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법률가들 -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 진실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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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나치의 법이론은 형식주의와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의 통합', '명예', '인종적 동질성', '인종적 평등' 같은 실체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법의 실질적 개념을 선호했다. 개인의 권리는 군주와 신민의 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잔재로 취급되며 저만치 밀려났다. 신뢰에 기초한 지도자Führer와 민족공동체의 단단한 결속관계와 무관하다는 이유였다. '독일적인 것'과 '독일법'이 나치 법이론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빌헬름 코블리츠는 나치당의 1920년도 강령 제19항이 이미 로마법을 독일 공동체법Gemeinrecht으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상기시킨다. 로마법은 〈유물론적 세계질서에 복무〉해 왔지만 독일의 공동체법은 일상을 규제받는 당사자들인 민족동지Volksgenossen의 도덕감정이나 정의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코블리츠는 이런 방식으로 법과 도덕 간의 대립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익은 사익보다 앞선다〉라는 원칙에 따라 법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신 공동체를 육성해야 했다."(20-1)


"히틀러의 생각들, 즉 『나의 투쟁』과 여러 연설에서 길게 늘어놓았던 장광설을 규범적 언어로 옮기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치 법이론가들은 필요한 규범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법률가들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을 근거 삼아, 총통의 포괄적 권위는 그가 집단적 의지를 개인 인격으로 체화한 것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 주권(일반의지)의 토대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물론 이들은 루소의 의도가 민주정 형태는 아니라 해도 공화정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규범적으로 좀 더 넓게 해석하려 했다. 헌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총통은 (존재질서Seinsordnung에 실질적 토대를 둔) '인민Volk'의 객관적 의지를 지닌 자〉로서 〈자기 내면에 민족주의적völkisch 집단의지를 형성함으로써 제각각인 모든 소망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인민의 전체성을 구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5-6)


"민족사회주의가 모든 시민의 삶을 통제하려는 것은 계몽철학적 기본원리와 충돌했다. 이는 민족사회주의 법사상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 및 법철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결국, 칸트가 법과 윤리를 구분한 것은 법적 권위를 시민의 윤리적 태도로까지 확장하는 민족사회주의 국가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나치 법률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에 기댈 수는 없는데도 특정 개념들─선의지, 무조건적인 의무, 정언명령 등─만 맥락에서 벗어난 채로 끌어다 쓰면서 윤리에 관한 고찰을 도구로 이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윤리적 의무는 행복이나 효용성 극대화 같은 목적과 별개로 유효하다는 칸트의 주장도 당연히 잘못 해석되고 말았다. 민족사회주의 수사rhetoric는 윤리적 의무가 그 자체로um ihrer selbst willen 유효하다는 칸트의 사상을, 당사자의 동의나 정당한 이유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의무로 간단히 바꿔버렸다."(28-9)


2장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제3제국으로


"'독재조항Diktatur-Artikel'이라고도 불리는 바이마르헌법 제48조 제1항은 대통령이 필요 시 특정 주가 헌법적으로나 법적으로 제국에 부여된 임무를 이행하도록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제2항에서는 공공질서와 안전이 훼손되거나 위험에 처할 경우 제국 대통령이 이를 회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규정했다. 대통령은 군사력 지원을 요청할 권리 외에도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들을 폐지할 권한이 있다." "이토록 광범위한 집행권한을 부여하는 법조항이 어떻게 의회민주주의 헌법에 파고들었을까? 첫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헌법 초안 작성자들의 당초 목적은 파괴적일 수 있는 극우파와 급진좌파의 영향력에 맞서 공화국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헌법위원회의 구성원 중 일부는 제국 의회가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며 필요한 개혁을 방해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막스 베버는 대통령을 의회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세우자고 역설했다."(47-8)


"당시 기본적인 논리는 이랬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은 '민의'에 의해 승인과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정부 내각은 정당들을 대표하여 전략적으로 정치적 협상을 벌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통령만큼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정치적 타협에 의존했던 반면 제국의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은 입장이었다. 따라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통합과 안정의 상징이었으나, 정부는 갈등으로 점철된 의회의 힘겨루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반영하는 존재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두 주요 정치기관의 규범적 토대에 대한 이런 견해는 보수우파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의 광범위한 권력 보장에다 위계적 국가에 대한 독일 내의 폭넓은 지지까지 결합하여 권위주의가 부상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일부 주요 조치들이 정당한 헌법적 규범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49)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에베르트 제국 대통령은 작센 및 독일 북부에서 공산주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무려 일곱 차례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에베르트는 제48조를 대대적으로 활용한 데 이어 입법권을 의회에서 내각으로 이양하는 「수권법Enabling Acts」으로 정치와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총 8개의 「수권법」이 통과되었다. 처음에 제48조 제2항은 정치적 불안과 격변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3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 사이 '입법독재'나 다름없는 대통령의 입법활동이 의회입법을 대체하자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서 권력의 추가 대통령 쪽으로 기울어버리는 상황이 됐다. 1925년은 바이마르공화국 제1기가 종말을 고한 해였다. 그해 2월 에베르트가 사망했고, 뒤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성향이자 반反공화주의 입장으로 유명한 육군 원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민당 후보를 제쳤다."(49-50)


"1932년 7월 20일, 프란츠 폰 파펜 제국 총리는 오토 브라운 총리가 이끌던 프로이센 내각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을 연방 전권위원 치하로 복속시켰다. 파펜이 보인 과감한 행보의 법적 근거는 제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승인한 긴급명령이었다." "파펜의 조치에 대해 프로이센주 정부는 법치를 따르는 동시에, 통상적으로 제국과 개별 주 사이에 분쟁 조율을 담당하던 라이프치히 법원(국사재판소)에 해당 문제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1932년 10월 25일, 국사재판소는 '프로이센 대對 제국' 구도에서 프로이센 정부는 제국에 대한 의무를 위반한 바 없으나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고(즉 제48조 제1항이 아니라 제2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 같은 판결은 프로이센 정부의 권한을 제국에 이양하는 것도, 프로이센 총리 및 각료들을 파펜이 해임한 것도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프로이센 경찰력을 장악하려는 조치는 제48조 제2항에 부합한다고 판결했다."(52-4)


"국사재판소의 결정은 당시 대표적인 법이론가인 카를 슈미트와 한스 켈젠의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슈미트는 국사재판소의 법적 절차에서 제국 측 변호를 맡아 프로이센주를 상대로 한 제국의 조치를 옹호했다." "슈미트가 추론한 핵심은 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명령을 실행할 권리를 부여하며, 이 경우 대통령은 그저 자신의 헌법적 권력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 안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정말로 대통령의 결정을 정당화할 만했느냐는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경우 힌덴부르크가 제48조를 동원한 것이 과연 헌법에서 제48조를 적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 상황에 해당했는가이다. 슈미트는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적 권한을 지닐 뿐 아니라 헌법의 수호자 역할도 담당하므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치적 재량에 달린,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같은 의문을 무마하려 했다."(54-6)


"슈미트의 주장에 반대한 켈젠은 제국 대 프로이센의 문제를 민주주의적 「바이마르헌법」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켈젠이 보기에 대통령은 헌법의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하며, 여기에는 헌법의 기본적인 규범 원칙을 존중하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제국의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린다는 슈미트의 가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힌덴부르크의 명령을 평가할 결정적 기준은 '제48조를 발동하기 위한 헌법적 요건이 충족되었는가'라고 생각했다. 켈젠이 비판한 지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제국 대통령의 명령은 위헌적이었고, 국사재판소인 라이프치히 법원의 판결에 일관성이 없었으며, 법원 판결의 결함은 상당 부분 제도적 실패─바이마르 내 헌법재판소의 부재─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켈젠은 헌법 사법권(관할권)의 열성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삼권분립이 명확히 이루어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국가에는 헌법재판소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59-61)


3장 총통국가


"나치 법이론가들은 히틀러의 정치적 쿠데타를 '합법적 혁명'으로 규정하여 혁명적 동력과 법적 정합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 이들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긴급명령에 의한 통치와의 연속성을 지적하며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은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나치 정권은 「바이마르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거나 제국의 대통령을 축출하지는 않았지만, 「수권법」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장악할 형식을 갖춘 것만은 분명했다. 카를 슈미트는 〈오늘날의 국가를 구속할 수 있는 어떤 토대도, 한계도, 그 어떤 중요한 해석도 폐위된 옛시대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 "('헌법적 의미의 혁명'을 언급했던) 울리히 쇼이너는 합법적 혁명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민운동Volksbewegung, 전통적 법질서와의 단절, 국가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새로운 정치원칙이었다. 쇼이너는 〈진정한 혁명〉인 나치의 장악이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73-5)


"민족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요소는 인민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였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민족 구성원들은 오직 공동체적 질서 안에서만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윤리적 삶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이너는 민족사회주의 법질서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국가의 필수재, 명예, 국민 건강, 관습, 전통〉을 수호하는 데 역점을 둔다고 봤다. 국가에 맞선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소위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나치 독일의 조직 원리로 〈지도자의 말씀이 모든 성문법에 우선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외에도, 민족공동체 원칙Volksgemeinschaftsprinzip이 법의 원천 즉 법원Rechtsquelle, 法原이 되었다." "민족공동체라는 개념이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한, 이는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그 위에 투사하기 좋은 배경이 되었다. 민족사회주의의 인종 독트린은 신화적 공동체의 가장 암울한 이데올로기를 나타낸 것이었다."(77, 81)


"카를 슈미트는 1932년 작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전체국가total state'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전체국가는 19세기 자유주의 '중립국neutral state'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모든 사회 영역을 아우르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전체국가는 전 국가적 통제로부터 특정 영역들(슈미트는 경제를 비롯하여 종교, 문화, 교육을 언급했다)은 제외해 주는 중립성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폐기했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적절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 전제되었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즉, 모든 정치적 행동의 근원─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도덕의 바탕이 '선과 악'의 개념이고 경제의 토대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범주이듯, '친구'와 '적'은 정치 영역의 구성요소였다. 슈미트는 이런 기본 개념들은 〈구체적인 실존주의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전체적 통일성을 상대화하지 않고 정치 영역의 내적 역동을 표현한 개념이었다."(82-3)


"법 이론가 오토 쾰로이터는 전체국가total state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전체국가의 권한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쾰로이터는 민족사회주의 정치체계를 권위주의 국가의 형태로 이해하고자 했다." "쾰로이터가 말한 권위주의 국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시할 수 없는 〈공동체 윤리〉에 뿌리를 두었다. 반면에, 권위주의 국가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쾰로이터가 보기에 민족사회주의 국가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했다. 정치적 힘이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므로 총통의 권력은 단순한 지배와 폭정 수준을 초월했다. 그는 전체국가와 대조적으로 〈권위주의 국가의 본질은 국민의 신뢰를 받은 국가권력의 존재에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리더십의 증표는 총통의 의지가 곧 국민의 의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86-7)


"민족공동체 원칙은 지도자 원칙에 이은 두 번째 법의 원천이었다. 지도자 원칙이 공동체 원칙보다 우선하는지 아니면 동등한지라는 난제에 봉착하면, 나치 법률가들은 총통에게는 무엇이 인민에게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독일의 연속성과 번영을 보장할지 정확히 알아내는 인식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회피했다. 즉 총통은 인민의 의지에 대한 직접적인 발현이며, 더 나아가 인민의 의지와 동일체라는 주장이었다." "총통의 절대적 권위를 이런 방식으로 옹호한 것은 나치 국가에 통제 메커니즘이 부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였다. '민족'의 질서에 대한 온전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정치적 리더십은 스스로 좋고 옳다고 판단한 것을 명령하게 됐다. 총통의 명령과 지시는 마음 깊은 곳의 충성심과 윤리적 헌신으로 복종해야 하는 법규나 마찬가지였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법적 의무와 윤리적 의무를 뒤섞어 버렸다. 이 왜곡된 규범 속에서 윤리, 법, 정치가 한데 맞물렸다."(102-3)


4장 민족사회주의 형법


"나치 체제에서 형법은 민족공동체의 순수성과 정권이 가진 불가침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범죄자들'을 겨냥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법사상가들(저명한 대학교수 및 법무부 소속의 고위공직자 등) 사이에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자유주의적 형법을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체계로 어떻게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이들은 법률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 대한 충성 의무를 위반한 경우까지도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을 수정할 방법을 찾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도' 중심의will-based 형법이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에 가장 잘 부합하리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런 법에서는 범죄자의 범행이라는 실제 결과보다는 범죄 의도가 책임과 죄책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다. 따라서 앞으로 형법은 행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신념과 태도에도 초점을 맞춰야 했다."(106)


"그럼에도 정권은 법률가들의 정치적 굴종에 보답하지 않았다. 1939년 12월 중순 히틀러는 법무부가 새롭게 마련한 형법 초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로써 6년에 걸친 대대적인 형법 정비작업은 무산되었다. 히틀러가 법적 규제에 대해 미적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1939년 9월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신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어떤 규범적 규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더 강해졌다. 명확히 구체화된 법적 규범과 법령을 인정한다면 나치 정권이 형사 사법권을 장악하는 데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과 법적 규범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나치 국가의 강압적 권력은 더 확대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개인의 양심에 규제를 맡겼던 윤리적 의무는 이제 법적 의무가 되었고, 민족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위반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윤리적 의무와 법적 의무의 통합은 윤리적 품위와 진실성, 범죄성 사이의 경계를 흐려놓았다."(108-9)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형법은 시민들이 특정 행위가 불러오는 부정적 결과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처벌은 법에서 잘못되었다고 명확히 정의한 행위에 대한 대응이다. 처벌은 나쁜 것이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복수는 물론이고 보복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보복과 복수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매여있으므로, 신뢰할 만한 형사 사법권의 안정적인 지침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나치 법이론가들에 따르면 보복은 형법의 핵심이었다. 나치 국가의 대표적인 형법학자인 에드문트 메츠거는 처벌의 본질과 목적을 구분했다. 처벌의 본질은 정당한 보복 대응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 목적은 민족공동체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메츠거는 보복 또한 예방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복은 형을 선고받은 개인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교육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치 국가의 형법 정책은 민족공동체 내에서 증오와 복수의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114-7)


"법의 도덕화는 충실, 충성, 명예 같은 특성이 형법 속에 스며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몇몇 나치 법이론가들은 명예처벌Ehrenstrafe을 재도입하는 데 찬성했다. 킬대학 형법학 교수인 게오르크 담은 이 같은 명예처벌은 형법을 〈범죄에 맞서 싸울 합리적 기법〉으로 보는 관점과 〈법의 영역에 개인 차원을 초월한 존엄까지 포함하여 민족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 통합하는〉 관점으로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에 따르면 〈법은 단지 시민의 외적 공존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법적 행동에만 관심을 둔다. 범죄자의 신념Gesinnungen은 상관하지 않는다. 국가는 권리를 박탈할 수 있지만 명예를 박탈할 수는 없으며 내적 신념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과 윤리, 형법과 민족에 대한 인식Volksanschauung이 함께 자라는〉 법 체계 속에서는 명예처벌을 없앨 수 없다. 실제 각 공동체는 구성원의 충성과 명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120-1)


"나치 법이론가들은 자유주의적 형법의 주요 원칙, 즉 어떤 행위를 처벌하려면 범행 발생 시점에 처벌 가능하다고 법적으로 공표된 경우에 한한다는 원칙을 거부했다. 사법권한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이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나치 법학자들은 〈범죄자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 비난했다. 법률상의 허점이나 법안의 불안전함을 근거로 범죄자에게 처벌을 피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법학자 카를 셰퍼는 자유주의적 준칙이 판사의 자유 재량에 족쇄가 되어 판사를 한낱 〈분류 기계Subsumtionsmaschine〉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치 법학자들은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를 '처벌 없는 범죄는 없다nullum crimen sine poena'로 대체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각 범죄마다 법으로 규정된 범행이 성립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처벌과 속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123)


5장 인종주의적 입법


"민족사회주의에 동조한 법이론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나치의 인종 독트린을 수용했다. 수많은 법률 해설자료에서 '인종'을 〈전형적인 신체적 특색과 정신적 특징에 의해 여타 인간 집단과 구분되는 인간들의 집단〉으로 규정한 귄터의 정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차이가 동질성Artgleichleit과 이질성Artfremdheit 간의 경계를 결정했으며, 이는 결국 법적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됐다." "쾰로이터는 국가의 토대와 통치에 대한 자신의 구상이 가져올 극단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리더십은 동질적 인간 십단을 상호보완적으로 조직하고 적의 세력을 저지하며 때에 따라서는 말살할 수도 있는 힘이다. 즉, 모든 리더십은 내적 질서를 생성하고 자체적인 힘을 사용해 방해 세력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 법률가들은 인종적-생물학적 요인을 범죄와 직접 연관 짓기도 했다. 범죄 예방은 독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보호를 수반했다."(163-5)


"나치 법률가들은 사실is과 당위ought의 이분법을 단순한 법실증주의의 구성 개념에 불과하다고 맹비난하면서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법실증주의는 민족적 법사상의 기본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논지는 분명했다. 주어진 민족의 생활질서, 즉 존재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민족중심적 법학에서 경험과 규범의 영역이 융합되어 사실/당위의 차이는 소멸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인 것과 규범적인 것의 이 같은 통일은 법이론가들이 인종 개념을 활용할 때 재량권을 부여했다. 나치 사상가들은 '사실'과 '당위'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경험적 차원에서 규범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도움이 되면 두 차원을 쉽게 뒤섞어버렸다. 이들 사고방식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자연과학적' 전제로부터 규범적 결론과 의무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용되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이후 통과된 인종주의 법에 사이비과학적 근거를 부여했다."(167-8)


"론 L. 풀러는 『법의 도덕성』에서 법의 8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즉, 법체계는 (임시 방편의 결정이 아닌) 일반 규칙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규칙은 일반에 공개되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너무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하고,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소급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공표된 규칙과 실제 집행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영향을 직접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법적 규범의 공표와 투명성은, 풀러가 생각한 법질서로서의 자격을 갖춘 규칙 체계의 핵심 요건이었다. 제3제국의 인종 정책이 전개되고 급진화된 과정, 특히 공표된 법에서 비밀스런 산업 수준의 대량학살 계획으로 전환한 것은 풀러가 제시한 조건이 적절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불가능성이 가져온 결과는 주목할만하다. 모든 규정을 공개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요건이 나치 정권이 최악의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0-1)


6장 경찰법


"제3제국 초기에 경찰권력은 1933년 2월 28일 자 「제국의회 화재 법령」에서 비상시에 허용한 특별조치를 기반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차츰 경찰의 주요 기능을 총통국가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일로 규정하면서 결국 행정집행 권한을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데─실정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나치 경찰법 전문가였던 발터 하멜은 경찰은 〈모두가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민족의 가치Volkswerte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역할을 준수하는지 확인〉할 임무를 띤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찰을 국가권력의 비이성적이고 정의하기 힘든 측면과 결부하는 이런 수사rhetoric는 힘러가 경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만드는 것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나치 법률가들은, 포괄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확히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국가를 지지하면서도 경찰이 더 이상 그런 권리 침해를 막지 않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202-4)


"3차 「게슈타포법」의 초안 작성자이자 게슈타포의 법률 자문이었던 베르너 베스트는 〈인종주의적 총통국가에서 정치경찰의 사상과 정신〉을 정의하면서 경찰의 임무를 인종 위생과 연결하기도 했다. 〈[정치경찰은] 각 질병의 증상을 시의적절하게 인식하고 파기의 원인균이 내부의 부식에 의해 생겨났는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의도적으로 독이 주입된 것인지 확인하여 적절치 못한 것은 뭐든 제거함[으로써] [···] 독일 정치체의 위생을 신중하게 감독하는 기관이다.〉 베스트의 저술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현혹된 나치 친위대 법률가의 토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찰법에 관한 당대의 공식적인 주요 해설이었다. 실제로, 1940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독일경찰』은 개인주의적-인도주의적 국가(개인들 간의 합의 의지 개념 고안)와 민족국가를 구분했고, 이는 경찰의 지침서가 됐다. 그가 보기에 경찰은 〈분열과 파괴에 맞서 민족적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질서 및 안보 서비스〉에 해당했다."(206-7)


"나치 국가에는 성문화된 경찰법이 없었다. 고정된 법체계 안에서 경찰권력의 범위를 규정했다면 독재정권의 정치적 야욕을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치 법률가가 초안을 작성한 유일한 법이었던 「게슈타포법」에는 행정 관료체계로부터 정치경찰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이들을 강화하려는 계산만이 담겨있었다. 나치의 법 관련 저술들은 전통적 규범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에 대한 이론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행정 관료체계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총통의 의지라는, 사실상 개인화된 이 형태가 국가 행정보다 우선했지만, 행정부는 나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전통적인 법적 안정성이라는 중요한 연속성을 제공했다." "베스트는 경찰이 나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통적인 형태의 합법성을 초월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당성 유지를 위해 관료국가Beamtenstaat와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 나치 국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214, 217-8)


7장 나치 친위대의 사법관할권


"1939년 10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나치 친위대와 경찰사법권은 무장친위대원, 친위대 특무대원, 참전 경찰부대원의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군사법원은 나치 친위대원의 정치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들을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힘러가 나치 친위대 내부에 특별 사법체계를 만든 것은 단지 무장친위대원들과 나치 친위대 특무대원들을 국방군의 군사법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법을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의 수중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제3제국 권력구조 안에서 나치 친위대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역사학자 제임스 바인가르트너의 표현에 따르면 나치 친위대 판사는 〈전통적인 판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처신해야 했다. 법조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상적으로는 법조문보다도 (나치 친위대 정신에 부합하는) 원칙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투사이자 교육자여야 했다.〉"(224-6)


"나치 형법이론의 변화─의도 중심의 형법, 범죄자 유형론 승인, 유추 허용 등─는 모두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에 뚜렷이 영향을 미쳤다. 나치 친위대 판사들은 법과 도덕의 통일과 함께 나치 친위대 정신에 따라 사건을 판결했다." "나치 친위대 판사 노르베르트 폴이 보기에 피고인이 판사에게 주는 인상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데 중대한 요소였다. 그는 심지어 〈법령보다도 피고인의 인격이 정의 구현을 좌우한다〉라고 주장하며 법령보다 인격을 우선시할 정도였다."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간 폴은 개별 범죄자 유형의 구체적인 특색((주취자, 상습절도범, 살인범 등)에 초점을 맞춘 범죄학적 접근과 달리, 규범적 접근은 소속 집단의 일반적 특징에 비추어 범죄자를 평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형을 선고할 때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이 작동하도록 문을 활짝 연 셈이 되었다. 폴이 범죄자 유형론을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바람에 일부 나치 법률가들조차 이를 법률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229-31)


"나치 친위대 사법권의 도덕률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이하게 변형된 도덕률의 문제는 그 개념들이 굉장히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도덕률을 구성하는 각종 원칙과 덕목─정직, 품위, 신뢰성, 청렴, 충성, 충실─은 사회적·법적 배경으로부터 추출된 것으로, 도덕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우리의 이해에 속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치 체제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을 재해석했다. 실제로 품위, 명예, 강직함, 충성, 출실 같이 수용 가능한 개념을 법치사회의 전통적 도덕에 의해 금지된 것으로 재정의하는 등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념을 왜곡했다. 그렇게 도덕 질서를 변형시킨 나치 국가, 특히 나치 친위대는 윤리적 의무가 무제한적 전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살인과도 혼동되는 규범 세계를 창조했다. 이 같은 새로운 규범 세계는 완전한 무도덕주의나 무한한 범죄의 세계가 아니라, 범죄행위와 살인이 윤리적 의무와 요건에 부합하는 것과 같은 전복된 질서였다."(244-5)


8장 민족사회주의가 추진한 법의 도덕화


"제3제국은 시민들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규제하려는 포괄적 가치체계다. 그러므로 전체주의 국가는 모든 사회영역에 스며들어 말 그대로 시민의 '좋은 삶'을 정의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을 제한한다. 나치의 규범적 포부는 존 롤스가 말한 완전히 포괄적인 도덕적·정치적 독트린, 즉 〈상세하게 설명된 하나의 체계 안에 모든 가치와 덕목을 포함하는〉 규범적 질서였다. 그러므로 〈완전히 포괄적인 독트린〉은 절대진리에 대한 근본주의적 주장, 즉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에 대한 국가의 관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다." "법규범과 윤리규범의 차이를 없애면서 나치 국가의 권한은 외적 자유의 영역뿐 아니라 내적 자유의 영역─즉, 개인의 윤리적 가치, 신념, 태도의 영역─에까지 미쳤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출입을 (마땅히) 금지하던 규범적 영토를 이제 국가가 침범한 것이다."(253-5)


"나치 법률가들의 법에 대한 관점은 얼핏 자연법 이론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자연법을 지지하는 쪽은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적극 옹호하면서, 정의와 도덕은 법에 필수적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연법 이론가들은 법을 한낱 전체주의 정권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개념을 전파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들이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한 것은 법의 이데올로기적 악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 같이 우리는 도덕과 법의 경계를 지우거나 그 거리를 좁히려는 모든 시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해도 회의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시도는 행위자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두 규범 영역의 분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과 법이 규제하는 영역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각기 다른 규범적 원칙을 따른다. 단순히 법과 도덕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나치의 법체계에서 발견된 종류의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275)


"그렇다면 나치 이론가들이 법과 도덕의 통합을 지지하고 민족사회주의가 법을 도덕화한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한가지 답변은 나치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도덕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 외에 딱히 심오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나치 체제는 도덕적 원칙, 규칙, 덕목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그런 왜곡된 도덕은 나치 친위대 등 이데올로기 중심의 나치 조직에 파고들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정직과 진실함, '용감, 충성, 용기'라는 덕목과, '재산의 신성함', '남자다운 규율이라는 규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되고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선전했다." "나치 법체계가 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한 것을 보면 도덕은 법치의 구성 조건을 규정하는 근원으로 기능할 때 법체계를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변수로서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치의 요건을 준수하는지의 여부가 온전한 법질서인지를 규정한다."(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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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필립 샌즈 지음, 정철승.황문주 옮김 / 더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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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_23 


"1914년 9월부터 1944년 7월 사이 리비우를 통치하는 세력이 여덟 번 바뀌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 로드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 및 아우슈비츠와 차토르 공국'이라는 긴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바로 그 '아우슈비츠'이다).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폴란드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독일로 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을 거쳐 마침내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레온 할아버지가 어릴 때 걸어 다녔던 갈리치아 왕국의 도로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마지막 날, 한스 프랑크가 600호 법정에 들어서게 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및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용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유대인 사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폴란드인들도 사라졌다. 리비우의 그 도로들은 20세기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축소판이며 문화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유혈 분쟁의 중심지였다."(30)


Part I 레온(LEON) _37 


"1914년, 비엔나에 도착한 레온의 가족은 '동유대인Ostjuden(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이민'으로 알려진, 갈리치아에서 비엔나로 이주한 수만 명의 이민자들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엄청난 수의 유대인 난민이 새로운 집을 찾아 비엔나로 왔던 것이다. 요제프 로트는 북부 기차역을 '그들 모두가 도착하는 곳'이라고 하고, 그 우뚝 솟은 홀은 '고향의 냄새'로 가득 찼다고 썼다. 비엔나의 새로운 거주자들은 레오폴드슈타트와 브리기테나우 등의 유대인 구역으로 이동하였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고 삶이 고단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많은 수의 난민이 동쪽으로부터 이주해 왔다. 게다가 반유대주의의 확산과 함께 국수주의자들이 반이민자 감정을 부추기는 형국으로 발전하자 정치권은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18년 8월에 결성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상대 당에 합병되었다. 그 당의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카리스마 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56-9)


"1933년 1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 독일 국회의사당인 라이히츠탁은 불에 타 사라지고 독일연방 선거에서 나치가 더 많은 표를 획득했다." "4개월이 지난 1933년 5월 13일 토요일, 새로운 독일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3발기인 독일 정부 비행기가 레온의 상점에서 멀지 않은 아스페른 비행장에 내렸다. 여기에는 새롭게 임명된 바이에른 주 법무장관이며 히틀러의 전 법률고문이자 친구인 한스 프랑크 박사가 이끄는 일곱 명의 나치 장관들이 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스트리아 총리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을 비합법화 한다는 조치들을 발표하였다. 그 때문에 돌푸스는 프랑크의 방문 1년 남짓 후인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들의 리더는 변호사인 오토 폰 베히터였다. 그는 10년 후 렘베르크의 나치 총독이 되었으며, 무장친위대 갈리치아 사단을 창설한 인물이다."(64-6)


"1938년 3월 12일 아침,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비엔나로 행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에 따른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은 독일로부터의 오스트리아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비엔나에 도착한 히틀러의 옆에는 새롭게 임명된 비엔나 총독, 아르투어 자잉스잉크바르트가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망명지 독일로부터 막 돌아온 오토 폰 베히터가 있었다. 며칠 만에 국민투표로 합병이 비준되었고, 오스트리아 전역에 독일법이 적용되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151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비엔나에서 독일 뮌헨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유대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도로바닥을 닦도록 학대하였으며,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유대인의 자산과 부동산, 사업 등록을 의무화하였다. 그리고 이는 레온과 매형인 막스가 운영하는 주류상점의 종말을 뜻했다."(71-2)


"나는 1944년 8월, 파리가 미군에 의해 자유를 되찾기 전 어렵던 시기에 (비엔나를 탈출한) 레온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아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거주 유대인 연합UGIF 소식지인 〈뷜땅〉Bulletin은 명령위반에 따른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과 강제 점령한 파리에서의 삶을 찍은 사진들을 게재함으로써 나치 규제의 플랫폼 역할을 하였다. 초기의 한 명령은 오후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유대인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1942년 2월). 한 달 뒤 유대인의 채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이 발표되었다. 1942년 5월부터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 왼쪽에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달아야 했다(레온이 일했던 품격 있는 19세기 빌딩의 UGIF 본부 사무실에서 제공). 7월에는 유대인들이 극장이나 다른 공연장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0월부터 유대인들은 매일 한 시간씩만 쇼핑이 가능하고 전화 소유가 금지되었으며, 지하철의 마지막 칸에만 탑승할 수 있었다. 1943년 8월에는 특별 신분증이 발급되었다."(98-9)


Part II 라우터파하트(LAUTERPACHT) _111 


"라우터파하트의 삶은 렘베르크에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간의 유혈충돌을 촉발시킨 스물세 살의 '붉은 왕자' 빌헬름 대공이 비밀리에 내린 결정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다. 레온이 비엔나로 떠난 지 5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빌헬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중 폴란드 부대를 렘베르크에서 축출시키고, 그들을 대신하여 우크라이나 사단 중 두 연대를 배치하였다. 11월 1일, 우크라이나군은 리비우의 지배권을 획득하고 이곳을 새로운 나라인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선포한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 간의 심각한 전투가 이어졌고, 유대인은 그 사이에 끼어 패자를 선택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11월 11일,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한 날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종전협정이 이루어졌다. 리비우는 로보프로 바뀌면서 약탈과 살인이 만연했다."(125-6)


"그동안 굳건했던 권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폴란드 또는 우크라이나 국가가 가시화되자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촉발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어 여러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집단 정체성과 자치권에 대한 여러 이슈들은 민족주의의 발생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가의 부상과 함께 법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법으로 소수민족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가? 특별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만한 국제 규범이 없었다. 오래되었든 신생이든 간에 각각의 국가는 영토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취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다수가 소수를 대하는 법에 대해서 국제법은 몇 가지 제한을 둘 뿐 개인은 권리가 없었다. 라우터파하트의 지적인 성장은 이 같은 중요한 시기와 맞물려 이루어졌다."(127-8)


"전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폴란드의 국제연맹 회원 자격을 '소수민족과 약소국민을 평등하게 취급한다'는 약속과 연계시키는 특별 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 흑인, 남부 아일랜드인,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 카탈로니아인 등 다른 집단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주어질 것을 우려하여 영국은 그 제안에 반대했다. 영국은 국가가 원하는 대로 국민을 취급할 권리인 주권의 침해 또는 국제기구에 의한 감시를 반대하였다. 영국은 더욱 많은 '불의와 압제'가 벌어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을 고수했다. 새로운 폴란드 정부 역시 이것을 내정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제93조는 폴란드로 하여금 민족, 언어 또는 종교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여겨지는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두 번째 조약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권리는 모두가 아닌 일부 집단에게 주어졌고,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은 자국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131-2)


"1919년 라우터파하트는 프로이트, 클림트, 말러의 도시인 비엔나의 서부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제국의 종말로 인한 트라우마와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는 사회민주주의자 시장이 이끄는 도시, 갈리치아에서 넘어온 난민이 넘쳐나고 인플레이션과 가난이 만연한 '붉은 빈'에 도착했다. 러시아 혁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안을,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선사했다. 오스트리아는 무릎을 꿇었고 제국은 해체되었다. 예속과 굴욕의 격앙된 민족주의 감정이 느껴졌다. 라우터파하트와 레온 같은 젊은 동유럽 유대인이 갈리치아로부터 유입되면서 만만한 표적이 되었다." "라우터파하트는 법과대학에 등록했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저명한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모델로 삼았던 오스트리아의 혁신적인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시민의 요청에 따라 헌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헌법재판소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135-6)


"1921년 켈젠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라우터파하트는 개별 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유럽의 새로운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에서처럼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는 다른 모델이다. 라우터파하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 그리고 국가적 강제력과 국제적 강제력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법률질서의 중심에 개인이 놓여 있었다. 반대로 법은 군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룬, 국제법의 동떨어진 보수적인 세계에서는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제93조와 나의 외할아버지 레온이 1938년 폴란드 국적을 잃게 만든 폴란드 소수민족보호조약은 일부 국가의 일부 소수민족을 보호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은 보호하지 못했다."(136-7)


"헤이그에 위치한 최초의 상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열망하며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2년에 설립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법의 여러 법원法源 중에서 조약과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반원칙인 관습법을 주로 적용했다. 그런데, 그런 관습법은 보다 잘 완비된 국내법 체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라우터파하트는 국내법과 국제법 사이의 이러한 연계성은 소위 '주권의 항구성과 불가양도성'을 한층 더 제한할 수 있는 원칙을 발전시킬 '혁명적인' 가능성을 제공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삶을 통해 형성된 실용적이고 본능적인 성향과 렘베르크에서 받은 법학교육으로 인해 라우터파하트는 주권을 제한할 가능성을 믿었다. 이것은 작가나 평화주의자의 열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국제 진보에 기여하겠다는 철저하고 굳게 뿌리박힌 사상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덜 소외되고 덜 엘리트적이며 외부적인 영향에 보다 더 개방적인 국제법을 원했다."(144)


"1945년 7월, 국제 형사법원 창설 과정에서 라우터파하트는 '침략행위'라는 단어 대신 '전쟁범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제안하며 전쟁법 위반은 전쟁범죄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러시아와 미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는, 아직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법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개별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인도人道에 반反하는 죄罪'라고 칭하는 것이 어떨까?" "이 같은 용어는 국제법의 보호 범위를 확장할 것이었다. 이 용어의 사용으로 전쟁 시작 전에 독일 국민 중 유대인과 다른 소수민족에 대해 독일이 자행한 행위 또한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1938년 11월 레온이 독일제국에서 추방당한 일과 1939년 9월 이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자행된 조치 등이 포함된다. 더 이상 국가는 자국민들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게 된 것이다."(185-6)


Part III 노리치의 미스 틸니(MISS TILNEY OF NORWICH) _191 


"〈유대인을 먼저.〉 미스 틸니는 서리 채플의 목사 데이비드 팬톤이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새벽〉에 쓴 글에 큰 영향을 받아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유대인과의 전투를 통해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제목의 히틀러 연설에 대한 〈타임스〉의 1933년 7월 25일자 기사(크리클우드의 라우터파하트가 읽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사) 이후 팬톤이 쓴 글을 본 것이 틀림없다. 팬톤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적 분노를 비이성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전혀 종교에 기반하지 않은 순전히 민족적, 광신적 증오라고 비판하였다. 팬톤은 히틀러의 시각은 개별 유대인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썼다. 이 글은 튀니지 제르바 섬에 살고 있는 미스 틸니에게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년 후인 1934년 봄, 그녀는 프랑스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 프랑스로 옮겨왔다." "1939년 1월, 레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침례교 교회에서 (유대인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203-4)


"7월 15일, 〈신뢰와 노역〉은 미스 틸니가 파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주일 후,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비엔나의 서부역으로 갔다. 그녀는 첫 돌이 막 지난 갓난아기(나의 어머니)를 자신의 손에 믿고 맡기는 리타를 만났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리타와 함께 레온의 누나인 로라도 11살 된 헤르타를 데리고 역으로 나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르타도 미스 틸니와 함께 파리로 갈 예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로라는 헤르타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헤어지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정은 이해가 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년 후인 1941년 10월, 어린 헤르타는 어머니와 함께 리츠만슈타트에 있는 게토로 강제이주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헤르타와 로라는 학살당했다. 미스 틸니는 아이 하나만 데리고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했다. 파리 동부역에서 그녀는 레온을 만났다. 그녀는 이름과 주소를 종이쪽지에 적어 레온에게 주었고, 그들은 각자 파리의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205-6)


Part IV 렘킨(LEMKIN) _221 


"1918년 7월, 전 세계적으로 인플루엔자가 유행했고, 많은 사망자 가운데 렘킨의 남동생 사무엘도 포함되었다. 그가 열여덟이 되던 해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렘킨은 집단의 파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핵심 포인트는 뉴스에 나왔던 1915년 여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었다. 〈12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했으며,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모겐소는 1918년의 로보프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역사상 최대의 범죄'라고 표현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이 사건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며, 프랑스에서 사용했다가 이슬람교의 민감성을 감안하여 수정한 용어인 '인류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다. 〈국가가 살해당했으며 범죄를 자행한 사람들은 풀려났다.〉 렘킨은 이렇게 적으며 오스만 제국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가장 잔인한 범죄자라고 규정했다."(229)


"1921년 6월 베를린에서 '아주 생생하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피고인은 독일 수도에서 전 오스만 제국 정부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암살한 젊은 아르메니아인 소호몬 텔리리안이었다." "텔리리안의 변호사는 집단 정체성 카드를 꺼내 피고인이 '인내심이 많은 아르메니아 대가족'을 위해 복수한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렘베르크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만약 텔리리안이 '내면의 혼돈' 때문에 자유의지 없이 행동했다면 석방하라고 요청한다. 배심원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무죄'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엄청난 소동을 낳았다." "당시 주권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치권을 의미했다. 렘킨은 주권이란 외교정책 또는 학교나 도로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등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국가가 '수백 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렘킨은 만약 주권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행위를 방지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234-6)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던 렘킨은 적절한 형법이 실제로 잔학행위를 금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에는 소수민족보호조약이 적절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잔학행위─집단학살─를 예방하고, 반달리즘─문화유산에 대한 공격─을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닌데,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전 세계적으로 어느 국가의 법원에서도 재판해야 한다는 '보편적 사법권' 관념을 주창한 루마니아의 학자 베스파시안 V. 펠라의 견해를 기반으로 하였다." "1934년 폴란드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1919년 소수민족보호조약을 파기했다. 외무부 장관 벡은 국제연맹에 폴란드가 소수민족을 박해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취급을 원한다고 밝혔다. 다른 국가들이 자국의 소수민족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면 폴란드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독일 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도하였고, 렘킨은 검사직을 그만두었다."(248-9)


"렘킨의 타고난 호기심은 독일 점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독일 나치의 법률이 정확하게 어떻게 실행되었는가? 독일인들은 여러 가지 결정을 서면으로 하는 등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문서로 더 큰 계획에 대한 단서를 남긴다. 때문에 그것은 독일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이어질 수 있다." "렘킨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결정적인 조치'를 계속 추적했다. 첫 번째 조치는 '국적박탈'로, 유대인과 국가 간의 연결고리를 단절시켜 개인을 무국적자로 만듦으로써 법의 보호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비인간화'로, 목표한 민족의 기본적인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두 단계의 패턴은 유럽 전역에 적용되었다. 세 번째 조치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렘킨은 1941년 초부터 점진적인 단계로 진행된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을 위한 법령을 가려냈다. 개별적으로 각각의 법령은 악의가 없어 보이지만 함께 적용되고 국경을 초월하여 실행되면 큰 목적이 드러났다."(259-61)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렘킨은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변론과 증거를 통해 미국인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에 제안서를 보냈고, 조지 핀치는 제안서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그렇게 출판된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 제9장에서 렘킨은 '잔학행위'와 '반달리즘'을 버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데, 그리스 단어 'genos'(종족 또는 민족)와 라틴어인 'cide'(살인)를 결합한 단어이다. 그는 이 장의 표제를 '제노사이드Genocide'로 정했다." "제노사이드는 직접적으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국가적 집단의 일원으로서 당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렘킨은 9장에 적었다. 〈새로운 관념은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설명도 없이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선택한 단어는 점령한 영토를 생물학적으로 영구히 바꾸려는 독일의 원대한 계획에 반대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276-9)


Part V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THE MAN IN A BOW TIE) _293 


Part VI 한스 프랑크(FRANK) _315 


"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24년에 졸업한 프랑크는 개업 변호사로 일하며 뮌헨공과대학교 법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인하고 기회주의적이지만 지적이거나 야심가는 아니었던 그는 1927년 10월 베를린 재판에서 나치 피고인들을 변호할 변호사를 찾는다는 〈퓔키셔 베오바흐터〉 신문의 광고를 본 순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프랑크는 지원했고 합격하여 마침내 고위급 정치 재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나치의 법률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수십 건의 재판에서 나치 정당을 변호한다." "프랑크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법정을 미디어 전략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합법적 수단으로 정치 권력을 얻으려 할 뿐이라는 주장, 즉 사실상 〈합법성의 선서〉를 공개적으로 공약했다. 프랑크의 스타일은 유연했지만 히틀러는 변호사나 법적인 사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관심은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319-20)


"1939년 10월 25일,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직을 수락하였다. 초기의 인터뷰에서 프랑크는 폴란드가 이제 '식민지'이고 폴란드 국민들은 '위대한 독일제국의 노예'라고 말했다. 프랑크는 국왕처럼 굴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그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고 했다. 폴란드는 국민이 권리를 가지는 입헌국이 아니며,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는 없었다. 바르샤바는 짧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프랑크는 재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 다수는 렘킨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들고 다녔던 가방에 들어간 것이었다. 프랑크의 명령은 넓은 영토와 야생동물(보호대상)에서 유대인(비보호대상)까지 많은 것을 대상으로 했다." "프랑크는 생사에 대한 완벽한 결정권을 가졌으며, 1935년 베를린 회의에서 밝힌 생각, 즉 그의 총독령에서 '국민의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기준이고 그러므로 개인은 주권자인 총통의 생각에 예속된다는 것을 실행하려고 하였다."(327-30)


"프랑크는 〈뉴욕타임스〉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943년 초, 그는 공식 회의에서 〈1등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고 발표했다. 이 표현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유대인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프랑크는 내각에 이렇게 말했다. 이 표현은 박수갈채를 이끌어냈고, 그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발견되든 사라질 것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독일제국의 단합과 무결성이 지속될 것이다." "3월에 크라쿠프 게토는 SS 소위 아몬 괴트의 효율적인 지휘 덕분에 1주일 안에 비워질 것이다. 5월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반란이 진압되었고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는 최종 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는 친위대 중장 위르겐 스투루프에 의해 진행되었고, 그는 세부사항에 대한 보고서를 자랑스럽게 히믈러에게 제출했다. 이로 인해 바르샤바 인구가 백만 명 줄었다."(374-5)


Part VII 혼자 서 있는 아이 (THE CHILD WHO STANDS ALONE) _393 


Part VIII 뉘른베르크(NUREMBERG) _407 


"1945년 11월 20일, 제프리 로랜스 재판장이 재판을 개시했다. 그는 〈본 재판은 세계 법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재판입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공소장을 읽기 전에 간단한 소개를 했다. 4개 연합국의 검사들은 각각의 공소사실을 하나씩 낭독하였다. 미국 검사들이 첫 번째 공소사실인 국제범죄를 공모했다는 점을 낭독하였다. 바통은 영국 검사들에게 넘겨져 둥근 얼굴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 경이 두 번째 공소사실인 평화에 반하는 범죄에 관해 낭독하였다. 세 번째 공소사실은 프랑스 검사들에게 할당된 '제노사이드' 혐의를 포함한 전쟁범죄였다. 프랑크는 이 용어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며, 어떻게 이 용어가 여기까지 와서 피에르 무니 검사가 이 법정에서 사용하게 되었을까 궁금했을 것이다. 네 번째인 마지막 공소사실은 소비에트 검사가 낭독한 '인도에 반하는 죄'였다. 프랑크에게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새로운 죄목으로, 이 공개 법정에서 처음으로 사용되는 용어였다."(413)


"재판 이틀째 날, 재판장은 미국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에게 검사측이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라고 말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재판을 시작하는 영광은 엄청난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잭슨은 단어 하나, 하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했다. 그는 승리자의 자비와 패배자의 책임, 비난받고 처벌되어야 할 계획적이고 사악하고 파괴적인 잘못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며, 이런 일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승리에 도취되고 부상에 고통 받는 위대한 4개국이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포한 적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것은 권력은 이성에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재판은 명확하지 않은 법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야 하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하찮은 범죄의 처벌'을 위한 것도 분명 아니라고 강조했다."(422-4)


"라우터파하트는 피고인들이 국제법 하에서 국가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국가에 충성하여 범죄를 자행한 개인 역시 유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쇼크로스는 법정에서 국가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며, 개인의 경우에 비해 더욱 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범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괴링, 스피어와 프랑크가 그의 눈에 보였다. 쇼크로스의 법리적 주장의 핵심은 라우터파하트의 것이었다.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영국 법무장관인 쇼크로스는 재판 이전과 재판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자주 반복될 명확한 어구를 사용하여 선언하였다. 〈국가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이다.〉 국가의 행동은 국가라는 무형 인격 뒤에 숨어 면책을 구할 수 없는 정치인들의 행동이다. 이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관념을 아우르고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와 근본적인 인간의 의무를 새로운 국제적 질서의 핵심에 두는 급진적인 표현이었다."(430)


Part IX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소녀(THE GIRL WHO CHOSE NOTTO REMEMBER) _463 


Part X 판결(JUDGEMENT) _479 


"렘킨은 전쟁 이전인 1933년부터 줄곧 자행된 모든 집단학살에 '제노사이드' 죄목을 적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논고문 초안에는 아예 빠져 있었던) 이 단어를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제노사이드'는 가중처벌이 가능한 '인도에 반하는 죄'이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자행되었을 때에만 해당된다. 이러한 제한은 1945년 8월 뉘른베르크 헌장 정의 조항에 있는, 악명 높은 세미콜론으로 인한 제6조 ⓒ항의 해석론이었다. 쇼크로스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요건'이라고 강조하며, 한 손으로 가져왔던 제노사이드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전체 의미에서 제한을 둠으로써 한발 물러섰다. 이 표현을 읽으며 나는 1939년 9월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를 재판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였다. 이로써 1938년 11월 이전의, 레온과 같은 개인과 다른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궁핍화와 추방, 재산몰수, 축출, 구금, 살인 등은 이 재판의 사법권을 벗어나는 일이 되었다."(50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로부터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소급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말살, 노예화, 핍박과 같은 모든 전쟁범죄 행위들이 대부분의 국가법에 의해서도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독일법으로는 합법이라는 사실은 전혀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쟁은 폭군들이 피통치자들에게 잔학행위를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쟁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이 허용되었다면 그랬을 때만 정당하고 합법적이다. 국제법상 어떻게 '사법절차에 의한 개입'이 불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쇼크로스는 좀 더 나아갔다. 그는 개인이 아닌 국가만이 국제법 아래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피고인들의 논리를 반박했다. 국제법에는 그런 원칙이 없으므로 국가를 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국가 뒤에 숨을 수 없다. 〈개인은 반드시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509-10)


"판결 첫째 날인 9월 30일은 전체적인 사실관계와 법리 판시에 집중했다. 각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두 번째 날 발표될 것이었다.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재판부는 작은 섹션으로 나누었다. 인위적이긴 했지만 재판부의 권한으로 법률가들이 편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재판부는 신속하게 기관들의 문제를 처리하였다. 나치 수뇌부, 게슈타포, SD(비밀경찰), 그리고 SS(친위대)는 그에 속한 50만 명의 장병들과 함께 책임이 인정되었다. 이로 인해 범죄자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SA(돌격대), 독일제국 각료와 독일군의 일반직원과 고위급 장서들은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법적 타협 행위였다. 재판부는 다음으로 예비음모, 폭력 행위 및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판결하였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판결의 중심에 섰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제법의 일부로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추상적 실체가 아닌 인간이 저지른 국제범죄에 대해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주요 표현을 채택했다."(532-3)


"이튿날 로렌스 재판장이 정확히 오전 9시 30분에 스물한 명의 피고인들 각각에 대한 판결 선고를 위해 법정에 입장하였다." "열 두 명의 피고인들은 항소권 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 중에는 교수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프랑크, 로젠베르크, 자이스잉크바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물 한 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세 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독일제국은행의 전 회장 얄마르 샤흐트는 침략전쟁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부총통 역할을 했던 프란츠 폰 파펜도 같은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괴벨의 선전부의 중요하지 않은 직원이며 공석인 상사의 직무를 애매하게 대행하던 한스 프리체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잔학행위를 하도록 선동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몇 명은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제노사이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진 피고인은 없었다. 그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535-8, 542)


에필로그 _547


"재판이 끝나고 몇 주 후, 뉴욕 북부에서 유엔 총회가 열렸다. 1946년 12월 11일 총회의 의제에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두 개가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된 것이었다. 국제인권장전 제정을 위한 길을 다지기 위하여 총회는 인도에 반하는 죄를 포함하여 뉘른베르크 헌장에서 인정한 국제법의 원칙이 국제법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유엔 총회는 결의안 95호를 통해 라우터파하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에 개인의 위치매김을 명확히 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는 그 다음으로 결의안 96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뉘르베르크에서 재판부가 판결한 내용을 넘어셨다 제노사이드가 전체 인간집단의 존재의 권리를 부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총회는 재판부의 판결을 넘어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 범죄임을 선언하였다. 판사들이 발을 들여놓기 꺼리던 영역까지 각국 정부는 렘킨의 연구를 반영한 규정을 법제화하였다."(547)


"허쉬 라우터파하트는 뉘른베르크 판결 선고 다음날에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그의 저서, 《국제인권장전》은 제노사이드 조약이 채택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 영감을 주었다. 선언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라우터파하트는 이것이 좀 더 강제력이 있는 것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길 희망했다. 이것은 1950년에 체결된 〈유럽인권조약〉으로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검사였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가 개인이 제소할 수 있는 최초의 국제인권재판소의 창설을 조약에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지역적, 세계적 인권조약이 뒤따랐지만 아직까지 렘킨의 제노사이드 조약에 준하는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조약은 없다. 1955년, 라우터파하트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영국 판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60년에 사망하였으며, 케임브리지에 묻혔다."(548-9)


"국가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며 국제범죄의 처벌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국제형사재판소라는 발상이 실현되기까지 50번의 여름이 지났다. 1998년 7월, 과거 유고슬로비아와 르완다에서의 잔학행위가 촉매가 되어 마침내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해 여름 150개국 이상이 로마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규정을 제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나는 동료와 함께 협상의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조약의 전문, 즉 서론에 해당하는 소개글을 작성하는 초창기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였다. 드러나지 않게 일하면서 우리는 '국제범죄의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하여 형사재판 관할을 가질 각국의 의무'라는 간단한 한 문장을 조약 전문에 삽입시켰다. 해로울 게 없어 보였는지 그 문장은 협상 과정에서 살아 남아 국제법에서 국가들이 그러한 의무를 승인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처벌하는 권한을 갖는 새로운 국제재판소가 마침내 창설되었다."(549-50)


"제노사이드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가해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피해집단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 또한 강화시킨다. 집단에 초점을 맞춘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그들' 또는 '우리'라는 의식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 정체성이라는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바로잡으려는 바로 그 상황을 부지불식간에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맞서게 대치시킴으로써 화해의 가능성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제노사이드 범죄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형사소추를 왜곡할 것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제노사이드의 피해자라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검사에게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게는 제노사이드 피해자라고 인정받는 것이 역사적으로 빈발해온 분쟁의 해결에 기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소시키는 결과와 무관하게 단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될 뿐이다."(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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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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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패배에 대한 두려움 


"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할 때, 정당은 패배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 정당이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생계가 어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며, 권력을 넘겨주는 정당과 그 지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선거는 종종 많은 것이 걸린 전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이 걸린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두려워할 때, 정당은 어떻게든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패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정당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게 만든다.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7-9)


2장 독재의 평범성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충직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라고 부른 사람들은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패배를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고, 정적을 물리치거나 유권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민주주의 암살자에게는 언제나 공범이 있다. 그 공범은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하는 정치 내부자들이다. 린츠는 이들을 가리켜 〈표면적으로 충직한semi-loyal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62-3)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정장과 넥타이 차림의 주류 정치인이며,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살해당했을 때에도, 살해 도구에서 그들의 지문이 발견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즉,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독재 세력과 협력할 때, 노골적인 독재 세력은 훨씬 더 위험해진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63-4)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정치인들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거부할 때,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고, 힘을 잃고, 포기한다." "그러나 주류 정당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지지할 때, 이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따른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 민주주의 붕괴를 주도하는 많은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 찬 경력지상주의자다.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이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그게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5-6)


3장 이 땅에서 벌어진 일 


"백인 반동주의자들은 (재건 시대에) 등장한 다인종 민주주의에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테러 행위로 응수했다. 흑인 시민이 남부 지역 대부분의 주에서 다수, 혹은 다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잔혹한 무력〉이 필요했다." "사실 1870년대에 민주당이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활용했던 테러와 부정행위 전술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남부 전역에 걸쳐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1888~1908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주 헌법과 선거법을 뜯어고쳤다." "1890년, 미시시피주 헌법제정의회는 인두세와 비밀 투표, 그리고 읽고 쓰기 능력 시험을 받아들였다. 남부의 많은 주가 이후 10년 동안 이러한 〈독창적인 고안품〉을 받아들였다." "남부 지역 민주당은 대규모 투표권 박탈을 통해 다인종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길을 잃게 만들었다."(117, 123, 125, 127)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와 관련해서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방 사법부였다. 그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길레스 대 해리스(1903)' 소송이었다." "'길레스 대 해리스' 소송은 과거에 노예였던, 그리고 앨라배마 유색시민투표권연합의 대표가 된 경비원인 길레스가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카운티 기록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투표권 소송이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작성한 대법관은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판사였다. 홈스는 그 소송이 앨라배마주의 유권자 등록 제도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만약 법원이 길레스의 손을 들어주고 다른 유권자들을 등록 명부에 추가한다면 앨라배마주의 부정행위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잉글랜드 귀족가문의 후손인 홈스는 법원이 그들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결국 대법원은 투표권 박탈이 이뤄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결정했다."(127-9)


"연방이 투표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부 지역의 민주주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흑인 투표율은 1880년 61퍼센트에서 1912년 상상조차 힘든 2퍼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민 다수를 차지한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흑인 시민의 1퍼센트, 혹은 2퍼센트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1876년에 유명한 조지아주 정치인 로버트 툼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번 총회가 열린다면 '국민'이 통치하고 흑인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바로잡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소망(남부 지역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소망)은 한 세기 만에 현실이 되었다. 이후 남부 지역에서는 한 세기에 걸쳐 독재 시대가 이어졌다. 흑인 선거권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경쟁이 무너졌고, 남부 전역은 일당 지배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테네시주를 제외한 이전 남부연합의 모든 주에서 70년 넘게 권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다섯 개 주에서는 '한 세기 넘게' 이어졌다."(133-4)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 


"21세기 초 공화당 정치인들은 선거 패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 지지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나라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미국 역사에 걸쳐 백인 기독교인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인종적 수직체계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백인 미국인은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는 곧 〈백인 시민에게는, 볼 수 있지만 그 아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유리 바닥〉이었다. W. E. B. 듀보이스는 이러한 특권을 백인으로 살아가는 〈심리적 임금psychological wag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더 이상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고, 한때 굳건했던 인종적 수직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 내에서 보장된 지위와 더불어 성장한 사람은 그러한 지위를 빼앗겼을 때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많은 백인 미국인은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느꼈다."(165-6)


"이러한 느낌은 오바마의 당선으로 한층 더 증폭되었다. 정치학자 마이클 테슬러는 연구를 통해 (정치적으로 온건한)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미국인의 정치적 태도를 뚜렷하게 급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모든 미국인은 그들의 나라가 다인종 민주주의의 평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악관에서 일하는 모습이 매일 TV 화면에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더 이상 인구 통계적으로나 정치적 차원에서 새로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백인 미국인은 그들이 자라난 나라가 그들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은 주로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학자 필립 고르스키는 이를 〈(백인) 기독교인이 미국을 건국했지만 이제 박해받는 (민족적) 소수가 되어가는 위기에 봉착했다〉라는 믿음으로 설명했다. 〈백인 기독교인〉은 이제 종교 집단이라기보다 민족 집단, 혹은 정치 집단에 더 가깝게 되었다."(167)


"트럼프의 성공은 백인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가 공화당 내에서 승리의 공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의 스타일과 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 반면 트럼프 열차에 탑승하기를 거부한 공화당 정치인은 은퇴하거나, 아니면 예비선거에서 패했다. 2020년에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던 어떤 계파도 공화당 내에 머물러 있지 못했고, 트럼프의 극단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많은 트럼프 지지자는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을 믿었다. 이 이론은 미국의 엘리트 집단이 〈토착〉 백인 집단을 쫓아내기 위해 이민자를 동원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2021년 미국 기업연구소가 후원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 중 56퍼센트가 〈전통적인 미국적 삶의 방식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172-5)


5장 족쇄를 찬 다수 


"민주주의자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야당의 권리가 다수결주의 범위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에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사실 다수에게 상당한 정도의 발언권을 부여하지 않는 정치 시스템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반다수결주의에는 이러한 위험이 따른다. 다시 말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설계된 규칙은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심지어 다수를 '지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은 〈다수의 독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소수의 독재라고 하는 위험한 현상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영역을 다수결주의의 범위 너머에 놓아두는 작업이 중요한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영역은 '다수결주의의 범위 안에' 그대로 남아 있도록 만드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보다 상위의 개념이지만, 다수의 지배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209-10)


"특히 두 영역만큼은 다수결주의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거, 그리고 의회의 의사 결정을 말한다. 첫째, 누가 공직을 차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자가 더 적은 표를 얻은 자를 이겨야 한다. 어떤 자유민주주의 이론도 이와 다른 결과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후보자나 정당이 다수의 의지를 거슬러 권력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둘째, 선거에서 이긴 자가 통치해야 한다. 의회 다수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지 않는 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의회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일반적이고 합법적인 입법 과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도록 허용하는 압도적 다수 규칙은 옹호하기 힘들다. (무제한) 상원 필리버스터와 같은 압도적 다수 규칙은 정치적 소수에게 강력한 무기인 거부권을 선사한다. 그러한 거부권이 시민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에 대한 보호의 차원을 넘어설 때, 의회 소수는 그들의 의지를 다수에게 강요할 수 있다."(210)


"또한 반다수결주의에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다. 헌법은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세대는 필연적으로 미래 세대의 손을 묶게 된다. 법률 이론가들은 이를 일컬어 '죽은 손의 문제problem of the dead hand'라 부른다." "수정의 장벽이 너무 높을 때, 오늘날 다수는 사회적 요구와 지배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법률의 〈강철 우리〉 속에 갇혀버릴 위험이 크다." "사법부는 이러한 문제에 취약하다. 특히 판사의 신분을 임기제한이나 정년과 같은 조건 없이 강력하게 보장할 때, 더욱 그렇다. 사법심사Judicial review(법원이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의 적법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제도)는 판사들에게, 그리고 일부는 수십 년 전에 임명된 판사들에게 오늘날 다수가 만든 법률과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핵심적인 반다수결주의 제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지나치게 만연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213-6)


6장 소수의 독재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선거인단 제도다. 이 제도는 보통선거를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시킨다. 첫째, 거의 모든 주(메인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는 승자 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 표를 할당한다. 이러한 방식은 전국적인 보통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선거인단 제도의 두 번째 왜곡인 작은 주 편향은 명백하게도 공화당에게 어드밴티지를 선사했다.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수는 의회 대표의 수, 즉 하원 의원에다가 상원 의원을 합한 수와 동일하다. 그런데 상원에서는 인구 밀도가 낮은 주들이 과잉대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은 총 538표 중 20표 정도가 시골 지역에 편향되어 있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다."(253-6)


"소수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그리고 당파적 편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두 번째 기둥은 상원 제도다. 미국 전체 인구에서 20퍼센트 미만을 차지하는 인구수가 낮은 주들만으로도 상원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11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들만으로도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가로막을 수 있는 충분한 상원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세 번째 기둥은 대법원이다. 선거인단과 상원의 특성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에서 패한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고, 미국 전체 인구의 소수를 대표하는 상원 다수가 이를 승인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네 번째 기둥은 헌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그리고 인위적인 다수를 '만들어내고' 때로 더 적은 표를 얻은 정당이 의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하는 선거 제도다." "많은 주 의회가 권력을 쥔 정당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거구를 재구획함으로써 유권자를 의도적으로 분할했다."(256-9, 262)


"1980년에 태어나서 1998년, 혹은 2000년에 처음으로 투표한 미국인을 떠올려보자. 그가 성인이 된 이후로 민주당은 상원 선출을 위한 6년 단위의 보통선거에서, 그리고 한 번을 제외한 모든 대선의 보통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 대통령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 그리고 공화당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 체제에서 성인기의 삶 대부분을 살아가고 있다. 소수의 지배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패자가 승리하도록 허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또한 국민의 삶과 밀접한 공공 정책에 교묘하게 영향을 미친다. 여론은 절대 완벽하게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당파적 소수가 과잉대표권을 행사하도록 제도가 허용할 때, 여론은 외면과 억압을 받는다. 〈다수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원 의원이나 판사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여론과 동떨어진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266-7)


"정치 세계는 두 세기가 넘도록 경쟁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다. 정치 이론가와 실무자 모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했던 반민주적인 이념을 물리치기 위한 원칙을 종종 언급한다. 밀은 널리 알려진 표현을 통해 진실이 거짓에 승리를 거두려면 〈대립하는 의견 사이의 충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집》 10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할 때, 다수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사악한 입장을 물리친다는 공화국 원칙이 우리를 구제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선거 제도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게 과잉대표를 허용할 때, 그래서 정당들이 '유권자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유권자의 생각에 반응해야 할 압박이 줄어든다. 그럴 때 정당들은 급진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일이 21세기 초 공화당에서 일어났다. 공화당은 경쟁해야 할 동기를 무디게 만드는 〈헌법적 보호 장치〉의 수혜자가 되었다."(280-1)


"대법원은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의회에서 소수의 독재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형태 중 하나로 드러난, 위스콘신주의 악명 높은 선거구 지도는 2016년 연방 법원에 의해 허물어졌다. 하지만 2018년 닐 고서치가 대법관으로 있는 연방대법원이 그 판결을 뒤집으면서(실제로 절차적 문제를 이유로 판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선거구 지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년 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브렛 캐버노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상황에서 연방대법원은 5 대 4의 다수 의견으로 주의 당파적 게리맨더링 사건을 심판할 권한이 대법원에는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 존 로버츠는 다수 의견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파적 게리맨더링 주장은 연방대법원의 권한을 넘어선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반다수결주의 상원에 의해 구성된 반다수결주의 대법원이 주 차원에서 소수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282-3)


7장 표준 이하의 민주주의, 미국 


"미국은 예외적인 국가다. 이제 다른 어떤 민주주의 국가보다 소수의 지배에 더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미국을 앞질러나갈 수 있었을까?"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가장 수정이 힘든 헌법이다. 도널드 러츠가 헌법 수정 절차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해 31개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봤을 때, 미국은 난이도 지수에서 최고점을 차지하면서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한 국가(호주와 스위스)를 큰 폭으로 따돌렸다.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2/3의 승인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3/4에 달하는 주들의 비준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준의 헌법 수정률을 보인다. 미국 상원의 발표에 따르면, 헌법을 수정하기 위한 시도가 11,848번 있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사례가 27번에 불과하다. 재건 시대 이후로 미국 헌법이 수정된 것은 20번에 불과하며, 가장 최근 사례는 30년도 더 된 1992년이었다."(314-5)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하는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다. 선거인단 제도를 규정하는 헌법 조항은 가장 빈번한 개혁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지난 225년에 걸쳐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시도는 700회를 넘었다. 20세기 중 이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세 번의 〈아슬아슬한〉 대선(1960년과 1968년, 1976년)이 있었고, 여기서 보통선거의 승자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1969년 9월에 하원은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338 대 70으로 통과시켰다. 이는 헌법 수정에 필요한 2/3 찬성 요건을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 그 법안이 상원으로 넘어갈 무렵, 갤럽 설문조사 결과는 미국인 81퍼센트가 개혁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과거의 많은 시도에서 그랬듯이 개혁안은 상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개혁안은 표결에 이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315, 318-9)


"또 한 번의 진지했던, 그러나 다시 실패로 끝난 헌법 개혁 시도는 1970년대에 있었다. 그것은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ERA으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상황은 비준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닉슨과 포드, 카터 대통령 모두 ERA를 지지했고,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1972년과 1976년에 찬성의 뜻을 밝혔다. 여론 또한 분명하게 비준의 편을 들었다. 1974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74퍼센트가 ERA를 지지했고, 1970년대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들에서는 전반적으로 2 대 1로 비준에 대한 찬성의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흐름은 이어지지 못했다. 1973년 이후로 5개 주가 추가로 ERA를 비준함으로써 1977년 기준으로 총 35개 주가 비준을 마쳤다. 미국 전체 비준까지 3개 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원이 비준 마감 시한을 1982년으로 연장했음에도 추가 비준은 나오지 않았다. 비준을 하지 않은 주들 15개 중 10개 주는 남부에 있었다. 과연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320-1)


8장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다


"1930년대의 유럽에서 비롯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한 가지 전략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적인 연합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물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봉쇄는 단기 전략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한가운데에는 경쟁이 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장기적인 연합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잡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유권자는 이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경험에 따르면, 〈대연정〉이 오랫동안 이어질 때 유권자들은 그들을 배타적이고 불법적인 공모 연합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주류 정당 간의 연합이 지나치게 길어질 때, 〈기득권 세력〉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포퓰리스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봉쇄 전략을 통해 반민주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력을 반드시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327-9)


"다음으로 전제주의자를 대적하는 두 번째 전략 역시 1930년대 유럽이 트라우마를 겪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정부의 권한과 법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반민주 세력을 '축출하고',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독이 처음 사용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경험을 한 독일의 전후 헌법 설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가 내부의 전제적 위협에 직면해서 무력하게 서 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동가, 혹은 〈반헌법적인〉 연설과 집단 및 정당을 '금지하고 제한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봉쇄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배제 전략에도 뜻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쉽게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고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에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전제주의의 급박한 위협에 직면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330-2)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던져준 기본 원칙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 원칙이란 극단주의 소수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거를 통한 경쟁이라는 것이다. 매디슨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악의적인〉 정치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가 선거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위해 미국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20세기 초 미국의 개혁가 제인 애덤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332-3, 341)


"우리의 여러 개혁안이 가까운 미래에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 주류 집단이 아이디어를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판단할 때, 정치인들이 아이디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을 때, 신문사 편집자가 아이디어를 외면할 때,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아이디어를 설명하지 않을 때, 학자들이 순진하다거나 현실 감각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야심 찬 아이디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때,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다. 어떤 개혁도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 제도 변화의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가 말한 〈때를 맞이한 아이디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라는 표현을 종종 거론하곤 한다. 그러한 때도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놓아야만 찾아온다."(342-5)


"그러나 의제의 공론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지속적인 사회적 운동, 즉 활동을 통해 논의의 흐름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힘의 균형점을 옮기는 광범위한 시민 연합을 통해 이뤄진다. 국민 청원과 방문 캠페인, 집회, 행진, 파업, 피켓 시위, 연좌 농성, 보이콧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는 사회 운동이 여론과 언론 보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실제로 미국에서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향한 많은 중요한 진보는 당시에는 개혁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린든 존슨 시절에 이뤄졌다. 이들 중 누구도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결국에 스스로 뒤집었던 기존 체제가 만들어낸 인물이었다."(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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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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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망치는 전쟁 


"1780년 찰스턴 함락 이후, 영국군 지휘관들은 남부로 전장을 옮기는 것을 상당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 이후에 더 큰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우선 그들은 국왕파의 지지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실수를 범했다. 설사 영국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군 장군들은 1776년 무어스 크리크 브리지와 찰스턴에서 패배한 뒤 남부 식민지를 등한시함으로써 스스로 기회를 차버렸다. 아치볼드 캠벨이 1779년 1월 서배너를 점령할 때까지 국왕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영국군이 다시 남부로 발길을 돌리기 전 몇 년 동안, 애국파 민병대들은 스스로 캐롤라이나와 조지아의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영국 왕에게 충성하는 분위기를 억제하는 임무를 질서유지 능력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애국파 민병대는 국왕파의 조직적 봉기 시도를 진압했다. 영국 정규군이 도착한 이후로도 국왕파의 의지를 꺾어놓기 위한 애국파의 임무는 계속됐다."(76-7)


"콘월리스는 국왕파의 지지가 없다는 점에 실망했다고 고백했다. 캐롤라이나인은 콘월리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콘월리스나 그의 후임들에게 아메리카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캐롤라이나인은 오히려 영국군의 정보병들을 습격했고, 보급품 수송 행렬을 공격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려는 왕당파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뉴잉글랜드와 중부 식민지처럼, 남부 역시 대륙회의의 것이었다. 남부 민병대는 대다수의 북부 비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대치전에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국왕파 민병대와 싸울 때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유능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그들은 그런 비정규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첫째,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믿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남부에 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모건이 지휘한 대륙군의 '도망치는 전쟁'은 남부 저지대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수단이 되었다."(77-8)


2장 전쟁의 이면 


"18세기 전장은 20세기 전장과 비교하면 병사들 사이에 친밀감이 매우 높았다. 당시 기준으로도 소규모였던 독립 전쟁의 교전에서는 특히 더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머스킷 총으로 적을 죽일 수 있는 사거리는 약 70미터에서 90미터 사이였고, 총검에 의존하는 데다 대포도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으니 근접적이 필수적인 환경이었다. 병사들이 적을 죽이려면 아주 가깝게 접근해야 했다. 이러한 조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18세기 보병 전술에서 가장 바람직한 목표였던 총검 돌격은 병사들의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총검 돌격을 하기 전, 대열에서 공격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때 병사들 사이에서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이 행동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적의 움직임이 잘 보이는 조건에서 싸웠다. 동시에 옆에 있는 전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소통했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87-9)


"역설적이게도, 참전한 모든 아메리카인 중에서 민병대원들이 독립의 이상과 목적을 가장 잘 실천했다. 독립이 가져다줄 것으로 보였던 가치를 직접 실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립했고, 적어도 개인적인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평등을 믿었고, 지휘관인 장교를 스스로 선택하기를 주장하는 등 평등을 실천하기도 했다. 민병대원들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짧게 복무했고, 마음 내킬 때 야영지를 떠났으며, 다른 이에게 지시받는 것을 꺼렸다. 특히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는 상관의 명령을 매우 경멸했다." "예를 들어, 민병대는 전황이 좋았던 카우펜스 전투에서는 아주 잘 싸웠지만, 전황이 나빴던 캠던 전투에서는 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캠던에서 그들은 그린이 말한 것처럼 '통제 불능'이었다. 민병대에게는 전투에서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통제하는 규칙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규 대륙군은 민병대 대다수를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95)


"아메리카의 정규군인 대륙군은 영국군만큼 정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몬머스 법원 전투 이후로는 거의 영국군 못지않게 인상적으로 포화를 견뎌내곤 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인내했다. 패배하고 퇴각하더라도, 다시 함께 뭉쳐서 공격을 시도했다. 이런 자질, 즉 인내와 끈기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다." "대륙군의 심리적, 도덕적 위상은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 직업군인의 중간쯤에 해당됐다. 그들은 1777년부터 3년 혹은 전쟁 기간 내내 복무했고, 긴 복무 기간을 보내며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노련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전장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전투에서 경험을 쌓는다고 위험에 무신경해지지는 않는다. 장기적이고 극단적인 피로로 이미 죽은 몸같아지지 않는 한 말이다. 단, 노련한 부대는 경험 없는 부대보다 더 효율적으로 두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범하게 두려움을 마주했던 것이다."(97-9)


3장 전쟁의 외부 


"영국군 점령 기간 동안 가장 고통받은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의 재산을 더 많이 가진 이들처럼 자주 약탈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식품과 연료를 구하지 못할 일은 없었으나, 영국군이 주둔하는 동안 해당 물품의 가격은 빠르게 치솟았다. 영국군 점령 기간 동안 모든 사회계층의 민간인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영국 왕의 뜻에 충성하는 이들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약탈하는 병사들이 애국파와 국왕파를 가려가며 약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9개월 동안 각종 사업은 번창했다. 국왕파 상인들은 크게 돈을 벌었고, 밀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는 영국 육해군 장교들도 있었다." "돈을 가진 상인이나 영국군 장교들은 전쟁 기간 중에도 다양한 문화활동을 즐겼다. 매주 무도회가 열렸고, 때때로 연극, 연주회, 파티가 한꺼번에 개최되는 '사교 시즌'도 있었다."(173-6)


"비록 사회 구조는 여느 때처럼 남아 있었지만, 사회는 어떤 중요한 면에서 독립 혁명과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례로, 투표권이 부여되는 법적 기준이 예전과 똑같든 또는 더 높아지든, 정치권력은 이제 대중의 요구 사항을 더 많이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각 주의 법률이 '민주주의'를 확립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권력의 이동을 의미했고, 실제로 권력이 이동했다. 사회가 정확히 '민주주의적' 또는 완전히 '아메리카적'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서 훨씬 평등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미국'이라는 신생국이 이전의 나라들과는 다른 성격의 국가라는 인식도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인'들의 이름으로 완수됐다. 독립 선언은 다른 나라에서 그들 자신을 분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카인이 자신의 대의를 '영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큰 사건들은 그들에게 나라와 독립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심어주었다."(183-4)


"내셔널리즘에 관한 감정을 자각한 혁명 세대의 아메리카인들은 그 이전과 이후 세대와는 구분됐다. 1775년 이전부터 아메리카의 권리를 수호한 사람들, 독립 혁명과 전쟁에 앞장선 사람들, 전투에서 싸웠던 사람들, 재산을 기부하고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한 사람들, 이들 모두는 자신의 뚜렷한 행동으로 다른 세대와 구분됐다. 그들은 1776년부터 지속된 위대한 대의를 함께 추구했다.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지향하는 영광스러운 대의를 말이다. 이런 지향의 정확한 본질은 즉시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1783년 평화조약 이후 5년 동안에 그 의미를 규정하는 일에는 큰 진척이 있었다." "전쟁이라는 긴 투쟁에서 독립 전쟁이 대의를 '영광스럽게' 만든 것은 그것의 내용이 위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대한 대의는 많은 사람이 그것이 위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위대할 수 있었다. 많은 아메리카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탓에 위대한 대의는 '공동의 대의'라는 대중적인 문구로 받아들여졌다."(185-6)


4장 요크타운과 파리 


"1781년 7월 말이 되자, 콘월리스는 전 병력을 유지하여 요크타운을 강화하기로 했다. 8월 2일, 그는 휘하 병력을 요크타운에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클린턴과 콘월리스가 혼란과 망설임에 빠져 허우적거릴 동안, 워싱턴은 당면한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8월 19일, 워싱턴은 체서피크만으로 대륙군을 움직였고 프랑스군도 곧 그 뒤를 따랐다. 클린턴에게 이런 움직임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워싱턴은 그의 눈에 모래를 뿌려 현혹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뉴저지를 노리는 것처럼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은 요크타운에 2개의 방어선을 구축했고, 9월 28일 아메리카와 프랑스 연합군 1만 6천 명이 요크타운을 포위했다. 콘월리스는 최후의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10월 17일 워싱턴에게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틀에 걸쳐 항복 조건이 논의됐다. 10월 19일 정오가 되기 얼마 전, 워싱턴은 항복 조건에 동의했고 문서에 서명했다."(218-20, 226, 233)


"요크타운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영국은 뉴욕시,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일부, 캐나다, 핼리팩스, 서인도제도에 여전히 군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강화講和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영국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항복 없이는 강화 이야기를 꺼내지도 말라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지만, 영국 의회는 이미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강화조약은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외교관인 베르젠은 사실 1781년 초 영국과 미합중국이 아메리카에 각자의 영토를 갖는 것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강화에 동의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영국은 뉴욕시와 남북 캐롤라이나 및 조지아의 대부분을 통치할 수 있었다." "영국 역시 아메리카와 합의해 유럽 숙적들과의 전쟁을 끝내고자 했으나 과거의 식민지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영국 내각을 이끄는 셸번 백작은 강화 협상에서 프랑스와 아메리카를 분열시키려 했다. 유럽과 관련된 논의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233-7)


"미합중국의 지위를 영국이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즈월드는 상급자로부터 아메리카의 독립을 인정하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고, 아메리카는 평화조약을 논하려면 영국이 미합중국의 독립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프랭클린은 더 나아가 미합중국에 캐나다까지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늦여름이 되자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협상의 관계자들은 천천히 합의로 나아갔다." "이후 3개월 동안 외교적 지뢰밭에서 양측의 협상이 진행됐지만 그래도 결과가 좋았고, 11월 30일에 아메리카와 영국의 위원들은 평화조약 예비 조항들에 서명했다." "모든 관계자들이 1783년 9월 3일 최종 평화조약 항목들에 동의하고 서명했다. 헨리 클린턴의 후임인 칼턴 장군은 아메리카에서 철군하는 우울한 일을 맡게 되었다. 1783년 말, 여전히 아메리카의 북서부 주둔지들에 남아 있던 영국군 파견대들을 제외하고는 영국군은 더 이상 미합중국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238-9, 242)


5장 헌법의 제정을 향해 


"1783년 3월, 뉴욕주 뉴버그에서 대륙회의의 몇몇 인사에게 사주를 받은 소수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 장교들은 전쟁 보상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봉급이 몇 달째 지급되지 않은 데다 대륙회의에서 연금 지급까지 반대하기 시작하자 장교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워싱턴은 일부 장교들이 군대를 동원해 지역 정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다소 늦게 알아차렸지만,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장교들을 직접 만나 타이르기 시작했다. 뉴버그에서 장교들과 대면해 문민정부를 상대로 어떤 군사적인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총사령관이 사심 없는 마음으로 호소하자 뉴버그 군인들은 분노를 가라앉혔다. 쿠데타의 위협이 잦아들면서 민간 정부의 존립을 흔드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워싱턴과 대륙회의의 인사들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불안감이 그해 12월 워싱턴이 직접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아나폴리스로 향하게 된 계기였다."(260-2)


"사실 독립 전쟁이 종결되기 전부터, 대륙회의는 점차 권위와 민중의 신뢰를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륙회의는 군대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쟁에 말려든 모든 정부들이 빠지는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자금을 모을 방법이었다. 정부는 독립 혁명 전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내고 그 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했다. 계획 없이 일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무절제한 화폐 발행이 가져올 결과, 즉 화폐 가치의 급락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대륙회의가 공공 재정을 다시 통제하려면 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야 했다. 1786년까지 9개 주가 대륙회의의 조치를 승인했지만, 나머지 여러 주는 사실상의 거부 의사를 표했다." "결국 대륙회의는 1787년에 예전의 요구 사항을 모두 철회하면서 각 주가 원하는 방식대로 부채를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권을 갖게 된 주들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 1788년에는 최소 7개 주가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다."(280, 284-6)


"1781년 대륙회의의 재무감에 임명된 로버트 모리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들이 생각한 혁명의 목표, 즉 사유재산의 보호와 재력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중앙권력체의 재정권이 증진돼야 한다고 믿었다. 공공 재정을 안정시킴으로써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주권이 13개로 갈라진 국가는 무질서하고 효과적이지 못했다. 군대가 독립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와중에 주 정부가 자기 멋대로 사소한 이익을 위해 골몰하는 상황은 모리스를 불쾌하게 했다." "그는 전쟁 부채를 갚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여겼고, 따라서 부채를 갚기 위한 과세는 대륙회의의 권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는 올바른 재정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는 대부분 성공했지만, 정치적 싸움에서는 자주 패배했다." "대륙회의의 관점에서 보면 공화정의 미래는 실제보다 훨씬 절망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1785년의 대륙회의는 아주 무기력했으며,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288-90)


"아메리카의 활력은 지난 20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지방, 즉 주들에서 나타났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의 교섭 위원들은 1785년 3월에 마운트버넌에서 만나 포토맥강의 탐사를 두고서 오랫동안 지속된 의견 차이를 정리했다. 이 회합에서 도출한 합의는 일련의 타협을 거쳐 나온 현명한 사익 추구의 모델이 되었다. 버지니아는 포토맥강에서 특권을 얻은 대가로 메릴랜드가 체서피크만에서 특권을 갖는 것을 받아들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 회합의 성공을 보고서 각 주가 더 큰 규모로 모이는 주 정부 회의에서도 상호 이익이 명백한 협동 정신을 발휘할 수 있으며, 대륙회의에 통상 규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매디슨은 바로 지금이 통상 규제권과 대륙회의의 과세권을 함께 묶어서 논의해야 지시를 내리라고 제안했다." "마침내 버지니아 하원은 1786년 1월에 주 정부 회의에서 〈통상의 규제에서 단일 체계가 그들의 공익과 영구적인 조화에 어느 정도 필요할지 고려하자고〉 촉구하는 데에 동의했다."(291)


"한편, 이 소식과는 아주 다른 부류의 소식이 거의 동시에 모든 주에 전해졌다. 바로 매사추세츠 중부와 서부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주도자인 대니얼 셰이즈의 이름을 따 셰이즈의 반란이라고 불린 이 봉기는 농부들이 일으켰다. 반란자 대다수는 매사추세츠주의 가혹한 재정정책에 심한 고통을 느껴 봉기에 나선 참전 용사들이었다." "농부들은 지불 능력을 넘어서는 부채와 세금 때문에 재산을 압수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장 봉기에 나섰다. 매사추세츠주는 몇 달에 걸쳐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반란으로 인해 여론이 바뀌고 있었다. 여론은 정체의 개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정체 개혁이 어느 정도로 또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불확실했다. 1787년 2월 21일에 대륙회의는 헌법제정회의의 소집에 찬성하는 결의안을 승인함으로써,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적 흐름에 올라탔다. 헌법제정회의는 1787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292-4)


6장 1780년대 두 번 태어난 사람의 자녀들 


"독립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1770년대, 위기가 닥쳤던 바로 그 순간에 버지니아 농장주들은 자신이 얼마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주 헌법의 틀을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헌법의 초안은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작성된 주 헌법이었고, 다른 지역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5차 버지니아 제헌회의는 1776년 주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6월 12일 버지니아 대표들은 '권리장전'을 공표했고, 6월 29일 주의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다." "'권리장전'은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 인민은 1776년이 주 헌법을 비준하거나 거절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인민이 주 헌법을 거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헌법이 정부 구조를 제외하면 그리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제헌회의가 그런 정부를 고안했는지는 이해할 만한다. 제헌회의가 제시한 새로운 정부 형태는 독립 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행정부 권력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305-7)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같은 사려 깊은 버지니아인은 버지니아가 독립 선언서에 선포된 자유의 한계를 넓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주려고 했다." "여러 측면에서 제퍼슨의 개혁 노력은 실패했다. 1776년 제정된 버지니아주 헌법은 피통치자의 동의를 그다지 효율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 노예제는 거의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았다. 범죄자를 야만스럽게 처벌하는 관행은 계속됐다. 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못했다. 반면 제퍼슨과 그의 친구들이 성공한 분야도 있었다. 권리장전, 한사 상속(특정 혈통만 재산 상속이 가능하다)과 장자 상속제의 폐지, 종교 자유의 확립 법안 등은 놀라운 성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행한 개혁이 독립의 위대한 원칙과 관련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의 공식 교회였던 국교회를 그 위치에서 끌어내리면서,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자유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320-1)


"일부가 '외부인'이라고 불렀던 새로운 사람들이, 독립 이전에 영국에 저항하기 위한 준비를 돕는 비공식적인 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인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펜실베이니아에서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1776년 그들이 비공식적인 주 정부를 장악하고, 선출된 의회를 교체하면서 더욱 큰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운동의 내부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고, 다른 애국파들이 영국과의 단절을 선언하기 전 이미 독립을 옹호했다. 토머스 페인은 많은 급진주의자의 멘토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와 가장 깊게 연관된 이들은 농부들, 특히 서부의 농부들과 숙련공, 소규모 자산가들, 공공정책에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려는 야심가들이었다." "1776년의 펜실베이니아주 헌법은 혼합 정부에 관한 어떤 요구도 거절했다. 급진주의자들은 민중의 관심사는 하나의 정부이며, 또 다른 전제 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는 공화정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22-4)


"다른 주들에서 발생한 상원의 문제, 즉 상원이 무엇이냐, 또 누가 대표하느냐 하는 문제는 헌법 입안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1780년 헌법을 제정한 매사추세츠주에서만 자산가가 상원을 차지했다." "상원의 구성에 관해 명확한 의견을 제시한 이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제퍼슨의 의견에 동조했다. 상원은 하원이 무모하게 행동할 때 제동 장치의 역할을 해야 했다. 또한 입법부의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와 비슷한 균형론은 양원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양원은, 곧 유행이 되어버린 표현에 따르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두 바퀴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의 급진주의자들은 양원제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결코 설득되지 않았다. 제헌회의는 그들의 통제 하에 있었고 결국 단원제 입법부가 설립됐다. 급진주의자들은 주 의회가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인민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324-5)


7장 헌법제정회의 


"정치적 이합집산에는 다양한 경제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 일단, 해외 무역과 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펜실베이니아와 매사추세츠의 사업가들, 버지니아와 양 캐롤라이나의 농장주들은 모두 인구비례에 따라 대표를 선출하고 싶어 했다. 특히 버지니아와 펜실베이니아에는 앞으로 개발해야 할 땅이 상당히 많았다. 신생 연방의회가 인구에 비례해 의원을 선출하게 된다면, 이런 미개발지 출신 의원은 그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힘을 실어줄 터였다. 남부 주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바로 노예제였다. 그들은 이 제도를 철폐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모든 작은 주가 서부의 땅을 원했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그 땅을 팔아서 공채를 청산할 생각이었다.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는 연방의회 내 주들 간의 평등성이 필요했다. 큰 주들이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생겨난다면 서부에 관련된 이해관계에서 작은 주들은 밀려나게 되고, 해당 주의 참전 용사들이 보상으로 약속된 땅을 받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340-1)


"양측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설립을 지지할 이유가 있었다. 또한 통상을 규제하기를 바랐고 셰이즈의 반란 같은 농민 봉기를 우려했다. 중앙정부가 있다면 그런 봉기는 미연에 방지하거나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다. 양측은 튼튼한 국가 재정과 채권자들의 보호라는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중앙정부가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탐욕스러운 군주정의 세계에서 공화국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큰 주든 작은 주든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시민이라는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헌법제정회의가 내린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개인적인 성향과 그들이 각 주의 이익을 대표했던 방식이다. 거의 넉 달 동안 헌법제정회의는 주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토의에서 대표들의 이성과 지성이 작용한 것처럼, 그들의 비합리성과 열정, 기회와 우연 등도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342-3)


"교착 상태를 피하려는 소망 덕분에 헌법제정회의에서 가장 골칫거리 문제들 중 하나가 해결됐다. 직접 과세의 대상이 되는 인민에 비례해 하원의 대표를 구성하자는 안이 채택된 것이다(제안자인 거버너 모리스는 나중에 이를 후회했다). 직접 과세는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민으로 간주해 부과됐다. 이런 계산은 비위가 상하는 것이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연방에 남아 있게 하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7월 16일에 상원에서 주들 간의 평등을 권고하는 것을 포함한 전체 안이 승인됐다. 투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의견은 분열됐다. 게리와 칼렙 스트롱은 안을 지지했고 킹과 고럼은 반대했다. 작은 주들의 연합과 노스캐롤라이나의 지지로 전체 안이 성사됐다.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는 반대했다. 분명 찬성했을 터인 뉴욕은 투표할 수 없었다. 랜싱과 예이츠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뒤였기 때문이다."(361-2)


8장 비준: 끝이자 시작 


# 1787년 9월 17일에 제정된 미국 헌법은 9개월 동안 많은 논쟁과 수정 끝에 1788년 6월 21일에 비준됐고, 1789년 3월 4일부터 발효됐다.


"독립 혁명은 거의 30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이 복잡하게 조합된 일련의 과정이기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여러 단계를 거쳐왔다. 어떤 한 단계를 다른 단계보다 더 '혁명적' 또는 더 '보수적'으로 추정하면 모든 단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되자 독립 혁명과 연관된 문제들의 성격이 바뀌었다. 1783년 전에 있었던 일련의 문제는 모두 독립의 성취라는 한 가지 목적과 연결된 것이었다. 그 이후의 시기에는 같은 문제들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했는데, 특히 자유민이 어떻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종전을 전후한 두 시기는 서로 달랐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는 전쟁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리고 전쟁은 고유의 임무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전시의 통치 방식 중 상당수가 평시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했다. 따라서 통치 업무라는 점에서는 전후의 문제가 전시의 문제와 비슷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달랐다."(378-9)


"전쟁이 끝나자 상인, 변호사, 대농大農, 농장주와 같은 세속의 사람들이 연합회의, 주 의회,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열정도 다소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의 미덕에 대해서는 예전처럼 두드러지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통상의 효율성과 정부의 활기가 공화주의 미덕만큼이나 중요했고 미덕을 구성하는 필수 사항이었다. 그들의 비전은 이제 국가를 포함한 거대한 조직들에, 그리고 그 조직들이 발휘할 수 있는 권력에 집중했다. 그 비전은 아마 그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전쟁 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그들의 정부 경험, 특히 대륙회의와 군대에서 겪은 경험을 고려하면 조직의 권력에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헌법을 작성했다. 그들은 환멸로 얼룩진 분위기에서 그 일을 해냈다. 아메리카에서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심이 널리 퍼졌지만,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아메리카가 성취한 일을 대견해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379-80)


"헌법 제정자들은 헌법이 미덕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헌법에는 아메리카인들의 삶에 오래 자리 잡아왔으며 독립 혁명 초창기에 명백히 드러난 도덕성이 어느 정도 구현돼 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헌법이 권력을 제한하기 때문이었다. 권력이 자유뿐 아니라 미덕도 위협한다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헌법에는 다수의 폭정을 막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인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이어야 했고,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헌법에 그런 봉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틀을 만들고자 했다. 단 그런 틀은 소수를 강압적으로 희생해 만들어져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헌법은 균형을 이루는 3부를 설치하고 각 부의 권한을 세세하게 열거함으로써 권력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 대표들은 몇 가지 이유로 이런 제한이 효과적이라 보았는데, 그 이유 중 이런 제한을 통해 부정부패와 다수의 방종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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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2 : 전쟁의 서막 1770~1780 - 자율이 강제를 이긴다 미국인 이야기 2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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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표류 


"노스 행정부는 1770년 초 그래프턴 정부에 뒤이어 들어섰는데, 출범 후 곧 식민지의 분쟁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톤젠드 관세를 철폐하여 갈등의 소지를 제거했고, 영국 의회를 잘 유도해 뉴욕 식민지를 괴롭혀왔던 통화법도 수정하도록 했다. 뉴욕은 이제 채권을 발행해 공적 채무를 지불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사실 그 뒤 3년 내내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임 내각과 마찬가지로 노스 내각도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내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노스는 식민지 사태가 그저 조용히만 흘러간다면 그냥 흐르는 대로 놓아둬도 좋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아메리카인도 영국 의회가 마음대로 식민지인을 이끌고 가겠다는 낡은 주장을 포기한다면 그런 표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선언법이 여전히 법령집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차에 대한 관세도 여전히 법으로 남아 있었다."(16-7)


"버지니아는 영국과의 갈등 초창기에, 특히 인지세법 위기 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그러나 다른 식민지인과 마찬가지로 버지니아인은 자유에 대한 위협이 줄어들자 평소의 생업으로 되돌아갔다. 매사추세츠의 양키들도 맹렬하게 자유를 수호했지만 역시 평온을 바라고 있었다." "1773년 5월, 영국 의회는 정치적 휴지기를 13개 식민지 전역에서 종식하는 조치를 취했다. 의회는 1773년에 차세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어려움에 빠진 동인도회사를 구제하기 위한 법이었다. 이 법은 이 회사에 식민지에서 차를 거래하는 독점권을 부여했고, 차에 3펜스 관세를 유지했다. 이 법의 두 가지 사안은 격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 두 조항은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에서 그들 마음대로 행동하겠다는 통지였다. 정치의 '휴지기'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영국 의회는 지고한 권리를 다시 한 번 주장하고 나섰다. 아메리카의 저항운동은 이제 표류 기간을 끝내고 명확한 방향성을 찾았다."(27, 34)


2장 결의 


"1771~1772년 동안 아메리카인은 차를 마셨고, 그 차의 대부분이 합법적으로 수입되었으며, 파운드당 3펜스의 관세를 물었다. 밀수가 여전히 용납됐고 상당량의 차가 네덜란드에서 불법으로 수입됐으나, 세관을 통해 들어오는 영국 차도 합법적으로 조용히 수입됐다. 그러나 차세법이 통과되고 나서 1년 사이에, 관세가 예전과 동일했는데도 반대운동이 되살아나서 그 유명한 차 사건이 보스턴 항구에서 발생했다. 2년 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이제 차를 수입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낙인이 찍혔다." "식민지인들은 차세법이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즉 문제 해결을 강요하는 것이었고,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서 과세권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주장한 셈이었다. 식민지인이 볼 때, 차세법은 식민지인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영국인의 음모가 되살아난 것이었다. 영국 정부의 의도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마당에 관세를 계속 납부한다면, 그것은 노예화 작업에 협력하는 행위가 될 것이었다."(37-8)


# 보스턴 차 사건(1773. 12. 16)에 대한 영국 의회의 대응(소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nce Acts')

1. 보스턴 항구 법안 : 보스턴 항구는 국왕이 재개항을 명령할 때까지 폐쇄되며, 국왕은 동인도회사가 차 손실에 대해 전액 배상을 받을 때까지 재개항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

2. 매사추세츠 규제법 : 국왕의 특허장으로 일부 자율을 허락받았던 매사추세츠 정부를 왕실 직영 정부로 전환한다.

3. 정의의 불편부당한 시행법 : 식민지에서 중죄를 저지른 영국 관리는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로 보내 재판을 받는다.

4. 또 다른 숙영법 : 기존 법은 민간 당국에게 막사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제는 개인 집에서도 숙영할 수 있도록 했다.

5. 퀘벡 법 : 퀘벡의 경계를 오대호 남부와 오하이호 강까지로 확장하고 프랑스계 주민들의 가톨릭 신앙을 인정했다.


"1774년 9월 5일 대륙회의가 처음 개최됐을 때, 대부분의 아메리카인은 영국 의회가 13개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이런 입장은 지난 10년 동안 줄기차게 선언됐고, 인지세법 위기가 끝나기 전 이미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 때만 해도 영국 의회가 대영제국의 일부인 식민지의 사안에 대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권리마저도 일부 논객의 노골적인 저항을 받았다." "토머스 제퍼슨에 따르면 영국이 행한 '임의적 조치' 중 최악은 영국과 아메리카 내의 모든 땅을 국왕이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봉건적 토지 보유권이 도입됐고, 그에 부수된 온갖 강탈이 시작됐다. 아메리카에서는 이 제도가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제퍼슨은 〈왕은 인민의 봉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즉, 왕은 법률의 구속을 받으며 계약의 당사자로서 계약이 정한 한계와 규정 내에서 통치한다는 것이다."(59-62)


"10월 14일, 대륙회의는 권리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이제 식민지의 권리가 자연법, 영국 헌법, 식민지 특허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세 가지 권리의 원천은 타협의 산물이었으나, 선언 자체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이 선언문이 주장한 권리들은 거의 10년 동안 아메리카의 대의로 주장되어온 것이었다. 이 선언은 식민지가 스스로 과세하고 입법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한동안 그들의 이해관계, 특히 경제적 이해관계가 그들을 분열시킬 뻔했으나 결국 대륙협회를 성사시켰다. 협회는 아메리카인들을 함께 묶는 가치를 표현했고, 자치권을 보호하려는 욕망에는 정체론을 초월하는 도덕적 관심사가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륙회의가 검소, 절약, 근면을 권장하며 사치와 낭비를 비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어휘는 식민지 창건 이래 아메리카에 존재해온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나왔다."(81, 84-5)


3장 전쟁 


"보스턴에 있던 게이지 장군은 무력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영국의 권위를 보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압 작전에 투입될 충분한 병력이 그의 수중에 없었다. 그를 가장 심란하게 만든 것은 아메리카인의 저항과 적개심이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1774년 9월 그가 찰스타운의 화약과 케임브리지의 대포를 압수하려고 했을 때 식민지인의 반응은 너무나 격렬했다. 그 소문이 뉴잉글랜드에 퍼지자 멀리 있던 코네티컷의 민병대까지 보스턴으로 몰려들었다. 집결한 대원들의 수는 약 4000명이었으며 그들의 태도는 싸움을 불사했다. 이 사건이 지나가자, 게이지는 매사추세츠 민병대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와 군수품을 사들이는 예산이 배정돼 착착 집행되고 있었다. 대륙회의는 산회하면서 지역 민병대를 소집할 권한을 안전 위원회에 부여했는데, 위원회는 게이지가 500명 이상의 정규군을 보스턴 밖으로 내보낼 경우 즉각 민병대를 소집할 예정이었다."(111-2)


"1775년 4월 14일 식민지 담당 장관인 다트머스가 보낸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는 영국 내각의 입장을 요약한 다음, 명시적인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으나 질책하는 어조로 보아 뭔가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게이지는 다트머스의 편지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지역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작업이 아니라, 콩코드와 우스터에서의 무기와 탄약 압수를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렉싱턴 전투와 콩코드 전투는 앞으로 영국군이 직면하게 될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군대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민중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전쟁은 18세기의 다른 많은 전쟁을 닮기도 했다. 전통적인 군대들이 전략에 따라 서로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인이 계속 동원된다는 점과 통상적인 전투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민중의 열정과 도덕적 강인함은 프랑스 혁명 전에 치러진 어떤 18세기 전쟁에서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했다."(114-6, 126-7)


4장 절반의 전쟁 


"5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 2차 대륙회의가 개최됐다. 대륙회의 참석자들은 이제 군인이 필요하고 콩코드 노상에서 전투가 발생한 이상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타협을 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을 할 것인지, 즉 전쟁의 목적에 대해서는 일치된 합의가 없었다." "대륙회의는 1년 뒤에나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회의는 독립이냐 타협이냐를 명확하게 결정내리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주권 국가의 대표 기관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륙회의는 한 달 전 고충의 시정과 평화와 화합의 회복을 탄원하는 서신을 국왕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식민지에는 무장을 하라고 지시했다. 5월 27일에는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위원회를 임명했다." "대륙회의는 대륙군을 통제할 규칙과 규정을 작성하는 책임을 맡은 위원회의 위원장을 임명했다. 6월 15일에는 '아메리카의 자유를 위해 모병됐거나 모병될 모든 대륙군'의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임했다."(138-9, 142-3)


"영국군은 여러 면에서 그 시대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싸우도록 조직된 전형적인 18세기 유럽 군대였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18세기에, 전쟁은 왕조 국가의 전유물이었고 제한된 목적을 위해 소규모로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병사들은 명예도 모르고 훈련시키기도 어려우며 유지하는 데 고비용인 가난한 계급에서 뽑아왔기 때문에, 군 지휘관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군대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일로 고심했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군사적 행동을 가능한 한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통상적으로 군사 작전은 좋은 날씨에만 수행됐고, 겨울철 전쟁은 드물었다." "지휘관들은 날이 좋아도 승리를 악착같이 추구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패배해 그 뒤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은 전투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도 않았다. 전면전과 그 결과물인 전면 승리라는 개념은 훨씬 후대에 발명됐다."(168-70)


"조지 워싱턴은 유럽의 군사 교리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비전문가로 구성된 군대의 태생적 약점을 드러냈다. 병사와 장교들이 갖고 있는 관심사와 유대 관계는 전문적인 군대의 목적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민병대는 그 군대의 성격상 언제나 신뢰하기 어려운 군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임시 근무를 하러 나온 민간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자신의 군대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유럽 사상을 고집하지 않았고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일을 꾸려나가는 능력도 있었다. 1775년 케임브리지에서 또는 전쟁 기간 내내 그는 전통적인 군대를 양성하려고 노력했지만 때로는 전통적인 군사 원칙에서 벗어나서 임기응변할 줄도 알았다. 그는 겨울에도 전투를 벌였고 비정규군인 민병대를 적절히 활용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원칙과 국민에게 호소할 줄도 알았다. 그는 전쟁을 그가 속한 계급의 소수 장교들과 사회 밑바닥의 찌꺼기 인생들만 가지고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173-4)


5장 독립 


"1775년 봄 독립을 지지하는 대표들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독립 선언을 지지하는 자는 더욱 없었다. 다수의 대표는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아메리카인들이 화해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름에 진행된 회의에는 뭔가 '변덕스러운 경향'이 있었다. 회의는 평화를 애걸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준비했고 화해를 탄원하면서 아메리카의 자유를 보호하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또한 영국군에게는 죽음을 경고하면서 국왕에게는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무더운 여름의 몇 주 동안에 벌어진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사람들이 벙커힐에서 죽었고, 아메리카인이 죽어갈 때마다 온건파 세력은 그만큼 떨어져 나갔다. 죽음과 고통은 뉴잉글랜드에 국한된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전투 소식은 널리 퍼졌고, 중부와 남부 식민지의 병사들이 보스턴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면서 타협의 정신 또한 떠나갔다."(196-8)


"아메리카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영국 의회 내의 많은 의원은 확실히 일치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내각의 지도를 따라 그해가 다 가기 직전인 1775년 12월 22일 아메리카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식민지와의 모든 거래를 중지시키는 법으로써 아메리카의 배와 화물을 영국 해군의 만만한 사냥감으로 만들었다. 법에서는 〈식민지와 거래하는 모든 배는 명백한 적의 선박 또는 물건으로 간주되어 국고에 몰수되고, 모든 해사법원과 기타 법원에서 그런 식으로 간주되고 판단되어 몰수될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여기에 대륙회의가 지난 7월에 승인한 탄원서 접수를 영국이 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더 많은 병력이 아메리카로 건너오는 중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대륙회의가 금지법을 접수한 1776년 2월에 이르러, 화해의 가능성은 가뭇없이 멀어졌다. 그렇지만 대륙회의는 독립 선언을 여전히 자제했다. 회의는 아메리카인이 영국과의 영원한 결별을 선호한다는 확증을 기다렸다."(199-200)


"페인이 《상식》에서 펼친 주장 중 일부는 지난 12년 동안 소책자 저자들이 줄기차게 해온 말이었다. 즉 식민지를 노예화하려는 음모가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인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기존의 영국-아메리카 제도의 구조가 곧 음모라는 것이었다. 군주제 또는 영국의 정체가 곧 음모이기 때문에 이제 아메리카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독립을 선언해야만 했다. 독립 선언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었고, 페인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이 역사 속 단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새롭게 시작할 힘을 가지고 있다. 현재와 비슷한 상황은 노아 시대 이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을 사람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는 아메리카의 과거에서 내려오는 기독교 천년주의 유산에 대한 호소였다. 페인은 동시에 치유 방안도 제시했다. 그것은 아메리카 혁명이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뚜렷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확신이었다."(206)


6장 진지전 


"영국군은 대양과 해안지대 그리고 대부분의 강을 지배했다. 그들은 수역을 통제했기에 비교적 빠르게 병력을 이동할 수 있었고, 원하는 곳에다 쉽게 병력을 집중할 수도 있었다. 반면, 아메리카군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장군들이 보기에는 크게 미흡했다." "〈성공이 매우 의심스러울 때나 적의 손에 붙잡힐 가능성이 있을 때, 용감하게 방어에 나서서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는 병사들을 자극하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워싱턴은 진지에 의존하게 됐다. 진지가 전략적으로도 가치가 높지만, 아메리카 병사들에게 진지에서만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워싱턴은 상비군이 용병부대보다 더 우수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대의가 있었고, 그들에게 명예 의식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전통적인 군대와 비슷한 군대로 훈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워싱턴의 군대에 드나드는 시민군에게는 자부심과 명예가 몹시 결핍되어 있었기에 그는 진지전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236-9)


"하우는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정치적 차원에 유념했다. 만약 그가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을 끌어안으려면, 그들을 보호해줘야 했다. 영국에 복종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 때문에 그동안 동요하던 국왕파들이 공개적으로 신분을 드러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하우가 갖고 있는 수단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워싱턴이 사료와 식량을 파괴하는 전술을 썼기 때문에 군수품이 부족했다." "대부분의 점령군이 그러하듯이, 하우 부대는 점령 지역의 주민을 '보호'하면서도 그들을 착취해야 하는 모순적인 입장에 빠졌다. 점령지 주민에게는 애국자로서 이기심 없이 영국군에 보답해야 한다는 감정이 없었다. 하우는 그들의 심정을 잘 알았기에, 도노프에게 탄약고를 지으라고 지시하면서 농부들로부터 물자, 특히 소와 곡식을 징발할 때 영수증을 써주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우의 이러한 지시는 탄력적인 것이어서 쉽게 남용할 수 있었다."(275)


7장 기동전 


"영국군의 1777년 전략 중 한 부분을 설계한 존 버고인 장군은 겨울 추위의 런던을 뒤로 하고 5월 6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그날 퀘벡은 완연한 봄 날씨였고, 장군이 도착하면서 낙관적인 봄기운도 함께 돌았다. 언제나 과감했던 버고인은 이제 자신이 바라던 바를 획득했다. 독립된 지휘권을 얻었고 물론 그 권한을 행사할 기회도 잡은 것이었다." "그는 6월 20일 위협과 위선적인 경건함으로 가득한 선언문을 반포해, 아메리카인은 그의 부대를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지옥불보다 더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버고인의 어조는 아주 오만했기 때문에 자신과 부대에게 몹시 해로운 메시지를 작성한 꼴이 되었다. 합헌성, 애국심, 기독교를 거론한 허장성세와 인디언을 풀어 공격하겠다는 야만적인 위협은 아메리카인의 분노와 경멸을 자아냈다. 전임 영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식민지인의 반감을 부추기는 데에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299, 302-3)


"1777년 북부 전투에서 존 버고인은 영국군을 이끌고 캐나다에서 남하해 아메리카를 공격했고 이에 맞서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가 아메리카군을 이끌었다." "9월 19일 배미스 하이츠 1차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은 프리먼스 팜에서 뒤로 밀리지 않고 진지를 고수했으나, 대체 불가능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총 556명의 영국 정규군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10월 7일 벌어진 배미스 하이츠 2차 전투에서 아메리카군은 증원군과 아놀드의 맹공에 힘입어 영국군을 퇴각시켰다. 10월 12일 게이츠는 버고인의 퇴로를 끊는 데 성공했다. 버고인은 도강을 할 수 없자 항복 조건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두 지휘관은 10월 16일 만났고, 다음 날 영국 정규군은 진지에서 나와 무기를 내려놓았다. 영국군은 버지니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이와 더불어 약 5800명의 영국군 장교와 병사, 27문의 대포, 5000점의 무기, 탄약, 기타 각종 군수품도 포획됐다."(311, 314, 319-21)


"워싱턴은 북부군의 성공을 아메리카 혁명의 대의와 연결했다. 자부심, 영웅심, 명예에 대한 호소는 전에도 했다. 그러나 '정의롭고', 영광스럽고, 온 '나라'가 공감하는 혁명의 대의에 그런 고상한 감정을 연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워싱턴은 이런 거대한 사상을 병사들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결부하면서 연설을 끝냈다. 〈적은 불명예스러운 말들로 그대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그대들은 이런 비난을 참아낼 수 있는가? 그대들의 조국이 입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겠는가?〉 실패한 혁명은 대역죄로 간주될 것이었다. 오로지 혁명 전쟁의 경우에만 병사들은 '정의로운 대의'라는 고상한 개념과 교수형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는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며 전투에 참여한다. 이 병사들은 공화주의의 세세한 점까지는 잘 몰랐지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명확하게 알았다. 그들은 막강한 영주나 주인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을 말이다."(332-4)


8장 혁명의 불꽃이 유럽의 전쟁으로 번지다 


"한편 프랑스는 1763년 7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영국에 복수할 날만 꿈꿔왔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식민지들이 격변에 휩싸였고,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대영제국이 분열될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했다." "마침 대륙회의는 1775년 초 원조를 받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던 차였다. 부분적으로는 대륙회의의 의원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 같은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대륙회의는 1775년 11월 29일 비밀 교신 위원회를 임명했다. 위원회는 프랑스의 태도에 가장 신경썼다." "마침내 프랑스의 아메리카 비밀 원조가 승인되자, 위대한 재무장관 튀르고만이 지원에 반대하면서 프랑스가 무슨 조치를 취하든 아메리카의 독립은 기정사실이며, 독립국 아메리카는 식민지 시절보다 훨씬 더 영국의 상업적 번영에 기여할 것이란 주장을 폈다. 1776년 5월 2일에 이르러, 루이는 튀르고의 이런 예측을 무시했고 식민지에 100만 리브르어치의 군수물자 지원을 승인했다. 열흘 뒤, 튀르고는 사임했다."(344-8)


"프랑스와 아메리카 양측은 우호와 통상 조약, 그리고 동맹조약을 1778년 2월 체결했다. 상업 조약은 최혜국 대우를 포함했고, 서인도제도의 여러 항구를 개방하며, 프랑스가 아메리카 선박에 무제한으로 항구를 개방하는 조항도 포함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하는 경우에만 발효되는 동맹조약은 두 국가가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특히 8조에 명시된 내용이 중요했다. 〈양국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영국과 휴전이나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또한 양국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이 전쟁을 끝내는 공식적 조약에 의해 확실하게 되기 전까지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합의한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영토에 대해서도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 중에 점령된 영토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소유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조약은 5월 4일에 대륙회의의 승인을 받았다. 6월 14일이 되자 프랑스와 영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356-7)


9장 남부에서의 전쟁 


"좌절 뒤에는 으레 새로운 희망이 뒤따르는데, 이는 헛된 환상이다. 아메리카인들의 봉기에 직면한 영국은 새로운 희망을 모색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헛된 환상에 가까웠다. 렉싱턴 전투가 발발하기 전, 영국 각료들은 아메리카 문제가 소수 반란자들의 음모로 부추겨진 것이며 대다수의 식민지 주민은 영국 의회와 국왕을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왕을 포함한 많은 이의 이런 확신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군사적 실패를 함께 책임져야 하는 낙담한 관료들에게 그런 확신은 틀림없이 위로가 되었다. 하우 형제는 아메리카 내에서 무수한 국왕파를 찾아낼 것으로 생각했지만, 1776년 트렌턴으로 진군하면서 이런 착각에서 어느 정도 깨어나게 되었다. 윌리엄 하우 경은 특히 남부 식민지에 충성스러운 신민이 무수히 있으며, 북부보다 훨씬 열렬히 국왕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아메리카인에 관한 가장 흔하고 근거 없는 신화의 한 가지 형태였다."(407-8)


"하우의 상관이었던 조지 저메인 경은 48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아메리카 내의 실망스러운 상황을 잘 몰랐으므로, 계속해서 대다수의 아메리카인이 충성스럽다고 믿었다. 1777년 여름, 캐롤라이나의 국왕파들이 잉글랜드에 도착해서 저메인의 귀에 아메리카에 국왕파가 많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흘려 넣었다. 이런 얘기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하우에게 남부로 진군할 것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영국군은 남부 전투의 전초전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항구도시 찰스턴을 공략하여 약 6주간에 걸친 공성전 끝에 1780년 5월 12일, 항복을 받아냈다." "클린턴은 충성을 서약하는 반역자들에게 대영제국 치하에서 누렸던 권리를 회복해줄 것이며, 영국 의회로부터 세금 면제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많은 반역자가 이미 서약을 통한 가석방 제안을 받아들였고, 사유 재산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보장과 대륙회의가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영국에 넘겨줄지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서 영국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408, 433)


"찰스턴의 비보를 듣게 된 대륙회의는 영웅이 남부의 전세를 일거에 회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게이츠에게 남부 군대의 총사령관직을 맡겼다. 그의 과거 군공을 감안하면 그것은 훌륭한 인사였다. 1777년부터 게이츠는 성공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고 새러토가 전투에서 버고인 부대의 항복을 받아낸 바 있다. 그러나 게이츠에 대한 의심은 그의 부임 즉시부터 시작됐다. 부임지에 온 바로 다음 날, 캠던으로 진군 중이던 대륙군에게 열병식을 거행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결국 식민지 남부에서의 세력 확보가 절실했던 영국군은 1780년 8월 16일 벌어진 캠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남부의 거점을 확보했다. 게이츠는 그날 저녁 약 96킬로미터 떨어진 샬럿에 도착했고, 19일에는 약 193킬로미터 떨어진 힐즈버러까지 왔다. 그는 힐즈버러에 도착해서는 후방 기지를 지키고 아메리카군을 재건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변명했다. 대다수의 병사는 게이츠를 따르지 않았고 대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438,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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