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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필립 샌즈 지음, 정철승.황문주 옮김 / 더봄 / 2019년 4월
평점 :
프롤로그 _23
"1914년 9월부터 1944년 7월 사이 리비우를 통치하는 세력이 여덟 번 바뀌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 로드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 및 아우슈비츠와 차토르 공국'이라는 긴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바로 그 '아우슈비츠'이다).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폴란드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독일로 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을 거쳐 마침내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레온 할아버지가 어릴 때 걸어 다녔던 갈리치아 왕국의 도로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마지막 날, 한스 프랑크가 600호 법정에 들어서게 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및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용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유대인 사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폴란드인들도 사라졌다. 리비우의 그 도로들은 20세기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축소판이며 문화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유혈 분쟁의 중심지였다."(30)
Part I 레온(LEON) _37
"1914년, 비엔나에 도착한 레온의 가족은 '동유대인Ostjuden(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이민'으로 알려진, 갈리치아에서 비엔나로 이주한 수만 명의 이민자들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엄청난 수의 유대인 난민이 새로운 집을 찾아 비엔나로 왔던 것이다. 요제프 로트는 북부 기차역을 '그들 모두가 도착하는 곳'이라고 하고, 그 우뚝 솟은 홀은 '고향의 냄새'로 가득 찼다고 썼다. 비엔나의 새로운 거주자들은 레오폴드슈타트와 브리기테나우 등의 유대인 구역으로 이동하였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고 삶이 고단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많은 수의 난민이 동쪽으로부터 이주해 왔다. 게다가 반유대주의의 확산과 함께 국수주의자들이 반이민자 감정을 부추기는 형국으로 발전하자 정치권은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18년 8월에 결성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상대 당에 합병되었다. 그 당의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카리스마 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56-9)
"1933년 1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 독일 국회의사당인 라이히츠탁은 불에 타 사라지고 독일연방 선거에서 나치가 더 많은 표를 획득했다." "4개월이 지난 1933년 5월 13일 토요일, 새로운 독일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3발기인 독일 정부 비행기가 레온의 상점에서 멀지 않은 아스페른 비행장에 내렸다. 여기에는 새롭게 임명된 바이에른 주 법무장관이며 히틀러의 전 법률고문이자 친구인 한스 프랑크 박사가 이끄는 일곱 명의 나치 장관들이 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스트리아 총리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을 비합법화 한다는 조치들을 발표하였다. 그 때문에 돌푸스는 프랑크의 방문 1년 남짓 후인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들의 리더는 변호사인 오토 폰 베히터였다. 그는 10년 후 렘베르크의 나치 총독이 되었으며, 무장친위대 갈리치아 사단을 창설한 인물이다."(64-6)
"1938년 3월 12일 아침,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비엔나로 행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에 따른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은 독일로부터의 오스트리아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비엔나에 도착한 히틀러의 옆에는 새롭게 임명된 비엔나 총독, 아르투어 자잉스잉크바르트가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망명지 독일로부터 막 돌아온 오토 폰 베히터가 있었다. 며칠 만에 국민투표로 합병이 비준되었고, 오스트리아 전역에 독일법이 적용되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151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비엔나에서 독일 뮌헨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유대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도로바닥을 닦도록 학대하였으며,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유대인의 자산과 부동산, 사업 등록을 의무화하였다. 그리고 이는 레온과 매형인 막스가 운영하는 주류상점의 종말을 뜻했다."(71-2)
"나는 1944년 8월, 파리가 미군에 의해 자유를 되찾기 전 어렵던 시기에 (비엔나를 탈출한) 레온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아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거주 유대인 연합UGIF 소식지인 〈뷜땅〉Bulletin은 명령위반에 따른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과 강제 점령한 파리에서의 삶을 찍은 사진들을 게재함으로써 나치 규제의 플랫폼 역할을 하였다. 초기의 한 명령은 오후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유대인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1942년 2월). 한 달 뒤 유대인의 채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이 발표되었다. 1942년 5월부터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 왼쪽에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달아야 했다(레온이 일했던 품격 있는 19세기 빌딩의 UGIF 본부 사무실에서 제공). 7월에는 유대인들이 극장이나 다른 공연장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0월부터 유대인들은 매일 한 시간씩만 쇼핑이 가능하고 전화 소유가 금지되었으며, 지하철의 마지막 칸에만 탑승할 수 있었다. 1943년 8월에는 특별 신분증이 발급되었다."(98-9)
Part II 라우터파하트(LAUTERPACHT) _111
"라우터파하트의 삶은 렘베르크에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간의 유혈충돌을 촉발시킨 스물세 살의 '붉은 왕자' 빌헬름 대공이 비밀리에 내린 결정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다. 레온이 비엔나로 떠난 지 5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빌헬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중 폴란드 부대를 렘베르크에서 축출시키고, 그들을 대신하여 우크라이나 사단 중 두 연대를 배치하였다. 11월 1일, 우크라이나군은 리비우의 지배권을 획득하고 이곳을 새로운 나라인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선포한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 간의 심각한 전투가 이어졌고, 유대인은 그 사이에 끼어 패자를 선택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11월 11일,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한 날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종전협정이 이루어졌다. 리비우는 로보프로 바뀌면서 약탈과 살인이 만연했다."(125-6)
"그동안 굳건했던 권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폴란드 또는 우크라이나 국가가 가시화되자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촉발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어 여러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집단 정체성과 자치권에 대한 여러 이슈들은 민족주의의 발생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가의 부상과 함께 법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법으로 소수민족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가? 특별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만한 국제 규범이 없었다. 오래되었든 신생이든 간에 각각의 국가는 영토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취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다수가 소수를 대하는 법에 대해서 국제법은 몇 가지 제한을 둘 뿐 개인은 권리가 없었다. 라우터파하트의 지적인 성장은 이 같은 중요한 시기와 맞물려 이루어졌다."(127-8)
"전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폴란드의 국제연맹 회원 자격을 '소수민족과 약소국민을 평등하게 취급한다'는 약속과 연계시키는 특별 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 흑인, 남부 아일랜드인,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 카탈로니아인 등 다른 집단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주어질 것을 우려하여 영국은 그 제안에 반대했다. 영국은 국가가 원하는 대로 국민을 취급할 권리인 주권의 침해 또는 국제기구에 의한 감시를 반대하였다. 영국은 더욱 많은 '불의와 압제'가 벌어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을 고수했다. 새로운 폴란드 정부 역시 이것을 내정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제93조는 폴란드로 하여금 민족, 언어 또는 종교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여겨지는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두 번째 조약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권리는 모두가 아닌 일부 집단에게 주어졌고,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은 자국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131-2)
"1919년 라우터파하트는 프로이트, 클림트, 말러의 도시인 비엔나의 서부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제국의 종말로 인한 트라우마와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는 사회민주주의자 시장이 이끄는 도시, 갈리치아에서 넘어온 난민이 넘쳐나고 인플레이션과 가난이 만연한 '붉은 빈'에 도착했다. 러시아 혁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안을,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선사했다. 오스트리아는 무릎을 꿇었고 제국은 해체되었다. 예속과 굴욕의 격앙된 민족주의 감정이 느껴졌다. 라우터파하트와 레온 같은 젊은 동유럽 유대인이 갈리치아로부터 유입되면서 만만한 표적이 되었다." "라우터파하트는 법과대학에 등록했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저명한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모델로 삼았던 오스트리아의 혁신적인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시민의 요청에 따라 헌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헌법재판소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135-6)
"1921년 켈젠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라우터파하트는 개별 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유럽의 새로운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에서처럼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는 다른 모델이다. 라우터파하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 그리고 국가적 강제력과 국제적 강제력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법률질서의 중심에 개인이 놓여 있었다. 반대로 법은 군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룬, 국제법의 동떨어진 보수적인 세계에서는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제93조와 나의 외할아버지 레온이 1938년 폴란드 국적을 잃게 만든 폴란드 소수민족보호조약은 일부 국가의 일부 소수민족을 보호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은 보호하지 못했다."(136-7)
"헤이그에 위치한 최초의 상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열망하며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2년에 설립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법의 여러 법원法源 중에서 조약과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반원칙인 관습법을 주로 적용했다. 그런데, 그런 관습법은 보다 잘 완비된 국내법 체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라우터파하트는 국내법과 국제법 사이의 이러한 연계성은 소위 '주권의 항구성과 불가양도성'을 한층 더 제한할 수 있는 원칙을 발전시킬 '혁명적인' 가능성을 제공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삶을 통해 형성된 실용적이고 본능적인 성향과 렘베르크에서 받은 법학교육으로 인해 라우터파하트는 주권을 제한할 가능성을 믿었다. 이것은 작가나 평화주의자의 열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국제 진보에 기여하겠다는 철저하고 굳게 뿌리박힌 사상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덜 소외되고 덜 엘리트적이며 외부적인 영향에 보다 더 개방적인 국제법을 원했다."(144)
"1945년 7월, 국제 형사법원 창설 과정에서 라우터파하트는 '침략행위'라는 단어 대신 '전쟁범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제안하며 전쟁법 위반은 전쟁범죄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러시아와 미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는, 아직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법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개별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인도人道에 반反하는 죄罪'라고 칭하는 것이 어떨까?" "이 같은 용어는 국제법의 보호 범위를 확장할 것이었다. 이 용어의 사용으로 전쟁 시작 전에 독일 국민 중 유대인과 다른 소수민족에 대해 독일이 자행한 행위 또한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1938년 11월 레온이 독일제국에서 추방당한 일과 1939년 9월 이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자행된 조치 등이 포함된다. 더 이상 국가는 자국민들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게 된 것이다."(185-6)
Part III 노리치의 미스 틸니(MISS TILNEY OF NORWICH) _191
"〈유대인을 먼저.〉 미스 틸니는 서리 채플의 목사 데이비드 팬톤이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새벽〉에 쓴 글에 큰 영향을 받아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유대인과의 전투를 통해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제목의 히틀러 연설에 대한 〈타임스〉의 1933년 7월 25일자 기사(크리클우드의 라우터파하트가 읽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사) 이후 팬톤이 쓴 글을 본 것이 틀림없다. 팬톤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적 분노를 비이성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전혀 종교에 기반하지 않은 순전히 민족적, 광신적 증오라고 비판하였다. 팬톤은 히틀러의 시각은 개별 유대인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썼다. 이 글은 튀니지 제르바 섬에 살고 있는 미스 틸니에게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년 후인 1934년 봄, 그녀는 프랑스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 프랑스로 옮겨왔다." "1939년 1월, 레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침례교 교회에서 (유대인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203-4)
"7월 15일, 〈신뢰와 노역〉은 미스 틸니가 파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주일 후,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비엔나의 서부역으로 갔다. 그녀는 첫 돌이 막 지난 갓난아기(나의 어머니)를 자신의 손에 믿고 맡기는 리타를 만났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리타와 함께 레온의 누나인 로라도 11살 된 헤르타를 데리고 역으로 나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르타도 미스 틸니와 함께 파리로 갈 예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로라는 헤르타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헤어지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정은 이해가 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년 후인 1941년 10월, 어린 헤르타는 어머니와 함께 리츠만슈타트에 있는 게토로 강제이주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헤르타와 로라는 학살당했다. 미스 틸니는 아이 하나만 데리고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했다. 파리 동부역에서 그녀는 레온을 만났다. 그녀는 이름과 주소를 종이쪽지에 적어 레온에게 주었고, 그들은 각자 파리의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205-6)
Part IV 렘킨(LEMKIN) _221
"1918년 7월, 전 세계적으로 인플루엔자가 유행했고, 많은 사망자 가운데 렘킨의 남동생 사무엘도 포함되었다. 그가 열여덟이 되던 해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렘킨은 집단의 파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핵심 포인트는 뉴스에 나왔던 1915년 여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었다. 〈12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했으며,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모겐소는 1918년의 로보프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역사상 최대의 범죄'라고 표현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이 사건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며, 프랑스에서 사용했다가 이슬람교의 민감성을 감안하여 수정한 용어인 '인류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다. 〈국가가 살해당했으며 범죄를 자행한 사람들은 풀려났다.〉 렘킨은 이렇게 적으며 오스만 제국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가장 잔인한 범죄자라고 규정했다."(229)
"1921년 6월 베를린에서 '아주 생생하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피고인은 독일 수도에서 전 오스만 제국 정부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암살한 젊은 아르메니아인 소호몬 텔리리안이었다." "텔리리안의 변호사는 집단 정체성 카드를 꺼내 피고인이 '인내심이 많은 아르메니아 대가족'을 위해 복수한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렘베르크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만약 텔리리안이 '내면의 혼돈' 때문에 자유의지 없이 행동했다면 석방하라고 요청한다. 배심원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무죄'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엄청난 소동을 낳았다." "당시 주권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치권을 의미했다. 렘킨은 주권이란 외교정책 또는 학교나 도로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등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국가가 '수백 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렘킨은 만약 주권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행위를 방지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234-6)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던 렘킨은 적절한 형법이 실제로 잔학행위를 금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에는 소수민족보호조약이 적절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잔학행위─집단학살─를 예방하고, 반달리즘─문화유산에 대한 공격─을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닌데,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전 세계적으로 어느 국가의 법원에서도 재판해야 한다는 '보편적 사법권' 관념을 주창한 루마니아의 학자 베스파시안 V. 펠라의 견해를 기반으로 하였다." "1934년 폴란드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1919년 소수민족보호조약을 파기했다. 외무부 장관 벡은 국제연맹에 폴란드가 소수민족을 박해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취급을 원한다고 밝혔다. 다른 국가들이 자국의 소수민족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면 폴란드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독일 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도하였고, 렘킨은 검사직을 그만두었다."(248-9)
"렘킨의 타고난 호기심은 독일 점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독일 나치의 법률이 정확하게 어떻게 실행되었는가? 독일인들은 여러 가지 결정을 서면으로 하는 등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문서로 더 큰 계획에 대한 단서를 남긴다. 때문에 그것은 독일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이어질 수 있다." "렘킨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결정적인 조치'를 계속 추적했다. 첫 번째 조치는 '국적박탈'로, 유대인과 국가 간의 연결고리를 단절시켜 개인을 무국적자로 만듦으로써 법의 보호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비인간화'로, 목표한 민족의 기본적인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두 단계의 패턴은 유럽 전역에 적용되었다. 세 번째 조치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렘킨은 1941년 초부터 점진적인 단계로 진행된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을 위한 법령을 가려냈다. 개별적으로 각각의 법령은 악의가 없어 보이지만 함께 적용되고 국경을 초월하여 실행되면 큰 목적이 드러났다."(259-61)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렘킨은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변론과 증거를 통해 미국인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에 제안서를 보냈고, 조지 핀치는 제안서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그렇게 출판된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 제9장에서 렘킨은 '잔학행위'와 '반달리즘'을 버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데, 그리스 단어 'genos'(종족 또는 민족)와 라틴어인 'cide'(살인)를 결합한 단어이다. 그는 이 장의 표제를 '제노사이드Genocide'로 정했다." "제노사이드는 직접적으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국가적 집단의 일원으로서 당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렘킨은 9장에 적었다. 〈새로운 관념은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설명도 없이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선택한 단어는 점령한 영토를 생물학적으로 영구히 바꾸려는 독일의 원대한 계획에 반대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276-9)
Part V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THE MAN IN A BOW TIE) _293
Part VI 한스 프랑크(FRANK) _315
"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24년에 졸업한 프랑크는 개업 변호사로 일하며 뮌헨공과대학교 법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인하고 기회주의적이지만 지적이거나 야심가는 아니었던 그는 1927년 10월 베를린 재판에서 나치 피고인들을 변호할 변호사를 찾는다는 〈퓔키셔 베오바흐터〉 신문의 광고를 본 순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프랑크는 지원했고 합격하여 마침내 고위급 정치 재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나치의 법률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수십 건의 재판에서 나치 정당을 변호한다." "프랑크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법정을 미디어 전략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합법적 수단으로 정치 권력을 얻으려 할 뿐이라는 주장, 즉 사실상 〈합법성의 선서〉를 공개적으로 공약했다. 프랑크의 스타일은 유연했지만 히틀러는 변호사나 법적인 사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관심은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319-20)
"1939년 10월 25일,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직을 수락하였다. 초기의 인터뷰에서 프랑크는 폴란드가 이제 '식민지'이고 폴란드 국민들은 '위대한 독일제국의 노예'라고 말했다. 프랑크는 국왕처럼 굴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그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고 했다. 폴란드는 국민이 권리를 가지는 입헌국이 아니며,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는 없었다. 바르샤바는 짧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프랑크는 재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 다수는 렘킨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들고 다녔던 가방에 들어간 것이었다. 프랑크의 명령은 넓은 영토와 야생동물(보호대상)에서 유대인(비보호대상)까지 많은 것을 대상으로 했다." "프랑크는 생사에 대한 완벽한 결정권을 가졌으며, 1935년 베를린 회의에서 밝힌 생각, 즉 그의 총독령에서 '국민의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기준이고 그러므로 개인은 주권자인 총통의 생각에 예속된다는 것을 실행하려고 하였다."(327-30)
"프랑크는 〈뉴욕타임스〉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943년 초, 그는 공식 회의에서 〈1등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고 발표했다. 이 표현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유대인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프랑크는 내각에 이렇게 말했다. 이 표현은 박수갈채를 이끌어냈고, 그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발견되든 사라질 것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독일제국의 단합과 무결성이 지속될 것이다." "3월에 크라쿠프 게토는 SS 소위 아몬 괴트의 효율적인 지휘 덕분에 1주일 안에 비워질 것이다. 5월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반란이 진압되었고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는 최종 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는 친위대 중장 위르겐 스투루프에 의해 진행되었고, 그는 세부사항에 대한 보고서를 자랑스럽게 히믈러에게 제출했다. 이로 인해 바르샤바 인구가 백만 명 줄었다."(374-5)
Part VII 혼자 서 있는 아이 (THE CHILD WHO STANDS ALONE) _393
Part VIII 뉘른베르크(NUREMBERG) _407
"1945년 11월 20일, 제프리 로랜스 재판장이 재판을 개시했다. 그는 〈본 재판은 세계 법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재판입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공소장을 읽기 전에 간단한 소개를 했다. 4개 연합국의 검사들은 각각의 공소사실을 하나씩 낭독하였다. 미국 검사들이 첫 번째 공소사실인 국제범죄를 공모했다는 점을 낭독하였다. 바통은 영국 검사들에게 넘겨져 둥근 얼굴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 경이 두 번째 공소사실인 평화에 반하는 범죄에 관해 낭독하였다. 세 번째 공소사실은 프랑스 검사들에게 할당된 '제노사이드' 혐의를 포함한 전쟁범죄였다. 프랑크는 이 용어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며, 어떻게 이 용어가 여기까지 와서 피에르 무니 검사가 이 법정에서 사용하게 되었을까 궁금했을 것이다. 네 번째인 마지막 공소사실은 소비에트 검사가 낭독한 '인도에 반하는 죄'였다. 프랑크에게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새로운 죄목으로, 이 공개 법정에서 처음으로 사용되는 용어였다."(413)
"재판 이틀째 날, 재판장은 미국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에게 검사측이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라고 말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재판을 시작하는 영광은 엄청난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잭슨은 단어 하나, 하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했다. 그는 승리자의 자비와 패배자의 책임, 비난받고 처벌되어야 할 계획적이고 사악하고 파괴적인 잘못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며, 이런 일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승리에 도취되고 부상에 고통 받는 위대한 4개국이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포한 적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것은 권력은 이성에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재판은 명확하지 않은 법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야 하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하찮은 범죄의 처벌'을 위한 것도 분명 아니라고 강조했다."(422-4)
"라우터파하트는 피고인들이 국제법 하에서 국가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국가에 충성하여 범죄를 자행한 개인 역시 유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쇼크로스는 법정에서 국가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며, 개인의 경우에 비해 더욱 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범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괴링, 스피어와 프랑크가 그의 눈에 보였다. 쇼크로스의 법리적 주장의 핵심은 라우터파하트의 것이었다.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영국 법무장관인 쇼크로스는 재판 이전과 재판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자주 반복될 명확한 어구를 사용하여 선언하였다. 〈국가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이다.〉 국가의 행동은 국가라는 무형 인격 뒤에 숨어 면책을 구할 수 없는 정치인들의 행동이다. 이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관념을 아우르고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와 근본적인 인간의 의무를 새로운 국제적 질서의 핵심에 두는 급진적인 표현이었다."(430)
Part IX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소녀(THE GIRL WHO CHOSE NOTTO REMEMBER) _463
Part X 판결(JUDGEMENT) _479
"렘킨은 전쟁 이전인 1933년부터 줄곧 자행된 모든 집단학살에 '제노사이드' 죄목을 적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논고문 초안에는 아예 빠져 있었던) 이 단어를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제노사이드'는 가중처벌이 가능한 '인도에 반하는 죄'이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자행되었을 때에만 해당된다. 이러한 제한은 1945년 8월 뉘른베르크 헌장 정의 조항에 있는, 악명 높은 세미콜론으로 인한 제6조 ⓒ항의 해석론이었다. 쇼크로스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요건'이라고 강조하며, 한 손으로 가져왔던 제노사이드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전체 의미에서 제한을 둠으로써 한발 물러섰다. 이 표현을 읽으며 나는 1939년 9월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를 재판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였다. 이로써 1938년 11월 이전의, 레온과 같은 개인과 다른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궁핍화와 추방, 재산몰수, 축출, 구금, 살인 등은 이 재판의 사법권을 벗어나는 일이 되었다."(50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로부터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소급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말살, 노예화, 핍박과 같은 모든 전쟁범죄 행위들이 대부분의 국가법에 의해서도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독일법으로는 합법이라는 사실은 전혀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쟁은 폭군들이 피통치자들에게 잔학행위를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쟁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이 허용되었다면 그랬을 때만 정당하고 합법적이다. 국제법상 어떻게 '사법절차에 의한 개입'이 불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쇼크로스는 좀 더 나아갔다. 그는 개인이 아닌 국가만이 국제법 아래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피고인들의 논리를 반박했다. 국제법에는 그런 원칙이 없으므로 국가를 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국가 뒤에 숨을 수 없다. 〈개인은 반드시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509-10)
"판결 첫째 날인 9월 30일은 전체적인 사실관계와 법리 판시에 집중했다. 각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두 번째 날 발표될 것이었다.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재판부는 작은 섹션으로 나누었다. 인위적이긴 했지만 재판부의 권한으로 법률가들이 편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재판부는 신속하게 기관들의 문제를 처리하였다. 나치 수뇌부, 게슈타포, SD(비밀경찰), 그리고 SS(친위대)는 그에 속한 50만 명의 장병들과 함께 책임이 인정되었다. 이로 인해 범죄자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SA(돌격대), 독일제국 각료와 독일군의 일반직원과 고위급 장서들은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법적 타협 행위였다. 재판부는 다음으로 예비음모, 폭력 행위 및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판결하였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판결의 중심에 섰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제법의 일부로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추상적 실체가 아닌 인간이 저지른 국제범죄에 대해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주요 표현을 채택했다."(532-3)
"이튿날 로렌스 재판장이 정확히 오전 9시 30분에 스물한 명의 피고인들 각각에 대한 판결 선고를 위해 법정에 입장하였다." "열 두 명의 피고인들은 항소권 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 중에는 교수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프랑크, 로젠베르크, 자이스잉크바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물 한 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세 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독일제국은행의 전 회장 얄마르 샤흐트는 침략전쟁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부총통 역할을 했던 프란츠 폰 파펜도 같은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괴벨의 선전부의 중요하지 않은 직원이며 공석인 상사의 직무를 애매하게 대행하던 한스 프리체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잔학행위를 하도록 선동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몇 명은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제노사이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진 피고인은 없었다. 그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535-8, 542)
에필로그 _547
"재판이 끝나고 몇 주 후, 뉴욕 북부에서 유엔 총회가 열렸다. 1946년 12월 11일 총회의 의제에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두 개가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된 것이었다. 국제인권장전 제정을 위한 길을 다지기 위하여 총회는 인도에 반하는 죄를 포함하여 뉘른베르크 헌장에서 인정한 국제법의 원칙이 국제법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유엔 총회는 결의안 95호를 통해 라우터파하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에 개인의 위치매김을 명확히 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는 그 다음으로 결의안 96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뉘르베르크에서 재판부가 판결한 내용을 넘어셨다 제노사이드가 전체 인간집단의 존재의 권리를 부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총회는 재판부의 판결을 넘어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 범죄임을 선언하였다. 판사들이 발을 들여놓기 꺼리던 영역까지 각국 정부는 렘킨의 연구를 반영한 규정을 법제화하였다."(547)
"허쉬 라우터파하트는 뉘른베르크 판결 선고 다음날에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그의 저서, 《국제인권장전》은 제노사이드 조약이 채택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 영감을 주었다. 선언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라우터파하트는 이것이 좀 더 강제력이 있는 것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길 희망했다. 이것은 1950년에 체결된 〈유럽인권조약〉으로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검사였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가 개인이 제소할 수 있는 최초의 국제인권재판소의 창설을 조약에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지역적, 세계적 인권조약이 뒤따랐지만 아직까지 렘킨의 제노사이드 조약에 준하는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조약은 없다. 1955년, 라우터파하트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영국 판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60년에 사망하였으며, 케임브리지에 묻혔다."(548-9)
"국가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며 국제범죄의 처벌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국제형사재판소라는 발상이 실현되기까지 50번의 여름이 지났다. 1998년 7월, 과거 유고슬로비아와 르완다에서의 잔학행위가 촉매가 되어 마침내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해 여름 150개국 이상이 로마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규정을 제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나는 동료와 함께 협상의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조약의 전문, 즉 서론에 해당하는 소개글을 작성하는 초창기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였다. 드러나지 않게 일하면서 우리는 '국제범죄의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하여 형사재판 관할을 가질 각국의 의무'라는 간단한 한 문장을 조약 전문에 삽입시켰다. 해로울 게 없어 보였는지 그 문장은 협상 과정에서 살아 남아 국제법에서 국가들이 그러한 의무를 승인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처벌하는 권한을 갖는 새로운 국제재판소가 마침내 창설되었다."(549-50)
"제노사이드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가해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피해집단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 또한 강화시킨다. 집단에 초점을 맞춘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그들' 또는 '우리'라는 의식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 정체성이라는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바로잡으려는 바로 그 상황을 부지불식간에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맞서게 대치시킴으로써 화해의 가능성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제노사이드 범죄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형사소추를 왜곡할 것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제노사이드의 피해자라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검사에게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게는 제노사이드 피해자라고 인정받는 것이 역사적으로 빈발해온 분쟁의 해결에 기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소시키는 결과와 무관하게 단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될 뿐이다."(5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