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이단 아카이브
탁지일 지음 / 현대종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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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기독교 아카이브의 필요성


"이단(heresy)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에서 벗어난 주장에 대한 교리적 판단이 내포된 정통의 상대적 개념이고, 컬트(cult)는 사회적 역기능에 대한 표현으로 사이비의 의미와 용법이 유사하다. 두 용어 모두 부정적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학계에서는 이단이나 컬트보다는 신흥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이라는 표현을 주로 선호한다. 기성 종교보다 상대적으로 새롭고(new), 종교적 답변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종교적(religious)이며, 안정적인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행 과정(movement)에 있다고 정의하는 가치중립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단'은 기독교 성경 및 전통적인 교리와 차별화된 주장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지칭하는 경우에 제한하여 사용한다. '사이비'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종교적 단체라고 주장하지만, 사회적 역기능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에 적용하고, 기독교 교리를 악용한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동시에 노출하는 경우에는 '이단사이비'라고 정의한다."(15-6)


"일제강점 후반기에 열광적 신비주의의 모습으로 싹이 움트기 시작한 기독교이단 운동은, 6.25전쟁 혼란기에 본격적으로 태동한다. 6.25전쟁과 전후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적 상황은 기독교 이단의 발흥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후 1960~1980년대까지의 군사정권 시기는 이단의 성장기였다. 정치적 정통성이 취약했던 군사정권은 적극적인 지지층을 필요로 했고, 종교적 정통성이 부재했던 이단들은 기성 교단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군사정권과 이단들은 서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던 부적절한 공생의 시대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주화와 함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문화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JMS,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등 이단 2세대들의 활동이 가시화된다. 특히 1990년 초 공산권의 몰락으로 시작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온라인 환경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는 한국 이단의 세계적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17-8)


2장 이긴자론


2-1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 (박태선)


"박태선은 1917년 11월 22일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읍남리 148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사업을 했으며, 귀국 후에 남대문교회 집사로 있던 중,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영향을 받고, 이후 적극적인 신앙생활과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1955년 창동교회 장로였던 박태선은 1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한다. 하지만 3월 26일부터 4월 5일까지의 남산 천막집회로 인해 논란이 야기되자, 7월 1일 한국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한국예수교부흥협회를 조직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박태선의 활동이 사이비종교운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1956년 2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다. 한국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스스로 영생불사를 주장하던 박태선은 1990년 2월 7일 사망했다."(34)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박태선 신격화 교리가 등장한다. 예수는 마귀 대장의 아들이고, 성경의 98%가 거짓말이고, 예수가 한 번밖에 못한 금식기도를 자신은 13번이나 했으며, 죄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는 99% 죄 덩어리이고 음란마귀의 아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신약성경을 부인하고, 자신의 말이 곧 성경이며, 자신의 나이가 5,798세인 새 하느님이라고 주장한다." "박태선은 이사야 41장 2절의 〈동방의 의인〉이 자신이고, 41장 9절의 〈땅끝〉과 〈땅 모퉁이〉, 그리고 25절의 〈해 돋는 곳〉은 한국이며, 1절에서 〈섬들은 내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으니 일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북방에서 오게 하며〉를 북한에서 남한으로 자신이 내려온 것을 의미한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또한 스가랴 4장 11절과 요한계시록 11장 4절의 〈감람나무〉가 자신이며, 또한 요한계시록 2장 17절과 26절에 기록된 〈이기는 자〉의 사명과 권세가 주어졌다고 주장했다."(34-5)


"박태선은 1957년 9월 1일 신앙촌 건설을 선언한 후, 신앙촌이 말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고, 신앙촌에 들어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앙촌을 중심으로 한 박태선의 배타적 구원 주장은 점점 발전한다. 1957년 10월 23일에는,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으로 구원이 없으며, 전도관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1957년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 15만 평 규모의 제1신앙촌과 1962년 덕소에 5만 평 규모의 제2신앙촌을 조성했고, 1970년 부산 기장에 제3신앙촌을 세워 현재까지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태선에게 신앙촌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지상천국 〈새 예루살렘〉이었다." "박태선은 한국 이단의 뿌리로 일컬어진다. 전도관의 영향을 받은 영생교(조희성), 새마을전도회(구인회), 장막성전(유재열), 신천지(이만희), 실로등대중앙교회(김풍일), 동방교(노광공), 한국중앙교회(김순린), 한국기독교에덴성회(이영수) 등 다수의 단체에 영향을 주었다."(37)


2-2 대한기독교장막성전 (유재열)


"17세에 〈어린 종〉이 된 유재열은 1949년 2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북문로 1가 83번지에서 태어났다. 〈삼손〉 혹은 〈선지자〉로 불리던 유재열은, 부친 유인구와 함께 김종규의 호생기도원 신도로 있던 중, 1965년 1월경에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환상을 체험했다고 한다. 이때 예수님 머리 위에 무지개와 일곱 개의 별이 떠 있었고, 한 손에 어린양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김종규의 간음행태를 목격한 후, 호생기도원을 이탈해 부친과 독립적인 모임을 시작한다. 1966년 3월 1일 두 번째 신비체험 후, 유재열은 1966년 4월 4일 당시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청계산 계고에 소위 증거장막을 짓고 27명의 신도가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후 약 6개월간의 기도를 마치고 9월 24일 하산했으며, 1966년 11월 24일에 김종규를 축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부친 유인구 및 측근들과의 계속되는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고, 1969년 11월 1일 시한부 말세 심판 예언이 실패한 후, 세력이 약화된다."(68-9)


"유재열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동방〉(사 24:15)의 〈해 돋는 쪽〉(사 59:19) 그리고 〈생수가...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슥 14:8) 흐르는 곳인 한국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동서로 갈라진 산'(슥 14:4)이 과천의 청계산이고, 이사야 22장 11절의 〈못〉이 과천 막계리이며, 그곳에 세워진 장막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계 11:19)가 있는 곳이라고 해석한다. 장막성전이란 명칭은 요한계시록 15장 5절의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를 근거로 붙여졌다. 바로 이곳에 〈일곱 천사〉(계 1:20)와 〈어린 양〉(사 11:1~9) 유재열이 나타났으며, 바로 그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계 12:5)라고 주장한다. 이사야 34장 16절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를 근거로 짝을 맞춰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9-70)


"장막성전의 일곱 천사를 중심으로, 제1단계로 비사와 비유의 상징으로 된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2단계로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어 신도들을 모으는 한편, 기성교회의 부패와 모순을 개혁하고, 제3단계로 해외로 진출해 구원의 은총을 나눈다는 로드맵을 설정한다." "유재열의 장막성전의 영향을 받은 여러 분파가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만희), 새광중앙교회(김풍일), 천국복음전도회(구인회) 등이 장막성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분파들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장막성전 신도였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설립자 이만희는, 사기를 당해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1967년 2월 장막성전을 이탈했으며, 1971년 9월 7일에는 유재열을 고소하고, 1984년 안양교회를 세워 홍종효, 신종환, 유인구 등과 함께 『요한계시록의 실상』과 『신탄』 등의 교리서를 발간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조직해 나아가 오늘에 이르렀다."(71-2)


2-3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이만희)


"이만희는 1931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에서 태어났다. 신천지 홈페이지의 〈신앙적 약력〉에 따르면, 17세인 1948년 〈서울 침례교 외국 선교사에게 믿음 없이 침례〉를 받았고, 1957년에 〈고향 땅 야외에서 성령으로부터 환상과 이적과 계시에 따라 전도관에 입교〉했으며, 1967년에는 〈성령의 계시에 이끌려 경기도 과천시 소재 장막성전에 입교〉했다고 한다." "이만희의 신격화에도 전도관과 장막성전의 짙은 흔적이 나타난다. 이만희는 스스로를 말세의 〈이긴자〉 〈보혜사〉 〈약속하신 대언자〉 〈약속의 목자〉라고 주장한다. 2017년 1월 5일 개최된 신천기 34년 총회에서 이만희는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우리 이긴자 총회장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내심을 받은 참 목자〉라고 소개된다." "이만희가 『계시록의 진상』에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천지와 영생을 유업으로 받으니 곧 상속자가 된다〉고 언급한 영생불사 〈이기는 자〉가 곧 자신인 것이다."(88-9)


"이만희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을 보고 들었다고 주장한다. 전도관과 장막성전을 탈퇴한 후 유재열을 〈배도한 세례요한〉이라고 비판하며 신천지를 조직한 이만희는, 이로 인해 박태선의 전도관 교리와 많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먼저 〈성경은 때와 장소와 용도에 따라 빙자하여 비유 비사로 기록된 영적 말씀이다〉(이만희, 『요한계시록의 진상』, 512)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이미 일어난 〈교훈〉과 앞으로 일어날 〈예언〉으로 되어있고, 예언은 〈배도〉 〈멸망〉 〈구원〉의 일들로 구분되어 있으며, 구원의 일은 〈선민이 멸망 받을 때 피해 나온 자〉와 인 맞은 〈14만 4천〉과 〈수많은 사람〉(흰 무리)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의 신천지 신도가 바로 〈14만 4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2020년 신천지가 정부에 제출한 명단에 나타난 신천지 교세는 총 31만 732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신천지 신도들 가운데서도 14만 4천에 속하기 위한 경쟁이 불가피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90)


"코로나19 이전에는 모략(위장)이 신천지 포교 활동의 주된 전략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교회에 잠입하거나, 행사 및 활동을 주도하며 신도 모집에 집중했다. 하지만 신천지 대구교회의 코로나 집단감염사건으로 인한 '조직과 신도들의 신분 노출'과 '신천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신천지자원봉사단 중심의 공개적인 봉사활동을 펼치는 한편, 긍정적인 여론 전환과 이미지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신천지 본부는 현재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에 있다. 본부총회를 중심으로, 신천지 12개 지파 조직이 전국 도 단위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서울·경기지역은, 서울야고보, 시몬, 마태, 바돌로매, 요한 지파, 강원도는 빌립, 충청도는 맛디아, 전라북도는 도마, 전라남도는 베드로, 경상북도는 다대오, 경상남도는 부산야고보와 안드레 지파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는 안드레 지파가 담당하고 있으며, 각 지파별로 신천지 해외 조직들을 분담해 관리하고 있다."(92-3)


3장 성적타락론


3-1 이스라엘수도원 (김백문)


"김백문은 경북 칠곡군 인동면 안의동 488번지에서 1917년 10월 19일 출생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과는 다른 성적타락론을 기본으로 하는 교리를 체계화했으며, 저서들을 보면 그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백문은 대구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수련의 실습을 위해 머물렀던 함경북도 청진도립병원에서, 일제강점후반기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운동을 펼치던 황국주의 제자인 김남조를 만나 영향을 받았고, 이후 학교를 중퇴한 김백문은 김남조의 소개로 원산 이스라엘수도원장인 백남주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탁명환은 기록한다. 1943년 일제강점말기에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에 이스라엘수도원을 설립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 상도동에 교회를 운영했는데, 당시 통일교 설립자 문선명이 찾아와 김백문으로부터 교리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백문이 문선명에게 미친 교리적 영향의 흔적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 데칼코마니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105-6)


"김백문은 인류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해석한다. 즉 타락한 천사인 뱀에게 유혹된 하와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과 성적 관계를 갖고 타락하게 된 것이 곧 선악과를 범한 것이고, 다시 아담과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온 인류의 혈통에 죄악성이 들어오게 되었으며(김백문, 『基督敎根本原理』, 485), 〈아담으로 시작된 타락에 육성세계에 근본악성은 혈통적 육체계식을 따라 유전적으로 각종에 죄의 형태를 이루어 인종이 번창할수록 죄악의 종족도 번창했든 것이다.〉 즉 인류가 번창함에 따라, 죄도 함께 번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김백문, 『聖身神學』, 103). 하지만 성적 타락으로부터의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혈통 복귀 교리와 행위로 인해 비윤리적인 성적(性的)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통일교 문선명을 거쳐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등 성적타락론 유사교리를 주장하는 이단 단체들로 인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106-7)


"일제강점후반기 열광적인 신비주의의 확산이 이루어지던 1930년대 말부터 김백문은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김백문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바로 한국이며, 재림주가 강림할 곳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3월 2일 김백문은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계시와 새로운 교리를 세상에 알리라는 사명을 받은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김백문의 삶과 활동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통일교 측의 자료에 부분적으로 행적이 드러나 있고, 김백문의 저서들을 통해 활동의 흔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基督敎根本原理』 서해(序解)에서 김백문은 그의 저술 목적에 대해 〈본서(本書)는 그 신(神)의 가르친 신(神)을 논(論)했고 그 신(神)의 다시 짓는 인생(人生)을 논(論)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 이단 교리를 체계화한 김백문은, 대규모 세력을 형성하거나 광범위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신(神)을 논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논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107-8)


3-2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문선명)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태어났다. 1991년 문선명의 방북과 김일성 면담 이후, 그가 태어난 집터에 통일교 '정주평화공원'이 세워져 통일교 신도들의 성지순례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1945년 최선길과 결혼했으나 1957년 이혼하고, 1960년 18세의 한학자와 재혼한다. 1964년에는 그의 본명인 문용명을 문선명으로 개명한다. 문선명은 1935년 부활절에 인류구원의 사명을 실패한 예수님을 만나 지상천국 건설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1976년에는 〈공자, 석가, 예수까지도 나의 부하〉라고 주장하고, 1992년에는 〈본인은 재림주요 구세주〉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2002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 한학자도 〈구세주,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2012년 9월 3일 사망했으며, 현재 스스로를 〈6천 년 만에 탄생한 독생녀〉라고 주장하는 부인 한학자가 문선명의 뒤를 이어 통일교를 이끌고 있다."(111-2)


"『원리강론』은 인류의 타락이 성적 타락임을 주장한다. 〈인간을 꼬여 타락하게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하여 타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를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불륜한 성적 관계에 의하여 천사장과 일체를 이루었던 「해와」는... 「아담」으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위치를 떠나게 하여, 마침내 그들은 육적인 불륜한 성적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아담」마저 타락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계승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번식하여 내려온 것이다.〉 (문선명, 『원리강론』, 80-91)." "이를 구원하기 위해 제2의 아담인 초림주 예수님이 강림했지만 실패했으며, 이후 제3의 아담인 문선명이 재림주로 왔다는 내용이다.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이 동방인 한국에 세워진다는 것이 『원리강론』의 결론이며, 통일교는 이의 실현을 지상목표로 삼고 활동하고 있다."(112-3)


"통일교는 대표적인 기업형 종교조직이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원리강론』을 근거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단체로 활동하는 한편, 국내외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관련 사업체들을 통해 기업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는 재림주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 곧 통일교 왕국 건설을 목표로 진행되는 종교적 활동들이다." "국내외 각 지역 교회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7년에는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해 제18대 총선에 참여하는 등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모색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했다." "문선명 사후 현재 후계 구도를 둘러싼 친어머니(한학자) 및 친형제(문현진, 문국진, 문형진) 간 대립과 다툼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통일교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은, 문선명의 후계를 둘러싼 갈등과 긴장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한편, 통일교가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114-6)


3-3 기독교복음선교회(JMS) (정명석)


"정명석은 1945년 음력 2월 3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월명동에서 태어났다. 정명석이 1975년 3월 20일 자로 작성한 통일교 입회원서에 따르면, 그가 20년 동안 장로교 집사로 있었으며, 당시 통일교 진산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명석은 1974년 11월 15일에 통일교에 입교해, 1979년까지 승공 강사 등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탈퇴한 후, 1982년 애천교회를 세우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재림주로 따르던 문선명을 〈실패한 세례요한〉이라고 폄하하고, 자신의 이름 영문 첫 글자인 JMS를 사용해, 자신이 예수(Jesus), 메시아(Messiah), 구세주(Savior)라고 주장하며 독립적인 단체를 시작한다. 청년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포교 활동을 하며 교세를 증가시켰지만, 여신도들에 대한 성범죄 혐의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후 현재는 고향이자 활동거점인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월명동수련원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33-2)


"정명석은 〈하와는 십대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 뱀으로 비유한 천사장 루시퍼에게 사랑의 꼬임을 받고서 호기심에 사랑의 충동감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끊고 그와 사랑의 관계를 맺어 이성의 타락을 함으로 영, 육으로 타락을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와는 그 타락한 몸을 가지고 아담을 사랑함으로 또 아담을 타락하게 했다.〉(『구원의 말씀』, 207-209) 라고 주장한다. 정명석의 교리에 대해, 항소심 판결문은 〈통일교원리를 요약·인용한 것으로 성경을 상징과 비유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 재림 예수가 피고인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암시함으로써 위 교단의 신도들은 그를 메시아로 믿고 그의 면전에서 그가 메시아임을 고백〉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성적 타락을 회복하기 위해 정명석이 재림주로 왔으며, 그와 성적 관계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인류 회복을 위한 영적 행위로 합리화한 것으로 법원은 봤다."(134)


"1980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서대문구 신촌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한 후, 초기에는 강남구 삼성동, 성북구 삼선동, 중구 을지로4가 등지로 옮기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국내외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JMS는, 주로 CGM(Christian Gospel Mission) 혹은 위장 동아리의 형태로 운동, 문화, 악기연주, 댄스, 노래, 연예기획, 모델, 치어리더, 행사 의전, 신앙 활동을 내세워 신도들을 모집하고 있다." "김백문의 『기독교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의 주장이 정명석의 「30개론」에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들의 유사 성적타락론의 흐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 사회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탁명환은 〈통일교의 원리를 새 진리로, 문선명 교주를 이 시대의 중심인물의 대권을 자신에게 물려 줄 전자(前者)〉로 가르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애천교회의 최대의 목적은 기독교회와 통일교를 애천교회에 흡수시키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135-7)


4장 시한부종말론


4-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엘렌 G. 화이트)


"안식교로 알려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SDA)는 몰몬교와 여호와의증인과 함께 미국에서 전래 된 가장 대표적인 단체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는 1831년부터 임박한 재림을 주장하던 침례교 설교자 윌리엄 밀러의 주장을 근간으로 시작됐다. 1818년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일어난다고 확신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밀러를 따랐던 사무엘 스노우는 그날이 3월이 아니라 1844년 10월 22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재림 예언은 다시 실패했고, 추종자들은 소위 〈대실망(The Great Disappointment)〉에 직면한다. 이후 밀러에게 영향을 받았던 엘렌 화이트와 조셉 베이츠와 존 바잉턴 등이 시한부종말론을 수정한 후 공식적으로 안식교 활동을 본격화한다. 안식교의 설립과 초기 교리형성 과정에서 엘런 화이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화이트는 23년 동안 200여 차례의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다."(151-2)


"안식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 즉 〈영원한 복음〉(계 14:6)을 전하는 것을 궁극적인 사명으로 이해한다." "안식교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희생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효력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승천 직후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봉사하셨다. 그리고 2300주야(단 8:14)의 끝에 하늘 성소의 둘째 칸에 들어가 조사심판을 시작하셨다. 이 심판이 마친 후 예수께서는...재림하신다〉고 설명하면서, 〈재림의 징조에 관한 예언들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한국선교 100주년, 2904~2004〉, 31)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셉 베이츠는 토요일 안식일 준수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고 시내산 언약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시이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짐승의 표식이며, 안식일을 지켜야만 14만 4천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52-3)


"안식교의 국내 전래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와이 이민을 위해 일본에 잠시 체류하던 손홍조가 1904년 6월 12일 일본 안식교 전도자에게 침례를 받은 후, 이민을 포기하고 다시 귀국하여, 안식교 선교사들이 내한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08년에는 일본선교회로부터 독자적인 조선 선교회로 독립했으며, 1915년 4월에는 이근억과 정문국이 최초의 안식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5년 안식교에 참여하면 면직과 제명한다는 장로교의 공식 결의가 있었지만, 현재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는 안식교 삼육대학교가 정회원으로 참여하여 신학적 교류를 하고 있어, 안식교의 이단성 여부에 대한 목회현장의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탁명환은, 안식교 성경해석의 오류, 엘렌 화이트의 환상과 예언에 대한 지나친 권위 부여 등의 교리적 문제점들은 〈이단적인 요소〉라고 판단하면서도, 〈안식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교육, 의료, 사회사업, 구호사업, 금주금연운동 등 실로 괄목할만한 활동을 해왔다〉고 평가한다."(154-7)


4-2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회 (안상홍)


"하나님의교회는 설립자 안상홍을 〈재림 그리스도〉 〈재림 예수〉 〈하나님〉으로 신격화한다. 하나님의교회 홍보 전단에는, 성부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안상홍 하나님이라고 나타나 있다. 안상홍은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내남면 명덕리에서 출생했는데, 하나님의교회는 이날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안상홍은 유년 시절을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보냈으며, 1947년 7월 안식교에 입교했으나, 1962년 3월 24일 안식교를 탈퇴한 후, 1964년 6월 2일 하나님의교회를 설립했다. 안상홍은 1985년 2월 25일 사망했다." "안상홍이 사망한 후 전도사였던 장길자가 안상홍의 뒤를 잇는다. 하나님의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갈 4:26)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장길자를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이자 〈어머니 하느님〉으로 신격화한다."(172)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과 장길자,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신격화하는 새로운 유형을 보여준다.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 나오는 〈우리〉라는 복수형 단어와 하나님의 히브리 원어인 〈엘로힘〉이 복수형 명사라는 것을 근거로 남녀 하나님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엘로힘〉의 성경적 의미는 단수, 즉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 의미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성경해석의 오류라고 비판받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유월절 준수를 강조한다. 인류 역사를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고, 성부 시대에는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셨고, 성자 시대에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으며, 성령 시대에는 안상홍이 유월절을 회복해 구원을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안식교와 마찬가지로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교가 종말의 때라고 주장했던 1844년을 기준으로 새로운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웠다."(172-3)


"즉, 1844년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 들어갔다는 안식교의 주장에 덧붙여, 모세가 장막을 짓는데 소요된 시간이 168일이고, 성경에서 하루는 일년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1884년에 168년을 합치면, 2012년이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1988년, 1999년, 2012년 등의 시한부 종말을 주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나님의교회 정관에 따르면, 영구직 총회장인 김주철에게 조직운영과 소유권 등의 절대적인 권한이 위임되어 있다. 규모와 교세 면에서 신천지와 함께 국내 최대 기독교계 이단으로 알려져 있으며, 적극적인 친사회적 봉사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있으며, 특히 해외에서의 현지인 포교 활동을 통한 교세 확장이 두드러지고 있다." "사회봉사를 기반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가장 폭넓게 진출해 있는 대표적인 한국 기독교계 이단 단체이다. 특히 설립자 안상홍 사후에 급속도로 발전한 점을 고려할 때, 종교사회학적으로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71-3, 176)


4-3 다미선교회 (이장림)


"다미선교회 이장림은 1948년 2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출생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성결교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성결교회 목회자로 있으면서 '생명의 말씀사'에서 성경주석과 휴거 관련 서적들을 번역했다. 휴거와 관련된 책들을 발간한 후, '생명의 말씀사'를 나와 1988년 8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선교회' 즉 다미선교회를 설립한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 24시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1988), 『하늘 문이 열린다』(1988), 『경고의 나팔』(1989) 등의 도서판매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으며, 1989년 3월에는 다미선교회 본부였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 365-25 소재 대지 148평 건평 94평의 주택을 자신 명의로 매입하는 등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장림은 종말을 한 달여 앞둔 1992년 9월 24일 신도들의 헌금 34억을 개인 계좌로 이체까지 한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채권의 지급일은 휴거 이후인 1993년 5월이었다."(204-5)


"다미선교회는 〈인간역사 6000년이 지나면 천년왕국이 도래함을 알 수 있으며,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에서 한 세대는 이스라엘 독립 후(1948.5.14) 50년(희년)으로 볼 수 있고, 7년 환난 전에 휴거가 있으므로 1992년에 휴거가 있게 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0월 28일 24시에 휴거가 있다고 계시되고 있는 바, 이스라엘에서는 오후 해질 무렵(오후 6시)부터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를 하루로 보며 우리나라보다 6시간이 늦으므로 우리나라의 24시는 이스라엘의 오후 6시로서 하루가 바뀌어 나팔을 부는 시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라고 해석했다." "다미선교회는 휴거된 신도들은 공중에서 재림주와 7년을 지내고, 이때 지상에서는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며, 1999년에 지상 재림하여 이후 1천 년 동안 천년왕국이 지속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택받은 청소년들이 북한과 중공에 들어가 순교한다고 예언했으나, 모두 예외 없이 실패했다."(205-6)


"당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다미선교회 이장림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직통 계시를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이들 중 한국중앙교회 이천성은 1992년 6월 21일 종말 주장이 빗나가자 충청남도 논산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는 1988년 올림픽 개막식 때 사망한 교주 안상홍이 주경기장 공중에서 내려온다고 주장했으며, 영생교는 1992년 2월 18일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면서 조희성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주장했다." "다미선교회의 1992년 시한부종말론은 개신교계 이단 단체의 병리 현상이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던 신도들의 모습은 국내외 언론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휴거의 불발은 신도들과 가정 특히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한부종말론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업 중단, 가정 해체, 가출, 직장 포기, 낙태, 정신질환 등이 폐해가 나타났으며, 사회 혼란의 야기와 함께 개신교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었다."(207-9)


5장 사회적 논란


5-1 동방교 (노광공)


"노광공의 공식적인 출생기록에 따르면, 1911년 1월 13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동방교 〈說敎文〉에 따르면 1914년 갑인년 1월 13일 평양 상수리 일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계 형사로서의 친일행적이 있고, 해방 후에는 경북 안동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했다. 6.25전쟁 후에는 전도관 집회에서 북을 치며 박태선을 추종하다가, 1955년 대구시 신천동에 동방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동방교 경전인 『경화록』에 따르면, 노광공이 태어난 후 3시간 만에 〈내가 世上에 조금 일찍 와서 苦生하겠구나〉라고 말을 했으며, 7시간 만에 〈혼자 일어서서 步行〉을 했다고 한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3개의 치아가 있었고, 3세 때 시조(時調)와 음율(音律)을 읊었고, 6세 때에는 천자문을 20일 만에 통독 암송했고, 학교에서는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7세 때는 콜레라고 죽었다가 모친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한다."(235-6)


"동방교 모든 교리와 행동지침은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방교는, 예수는 일래(一來)이고, 〈심판주요 창조주〉인 노광공은 〈여호와 이래(二來)〉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광공과 그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를 삼위일체로 믿었다. 즉 노광공은 성부이고, 노영도는 성자이며, 노영구는 성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노광공을 〈이래 조부님〉, 노영도를 〈아바 조부님〉, 노영구를 〈아브니엘 주부님〉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신도들에 대한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또한 1970년대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으나 실패하자, 신도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연기되었다고 주장했다. 동방교는 구원의 조건으로 〈지성금(至誠金)〉을 내세웠다. 동방교 신도들을 〈성민(聖民)〉이라고 부르면서, 성민이 되기 위해서, 지성금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성금의 종류는 30여 종에 이르렀는데, 61계급의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그리고 각종 절기마다 온갖 종류의 지성금을 바쳐야 했다."(237-8)


"1967년 7월 26일 노광공이 당뇨병으로 사망한 후, 동방교는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 총회로 변신하고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주간기독교」라는 신문과 「청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고, 청림농림학원, 고등성경통신학교, 기독교통신대학, 성봉신학교를 운영했다. 재단법인 밀알복음전도선교회를 운영했으나 끊임없는 반사회적 범죄혐의로 인해 1976년 7월 13일 인가가 취소되었다." "탁명환은 〈1950년대 교조 노광공의 부산 여학생 간음 사건을 비롯하여 1960년댕에 접어들어 간음, 린치, 폭력, 살인 등 갖가지 사건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동방교는 1967년 7월 13일 그 재단법인이 대법원으로부터 취소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실로 가공할 사교로서의 범죄행각〉을 벌였다고 평가하고(『기독교이단연구』, 298, 325), 〈동방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또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로 변신한 동방교는 기독교 간판으로 위장한 사이비 종교집단〉(『한국의 신흥종교』 제2권, 62)이라고 결론짓는다."(239-42)


5-2 대한구국선교단 (최태민)


"최태민은 1912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서 태어났다. 출신과 배경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태민을 직접 만났던 탁명환은 그를 〈신흥종교단체의 교주〉, 〈유사 무속인〉, 〈권력 그늘 속의 종이호랑이〉, 〈권력의 시녀〉, 〈고려 말 괴승 신돈〉,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돈거래로 목사직을 산 것으로 보이는) 가짜 목사〉라고 묘사했다. 탁명환의 증언과 관련 자료들을 통해 최태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최태민의 종교적 활동이 노출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 최태민은 원자경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을 〈영세계 칙사관〉이라고 주장했다. 즉 스스로를 〈조물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불교의 깨우침, 기독교의 성령강림, 천도교의 인내천을 이룰 칙사님〉이라는 것이다. 혼합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자신의 영험함을 주장했던 유사종교 단체의 교주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구국십자군과 대한구국선교단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신교 목사로 변신했다."(356-7)


"최태민은 각종 기성 종교의 교리를 혼합해서 사용했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 곧 〈영세계 칙사관〉인 자신이 〈불교에서의 깨침,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라고 주장하면서, 〈난치의 병으로 고통받으시는 분께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고 선전했다. 질병 치료와 재난극복을 위해 최태민이 한 일은, 〈벽에다 둥근 원을 색색으로 그린 후 이를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최태민은 주장했다." "최태민은 대한구국십자군과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해 운영했다. 탁명환은 이에 대해, 〈당시 저항 세력이었던 기독교계의 저항을 희석시켜보려는 의도에서 대한구국십자군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357-9)


"최태민은 각종 기독교 행사를 주도했지만, 그는 여전히 '가짜 목사'였다. 정식적인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 그가 금전거래를 통해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증언까지 확보한 탁명환은 그가 가짜 목사라고 판단했다. 특히 그가 주도하거나 참여한 기독교 행사에서 목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최태민을 보면서 탁명환은 그가 목사직을 급조해 만들어 악용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최태민은 한국 사이비종교 역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권력 핵심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체계적인 교리와 치밀한 조직을 갖춘 통일교도 하지 못했던 일을 비주류 사이비종교 교주인 최태민이 해낸 것이었다. 특히 육영수 여사의 사망이라는 절묘한 시점과 그 유자녀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예상 밖의 선택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일단 관계가 형성되자, 소위 구국의 명분을 내세워, 핵심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사욕을 채웠다."(359-60)


5-3 영생교 (조희성)


"영생교의 설립자 조희성의 출생기록에 따르면, 1931년 8월 12일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박태선 전도관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영향을 받았다. 조희성은 전도관을 떠난 후에도 박태선을 〈영모님〉으로 따랐으며, 영생교는 현재도 전도관의 이슬성신절(매년 1월 1일)을 지키고 있다. 1981년 8월 18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서 독자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1년 10월 10일 부천시 역곡동 74-141에 승리제단을 설립한다. 조희성은 스스로를 〈이긴자〉 〈정도령〉 〈구세주〉 〈하나님〉 〈주님〉 등으로 신격화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이 〈구세진인 正道令〉이고 〈개벽의 주인공〉이며 〈경전과 예언서에는 이슬(甘露)을 내리는 자를 이긴자, 메시아, 생미륵불, 정도령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왔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1980년 10월 15일을 기하여 한국 땅에 출현〉(『승리신문』 1993년 11월 7일 자) 했다고 주장한다."(383-4)


"영생교의 공식명칭은 〈영생교 하나님의 승리회 승리제단〉으로, 〈하나님이 서 계신 승리대, 즉 승리하신 하나님의 재단이란 뜻〉이다." "〈성화(이슬성신)이란〉 제하의 영생교 유인물에는, 〈성경에는 구세주의 증표로 이슬성신이 내린다 했고, 불경에는 생미륵불의 증표로 감로수(甘露水, 이슬)를 부어주신다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예언서에는 정도령의 증표로 감로해인(甘露海印)을 사용한다고 되어있습니다〉라고 설명한 후, 〈승리제단에서는 「이긴자」 조희성님으로부터 10년 동안 계속 이슬성신이 내리고 있으며, 이 이슬성신에 의해 인간 몸이 변하는 새로운 장(場)이 열리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의 출생일인 8월 12일을 성탄절로 지키면서, 2004년 6월 19일 그의 죽음을 〈보광(普光)〉이라고 명명하면서, 보광은 〈구세주의 영광의 빛이 온 누리에 두루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완성〉된 조희성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385-6)


"1992년 9월 서울지검 강력부는, 영생교 신도 실종 사건에 조희성이 관련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1993년 1월 10일 도피 중이던 조희성을 검거했으며, 신도들에게 영생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현금 3억 6천만 원을 가로챈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구속수감했으며, 1994년 8월 30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은 징역 4년에 추징금 5백만 원의 실형을 선고한다. 1995년 3월 8일에는 실종 신도의 유골이 발견되는 한편, 영생교 간부들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조희성은 영생교 신도 6명에 대한 살인교사 및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004년 항소심에서 살인교사 혐의는 무죄, 범인도피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직후인, 6월 19일 수감 중이던 서울구치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현재 조희성 사망 직후인 2004년 6월 20일 승리재단 총재로 취임한 부인 이영자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384, 387-9)


6장 기독교이단 아카이브 현황 및 활용 방안


7장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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