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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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퍼즐 


"나는 소련 붕괴가 불가피했다는 지배적인 서사, 즉 서방과 소련 내 반공주의 집단 내부에서 생겨난 서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소련 붕괴의 역사는 사전에 알려진 대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상, 두려움, 열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태가 전개되며 펼쳐진 드라마였다." "이 책은 고르바초프를 중심에서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소련 행위자와 목소리, 이니셔티브(주도적 행동이나 조치)를 소개한다." "또한 소련 붕괴에 서방, 특히 미국이 미친 영향의 궤적을 고찰한다. 정부 및 비정부 행위자들과 언론은 소련 정치와 상상력에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멀리서 보면 잘 알려진 증거도 달리 보인다. 소련사의 최종 국면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내가 그 사건의 참여자이자 목격자였을 때보다 지금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련의 종말에서 무엇보다도 돈이 결정적이고 가차 없는 역할을 했음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소련 시절에 경제적 무지라는 내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예전에는 완전히 놓친 것이었다."(25-8)


1부 희망과 오만, 1983~1990년


1장 페레스트로이카 


"1980년대 소련의 세입과 재정 상태는 위태로웠다. 문제는 서방의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막대한' 국방 지출이 아니었다. 문제는 소련이 세계경제에 점차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과 소련의 재정이었다. 소련의 무역수지는 높은 유가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 사근사근하고 태평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과 달리 안정화 자금의 축적, 다시 말해 미래에 대비한 저금에 신경 쓰지 않았다. 1982년 11월 당 총회에서, 안드로포프는 곡물, 지방, 육류를 비롯한 식품의 수입이 늘어나는 상황을 비판했다. 〈누굴 겁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린 지난 몇 년간 수십억 루블과 금을 낭비했소.〉 소련은 석유에서 나온 이윤을 서방의 과학기술을 수입하는 대신 식량을 수입하고 위성국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써버렸다. 적어도 폴란드는 서방에 진 빚더미에서 깔리면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할 테고, 미국은 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미국인들이 소비에트 블록에 속한 국가들을 상대로 벌이는 '통화 전쟁'에 관해 불길하게 언급했다."(36-7)


"안드로포프는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당 개혁가를 찾았다. 그렇게 만난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적 신념은 공포와 배신, 학살의 세월로 얼룩지지 않았다. 1950년대에 모스크바대학을 다닌 학생으로서, 고르바초프는 불셰비키 지도자를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친애하는 일리치'는 전제정과 불의에 맞섰고, 대중 테러 수단을 마지못해 채택했으며, 스탈린을 몰아내려다 비극적이게도 일찍 죽었다. 이 신화는 고르바초프 일파에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레닌은 이상이었고, 스탈린은 결함 있는 현실이었다." "1985년 12월, 야코블레프는 고르바초프에게 미래 정치 개혁을 위한 요강을 보냈다. 그는 지도자의 임무가 소련 사회에 억눌린 좌절감을 급진적 변화로 돌리는 것이라고 썼다. 초점은 정치적 개혁에 맞춰져야 한다.야코블레프는 당을 경제 관리에서 배제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탈집중화, 글라스노스트(문제점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는 '관료제라는 독재'에서 소련을 해방해줄 것이다."(40-3)


"신레닌주의적 웅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첫 2년 동안 어떤 개혁 전략을 취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레닌의 숭배자로서, 소련 사회와 경제를 소생시킬 핵심 수단을 모색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의 보수적인 충고도 유념했다. 야코블레프가 제시한 급진적 정치 변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소련 인민이 경제에서 실질적인 개선을 실감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므로 집권 직후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다뤄야 할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1) 품질 2) 금주 투쟁 3) 빈곤층 4) 과수원과 텃밭을 위한 토지 5)  의약품.〉 놀랍게도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거시경제 안정성에 관해 제기했던 시급한 문제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식량 수입을 줄이고, 무역수지 균형을 회복하고, 그림자 경제를 강력히 단속하고, 노동력을 규율할 필요성 말이다. 고르바초프의 작성문은 소련 경제를 괴롭히는 경제적·재정적 문제점에 대한 진단은 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의 공식 표어는 '가속화'였다."(44-5)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 소련 경제학자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무엇을 계산했든 간에, 1986년 4월 26일에 발생한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 참사는 모든 것을 망쳤다. 소련 예산 중 체르노빌 참사 복구 비용은 사고 후 첫 한 달간만 30억 루블에 달했다. 1989년 초, 리시코프는 복구 비용이 8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무신론자지만 미신을 믿었던 라이사 고르바초바는 체르노빌을 매우 나쁜 징조로 여겼고, 수백만 명이 똑같이 생각했다.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소련 지도자는 물론 격노했지만, 레닌을 재연하기도 했다. 그는 위기를 이용해 포괄적인 결론으로 비약했다. 구체제 전체가 심하게 병들고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위기는 또 다른 혁명을 요구했다. 주된 메시지는 소련이 벼랑 끝에 있는데, 지난 15년간 국가와 인민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살았고 고약한 습관에 빠진 탓이라는 것이다. 당이 이 수렁에서 그들을 끌어내지 못하면 소련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늪'으로 다시 가라앉을 것이었다."(48-9)


"국영기업법은 1988년 1월에 시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개혁가들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법은 과거 소비에트 경제를 안정화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 무엇보다도 당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수십 년간 기업 경영자들은 당원이자 노멘클라투라였다. 이제부터 기업의 수장은 노동자와 직원의 '조합'에 의해 선출된 예정이었다. 더 이상 위에서 해고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개혁은 진정한 자유화와 경제 회생을 불러오지 못했다. 경영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기업 조합들은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지만 이를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고 능률과 생산 품질을 개선할 동기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 이윤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임금과 봉급을 불릴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소련 소비자 중 절대다수가 원하는 값싼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고, 값비싼 품목의 생산에 초점을 맞췄다. 단 몇 년 만에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소비에트 경제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을 터였다."(53-4)


2장 해방 


"소련 경제를 개혁하는 데 열심인 서기장이 서방 국가를 방문할 때 경제학자, 기획자, 군수 산업 경영자, 은행가, 여타 기술 관료와 동행했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신, 고르바초프는 언론인과 사회과학자, 작가, 연극 연출가, 영화제작자를 비롯하여 문화 인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수행단을 데려갔다. 대다수는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서방의 모든 것에 대해 매혹과 찬탄,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급진적 개혁을 위해 소련 인민을 준비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고무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열심히 모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의 주요 원천은 모두 서방에 있다고 믿었다." "내부 담론에서 사용된 적 없는 언어와 개념이 들어올 길이 열렸다. 소련은 이제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고, '다원주의', '위기', '전체주의', '스탈린주의' 같은 단어를 수용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 들여온 어휘들과 소련 언론인, 사회과학자, 작가의 저작에서 나온 어휘들이 소련의 옛 어휘를 점차 대체해나갔다."(74-5)


"고르바초프가 전 지구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때는 투철한 신레닌주의자였다. 정치국과 측근들과 함께 외교 정책을 논의하면서,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은유를 활용하곤 했다. 이것은 볼셰비키 정부가 1918년 3월에 독일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한 도시다. 이 조약으로 레닌은 영토를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소비에트 정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후퇴와 긴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이 은유를 이용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브레스트-리토프스크가 주는 교훈은 지정학적 양보 이상을 뜻했다. 그는 냉전의 상대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의를 하고 싶었다. '공동의 이해관계'와 '인류 공통의 가치'를 토대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함께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소련 지도자는 현실정치의 각본을 따르는 대신, 도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보편적 비전을 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제안을 경제 및 정치 개혁의 시작과 일치시켰다."(75)


3장 혁명들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소련 최초의 핵무기를 설계했지만,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권 옹호자가 되었고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항의했으며 1980~1986년 KGB의 감시 아래 망명 생활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하로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1989년 봄의 모스크바 민주파 모임에서, 사하로프는 법의 지배, 시민사회, 인권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적 의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한때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막 탄생한, 말하자면 젊은 정치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빙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죠. 1주일, 아니면 2주일? 정말이지, 한 시간 만에 끝나버릴 수도 있어요.〉 그는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최고의 전술은 불가능을 이루려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연단에서 허용되는 한 '진살의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고르바초프가 기대하거나 원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111-2)


"인민대표대회가 만든 새로운 최고소비에트의 주요 메시지는 '행정적-관료적 시스템의 타도'였다. 입법 활동의 상당 부분은 '전체주의적'이지도, 자본주의적이지도 않은 경제를 수립하려는 욕망에 영감을 받았다. 갓 당선된 의원들은 유권자들에 대한 열의를 과시하며, 사회 안전망 프로그램을 확대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다양한 요구를 정부에 쏟아냈다. 하지만 필요한 수단과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부 위원회들은 기업체와 협동조합 및 수출 지향 이해집단을 대변하는 새로운 로비 활동가들을 위한 정보 교환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최고소비에트는 그러한 경제 행위자들에게 이익은 더 많이 배분해주고 세금은 낮춰주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 긴축 프로그램의 기획자인 아발킨은 1989년 7월 말에 최고소비에트가 〈[경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법안을 단 한 건도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가 불능〉의 기운이 짙어지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불평했다."(118-9)


"1989년의 (동유럽) 혁명은 같은 해에 일어난 소련의 급진화처럼, 서구식 소비주의가 대중을 유혹하면서 야기되었다.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베를린장벽 위에서 자유에 취해 춤추는 동안, 수십만 명이 서베를린의 호화로운 상점을 뒤덮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보고 만지고 맛보고 싶었다." "1989년 봄과 여름에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자유화 노선은 상당한 급진화를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나라의 핵심부, 무엇보다 모스크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공업 지대, 지배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전면이 먼저 무너졌고, 그다음은 동유럽에 위치한 외부 제국의 차례였다. 12월 16일, 동유럽의 마지막 공산 정권이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무색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소련 지도자와 엘리트들에게 내부의 위기가 외부의 사건을 점차 압도했다."(139, 144)


4장 분리주의 


"옐친은 처음에는 보수주의적인 러시아 민족주의로 기울었지만, 미국을 방문한 후로는 자유주의적 의제로 전향했다. 1989년 12월 초, 그는 '러시아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러시아의 민주적·국가적·정신적 부활〉이라고 선언했다. 옐친의 '러시아'는 러시아연방만이었다. 그는 소련의 핵심부가 완전한 주권을 얻고, 자체적으로 헌법을 보유하고, EEC에 가입하고, 미국, 일본, 영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길 원햇다. 터무니없이 야심 찬 목표였지만, 그 덕분에 옐친은 급진적인 포퓰리즘적 의제를 세웠다.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그늘에서 벗어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옐친이 보내는 메시지는 〈러시아는 다른 공화국들이 오랫동안 보유했던 경제적·정치적·사회적·과학적 기관이 없는, 국가성이 없는 유일한 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인텔리겐치아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달랐는데, 러시아연방이 민주파에게 더 나은 목표라는 것이었다."(150-1)


"1990년 5월 31일 정상회담 첫날, 부시가 독일과 NATO에 관해 묻자 고르바초프는 갑자기 헬싱키최종의정서에 따라 독일은 가입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부시와 미국 관리들은 귀를 의심했다. 고르바초프가 거래하려 들거나 자문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매우 중요한 것을 그냥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체르냐예프가 소련대표단 가운데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위해 외교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크렘린 지도자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소련이 〈더 강하지만 민주적이고 ······ 진보적이고, 역동적이고, 자유로워져서, 바깥 세계와 미국을 향해 돌아서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그 외에 나머지 소련 대표단은 그런 고고한 염원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공통의 목표 의식, 고르바초프나 나라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더는 없었다. 미국인들과의 동맹이 고르바초프의 실패한 개혁을 구해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173)


"부시 행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한 지렛대로서 계속해서 미국의 지원이라는 미끼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부시는 소련 경제 계획의 지침을 IMF와 세계은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한 터였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의 개혁 정책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제 개혁이 실패하더라도 부시 행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1990년 전반기 동안, 고르바초프는 공화국 엘리트층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갈수록 거침없어지는 러시아 대항 엘리트층을 결국엔 상대해야 했다. 한쪽은 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에서 옐친이 이끄는 집단이고, 다른 한쪽은 '러시아공산당' 집단이었다. 대항 엘리트층은 러시아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포퓰리즘,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상충하는 세력들을 대변했다. 그 결과,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추락했고 정치적 기반은 좋게 말해서 위태로웠다.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유일하게 유리한 입지는 세계 정치가라는 독특한 위상이었다."(177-8, 181)


5장 갈림길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연석회의에서 경제 위기의 심각성과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짐짓 놀라워한 유일한 참석자였다. 그는 페트라코프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리시코프가 정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길 기다렸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경제 전략 논의를 의회 기구에 위임했다. 둘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양극화, 급진적 포퓰리즘, 희생양 찾기의 분위기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대통령뿐이었다. 최고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돈이 많이 드는 사회 보호 프로그램에 투표했다. 그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돈은 지폐를 더 찍어내야 하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심화된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리시코프 정부는 마침내 국영기업의 수익에 55퍼센트를 과세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포퓰리즘적인 최고소비에트는 거부권을 행사했다."(182, 187)


"사실, 옐친은 강력한 연방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는 러시아와 같은 주권국가들로 구성되고, 상위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는 연합만 수용할 태세였다. 옐친의 구체적 요구 사항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이었다. 그는 리시코프 정부와 재무부, 국영은행, 대외무역은행의 수장들도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재무부는 개별 공화국들에서 파견한 이사들이 감독해야 한다. 러시아연방은 자체 KGB와 경찰을 두고, 수도인 모스크바와 자체 세관, 대륙붕·삼림·어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러시아 영토상의 무수한 산업 단지와 MIC(군산복합체)의 '폐쇄' 도시들도 관리해야 한다. 러시아 정부는 금 보유고와 다이아몬드, 석유, 여타 자원에서 러시아의 몫을 받아야 한다. 러시아의 과학아카데미, TV 방송, 항공사도 설립될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옐친은 〈크렘린은 러시아 소유〉라고 선언했다. 공화국 의회에서 아주 근소한 차로 선출된 지난날의 추방자는 최후통첩의 언어를 구사했다."(197-8)


6장 리바이어던 


"소련군이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철수하기로 하자 이는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인 야로센코는 〈우리는 거대한 소련 군사력을 파괴하기로 동의했다. 그것도 공짜로. ······ 하지만 최고소비에트를 비롯한 누구도 그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 신뢰? 대출? 지원? 코콤(COCOM) 제재의 끝?〉 … 국방부장관 야조프는 전쟁으로 형제들과 형제들과 일가친척 서른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참모총장 모이세예프는 전쟁에서 형제들을 잃었다. 그들의 경력 전체가 냉전기에 이뤄졌다." "장성들은 고르바초프가 신세계 질서라고 말하는 사명감 가득한 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의무감과 규율로 인해 고르바초프의 뜻을 따랐지만, 속으로는 대후퇴에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자문은 좀 더 유연해져서 군축 회담에서 양보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통일독일이 NATO에 가입하리라는 전망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228-9)


2부 쇠퇴와 몰락1991년


7장 대치 


"소련 지도자는 걸프에서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에게 걸프전은 그와 부시가 함께 건설하기로 다짐한 평화로운 세계 질서라는 비전에 타격을 입힐 것이었다." "걸프전의 결과로 고르바초프는 체면을 잃고 위축되었다. 체르냐예프는 상관이 불만을 터트렸다고 기록했다. 〈워싱턴에서는 옛 시절과 옛 방식을 더욱 그리워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열광적 도취를 끝내려는 모양이다.〉 미국의 걸프전 준비 과정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민족주의자들과의 유혈 충돌은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운 음모의 일환이었다. 미국의 자문들이 〈반대파, 누구보다도 옐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라고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분명 고르바초프는 KGB 보고서에 의존했지만, 체르냐예프조차도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고르바초프의 꿈을 전쟁이 묻어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체르냐예프와 그의 상관 모두, 소련은 미국의 하위 파트너 위치를 받아들이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277-9)


"1991년 3월 17일의 전 연방 국민투표는 고르바초프가 간절히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억 4857만 4606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 중 1억 1350만 명이 개혁된 연방을 보존하자고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 국민투표는 공화국들에서 분리주의에 대한 요구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몰도바까지 여섯 공화국이 투표에 불참했다."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두 공화국 국민의 과반수 이상은 독립공화국이 '주권국가연합'에 가입하는 데 '찬성' 표를 던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지만 그러고 나서는 연방정부가 없는 연합에 가입한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 주 세 곳은 자체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소련으로부터의 분리에 찬성했다." "러시아연방 내 84개 자치구에서 옐친의 프로젝트는 확고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 투표 결과는 러시아연방 내 민족적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그의 정책을 확인해주었다."(283-4)


8장 이양 


"5월 21일,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의의 또 다른 특별 회기가 상당한 비용을 들여 크렘린에서 개최되었다. 4일간의 회기 동안, 러시아 대의원들은 선거 규정을 승인하고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으로 제한했다. 대회는 또한 옐친과 그 외의 다섯 후보자를 대통령 경선 후보자로 승인했다." "민주러시아는 옐친의 풀뿌리 선거 운동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제공했다. 대부분은 저항적인 '과학-기술 인텔리겐치아' 출신이었다. 옐친 선거 운동의 최말단은 그의 열성 팬, 다시 말해 혁명가적인 카리스마를 추종하는 수십만 개인이었다. 그들로서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식의 통치와 구질서의 붕괴로 인한 고통스러운 권력 공백을 채워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준종교적인 숭배심과 믿음도 불어넣었다. 서방 관측통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그저 옐친이 그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러시아식 사우나를 즐기며, 얼음장 같은 찬물에 첨벙 뛰어들었던 것이다."(304-7)


"옐친은 새로운 대통령직에 국가적 수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웠다. 옐친은 여전히 국가 관료 기구에는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포퓰리즘적인 연설에서, 옐친은 중앙 관료제가 터무니없이 돈이 많이 들고, 특권의 중심지이며, 인민이 더 잘 살 수 있게 재정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론 생각이 달랐다. 부르불리스가 회고하길, 옐친은 관료 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 계획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소련 관료 중 최고의 인력을 새로운 러시아 국가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옐친은 KGB가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의심했지만, 그런 막강한 조직의 적대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러시아 지도자가 러시아연방 내 비러시아계 '민족' 자치구들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산당 없이, 러시아의 영토적·정치적 주권을 공고히 할 다른 국가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KGB는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318-9)


9장 합의 


"1991년 여름은 소련의 미래와 소련 경제를 세계 시장에 적응시킬 방안에 관한 합의 없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서방의 선택지는 단 하나,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이곳의 비판가들은 준종교적 성격 때문에 이 개념을 '십계명'이라고 불렀다." "1991년 4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일부 러시아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한 그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980년대에 경제 성장을 유일하게 경험한 칠레를 방문했다. 그룹의 리더인 비탈리 나이슐은 수학을 연구한 적 있는 41세의 경제학자로, 고스플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나이슐과 친구들은 소련의 관료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는데, 소련의 노동력은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전체주의로 인해 변질되고 저하되었기 때문에, 냉혹한 시장 충격만이 노동 윤리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상' 경제로 향하려면 완전한 붕괴와 고통, 그에 따른 생존의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322-4)


"야블린스키의 해법은 대기업들로 이루어진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종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민영화는 안정화 기금에서 인민이 대출한 돈으로 이뤄지며, 이 기금은 서방 국가들에 의해 조성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혁이 소련 경제에 시동을 걸고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개인적으로는, 소련을 위한 '마셜플랜'이라고 불렀다." "미국 언론은 이 계획을 신나게 공격했다. 윌리엄 새파이어는 《뉴욕타임스》에서 앨리슨과 야블론스키를, 〈자본주의가 돈을 댄 버팀목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긴급 구제하는〉 터무니없는 방안을 들고나온 선의의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련이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하고 싶다면, 붉은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주택과 아파트, 토지와 공장을 매각하고, 이윤 동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 요구되는 정치적 기후를 자유라고 한다〉라고 말했다."(329-30, 334-5)


"6월 3일, 행정부의 주요 일원들이 소련에 관해 토론했다. 국무부의 베이커 팀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존중과 관여'라는 입장을 대변했다. 그들은 공동의 경제 공간을 지닌 개혁된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딕 체니와 펜타곤 소속 보좌관들은 소련 '제국'의 해체를 환영하면서 소련 의존국인 쿠바와 아프가니스탄을 버리고, 핵무기를 감축하고, MIC의 해체 과정에 착수하도록 고르바초프에게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무부 장관 니컬러스 브래디와 국제문제 특별보좌관 데이비드 멀퍼드는 재정적 근거에서 소련에 대한 대규모 지원에 단호히 반대했다." "브래디는 솔직하게 미국의 전략적 우선 사항을 표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련 사회가 국방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소련이 시장 체제로 간다면, 그들은 대규모 국방 조직을 감당할 수 없다. 진짜 개혁 프로그램은 그들을 3류 국가로 전락시킬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다.〉"(335-6)


10장 음모 


"불청객의 난입[쿠데타]으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고대하던 휴가는 느닷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날 훨씬 중요한 무엇이 툭 끊어졌다.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줄 알던 정치적 마법사 고르바초프가 끝났다. 그는 몰랐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미국과 맺은 모든 국제적 합의와 위대하고 민주적인 유럽 공동의 집에 대한 환상의 끝이기도 했다." "러시아연방의 모든 지역과 주요 도시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통치하기로 했다. 셰닌과 모스크바 당 조직의 수장인 유리 프로코피에프 같은 일부 당료들은 쿠데타 음모를 열렬히 지지했고, 당 연락망을 이용해 공화국별, 지역별, 지구별 조직의 동료들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모자들은 당 기반 시설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셰닌의 이름은 위원회 명단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반동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라고 바클라노프는 회상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새로운 것의 탄생을 상징해야 했다.〉"(384-6)


11장 훈타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부르불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옐친은 의회 건물 앞 광장에서 코르자코프와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차에서 내렸다. 탱크 위에 올라선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다. 그는 〈우익, 반동, 반헌법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옐친이 대답했다. 〈군은 인민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허세였다. 옐친의 총파업 선언은 통하지 않았다. 군에 대한 그의 주장도 엄포일 뿐이었다." "누구도 옐친이 돌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련 헌정 질서의 주요 파괴자에서 수호자로 변신했는데 말이다. 미국의 방송국 자유라디오는 러시아 의회 내에 특파원을 두고 옐친의 발언을 소련 전역에 중계했다. CNN 카메라맨이 탱크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포착해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보도 방송은 옐친을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심에 두었고, 사태 전개에 엄청난 중요성을 띠었다."(392-4)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면 대중적 정당성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쿠데타에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 그리고 러시아 역사의 교훈이었다. KGB 의장 크류치코프는 눈앞의 딜레마를 고민했다. 옐친과 러시아의 여타 선출 공직자들을 체포했다가는 서방에서 공분이 빗발치고 냉전으로 회귀할 수도 있었다. 소련의 경제와 재정은 서방의 제재를 버틸 수 없었다. 크류치코프는 야조프, 야나예프, 루캬노프가 폭력사태를 각오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대 책임을 이용하는 점진적인 단계별 전술에 의해 비상통치가 필요하다고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옐친을 잡지 않고 놔둔 것은 크류치코프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다른 잘못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공모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가장 막강한 무기인 TV를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TV에서 소련 인민들은 무자비한 훈타 대신, 권력 의지가 없는 한 무리의 썰렁한 관료를 목도하고 있었다."(396-400)


"훗날 정치적 목적을 위해 8월의 사건을 미화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을 때, 옐친은 훈타의 구성원이 무자비한 냉소주의자와 전체주의적인 폭군이 아니라 〈평균적이고, 평범한 소련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들이 인명과 합법성을 존중했다고도 시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항하고 권력을 잃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1993년 10월, 모스크바의 헌정 위기 동안에 옐친은 아주 딴판으로 행동했는데, 러시아 의회가 자신에게 대항하자 탱크 부대 지휘관들에게 의사당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했고, 정적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며, 6년을 더 집권했다." "국가 기구의 일부 목격자들은 8월 21일에 일어난 일을 '정치적 멜트다운(붕괴)'이라고 묘사했다. 공모자들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을 이뤄냈으니, 바로 중앙 정부의 행정부가 완전히 항복한 것이었다. 실패한 비상통치는 옐친과 그의 민주파 추종자 및 지지자에게 고르바초프와 헌정 질서를 대신해 집행 권한의 수단을 장악할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했다."(420-1)


12장 종말 


"소련 지도자는 여전히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사흘간의 개인적 드라마에 몰두해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훈타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지만, 서방 기자들을 제외하면 언론은 적대적이었다. 옐친의 자문이자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유리 카랴킨은 고르바초프에게 왜 그런 〈명백한 악당들〉을 정부의 중요 직위에 임명했는지 물었다. 고르바초프는 크류치코프와 야조프를 '신뢰했다'고 맥없이 시인했다. 또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현명하지 못하게 덧붙였다. 이 발언은 그 후 여러 음모론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동안 일부 인사들은 〈진짜 민주주의자〉처럼 처신했다고 말하며 당 기구를 변호했다. 영국 대사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소련 대통령을 프랑스혁명 이후의 부르봉 왕가에 비유하며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33)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고르바초프는 다시금 굴복했다. 그는 자신이 고른 후보자를 임명하라는 옐친의 요구에 동의했다. 이 시점부터 소련 지도자는 명목상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군과 KGB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한때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본산이었던 당 본부는 이제 서류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이 줄지어 놓여 있는, 환기가 되지 않은 채 버려진 건물이었다. 당은 거대한 단체였기에, 누구도 그곳을 무사히 떠날 수 없었다. 갑자기,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날 늦게,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이끌던 권력 구조를 어쩔 수 없이 해산해야 했다. 옐친은 러시아 의회의 긴급 회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문서 한 장을 떠밀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가 〈[소련] 정부 전체가 사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옐친은 의기양양하게 소련의 다음 총리는 러시아연방에서 지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반대하지 않았다."(435-8)


"중앙 국가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소련 경제의 무정부적 와해 과정이 시작되었다. 고전 명작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는 그리스의 마을 주민들이 부유한 부인의 집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단 몇 분 만에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탈탈 털려서 텅 빈 잔해만 남는다. 소련의 조르바 같은 환경에는 명백한 승자가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기간에 이미 출발하는 데 유리했으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돈을 버는 것이 진짜 목표인 젊은 기업가였다. 그들 중 다수는 콤소몰 출신이었다. 소련 당국은 콤소몰 활동가에게 최초의 상업은행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을 출범시킬 독보적인 특권을 부여했다. 폴 클렙니코프는 KGB와 당이 〈한 세기 전 차르 비밀경찰이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나중에 썼는데, 말하자면 혁명가들을 통제할 요량으로 그들의 뒤를 봐줬던 것이다. 신진 자본가들이 소련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훈타의 실패 뒤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를 느꼈다."(453)


"고르바초프의 임시정부 도박은 마지막이자 가장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소련의 대통령이라는 헌법적 지위와 국제적 명성, 완전한 경제적 붕괴에 대한 공화국들의 두려움이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도록 당분간은 내버려뒀다. 그러나 새로운 연방이란 전망은 고작 두 달 만에 모스크바의 인디언 서머처럼 사라져버릴 터였다. 옐친은 자신보다 위에서 행사되는 권력 없이 '러시아'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길 원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붕괴의 위협과 자신에 대한 서방 지도자들의 지지만으로 공화국 실력자들을 공동의 정치적 프로젝트로 이끌 수 있다고 착각했다. 실상 그는 옐친과 공화국 실력자들을 위해 정치적 짐을 떠맡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의 언론 비서관 안드레이 그라초프가 나중에 말했듯이, 소련의 대통령은 스스로 리어왕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유형의 자산을 내준 것이다."(463)


13장 불협화음 


"9월 4일, 부시와 각료들은 허약한 소련과 소련의 해체 중 어느 쪽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지 토론했다. 펜타곤의 수장인 딕 체니는 고르바초프를 버리고 진짜 민주주의자이자 서방의 가치를 수용하는 옐친을 택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체니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인정하라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단체들과 NED의 청원을 지지했다.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 휘하의 허약한 연방이 독립 공화국들의 예측 불가능한 불협화음보다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휘하의 보좌관들처럼 폭력적 혼돈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 치닫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외교의 눈앞에는 두 장의 와일드카드가 있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소련 경제를 안정화할 서방의 대규모 금융 지원 방안이었다." "부시는 니컬러스 브래디 재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 이 방안에 확고히 반대했다. 미국 경제가 신음하고 있는데 소련에 납세자들의 돈을 쓰자고 제안할 수는 없었다."(472-4)


"우크라이나 독립은 두 번째 와일드카드였다. 대통령의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체니는 다시금 '공격적' 접근법을 들고나왔다. 그는 미국이 소비에트 공간에 보유한 거대한 지렛대를 이용해 그곳을 쪼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니의 발언 요지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민주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민주국가가 될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인정은 어쨌거나 좋은 정책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러시아가] 작은 게 우리한테는 낫다.〉 베이커는 체니에게 딜레마의 다른 측면도 상기시켰다. 만약 소련 해체가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어쩔 건가? 〈우린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를 원치 않았다〉라고 스코크로프트는 회고했다. 그는 체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이 공공연하게 소련의 해체를 지지한다면, 〈소련의 다수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장기적으로 적대감을 이끌어낼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상황을 방치했다.〉"(474-5)


14장 독립 


"이 역사적인 순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 미하일 베른스탐은 소련의 해체가 〈하나의 목표로 합쳐진 이원 정책〉이었다고 썼다. 첫 번째 정책은 '잔여' 소련을 인수하여 고르바초프 없이 운영하려는 러시아 개혁가들의 시도였다. 두 번째 정책은 다른 공화국들과 합의하고 보조금과 지원금 시스템을 중지시키려는 시도였다. 개혁가들은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는데, 소련 자산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다종족적인 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한 가지는 버려야 했다. 그에 따른 갈등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 경제학자는 네 번째 목표를 간과했는데,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소련의 폐허로부터 강한 러시아 국가를 재건하길 바랐고, 이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러시아적인 이 목표는 연방 해체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512-3)


"옐친의 자문이었던 부르불리스는 자신과 동료들이 우크라이나 독립에 전적으로 찬성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르불리스는 우크라이나와 가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자기처럼 피가 섞인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연방을 별개의 존재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인에게 우크라이나는 잉글랜드인에게 스코틀랜드와 같았으며, 더 가깝게 느낄 뿐이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합의 없이 이혼 신청을 하는 격이었다. 모스크바의 그 누구도 우크라이나라는 방주가 소련-러시아라는 선거(船渠)를 떠나는 것을, 그리고 즉시 침몰하지 않고 항해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심적 태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충돌하고 향후 몇십 년 동안 커다란 긴장과 갈등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528-9)


15장 청산 


"크라우추크는 나중에 우크라이나 국민투표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그 공을 인정받아야 한다.〉 증거는 이런 주장과 상충한다.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는 소련의 붕괴를 반영한 것이지, 그 원인이 아니었다. 1991년 12월 2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뒤이어 옐친의 가차 없는 분리주의 노선으로 파괴되어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소련에 대한 재정적 부고(루블화 가치 폭락)는 그 파괴를 가장 잘 설명한다. 국가의 주요 기능인 통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일어난 일은 고르바초프와 자발적 연방이라는 그의 환상을 끝장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일격은 옐친의 새로운 노선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예상한 가이다르와 그의 팀은 이미 허구에 불과한 중앙의 기능을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민투표 이후, 러시아 개혁가들은 드디어 자유롭게 이 중앙을 청산할 수 있었다."(546-7)


"비스쿨리는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사냥했던 곳이었다. 그곳을 찾은 외빈들로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에리히 호네커도 있었다. 1991년 12월 7일 토요일 저녁, 세 슬라브 공화국 간 회담의 절대적 보안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KGB 특수부대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크라우추크를 달래기 위해, 러시아인들과 벨라루스(이제는 벨로루시가 아니었다) 관리들은 향후 협정에서 '연방'이란 단어는 빼기로 합의했다. 그 대신 그들은 중심부와 식민지들의 품위 있는 결별을 가져온 국제기구 영연방의 예를 따라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하기로 했다." "회담 과정이 궁금한 160여 명의 기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인근 마을에서 음식도 없이 참담한 조건에서 전날 밤을 보냈다. 이제 그들은 소비에트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영토상의 모든 연방 조직과 기관의 효력이 없어졌다. CIS의 본부는 민스크로 정해졌다. 연합 창립의 기반이 되는 문서는 배포되지 않았다."(549-52)


"술을 빼면, 불안을 잠재울 자연스러운 치료법은 정당성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거둔 압도적 승리에 기댈 수 있었다. 옐친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가 정당화한 논리는 부정적으로, 고르바초프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련 지도자에게 전화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가이다르는 〈핵무기가 있는 나라에서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전면적 내전을 용케 피했던 게 자랑스럽다〉고 회고했다. 부르불리스도 〈제국의 유혈 분할〉을 막았다고 동의했다. 또 비스쿨리회담이 〈냉전을 끝냈〉으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기적적인 전망을 내놓았다〉고 평가했다. 크라우추크는 수년 뒤에 자신도 내전을 걱정했고 안도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경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정에 가입했다. 〈러시아는 [연합이] 느린 결별이라고 강조했다.〉 이 마지막 요점이 향후 몇 년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규정했다."(554-7)


결론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를 품은 개혁가적 열성과 정치적 소심함을, 도식적인 메시아주의와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비전이 넘치고 숨 막히는 외교 정책과 결정적인 국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모두 갖췄다. 그러나 폭력과 무력에 대한 혐오감은 보수주의자들도 공유할 만큼 그의 세대에 전형적이었다. 이것은 스탈린 사후 몇십 년 동안 소련 엘리트의 더 깊은 문화적·사회적 변모를 가리킨다. 그들은 정치적·경제적 폭풍이 들이닥쳤을 때 놀랄 만큼 무기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국의 누구도 고통스러운 개혁을 실시하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눈감고 해낼 뚝심이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선호한 정책, 인텔리겐치아를 달래고 공화국의 지배 엘리트에게 책임을 이양하는 정책은 더 나은 개혁이 아니라 혼란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발트 지역과 남캅카스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핵심 슬라브 공화국들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리주의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했다."(588-9)


"서방의 지도자들에게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전대미문의 역사적인 기회를 붙잡으려는 정치적 의지나 상상력이 없었다.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이 서방의 궤도 안으로 통합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예측하기 힘들다는 시각이 만연했다. 무엇보다도 동유럽과 발트 지역에서 냉전 승리의 손쉬운 성과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이었다." "그리고 1992년 덩샤오핑이 중국을 사업에 재개방함에 따라 막대한 금액이 공산주의 중국으로도 곧 쏟아져 들어갔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세계 단기 금융시장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공화국들을 곤경에 내버려뒀다. 발트 3국만이 예외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경쟁하듯 서방의 관대함,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그리고 지정학적 혜안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은 탐욕스러운 투자자들을 놓고 다투는 처지가 되었고, 그것은 두 나라가 모두 지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글로벌 금융 기구들은 국가 주권과 자존심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595-6)


"러시아는 거대한 사회적 전위와 부의 불평등을 비롯해 1980년~19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자본주의의 최악을 경험했다. 현대화 대신 대규모 탈산업화가 일어났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지만 대체로 야만적이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민영화는 급성장하는 중간계급을 낳지 못했다. 국가 자산의 분배는 뻔뻔할 정도로 불공정했고, 자국 시민들에는 무관심한 라틴아메리카의 수출 지향 매판 부르주아를 닮은 새로운 파벌인 이른바 '올리가르히'를 탄생시켰다." "많은 이가 자신들의 친미·친서방 태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재정적 통제력을 파괴하면서 자본주의적 불확실성을 향해 달려갔던 1991년의 반공 열기는 돌이켜보니 이데올로기적 광기로 비치기 시작했다." "국내적·국제적 시장 세력들과 지정학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합이 아닌 경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옛 로마 경구 '바이 빅티스(Vae Victis)', 즉 〈패자는 비참하도다〉라는 말은 변함없이 진실한 예언으로 드러났다."(597-8)


"소련이라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에 서구 정부들은 1988~1991년 소련의 파괴적인 정책들과 유사하게 국민의 세금과 심지어 저축을 이용해 기업들을 긴급 구제해야 했다. 고고한 레토릭으로 둘러싸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버락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서 수렁에 빠졌을 때 고르바초프와 비교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해법으로 여겨진 것이 오히려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관찰자들에게 1991년 3월 고르바초프의 국민투표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소련 '제국'에 의한 '러시아'의 희생을 운운하던 옐친의 수사법을 아득하게 일깨웠다." "역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관한 도덕극이었던 적은 없다. 그 대신 세계는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이상주의와 권력, 훌륭한 통치와 부패, 고조되는 자유의 위기와 비상시에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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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신이 된 시장 :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하비 콕스 지음, 유강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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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개관

1. 신이 된 ‘시장’


나는 경제학자-신학자들의 주장에서 현대 종교 사상의 변증론을 발견했다. 특히 기업 신학자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윌리엄 제임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간혹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라고 불리는 사조와 비슷하다. 제임스는 ‘유한한 신성’, 즉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궁극적인 속성을 향해 나아갈 뿐인 신성을 옹호했다. 이런 추론은 분명한 이유로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 신정론theodicy이 부딪히는 당혹스러운 문제, 즉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며 자애로운 신이 묵인할 것 같지 않은 갖가지 나쁜 일이 왜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장’ 신학자들이 보기에 능력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끝없이 확대되는 시장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탈구dislocation, 고통, 방향성 상실이라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신Market God’이 궁극적으로 자애롭다는 사실에 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11-2)


‘시장’의 궁극적인 전지적 능력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칼뱅의 불가사의한 신이 그렇듯이 ‘시장’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결국 ‘시장’은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시장’ 종교의 시대에 회의론자와 자유사상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한다. 가짜 기적을 폭로한 볼테르들이나 종교를 빙자한 사기를 날카롭게 고발한 멩켄Henry Louis Mencken들은 어떻게 됐나? 현재의 정통 신앙이 워낙 지배적이기 때문에 ‘시장’의 전지적 능력에 의문을 품는 것은 섭리의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게 진짜라고 말하면(코카콜라를 생각해보라 〔코카콜라는 1969년 광고에서 ‘이것이 진짜’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그것은 진짜임이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말했듯이,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이제 ‘시장’의 지치지 않는 탐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다. 17-8)


2. 왕의 과학과 신의 과학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심각한 분열을 낳은 신학 논쟁은 ‘교황 무오류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다. 오늘날 무오류성을 둘러싼 견해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묘하게 비교되는 문제를 둘러싸고 비슷한 논쟁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고 무척 흥미로웠다. 이처럼 논쟁적인 경제학 교의 항목의 창시자는 시카고대학교의 유진 파마Eugene Fama다. 그는 일련의 저서와 논문에서 ‘시장’은 현존하는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에 근거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틀리지 않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교황의 무오류성이 교황은 일정한 조건 아래서(즉 교황좌에서ex cathedra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관해 전체 교회를 상대로 발언할 때)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변명의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시장 무오류 가설 역시 오직 ‘효율적인’ ‘시장’에서 무오류성을 주장한다. 파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장의 효율성이란 시장이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활용한다는 뜻이다.” 26)


이 두 가지 유사한 논의를 숙독할 때면 가끔 놀라운 결론에 거의 이를 뻔했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신학자나 경제학자도 내리지 않은 결론이다. 두 경우에서 ‘오류가 없다’와 ‘올바르다’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의 용법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정의된다. 두 교의가 이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로 볼 때, 어떤 발언이 진실일 뿐만 아니라 오류가 없는 진실인 것은 단지 교황이 선언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이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이라고 부른다)를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교황이 어떤 것을 공식 교의로 반포하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에서 ‘진실’이 된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교의 반포 전날에 어떤 견해가 있었든, 이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장’은 (효율적일 때) 언제나 올바르다. ‘시장’은 원래 그런 것, 즉 구매자와 판매자, 투자자가 행하는 무수히 많은 결정의 정확한 반영이자 증류물이기 때문이다. 27)


3. ‘시장’은 어떻게 신성한 존재가 되었는가


고대 제국의 도시에서 시장은 항상 도시의 물리적 중심인 사원 구역에 자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신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낸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보라. 환전상이 펼쳐놓은 상을 뒤엎고 그들을 강도라고 꾸짖은 이야기는 오랫동안 엄청난 오해를 받은 주제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가 신성한 장소의 담장 안에서 이런 상업 활동을 한다고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전후의 여느 신전처럼 이 유대교 신전에도 담장, 즉 바깥마당 안에 다양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장소가 있었다. 무엇보다 희생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과 새를 파는 장사치가 많았다. 순례자들은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의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왔으니 서로 다른 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지역 화폐로 짐승 값을 치러야 하니 ‘환전’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 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32)


강과 마찻길이 합류하는 지점마다 점차 상설 시장 천막촌이 등장했다. 고대의 또 다른 관습이다. 시장을 뜻하는 수메르의 표의문자는 Y로, 교차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디서 등장하든 시장은 신전 담장 안에서 장사할 때부터 통용된 도덕적·종교적 제약 아래 거래해야 했다. 도시와 자치구 그리고 회원들이 ‘공정가격’이라는 신학적 개념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저울을 누르고 이중 바닥을 깐 바구니를 사용하는 사기꾼에 속지 않게 구매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내면화하던 길드와 동업조합이 이런 제약을 강제했다. ‘구매자가 조심해야 한다caveat emptor’는 인식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구매자는 자신의 신중함뿐만 아니라 파렴치범의 약탈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도덕적 교훈의 오랜 전통에도 도움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시장이 자동적으로 자기 조정을 한다는 사고를 기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래자나 구매자, 판매자는 모두 그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에 엮인 신뢰, 예절, 의무가 가정된 관계에서 거래했다. 34)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퍼져 나갔다. 이제 멀리 떨어진 도시들 사이에, 심지어 다른 민족들 사이에도 교역이 발전함에 따라 묘하게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담보대출, 환전, 운송보험, 합자 사업 등이 등장했다. 지폐가 황금 자루를 대체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추상적 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용장을 비롯한 여러 ‘증서’가 등장함에 따라 노점과 가판대는 필요 없어졌다. 돈으로 돈을 벌고 빚을 져서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자비함과 사기에 매혹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커진 돈 상자를 억제할 가능성은 줄었다. 이제 구매자와 판매자, 차용인과 대부자가 만나서 암묵적이거나 공공연한 도덕규범 안에서 거래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시장을 단순히 특정한 구역이나 여러 사회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시장주의’ 시대에 산다. 이제 ‘시장’은 우리의 사회적 상상에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태도의 변화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35-6)


4. ‘시장’은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그리스 종교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보여준다. 신은 남을 속이고 질투하기도 한다. 게다가 (미천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죽일 듯한 원한을 품는다. 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은 불사의 존재다. 이제 새로운 인간을 보라ecce homo novus. 현대의 법인corporation-person을 보라. 지난 세기에 장황하게 얽힌 법률과 판례를 통해 등장한 현대의 법인 기업은 제우스와 아테나 같은 올림포스산의 지위에 다다랐다. 법인 기업은 생명을 무기한 이을 수 있다. 구식 모델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나타내는 새로운 법인의 다른 특징은, 많은 경우 법률이 법인에 ‘유한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 모델을 새롭게 주조된 법인 모델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다. 구식 인간은 우리가 꿈틀거릴수록, ‘비극적 얽힘’에도 우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다(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자유의지와 죄와 책임이라는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었다. 39-40)


'유한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성 외에도 ‘시장’이 창조한 ‘인격’은 어느 작가가 ‘변신shape shifting’이라고 말한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비교종교학, 특히 민속 종교를 연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개념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 코요테나 사슴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은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이런 변신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능력은 늑대 인간과 커다란 검은 박쥐와 사람이 거의 자유자재로 바뀌는 최근 뱀파이어 영화의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법인의 세계에서 변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법인 기업은 불멸의 존재지만, 예를 들어 성가신 소송을 피해야 할 때는 다른 법인 기업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간단히 몸을 숨길 수 있다. 이 과정은 부분적으로 변신이지만, 화신化身과도 기괴한 유사성이 있다. 그 결과 이전의 법인은 사멸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며, 이전에 한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40)


법인 기업은 1790년대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었을 때 소규모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각 주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 기업들의 주식은 보통 해당 기업의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지역 주민이 샀다. 설립 취지문에는 보통 기업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규정되었고, 이 기업들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설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인 기업에 설립 허가를 내준 정부는 기업이 대중에 의해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대중에게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주주shareholder뿐만 아니라 이해 당사자stakeholder (법인 기업이 이해를 충족해야 하는 사람과 기관 )도 있었다. 초창기 법인 기업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획득하는 일부 특질을 갖춘 것 같다. 법인 기업은 덩치가 훨씬 더 커지고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쌓으면서 이윤 획득에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기는 정부 감독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변화는 그 유명한 ‘강도 귀족robber baron’의 시대를 열었다. 46-7)


5. 고리대금업과 피싱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주교이자 유명한 설교자 바실리우스Basilius(329~379)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자를 물리고 돈을 빌려주는 식으로 궁핍을 악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소리로 비난했다. 대신 무조건적인 선물을 주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선물은 하느님에게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교회와 문화 일반 모두 고리대금업을 혐오스럽고 부도덕한 행위로 보았다. 단테가 지옥을 점점 깊어지는 아홉 단계 원형 구덩이로 묘사했을 때, 고리대금업자는 가장 깊숙한 일곱 번째 고리에 자리하는데, 그 옆에는 신성모독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폭력을 가했다’고 여겨지는 남색자가 있다. 고리대금업자는 아는 사람과 이방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죄인보다 나빠서, 살을 물어뜯는 뜨거운 바람(‘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물다’라는 뜻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벌이다)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을 떨쳐내려고 헛되이 애쓰는 존재로 묘사된다. 57-8)


장 칼뱅이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상업적인) 도시국가 제네바에서 적당한 이자를 허용한 것은 사실이다. 칼뱅의 교의에서 ‘허용’ 부분은 금세 받아들여졌지만, ‘적당한’이라는 부분은 이내 무시되었다. 종종 버티려는 시도는 있었다. 1552년, 구두쇠 정신과 약삭빠른 사업 관행으로 이름을 날린 스코틀랜드에서 새로 등장한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개신교 가운데 칼뱅파〕는 탐욕스러운 상인, 임금을 주지 않는 주인, 소작인을 혹사하는 지주 등과 나란히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교리문답을 발간했다. 하지만 분주한 상업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 설교자와 도덕가의 훈계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1572년 〈고리대금업에 관한 토론Discourse upon Usury〉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서 널리 읽힌 소책자에서 토머스 윌슨Thomas Wilson은 이자를 물리는 대부는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이며, 상인을 비롯한 사업가들은 “자신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 등의 집단에게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58-9)


일부 길드와 교구, 수도원에서 구사한 좀 더 창의적인 책략은 가난한 사람이 훨씬 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릴 수 있는 대안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1462년,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프란치스코회는 경건은행mont-de-piété 〔교회에서 자선사업으로 운영하는 공공 전당포〕 모델을 만들어 이탈리아 전역과 나중에는 프랑스와 독일까지 퍼뜨렸다. 뒷날 프로테스탄트도 이 모델을 채택했는데, 지금도 교회가 후원하는 신용조합에서 그 후예를 볼 수 있다. 이런 고귀한 시도는 경제 변화의 거대한 흐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세상의 모든 교회 세력도 계약, 식민지, 무역 회사, 합자회사, 신용 기법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17세기에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 신부가 런던의 성공회 성당인 세인트메리울노스에서 고리대금업을 비난하는 설교를 한 일은 상징적인 클라이맥스다. 설교문은 다음과 같다. “탐욕스러운 바리새인은 이 모든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비웃었습니다.” 신부는 그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59-60)


6.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희년은 서판을 깨끗이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 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새롭게 경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가 우리가 보통 가난한 이의 주된 옹호자로 보는 예언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성스러운 율법에 한 층위로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희년은 예수 시대에 실행되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점령자의 가혹한 과세 정책과 억압적인 토지 규제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희년에 대해 알았다.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처음 자신의 사명을 발표하며 성경 구절을 읽는다(〈누가복음〉 4장 16~19절). 예수는 ‘두루마리를 말기’ 직전에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 학자들은 이것이 희년을 가리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없애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주시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파에서는 빚이라는 용어 대신 ‘죄trespass’,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문구는 원래의 경제적 내용이 사라졌다. 65)


2부 장애와 질환

7. 상층부의 합선


가톨릭교회는 4세기 무렵부터 많은 이에게 합리적인 해법으로 보이는 조치를 내놓았다. 대수도원장과 주교는 말했다. “우리에게 재산을 내놓아라. 우리는 정당하게 임명된 그리스도의 후계자이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 재산을 맡아놓고 신중하게 분배할 것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현생과 다음 생에서 여러분과 그 가족을 위해 계속 기도와 대리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이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으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교회가 수도원과 교구를 통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관리하게 기부한 재산은 ‘가난한 사람의 세습재산’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교회에 기부나 유산 증여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중세 사학자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이런 관념이 엄격한 윤리적 권고와 전례를 통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 기금을 고갈시킨 이들은 ‘빈민 살인자necatores pauperum’라고 불렸다. 79-80)


1305년에 프랑스 고위 성직자 다수가 장악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 교황을 선출했고, 신임 교황은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프랑스인 교황 다섯 명이 아비뇽에 남아 가톨릭 세계를 통치했다. 아비뇽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간 종교 상품을 생산하는 국제 카르텔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 제품은 교회 직책으로 유급 직책이나 ‘고위 성직’, 당시 교회의 거대한 위계질서에서 부른 말은 ‘성직록을 받는 성직’이다. 당시 주교가 700명, 그 아래 성직자가 수천 명이었다. 성직자도 때가 되면 죽었기 때문에 채울 자리가 계속 생겼다. 이런 성직은 대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이고, 때로는 피임명자가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자리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아무 부끄럼 없이 공공연하게 직책이 매매되었다. 마술사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simony(성직 매매)’라고 불린 관행이다. 마술사 시몬은 영적인 힘을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사려고 한 인물이다(〈사도행전〉 8장 9~24절). 81)


8. 거대 은행과 거대 교회


초대형 교회가 기업과 가장 흡사한 특징은 어느 학자가 말한 것처럼 “혹독하게 성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매리언 매덕스는 초대형 교회가 자신이 소망하는 사고의 요소를 담아 지칭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른 비평가들이 ‘성장주의growthism’라고 부르는 현상의 신봉자인 초대형 교회는 교인 숫자를 늘리고 더 많은 헌금을 모으는 데 노력을 집중한다. 이런 활동이 대부분 노골적인 물질주의고, 진정한 영적 의미는 전혀 없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말라기〉 3장 10절). 번영 설교자는 이 구절을 들이대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화가 부족한 사람은 분명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거나, 교회에 충분히 헌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7-8)


구조적으로 볼 때, 초대형 교회는 종종 성서의 해석보다 현대 경영 기법에 관심 있는 대표 성직자를 둔 대기업 조직을 모방한다. 초대형 교회는 계속 움직이는 존재로, 미래의 강한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곳은 당신 할아버지가 다니던 교회가 아닙니다.’ 앞 세대가 교회에 갈 때 준수하던 복장 규칙이 대부분 폐기되고 반바지, 심지어 짧은 청바지를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현상은 초대형 교회의 느슨한 스타일이 널리 퍼진 ‘시장’ 정신에 깔끔하게 순응한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초대형 교회 성직자들이 항상 이런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회중에는 종종 한 세대 이상이 포함되며, 음악과 의상의 선호도 서로 다르다. 미국에서 일부 초대형 교회는 시간대에 따라 다른 예배를 제공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특이한 취향에 맞춘다. 컨템포러리 예배는 오전 9시, 전통 예배는 오전 11시, ‘가스펠’ 예배는 오후 2시, 포크 예배는 오후 5시 같은 식이다. 91)


3부 역사: 돈을 좇다

9. 주교와 수사: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기를 꺼렸음에도 그와 추종자들이 마침내 펠라기우스에게 승리했을 때, 단순히 신학적 관념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싸움을 치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파벌은 앞서 도나투스파(자신들이 보기에 기꺼이 타협하는 기독교인과 친교를 받아들이기 거부한 순수주의자)라 불리는 운동과 싸움에서 이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쪽 사람들은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도나투스파의 토지는 로마제국에 압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던 가톨릭교도는 이후 그 토지와 그에 따르는 수입까지 물려받았다. 교회가 거둔 승리의 결실이다. 그 결과 그들은 펠라기우스를 상대로 제국 법정에서 새로운 소송을 벌일 때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자원을 끌어모았다. 현금의 조용한 속삭임은 종교의 정치를 포함해 정치에서 언제나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종교에서도 그만큼 설득력을 보였다. 98)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의 재력은 많은 귀족 가문의 재정적 혼란 때문에 특히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족 가문들은 제국 법정에 가까웠을 테지만, 당시 그들 지역을 휩쓸면서 재산을 유린한 반달족 침입자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상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팀은 적재적소에 돈을 썼고, 돈을 뒷받침하는 정치 공작에도 능숙했다. 이 가문 중 일부는 워낙 사정이 쪼들려서 야만족 침입자를 매수하기 위해 모금하는 공동 자금에 돈을 내지 않았고,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다른 귀족과 사이에 불화와 긴장이 생겼다. 다시 통일을 확립하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반달족이 침략하기 전에는 상충하는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일치가 용납할 수 없는 분열로 간주되었다. 알프스산맥 너머에서 온 약탈자에 맞서 정치적·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야 할 때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이단자로 규정한 것은 이런 지배적인 정서에 영합한 것이다. 분열은 나쁘고, 돈은 환영받았다. 98)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부는 일종의 ‘은사charisma’, 즉 하느님이 준 신비로운 선물이며, 문제는 재부가 있는지 혹은 재부를 어떻게 획득했는지가 아니라 그 재부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사고를 내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파와 펠라기우스파의 논쟁에서 재부와 세속 권력이 수행한 커다란 역할은, 이후 벌어진 표면상 신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논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중세 후기에 수도원 운동과 이른바 ‘이단’ 그룹이 부상한 이면에는 교회의 재부가 커지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종교개혁은 원래 면벌부 판매에 관한 논쟁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맘몬Mammon은 심지어 지성소에도 전혀 없지는 않다. ‘돈을 따라’의 렌즈로 교회사를 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사상, 논쟁, 인물 등도 들어간다. 하지만 가르침과 교의에 관한 일반적인 책자에서는 현금 흐름이라는 요소를 자주 무시하거나 최소화하기 때문에, 이 렌즈로 종종 작은 활자나 행간에서 드러나는 내용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99-100)


10. 애덤 스미스: 창시자이자 수호성인?


스미스는 경쾌한 18세기 산문으로 인간의 도덕 감정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 우리의 이기적인 애정은 억제하고 남에 대한 자비로운 애정은 내버려두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성하는 길이다.” 일종의 칼뱅주의자인 스미스는 때로 종교 속의 ‘열정’을 비난하지만 (감리교도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사실 그는 거기에서 핵심적 사고를 빌렸다. 인간은 원죄의 속박을 벗어나서,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우리에게 의도한 ‘완전함perfection’을 향해 ‘나아갈’ 힘이 있다. 그러므로 칭찬할 만한 욕망과 비천한 욕망 둘 다 존재한다. 진정한 공화국commonweal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진보에 기여하는 욕망과 그렇지 못한, 심지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욕망. 여기서 성인 후보 스미스는 분명히 무제한적인 소비자주권의 옹호자가 아니다. 그는 순전한 이단, 기껏해야 ‘시장신’을 찬미하지 않는 교의를 가르친다. 106-7)


스미스는 우리를 위해 정해진 도전해볼 만한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문제에서 정통 교의와 크게 견해가 갈린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시장’의 교리문답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에게 제시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 가운데 자기 이익을 선별할 힘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이 실망스러운 것임이 밝혀질 때 그것은 어떤 내적인 약점 때문이 아니라 둘 중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지나치게 많은 규제 탓에 선택의 범위가 왜곡되거나, 선택하는 사람이 합리적인 구매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떤 실체적인 선의 개념은 배제된다. 좋은 것은 선택되고, 선택되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고귀한 본성과 천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 똑같이 싸우는 것을 인정하며 고귀한 본성을 ‘공정한 관찰자’, 즉 우리 머릿속 양심의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개인의 만족뿐만 아니라 공동의 안녕에 대한 인식에도 근거하는 선택을 옹호한다. 107)


11. 애덤 스미스: 신학자이자 예언자?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현재 경제학과 신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전에 살면서 글을 썼다. 그의 저작은 21세기 경제학자나 신학자가 출간하는 저술과 닮은 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하지만 스미스의 저술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나 당대 신학자와 비슷한 추론 패턴을 따른다. 그는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와 철학 전통의 흐름에 의지한다. 여기에는 성서 연구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스미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국부론》의 제목을 성서에서 빌렸음을 알 수 있다 〔《국부론》의 원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는 〈이사야〉 60장 5절에서 빌려온 ‘이방 나라의 재산the wealth of the nations’이라는 구절이 있다〕. 스미스는 ‘신학’에 포함되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에서 헤엄쳤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인 1759년에 많은 이들이 경탄하는 《도덕 감정론》을 출간한 사실이 중요하다. 111-2)


스미스의 신학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당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온건한 칼뱅주의다. 그의 시대에 군림한 칼뱅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 않았다. 당대 칼뱅주의는 오히려 칼뱅에게 중요한 다른 개념, 즉 세상에서 신의 섭리적 존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유익한 기여, 신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서 이성의 중요한 역할, 신의 자애로운 인도 아래 인류의 축복받은 미래 등을 강조했다. 스미스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라고 썼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아이작 뉴턴이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사고에 미친 지배적인 영향은 그가 특히 독일식 표현으로 익숙한 자연법 전통이다. 이 학파는 보통 말하는 자연의 우주보다 윤리와 도덕에 관심이 많았다. 이 학파는 스미스가 글래스고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13)


12. 은행가, 철학자, 트릭스터, 작가


농담, 장난, 잔꾀, 골려 먹기. 이는 신화와 민간신앙 연구자들이 사실상 알려진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형인 ‘트릭스터trickster(장난꾸러기)'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저장고에 담긴 책략이다. 트릭스터는 신일 수도 있고 반신반인이나 동물, 인간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특징은 전통에 따라 다르지만, 트릭스터는 언제나 똑똑하고 빈틈없고 창의적이며 일반적인 예절 규칙과 관습을 조롱하는 농담과 책략의 원천이다. 히브리 족장 야곱이 트릭스터 유형의 좋은 사례인 것은 그가 비록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 빼앗지만, 우리가 그의 용기와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릭스터의 꼴사나운 광대 짓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미소 짓고 어여삐 여기며 심지어 존경한다. 트릭스터가 종종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삶이 온통 불공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트릭스터가 적어도 불행과 정면 대결하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27-8)


1857년, 멜빌은 고향 땅의 영혼을 소설적으로 탐사한 작품 《사기꾼: 그의 변장The Confidence Man: His Masquerade》을 발표했다. 《사기꾼》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외륜선 피델호Fidele호의 승객이 유창한 사기꾼에게 속아서 차례로 돈을 빼앗기는 풍자적인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훨씬 더 많은 층위가 있으며, 이야기가 펼쳐짐에 따라 독자는 질문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거지?” 마침내 멜빌은 교묘하고 능수능란한 문학적 눈속임으로 독자가 이 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우리 역시 속았음을 깨닫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의 삶 전체가 거대한 순회 서커스 천막이나 월 스트리트 안에서 진행된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이곳에서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피델호에 탄 사람처럼 다른 모든 이들을 속이는 것 같다. 멜빌은 선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속임수의 잔치에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지어내는 작가이며, 소설은 독자가 기꺼이 공모하는 거짓말의 직조다. 128-9)


연구자들은 멜빌이 《사기꾼》 에 집어넣지 않은 초고 한 장을 발견했다. 여기서 소설가는 자신이 ‘저자들의 저자’라고 부르는 하느님조차 인간이 처한 조건의 온갖 모순과 수수께끼를 피하지 못한다고 숙고한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근거한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은 신이 고전 신학자들이 생각한 완전성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심지어 그런 완전성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신 역시 인간이 부여잡고 고투하는 유한성의 한계를 일부 공유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서의 하느님은 신인 동형이 아니라 신인 동정이라고 주장(신도 인간처럼 기쁘고 괴로운 감정이 있다는 주장)했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는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일명 ‘케노시스kenosis’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신적 완전성을 갖췄음에도 성육신에서는 이런 완전성을 밀쳐두고 유한성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제한을 완전히 공유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멜빌 역시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130-1)


13. 하느님의 숨결과 시장의 정신


‘시장’은 불균등하거나 비대칭적인 것은 죄다 혐오한다. 마케팅, 생산, 유통은 사회 환경이 획일적일 때 더 효율적이다. 다양한 문화적 풍경과 사회적 제도, 국지적 취향과 전통 관습에 맞추기 위해 광고 카피를 끊임없이 고쳐 쓰고 판매 기법을 조정하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시장’은 〈시편〉의 작자처럼 산과 언덕은 깎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기 원한다. 주형이 깨질 때만 중요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이런 사실을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혼란을 불쾌하게 여기며, 가급적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열망한다. ‘시장’은 단색 외부 지형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예측 가능성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개심에 열려야 하는 것이다. ‘시장’의 복음은 복잡한 게 아니다. 물론 어지러울 만큼 갖가지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지만, 그 밑바탕에 놓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 복음이 하는 말은 간단하다. “이걸 사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 136-7)


14. “세상으로 나가라”


성서학자들은 오순절을 다양성의 단호한 찬양으로 해석한다. 성서는 방 안에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사도행전〉 2장 9~10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성령 덕분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 모두 그리스어나 라틴어, 히브리어로 말한 것은 아님에 주목하자. 그들은 언어적 획일성에 종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언어로 말했고 서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들이 문화적 차이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이야기를 뒤집은 일화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써서 갑자기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 오순절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우지 않은 채 좀 더 포용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 화소의 오순절은 그런 차이를 삭제함으로써 새로운(획일적인) 집단을 창조한다. 142-3)


15. ‘시장’의 교회력


‘시장’ 종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교회력을 만든다. 때로는 독자적인 축일을 고안한다. 하지만 대개 종전 종교 축제에서 생겨난 정서와 관행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며, 나름의 취지를 위해 이런 감정을 활용한다. 이런 취지가 항상 해당 축일의 원래 취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은 대체로 흡수 전략을 선호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 축일의 활기에 편승하는 게 무에서 고유한 축일을 창조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어떤 축일도 판매를 확대할 기회로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특별한 날은 충분히 많은 잠재적 고객을 끌어들일 만큼 유명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내가 최근에 직접 목격한 사례는 타미힐피거가 이슬람교 성월인 라마단을 추가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활용하려고 벌이는 캠페인이다. 타미힐피거는 이런 매혹적인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 카프탄caftan과 카울 넥cowl neck, 검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 청록색 긴소매 드레스 등을 출시했다. 150-1)


16. 모든 소원을 아시며


기업은 이른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 업체와 연결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미국 최대 데이터 중개업체는 액시엄Acxiom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액시엄은 컴퓨터 서버 2만 3,000개를 보유하고 1년에 데이터 거래 50조 건을 처리한다. 이 회사는 개인별로 13자리 숫자 고유 번호를 붙인 미국인 2억 명에 관한 ‘디지털 기록’에 평균 2,500개 데이터 포인트를 저장한다. 이 조사의 특징이 무엇이든, 마케팅 담당자들 역시 전통적인 고해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 은밀한 욕망을 발견하는 것을 훌쩍 넘어선다. 그들은 이런 욕망을 창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매일같이 우리 공간을 침범하는 광고(스팸 메일, 텔레비전 광고, 길거리 광고판, 인터넷 광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한 사람은 주변에 흘러넘치는 광고가 대부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욕망을 창조하려는 가차 없는 시도임을 안다. 이 과정은 과거 고해실처럼 종전의 열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열망을 불어넣기도 한다. 165-6)


17. ‘시장’과 세상의 종말


신학자들은 세계의 종말에 대한 관념 연구에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마지막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eschata’에서 유래했지만, 종말은 이따금 시초로 돌아가는 것이고 일부 신학에서 ‘종말’은 ‘끝finis’뿐만 아니라 ‘목적telos’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론은 점차 ‘역사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 다닌 교회학교 벽에 있던 일곱seven ‘시대dispensations’ 도표에 빠져든 것은 ‘최후의 심판 날’을 묘사한 방식 때문이라기보다 가차 없는 시대의 흐름에서 내 위치에 관한 표시가 묘한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많은 사람이 대재앙을 예상하는 종말론에 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말론은 비록 이따금 틀린 것이라도 의미와 방향, 중요성에 대한 느낌을 제시한다. 때로 사람들이 태평한 왕국 같은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고무한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이 잔인하고 과격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172)


히브리 신앙은 일신교가 아니라 단일신교henotheism이다. 〈시편〉의 다음 구절에서 핵심은 신들에게 부족해 보이는 진정한 신의 의무를 자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 하느님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셨다. /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주고, /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주어라. /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시편〉 82편 1~7절. 진정한 신에 대한 이런 기준을 감안할 때, ‘시장’은 자격 미달이다. 178-9)


18. ‘시장’의 영혼 구하기


라틴어 ‘restoratio humani(인간의 회복)’라는 구절은 인간을 만물의 질서에서 적합한 자리, 즉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질문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 답하고자 한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생명으로 화신한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화神化(theosis)라는 이 개념은 초기의 일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로마 종교의 일부 경향으로 들어갔다. 후자의 경향에서는 인간이 때로 신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취하셨다.” 하지만 결국 등장한 지배적인 모티프는 약간 다르다. 신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온 것은 인간을 신성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되어야 하는 모습, 즉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회복’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182-3)


이스라엘 학자 아비바 고틀리브 존버그Avivah Gottlieb Zornberg는 〈창세기〉에 관한 통찰력 있는 저서에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힘을 다른 중심으로 분산하느라 분주했다고 설명한다. 존버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한 일은 ‘복잡성을 증대’하는 ‘원초적인 해체’ 작업이다.  “그날 〔첫째 날〕의 주된 업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하나 됨oneness에서 하나 이상의 가능성으로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형하는 것이었다.” ‘시장’도 마찬가지로, 재창조 ‘첫째 날’ 혹은 ‘1단계’ 목표는 ‘시장’에 어울리는 건전한 자리로 그것을 회복하는 일(탈집중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날 하느님은 탈집중화를 계속한다. 하느님은 땅이 나타날 수 있도록 물과 물 사이를 가른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자기 것이 아닌 현실을 갈라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하느님은 새롭게 생긴 그 갈라진 영역 안에서 ‘권력 이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일한 과정을 도입하고, 이 요소 사이에 존재할 상호 관계의 성격을 만들었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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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를 읽다 - 유가를 중국 사상의 주류로 만든 순자를 공부하는 첫걸음 ㅣ 유유 고전강의 14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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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자에게 공정한 평가를 돌려주자


"공자는 서주西周 봉건제도의 왕관학 전통을 이어받아 특히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예와 법을 서로 관련되면서도 대립적인 두 가지 힘으로 간주했습니다. 법과 형벌을 사용하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으려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수치심이 없고 자발적인 극기克己의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로써 규제하면 진심으로 정당한 행위 법칙을 준수합니다. 확실히 예는 법보다 근본적입니다. 예는 외적인 것이지만 예의 작용은 누가 외적인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내적 원리를 인지하고 이해하게끔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윗사람을 존중하는 그의 내적인 천성을 일깨워서, 그가 예의 배후에 있는 정신을 이해하고 더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또 무의식적 습관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윗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입니다. '예'와 '예의 근본'을 강조하고 예가 사람의 내적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확실히 성선의 가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32-4)


# 왕관학王官學 : 군자의 도리와 치국 방법의 전수에 중점을 둔 고대의 귀족 교육 체계


"맹자의 시대는 장자의 시대와 대단히 가까웠습니다. 기원전 4세기 말부터 3세기 초에 해당하는 그 시대에는 수많은 유세객의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왔지요. 기준이 될 만한 답도 없고 고정된 상하관계의 틀도 없어서 모두가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고, 또 모두가 미망 속에서 분주히 답을 찾아 헤맸습니다." "당시 유세객은 누구에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을까요?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군주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귀에 거슬리고 황당한 의견이라도 그 시대의 군주들은 참고 듣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만약 듣지 않거나 두루 경청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은 의견과 주장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는 인재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불안하고 위기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 각국의 군주 앞에서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갖고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유리하고 이치에 맞는지, 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지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웅변'의 풍조가 생겨났습니다."(40-3)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 웅변의 풍조는 이미 막바지에 다다랐고, 유세객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미 칠웅은 나란히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진나라가 열국列國 가운데 가장 강대하고 무시무시한 위치를 점유했지요. 또한 이에 상응해 진나라의 부상에 관한 한 견해가 점점 더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진나라가 강대해질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진효공秦孝公이 상앙商鞅을 등용해 ‘변법’變法을 시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앙의 변법의 핵심적인 의의는 어떤 구체적인 법을 제정한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법의 지위를 봉건 종법의 규범을 능가하는 위치까지 끌어올린 데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왕자가 법을 어겨도 서민과 똑같이 죄를 지은 것”王子犯法與庶民同罪이라는 말이 그 정신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의 그 형세에서 치국治國의 가장 훌륭한 답이 이미 검증된 셈이 아니겠습니까? 웅변의 유행과 확장은 이 시점에 이르러 법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43-5)


"따라서 순자의 핵심 사상도 공자나 맹자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예가 인위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공통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성인의 지혜가 사람마다 내면에 갖고 있는 예의 정신적 질서를 정리하고 통합해 외부에 제도화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순자는 보통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성인의 차별점은 초월적 지혜로 예를 창조해 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자에 따르면 성인이 창조한 예는 보통 사람의 천성에서 비롯되지 않았을뿐더러 거꾸로 보통 사람의 천성을 다스리고 바로잡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예가 보통 사람의 천성에 위배되는 까닭은 예의 구속과 훈련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보통 사람의 천성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 ‘악한 천성’을 제한해야만 비로소 훌륭하고 질서 있는 예의 환경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예는 성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며, 보통 사람은 배움을 통해 예의 바르게 변하여 성인에 가까워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춥니다."(47-8)


2. 유가의 변모


"'분分은 순자의 사상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분은 사람이라면 응당 주어지는 신분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분을 이해하고 지킨다면 사회에는 당연히 영속적인 질서가 생기고 나라도 다스리기 쉬워질 겁니다. 반대로 가정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분을 안 지키고 분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순자는 생각했습니다." "순자가 보기에 묵가의 문제점은 가정, 국가, 천하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법도(어떠한 신분과 지위도 그에 상응하는 권리와 행위를 수반하는데, 이것 역시 ‘예’입니다)가 있는 것도 모르고 실제적인 공리와 실용만 중시하고 있어 마땅한 상하 신분 차이조차 무시한  데에 있었습니다." "순자는 법가 역시 인위적으로 제정한 법령만 중시하고 그 배후의 더 크고 높은 총체적 원칙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니 그런 법령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도 없고, 사람마다 당연히 가져야 할 ‘본분’分을 확립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60-3)


"순자의 「비십이자」非十二子의 초점은 사실 자사와 맹자이며, 이 두 명 중에서도 시간상 순자와 더 가까웠던 맹자가 초점 중의 초점입니다. 순자는 그들이 고대의 선왕을 추종한다고 하면서도 흉내만 낼 뿐 그 원리는 몰랐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멋대로 자기 능력을 과신해 원대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잡다해서 전혀 가다듬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문제의 핵심은 큰 줄기統를 몰랐던 데에 있다고도 합니다. 순자에 따르면 그들이 옛날 자료에 근거해 만든 오행(다섯 가지 옳은 행위),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학설도 부적절하고 진리를 왜곡한 것이었습니다. 이 학설은 난삽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설명이 없는데도, 그들은 논리의 허점을 가리고 꾸미기에만 열중하며 “이것은 공자의 진정한 사상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자사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그는 공자의 손자여서 더더욱 그 주장에 힘이 실렸을 겁니다. 맹자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세속의 무지한 유자들을 미혹시켰습니다."(67)


"이어서 순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공자와 염옹의 도리를 이야기합니다. 〈방법과 책략을 아우르고, 말과 행동을 같게 하고, 여러 부류를 통일하면서 천하의 인재를 모아 옛날 일을 알려 주고 가장 옳은 이치를 가르친다. 若夫總方略, 齊言行, 壹統類, 而群天下之英杰, 而告之以大古, 教之以至順.〉 “아우르고”總, “같게 하고”齊, “통일해야”壹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통합의 원리가 있어야 하고, 백성의 말과 행동은 가지런하고 일치해야 하며, 사회질서에는 고정적이며 변치 않는 신분의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하의 능력 있는 사람을 다 모아서 상고시대 선왕들의 사적을 배우게 하고, 궁극적이며 절대적이라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순자는 어지럽고 복잡한 현상을 선호하지 않았고, 인재가 개성을 발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효과적으로 엄밀하게 분류해 통일된 원리 원칙으로 귀납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69-70)


"유가는 특수한 이중성을 보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존 전통의 내용을 개량한 새로운 왕관학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주의 새로운 환경과 혼란에 대응해 나타난 ‘제자학’諸子學 중 가장 일찍 성립된 학파였습니다. ‘주례’周禮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계승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춘추시대의 변란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들은 백성이 편안히 살도록 해 주려면 정신적인 측면에서 기존 전통을 부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책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관학과 제자학이라는, 시대적으로도 내용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 지식의 조류가 유가에서 기묘하게 통합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더 심각하게 쇠퇴했고, 주나라의 전통문화도 점점 더 홀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가의 이중성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관학을 계승한 부분은 갈수록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제자학 부분은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다른 학설들과 경쟁하면서 갈수록 강화되었습니다."(93-4)


3. 유가는 쓸모가 있는가


"주공은 종법상으로 방계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적장자인 무왕의 아들을 대신해 천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참람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친형제인 관숙을 죽이긴 했지만 관숙은 다른 형제인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상나라의 잔여 세력을 이끌던 무경武庚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를 죽인 것은 포악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로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당시 형세에 대응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고 다시 그 자리를 성왕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역시 예에 어긋난 짓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사이 천하는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공 같은 성인 혹은 대유大儒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명의 대유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요한 시기에 혈연적 신분 관계까지 뛰어넘어 천자가 되어서 막대한 책임을 지고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순자의 마음 속에서 주공은 ‘유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儒之最大者이자 유자의 극치였습니다."(105-6)


"유자와 유가는 공자 시대에는 특수한 왕관학 훈련을 받은 ‘사인’士人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예와 정치의 도를 잘 알아서 군주와 대부를 보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자는 주공 같은 과거의 군주도 대유라고 하여 역시 유자로 간주하면서, 유자가 군주같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진소왕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위와 권력을 갖고 옳은 방식으로 권력을 이용해 위기를 해결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는 사람은 공자의 개념에서는 유자가 아니라 ‘성인’이었습니다. 이때에 와서 유자는 일종의 특수한 태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본래 사인의 신분과는 무관해져 군주도 유자가 될 수 있고 유자도 군주를 맡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습니다." "군주는 법가의 학설을 받아들여 ‘법가적 군주’가 될 수 있었으므로, 순자는 당연히 유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가적 군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군주가 유가를 지지하고 수용하게 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114-5)


"군자 혹은 유자의 능력은 선택적이며 어떤 포인트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팔거나 측정 도구를 능숙히 다루는 일은 당연히 농부, 상인, 장인보다 못합니다. 진정한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 검은 것은 희다 하고 틀린 것은 맞다 하며 입으로만 상대를 이겨 먹는 점에서도 혜시와 등석 같은 명가에 못 미칩니다. 군자와 유자는 일반적인 책사나 유세객이 아닙니다. 말을 위한 말을 일삼고 군주 앞에서 다른 사람을 압도하며 부귀를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자는 그런 일에 능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유자는 그런 일을 경시합니다." "사람의 덕과 능력을 비교해 그 높고 낮음에 따라 벼슬과 지위를 분배하고, 만물과 사물의 변화에도 그 기본 성격에 맞춰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유자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는 말 잘하는 신도나 묵적 같은 이도 유자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분석 잘하는 혜시와 등석 같은 이도 역시 유자 앞에서 방자하게 궤변을 늘어놓지 못하지요."(119-20)


"개인적인 관점에서도 유가는 효용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유가는 배움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맹자처럼 “사람은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순과 성인은 특정한 역사의 시공간적 조건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공로를 세운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닙니다. 전국시대의 유가는 요순과 성인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요순이 상징하던, 사람들이 가장 대단하다고 상상한 성취는 안으로 인의와 덕성을 갖추고 밖으로 인의를 실천해 천하를 복되게 할 만큼 충분한 권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요순이어도, 다시 말해 아무리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어도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은 없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맹자가 보기에 범인과 성인 사이의 접점은 공동의 선한 인성이었습니다. 순자가 보기에 그것은 배움이었고요. 누구나 배움을 원하고 배움의 방법만 알면 사인에서 군자로, 또 군자에서 성인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127-30)


4. 배우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온종일 생각만 해 본 적이 있는데 잠깐 배우느니만 못했다. 나는 발돋움해 멀리 바라본 적이 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드넓게 바라보느니만 못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손짓을 하면 팔이 길어지지는 않지만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바람을 따라 소리치면 소리가 커지지는 않지만 명확하게 들린다. 또한 수레와 말을 빌리면 걸음이 빠르지 않아도 수천 리를 갈 수 있고, 배와 노를 빌리면 물에 익숙하지 않아도 강을 건널 수 있다. 군자는 나면서부터 달랐던 것이 아니라 사물의 힘을 빌려 훌륭해진 것이다. 吾嘗終日而思矣, 不如須臾之所學也; 吾嘗跂而望矣, 不如登高之博見也. 登高而招, 臂非加長也, 而見者遠; 順風而呼, 聲非加疾也, 而聞者彰. 假輿馬者, 非利足也, 而致千里; 假舟楫者, 非能水也, 而絕江河. 君子生非異也, 善假於物也.〉" "순자는 배움의 가장 근본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옛날과 오늘날의 지식을 통해 능력을 확장시켜 타고난 한계를 넘어 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62-3)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흰 모래가 개흙 안에 있으면 더불어 모두 까매진다. 구릿대의 뿌리는 백지白芷인데, 그것을 구정물에 적셔 두면 군자도 가까이하지 않고 서민도 몸에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그 바탕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담가 둔 것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거주할 때 반드시 고을을 가리고 여행할 때도 반드시 가까이할 사람을 가림으로써 사악하고 편벽됨을 방지하고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蘭槐之根是爲芷, 其漸之滫, 君子不近, 庶人不服. 其質非不美也, 所漸者然也. 故君子居必擇鄉, 遊必就士, 所以防邪僻而近中正也.〉 환경의 중요성은 다양한 기초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환경은 영향과 감화를 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신중하게 자기가 살 곳을 고르며, 다른 곳을 여행할 때도 역시 신중하게 가까이할 사람을 고릅니다. 그래야만 편벽되고 사악해질 위험을 피하고 언제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165-6)


"배움은 변화시키는 것 말고도 한 가지 특성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축적’積입니다. 조금씩 쌓아 이루는 것이지요." "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산을 이루고 그 위로 비바람 같은 기상 현상이 늘 펼쳐집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고이고 또 고여 연못을 이루면 그 속에 이무기가 생깁니다. 선한 마음과 행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내면의 덕이 생겨 자연히 정확한 판단력과 성인의 정신이 갖춰집니다. 다리를 들어 앞으로 반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절대로 천 리 밖에 닿을 수 없습니다. 작은 물줄기가 쌓이지 않으면 강과 바다도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또한 가장 빨리 달리는 준마도 한 번 뛰어 열 걸음이나 되는 먼 거리를 가지 못하지만, 느려 터진 말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가고 또 가면 열흘이나 걸리는 긴 여정을 주파할 수 있습니다. 조각을 할 때도 칼을 대자마자 포기하면 썩은 나무조차 새기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기고 또 새기면 가장 단단한 쇠와 돌에도 원하는 모양과 무늬를 새길 수 있습니다."(169-71)


"축적은 집중력과 인내심 그리고 집요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변치 않는 굳은 의지가 없으면 배움으로 얻은 밝은 지혜가 있을 리 없고, 힘들게 몰두하는 정신이 없으면 크고 놀라운 공을 이루기가 불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호파가 물가에서 비파를 뜯으면 물고기가 깊은 곳에서 떠올라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 꼴을 먹던 말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고 합니다. 쌓은 것이 충분하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들리게 마련이고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눈길을 끌게 마련입니다(인내심을 갖고 쌓아 나가면 틀림없이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옥이 있는 산에서는 풀과 나무가 유난히 무성하고 아름다우며, 진주가 있는 연못에서는 물가의 언덕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선행을 실천하면 틀림없이 반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배움을 수단으로 삼아 집중하고 계속 쌓아 나가면 결국에는 사람들을 더 훌륭하게 변화시켜 더 훌륭한 사회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자가 고수한 신념입니다."(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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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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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3일 만에 혁명이 실패하자 서재필은 망명하고, 첫 번째 아내는 자살했다.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고, 집안 전체가 멸문당한다. 서재필은 고작 스무 살이었다. 갑신정변의 동지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기대와 달리 일본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다시 박영효, 서광범과 태평양을 건너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서재필은 어느 미국인 자선사업가의 도움으로 1886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습력이 뛰어났던 서재필은 모든 학생을 대표해 졸업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원하던 독지가는 서재필이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과학을 택했다.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12)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최초의 순 한글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에 맞춰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만든다.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모임은 7월 2일 독립협회로 발전한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국고를 지원했다. 여기에 고종의 측근뿐 아니라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친러파, 친일파 등 정파를 초월한 다수의 관료가 참여했다. 어쩌면 몰락하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석 달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기에 대한 의례를 시작했던 서재필은 독립문에 태극기를 새겼다. 《독립신문》은 태극기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제호에도 태극기를 인쇄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자주 독립국으로서 ‘제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897년 10월, 여론에 호응한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이때만 해도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았던 두 세력은, 곧 민주주의 도입을 둘러싸고 대립한다. 14)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토론 수업을 시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학생들이 토론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협성회’의 시작이다. 협성회는 이승만, 주시경, 오긍선 등 배재학당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으며, 토론회를 기반으로 대중 계몽 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큰 영향을 준 서재필은 그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오긍선 역시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아 서재필의 뒤를 이었고, 나중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의 서양 의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선도하는 대중 토론회가 인기를 끌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에서는 안창호가 명연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러한 활동은 점차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외교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15)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안창호가 하와이를 지나가고 두 달 뒤인 1902년 12월, 대한제국의 정식 여권을 소지한 최초의 이민자들이 민영환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에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민영환은 이들의 여권과 비자 처리 업무를 맡았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뜬 그는 날로 격해지는 열강들의 침략을 외교 관계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하와이 이주 사업 역시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같은 해, 일본의 요구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도 금지되었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여기서 다했다. 하와이 이민을 주선했던 민영환은 자결하고, 이민자들이 돌아갈 조국은 없어졌다. 20-1)


한편, 3·1운동의 폭풍이 지난 1919년 여름, 파리의 프랑스 정보 당국은 하노이에 긴급 전보를 보내 한 젊은 남자의 신원 확인을 요청한다. 이 젊은이는 ‘응우옌 아이 쿠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응우옌(Nguyễn)은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으로 한자로는 ‘완(阮)’이고, ‘아이 쿠옥(Ái Quốc)’은 한자 ‘애국(愛國)’을 베트남어로 표시한 것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운동가였던 그는 난데없이 파리강화회의장에 들어가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했다. 당황한 프랑스 정보 당국은 이 사람의 배후를 캐기 시작했는데, 밝혀진 내용은 이렇다. 1911년 베트남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미국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스 정보 당국이 기록한 단체의 이름은 ‘Korean National Association’.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이 결성한,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이민자들이 꼬박꼬박 기금을 모으던 바로 그 ‘대한인국민회’다. 24)


#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나중에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1918년 상하이 망명 중이던 여운형 역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김규식을 대표단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이와 동시에 여운형은 전국적인 봉기를 조직해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는데, 이것이 3·1운동의 시작이다. 파견된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서 백방으로 뛰던 도중 프랑스 측으로부터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 한다는 답변을 듣고, 긴급히 여운형 측에 알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25)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의 실체가 드러나자 외교론이나 애국계몽론의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는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설득력을 얻으며, 한인사회당이 임시정부의 다수파가 된다. 임시정부는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세력을 재편하여 동로, 북로, 서로의 3대 군관구를 설정했다. 그해 6월 홍범도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다. 이동휘는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추가 파견하여 이미 활동 중인 박진순에게 합류시키고,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 약속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신용이 없던 신생 소비에트의 지폐가 아니라 환전이 가능한 제정러시아의 금화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이르쿠츠크파가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 계열(김구 등)에 이 돈의 존재를 폭로한다. 이를 임시정부의 공금으로 생각한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띠었다. 1921년 1월, 이동휘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29-30)


한편, 1920년 독립군의 맹활약에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하며, 만주 한인 민간인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15 이에 세력이 위축된 여러 독립군 조직은 1921년 초 연해주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자유시)에 집결하여(4,500명) 단일한 독립군 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다. 사실 이 집결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의 산물이었고, 상해파의 지도를 받는 다수의 독립군 조직을 이르쿠츠크파가 연해주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의 접수를 시도했다. 1921년 6월 28일 볼셰비키와 진압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을 무력으로 제압하는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당시 김구는 좌파 지도자들이 횡령했다고 의심하고, 1922년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 분열이 시작되었다. 30)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초기 사회주의자 김철수는 김구에 복수하려는 세력을 끝까지 말렸고,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 이후 새로운 좌파 지도자로 등장한 박헌영 등의 스탈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1990년대 러시아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구가 지목한 인물들의 공금횡령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제적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이동휘와 동행을 마친 이극로는 황진남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남아 1922년부터 베를린대학(Universität zu Berlin)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이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만들어 스스로 강의했다. 2019년, 이극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이 강좌를 1923년 독일 교육 당국이 정식 강좌로 허가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어는 독일어로 ‘Koreanische Sprache(한국어라는 뜻)’라고 표기되어 있다. 31-2)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과학이 조선의 살길이라는 것은 명백했고,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과학을 배우자’라는 구호로 이어졌다.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公民(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36-7)


나경석은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회사와 제약 사업 등에 종사했으나 실패하고, 유학 친구 신익희와 축구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신익희와 함께 비밀 조직을 만들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신익희는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여기서 손정도, 여운형, 황진남과 함께 임시의정원 활동을 했다. 이 무렵 과학 연구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시작은 1924년 김용관이 조선일보에 발명학회 설립을 제안하면서부터다. 대한제국이 이공계 교육을 위해 설립한 상공학교(1899년)에 뿌리를 둔 경성공업전습소(1907년)가 1915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20 이 학교 졸업생들은 최초의 과학도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를 만들고, 1920년 10월 20일 《공우(工友)》라는 잡지를 창간해 과학 계몽에 앞장섰다. 이 창간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37-8)


1933년 6월, 발명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한다.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릉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38-40)


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100년 전, 나라 잃은 민족의 부활 수단으로 인식되며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상대성이론은 1922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조선 전체에 아인슈타인 붐으로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간다는 사실은 6월부터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기 전이었다.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더욱 떠들썩해졌다. 아인슈타인의 세세한 일정을 보도하던 《동아일보》는 11월로 예정된 그의 도착에 맞춰 특집 기사를 기획한다. 필자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황진남. 함흥 출신의 하와이 이주민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서 현순, 여운형, 신익희와 함께 활동했던 그 황진남이다. 임시정부의 분열 때문에 이극로와 마찬가지로 독일 유학을 택했던 그는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다. 43)


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 다음 해인 1923년,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기획한다. 그들의 리더로는 한위건과 이여성이 있었고, 여기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최윤식이 합류했다. 1919년의 3·1운동이 시작되던 첫날, 시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경성의전 학생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한위건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3년 여름 학우회 순회강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순회강연단의 또 다른 리더 이여성은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이다. 그의 조부는 금부도사였고 부친은 현감을 지낸 만석꾼이었다. 그는 집에서 토지 문서를 훔쳐 중국으로 떠나며 어린 시절 항일운동으로 의형제를 맺었던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호를 짓는데, 김원봉은 약산(若山, 산과 같이), 김두전은 약수(若水, 물과 같이) 그리고 이명건은 여성(如星, 별과 같이)으로 불리게 된다. 49)


상대성이론 열풍은 문인 이광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소설 〈무정〉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던 그는 1927년 6월 《동광》에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 시간 공간 및 만유인력 등 관념의 근본적 개조>라는 장문의 논설을 싣는다. 《동광》은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기관지 성격으로 1926년에 시작된 잡지다. 이제는 상대성이론을 단지 어렵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이해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이광수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에 이광수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문체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에테르의 존재가 부정된 마이컬슨의 실험으로 시작해 빛의 상대속도가 어떻게 새로운 중력이론으로 연결되는지 상대성이론을 비교적 정확하게 해설했다. 이처럼 당시 아인슈타인은 일반인에게 알려질 정도로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고, 1928년 8월 22일 《중외일보》는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라는 사설을 싣기도 한다. 이 흐름은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54)


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1923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이 시기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폭등한다. 1923년 10월 한 달에만 300배가 올라, 11월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으로 나치가 급부상했다. 1924년 6월 26일 《신한민보》에 미주 한인들이 베를린 유학생 대표에게 송금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 수령자는 이극로였다. 이렇게 미주 한인들과 인연을 맺은 이극로는 몇 해 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미주 순회 한글 강연에서 ‘언어는 민족의 생명’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나라는 언어에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말과 글의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극로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년)다. 61-2)


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어린 시절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규남은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韓英書院, 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던 1899년 초, 윤치호는 ‘산업 학교(industrial school)’를 설립하기 위해 재산 일부를 남감리교회 재단에 기부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가 이를 종잣돈으로 1906년 개성에 세운 학교가 ‘한영서원’이다. 설립 목적에 맞게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조선에 아인슈타인 붐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고교 야구 선수 최규남은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당시 연희전문 수물과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학과 물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1932년, 최규남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모교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34년 무렵 양자역학 강의를 시작한다. 서양에서조차 낯설던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65-7)


1931년 교토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1932년 1월 8일, 이태규가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얼마 뒤 일본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다. 다이쇼 천황에 이어 즉위한 쇼와 천황 히로히토에게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며 온건 의회주의자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군부가 행동에 나섰다.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밀어붙이지만 곧이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점령군 수뇌부가 붕괴한다. 밀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5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을 사살하고, 일본의 정당정치가 무너진다. 이로부터 일본은 제동이 걸리지 않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경제공황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먹고사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는 독일 바이마르 체제를,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심지어 조선의 지식인 사회까지 급격히 우경화시키고 있었다. 아마 심훈의 《상록수》(1935년)는 이런 지식인 사회의 변절과 비관에 반전을 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71)


이상의 시 〈삼차각 설계도: 선에관한각서 1〉(1931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요하게나를전자(電子)의양자(陽子)로하라〉 여기서 양자는 ‘量子(quantum)’가 아니라 ‘陽子’로 표기되어 있어, 양성자(陽性子, proton)를 의미한다. 이 시를 쓸 무렵 원자는 전자와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시가 발표되고 한 해 뒤인 1932년에는 중성자도 발견된다. 문제는 양성자와 중성자만으로 이루어진 원자핵이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는가였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들을 붙잡고 있는 힘을 가진 새로운 입자가 필요했고, 유카와 히데키는 이 입자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 ‘중간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실험으로 발견되어 노벨상을 받았다.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73)


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


1930년대 말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면서 일제가 과학 교육까지 제약하기 시작했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양자역학 연구를 이어가던 도상록은 1941년 만주국(滿洲國) ‘신징(新京)공업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도 록일랑(都 祿一郞, 미야코 로쿠이치로)’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러 편의 양자역학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84-5)


1937년 교토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種)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油菜)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1937년 4월 이태규 박사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종의 합성〉으로 스타가 된 우장춘 박사가 다키이 연구 농장 초대 농장장이 되어 교토로 갔다. 리승기까지 합류해 교토에서 세 사람이 모인 것도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88)


듀퐁의 나일론이 1938년부터 상업적으로 사용되자, 실크가 나일론으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세계 최대 실크 생산국이었던 일본은 다급해졌다.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미국이 원유 공급을 끊자 리승기 교수의 비날론 연구는 더욱 군사화되었다. 석유에서 합성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유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나일론이 들어온 것은 1953년 코오롱이 시작인데, 코오롱은 ‘코리아’와 ‘나일론’의 합성어다.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89-91)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춘원 이광수의 총애를 받았던 윤석중은 자신의 호를 한자 이름인 석중(石重)에서 딴 석동(石童), 즉 ‘돌아이’라고 지었다.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기도 한 그는 1969년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자, 어린이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앞으로〉라는 동요를 작사했다. 비록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로는 우주 개발이 먼 일이었지만,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우주에 대한 꿈을 키우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94-5)


초기 대종교는 무장 독립 세력이 집결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여기에 대종교인이던 김좌진, 홍범도 두 장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궤멸하자 이들은 다른 부분에서 활약한다. 바로 한글 운동이다. 이를 이끈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고, 그들은 ‘조선어학회’로 뭉쳤으며 한글 교육을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보았다.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 책은 한글 창제에서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인간의 발성 구조와 연관되는지, 초성-중성-종성이라는 논리적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한 귀한 자료다. 97)


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와세다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신격호는 1944년 공작기계의 필수품인 ‘절삭유(cutting oil)’ 공장을 차렸으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은 불타버린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절삭유 원료인 피마자기름으로 비누와 포마드 오일을 개발해 크게 성공한다. 이 돈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려 화학제품군을 확장했다. 이때 그의 눈길을 끈 제품이 있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져온 신기한 물건인 껌이었다. 그는 세계 최대의 껌 회사인 미국의 리글리(Wrigley)가 원래 비누 회사였다가 품목을 전환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리고 공정 개발에 착수한다.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출신들을 영입해 이 연구에 투입했다. 당시 여러 일본 회사가 껌 개발에 나섰지만, 화학공학 출신으로 각종 화학제품 생산 경험이 풍부한 신격호가 단연 선두에 섰다. 1948년, 껌이 성공하자 신격호는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 이름을 ‘롯데’로 바꾸었다. ‘롯데(Lotte)’는 신격호가 좋아하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샤를로테(Charlotte)에서 따왔다. 106)


최형섭(1920년생)과 신격호(1921년생)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1940년대 초, 문선명(1920년생)도 이곳에서 유학했다. 그의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당시 와세다대학 건축과에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의 아들 엄덕문(1919년생)도 있었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건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대극장과 인민문화궁전과 같은 대형 공연장에 놀란다. 박정희 정부는 급히 이에 필적할 공연장 건축에 나섰다. 나전칠기 집안에서 자란 엄덕문은 누구보다 전통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광화문 거리의 랜드마크가 이렇게 탄생했다. 2022년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 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엄덕문의 원래 아이디어였던 광장도 결국 실현되었다. 엄덕문은 문선명과 평생 친구였다. 해방 전 가시마 건설에서 같이 일했던 그는 한때 통일교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격호의 소공동 롯데 호텔과 백화점도 그의 작품이다. 106-7)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1946년, 삼팔선으로 남북이 갈리며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고,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세울지 곳곳에서 좌우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여운형은 어떻게든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에 나섰지만, 한쪽으로만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그는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던 황진남도 마찬가지였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작은 6월 초, 도상록 교수에 대한 전격적인 파면 조처였다. 당시 경성대학은 자치위원회로 돌아가고 있었고, 도상록은 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건준을 인정하지 않던 미 군정은 자치위원회 역시 인정하지 않았고, 도상록이 자치위원회를 통해 대학 자금을 사용한 것을 공금 횡령으로 몰아간 것이다.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식민 지배 스타일의 강압적인 지배 구조가 이어지자 학계가 반발한다. 파면된 도상록은 월북해서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김일성종합대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110)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은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국대안)’을 발표한다. 국대안의 요지는 경성대학과 경성의전,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 9개를 합쳐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이것이 서울대학교의 시작이다. 도상록의 해임을 둘러싼 논란이 가시기 전에 이루어진 이 조치로 9월, 이공학부 교수 38명이 집단 사표를 내고 대부분 월북했다. 고향이 평안도 선천인 최윤식은 9월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곧 남쪽으로 내려와 이들 세 교수의 빈자리를 맡는다. 10월 개교한 서울대학교에서 이태규는 문리대 학장이 되고, 리승기는 공대 학장으로 수습에 나섰다. 수학과 교수들이 월북해버린 상태에서 최윤식이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를 맡았고, 교토제국대학 3인방 중 한 명인 박철재가 물리학과 초대 주임교수로 합류한다. 110)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이념 대립으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여운형은 겨레를 통합시킬 유일한 방법이 스포츠라고 믿었다. 보스턴 마라톤 직후인 1947년 6월 15일 시작되는 IOC 총회에 여운형은 미시간대학 출신 전경무를 파견한다. 그런데 5월 29일 서울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후지산에 추락해 전경무가 사망했다. 여운형은 미국에 있던 이원순에게 급히 연락해 IOC 총회에 대신 참가시킨다. 전경무가 사망 당시 휴대했던 서류들이 이원순에게 보내졌다. 여운형은 필사적이었다.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 끝에 마침내 IOC는 6월 20일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KOC)를 승인하고, 여운형이 초대 KOC 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여운형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정식으로 정부를 구성하기도 전에 국제기구 가입부터 이뤄낸 것이다. 전국이 들썩이고 모두가 환호했다.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을 맞았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117-8)


1948년 올림픽에 손기정은 선수단장으로 기수를 맡았고, 역도 선수 김성집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나중에 손기정은 이렇게 회상했다. 1945년 봄, 건국동맹을 꾸리던 여운형은 손기정에게 당시 일본군 중좌인 채병덕과 비밀리에 접촉하도록 지시했다. 여운형은 채병덕에게 유사 시 건준에 무기를 공급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비록 채병덕은 친일 일본군 장교였지만, 윤치호와도 친분을 유지했던 여운형은 이처럼 유연한 사고와 광폭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인 1947년 7월 1일, 이승만 견제를 위해 미 군정이 초청한 서재필이 한국에 도착했다. 서재필의 두 번째 귀향이었다. 이미 83세의 노령이던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발탁했던 후배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서재필에게 당시의 남북 대결 구도는 자기 인생 전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분단은 막아보려던 그는 이승만 계열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고, 1948년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자 결국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119)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1950년 3월 8일, 우장춘이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일찍이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우장춘은 종전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여러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무려 5년간 무직으로 지내다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한국에서 귀국 추진 위원회는 일본에 남은 우장춘 가족의 생계를 위해 100만 엔을 보냈다.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 박사는 이 돈을 가족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 기구를 구입하는 데 다 써버렸다. 당황한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그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 지 석 달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사의 연구소가 있던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부산에서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난리가 벌어졌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홀린 듯이 종자 개발에만 집중했다. 124-5)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1938년, 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 안과에 가서 치료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을 향한 열정에 감동한 의사 공병우는 한글 기계화에 인생을 걸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 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 북한, 중국이었기에 협정문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로 작성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한글 타자기가 없었다. 때문에 UN군은 북한을 위해 한국군의 공병우 타자기로 한국어 정전협정문을 인쇄한 것이다. 131)


1954년 오랜 공을 들인 진도에서 드디어 채소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한국인의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무와 배추 등이었다.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계속된 연구가 결실을 보았다. 가장 큰 성과는 김장용 배추가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가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 더해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의 조상 ‘원예 1호’의 탄생이다. 우장춘은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로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종자를 꿈꾸고 있었다. 1959년 8월 7일,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132-3)


일본을 무너뜨린 원자력 기술은 신생 독립국인 한국의 과학계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분야였다. 이에 이태규, 리승기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3인방으로 불리던 박철재 박사가 새롭게 출범하는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그 뒤를 이어 최형섭의 아버지 최지환의 친구였던 김법린이 2대 소장이 되었다. 김법린의 추천으로 1962년 원자력 연구소장이 된 최형섭은 탁월한 연구 행정 능력을 보이며 과학계의 신망을 얻게 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최형섭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대통령을 설득하고, 정부를 움직이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명성 황후의 묘소가 있던 홍릉에 KIST를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어 과학 행정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과학재단(현 연구재단)을 만들고,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했다. 대한민국의 1960~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끈 과학 발전은 거의 모두 그의 리더십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공로로, 최형섭은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133)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1957년 군론(group theory) 연구를 시작한 이임학은 1960년 새로운 유한단순군(finite simple group)을 발견한다. 프랑스 수학자 갈루아(Évariste Galois)로부터 시작된 군론 연구는 20세기 현대 수학의 주요한 흐름이었다. 1950년대 새로운 단순군의 발견이 초미의 관심사였기에, 이임학이 발견한 ‘Ree군’은 세계 수학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임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쪽으로 데려왔으나, 함흥에 남겨진 친척 생각이 간절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Paul Erdös)가 편지 왕래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건네진 북한 친지들의 편지가 빌미가 되어 남쪽의 가족은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많은 후학이 이임학의 국적과 명예 회복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80년대 이임학이 함흥을 직접 방문하자, 국적회복은 더욱 요원해졌다.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행사로 한국에 왔지만, 국적회복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임학은 캐나다 시민으로 2005년 사망했다. 138-9)


에필로그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나는 ‘단절’의 레볼루션(revolution)보다 ‘연결’이라는 의미가 담긴 에볼루션(evolution)을 선호한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인간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만들어냈지만, 강한 자신감은 이념을 만들었고, 결국 끔찍한 제1·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아마 우리 근대 과학사 역시 정치적, 이념적 분열이 만들어낸 단절의 역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망각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비극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린,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록이다. 오염된 이념으로 과거를 재단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그 흔적 자체를,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걸러지지 않은 날것으로 과거를 살펴야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래는 기억하고 기록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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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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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해방 조선의 민낯


"해방 후 남한에서는 일본인 유곽 및 요정 업주들이 이른 시기에 돌아간 덕분에 조선인 업자들이 이권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만주 귀환자와 초기 월남민, 그리고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일본·동남아·태평양 등지의 귀환자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규모 공창과 요정을 거머쥔 조선인 업자들에게 영업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더없이 고마운 '먹잇감'이었다." "여기에 살길이 막막한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그리고 월남한 여성들이 이들 공창의 값싸고 풍부한 무한 공급원으로 부상하자 관련 업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해방 후에도 이렇게 고급 요정과 유곽이 전국적으로 늘어가자 여성계에서는 창기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무리한 몸값(전차금)을 말소하고 여성의 공공연한 인신매매를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5월 법령 제70호를 공포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을 나와도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었으므로 변형된 형태의 공창과 사창으로 다시 흡수되기 일쑤였다."(24-5)


"해외 귀환자들은 초기 정착 단계부터 적절한 구호가 이루어지지 않자 기존의 빈민 집단에 더하여 해방 공간의 새로운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이들은 모국 사회로부터 강한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대규모 재해가 발생하거나 역병이라도 돌면 이들은 영락없이 애꿎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가뜩이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해외 각지에서 도착한 귀환선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역병이 도는 바람에 총 1만 181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그 역병의 시발점이 단지 '귀환선'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전에 돌아온 사람들마저 '병균 덩어리' 취급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존 주민들은 이들이 해외나 타지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으로 여길 만큼 귀환선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따위에는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사람들이 해외에서 들어올수록 삶이 더욱 팍팍해져만 갔다는 부정적 경험만이 쌓여갈 뿐이었다."(32)


"1947년 7월 무장한 경찰대가 예고도 없이 마포구 대흥동의 제2 전재민 수용소로 들이닥쳤다. 규정 체류 기한을 넘긴 자들에게 퇴소를 명령했으나 귀환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수용소장이 급기야 경찰을 부른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자들과 이들을 끌어내려는 자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한 임산부가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러자 수용소의 귀환자들이 경찰들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6월 14일 제2수용소의 명도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바로 숭문상업학교의 이사장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자 조선일보 9대 사장을 지냈으나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는 친형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삼았다. 방재윤의 아들들이 바로 최근까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이처럼 숭문상업학교 교사 이전 과정에는 조선일보의 인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일보 입사 시험은 으레 이 학교에서 치르곤 했다."(41, 45)


"열악한 모국의 정착 환경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결실을 거둔 사례도 있었다. 귀환자와 월남민의 전재민 노점 시장으로 시작한 낙원시장의 성공 사례가 대표적이다. 탑골공원 뒤에 자리 잡은 이 시장 터는 과거 총독부가 방공용 소개지로 지정했기 때문에 해방 초기만 해도 상권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유입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곳이 전재민 시장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초기 월남민들이 모여들면서 번성하였다. 이곳의 노점상도 처음에는 하루 벌이로 연명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48년 상인 조합을 결성하였고, 1949년에는 조합원이 약 4,500명 규모로 증가하자 출자를 통해 인사동 고려청년회관에서 낙원시장주식회사 창립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주민들 사이에 〈해외 귀환자와 월남민은 하나같이 드세고, 억세다.〉라는 이미지가 각인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어떻게든 서울에 정착하려면 그토록 모질게 버텨내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52-3)


"1946년 12월 말 장충단 수용소에는 약 2,400명이 있었다. 그런데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에서 직원을 파견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약 1,700명이 영양실조와 동상을 안고 있었고, 겨울로 접어든 뒤로는 매일 평균 7~8명이 죽어 나갔다. 이런 사태를 이미 예견하고 있던 남한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는 시내에 산재한 13개 대형 '적산 요정'이라도 시급히 개방해 이들의 동사를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12월 23일까지 반드시 이들을 입주하게 하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개방을 연기했다." "전재 동포들은 구 일본인 소유 건물을 두세 채씩이나 차지해 졸부가 된 사람들로 인해 낮에는 미군이 버린 잔반을 뒤지며 구걸하고, 밤에는 한강 다리 아래에 움집을 파거나 거리를 전전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만성화되어 해방 후 약 3~4년 동안 겨울마다 되풀이된 귀환자와 월남민의 아사 및 동사 관련 보도는 시간, 장소, 인물만 바꿔도 또 다른 완벽한 기사가 될 정도였다."(54-6)


2장 해방 후에도 이어진 지독한 인연


"'전재민'들은 시기별로 각기 다른 남하 동기와 집단 구성을 보였다. 1945년 말까지는 과거 총독부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북선개척北鮮開拓'을 위해 동원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본디 남한 출신의 귀향민(Returnee)과 생활난으로 남하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46년에는 만주에서 유입된 사람은 줄어든 반면, 북한 통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반체제 집단의 유입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고학력의 지주, 대상인, 의사, 법률가, 교사, 종교인, 친일파, 구 식민 관료 출신자들이 많았고, 남하 후에는 나름의 공동생활체를 꾸리기도 했다." "북한은 1946년도만 해도 자발적인 집단 남하를 '사회 정화' 차원에서 반겼다. 그러나 1947년 7월부터 남북 및 미소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생활난'을 이유로 한 월남민 증가는 곧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반증하는 구실로 악용될 수도 있고,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인적자원이 누수된다는 판단에 따라 38도선을 굳게 잠그기 시작했다."(73-4)


"해방 후 귀향민·월남민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 본토와 만주 방면의 귀환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 가운데 만주 귀환자들은 해방 후 급격히 고조된 중국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현지에서 일군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거나 국공내전으로 불안해진 거류 환경 때문에 돌아온 사람이 많았다. 특히 1946년 가을 무렵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진출하면서 피해가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한정서와 이데올로기적 중상에 노출된 채 방치된 조선인에게 귀환은 곧 생환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한편 부산항 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루트는 주로 일본과 태평양 방면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식민지배 말기에 징용 등의 '강제 동원'으로 인해 해외에 단기간 거류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 직전부터 밀항을 시도할 만큼 모국 귀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불과 두세 달 사이에 대거 유입되었다."(74-7)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1945년 9월 초순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일본인들의 동향은 '뱅크런'과 '집단 패닉'이란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으로 달려가 예금부터 찾고 가재도구까지 급하게 팔아치운 뒤 모두들 먼저 돌아가겠다며 밀선을 섭외할 수 있는 부산항 일대로 몰려갔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경성일보인세화회회보』 창간호가 나왔다. 발간사는 〈우리들의 친구 조선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협력하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 사회가 조선인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긴장감'을 반영한다. 동시에 '공생'을 모토로 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에 세화회에서는 잔류 쪽에 무게를 두면서 영주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도 하였다. 수강 신청자가 몰려 대박을 터뜨린 'YMCA 조선어 강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113-4)


"1945년 10월에는 군정 당국의 일본인 공식 송환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잔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제는 '재산 처리'가 최대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이제는 한가하게 조선어를 공부하거나 아이들 교육 문제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미군의 간섭과 단속이 더 강화되기 전에 밀선이라도 구해서 조선에서 어렵게 일군 돈과 재산을 최대한 안전하게 반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 회보에 〈부모는 사유재산이나 저금통장보다도 아이들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라거나 〈일본 밀항을 중지하라〉 등의 기사가 등장했겠는가. 이것은 그만큼 일본인 집단 안에서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재산이라도 챙겨 가자〉라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세화회 소식지도 10월 중순부터는 일본인 사유재산 처리에 관한 내용들을 늘어갔다. 즉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경성의 일본인들은 비로소 조선을 '이국' 내지 '타자'로서 인식하게 된 것이다."(115-6)


"한편 남한에서는 총독부와 일본 군대 등 식민 기구가 관리하던 국공유 재산은 물론이고 개인과 법인의 민간인 재산을 '귀속재산(적산)'이라고 불렀다. 해방 후 그 처리를 둘러싸고 이것은 '조선'에서 '조선인'의 고혈을 짜낸 결과이니 해방 후 신국가 출범을 앞두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공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재산을 임차하거나 구매하기를 원하는 개인이나 법인에게 불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양분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한일 양 지역의 미군 점령 통치 아래서 발생한 만큼 남한의 주한 미군정과 일본의 연합국총사령부가 일찍이 정리했어야만 할 문제였다. 하지만 점령군은 이 문제를 단독으로 처리할 권한이 없었고, 최종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 한일 양국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발을 뺐다. 그 결과 이것이 불씨가 되어 해방 후 양국이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각기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주장함으로써 한일조약 체결이 지연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117)


3장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 적산가옥과 고급 요정


"송환을 앞둔 일본인들이 생산 시설을 파괴하고 원료나 재고품 등의 물자를 빼돌리거나 폐기한 배경에는 우선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개한 '자주관리운동'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아울러 이러한 행위는 조선에 자본과 기술을 투자한 일본인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패전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해 그나마 영업 손실을 줄여보고자 한 '자본 철수' 및 '물품 회수'라는 측면이 공존했다." "이처럼 현금 확보를 위한 자산 처분과 물품의 방매는 기계 등 생산 시설의 파괴와 원료 및 제품의 망실로 이어졌으므로, 해방 후 적산 기업(귀속 기업)은 만성적인 자금난과 원료난에 직면했다." "당시 남한 사회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건국 방해 행위로 받아들였다. 왜냐면 이러한 생산시설 등은 해방 후 신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산(귀속재산)으로 엄격히 관리해 반드시 공익적 차원에서 재활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자산인데, 이렇게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재산 밀반출을 위해 의도적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다."(129-31)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는 단지 일본인 송환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을까. 결코 아니다.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일본인은 당국의 허가 없이는 자신이 등록된 정회町會로부터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그저 말로만 그칠 뿐 이를 어겨도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131-3)


"이때를 틈타 송환 국면에서 돌아가는 일본인과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명의를 도용해 건물의 소유권이나 점유권(사용권)을 독차지한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개 구 일본인 부동산의 매매를 비롯해 식량 등 생필품의 사재기, 반출입 금지 품목의 밀수 등을 통해서 갑자기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도량하게 된 주된 원인은 미군정의 일본인 사유재산 매매 허가와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었던 허술한 관재 행정에 있었다. 미군정이 비록 법령 제33호를 통해 뒤늦게나마 기존의 매매 거래를 무효화했다고는 하지만, 두세 달 사이에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부정 거래를 적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미군정 관재 당국은 뒤늦게나마 구 일본인 부동산을 조사해 각 물건별로 임대차계약 체결을 통한 공정 관리를 표방했으나 해당 물건의 수효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그 상자는 열어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한 조선학술원 백남운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생각보다 너무 컸다."(139-40)


"1946년 11월 20일, 서울 돈의동 명월관에서 김린이金麟伊라는 자칭 사업가가 최선이라는 기생 등 4~5명을 거느린 가운데 20여 명의 '신사 숙녀'와 함께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다가, 취기가 오르자 모종의 경로로 들여온 포르노를 틀어놓고 향락의 끝을 맛보았다는, 일명 명월관의 도색영화 상영 사건이 터졌다." "4~5명이 모여 고급 요정에서 즐기면 대략 6~7천 원이 들었는데, 명월관에서는 20여 명이나 어울렀으니 김린이에게 부과된 벌금 5천 원은 한차례 술값보다도 훨씬 적은 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급 요정은 군정 관료, 해방의 혼란을 틈타 돈을 번 신흥 자산가, 그리고 정치 브로커 등 건국을 방해하는 '매국노들의 소굴'로서 깊이 각인되었다. 이것은 근대 이래 에로(エロ, erotic), 구로(グロ, grotesque), 넌센스(ナンセンス, nonsense)가 고급 요정과 포르노를 매개로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현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어찌 이보다 더 '선정적이고, 기괴하며, 지각없는 처사'가 있겠는가."(145, 151-2)


"당시 사건을 취재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문제안의 회고는 결국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들이 미군에게 향응을 제공하고자 돈 많은 사장이나 장사치에게 '물주' 노릇을 시켰다는 이야기이다. 미군을 접대한 대가는 어떤 중요한 정보나 이권이었을 터이니, 그 떡고물을 조선인 관료와 물주 노릇을 한 자들이 적당히 나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부동산 등의 자산을 법망의 빈틈을 이용해 손에 넣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광역에 걸친 밀수와 암거래를 통해 번 돈으로, 이들은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와 미군을 상대로 고급 요정에서 '물주' 노릇을 해가며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내밀한 정보를 캐고자 했다. 또 만일에 발각될 경우에 대비해 경찰 및 사법계 요로에 후원금을 상납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방식으로 후사를 도모했다. 요정은 이렇게도 도색영화와 주지육림, 그리고 명기들의 춤사위를 맛보며 이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고마운 공간이었으니, 어찌 추레한 전재민에게 내줄 수 있었겠는가."(162, 167)


4장 해방 조선에서 출세를 하려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방과 건국이란 시공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한의 '양극화'가 사회 전면으로 파급된 시기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조적인 사회현상이 부유층 자제의 '유괴'와 극빈 가정 유아의 '밀장密葬'이다. 즉 부잣집 아이는 부모의 금품을 노리는 유괴범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는 병들거나 굶어 죽어도 부모가 장사 치를 돈조차 없어 매장은 고사하고 허름한 거적 등으로 말아 인적이 뜸한 외진 곳에 버려지는 일이 적잖았다. 이것은 일견 정반대의 상황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결국 '고르지 못한' 공동체 안에서는 그 구성원이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결코 편안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매우 거칠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1949년 11월 종로 2가 동양루 사장 아들의 유괴 및 살해는 어린이 유괴 사건의 서막을 알렸다. 이 교동국민학교 유괴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차에 1950년 1월 24일에 다시 청파동 여야 유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190-2)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건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병원으로 달려온 피해 어린이의 큰아버지, 즉 김형민 전 서울시장이었다. 피해 어린이가 전 서울시장의 조카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뒤이어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대목은 바로 김형민이 조카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데려다준 그 '집의 위치'이다. 왜냐면 당시 피해 어린이가 살고 있던 '청파동1가 58번지' 일대는 김형민의 시장 재임기는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도 끊임없이 재기된 이른바 '대규모 적산 가옥 스캔들'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유괴 사건 직전해에 불거진 1949년 당시 '적산 가옥 부정 처리'사건은 언론이 주목한 초대형 사건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뒤로 관련 소식이 끊겼다. 그것은 이 사건의 사후 처리와 관련해 매우 '강력한 윗선'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내용이 현재 제헌의회 국회 속기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194-6)


"1949년 12월 제헌의회 법사위원회에서는 건국 후 국가기관의 주요 조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법무부에서 제출한 '검찰청법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제5회 57차 회의의 핵심 의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일원화)', 그리고 검찰 산하 중앙수사국의 설치 및 '사법경찰관(현 검찰조사관)'의 감독권 행사 문제였다. 국회 법사위원장 백관수의 주재로 열린 법안 검독회(검토회)에서 법무부장관 권승렬은 〈현재 검찰(검사)은 187명에 불과하지만 경찰은 무려 5만 명이나 된다. 현재는 내무부 산하의 경찰총장이 사실상 수사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검사들이 중앙수사국 사법경찰관을 통해 수사 과정 일체를 지휘하고 기소까지 완결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장관은 그 근거로 1948년 7월의 서울시장 김형민에 대한 경찰의 허술한 '수사 기록'을 제시했다."(196-7)


"당시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미군 통역관' 시절에 적산 가옥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이 막대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장사' 덕분이었다." "당시 석유(가솔린)는 연합국총사령부가 관할하는 모든 지역에서 매우 엄격하게 통제받는 일등 관리 품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형민이 단순히 배급망의 말단 기구나 대리점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이 품목의 배급과 유통을 총괄하는 '지배인(manager)'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자리를 얻기까지는 미군정 관재 담당 관리와 상당한 교감이 오갔을 것이다. 즉 이것은 통역관으로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권이었던 셈이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후암동의 서울시장 공관으로 이사하면서, 해방 후 함께 석유 사업을 하다가 상공부에 공직자로 들어간 동생들('친척들')에게 청파동의 구 일본인 가옥 10채를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선우종원 당시 검사가 집중적으로 캐고자 한 혐의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208-12)


"일본인들은 용산 지역을 사대문 안과 달리 순전히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개발한 지역이라고 인식했다. 철도 부지 및 군용지 수용 과정을 보면 일단 사유지의 경우 논밭과 대지, 가옥, 분묘 등을 합해 '89만 7,534원'을 보상가로 추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평당 채 2전이 되지 않는 돈만 지불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 보상비의 1/60에 불과했다. 조선인들은 당연히 강력히 반발했지만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갈월동, 남영동, 후암동 일대의 조선인 주민을 용산중고등학교 뒤편의 산기슭 너머, 즉 108계단 위 해방촌, 보광동, 이태원 쪽으로 밀어냈다." "결국 김형민이 사들인 청파동의 10채나 되는 가옥은 해방촌과 이태원 쪽으로 밀려난 조선인 원주인 땅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해방 후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재산이 미군정이 잠시 자유 매매 거래를 허가한 그 짧은 사이에 돈 있고 발 빠른 사람들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225, 228)


5장 비정하기만 했던 나의 조국, 조선


"해방 공간의 상층부는 미군정 관재 행정 중앙부처(재무부/상공국)─대행기구(각 시도 귀속재산관리처 혹은 조흥은행 등)─정계·경찰·사법─자본가(기성사업가·신흥투자가·밀수업자·유통업자·알선업자 등)로 이어지는 정·관·재계의 다층적인 카르텔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해방 공간의 다양한 카르텔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때 비로소 공동정범共同正犯의 큰 그림이 밝혀지곤 했다. 그 내막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대략 1947년도부터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때였다. 막대한 '눈먼 돈'을 굴릴 수 있는 자리, 즉 이제 곧 수립될 새 정부의 최고위 관직이나 '알짜배기'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이 과열되거나, 분배 결과에 누군가 불만을 품었거나, 비밀 엄수의 묵계를 깨뜨린 배신자가 나올 때 비로소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귀속재산 처리를 둘러싼 뇌물 수수 사건 보도가 매일 같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으레 '의혹'이 제기되면 곧 '기정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243-6)


"고급 요정이나 유곽 외에도 빌딩과 같은 덩치 큰 귀속재산의 경우는 미군정기에 시작된 잡음이 심지어는 박정희 정권기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3년에 삼성 계열의 신세계가 인수한 남대문의 동화백화점(구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현재 신세계백화점)이다. 해방 후 이 건물의 초대 사장(정식 불하 이전의 관리인, 영업권자)은 김계조였다. 그는 총독부 고위 관료와 친일 정부 수립을 모의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공작의 일환으로 국제문화사 댄스홀을 설치했다는 의혹을 산 '김계조 사건'의 장본인(배구자의 남편)이었다. 그가 이 사건으로 수감이 되자 '관리인'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래서 차기 사장(관리인)으로 이두철이란 자가 나타난 윤상균, 지희철과 함께 이곳을 공동 인수했다가, 1948년 1월 두 사람을 밀어내고 사업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백화점에 입주한 업주들의 가게 보증금을 일방적으로 올려 원성을 샀고, 종업원 월급을 상습적으로 체불해 종업원 노조의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247)


"그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도와준 고마운 인물이 '친일 고문 경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다. 그래서 노덕술이 정부 수립 후 1948년 말부터 반민특위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은신하는 과정에서 이두철은 그를 자택에 숨겨주기도 했다. 노덕술이 효창동, 번지수로는 '청파 2가'에 있는 이두철 집 안방의 병풍 뒤에서 체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 또한 1930년대 중후반 청파동과 갈월동 일대의 문화주택단지 분양이 붐을 이룬 시기에 들어선, 도로변의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이었다. 앞서 4장에서 등장한 김형민 시장이 미군정 통역관 시절에 사들인 10채의 집들과도 지척에 있었다. 이처럼 구 친일 자본가(박흥식)와 구 친일 고문경찰((노덕술), 미군 통역관 출신의 관료(김형민), 그리고 신흥 투기꾼(이두철) 등의 카르텔은 구 일본인 재산을 매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해방 공간의 고난도 퍼즐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인 셈이다."(247-8)


"1945~1946년 동절기를 지나면서 해방 직후 반짝했던 사회적 환영 분위기가 사라지고, 귀환자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방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그 결과 1946년 초봄의 해빙기를 기점으로 귀환자들의 만주 재이주, 일본 재밀항에 관한 보도가 늘어갔고, 기사의 제목도 점차 자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만큼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건만 열악한 정착 환경과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오만정'을 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동북 삼성의 만주 당국은 해방 후 조선인들이 전란이나 박해를 피해 빠져나간 뒤에 텅 빈 한촌이 되어버린 농지를 다시 일궈야만 했기 때문에 이들의 재유입을 환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한의 물가고와 이기지 못해 일본 밀항을 시도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보도한 단발 기사는 흔하다. 그러나 「빙설氷雪 같은 동포애」라는 기사는 남한 사회의 미흡한 구호와 사회적 냉대가 이들을 현해탄으로 내몰고 있다며 경제 외적인 요인을 적시했다. 즉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까지도 다친 것이다."(269-73)


"일본과 남한은 각기 연합국총사령부와 미군정의 점령 체제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정부와 의회가 있었고 간접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귀환 문제와 관련해 일본 측의 입장을 맥아더사령관에게 전달하거나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아직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고 과도입법의원은 구호 정책도 입안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연합국총사령부의 하위 기관이었으므로 남한 현실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독립적으로 취할 수도 없었다. 즉 해외 귀환자나 월남민은 250만 명이나 되었지만 남한은 이들을 구호할 법적인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한 무정부 사회(혹은 이중 권력 국가체)였다." "이후에도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의회에 진출하여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283-5)


에필로그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9만 3,349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에 올랐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해방 후 재일동포는 취직은 물론이고 자녀 교육, 영세자영업자에 대한 특별금융 지원, 공공주택 입주에 이르기까지 민족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울러 조선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불법으로 규정해 해방 후에도 노골적인 '동화와 배제'를 강요했다. 건강, 그리고 '꿈'을 잃게 되면 우리네 삶도 맥이 빠지는 법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던 이들이 북송선에 올랐다. 바로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 한국전쟁으로 인구가 줄어 전후 복구 인력이 필요했던 북한이었다. 특히 남한으로 유출된 '(월남민)인재'가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한반도 밖에 있는 '동포 사회'에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대략 1950년대 중반부터 북한 당국은 일본의 '민족학교'나 '명문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김일성(조총련) 장학금'까지 지원하며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환상을 퍼뜨렸다."(290-2)


"일본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엣가시'같은 재일동포를(1959년 당시 60만 7,533명 규모) 남한이든 북한이든 자발적으로 데려가 준다면 그야말로 감사할 일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점령 통치 아래서 연합국총사령부의 송환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조선 등 식민지에 있던 일본인은 패전 국민이라며 징벌적 차원에서 '일괄 송환'했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거주지 선택권'을 허용한 것이 내내 마뜩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동포는 식민 통치와 관련해 '과거사'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치부를 드러냈고, 정치적으로도 일본공산당이나 사회당과 함께 반정부 운동에 앞장섰다. 게다가 복지 재정도 갉아먹었다. 1955년 현재 재일동포의 생활보호 비율은 일본 평균의 10배였다. 물론 이들의 가난은 과거 식민 통치 이래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복지 재정이나 갉아먹는 '기생충' 취급을 하며 어떻게든 추방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292)


"한편 이승만 정권은 절대다수가 남한 출신인 이들 재일동포가 차별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과 생활권마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60만 동포'를 오로지 '반공'이란 잣대로 모두 '빨갱이'로 몰아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심지어 남한, 북한, 일본의 '동상이몽' 속에서 국제적십자사는 이것을 '거주지 선택권'을 존중한 '귀국'이라며 교묘히 '인도주의'로 포장하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결국 북송은 해방 이전 한일 간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배태된 제국 내 지역 간 이민족의 이주민 문제가, 해방 후 귀환 국면에서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동포를 추방하려던 일본 정부의 배제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전쟁 후 재일동포를 단지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이념 및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전취해야 할 수단〉으로만 인식한 남한과 북한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재외동포관이 맞물려 빚어진 '인재'이자 '참사'가 곧 북송이었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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