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복지국가 만들기에 실패했나
몰리 미셸모어 지음, 강병익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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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세금은 왜 중요한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90% 이상의 미국인이 많든 적든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 및 경제적 안정을 공공자금에 의존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연방부조 수급자의 대부분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복지여왕들'이 아니라, 중산층 자택 소유자, 유급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퇴직자들이다. 인정은 고사하고 거의 인식조차 되지 않았지만, 미국 중산층은 사실상 1세기 동안 표적화된 사회·경제 정책의 산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신을 경제적 안정과 중산층이 다수가 되도록 계층 상승을 도왔던 정부 정책의 수혜자보다는 조세법의 과중한 희생자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현대 미국 정치의 기본적인 역설이다. 미국인들은 정부를 싫어하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특례, 사회보장, 계층 이동성을 하나의 권리 문제로 요구하고, 기대한다. 이 책의 목적은 1930년대 뉴딜로부터 1980년대 레이건 혁명을 거쳐 지금까지 조세와 지출 정책의 전개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명백한 모순을 해명하는 데 있다."(8-10)


제1장 복지국가와 조세국가 지키기_뉴딜과 전후 복지국가 논쟁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대부분의 자유주의 사회 프로그램이 종전 직후 짧았던 보수주의의 부활에도 살아남았다.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입법권자들은 퇴역 군인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교육 수당을 늘리고, 심지어는 주택 구매도 더욱 손쉽게 할 수 있도록 새롭고 이전보다 훨씬 관대한 수당제도를 쏟아냈다. 사회보장 역시 확대되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미국적이지 않은, 〈노동자와 사업주의 급여를 통해 지급되는 주정부의 자선 형식〉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 이르자 오하이오주의 공화당 상원 의원 로버트 태프트와 같은 투철한 보수주의자와 전국상공회의소마저도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상하 양원 모두에서 양당 간 협력을 통해 다수로 통과된 1950년의 사회보장법 수정안은 이 프로그램이 장기간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미국 복지국가의 핵심에 이 프로그램을 정착시킬 수 있게 했으며, 이전의 취약했던 프로그램을 '불문율third rail'로 전환시키도록 도왔다."(39-40)


"자유주의자들 역시 그들의 시각을 수정했다. 본래 조세국가와 복지국가는 전시에 사라졌던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고 승인받았다. 그러나 조세국가와 복지국가, 양자에 대한 도전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전후 자유주의 국가를 봉쇄하고 저지하려는 노력은 보수주의 정책 엘리트들이 세금을 삭감하고, 뉴딜 사회 정책 프로그램의 폐지와, 국가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전력함으로써 배가되었다." "결국 자유주의 세력은 자유주의 정치 기획을 통째로 저당잡힘으로써 그럭저럭 조세국가와 복지국가의 기본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세저항 심리가 기존의 경제 및 사회 정책 프로그램─초기 냉전 시기의 국가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전후 자유주의 정책 결정에 대한 케인스주의 경제 성장의 중요 논리가 조화된─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자유주의 세력의 공포는 입법자들이 핵심적인 경제 및 사회 정책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 지원을 훨씬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도록 했다."(42-3)


"공공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널리 퍼진 대중들의 적대감은 뉴딜로부터 계승된 복지국가의 한계와 종전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적·경제적 특성을 모두 말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대공황과 전시 이후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고대했지만, 그러한 미래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도 품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의 관계 악화와 냉전의 출현은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한) 최후의 전 지구적 갈등이라는 불안감을 드높였다." "전후경제 성장도 그 자체로 문제를 야기했다. 〈사치와 결핍〉이 뒤섞여 경기 호황 자체가 혼란스러웠는데, 〈결핍의 목록〉은 〈끝이 없었고 ··· 수요는 ··· 엄청났으며 ··· 돈 없는 사람이 없고 ···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없어 보이지〉만, 미래는 불안정해 보였다. 많은 이들이 10년 이내에 또 다른 심각한 경기 불황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이러한 번영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47-8)


"납세자들의 눈먼 돈을 훔치는 '구호민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한 신경질적인 머리기사들에도 불구하고 공공부조는 결코 세금 상승의 원인도, 공공 지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1960년까지 중위 소득 이상의 미국인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직접 지급되는 이전급여의 51%를 가져갔다. 중간계급 납세자들은 특히 퇴역 군인과 농민 수당의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대부분의 빈곤층에게 지급되는 프로그램들조차도 중산층과 상위 계층의 소득자들에게 일부 지원금을 제공했다. 1960년에는 사회보험 지급액의 30% 이상이 중위 소득 이상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연방 재정 정책을 설명하는 전문용어를 활용하여 중간계급의 구성원들─풍요로운 미래의 꿈을 향유하는─에게 그들의 새로운 금전적 이익과 경제적 안정, 그리고 직접적인 정부 지출과 간접적인 정부 지출 간 연결고리를 무시하게 함으로써 이 막대한 대부분의 국내 지출을 지속적으로 위장하거나 숨기기까지 했다."(50-1)


"정책 선택이 이러한 수사법을 통한 분리를 강화했다. 사회보장 전문가들과 주창자들은 노령자유족보험OASI과 같은 기존 제도를 보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배가함으로써 공공 지출과 세금 인상에 대한 의회와 대중의 적대감에 대응했다. OASI로 통칭되는 사회보장제도가 세금에 대한 미사여구와 반국가적 수사법을 동원한 부양아동보조ADC와 일반부조 반대운동에 희생될 것을 우려한 사회보장청의 전문가들은 이 프로그램을 실패한 복지정책과 거리를 두게 하고, 연간 예산 절차가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사회보장제도 주창자들은 OASI가 〈모든 미국인 가정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대상〉으로 하도록 고안된 〈일종의 정부 보험회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 〈쳬게적이고 현명한 절약〉 프로그램에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납세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워 건전하지 못한 국가 의존성을 당연시하며 조장하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대비시켰다."(52)


"공화당은 감세의 정치적 호소력을 알고 있었다. 1947년 공화당 열성분자들이 주장했던 감세는 '미국의 복지'뿐만 아니라 '1948년 공화당의 성공'을 넘어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부과된 조세 부담은 전시와 전후 모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생계비 상승과 연동된 세 부담의 상승은 풀뿌리 수준에서 유권자의 불만을 고조시켰는데, 이는 민주당 표밭에서 유권자들이 이탈하도록 공화당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였다. 국민 경제의 변화는 세금을 정치 쟁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이 점점 더 세금을 의식하게 되자 감세는 더 매력적인 정치 의제가 되었다. 더욱이 감세는 공화당이 핵심 원칙을 위반하거나 기업집단에 대한 지지 기반을 잠식하지 않고 선거에서 호소력을 키울 수 있게 했다." "전시의 대규모 소득세 창출은 공화당이 납세자인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기회와, 공화당에 〈이상주의적 의식과 좋은 삶에 헌신〉할 기회를 제공했다."(58-60)


"1951년 7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대상자의 68%가 연방세 최고 한도를 25%로 하는 제안에 찬성했는데, 찬성 의사는 고르게 나타났다. 기업인과 전문 직종에서 64%의 지지 의사가 표출되었고, 육체노동자와 농민층은 68%,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69%가 찬성했다. 이들 납세자 중 이와 같은 감세안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 조치의 반대자들은 감세안이 과세 부담을 기업과 부자들로부터 중간 및 하위 소득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임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사실 개인 납세자의 약 1%만이 과세제한으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운 좋은 소수를 위해, 감세 혜택의 규모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소득 규모와 연동하여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연간 2만 5천 달러로 살아가는 4인 가족은 약 750달러의 세금 감면을 기대할 수 있었고, 연간소득이 100만 달러인 유사한 가족 구성원을 가진 부부는 62만 달러 이상의 횡재에 가까운 감세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거대 기업에게는 훨씬 유리했다."(64-5)


"1954년 재정법은 전후 8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조세법이었다." "양당 합의를 반영한 재정법은 미국 정책 결정자들이 안정적 경제 성장을 위해 지출보다는 과세에 의존하는 일종의 미국화된 케인스주의를 통해 경제 성장에 주력할 것을 천명했다. 누진적 소득세를 보호하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 세력은 뉴딜 복지국가의 유지와 확장을 명백히 하는 데 성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한 누진적 소득세는 좋은 조세 정책의 중심에 '지불 능력' 기준을 구체화함으로써 복지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국가의 '비용'을 가시화하여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을 촉발했다. 몇몇 공화당 인사들은 종전 이전에 이미 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잠재적 견제 심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1944년 공화당이 예측했듯이, 〈임금소득자 다수에 대한 직접세〉는 〈정부 활동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다수의 시민〉을 형성함으로써 국민국가의 성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게 될 것이었다."(69-70)


제2장 시장의 실패_케네디-존슨 정부 시기 감세와 복지 축소의 정치


"1961년, 뉴버그시의 행정 담당자인 조셉 미첼은 〈복지 사기꾼, 게으름뱅이, 사회 기생충〉을 도시에서 몰아내자는 잘 짜인 홍보를 시행했다." "미첼은 〈평가 가치의 손실 ··· 그리고 전체 업무 지구의 파산〉부터 폭력을 발생시키는 〈공중위생의 위험〉과 혼외 자녀 출산율의 급상승까지 복지에 관한 모든 것을 비난하면서, 복지 수급자들이 〈주 혹은 연방의 명령에 의해 빈둥거릴 수 있고, 일하지 않고, 버릇없는 아이들처럼 계속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졌다며 공격했다." "이른바 '뉴버그 전투'는 1960년대 초 자유주의 정책 결정자들이 직면했던 난관을 잘 드러냈다. 뉴버그시의 위기는 1960년대 남부 백인, 흑인, 백인 도시 노동자, 그리고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취약한 뉴딜 연합에 균열을 일으킬 인종 갈등 정치의 윤곽을 미리 보여주었다. 미첼은 그의 복지 규제의 핵심에 인종주의 정치가 있음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시의 경제와 사회 문제의 원인이 '남부 이주민들'에게 있다고 거듭해서 비난했다."(87-8)


"뉴버그시의 위기는 종전 직후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이 주도했던 타협에서 벗어난 것으로, 점점 더 협소하게 규정되어 가는 복지에 관한 정의를 평범한 미국인들의 증대하는 조세 부담 문제에 연계한 정치 담론과 정책기구의 직접적 결과였다. 미첼의 전쟁을 활성화한 과세와 지출의 정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의 핵심적인 국내 정책 계획에 영향을 주었다. 점점 취약해지는 민주당 선거 연합 재정비에 대한 열망과 세금 신설이나 더 높은 세율에 대한 대중과 의회의 적대감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와 존슨 모두 그들의 국내 및 국제 정책 공약을 뒷받침할 경제 성장의 성과에 의존했고, 낮은 세금, 사회보장, 그리고 전후 사회 협약이었던 계층 상승 공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존슨 감세로 잘 알려진 1964년 재정법은 전면적으로 세금을 큰 폭으로 줄이고 〈절세를 민간 경제에 이전〉함으로써 납세자와 미납세자를 막론하고 모든 미국인들에게 혜택을 줄 것을 약속했다."(89-90)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중간계급 다수를 노동자에서 주택 소유주와 납세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이러한 원대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한 잠재력이 약화되었다." "1960년대 말에 이르자 미국의 자유주의는 거의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 직면했다. 모든 시민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모든 납세 시민들이 '당연하게 받게 되는' 낮은 세율을 수호하고 자유기업 경제의 성장을 보장하기로 약속하면서, 1964년 재정법과 빈곤과의 전쟁은 모두 전후 자유주의의 모순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감세는 암묵적으로 국가 경제의 성장과 개인 경제의 보호 모두에 대해 연방정부의 책임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빈곤과의 전쟁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겠다는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빈곤하지 않은 다수에게 이러한 권리를 제공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역할은 연방의 법인세법과 개별세법에 깊숙이 사장되거나 시야에서 사라졌다."(92-3)


"감세는 경제 성장을 이루거나, 케네디가 선거운동을 통해 〈약에 취한 선잠의 시기〉로 간주했던 아이젠하워 시대에서 벗어나 국가를 부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다. 경제 성장은 새로운 지출이나 확대 지출을 통해 이룰 수도 있었다. 실제로 케네디 행정부는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물리적·인적 자원에 대한 공공투자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접지출은 채택하기 힘든 것이었다. 대통령의 제안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긴 했지만, 의회는 국내 프로그램의 지출을 늘리는 데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남부 민주당 의원,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 그리고 양당의 재정 적자에 강경한 매파deficit hawks들을 포함한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케네디의 1961년 경기 부양 법안들에 제동을 걸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이었던 제임스 토빈과 그의 동료들은 〈모든 이들이 '더 많은, 더 많은, 또 더 많은 지출'〉에 의존하는 경제 회복 계획은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95-6)


"케네디-존슨 행정부가 추진한 시장 중심의 복지정책 접근 방식에 대한 도전은 대체로 흑인자유운동에서 나왔는데, 이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공공 정책과 인종 및 계급 불평등 간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공민권 활동가들은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흑인투표법에 의해 보장된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가 흑인의 경제 안정을 보장하는 적극적인 정책 없이는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45년의 제대군인원호법(퇴역 미군의 권리보장법)에 비견할 만한 연방 차원의 투자만이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소득 수준을 제공함으로써 '흑인 게토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법이 흑인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가 되는 ··· 문턱〉에 이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공동체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걷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에게 신발을 주는 것〉은 〈잔인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기시켰다."(117)


"민권운동 지도자들과 복지권 운동가들은 정치적 권한 부여와 경제적 보장 모두를 요구하면서, 납세자와 세금 소비자 간 잘못된 이분법에 대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백인 중간계급 중심의 연방 보조금은 쉽게 부정되고 대체로 무시되었다. 연방정부에 비판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조력자인 다수의 미국인들이 스스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 보장과 이동성을 확보하자 빈곤층과 흑인에 대한 동일한 권리의 확장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동맹에 대한 전망은 상당히 어두워졌다. 계급과세에서 대중과세로의 연방소득세 개혁은 다수를 위한 정치, 납세자의 권리와 빈곤층의 욕구가 서로 적대시되는 계급정치의 견고한 제도적 요소들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전체적인 경제 성장으로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연방소득세제로 편입됨에 따라 조세국가의 정책은 가난한 소수 인종 정책과 분명하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었다."(123-4)


제3장 정치적 합의의 붕괴_뉴딜 체제의 와해와 위대한 사회의 분열


"1967년 초, 여론조사 전문가인 벤 와텐버그가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한 짤막한 경고가 화제가 되었다. 빈곤과의 전쟁과 베트남전에 집중하고 있는 행정부가 민주당이 '미국 중간계급 노동자들'의 관심과 득표를 얻는 데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노동조합원들은 오늘날 빈곤층이 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연방 정부에 요구〉했지만, 중간계급 및 노동계급의 지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전엔 빈민촌에 거주했던 미국 노동자들이 이제는 교외 지역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빈곤 프로그램이나 심지어 최저임금에 거의 관심이 없던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에 대해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설계된 복지 프로그램보다 ··· 〈그들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데 매우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와텐버그의 결론은 노동자들과 노조원들이 연방정부가 〈근래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129)


"여기에는 존슨 행정부가 직면한 딜레마가 요약되어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중간계급의 다수는 국가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들─선동적인 흑인 투사와 복지 수혜를 받는 어머니들, 쾌락주의적인 히피족과 대학생 혁명주의 세력─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책 결정자들로 인한 좌절, 분노, 환멸이 커졌다. 사실 많은 미국인들, 특히 닉슨이 〈침묵하는 다수〉라고 불렀던 백인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정부로부터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빈곤과의 전쟁과 민권혁명에 희생되었다고 느꼈다. 1967년 한 백인 자택 소유자 단체는 〈법을 준수하는 사회인 미국의 대다수를 대신해서 의회가 어떤 행동을 취할 때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들은 민권법과 빈곤 프로그램을 겨냥해 〈이런 빌어먹을 게으름뱅이들과 폭도들에게 지속적인 무상복지를 제공〉하는 데 대해 분노를 표시했고, 그들의 선출직 관료들에게 〈이 나라가 지탱되도록 대부분의 세금을 내는 평균적인 미국인들을 돕는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했다."(130)


"1966년 말 존슨 대통령이 역사적인 민권법안을 보장하고, 국가 최초로 전국 의료보험 체계를 제정하고, 연방정부의 교육 공약과 교육 투자를 늘리고, 위대한 사회를 위해 빈곤과의 전쟁을 추진하도록 한 정치적 합의는 모두 깨지고 말았다." "경제는 행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속적이고 유례가 없는 경제 성장과 예산은 부족했어도 목적이 분명했던 빈곤해소 법안으로도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은 최근에야 중간계급에 편입한 많은 미국인의 생활비 인상에 위협 요인이 되었다. 당내에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불만을 품은 좌파-평화 활동가들과 시민권과 평등권을 위한 투쟁이 더디게 진행되는 데 실망한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민주당의 보수파 역시 행정부에 환멸을 느꼈고, 의회 공화당과 협력해서 대통령의 입법 우선 사안 중 많은 부분, 특히 시민권 영역과 빈곤해소 정책을 막는 데 충분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132-3)


"복지 문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진단은 복지 프로그램의 자유주의 옹호자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내린 결론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밀스와 그의 동료 의원들은 대부분의 복지 전문가들과 전문 사회 사업가들이 인정한 재활적 접근을 거부했다. 무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입위원회는 AFDC 수급자들의 복지급여에 약간의 소득을 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칙을 포함해, 강제적 노동 요구 체계를 통한 노동 유인책을 추가했다. 밀스는 복지가 '삶의 방식'이 된다면 공적 이익을 꾀할 수 없다는 점을 동료 의원들에게 상기시키고, AFDC 수급자들이 〈공공기금을 받으려면 ··· 그들의 직업 습득 능력을 검증하는 데 ···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눈에 보이는 모든 실업 상태의 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어머니들〉도 〈취업을 위해 훈련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정위원회는 근로유인 혹은 근로장려 프로그램을 신설하면서 훨씬 무거운 근로 요구를 강조했다."(140-1)


"1960년대 말에 이르자 여성 노동력 참여 증대와 여성주의 운동의 출현으로 가족임금 체제─아이들은 국가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생산물〉이며, 어머니에게는 농부와 마찬가지로〈훌륭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한─자체가 크게 약화되었다. 모성주의에 냉담한 정책 결정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성 중립적 납세자 권리의 방어로 대응했다. 한 예로, 롱 위원장은 1967년 법안에 의해 신설된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강제 근로 연계 프로그램 참여 의무를 지지하면서, 일하는 어머니들에게 〈공공부조 비용을 위해 지불되는 ···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하는 미국의 1천만 명의 어머니들이 지불한 세금을 일하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어머니를 지원하는 데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불안정한 미국 경제의 구조 변동으로 어려움에 처한 노동계급과 저소득 남성 및 여성 중간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147-8)


"1960년대 말이 되면 국내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확대하기 위해 오랫동안 의지했던 재원으로는 더 이상 연방정부 사업과 그 대가를 치를 의지가 없는 미국인들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백인 중산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뉴딜과 전후 사회정책이 1944년 경제적 권리장전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약속한 '권리혁명'의 완수 가능성에 제약을 가했다. 전후 자유주의 국가의 팽창을 가능하게 했던 동일한 특징들, 즉 국가의 경제 성장에 대한 의존성, 열정적으로 추진한 법인세율과 개인세율 인하, 목적세인 급여세, 혹은 개인 복지와 기업 복지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권리와 그 비용을 제공하는 데 의존한 것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다루기 힘든 문제를 해결할 자유주의자들의 능력을 제한했다. 점증하는 다수 비빈곤층의 정부 보호 요구와 새로운 조세 부담에 대한 그들의 저항 사이의 모순은 뉴딜 질서를 깨뜨리고, 그것을 대체하고자 했던 보수적인 대안을 굳건하게 형성시켰다."(164-5)


제4장 세금 논쟁_닉슨 행정부 시기 복지 개혁과 조세저항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공화당과 민주당은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여러 방식을 시도했다." "다수의 민주당 지도부는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을 배제해왔던 민주당의 '오만한 태도'를 일소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민주당의 정치적 미래를 위협하는 문화적·인종적 균열을 초월할 수 있는 경제적 포퓰리즘으로 당의 지향을 재설정하고자 했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중산층 백인 유권자를 달래면서도 인종적·경제적 평등에 관한 정당의 공약은 유지하는 정책 의제를 고수하면서, 〈불법적인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계급, 기관들〉에 대한 민중적 저항을 유도함으로써 흑인과 백인 노동계급 및 중산층의 '기본적인 경제적 이익'이 융합되기를 희망했다." "진보 단체들은 대중에게 확고히 자리 잡은 복지에 대한 적대감이 가난한 여성과 그 자녀들로부터 〈진정한 복지 수급자, 곧 연방 재무부에서 수십억 달러를 빼내 간 부자와 연줄 많은 기업〉을 향하게 하고자 했다."(172-3)


"공화당과 보수주의 동맹 세력은 침묵하는 다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하나의 권리 문제로 기대했던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특권과 특혜 보호를 주력하는 데 그쳤다." "FAP의 목표 역시 빈곤 타파가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들의 표심을 공고히 하고, 이들 유권자들에게 가시적인 복지국가의 혜택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미국의 다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닉슨은 복지국가의 축소가 아닌 재설정과 확대를 목표로 삼았다. 1969년에서 1971년 사이, 닉슨의 백악관은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인식된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유권자들에게 연방 보조금 확대를 약속하는 인상적인 일련의 복지정책들을 제안했다. 행정부는 이러한 국내정책 우선순위에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재원으로 부가가치세까지 고려했다. 북부와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수당의 대부분을 제공했던 FAP는 이 초기 확대 단계의 핵심 요소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175-6)


"하지만 만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초기 여론은 FAP에 대중적인 지지를 나타냈지만, 1970년 중간선거에서의 공화당의 패배는 중하층 및 노동계급 유권자들을 정치 동맹으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지출 프로그램을 활용하려는 닉슨의 기획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1971년 4월, 닉슨은 참모들에게 이 제안의 가장 급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에 대한 지원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는데, 대중들은 〈일하는 가정에 대한 지원 제공〉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봄이 지날 무렵, 닉슨은 이 계획이 〈일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사람들을 복지명부에 추가〉하는 〈정치적 실패작〉임을 인정하고, FAP를 완전히 포기했다. 특히 기업집단을 위시한, 이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양면성과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같은 반복지 보수주의자들의 점증하는 압력과 결탁한 것은 닉슨이 그의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내 개혁을 최종적으로 철회한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180)


"FAP가 실패한 이후, 우파와 좌파 모두 잊힌 미국 중산층에게 호소하기 위해 지출 정책보다는 조세정치로 돌아섰다. 닉슨의 복지 제안에 대한 논쟁이 장기화되면서 진보적인 빈곤해소 단체 내에서 균열이 나타났고, 복지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심화되었다. 좌파는 경제 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다수를 재건하기 위해 광범위한 정치적 호소가 담길 쟁점을 찾아 나섰다. 조세 개혁은 이러한 새로운 다수 전략에 기반해서 중하위 소득 노동자들에 대한 감세와 연계한 기업의 조세 포탈을 겨냥했다. 이에 대응하여 닉슨 행정부는 1968~1972년 추진한 재정 확대 정책을 포기하고, 대신 사회지출─특히 도시 지역의 소수 빈곤층과 관련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의 대폭적인 삭감과 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감세 약속을 연계하는 국내 의제로 전환했다. 1972년 이후 풀뿌리 수준에서 조직된 지역 조세 개혁 연합체의 납세자들과 점점 세를 불려 나간 활동가들은 조세 정책을 핵심 국정 의제로 계속 이어 나가는 데 기여했다."(186-7)


"처음엔 자유주의자들이 초기 중간계급의 조세저항을 포착하고 이를 이념적으로는 일관되고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다수 연합으로 전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한 듯 보였다." "불공정한 과세, 즉 소수의 부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점점 더 걷어가는 조세제도에 분노한 납세자들은 의회의 조세 관련 의원들과 함께 전국적인 정치 의제로 조세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조세 개혁만으로는 진보적인 조세 개혁가들이 약속했던 대규모의 사회 프로그램 재원을 충당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 스탠리 서리는 〈조세 개혁을 통해 복지 개혁의 진전과 복지 개혁의 비용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노력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세 개혁으로 복지 개혁에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또한 조세 개혁이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빈곤층의 이익과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188-9, 201-2)


"자유주의 조세 개혁 담론과 정책들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세금으로 〈쥐어짜인〉 중위 소득의 노동계급 주택 소유자들과 납세자들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진보주의자들이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가운데, 보수 세력은 강력한 납세자 저항을 혁명적인 정치 세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공화당 전략가들은 1972년 민주당 예비선거 기간에 조세정치의 재도입에 대응하여 높아가는 조세 부담의 원인이 대부분 '무책임'하고 '소모적인' 민주당 정책에 있다고 비난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사를 발전시켰다.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향한 적대감은 FAP 논쟁의 장기화로 불붙은 복지에 대한 적대감 재발과 결합하여 이들 주장을 응집력 있게 만들고 주목받게 했다. 1972년 선거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가족 해체와 불안정'을 이끌 것이라는 빈곤 전사들의 주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된' 조세법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활용하여 그들을 연방 지출 일반에 반대하도록 돌려세웠다."(203-5)


제5장 게임 오버_레이건 혁명과 조세 논쟁의 결말


"1980년 초여름, '인종차별주의 신념'을 가진 로버트 존슨과 론 프람스퍼라는 야심만만한 두 메릴랜드 기업인은 '백인 저소득 중간계급'의 분노를 보드게임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의 발명품─공공부조: 이 위대한 복지 게임을 할 수 있는데 먹고살려고 일할 이유가 있나요?─은 그해 말 연말 쇼핑 시즌에 맞춰 출시되었다." "이 게임에서 '노동자의 평범한 길' 위의 인생은 돈이 많이 들고 위험했다. 거의 예외 없이 '노동자의 평범한 길'에 놓인 운 나쁜 참가자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 질식할 것 같은 정부 규제, 그리고 역차별에 희생당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신체 건강한 복지 수급자의 산책길' 위에 있는 참가자들은 〈약탈, 도박, 음주, 혼외 자녀 출산, 그리고 정부 혜택 수령의 유쾌한 원정〉으로 묘사한 것을 경험했다." "이 게임은 신체 건강한 복지 수급자와 그들을 돕는 연방정부 모두의 행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215-7)


"우파의 조세 및 지출 의제는 정부가 백인 중간계급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동시에 복지─이른바 소모적이고 잔여적 프로그램이라고 언급되는─를 정부의 공적 역할로 인정하는 데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던 자유주의 조세복지국가의 노선 덕에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공화당 우파는 조세와 위법적이고 심지어 유해하기까지 한 복지지출이라는 쌍둥이 이슈에 집중했던 전후 자유주의에 대한 응집력 있고 정치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성공적으로 가시화했다. 복지 의제는 공화당에 자유주의 국가를 공격하는 공론정치의 선명성을 부여했다. 공화당은 개인의 권리와 경제력 향상에 대한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옹호 논리를 차용하면서 단지 〈예산과 국가에 커다란 부담〉을 부과하고 〈국민들을 정부에 종속〉시키는 데만 성공한 공공 프로그램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의 소망을 무시하는 결정을 했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218-9)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제 위기는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스태그플레이션 문제를 실용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기는커녕 이를 설명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경제학 분야에서 일종의 지적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실패는 전체 경제 전문가들 내에서 케인스주의 합의의 약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경제학 이론과 정책의 형성 및 확산을 위한 정치적 공간을 넓혀 놓았다. 이러한 관념들─(정치화된 공공 정책과 선동적인 저널리즘 속에서 형성된) 공급경제학─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도드라진 부분은 공급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소비자 수요 촉진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를 거부한다는 데 있었다. 공급경제학자들은 19세기의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의 연구로 돌아가, 케인스주의자들이 노동과 투자에 대한 인간의 동기를 무시했다고 비난하면서 정부 정책들이 대규모의 노동과 자본을 시장에서 철수하게 함으로써 어떻게 '절름발이 경제'를 만들었는지로 관심을 돌렸다."(227)


"1981년 8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서 레이건 혁명의 시작이자 끝을 나타내는 두 가지 상징적인 법안에 서명했다. 첫 번째는 총괄예산조정법OBRA으로, 3년 동안 연방 예산 지출을 1,300억 달러 삭감함으로써 '정부 규모와 비용'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번째는 경제회복조세법ERTA으로, 개인한계소득세율을 전면적으로 3년마다 25% 삭감하는 것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세 구간을 물가 상승에 따라 매년 조정하거나 연동시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새 대통령이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적 혼란〉이라고 묘사한 현재의 경제적 진통이 〈경제에 기초가 되는 인적 자원, 기술 자원, 천연자원의 고갈〉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진통은 이전 수십 년간 견제받지 않은 정부 정책과 국가 성장의 불행한 결과였다. 백악관은 시장을 불필요한 조세와 규제 형태의 제약에서 풀어주고, 정부의 불필요한 지출 프로그램을 폐지함으로써 다시 한 번 국가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239, 244)


"레이건의 백악관은 1981년 초 내내 위법적인 복지 수급자의 권리 주장에 맞서 납세자들의 권리와 특권을 옹호함으로써 조세와 지출 삭감에 대한 정당성을 밝혔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레이건은 결국 그의 행정부가 실질적으로 국가의 규모를 줄이고 진정으로 혁신적 대통령직을 수행할 여지를 줄였다. 실제로 레이건은 그의 반국가주의를 복지─전체 연방 지출의 맥락에서 매우 제한적인 액수를 대상으로 하는─와의 '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욕조에 빠뜨려 익사시킬 수 있는〉 정도로 국가를 축소하는 더 큰 보수주의 기획을 약화했다." "공급 주창자들이 약속한 경제 성장 창출에 실패했던 감세 효과와 방위비 지출 가속화, 그리고 중간계급의 복지국가를 위한 복지지출의 자연적 증가에 의해 레이건 집권 기간 중 연방 적자는 급증했다." "결국, ETRA 법안에 서명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레이건은 조용히 상당한 증세에 해당하는 액수를 제안하면서 〈세법상 특정한 세금 남용을 막고 세수를 늘리는〉 개정안을 요구했다."(254-6)


"하지만 레이건 혁명은 미국의 재정 정책과 정치의 성격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변화는 국가의 정치적 의제를 '문제 해결에서 예산 삭감'으로 이동시키고, 시민권의 혜택을 시민권에 대한 비용으로 대체함으로써 정치 논쟁의 일반적 의미와 내용을 확대했다." "동시에 납세자 보호를 아주 협소한 불법적인 복지지출 부분에 대한 제한된 싸움에 속박함으로써 우파는 공화당의 선거 승리를 가져온 이념적 재편의 범위를 제약했다. 비용이 들지 않는 적극적 국가의 확장을 약속했던 자유주의 합의와 비용이 들지 않는 적극적 국가의 축소를 공언했던 보수주의 반혁명의 결과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교착 상태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조건은 납세자에 대한 비용의 강조와 '정부 간섭'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새로운 자유주의 정책의 가능성을 배제했지만, 동시에 자유주의 국가의 가장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정책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반국가 전략에 기반한 진정한 보수주의 혁명을 방해했다."(256-8)


에필로그 교착 상태의 미국 복지국가


"전후 시기에 자유주의자들은 경제 및 사회보장의 약속과 개별 시민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조세 부담만을 부과한다는 약속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 연구는 조세정치와 뉴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후 자유주의적 사회 협약의 결정적 요소로서 낮은 과세(율)에 대한 이해에 주목함으로써 '자유주의 황금기'에 대한 좌·우파의 비전과 그 비전을 계승한 보수주의적 복지 축소 모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의 수사로만 국가를 향한 정치적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우경화와 연속적인 자유주의 사회 정책의 축소가 민권운동과 위대한 사회의 자유주의에 대항한 인종주의적 반동에 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현대 미국 정치의 역설─시민들이 최소한의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향유할 수 있도록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제공해온 국가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조되는 환멸─을 이해하려면 전후 자유주의 국가의 제도와 사회 협약의 이념적 측면에 대한 재분석이 요구된다."(260-2)


"미국 복지체계의 가장 관대하고 효과적이며 인기 있는 부분들은 상당수 미국인들에게 경제적 안정은 물론 경제적 기회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급여 형태는 사적 매개자들을 통해 제공되거나, 사적 노동시장 참여를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경제적─인종적이고 젠더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위계화에 도전하기보다는 이를 재생산했다. 경제적 안정을 노동력 참여에 직간접적으로 구속시킴으로써 미국의 복지국가는 '자격 있는' 빈자와 '자격 없는' 빈자의 구별 짓기를 장기간 강화했다. 사회보장제도와 메디케어는 은퇴 이후 적절한 소득급여로 유지될 수 있었다. 즉 조세지출은 무시되거나, 아니면 더욱 빈번히, 어쨌든 정당하게 납세자들에게 돌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빈곤층에 대한 직접적인 현금 부조 제공은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주는 부당한 경품으로, 그리고 납세자로부터 세금 먹는 하마들에게 부당하게 이전되는 것으로 쉽게 공격받을 수 있었다."(265)


"전후 미국 경제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결국 인플레이션과 스태그네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에 우파는 우파는 적극적 국가의 혜택보다는 비용에 초점을 맞춘 감세 의제를 지지했다. 복지 및 조세 국가의 구조는 국내외 정치경제의 변화에 대응하는 민주당의 능력을 제한하기도 했고, 공화당─보수파가 점진적으로 장악해갔던─이 납세자들의 이익에 대한 대중적 대변자로서 스스로를 혁신하도록 해주기도 했다.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상당 부분이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체감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당의 자유주의 세력은 벤 와텐버그가 '노동자, 노조원'을 대신해서 1967년 린든 존슨에게 제기한 골치 아픈 질문─〈최근에 나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죠?〉─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진보적 조세정치의 실패와 '감세 정당'으로서의 공화당의 등장은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급여 체계의 구조─즉 수당이 어떻게 전달되고,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고 배분하는지─임을 상기시켰다."(268-9)


"미국인들은 기본적인 시민권으로서 연방정부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지만, 이를 위한 징세는 원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세력은 이러한 이중적 요구를 낮은 조세율과, 새로운 경제 안정과 기회 체계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는 사회 협약을 도입함으로써 조정했다." "이들 자유주의 국가 건설자들처럼, 보수주의 세력은 그들의 사회 정책 의제를 발전시키는 데 복지가 유용한 도구임을 발견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사회 정책에 대한 새로운 투자와 새로운 복지국가 제도의 창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지 실패를 활용했다면, 보수주의 세력은 복지국가 자체를 공격하기 위해 복지의 '실패'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제가 현대 미국 정치의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과거의 자유주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 세력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보호와 낮은 개별 세금 부담을 모두 약속한 전후 사회 협약에 의해 그들 스스로도 제약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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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화 2024-02-15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지는 국가기능의 순기능으로 소외층을 표면위로 올리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복지지향세력이 발생되는 것은 순방향이 아니다. 모두가 표면밑으로 가라앉으면 복지가 종결된다. 이는 복지를 이용하는 세력의 어리석음 때문이라 우려된다. 사회는 복지대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 소외계층은 왜 발생하는가 ? 접근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리 는 접근에 다양함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고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