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왜의 쓸모 - 관계와 힘의 구조를 파악하는 네 가지 프레임
찰스 틸리 지음, 최지원 옮김 / 유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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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왜 이유를 제시하는가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이유(서로 중첩되는 네 가지 범주)

1. 관습Convention: 태업, 파격, 비범함, 행운에 관해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기차가 연착됐어요, 이제 너도 때가 된 거야, 그 여자는 집안이 좋아, 그 남자는 그저 재수가 좋은 거야 등등.

2. 이야기Stories: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서술. 생소한 현상이나 9·11 참사와 같은 특수한 사건뿐 아니라, 친구에게 배신당했거나, 큰 상을 받았거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20여 년 만에 고교 동창을 만난 일 등에도 사용된다.

3. 코드Codes: 법원 판결, 종교적 참회, 메달 수여 등의 행위에 관여한다.

4. 앞의 세 가지 범주에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s: 9·11 사건에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여객기가 충돌했을 때 88층에 있던 일레인 더치에게 일어난 일을 건축 공학자, 피부과 의사, 정형외과 의사는 각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관습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가령 똑같은 태업이나 파격, 행운을 설명하더라도 버스에서 옆 사람을 납득시키는 정도의 이유로는 배우자의 노여움을 가라앉히지 못할 것이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확증하거나, 개선하거나, 거부한다. 따라서 현재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건이나 생소한 현상에는 다른 종류의 이유가 요구된다. 바로 이야기이다. 지독한 실패나 값진 승리, 대대적인 실수, 공동체적 비극, 한밤중에 들리는 의문의 소리 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말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당면한 상황과 사회적 관계에 이유를 맞추려 하지만, 이제는 이유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결혼이나 이혼, 부모의 죽음 같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도 관습이 제공하는 것보다 무게감 있는 설명이 필요해진다. 예외적인 사건의 이유를 제시할 때, 우리는 대체로 약간의 정당화나 비난으로 설명을 보완한다. 23)


이야기와 달리 코드는 유효한 규칙을 준수하는 한, 설명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없다(그냥 규정이 그래!”). 종교적 지령, 법규, 권위 있는 시상 제도에는 이유가 넘쳐나지만, 그러한 이유는 실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벌어진 일이 현재의 코드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학술적 논고는 구조와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신뢰할 만한 인과 관계를 밝히려 한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구조공학자는 인과 관계의 초점을 기계적 원리에, 내과 의사는 유기체의 역학에, 경제학자는 시장 주도적인 작용에 둔다. 이런 전문가들은 이따금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널리 인정되는 전문적 방법에 따라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열정적으로 변론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대체로 잠정적인 원인과 결과에 집중되어 있다. 전문 분야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조직된 모든 기관은 이들의 학술적 논고를 뒷받침한다. 24-5)


2장 관습


에티켓은 예의와 이기심의 결합이다. 에티켓 컨설턴트 페기 포스트Peggy Post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경영인에게 이러한 조언을 해 준다. “어떤 사람과 약속을 마쳤는데 그 사람이 떠날 기미가 없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하라. ‘정말 죄송한데, 제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좋은 에티켓은 당신이 하는 일이나 하지 않는 일에 관해 적절하고 효과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상당 부분 완성된다. 좋은 에티켓에는 관습적인 이유가 들어간다. 그러한 이유가 사실일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대체로 공손한 행동이 요구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관습은 이야기나 코드, 학술적 논고보다 더 적절하게 작동한다. 이럴 때 다른 이유들은 오히려 의사 전달을 복잡하게 할 뿐이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거나 개선한다. 당면한 상황과 관계에 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는 일은 우리가 아는 인간적인 사회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부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면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 37-8)


미국의 사회과학자 어빙 고프먼은 소규모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한 독창성, 통찰력, 영향력을 두루 갖춘 연구를 발표했다. 고프먼은 에밀리 포스트를 전거로 삼는 자신의 대중 행동 분석을 정력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에티켓 서적에 기술된 규범들이 중산층의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미국에서 공적 행위의 체계를 제안하는 몇 안 되는 출처 중 하나”를 끌어다 사용했다. 고프먼이 반복해서 관찰한 바와 같이, 적절한 이유를 제시하는 능력은 사회적 역량의 중요한 표지가 된다. 반대로, 적절한 이유를 제시할 능력이 없으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고프먼이 “해설”accounts이라고 부르는 분석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실수와 태업을 바로잡거나 감추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고프먼은 다른 무엇보다 즉흥적인 팬터마임이 구두로 제시되는 이유를 대신할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몸짓 주석’body gloss이라 명명했다. 고프먼의 연구는 사람들이 타인과 주고받는 상호작용보다 개인이 남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38-9)


자기표현에 관한 고프먼의 비범한 연구는 이 책의 한 가지 주안점을 명백히 강조해 준다. 언어든 팬터마임이든 혹은 둘 다이든, 이유의 제시는 일종의 자기표현을 성립시키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다. 고프먼의 책을 피상적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일들은 모두 개인의 정신 내부에서 벌어진다는, 즉 사람들은 주로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즉 불안정한 개인의 신호를 수신하는 타인, 그리고 그 신호에 대한 반응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불안정한 개인은 타인의 반응을 조작하거나 적어도 예측하려 애쓰며 신호를 전송하기 때문이다. 고프먼이 기술한 ‘연기하는 인물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유를 제시하는 일은 언제나 당사자 간의 관계를 규정하거나 재규정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사자 간의 관계를 위험하고, 희생이 크고, 불명확하고, 당혹스러울 수 있는 다른 관계와 구별한다. 40-2)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는 전문적 지식이 거의 혹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인과적 타당성보다 적합성의 규칙을 따른다. 우리는 보통 양식화된 단순함과 추가적인 논의가 없다는 점을 통해 관습적 이유가 오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문제는 설명이 인과적으로 불충분할 때가 아니라, 화자가 제시한 이유를 청자가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에 부적절하다고 해석할 때 주로 발생한다. 가령 정신과 환자가 자신의 입원 사유를 일반화하여 말하는데 의사가 그러한 설명을 거부할 때이다. 이럴 때 청자는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가 아니라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라며 항의한다. 어떠한 이유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적절한지 여부는, 그때 제시되는 이유를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목격할 것인지,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에 관해 그들이 어떠한 추론을 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고프먼이 말하는 몸짓 주석은 사람들이 혼자이거나 남들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구태여 방어적인 이미지를 투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43)


3장 이야기


이야기는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사건에 단순화된 인과적 해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널리 통용되는 지식에 기대어 세상을 이해하게 해 준다. 이 특별한 종류의 서술에는 행위자와 그들의 행위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한 결과가 포함된다.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인간 행위자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경우, 가령 동물이나 영혼, 조직, 혹은 태풍 같은 물리적 환경인 경우에도 대체로 인간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그들이 재현하는 이야기는 종종 칭찬이나 비난의 뜻을 전달한다.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사회적 발명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늘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합적인 곳이다. 동시적 인과 관계, 점증 효과, 환경 효과, 오류, 예상치 못한 결과, 피드백은 물리적·생물학적·사회적 과정을 악마의 소행(혹은 신의 작업)처럼 지독하게 꼬아 놓는다. 이야기는 이처럼 불편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배제한다. 63)


이야기는 특정 행위자에게 주요한 영향을 귀속시킴으로써, (그러한 행위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신적 존재인 경우에도) 개인의 책임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따른다. X는 그 행위를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발생한 일에 관한 칭찬이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야기는 극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관습과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고전 희곡에 가깝다. 이야기는 시간적·지리적 환경을 넘나들지 않고 대체로 시공간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제한된 수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가시적인 행동이 모든 후속 행동과 그로 인한 주요한 결과를 야기한다. 이야기에는 종종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 관습은 행위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고 개선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고유한 작업을 수행한다.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일들을 일상생활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을 키워 나간다. 64-6)


수사학은 변증법과 유사하지만, 주장과 예시를 결합해 상대를 설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과학은 반박할 수 없는 보편적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기에, 변증법과 수사학은 둘 다 과학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①정치 연설: 제안된 행동 방침에 찬성 혹은 반대함, ②법정 변론: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변호함, ③선전 연설: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난함. 수사학의 효과는 견고한 논리뿐 아니라 인간의 특성과 감정에 관한 날카로운 이해에 달려 있다. 이는 화자와 논점, 청중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 필연적으로 관계적 해명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두 가지 결론이 따라온다. 첫째, 수사학적 노력의 성공은 청중이 화자와 논점의 조합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수사학자가 얼마나 잘 추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논점과 화자가 같더라도 청중이 달라지면 그 영향도 달라진다. 두 가지 결론은 동일한 명령을 이끌어 낸다. 청중을 파악하고 반응을 관찰하라. 70-1)


이야기는 사회적 작용을 한다.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증 혹은 재규정하거나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게 해 준다.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원형에 수시로 의존하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관한 신호로 해석되며, 때로는 자존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는 깊이 묻혀 있는 무언가를 파낸다. 이야기는 그 본연의 특징 때문에 순수주의자를 좌절시킨다. 원인과 결과들을 턱없이 많이 쳐내어 복합적인 삶을 단순한 플롯으로 압축시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평범한 삶에서 희극과 비극, 도덕과 비도덕, 승리와 패배를 강조한다. 이야기는 관습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제공하고, 코드와 학술적 논고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코드와 학술적 논고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부득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이야기로 변환해야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이유를 진지하게 여길수록 그 이유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 86-8)


4장 코드


범주, 절차, 규칙이 결합된 코드는 이유의 정당화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언어학자들이 문법으로 단순화하고 표준화한 코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작가, 독자 사이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시대든 간에 회화, 음악, 시 그리고 기타 대중예술은 코드를 따름으로써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게 쉽게 할 뿐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이 거기에 담긴 창의적 혁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민간에서 혹은 종교적으로 행해지는 엄숙한 의식은 공동의 약속을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코드들은 반드시 이유의 제공과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코드에는 고유한 역학이 작용한다. 범주는 변화하고, 관련 증거를 처리하는 절차도 변화하며, 해석상의 규칙 역시 변화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상호작용을 한다. 어떠한 분야에서든 기관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규칙을 변경한다. 따라서 축적된 규칙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직면했던 과거의 주요 문제들에 관해 알려준다. 94-5)


법적 분쟁은 그 성격상 코드를 작동시킨다. 이러한 분쟁에서 진술과 판결은 대체로 인과적 설명보다 법적으로 확립된 사실과 유효한 원칙 사이의 일치를 강조한다. 과실의 주장은 진술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보다 유효한 원칙을 잘못 적용하거나 소홀히 했다는 주장일 때가 더 많다. 법적 분쟁의 이러한 특성은 코드에 기반한 불일치와 다른 종류의 불일치를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논제에서 중요하다. 관습은 전문 지식에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해 준다. 관습에서의 논쟁은 주로 그러한 관습적 이유가 사용 가능한 프로토콜에 명쾌하게 들어맞는지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관해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중점을 둔다. 이야기는 서로 대립되는 설명에 토론의 장을 열어 주지만,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학술적 논고 간의 이견은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코드와 유사하지만, 적합성의 논리보다 무엇이 무엇을 초래했는지에 관한 상충되는 주장에 의존한다. 99)


법률 및 의료 분쟁은 코드가 지배하는 희귀한 세계에서 발생한다. 코드는 랍비, 변호사, 공무원, 심판, 의료 윤리학자와 같은 전문가들의 영역에 속해 있다. 설교, 강의, 프레젠테이션, 교과서, 설명서 등은 원칙을 간략히 설명한 후 현실에서의 적용을 덧붙이는 형태로 코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코드는 형식 자체가 일상적인 사회적 교류와 현저히 다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묘사와 설명을 제시한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듣고 코드로 변환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응급실에서 중증도 환자를 분류하는 간호사들은 환자를 임시로 진단 및 치료의 범주에 배정하는 기록을 작성한다. 사회복지사는 수급 지원자를 면담하여 자격 여부를 결정한다. 성직자는 참회의 근거가 되는 고해성사를 주관한다. 경찰 심문관은 형사재판에 제시하기 위한 자백을 끄집어낸다. 이러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인과적 설명을 공식으로, 대중적인 관용어를 전문적인 담론으로 바꾸는 이중 변환을 시행한다. 108)


우리 같은 외부인들은 관습과 이야기, 학술적 논고로 이유를 조직하기 때문에 코드를 성가시게 여길 때가 많다. 요컨대, 코드에 속하는 적합성의 논리는 이야기에 속하는 인과적·윤리적 논리와 모순된다. 우리는 상속, 조직 행동, 의학적 분석, 의료 과실 그리고 범죄 문제에서 그러한 모순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했다. 윤리학이나 목회 신학, 건축 표준, 입법 절차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전문적 규제 영역에서 이야기와 코드 사이에는 그와 같은 격차가 발생한다. 코드는 개념과 자원, 활동 및 사람에게 질서를 부여하려는 조직들의 점진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일단 코드가 실행되면, 그것은 해당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그 조직의 지배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영역에서 코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실행하지 못한 일에 관해 제시하는 이유를 구성한다. 우리가 코드를 피하거나 파괴하려 할 때조차 코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11-2)


5장 학술적 논고


학술적 논고는 이야기, 관습, 코드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그 정의상 (적합성의 논리가 아닌) 인과적 설명을 (일상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학문적 근거와 결합시킨다. 하지만 학술적 논고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수한 코드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첫째, 코드가 그 실행자에게 비전문가에게는 금지된 형식의 조사를 수행할 권한을 부여하고, 둘째, 코드가 관련 근거의 유용성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며, 셋째, 실행자들 스스로가 적절한 절차와 부적절한 절차를 구분하는 코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학술적 논고는 이미 축적된 정의, 관행, 결과에 관해 공유된 지식을 가정하여, 그러한 정의, 관행, 결과의 참조를 줄이게 해 준다. 자신에게 공감하는 다른 전문가들에게 당신도 우리 편에 속한다고 말하며, 저자와 의견이 다른 타 분야 사람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초심자나 의뢰인에게 해당 분야의 개론을 제공하며, 존경받는 비전문가에게 맞서 저자의 권위를 확립한다. 117)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펼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가 처음으로 전 세계의 주요 대륙에 도달했을 때(기원전 1만 1,000년) 각 대륙은 가축화가 가능한, 따라서 체계적인 식량 생산이 가능한 야생 동식물의 수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아메리카는 홍적세 후기에 대형 포유류가 거의 다 멸종해 버린 상태였다. 여기서 지리적 유리함이라는 두 번째 요인이 발생한다. 위상학적으로 심각한 장벽이 없는 데다 기후, 일조량, 위도와 관련된 그 밖의 환경적 변화가 적은 동서축으로의 확산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 대륙 간의 확산에도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고립된 데 반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는 서로 가까웠다. 아프리카에서 사육되는 가축은 대부분 유라시아에서 건너왔다. 마지막으로, 대륙의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클수록 경쟁이 심화되고 혁신의 요소가 늘어났다. 고립된 섬들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인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134-5)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이아몬드는 주요한 지리적 영역 간의 차이를 밝힌 다음 그러한 차이를 만든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일련의 미스터리를 구성하여 자신의 학술적 논고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 책에는 인종주의와 지리적 결정론에 관한 비교적 간단한 주장부터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한 조금 더 복잡한 주장은 물론이고, 특수한 현상에 관한 미묘한 (그리고 종종 추측에 근거한) 주장이 결부되어 있다. 다이아몬드의 글은 두 가지 면에서 학술적 논고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인과 관계를 진지하게 탐색하고 엄청난 범위의 전문 지식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이아몬드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그의 논리가 관습적으로 익숙해서도 아니고, 표준적인 코드에 부합해서도 아니며, 단순화된 이야기를 능숙하게 제공하기 때문도 아니다. 유효한 전문적 근거를 활용해 가능한 원인의 일부를 제외하고 다른 원인의 설득력을 높인 그의 설명 방식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135-6) 


다이아몬드의 저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책들은)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당신과 내가 서로 근황을 나눌 때 사용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와 같은 최상의 진화론적 설명은 양질의 이야기superior stories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인과적 과정을 단순화하여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지만, 논리적이고 전면적인 학술적 논고에서와 같은 자격과 인과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양질의 이야기는 설명이 작동하는 공간을 단순화하고, 행위와 행위자의 수를 간추리며, 점증, 간접, 상호, 동시, 환경 및 피드백 효과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한다. 설명(특히 인과적 메커니즘에 관한 설명)은 당신이 근거를 취하는 전문 분야 내에서 명백하고 변론 가능한 요소로만 제한한다. 마지막으로, 청중을 유념한다. 양질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의 지식과 열정에 따라 달리 전달되어야 한다. 양질의 스토리텔링은 관계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137-8)


6장 네 가지 이유의 조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대상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학부생들은 사회적 과정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내 수업에 들어온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같은 현상에 관한 설명이라도 학술적 논고보다 양질의 이야기가 더 효율적이고 유용하다. 그들은 학술적 논고를 알아보는 법과 그 안에서 타당성의 표식을 찾아내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사회적 과정에 관한 인과적 추론까지 낱낱이 파악할 필요는 없다. 내가 대학원생들에게 전달하는 건 대부분 학술적 논고와 관련 코드이다. 이러한 수업 방식이 결국에 가서 성공한다면, 그들은 연구를 통해 유효한 학술적 논고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코드(적절한 증거와 절차, 결과 보고에 관한 코드)를 개선해 나갈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훗날 나처럼 학부생들에게 양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모든 건 그들이 학술적 논고와 그에 수반되는 코드를 숙지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와 대학원생들은 외부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한다. 151-2)


나와 학생들의 관계는 매우 큰 현상 가운데 하나의 작은 사례, 즉 이유를 주고받는 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이 책의 두 가지 기본 논제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첫째, 적절한 이유의 제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학술적 논고와 이야기의 경우에도 관습이나 코드와 마찬가지로 이 점이 강력하게 적용된다. 둘째, 이유의 제시는 당사자 간의 관계를 설립, 확증, 조정, 혹은 개선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관한 분석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관습은 일상적인 관계 작업의 대부분을 수행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코드나 학술적 논고, 이야기를 제시해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엄청나게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고 융통성과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 할 만하다. 삶이 복잡해질 때는 이야기가 관계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이유는 관계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152)


사람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관계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관습과 이야기는 대부분 당신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 관계들을 확증한다.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관계를 주장하는 ‘잘못된’ 관습이나 이야기가 제시되면, 당신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낯선 관용어로 된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제공하면, 재빨리 두 가지 해석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 사람이 당신과의 관계를 오해했거나 난해한 지식을 내세워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존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관련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간추려 달라고 요청했다면, 당신은 적어도 이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미 불평등한 관계를 확립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영리하고 호의적인 대화 상대라면 당신의 요청을 받은 후 관습과 이야기에 가깝게 설명함으로써 관계의 균형추를 옮겨 줄 것이다. 이유의 제시는 폭넓은 사회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 작업에는 언제나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포함된다.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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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살다 - 한국 근대의 인물과 사상 ㅣ 知의 회랑 43
김경일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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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문명론과 인종주의: 아시아연대론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을 개화와 반半개화 그리고 미未개화의 3단계로 구분한다. 이는 문명을 야만과 반개半開 그리고 문명의 3단계로 구분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문명론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놓여 있다. 후쿠자와에게 문명이란 야만에 대한 문명이다. 즉, 후쿠자와의 문명론은 역사주의보다 구조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 유길준의 경우는 미개화-반개화-개화라는 등급 체계에서 단계론의 사고가 강하게 나타난다." "유길준은 자신이 설정한 각 단계가 변할 수 있는 잠정 상태로 간주하고 비록 현 시점에서는 조선이 반개 상태에 속하더라도 개화 노력을 통해 문명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 했다. 지식사회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후쿠자와가 이미 일본이 도달한 문명 단계에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면, 반개 상태에서 벗어날 출로가 여전히 보이지 않던 1880년대 후반 조선의 현실에서 유길준은 발전 단계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조건에 놓여 있었다."(28-32)


"그런데 진보와 문명 단계에서 유길준 앞에 놓인 이러한 존재 피구속 상황이 당시 유행하던 인종주의의 덫으로부터 그를 벗어날 수 있게 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인종에 대한 유길준의 논의를 보면, 문명-야만의 틀을 인종에 적용하거나 인종을 차별화하는 인종주의의 혐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저작 『서유견문』에서 인종은 형질 특성과 거주 지역을 소개하는 등 단순한 인지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의 황색인이 구미 양주의 백색인과 비교함에 그 천질天質의 불급함이 없음은 분명〉하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유길준은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인종에 내재한 고유 속성으로 바라보는 인종주의의 사고방식을 부정했다. 환언하자면 서양이 아시아보다 부강한 까닭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후쿠자와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한다〉는 그의 탈아론 주장에서 아시아 인종은 문명 기준에 의해 열등하고 사악한 것으로 재단되는 차별받는 존재다."(32-3)


"후쿠자와가 선과 악의 대조를 통해 문명과 야만을 강조한 것처럼, 윤치호는 자연에 대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들어 문명과 야만을 대비하려 했다. 나아가 두 대립 범주의 내용을 이루는 대행자로서 그가 민족이나 인종을 설정한 점도 주목된다. 다가올 문명의 담지자로서 황인종이나 비서구 민족을 설정한 것은 현시점에서 야만 상태에 있는 이들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조선을 반개 상태로 본 유길준과 달리, 조선이 아직 야만 상태를 못 벗어났다고 인식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3년 6개월 동안 유학 생활을 경험한 윤치호에게 중국은 악취, 불결, 낙후, 무기력, 완고, 교만 같은 부정적 속성으로 묘사되는 나라였다." "윤치호는 청일전쟁이 문명 전쟁이라는 통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것은 〈갱생하는 서구 문명과 동양의 퇴락하는 야만 사이의 갈등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관되게 일본에 동경과 찬사를 보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친일 경력으로 이어졌다."(37-40)


"그의 일본 선호에 문명개화국으로서 일본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어려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문명 기준에서는 미국이 당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 점에서, 그 또한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과 인식을 함께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미국 유학 생활을 통해 윤치호는 표방되는 바로서의 문명과 실제로서의 문명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강하게 인식했다. 1890년 2월 14일자 일기에서 그는 미국인이 말하는 천부인권이나 자유 같은 이상이 실제로는 단지 허울 좋은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이른바 천부의 인권을 누리고자 한다면, 백인이어야만 한다며 그는 야유한다." "이렇게 〈고귀한 이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추악한 현실〉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힘의 논리였다. 힘이 곧 정의라는 그의 생각은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의 교리를 원론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점에서 윤치호는 선택과 제한적 방식으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유길준과 달랐다."(43-4)


|제2장| 열린 민족주의와 동양평화론: 보편주의로의 지평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의 벽을 초월하는 열린 민족주의의 자세를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다. 오늘날 잘 알려진 휘호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는 관동도독부의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이 서양에 다녀오면서 양말 두 켤레를 안중근에게 선물로 넣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적은 것이고, 휘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은 사형 당일 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간수였던 일본군 육군 상등병 치바 도히치에게 적어준 것으로 그의 마지막 유품이다." "당시 상황이나 안중근의 인격으로 미루어보아 이 유묵들은 당사자에게 잘 어울리면서 또 그에게 절실한 내용을 적어주고 싶은 안중근의 마음을 드러내는 선물이었다는게 보다 사실에 부합해 보인다. 이렇게 안중근의 유묵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의미의 탈맥락화와 그에 대한 성찰은 그가 생명을 놓는 시점에도 민족과 국가에 대해 열린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국가와 민족의 벽을 실감하면서도 안중근 자신은 그 벽을 간단히 뛰어넘어버렸다."(73-6)


"보통 이 시기 지식인 전반은 이른바 일본발 아시아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일찍이 아시아 연대에 공감한 김옥균은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제휴를 의미하는 '삼화三和'를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그 실현에 몰두했다. 그의 삼화주의는 일제 말기 대동아공영권이 제창된 시기에 동양주의와 대아시아주의의 선구로 추앙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창호 역시 이토와의 회견에서 3국의 정립 친선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의견에 공감하면서 서양 세력의 아시아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과 일본, 중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보호'국화가 추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아시아연대론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면서 아시아를 단위로 한 지역 연대 구상이 외면받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추구가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던 점을 고려해볼 때, 민족주의 사학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조차 1909년에 이르러서야 동양주의에 대한 비판을 발표한 것은 뒤늦은 감이 있었다."(80-1)


"필자는 동양 평화에 대한 안중근의 방책을 적극 평가하는 일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는 해도, 마치 그것을 안중근의 고유한 제안으로 부각하려는 시도는 결국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칫 동양 평화에 관한 일련의 실천적 제안들을 안중근에게 독점 귀속시킴으로써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하려는 의도로 이끈다. 나아가 안중근의 민족주의에 대한 왜곡과 연동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에 폐쇄와 고립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신화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낳는다. 동양 평화를 위한 안중근의 실천 방안들은 그 자신의 독창적 고안이라기보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언론 매체를 통해 논의되어온 제안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동아시아 지식 공간을 떠돌아다니면서 안중근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비평받고 보완되며 전유되는 역사 과정을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 공동의 지식 자산이자 제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87-8)


"하얼빈 역 의거 후 자신이 어떤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안중근은 〈그것은 간단하다. 나는 한국의 의병으로서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만국공법에 따라〉야 한다고 답변한다. 여기서 안중근이 동아시아 특정 국가가 아닌 만국공법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보편적 세계주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보편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은 그의 동아시아 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시기 동아시아 지식인에 의한 동아시아 구상 대부분이 입으로는 동아시아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따져 들어가면 자기 민족과 국가에 한정된 폐쇄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것과 달리, 그의 동양평화론은 보편 세계를 지향하는 열린 민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이 시기 회자되던 아시아주의와 동양평화론의 일부 부정적 속성이 반영된 시대적 한계에 구속된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동아시아 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91-2)


|제3장| 한상룡을 말한다: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


"1900년 초반 러시아는 청일전쟁 승리로 본격화하려던 일본의 조선 진출을 이른바 3국 간섭을 통해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종에게 경제 차관 500만 원을 자국으로부터 빌릴 것을 강요했다. 철도를 부설하거나 산업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하되 운용의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 지배를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외무성을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을 앞세워 그곳에서 경제 차관을 융통한다는 구실로 러시아 차관을 거절하는 묘책을 찾아냈다." "극비리의 교섭 끝에 일본은 새로 은행을 인가받는 것은 러시아의 시선을 끌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고, 관료이자 〈서울 재계의 거족〉인 김종한이 1, 2년간 경영하다가 유명무실 상태에 있던 한성은행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03년 2월 사립 한성은행이 발기되었다. 같은 해 12월 설립 인가를 받았고, 이재완은 은행장, 한상룡은 우총무에 취임했다."(99-100)


"상업이나 실업 활동을 천시하는 사회 통념이 지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신분 배경이나 친일 경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보다 정치를 택했던 시기에, 한상룡은 주저 없이 경제를 택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일찍 신문물을 접한 그의 식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존경했고, 또 그렇게 되고자 했던 인물이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3대에 걸쳐 일본 재계 최대 지도자이자 통솔자〉로 평가받는 시부사와는 일본의 조선·중국 침략 과정에서 '재계의 첨병' 역할을 했다. 3년 남짓한 대장성 관료 생활을 청산하고 1873년에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한 뒤 일찌감치 이 은행을 조선에 진출시켰다. 청일전쟁 후 철도 건설과 광산 개발에 주력하면서 일본의 대외 침략을 적극 조장한 제국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식민지에서 실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동경의 대상인 일본을 오가면서 한창룡은 점차 예속 친일 자본가로 성장했다."(103-5)


"한성은행은 일제가 강제 병합의 대가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금으로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으며, 일제에 대한 예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치열한 자본 경쟁의 복판에서 일정 기간 생존할 수 있었지만, 결국 1928년 일제 자본에 의해 강탈당하고 말았다." "금융계에서 한평생 외길을 가고 싶다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 경영권을 양도하고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살아 있어도 사실상 죽은 몸이었고, 죽는다 해도 이미 껍데기뿐인 인생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는 듯 식민 권력과 연계된 부문에서 적극 활동했다. 환언하자면 친일 행각이 노골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전시 체제로 이행한 이유도 있었지만, 금융계 기반 자체가 취약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한창룡은 일제에 더욱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식민지 권력과 밀착해 전시 체제에서 일제의 정책 수립과 집행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예속 부르주아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110, 120-2)


"완전 식민지 아래서 근대화는 식민지 모국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 시기 근대성은 불가피하게 식민지성을 내포한다. 근대성이 식민지성을 수반하고, 식민지성은 근대성을 가장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바깥에서 위로부터 부과된 근대화 과정에 토착민의 참여나 개입은 불가능하거나 일정한 한계를 내포한다. 따라서 근대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획득하는 일은 식민지 모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망에 편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파농식으로 말하자면, 흔히 이 관계는 자기 열등감이나 막연한 동경 혹은 비주체의 모방에서 시작해 자기 비하의 굴종이나 비인격적 예속 혹은 맹신에 가까운 복종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다. 한상룡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는 친일 예속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주나 진보로 불리는 다른 발전의 길이 애초부터 그와 무연했다고 한다면, 이 시기 그가 택한 삶은 식민성을 수반하는 근대성의 길 이외에 다른 대안을 보지 못하게 했다."(129-30)


|제4장| 여운형의 사상 노선: 노동 인식과 마르크스주의


"노동이나 노동자와 관련해 여운형이 직접 경험하거나 언급한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평민주의자' 혹은 인민 대중에게 헌신해온 이로 평가받은 그의 삶에 비추어볼 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여운형의 실제 삶은 중앙 정치와 지도자나 엘리트 위주의 사회 상층부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여운형은 노동·노동자·노동운동을 관찰자의 객관적 시각 속에서 대상화된 실체로 인식하면서 노동을 타율적이고 무능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여운형이 관찰한 노동의 실제는 무기력과 수동성, 침체로 점철된 어떤 것이었다." "여운형의 눈에 비친 조선인 노동자는 오랜 세월 지배계급으로부터 고난과 굴욕을 인내하면서 전통과 인습에 지배당해온 침체와 운명, 수동과 타율의 존재다. 그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아세아적 농민'이란 당대를 풍미했던 비트포겔의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묘사된 아시아에 대한 정체와 불변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이다."(142, 146-7)


"그럼에도 여운형은 인민이나 노동 대중의 역량을 신뢰하는 만큼,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에 대해 불신과 의구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1936년 1월의 한 연설에서 그가 각 분야의 실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학생계의 지도자는 학생에서 나고 공장의 지도자는 공장에서 나고 농촌의 지도자는 농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노동에 대한 관찰자의 객관적 시각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 지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선을 그음으로써 노동자, 농민, 학생을 주요 구성 분자로 하는 인민 대중의 주도성과 자발성의 함양을 촉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운형이 대중과 지도자를 구분해 전자에 신뢰와 기대의 눈길을 보내는 만큼, 후자에 대해서는 불신, 회의, 비판, 때로는 조소의 시각까지 지니고 인식했던 경향이 있어 보인다."(156)


"1920년 5월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후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기를 그는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과 더불어 살았다. 젊고 의식 활동이 왕성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걸친 나이였다. 당대를 풍미했던 이 이념은 다른 식민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여운형의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이 사상을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마르크스 이론에는 찬성하지만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답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 중국에서는 삼민주의로 정착한 사실을 환기하면서 〈조선에서는 러시아, 중국과 사정을 달리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산주의 이념을 그 자체로 수용했다기보다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해 적용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조선 해방의 첩경으로 그가 제시한 여운형주의의 실체라 할 수 있다."(161-3)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다르게 혁명운동의 주체를 농민으로 설정했다. 바로 이들이 일제의 착취와 억압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이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 주체로 노동자를 설정한 마르크스의 논거와 같은 맥락이었다. 여운형이 보기에 조선은 아직 농민이 주류를 이루는 (반半)봉건 사회였고, 이러한 점에서 당면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닌 농민이 되어야 했다." "나아가 그는 민중 생존이 위협받는 비참의 상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지목하면서 조선이 독립해야 할 필요를 정당화한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착취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민족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립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때 그의 조선 독립의 신념을 오직 민족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편협한 이해를 조장할 뿐이다. 여운형에게 독립은 민족의 생존권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민족의 배후에는 늘 민중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83-4)


|제5장| 좌절된 중용: 지식 생산에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시기에 형성된 초기 역사학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과 근대에 대한 선망에서 일본 국학자들이 주장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요소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신채호에 의해 '무정신의 역사'로 비판받은 이 흐름은 합방 이후 민속학, 종교학, 예술, 철학 등으로 점차 분화되면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식민 권력의 탄압 아래서 역사학을 비롯한 토착 학문이 존립을 위해 채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째 학문과 지식, 나아가 포괄적인 의미에서 문화를 정치와 엄격하게 분리하고, 둘째 현재의 현실을 벗어난 다른 시간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 구속받지 않는 문화와 비非현재(특히 고대) 영역에서 이들은 민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정신과 애국주의를 고취하려 했다. 이 시기 연구자들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일제 강점 초기를 다룬 박은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고대나 중세 한국 혹은 조선 시기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했다."(202)


"1930년대 이후 또 다른 흐름으로 등장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가치들이 결코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학이란 가치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해명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랑케 류의 개별 기술 방식을 그저 단순한 방법론으로만 보지 않고 이론 차원으로까지 고양시켰다. 비슷한 시기 사회과학 영역에서 미국 신역사학자들의 보편주의 지향이나 프랑스 아날학파의 사회과학 종합이론에 대한 열망 대신, 이들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특수성을 추구했다. 따라서 서구 지성사의 맥락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전통 역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보편 역사나 역사의 법칙성을 거부하고 개별 사실에 관한 실증 연구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과학'의 이름으로 문헌 고증의 방법을 내세운 전통 역사학의 함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의도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간에 이들은 과학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04)


"이처럼 보편주의와 특수주의가 서로 수렴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나름의 입장에서 양자를 조화시키려 한 이가 바로 안재홍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먼저 일본의 특수주의가 식민지 현실에서 일종의 보편주의 억압으로 가해지는 상황에 주목했다. 물론 그가 일본의 문화와 사상만 문제 삼은 건 아니었다. 그가 정당하게 파악했듯이, 1930년대는 파시즘의 고양과 블록 경제의 형성 그리고 사회주의의 국제주의 주창으로 상징되는 바로서 국제주의와 세계주의가 처음으로 지구 곳곳에서 느껴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 서구의 진보 지식인들처럼 그 역시 때로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이렇게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국제주의와 보편주의가 지니는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과 전통의 특수성을 역사 발전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무시해버린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그는 조선의 특수성을 강조하고자 했다."(218-21)


"국제화의 경향을 필연과 자동으로 본 것만큼이나 안재홍은 민족의 특수성을 고양하는 작업 역시 준엄한 역사의 철칙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제성은 '천하일률天下一律'이 아니고 특수성은 '고립유아孤立唯我'가 아니기 때문에, 양자가 각기 상호 작용하면서 발전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국제화와 특수화의 교호 작용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민족과 전통에 대한 특수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 연구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민족주의 우파와의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그에 포섭되고 말았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화해를 꾀하고자 한 그의 시도는 이미 좌절이 예정된 것이었다. 국제화와 세계화가 소리 높이 외쳐진 현실에서 보편주의에 대한 전망, 나아가 다가올 근대에 대한 비전을 설정하지 못하고 전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그의 비극이었다."(222-4)


|제6장| 신여성의 미국 체험과 자아 정체성


"낙후된 식민지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뒤, 발전한 선진 문명을 목도하면서 세 명의 신여성은 모두 일종의 문화 충격에 직면했지만 조금씩 입장의 차이가 있다. 김마리아에겐 민족 정서가 두드러지는 토착 요소도 있었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받은바 서구와의 친화력이 있었다. 하지만 일종의 망명객 신분으로 어려운 경제 형편 속에서 인종 차별 등에 민감했던 김마리아에게 미국 생활은 동경이나 경이보다 괴로움과 어려움 그리고 아픔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이었다." "반면 박인덕은 적극적인 추구형이었다. 상대적으로 미국 사회 밑바닥에서 차별과 고통을 겪지 않은 그녀는 미국 문명에 대해 동경과 찬사를 수반한 피상적이고 무비판적인 평가로 일관했다. 의미 맥락은 달랐지만, 김마리아처럼 박인덕에게도 미국은 〈제2의 고향〉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허정숙은 미국 문명과 거리를 두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녀는 거대함과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물질에 대한 추구로 미국 문명의 특징을 요약했다."(248-51)


"허정숙은 미국 문명의 핵심을 금전 추구로 요약했다. 사회주의 이념의 원칙에 충실한 경제적 해석이었다.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극복의 대안으로 사회운동과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미국 체험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혀나간 셈이었다. 이 신념에 따라 그녀는 귀국 후 근우회 운동과 이후 중국에서 민족 혁명 운동에 헌신했다."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김마리아는 먼저 독립을 위해선 교육을 통해 민력을 키우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으며,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 양성론과 준비론에 철저히 공감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의 단결과 조직을 강조했다." "박인덕 역시 혁명보다 교육의 길을 선택한 데서 김마리아와 실천이 겹친다. 이러한 믿음으로 귀국 후 교육, 저술, 농촌 사업에 투신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으며, 1941년 현대의 〈현명순량賢明順良한 주부를 양성〉하기 위해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한다."(255-9)


"김마리아는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여성해방을 이해했다. 여성은 〈남녀동등, 여자해방을 말함보다 실지로 남자와 같은 학식을 가졌으며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체류 중 '평등'이 아닌 '동등'의 개념으로 여성해방을 이해한 그녀의 생각은 귀국 후 보수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봉건 결혼제도의 모순을 직접 체험했던 박인덕은 조선에서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언급하지만, 곧이어 여기에 〈그렇다고 함부로 해방을 부르짖으라는 말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다. 김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급진주의나 사회주의의 입장과는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허정숙은 두 여성과는 달리 미국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미국 부인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의 놀라움을 그녀는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는 완전한 인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본주의 미국은 〈인간인 여자를 돈 잘 아는 인형으로 제조화製造化하는 공장〉이라고 그녀는 덧붙인다."(267-72)


"미국 문명에 대한 경이와 동경보다 거기서 겪은 고통과 아픔에 익숙했던 김마리아는 정치 운동 같은 거대 담론보다 앎의 욕구로서 지식과 그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궁핍과 억압에 시달리던 낙후한 식민지 현실에 공감과 연민을 감추지 못했으며, 귀국 후엔 오롯이 여성 교육에 전념했다." "박인덕의 미국 문명 이상화 경향은 민족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는 즉각적 반응과 결부되었지만, 자기 경험과 욕구에 의거해 서구 사례들 가운데 자유결혼, 자유이혼, 직업 활동의 필요성 등을 선택적으로 부각시켰다. 본격적으로 친일의 걸으면서부터는 이를 침략 전쟁을 위한 모성 보호와 여성 참여에 관한 주장으로 수렴시켰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허정숙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형이자 물질적 동기와 자본에 지배당한 채 세속적 욕구와 범죄가 횡행하는 세계로서 미국을 이해했다. 그녀의 미국 체험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다가올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기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273-4)


|제7장| 차이와 구별로서의 신여성


"1900~1910년대에 이르는 계몽주의 시기 여권 사상에는 고유한 모순이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시대사조로서 자아 각성이나 개성 실현을 여성에 적용하면서도 그것을 여성의 고유 역할로 상정한 현모양처와 결부시키려 했다. 계몽주의 시대 어머니 세대가 여성의 근대 교육을 열렬히 지지한 것과 달리, 신여성들은 당대 여자 교육의 이러한 목표와 방향에 강한 의구심을 표명했다." "또한 어머니 세대 여성들은 남성 계몽주의자들의 근대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으로서 민족 독립과 의식 각성을 표방했다. 물론 신여성들 또한 이러한 민족의 정조情調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의 정조에도 불구하고, 신여성들의 주된 관심은 어머니 세대 여성들과 달리 결코 민족에 있지 않았다. 신여성들은 자아와 개성, 자유와 이상이라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성과 친밀성의 영역에 초점을 맞춘 사사 차원에서의 쟁점에 몰두했으며, 민족이나 계급 같은 거대 서사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289, 292-3)


"급진주의 부류 안에서도 다양하고 미묘한 시각차는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 '성性'은 사적 영역의 문제로서 오롯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의 자기 결정권에 관한 주장과 함께 이들은 자유로운 성과 성 해방 실천을 지향했다. 남성이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에서 이들은 여성의 자의식과 정체성 차원에서 성과 사랑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여성의 정조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때로는 그를 부정하고 그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남녀 간 인격적 결합이나 정신의 일치 혹은 인간으로서의 합일처럼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려 했다. 무엇보다 이론 차원에서의 주장만 되풀이하지 않았다. 몸소 주장을 실행에 옮겼고, 이로 말미암아 비참한 파국을 맞기도 했다. 주류 사회의 극심한 반발과 비판에 직면했으며, 같은 여성들로부터 질책과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양성 간 사랑과 화합, 인간으로서의 친밀성 같은 비전에 대한 헌신은 이들에게 사회로부터 고립과 파멸이라는 대가를 요구했다."(304-5)


|제8장| 지배와 연대 사이에서


"이규수는 재조 일본인은 '제국'과 '식민지'의 접점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현살들에 접근하는 통로로서, '근대성'과 '식민성'을 규명하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재일 조선인과 재조 일본인 모두 역사 속에서 늘 주변인이었다는 전제 아래, 〈어느 한쪽 끝을 더듬다보면 결국에는 그 경계의 어디에선가 또 다른 한쪽〉에 맞닿을 수 있다는 바람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제기되는 문제다. 그런가 하면 기유정은 재조 일본인에 대해, 식민지 정주 과정에서 원주민보다도 더 '혼성hybrid'이 될 수 있는 극단적 조건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혈통 근거지인 본토와 생활 근거지인 식민지 가운데 어디를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원래 제국이 의도했던 주체 구성 원리를 비껴가거나 횡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오구마 에이지 등이 말하는 제국 정체성의 양가 성격, 즉 순혈론 대 혼혈론의 대립과 긴장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존재라는 것이다."(322-3)


|제9장| 사상 전향과 식민지 근대


"근대 법은 특정 시민의 행위에 적용되는 것일 뿐, 그 행위 배후에서 작용하는 사상이나 신념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향은 사정이 달랐다. 전향은 행위 동기를 이루는 사상을 공식화하고 공공연히 비판함으로써 행위뿐 아니라 사상 자체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통해 국가는 개인 내면 깊숙이 침투했고, 개인은 권력 작용 범위를 넘어서는 사고를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서 전향은 지배와 통제 방식의 하나로서 그 억압적·폭력적 성격이 인정되는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애정과 자애'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체포와 고문 같은 지배 권력의 역할 수행 못지않게 가족이나 천황 같은 심리 요소와 문화 전통이 중요했다는 지적, 국가에 의해 강제된 사상 변화와 함께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사상 변화로 전향을 정의하는 방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향의 양면성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일제 식민 정책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더 주목하는 반면, 일본은 그 온정성을 강조하는 셈이다."(342-4)


"전향 정책 초기에는 외래 사상 가운데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주요 이념으로 주목되면서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전향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전향의 기준이 서구 기원을 가진 '비일본인 사상'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자유주의자와 기독교도 역시 이 정책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1936-37년에 걸친 정책 전환 단계에 이르면 권력은 개인이 단순히 사상 포기를 선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정신을 적극 받아들여 스스로 개조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도록 요구했다. 한 일본인 작가가 고백하듯이, 이 단계가 되면 〈전향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인간의 갱생〉이 되는 것이다. 급진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나 기독교도들까지로 전향의 대상이 확대된 것도 이때 이후다. 전향의 적극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이 단계야말로 전향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대동아공영권'내의 다른 국가와 지역들로 확대되었다."(350-2)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의 전향자들은 내재적 동기보다 외적 강압에 의해 움직였다. 전향의 효과가 '일본 정신'으로 상징되는 국가관의 주입이라면, 식민지 전향자들이 그러한 동기로 추동된 사례는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내재적 동기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애와 가정 관계로서, 이는 일본의 전향 동기를 가운데서 마찬가지로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가족과 가족애에 대한 배려가 '국민적 자각'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그것이 순수한 가족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관심'이 그 과정에서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조선의 작가는 전향해도 돌아갈 조국이 없다〉라고 선언한 바 있지만, 식민지 지식인들은 전향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지 내재적 동기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의 중심에 민족 정체성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359-60)


"전향자들은 공통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민족 사상에 대한 감정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에서 민족 해방이나 독립을 주장해온 민족주의의 대의는 협애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이 파악한 식민지의 〈냉정한 현실〉이란 〈조선의 민족적 생활 상태〉가 〈일본의 국민 생활 기구로부터 이탈해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1936년 9월 전향자들에 의해 조직된 대동민우회는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바는 '조선의 전향'이며, 그 이상으로 하는 바는 '내일의 조선'을 건설하는 것〉이라면서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필수 조건으로 〈내선일여內鮮一如의 공고한 결합〉을 들었다." "당시의 표현대로 전선의 유지가 일본의 '생명선'인 것과 비슷하게 완전한 일본인 됨을 실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선이었는지도 모른다. 1945년 해방이라는 또 다른 현실의 부과 외에 이들이 그로부터 벗어날 길은 거의 없었다."(365-7)


|제10장| 식민주의와 동화주의: 복합과 균열


"조선을 지배하면서 일본이 내세운 논리 가운데 하나는 조선과 일본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인종[同文同種]이기 때문에 '합방'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이는 먼 과거에 하나였다가 현재 분리된 상태에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따라서 식민지 정복 행위가 아니라 민족의 (재)통합이라는 논리다. 따라서 식민지 피지배민은 분리보다 공통성을 의미하는 '신부국민新付國民'으로 지칭되었고, 조선은 '신영토' 혹은 '외지'로 통용되었다. 식민지를 의미하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라는 쟁점은 의도적으로 기피되었다. 일제가 식민 지배의 공식 기조로 채택한 동화주의는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두었다. 당장 강자에 의한 약자의 종속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의 시각과는 대조되어 보인다. 흥미로운 건 1910년 강제 병합을 두고 조선에서는 사회진화론에 의지한 설명이 우세했던 반면, 일본에서는 동화주의 입장이 우세했다는 점이다."(381-2)


"그렇다고 일본의 지배 정책이 단순히 동화주의라는 단일체로만 결정된 것은 아니다. 동화주의에 비판적인 흐름 또한 그 '평등화' 요소에 주목하고, 도리어 이것이 식민지 민중에 대한 차별이라는 근거에서 동화주의를 부정했다. 즉, 이민족이 일본 민족의 특수성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동화의 가능성은 부정되며, 식민지 피지배 민족이 일본 민족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들에 대한 일본 문화의 이식 또한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대신 동화주의 반대론자들은 현지 전통과 관습을 온존시키고, 재래의 지배층인 양반을 활용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제시했다. 이렇게 일본인 배제와 식민지 자치를 주장하는 간접 통치론이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화주의는 식민 통치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이 오랫동안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인종이라는 주장은 서구 열강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일본에게 이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385-6)


"1910-1920년대 일본에선 자유주의와 혁신주의의 기운이 분출했고, 바깥 나라들에 대해 구미 협조 노선이 득세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들을 반영하면서 전통적인 동화주의를 대신해 등장한 것이 내지연장주의였다. 메이지 시기 동화주의가 문화와 정신의 '일본화'를 강조했다면, 새 변형태로서 수정주의는 이른바 문화정치의 시행에서 보듯이 제도의 문명화를 의도했으며, 동시에 일본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을 지향하는 미묘한 강조점의 이행을 보여주었다. 즉, 무력을 통해 일본 정신과 문화를 강제로 주입한다던 이전 원칙을 대신해, 이제 동화주의는 일본을 근대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 설정하는 세계관을 반영했다. 결국 일본인에의 동화란 서구를 준거 삼은 문명화를 의미하게 되었고, 일본 문화 그 자체의 이식은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대적 관점에서 일본 전통에 소홀해지는 이러한 사유 방식은 식민지로 확장되었고, 식민지의 '야만' 전통 또한 문명화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388-9)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동화주의는 직접 무력을 동원하고 행사하기보다 그 과시와 위협을 통해 식민지인의 정신에 극도의 억압을 강제했다. 그것은 비상 전시 체제 아래서 끊임없이 피지배자들의 긴장을 유도하고 끝없이 피지배자들을 동원한 열광의 광기였다. 따라서 황민화 정책을 단순한 일본 문화의 동질화가 아니라 〈정신의 정복〉, 〈정신의 총동원 체제〉라고 본 것은 일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 안에선 조선과 일본을 별개로 보는 호칭 자체가 소거되었다. 예컨대 '선인'이나 '조선인'은 차별어로 불렸고, 대신 '반도인'이나 '반도 동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일본어'라는 호칭도 일본을 외국처럼 본다는 이유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국어'가 올바른 용어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조선어 사용 금지는 민족어 말살이라기보다 표준어나 공통어를 보급하는 차원의 하나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전시 체제 아래서 동화주의는 민족과 관련된 모든 형태의 표지를 소거함으로써 〈조선인을 근본에서 일본인화〉하려 했다."(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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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달러 종말의 허구
곽수종 지음 / 메이트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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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 달러가 흔들릴 때 문명도 전환점에 선다


문명의 전환, 혹은 대변화의 시작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첫째, 총·균·쇠의 강도가 거세진다. 총은 전쟁, 균은 질병의 파괴력, 쇠는 산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석기에서 청동기·철기로의 전환, 풍력에서 석탄·석유로 이어진 내연기관의 발명 등이 그 사례다. 둘째, 강대국은 스스로 무너진다. 여당의 실수를 먹고사는 야당처럼, 강한 세력이 자충수를 두어 몰락한다. 내부 균열이 심각해지면 천재지변이나 인접 강국의 침략으로 붕괴된다. 셋째, 경제에서 버블 붕괴는 대공황을 낳지만, 정치에서 패권 붕괴는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권력이 없으면 질서도 유지될 수 없다. 영국 파운드의 몰락이나 달러의 부상은 필연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달러의 몰락도 필연은 아니다. 기축통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달러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미국 스스로 자초한 재앙일 것이다. 경제 패권의 붕괴는 재건이 가능하지만, 정치 패권의 붕괴는 국가의 쇠멸을 뜻한다. 8)


◆ CHAPTER 1 트럼프의 오독: 달러 패권이 불안하다


대다수 공화당 사업가들과 달리, 트럼프는 세계를 착취 대상이 아니라 미국을 이용하는 ‘호구(the patsies)’로 바라본다. 1987년,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 두 개 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미국 국민에게(To the American People)’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에서 그는 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에 군사비를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는 결국 “우리 위대한 나라가 더 이상 조롱 당하게 놔두지 맙시다(Let’s not let our great country be laughed at anymore)”라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트럼프의 정치적 메시지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 시기는 ‘골디락스(Goldilocks) 경제’라 불리며 풍요와 낙관이 공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방위 예산은 패권국으로서 당연히 부담해야 할 대가이고, 무역은 그 보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이러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4)


억만장자 기업가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저서 『세계질서의 변화』에서 제국 쇠락 초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정서를 경고한다. “제조업 부활”을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작 청정에너지와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다. ‘산업과 상업이 떠난 자리에 자본만 남는다’는 사실은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임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미국은 이제 관세나 무역 압박만으로는 중국의 국가 주도 전략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중국은 전략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첨단 산업에서의 지배를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집중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중국도 부동산 침체와 고령화 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의 예측과 달리, 중국은 매번 돌파구를 마련하며 국가 주도 체제를 유지해왔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세 집착은 오히려 중국 중심 세계의 부상을 앞당길 뿐이다. 17-8)


냉전 이후 미국의 대중 외교 접근은 미국 지도자들이 더 이상 전략적 외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대에는 더 이상 경쟁할 강대국이 없었고, 구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이전의 그 어떤 강대국도 상상할 수 없었던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워싱턴은 경쟁국의 행동을 조율하는 대신, 그들을 자유주의 사회로 바꾸려는 더 야심찬 목표를 추구했다. 오늘날 강대국 간 경쟁은 다시 돌아왔고, 체제 간 전쟁도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간명하다. 전략적 외교로 회귀해야 한다. 아르키다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을 암시하지도, 굴복을 암시하지도 않는 어조(a tone not too suggestive of war, nor again too suggestive of submission)”로 적들과 교섭해야 하며, 그로부터 확보한 시간을 이용해 동맹과 국내 자원을 전쟁을 위한 더 나은 상태로 준비시켜야 한다. 당연히 그 목적은 전쟁을 피하는 데 있다. 31-2)


◆ CHAPTER 2 달러의 매력과 균열: 기축통화의 힘과 한계


달러의 진정한 특수성은 ‘거래 지배력’에 있다. 국제 차입·대출의 명시 통화가 달러이고, 무역 청구서도 달러로 작성된다. 미국 내 유통 화폐 가치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100달러 지폐 중 약 3분의 2가 해외 보유라는 사실은 ‘대마불사’에 가까운 저변 수요를 보여준다. 왜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국가경제가 미 달러화를 사용할까?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는 미 달러화의 역할이 영어의 국제 공통어 역할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가 쓰기 때문에 더 쓰게 되는 네트워크 외부성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통화의 특별한 역할은 주로 민간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강제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관세 위협으로 달러 사용을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과대망상을 넘어 정책 오류다. 오히려 상시적 처벌 관세는 달러의 명성과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외교적 영향력은 ‘대체로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국가’라는 평판에서 나온다. 그 평판이 흔들리면 달러의 네트워크 기반도 약화된다. 58)


달러화는 사실상 공짜 돈이자 일종의 무이자 대출(making an interest-free loan to us)이다. 미국 달러화를 사용한다고 해서 사용료를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얼마나 많은 달러가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50조 달러 이상을 해외에서 보유중이라면 이는 곧 무이자 대출 규모와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해외가 미국에 달러로 대출을 해줄 때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입하든 미국 내 자산에 투자하든 달러로 거래된다는 이유만으로 전통적으로 낮은 이자율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전 세계가 미국 금융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에 미국의 차입 비용과 이자율은 약 0.5~1% 낮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미국 주택 매입자의 대출 금리가 타국보다 낮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달러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 더 많은 차입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시장금리에 따라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 0.5~1%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차이이자 특혜다. 61)


“전 세계가 달러를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써, 미국이 수입하는 것은 싸지고 수출하는 것은 비싸진다”는 주장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조적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적자를 지적할 때 즐겨 쓰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투자 자산시장과 소비재 시장을 혼동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미국에서 더 저렴한 것은 달러 강세 때문이 아니라, 미국 시장이 더 완전경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산업 기반과 제조업 일자리를 잃은 것은 금융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달러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자국 통화를 낮게 유지해 미국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값싼 수입품으로 미국 시장을 잠식했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요약하자면, 달러의 지배적 위치가 미국 제조업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경우가 많다.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간단히 말해 설득력이 부족하다. 63)


지금 달러를 지탱하는 것은 연준(Fed), 즉 미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급격히 높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실제로는 평균 2%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 소비자 물가가 2% 수준에서 안정되면, 세계 각국의 통화정책도 이에 연동되어 안정적으로 운용된다는 경험이 지난 30년간 축적되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수단이 미국 재무성 채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티븐 미누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듯 보이는 ‘100년 만기 0% 국채 매입’ 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미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경제가 함께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인류 문명사에서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설립은 매우 중요한 발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다. 조 바이든도, 오바마도 모두 금리를 낮추길 원했다. 투자를 늘리고, 주택을 구입하고, 은행 대출을 쉽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결국 트럼프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68)


미국은, 더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스템을 점점 더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무기화하고 있다. 속되게 표현하면 “빚은 못 갚으니 채권자가 알아서 해라, 미국은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강력한 카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좋은 상태”에 있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형편없다”고 고백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중간점은, ‘달러는 아직 강하지만 미국 경제는 불확실하다’는 해석일 것이다. 달러가 강하다는 것은 여전히 세계경제가 달러 지배력의 우산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독점적 지위가 오히려 미국의 악화된 경제와 불확실한 달러의 미래를 드러내는 역설이 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빌리면, “달러는 약해야 하지만 동시에 기축통화로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가 동시에 약하고 강하길 원한다. 69-70)


가능한 시나리오는 둘이다. ‘디폴트’는 아니다. 하나는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트럼프가 부채의 실질가치를 낮출 정도로 통화 확대를 지지하는 인물을 연준 의장에 임명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현실화하려면 트럼프가 쓸 수 있는 또 다른 카드가 있다. 부채를 민간에 떠넘기는 ‘금융 억압’이다. 이런 조치에는 장단점이 있다. 금리가 급등하면 정부 이자비용이 폭증하고 달러 가치가 급락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은 앞으로 부채에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한다. 여전히 ‘주요 통화 1위’ 지위는 유지하더라도, 달러에 대한 도전이 잦아지면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준다. 제재 수단의 효능이 약해지고, 정보 수집 능력에도 타격이 간다.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 위기는 점진적이고, 달러의 위상 하락도 느린 불꽃처럼 진행된다. 달러 위상이 떨어지는 국면에서 팬데믹이나 또 다른 위기가 닥치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변화를 실감할 것이다. 73-4)


◆ CHAPTER 3 달러 패권의 흔들림: 종말인가, 전환인가


21세기 독재자들은 대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는다. 과거 카스트로나 피노체트가 야당을 폭력으로 억압했다면, 오늘날 독재자들은 공공기관을 정치 무기로 바꾸고 법 집행·세무·규제 기관을 동원해 반대자를 압박한다. 이를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라고 한다. 형식상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지만, 집권자의 조직적 권력 남용으로 야당에게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체제다. 헝가리, 인도, 세르비아, 터키 등이 이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차베스 집권기에도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권위주의로 넘어섰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간단한 기준은 ‘정부에 반대하는 비용’이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데 앞장선 시민들이 ‘정부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현실적 두려움 때문에 한 번 더 주저해야 하는 순간, 그 국가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라 부르기 어렵다.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경쟁적 권위주의’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96-7)


문제는 ‘이 체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을 공격하며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결국 미국 경제의 모든 열쇠를 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가족들이 무차별적으로 뛰어든 암호화폐 사업과 해외 순방에서의 이해상충적 사업 추진은 ‘미국판 마르코스’를 연상케 한다. 이는 미국 경제와 달러 패권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글로벌 패권 몰락의 전조가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사회가 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미온적인 대응만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CEO·로펌 파트너·언론 편집장·대학 총장 등은 민주주의 수호를 원하면서도, 정부 위협 앞에 회유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3년만 버티자”는 자기보호 전략에 몰두하며, 주주·예산·규제·소송 위험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작은 굴복은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유화정책(appeasement)’의 치명적 논리다. 권력은 단순히 힘으로만 강화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타협할 때 강화된다. 99-100)


채권시장은 경제 전망과 정책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보통 장기 금리가 높은 이유는 중장기 성장 가능성을 가정하기 때문이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와 미국 채권 매도세가 겹치면서, 가격은 떨어지고 그 역수인 금리는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채권의 ‘안전자산’ 지위가 흔들리면, 글로벌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미 연준이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번에 1%p 금리를 내린다 해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투자자는 없을 수 있다. 재정적자가 GDP 대비 120%를 넘어서면서, 채권 이자율 급등이 다시 이자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모기지 금리 상승으로 연결되어 기업과 가계에 큰 부담을 준다. 이를 두고 미국 자산 수요 감소와 매우 높은 적자를 고착시키는 재정 절차의 경직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경직성이 자산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커져가는 부채 부담은 채권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하며, 미국의 부채 유지 비용을 끝없이 상승시킨다. 105, 108)


신흥국 투자자들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익률 상승 → 이자 비용 증가 → 부채 확대 → 통화 완화 정책 의존’이라는 전형적인 금리 악순환 때문이다. 이는 결국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그리고 채권 수익률 상승이 반복되는 ‘신흥시장 함정’이다. 지금 미국(그리고 일본 역시)은 그 함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도 2025년 9월 기준 장기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 30년물은 3.23%로 사상 최고치, 20년물은 2.69%로 25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의 장기 금리 상승은 경제 회복 기대라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GDP 대비 부채 규모 260%라는 현실 속에서 장기 금리가 더 오르면 일본은행이 감당해야 할 이자 부담이 급증한다. 이 때문에 미·일 국채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면 일본 투자자들은 자금을 미국에서 빼내 본국으로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미국 채권 가격 하락 → 금리 재상승 → 또다시 악순환’이 이어져 일본 경제에도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109)


미국의 부채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여전히 강하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행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달러 약세를 반길 수도 있다. 부통령 J.D. 밴스는 외국인의 미국 증권 대량 보유가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여 제조업에 피해를 줬다고 주장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 스티븐 마이런도 해외 보유 미 국채에 세금을 부과하는 아이디어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국의 경상·무역적자는 상대국의 대미 흑자가 미 국채 매수로 ‘재활용’되는 구조다. 따라서 달러 표시 국채 매입을 막으면, 흑자국의 대미 흑자를 축소하거나 아예 실현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전 세계 중앙은행가들을 이 정도로 자극한 단일 문서는 드물다. 일부는 미 재무부의 제재 역량을 경계하고, 다른 이들은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기’ 차원의 분산을 택했다. 달러의 전 세계 외환보유 비중은 2001년 73%에서 현재 58%로 하락했다. 이러한 다변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115-6)


◆ CHAPTER 4 금과 암호화폐: 달러를 대체할 수 있을까


1991년 구 소련의 몰락 이후,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극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만, 군사적 우위의 지속과 경제적 패권의 약화가 미국의 절제(자제) 능력을 시험할 것이다. 그 시험은 네 가지 주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동맹을 압박해 단기적 이익을 챙기려는 유혹이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여러 면에서 워싱턴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려는 충동은 늘 존재한다. 워싱턴이 이득을 얻기 위해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미국이 과도한 이익 추구로 권력을 남용하면 리더십과 질서의 정당성이 훼손된다. 둘째, 중국 같은 국가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때 미국은 과잉 반응할 유혹을 받을 것이다. 과거 떠오른 강대국(독일·일본·소련)은 대체로 경제보다 군사력이 앞섰다. 반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더 클 것이다. 이는 국제질서에는 비교적 안정적 파급을 줄 수 있지만, 중국이 경제적 방식의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며, 신중한 관리가 필요하다. 142)


셋째, 미국은 핵심 이익이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안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항상 겪는다. 냉전기 미국의 베트남,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이 그 예다. 오늘 미국에는 동등한 경쟁자가 부재하지만, 이 유혹은 여전하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핵심 이익이 걸린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군사 태도를 피해야 한다. 예컨대 베이징의 A2/AD(접근거부/지역거부) 역량 강화로 중국 인근에서의 미 군사작전 비용·위험이 커졌다. 워싱턴의 대응은 전략목표의 재정의에 달려 있다. 1990년대와 같은 완전한 군사적 자유를 되찾으려 들면 충돌 위험이 커진다. 어떤 접근이든, 미국의 글로벌 이익에서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영토 그 자체가 아니라, 전략·전술이 더 넓은 질서에 미치는 파급이다. 중국의 전략은 분명하다. 굳이 무력을 동원해 미국을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스포츠에서도 ‘상대 실수 유도’가 가장 효율적 전략일 수 있다. 중국은 현 상태를 정면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미국도 중국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할 때다. 142-3)


미국 달러 가치가 만약 급락해 기축통화 지위가 실질적으로 약화된다면, 금은 국제 부채 결제의 보조 단위이자 가치 저장 수단으로 존재감을 더 키울 수 있다. 중앙은행들이 법정통화와의 직접 태환을 부활시키지는 않더라도, 외환보유고의 통화 구성을 다변화하면서 금 비중을 높이는 흐름은 패러다임 전환기에 대비한 방어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법정통화 기반 준비자산이 인플레이션으로 실질가치가 줄어들 때, 금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의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화폐 신뢰가 흔들릴 때 소비와 교환이 앞당겨지며 물가 급등을 자극해 위기를 심화시키는 자기강화 메커니즘이 관찰되지만, 이것이 항상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들이 금 매입을 확대하고 보유 금을 역내 반입하는 사례는, 제재·지정학·제도 신뢰 리스크에 대한 포트폴리오 헤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더해 완전한 ‘탈달러’는 대체 결제 인프라·유동성·법제 등에서 높은 진입장벽을 마주한다. 148)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달러를 대체하는 기축통화로 기능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 다만 보조적 기능을 일부 수행할 여지는 있다. 게다가 비트코인의 가격 불안정성은 일상적 화폐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한다. 또한 비트코인이 완전한 익명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콜로니얼 파이프라인 랜섬웨어 사건에서 해커 조직 다크사이드가 받은 비트코인의 일부를 추적·회수한 사례는, 비트코인 거래가 완전히 추적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국 비트코인은 본래의 목표에는 실패한 채 투기성 자산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는 아이러니하다.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없고, 어떤 실물 자산에도 연동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지자들끼리 한정판 굿즈를 사고파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지자들은 금처럼 희소성에 의미를 부여하며, 발행 한도가 2,100만 개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이는 명품의 ‘한정판(limited edition)’과 같은 성격이다. 152-4)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이란 미국이 대량의 비트코인을 매입해 보유하는 것이다. 비트코인 정책연구소(BPI)는 미국이 비트코인을 채택하면 달러 패권을 약화시키려는 중국과 러시아보다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국가는 금에 집중하고 있지만, 미국은 디지털 금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장점은 공급량이 한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 압력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 발행량은 2,100만 개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미 약 1,990만 개가 채굴된 상태다. 이론상 수요가 유지된다면 장기적으로 가격 상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가격이 급등하면 인플레이션이나 독점적 가격 착취로 이어질 수 있으며, 무차별적인 시장 교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만약 미국이 이를 달러 대체 수단이나 최소한 달러 방어 수단으로 삼는다면, 가장 큰 위험은 변동성 그 자체다. 화폐의 변동성은 금리·환율로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하지만, 기초적 펀더멘털이 부재한 비트코인은 공급과 투자자 심리에 따라 가격이 움직인다. 157)


스테이블 코인의 주요 위험 요인들을 요약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금리 위험(Interest Rate Risk)으로,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스테이블코인이 매일 채권을 사고판다면, 단기 금리 변동에도 일부 평가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유동성 위험(Liquidity Risk)이 잠재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하루 단위로 대량 국채를 거래할 경우, 유동성 부족 시 원하는 가격에 매도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재투자 위험(Reinvestment Risk)이 존재한다. 만기 채권이 재투자될 때, 금리가 이전보다 낮으면 예상 수익률이 감소한다. 넷째, 신용 및 제도적 위험(Credit / Regulatory Risk)이다. 미국 국채는 사실상 무디스, S&P AAA 등급으로 초우량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시나리오(예: 정부 채무 상환 지연, 미국 디폴트 가능성)는 이론상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운영 및 시스템 위험이 존재한다. 매일 채권을 사고파는 구조에서는 거래 시스템 오류, 가격 산정 오류, 스마트 계약 오류 등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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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
케네스 로고프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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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장. 지배적 통화의 탄생


세계통화를 발행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반면에 세계통화 지위를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져나오는 사회적 요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공장과 기반시설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 식민 지배 권력을 계속 휘두르려는 욕망 등으로 인해(GDP의 240퍼센트를 넘어선 전후戰後 채무는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이 잇따라 재정 문제를 겪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은 1956년, 1967년, 1976년 세 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으려고 국제통화기금IMF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며 이것 말고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여러 구제책에 기대야 했다. 파운드가 세계통화로 군림하던 영광의 시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달러가 이런 운명을 맞으려면 여러 번의 불운을 겪어야 할 것이다. 지배적 달러는 이제 중장년에 접어들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건강하다. 그럼에도 앞에 놓인 도전(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다)을 마주하려면 우선 세계에서 어떻게 달러가 패권을 쥐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21)


1부. 달러 패권에 맞선 과거의 도전자들


오늘날 유로는 국제 교역과 금융에서 확실히 달러의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하지만 비EU 나라들 사이의 교역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로는 세계통화가 아니다. 유로존 정부 부채 시장은 발칸화되어 있다. 투자자들은 독일의 부채와 이탈리아의 부채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며 이는 당연하다. 강력한 재정 당국이 없다는 것은 유로화가 가진 또 다른 주요 한계의 뿌리다. 이를테면 범유로화 예금 보험 제도는 아직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은행 연합이 온전히 발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다. 자본시장 연합이나 더 온전하게 통합된 은행 시스템이 없고 유럽 정부 부채가 파편화된 상황은 달러와의 경쟁에서 유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주요 걸림돌이다. 이런 탓에 최근 수십 년간 유럽의 성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유럽이 역동성을 잃은 요인은 높은 세율과 방만한 복지 등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격차 중에서 70퍼센트 이상은 낮은 생산성 때문이므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50-3)


유로화는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을 보유했으며 이 강점은 향후 수십 년 안에 전면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은 유럽연합의 기초가 되는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 의회 입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렇기에 만일 의회가 원한다면 연방준비제도는 폐쇄되어 몇 주 안에 미국 재무부에 재흡수될 수 있다. ECB는 헌법적 지위를 누리며 주요 임무는 유로존 전역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방법이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점이 좁아서 창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다. 반면에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을 유지한다는 연준의 이중 의무는 해석의 여지가 크며 관례적으로 연준은 이를 낮은 인플레이션과 완전고용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와 관련하여 정치적 압력을 훨씬 많이 받는다. ECB가 공동 책임으로 운영되는 것도 안정성의 한 요인이다. 53)


2부. 중국: 현재의 도전자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마는 근거는 여럿 있다. 아마도 가장 주된 근거는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부유해짐에 따라 (정부 형태와 무관하게) 포퓰리즘적 재분배 압박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탈선시킨다는 것이다. 전형적 사례를 보자면 성장이 느려지고 정부가 성장을 지탱할 방법을 찾을 때는 대외 차입을 비롯한 금융 탈규제가 강력한 단기적 해결책일 수 있다. 신생 정부의 제도가 허약하면 급증한 차입은 생산성이 낮은 투자로 흘러들기 쉬운데, 결국에 가서는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차입이 단기적 해결책으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성장이 불가피하게 다시 느려져 누적된 부채를 지탱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금융 압박과 자금 부족은 여러 해 동안 쌓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폭발하기도 한다. 대외 차입이 많았다면 외국 채권자들이 도피하고 그와 더불어 환율이 폭락하고 달러 부채를 자국 화폐 소득으로 상환하는 금융 부담이 치솟는다. 그 결과는 지독한 금융위기다. 87-8)


3부. 나머지 모두의 문제: 달러와 함께 살아가기


고정환율제는 퇴출되었다. 1997~1998년 부채 위기 이후 아시아 각국은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IMF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달러 환율을 흘끗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변동폭이 크지 않거나 변동 속도가 빠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대부분의 아시아 경제국은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폭넓게 개입하면서도 자신들이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했다고 IMF에 보고했으며, 이에 따라 IMF는 공식 환율 분류 문서에서 이 환율제들이 유연하다고 기록했다. 요약하자면 많은 신흥시장, 특히 아시아 신흥시장들은 워싱턴 합의를 거부했다기보다는 핵심 요건을 채택하되 나름의 개선점을 첨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은 자본 통제와 금융시장 규제가 나름대로 유용하기는 하지만 거시경제 정책의 심각한 비일관성을 만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금을 비축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일부 통제를(특히 자본 유입과 관련하여) 도입했다. 131, 135-6)


2000년대 초 나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는 아시아가 달러 보유고를 꾸준히 늘리는 바람에 세계경제의 골치 아픈 불균형이 악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이체 방크의 세 이코노미스트(마이클 둘리, 데이비드 폴커츠-랜도, 피터 가버는 셋 다 학자 출신이다)는 아시아가 전후戰後 유럽과 같은 발전 전략을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장을 북돋우려면 저평가된 환율을 유지해야 하므로 개입과 자본 통제를 혼합하여 구사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국제 통화 체제가 (미국, 유럽, 일본을 주로 아우른)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와 비슷한 브레턴우즈 II 체제로 진화했다고 묘사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은 위기로 비화할 위험하고 불공정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시아 경제(와 이를 모방한 몇몇 나라)가 매우 합리적인 발전 전략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의 공공·민간 채무자들은 불평할 게 아니라 이 체제 덕분에 미국인들이 막대한 해외 자금을 유난히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136)


환율 저평가 이야기에는 중국 당국이 자국 경제의 초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빠졌다. 그것은 중국 농촌에서 도시와 제조업 중심부로 해마다 꾸준히 이주하는 수백만 명의 인구다. 서구 경제가 맞닥뜨린 진짜 문제는 도시의 생산 중심지에서 일할 기회를 찾아 해마다 밀려드는 중국 빈농의 물결이었다. 외환시장 개입은 중국 통화의 이른바 저평가에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은 부차적이었을 것이다. 삼인조 논문의 두 번째 주장은 아시아에서 흘러드는 값싼 자금이 미국에 순수하게 이로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 은행 규제 담당자들이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에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이른바 자본 유입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금융 규제에 허점이 있는 나라에 외국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 빈틈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의 명목상 대외 차입이 그 자체로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분명하다. 137)


4부. 대안 통화


유발 노아 하라리는 화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무언가를 화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이 미크로네시아 얍 섬의 거석이든 중세 일본의 쌀이든 실제로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부가 발행하는 국가 통화는 어떤 대체물이나 사적 통화도 넘볼 수 없는 근본적 이점이 있다. 정부는 모든 피고용인과 공급업자들에게 자신의 통화로 급여를 지불할 수 있으며 정부 통화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정부는 자신의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발행할 수 있다. 미국 달러가 ‘법정통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부채가 미국 달러로 상환될 경우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다양한 활동에서 자신의 통화가 법적 회계 단위로 쓰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점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정부 통화는 넘볼 수 없는 우위를 누린다. 이걸로 모자란다면 은행 예금의 정부 통화 표시를 의무화하는 등의 제약을 추가할 수도 있다. 151)


규제에 반대하는 격렬한 로비 시도를 제외하면 적어도 울타리를 둘러쳐 암호화폐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운용할 때 ‘거래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래소를 규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온 체인’(블록체인 위에서) 암호화폐 거래가 너무 어렵고 너무 많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소를 잘못 입력했다가 전 재산을 영영 잃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거래소는 블록체인 용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실은 은행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블록체인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100달러 지폐와 비슷하고, 거래소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은행에 넣어둔 돈과 비슷하다. 거래소는 은행과 꽤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거래소는 정부가 최종 대부자로서 뒤를 받쳐주지 않으며 암호화폐 업계가 기존 은행 수준으로 규제받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가망은 없다. 다시 말해 정부는 최종 레버를 쥐었다. 152-3)


골수 암호화폐 신봉자들은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코드가 법이다”라거나 “암호화폐는 검열에 저항력이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설령 정부가 암호화폐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암호화폐의 이용을 번거롭고 값비싸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암호화폐가 정부 통화에 맞서 경쟁력을 가지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블록체인 기술이 다른 측면에서 금융에 혁명적 영향을 미칠 뚜렷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통화 독점은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공공부채 위기를 피하는 데 필수적이다. 비트코인 본위제의 문제들 중 상당수는 금 본위제와 동일할 것이다. 간헐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위기가 일어나면 그 규모가 훨씬 커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경기 역행적 케인스 통화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면 경기 순환이 훨씬 극심해질 수 있다. 153-5)


화폐에 대한 유발 노아 하라리의 설명이 비트코인 전도사들에게 더없는 희망을 선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가 투기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은 암호화폐의 킬러 앱(시장에 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장악하는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옮긴이)을 무시하는 처사다. 점점 커져가는 지하경제 말이다. 역사적으로 현금은 은밀한 거래에서 선호되는 수단이었다. 비트코인이 합법적 과세 거래에서는 정당한 쓰임새가 거의 없을지 몰라도 지하경제에서 거래를 촉진하는 데 널리 쓰인다면, 이것을 순전히 투기적인 자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제 당국이 서투르고 법 집행이 무르다고 항의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의 본원적 가치가 0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를 기준틀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폭넓은 불법 활동에 쓰이며 랜섬웨어 공격과 다크웹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통화다. 157-9)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같은 매력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류다.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두 가지 코인인 테더와 USD 코인USDC이 단연 가장 중요하다. 둘 다 가치가 1달러에 고정되어 있다. 세 가지 핵심 문제가 있다. 첫째, 스테이블코인 공급자의 뒤에 최종 대부자가 없을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재무부 채권 같은 안전한 달러 표시 증권으로 충분히 보증되지 않으면 인출 사태를 겪을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고정환율제에서 일어나는 인출 사태와 매우 비슷하다. 둘째, 보유 증권에 대한 이자를 정부 소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공급자가 수취한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히 보급되고 편리해지면 은행의 중개자 역할을 박탈할 우려가 있다. 은행이 대부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필수 요소를 공급하던 통상적 예금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걸림돌과 부작용도 많다. 물론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부만이 가능하다. 162-3)


유럽중앙은행, 영국은행, 캐나다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 중 상당수는 독자적인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즉 ‘CBDC’의 개발을 꽤 많이 진척시켰다. 주도적 CBDC를 내놓으려는 경주에서 달러의 유리한 출발선과 미국의 전반적 기술 우위를 감안컨대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소매) CBDC의 잠재적 ‘이익과 위험’을 공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때는 2022년 초다. 미국의 굼뜬 행동은 납득할 만하다. 현재의 통화 체제에서 달러가 왕좌에 있는데 뭐하러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는가? 디지털 통화의 발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달러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테면 디지털 통화는 다른 통화에 대해 고도로 유동적인 시장을 창출하여 달러의 네트워크 우위를 감소시킬 수도 있고, 미국 규제 당국의 권한 밖에 있는 국제 지불의 대안적 ‘레일rail’(거래가 처리되는 매체인 디지털 전송·처리 시스템―옮긴이)을 도입할 수도 있다. 164-5)


모든 우려(사이버 위험, 시스템 장애, 중개자 역할 박탈, 과도한 정부 권력)는 왜 새로운 금융 기술을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지, 왜 미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에서 먼저 실험하는 것이 이상적인지 잘 보여준다. 연준은 문제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기길 바랄 것이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사실상 모든 거래 신기술에서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늑장을 부렸다. 신용카드에 칩을 넣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외국 중앙은행의 CBDC(세계 수준의 금융 시스템을 갖춘 영국을 포함)와 경쟁해야 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백악관과 연방준비제도는 자신들이 이 문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언젠가 디지털 달러를 도입할지도 모른다는 위협만으로도 외국 중앙은행들은 자체 CBDC 도입 계획을 포기할 것이다. 체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위협이 실행보다 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거나 (중국처럼) 자국 통화를 달러와 맞먹게 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67-8)


5부. 지배적 통화에 따르는 혜택과 부담


권력의 순수한 희열을 제외하면 달러 패권은 미국에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매우 구체적인 유익 한 가지는 외국인들이 놀랍도록 다량의 미국 부채를 기꺼이 보유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 정부는 지불해야 하는 금리를 낮출 수 있다. 달러 부채가 웃돈이 붙어 팔리는(더 낮은 금리를 지불한다는 뜻)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미국의 금융시장이 가장 깊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미국 재무부 부채를 별도의 거래 비용 없이 빠르게 팔기는 식은 죽 먹기다. 즉 미국 부채는 유동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적어도 약속된 만큼의 달러를 상환받는다는(즉 깜짝 인플레이션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미국 부채는 매우 안전하다. 미국 정부 부채, 특히 재무부 단기 부채의 수요를 떠받치는 요인 중에서 덜 분명하지만 극도로 중요한 것은 전 세계 금융거래에서 담보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다. 재무부 채권은 담보물로 쓰여 화폐와 거의 비슷하기에 (경제학 용어로) ‘보유편익’을 누린다. 172)


수년간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차입하는 엄청난 속도로 보건대 어떻게 미국이 공식 통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깊이 부채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는가다. 특히 흥미로운 시기는 1998~2010년이다. 이때 미국 순 대외 채무의 증가 속도는 미국의 차입 규모에 비하면 달팽이걸음이었다. 이를테면 2010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수입의 45퍼센트에 육박했지만 대외 채무는 17퍼센트밖에 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공교롭게도 대미 외국인 투자는 오랫동안 채권, 특히 단기 채권에 치우쳐 있었다(채권 대 위험자산 비율이 약 60대 40). 하지만 미국의 대외 투자는 정반대로, 주식과 대외 직접 투자가 약 60퍼센트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균적으로 미국인들이 대체로 높은 수익을 거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이 채권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니 말이다. 대외 직접 투자는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형태의 투자다. 179-80)


외국 자산에 대한 투자자로서 미국인은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만한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이민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 특히 1, 2세대 이민자는 여전히 모국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며 모국의 제도를 잘 안다. 그 덕에 미국 투자 자금을 모국에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비교 우위를 누린다. 최근 나머지 세계가 쌓은 부가 더욱 집중되고 외국 가정이 자녀를 미국 대학에 보내어 미국과 연결을 맺으면서 외국인 직접 투자 채널은 양방향 도로에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많고 다양한 이민자 인구가 미국에 선사하는 투자 이점이 일부 상쇄되었다. 위험을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좋게든 나쁘게든 미국 체제의 전체 구조는 위험 감수에 보상하며(파산법이 너그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훨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인은 다른 큰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부유하며 부자는 더 큰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184)


지배적 세계통화를 발행함으로써 미국은 정보에 특권적으로 접근하고 강력한 금융 제재를 부과하는 등의 비정형적 편익에 더해 뚜렷한 양적 편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지배적 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도 따를까? 달러는 이제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다. 미국 재무부 부채에는 이제 금약관(장래의 화폐 변동으로 인한 채권자의 손해를 막기 위하여, 채무자가 빚을 금이나 금화로 갚거나 금화 가치로 환산하여 갚도록 규정한 금전 채권의 약정―옮긴이)이 없다. 달러를 금으로 보증한다는 약속이 사라진 지금 지배적 통화 지위에 따르는 심각한 단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단점 중 하나는 매우 명확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단점으로, 미국이 침체기에 글로벌 포트폴리오에 일으키는 막대한 손실과 관계있다. 미국이 막대한 손실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이유는 세계의 은행가이자 비교적 위험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이유는 달러가 글로벌 침체기에 절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92)


군사력이 통화 패권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논란의 여지는 크지 않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을 때 자국 통화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다. 군사력과 통화 패권은 아무리 못해도 상보적이다. 달러 패권은 군비 조달을 용이하게 하며 특히 갑작스러운 군비 증강에 요긴하다.2 더 미묘한 논점은 미국의 군사력이 국제 금융시장과 국제 금융 기구의 규칙을 확립하고 정책을 설정하는 데에 추가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정학적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는 지배적 통화의 역할을 지속하기 힘들다. 유럽은 미국의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여러 중대 사안에 대해 영향력과 능력이 미비하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규칙에 좌우되는데, 이 장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경제·군사 강국인 나라는 규칙을 제정할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위험할 정도로 어수룩하다. 193, 196)


이 장 첫머리에서 언급했듯 경제학자들은 달러 지배의 또 다른, 전혀 별개의 비용에도 주목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심각한 침체와 (정도는 덜하더라도) 불황에 빠졌을 때 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소가 있다. 하나는 위기가 터졌을 때 달러가 절상되곤 한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그럴 땐 자금이 대부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것은 미국이 저위험 채무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 시장이 유난히 깊기에 동결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러가 등귀하면 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미국 자산의 외국환 시장 가치가 증가하고 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외국 자산의 달러 시장 가치가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을 ‘보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덕분에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한 투자는 위기에 대비한 더 나은 헤지가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것은 미국 재무부 채권의 금리가 유난히 낮은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196)


6부. 달러 패권의 정점


달러의 패권과 안정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내부에 있다. 통화를 보증하는 귀금속이 없는 순수한 법정통화의 세상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합리적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는 연방준비제도의 약속에 대한 신뢰야말로 세계경제가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거시경제 석기시대(말하자면 1970년대)로 돌아갈 것인가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가장 중요한 보루다.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이 금과옥조라는 생각은 어수룩하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라는 정치적 압력이 너무 거세면, 특히 재정 정책이 명백히 지속 불가능하면 연준이 끝끝내 저항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연준 이사진의 임명을 좌우하며 의회는 연준의 예산을 좌우하고 이론상 연준을 눈 깜박할 사이에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 그랬듯 이따금 연준이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굴복하면 기대 인플레이션이 점차 상승하고 불안정이 뒤따를 것이다. 200)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실물경제가 여러모로 왜곡되며 금융 시스템에 혼란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높고 안정된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30년 가까이 득세한 초저인플레이션 시기는 달러가 꽤 안정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인플레이션 시대는 더 많은 사람, 기업, 국가가 달러를 신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달러 이용자와 쓰임새의 저변을 구축했으며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를 보강하고 강화했다. 연준이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 앞에서 갈팡질팡하면 네트워크 효과가 (하룻밤 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점차 깎여나갈 것이다. 달러는 다른 통화(이를테면 유로화, 스위스 프랑, 어쩌면 일본 엔화)로 대체될 것이다.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중국의 시도에도 틀림없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안정된 달러 본위제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금융 부문은 쪼그라들 것이다. 설령 미국 달러가 선두를 유지하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자들이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203-4)


그렇다면 중앙은행 독립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매우 뚜렷해진 지금 왜 걱정거리가 남았을까? 한 가지 문제는 저인플레이션 시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정된 인플레이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앙은행이 목적을 바꿔 다른 문제(이를테면 지구온난화)를 다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오랜 제로 금리 시대(중앙은행들은 단기 금리를 0이나 심지어 그보다 약간 아래로 끌어내렸다)에 통상적 금리 정책이 마비되면서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다시는 중대한 우려 사항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중앙은행이 독립성과 발권력을 가지고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진보 진영에서는 연준이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물론!) 환경을 치유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대견한 목표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이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주도적 역할을 할 전문성, 정책 수단, 민주적 책임성을 갖췄는가다. 204-5)


현재 미국이 노골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더 쉬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미국 시장성 부채의 양은 나머지 모든 선진국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미국 부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도 총 연간 이자 지불금으로 따진 부채 상환 비용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때로는 부채 규모가 증가하는데도 이자 지불금이 감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주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질금리가 급전직하한 덕분이었다. 물가조정 10년물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익률은 2012년부터 2021년 말까지 평균 0에 가까웠다. 단기 부채에 대한 실질금리는 뚜렷한 마이너스였다. 재무부 채권에 대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채권 보유자들이 ‘안전한’ 부채를 보유하는 특권의 대가를 미국 정부에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이자를 받더라도 해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남은 원금과 이자의 구매력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채권 보유자들은 순손실을 입는다. 212-4)


어떤 사람들은 2024년 부채가 GDP의 250퍼센트를 넘어선 일본을 예로 들어 부채가 높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 미국 정부는 쓸 수 있는 패가 많으며 지배적 통화 발행국으로서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차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채무불이행(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인플레이션(미국 부채의 대부분이 단기 부채이고 10퍼센트만이 물가에 연동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서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금융억압(기본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직간접 부채 보유를 강제하는 것) 등 기본적 수단은 동일하다. 이 중에서 훈훈하거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 까다로운 환경을 맞닥뜨린 탓에 앞으로 10년 안에 또 다른 인플레이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우 높은 부채는 설령 인플레이션 압박에 일조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23)


미국 부채의 상당 부분을 외국이 보유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달러에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부채를 국내에 보유하는 경우보다 훨씬 취약해진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부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이 느닷없이 확신을 잃었을 때 발생할 위험 때문에 현대판 ‘트리핀 딜레마’(기축통화 발행국이 기축통화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면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는 상충 관계―옮긴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트리핀 딜레마와의 유사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미국 정부가 외국인을 붙잡아둘 능력이 자국민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국민을 상대로 미국은 금융억압을 실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규제를 확대하여 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부채를 떠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금융억압은 자국민에게만 부과할 수 있는 일종의 세금이다. 금융억압은 외국인 보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돈을 빼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226-7)


행운과 실력은 미국 달러의 전후戰後 궤적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등식의 ‘행운’ 부분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러시아가 1960년대 중반 경제를 자유화했다면, 일본이 1980년대 중반 우격다짐에 밀려 통화 절하로 불안정을 자초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2001년 그리스를 유로화에 포함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2010년대 온전한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면 달러는 여전히 꼭대기에 있었겠지만 오늘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안적 현실들 중 어느 것에서든 미국 금리는 더 높았을 것이고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더 적었을 것이다. 달러 패권이 맞닥뜨린 최대 위험은 내부에 있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마찬가지다.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게 문제다. 지난 수십 년간 달러 패권이 승승장구하면서 미국 정치인(과 많은 경제학자)들은 초저금리가 미래에도 거의 틀림없이 정상적 규범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의 위안거리는 고전적인 ‘이번엔 다르다’ 사고방식이다. 231)


역사에서 보듯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기를 풍미한 초저금리는 훨씬 오랜 추세로부터의 일시적 일탈로 보아야 한다. 빠르게 증가하는 부채가 방치되고 대규모 적자를 해소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면 미국과 전 세계는 평균 실질금리와 인플레이션이 더 높아지고 부채 위기와 금융위기가 더 자주 발생하는 세계 금융 변동성의 시대를 오랫동안 겪을 것이다. 딕 체니 전前 미국 부통령의 ‘적자는 문제가 아니다’ 가설은 금리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시기에는 좋은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리가 (불황을 제외하고) 정상화되는 지금은 글러먹은 생각이다. 지난 70년에 걸친 세계 통화 체제의 발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단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고삐 풀린 미국 부채 정책이 높은 실질금리와 지정학적 불안정을 계속 맞닥뜨린다면, 정치적 압력 때문에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을 일관성 있게 길들이지 못한다면 달러는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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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딸 - 위대한 과학자를 완성시킨 비밀의 기록 ㅣ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제1부 피렌체로


"1610년 1월 초에 갈릴레오는 그 무엇보다 대단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이른바 궤도를 그리며 목성 주위를 도는, '창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네 개의 행성'이었다. 코시모 1세는 1569년 대공의 직위에 오르기 전인 1537년 공작이 되었을 때, 메디치 가를 위한 고전적인 신화를 창출해냈다. 코시모cosimo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자신을 지구에 사는 우주cosmos의 화신으로 형상화시켰다. 이 같은 고등 전술로 그는 오랫동안 불편한 연합 관계를 맺어온 다른 유력한 지배층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 메디치 가의 숙명임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설파할 수 있었다. 왕가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코시모 1세는 자신을 로마 주신主神의 이름을 딴 주피터 행성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하고 다스리는 시뇨리아 궁을 이 올림피아의 주제를 강조한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채웠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베네치아에 바쳤고, 이제 피렌체에는 목성의 위성들을 헌정할 작정이었다."(60)


"갈릴레오의 이전 동료였던 피사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유명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부동의 우주'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의 근거인 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이 같은 주장의 우수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자신의 발견을 알리기로 했다." "로마로 건너간 갈릴레오는 교부 클라비우스가 주임 수학자로 재직 중이던 예수회의 중앙 교육 기관인 콜레조 로마노의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큰 힘을 얻었다. 교회 측이 천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는 클라비우스와 그의 훌륭한 동료들은 그 망원경을 독자적으로 입수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이제 갈릴레오가 관찰한 내용 모두를 인증해주는 단체 역할을 했다. 이 예수회 소속 학자들은 우주는 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을 고수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방문해달라는 흔치 않은 초대로 갈릴레오의 영광을 높여주기까지 했다."(70-2)


"『물에 뜨는 물체 혹은 물속에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논쟁』은 물에 뜨거나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태양의 완전함을 손상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물에 뜨는 물체』를 유럽의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일종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해 학문적인 전통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갈릴레오의 이 같은 행동은 동료 철학자들의 분노를 사고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와 토론을 벌여 패한 피렌체 아카데미의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 같은 이들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콜롬베는 갈릴레오의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응해 '반갈릴레오'를 선언했다. 반대로 갈릴레오의 지지자들은 '갈릴레오주의자'를 표방했으며 콜롬베의 이름을 조롱하며 그의 얄팍한 철학을 더욱 신랄하게 공격했다. 콜롬베가 이탈리아어로 '비둘기'를 뜻하므로 이들 갈릴레오를 비판하는 무리를 '비둘기 연맹'이라고 불렀다."(80-1)


"1613년 봄 로마에서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은 당시 진행 중인 연속물의 일환으로, 벨저가 쓴 상대적으로 짧은 네 통의 편지와 갈릴레오가 쓴 매우 긴 세 통의 답장을 『태양의 흑점과 그 현상에 관한 역사와 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벨저는 한 달도 더 걸린, 태양을 뒤쫓으며 만든 뛰어난 조판으로 책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갈릴레오와 그의 공공연한 적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책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새로운 적이 생겨났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가 몇 해 전 다른 나라에서 조용히 사망함에 따라 갈릴레오가 태양중심설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비난받기 시작했다. 『물에 뜨는 물체』를 공격한 '비둘기 연맹'은 갈릴레오에 반대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지지했지만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제 성경이라는 한층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고 나섰다."(95-6)


"교황은 신학 분야의 고문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을 불러들였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 때 종교재판관을 지낸, 뛰어난 지성을 지닌 예수회 수사였다. '이단자의 심판관'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에게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생각하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벨라르미노는 약 15년에 걸쳐 여러 사교 모임에서 갈릴레오와 만나 아는 사이였다. 1611년에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피렌체에서 직접 천문학을 공부한 인물로서 갈릴레오의 업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치하한 바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설이 아닌 현실로 대하는 고집이었다. 어쨌든 증거가 없었다. 나아가 추기경은 갈릴레오가 사람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는 데 그쳐야지,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19-20)


"1616년 3월 5일, 금서위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공표했다. 즉 그의 주장이 '성서에 위배되는 거짓'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교령에는 관계자들의 이름과 이들에게 가하는 조치가 명시되었다. 문제 되는 내용이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일시적으로 금하며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교의 진리에 대해 편견을 유포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성경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한 책만이 이 혹독한 처분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교령에도 언급되지 않고 어떤 개인적인 견책도 받지 않은 갈릴레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그가 지지한 학설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것을 가설로 다루는 것과 언젠가는 그 교령이 효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은 자유였다. 그는 변함없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이탈리아 과학의 거장이었다. 그는 3월 11일에는 파울루스 교황과 한 시간 가까이 개인적인 면담을 하기도 했다."(125-6)


제2부 벨로스구아르도에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갈릴레오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때는 1611년이다. 이때 그는 갈릴레오에 대해 말하길 장수하여 남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할 위대한 능력을 지닌 고귀하고도 독실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후 몇 년간 이 추기경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라, 1620년에 「위험한 추종」이라는 시를 보내 갈릴레오를 새롭고도 경이로운 천체 현상의 발견자로 칭했을 뿐 아니라 그가 발견한 태양의 흑점에 대해 '강한 자의 마음속에 깃든 두려움'이라는 은유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찬사 가득한 시상이 담긴 편지를 맺으며 추기경 자신을 '당신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그런 그가 162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학문을 사랑했던 우르바누스는 교황청에 지식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비르지니오 체사리니 몬시뇨르를 교황의 의전관으로 임명했는데, 체사리니는 새 교황을 환호로 맞이하는 시를 썼으며 갈릴레오의 강의를 들은 후 수학 연구에 헌신해온 인물이었다."(154, 162)


"갈릴레오가 유럽 전역의 서신 왕래자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듯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1620년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수정해야 한다는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 교령은 이탈리아의 체면을 구겨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르바누스를 위축시킨 소문도 나돌았는데 내용인즉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독일인들이 이 교령 때문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교령이 발령되고 8년이 지났지만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천문학적인 계산과 예측의 도구로 활용되는 데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태양중심설은 입증되지 않은 단순한 견해로 남아 있었고, 우르바누스는 차후에도 이것이 입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는 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참작하고자 한다면, 이 학설이 가설이라고 전제하는 데 변함없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202-3)


"갈릴레오는 1629년 가을 내내 『린체이 회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의 완성을 위해 매달렸고, 마침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끝마쳤다. 그는 『대화』의 끝에서 『시금관』에서의 매미 철학 즉, 신과 자연은 인간이 관찰하는 자연 현상을 창출한 무한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교황 우르바누스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 심오함을 간단히 표현함으로써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파의 학자들을 좌절시켰다." "갈릴레오는 『대화』의 최종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발간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물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 것들로, 그것은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이 이 규범에 가장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종교재판소의 검사성성이 있는 로마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금관』도 공식적인 절차를 무난히 통과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대화』의 실질적인 내용이 검열관들의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250-5)


제3부 로마에서


"『대화』는 이내 우르바누스 교황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전쟁을 벌이느라 돈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 빚이 두 배로 불어나고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스페인의 음모가 두려워 편집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최악의 시기에 갈릴레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1632년 3월 8일 스페인 주재 바티칸 대사인 가스파레 보르자 추기경은 30년 전쟁에서 독일의 신교도에 대항해 필립 4세 왕을 지켜내지 못한 교황의 실책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1632년 여름 갈릴레오의 책이 로마로 들어왔지만 우르바누스는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익명의 고문관들이 교황 대신 이 책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것은 지독한 모함이었다. 로마에 있는 갈릴레오의 수많은 적들은 『대화』를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찬양으로 보았다. 게다가 이미 유럽이라는 가톨릭교의 제일선에서 가톨릭의 열기가 쇠약해져가는 것을 소리 높여 추궁한 교황은 새로 발간된 이 무례한 내용의 책을 벌하지 않고 넘어갈 도리가 없었다."(314-6)


제4부 로마의 메디치 빌라, 토스카나 대사관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백과사전에조차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이 두 차례 열렸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재판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이는 1616년 갈릴레오와 벨라르미노 추기경과의 만남을 첫 번째 재판으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은, 다소 오래 지속되었던 1633년의 심문을 두 번째 재판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단 한 번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천 번은 열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종교의 억압이자, 권위에 대한 개인주의의 수호, 혁신 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충돌, 오래된 신념에 대한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견의 도전, 그리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교회법이나 관습법의 전 시대를 통틀어 그 의미와 파급 효과가 더 큰 재판, 억측과 유감을 더 많이 남긴 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1633년 봄에 단 한 번 열렸으나, 적어도 증거의 절반과 대부분의 증언은 1616년의 논쟁과 관련된 것이다."(323-4)


"갈릴레오가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두 달을 기다린 후인 1633년 4월 12일 화요일, 종교재판소 검사성성의 수석대표가 마침내 심문을 받으러 오라고 그를 소환했다." "〈저는 그 책에서 지구가 돌며 태양은 고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펴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취약하고 설득력 없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갈릴레오의 마지막 증언은 그의 곤란한 상황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이처럼 말을 얼버무린 데 대해 그를 비난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날의 심문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으며 자신을 방어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을 수도 있다. 니콜리니 대사가 그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종교재판관들이 바라는 태도를 꾸며 보이라고 경고한 터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자신이 무고하며 진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재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338, 351-2)


"한편 로마로 돌아온 우르바누스 교황은 갈릴레오의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검사성성의 종교재판관들이 친갈릴레오파와 반갈릴레오파로 분열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그 책으로 인해 무지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갈릴레오의 감상적인 변명에서 부정직함을 감지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레오가 직접적인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6월 16일, 추기경인 종교재판관들과의 회의를 주재했다. 교황은 1615년 이 철학자에 대한 최초의 비난에서부터 이 책의 출간, 그리고 최근의 변명과 선처를 호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사건을 요약한 정식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대화』를 쓴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해 갈릴레오의 '의도'를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이 책은 어떻든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갈릴레오는 감금되거나 참회를 해야 할 판이었다."(365, 374)


"6월 22일,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공식 발표되었다. 며칠 후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검사성성의 지하 감옥에서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관으로 바꿈으로써, 그에 대한 판결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르바누스는 사면을 해달라는 청원은 거절했지만, 갈릴레오로 하여금 마침내 로마를 떠나도록 해주었다." "갈릴레오에 대한 굴욕적인 판결문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파도바에서 볼로냐, 밀라노에서 만토바, 피렌체에서 나폴리와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의 플랑드르와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요란스럽게 고시되고,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철학 교수와 수학 교수들은 갈릴레오에 대한 재편 결과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 사건들로 인해 1633년 여름에는 금지된 『대화』를 중심으로 암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실 『대화』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 중 그것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책의 가치가 높아감에 따라 새로운 귀의자들도 생겨났다."(384-6)


제5부 시에나에서


"시에나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는 두 명의 교황과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낸 뛰어난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갈릴레오의 오랜 찬미자였다. 재판이 끝난 후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보호를 자청했다. 니콜리니 대사는 4월에 검사성성의 심문을 받고 돌아온 갈릴레오를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고 묘사했다. 이후로 몇 주가 더 지나고 충격까지 받은 그가 7월에 시에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겠는가? 그는 부당한 판결로 고통 받은 나머지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거처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켜 과학적인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굴욕을 딛고 일어나, 다른 책(『두 개의 새로운 과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피콜로미니의 열성적인 호의에 힘입은 바 크다."(393–5)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에 교수로 재직할 때 운동에 관한 기초 논문에 처음 착수했으나 책을 펴내지는 않았다. 그런 후 파도바에서 20년간 살면서 이 책을 쓰기 위한 새로운 실험 원리를 세웠는데, 즉 가르치는 의무를 다하고 작은 집에서 군사용 컴퍼스 제조 사업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진자 운동을 측정해 그 주기의 수학적 법칙을 이끌어냈으며, 경사면에 청동 공을 수도 없이 굴려 자유낙하 시의 가속률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사물이 '왜' 움직이는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의 모든 담론을 일축하고 고통스러운 관찰과 측정을 통해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전 세대의 철학자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던져지거나 발사된 탄환 등이 공중을 지나는 경로는, 그의 선배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어느 정도 곡선을 이루는 선'이 아니라 매번 정확히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410-2)


"갈릴레오는 후에 '지금까지 펴낸 책보다 『두 개의 새로운 과학』이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내 모든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결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저항과 운동에 관해 자신이 밝혀낸 사실이 자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온갖 천문학적인 발견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수한 망원경을 만들어 그것으로 하늘을 처음 관찰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위대한 천재성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비율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니콜리니 대사는 갈릴레오가 시에나에서 교황과 검사성성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죄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보고했다. 우르바누스는 이 같은 견해를 시에나의 성직자들이 보낸 비난과 비교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를 이단자임을 고백한 죄인이기보다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었다."(443-5)


제6부 아르체트리에서


"경사면에 공을 굴리는 실험은 갈릴레오가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서 여러 원리와 함께 소개한, 낙하의 진실에 대한 지루하지만 성공적인 전주곡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을 몇 개의 문자와 상징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대수 분석 방법에 따르지 않고, 기하학적인 비율로 표현했다." "〈총탄이 가장 멀리까지 나가는 경우는, 양각을 45도로 했을 때 또는 포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4분원의 여섯 번째 점인 지점을 통과할 때라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서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것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네.〉"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의 현실적인 적용과 그 가치에 대한 갈릴레오의 이 같은 강조는 당대의 대다수 철학자들과는 동떨어진 행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질과 자연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갈릴레오는 시간, 거리, 가속 같은 측정 가능한 실체를 추구했다."(456-8)


"마침내 우르바누스는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아르체트리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판결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한 것이었다. 시에나의 환경이 고급 살롱의 분위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후로 갈릴레오의 사회적 접촉을 제한할 것과 가르치는 행위 일체를 영원히 금할 것을 검사성성에 권고했다." "그럼에도 1634년 8월, 갈릴레오는 동료 수학자들과 다시 활발한 서신 왕래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에는 미완의 원고인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다시 매달렸다." "네덜란드는 신교를 믿는 국가였으므로 네덜란드인 출판업자 엘체비르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체트리에서 여전히 불안에 휩싸여 있던 갈릴레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 책의 출판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프랑스 대사인 프랑수아 드 노아유에게 바친 헌정사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외국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지 놀랍다며 짐짓 꾸며냈다."(463-4, 472, 478)


"1638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저자인 갈릴레오는 책이 출판된 지 수주일이 지난 뒤에 단 한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책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책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637년 7월 그의 오른쪽 눈이 처음 시력을 잃게 되자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닷새째 날을 추가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은 이듬해 겨울에 시력을 잃었다. 오직 한쪽 눈만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이전에 써놓은 글과 그림을 정독했던 이 황혼기에, 그는 별들의 지름과 천체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최상의 방법에 관해 짧은 마지막 논문을 썼다." "〈나의 놀라운 관찰과 명징한 증명으로, 지난 모든 세기의 현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지했던 한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더 커진 이 우주가, 이제 내게는 너무도 작게 줄어들어 내 몸의 조그마한 틀만큼이나 작아져버렸다네.〉 갈릴레오는 엘리아 디오다티에게 이렇게 토로했다."(481-3)


"이렇듯 쇠약해진 갈릴레오는 1638년 10월, 함께 살 가장 완벽한 반려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피렌체 출신의 16세 젊은이 빈첸초 비비아니였다. 비비아니의 학문적 탁월함은 페르디난도 대공의 눈에 띄었고, 대공은 그에게 갈릴레오의 조수로 갈 것을 명했다." "1654년 비비아니가 쓰기 시작한 갈릴레오의 전기에는, 연로한 스승이 자유롭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젊은 제자는 온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두 사람이 단둘이 누린 시간을 초월한 즐거운 한때가 묘사되어 있다.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아주 중대한 몇몇 순간을 추적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거의 신화적인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 인물은 다름 아닌 비비아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의학을 공부했던 학생 시절,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흔들리는 전등불을 바라보다 진자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라든지, 밑에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있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포탄을 굴려 떨어뜨린 장면 등을 생생하게 살려냈다."(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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