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로르 도트리슈 지음, 이세진 옮김 / 프란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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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모든 음악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역사에 참여한다. 그들은 권력에 매혹을 느끼기도 하고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어떤 창작자는 음침한 정권의 대변인이 되기도 한다." "그들과 시대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우리는 온갖 것을 발견한다. 오페라, 교향곡, 칸타타, 피아노 소나타······ 이 위엄 넘치는 작품들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작품들은 군중을 전율시켰다. 이 작품들이 그들을 살게 했으며, 나아가 그들의 나라와 화해하게 했다. 작곡가들의 의도도 대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몇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선율, 현의 속삭임, 매혹적인 리듬으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때때로 시대에 떠밀려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타일의 전격적인 변화는 음악가가 작품에 혁명적이거나 정복자적인 어조를 부여하고자 할 때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정통적이지 않은 형식과 화성을 구사함으로써 음악사를 급작스럽게 변화시켰다."(13-4)


1 장바티스트 륄리


"1653년 2월 23일, 루이 14세의 프롱드의 난─프랑스의 귀족들이 루이 14세의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내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진압을 축하하는 「밤의 발레」 공연에서 륄리도 단역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아마 목동도 되었다가 병사도 되었다가 절름발이 분장도 했다가 하는 일개 실루엣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소 춤을 추는 왕과 한 무대에 오를 기회였다. 젊은 군주는 춤을 무척 좋아하여 매일 몇 시간이나 춤에 몰두했다. 륄리는 여기에 전부를 걸었다. 그는 왕에게 금빛 햇살로 짠 듯 화려한 의상을 입은 아폴론의 모습으로 무대에 서라고 권했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루이 14세는 이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전진하며 중신들에게 위엄을 떨쳤다. 젊은 왕은 이렇듯 예술을 통하여 궁정에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절대왕정의 광휘를 유럽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과시했다. 바야흐로 태양왕이 탄생하고 있었고, 륄리는 출세의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21)


"왕은 그를 신뢰했고 륄리는 그 대가로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다. 륄리는 왕의 치세를 드높일 생각밖에 없었다. 륄리는 무엇보다 태양왕을 무대에 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왕이 발레 「병든 사랑」(LWV 8) 전체의 작곡을 맡겼을 때 륄리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주어진 기한이 매우 짧았는데도 1657년 1월 17일 루브르궁에서의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왕은 첫 장면부터 륄리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등장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무대에 오를 터였다. 이제 막 작곡가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륄리의 음악에는 이미 마법적인 데가 있었다. 단순한 반음계 혹은 조성의 맛깔나는 변화만으로도 왕이라는 존재가 강력하고 눈부시게 부상하는 듯했다. 1653년부터 1661년까지 이 젊은 이탈리아인의 발레 음악은 프랑스 음악을 착착 장악해갔다. 아직 새로운 음악 형식을 만들어내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이미 프랑스 군주정을 음악으로 가장 잘 구현하는 음악가였다."(22)


"베르사유성은 군주의 영광을 드높이는 도구로 쓰였다. 1664년 봄, 왕은 성대한 연회에 올릴 혁신적인 공연물, 연극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는 작품을 륄리와 몰리에르의 합작물로 만들 것을 명했다." "소극과 풍속희극은 이 새로운 유형의 연회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륄리와 몰리에르는 영역을 바꾸었다. 그래서 「엘리드 공주」(LWV 22/5-22)의 스토리는 기마 수렵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놀라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모두에게 선보인 이 코메디발레의 장면들 중간중간에는 음악과 춤이 교차한다. 음악과 말이 처음으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륄리는 자신의 작곡 방식을 바꾸어 몰리에르의 운문을 따라갔다. 텍스트에는 운문과 산문이 섞여 있었고, 악구는 보다 유연해져 가사에 착 붙었다. 륄리는 아리아를 배우의 연기에 통합시켰다. 그러나 그가 고안한 가장 중요한 장치는 레치타티보, 즉 인물이 낭독을 하듯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때까지는 그러한 음악이 없었다. 프랑스 오페라의 첫 소산이었다."(26-7)


"1685년 1월 륄리는 치명적인 불명예를 입는다. 루이 14세에게 륄리가 왕의 시동 중 하나인 열세 살짜리 소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고발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궁정에는 륄리가 자신들과 같은 신분임을 절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귀족이 많았다. 그들은 여전히 냉소적으로 그를 바티스트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륄리는 언제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상대, 일개 하인이자 장인匠人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일을 이용해 그를 가장 강하게 공격한 이들은 다름 아닌 성직자들이었다." "1686년 2월, 그는 자신의 마지막 서정 비극 「아르미드」(LWV 71)를 왕에게 들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의 루이 14세는 그 작품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부 발췌 부분이 궁정 왕세자비 처소의 부속실에서 비공개로 연주되었으나 왕은 그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걸작, 륄리의 가장 빼어난 작품을 왕은 영영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했으나, 륄리는 이제 두 번 다시 왕 앞에 나서지 못할 운명이었다."(34-5)


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튀링겐주 아이제나흐의 교회, 거기서 바흐는 루터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세기의 간격이 있었지만 둘 다 그 교회의 성가대 소년이었다. 루터가 교황에게 파문당한 뒤 설교를 했던 교회가 바로 그곳이었고, 바흐 또한 그 교회에서 평생의 악기가 될 오르간과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어릴 적 그 교회에 딸린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바흐가 일곱 살 나이로 입학했을 때부터 교회학교에는 루터의 그림자가 떠돌고 있었다. 교육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음악, 그중에서도 가창이었다." "루터는 음악이 성경 말씀을 풍부하게 표현해준다고 보았다. 음악은 복음서의 말씀을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게 한다고. 바로 그 점이 바흐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데 확신을 더해주었다. … 1707년 4월, 스물두 살의 청년 바흐는 초기 교회 칸타타 중 하나, 즉 루터의 일곱 절 코랄을 바탕으로 작곡한 칸타타를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BWV 4)였다. 노랫말은 종교개혁의 가장 오래된 코랄중 하나에서 따왔다."(41-3)


# 칸타타 :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 독창, 중창, 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진다.


"그는 악보 첫머리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음으로써 신성한 영광의 표지 아래 자신의 작품을 둘 것이었다.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하지만 바흐가 루터를 맹목적으로 좇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형식을 다양화했다. 어떤 때는 칸타타를 호른과 트럼펫으로 화려하게 시작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현을 잔잔하게 깔아 보다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성경 말씀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인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대화, 혹은 양과 목자의 대화를 상상하기도 했다." "메시지는 가사뿐만 아니라 악기의 정묘한 사용으로도 전달된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구현하는 이미지처럼 악기 자체가 전례력의 한 장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트럼펫은 부활을 예고하고, 오보에는 크리스마스의 목가적인 면을 환기하며, 첼로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들을 장중하게 반주한다. 바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에서 반음계를 쓰고, 주의 숨이 끊어짐을 표현할 때는 빠른 트릴을 구사했다."(48-50)


"1730년에는 마침내 장엄미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B단주 미사」(BWV 232)가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을 그는, 죽기 직전에야 완성할 터였다." "생애 말년에 이르러 음악적 유언을 남기면서, 바흐는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교회를 초월하는 보편 교회에 기준을 두기라도 한 것 같다." "바흐는 현기증 나는 솜씨로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이 미사곡에 통합해냈다." "바흐가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 1750년, 세상의 풍조가 그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얼마 전부터 갈랑 양식이 유럽을 휩쓸던 참이었다. 복잡하고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평을 듣는 바흐의 음악보다는 귀에 착착 감기는 아름다운 선율 위주의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바흐의 음악은 계속 연주되었고 그의 제자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 스승의 이름을 이어나갔지만, 세상은 경건주의 운동과 계몽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럽은 음악적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제 6년 후에는 모차르트가 태어날 것이다."(52-3)


# 장엄미사 : 가톨릭의 대미사를 위한 곡


# 갈랑 양식 : 바로크 시대의 중후한 폴리포니(다성음악)에 반발하여 경쾌하고 우아한 호모포니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 양식


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은 사랑과 빛이 도처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이었다. 몇 년 전부터 모차르트는 가톨릭 교리의 관행에 냉담했다. 결코 충족되지 못한 커다란 열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는 신에게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당연히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미사에 참석했으며 사순절도 지켰다. 그렇지만 프리메이슨 지회에서 그는 종교적 관용과 박애라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는 프리메이슨 단원으로서 귀족들과 대등해졌다. 대단한 영주들 앞에서도 전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평민이 아니었다." "1785년 3월에 프리메이슨을 위한 첫 작품 〈직인의 여행 노래〉(K. 468)를 만들면서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노래는 과장 없이 경쾌하기만 하다. 단 한 연으로 이루어진 이 가곡에서 테너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새로운 앎의 단계에 다가가는 그대, 그대의 오솔길을 굳건히 걸어가시오. 그것이 지혜의 길임을 아시오.〉"(59-61)


"사실 빈은 모차르트에게 이미 싫증을 낸 터였다. 대중은 건반의 비르투오소 모차르트를 사랑했지만 그의 오페라는 지나치게 복잡하다며 불평했다. 새로운 화음이 그들의 귀에 생경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차르트 오페라의 독창적인 사상에 당혹감을 느껴서?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1786년에 모차르트는 환멸에 빠졌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빈의 청중에게 당최 전달할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를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프라하와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프라하의 거리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들도 그의 오페라 몇 소절을 휘파람으로 흥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빈에서도 프리메이슨 지회만큼은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서 그는 존경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았다. 모차르트는 다른 바람이 없었다. 자신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기가 다른 음악가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라도 주의 깊게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는 그 사람을 위해 몇 시간이고 연주할 수 있었다."(63)


"1791년 초 무렵, 빈에서 프리메이슨은 1780년대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빛나는 엘리트 집단이 아니었다. 요제프 2세는 죽고 1790년 2월 레오폴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참이었다. 그 전까지 프리메이슨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왔지만 프랑스대혁명의 성난 외침에 겁을 먹은 새 황제는 그들의 세력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자유를 존중했던 전임 황제의 태도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1791년 봄 프리메이슨 출신이자 빈의 한 극장장 에마누엘 시카네더가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에서 영감을 받은 오페라, 이 비밀결사의 영광을 기리는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했다. 이 작품이 다름 아닌 「마술피리」(K. 620)다. 형제들이 위협받고 있었으니,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이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권한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모차르트는 전혀 피곤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홉 달 뒤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69-71)


"모차르트는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따금씩 몸이 안 좋긴 해도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다. 그는 극심한 불안을 억압하기 위해 무절제한 생활에 빠지거나 미친 듯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8월에 의뢰받은 「레퀴엠」(K. 626)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가 잠시 작업을 멈추었다. 다른 데서 더 흥미로운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프리메이슨 칸타타였다. 모차르트는 자기 지회의 새로운 회합 장소 개막식을 위해 생애 마지막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가 '우정의 찬가'라 불렀던 「작은 프리메이슨 칸타타」(K. 623)이다. 「레퀴엠」은 결국 미완으로 남았으므로 이 칸타타가 그의 마지막 완성작이다. 당시의 극심한 피로를 반영하듯, 그의 편지 속 글씨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다. 하지만 악보만큼은 여전히 명쾌하며, 모든 음표는 완벽한 통제하에 놓여 있다." "육체의 피로와 빚더미에도 불구하고 더욱 박애적인 내일의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이 놀라운 작곡가를 보라! 그러나 그의 살날은 20일밖에 남지 않았다."(74-6)


4 프랑수아 조제프 고세크


"1789년 겨울, 쉰여섯 살의 고세크는 구체제의 유명 인사로서 25년 넘게 귀족들을 위해 일을 해주고 경제적 안락을 누려온 터였다." "온 나라가 혁명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했을 때, 고세크는 자신의 이력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겁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처럼 민활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는 1789년의 사건들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고세크는 왕을 존중하면서도 헌법이 제정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혁명사상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음악가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권력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없는 그였다. 이 위험천만한 일에 홀로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수완 좋은 사람답게, 민중이 틀림없이 그에게 보내올 신호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바스티유 점령 며칠 뒤 고세크는 당시 목숨을 잃은 시민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의적절한 음악을 만들기에 그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고세크는 주저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81-3)


"1795년 1월 21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 처형 2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고세크가 이끄는 연주자들의 공연도 마련되었다. 튈르리궁의 공연 장소에서 고세크의 오케스트라는 근엄하면서도 사색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서정성이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국민공회 의원들은 기가 막혀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구슬픈 소리는 뭐지? 이런 탄식으로 1월 21일을 기념한다고? 누군가는 역사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세크를 불렀다. 〈이 음악은 도대체 뭐요? 루이 16세, 그 독재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건가?〉 고세크는 당황해서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 〈저는 단지 독재자에게 해방된 행복이 섬세한 영혼들에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연주자들은 의혹을 남기지 않기 위해 곧바로 공화국의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몇몇 의원은 나중에 귀를 틀어막기에 이르렀다."(95)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혁명 음악의 시대는 끝났다." "보나파르트가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을 때 고세크는 다른 소수의 작곡가들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국가원수가 자신의 첫 정치적 승리들을 음악으로 옮긴 자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한 셈이었다. 그것이 고세크 인생의 마지막 훈장이었다. 동료 작곡가 에티엔 메윌이나 앙드레 그레트리가 그랬듯 고세크 역시 점차 총애를 잃는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814년에는 그 자신도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아흔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고세크는 두 친구와 함께 참으로 길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혁명의 아름다운 날들, 상드마르스의 여러 의식에서 그의 찬가들이 거둬들인 성공이었다. 인민을 음악에 입문시킨 순간들을 고세크는 즐겨 회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 민중이 처음으로 역사적 기념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고세크의 공로다."(96-7)


5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떠받치는 사람이라 믿었으며 그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교향곡에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내걸릴 것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만들어온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걸작을 내놓고 싶었다. 그토록 신봉하는 혁명을 음으로 옮기고 싶었다." "바로 그때, 1805년 5월, 파리에서 보나파르트가 머지않아 황제의 자리에 오를 뜻을 밝혔다. 베토벤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보나파르트 장군은 이제 나폴레옹 1세가 될 터였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적힌 악보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베토벤이 그토록 찬양했던 혁명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혁명은 전쟁 중에 와해되었다. 그가 교향곡에 붙이려 했던 제목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그 작품에 「영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어느 위대한 인간을 기억하며〉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제 그는 전에 없던 소리와 리듬의 조합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이어감으로써 음악의 혁명을 이루어낼 것이었다."(104-8)


"1808년 12월, 도시에서 가장 지체 높은 이들이 빈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날의 관람권 한 장 가격이 노동자의 일주일 치 급료를 뛰어넘었다. 이날 베토벤은 네 시간에 걸쳐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교향곡 5번」과 「교향곡 6번」(Op. 68)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보였고, 건반 앞에 앉아서 「피아노 협주곡 4번」(Op. 58)을 연주했다. 그다음에는 즉흥연주를 했다. 그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직접 연주하는 모습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각 상실이 그를 덮칠 터였다." "베토벤은 관객을 휘어잡고 싶었고, 자신을 향한 그들의 지지를 느끼고 싶었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로브코비츠 공작이 합의하여 베토벤에게 연간 4000플로린을 지급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빈에 계속 남는다는 조건을 준수하는 한, 베토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만들고 싶은 곡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110-1)


"하지만 외부적인 요소가 그를 후려쳤다. 180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다시금 전쟁에 돌입했다. 황실 가족은 빈을 떠나야 했고, 나폴레옹이 강제한 조약으로 인해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더는 후원자들에게 한 푼도 얻어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의 설원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이 중대한 역전의 첫걸음을 베토벤은 놓치지 않고 음악으로 옮겼다. 1813년 6월 12일, 바스크 지방의 비토리아 인근에서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격멸하자 나폴레옹 황제와 적대 관계에 있던 모든 이들, 특히 그곳으로부터 1600킬로미터 떨어진 빈에 있던 베토벤은 기뻐 날뛰었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로 작정하고 때맞춰 〈웰링턴의 승전〉(Op. 91)을 만들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당대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음악으로 한정된 숭배자와 음악 애호가 무리를 벗어나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111-4)


"그러나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이 옛일이 되자 애국적 색채가 짙은 작품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베토벤의 영웅시대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은 예전처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빈 사람들은 로시니의 경쾌한 음악, 카리스마 넘치는 테너가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기교적인 아리아를 훨씬 더 좋아했다. 베토벤의 주요한 후원자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이제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에 사로잡혀 낮이고 밤이고 일에만 몰두했다. 최고의 대작 「교향곡 9번」(Op. 125)이 완성되기까지는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입문의 여정처럼 작동시킨다. 이는 흡사 건축가의 작업과도 같다. 그는 가장 적합한 소리를 찾고 이런저런 시도를 싸하가며 오선보를 수없이 수정했다. 〈아니, 이건 우리의 절망을 상기시키는군.〉 그러다 마침내 환희를 노래하기에 알맞은 선율을 찾고서 이렇게 쓴다. 〈아, 찾았다 / 아름다운 기쁨.〉"(115-8)


6 엑토르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에게 1830년 7월혁명은 사상의 혁명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던 시기에 그는 음악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80대 노인 음악가들의 케케묵은 이론을 일거에 몰아내고 싶었다. 19세기의 뭇 음악가에게 영향을 주게 될 「환상교향곡」(H. 48)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마치 벼락처럼 일어났다. 베를리오즈는 비이성적인 것, 과한 것, 극단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에겐 숨 가쁘게 질주하는 상상력이 있었다. 상상력이 그의 존재 전체를 뒤덮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의 힘을 믿는다. 이성은 크나큰 신비를 해명할 수 없으며 상상이야말로 인간의 신비를 더 잘 통찰할 수 있으리라고 베를리오즈는 생각했다." "베토벤이 그랬듯 베를리오즈 역시 자기가 만드는 교향곡의 각 악장에 제목을 붙였다. 아니,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베를리오즈는 각 악장에 아주 상세하게 작성한 프로그램을 곁들였다. 역사상 최초의 표제 교향곡이었다."(131-2)


"베를리오즈는 마흔도 안 되어 국가의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대단한 후의를 입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열정적이고 몽상적인 낭만파 예술가였다." "1840년은 7월혁명 10주년이었다. 이 기념일에 인색하게 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루이필리프는 10년 전에 누렸던 인기를 되찾고자 했다. 당시 민중이 품었던 소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집단적 환멸만 남아 있었다. 왕은 이제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 60미터 높이의 기둥과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고, 영광의 사흘 당시 목숨을 잃은 500여 명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 올 계획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이벤트가 음악 없이 성사될 수는 없었다. 규모에 걸맞은 대곡, 기념식이 열리는 야외에서 성대하게 올릴 작품이 필요했다." "그는 진작부터 장송 교향곡을 기획 중이었고, 악보는 겨우 두 달 만에 완성되었다. 베를리오즈적 전통에서 하나의 기념비로 남게 될 이 작품의 제목은 「장송과 승리의 대고향곡」(H. 80)이었다."(136-7)


7 주세페 베르디


"1842년 3월 9일, 베르디는 밀라노 스칼라 극장 무대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 대중은 「나부코」(IGV 19)에 열광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오페라는 그들의 처지를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탈리아는 벌써 3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히브리 노예들이 저 매혹적인 〈날아가라, 상념이여〉를 한목소리로 부를 때 극장 전체가 열광에 빠졌다. 청중은 그 합창의 마법적인 힘과 트럼펫의 폭발적인 소리에 홀려버렸다. 당시만 해도 무기를 들고 일어나 오스트리아 주둔군을 몰아낼 생각을 하는 이탈리아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밀라노의 애국 투사들은 이미 국토 해방을 꿈꾸고 있었고, 그들에게 이 애달프고 매혹적인 노래는 금세 집합 신호가 되었다." "베르디의 음악은 민중의 가슴을 정통으로 울렸다. 강력한 조국애가 그의 오페라에서 뿜어져 나왔다. 베르디는 더욱더 민중의 취향을 고려하여 오페라에 서사시적인 기개를 불어넣기 시작했다."(144-5)


# 나부코 왕 :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이탈리아어로는 나부코도노소르


"민중은 그의 몇몇 오페라 아리아에 베르디 자신으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열정적인 의미를 한마음으로 부여했다. 비결은 그의 언어에 있었다. 베르디는 보잘것없는 시골 농부도 이해할 수 있는, 모두가 알아듣는 소박한 언어를 구사했다. 의미로 충만하다 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말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바그너가 전설을 말한다면 베르디는 인간의 드라마를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연약함, 감정의 힘, 미묘한 정서를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났다. 가장 비천한 이야기도 베르디를 통하면 위풍당당해졌다. 바로 그러한 점에 대중은 전율했다." "1850년대 초반에는 애국적인 오페라가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했다. 베르디는 이 시기에 일명 '대중적 3부작', 즉 「리골레토」(IGV 25)와 「일 트로바토레」(IGV 31), 「라 트라비아타」(IGV 30)로 이력의 정점을 찍었다." "베르디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하고, 감동을 주고, 꿈을 꾸게 만드는 주역은 다름 아닌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였다."(149-50)


8 클로드 드뷔시


"전쟁 발발과 함께 프랑스로 밀려드는 애국의 파도가 드뷔시를 사로잡았다. 드뷔시는 생각했다. 승리를 거두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음악을 통해 이루어질 터였다. 그는 전쟁에서 무엇을 들었는가? 귀에 거슬리는 전선의 소음, 병사들의 고통, 대포 소리. 그러나 그 소리를 곧장 음악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런 건 그의 음악적 양식과 맞지 않았다. 드뷔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1914년 11월, 작품 의뢰를 받은 그는 완성된 곡에 〈영웅의 자장가〉(L. 132)라는 제목을 붙여 벨기에 왕과 그의 용맹한 병사들에게 헌정했다. 전쟁 초 벨기에의 용감한 저항이 프랑스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속도를 늦춘 터였다." "친구들을 앗아간 전쟁의 와중에 드뷔시는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되살리려는 양 프랑스 전통으로의 회귀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한때 비유럽 음악에 대한 개방의 상징이었던 그가, 이제는 너무 많은 영향에 휘둘려 엇나가는 프랑스 음악의 명예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169-70)


"드뷔시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애국적인 대작을 쓰고 싶었다.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를 그 작품의 주제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이 그의 발목을 잡을 터였다. 비록 당분간은 몸이 버텨줄지라도. 1916년의 추운 겨울 저녁, 그는 파리의 한 살롱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 그의 아내 에마가 속한 '전쟁 포로의 옷' 사업단을 위한 자리였다. 때때로 그가 호소하는 무시무시한 피로는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날 저녁 그가 연주한 작품은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갓 완성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백과 흑으로」(L. 134)를 들고 온 것이다. 흑백의 대조보다는 벨라스케스의 회색을 생각하면서 썼다는 작품이다." "드뷔시는 독일을 상징하기 위해 루터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선율을 살짝 비틀어 단편적으로 삽입했다. 이 작품의 현대성이 그날 저녁 휘황찬란한 살롱에서 음악에 귀 기울이는 이들 모두를 휘어잡았다."(174-6)


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음악의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 접근 방식 또한 야심만만했다. 모두 독일 음악가들의 권리와 직결된 행보였다. 그는 저작권 규정을 개정해 창작자의 권리 보호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늘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야만 했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로서 이력을 쌓는 내내 늘 권력자들과 가까워지려 애썼다. 일단 새로운 선전부 장관 괴벨스 박사를 거쳐야 했다. 슈트라우스는 1933년 7월에 괴벨스를 만났다." "그의 제안은 직접적이었다. 독일 음악가들에게서 유대인의 영향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제3제국 음악원의 총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주저 없이 수락했다." "슈트라우스는 흡족했다. 괴벨스의 지지를 확신한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작은 시내〉(Op. 88-1)라는 노래를 헌정하고 국가사회주의 조직에서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준 히틀러와 괴벨스에게 감사를 표했다."(182-4)


"괴벨스는 슈트라우스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한 그가 독일의 위엄을 높이기에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1936년 8월 1일,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무수히 휘날리는 새 경기장에 히틀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12만 개의 팔이 일제히 나치식 경례를 붙였다. 군중은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올림픽은 독일의 위대함을 만방에 과시할 이상적인 기회였다. 베를린 올림픽 포스터에는 인간 같기도 하고 신 같기도 한 금빛 형체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행사의 음악을 담당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정장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경기장 중앙의 나무 연단에 올라가 오른손에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와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의 제창을 이끌었다. 〈올림픽 찬가〉가 연주되는 4분 동안, 슈트라우스는 박력 있고 불규칙하면서도 장중한 음악으로 나치 체제를 드높였다. 몰개성적인 수많은 목소리가 그들의 유일한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군중 속을 파고들었다."(190-1)


"1945년 2월, 괴테와 수많은 음악인의 그림자가 엘베 강변에 어려 있는 도시 드레스덴이 처음으로 폭격을 당했다.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재가 된 시체들만 남았다." "다음 날부터 슈트라우스는 레퀴엠 형식의 서정적이고 비탄 어린 작품 〈변신〉(Op. 142)을 쓰기 시작했다." "〈변신〉은 아마도 슈트라우스의 가장 영적인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마음을 자극하는 만큼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유대인 차별법,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존재했건만 그동안 슈트라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터였다.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고 수용소와 대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그랬던 그가 이 감동적인 작품을 통해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물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45년 4월 12일 이 악보를 완성했다. 그로부터 2주 뒤, 히틀러가 총부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자살은 제3제국의 최후를 뜻했다."(200-1)


10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대大숙청의 공포에 시달리던 1937년 4월,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게 될 「교향곡 5번」(Op. 47)의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작품에 체제순응적인 부제를 달았다.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 초연 날 저녁, 연주회장은 꽉 찼다. 박수갈채가 30분 넘게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고자 자신의 음악에 보다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부여해 웅장한 D장조의 군악풍 주제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작곡가는 그동안 비판을 사던 형식주의도 제거하여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스타일을 한결 단순화했다. 그 관습적 언어라는 껍데기 아래서, 극도로 주지주의적인 태도 이면에서, 일부 청중은 모종의 메시지를 감지해낼 터였다.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대숙청이 세상을 온통 마비시키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기로 작정한 한 남자의 메시지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공포를 악보에 옮기면서도 그가 가진 최고의 것을 드러내는 거장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213-4)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해 왔고,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도시는 세상과 단절된 게토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건만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낙관적인 음악을 요구했다. 「교향곡 7번」(Op. 60)은 대단한 호평을 얻었고 서양 사회, 특히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의용소방대 헬멧을 쓴 쇼스타코비치의 사진이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정권의 상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행간에 메시지를 흘렸다. 그의 작품에는 은밀한 암시와 인용이 숨어 있다. 3악장에서 바이올린은 영원히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앞 2악장에도 기쁨은 공포와 뒤엉켜 있다. 마치 이 미친 세상에서 공격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희희낙락해야 한다며 억지 웃음을 짓는 것처럼. 검열, 그리고 자신을 눈여겨보는 스탈린을 의식하면서도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몸부림쳤다. 그 무엇도 자기 예술을 포기하는 것보다 끔찍하지는 않았다."(214-5)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온 나라를 흔들어놓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전망이 열리기를, 스탈린 치세의 무거운 압박에서 비로소 해방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1970년대 초의 쇼스타코비치는 회한에 찌들어 기진맥진한 사내였다. 살아오면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지만 모두 죽은 사람들, 그야말로 시체들의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악보에 지시어를 쓰면서 종종 '모렌도morend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모렌도, '죽어가듯이'라는 이 단어는 마치 작곡가 자신의 삶의 반향 같다. 그는 비겁하게 살았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혔다. 여섯 번의 스탈린상과 세 번의 레닌상을 수상한 경력마저 자책의 이유가 되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는 괴로워하며 서서히 죽어갔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은 장례식을 성대하게 마련했다. 쇼스타코비치를 그토록 오래 박해했던 자들이 상석을 차지했다."(223-5)


11 기데온 클레인


"1941년 12월, 기데온 클레인은 프라하에서 출발한 세 번째 호송대에 이끌려 체코의 작은 마을 테레진에 있는 게토로 끌려갔다." "수용자들은 대부분 게토 정비 사업에 동원되었다. 가건물이나 화장터를 지어야 했고, 나치 친위대의 농지도 건사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 가스실은 없었다. 테레진은 잠시 머물다 가는 수용소였다." "나치 지도부는 처음에는 모든 예술 활동을 금지했지만 3주쯤 지나서부터는 방침을 바꾸었다. 음악을 허용하면 수용자들의 반항심이 잦아들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문화생활을 조금 누리게 해주면 훨씬 편해질 터였다. 게다가 테레진이 꽤 지낼 만한 게토라는 생각도 신빙성을 얻을 것이므로 수용소장 자이틀은 그들의 연주나 노래를 막지 않았다. 그는 수용자들이 아직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테레진에서 음악은 일종의 배경 장식이자 눈속임이었다. 나치는 수용소 내 문화생활을 장려하는 '여가 관리' 원칙까지 받아들였다."(229-33)


"적십자단이 다녀가고 나치 선전 영화 촬영이 있은 후로 아우슈비츠나 그 외 동부의 학살 수용소를 향해 떠나는 호송대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1944년 10월 초, 게토에는 이제 1만 1000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개중에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도 클레인의 열의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의 「현악 3중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악보는 음표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고통과 음악의 순수성이 빚어내는 대비가 악절마다 깊이 스며 있는 듯하다." "이 3중주는 게토 안에서 연주되지 못할 것이었다. 1944년 10월 16일, 그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이 완성된 지 아흐레 만에 클레인은 949번 표지를 단 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붉은 군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1945년 1월 27일, 나치유격대가 현장에 와 남아 있던 포로들을 몰살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기데온 클레인도 있었다. 그는 수용소 해방을 며칠 앞두고 죽었다.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241-2)


12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1958년 6월의 그 저녁, 테오도라키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야니스 리초스의 시 「묘비명」을 다시 읽었다. 시인이 1936년 살로니카 담배 공장 노동자 파업 진압으로 사망한 아들의 피투성이 시신을 들여다보는 어느 어머니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그 심정을 옮겨낸 작품이었다. 시를 읽던 중,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문득 속에서 음악이 샘처럼 치솟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수첩을 꺼내 오선을 긋고 떠오르는 대로 음표를 받아 적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쉬지도 않고 곡을 썼다. 그날 저녁에 쓴 곡만 여덟 편이었다! 프랑스 시에 곡을 붙일 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사랑하는 모국어에서 영감을 받은 선율과 악절은 숨 쉬듯 저절로 나왔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음악의 전통들을 한데 아울러 모든 그리스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어휘로 노랫말을 다듬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 조국 그리스와 음악을 하나로 아울렀다. 이 노래가 그리스인들의 희망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248-9)


"1967년 4월의 어느 밤, 전화가 왔다. 여성 동지가 전차들이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군사정권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헌법을 폐지한 것이다. 암울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라키스는 생각했다. 내가 잡힌다면,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작품이 뒷일을 맡아주리라. 그의 음악은 그보다 힘이 셌다. 군사정권은 민중이 그의 음악에서 어떤 힘을 얻는지, 그의 노랫말이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고 격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령들에게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특별히 취급할 만한 독보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령을 내렸다. 〈군령 13호. 공산주의자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과 노래에 대하여 재생과 연주를 금한다. 이 작곡가는 현재 해체된 공산주의 조직 람브라키스 민주청년단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음악은 공산주의를 보좌한다.〉 어찌 보면 압제자들은 이 자유의 작곡가에게 가장 아름다운 경의를 표한 셈이다."(254-6)


13 존 애덤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지 14년 후에 존 애덤스는 꼬박 2년을 「중국에 간 닉슨」에 할애하면서 자신이 이 오페라에 담고 싶은 소리를 찾았다. 색소폰 네 대와 타악기들이 포진한 오케스트라 구성은 1930년대의 스윙 악단과 비슷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댄스홀에 왔던 듀크 엘링턴 악단을 본 뒤로 재즈와 대중음악의 피가 줄곧 그의 몸속에 흐르던 터였다. 심지어 그 전설적인 재즈 연주자가 피아노를 칠 때 존 애덤스는 바로 옆에서 이를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는 금관악기의 박력에 압도되었다. 듀크 엘링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의 환희와 서정성,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특별한 방식에 그는 단단히 사로잡혔다. 애덤스의 신전에는 모차르트, 바그너, 시벨리우스뿐 아니라 마일스 데이비스, 비틀스, 지미 헨드릭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길잡이로서 이 작곡가의 삶에 함께했다. 존 애덤스는 클래식 음악 지식과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교차시키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갔다."(273-4)


"오페라에 아직 미래가 있다면 이 장르 역시 우리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애덤스는 생각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맞닿아 있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테러리즘에 대해서 말해야 했다. 하지만 정치가 개입되면 문제가 커지기 마련이다. 1990년에 그는 「클링호퍼의 죽음」을 만들었는데,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었다. 5년 전, 어느 팔레스타인 유격대가 유람선 아킬레 라우로호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집트 난바다에서 승객들을 볼모로 잡고 레온 클링호퍼라는 유대계 미국인인 하지 마비환자를 처형한 뒤 그의 시신을 휠체어와 함께 바다에 유기했다. 오페라 대본의 일부는 선장, 스위스인 할머니, 그 외 승객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망명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합창과 홀로코스트를 모면한 유대인들의 합창이 오페라를 여는데, 이 두 합창의 대결로 아킬레 라우로호 인질극 사건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더 넓은 집단적 비극의 맥락 안에 놓인다."(275-6)


"〈영혼의 환생에 대하여〉는 9.11 테러의 공포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지만 인상파의 작품이 그렇듯 내면에 집중한다. 고통의 아픔과 깊이가 여간하지 않아 그로서는 그 이상을 말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려 해봐야 소용없었다. 다만 애덤스는 서정성을 지나치게 쏟아내는 것만은 반드시 피할 작정이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증폭시키는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악취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2년 3월, 테러 이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 그는 미국을 횡단해 뉴욕으로, 그 테러의 현장으로 갔다. 현장 주변 거리의 벽마다 사고 직후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희생자를 찾기 위해 남겨놓고 간 낙서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꽤 흘러 흐릿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희생자의 사진과 이름, 신체적 특징, 전화번호 그리고 가슴 아픈 메모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만든 곡은 '추모의 장'이었다. 존 애덤스는 프로그램에 작품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각자가 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하고만 함께하는 작품.〉"(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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