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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지음, 최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8월
평점 :
1장 조선 왕조와 일본
"일군만민 체제에서는 공론이나 직소가 중요한 언로였고, 건국 당초부터 중시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정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국왕이나 관료, 사족이었고, 백성은 정치의 객체일 뿐이었지만 그 대신 백성의 이의 신청은 확고하게 인정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그 외에도 권농교화, 진휼부조, 평균분배 등을 그 구체적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민본주의의 기초에는 농본주의가 있어 순박한 농부로 살아가는 것을 통속 도덕적으로 교화하였다. 백성은 먹을 것을 생산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재난에 처했을 때에는 인정(仁政)을 받을 권리를 가졌다. 민본인 이상 백성을 나라보다도 중시하였고, 민중들의 상호 부조도 장려하였다. 부민은 빈민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양반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내면화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민중 구제는 양반의 당연한 책무였다. 이러한 민본주의의 양상은 자연스럽게 평균주의를 이상으로 만들고, 균전사상(均田思想)을 배태하였다."(25-6)
"확실히 유교적 통치 방법은 근세 일본에서도 채용되었다. 근세 일본에서는 인정(仁政)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 공의(公儀)와의 은뢰 관계(恩賴關係), 즉 〈백성 성립〉의 논리가 있었고, 교유(敎諭)를 축으로 하는 유교적 정치 문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이묘를 목민관으로 파악하는 논의도 있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는 것은 무사(武士)의 당연한 소양이었고, 유교 교육을 근간으로 하는 번교(藩校)가 18세기 끝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근세 일본에서 〈무위(武威)〉가 막번 체제 최대의 기반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민본주의에 의해 형성되는 목민 의식이 있었지만, 엄격한 법치 사상과 〈구원〉에 의한 인정주의가 양립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자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라이 하쿠세키나 구마자와 반잔 등에게서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유학자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30-1)
# 유교 이데올로기는 조선에서는 통치 원리 자체였지만, 일본에서는 통치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다.
"〈정한征韓〉 사상은 메이지 시기에 들어 갑자기 대두한 것이 아니다. 조선 멸시관을 전제로 하면서 18세기가 끝날 무렵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하야시 시헤이는 조선을 일관되게 일본에 복속하였던 나라로 간주하였는데, 조선을 향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선구자는 사토 노부히로였다. 그는 〈만주〉를 시작으로 하여 몽고, 조선을 침공하고, 결국 중국 본토로의 침략을 몽상하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서구의 충격〉에 대항하여 대륙 팽창의 방책을 제창한 것이다. 이러한 정략은 하시모토 사나이나 요시다 쇼인이 계승하였는데,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생각하는 선상에서 중요한 인물은 쇼인이다. 그는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교역에서 러시아에 잃어버린 것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장래 러시아에게 빼앗길 부(富)의 대체 보상으로 조선을 시작으로 한 대륙 침공을 구상하였다."(42)
"근세 일본에서는 불교나 신도(神道)도 유교와 병존하면서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난학(蘭學)마저도 허용되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구의 충격〉이라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켜내야 할 무언가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국체〉였다. 〈국체〉란 미토 번사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쓴 『신론(新論)』(1825)에서 처음으로 정의를 내린 용어이다. 거기서 국체란 ① 천황의 일계(一系) 지배, ② 천황과 억조(만민)의 친밀성 ③ 억조의 자발적이고 끊임없는 봉공심(奉公心)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권력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에 심취한 자가 쇼인이었다. 그는 〈국체〉론적 입장에서 『맹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였고, 거기에 기초하여 조슈 번의 대유(大儒) 야마가타 다이카와 논쟁을 벌였다. 쇼인의 입장은 〈도〉와 〈국가〉를 확연하게 분리하여 〈도〉 위에 〈국가〉를 위치시키는 것이었다."(43)
"메이지 유신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1869년 1월 31일, 신정부는 쓰시마를 통하여 왕정복고 사실을 조선에 고지하였는데, 그 서계(書契, 조일 간의 외교 문서)가 일방적으로 구례(舊例)를 배척한 것이었고, 〈황(皇)〉이라든가 〈칙(勅)〉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조선 국왕을 격하하고 천황을 그 상위에 두는 것과 같은 문서였다. 조선은 이 서계의 수리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여기서 국교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근세에 곡절이 있었으나 꾸준히 구축되어 왔던 선린 관계가 단절되었다. 신정부는 조선이 이 서계를 거부할 것을 확신하면서 사절을 파견하였다. 기도 다카요시는 사절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조선이 이제까지 천황에게 조공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무례〉하다고 비난하면서, 조선이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신주(神州, 즉 일본)의 위엄을 펼칠 것〉을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애초부터 침략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44-5)
2장 조선의 개항
"(개항 과정에서) 숭문(崇文)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조선이 도리어 무위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일본 이상으로 완강히 저항했다는 점은 양국 문명 의식의 차이와 크게 관련된다." "이항로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존망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행위라 하여 유교 문명의 절대적인 수호를 준렬하게 설파하였다. 이 점은 현실의 조선 왕조가 존귀한 것은 〈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실천을 포기한다면 그러한 왕조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국체〉 사상과는 전혀 달랐다. 일본에서는 〈국체〉 사상의 대두를 통해 〈국가〉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도〉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서구화로의 전환이 용이할 수 있었다. 서구에 대한 철저한 항전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일 뿐이다. 서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자마자 존양론(尊攘論)이 개국론으로 급격하게 전환하였던 비밀이 여기에 있다."(59-61)
1875년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운요호가 강화도에 출몰해 조선 관민을 도발한 사건은 "마실 물을 구하려고 초지진으로 향하던 차에 불의의 공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날조되었다. 운요호의 강화도 접근은 명백하게 〈만국공법〉을 위반한 것이었는데, 마실 물의 보급이라면 〈만국공법〉에서 인정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요호는 최초부터 조선군을 도발하였고, 반격을 시도하면서 영해를 침범했다." "일본 정부는 강화도 사건을 절호의 구실로 하여 일거에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실현하려 했다. 운요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측에 잘못을 덮어씌워 조약을 체결하려는 계산이었다." "1876년 2월 10일, 구로다 일행은 군함 6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났고, 병력이 4000명이라 했다. 페리의 사례를 모방하려 한 위압 외교였다. 다음날부터 진행된 회담에서, 조선 측의 접견대신 신헌과 부관 윤자승은 〈만국공법〉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조약이 무엇인지도 몰랐다."(65-7)
#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 조인
3장 개항과 임오군란
"조선 정부는 이홍장의 중개로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조약 교섭의 임무에 나선 이는 박규수의 제자 김윤식이었다. 그는 근대 병기의 제조 학습을 목적으로 한 유학생 38명을 인솔하는 영선사의 임무를 가지고 1881년 11월 17일 이홍장이 있는 톈진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임무였고, 보다 중요한 임무는 미국과의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이었다. 위정척사파가 우세하였던 조선에서는 조약 교섭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톈진에는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은 해군 제독 슈펠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섭에서 가장 논란이 된 내용은 청국의 종주권을 조약문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홍장은 〈속방〉 규정을 고집하였는데, 김윤식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청국의 〈속방〉이더라도 조선은 내정과 외교에 대해서는 〈자주〉라고 하는 의식을 이홍장과 김윤식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1)
# 슈펠트의 반대로 〈속방〉 규정 명문화 무산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은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강문형, 민종묵, 이헌영, 어윤중, 홍영식 등 12명의 조사(朝士)와 27명의 수행원, 기타 2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수행원 가운데 유길준과 유정수는 게이오기주쿠에, 윤치호는 도진샤에 유학하였다. 조선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조사시찰단은 메이지 일본이 실시하였던 이와쿠라 사절단과 성격이 유사했다. 구미로 직접 향하기에는 자금과 시간, 어느 쪽으로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손쉬운 일본을 선택했다. 조사들은 각각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 지향을 강하게 하고 귀국한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조사들은 일본이 〈부국강병〉을 달성해 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으나, 산업화의 추진 과정에서 누적된 국채 때문에 국가재정이 파탄 났다고 보아 메이지 유신을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반면,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한 조선의 근대화와 대국화를 꿈꾸었다.(83-4)
민비의 실각과 대원군의 재등장, 청국의 개입과 대원군의 청국 억류 등 일련의 사태를 야기한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의 여론 동향은 어떠했을까? 우선 정부의 강경한 대조선 정책에 곧바로 응하듯이 관권파 신문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일본의 피해를 크게 부풀려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부채질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재하는 「지지 신보」는 청국에 대한 대항을 의식하여 충분한 육해군 병력의 출병을 호소함과 동시에, 군사적 충돌을 개시할 각오로 배상금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이제까지 동양 맹주론을 주장하여 조선이나 중국을 문명적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커다란 변절의 첫걸음이었다. 이 시기, 임오군란과 관련된 니시키에(錦繪)가 매우 많이 팔렸는데, 그것들은 하나부사 공사 일행의 탈출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일본 민중의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더 조장하였다. 그에 따라 헌금이나 종군 청원을 제출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91)
4장 갑신정변과 조선의 중립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가 지향한 것은 서구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만국공법〉 체제로의 일원적 진입을 꾀하고, 종주권을 강화한 청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국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단시일 안에 서구화를 달성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매우 좋은 모델이었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프랑스〉를 지향하려 한 김옥균에게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국 지향 노선도 일부 보인다." "그러나 김옥균에게는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주의적 연대 사상도 있었다." "애초부터 조선에서는 〈부국강병〉은 권력주의적 패도(覇道)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존재하였다. 그것을 대신하여 주창한 것이 〈자강〉이었다. 〈자강〉이란 민본을 기초로 두고 내정과 유교적 교화의 충실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국강병〉이 패도인 데 비하여 왕도라고 할 것이다."(106-7)
"급진개화파에게는 우민관도 강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것은 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민을 정치의 주체로 둔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민평등의 사상은 개화파의 아버지인 박규수에 의하여 열렸으나, 구체적 실천의 차원이 되면 엘리트적 사(士)의 자각을 가진 개화파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갑신정변이 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형태를 취하고, 더욱이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의존하려 했는가, 그 본질은 전적으로 개화파의 우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개화파 정권의 붕괴에는 한성 민중의 공격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중 사이에서는 국왕을 폐위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민중은 계속해서 왕궁이나 공사관을 둘러싸고 일본인이나 개화파에게 투석이나 폭행을 가했다. 민중을 신뢰하지 않고 외국을 신뢰한 개화파 정권은 민중에 의해 타도되었다. 민중의 이반은 개화파 정권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107-8)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시기,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은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급진파는 계속해서 과격 사건을 일으켰고,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자유당은 1884년 10월에 해산했다. 갑신정변은 그러한 궁지를 타개할 한 줄기 빛이었다. 민권파의 신문은 들고 일어나 대청 강경론을 전개하여 1885년 1월 18일과 30일에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학생, 청년과 장사 등에 의한 지사 운동회와 반청 데모가 일어났다." "1885년 11월 23일 오이 겐타로나 고바야시 구스오가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오사카 사건은 자유 민권 운동이 국권론으로 크게 선회한 내부 사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구 자유당원들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 한 계획이 발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에 대한 연대라고 말하였지만 사실은 침체한 자유 민권 운동의 활기를 살려내기 위해서 사건을 바깥에서 꾸민 것에 불과했다. 조선 문제를 이용하려 했을 때, 민권론을 국권론으로 쉽게 전환하였다."(109)
5장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갑오농민전쟁은 근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민중 운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의 정치 문화를 배경으로, 무력적으로 중개 세력을 배제하고, 일군만민의 논리에 호소하여 민중적 요구를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년도 채우지 못한 기간이었지만 민중 자치를 실행하였던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일군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출현하는 가운데 민중은 농민군 간부의 지도를 이탈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였다. 농민 전쟁의 전 과정에서 책임을 지려 했던 전봉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바였다. 그러나 민중은 자신들이 그리던 유토피아를 자율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개혁이 설령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국왕은 반드시 그것을 용서해 주리라는 낙관론에 취해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충군애국〉 사상과 의병 의식을 가지고 궐기했던 전봉준과, 유토피아의 실현을 서두른 민중 사이에는 분명히 의식의 괴리가 있었다."(148-9)
"갑오개혁은 갑오농민전쟁에서 나타난 농민의 제반 요구를 국정 전반에 걸친 근대적 여러 개혁을 통하여 응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 재정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실현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급격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영세한 농업이나 상공업에 대한 개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리어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농민은 소농 회귀적인 토지 정책을 바라고 있었는데, 갑오개혁 정권은 지주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거기에 일절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또한 조세 금납화는 농민이 더욱 더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되어 몰락의 길을 가속화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은 갑오개혁 정권과는 반대로 반근대적 지향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개혁이 일본의 간섭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근대화와 침략을 겹쳐 보이게 만들어 반일·반개화의 기운을 한층 고조시켰다."(152-3)
6장 대한제국의 시대
"고종은 칭제(稱帝)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6군(천자의 군대)과 만민의 바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수사를 구사하였다. 공론 중시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기본이었고, 고종은 이제까지의 유교적 정치 문화를 존중하면서 칭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고종은 일군만민 사상이 성숙하였고, 갑오농민전쟁에서 정점에 도달하였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조 신원 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대처도 당초에는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선무공작이나 회유공작을 실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은 홍범14조의 발포 다음 날에 낸 칙령 제14호에서 〈군주가 자주를 하려고 하더라도 백성에게 의지하여야 하며, 나라가 독립하려고 하더라도 백성과 함께해야 한다. 너희 서민들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다만 나라를 사랑하고, 그 기운을 같이하여 오직 군주를 사랑하라〉라고 하여 〈충군애국〉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165)
"이리하여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다. 그 국제가 바로 1899년 8월에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이다. 이것은 겨우 전체 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문장에 불과하나,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의 제국〉이며, 그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 정치〉로, 황제는 〈무한의 군권〉을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황제는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외교권, 은사권 등 모든 권력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국제는 결코 헌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국가의 이념이나 신민의 권리·의무, 끝으로는 관권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표방하였고, 오히려 유교와 민본주의는 국가의 원리였다. 이미 신민의 생명 재산에 대한 보호에 대해서는 홍범14조와 칙령 제14호에 명기되어 있었다. 대한국국제는 단지 민본주의 이념을 당연하다는 듯이 실천하며, 한없이 자애로워야 하는 황제의 권능을 명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167)
"독립협회에 대한 조삼모사식의 대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종은 대원군에게서 물려받은 책사적 일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경솔하고 사려가 부족하였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나 정실(情實)적인 인사는 총애와 경질을 반복하였고, 때로 믿기 어려운 사건까지도 일으켰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이권을 도모한다면서 그때까지 총애하던 전 역관 김홍륙을 유배에 처하자 원한을 사 1898년 9월 11일 만수성절(황제의 탄생일)의 커피에 아편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 고종은 무사하였으나, 황태자 척(拓)은 그 후 평생 병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일군만민의 정치라고 하는 것은 현명한 군주를 전제로 하는데, 그것은 부단한 인격적 도야와 신하와 변함없는 신뢰 관계를 구축한 위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그것은 단순한 독재와는 구별되는 이상주의적 군주 정치이다. 고종에게 군주라는 자리는 짐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고, 그 점은 노회한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치 속에서 분명해졌다."(187)
7장 러일전쟁하의 조선
"양국이 결정적 대립을 맞이한 것은 1903년에 들어서다. 러시아는 같은 해 4월 이행하기로 되어 있던 만주로부터의 제2기 철수를 실행하지 않고, 도리어 만주 지배를 강화하려 하였다. 더욱이 5월경부터 압록강 조선 측 하구에 있는 용암포의 토지를 매수하여 건물들을 건축하고, 삼림 사업을 개시하려 하였다. 러시아가 조선 전역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용암포로의 진출은 일본의 만주 진출에 대한 방어선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삼국 간섭 이후 〈와신상담〉을 구호로 삼아 온 일본에서는 관민 모두에게 개전의 열기가 비등해 있었고, 조선에 대한 군사적 지배의 달성을 열망하고 있었다." "2월 4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되자, 8일 연합 함대가 뤼순 항 바깥의 러시아 함대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보다 앞선 6일, 일본은 조선의 진해만과 부산, 마산의 전신국을 군사 점령하였다. 러일전쟁도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군사 행동이 선행되었던 것이다."(199-200)
# 한일의정서 조인(1904.2) 이후 조선의 상황
1. 군율 체제의 성립 : 군용 시설 훼손, 치안 방해 행위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집회·결사·언론·출판 행위를 단속(식민지 무단 통치의 원형)
2. 군용지 수용 : 필요 면적의 16배 이르는 토지를 헐값에 군용지와 철도 부지로 강제 수용
3. 인부 징용 : 촌락을 연대 책임으로 묶어 철도 부설 인부를 강제 징용(식민지 총력전 체제기 강제 연행의 원형)
4. 화폐 정리 : 한국의 화폐 발행권을 강탈하고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한 신화폐를 본위 화폐로 확정
"(각지에서 속출하는) 민란 가운데 유달리 주목되는 것은 9월 경기도 시흥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 민란은 군수 박우양이 일본인과 협력하여 인부의 차출과 그에 관련한 비용을 군민에게 부과한 일을 단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군민은 전통적인 민란의 규칙에 따라 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군수가 일본인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일본인 인부 7~8명을 관아로 데려왔을 무렵 군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일본인 두 명을 살해하고, 네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군수와 그의 아들까지도 살해하였다. 왕명을 받은 군수는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란의 규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라고 하는 정치 문화를 전제로 하여 성립해 있는, 정부와 민중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이 규칙이 깨졌다는 것은 중대한 사태를 의미했다." "다만 동학 이단파와 같은 강력한 구심력을 가진 세력이 존재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민중의 싸움은 산발적, 한정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219-20)
8장 식민지화와 국권회복운동
"1905년 11월 18일, 보호조약의 체결로 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이 파견되었다. 한성, 평양, 부산, 인천, 목포, 군산 등의 요지나 개항장에는 이사청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종래의 영사관 업무를 담당함과 동시에 조약 의무 이행의 명목하에 지방 시정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자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1905년 12월 21일 임명되었고, 통감부는 한국 외부(外部)를 청사로 삼아 1906년 2월 1일 개청하였다. 통감은 천황에게 직속하였고, 한국 외교를 감리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다. 또 황제를 내알(內謁)하여 정무의 소통을 꾀하였고, 정부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중요 관직에는 보임(補任) 추천을 실시하여 한국 시정에 대하여 권고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통감은 한국 주차군을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다." "이리하여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내정권조차 반쯤 박탈당한 상태가 되었다."(229-30)
"의병 운동이나 국채 보상 운동이 고조되는 한편으로, 고종은 밀사 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활동이 1907년 6월 29일 이토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격노했다. 7월 3일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여 그 행위를 〈음험〉한 것이라고 힐책하였고,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라고 윽박질렀다. 이어서 총리대신 이완용에게도 마찬가지로 협박하며 고종의 양위를 다그쳤다. 일진회 송병준은 양위하지 않는다면 자결하든가, 천황에게 직접 사죄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고종을 다그쳤다. 결국 7월 20일 양위식을 거행하였고, 황태자 척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순종(純宗)이었다." "이토는 다음 단계의 정책을 즉석에서 실행에 옮겼다.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협약으로 일본은 통감에 의한 내정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법령 제정과 행정 시행, 관리 임면 등은 통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다."(242-4)
9장 한국 병합
"순종의 순행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한성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통감을 사임할 뜻을 굳힌 이토에게 1909년 4월 10일 수상 가쓰라 다로와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방문하여 한국 병합안을 제시하자, 이토는 군말 없이 병합안을 승인했다. 이토는 6월 14일 통감을 사임하였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을 각의에서 결정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실시하기로 했다." "명성에 신경 쓴 이토는 1908년 말 무렵부터 통감 사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었는데, 순종의 순행 실패로 일본의 조선 지배가 합의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통감 사임만이 아니라 병합도 용인하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보호국이든, 자치 식민지든, 병합 일체화든 조선이 일본의 완전 식민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토는 지배 비용이 든다는 점과 국제적으로 무단한 행위라는 인상을 준다는 데 신경 썼던 것에 불과했다."(275-6)
"외상 고무라 주타로는 1910년 2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을 각국에 통지하였다. 그리고 동맹국인 영국에 대하여 6월 3일 관세 자주권이 없는 조선에서 관세를 당분간 현행대로 할 것을 조건으로, 병합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미국은 만주의 문호 개방을 호소하는 가운데 일본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었으나, 만주에서 강고한 이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러시아로부터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침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간도 진출에 일시적으로 불신을 품고 있었는데, 문호 개방을 제창하면서 실제로는 만주로의 경제적 진출을 꾀하는 미국에게 한층 더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7월 4일 제2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항한다는 취지에서 〈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특수 이익〉을 인정하여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제 한국 병합은 언제라도 감행할 준비가 끝났다."(287-8)
"1910년 5월 30일 병약한 소네 아라스케를 대신하여 육군 대장이며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이 되었다. 6월 3일 각의에서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천황에 직속하는 총독이 대권으로 통치한다는 「병합 후 한국에 대한 시정 방침」을 결정하였다. 새로운 지배 기구는 통감부를 대신하여 총독부라고 불렀고,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으로 결정되었다." "데라우치가 병합의 결행에 착수한 것은 8월 16일이다. 이날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병합안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 형식은 〈합의의 조약〉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보호국이라는 것은 자치 혹은 독립을 부여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병합이라는 말은 거기에 반하는 정책으로서 국제적으로 일본의 면목을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합〉이라는 말은 대등한 일체화의 어감을 갖는 〈합방〉이나 〈합병〉과는 달랐다. 한국 폐멸까지도 완곡하게 의미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고안한 것이었다."(288-9)
#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 조인(1910.8.22) 및 공포(8.29)
"한국병합조약의 체결은 조선 사회에 그때까지의 조약과 비교하자면 사실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또 황제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생활주의로 살아가는 민중에게 선정이나마 베풀어 준다면 지배자의 변경은 감수할 수 있었다. 민중의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다분히 시원적이었다." "병합조약과 동시에 조선귀족령을 실시하여 76명의 조선인이 귀족에 포함되었다. 한규설과 유길준을 비롯한 6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 "순국자는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다. 양반 유생 9,811명에게는 경로금이 지급되었고, 효자 등 향촌의 모범자에게는 포상을 수여하였다. 또 대사면을 실시하여 부정을 한 지방 관료도 그 죄를 용서받았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미납 세금을 면제하였고, 추수에 한하여 지세를 5분의 4로 감면하였다. 더욱이 13도에는 국탕금 1700만 엔을 지출하여 진휼이나 교육 보조금 등에 충당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대접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진수성찬과 같은 것이었다."(2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