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8
벤체 나너이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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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미학을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술가와 음악가, 하물며 철학자들까지. 이것은 미학의 대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며 그런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미학의 영역은, 고급·저급에 관계없이 예술의 영역보다 훨씬 넓으며 우리가 살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것을 아우른다." "미학은 어느 예술품이 훌륭한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경험이 가치 있는지, 가령 거리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아니면 연주회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험이 당신에게 가치 있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경험은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적 쾌감을 얻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미학은 어느 경험이 용인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휴대용 도감이 아니다. 미적 쾌감을 찾도록 안내해주는 지도도 아니다. 미학은 가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석하는 방편이다. 미학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10-11)


2 섹스와 마약, 로큰롤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경험은 어찌 보면 각양각색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경험뿐 아니라 유튜브에서 '극장골' 장면 모음을 보거나 신고 나갈 구두를 고르는 경험, 커피 메이커를 조리대 어디에 둘지를 결정하는 경험도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모든 경험의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서도 안 된다. 철학자들은 예술에 대한 경험을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흥분의 경험과 (또 '로큰롤rock 'n' roll'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대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것과 같은 쾌락 경험 일반과도) 곧잘 구분한다. 이런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우리는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 사이에 어떻게든 선을 그어 섹스와 마약은 배제하고 헤어스타일과 음악은 용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미학에 접근하는 기존 방법들을 우리가 살펴보면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18-9)


"미학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통념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다룬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어떤 것은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미학은 우리가 그것들을 구분하게 도와주고, 나아가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용실 접근법'이라고 부르는데, 미용 산업에서는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지의 개념이 상당히 명확하기 때문이다." "미용실 접근법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미적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다. 하지만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경험, 로큰롤의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경험들은 미적으로 여겨질 수 없다." "미용실 접근법의 진짜 문제는 고상한 척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런 경계선을 긋는다는 사실 자체다. 아름다움은 시대와 맥락, 관찰자가 바뀌어도 늘 한결같은 대상의 특성이 아니라는 말이다."(20-1)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의 차이를 따질 때 자주 등장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즐거움이다. 요컨대 미학은 즐거움을 다룬다." "심리학자는 즐거움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중 첫째는 불쾌한 것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안도의 즐거움'이다. 안도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불쾌한 상황이 끝났을 때의 즐거움은 안도의 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안도의 즐거움은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그 일을 더 하도록 북돋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북돋는 즐거움'은 지금 하는 일을 우리가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런 즐거움은 안도의 즐거움과 달리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이것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어떤 성적 활동이나 마약을 통한 활동은 북돋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섹스와 마약을 무차별로 거부하고 그것들을 미적 활동이라는 엘리트 범주에서 몰아낼 수 없다."(25-7)


"미적 영역을 규정하는 셋째 방법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요컨대 미적 경험은 곧 감정 경험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감정이 수반하는가? 미적 참여를 할 때 촉발하는 감정은 모두 늘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에 참여하고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인가?" "미적 참여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가령 그랜드캐니언의 경치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대한 미적 경험은 각기 매우 다른 감정을 수반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단 하나의 두루뭉술한 감정을 찾겠다는 것은 결국 미학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은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미적 참여가 꼭 감정적이기만 할까?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의 미적 경험을 〈사고나 감정 없이 표류하면서 내 감각에만 주목〉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감정이 뒤서는 친숙한 한 형태의 미적 참여를 가리키는 듯하다. 적어도 이떤 경우의 미적 경험에서는 감각이 감정에 앞선다."(29-33)


"수전 손택은 미적 경험을 초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뿐 아니라 분노와 찬동, 나아가 현실적 관심사로부터 초연함, 이것은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을 구분해줄 마지막 유력 후보로, 미적 참여가 (단지 미적 쾌감) '그 자체를 목적'하는 참여임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이루려고 그 활동을 하는가, 아니면 오직 그 활동 자체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가? 문학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다른 어떤 목적(시험 통과)을 이루려고 어떤 활동(소설 읽기)을 하는 것이다. 반면 단지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이 활동은 미적 영역에 더 가깝다. 하지만 미적 경험은 문학 수업 때문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순전히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데도 그 활동에 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참여가 덜 미적일 수밖에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중도의 사례들은 '그 자체를 목적하는 것'이 미학의 성배(聖杯)가 아님을 보여준다."(33-5)


3 경험과 주목


"미적인 모든 것의 공통성은 아주 단순한 데 있다. 바로 주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약을 통한 환각이나 성적 흥분을 경험할 때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걸작을 응시할 때라고 해서 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술품을 감상할 때 으레 예술품의 일부 특성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가령 그림을 볼 때 물감의 균열은 무시하고 그 밖의 표면적 특성에만 주목한다. 균열은 고려 대상에서 배제한다. 바로크 시대에 재건축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교회를 볼 때는 그 중세적 구조를 완상하기 위해 바로크적 요소는 무시하려고 할 것이다. 이 또한 예술품의 특성 일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품의 어떤 특성을 주목해야 하고, 어떤 특성을 무시해도 되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배제해도 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정답이나 손쉬운 방법은 없다. 미적 향유의 성패는 주목에 달렸다." "우리는 자신이 미적 참여를 할 때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주목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42, 50-1)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고 해서 미적 경험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좋은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을 해체하지 못해 초조해한다. 폭탄의 어느 부분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때 본드는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대한 주목은 자유롭고 제한이 없어야 한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 해체 방법을 찾으려고 폭탄의 이쪽저쪽을 굉장히 집중해서 주목한다. 본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본드는 여러 특성에 주목하지만 그 모든 특성에 대한 그의 주목은 극도로 예민하다.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이와 정반대 방식으로 주목한다. 특정한 어떤 것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마주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풍경(화)의 다양한 특성에 주목하지만 어떤 개별적 특성이나 일단의 특성에도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것이다."(58-9)


"우리가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으로 주목을 분산할 때, 단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나는 이런 주목 방식을 '제한 없는 주목'이라고 부르겠다. 고정된 주목은 결국 심신을 지치게 한다. 반면 제한 없는 주목은 정신을, 적어도 지각계(知覺界)를 이완하는 휴식과 같다. 몸이 근력 운동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듯 지각계도 고정된 주목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 "미적 경험이 지각계의 휴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각계에 무리가 가면 미적 경험도 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일 뿐이다. 제한 없는 주목은 특별하다. 제한 없이 주목할 때 우리는 한 그림 속의 무관해 보이는 두 형태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독립된 두 멜로디가 한 곡에서 멋진 대비를 이루어나가는 방식도 추적할 수 있다. 또 한 요리에 들어간 재료들의 차이점이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이런 주목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60-1)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보는 대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 질(質)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하는데 이 점이 중요하다." "권위에 한번 호소해볼까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와 매우 유사한 견지에서 미적 경험을 묘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참된 경험은 현실과의 접촉을 줄이는 동시에 그 접촉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는 데 있다.〉 여기서 경험 대상과의 접촉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경험 대상과 경험 질의 관계에 대한 주목이다." "제한 없고 통제받지 않는 주목이 중요한 이유 하나는 우리가 지각 대상의 특성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 특성에도 자유롭게 주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힘들여 등산길에 오른 당신은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발아래 펼쳐진 들판과 강 등 전망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전망에만 주목할 것 같았으면 아까운 시간을 들여 등산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당신은 성취감에 젖은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할 것이다."(65-7)


"산스크리트 미학에서 예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모든 감각 양상에 몰두하는 다중양상의 경험이다. 산스크리트 미학의 핵심 개념인 라사(Rasa)에서는 미적 주목을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 경험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꼽는다." "미적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바로 주목 방식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아름답게 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주목이다. 그런데 주목은 감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를 주목함'에 초점을 맞춘 견해에서 초연함과 제한 없음이 미적 영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배웠으며, 그 중요성을 금지 구역이 거의 없는 자유롭고 제한 없는 주목의 견지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 "당신이 먹고 싶어서 토마토를 바라보는 경우라면, 토마토 자체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미적 경험을 하는 경우라면 당신은 토마토뿐 아니라 그 토마토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따라서 미적 경험은 투명하지 않다."(68-70)


4 미학과 나


"'서양' 미학 대부분은 박식한 미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적 판단은 (보통은 스스로, 때로는 타자에게) 특정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우아하다, 흉하다, 역겹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적 참여 대부분은 전혀 이와 같지 않다." "우리가 미적 판단을 내리는 데서 (가령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의 순위를 SNS에 게시하는 데서) 어떤 즐거움을 얻는다면, 이 즐거움은 판단을 공유하는 것과 더 관계있지 실제로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별로 관계없을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친구와 그 영화에 대해 길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에 반해 미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시간적 펼쳐짐은 재미있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각자가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펼쳐짐이 미적 판단의 형태에 이를 때도 있는데, 이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판단보다 경험에 초점을 맞출 때의 큰 이점은 미적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갖는 개인적 중요성과 절실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76-7)


"더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린다고 해서 더 강렬하고 더 가치 있는 미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강렬하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개인에게 소중한 미적 경험을 미학에 대한 논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미적 판단에만 골몰하느라 그런 경험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판단에 앞서는 것은 오히려 경험이다." "많은 그림이 걸린 전시실에 들어가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보라. 전시작 일부는 마음에 들고 나머지는 그저 그럴 것이다. 당신은 어느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모르며, 따라서 아무런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그림에 다가갈지, 어느 그림을 살펴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초기의 호감이다. 우리가 모든 사항을 고려해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일찍이 어떤 예술품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특정 예술품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다."(83)


5 미학과 타자


"우리는 사회적 존재며 사회적 측면을 완전히 결여한 미적 상황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서양' 미학사에서 이루어진 미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미적 의견 일치와 미적 의견 충돌이라는 한 가지 사안에만 치중했다."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데 주어진 선택 사항은 딱 두 가지다. 첫째는 서로가 의견 충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고 나는 저것을 좋아한다. 누구도 옳지 않다. 아니 우리 둘 다 옳다. 둘째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은 명백히 그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택 사항의 적합성은 어느 사례를 고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문제는 미적 의견 충돌이 (같은 그림을 보면서) '네모나냐 세모나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각자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느냐 아니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다. 그런 까닭에 '서양' 미학의 주요 문헌들 일부는 순전히 '주관적인'(할머니와 관련된) 의견 충돌과 순전히 '객관적인'(모양과 관련된) 의견 충돌을 중재하는 위치에 서려고 시도했다."(92-5)


"이렇듯 미적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규범성(normativity)이다. 규범성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관계있다. 우리의 미적 삶도 어떤 점에서는 매우 규범적인 측면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미학이 어째서 '서양'에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되는지 꽤 규범적인 주장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가령 한 악곡의 연주가 일정한 악곡을 (정해진 음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연주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확립된 미적 관행을 이야기하기 곤란할 것이다. '해야' 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미적 영역을 논하는 대목 곳곳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하지만 미학은 규범적 학문이 아니며 이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윤리학의 하위 분야 일부는 실제로 규범적 주장을 다루는 듯하다. 하지만 미학은 다르다. 본래 미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다룬다."(96-7)


"어떤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그 경험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어서가 아니다. 그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 때문이다. 주목 방식에는 정확하고 말고가 없다. 경험은 정확하거나 부정확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성과 하등 관계 없다." "당신과 나는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을 보더라도 서로 아주 다른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의견 충돌로 규정하는 것은 (미적 경험보다) 미적 판단을 은근슬쩍 우위에 두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미용실 접근법만 강요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내가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각자 다른 경험을 할 때 발생하는 차이는 중요하다. 그림의 모양에 대한 의견 충돌이나 그림이 누군가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는지에 대한 의견 충돌보다 훨씬 중요하다. 미적 참여의 사회적 측면을 미적 의견 충돌의 문제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미학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상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깨닫기 힘들다."(99-101)


"비교적 겸허한, 그러나 결코 해가 없지 않은 규범성에의 호소는 미적 평가의 보편적 호소와 관계있다. 이것은 일정한 예술품이 당신에게 일정한 반응을 보일 것을 단순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어떤 미적 반응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고, 혹은 어쨌든 그래야 한다고 암암리에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로, '서양' 미학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칸트 철학의 지적 성취에 경외심을 갖고 공손히 말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미학의 역사상 가장 오만한 발상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반응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가정하는 것은 인류의 다양성과 그들이 나고 자란 문화 배경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폄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이 보편적 호소력 혹은 보편적 전달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이 들라치면, 멈춰 서서 내가 '미적 겸손'이라고 부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102-3)


6 미학과 삶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발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많다. 예술 작품을 대하는 방법도 많으며, 그 방법 간에 애당초 우열은 없다. 따라서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바꾸라고(혹은 예술 작품처럼 대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도 안 되고 딱히 의미도 없다." "미학과 우리 삶을 관련짓는 또하나의 인기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과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초연한 관객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19, 20세기에 널리 유행했다." "이런 주목 방식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매우 특정한 유형의 미적 경험을 설명해주며, 이런 미적 경험은 관조로 불리는 경험과 상당히 잘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적 경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유럽에서, 가령 20세기 전반기에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적 경험은 초연할 필요도, 관조적일 필요도, 제한 없는 주목을 수반할 필요도 없다."(119-21)


"예상은 우리가 예술에 참여할 때 중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상에 주목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순수한 놀라움에 내맡기는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자발성이다."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강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마치 처음 보듯 바라본다. 실제로,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경험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설령 이전에 여러 번 보았더라도 우리가 정말로 감동할 때 그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really)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처음 본다'라는 이 말이 고리타분한 상투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그 이상이다.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그것을 관습적이고 판에 박은─자신과 관련된 특성들을 가려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특성들도 유의미할 수 있으므로 두루 주목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128-31)


"무언가를 처음 본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모든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것이 내 흥미를 끄는 차이, 즉 무언가를 바라보는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방식과 그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다." "십대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노래를 기억하는가? 그 노래는 당신에게 언제나 감동을 주었다. 음, 그 감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당신은 그 노래를 완전히 소진해버리고 그 노래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때마다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래도 다행히 이런 경험은 종종 다시 할 수 있다. 그 노래를 한동안 듣지 않다가 몇 달 뒤에 다시 들으면 이전보다 훨씬 벅찬 감동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이때 당신은 그 노래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다. 습관과 관성은 사라진다." "습관은 당신을 무뎌지게 한다. 하지만 당신은 예술의 도움으로 습관을 버리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132-3)


"미적인 것은 또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미적 경험은 지속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 효과는 아직 탐구가 덜 이루어진, 예술 항유의 한 가지 독특한 측면이다. 예술 향유는 지속한다. 온종일 미술관에 있다가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당신 눈에는 칙칙한 버스정류장이 그 미술관에서 본 어느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연주회나 극장에서 멋지 작품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흉하고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거리 풍경이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미적 참여에서 주목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의 이점 하나는 이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술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심적 주목 상태는 돌연 중단되지 않는다. 지속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당신에게 본다는 것의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줄 수 있다. 무엇을 보는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게 해준다."(134-6)


7 범세계 미학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보편자를 다룬다. 다시 말해 미학은 우리가 예술품과 그 밖의 미적 대상에 참여하는 방식을 우리의 문화 배경과 무관하게 탐구한다는 것이다. 미학자들이 미술사가들에게 곧잘 비난받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 보편주의 때문이다. 신경 과학에 오염된 최신 유행의 미학 연구는 미학의 이런 보편주의를 한층 더 강력히 밀어붙이는데, 그 목적은 다양한 형태의 미적 감상 가운데서 신경 상관자(neural correlates)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 감상 주체의 문화 배경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마음의 경험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이로부터 얻는 실질적 가르침은 문화 보편주의를 완전히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각에 미치는 풍부한 하향식 영향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과 신념이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지각도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140)


"문제는 지각에 미치는 하향식 영향이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과정에 따라 매개되느냐다. 나는 그 매개 기제로 두 가지를 들 텐데, 하나는 주목이고 또 하나는 심상이다. 주목과 심상은 둘 다 신념이나 지식과 같은 우리의 고차적 정신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편 양자는 모두 우리의 지각과 미적 참여에 영향을 준다. 달리 말해 주목과 심상에는 문화 간 편차가 있다. 따라서 미적 참여에서 주목과 심상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이것은 미적 참여에도 틀림없이 문화 간 편차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한 우리는 보편주의 노선을 택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미적 참여가 현지의 인공품 제작자가 의도한, 또 그 사용자가 행한 참여와 같으리라고 가정할 수 없다." "즉,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커다란 문화 간 편차가 있음을 뜻한다."(140-1)


"낯선 문화와 그 문화의 예술 제작 양식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문화를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 문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미적 경험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타 문화의 한갓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겸손한 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늘 자신이 견지하는 문화적 관점을 의식하고 자신의 미적 평가를 겸손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의 평가는 매우 특수한 문화적 관점에서 기인한 하나의 평가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학과 관련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 쉬운데 이것은 미학이 우리 개인에게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미적 평가를 내릴 때 한층 더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많은 미적 겸손이 필요하다."(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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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의 역사
강원택 지음 / 동아시아연구원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프롤로그_보수와 생존


"보수주의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 폭풍우처럼 몰아쳐 온 역사의 거친 변화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것은 대단한 생존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다." "가진 자의 정치적 생존의 기술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는 하나의 이념'ism'이라기보다 경험이나 상식 등 현실적 체험과 관찰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 감정의 양태, 생활양식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구체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보수당이 대표하는 이념을 두고 당내에서 심각한 이념적 대립이나 토론이 벌어진 적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책에서 이념적 요인보다 생존의 기술로서의 보수주의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는 보수당의 역사가 이념적 순수성이나 완고함보다는 실용성과 유연성이 보다 중시되어 온 까닭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수당의 원칙은 실현하려는 추상적인 목표라기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18-9)


2 보수당 이전의 보수파_토리에서 보수당으로


"찰스 2세 시절, 왕위배척법을 둘러싼 갈등과 함께 의회는 정치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정파로 분열되었다. 한 쪽에서는 가톨릭을 믿고 로마 교황을 따르는 국왕(제임스) 하에서 영국의 헌정체제와 국교인 성공회는 절대로 보존될 수 없다고 본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라고 해도 그가 국왕직에 오르는 권리는 신으로부터 내려진 천부의 권한이므로 침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휘그Whig와 토리Tory라는 두 개의 정파로 나눠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휘그는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고 영국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의 입장을 두둔한 반면, 토리는 가톨릭교도가 영국 국왕직을 잇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토리파라고 해서 국교인 성공회보다 가톨릭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왕위 계승에 간섭하려는 것은 헌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며 잘못 그르치면 1640년대의 공포시기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26-7)


# 왕위배척법Exclusion Bill(1679년) : 가톨릭 신자인 왕위계승자 제임스가 국왕직을 물려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휘그파의 우려대로 즉위 후 곧바로 가톨릭을 내세웠으며 프랑스의 루이 16세처럼 의회를 무시하고 절대군주처럼 통치하고자 했다. 특히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인 자신의 측근들을 정부와 군의 요직에 앉히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사법을 폐지하고자 했다. 의회가 이를 거부하자 제임스 2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제임스 2세는 자신은 심사법에 규정받지 않는 초월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제임스 2세의 왕권강화 시도와 가톨릭에 대한 옹호로 인해 그의 왕위 즉위를 지원했던 토리파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국왕에 대한 충성과 제임스 2세가 위협하는 국교회에 대한 지지를 두고 토리는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결국 토리들은 국교회를 선택했다. 뜻을 같이 하게 된 토리와 휘그는 비밀리에 오렌지의 윌리엄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윌리엄의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면서 제임스 2세는 해외로 도피했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이뤄졌다."(28-9)


# 심사법Test Act(1673년) : 정부와 군에서 공직을 맡는 이들은 반드시 영국 국교인 성공회 신자여야 한다고 규정한 법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뒤따른 루이 16세의 처형은 영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적이었던 루이 16세의 죽음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혁명의 결과가 왕실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에 기반한 전통적 지배계급의 종말까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혁명에 대한 영국 사회의 두려움은 커지게 되었다." "이 무렵인 1794년 휘그파 내에서 분열이 생겼다. 폭스는 프랑스 혁명 정부와의 화평을 주장했고 그레이는 의회 개혁을 주장했는데 이는 모두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휘그파 내의 보수 성향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휘그 내의 대다수 상원의원과 50명이 넘는 하원의원들이 토리로 옮겨왔다. 이로 인해 국왕에 충성스러운 토리와 토지소유계급인 보수적 휘그 간 연합이 이뤄졌으며, 보다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소수의 휘그를 주변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1794년 소 피트가 이끄는 토리로 옮아간 휘그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에드먼드 버크였다."(35-6)


#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토리파가 직면한 두 가지 쟁점

1. 가톨릭 : 1801년 아일랜드 통합 이후 가톨릭교도들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 대두(1673년 제정된 심사법Test Act은 군과 행정 분야에서 가톨릭 신자의 고위직 임용을 금지했다)되었고, 마침내 1829년 5월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의 시민권을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가톨릭구제법Catholic Relief Act을 통과시켰다.

2. 의회개혁 : 토리의 정치적 대표성은 세습 귀족과 토지에 기반을 둔 젠트리였다. 이들은 주요 기반이 농촌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도시 상공업이 활성화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구 확대와 공평한 의석 배분에 강하게 저항했다. 결국 개혁법Reform Bill은 1832년 6월 휘그파의 주도로 통과되었다.


3 필 수상과 보수당의 등장


"보수당이라는 명칭은 1830년경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1835년경이 되면 토리보다 보수당이 일반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2년 개혁법은 보수당 내 반대자들이 우려한 것만큼 결코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혁명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국왕의 권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1911년 의회법이 통과될 때까지 보수파의 보루였던 상원의 권한에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귀족들의 지위도 여전히 내각과 지방에서 지배적인 존재였다. 토지소유 계급들의 지위 역시 약화되지 않았다. 개혁법이 몰고 온 중요한 변화는 정부의 교체를 이루는 것은 국왕의 의지가 아니라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정당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을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정당 정치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53-5)


"1832년 이후 보수당의 정치적 회복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로버트 필의 리더십이다. 필은 1834년 12월 '탐워스 강령'을 발표했다." "자신의 선거구 탐워스에서 필은 강령을 통해 강경 보수파에 의한 반동적인 대응과 급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급진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이기까지 한 변화를 모두 거부하고 그 사이의 중도적 입장에 대한 보수당의 가치와 사상을 제시했다. 필은 탐워스 강령을 통해 보수당은 1832년 개혁법을 존중할 것이고 폐지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하였고 이후의 추가적인 개혁도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에 의한 보다 온건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며 자신의 보수주의를 중산계급이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필은 자신이 귀족 집단과 상공업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에 균형 잡힌 온건한 개혁을 선호한다는 점을 밝혔다. 탐워스 강령은 1832년 개혁법 통과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 상황 속에서 보수당의 사상을 최초로 명확하게 제시했다."(56-7)


# 로버트 필의 개혁정책의 여파

1. 아일랜드 지원 :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의 가톨릭 사제학교에 지원하는 지원금을 확대하여 가톨릭 주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온건한 가톨릭교회가 분리 독립 운동과 연계되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많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2. 곡물법 폐지 : 1840년대의 불경기와 도시 노동자의 증가, 해외시장 확대 필요성, 아일랜드 대기근(1845년) 등 복합적인 요인들을 감안해 곡물법 폐지를 통과(1846년 6월)시켰지만, 당 내 반대파들과 치유하기 힘든 깊은 분열이 생겼다.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분열된 보수당의 두 정파를 재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1850년 필의 죽음은 이들 정파의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필 지지자들의 일부는 정치를 떠났고 일부는 그의 서거 후 다시 보수당에 복귀했다. 그러나 필의 지지자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필이 옳았고 1846년 물러난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필에 대한 동정과 보수당 내 보호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그들은 곡물법 폐지를 지지한 휘그에 보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859년 결국 필 지지자들과 휘그는 함께 공식적으로 자유당을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필 지지자 가운데 보수당에서 휘그로 옮긴 대표적인 인물이 후일 자유당 수상이 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다." "곡물법 파동을 거치면서 보수당은 집권 대안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했고 분열을 극복할 유능한 당내 지도자를 찾기도 힘들었다. 보수당이 다시 과반의석을 얻어 권력에 복귀하는 것은 1874년이 되어야 가능했다."(67)


4 디즈레일리_보수당의 기반


"'보수당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듣는 디즈레일리는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1874년까지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어려움을 겪던 보수당을 구하고 이후 1906년까지 약 30년간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872년, 보수당 지도부는 자유당에 대한 맹렬한 공세를 시작했고 공공 생활과 관련된 많은 법안을 입법화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유당 정부가 비밀투표를 보장하는 투표법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반 유권자의 생활수준, 특히 위생 수준을 높이는 데는 소홀하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더 이상 사회개혁 법안에 대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수권정당으로의 신뢰감을 높였다." "보수당 내의 이러한 전향적 움직임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움직임 등 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1871년 파리코뮌의 사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71, 76-7)


"디즈레일리는 1872년에 행한 두 차례의 연설을 통해 보수당만이 현재 영국의 제도를 보존할 수 있고, 대영제국을 수호할 수 있으며, 일반 국민의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당시 언론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디즈레일리가 제시한 보수당이 자임한 세 가지 역할은 이후에도 보수당의 중요한 정치적 사상으로 남게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을 사회개혁의 주창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통합과 대영 제국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이슈를 선점하는 안목과 능력이 있었다." "1874년 총선 승리로 보수당은 이제 잉글랜드 지역과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존하는 정당이아니라,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게 호소력을 갖는 실질적인 '전국 정당'이 될 수 있었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에 남긴 큰 족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 조직의 측면에서나, 선거 지지라는 측면에서 보수당이 전국적인 정당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77-8)


"이제 도시지역과 새로이 형성된 교외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산층이 보수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교외 지역에는 계급적으로 하위 중산계급이 밀집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런 지역에서는 공동체적인 관계보다 계급에 의한 투표가 보다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사무직 종사자와 같은 하위 중산계급이 일반 노동계급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표현하게 된 것도 보수당의 지지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즉, 교외 지역에 형성된 신흥 주택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보수당의 지지자들, 곧 '빌라 토리즘'이 1874년 이후 보수당의 정치적 상승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보수당은 노동계급 유권자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보수당은 음주나 유희 등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의 생활방식에 관대했고, 대영제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강조했다. 이처럼 '맥주와 대영제국'으로 요약할 수 있는 노동계급에 대한 보수당의 접근방식은 특히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중년 혹은 노년 노동자들에게서 높은 호응을 얻었다."(81-2)


5 자유당의 분열과 보수당의 행운


"솔즈베리는 디즈레일리 이후 16년간 보수당을 이끌었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업적이었다. 솔즈베리는 1867년과 1884년의 선거권 확대를 마지못해 수용했으며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디즈레일리의 사회개혁과 대중에 호소력을 갖는 보수당을 만들겠다는 토리 민주주의의 이상은 솔즈베리에게로 이어지지 않았다. 랜돌프 처칠이 이러한 입장을 이어 받았지만 그는 솔즈베리와의 당권 경쟁에서 밀려났다." "솔즈베리의 보수당이 이후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보수당 스스로의 변신과 개혁 노력보다는 자유당의 내홍과 분열 때문이었다. 자유당 내각을 이끌었던 글래드스턴이 1886년 12월 아일랜드 독립 법안을 추진하면서 당내에 커다란 내분이 생겨났던 것이다." "보수당은 아일랜드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자유당 내부의 불만 세력의 동조를 이끌어냈다. 실제로 이 정책에 불만을 가진 자유당 의원들이 이후 보수당에 참여함으로써 정당 재편을 이끌었다."(100-1)


"디즈레일리처럼 솔즈베리의 후기는 외교 및 제국 이슈가 지배하였다. 당시 대영제국은 확대되고 있었다. 버마를 복속시켰고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었다. 솔즈베리 정부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복속시키기 위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국내적으로는 아일랜드를 포함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솔즈베리는 당시 수상으로서는 드물게 1900년까지 외무장관을 겸직했고 내각 내에서 외교문제에 관해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그의 외교정책은 내각 내에서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삼각동맹과 협력관계를 모색함으로써 영국의 이익을 보장받으면서 대외문제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의 세계정세, 1890년 비스마르크의 실각과 이에 따른 프로이센과 영국의 관계 악화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솔즈베리의 고립주의 정책은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적절한 것도 현명한 것도 아니었다."(108)


6 보수당의 분열과 관세개혁


"솔즈베리를 뒤이은 새로운 수상은 밸포어였다. 밸포어는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을 이끄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가 주도했던 교육법은 영국 국교회 및 가톨릭계 학교에 대한 지원만을 규정함으로써 그 법의 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던 비국교도 학교들을 소외시켰다. 이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보수당을 굳건하게 지지해 왔던 비국교도들이 보수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노동계급 또한 벨포어의 정책에 분노했다. 1901년의 테프 베일 판결은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했다." "노동조합 측은 노동운동과 파업 권한을 회복시키는 법안 제정을 요청했지만 벨포어는 이를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노령 연금 관련 법안을 잇달아 부결시키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벨포어의 보수당 정부는 노동계급의 요구에 별다른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노동계급은 이제 막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당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116-7)


"체임벌린이 주장한 관세 개혁은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에 기반했는데, 강력한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독일이나 미국과 경쟁할 수 있도록 영국은 대영제국을 호혜관세로 보다 가깝게 묶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임벌린은 대영제국 외부의 상품이 영국에 수입되는 경우 대영제국 국가의 상픔보다 높은 관세를 물리고, 반대로 대영제국 국가들은 영국 제품에 대해서 다른 국가들보다 낮은 관세를 물리도록 함으로써 대영제국 국가들끼리의 교역에 혜택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즉 대영제국 내의 각 자치령이 독자적인 공업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제국 내 각 자치령의 원심적 이탈을 막고 상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영제국 내 국가간 호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899년 보어전쟁에서 보듯이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며 체임벌린은 관세를 징수함으로써 외국이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119)


"그러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 체임벌린의 마스터플랜은 사실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보호무역 대 자유무역 간의 갈등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 경제는 이미 분화되고 있어서 관세개혁은 어떤 산업에는 이득을 보장해 주지만 다른 산업에는 심각한 손해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관세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관세 개혁이 원자재 가격의 상승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식품 가격(빵 값)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영제국 내 식민지 국가에 대한 특별한 보호주의적 혜택을 위해 다른 국가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 보다 값싼 곡물 수입에 대해 관세를 물림으로써 전반적인 식품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도시 노동자 가구에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책 추진은 도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구에서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120)


"1908년, 자유당 정부 내에서는 노령 연금 등 사회개혁 지출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로이드 조지나 윈스톤 처칠 등의 입장과 군함 건설 등 해군력을 강화하고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소위 '대포와 버터'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심각했다. 로이드 조지가 선택한 해결책은 바로 소득세 인상, 새로운 토지세의 도입, 양주에 대한 과세 등 상층계급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국민의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벨포어는 관세개혁을 '사회주의' 예산안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심지어 보수당 내 강경 자유교역주의자들도 자유당이라는 더 큰 적에 대항하기 위해 벨포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910년 1월 실시된 총선은 귀족들로 가득한 상원의 특권을 둘러싼 논란과 '귀족 대 평민' 간의 대결이라는 자유당의 선거 이슈가 주도했다. 그 결과 자유당은 노동당을 파트너로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의 지지를 지원군 삼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29-31)


7 보나 로와 아일랜드 이슈


"보나 로는 보수당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 대안 제시보다 자유당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는 전략을 펴기로 했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 보수당이 역점을 두고 공세를 퍼부었던 것은 아일랜드 독립 문제였다." "이제 곧 아일랜드가 독립국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보수당을 두렵게 했고 이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불러왔다. 보수당 내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막기 위해 대단히 위험하고 극단적인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당시 유명한 법학자였던 윌리엄 앤슨은 의회법을 통해 헌정질서에 폭력을 가한 것은 바로 자유당이므로, 보수당은 아일랜드 독립을 부여하려는 또 다른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얼스터 출신으로 당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에드워드 카르손은 아일랜드 독립법안이 통과된다면 북아일랜드(얼스터) 지방의 주도州都인 벨파스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반란 계획에 깊이 가담하기도 했다."(140-2)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은 일차적으로는 보나 로 자신이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방의 가문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었다. 여기에 자유당이 의회법을 통해 상원에 대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현재 헌정체제가 일시적으로 '유보된 상태'인데, 새로운 헌정질서가 자리잡히기도 전에 아일랜드 독립 같은 영토상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비헌정적인 형태의 저항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보수당 의원들이 공유하는 상황 인식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보수당 당수까지 나서서 무력 저항을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보수당 역사에 전례가 없었다." "보수당을 이런 미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덕분이었다. 1914년 7월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위기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던 보수당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 동안 보수당이 강조해 온 연합왕국의 보존, 관세개혁, 그리고 대영제국과 같은 사안들은 모두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142-4)


8 제1차 세계대전과 연립정부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애국주의적이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치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해 왔다." "반면 전쟁 상황으로 인해 도입된 징병제─1916년 5월 강제복무제 전면 도입─를 비롯하여 새로이 '전면전'이라는 이름 하에 요구되는 억압적 조치들은 자유당을 힘들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당의 전통적인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전쟁은 보수당의 입지를 전반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방위비 지출이나 징병제 등에 대한 보수당의 주장이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전쟁 수행에 참여한 호주,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많은 자치령 국가들의 도움과 기여로 인해 대영제국의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한 인식도 커졌다." "전후의 새로운 관심사는 국가의 역할, 경제, 사회개혁, 실업문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의 부상 등이었다. 노동당은 이제 자유당과의 협약 없이도 독자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많은 당선자를 낼 수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148-52)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참전 군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전시 물품제조 등 후방에서 전쟁수행에 기여한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 이유로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18년 선거법 개정으로 21세 남성─군인의 경우에는 19세 이상─과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함으로써, 이제 성인 인구 가운데 대다수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과 비교하면 약 700만 명의 유권자에서 2,100만 명으로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와 함께 이제 노동계급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즘의 확산이 유럽 전역을 위협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노동분규와 사회주의 운동이 격화되는 등 사회 불안정과 혁명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던 시기였다." "보나 로는 당시까지 대단치 않은 존재였던 노동당이 점점 지지를 확대해 가는 것에 대해서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153-4)


"선거권 확대로 인한 정치적 결과를 확신하지 못했던 보수당은 스스로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려 하기보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며 노동계급 유권자에 보다 호소력을 가진 자유당 로이드 조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시 연립내각에 계속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연립정부는 내부의 분열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상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보수당의 원래 원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40-50명의 보수당 평의원들이 1921년 결집하기에 이른 것이다." "1922년까지, 연립정부 잔류 여부를 두고 보수당 내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겨났지만 1916년 이후 자유당처럼 파멸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자유당에서는 로이드 조지와 애스퀴스의 갈등이 위에서 아래까지 당을 수직적으로 갈라놓았다면, 보수당의 경우에는 그 갈등이 당의 상층부를 수평적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에 당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154-7, 162-3)


9 격변기의 보수당_대공황, 사회주의와 볼드윈


"1922년 11월 15일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처음으로 얻은 확실한 승리였다." "1922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보수당과 권력을 겨루는 강력한 경쟁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1918년 선거에서도 노동당은 의석수에 있어서는 63석으로 전체 의석의 8.9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득표율로는 이미 22.2퍼센트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1922년 선거에서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약 80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민족당 소속 의원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1886년 자유당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독립 법안의 추진을 밝힌 이래 아일랜드 민족당은 자유당의 견고한 동맹세력이었다. 그러나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이들의 의석은 영국 정치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보수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북부 얼스터 지역의 연합파 영국계 주민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수당이 한결 유리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165-6)


"1924년 1월 램지 맥도날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집권하게 되었지만, 캠벨사건이라고 불린 정치적 논란 끝에 붕괴되었다." "1924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적색 공포를 최대한 활용한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채택했다." "이러한 보수당의 전략은 '지노비에프 서신'이라는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총선을 불과 나흘 앞둔 1924년 10월 25일 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최고 간부회의 의장인 지노비에프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는다. 그 내용은 영국에서, 특히 영국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 선동을 강화하라는 지령이었다. 그런데 당시 노동당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지노비에프 서신'은 노동당이 공산주의의 동조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후일 지노비에프 서신은 조작된 것으로 결국 확인되었지만 19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역사상 첫 번째 노동당 정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172-3)


# 캠벨사건 : 공산주의 계열 잡지인 〈워커스 위클리〉workers' Weekly의 편집장이던 존 캠벨은 이 잡지에 영국 군대가 (적국의 군대라 해도) 동료 노동자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글을 게재했다. 검찰은 캠벨에게 반란법 상의 선동죄를 적용했고, 결국 하원 내 조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자 맥도날드는 이 조치를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한 볼드윈은 '새로운 보수주의'를 제창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적으로는 평온한 삶, 대외적으로는 평화와 군축 그리고 전쟁 이전의 일상생활로의 복귀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다. 볼드윈의 보수당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볼드윈이 이끈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보수당 정부는 매우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다. 대표적인 사회개혁 가운데 하나인 1925년의 과부·고아·노령연금법은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가 부담해야 하는 강제 기여 구조였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슬럼을 없애고 주택을 제공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도시 외곽의 마을과 도시에는 중산계급을 위한 새로운 가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28년에는 동등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안은 여성의 투표 연령을 30세로부터 21세로 낮춰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규정했다. 경제분야에서는 석탄과 면직산업의 합리화 정책, 중앙전력국 창설 등을 이끌었고, 1926년에는 BBC 방송을 설립했다."(175-8)


"1929년 총선은 자유당 당수로서 로이드 조지의 권력을 향한 최후의 일전이었다. 자유당은 1924년에는 340명을 공천했지만, 1929년 총선에서는 513개의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했다. 447개의 선거구에서 보수당-노동당-자유당 3당 간 각축전이 벌어졌다. 적극적인 공세로 자유당은 보수당의 표를 상당부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단지 59석을 얻는데 그쳤고 이후 자유당은 정치적으로 사실상 몰락했다. 보수당의 의석은 419석에서 260석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노동당은 288석을 차지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제1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이번에도 과반 의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램지 맥도날드가 이끄는 두 번째 노동당 정부는 이전처럼 소수파 정부로 다시 출범했다. 노동당의 크나큰 불운은 하필이면 월 스트리트가 붕괴하고 대공황이 시작된 그 해에 집권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29년의 선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패배한 정당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선거가 되었다."(180)


10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보수당에서 볼드윈의 뒤를 이은 체임벌린의 온건한 유화정책은 사실 오랫동안 국민들 사이에 무척 인기 있는 정책이었다. 1938년 9월 체코 위기 와중에는 실제로 다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 때 체임벌린이 독일을 방문했고 뮌헨협상에서 히틀러와 타협을 이뤄냈을 때 영국 국민들은 큰 안도감을 느꼈고 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귀국길에 체임벌린은 자신이 '명예로운 평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어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당내 모든 계파로부터 지지는 물론 국민들의 커다란 성원을 받았다. 그가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영웅의 귀환과 같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그러나 소수의 의원들은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우려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의회 연설을 통해 그는 많은 이들이 지금 무시하고 있거나 잊어버리고 있지만 유화정책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체임벌린을 강하게 비판했다."(200-1)


11 처칠과 제2차 세계대전


"처칠은 이제 수상이 되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보수당 내에서 고집불통의 비판자였다. 관세개혁을 둘러싸고 당 노선에 반대하여 한때 당적을 자유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보수당으로 복당한 후에도 인도 자치정부 허용 문제나 대유럽 정책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해 왔고 이 때문에 한동안 당내에서 사실상 소외되어 외톨이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내각의 각료로 임명되지 못했다. 그는 동료 의원들이 볼 때 고집 센 독불장군이었고 당에 대한 충성심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광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처칠은 전시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전시내각에는 보수당뿐만 아니라 자유당과 노동당 의원을 모두 포함했다." "정치권은 소속 정당과 무관하게 위기 상황을 맞아 대체로 결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회 내에서 전시 연립정부의 지위는 굳건했고 처칠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도전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208-10)


"1945년 5월 전시 연립정부가 해산되면서 전쟁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정당 간 경쟁이 다시 본격화되었다. 전쟁기간 내내 국내 문제를 책임지면서 경제, 사회정책을 담당했던 노동당은 유권자에게 정책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신뢰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당은 중산층 유권자에게 자신의 장점을 확신시키지 못했다. 비버리지 보고서의 제안 같이 적극적인 사회개혁 정책에 대해 보수당이 보여준 부정적이고 불확실한 태도는 노동당 각료들의 확신에 차고 일치된 지지의 입장과 분명한 대조가 되었다. 보수당이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자산은 처칠 수상뿐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전쟁 수행 중 보수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했었다. 때문에 보수당은 1945년 총선에서 적절한 정책 공약을 마련하지 못했고 당 소속 각료들이나 지방조직 등도 선거에 일사분란하게 대비하지 못했다. 결국 1945년 총선은 1906년 이래 최악의 참패를 보수당에 가져다 주었다."(219-20)


"그러나 보수당이 참패한 보다 중요한 원인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영국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전쟁은 영국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군대 징집과 군사물자 조달을 위해 새로운 지역에 공장이 건설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기존 거주지에서 이주하게 되었다. 또한 도시의 어린이들은 공습을 피해 안전한 시골로 옮겨 가면서 상이한 계급 간, 지역 간 사회적 경계가 약화되었다. 여성들도 전례 없이 대규모로 전쟁 관련 업무에 동원되었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경험 속에서, 상이한 계급의 사람들이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서로 뒤섞이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 희생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기간 중 산업과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운송 관련 산업의 국유화 등을 경험하면서 정부 계획이나 국가 소유는 더 이상 낯설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전쟁 사회주의'의 경험은 노동당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221-3)


12 전후 합의체제와 처칠


"1947년 5월 11일, 버틀러가 이끄는 산업정책위원회는 보수당이 추구할 보편적인 원칙을 담은 산업헌장을 발표했다." "산업헌장은 노동당 정부가 행한 초기 입법 내용을 받아들였고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노사 간 상호협력을 지지했다. 보수당은 이와 함께 국가의료보험NHS의 설립과 철도, 석탄, 가스산업 등의 국유화도 수용했다. 또한 산업헌장 속에는 보수당이 완전고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국가, 기업, 노조 간의 협력 관계를 강조하는 코포라티스트corporatist적 입장도 수용했다. 즉 보수당은 케인즈주의 경제관리 방식이 안정적인 고용과 건전한 노사관계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으며, 국가의 역할 확대를 수용하면서 보수당은 복지국가를 해체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보수당은 사기업을 억누르거나 부의 재분배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확대된 역할도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230-1)


13 이든과 수에즈 운하 사건


"앤소니 이든은 1955년 총선에서의 압승을 통해 처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명백한 위임을 국민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탓에 경제를 비롯한 국내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별다른 경험을 쌓지 못했다. 이든은 버틀러에게 경제문제를 맡기고 자신은 대외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리더십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든과 버틀러는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주택 보조금을 줄였고 국유화 기업에 대한 자본투자 계획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더욱이 소비세도 높였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은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든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사건은 경험이 일천한 국내 문제보다 그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외교 정책 분야에서 발생했다. 1953년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권력자로 떠오른 압둘 나세르가 1956년 7월에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251-2)


# 1956년 10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집트를 전격 침공했으나, 미국은 해당 작전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표명했고, 결국 두 나라는 외교적 망신만 당한 채 무기력하게 퇴각해야 했다. 


14 합의체제의 유지와 변화의 바람


"맥밀란은 1930년대에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 국가개입과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소수의 보수당 의원 중 하나였다." "1957년, 수상이 된 이후에도 다소 인플레이션의 우려가 있더라도 국가 지출을 위축시키거나 실업을 늘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에즈 운하 사건에서 맥밀란이 얻은 교훈은 영국이 이제 다시는 미국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맥밀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전시 중 맺은 인연을 주고받으며 이전의 수준으로 양국간 연대감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다." "1950년대 영국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고 실업은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1959년 총선 승리는 사실 부분적으로는 노동당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결과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은 다소 약화되었다. 완전고용과 복지국가로 인해 이제 많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전쟁 이전과 비교할 때 노동조합과 노동당에 훨씬 덜 의존적이 되었기 때문이다."(257, 259-62)


"1964년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보수당은 다시 야당이 되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1964년까지 13년 간 보수당은 노동당을 압도하며 지배해왔다. 이러한 보수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자유당의 몰락으로 선거 경쟁은 사실상 보수당과 노동당 양 당 간에 이뤄졌다. 자유당의 득표율은 이 시기 6퍼센트를 넘기지 못했다. 특히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97퍼센트에 달했다. 거의 완전한 양당제가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 유권자의 대다수가 견고하게 보수당을 지지했고, 노동계급 유권자의 지지 역시 적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보수당을 총선 승리로 이끈 세 명의 지도자, 처칠, 이든, 맥밀란은 모두 총선 무렵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노동당의 애틀리는 1945년과 달리 1951년, 1955년 총선에서 강인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고 쇠약해졌다. 그의 후계자인 게이츠켈 역시 맥밀란을 압도하지 못했다."(271-2)


15 막다른 골목


"출신 배경을 볼 때 보수당의 많은 지도자는 '이튼 출신의 마피아'이거나 '매직 서클' 내에 포함되는 인물이었지만, 히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오히려 중하류층에 가까운 배경을 갖고 있었다." "히스가 보수당을 이끄는 동안 드러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보수당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1950년대 이래 이어져 온 합의정치 체제에서 보수당은 복지 문제나 완전고용, 노동정책에 있어서 노동당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당내에서는 보수당이 온정적 진보주의로부터 벗어나서 노동당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즉, 전후의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에 기반한 복지국가 모델에서 벗어나 공공지출을 줄이고 직접세를 낮추고 노조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등 버츠켈리즘에서 탈피하기 위한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 우파나 서독 기민당의 변화 역시 이러한 당내 노선 변화의 필요성을 부채질했다."(278)


# 버츠켈리즘Butskellism : 보수당 정부 버틀러 재무장관의 정책과 그 이전 노동당 정부 휴 게이츠켈 재무장관의 정책이 유사한 것을 빗대어 지어낸 말


"1970년 3월 런던 남부 크로이든의 셀스돈 파크 호텔에서 열린 예비내각 회의에서 히스는 보수당이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집권 후 정책 방향에 대한 논의를 했다." "여기서의 논의 결과 자유 시장 경제 정책으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셀스돈 회의에서는 복지국가, 세금, 교육, 국유화 등 매우 폭넓은 정책 분야에 대해 논의했으며, 기본 방침은 보수당 정부가 낙후된 산업이나 경쟁력 없는 산업 분야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레임덕' 산업이 홀로 서지 못하더라도 국가 보조금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개인이 어렵더라도 무료 학교급식이나 우유 배급, 무상 의료지원 등을 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역시 영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셀스돈에서의 논의를 통해 1950년대 이후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한 합의체제로부터 보수당의 정책 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282)


"하지만 당초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실업이 계속 늘어나면서 제조업 투자도 침체에 빠지게 되자 당황한 히스 정부는 정책상의 급격한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1972년 3월 예산안을 짜면서 재무장관 바버는 세금을 다소 낮췄지만 공공 지원금은 대폭 늘렸다. 이도 저도 아닌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이다. 1972년 산업 분야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정부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둔 1972년의 산업법은 히스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의 분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레임덕' 산업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정책이 폐지되었고, 산업개발처를 신설하여 경쟁력이 없는 기업에게도 지원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기업 지원을 위해서 지역개발지원금도 활용하기로 했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도록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교육과학성 장관을 맡고 있던 대처의 태도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셀스돈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교육과학성에서 관장했던 학교 무료 우유급식 폐지는 나중까지도 바뀌지 않았다."(285-6)


# 1975년 2월 11일 마가렛 대처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다.


16 대처 시대_철의 여인과 신자유주의 혁명


"대처의 예비내각에서 중요한 인물은 키스 조세프였다. 키스 조세프는 1974년 중순 마가렛 대처를 비롯한 당내외의 지지자들과 함께 정책연구센터를 설립했다. 보수당 조사국의 싱크탱크였던 정책연구센터는 영국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히스 정부 때와는 달리 통화주의, 자유 시장 경제 원칙을 강조했다. 히스와 그 이전의 맥밀란 수상은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세프와 그의 동료들은 확대된 정부가 바로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만이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으며, 집단주의의 흐름은 이제 퇴조했으며 탈규제, 민영화, 재산권의 확대, 개인의 노력과 노조의 개혁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적 방향은 뒤에 대처 정부의 핵심적 의제가 되었다." "대처의 리더십 하에서 보수당은 점진적으로 보다 통화주의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지만, 총선을 의식해서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인 정책 공약의 제시는 피해나갔다."(296-9)


"1982년 4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1976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갈티에리 장군이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침공한 것이다.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은 150년 전에 영국이 차지한 것이었지만 사실 아르헨티나가 침공해 오기 전까지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이 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침공은 영국 국민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했다." "5월 21일 영국 해병대와 특수부대가 포클랜드 섬에 상륙하면서 전세가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은 항복했다. 포클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은 재확인되었다. 전쟁 승리와 함께 보수당 정부의 인기는 급격히 상승했다. 대처의 결단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의 지속, 실업의 증가,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위상 실추 등 그 동안 영국 국민들이 들어 온 실망스러운 소식과는 달리 포클랜드에서의 승전부는 다시금 국가적 위신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307-9)


"1987년 10월 19일 전 세계적으로 증시가 갑자기 폭락했다. 소위 '검은 월요일'의 충격으로 영국 증권시장 역시 하루아침에 24퍼센트의 가치가 하락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등 쌍둥이 적자로 고전하고 있던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감 하락이 주된 원인이었다. 금융 관련 스캔들도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이에 재무장관 로손은 동요하지 않고 기존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가 고집한 감세 정책으로 인해 물가상승이 계속되었고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했다. 또한 경상수지 적자는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고 계속된 인플레이션으로 이자율이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 대처는 공기업의 민영화와 임대주택의 판매 등으로 주식이나 주택을 소유히게 된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율의 상승과 계속된 인플레이션은 대처로 인해 혜택을 입은 바로 이들 중산층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처로서는 자신의 핵심 지지층이 동요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320)


# 1989년 11월 22일, 보수당 당수 2차 경선에 불참하면서 대처 시대가 막을 내리다.


17 유럽 이슈와 당내 불화


"대처의 뒤를 이은 메이저 수상은 여론조사와 당내에서의 비관적인 예측을 뒤집고 1992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전례 없는 보수당의 연속 4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정작 메이저가 당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메이저 리더십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도전은 다름 아닌 유럽 문제였다. 총선이 끝난 뒤 다섯 달 뒤인 1992년 9월 16일 투기 자본이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면서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검은 수요일'의 충격으로 인해 메이저 정부는 부득이 '유럽환율조정체제'ERM에서 탈퇴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유럽통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당내에서 보다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메이저는 토니 블레어의 등장으로 만만치 않은 야당을 상대해야 했다. 토니 블레어가 주창하는 '신노동당'은 보수당의 비밀 병기 가운데 하나인 정치적 적응력, 유연성을 선점해 버렸다." "이제 노동당은 더 이상 보수당을 지지해 온 유권자들을 두렵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332-5)


"메이저 수상이 이뤄낸 중요한 업적은 북아일랜드 정책이다. 1993년 12월 메이저는 아일랜드 수상 알버트 레이놀즈와 함께 '다우닝 가 선언'을 통해 북아일랜드의 정치세력들이 무력투쟁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후 가톨릭계와 신교 측의 무장테러세력이 휴전을 선언했다. 후일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의 중요한 돌파구가 된 1998년 '굳프라이데이협정'을 조인한 이후 당시 수상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인정했듯이 메이저는 북아일랜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게 참패를 당했다. 메이저에게 아쉬웠던 점은 기존의 당내 갈등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아젠다를 발굴해서 그것을 자신의 리더십으로 연결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그 과제는 메이저가 떠난 이후에도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338-9)


18 다시 황야에서


"2005년 데이비드 카메론이 보수당 당수로 당선된 것은 1997년 이전 18년 간 야당 신세에 머물러 있던 노동당이 당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당시 41세였던 젊은 토니 블레어를 필요로 했듯이 보수당 역시 당의 면모일신을 위해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카메론은 한 때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블레어의 계승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유주의적 색채를 가지면서 당의 개혁과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카메론은 시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적 색채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기조는 '온정적 보수주의'로 요약되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보수당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보수당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환경보호에 대한 적극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무와 연두색을 넣은 새로운 당 로고를 제정하기도 했다."(347-9)


19 에필로그_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성공적인 생존의 역사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보수당은 대단히 권력을 열망하는 정당이다. 이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급격한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실 보수당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데는 다소 취약하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정당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바꾸려고 하기보다 지키려고 하는 데서 보수당이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셋째, 보수당은 당의 외연을 넓혀 왔다. 토지소유 계급, 귀족 집단으로 출발한 보수당은 산업혁명 이후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사회적 힘으로 떠오른 상공업자들을 끌어들였고 이들과 하나로 융합했다. 노동계급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된 이후 당 조직의 강화를 통해 이들을 보수당의 지지자들로 만들었다."(353-8)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수호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당은 디즈레일리나 볼드윈처럼 필요하다면 사회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애국주의 정당, 제국의 정당과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요소를 보수당의 전통에 포함시켰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로 평가받는 것은 기존 질서와 헌정체제의 수호라는 보수당의 전통적 가치에 사회개혁과 애국주의 정당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디즈레일리는 사회개혁을 통해 보수당을 어느 한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모두의 정당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일국 보수주의'의 전통은 보수당의 정치적 명분과 기반을 크게 확대시켰다." "애국주의에 대한 강조가 계급 적대감을 퇴색시키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모든 계급이 국왕과 유니온 잭 그리고 국가의 상징에 감동하고 보수당을 중심으로 단합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만은 분명하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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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지음, 이종인 옮김 / 북길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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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르크스의 이론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 계급 이론과 역사의 경제적 해석은 두 개의 독립된 학설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전자(사회 계급 이론)는 후자(역사의 경제적 해석)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그리하여 그것(사회 계급 이론)은 생산의 조건 혹은 생산 양식의 '운영 방식modus operandi'을 구속하거나 더욱 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생산 조건 혹은 생산 양식은 사회 구조를 결정한다. 또 그 구조를 통하여 문명의 모든 발현물이 나타나고, 문화적·정치적 역사의 전반적인 행진이 시작된다. 하지만 사회 구조는 모든 비非사회주의적 시대에 대해서도 계급의 관점─두 개의 계급─에서 규정된다. 이 두 계급은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들이고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 체제(두 계급을 통하여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체제)의 논리에서 유일한 '직접적' 창조물이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두 계급을 순전히 경제적인 현상, 그것도 아주 협소한 의미의 경제적 현상으로 만들어버렸다."(41-2)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사회학적으로, 즉 생산 수단에 대한 개인적 통제의 제도로 '정의'했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의 '역학mechanics'은 그의 경제 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마르크스 경제 이론은 계급, 계급 이해, 계급 행태, 계급 간의 교환 따위의 개념들에 구현된 사회학적 데이터가 어떻게 경제적 가치, 이익, 임금, 투자 등의 경제적 수단을 통하여 발현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또 그런 데이터가 어떻게 독특한 경제 과정을 창출하는지 보여준다. 그 경제 과정은 마침내 그 자체의 제도적 틀을 부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사회적 세계의 출현을 위한 조건들을 창조한다. 사회 계급 이론은 역사의 경제적 해석과 이익 경제의 개념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교통정리하고, 모든 현상을 공통의 초점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이론은 유기적 기능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 체계에서는 그 이론으로 어떤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그런 유기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43-4)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을 논의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완전 경쟁적 경제하에서 착취 이윤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생산을 확대하도록 유도하거나, 생산의 확대를 시도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축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축적의 대대적 효과는 제품 가격의 하락을 통하여 혹은 결과적인 임금 비율의 상승을 통하여 잉여 가치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보여주는 아주 그럴듯한 사례로서 마르크스는 이런 모순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런 경향은 개별 자본가들이 축적을 강제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전체 자본가 계급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심지어 이와는 다른 정태적 과정에서도 일종의 축적 충동이 발생한다. 이 과정은 안정된 균형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축적이 잉여 가치를 제로 수준으로 떨어뜨려 자본주의 그 자체를 파괴한다."(58-9)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경제는 정태적이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 경제는 꾸준한 방식으로 내내 확대되어 나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기업에 의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변혁을 이루어나간다. 즉 그 어느 때든 새로운 상품, 새로운 생산 방법, 새로운 상업적 기회가 기존 산업 구조로 흘러드는 것이다. 기존 구조와 사업 수행 조건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어떤 상황은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뒤집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발전은 곧 동요를 의미한다. 이런 동요 속에서, 경쟁은 정태적인 과정(비록 경쟁적이라 할지라도)에서 작동하는 것과는 완전 다르게 작동한다.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이윤을 올릴 가능성, 낡은 제품을 더 값싸게 생산하여 이윤을 올릴 가능성 등이 한결같이 발생하며 새로운 투자를 요구한다. 이런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방법은 낡은 제품 및 낡은 방법과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게는 죽음을 안겨주는 불공평한 방식으로 경쟁한다."(59)


"마르크스는 경기 순환론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잉여 가치의 출현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 기계화(고정 자본의 상대적 증가), 잉여 인구, 이 인구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궁핍화 현상 등이 서로 결합하여 자본주의의 대재앙을 가져온다는 논리에 동의하자.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자본주의 과정의 경기 변동을 꼭 집어 설명해 주고 또 번영과 침체가 교대하는 '내재적' 변화를 설명하는 요인을 얻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생산 규모가 〈발작적으로〉 확장하는데 이것이 〈똑같이 갑작스러운 수축의 서곡〉이라는 견해를 표시했을 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적절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경제학의 피상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경제학은 산업 사이클의 주기적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에 불과한 신용의 확대와 수축을 그 변화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일련의 부수적인 사건과 우연한 사건들을 마치 중요한 공헌을 하는 요인처럼 말하고 있다."(69-70)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 당시에 경기 변동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업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선배 경제학자들도 경기 변동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는 챘다. 그러나 그들은 〈위기들〉이라고 알려진 대규모 붕괴에만 주목했을 뿐, 그 위기의 진면목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 위기들이 경기 순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들임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보다 큰 그림 혹은 보다 세부적인 그림은 보지 못하고, 위기들을 오류, 과도함, 비행의 결과 혹은 신용 메커니즘의 오작동 등에서 발생하는 산발적 불운으로 여겼다. 내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그런 전통을 극복한 최초의 경제학자였고 쥐글라의 저작을 예고하는 사람이었다. 마르크스는 경기 사이클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 현상을 분명히 꿰뚫어 보았고, 그 메커니즘을 상당부분 이해했다. 이 때문에 그는 현대 경기 순환 연구 분야의 아버지들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70-1)


"그의 모든 단점들은 그의 논증이 추구하는 위대한 비전 때문에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 그 단점들이 어떤 경우에는 그 비전에 의해 구제되고, 어떤 때는 구제되지 못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가 실제로 성취한 경제학 방법론 중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경제의 역사를 직접 연구하거나 아니면 다른 학자들의 역사서를 활용했다. 하지만 경제사經濟史의 사실들을 별도의 공간에다 따로 모셔놓았다. 경제사의 사실들이 이론에 도입될 때에는 예증의 역할 혹은 결과 검증의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경제사의 사실들은 그 이론과 기계적으로 섞였을 뿐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사실과 이론을 화학적으로 결합시켰다. 다시 말해 그는 사실들을 논증의 중심으로 도입하여 결과를 도출했던 것이다. 그는 경제 이론이 역사 분석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알아보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최초의 일급 경제학자였다. 다시 말해 역사 이야기가 '이론적으로 규명된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74-5)


"마르크스가 볼 때 진화는 사회주의의 부모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구도의 내재적 논리를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혁명이 진화 과정의 어떤 부분을 대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혁명(구체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도입되었고, 완전히 다른 전제 조건들 아래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 혁명은 그 성격이나 기능에 있어서 부르주아 과격파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음모꾼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벌어지는 혁명이다." "사물의 내재적 논리에 의해 촉발된 여느 사상들이 그러하듯이, 그 심오하고 원숙한 사상은 의심스러운 환상적 번쩍거림 아래에 뚜렷이 보수적인 의미를 감추고 있다. 그 어떤 진지한 논증도 무조건적으로 〈이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화려한 수사修辭를 벗겨보면,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보수적 의미의 해석을 발견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아주 진지한 대접을 받을만한 사상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94-5)


2부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 과정은 우연의 작용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의 공력으로 인해 점진적으로 일반 대중의 생활 수준을 높인다. 자본주의 과정은 일련의 변천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데, 그 변천의 강도는 발전의 속도에 비례하면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그 작업을 수행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1928년 이전의 60년 동안에 누렸던 호황을 다시 누려 1인당 1,300달러의 소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사회 개혁가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미해결 소망 사항이 자동적으로 해결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 과정을 크게 손대지 않고서도' 성취될 수 있다." "망각의 공동묘지에는 아동 노동, 하루 16시간 노동, 방 하나에 다섯 식구 거주 등의 유령이 잠들 것이다. 이런 유령들은 과거에 자본주의 업적의 사회적 비용으로 자주 거론되었으나, 장래의 나머지 대안들을 생각할 때 반드시 관련 있는 사항들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현시대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창기 시대의 무능력과, 완전하게 성숙한 자본주의 체제의 능력 사이의 중간쯤에 서 있다."(108-11)


"자본주의는 그 성질상 경제적 변화의 형태 혹은 방법이 결코 정태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자본주의 과정의 이런 진화적 특징은 경제생활이 사회 환경이나 자연 환경(늘 변화하고 그 변화로 경제 활동의 데이터를 변화시키는 환경)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서만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은 중요하고 이런 변화들(전쟁, 혁명 등)이 종종 산업 변화의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주된 동인은 아니다. 진화적 특성이 인구와 자본의 준準자동적인 증가 혹은 화폐 제도의 변덕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엔진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근본적 충동은 새로운 소비자 물품, 새로운 생산이나 수송 방법, 새로운 시장, 기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조직 등에서 나온다." "(돌연변이와도 같은) 이 과정은 '내부로부터'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꾸준히 변화시키면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항이다."(125-6)


"완전 경쟁은 모든 산업에의 자유로운 진입을 의미한다. 일반 이론의 범위 내에서는 자유 진입이 최적 자원 분배의 조건이고, 또 생산을 극대화하는 조건이다. 만약 우리의 경제 세계가 잘 확립된 불변의 생산 방식으로 친숙한 상품들을 생산하는 여러 개의 회사들로 구성되어 있고, 추가 인원과 추가 저축이 결합하여 똑같은 유형의 새로운 회사들을 복제하는 세계라면, 특정 산업에 신규 진입을 가로막는 것은 공동체에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완벽하게 자유로운 진입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입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생산 방법과 새로운 상품에의 진입은 처음서부터 완전한─혹은 완전하게 신속한─경쟁 상황 아래에서는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 발전의 상당 부분이 완전 경쟁과는 양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완전 경쟁을 주장하는 전통적 명제의 경제생활 구도에서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없다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150-1)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진화의 조건들 속에서 작동하면서 완전 경쟁 모델은 그 나름의 낭비를 보여준다. 완전 경쟁과 양립하는 형태의 회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내부적 효율성, 특히 기술적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완벽하게 경쟁적인 산업은 대기업에 비하여 발전과 외부적 교란의 영향 아래에서 파괴되기가 훨씬 쉽다. 즉 불황의 세균을 퍼뜨리기가 더 쉽다는말이다." "반면에 대기업은 경제 발전의 가장 강력한 엔진이 되었고, 개별적 사례나 개별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제한적인 전략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문에 대기업은 장기적인 총생산량의 확대에 기여했다. 이런 점에서 완전 경쟁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열등한 모델이며, 이상적 효율성의 대명사로 찬양받을만한 자격도 없다. 따라서 정부의 산업 규제 이론이 기존의 대기업 이론에 바탕을 두는 것은 오류이다. 각 산업이 완전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기업도 움직여야 한다는 그런 원칙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된다."(153-4)


"안타깝게도 기업가의 사회적 기능은 이미 중요성을 잃고 있고, 장래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중요성을 잃을 것이다. 기업가 정신의 주된 동인인 경제 과정 그 자체가 앞으로도 계속 현상을 유지한다고 해도, 이런 전망에는 변함이 없다. 우선, 일상적인 업무 바깥에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과거보다 현재가 훨씬 더 쉬워졌다. 혁신 그 자체도 이제 일상적인 업무로 축소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개발은 점점 더 훈련받은 전문가 팀의 비즈니스가 되어가고 있고, 그 팀은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그것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초창기에 있었던 상업적 모험의 로맨스는 신속히 사라져간다. 과거에 천재의 섬광 속에서만 구상되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철저하게 사전에 계산될 수 있다. 경제적 변화에 적응되어 그런 변화를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는 개성이나 의지력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리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저항 아래서) 경제 발전은 몰개성화되고 자동화된다."(190-1)


"만약 자본주의 진화(발전)가 중지되거나 완전 자동화된다면, 다시 말해 기업가의 사회적 기능이 중요성을 잃게 된다면, 산업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기반은 현행 관리직에게 지불되는 임금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단 일부 예외로서, 유사 임대료나 독점적 소득은 당분간 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기업 정신은 그 성취로 인해 발전을 자동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기업 정신은 그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의 성공이 가져오는 압력으로 인해 스스로 산산 조각나버린다. 완전 관료화된 거대 산업 재벌은 중소기업들을 몰아내고 그 소유주들을 〈수탈〉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기업가들을 추방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수탈한다. 그 과정에서 이 계급은 그 소득을 잃어버리고, 또 더욱 중요하게는 그 기능을 상실한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는 그 사상을 선전하는 지식인이나 선동가들이 아니라, 밴더빌트, 카네기, 록펠러 같은 재벌들인 것이다."(193)


"나는 부르주아 계급이 합리적이고 반反영웅적이라고 말했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국가를 자신의 의지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반영웅적인 수단에만 의존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경제적 성과에서 기대하는 것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고, 돈을 내놓겠다고 약속하거나 내놓지 않겠다고 위협할 수 있으며, 배신을 잘 하는 용병 부대 혹은 정치가 혹은 언론인을 돈 주고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 정치적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적 보호 틀을 해체하면서, 자본주의는 발전의 장애를 제거하는 한편 그 자신의 붕괴를 막아주는 보호벽도 함께 날려버렸다. 그 과정은 무자비한 필요성의 측면에서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계층의 협력자를 제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 협력자와의 공생이 자본주의 구도에서 아주 핵심적 요소인데도 말이다."(199-201)


"이렇게 하여 자본주의 과정은 모든 제도들, 특히 사유 재산과 자유 계약의 제도적 틀을 뒷전으로 내몰고 말았다. 진정으로 〈사적인〉 경제 활동의 욕망과 파도를 표현해주던 것들을 제거한 것이다. 노동 시장의 자유 계약은 이미 사라졌다. 또 그런 제도들을 철폐하지 않은 곳에서는 기존의 법적 형태의 상대적 중요성을 다르게 바꾸어 놓음으로써─가령 합자 회사 혹은 개인 회사에 속하는 법적 형태를 주식회사의 법적 형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동일한 목적을 달성한다. 혹은 그 형태의 내용이나 의미를 바꾸기도 한다. 자본주의 과정은 공장의 담장과 기계류를 단순한 주식 뭉치로 대체함으로써, 사유 재산의 개념에서 생명력을 빼앗아버렸다." "가시적이고 가촉적인 실체가 없는, 구체성이 없고, 기능성이 없으며, 주인이 부재하는 소유권은 과거의 역동적인 재산권처럼 강력한 도덕적 동맹을 이끌어낼 힘이 없다. 결국, 사유재산의 의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205)


3부 사회주의는 작동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 청사진이 우월한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사회주의가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경쟁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화가 최대 속도로 내달릴 때에는 이런 해방의 타당성이 의심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진화가 경제 메커니즘의 내부적 요인 혹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항구적으로' 침체된다면, 그 주장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무한한 움직임과 반대 움직임이 필요하고, 또 행동을 마비시키는 불확실성의 분위기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반면,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그런 전략이나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생산 문제의) 확정적 해결로 가는 길을 단축하거나 부드럽게 해주거나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은 뭐든지 인간의 에너지와 물질 자원을 절약해주고, 또 소정의 결과에 도달하는 비용을 줄여준다. 이렇게 하여 절약된 자원이 완전히 낭비되지 않는 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식) 효율성은 필연적으로 늘어나게 된다."(275-6)


"이것은 특히 경기 순환의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대부분의 현상들에 적용된다. 자본주의 기업은 조절 장치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들이 벌어질 때 생산을 미리 확정하는 계획 경제, 특히 체계적인 조정과 질서 있는 분배는 아주 효율적이다. 특히 어떤 때에는 돌발적 경기를 예방하고, 또 어떤 때에는 불황적 반작용을 방지한다. 이런데 있어서 계획 경제는 이자율이나 여신 공급의 자동적 혹은 조작적 변경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효과적이다. 사실, 계획 경제는 경기 순환의 상승이나 하강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반면, 자본주의 질서는 그런 상승이나 하강을 완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과정─특히 경쟁적 자본주의 과정─에서는 낡은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일시적인 마비와 손실, 그리고 부분적인 기능 부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괄적 계획 경제에서는 이 과정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낡은 것, 그것만을 버리기〉로 최소화될 수 있다."(277)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도 우리가 앞서 도달한 결론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들의 동의는 이런 단서를 달고 있다. 〈그래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사회주의 엔진을 지휘하는 사람이 신적인 존재이거나, 그 엔진을 담당하는 사람이 대천사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사회주의 사회라고 해도 인간은 신적인 존재나 대천사가 아니고, 인간성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예요. 동기 부여와 책임과 보상이라는 패턴을 가진 자본주의 제도가 이론상으로는 최선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실천성 높은 제도라는 거죠.〉" "우리는 신적 존재에 대해서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사회주의 엔진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 그런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결해야 할 과제─일단 이행기의 어려움들이 모두 처리된 이후에─는 현대 세계의 산업 지도자가 직면한 과제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니면 한결 더 쉽다고 할 수 있다."(284-7)


"사회주의 엔진을 돌리기 위해서 대천사 역시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이 목적을 위하여 유익한 구분을 하나 해보자. 첫째, 느끼고 행동하는 일련의 성향들이 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바뀔 수 있다. 단, 그 성향들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 패턴(〈인간성〉)은 그대로이다. 우리는 이것을 '재조건화에 의한 변화'라고 부르자. 둘째, 그런 근본적 패턴 내에서 재조건화가 느끼고 행동하는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 환경적 변화가 합리적인 것이라면 그 성향은 결국 그 변화에 부응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성향이 변화에 일시적으로 저항하면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저항을 '습관'과 결부시켜볼 수 있다. 셋째, 인간성이라는 것도 동일한 인간 집단 내에서 변화될 수 있고, 또는 그 집단의 불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인간성은 인적 구성이 바뀐 집단 내에서는 어느 정도 신축성이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해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필요는 없다."(287-8)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은 소규모이지만 고도로 집중된 러시아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붕괴시켰다. 노동자 대중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그들은 마치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무수히 파업을 벌이거나 공장을 접수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노동자 평의회 혹은 노동조합에 의한 관리가 통상적이었고, 많은 지도자들에 의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1918년 초에 이루어진 타협에 의하여, 노동조합은 엔지니어들과 최고 평의회에 대하여 최소한의 영향력을 겨우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타협은 아주 불만족스럽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결국 1921년에 신新 경제 정책을 실시하게 된 주요 이유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1차 5개년 계획(1928년)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32년에 이르러 산업 프롤레타리아들은 과거 차르 시대보다 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볼셰비키들이 다른 것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이 점 하나만은 그때 이후 확실하게 성공했다."(306)


"노조는 탄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에 의해 권장되었다. 노조원 숫자는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1932년 초에는 근 1,700백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집단 이익을 주장하며 규율과 성과를 방해하던 존재에서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규율과 성과를 올려주는 수단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는 이런 조치에 붙이는 반反혁명적이라는 기이한 레이블에 미소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조치를 반마르크스적이라고 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태도에는 반사회주의적인 것은 없다. 계급 투쟁과 함께 방해주의적인 관행은 사라지고, 집단 협약의 특성 또한 바뀌는 것은 논리적 결과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개인 규율과 집단 규율을 정립시킬 수 있었고, 그것은 우리가 규율에 대하여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켰다. 동시에 권위주의적 규율이 경제적 성과에 수행한 역할을 간과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권위적 규율은 개인 규율과 집단 규율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강력하게 보충했다."(306-8)


4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고전 (민주주의) 이론의 주된 문제점은 〈국민들〉이 모든 개별적 문제에 대하여 확정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의견을 갖고 있고, 또 그런 의견을 대행해줄 〈대표〉를 선임함으로써 그런 의견을 구체적으로 표명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민주적 제도의 2차적인 의미이고, 유권자들이 정치적 문제를 직접 결정한다는 것이 1차적인 의미였다. 이 순서를 바꿔, 대표를 선출하여 결정을 위임하는 것이 1차적 의미이고, 유권자에 의한 문제 결정을 2차적 의미라고 해보자. 다르게 설명하자면 국민의 역할은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 혹은 중간 단체를 만들어내고, 이 단체로 하여금 전국적인 행정부 혹은 정부를 결성하는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런 정의를 갖게 된다. 이 민주적 방법은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며, 그 제도 내에서 개인들은 국민의 표(투표)를 얻는 경쟁적 투쟁의 수단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권력을 획득한다."(380-1)


"우리가 취한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민〉이 〈통치〉한다는 그 문자적 의미대로 국민이 실제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이 자신들을 통치할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국민은 이 문제마저도 아주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의를 더욱 비좁게 잡아야 했다. 즉, 민주적 방법을 확인하는 추가적 기준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민주적 과정이란 유권자의 투표를 얻기 위해 지도자 후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유 경쟁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의 한 가지 측면을 이렇게 표현해볼 수도 있다. 즉, 민주주의는 정치가의 통치이다."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정치가 필연적으로 평생 전문직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개별 정치가들이 정치 분야에 갖고 있는 뚜렷한 전문적 이해, 그리고 독립된 그룹들의 이해를 인식하게 된다."(398-9)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정치의 인적 요소─당 기구를 운영하는 사람, 의회에 진출하는 사람, 각료직에 오르는 사람 등─가 충분히 높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절한 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갖춘 개인들이 충분히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민주적 방법은 국민 전체 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소명에 부응한 사람, 좀 더 구체적으로 선출직에 입후보한 사람들 중에서만 뽑는다. 모든 선출 방법이 이렇게 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소명이 재능과 품성을 유인하는 정도에 따라, 그 소명 내에서 국민 평균보다 낮은 혹은 높은 성과가 달성될 것이다. 그러나 관직에 대한 경쟁적 갈등은 한편으로는 인력과 정력의 낭비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적 과정은 정치 분야 내에 손쉽게 어떤 조건들을 형성한다. 그런 조건들이 일단 형성되면, 정치 말고도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둘 만한 인재들을 대부분 물리치게 된다."(405-6)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정치적 결정의 효과적 범위가 너무 멀리까지 확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적 방법의 전반적 제약 사항들에 달려 있다." "그 범위는 정치적 리더십의 경쟁을 벌이는 정부가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의 종류와 수량에 달려 있다. 또 그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자질, 정치적 기구의 유형, 정치인들이 상대해야 하는 일반 여론의 패턴 등도 그 범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민주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일반 국민이 이해할 수 있고 또 진지한 의견을 갖고 있는 문제들만 정부가 다루는 것은 아니다. 성격은 같지만 강도가 조금 떨어지는 문제들도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가령 형법 같은) 특정 문제의 입법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자면 정부나 의회의 비전문가들이 빠져들기 쉬운 복수심이나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정치적 결정의 '효과적' 범위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407-8)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현대 산업 국가들의 민주 정부는 공공 행위의 모든 영역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공공 행위는─그 숫자가 많고 적음의 문제와는 상관없이─잘 훈련된 관료제의 서비스를 포함한다. 이 관료제는 좋은 전통과 명성을 갖고 있고, 투철한 사명감과 그에 못지않은 '단체정신esprit de corps'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관료제는 그 나름의 행정 원칙들을 개발해야 하고, 또 그런 원칙들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 나름의 권리를 갖춘 권력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관료 사회의 인사, 보직, 승진은 형태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그 사회의 집단 의견에 따라─정치가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공무원 규정에 의거하여─결정되어야 한다. 언제나 그런 일이 벌어지듯이, 정치가나 일반 여론이 공무원 사회에 비위가 상하여 아우성을 칠 때에도 관료 사회는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409-10)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네 번째 조건은, '민주적인 자기 통제'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가 내의 모든 중요한 집단들이 법령집에 들어 있는 법규와 유능한 입법 기관이 내놓은 행정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민주적 방법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민주적 자기 통제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유권자와 의회는 사기꾼과 협잡꾼의 달콤한 제안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지적·도덕적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혹은 그들의 방식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국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손상될 것이고 또 그에 대한 충성심도 감소할 것이다. 입법적 개혁이나 행정 조치를 위한 개별적 법안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질서 정연하게 줄 서는 것을 돕는 정도로 그쳐야지, 빵 배급소에 달려들어 빵을 직접 나누어주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상당히 자발적인 복종이 필요한 것이다."(411)


"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적 방법의 운용이라는 측면에서 한 가지 훌륭한 자격을 갖고 있다. 정치적 결정의 영역을 경쟁적 리더십의 방법이 주무를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지는 그들만의 독특한 해결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정치 구도는 공공 권위의 영역을 제한함으로써 정치의 영역을 제한한다. 부르주아의 독특한 해결안은 절제하는(간섭을 적게 하는) 국가의 이상으로, 국가는 주로 부르주아의 합법성을 보장하고 전 분야에서 자율적인 개인 노력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 내재된 평화를 사랑하고─적어도 반전적反戰的이고─자유 무역을 선호하는 경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는 정치적 결정의 역할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크게 감소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정치적 역할의 중요성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축소되어 때로는 정치 분야의 무기력이 의심될 정도인 것이다."(415-6)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민주적 절차의 형태와 조직은 부르주아 세계의 구조와 문제들로부터 자라나온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원칙 그 자체도 이런 과정에서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민주주의적 형태와 조직이 자본주의와 함께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충선, 정당, 의회, 내각, 총리 등은 사회주의 체제가 정치적 결정의 아젠다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편리한 도구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아젠다의 리스트에는 오늘날 목격되는 개인의 이해와 그 이해를 규제해야 하는 필요에서 나오는 갈등의 흔적이 전혀 없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사항들이 추가될 것이다. 투자량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기존의 사회 제품 분배 규칙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신규 사항으로 등재될 것이다." "이때 내각의 정치가들, 특히 생산청의 수석 자리를 맡은 정치가는 틀림없이 정치적 요소의 영향력을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효율성과 배치되는 수준으로 그런 권한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다."(420-1)


"민주적 과정을 지키는 일은 아주 미묘할 수도 있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이 언제나 유혹에 빠지기 쉬운 행동 노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결국 사회주의 경제의 효과적 관리는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를 의미한다. 공장에서 엄격한 규율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도 투표소에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주권을 이용하여 공장의 규율을 완화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으므로, 정부─국가의 미래를 늘 명심하는 정부─는 이런 규율을 잘 활용하여 그런 주권을 제한해야 한다. 현실적 필요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비하여 더 속임수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 고전 이론에 깃든 이상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그런 체제는 아닐 것이다."(423)


5부 사회주의 정당들의 역사적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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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5 - 개발주의 시대로 1972-2014 중국근현대사 5
다카하라 아키오.마에다 히로코 지음, 오무송 옮김 / 삼천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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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혁명에서 발전으로, 1972~1982


"마오쩌둥 사상에는 개발주의적인 사고와 급진주의적인 사고가 병존했다. 마오쩌둥은 만년인 1974년 연말부터 1975년에 걸쳐 서로 대립되는 듯한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부르주아의 여러 권리를 제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 분배 원칙을 부정하고, 화폐 교환이나 상품마저도 비판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지시였다. 이 지시는 '4인방'에 이용당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학습하는 운동을 추진하는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안정과 단결에 관한 지시였는데, 이는 주로 '4인방'을 대상으로 한 비판이었다. 파벌적인 권력투쟁에 대한 충고이자 지도부는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는 경제를 담당하는 부총리 리셴넨에게 내린 국민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덩샤오핑을 요직인 당 부주석, 제1부총리, 총참모장에 앉히고, 병석에 있는 저우언라이를 대신하여 당 중앙의 일상 활동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게 했다."(33-4)


"1976년 2월, 총리대행으로 지명되었고, 그 해 10월 6일에는 주도적으로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를 견지하는 이른바 '두 가지 범시론'이라는 방침을 표방해 왔다. 여기에 화궈펑은 〈마오 주석의 이미지를 손상하는 모든 언동을 제지해야 한다〉며 또 하나의 '범시'를 추가로 제기했다. 화궈펑이 보기에, 마오쩌둥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중국공산당 및 그 지배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1977년 1월 저우언라이 서거 1주기 무렵, 베이징을 비롯한 몇몇 크고 작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추도 움직임이 나타났다." "화궈펑 등은 이 때 '두 가지 범시론'을 제창했다고 알려졌다. 즉 '4인방' 잔당과의 투쟁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르고, 만사를 〈과거의 방침에 따라야〉한다고 명확히 함으로써 권력 이행기에 대국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그 시점에서 천안문 사건의 명예회복과 덩샤오핑의 부활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저지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42)


"그러나 화궈펑과의 사상 노선 투쟁에서 승리한 덩샤오핑이 도입한 개혁 정책은 무엇보다 분권화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지방이나 기업에 예전보다 큰 경제상의 권한을 주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너스 제도나 작업량에 따른 임금지불 제도를 부활시켰다. 둘째로, 부분적인 시장 도입, 곧 생산과 유통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가격 자유화를 실시했다. 세 번째로, '개체호'(個體戶)라고 일컫는 자영업을 허용함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었다. 규모가 큰 개체호가 나타나면 최종적으로 민간 기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대약진 때에 만들어진 농촌 공업의 기초 위에 마을 운영이나 개인 경영 등을 통한 '향진(鄕鎭) 기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 주체는 계획 대상에 들지 않았고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즉 인구 압력에 따라 계획경제의 틀에서 빠져나온 경제 주체가 늘어나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메커니즘이 생긴 것이다."(53)


2장 개혁개방을 둘러싼 공방, 1982~1992


"1980년대 초반, 중국은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서 대일 관계를 고려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했다." "하지만 1982년 9월 제12회 당대회의 정치보고에서, 후야오방 총서기는 '독립자주 외교'로 전환한다고 밝히고 '전방위 외교'를 제창하며 소련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된다. 독립자주 외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거리를 조정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대미 관계에서 최대 현안 문제가 미국의 타이완에 대한 무기 수출이었다. 1981년에 등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친타이완파로 알려졌고, 그해 말에 전투기 부품과 공군 서비스를 타이완에 수출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중국 측의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 8월 미중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제12회 당대회 정치보고는 초강대국의 패권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중국은 〈그 어떤 강대국 또는 국가 블록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68)


"중국은 초강대국(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해 비판했지만 종래의 '반패권 통일전선' 노선은 드러내지 않았다. 국방 건설보다는 경제 건설을 우선하는 덩샤오핑에게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국경 지역의 긴장 완화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 배경에는 소련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레이건 정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미소 관계의 악화가 있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재검토하면서 중소 관계는 호전된다. 미중·중소 관계가 개선되면서, 1988년 덩샤오핑은 〈국제정치 분야는 대결에서 대화로, 긴장에서 완화로 전환되고 ······ 현재는 국제정치의 새 질서를 수립해야 할 시기〉라고 발언했다 .1989년 5월, 중·소 두 나라는 평화 5원칙을 담은 '베이징코뮤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공산당 지도부, 특히 좌파들한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69-72)


"천안문 사건 후 덩샤오핑도 더는 당정 분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해체됐던 정부 기관의 당조가 부활하고 노동조합 등 조직들의 당으로부터 자립이 부정되었다. 1990년대에 실시된 공무원 제도는 1987년의 구상 단계에서 목표로 했던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정치개혁은 거의 정지 상태에 빠졌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에서 발생한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로 좌파의 위기감과 공세는 강해졌다. 덩리췬은 사회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을 소유제와 결부시켜 공유제와 외자, 개인 경영 등 사유제 사이에는 모순과 투쟁이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문혁기와 같은 어조로, 이런 모순은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 사이 모순이며 이런 현상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2월에 열린 전국 조직부장 회의에서 다음해 당대회의 인사 정책이 검토되었지만, 회의에서 결정된 간부 선정의 첫 번째 기준이 된 것은 사회주의와 당의 영도에 대한 충성 그리고 천안문 사건 때의 언동이었다."(91-5)


3장 사회주의의 중국적 변화, 1992~2002


"1992년 초,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우한을 경유해 광둥 성의 경제특구를 시찰한다(제2차 남방시찰). 그는 지방 간부들한테 대담하게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하도록 강하게 호소했다. 일부러 광둥 성까지 발길을 넓힌 이유는, 그 전해에 상하이에서 발신한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중앙 선전 부문 등의 저항 때문에 선전 효과가 적었던 데 있었다. 이번 걸음은 홍콩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반격의 봉화를 올린 것이다. 남방시찰을 통해 지방의 불만을 규합하여 중앙의 정국을 움직이려는 방법은,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때 마오쩌둥의 방식과 같았다. 덩샤오핑으로서는 이 발걸음이 중대한 국면이었고 말 그대로 건곤일척의 행동이었다. 생산력과 국력, 생활수준의 향상에 유리한 제도나 정책이라면 그것은 사회주의다라는 '세 가지 유리론' 등을 내용으로 한 덩샤오핑의 남방담화는, 먼저 홍콩의 미디어를 통해서 전 세계로 전해졌고, 다시 중국에 역수입되어 경기 침체에 고민하고 있던 지방 간부들의 강한 지지를 얻었다."(99)


"제2차 천안문 사건(1989) 직후에 덩샤오핑은 기존 교육의 실패, 특히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정치 교육의 실패가 사건을 일으킨 큰 원인이 되었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또 장쩌민도 민주화 운동을 매국주의라고 단정하고 전국 학교에 애국주의 교육 강화를 지시했다. 자국의 문화나 국제적 지위, 국력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내셔널리즘은, 근대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이 본질적인 동기로 되어 왔다. 그리고 1990년대 중엽 덩샤오핑에서 제3세대 지도자로 권한 위양이 완료되면서,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94년 8월에 발표된 〈애국주의 교육 실시 강요〉는 애국주의를 전 사회가 학습해야 할 과제로 규정하였다." "그전까지의 애국주의 교육이 마오쩌둥이나 공산당 영웅들의 정신이나 무용(武勇)을 강조하는 면이 강했던 데에 비해,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애국주의 교육은 열강으로부터 받은 침략이나 굴욕을 강조하는 피해자의식을 심어주는 특징이 있었다."(113-4)


"2001년 7월 1일 중국공상당 창립 80주년 기념강의에서 장쩌민은 사영 기업주,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실질적으로 용인하였다. 본디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며 자본가는 계급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자본가를 입당시킨다는 대담한 결정에는 당 내부의 저항도 컸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는 억제되어 2002년의 제16회 당대회에서 당 규약이 개정되고,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임과 동시에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전위라고 규정되었다. 그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2000년 2월에 장쩌민이 자신의 '중요 사상'으로 제시한 '세 가지 대표론'이었다. 공산당이 '선진적 생산력의 발전, 선진적 문화의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근본적 이익' 세 가지를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공유제의 포기와 실질적인 사유화가 진척된 결과, 필연적으로 신흥 사회 세력으로 대두하는 사영 기업주를 '광범위한 인민'에 포함시킨 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산당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전환한다."(135)


4장 두 개의 중앙 지도부, 2002~2012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은 실로 미묘한 당내의 세력균형을 기초로 성립한 정권이었다. 오랫동안 중앙 지도부에 있었던 리펑이나 리루이환, 주룽지까지 은퇴했지만, 장쩌민의 영향력은 짙게 남았다. 돌이켜 보면 덩샤오핑은 제2차 천안문 사건 이후 장쩌민을 '제3세대 영도 집단의 중핵'이라고 부르고, 다른 지도자에게 장쩌민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시달하면서 〈어떤 영도 집단에도 반드시 중핵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덩샤오핑의 이 생각은 총서기 자오쯔양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의 대립이 당시의 위기를 불러온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반성에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이른바 그 은혜를 받은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유훈을 돌아보지 않았다. 후진타오 정권은 '후진타오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아니고,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미묘한 호칭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중앙'이 존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142)


"2003년 이후부터 활발해지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당초 후진타오 정권은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홍콩에서 2007년의 행정장관 직접선거나 2008년의 입법회 전면 직접선거에 대한 요구가 나오자, 2004년 초 장쩌민은 선전에서 '홍콩 지도층의 주체는 애국 인사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덩샤오핑의 경고를 되풀이했다." "타이완을 향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장쩌민은 1998년에 통일의 시간표가 필요하다고 발언하면서, 타이완 당국이 교섭을 무기한 연기할 경우 무력행사도 배제하지 않는 정책을 취했다. 반면 후진타오는 2005년 4월에 롄잔 국민당 주석을 대륙으로 초청하여 국공 양당의 역사적인 화해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9월의 항일전쟁·반파시즘전쟁 승리 60주년 기념대회에서 후진타오는, 국민당이 항일전쟁의 '정면'에서 주체로 싸우고 공산당은 '적의 후방 전장'을 지도하는 국공 양당의 분업이 이루어졌다고 발언하며 국민당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152-3)


"공산당에게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은 후진타오 정권기에 폭발적으로 발달 보급된 인터넷에 대한 관리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 발신 능력을 갖춘 일반 국민들이 당간부의 독직 부패나 권력 남용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동하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당내의 의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에 따르면, 여러 이익 충돌이 발생하고 있기에 사람들의 불만과 요구 표출이나 모순의 조정과 권익 보장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한층 더 정비해야 했다. 여기에는 이른바 시민사회, 즉 시민이나 농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사회 조직을 활용하려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저우번순 중앙정법위원회 비서장은 《구시》(求是)에 논문을 발표하여 〈'공민사회'(civil society, 시민사회)는 서방이 중국을 목표로 설계한 올가미이다〉라고 단정했다. 중앙정법위원회란 경찰이나 사법 등 치안을 담당하는 부문의 총괄 부서인 강력한 당 기관이다."(173)


5장 초강대국 후보의 자신감과 불안, 2012~2014


"2012년 11월 15일에 열린 제18기1중전회에서 시진핑 총서기가 선출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시진핑은 새로운 상무위원들을 인솔하여 국가박물관을 방문해 '부흥의 길'이라는 전시를 참관했다. 근대 이래 중국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당당한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전시회에서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의 꿈(中國夢)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사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고, 좋은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는 연고주의의 만연이었다. 가령 회사에 들어가도 출세할 수 없다는 개인으로서의 차이니즈드림이 시들어 버린 것이었다. 거기에서 차이니즈드림(중국인의 꿈)을 대신하여 국가 차원의 차이나드림(중국의 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었다. 이는 곧 국가가 세계 챔피언이 됨으로써 개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는 내셔널리즘의 스토리였다."(190-2)


"시진핑의 말투나 행동에서 마오쩌둥을 방불케 했다. 예를 들면, 2013년 1월에 시진핑은 새 중앙위원회 위원들한테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훈계 발언을 했다. 〈개혁개방의 전후 시대를 대립적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즉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이용하여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개혁개방 전의 역사를 이용해서 개혁개방 후의 역사를 부정해도 안 된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개혁개방에 착수했던 덩샤오핑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덩샤오핑은 좌파도 우파도 사회주의를 멸망시킬 수 있다며, 중국은 우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좌를 방지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남방담화에서 밝혔다. 이에 대하여 시진핑은 문혁을 되돌아보며 〈7년 동안의 상산하향(上山下鄕)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대중과 비교적 깊은 정을 맺게 하고, 성장과 진보를 위하여 비교적 좋은 기초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시진핑은 문혁을 고난을 극복한 성공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194-5)


"'붉은 2대'(紅二代)라고 불리는 태자당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이념을 중시하면서도 개발주의에 편승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지배의 정통성을 잃는다는 점도 알고 있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실천한 바와 같이 경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혁명 정신을 환기하여 사람들의 정서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많은 태자당들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독점 권력 아래에서 시장화를 진행한 결과, 사회 모순이 커졌고 개발주의만으로는 인심을 모을 수 없었기에, '붉은 2대'는 혁명 회귀나 내셔널리즘을 국민 통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30여 년의 개발주의 정책을 통해 사회는 크게 변했다. 중국의 발전과 글로벌화는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성장 속도가 계속 느려지면, 언젠가 보수·국수주의와 개혁·국제주의의 줄다리기가 치열해질 것이다.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시진핑은 현재 전자를 후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붉은 3대'는 아직 없고 표변하는 군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2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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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현대사 4 -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1945-1971 중국근현대사 4
구보 도루 지음, 강진아 옮김 / 삼천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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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전후의 희망과 혼돈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한다는 대의명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간에 격렬한 항쟁이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민중들 사이에는 부흥을 바라며 〈더 이상 전쟁은 사양한다〉는 내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대표로 충칭에 머무르면서 이러한 여론 동향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내전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 가장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다〉라고 거듭 옌안의 당 중앙에 보고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국제적으로는 국민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통일 중국 재건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가 필사적으로 국공 양당 사이를 조정하였고, 소련도 중국에서 내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역시 전후 헌정을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전쟁이 끝나면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인 '훈정'을 끝내고 민주적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18-20)


"경제개방 정책의 파탄과 구일본군 점령지 경제 접수 작업의 혼란은 전후 국민정부의 재정경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생산과 유통의 재건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시장에 공급되는 물자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데도,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을 준비할 전비(戰費)를 확보하려고 방대한 적자예산을 편성하고 통화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 당연히 물가는 폭등했다." "국민정부가 내놓은 인플레이션 대책은 통화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물가를 억제한다는 방안이었다. 1948년 8월에 금원권(金圓券)이라는 새로운 통화가 발행되었다. 정부는 종래의 법폐 300만 위안을 금원권 1위안으로 강제로 교환하도록 하여, 물가와 임금 동향을 진정시키려 했다. 금원권이란 신화폐를 유통시켜 표시 가격을 인하하면서 물가와 임금을 동결한 과격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규제를 싫어하는 시장에서 상품이 모습을 감추고, 물물교환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이 개혁은 실패했다."(31-3)


"1946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헌법제정국민대회가 열렸다. 정당 중에 국민당, 청년당, 민주사회당이 출석했을 뿐이었다. 공산당과 민주동맹은 국민당이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려고 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대회 출석을 보이콧했다. 국민당의 강경책은 일시적으로는 국민정부의 통치를 강고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당의 지지 기반을 좁히고 약화시켰다. 헌법 시행(1947년 12월)에 따른 입법 활동을 위해 1948년 3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두드러졌다. 대회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수도 난징에서조차 유권자 147만 명 가운데 80퍼센트가 기권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선거를 둘러싼 매수 사건과 폭력 사태, 대리투표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에게 환멸을 주었다." "대조적으로 공산당은 생계보장과 내전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운동에 연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국민정부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었다."(37-40)


2장 냉전 속의 국가 건설


"1949년 10월, 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국가기구를 보면 각 성청(省廳)의 장관에는 민주당파가, 부책임자에는 공산당원이 취임하는 패턴이 많았다. 지방정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1911년 신해혁명 때, 성청 장관에는 청의 개혁파 세력이던 입헌파가 취임하고 부책임자로 혁명파가 취임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신해혁명 당시 상황은 현실 정치의 힘 관계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1949년 혁명의 경우 실권은 대부분 공산당이 장악했으면서도 정권 밖의 일반 사회에 대해서 당외(黨外) 세력이 존중받고 있음을 과시하고, 당외 세력들한테서 새 정권이 신뢰와 협력을 얻어 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이런 체제가 채용된 면이 강하다. 실제로 그 후 공산당이 사회주의로 조기 이행에 착수하고, 특히 1957년에 잠재적인 정권 비판자를 적발하는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당외 세력 대부분은 정권 밖으로 배제되었다."(63)


"한국전쟁에 따른 재정적·경제적 부담에 대처하고 국민경제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증산과 절약을 호소했다. 그 일환으로 1951년 12월에 3반운동(三反運動)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전시경제 체제 아래에서 생겨난 오직(汚職), 낭비, 관료주의 세 가지 부정적 현상을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적발하고, 세 가지에 반대하여 증산과 절약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반운동을 거치면서 국민정부 시대부터 계속 일해 온 전문가나 경제 재정 관료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민간 기업에 대한 비판도 확대되었다. 1952년 1월 말부터 시작되어 6월에 일단락되기까지 5반운동(五反運動)이 전개되었다. 5반이란 뇌물 공여, 탈세, 정보 누설, 부실공사, 공공재 절도 등 증산과 절약을 방해하는 민간 기업의 다섯 가지 행위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5반운동으로 개별 민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공산당 정권의 통제와 감시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83-5)


"신민주주의를 내걸고 출발한 공산당 정권은 1952년 후반부터 이듬해 전반까지 사회주의화 강행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했다. 왜 공산당 정권은 사회주의화를 서두른 것일까." "무엇보다 공산당 지도부는 현대적 장비를 갖춘 미군과 대결한 한국전쟁에서 자국의 빈약한 장비에 위기감을 통절히 느꼈다. 그래서 소련이 선전하는 군수공업을 축으로 한 급속한 공업화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두 번째로 3반운동과 5반운동이 전시체제하의 증산과 절약을 목표로 전개된 결과, 민간 기업에 대한 통제가 이미 눈에 띄게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상공업의 전반적인 집단화와 국영화를 실시하는 데 수월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세 번째로 농촌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주도한 토지개혁으로 지나치게 영세한 경영이 이뤄지면서 농업 생산이 저조해진 바람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도 (집단화를 추진한) 1930년대 소련이 모델이 되었다."(86-7)


3장 '대약진운동'의 좌절


"중국이 소련형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한 직후인 1956년, 이러한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한 신뢰를 뒤흔든 큰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소련에서는 중국이 모델로 삼으려 한 스탈린 시대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어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서는 사회주의화 강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더해 중국 내에서도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농업과 경공업 생산이 저조했기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이 분출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심각한 위기감을 안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소련에 동조하여 동유럽 국가들의 민중운동 탄압을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지만, 실제로는 사태를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련이 동유럽에 개입하는 근거로 삼은 '제한주권론' 주장, 즉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해 각국의 국가주권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한 불신감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01-4)


"그렇지만 1950년대 중국은 뭐니 뭐니 해도 소련형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고 있었고, 소련의 기술과 경제, 군사원조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1957년 10월 소련과 '국방 신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소련이 원자폭탄의 견본과 원폭 생산의 기술 자료를 제공하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사실 중소 국방신기술협정이 체결에서 파탄에 이르는 중간에, 중국군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6일에 걸쳐 포탄 44만 발을 샤먼 앞바다의 진먼 섬에 퍼부었고, 섬을 수비하는 타이완 정부군을 공격했다. 이때 미군은 타이완에 군수물자를 지원했을 뿐,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중국군도 진먼 섬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강행하지 않은 채, 40일 동안 봉쇄와 포격으로 일관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이완 해방'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소련에 통고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전달받은 소련의 회답은 국방신기술협정의 파기였다."(111-2)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난항을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마오쩌둥 일파가 점차 소련과 대립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종래의 소련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모색하여 밀어붙인 것이 대약진운동이었다." "소규모 간이 용광로(土法高爐)를 이용한 제철이나 댐 건설에 수많은 민중이 동원되었다. 동시에 땅을 깊게 갈고 작물을 촘촘히 심어 증산을 꾀하는 농사법(深耕密植)이 장려되었으며,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단농장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토법고로, 심경밀식, 인민공사는 어느 하나도 뜻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아니, 오히려 참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연이은 대흉작 속에 중국 경제는 전면적인 붕괴 위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차후에 공표된 인구통계에 기초하여 추계해 보면, 식량도 물자도 부족한 이 시기에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적어도 2천만 명 이상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참상이었다."(123-35)


4장 시행착오를 겪는 사회주의


"(지도부가)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실패의 주된 원인은 자연재해였다고 규정함으로써, 대중 동원에 기댄 고도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도 공산당 내에서 당 주석으로 수장의 지위를 계속 지켰다. 1960년 경제계획은 〈세계 과학기술의 정상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그해부터 막대한 자금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개발계획은 조정 정책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화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호소하는 등 다시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에 도전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원래 농업과 경공업 진흥을 중시하는 조정기의 방침 자체가 중화학공업화 노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64년부터 추진된 제3차 5개년계획(1966~1970) 책정 작업에서 특히 중시된 것은 내륙지역에 군수공업 기지를 건설하는 '3선정책'(三線政策)이었다."(144-6)


"조정기의 동향은 단순히 경제정책의 수정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의 통치 방식 그 자체까지 수정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농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1961년 6월 15일의 지시에는 〈농촌 생활에 관여하는 간부나 일반 민중에 대해 우경화니 '좌경화'니 하며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은 앞으로 금지한다. 그들에 대해 정치적 딱지를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기하였다. 7월 19일의 지시는 더욱 명확하게 〈'반우파' 투쟁 이후, 각 대학이나 기업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 가한 비판은 재검토해야 한다. ······ 만약 잘못된 비판이 가해졌다면, 시시비비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쳐야만 한다〉고 하여, 급진적 사회주의의 주도 아래 수많은 당원이나 전문가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비판이 거듭된 1957년 '반우파' 투쟁 이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조정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자세를 강화해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159)


"그 무렵 안후이 성과 광시 성에서는 농민이 촌(村)에서 농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한 농작물 일부로 촌에 차지료(借地料)를 지불하는 도급 경작이 확산되고 있었다. 차지료를 지불하고 남은 농작물이 전부 농민의 수입이 되었기 대문에 농민의 경작 의욕을 자극하여 전체 농촌 생산도 증가했다. 그러한 움직임에 기초하여 농촌 증산을 꾀하기 위해 개별 농가의 도급 경작도 인정해야 한다는 방침을 공산당 중앙의 농촌사업부장 덩쯔후이가 제기하자, 이를 받아 덩샤오핑도 〈안후이 성 동지들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라며 도급 경작을 지지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직후 1962년 7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에서 덩샤오핑이 한 발언이 뒷날 유명해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라는 어구이다. 이러한 동향에 대해 마오쩌둥은 도급 경작은 집단농업의 해체로 이어지는 조치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160-1)


5장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배후에는 경제조정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다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향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적었고, 당내 다수파는 경제조정 정책의 방향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부인 장칭이 인맥을 가진 당의 문화선전 부문이었다. 이리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항쟁이 '문화혁명'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전개되었다. 또한 국제 환경 아래, 한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국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차이와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분쟁으로 야기된) 소련과의 대립 역시 심화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한층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점도 주의해야 한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은 가혹하고 치열한 정치투쟁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177-8)


"각지에서 혼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문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파괴된 가운데 그때까지 억압당해 온 여러 사회계층의 불만이 분출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 일본의 단카이 세대(團塊世代)에 해당하는 중국의 홍위병 세대는, 중국 경제가 계속해서 침체된 가운데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쉽사리 정규직을 찾지 못하고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다. 늘어만 가던 전후 출생 젊은 실업자 내지 반실업자들이야말로 홍위병을 자칭한 학생이나 문혁파 노동자들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한편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이미 대약진 정책의 파탄에 실망하여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문혁파가 내건 급진적 사회주의화 정책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나마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킨 경제조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을 뿐,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183)


"홍위병은 원래 계통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족 당시인 1966년 8월 무렵부터 여러 가지 의견 차이로 분열과 다툼이 거듭되었다." "아무리 문혁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지도부라 해도 이런 사태에는 당혹감을 느껴 충돌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우한의 7·20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67년 7월 20일 항쟁 조정에 나선 공산당 중앙의 문혁파 간부 왕리와 셰푸즈가 문혁에 비판적인 '백만웅사'(百萬雄師)라는 현지 민중 단체에게 억류되어, 문혁파 계열 조직을 옹호하는 방침을 철회하도록 압박당한 사건이다. 이 행동에 참가한 2천 명의 주력은 공사용 헬멧을 쓰고 트럭 27대와 소방차 8대에 나눠 탄 채 밀고 들어온 노동자들로,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대에는 1천 명 가까운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러한 조직적 행동은 당 조직과 군의 지지 없이는 일어나기 어려웠다. 문혁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민중들뿐 아니라 기존의 당 조직과 행정 간부, 군부 사이에도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189-91)


6장 문혁 노선의 불가피한 전환


"1966년에 문혁의 영향으로 대학교 입학생 모집 업무가 정지된 뒤로 1968년까지 3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의 젊은이들이 홍위병 운동의 주된 인력 공급원이기도 했다. 따라서 홍위병 활동을 완전히 봉쇄하려면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혁의 혼란으로 생산력은 떨어지고 도시 상공업의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었다. 도시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이나 오지의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을 '하방'(下放)'이라고 불렀다. 1968년 11월 15일 당·정부·군은 연명으로, 문혁 시기에 공부할 시간도 없이 졸업반이 되어 버린 학생들이나 진로를 정하지 못한 졸업생들에게 모두 직장을 정해 주겠다는 방침을 알렸다." "하지만 생산 현장에서 농민과 노동자한테 배우자는 말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허울뿐인 성가신 존재를 쫓아 버린 것이었다."(204)


"문혁이 시작되던 시기의 중국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와 군사 충돌을 대비하면서, 동시에 '인도 반동파'와도 '일본 군국주의'와도 대결한다는, 이른바 사면초가에 가까운 고립감을 느끼며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저지하고, 1969년에 중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이 일어난 뒤에는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의 위협이 가장 절박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하 방공호를 건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1969년 가을부터 1970년에 걸쳐 전시체제를 강화한 것도 특히 소련의 공격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검토하고 국제 전략을 논의하면서 얻은 결론은, 미국과 소련 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우선은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 소련의 공격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미국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이익을 찾아내고 있었다."(219-20)


# 1971년 7월, 베이징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저우언라이 총리 회담 성사


"1971년 9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국외로 도피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유일한 합법적 대표권을 인정하고, 중국을 다섯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타이완을 유엔과 그 관련 기관들에서 배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린뱌오 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중국 국내의 권력투쟁이 어두운 심연을 슬쩍 드러낸 직후에, 나라 바깥에서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셈이다. 물론 이 유엔총회의 결의는 타이완 외교에서는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혁 시기에 실각한 덩샤오핑이 복귀하여 중국 정부의 부총리로 유엔총회에 참여한 것은 1974년 4월의 일이었다. 이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은 임박해 있었다. 문혁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문혁 이후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226-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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