그 결과는 종종 일생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성격 특질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믿음직한 동료를 대체로 선호한다. 파티에서는 유머 감각이 있는지 여부가 관심사일 것이다. 성격 특질에 맞는 직업도 다르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찾아가고 싶은 의사는 공감 능력이 있고 인지 능력이 뛰어나서 증상과 진단을 쉽고 정확하게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레스토랑에 갈 때 우리가 원하는 주방장은 기발하고 엉뚱한 사람이다. 심지어 주방장이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울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거라 맏기도 한다. 성마르고 창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의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151-2)


"섬(insula)은 통증, 굶주림, 목마름, 분노, 혐오 같은 부정적 정서 상태를 처리한다. 변연계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뇌 속 깊숙한 곳에 들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섬은 충동적이고 자동적인 의사 결정 유형에 관여한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섬은 컴퓨터의 부당한 제안보다는 사람의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심하게 활성화되었으며, 제안이 부당할수록 섬 반응이 커졌다. 참가자들의 섬 활성화에는 예측력도 있었다. 섬이 많이 활성화되는 참가자들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비율이 훨씬 컸다. 산피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부당한 제안에 반응하는 기전이 악취에 반응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대우는 분노와 더불어 '도덕적' 유형의 혐오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전전두피질은 나중에 수용된 부당한 제안에 대해 더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며 이를 거부하려는 정서적 충동을 극복하려면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68)


8 거시경제에서의 행동


"기존 거시경제학은 모든 노동자와 모든 기업이 같고 결정도 똑같은 방식으로 내린다고 가정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완벽히 합리적이기에, 어떤 사람들이 거시경제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묘사하는 일도 비교적 수월하다. 표준 거시경제학 이론에서 묘사하는 것은 한 개인─대표적 행위자(representative agent)─으로, 그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많은 표준 경제학 이론에서 대표적 행위자는 모든 기업이나 모든 노동자의 행동을 대표한다. 대표적 행위자의 행동을 곱하면 거시경제 모형이 된다." "하지만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대표적 행위자라는 수단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 있게 종합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성격과 감정의 차이, 행위자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행동경제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에는 대표적 행위자가 단 한 명도 없다.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그 대신 총체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184-5)


"행동거시경제학자들은 금융과 금융 불안정에 미치는 영향에도 주목한다. 역사에 기록된 투기적 거품들은 냉철한 합리적 행위자가 자산 매입의 상대적 비용과 편익을 평가할 때 신중한 수학적 계산을 한다는 표준 경제학의 시각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먼 민스키는 이러한 금융 불안정을 설명하기 위해 신용 순환 이론을 발전시켰다. 케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취약한 금융 체계와 이 취약성이 거시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민스키의 분석에서는 정서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스키는 공포와 공황의 순환이 경기순환을 추동하고 금융 체계의 취약함이 극단적 변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기순환은 처음에 투기적 도취와 기업가의 지나친 낙관주의라는 물결에 휩쓸린다. 은행은 대출을 지나치게 늘리고 기업은 차입을 지나치게 늘린다. 결국 이 호황에 탄탄한 토대가 없음을 누군가 깨닫고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고, 야단스럽게 불황 국면이 찾아온다."(186-8)


9 경제적 행동과 공공 정책


"전통적으로 조세와 보조금은 정부와 정책 입안자가 시장의 기능을 개선하려고 이용하는 주된 정책 수단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례로 흡연이 있다. 흡연이 공중 보건 체계를 압박하여 납세자에게 비용을 발생시키면 담배에 과세하는 것이 유익하다. 흡연의 유인을 줄일 뿐 아니라 정부가 보건 체계에 투여할 세입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특정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하고 있다면 보조금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경제 활동을 증진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위적 시장 시스템은 '시장 부재(missing market)'를 대체한다. 오염은 단순한 사례다. 기업이 기업이 공기나 물을 오염시킬 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기업은 공짜 오염 허가를 얻은 셈이 된다. 오염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도 보상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에 오염에 대한 시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로널드 코스의 통찰에 근거한 해결책은 인위적 시장(배출권 거래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99-200)


"행동공공정책은 시장 실패에 주목하기보다는 행동 변화(behaviour change)에 초점을 맞춰 사람들을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의사 결정으로 유도하여 사람들이 일상적인 결정과 선택을 내리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넛지』의 저자들인 세일러와 선스타인은 정책 입안자들이 효과적인 정책 수단을 설계하려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어림짐작과 편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의사 결정 구조를 재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을 바탕으로 두 사람은 이른바 우리의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를 규명하면서, 넛지를 일종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라고 표현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단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 점화와 넛지를 설계하여 사람들의 결정을 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좋은' 결정이 강화되고 '나쁜' 결정이 억제되도록 자주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이 모든 전략은 행동공공정책 입안자의 도구로 쓰인다."(20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과 피 - 정치의 이해
라종일 지음 / 이조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정치의 두 가지 의미


"우리가 자주 쓰는 '정치'라는 말에는 크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뜻이 있습니다. 일단 하나는 '큰 의미의 정치', 다른 하나는 '작은 의미의 정치'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먼저 '큰 의미의 정치'는 사람이 함께 모여 살 수 있게 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산다는 조건을 깨뜨리지 않고, 일정한 규범과 규칙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일정한 목적을 공유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큰 의미의 정치입니다. '작은 의미의 정치'는 공동생활 내에서 자기 자신이나 집단이 더 많은 가치를 획득하고 향유하기 위한 수단과 능력, 활동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권력에는 한편으로 사람들을 뭉치게 하고 협력해서 공동의 사업을 이루게 하는 '물의 이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며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돌보지 않는 '피의 논리'도 있습니다." "정치의 두 가지 의미, 즉 '큰 의미의 정치'와 '작은 의미의 정치'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입니다."(31-3)


1장 정치의 시작과 양날의 검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현인 프로타고라스가 아테네를 방문하자 그를 찾아가 평소에 알고 싶었던 것을 물었습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정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신화를 매개로 정치의 핵심적인 진실을 설명했습니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진실로서 사람은 함께 모여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사회는 언제든 무질서 혹은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즉 큰 정치의 실패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으려면 누구나 인정하고 지킬 수 있는 일정한 원칙과 규범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규범은 일부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프로타고라스는 '양심'과 '정의'를 그 비결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양심'과 '정의'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는 점일 것입니다."(43, 47)


"서양은 근대의 전개 와중에 많은 불행한 일을 겪고 또 다른 세계를 상대로 사악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 과정에서 독특하면서도 의미 있는 여러 정치적 실험을 해 왔습니다. 간단히 말해 근대 서양에서는 원래 함께 어울려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족이나 언어, 문화, 종교 등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근대 이전에도 큰 제국을 건설하여 여러 민족이 하나의 정치 질서 안에 함께 산 일이 있습니다. 다만 제국이 붕괴하면 그런 질서도 함께 무너져 버렸지요." "국민국가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난관은 이념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갈등 관계의 이념적 집단들도 점차 주어진 정치 질서의 틀 안에서 공동의 법과 규범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즉 국민국가는 인종적 차이, 종교적 갈등, 이념적 충돌 등을 같은 정치 질서 안에 수용하여 사람들을 같은 시민이자 국민으로 살게 하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49-50)


"물리적 폭력이 권력의 기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본질적으로 더 강하게 해주는 것은 설득입니다. 강자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육체적인 힘 외에 자기 나름의 '양심'과 '정의'를 내세워 '설득'을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강자가 이렇게 자기 권력의 이유를 구축하면서 실제 현실을 그런 말과 가깝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득'은 한편으로 강자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시켜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작됩니다. 이제 권력은 타고난 육체적 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를 따지는 '말'과 '상징'의 조작을 통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기존 권력의 반대편에 있는 구성원과 세력 역시 이제는 말을 통해 반대하고 자신의 이해를 추구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언어가 발달하고 의식(儀式)이나 상징 등 문명의 요소들이 속속 고안되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지요."(58-60)


"모든 정치 현실은 부분적으로 '폭정'의 요소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소수든 다수든 일정 수의 사람에게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혹은 그 사회의 지배 권력이 항상 불의한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그 자체로 현실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존재할 것이며, 이 또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권력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계에서 힘과 술수만으로 권력을 지킬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권력은 끊임없이 자신을 합법적으로 보이도록 스스로를 겉치장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치 이론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정치 이론은, 권력의 '설득'이 그랬듯이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정치 이론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권력을 정당화해 줍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 자의적이고 폭정적인 면을 제한하고 순화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권력은 스스로 정치 이론과 큰 간극이 없어 '보이도록', 또는 정치 이론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64-5)


2장 문명과 자유 그리고 신


"루소의 말처럼 사람들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모여 살기로 했고 문명을 이룩했지만 동시에 모두가 그 문명의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도시에 모여 사는 동물'인 한 공상적인 자연 상태와 그 속의 자유는 그저 환상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문명이 제공하는 혜택 덕분일 것입니다. 설령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를 가정하더라도 그 속에서 혼자 사는 자연인의 가장 큰 관심은 어떤 자유의 만끽 같은 것이라기보다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발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정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즉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명제에 부딪혀 나타나는 어려움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현대 문명이 초래하는 소외나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는 물론 존재하고 또 중요하지만 이것은 다른 차원에 속하는 문제입니다."(80-1)


"그런데 집단생활 과정에서 사람을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일이 등장합니다. 신의 등장입니다." "집단의 일을 기획하고 주관하는 지도자의 경우에는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초인적인 능력과, 그 능력의 사용에 관한 초월적인 정당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집단의 윤리는 개인의 윤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개인이라면 죄의식을 느낄 잘못된 행동이 집단의 일원으로서는 정당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에 기반해 지도자는 모든 면에서 개인으로서의 상식적인 제약을 초탈하는 정치를 경험하고 그런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서 초자연적 혹은 초인간적 신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이나 종교가 오로지 인간의 집단생활과 관련해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른 설명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권력을 중심으로 이룩한 집단의 성취가 신에 대한 영감을 구체화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82-4)


"때로는 정치가 종교의 대안이 됩니다. 저는 마키아벨리 같은 이의 저서를 읽을 때마다 신의 영광에 대비되는 사람의 영광과 더불어 정치 권력의 위대함을 되새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신의 영광을 향한 사람의 도전에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결집되고 축적된 능력, 즉 정치가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후에도 사람들은 새로운 바벨탑을 지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진실을 향한 작품을 통해, 학자는 미지를 밝히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다수 사람은 정치, 특히나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대혁명을 통해 신의 영역을 향한 도전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이제 실패담을 넘어서 현대인의 정신을 일깨우는 예술적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소련 혁명, 중국 혁명 등도 모두 바벨탑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모진 좌절을 동반하고 행복한 결말이 보장되지도 않지만 사람들은 정치와 함께 초월적인 어떤 일을 꿈꿉니다."(91)


3장 적과 동지 그리고 동반자


"적이 있으려면 먼저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합니다. 루소가 동경한 자연 상태는 공상에 가까운 것이고, 현실에서 사람들은 괴롭지만 한편으로 어쩔 수 없는 근본적인 결정을 먼저 내려야 합니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결정 말이지요. 즉 '함께 살아간다'라는 '큰 정치'가 있고 나서 그 안에 '작은 정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작은 정치'의 영역 안에서, 집단 안에서 싸우고 또 집단 바깥의 존재와 싸우는 것입니다. 적은 정치를 전제한 뒤에 있는 것입니다." "작은 정치나 적, 그리고 투쟁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외부 적과의 투쟁은 내부적으로 구성원 사이에 연대감과 동료 의식을 높여 주고, 그에 따라 구성원은 투쟁에 임하여 단결하고 때로는 자발적인 자기희생도 하게 됩니다." "내부 적과의 갈등이나 각축도 질서의 수준을 높이거나 더 고차원적인 사고와 언어의 발달을 촉진하여 진일보한 문명의 발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은 함께 살아간다고 하는 큰 정치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104-5)


"갈등은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방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는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엄마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갈등의 첫 발단입니다. 그다음은 자신과 타인의 이해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즉 차이를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이 '차이'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상대방의 이해가 대립되는 단계에 이르면 드디어 적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이 적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상대방의 손해가 자신의 이득이 되고 자신의 손해가 상대방의 이득이 되는 모순의 단계에 이릅니다. 여기서 관계가 한 단계 더 악화되면 제가 '초모순'이라고 부르는 단계가 됩니다.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상대방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단계입니다." "정치의 본령은 갈등이 이렇게 높은 '모순' 혹은 '초모순'의 차원으로 악화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나아가 가능한 한 이 갈등을 집단이 한 단계 더 나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동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107-8)


"1941년 1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후일 '네 가지 자유'로 알려진 연설을 행하였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말 그대로 네 가지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우리의 주제인 '정치'와 관련해서 이 연설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이 연설은 사고의 차원에서 처음으로, 적을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인종이 아닌 보편적, 추상적 개념에 따라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의 연설에 따르면, 인류의 공통된 적은 다른 민족이나 이웃 나라 혹은 어떤 인간 집단이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것, 즉 추상적 개념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이 인류 공통의 적입니다. 또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습, 제도, 이념, 권력 등이 우리의 적입니다. 신앙의 자유도 마찬가지겠지요. 다른 신앙을 악마화하는 근본주의적 종교나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 그리고 우리 신변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적입니다."(109-10)


"19세기를 통해 스포츠에서 일어난 큰 변화는 이른바 '유혈 스포츠'를 지양하고, 점차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선수(혹은 동물)에게 잔혹한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투기를 새로운 차원, 즉 스포츠로 고양시킨 것인데, 이를 흔히 '체육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즉 승패만이 중요한 폭력적이고 사행심이 동반된 과거의 스포츠와 달리 인격의 도야, 용기, 인내 혹은 규칙을 지키는 공정한 경쟁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상대방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타도해야 하는 적이 아니라, 훌륭한 경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파트너)입니다." "관중에게도 새로운 역할이 부여됩니다. 사실 스포츠 경기에서 관중은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닙니다. 이들은 제한된 차원이지만, 경기와 선수들에 대한 일종의 심판 혹은 평론가 역할도 합니다. 즉 국민은 정치가가 권력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정치의 장에서 행위자로, 심판자로, 그리고 관중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119-22)


4장 신념, 신앙, 이념


"어쩌면 우리는 이념을 세속적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념을 신뢰한다면 자유롭고 합리적인 토론을 지향할 법한데, 현실 정치에서는 이념의 힘보다 오히려 권력에 매몰되어 강제와 폭력, 일방적인 학습의 강요를 통해 이념적 '진리'를 실현하려고 하지요. 이 점에서는 합리적인 맑시즘이나 비합리적인 파시즘, '올바른' 신앙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이념을 버리고 다른 이념을 받아들일 때 그 모습은 합리적 토론이나 사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앙을 받아들이는 '개종'과 유사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다른 유사점도 있습니다. 신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념의 경우에도 이를 '믿는'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초기에는 어느 정도 그 믿음에 충실한 이상적인 통치가 시도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신앙과 마찬가지로, 이념도 권력의 논리, 즉 그것의 남용과 부패, 그리고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양상을 드러내고 맙니다."(133-5)


5장 내 안의 세계, 세계 안의 나


"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은 인도에 적잖은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리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입헌국의 실현이라는 야심 찬 정치적 기획이 있었는데, 인도가 그 기획을 시험할 적절한 땅으로 보였지요. 많은 영국인이 이런 목적으로 인도에 건너가서 식민지 통치에 임했습니다. 영국이나 유럽은 기존의 입법 체계나 전통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번거로움이 많았던 반면, 인도는 그런 것이 없어서 마치 '백지(tabula rasa)'처럼 자기들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쌓인 문명과 문화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백지'라고, 쉽게 지우고 쉽게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인식이 식민지 주민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닙니다. 본국의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도 그러한 인식 아래 선거권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집단은 문명화된 집단이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154-5)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데는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자아 형성기에 습득한 관념이나 습관을 버리기 어렵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기존의 세계에 남아 있는 편이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역시 정치에 있습니다. 기성 권력은 구성원을 다른 세계로부터 차단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합니다. 그래서 편향된 선전과 설득을 실시하고, 적절한 적대감을 조성해 구성원을 에워쌉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는 너무나 좁아졌습니다. 또 인류가 직면한 여러 시급한 문제들 중에는 어느 한 집단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게 많고 공동의 대응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는 여전히 순리대로 흐르는 물의 이치가 아니라 역류도 하는 피의 이치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의 작은 점에 불과한 이 작은 지구에서 다시 더 작은 세계들로 갈라져 피의 이치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165)


6장 축복과 저주 - 권력의 수수께끼


"어떤 집단이 성립하여 해체되지 않고 공동의 목표를 가진 집단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행위와 결정이 마비되지 않게 해줄' 권력이 필요합니다. 집단이 있으면 정치가 있고, 정치가 있으면 권력이 있습니다." "집단이 어떤 시기에 특정한 목적에 합의하고 또 이를 위한 노력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합니다. 권력의 안정성이나 확장 여부는 집단의 성취 그리고 구성원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능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권력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폭력입니다. 폭력에는 물리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고, 따라서 권력을 분석할 때 관건은 권력의 폭력적인 요소가 어떤 형태로 또 어느 정도로 작용하는가입니다. 권력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집단의 목표를 달성한 후 발생하는 성취 혹은 가치를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분배 과정 및 결과가 구성원이 올바르다고 승복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인데, 바로 여기서 물의 이치와 피의 이치가 가장 적나라하게 얽힙니다."(170-1)


"권력과 폭력의 관계는 몇 단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정도가 가장 큰 것은 이른바 '경찰국가'라고 부르는 경우입니다." "그다음은 '법치 국가'입니다. 분쟁은 법정에서 해결되고, 법정의 결정은 강제력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이를 두고 '소송 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공동체적 질서'의 경우가 있습니다. 질서 유지가 경찰의 개입이나 법에 의한 것보다 사람들 사이의 암묵적인 이해, 전통, 관행, 예절 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입니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역시 폭력의 개입이 최소한으로 국한되며 정교한 의식(ritual) 등에 의지하여 통치를 하는 예도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극장 국가'라고 부르는 경우입니다. 한편 '문화적인 통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사회의 구성원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적인 일에 스스로 '기쁘게' 참여합니다. 이 경우에도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폭력의 요소는 잠재해 있습니다."(187-9)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는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부패하는 문제의 이면에는 사람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집단의 결집된 힘은 개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차원의 위력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힘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의 정신은 이미 일반 사람들의 차원을 벗어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인격 수양이나 도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 이상의 문제입니다." "권력의 남용과 오용, 그리고 부패는 피하기 어렵다기보다 오히려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중 가장 경계해야 할 한 가지 형태는 이상주의와 권력의 결합입니다." "'대의'에 입각한 자신들의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용서 없이 탄압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집권의 이유, 즉 권력의 본래 목적은 상실된 채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집단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집단이 되는 상황이 초래됩니다. 흔한 일이지요."(191-4)


7장 정의와 정의의 다툼?


"국가란 매우 높은 수준의 추상체입니다. 국가는 하나의 단일 의사가 아니라 수많은 생각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합체입니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정치 공동체로서 국민에게 공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동시에 고향과 같은 애착의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실현하는 터전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애국심은 이미 국가를 이룬 사람들보다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신생 독립국가의 국민에게서 더 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국심은 근대 세계에서 매우 강렬한 대중적인 열정이었습니다. 근대 국가는 이런 대중의 열정에 기초해서 성립했지요." "한편 국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에게 국가란 단지 특정한 집단 혹은 계급이 인민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런 근본적인 비판이 국가를 이론적으로 버티게 해주는 근대 세계의 근본 원리, 즉 이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도 염두에 둘 만합니다."(207-8)


"헤겔은 국가 간의 전쟁을 일러 '정의와 정의의 싸움'이라면서, 전쟁이 한 국가의 건강 상태를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현실에서 국가는 이성의 최고 발현 단계이므로 국가가 '최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경우, 그런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정할 권위는 없는 셈입니다. 전쟁이 특정한 국가의 건강을 보여 준다는 말은 전쟁 자체를 이상화하는 군국주의적인 뜻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질병에 잘 대처할 수 있듯이, 정신과 육체 모든 면에서 튼튼한 국가가 명운을 건 폭력 대 폭력의 대결, 전쟁이라는 질병에 더 잘 대처하리라는 이야기였지요. 한편 전쟁이 일어나면, 국민 개개인은 자신의 운명이 전체 즉 국가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국가의 명운에 온몸을 바치기도 합니다." "이는 파시스트나 군국주의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헤겔의 말은 이처럼 학교 연구실을 벗어나 전쟁이 일어나는 현실과 맞물리게 되면, 애초 의도와 달리 엄청난 괴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212-3)


8장 물과 피 그리고 사람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가 잘 구비되어 있고 그것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고 믿는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조차도 권력의 오작동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오늘날 주요 국가들이 축적한 무기의 위력을 떠올리면, 권력의 불안정성 때문에 전 세계가 한순간에 파멸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이란 게 의외로 소박한 데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한 사람, 자기 소신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한 명 한 명이 전 인류 차원의 엄청난 파국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물론 언제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하리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들이 반드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사회의 권력이란 근본적으로 '물'보다는 '피의 길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238-9)


"'위대한 지도자'는 온갖 좋은 말로 그의 권력을 정당화합니다. 자신이야말로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고 행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적임자라고 주장합니다. 때로 그것은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우리는 피의 길을 내다보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속에는 물도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물의 이치, 즉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동시에 언제 칼을 휘두를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권력은 그 작용에 관한 정보가 상당한 정도로 일반에게 공개되어야 하며 제도적으로 견제되고 제어되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양한 도덕적 규범에 의해서도 제어되어야 합니다." "정치란 결국 사람의 영역입니다. 사람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고 중요한 희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명분으로라도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교류를 막는 것을 이 시대의 '인류의 적'으로 상정해도 될 것입니다."(240-1)


후기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8
벤체 나너이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미학을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술가와 음악가, 하물며 철학자들까지. 이것은 미학의 대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며 그런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미학의 영역은, 고급·저급에 관계없이 예술의 영역보다 훨씬 넓으며 우리가 살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것을 아우른다." "미학은 어느 예술품이 훌륭한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경험이 가치 있는지, 가령 거리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아니면 연주회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험이 당신에게 가치 있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경험은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적 쾌감을 얻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미학은 어느 경험이 용인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휴대용 도감이 아니다. 미적 쾌감을 찾도록 안내해주는 지도도 아니다. 미학은 가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석하는 방편이다. 미학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10-11)


2 섹스와 마약, 로큰롤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경험은 어찌 보면 각양각색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경험뿐 아니라 유튜브에서 '극장골' 장면 모음을 보거나 신고 나갈 구두를 고르는 경험, 커피 메이커를 조리대 어디에 둘지를 결정하는 경험도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모든 경험의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서도 안 된다. 철학자들은 예술에 대한 경험을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흥분의 경험과 (또 '로큰롤rock 'n' roll'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대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것과 같은 쾌락 경험 일반과도) 곧잘 구분한다. 이런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우리는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 사이에 어떻게든 선을 그어 섹스와 마약은 배제하고 헤어스타일과 음악은 용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미학에 접근하는 기존 방법들을 우리가 살펴보면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18-9)


"미학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통념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다룬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어떤 것은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미학은 우리가 그것들을 구분하게 도와주고, 나아가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용실 접근법'이라고 부르는데, 미용 산업에서는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지의 개념이 상당히 명확하기 때문이다." "미용실 접근법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미적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다. 하지만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경험, 로큰롤의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경험들은 미적으로 여겨질 수 없다." "미용실 접근법의 진짜 문제는 고상한 척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런 경계선을 긋는다는 사실 자체다. 아름다움은 시대와 맥락, 관찰자가 바뀌어도 늘 한결같은 대상의 특성이 아니라는 말이다."(20-1)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의 차이를 따질 때 자주 등장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즐거움이다. 요컨대 미학은 즐거움을 다룬다." "심리학자는 즐거움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중 첫째는 불쾌한 것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안도의 즐거움'이다. 안도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불쾌한 상황이 끝났을 때의 즐거움은 안도의 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안도의 즐거움은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그 일을 더 하도록 북돋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북돋는 즐거움'은 지금 하는 일을 우리가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런 즐거움은 안도의 즐거움과 달리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이것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어떤 성적 활동이나 마약을 통한 활동은 북돋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섹스와 마약을 무차별로 거부하고 그것들을 미적 활동이라는 엘리트 범주에서 몰아낼 수 없다."(25-7)


"미적 영역을 규정하는 셋째 방법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요컨대 미적 경험은 곧 감정 경험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감정이 수반하는가? 미적 참여를 할 때 촉발하는 감정은 모두 늘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에 참여하고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인가?" "미적 참여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가령 그랜드캐니언의 경치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대한 미적 경험은 각기 매우 다른 감정을 수반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단 하나의 두루뭉술한 감정을 찾겠다는 것은 결국 미학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은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미적 참여가 꼭 감정적이기만 할까?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의 미적 경험을 〈사고나 감정 없이 표류하면서 내 감각에만 주목〉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감정이 뒤서는 친숙한 한 형태의 미적 참여를 가리키는 듯하다. 적어도 이떤 경우의 미적 경험에서는 감각이 감정에 앞선다."(29-33)


"수전 손택은 미적 경험을 초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뿐 아니라 분노와 찬동, 나아가 현실적 관심사로부터 초연함, 이것은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을 구분해줄 마지막 유력 후보로, 미적 참여가 (단지 미적 쾌감) '그 자체를 목적'하는 참여임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이루려고 그 활동을 하는가, 아니면 오직 그 활동 자체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가? 문학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다른 어떤 목적(시험 통과)을 이루려고 어떤 활동(소설 읽기)을 하는 것이다. 반면 단지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이 활동은 미적 영역에 더 가깝다. 하지만 미적 경험은 문학 수업 때문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순전히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데도 그 활동에 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참여가 덜 미적일 수밖에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중도의 사례들은 '그 자체를 목적하는 것'이 미학의 성배(聖杯)가 아님을 보여준다."(33-5)


3 경험과 주목


"미적인 모든 것의 공통성은 아주 단순한 데 있다. 바로 주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약을 통한 환각이나 성적 흥분을 경험할 때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걸작을 응시할 때라고 해서 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술품을 감상할 때 으레 예술품의 일부 특성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가령 그림을 볼 때 물감의 균열은 무시하고 그 밖의 표면적 특성에만 주목한다. 균열은 고려 대상에서 배제한다. 바로크 시대에 재건축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교회를 볼 때는 그 중세적 구조를 완상하기 위해 바로크적 요소는 무시하려고 할 것이다. 이 또한 예술품의 특성 일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품의 어떤 특성을 주목해야 하고, 어떤 특성을 무시해도 되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배제해도 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정답이나 손쉬운 방법은 없다. 미적 향유의 성패는 주목에 달렸다." "우리는 자신이 미적 참여를 할 때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주목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42, 50-1)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고 해서 미적 경험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좋은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을 해체하지 못해 초조해한다. 폭탄의 어느 부분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때 본드는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대한 주목은 자유롭고 제한이 없어야 한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 해체 방법을 찾으려고 폭탄의 이쪽저쪽을 굉장히 집중해서 주목한다. 본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본드는 여러 특성에 주목하지만 그 모든 특성에 대한 그의 주목은 극도로 예민하다.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이와 정반대 방식으로 주목한다. 특정한 어떤 것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마주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풍경(화)의 다양한 특성에 주목하지만 어떤 개별적 특성이나 일단의 특성에도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것이다."(58-9)


"우리가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으로 주목을 분산할 때, 단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나는 이런 주목 방식을 '제한 없는 주목'이라고 부르겠다. 고정된 주목은 결국 심신을 지치게 한다. 반면 제한 없는 주목은 정신을, 적어도 지각계(知覺界)를 이완하는 휴식과 같다. 몸이 근력 운동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듯 지각계도 고정된 주목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 "미적 경험이 지각계의 휴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각계에 무리가 가면 미적 경험도 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일 뿐이다. 제한 없는 주목은 특별하다. 제한 없이 주목할 때 우리는 한 그림 속의 무관해 보이는 두 형태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독립된 두 멜로디가 한 곡에서 멋진 대비를 이루어나가는 방식도 추적할 수 있다. 또 한 요리에 들어간 재료들의 차이점이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이런 주목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60-1)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보는 대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 질(質)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하는데 이 점이 중요하다." "권위에 한번 호소해볼까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와 매우 유사한 견지에서 미적 경험을 묘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참된 경험은 현실과의 접촉을 줄이는 동시에 그 접촉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는 데 있다.〉 여기서 경험 대상과의 접촉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경험 대상과 경험 질의 관계에 대한 주목이다." "제한 없고 통제받지 않는 주목이 중요한 이유 하나는 우리가 지각 대상의 특성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 특성에도 자유롭게 주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힘들여 등산길에 오른 당신은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발아래 펼쳐진 들판과 강 등 전망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전망에만 주목할 것 같았으면 아까운 시간을 들여 등산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당신은 성취감에 젖은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할 것이다."(65-7)


"산스크리트 미학에서 예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모든 감각 양상에 몰두하는 다중양상의 경험이다. 산스크리트 미학의 핵심 개념인 라사(Rasa)에서는 미적 주목을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 경험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꼽는다." "미적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바로 주목 방식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아름답게 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주목이다. 그런데 주목은 감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를 주목함'에 초점을 맞춘 견해에서 초연함과 제한 없음이 미적 영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배웠으며, 그 중요성을 금지 구역이 거의 없는 자유롭고 제한 없는 주목의 견지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 "당신이 먹고 싶어서 토마토를 바라보는 경우라면, 토마토 자체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미적 경험을 하는 경우라면 당신은 토마토뿐 아니라 그 토마토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따라서 미적 경험은 투명하지 않다."(68-70)


4 미학과 나


"'서양' 미학 대부분은 박식한 미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적 판단은 (보통은 스스로, 때로는 타자에게) 특정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우아하다, 흉하다, 역겹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적 참여 대부분은 전혀 이와 같지 않다." "우리가 미적 판단을 내리는 데서 (가령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의 순위를 SNS에 게시하는 데서) 어떤 즐거움을 얻는다면, 이 즐거움은 판단을 공유하는 것과 더 관계있지 실제로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별로 관계없을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친구와 그 영화에 대해 길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에 반해 미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시간적 펼쳐짐은 재미있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각자가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펼쳐짐이 미적 판단의 형태에 이를 때도 있는데, 이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판단보다 경험에 초점을 맞출 때의 큰 이점은 미적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갖는 개인적 중요성과 절실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76-7)


"더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린다고 해서 더 강렬하고 더 가치 있는 미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강렬하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개인에게 소중한 미적 경험을 미학에 대한 논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미적 판단에만 골몰하느라 그런 경험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판단에 앞서는 것은 오히려 경험이다." "많은 그림이 걸린 전시실에 들어가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보라. 전시작 일부는 마음에 들고 나머지는 그저 그럴 것이다. 당신은 어느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모르며, 따라서 아무런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그림에 다가갈지, 어느 그림을 살펴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초기의 호감이다. 우리가 모든 사항을 고려해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일찍이 어떤 예술품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특정 예술품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다."(83)


5 미학과 타자


"우리는 사회적 존재며 사회적 측면을 완전히 결여한 미적 상황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서양' 미학사에서 이루어진 미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미적 의견 일치와 미적 의견 충돌이라는 한 가지 사안에만 치중했다."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데 주어진 선택 사항은 딱 두 가지다. 첫째는 서로가 의견 충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고 나는 저것을 좋아한다. 누구도 옳지 않다. 아니 우리 둘 다 옳다. 둘째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은 명백히 그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택 사항의 적합성은 어느 사례를 고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문제는 미적 의견 충돌이 (같은 그림을 보면서) '네모나냐 세모나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각자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느냐 아니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다. 그런 까닭에 '서양' 미학의 주요 문헌들 일부는 순전히 '주관적인'(할머니와 관련된) 의견 충돌과 순전히 '객관적인'(모양과 관련된) 의견 충돌을 중재하는 위치에 서려고 시도했다."(92-5)


"이렇듯 미적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규범성(normativity)이다. 규범성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관계있다. 우리의 미적 삶도 어떤 점에서는 매우 규범적인 측면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미학이 어째서 '서양'에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되는지 꽤 규범적인 주장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가령 한 악곡의 연주가 일정한 악곡을 (정해진 음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연주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확립된 미적 관행을 이야기하기 곤란할 것이다. '해야' 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미적 영역을 논하는 대목 곳곳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하지만 미학은 규범적 학문이 아니며 이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윤리학의 하위 분야 일부는 실제로 규범적 주장을 다루는 듯하다. 하지만 미학은 다르다. 본래 미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다룬다."(96-7)


"어떤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그 경험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어서가 아니다. 그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 때문이다. 주목 방식에는 정확하고 말고가 없다. 경험은 정확하거나 부정확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성과 하등 관계 없다." "당신과 나는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을 보더라도 서로 아주 다른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의견 충돌로 규정하는 것은 (미적 경험보다) 미적 판단을 은근슬쩍 우위에 두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미용실 접근법만 강요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내가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각자 다른 경험을 할 때 발생하는 차이는 중요하다. 그림의 모양에 대한 의견 충돌이나 그림이 누군가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는지에 대한 의견 충돌보다 훨씬 중요하다. 미적 참여의 사회적 측면을 미적 의견 충돌의 문제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미학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상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깨닫기 힘들다."(99-101)


"비교적 겸허한, 그러나 결코 해가 없지 않은 규범성에의 호소는 미적 평가의 보편적 호소와 관계있다. 이것은 일정한 예술품이 당신에게 일정한 반응을 보일 것을 단순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어떤 미적 반응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고, 혹은 어쨌든 그래야 한다고 암암리에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로, '서양' 미학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칸트 철학의 지적 성취에 경외심을 갖고 공손히 말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미학의 역사상 가장 오만한 발상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반응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가정하는 것은 인류의 다양성과 그들이 나고 자란 문화 배경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폄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이 보편적 호소력 혹은 보편적 전달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이 들라치면, 멈춰 서서 내가 '미적 겸손'이라고 부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102-3)


6 미학과 삶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발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많다. 예술 작품을 대하는 방법도 많으며, 그 방법 간에 애당초 우열은 없다. 따라서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바꾸라고(혹은 예술 작품처럼 대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도 안 되고 딱히 의미도 없다." "미학과 우리 삶을 관련짓는 또하나의 인기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과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초연한 관객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19, 20세기에 널리 유행했다." "이런 주목 방식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매우 특정한 유형의 미적 경험을 설명해주며, 이런 미적 경험은 관조로 불리는 경험과 상당히 잘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적 경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유럽에서, 가령 20세기 전반기에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적 경험은 초연할 필요도, 관조적일 필요도, 제한 없는 주목을 수반할 필요도 없다."(119-21)


"예상은 우리가 예술에 참여할 때 중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상에 주목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순수한 놀라움에 내맡기는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자발성이다."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강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마치 처음 보듯 바라본다. 실제로,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경험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설령 이전에 여러 번 보았더라도 우리가 정말로 감동할 때 그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really)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처음 본다'라는 이 말이 고리타분한 상투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그 이상이다.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그것을 관습적이고 판에 박은─자신과 관련된 특성들을 가려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특성들도 유의미할 수 있으므로 두루 주목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128-31)


"무언가를 처음 본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모든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것이 내 흥미를 끄는 차이, 즉 무언가를 바라보는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방식과 그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다." "십대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노래를 기억하는가? 그 노래는 당신에게 언제나 감동을 주었다. 음, 그 감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당신은 그 노래를 완전히 소진해버리고 그 노래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때마다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래도 다행히 이런 경험은 종종 다시 할 수 있다. 그 노래를 한동안 듣지 않다가 몇 달 뒤에 다시 들으면 이전보다 훨씬 벅찬 감동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이때 당신은 그 노래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다. 습관과 관성은 사라진다." "습관은 당신을 무뎌지게 한다. 하지만 당신은 예술의 도움으로 습관을 버리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132-3)


"미적인 것은 또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미적 경험은 지속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 효과는 아직 탐구가 덜 이루어진, 예술 항유의 한 가지 독특한 측면이다. 예술 향유는 지속한다. 온종일 미술관에 있다가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당신 눈에는 칙칙한 버스정류장이 그 미술관에서 본 어느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연주회나 극장에서 멋지 작품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흉하고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거리 풍경이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미적 참여에서 주목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의 이점 하나는 이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술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심적 주목 상태는 돌연 중단되지 않는다. 지속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당신에게 본다는 것의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줄 수 있다. 무엇을 보는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게 해준다."(134-6)


7 범세계 미학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보편자를 다룬다. 다시 말해 미학은 우리가 예술품과 그 밖의 미적 대상에 참여하는 방식을 우리의 문화 배경과 무관하게 탐구한다는 것이다. 미학자들이 미술사가들에게 곧잘 비난받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 보편주의 때문이다. 신경 과학에 오염된 최신 유행의 미학 연구는 미학의 이런 보편주의를 한층 더 강력히 밀어붙이는데, 그 목적은 다양한 형태의 미적 감상 가운데서 신경 상관자(neural correlates)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 감상 주체의 문화 배경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마음의 경험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이로부터 얻는 실질적 가르침은 문화 보편주의를 완전히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각에 미치는 풍부한 하향식 영향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과 신념이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지각도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140)


"문제는 지각에 미치는 하향식 영향이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과정에 따라 매개되느냐다. 나는 그 매개 기제로 두 가지를 들 텐데, 하나는 주목이고 또 하나는 심상이다. 주목과 심상은 둘 다 신념이나 지식과 같은 우리의 고차적 정신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편 양자는 모두 우리의 지각과 미적 참여에 영향을 준다. 달리 말해 주목과 심상에는 문화 간 편차가 있다. 따라서 미적 참여에서 주목과 심상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이것은 미적 참여에도 틀림없이 문화 간 편차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한 우리는 보편주의 노선을 택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미적 참여가 현지의 인공품 제작자가 의도한, 또 그 사용자가 행한 참여와 같으리라고 가정할 수 없다." "즉,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커다란 문화 간 편차가 있음을 뜻한다."(140-1)


"낯선 문화와 그 문화의 예술 제작 양식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문화를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 문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미적 경험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타 문화의 한갓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겸손한 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늘 자신이 견지하는 문화적 관점을 의식하고 자신의 미적 평가를 겸손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의 평가는 매우 특수한 문화적 관점에서 기인한 하나의 평가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학과 관련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 쉬운데 이것은 미학이 우리 개인에게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미적 평가를 내릴 때 한층 더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많은 미적 겸손이 필요하다."(16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