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의 역사
강원택 지음 / 동아시아연구원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프롤로그_보수와 생존


"보수주의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 폭풍우처럼 몰아쳐 온 역사의 거친 변화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것은 대단한 생존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다." "가진 자의 정치적 생존의 기술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는 하나의 이념'ism'이라기보다 경험이나 상식 등 현실적 체험과 관찰에 의해 형성된 사고방식, 감정의 양태, 생활양식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구체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보수당이 대표하는 이념을 두고 당내에서 심각한 이념적 대립이나 토론이 벌어진 적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책에서 이념적 요인보다 생존의 기술로서의 보수주의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는 보수당의 역사가 이념적 순수성이나 완고함보다는 실용성과 유연성이 보다 중시되어 온 까닭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수당의 원칙은 실현하려는 추상적인 목표라기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18-9)


2 보수당 이전의 보수파_토리에서 보수당으로


"찰스 2세 시절, 왕위배척법을 둘러싼 갈등과 함께 의회는 정치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정파로 분열되었다. 한 쪽에서는 가톨릭을 믿고 로마 교황을 따르는 국왕(제임스) 하에서 영국의 헌정체제와 국교인 성공회는 절대로 보존될 수 없다고 본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라고 해도 그가 국왕직에 오르는 권리는 신으로부터 내려진 천부의 권한이므로 침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휘그Whig와 토리Tory라는 두 개의 정파로 나눠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휘그는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고 영국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의 입장을 두둔한 반면, 토리는 가톨릭교도가 영국 국왕직을 잇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토리파라고 해서 국교인 성공회보다 가톨릭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왕위 계승에 간섭하려는 것은 헌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며 잘못 그르치면 1640년대의 공포시기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26-7)


# 왕위배척법Exclusion Bill(1679년) : 가톨릭 신자인 왕위계승자 제임스가 국왕직을 물려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휘그파의 우려대로 즉위 후 곧바로 가톨릭을 내세웠으며 프랑스의 루이 16세처럼 의회를 무시하고 절대군주처럼 통치하고자 했다. 특히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인 자신의 측근들을 정부와 군의 요직에 앉히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사법을 폐지하고자 했다. 의회가 이를 거부하자 제임스 2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제임스 2세는 자신은 심사법에 규정받지 않는 초월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제임스 2세의 왕권강화 시도와 가톨릭에 대한 옹호로 인해 그의 왕위 즉위를 지원했던 토리파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국왕에 대한 충성과 제임스 2세가 위협하는 국교회에 대한 지지를 두고 토리는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결국 토리들은 국교회를 선택했다. 뜻을 같이 하게 된 토리와 휘그는 비밀리에 오렌지의 윌리엄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윌리엄의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면서 제임스 2세는 해외로 도피했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이뤄졌다."(28-9)


# 심사법Test Act(1673년) : 정부와 군에서 공직을 맡는 이들은 반드시 영국 국교인 성공회 신자여야 한다고 규정한 법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뒤따른 루이 16세의 처형은 영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적이었던 루이 16세의 죽음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혁명의 결과가 왕실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에 기반한 전통적 지배계급의 종말까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혁명에 대한 영국 사회의 두려움은 커지게 되었다." "이 무렵인 1794년 휘그파 내에서 분열이 생겼다. 폭스는 프랑스 혁명 정부와의 화평을 주장했고 그레이는 의회 개혁을 주장했는데 이는 모두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휘그파 내의 보수 성향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휘그 내의 대다수 상원의원과 50명이 넘는 하원의원들이 토리로 옮겨왔다. 이로 인해 국왕에 충성스러운 토리와 토지소유계급인 보수적 휘그 간 연합이 이뤄졌으며, 보다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소수의 휘그를 주변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1794년 소 피트가 이끄는 토리로 옮아간 휘그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에드먼드 버크였다."(35-6)


#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토리파가 직면한 두 가지 쟁점

1. 가톨릭 : 1801년 아일랜드 통합 이후 가톨릭교도들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 대두(1673년 제정된 심사법Test Act은 군과 행정 분야에서 가톨릭 신자의 고위직 임용을 금지했다)되었고, 마침내 1829년 5월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의 시민권을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가톨릭구제법Catholic Relief Act을 통과시켰다.

2. 의회개혁 : 토리의 정치적 대표성은 세습 귀족과 토지에 기반을 둔 젠트리였다. 이들은 주요 기반이 농촌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도시 상공업이 활성화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구 확대와 공평한 의석 배분에 강하게 저항했다. 결국 개혁법Reform Bill은 1832년 6월 휘그파의 주도로 통과되었다.


3 필 수상과 보수당의 등장


"보수당이라는 명칭은 1830년경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1835년경이 되면 토리보다 보수당이 일반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2년 개혁법은 보수당 내 반대자들이 우려한 것만큼 결코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혁명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국왕의 권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1911년 의회법이 통과될 때까지 보수파의 보루였던 상원의 권한에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귀족들의 지위도 여전히 내각과 지방에서 지배적인 존재였다. 토지소유 계급들의 지위 역시 약화되지 않았다. 개혁법이 몰고 온 중요한 변화는 정부의 교체를 이루는 것은 국왕의 의지가 아니라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정당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을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정당 정치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53-5)


"1832년 이후 보수당의 정치적 회복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로버트 필의 리더십이다. 필은 1834년 12월 '탐워스 강령'을 발표했다." "자신의 선거구 탐워스에서 필은 강령을 통해 강경 보수파에 의한 반동적인 대응과 급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급진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이기까지 한 변화를 모두 거부하고 그 사이의 중도적 입장에 대한 보수당의 가치와 사상을 제시했다. 필은 탐워스 강령을 통해 보수당은 1832년 개혁법을 존중할 것이고 폐지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하였고 이후의 추가적인 개혁도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에 의한 보다 온건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며 자신의 보수주의를 중산계급이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필은 자신이 귀족 집단과 상공업자들의 이해관계 사이에 균형 잡힌 온건한 개혁을 선호한다는 점을 밝혔다. 탐워스 강령은 1832년 개혁법 통과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 상황 속에서 보수당의 사상을 최초로 명확하게 제시했다."(56-7)


# 로버트 필의 개혁정책의 여파

1. 아일랜드 지원 :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의 가톨릭 사제학교에 지원하는 지원금을 확대하여 가톨릭 주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온건한 가톨릭교회가 분리 독립 운동과 연계되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많은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2. 곡물법 폐지 : 1840년대의 불경기와 도시 노동자의 증가, 해외시장 확대 필요성, 아일랜드 대기근(1845년) 등 복합적인 요인들을 감안해 곡물법 폐지를 통과(1846년 6월)시켰지만, 당 내 반대파들과 치유하기 힘든 깊은 분열이 생겼다.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분열된 보수당의 두 정파를 재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1850년 필의 죽음은 이들 정파의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필 지지자들의 일부는 정치를 떠났고 일부는 그의 서거 후 다시 보수당에 복귀했다. 그러나 필의 지지자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필이 옳았고 1846년 물러난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필에 대한 동정과 보수당 내 보호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그들은 곡물법 폐지를 지지한 휘그에 보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859년 결국 필 지지자들과 휘그는 함께 공식적으로 자유당을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필 지지자 가운데 보수당에서 휘그로 옮긴 대표적인 인물이 후일 자유당 수상이 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다." "곡물법 파동을 거치면서 보수당은 집권 대안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했고 분열을 극복할 유능한 당내 지도자를 찾기도 힘들었다. 보수당이 다시 과반의석을 얻어 권력에 복귀하는 것은 1874년이 되어야 가능했다."(67)


4 디즈레일리_보수당의 기반


"'보수당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듣는 디즈레일리는 1846년 곡물법 파동 이후 1874년까지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어려움을 겪던 보수당을 구하고 이후 1906년까지 약 30년간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872년, 보수당 지도부는 자유당에 대한 맹렬한 공세를 시작했고 공공 생활과 관련된 많은 법안을 입법화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유당 정부가 비밀투표를 보장하는 투표법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반 유권자의 생활수준, 특히 위생 수준을 높이는 데는 소홀하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더 이상 사회개혁 법안에 대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수권정당으로의 신뢰감을 높였다." "보수당 내의 이러한 전향적 움직임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움직임 등 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1871년 파리코뮌의 사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71, 76-7)


"디즈레일리는 1872년에 행한 두 차례의 연설을 통해 보수당만이 현재 영국의 제도를 보존할 수 있고, 대영제국을 수호할 수 있으며, 일반 국민의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당시 언론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디즈레일리가 제시한 보수당이 자임한 세 가지 역할은 이후에도 보수당의 중요한 정치적 사상으로 남게 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을 사회개혁의 주창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통합과 대영 제국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이슈를 선점하는 안목과 능력이 있었다." "1874년 총선 승리로 보수당은 이제 잉글랜드 지역과 소수의 특권계급에 의존하는 정당이아니라,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게 호소력을 갖는 실질적인 '전국 정당'이 될 수 있었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에 남긴 큰 족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 조직의 측면에서나, 선거 지지라는 측면에서 보수당이 전국적인 정당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77-8)


"이제 도시지역과 새로이 형성된 교외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산층이 보수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교외 지역에는 계급적으로 하위 중산계급이 밀집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런 지역에서는 공동체적인 관계보다 계급에 의한 투표가 보다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사무직 종사자와 같은 하위 중산계급이 일반 노동계급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표현하게 된 것도 보수당의 지지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즉, 교외 지역에 형성된 신흥 주택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보수당의 지지자들, 곧 '빌라 토리즘'이 1874년 이후 보수당의 정치적 상승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보수당은 노동계급 유권자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보수당은 음주나 유희 등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의 생활방식에 관대했고, 대영제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강조했다. 이처럼 '맥주와 대영제국'으로 요약할 수 있는 노동계급에 대한 보수당의 접근방식은 특히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중년 혹은 노년 노동자들에게서 높은 호응을 얻었다."(81-2)


5 자유당의 분열과 보수당의 행운


"솔즈베리는 디즈레일리 이후 16년간 보수당을 이끌었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업적이었다. 솔즈베리는 1867년과 1884년의 선거권 확대를 마지못해 수용했으며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디즈레일리의 사회개혁과 대중에 호소력을 갖는 보수당을 만들겠다는 토리 민주주의의 이상은 솔즈베리에게로 이어지지 않았다. 랜돌프 처칠이 이러한 입장을 이어 받았지만 그는 솔즈베리와의 당권 경쟁에서 밀려났다." "솔즈베리의 보수당이 이후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보수당 스스로의 변신과 개혁 노력보다는 자유당의 내홍과 분열 때문이었다. 자유당 내각을 이끌었던 글래드스턴이 1886년 12월 아일랜드 독립 법안을 추진하면서 당내에 커다란 내분이 생겨났던 것이다." "보수당은 아일랜드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자유당 내부의 불만 세력의 동조를 이끌어냈다. 실제로 이 정책에 불만을 가진 자유당 의원들이 이후 보수당에 참여함으로써 정당 재편을 이끌었다."(100-1)


"디즈레일리처럼 솔즈베리의 후기는 외교 및 제국 이슈가 지배하였다. 당시 대영제국은 확대되고 있었다. 버마를 복속시켰고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었다. 솔즈베리 정부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복속시키기 위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국내적으로는 아일랜드를 포함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솔즈베리는 당시 수상으로서는 드물게 1900년까지 외무장관을 겸직했고 내각 내에서 외교문제에 관해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그의 외교정책은 내각 내에서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삼각동맹과 협력관계를 모색함으로써 영국의 이익을 보장받으면서 대외문제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의 세계정세, 1890년 비스마르크의 실각과 이에 따른 프로이센과 영국의 관계 악화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솔즈베리의 고립주의 정책은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적절한 것도 현명한 것도 아니었다."(108)


6 보수당의 분열과 관세개혁


"솔즈베리를 뒤이은 새로운 수상은 밸포어였다. 밸포어는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을 이끄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가 주도했던 교육법은 영국 국교회 및 가톨릭계 학교에 대한 지원만을 규정함으로써 그 법의 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던 비국교도 학교들을 소외시켰다. 이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보수당을 굳건하게 지지해 왔던 비국교도들이 보수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노동계급 또한 벨포어의 정책에 분노했다. 1901년의 테프 베일 판결은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했다." "노동조합 측은 노동운동과 파업 권한을 회복시키는 법안 제정을 요청했지만 벨포어는 이를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노령 연금 관련 법안을 잇달아 부결시키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벨포어의 보수당 정부는 노동계급의 요구에 별다른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노동계급은 이제 막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당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116-7)


"체임벌린이 주장한 관세 개혁은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에 기반했는데, 강력한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독일이나 미국과 경쟁할 수 있도록 영국은 대영제국을 호혜관세로 보다 가깝게 묶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임벌린은 대영제국 외부의 상품이 영국에 수입되는 경우 대영제국 국가의 상픔보다 높은 관세를 물리고, 반대로 대영제국 국가들은 영국 제품에 대해서 다른 국가들보다 낮은 관세를 물리도록 함으로써 대영제국 국가들끼리의 교역에 혜택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즉 대영제국 내의 각 자치령이 독자적인 공업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제국 내 각 자치령의 원심적 이탈을 막고 상호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영제국 내 국가간 호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899년 보어전쟁에서 보듯이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며 체임벌린은 관세를 징수함으로써 외국이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119)


"그러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 체임벌린의 마스터플랜은 사실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보호무역 대 자유무역 간의 갈등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 경제는 이미 분화되고 있어서 관세개혁은 어떤 산업에는 이득을 보장해 주지만 다른 산업에는 심각한 손해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관세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관세 개혁이 원자재 가격의 상승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식품 가격(빵 값)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영제국 내 식민지 국가에 대한 특별한 보호주의적 혜택을 위해 다른 국가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 보다 값싼 곡물 수입에 대해 관세를 물림으로써 전반적인 식품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도시 노동자 가구에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책 추진은 도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구에서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120)


"1908년, 자유당 정부 내에서는 노령 연금 등 사회개혁 지출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로이드 조지나 윈스톤 처칠 등의 입장과 군함 건설 등 해군력을 강화하고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소위 '대포와 버터'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심각했다. 로이드 조지가 선택한 해결책은 바로 소득세 인상, 새로운 토지세의 도입, 양주에 대한 과세 등 상층계급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국민의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벨포어는 관세개혁을 '사회주의' 예산안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심지어 보수당 내 강경 자유교역주의자들도 자유당이라는 더 큰 적에 대항하기 위해 벨포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910년 1월 실시된 총선은 귀족들로 가득한 상원의 특권을 둘러싼 논란과 '귀족 대 평민' 간의 대결이라는 자유당의 선거 이슈가 주도했다. 그 결과 자유당은 노동당을 파트너로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의 지지를 지원군 삼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29-31)


7 보나 로와 아일랜드 이슈


"보나 로는 보수당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 대안 제시보다 자유당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는 전략을 펴기로 했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 보수당이 역점을 두고 공세를 퍼부었던 것은 아일랜드 독립 문제였다." "이제 곧 아일랜드가 독립국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보수당을 두렵게 했고 이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불러왔다. 보수당 내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막기 위해 대단히 위험하고 극단적인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당시 유명한 법학자였던 윌리엄 앤슨은 의회법을 통해 헌정질서에 폭력을 가한 것은 바로 자유당이므로, 보수당은 아일랜드 독립을 부여하려는 또 다른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얼스터 출신으로 당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에드워드 카르손은 아일랜드 독립법안이 통과된다면 북아일랜드(얼스터) 지방의 주도州都인 벨파스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반란 계획에 깊이 가담하기도 했다."(140-2)


"이와 같은 강경한 입장은 일차적으로는 보나 로 자신이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방의 가문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었다. 여기에 자유당이 의회법을 통해 상원에 대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현재 헌정체제가 일시적으로 '유보된 상태'인데, 새로운 헌정질서가 자리잡히기도 전에 아일랜드 독립 같은 영토상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비헌정적인 형태의 저항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보수당 의원들이 공유하는 상황 인식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보수당 당수까지 나서서 무력 저항을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보수당 역사에 전례가 없었다." "보수당을 이런 미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덕분이었다. 1914년 7월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위기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던 보수당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 동안 보수당이 강조해 온 연합왕국의 보존, 관세개혁, 그리고 대영제국과 같은 사안들은 모두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142-4)


8 제1차 세계대전과 연립정부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애국주의적이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치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해 왔다." "반면 전쟁 상황으로 인해 도입된 징병제─1916년 5월 강제복무제 전면 도입─를 비롯하여 새로이 '전면전'이라는 이름 하에 요구되는 억압적 조치들은 자유당을 힘들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당의 전통적인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전쟁은 보수당의 입지를 전반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방위비 지출이나 징병제 등에 대한 보수당의 주장이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전쟁 수행에 참여한 호주,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많은 자치령 국가들의 도움과 기여로 인해 대영제국의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한 인식도 커졌다." "전후의 새로운 관심사는 국가의 역할, 경제, 사회개혁, 실업문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의 부상 등이었다. 노동당은 이제 자유당과의 협약 없이도 독자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많은 당선자를 낼 수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148-52)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참전 군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전시 물품제조 등 후방에서 전쟁수행에 기여한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 이유로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18년 선거법 개정으로 21세 남성─군인의 경우에는 19세 이상─과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함으로써, 이제 성인 인구 가운데 대다수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과 비교하면 약 700만 명의 유권자에서 2,100만 명으로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와 함께 이제 노동계급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즘의 확산이 유럽 전역을 위협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노동분규와 사회주의 운동이 격화되는 등 사회 불안정과 혁명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던 시기였다." "보나 로는 당시까지 대단치 않은 존재였던 노동당이 점점 지지를 확대해 가는 것에 대해서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153-4)


"선거권 확대로 인한 정치적 결과를 확신하지 못했던 보수당은 스스로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려 하기보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며 노동계급 유권자에 보다 호소력을 가진 자유당 로이드 조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시 연립내각에 계속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연립정부는 내부의 분열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상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보수당의 원래 원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40-50명의 보수당 평의원들이 1921년 결집하기에 이른 것이다." "1922년까지, 연립정부 잔류 여부를 두고 보수당 내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겨났지만 1916년 이후 자유당처럼 파멸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자유당에서는 로이드 조지와 애스퀴스의 갈등이 위에서 아래까지 당을 수직적으로 갈라놓았다면, 보수당의 경우에는 그 갈등이 당의 상층부를 수평적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에 당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154-7, 162-3)


9 격변기의 보수당_대공황, 사회주의와 볼드윈


"1922년 11월 15일 실시된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처음으로 얻은 확실한 승리였다." "1922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보수당과 권력을 겨루는 강력한 경쟁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1918년 선거에서도 노동당은 의석수에 있어서는 63석으로 전체 의석의 8.9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득표율로는 이미 22.2퍼센트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1922년 선거에서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약 80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민족당 소속 의원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1886년 자유당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독립 법안의 추진을 밝힌 이래 아일랜드 민족당은 자유당의 견고한 동맹세력이었다. 그러나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이들의 의석은 영국 정치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보수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북부 얼스터 지역의 연합파 영국계 주민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수당이 한결 유리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165-6)


"1924년 1월 램지 맥도날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집권하게 되었지만, 캠벨사건이라고 불린 정치적 논란 끝에 붕괴되었다." "1924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적색 공포를 최대한 활용한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채택했다." "이러한 보수당의 전략은 '지노비에프 서신'이라는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총선을 불과 나흘 앞둔 1924년 10월 25일 영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최고 간부회의 의장인 지노비에프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는다. 그 내용은 영국에서, 특히 영국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 선동을 강화하라는 지령이었다. 그런데 당시 노동당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지노비에프 서신'은 노동당이 공산주의의 동조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후일 지노비에프 서신은 조작된 것으로 결국 확인되었지만 19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역사상 첫 번째 노동당 정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172-3)


# 캠벨사건 : 공산주의 계열 잡지인 〈워커스 위클리〉workers' Weekly의 편집장이던 존 캠벨은 이 잡지에 영국 군대가 (적국의 군대라 해도) 동료 노동자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글을 게재했다. 검찰은 캠벨에게 반란법 상의 선동죄를 적용했고, 결국 하원 내 조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자 맥도날드는 이 조치를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1924년 총선에서 승리한 볼드윈은 '새로운 보수주의'를 제창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적으로는 평온한 삶, 대외적으로는 평화와 군축 그리고 전쟁 이전의 일상생활로의 복귀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다. 볼드윈의 보수당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볼드윈이 이끈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보수당 정부는 매우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다. 대표적인 사회개혁 가운데 하나인 1925년의 과부·고아·노령연금법은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가 부담해야 하는 강제 기여 구조였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슬럼을 없애고 주택을 제공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도시 외곽의 마을과 도시에는 중산계급을 위한 새로운 가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28년에는 동등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안은 여성의 투표 연령을 30세로부터 21세로 낮춰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규정했다. 경제분야에서는 석탄과 면직산업의 합리화 정책, 중앙전력국 창설 등을 이끌었고, 1926년에는 BBC 방송을 설립했다."(175-8)


"1929년 총선은 자유당 당수로서 로이드 조지의 권력을 향한 최후의 일전이었다. 자유당은 1924년에는 340명을 공천했지만, 1929년 총선에서는 513개의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했다. 447개의 선거구에서 보수당-노동당-자유당 3당 간 각축전이 벌어졌다. 적극적인 공세로 자유당은 보수당의 표를 상당부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단지 59석을 얻는데 그쳤고 이후 자유당은 정치적으로 사실상 몰락했다. 보수당의 의석은 419석에서 260석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노동당은 288석을 차지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제1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이번에도 과반 의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램지 맥도날드가 이끄는 두 번째 노동당 정부는 이전처럼 소수파 정부로 다시 출범했다. 노동당의 크나큰 불운은 하필이면 월 스트리트가 붕괴하고 대공황이 시작된 그 해에 집권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29년의 선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패배한 정당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선거가 되었다."(180)


10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보수당에서 볼드윈의 뒤를 이은 체임벌린의 온건한 유화정책은 사실 오랫동안 국민들 사이에 무척 인기 있는 정책이었다. 1938년 9월 체코 위기 와중에는 실제로 다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 때 체임벌린이 독일을 방문했고 뮌헨협상에서 히틀러와 타협을 이뤄냈을 때 영국 국민들은 큰 안도감을 느꼈고 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귀국길에 체임벌린은 자신이 '명예로운 평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어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당내 모든 계파로부터 지지는 물론 국민들의 커다란 성원을 받았다. 그가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영웅의 귀환과 같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그러나 소수의 의원들은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을 우려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의회 연설을 통해 그는 많은 이들이 지금 무시하고 있거나 잊어버리고 있지만 유화정책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체임벌린을 강하게 비판했다."(200-1)


11 처칠과 제2차 세계대전


"처칠은 이제 수상이 되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보수당 내에서 고집불통의 비판자였다. 관세개혁을 둘러싸고 당 노선에 반대하여 한때 당적을 자유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보수당으로 복당한 후에도 인도 자치정부 허용 문제나 대유럽 정책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해 왔고 이 때문에 한동안 당내에서 사실상 소외되어 외톨이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내각의 각료로 임명되지 못했다. 그는 동료 의원들이 볼 때 고집 센 독불장군이었고 당에 대한 충성심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광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처칠은 전시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전시내각에는 보수당뿐만 아니라 자유당과 노동당 의원을 모두 포함했다." "정치권은 소속 정당과 무관하게 위기 상황을 맞아 대체로 결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회 내에서 전시 연립정부의 지위는 굳건했고 처칠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도전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208-10)


"1945년 5월 전시 연립정부가 해산되면서 전쟁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정당 간 경쟁이 다시 본격화되었다. 전쟁기간 내내 국내 문제를 책임지면서 경제, 사회정책을 담당했던 노동당은 유권자에게 정책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신뢰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당은 중산층 유권자에게 자신의 장점을 확신시키지 못했다. 비버리지 보고서의 제안 같이 적극적인 사회개혁 정책에 대해 보수당이 보여준 부정적이고 불확실한 태도는 노동당 각료들의 확신에 차고 일치된 지지의 입장과 분명한 대조가 되었다. 보수당이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자산은 처칠 수상뿐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전쟁 수행 중 보수당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했었다. 때문에 보수당은 1945년 총선에서 적절한 정책 공약을 마련하지 못했고 당 소속 각료들이나 지방조직 등도 선거에 일사분란하게 대비하지 못했다. 결국 1945년 총선은 1906년 이래 최악의 참패를 보수당에 가져다 주었다."(219-20)


"그러나 보수당이 참패한 보다 중요한 원인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영국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전쟁은 영국 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군대 징집과 군사물자 조달을 위해 새로운 지역에 공장이 건설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기존 거주지에서 이주하게 되었다. 또한 도시의 어린이들은 공습을 피해 안전한 시골로 옮겨 가면서 상이한 계급 간, 지역 간 사회적 경계가 약화되었다. 여성들도 전례 없이 대규모로 전쟁 관련 업무에 동원되었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경험 속에서, 상이한 계급의 사람들이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서로 뒤섞이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 희생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기간 중 산업과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운송 관련 산업의 국유화 등을 경험하면서 정부 계획이나 국가 소유는 더 이상 낯설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전쟁 사회주의'의 경험은 노동당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221-3)


12 전후 합의체제와 처칠


"1947년 5월 11일, 버틀러가 이끄는 산업정책위원회는 보수당이 추구할 보편적인 원칙을 담은 산업헌장을 발표했다." "산업헌장은 노동당 정부가 행한 초기 입법 내용을 받아들였고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노사 간 상호협력을 지지했다. 보수당은 이와 함께 국가의료보험NHS의 설립과 철도, 석탄, 가스산업 등의 국유화도 수용했다. 또한 산업헌장 속에는 보수당이 완전고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국가, 기업, 노조 간의 협력 관계를 강조하는 코포라티스트corporatist적 입장도 수용했다. 즉 보수당은 케인즈주의 경제관리 방식이 안정적인 고용과 건전한 노사관계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으며, 국가의 역할 확대를 수용하면서 보수당은 복지국가를 해체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보수당은 사기업을 억누르거나 부의 재분배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확대된 역할도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230-1)


13 이든과 수에즈 운하 사건


"앤소니 이든은 1955년 총선에서의 압승을 통해 처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명백한 위임을 국민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탓에 경제를 비롯한 국내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별다른 경험을 쌓지 못했다. 이든은 버틀러에게 경제문제를 맡기고 자신은 대외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총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리더십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든과 버틀러는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주택 보조금을 줄였고 국유화 기업에 대한 자본투자 계획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더욱이 소비세도 높였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은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든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사건은 경험이 일천한 국내 문제보다 그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외교 정책 분야에서 발생했다. 1953년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권력자로 떠오른 압둘 나세르가 1956년 7월에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251-2)


# 1956년 10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집트를 전격 침공했으나, 미국은 해당 작전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표명했고, 결국 두 나라는 외교적 망신만 당한 채 무기력하게 퇴각해야 했다. 


14 합의체제의 유지와 변화의 바람


"맥밀란은 1930년대에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 국가개입과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소수의 보수당 의원 중 하나였다." "1957년, 수상이 된 이후에도 다소 인플레이션의 우려가 있더라도 국가 지출을 위축시키거나 실업을 늘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수에즈 운하 사건에서 맥밀란이 얻은 교훈은 영국이 이제 다시는 미국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맥밀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전시 중 맺은 인연을 주고받으며 이전의 수준으로 양국간 연대감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다." "1950년대 영국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고 실업은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1959년 총선 승리는 사실 부분적으로는 노동당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결과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은 다소 약화되었다. 완전고용과 복지국가로 인해 이제 많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전쟁 이전과 비교할 때 노동조합과 노동당에 훨씬 덜 의존적이 되었기 때문이다."(257, 259-62)


"1964년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보수당은 다시 야당이 되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1964년까지 13년 간 보수당은 노동당을 압도하며 지배해왔다. 이러한 보수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자유당의 몰락으로 선거 경쟁은 사실상 보수당과 노동당 양 당 간에 이뤄졌다. 자유당의 득표율은 이 시기 6퍼센트를 넘기지 못했다. 특히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97퍼센트에 달했다. 거의 완전한 양당제가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 유권자의 대다수가 견고하게 보수당을 지지했고, 노동계급 유권자의 지지 역시 적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보수당을 총선 승리로 이끈 세 명의 지도자, 처칠, 이든, 맥밀란은 모두 총선 무렵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노동당의 애틀리는 1945년과 달리 1951년, 1955년 총선에서 강인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고 쇠약해졌다. 그의 후계자인 게이츠켈 역시 맥밀란을 압도하지 못했다."(271-2)


15 막다른 골목


"출신 배경을 볼 때 보수당의 많은 지도자는 '이튼 출신의 마피아'이거나 '매직 서클' 내에 포함되는 인물이었지만, 히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오히려 중하류층에 가까운 배경을 갖고 있었다." "히스가 보수당을 이끄는 동안 드러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보수당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1950년대 이래 이어져 온 합의정치 체제에서 보수당은 복지 문제나 완전고용, 노동정책에 있어서 노동당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당내에서는 보수당이 온정적 진보주의로부터 벗어나서 노동당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즉, 전후의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에 기반한 복지국가 모델에서 벗어나 공공지출을 줄이고 직접세를 낮추고 노조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등 버츠켈리즘에서 탈피하기 위한 보수당의 정책 전환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 우파나 서독 기민당의 변화 역시 이러한 당내 노선 변화의 필요성을 부채질했다."(278)


# 버츠켈리즘Butskellism : 보수당 정부 버틀러 재무장관의 정책과 그 이전 노동당 정부 휴 게이츠켈 재무장관의 정책이 유사한 것을 빗대어 지어낸 말


"1970년 3월 런던 남부 크로이든의 셀스돈 파크 호텔에서 열린 예비내각 회의에서 히스는 보수당이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집권 후 정책 방향에 대한 논의를 했다." "여기서의 논의 결과 자유 시장 경제 정책으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셀스돈 회의에서는 복지국가, 세금, 교육, 국유화 등 매우 폭넓은 정책 분야에 대해 논의했으며, 기본 방침은 보수당 정부가 낙후된 산업이나 경쟁력 없는 산업 분야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레임덕' 산업이 홀로 서지 못하더라도 국가 보조금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개인이 어렵더라도 무료 학교급식이나 우유 배급, 무상 의료지원 등을 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역시 영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셀스돈에서의 논의를 통해 1950년대 이후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한 합의체제로부터 보수당의 정책 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282)


"하지만 당초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실업이 계속 늘어나면서 제조업 투자도 침체에 빠지게 되자 당황한 히스 정부는 정책상의 급격한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1972년 3월 예산안을 짜면서 재무장관 바버는 세금을 다소 낮췄지만 공공 지원금은 대폭 늘렸다. 이도 저도 아닌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이다. 1972년 산업 분야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정부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둔 1972년의 산업법은 히스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의 분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레임덕' 산업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정책이 폐지되었고, 산업개발처를 신설하여 경쟁력이 없는 기업에게도 지원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기업 지원을 위해서 지역개발지원금도 활용하기로 했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도록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교육과학성 장관을 맡고 있던 대처의 태도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셀스돈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교육과학성에서 관장했던 학교 무료 우유급식 폐지는 나중까지도 바뀌지 않았다."(285-6)


# 1975년 2월 11일 마가렛 대처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다.


16 대처 시대_철의 여인과 신자유주의 혁명


"대처의 예비내각에서 중요한 인물은 키스 조세프였다. 키스 조세프는 1974년 중순 마가렛 대처를 비롯한 당내외의 지지자들과 함께 정책연구센터를 설립했다. 보수당 조사국의 싱크탱크였던 정책연구센터는 영국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히스 정부 때와는 달리 통화주의, 자유 시장 경제 원칙을 강조했다. 히스와 그 이전의 맥밀란 수상은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세프와 그의 동료들은 확대된 정부가 바로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만이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으며, 집단주의의 흐름은 이제 퇴조했으며 탈규제, 민영화, 재산권의 확대, 개인의 노력과 노조의 개혁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적 방향은 뒤에 대처 정부의 핵심적 의제가 되었다." "대처의 리더십 하에서 보수당은 점진적으로 보다 통화주의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지만, 총선을 의식해서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인 정책 공약의 제시는 피해나갔다."(296-9)


"1982년 4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1976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갈티에리 장군이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침공한 것이다.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은 150년 전에 영국이 차지한 것이었지만 사실 아르헨티나가 침공해 오기 전까지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이 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침공은 영국 국민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했다." "5월 21일 영국 해병대와 특수부대가 포클랜드 섬에 상륙하면서 전세가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은 항복했다. 포클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은 재확인되었다. 전쟁 승리와 함께 보수당 정부의 인기는 급격히 상승했다. 대처의 결단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의 지속, 실업의 증가,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위상 실추 등 그 동안 영국 국민들이 들어 온 실망스러운 소식과는 달리 포클랜드에서의 승전부는 다시금 국가적 위신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307-9)


"1987년 10월 19일 전 세계적으로 증시가 갑자기 폭락했다. 소위 '검은 월요일'의 충격으로 영국 증권시장 역시 하루아침에 24퍼센트의 가치가 하락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등 쌍둥이 적자로 고전하고 있던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감 하락이 주된 원인이었다. 금융 관련 스캔들도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이에 재무장관 로손은 동요하지 않고 기존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가 고집한 감세 정책으로 인해 물가상승이 계속되었고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했다. 또한 경상수지 적자는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고 계속된 인플레이션으로 이자율이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 대처는 공기업의 민영화와 임대주택의 판매 등으로 주식이나 주택을 소유히게 된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율의 상승과 계속된 인플레이션은 대처로 인해 혜택을 입은 바로 이들 중산층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처로서는 자신의 핵심 지지층이 동요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320)


# 1989년 11월 22일, 보수당 당수 2차 경선에 불참하면서 대처 시대가 막을 내리다.


17 유럽 이슈와 당내 불화


"대처의 뒤를 이은 메이저 수상은 여론조사와 당내에서의 비관적인 예측을 뒤집고 1992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전례 없는 보수당의 연속 4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정작 메이저가 당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메이저 리더십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도전은 다름 아닌 유럽 문제였다. 총선이 끝난 뒤 다섯 달 뒤인 1992년 9월 16일 투기 자본이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면서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검은 수요일'의 충격으로 인해 메이저 정부는 부득이 '유럽환율조정체제'ERM에서 탈퇴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유럽통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당내에서 보다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메이저는 토니 블레어의 등장으로 만만치 않은 야당을 상대해야 했다. 토니 블레어가 주창하는 '신노동당'은 보수당의 비밀 병기 가운데 하나인 정치적 적응력, 유연성을 선점해 버렸다." "이제 노동당은 더 이상 보수당을 지지해 온 유권자들을 두렵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332-5)


"메이저 수상이 이뤄낸 중요한 업적은 북아일랜드 정책이다. 1993년 12월 메이저는 아일랜드 수상 알버트 레이놀즈와 함께 '다우닝 가 선언'을 통해 북아일랜드의 정치세력들이 무력투쟁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후 가톨릭계와 신교 측의 무장테러세력이 휴전을 선언했다. 후일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의 중요한 돌파구가 된 1998년 '굳프라이데이협정'을 조인한 이후 당시 수상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인정했듯이 메이저는 북아일랜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게 참패를 당했다. 메이저에게 아쉬웠던 점은 기존의 당내 갈등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아젠다를 발굴해서 그것을 자신의 리더십으로 연결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그 과제는 메이저가 떠난 이후에도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338-9)


18 다시 황야에서


"2005년 데이비드 카메론이 보수당 당수로 당선된 것은 1997년 이전 18년 간 야당 신세에 머물러 있던 노동당이 당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당시 41세였던 젊은 토니 블레어를 필요로 했듯이 보수당 역시 당의 면모일신을 위해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카메론은 한 때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블레어의 계승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유주의적 색채를 가지면서 당의 개혁과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카메론은 시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적 색채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기조는 '온정적 보수주의'로 요약되었다. 카메론은 사회적 이슈에 보수당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보수당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환경보호에 대한 적극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무와 연두색을 넣은 새로운 당 로고를 제정하기도 했다."(347-9)


19 에필로그_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성공적인 생존의 역사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보수당은 대단히 권력을 열망하는 정당이다. 이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급격한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실 보수당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데는 다소 취약하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정당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바꾸려고 하기보다 지키려고 하는 데서 보수당이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셋째, 보수당은 당의 외연을 넓혀 왔다. 토지소유 계급, 귀족 집단으로 출발한 보수당은 산업혁명 이후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사회적 힘으로 떠오른 상공업자들을 끌어들였고 이들과 하나로 융합했다. 노동계급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된 이후 당 조직의 강화를 통해 이들을 보수당의 지지자들로 만들었다."(353-8)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보수당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수호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당은 디즈레일리나 볼드윈처럼 필요하다면 사회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애국주의 정당, 제국의 정당과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요소를 보수당의 전통에 포함시켰다.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로 평가받는 것은 기존 질서와 헌정체제의 수호라는 보수당의 전통적 가치에 사회개혁과 애국주의 정당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디즈레일리는 사회개혁을 통해 보수당을 어느 한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모두의 정당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일국 보수주의'의 전통은 보수당의 정치적 명분과 기반을 크게 확대시켰다." "애국주의에 대한 강조가 계급 적대감을 퇴색시키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모든 계급이 국왕과 유니온 잭 그리고 국가의 상징에 감동하고 보수당을 중심으로 단합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만은 분명하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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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검사 - 죄수들이 쓴 공소장
심인보.김경래 지음 / 뉴스타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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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죄수들이 쓴 공소장


"죄수란 갇혀 있는 사람이다. 죄수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는 질병으로 인한 입원이나 직계가족의 사망 등 특별한 사유에 한한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도 구치소나 교도소 밖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출정이다. 출정이란 원래 구치소에 수감된 재소자가 재판을 받거나 자신의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추가 조사를 받으러 구치소 밖으로 나가는 절차를 말한다. 재판이야 정해진 일정대로니 별다른 특혜나 조율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가는 출정이다. 검사가 클릭 몇 번으로 공문 한 장을 보내기만 하면 언제든 죄수를 자신의 검사실로 불러들일 수 있다. 공문에 구체적인 수사 내용을 적시할 필요도 없다. 수사하는 내용의 제목 정도만 적어주고 관련 수사라고만 쓰면 된다. 본래 수용자에 대한 관리의 책임과 권한은 법무부 산하 교정본부, 즉 구치소나 교도소 측에 있지만 검사는 이 방법으로 죄수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 똑같은 수사기관이지만 경찰은 출정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21-2)


"일단 검사에게 '간택'을 받은 죄수는 구치소 안에서 일종의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권력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악용의 결과는 대개 죄수들 사이의 사기 사건으로 귀결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2차, 3차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검사나 수사관도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마찬가지다. 금융 범죄를 저지르고 구속된 죄수는 감옥 밖에 여전히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몸이 구속되어 궁박한 처지에 놓여있으므로 아주 작은 편의를 받는 데 큰돈을 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검사실에 드나드는 죄수는 누가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현재 가장 아쉬워하는 편의는 무엇인지 등 다른 죄수에 관한 정보를 검사나 수사관에게 전달하고 심지어 다리까지 놓아준다." "금전적인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바로 성과를 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것이다. 흔히 '별건 수사'라고 알려진 타건 압박 수사로 재소자를 쥐어짬으로써 원하는 진술과 증거를 얻어내는 수법이다."(33-4)


"서울남부지검은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조세 범죄를 중점으로 수사한다. 지난 2013년 서울중앙지검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신설됐는데, 이듬해인 2014년 서울남부지검으로 이전했고, 2015년에는 역시 중앙지검에 있던 금융조세조사 1부와 2부가 남부지검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남부지검은 대한민국의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 수사를 총괄하는 사실상의 컨트롤타워가 되었다. 그런데 금융 범죄와 기업 범죄는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수사가 매우 어렵다. 자본시장 전문가인 죄수를 수사에 활용했다는 주장이 개연성을 갖는 대목이다." "그런데 수사를 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수사가 어려울수록 역설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덮을 수 있는 재량의 범위가 넓어진다. 더군다나 금융 범죄나 기업 범죄 사건은 변호사들의 수입 액수가 일반 사건에 비해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에 이를 정도로 크다. 바로 이 지점을 전관 변호사들이 파고들어 검사와 유착하고 사건을 은폐한다는 것이다."(37)


"죄수 K와 김형준 전 검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리 동창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죄수 K는 반장이었고 김형준은 전교 학생회장이었다." "죄수 K와 김형준 두 사람의 우정이 파탄 나는 과정은, 아무리 우정을 가장하고 있다 해도 돈으로 맺어진 스폰서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에게 내연녀의 오피스텔까지 알아봐주며 '충성'을 다한 것은 그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 아니라 유사시에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사시'가 되자 당연히 도움을 기대했다. 김형준 검사에게도 죄수 K는 어려울 때 자기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도와야할 친구가 아니었다. 죄수 K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빠지자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려 했다. 수사 검사를 만나 했다는 '죄수 K는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하고 자신에 대한 오해만 없도록 해 달라'는 부탁은 죄수 K를 진짜 친구로 생가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43, 55)


"도피 중이던 죄수 K가 한겨레신문에 제보를 하고 이 제보가 기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형준 측이 긴박하게 움직였던 1박 2일 동안 가장 중요한 장면은 손영배 검사가 신현식 변호사에게 전화를 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전화 한 통이 모든 뒷거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겨레신문 기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이 다 된 거냐, 내가 알기로 김형준 검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보도를 꼭 해야 하나〉라는 얘기를 했다." "검찰은 죄수 K의 고소 사건에 김형준 검사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압수수색 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고 결국 경찰에 맡겼던 사건을 다시 빼앗아왔다. 비위 사실을 보고 받은 대검은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사건을 철저히 뭉갰다. 죄수 K가 김형준 검사의 비위를 언론에 제보하자 이번에는 현직 검사가 개입해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 그리고 다시 검찰은 이 같은 현직 검사의 개입 사실을 알면서도 덮었다. '검찰 식구' 전체로 보면 4중 5중의 제 식구 감싸기다."(58-60)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림자처럼 계속 등장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 박수종이다." "박수종 변호사가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에서 한 일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1) 김형준이 내연녀에게 줄 돈 천만 원을 빌려줬고 2) 김형준의 내연녀가 일하던 술집에 드나들며 김형준에게 회당 수십만 원어치의 술을 사줬다. 3) 일이 터지고 난 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돈을 갚을 때는 돈 심부름을 했고, 4) 김형준의 내연녀를 찾아가 입단속을 시켰다. 5) 이른바 '셀프 고소' 작전을 기획했고 6) 죄수 K의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해 현직 검사 손영배를 끌어들였다. 7) 언론 제보를 막기 위한 뒷거래 비용으로 죄수 K에게 2천만 원을 보냈고 8) 죄수 K와 연락하며 언론 제보를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9) 한때 자신의 의뢰인이던 죄수 K가 체포되도록 죄수 K의 차명 전화 번호를 검찰에 제공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분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66, 70-1)


2부 악어와 악어새


"제보자 X 역시 박수종을 알고 있었다 주식시장에서 그의 이름은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짧은 기간 동안 워낙 큰돈을 벌어 '박 재벌'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제보자 X 자신이 연루됐던 사건인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도 박수종은 한 주가조작범의 변호인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제보자 X가 남부지검에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사건에서는 주가조작 혐의자로 등장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보자 X는 그로 미루어, 박수종의 뒷배에 큰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어렴풋한 감을 가지고 있던 박수종에게 제보자 X가 분명한 의심을 품게 된 건 바로 고교 동창 스폰서 사건 이후다. 서울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수단장을 지낸 김형준 검사가 박수종의 친구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박수종 변호사에게 분명한 범법 혐의가 있다면,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에서 그가 기이할 정도의 저자세로 '견마지로'를 다했던 게 이해가 간다."(79-81)


"우리가 박수종의 진술조서에서 확인한 것처럼, 금융위는 2015년 초부터 박수종의 네 가지 금융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다. 금융위는 두 차례나 출석을 요구했지만 박수종은 거부했다. 그는 대검 특별감찰팀에 〈죄가 없으니까 (금융위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죄가 없으니 조사를 받으러 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얘기다. 아마도 일반인이었다면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성실하게 금융위 조사에 응했을 것이다. 금융위는 결국 대검찰청에 박수종을 수사 의뢰했고, 이 사건은 그해 11월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으로 배정됐다. 그런데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단장은 바로 김형준이었다. 김형준이 죄수 K에게 했던 〈지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형준 사건에서 박수종이 했던 일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모든 일들이 '피의자'가 '수사책임자'를 위해 해준 일이 되는 것이다."(84)


"제보자 X는 M&A 시장에 〈검찰이 세 번만 봐주면 누구나 재벌이 될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가깝고 살짝만 불법을 저지르면 큰 수익을 올릴 기회가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검찰은 박수종 변호사가 다스텍 주식을 활용해 수익을 올리는 과정에서 눈을 여러 번 감아줬다(다스텍을 포함한 세 사건은 약식기소, 한 사건은 불기소 처리됐다). 주범 서정기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다. '다스텍을 수사하지 않는다'는 수사 기밀을 박수종에게 귀띔해준 것이 두 번째다. 김형준 검사가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금감원이 수사 의뢰한 박수종의 금융 범죄 혐의를 봐준 게 세 번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6년 9월 김형준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진 뒤 대검 감찰본부가 직접 박수종을 조사하면서 금융 범죄 혐의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약식기소를 한 것이 네 번째다."(97)


"한국의 약탈적 주식담보대출은 상상인과 상상인플러스 두 개의 저축은행이 거의 도맡아왔다. 주식담보대출이 그렇게 좋은 사업이라면 상상인 계열의 저축은행들만 도맡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너무 가까워 언제든 쇠고랑을 찰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상인을 주식담보대출에 '올인'하도록 이끄는 '용감한' 사람은 유준원 회장이라는 인물이다." "박수종은 유준원의 도움으로 위기에 빠진 상장사를 장악했다. '회사 정상화'라는 명분을 걸고 들어왔지만 상장폐지를 막는 유일한 길인 유상증자를 포기했고 대신 상장폐지 이후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헐값에 거두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박수종은 천억 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손자회사를 거느린 비상장회사의 오너가 됐다. 그 사이 회삿돈 360억 원을 빼내 유준원 회사의 주식을 사는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 반면 모다와 파티게임즈의 소액 주주들은 상장폐지로 천 6백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102, 114-5)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유준원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단 한 차례의 참고인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유준원이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식 계좌관리인이었던 브로커 김 씨가 검찰조사에서 끝내 유준원의 공모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가조작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한 브로커 김 모 씨의 변호인은 박수종이었다. 그리고 박수종은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인 김형준에게 자주 향응을 제공하는 사이였다. 결국 박수종 자신의 금융 범죄 사건도 유야무야됐고 유준원도 무사했다." "스포츠서울 주가조작 사건은 유준원과 박수종 두 사람이 자본시장에서 왜 막강한 '콤비'로 불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유준원에게는 자본이라는 무기가, 박수종에게는 검사들과의 네트워크라는 무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단기간에 쌓아올린 막대한 부는 두 무기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134-7)


3부 검찰의 썩은 꽃, 특수부


"전체 검사 2천 2백여 명 가운데 특수부 검사는 불과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수부는 인지수사를 한다. 인지수사를 한다는 건 고소나 고발 없이 수사기관이 자체적으로 범죄를 알아차려서 즉 '인지'해서 수사를 한다는 뜻이다." "구치소나 교도소의 죄수들이 처벌받은 범죄는 그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여러 건의 범죄 중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꼭 자기 사건이 아니라도 죄수들은 범죄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검사는 죄수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 어떤 죄수의 여죄를 파헤쳐 수감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여죄가 드러난 죄수를 봐줄 수도 있다." "검찰의 출세 코스인 특수부, 인지수사의 부담, 범죄 정보의 보고인 구치소, 절박한 죄수들, 그리고 죄수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검사의 막강한 권한. 이 모든 조건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검찰 특수부의 하수도에는 오수가 흐르게 되고 그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독초에서는 썩은 꽃이 피게 된다."(164-6)


"나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 죄수 K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거래에 '삼각 사건 거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각형의 첫 번째 꼭짓점인 죄수 이 씨가 두 번째 꼭짓점인 죄수 K에게 돈을 주고 사건을 산 다음 이걸 세 번째 꼭짓점인 검사에게 상납했기 때문이다." "출정 내역에 따르면 죄수 이 씨는 2016년 한 해에만 김영일 검사실에 94번이나 출정을 갔다. 주 1.8회 꼴이다. 주말을 제외하면 닷새의 평일 가운데 이틀 정도를 구치소가 아닌 검사실에서 지낸 것이다. 이 정도면 죄수가 아니라 검사실 직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수 이 씨의 혐의는 특가법상 횡령이다. 횡령범에 불과한 죄수 이 씨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방위사업수사부나 특수부 수사에 그토록 자주 출정을 나간 이유는 김영일 검사와 죄수 이 씨가 '특수관계'라는 점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즉 죄수 이 씨는 김영일 검사에게 사건 정보를 물어다 주는 역할을 하는 '브로커 죄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172-4)


"IDS홀딩스는 투자자들의 돈을 유치해 그 돈을 굴려 수익을 낸 뒤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을 돌려주는 일종의 투자회사였다.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홍콩의 FX 마진 거래에 투자해 수익을 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검찰 수사로 밝혀진 전모에 따르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만 2천 명, 이들이 투자한 금액은 무려 1조 855억 원에 달했다. 2016년 9월 IDS 홀딩스의 대표였던 김성훈이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별관에 있는 방위사업수사부는 굵직한 방위산업 비리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지난 2016년 방위산업 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죄수들이 중앙지검 별관 408호 김영일 검사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브로커 죄수 이 모 씨, 그리고 IDS홀딩스 사건의 주범 김성훈이 그들이다. 그런데 당시 김영일 검사실에 이들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죄수가 바로 한 모씨다.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8천억 자산가로 소개했던 그 한 씨다."(182-3, 194)


"검찰 수사에서 김성훈이 홍콩에 숨겨두었던 27억 원을 한 씨에게 송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돈으로 한 씨는 거물 사업가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접근했고 다시 한번 사기를 쳤다(김성훈의 채무를 자신이 대위변제 해줄테니 그에 대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검찰은 한 씨를 사기 혐의뿐 아니라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도 기소했다. 김성훈으로부터 받은 27억 원이 피해자들에게 사기를 쳐서 벌어들인 범죄수익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다. 애초에 자신들의 돈이었던 범죄수익이 다시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자금으로 사용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한 씨와 김성훈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귀인'이었다. 한 씨는 김성훈 덕분에 합의금을 지불한 뒤 출소해 사업가 행세를 하면서 또 한 번 사기를 칠 수 있었고, 김성훈은 한 씨 덕분에 피해자들로부터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배경이 바로 김영일 검사실이었다."(198-9)


"죄수들에게 돈은 힘이다. 돈이 있으면 그걸 영치금으로 넣어서 음식도 사먹을 수 있고 신문도 마음껏 구독할 수 있다. 내의도 추가로 구매해 교도소 안의 추운 겨울을 그나마 좀 따뜻하게 날 수도 있다. 그보다 돈이 많으면 접견 변호사를 몇 명씩 두고 거의 매일같이 변호사 접견을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효용보다 더 중요한 돈의 효용은 바로 검사와 브로커 죄수들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에 한 몫 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 이 씨를 중심으로 한 '사각(김성훈을 포함한) 사건 거래'와 죄수 한 씨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위변제 사기 역시 김성훈의 돈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김성훈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출정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일 검사실에 수시로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브로커 죄수 이 씨와 한 씨를 자신의 형집행정지나 감형을 위한 '작전'에 마치 아랫사람처럼 동원했다. 힘의 근원은 역시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이다."(202)


4부 한명숙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됐다. 김대중-노무현, 민주당 계열 정권 10년이 끝났다. 말하자면 세상이 바뀐 셈이다." "정연주 사장을 내보내려면 KBS 이사회가 해임안을 의결해야 했다. 이사회는 모두 11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전임 정부 시절 여당 쪽에서 추천된 이사가 7명이다. 7대 4 구조. 새로운 여당 입장에서는 표가 부족했다. 7명 중 2명을 설득해서 정연주 사장 해임안에 찬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6대 5로 해임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설득이 안 되면 이사 2명을 입맛에 맞는 인사로 교체하는 방법도 있었다. 2008년 5월 이사장이었던 김금수가 돌연 사퇴했다. 김금수는 전임 참여정부 측에서 추천한 인사였다. 김금수는 KBS 사장 교체를 진두지휘했던 최시중 방통위원장에게 정연주의 해임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사퇴했는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 사장 해임에 찬성하는 유재천 교수가 이사장으로 들어왔다."(229-30)


"신태섭 이사가 다음 타깃이었다. 신태섭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적당한 해임 사유가 필요했다. 이명박 정부는 꽤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신태섭은 부산 동의대 교수였다. 먼저 동의대가 움직였다. 동의대는 KBS 이사직을 하면서 겸임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태섭 교수를 해임했다. 그다음 방통위는 신태섭을 KBS 이사에서 해임했다. 교수에서 해임됐으니 국가공무원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2008년 7월이었다. 이렇게 정족수를 채운 KBS 이사회는 2008년 8월 8일 (드디어)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의결했다." "8월 11일 이명박은 이사회 제청을 받아 즉각 정연주를 해임했다. 8월 12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연주를 체포했다. 배임 혐의였다. (정연주는 2012년 최종적으로 배임 혐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임 처분도 취소됐다. 하지만 KBS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상했으니까, 한명숙 사건은 당시 벌어졌던 수많은 이상한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230-1)


"법원행정처는 2015년 5월 6일 한 문건을 작성한다. 문건 제목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 국회 전략'. 한명숙 사건 대법원 판결을 석 달여 앞둔 시점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에서 한명숙 사건을 전부 무죄 취지로 파기할 경우,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법안과 관련해 김무성을 설득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문건에 적었다. 또 다른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20일 작성한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BH 설득전략'이다." "〈향후 예정돼 있는 정치인 형사사건에도 BH의 관심과 귀추 주목될 것, 주요 현안 관련 접점 모색을 위한 유화적 태도 보일 가능성 충분.〉 말을 어렵게 해놨지만 간단하다. 앞으로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 판결이 많다. 청와대가 관심이 많다. 그래서 청와대가 당분간 법원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뒤에 주요 정치인 형사사건 목록을 죽 적어 놨다. 첫 번째가 한명숙 사건이었다."(256-7)


"한만호는 분양 사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가 나서 2008년 구속됐다. 2010년 1월 형이 확정됐다. 3월 통영교도소로 옮겼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통상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된다. 만기출소는 2011년 6월이었다. 한만호는 출소를 1년 3개월 앞둔 평범한 죄수였다. 통영교도소로 옮긴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3월 31일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 한만호는 이유를 몰랐다." "서울구치소 이감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걸 한만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이감 다음 날(4월 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출정을 나간다." "특수1부에 가자 검찰은 아는 정치인이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한만호는 처음에 검찰이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친박계 ○○○ 의원에게 6억 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특수부 소환 첫날 자금이 한나라당 의원 쪽으로 제공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조사를) 종료했다. 급히 덮었다.〉" "한만호 주장의 핵심은 검찰이 이미 타깃을 정해 놨다는 말이다."(273-5)


"한만호가 검찰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음 날부터 한만호는 스스로 '스토리를 구상해' 검찰에 진술하기 시작했다. 4월 5일 1차 조서를 썼고 5월 11일 마지막 5차 조서가 완성된다. 한 달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한만호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칭찬했다. 한만호는 자괴감을 느꼈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검찰에 협조하는 자신과, 그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자의식이 싸움을 벌였다. 공포와 욕망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불안한 심리상태는 스스로를 '강아지'라고 부를 지경이 됐다." "〈매주 불러서 테스트하고 변호인 답변 피해가는 방법 교육하더니 아예 검찰 진술조서도 제공해주고 구치소에서도 공부하라 하며 "시험 본다"라며 테스트했다. 열심히 하는 체했다. 50을 넘기고 머리 허연 놈이 쪼다 짓을 했지만 그래도 20년 넘게 CEO 한 사람을 마치 저능아 취급했다. 그 모멸감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밖에서였다면 눈도 마주칠 수 없는 한참 동생뻘들이다.〉"(279-80, 284-5)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돈을 줬든 안 줬든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한만호의 행동이 상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검찰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도움을 약속했을 수도 있고, 한만호가 막연히 기대했을 수도 있다. 다만 한만호는 검찰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검찰의 도움을 받아 재기하려고 했다. 한만호는 2011년 6월 출소할 예정이었다. 검찰에서 진술한 대로 법정 증언을 마치면 그만이었다. 검찰이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한만호가 검찰에게 협조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밖에서 다시 사업을 일구고 가족과 즐겁게 살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왜 진술을 뒤집었을까."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한만호의 검찰 진술이 모두 진실이었다면 한명숙이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한만호는 돈을 전혀 받은 적이 없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한명숙 앞에서 일관된 태도로 사죄의 마음을 표시했다. 더구나 위증죄를 무릅쓰고."(297-8)


# 한명숙 사건 타임라인

2010.03.31 한만호 서울구치소로 이감

2010.04.03 한만호, 한명숙에게 9억 제공 검찰 진술 시작

2010.06.02 한명숙 서울시장 선거 낙선

2010.07.21 검찰, 한명숙 정치자금법위반 불구속기소

2010.12.20 한만호, 법정에서 진술 번복

2011.02.21 동료 재소자 김 씨 1차 법정 증언(한만호 진술 번복 탄핵)

2011.03.07 동료 재소자 최 씨 법정 증언(한만호의 진술 번복 탄핵)

2011.03.23 동료 재소자 김 씨 2차 법정 증언

2011.06.09 검찰, 한만호 감방 압수수색, 비망록 압수

2011.06.13 한만호 출소

2011.07.07 검찰, 한만호 위증 혐의 기소


"김 씨는 2010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89번 검찰청에 출정을 갔다. 한 달에 평균 15번이다. 주말과 휴일을 빼면 사실상 매일같이 불려나간 셈이다. 최 씨도 비슷하다. 2010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1년 동안 148차례 검사실에 출정을 나갔다. 한 달 평균 12번이다." "한만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김 씨와 최 씨의 증언이 법정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지만 검찰은 목적을 달성했다. 언론이 김과 최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한만호가 진술을 번복한 것은 한명숙의 도움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만호는 한명숙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재개할 꿍꿍이가 있었다. 증인 김 씨와 최 씨의 논리이고 정확하게 검찰의 입장이었다 언론은 검찰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김과 최의 증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당시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취재했던 언론은 없다. 이쪽 저쪽 주장만 중계했을 뿐이다. 그래서 검찰의 수고로움은 그리 헛되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315-8)


"2020년 뉴스타파 보도 이후 대검 감찰이 시작됐다. 한동수 감찰부장은 판사출신이다. 법조비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2006년 김홍수 게이트 이후 2008년부터 감찰부장은 외부 공모를 통해 선발했다. 한동수는 2019년 당시 조국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감찰부장에 임명됐다. 임은정 검사는 평소 SNS나 언론을 통해 검찰 개혁을 강하게 주장해온 인물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비주류, 정확하게 말하면 왕따로 평가 받는다." "검찰 수뇌부는 한동수와 임은정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2021년 3월 2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한명숙 재판 모해위증 사건'의 주임검사를 허정수 감찰3과장으로 지정했다. 2020년 6월부터 감찰이 시작됐는데 공소시효 나흘을 남기고 담당 검사를 갈아치웠다. 윤석열은 3월 3일 총장직에서 사임했다. 윤석열은 임기 마지막 지시로 검사 모해위증교사 의혹을 덮었다. 3월 5일 허정수 감찰3과장은 사건을 불기소 종결처리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으로 내린 결론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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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3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4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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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서언


"벤담은 『정치적 오류들』에서 이렇게 썼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인간은 항상 두 갈래의 이익에서 영향을 받는다. 〈전체 공동체의 (중략) 행복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공적인 이익과, 〈공동체 전체보다 작은 일부분의 복지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사적인 이익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사적 이익이 일반이익과 충돌할 때, 일반이익에 등을 돌리고 자기가 소속한 개별적 단체의 이익을 기필고 옹호하길 원할수록 오류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이 일치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그러한 일치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개혁가들이 노력하는 방향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와 같은 이익의 일치가 이미 달성되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통치하는 단체에 속한 모든 회원들이 말하는 방향이다. 평화가 회복된 이후로 마침내 얘기를 들어줄 청중까지 생긴 참에, 철학적 급진파는 보수파 세력들의 모든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한목소리로 공격한다."(3-4)


# 평화의 회복 :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을 가리킨다.


# 보수파의 오류

1. 경제적 오류 : 보호무역주의는 생산자 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나머지 시민들에게 고통을 부과한다. 따라서 집단이익은 일반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방식은 모든 개인들 사이에 모든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이다.

2. 정치적 오류 : 정치 및 사법제도의 복잡성은 인민의 자유가 아니라 귀족의 특권들을 지켜주는 방호벽이다. 따라서 보통선거를 시행하여 집행자들은 의회에 의존하고, 의회는 인민 다수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3. 철학적 오류 : 귀족제는 희생의 도덕을 가르치고,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이기적으로 수호함으로써 전체의 번영을 실현하라고 안내한다.


1장 / 경제사회의 자연법칙


"리카도는 정치경제학을 이제 더 이상 〈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부가 일단 생산된 다음에 그것을 만드는 데 함께한 계급들 사이에서 그 부가, 교환과는 상관없이, 분배되는 방식에 관한 탐구로 새롭게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따져 물을 때, 리카도의 경제철학 내부에서, 정태적 관점과 동태적 관점을 구분해야 할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리카도에서 교환이라고 하는 정태적 법칙만을 중시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비록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의 법칙이 실제 작동에서는 수많은 방해 요인들 때문에 한계를 만나며 리카도 자신이 그런 요인들을 엄밀하게 정의하려 애쓰고 있지만, 리카도의 신조가 낙관주의가 된다. 리카도에서 인구와 지대와 임금과 이윤의 동태적 법칙을 분석해내려는 사람이 보기에는, 리카도의 신조는 반대로 상대적 비관주의가 되고, 그러한 비관주의의 근거가 되는 원리는 이익의 자연적 균열 원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15-6)


"〈상거래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동등하게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주와 일반 공중 사이의 관계는 그런 거래와 같지 않다. 한쪽은 온전히 손해만 보고, 다른 한쪽은 온전히 이득만 본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에서 새로운 국면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여기다." "이제 지대의 운동법칙이 정치경제학의 근간이 된다. 그 법칙이 일정한 〈계급〉 이익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법칙인 만큼 정확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사회 안에서 자기네 노동의 산물을 서로서로 자유롭게 교환하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계급들도 고찰해야만 한다. 이러한 계급들은 자연적으로 일치하는 이익들을 정부가 서로서로 맞서게 만들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윤곽만을 그려 놓았던 부의 분배 이론과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을 리카도가 풀어낸 것은 차액지대의 동태적 법칙을 기반으로 삼고, 그것이 다양한 경제적 〈계급들〉의 형성에 기여하는 경로를 연구한 덕택이었다."(37-8)


#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 : 조세를 외견상 납부하는 사람 말고, 궁극적으로 조세 부담이 귀착되는 경제 주체가 누군지에 관한 이론. 리카도가 보기에 오직 지대에 비례한 토지세만이 지주들의 부담으로 귀착된다.


"이윤과 임금이 역비례로 변동하게 되는 법칙은 자본가 계급과 임금소득자 계급 사이에 이익의 자연적 괴리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이윤의 축적이 임금 하락의 핵심적 원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리카도에 따르면, 이윤의 운동법칙은 궁극적으로 인구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지대의 징수는 생산물의 가치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되어야 할 부분을 모든 구획의 토지에 대하여 평준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반면에 인구가 증가하고 더욱 척박한 토지에도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 생계에 필요한 식량의 가격은 끊임없이 올라가기 때문에, 노동의 자연가격도 동일한 비율로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자본가가 챙길 수 있는 몫은 끊임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생산물의 '가치'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언제나 줄어든다. 생산물의 '이윤율'은 더욱 급격한 속도로 하락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빈곤 덕에 부유해지는 것은 제조업자가 아니라 지주다."(44-6)


"지대, 이윤, 그리고 임금의 움직임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이런 식으로 경제적 세계의 세 계급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이익의 갈등을 산출한다. 리카도의 추상적인 공식들은 그 자신의 시대가 보여주는 광경을 신실하게 표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균열은 1815년 이후에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서 산업이 재개되었다. 유럽에서 영국의 산업 생산물은 전만큼 필요하지 않았다. 영국 산업은 전만큼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낮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빵이 비싼 체제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다. 과거의 토지 귀족과 새로운 상업과 산업과 금융의 귀족들 사이에 궁극적인 융합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토지 귀족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와 민중,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동맹이 1832년의 정치개혁과 1846년의 경제개혁으로 이어진 운동의 공식이었다. 리카도가 제창한 부의 분배 이론은 영국의 경제사에서 이렇게 획기적인 시기의 표현이었다."(49-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국가가 경제적 관계들에는 가능한 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바랐다. 신조에 차이점들이 있지만, 이 점에서 그는 케네와 애덤 스미스의 전통에 충실했다." "리카도는 산업화 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 심각한 위기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책략에 의해 그런 위기를 방지하거나 단기에 종식하려 시도하면 안 된다. 〈[그런 위기는] 부유한 민족이 감수해야 하는 악이다. 이에 관해 불평한다는 것은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이웃의 오두막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안전한데 자신의 선박은 바다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한탄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리카도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의 이론은 많은 경우에 자연에 대한 신념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인간을 공격하는 재앙을 인간이 교정할 수 없다는 무력함의 인정이다. 이것은 낙관론이라기보다는 운명론이다. 정부는 경제적 관계들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시도하는 치유책이 그 폐단보다 어쩌면 더 나쁠 수가 있기 때문이다."(51-7)


"리카도는 지주를 농업종사자, 다시 말해, 제조업자처럼 자본가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그가 역설한 유일한 이익의 대립은 모두 자기 각자의 생산물을 가급적 비싸게 팔고 싶어 하는 생산자 집단들과 소비자 전부, 다시 말해, 모든 생산물들이 최저가격에 팔리기를 누구나 예외 없이 신경 쓰는 모든 개인들 전체 사이의 대립뿐이었다. 생산자들의 집단 모두의 이익 하나하나를, 서로 모순될 것이 뻔한 일련의 세세한 법률들에 의거해서, 한꺼번에 보호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이익, 이런저런 경제적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들로 고찰되는 모든 개인들의 이익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학파는 개인주의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 학파는 일반이익을 서로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은 집단이익들의 총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개인이익들의 총합으로 보기 때문이다."(58-9)


"사회의 번영에 대해 이토록 순조롭지 않은 여건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물들의 정상적인 진행에 인위적인 수단으로써 대응하여 평형을 잡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교환의 자연적 작동에, 자생적인 분업에 〈공급과 소비〉를 규율하는 필수적인 기능을 맡겨야 하는가? 애덤 스미스 이래 모든 경제학자들의 고전적 명제가 그것이었다. 제임스 밀도 스스로 애덤 스미스의 제자라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여기서 제임스 밀은 분업이 일을 잘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 까닭은 정확히 분업이 〈흔히들 일컫듯이 실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우연에 의해서, 개별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개인들이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것들 덕분에 어떤 특정한 이득을 이런저런 분야에서 얻을 수 있겠다고 눈치채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이 질문을 논제로 올리고, 분석과 종합에 의해서 업무들을 체계적이고 숙고를 거친 방식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97)


"제임스 밀은 지주의 이익과 공동체의 여타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괴리를 지대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교정하는 가능성을 리카도보다 더욱 명료하게 지각했다."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는 거기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체계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구획되기 이전까지, 토양의 생산력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고, 그러므로 공동의 또는 공통의 목적과 요구를 위해 특별히 맞춰진 하나의 기금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밀은, 자기 아들이자 제자였던 스튜어트 밀도 옹호했고, 헨리 조지 학파의 농업사회주의자들도 옹호했던, 단일토지세를 통한 해결을 옹호했을까? 전혀 아니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처럼, 애덤 스미스가 정리한 원리에 끝까지 충실했다. 〈공정하게 작동하는 세금이란 납세하는 여러 계급들 사이의 상대적 조건을 납세 이후에도 납세 이전과 동일하도록 놔두어야 한다〉는 것이, 〈국가의 임무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액수〉와 관련한 〈진정한 분배의 원리〉다."(99-101)


"이제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일이 남았다. 소득이 일단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자본으로 전환할 것인가?" "가장 확실한 방법, 시행했을 때 가장 꾸준하게 효과를 보일 것으로 확인되는 방법은, 간접적이며 도덕적인 방법들이다. 입법자는 대중에 의한 제재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할 수 있다." "구빈법은 구걸 상태를 어떤 의미에서 합법화하고 재가해주는 법률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국가가 설립해야 할 것은 이 지구 위에서 심리와 생리와 물리의 법칙들이 결합해서 인간에게 제공한 실존의 조건들에 관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하나의 교육체계다. 나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제임스 밀이 맬서스의 관점에서 이론을 마련해준 저축은행이나 공제조합 같은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결혼 시기를 연기하고, 출산 횟수를 줄이며, 자본을 축적하는 성향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신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만들기 위한 성격이었다."(102-4)


"그렇지만 제임스 밀이나 플레이스의 신-맬서스주의에서 콩도르세의 낙관론까지는 머나먼 길이다." "콩도르세는 조건의 절대적 평등을 지향하는 항상적인 경향, 그리고 자연의 후원을 받는 경향을 인류의 역사에서 자기가 인지했다고 믿었다. 반면에 공리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의 자연법칙들이 절대적 평등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설치한 난제들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벤담은 언제나 평등을 입법에서 단지 부차적인 목표로 간주했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를 때, 재화의 평등한 분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정부가 필요한 근거 아니겠는가?" "자연은 조건들을 불평등하게 설정해 놓았고, 경제학자들은 어떤 법칙들이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만약 폭력으로 이 불평등을 파괴한다면, 그 대신에 더 나쁜 불평등 또는 보편적 빈곤이 자리를 잡을 뿐이다. 폭력에 맞서서 재산의 불평등을 보호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에게서 차용한 벤담의 정의에 따를 때,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본질이다."(108-10)


# 신-맬서스주의 : 건강에 해롭지 않은 임신 방지 예방법을 명확하고,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적시해야만 인구의 과잉 증가를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들로 스튜어트 밀과 그의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진보에 관해 리카도와 맥컬럭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두 가지 상반되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두 가지 상이한 심리학,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경제적 동기를 생각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방식에 기인한다. 맥컬럭은 이렇게 쓴다: 〈올라가려는 야망이 사회에 활력을 주는 원리다. 모든 시대 인류의 커다란 목표는 아버지들의 여건에 만족하며 지내기보다는 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부의 저울에서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리카도와 제임스 밀이 중시한 것은, 일단 획득한 경제적 위상을 향상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유지하려는 욕구로 구성되는 동기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인간은 지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진보의 역량이 있다. 인간은 지적인 자본을 무한히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인간은 단지 작은 범위에서만 저축하고 축적할 역량이있다." "이와 반대로 맥컬럭에 따르면, 자본의 축적은 쉽고 자연적이다. 그리하여 진보의 철학은 다시 한번 거의 무제한적인 낙관론이 된다."(114)


2장 / 정의의 조직과 국가의 조직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다른 사람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 사법기관의 조직을 위한 법률안 초안」(1791)에서부터 벤담이 늘 표명한 바람이었다." "이는 〈개인 각자가 자기 이익의 최고 판관〉이라는 경제적 격률을 떠올리게 하며, 〈사람은 각자가 사제〉라는 루터의 공식과 연결되는 격률이기도 하다. 자유거래의 최초 이론가들이 상업의 자유를 향한 요구에서 일종의 상업적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목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벤담과 그 주변의 반교권주의 집단은 자기네 공리주의에서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의해 시작된 해방 운동의 마지막 단계를 목도했다. 사제의 자격과 법률가의 자격은 하나다. 판사들에 의해 제작되는 법률은 사제들에 의해 제작되는 종교와 매한가지다." "여기서도 공리의 규칙은 곧 단순성의 규칙이다. 사법개혁을 일궈내려면 기술적 체계의 복잡성에서 자연적이고 가족적인 체계의 단순성으로 탈바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141-2)


"몽테스키외의 증언에 따르면 문명 세계 전체에 걸쳐서 신성시되고 있던, 자유주의적 편견들 또는 자유주의적이라고 간주되던 편견들에 벤담주의자들의 단순주의는 충격을 안겼다. 단순한 제도는 독재국가에 알맞고 자유국가에는 복잡한 제도가 어울린다는 것이 자유주의 파당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절차의 문제에 있어서, 벤담은 증언과 증거를 평가할 때 판사의 의견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규칙,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피고인의 자유를 지켜줄 수많은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그 모든 규칙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항상 요구했다. 사법부의 조직에 관해서는, 벤담은 여러 명의 판사가 재판하는 체제를 부정하고,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한 판사가 단독으로 주재하기를 바랐으며, 영국 자유주의의 자랑거리였던 배심제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였고, 법정 공방의 공개만으로도 판사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구현할 것이라며 만족할 수 있었다."(127-8)


"공론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적 책임감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는 벤담이 일찍이 도달했고 끝내 버리지 않았던 확신이다. 〈(판사들을 공론으로 통제하는) 공개가 없다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헛되게 된다. 공개에 비하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보잘것없다. 영국의 절차 체계가 최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 가운데 가장 덜 나쁜 체제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타 모든 사항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욱 공개의 덕택이다. 사법의 영역에서 프리드리히와 예카테리나가 선의를 가지고 노력했지만 목표로 삼았던 과녁에 그렇게 한참이나 못 미친 채 실패로 끝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원칙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벤담이 『헌법전』에서 사법조직 체계의 기초로 삼은 동기는 40년 전 『파놉티콘』에서 교도소 행정 체계의 기초로 삼았던 동기와 같았다: 〈영향력이 가장 강하고, 가장 지속적이며, 가장 획일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동기, 곧 가장 광범위한 공개에 의해서 교정되는 개인적 이익〉이라는 동기였다."(181-2)


"벤담의 신조에 의해 구상되는 판사는 자기 재판정 안에서 홀로 고립된 일종의 군주로서, 공론에 의해 그에게 행사되는 순수한 도덕적 통제 말고는, 결과적인 권력 남용을 예방할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리고 어떤 법률적 형식도 없이, 자기 나름의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이런 신조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신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신조의 어법은 19세기에 카이사르주의자들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를, 그리고 그것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인 만큼만 책임을 지는 정부를, 세우자고 요구했을 때 사용한 어법과 거의 동일하다. 벤담은 가족의 비유 그리고 가정의 다스림에 대한 비유를 호출한다. 17세기에, 로버트 필머 경은 동일한 비유를 기초 삼아 하나의 신정적인 군주정 체제의 이론을 건축했었고, 로크에 의해 반박당했다. 《에든버러 평론》에 따르면, 벤담의 급진주의는, 사법절차와 사법조직의 영역에서, 절대군주제를 옹호했던 로버트 필머가 주창한 가부장 체제의 복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182-3)


# 벤담의 정치철학의 세 가지 원리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리 : 입법자는 그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최대 다수(모든 개인의 최대 행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의 최대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2. 자기-선호의 원리 : 모든 개인은 본질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이기주의자다. 따라서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의 일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3. 이익의 연합 원리(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 : 따라서 정부는 정치사회의 구성원들을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하는 여건들 아래에 위치시켜야 한다.


"벤담에 따르면, 모든 쾌락들은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르고 구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두 개의 악 중에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해야 한다〉가 아마도 공리주의 철학의 근본적인 격률일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정치 분야에서) 〈행복을 최대한 가져오기 위해서〉는, 또는 벤담의 다른 표현으로는,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오직 두 가지 방법만이 있다: 공직자의 적성이 최대화되어야 하고, 비용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형용사적인 법률의 근본 문제를, 약간 수정된 형태지만, 여기서도 인지할 수 있다. 정부의 기능이 잘 수행되기 위해서는, 보수가 가능한 한 많이 지급되어야 하며, 비용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가장 광범위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비용은, 고통을 담고 있거나 쾌락의 박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비용이 가능한 한 적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리하여 문제는 이윤과 손해를 계산하는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된다."(188-9)


# 형용사적인 법률 : 벤담은 법률을 〈실체적〉인 법률들과 〈형용사적〉인 법률들로 나눈다. 여기서 형용사적인 법률이란 문법에서 형용사가 실사(實辭, substantive)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듯이, 실체적인 법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절차에 관한 법률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안은 통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권력이 결과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보장책이다. 통치자들이 더욱 지성적이고 더욱 활동적일수록, 남용은 어쩌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절한 도덕적 적성의 최대화〉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정부의 모든 구성원은, 처벌하거나 보상하는, 협박하거나 약속하는, 쾌락과 고통을 분배하는, 두 겹의 권력을 자기가 부여받은 사실을 안다. 그는 이 권력을 악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그가 이 권력을 선을 위해 사용하고 악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끔 만사를 편성하는 것이 과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단일한 규칙에 달려있다: 〈신임을 최소화하라〉. 그런데 벤담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접목하는 이 규칙은 기실 영국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피치자들이 통치자들을 불신해야 한다는 것은 휘그파 중 가장 소심한 부류에서부터 급진파 중 가장 완강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신념이었다."(189-90)


# 벤담이 헌법을 제시한 민주국가는 삼권분립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성인 시민들을 대표하는 기관인 입법부가 〈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국가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도덕적 비관론에 근거한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의 진정한 이익이나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정부는 악하다. 가장 덜 나쁜 헌법이란 정부 조치의 집행에 맞서서 장애물을 가장 많이 설치해 놓은 헌법일 것이다. 여기서 혼합헌정 또는 복합헌정이라는 발상이 일어난다." "반면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해서 정의된 급진적 국가는 주권을 인민에게 부여하는 국가다. 그 후에 인민은 일정한 수의 정치적 기능들을, 인민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거나, 주권의 일부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를 표명하고 이어서 그 집행을 더욱 효과적이고 더욱 집중되게 만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으로 선출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인민의 대표들이 자기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혀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주권 전부 또는 일부를 훔쳐가지 못하게 방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담의 체계에서 인민의 주권은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에 봉착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민주권은 모든 시민들의 주권을 의미하고, 만장일치의 투표를 함축한다. 그러나 헌법적으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의견의 분포가 분열되어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가 십상이다." "이에 대해 플레이스는 〈공리의 원리는 계몽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명료하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임스 밀은,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진술한 바 있었다: 〈이성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증거를 저울질해보고, 무게가 더 나가는 쪽으로 인도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하다. 다양한 결론들이 나름의 증거를 가지고 동등한 정성과 동등한 수완에 의해 제출되었을 때, 비록 극소수 몇몇은 잘못 이끌려 갈 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바르게 판단할 것이고, 증거의 가장 강력한 힘이 어디에 있든지 튀어나와 가장 강력한 인상을 산출하리라는 도덕적 확실성이 있다〉. 벤담주의자들은 다수의 주권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했다."(194-6)


"벤담은 의회에 진출한 대표들에게 다섯 가지 〈보장〉을, 유권자들과의 관계에서, 요구한다. 이중 둘을 그는 〈일차적 또는 주된〉 보장이라고 보는데, 유권자들에 대한 의존과 왕과 궁정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차적 또는 도구적〉인 보장도 둘인데, 매년 재선거에 임해야 한다는 조건과 공무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이것들은 주된 보장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무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보장은 벤담의 용어로 〈출석의 보편적 항상성〉이다. 다음으로는 의회의 선거인들이 규정되어야 한다. 벤담은 자신의 계획을 네 가지 요점으로 정리한다: 사실상의 보통선거권, 실천적인 평등 선거권, 투표의 자유 또는 진정성, 비밀투표." "벤담은 단순화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로 〈세대주 참정권〉에서 〈사실상 보통선거권〉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고, 그 뒤로는 그 운동의 공인된 이론가가 되었다. 〈보통선거권〉, 〈매년 의회선거〉, 그리고 〈비밀투표〉가 급진파 모임에서 으레 등장하는 공식이었다."(204-6)


"정치경제학에서, 공리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여건들을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권리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제도를 확립하더라도 경제적 여건의 불평등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부자가 빈자에게 미치는 《필연적이면서 자연적인》 영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봤다." "공리주의자들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시장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비유적으로 말해서 정치적 시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자는 것으로서, 이는 곧 각자가 자신의 부와 재능과 평판에 의해서 부여받는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가 사회의 진정한 이익에 해를 입히면서 엄청난 재산을 지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독점이나 특권에 의해 이 자연적 불평등이 인위적으로 악화되면 안된다. 왜냐하면, 경제적 진보를 결정할 자본의 축적에 더욱 역량이 나은 계급, 즉 중간계급이 많이 형성되는 것이 사회에 이익이기 때문이다."(224-5)


"새로운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은 각자가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선의 판관이며, 모든 개인의 이익은 하나의 일반적 규칙으로서 동일하다고 말한다. 벤담이 추천한 체제는 이 동일성이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체제에서 정부 권위는 인민으로부터 직접 발출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집행권은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헌법전』에서는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만이 끊임없이 적용된다. 벤담은 한편으로 개인들의 이익을 체계적으로 보호할 정부를 조직하고자 권위와 행정권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자들을 피치자에게 복속시킴으로써 그들의 개별적인 이익을 민족의 이익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도록 예방할 일련의 헌법적 장치들을 처방했다. 벤담이 구상한 국가는 개별적인 존재로 이해되는 개인 각자가 모든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의 통제로부터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게끔 잘 축조된 하나의 기계다."(231-2)


"벤담과 제임스 밀의 〈대의민주주의〉란 단지 순수한 민주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민족의 실존적 필요에 맞춰 적응한 결과일 뿐이었다. 영국인들로 하여금 유럽에서 자유로운 인민의 본보기가 되게 만들어준 지방자치제에 영국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있던 그 시기에, 공리주의 급진파들은 대체로 프랑스의 체제에서 영감을 받아 행정적 중앙집권체제를 옹호했다. 개인의 행위든 정부의 행위든, 모든 행위는 두 가지 계기를 함축한다: 행위에 앞서는 숙고와 행위 자체의 집행이다. 권위주의자들은 의회의 일상적 절차를 단순화함으로써, 정부 조치의 집행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만들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헌법적 조직들을 복잡하게 편성함으로써, 행위에 앞서는 숙고의 기간을 가능한 한 연장하기를 바랐다. 벤담은 자유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박애주의적 개혁을 위해 항상 안달이 나 있던 그는, 군주적 권위주의에서 민주적 권위주의로, 앵글로색슨의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중간 단계에 머무른 적 없이, 곧바로 건너갔다."(128-9)


3장 / 사유의 법칙과 행동의 규범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을 하나의 합리적인 과학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현상들이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고, 사회 세계의 모든 법칙들은 다시 〈인간 본성의 법칙들〉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법칙들은 그 자체로 두 종류다: 물리학자와 지질학자와 생물학자가 정의해 놓은 것을 경제학자와 법학자가 빌려와야 하는 물리적 법칙과, 그런 법칙이 있는지 여부가 아직 질문거리로 남아있는 심리적 법칙이다. 자연과학의 유형에 맞춰서 구성되는 어떤 과학적 심리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마저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학적 심리학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제임스 밀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존재하기 시작한 다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방식을 취했다." "이 새로운 심리학의 역사에서 제임스 밀이 수행한 역할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역사에서 리카도가 수행한 역할(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 맬서스의 혁신을 포함한)과 흡사하다."(233-4)


"토머스 벨셤이나 프리스틀리 같은 여러 저술가들은 하틀리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심화해서, 그 원리들을 새로운 문제들의 해결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의식의 상태를 탐구자의 엄밀한 관찰을 통해 포착할 수 있게 해줄 모종의 유형적 등가물을 찾기 위해서, 어떻게든 생각을 물체로 번역해보려는 고유한 경향이 이 철학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신경의 요소를 의식 상태의 표식 또는 원인 또는 심지어 본체와 같은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단어 역시도 관념의 표식 또는 어떤 경우에는 관념의 본체인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정신 현상에 관해서 에라스무스 다윈은 하나의 생리학적 이론을, 그리고 혼 투크는 하나의 언어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의 두 갈래 이론은 오늘날에는 불신의 대상이지만, 20여 년 동안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다윈과 투크는 제임스 밀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해서, 연상주의 심리학의 부활에도 영향을 미쳤다."(245-6)


"제임스 밀은 유명론의 명제를, 로크나 하틀리처럼, 수많은 결합된 관념들을 지칭하는데 〈복합관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원래 구분되는 여러가지 관념들이 하나의 단일한 관념으로 합쳐질 때, 진정한 심리적 결합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화학은 자연에 관해 관해 뉴턴의 체계가, 데카르트의 물리학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맞다고 확인해줬다. 다시 한번, 인과의 고리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이해할 수 있는 연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고, 원인을 보고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의 속성들로부터 물의 속성을 예측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인력의 법칙이라는 단일한 법칙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희망을 뉴턴의 과학이 지탱해준다손 치더라도, 한편으로는 원소들과 법칙들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기계적 과정만으로 원소를 분리해낼 수 없는 경우에, 새로운 물체들이 결합을 통해 생성된다고 인정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260-1)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 의해서, 제임스 밀이 인간 정신에 관한 〈해명〉 또는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 벤담주의자들에게 확립되었다. 이론가는 〈관찰되는 사안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자신을 국한하기를 그는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불행히도 이론이라는 단어는 이와 아주 다른 작업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살펴보는─관찰하는─부분이 대체되고, 그 대신에 본질적으로 상정(想定)하는 일, 그리고 상정된 사안을을 관찰된 사안들이라고 내세우는 일에 해당하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이론은 기실 가설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론〉은 현상들을 관찰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고, 생각에서 나오는 자의적인 요구들을 현상에 부과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설〉과 구분된다. 그러나 적어도 관찰된 현상들을 배열하는 과제, 그리고 가급적 손에 쥘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지식이 산출되도록 고안된 계획에 따라서 그것들을 배열하는 과제는 이론 자체의 몫으로 남는다."(266, 272)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최초로 알리고〉, 의지와 행동의 심리학에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이 바로 제임스 밀이다." "복잡한 쾌락들은 자체의 본질을 가진다. 복잡한 쾌락들은 새로운 쾌락들이고, 인간 본성을 가장 잘 음미해준다. 그것들이 그러함을 우리의 내부적 경험이 말해준다." "단순한 쾌락들은, 서로서로 결합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원인에 관한 관념들과 결합해서, 정감을 생성한다. 정감은 동기를 생성하고 동기는 성향을 생성한다. 만약 우리의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우리의 쾌락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성향들이 발휘되고 이러한 습관들이 획득되기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사심 없는 느낌들이, 우리에게 자체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 안에 자라나는 것을 이기주의 도덕이 왜 방해하겠는가? 제임스 밀의 분석은, 이런 식으로 인식된다면, 복잡한 느낌들을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생산할 이유와 방법을 제공해줄 것이다."(296-7)


"제임스 밀은 인류의 진보를 믿었고, 이 진보가 필연적인 법칙들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겼다. 이를 최초로 정형화한 사람 중 한 명인 프리스틀리에 의하면, 이 진보의 법칙은 다름 아닌 관념결합(연상)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이 법칙에 따라서 사회에서 쾌락의 총합은 고통의 총합을 능가하는 경향을 항상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 밀은,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서, 가장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감의 느낌들이 어떻게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한 느낌이 다른 느낌으로부터, 생성되는지를 보이고자 시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관계들이 증가하고 긴밀해짐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이기적 느낌과 공감적 느낌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리고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기가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사세(事勢)에 의해서 점점 더 빡빡하게 속박을 받을 것이다."(300-1)


"자기 부모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그들의 행복은 아이에게 욕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불행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이 자연적 진보를 장려하고, 그만큼 그 아이의 주변에서 우연의 역할이나 개인적 변덕의 역할이 가능한 한 제거되도록, 그리고 공감적 정감들이 아주 세세한 대목에서까지 그 자체의 발전의 일반법칙에 부합해서 이뤄지도록, 제반 사정들을 조합하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보존에서 얻는 이익은 다른 사람의 보존에서 얻는 이익에 비교할 때 무한히 크다. 그러나 그 개인이 자신의 보존을 위해 맘대로 쓸 수 있는 힘은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연합해서 그에게 대항해서 쓸 수 있는 힘과 비교할 때 무한히 작다. 그렇다면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자신의 사회적 실존 조건들에 맞추는 것이 그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한다면, 도덕은 일종의 낙관적 운명론이 되고, 체념과 희망이 대등한 비율로 들어가 섞인 합성물이 될 것이다."(301-2)


#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소수에 비해 다수의 수가 더 많아지는 데 비례해서,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근접한다.


"개인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을 조화시키려는 공리주의자들의 시도는, 자기희생을 격하하고 이기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그들의 철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대의 선행이 언제나 그대 자신의 이익에 간접적으로 복무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선의를 가지고 선을 행하라─덕에 관한 벤담과 제임스 밀의 이론 전부를 이 공식이 요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기주의는 도덕의 기초 그 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연상주의 심리학의 모든 노력은 이기주의가 원초적 동기로서 영혼의 모든 정감들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이어진 복합물들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공리주의 도덕학자의 모든 노력은, 이기적이든 아니면 사심이 없든, 감성적인 충동들을 하나의 성찰적 이기주의에 종속시키기 위함이었다. 행복의 총합은 개인적 단위들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각자가 이기적이기만 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305, 310-1)


"공리주의자들의 도덕은 명령문으로 번역된 그들의 경제심리학이었다. 두 세기 전에 홉스는 공리의 신조 위에 사회적 독재의 완전한 체계 하나를 세웠었다. 그리고 실제로, 벤담의 사법이론의 근거가 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을 정당화했다: 이익과 의무의 연관을 개인을 위해 확립해주는 것은 주권자가 강요하는 처벌의 위협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성장하고 승리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그 신조 안에 다른 원리가 주도적인 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본성에 부합하는 사회 안에서 이기주의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원리였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공리주의 이론가들에게 도덕의 근본적인 개념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교환의 개념이었다. 도덕적 행동의 동기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였다. 공리주의 도덕학자는 입법자가, 사회 안에 이기주의들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챙기는 일 말고는, 그 이상의 개입은 불필요하게 만들었다."(312-3)


4장 / 결론


"벤담과 그 제자들에 따르면, 윤리는 하나의 고된 기예다. 나아가, 우리가 그들을 믿는다면, 윤리라는 기예의 기초는 합리적인 과학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공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방식 역시 그들 철학의 근본적 특질과 관련해서 오해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로크 학파에 속했고,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두 경험에서 차용되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연역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인하는 데 조금이라도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이라는 뉴턴의 법칙은 경험에서 추출된다. 그러나 일단 그 법칙이 공표되면, 단지 그 법칙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 끊임없이 그 법칙의 응용을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하다." "이제, 벤담주의자들의 야심은 모든 사회과학들을 연역적 과학의 모델에 맞춰 확립하는 것이었다."(343)


"진실을 말하자면,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보다는 당연한 전제로 여겼다. 하나의 사회과학이 가능하려면, 행복이 쾌락들의 총합으로 여겨지기를,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쾌락들의 총합이 고통들의 총합을 상쇄하고 남는 초과분이 행복이라고 여겨지기를 그들은 원했고, 이러한 쾌락들과 고통들의 계산이 가능하기를 그들은 원했다." "벤담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체들이 서로 다른 행복을 합산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엄밀하게 고찰하면 허구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모든 정치적 추론이 중단되어야 하는 대전제다〉." "그러나 만일 허구가 성공적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실재로 취급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허구임을 번번이 되새기지 않는 편이 낫다. 벤담에 의하면, 공리주의 신조의 합리주의적 전제는, 만일 수많은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 과학적 정치의 확립을 초래할 역량을 그것이 진실로 가지고 있다면, 그 결과에 의해서 정당화된다."(345-7)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관한 틀림없는 판관이고,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제약 없이 추구할 수 있다.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이익의 조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입법자의 선의와 역량이 기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리주의는, 자체로 모순이 아니라손 쳐도, 실현되기 위해 거의 하나의 기적과 같은 우연을 전제한다. 실지로, 모든 이익들을 조화롭게 만들기에 필요한 지성적·도덕적 적성을 주권자가 가진다는 어떤 보장이 우리에게 있는가? 벤담과 그 친구들이 1807년 이후 채택한 해법의 취지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주권을 인민 전체, 또는 적어도 다수에게 귀속시켰다. 어떤 자유들은 희생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자유들은 언제나 소수의 자유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권력을 가진 다수는 공리주의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계몽되어 있어서 보편적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알 것이다."(364)


"벤담과 그 제자들의 신조는 이제 우리 앞에서 그 모든 복잡한 실상을 드러냈다. 그것은 분명히 쾌락의 도덕인데, 스스로를 확립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처럼 정의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전제하는 쾌락의 도덕이다. 이 두 가지 기초 위에 세워진 이 신조는, 어떤 의미에서 이 체계 내부에서 서로 경합하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원리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한 원리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갈라지는 이익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입법자의 과학이 간섭해야 하고, 다른 원리에 따르면, 이기주의들의 조화에 의해서 사회 질서가 자생적으로 실현된다. 공리주의자들이 자기네 논리체계에 의해서 이들 두 원리 가운데 한쪽 또는 다른 쪽에 호소할 자격이 얼마나 있느냐가 질문거리다. 공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비난받을 일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 필연적인 결론들을 어쩌면 모두 도출하지 않은 점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367)


"벤담이 사망한 지 20년 후에, 벤담의 제자라기보다는 훨씬 더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로 바뀐 공리주의자들은 이제, 정부나 행정을 통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더 이상 자기네 신조에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규제와 법률도 적대시했던 이 새로운 이론가들의 사회적 사고방식은 자유거래의 이념 그리고 이익의 자생적 일치라는 이념으로 요약되었다." "다윈이 맬서스의 법칙을 모든 생물종에게 연장하는 와중에, 버클은 역사의 철학 전부를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환원하고 있었다. 『사회정학』에서 허버트 스펜서는 경제학자들의 자연법칙들과 법학자들의 자연법을 명시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리고 법의 원천이 실정법과 정부의 의지인 것으로 만들었던 벤담주의를 반박하는 데서 자기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공리주의가 기초로 삼았던 두 가지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때는 이미 영국의 사상사 그리고 입법사에서 철학적 급진주의가 그 힘을 다 소진한 다음이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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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2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3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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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서언


"정치 분야에서 벤담과 그의 제자 뒤몽은, 〈인간의 권리 선언〉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매킨토시와 페인과 고드윈의 경우에는, 평등한 권리의 원리보다는 이익 일치의 원리가 항상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공리주의는 장래의 철학적 급진주의를 예시한다. 경제 분야에서, 고드윈은 개인재산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필요한 만큼의 생계를 평등하고 풍요롭게 제공받게 될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서 언제나 근간이었던 노동의 법칙을 역설하면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아 어두운 면을 지적했다. 인간이 본능을 억제할 줄 모르는 한, 소비자 수가 가용한 생계자원의 양보다 계속해서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행복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조건에 종속된다. 이와 같은 두 갈래의 공리주의 중에서, 정통 교리가 되는 쪽은 고드윈의 것이 아니라 맬서스의 것이었다."(5)


"자유주의 이념들이 영국에서 재신임을 얻고 있던 시기였던 만큼, 자유주의 이념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말하는 언어였던 공리의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에 1808년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추가된다. 오랫동안 휘그당 내 진보파였던 제임스 밀은 벤담을 자유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고, 종내에는 정치적 급진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에게도 이념을 주입했다. 리카도가 경제적 신조 전체를 통일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다가 맬서스의 두 가지 진화법칙을 결합한 것은 밀의 지령과 감독에 따른 일이었다. 결국, 제임스 밀은 가능한 모든 출판 수단을 통해서 스스로 벤담주의의 열렬한 선전가가 된다. 오랫동안, 18세기부터, 서로 격리된 개인들이 여기저기서 선전해왔던 이념들이, 이제야 비로소 제임스 밀 덕택에 그리고 벤담의 후원 아래, 공리주의 학파로 집중되었다."(5-6)


1장 / 정치적 문제


"흄과 애덤 스미스와 벤담은 저항권이라는 발상과 결부시켰기 때문에 사회계약이라는 발상을 비판했었다. 버크는 반란이라는 수단을 꾸짖을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들어있다고 봤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을 받아들였다. 사회계약이란 사람들이 서로 묶여있다는 뜻이지, 다수파에게 자기네 맘대로 사회적 연대의 끈을 풀어버릴 자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적 공리라는 관점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인민주권의 교의는 오류다: 〈누구도 자신의 대의명분에 관해 스스로 판관이 될 수 없다〉. 다수의 의지가 다수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민주권이란 다수파의 절대 권력일 뿐으로, 한 사람의 절대 권력을 뜻하는 군주주권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법을 농단하는 것이며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버크는 공리주의 철학에서 반민주주의 정치를 연역했다. 그가 보기에, 인권의 이론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이었고, 프랑스 혁명에 책임이 있는 저자들, 문사들, 필로조프들의 작품이었다."(12-3)


"벤담은 한때 공화주의 쪽으로 기운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위기는 극히 짧았고 극히 피상적이었다. 제헌의회 연설가들의 〈망상〉과 〈열광적인 웅변〉은 이미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루이 14세 시절에 박해받은 신교도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재산을 돌려주는 등의 시책은 그가 보기에 안전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었다." "1793년에 아직 영국을 떠나지 않은 탈레랑에게 벤담은 『식민지를 해방하라!』는 제목의 소책자 한 부를 증정했다. 이 책은 원칙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하여, 식민제국의 소유가 인권이라는 신조의 관점에서 불의할 뿐만 아니라, 식민을 하는 나라의 이익에도 식민지의 이익에도 무용하고 해로움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남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공격하는 어리석음은 무엇 때문이냐고 1797년에 상원에서 그는 캐물었다." "벤담은 이것이 자신의 자코뱅주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자코뱅주의를 제외하면, 벤담은 반-자코뱅파였다."(40-2)


"1789년 초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말미에, 미국의 인권선언들, 특히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의 인권선언을 비판하는 내용의 주석을 첨가했다. 이 두 선언은 제1조에,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형성할 때 후손들에게 수여할 수도 없고 박탈할 수도 없는 일정한 자연권이 있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고 보호할 수단,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고 확보할 수단을 가지고 생명과 자유를 향유할 권리가 거기에 포함된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서 '생명 또는 자유의 향유를 박탈하는' 모든 법률과 기타 명령은 무효〉라는 말과 같다─다시 말해서, 모든 형법은 예외 없이 무효라는 말인 것이다." "벤담이 생각하기에, 인민은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인민의 선량한 즐거움만이 오직 인민을 제어할 수 있고, 어떤 다른 고삐도 거기에 추가될 수 없으며,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무효화될 수도 없다. 벤담은 박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획가였다. 그러나 그는 공화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44-5, 52)


"벤담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의 초점을 모은다. 첫째, 인권선언의 언어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평등하고, 법은 시민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억압된 평등을 회복하고 위협받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인권선언문에서 서술문으로 표현된 내용은 명령문으로 적혔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평등'해야 하고', 법은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어야 하는 것이다. 법에 대한 〈합리적 검열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차이, 균형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차이가 이것이다. 합리적 검열자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런 법의 폐지를 요구한다. 무정부주의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변덕을 법으로 세우면서, 인류 전체를 초대한다." "벤담이 보기에, 한 민족 전체가 숙고해서 고안했다고 자처하는 헌법은, 영국 헌정 같은 〈우연의 합성〉보다 덜 지혜롭고, 행복의 생산성도 낮다."(45-6)


"둘째, 인권선언은 네 가지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 그런데 이 네 가지 자연권은 벤담의 민법철학에서 지목된 네 가지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다. 자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유를 자의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법, 따라서 이 불가양의 권리에 대한 위협이 아닌 법은 없다. 하지만 악을 행할 자유 역시 자유가 아니던가?" "재산? 재산은 법이 확정한다. 그러나 모든 세금과 모든 벌금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이고, 따라서 저항과 봉기를 정당화한다. … 안전? 제약을 가하거나 처벌을 위협하는 법은 모두 안전에 대한 공격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권? 이 권리는 다른 권리들과 같은 근거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권리가 아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여길 때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수단이다." "이 권리의 정의는 그 이론의 반역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을 특히 정확하게 보여준다."(46-8)


"권리는 사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법률적 구성이 완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인권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때까지는 '자연법'이니 '자연권'이니 하는 문구들은 장광설의 구름 속에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교사들에게나 편리한 〈무의미한 전문용어〉에 불과하다.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일반이익'이다. 공리가 지고지상의 목표로서, 법과 덕과 진리와 정의를 그 안에 포섭한다〉. 그것만이 하나의 객관적 과학으로서 도덕에 관한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공리의 원리 위에서 추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의견 차이가 오래 가는 경우가 확률상 드물다. 그들은 경험에 즉각 의거해서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판단을 교정할 규칙이 쉽고 단순하고 오직 한 갈래의 진로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논쟁을 매조지하는 굉장한 비결이다.〉"(54)


2장 / 경제적 문제


"〈모든 물건의 진정한 가격, 모든 물건이 그것을 취득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진실로 드는 비용은 그것을 취득하는 데 따르는 땀과 고생〉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윌리엄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이어받아, 인간의 노동 이외에 어떤 다른 부(富)도 세상에서 인정하지 않고자 했다. 그는 부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게끔 강제하도록 일정한 개인들에게 사회의 제도가 부여해준 권력〉일 뿐이라고 봤다." "〈부의 소유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권력은 (중략) 구매의 권력, 그 시점에 시장에 있는 모든 노동 또는 노동의 모든 산물에 대한 일정한 장악력이다. 그의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는 이 권력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것 덕분에 그가 구입할 수 있게 된 또는 장악할 수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양 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산물의 양에 비례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고드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112-4)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적 정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정부가 그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 분배는 부의 생산 자체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이다. 반면에 고드윈은 자본주의와 토지재산에서 상속의 효과,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적극적 제도, 정부가 만든 하나의 인공물의 효과를 봤다. 〈우리의 개인적 용도에 활용되어야 할 물건들과 관련해서, 또는 우리의 근면으로 얻은 생산물과 더더욱 관련해서, 재산 또는 영구적 지배권이라는 발상은 그것을 보장해주는 모종의 법 또는 관행이라는 발상을 불가피하게 시사한다. 이런 것이 없다면 재산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재산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제도의 직접 간섭에 의해서 지탱된다.〉 그러므로 애덤 스미스가 정의하듯,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에 따라 받는 상태만이 아니라, 공리의 원리에 부합하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받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115-6)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가 단지 혼동된 방식으로만 지각했던 실제 사회에는 이익의 조화가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된 사회 상태가 주어졌다면, 빈궁한 사람은 오직 부자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할 때만 생계수단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부자들이 자기네 부를 소비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일들을 새로 발명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모든 정교한 사치품, 수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경향이 있는 모든 발명은 행복의 확산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사치품이 하나 발명되었다는 것은, 일시적인 차원 이상으로는 임금이 늘어나지 않은 채, 사회의 최하위 계급에게 강요되는 노동의 양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대다수 구성원들의 노동을 사거나 팔 권력을 사기 또는 무력으로써 찬탈한 자들은 '노동자들이 생계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관리하는 데 충분히 이골이 나 있다.〉"(119-20)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일단 토지가 점유되고 자본이 축적되고 나면, 노동자는 더 이상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전부 누리지 못한다. 그의 임금은 그 자신과 고용주 사이에서 맺어진 흥정의 결과로 정해진다. 이 흥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주인이 유리하다. 고용주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한계에 의해 제지될 때까지 임금을 낮춘다." "이제 부자가 빈자의 생계를 허락하는 것은 일과 교환한 대가다. 똑같은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교환이 이뤄지는 조건들이 교환을 불공정하게 만들고, 이익의 일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희미하게만 감지했던 이 사실을 최초로 드러낸 사람 중 한 명이 고드윈이었다." "이처럼 개인재산 제도 위에 세워진 실제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는 손상되지 않는다. 개인재산 자체가 현실 속의 정부 제도에 근거하며, 인위적 문명의 상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121-3)


"문명화된 동시에 평등주의적인 사회, 아무도 다른 사람의 노동의 산물을 소유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노동의 산물도 소유하지 않는 사회, 다만 각자가 공동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필요에 비례해서 향유할 뿐인 사회,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런 사회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결정적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향이 바뀌어, 자기가 소유할 때보다 이웃 사람이 소유했을 때 더 큰 공리를 생산할 것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되는 변화다: 이런 성향이 풍미하게 될 시대는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팽배한 사회가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사의 자연적 진보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성도 항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고드윈은 이익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기적이기를 멈추고 분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반드시 이 최종적 상태를 지향한다고 여겼다."(123-5)


"1786년, 벤담과도 알았던 조지프 타운센드라는 경제학자가 〈인구의 원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입장에 근거해서 구빈법의 문제를 다룬 한 편의 〈논문〉을 제출한다. 타운센드는 살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고, 근로의 의무를 부과하는 모든 법률적 질서는 굶주림이라는 자연의 제재에 비해 약하고 실효성이 없다는 원칙을 바탕에 깔면서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들, 다시 말해, 미래를 대비할 줄 모르고, 사회적 기능 가운데 가장 〈굴욕적이고 더럽고 비천한〉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로써 〈인간 행복의 재고량〉이 최종적인 회계에서 증가한다. 굶주림, 빵을 얻으려는 욕망은 가장 힘든 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부드럽게 만든다. 반면에, 구빈법은 〈세상의 본질과 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 것을 달성하겠다고 나서는 셈으로, 어불성설과 접경지대에서 걸치는 원칙들에서 추진된다〉. 〈사회가 진보하는 와중에서〉, 누군가는 궁핍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144-5)


1797년 2월, 벤담은 피트를 상대로 「구빈법안에 관한 관찰」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의 태도가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법안을 비난하는 데는 그것이 하나의 평등주의적인 조치임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평등화 체제가 임금에 적용되었을 때 근면과 그리고 이어서 재산에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위협을 가하는 정도는 그것이 재산에 적용될 때 재산과 그리고 이어서 근면에 위협을 가하게 될 정도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 하나의 표준임금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를 그는 비난했고, 특히 피트의 법안에서 〈능력 부족 조항 또는 보조임금 조항〉이라 명명한 대목을 비난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불운일 뿐인 어떤 약점 때문에 이웃들보다 더 열악한 상태로 그를 내버려두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벤담이 보기에, 이런 감상주의는 모든 종류의 엄밀한 법과 어울릴 수 없다."(152-4)


"구빈법의 취지를 옹호하던 맬서스가 〈맬서스주의〉로 개종하게 된 것은 1797년 고드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물었다: 〈(인간 근면 진보의 법칙과 인구 진보의 법칙) 이 두 가지 대등하게 필연적인 법칙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킬 단계, (중략) 사람 수 증가가 생계수단의 증가를 능가하는 단계가 틀림없이 오지 않을까?〉 물론 고드윈과 콩도르세에 따르면, 인구와 인간 번영에서 그와 같은 퇴보는 지극히 머나먼 일이었다. 그러나 맬서스는 이렇게 말한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생계수단의 분배에서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치유할 권력이 사회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생계의 권리가 있고, 따라서 동료로부터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연은 계속 수가 증가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양의 생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계의 권리는 착각 속의 권리이며, 만사의 본질 안에 근거하지 않는다."(157-9)


"인간의 산업이 진보해서 풍요가 일단 실현되었다고 하면, 재산이라는 제도와 교환이라는 현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기주의가 쓸데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분업에 기초한 이익조화의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재산, 교환, 이기주의 등의 개념들을 함축한다. 맬서스는 이익 융합의 원리를 거부했다. 선의의 감성은 이기주의로부터 점진적 진화에 의해 파생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기주의 대신에 선의로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바꾸게 되면, 오늘날 단지 소수만이 느끼는 결핍의 아품을 전체 사회가 느끼도록 만드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분해주는 모든 것은 확립된 재산 체제 덕분이고, 편협한 것처럼 보이는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전통을 충실하게 물려받은 수탁인으로 보인다." "이 신조를 적용한다는 것은 곧 도움받을 권리를 규탄하는 것이고,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구빈법을 규탄하는 것이다."(162-3)


"맬서스는 국가에게 교육의 기능이 맡겨지기를 바랐다.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가난한 집의 아동들이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구 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를 그는 옹호했다. 기존의 소규모 〈자선학교〉와는 달리, 이런 학교에서는 더욱 실천적인 성격의 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기하학과 역학의 요지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애덤 스미스는 이미 요구한 바 있었다. 맬서스는 이보다 나아가, 정치경제학을 인민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기존의 움직임에 공리주의적 공식을 마련해줬다. 교회개혁파들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성경에 관해, 신의 법에 관해, 그리고 도덕의 법칙에 관해, 지식을 가능한 한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자연이 그들의 처분에 맡긴 쾌락의 양의 증가에 맞춰 자기네 필요의 증가를 어떻게 규율해야 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인간 종의 발전과 증가를 결정하는 물리적 법칙을 아는 것이 '유용'하다고 주장했다."(168-9)


"이제 우리는 맬서스의 지적 태도를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의 신조로부터 그려지는 인간 삶의 모습은 〈암울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복종의 정치이론이나 악에 대해 체념하는 도덕이론이 거기서 도출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인생이라는 것이 〈더 높은 행복의 상태를 준비하기 위한 시련의 상태이자 덕의 수련장〉이라는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신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잘되기를 원한다. 육체적 필요는 정신을 발동시켜 진보의 역량을 일깨울 목적을 가진다. 인구가 식량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끔 예정된 것은, 지구 전체를 경작지로 만들도록 인간을 제약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자극제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인구와 식량의 증가 법칙이 같았다면, 인간은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맬서스는 속죄라고 하는 초자연적 이념에 반해서 진보라는 인간적 이념의 편에 섰다. 실제로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였고, 언제나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로 남았다."(169-70)


3장 / 벤담, 제임스 밀, 벤담주의자


"제임스 밀과 알게 된 1808년에 벤담은 예순 살이었다. 그렇지만, 괴이하게도, 영국의 공중에게 법과학의 이론가로서 그리고 개혁가로서 그의 면모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로는, 『파놉티콘』을 쓴 사람이라는 점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한 가지 구상의 제창자〉 가운데 한 명쯤으로 치부되었을 뿐인데, 그런 사람은 당시 영국에 무척 많았다. 농업 공산주의를 설파한 스펜스, 보통선거권을 옹호한 카트라이트, 사각형 모양의 마을 구조를 통해서 인간의 도덕적 갱생을 제창한 로버트 오웬 등등이 있었다. 또는, 벤담은 어떤 보편적 해결책을 제창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감옥 개혁가 하워드라든지, 노예제에 반대했던 윌버포스와 같은 유형의 박애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1808년으로 접어들 무렵, 벤담은 자신의 박애주의 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여겼다. 실망으로 끝난 박애주의는 그의 마음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불신으로 탈바꿈했다."(188-9)


"제임스 밀은 여러 해 전부터 휘그당원이었고, 아마 휘그당원 중에서도 진보파였을 것이다. 그는 무한한 완성 가능성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는 가톨릭 해방을 요구한 점에서 《에든버러 평론》의 출판인들과 뜻이 같았다. 의견과 언론의 자유는 그가 가장 열렬히 옹호한 대의명분이었다. 그런데 벤담은 제임스 밀과 만나게 된 때부터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언론의 자유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임스 밀은 휘그 자유주의의 전통적 명제로 가까이 간다. 그보다 앞서 프리스틀리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밀은 정부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일단 전제하면 정부 자체도 하나의 조직된 통제에 복속하는 것이 순서라고 요구하기 위해,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기초로 삼았다. 하지만 제임스 밀은 아직 무척이나 소심했다! 그는 미국에게 하나의 민주적 헌법을 부여할 태세는 되어 있었지만, 애당초 그 헌법의 '형태를 갖추는' 임무를 인민에게 맡길 만큼 신임하지는 않았다."(198-9, 203)


"벤담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이념에 무관심했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의 영향 아래, 벤담의 내면에서 민주주의 이념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벤담은 카트라이트와 같은 신조를 자신도 제창하도록 모르는 사이에 이끌려왔음을 깨달았다. 단체의 혼은 정의상으로 일반적 공리의 원리에 적대적이고, 정치적 귀족계급은 하나의 폐쇄적인 단체였다. 이 귀족계급이 자신의 박애주의적 기획을 향해 보여준 무관심 때문에 벤담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 운동의 다름 아닌 중심지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제임스 밀을 만났고, 밀을 통해서 프랜시스 버데트 경과 플레이스와 카트라이트를 만났다." "그러나 벤담이 한 명의 급진파로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급진당의 성격 자체가 변하게 된다. 1814년에 급진적 개혁가였던 브롬은 1818년에 버데트에 의해서 대변되고 있던 벤담과 결별한다."(215-6)


"기성 정부들을 폭력 혁명을 통해 전복하자는 요구는 이제 논외였다. 머지않아 벤담은 코베트나 헌트 같은 선동가와도 말다툼을 벌인다. 지성이 자연스럽게 진보하면 모든 정부가 쓸모를 잃고 폐지되는 날이 오리라는 고드윈과 같은 사람의 동경도 논외였다. 벤담과 밀은 정책적 사안에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아니라 인위적 일치 원리를 적용했다.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서 그들은 일반이익, 즉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입법부에서 채택되는 결정으로부터 틀림없이 귀결될 그런 조건 아래 대의적인 정권을 조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된 대의제 정권의 급진적 이론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영국 자유주의의 명제와 동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당파는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상실하는 경향, 그리고 부르주아 소신가들의 당파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당파는 15년이 지나면, 〈급진적 지식인들〉의 당파 또는 〈철학적 급진파〉로 불리게 된다."(216-7)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에게 정치경제학은 산업계와 상업계의 현상에 관련된 일정 개수의 관찰들의 실천적 응용의 총합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정치경제학의 구성에서 '예비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그리고 오로지 예비적인 부분에 불과한,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연역추론이 귀납과 뒤섞이는데 각각의 비율은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흄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의 관찰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역사가로서 진행하기를 원했던 것이 확실하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예비적이었던 것이 리카도에게는 정치경제학의 핵심이 된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실천에서 유리된, 나중에 어떤 실천적 결과를 빚게 되든지 상관없이, 하나의 이론이다." "리카도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의 목적은 '법칙들'이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정치와 입법의 한 분과였던 정치경제학이 리카도에게는 부의 자연적 분배 법칙의 이론이 된 것이다."(222)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체계적이고 연역적인 성격은,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매개를 통해 소개된, 프랑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벤담에 관해서는, 이 여부는 매우 불확실하다. 세와 리카도가 의도했듯이, 벤담도 애덤 스미스의 〈뒤범벅〉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의 정치인 스페란스키가 벤담의 『정치경제학 교본』의 원고를 1804년에 뒤몽으로부터 받아보고 칭찬한 표현들은 한 마디도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세의 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야의 범위, 분류의 명료함과 정밀함, 그리고 편제의 체계적 성격〉을 그는 칭송했다." "그러나 벤담이 정치경제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채택한 관점은 세와 리카도의 관점과는 정면에서 상반된다. 벤담에게 공리의 원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하나의 격언, 의무체계의 기초였다. 일반적 공리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의 일치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입법자의 기예고, 정치경제학은 그 한 분과다."(230)


# 리카도식 정치경제학의 법칙적 성격은 진보의 철학을 설파한 (콩도르세의) 계몽 철학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기에 이 법칙들은 정태적인 균형의 법칙만이 아니라, 동태적인 진화와 진보의 법칙이기도 하다.


"1818년의 「교육」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스 밀은, 인간 본성의 유용한 자질들 중에 교육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이 어느 정도고, 속하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엘베시우스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명백히 평균 이하로 태어난 상대적으로 제한된 수의 개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탁월해질 수 있을 만큼 대등하게 민감하다고 간주할 수 있고, 그들의 불평등을 치유할 수 있는 원인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의견을 가진 것은 확실히 엘베시우스뿐이었다." "엘베시우스의 이론을 최초로 실험을 통해 검증하려고 제임스 밀은 자신의 맏아들 존 스튜어트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스튜어트 밀이 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벤담의 작품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아버지는 스튜어트 밀을 엘베시우스와 벤담의 신조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사상가이자 시민이자 인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힘든 길을 따라, 온 힘을 쏟았다."(253-6)


"그러나 벤담의 제자이자, 말하자면, 자기 주군에게 봉사하는 수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던, 제임스 밀은 개인적 교육이라는 고립된 경험에 자신의 노력을 국한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육의 보편화가 그 자체로 선이라는 점이었다." "《에든버러 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제임스 밀은, 고향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긍지를 담아, 인민 교육이라는 발상이 스코틀랜드에서 나왔음을 되새긴다. 인민에 대한 강습이 공공 서비스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관해, 그는 가급적 정부의 간섭을 멀리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원칙에 부합할 것이며 경험에서 오는 교훈과도 어울린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인민이 극도로 무식하고 강습을 받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도록 가난한 현실에서는, 국가가 개입해서 이 사업에 추동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위임받은 권력을 국가가 남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일종의 지성적 독재체제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보장책, 곧 언론의 자유만으로 족하다."(259, 268-9)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것이 진실로 1832년경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집단적 교조주의가 형성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반적인 근거들이 있다. 정치와 경제와 사법의 질서에서 일정한 개혁들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18세기 말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1815년에는 여론의 상당한 일부가 모두 비슷한 강도로 개혁을 부르짖었고, 그런 세력은 날마다 커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적인 존재인 인간이 이 모든 개별적인 요구들을 하나의 단일한 원리 안에 체계화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은, 이때부터 필연적이었다. 그런 원리가 공리의 원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거의 필연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가 영국적 지성의 근거였으며, 보수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세습적 사유재산을 지지하는 자든, 자유거래의 산봉자든 보호주의자든, 영국의 사상가라면 모두 본능적으로 그 원리로 돌아가 준거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벤담이 그 운동의 우두머리로 선택된 것이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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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1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2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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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서문


"프랑스 혁명의 백 년은 바다 건너편에서 산업혁명의 백 년에 대응하며, 사법에 주목하면서 영혼을 강조했던 인권의 철학에는 이익의 동질성을 강조한 공리주의 철학이 대응했다. 모든 개인의 이익은 동질적이다─각 개인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고의 판관이다─그러므로 전통적 제도들이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인위적 장벽과, 개인들을 서로로부터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보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사회적 제약들을 모두 부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해방철학이다. 장-자크 루소의 감성적 철학과는 영감이나 원리에서 아주 다르지만, 응용에서는 여러 면에서 흡사한 해방의 철학이다. 대륙에서 인권의 철학은 결국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익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철학이 맨체스터학파에 의한 '자유거래주의'의 승리를 낳았다."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철학의 역사에 들어갈 하나의 장(章)인 동시에 역사의 철학에 들어갈 하나의 장이기도 하다."(5-6)


# 자유거래주의(doctrine of free trade) : 국제 거래만이 아니라 국내 거래도 포함되며, 교환, 유통, 직업선택 등등 포괄적인 경제활동을 가리킨다.


서언


"1789년 초에 이르면, 사법적 논제들에 관한 한, 공리주의 신조는 모든 세목에서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 신조는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공리주의 정치경제학도, 나중에 맬서스와 리카도가 애덤 스미스의 신조에 첨가한 내용을 제외하면, 가치이론이라든지 상업과 산업의 자유주의 같은 핵심 주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던 애덤 스미스의 발상들을 벤담은 채택했다. 『국부론』은 미국 혁명이 일어나고 중상주의가 붕괴하던 시점(1776)에 나왔다. 그만큼 당대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책이었다. 아울러,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해서 회의주의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이었다. 편견을 타파하고 개혁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정부가 무슨 수단을 쓰든 개의치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혁명과 소요의 와중에 미래의 급진주의 강령이 이미 형체를 갖춰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정치적 주제에서는 시대가 공리주의 신조를 앞질렀다."(9-10)


1장 / 기원과 원리


"법칙은 오직 일반성을 갖출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관계가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가 항상적이라는 말이다. 외부의 자연에 대해 내가 뭔가 유용한 행동을 하려면,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고, 그 관계가 항상적인 것으로 족하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현상을 일으키면 내가 목표로 삼은 두 번째 현상이 초래되리라고 내가 확신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에 관한 뉴턴의 사고방식이다." "뉴턴의 물리학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실험적 증거에 입각하면서 동시에 엄밀한 과학의 성격을 갖춘 정신의 과학과 사회의 과학이 구성된 다음이라면, 그러한 새로운 학문을 토대로 도덕이론과 법률이론도 과학적인 형태로 정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리주의 또는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일종의 뉴턴주의라고, 달리 말하자면, 정치와 도덕에 뉴턴주의를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12-4)


"흄의 방법 안에는 이중성이 내재한다. 어떤 측면을 보면, 그의 방법은 합리주의적이다. 도덕의 영역에서 만유인력이라는 물리적 원리에 상당하는 법칙과 원인을 확정하려 한다. 그는 도덕과학의 창시자로서, 이 도덕과학은 후일 하나의 학파가 만들어져서 연역적이며 체계적인 형태로 조직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연상주의─흄에게 연상주의는 추론을 이어가다 보니 추론 자체에 반기를 들게 되는 추론, 곧 하나의 비합리주의였다─라는 교조는 그에게서 비롯되었고, 그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적 신조도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우주에서 필연성이라는 관념을 추방할 길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과학을 창시하기는커녕 기성의 과학이 취하고 있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겉모습을 파괴하러 온 회의주의자였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된다. 궁극적으로 보면, 흄은 오히려 행동하는 권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성찰을 문죄한다."(25)


# 연상주의(associationisme) : 하나의 정신 상태가 거기서 이어지는 다른 정신 상태와 결합하는 과정으로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발상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과학 자체를 흄이 이해했던 의미가 후일 공리주의 도덕학자들이 이해했던 의미와 달랐다.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뉴턴주의의 경로를 따라 진행한다. 개인적 장점이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데 그는 〈실험적 방법〉을 응용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천명한다. 선과 악의 구분과 여타 뚜렷한 심리적 구분 사이에서, 두 구분이 같은 비례로 같은 원인의 영향 아래 함께 변화하고 있다는 공존 관계를 만약 확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두 구분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현상들이 서로 달라 보이거나 심지어 모순적으로 보이더라도, 일반법칙은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라인강과 론강은 같은 산에서 발원하지만, 똑같은 인력의 법칙에 따라 상반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도덕철학에서는 공리의 원리가 만유인력에 해당한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행위가 사회의 이익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에 따라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상찬할 만하다고 말한다."(27-8)


"그러나 순수하게 실험적인 방법을 채택하겠다고 천명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흄은 명령을 발하는 것은 도덕철학자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찾아다닌다. 대다수 도덕학자들이 같은 경로를 따라왔으면서도 느닷없이, '있어야 할 당위'를 규정하러 나서는 것은 이상한 순환논법에 빠진 탓이다. 만일 여기에 순환논법이 끼어든 것이라면, 반론은 벤담에게도 해당한다. 왜냐하면 공리의 원리 안에서 하나의 과학적 법칙과 동시에 하나의 도덕적 명령도 발견했다는 것이 정확히 벤담의 중심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존재와 당위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명제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본질적으로 비활동적이다. 이성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들을 비교하는 데 있기 때문에, 행위에서 선과 악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도덕적 판단이란 관념이 아니라 인상에, 하나의 〈느낌〉에, 기반을 둔다. 도덕학자의 과제는 이 느낌을 분석하고, 도덕적 느낌이 과연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 있다."(28)


# 공리의 원리에서 이기심의 문제

1. 맨더빌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나름대로 화합을 이루면서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한다(그렇다면 왜 이기심을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라 명명하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하틀리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은 점진적이며 누진적이다. 즉 이기적인 것과 공감적인 것의 (무수한) 결합은 '마침내' 순수한 쾌락의 상태로 나아간다.

3. 벤담(입법자의 과제)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의 이익과 일반 이익을 일치시키려면 인공구조물(훌륭한 헌정구조)이 필요하다.


"엘베시우스는 흄의 선례를 따라 〈도덕학을 여타 모든 과학들처럼 취급하고, 도덕학도 물리학 같은 실험과학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가 도덕학에 부여한 원리는 〈공공의 이익, 다시 말해 최대다수의 이익〉이었고, 그는 정의(正義)를 곧 〈더 많은 수에게 유용한 행위의 실천〉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몽테스키외의 물리적 결정론 또는 지리적 결정론 대신에 엘베시우스는 하나의 도덕적 결정론을 제출한다. 인간은 지리적 정황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정황의 산물이다─가장 넓은 의미의 교육의 산물이다. 〈정신의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은 도덕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이론의 귀결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관해 획득한 지식 덕택에 인간에게는 인간을 변혁하거나 개혁할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벤담의 제자 제임스 밀과 고드윈의 제자 로버트 오웬 등, 19세기 초의 교육운동가들이 채택하는 이론이 이것이다─교육을 통해 개인들은 자기네 이익을 일반이익과 어떻게 합치시킬지를 배운다."(47-8)


"입법자는 교사,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다. 오로지 좋은 법을 통해서만 덕스러운 사람들이 형성될 수 있다." "도덕학자의 모든 연구는 상급과 벌칙에 어떤 효용이 있을지, 그리고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을 한데 묶는 데 그것들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확정하는 데 있다.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의 연합에서 그는 〈도덕학자들이 스스로 목표로 삼아야 할 주된 과제〉를 봤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욱 예리한 문구로 엘베시우스는 벤담이 멀지 않은 후일 실행하려 시도했던 바로 그 설계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법의 탁월성은 입법자의 통일된 견해, 그리고 법률들 사이의 상호의존에 좌우된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을 확립하려면, 모든 법을 어떤 단순한 원리로 축약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공중을 위한 공리의 원리, 다시 말해, 하나의 정부 형태 치하에서 살아가는 최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공리의 원리 같은 원리로서, 아직 그 범위와 결실이 완전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덕과 입법 전체를 망라하는 원리다.〉"(49-50)


"엘베시우스의 신조는 영국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퍼졌다. 이탈리아의 베카리아는 유명한 저서에서 엘베시우스의 철학을 형법이라는 주제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범죄와 처벌』은 1764년에 나왔다. 벤담은 엘베시우스의 제자인 만큼 베카리아의 제자이기도 하다. 벤담은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적용하는 작업을 베카리아가 갔던 지점 너머로 연장했다. 그는 하나의 보편적 법전을 구상하고 작성하기 시작해서, 하나의 포괄적인 형법전을 일궈냈다." "벤담은 베카리아의 작은 책 도처에 산재한 여러 가지 관찰들을 활용해서 공리주의 철학에 하나의 수학적 엄밀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베카리아의 책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식이 엘베시우스에서보다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도, 지속성, 근접성, 확실성 등, 고통의 무게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한 베카리아의 분석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계산법을 구성하게 될 첫 번째 요소들을 발견했다."(50-1)


"그리고 공리주의 신조가 이즈음에 영국에서 인기를 누렸던 두 사람의 저자들에 의해 거의 최종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성직자로서, 한 사람은 비국교도였던 프리스틀리고 다른 한 사람은 국교도였던 페일리다. 프리스틀리는 1768년에 출판된 논문, 『정부의 첫 번째 원리, 그리고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에서, 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상위 기준〉으로서 〈국가의 구성원들, 다시 말해, 다수 구성원의 선과 행복〉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페일리는 1785년에 나온 『도덕정치철학의 원리』에서 공리의 원리를 도덕과 신학의 문제에 적용한다. 그는 쾌락들이 오직 지속성과 강도에서만 차이가 난다고 보면서, 행복을 쾌락의 합계로 정의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쾌락의 합계에서 고통의 합계를 차감한 나머지로 정의한다. 도덕적 행위는 경향에 의해서 부도덕한 행위와 달라지며, 법의 기준은 공리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후 반세기 동안 페일리는 공리주의 도덕의 공식 대변인으로 남는다."(52-4)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엘베시우스에서 거의 단어 하나도 바꾸지 않고 베껴온 명제 하나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두 개의 주권적 주인, 즉 고통과 쾌락의 다스림 아래 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이 두 주인들이다. 한편에서 옳고 그름의 표준도, 다른 한편에서 원인과 결과의 고리도 이 주인들의 왕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공리의 원리'는 이와 같은 종속 관계를 인지하고, 행복이라고 하는 대구조물을 이성과 법의 손으로 축조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종속 관계를 대전제로 삼는다. 공리의 원리라 함은 이익 당사자의 행복을 확장하거나 아니면 축소하는 경향, 같은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 행복을 증진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에 따라서 모든 행동을 승인하거나 부정한다는 원리를 뜻한다. 나는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적 개인의 모든 행동만이 아니라, 정부의 모든 조치도 포함된다.〉"(65-6)


# 쾌락과 고통을 계량화하는 기준

1. 강도(intensity)

2. 지속성(duration)

3. 확실성(certainty) 또는 불확실성(uncertainty)

4. 근접성(proximity) 또는 거리(distance)

5. 생산성(fecund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질 확률

6. 순수성(pur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상반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확률

7. 범위(extent) : 쾌락이 도달하는 사람의 수, 다시 말해 쾌락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수


2장 / 벤담의 법철학


"벤담은 '단순명령적' 법과 '처벌적' 법을 구분한다. 단순명령적 법은 예컨대, 〈도둑질은 금지한다〉와 같은 형식으로 진술되고, 처벌적 법은 〈도둑질을 한 자는 누구든 교수형에 처한다〉는 형식으로 진술된다. 민법은 여러 권리들의 정의(定義)로 구성된다. 형법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다시 말해, 범죄의 정의로 구성된다. 사법 기능을 행사하는 주체로 간주되는 국가는 여러 가지 의무들을 창설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위는 형벌로써 억누른다. 이제, 범죄의 존재 자체는 이익 융합의 원리도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도 해당 사안에서는 자명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범죄가 저질러질 때마다, 공감의 정서보다 반감의 정서가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개인들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이웃의 이익을 해치는 데서 자신의 이익을 봤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의무와 형벌을 정의하는 일이다."(85)


"벤담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입법자들 그리고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다시 말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벤담은 루소의 나라 그리고 심지어 베카리아의 나라에서 팽배하던 인간주의 철학과 영구적으로 구별되는 색깔을 영국의 개혁철학에 이미 칠해놓았다.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인간을 쾌락과 고통의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고, 입법자를 어떤 법이어야 인간의 감수성이 복종할지를 아는 현자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종식시키기를 희망하지 않았고, 차라리 이익의 인위적 일치를 이룩해내기 위해서 형벌을 가할 권력을 몰수하여 무엇이 유용한지를 알고 있는 입법자의 손아귀에 맡겼다. 최종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쾌락의 합계가 고통의 합계를 능가하도록 만드는 일은 입법자가 독재적으로 그리고 엄밀한 절차에 따라 고통을 개인들에게, 그들의 본능적이거나 감상적인 저항은 무시하면서, 부과함으로써 꼼꼼히 살피도록 입법자의 이성에 맡겨진다."(159-60)


"법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공중은 모르며, 따라서 법이 성문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률가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영국에서 법의 압도적인 대부분이 법률가들의 용어로 보통법이라 불리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불문법,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정의 법학 이론들로 구성되는 까닭이 이것이다. 불문법은 〈기억할 수 없도록 아득한 옛날부터 오랫동안 사용됨으로써, 그리고 왕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구속력과 법적 효력을 획득했다〉고 블랙스턴은 썼다." "법률가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공이익과 상반되는 자기네끼리의 이익을 찾아내는 지점이 바로 이 모호함 안에서다. 모호함 덕분에 그들은 법에 관한 지식과,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자의적으로 정의할 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의 보호자인 법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계급보다는 개별적인 개인 각자에게 우호적이기〉를 원한다면, 법은 성문화되어야 한다."(163-5)


"이 당시 영국에서는 체계화된 성문법전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유럽 전역의 개혁가들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계속해서 인용했던 것은 바로 영국의 사법제도였다. 일반적으로 영국은, 정부의 권위가 아니라 신민의 자유가 무제한이라고 간주되는 나라로 비쳤다. 개인의 행동들은, 그것을 불법이라 선언하는 법이 특정되기 전까지는, 합법으로 간주되는 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소가 이뤄진 다음에 법은 유죄판결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연시키고 방해하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였다. 영국은 심문이나 고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거기엔 배심재판제가 있었다. 사법제도가 복잡한 것 자체가 신민의 자유를 위한 안전장치로 보였다." "영국은 왕이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고 항상 의심을 받고, 그런 왕의 권력에 맞서 법률이라는 직능이 배심원단의 후원 아래 영국인들의 자유를 지켜줄 옹호자라고 전통적으로 간주되어 오던 나라다."(1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개혁과 박애의 거대한 운동이 벤담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었다. 박애주의자들과 법률가들과 입법자들을 모두 몰두하게 만든 것은 형법의 문제, 교도소 체제의 문제였다. 경건주의적인 동시에 실천적이고 사회적이며 〈공리주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전형적인 대변자들은 〈복음주의 교파〉의 사람들, 〈성자들〉, 일종의 감리교도지만 영국교회 안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혈이 낭자한 사냥의 폐지, 일요일 안식의 엄격한 준수, 노예제 폐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개혁을 요구했다." "그 후, 1784년에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로 행정적 추방이라는 편법을 개시했을 때, 벤담은 새로운 체제를 제시하면서 종래의 체제에 맞섰다. 추방이라는 발상과 대조적으로, 그는 스스로 『파놉티콘』이라고 명명한 모범 감옥의 설계도를 그려냈다. 이것은 엘베시우스에서 그가 발견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한 결과였다."(176-9)


3장 / 경제이론과 정치이론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우리는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만났던 〈자연〉이라는 단어를 다시 만난다. 벤담에 따르면, 형벌의 〈자연적〉 척도는 판사에 의해 가해지는 물리적 고통의 양과 범죄로 분류된 행위에서 결과하는 물리적 고통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애덤 스미스에게, 가치의 〈자연적〉 척도는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경험된 고통의 양,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희생된 쾌락의 양과 그 물건을 획득한 결과로, 이 획득이 노동을 통해 직접 이뤄졌던지 아니면 노동에 교환이 뒤따름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뤄졌든지 상관없이, 기대되는 쾌락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형벌이 효과적이려면 형벌의 악이 범죄의 악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노동이 효과적이려면 보상의 선이 노동의 고통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다만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쾌락과 고통의 계산은 입법자와 행정관의 의도적인 작업에 의해 인위적으로 확정된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는 동일한 계산이 저절로 이뤄진다."(201-2)


"애덤 스미스는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모든 조건들을, 물리적 조건이든지 심리적 조건이든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앞장섰다. 첫째, 어떤 시점에서든, 도처로부터, 그리고 무한한 양으로, 대상들이 시장에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이 더욱 잘 충족될수록 시장가격은 자연가격 언저리에서 일정한 수준으로 더 잘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완벽하게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에게는 경제 현상들의 본질이 이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켜준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생산물을 얼마만큼의 양으로 시장에 내놓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인지에 관해 판매자들이 틀리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결산에서는 개별적인 착오들이 상쇄된다." "완벽하게 이기적인 개인은,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동시에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는 가정이 여기에 들어 있다."(209-10)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은 생산량대로 소비되지 않은 자본을 생성하고, 자본의 소유자는 '이윤'을 고려하면서 그것을 노동자에게 꿔줄 태세를 갖추게 된다. 시간이 또 흐름에 따라 토지는 모두 점유되고, 그러면 지주가 자기에게 속한 땅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대'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윤도 지대도 노동의 '임금'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윤과 지대가 어떤 상품의 가격에 요소로서 포함된다면, 분업에 상응하지 않게 할당되는 이득이 있다는 뜻이다. 이익의 일치를 낳는 것은 교환에 근거한 분업이기 때문에, 이익의 일치는 더 이상 필연적이지 못하고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어떤 나라에서는 〈지대와 이윤이 임금을 잡아먹는다〉고 말하며, 자기 용어로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두 계급 사이에 이익의 필연적인 대립을 정립한다." "그리하여 그에 따르면 자연적 독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인위적 독점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교환의 메커니즘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212-3)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상업과 산업의 자유를 제창한 이론가들의 새로운 관점에서는 나약한 정치권력에도 민사를 내버려두고 레세-페르를 실천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권력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결함, 지출하고 지출을 방치한다는 심각한 결점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새로운 신조의 지지자들도 정부에게 자기관리를 촉구했다. 정부가 상업과 산업을 규제하기 위한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세금 징수 역시 간섭의 한 방식이다. 정부는 가능한 한 적게 다스리고 또 적게 지출하는 것이 적당하다─이 두 조건은 하나로 축약된다.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의 원래 의미가 이런 사고방식에 부합했었고, 1780년까지도 이 의미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국부론』을 쓸 당시의 애덤 스미스, 그리고 경제개혁에 관해 유명한 연설을 행할 때의 버크는 〈정치경제학〉을 〈정치인 또는 입법자의 과학 분야〉로서, 공공재정을 사려 깊게 관리하는 과학이자 하나의 실천 이론으로 이해했다."(221-2)


"정치경제학은 하나의 '과학'과 함께 하나의 '예술'을 담고 있는데, 과학이 예술에게 아슬아슬하게 복속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벤담은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벤담은 정치경제학을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정의했다: 그것은 〈입법의 예술의 한 분야〉로서, 민족의 부를 이끌어갈 최선의 방향에 관한 지식이자, 〈최대행복이라는 더욱 일반적인 목적이 최대의 부와 최대의 인구를 생성함으로써 촉진되는 한, 최대행복을〉 생성해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찾아낼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명제 아래에서 노동자들, 자본가들, 지주들로 구성된 사회 안의 부의 분배를 검토해보면 이익은 자연스럽게 균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벤담은 이 질문을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제네바의 뒤몽에 따르면, 〈이런저런 지점에서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민족의 번영이 가능한 최고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법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이것이 벤담이 제안하려는 목표였다."(227-8)


"1785년 무렵에, 벤담은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과 자신의 사법이론을 융합─고리대금업을 옹호하고 식민지 보유에 반대하면서─하는데 성공했다고 봤다. 그 두 이론은 국가의 기능에 대한 정의에서 일치했다. 모를레는 셸번 경에게 이렇게 썼다. 〈자유는 자연적 상태고 제약은 반대로 강박의 상태이므로, 도둑과 살인자들만 계속해서 잡아낸다면, 자유를 돌려줌으로써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만사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실제로 가졌던 견해를 경구의 형식으로 표현한 셈과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를 직접 증가시키고 자본을 직접 조성하는 것은 국가의 기능이 아니다. 국가의 기능은 부가 일단 획득된 다음에 부의 소유에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국가는 완수해야 할 사법적인 기능이 있지만, 국가의 경제적 기능은 최소한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들을 채택함으로써 벤담은 40년 후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구성으로 이어지게 될 이념체계의 형성에 첫걸음을 떼었다."(245)


"프리스틀리가 1768년에 『정부의 제일 원리』에서 채택한 것은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였다. 그가 이 책에서 공리의 원리와 민주주의 이념을 의식적으로 융합했기 때문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연구할 때 이 책이 중요하다. 하나의 국가에 상관되는 모든 일의 기준은 〈어떤 국가든 구성원들의, 다시 말해 구성원 다수의, 복리와 행복〉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정부 형태는 〈현재 인류의 행복에 가장 도움이 되고, 미래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형태다. 따라서 하나의 정부를 세우려고 할 때의 관건은, 흄이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통치자들의 이익과 피치자들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위태로운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이익 일치를 어떻게 확보할까? 〈그런 군주들을 한계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경쟁자에게 우호적일지 모를 반란에 대한 지속적인 공포뿐이다. 다시 말해, 인민에게서 애호를 받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되게끔 만드는 것뿐이다.〉"(267-8)


# 동시에 프리스틀리는 모든 사람이 모든 기능을 선출할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정치적 자유에 제한을 두었다.


"1776년에 출판한 『정부에 관한 단상』에서 벤담은 블랙스턴이 제시했던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 즉 〈모두에 의한 정부〉를 고찰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형태의 정부는 모든 정부에 대한 부정에 해당한다며 반대한다." "민주주의 체제가 자연상태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라는 견해를 토머스 페인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념을 공리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는 여러 갈래지만, 해석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일단 당시에는,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에 영국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전반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은 계약의 개념, 흄과 벤담이 공리의 개념을 제시하여 대조했던 상대 개념인 바로 그 계약의 개념이었다. 보통선거권 또는 임기 1년의 의회를 요구했던 개혁가들은 그런 개혁에 효용이 있다는 이유보다는,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확립된 역사적 규약의 원래 조항들과 그것이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존중할 만한 하나의 전통과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웠다."(272-3)


"그러나 원초적 계약의 이론가들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정부의 역사적 기원을 하나의 협약에서 찾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부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기초도 이 협약에서 찾는다. 만일 우리가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주권자가 신민에게 정의와 보호를 제공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서 신민의 의무도 부과한다는 조건부 약속이 군주나 정부를 구속하지 않는 한, 어떤 군주나 어떤 정부에도 복종을 바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명제는 일반적인 의견에 상반된다. 정부에 대한 자신의 복종이 하나의 계약에 달려있고, 정부가 그 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한다는 조건에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하나의 원초적 계약 위에 구축하는 이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의 추상적 이론에 불과하다.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277-9)


"홉스의 전통에 충실했던 벤담은, 자기가 보기에는 여전히 만들어진 추상이자 법률적 허구일 뿐이었던 '권리'의 개념 또는 '자연권'의 개념을 위한 자리를, 자신의 사법체계에서는 허용하지 않는 편을 선호했던 것이 명백하다. 의무와 범죄는 실정법이 창조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정부가 설치된 까닭은 사람들이 권리를 가져서가 아니라 아무 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없는 옛날부터 권리가 있어서 바람직했다고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지만, 문제 되는 그 권리가 그때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을 바로 그런 주장 자체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자들은 보통 원초적 계약과 자연권이라는 관념들을 자기네 요구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조가 공리주의 신조의 창시자들에게 안겨줬을 역겨움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 미국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음에는 프랑스를 장악한 인권 이론은, 공리의 원리 위에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버크와 벤담으로부터 완강한 반대를 겪어야 했다."(288-91)


"벤담이 보기에, 하나의 〈정치사회〉라는 개념, 여러 가지 제약들이 강요되고 경험되는 하나의 체제는 실증적인(positive)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의 정착된 정부에 복종하는 습관이 없는 하나의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그리고 제약의 부재를 뜻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순전히 부정적인(negative) 개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유는 〈우리에게 제약이 부과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되고, 안전은 〈남들에게 제약이 부과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된다. 공리에 관해 말하라.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제약에 복속해야 함을 저 개인이 납득할 것이다. 자연권에 관해, 자연법에 관해 말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을 완강히 붙들고, 그리고 공감과 반감의 원리가 부추기는 대로 넘어간 상태에서, 자기 기분에 거슬린다고 생각되는 모든 법에 맞서서 무기를 들라고 초대하는 셈이다. 공리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의 철학이 아니다."(299-301)


"1788년 말 무렵에 벤담은 다가오는 삼부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에 자신의 성찰들로써 도움을 줄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개인은 행복을 향해 평등한 욕구를 가진다. 모든 개인들에게, 어느 한 물건이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늠하는 능력이 그 행복과 같다면, 〈최선의 정부 형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아주 간단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투표권을 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미성년자, 정신병자, 그리고 (약간 다르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여성을 빼면, 선거인에게 필요한 지적인 역량의 정도를 확정하는 데 적당한 규칙이 없는 터라서,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수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권의 이론이 공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리 연습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루소의 평등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위한 공리주의적 공식을 찾아내보자 애썼던 것이다."(308-9)


"무정부주의적 명제를 지지하기에는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과학의 통치를 너무 많이 신봉했다." "통치자들에게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벤담이 의지하는 유일한 제재는 도덕적 제재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가 〈공론의 재판정〉이라고 부른 상시적인 관할권 아래 통치자들이 복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그의 태도는 엘베시우스나 볼테르, 또는 왕이 저술가들의 조언을 듣고 비판을 받고 그리고 〈계몽되어야〉 한다면서, 필요한 개혁을 실현해주기를 그리고 특권적인 단체들의 사욕에 사로잡힌 완고함을 무찔러주기를 왕에게 의존했던 대륙의 모든 철학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벤담은,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처럼, 통치자들의 이익은 피치자들의 이익과 같다고 확인하고, 따라서 통치자들을 개혁의 명분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관해 그들을 계몽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태세가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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