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복지국가 만들기에 실패했나
몰리 미셸모어 지음, 강병익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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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세금은 왜 중요한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90% 이상의 미국인이 많든 적든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 및 경제적 안정을 공공자금에 의존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연방부조 수급자의 대부분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복지여왕들'이 아니라, 중산층 자택 소유자, 유급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퇴직자들이다. 인정은 고사하고 거의 인식조차 되지 않았지만, 미국 중산층은 사실상 1세기 동안 표적화된 사회·경제 정책의 산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신을 경제적 안정과 중산층이 다수가 되도록 계층 상승을 도왔던 정부 정책의 수혜자보다는 조세법의 과중한 희생자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현대 미국 정치의 기본적인 역설이다. 미국인들은 정부를 싫어하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특례, 사회보장, 계층 이동성을 하나의 권리 문제로 요구하고, 기대한다. 이 책의 목적은 1930년대 뉴딜로부터 1980년대 레이건 혁명을 거쳐 지금까지 조세와 지출 정책의 전개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명백한 모순을 해명하는 데 있다."(8-10)


제1장 복지국가와 조세국가 지키기_뉴딜과 전후 복지국가 논쟁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대부분의 자유주의 사회 프로그램이 종전 직후 짧았던 보수주의의 부활에도 살아남았다.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입법권자들은 퇴역 군인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교육 수당을 늘리고, 심지어는 주택 구매도 더욱 손쉽게 할 수 있도록 새롭고 이전보다 훨씬 관대한 수당제도를 쏟아냈다. 사회보장 역시 확대되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미국적이지 않은, 〈노동자와 사업주의 급여를 통해 지급되는 주정부의 자선 형식〉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 이르자 오하이오주의 공화당 상원 의원 로버트 태프트와 같은 투철한 보수주의자와 전국상공회의소마저도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상하 양원 모두에서 양당 간 협력을 통해 다수로 통과된 1950년의 사회보장법 수정안은 이 프로그램이 장기간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미국 복지국가의 핵심에 이 프로그램을 정착시킬 수 있게 했으며, 이전의 취약했던 프로그램을 '불문율third rail'로 전환시키도록 도왔다."(39-40)


"자유주의자들 역시 그들의 시각을 수정했다. 본래 조세국가와 복지국가는 전시에 사라졌던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고 승인받았다. 그러나 조세국가와 복지국가, 양자에 대한 도전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전후 자유주의 국가를 봉쇄하고 저지하려는 노력은 보수주의 정책 엘리트들이 세금을 삭감하고, 뉴딜 사회 정책 프로그램의 폐지와, 국가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전력함으로써 배가되었다." "결국 자유주의 세력은 자유주의 정치 기획을 통째로 저당잡힘으로써 그럭저럭 조세국가와 복지국가의 기본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세저항 심리가 기존의 경제 및 사회 정책 프로그램─초기 냉전 시기의 국가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전후 자유주의 정책 결정에 대한 케인스주의 경제 성장의 중요 논리가 조화된─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자유주의 세력의 공포는 입법자들이 핵심적인 경제 및 사회 정책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 지원을 훨씬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도록 했다."(42-3)


"공공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널리 퍼진 대중들의 적대감은 뉴딜로부터 계승된 복지국가의 한계와 종전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적·경제적 특성을 모두 말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대공황과 전시 이후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고대했지만, 그러한 미래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도 품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의 관계 악화와 냉전의 출현은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한) 최후의 전 지구적 갈등이라는 불안감을 드높였다." "전후경제 성장도 그 자체로 문제를 야기했다. 〈사치와 결핍〉이 뒤섞여 경기 호황 자체가 혼란스러웠는데, 〈결핍의 목록〉은 〈끝이 없었고 ··· 수요는 ··· 엄청났으며 ··· 돈 없는 사람이 없고 ···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없어 보이지〉만, 미래는 불안정해 보였다. 많은 이들이 10년 이내에 또 다른 심각한 경기 불황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이러한 번영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47-8)


"납세자들의 눈먼 돈을 훔치는 '구호민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한 신경질적인 머리기사들에도 불구하고 공공부조는 결코 세금 상승의 원인도, 공공 지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1960년까지 중위 소득 이상의 미국인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직접 지급되는 이전급여의 51%를 가져갔다. 중간계급 납세자들은 특히 퇴역 군인과 농민 수당의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대부분의 빈곤층에게 지급되는 프로그램들조차도 중산층과 상위 계층의 소득자들에게 일부 지원금을 제공했다. 1960년에는 사회보험 지급액의 30% 이상이 중위 소득 이상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연방 재정 정책을 설명하는 전문용어를 활용하여 중간계급의 구성원들─풍요로운 미래의 꿈을 향유하는─에게 그들의 새로운 금전적 이익과 경제적 안정, 그리고 직접적인 정부 지출과 간접적인 정부 지출 간 연결고리를 무시하게 함으로써 이 막대한 대부분의 국내 지출을 지속적으로 위장하거나 숨기기까지 했다."(50-1)


"정책 선택이 이러한 수사법을 통한 분리를 강화했다. 사회보장 전문가들과 주창자들은 노령자유족보험OASI과 같은 기존 제도를 보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배가함으로써 공공 지출과 세금 인상에 대한 의회와 대중의 적대감에 대응했다. OASI로 통칭되는 사회보장제도가 세금에 대한 미사여구와 반국가적 수사법을 동원한 부양아동보조ADC와 일반부조 반대운동에 희생될 것을 우려한 사회보장청의 전문가들은 이 프로그램을 실패한 복지정책과 거리를 두게 하고, 연간 예산 절차가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사회보장제도 주창자들은 OASI가 〈모든 미국인 가정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대상〉으로 하도록 고안된 〈일종의 정부 보험회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 〈쳬게적이고 현명한 절약〉 프로그램에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납세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워 건전하지 못한 국가 의존성을 당연시하며 조장하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대비시켰다."(52)


"공화당은 감세의 정치적 호소력을 알고 있었다. 1947년 공화당 열성분자들이 주장했던 감세는 '미국의 복지'뿐만 아니라 '1948년 공화당의 성공'을 넘어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부과된 조세 부담은 전시와 전후 모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생계비 상승과 연동된 세 부담의 상승은 풀뿌리 수준에서 유권자의 불만을 고조시켰는데, 이는 민주당 표밭에서 유권자들이 이탈하도록 공화당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였다. 국민 경제의 변화는 세금을 정치 쟁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이 점점 더 세금을 의식하게 되자 감세는 더 매력적인 정치 의제가 되었다. 더욱이 감세는 공화당이 핵심 원칙을 위반하거나 기업집단에 대한 지지 기반을 잠식하지 않고 선거에서 호소력을 키울 수 있게 했다." "전시의 대규모 소득세 창출은 공화당이 납세자인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기회와, 공화당에 〈이상주의적 의식과 좋은 삶에 헌신〉할 기회를 제공했다."(58-60)


"1951년 7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대상자의 68%가 연방세 최고 한도를 25%로 하는 제안에 찬성했는데, 찬성 의사는 고르게 나타났다. 기업인과 전문 직종에서 64%의 지지 의사가 표출되었고, 육체노동자와 농민층은 68%,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69%가 찬성했다. 이들 납세자 중 이와 같은 감세안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 조치의 반대자들은 감세안이 과세 부담을 기업과 부자들로부터 중간 및 하위 소득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임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사실 개인 납세자의 약 1%만이 과세제한으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운 좋은 소수를 위해, 감세 혜택의 규모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소득 규모와 연동하여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연간 2만 5천 달러로 살아가는 4인 가족은 약 750달러의 세금 감면을 기대할 수 있었고, 연간소득이 100만 달러인 유사한 가족 구성원을 가진 부부는 62만 달러 이상의 횡재에 가까운 감세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거대 기업에게는 훨씬 유리했다."(64-5)


"1954년 재정법은 전후 8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조세법이었다." "양당 합의를 반영한 재정법은 미국 정책 결정자들이 안정적 경제 성장을 위해 지출보다는 과세에 의존하는 일종의 미국화된 케인스주의를 통해 경제 성장에 주력할 것을 천명했다. 누진적 소득세를 보호하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 세력은 뉴딜 복지국가의 유지와 확장을 명백히 하는 데 성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한 누진적 소득세는 좋은 조세 정책의 중심에 '지불 능력' 기준을 구체화함으로써 복지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국가의 '비용'을 가시화하여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을 촉발했다. 몇몇 공화당 인사들은 종전 이전에 이미 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잠재적 견제 심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1944년 공화당이 예측했듯이, 〈임금소득자 다수에 대한 직접세〉는 〈정부 활동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다수의 시민〉을 형성함으로써 국민국가의 성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게 될 것이었다."(69-70)


제2장 시장의 실패_케네디-존슨 정부 시기 감세와 복지 축소의 정치


"1961년, 뉴버그시의 행정 담당자인 조셉 미첼은 〈복지 사기꾼, 게으름뱅이, 사회 기생충〉을 도시에서 몰아내자는 잘 짜인 홍보를 시행했다." "미첼은 〈평가 가치의 손실 ··· 그리고 전체 업무 지구의 파산〉부터 폭력을 발생시키는 〈공중위생의 위험〉과 혼외 자녀 출산율의 급상승까지 복지에 관한 모든 것을 비난하면서, 복지 수급자들이 〈주 혹은 연방의 명령에 의해 빈둥거릴 수 있고, 일하지 않고, 버릇없는 아이들처럼 계속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졌다며 공격했다." "이른바 '뉴버그 전투'는 1960년대 초 자유주의 정책 결정자들이 직면했던 난관을 잘 드러냈다. 뉴버그시의 위기는 1960년대 남부 백인, 흑인, 백인 도시 노동자, 그리고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취약한 뉴딜 연합에 균열을 일으킬 인종 갈등 정치의 윤곽을 미리 보여주었다. 미첼은 그의 복지 규제의 핵심에 인종주의 정치가 있음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시의 경제와 사회 문제의 원인이 '남부 이주민들'에게 있다고 거듭해서 비난했다."(87-8)


"뉴버그시의 위기는 종전 직후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이 주도했던 타협에서 벗어난 것으로, 점점 더 협소하게 규정되어 가는 복지에 관한 정의를 평범한 미국인들의 증대하는 조세 부담 문제에 연계한 정치 담론과 정책기구의 직접적 결과였다. 미첼의 전쟁을 활성화한 과세와 지출의 정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의 핵심적인 국내 정책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 점점 취약해지는 민주당 선거 연합 재정비에 대한 열망과 세금 신설이나 더 높은 세율에 대한 대중과 의회의 적대감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와 존슨 모두 그들의 국내 및 국제 정책 공약을 뒷받침할 경제 성장의 성과에 의존했고, 낮은 세금, 사회보장, 그리고 전후 사회 협약이었던 계층 상승 공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존슨 감세로 잘 알려진 1964년 재정법은 전면적으로 세금을 큰 폭으로 줄이고 〈절세를 민간 경제에 이전〉함으로써 납세자와 미납세자를 막론하고 모든 미국인들에게 혜택을 줄 것을 약속했다."(89-90)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중간계급 다수를 노동자에서 주택 소유주와 납세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이러한 원대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잠재력이 약화되었다." "1960년대 말에 이르자 미국의 자유주의는 거의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 직면했다. 모든 시민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모든 납세 시민들이 '당연하게 받게 되는' 낮은 세율을 수호하고 자유기업 경제의 성장을 보장하기로 약속하면서, 1964년 재정법과 빈곤과의 전쟁은 모두 전후 자유주의의 모순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감세는 암묵적으로 국가 경제의 성장과 개인 경제의 보호 모두에 대해 연방정부의 책임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빈곤과의 전쟁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겠다는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빈곤하지 않은 다수에게 이러한 권리를 제공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역할은 연방의 법인세법과 개별세법에 깊숙이 사장되거나 시야에서 사라졌다."(92-3)


"감세는 경제 성장을 이루거나, 케네디가 선거운동을 통해 〈약에 취한 선잠의 시기〉로 간주했던 아이젠하워 시대에서 벗어나 국가를 부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다. 경제 성장은 새로운 지출이나 확대 지출을 통해 이룰 수도 있었다. 실제로 케네디 행정부는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물리적·인적 자원에 대한 공공투자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접지출은 채택하기 힘든 것이었다. 대통령의 제안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긴 했지만, 의회는 국내 프로그램의 지출을 늘리는 데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남부 민주당 의원,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 그리고 양당의 재정 적자에 강경한 매파deficit hawks들을 포함한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케네디의 1961년 경기 부양 법안들에 제동을 걸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이었던 제임스 토빈과 그의 동료들은 〈모든 이들이 '더 많은, 더 많은, 또 더 많은 지출'〉에 의존하는 경제 회복 계획은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95-6)


"케네디-존슨 행정부가 추진한 시장 중심의 복지정책 접근 방식에 대한 도전은 대체로 흑인자유운동에서 나왔는데, 이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공공 정책과 인종 및 계급 불평등 간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공민권 활동가들은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흑인투표법에 의해 보장된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가 흑인의 경제 안정을 보장하는 적극적인 정책 없이는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45년의 제대군인원호법(퇴역 미군의 권리보장법)에 비견할 만한 연방 차원의 투자만이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소득 수준을 제공함으로써 '흑인 게토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법이 흑인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가 되는 ··· 문턱〉에 이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공동체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걷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에게 신발을 주는 것〉은 〈잔인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기시켰다."(117)


"민권운동 지도자들과 복지권 운동가들은 정치적 권한 부여와 경제적 보장 모두를 요구하면서, 납세자와 세금 소비자 간 잘못된 이분법에 대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백인 중간계급 중심의 연방 보조금은 쉽게 부정되고 대체로 무시되었다. 연방정부에 비판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조력자인 다수의 미국인들이 스스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 보장과 이동성을 확보하자 빈곤층과 흑인에 대한 동일한 권리의 확장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동맹에 대한 전망은 상당히 어두워졌다. 계급과세에서 대중과세로의 연방소득세 개혁은 다수를 위한 정치, 납세자의 권리와 빈곤층의 욕구가 서로 적대시되는 계급정치의 견고한 제도적 요소들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전체적인 경제 성장으로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연방소득세제로 편입됨에 따라 조세국가의 정책은 가난한 소수 인종 정책과 분명하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었다."(123-4)


제3장 정치적 합의의 붕괴_뉴딜 체제의 와해와 위대한 사회의 분열


"1967년 초, 여론조사 전문가인 벤 와텐버그가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한 짤막한 경고가 화제가 되었다. 빈곤과의 전쟁과 베트남전에 집중하고 있는 행정부가 민주당이 '미국 중간계급 노동자들'의 관심과 득표를 얻는 데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노동조합원들은 오늘날 빈곤층이 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연방 정부에 요구〉했지만, 중간계급 및 노동계급의 지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전엔 빈민촌에 거주했던 미국 노동자들이 이제는 교외 지역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빈곤 프로그램이나 심지어 최저임금에 거의 관심이 없던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에 대해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설계된 복지 프로그램보다 ··· 〈그들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데 매우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와텐버그의 결론은 노동자들과 노조원들이 연방정부가 〈근래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129)


"여기에는 존슨 행정부가 직면한 딜레마가 요약되어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중간계급의 다수는 국가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들─선동적인 흑인 투사와 복지 수혜를 받는 어머니들, 쾌락주의적인 히피족과 대학생 혁명주의 세력─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책 결정자들로 인한 좌절, 분노, 환멸이 커졌다. 사실 많은 미국인들, 특히 닉슨이 〈침묵하는 다수〉라고 불렀던 백인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정부로부터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빈곤과의 전쟁과 민권혁명에 희생되었다고 느꼈다. 1967년 한 백인 자택 소유자 단체는 〈법을 준수하는 사회인 미국의 대다수를 대신해서 의회가 어떤 행동을 취할 때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들은 민권법과 빈곤 프로그램을 겨냥해 〈이런 빌어먹을 게으름뱅이들과 폭도들에게 지속적인 무상복지를 제공〉하는 데 대해 분노를 표시했고, 그들의 선출직 관료들에게 〈이 나라가 지탱되도록 대부분의 세금을 내는 평균적인 미국인들을 돕는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했다."(130)


"1966년 말 존슨 대통령이 역사적인 민권법안을 보장하고, 국가 최초로 전국 의료보험 체계를 제정하고, 연방정부의 교육 공약과 교육 투자를 늘리고, 위대한 사회를 위해 빈곤과의 전쟁을 추진하도록 한 정치적 합의는 모두 깨지고 말았다." "경제는 행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속적이고 유례가 없는 경제 성장과 예산은 부족했어도 목적이 분명했던 빈곤해소 법안으로도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은 최근에야 중간계급에 편입한 많은 미국인의 생활비 인상에 위협 요인이 되었다. 당내에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불만을 품은 좌파-평화 활동가들과 시민권과 평등권을 위한 투쟁이 더디게 진행되는 데 실망한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민주당의 보수파 역시 행정부에 환멸을 느꼈고, 의회 공화당과 협력해서 대통령의 입법 우선 사안 중 많은 부분, 특히 시민권 영역과 빈곤해소 정책을 막는 데 충분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132-3)


"복지 문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진단은 복지 프로그램의 자유주의 옹호자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내린 결론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밀스와 그의 동료 의원들은 대부분의 복지 전문가들과 전문 사회 사업가들이 인정한 재활적 접근을 거부했다. 무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입위원회는 AFDC 수급자들의 복지급여에 약간의 소득을 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칙을 포함해, 강제적 노동 요구 체계를 통한 노동 유인책을 추가했다. 밀스는 복지가 '삶의 방식'이 된다면 공적 이익을 꾀할 수 없다는 점을 동료 의원들에게 상기시키고, AFDC 수급자들이 〈공공기금을 받으려면 ··· 그들의 직업 습득 능력을 검증하는 데 ···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눈에 보이는 모든 실업 상태의 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어머니들〉도 〈취업을 위해 훈련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정위원회는 근로유인 혹은 근로장려 프로그램을 신설하면서 훨씬 무거운 근로 요구를 강조했다."(140-1)


"1960년대 말에 이르자 여성 노동력 참여 증대와 여성주의 운동의 출현으로 가족임금 체제─아이들은 국가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생산물〉이며, 어머니에게는 농부와 마찬가지로〈훌륭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한─자체가 크게 약화되었다. 모성주의에 냉담한 정책 결정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성 중립적 납세자 권리의 방어로 대응했다. 한 예로, 롱 위원장은 1967년 법안에 의해 신설된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강제 근로 연계 프로그램 참여 의무를 지지하면서, 일하는 어머니들에게 〈공공부조 비용을 위해 지불되는 ···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하는 미국의 1천만 명의 어머니들이 지불한 세금을 일하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어머니를 지원하는 데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불안정한 미국 경제의 구조 변동으로 어려움에 처한 노동계급과 저소득 남성 및 여성 중간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147-8)


"1960년대 말이 되면 국내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확대하기 위해 오랫동안 의지했던 재원으로는 더 이상 연방정부 사업과 그 대가를 치를 의지가 없는 미국인들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백인 중산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뉴딜과 전후 사회정책이 1944년 경제적 권리장전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약속한 '권리혁명'의 완수 가능성에 제약을 가했다. 전후 자유주의 국가의 팽창을 가능하게 했던 동일한 특징들, 즉 국가의 경제 성장에 대한 의존성, 열정적으로 추진한 법인세율과 개인세율 인하, 목적세인 급여세, 혹은 개인 복지와 기업 복지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권리와 그 비용을 제공하는 데 의존한 것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다루기 힘든 문제를 해결할 자유주의자들의 능력을 제한했다. 점증하는 다수 비빈곤층의 정부 보호 요구와 새로운 조세 부담에 대한 그들의 저항 사이의 모순은 뉴딜 질서를 깨뜨리고, 그것을 대체하고자 했던 보수적인 대안을 굳건하게 형성시켰다."(164-5)


제4장 세금 논쟁_닉슨 행정부 시기 복지 개혁과 조세저항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공화당과 민주당은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여러 방식을 시도했다." "다수의 민주당 지도부는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을 배제해왔던 민주당의 '오만한 태도'를 일소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민주당의 정치적 미래를 위협하는 문화적·인종적 균열을 초월할 수 있는 경제적 포퓰리즘으로 당의 지향을 재설정하고자 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중산층 백인 유권자를 달래면서도 인종적·경제적 평등에 관한 정당의 공약은 유지하는 정책 의제를 고수하면서, 〈불법적인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계급, 기관들〉에 대한 민중적 저항을 유도함으로써 흑인과 백인 노동계급 및 중산층의 '기본적인 경제적 이익'이 융합되기를 희망했다." "진보 단체들은 대중에게 확고히 자리 잡은 복지에 대한 적대감이 가난한 여성과 그 자녀들로부터 〈진정한 복지 수급자, 곧 연방 재무부에서 수십억 달러를 빼내 간 부자와 연줄 많은 기업〉을 향하게 하고자 했다."(172-3)


"공화당과 보수주의 동맹 세력은 침묵하는 다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하나의 권리 문제로 기대했던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특권과 특혜 보호를 주력하는 데 그쳤다." "FAP의 목표 역시 빈곤 타파가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들의 표심을 공고히 하고, 이들 유권자들에게 가시적인 복지국가의 혜택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미국의 다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닉슨은 복지국가의 축소가 아닌 재설정과 확대를 목표로 삼았다. 1969년에서 1971년 사이, 닉슨의 백악관은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인식된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들에게 연방 보조금 확대를 약속하는 인상적인 일련의 복지정책들을 제안했다. 행정부는 이러한 국내정책 우선순위에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재원으로 부가가치세까지 고려했다. 북부와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수당의 대부분을 제공했던 FAP는 이 초기 확대 단계의 핵심 요소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175-6)


"하지만 만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초기 여론은 FAP에 대중적인 지지를 나타냈지만, 1970년 중간선거에서의 공화당의 패배는 중하층 및 노동계급 유권자들을 정치 동맹으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지출 프로그램을 활용하려는 닉슨의 기획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1971년 4월, 닉슨은 참모들에게 이 제안의 가장 급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에 대한 지원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는데, 대중들은 〈일하는 가정에 대한 지원 제공〉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봄이 지날 무렵, 닉슨은 이 계획이 〈일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사람들을 복지명부에 추가〉하는 〈정치적 실패작〉임을 인정하고, FAP를 완전히 포기했다. 특히 기업집단을 위시한, 이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양면성과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같은 반복지 보수주의자들의 점증하는 압력과 결탁한 것은 닉슨이 그의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내 개혁을 최종적으로 철회한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180)


"FAP가 실패한 이후, 우파와 좌파 모두 잊힌 미국 중산층에게 호소하기 위해 지출 정책보다는 조세정치로 돌아섰다. 닉슨의 복지 제안에 대한 논쟁이 장기화되면서 진보적인 빈곤해소 단체 내에서 균열이 나타났고, 복지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심화되었다. 좌파는 경제 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다수를 재건하기 위해 광범위한 정치적 호소가 담길 쟁점을 찾아 나섰다. 조세 개혁은 이러한 새로운 다수 전략에 기반해서 중하위 소득 노동자들에 대한 감세와 연계한 기업의 조세 포탈을 겨냥했다. 이에 대응하여 닉슨 행정부는 1968~1972년 추진한 재정 확대 정책을 포기하고, 대신 사회지출─특히 도시 지역의 소수 빈곤층과 관련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의 대폭적인 삭감과 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감세 약속을 연계하는 국내 의제로 전환했다. 1972년 이후 풀뿌리 수준에서 조직된 지역 조세 개혁 연합체의 납세자들과 점점 세를 불려 나간 활동가들은 조세 정책을 핵심 국정 의제로 계속 이어 나가는 데 기여했다."(186-7)


"처음엔 자유주의자들이 초기 중간계급의 조세저항을 포착하고 이를 이념적으로는 일관되고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다수 연합으로 전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한 듯 보였다." "불공정한 과세, 즉 소수의 부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점점 더 걷어가는 조세제도에 분노한 납세자들은 의회의 조세 관련 의원들과 함께 전국적인 정치 의제로 조세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조세 개혁만으로는 진보적인 조세 개혁가들이 약속했던 대규모의 사회 프로그램 재원을 충당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 스탠리 서리는 〈조세 개혁을 통해 복지 개혁의 진전과 복지 개혁의 비용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노력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세 개혁으로 복지 개혁에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또한 조세 개혁이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빈곤층의 이익과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188-9, 201-2)


"자유주의 조세 개혁 담론과 정책들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세금으로 〈쥐어짜인〉 중위 소득의 노동계급 주택 소유자들과 납세자들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진보주의자들이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가운데, 보수 세력은 강력한 납세자 저항을 혁명적인 정치 세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공화당 전략가들은 1972년 민주당 예비선거 기간에 조세정치의 재도입에 대응하여 높아가는 조세 부담의 원인이 대부분 '무책임'하고 '소모적인' 민주당 정책에 있다고 비난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사를 발전시켰다.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향한 적대감은 FAP 논쟁의 장기화로 불붙은 복지에 대한 적대감 재발과 결합하여 이들 주장을 응집력 있게 만들고 주목받게 했다. 1972년 선거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가족 해체와 불안정'을 이끌 것이라는 빈곤 전사들의 주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된' 조세법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활용하여 그들을 연방 지출 일반에 반대하도록 돌려세웠다."(203-5)


제5장 게임 오버_레이건 혁명과 조세 논쟁의 결말


"1980년 초여름, '인종차별주의 신념'을 가진 로버트 존슨과 론 프람스퍼라는 야심만만한 두 메릴랜드 기업인은 '백인 저소득 중간계급'의 분노를 보드게임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의 발명품─공공부조: 이 위대한 복지 게임을 할 수 있는데 먹고살려고 일할 이유가 있나요?─은 그해 말 연말 쇼핑 시즌에 맞춰 출시되었다." "이 게임에서 '노동자의 평범한 길' 위의 인생은 돈이 많이 들고 위험했다. 거의 예외 없이 '노동자의 평범한 길'에 놓인 운 나쁜 참가자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 질식할 것 같은 정부 규제, 그리고 역차별에 희생당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신체 건강한 복지 수급자의 산책길' 위에 있는 참가자들은 〈약탈, 도박, 음주, 혼외 자녀 출산, 그리고 정부 혜택 수령의 유쾌한 원정〉으로 묘사한 것을 경험했다." "이 게임은 신체 건강한 복지 수급자와 그들을 돕는 연방정부 모두의 행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15-7)


"우파의 조세 및 지출 의제는 정부가 백인 중간계급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동시에 복지─이른바 소모적이고 잔여적 프로그램이라고 언급되는─를 정부의 공적 역할로 인정하는 데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던 자유주의 조세복지국가의 노선 덕에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공화당 우파는 조세와 위법적이고 심지어 유해하기까지 한 복지지출이라는 쌍둥이 이슈에 집중했던 전후 자유주의에 대한 응집력 있고 정치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성공적으로 가시화했다. 복지 의제는 공화당에 자유주의 국가를 공격하는 공론정치의 선명성을 부여했다. 공화당은 개인의 권리와 경제력 향상에 대한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옹호 논리를 차용하면서 단지 〈예산과 국가에 커다란 부담〉을 부과하고 〈국민들을 정부에 종속〉시키는 데만 성공한 공공 프로그램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의 소망을 무시하는 결정을 했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218-9)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제 위기는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스태그플레이션 문제를 실용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기는커녕 이를 설명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경제학 분야에서 일종의 지적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실패는 전체 경제 전문가들 내에서 케인스주의 합의의 약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경제학 이론과 정책의 형성 및 확산을 위한 정치적 공간을 넓혀 놓았다. 이러한 관념들─(정치화된 공공 정책과 선동적인 저널리즘 속에서 형성된) 공급경제학─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도드라진 부분은 공급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소비자 수요 촉진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를 거부한다는 데 있었다. 공급경제학자들은 19세기의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의 연구로 돌아가, 케인스주의자들이 노동과 투자에 대한 인간의 동기를 무시했다고 비난하면서 정부 정책들이 대규모의 노동과 자본을 시장에서 철수하게 함으로써 어떻게 '절름발이 경제'를 만들었는지로 관심을 돌렸다."(227)


"1981년 8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서 레이건 혁명의 시작이자 끝을 나타내는 두 가지 상징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첫 번째는 총괄예산조정법OBRA으로, 3년 동안 연방 예산 지출을 1,300억 달러 삭감함으로써 '정부 규모와 비용'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는 경제회복조세법ERTA으로, 개인한계소득세율을 전면적으로 3년마다 25% 삭감하는 것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세 구간을 물가 상승에 따라 매년 조정하거나 연동시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새 대통령이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적 혼란〉이라고 묘사한 현재의 경제적 진통이 〈경제에 기초가 되는 인적 자원, 기술 자원, 천연자원의 고갈〉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진통은 이전 수십 년간 견제받지 않은 정부 정책과 국가 성장의 불행한 결과였다. 백악관은 시장을 불필요한 조세와 규제 형태의 제약에서 풀어주고, 정부의 불필요한 지출 프로그램을 폐지함으로써 다시 한 번 국가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239, 244)


"레이건의 백악관은 1981년 초 내내 위법적인 복지 수급자의 권리 주장에 맞서 납세자들의 권리와 특권을 옹호함으로써 조세와 지출 삭감에 대한 정당성을 밝혔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레이건은 결국 그의 행정부가 실질적으로 국가의 규모를 줄이고 진정으로 혁신적 대통령직을 수행할 여지를 줄였다. 실제로 레이건은 그의 반국가주의를 복지─전체 연방 지출의 맥락에서 매우 제한적인 액수를 대상으로 하는─와의 '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욕조에 빠뜨려 익사시킬 수 있는〉 정도로 국가를 축소하는 더 큰 보수주의 기획을 약화했다." "공급 주창자들이 약속한 경제 성장 창출에 실패했던 감세 효과와 방위비 지출 가속화, 그리고 중간계급의 복지국가를 위한 복지지출의 자연적 증가에 의해 레이건 집권 기간 중 연방 적자는 급증했다." "결국, ETRA 법안에 서명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레이건은 조용히 상당한 증세에 해당하는 액수를 제안하면서 〈세법상 특정한 세금 남용을 막고 세수를 늘리는〉 개정안을 요구했다."(254-6)


"하지만 레이건 혁명은 미국의 재정 정책과 정치의 성격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변화는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문제 해결에서 예산 삭감'으로 이동시키고, 시민권의 혜택을 시민권에 대한 비용으로 대체함으로써 정치 논쟁의 일반적 의미와 내용을 확대했다." "동시에 납세자 보호를 아주 협소한 불법적인 복지지출 부분에 대한 제한된 싸움에 속박함으로써 우파는 공화당의 선거 승리를 가져온 이념적 재편의 범위를 제약했다. 비용이 들지 않는 적극적 국가의 확장을 약속했던 자유주의 합의와 비용이 들지 않는 적극적 국가의 축소를 공언했던 보수주의 반혁명의 결과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교착 상태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조건은 납세자에 대한 비용의 강조와 '정부 간섭'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새로운 자유주의 정책의 가능성을 배제했지만, 동시에 자유주의 국가의 가장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정책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반국가 전략에 기반한 진정한 보수주의 혁명을 방해했다."(256-8)


에필로그 교착 상태의 미국 복지국가


"전후 시기에 자유주의자들은 경제 및 사회보장의 약속과 개별 시민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조세 부담만을 부과한다는 약속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 연구는 조세정치와 뉴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후 자유주의적 사회 협약의 결정적 요소로서 낮은 과세(율)에 대한 이해에 주목함으로써 '자유주의 황금기'에 대한 좌·우파의 비전과 그 비전을 계승한 보수주의적 복지 축소 모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의 수사로만 국가를 향한 정치적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우경화와 연속적인 자유주의 사회 정책의 축소가 민권운동과 위대한 사회의 자유주의에 대항한 인종주의적 반동에 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현대 미국 정치의 역설─시민들이 최소한의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향유할 수 있도록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제공해온 국가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조되는 환멸─을 이해하려면 전후 자유주의 국가의 제도와 사회 협약의 이념적 측면에 대한 재분석이 요구된다."(260-2)


"미국 복지체계의 가장 관대하고 효과적이며 인기 있는 부분들은 상당수 미국인들에게 경제적 안정은 물론 경제적 기회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급여 형태는 사적 매개자들을 통해 제공되거나, 사적 노동시장 참여를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경제적─인종적이고 젠더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위계화에 도전하기보다는 이를 재생산했다. 경제적 안정을 노동력 참여에 직간접적으로 구속시킴으로써 미국의 복지국가는 '자격 있는' 빈자와 '자격 없는' 빈자의 구별 짓기를 장기간 강화했다. 사회보장제도와 메디케어는 은퇴 이후 적절한 소득급여로 유지될 수 있었다. 즉 조세지출은 무시되거나, 아니면 더욱 빈번히, 어쨌든 정당하게 납세자들에게 돌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빈곤층에 대한 직접적인 현금 부조 제공은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주는 부당한 경품으로, 그리고 납세자로부터 세금 먹는 하마들에게 부당하게 이전되는 것으로 쉽게 공격받을 수 있었다."(265)


"전후 미국 경제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결국 인플레이션과 스태그네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에 우파는 우파는 적극적 국가의 혜택보다는 비용에 초점을 맞춘 감세 의제를 지지했다. 복지 및 조세 국가의 구조는 국내외 정치경제의 변화에 대응하는 민주당의 능력을 제한하기도 했고, 공화당─보수파가 점진적으로 장악해갔던─이 납세자들의 이익에 대한 대중적 대변자로서 스스로를 혁신하도록 해주기도 했다.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상당 부분이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체감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당의 자유주의 세력은 벤 와텐버그가 '노동자, 노조원'을 대신해서 1967년 린든 존슨에게 제기한 골치 아픈 질문─〈최근에 나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죠?〉─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진보적 조세정치의 실패와 '감세 정당'으로서의 공화당의 등장은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급여 체계의 구조─즉 수당이 어떻게 전달되고,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고 배분하는지─임을 상기시켰다."(268-9)


"미국인들은 기본적인 시민권으로서 연방정부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지만, 이를 위한 징세는 원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세력은 이러한 이중적 요구를 낮은 조세율과, 새로운 경제 안정과 기회 체계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는 사회 협약을 도입함으로써 조정했다." "이들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처럼, 보수주의 세력은 그들의 사회 정책 의제를 발전시키는 데 복지가 유용한 도구임을 발견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사회 정책에 대한 새로운 투자와 새로운 복지국가 제도의 창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지 실패를 활용했다면, 보수주의 세력은 복지국가 자체를 공격하기 위해 복지의 '실패'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제가 현대 미국 정치의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과거의 자유주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 세력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보호와 낮은 개별 세금 부담을 모두 약속한 전후 사회 협약에 의해 그들 스스로도 제약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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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화 2024-02-15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지는 국가기능의 순기능으로 소외층을 표면위로 올리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복지지향세력이 발생되는 것은 순방향이 아니다. 모두가 표면밑으로 가라앉으면 복지가 종결된다. 이는 복지를 이용하는 세력의 어리석음 때문이라 우려된다. 사회는 복지대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 소외계층은 왜 발생하는가 ? 접근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리 는 접근에 다양함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대변혁 3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8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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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국가 (최소정부, 통치자의 업적, 미래의 철창)


"정치권력 조직의 역사에서 19세기는 다양성에서 단순성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또한 19세기는 20세기에 들어와 세계적 추세를 형성하게 되는 네 가지 주요 발전과정─국가의 형성, 관료화, 민주화, 복지국가의 출현─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적 시각으로 회고해보면 19세기는 국가발전의 황금시대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국가와 공공복지의 원칙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국가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국가는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14년 이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군사적 잠재력의 증가를 억제했다. 요컨대, 국가는 이전에 경험한 바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정치형태─폭정과 무정부상태─의 출현을 막아냈다." "이런 추세가 모두 유럽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현대적 입헌국가는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났고, 군주제 이후의 독재통치는 남아메리카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1585-6)


"물리력의 독점은 '근대' 국가를 정의하는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시도하여 획득한 역사발전의 예외적 상황일 뿐이다. 혁명의 시대에 폭력의 독점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18세기 내내 중국정부는 민중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또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태평천국혁명 시기에 수백만 명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청조정에 저항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무기를 드는 일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중앙정부가 호전적인 엘리트와 대다수 민중에게 법과 질서를 지켜낼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을 때 폭력의 독점은 유지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폭력의 시장이 열리고 사유화된 폭력이 사회화된 폭력을 빠르게 대체한다." "국가는 언제나 이성과 객관성을 향해 발전해간다는 믿음은 극히 왜곡된 이상일 뿐이다. 국가는 사회를 만들어 내고 동시에 국가도 혁명과 전쟁에 의존하고, 재력을 생산하는 경제에 의존하고, '하인'의 충성에 의존한다."(1587-8)


# 1900년 무렵에 존재한 정치질서의 유형들

1. (개인) 전제정체 : 차르 통제하의 러시아, 오스만제국

2. 독재정체 : 호앙 카를로스의 포르투갈,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멕시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아르헨티나

※ 독재정은 전제정과 비교해 전통, 왕조의 합법성, 종교적 축성(祝聖) 같은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3. 입헌군주제 : 독일제국,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4. 의회책임제 :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제3공화국

5. 충성관계 또는 후견관계 : 유럽 식민주의에 복속된 여러 지역의 정치체제들


"프랑스대혁명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세기 중반에도 군주제는 여전히 세계적인 범위에서 주류 국가형식이었다. 유럽에서 근대초기와 혁명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공화국은 '군주화'의 마지막 물결과 함께 사라졌다." "1815년 직후 스위스는 유럽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유일한 비군주국이었다. 군주제에 대한 호의적인 정서는 머나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퍼져 있었다." "'군주제' 또는 '왕국'이란 표지의 배후에는 수많은 정치조직의 형식이 숨겨져 있었다. 조직구조가 비슷한 정체라 할지라도 군주제 문화의 침투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로마노프왕조가 종결될 때까지 전제적인 통치를 해온 러시아의 차르는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민중에게 종교적인 수준의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왕에게 1830년 이후로 남은 것은 부르주아 국왕으로서 일상적인 역할 뿐이었다."(1597-8)


"군주제와 민족국가의 결합은 19세기의 세계적 추세 가운데 하나였다. 일부 국가는 군주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는 사실상 1805년에 수립되었으나 왕위의 세습을 인정하는 이스탄불 술탄의 칙령은 1841년에 반포됨으로써 비로소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근대 샴(태국)을 만든 사람도 개명 전제군주 출라롱코른(라마 5세라고도 불렀다)이었다." "확장 중인 제국이든(러시아) 판도가 축소되는 제국이든(합스부르크제국, 오스만제국) 다민족국가의 통치자들은 분리주의에 맞서 민족과 국가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내야 하므로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군주와 국가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현상은 원래 유럽이 아니라 일본에서 나왔다. 메이지 천황의 손자인 쇼와 천황(1926-89년 재위) 통치하에서 군주와 국가는 혼연일체가 되었고 이러한 결합은 2차 대전 동안에 아시아에 재난을 가져왔다."(1619-20)


"1900년 무렵의 세계에서 백 년 전에 비해 더 많은 민중이 정치적 운명의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서유럽과 미국의 상황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했겠지만 식민주의로 인한 계량화할 수 없는 정치적 참여의 제약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의지는 어떤 제약도 없이 표현되어야 하며, 원칙적으로 인민은 어떤 형태의 정부든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1623-4)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징세정책의 혁신 가운데 하나는 소득에 대한 직접적인 정률 소득세였다. 영국은 1842년 이후로 줄곧 이 세수정책을 시행해왔는데, 중상층 소득집단의 부의 증가분을 조심스럽게 재분배하는 효과가 입증되었다. 1861-1900년, 많은 유럽 국가가 이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영국의 소득세는 사회복지를 개혁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의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새로운 정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자유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관세를 폐지함으로써 생긴 세수 손실을 소득세라는 새로운 세목을 설치해 보완했고 반대로 자유무역은 소득의 증가를 촉진했다. 세수제도, 특히 서방과 일본의 세수제도는 그 현대성이 최소한 평화시에는 납세자들이 국가의 갑작스럽고 자의적인 특별세 징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최종적으로 구현되었다. 법률이 적용되는 지역과 시간의 범위는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와 법치는 상호 보완관계였다."(1663-4)


"19세기 유럽에서 국가는 일찍부터 요란스러운 공개 처벌을 피했다. 국가는 더 이상 처형 의식으로 공포의 무대를 연출하지 않았다. 인도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이런 방식은 점차로 용납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에서 이런 행위는 자취를 감추었다(독일민족의 국가에서는 1863년 이후로, 영국에서는 1868년 이후로). 숙련 장인이자 연예인으로서 직업적 사형집행인이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처형장면이 증오의 대상이 된 데는 시장의 요인도 작용했다. 많은 도시에서 형장 가까운 곳에 산다면 상승세에 있던 주택가격이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비치명적 국가폭력이 존재한 시간은 좀더 길었다. 1845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채찍형의 공개적인 집행을 금지시켰지만 실제로는 인도주의자와 (문명국으로서의 러시아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 민족주의자들이 요란스럽게 항의하기 시작한 세기 말까지 널리 행해졌다."(1669-70)


"사회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치안기관은 노골적인 위협 수단과는 다른 권력의 도구였다. 경찰제도는 19세기에 창설되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중앙정부가 관할하는 전문 경찰기구를 설치한 국가이며 그 시기는 17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829년부터 경찰제도를 갖게 되었고, 베를린 경찰은 1848년부터 제복을 지급받았다." "일본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찰의 직업화와 훈련을 중시했다. 경찰은 메이지시대의 각종 개혁을 관철시키는 가장 중요한 국가기구였다." "19세기에 거의 모든 유럽 식민지에 최소한 가장 기본적인 현대 경찰체계가 (특히 도시지역에) 도입되어 있었다." "영국의 많은 보수파는 영국 정부도 민주화를 주장하는 논조와 행동에 대해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해 좀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주의는 줄곧 종주국 수도의 자유주의 사상에 도전했고 더 강한 경찰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반복적으로 들려왔다."(1670-3)


"미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전국적인 경찰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경찰력 분포의 편차가 컸다. 사설 탐정기구가 그 빈틈을 메웠다. 가장 유명한 사설탐정 회사는 1850년에 앨런 핑커튼이 세운 회사였다. 핑커튼 탐정회사의 첫 번째 업무는 철도와 우편마차를 경호하는 것이었으나, 1890년대가 되자 노동자 파업 진압으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을 제외하면 국가의 불완전한 폭력독점 때문에 사법적 감독이 쉽지 않은 사설 경찰력에 그토록 넓은 업무공간을 남겨준 나라는 없었다. 미국에 경찰은 '국가'기관의 위계 안에 포함되는 기관이 아니라 지방자치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프랑스나 일본의 제도와는 정반대였고 영국의 제도와도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19세기 말의 영국 경찰은 자신이 보통법과 비성문 헌법을 대표한다고 인식했다. 반면에 미국 경찰은 자신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정의를 대표한다고 인식했다. 미국 서부의 '보안관'(marshall)은 이런 유형의 명백한 화신이었다."(1674)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유럽에서는 '세 가지 복지국가 모형'이 등장했다. 첫째, 스칸디나비아반도 모형은 소득의 재분배를 통해 조성된 재원으로 사회안전을 보장했다 둘째, 영국 모형은 세수에 의존하여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유지함으로써 빈곤을 해소했다. 셋째, 유럽대륙 모형은 개별적인 보험료를 통해 재원을 마련했는데 앞의 두 모형과 대비되는 점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보험료의 액수가 다르게 정해진다는 것이었다(예컨대, 공무원은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복지제도를 수립한 경로는 다르지만 세계에서 유럽,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사회단체, 자선기관, 교회, 정부의 빈민구제 활동이 자체 동력이 되어 국가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전환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미국에서는 개인의 기부는 선행으로 찬양받았지만 빈민구제에 투입되는 세금은 낭비로 인식되었다. 1947년에야 실업보험 제도를 도입한 일본은 이 제도를 실시한 마지막 공업대국이었다."(1679-80)


제3부 주제


12장 에너지와 공업 (누가, 언제, 어디서 프로메테우스를 풀어놓았는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한, 특히 중요한 요인들을 꼽아보자면, 첫째, 18세기를 통틀어 영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국내시장에서는 생활필수품과 사치품 사이에 끼어 있는 '비교적 고품질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점진적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소비의 주력군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런 소비층이 아직도 귀족계급과 상업 엘리트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둘째, 18세기 초, 영국은 어떤 나라보다도 강성했고 해외 무역량은 네덜란드를 초과했다. 생산량이 늘어나는 상품을 영국 국내시장에서 소화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특히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가 중요한 소비시장이 되었다." "셋째, 영국에서는 '이론가' 집단과 '실천가' 집단이 더 활발하고 긴밀하게 접촉했다. 이렇게 영국에서 처음으로 산업화 개념의 또 하나의 표지가 등장했다. 그것이 기술혁신의 표준화였다. 이전 시기와 다른 점은 이때의 혁신 물결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739-40)


"사람들은 산업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월한 자연조건 이외에 다른 요소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농민을 비경제적 요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또 하나는 '인력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였다. 교육사업은 문맹퇴치 운동에서부터 국가연구기관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양호한 교육을 받은 노동력은 토지와 광물자원의 부족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한 몇몇 유럽 국가와 일본은 19세기 말의 수십 년 동안에 모범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산업화 생산방식의 큰 장점은 최소한 어느 면에서는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하나의 공장에 집중되는 대기업은 당시 세계에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대량생산 방식이 여러 분야로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탄력적 생산'이라 불리는 생산방식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집중 방식과 분산 방식이 결합된 곳에서는 산업화의 성과가 탁월했다."(1746-7)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1870년 이후로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물리학을 흉내 내어 에너지원의 개념을 대대적으로 차용했다. 동물이 신체를 이용하여 얻어낸 에너지가 경제적인 의미를 잃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얄궂게도 인체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노동력'이란 표현은 열역학의 영향을 받아 '인체발동기'로 바뀌었다. 근육과 신경의 결합체인 인체발동기는 계획적인 작업 과정에 응용될 수 있었고 에너지의 투입-산출 비용은 실험을 통해 정확하게 계량될 수 있었다."(1755)


"광물에너지원을 기초로 한 에너지경제가 수립된 유럽은 비서구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 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의 인종주의는 피부색만을 따지지 않았고, 인간의 '종류'를 육체적 에너지와 지적 에너지의 잠재적인 크기에 따라 구분했다. 그러므로 세기가 바뀔 무렵 비유럽 세계는 서방의 전형적인 특징은 '젊다는 것'이지만 비유럽 세계 자신의 전통과 통치자는 '늙고' 수동적이며 무기력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1764-5)


"사회구조('카스트'제도)와 국민성 또는 종교적 성향('힌두교는 노동을 적대시한다')이 인도의 자주적 발전과 외부세계로부터의 학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는 문화결정론의 논조는 서방 사회학계에서 오랫동안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인도가 보여준 첨단기술 분야의 성공은 이런 주장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마찬가지로, 이익을 좇지 않는다는 '유교사상'의 경제관이 19세기와 그 이전 세기에 중국의 '정상적인' 경제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 싱가포르, 타이완 등 중국어 사용권 국가─최소한 간접적으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본과 한국을 포함하여─와 지역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성과를 보여준 뒤로 이런 낡은 논조는 조용히 사라졌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인도와 중국 같은 나라는 왜 '당연히' 따랐어야 할 모형대로 발전하지 않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1777)


13장 노동 (문화의 물질적 기초)


"구체적인 노동자와 노동과정은 사회 계층의 특징을 대표한다. 권력과 지배의 관계가 노동의 자율성과 타율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노동과정의 표준화와 기본적으로 노동을 통해 정의되는 의식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결과가 '직업'이다. 직업에서 정체성을 찾는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인정받기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직업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집단적으로 정의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직업의 영역을 통제하거나 때로는 독점한다. 그들은 〈시장을 우회하여〉 진입을 제한하고 흔히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이런 방식을 통해 생겨난 폐쇄적 직업조직(장인조합, 동업조합 등)은 그 자체가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이 된다." "모든 (또는 대부분의) 문명에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노동에 대한 관념은 기대치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은 노동자를 어떻게 '공정하게' 대우하느냐와 관련이 있다."(1820-2)


"19세기에 농업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취업영역이었다. '윤리적 경제'의 관점에 따르면 농민은 자급자족적이고 시장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으며, 집단소유제와 개인소유제 사이에서 집단소유제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으로서 농민의 대외적 행위는 방어형과 위험 회피형이다. 그들의 이상은 전통의 틀 안에서의 정의와 상호부조─후원자로서의 지주와 수혜자로서의 소작인의 관계를 포함하여─이다. 이때 토지의 매각은 최후의 수단(umtima ratio)이 된다. '합리적 선택'의 관점에 따르면 농민은 최소한 잠재적인 소규모 기업가다. 농민은 반드시 이윤의 최대화를 목표로 하지는 않으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존의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집단의 단결과 상호부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위해 시장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알고 있다. 또한 이 학파는 자본주의가 전파되면서 애초에는 동일한 사회적 상황에 처해 있던 농민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1825)


# 19세기까지 존속한 농촌생산(생활) 방식

1. 장원경제(자급자족 노동과 영주에게 제공되는 무상 노동이 결합된 형태)

2. 가족 임차영농(지대를 수취하는 지주와 농민의 대립)

3. 비교적 안정적인 소유권을 가진 소규모 가족영농

4. 플랜테이션(비현지 노동력을 사용하여 자본집약적 작물을 생산하는 형태)

5. 대규모 자본주의 영농(토지 소유주가 임금노동자를 고용)


"운하공사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운하건설은 새로운 시장이자,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활동이었다. 지구는 더 이상 농민과 광산노동자의 세상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동맥이 지구 곳곳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하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1849)


"수십만 명의 아랍 노동자들이 사막에서 삽으로 운하를 파고 있을 때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철도 궤도가 놓이고 기차역이 세워지고 있었다." "철도부설에는 운하건설과 마찬가지로 삽, 도끼, 쟁기를 사용하는 원시적 육체노동은 물론이고 증기 크레인 같은 현대적 장비도 필요했다. 미국의 동서횡단 철도는 수에즈 운하가 완공된 1869년에 완공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대형 철도공사는 다국적 성격이었다. 1860년 이전에는 철도건설에 참여한 자본은 영국과 프랑스 자본이 주류였다. 1860년 이후로는 보조적이었던 민족자본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 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이 필요했다."(1854-7)


"19세기 경제학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은 노동은 자유로우며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인간을 노동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인간은 '동기부여'가 있을 때 노동한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노동은 노동자의 시민으로서의 자유 또는 신체적 자기결정권이 제약받지 않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19세기 전반에─서구 일부 국가에서는 그 기간이 더 길었다─수백만 명의 노동조건은 같은 시기에 자유주의가 찬양하던 도덕적·경제적 이상인 '자유로운' 노동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노동한 부문은 각 국가의 경제에서 원시적이고 낙후한 부문이 아니었다. 이미 증명되었듯이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기 직전의 카리브해 지역이건 아니면 내란이 일어나기 전의 미국 남부의 각 주이건 노예제 플랜테이션은 모두가 효율성과 수익성이 높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생산방식이었다."(1865-70)


"사회발전은 새로운 보편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농노제(특히 17세기에 새로 건설된 동유럽의 '2차' 농노제)는 신대륙의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노동력 결핍에 대한 반응이었다. 19세기 유럽 인구의 빠른 증가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시에 도시발전과 초기 산업화가 농촌에서 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취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노동시장은 더 유연해지고 반면에 강압적인 노동안정은 이념적으로 점점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농민해방으로 유럽의 농민은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유농민이 되지는 않았다. 유럽의 농민이 영주와의 관계에서 누리던 '옛' 자유는 농촌에서 사라지고 19세기의 '새로운' 자유는 국가가 설정한 틀을 깰 수 없었다. 가장 강인한 자유주의자도 그 어떤 시장보다도 농업시장이 정책적 통제와 개입을 요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농업정책이 탄생했다. 유럽 농민의 생존은 이때부터 이 정책에 의존해왔다."(1879-80)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 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 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농촌에서도 '자유로운 임금노동'은 의심스러운 개혁이었다. 그에 따른 '무산계급화'는 사회적 지위의 하락이었다. 산업부문은 달랐지만 비대칭적 노동시장에서 완벽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뿐만이 아니었다."(1885-7)


14장 네트워크 (작용범위, 밀도, 틈)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은 19세기의 새로운 진전이었다. 17세기에 영국의 윌리엄 하비가 인체는 하나의 순환계통이란 사실을 발견했고, 18세기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케네가 이 모형을 경제와 사회현상에 응용했다. 그다음 단계가 네트워크였다. 1838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전국적인 철도교통망인 '전국운수체계'를 설계했다. 이것은 미래를 내다본 대담한 구상이었다. 1850년 이전에는 유럽대륙의 어떤 국가도 진정한 의미의 철도망을 갖추지 못했다. 리스트를 이 구상을 실행할 기초 설계도를 확정했다. 철도가 완공되고 실제 운행에 들어가자 비판자들이 철도망을 상징하는 거미줄 그림을 보여주며 철도를 곤충을 질식시켜 죽이는 거미에 비유했다. 그 뒤로부터 거미줄은 '미로', (특히 미국에서) '격자'(格子, grid)와 함께 도시의 모습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다. 사회의 자기 이미지로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19세기에 시작되었다."(1910-1)


"범선과 비교했을 때 증기선은 환경적 요소의 제약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연안, 풍랑이 없는 내륙호수, 하천, 운하 항행에 적합했다. 더 이상 변화무쌍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자 역사상 처음으로 항행시각표를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고 수로 운수의 네트워크화는 새로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각종 관계는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예측 가능해졌다." "새로운 수송능력과 새로운 새로운 운송수요는 상호작용을 했다. 예컨대,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의 증기선 운수의 확장은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플랜테이션의 면화생산 확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전반의 빠른 기술진보 덕분에 19세기 중반 이후 증기선으로 브리스톨에서 뉴욕까지 가는 데는 14일이면 충분했고 이 항행시간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번 크게 단축되었다. 대규모 이민의 물결이 신대륙을 향해 흐르기 시작하면서 전례 없는 규모의 여객운송 수요가 생겨났다."(1915-7)


"해저케이블이 세계를 이어주면서 19세기의 세 번째 사반세기에 세계를 포괄하는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사용자의 개인생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면에서 보자면 전보는 그 뒤에 등장한 전화나 인터넷에 비해 영향력이 적었지만 상업, 군사, 정치적 활동에서 전보의 중요성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정치적 영향도 피할 수 없었다. 전보는 해외 현지에 나가 있는 외교관은 물론이고 내각과 수도의 의사결정 기구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국제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반응속도는 더 빨라졌고 대형 회의의 회기는─꼭 이 원인 때문만은 아니지만─단축되었다. 암호를 사용한 전보는 해독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거나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염려와 공포는 통신의 광채를 가렸고 검열이라는 새로운 기회가─때로는 실행하기 어려웠지만─열렸다."(1926-3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 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 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과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1839-42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은 문제였다." "중국의 조처는 단순히 영국이 중국 인민에게 끼치는 해독에 대한 대응 이상의, 더 넓은 세계경제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과 차 수출시장이 위축되면서 1820년 이후로 중국의 은 유입량이 줄어들었고 동시에 남아메리카의 은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은의 국제가격이 올라갔다. 두 요인이 합쳐져 중국 은의 대외 유출을 자극했던 것이다."(1951-3)


"정부와 투자자들은 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금을 사들였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영국정부는 금본위제 시행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영국이 유일하게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모든 국가에서 금본위제의 실시여부를 두고 대토론이 벌어졌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생긴 곳은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1879년부터 (논란이 많은) 금본위제를 시행했지만 의회가 정식으로 승인한 때는 1900년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다량의 불태환화폐를 발행했던 러시아는, 1897년에 금본위제의 실시를 선언했다. 일본은 1895년에 중국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전쟁배상금으로 중앙은행의 비축 금을 확충한 그 해에 바로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당시 일본의 여러 정책이 그러했듯이 이 조처는 '문명세계'에 합류하려는 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금본위제의 채택은 국제사회에서의 존경을 의미했고 서구식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의사표시였다."(1954-5)


# 불태환화폐(Fiat currency) : 발행한 정부가 그 가치를 보증하는 명목화폐


"우리는 영국 중심의 이 체계의 내재적인 위험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는 물론이고 세계경제의 비식민지 주변부도 이 체계에 (간접적으로든 미약한 정도로든) 통합되지 않았다. 금본위제는 일종의 도덕적 질서였다. 금본위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자기책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신뢰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경제활동 환경,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부─를 전파했다. 금본위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참여국이 이런 규범을 지키고 이 규범의 바탕이 되는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뒤집어 말한다면 성공적인 금유질서는 자유주의 세계관이 생활의 실제적 목표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금본위제는 자연적(경제적) 요인에 종속적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이전의 조건에서 수립되었다. 1848년 이후 세 대륙의 프런티어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이 제도의 최종적인 형태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1959)


"자본흐름의 기존 구조를 네트워크로 상상한다면 실상을 오해할 수 있다. 무역과 달리 이 영역은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자본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전되었다. 채무국과 투자 목적국에서 돌아 나오는 자금은 대출자본이 아니라 이윤으로서 자본 점유자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 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 일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한 세기 가까이(1820-1914) 국제 금융네트워크에는 개입을 통해서도 복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신용의 붕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붕괴는 20세기의 특징적 현상이었다."(1962, 1970-1)


15장 등급제도 (사회적 공간의 수직적 차원)


"19세기는 가장 오래된 사회집단인 귀족이 중요한 역할을 한 마지막 시대였다. 18세기에 유럽 귀족의 〈사회적 지위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였으나 1920년 무렵에는 그런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귀족에게 튼튼한 정치적 세력이나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럽 귀족의 몰락은 한편으로는 18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혁명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와 권위의 원천이던 토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귀족이란 사회제도가 유럽에서 쇠락한 것은 대체로 1789-1920년의 비교적 짧은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귀족의 세력이 직선으로 하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라인강 이동지역의 귀족정치의 상황은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19세기도 귀족에게는 여전히 '좋은 시절(belle epoque)'이었다."(1997-8)


"영국의 귀족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귀족과는 분명히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계층이었다. 그들이 가진 법률상의 특권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정치와 사회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다. 계승법에 규정된 장자계승권은 부의 집중을 보장했다." "그러나 영국 귀족이 가진 특권은 많지 않았다. 법률로 규정된 가장 명확한 특권은 세습귀족으로서 의회에서 상원의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상층 귀족이 차지한 상원 의석수는 1830년 무렵 300여 개, 1900년 무렵에는 500여 개였다." "영국귀족은 왕실에 의존하지 않았다. 빅토리아시대에 궁정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사회영역에서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복종을 누렸다." "영국이 다른 국가와 대비되는 점은 귀족은 확정된 법률상의 지위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기질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끄는 자신감이었다."(2002-3)


"중국의 신사(紳士, gentry)는 유럽과 일본의 군사귀족과는 달랐다. 신사는 혈통이 아니라 재능 덕분에 관리로 선발되었다. 개별 집안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한 집안이 흥했다 쇠퇴하는 과정이 단지 몇 세대 안에 일어났다." "유럽 귀족과 마찬가지로 신사는 비교적 평온하게 19세기를 넘겼다. 1864년에 태평천국의 위협이 지나간 후 그들이 사회 내부에서 직면했던 경쟁은 유럽에 비해 적었다. 중국 신흥 중산계층이 신사가 지닌 통치지위에 도전했지만, 이는 유사한 상황에서 유럽이 보여준 격렬함에 훨씬 못 미쳤다. 중국에서 위협의 주요 출처는 농민혁명과 외국 자본주의였다. 프랑스 귀족이 종점에 도달한 때는 1790년이었고, 일본 사무라이의 경우는 1873년, 독일 귀족은 1919년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신사계층이 종점에 도달한 때는 1905년이었다. 신사는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몰락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엘리트 계층이자 세계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엘리트 계층이었다."(2014)


"부르주아는 토지와 혈통에 의존하여 신분을 획득한 봉건영주가 아니며, 종속적 지위의 육체노동자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범주는 어떤 사회적 개념보다 넓다." "'부르주아계층'이란 개념의 기만성은 부르주아계층의 생활방식에서 나왔다. 부르주아는 (계층) '상승'을 추구하면서 그 반대─빈곤 속에 떨어지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의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지만 몰락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낙오자일 뿐이다. 성공한 부르주아는 자립심과 자기노력으로 지위를 획득했다고 인정받는다. 그에게는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부르주아에게 사회란 사다리다. 부르주아는 그 사다리의 중간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비부르주아 엘리트가 존재하는 한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라도 사회 등급의 최정상에 설 수 없다."(2018-9)


"귀족은 명예를 중시했고 전형적인 부르주아는 사회적 존경에 집착했다." "〈존경받을 만한 품성〉은 영국 신사의 성격 모형에서 보듯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학습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이상이었다. 예컨대, 19세기 남아프리카의 도시에서 백인과 흑인 중산계층은 사회적 존중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정서적으로 서로 근접해 있었다(인종주의가 고개를 들면서부터는 이런 동질성이 발전하기는 점차 어려워졌지만). 아랍, 중국, 인도의 상인도 육체노동을 멀리하고, 가정 내부의 미덕을 중시했다(일부다처제에서도 특수한 방식으로 이 미덕을 실천했다). 또한, 행동할 때 통찰력을 중시했으며 그 명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했다. 따라서 20세기의 마지막 1/3세기에 일본, 인도, 중국, 터키에서 등장한 수억을 헤아리는 중산계급을 서방 사회형태의 수입품이라고만 설명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현지의 기반이 없이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가 없다."(2024-5)


"이 지점에서 세계사회사 연구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분명히 부르주아와 부르주아적 가치는 근대 초기 서유럽 도시문화와 장거리 무역의 산물이며 19세기에 산업자본주의와 혁명적 평등사상의 영향 아래서 한걸음 더 진화한 모습이 되었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과 실현된 현실의 일부는 (서)유럽 근대사의 특수한 경로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면이기도 하다." "많은 아시아 국가의 (준) 부르주아계급과 정부의 친밀도는 서유럽보다 높았다. 그렇기에 이들 부르주아계급은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관점을 지지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 뒤에는 독자적인 상업적 성공의 역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오스만제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정부의 보호와 지지를 받는 소규모의 상업집단이었다. 19세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민간시장이 조절하는 자주적인 체계가 수립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2026-30)


16장 지식 (증가, 농축, 분포)


"'지식'은 특별히 생명이 짧은 실체다.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철학적 정의와는 별도로 사회적 요소로서 지식은 역사가 백 년도 채 안되는 지식사회학이란 학문의 발명품이다. 지식사회학은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정신'(Geist)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회의 중심에 놓고 실제 생활이나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킨다. 온갖 것을 포괄하는 '문화'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지식'의 외연은 상대적으로 좁다. 이때의 지식은 종교와 예술을 포함하지 않으며, 현실세계에서 문제해결과 생활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이용되는 인지자원을 가리킨다." "지식은 당연히 유용해야 한다. 지식은 대자연을 지배하는 인류의 능력을 높여주어야 하고 기술 운용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켜주어야 하며, 사람들의 세계관을 미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요컨대 지식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어야 한다. 유럽 엘리트의 눈에 진보는 시대의 표지였고, 지식의 확대와 증가만큼 인간의 진보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척도는 없었다."(2079)


"읽고 쓰는 데 통달한 사람만 고상한 문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해력의 보급은 농민을 위한 역서(曆書)에서부터 싸구려 소설에 이르기까지 통속적인 서적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엘리트들이 문해력 보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읽기와 모범적인 문화생활을 통해 '보통사람'을 계몽시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위로부터의 '문명화'와 근대화의 실천방식이며 민족통합의 촉진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문화의 해방에 대한 의심과 염려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중문화의 해방은─얼마 안 가 노동자 단체가 보여주었듯이─동시에 대중의 사회적·정치적 지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권력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이런 불신은 현실적인 근거가 없지 않았다. 읽고 쓰는 능력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명예와 권력의 등급질서의 변혁을 유발하거나 현존질서를 건드릴 수 있었다."(2098-9)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사람들은 사회 내부의 지식학습과 도덕교화에 관련된 모든 형식을 교육체계로 인식하고 실제 교육체계로 조직해냈다." "국가가 청년의 공식교육을 독점적으로 통제한다는 구상은 19세기의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사회저층과 중산계층의 자녀들이 처음으로 차별 없이 국립학교 입학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가정교사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갈수록 줄었으며 학교에 등교하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다이는 독일 제후국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국가는 '학교국가'(Schulstaat)가 되었고 사회는 '학교사회'(Schulgesellschaft)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공공교육을 확대하는 정책을 수립하면서 각자의 목표와─민중에 대한 기율교육, '모범국가'를 만들기 위한 '모범시민'의 양성, 군사적 효율성의 제고, 균질적인 민족문화의 창조, 제국의 문화적 통합, '인력자본'의 소질과 기능의 배양을 통한 경제발전 촉진 등─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2108-9)


"야망과 열정이 가장 적은 곳이 식민정부였다. 식민정부는 교육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거나 교육에 관해서는 완전히 선교사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었다. 1960년대 비식민화가 시작되었을 때 콩고자유국(1908년 이후로 벨기에령 콩고)에는 80년 동안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후에도 유럽식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엘리트계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1851/62년부터 영국이 통치)와 세네갈(1817년부터 프랑스가 통치)의 상황은 이보다는 나았지만 지속적인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학교는 매우 드물었다." "인도의 식민정부는 1차 대전 이전부터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지원했지만, 각 대학에서는 '인문학'(즉, 유럽의 고상한 문화)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영국인의 교육 목표는 식민행정에 동원할 수 있는 문화적으로 영국화된 인도인 계층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소수의 개혁파 인사들이 수십 년 동안 대다수 관리들의 '인문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맞서 싸웠다."(2110-1)


"긴 19세기 동안 전 세계 지식 유통의 경로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더 일방통행이었다. 서방의 자연과학은 세계 기타 지역의 자연과 관련된 지식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쌍방향으로 이동한 것은 미학과 종교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이며, 검증 가능한 연구와 과학적 비판과정을 거쳐 이미 입증된 지식이 아니라 영성과 새로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찾는 서방에게 보여준 아시아(훗날에는 아프리카)의 반응이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와 자연과학의 이성적 세계관이 다 같이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고 있을 때 마르지 않는 '동방의 지혜'가 그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지혜를 응용하여 서방이 공급한 정신적 자양분에 맞섰다." "아무런 구분 없이 구원종교의 발생지(fons et origo)로 인식되던 '아시아'는 이렇게 비이성주의의 상징이 되어 서방의 이성주의와 논쟁적으로 맞서게 되었다."(2139-43)


17장 문명화와 배제


"'문명'은 그 대립물인 '야만'이 있어야 존재가 부각된다. 세상에서 '야만'이 사라진다면 자만심에 빠진 문명인이 타인을 공격할 때 또는 조잡함과 쇠락에 빠진 우월한 문명의 운명을 한탄할 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막이 없어진다. 문명의 대극장에서 문명의 정도가 비교적 낮은 집단은 관중의 입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문명인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되도록이면 찬양과 존경 그리고 암묵적인 감사의 형식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집단의 선망과 질투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동기가 '문명포교'(Zivilisierungsmission)의 자양분이 된다. 여기서 '포교'(Mission)는 반드시 종교적 신앙의 전파를 가리키지는 않으며 자신의 규범과 제도를 타자에게 주입하려고─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타자가 받아들이도록 강압하려고─자임한 사명감을 일컫는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자신의 생활방식이 우월하다는 문명인의 확신이다."(2187-8)


"'문명화'의 개념은 19세기에 사회 내부에도 적용되었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남아 있던 고대 씨족사회 구조의 잔재는 남쪽에서 온 관광객 눈에는 민속으로 비쳤다. 18세기 7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발견이 북방의 아프리카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고 한다면 런던에서 세계 박람회가 열린 1851년에 스코틀랜드는 야외 사회사박물관이 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메초죠르노를 바라보는 눈길은 영국인이 스코틀랜드를 바라보는 눈길보다 더 냉혹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북부 이탈리아는 변경지역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이에 실망을 느낄수록 변경지역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은 아프리카를 언급할 때 드러나는 인종주의적 논조에 가까웠다. 공업화된 대도시의 사회 저층도 외래 '종족',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시장, 개인적인 자선행위, 종교적 설득을 통해 최소한의 문명화된 행동방식, 다시 말해 시민계급의 행동방식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2191-2)


"시장경제, 법률, 종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영국의 문명포교 사업을 떠받친 세 개의 기둥이었다. 프랑스식의 문명포교는 여기에다 식민국가의 고급문화를 동화시킨다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집단 생활방식의 개혁 사업으로서 문명포교는 두 가지 극단적인 불간섭주의의 중간에 자리했다. 한쪽에는 유럽 인도주의의 도덕적 태도와 함께 '야만인'은 멸종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숙명론자의 냉정하고 오만한 태도가 병존하고 있었다." "1846-50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지나치게 고집스러운 경제학자들은 불가피한 적응성의 위기라고 해독했다. 다른 한쪽에는 모든 유럽 식민세력이 특수한 조건하에서 기꺼이 실행한 간접통치─달리 말해 현지 사회의 구조에 깊이 개입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정책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구조와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개조하려는 문명포교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권력균형과 문화적 타협을 교란할 뿐이었다."(2201-3)


"노예제 폐지는 아이티혁명으로 촉발된 충격파가 서방 식민지 세계를 덮친 지연된 도미노효과였다. 영국이 선구적 행동을 보인 후 '문명국'으로 비치기를 원했던 유럽국가 가운데서 어느 나라도 노예제 폐지운동 흐름의 바깥에 머물 수가 없었다. 러시아의 1861년 농노해방도 전체 유럽의 발전 추세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보기에 농노제는 러시아의 국제적 위신을 손상시키는 오점이자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제도였다." "노예제도를 제외하면 역사에는 단지 세 차례의 가혹한 인종차별 제도가 존재했다. 19세기 90년대부터 20세기 2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남부, 1948년 이후의 남아프리카, 1933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기간의 독일 점령지가 그것이다." "20세기 들어 미국과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노예제는 백인 우월주의로 대체되었고, 피부색 하나만으로 규정된 집단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폭력과 비국가 폭력이 동원되었다."(2221, 2235)


"서구에서 노예제 폐지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기독교와 인도주의 사상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시장이란 조건하에서 해방노예들이 긍정적인 자극에 반응할 것이며 수출농업 분야에서 예전만큼 생산적으로 일할 것이란 희망이었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노예해방을 거대한 실험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중산계급 개혁가들은 해방노예들이 반드시 중산계급의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실망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흑인은 시장의 합리적인 수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학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개인적인 생활방식도 '문명'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이것이 인종주의의 근원은 아니었지만 인종주의의 추세를 강화시켜주었다. 노에해방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주도한 자유주의자들이 품었던 환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희망의 큰 부분은 실현되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2239-40)


"1900년 무렵, '인종'이란 단어는 세계의 수많은 언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였다. 세계 각지 여론의 분위기는 인종주의로 넘쳐났다." "1900년 무렵, '인종'은 '백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핵심 화제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지배자의 지위에 있던 소수 '백인'은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열등' 인종이 백인의 절대적인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일본과 중국에서 지식인 집단이 유럽의 '인종학'(Rasselehre)이란 용어를 학습하고 응용하고 있었다. '인종'은 진지한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졌다. 이 용어는 일부 인접 학파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생물학자와 민족학자들이 '인종'이란 용어를 빈번하게 언급했다. 인접 학과에서 '인민'(Volk, 영어의 people)이라고 할 때는 수십 년 전에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민중'(demos)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갈수록 생물학적인 공통의 혈연집단으로서의 '인종'(ethnos)을 가리키는 경향이 강해졌다."(2241-2)


# 인종주의의 종류

1. 하층계급을 만들어내는 '억압형 인종주의'

2. 제한구역을 만들어내는 '격리형 인종주의'

3. 국가의 국경을 봉쇄하는 '배척형 인종주의'

4. 특정 집단을 '적'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는 '멸종형 인종주의'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에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과학적 연구방법으로서 분류와 비교가 유행했다. 인류를 '유형'으로 분류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기에 비교해부학과 두개골 용량의 측량으로 인종의 지적 수준을 추론하는 골상학이 과학의 색채를 덧씌워 주었다." "18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인종분류는─'황인종'(yellow race), '흑인'(negro), '코카서스인'(Kaukasier)─완고하게 유지되었다." "19세기의 인종학은 혁명 이후 시대의 특징을 띠고 있었다. 기독교의 구속력은 느슨해졌고 등급제도는 신의 질서 또는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인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형성된 인종학은 영국보다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모습을 더 많이 드러냈다. 영국의 정치사상은 평등을 강조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느끼는 이론상 약속된 평등과 현실에서의 불평등 사이의 괴리는 독립선언과 인권선언을 발표한 국가에서 느끼는 만큼 강렬하지 않았다."(2246-7)


"대략 1815년 이후 새로운 인종학의 생성이 가능해졌다. 거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었다. 하나는, 환경조건이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인체의 표현 형질의 변화에도 항구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환경론과의 결별이었다. 이때 인종학 사상에서 '개량'의 관념은 사라졌다가 그 세기의 마지막 1/3세기에 우생학이란 생명공학으로 모습을 바꾸어 돌아왔다. 이때부터 인종학은 문명포교의 주장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전제는, 계몽운동 말기의 자연과학자와 비교할 때 새로운 인종이론가들은 명성을 좇았다는 것이다. '인종'은 역사철학의 핵심 범주로 떠올랐고, 역사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되었으며, '계급' '국가' '종교' 또는 '민족정신' 등과 직접 경쟁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인종사상의 특징은─토크빌은 그것을 일찍부터 인식한 인물이었다─결정론에 대한 강한 경향성, 그로 인한 정치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역사의 주변화였다."(2247-8)


"왕조시대의 중국은 각종 '야만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익숙하게 알고 있었고 제국의 변경에서 만나는 여러 유형 인종의 외모 특징을 기록해두었다. 중국인은 야만인이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은 개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며, 그러므로 야만인은 교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전통 중국사상에서는 문화가 다르면 반드시 인종도 다르다는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19세기 말이 되자 서방과의 접촉으로 상황이 변했다."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새로운 위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찾는 과정에서 지식인 사회의 선두 집단은 인종 간의 투쟁이란 관점에 매료되었고 유럽을 모방하여 인종등급표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확산의 전제는 인종주의 담론이 범람했던 세기 말의 특수한 여론 분위기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와 (전형적인) 범아프리카주의자도 자동적으로 인종적 차이의 관점에서 사고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안으로서 '흑인종'의 단결을 고취했다."(2257-9)


18장 종교


"19세기는 흔히 '세속화'의 시대─특히 서유럽에서─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세속화가 종교적 상징물을 공공의 공간으로부터 치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최소한도라도 종교적 승인에 의지하는 군주정체가 존재하는 한 국가적 의례는 종교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 군주통치를 소멸시킨 곳이라면 이런 유형의 권력신성화도 종말을 고했다. 1912년 이후로 중국에서는 황제가 천단(天檀)에서 거행하는 제사의식은 없어졌다. 술탄 칼리파의 통치가 종결된 후 케말주의 공화국 정권의 세속주의 상징이 지난 왕조의 종교적 표현을 대체했다." "1826년 이후 오스만 개혁으로 실제로 시작된 국가의 세속화가 이슬람세계의 핵심 화제가 되었다. 케말 아타튀르크 치하의 터키공화국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이후 시대의 국가는 20세기에 대부분 세속주의 정권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1979년의 이란혁명(호메이니 혁명)은 이 과정이 역전될 수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2312-3)


"대혁명 이후 (최소한 개신교 국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경건함과 기독교 도덕문화는 중산계급의 특징이었고, 그 부산물 가운데 하나가 성공적인 반노예제 운동이었다. 이러한 추세의 선봉인 영국에서 등장한 종교적 역동성은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던) 국교인 성공회 밖에서 개신교 복음파의 혁신운동으로 집약되었고 뒤에 가서는 성공회 내부의 반대파도 여기에 합류했다." "19세기 초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은 북아메리카인의 대규모 기독교 귀의로 발전했다. 유럽과는 달리 이 운동은 공식적인 교회조직으로 진화하지 않았고 시종 유동적인 교회와 교파의 형태로 역동성을 유지했다. 1780-1813년에 미국 인구가 8배로 증가하는 동안에 기독교 교구는 2,500개에서 5만 2,000개로 21배 발전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영속적인 부흥운동은 미국을 기독교 신앙이 깊고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이미 '문명국'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는 국가로 바꾸어놓았다."(2313-5)


"일본의 신도(神道)는 메이지시대 민족통합의 도구로서, 국가가 규정한 신흥종교였다. 신도는 추종자의 신앙이나 '경건함'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을 통해 밝혀지는 올바른 신념(Orthodoxy)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올바른 행동(Orthopraxy)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도는 대각성 운동과는 정반대로 종교적 감성을 냉각시키는 데 적합했다. 다른 한편으로 신도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또는 '세계종교')가 아니라 일본의 국교였기 때문에 현대종교의 다양성 개념과 충돌했다. 국가목표에 완전히 종속된 신도는 종교는 개인의 신앙문제이며 여러 사회영역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의 반면(反面)이었다. 이러한 일본과 중국을 대비해보면, 청제국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에 중국이 종교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1949년 이후의 30여 년 동안 국가마르크스주의(또는 '마오쩌둥주의')가 기능적인 면에서 국가신도와 대등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2320)


"언제나 제국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식민지의 종교지형과 등급제도에 개입해왔지만 근본적으로 이를 변화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의 식민지가 아닌 지역에서, 종교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현지 기독교도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경우는 흔히 고의적인 도발의 핑계였다. 러시아는 오스만제국 내 그리스인을, 프랑스는 레바논 산악지역의 기독교도를 보호한 적이 있지만(반대로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기독교도 통치하에 있는 모든 무슬림의 보호자임을 선포했다) 두 경우 모두 국제분쟁과 전쟁을 유발했다. 적대적인 제국이 서로 상대 내부의 종교적 소수파, 소수민족, 또는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소수파 인구를 상대로 벌이는 선동공작은 1차 대전 중에 독일이 영국제국을 겨냥한, 영국제국이 오스만제국을 겨냥한 전략─『아라비아의 로렌스』─으로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략은 19세기의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이미 실전응용을 마쳤다."(2324-5)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라고도 불리는 모르몬교는 1830년에 미국의 한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창설했다." "태평천국의 주장을 『성경』의 원래 뜻과는 멀리 떨어졌지만 현지화된 기독교 교리라고 해석한다면 창시자가 기록한 자기들만의 성서를 가진 모르몬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리가 현지화 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르몬교를 '기독교'로 분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이 있다. 일부다처제의 특징 때문에 모르몬교는 창설되던 시대의 동시대인에게는 '미국의 이슬람교'처럼 낯선 종교였다. 그러나 모르몬교는 『성경』에는 왜 미국이 언급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모르몬교는 구약시대에 미국을 목적지로 하는 대규모 이민이 있었으며 그것은 미국 땅을 구원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성서적 계획이라는 대담한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르몬교는 미국의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종교다."(2337)


"이란 시아파의 한 이단 분파인 바브운동은 『쿠란』의 가르침을 대체하는 전능자와의 직접 교류를 기본교리로 삼았다. 창시자인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 쉬라지는 신이 선택한 선지자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신성한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주장했고 끝내는 자신이 선지지라고 주장했다. 창시자가 1850년에 총살형으로 처형된 후에는, 알리 누리(일명 바하올라)가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는 때때로 세계의 구세주, 다시 태어난 예수와 마디와 조로아스터가 한 몸으로 합쳐진 존재로 자처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종파의 교리를 현대세계의 표현에 맞추어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189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창시자가 내세웠던 시아파 메시아주의는 현대적인 바하이(Bahai)교로 발전해 있었다. 1910년 이후로 이 종교는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지금은 그 정신적 조직적 중심지가 이스라엘의 하이파이다. 이 종교는 19세기에 타생한 종교 가운데서 모르몬교, 인도의 시크교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종교다."(2339)


맺음말


"단순히 유럽에 대한 관찰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19세기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19세기는 18세기 80년대부터 1차 대전까지 이어지는 긴 세기라는 관점이 유익한 가설이자 보조적인 구상이기는 해도 당연하거나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역사형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시원스럽게 1789년과 1914년을 유럽의 19세기의 시작과 끝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몇몇 국가와 지역의 역사는 이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례로, 중국의 정치사에서 건륭황제가 퇴위한 1796년과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사이의 시기는 긴 19세기라는 구분방식과 시간적으로는 어느 정도 일치하지만 내부 발전의 결과일 뿐이지 유럽이 동아시아에서 벌인 활동과 연관시킬 수는 없다. 일본의 경우 1853년의 문호개방과 1945년 제국의 붕괴 사이의 시기는 완전한 하나의 역사주기를 구성한다. 더 많은 국가가 다른 시대구분법을 따르고 있다."(2364-5)


"그래도 이 책이 서술하는 여러 가지 내용과 단서를 하나로 모으면 몇 가지 현실적인 답안이 나온다. 18세기 60년대, 전체 대서양지역의 복합적인 정치위기,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 새로운 생산기술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렸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1차 대전의 각종 결과가 드러나고(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도 좋은 결과가 나왔다) 세계의 모든 식민지와 서방으로부터 기타 형태의 압박을 받는 지역에서─아프리카 열대지역 제외─민족독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시대는 종결되었다. 세계혁명을 추구하던 소비에트정권이 새로운 소련제국으로 변한 것도 영향력이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광활한 영토 위에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실비판 정신을 담은 사상인 사회주의가 싹을 틔워 역사에 전례가 없는 기이한 제도를 실현함으로써 세계정치 무대에 새로운 극(極)이 등장했고, 이 체제는 초기에는 새로운 세계혁명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2366)


# 긴 19세기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1. 19세기는 생산효율─노동생산성, 기술혁신, 농업혁명(토지개발), 군사혁신, 국가관료기구의 행정력 확대 등─이 '비대칭적으로 상승한' 시대였다.

2. 19세기는 유동성─급격한 인구이동, 생산량 증가를 초월하는 세계무역, 국제자본시장, 모든 형태의 이동수단의 기술혁신 등─이 증가한 시대였다.

3. 19세기는 상호관계 강화의 비대칭성─외부지향성이 양적으로 늘어났고, 서방이 세계의 표준문화로 단극화(單極化) 되는─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4. 19세기는 평등─각종 차별의 제거와 법률상 평등의 실현─과 등급제도─유럽 5대 강국이 국제무대를 좌우하는 체제 성립─가 대립한 시대였다.

5.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해방─(민족)국가들의 독립, 노예제 폐지, 농민 처지 개선, 노동자 권리(선거권 포함) 쟁취, 여성해방은 물음표─의 시대였다.


"19세기는 1914년 8월에 갑자기 끝나지 않았고, 1916년 베르됭전투 이전에 끝나지도 않았고,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도착한 1917년 4월에 끝나지도 않았다. 역사는 막이 갑자기 내려오는 연극무대가 아니다. 그러나 1918년 가을에 많은 사람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제의 세계'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19세기는 1914년 이후 발생한 재난을 위해 길을 닦아 놓았다. 한나 아렌트 등은 19세기는 이 때문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받들었던 일부 전통과 사상, 예컨대 자유주의, 평화주의, 노동조합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1945년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았고 또한 추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1950년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1910년─버지니아 울프는 인류의 본성이 바뀐 해라고 탄식했다─은 아득히 먼 시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본다면 1910년은 가장 최근에 겪은 전쟁의 공포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었다."(2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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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2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7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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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도시 (유럽 모형과 세계적 특색)


"19세기 중엽부터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잇따라 등장한 대도시는 기왕의 도시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은 대도시는 '사회'가 결집되고 사회적 기준이 형성되는 곳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대도시는 경제순환의 동력원으로서, 사회적 유동성의 증폭기로서 기능했다. 대도시에서 가치는 (농촌에서처럼) 오로지 생산을 통해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증가했다. 상품의 신속한 회전이 부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근대적 대도시의 본질은 순환, 다시 말해 교통기술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주변지역 사이의 사람, 가축, 교통수단, 상품의 이동이란 점을 점차 깨달아갔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대도시 생활의 빠른 속도에 대해 끝없이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냈지만 반대로 도시의 개혁자들은 근대도시의 핵심인 원활한 순환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구상했다."(765)


"도시의 급격한 양적 성장과 급속한 현대화가 같은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탈도시화'가 (더러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위기와 정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18세기 공업화 시초 단계에서 대도시 인구의 외부유출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로 탈도시화는 1800년 이전 유럽의 여러 지역, 예컨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남유럽 도시의 쇠락은 유럽 도시문화의 중심이 남쪽에서 북쪽과 대서양으로 옮겨가는 추세의 반영이었다. 1840년 무렵이 되어서야 남쪽 옛 도시의 쇠락이 멈추었다. 발칸은 하나의 예외였다. 경제발전 수준이 비슷한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발칸의 도시화 정도는 꽤 높았다. 이것은 19세기 특유한 발전 추세의 결과가 아니라 오스만제국의 도시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존중과 각 요새도시의 중요한 지위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가 끝난 후 많은 발칸 국가가 탈도시화의 과정을 경험했다."(787)


"동아시아에서 탈도시화는 다른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 대략 1750년 이후 상업이 번성하면서 각지의 도시가 빠르게 팽창했다. 19세기 초, 방콕의 인구는 태국 전체 인구의 1/10을 넘어섰다. 버마와 말레이시아 각 주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1850년대 쌀 경작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농촌화' 현상이 나타났고 농촌인구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1815-90년에 자바에서는 주민 2,000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중이 7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떨어졌다. 이것은 현지의 경제가 수출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생긴 직접적인 결과였다." "식민통치가 도시화를 촉진하는지, 방해하는지 또는 후퇴시키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해나가던 1765-1818년 현지에 원래 있던 도시체계를 보존하고 유지시켰다. 이런 방식은 식민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식민전쟁 중에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기간시설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유명한 인도의 국도가 여기에 포함되었다."(788-9)


"미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운하와 철도의 역할은 유럽의 경우보다 훨씬 컸다. 콜로라도주 덴버시는 수로로는 연결되지 않는 도시였지만 순전히 철도 덕분에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철도산업 덕분에 고립된 개별 도시의 기초 위에서 종횡으로 연결된 도시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식민지시대 초기에 형성된 대서양 연안의 정착지가 집결된 동북부지역에서 철도망이 확산되자 새로운 도시가 잇달아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종횡으로 확장된 도시체계가 나타났다. 미국 서부에서는 이러한 도시체계가 19세기 중엽에 갑자기 형성되었다. 그 첫 번째가 시카고였다. 이 도시의 인구는 불과 40년 만에 (1850년의) 3만 명에서 110만 명으로 폭증했다. 시카고와 중서부 지역의 기타 도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변경이 서부로 확장되면서 하나씩 생겨난 도시는 유럽의 모형을 따르지 않고 주변지역이 농업지역으로 개발되기 전에 기반을 잡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발전해나갔다."(791-2)


# 단일 기능의 도시 유형들 : 성지(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인도의 바라나시 등) 도시, 휴양지(벨기에의 스파Spa, 프랑스의 비쉬, 크리미아의 얄타 등) 도시, 광산(볼리비아의 포토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미국 콜로라도주의 애스펀Aspen 등) 도시


"19세기에 경제적 성공은 내부적으로는 통합되면서도 등급이 분명하고 외부적으로는 개방된 도시체계를 갖춘 나라에서 나타났다. 민족국가에서는 도시체계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도시는 제대로 작동하는 민족국가의 틀에 반드시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가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산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성장 잠재력이 높은 도시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가 나선 조정(調整)은 법적·재정적 통일성을 높였고, 교환과 통신의 표준을 제시했다. 또한, 공공 목적의 도시 기반시설을 설계할 때 기준을 제시했으며 건설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체계의 형성과 건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민족국가시대'에도 개별 국가가 반드시 대도시보다 '강대'하지는 않았다. 대도시는 (국가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795-6)


"1870년 무렵에 기차를 타고 유럽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도시에 오기까지는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는 기술을 이용했지만 일단 도시의 기차역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말이 끄는 운송수단에 의존해야 했다." "걸어 다녀야 하는 도시에서 일터와 집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수는 없었다. 주거 밀도가 높은 빈민가가 형성된 이유가 이것이었고 빈민가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또한 이것이었다. 저소득 인구도 감당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을 찾아내는 일은 도시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다. 공업화 시대 이전의 교통기술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공업시대'로 진입한 뒤에도 전통적 교통수단이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마차는 도시교통에서 중요한 초기의 발명품이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가격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는 미국인의 발명품이었고 1832년에 처음으로 뉴욕 거리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도시 여객마차가 파리의 거리에 등장했다."(878-9)


"마차와 마차철도는 사회공간의 분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차버스의 요금과 교통노선 주변의 지가 상승을 감당할 수 있는 중산계급은 일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옮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사회학에서 말하는 작업장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마차교통은 철도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시 교통의 여러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은 궤도전차가 도입된(1888년 미국) 뒤의 일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전차는 전기적 에너지를 회전구동력으로 전환시킨 기계장치였다. 궤도전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내 교통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왔다. 궤도전차의 속도는 마차철도보다 두 배나 빠르면서도 요금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전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운임 하락의 파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십 년 전에 대서양을 건너는 우편 증기선의 운임이 떨어졌을 때와 거의 같았다."(880-3)


"단거리 대중교통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은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이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은 런던이었다. 지하철은 철도기술과 하수도 공사를 통해 터득한 터널기술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1860년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고, 3년 뒤에 첫 번째 지하철 노선─길이 6킬로미터의 '메트로폴리스 라인'(Metropolis Line), 세계적으로 지하철의 통칭인 '메트로'(Metro)가 여기서 나왔다─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깊이 15-30미터의 지하에 건설되었는데 진정한 의미의 지하터널(tube) 방식은 아니었다. 지하 굴착기술이 성숙한 1890년에 이르러서야 터널방식의 지하철이 등장했다. 이때부터 지하철 역이 땅속 더 깊은 곳에 설치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지하철의 동력도 전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하철 노선망의 점진적 확대는 도시의 통합과 교외지역의 개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지하철 운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운영자의 입장에서도 지하철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885-6)


7장 프런티어 (공간의 정복, 유목생활에 대한 침입)


"19세기에 들어온 이후로 도시에 대칭되는 극단은 더는 '농촌'(토지에 의존하는 농민의 생활권)이 아니라 '프런티어'(자원개발 과정에서 이동하는 영역)이다. 프런티어는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확산된다. 프런티어는 확장자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말하듯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동영역이 자기 쪽으로 접근하여 오는 모양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는 침략자의 창끝이다." "도시와 프런티어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도시도 프런티어도 19세기 인구이동을 끌어당긴 거대한 자석이었다. 그곳은 꿈의 실현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시와 프런티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사회적 조건의 삼투성(渗透性)과 가소성(可塑性)이다. 가진 것이 재능뿐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었다. 기회가 많다는 것은 동시에 위험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런티어에서 카드의 패는 다시 뒤섞여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945)


"프런티어의 식민화 과정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토지침탈의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비유럽 민족이 침입에 저항하여 일정 정도의 승리를 거둔 소수의 사례─예컨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Maoris)─가 있기는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원시 생존방식에 대한 공격은 거의 모두 원주민의 패배로 마감되었다. 토착사회는 전통적인 생존의 기반을 상실했고 동시에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땅에 등장한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 뿌리내릴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다.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피한 원주민일지라도 '문명화'와 개조 과정은 피해갈 수 없었다. '문명화'의 근본 내용은 토착문화에 대한 완벽한 멸시였다." "피해자인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의 외부세계의 점진적인 인정은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생활방식의 주변화란 기본적인 사실은 바꿀 수가 없었다."(948-9)


"프런티어에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제국의 경계가 전형적인 프런티어이다. 제국이 확장을 멈추는 순간 프런티어도 더 이상 잠재적인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 외부 위협을 막아내는 노출된 측면으로 바뀐다. 프런티어는 제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는 통제되지 않는 공간, 마지막 초소 넘어 저쪽의 게릴라와 비적(bandit)이 수시로 출몰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된다." "프런티어에 대한 제국의 태도는 구조적으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프런티어는 지속적으로 혼란스러우므로 제국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위협이다. 정복을 완성한 후 제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기를 지니고 순종하지 않는 개척민은 (식민지를 포함하여) 근대국가가 추구하는 무력의 독점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식민지의 변경에 위치한 프런티어는 그러므로 '임시적인'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곳은 '아직' 제국에 병합되지 않았거나 '머지않아' 제국에서 이탈할 지역이다."(955-6)


"미국의 프런티어는 언뜻 보기에 토지를 끝없이 공급해줄 것 같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비교적 평등한 분배와 보편적 번영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하층계급이 없는 위대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이 지점에서 미국을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와 비교해보면 하나의 의미 있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에서 프런티어의 토지는 처음에는 공공의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유동성이 높고 모험심이 강한 소농이 국가가 공급하는 토지를 흡수했고 그래서 투기는 초기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토지는 대지주의 손에 떨어졌다. 대지주가 소작인에게 좋은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런티어의 균등주의 정신을 믿었던 사람들은 절망의 제물이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의 하나는, 아르헨티나 정부는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추구했지만 캐나다는 균형 잡힌 사회질서를 중시한 차이였다."(960-1)


"전쟁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다. 교전 쌍방의 살육행위와 방어수단이 없는 평민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과 학살은 구분되지 않았다. 쌍방은 무장하고 있었고 폭력은 프런티어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18세기 말에 벌어진 식민전쟁이 남긴 유산이었다. 다른 문명 사이의 폭력사용과 프런티어 사회의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폭력이 뒤엉켜 있었다. 생활 속의 분쟁을 권총이나 소총으로 해결하는 '거친 서부'의 개척민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무장을 갖춘 집단이었다. 내전시기에나 통하던 '총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평화시의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폭력은 남성의 명예를 지키는 궁극적인 방식이었다. 미국 동부의 도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이 방식은 충돌을 완화하기보다는 격화시켰다('비후퇴의 의무'). 서부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자살형 '용기'를 숭배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980-1)


# 비후퇴의 의무(No Duty to retreat)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성(castle), 즉 보호구역이 있고 그곳에 침입해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미국 형법의 원칙


"서부의 중요한 특징은 자경단주의(vigilantism)였다. 법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때 혁명적인 무력으로서 자경단이 등장하여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거칠게 해석된 자위권 사상과 인민주권(Popula sovereignty)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처드 브라운의 분석에 따르면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자경단은 정규적인 법체계에 비해 인력소모는 많아도 비용은 적게 드는 방식이다. 1865년에 내전이 끝난 뒤로 약 40년 동안 권총을 든 영웅들이 만들어낸 공포의 심각성과 보편성은 정점에 다다랐다. 브라운은 이런 상태를 일종의 소규모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200-300 명의 악명 높은 전문살인자들(여기에 더하여 이보다 지명도가 낮은 수많은 전문살인자들)이 대지주의 지시를 받고 소규모 목장주와 자경농민을 상대로 대지주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이들은 정의감이 강하고 보통사람을 돕는 협객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상층부의 대리인이었다."(981)


"1874년 특허를 획득한 철조망이 대규모 생산을 통해 보급되자 '열린 서부'에서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분명한 선으로 표시되었다. '황야'는 분할되고 식민화되었으며 '유랑하는 야만인'(이것은 당시의 표현이다)은 생존공간을 잃어버렸다. 단일한 측량방식이 미국영토 전체에 적용되었고 프런티어를 넘나드는 생존방식은 불가능해졌다. 전술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은 최후의 패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인디언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은 인디언조차도 〈지금까지의 존재양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다른 존재로 바뀌라는 끊임없는 압력에 포위당한 종족이 되었다.〉 19세기 80년대에 마지막 전투적인 인디언 부족이 무장해체를 당하고 국가의 피보호자 신세로 전락했다. 1871년 정부는 앞으로 인디언과는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때부터 인디언국가는 더 이상 담판의 대상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988)


"남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의 발전사에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이 많았다. 두 곳에서 유럽이민과 토착민 사이의 첫 번째 접촉은 모두 17세기에 발생했고, 두 나라에서 19세기 30년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부의 인디언을 축출하는 정책을 펼쳤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보어인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독특한 점은 영국인이 희망봉을 점령한 뒤 백인집단이 분열했다는 것이다.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인 보어인 외에는 비교적 적은 숫자의 영국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영국인 공동체는 영국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독점했다." "보어인은 두 개의 공화국을 세웠다(트란스발 공화국(1852)과 오렌지자유주(1854))." "그러므로 19세기의 남아프리카에는 미국정부의 연방 '인디언정책'과 상응하는 '흑인정책'을 수립할만한 통일된 국가가 없었다."(1000-2)


"북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에서도 프런티어의 핵심집단은 자급자족의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무장한 개척민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에서는 수출수요를 겨냥한 대기업형 생산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8세기에 담배와 면화 플랜테이션이─대부분이 프런티어 지역에 있었다─광역 무역망의 일부를 형성했다. 19세기를 통틀어 프런티어는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현상으로 변해갔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은 내륙으로의 대이주 후에 이전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멀어졌다. 보어인들이 세운 두 개의 공화국에서 국가기구의 기능은 온전하지 못했고 재정은 불안정했다. 교회를 제외하고는 '시민사회'를 통합할 시스템은 없었다. 그러나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의 영토 안에서 19세기 60년대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금광이 발견되자 자족형 농업과 병행해 (세계시장으로 연결된) 광업 프런티어가 형성되었다."(1002-3)


"남아프리카의 지배층은 특정한 구역을 흑인(프롤레타리아)의 집중주거지로 지정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거주구역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homelands)이란 명칭을 붙인 흑인 보호구역은 인디언 보호구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뒤에 생겨났고(1951년 이후), 경제적인 기능을 상실한 인구집단을 격리시킬 목적에서 만든 야외감옥이라기보다는 흑인 노동력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경제 분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흑인 보호구역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세워졌다. 하나는 보호구역 내의 모든 흑인 가정이 경작을 통해 자급자족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하여 물리적 재생산 비용이 최소 수준에 머물게 된) 남성 노동자를 신흥 경제영역으로 유입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아직도 존재한다. 남아프리카의 '고향'은 지도 위에서 이미 사라졌고 다만 토지소유권의 분배에서는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1004-5)


"미국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중앙집권적인 계층제 구조의 제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체제였다. 제국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마 유목민이 통치하며 주변의 정주형 농업사회에 기생적인 초원 제국이다. 다른 하나는 자국 농민으로부터 직접 징세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제국이다. 두 유형 사이에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초기에는 구조적으로 몽고제국과 유사하게 군사지도자 사이에 맺어진 느슨한 연맹으로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제국으로 변했다." "청제국은 1760년대까지 거침없이 성장하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확장하는 러시아제국을 만나게 되었다." "18세기 말, 한때는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유목민이 세운 오래된 나라들이 모두 대제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런 상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끝이 났다."(1015-6)


"프런티어는 파멸의 장소이면서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장소다. 파괴와 건설은 흔시 변증법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프런티어는 폭력적 무정부주의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현대 정치와 사회의 요람이었다." "20세기초,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과잉에 따른 자원부족의 위험을 피할 충분한 '생존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열등한 민족이 적절치 못하게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는 것은 강대국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주장이 극우단체와 여론 주도층 내부에 자리 잡았다. 이런 생존공간 전략을 실행한 나라는 대부분 20세기 30년대에 일어선 신흥제국─이탈리아 파시스트정권은 리비아에서(에티오피아도 점령했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일본은 1931년 이후 만주에서,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때 단명으로 끝난 동부제국(Drang nach Osten)에서─이었다. 이 세 가지 사례는 프런티어전쟁을 통해 민족의 세력을 증명하고, 토지약탈을 통해 민족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1033-4)


8장 제국과 민족국가 (제국의 지구력)


"국제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는 전쟁과 평화─전쟁의 부재상태─이며, 전쟁을 피하는 것은 지고의 선이었다. 19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관계가 탄생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양극' 핵 대치상황이 종결되면서 냉전과 양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가지 전쟁방식과 국제관계의 행태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런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국제관계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945년 이후로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발동하는 전쟁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침략전쟁은 더는 합법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이미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19세기와는 달리,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이상 '현대성의 증명'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아시아 국가의 핵무기 보유의 상징적 의미는 다른 범주의 얘기다."(1098-9)


# 19세기에 이루어진 국제관계의 발전과 변화 양상

1. 국민개병제 확립 : 군대는 더 이상 통치자의 도구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정치적 의지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2. 국가이익 지상주의 : 통치자나 왕실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인 '(민족)국가'의 이익이 국제정치에서 핵심이 되었다.

3. 기술발전 : 민족국가들은 기술 발전 덕분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파괴 능력을 확보되게 되었다.

4. 산업생산력 증대 :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산업생산력의 격차가 확대되고 이는 군사기술상의 격차로 이어졌다.

5. 국가체제의 세계화 : 유럽 제국주의와 비유럽 강대국(미국 및 일본)의 부상은 세계적 국가체제를 정착시켰다.


"19세기의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제국이 더 많고 민족국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1900년 무렵에 제국의 시대가 머지않아 끝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3대 제국─오스만, 호엔촐레른, 합스부르크의 세 다민족국가─은 사분오열되었지만 그래도 제국의 시대는 계속되었다. 서유럽의 모든 식민제국은 물론이고 필리핀 한곳만 식민지로 갖고 있던 소형 식민제국 미국은 흔들림이 없었다. 종주국 자신의 발전상을 보자면 20세기 20, 30년대에 이들 제국은 경제와 정신면에서 최고점에 도달했다. 신생 소비에트정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러시아제국 말기에 정복했던 카프카스지역과 중앙아시아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 일본, 이탈리아, (단명했던) 나치독일은 옛 제국을 모방해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일어난 뒤에야 (1956년의 수에즈운하 위기에서부터 1962년의 알제리전쟁 종결까지) 제국의 시대는 종말을 향해 다가갔다."(1123)


"19세기가 '민족국가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19세기에 하나의 새로운 사유체계와 정치적 신화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강령과 정책으로서 받들어졌고 민중의 정서를 자극해 동원하는 도구로서 작용했다. 민족주의는 시발점에서부터 강력한 반제국주의의 색채를 드러냈다. 나폴레옹시대에 프랑스의 '이민족통치'를 받은 경험이 독일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여러 곳에서─러시아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만제국, 아일랜드를 가릴 것 없이─새로운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목표가 예외 없이 민족국가 수립은 아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서구에 맞서 생겨난 '반식민침략운동' 역시 독립된 민족국가 수립이 목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에 진입한 후, 엘리트들이 민족해방이란 명분의 동원능력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이차적 저항'이 일어났다."(1123-4)


"19세기 유럽에서 제국의 세계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새로운 민족국가의 수는 손가락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된 정치적 실체의 숫자는 역사에 전례가 없는 속도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8세기 중엽, 아프리카, 무굴제국이 해체된 뒤의 인도, 자바섬, 말레이반도에서 각종 형태의 정치체제─왕국, 토후국, 술탄국, 부족연맹, 도시국가 등─는 그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분명한 것은 1800년 무렵 여전히 수천 개를 헤아리던 정치적 실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등이 통치하는 40개 가까운 식민지로 정리되었다. 식민지 열강의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은 아프리카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반대였다. 그것은 분할이 아니라 통치지역의 강제적인 합병과 집중, 떠들썩한 정치 기반의 대청소였다. 당시 아프리카 전체에서 민족국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1149-50)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안정된 민족국가 대 불안정한 제국'이란 관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념의 뿌리는 민족은 자연스러우며 본원적이지만 제국은 인위적인 권력관계로서 민족이 이탈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사상이다. 고대의 중국과 서방 양쪽에서 제국의 흥망성쇠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표면현상의 착각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은 승리자의 자세로, 멸시와 애석함의 감성으로 아시아 대륙 제국의 쇠락에 대해 예언을 쏟아냈다. 그들은 국제적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아시아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만제국의 해체는 최종적으로 1차 대전 이후에야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에 왕조제도가 붕괴했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혼란을 경험한 뒤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제국의 재건을 성공적으로 실현했다."(1152-3)


"다른 제국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는 식민지란 개념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이 제국에는 심지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처럼) 차별받는 '내부' 식민지도 없었다." "이 제국은 통일성이 결여된 다민족 제국, 역사적 연원이 다른 많은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독자성이 강한 지역과 민족은 헝가리였다. 1867년, 헝가리는 반(半)자치왕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헌법체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중군주제' 제국에 합병되었다. 헝가리는 자신의 양원제 의회와 정부를 가졌다. 이중제국에서 헝가리의 지위는 영국제국 내에서 캐나다 자치령의 지위와 대체로 동일했다(캐나다 자치령도 1867년에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내부통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은 문화를 통일시키고 동질감을 강화하기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수평방향의 사회통합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제국의 단결은 군주란 상징과 다민족 장교단을 통해 최고 계층에서만 유지되었다."(1180-1)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제국은 제국의 가장 전형적인 두 가지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폴레옹은 짧은 시간 안에 제국의 우수한 엘리트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들을 각지로 파견했고 순환근무제를 통해 이들을 관리했다." "나폴레옹제국은 극도로 국가통제주의적인 정치체제였으며,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현대적 직능을 갖추었으나 신민에게는 제도화된 발언이나 정치참여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제국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제국도 피정복 사회의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토착 지배자와 토착 엘리트와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영국 모델에서는 허용된) 최저한도의 형식적인 대표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폴레옹의 확장계획 전체가 강렬한 문화적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우월감의 바탕에는 혁명시대 이후 세속화된 프랑스 사회가 계몽사상과 문명의 정점을 대변한다는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1184-5)


"1900년 무렵, 식민행동의 방식에 변화가 발생했다. 세기가 교체될 무렵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복은 기본적으로 완결되었다. 평화의 시기에 식민열강은 식민통치의 체계화, 비교적 폭력을 적게 사용하는 식민정책의 단계를 열어갔다. 목표는 하나, 프랑스의 식민 이론가가 말한 '가치안정화'(mise en valeur)였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제국에서,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1905년 이후의 시기를 당시의 식민상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데른부르크시대'라고 부른다." "같은 시기에 '가치안정화'가 가장 철저하게 시행되어서 다른 식민열강의 모방의 대상이 된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모든 식민세계가 그렇듯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식민정부는 현지 민중의 교육과 훈련을 중시하지 않았고 1901년 이후의 개혁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력자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은─'부족'이란 유럽과 비교했을 때의 표현이다─어쩌면 유럽 식민주의의 최대의 죄악인지 모른다."(1196-8)


"대형 플랜테이션과 특허 회사의 활동 지역은 통상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일종의 '사적인 제국'에서는 엘베강 동쪽의 융커의 장원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법률은 간접적으로만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심지어 법률로 보호받는 영지를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허회사가 아시아에서 철저하게 몰락한 뒤로(1858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아시아에는 새로운 반(半)관영 식민 대리기구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남만철, SMR)였다. 남만철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만주의 남단(요동반도)과 러시아가 부설한 현지 철도의 남단을 부분 소유했다. 이 회사는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는 식민권력이 되었다. 이 회사가 세운 유사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철도 식민지가 중국 동북의 경제 핵심지역이었으며 이곳은 또한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공업 기지이기도 했다."(1201)


"19세기에 영국제국은 영토의 면적이나 인구의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큰 제국이었다. 영국제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제국과 달랐다. 영국은 제국형 민족국가라 할 수 있었다. 내부 상황을 보더라도 제국시대 이전부터 영국은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확정된 영토를 가진 민족국가였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민족의 이익을 제국의 이익으로, 또는 제국의 이익을 민족─네 개의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이기는 하지만─의 이익으로 정의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가 없는 민족국가였다. 영국은 제국적 민족주의라는 역설로 가득하다." "19세기를 통틀어 영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는 문명의 전파자라는 강렬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전제적인 권력의 압박을 받으면서 미신에 휘둘리고 있는 비기독교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같은 관용적인 수사(修辭)는 언제나 수많은 지지자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1213-5)


"영국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이념의 출생지였다. 영국인─특히 존 스튜어트 밀─이 만들어낸 인권문제에 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제로서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이고 중요한 사례가 바로 노예무역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투쟁이었다. 1807년, 노예제 폐지파는 영국 의회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그 뒤 30년 동안 제3국의 노예운반선을 나포하여 실려 가는 노예를 석방하는 일이 영국 해군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포괄적 개입주의는 영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부대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슘페터는 영국의 목적은 해상 패권의 쟁취가 아니라 〈해상의 교통경찰〉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이 세계를 향해 지니고 있던 태도의 이념적 핵심은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었다. '문명화의 사명'은 유아독존적 광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수단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졌다."(1215)


"영국제국이 로마제국·18세기 청제국과 다른 점은 문명 세계 전체(orbis terrarum)를 통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영국은 어떤 대륙에도 대적할 자가 없는 독점적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영국은 기타 강대국의 도전과 경쟁을 마주해야 했다. 영국제국은 동질적인 영토적 집합이 아니라 중추형밀집점(中樞形密集点)과 통제하기 어려운 중간지대가 함께 어우러져 구성된 체제였다. 2차 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미국과 다른 점은 미국은 기술적으로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폐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19세기의 영국제국은 지구의 어느 곳이든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군사적 개입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1849년, 영국의 일부 민중이 헝가리혁명을 돕기 위해 개입하라고 호소했으나 당시로서는 개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은 어느 정도는 해상의 헌병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찰'이 될 수 없었다."(1232)


9장 강대국체제, 전쟁, 국제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19세기 말에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모든 국제관계는 단일한 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유럽 정치와 주변부를 개념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전부터 내려오는)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여러 장소─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심지어 1902-1903년 겨울에는 베네수엘라─에서 부딪쳐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국의 충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었거나 그 영향이 충분히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이 불문율인 '놀이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 '놀이규칙'이란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이 좌절되었을 때 그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보상'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용인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충돌과 대립은 유럽 각국 사이에 항구적인 불신감을 낳았지만 어떤 충돌도 유럽에 주는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촉발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1291)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국제체제가 흔들린 것은 외부 영향 때문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쉬더는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다섯 강대국으로 구성된 유럽의 국제체제가 하나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패권'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해외 이익의 균형은 모두가 예외 없이 쌍방의 협조하에 실현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집단행동은 오직 한 차례뿐이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의화단에게 포위된 공사관 구역을 포위망을 뚫고 구조했다. 연합군 군대 가운데서 일본과 미국 군대가 주도 작용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참여는 이 제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가장 야심찬 외교행동이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제국주의는 개별 제국주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5대 강국이 대륙을 초월한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강국으로서 등장했을 때 유럽의 국제체제는 5대 강국 사이에서 작동했다.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1291-2)


"남아메리카에서 각국이 독립한 뒤에도 정치지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역 전체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국가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로서의 위상을 찾고 있었다. 어느 국가도 (포르투갈 배경을 갖고 있어서 다른 나라와는 구분되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패권국가로 올라설 능력이 없었다." "열강과 이들 국가 중의 개별국가는 후견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것이 좀더 넓은 범위의 질서로 발전하여 패권적 지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지나간 독립전쟁 시기에 지녔던, 미국의 모형을 본받아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연방을 만들겠다던 꿈을 기억하고 다시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틴아메리카 세계에 진정한 강대국이 없었다는 것은 약점이라기보다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라틴아메리카 세계에는 (세기말에) 점차 강대해지고 있던 미국에 맞설 군사적 능력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1298)


"중국제국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를 정치적으로 효율적으로 운용해왔다. 이 세계질서는 근대 유럽이 다중심 국제체제와는 달리 고도로 발달한 단일중심체였다." "이 세계질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구성원과 구성원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명확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질서는 광의의 국제체제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전체 배치가 완전히 중국 조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국제체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개별 구성원은 주권과 평등한 관계를 제약 없이 누린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등급의식은 중국인의 국가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 종주국-속국 관계를 관리하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인도인, 말라야인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은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1303-4)


"20세기 후반과 비교할 때 19세기에 강대국의 지위와 군사적 성취는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일본처럼 경제적 거인이 사실상 군사적 비중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1900년 무렵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내전이 끝나고 경제가 빠르게 발전할 때에 외교적 위신이 크게 올라갔지만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강대국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95년의 전쟁에서 중국을 이기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역적 강국으로서 존중받았지만 1905년 러시아를 꺾은 뒤에야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문화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던 독일은 1871년에 들어와 갑자기 강대국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와는 반대로, 중국, 오스만제국, 스페인은 군사적 재난을 겪은 후 세계로부터 존경받던 강대국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렇게 세계를 선도하던 국가의 명단에 변화가 생긴 배후에는 조직된 폭력의 역사의 보편적 추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1307-8)


"19세기 유럽의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이론 중의 하나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하의 세계평화란 관념에 뿌리를 둔 좀더 오랜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기적 이성의 원칙에 뿌리를 둔 이론이었다. 1814-15년의 빈체제는 이 두 가지 논리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국제체제 안에서 상호 합의된 충돌 억제절차를 통해 개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세기 유럽의 확장 과정에는 영국의 '보호국' 법제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보호국 제도란 한 국가가 종주국에게 외교관계의 후견인 역할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 식민과정에서 보호국의 설치는 〈일종의 은폐된 형식의 병합〉이었다. 이런 법률형식이 환영받은 이유는 종주국으로서는 각종 경로를 통해 보호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면서도 피점령국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은 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3국(즉, 다른 하나의 종주국)이 보호국 관계의 수립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면 국제법상 장애는 아무것도 없었다."(1327, 1343)


"1815-70년이란 시기는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좁은 범위의 귀족 엘리트 전문가 집단이 독점한 고전적인 권력 개입의 시기였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전에는 왕조의 이익이 '현실주의' 외교정책의 길목을 막고 있었고 외교의 전문직업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그 후에는 신문매체와 유권자의 정서가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정서를 조작하는 위기를 조성하고 식민지(베트남)를 점령함으로써 국내의 사기를 높였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누구의 간섭과 비평도 허락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도 때로는 대중동원이란 카드를 사용했다. 예컨대,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프로이센을 상대로 한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에게 애국주의의 이름을 빌려 독일인을 단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민족주의와 언론매체가 개입하는 상황에서 대중의 정서적 반응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갔다."(1344-5)


10장 혁명 (필라델피아로부터 난징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19세기의 정치는 혁명적 정치였다. 19세기의 정치는 '오래된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으며, 미래를 바라보며 국부적인 이익(특수 '계층' 혹은 계층 연맹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 또는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이익으로 끌어올렸다 유럽에서 '혁명'은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이념이 되었으며 처음으로 '좌익'과 '우익'을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 '긴' 19세기 전체가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이 태어난 1783년은 국가의 새로운 형태의 초석이 놓인 해였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혁명의 물결은 일찍이 18세기 60년대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본질을 말하자면 혁명의 시대는 바로 이때 막을 열었다. 그렇다면 19세기는 한 차례의 혁명이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을까 아니면 여러 차례의 혁명이 발생한 시대였을까. 어느 쪽 해석도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역사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관점은 단수의 혁명을 선호하고 구조를 중시하는 관점은 복수의 혁명을 지지한다."(1389-90)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경험했거나 주도한 사람은 새로운 혁명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1776년과 1789년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13개 주가 영국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민제헌의회를 구성했다. 이렇게 역사는 전례가 없는 연동상태를 연출했다. 이전의 폭력적 변혁이 새로운 병에 오래된 술을 담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결국 이전으로의 복귀였다고 한다면,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시대의 경계를 부수고 직선형 진보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혁명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지역적 사건이다. 더 나아가 1776년과 1789년의 혁명이 우연히 발생했기 때문에 혁명이념이 태어났다. 이후의 모든 혁명은 이러한 이념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라났다. 달리 말해 혁명은 모두가 모방이었다."(1390-1)


"혁명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정의는 협소한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의 목적과 그 철학적 근거를 따지거나 역사철학에서 말하는 '대혁명'의 특수한 작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실제적인 결과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혁명을 만날 수 있다. 혁명은 특수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인 항의 사건이며 이전 정권의 집권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제도의 변경이다. 사회과학자의 신중한 표현을 빌려서 정의한다면 혁명은 〈신엘리트가 성공적으로 구엘리트를 전복시키고(통상적으로 상당한 폭력과 대중 동원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후 사회구조와 함께 권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다. 이 정의는 역사철학의 시각에서 혁명을 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 근대성의 열정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어느 시기에나 이런 의미의 혁명은 있었다."(1391-2)


"역법 상의 19세기(1800-1900년)는 통상적인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세기에 북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혁명의 성과가 나타났지만 '대'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1800년 무렵 혁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영웅적인 시작의 모방이거나 무기력한 복습이었다. 또는 비극이 끝난 뒤의 광대극이거나 1789-94년에 진행되었던 위대한 봉기를 소란스러운 소규모로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역사는 1917년 러사이에서 다시 한번 전례가 없는 극을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라기보다는 반항의 세기였다. 19세기에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라는 정치무대에서 임계점을 넘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1849-1904년(즉, 1차 러시아혁명 기간)에는 유일한 예외인 1871년의 실패한 파리 코뮌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혁명적 상황'은 결국 '혁명적 행동'으로 전환되지 못했다."(1394)


"그러나 19세기에는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히 존재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은 가장 급진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적 실험이면서 혁명이란 명칭을 거부했다." "메이지유신은 대다수 유럽 정치평론가들의 시야 밖에서 일어났고, 그와 관련된 지식은 유럽인의 혁명과 개혁에 관한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천황 직접통치의 외피를 걸친 정치체제 개혁을 합법화하기 위해 현실에서 현존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려는 일련의 조처를 '유신' 또는 '회복'으로 위장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예방하거나 보편적인 원칙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빠른 시간 안에 효율을 높이려는 혁신 방식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각자의 발원지에 미친 영향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불공정과 언론자유 결핍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통해 전 지구적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성장 중인 국가의 목표였다."(1397)


"대략 1765-1830년 무렵에는 몇몇 지역에서 혁명적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를 혁명 밀집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건의 여파는 모든 대륙에 미쳤다. 이처럼 상호 영향을 미치는 혁명의 발원지는 미국과 유럽대륙에 있었다. 그래서 '혁명적인 대서양지역'이란 개념이 합당한 것이다. 혁명이 두 번째로 집중적으로 발생한 때는 1847-65년이었고 이 기간 중에 유럽혁명(1848-51년), 중국의 태평천국운동(1850-64년), 인도의 민족봉기(1857년), (특별한 사례로서) 미국의 내전(1861-65년)이 있었다." "세 번째 혁명의 물결─1905년 러시아, 1905년 이란, 1908년 터키, 1911년 중국─이 유라시아대륙을 휩쓴 때는 세기가 바뀐 뒤였다. 1917년 2월에 세계대전이란 특수한 형세에서 태어난 제2차 러시아혁명도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세기 중반과 비교할 때 이 시기 개별 사건 사이의 상호 영향은 좀더 커졌다."(1402-3)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포한 아이티혁명은 자료도 부족한 데다 화제가 될 만한 극적인 사건도 알려진 게 없어서 오랫동안 혁명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예해방 주장을 제외한다면 아이티혁명에서 비롯된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정치사상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령 카리브해 지역이 처음부터 전체 대서양 지역의 혁명담론인 자유란 주제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일부는 계속 노예를 소유했고, 1787년의 미국 헌법은 물론이고 그 후 헌법수정안에서도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완고한 착취제도의 피해자로서 흑인과 유색인종은 프랑스대혁명의 관념, 이상, 상징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1794년의 선언이 밝힌 대로 '피부색을 나누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서 시민의 신분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1422-3)


"1778년 이후의 북아메리카 반란자들과는 달리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자유투사들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얻을 수 없었고 미국의 지지도 없었다. 아이티혁명 과정에 있었던 일시적인 외부 강대국의 직접적인 개입도 없었다. 대서양 해역 전체를 장악한 영국 해군이 보호막의 역할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다른 혁명과는 달리 크레올인과 복원된 스페인 왕조 대표 사이의 결정적인 군사적 충돌에 제3자의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가볍게 보아서 안 될 것은, 처음(즉, 1810년 무렵)에 프랑스가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스페인 왕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꺼이 나폴레옹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라틴아메리카인은 없었다. '개인적인' 지지가 중요한 군사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해적은 정부의 묵인하에 스페인 함선을 공격했다. 영국 상인은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였다."(1430-1)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끝나자 곧바로 1830-31년의 유럽혁명이 이어졌다. 혁명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과거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혁명시대의 종결로 분류된다고 한다면 1830-31년의 유럽혁명은 혁명시대의 한 부분으로 분류된다. 1830년 7월 말 파리에서 발생한 수공업자들의 폭동으로부터 촉발된 혁명적인 상황이 프랑스 전역, 네덜란드 남부(이 사건이 끝난 후 이 지역은 독립국 벨기에가 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연방의 일부 가맹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유럽에서 상승세를 탄 왕정복고 세력은 1815년 이후 각처에서 약화되었으나 정치적으로 패배한 곳은 프랑스뿐이었다. 그런 프랑스에서조차도 정치적 활동공간을 넓힌 주요 사회세력은 '저명인사'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집단이었으며 이들이 7월혁명 이전 엘리트계층의 핵심을 형성했다."(1433-4)


"영국도 1830년의 유럽혁명운동에 참여했다. 1830년 여름, 국왕 조지 4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 프랑스로부터 7월혁명의 소식이 들려왔다. 1832년 7월, 극단적으로 대립을 겪으면서 의회는 일련의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시기에 영국은 19세기 이래 가장 심각한 내정의 위기를 경험했다. 영국이 혁명 앞에서 가장 취약했던 시기는 1790년대나 1848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이 종결된 뒤의 15년 동안이었다. 나폴레옹전쟁이 남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초기 공업화의 후유증이 현행 체제에 대한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최종적으로 휘그당 출신의 찰스 그레이 수상이 웰링턴 공작의 도움을 받아 통과시킨 개혁 법안은 남성 투표권자의 범위를 조심스럽게 확대하고 신흥 공업도시의 의석수를 늘렸다. 그러나 법안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먼저 발생했던 것이다."(1440-1)


"경제사학자들이 공업화의 시대를 19세기까지 연장한 뒤로 혁명의 시대는 거대한 역설을 보았다. 에릭 홉스봄이 앞장서서 퍼뜨린 이중혁명─프랑스의 정치혁명,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치적 근대는 혁명시대의 위대한 문건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1776), 미국의 「헌법」(1787),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제 폐지법령(1794), 볼리바르의 앙고스투라─앙고스투라 회의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독립전쟁 중에 시몬 볼리바르가 소집하여 1819년 2월 15일에 앙고스투라(현 베네수엘라의 시우다 볼리바르)에서 열린 회의다─연설(1819)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건들이 등장했을 때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아직 혁명적인 충격을 주고 있지도 않았다. 대서양혁명의 동력은 공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충돌이 아니았다. 대서양혁명이 '부르주아'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특징은 공업화와는 무관한 것이다."(1444)


"1900년 이후 유라시아에서 발생한 네 혁명의 목표는 서유럽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는 구식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러시아와 아시아에는 법률로서 권력을 제한하는 전통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서유럽과 비교할 때 이 지역 국가에서 그런 전통의 발전은 매우 빈약했다. 귀족과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집단의 세력은 서유럽(또는 일본) 봉건제도처럼 통치자의 절대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적이 없었다. 이 지역 각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군주의 지위는 루이 16세나 영국의 조지 3세보다 더 굳건했다. 본질적으로 이 지역 국가의 정치체제는 통치자가 신분대표회의나 의회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 없이 최종적인 발언권을 갖는 전제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통치자가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때 언제나 독단으로 전횡하지는 않았다. 다른 체제와 비교할 때 이런 체제에서 권력의 행사는 많은 부분이 왕좌에 앉은 인물의 개인적 품성과 소양에 따라 결정되었다."(1482)


# 유라시아의 네 혁명

1. 러시아 혁명(1904-07)

2. 헌정(憲政)혁명이라 불리는 이란혁명(1905-06)

3. 청년터키당이 주도한 오스만제국혁명(1908)

4. 중국의 신해혁명(1911)


"혁명가들이 현행 통치제도에 맞설 때 사용하는 무기─또한 각국 혁명가들의 공통자산─는 입헌주의 사상이었다." "네 혁명은 각자의 성문헌법을 만들어냈다. 서방의 표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본국 정치문화의 특성에 맞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입헌제는 결코 유럽에 대한 단순하고 기회주의적인 모방이 아니었다." "널리 찬양받는 표본은 1889년에 제정된 일본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외국의 경험을 참조하고 본국의 현상을 결합한 표본적인 헌법이었다. 일본은 한 국가가 흥기하는 과정에서 헌법이 국가통일의 정치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헌법은 국가기구의 조직체계에 관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인민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문화적 성취이기도 하다. 일본은 헌법 내용에서 유럽의 인민주권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럽과 흥기하는 아시아 국가의 새로운 헌법전통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었다."(1484-5)


"네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고, 중국은 1900년 의화단운동으로 8국 연합군의 침입을 맞고 있었고, 오스만제국은 발칸지역에서 다시 좌절을 겪고 있었고, 이란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 영토 안에서 각자 세력권을 넓히고 있었다. 이들 네 나라는 다 같이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나머지 세 나라와 비교할 때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던 것이다."(1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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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1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6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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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책은 한 시대의 초상화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한 세기를 완벽하고도 백과전서식으로 다룬 것처럼 가장할 의도는 없으며, 상세한 자료를 갖춘 해설서로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 책과 베일리의 저서(『현대세계의 탄생』)는 다른 저서들보다 앞서서 지역을 국가, 문화 또는 대륙으로 나누는 방식을 버렸다. 두 저작은 다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이것에 관한 설명을 위해 별도의 장을 두지 않고 저서 전편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두 저작은 다 같이 베일리가 그의 영문판 부제에서 언급한 '세계적 연결'(global connections)과 '세계적 비교'(global comparison)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없다고 가정한다. 두 가지는 서로 결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아가 모든 비교가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결과 비교를 적절히 통합할 수 있다면 때로는─반드시는 아니지만─현실과 동떨어진 비교보다 훨씬 더 많은 수확을 가져올 수 있다."(30-1)


제1부 근경近景


1장 기억과 자기관찰 (19세기의 영구화)


"오늘날, 리스본에서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지어진 오페라극장은 여전히 관중으로 넘쳐나고 그곳에서 상연되는 작품도 대부분이 19세기 작품이다. 19세기 중엽, 오페라는 세계 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파리에 '상륙'했다. 1830년 무렵 파리의 음악사는 바로 세계의 음악사였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수많은 경쟁자들이 몰려들어 음악가들의 '자석의 성'(Magnetstadt)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페라는 바다 건너 식민지에까지 전해졌다. 프랑스문화의 우월성은 식민지에 세워진 당당한 오페라극장 건물을 통해 입증되었다. 가장 웅장한 건축은 1911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이었다." "오페라가 북아메리카에 뿌리내린 시기는 좀 더 빨랐다. 1859년,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 오페라하우스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883년에 완공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이 되었고 동시에 미국 상류사회의 자기과시 무대가 되었다."(76-7)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전의 어떤 세기보다도 기록물이 중요해졌다. 유럽에서 19세기는 국가가 모든 기록을 차지한 시대였다.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국가 기록보관소는 통치행위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보관된 장소였다. 기록보관소와 함께 직업과 사회적 신분의 하나로서 기록 관리원과 전문적으로 문헌을 연구하는 공공기록 역사가가 등장했다." "기록보관소는 유럽인의 발멸품은 아니지만 19세기에 유럽만큼 문헌자료의 수집에 관심을 가졌던 다른 지역과 나라는 없었다. 중국에서는 문헌사료의 보존은 오랜 옛날부터 국가의 직무로 인식되어 왔으나 개인이 수장에 흥미를 보인 경우는 드물었다. 과거든 현재든 극소수의 비국가 단체만 자신의 기록보관소를 보유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헌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일찍부터 많은 양의 문자자료가 생산·보존되어 왔고 이를 관리 연구하는 전문가집단이 양성되었다."(82-4)


# 기록보관소와 유사한 사례로 공공도서관, 공공(혹은 국가)박물관, 백과전서 편찬 등이 있다.


"19세기 신발명품의 하나가 세계박람회였다. 이것은 파노라마식 시각과 백과전서식 기록의 가장 역동적인 결합이었다. 세계박람회의 시발은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만국공업박람회(1851)였다." "이런 대형 박람회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박람회가 보여준 풍부한 상징성이다. 박람회는 세계평화와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대의 시작, 전 세계를 향하여 영국의 경제적·기술적 우월성을 확인시키는 기회, 야만과 혼란을 이긴 제국 질서의 개선곡 등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하나는 박람회에서 적용된 정확한 물품 분류법이다. 박람회는 전시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강(綱, class), 유(類, division), 아류(亞類, subdivision) 등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법의 배후에는 시간의 종적계층화(縱的階層化)란 개념이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다 같이 높은 단계의 문명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박람회라는 기회를 이용해 펼치고자 하는 의도였다."(94-5)


"이 시기의 주요한 사상 유파─실증론, 역사론, 진화론─는 지식의 누적성과 비판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인식과 지식이 가진 공공적 의의에 대한 인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식은 교육의 기능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실용적 가치도 가져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등장하자 새로운 사물과 낡은 사물이 서로 융합될 수 있었다.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문화에서도 학문이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한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문명에서는, 예컨대 일본과 중국에서는 교육계의 엘리트들이 유럽의 새로운 이념과 제도가 전파될 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더 나아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보태기도 했다." "19세기는 기억이 잘 보존된 시대였다. 지금도 19세기가 선명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에 탄생한 수장과 전람의 제도와 기구는 그것들이 창설되던 당시에 설정된 여러 가지 목표와 제약을 넘어서 지금까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99)


"19세기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은 19세기 사람들이 그 시대에 관해 남겨놓은 방대한 서술과 해석이다." "사람들이 사회 저층의 생활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사회보도'와 '실증조사'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등장했다.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이거나를 따질 것 없이 모든 학자가 부르주아지─대다수의 학자들 자신이 이 계급 출신이었다─를 비판의 확대경 아래에 놓았다." "사회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문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파노라마식 관찰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세바스띠앙 메르시에가 내놓은 『파리화집』(파리의 도시생활을 묘사한 12폭의 화집)이 이런 관찰방식의 전범이 되었다. 메르시에는 철학적 방식으로 파리를 묘사하기를 거부했다. … 엥겔스는 1845년에 출판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서 〈대영제국 무산계급의 전통적인 환경〉을 묘사했다." "엥겔스가 저서에서 묘사한 개인과 그들의 생활상황은 실명과 함께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신뢰성과 생동감을 더해주었다."(101-3)


# 사회보도와 유사한 사례로 사실주의 소설, 여행문학 등이 있다.


"지리학─무수한 여행과 끝없는 측량을 동반한─의 시야는 세계를 보면서 뿌리는 지역에 내려야 하는 과학이다. 지리학의 한 분파인 경제지리학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로서 생겨났고 식민 지리학은 서방의 약탈적인 영토 확장의 동반자로서 생겨났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관찰 기관으로서 최근애 생겨난 것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은 이론적 바탕을 갖춘 문제 제기를 통해 이왕의 사회보도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사회현상의 실증적 묘사와의 관련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제학의 영역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획기적인 저작 『국부론』(1776)이 나오기 전에 이런 관련성이 이미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추상적인 이론 모델을 수립하는 추세는 1817년 리카도의 저작에서 그 싹을 틔웠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배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관적 효용을 표현하는 수학적 이론과 시장균형 이론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제시된 1870년 이후에 나타났다."(115)


"19세기는 '현대' 통계학의 창립단계였다. 통계는 무작위적인 데이터의 집적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학적인 처리를 거친 결과이다. 국가는 꾸준히 통계업무를 늘려왔다. 복잡한 통계업무를 처리할 조직적인 역량을 정부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는 사회가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자기감독(self-monitoring)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방면에서 인간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일부 국가가 쌓은 통계지식은 학술과 행정 영역에서 실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과했다. 통계학은 이때부터 정치적 수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통계학자가 부득이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어떤 통계개념은 국가 관료의 손안에서 도구가 되었다. 기술적인 필요에서 만들어 냈던 사회통계의 범주─계급, 계층, 카스트, 인종─는 행정관서의 편의대로 사회의 모습을 빚어내는 권력이 되었고, 사실상 사회의 인식 자체를 규정짓는 권력이 되었다."(119, 126)


"19세기에 사실주의 소설, 통계학, 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신문이었다. 신문업이 뿌리를 내린 곳이면 그곳의 정치적 소통 환경에는 즉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언론자유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변혁을 추진하는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1789년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은 〈사상과 관점의 자유로운 표현〉을 〈인류의 가장 귀한 권리의 하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천이란 면에서 보자면 이 선언은 당시에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2제국(1851-70년)에서 집권자들은 처음에는 신문·잡지와 서적 출판에 대한 통제의 강화와 탈정치적 개조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이후 국가가 준의회제로 전환되면서 출판물에 대한 통제는 점차 완화되었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 파리코뮌 실패(1871) 후의 국가테러 수준의 억압정책이 폐지(1878)되고 나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공공 공간이 탄생했다."(127, 131-2)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표면적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을 기록하기 위해 광학과 화학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생생하고 진실한 영상기록이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을 경계로 하여 전체 19세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1827년에 세상을 떠난 베토벤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1849년에 세상을 떠난 쇼팽의 수척한 모습을 사진을 통해 알고 있다. 슈베르트는 초상화로 후세에 모습을 남겼지만 로시니는 그보다 5년 연상인데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초상 사진을 남겼다." "이 시기에 회화와 사진은 대부분의 경우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찍은 생생한 사진들, 즉 살아 있거나 죽어가는 군인들의 실제 모습은 영웅주의를 주제로 한 전쟁 회화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표지였다. 1888년에 값싸고, 휴대하기 쉽고, 조작도 간편한 코닥(Kodak) 필름 사진기가 나와 인류의 시각 기록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제공했다."(147-9)


# 뤼미에르 형제와 기술자 쥘 카르팡티에는 움직이는 영상 '시네마토그라프'를 1895년에 처음 공개했다.


2장 시간 (19세기는 언제인가?)


"나의 19세기는 몇 년 몇 월에 시작되어 몇 년 몇 월에 끝나는 시간의 연속적 통일체가 아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역사는 백 년 또는 그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이리하여······그 뒤로······〉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서사적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전환과 변화의 과정이다." "모든 역사적 변화의 시작과 종결은 여러 시점에서 발생한다. 그 시간적 연속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변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앞선 역사 발전단계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초기 근대'라고 하는 표현이 그 한 예다." "둘째, 19세기는 지금 이 시대의 '사전사'이다. 19세기에 시작된, 또는 19세기적 특징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변화가 1914년(또는 1900년)이 되자 일시에 멈춰버린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규범을 무시하고 시선을 20세기로 향할 것이며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까지 시야에 포함시킬 것이다. 19세기는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와 융합된, 역사 '속의' 19세기다."(196-7)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이 한 시대의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한다는 신비스러운 관념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역사적 시대구분은 '문화영역에서의 시간의 다양성'이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사의 중대 사건과 경제사의 중요 전환은 시간적으로 겹치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하나의 예술사조가 시작하거나 끝나는 시점은 일반적으로 사회사에서 새로운 발전이 생겨났다고 생각되는 시점과 관련이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대사건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미미할 뿐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전체 인류사에 획을 긋는 연도는 없었다. 역사를 뒤돌아 보건대 세계사적 영향을 미친 프랑스대혁명도 그 시대에 미친 영향을 보면 중간 규모 유럽국가의 군주가 왕위에서 쫓겨나 단두대로 보내진 사건이었을 뿐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혁명이) 외부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 내에 국한된 혁명적 강령과 정책이 아니라 그 강령이 군사적 확장을 통해 전파되는 과정이었다."(211-3)


"1차 대전이 폭발했을 때도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는 초기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더욱이 독감이 세계를 휩쓸자 형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겨우 몇 달 사이에 모든 대륙의 생산자와 판맨자가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이 불러온 충격을 느꼈다. 처음에는 1937년 7월 중국과 일본에서, 다음으로는 1939년 9월 러시아 서쪽의 유럽지역에서(독일의 폴란드 침공),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고 일본이 미국을 습격했을 때야 2차 대전의 시작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라틴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 미친 영향은 1차 대전 때의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1945년 이전에는 세계'정치'사에서 전체 인류가 동시에 근거리에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특정한 날짜는 없었다. 1945년 이후가 되어서야 인류가 공유하는 세계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13-4)


# 안장형 시기(Sattelzeit, 대략 1750년~1850년)의 특징

1. 유럽 정복국가의 등장으로 세계의 세력관계가 극적으로 변화

2. 서반구의 식민지 정착 사회에서 (캐나다를 제외하고) 정치적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음

3. 통합적인 사회적 연대의식과 시민적 평등이라는 새로운 이상 출현

4.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중 참여의 확대(여성, 인디언, 흑인노예는 여전히 배제)

5.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의 점진적인 전환

6. 산업혁명이 영국의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성장흐름으로 변모

7. 1830년 경은 유럽의 철학과 예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1827년 베토벤, 1828년 슈베르트, 1831년 헤겔, 1832년 벤담 사망)


# 빅토리아시대와 세기말을 이어주는 전환기(19세기 80년대)의 특징

1. 광물에너지가 생물에너지를 추월하면서 전 지구적 환경사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

2. 산업화의 지리적 범위가 끊임없이 확대되었고,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이 등장

3. 자본주의 내부의 구조개편(특히, 해외시장 개척)으로 세계경제의 연계성 확대

4. 제국주의 확장의 새로운 국면 전개(간접적인 영향력 행사에서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로 전환)

5. 정치 체제는 제각각이지만 세계 여러 강국들의 정치 질서가 안정기로 진입

6. 유럽의 문화적 부흥 시기(반 고흐, 세잔의 회화, 말라르메의 시, 드뷔시의 음악, 니체의 철학 등)

7. 비서방 세계에서는 강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적 자아의식의 등장


"많은 역사적 증거가 보여주듯이 노예제도의 종결은 해방된 노예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치 새로운 시대가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생활 가운데서 '노예제도의 사망'은 길고도 험난하고 거듭되는 실망의 과정이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 50년대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은 새로운 시간질서에 대한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혁명의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전통과 결별한 새로운 역법의 수립이었다." "18세기 말기 이후 시기의 특징은 시간 기록의 합리화와 그것을 근대세계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었다. 1792년의 프랑스,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1918년 2월의 러시아(볼셰비키 정권은 지체 없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다)의 경우가 그랬다.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이상국가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시간은 간단하고, 투명하며, 속임이 없었다."(256)


3장 공간 (19세기는 어디인가?)


"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긴' 19세기 개념과 기본적으로 중첩된다─는 쿡 선장이 첫 번째 세계일주 항해에 나선 1768년에 시작되었다. 이 항해에서 쿡 선장은 과학자 동료들과 함께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다. 그 후로 영국 해군은 탐험활동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다가 프랭클린 탐험대의 조난(1847년)을 만나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11년 12월,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착함으로써 지리발견의 찬란한 연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 후로도 산악·사막·해양탐험 활동은 여전히 활발했지만 인류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294-5)


"19세기에는 지리학의 중요 개념의 정의도 아직 유동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란 개념도 그 의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명료하지 않고, 특히 '스페인령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포르투갈어 사용지역'을 구분하려는 사람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이다. '서인도제도' 혹은 카리브해 지역을 라틴아메리카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시몬 볼리바르 세대는 '남부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라틴아메리카'란 명칭은 1861년에 범라틴주의(pan-Latinism)를 지지하던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들이 만들어냈고 곧바로 정치가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색채가 강해졌다." "그래도 '라틴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오래된 지역 개념이다. 지역 개념으로서 '동남아시아'는 1차 대전 기간에 일본에서 등장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인'에게는 문화적 동질감이 없었다. 이 지역 전체에 관한 첫 번째 역사서가 나온 것도 1955년 이후의 일이었다."(299-301)


"초기 근대사 지도에서 아시아대륙의 중간 부분은 경계가 모호하게 표시된 채 명칭도 '타타리'(Tartary)라고만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이곳을 '내륙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모호한 명칭은 아직도 개념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동방'(Orient)이란 아랍인, 터키인, 이란 무슬림이 거주하는 땅─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반도를 포함하여─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문화적인 개념이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근동'(Near East)이란 명칭이 외교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오스만제국과 한때는 오스만제국의 영토였으나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그 통치를 벗어난 북아프리카(이집트와 알제리)였다." "'중동'은 미국 해군장교이자 군사학자인 알프레드 마한이 1902년에 만들어낸 개념이다. 중동이란 명칭에는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전혀 없었고 영국과 제정 러시아가 서로 차지하려고 힘을 겨루는 페르시아만 이북 지역을 가리켰다."(301-3)


"오래전부터 유럽은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단일성과 함께 다양성을 유지해왔다는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으며 그 요소들은 무엇인가? 헤르더가 제시했고 19세기 초에 성행했던 낭만주의 민족학의 '3원론'은 유럽을 '라틴─게르만─슬라브' 3대 지역으로 나누었다. 많은 사람이 이 학설을 추종했고 심지어 1차 대전에서는 선전 주제로 이용했다. 훗날 나치는 이런 관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활시켰다." "서유럽이란 개념은 (1차 대전 이전에는 형성되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연대를 전제로 한다. 외교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었다. 민주주의-입헌주의란 가치관의 각도에서 볼 때 두 나라 사이에 동질성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국의 정치엘리트 계층은 나폴레옹 3세의 '독재정권'을 늘 불신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19세기에 관한 한 '서유럽'이란 곤혹스러운 지역개념이다."(339-41)


"19세기의 공간은 사실상 고도로 획일적이고 연속적이었고, 이는 정부가 개입한 결과였다. 미국의 토지법이든, 여러 나라(네덜란드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토지측량과 소유권 등기든, 지금까지 강력한 통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지역에 대한 식민통치이든 국가는 공간을 철저하게 동질화하는 활동을 해왔다. 특히 1860년 이후 국가통치를 단순히 전략적 거점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지역 세력에 대한 상시적인 개입으로 보는 시대적 추세가 나타났다. 이런 추세는 근대 초기부터 시작된 점진적인 '영토주권화' 또는 '영토권 형성'의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유럽 특유의 현상은 아니었다." "영토권은 현대국가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군주정치의 한 형식이었다. 예컨대, 19세기의 이란에서 통치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는 새로운 영토의 탈취이거나 최소한 기존 영토의 방어 여부였다. 이런 업적이 없는 군주는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이 반역할 수 있는 좋은 표적이 되었다."(355-6)


제2부 전경全景


4장 정주와 이주 (유동성)


"19세기의 인구 재난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이 경험한 재난은 분명히 적었다. 아일랜드는 19세기 유럽의 불운아였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국가였다. 1780년 무렵 아일랜드는 인구 고속성장기에 진입했으나 1846-52년의 대기근으로 인구 상황은 철저하게 바뀌었다."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유럽 인구감소의 원인으로서 전쟁과 내란의 중요도는 18세기와 훗날 20세기 때보다 크게 떨어졌다." "1815년부터 크리미아전쟁─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충돌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의─이 발발한 1853년까지 유럽에는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1500년 이후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10차례의 강대국 간 전쟁 가운데서 1815-1914년에 발생한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 "전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유럽의 비중을 감안하면 18세기에 발생한 전쟁의 전사자 수는 19세기의 8배나 됐다."(417-8)


"해외이민은 이미 근대 초기의 유럽을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였다. 중국과 일본의 통치자들이 자기 백성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을 때 유럽인은 전 세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구대비 해외이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영국의 이민 목적지는 주로 아메리카 신대륙이었고 네덜란드의 경우는 아시아였다.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스페인이었고, 러시아 이서(以西)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프랑스는 이민배출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19세기 사회사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그 직전 시대의 이민 활동의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의 '민족 대이동'이 아니라 17세기와 18세기의 이민이 수많은 사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세 가지 요소─약탈과 잇따른 바이러스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은 원주민, 유럽 이민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로부터 성장해 나온 젊은 사회였다."(426-9)


"19세기 이민사에서 대중의 주의를 끄는 제도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곤궁, 고독, 극단적으로 열악한 기후조건에 노출시키는 징벌적 식민지이다. 시베리아는 1648년에 이미 제정러시아의 유배지가 되었고, 표트르 대제 통치 시기에도 전쟁포로를 격리시키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12월당(Dekabrists)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부터 시베리아는 정치범의 중요한 유배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848년과 1851년의 동란을 평정한 후 정치범들을 추방했다. 파리코뮌의 봉기를 진압한 후 프랑스 정부는 3,800명 이상의 반란가담자들을 19척의 배에 실어 (185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로 보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유배지였다. 해양 패권을 두고 프랑스에게 밀릴 수 없다는 전략적 동기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1780년대 중반 영국 감옥의 심각한 과밀현상 때문에 생긴 위기가 없었더라면 죄수들을 수만 리 떨어진 먼 섬으로 유배하자는 발상은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435-9)


"20세기와 비교할 때 19세기의 (정치적 망명 혹은) 난민은 (최소한 19세기 60년대 이전까지는)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분명히 식별되는 부유하고 좋은 교육 배경을 가진 난민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1776년에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자 캐나다와 카리브해 지역으로 도피한 약 6만 명 가량의 영국왕실에 충성하는 사람들, 1789년에 부르봉 왕조에 충성했던 망명자들, 1848-49년 유럽 각지의 혁명이 실패한 후 진압당한 피해자들이 있었다."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대한 사건은 1839년의 '7월 혁명'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서유럽, 특히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에서 정치적 망명─정치범의 송환금지─을 법으로 보호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1848-49년 유럽의 혁명 시기에 대부분의 국가가 이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국가재정으로 정치적 망명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정치적 망명자의 행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441-2)


"정치적 이민과 영웅적인 망명이 19세기의 표지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집단적으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도모하는 수많은 가난한 난민의 모습은 '전면전'(totaler Krieg)과 인종적 편견을 배경으로 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범람한 시대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 행위가 촉발한 국경을 넘는 난민의 물결은 19세기에도 없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몇 차례 중대한 행동, 혹은 국가행동의 배후에는 잔혹한 현실이 숨겨진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그래서 서둘러 마련된 민족국가의 이념은 이민족을 융합하거나 배척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각국의 이민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이었다. 유출되는 이민의 규모는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이는 유입이민의 규모와 평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다수 정부는 이민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많은 유입이민을 경계했다. 다른 나라에 와 있는 통합주의 소수집단은 언젠가는 합병 주장을 지지하고 민족주의 외교정책의 유용한 도구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447, 452-3)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아프리카는 더 이상 대륙 간 이민체계의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달리 말해 세기말의 유럽, 남아시아, 중국과는 달리 아프리카는 더 이상 장기적이며 정기적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 대륙으로의 식민 이민은 주목받아야 한다.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직전, 구세계 유럽의 이민이 집중된 곳은 오래된 문명과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 알제리의 76만 명의 유럽인(2/3가 프랑스인이었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가 큰 식민지 정착민 집단이었고, 인도의 최대 17만 5,000명(온갖 부류를 다 포함해도)의 유럽인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같은 시기에 남아프리카에는 약 130만 명의 백인 주민이 있었다." "모든 형태의 거주자를 다 합하여 대략 240만의 '백인' 또는 유럽 혈통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고 대부분이 1880년 이후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473-4)


"19세기에 비유럽 국가 출신의 새로운 이민도 등장했다. 이런 이민의 '추동요인'(pull faktor)은 대영제국과 영국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그러나 이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노동력 부족이었다. 그 경제적 동력은 제조업보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신흥영역─플랜테이션, 기계화된 채광업, 철도산업─에서 나왔다. 양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 수요처는 도구의 기계화와 작업의 조직화를 농업 원재료의 생산과 가공에 적용한 (농업과 산업혁명이 결합된 산물인) 플랜테이션이었다. 새로 노동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외 없이 유색인종이었다." "그들의 사생활에 제도적으로 개입하는 '주인'이나 사회적 낙인은 없었다. 그들의 고용 기간은 특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녀는 법률상으로 고용관계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민자의 생각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노예들은 노예제 폐지를 전적으로 지지했지만 계약노동자들의 경우는 상황이 분명치 않았다."(483-5, 489)


5장 생활수준 (물질적 생존의 안전과 위험)


"1800년 무렵 세계인구의 기대수명은 30세에 지나지 않았고 아주 드문 특수 상황하에서 35세나 그보다 약간 더 올라갔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취미생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난 뒤의 '퇴근'이란 없었고 직업적 생애를 마감한 뒤의 '은퇴'란 것도 없었다. 가장 흔한 사망원인은 감염에 의한 질병이었다. 사망은 오늘날보다 '더 날쌔게' 찾아왔다."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인류의 수명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 적은 없었고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화 초기(대략 1780년-1850년)에 영국의 기대수명은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시대에 도달한 적이 있는 정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영국 노동자의 물질생활 수준은 1780-1850년 기간에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시기가 지난 뒤 임금 증가의 속도가 분명하게 물가의 상승폭을 초과했고 예상 평군수명도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540-2)


"대략 1850년부터 각국 정부는 공중위생 체계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각국은 질병의 전염원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와 격리─예컨대, 예전부터 시행해오던 지중해와 흑해지역 항구의 검역소─에서 출발하여 질병의 온상이 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기초 시설투자로 나아갔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유럽인들은 공중의료가 교회나 자선사업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부 직무의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849년 영국의 의사 존 스노의 발견 덕분에 식수를 정화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스노는 콜레라의 전염 경로가 공기나 인체 접촉이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공중 위생체계 수립을 위한 수자원 정책의 전제는 수자원의 공공재적 속성을 인정하고, 물에 관한 권리를 정의하여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물의 소유와 사용(산업적 사용을 포함하여)에 관한 온전한 법체계를 갖추는 것은 복잡하고도 긴 과정이었다."(543-4)


"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에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homo hygienicus)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지역에서 위생 조건의 개선이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 효과는 여전히 간편하고 저렴한 기술로 같은 효과를 기대했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컸다."(551)


"사망률이 떨어지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질병예방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이었다. '인구 과도기'가 그랬듯이 전염병학의 과도기도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19세기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규모 사망─인구통계학자들이 '사망률의 위기'라고 부르는─으로 이어질 확률은 크게 줄었다. 서북유럽에서 전염병의 발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첫 단계는 1600년 무렵에 시작하여 1670-1750년에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페스트와 티푸스의 발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성홍열, 디프테리아, 백일해에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 대략 1850년 무렵에 시작되는 세 번째 단계에서는 폐결핵을 제외한 호흡기 질환의 심각성이 점차 낮아졌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늘날 유럽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망률의 구조─심혈관계 질환과 암이 사망의 주요 원인─가 점차 정착되었다."(555)


"19세기는 여러 면으로 의학발전사에서 구시대에 속하면서 동시에 구시대 종말의 시작이었다. 어느 사회나 고위험 집단이 존재했고 어느 나라나 첫 번째로 위험에 노출되는 집단은 군대였다. 뉴질랜드 정복 전쟁이 19세기에 일어난 전쟁 가운데서 전투나 사고로 사망한 병사가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보다 더 많은 유일한 전쟁일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극단이 1895년의 마다가스카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략 6,0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말라리아로 죽었고 전사자는 20명 뿐이었다. 의학사의 새로운 시대는 유럽 밖에서 1904-05년의 러일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사전에 병사들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우수한 의료장비를 확보함으로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전체 병력 손실의 1/4로 낮출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낙후한 일본 군국주의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부족한 물질적 인적 자원을 아끼고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588-9)


"(공중위생의) 위대한 대표 인물들은 대부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연구자가 아니라 사회개혁가와 의료 위생의 실천자였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논증되기 전부터 깨끗한 식수와 양호한 오수 배출 체계, 이와 더불어 조직적인 쓰레기 처리와 거리 청소 체계가 갖추어지면 도시의 생활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태도의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유럽에서 도입된 최신 과학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 문화적 배경이었다. 도시의 보건위생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희망과 의지(또는 능력)를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 재정을 투입한 사회가 얻은 것은 더 긴 수명과 증강된 군대의 전투력 그리고 확대된 사회적 활력이었다. 전염병에 대응해본 경험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비중이 달라졌다."(590)


"기근은 간단하게 주기적 기근(장기적 식품부족)과 높은 사망률이 뒤따르는 돌발적 기근으로 나눌 수 있다. 기근의 위기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의 특징이었다. 위대한 의학 발전의 세기, 기대수명이 두 배로 늘어난 20세기는 또한 역사상 기근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 세기이기도 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연대에 유럽의 많은 지역이 기근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에서 실제로 굶어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민중에게 일상으로 익숙한 물건들─예컨대 밀가루나 보리 같은 식료품─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비싸졌다." "어느 집이건 여인과 어린이의 희생이 더 컸던 것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와야 하는 가장과 남성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의 양식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1816-17년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생존 위기의 망령은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하던 지역, 예컨대 발칸반도에서 18세기 80년대 이후 기근은 드문 현상이 되었다."(601-3)


# 아일랜드 대기근(1845-49)은 완전한 식량부족의 직접적 결과였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사례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덮친 1846년, 미국의 농업이 역사상 기록적인 풍년을 맞은 가운데, 당시 영국 정부의 대응책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간섭은 토지 소유자의 이익과 자유무역을 손상시키는 행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자 경작을 위주로 하는 농업경제의 붕괴는 농업의 현대화와 구조조정을 위한 좋은 기회이며 그 결과 농업은 '자연적인 평형'을 실현할 것이란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감자 경작의 위기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사회의 여러 가지 불공정을 바로 잡으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적대 관계도 정부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 정부가 볼 때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금전적 탐욕과 농업 개조에 대한 무관심이 이때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었다. 영국 정부로서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606)


"1891-92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기근이 주로 볼가강 유역에서 80만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때 러시아는 특별한 구호조처 없이 두 차례의 기근을 극복했다." "1891-92년의 대기근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기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찾아온 '반동이' 시기를 종식시키고 러시아 사회를 혼란의 시대로 몰아넣었는데, 혼란은 결국 1905년의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정부가 재난구조 활동에서 보여준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정치의 영역에서는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의 러시아 민중이 볼 때 기근이란 아일랜드, 인도, 중국 같은 '미개한'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명국가'에게 기근이란 일종의 수치였다. 1890-92년에 발생한 시대에 뒤떨어진 대기근은 러시아와 번영·발전하는 서방 국가 사이의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는 격차를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607-8)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발생한 인도의 대기근은, 우매한 인도인이 발전에 반대하는 저항심의 표현─당시에 적지 않은 유럽인이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이 아니라 근대화 초기의 부정적인 증상의 표출이었다. 철도와 운하는 원래는 구호물자를 실어나를 수 있는 편리한 기초시설이었지만 동시에 농촌지역에서 농산품 투기사업을 펼치기에 적절한 조건도 만들어냈다. 요컨대, 식량의 유입도 쉬워졌지만 식량의 유출 또한 쉬워졌다. 수확의 감소는 불가피하게 식량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매점매석과 투기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의 사태에서 드러난 새로운 면은, 모든 농촌의 전통적인 비축식량이 전국 또는 국제시장의 교역품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농산물 수확의 미세한 변동도 식량가격의 두 배로 높여놓을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농촌 주민이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613-4)


"미국의 부자들이 보유한 부의 규모는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누구도 그처럼 방대한 물질적 부를 축적한 적이 없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부호들이 석유, 철도, 철강업에서 끌어모은 부는 유럽의 산업화 시기에 가장 부유했던 면방업계 거두들이 보유했던 자산 규모보다 몇 배나 많았다." "미국 최고 부자의 자산은 1860년에 2,500만 달러이던 것이 20년 뒤에는 1억 달러로 늘어났고 다시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는 10억 달러가 되었다. 1900년이 되자 미국 최고의 부자는 유럽 최고의 부자(영국의 귀족이었다)보다 20배나 많은 자산을 보유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금권정치가 등장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내부에서 분열했다. 부자들 사이에서 보수파 또는 우파 자유주의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부자와 초부자가 모두 보수적 가치관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유주의자 부호'란 말은 모순된 개념이 되었다."(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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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길들이다 - 통계는 어떻게 우연을 과학으로 만들었는가?
이언 해킹 지음, 정혜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옮긴이 서문


"우연이라는 것은 본디 인간에게 미지의 존재로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그러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뉴턴주의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지닌 존엄성이 침해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전자의 믿음은 합리적 사고와 물리과학의 발달을 통해 얻은 성과가 가져다준 자신감의 발로라면, 후자의 우려는 엄격한 인과적 법칙이 인간이 누려야 할 의지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소산이었다." "통계적 규칙성을 규명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의 존엄함에 관한 위기감 중 어느 것도, 우연이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홀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통계적 법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없었을 것이고, 위기감이 아니었더라면 통계적 법칙과 결정론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다."(16)


1 우연을 길들인다는 것


"이성의 시대 내내, 우연은 우매한 자들의 미신으로 불렸다. 우연·미신·우매함·비이성 모두 매한가지였다. 소위 합리적 인간은 이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불변의 법칙을 도구 삼아 혼란을 가릴 수 있었다." "당시는 결정론에 대한 의구심을 지닌 이들이 많은 시기였다.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가 끼어들 여지를 갈구하거나, 유기체나 생명의 작용에 있어 개별적 특징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예이다." "마침내 1900년 경에 이르러서는 우연의 법칙의 득세가 진정한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궁극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의 무대가 조성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이지만, 비결정론적인 여지가 커지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물리과학에서는 이 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양자물리학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긴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궤도에 개입하고 수정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무한하게 신장시켰다."(22-3)


"필자가 기술하고자 하는 면모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하나의 사건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활자화된 숫자들의 쇄도avalanche of printed number이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을 새롭게 분류하고, 집계하고, 표로 작성하였다." "숫자의 활자화는 표면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분류 및 계량화 기술, 그리고 그러한 기술을 전개할 수 있는 권위와 연속성을 지닌 새로운 관료제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관료제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사실들을 새로이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을 집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맞게 분류할 수 있는 범주가 만들어져야 했다.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의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방식은 물론 가까운 이웃을 설명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24-5)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인식론적·논리학적·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할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27-8)


2 숙명론의 시대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당연시했다. 자연의 필연성과 인간의 책임감의 충돌로 인해 자유의지는 절박한 문제가 되어 갔다. 한 가지 해결책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추종하는 것이었는데, 데카르트의 주장은 마음과 육체,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실체와 공간에 실재하는 실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공간적 실체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어김없이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모든 공간적-시간적 현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에 관해서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칸트의 서술은 이러한 생각을 정교화시킨 것이었다. 공간적, 그리고 정신적이라는 두 가지 실체는 인지가능knowable 영역과 불가지unknowable 영역이라는 두 가지 세계로 대체되었다. 자유로운 자아는 실체의 불가지 영역에 존재한다."(42)


"흄이 우연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과론과 필연성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였던 그는 숙명론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현상계의 물체들의 움직임들은 필연적이며, 이들 물체들의 움직임 간의 상호 교류 ··· 그리고 물체 간의 끌어당김과 상호 결합들을 보면, 이들 물체들 사이에 상호 무관성 내지는 자유로움이 존재한다고 볼 만한 최소한의 근거조차 없음은 널리 인정된다. 모든 물체는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숙명과 그 운동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 따라서 물질의 움직임은 필연적 움직임에 대한 실증적 예로 간주해야 한다.〉" "계속해서 흄은, 뉴턴이 공허한 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즉, '뉴턴은 자연이 지닌 미스터리를 둘러싼 베일을 일부 걷어낸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기계적 철학의 단점 역시 명백히 했으며, 따라서 그는 자연이 지닌 비밀들을 그전에도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을 불분명의 영역으로 복구시켰다'는 것이다."(45-6)


3 공적인 아마추어, 비밀스런 관료


"17세기 확률의 등장에 대한 증인으로서 라이프니츠는 프로이센 공공 통계의 철학적 대부였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다음과 같았다. 프로이센 국가의 성립이라는 과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힘에 대한 정확한 측정치는 바로 그 인구이기에, 새로 세워질 프로이센 국가는 자신의 힘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정부에 통계 부서를 보유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프로이센 국가의 건국은 통계국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종류의 통계 문제에 왕성한 관심을 가졌으며 질병·사망·인구의 문제에 활발히 매진했다. 그는 56가지 부문에서 국가를 평가하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 평가법의 항목에는 성별 및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인구,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남자의 수, 결혼적령기 여성의 수, 인구 밀도와 연령 분포, 유아 사망률, 기대 여명, 질병의 분포와 사망의 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집계표 작성은 오늘날에는 일상화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미래적인 것이었다."(55-6)


4 통계 전담 기관의 등장


"프로이센은 훗날 대세로 자리잡게 될, 그러나 당시에는 예외적이었던 존재를 출범시켰다. 통계국은 정부 내 여타 모든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숫자의 제공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04년에, 도나는 1809년에, 범용적인 통계국은 새로운 유형의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류의 일꾼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조직체라는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장관들이었던 슈타인과 알텐슈타인이 선호했던 것은 엣 질서를 간결하게 가다듬은 버전이었다. 그들은 통계국은 재정부를 돕기 위한 기관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정부의 조직 체계는 유지되어야만 했으며, 모든 기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부서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왕과 도나가 이겼다. 프로이센은 기초부터 다시 세워지고 있었고, 새로운 유형의 기관이 존재할 여지가 생겼다." "(점차 각국에 설립된) 통계국들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무수한 숫자를 통해 실체가 표현되는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켰다."(75, 82, 86)


5 이성의 감미로운 지배


"도덕과학science morale은 우리가 윤리학이라 부르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다. 도덕과학은 풍속moeurs·관습·사회에 대한 과학으로 이해하는 편이 맞다." "뉴턴은 천체역학과 유리역학rational mechanics을 제안했다. 프랑스인은 뉴턴의 주장들 중 일신론一神論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로크의 사상 이론은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능력에 대해 연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수많은 주요 철학자들은 '관념론자'라는 표식, 즉 특정 이데올로기의 이론가나 지지자가 아니라 사상 그 자체에 대한 옹호자, 즉 로크주의자Locke-ites라는 딱지를 열렬히 환영했다. 도덕과학의 개념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였으며, 태동 당시의 도덕과학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합리적 이론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콩도르세가 그려낸 도덕과학은 훗날 두 가지 다른 영역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역사로서의 도덕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확률, 통계학, 결정이론, 비용편익분석, 합리적 선택이론, 응용경제학 등으로서의 도덕과학이다."(93-5)


"1776년에 튀르고는 젊은 뒤빌라르 같은 이들을 종합감사관실에 임명했다. 튀르고가 물러나자 뒤빌라르는 재정부로 자리를 옮겼다. 뒤빌라르는 혁명 8주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후에 그는 원로원으로 옮겼으며 1805년에는 내무부의 통계청으로 갔다. 1812년에 그는 다시 승진하여 종합편성국의 수장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뒤빌라르는 살아남았다. 내무부에 몸담고 있는 동안, 뒤빌라르는 제너의 천연두 백신이라는 희대의 발견이 보험에 미칠 영향에 대해 최초로 심도 깊은 분석을 실시했다." "인구에 대한 뒤빌라르의 수학적 통계 논문은 사망률 법칙에 관해 체계적 분석을 수행하는 데 있어 단순한 연령뿐 아니라 성, 혼인 상태, 그리고 주소 및 직업과 같은 가변적 요인을 프랑스 최초로 활용한 시도였다. 그와 같은 질문은 조만간 숫자들의 쇄도를 불러일으킬 서기·통계가·계산가·출판인과 같은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다."(106-7)


6 질병의 양을 재다


"질병의 법칙에 대한 가장 저명한 저자는 잉글랜드-웨일즈 호적본서의 창립자였던 윌리엄 파William Farr였다." "파는 질병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토대로 이 분야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여, 1830년대의 공제조합들에 대한 논쟁에 기여하였다. 파는 질병통계에 대한 개별 분석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1837년경에는 자신이 편집했던 잡지 중 하나에서, 질병의 빈도와 더불어 '질병의 상대적인 기간과 위험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방법론을 다룬 소논문을 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파는 병원 기록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질병분류학nosology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질병분류학에 따른 집계법이다. 파는 자신이 수행한 활동에 어울리는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 내었으니, 바로 질병측정학nosometry이었다. 이는 질병분류학을 활용하여 '측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분류와 새로운 집계법은 서로 불가분임을 상기시켜 준다."(121-2)


7 과학의 곡창


"필자는 기본 상수들constants은 자연의 기본 법칙에서 고정된 값을 가지는 인수 역할을 지닌다는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는 배비지보다 최근의 개념이다. 배비지의 상수들은 수많은 '법칙들'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만약 투표자의 소득이 비슷한 법칙을 따른다면···'이라고 그가 쓴 데서 보듯, 배비지는 법칙이라는 단어를 단지 규칙·규칙성·획일성을 의미하는 데 사용했다. 법칙에 대한 배비지의 관념에서 우리는 그를 베이컨주의자, 실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영역,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통계적 법칙에 대한 초기 개념의 모든 영역에서 법칙화를 수행했던 것은 바로 베이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수리적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본연의(그리고 미묘한) 주장에 대한 해석들 중 가장 단순화되고 가장 베이컨의 품격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귀납적 결론을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135-7)


8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에스퀴롤이 살았던 시기(19세기 초)는 그의 직업(의사)이 거침없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그는 자살을 감시·치료·통제·판단할 권리가 의사에게 있다는 의견을 비쳤다. 자살은 더 이상 아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도덕주의자와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은 자살이 '임상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는 매우 맹렬한 권리 주장이다. 에스퀴롤은 암묵적인 삼단논법을 펼치고 있었다. (1) 정신이상은 의사의 영역이다. (2)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그러므로 (3) 자살은 의사의 영역이다. 에스퀴롤에게 전제 (1)은 탄탄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살이 일종의 정신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살을 의학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이론은 여타의 정신이상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살자들은 '편집광들'이었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의 이론과 자살의 집계는 서로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141-2)


9 입법철학의 경험적 근거


"1829년에 게리는 교육과 범죄에 대한 '비교 통계학'을 공동 연구로 수행한 바 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한 확장이 바로 그의 첫 주요 연구인 1832년의 도덕 통계 연구였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자연히, 노동계급의 퇴화와 무지가 바로 통계학자들이 범죄의 성향penchant au crime으로 부르던 것의 원천이라는 추정이 제기되었다. 게리는 이러한 가설을 반박하기 위해 오늘날 순위순서 통계량rank-order statistics이라 불리는 것을 내놓았다." "그 결과, 교육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율도 높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러한 결론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래된 용어인 '도덕과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수행했던 것은 도덕분석moral analysis이었다. 이는 사실과 가치를 구별하는 실증과학이었다. '사회에 관계된 계량화된 사실만을 진술함으로써 도덕분석은 입법철학과 경험적 근거를 형성한다.' 콩도르세가 꾸었던 사회수학의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164-6)


10 확실함도, 상세함도, 통제도, 가치도 없는 사실들


"당시에 통계치는 널려 있었지만 결정적인 통계적 추론은 거의 없었다. 통계는 과학이 아니라 수사학의 도구였다. 숫자에 대한 모든 열망에 대하여, 통계는 기대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1828년 초, 시비알레는 결석 수술법에 대한 비교연구를 몽티용 상 측에 제출했다. 마치 배심원단 같았던 수학자들(심사위원들)은 거만하게도, 그와 같은 연구들이 '확실함이 없고, 상세한 설명도 없으며, 통제되지 않았으며, 가치가 없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통계는 '무한의 다수'로 간주할 수 있는 부류의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으나 '의학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실용의학에서 확률을 계산하기에는 사실이 너무 빈약한 것은, 보다 많은 데이터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이한 개인에 대해 많은 데이터를 얻어 보았자 다루고자 하는 환자의 특정 사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학자들은 이러한 조심스런 관찰에 대해 오만할 정도로 무관심했다."(177-9)


11 어느 다수결 규칙을 따를 것인가?


"사회적 불안정과 개혁의 나온 것이 1808년의 법전이었다. 이 법전 자체는 영속성 있게 지속되었지만, 배심원제는 프랑스 법제에서 가장 불안정한 요소 중 하나였다. 1808년 당시 유죄 선고는 단순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졌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을 때마다 배심원제는 영향을 받았다." "라플라스는 1808년의 배심원제에는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이 7:5로 단순 다수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경우에 오심의 가능성은 거의 3분의 1이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증언이 옳을 확률이란 증인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증언이 옳을 확률은 증언된 사실의 본질과 무관하다." "따라서 라플라스는 단순 다수결을 통한 유죄 선고에 반대했다. 배심원 12명 만장일치에 의한 평결은 안전하나, 아마도 지나치게 안전한 듯하다. 라플라스는 1000분의 1 정도의 오심 확률을 목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따라서 배심원 9명의 만장일치제가 적절하다고 제안했다."(188-91)


"푸아송이 배심원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1830년 혁명 이후였다." "라플라스에겐 사법 통계자료가 없었던 반면 푸아송에게는 있었다. 푸아송은 오심의 확률이 라플라스가 추정한 것만큼 크지는 않다고 추론했다. 7:5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은 실증적으로는 라플라스가 8:4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로 계산한 값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만약 라플라스의 계산에 근거하여 8:4 다수결 평결에 만족한다면 7:5 다수결 평결에도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국회가 1835년 8월 19일 배심원제를 단순 다수결제로 되돌린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증명을 그 해 말에 완료하였다. 1837년에 간행된 배심원제에 대한 그의 저작은 보수적 견해를 수학적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푸아송의 수학이 지니는 과학적 엄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정보와 통제의 구현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그것은 수학적 연구인 동시에 정치적인 연구이기도 했다."(196)


12 대수의 법칙the law of large numbers


"프랑스에서는 '대수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굳건히 정착하였으며, 세계에 대한 심오한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의론자들의 조언과는 반대로, 통계적 법칙은 권위를 인정받았다. 충분히 많은 수의 사건의 경우에서는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법칙은 경험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사물이 따르도록 되어 있는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대수의 법칙에 대한 수학적 논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수의 법칙은 형이상학적인 진실이 되었다. 푸아송의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웠지만, 그리고 실제 현상에서는 발견되는 불규칙성은 흔히 주장되던 것보다는 훨씬 컸지만, 대수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맹신, 태만, 모호함, 숫자에 대한 혼미, 사회적 통제에 대한 환상, 공리주의자들이 선전 등의 요인에 힘입어, 대수의 법칙(푸아송의 정리 그 자체가 아니라 대량 현상의 안정성에 대한 명제)은 이후 한두 세대 동안은 선험적 진실로 가공되었다."(216)


13 표준적인 가슴둘레


"1830년대 초 일련의 저술에서 케틀레는 '평균인'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평균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한결 같은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평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균인의 존재에 대한 상식적인 반응은 이렇다." "'평균인'이란 편의상 사용되는 약칭일 뿐이다. 그러나 케틀레에게 이 표본적인 인간은 약칭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첫째, 이 개념은 한편으로는 우생학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종의 평균적인 특질을 보존하거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정책을 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둘째, (보다 학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평균 키를 추상적 개념, 즉 산술적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집단에 관해 '실재하는' 특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일본인의 수명은 매년 증가해 1988년에 일본은 지구상의 최장수 국가에 해당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수명을 두고 일본인이 삶과 문화에 실재하는 특징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221-3)


"1844년, 케틀레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계로 나아갔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물리적 양을 일정한 확률오차를 수반하면서 측정하는 법에 대한 이론을, 집단이 지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특질의 측정에 대한 이론으로 변모시켰다. 집단의 특질들 역시 물리적 양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기법에 의해 계산될 수 있었기에, 집단의 특질들은 이제 실재적인 양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우연을 길들이는 데서 중대한 단계이다. 이전에는 거대한 규모의 질서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통계적 법칙은 자연과 사회의 기저에 내재된 진실과 원인을 다루는 법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집단의 신장 등의 분포가 한 개인이 지닌 값이 오차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추정되었을 때 나타나는 분포와 같다면, 우리는 집단의 평균이 해당 집단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집단에 관해서 만족스러운 정규분포 곡선이 나온다면 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특징에 관한 하나의 진정한 값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223-5)


14 사회가 범죄를 예비하다


"1836년 경, 케틀레는 '도덕적 질서는 통계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 이는 인간 본성의 완벽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낙담할 만한 사실일 것이다. 자유의지란 오로지 이론 속에서만 존재할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그러나 1926년에 시작된 양자역학의 두 번째 흐름은 미시세계의 근원적 법칙이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확률적임을 입증했다." "양자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숙명론적이고 순수하게 결정론적인 법칙이 아니다." "1830년대와 1930년대의 감수성이 보여 주는 대조는 역설적이다. 1930년대에는, 자연 법칙이 확률적이라는 확신은 세상이 자유의 안전지대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됐다. 동일한 확신이 1830년대에는 위와는 정반대로 해석되었다. 즉 만약 범죄와 자살을 관장하는 통계적 법칙이 존재한다면, 범죄인들의 범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는 확률이 자유의지의 존재 여지를 제공해 주었지만, 1830년대에 확률은 자유의지를 완전하게 배제해버렸다."(237-8)


"케틀러와 파는 모두 19세기 통계학이 지닌 박애주의적·공리주의적 측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통계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운명을 향상시키려 했으며, 새로운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범죄·질병·악덕·불안정을 다스리는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라. 그리고 그러한 법칙들이 적용되는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반면에 게리는 실증주의자였다. 도덕 분석은 분명 입법가들의 결정에 활용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입법가에게 어떠한 제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과 가치 사이의 구별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케틀레는 최소한 그의 젊은 시절에는 개혁주의자였다. 연간 범죄율은 사회 질서의 '필연적 결과'이기에 입법가들은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 변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파는 자신이 통계 사실을 총합하고 결합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권고를 내릴 의무 역시 지녔다고 생각했다."(243)


"아무리 박애주의적 열정으로 은폐되었다고 해도, 개혁의 진정한 기능은 확립된 질서를 보전하는 것이었다(라고 누군가는 주장할 것이다)." "부유층 역시 체제의 적용을 받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법칙은 계층에 관한 것이다. 통계적 법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측정되고, 분석되고, 통치의 논거로 활용되어야 하는 피지배계층인 '그들'이었다. 여기서 계층이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실체이다. 필연적으로, 자신들을 위해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노동자 혹은 범죄자 또는 식민지 계층이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계층 외에도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보다 큰 단위의 계층이 있다. 오늘날 인종이 내포하고 있는 제1의 함의는 피부색이다. 파가 연설에서 언급한 인종이란 전통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관습의 공통성이 있는 국민, 종족, 심지어 가족 그룹을 의미했다. '인간은 자신의 인종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다'고 그는 썼다. 이렇게 우생학이 시작되었다."(245-7)


15 사회에 대한 천문학적 시각


"독일 사상가들은 '규칙성'은 '법칙'이 아니며, 심지어 '규칙'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통계적 규칙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통계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실재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러한 원인들은 개별 사건들에 작용하며 필연적으로 효과를 생성해 내는 것들이다. 라플라스와 케틀레 같은 프랑스인들이 주장한 수많은 미미한 원인들은 통계적 분포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러한 분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분포를 일컬어 법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법칙뿐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후계자들은 케틀레에 맞섰다. 서유럽에서는, 실증주의의 정신은 모든 법칙이 단순히 규칙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규칙성을 뛰어넘는 원인에 대한 믿음은 형이상학의 시대가 낳은 부조리한 잔재였다. 따라서 통계적 법칙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통계에 대한 '공산사회주의적' 접근과 부합하는 철학을 제공하였다."(257-8)


"엥겔은 '특정 집단에서 매년 거의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썼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원인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위 사실은 단순한 습관적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법칙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실이 자연이나 사회의 법칙이 아니라면, 의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이것이 엥겔의 해답이었다.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살의 법칙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다." "(교수이자 사회주의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강단사회주의자들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식을 서로 협력하여 선택함으로써 국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국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개인들이 자신을 훌륭한 국민으로 도야할 수 있도록 국가 자체와 제도를 다듬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엥겔이 지휘하던 프로이센의 통계국은 이러한 전일주의적 정치 철학으로 무장한 대변자가 되었다."(260-2)


16 사회에 대한 광물학적 시각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그러했듯이, 르 플레의 비전은 인간을 먼저 혼인 상태와 가족 관계에 따라, 그리고는 주거지, 무엇보다도 가계 생활비 규모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하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르 플레의 저작은 프랑스의 부유계층이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한 그 저작은 중편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개별 가족의 지출 규모에 대한 계량적 연구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케틀레가 사용했던 것처럼 평균치에 대해 파고든 것이 아니라, 박물학자들이 암석 혹은 식물 견본을 패러다임으로 활용하듯이 대표적인 개인을 이용하여 인간 유형의 주요 특징을 보여 주었다. 르 플레는 우랄 산맥의 유목민과 셰필드의 칼장수, 스웨덴의 대장장이와 카스티야의 소작농들을, 그리고 모로코의 목수들과 (오늘날의) 시리아의 마을 거주민들을 묘사하였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현실의 구성원으로서의 평균인이 아니라 대표성을 띠는 개인에게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 르 플레의 주장이었다."(271-4)


17 우연,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


"18세기 잉글랜드의 뉴턴주의자들은 통계적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계몽주의적 신을 언급한 바 있었으나, 그러나 이보다 오래되고 더 변덕스러운 신들, 즉 계몽주의자 흄이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라고 폄하했던 우연을 즐기는 신들이라는 희미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불씨는 낭만주의에 의해 다시 점화되었으며, 니체에 의해 더욱 거세졌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은 '신성한 우연을 위한 무도장', '신성한 주사위와 도박자를 위한 신의 탁자'에 비견된다. 그렇다면 합리성은 어떻게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예상하듯이, 비이성적인 방식과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였다.' 19세기 말의 철학자였던 니체와 퍼스의 우연·창조·필연성에 대한 관념은 흥미로울 정도로 유사했다. 이 둘은 다른 이들이 질서정연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둘 중 누구도 법칙의 존재가 우주의 우연적 특성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92-3)


"니체의 사상들 중 하나에 대해 질 들뢰즈가 쓴 간결한 요약이 있다. '한 번 던져진 창조의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우연의 소멸이라기보다는 우연 자체의 조합이다.'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주사위 게임이 등장한다. 니체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비로소 우연이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과 이유에 대한 개념을 부분적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우주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임을 알고 있는 이는 목적이라는 허상에 구애받지 않는다." "니체는 우리가 우연에 관해 지금까지 접해 온 것들 중 가장 난해한 철학적 지혜를 터득하였다. 필연성과 우연은 서로 쌍둥이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동전의 앞면이 뒷면을 설명하는 이상으로는 필연성과 우연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을 설명해 주지는 못 한다."(294)


18 카시러의 명제


"동적인 결정론, 즉 숙명론이 1872년에서야 진정으로 보편적인 명제가 되었다는 카시러의 말은 옳은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니다." "그렇다면 카시러 테제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결정론'이라는 단어는 1850년대 말에서 1870년대 초의 시기에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결정론이 이러한 의미를 지칭하게 된 것은 특수한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프랑스의 베르나르와 독일의 뒤부아-레이몽은 생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생기론을 거부했으며 모든 생명 과정은 화학반응과 전기(등등)의 작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독자는 라플라스가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연의, 공간상의, 물질의 실체라는 범위에 한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라메트리는 라플라스와는 달리 정신의 영역까지 이야기하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결정론은 라플라프보다도 교만했다. 이 새로운 결정론은 정신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인 뇌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녔다."(306-8)


"1874년 에밀 부트루는 자연 법칙이 지니는 우연성에 대해, (즉, 결정론의 퇴색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출간했다. 이 논문의 바탕을 이루는 교의는 창발주의emergentism와 계층적 구조a hierarchy of structures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층들을 보면, 가장 아래층은 원소의 원자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층에는 분자의 구조가 있겠지만 부트루는 원자들에 적용되는 법칙들이 화합물에 적용되는 법칙들을 결정짓지는 않을 수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화합물들이 따르는 법칙들은, 심지어 유기 화합물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이라 하더라도 동식물 생명체의 법칙들을 결정짓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이 이성적인 존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과 심리적 법칙들은 사회의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이루는 계층의 각 단계에는 우연성이 존재하며, 하위에 위치한 간단한 구조가 보다 상위의 새로운 법칙을 결정하지는 않는다."(312-3)


# 창발주의 : 하위 계층의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이들이 합쳐진 상위 계층에서 창조적으로 돌연히 발현된다는 주장


"부트루의 가장 유명한 학생은 뒤르켐이었다. 뒤르켐의 《자살론》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크다. '이러한 공리는 전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라는 르누비에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회의 법칙은 우주의 힘 또는 전기의 힘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개인의 심리 상태가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원리들이 아니라 그보다 거대한 원리들로부터 나온다. 창발주의는 순수한 물리적 세계의 결정론적 토대와 사회 법칙들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통계적 법칙을 흡수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젊은 시절(1885년)의 뒤르켐은 이미, 사회학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과학이다. 자연에는 세 가지 세계가 있다.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 위에 사회학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부트루의 가르침에 찬동했다. 1897년에는, 자살의 안정성을 야기하는 집단적 힘을 일컬을 때도 '독자적'이라는 어구가 사용되었다."(315-6)


19 '정상 상태'의 탄생


"'병리성'은 질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듯하지만 1800년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질병은 신체 전체가 아닌 개별 기관의 속성이 되었고, 병리학은 병자가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다." "병리학자들에게 정상이란 이러한 개념의 역으로부터 나왔다. 병적인 기관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를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병리성의 개념이 우선이고 정상은 병리성의 반대 개념으로서 부차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콩트가 브루새의 위대한' 원리'라고 칭했던 것이 이러한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병리성은 정상으로부터의 이탈로 정의된 것이다. 모든 변이는 정상 상태로부터의 변이라는 관점에서 특징지어졌다." "기준과 표준에 대한 아이디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지만, '정상적'이라는 단어가 현대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은 의학적 맥락을 통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표준은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328-30)


"콩트가 정상성의 개념을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또 다른 변형을 초래했다. 정상은 더 이상 일상적인 건강 상태를 의미하지 않았다. 정상이란 것은 우리가 노력하여 달성하고 에너지를 바쳐야 할 정화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진보와 정상 상태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진보란 다름 아니라 질서의 발굴이다. 즉, 진보는 정상 상태에 대한 분석이다'라는 것이다." "'실증주의 학파는 지난 3세기에 걸친 혁명적 투쟁 기간 동안, 지식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과 구성원들의 진정한 정상 상태를 가능한 한 최대로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다져 왔다'고 콩트는 말했다. 따라서 콩트는 정상이라는 아이디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대치 상황을 표현했던 인물,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러한 대치 상황을 이끌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평균으로서의 정상과 우리가 진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함의 표상으로서의 정상 사이의 대치 상황 말이다."(335-6)


20 우주의 힘만큼이나 실재하는


"골턴과 뒤르켐은 각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졌으며 정상과 비정상을 새로운 법칙의 실재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생각했다. 물론 뒤르켐의 창발주의 철학은 골턴에게는 이질적이었으며, 정상과 관련하여 각자가 핵심으로 생각하고 집착했던 관점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 않았다. 실재적이고 완전한 법칙으로 골턴이 취급했던, 집단에 관한 정규분포는 뒤르켐이 집단에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우주의' 힘을 다스리는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정상의 반대는 무엇인가? 당연히, 비정상성이다. 그러나 골턴에게 정상의 특징은 정규곡선을 통해 묘사된다. 비정상은 평균으로부터 강하게 벗어난 것이다. 뒤르켐에게는, 비정상은 병적인 것으로 불렸다. 결국 비정상은 병든 것이다." "매우 간략화시켜 말하자면, 뒤르켐은 도덕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동일시하였다. 골턴에게는 정상은 좋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극단적 존재들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수한 것이었다."(354-5)


21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


"케틀레로부터 골턴은 오차곡선을 이용해 평균에서 편차를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 케틀레가 중심 집중 경향, 평균에 대해 생각하던 대목에서 골턴은 항상 예외에 몰두했으며 분포의 꼬리와 분산을 생각했던 것이다." "골턴은 평범함으로의 복귀는 정규곡선이 가져오는 수학적 귀결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집단이 정규분포를 따르고 있다면 다음 세대 역시 이전과 대체로 동일한 평균과 분산을 지닌 정규분포를 따를 것이되, 다만 나중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하는 멤버들은 대체로 이전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했던 멤버들의 후손은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골턴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골턴은 (1) 현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2) '독립적인 사소한 원인들'을 배제시키는 일석이조를 거두었다. 그는 수많은 형질들이 보여 주는 정규분포를 자율성을 지닌 통계적 법칙으로 간주했다. 통계적 법칙은 이제 성숙한 세계로 접어들었다. 골턴은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보았다."(364-8)


"《과학 문법》을 저술한 피어슨은 골턴 이전의 모든 이들이 상관관계의 분석을 빠트렸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마음 속에 자리한 두 가지 다른 문제를 숙고하던 골턴은 상관관계의 개념에 도달했다. A는 B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지만, B를 낳는 데 기여한다. 그 수가 많건 적건 간에 B에 작용하는 다른 원인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일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를 수도 있다. ··· 부분상관관계에 대한 이러한 측정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한 오래된 인과관계를 대체할 뿐 아니라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상관관계라는 광대한 부류를 낳은 기원이었다. 자연과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인과관계의 개념은 산산조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 그 이후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관점은, 우주는 서로 완벽한 상관관계, 즉 절대적인 인과성에는 도달할 수 없는 변량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372-3)


22 프로이센 통계학의 한 장면


"1851년 노이만은 피르호의 의학지에 〈1846년 통계국 보고서로 본 프로이센 국가의 의학 통계〉라는 연구 한 편을 출간했다. 서두는 놀라운 명제로 시작했다. 굵은 활자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공중보건의 관리는 국가의 의무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그 구성원들의 복지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동등한 자격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된 유기적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정치과학의 진정한 취지와 목적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본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인간의 정상적인 발전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번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새로운 윤리적 세계관'을 낳는다. 노이만은 계속해서, 훌륭한 보건은 개개인의 완전한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전제로부터, 국가는 시민을 위한 의료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다.'"(378)


"노이만의 《유대인의 대량 입국이라는 신화》는 1880년에 제2판이 나왔다." "당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독일 동쪽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이 입국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한층 증폭되었다. 선동적인 소책자들은 갈리시아와 같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북부지역과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입국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은 슐레지엔, 포젠, 그리고 동프로이센 등의 동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입국이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독일인의 특징은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책자들은 악의적인 익명의 저자가 쓴 것이었지만, 이들 중 어느 한 시리즈는 베를린 최고의 역사가이자 신랄한 학자 겸 정치가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쓴 것이었다. 노이만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기초한) 아우성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최소한의 '사실', 즉 독일로의 유대인 대량 입국에 대한 '통계적 공리'를 검증하는 데 전념하였다."(382-3)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반유대주의의 유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엥겔의 프로이센 통계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뵈크의 1880년 연감에는 유대인의 입국에 관해 신문이 늘어놓는 무지한 불평불만을 조롱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 연감은 '통계에 대한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악용이 반유대주의 동요를 관통하고 있다'고 썼다. 노이만은 그의 책 제3판에서 뵈크의 '양식 있음'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엥겔은 《프로이센 왕립 통계국지》에 무기명으로 발표한 비평에서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발행한 연감과 새로 설립된 제국 통계국에서 발행한 연감을 논했다. 이 비평은 제국 연감의 객관성이 모두에게 모범적인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뵈크의 연감은 일간지의 보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들은 현재의 사건을 다루지만, 통계국은 후대뿐 아니라 행정가, 입법가, 상인들을 위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장차 통계학자들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활동하도록 하자는 것이 위 비평의 주장이었다."(390)


23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


"퍼스는 결정론을 부인했고, 세상이 결정론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에 의혹을 품었다. 그는 배비지의 자연 상수가 지닌 진정한 값을 확증하려고 애쓰는 집단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수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상수라는 것들이 지닌 숫자는 우리가 점차적인 과정을 통해 정착시켜 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귀납적 학습과 추론을 단순히 통계적 안정성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기술적으로는 그는 실험 설계에서 임의화randominzation의 방법을 의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즉, 그는 보다 예리한 질문을 제기하고 보다 유용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우연이 지니는, 법칙과도 같은 특징을 활용하였다." "그는 확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빈도주의적frequentist인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또한 증거가 지닌 주관적 중요성(log odds)의 측정법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인 우주를 상상했다."(395)


"주목할 만한 것은 확률에 대한 퍼스의 개념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논증의 건실함과 연계했던 방식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1866년 10월 31일 보스턴 강연에서 이미 선을 보였다. '증거로부터 가능성이 나오는 것은 언제나,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과정은 가능성을 낳는다.' '거짓보다는 진리를 자주 가져옴'. 이것이 바로 귀납 및 연역 논리에 대한 퍼스의 이해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논리는 논증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과학이다.' 이는 개개의 논증을 검증하기보다는 논증의 속genus을 숙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면 그 결론은 언제나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논증적'demonstrative이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며 그 결론은 대체로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단지 '개연적'probable일 뿐이다. 양자의 경우 모두, 타당한 논증은 '진리 생성적 성격the truth-producing virtue'을 지닌다."(412-3)


# 논증의 속genus : 비슷한 논증의 집합


# 3가지 종류의 추론

1. 연역법 : 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2. 귀납법 : 사실 A가 무수히 반복적으로 관찰될 경우 가설 B가 사실로 도출된다.

3. 상정논법(abduction, 가설) : 전제가 참이라도 결론이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패턴이다.

※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

 1-1. 특이한 사실 A가 관찰되었다.

 2-1. 만약 가설 B가 참일 경우, 사실 A는 이상하지 않다.

 3-1. 따라서 B가 참이라고 '상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퍼스는 사람들이 어떠한 견해에 대해 합의에 이르게 된다면 그 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가르쳤다. 일찍이 유명론적인 관점에서 그는 진리란 우리가 믿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썼다. 나중에는, '만약 진리가 만족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재의' 어떠한 만족에도 진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근원적이며 회피할 수 없는 쟁점에 대한 검증을 거친 이후에도 최종적으로 '발견될' 만족에만 진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는 유명론에서 실재론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모습이며, 확률은 일련의 사건에서 해당 사건의 상대빈도라는 관점으로부터 확률은 '지향성'이라는 관점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과 상응한다." "〈공동체가 어떠한 질문에 대한 불변의 결론을 합의로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 기껏해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정도이다.〉"(419-20)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하면, 이성에게 위안이 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 우연은 더 이상 비밀스런 환희를 위협하거나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통계적 법칙, 즉 물질의 가장 미세한 입자 위에 자그맣게 새겨진 평균의 법칙에 의해 안전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퍼스는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라는 식의 서술을 즐겼다. '첫째는 우연이고, 그다음은 법칙이며, 어떤 기질을 가질 경향은 셋째이다.' 이것은 우연이 통계적 법칙에 의해 소멸된다거나, 연속적인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서 우리가 흄이 주장한 습관이라는 저 마음 편한 개념을 다시 상정해 볼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째였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첫째이다. 우리가 우주의 별자리를 보는 경우처럼 무한의 상황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경우처럼 전적으로 개별적인 특수성의 환경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연은 감각의 모든 경로에 쏟아져 내린다."(426-7)


# 흄의 습관 : 흄이 귀납법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인과관계를 확립하는 메커니즘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흄은 '원인'으로부터 '결과'에의 '이행'移行이 일어나는 것은 '습관'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으로, 여기에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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