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 엘리트, 반엘리트, 정치적 해체의 경로
피터 터친 지음, 유강은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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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양적 역사 분석을 통해 우리는 세계 각지의 복잡한 사회들이 반복적이고,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정치적 불안정의 파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 파동은 수천 년에 걸친 인류 역사 내내 작동하는 동일한 일군의 기본적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대부분 악의 속임수나 부패한 개인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정부기관과 갤럽 같은 기관들이 만들어낸 사회학적 조사, 그리고 임금과 세금, 국내총생산(이하 GDP)에 관한 널리 합의된 빅데이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데이터는 사회과학자들이 학술 저널에 발표하는 통계 분석에 반영된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설명이 왜 더 복잡한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든 데이터와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계 과학이 필요하다. 역사동역학은 수학 모델을 활용해서 우리 사회, 즉 복잡한 사회 체계의 각기 다른 ‘구동 부품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추적한다. 12-3)


# 역사동역학cliodynamics :그리스 신화의 역사의 무제muse[뮤즈] ‘클리오Clio’와 변화의 과학인 동역학dynamics을 합친 것이다


1부. 권력의 역사동역학

1장. 엘리트, 엘리트 과잉생산, 위기로 가는 길


모든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얻고 싶은 야망을 품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권력 지위보다 지망자가 더 많게 마련이다. 불가피하게, 권력 지위를 얻으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좌절한 엘리트 지망자들이다. 엘리트 과잉생산은 엘리트 지망자들의 권력 지위 수요가 공급을 대대적으로 압도할 때 늘어난다. 1980년대를 시작으로 미국 슈퍼리치(최소 1,0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천만장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983년 천만장자는 6만 6,000가구에 불과했는데, 2019년(데이터를 구할 수 있는 최근 연도)에 이르면, 그 수가 69만 3,000가구로 열 배 이상 증가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부유층 수의 증가가 그렇게 나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메리칸드림의 일부인 이 뉴스에는 두 가지 부정적인 면이 존재한다. 우선, 초부자 계급의 확대는 나머지 인구의 부침과 고립된 채 이루어지지 않았다. 슈퍼리치의 수가 증가하는 한편, 전형적인 미국 가구의 소득과 자산은 실제로 감소하고 있다. 20)


다음 문제는 한결 미묘하다. 사회 피라미드의 상층부가 너무 무거워지면, 우리 사회의 안정에 암울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엘리트 지망자 게임, 줄여서 지망자 게임에서는 매번 의자 수를 줄이는 대신 참가자 수를 늘린다. 게임은 권력 지위(공직 같은)를 나타내는 의자 열 개를 가지고 의자 뺏기 게임과 똑같이 시작한다. 첫 번째 게임에서 열한 명(엘리트 지망자)이 의자를 차지하려고 겨룬다. 열 명이 기성 엘리트가 되고, 패자는 좌절한 지망자가 된다. 다음 판에서는 참가자 수를 늘리는데, 결국 두 배, 그리고 세 배까지 늘린다(의자는 그대로 열 개다). 승자 수는 그대로이지만, 좌절한 지망자 수는 처음의 한 명에서 열 명, 스무 명으로 늘어난다. 게임이 진행되는 가운데 혼돈과 갈등의 정도가 높아진다고 상상해보라. (아이 생일파티에서는 이 게임을 하는 걸 추천하고 싶지 않다.) 기묘한 증폭 효과도 생긴다. 지망자 수를 두 배에 이어 세 배로 늘리면, 좌절한 지망자의 수는 열 배, 스무 배로 늘어난다. 20-1)


게임 이론에서 참가자는 주어진 규칙 안에서 승리 전략을 고안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사람들은 항상 규칙을 왜곡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의자에 가까이 가면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바로 옆에 서서 음악이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경쟁자들을 밀칠 수 있다. 축하한다. 당신은 이제 막 반엘리트counter-elite(대항엘리트)가 된 셈이다. 게임에서 성공하기 위해 기꺼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남들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해서 의자마다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오래지 않아 당신은 난투극에서 이기기 위한 비법을 얻게 된다. 권력 지위의 수는 지난 수십 년간 변함이 없었지만, 지망자 수는 전반적인 자산 소유자 수와 나란히 증가하고 있다. 증폭 효과 때문에 좌절한 지망자 수는 이미 인상적인 자산 소유자 수의 팽창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급증했다. 참가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규칙을 어길 가능성이 커진다. 게임 규칙—민주적 선거를 좌우하는 사회규범과 제도—이 느슨해지는 것이 놀랄 일인가? 21-2)


우리에게 트럼프 대통령을 안겨준—그리고 미국을 국가 와해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회적 힘은 엘리트 과잉생산과 대중의 궁핍화다. 트럼프는 급속하게 늘어나는, 공직을 열망하는 초부유층 집단에 속한다. 그는 이미 굉장한 부자이고(천만장자, 어쩌면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억만장자인) 유명했지만, 더 많은 것을 원했다. 2016년에 이르면 대중의 궁핍화가 1992년보다 훨씬 심해졌고, 트럼프는 대통령 도전에서 이런 사회적 힘을 현명하면서도 무자비하게 활용했다. 결국 자신이 뒤처졌다고 느끼는 미국인의 대다수가 이 예상을 깨고 대통령이 된 후보—억만장자—에게 표를 던졌다. 여기에 더해 엘리트 과잉생산 게임이 분기점에 이르러서 많은 이들이 정치 캠페인의 행동 규칙을 내팽개친 상태였다. 후보자들은 언론의 관심을 끌고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앞다퉈 기이한 발언을 늘어놓고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은 반면, ‘진지한’ 후보자들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떨어져서 탈락했다. 24-5)


2장. 한 걸음 뒤로: 역사의 교훈들


우리의 분석은 불안정을 낳는 네 가지 구조적 추동 요인을 가리킨다. 대중의 동원 잠재력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궁핍화, 엘리트 내부 충돌로 귀결되는 엘리트 과잉생산, 쇠약한 재정 건전성과 국가의 정당성 약화, 지정학적 요인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엘리트 내부의 경쟁과 갈등은 위기가 다가옴을 보여주는 믿을 만한 예측 지표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추가 요인 하나를 언급해야겠다. 해체 단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단계가 항상 암울하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집단적 폭력 수준은 리듬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한 세대는 전면적인 내전을 벌이지만, 이 폭력으로 상처 입은 다음 세대(‘아들들’)는 불안한 평화를 유지한다. 폭력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채 자라는 그다음 세대(‘손자들’)는 할아버지들의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런 동학 때문에 대략 50년(두 세대)에 걸쳐 폭력이 되풀이되는 주기가 만들어진다. 이 주기는 구조적 조건이 어떻게든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면서 다음의 통합 단계로 이어진다. 34-5)


13세기는 중세 프랑스의 황금시대였다. 프랑스 왕이 직접 다스리는 영토는 13세기를 거치면서 세 배가 되었고, 1300년에 이르면 프랑스는 군사, 정치, 문화적으로 서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1300년 무렵 프랑스 왕국의 광채가 빛을 잃기 시작했다. 황금시대는 도금시대로 바뀌었다. 엘리트의 부는 지속된 반면, 보통 사람의 생활 상태는 악화되었다. 대중의 궁핍화를 낳은 근본 원인은 1300년 전 두 세기 동안 서유럽의 인구가 대대적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인구 폭발이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모든 이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중세 경제의 역량을 압도했다. 인구 대다수가 기아 경계선에서 살았고, 1315년에서 1322년 사이에 흉작과 가축 감염병이 잇따르면서 체제가 궁지로 몰렸다. 수백만의 죽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듯, 인구 재앙은 사회 피라미드의 상층부를 너무 무겁게 뒤바꿈으로써 사회적 안정에 더 미묘하면서도 파괴적인 또 다른 영향을 미쳤다. 35-6)


1250년 이후 귀족의 수는 인구 전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많은 하위 귀족은 두 명 이상의 아들에게 토지를 나눠줘도 모든 상속자에게 귀족 지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소득을 안겨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널리 퍼진 재산을 가진 부호들은 외딴곳에 있는 재산을 일부 사용해서 장남을 제외한 아들들을 중간 귀족으로 만들어주었다. 사회적 상향 이동 비율도 증가해서 부유한 농민과 성공한 상인들이 귀족으로 올라섰다. 기근과 감염병이 닥쳤을 때, 엘리트들은 재난을 견딜 만큼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평민보다 사망률이 낮았다. 이 모든 추세가 결합되어 생산적 계급에 비해 귀족의 수가 증가해서 사회 피라미드의 상층부가 너무 무거워졌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귀족의 경제적 운이 역전되었다. 1300년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엘리트 수가 적고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서 귀족들이 유리한 경제적 상황을 누린 반면,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36)


엘리트 지위를 유지할 만한 수입이 부족한 귀족들은 국가에 고용되려고 하는 한편, 농민들로부터 더 큰 비율의 자원을 뽑아내는 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국가는 가난해진 귀족 전부를 고용할 수 없었다. 귀족이 너무 많았고, 정부 자체도 재정 파산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규모 인구 증가로 추동된 물가 상승이 국가 세입을 갉아먹었고, 왕실 재정을 한계점까지 압박했다.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수입을 뽑아낸다는 것은 지주들이 잉여를 챙기는 것을 넘어서서 농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자원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지주의 억압은 그 자신의 경제적 토대를 훼손했다. 농민들이 도망치거나 굶어죽거나 헛된 반란을 일으켜 죽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족들은 서로를 먹잇감으로 삼기 시작했다. 엘리트 과잉생산 게임은 최후의 폭력적 단계로 들어섰고, 엘리트 간 충돌이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졌다.4 1350년대에 내부 질서의 와해가 왕국의 심장부까지 다다랐다. 36-7)


100년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한 세기 동안 통합 단계를 누렸다. 1450년 전의 한 세기는 왜 그토록 황량했고, 그다음 세기는 왜 그렇게 찬란했을까? 그 답은 프랑스를 내전으로 떠민 힘들이 1450년 무렵에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대중의 궁핍화는 기근과 감염병, 내전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요인들이 누적된 결과로 프랑스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이제 농민들에게 땅이 풍부했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노동자 실질임금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지대가 곤두박질치며 임금이 상승하자 부의 펌프가 사실상 막혔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 크레시와 푸아티에, 아쟁쿠르, 그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전투에서 벌어진 수많은 인명 손실로 수만 명의 ‘잉여’ 귀족이 사라졌다. 1300년에서 1450년 사이에 전체 인구가 절반으로 준 한편, 같은 시기에 귀족 수는 4분의 1로 감소했다. 사회 피라미드의 상층부가 너무 무거운 상황이 끝이 나고, 아래쪽이 넓고 위는 좁은 한층 더 안정된 형상을 회복했다. 38)


2부. 불안정을 추동하는 요인들

3장. “농민들은 혐오스럽다”


1976년에 공립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평균 비용은 연간 617달러였다. 1976년에 중위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한해 대학교 학비를 벌려면 150시간을 일해야 했다. 2016년에는 공립 대학교 평균 학비가 8,804달러였다. 중위 임금 노동자가 이를 감당하려면 500시간을 일해야 했다. 세 배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이다. 중위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중위 노동자는 1976년에 비해 2016년에 주택을 사기 위해 40퍼센트를 더 일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중위 임금 대신 고졸 노동자 평균 임금—1976년에서 2016년 사이에 절대적 액수로 감소했음을 유념할 것—을 놓고 똑같은 계산을 해보면, 대학 학비를 내기 위해 일하는 노동 시간이 거의 네 배(정확히 말하면 3.85배)다. 2016년에 ‘노동계급’(저학력) 부모는 1976년에 비해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네 배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결국 지난 몇십 년간 저학력 계층에서 고학력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대폭 잠식되었다는 뜻이다. 59)


복리와 그 반대인 궁핍화에는 다른 차원들도 존재한다. 생물학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그것이다. 생물학적 복리를 보여주는 가장 민감한 지표 중 하나는 인구 집단의 평균 신장이다. 영양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에너지 섭취이지만, 식사의 질(가령 신선한 채소 섭취) 또한 신장에 영향을 미친다. 성장을 방해할 수 있는 환경의 압력에는 높은 유행병 빈도(감염을 막으려면 에너지가 소요된다)와 고된 노동(특히 아동과 청소년 시기에) 등이 포함된다. 15~20세의 청소년은 폭풍 성장기를 겪으면서 성인의 신장에 도달하고, 일단 20대 초가 되면 성장이 멈춘다(그리고 결국 아주 느리기는 해도 키가 줄기 시작한다). 따라서 1960년에 태어난 아동의 키는 1975년에서 1980년 사이에 경험한 환경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정해졌다. 그리고 이 조건은 대체로 부모 세대가 받는 임금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 전형적인 미국인의 실질임금이 증가를 멈췄을 때, 그 자녀들의 평균 신장도 증가를 멈췄다. 59-60)


생물학적 복리를 보여주는 또 다른 매우 유용한 지표는 기대수명이다. 케이스와 디턴이 사망률 증가를 기록한 첫 번째 인구 집단은 45~55세의 노동계급 백인 남성이다. 이 집단의 추세가 역전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사망률 증가를 추동한 요인은 케이스와 디턴이 “절망사”라고 뭉뚱그려 언급하는 원인들의 결합이다. 절망사는 자살,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으로 인한 죽음이다. 모두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자살은 가장 빠른 탈출구이지만, 약물 과용과 알코올성 간경변으로 인한 사망도 마찬가지로 자초한 죽음이며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다. 특히 인상적인 사실은 저학력 남성에게서 절망사가 네 배 증가한 반면, 고학력 남성의 경우 별로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5년, 중년 이전 세대의 절망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30대와 40대 미국인의 사망률은 부모 세대의 사망률보다 빠르게 높아졌다.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보다 사망률이 낮은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62-3)


4장. 혁명군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를 대중의 의식에 주입한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학위 보유자들을 프레카리아트 집단의 하나로 본다. 〈이 집단은 부모와 교사, 정치인들에게서 경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내 복권을 산 것임을 깨달은 채 미래 없이 빚만 잔뜩 지고서 사회로 나온다. 이 파벌은 더 적극적인 의미로 위험하다. 그들은 포퓰리스트를 지지할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또한 낡은 보수주의 정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거부한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새로운 낙원의 정치를 추구한다. 낡은 정치 스펙트럼이나 노동조합 같은 조직에서는 이런 정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고학력 프레카리아트(또는 역사동역학의 용어로는 좌절한 엘리트 지망자 계급)가 사회 안정에 가장 위험한 계급임을 알 수 있다. 고급 학위를 가진 젊은이의 과잉생산은 1848년 혁명에서부터 2011년 아랍의 봄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격변을 추동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76)


1991년 로스쿨 졸업생의 초봉 분포를 보면 가장 흔한 연봉을 반영하는 3만 달러가 최고점이었다. 분포의 왼쪽 ‘꼬리’ 부분은 짧지만 2만 달러 이하는 없었다. 오른쪽 꼬리 부분은 더 긴데, 9만 달러가 최대였다. 2020년 졸업생은 왼쪽 혹이 약간 납작해지고 대다수가 4만 5,000~7만 5,000달러의 연봉을 보고해서 전체 연봉의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오른편 봉우리는 이제 19만 달러로, 전체 분포의 20퍼센트 이상이었다. 연봉이 19만 달러인 오른쪽 봉우리의 20퍼센트는 기성 엘리트층에 순조롭게 진입하는 중이다. 왼쪽 혹 부분에 있는 4만 5,000~7만 5,000달러 소득자들은 곤란한 상태다. 2020년 로스쿨 졸업생의 절반이 16만 달러 이상의 빚을 지고 있음(네 명 중 한 명은 20만 달러)을 감안하면, 이 개인들 가운데 엘리트 계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그 대신 대다수가 빚과 가차 없이 쌓이는 이자에 짓눌릴 것이다. 미국 로스쿨 졸업생 대다수가 프레카리아트 성원이라는 것은 이상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77)


2004년 출간된 선견지명이 담긴 책 《치팅컬처: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에서 데이비드 캘러헌David Callahan은 1980년대를 시작으로 무제한 경쟁과 폭발적 불평등, 승자독식 사고방식을 촉발한 문화적 전환이 낳은 결과를 분석한다. 그는 대기업 스캔들과 도핑을 하는 운동선수, 표절하는 언론인,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 등에 관해 서술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동학은 지망자 게임이 마지막 단계로 나아가면서 벌어지는 현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극단적 경쟁은 가장 뛰어난 후보, 그 지위에 가장 적합한 후보를 선별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의 규칙, 즉 사회가 어떻게 기능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다스리는 사회규범과 제도를 갉아먹는다. 이런 경쟁은 협력을 파괴하고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낸다. 또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창출한다. 그리고 실패한 엘리트 지망자들 가운데 일부는 급진적인 반엘리트로 돌아서서 자신들을 길러낸 부당한 사회질서를 파괴하려고 한다. 77-9)


오늘날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엘리트 내부 충돌에서 무기로 활용된다. 기성 엘리트 성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경쟁하는 지망자들을 앞지르기 위해서도 그렇다. 다시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엘리트 과잉생산을 해결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전형적인 방식은 대량 학살이나 투옥, 국외 이주, 강제적 또는 자발적인 하향 사회 이동을 통해 잉여 엘리트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패자들을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식으로 처리했다. 지금 우리가 접어들고 있는 듯 보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두 번째 단계의 사회적 논리는 더욱더 급진화를 추동한다. 경쟁 파벌들이 벌이는 투쟁에서 기꺼이 비난을 고조하려는 세력이 온건한 세력에 승리를 거둔다. 패자들이 옆으로 밀려나는 가운데 전장이 이동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급진적으로 보였던 이념이 이후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한 전장이 된다.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의 좌파와 우파 양쪽 끝 모두에서 동일한 논리가 작동한다. 87)


5장. 지배계급


미국의 대통령과 사회과학자, 공적 지식인 등이 미국이 금권정치 국가라는 생각을 표현한 바 있다. 나도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용어를 중립적 의미로, 즉 단지 경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국가의 약칭으로 사용한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에서 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대기업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은행, 로펌 등 대규모 소득을 창출하는 자산의 소유주와 경영자들이 그 주인공이다.18 몇몇 대기업 부문은 공공정책에 미치는 영향력과 응집력이 너무 큰 탓에 지난 시기에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나 FIRE(금융finance, 보험insurance, 부동산realestate) 부문, 에너지(석유와 가스, 전기) 부문, 실리콘밸리, 대규모 식품회사Big Food, 대규모 제약회사Big Pharma, 의산복합체medical-industrial complex, 교산복합체education-industrial complex 등 갖가지 별칭을 얻었다. 경제와 행정의 두 권력 네트워크는 아주 철저한 방식으로 일심동체를 이루지만, 경제 네트워크가 지배적인 관계다. 98)


정치학자 마틴 길런스Martin Gilens는 소규모 연구 조교들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데이터 집합을 수집했다. 1981년에서 2002년 사이에 2,000건에 육박하는 정책적 쟁점이었다. 각 사례마다 제안된 정책 변화와 그 제안에 관한 찬반을 묻는 국민 여론조사를 연결시켰다. 데이터 집합을 통계 분석한 결과, 빈곤층의 선호가 정책 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이 드러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다. 놀라운 것은 평균적 유권자 효과가 전혀—무無, 0— 없었다는 것이다. 정책 변화의 방향에 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유층의 정책 선호였다. 이익집단이 추가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기업 중심 로비가 가장 영향력이 컸다. 통계 모델에 상위 10퍼센트와 이익집단의 선호를 포함시키면, 보통 사람의 영향력은 통계적으로 0과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시민들이 언제나 지는 쪽이라는 말은 아니다. 일반 시민들이 부유층과 견해를 같이하는 정책 쟁점이 많이 있으며, 이런 정책 변화는 쉽게 실행된다. 101)


6장. 왜 미국은 금권정치인가?


미국 남북전쟁 전의 지배계급은 잉글랜드 지주 계급의 직접적인 파생물이었다. 버지니아와 남북 캐롤라이나, 조지아에 정착한 이들은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찰스 1세를 지지하는 파벌인 왕당파Cavaliers였다. 그들은 귀족적 생활방식과 계약하인indentured servants[주인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경비와 숙식을 제공해주는 대신에 정해진 기간 동안(주로 4~5년) 하인으로 봉사하는 제도]을 함께 들여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하인은 수입된 아프리카인, 즉 평생 노예가 된 이들로 대체되었다. 대영 제국에 맞선 혁명전쟁에서 승리한 뒤, 승자들은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남부 농장주들과 북부 상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문화적 형태의 거버넌스를 베꼈다. 초기 아메리카공화국은 군주(그 시점에 이르러 군주는 대영 제국에서도 어쨌든 명목상의 인물로 전락하는 중이었다)가 없기는 했지만 영국을 본뜬 과두제였다. 그 결과 미국은 금권정치를 ‘문화적 유전자형’의 일부로 물려받았다. 107-8)


하지만 대기업 금권정치가 남북전쟁에서 전쟁 전 지배계급을 무너뜨렸을 때, 이런 대륙 팽창 과정이 거의 완성되었다. 멕시코나 캐나다는 미국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는 거대한 두 해자—대서양과 태평양—에 의해 어떤 잠재적 위협으로부터도 보호받는 거대한 섬이다. 미국에 존재했던 군사정치는 남북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 직업군인 장교의 압도적 다수가 패자 쪽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1914년 전에 관료 기구는 사라져가는 소수로서, GDP에서 연방 정부가 점유하는 비중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어쨌든 변변치 않은 수준의 행정 기구는 금권정치가 철저하게 지배했다. 1828년에서 1900년 사이에 악명 높은 ‘엽관제’ 덕분에 대부분의 연방 관리들이 선거에서 승리한 당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금권정치의 부상은 대부분 그 역사적 선조들과 지리적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금권정치가 계속 생존하고 21세기에 개화한 것은 대체로 두 번째 원인, 인종과 종족 때문이다. 108)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시기의 민주당은 노동계급의 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덧붙여야 한다. 민주당은 백인 노동계급의 당이었다. FDR은 자신의 의제를 밀어붙이기 위해 남부 엘리트들과 악마의 거래를 해야 했다. 이로써 남부는 사실상 FDR 행정부가 구축한 노동, 기업, 정부 삼자 교섭의 예외가 되었다. 특히 남부의 인종분리주의 체제는 고스란히 남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흑인 노동자까지 포함하는 식으로 사회계약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자 금권정치인들이 미국이 거의 북유럽 국가가 되어 다른 두 이익집단, 즉 노동자와 국가가 자신들의 권력을 제약한다고 불만을 품으면서 활약할 여지가 생겨났다. 그들은 공화당을 활용해서 자신들의 의제를 밀어붙이면서 노동자 보호를 해체하고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고자 했다. 이런 의제는 처음에는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와 리처드 닉슨 같은 정치인들의 행동으로 전환되었고, 나중에는 로널드 레이건의 ‘남부 전략’으로 바뀌었다. 109-11)


대략 193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미국의  ‘대압착’은 이례적이고 희망찬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유혈 혁명이나 국가 붕괴, 파괴적인 감염병이 전혀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순전히 해외에서 벌어졌다. 내부 혁명과 외부 경쟁—나치 정권과 냉전기의 소련에 맞서—의 위협은 분명 미국 지배계급이 올바른 조합의 개혁을 채택하는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런 개혁은 부의 펌프를 중단하고 불평등의 추세를 뒤집었다. 하지만 진보의 시대부터 뉴딜을 거쳐 ‘위대한 사회’에 이르기까지 미국 지도자들을 움직인 유일한 동기가 공포였다고 생각한다면 부당한 판단일 것이다. 전후 시기에 이르러, 대다수 엘리트들은—엘리트들 사이의, 그리고 엘리트와 보통 사람들 사이의—사회 협력을 장려하는 가치들을 내면화한 상태였다. 그들은 재정 정책과 정부 조치를 활용해서 국가가 경기 하락에 대처하는 것을 옹호했다. 그리고 국가가 경제생활을 인도하는 데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사고를 받아들였다. 117)


3부. 위기와 여파

7장. 국가의 와해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다. 어떤 국가는 폭력 사태 속에 사라지고 어떤 국가는 조용히 허물어지다가 신음 소리로 명이 끊긴다.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68년까지 로마를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네로가 중얼거리면서 끝이 났다. “내 안의 훌륭한 예술가가 죽는구나!” 중앙 권력이 갑자기 파국적으로 해체되는 국가 붕괴는 역사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최근의 생생한 사례는 쿠바 혁명인데,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가 비행기를 타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망친 1959년 1월 1일에 기정사실이 되었다. 같은 식으로 권력이 내파內破된 최근의 사례(최소한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는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이 붕괴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국가가 내파하는 ‘네로의 순간’은 5,000년 전 최초의 국가들이 진화한 이래 줄곧 존재했고, 다시 생길 게 분명하다.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들에 이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22-3)


소련 해체 이후 지배 파벌로 떠오른 경제 엘리트(올리가르히)는 모든 주요 매스미디어를 소유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엘리트들을 통제했다. 두 번째 집단에는 행정 엘리트(관료 집단)와 군사 엘리트(국가안보기관과 군 장교들을 포함하는 이른바 실로비키siloviki)가 포함된다. 이어진 권력 투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끄는 행정/군사 엘리트 동맹이 금권정치인들을 물리쳤다. 갑작스러운 혁명 같은 건 없었다. 이 과정은 점진적이어서 올리가르히들이 잇따라 망명길에 오르거나(베레좁스키와 구신스키), 투옥된 뒤 망명하거나(호도르콥스키), 권력 위계에서 종속적인 지위로 좌천되었다(포타닌). 올리가르히들이 패배한 것은 응집력 있는 지배계급이 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증진시키는 대신 서로 싸우느라 에너지를 소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강압 기구를 통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과소평가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는 어떤 정당성도 없었고, 국민들이 그들의 도둑정치 방식을 진심으로 혐오했다. 133)


1990년대 동안 우크라이나의 정치경제는 러시아와 비슷했다. 한 무리의 올리가르히들이 국가 소유 생산수단을 민영화하면서 집권했다. 하지만 1999년 이후 두 나라가 걸은 궤적이 갈라졌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올리가르히들이 전혀 타도되지 않았다. 대신에 경제 엘리트들이 절대권력을 잡았다. 우크라이나의 올리가르히들은 내부의 다른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 나라를 통치했음에도 응집력 있는 지배계급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몇몇 파벌을 결성해서 선거 정치와 반半합법적 자산 압류, 심지어 투옥 등까지 무기로 활용하면서 서로 싸웠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누구를 선출하든 간에 공직자들은 보통 사람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대신에 패배한 올리가르히들로부터 부와 권력을 빼앗는 데 집중했다. 우크라이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정반대로 대립되는 생각을 가진 양대 진영으로 유권자들이 분열되면서 국가의 전반적인 기능장애가 한층 심해졌다. 134-5)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래 30년 동안 국가 권력 구조는 국민, 올리가르히, 미국의 식민지 총독들이라는 세 층위의 구성으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 시민의 다수는 정기적인 선거에서 투표했지만, 누구를 뽑든 간에 유권자들의 바람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그 결과 모든 행정부는 선출되자마자 대중의 지지를 잃고 스캔들에 휘말렸다. 초기의 한 명(쿠치마)을 제외하면, 어떤 대통령도 연임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 선거에서 좌절한 유권자들은 기존의 패거리를 내쫓고 다른 패거리를 선출했다. 2004년과 2014년 두 차례 혁명이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인들 또한 올리가르히들 자신이나 그들이 긴밀하게 통제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혔다. 변한 거라곤 다른 한 무리의 올리가르히들이 여물통 앞에서 배를 채운다는 것뿐이었다. 연구자들은 출신지에 바탕을 둔 네 개의 주요 네트워크, 또는 ‘패거리’를 확인했다. 남동부의 드니프로와 도네츠크, 중부의 키이우, 서부의 볼히니아가 각 중심지다. 136-7)


2014년 혁명의 가장 파국적인 결과는 돈바스의 두 지역인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벌어진 격렬한 내전이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돈바스 민병대가 우크라이나군과 아조우 연대Azov Regiment처럼 공공연하게 네오나치를 표방하는 지원병 여단에 맞서 싸웠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쯤이면 돈바스 전쟁으로 이미 1만 4,000명이 전사한 상태였다. 현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양대 올리가르히인 포로셴코(2014년에서 2019년까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와, 그에게 대항할 후보가 필요했던 이호르 콜로모이스키Ihor Kolomoisky(드니프로[페트롭스크] 올리가르히 패거리)가 경쟁한 결과였다. 하지만 충돌이 2월 24일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젤렌스키는 재빨리 전시 대통령으로 변신한 뒤 승전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엄중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 침몰하는 국가가 될 것인지, 군사정치로 변신할 것인지의 선택이다. 139)


8장. 근미래의 역사들


급진화 과정은 질병처럼 작동한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개인이 관여한다. ‘순진한’ 유형은 역학 체계에서 쉽게 감염되는 사람들에 해당한다. 순진한 개인들은 급진적 유형의 개인(질병 모델에서 전염성 개인에 해당)들에게 노출되면서 ‘급진화’될 수 있다. 순진한 사람과 극단주의자 이외에 개인은 ‘온건주의자’(감염병 모델에서 ‘회복된 사람’에 해당)다. 이 집단은 급진주의와 폭력에 환멸을 느끼고 사회 성원들이 협력해서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옛 극단주의자들로 구성된다. 순진한 개인들은 능동적인 정치 프로그램이 없고, 극단주의자는 불안정을 증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온건주의자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극단주의자가 많을수록(따라서 폭력의 비율이 높을수록) 순진한 개인이 급진화되기가 쉽다. 하지만 온건주의자들 또한 역할이 있다. 온건주의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들이 불안정을 억제하는 중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면 급진주의에 의한 ‘감염’이 감소한다. 145-7)


마크 미즈러키Mark Mizruchi는 2013년 저서 《미국 대기업 엘리트의 균열The Fracturing of the American Corporate Elite》에서 전후 시대에 통일되고 중도적, 실용적이었던 대기업 엘리트들(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고위 중역)이 최근 수십 년간 파편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 지도자들은 중도에서 멀어지고 공동선에 기여하려는 의지가 줄었다. 이런 현상이 “미국 민주주의의 현재적 위기를 낳은 중요한 원천이며 21세기 미국이 처하게 된 곤경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기업 공동체 내부의 양극화를 보여주는 점차 가시적인 징후 하나는 극단적 이데올로기 의제를 밀어붙이는 자선 재단의 부상이다.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초보수주의 재단들이 있다. 찰스 코크Charles Koch, 머서 일가, 세라 스케이프Sarah Scaife 등이 대표적이다. 돔호프는 이 재단들을 “정책 방해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정책 방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목표는 “모든 정부 프로그램을 공격하고 정부 공무원들의 동기를 모조리 의심하는 것”이다. 150-1)


오늘날 미국의 지배계급은 인류의 역사 내내 수천 번 반복된 곤경에 빠져 있다. 많은 평범한 미국인들이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 지배계급의 얼굴에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공화당의 기성 정치인들도 포퓰리즘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대기업에 대한 충성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엘리트 지위를 추구하다가 좌절한 수많은 학위 소지자들이 반엘리트를 키우는 온상이다. 기존 체제를 타도하는 꿈을 꾸는 이들이다. 대다수 자산 보유자들은 현 상태를 보전하기 위해 어떤 개인적 이익도 희생할 생각이 없다. 이런 현상을 전문적 용어로 ‘혁명적 상황’이라고 한다. 지배계급이 혁명적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의 전복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일련의 개혁을 채택해 사회 체계의 균형을 바로잡으면서 대중의 궁핍화와 엘리트 과잉생산 추세를 뒤집는 것이다. 미국의 지배계급은 과거에, 그러니까 한 세기 전에 이를 해냈다.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162-3)


9장. 부의 펌프와 민주주의의 미래


부의 펌프가 차단된 균형 잡힌 사회 체계는—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끊임없이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불안정한 평형 상태다. 이런 불안정은 사회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의 하나인 “과두제의 철칙” 에 기인한다. 한 이익집단이 많은 권력을 획득하면 필연적으로 이 권력을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전근대 사회와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초기 러시아 제국은 모든 사람, 즉 농민과 귀족과 통치자가 복무하는 일종의 복무 국가service state였다. (표트르 1세는 복무 차르의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귀족이 다른 집단보다 권력이 더 많았고, 결국 귀족들은 자신들만 복무를 면제받는 식으로 삼자협약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부의 펌프를 작동해 농민을 억누르면서 기생 계급이 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역사적 국가에서 거듭해서 이와 동일한 과정을 목격한다. 불안정의 물결이 언제나 반복되는 이유다. 172-3)


유감스럽게도,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과두제의 철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 가지 뚜렷하고 분명한 징후는 20세기의 대부분 시기 동안 장기간에 걸쳐 소득과 부가 압착(대압착)된 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내에서 경제 불평등이 다시 증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유럽은 또한 고급 학위를 보유한 젊은이가 과잉생산된다는 점점 극심해지는 문제를 겪고 있다. 한층 더 우려스러운 상황은 서구 민주주의가 ‘계급에 기반한 정당 체계’에서 ‘다수의 엘리트 정당 체계’로 이행하는 것이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면, 비록 민주적 제도가 사회를 통치하는 가장 좋은(또는 가장 덜 나쁜) 방식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는 특히 금권정치인들의 전복 시도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적나라한 열정만으로는 지속적, 장기적인 효과를 내기에 부족하다. 물론 돈만 있는 것보다는 돈에 열정이 더해지는 게 더 낫지만 말이다. 금권정치인들은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장기적으로 실행할 만큼 (말 그대로) 여유가 있다. 173-4)


누적적인 문화적 진화를 통해 우리는 인간 사회가 유례없이 높은—그리고 폭넓은 기반을 둔— 삶의 질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기술(제도)을 포함한 갖가지 놀라운 기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능력은 종종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나라마다 시민들에게 복리를 제공하는 능력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문화적 진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런 변이가 필요하다. 사회들이 더 나은 사회적 조정을 이루기 위한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진화는 멈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지배계급이 사회를 망가뜨린다면 다른 대안—성공담—을 찾는 게 좋다. 그리고 우리의 통치자들에게 우리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복잡한 인간 사회가 순조롭게 작동하려면 엘리트—통치자, 행정가, 사상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엘리트를 없애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결은 엘리트들이 만인을 위해 행동하도록 제약하는 것이다.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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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대가 - 기후위기와 물가 그리고 명제국의 붕괴 ㅣ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8
티모시 브룩 지음, 박찬근 옮김 / 너머북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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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 물가사 연구자로서 나의 이력 


"1640년대 초반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 불리는 장기간의 전 지구적 기온 하강이 중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는 천문학자 애니와 월터 마운더를 기리기 위해 '마운더 극소기Maunder Minimum'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지구의 기온 하락과 태양 흑점 활동의 감소 사이의 연관성을 가설로 제시했으며, 이 기간을 1645년부터 1715년으로 추정했습니다." "명대 중국의 소비문화와 사회적 투자에 집중하면서, 저는 물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가 자료를 찾아보던 중, 저는 읽고 있던 텍스트에서 고개를 들 때마다 소비의 역사가 저를 물가사뿐 아니라 기후사로도 이끌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물가가 상승하여 기록가들이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던 시기가 바로 기후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종합해 제시하는 내용은 단순한 명대 물가사를 넘어, 명나라 사람들과 그들에게 불리하게 변한 기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물가를 매개로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합니다."(11-2, 18)


1장 천치더의 이야기 


"천치더陳其德는 명대 최악의 재난이 닥친 시기를 묘사한 두 편의 회고록을 남겼다. 〈사람들의 마음이 방종으로 기울고 하늘이 그 풍요를 싫어하리라고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자년(1588)이 도래했다. 폭우가 내려 우리를 적셨고 멀고 가깝고를 막론하고 사방을 거대한 진창으로 만들었다. 이듬해인 기축년(1589)에는 천리에 이르는 땅이 메말랐다. 두 달 동안 강이 바짝 말랐고 강바닥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1588년과 1589년은 폭우와 심한 가뭄이 이어진 대규모 자연재해의 시기였다. 유학자인 그에게 이러한 이중 재해를 설명할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불러온 인간의 잘못을 찾는 것이었다. 그의 관점으로 볼 때 만력 초기의 풍요로움이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폭우와 가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늘의 경고였다. 천치더는 이 경고의 심각성을 정량화하고자 쌀 가격으로 돌아온다. 그는 쌀 가격이 1두당 은 1.6냥으로 치솟아 원래 가격의 네 배에서 다섯 배까지 올랐다고 썼다."(27-8)


"물가 상승의 경제적 결과는 시장이 문을 닫는 것이었다. 사회적 영향을 참혹했다. 〈부유한 가정도 하루에 두 끼의 밀가루 죽만 먹고도 충분히 배부르다 했고, 대다수는 하루에 한 끼로 버텨야 했다.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으며, 각자 생존을 위해 흩어졌다. 쓸 만한 물건들이 시장에 쌓여 있었지만,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절반은 가격을 물어본 후 그냥 지나쳤다. 아름다운 장식품에 대해서는 아무도 멈춰서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다. 아, 사람들이 빈곤함이 얼마나 심했는지!〉 담보로 삼을 것이 없어져서 전당포마저 문을 닫았다. 아직 특튼해서 일할 수 있는 농민들은 농작물을 심으러 나갔지만, 그들이 삼자마자 메뚜기 떼가 나타나 모든 싹을 갉아먹었다. 그 후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아마도 페스트였고 인구의 50~60퍼센트가 감염되었다. 자살이 이어졌고, 천치더는 이를 '관棺에 들었다就木'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무가 없었던 자들은 파리들이 애도해 주었다〉고 했다."(29-30)


"천치더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었고, 물가도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물가가 공급과 수요에 따라 계절적으로 변동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물가가 원래의 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열망은 가격이 〈공평해야平〉 한다거나 안정되어야 한다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가장 이상적인 세상은 번영하고 자급자족하는 마을들 사이에 〈곡물이 풍부하고 가격이 공정하여, 수탉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사람들은 적절한 이익을 얻기 위해 물건을 멀리까지 운송하는 번거로움에 직면해서는 안 된다.〉 쉬광치徐光啓의 말이다. 쉬광치의 의도는 상업 교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유교 근본주의자들이 했을 수도 있듯이, 상업 교환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혜택을 가져다주고 공정한 가격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이었다."(37-9)


"물가를 안정적이고 공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단순하게 긍정적인 혜택이 아니라 정의의 행위라는 관점은 17세기 영국의 무역 옹호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제라드 드 말린스가 1622년에 쓴 상업 관행에 관한 편람에서 〈하나의 것이 다른 것을 초과하는 불평등〉을 선호하기보다는, 가격 책정은 〈둘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1635년에 포목상인 윌리엄 스콧은 가격이야말로 공정한 시스템에서 물건들의 진정한 척도다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사업의 척도인 것처럼, 가격은 상품의 척도다. 만약 가격이 물건의 가치를 초과하거나, 물건의 가치가 가격을 초과한다면, 정의의 평등은 상실된다.〉" "명나라 사람들은 공급과 수요가 공정한 가격을 결정하는 논리를 이해했지만, 그들은 이 메커니즘을 추상적인 정의의 작동보다는 개인적 덕의 행사 측면에서 더 생각했을 것이다. 시장을 정의의 자율적 생성자로서 인정하는 것은 명나라 관찰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는 아니었다."(40-1)


2장 태평한 날들? 만력 연간의 가격 체제 


"하이루이海瑞의 이야기는 그가 춘안의 지현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부터 시작한다. 이 빈곤한 도시는 저장성에 위치하고, 성도 항저우로부터 상류 쪽으로 먼 거리에 있었으며, 행정적으로는 현縣이 아닌 청廳이었다. 청은 통치하기 어려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단위였다. 1558년 하이루이가 이곳에 부임했을 때, 지역 유력자들이 자신들의 토지 소유와 납세 의무를 기록에서 제거하기 위해 관청의 관리들을 위협하거나 매수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이루이의 개혁 중 하나는 관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시장 가격 이상으로 지불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지역의 공급자들에게 상품과 서비스의 대가를 과다 청구할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으며, 그의 부하들에게는 공급자들이 시장 가격 이하로 판매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는 가격의 공개적 명시를 필요로 했다. 하이루이는 각 항목을 변경할 때 지불해야 할 금액을 명시하여 비용 절감을 시도했다."(82-4)


"1509년 선방沈榜이 베이징 완핑에 지현으로 부임했을 때 그 역시 재정적 혼란과 회계 부실에 직면했으나, 중앙 정부와 황실이 해당 직책에 부과한 부담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하이루이와 매우 달랐다. 부임하자마자 선방은 관청에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6,000냥인 반면 금고에는 겨우 52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회계 감사만이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선방의 회계 감사 목표는 연간 현 예산을 작성하고 〈수입을 측정〉하여 〈지출을 결정〉하는 명나라 회계의 기본 원칙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감사 결과를 확정하기 위해, 그는 모든 자료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선방의 안내서는 다른 어떤 명나라 출판물보다 더 많은 가격을 기록했다. 한 상급자는 〈현의 지출에 관한 장들은 그 정도가 너무 상세해서 서기들이 부당 이득을 취할 여지가 없다〉며 감탄했다. 그의 『완서잡기』는 버찌부터 변기, 범죄자를 구속하는 족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가격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85-6)


"은 1냥은 일반 사람들에게 상당한 금액이었으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는 지불 가격이었다. 은 1냥은 일반적으로 거래의 최소 금액으로 여겨졌다. 상하이에 거주하던 판윈돤潘允端은 1590년에서 1592년 사이에 가정부에게 지불한 금액을 그의 일기에 기록했는데, 은 4냥에서 10냥의 범위였다. 판윈돤은 1592년에 천원陳文과 그의 아내에게 은 8냥을 지불했다. 도장업자인 구시우顧秀와 그의 아내에게는 1588년에 단 2냥을 지불했는데, 1588년은 심각한 기근이 든 해였기 때문에 부부는 자신들을 팔아 생존하는 것이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은 1냥은 심각한 범죄를 유발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그 이상이라면 어떤 범죄든 일어날 수 있었다. 1610년 후반 장시성의 한 불교 사원이 모금 활동을 할 때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최소 기부액을 은 2냥으로 설정했다. 은 1냥은 부처님의 후원자로서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영예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았다."(95-7)


"만력 연간의 품위 있는 가정은 연간 약 23냥 이상을 생활비로 지출했고, 최저 생계 수준의 가정은 14냥 조금 넘게 필요했다. 이 추정치는 1595년 푸젠성 해안의 일화로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송대 신유학자 주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사당을 방문한 한 지부는 주희의 후손 두 명이 사당 관리를 맡으면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사당 부지에서 직접 리치와 채소를 재배해 연간 동전 1만 문을 수입으로 얻었다. 동전 800문당 은 1냥으로 환산하면, 은으로 측정된 수입은 12.5냥이었다. 이들을 위해 지부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한 소규모 모금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토지는 연간 쌀 30석의 수입을 가져왔다. 그중 5석은 건물 수리비로 따로 두고 나머지 25석은 후손들에게 수입으로 주어졌다. 1석당 은 0.5냥으로 계산하면, 후손들이 받은 곡물은 12.5냥이 되어 그들의 수입을 기존의 두 배인 25냥으로 늘렸다. 이 조치는 이들을 최저 생계 수준에서 품위 있는 생활 수준으로 향상시켰다."(112-3)


3장 은, 물가, 그리고 해상 무역 


"은을 수요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최적의 조건으로 상품을 구매하고, 그 상품을 수요가 있는 시장으로 운송 및 판매하여, 그렇게 얻은 은이 처음 지출한 은을 초과하는 이익을 얻는 것은 중상주의자의 꿈이었다. 상품 교환을 부를 증가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무역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당시 중국 문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아이디어가 낯설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역을 옹호할 수 있는 공공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상인들은 그들이 다루어야 할 대중이 없었고 상인 자신들의 견해와 거래 내용을 그들만 알았으며, 거래가 완료되면 경쟁자나 호기심 많은 세금 당국자들이 추적할 수 없도록 문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파기했다." "명대 후기에는 외국 무역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여 사적 부가 공공선과 경쟁하고 또 위협한다는 기존의 유교적 관점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외국 무역이 모든 사람들의 부를 증가시킴으로써 실제로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것이다."(180-1)


"1639년 4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왕조의 붕괴가 5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푸위안추傳元初는 숭정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1638년에 다시 부과된 해상 무역 제한 조치를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상소문은 널리 주목을 받았다. 푸위안추는 해적 문제를 인식했고, 해안을 폐쇄하는 것이 해적을 차단하는 매력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서쪽으로는 동남아시아인들이 중국에서 수요가 있는 산단목, 후추, 상아와 같은 사치품을 제공했으며, 동쪽으로는 필리핀의 유럽인들이 은을 가지고 있었다. 두 집단 모두 자신들이 가진 것과 직접 생산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중국과 무역을 원했다." "특히 푸위안추는 외국인 구매자들이 후저우의 비단 직물과 징더전의 도자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양쪽 모두 이익이 컸기 때문에 해금은 무역을 범죄화하고 이익을 밀수업자들에게 넘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푸위안추는 해상 무역을 재개하지 않으면 귀중한 관세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1-3)


"1639년 명나라는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10년 전에 중국 전역에 걸쳐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 추위가 시작되고 8년 째인 1637년에는 대부분 지역에 가뭄까지 덮쳐 1644년까지 이어진 치명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푸위안추의 고향인 푸젠은 1639년에 기근에 시달렸고, 이어서 1640년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이 재난들은 재정과 생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관리들이 어떠한 정책을 채택해야 할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켰다. 국경 봉쇄가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 이들에 반대하여, 푸위안추는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조정이 가장 마지막에 취해야 할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는 푸젠성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빈곤, 그리고 북방 국경의 군대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고갈된 지방의 재정에 대해 언급했다. 국가는 자금이 필요했고, 사람들은 수입이 필요했으며, 무역은 둘 다를 위한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결국 푸위안추의 견해는 관철되지 않았다."(185-6)


"'마젤란 교환'이라고 불리는 개념에 따르면, 은은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마닐라로 대량으로 운송되어 그곳에서 중국 제품과 교환된 후, 장저우로 이동하여 명나라 경제에 침투했다. 실상은 이와 달랐다. 첫째, 이론보다는 사실의 차원에서 아메리카보다 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중국으로 더 많은 은이 도달했다. 둘째,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따라 운항하는 마닐라 갤리온선이 중국 상품과 아메리카 은의 교환을 위한 중요한 통로를 만들었지만, 명나라에 도달한 은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간 후 동인도회사와 같은 기관에 의해 아시아로 재운송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경제는 유럽 전체 경제와 거의 동등할 정도로 충분히 컸기 때문에 유입된 은을 상업적 교환 시스템에 통합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불안정해지지는 않았다." "나의 주장은 전 지구적 무역이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가 명나라의 곡물 가격을 치명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189-91)


4장 기근 시기의 곡물 가격 


"명조가 창건된 1368년에 황제는 절도죄 처벌 수위를 정할 때 참조할 수 있도록 가격 평가 목록을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절도의 처벌은 도난당한 물건의 가치에 기초하여 결정되었다. 이 목록에는 다섯 가지 곡물의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비싼 것은 1두당 은 3.125푼(동전 31.25문)의 가격인 쌀이다. 다음으로 밀이 1두당 2.5푼(동전 25문)이다. 세 번째로 가격이 높은 것은 좁쌀과 콩으로, 각각 1두당 2.25푼(동전 22.5문)이다. 목록에 있는 가장 저렴한 곡물은 1두당 1.5푼(동전 15문)의 수수와 1.25푼(동전 12.5문)의 보리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간이 섭취하기에 적합한 식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1608년 마드리드 상인 페드로 데 바에자는 광둥의 쌀 가격이 3.5푼에서 4푼 사이라고 보고했다. 놀랍게도 이 가격 범위의 하한선은 2세기 반 전의 평가보다 겨우 0.25푼 높다. 천치더 역시 만력 연간 초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곡물 1두의 가격이 3푼에서 4푼이었다〉고 주장했다."(197-8)


"최악의 기근이 닥치면 사람들이 유랑과 굶주림에 이르고, 그 너머로는 도적질과 심지어 식인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모든 종류의 극단적인 물가 기록이 나타났다. 한 가지 유형은 부모가 자식을 파는 가격이 극단적으로 하락하는 것이다. 곡물로 환산된 소년의 가격은 2두에서 3승升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또 다른 극단적인 사례는 곡물 가격이 너무 비싸져 먹을 것이 사람이 되는 경우였다. 식인 행위를 유발하는 가격은 장소, 시간, 상황에 따라 달랐다. 1588년 허난성의 한 현에서는 곡물 가격이 1두당 동전 200문이 되면 식인 행위가 시작되었다. 같은 현에서 1640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좁쌀 가격이 1두당 동전 1,500문에 이를 때까지는 기아 상태의 사람들이 식인 행위에 돌입하지 않았다. 같은 성의 다른 지역에서는 한 해 전 메뚜기 떼가 창궐했을 때, 1두당 은 1.5냥(150푼)에 이르자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 산둥성의 한 지방지는 1640년에 인육을 먹기 시작한 가격을 은 2냥으로 기록했다."(206)


"1597년에서 159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베이징에서 대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여행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겨울 기온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겨울이 시작되면 중국 북부의 모든 강들이 너무 단단하게 얼어붙어 그 위를 항해할 수 없게 되고, 마차가 그 위를 지나갈 수 있다〉고 관찰했다. 그는 이것이 〈타타르의 눈 덮인 산들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치 한파가 예외가 아니라 특정 지역의 영구 조건인 것처럼, 중국 우주론의 관점으로 보면 하늘이 작용이라기보다는 땅의 작용인 것처럼 말이다. 리치가 북반구 온도가 전 세계적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1577년에 유럽을 떠나지 않았다면, 중국의 추운 날씨에 대한 지역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명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이례적으로 온난한 기온으로 기록된 해는 1602년 한 해뿐이었고, 23년 동안 이상 한파가 기록되었다. 1629년에 기온이 더욱 떨어져 1644년과 그 이후까지 비정상적으로 낮은 상태를 유지했다."(225-6)


"기후 변화로 농부들은 논밭에서 곡식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적정 온도와 강수량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은 명대 사람들의 생존 가능한 한계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흉작으로 인해, 보관한 곡물 가격이 비현실적으로 높아졌다. 가뭄은 농경지뿐만 아니라, 곡물 상인들과 국가가 곤경에 처한 지역으로 식량을 운반할 수 있게 해 주던 운하도 메마르게 했다. 기후 변화는 단순히 물가 상승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곡물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전체 시스템을 변화시켰다." "기근 곡물 가격은 명나라의 멸망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기후를 배제한 상태에서 숭정 연간의 마지막 위기를 서술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소리와 분노에 가득 차 있으나 아무 의미도 없다.〉" "다른 지도자나 다른 정부는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을 수도 있지만, 곡물이 논밭에서 자라지 않을 때에는 거의 무의미한 가정이다. 가격 체제가 무너졌듯이 정치 체제도 무너졌고, 둘 다 회복되지 않았다."(241-2)


5장 숭정 연간의 가격 급등 


"예멍주葉夢珠는 상하이 남서쪽의 소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가문의 시골 집은 쑹장과 상하이 사이의 농촌에 위치했다. 그의 회고록인 『열세편』(세간에 대한 조사)에서 예멍주는 그의 어린 시절인 숭정 연간부터 1693년까지의 지역 역사를 재구성했다. 세심하게 구성되고 정확하게 쓰인 이 책은 만주족 통치의 첫 50년 동안을 대상으로 양쯔강 삼각주의 민족지와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제7권 '식화食貨(음식과 물품)'에서 예멍주의 관심사는 인구나 세금이 아닌 상품의 가격에만 있다. 그는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로 시작한다. 〈상품 가격은 안정적이지 않으며, 이는 고대부터 그러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어떤 물건의 가격이 그 이전의 수십 배, 심지어 수백 배까지 오를 수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뿐만 아니라 비싼 것이 저렴하게, 저렴한 것이 비싸게 변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천지더가 만력 연간에서 회상하려고 했던 목가적인 단순함은 숭정 연간 예멍주의 삶에는 없었다."(264-5)


"예멍주는 1632년의 가격을 처음 언급한다. 〈그때 백미는 1두당 동전 120문, 혹은 은 10푼이었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16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표준 기근 가격이 바로 1두당 동전 100문이었다. 1632년에는 기근 시의 쌀 가격이 일상적인 정상 가격이 되었다. 예멍주는 쌀 가격이 변덕스러운 원인 중 하나가 은전비가(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의 변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위조꾼들이 동전을 녹여 더 저질의 것으로 재주조하여 발생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은전비가 상승이 동전의 가치 하락 때문이 아니라 1640년대 아메리카로부터 은 유입이 감소하여 중국 내 은가가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멍주는 이 논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더 타당한 접근은, 은을 가진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은을 유통 시장에서 거두어 축장할 경우, 지역 경제에서 유동성이 부족한 시기에 더 많은 동전을 유통시키고자 동전 위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266)


"청대의 관점이 아닌 명대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예멍주의 물가 자료가 보여 주는 것은 17세기 말에 가격이 재안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1640년대의 가격을 기준으로 삼으면 반 토막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상 물가보다 두 배 수준이다. 모든 상품 가격이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운송과 장거리 상업 네트워크에 의존해 경제성을 유지해야 했던 면화와 같은 원자재는 인건비에 의해 가격이 저하되었다. 예멍주의 물가 자료가 17세기 내내 긴 파동을 그리며 움직였다고 본다면, 그 파동은 시작 지점보다 훨씬 높은 가격 수준에서 진정되었다. 그러나 예멍주의 회고록이 보여 주는 것은 파동이 아니라, 숭정 연간의 기근이 가격급등을 일으켰고 이것이 진정되거나 익숙한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말의 가격은 정상이 아니라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었다. 이 새로운 정상 가격은 비용을 변화시켜 생활 수준을 저하시키고 가계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275)


"명나라가 중국 역사 속으로 점점 묻혀 가면서 '숭정 위기'의 충격은 잊혔고, 재앙의 원인은 자연적 요인에서 인간적 요인으로 전환되었다. 18세기가 되자 많은 논평가들이 명대를 되돌아보며 더 나은 시절로 여기기 시작했다. 양쯔강 삼각주 북쪽에 있는 양저우부의 1733년 지방지의 편찬자는 17세기를 지나 16세기로 시선을 돌려,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는 그의 시대와 달리 〈가격이 적당하고 풍속이 소박했던 순진한 시기〉로 상상했다. 만약 명대가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아르카디아였다면, 곡물 가격은 자신의 시대에 만연한 노골적 상업화와 옛 방식을 버린 것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야 했다. 이 18세기 저자에게도, 우리가 다루었던 당시의 관찰자들에게도, 설명은 도덕적인 것이어야 했다. 경제를 체계적으로, 즉 직면한 물가 충격을 더 높은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도덕이었다. 기후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체계였다."(278-9)


후기_ 기후와 역사


"명나라의 몰락 원인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파벌주의, 행정 실패, 세수 감소, 농촌 반란 등으로 서술되어 왔으며, 이 모든 것은 도덕적 실패라는 더 큰 판단에 의해 가려졌습니다. 청 제국이 명나라 영토를 침략하고 점령할 수 있었던 원인이 명나라가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이 서사는 단순히 청조로의 왕조 전환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서사를 작성하고 승인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숭정 위기'를 특징짓는 것은 곡물 가격이 충격적으로 상승한 시기에 북쪽 국경 너머의 잘 조직된 무장 세력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공격의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숭정 연간 관리들의 도덕적 실패를 왕조의 붕괴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관리들이 공공의 이익을 희생하며 개인의 부와 안전을 우선시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당대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조건에 직면하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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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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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퍼즐 


"나는 소련 붕괴가 불가피했다는 지배적인 서사, 즉 서방과 소련 내 반공주의 집단 내부에서 생겨난 서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소련 붕괴의 역사는 사전에 알려진 대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상, 두려움, 열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태가 전개되며 펼쳐진 드라마였다." "이 책은 고르바초프를 중심에서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소련 행위자와 목소리, 이니셔티브(주도적 행동이나 조치)를 소개한다." "또한 소련 붕괴에 서방, 특히 미국이 미친 영향의 궤적을 고찰한다. 정부 및 비정부 행위자들과 언론은 소련 정치와 상상력에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멀리서 보면 잘 알려진 증거도 달리 보인다. 소련사의 최종 국면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내가 그 사건의 참여자이자 목격자였을 때보다 지금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련의 종말에서 무엇보다도 돈이 결정적이고 가차 없는 역할을 했음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소련 시절에 경제적 무지라는 내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예전에는 완전히 놓친 것이었다."(25-8)


1부 희망과 오만, 1983~1990년


1장 페레스트로이카 


"1980년대 소련의 세입과 재정 상태는 위태로웠다. 문제는 서방의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막대한' 국방 지출이 아니었다. 문제는 소련이 세계경제에 점차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과 소련의 재정이었다. 소련의 무역수지는 높은 유가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 사근사근하고 태평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과 달리 안정화 자금의 축적, 다시 말해 미래에 대비한 저금에 신경 쓰지 않았다. 1982년 11월 당 총회에서, 안드로포프는 곡물, 지방, 육류를 비롯한 식품의 수입이 늘어나는 상황을 비판했다. 〈누굴 겁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린 지난 몇 년간 수십억 루블과 금을 낭비했소.〉 소련은 석유에서 나온 이윤을 서방의 과학기술을 수입하는 대신 식량을 수입하고 위성국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써버렸다. 적어도 폴란드는 서방에 진 빚더미에서 깔리면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할 테고, 미국은 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미국인들이 소비에트 블록에 속한 국가들을 상대로 벌이는 '통화 전쟁'에 관해 불길하게 언급했다."(36-7)


"안드로포프는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당 개혁가를 찾았다. 그렇게 만난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적 신념은 공포와 배신, 학살의 세월로 얼룩지지 않았다. 1950년대에 모스크바대학을 다닌 학생으로서, 고르바초프는 불셰비키 지도자를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친애하는 일리치'는 전제정과 불의에 맞섰고, 대중 테러 수단을 마지못해 채택했으며, 스탈린을 몰아내려다 비극적이게도 일찍 죽었다. 이 신화는 고르바초프 일파에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레닌은 이상이었고, 스탈린은 결함 있는 현실이었다." "1985년 12월, 야코블레프는 고르바초프에게 미래 정치 개혁을 위한 요강을 보냈다. 그는 지도자의 임무가 소련 사회에 억눌린 좌절감을 급진적 변화로 돌리는 것이라고 썼다. 초점은 정치적 개혁에 맞춰져야 한다.야코블레프는 당을 경제 관리에서 배제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탈집중화, 글라스노스트(문제점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는 '관료제라는 독재'에서 소련을 해방해줄 것이다."(40-3)


"신레닌주의적 웅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첫 2년 동안 어떤 개혁 전략을 취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레닌의 숭배자로서, 소련 사회와 경제를 소생시킬 핵심 수단을 모색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의 보수적인 충고도 유념했다. 야코블레프가 제시한 급진적 정치 변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소련 인민이 경제에서 실질적인 개선을 실감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므로 집권 직후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다뤄야 할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1) 품질 2) 금주 투쟁 3) 빈곤층 4) 과수원과 텃밭을 위한 토지 5)  의약품.〉 놀랍게도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거시경제 안정성에 관해 제기했던 시급한 문제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식량 수입을 줄이고, 무역수지 균형을 회복하고, 그림자 경제를 강력히 단속하고, 노동력을 규율할 필요성 말이다. 고르바초프의 작성문은 소련 경제를 괴롭히는 경제적·재정적 문제점에 대한 진단은 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의 공식 표어는 '가속화'였다."(44-5)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 소련 경제학자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무엇을 계산했든 간에, 1986년 4월 26일에 발생한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 참사는 모든 것을 망쳤다. 소련 예산 중 체르노빌 참사 복구 비용은 사고 후 첫 한 달간만 30억 루블에 달했다. 1989년 초, 리시코프는 복구 비용이 8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무신론자지만 미신을 믿었던 라이사 고르바초바는 체르노빌을 매우 나쁜 징조로 여겼고, 수백만 명이 똑같이 생각했다.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소련 지도자는 물론 격노했지만, 레닌을 재연하기도 했다. 그는 위기를 이용해 포괄적인 결론으로 비약했다. 구체제 전체가 심하게 병들고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위기는 또 다른 혁명을 요구했다. 주된 메시지는 소련이 벼랑 끝에 있는데, 지난 15년간 국가와 인민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살았고 고약한 습관에 빠진 탓이라는 것이다. 당이 이 수렁에서 그들을 끌어내지 못하면 소련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늪'으로 다시 가라앉을 것이었다."(48-9)


"국영기업법은 1988년 1월에 시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개혁가들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법은 과거 소비에트 경제를 안정화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 무엇보다도 당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수십 년간 기업 경영자들은 당원이자 노멘클라투라였다. 이제부터 기업의 수장은 노동자와 직원의 '조합'에 의해 선출된 예정이었다. 더 이상 위에서 해고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개혁은 진정한 자유화와 경제 회생을 불러오지 못했다. 경영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기업 조합들은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지만 이를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고 능률과 생산 품질을 개선할 동기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 이윤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임금과 봉급을 불릴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소련 소비자 중 절대다수가 원하는 값싼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고, 값비싼 품목의 생산에 초점을 맞췄다. 단 몇 년 만에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소비에트 경제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을 터였다."(53-4)


2장 해방 


"소련 경제를 개혁하는 데 열심인 서기장이 서방 국가를 방문할 때 경제학자, 기획자, 군수 산업 경영자, 은행가, 여타 기술 관료와 동행했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신, 고르바초프는 언론인과 사회과학자, 작가, 연극 연출가, 영화제작자를 비롯하여 문화 인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수행단을 데려갔다. 대다수는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서방의 모든 것에 대해 매혹과 찬탄,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급진적 개혁을 위해 소련 인민을 준비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고무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열심히 모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의 주요 원천은 모두 서방에 있다고 믿었다." "내부 담론에서 사용된 적 없는 언어와 개념이 들어올 길이 열렸다. 소련은 이제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고, '다원주의', '위기', '전체주의', '스탈린주의' 같은 단어를 수용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 들여온 어휘들과 소련 언론인, 사회과학자, 작가의 저작에서 나온 어휘들이 소련의 옛 어휘를 점차 대체해나갔다."(74-5)


"고르바초프가 전 지구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때는 투철한 신레닌주의자였다. 정치국과 측근들과 함께 외교 정책을 논의하면서,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은유를 활용하곤 했다. 이것은 볼셰비키 정부가 1918년 3월에 독일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한 도시다. 이 조약으로 레닌은 영토를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소비에트 정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후퇴와 긴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이 은유를 이용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브레스트-리토프스크가 주는 교훈은 지정학적 양보 이상을 뜻했다. 그는 냉전의 상대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의를 하고 싶었다. '공동의 이해관계'와 '인류 공통의 가치'를 토대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함께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소련 지도자는 현실정치의 각본을 따르는 대신, 도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보편적 비전을 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제안을 경제 및 정치 개혁의 시작과 일치시켰다."(75)


3장 혁명들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소련 최초의 핵무기를 설계했지만,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권 옹호자가 되었고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항의했으며 1980~1986년 KGB의 감시 아래 망명 생활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하로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1989년 봄의 모스크바 민주파 모임에서, 사하로프는 법의 지배, 시민사회, 인권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적 의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한때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막 탄생한, 말하자면 젊은 정치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빙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죠. 1주일, 아니면 2주일? 정말이지, 한 시간 만에 끝나버릴 수도 있어요.〉 그는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최고의 전술은 불가능을 이루려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연단에서 허용되는 한 '진살의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고르바초프가 기대하거나 원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111-2)


"인민대표대회가 만든 새로운 최고소비에트의 주요 메시지는 '행정적-관료적 시스템의 타도'였다. 입법 활동의 상당 부분은 '전체주의적'이지도, 자본주의적이지도 않은 경제를 수립하려는 욕망에 영감을 받았다. 갓 당선된 의원들은 유권자들에 대한 열의를 과시하며, 사회 안전망 프로그램을 확대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다양한 요구를 정부에 쏟아냈다. 하지만 필요한 수단과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부 위원회들은 기업체와 협동조합 및 수출 지향 이해집단을 대변하는 새로운 로비 활동가들을 위한 정보 교환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최고소비에트는 그러한 경제 행위자들에게 이익은 더 많이 배분해주고 세금은 낮춰주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 긴축 프로그램의 기획자인 아발킨은 1989년 7월 말에 최고소비에트가 〈[경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법안을 단 한 건도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가 불능〉의 기운이 짙어지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불평했다."(118-9)


"1989년의 (동유럽) 혁명은 같은 해에 일어난 소련의 급진화처럼, 서구식 소비주의가 대중을 유혹하면서 야기되었다.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베를린장벽 위에서 자유에 취해 춤추는 동안, 수십만 명이 서베를린의 호화로운 상점을 뒤덮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보고 만지고 맛보고 싶었다." "1989년 봄과 여름에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자유화 노선은 상당한 급진화를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나라의 핵심부, 무엇보다 모스크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공업 지대, 지배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전면이 먼저 무너졌고, 그다음은 동유럽에 위치한 외부 제국의 차례였다. 12월 16일, 동유럽의 마지막 공산 정권이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무색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소련 지도자와 엘리트들에게 내부의 위기가 외부의 사건을 점차 압도했다."(139, 144)


4장 분리주의 


"옐친은 처음에는 보수주의적인 러시아 민족주의로 기울었지만, 미국을 방문한 후로는 자유주의적 의제로 전향했다. 1989년 12월 초, 그는 '러시아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러시아의 민주적·국가적·정신적 부활〉이라고 선언했다. 옐친의 '러시아'는 러시아연방만이었다. 그는 소련의 핵심부가 완전한 주권을 얻고, 자체적으로 헌법을 보유하고, EEC에 가입하고, 미국, 일본, 영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길 원햇다. 터무니없이 야심 찬 목표였지만, 그 덕분에 옐친은 급진적인 포퓰리즘적 의제를 세웠다.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그늘에서 벗어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옐친이 보내는 메시지는 〈러시아는 다른 공화국들이 오랫동안 보유했던 경제적·정치적·사회적·과학적 기관이 없는, 국가성이 없는 유일한 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인텔리겐치아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달랐는데, 러시아연방이 민주파에게 더 나은 목표라는 것이었다."(150-1)


"1990년 5월 31일 정상회담 첫날, 부시가 독일과 NATO에 관해 묻자 고르바초프는 갑자기 헬싱키최종의정서에 따라 독일은 가입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부시와 미국 관리들은 귀를 의심했다. 고르바초프가 거래하려 들거나 자문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매우 중요한 것을 그냥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체르냐예프가 소련대표단 가운데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위해 외교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크렘린 지도자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소련이 〈더 강하지만 민주적이고 ······ 진보적이고, 역동적이고, 자유로워져서, 바깥 세계와 미국을 향해 돌아서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그 외에 나머지 소련 대표단은 그런 고고한 염원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공통의 목표 의식, 고르바초프나 나라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더는 없었다. 미국인들과의 동맹이 고르바초프의 실패한 개혁을 구해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173)


"부시 행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한 지렛대로서 계속해서 미국의 지원이라는 미끼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부시는 소련 경제 계획의 지침을 IMF와 세계은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한 터였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의 개혁 정책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제 개혁이 실패하더라도 부시 행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1990년 전반기 동안, 고르바초프는 공화국 엘리트층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갈수록 거침없어지는 러시아 대항 엘리트층을 결국엔 상대해야 했다. 한쪽은 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에서 옐친이 이끄는 집단이고, 다른 한쪽은 '러시아공산당' 집단이었다. 대항 엘리트층은 러시아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포퓰리즘,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상충하는 세력들을 대변했다. 그 결과,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추락했고 정치적 기반은 좋게 말해서 위태로웠다.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유일하게 유리한 입지는 세계 정치가라는 독특한 위상이었다."(177-8, 181)


5장 갈림길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연석회의에서 경제 위기의 심각성과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짐짓 놀라워한 유일한 참석자였다. 그는 페트라코프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리시코프가 정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길 기다렸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경제 전략 논의를 의회 기구에 위임했다. 둘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양극화, 급진적 포퓰리즘, 희생양 찾기의 분위기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대통령뿐이었다. 최고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돈이 많이 드는 사회 보호 프로그램에 투표했다. 그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돈은 지폐를 더 찍어내야 하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심화된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리시코프 정부는 마침내 국영기업의 수익에 55퍼센트를 과세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포퓰리즘적인 최고소비에트는 거부권을 행사했다."(182, 187)


"사실, 옐친은 강력한 연방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는 러시아와 같은 주권국가들로 구성되고, 상위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는 연합만 수용할 태세였다. 옐친의 구체적 요구 사항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이었다. 그는 리시코프 정부와 재무부, 국영은행, 대외무역은행의 수장들도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재무부는 개별 공화국들에서 파견한 이사들이 감독해야 한다. 러시아연방은 자체 KGB와 경찰을 두고, 수도인 모스크바와 자체 세관, 대륙붕·삼림·어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러시아 영토상의 무수한 산업 단지와 MIC(군산복합체)의 '폐쇄' 도시들도 관리해야 한다. 러시아 정부는 금 보유고와 다이아몬드, 석유, 여타 자원에서 러시아의 몫을 받아야 한다. 러시아의 과학아카데미, TV 방송, 항공사도 설립될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옐친은 〈크렘린은 러시아 소유〉라고 선언했다. 공화국 의회에서 아주 근소한 차로 선출된 지난날의 추방자는 최후통첩의 언어를 구사했다."(197-8)


6장 리바이어던 


"소련군이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철수하기로 하자 이는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인 야로센코는 〈우리는 거대한 소련 군사력을 파괴하기로 동의했다. 그것도 공짜로. ······ 하지만 최고소비에트를 비롯한 누구도 그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 신뢰? 대출? 지원? 코콤(COCOM) 제재의 끝?〉 … 국방부장관 야조프는 전쟁으로 형제들과 형제들과 일가친척 서른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참모총장 모이세예프는 전쟁에서 형제들을 잃었다. 그들의 경력 전체가 냉전기에 이뤄졌다." "장성들은 고르바초프가 신세계 질서라고 말하는 사명감 가득한 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의무감과 규율로 인해 고르바초프의 뜻을 따랐지만, 속으로는 대후퇴에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자문은 좀 더 유연해져서 군축 회담에서 양보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통일독일이 NATO에 가입하리라는 전망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228-9)


2부 쇠퇴와 몰락1991년


7장 대치 


"소련 지도자는 걸프에서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에게 걸프전은 그와 부시가 함께 건설하기로 다짐한 평화로운 세계 질서라는 비전에 타격을 입힐 것이었다." "걸프전의 결과로 고르바초프는 체면을 잃고 위축되었다. 체르냐예프는 상관이 불만을 터트렸다고 기록했다. 〈워싱턴에서는 옛 시절과 옛 방식을 더욱 그리워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열광적 도취를 끝내려는 모양이다.〉 미국의 걸프전 준비 과정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민족주의자들과의 유혈 충돌은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운 음모의 일환이었다. 미국의 자문들이 〈반대파, 누구보다도 옐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라고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분명 고르바초프는 KGB 보고서에 의존했지만, 체르냐예프조차도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고르바초프의 꿈을 전쟁이 묻어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체르냐예프와 그의 상관 모두, 소련은 미국의 하위 파트너 위치를 받아들이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277-9)


"1991년 3월 17일의 전 연방 국민투표는 고르바초프가 간절히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억 4857만 4606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 중 1억 1350만 명이 개혁된 연방을 보존하자고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 국민투표는 공화국들에서 분리주의에 대한 요구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몰도바까지 여섯 공화국이 투표에 불참했다."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두 공화국 국민의 과반수 이상은 독립공화국이 '주권국가연합'에 가입하는 데 '찬성' 표를 던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지만 그러고 나서는 연방정부가 없는 연합에 가입한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 주 세 곳은 자체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소련으로부터의 분리에 찬성했다." "러시아연방 내 84개 자치구에서 옐친의 프로젝트는 확고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 투표 결과는 러시아연방 내 민족적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그의 정책을 확인해주었다."(283-4)


8장 이양 


"5월 21일,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의의 또 다른 특별 회기가 상당한 비용을 들여 크렘린에서 개최되었다. 4일간의 회기 동안, 러시아 대의원들은 선거 규정을 승인하고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으로 제한했다. 대회는 또한 옐친과 그 외의 다섯 후보자를 대통령 경선 후보자로 승인했다." "민주러시아는 옐친의 풀뿌리 선거 운동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제공했다. 대부분은 저항적인 '과학-기술 인텔리겐치아' 출신이었다. 옐친 선거 운동의 최말단은 그의 열성 팬, 다시 말해 혁명가적인 카리스마를 추종하는 수십만 개인이었다. 그들로서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식의 통치와 구질서의 붕괴로 인한 고통스러운 권력 공백을 채워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준종교적인 숭배심과 믿음도 불어넣었다. 서방 관측통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그저 옐친이 그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러시아식 사우나를 즐기며, 얼음장 같은 찬물에 첨벙 뛰어들었던 것이다."(304-7)


"옐친은 새로운 대통령직에 국가적 수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웠다. 옐친은 여전히 국가 관료 기구에는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포퓰리즘적인 연설에서, 옐친은 중앙 관료제가 터무니없이 돈이 많이 들고, 특권의 중심지이며, 인민이 더 잘 살 수 있게 재정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론 생각이 달랐다. 부르불리스가 회고하길, 옐친은 관료 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 계획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소련 관료 중 최고의 인력을 새로운 러시아 국가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옐친은 KGB가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의심했지만, 그런 막강한 조직의 적대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러시아 지도자가 러시아연방 내 비러시아계 '민족' 자치구들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산당 없이, 러시아의 영토적·정치적 주권을 공고히 할 다른 국가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KGB는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318-9)


9장 합의 


"1991년 여름은 소련의 미래와 소련 경제를 세계 시장에 적응시킬 방안에 관한 합의 없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서방의 선택지는 단 하나,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이곳의 비판가들은 준종교적 성격 때문에 이 개념을 '십계명'이라고 불렀다." "1991년 4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일부 러시아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한 그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980년대에 경제 성장을 유일하게 경험한 칠레를 방문했다. 그룹의 리더인 비탈리 나이슐은 수학을 연구한 적 있는 41세의 경제학자로, 고스플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나이슐과 친구들은 소련의 관료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는데, 소련의 노동력은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전체주의로 인해 변질되고 저하되었기 때문에, 냉혹한 시장 충격만이 노동 윤리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상' 경제로 향하려면 완전한 붕괴와 고통, 그에 따른 생존의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322-4)


"야블린스키의 해법은 대기업들로 이루어진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종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민영화는 안정화 기금에서 인민이 대출한 돈으로 이뤄지며, 이 기금은 서방 국가들에 의해 조성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혁이 소련 경제에 시동을 걸고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개인적으로는, 소련을 위한 '마셜플랜'이라고 불렀다." "미국 언론은 이 계획을 신나게 공격했다. 윌리엄 새파이어는 《뉴욕타임스》에서 앨리슨과 야블론스키를, 〈자본주의가 돈을 댄 버팀목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긴급 구제하는〉 터무니없는 방안을 들고나온 선의의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련이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하고 싶다면, 붉은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주택과 아파트, 토지와 공장을 매각하고, 이윤 동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 요구되는 정치적 기후를 자유라고 한다〉라고 말했다."(329-30, 334-5)


"6월 3일, 행정부의 주요 일원들이 소련에 관해 토론했다. 국무부의 베이커 팀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존중과 관여'라는 입장을 대변했다. 그들은 공동의 경제 공간을 지닌 개혁된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딕 체니와 펜타곤 소속 보좌관들은 소련 '제국'의 해체를 환영하면서 소련 의존국인 쿠바와 아프가니스탄을 버리고, 핵무기를 감축하고, MIC의 해체 과정에 착수하도록 고르바초프에게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무부 장관 니컬러스 브래디와 국제문제 특별보좌관 데이비드 멀퍼드는 재정적 근거에서 소련에 대한 대규모 지원에 단호히 반대했다." "브래디는 솔직하게 미국의 전략적 우선 사항을 표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련 사회가 국방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소련이 시장 체제로 간다면, 그들은 대규모 국방 조직을 감당할 수 없다. 진짜 개혁 프로그램은 그들을 3류 국가로 전락시킬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다.〉"(335-6)


10장 음모 


"불청객의 난입[쿠데타]으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고대하던 휴가는 느닷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날 훨씬 중요한 무엇이 툭 끊어졌다.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줄 알던 정치적 마법사 고르바초프가 끝났다. 그는 몰랐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미국과 맺은 모든 국제적 합의와 위대하고 민주적인 유럽 공동의 집에 대한 환상의 끝이기도 했다." "러시아연방의 모든 지역과 주요 도시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통치하기로 했다. 셰닌과 모스크바 당 조직의 수장인 유리 프로코피에프 같은 일부 당료들은 쿠데타 음모를 열렬히 지지했고, 당 연락망을 이용해 공화국별, 지역별, 지구별 조직의 동료들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모자들은 당 기반 시설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셰닌의 이름은 위원회 명단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반동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라고 바클라노프는 회상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새로운 것의 탄생을 상징해야 했다.〉"(384-6)


11장 훈타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부르불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옐친은 의회 건물 앞 광장에서 코르자코프와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차에서 내렸다. 탱크 위에 올라선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다. 그는 〈우익, 반동, 반헌법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옐친이 대답했다. 〈군은 인민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허세였다. 옐친의 총파업 선언은 통하지 않았다. 군에 대한 그의 주장도 엄포일 뿐이었다." "누구도 옐친이 돌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련 헌정 질서의 주요 파괴자에서 수호자로 변신했는데 말이다. 미국의 방송국 자유라디오는 러시아 의회 내에 특파원을 두고 옐친의 발언을 소련 전역에 중계했다. CNN 카메라맨이 탱크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포착해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보도 방송은 옐친을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심에 두었고, 사태 전개에 엄청난 중요성을 띠었다."(392-4)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면 대중적 정당성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쿠데타에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 그리고 러시아 역사의 교훈이었다. KGB 의장 크류치코프는 눈앞의 딜레마를 고민했다. 옐친과 러시아의 여타 선출 공직자들을 체포했다가는 서방에서 공분이 빗발치고 냉전으로 회귀할 수도 있었다. 소련의 경제와 재정은 서방의 제재를 버틸 수 없었다. 크류치코프는 야조프, 야나예프, 루캬노프가 폭력사태를 각오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대 책임을 이용하는 점진적인 단계별 전술에 의해 비상통치가 필요하다고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옐친을 잡지 않고 놔둔 것은 크류치코프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다른 잘못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공모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가장 막강한 무기인 TV를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TV에서 소련 인민들은 무자비한 훈타 대신, 권력 의지가 없는 한 무리의 썰렁한 관료를 목도하고 있었다."(396-400)


"훗날 정치적 목적을 위해 8월의 사건을 미화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을 때, 옐친은 훈타의 구성원이 무자비한 냉소주의자와 전체주의적인 폭군이 아니라 〈평균적이고, 평범한 소련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들이 인명과 합법성을 존중했다고도 시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항하고 권력을 잃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1993년 10월, 모스크바의 헌정 위기 동안에 옐친은 아주 딴판으로 행동했는데, 러시아 의회가 자신에게 대항하자 탱크 부대 지휘관들에게 의사당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했고, 정적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며, 6년을 더 집권했다." "국가 기구의 일부 목격자들은 8월 21일에 일어난 일을 '정치적 멜트다운(붕괴)'이라고 묘사했다. 공모자들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을 이뤄냈으니, 바로 중앙 정부의 행정부가 완전히 항복한 것이었다. 실패한 비상통치는 옐친과 그의 민주파 추종자 및 지지자에게 고르바초프와 헌정 질서를 대신해 집행 권한의 수단을 장악할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했다."(420-1)


12장 종말 


"소련 지도자는 여전히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사흘간의 개인적 드라마에 몰두해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훈타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지만, 서방 기자들을 제외하면 언론은 적대적이었다. 옐친의 자문이자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유리 카랴킨은 고르바초프에게 왜 그런 〈명백한 악당들〉을 정부의 중요 직위에 임명했는지 물었다. 고르바초프는 크류치코프와 야조프를 '신뢰했다'고 맥없이 시인했다. 또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현명하지 못하게 덧붙였다. 이 발언은 그 후 여러 음모론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동안 일부 인사들은 〈진짜 민주주의자〉처럼 처신했다고 말하며 당 기구를 변호했다. 영국 대사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소련 대통령을 프랑스혁명 이후의 부르봉 왕가에 비유하며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33)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고르바초프는 다시금 굴복했다. 그는 자신이 고른 후보자를 임명하라는 옐친의 요구에 동의했다. 이 시점부터 소련 지도자는 명목상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군과 KGB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한때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본산이었던 당 본부는 이제 서류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이 줄지어 놓여 있는, 환기가 되지 않은 채 버려진 건물이었다. 당은 거대한 단체였기에, 누구도 그곳을 무사히 떠날 수 없었다. 갑자기,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날 늦게,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이끌던 권력 구조를 어쩔 수 없이 해산해야 했다. 옐친은 러시아 의회의 긴급 회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문서 한 장을 떠밀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가 〈[소련] 정부 전체가 사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옐친은 의기양양하게 소련의 다음 총리는 러시아연방에서 지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반대하지 않았다."(435-8)


"중앙 국가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소련 경제의 무정부적 와해 과정이 시작되었다. 고전 명작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는 그리스의 마을 주민들이 부유한 부인의 집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단 몇 분 만에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탈탈 털려서 텅 빈 잔해만 남는다. 소련의 조르바 같은 환경에는 명백한 승자가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기간에 이미 출발하는 데 유리했으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돈을 버는 것이 진짜 목표인 젊은 기업가였다. 그들 중 다수는 콤소몰 출신이었다. 소련 당국은 콤소몰 활동가에게 최초의 상업은행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을 출범시킬 독보적인 특권을 부여했다. 폴 클렙니코프는 KGB와 당이 〈한 세기 전 차르 비밀경찰이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나중에 썼는데, 말하자면 혁명가들을 통제할 요량으로 그들의 뒤를 봐줬던 것이다. 신진 자본가들이 소련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훈타의 실패 뒤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를 느꼈다."(453)


"고르바초프의 임시정부 도박은 마지막이자 가장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소련의 대통령이라는 헌법적 지위와 국제적 명성, 완전한 경제적 붕괴에 대한 공화국들의 두려움이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도록 당분간은 내버려뒀다. 그러나 새로운 연방이란 전망은 고작 두 달 만에 모스크바의 인디언 서머처럼 사라져버릴 터였다. 옐친은 자신보다 위에서 행사되는 권력 없이 '러시아'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길 원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붕괴의 위협과 자신에 대한 서방 지도자들의 지지만으로 공화국 실력자들을 공동의 정치적 프로젝트로 이끌 수 있다고 착각했다. 실상 그는 옐친과 공화국 실력자들을 위해 정치적 짐을 떠맡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의 언론 비서관 안드레이 그라초프가 나중에 말했듯이, 소련의 대통령은 스스로 리어왕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유형의 자산을 내준 것이다."(463)


13장 불협화음 


"9월 4일, 부시와 각료들은 허약한 소련과 소련의 해체 중 어느 쪽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지 토론했다. 펜타곤의 수장인 딕 체니는 고르바초프를 버리고 진짜 민주주의자이자 서방의 가치를 수용하는 옐친을 택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체니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인정하라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단체들과 NED의 청원을 지지했다.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 휘하의 허약한 연방이 독립 공화국들의 예측 불가능한 불협화음보다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휘하의 보좌관들처럼 폭력적 혼돈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 치닫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외교의 눈앞에는 두 장의 와일드카드가 있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소련 경제를 안정화할 서방의 대규모 금융 지원 방안이었다." "부시는 니컬러스 브래디 재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 이 방안에 확고히 반대했다. 미국 경제가 신음하고 있는데 소련에 납세자들의 돈을 쓰자고 제안할 수는 없었다."(472-4)


"우크라이나 독립은 두 번째 와일드카드였다. 대통령의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체니는 다시금 '공격적' 접근법을 들고나왔다. 그는 미국이 소비에트 공간에 보유한 거대한 지렛대를 이용해 그곳을 쪼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니의 발언 요지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민주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민주국가가 될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인정은 어쨌거나 좋은 정책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러시아가] 작은 게 우리한테는 낫다.〉 베이커는 체니에게 딜레마의 다른 측면도 상기시켰다. 만약 소련 해체가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어쩔 건가? 〈우린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를 원치 않았다〉라고 스코크로프트는 회고했다. 그는 체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이 공공연하게 소련의 해체를 지지한다면, 〈소련의 다수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장기적으로 적대감을 이끌어낼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상황을 방치했다.〉"(474-5)


14장 독립 


"이 역사적인 순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 미하일 베른스탐은 소련의 해체가 〈하나의 목표로 합쳐진 이원 정책〉이었다고 썼다. 첫 번째 정책은 '잔여' 소련을 인수하여 고르바초프 없이 운영하려는 러시아 개혁가들의 시도였다. 두 번째 정책은 다른 공화국들과 합의하고 보조금과 지원금 시스템을 중지시키려는 시도였다. 개혁가들은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는데, 소련 자산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다종족적인 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한 가지는 버려야 했다. 그에 따른 갈등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 경제학자는 네 번째 목표를 간과했는데,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소련의 폐허로부터 강한 러시아 국가를 재건하길 바랐고, 이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러시아적인 이 목표는 연방 해체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512-3)


"옐친의 자문이었던 부르불리스는 자신과 동료들이 우크라이나 독립에 전적으로 찬성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르불리스는 우크라이나와 가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자기처럼 피가 섞인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연방을 별개의 존재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인에게 우크라이나는 잉글랜드인에게 스코틀랜드와 같았으며, 더 가깝게 느낄 뿐이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합의 없이 이혼 신청을 하는 격이었다. 모스크바의 그 누구도 우크라이나라는 방주가 소련-러시아라는 선거(船渠)를 떠나는 것을, 그리고 즉시 침몰하지 않고 항해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심적 태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충돌하고 향후 몇십 년 동안 커다란 긴장과 갈등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528-9)


15장 청산 


"크라우추크는 나중에 우크라이나 국민투표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그 공을 인정받아야 한다.〉 증거는 이런 주장과 상충한다.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는 소련의 붕괴를 반영한 것이지, 그 원인이 아니었다. 1991년 12월 2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뒤이어 옐친의 가차 없는 분리주의 노선으로 파괴되어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소련에 대한 재정적 부고(루블화 가치 폭락)는 그 파괴를 가장 잘 설명한다. 국가의 주요 기능인 통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일어난 일은 고르바초프와 자발적 연방이라는 그의 환상을 끝장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일격은 옐친의 새로운 노선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예상한 가이다르와 그의 팀은 이미 허구에 불과한 중앙의 기능을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민투표 이후, 러시아 개혁가들은 드디어 자유롭게 이 중앙을 청산할 수 있었다."(546-7)


"비스쿨리는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사냥했던 곳이었다. 그곳을 찾은 외빈들로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에리히 호네커도 있었다. 1991년 12월 7일 토요일 저녁, 세 슬라브 공화국 간 회담의 절대적 보안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KGB 특수부대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크라우추크를 달래기 위해, 러시아인들과 벨라루스(이제는 벨로루시가 아니었다) 관리들은 향후 협정에서 '연방'이란 단어는 빼기로 합의했다. 그 대신 그들은 중심부와 식민지들의 품위 있는 결별을 가져온 국제기구 영연방의 예를 따라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하기로 했다." "회담 과정이 궁금한 160여 명의 기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인근 마을에서 음식도 없이 참담한 조건에서 전날 밤을 보냈다. 이제 그들은 소비에트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영토상의 모든 연방 조직과 기관의 효력이 없어졌다. CIS의 본부는 민스크로 정해졌다. 연합 창립의 기반이 되는 문서는 배포되지 않았다."(549-52)


"술을 빼면, 불안을 잠재울 자연스러운 치료법은 정당성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거둔 압도적 승리에 기댈 수 있었다. 옐친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가 정당화한 논리는 부정적으로, 고르바초프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련 지도자에게 전화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가이다르는 〈핵무기가 있는 나라에서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전면적 내전을 용케 피했던 게 자랑스럽다〉고 회고했다. 부르불리스도 〈제국의 유혈 분할〉을 막았다고 동의했다. 또 비스쿨리회담이 〈냉전을 끝냈〉으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기적적인 전망을 내놓았다〉고 평가했다. 크라우추크는 수년 뒤에 자신도 내전을 걱정했고 안도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경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정에 가입했다. 〈러시아는 [연합이] 느린 결별이라고 강조했다.〉 이 마지막 요점이 향후 몇 년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규정했다."(554-7)


결론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를 품은 개혁가적 열성과 정치적 소심함을, 도식적인 메시아주의와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비전이 넘치고 숨 막히는 외교 정책과 결정적인 국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모두 갖췄다. 그러나 폭력과 무력에 대한 혐오감은 보수주의자들도 공유할 만큼 그의 세대에 전형적이었다. 이것은 스탈린 사후 몇십 년 동안 소련 엘리트의 더 깊은 문화적·사회적 변모를 가리킨다. 그들은 정치적·경제적 폭풍이 들이닥쳤을 때 놀랄 만큼 무기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국의 누구도 고통스러운 개혁을 실시하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눈감고 해낼 뚝심이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선호한 정책, 인텔리겐치아를 달래고 공화국의 지배 엘리트에게 책임을 이양하는 정책은 더 나은 개혁이 아니라 혼란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발트 지역과 남캅카스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핵심 슬라브 공화국들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리주의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했다."(588-9)


"서방의 지도자들에게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전대미문의 역사적인 기회를 붙잡으려는 정치적 의지나 상상력이 없었다.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이 서방의 궤도 안으로 통합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예측하기 힘들다는 시각이 만연했다. 무엇보다도 동유럽과 발트 지역에서 냉전 승리의 손쉬운 성과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이었다." "그리고 1992년 덩샤오핑이 중국을 사업에 재개방함에 따라 막대한 금액이 공산주의 중국으로도 곧 쏟아져 들어갔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세계 단기 금융시장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공화국들을 곤경에 내버려뒀다. 발트 3국만이 예외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경쟁하듯 서방의 관대함,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그리고 지정학적 혜안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은 탐욕스러운 투자자들을 놓고 다투는 처지가 되었고, 그것은 두 나라가 모두 지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글로벌 금융 기구들은 국가 주권과 자존심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595-6)


"러시아는 거대한 사회적 전위와 부의 불평등을 비롯해 1980년~19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자본주의의 최악을 경험했다. 현대화 대신 대규모 탈산업화가 일어났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지만 대체로 야만적이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민영화는 급성장하는 중간계급을 낳지 못했다. 국가 자산의 분배는 뻔뻔할 정도로 불공정했고, 자국 시민들에는 무관심한 라틴아메리카의 수출 지향 매판 부르주아를 닮은 새로운 파벌인 이른바 '올리가르히'를 탄생시켰다." "많은 이가 자신들의 친미·친서방 태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재정적 통제력을 파괴하면서 자본주의적 불확실성을 향해 달려갔던 1991년의 반공 열기는 돌이켜보니 이데올로기적 광기로 비치기 시작했다." "국내적·국제적 시장 세력들과 지정학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합이 아닌 경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옛 로마 경구 '바이 빅티스(Vae Victis)', 즉 〈패자는 비참하도다〉라는 말은 변함없이 진실한 예언으로 드러났다."(597-8)


"소련이라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에 서구 정부들은 1988~1991년 소련의 파괴적인 정책들과 유사하게 국민의 세금과 심지어 저축을 이용해 기업들을 긴급 구제해야 했다. 고고한 레토릭으로 둘러싸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버락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서 수렁에 빠졌을 때 고르바초프와 비교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해법으로 여겨진 것이 오히려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관찰자들에게 1991년 3월 고르바초프의 국민투표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소련 '제국'에 의한 '러시아'의 희생을 운운하던 옐친의 수사법을 아득하게 일깨웠다." "역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관한 도덕극이었던 적은 없다. 그 대신 세계는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이상주의와 권력, 훌륭한 통치와 부패, 고조되는 자유의 위기와 비상시에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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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신이 된 시장 :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하비 콕스 지음, 유강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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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개관

1. 신이 된 ‘시장’


나는 경제학자-신학자들의 주장에서 현대 종교 사상의 변증론을 발견했다. 특히 기업 신학자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윌리엄 제임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간혹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라고 불리는 사조와 비슷하다. 제임스는 ‘유한한 신성’, 즉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궁극적인 속성을 향해 나아갈 뿐인 신성을 옹호했다. 이런 추론은 분명한 이유로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 신정론theodicy이 부딪히는 당혹스러운 문제, 즉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며 자애로운 신이 묵인할 것 같지 않은 갖가지 나쁜 일이 왜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장’ 신학자들이 보기에 능력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끝없이 확대되는 시장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탈구dislocation, 고통, 방향성 상실이라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신Market God’이 궁극적으로 자애롭다는 사실에 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11-2)


‘시장’의 궁극적인 전지적 능력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칼뱅의 불가사의한 신이 그렇듯이 ‘시장’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결국 ‘시장’은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시장’ 종교의 시대에 회의론자와 자유사상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한다. 가짜 기적을 폭로한 볼테르들이나 종교를 빙자한 사기를 날카롭게 고발한 멩켄Henry Louis Mencken들은 어떻게 됐나? 현재의 정통 신앙이 워낙 지배적이기 때문에 ‘시장’의 전지적 능력에 의문을 품는 것은 섭리의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게 진짜라고 말하면(코카콜라를 생각해보라 〔코카콜라는 1969년 광고에서 ‘이것이 진짜’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그것은 진짜임이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말했듯이,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이제 ‘시장’의 지치지 않는 탐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다. 17-8)


2. 왕의 과학과 신의 과학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심각한 분열을 낳은 신학 논쟁은 ‘교황 무오류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다. 오늘날 무오류성을 둘러싼 견해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묘하게 비교되는 문제를 둘러싸고 비슷한 논쟁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고 무척 흥미로웠다. 이처럼 논쟁적인 경제학 교의 항목의 창시자는 시카고대학교의 유진 파마Eugene Fama다. 그는 일련의 저서와 논문에서 ‘시장’은 현존하는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에 근거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틀리지 않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교황의 무오류성이 교황은 일정한 조건 아래서(즉 교황좌에서ex cathedra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관해 전체 교회를 상대로 발언할 때)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변명의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시장 무오류 가설 역시 오직 ‘효율적인’ ‘시장’에서 무오류성을 주장한다. 파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장의 효율성이란 시장이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활용한다는 뜻이다.” 26)


이 두 가지 유사한 논의를 숙독할 때면 가끔 놀라운 결론에 거의 이를 뻔했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신학자나 경제학자도 내리지 않은 결론이다. 두 경우에서 ‘오류가 없다’와 ‘올바르다’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의 용법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정의된다. 두 교의가 이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로 볼 때, 어떤 발언이 진실일 뿐만 아니라 오류가 없는 진실인 것은 단지 교황이 선언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이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이라고 부른다)를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교황이 어떤 것을 공식 교의로 반포하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에서 ‘진실’이 된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교의 반포 전날에 어떤 견해가 있었든, 이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장’은 (효율적일 때) 언제나 올바르다. ‘시장’은 원래 그런 것, 즉 구매자와 판매자, 투자자가 행하는 무수히 많은 결정의 정확한 반영이자 증류물이기 때문이다. 27)


3. ‘시장’은 어떻게 신성한 존재가 되었는가


고대 제국의 도시에서 시장은 항상 도시의 물리적 중심인 사원 구역에 자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신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낸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보라. 환전상이 펼쳐놓은 상을 뒤엎고 그들을 강도라고 꾸짖은 이야기는 오랫동안 엄청난 오해를 받은 주제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가 신성한 장소의 담장 안에서 이런 상업 활동을 한다고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전후의 여느 신전처럼 이 유대교 신전에도 담장, 즉 바깥마당 안에 다양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장소가 있었다. 무엇보다 희생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과 새를 파는 장사치가 많았다. 순례자들은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의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왔으니 서로 다른 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지역 화폐로 짐승 값을 치러야 하니 ‘환전’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 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32)


강과 마찻길이 합류하는 지점마다 점차 상설 시장 천막촌이 등장했다. 고대의 또 다른 관습이다. 시장을 뜻하는 수메르의 표의문자는 Y로, 교차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디서 등장하든 시장은 신전 담장 안에서 장사할 때부터 통용된 도덕적·종교적 제약 아래 거래해야 했다. 도시와 자치구 그리고 회원들이 ‘공정가격’이라는 신학적 개념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저울을 누르고 이중 바닥을 깐 바구니를 사용하는 사기꾼에 속지 않게 구매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내면화하던 길드와 동업조합이 이런 제약을 강제했다. ‘구매자가 조심해야 한다caveat emptor’는 인식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구매자는 자신의 신중함뿐만 아니라 파렴치범의 약탈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도덕적 교훈의 오랜 전통에도 도움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시장이 자동적으로 자기 조정을 한다는 사고를 기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래자나 구매자, 판매자는 모두 그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에 엮인 신뢰, 예절, 의무가 가정된 관계에서 거래했다. 34)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퍼져 나갔다. 이제 멀리 떨어진 도시들 사이에, 심지어 다른 민족들 사이에도 교역이 발전함에 따라 묘하게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담보대출, 환전, 운송보험, 합자 사업 등이 등장했다. 지폐가 황금 자루를 대체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추상적 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용장을 비롯한 여러 ‘증서’가 등장함에 따라 노점과 가판대는 필요 없어졌다. 돈으로 돈을 벌고 빚을 져서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자비함과 사기에 매혹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커진 돈 상자를 억제할 가능성은 줄었다. 이제 구매자와 판매자, 차용인과 대부자가 만나서 암묵적이거나 공공연한 도덕규범 안에서 거래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시장을 단순히 특정한 구역이나 여러 사회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시장주의’ 시대에 산다. 이제 ‘시장’은 우리의 사회적 상상에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태도의 변화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35-6)


4. ‘시장’은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그리스 종교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보여준다. 신은 남을 속이고 질투하기도 한다. 게다가 (미천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죽일 듯한 원한을 품는다. 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은 불사의 존재다. 이제 새로운 인간을 보라ecce homo novus. 현대의 법인corporation-person을 보라. 지난 세기에 장황하게 얽힌 법률과 판례를 통해 등장한 현대의 법인 기업은 제우스와 아테나 같은 올림포스산의 지위에 다다랐다. 법인 기업은 생명을 무기한 이을 수 있다. 구식 모델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나타내는 새로운 법인의 다른 특징은, 많은 경우 법률이 법인에 ‘유한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 모델을 새롭게 주조된 법인 모델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다. 구식 인간은 우리가 꿈틀거릴수록, ‘비극적 얽힘’에도 우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다(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자유의지와 죄와 책임이라는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었다. 39-40)


'유한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성 외에도 ‘시장’이 창조한 ‘인격’은 어느 작가가 ‘변신shape shifting’이라고 말한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비교종교학, 특히 민속 종교를 연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개념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 코요테나 사슴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은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이런 변신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능력은 늑대 인간과 커다란 검은 박쥐와 사람이 거의 자유자재로 바뀌는 최근 뱀파이어 영화의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법인의 세계에서 변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법인 기업은 불멸의 존재지만, 예를 들어 성가신 소송을 피해야 할 때는 다른 법인 기업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간단히 몸을 숨길 수 있다. 이 과정은 부분적으로 변신이지만, 화신化身과도 기괴한 유사성이 있다. 그 결과 이전의 법인은 사멸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며, 이전에 한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40)


법인 기업은 1790년대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었을 때 소규모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각 주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 기업들의 주식은 보통 해당 기업의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지역 주민이 샀다. 설립 취지문에는 보통 기업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규정되었고, 이 기업들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설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인 기업에 설립 허가를 내준 정부는 기업이 대중에 의해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대중에게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주주shareholder뿐만 아니라 이해 당사자stakeholder (법인 기업이 이해를 충족해야 하는 사람과 기관 )도 있었다. 초창기 법인 기업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획득하는 일부 특질을 갖춘 것 같다. 법인 기업은 덩치가 훨씬 더 커지고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쌓으면서 이윤 획득에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기는 정부 감독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변화는 그 유명한 ‘강도 귀족robber baron’의 시대를 열었다. 46-7)


5. 고리대금업과 피싱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주교이자 유명한 설교자 바실리우스Basilius(329~379)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자를 물리고 돈을 빌려주는 식으로 궁핍을 악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소리로 비난했다. 대신 무조건적인 선물을 주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선물은 하느님에게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교회와 문화 일반 모두 고리대금업을 혐오스럽고 부도덕한 행위로 보았다. 단테가 지옥을 점점 깊어지는 아홉 단계 원형 구덩이로 묘사했을 때, 고리대금업자는 가장 깊숙한 일곱 번째 고리에 자리하는데, 그 옆에는 신성모독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폭력을 가했다’고 여겨지는 남색자가 있다. 고리대금업자는 아는 사람과 이방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죄인보다 나빠서, 살을 물어뜯는 뜨거운 바람(‘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물다’라는 뜻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벌이다)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을 떨쳐내려고 헛되이 애쓰는 존재로 묘사된다. 57-8)


장 칼뱅이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상업적인) 도시국가 제네바에서 적당한 이자를 허용한 것은 사실이다. 칼뱅의 교의에서 ‘허용’ 부분은 금세 받아들여졌지만, ‘적당한’이라는 부분은 이내 무시되었다. 종종 버티려는 시도는 있었다. 1552년, 구두쇠 정신과 약삭빠른 사업 관행으로 이름을 날린 스코틀랜드에서 새로 등장한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개신교 가운데 칼뱅파〕는 탐욕스러운 상인, 임금을 주지 않는 주인, 소작인을 혹사하는 지주 등과 나란히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교리문답을 발간했다. 하지만 분주한 상업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 설교자와 도덕가의 훈계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1572년 〈고리대금업에 관한 토론Discourse upon Usury〉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서 널리 읽힌 소책자에서 토머스 윌슨Thomas Wilson은 이자를 물리는 대부는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이며, 상인을 비롯한 사업가들은 “자신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 등의 집단에게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58-9)


일부 길드와 교구, 수도원에서 구사한 좀 더 창의적인 책략은 가난한 사람이 훨씬 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릴 수 있는 대안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1462년,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프란치스코회는 경건은행mont-de-piété 〔교회에서 자선사업으로 운영하는 공공 전당포〕 모델을 만들어 이탈리아 전역과 나중에는 프랑스와 독일까지 퍼뜨렸다. 뒷날 프로테스탄트도 이 모델을 채택했는데, 지금도 교회가 후원하는 신용조합에서 그 후예를 볼 수 있다. 이런 고귀한 시도는 경제 변화의 거대한 흐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세상의 모든 교회 세력도 계약, 식민지, 무역 회사, 합자회사, 신용 기법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17세기에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 신부가 런던의 성공회 성당인 세인트메리울노스에서 고리대금업을 비난하는 설교를 한 일은 상징적인 클라이맥스다. 설교문은 다음과 같다. “탐욕스러운 바리새인은 이 모든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비웃었습니다.” 신부는 그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59-60)


6.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희년은 서판을 깨끗이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 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새롭게 경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가 우리가 보통 가난한 이의 주된 옹호자로 보는 예언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성스러운 율법에 한 층위로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희년은 예수 시대에 실행되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점령자의 가혹한 과세 정책과 억압적인 토지 규제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희년에 대해 알았다.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처음 자신의 사명을 발표하며 성경 구절을 읽는다(〈누가복음〉 4장 16~19절). 예수는 ‘두루마리를 말기’ 직전에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 학자들은 이것이 희년을 가리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없애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주시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파에서는 빚이라는 용어 대신 ‘죄trespass’,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문구는 원래의 경제적 내용이 사라졌다. 65)


2부 장애와 질환

7. 상층부의 합선


가톨릭교회는 4세기 무렵부터 많은 이에게 합리적인 해법으로 보이는 조치를 내놓았다. 대수도원장과 주교는 말했다. “우리에게 재산을 내놓아라. 우리는 정당하게 임명된 그리스도의 후계자이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 재산을 맡아놓고 신중하게 분배할 것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현생과 다음 생에서 여러분과 그 가족을 위해 계속 기도와 대리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이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으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교회가 수도원과 교구를 통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관리하게 기부한 재산은 ‘가난한 사람의 세습재산’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교회에 기부나 유산 증여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중세 사학자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이런 관념이 엄격한 윤리적 권고와 전례를 통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 기금을 고갈시킨 이들은 ‘빈민 살인자necatores pauperum’라고 불렸다. 79-80)


1305년에 프랑스 고위 성직자 다수가 장악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 교황을 선출했고, 신임 교황은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프랑스인 교황 다섯 명이 아비뇽에 남아 가톨릭 세계를 통치했다. 아비뇽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간 종교 상품을 생산하는 국제 카르텔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 제품은 교회 직책으로 유급 직책이나 ‘고위 성직’, 당시 교회의 거대한 위계질서에서 부른 말은 ‘성직록을 받는 성직’이다. 당시 주교가 700명, 그 아래 성직자가 수천 명이었다. 성직자도 때가 되면 죽었기 때문에 채울 자리가 계속 생겼다. 이런 성직은 대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이고, 때로는 피임명자가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자리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아무 부끄럼 없이 공공연하게 직책이 매매되었다. 마술사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simony(성직 매매)’라고 불린 관행이다. 마술사 시몬은 영적인 힘을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사려고 한 인물이다(〈사도행전〉 8장 9~24절). 81)


8. 거대 은행과 거대 교회


초대형 교회가 기업과 가장 흡사한 특징은 어느 학자가 말한 것처럼 “혹독하게 성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매리언 매덕스는 초대형 교회가 자신이 소망하는 사고의 요소를 담아 지칭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른 비평가들이 ‘성장주의growthism’라고 부르는 현상의 신봉자인 초대형 교회는 교인 숫자를 늘리고 더 많은 헌금을 모으는 데 노력을 집중한다. 이런 활동이 대부분 노골적인 물질주의고, 진정한 영적 의미는 전혀 없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말라기〉 3장 10절). 번영 설교자는 이 구절을 들이대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화가 부족한 사람은 분명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거나, 교회에 충분히 헌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7-8)


구조적으로 볼 때, 초대형 교회는 종종 성서의 해석보다 현대 경영 기법에 관심 있는 대표 성직자를 둔 대기업 조직을 모방한다. 초대형 교회는 계속 움직이는 존재로, 미래의 강한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곳은 당신 할아버지가 다니던 교회가 아닙니다.’ 앞 세대가 교회에 갈 때 준수하던 복장 규칙이 대부분 폐기되고 반바지, 심지어 짧은 청바지를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현상은 초대형 교회의 느슨한 스타일이 널리 퍼진 ‘시장’ 정신에 깔끔하게 순응한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초대형 교회 성직자들이 항상 이런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회중에는 종종 한 세대 이상이 포함되며, 음악과 의상의 선호도 서로 다르다. 미국에서 일부 초대형 교회는 시간대에 따라 다른 예배를 제공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특이한 취향에 맞춘다. 컨템포러리 예배는 오전 9시, 전통 예배는 오전 11시, ‘가스펠’ 예배는 오후 2시, 포크 예배는 오후 5시 같은 식이다. 91)


3부 역사: 돈을 좇다

9. 주교와 수사: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기를 꺼렸음에도 그와 추종자들이 마침내 펠라기우스에게 승리했을 때, 단순히 신학적 관념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싸움을 치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파벌은 앞서 도나투스파(자신들이 보기에 기꺼이 타협하는 기독교인과 친교를 받아들이기 거부한 순수주의자)라 불리는 운동과 싸움에서 이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쪽 사람들은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도나투스파의 토지는 로마제국에 압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던 가톨릭교도는 이후 그 토지와 그에 따르는 수입까지 물려받았다. 교회가 거둔 승리의 결실이다. 그 결과 그들은 펠라기우스를 상대로 제국 법정에서 새로운 소송을 벌일 때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자원을 끌어모았다. 현금의 조용한 속삭임은 종교의 정치를 포함해 정치에서 언제나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종교에서도 그만큼 설득력을 보였다. 98)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의 재력은 많은 귀족 가문의 재정적 혼란 때문에 특히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족 가문들은 제국 법정에 가까웠을 테지만, 당시 그들 지역을 휩쓸면서 재산을 유린한 반달족 침입자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상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팀은 적재적소에 돈을 썼고, 돈을 뒷받침하는 정치 공작에도 능숙했다. 이 가문 중 일부는 워낙 사정이 쪼들려서 야만족 침입자를 매수하기 위해 모금하는 공동 자금에 돈을 내지 않았고,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다른 귀족과 사이에 불화와 긴장이 생겼다. 다시 통일을 확립하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반달족이 침략하기 전에는 상충하는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일치가 용납할 수 없는 분열로 간주되었다. 알프스산맥 너머에서 온 약탈자에 맞서 정치적·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야 할 때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이단자로 규정한 것은 이런 지배적인 정서에 영합한 것이다. 분열은 나쁘고, 돈은 환영받았다. 98)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부는 일종의 ‘은사charisma’, 즉 하느님이 준 신비로운 선물이며, 문제는 재부가 있는지 혹은 재부를 어떻게 획득했는지가 아니라 그 재부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사고를 내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파와 펠라기우스파의 논쟁에서 재부와 세속 권력이 수행한 커다란 역할은, 이후 벌어진 표면상 신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논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중세 후기에 수도원 운동과 이른바 ‘이단’ 그룹이 부상한 이면에는 교회의 재부가 커지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종교개혁은 원래 면벌부 판매에 관한 논쟁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맘몬Mammon은 심지어 지성소에도 전혀 없지는 않다. ‘돈을 따라’의 렌즈로 교회사를 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사상, 논쟁, 인물 등도 들어간다. 하지만 가르침과 교의에 관한 일반적인 책자에서는 현금 흐름이라는 요소를 자주 무시하거나 최소화하기 때문에, 이 렌즈로 종종 작은 활자나 행간에서 드러나는 내용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99-100)


10. 애덤 스미스: 창시자이자 수호성인?


스미스는 경쾌한 18세기 산문으로 인간의 도덕 감정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 우리의 이기적인 애정은 억제하고 남에 대한 자비로운 애정은 내버려두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성하는 길이다.” 일종의 칼뱅주의자인 스미스는 때로 종교 속의 ‘열정’을 비난하지만 (감리교도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사실 그는 거기에서 핵심적 사고를 빌렸다. 인간은 원죄의 속박을 벗어나서,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우리에게 의도한 ‘완전함perfection’을 향해 ‘나아갈’ 힘이 있다. 그러므로 칭찬할 만한 욕망과 비천한 욕망 둘 다 존재한다. 진정한 공화국commonweal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진보에 기여하는 욕망과 그렇지 못한, 심지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욕망. 여기서 성인 후보 스미스는 분명히 무제한적인 소비자주권의 옹호자가 아니다. 그는 순전한 이단, 기껏해야 ‘시장신’을 찬미하지 않는 교의를 가르친다. 106-7)


스미스는 우리를 위해 정해진 도전해볼 만한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문제에서 정통 교의와 크게 견해가 갈린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시장’의 교리문답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에게 제시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 가운데 자기 이익을 선별할 힘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이 실망스러운 것임이 밝혀질 때 그것은 어떤 내적인 약점 때문이 아니라 둘 중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지나치게 많은 규제 탓에 선택의 범위가 왜곡되거나, 선택하는 사람이 합리적인 구매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떤 실체적인 선의 개념은 배제된다. 좋은 것은 선택되고, 선택되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고귀한 본성과 천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 똑같이 싸우는 것을 인정하며 고귀한 본성을 ‘공정한 관찰자’, 즉 우리 머릿속 양심의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개인의 만족뿐만 아니라 공동의 안녕에 대한 인식에도 근거하는 선택을 옹호한다. 107)


11. 애덤 스미스: 신학자이자 예언자?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현재 경제학과 신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전에 살면서 글을 썼다. 그의 저작은 21세기 경제학자나 신학자가 출간하는 저술과 닮은 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하지만 스미스의 저술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나 당대 신학자와 비슷한 추론 패턴을 따른다. 그는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와 철학 전통의 흐름에 의지한다. 여기에는 성서 연구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스미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국부론》의 제목을 성서에서 빌렸음을 알 수 있다 〔《국부론》의 원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는 〈이사야〉 60장 5절에서 빌려온 ‘이방 나라의 재산the wealth of the nations’이라는 구절이 있다〕. 스미스는 ‘신학’에 포함되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에서 헤엄쳤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인 1759년에 많은 이들이 경탄하는 《도덕 감정론》을 출간한 사실이 중요하다. 111-2)


스미스의 신학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당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온건한 칼뱅주의다. 그의 시대에 군림한 칼뱅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 않았다. 당대 칼뱅주의는 오히려 칼뱅에게 중요한 다른 개념, 즉 세상에서 신의 섭리적 존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유익한 기여, 신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서 이성의 중요한 역할, 신의 자애로운 인도 아래 인류의 축복받은 미래 등을 강조했다. 스미스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라고 썼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아이작 뉴턴이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사고에 미친 지배적인 영향은 그가 특히 독일식 표현으로 익숙한 자연법 전통이다. 이 학파는 보통 말하는 자연의 우주보다 윤리와 도덕에 관심이 많았다. 이 학파는 스미스가 글래스고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13)


12. 은행가, 철학자, 트릭스터, 작가


농담, 장난, 잔꾀, 골려 먹기. 이는 신화와 민간신앙 연구자들이 사실상 알려진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형인 ‘트릭스터trickster(장난꾸러기)'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저장고에 담긴 책략이다. 트릭스터는 신일 수도 있고 반신반인이나 동물, 인간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특징은 전통에 따라 다르지만, 트릭스터는 언제나 똑똑하고 빈틈없고 창의적이며 일반적인 예절 규칙과 관습을 조롱하는 농담과 책략의 원천이다. 히브리 족장 야곱이 트릭스터 유형의 좋은 사례인 것은 그가 비록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 빼앗지만, 우리가 그의 용기와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릭스터의 꼴사나운 광대 짓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미소 짓고 어여삐 여기며 심지어 존경한다. 트릭스터가 종종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삶이 온통 불공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트릭스터가 적어도 불행과 정면 대결하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27-8)


1857년, 멜빌은 고향 땅의 영혼을 소설적으로 탐사한 작품 《사기꾼: 그의 변장The Confidence Man: His Masquerade》을 발표했다. 《사기꾼》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외륜선 피델호Fidele호의 승객이 유창한 사기꾼에게 속아서 차례로 돈을 빼앗기는 풍자적인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훨씬 더 많은 층위가 있으며, 이야기가 펼쳐짐에 따라 독자는 질문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거지?” 마침내 멜빌은 교묘하고 능수능란한 문학적 눈속임으로 독자가 이 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우리 역시 속았음을 깨닫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의 삶 전체가 거대한 순회 서커스 천막이나 월 스트리트 안에서 진행된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이곳에서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피델호에 탄 사람처럼 다른 모든 이들을 속이는 것 같다. 멜빌은 선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속임수의 잔치에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지어내는 작가이며, 소설은 독자가 기꺼이 공모하는 거짓말의 직조다. 128-9)


연구자들은 멜빌이 《사기꾼》 에 집어넣지 않은 초고 한 장을 발견했다. 여기서 소설가는 자신이 ‘저자들의 저자’라고 부르는 하느님조차 인간이 처한 조건의 온갖 모순과 수수께끼를 피하지 못한다고 숙고한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근거한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은 신이 고전 신학자들이 생각한 완전성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심지어 그런 완전성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신 역시 인간이 부여잡고 고투하는 유한성의 한계를 일부 공유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서의 하느님은 신인 동형이 아니라 신인 동정이라고 주장(신도 인간처럼 기쁘고 괴로운 감정이 있다는 주장)했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는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일명 ‘케노시스kenosis’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신적 완전성을 갖췄음에도 성육신에서는 이런 완전성을 밀쳐두고 유한성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제한을 완전히 공유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멜빌 역시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130-1)


13. 하느님의 숨결과 시장의 정신


‘시장’은 불균등하거나 비대칭적인 것은 죄다 혐오한다. 마케팅, 생산, 유통은 사회 환경이 획일적일 때 더 효율적이다. 다양한 문화적 풍경과 사회적 제도, 국지적 취향과 전통 관습에 맞추기 위해 광고 카피를 끊임없이 고쳐 쓰고 판매 기법을 조정하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시장’은 〈시편〉의 작자처럼 산과 언덕은 깎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기 원한다. 주형이 깨질 때만 중요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이런 사실을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혼란을 불쾌하게 여기며, 가급적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열망한다. ‘시장’은 단색 외부 지형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예측 가능성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개심에 열려야 하는 것이다. ‘시장’의 복음은 복잡한 게 아니다. 물론 어지러울 만큼 갖가지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지만, 그 밑바탕에 놓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 복음이 하는 말은 간단하다. “이걸 사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 136-7)


14. “세상으로 나가라”


성서학자들은 오순절을 다양성의 단호한 찬양으로 해석한다. 성서는 방 안에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사도행전〉 2장 9~10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성령 덕분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 모두 그리스어나 라틴어, 히브리어로 말한 것은 아님에 주목하자. 그들은 언어적 획일성에 종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언어로 말했고 서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들이 문화적 차이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이야기를 뒤집은 일화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써서 갑자기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 오순절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우지 않은 채 좀 더 포용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 화소의 오순절은 그런 차이를 삭제함으로써 새로운(획일적인) 집단을 창조한다. 142-3)


15. ‘시장’의 교회력


‘시장’ 종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교회력을 만든다. 때로는 독자적인 축일을 고안한다. 하지만 대개 종전 종교 축제에서 생겨난 정서와 관행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며, 나름의 취지를 위해 이런 감정을 활용한다. 이런 취지가 항상 해당 축일의 원래 취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은 대체로 흡수 전략을 선호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 축일의 활기에 편승하는 게 무에서 고유한 축일을 창조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어떤 축일도 판매를 확대할 기회로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특별한 날은 충분히 많은 잠재적 고객을 끌어들일 만큼 유명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내가 최근에 직접 목격한 사례는 타미힐피거가 이슬람교 성월인 라마단을 추가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활용하려고 벌이는 캠페인이다. 타미힐피거는 이런 매혹적인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 카프탄caftan과 카울 넥cowl neck, 검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 청록색 긴소매 드레스 등을 출시했다. 150-1)


16. 모든 소원을 아시며


기업은 이른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 업체와 연결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미국 최대 데이터 중개업체는 액시엄Acxiom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액시엄은 컴퓨터 서버 2만 3,000개를 보유하고 1년에 데이터 거래 50조 건을 처리한다. 이 회사는 개인별로 13자리 숫자 고유 번호를 붙인 미국인 2억 명에 관한 ‘디지털 기록’에 평균 2,500개 데이터 포인트를 저장한다. 이 조사의 특징이 무엇이든, 마케팅 담당자들 역시 전통적인 고해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 은밀한 욕망을 발견하는 것을 훌쩍 넘어선다. 그들은 이런 욕망을 창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매일같이 우리 공간을 침범하는 광고(스팸 메일, 텔레비전 광고, 길거리 광고판, 인터넷 광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한 사람은 주변에 흘러넘치는 광고가 대부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욕망을 창조하려는 가차 없는 시도임을 안다. 이 과정은 과거 고해실처럼 종전의 열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열망을 불어넣기도 한다. 165-6)


17. ‘시장’과 세상의 종말


신학자들은 세계의 종말에 대한 관념 연구에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마지막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eschata’에서 유래했지만, 종말은 이따금 시초로 돌아가는 것이고 일부 신학에서 ‘종말’은 ‘끝finis’뿐만 아니라 ‘목적telos’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론은 점차 ‘역사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 다닌 교회학교 벽에 있던 일곱seven ‘시대dispensations’ 도표에 빠져든 것은 ‘최후의 심판 날’을 묘사한 방식 때문이라기보다 가차 없는 시대의 흐름에서 내 위치에 관한 표시가 묘한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많은 사람이 대재앙을 예상하는 종말론에 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말론은 비록 이따금 틀린 것이라도 의미와 방향, 중요성에 대한 느낌을 제시한다. 때로 사람들이 태평한 왕국 같은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고무한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이 잔인하고 과격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172)


히브리 신앙은 일신교가 아니라 단일신교henotheism이다. 〈시편〉의 다음 구절에서 핵심은 신들에게 부족해 보이는 진정한 신의 의무를 자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 하느님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셨다. /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주고, /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주어라. /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시편〉 82편 1~7절. 진정한 신에 대한 이런 기준을 감안할 때, ‘시장’은 자격 미달이다. 178-9)


18. ‘시장’의 영혼 구하기


라틴어 ‘restoratio humani(인간의 회복)’라는 구절은 인간을 만물의 질서에서 적합한 자리, 즉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질문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 답하고자 한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생명으로 화신한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화神化(theosis)라는 이 개념은 초기의 일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로마 종교의 일부 경향으로 들어갔다. 후자의 경향에서는 인간이 때로 신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취하셨다.” 하지만 결국 등장한 지배적인 모티프는 약간 다르다. 신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온 것은 인간을 신성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되어야 하는 모습, 즉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회복’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182-3)


이스라엘 학자 아비바 고틀리브 존버그Avivah Gottlieb Zornberg는 〈창세기〉에 관한 통찰력 있는 저서에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힘을 다른 중심으로 분산하느라 분주했다고 설명한다. 존버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한 일은 ‘복잡성을 증대’하는 ‘원초적인 해체’ 작업이다.  “그날 〔첫째 날〕의 주된 업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하나 됨oneness에서 하나 이상의 가능성으로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형하는 것이었다.” ‘시장’도 마찬가지로, 재창조 ‘첫째 날’ 혹은 ‘1단계’ 목표는 ‘시장’에 어울리는 건전한 자리로 그것을 회복하는 일(탈집중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날 하느님은 탈집중화를 계속한다. 하느님은 땅이 나타날 수 있도록 물과 물 사이를 가른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자기 것이 아닌 현실을 갈라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하느님은 새롭게 생긴 그 갈라진 영역 안에서 ‘권력 이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일한 과정을 도입하고, 이 요소 사이에 존재할 상호 관계의 성격을 만들었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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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를 읽다 - 유가를 중국 사상의 주류로 만든 순자를 공부하는 첫걸음 ㅣ 유유 고전강의 14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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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자에게 공정한 평가를 돌려주자


"공자는 서주西周 봉건제도의 왕관학 전통을 이어받아 특히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예와 법을 서로 관련되면서도 대립적인 두 가지 힘으로 간주했습니다. 법과 형벌을 사용하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으려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수치심이 없고 자발적인 극기克己의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로써 규제하면 진심으로 정당한 행위 법칙을 준수합니다. 확실히 예는 법보다 근본적입니다. 예는 외적인 것이지만 예의 작용은 누가 외적인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내적 원리를 인지하고 이해하게끔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윗사람을 존중하는 그의 내적인 천성을 일깨워서, 그가 예의 배후에 있는 정신을 이해하고 더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또 무의식적 습관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윗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입니다. '예'와 '예의 근본'을 강조하고 예가 사람의 내적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확실히 성선의 가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32-4)


# 왕관학王官學 : 군자의 도리와 치국 방법의 전수에 중점을 둔 고대의 귀족 교육 체계


"맹자의 시대는 장자의 시대와 대단히 가까웠습니다. 기원전 4세기 말부터 3세기 초에 해당하는 그 시대에는 수많은 유세객의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왔지요. 기준이 될 만한 답도 없고 고정된 상하관계의 틀도 없어서 모두가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고, 또 모두가 미망 속에서 분주히 답을 찾아 헤맸습니다." "당시 유세객은 누구에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을까요?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군주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귀에 거슬리고 황당한 의견이라도 그 시대의 군주들은 참고 듣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만약 듣지 않거나 두루 경청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은 의견과 주장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는 인재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불안하고 위기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 각국의 군주 앞에서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갖고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유리하고 이치에 맞는지, 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지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웅변'의 풍조가 생겨났습니다."(40-3)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 웅변의 풍조는 이미 막바지에 다다랐고, 유세객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미 칠웅은 나란히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진나라가 열국列國 가운데 가장 강대하고 무시무시한 위치를 점유했지요. 또한 이에 상응해 진나라의 부상에 관한 한 견해가 점점 더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진나라가 강대해질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진효공秦孝公이 상앙商鞅을 등용해 ‘변법’變法을 시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앙의 변법의 핵심적인 의의는 어떤 구체적인 법을 제정한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법의 지위를 봉건 종법의 규범을 능가하는 위치까지 끌어올린 데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왕자가 법을 어겨도 서민과 똑같이 죄를 지은 것”王子犯法與庶民同罪이라는 말이 그 정신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의 그 형세에서 치국治國의 가장 훌륭한 답이 이미 검증된 셈이 아니겠습니까? 웅변의 유행과 확장은 이 시점에 이르러 법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43-5)


"따라서 순자의 핵심 사상도 공자나 맹자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예가 인위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공통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성인의 지혜가 사람마다 내면에 갖고 있는 예의 정신적 질서를 정리하고 통합해 외부에 제도화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순자는 보통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성인의 차별점은 초월적 지혜로 예를 창조해 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자에 따르면 성인이 창조한 예는 보통 사람의 천성에서 비롯되지 않았을뿐더러 거꾸로 보통 사람의 천성을 다스리고 바로잡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예가 보통 사람의 천성에 위배되는 까닭은 예의 구속과 훈련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보통 사람의 천성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 ‘악한 천성’을 제한해야만 비로소 훌륭하고 질서 있는 예의 환경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예는 성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며, 보통 사람은 배움을 통해 예의 바르게 변하여 성인에 가까워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춥니다."(47-8)


2. 유가의 변모


"'분分은 순자의 사상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분은 사람이라면 응당 주어지는 신분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분을 이해하고 지킨다면 사회에는 당연히 영속적인 질서가 생기고 나라도 다스리기 쉬워질 겁니다. 반대로 가정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분을 안 지키고 분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순자는 생각했습니다." "순자가 보기에 묵가의 문제점은 가정, 국가, 천하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법도(어떠한 신분과 지위도 그에 상응하는 권리와 행위를 수반하는데, 이것 역시 ‘예’입니다)가 있는 것도 모르고 실제적인 공리와 실용만 중시하고 있어 마땅한 상하 신분 차이조차 무시한  데에 있었습니다." "순자는 법가 역시 인위적으로 제정한 법령만 중시하고 그 배후의 더 크고 높은 총체적 원칙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니 그런 법령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도 없고, 사람마다 당연히 가져야 할 ‘본분’分을 확립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60-3)


"순자의 「비십이자」非十二子의 초점은 사실 자사와 맹자이며, 이 두 명 중에서도 시간상 순자와 더 가까웠던 맹자가 초점 중의 초점입니다. 순자는 그들이 고대의 선왕을 추종한다고 하면서도 흉내만 낼 뿐 그 원리는 몰랐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멋대로 자기 능력을 과신해 원대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잡다해서 전혀 가다듬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문제의 핵심은 큰 줄기統를 몰랐던 데에 있다고도 합니다. 순자에 따르면 그들이 옛날 자료에 근거해 만든 오행(다섯 가지 옳은 행위),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학설도 부적절하고 진리를 왜곡한 것이었습니다. 이 학설은 난삽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설명이 없는데도, 그들은 논리의 허점을 가리고 꾸미기에만 열중하며 “이것은 공자의 진정한 사상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자사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그는 공자의 손자여서 더더욱 그 주장에 힘이 실렸을 겁니다. 맹자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세속의 무지한 유자들을 미혹시켰습니다."(67)


"이어서 순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공자와 염옹의 도리를 이야기합니다. 〈방법과 책략을 아우르고, 말과 행동을 같게 하고, 여러 부류를 통일하면서 천하의 인재를 모아 옛날 일을 알려 주고 가장 옳은 이치를 가르친다. 若夫總方略, 齊言行, 壹統類, 而群天下之英杰, 而告之以大古, 教之以至順.〉 “아우르고”總, “같게 하고”齊, “통일해야”壹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통합의 원리가 있어야 하고, 백성의 말과 행동은 가지런하고 일치해야 하며, 사회질서에는 고정적이며 변치 않는 신분의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하의 능력 있는 사람을 다 모아서 상고시대 선왕들의 사적을 배우게 하고, 궁극적이며 절대적이라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순자는 어지럽고 복잡한 현상을 선호하지 않았고, 인재가 개성을 발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효과적으로 엄밀하게 분류해 통일된 원리 원칙으로 귀납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69-70)


"유가는 특수한 이중성을 보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존 전통의 내용을 개량한 새로운 왕관학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주의 새로운 환경과 혼란에 대응해 나타난 ‘제자학’諸子學 중 가장 일찍 성립된 학파였습니다. ‘주례’周禮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계승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춘추시대의 변란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들은 백성이 편안히 살도록 해 주려면 정신적인 측면에서 기존 전통을 부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책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관학과 제자학이라는, 시대적으로도 내용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 지식의 조류가 유가에서 기묘하게 통합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더 심각하게 쇠퇴했고, 주나라의 전통문화도 점점 더 홀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가의 이중성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관학을 계승한 부분은 갈수록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제자학 부분은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다른 학설들과 경쟁하면서 갈수록 강화되었습니다."(93-4)


3. 유가는 쓸모가 있는가


"주공은 종법상으로 방계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적장자인 무왕의 아들을 대신해 천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참람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친형제인 관숙을 죽이긴 했지만 관숙은 다른 형제인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상나라의 잔여 세력을 이끌던 무경武庚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를 죽인 것은 포악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로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당시 형세에 대응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고 다시 그 자리를 성왕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역시 예에 어긋난 짓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사이 천하는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공 같은 성인 혹은 대유大儒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명의 대유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요한 시기에 혈연적 신분 관계까지 뛰어넘어 천자가 되어서 막대한 책임을 지고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순자의 마음 속에서 주공은 ‘유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儒之最大者이자 유자의 극치였습니다."(105-6)


"유자와 유가는 공자 시대에는 특수한 왕관학 훈련을 받은 ‘사인’士人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예와 정치의 도를 잘 알아서 군주와 대부를 보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자는 주공 같은 과거의 군주도 대유라고 하여 역시 유자로 간주하면서, 유자가 군주같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진소왕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위와 권력을 갖고 옳은 방식으로 권력을 이용해 위기를 해결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는 사람은 공자의 개념에서는 유자가 아니라 ‘성인’이었습니다. 이때에 와서 유자는 일종의 특수한 태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본래 사인의 신분과는 무관해져 군주도 유자가 될 수 있고 유자도 군주를 맡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습니다." "군주는 법가의 학설을 받아들여 ‘법가적 군주’가 될 수 있었으므로, 순자는 당연히 유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가적 군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군주가 유가를 지지하고 수용하게 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114-5)


"군자 혹은 유자의 능력은 선택적이며 어떤 포인트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팔거나 측정 도구를 능숙히 다루는 일은 당연히 농부, 상인, 장인보다 못합니다. 진정한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 검은 것은 희다 하고 틀린 것은 맞다 하며 입으로만 상대를 이겨 먹는 점에서도 혜시와 등석 같은 명가에 못 미칩니다. 군자와 유자는 일반적인 책사나 유세객이 아닙니다. 말을 위한 말을 일삼고 군주 앞에서 다른 사람을 압도하며 부귀를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자는 그런 일에 능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유자는 그런 일을 경시합니다." "사람의 덕과 능력을 비교해 그 높고 낮음에 따라 벼슬과 지위를 분배하고, 만물과 사물의 변화에도 그 기본 성격에 맞춰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유자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는 말 잘하는 신도나 묵적 같은 이도 유자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분석 잘하는 혜시와 등석 같은 이도 역시 유자 앞에서 방자하게 궤변을 늘어놓지 못하지요."(119-20)


"개인적인 관점에서도 유가는 효용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유가는 배움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맹자처럼 “사람은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순과 성인은 특정한 역사의 시공간적 조건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공로를 세운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닙니다. 전국시대의 유가는 요순과 성인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요순이 상징하던, 사람들이 가장 대단하다고 상상한 성취는 안으로 인의와 덕성을 갖추고 밖으로 인의를 실천해 천하를 복되게 할 만큼 충분한 권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요순이어도, 다시 말해 아무리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어도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은 없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맹자가 보기에 범인과 성인 사이의 접점은 공동의 선한 인성이었습니다. 순자가 보기에 그것은 배움이었고요. 누구나 배움을 원하고 배움의 방법만 알면 사인에서 군자로, 또 군자에서 성인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127-30)


4. 배우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온종일 생각만 해 본 적이 있는데 잠깐 배우느니만 못했다. 나는 발돋움해 멀리 바라본 적이 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드넓게 바라보느니만 못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손짓을 하면 팔이 길어지지는 않지만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바람을 따라 소리치면 소리가 커지지는 않지만 명확하게 들린다. 또한 수레와 말을 빌리면 걸음이 빠르지 않아도 수천 리를 갈 수 있고, 배와 노를 빌리면 물에 익숙하지 않아도 강을 건널 수 있다. 군자는 나면서부터 달랐던 것이 아니라 사물의 힘을 빌려 훌륭해진 것이다. 吾嘗終日而思矣, 不如須臾之所學也; 吾嘗跂而望矣, 不如登高之博見也. 登高而招, 臂非加長也, 而見者遠; 順風而呼, 聲非加疾也, 而聞者彰. 假輿馬者, 非利足也, 而致千里; 假舟楫者, 非能水也, 而絕江河. 君子生非異也, 善假於物也.〉" "순자는 배움의 가장 근본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옛날과 오늘날의 지식을 통해 능력을 확장시켜 타고난 한계를 넘어 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62-3)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흰 모래가 개흙 안에 있으면 더불어 모두 까매진다. 구릿대의 뿌리는 백지白芷인데, 그것을 구정물에 적셔 두면 군자도 가까이하지 않고 서민도 몸에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그 바탕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담가 둔 것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거주할 때 반드시 고을을 가리고 여행할 때도 반드시 가까이할 사람을 가림으로써 사악하고 편벽됨을 방지하고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蘭槐之根是爲芷, 其漸之滫, 君子不近, 庶人不服. 其質非不美也, 所漸者然也. 故君子居必擇鄉, 遊必就士, 所以防邪僻而近中正也.〉 환경의 중요성은 다양한 기초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환경은 영향과 감화를 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신중하게 자기가 살 곳을 고르며, 다른 곳을 여행할 때도 역시 신중하게 가까이할 사람을 고릅니다. 그래야만 편벽되고 사악해질 위험을 피하고 언제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165-6)


"배움은 변화시키는 것 말고도 한 가지 특성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축적’積입니다. 조금씩 쌓아 이루는 것이지요." "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산을 이루고 그 위로 비바람 같은 기상 현상이 늘 펼쳐집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고이고 또 고여 연못을 이루면 그 속에 이무기가 생깁니다. 선한 마음과 행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내면의 덕이 생겨 자연히 정확한 판단력과 성인의 정신이 갖춰집니다. 다리를 들어 앞으로 반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절대로 천 리 밖에 닿을 수 없습니다. 작은 물줄기가 쌓이지 않으면 강과 바다도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또한 가장 빨리 달리는 준마도 한 번 뛰어 열 걸음이나 되는 먼 거리를 가지 못하지만, 느려 터진 말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가고 또 가면 열흘이나 걸리는 긴 여정을 주파할 수 있습니다. 조각을 할 때도 칼을 대자마자 포기하면 썩은 나무조차 새기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기고 또 새기면 가장 단단한 쇠와 돌에도 원하는 모양과 무늬를 새길 수 있습니다."(169-71)


"축적은 집중력과 인내심 그리고 집요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변치 않는 굳은 의지가 없으면 배움으로 얻은 밝은 지혜가 있을 리 없고, 힘들게 몰두하는 정신이 없으면 크고 놀라운 공을 이루기가 불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호파가 물가에서 비파를 뜯으면 물고기가 깊은 곳에서 떠올라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 꼴을 먹던 말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고 합니다. 쌓은 것이 충분하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들리게 마련이고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눈길을 끌게 마련입니다(인내심을 갖고 쌓아 나가면 틀림없이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옥이 있는 산에서는 풀과 나무가 유난히 무성하고 아름다우며, 진주가 있는 연못에서는 물가의 언덕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선행을 실천하면 틀림없이 반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배움을 수단으로 삼아 집중하고 계속 쌓아 나가면 결국에는 사람들을 더 훌륭하게 변화시켜 더 훌륭한 사회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자가 고수한 신념입니다."(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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