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모든 것이 양자 이론
곽재식 지음 / 지식의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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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 electron│물체의 성질 대부분을 정해 주는 물질


우리가 흔히 전자 제품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기계는 전자를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조절하여 복잡한 동작을 하는 기구를 말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역시 전자를 조작해서 특수한 기능을 하게 만든 부품이다. 나아가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기계도 따지고 보면 전자 덕택에 움직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전기를 사용한다고 할 때 그 전기는 다들 전선을 따라서 수많은 전자가 움직이도록 하면서 그 전자의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전기의 힘을 이용하는 장치다. 나는 어릴 때 전기가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선 속을 흘러 다니는 전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기가 빛의 속도로 전달된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전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전기 기구 속의 전자는 의외로 느리게 움직인다. 단지 그 전자가 내뿜는 (-)전기의 힘, 음의 전기의 힘 곧 음전기의 힘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속도가 빛의 속도일 뿐이다. 11)


왜 어떤 물질에는 공기 중의 산소 기체가 그렇게 빠르게 달라붙으며 빠른 변질(산화(oxidation) 반응)을 일으킬까? 답은 전자 때문이다. 공기 속의 산소 기체는 전자를 약간 빨아들이고 싶어 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산소 기체는 물체에 닿으면 전자를 끌어당긴다. 산소 기체가 물체에 달라붙어 그 속의 전자를 아예 뜯어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물체는 원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 물질의 모습도 바뀌고 성질도 바뀐다. 이런 현상이 물체가 불타면서 재로 변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불탄다는 것은 산소 기체가 땔감 속에 들어 있는 전자를 빠르게 뜯어 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전자가 잘 떨어져 나가는 물질은 쉽게 불타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반대로 전자가 쉽게 뜯겨 나가지 않는 물질은 불에 잘 타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구조를 가진 물질이 바로 물이다. 산소와 관련된 것 말고도 세상의 온갖 화학 반응이 일어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대부분은 전자에 달려 있다. 14)


이렇게 전자만큼 작은 크기의 알갱이들을 흔히 과학에서는 입자(particle)라고 부른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 온갖 일을 다 일으키는 전자같이 아주 작은 입자의 움직임을 입자 하나하나에 대해 각기 정밀하게 따져 보기 위해서는 양자 이론(quantum theory)이라고 하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계산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 두뇌 속의 전자 움직임을 누군가 조종하여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두뇌 속의 전자를 어떻게 하면 얼마나 바뀌게 되는지를 계산하기 위해 양자 이론이라는 계산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전자라는 입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음전기를 활용할 때는 대부분 전자 때문에 그 음전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의 뇌세포 속에 있는 미세한 전기든, 발전기에서 고압선으로 보내는 막강한 전기든 음전기라면 어느 것이든 그 속의 전자가 내뿜고 있는 전기다. 18-9)


• 위 쿼크 upquark│우리 주변 물체 속에 양전기를 만들어 주는 물질


우리가 흔히 산성 물질이라고 부르는 물질은 물에 섞어 놓았을 때 양전기를 띤 수소가 많이 생긴다. 이렇게 양전기를 띠고 있는 수소를 수소 이온 또는 수소 양이온(anion)이라고 부른다. 흔히 산성 물질이란 곧 수소 이온이 많이 들어 있는 물질, 수소 이온 농도가 높은 물질을 말한다. 그 양전기는 음전기를 끌어당길 수 있고 음전기를 띤 전자를 끌어당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양전기를 띤 수소는 다른 물질 속으로 파고들어서 전자를 끌어당겨서 원래 있던 위치에서 어긋나게 할 수 있다. 혹은 아예 전자를 자기 쪽으로 당기다가 원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아주 많이 빨리 일어나면 전자를 빼앗긴 물질도 급박하게 성질이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 물질을 만난 여러 가지 물질은 견디지 못하고 망가지고 결국 녹아내린다. 이렇게 보면 산성 물질이 갖고 있는 녹이는 힘은 결국 양전기를 띤 수소가 갖고 있는 전기의 힘이다. 양전기를 띤 수소를 다른 말로 양성자(proton)라고 부른다. 21-2)


# pH : 수소 이온이 물속에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표시하는 기호. 수치가 낮을수록 수소 이온이 더 많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얼핏 생각하면 전자가 많이 붙어 있는 원자는 전자가 넘쳐나니까 전자가 잘 떨어지는 물질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원자일수록 그 전자를 끌어당기는 양성자도 많다.  많은 양성자와 많은 전자 사이에 생기는 양전기와 음전기의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오히려 전자가 훨씬 안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힘도 있다. 전자 개수가 많은 원자는 그 원자 속의 같은 전자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힘이 크다. 전자들은 모두 음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음전기와 음전기 사이의 밀어내는 힘 때문에 서로를 튕겨 내려고 한다. 이런 서로 다른 밀고 당기는 힘의 묘한 균형 때문에 원자들의 종류마다 어떨 때 전자가 잘 떨어져 나오고 어떨 때 전자가 잘 붙는가 하는 성질이 특별하게 달라진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받으면 전자가 얼마나 움직이게 되는 지는 역시 양자 이론을 이용해 계산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힘과 움직임의 정도 차이 덕분에 물질의 성질 차이가 나타난다. 26)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서, 과학자들은 양성자 역시 하나의 작은 알갱이가 아니라 다른 더 작은 물질이 모여서 만들어진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자들은 하나의 양성자가 위 쿼크라는 알갱이 두 개와 아래 쿼크라는 알갱이 하나가 합쳐진 물질이라고 보고 있다. 위 쿼크와 아래 쿼크 중에 양전기를 띠고 있는 것은 위 쿼크다. 사실 양성자가 지닌 가장 선명한 특징인 그 양전기의 힘은 본래 위 쿼크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전자나 쿼크처럼 더 작은 물질로 분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작고 가장 기본이 되는 아주 작은 크기의 알갱이를 기본 입자(elementary particle)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기본 입자라는 말 대신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소립자(素粒子)라는 말도 많이 썼다. 그런데 소립자라고 하니 사람들이 작을 소(小)자를 써서 크기가 작은 입자라는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혼란이 없도록 소립자 대신 기본 입자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추세다. 27-8)


• 아래 쿼크 downquark│우리 주변 물체 속에 중성을 만들어 주는 물질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탄소 중 아주 일부가 좀 이상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상한 새로 발견한 탄소 역시 탄소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이기는 하다. 그 말은 둘 다 똑같이 각기 6개의 전자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새로 발견한 이 이상한 탄소는 보통 탄소보다 살짝 무거웠다. 보통 탄소 원자 하나의 무게가 12 정도라면, 새로 발견한 특이한 탄소 원자 하나의 무게는 14 정도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무게만 무거운 탄소가 있다면 탄소의 원자핵 속에 양성자 말고 또 다른 물질이 뭔가 더 붙어 있어서 무게를 더해 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추가로 더 붙어 있는 물질은 전기를 띠고 있으면 절대 안 된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추가로 더 붙어 있으면서 무게만 더 늘려 줄 뿐, 전기는 띠지 않는 물질을 중성의 작은 알갱이라고 해서 중성자(neutron)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성자는 가끔 그중 일부가 방사선을 내뿜고 양성자로 변화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31-2)


탄소 원자는 여섯 개의 전자를 갖고 있다. 전자들이 원자 속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과 다르게 양성자 여섯 개는 대단히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모여 있다. 그런데 양성자들은 다들 양전기를 갖고 있으니 양전기끼리 밀어내려는 힘으로 강하게 서로를 밀쳐 낸다. 그러므로 이렇게 여섯 개나 되는 양성자가 한 군데 모여 있기가 쉽지 않다. 금방 밀려나 흩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양성자들이 서로 붙어 있을까? 과학자들은 거기에 같이 붙어 있는 중성자라는 물질이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중성자와 양성자, 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과학자들은 핵력(nuclear force)이라고 이름 붙였다. 핵력은 양성자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여 주는 접착력이다. 만약 양전기로 밀어내며 튕겨 나가려고 하는 전기의 힘보다도 접착력인 핵력이 충분히 더 강력하다면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은 좁은 공간에 붙어 있을 수 있다. 36)


한참 나중의 일이지만,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그 중성자조차도 더 확대해서 보면 그 내부는 위 쿼크와 아래 쿼크라는 더 작은 물질이 모여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위 쿼크는 양전기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 중성자가 전기를 띠지 않기 위해서는 음전기를 띤 쿼크도 같이 모여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음전기를 띤 아래 쿼크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기 세 개의 쿼크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양성자는 위 쿼크 두 개, 아래 쿼크 하나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중성자는 아래 쿼크 두 개, 위 쿼크 하나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양성자는 위 쿼크가 많이 있는 물질이고 중성자는 아래 쿼크가 많이 있는 물질이다. 마침 위 쿼크의 양전기 세기는 아래 쿼크의 음전기 세기의 딱 두 배다. 그렇기 때문에, 중성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정확히 같아져서 전기를 띠지 않는다. 그리고 양성자는 양전기가 남아돌아 전체적으로도 양전기를 띤다. 38)


• 기묘 쿼크 strangequark│특이한 우주 방사선의 재료


우리가 방사선이라고 부르는 현상 중 다수는 물질과 반응하면 그 물질이 전기를 띄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물질 속의 전자는 작고 가볍기에 방사선을 맞으면 종종 그 힘에 뜯겨 날아가 버린다. 그러면 그 전자가 물질 속에서 하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전자가 부족해진 물질이 엉뚱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방사선을 너무 많이 맞으면 몸에 해롭다는 것도 이런 일일 때가 많다. 그런 만큼 우주 방사선이 잘못해서 컴퓨터에 사용하는 반도체에 우연히도 교묘하게 명중하게 되면, 반도체를 흘러 다니던 전자를 날려 보낼 수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전자가 반도체를 이용해 어떤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그 반도체를 사용하는 컴퓨터의 결과에도 오류가 생길 것이다. 보통 이렇게 생긴 오류는 기계를 한번 껐다가 켜면 다시 새로운 전자가 새로 흘러가면서 저절로 문제가 회복되곤 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부드러운 오류라는 뜻으로 소프트 에러(soft error)라고 부른다. 43)


우주 방사선의 성분인 작은 알갱이들을 살펴보면, 그중에는 무게가 전자와 양성자 사이의 어중간한 중간쯤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 입자는 양성자 무게보다 작으므로 양성자나 중성자가 여러 개 모여서 생길 수는 없는 물질이었다. 그러나 전자보다는 무거우므로 분명 전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전자 여러 개가 뭉쳐 있다고 보기에는 음전기를 띤 전자 여러 개를 뭉쳐줄 만한 방법이 따로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런 관찰 결과는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전자도 양성자도 중성자도 아닌 무엇인가 다른 물질이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양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영도 아닌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그나마 그런 입자가 한두 가지였으면 전자, 양성자, 중성자 말고, 무엇인가가 하나쯤 더 있다고 치고 적당히 넘어갔을 텐데, 그렇게 이상해 보이는 입자들이 너무 많았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 세 가지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우아한 꿈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46)


그러던 중에 1960년대 중반 무렵이 되자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 나가면서 명성을 얻은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미국의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이었다. 겔만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양성자, 중성자, 파이온, 델타 입자, 시그마 입자, 오메가 입자 등등의 다양한 입자들은 사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쿼크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성자는 위 쿼크 두 개와 아래 쿼크 하나를 합쳐서 만든 것이고, 중성자는 위 쿼크 하나와 아래 쿼크 하나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파이온은 위 쿼크 또는 아래 쿼크와 함께 거기에 더해 그 둘이 아닌 또 다른 세 번째 쿼크를 합치면 만들 수 있다. 그 세 번째 쿼크의 이름은 기묘 쿼크(strange quark)로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겔만의 입자 분류 기준 속에서 진정한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재료가 되는 물질로 쿼크가 있다는 생각이 탄생했다. 지금까지도 전자나 쿼크보다 더 단순하고 작은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47)


• 광자 photon│빛의 재료이자 전자기력의 운반자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에 따르면, 빛이란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엮여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물결치듯 퍼져 나가는 현상이다. 맥스웰의 이론을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해 보자면 빛은 전기장(electric field)과 자기장(magnetic field)이 서로 엮여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허공을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빛을 다른 말로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라고도 하고, 줄여서 전자파라고도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전자기파만을 빛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런데 빛 중에는 자외선이나 적외선처럼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도 많으며 그렇게 보면 전자기파나 전자파나 빛은 다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리고 빛을 이루고 있는 전기와 자기의 힘이 세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정도가 얼마인지를 따지는 말이 바로 주파수다. 만일 어떤 빛이 80헤르츠의 주파수를 갖고 있다고 하면, 그 빛은 1초에 80번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세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빛이라는 뜻이다. 50-1)


흑체 복사(black body radiation) 문제란 성질이 아주 단순하다고 가정한 물체를 대상으로 온도와 빛의 관계를 풀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흑체 복사에서 온도에 따라 빛이 나오는 정도를 계산해 보면 온도가 올라갈수록 높은 주파수를 띤 빛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결론이 나왔다. 온도를 조금만 올려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의 빛인 자외선이 막대한 양으로 쏟아지는 것이 그 시대 과학자들의 계산 결과였다. 만약 현실이 그대로 벌어졌다면, 사람이 높은 온도로 철을 달굴 때마다 거기서 강력한 자외선이나 X선이 마구 쏟아져서 그 빛을 맞고 모두 피부가 상하고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구식 전등 역시 온도를 높여 가며 빛을 내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므로 옛 과학자들의 계산대로라면 전등불의 전등만 켜도 거기서 엄청난 양의 자외선과 X선이 쏟아져 주변을 파괴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오류를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라고들 불렀다. 52)


하지만 1900년, 플랑크는 놀라운 방법으로 자외선 파탄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빛이 세지고 약해지는 정도에 일정한 단계가 있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을 계산 방법에 끼워 넣었다. 그 말은 빛의 양을 따질 때 어떤 최소의 단위가 있어서 빛 한 개, 빛 두 개라고 빛을 셀 수가 있다고 치고 계산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치고 계산해야만 뜨거운 물체가 빛을 내뿜을 때 어떤 색깔의 빛이 나오는지를 더 정확히 예상할 수 있었다. 플랑크는 이 이론의 특징이 어떤 양(quantity)을 작은 단위의 조각으로 단계별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 양의 작은 단위를 퀀텀(quantum) 곧 양자라고 불렀다. 그 덕택에 이 이론의 이름은 양자 이론(quantum theory)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양자 이론에 등장한 빛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빛 한 조각을 광자(photon)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빛과 빛을 이루고 있는 작은 조각인 광자가 과학자들이 생각한 첫 번째 양자 물질이고 퍼스트 퀀텀이다. 52-3)


플랑크는 정작 자신이 양자 이론을 개발해 놓고도 정말로 빛이 광자라는 작은 조각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정말로 광자로 되어 있다는 듯한 증거는 계속해서 등장했다. 결국, 1920년대 중반이 되자 과학자들은 빛의 움직임과 빛이 지닌 힘을 계산하기 위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계산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작은 알갱이의 움직임을 나타내면서도 그 알갱이의 속력이나 위치를 계산할 때는 부드러운 물결의 움직임이나 소리의 높낮이 또는 물체의 떨림을 계산할 때 쓰던 방식을 가져 와서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아주 특이한 계산 방법이었다. 이런 계산 방법을 파동 함수(wave function)를 다루는 파동 방정식(wave equation)이라고 한다. 파동 함수로 양자 이론을 풀이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로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에어빈 슈뢰딩거(Erwin Shrodinger)를 자주 꼽는다. 53-4)


• 글루온 gluon│원자력의 뿌리가 되는 강력의 운반자


우라늄이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 원인을 살펴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강력(strong force)이라는 힘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력의 간접 영향 때문이다. 가장 흔한 우라늄 원자 하나 속에는 그 중심의 핵 부분에 92개의 양성자와 146개의 중성자가 엉겨 붙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핵력이 세다고 해도, 238개 중에 총 92개나 되는 양성자들이 계속 같은 양전기끼리 서로 밀어내려는 전기의 힘을 내뿜는다면, 가끔은 그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쪼개져 떨어져 나올 수 있다. 이런 일이 정말로 생기면, 238개의 덩어리 중에서 일부가 떨어져 튕겨 나간다. 보통은 양성자 두 개와 중성자 두 개가 붙은 조그마한 조각이 튕겨 나온다. 그런 식으로 튀어나온 조각을 알파선(alpha ray)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방사선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이렇게 알파선이 튀어나오는 현상을 알파 붕괴(alpha decay)라고 부른다. 이런 방사선은 C-14 같은 물질 속에서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며 내뿜는 방사선과는 성질이 매우 다르다. 61)


전기의 힘과 강력을 비교해 보면 그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전기에는 양전기와 음전기 두 가지가 있다. 그래서 양전기와 음전기는 서로 끌어당긴다. 반대로 같은 양전기끼리 또는 음전기끼리는 서로 밀어낸다. 이런 전기의 힘 덕택에 수많은 전기 현상이 일어나고 전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러 물질의 서로 다른 성질을 만들어 낸다. 한무영은 전기처럼 무엇인가 두 가지 다른 것이 힘을 만드는 현상뿐 아니라 무엇인가 세 가지 특성이 어울려 힘을 만들 수가 있다면 그런 힘은 강력과 같이 아주 복잡하고 특이한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냈다. 쿼크를 개발한 머리 겔만은 이 생각을 받아들여 그 세 가지 특성에 빨강(red), 초록(green), 파랑(blu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실제로 쿼크가 어떤 색깔로 보이느냐 하는 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색깔 이름을 딴 이런 쿼크의 성질을 그냥 색깔이라고 부르면 눈에 보이는 색깔과 헷갈릴 수도 있으므로 보통은 색전하(color charge)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65)


강력은 세 물체가 빨강, 초록, 파랑 세 가지 색전하를 각기 한 가지씩 갖고 있을 때 그 세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붙이는 힘이라는 것이 한무영의 이론이었다. 이런 독특한 성질이 있다고 치고 계산 방법을 만들면 강력이 일으키는 여러 특이한 현상을 훨씬 잘 풀이할 수 있었다. 강력이 쿼크를 잡아당기는 힘은 해괴하게도 가까울 때는 힘이 약해지고 멀리 떨어질수록 힘이 더 세질 때가 있다. 이런 성질을 점근적 자유도(asymptotic freedom)라고 부른다. 또 쿼크는 항상 둘씩, 셋씩, 여러 개가 붙어 있는 덩어리로만 발견될 뿐, 그 덩어리에서 쿼크 하나만을 따로 떼어내서 관찰하기는 어렵다. 이런 현상을 쿼크 속박(quark confinement)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전자나 광자는 그렇지 않다. 전자는 하나하나 분리되어 있는 상태가 기본이다. 광자 역시 광자 하나만 떨어져서 돌아다니는 일이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강력의 영향 때문에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서로 당기는 힘인 핵력도 탄생한다. 66)


머리 겔만은 한무영의 연구를 받아들여 쿼크와 강력을 계산하는 방법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그 계산 방법에 직접 이름을 붙였다. 그는 강력 계산법은 색전하를 따지는 연구라고 해서 양자색역학(quantum chromodynamics, QCD)이라고 불렀다. 양자색역학이라는 계산 방법의 전체적인 방식을 살펴보면 그 전체적인 흐름은 전기의 힘을 계산할 때 쓰는 양자전기역학과 비슷하다. 즉 두 물체 사이에 힘이 있을 때 힘의 운반자가 그 두 물체 사이를 오고 간다고 치고 그 때문에 힘이 나타난다고 보면서 그 힘에 대한 계산을 해보는 방식이다. 전기의 힘을 따질 때 물체 사이를 오고 가면서 전기의 힘의 운반자가 된 것은 광자였다. 마찬가지로 양자색역학에서는 쿼크끼리 서로 글루온(gluon)이라는 운반자를 주고받는다고 치고 계산하면서 어디에 어떻게 강력이라는 힘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알아낸다. 이때에도 물결치는 듯한 현상을 따지는 방법인 양자 이론을 적용한 방법을 사용한다. 67)


• 맵시 쿼크 charmquark│지금의 과학을 완성해 준 물질


양자장 이론은 모든 물체에 대해 그 물체를 나타내는 양자장이라고 하는 어떤 장(field)이 온 세상에 퍼져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장의 움직임이 곧 물체에 일어나는 변화를 나타낸다고 보고 계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양자장 이론에 따라 물결의 움직임을 막상 계산해 보려고 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때가 많다. 제대로 숫자를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가 자꾸 계산 과정에서 나오는 것은 양자장 이론의 고질적인 문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무한대 문제가 나올 때는, 대충 안 풀리는 부분은 적당히 제쳐 놓고 넘어간 뒤에 나중에 몇 가지 숫자들을 끼워 맞춰서 “아마 이럴 것이다”라고 계산할 수 없는 부분을 숫자 몇 개로 바꿔치기하는 요령까지 개발해야 했다. 일종의 편법이다. 이 편법 계산 요령을 재규격화(renormalization)라고 부른다. 전자와 광자의 움직임과 힘에 대해 계산을 할 때 재규격화 방법을 개발해서 어쨌든, 무엇인가 답이 나올 수 있게 한 것은 리처드 파인먼 최대의 공적이었다. 72-4)


약력(weak force)은 물질의 근본을 바꿔 주는 역할을 하는 아주 기이한 힘이다. 그래서 약력은 강력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방사능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1970년대의 과학자들은 케이온이라는 물질이 약력 때문에 방사선을 내뿜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무엇인가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렇게 연구한 결과를 흔히 김(GIM) 기작(mechanism)이라고 부른다. 김 기작을 연구하던 셸던 글래쇼(Sheldon Lee Glashow)는 김 기작을 좀 더 쉽고 간편하고 깨끗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머리 겔만과 한무영 등의 과학자들이 만든 쿼크에 대한 이론이 맞다고 해야 설명이 쉬워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그때까지는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쿼크가 하나 더 있으면 말이 정말 더 잘 맞아 들 거라고 보았다. 이때 글래쇼는 그 새로운 쿼크를 맵시(charm) 쿼크라고 불렀다. 글래쇼는 그때까지 아무도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쿼크인 맵시 쿼크가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75)


게일러드, 이휘소, 그리고 연구에 도움을 준 또 다른 과학자 조너선 로스너(Jonathan Rosner)가 함께 쓴 논문이 바로 제목도 기가 막힌 <Search for Charm>이다. 1974년 상반기에 이 논문의 원고가 나오고 불과 몇 달이 지난 1974년 11월에 정말로 맵시 쿼크를 품고 있는 물질이 발견되어 버렸다. 팅(Ting)과 릭터(Richter)라는 과학자가 각기 따로 발견했는데, 팅은 그 물질에 제이(J)라는 이름을 붙였고, 릭터는 그 물질에 사이(psi)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과학계에서 말하는 11월 혁명이다. 혁명이라는 말은 너무 과장인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 큰 사건이기는 하다. 단지 맵시 쿼크라는 새로운 물질이 나타났다는 그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쿼크라는 것들로 세상의 보통 물체들 대부분이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 전체가 맞다는 아주 기막힌 증거를 발견한 사건이었다. 덕택에 지금까지도 양자장 이론은 모든 물질과 힘을 설명하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기초 이론 역할을 하고 있다. 77-8)


• 뮤온 muon│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사선의 대표인 전자의 무거운 친척


뮤온은 1936년에 발견되었다. 그때는 과학자들이 온 세상은 모두 음전기를 띤 전자, 양전기를 띤 양성자, 전기가 없는 중성자라는 세 가지의 작디작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음, 양, 중성의 조화가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전자도 아니고 양성자도 아니고 중성자도 아닌 뮤온이 난데없이 발견되어 그 순박한 믿음을 깨뜨려 주었다. 뮤온의 무게는 대략 180론토그램 정도인데, 전자의 무게는 약 0.9론토그램이고, 양성자나 중성자의 무게는 1700론토그램 정도다. 그러니 뮤온의 무게는 전자와 양성자 둘 사이의 애매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전자가 뭉쳐서 뮤온이 된다는 식으로 상상을 해 보자니 너무나 이상하게도 뮤온이 갖고 있는 음전기의 세기는 전자가 갖고 있는 음전기의 세기와 정확히 같았다. 전자와 음전기의 정도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딱 맞춰 놓은 것처럼 전자의 음전기 세기보다 뮤온의 음전기 세기는 1%라도 더 세지도 더 약하지도 않게 똑같은 정도의 세기였다. 83-4)


뮤온은 보통 지구 하늘 높은 곳 즈음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뮤온은 우주 방사선 중에서도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온 우주 방사선의 영향을 받아 지구의 하늘에서 새로 생겨난 2차 우주 방사선 또는 3차 우주 방사선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늘에서 생겨나 떨어지는 뮤온의 속력은 무척 빠르다. 그렇게 빠른 속력으로 날아가는 물체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뮤온은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꽂힌다. 빠른 것은 시속 수천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속력으로 지상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나 빠르게 날아가기 때문에 뮤온은 다른 물체를 쉽게 꿰뚫고 통과한다. 뮤온은 같은 속력의 전자보다도 훨씬 더 물체를 잘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뮤온은 꼭 전자처럼 음전기를 띠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물체 속에 들어갔다가 그 물질 속에 있는 전기를 띤 성분 때문에 이끌리거나 밀리다 보면 날아가는 방향이 휘거나 속력이 늦춰지는 현상도 나타난다. 85)


어떻게 보면 뮤온은 방사능을 띤 전자 같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뮤온은 항상 뮤온 상태로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뮤온은 방사선을 내뿜고 흔한 전자로 변해 버린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전자와 뮤온을 한 묶음으로 묶고, 그 둘이 양성자와 중성자보다 가벼운 물질이라는 뜻으로 가볍다는 뜻의 그리스어를 변형한 말인 렙톤(lepton)이라는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한자어로 번역해 경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전자와 뮤온은 경입자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기본 입자다. 그에 비해 양성자, 중성자 같은 물질은 무겁다는 뜻의 그리스어를 변형하여 바리온(baryon)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다. 역시 한자어로 반영해 중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중입자로 분류했던 양성자, 중성자가 진정한 기본 입자가 아니고 쿼크 세 개의 조합으로 된 물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요즘에는 쿼크 세 개가 조합된 물질을 중입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88)


• 타우온 tauon│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전자의 더욱 무거운 친척


1975년 연말 무렵 마틴 펄(Marin Perl) 연구팀이 찾아낸 물질은 대단히 짧은 시간이 지나면 바로 방사선을 내뿜고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마틴 펄이 찾아낸 물질의 수명은 300펨토초가 되지 않았다. 1펨토초는 1000조 분의 1초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가 찾아낸 물질은 태어난 뒤 30조 분의 1초가 지나면 그 사이에 삶을 다 살고 썩어서(decay) 사라져 버리며 다른 물질로 변하는 그런 물질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질에 대한 무엇인가 연구하고 살펴보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을 활용하면 한 가지 묘수가 생긴다. 만약 펄이 찾아낸 물질을 시간이 지연되는 세상에서 만들고 바깥 세상에서 이 물질을 관찰한다면 어떻게 보일까? 이 물질 입장에서는 여전히 30조 분의 1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흘러갔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시간이 훨씬 빨리 흐른다. 반대로 말해 보면 그 물질의 세상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94)


다시 말해 관찰하려는 물질을 우주로 날아가는 우주선처럼 빠르게, 더 빠르게, 아주 빠르게 움직여서 시간 지연을 많이 일으키면 그 물질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난다. 그리고 기본 입자들에 대해 실험하는 곳에서도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해서 굉장히 빠르게 물질이 움직이면서 벌어지는 현상을 조금 더 오래 세심히 살필 수 있다. 자주 벌어지는 현상 중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뮤온을 맞게 되는 이유도 사실은 상대성 이론과 시간 지연 효과 때문이다. 뮤온의 수명도 길지는 않다. 고작 2마이크로초, 그러니까 50만 분의 1초 정도다. 이 정도면 하늘 높은 곳에서 생긴 뮤온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 수명은 끝나버린다. 그런데 뮤온이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래서 실제로는 상대성 이론에 따라 뮤온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뮤온은 땅에 떨어질 때까지도 수명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우리 머리 위로 뮤온이 떨어져 닿게 된다. 95)


상세한 분석을 거쳐 펄이 발견한 것은 결국 새로운 기본 입자로 판명되었다. 그 이름은 타우온(tauon)이다. 뮤온, 그리고 전자를 뜻하는 일렉트론(electron)과 같은 운율이 되도록 타우(tau)라는 말을 변형해 만든 말이다. 그래서 타우온 대신 그냥 짧게 타우(tau)라고만 부를 때도 있다. 타우 경입자 또는 타우 렙톤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질을 조사해 보니 타우온은 뮤온보다 무게는 훨씬 더 무거웠지만, 나머지 성질은 뮤온과 매우 비슷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뮤온과 성질이 비슷한 전자와 타우온의 성질도 비슷하다는 뜻이다. 뮤온이 그랬던 것처럼 타우온도 음전기를 띠고 있고, 그 음전기의 세기는 전자의 음전기 세기, 뮤온의 음전기 세기와 정확히 같다. 즉 전자, 뮤온, 타우온이 하나의 가문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마침 방사능을 따질 때에서는 어머니(mother)와 딸(daughter)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타우온이 방사선을 내뿜고 뮤온으로 변했다면, 흔히 타우온을 어머니 입자, 뮤온을 딸 입자라고 부른다. 95)


• W 보손 wboson│베타 붕괴 방사능 물질의 원인인 약력의 운반자


돌 속의 K-40, 유물 속의 C-14가 뿜어내는 방사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방사선의 성분이 전부 빠르게 튀어나오는 전자라는 것이다. 보통 방사능을 따질 때는 이렇게 나온 방사선을 베타선(β-Ray)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리고 물질이 베타선 즉 전자를 내뿜으며 변화하는 현상을 베타 붕괴(beta decay)라고 부른다. 원자핵 속에 있는 중성자는 위 쿼크 하나와 아래 쿼크 두 개로 되어 있다. 양성자는 위 쿼크 두 개와 아래 쿼크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니 만약 중성자 속의 아래 쿼크 하나가 위 쿼크 하나로 바뀐다면 중성자는 양성자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것이 베타 붕괴다. 즉 무엇인가가 아래 쿼크 하나를 건드려서 위 쿼크로 바꿔 주는 현상이 일어나면 그 물질은 베타선이라는 방사선을 내뿜는다. 그렇게 아래 쿼크를 건드려 주는 힘이 무엇일까? 바로 그 힘을 우리는 약력(weak for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약력이 원자 속을 건드리면 베타선이라는 방사선이 튀어나온다. 105-6)


보통 과학에서 말하는 가장 근원에 있는 힘들은 뭔가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는 힘이 많다. 그러나 약력은 다르다. 약력은 뭘 밀거나 당기는 힘으로 우리 눈에 그 위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약력은 그 대신 물질을 바꾸어 주는 일을 하면서 여러 현상을 일으킨다. 그것도 물질을 이루는 가장 밑바탕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작디작은 그 알갱이를 바꾼다. 이렇게 보면 약력은 기본 입자를 다른 기본 입자로 변신시키는 힘이다. 핵융합 자체는 강력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핵융합이 일어나려면 그 전에 우선 양성자들이 아주 가깝게 달라붙어야 한다. 그때 약력이 필요하다. 약력이 양성자를 중성자로 바꾸어 준다면 전기가 없는 중성자는 그저 강력만 받아서 철썩 달라붙을 것이다. 중성자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잘 해내게 될 것이다. 약력의 활약 덕택에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어서 접착제 같은 중성자가 많이 생기면 훨씬 쉽게 원자들이 달라붙고 핵융합을 잘 일으킬 수 있다. 106-7)


양자장 이론에서는 힘이 있으면 항상 그 힘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운반자가 있다. 약력도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약력의 운반자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베타 붕괴 등의 현상을 일으키는 운반자를 W 보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약력 때문에 베타 붕괴나 다른 방사능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지 계산할 때에는 물질 사이에 W 보손이 오고 가며 힘을 전달한다고 치고 양자장 이론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계산하면 된다. 기본 입자 중에 보스 통계 방법으로 따져야 하는 물질을 보손(Boson)이라고 하고, 페르미 통계 방법으로 따져야 하는 물질을 페르미온(Fermion)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모든 기본 입자 중에 우리가 물체를 이루는 재료로 보고 있는 기본 입자들은 다들 페르미온이고, 물체 사이의 힘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운반자들은 보손이다. 그러므로 전자, 뮤온, 타우온, 각종 쿼크들이 페르미온이고 전기의 힘을 전달해 주는 광자, 강력의 힘을 전달해 주는 글루온 등이 보손이다. 107-8)


• Z 보손 zboson│전기를 띠지 않는 덜 눈에 뜨이는 약력의 운반자


원자는 크기가 작고 전자는 그 원자보다 더욱 작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원자나 전자도 마치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듯한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원자, 전자 따위의 작은 물체가 뱅뱅 돌아가는 듯한 현상을 스핀(spin)이라고 부른다. 전자 말고도 뮤온, 쿼크, 타우온, 글루온, 광자 모두 이런 현상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관찰 결과 우젠슝의 연구팀은 Co-60이라는 코발트 원자에서 방사능 때문에 나오는 전자는 하나 같이 전부 왼쪽으로 도는 듯이 튀어 나온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전기 장치를 이용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면 보통 전자들은 힘을 어디서 어떻게 받았느냐에 따라서 오른손잡이(right handed) 입자가 되기도 하고 왼손잡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약력이 방사능 물질 속에서 베타 붕괴를 일으키며 전자를 튕겨 내서 날려 보낼 때는 마치 누가 일부러 왼쪽으로 전자를 돌리기라도 하는 듯이 왼손잡이 전자만 나온다. 113)


약력이 이 정도로 상식을 초월하는 괴이한 힘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 힘이 언제, 어느 정도로 생기는지, 그 계산하는 방법을 개발해 내려고 노력했다. 연구 결과로 얻은 결론은 힘을 전달하는 운반자가 실제로 혼자서 나타나게 된다면 무척 무거운 무게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약력을 전달하는 운반자를 발견한다면 그 무게는 매우 무거울 것이다. 결코 풀리지 않을 복잡한 문제의 마지막 고비를 넘도록 해 준 것은 한참 나중에 다시 한번 큰 화제가 되었던 물질인 힉스(Higgs) 입자(particle)였다. 그러니까 일단 약력 이론도 원래는 전자기력이나 강력처럼 무게가 없는 운반자가 힘을 전달해 주는 그런대로 평범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힉스 입자라는 또 다른 새로운 물질이 한번 추가로 더 관여하는 덕택에 약력을 나타내는 양자장이 그 영향을 받는다. 그 힉스 입자가 미치는 영향 덕분에 약력을 전달하는 운반자는 무거워진다. 이런 복합적인 이론이 마지막 결과물이었다. 114-5)


이렇게 개발된 약력 이론에는 또 다른 놀라운 특징도 있었다. 이들이 만든 이 복잡한 이론이 약력과 전자기력은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돌아볼수록 더욱 놀라운 결과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많이 다루어 보았고 가장 자주 일상생활 문제와 연관되는 힘인 전자기력이 반대로 힘 중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특이해 보이는 약력과 알고 보면 같은 힘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통합된 전약력 이론에 따르면, 전약력과 관련이 있는 힘을 전달하는 입자는 결국 총 네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그 네 가지는 양전기를 띤 W 보손, 음전기를 띤 W 보손, Z 보손, 광자다. 이 중에서 친숙한 광자는 전자기력을 전달하는 운반자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남은 W 보손 두 가지와 Z 보손이 우리가 보통 약력이라고 부르는 힘의 운반자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W 보손들은 베타 붕괴 등과 같이 그 전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약력을 전달하는 입자다. 117)


1970년대 유럽 과학자들이 만든 가가멜(Gargamelle)은 자동차쯤 되는 크기의 쇠로 된 단단한 통처럼 생겼다. 거기에 기체를 가득 채워 놓는데 아주 높은 압력으로 꾹꾹 눌러 담아 그 기체가 액체로 변할 정도로 꽉 채워 두되 아주 살짝만 건드리면 바로 다시 끓어 올라 기체가 될 정도로 눌러 담아 둔다. 만약 가가멜 속에 아주 작은 알갱이로 된 물질이 하나라도 날아들어 온다면 그것이 그 속의 액체를 살짝 건드릴 것이다. 그러면 그 충격으로 그 주변이 조금 끓어 오른다. 그러면 그 끓어 오른 자국이 아주 미세한 거품 비슷하게 변할 것이다. 그 거품은 사진으로 촬영하면 찍혀 나올 정도로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장치를 거품 상자(bubble chamber)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가가멜은 거대한 거품 상자였다. 1970년대 초가 되어 가가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후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약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W 보손이 일으키는 현상과는 다른 특이한 반응을 찾아내려고 했다. 118-9)


그 당시에는 Z 보손이 전기를 띠고 있지 않은 중성이라고 하여 중성류(neutral current) 현상이라고 불렀다. 결국, 1973년 가가멜에서 세계 최초로 중성류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 말은 Z 보손이 정말로 세상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만화 속 가가멜은 작은 스머프를 못 잡았지만 가가멜 실험 장치는 그 작은 Z 보손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그것은 Z 보손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 많은 과학자들이 겹겹이 이론을 쌓아 만든 그 복합적인 약력 계산 방법 역시 정말로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었다. 1983년에는 아예 Z 보손이라는 운반자가 그 자체로 따로 튀어나와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명확히 찾아내기까지 했다. 역시 W 보손을 발견한 유럽 과학자들이 해낸 일이었다. 중성류 현상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유령 같은 물질이라고 부르던 흐느끼듯이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다니는 물질의 움직임을  추적해서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은 유령 입자(ghost particle)를 사냥해야 했다. 119)


• 중성미자 neutrino│가까이 있지만 너무나 느끼기 힘든 아주 흐릿한 물질


반물질(antimatter)은 단순히 희귀할 뿐만 아니라 쓸모도 많고 찾는 사람도 많은 물질이다. 어림짐작으로 계산해 보면, 단 0.1그램의 반물질만 있어도 거기서 나오는 빛을 전기로 다 바꾸면 대한민국의 모든 건물, 가게, 공장 등등에서 온종일 사용하는 양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우주 전체에서 같은 무게의 재료를 사용해 그보다 더 강한 빛을 내뿜을 방법은 이론상 없다. 어떤 원료를 쓰든 간에 가장 강한 빛을 만들 방법은 반물질을 쓰는 것이다. 반물질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물질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빛은 더욱더 많아진다. 그렇게 빛을 뿜어내고 나면 반물질은 완전하고도 깨끗하게 사라진다. 그래서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불타고 나서 잿더미가 남는 것 같은 현상조차 없다. 연기나 냄새가 남는 일도 없다. 그저 빛 이외에 모든 것이 완벽히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반물질이 그 짝이 되는 보통 물질과 닿으면 빛을 내뿜으면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현상을 쌍소멸(pair annihilation)이라고 부른다. 121)


1930년대 과학자들은 베타 붕괴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인 전자가 튀어나올 때 과연 어느 정도로 맹렬히 튀어나오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베타 붕괴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속력은 이상하게도 그때그때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전자의 속력이 달라진다는 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law of energy conservation) 위반이다. 결국 파울리는 이 정체불명의 물질이 뭔지는 모르지만 베타 붕괴 때 같이 튀어나오고 그 물질이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이상한 설명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물질이 뭔지 모르는 이유는 그 물질이 전기를 전혀 띠고 있지 않아 전자 장비로 발견하기가 어렵고 무게도 너무나 가볍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엔리코 페르미는 그런 특징을 강조해서 그 물질에 이름을 붙이려고 했고, 그래서 중성을 띤 입자를 뜻하는 말 뉴트론(neutron)을 이탈리아식으로 변형해 뉴트리노(neutrino)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것을 한자어로 번역해서 부르는 말이 중성미자다. 123-4)


중성미자는 너무나 가볍고 전기도 전혀 띠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도 걸릴 것 없이 아무 물질이나 휙휙 통과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한번 튀어나온 중성미자는 벽을 통과해 그냥 바깥으로 쭉쭉 날아가고 그러다 산에 부딪히면 산도 그냥 통과해 날아간다. 벽이나 사람을 스르륵 통과하는 영화 속의 유령보다도 중성미자는 훨씬 더 물체를 잘 통과하는 유령 입자다. 중성미자가 어찌나 물체를 잘 통과하는지, 중성미자가 바닥 방향으로 날아가면 땅을 통과해 지구를 통째로 지나친 뒤 지구 반대편 땅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하늘로, 더 나아가 우주로 날아가는 일도 너무나 흔하다. 중성미자는 전기의 힘과도 상관이 없고 강력과도 상관없다. 그나마 중성미자는 약력과 반응한다. 그런데 약력은 오른쪽과 왼쪽을 따지는 이상한 성질이 있어서 왼손잡이 물질에만 힘을 준다. 그렇다면 보통 베타 붕괴에서 생겨 나는 중성미자는 그냥 중성미자가 아니라 중성미자의 반대인, 반물질 중성미자, 곧 반중성미자(antineutrino)일 것이다. 125)


• 뮤온 중성미자 muonneutrino│블랙홀 쪽에서 날아온 중성미자


중성미자는 아무 물질이나 잘 통과하면서 무게도 너무나 가벼워 굉장한 속력으로 우주를 얼마든지 날아다닐 수 있다. 그렇기에 중성미자는 별들 사이의 광막한 공간조차 건너다닐 수 있다. 중성미자 외에 이런 물질은 드물다. 별에서 나온 중성미자는 심지어 별빛보다도 더 쉽게 우주를 건너올 수 있다. 빛은 물체에 가로막히기도 하고 반사되거나 휘어지며 방향이 바뀌는 일도 흔히 겪는다. 그러나 중성미자는 그런 일을 거의 겪지 않고 그냥 어지간한 물체면 다 통과해서 계속 날아간다. 태양에서 오는 중성미자를 측정한 과학자들은 측정이 거듭될수록 생각보다 적은 숫자의 중성미자가 감지된다는 결과를 얻어 이상하게 생각했다. 면밀한 검토 끝에 그저 기술 부족으로 단순히 중성미자를 놓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 중성미자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있었다. 그 답은 중성미자가 한 가지가 아니며 여러 가지이고 서로 간에 변화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134-5)


그래서 전자와 비슷하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질로 뮤온, 타우온이 있듯이, 중성미자도 비슷하게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중성미자가 날아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전자 중성미자, 뮤온 중성미자, 타우온 중성미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자꾸 바뀌는 모습은 언뜻 진자가 왔다 갔다 변화하는 것 같다고 해서 이 현상을 학계에서는 중성미자 진동(neutrino oscillation)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중성미자 진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는 내용이 많고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꺼림칙한 대목이 많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중성미자가 자꾸 변신하느냐에 대해서도 모두가 즐겁게 공감할 수 있는 산뜻한 설명은 지금도 없다. 예를 들어, 중성미자가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면 그때마다 그 무게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쉽게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아직 전자 중성미자, 뮤온 중성미자, 타우온 중성미자 각각의 무게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136-7) 


• 타우온 중성미자 tauonneutrino│예전 한때 암흑물질의 후보


루빈과 루빈의 동료인 켄트 포드(Kent Ford)가 정리한 결과에 따르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은하의 가장자리 부분이 돌아가는 속력이 이상하게 너무 빨라 보였다. 꼭 무슨 알 수 없는 무게가 더 실려 있는 듯한 모습으로 은하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은 세상에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물질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암흑물질은 단지 색깔이 없는 물질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외선, 전파, 레이더를 이용한 관찰 등등 모든 빛, 전기, 자기의 힘과 관련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암흑물질은 만질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암흑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란 더욱 어렵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암흑물질의 양을 추산해 보니 그 양이 오히려 보통 물질보다도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우주의 물질 중 85%는 정체불명의 암흑물질이다. 그게 무엇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141-2)


중성미자는 모든 물체를 아주 잘 통과해 지나간다. 그리고 빛, 전기와는 반응하지 않고 약력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중성미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으며 감지하기가 어렵다. 그 말은 중성미자의 양이 굉장히 많고 무게도 무거워서 우주 곳곳에 가득 차 있어도 잘 감지는 안 될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 중성미자의 양이 많으면 암흑물질의 묵직한 무게를 충분히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타우온은 전자에 비해 3,500배나 무거운 물질이다. 그렇다면 타우온 중성미자가 의외로 좀 무게가 많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까지는 타우온 중성미자 역시 무게가 별로 무겁지는 않다는 것이 대부분의 연구에서 나온 결론이다. 지금도 중성미자를 연구해서 암흑물질의 정체를 밝히려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있다. 예를 들어 (심지어 약력에도 반응하지 않는) 비활성 중성미자(sterile neutrino)라고 하는 새로운 중성미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144-5)


• 꼭대기 쿼크 topquark│가장 무겁고 불안해서 관찰해볼 만한 물질


양자 이론에서는 결과가 처음부터 과거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확인하는 순간 결정된다고 봐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그리고 그 문제가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는 상황이 바로 ‘양자 얽힘’이라는 상황이다. 두 개의 경우의 수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과학에서는 얽힘(entanglement) 상태라고 한다. 1론토그램도 안 되는 아주 작은 크기의 패를 나눠 가진 두 명의 도박꾼이 그 패를 들춰보지도 않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도 않고 그대로 자기 집으로 온다고 생각해보자. 양자 이론에서는 이런 경우, 그 패를 어느 한 사람이 들춰보기 전까지는 누가 승리인지 패배인지는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결정된 일은 없다는 것이 양자 이론의 계산 방식이다. 이것을 양자 이론에서는 중첩(superposition)이 있었다가 중첩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즉 승리 패와 패배 패, 한쪽이라고 말할 수 없는 중첩된 상태에 있다가 확인해 보는 순간 중첩이 사라지고 승리 패로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150-1)


그런데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기묘함은 따로 있다. 만약 패를 들춰 보는 순간에 승리와 패배가 결정된다면 내가 승리 패를 뽑은 순간, 상대방 패는 패배 패가 되도록 무엇인가가 상대방 패를 동시에 같이 결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승리 패인 것을 확인했는데, 상대방도 패를 들춰 봤더니 역시 승리 패라고 나와서는 안 된다. 내가 승리 패인 것을 확인한 순간, 상대방 패는 패배 패가 나와야만 한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나는 승리 패, 상대방은 패배 패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승리와 패배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양자 이론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런 것은 중첩 상태가 아니다. 내 패가 승리냐 패배냐 하는 문제는 내가 관측하기 전까지는 정해져 있지 않고 관측할 때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양자 이론의 중첩이다. 이 문제를 논문으로 써서 지적한 과학자들의 이름 약자를 따서 이것을 흔히 EPR 역설(EPR Paradox)라고 부른다. 151-2)


EPR 역설에서는 빛보다 빠른 무엇인가가 있을 수 없다는 상대성 이론의 위반부터가 당장 큰 문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뭐가 있길래 어떻게 이런 일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상대방의 패를 정해 준단 말인가? 그것도 빛보다 조금 더 빠른 정도가 아니라 무한히 빠른 속도로 즉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예로부터 수많은 과학자가 뼈저린 껄끄러움을 느꼈다는 양자 얽힘 문제다. 명확히 관찰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양자 얽힘은 여러 물질이 다양한 반응을 일으킬 때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승리 패를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패를 나누어 가지는 때에 영향을 미치는 듯한 현상이라고 볼 만도 하다. 이런 일은 시간 여행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일이라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원인이 결과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바꾸는 것 같기도 하다. 152)


꼭대기 쿼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본 입자 중에서 가장 무겁고 덩치가 큰 물질이다. 꼭대기 쿼크의 무게는 하나에 30만 론토그램 정도다. 전자 하나 무게와 비교해 보면 꼭대기 쿼크는 35만 배나 무겁다. 쿼크들 대부분은 1970년대에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꼭대기 쿼크는 너무나 무겁고 찾기 어려워서 1995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발견된 거대한 꼭대기 쿼크에서도 양자 얽힘 현상은 어김없이 잘 관찰되었다. 꼭대기 쿼크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나타나자마자 대단히 짧은 시간이 지나면 바로 방사선을 내뿜으며 다른 물질로 변화해버리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꼭대기 쿼크의 수명은 대략 1조 분의 1초를 다시 2조 등분한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꼭대기 쿼크는 다른 물질들과 잡다하게 들러붙거나 반응하는 일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그 덕택에 꼭대기 쿼크를 잘 관찰하면, 쿼크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도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56-7)


• 바닥 쿼크 bottomquark│대형 입자 가속기를 만들어 자주 살펴보던 물질


LHC는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의 약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이 장치가 하는 일은 지상에서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아주 작은 물질을 이런 우주 방사선 같이 빠르게 날아가도록 쏘는 것이다. 대형 강입자 충돌기라는 말에서 강입자는 하드론(hadron)을 번역한 단어로, 쿼크 여러 개가 붙어 있는 물질을 말한다. 우주 방사선 중에 흔히 잘 감지되는 것도 양성자이고 양성자는 쿼크 세 개가 붙어 있는 것이므로 역시 강입자라고 할 수 있다. 보통 LHC 같은 장비를 입자 가속기(particle accelerator)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입자 가속기는 전기를 띤 아주 작은 물질 알갱이를 전기의 힘과 자력을 이용해 빠르게 날려 주는 장치다. 사상 최대의 입자 가속기인 CERN의 LHC 역시 바로 이런 원리로 동작한다. 그래서 LHC에서는 양전기를 띠고 있는 양성자를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고 그 양성자가 날아가도록 가능한 한 강한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전기를 사용한다. 160, 162) 


바닥 쿼크의 발견은 1970년대 중반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SLAC, Stanford Linear Accelerator Center)에서 타우온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얻은 성과였다. 그러니까 전자와 거의 같은 물질로 전자보다 좀 더 무거운 뮤온이 있고 그보다 더 무거운 타우온이 있어서 전자-뮤온-타우온 세 가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침 쿼크들 중에서도 아래 쿼크가 있고 그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무거운 기묘 쿼크가 있고 그보다 더 무거운 바닥 쿼크가 발견되어, 아래 쿼크-기묘 쿼크-바닥 쿼크 세 가지가 있다는 결과였다. 딱딱 짝이 맞았다. 박자가 들어맞는 것 같은 3단계 구성이 두 벌  관찰 되었다. 타우온에 이어 바닥 쿼크가 발견된 것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들이 대체로 세 벌씩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아주 좋은 정황 증거였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3개의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결과가 나중에 추가로 관찰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귀가 딱 들어맞게 되었다. 166)


• 힉스 입자 higgs│기본 입자들이 무게를 갖게 해 주는 것


# 현재까지 밝혀낸 우주의 재료

1. 4가지 물질 재료 : 음전기 쿼크, 양전기 쿼크, 음전기 경입자, 전기를 띠지 않는 경입자

2. 4가지 물질재료를 구성하는 3가지 기본입자 : 음전기 쿼크(아래 쿼크, 기묘 쿼크, 바닥 쿼크), 양전기 쿼크(위 쿼크, 맵시 쿼크, 꼭대기 쿼크), 음전기 경입자(전자, 뮤온, 타우온), 전기를 띠지 않는 경입자(중성미자, 뮤온 중성미자, 타우온 중성미자)

3. 힘의 운반자 역할을 하는 4가지 기본입자 : 광자, 글루온, W 보손, Z 보손


바로 이 12가지 물질 재료 기본 입자들과 4가지 힘 운반자 기본 입자들이 어떻게 서로 반응하는지를 따져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을 현대 과학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이라고 부른다. 과학에서는 우주의 모든 일을 일으키는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네 가지 힘밖에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력은 지금의 표준 모형이 다루지 못하고 있는 대상이다. 이래서야 표준 모형이 우주 모든 물질을 다루는 표준 이론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중력을 계산할 때 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방법에 양자 이론을 적용해서 풀이하기 위한 좋은 방법을 아직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자기력, 강력, 약력, 나머지 세 가지 힘은 모두 양자 이론에 바탕을 두고 계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양자 이론으로 풀이해 보려는 시도는 도전이 시작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아직도 깨끗한 답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171-2)


전자기력의 운반자가 광자이고 강력의 운반자가 글루온이듯이 중력을 전달하는 운반자 역할을 하는 기본 입자에 중력자 혹은 그래비톤(graviton)라는 이름을 붙여 놓기는 했다. 중력자가 중력의 운반자라고 보고 양자장 이론을 개발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중력자를 발견한 사람도 없고 중력자에 대해 명확히 확인된 사실도 없다. 그렇기에 다른 힘과는 달리 중력이 얼마나 센지, 약한지를 계산해 보고 싶을 때에는 양자 이론으로 만든 양자장 이론이라는 방식을 쓸 수가 없다. 중력의 운반자가 오고 가는 모습을 물결과 떨림, 소리를 나타내는 기술을 이용하여 계산하는 그 우아하고도 절묘한 방식을 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상대성 이론의 내용 중에서 특수 상대성 이론만 하더라도 양자 이론과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자재로 결합되어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중력을 계산할 때 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은 양자 이론으로 풀이가 되지 않는다. 172)


힉스 입자는 표준 모형에 나오는 다른 물질들이 무게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힉스 입자가 없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물질의 재료들이 무게를 갖지 못하여 빛과 비슷한 상태가 될 것이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힉스 입자를 나타낼 수 있는 힉스장(Higgs field)이라고 하는 억겁의 바다를 채운 바닷물 비슷한 것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다. 양자장 이론에서 말하는 다른 기본 입자들의 양자장과도 비슷하다. 만약 힉스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물질이 있다면 그럴수록 그 물질은 무거운 무게를 갖게 된다. 반대로 힉스장의 영향을 약하게 받는 물질이 있다면 그 물질은 가벼워진다. 즉 질량이 작게 나타난다. 만약 힉스장이 저 혼자 소용돌이치고 휘몰아치면서 어느 위치에 특히 강한 모습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물질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 그 물질이 관찰되면 그것이 바로 힉스 입자다. 175) 


2012년 7월 4일 드디어 CERN에서 공식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CERN의 과학자들은 125기가 일렉트론볼트 정도의 에너지를 갖는 새로운 입자가 있다는 증거를 찾았다면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새로 나타난 낯선 입자의 무게가 22만 5천 론토그램 정도 된다는 뜻이었다. 유럽 CERN의 LEP 실험에서 힉스 입자를 못 찾고 미국 페르미 연구소에서 힉스 입자를 못 찾았던 딱 그 사이의 무게였다. 여길 봐도 없고 저길 봐도 없었던 힉스 입자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후 수년간 이어진 후속 연구를 통해 세상 모든 물질의 재료인 열두 가지 기본 입자들은 그 움직임을 억겁의 바다에 일어나는 물결이나 소용돌이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양자장 이론이라는 방법으로 계산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을 움직이는 힘은 4가지 운반자를 주고받는다고 치고 계산할 수 있다는 우리의 생각은 적어도 아직은 틀린 점이 없고 잘 들어맞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이 대체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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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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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2020년 미시간주에서 한 무리의 백인 극우 극단주의자 그룹이 꾸민 납치 시도가 내전이 임박했다는 징후라고 말한다면, 독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의 내전은 바로 이런 자경단원들에서 시작된다. 무장한 전투원들이 사람들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민병대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규정하는 특징이다. 시리아에서 반정부 반란자들은 반군들과 풀려난 수감자들이 뒤죽박죽된 세력으로, 극단주의 단체 이슬람 국가(IS)와 나란히 싸우고 있다. 시리아 최대의 초기 반란 세력 ─ 자유 시리아군Free Syrian Army ─ 도 중앙에서 지휘하는 조직이라기보다는 느슨하게 연결된 소규모 그룹 수백 개가 뒤섞인 집단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전에서는 산적, 군벌, 민간 군사 기업, 외국 용병, 정규 반군 등이 싸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예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공식 군복을 입은 단일한 전투 부대가 전통적인 무기를 들고 싸우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10)


1 아노크라시의 위협


이라크는 종족, 종교에 따라 정치적 경쟁이 극심한 나라였다. 북부에 사는 대규모 소수 종족인 쿠르드족은 오랫동안 후세인에 맞서 자치권을 얻기 위해 싸웠다. 이라크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시아파는 수니파인 후세인과 역시 수니파가 주류인 바트당의 통치를 받는 것에 분노했다. 수십 년간 후세인은 종교나 종파에 상관없이 공직을 맡으려면 바트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수니파로 정부 직책을 채우고 또한 나머지 국민들은 잔인한 보안군을 앞세워 탄압함으로써, 소수 종파의 권력을 굳힐 수 있었다. 고작 침공 두 달 반 만에 이라크인들은 경쟁하는 몇몇 종파적 파벌로 뭉쳤다. 미국의 이라크 임시 정부 수반 폴 브리머Paul Bremer는 이라크에 신속하게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해 바트당을 불법화하고 후세인 정부에서 일한 모든 관리 ─ 거의 전부 수니파 ─ 는 영원히 권력에서 배제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고는 이라크군을 해체함으로써 수니파 수십만 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16-7)


하지만 후세인 치하에서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은 기회를 포착했다.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시아파 반정부 인사 누리 알말리키Nouri al-Maliki나 이라크를 이슬람 체제로 변신시키려는 급진 시아파 성직자 무끄타다 알사드르Muqtada al-Sadr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곧바로 정치적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원래 미국은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간의 권력 분점 합의를 중재하고 싶어 했지만, 이내 인구 구성에 따라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정부를 원하는 알말리키의 요구를 묵인했다. 권력 장악에 뒤이은 혼돈 상태였다. 수니파 반군은 처음에는 미군 병력을 추격하지 않았다(미군 또한 무장이 철저했다). 대신에 반군은 손쉬운 표적에 공격을 집중했다. 미국인들을 돕는 개인들과 단체들이었다. 반군의 목표는 미국 점령에 대한 지지를 줄이거나 근절하고 미군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반군은 미군 병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후세인이 생포되는 2003년 12월 무렵이면 이미 게릴라전이 발발한 상태였다. 17-8)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또는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지 여부다. 한 나라가 험난한 이행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완전한 독재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로 옮겨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가 지도자의 민주화 시도에는 종종 중대한 퇴보나 유사 독재적인 중간 구간의 정체가 포함된다. 그리고 시민들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정부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 지망자가 권리와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고 권력을 집중하면서 민주주의가 쇠퇴할 수 있다. 헝가리는 1990년에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오르반 빅토르Orbán Viktor 총리가 서서히 체계적으로 민주주의를 독재로 몰아갔다. 대개 바로 이런 중간 구간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전문가들은 이런 중간 구간을 통과하는 나라를 〈아노크라시anocracy〉라고 부른다. 완전한 독재autocracy도, 민주주의democracy도 아닌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 20)


민주화를 진행 중인 정부는 앞선 체제에 비해 ─ 정치적, 제도적, 군사적으로 ─ 허약하다. 독재자와 달리, 아노크라시 지도자는 대개 반정부 세력을 진압하고 충성을 보장할 만큼 충분히 권력이 많거나 무자비하지 못하다. 정부는 또한 종종 지리멸렬하고 내부 분열에 시달리면서 기본적 서비스나 심지어 안전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다. 야당 지도자들이나 심지어 여당 내부 인사들도 개혁 속도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한편, 새로운 지도자들은 신속하게 시민과 동료 정치인, 군 장성 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이행의 혼돈 속에서 이 지도자들은 종종 실패한다. 아노크라시에서 패자들 ─ 예전 엘리트층, 야당 지도자, 한때 이득을 누렸던 시민 ─ 은 정부가 공정할지, 또는 자신들이 보호받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진정한 불안이 조성될 수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경쟁자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를 기다리느니 아직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힘이 강할 때 싸움을 벌이는 편이 나았다. 23-4)


2 고조되는 파벌 싸움


정치 불안정 연구단은 오래전부터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던 중에 인상적인 양상을 발견했다. 각국의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정치 불안정 및 폭력과 강한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파벌주의〉라고 명명한 극단적 형태의 정치적 양극화였다. 파벌주의로 분열되는 나라들에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종족이나 종교, 인종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정당들이 존재하는데, 이 정당들은 타자를 배제하고 희생시키면서 통치하려고 한다. 〈파벌화되었다〉고 간주되는 나라들에 존재하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당들은 대개 비타협적이고 유연하지 않다. 정당들 사이의 경계가 엄격해서 치열한 경쟁과 심지어 전투로까지 이어진다. 경쟁하는 집단들은 종종 규모가 비슷하다. 실제로 두 집단 사이에 힘의 균형이 존재할 때 이처럼 치열한 경쟁이 발생한다. 승리나 패배의 결과가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이 당들은 또한 성격상 종족적, 종교적 민족주의에 호소해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지배적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35-6)


전문가들이 발견한 것처럼, 파벌주의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집단의 엘리트층과 지지자들이 기회를 감지한다. 아마 정권이 약해지는 순간이나 인구 변동 때문에 불만이나 취약성의 느낌이 고조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사람들을 정책의 쟁점을 중심으로 집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된 단어나 상징 ─ 종교 문구, 역사적 슬로건, 시각적 이미지 ─ 을 활용함으로써 충성을 부추긴다.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에서 오스만 전투의 기억을 환기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런 언어 구사는 점차 집단의 독자적 성격을 강화하면서 사회에서 긴장을 조성하며, 만약 이 파벌이 집권하면 흔히 지위를 이용해서 경쟁 파벌을 탄압한다. 정당한 법 절차를 잠식하고 공공연한 전투성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경쟁 집단들 사이에 공포와 불신이 커지면서 긴장이 한층 높아지고, 각 집단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력행사를 고려하게 된다. 이윽고 이런 분열이 정치의 장에서도 나타난다. 37)


종족적 민족주의, 그리고 파벌을 통한 표출은 한 나라에서 스스로 강화되지 않는다. 한 사회가 정체성 구분선을 따라 분열되려면 대변자가 필요하다. 특정 집단의 이름으로 기꺼이 차별을 호소하고 차별 정책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대개 공직에 오르거나 그런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쟁탈전을 지지할 유권자 집단을 가두려는 방편으로 공포감을 자극하고 부추긴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종족 사업가ethnic entrepreneur〉가 그것이다. 이 용어는 1990년대에 밀로셰비치나 투지만 같은 인물들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그 후에 그런 현상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있다. 이 전쟁 선동가들은 대개 권력을 잃을 위험이 아주 높거나 최근에 잃은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정체성에 기반한 민족주의를 부추겨 폭력과 혼돈의 씨앗을 뿌리면서 연구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부활을 위한 도박〉 전략을 활용한다. 41-2)


흥미롭게도, 보통 시민들은 대개 종족 사업가들에 대해 분명히 안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의제를 갖고 있고 전부 진실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기 삶에 위협이 고조된다고 느끼면 기꺼이 지지를 보낸다. 시민들은 만약 아무리 희박할지언정 반대파가 자신들을 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되면, 아무리 악랄한 사람이더라도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지도자에게 의지하게 마련이다. 투지만이 크로아티아 문장을 채택하고 크로아티아 정부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숙청하자, 크라이나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밀로셰비치의 경고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해석했다. 마찬가지로,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지배하는 유고슬라비아군에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을 때, 크로아티아인들은 투지만이 주창한 바와 같이 자신들의 생활 방식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양 파벌 모두 결국 자신들을 구하려면 폭력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43-4)


3 지위 상실이 가져온 암울한 결과


파벌화된 아노크라시에 불만을 품은 채 살아가는 종족 집단은 어디에나 많으며, 대부분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티오피아에는 80개가 넘는 종족 집단이 있고 주요 종교만 최소 5개에 이른다. 하지만 오직 소수만이 조직을 이루어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역시 세계에서 종족적으로 가장 다양한 나라로 손꼽힌다. 360개가 넘는 부족과 종족-언어 집단이 있지만, 지금까지 4개 집단 ─ 암본인, 동티모르인, 아체인, 파푸아인 ─ 만이 무기를 들었다. 학자들이 처음 발견한 한 가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실인데, 폭력적으로 바뀐 집단들이 대체로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은 투표권이 제한되고 정부 공직에 거의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 정치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하지만 학자들이 발견한 폭력의 가장 유력한 결정 요인은 한 집단의 정치적 지위의 궤적이다. 일단 권력을 잡았다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특히 싸움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54)


정치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지위 격하downgrading〉라고 지칭한다. 지위 격하는 정치적, 인구학적 사실인 만큼이나 심리적 현실이기도 하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기독교도든 무슬림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지위가 격하된 파벌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집단의 성원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지위가 상실됨을 느끼고 그 결과 원한을 품는다는 사실이다. 지위 격하는 단순한 정치적 패배가 아니라 지위가 역전된 상황인 것이다. 지배적인 집단이 어느 순간 누구의 언어를 사용하고, 누구의 법을 집행하며, 누구의 문화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옮겨 간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의 가난이나 실업, 차별을 참을 수 있다. 조잡한 학교나 열악한 병원, 방치된 기반 시설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참지 못한다. 원래 자기 것이라고 믿는 장소에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은 못 참는다. 21세기에 가장 위험한 파벌은 한때 지배적이었으나 쇠퇴에 직면한 집단이다. 54-6)


전문가들은 전쟁을 벌이는, 지위가 격하된 많은 종족 집단이 〈토박이sons of the soil〉 유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토박이〉는 한 지역의 원주민이거나 그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태어난 땅의 정당한 상속자로서 특별한 혜택과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집단이 지배적인 것은 그들이 다수 지위를 차지하거나 처음에 그 영토에 거주하거나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토착민〉이라고 여기며, 나중에 그 땅에 정착하거나 지역의 주요 언어를 모어로 사용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외부자〉라고 규정한다. 1800년 이래 벌어진 내전을 다룬 한 연구에 따르면, 〈토박이〉 범주에 해당하는 종족 집단이 반란을 일으키는 비율은 약 60퍼센트로, 다른 범주 ─ 28퍼센트 ─ 에 비해 두 배 정도 높았다. 이런 집단이 위험한 이유는 저항 운동을 조직하는 역량이 강하고 불만을 느끼는 정도가 압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내전을 촉발하는 주체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요인이다. 56-7)


4 희망이 사라질 때


1922년 당시 북부에 살던 아일랜드 가톨릭교인들은 나머지 아일랜드 지역과 더불어 독립을 얻지 못했다. 영국은 아일랜드 자유국을 만들었지만, 북부의 6개 주는 영국의 통제하에 남겨 두었다. 설상가상으로 웨스트민스터 당국은 북아일랜드의 경계선을 수정해서 개신교인들 ─ 스스로 영국인이라고 생각한 이들 ─ 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보장했다. 결국 가톨릭교인이 아니라 개신교인이 새로 구성된 반자치 정부를 지배하면서 교육과 법률, 공공사업, 산업, 농업 등을 통제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당국은 개신교인들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한 그들 마음대로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북부의 가톨릭교인들은 아일랜드의 나머지 지역과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기네 땅에서 소수자가 되었다. 세기 중반에 이르러 북아일랜드에는 내전의 밑바탕이 되는 조건이 두루 존재하게 되었다. 부분적 민주주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경쟁하는 파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정치에서 배제된 토착 주민 등이 그것이다. 64-5)


가톨릭교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북아일랜드에서 공정한 정치적 대표권과 평등한 대우를 얻기 위해 수십 년간 평화롭게 시위를 벌인 바 있었다. 편지를 쓰고, 시민권 협회를 결성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야외 집회와 연좌시위를 하고, 1968년에는 벨파스트에 있는 북아일랜드 의회를 점거하기도 했다. 1969년 1월에는 미국의 셀마-몽고메리 행진을 본보기로 삼아 벨파스트에서 데리까지 〈대행진〉을 조직했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은 내내 타협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국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가톨릭교인들은 민주적인 런던 정부가 북아일랜드 개신교인들의 최악의 경향을 제어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지역 개신교인들이 완강하게 자신들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은 알았지만, 영국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파벌적이고 유사 민주적인 북아일랜드 지도자들보다는 그래도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군인들이 반란 진압 전술을 구사하자 진실이 드러났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가톨릭교인들은 희망을 잃었다. 67)


시위 자체는 내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실 시위는 기본적으로 희망에서 우러나는 행동이다. 일반 시민이 집을 나와 종이와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가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는 것은 정부가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들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정부가 자신들에게 총을 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 너무 무서워서 행동에 나서지 못하거나 ─ 결의를 불태우며 나가게 마련이다. 휴대 전화 하나만 달랑 들고서 거리로 나가는 것은 낙관적인 행동이다. 체제가 스스로 교정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위가 실패로 돌아가면 희망이 사라지고 폭력의 구실이 생긴다. 대개 오랫동안 평화 시위가 벌어지고 난 뒤 내전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위자들 스스로가 병사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다. 불만을 품은 집단의 호전적인 성원들이 이제 다른 선택지가 전혀 없다고 느끼면서 무력 저항을 조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1)


5 촉매


2010년 이래 해마다 세계는 민주주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나라보다 내려가는 나라가 더 많은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새롭게 민주화된 나라들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의 민주주의를 자랑하던 부유한 자유주의 국가들에서도 이런 퇴보가 나타난다. 적어도 한동안 아프리카는 이런 추세에서 두드러진 예외였다. 지난 10년의 대부분 동안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민주주의가 축소되지 않고 계속 확대된 유일한 지역이었다.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 나라들은 인터넷 사용률이 매우 낮았다. 아프리카에서 인터넷 접속이 늘어난 때는 2014년인데, 당시 소셜 미디어가 주요한 소통 수단이었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는 2015년부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진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돌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018년 이후 새롭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충돌은 계속 고조되었다. 한 분석가에 따르면, 이는 〈페이스북이 지배하는 인터넷 접속이 급증하는 시기〉와 일치했다. 82-3)


문제는 소셜 미디어가 추구하는 사업 모델이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구글, 트위터 같은 정보 기술 기업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최대한 오랫동안 자사 플랫폼에 잡아 두어야 ─ 또는 그들의 표현대로 〈관여하게engaged〉 만들어야 ─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행동 알고리즘은 스스로 강화하면서 이용자들을 위험한 경로로 인도하는 기이한 정보 창고를 만들어 냈다. 음모론과 반쪽 진실half-truth,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극단주의자들로 나아가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무서운 이유는 바론 이런 〈관여〉라는 사업 모델 때문이다. 현재의 모델은 자신이 퍼뜨리는 정보가 많은 관심을 끌기만 하면 진실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날 뉴스와 정보의 새로운 게이트 키퍼 노릇을 담당하는 빅테크 기업들은 누가 자사의 플랫폼을 사용하는지, 또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제한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정보를 최대한 널리 퍼뜨리는 것이 빅테크 주주들에게는 이익이 된다. 84-6)


현대사에서 반민주적 성향의 포퓰리스트가 집권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퇴보를 겪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전에는 군 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독재가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은 유권자들 스스로가 독재를 탄생시킨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는 소셜 미디어 덕분에 후보자들이 하나의 정부 형태로서 민주주의에 관해 시민들이 가질 법한 의심을 키우거나 편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짜 정보 캠페인을 활용해서 제도를 공격하면서 대의 정부와 자유 언론, 독립적 사법부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훼손하고, 관용과 다원주의에 대한 지지를 갉아먹을 수 있다. 또한 가짜 정보를 활용해서 공포를 부추김으로써 법질서를 강조하는 극우파 후보가 당선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짜 정보를 활용해서 부정 선거를 주장하고 최소한 일부 유권자들에게 선거 결과가 뒤집어졌다고 설득하면서 시민들이 선거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 수 있다. 89)


6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The Federalist Papers』의 저자들에 따르면, 공화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통제를 하고 싶어 안달인 국내의 집단이었다. 이런 파벌의 지도자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른 시민들의 권리나 공동체의 항구적이고 종합적인 이익을 거스르면서35 권력을 굳히고 공공선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드높일 것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커다란 위협이라고 본 파벌 유형은 계급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들은 재산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부를 지키고 부의 재분배를 막기 위해 정치권력을 집중시킬 것을 우려했다. 매디슨의 삼권 분립 ─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 모델은 이런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18세기 지도자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이 우려한 〈파벌화〉가 계급이 아니라 종족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1789년에는 적어도 연방 차원에서는 미국의 유권자가 전부 백인 ─ 그리고 전부 남성 ─ 이었기 때문이다. 106)


정체성 기반 정치로의 변화가 대거 시작된 때는 1960년대 중반으로, 당시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은 민권 법안을 지지함으로써 남부 백인들을 배신했다. 1964년 존슨이 민권 법안을 내놓자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민주당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존슨과 대결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그는 민권 법안에 반대했다)는 남북 전쟁 재건기 이래 최남부에서 선거인단 표를 싹쓸이한 첫 번째 공화당 후보였다. 이후 수십 년간 다른 정체성의 표지들이 정치화되었다. 종교가 그다음이었다. 공화당 엘리트들은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점점 결집하는 신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점점 더 낙태 반대pro-life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기독교 우파와 관련된 정치 단체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의 지도자인 제리 폴웰 시니어Jerry Falwell Sr. 같은 사람들이 점차 득세하게 되었다. 21세기 초에 이르면, 기독교인이나 복음주의자라면 공화당에 투표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06-7)


한 나라의 파벌주의 수준은 5점 기준으로 평가하는데, 5점이 가장 파벌주의가 약하고 1점이 가장 강하며, 3점은 확실히 위험 구간이 된다. 2016년 미국은 3점 ─ 파벌화됨 ─ 으로 떨어졌고, 지금도 우크라이나, 이라크와 나란히 그 점수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 또한 2016년에 3점으로 떨어졌다. 이 정도 수준의 파벌주의는 과거에 두 차례뿐이었다. 남부 민주당이 비타협으로 일관하면서 비백인을 법의 동등한 보호에서 배제한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리고 민권 시위와 베트남 전쟁, 반체제 운동을 진압하는 데 몰두한 부패한 정부로 나라 전체가 요동치던 1960년대 중반에 그러했다. 두 시기 모두 미국의 정당들은 나라의 미래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나라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나라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 집단이 점점 더 과격해지고, 초법적 조치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자신의 전망을 폭력적으로 추구한다. 오늘날 공화당은 약탈적 파벌처럼 행동하고 있다. 109-10)


오늘날 미국은 어디쯤 와 있을까? 미국은 아노크라시의 문턱에 선 파벌화된 나라로, 빠른 속도로 공공연한 반란 단계로 접근하는 중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내전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의사당 습격 사건을 계기로 이제 정부는 극우파 단체들이 미국과 민주주의에 제기하는 위협을 간단히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공격에 가담한 많은 투사 중 일부는 실전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 의사당 습격이 재연되거나 어떤 양상의 일부가 될지를 알지 못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인들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책임인지 의문을 던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혼돈을 틈타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얻지 못한 것을 폭력을 통해 획득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공공연한 반란 단계에 정말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지금 당장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의 극단주의자들이 점점 더 조직화되고 위험해지고 완강해지며,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118)


7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테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그 공격 대상 ─ 시민들 ─ 이 정치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테러 공격을 막지 못하는 정치인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수 있다. 아일랜드 공화군, 하마스, 타밀 호랑이 등은 모두 일반 시민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길수록 정부가 평화를 대가로 테러리스트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극단주의자들이 이득을 얻는다. 국가 지도자로 하여금 극단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정책 ─ 총기 규제 폐지, 엄격한 이민 정책 추진 ─ 을 추구하도록 설득하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들과 가까운 극단적 지도자를 선출하게끔 유권자들을 설득한다. 테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굉장히 쉽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감시가 적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 단체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것을 가로막는 헌법적 제약이 많기 때문에 외국 테러리스트들보다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그들은 미국인들에게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123-4)


극단주의자들은 대개 몇 가지 고전적 문서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떠받치는 영감을 발견해 낸다. 미국에는 연방 수사국이 〈인종주의 우파의 바이블〉이라고 지칭한 『터너의 일기The Turner Diaries』가 있다. 아리아인 혁명이 일어나 미국 정부를 전복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1978년에 네오나치 단체 민족 동맹을 이끈 윌리엄 피어스William Pierce가 쓴 이 이야기는 인종적 원한을 인종 전쟁으로 끌어올리는 각본을 제공하면서 어떻게 비주류 활동가 무리가 연방 정부를 무너뜨리고 다른 백인들을 〈각성시켜〉 자신들의 대의로 이끄는지 ─ 테러 공격, 대량 살상 폭탄 ─ 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터너의 일기』는 극우 테러리즘을 직접적으로 고무한 바 있다. 이 책에는 연방 수사국 본부 폭탄 공격과 의사당 건물 습격, 그리고 〈인종 배반자들〉 ─ 정치인, 변호사, TV 뉴스 진행자, 판사, 교사, 목사 등 ─ 을 교수대에 목매달아 죽이는 〈밧줄의 날〉 제정 등에 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124-5)


오늘날 미국의 극단주의자들은 이른바 가속주의accelerationism를 신봉한다. 현대 사회는 구제할 길이 없으며 그 종말을 한시바삐 앞당겨야만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묵시록적 믿음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미국을 반란 단계에서 위로 끌어올리고 또한 어쩌면 종족 청소로 이끌기 위해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다. 가속주의 신봉자들은 일반적인 수단 ─ 집회, 우파 정치인 선출 ─ 으로는 충분한 진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 변화를 재촉해야 한다고 믿는다. 테러리즘 전문가 맥냅이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충돌을 유발하기 위해 코로나 록다운부터 인종 정의를 위한 시위에 이르기까지 온갖 구실을 찾는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런 행동을 계기로 폭력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어 온건한 시민들 ─ 정부의 억압과 사회적 불의를 눈뜨고 지켜보는 시민들 ─ 도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에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대규모 충돌이 필요하다고 믿는 극우 단체가 수백 개 존재한다. 128-9, 132)


반란자들이 강력한 민주주의에 대항해서 사용하는 전략은 무수히 많다. 한 가지는 본질적으로 소모전으로, 사람과 공공 기반 시설을 겨냥한 공격을 꾸준히 이어 가는 방식이다. 또 다른 전략은 협박이다. 중앙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다면, 폭력을 행사해서 사람들을 직접 굴종으로 몰아갈 수 있다. 또 다른 테러 전략은 〈더 세게 지르기outbidding〉이다. 한 전투적 집단이 지배권을 공고히 굳히기 위해 다른 집단들과 경쟁할 때 이 전술을 구사한다. 극단적 이데올로기와 활동 방식은 더 헌신적인 전투 부대와 단호한 지지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으며, 대의에 헌신하지 않는 이들을 솎아 내면서 빈약한 성과, 편 바꾸기, 배신 등의 문제를 줄인다. 마지막 테러 전략은 〈망치기spoiling〉다. 온건한 집단들이 새로운 종족 국가를 세우려는 원대한 목표를 위태롭게 만들고 뒤엎으려 할 때, 테러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전술이다. 온건한 반군 집단과 정부의 관계가 개선되어 평화 협정이 임박한 듯 보일 때 보통 이 전략이 작동한다. 133-5)


# 그레고리 스탠턴Gregory Stanton이 쓴 문서 「제노사이드의 10단계The Ten Stages of Genocide」

1. 분류 : 권력을 쥔 한 정체성 집단이 시민들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2. 상징화 : 그들 자신이나 다른 집단을 가리키는 일정한 표식을 도입한다.

3. 차별 : 법률이나 관습을 동원해서 다른 이들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억압한다.

4. 비인간화 : 표적이 된 소수자를 범죄자나 인간 이하로 폄하한다.

5. 조직화 : 군대나 민병대를 모아서 다른 집단을 근절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 양극화 : 선전을 확대하면서 표적 집단을 더욱 악마화하고 분리한다.

7. 준비 : 군대를 조직하고, 사람들에게 피해자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주입한다.

8. 박해 : 본격적이고 집단적으로 표적 집단을 탄압한다.

9. 절멸 : 군대와 법집행 기관의 도움을 받아 표적 집단을 완전히 말살한다.

10. 부정 : 가해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부정한다.


흔히들 종족 청소가 증오에 의해 추동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증오는 존재하지만 종족 청소를 부추기는 진짜 요인은 공포다. 자신이 위협받고 취약하다는 공포 말이다. 폭력 사업가들은 이런 불안을 활용하면서 적이 자기를 해치기 전에 먼저 적을 해치라는 신호를 보내는 생존 본능에 편승한다. 이런 실존적 공포가 국내의 군비 경쟁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한 집단이 불안을 느끼게 되면 안전을 확보하고자 민병대를 결성하고 무기를 사들인다. 그러면 경쟁 집단도 불안을 느끼면서 똑같이 민병대를 결성하고 무기를 사들인다. 또다시 앞의 집단은 훨씬 더 많은 무장을 갖출 수밖에 없다. 양쪽 모두 자신들이 방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믿지만, 그 결과 한층 더 불안감이 조성되어 언제든 전쟁으로 이어지는 나선 운동이 촉발될 수 있다. 사람들이 무장을 갖추면 이런 식의 안전 딜레마가 생겨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국의 총기 판매는 2020년에 역대 최고를 기록해서 1월에서 10월 사이에 1천7백만 정이 팔렸다. 137-8)


8 내전을 예방하기


1986년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억압을 확대하자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들 ─ 미국, 유럽 공동체, 일본 ─ 이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미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는데, 1989년 비타협적인 P. W. 보타P. W. Botha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F. W. 데클레르크F. W. de Klerk는 중요한 계산을 했다. 국가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집권당인 국민당 소속이긴 했지만 데클레르크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경제가 붕괴하면 백인이 쌓아 둔 부도 붕괴할 터였다. 공화국 인구의 4분의 3은 흑인이었다. 백인 통치를 계속 고집하면 내전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는데, 백인이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데클레르크는 내전 대신 아프리카 민족 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를 비롯한 흑인 해방 정당에 대해 29년간 이어진 금지를 철폐하고, 언론 자유를 복원했으며, 아프리카 민족 회의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포함한 정치범을 석방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내전 직전에 멈춰설 수 있었다. 141)


198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오늘날의 미국보다 내전에 더 가까운 상태였다. 백인이 흑인을 억누르기 위해 만든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는 1965년까지 미국에 존재한 유사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이 백인과 결혼하거나, 백인 구역에 사업체를 설립하거나, 〈백인 전용〉 표기가 된 해변이나 병원, 공원에 가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노크라시 역사도 현대 미국보다 훨씬 길어서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미국은 중간 구간에 잠깐 머물렀을 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또한 스스로 〈토박이〉라고 생각하는 주요 집단이 두 개 있었다. 흑인과 백인 모두 이 땅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한 집단만이 그런 주장을 한다(주변으로 밀려나고 상대적으로 인구도 적은 원주민은 예외다). 1980년대 후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질 위협에 비하면 오늘날 미국의 위험성은 크지 않은데, 그래도 어쨌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전쟁을 피했다. 142)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를 보면 지도자 ─ 기업 지도자, 정치 지도자, 반대파 지도자 ─ 의 힘이 떠오른다. 지도자는 위험에 직면해서 타협을 할 수 있고, 또는 싸움을 선택할 수 있다. 데클레르크와 만델라는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만델라를 비롯한 흑인 지도자들은 백인들이 상당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조건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데클레르크는 흑인에게 완전한 시민권과 과반수의 정부 장악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보타는 데클레르크처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무력 저항에 찬성했던 만델라는 종족적 폭력을 옹호할 수 있었다. 또는 종족 사업가가 되어 내전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흑인 동포들의 분노와 원한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치유와 통합, 평화를 설파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더 많은 충돌과 유혈 사태를 겪지 않게 만든 것은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이었다. 1993년 데클레르크와 만델라는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42)


한 나라의 거버넌스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경제 개선보다 더욱 중요하다. 부유한 나라가 경제 번영에 걸맞는 수준에 비해 정부가 좋지 않으면, 〈이후 시기에 내전이 발발할 위험성이 크게 증가했다〉. 따라서 미국 같은 부유한 나라의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하게 되면 설령 1인당 소득이 바뀌지 않더라도 내전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어떤 특징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까? 피어런은 〈좋은 일은 대개 동반하는 경향이 있지만〉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8 법치(법적 절차의 평등하고 공정한 적용), 발언권과 책임성(시민들이 정부를 선택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정도, 그리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유능한 정부(공공 서비스의 질과 행정 조직의 질과 독립성)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도와 정치 제도가 탄탄하고 정당성과 책임성이 있는 정도를 반영한다. 거버넌스가 개선되면 이후에 전쟁이 벌어질 위험성이 줄어든다. 144-5)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내전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파벌화다. 시민들이 종족이나 종교, 지리적 구분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정당들이 약탈적으로 바뀌어 경쟁자를 배제하고 주로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실행할 때 파벌화가 완성된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만큼 파벌화를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것은 없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본보기이자 자유의 횃불이지만, 우리는 돈과 극단주의가 우리 정치에 침투하게 방치했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적 제도와 사회를 강화할 수 있다. 우리는 뉴딜을 통해 이런 일을 해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사람들을 다시 일하게 하고, 많은 미국인을 빈곤에서 구했으며, 경제 체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믿음을 회복시키면서 희망을 되살렸다. 이제 다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자기 차별적이고 약탈적인 파벌주의의 경로에서 벗어나 우리 나라의 장기적인 건전성에 대한 희망을 회복시키기 위해 공적 담론을 되찾고 중재해야 한다. 154,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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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왜 아프리카 원조는 작동하지 않는가 - 아프리카 개발협력의 혁신적 전략 10가지
로버트 칼데리시 지음, 이현정 옮김, 허성용 해제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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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_ 아프리카는 무엇이 다른가


1장. 변명거리 찾기


아프리카 문제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목되는 것이 ‘국제경제가 아프리카에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규모 농업 생산자들이 국제시장에서 불리하고 자국 농민들을 보호하는 서구 국가들의 정책이 아프리카의 잠재적 수출을 제한하거나 (특히 목화의 경우) 국제가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부유한 국가들의 경쟁자로 인해 입지를 잃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공급자들에게 시장을 내주어왔다.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장 큰 자산인 농업 분야가 과도한 과세 및 여타 잘못된 정책의 도입 탓에 꾸준히 쇠퇴하는 상황을 방관해왔다. 세계경제에서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아프리카 각 정부들은 경제에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는 대신 생산자에게 족쇄를 채워버린 것이다. 사실 국제경제는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아프리카에 우대 조치를 취해왔다. 부국富國들은 수십 년 동안 농산물을 포함한 많은 아프리카 제품에 시장을 개방했다. 23)


부유한 나라들이 농산물 시장을 더욱 개방해야 한다는 국제적 압력은 결국 열대 지방 농부들의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겠지만,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아프리카 국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생산 효율성을 높이려면 상당한 개혁과 투자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효율성’은 아프리카의 많은 곳에서 금기어로 여겨져왔다. (악당들로 간주되는) 세계은행과 IMF로부터 20년 넘게 받은 조언과 강압적인 정책을 상기시키는 탓이다. 이 두 기구는 아프리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적이다. 아프리카인들처럼 세계화를 비판하는 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세계은행을 비난하고 있으며 몇몇은 극단적 용어를 사용했다.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정적政敵들을 살해했으며, 야당 우세 지역의 사람들을 굶주리게 한 잔인한 독재자다. 그러나 IMF와 세계은행에 비하자면 그가 아프리카에 끼친 피해는 경미하다.” 24)


아프리카 정부들은 왜 정부가 국제기구와 협상하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절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정부들과 일부 민간기업들은 개혁에 믿음이 없거나, 대충 동의했거나, 혹은 원조 관계자들이 방심할 경우 개혁을 깎아내렸다. 그 결과 ‘위기’는 그들 자신이 아닌 타인 탓에 초래된 것으로 보였다. 전체 개혁 과정이 틀어진 것도 대개는 아프리카 정부들이 국민에게 상황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가 세계시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 국가예산이 필수 자재와 물자 확보는커녕 공무원들의 급여 지급도 간신히 감당하는 수준임을 아는 아프리카인은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이 목격한 것은 사회기반시설과 공공 서비스의 붕괴뿐이었다. 그들은 자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빈곤을 줄이겠다고 말하지만 매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듯한 외부 기구들은 더욱 신뢰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생산 및 유통 비용이 높고 투자 환경이 열악하다는 근본적 문제는 아프리카를 지원하려는 서구의 서툰 노력에 가려졌다. 26)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인의 사고방식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해도 그 상처가 아프리카 대륙의 물질적 발전을 방해하는 원인인지는 의문이다. 노예제도는 영국에서는 1833년에, 프랑스 영토에서는 1858년에 폐지되었다. 그보다 최근인 제2차 세계대전 때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다른 나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말살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상처가 생존자들을 덜 기업가적이고 자신감도 낮아지게 했다는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감한 주제이긴 하지만 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총리이자 현대 아프리카에 대한 계몽적 도서를 여러 권 저술한 장 폴 응구판데Jean-Paul Ngoupandé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예무역은 실제로 존재했고, 많은 이가 우리의 어려움이 노예무역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 독립을 실현하면서 양호하게 출범한 코트디부아르 같은 나라에서의 쿠데타, 즉 정치적 혼란이 노예무역 탓이라 여기지 않는다. 이는 현 아프리카 사람들의 책임이다.” 27-8)


아프리카의 부채 부담은 어떠할까? 부채는 더딘 아프리카 발전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증상이다. 아프리카가 다른 대륙보다 덜 현명한 방법으로 돈을 빌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신 아프리카의 부채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연간 700억 달러의 수출 소득 손실이다. 게다가 세계 사회는 25년 이상 아프리카의 빚을 탕감해왔다. 부채 탕감이야 새로울 바 없지만 순수 탕감의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1998년 서방 국가들은 아프리카가 가진 500억 달러의 부채를 탕감해주기로 합의했다. 전 세계의 후한 인심의 덕을 보는 것은 국민이 아닌 정부다. 부채 탕감에도 비용이 든다. 일부 국제운동가들은 채무면제가 비교적 힘든 일이 아니며 아프리카 정부들이 부채를 상환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방 정부들 또한 과거의 차관을 회수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부채감소에 충당되는 돈은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3)


2장. 다양한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24개국의 경제 정책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구다. 내 업무는 회원국들의 대외원조 절차를 단순화하고 상호조화시킴으로써 개발도상국의 행정 부담을 완화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조국들인 미국, 일본, 독일은 절차의 단순화에 무관심했다. 이들 국가는 자신들의 관대한 원조에도 지켜야 할 ‘조건들’이 있다는 점을 국회나 여론에 보여주고 싶어 했고, 저마다 자신의 양식과 규정을 빈틈없이 지키려 했다. 공동원조의 표준과 절차를 정하고 지켰다면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의 서류 업무는 상당히 줄어들었겠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로 남아 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규칙은 원조 예산을 늘리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이기도 했다. 나는 곧 현장에서 마주했던 구체적인 문제들을 놓치기 시작했고, 그래서 12개월이 채 지나기 전에 워싱턴 D.C.에 있는 세계은행에 탄자니아 차관 담당자로 합류했다. 43)


혹독한 열대우림 기후, 토양, 질병 등 아프리카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동일하게 갖고 있는데도 인도네시아는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기적’의 선두에 있지 않던 이 나라는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정부기관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외국의 기술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발전은 국제개발의 성공 사례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지 않는 나라 중 하나이다. 그 발전이 권위주의적인 정권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고, 인도네시아 경제의 바탕을 이루는 부정부패와 연고주의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정책 입안자들은 정부 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현명하게 자금을 빌렸다가 제때 상환하며, 새로운 도전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등 ‘좋은 살림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들 전략의 핵심은 석유 수입의 대부분을 지역개발 및 소득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에 현명하게 투자했다는 것이다. 43-4)


3장. 권력을 가진 악당들


아프리카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좋은 정부가 한 번도 수립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파트너’ 또는 ‘후원국’이 된 과거 아프리카 식민통치국들은 아프리카 독립 후 초기 몇 년 동안 아프리카가 선거나 다당제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서구인이 갖는 정치적 권리들을 아프리카 사람은 갖지 말아야 한다는 그러한 주장은 당시의 젊은 지도자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 중 많은 이가 전성기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케냐의 톰 음보야Tom Mboya의 이상주의, 선명성, 약속들은 1969년 그가 암살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부르키나파소의 토머스 상카라Thomas Sankara와 같은 이들 역시 어려운 현실에 맞서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볼 기회를 갖기도 전에 살해되었다. 그 이상주의자들도 살아 있었다면 본래 품었던 뜻과는 달리 일당제 국가를 세웠을 수도 있었겠으나 우리로선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이들은 그렇게 했다. 57-8)


아주 작은 진보적 변화까지 알아차리는 데 익숙한 아프리카 전문가들은 1991년 베냉이 국민투표로 정권을 교체한 첫 번째 아프리카 국가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런 예가 희소하다는 점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지난 수십 년간 대부분의 아프리카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발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대륙 인구의 절반은 네 개 국가가 차지한다. 1억 2,700만 명의 나이지리아, 6,400만 명의 에티오피아, 5,100만 명의 콩고민주공화국, 4,300만 명의 남아공이다. 앞의 3개국 인구를 합하면 2억 5,000만 명가량인데, 그들은 삶의 대부분 동안 정치적 혹한기 또는 명백한 사회적 혼란기를 겪었다. 독립 이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누린 나라는 인구가 각각 200만 명, 100만 명인 보츠와나와 모리셔스 두 소국뿐이다. 이 두 나라와 남아공은 1980년부터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국가경쟁력지수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등장한 아프리카 국가다. 이 지수는 냉철한 투자자들에게 투자 가이드 역할을 한다. 59-60)


4장. 문화, 부패, 정당성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에 서구적 윤리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프리카인들이 삶에 접근하는 방식은 반투인Bantu의 고사성어인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이런 구분들이 구시대적이고 논란의 여지를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아프리카인들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가치를 주장한다. 그중 하나가 마을 단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관대함과 환대다. 전근대적 문화에는 놀라운 가치가 있고 그중 일부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고귀한 야만인의 신화를 믿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관대함과 같은 일부 전통 가치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게으름은 악덕으로 여겨졌기에 마을 사람들은 게으름뱅이를 돕지 않고 추방했다. 또한 나눔 문화의 범위는 부족 단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아프리카인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76-7)


또 하나의 뚜렷한 아프리카의 가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아프리카 문화는 가족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개인은 부모나 형제자매에 대한 언급 없이 완전해질 수 없다. 전반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눈앞의 상황에 몰두한다. 거의 모든 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의 삶을 즐기는 편이다. 가족과 즐거움 외에 노인 공경 또한 아프리카인에겐 매우 중요하다. 사실 아프리카인들은 권위 있는 연장자들을 극도로 존경한다. 지혜와 경험이 높이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영향력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리더십은 지혜와 경험 대신 무지와 부정직, 완고함을 특징으로 한다. 결함 있는 상사에 대한 인내심은 도시화와 빈곤의 압박으로 무너지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은 거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대개는 그룹에서 더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이 먼저 의견을 말하기를 기다리거나,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중개자를 활용하는 3각 대화에 의존한다. 77-8)


누군가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아프리카인의 특징이 1950~1960년대의 이탈리아인이나 스페인인의 특징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족관계, 삶에 대한 사랑, 나이와 권위에 대한 존중은 경제발전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가치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의 특징 중에는 라틴계 사람들을 압도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 가족우선주의는 아프리카에서 압제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자발적으로 가족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잔혹한 방식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또 친척 중 누군가 성공할 경우 그리 큰 성공이 아니어도 다른 친척들은 종종 그 성취의 열매를 나누어 받겠다고 고집한다. 이는 1960년대에 이미 사회적 관습이 되어 있었다. 한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 배척당하고, 씨족에서 추방되며, 끔찍할 정도로 버림받는 상태에 처한다.” 심지어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도 대륙의 쇠퇴에 기여했다. 아프리카인들은 독재와 권위 있는 선출직 공무원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79)


아프리카인들의 종교적 신념 또한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다. 순수한 종교 외에 사악한 종교도 그들을 넘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들은 대개 숙명론적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들의 세계관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사건 통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한다. 많은 부모가 아이가 숨을 거둬도 그 원인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거두어가셨다.”라는 문구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이러한 포용성은 아프리카인들이 현세에서 가혹한 현실에 도전할 가능성을 낮춘다. 사실상 그들의 믿음이 사회정의 구현의 의지를 꺾는 것이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처음으로 프랑스를 방문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시 조상의 나라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것은 수 세기 동안 억압받았던 분노, 야망, 그리고 순수한 인간의 용기일 것이다. 80)


역설적이게도 부패의 뿌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강력한 가족 유대에 원인이 있다. 가족의 압력이 너무 만연하여 아프리카인들은 그것을 농담거리로 삼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가족으로부터 도망가기도 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장관과 고위 공무원들이 있는데, 그들의 문 밖에는 심지어 주말에도 불만을 토로하거나 물질적 지원을 받으려는 사촌, 지인, 유권자가 줄을 서 있다. 아프리카에서 부패가 늘어난 것은 명백한 순수함 때문이다. 이는 변명이나 용납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부패는 아프리카의 매우 고질적인 문제이므로 세계는 이제 아프리카인을 돕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권력이나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격변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 심지어 야당들도 자신들이 악용할 차례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을 별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반부패 캠페인의 목적은 홍보일 뿐이고 홍보 대상은 대부분 외국인이다. 82-5)


아프리카인의 특성이 그들을 운명론자로 만들고 부패가 그들의 사회지도층을 서로 꽁꽁 엮는다면, 서구사회가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는 아프리카의 불행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교정이 필요한 서구의 인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이자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가난해진 아프리카에 대한 일반적 동정심이다. 자신의 복지가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실업자들을 실직 상태에 있다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아프리카에 대한 비판을 꺼린다. 교정이 필요한 두 번째 인식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과거 식민 국가들이 갖는 역사적 또는 인종적 죄책감이다. 이런 나라의 시민들은 식민지 시대가 아프리카의 일부 ‘황금기’를 파괴했으며 인위적인 국경을 만들어 독립정부가 지속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별 이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서구의 이해관계가 아프리카에 가한 피해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고 있다. 85)


세 번째로 교정이 필요한 인식은 아프리카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으며 많은 문제를 훌륭히 처리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구가 아프리카에서 배울 것이 많고, 문제는 오히려 유럽과 북미에 많다고 믿는다. 아프리카인들이 균형 잡힌 시각, 공동체 의식, 회복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네 번째로 정치적 교정이 필요한 인식은 세계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국제무역이 어떻게 가난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국가를 도울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세계 경제를 도덕적 전쟁터로 묘사한다. 그들에 따르면 기업의 이윤은 ‘피 묻은 돈bloody money’이고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는 ‘전쟁 기계’이며, 부유한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세계 전쟁’을 벌이고 있다. 표현 형태가 세속적이든 극단적이든 서구의 이러한 감수성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도록 허용한다. 85-6)


2부_ 최전방 이야기


5장. 탄자니아: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현대 아프리카의 초창기 영국의 탕가니카 보호령과 이슬람 섬 국가인 잔지바르가 합쳐져 1964년에 탄생한 탄자니아는 무엇보다 자립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 실험과 이를 주도한 인물은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에겐 높은 이상, 강한 공직자 의식, 자신을 표현하는 재능, 목표 달성에 대한 완고함이 있었다. 이런 특징들이 가장 잘 표출된 것이 1967년의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이다. 아루샤 선언은 원조기구들에게 최소한 탄자니아만큼은 스스로 중장기 개발을 계획하고 있으며 국제 현실에 맞게 속도나 목표를 조정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우자마아Ujamaa’ 또는 ‘가족주의familyhood’라 불리는 니에레레식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아프리카의 연대와 기독교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탄자니아는 자립을 고집한 덕에 매우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니에레레의 예상대로 외부 지원은 항상 부족했다. 94-6)


아루샤 선언 후 10년이 지난 1977년, 니에레레는 원조사업 진행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내놓았다. 1967년엔 탄자니아 목화솜 대부분이 천으로 만들어지지 못했으나 1975년까지 여덟 개의 방직 공장이 생겨났고, 초등학교 입학률은 거의 두 배로 뛰었으며, 인구의 약 3분의 1인 500만 명 이상이 성인 문해력 교육을 받는 중이고, 농촌 보건소의 수는 세 배 이상 증가했으며, 300만 명의 시골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이용하게 되었고, 개인 소득의 격차가 줄어들었으며, 마을화 프로그램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루샤 선언의 핵심인 농업 부문은 가장 낮은 수익을 기록했다. 식량생산 증가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고 정부가 정한 농작물 가격은 너무 낮았다. 글로벌 경제 상황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입 가격은 높고 수출 가격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탄자니아는 비효율적이었다. 국영기업은 부의 창출은커녕 흡수를 하고 있었고 생산성은 하락 중이었다. 97-8)


니에레레는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빠른 정부 조직의 확대는 탄자니아 및 아프리카 전역을 예산 부족의 고통에 빠뜨릴 것임을 깨달았다. 개발 예산의 60퍼센트는 해외원조로 이루어졌는데 그가 보기에 이 수치는 지나치게 높은 것이었다. 게다가 탄자니아의 부정부패는 처음에 억제되는 듯 보였으나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탄자니아는 계속해서 많은 지원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채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몇몇 원조기구들은 그 부채 중 일부를 탕감해줘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느꼈다. 개별 지원국의 부채 탕감만으로는 탄자니아를 살릴 수 없었다. 고유가, 낮은 수출·입, 악천후 및 늘어나는 부채상환은 1981년까지 이 나라의 목을 졸랐다. 탄자니아 정부는 매주 말 그대로 돈을 세계은행 프로젝트에 쓸지, 아니면 배 한 척 분량의 긴급구호 식량을 더 구매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정부는 아주 자연스럽게 부채 대신 긴급 구호 식량을 택했고 세계은행은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했다. 98-100)


탄자니아 친구들은 그에게 늘 상충된 조언을 해주었다. 우선 초등교육을 강조했던 그를 칭찬하고는 나중에는 고등교육을 소홀히 했다며 항의를 표했다. 1970년대 중반의 재앙적인 가뭄 이후 식량 가격 인상을 장려해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옥수수를 이용한 자급자족을 달성했으나 커피와 차 같은 수출작물 농업을 붕괴시켰다며 되레 비난을 받았다. 1977년 외부인들은 산업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원자재 및 예비 부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수입통제를 완화해달라고 촉구했으나 얼마 후 원조기구들은 탄자니아 정부가 전 세계의 커피 붐이 끝나갈 무렵에야 커피 산업과 관련한 조치를 취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모든 조언은 최고의 분석과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선순위와 인식의 변화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고 탄자니아는 경제적 자립이란 목표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탄자니아 경제에 대한 실험적 시도에 이미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고, 세계적 경기침체와 낮은 국제 원자재 가격은 선택지를 더욱 줄어들게 했다. 101)


아루샤 선언이 있은 지 30년 뒤인, 그리고 니에레레의 성과 평가가 있은 지 20년 뒤인 1997년 세계은행은 연례원조회의를 다르에스살람에서 개최했다. 탄자니아의 요구는 전반적으로 더 많은 원조를 해줄 것, 원조기구는 개별 프로젝트 비용을 더 많이 분담할 것(그러나 이미 80~95퍼센트가 원조기금으로 운영 중이었다), 그리고 해외원조 채무상환을 위한 특별기금 조성을 포함하여 더 많은 부채를 탕감해줄 것 등이었다. 탄자니아의 벤저민 음카파Benjamin Mkapa 대통령은 50개 마을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도 인용했다. 경제원조 결과로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다섯 가구 중 한 가구 꼴에 불과했고, 더 안 좋아진 것으로 느낀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0퍼센트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달라지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남아공 사람들은 양조장과 담배회사를 인수했고, 인도인들은 자전거 공장을 매입했으며, 탄자니아의 인구는 22년 만에 1,700만 명에서 3,30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101-2) 


6장. 코트디부아르: 기적의 종말


1960~1990년에 번영했고 안정적이었으며 개인투자자가 몰렸던 이 나라는 인근 국가에서 온 구직자들의 안식처였다. 비록 1990년대 초반에는 주요 수출품인 코코아의 가격하락 및 고평가된 통화로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적은 1999년 12월 24일 군부의 정부 전복과 함께 끝났다. 쿠데타는 아프리카 여타 지역들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코트디부아르로서는 1960년 독립 이후 처음 발생한 것이라 큰 충격이었다. 코트디부아르 내의 다양한 커뮤니티, 내국인과 외국인 간의 관계는 내가 아비장에 살았을 때부터 그 나라에 독이 되었다. 과거 이민자 보호소는 ‘이부아리테Ivoirité’라 불리는 개념에 집착했다. 이부아리테는 코트디부아르 국경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수상한 존재라 암시하는 국수주의 개념이었다. 한때 종교적 관용을 자랑했던 코트디부아르에 새롭게 등장한 이 개념은 이 나라의 최대 단일집단인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인들보다 열등하고 시민권도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4)


1990년에 다당제 선거가 도입되었는데도 코트디부아르는 여전히 일당제 국가나 마찬가지였으며 공개토론 자리는 거의 없었다. 반정부 성향의 야당 언론이 존재하긴 했으나 라디오와 TV 방송은 여당 전용이었고, 정치적 시위는 1992년 2월 이후 금지됐다. 정치적 표현들에 대한 압박, 그리고 ‘좋은 행동’으로 점수를 따려는 야당의 노력에 대한 압박은 여론 형성을 막았다. 이제 대중의 열망과 좌절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격앙된 환경에서 대통령이 된 로베르 구에이Robert Gueï 장군은 모든 올바른 조치를 취했다. 첫 대국민 방송에서 크리스마스와 이슬람 축제를 방해한 것을 사과했고, 몇 달 전 자국민 수백 명을 강제송환한 것에 대해 이웃나라인 말리와 부르키나파소에 유감을 표했다. 그는 통합을 약속했고, 형제애 및 이해와 관련해 우푸에부아니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들을 인용했다. 로베르 구에이의 연설은 이런 변화가 대개 투표보다 쿠데타나 암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105-6)


다음 선거는 2000년 10월로 결정되었으며 로베르 구에이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한 지 불과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전임자의 행보를 따랐다. 가장 중요한 안건인 대통령 출마 자격을 두고 그는 처음엔 모호한 입장을 보였으나 결국엔 ‘외국인’을 선거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이들의 편에 섰다. 이부아리앵 인민전선FPI: Ivorian Popular Front당의 로랑 그바그보 대표는 민주주의자이므로 이러한 선거 조작에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공명정대한 선거가 자신의 당선 확률을 낮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악마와 계약을 했고, 후보 자격 관련 제한을 받아들여 경쟁 구도를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로랑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의 네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열광했고 그간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많은 인사가 중용되었다. 그렇지만 그바그보 정부는 코트디부아르 역사에 또 다른 추한 면을 남겼다. 한때 국제주의자였던 새 대통령은 ‘이부아리테’ 개념을 새로운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113-4)


사실 건국 이래 30년간 지속된 정치적 탄압은 격정과 질투심을 키웠고, 세기 말에는 추악한 모습으로 터져나오게 했다. 또한 자아도취와 자산증식에만 몰두하던 정치 지도자들은 다른 이들이 뒤따를 수 있는 패턴을 형성했다. 혼인을 통해 이미 부유해진 우아타라 같은 사람조차 역사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바그보처럼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감투를 위해서라면 조작된 선거 규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이 나라는 고집 센 정치인 셋과 장군 하나(로베르 구에이)로 불과 10년 만에 몰락했다. 우아타라와 그바그보 같은 몇몇 인물은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결국 권력에 눈이 멀어 원칙보다 잇속을 우선시했다. 2004년 말까지 아비장은 마치 아프리카의 축소판처럼 후미진 곳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2004년 11월 분쟁이 격화되자 코트디부아르인들은 처음으로 안전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한때 유혈 사태와 혼돈의 대명사였던 라이베리아였다. 115)


7장. 중앙아프리카의 불화


탄자니아와 코트디부아르는 각자 다른 이유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이 둘보단 덜 유명하지만 다른 나라들 또한 독재, 시시콜콜한 다툼, 경제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으로 험난한 시기를 겪었다. 중앙아프리카경제통화공동체는 그 명칭이 무색하게도 상호혐오로만 단결된 채 6개 회원국을 엮는 데는 그리 큰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6개국 중 가장 큰 카메룬은 가장 부유한 가봉과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다. 차드는 카메룬이 지배하려 든다고 생각했으며,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차드를 불신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작은 이웃나라인 콩고공화국은 정치 분쟁으로 분열되었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반군들을 숨겨주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적도기니는 야만적 인권침해 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배제되었지만 연안에서 막대한 매장량의 석유를 발견함에 따라 더 이상 이웃나라들을 필요치 않게 되었다. 6개국 중 어느 나라의 역사가 가장 슬픈지를 꼽기란 어려운 일이다. 116)


3부_ 사실과 마주하기


8장. 경제학의 실패


아프리카의 경제규모가 작은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부가 소규모 농가를 짓밟고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민간투자 유치에 좀더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주요 산업인 농업은 모든 종류의 잘못된 관리 정책 탓에 위축되었다. 호주, 캐나다, 덴마크, 뉴질랜드와 같은 부국에서 농업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아프리카의 경제 기획자들은 경제발전의 ‘다음 단계’, 즉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을 갈망했다. 민간투자는 산업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아프리카는 소비자들을 잃는 것과 더불어 민간투자자들의 외면도 받았다. 높은 환율 때문에 일부 상품은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수입하는 편이 더 저렴했고 너무나 많은 세금, 이해할 수 없는 규제들, 타성에 젖은 행정, 법 체계, 임시 또는 계절적 노동자 고용을 어렵게 만드는 노동법, 독점, 부패, 사기 탓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아프리카에 투자하길 꺼렸던 것이다. 125-6)


아프리카의 문제를 시정하려는 노력에 만족하거나 당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여자들은 자유낙하 상태의 누군가에게 안전망을 제공한다 여겼고,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박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의 상황이 안정되길 바라는 원조기구들 입장에선 가끔씩 모래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한편,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마취 없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는 데다 수술대 위에서 몸부림치거나 징징거리지 말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게임의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새로운 아이디어, 기술 및 접근 방식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을 포함한 신규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은 초기 학습과 경험 축적의 기간이 아니라 빠르게 규칙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모두가 그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다. 많은 국가가 다시 성장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인구증가 속도와 겨우 보조를 맞추는 수준일 뿐이다. 131-2)


9장. 국제원조의 험난한 길


해외원조의 기본 철학은 ‘유대-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20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부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 부의 일부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외원조가 경제적으로도 타당하다는 예는 1946년 세계은행의 설립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라 불렸던 세계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무역의 지속적 확장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목적은 자선이 아닌 자기이익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모든 이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 예상되었다. 원조는 자기이익의 다른 측면에도 호소할 수 있다. 나눔은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1970년대 후반 세계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연간 약 50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원조가 군비경쟁에 지출된 4,000억 달러보다 국제안보에 있어 더 나은 투자라고 주장했다. 135)


원조기구들은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1960~1970년대엔 국영 산업을 지원하는 방향이었으나 1980~1990년대엔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또한 농업, 산업 및 주택과 같은 특정 부문에 대한 신용한도 설정부터 시작해 국가 금융 시스템을 지원하고 세부적인 차관 결정은 현지 전문가에게 맡기는 일, 특정 지역의 복잡한 농촌개발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지원부터 유사 목적의 간접적 달성에 필요한 폭넓은 국가 서비스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원조 기획자들은 농업 연구, 도로 건설, 값싼 에너지(수력 전기 등)가 경제성장의 주요 구성요소로 간주되고 결국 보다 균등한 부의 분배를 이룬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의 경험에 의지했다. 이러한 실험들이 시도되기도 전에 회의론자들은 실패를 예상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라면 마땅히 번영을 위해 자국만의 방법을 찾아야 하고, 외부의 도움은 해당국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키고 국내 저축을 저해하며 의존성을 유발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137)


원조기구들은 피지원국이 특정 개혁과제를 달성할 시 그 보상으로 농업, 교육, 또는 보건 분야 국가 예산의 일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부문별 프로그램 원조’를 개발 촉진 수단으로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로젝트와 기술을 제공하기보단 개발도상국의 국가 정책을 바꾸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 점점 강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원조기구와의 합의를 존중할 거라 신뢰할 만한 국가의 수는 매우 적었고, 이 ‘당근과 채찍’ 접근법은 원조효과에 대한 수년간의 연구결과에 반하는 것이었다. 실제 경험에 따르면 원조는 외국 자본가에게 잘 보이려는 정부보다는 이미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자발적으로 파악한 필요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를 설정 및 시행하며, 그에 필수적인 기관을 설립하는 정부의 나라에서 잘 작동한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력과 용기를 갖춘 나라는 아프리카에 거의 없다. 스스로를 개혁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 소수의 국가는 바닥을 경험하며 순수한 수치심이나 절망으로 행동에 나섰을 뿐이다. 138)


아프리카에서 원조 관계자들은 임기응변과 정치적 타협에 취약했다. 그 예로 1970~1980년대에 두드러지게 논의되다가 1990년대에 화제에서 사라진 인구 정책을 들 수 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젊고 성생활도 가장 활발한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이 15세 미만인 아프리카 국가도 많다. 여덟 명 중 한 명꼴인 캐나다, 미국과 대조적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상위 40개국 중 34개국이 아프리카 국가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이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라 일컫는 후손들을 유지하면서도 가난하다고 불평하자 원조 관계자들은 이러한 수치의 인용을 그만두었다. 아프리카 여성들은 산아제한 실천에 긍정적이었으나 그들의 정부와 남편들은 부정적이었다. 남편들은 대가족, 혹은 더 많은 아들을 갖고 싶어 했고, 따라서 콘돔 및 상담을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는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인구 정책이 효과적인 아프리카 국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45-6)


원조 관계자들은 언론인, 기업인, 노동조합원, 환경운동가, 인권운동가, 기타 지역사회 지도자로 구성된 자체 ‘자문 그룹’을 만들어 원조기구에 솔직히 조언하게 함으로써 소속감 고취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공신력 있는 자유언론, 강력한 야당, 모든 층의 여론을 대변할 만한 정부를 그들이 대신하긴 어렵다. 원조기구의 자문 그룹들은 오래되었고 독립성을 잃었다. 또한 회원들은 계속해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와 자문 보수를 소중히 여기기에 때때로 말을 아낀다. 개방된 정치 체제와 평등한 경제적 기회 및 공공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확실히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경제는 1980년대에 전혀 성장하지 않았고, 1990년대엔 역경을 겪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잠재력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개혁을 촉진하고 성장의 이점을 공평하게 공유하려면 정직한 선거, 강력한 의회, 활기찬 자유언론을 주장하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147)


10장. 차드-카메룬 송유관


차드는 아프리카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국토 면적은 프랑스의 두 배가 넘는데 포장된 도로의 길이는 200마일에 불과하고, 모래를 제외하면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 세계 최악의 극빈국 중 하나인 차드의 남부에 사는 엄마들은 건기가 되면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흰개미 서식지를 습격해 애벌레들을 잡을 정도이다. 1970년 이래 차드에선 큰 유전들이 발견되었으나 개발되진 않았다. 이제는 싸우는 이유조차 모호해진 내전, 어떤 투자자로부터도 신뢰받지 못하는 잔혹한 독재정권, 그리고 카메룬을 지나 대서양 연안까지 약 700마일에 달하는 석유 운송 거리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기엔 국제 유가가 너무 낮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90년대 중반, 미국 최대 기업인 엑손모빌Exxon-Mobil과 세계은행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손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국제여론의 힘, 그리고 ‘좋은’ 대의에 맞서 싸우는 데 이상한 수법을 사용하는 일부 비정부기구 사람들의 맹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151)


사실 차드-카메룬 송유관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선 등장하는 주체들부터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 엑손모빌은 1989년에 발생한 알래스카 밸디즈만灣의 재앙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차드-카메룬 송유관 프로젝트의 파트너인 쉘Shell은 나이지리아의 오고닐랜드 지역에 환경적·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며, 그곳에서의 활동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을 억누르려다 유혈 사태까지 일으킨 바 있었다. 더불어 과거 프랑스의 국영 석유회사였던 엘프Elf는 수십 년간 때로는 자신들의 주도하에 혹은 프랑스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무장정권을 지원했고, 차드-카메룬 송유관 프로젝트가 준비 단계였을 당시엔 엘프와 관련된 프랑스 유명 사업가들이 자국에서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세계은행이 그간 기록해온 환경적 발자취를 무색하게 한다는 점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가진 독재국가 차드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프로젝트 전체를 거의 명백한 비판 대상으로 만들었다. 151-2)


프로젝트에는 여러 먹구름이 드리웠다. 첫 번째 먹구름은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 가능하고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그것을 내버려두면 프로젝트엔 치명적일 게 거의 확실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차드와 카메룬은 부채가 많고 국제신용등급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은행은 자체 소프트론soft loan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 나라들을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독일과 미국 같은 세계은행의 주요 기부자들은 학교, 보건소, 아동 영양 및 기타 ‘직접적인’ 빈곤해결 프로젝트에 쓰였던 소프트론 자금을 대규모 민간 부문 에너지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건 반대한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세계은행 총재 짐 울펀슨이 슈투트가르트에 방문했을 때 독일 정부는 그에게 취임 후 2년간 서방 국가에서 얻은 인기를 잃고 싶지 않다면 소프트론을 활용할 생각은 버리라고 말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펀슨은 재정부서 직원에게 신용이 낮은 차드와 카메룬에겐 소프트론 대신 상업차관을 빌려주라고 지시했다. 153-4)


# 소프트론soft loan : 조건이 비교적 까다롭지 않은 차관, 상업차관은 소프트론보다 금리가 높고 만기가 짧다.


프로젝트를 둘러싼 다른 의심들은 이보다 익숙한 내용이다. 석유 산업의 환경적 기록 및 그 분야에서 세계은행이 남긴 파란만장한 역사를 고려해봤을 때 과연 송유관에서 기름이 유출되진 않을지, 반대 단체들이 송유관을 폭파시키진 않을지, 송유관 노선에 영향을 받을 취약한 생태계 및 선주민의 권리는 보호될지 등 국제사회가 어떻게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엑손모빌은 철저히 환경평가를 진행했고, 이 프로젝트의 옹호자들은 평가 자료가 열아홉 권에 이를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분량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자료에선 이 프로젝트에 어려운 과제가 다수 따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물론 지진 지역에 발전용 댐을 건설하는 것과 달리 모두가 감당 가능한 과제들이었다. 환경 계획은 양국 정부가 아닌 엑손모빌이 현지 및 세계의 감독하에 시행할 것이었다.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카메룬이나 차드 정부보다 유능했고, 국제여론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154)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남은 다른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복잡한 사안이었다. 석유 수익이 국가 발전에 쓰일 거라고 누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1998년 12월 차드 국회는 세계은행의 촉구에 따라 석유 수익의 10퍼센트를 해외에서 관리될 미래세대기금Future Generations Fund에, 5퍼센트는 생산 지역에, 나머지 80퍼센트는 농업·교육·보건·인프라 프로젝트에 할당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금 사용에 대한 개방성을 보장하기 위해 엑손모빌은 해외계좌에 정부 몫의 수익을 예치하기로 했다. 차드의 공무원, 국회의원, 종교단체, 인권단체 및 기타 비정부기구들로 구성된 ‘감시’위원회는 정부지출 계획을 심사하고, 국가예산에 대한 석유 수익 공개를 승인하고, 실제 자금사용을 추적할 것이었다. 그 사이 국제환경단체들은 현장방문 시위를 했다. 세계은행의 업무나 프로젝트 최신 정보에의 접근이 제한적인 일부 국제단체들에겐 이 프로젝트가 진심으로 해결해야 할 우려 사안이었던 것이다. 155-6)


토론이 이어지던 마지막 해에 세계은행은 이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편지를 5만 통 이상 받았는데, 그중 1만 6,000통은 캘리포니아의 공익 전화회사인 워킹에셋Working Assets에서 보낸 것이었다. 워킹에셋은 수익의 일부를 좋은 대의에 쏟고 매달 가입자들에게 특정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해왔다. 환경보호기금과 같은 미국 단체들은 여전히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 입장이 마치 공익단체가 지닌 힘을 보여주는 증거, 혹은 미래의 기부자들이 볼 수 있게끔 자사 입구에 전시할 트로피라도 되는 듯 말이다. 

세계은행 총재와 가까운 홍보 직원들도 이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할 경우 세계은행의 ‘브랜드 이미지’가 받을 영향을 우려했는데, 이는 놀라운 추론이었다. 외부 비판자들 대부분은 세계은행의 평판이 이미 망가졌다고 여기는 데 반해, 세계은행 직원들은 어렵지만 가치 있는 대의를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58-9)


11장. 가치의 충돌


아프리카의 빈곤은 사실 아프리카의 문제라기보다는 서양의 문제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정부들은 가난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일이라기보단 바람이나 비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 받아들인다. 아프리카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은 빈민은커녕 국가경제와 관련한 기본적 활동들조차 자신과는 무관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 2002년 나는 가봉의 수도인 리브르빌의 빈민 지역에서 기획부 장관과 함께 지역사회 도로 프로젝트 상황을 둘러보았다. 장관이 그 동네를 찾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그가 이 나라의 주요 항구에 방문한 것도 그날 저녁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14년 동안 기획부 장관을 지냈고 그 전에는 총리로 일했지만, 그는 국가경제의 동맥에 해당하는 지역조차 돌아볼 시간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날의 방문도 거의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가 현장으로 따라나선 유일한 이유는 세계은행 부총재가 나와 동행했기 때문이다. 165, 168)


4부_ 미래를 향해


12장. 아프리카를 바꾸는 열 가지 방법


1. 공적자금 추적 및 회수를 위한 메커니즘을 도입한다.

2. 대통령, 장관, 고위 관료들의 계좌 공개 및 감사를 실시한다.

3. 각 국가에 대한 직접적 원조의 50퍼센트를 축소한다.

4. 빈곤감소를 진지하게 원하는 4∼5개국에 집중적인 원조를 실시한다.

5. 국제사회 감독하에 선거할 것을 요구한다.

6. 자유언론과 사법부 독립 등 민주주의의 다양한 요소를 장려한다.

7. 아프리카의 학교 운영 및 에이즈 프로그램을 운영·감독한다.

8. 정부 정책 및 원조 협정에 대한 시민사회 감시그룹을 설립한다.

9. 인프라 및 국가 간 연결에 더욱 집중한다.

10. 세계은행, IMF, 유엔개발계획의 통합을 추진한다.


13장. 새로운 시대


전 세계는 아프리카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 자신들이 가장 중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여길 거라 기대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해외원조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대한 동정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성인과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변명하는 것을 멈추고, 지역적 또는 민족적 기원과 상관없이 아프리카의 인재와 기업을 배출해야 미래가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아직 붕괴되지 않은 한 가지는 ‘아프리카의 정신’이다. 아프리카의 고집 일부는 단순한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또 다른 일부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꺼리는 데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는 잠시 희망이 멈춘 상황이다. 아프리카의 인간적 아름다움, 잠재력, 고통에 익숙한 이들만이 향후 10년 안에 돌파구를 희망할 수 있다. 오직 아프리카인들만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테러, 가난, 평범함의 순환을 끊을 수 있음을 그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잘 알고 있다.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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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3 - 지리는 어떻게 우주까지도 쟁탈의 대상으로 만드는가 지리의 힘 3
팀 마샬 지음, 윤영호 옮김 / 사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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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주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격전장이 등장했다


▣ 1장: 인간, 하늘을 올려다보다


▣ 2장: 냉전이 우리를 우주로 끌어올렸다


현대 로켓에 관한 경우라면 우주비행 역사가들은 대체로 콘스탄틴 치올콥스키(1857-1935년), 로버트 고더드(1882-1945년), 헤르만 오베르트(1894-1989년),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다. 미국인인 고더드는 9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된 이래로 줄곧 사용되던 압축된 가루 고체연료인 화약 대신 액체연료를 사용해 지상에서 로켓을 발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베르트는 독일 과학자로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명성이 실추되었는데, 나치는 로켓에 관한 그의 연구를 활용해 베르겔퉁스바페 2(Vergeltungswaffe 2, 보복무기 2호) 혹은 V-2로 불리는 로켓을 개발했다. 1903년 동력을 갖춘 최초의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6개월 전, 독학으로 깨우친 한 무명의 러시아 과학자가 우주비행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해 말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 성공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치올콥스키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견지명을 갖춘 과학자 중 한 명이었음에도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다. 28)


그의 초기 저서에는 태양에너지로 가동되는 우주정거장 건설하는 방법, 우주선의 방향을 제어하는 자이로스코프(바퀴의 축을 삼중의 고리에 연결해 어느 방향이든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 스케치, 우주선이 서로 도킹할 수 있도록 하는 에어로크, 우주비행사가 우주선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밀(공기가 밖으로 누출되지 않도록 밀폐하는 것) 구조의 우주복 같은 발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1895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그는 우주 엘리베이터라는 개념도 이론화하고 있었다. 「반작용 장치를 이용한 우주공간 탐험」에서는 로켓이 대기권을 돌파해 지구의 궤도를 돌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치올콥스키는 지구 궤도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수평속도를 계산해 냈는데 그 속도는 연료로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로켓을 이용해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치올콥스키 로켓 방정식〉으로 알려진 그의 공식은 바로 우주여행의 기반이 된다. 28-9)


스푸트니크 1호는 1957년 10월 4일 카자흐스탄에서 발사되었다. 크기는 비치볼보다 조금 더 컸고 무게는 고작 85킬로그램에 불과했다. 스푸트니크 1호는 외피가 매우 눈부시게 빛나는 고광택의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의 대기권에 재진입해 불타버릴 때까지 미국인들은 3개월 동안 매일 90분마다 그것이 머리 위로 지나갈 때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그럴 때마다 소련이 미국의 기술을 능가했다는 것을 재차 상기시켰다. 여기서 미국의 걱정은 인공위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싣고 우주로 올라간 거대한 로켓에 관한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지구의 인공위성〉이라고 불렀던 것은 그야말로 게임 체인저였다. 스푸트니크가 등장하기 전에 미국은 소련의 핵무장 항공기를 요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는 사실상 탄도미사일과 다름없는 물체의 최상단에 실려 우주로 발사되었고 그 같은 로켓은 이제 미국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32-3)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은 보스토크Vostok 1호 우주선에 다가가면서 자신을 발사대까지 데려다준 차량의 오른쪽 뒷바퀴에 소변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이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 (여성 우주비행사들은 병에 담아와 바퀴에 뿌린다.) 이윽고 가가린은 캡슐에 올라 탑승한 후 대기했다. 카운트다운은 없었고(세르게이 코롤료프는 그것을 미국인들의 허세라고 생각했다) 모스크바 시각으로 오전 9시 7분에 발사 버튼이 눌러졌다. 가가린은 “포예칼리Poyekhali!”(가자!)라고 소리쳤고, 그는 이륙하면서 지구의 강력한 속박에서 벗어나 미국의 시인이자 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존 길레스피 매기가 “저 높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우주의 성역”이라고 지칭한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은 가가린이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린 108분 동안 이어졌다.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35)


코롤료프 사후에 소련이 직면한 문제의 실상을 알지 못했던 미국은 소련이 1968년 12월에 우주선 발사를 위한 최적의 발사가능시간대launch window를 이용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그 기회의 문은 열렸다 닫혀버렸다. 소련 측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오히려 같은 달에 세 명의 미국인이 달의 궤도에 오른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아폴로 8호는 프랭크 보먼, 짐 로벨, 빌 앤더스를 태우고 달 주위를 열 바퀴 돌았다. 이때 앤더스는 그 유명한 〈지구돋이Earthrise〉 사진을 찍었고 훗날 자신들은 달에 갔지만 지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옅은 대기층의 보호를 받으며 허공에 불안정하게 떠 있는 “창백한 푸른 점”과도 같은 사진 속 지구의 이미지는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미쳤고 새로이 부상하던 환경운동에 크게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지구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 사람은 가져간 카메라를 통해 아폴로 8호에서 생방송에 참여했다. 38)


# 발사가능시간대launch window : 로켓이나 우주선이 발사되어야 하는 특정 시간대를 의미한다. 이 시간대는 궤도 역학, 행성의 위치, 지구의 자전, 날씨 조건 등 여러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성공적인 발사를 위해서는 모든 조건이 적절해야 하며, 이 때문에 발사 기회를 놓치게 되면 다음 가능한 시간대를 기다려야 한다.


1969년 7월 20일, 마침내 닐 암스트롱이 고요의 바다 표면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인류 역사에 거대한 도약을 이루었다. 그는 자신이 가가린, 치올콥스키, 고더드, 오베르트, 코롤료프, 폰 브라운 같은 위인들, 그리고 그들보다 앞선 여러 시대 위대한 과학자들의 노고에 힘입어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냉전시대 상황에서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를 잘 이해했는데 훗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0만 혹은 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고, 이 나라의 희망과 위엄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수 있도록 정확한 궤도를 계산해낸 뛰어난 수학자 캐서린 존슨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달 착륙선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마거릿 해밀턴 같은 드러나지 않은 영웅들도 있었다. 40)


▣ 3장: 우주는 21세기의 새로운 부동산이다


우리는 사실상 로켓을 발사하기에 최적의 장소를 갖춘 육지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로켓을 발사하는 데 가장 최적의 장소는 연료를 덜 사용하면서 우주에 가능한 한 빨리 진입할 수 있도록 지구의 자전 속도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는 곧 지구의 자전 속도가 가장 빠른(시속 약 1,669킬로미터) 적도에 인접한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국은 자국 국경 안에서 적도에 가장 근접한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센터를 이용하고 있는데 그곳의 자전 속도는 시속 1,440킬로미터다. 유럽연합 같은 경우는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를 이용하며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을 이용하고 있다.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로켓을 동쪽으로 발사하면 지구의 자전 속도에서 추가로 추진력을 얻어 그만큼 연료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또한 로켓 추진장치의 낙하 지점이 거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이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발사대 부지가 동쪽 해안지대에 위치해 있다. 48)


지구 표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 빠른 속도로 상업용 비행기의 최대 순항고도(안전한 비행을 위해 유지해야 하는 적절한 해발고도)인 약 12킬로미터 상공을 넘어서까지 상승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60킬로미터를 더 올라가면 우주에 근접하게 되는데, NASA의 정의에 따르면 해발 80킬로미터 상공부터 우주가 시작되며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전부 지구다. 하지만 각종 우주비행 기록을 승인하는 국제항공연맹(FAI)은 우주가 100킬로미터 상공부터 시작된다고 정의한다. 그곳이 바로 카르만 라인Karman line─미국의 물리학자인 시어도어 폰 카르만이 정의한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선을 뜻한다─이며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지구와 38만 5,000킬로미터 떨어진 달 사이의 시스루나 공간cislunar space에 진입하고 있다. 〈시스루나〉라는 단어는 라틴어가 어원으로 〈달 가까이〉라는 뜻이다. 48)


더 위로 올라가 약 160킬로미터에서 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상공인 저궤도에 진입하면 평균 400킬로미터 상공에서 궤도를 순환하는 국제우주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 일명 ISS라고 많이 함)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이곳은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이후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1993년에 미국, 러시아, 유럽, 일본, 캐나다의 우주 관련 기관들은 정치적, 문화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협약에 합의했다. 이에 1998년에 러시아가 첫 번째 모듈을 쏘아올렸고 2년 후에는 탑승자들이 입주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었다. 이 우주정거장은 인류가 우주에서 협력을 통해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국제우주정거장은 거의 수명이 끝나가고 있고 2031년에는 퇴역할 예정이다. 소위 포인트 니모Point Nemo7라고 알려진 태평양의 외딴 지점에 추락해 그곳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다. 49)


# 포인트 니모Point Nemo : 임무를 끝낸 인공위성이 회수되는 지점으로, 인적이 없고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인공위성이 추락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흔히 〈인공위성의 공동묘지〉라고도 한다.


전략적으로 저궤도는 유력한 〈요충지〉이자 〈관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상에서 수에즈 운하와 호르무즈 해협 같은 요충지들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그 두 지역은 지형상 바닷길이 협소해 쉽게 봉쇄할 수 있는 곳들이다. 우주의 저궤도를 지상의 수에즈 운하나 호르무즈 해협에 비유하는 것은 정확한 비유는 아닐 수 있지만 효과적인 비유는 된다. 왜냐하면 우주로 탐험을 떠나기 위해서는 로켓 발사장을 지켜내야 하는 것처럼, 광활한 우주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저궤도에 있는 인공위성들이 제공하는 통신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저궤도를 통과해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약 2,000킬로미터 상공에 이르면 이제 중궤도에 진입하는데 이 궤도는 약 35,786킬로미터 상공까지 이어진다. 이곳에 위치한 인공위성들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대략 12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들 중 다수는 지구에 위치 확인 및 길 찾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보통은 그렇다. 51)


계속 위로 올라가 35,786킬로미터 상공을 넘으면 지구 동기궤도와 지구 정지궤도가 시작되는 고궤도에 도달한다. 이 둘의 유일한 차이라면 동기궤도에 있는 인공위성은 어떤 경사각에서도 지구를 돌 수 있는 반면, 정지궤도에 있는 인공위성은 항상 적도를 따라 돈다는 것이다. 저궤도는 통신용 인공위성을 운용하기에는 어려운 곳이다. 고도가 낮아 위성의 이동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지상의 기지국에서 위성의 위치를 계속 추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지궤도에서는 인공위성의 속도가 지구의 자전 속도와 일치하기 때문에 인공위성은 항상 같은 장소 위에 위치한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지상에서 그런 인공위성을 본다면 마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고궤도(35,876킬로미터 이상)는 나름 분주하지만, 그저 자리만 많을 뿐이지 신호 간섭 때문에 기기로 통신할 수 있는 주파수는 제한적이다. 그래서 유엔 국제전기통신연합은 자리와 주파수를 지정해서 이곳을 함부로 진입하거나 점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52)


▣ 4장: 지금 우주는 (사실상) 무법지대다


더 많은 인공위성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우주쓰레기를 발생시킬 것이다. 쓰레기가 증가할수록 케슬러 증후군Kessler Syndrome이 실현될 위험성도 더 커진다. 그 시나리오에 따르면 궤도를 떠도는 우주쓰레기가 잦은 충돌을 유발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그러면 재앙과도 같은 연쇄충돌이 일어나면서 우주쓰레기 구름이 허블 우주망원경을 박살내고, 거기서 생겨나는 파편은 지나가는 우주왕복선을 파괴시킨 후 국제우주정거장을 향해 이동한다. 영화 「그래비티Gravity」의 줄거리는 1978년 논문에서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 전직 NASA의 과학자 도널드 케슬러의 이론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인공위성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저궤도에 떠도는 우주쓰레기들로 형성된 고리 때문에 우주선이 아예 지구에서 발사되지도 못할 때까지 연쇄충돌이 일어난다. 케슬러 증후군은 하나의 예측일 뿐이지만 현재 우주쓰레기로 인한 위협은 그저 가설에만 불과한 것이 아니다. 73)


자연은 우리를 대신해 일부 우주쓰레기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 지구의 중력은 우주쓰레기를 저궤도로 끌어내리고 있는데, 만약 그 우주쓰레기가 600킬로미터보다 낮은 고도에서 궤도 순환을 한다면 보통 그것은 몇 년 안에 대기권으로 추락한다. 해마다 수백 개의 우주쓰레기 파편들이 이런 경로를 따르고 있으며 대부분의 작은 파편들은 도중에 연소되어 사라질 것이다. 일부 인공위성은 소멸설계Design for Demise15라는 공정을 통해 대기권 재진입 과정에서 쉽게 해체되도록 설계된다. 대부분 지상 70-80킬로미터 상공에서 분해되고 부서진 조각들은 소멸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쓰레기를 하늘에서 쏴서 날려버릴 수는 없을까? 한 가지 난관이라면 우주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개발된 모든 장치는 다른 목적(이를테면 우주선이나 인공위성을 공격하는 무기)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인공위성과 관련된 모든 계획과 규정은 군사 및 국가안보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76-7)


▣ 5장: 중국, 승자보단 리더가 되고자 한다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은 1970년 4월 24일에 궤도에 진입해서 28일 동안 지구 주위를 돌았다. 이로써 중국은 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어 인공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킨 다섯 번째 국가가 되었다. 인공위성에 탑재된 다섯 개의 배터리를 사용해 중국은 「동방홍The East Is Red」이라는 유명한 노래를 지구로 송출했다. “동녘이 붉어지며 태양이 떠오른다. 중국에 마오쩌둥이 나타났다!” 현재 중국에서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된 4월 24일은 〈우주의 날〉이다. 그때부터 중국의 우주 프로그램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인공위성을 정기적으로 발사했고 다른 국가들에 자국의 시설을 제공하기도 했다. 중국의 우주 프로그램은 처음 몇십 년 동안에는 주로 군사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중국공산당은 자국이 군사, 기술, 경제 분야에서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국가라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선전하는 용도로 인공위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86)


현재 중국은 2011년에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울프 개정안Wolf Amendment 탓에 아르테미스 협정에서 배제되었는데, 이 법안은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NASA 등 미 정부 기관과 중국 간의 협력을 일절 금지한 법안이다. 당시 이 법안을 발의한 공화당 하원의원 프랭크 울프는 우주탐사 및 기술적 진보와 중국 군대와의 관계가 미국이 “성장하는 경쟁국과의 협력”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논리를 펼쳤다. 중국은 자국을 배제하는 행태에 대해 국제우주정거장의 대항마를 건설하고, 여러 국가와 과학을 통한 전략적 관계를 형성하고, 적어도 미국 우주산업 못지않게 최첨단으로 자국 우주산업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미국의 조언이나 지원 없이 이루어냈다. 그리고 2003년에 38세의 조종사 양리웨이 중령이 중국인 최초로 우주에 진출한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과를 내고 있다. 《차이나 데일리》는 이것을 “하늘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지칭했다. 88)


최근에 중국은 공산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찬양의 수위는 낮추는 대신 오랜 역사적 집단기억에서 민족주의 요소와 신화를 강조하고 있다. 2007년에 달 궤도를 순환한 무인 우주선은 창어 1호로 불렸는데 그것은 중국의 민간설화에서 남편으로부터 불사의 영약을 훔쳐 마시고 달로 날아가 천체의 여신이 된 아름다운 선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어는 위투(Yutu, 옥토끼)라고 불리는 애완용 토끼와 함께 지내는데 이제 그 토끼는 달 주위를 뛰어다니며 창어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절구에 불사의 영약을 넣어 찧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2013년에 창어 3호를 달 표면에 착륙시켰을 때 그곳을 덜컹대며 이동하던 로버를 위투라고 부른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한편 선저우(〈신의 배〉라는 뜻) 우주선을 타고 자국의 우주정거장에 탑승한 중국인 우주비행사들은 자신들이 중국 신화에서 최고의 권위로 우주를 다스리던 천상계 통치자의 궁궐 이름에서 따온 〈하늘의 궁전〉, 즉 톈궁에 들어왔다는 행운에 감격했을 것이다. 89-90)


하지만 가장 정치적 의미가 큰 프로젝트는 아마도 중국의 임박한 달 착륙일 것이다. 2021년에 중국과 러시아는 달에 공동으로 기지를 건설한다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양국은 “달 기지를 위한 기초 구조물을 조성하기 위해 달의 남극에 대한 탐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달의 남극이 부지로 선정된 이유는 그곳의 얼어붙은 크레이터들이 잠재적인 물 공급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여름에 중국은 달 기지 건설에 대한 일정을 제시했는데 그 기지의 이름은 미국 주도의 아르테미스 임무만이 유일한 합동 프로젝트가 아님을 천명하기 위해 〈국제달과학연구기지〉로 결정했다. 또한 2028년에 자국의 창어 8호 로켓이 3D 프린팅으로 달의 토양을 벽돌로 만들도록 설계된 로봇을 싣고 달에 착륙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이후의 임무들을 위한 시험운영이 될 것이며, 일부 유인 임무도 포함될 그 과정들은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기지를 위한 기반시설 건설이 목적이다. 93)


우주의 지리에 대한 소유권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제기될 것이다. 중국은 이미 자체 우주정거장인 톈궁 3호를 운영하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달 기지만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는 못하겠지만, 우주정치학적 관점에서 유일하게 자국 주권의 우주정거장을 보유한다는 것은 우주에 대한 상당한 의지의 표현이다. 더 잘 알려진 국제우주정거장은 유럽 국가들과 일본,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이 참여한 〈협력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19개국 250명의 우주비행사들을 수용했다. 하지만 톈궁은 오직 중국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며 최대 2037년까지 가동될 것으로 예상된다. 허블 우주망원경과 크기는 비슷하지만 직경 2미터의 거울이 장착된 순톈 우주망원경은 300배 넓은 시야와 25억 픽셀을 표현할 수 있는 카메라를 갖추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톈궁에 탑승한 중국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의학, 생명공학, 극미중력 상태에서의 연소, 3D 프린팅, 로봇공학, 광선빔, 인공지능 등을 연구하고 있다. 94-5)


▣ 6장: 미국,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면 다른 쪽에게 기회가 간다


2019년에 미국 정부는 우주군을 창설했는데 이는 미군의 6개 정규군(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해안경비대, 우주군) 중 가장 최근에 조직된 군이다. 우주군은 다른 군의 수장과 마찬가지로 미군의 수뇌부인 합동참모본부에 소속된 4성 장군이 지휘한다. 우주군의 임무는 다른 나라의 미사일 발사를 감지할 수 있는 GPS 위성을 운용하고 적대국 인공위성의 전파를 차단하는 지상의 전파교란기를 가동하는 것 등이다. 또한 우주쓰레기도 추적한다. 연간 약 260억 달러에 달하는 우주군의 예산은 현대전에서 우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더욱 증가할 것이다. 우주군이 창설되었을 때 일부 평론가들은 그들이 우주를 〈군사화〉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인류가 처음 대기권을 돌파한 순간부터 이미 우주는 군사화되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우주군은 이미 미 공군에서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던 부대에서 파생되어 편성되었는데, 소련과 미국은 냉전시대에 인공위성을 활용해 서로를 정찰했다. 102-3)


언젠가 우주에서 사용될 레이저 무기 개발에도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미 해군은 2014년부터 여러 형태의 레이저 무기 시스템을 운용해 왔지만, 2022년에 전기만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고출력 레이저 무기로 고속 크루즈 미사일을 격추하는 데 성공하면서 한층 발전된 역량을 과시했다. 당시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빔이 미사일을 향해 발사되었는데 불과 몇 초 만에 미사일 일부가 오렌지빛으로 불타기 시작하더니 엔진에서 연기가 나면서 아래로 추락했다. 일단 이 시스템이 구축되면 실제 이 킬 샷kill shot에 드는 비용은 고작 전기료 몇 달러에 불과할 것이다. 반면 유도미사일(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하기 위해 레이더, GPS, 적외선 등의 유도에 따라 목표물을 폭발시키는 미사일)은 한 발에 수만 달러에서 수십만 달러의 비용이 든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레이저 무기는 오직 지상에만 배치될 수 있는데, 만약 어떤 우주비행 국가가 인공위성에 레이저 무기를 장착한다면 다른 국가들도 당연히 따라 할 것이다. 104-5) 


루나 게이트웨이는 달로 복귀하려는 계획의 핵심으로, 달 주위 타원형 궤도에 위치하게 된다. 이따금 루나 게이트웨이가 달 표면에 더 가까워지면서 착륙이 수월해지기도 하겠지만, 궤도의 특정한 지점에 이르면 지구에 더 가까워지면서 고향 행성에서 오는 우주비행사들과 보급품을 더 쉽게 픽업할 수 있게 된다. 이 방식이 성공을 거두면 인간을 화성으로 이동시키는 계획에도 적용될 것이다. 또한 루나 게이트웨이는 거주및물류거점모듈(Habitation and Logistics Outpost, HALO)을 갖추게 될 예정인데, HALO에 탑승해서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실험은 방사능 수치 측정일 것이다. 우주비행사들은 지구 자기장을 벗어나면 암 발병률을 높이고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킬 수 있는 고에너지 입자에 노출된다. 게이트웨이는 당연히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장기간에 걸친 방사능 수치를 정확히 측정하고 그것이 인체에 미칠 잠재적인 영향력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107)


▣ 7장: 러시아, 땅에서도 우주에서도 전성기는 지났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는 이미 로켓 엔진 판매, 인공위성 발사 서비스, 국제우주정거장으로의 우주비행사 수송 같은 경쟁에서 시장 점유율을 잃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발전해온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주산업이 확장되고 있음에도 러시아는 대부분의 협력관계, 투자, 전문기술 등에서 소외되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 100만 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조국을 떠났는데 그중에는 수천 명의 엔지니어, 컴퓨터 전문가, 과학자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 러시아의 우주 프로그램에 얼마나 심각한 타격을 입힐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전쟁이 발발한 후 몇 주 동안 작성된 몇몇 확인되지 않은 보고서들에 의하면, 러시아 연방우주공사는 자칫 귀국하지 않을 경우를 우려해 직원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고 국경 경비대에는 특정 부류의 과학자들이 조국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한다. 117)


러시아는 현재 러시아판 GPS에 해당하는 글로나스GLONASS라는 위성항법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24개의 인공위성으로 구성된 글로나스 군집위성은 GPS보다 2년 늦은 1995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지구 전체를 감당하는 완전한 기능을 유지하려면 수시로 새 인공위성을 발사해 수명이 끝나가는 인공위성들을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1990년대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 러시아는 우주 프로그램 관련 예산을 80퍼센트나 삭감했다. 2000년에 자신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경제가 호전되기 시작하자 푸틴은 글로나스 시스템 복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으며 해당 예산을 두 배 이상 늘렸다. 2011년에는 다시 24개의 인공위성을 갖추었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지구 전체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적의 인공위성 시스템을 공격하는 데에도 투자했다. 그중 일부는 군사적 의도를 그럴듯한 핑계로 가릴 수 있는 이중 목적의 시설들이고, 다른 일부는 전쟁을 막기 위한 억지력의 일환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119-20)


러시아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열세인데 어떤 경우에도 중국에 뒤처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지만 중국은 자금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더 이상 누군가를 뒤쫓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관계에서 더 절실한 쪽은 러시아다. 이런 현실은 러시아를 돕는 문제에 중국이 보다 신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는 러시아에 이익이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철수하고 나면 러시아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중국의 톈궁 우주정거장뿐이다. 중국이 없으면 러시아는 달에 자체 기지를 건설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러시아는 주요 우주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고, 중국은 러시아와의 우정에 대한 대가로 적정한 가격으로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사들일 수 있다. 한편 이 거래의 이면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느슨한 민주주의 연대에 맞서는 반대 세력권을 구축해 다른 국가들을 이에 합류하도록 설득하려는 두 나라의 공동 전략이 숨어 있다. 187-8) 


▣ 8장: 유럽,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우주 진출


중국, 미국, 러시아 외에 다른 국가들 중에서 유럽우주국은 한 걸음 앞서 있다. 유럽우주국은 1975년에 10개국이 참여해 설립했고 현재는 22개 회원국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우주국은 “한층 더 가까워진 연합”이라는 목표의 일환으로 유럽연합 국가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유럽연합과는 전혀 별개의 기관이며 유럽연합의 우주 프로그램과도 무관하다. 유럽우주국의 예산은 유럽연합이 약 25퍼센트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개별 회원국들이 부담한다. 조직으로서 유럽우주국은 갈릴레오 위성항법 시스템(유럽판 GPS), 코페르니쿠스 지구 관측 프로그램, 국제우주정거장에서의 역할 등을 포함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달 기지 건설과 같은 야심찬 프로젝트의 경우 유럽은 서로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우주강국과의(이 경우에는 미국) 협력도 이끌어내야 한다. 유럽우주국은 미국과 공고한 동맹을 맺고 있으며 아르테미스 협정의 달 탐사 로켓 발사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130) 


유럽연합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비군사적 우주강국이지만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군사용 우주 장비에 대한 투자를 더 이상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망설이는 듯한 행보는 군사용 인공위성 정보를 계속해서 미국에 의존하는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군사적 차원에서 일본은 인상적인 우주비행 역사를 지니고 있고 거창한 달 탐사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자체적인 발사 역량을 갖춘 극소수의 국가 중 하나다. 1970년에 첫 번째 인공위성을 우주로 발사했고 1990년에는 무인 우주선을 달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영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목표 지점의 90미터 이내에 착륙할 수 있도록 설계된 달 탐사용 착륙선인 슬림SLIM을 개발해 2023년에 발사했다. 아르테미스 협정 서명국으로서 일본은 루나 게이트웨이 건설에도 협력할 것이고 2028년, 2029년, 혹은 2030년에 일본인 우주비행사를 달에 보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137)


인도의 우주 관련 역량은 추진력을 얻고는 있지만 2040년 이전에 주요 우주강국이 되기에는 발전 속도가 너무 더디다. 인도는 군사위성 시스템과 민간위성이 있지만 독자적인 글로벌 위성항법 시스템을 개발하려는 중국의 자금력에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인도는 우주와 관련된 민간 부문에서는 훨씬 더 잘 대처하고 있다. 그들은 인공위성 운송 산업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고 화성 궤도에 탐사선을 보내면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행성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켰다. 2008년에는 찬드라얀 1호Chandrayaan-1 탐사를 통해 달의 극지방에서 거대한 얼음 퇴적물을 발견하는 등 달에 물이 존재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현재 달 기지 건설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촉발했던 여러 요인 중 하나였다. 인도는 자체적인 달 기지나 우주정거장을 건설할 여유는 없지만 2023년 6월에 아르테미스 협정에 가입하면서 미국 주도의 달 기지 건설 프로젝트에서 나름의 역할을 맡을 것이다. 140-1)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와는 쿼드 동맹국이며 주요 군사적 고려 대상이 중국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인도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는 몇 안 되는 자국 인공위성을 혹시 모를 중국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낼 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입지는 정보 수집과 우주추적(인공위성과 우주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을 실행할 만한 안전한 기지를 물색하던 우방국 미국을 매료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외딴 지역에 기지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보안도 보장되고 무선 주파수 방해도 거의 받지 않는다. 또한 북반구에서는 볼 수 없는 우주 영역을 관측할 수 있으며 중국 우주발사체의 궤적과 정지궤도를 감시하기에도 적합하다. 1961년에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과 협정을 체결해 자국 내 전역에 걸쳐 그와 같은 기지 여러 개를 건설했다. 일부 기지는 1969년의 달 착륙을 포함한 미국의 우주탐사 로켓을 추적하는 데 사용되었다. 142)


2023년 초에 지부티는 중국의 홍콩항천과기그룹과 자국에 우주기지를 건설한다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뿔에 위치한 작은 국가인 지부티는 최소 10제곱킬로미터의 토지를 35년 동안 중국에 임대하고 그 기간이 끝나면 중국은 그곳의 기반시설을 지부티 정부에 반환할 예정이다. 10억 달러 규모의 이 프로젝트에는 항만시설과 도로 건설도 포함되는데 중국은 이를 통해 자국의 항공우주 장비를 일곱 개의 인공위성 발사대와 세 개의 로켓 실험용 발사대가 세워질 부지까지 운송할 수 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실행된다면 중국은 아프리카의 핵심 요지에 우주기지를 보유하게 된다. 지부티는 적도에 가까워 발사 비용이 절감된다. 더불어 그곳은 아덴만에 이르기 전까지 바다가 좁아지는 홍해의 병목지점에 자리하고 있어 중국 해군기지의 거점도 될 것이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에 우주 관련 시설을 건설하면 중국은 그 지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148-9)


▣ 9장: 2038년, 결국 우주전쟁이 일어나다


우리는 우주에서 평화적인 활동을 수행하도록 이끌 수 있는 유의미한 체제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주를 두고 대립을 향해 치닫는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표출될까? 개념상으로 일부 우주정치학 학자들은 우주전쟁을 〈하늘 위의 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지구에서 각국이 해상 항로와 그에 따른 교통과 교역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던 것처럼, 전 세계 국가들은 이제 우주에서도 궤도 항로를 두고 경쟁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우주전쟁 전문가 블레딘 보웬 같은 사람들은 지상의 강대국들이 해안선 주위의 바다를 장악하는 것처럼 그 위력을 우주에도 투사해 상공의 영역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이런 궤도 항로를 “우주 해안선Cosmic Coastline”이라고 부른다. 일반인들에게는 우주를 그 아래에 있는 영토나 전장을 지배하기 위해 점령해야 할 장소인 〈고지대high ground〉라고 생각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 154)


1962년에 미국은 스타피시 프라임Starfish Prime이라는 코드명의 군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들은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태평양 상공 400킬로미터에서 수소폭탄을 터뜨렸다. 그것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100배나 더 강력했다. 단 몇 초 만에 전자기 펄스(핵무기로부터 발생하는 진폭이 작은 감마선)가 하와이에 정전을 일으켰고 하와이부터 뉴질랜드까지의 밤하늘은 인간이 만든 오로라로 인해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로 인해 지구 주위에는 인공 방사능대가 형성되어 10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졌다. 또한 바로 전날 발사되었던 텔스타 통신위성을 포함해 적어도 일곱 대의 인공위성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만약 불량국가가 저궤도에서 훨씬 더 강력한 핵폭탄을 터뜨리면 수년 동안 인공위성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그 테스트가 입증했다는 것은 불행한 사실이었다. 핵폭풍에 휩쓸린 전자장비는 모두 파괴될 것이고 뒤이은 방사능에 모든 대체장비도 망가질 것이다. 162)


상호확증파괴에 따르면, 핵공격은 보복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 모두가 파멸하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돌먼이 설명하는 것처럼 “상호확증파괴는 상호(모두), 확증(변명이나 예외는 없다), 파괴(완전한 손실)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만약 위협이 믿을 만하지 않다면…… 억제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억지력이 있다고 해도 전통적인 형태의 전쟁까지 막지는 못한다. 우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최후의 수단에는 손을 대지 않지만 우주활동 역량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 인공위성에 대한 전파교란, 해킹 등은 어떤 우주쓰레기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상호확증파괴의 억지력은 누군가 이런 유형의 기술을 개발하거나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는데 그런 행위는 자칫 확전의 양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 대안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확대되는 군비경쟁이다. 따라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포괄적인 군비감축 협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163)


▣ 10장: 달, 화성, 그리고 인간의 마음


거주지를 찾을 때는 오로지 입지, 입지, 입지만을 생각해야 한다. 달의 적도 인근은 2주일 동안 자연채광이 지속적으로 비치지만 다음 2주일 동안은 계속해서 밤이 이어진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달의 자전이 지구 시간으로 약 한 달 정도 걸리기 때문인데, 따라서 달의 낮과 밤은 각각 지구 시간으로 대략 14일 동안 지속된다. 또한 달의 적도에서는 기온이 낮에는 영상 132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영하 179도까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달의 남극에 위치한 남극-에이킨 분지에서 소위 〈정착지 사냥〉을 하고 있다. 그곳은 태양이 지평선 위로 거의 떠오르지 않아 크레이터 깊숙한 곳까지 태양빛이 닿지 못한다. 따라서 크레이터 대부분이 수십억 년 동안 그늘 속에 있었고 아마도 그 내부에는 산소, 수소, 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얼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원소들로 로켓 추진제를 제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달 기지는 화성으로 향하는 전초기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169-70)


NASA의 과학자들은 첫 번째 달 기지 후보지로 기대되는 몇몇 지역을 찾아냈는데 모두 남극의 위도 6도 이내에 자리하고 있다. 각 지역은 15제곱킬로미터 정도의 규모에 다수의 유력한 착륙장 부지도 포함하고 있다. 태양은 하늘에서 아주 낮게 떠 있지만 최초의 거주자들은 태양광 패널로 충분한 에너지를 집적해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살든지 숨을 쉴 수 있는 산소가 최우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다행히 레골리스regolith라고 불리는 달의 표토에서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을 듯하다.  달의 표면 전체를 덮고 있는 레골리스를 용기에 담아 고온으로 가열하다가 수소와 약간의 과학지식을 첨가해 보라. 그러면 산소와 수소로 분리할 수 있는 수증기가 생성된다. 자, 그럼 이제…… 숨을 쉬세요. 그런 다음에는 숨을 내쉬어라. 이유는 우주비행사들의 날숨은 산소를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들의 땀과 소변은 이미 재활용되고 있다. 170) 


이처럼 빛, 물, 산소, 에너지가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거주 공간이다. 처음에는 지구에서 가져간 조립식이나 팽창식 구조물들로 만들어질 것이다. 달에 끊임없이 내리쬐는 엄청난 양의 방사선으로부터 거주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구조물들은 레골리스로 덮어두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달 탐사 임무 중 독일이 수행한 실험 데이터에 따르면, 희박한 대기로 인해 달 표면의 방사능 수치는 지구 표면보다 200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행히도 레골리스는 태양 복사에 대한 강한 내성과 낮은 열전도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달에 기지를 건설할 때 마감재로 사용할 수 있다. 달에는 동굴로 이어지는 구덩이가 알려진 것만 해도 약 200개가 있는데 그들 대다수는 상시 온도가 영상 17도로 과학자들은 이를 〈스웨터 날씨〉(스웨터를 입기 적당한 날씨)라고 표현한다. 돌출된 바위들이 낮에는 구덩이가 뜨거워지지 않도록, 밤에는 열기가 소실되지 않도록 막는다고 추정된다. 170-1) 


최초의 화성 정착민들이 직면할 문제 중 하나는 화성의 기온이 다소 쌀쌀하다는 것인데 밤에는 영하 63도까지 떨어진다. 또 다른 문제는 희박한 산소 탓에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달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산소를 만들어낼 방법은 있지만 그렇게 되면 거주지가 소규모로 제한되고 행성에 제대로 정착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니 테라포밍(terraforming, 다른 행성을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해 보자. 2019년에 일론 머스크는 “화성에 핵폭탄을 터뜨리자!”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화성의 토양과 극관(polar caps, 화성의 극에서 얼음으로 덮여 하얗게 빛나 보이는 부분)에 저장된 이산화탄소와 다른 가스들을 배출시켜 온실효과를 일으켜 행성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핵폭탄을 터뜨리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후변화는 좋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모든 과학자들이 화성의 표면에 대기를 따뜻하게 할 만큼 충분한 이산화탄소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173)


체액은 우리 체중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하며 중력으로 인해 우리 몸의 하반신에 모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직립보행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직립한 상태에서 심장과 뇌에 충분한 혈액이 공급되도록 인체 조직을 진화시켜 왔다. 따라서 우주에 있다고 해서 몇 개월 만에 진화가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인체 조직은 무중력 상태에서도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 몸의 상반신에 체액이 증가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비행사들의 얼굴이 붓는 이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중력이 없으면 심장이 그렇게 강하게 박동할 필요가 없고 그로 인해 심장 기능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모든 근육도 마찬가지다. 심장이 약해진다는 것은 혈압이 낮아진다는 의미이며 그에 따라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 또한 감소할 수 있다. 하중이 실리지 않으면 우리의 뼈도 약해지고 부러지기 쉬운데, 특히 척추와 엉덩이처럼 하중을 지지하는 부위의 뼈들이 약해진다. 174)


맺음말: 우주가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항상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유전적 구성에 기인하는 듯하다. 우리는 산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 했다. 또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이제 지구라는 영역을 완전히 파악하자 더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고 우리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를 이끌어낼 기술적인 혁신들 또한 이루어낼 것이다. 공상과학 소설가인 아서 C. 클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불이나 전기가 물고기의 상상력을 초월한 것처럼 그런 기술적인 혁신들도 현재 우리의 비전을 훨씬 초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우리의 발전을 저해하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문명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위대한 금자탑을 쌓아왔다. 문명이라는 유산에는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여기 있을 때 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또한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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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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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르네상스의 탄생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형성해온 힘의 해방을 단 하나의 원인을 들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르네상스를 특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인물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재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 재발견을 둘러싼 이야기는 우리가 근대적 삶과 사상의 근원에 대한 문화적 전환을 가리키기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르네상스(renaissance)', 즉 고대의 재생(再生, rebirth)'과 진실로 잘 들어맞는다. 물론, 한 편의 시가 그 자체로서 모든 지적, 도덕적, 사회적 전환을 가져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작품도 그럴 수는 없다. 하물며 수세기 동안이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공공연히 자유롭게 입에 올릴 수도 없던 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특정한 한 권의 고대 서적이 갑자기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옴으로써 분명히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19)


1 책 사냥꾼 


"가족과 친족관계, 길드와 조합. 이것들이 1417년 당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 짓는 구성요소였다. 당시 사회는 독자성과 자립심을 거의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누구에게나 자명하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명령과 복종의 연결 고리 안에서 결정되었다. 이 연결 고리를 끊고 나오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농사꾼은 오직 쟁기질 하는 법만 알면 족했고 방직공은 베 짜는 법, 수도사는 기도하는 법만 알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런 타고난 운명보다 형편이 다소 호전되거나 악화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포조가 살던 사회는 드문 기술을 가진 자는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상당한 범위로 그 능력에 대한 보상도 해주었다. 그러나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 힘든 개성이나 다재다능함, 또는 남다른 호기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귀하게 대접받는 일은 결코 없었다. 심지어 교회는 호기심을 치명적인 악으로 단죄했다. 호기심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영원한 지옥살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25-6)


"이 낯선 이방인(포조)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원이었지만, 그는 사제도 신학자도 종교재판관도 아니었고, 기도서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포조의 목표물은 수도원이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필사본이었다. 이런 필사본의 상당수는 곰팡내가 풀풀 나고 벌레가 갉아먹은 상태였으며,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독자도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약 필사본의 양피지가 여전히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현물로서 일정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표면의 글씨를 칼로 긁어내고 활석 가루로 문질러 광택을 내면, 다시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포조는 양피지 판매업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렇게 오래된 필사본의 글자를 긁어내는 자들을 혐오했다. 그는 그 오래된 양피지 위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고 싶어했고, 설령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고 내용이 어렵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10세기, 혹은 그 이전에 작성한 족히 400~500년은 된 필사본에 관심이 많았다."(27-8)


2 발견의 순간 


"포조는 수도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으로 진실하며 학식이 높은 훌륭한 수도사들을 몇 명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포조가 보기에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다. 수도원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 힘든 자들을 모아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은 약골, 사회 부적응자, 혹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자식을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상인은 아둔하거나 무기력한 자식을 그곳에 내다버렸고, 농부는 자기 힘으로 먹일 수 없는 남아도는 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곳을 이용했다." "영적 수련을 위해서 세워진 수도원 회칙에 따른 힘겨운 생활 역시 밭에서 이루어지는 진짜 힘든 노동과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찬송가 영창을 위해서 일어나 앉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얼마나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이다. 포조에게는 수도사가 하는 수련이라는 것이 몽땅 위선으로만 생각되었다."(49-51)


"사실 중세에 가장 명성이 높은 수도원 도서관도 고대 로마 제국의 도서관이나 당시 바그다드나 카이로에 존재했던 도서관에 비하면 형편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활자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전의 오랜 세월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책이나마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고 불린 궁극의 시설 덕분이었다. 스크립토리움은 수도사들이 오랜 시간 앉아서 필사를 하던 작업 공간이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수도원에 자리가 생기는 대로 작업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필사 목적에 맞게 특별히 설계하고 건축한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귀중한 책을 수집하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훌륭한 수도원마다 깨끗한 유리창이 갖춰진 방을 준비하고 많게는 30명의 수도사가 한꺼번에 같이 앉아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책 사냥꾼들이 그들의 빼어난 유혹기술을 가장 집중적으로 발휘해야 할 사람은 스크립토리움의 책임자인 수도원 도서관 사서였다."(53)


"포조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포조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도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작품에 인용된 한두 줄의 토막글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점점 어두어져가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원장과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포조는 책의 서두를 읽는 것 이상의 여유는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포조는 루크레티우스의 라틴어 문장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곧장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데리고 온 보조 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이 어두운 도서관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서둘렀다. 다만 분명하지 않은 것은 포조가 그 책을 풀어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66)


3 루크레티우스를 찾아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이미 수세기 전부터 발생한 사상을 널리 퍼트리려고 한 추종자의 작품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구세주인 에피쿠로스는 에게 해에 있는 사모스 섬에서 기원전 342년 말미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테네 출신의 가난한 선생으로 식민지 개척자로 그곳에 오게 되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자신의 유수한 조상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출신이 한미한 에피쿠로스는 분명 그들과 같은 주장을 펼칠 수는 없었다."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은 하나의 눈부신 아이디어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지금껏 존재해온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으며 그 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인은 이 보이지 않는 입자들을 가리켜 더 이상 나누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원자(atom)'라고 불렀다."(93-4)


"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자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서로 결합하여 더 큰 물체를 이루기도 한다.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물체는 해와 달인데, 인간이나 물가의 날벌레, 모래알과 마찬가지로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에는 상위 범주도 없으며 원자 간의 위계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체(天體)도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며 진공(void)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움직임도 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천체는 단순히 자연질서의 한 부분이며, 원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로서, 천체를 구성하는 원자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창조와 파괴의 원리를 따른다. 설령 자연의 질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이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이다."(95-6)


4 시간의 이빨 


"팔레스타인에서 온 구세주[예수]에 대해서 에피쿠로스 학파가 던진 조롱과 그에 대한 특정한 이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인이 에피쿠로스 사상 전체를 완전히 사장시키게 만드는 배경을 제공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이교도였지만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며, 그들의 사상은 승리한 기독교에 궁극적으로 영합될 수 있었다. 에피쿠로스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神性)이라는 개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자신 외의 다른 존재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우리의 기도나 제의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보기에 기독교인은 우물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개구리 떼 같았다. 그들은 소리 높여 개골개골 울어댄다. 〈세계는 우리를 위해서 창조되었다!〉"(124-5)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교도(pagan)'라는 단어를 오래된 다신교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유피테르, 미네르바, 마르스를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을 이교도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교도'라는 단어는 4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어원적으로는 '농민(peasant)'과 관계가 있다. 이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촌스러운 무지에 대한 조롱이었으나 그 방향이 결정적으로 뒤집혔음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논객들은 에피쿠로스와 그 신봉자들에 대항하여 조롱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 경우에 이교 신들의 희화화는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신에게 희생 제의를 바치는 신앙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모든 고대 신화를 부정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상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재정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에피쿠로스는 멍청이에 먹보,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로마인 수제자 루크레티우스의 운명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127, 129)


"락탄티우스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그는 단지 기독교인이 인간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막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신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그러니까 신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설명처럼 신성한 쾌락의 굴레 안에만 머물며 인간의 운명에는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락탄티우스는 313년에 쓴 유명한 글을 통해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마치 탕아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시는 바로 신의 분노였다. 그리고 신께서는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그리고 그것은 그의 사랑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했다─지엄하고 가차 없는 폭력으로 부단히 인간을 벌하기를 원하셨다. 쾌락의 추구에 대한 혐오와 신의 정당한 분노의 현현. 이로써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조종이 울렸다."(130)


"5~6세기의 기독교인은 여러 가지로 울 일이 많았다. 도시들은 붕괴했고, 벌판은 죽어가는 군인들의 피로 물들었으며, 강도질과 강간이 횡행했다. 마치 이전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처럼 인간이 몇 세대 동안이나 이렇게 끔찍한 행동으로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이 필요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사태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깊고 근본적인 답을 제시했다. 이 모든 재앙은 한 개인이나 기관의 이런저런 흠 때문이 아니었다. 이 모두는 인간이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패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물려받은 후손으로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끔찍한 재앙을 받아 마땅했다. 엄청난 양의 끝없는 고통은 그들이 치러야 할 당연한 몫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류가 고통을 적극적으로 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이 정의롭고 확고하게 요구하는 진노의 대가를 제대로 지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33-4)


5 탄생과 재생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고대 문헌을 찾는 일을 페트라르카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을 다른 어떤 보물찾기보다 우위에 두면서 거의 관능적인 절박함과 쾌락을 동반한 일로까지 새롭게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그였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현재라는 시대를 한없이 혐오했다. 그는 자신이 거칠고 무지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곧 사라지고 말 하찮고 추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언사는 오히려 그의 카리스마와 명성을 드높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명성은 꾸준히 높아졌고 더불어 과거에 대한 그의 집착이 가진 문화적인 중요성도 점점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페트라르카의 집착은 후대에 부분적으로 관습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력한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른바 '인문학(studia humanitatis)', 즉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이들 언어로 된 문헌의 습득을 강조하고 수사학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150-1)


"초기의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기원을 이루는 운동에 관여하고 있음을 느꼈고, 여기에 자부심과 함께 경이로움,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운동의 일정 부분은 지금껏 살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틀린 것을 맞는 척 가장하지 말고 고대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첫 걸음이었다.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그 비극적인 손실을 애도하고 나자, 죽음의 저편에 누워 있는 것들로 가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즉 부활을 꿈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부활'은 모든 선량한 기독교인─성직자였으며 진실로 독실한 기독교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한─에게 매우 친숙한 개념이었다. 다만 이 경우에 부활은 내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이루어졌으며, 부활의 대상 역시 근본적으로 문화적이며 세속적인 것이었다."(151-2)


"요새화된 탑과 벽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등이 세워진 비좁은 피렌체 도심에는 공화국의 정치적 심장인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시뇨리아 광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일명, 베키오 궁)가 있었다. 살루타티에게 그곳은 도시국가 피렌체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였다. 피렌체가 다른 국가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고, 교황령에도 속하지 않으며, 왕이나 독재자, 혹은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 시민인 그들 자신으로 구성된 집단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독립적인 도시국가라는 사실이야말로 살루타티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피렌체의 지배자인 시민을 대신해서 쓴 편지나 공문, 의정서, 성명서 등은 모두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서 실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널리 읽히고 배포되었다. 살루타티는 과거의 부활이 골동품 애호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페트라르카와 공유했다. 살루타티의 글은 고대 수사학이 아직 살아 있으며 그것이 효과적으로 정치적인 감정과 오래된 꿈을 다시 일깨웠음을 보여주었다."(156-7)


"포조가 처음 니콜리를 만난 1390년대 후반만 해도 두 사람의 고대 도서 수집욕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이 둘은 처음부터 신앙에 관한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후대의 것보다 고대의 것이 더 우수하다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페트라르카와 같은 놀라운 문학적 야심이나 독창성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었다. 살루타티의 인문주의에 불을 지폈던 열렬한 애국심과 자유에 대한 열망도 시들해졌다. 대신에 그들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정신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가치들에 훨씬 더 못 미치는 것이면서 동시에 조금 더 이루기 힘들고 고된 것이었다. 그들을 지배한 것은 고대의 모방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그 모방의 정확성에 대한 강한 집착이었다. 살루타티가 키운 두 젊은이는 새로운 것을 경멸했으며 오래된 것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일만을 꿈꿨다. 정신적으로 편협하고 황폐한 이런 꿈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꿈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165)


6 거짓말 공작소에서 


"15세기 초에 포조가 로마에서 일할 당시, 해결을 구하며 교황청으로 날아드는 편지는 매주 거의 2,000통에 달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어느 법정의 사무량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이었고, 이와 같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인재가 필요했다. 신학자, 변호사, 공증인, 서기, 비서 등의 특화된 인물들이 로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청원서는 적합한 서식에 따라서 작성되고 제출되어야 했으며, 의사록도 세심하게 작성, 보관되어야 했다. 모든 결정과 판결도 기록된 뒤 필사되어 보관되었다. 칙령, 특허장, 인가증 등 교황청에서 내리는 일련의 교서들은 모두 필사한 뒤 봉인하여 보관했으며 이들을 축약한 문서를 따로 준비하여 배포했다. 로마 주교는 그 지위에 어울리는 거대한 규모의 내무조직을 갖추고, 로마 주교직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와 예법상 법도에 맞게 궁정인, 고문, 서기, 하인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행단을 거느렸다. 포조가 입문하여 발돋움하고자 하는 세상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172-3)


"교황청은 그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지식인 계급을 탄생시켰다. 이 지식인들은 사회적 기반이 약했으며 모순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들은 고용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헌신했고, 고용주의 후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형편에 냉소적이었고 자신들의 처지를 불행하게 생각했다. 냉소주의와 탐욕, 위선이 판을 치고, 전 인류에게 도덕적으로 살라고 설교하지만 정작 본인은 비뚤어진 웃전의 비위를 맞추면서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궁에서 유리한 지위를 얻고자 경쟁을 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건전한 희망과 품위를 갖춘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포조에 따르면, 교황청 사무국에 있는 모든 사제와 수도사들은 전부 위선자였다. 그곳에서는 종교가 이루고자 하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만약 교황청 사무국에서 혹시라도 특별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를 마주친다면 주의할지어다. 그자는 가장 악질에 속하는 위선자이다."(184, 187)


7 여우 잡는 함정 


"콘스탄츠 공의회(1414)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교회의 균열을 끝내는 것이었지만, 다른 두 개의 주요한 안건도 있었다. 하나는 교황의 통치를 개혁하는 문제로서 이 또한 요한네스 23세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이단 탄압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궁지에 몰린 여우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실상 이단 문제는 코사(요한네스 23세)가 손에 쥔 거의 유일한 전략적 무기였다." "체코 출신 성직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는 몇 년간 교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보헤미아 지방의 강력한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후스는 위험한 사상을 계속 유포시켰으며, 그 위험한 사상은 널리 퍼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교회조직 전체로부터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이 위험한 보헤미아인은 한편으로는 교회 내부에 있는 코사의 적들이 코사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주요 원칙을 누구보다도 명확한 어조로 밝히고 있었다. 부패로 지탄받는 교황에게 불복종하고 그를 폐위시켜라."(208-9)


"코사가 정말 후스에 대한 종교재판이 공의회의 주의를 분산시켜서 교회 분열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저지하거나 정적들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공식적으로 코사에게 통보된 고발장에는 총 70개의 혐의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공의회는 고발장의 내용을 그중에서 가장 가증스러운 16개 항목으로 압축했다. 성직 매매, 남색, 강간, 근친상간, 고문, 그리고 살인. 또한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선대 교황을 독살했다는 죄로, 그의 주치의를 포함한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고발당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가 고대부터 죄악시된 에피쿠로스 사상을 추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고발한 자들에 따르면, 교황은 믿을 만한 인사들 앞에서 줄곧 내세니 부활이니 하는 것은 다 거짓이며, 인간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몸이 죽을 때 영혼도 함께 사멸한다고 완고히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1415년 5월 29일, 교황은 공식적으로 퇴위되었다."(212, 214-5)


"포조는 콘스탄츠에 일정 기간 더 머물렀지만, 후스가 공의회가 열리는 회의장 앞으로 불려나왔을 때에도 여전히 콘스탄츠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토록 염원했고 그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나타난 회의장에서 이 종교개혁가는 조롱만 당했다. 그가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고함소리와 함께 저지당하고 말았다.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대성당에서 열린 엄숙한 의식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공식적으로 성직을 박탈당했다. 이단으로 판명된 후스의 머리에는 높이가 약 45센티미터에 달하는 원형 종이 왕관이 씌워졌다. 왕관 위에는 영혼을 잡은 채 갈가리 찢고 있는 세 마리의 악마가 그려져 있었다. 후스는 머리에 이 왕관을 쓰고 몸에는 쇠사슬을 찬 채로 대성당에서 끌려나와 자신이 쓴 책이 화염에 뒤덮여 있는 장작더미 앞을 지나쳐 마찬가지로 화형대 위에서 불태워졌다. 유물이 남지 않도록 형을 집행한 담당자들은 불에 시커멓게 변한 후스의 뼈까지 산산조각 낸 뒤에 라인 강에 뿌렸다."(216)


"포조처럼 빈틈없고 매우 숙련된 관료로서 이제 나이도 거의 마흔에 달한 자라면 뭔가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든든한 수단을 강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포조는 그런 종류의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성 갈렌 수도원에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이번에는 동행인 하나 없이 콘스탄츠를 떠났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숭고한 작품을 찾아내서 그 끔찍한 감옥에서 꺼내 다시 세상 빛을 보게 해주어야겠다는 포조의 열망은 이런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더 강렬해지기만 한 것 같았다." "포조가 치유사로서의 마법 같은 능력을 다시금 발휘한 것은 1417년 1월, 이번에는 아마도 풀다 수도원에서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선반 위에 놓인 한 권의 장편시를 꺼내 들었다. 포조는 예전에 본 퀸틸리아누스의 글이나 성 히에로니무스가 집대성한 연대기에서 그 시의 저자의 이름을 읽은 적이 있음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바로 그 시의 제목이었다."(226-8)


8 사물의 길 


"루크레티우스가 생각하기에는 신들이 정말로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거나 혹은 그들이 바치는 여러 종교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정말이지 천박한 신성모독이었다. 신이라는 존재의 행복이 우리가 웅얼거리는 몇 마디 말이나 반듯한 행동거지에 달려 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사실 이런 신성모독도 따지고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신들은 인간이 던지는 모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혹은 할 수 없는) 그 무엇도 신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 "이교도 문헌에서 마주치게 된 이런 위험한 생각들은 그 자체가 막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후대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공감한 일부 독자들처럼 포조 자신도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빼어난 고대의 시인은 그저 이교도 신앙이 얼마나 공허하며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에 대한 희생 제의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직관적으로 깨달았음을 보여줄 뿐이라고."(231-2)


"그러나 무신론─보다 엄밀하게는 신의 무관심─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제점이 아니었다. 정작 가장 주요한 쟁점이자 대단히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물질계였다. 이 논쟁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수많은 이들─마키아벨리, 브루노, 갈릴레오 등─을 매료시켜서 기묘한 일련의 사상적 조류를 형성했다. 일찍이 이것은 포조의 발견의 결과로서 그 사상이 되살아난 바로 그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탐구된 바 있었다." "그 주장들 중 일부는 여전히 생경하고, 다른 일부는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 덕분에 가능해진 과학적 발전의 결과를 향유하는 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항의를 받기도 한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만하다. 포조의 동시대인들도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그 시 자체는 깜짝 놀랄 만큼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루크레티우스가 시에서 주장한 내용의 대부분은 도통 내용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며 불경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232-3)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 세상은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정신적 삶과 육체적 삶도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 영혼도 육신만큼이나 물질적이며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 이 모두를 깨닫게 된다고 해도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야말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거나 신을 두려워하거나 필멸의 존재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고결하게 희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랠 수 없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행복한 인생의 주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수련을 통해서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248-9)


"이성의 수련은 전문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성직자를 시작으로 하여 거짓 환상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내뱉는 거짓말을 뿌리치고 사물의 본질을 똑바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모든 관조의 노력들─모든 과학, 도덕적 고찰, 삶을 가치 있게 만들려는 시도들─은 사물을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씨앗인 원자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해서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이 세상에는 원자와 진공,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말이다(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차가운 공허함만 느껴질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흔히 철학의 기원은 경이롭게 생각하는 마음이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뭔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로 바뀌어, 지식에 의해서 경이로워했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설명에서는 이 과정이 뭔가 역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의 가장 깊은 경이로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249)


9 귀환 


"포조는 새로 선출된 교황 니콜라우스 5세에 대한 봉사에 여러모로 매우 만족했다. 니콜라우스 5세의 속명은 톰마소 다 사르차나로서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교양 있는 인문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페트라르카, 살루타티 등 여러 인문주의자들이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고전에 대한 학식과 심미안에 기초한 교육으로 탄생한 결정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결과적으로 니콜라우스 5세의 재위기간(1447~1455)은 매우 만족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교황의 비서로서 포조가 처음에 꿈꿨던 것만큼 그렇게 완벽하게 목가적인 평온한 시기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 동안, 포조는 트라브존 출신의 조르조와 터무니없는 실랑이 끝에 비명과 주먹질로까지 이어진 소동을 겪었다. 또한 포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의 보호자가 되어달라는 자신의 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교황이 자신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적 로렌초 발라를 교황의 비서로 지명했을 때 틀림없이 당황했을 것이다."(268-9)


"1453년 4월, 피렌체의 총리 카를로 마르수피니가 죽었다. 마르수피니는 뛰어난 인문주의자였으며 임종 시에도 『일리아드』를 라틴어로 번역하던 중이었다. 당시 총리직은 더 이상 피렌체 권력의 중심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 실질적으로 도시를 장악함으로써 총리의 정치적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고전 수사학에 대한 통달이 공화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것처럼 보였던 살루타티의 시대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포조의 옛 동료이자 뛰어난 재능의 역사가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맡았던 두 차례의 임기를 포함한 지난 세월 동안, 피렌체의 총리직은 여전히 그런 뛰어난 인문주의자들을 위한 자리로 남아 있었다." "포조는 피렌체의 총리로 5년간 봉직했다. 아마도 포조는 총리가 해야 할 소소한 업무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그는 보다 상징적인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다. 약속대로 그는 저술활동에 헌신하여 여러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했다."(269-70)


10 일탈 


"시적 힘과 더불어 명료하게 기술된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무신론을 정의하는 일련의 단죄목록이 담긴 실질적인 교과서라고 할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종교재판관의 심문 교본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 이 사상이 일으킨 파장은 그 시가 가진 시적 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들로부터 초조한 반응을 끌어냈다. 그런 반응의 하나를 대표하는 인물로 15세기 중반의 위대한 피렌체인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다. 일찍이 20대 시절, 피치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접하고 크게 감명을 받아 시의 저자를 〈우리의 위대한 루크레티우스〉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학술적인 논평까지 썼다. 그러나 훗날, 다시 이성을 찾은─말하자면 기독교인으로 돌아온─피치노는 자신이 쓴 논평을 태워 없애버렸다. 자신이 〈루크레티아니〉라고 부른 루크레티우스 추종자들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공격했고, 삶의 대부분을 플라톤 철학을 응용하여 기독교를 위한 독창적인 철학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바쳤다."(277)


"사실 루크레티우스를 금지한 교회 당국 내에도 인문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 있었으며, 결국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549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금서목록에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추기경 마르첼로 체르비니의 요청으로 금서목록에 오르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가톨릭 지식인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담긴 생각을 우화라는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에라스무스 역시 『에피쿠로스주의자』라는 제목의 대화체 형식의 글에서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인 히도니우스의 입을 통해서 〈경건한 기독교인보다 더 에피쿠로스주의적인 사람은 없다〉라고 언급했다. 금식하고 죄를 회개하며 죄지은 육신을 벌주며 사는 기독교인이야말로 쾌락주의자로 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들이야말로 옳은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옳게 사는 자보다 더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284-5)


"에라스무스의 이런 역설이 교묘한 속임수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에라스무스의 친구인 토머스 모어의 대표작 『유토피아』(1516)에는 에피쿠로스주의와의 연결점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토피아의 거주민들은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전부 또는 그 대부분〉이 쾌락의 추구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좋은 유토피아 사회와 부패하고 사악한 영국 사회(게으른 귀족들이 소작농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의 핵심에는 바로 에피쿠로스주의의 중심 원칙이 있음을 이 작품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모어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등장하는 베누스에 대한 멋진 찬가를 통해서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이 쾌락의 원칙은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재생산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쾌락의 추구라는 이 원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게 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모어는 잘 알고 있었다."(285-7)


"그러나 유토피아는 영혼이 육체와 마찬가지로 없어질 것이라고 믿거나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무관심하며 오직 신 자신에게만 신경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소수의 계몽된 엘리트만 모인 철학자의 정원에서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 곤란할 것이다. 설령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의 힘이 존재한다고 해도 모어는 인간의 본성은 그런 두려움 없이는 결국 무력과 거짓이라는 잘못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야 만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모어의 믿음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열렬한 가톨릭 신앙의 영향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군주론』의 저자 역시, 법과 관습은 두려움이 동반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90-1)


"그런데 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몸집의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 주인공이었다. 1580년대 중반, 브루노는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나폴리에 있던 수도원에서 도망쳐나와 이탈리아와 프랑스 각지를 계속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런던에 정착했다." "브루노에게 루크레티우스의 우주는 음울한 각성의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우주에 시공간의 한계가 없다는 것, 규모가 아무리 크든 작든 모든 것은 원자로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원자야말로 모든 존재의 기본 구성요소이며 바로 그 원자를 통해서 개체와 무한이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다. 멍들고 두들겨 맞은 성자 예수의 몸에 신성을 부여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머나먼 천국에 있는 성부 여호와를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무의미한 짓이었다." "브루노가 귀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을 내는 목소리를 언제든지 틀어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 호전적인 바보들에 대항하여 박차고 일어서는 용기였다."(292, 297-8)


"브루노가 지구가 우주의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지지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여전히 교회나 학계 모두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받으며 파문까지 당할 수 있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불러일으킨 충격을 더 멀리 끌고 나갔다. 브루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1600년 2월 17일,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에 세워진 화형대 앞에 성직을 박탈당한 전 도미니쿠스회 수도사가 머리를 밀고 당나귀 등에 올라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곧 불이 붙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브루노는 산 채로 불탔고, 채 타지 않고 남은 뼛조각도 긁어모아 산산이 가루로 만들었다. 화형의 흔적인 뼛가루와 재는 그렇게 흩어졌다. 이제 그 작은 입자들은 브루노가 믿었던 것처럼 즐겁고 위대한 영원한 물질의 순환 속으로 돌아갈 것이었다."(298, 302)


11 사후세계


"브루노가 영국에서 보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가도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하나인 몽테뉴의 『수상록』을 통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마주친 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1580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된 『수상록』은 1603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100여 행에 달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을 직접 인용했다."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 대한 악몽을 통해서 도덕성을 강제하려는 태도를 경멸했다. 몽테뉴 역시 자기 자신의 감상의 중요성과 물질계의 증거에 매달렸다. 또한 금욕적인 자학과 육신에 가해지는 폭력을 혐오했으며, 내적 자유와 만족감을 귀하게 여겼다. 몽테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서면서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과 함께 스토아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몽테뉴에게 더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육체적 쾌락을 찬양하도록 이끈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이었다."(304-5)


"몽테뉴는 에피쿠로스적 세계에서 생각하고 쓰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긴 꿈 중 하나를 통째로 버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고요하고 안전한 땅에 서서 다른 이들에게 닥치는 난파의 운명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서 있을 수 있는 안락한 언덕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배에 올라탄 상태였다. 몽테뉴도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명예와 권력, 부를 향한 끝없는 분투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냉소주의에 완전히 공감했다. 또한 그 역시 자신만의 상아탑으로 물러나 책으로 둘러싸인 개인 서재에서 스스로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은둔 생활은 끝없는 동요, 형태의 불안정성, 세상의 다원성, 그리고 그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휩쓸려들게 되는 무작위적인 일탈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307)


"영국에서도 매우 어렵기는 했지만 신을 최초에 원자를 창조한 자로 설정함으로써 원자론과 신앙의 병존이 가능해졌다. 아이작 뉴턴은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의 하나로 여겨지는 자신의 책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시 제목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원자론자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입자들이 전체로서 계속 존재하는 한 그들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똑같은 본성과 성질을 가진 여러 형체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입자들이 닳아서 없어지거나 조각나 부서지게 되면, 사물의 본성은 바로 이 입자들에 달려 있으니 그 또한 변할 것이다.〉 그러면서 뉴턴은 조심스럽게 신성한 창조주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 어떤 일상적인 힘도 신이 최초에 창조한 원자를 쪼갤 수는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은 드라이든이나 볼테르의 회의주의, 디드로나 흄을 비롯한 많은 계몽시대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실용주의적이며 대단히 파괴적인 불신론을 낳는 데에도 기여했다."(326-7)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한 권이었다. 제퍼슨은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 특히 무지와 공포가 인간 존재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확신을 품는 데에 도움을 받았다. 사실 제퍼슨은 시의 저자인 루크레티우스가 기대했을 법한 방식이 아니라 16세기 초의 토머스 모어가 꿈꿨을 만한 방식으로 이 고대 유산을 받아들였다. 알다시피 제퍼슨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공적 생활로 인한 격렬한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새로운 공화국의 초석이 되는 중대한 정치적 문서를 작성하는 데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 문서의 내용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만든 또 하나의 뜻밖의 전환이었다. 이 문서로 탄생하는 정부의 사명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복 추구〉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루크레티우스를 이루던 원자들은 이렇게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그 자취를 남겼다."(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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