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H2O인가? -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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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최신 과학은, 물은 단순히 H2O라는 견해를 더는 지지하지 않는다. 물은 중수소를 비롯한 드문 동위원소들을 포함하고 있을뿐더러, 물의 익숙한 화학적 물리적 속성들은 다양한 이온들의 존재와, 인접한 물분자들 간의 끊임없는 결합 및 재결합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 단일분자의 화학식 H2O는 이 같은 물 분자들의 상호작용을 은폐한다. 만약에 우리 앞에 H2O 분자들이 단순히 쌓인 무더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물로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은 H2O다'라는 견해는 물의 구조에 관한 진리의 중요한 요소 하나를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탐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견해를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오히려 그 견해는 계속 전진하는 과학의 서사시에서 하나의 중요한 휴식 지점이었을 따름이다. 이 예에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과학자들이 이미 수정한 단순소박한 과학적 진리에 교조주의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다."(23-4)


1장 물과 화학혁명


1.1 요절한 플로지스톤


"프리스틀리(1733~1804)는 새로운 공기들을 가장 많이 발견하고 생산한 인물이었다. 그의 연구 이후, 평범한 공기는 최소한 두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화학반응에 의해 다양한 유형의 공기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정착했다." "프리스틀리는 '탈脫플로지스톤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평범한 공기에 섞여 있는 '플로지스톤'을 제거하고 남은 공기를 가리키기 위하여 그 문구를 사용했다. 플로지스톤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가연성의 요소였다. 여기에서 '요소'란 영어로 'principle'인데, 현대적 어법에서 'principle'은 '원리'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물질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고유한 속성들을 그 물질들에 부여하는 어떤 근본적인 물질을 뜻했다. 플로지스톤은 가연성 물질들에 가연성을 전달해주는 요소였다. 가연성 물질은 플로지스톤을 풍부하게 보유한 물질이었고, 그런 물질은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을 방출했다."(39-42)


"라봐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들과 관찰들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연소는 녹슮(프리스틀리는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하면, 금속은 자신의 핵심 속성들을 잃고 '금속회calx'로 변환된다고 생각했다)과 마찬가지로 산소와의 결합이었다. 프로스틀리가 탈플로지스톤화를 본 곳에서 라봐지에는 산화를 보았다. 라봐지에가 비춘 빛을 보고 난 화학자들은 다시는 플로지스톤을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과학혁명에서 패배한 진영이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토머스 쿤조차도 프리스틀리에게는 놀랄 만큼 냉담했다. 물론 라봐지에 화학에 대한 프리스틀리의 저항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었다는 점은 부정했지만, 쿤은 프리스틀리가 그토록 오래 저항한 것은 무리한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속한 전문가 집단 전체가 견해를 바꾼 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람은 그 저항으로 인해 과학자이기를 그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44-5)


"다원주의적 기획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1)과학자들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을 거부함으로써 상실한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한낱 이론보다 더 많은 것이 결부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론' 대신에 '시스템'이라는 표현을 쓸 것이다.) 바꿔 말하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했고 산소주의 시스템은 할 수 없었던 좋은 것이 있었을까? 과학혁명은 전형적으로 그런 지식의 상실을 동반한다고 쿤은 생각했다. 그를 기리는 뜻에서, 이를 '쿤 상실Kuhn loss'이라고 부른다. (2)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발전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이론의 때 이른 죽음 때문에 발전이 지체되거나 가로막힌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 (3)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이 둘 다 있었을 때,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이로운 결과들이 있었을까? (4)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 사이에서 이로운 상호작용이 계속되었을까?"(59)


1.2 플로지스톤이 살아남았어야 하는 이유


"(양 진영의 '인식적 가치들의 어긋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순성'과 '완전성'의 대립이었다. 산소주의자들, 특히 라봐지에 본인은 단순성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특히 우아함이라고 할 만한 유형의 단순성이 중시되었다. 플로지스톤주의자들, 특히 프리스틀리는 완전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주어진 문제 영역에 속한 모든 관찰된 현상들과 그것들의 모든 관찰된 측면들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라봐지에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견해에 멋지게 들어맞는 모범적인 사례들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더 지저분한 사례들은 제쳐놓기를 좋아했다. 반면에 프리스틀리와 몇몇 플로지스톤주의자 동료들은 자신들이 산출하고 관찰한 모든 주요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설령 더 난해한 사례들에서는 설명들이 어색해지더라도 말이다. 단순성이나 완전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각 진영이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그 가치들을 강조하는 정도, 혹은 그것들에 집착하는 정도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80-1)


"단순성과 완전성 외에 더 광범위한 유형의 인식적 가치들도 역할을 했다. 일종의 인식적 보수주의는 많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옹호한 가치들 중 하나였다. 반면에 산소주의자들은 개혁 혹은 참신함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이 견해들 중 어느 쪽이 가장 참된지를 실험으로 판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플로지스톤 원리가 모든 현상들을 적어도 라봐지에 씨의 원리에 못지않게 잘 설명하므로, 나는 플로지스톤 원리를 고수해왔다.〉 확실히 여기에서 나타나는 캐븐디시의 기질은 라봐지에가 1773년에 자신의 연구들은 〈물리학과 화학에서 혁명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드러낸 젊은 열정과 의미심장한 대비를 이룬다." "그렇지만 프리스틀리는 〈자유로운 토론은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플로지스톤을 옹호하는 많은 논증들의 동기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 라봐지에주의의 교조주의에 맞선 다원주의였다."(86-7)


"양 진영은 모두 통일성에 가치를 두었으며, 각 진영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유형의 통일성을 자신을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로 거론했다. 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수렴이 존재했다. 양 시스템 모두 연소, 녹슮, 호흡을 유사한 방식으로 통일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통일되는가, 하는 것에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유사하지만 더욱 두드러진 양상은, 양 진영 모두가 '체계성'systematicity을 중대한 가치로 여기면서 서로 상대 진영은 체계성 없이 자의적이고 무계획적이라며 비난했다는 점이다. 플로지스톤주의 진영에서 라봐지에주의자들에 대하여 제기한 비난은, '유사한 결과에 유사한 원인을 배정한다'는 규칙을 그들이 충실히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봐지에도 할 말이 있었다. 그는 다양한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다양한 새 현상들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애쓰면서 이론에 도입한 수많은 복잡한 대책들과 상호모순적 변화들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92-3)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제각각 화학물질의 근본적 존재론에 관한 중요한 형이상학적 교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자는 합성주의compositionism의, 후자는 요소주의principlism의 특수한 구현 사례였다." "합성주의 시스템-유형의 근본적인 인식활동 하나는 화학물질을 원소로서, 혹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화합물로서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더 실험적인 활동들이 있었다. 즉, 화합물을 원소들로 분해하기, 그리고 그 원소들로부터 그 화합물을 재합성하기가 있었다. 분해와 재합성 둘 다 할 수 있을 경우, 그것은 해당 물질의 조성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증명으로 간주되었다. 이 실천들은 성분들이 화학반응 내내 보존되는 안정적 단위들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했다. 또한 그 전제는 화학반응을 각각 특유하고 안정적인, 설령 합성 상태에서는 그것들의 속성이 표출되지 않더라도 내내 동일성을 유지하는 블록들의 재배열도 설명하는 활동을 떠받쳤다."(113-4)


"18세기에 합성주의 화학의 주요 경쟁자는 요소주의였다. 요소주의는 '요소' 개념, 곧 특정 속성들을 다른 물질들에 주는 근본물질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시스템-유형이다. 요소주의에서 핵심적인 인식활동들은 관찰 가능한 속성들에 따라 물질들을 분류하기, 요소들을 지목함으로써 물질의 속성들을 설명하기, 요소들을 추가함(혹은 빼냄)으로써 물질들을 변환하기였다. 합성주의와 마찬가지로 요소주의 시스템-유형도 많은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그것들 모두는 위의 세 가지 핵심 활동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요소주의 존재론은 요소들과 요소들에 의해 변환되는 기타 물질들 사이의 비대칭성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요소들은 능동적이었고, 기타 물질들은 수동적이었다. 요소주의에는 과거의 잔향殘響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바탕에 깔린 원소들이 요소들의 영향으로 달라진다는 과거의 형이상학, 심지어 물질이 형상을 부여받는다는 과거의 형이상학이 남아 있다."(115)


"요소주의와 합성주의 사이의 생산적 갈등은 화학에서 건강한 다원주의가 유지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합성주의가 더 순수한 형태로 발전하고 라봐지에로부터 돌튼과 그 이후까지 당당히 행진하며 점점 더 지배력을 강화함에 따라, 화학의 주춧돌을 다음과 같은 삭막한 선택의 문제로 간주하게 만드는 유혹도 커졌다. '단순소박한 원자론에 동의하라. 아니면, 화학적 물질에 관한 어떤 존재론적 논의도 포기하라.' 이것은 몇몇 논평자들이 19세기에 있었던 원자론과 실증주의의 대립을 서술하기 위하여 뽑아낸 문구다. 만약에 화학자들이 기본적인 합성주의를 유지하면서도 플로지스톤주의-요소주의의 성취들을 더 잘 알았다면, '원소'를 보는 더 유연한 관점과 '무게 없는 물질'에 대한 더 섬세한 해석을 발전시켜 전기와 열역학을 화학 안에 더 쉽게 편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얻어졌을 혜택 하나는 그 시스템이 미해결 문제들을 일깨우는 구실을 했으리라는 것이다."(139-40)


1.3 선택, 합리성, 대안


"합리성의 의미에 관한 보편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여기에서 몇 마디 말로 그런 합의를 제조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유익한 논점 몇 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그 논점들은 보편적 승인을 받아야 마땅하다. 첫째, 합리성은 진리에 관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합리성은 그때그때의 지식 혹은 믿음을 감안하면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는 좋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합리적인 판단들은 (궁극의 진리 따위가 있다면) 궁극의 진리를 한참 벗어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채택해야 하는 근거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합리적 사고 혹은 논의는, 아무튼 의식적 숙고가 존재하는 한에서는, 해당 공동체 내부에서 합의된 모종의 규칙 혹은 방법을 따른다. 셋째, 중요한 것은 합리성의 최소 조건이다.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면, 합리적 행위는 행위자가 밝힌 목표를 성취하거나 적어도 행위자가 특정 목표에 기여하는 행위로서 의도한 것이어야 한다."(141-2)


"충분히 납득할 만하게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반사실적 사고思考를 경계하고, 그런 사고는 실제 증거에 기초하지 않으므로 타당성이 없으며 명확히 정해진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고 염려한다. 반사실적인 것들은 소설가에게는 흥미로운 영역일지 몰라도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제는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 때문에 반사실적 역사를 연구한다." "첫째 이유는 인과론적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나는 반사실적 추론이 역사에 대한 인과론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제프리 호손의 주장에 동의한다. 〈X가 Y를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약에 X가 없었다면, Y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취지의(대게는 이런 확정적 진술보다 더 약한 형태의) 반사실적 진술을 하는 셈이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다루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상식이다." "한낱 상관성을 넘어선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모종의 반사실적 진술들도 수용할 용의가 있어야만 한다."(164-5)


"반사실적 추론의 둘째 목적은 우리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아는 바와 우리가 가능성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바에 의해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적당량의 반사실적 추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개방시켜주는 이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강조되지 않은 반사실적 역사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궁극적으로 나는 실제 역사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들을 단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과거에 실제로 선택되지 않은 가능한 발전 경로를 살려내야 할지, 또 어떻게 살려낼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으려면, 우선 그 경로가 선택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반사실적 역사는 더 능동적인 단계를 위한 예비 작업, 타당성 조사, 심지어 행동 계획으로 기능한다. 반사실적 추론은 선택되지 않은 경로들을 상상으로 따라가면서 어떤 길이 뚫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유망한지 판단하는 정찰 작업으로 구실할 수 있다."(167-9)


2장 전기분해: 혼란의 더미와 양극의 당김


2.1 전기분해와 그 불만


"물의 전기분해 실험이 라봐지에의 새로운 화학이 수용되는 것에 중요하게 기여했다고들 하지만, 산소와 수소가 혼합된 채로 산출되었기 때문에 이 실험은 깔끔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혼합 기체에 다시 스파크를 가하여 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소량의 혼합 기체를 쉽게 성분들로 분리하여 수소와 산소의 존재를 다른 방법으로 입증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니컬슨-칼라일 실험에서는 수소와 산소가 깔끔하게 분리된 채로 산출되었다." "그러나 니컬슨-칼라일 전기분해의 그 깔끔함은 또한 심층적인 문제 하나를 들춰냈다. 전기의 작용으로 물 분자 각각이 산소 입자와 수소 입자로 분해되는 것이라면, 왜 그 두 기체가 같은 장소에서 나오지 않고 거시적인 거리만큼(거뜬히 1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두 위치에서 나올까? 또 왜 산소는 전지의 양극과 연결된 전선에서 나오고 수소는 음극과 연결된 전선에서 나올까? 거리 문제는 분해된 물질들의 조성에 관한 전기분해의 함의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 듯 했다."(180-1, 188)


"19세기 초반의 전기화학을 돌이켜보면, 이 분야에서 미시적 이론의 구성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전기분해는 시대를 너무 많이 앞서간 실험 기술이었다. 우선, 전기분해의 메커니즘에 관한 신뢰할 만한 가설을 세우려면, 물을 이룬다고 추정된 원자적 입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관한 명확한 아이디어들이 필요했다. 어떻게 전기가 원자들을 떼어놓는가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려면, 무엇이 원자들을 함께 묶어놓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전기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심지어 전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지배적인 견해는 전기가 플로지스톤이나 칼로릭, 자기magnetism와 마찬가지로 무게 없는(또는 '미묘한subtle') 유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전기 유체가 존재하며 그것의 상대적 과잉과 결핍이 양전하와 음전하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들과 양전기 유체와 음전기 유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다."(202-3)


2.2 굴하지 않은 전기화학


"19세기 후반, 전기분해에 관한 새로운 존재론이 등장했다. 그 존재론은 거리 문제 자체의 바탕에 깔린 중요한 전제 하나를 부정했다. 〈만일 전기분해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기의 작용으로 물 분자 각각이 분해되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새로운 존재론의 핵심은 자유이온으로의 해리였다. 즉, 일부 물분자들은 외적인 전기를 가하기 전에도 이미 전하를 띤 이온들로 분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이온들이 액체 전체에 퍼져 있다가 자기가 보유한 전하에 맞게 전극들에서 선택된다." "물-화합물 전기화학은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 출발점을 수정하고 개선했다. 초기 전기화학(또는 초기 원자론)의 많은 부분이 물이 HO라는 전제에 기초하여 발전했다. 그러나 원자론 화학이 성숙하고 전기화학이 자유 해리의 개념을 받아들이자,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물의 화학식은 H2O로, 물의 이온 조성은 H+와 OH-로 바뀌었다. 물은 여전히 화합물이었지만, 처음에 상상된 단순한 수소-산소 화합물이 아니었다."(233-7)


# 물-화합물 전기화학 :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주장. 이에 맞서 물이 다른 원소와 결합(합성)될 수 있는 하나의 원소라는 주장이 있었다.


"19세기 전기화학이 명확한 패러다임을 보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중요하게 명심해야 할 점은 당시의 이론적 상황은 완전한 카오스가 아니라 '조율된 다양화'라는 것이다. 물-화합물 전기화학의 확증은 주로 실험 영역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험에 대한 몇몇 근본적인 이론적 해석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도 그 확증에 기여했다." "19세기 전기 화학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전-과학pre-science도 아니고 정상과학 기간들 사이의 혁명적 격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수의 시스템들이 공존하는 지속적 다원성이다. 다양한 시스템의 창조자들과 옹호자들은 출판된 글과 사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잘 소통했다. 시스템들과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대체로 생산적이었다. 현대 철학과 다르지 않게, 19세기 전기화학은 견해의 불일치, 논쟁, 토론을 기반으로 번창하는 분야였다. 지속적으로 견해가 어긋나는 학자들의 공동체를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개념적 관습적 공통 기반이 존재했다."(246-7)


2.3 전해질 용액 속 깊숙이


"나는 특히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흔하지만 일부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사회학자들도 공유한 암묵적 전제 하나를 반박하고자 한다. 그 전제는 더 다원주의적이었던 과학의 단계들에 계속 집중하는 것보다 합의의 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지프 슈왑의 생각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쿤의 정상과학/탈정상과학 구분과 슈왑의 안정적/유동적 탐구 구분은 매우 유사하지만, 과학의 발전이 계속되면 점점 더 많은 연구가 유동적 탐구에 할애된다는 것이 슈왑의 견해였다. 쿤이 말한 탈정상과학과 슈왑이 말한 유동적 탐구는 다원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띤다. 그러므로 과학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런 과학 단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심지어 쿤이 말한 정상과학에서도 연구의 최전선은 슈왑이 말한 유동성을 어느 정도 띠어야 한다. 모든 과학 분야의 근본적 논쟁이 깔끔한 종결에 이르는 때가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생각은 그럴싸하지 않은 생각이다."(263-4)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적 과학 단계가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며 따라서 더 통일된 단계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과연 옳은지도 불명확하다. 찬란한 통일과 합의의 순간은, 기초적인 수준의 통찰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그리 유용하지 않은 깨달음의 순간epiphany moment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 순간은 '과도한' 단순화와 '과도한' 확신의 순간이며, 그 다음에 과학자들은 대개 더 현실적이고 노련한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 다시 난점들, 예외들, 문제들, 흠집들, 숨어 있는 개념적 불합리들, 역설들, 실패한 예측들,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현상들을 다룬다. 분자유전학이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왓슨과 크릭의 '중심 교리'를, 곧 정보가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로 흘러간다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생각을 벗어난 덕분이었다. 만약에 코페르니쿠스적 천문학이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등속원 운동에 대한 황홀한 애착에 머물렀다면, 그 천문학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264-5)


3장 HO일까, H2O일까?: 원자의 개수를 세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3.1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셀까?


"당시에는(심지어 지금도) 개별 원자들을 직접 관찰할 길이 없었다. 분자 속 원자들을 개별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원자들의 개수를 셀 수 있을까?" "물의 전기분해 직후, 원자론이 등장했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화학적 원자론은 잉글랜드 북부의 과묵한 교사 존 돌튼(1766~1844)의 작품이다." "돌튼의 주요 업적은 익숙하고 오래된(심지어 고대에도 있었던) 원자 개념을 18세기 합성주의 화학과 융합하여 19세기 원자화학으로 이어지는 필수 연결고리를 창조한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화학물질들이 서로 결합할 때 따르는 비율의 놀라운 규칙성을, 화학결합이란 명확히 정해진 무게를 지닌 원자들의 결집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많은 화학자들은 돌튼의 원자를 곧이곧대로 믿기를 꺼렸지만, 기본 물질들(원소들)을 이루는 모종의 원자적 단위들의 결집과 재결집을 통해 화학반응을 개념화하는 것은 머지않아 통상적인 실천으로 자리잡았다."(292-4)


"자신이 말하는 원자들을 직접 관찰하기는 불가능함을 인정한 돌튼은 물 분자가 단순하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HO에 도달했다. 그가 아는 한에서,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은 물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물의 조성이 최고로 단순한 조성, 곧 수소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하나의 조합이 아니라고 그가 추측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물론 물 분자가 수소 원자 24개와 산소 원자 37개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 왜 그렇게 추측해야 할까?" "실제로 돌튼은 동일한 원소의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이한 원소들의 원자들과 달리) 화학적 친화성에 의해 서로에게 끌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학적 친화성이 있다면, 원자들 각각이 보유한 칼로릭의 척력과 화학적 친화성이 균형을 이뤄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내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만일 한 분자를 이룬 유사한 원자들의 개수가 더 많다면, 그 분자는 덜 안정적일 것이었다. 따라서 물은 HO여야 했다."(298-9)


"조제프루이 게이뤼삭과 돌튼은 둘 다 기체가 열에 기체가 열에 반응하여 보이는 행동을 연구하여 처음으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 관심을 화학결합으로 돌린 게이뤼삭은 계속해서 기체에 초점을 맞췄고 무게가 아니라 '부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끝에, 기체들이 서로 화학적으로 반응할 때는 (압력과 온도가 동일한 경우) 아주 단순한 부피 비율로 반응한다는 놀라운 일반적 규칙성을 발견했다. 예컨대 부피 2의 이산화탄소는 부피 1의 산소와 결합하여 부피 2의 탄산이 되었다. 부피 1의 질소는 부피 3의 수소와 결합하여 부피 2의 암모니아가 되었다. 물도 다시 등장한다. 일찍이 캐븐디시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을 형성할 때의 부피 비율이 2:1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물은 H2O라는 것이 뻔히 드러난 것이 아닐까? 그렇다. 하지만 그 그림의 암묵적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즉 동일한 부피의 모든 기체는 동일한 개수의 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그러하다."(307-8)


3.2 원자화학에서 다양성과 수렴


# 당대에 제기된 원자화학 시스템들

1. 무게 유일 시스템(돌튼)

2.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베르셀리우스)

3.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아보가드로)

4. 치환-유형 시스템(샤를 게르하르트)

5.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월라스턴)


"이런 질문이 떠오를 만하다. 원자화학 이야기가 다원주의의 작동을 멋지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이제 더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화학식 H2O와 같은 영원한 성취들이 '일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안을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정합성이다. 우리가 특정 시스템들 안에서 연구하고 있다면, H2O에 대한 불신은 당연히 우리의 실천 시스템 안에서 모종의 비정합성incoherence을 야기할 것이다. 1860년대 이후에 HO를 고수하면서 유기 구조 화학을 실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먼지가 가라앉은 지금,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물은 H2O가 아니라고 보는 화학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화학의 진화 계보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영원하며 변경 불가능한 성취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는 특정한 성취가 앞으로도 확고할 경계를 긋고 그 확고함이 존속하는 한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다."(401)


"고찰해야 할 또 다른 사안은 성공이다. 무게 유일 시스템이나 구식 이원주의 시스템 및 실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물을 HO로 보는 화학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물을 HO로 보는 다른 원자화학 시스템들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원자를 상정하지 않는 화학 시스템들도 실제로 있었다. 우리가 H2O를 배타적이며 영구적으로 선호하려면, 그 대안적인 시스템들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앞으로 성공적일 가망도 없다고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 확신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확신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의 지식이나 경험을 보유하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성공을 증가시키리라고 스스로 진지하게 믿는 바를 실천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전망이 암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장의 포기는 우리가 보장 없이 성취해온 바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401-3)


3.3 복잡한 화학에서 미묘한 철학으로


"여기에서 나는 작업주의operationalism와 표준적인 경험주의를 구별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경험주의는 관찰 가능한observable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데 집중한다. 반면에 작업주의의 초점은 '실행 가능한'doable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찰 가능성은 인간의 감각 기관들이 감각을 향상시키는 장치의 도움을 받거나 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개념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원자와 분자를 이런 의미에서 관찰 가능하게 만들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자와 분자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화학자들은 원자와 관련된 다양한 속성들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원자를 작업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측정은 수동적 관찰이 아니다. 왜냐하면 측정은 잘 정의된 특정 작업들의 계획적 수행에 의존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점은 비록 원자 자체는 관찰 불가능한 상태로 머물러 있더라도, 원자화학은 이런 식으로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이다."(406-8)


"19세기의 원자화학자들은 원자를 실재론-비실재론 스펙트럼상의 어느 한 위치에 놓기 어렵다는 철학적 태도를 취했다. 무게 유일 시스템에서는 어떤 불명확한 무게의 보유자로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과 인정은 있었지만 그 외의 의미에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딱히 없었다. 심지어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도 원자의 물리적 속성들로서 무게와 부피를 인정할 따름이었다.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에서는 실재론적 믿음이 조금 더 깊었다. 이 시스템은 전하를 띠었으며 경계가 명확한 입자로서의 원자들과 그것들이 서로에게 발휘하는 힘들을 상상했다. 치환-유형 시스템은 원래 무게 유일 시스템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원자의 실재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다만, 이 시스템은 기radicals에 화학적 단위로서의 실재성을 부여했다.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은 원자들 사이의 위상수학적 공간적 관계의 실재성을 믿고 인정했지만, 이 관계는 분자들의 실재적인 3차원 모양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았다."(418)


"나는 원자 개념의 작업화를 원자화학자들이 이뤄낸 성공의 열쇠로 지목해왔다. 19세기 화학자들의 다수는 원자의 존재에 관한 비생산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구체적인 실험적 이론적 연구에서 원자 개념을 활용 가능하게 만다는 다양한 길들을 추구했다." "일반적으로 퍼스에게서 유래했다고 여겨지는 신념, 곧 탐구의 길들이 결국엔 진리로 수렴할 것이라는 신념을 나는 배척한다. 오히려 나는 '결국'은 끝내 도래하지 않고 탐구는 영영 종결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진정으로 실용주의적인 인식론은 궁극적 수렴을 증명하려 안간힘을 쓰거나 진리의 의미를 성공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집중하는 대신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알고 사는가를 고려한다." "19세기 전반기 원자화학자들의 공동체에는 (실용주의의 한 요소인) 오류가능주의 정신이 명백히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오류가능주의는 내가 서술한 원자화학 시스템 다섯 개의 번창과 동시에 나타난 굳센 다원주의를 뒷받침했다."(422-3)


4장 능동적 실재주의와 H2O의 실재설


4.1 물은 실재적으로 H2O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뒤엠 문제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뒤엠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심화하는 것이다. 그 통찰에 덧붙여, 믿음은─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행위와 뗄 수 없게 얽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설의 검증에만 보조 전제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채택하는 임의의 검증 방법은 오로지 그 방법과 정합하는 다른 인정된 '실천들' 혹은 인식활동들의 맥락 안에서만 타당하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가설을 검증하는 활동은 오직 실천 시스템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이론의 입증은 오직 실천 시스템의 성공의 일부로서만 이루어진다. 사용 가능한 가설이나 이론은 어느 것이든지 실천 시스템 안에 내장된embedded 채로 등장한다. 이론은 실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데, 실천 시스템의 성공과 별개로 이론의 옳음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따라서 어떻게 이론들이 선택되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 시스템들이 선택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433-4)


# 뒤엠 논제Duhem thesis : 〈한 실험의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실험을 보증하는 이론들의 집단 전체를 신뢰하는 것에 기초한 행위다.〉 그러므로 실험은 〈고립된 가설을 결코 반박할 수 없고 이론적 집단 전체만 반박할 수 있다〉


"모든 관찰자가 보기에 적당히 안정적인 현상들의 영역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영역을 개념적으로 또 물리적으로materially 세분하고 정리하는 방법들은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 그 자체는 깔끔하게 세분되어 분류 상자들에 담긴 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 상자들을 스스로 발명해야 하고, 거기에는 우리가 고안하는 어떤 상자 시스템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있을 개연성이 높다. 분류를 위한 최선의 일반 원리는 중요한 차이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만, 몇몇 맥락들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들이 다른 맥락들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대다수의 화학적 상황에서 우리는 주어진 원소의 모든 동위원소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똑같은 원소로 취급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상황들에서는 동위원소의 다양성이 온갖 차이를 만들어내는데도 말이다(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부터 원자폭탄까지 온갖 것들이 작동하게 한다)."(447)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둘 것은 나의 진리 개념에 내재하는 다원주의다. 나의 진리 개념은 본래적으로 성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에는 다원주의가 내재한다. 현실의 삶에서 무릇 성공은 제한적, 상대적, 잠정적 성공이다. 설령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의 진리성이 전적으로 정확하고 확실하더라도, 그 진리성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그 시스템 자체에 대한 우리의 수용이 확정적인 만큼만 확정적이어야 하며, 그 수용은 다시금 그 시스템이 계속 성공적인 때만 보장된다. 성공은 역동적인 기준이며, 상대적 성공의 판정은 배제하기 게임이 아니라 용인하기 게임이다. 잠정적 성공은 '머무르기에 충분할 만큼 좋음'에 달려 있다. 래리 라우단이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추구pursuit이지, 수용acceptance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특정 시스템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시스템들이 단절되어야 한다거나 아무도 다른 시스템을 선택하면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450-1)


4.2 능동적 과학적 실재주의active scientific realism


"내가 '표준적 (과학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과학적 이론들은 (적어도 근사적이거나 부분적인) 진리를 보유했다는 믿음이다." "반면, 내가 말하는 과학적 실재주의는 우리가 실재와의 접촉을 추구하되 우리의 배움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능동적' 교설이지, 우리가 우주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거나 얻어왔는지에 관한 탁상공론식 서술이 아니다." "표준적 실재론의 표어가 진리라면, 능동적 실재주의의 표어는 '진보'다. 몇몇 극단적인 반실재론들과 달리 능동적 실재주의의 관점에서는, 관찰 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이론이 우리를 실재에 관한 더 많은 발견들로 이끄는 발견적heuristic 힘을 지녔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나 기타 반실재론이 실재가 어떠하고 어떤 유형의 이론들이 허용 가능한지에 관한 불필요하고 제약적인 표준-실재론적 전제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 실증주의를 비롯한 반실재론은 능동적 실재주의에 도움이 될 수 있다."(468-70)


"포퍼-쿤 논쟁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각각의 새 이론은 앞선 이론보다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할 때 포퍼는 능동적 실재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일원주의적 색채를 상당히 띤, 연속성에 대한 부당한 요구를 덧붙였다. 〈새 이론은 아무리 혁명적이더라도 항상 앞선 이론의 성공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쿤은 포퍼 풍의 연속성 요구가 지닌 한계를 꽤 명확하게 알아챘기에,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 사이의 비정합성과 한 패러다임에서 다음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 일어날  때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발생하는 지식의 상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쿤의 과학관조차도 일원주의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분야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이 독점권을 누리는 것을 정상과학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했다. 이런 패러다임-일원주의에서, 또 패러다임 이행기의 '쿤 상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에서 쿤은 능동적 실재주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했다."(471-2)


4.3 표준적 실재론의 파리 병에서 빠져나가기


# Truth의 다섯 가지 의미

(Truth1) 본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와 정확히 대응하게 진술한다는 의미의 truth(진리) 개념. 이 의미의 truth는 대응에 관한 것이지만 단지 내가 말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바 사이의 대응에 관한 것일 뿐이다.

(Truth2) 정의에 따라 truth인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정의를 내리고 사용하고 들이댐으로써 구성하고 판정하고 주장하는 truth(진리)다. 〈미터원기의 길이가 1미터라는 것은 당연히 진리true다.〉

(Truth3) 일부 truth는, 우리가 그것을 주어진 바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활동할 때, 전제-채택presumption에 의해 진리true로 된다. 그 전제-채택이 의식적이고 명시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truth를 '공리axiom' 또는 '공준postulate'이라고 부른다. 〈빛의 속력은 관찰자나 광원의 운동과 상관없이 동일하다.〉

(Truth4) 논리학의 맥락 안에서 명제들은, 당사자의 작업이 속한 논리 시스템의 공리들에 따라서, 다른 진리true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면 진리true다. 〈명제 P가 진리면, P의 대우contrapositive도 진리다.〉

(Truth5)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가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옳음correctness 검사를 '상황의존적으로'contingently 통과하면, 우리는 그 명제를 진리true로 인정한다.


"능동적 실재주의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진리 개념은 진리5(Truth5)다. 능동적 실재주의는 이 진리5를 끊임없이, 또한 겸허하게 탐색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나머지 진리1부터 진리4까지 각각도 탐구에 필수적인 다양한 인식활동들과 연결되어 있다. 즉, 경험의 보고, 개념의 정의, 탐구를 가능케 하는 전제의 채택, 논리적 도출과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진리의 다섯가지 의미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의미들은 효과적인 탐구에서 서로 조화롭게 연결된 활동들에서 유래한다. 각각의 시스템 안에서 진리5를 탐색하는 활동은 바라건대 실재에 관한 앎을 산출할 것이다. 서로 다른 시스템들 안에서 입증된 진리5들 사이의 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런 진리5들은 서로 일관될 수도 있고 비정합적일 수도 있다. 혹은 서로 관련이 없다시피 할 수도 있다. 능동적 실재주의는 각 시스템에서의 진리5 탐색을 옹호하며, 또한 진리5의 탐색을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시스템들의 육성을 옹호한다."(513-4)


"경험적인 사안들(진리5의 후보로 머물러 있는 명제들)을 다룰 때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확실성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잘해나갈 것인가다. 오늘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확실성보다 확률을 더 많이 거론하곤 하는데, 이는 건강한 경향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몇몇 베이즈주의 전통들에서는, 확률을 진리와 확실성 모두의 대리물로 취급하면서 우리의 탐구가 계속되면 확률이 상승하여 1에 접근함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려는 충동이 있다. 이 기획에서 확률의 개념은 제 '쓰임새'를 잃고 '근사적 진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역할만 하게 된다. 이것은 온당치 않다. 확률의 진짜 쓰임새는, 바로 확률값이 1이나 0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확률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애써야 할 것은 계획 수립을 위하여 '안정적인' 확률값들에 도달하는 것이지, 확률값들이 0이나 1에 접근하리라는 헛된 희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다."(516)


"'물'의 외연은 〈H2O 분자들로 이루어진 모든 전체들〉이라는 퍼트넘(1975b)의 생각은, 40년 전에 나왔으며 당시에도 이미 시대에 뒤처진 생각이었다." "헨드리(2008년)는 현재 화학에서 통용되는 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거시적인 물 집단body은 다양한 분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역동적인 뭉치congeries이며, 그 안에서는 개별 분자들의 해리, 이온들의 재결합, 소중합체들oligomers의 형성, 성장, 해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H2O 분자들 사이에서 그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물은 우리로 하여금 물을 물로 인정하게 만드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큐리얼의 도발적인 말마따나 〈얼마나 순수하거나 작은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태나 환경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어떤 분량의 물도 물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H2O 분자들이 모여 이룬 임의의 더미를 물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면 최신 과학을 위반하게 된다."(525-6)


5장 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


5.1 과학이 다원주의적일 수 있을까?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겸허함'이다. 프리스틀리는 인식적 겸허함에 대해서 특히 교훈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개념은 역동적이었다. 〈모든 각각의 발견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것들을 우리의 시야 안에 가져다놓는다.〉 그는 대단히 멋진 이미지를 떠올렸다. 〈빛의 원이 커질수록, 그 원을 둘러싼 어둠의 경계도 더 커진다.〉 지식이 늘어나면, 무지도 늘어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자각하는 무지의 범위도 늘어난다. 프리스틀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많은 빛을 얻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만족스러운 관조의 범위를 확장하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빛의 경계는 더욱더 확장될 것이며, 신의 본성과 창조물들의 무한함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끝없이 진보하리라고 우리 자신에게 약속해도 된다. 이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전망이다.〉"(532-3)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상대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적어도 어느 정도 동반하는 반면, 다원주의는 더없이 분명하게 그런 포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숙한 다원주의적 태도를 지닌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과 생산적으로 관계 맺는다. 이런 태도를 갖춘 인물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상대주의자의 캐리커처, 곧 '아무것이나'라고 말하는 사람과 전혀 딴판이다." "상대주의가 단지 존재'하는' 모든 대안들 각각을 동등하게 취급할 것만을 주장한다면, 다수의 대안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요구는 없는 것이다. 모두가 실제로 무언가에 동의하고 아무도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상대주의는 그 상황에 강하게 반발할 길이 없다." "〈'다원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다원성'의 요구다.〉 다원주의에서 관건은 실제로 다수의 시스템들이 공존할 때 얻어지는 혜택이다. 따라서 나의 다원주의 구호는 '어떤 것이든지 좋다Anything goes'가 아니라 '많은 것들이 좋다Many things go'이다."(544-5)


"과학을 모범으로 삼아 사회를 조형하려 한 근대주의적 프로젝트인 과학주의scientism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좋은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으로 여기는 것을 모범으로 삼아 과학을 조형하는 시도를 해볼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의 장점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지저분한 정치의 세계로부터 겸허하게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실패한 정치 시스템들도 인해 무수한 개인들이 겪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여러 세기에 걸쳐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다. 현재의 다원주의적 자유민주주의 형태들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형태들이 우리를 훨씬 더 나쁜 과도함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원주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투박하다. 즉, 일당독재를 피하고 적어도 양당 시스템을 두라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전체주의보다 여러모로 덜 효율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효율성이 사악한 목적에 종사하면 악몽을 빚어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539, 551)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유일무이한 진리를 탐색할 때 봉착하는 가장 명백한 난관은 우리가 그런 진리를 획득했는지 여부, 심지어 그런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과학적 진보의 역사는 오늘 가장 선호되는 경로가 내일은 가장 유망한 경로가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뉴튼 역학의 공식들은 속도가 낮은 상황에서 성립하는 특수상대성이론의 한계 사례로서 살아남았지만, 이 생존은 그 새 이론에서 절대공간 및 절대시간 개념의 설득력이 보존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의 전반적 성공은 그 뒤를 이어 유일무이한 진리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이 전혀 다른 탐구 방향에 놓여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보증서가 아니었다. 극복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 합리적인 행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어떤 탐구 노선이 결국 우리의 목표점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다수의 노선들을 열어두어야 한다."(565-6)


"다원성은 앎을 풍부하게 한다. 심지어 한 시스템이 우리의 목표들에 꽤 적합하게 종사할 수 있을 때도, 다른 시스템들 역시 똑같은 목표들에 새로운 방식들로 종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인식적 풍요는 우리를 기쁘게 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목표가 진리이고 우리가 진리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더 다원적인 풍요를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에 관한 진리인 이론을 보유하더라도, 과학이 종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을 시도할 수 있다! 동일한 주제에 관한 두 개의 진리는 서로 정확히 등가여야equivalent 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논리학이 요구하는 바는 진리인 이론 두 개가 정면으로 모순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나에게 양자역학의 하이젠베르크 버전, 슈뢰딩거 버전, 파인만 버전 '그리고' 봄 버전을 달라. 물리 세계를 음미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그렇게 많으면, 자연을 향한 창들이 더 많아지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진다."(577-9)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물은 H2O다'처럼 결정적인 과학적 상식이 당면 주제였다는 사실은 비판적 의식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느낌을 일으켰다. 나는 우리 모두가 물은 '단순히' H2O가 아님을 의식하는 것과 과학자들이 그 믿음에 도달한 미묘하고 정교한 이유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비판적 의식을 여러 방식으로 방해하는 다음과 같은 통념들 각각에 반대한다. (1)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며, 우리는 주로 과학자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좋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 (2)과학적 이론 선택에서 확실성과 합리성의 결여는 어떤 경우에든지 겉모습에 불과하며, 우리는 간과된 요인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겉모습을 떨쳐내야 한다. (3)우리는 현재 과학의 판결에 따라 과거 과학의 인식적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4) 혹은 과거 과학의 인식적 가치를 아예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5)무엇보다도 우리는 내려진 과학적 결정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모색해야 한다."(623)


"다원주의적 태도의 실험은 다원주의자에(혹은 적어도 일원주의를 향한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한세기 정도에 걸친 과학 연구의 많은 부분은 일원주의 실험이었다! 우리는 일원주의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얻었으며 일원주의를 가지고 우리가 어떤 성과들을 얻었는지 안다. 우리에게 심각하게 결핍된 것은 그에 맞먹을 만한 다원주의 실험 데이터다. 다원주의는 최근의 과학에서 큰 규모로 시도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계속될 일원주의적 과학과 나란히, 다량의 다원주의적 과학을 시작하는 것이다. 생물학의 몇몇 영역들과 비교적 새로운 일부 과학 분야들에서는 이미 다량의 다원주의가 실천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일원주의에서 얻은 것에 못지않게 충분한 경험을 다원주의에서 얻으려면 다원주의적 실천이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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