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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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3일 만에 혁명이 실패하자 서재필은 망명하고, 첫 번째 아내는 자살했다.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고, 집안 전체가 멸문당한다. 서재필은 고작 스무 살이었다. 갑신정변의 동지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기대와 달리 일본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다시 박영효, 서광범과 태평양을 건너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서재필은 어느 미국인 자선사업가의 도움으로 1886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습력이 뛰어났던 서재필은 모든 학생을 대표해 졸업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원하던 독지가는 서재필이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과학을 택했다.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12)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최초의 순 한글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에 맞춰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만든다.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모임은 7월 2일 독립협회로 발전한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국고를 지원했다. 여기에 고종의 측근뿐 아니라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친러파, 친일파 등 정파를 초월한 다수의 관료가 참여했다. 어쩌면 몰락하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석 달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기에 대한 의례를 시작했던 서재필은 독립문에 태극기를 새겼다. 《독립신문》은 태극기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제호에도 태극기를 인쇄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자주 독립국으로서 ‘제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897년 10월, 여론에 호응한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이때만 해도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았던 두 세력은, 곧 민주주의 도입을 둘러싸고 대립한다. 14)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토론 수업을 시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학생들이 토론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협성회’의 시작이다. 협성회는 이승만, 주시경, 오긍선 등 배재학당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으며, 토론회를 기반으로 대중 계몽 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큰 영향을 준 서재필은 그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오긍선 역시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아 서재필의 뒤를 이었고, 나중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의 서양 의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선도하는 대중 토론회가 인기를 끌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에서는 안창호가 명연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러한 활동은 점차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외교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15)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안창호가 하와이를 지나가고 두 달 뒤인 1902년 12월, 대한제국의 정식 여권을 소지한 최초의 이민자들이 민영환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에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민영환은 이들의 여권과 비자 처리 업무를 맡았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뜬 그는 날로 격해지는 열강들의 침략을 외교 관계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하와이 이주 사업 역시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같은 해, 일본의 요구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도 금지되었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여기서 다했다. 하와이 이민을 주선했던 민영환은 자결하고, 이민자들이 돌아갈 조국은 없어졌다. 20-1)


한편, 3·1운동의 폭풍이 지난 1919년 여름, 파리의 프랑스 정보 당국은 하노이에 긴급 전보를 보내 한 젊은 남자의 신원 확인을 요청한다. 이 젊은이는 ‘응우옌 아이 쿠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응우옌(Nguyễn)은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으로 한자로는 ‘완(阮)’이고, ‘아이 쿠옥(Ái Quốc)’은 한자 ‘애국(愛國)’을 베트남어로 표시한 것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운동가였던 그는 난데없이 파리강화회의장에 들어가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했다. 당황한 프랑스 정보 당국은 이 사람의 배후를 캐기 시작했는데, 밝혀진 내용은 이렇다. 1911년 베트남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미국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스 정보 당국이 기록한 단체의 이름은 ‘Korean National Association’.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이 결성한,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이민자들이 꼬박꼬박 기금을 모으던 바로 그 ‘대한인국민회’다. 24)


#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나중에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1918년 상하이 망명 중이던 여운형 역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김규식을 대표단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이와 동시에 여운형은 전국적인 봉기를 조직해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는데, 이것이 3·1운동의 시작이다. 파견된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서 백방으로 뛰던 도중 프랑스 측으로부터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 한다는 답변을 듣고, 긴급히 여운형 측에 알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25)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의 실체가 드러나자 외교론이나 애국계몽론의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는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설득력을 얻으며, 한인사회당이 임시정부의 다수파가 된다. 임시정부는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세력을 재편하여 동로, 북로, 서로의 3대 군관구를 설정했다. 그해 6월 홍범도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다. 이동휘는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추가 파견하여 이미 활동 중인 박진순에게 합류시키고,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 약속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신용이 없던 신생 소비에트의 지폐가 아니라 환전이 가능한 제정러시아의 금화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이르쿠츠크파가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 계열(김구 등)에 이 돈의 존재를 폭로한다. 이를 임시정부의 공금으로 생각한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띠었다. 1921년 1월, 이동휘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29-30)


한편, 1920년 독립군의 맹활약에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하며, 만주 한인 민간인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15 이에 세력이 위축된 여러 독립군 조직은 1921년 초 연해주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자유시)에 집결하여(4,500명) 단일한 독립군 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다. 사실 이 집결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의 산물이었고, 상해파의 지도를 받는 다수의 독립군 조직을 이르쿠츠크파가 연해주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의 접수를 시도했다. 1921년 6월 28일 볼셰비키와 진압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을 무력으로 제압하는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당시 김구는 좌파 지도자들이 횡령했다고 의심하고, 1922년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 분열이 시작되었다. 30)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초기 사회주의자 김철수는 김구에 복수하려는 세력을 끝까지 말렸고,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 이후 새로운 좌파 지도자로 등장한 박헌영 등의 스탈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1990년대 러시아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구가 지목한 인물들의 공금횡령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제적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이동휘와 동행을 마친 이극로는 황진남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남아 1922년부터 베를린대학(Universität zu Berlin)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이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만들어 스스로 강의했다. 2019년, 이극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이 강좌를 1923년 독일 교육 당국이 정식 강좌로 허가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어는 독일어로 ‘Koreanische Sprache(한국어라는 뜻)’라고 표기되어 있다. 31-2)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과학이 조선의 살길이라는 것은 명백했고,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과학을 배우자’라는 구호로 이어졌다.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公民(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36-7)


나경석은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회사와 제약 사업 등에 종사했으나 실패하고, 유학 친구 신익희와 축구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신익희와 함께 비밀 조직을 만들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신익희는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여기서 손정도, 여운형, 황진남과 함께 임시의정원 활동을 했다. 이 무렵 과학 연구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시작은 1924년 김용관이 조선일보에 발명학회 설립을 제안하면서부터다. 대한제국이 이공계 교육을 위해 설립한 상공학교(1899년)에 뿌리를 둔 경성공업전습소(1907년)가 1915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20 이 학교 졸업생들은 최초의 과학도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를 만들고, 1920년 10월 20일 《공우(工友)》라는 잡지를 창간해 과학 계몽에 앞장섰다. 이 창간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37-8)


1933년 6월, 발명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한다.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릉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38-40)


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100년 전, 나라 잃은 민족의 부활 수단으로 인식되며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상대성이론은 1922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조선 전체에 아인슈타인 붐으로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간다는 사실은 6월부터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기 전이었다.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더욱 떠들썩해졌다. 아인슈타인의 세세한 일정을 보도하던 《동아일보》는 11월로 예정된 그의 도착에 맞춰 특집 기사를 기획한다. 필자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황진남. 함흥 출신의 하와이 이주민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서 현순, 여운형, 신익희와 함께 활동했던 그 황진남이다. 임시정부의 분열 때문에 이극로와 마찬가지로 독일 유학을 택했던 그는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다. 43)


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 다음 해인 1923년,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기획한다. 그들의 리더로는 한위건과 이여성이 있었고, 여기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최윤식이 합류했다. 1919년의 3·1운동이 시작되던 첫날, 시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경성의전 학생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한위건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3년 여름 학우회 순회강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순회강연단의 또 다른 리더 이여성은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이다. 그의 조부는 금부도사였고 부친은 현감을 지낸 만석꾼이었다. 그는 집에서 토지 문서를 훔쳐 중국으로 떠나며 어린 시절 항일운동으로 의형제를 맺었던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호를 짓는데, 김원봉은 약산(若山, 산과 같이), 김두전은 약수(若水, 물과 같이) 그리고 이명건은 여성(如星, 별과 같이)으로 불리게 된다. 49)


상대성이론 열풍은 문인 이광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소설 〈무정〉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던 그는 1927년 6월 《동광》에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 시간 공간 및 만유인력 등 관념의 근본적 개조>라는 장문의 논설을 싣는다. 《동광》은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기관지 성격으로 1926년에 시작된 잡지다. 이제는 상대성이론을 단지 어렵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이해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이광수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에 이광수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문체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에테르의 존재가 부정된 마이컬슨의 실험으로 시작해 빛의 상대속도가 어떻게 새로운 중력이론으로 연결되는지 상대성이론을 비교적 정확하게 해설했다. 이처럼 당시 아인슈타인은 일반인에게 알려질 정도로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고, 1928년 8월 22일 《중외일보》는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라는 사설을 싣기도 한다. 이 흐름은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54)


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1923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이 시기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폭등한다. 1923년 10월 한 달에만 300배가 올라, 11월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으로 나치가 급부상했다. 1924년 6월 26일 《신한민보》에 미주 한인들이 베를린 유학생 대표에게 송금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 수령자는 이극로였다. 이렇게 미주 한인들과 인연을 맺은 이극로는 몇 해 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미주 순회 한글 강연에서 ‘언어는 민족의 생명’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나라는 언어에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말과 글의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극로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년)다. 61-2)


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어린 시절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규남은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韓英書院, 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던 1899년 초, 윤치호는 ‘산업 학교(industrial school)’를 설립하기 위해 재산 일부를 남감리교회 재단에 기부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가 이를 종잣돈으로 1906년 개성에 세운 학교가 ‘한영서원’이다. 설립 목적에 맞게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조선에 아인슈타인 붐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고교 야구 선수 최규남은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당시 연희전문 수물과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학과 물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1932년, 최규남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모교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34년 무렵 양자역학 강의를 시작한다. 서양에서조차 낯설던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65-7)


1931년 교토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1932년 1월 8일, 이태규가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얼마 뒤 일본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다. 다이쇼 천황에 이어 즉위한 쇼와 천황 히로히토에게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며 온건 의회주의자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군부가 행동에 나섰다.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밀어붙이지만 곧이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점령군 수뇌부가 붕괴한다. 밀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5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을 사살하고, 일본의 정당정치가 무너진다. 이로부터 일본은 제동이 걸리지 않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경제공황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먹고사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는 독일 바이마르 체제를,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심지어 조선의 지식인 사회까지 급격히 우경화시키고 있었다. 아마 심훈의 《상록수》(1935년)는 이런 지식인 사회의 변절과 비관에 반전을 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71)


이상의 시 〈삼차각 설계도: 선에관한각서 1〉(1931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요하게나를전자(電子)의양자(陽子)로하라〉 여기서 양자는 ‘量子(quantum)’가 아니라 ‘陽子’로 표기되어 있어, 양성자(陽性子, proton)를 의미한다. 이 시를 쓸 무렵 원자는 전자와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시가 발표되고 한 해 뒤인 1932년에는 중성자도 발견된다. 문제는 양성자와 중성자만으로 이루어진 원자핵이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는가였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들을 붙잡고 있는 힘을 가진 새로운 입자가 필요했고, 유카와 히데키는 이 입자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 ‘중간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실험으로 발견되어 노벨상을 받았다.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73)


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


1930년대 말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면서 일제가 과학 교육까지 제약하기 시작했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양자역학 연구를 이어가던 도상록은 1941년 만주국(滿洲國) ‘신징(新京)공업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도 록일랑(都 祿一郞, 미야코 로쿠이치로)’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러 편의 양자역학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84-5)


1937년 교토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種)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油菜)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1937년 4월 이태규 박사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종의 합성〉으로 스타가 된 우장춘 박사가 다키이 연구 농장 초대 농장장이 되어 교토로 갔다. 리승기까지 합류해 교토에서 세 사람이 모인 것도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88)


듀퐁의 나일론이 1938년부터 상업적으로 사용되자, 실크가 나일론으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세계 최대 실크 생산국이었던 일본은 다급해졌다.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미국이 원유 공급을 끊자 리승기 교수의 비날론 연구는 더욱 군사화되었다. 석유에서 합성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유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나일론이 들어온 것은 1953년 코오롱이 시작인데, 코오롱은 ‘코리아’와 ‘나일론’의 합성어다.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89-91)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춘원 이광수의 총애를 받았던 윤석중은 자신의 호를 한자 이름인 석중(石重)에서 딴 석동(石童), 즉 ‘돌아이’라고 지었다.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기도 한 그는 1969년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자, 어린이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앞으로〉라는 동요를 작사했다. 비록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로는 우주 개발이 먼 일이었지만,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우주에 대한 꿈을 키우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94-5)


초기 대종교는 무장 독립 세력이 집결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여기에 대종교인이던 김좌진, 홍범도 두 장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궤멸하자 이들은 다른 부분에서 활약한다. 바로 한글 운동이다. 이를 이끈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고, 그들은 ‘조선어학회’로 뭉쳤으며 한글 교육을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보았다.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 책은 한글 창제에서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인간의 발성 구조와 연관되는지, 초성-중성-종성이라는 논리적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한 귀한 자료다. 97)


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와세다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신격호는 1944년 공작기계의 필수품인 ‘절삭유(cutting oil)’ 공장을 차렸으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은 불타버린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절삭유 원료인 피마자기름으로 비누와 포마드 오일을 개발해 크게 성공한다. 이 돈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려 화학제품군을 확장했다. 이때 그의 눈길을 끈 제품이 있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져온 신기한 물건인 껌이었다. 그는 세계 최대의 껌 회사인 미국의 리글리(Wrigley)가 원래 비누 회사였다가 품목을 전환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리고 공정 개발에 착수한다.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출신들을 영입해 이 연구에 투입했다. 당시 여러 일본 회사가 껌 개발에 나섰지만, 화학공학 출신으로 각종 화학제품 생산 경험이 풍부한 신격호가 단연 선두에 섰다. 1948년, 껌이 성공하자 신격호는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 이름을 ‘롯데’로 바꾸었다. ‘롯데(Lotte)’는 신격호가 좋아하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샤를로테(Charlotte)에서 따왔다. 106)


최형섭(1920년생)과 신격호(1921년생)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1940년대 초, 문선명(1920년생)도 이곳에서 유학했다. 그의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당시 와세다대학 건축과에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의 아들 엄덕문(1919년생)도 있었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건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대극장과 인민문화궁전과 같은 대형 공연장에 놀란다. 박정희 정부는 급히 이에 필적할 공연장 건축에 나섰다. 나전칠기 집안에서 자란 엄덕문은 누구보다 전통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광화문 거리의 랜드마크가 이렇게 탄생했다. 2022년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 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엄덕문의 원래 아이디어였던 광장도 결국 실현되었다. 엄덕문은 문선명과 평생 친구였다. 해방 전 가시마 건설에서 같이 일했던 그는 한때 통일교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격호의 소공동 롯데 호텔과 백화점도 그의 작품이다. 106-7)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1946년, 삼팔선으로 남북이 갈리며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고,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세울지 곳곳에서 좌우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여운형은 어떻게든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에 나섰지만, 한쪽으로만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그는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던 황진남도 마찬가지였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작은 6월 초, 도상록 교수에 대한 전격적인 파면 조처였다. 당시 경성대학은 자치위원회로 돌아가고 있었고, 도상록은 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건준을 인정하지 않던 미 군정은 자치위원회 역시 인정하지 않았고, 도상록이 자치위원회를 통해 대학 자금을 사용한 것을 공금 횡령으로 몰아간 것이다.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식민 지배 스타일의 강압적인 지배 구조가 이어지자 학계가 반발한다. 파면된 도상록은 월북해서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김일성종합대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110)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은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국대안)’을 발표한다. 국대안의 요지는 경성대학과 경성의전,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 9개를 합쳐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이것이 서울대학교의 시작이다. 도상록의 해임을 둘러싼 논란이 가시기 전에 이루어진 이 조치로 9월, 이공학부 교수 38명이 집단 사표를 내고 대부분 월북했다. 고향이 평안도 선천인 최윤식은 9월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곧 남쪽으로 내려와 이들 세 교수의 빈자리를 맡는다. 10월 개교한 서울대학교에서 이태규는 문리대 학장이 되고, 리승기는 공대 학장으로 수습에 나섰다. 수학과 교수들이 월북해버린 상태에서 최윤식이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를 맡았고, 교토제국대학 3인방 중 한 명인 박철재가 물리학과 초대 주임교수로 합류한다. 110)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이념 대립으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여운형은 겨레를 통합시킬 유일한 방법이 스포츠라고 믿었다. 보스턴 마라톤 직후인 1947년 6월 15일 시작되는 IOC 총회에 여운형은 미시간대학 출신 전경무를 파견한다. 그런데 5월 29일 서울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후지산에 추락해 전경무가 사망했다. 여운형은 미국에 있던 이원순에게 급히 연락해 IOC 총회에 대신 참가시킨다. 전경무가 사망 당시 휴대했던 서류들이 이원순에게 보내졌다. 여운형은 필사적이었다.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 끝에 마침내 IOC는 6월 20일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KOC)를 승인하고, 여운형이 초대 KOC 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여운형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정식으로 정부를 구성하기도 전에 국제기구 가입부터 이뤄낸 것이다. 전국이 들썩이고 모두가 환호했다.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을 맞았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117-8)


1948년 올림픽에 손기정은 선수단장으로 기수를 맡았고, 역도 선수 김성집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나중에 손기정은 이렇게 회상했다. 1945년 봄, 건국동맹을 꾸리던 여운형은 손기정에게 당시 일본군 중좌인 채병덕과 비밀리에 접촉하도록 지시했다. 여운형은 채병덕에게 유사 시 건준에 무기를 공급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비록 채병덕은 친일 일본군 장교였지만, 윤치호와도 친분을 유지했던 여운형은 이처럼 유연한 사고와 광폭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인 1947년 7월 1일, 이승만 견제를 위해 미 군정이 초청한 서재필이 한국에 도착했다. 서재필의 두 번째 귀향이었다. 이미 83세의 노령이던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발탁했던 후배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서재필에게 당시의 남북 대결 구도는 자기 인생 전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분단은 막아보려던 그는 이승만 계열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고, 1948년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자 결국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119)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1950년 3월 8일, 우장춘이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일찍이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우장춘은 종전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여러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무려 5년간 무직으로 지내다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한국에서 귀국 추진 위원회는 일본에 남은 우장춘 가족의 생계를 위해 100만 엔을 보냈다.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 박사는 이 돈을 가족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 기구를 구입하는 데 다 써버렸다. 당황한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그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 지 석 달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사의 연구소가 있던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부산에서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난리가 벌어졌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홀린 듯이 종자 개발에만 집중했다. 124-5)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1938년, 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 안과에 가서 치료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을 향한 열정에 감동한 의사 공병우는 한글 기계화에 인생을 걸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 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 북한, 중국이었기에 협정문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로 작성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한글 타자기가 없었다. 때문에 UN군은 북한을 위해 한국군의 공병우 타자기로 한국어 정전협정문을 인쇄한 것이다. 131)


1954년 오랜 공을 들인 진도에서 드디어 채소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한국인의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무와 배추 등이었다.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계속된 연구가 결실을 보았다. 가장 큰 성과는 김장용 배추가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가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 더해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의 조상 ‘원예 1호’의 탄생이다. 우장춘은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로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종자를 꿈꾸고 있었다. 1959년 8월 7일,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132-3)


일본을 무너뜨린 원자력 기술은 신생 독립국인 한국의 과학계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분야였다. 이에 이태규, 리승기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3인방으로 불리던 박철재 박사가 새롭게 출범하는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그 뒤를 이어 최형섭의 아버지 최지환의 친구였던 김법린이 2대 소장이 되었다. 김법린의 추천으로 1962년 원자력 연구소장이 된 최형섭은 탁월한 연구 행정 능력을 보이며 과학계의 신망을 얻게 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최형섭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대통령을 설득하고, 정부를 움직이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명성 황후의 묘소가 있던 홍릉에 KIST를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어 과학 행정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과학재단(현 연구재단)을 만들고,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했다. 대한민국의 1960~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끈 과학 발전은 거의 모두 그의 리더십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공로로, 최형섭은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133)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1957년 군론(group theory) 연구를 시작한 이임학은 1960년 새로운 유한단순군(finite simple group)을 발견한다. 프랑스 수학자 갈루아(Évariste Galois)로부터 시작된 군론 연구는 20세기 현대 수학의 주요한 흐름이었다. 1950년대 새로운 단순군의 발견이 초미의 관심사였기에, 이임학이 발견한 ‘Ree군’은 세계 수학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임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쪽으로 데려왔으나, 함흥에 남겨진 친척 생각이 간절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Paul Erdös)가 편지 왕래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건네진 북한 친지들의 편지가 빌미가 되어 남쪽의 가족은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많은 후학이 이임학의 국적과 명예 회복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80년대 이임학이 함흥을 직접 방문하자, 국적회복은 더욱 요원해졌다.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행사로 한국에 왔지만, 국적회복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임학은 캐나다 시민으로 2005년 사망했다. 138-9)


에필로그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나는 ‘단절’의 레볼루션(revolution)보다 ‘연결’이라는 의미가 담긴 에볼루션(evolution)을 선호한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인간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만들어냈지만, 강한 자신감은 이념을 만들었고, 결국 끔찍한 제1·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아마 우리 근대 과학사 역시 정치적, 이념적 분열이 만들어낸 단절의 역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망각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비극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린,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록이다. 오염된 이념으로 과거를 재단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그 흔적 자체를,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걸러지지 않은 날것으로 과거를 살펴야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래는 기억하고 기록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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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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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해방 조선의 민낯


"해방 후 남한에서는 일본인 유곽 및 요정 업주들이 이른 시기에 돌아간 덕분에 조선인 업자들이 이권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만주 귀환자와 초기 월남민, 그리고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일본·동남아·태평양 등지의 귀환자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규모 공창과 요정을 거머쥔 조선인 업자들에게 영업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더없이 고마운 '먹잇감'이었다." "여기에 살길이 막막한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그리고 월남한 여성들이 이들 공창의 값싸고 풍부한 무한 공급원으로 부상하자 관련 업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해방 후에도 이렇게 고급 요정과 유곽이 전국적으로 늘어가자 여성계에서는 창기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무리한 몸값(전차금)을 말소하고 여성의 공공연한 인신매매를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5월 법령 제70호를 공포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을 나와도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었으므로 변형된 형태의 공창과 사창으로 다시 흡수되기 일쑤였다."(24-5)


"해외 귀환자들은 초기 정착 단계부터 적절한 구호가 이루어지지 않자 기존의 빈민 집단에 더하여 해방 공간의 새로운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이들은 모국 사회로부터 강한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대규모 재해가 발생하거나 역병이라도 돌면 이들은 영락없이 애꿎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가뜩이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해외 각지에서 도착한 귀환선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역병이 도는 바람에 총 1만 181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그 역병의 시발점이 단지 '귀환선'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전에 돌아온 사람들마저 '병균 덩어리' 취급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존 주민들은 이들이 해외나 타지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으로 여길 만큼 귀환선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따위에는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사람들이 해외에서 들어올수록 삶이 더욱 팍팍해져만 갔다는 부정적 경험만이 쌓여갈 뿐이었다."(32)


"1947년 7월 무장한 경찰대가 예고도 없이 마포구 대흥동의 제2 전재민 수용소로 들이닥쳤다. 규정 체류 기한을 넘긴 자들에게 퇴소를 명령했으나 귀환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수용소장이 급기야 경찰을 부른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자들과 이들을 끌어내려는 자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한 임산부가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러자 수용소의 귀환자들이 경찰들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6월 14일 제2수용소의 명도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바로 숭문상업학교의 이사장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자 조선일보 9대 사장을 지냈으나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는 친형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삼았다. 방재윤의 아들들이 바로 최근까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이처럼 숭문상업학교 교사 이전 과정에는 조선일보의 인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일보 입사 시험은 으레 이 학교에서 치르곤 했다."(41, 45)


"열악한 모국의 정착 환경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결실을 거둔 사례도 있었다. 귀환자와 월남민의 전재민 노점 시장으로 시작한 낙원시장의 성공 사례가 대표적이다. 탑골공원 뒤에 자리 잡은 이 시장 터는 과거 총독부가 방공용 소개지로 지정했기 때문에 해방 초기만 해도 상권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유입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곳이 전재민 시장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초기 월남민들이 모여들면서 번성하였다. 이곳의 노점상도 처음에는 하루 벌이로 연명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48년 상인 조합을 결성하였고, 1949년에는 조합원이 약 4,500명 규모로 증가하자 출자를 통해 인사동 고려청년회관에서 낙원시장주식회사 창립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주민들 사이에 〈해외 귀환자와 월남민은 하나같이 드세고, 억세다.〉라는 이미지가 각인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어떻게든 서울에 정착하려면 그토록 모질게 버텨내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52-3)


"1946년 12월 말 장충단 수용소에는 약 2,400명이 있었다. 그런데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에서 직원을 파견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약 1,700명이 영양실조와 동상을 안고 있었고, 겨울로 접어든 뒤로는 매일 평균 7~8명이 죽어 나갔다. 이런 사태를 이미 예견하고 있던 남한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는 시내에 산재한 13개 대형 '적산 요정'이라도 시급히 개방해 이들의 동사를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12월 23일까지 반드시 이들을 입주하게 하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개방을 연기했다." "전재 동포들은 구 일본인 소유 건물을 두세 채씩이나 차지해 졸부가 된 사람들로 인해 낮에는 미군이 버린 잔반을 뒤지며 구걸하고, 밤에는 한강 다리 아래에 움집을 파거나 거리를 전전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만성화되어 해방 후 약 3~4년 동안 겨울마다 되풀이된 귀환자와 월남민의 아사 및 동사 관련 보도는 시간, 장소, 인물만 바꿔도 또 다른 완벽한 기사가 될 정도였다."(54-6)


2장 해방 후에도 이어진 지독한 인연


"'전재민'들은 시기별로 각기 다른 남하 동기와 집단 구성을 보였다. 1945년 말까지는 과거 총독부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북선개척北鮮開拓'을 위해 동원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본디 남한 출신의 귀향민(Returnee)과 생활난으로 남하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46년에는 만주에서 유입된 사람은 줄어든 반면, 북한 통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반체제 집단의 유입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고학력의 지주, 대상인, 의사, 법률가, 교사, 종교인, 친일파, 구 식민 관료 출신자들이 많았고, 남하 후에는 나름의 공동생활체를 꾸리기도 했다." "북한은 1946년도만 해도 자발적인 집단 남하를 '사회 정화' 차원에서 반겼다. 그러나 1947년 7월부터 남북 및 미소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생활난'을 이유로 한 월남민 증가는 곧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반증하는 구실로 악용될 수도 있고,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인적자원이 누수된다는 판단에 따라 38도선을 굳게 잠그기 시작했다."(73-4)


"해방 후 귀향민·월남민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 본토와 만주 방면의 귀환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 가운데 만주 귀환자들은 해방 후 급격히 고조된 중국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현지에서 일군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거나 국공내전으로 불안해진 거류 환경 때문에 돌아온 사람이 많았다. 특히 1946년 가을 무렵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진출하면서 피해가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한정서와 이데올로기적 중상에 노출된 채 방치된 조선인에게 귀환은 곧 생환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한편 부산항 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루트는 주로 일본과 태평양 방면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식민지배 말기에 징용 등의 '강제 동원'으로 인해 해외에 단기간 거류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 직전부터 밀항을 시도할 만큼 모국 귀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불과 두세 달 사이에 대거 유입되었다."(74-7)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1945년 9월 초순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일본인들의 동향은 '뱅크런'과 '집단 패닉'이란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으로 달려가 예금부터 찾고 가재도구까지 급하게 팔아치운 뒤 모두들 먼저 돌아가겠다며 밀선을 섭외할 수 있는 부산항 일대로 몰려갔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경성일보인세화회회보』 창간호가 나왔다. 발간사는 〈우리들의 친구 조선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협력하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 사회가 조선인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긴장감'을 반영한다. 동시에 '공생'을 모토로 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에 세화회에서는 잔류 쪽에 무게를 두면서 영주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도 하였다. 수강 신청자가 몰려 대박을 터뜨린 'YMCA 조선어 강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113-4)


"1945년 10월에는 군정 당국의 일본인 공식 송환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잔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제는 '재산 처리'가 최대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이제는 한가하게 조선어를 공부하거나 아이들 교육 문제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미군의 간섭과 단속이 더 강화되기 전에 밀선이라도 구해서 조선에서 어렵게 일군 돈과 재산을 최대한 안전하게 반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 회보에 〈부모는 사유재산이나 저금통장보다도 아이들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라거나 〈일본 밀항을 중지하라〉 등의 기사가 등장했겠는가. 이것은 그만큼 일본인 집단 안에서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재산이라도 챙겨 가자〉라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세화회 소식지도 10월 중순부터는 일본인 사유재산 처리에 관한 내용들을 늘어갔다. 즉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경성의 일본인들은 비로소 조선을 '이국' 내지 '타자'로서 인식하게 된 것이다."(115-6)


"한편 남한에서는 총독부와 일본 군대 등 식민 기구가 관리하던 국공유 재산은 물론이고 개인과 법인의 민간인 재산을 '귀속재산(적산)'이라고 불렀다. 해방 후 그 처리를 둘러싸고 이것은 '조선'에서 '조선인'의 고혈을 짜낸 결과이니 해방 후 신국가 출범을 앞두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공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재산을 임차하거나 구매하기를 원하는 개인이나 법인에게 불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양분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한일 양 지역의 미군 점령 통치 아래서 발생한 만큼 남한의 주한 미군정과 일본의 연합국총사령부가 일찍이 정리했어야만 할 문제였다. 하지만 점령군은 이 문제를 단독으로 처리할 권한이 없었고, 최종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 한일 양국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발을 뺐다. 그 결과 이것이 불씨가 되어 해방 후 양국이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각기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주장함으로써 한일조약 체결이 지연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117)


3장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 적산가옥과 고급 요정


"송환을 앞둔 일본인들이 생산 시설을 파괴하고 원료나 재고품 등의 물자를 빼돌리거나 폐기한 배경에는 우선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개한 '자주관리운동'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아울러 이러한 행위는 조선에 자본과 기술을 투자한 일본인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패전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해 그나마 영업 손실을 줄여보고자 한 '자본 철수' 및 '물품 회수'라는 측면이 공존했다." "이처럼 현금 확보를 위한 자산 처분과 물품의 방매는 기계 등 생산 시설의 파괴와 원료 및 제품의 망실로 이어졌으므로, 해방 후 적산 기업(귀속 기업)은 만성적인 자금난과 원료난에 직면했다." "당시 남한 사회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건국 방해 행위로 받아들였다. 왜냐면 이러한 생산시설 등은 해방 후 신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산(귀속재산)으로 엄격히 관리해 반드시 공익적 차원에서 재활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자산인데, 이렇게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재산 밀반출을 위해 의도적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다."(129-31)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는 단지 일본인 송환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을까. 결코 아니다.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일본인은 당국의 허가 없이는 자신이 등록된 정회町會로부터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그저 말로만 그칠 뿐 이를 어겨도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131-3)


"이때를 틈타 송환 국면에서 돌아가는 일본인과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명의를 도용해 건물의 소유권이나 점유권(사용권)을 독차지한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개 구 일본인 부동산의 매매를 비롯해 식량 등 생필품의 사재기, 반출입 금지 품목의 밀수 등을 통해서 갑자기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도량하게 된 주된 원인은 미군정의 일본인 사유재산 매매 허가와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었던 허술한 관재 행정에 있었다. 미군정이 비록 법령 제33호를 통해 뒤늦게나마 기존의 매매 거래를 무효화했다고는 하지만, 두세 달 사이에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부정 거래를 적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미군정 관재 당국은 뒤늦게나마 구 일본인 부동산을 조사해 각 물건별로 임대차계약 체결을 통한 공정 관리를 표방했으나 해당 물건의 수효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그 상자는 열어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한 조선학술원 백남운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생각보다 너무 컸다."(139-40)


"1946년 11월 20일, 서울 돈의동 명월관에서 김린이金麟伊라는 자칭 사업가가 최선이라는 기생 등 4~5명을 거느린 가운데 20여 명의 '신사 숙녀'와 함께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다가, 취기가 오르자 모종의 경로로 들여온 포르노를 틀어놓고 향락의 끝을 맛보았다는, 일명 명월관의 도색영화 상영 사건이 터졌다." "4~5명이 모여 고급 요정에서 즐기면 대략 6~7천 원이 들었는데, 명월관에서는 20여 명이나 어울렀으니 김린이에게 부과된 벌금 5천 원은 한차례 술값보다도 훨씬 적은 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급 요정은 군정 관료, 해방의 혼란을 틈타 돈을 번 신흥 자산가, 그리고 정치 브로커 등 건국을 방해하는 '매국노들의 소굴'로서 깊이 각인되었다. 이것은 근대 이래 에로(エロ, erotic), 구로(グロ, grotesque), 넌센스(ナンセンス, nonsense)가 고급 요정과 포르노를 매개로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현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어찌 이보다 더 '선정적이고, 기괴하며, 지각없는 처사'가 있겠는가."(145, 151-2)


"당시 사건을 취재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문제안의 회고는 결국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들이 미군에게 향응을 제공하고자 돈 많은 사장이나 장사치에게 '물주' 노릇을 시켰다는 이야기이다. 미군을 접대한 대가는 어떤 중요한 정보나 이권이었을 터이니, 그 떡고물을 조선인 관료와 물주 노릇을 한 자들이 적당히 나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부동산 등의 자산을 법망의 빈틈을 이용해 손에 넣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광역에 걸친 밀수와 암거래를 통해 번 돈으로, 이들은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와 미군을 상대로 고급 요정에서 '물주' 노릇을 해가며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내밀한 정보를 캐고자 했다. 또 만일에 발각될 경우에 대비해 경찰 및 사법계 요로에 후원금을 상납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방식으로 후사를 도모했다. 요정은 이렇게도 도색영화와 주지육림, 그리고 명기들의 춤사위를 맛보며 이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고마운 공간이었으니, 어찌 추레한 전재민에게 내줄 수 있었겠는가."(162, 167)


4장 해방 조선에서 출세를 하려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방과 건국이란 시공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한의 '양극화'가 사회 전면으로 파급된 시기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조적인 사회현상이 부유층 자제의 '유괴'와 극빈 가정 유아의 '밀장密葬'이다. 즉 부잣집 아이는 부모의 금품을 노리는 유괴범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는 병들거나 굶어 죽어도 부모가 장사 치를 돈조차 없어 매장은 고사하고 허름한 거적 등으로 말아 인적이 뜸한 외진 곳에 버려지는 일이 적잖았다. 이것은 일견 정반대의 상황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결국 '고르지 못한' 공동체 안에서는 그 구성원이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결코 편안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매우 거칠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1949년 11월 종로 2가 동양루 사장 아들의 유괴 및 살해는 어린이 유괴 사건의 서막을 알렸다. 이 교동국민학교 유괴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차에 1950년 1월 24일에 다시 청파동 여야 유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190-2)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건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병원으로 달려온 피해 어린이의 큰아버지, 즉 김형민 전 서울시장이었다. 피해 어린이가 전 서울시장의 조카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뒤이어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대목은 바로 김형민이 조카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데려다준 그 '집의 위치'이다. 왜냐면 당시 피해 어린이가 살고 있던 '청파동1가 58번지' 일대는 김형민의 시장 재임기는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도 끊임없이 재기된 이른바 '대규모 적산 가옥 스캔들'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유괴 사건 직전해에 불거진 1949년 당시 '적산 가옥 부정 처리'사건은 언론이 주목한 초대형 사건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뒤로 관련 소식이 끊겼다. 그것은 이 사건의 사후 처리와 관련해 매우 '강력한 윗선'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내용이 현재 제헌의회 국회 속기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194-6)


"1949년 12월 제헌의회 법사위원회에서는 건국 후 국가기관의 주요 조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법무부에서 제출한 '검찰청법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제5회 57차 회의의 핵심 의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일원화)', 그리고 검찰 산하 중앙수사국의 설치 및 '사법경찰관(현 검찰조사관)'의 감독권 행사 문제였다. 국회 법사위원장 백관수의 주재로 열린 법안 검독회(검토회)에서 법무부장관 권승렬은 〈현재 검찰(검사)은 187명에 불과하지만 경찰은 무려 5만 명이나 된다. 현재는 내무부 산하의 경찰총장이 사실상 수사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검사들이 중앙수사국 사법경찰관을 통해 수사 과정 일체를 지휘하고 기소까지 완결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장관은 그 근거로 1948년 7월의 서울시장 김형민에 대한 경찰의 허술한 '수사 기록'을 제시했다."(196-7)


"당시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미군 통역관' 시절에 적산 가옥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이 막대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장사' 덕분이었다." "당시 석유(가솔린)는 연합국총사령부가 관할하는 모든 지역에서 매우 엄격하게 통제받는 일등 관리 품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형민이 단순히 배급망의 말단 기구나 대리점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이 품목의 배급과 유통을 총괄하는 '지배인(manager)'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자리를 얻기까지는 미군정 관재 담당 관리와 상당한 교감이 오갔을 것이다. 즉 이것은 통역관으로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권이었던 셈이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후암동의 서울시장 공관으로 이사하면서, 해방 후 함께 석유 사업을 하다가 상공부에 공직자로 들어간 동생들('친척들')에게 청파동의 구 일본인 가옥 10채를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선우종원 당시 검사가 집중적으로 캐고자 한 혐의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208-12)


"일본인들은 용산 지역을 사대문 안과 달리 순전히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개발한 지역이라고 인식했다. 철도 부지 및 군용지 수용 과정을 보면 일단 사유지의 경우 논밭과 대지, 가옥, 분묘 등을 합해 '89만 7,534원'을 보상가로 추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평당 채 2전이 되지 않는 돈만 지불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 보상비의 1/60에 불과했다. 조선인들은 당연히 강력히 반발했지만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갈월동, 남영동, 후암동 일대의 조선인 주민을 용산중고등학교 뒤편의 산기슭 너머, 즉 108계단 위 해방촌, 보광동, 이태원 쪽으로 밀어냈다." "결국 김형민이 사들인 청파동의 10채나 되는 가옥은 해방촌과 이태원 쪽으로 밀려난 조선인 원주인 땅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해방 후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재산이 미군정이 잠시 자유 매매 거래를 허가한 그 짧은 사이에 돈 있고 발 빠른 사람들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225, 228)


5장 비정하기만 했던 나의 조국, 조선


"해방 공간의 상층부는 미군정 관재 행정 중앙부처(재무부/상공국)─대행기구(각 시도 귀속재산관리처 혹은 조흥은행 등)─정계·경찰·사법─자본가(기성사업가·신흥투자가·밀수업자·유통업자·알선업자 등)로 이어지는 정·관·재계의 다층적인 카르텔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해방 공간의 다양한 카르텔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때 비로소 공동정범共同正犯의 큰 그림이 밝혀지곤 했다. 그 내막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대략 1947년도부터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때였다. 막대한 '눈먼 돈'을 굴릴 수 있는 자리, 즉 이제 곧 수립될 새 정부의 최고위 관직이나 '알짜배기'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이 과열되거나, 분배 결과에 누군가 불만을 품었거나, 비밀 엄수의 묵계를 깨뜨린 배신자가 나올 때 비로소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귀속재산 처리를 둘러싼 뇌물 수수 사건 보도가 매일 같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으레 '의혹'이 제기되면 곧 '기정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243-6)


"고급 요정이나 유곽 외에도 빌딩과 같은 덩치 큰 귀속재산의 경우는 미군정기에 시작된 잡음이 심지어는 박정희 정권기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3년에 삼성 계열의 신세계가 인수한 남대문의 동화백화점(구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현재 신세계백화점)이다. 해방 후 이 건물의 초대 사장(정식 불하 이전의 관리인, 영업권자)은 김계조였다. 그는 총독부 고위 관료와 친일 정부 수립을 모의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공작의 일환으로 국제문화사 댄스홀을 설치했다는 의혹을 산 '김계조 사건'의 장본인(배구자의 남편)이었다. 그가 이 사건으로 수감이 되자 '관리인'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래서 차기 사장(관리인)으로 이두철이란 자가 나타난 윤상균, 지희철과 함께 이곳을 공동 인수했다가, 1948년 1월 두 사람을 밀어내고 사업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백화점에 입주한 업주들의 가게 보증금을 일방적으로 올려 원성을 샀고, 종업원 월급을 상습적으로 체불해 종업원 노조의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247)


"그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도와준 고마운 인물이 '친일 고문 경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다. 그래서 노덕술이 정부 수립 후 1948년 말부터 반민특위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은신하는 과정에서 이두철은 그를 자택에 숨겨주기도 했다. 노덕술이 효창동, 번지수로는 '청파 2가'에 있는 이두철 집 안방의 병풍 뒤에서 체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 또한 1930년대 중후반 청파동과 갈월동 일대의 문화주택단지 분양이 붐을 이룬 시기에 들어선, 도로변의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이었다. 앞서 4장에서 등장한 김형민 시장이 미군정 통역관 시절에 사들인 10채의 집들과도 지척에 있었다. 이처럼 구 친일 자본가(박흥식)와 구 친일 고문경찰((노덕술), 미군 통역관 출신의 관료(김형민), 그리고 신흥 투기꾼(이두철) 등의 카르텔은 구 일본인 재산을 매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해방 공간의 고난도 퍼즐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인 셈이다."(247-8)


"1945~1946년 동절기를 지나면서 해방 직후 반짝했던 사회적 환영 분위기가 사라지고, 귀환자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방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그 결과 1946년 초봄의 해빙기를 기점으로 귀환자들의 만주 재이주, 일본 재밀항에 관한 보도가 늘어갔고, 기사의 제목도 점차 자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만큼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건만 열악한 정착 환경과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오만정'을 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동북 삼성의 만주 당국은 해방 후 조선인들이 전란이나 박해를 피해 빠져나간 뒤에 텅 빈 한촌이 되어버린 농지를 다시 일궈야만 했기 때문에 이들의 재유입을 환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한의 물가고와 이기지 못해 일본 밀항을 시도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보도한 단발 기사는 흔하다. 그러나 「빙설氷雪 같은 동포애」라는 기사는 남한 사회의 미흡한 구호와 사회적 냉대가 이들을 현해탄으로 내몰고 있다며 경제 외적인 요인을 적시했다. 즉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까지도 다친 것이다."(269-73)


"일본과 남한은 각기 연합국총사령부와 미군정의 점령 체제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정부와 의회가 있었고 간접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귀환 문제와 관련해 일본 측의 입장을 맥아더사령관에게 전달하거나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아직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고 과도입법의원은 구호 정책도 입안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연합국총사령부의 하위 기관이었으므로 남한 현실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독립적으로 취할 수도 없었다. 즉 해외 귀환자나 월남민은 250만 명이나 되었지만 남한은 이들을 구호할 법적인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한 무정부 사회(혹은 이중 권력 국가체)였다." "이후에도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의회에 진출하여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283-5)


에필로그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9만 3,349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에 올랐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해방 후 재일동포는 취직은 물론이고 자녀 교육, 영세자영업자에 대한 특별금융 지원, 공공주택 입주에 이르기까지 민족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울러 조선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불법으로 규정해 해방 후에도 노골적인 '동화와 배제'를 강요했다. 건강, 그리고 '꿈'을 잃게 되면 우리네 삶도 맥이 빠지는 법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던 이들이 북송선에 올랐다. 바로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 한국전쟁으로 인구가 줄어 전후 복구 인력이 필요했던 북한이었다. 특히 남한으로 유출된 '(월남민)인재'가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한반도 밖에 있는 '동포 사회'에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대략 1950년대 중반부터 북한 당국은 일본의 '민족학교'나 '명문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김일성(조총련) 장학금'까지 지원하며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환상을 퍼뜨렸다."(290-2)


"일본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엣가시'같은 재일동포를(1959년 당시 60만 7,533명 규모) 남한이든 북한이든 자발적으로 데려가 준다면 그야말로 감사할 일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점령 통치 아래서 연합국총사령부의 송환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조선 등 식민지에 있던 일본인은 패전 국민이라며 징벌적 차원에서 '일괄 송환'했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거주지 선택권'을 허용한 것이 내내 마뜩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동포는 식민 통치와 관련해 '과거사'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치부를 드러냈고, 정치적으로도 일본공산당이나 사회당과 함께 반정부 운동에 앞장섰다. 게다가 복지 재정도 갉아먹었다. 1955년 현재 재일동포의 생활보호 비율은 일본 평균의 10배였다. 물론 이들의 가난은 과거 식민 통치 이래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복지 재정이나 갉아먹는 '기생충' 취급을 하며 어떻게든 추방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292)


"한편 이승만 정권은 절대다수가 남한 출신인 이들 재일동포가 차별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과 생활권마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60만 동포'를 오로지 '반공'이란 잣대로 모두 '빨갱이'로 몰아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심지어 남한, 북한, 일본의 '동상이몽' 속에서 국제적십자사는 이것을 '거주지 선택권'을 존중한 '귀국'이라며 교묘히 '인도주의'로 포장하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결국 북송은 해방 이전 한일 간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배태된 제국 내 지역 간 이민족의 이주민 문제가, 해방 후 귀환 국면에서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동포를 추방하려던 일본 정부의 배제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전쟁 후 재일동포를 단지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이념 및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전취해야 할 수단〉으로만 인식한 남한과 북한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재외동포관이 맞물려 빚어진 '인재'이자 '참사'가 곧 북송이었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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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테크노퓨달리즘 - 클라우드와 알고리즘을 앞세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탄생
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노정태 옮김, 이주희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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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자본주의의 매개체인 ‘시장market’은 디지털 거래 플랫폼으로 대체되었다. 디지털 거래 플랫폼은 마치 시장처럼 보이지만 차라리 (봉건시대의) 영지fiefdom라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자본주의의 엔진인 이윤은 봉건시대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을 지대rent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특히 플랫폼과 클라우드에 더욱 폭넓게 접속하려면 내야 하는 어떤 유형의 지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클라우드 지대cloud rent’라 부른다. 그 결과 전통적인 자본의 소유자들은 오늘날 진정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의 임금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뽑아내지만 예전과 달리 지배자가 아니다. 전통적인 자본가는 클라우드 자본을 소유한 ‘신흥 봉건 영주owners of cloud capital’라는 새로운 계급의 가신이 되었다. 그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대부분은 새로운 지배 계급의 권력과 부에 무임금 노동으로 봉사하며, 기회가 주어질 때 간간이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이전 계급인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13)


1장. 헤시오도스의 탄식


모든 혁명적 기술이 그렇듯 철은 역사의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어떤 방향인가?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철은 우리의 쟁기뿐 아니라 영혼까지 단단하게 만들었다. 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은 망치에 맞으며 불에 달궈졌다. 우리는 새로운 욕망을 품고 대장간의 물통에 들어가는 쇳조각처럼 새된 소리를 낸다. 부와 재산이 늘어가는 만큼 미덕은 시험대에 오르고 가치는 파괴된다. 제우스는 언젠가 기술로 인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류를 신의 손으로 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헤시오도스에게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인류가 기술의 노예가 되고, 기술을 동원해 서로를 옥죄는 대신, 기술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훔쳐낸 작열하는 불꽃은 기술의 힘을 의미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우리가 세상을 불태우지 않고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불을 훔쳤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19-20)


아버지는 두 분야에 대한 헌신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용광로, 야금술, 기술 전반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해서도 헌신적이었다. 나는 《공산당 선언》의 그 유명한 첫 줄을 읽으면서,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결코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신분적인 것, 모든 정체적(停滯的)인 것은 증발되고, 모든 신성한 것은 모독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는 기술 옹호론과 기술 공포론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빛이 두 개의 모순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듯이 자연의 모든 것에는 서로 대립하는 양면이 깃들어 있다. 강화된 철과 증기기관, 서로 연결된 컴퓨터 역시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있고 노예로 만들 수도 있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지배적인 힘이 될지를 결정할 힘은 우리,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손에 있다. 그러니 정치가 중요한 것이다. 21-2)


2장. 자본주의의 몰락


1960년대 미국 광고업계를 다룬 미국 드라마 <매드맨Mad Men>을 보는 시청자들은 드레이퍼가 저러고 사는데 왜 회사가 월급을 주고 있는지 의구심에 사로잡힙니다. 드레이퍼는 엄청난 양의 버번 위스키를 마셔대고, 끝없이 쉬고 쉬고 또 쉬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수평으로 누워 보내다가, 암호같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나 하기 일쑤인 사람이죠. 하지만 저러다가 자기 인생 자기가 망치겠다, 내지는 곧 잘리겠구나 싶을 때, 드레이퍼는 흔해 빠진 초콜릿, 뻔한 철강 제품, 2류 레스토랑 체인점처럼 그 수많은 것들을 다시 상상해서 마법처럼 활기를 불어넣어요. 갑자기 제품들은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드레이퍼가 보여주는 이러한 두 가지 면모를 보고 있으면 전후 자본주의가 어떻게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상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어요. 반짝거리는 새로운 산업적 기반 위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주의attention’를 사고파는 시장을 찾아낸 거죠. 34-5)


전쟁은 비즈니스와 정부를 깊숙한 곳에서부터 뒤엉켜놓았어요. 그런데 물자와 기술을 무한정으로 요구하던 전쟁이 끝나버린 지금, 거대 복합 기업conglomerate의 성장을 지속하는 일도 어려운 주제가 되었어요. 갤브레이스는 이 복합체를 일컬어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라 불렀습니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본인들의 일자리를 지키고 뭔가 일하는 것처럼 바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어요. 즉, 전쟁이 끝났는데도 거대 기업 체제가 축소되는 것을 막는 것을 넘어 그 크기를 키우고자 했다는 거죠. 여기서 돈 드레이퍼가 등장하는 거예요. 돈 드레이퍼의 특기가 뭐였는지 기억하세요? 테크노스트럭처가 우리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 우리의 주의와 관심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지닌 무한대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죠. 물건을 만들어내는 제조력이라면 이미 완전히 테크노스트럭처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드레이퍼의 도움을 받아 그 제품들을 필요하다고 느끼는 욕망을 찾아낼 수 있었죠. 38-9)


테크노스트럭처는 대중의 욕망과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지만 사실 그건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비재를 아무리 구입한다 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죠. 우리의 소망이 충족되지 않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꿈, 우리의 좌절된 욕망 등이 다른 이에 의해 대량생산된 것임을 깨닫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잖아요. 우리의 대량생산된 갈망이 충족될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더욱 줄어듭니다. 테크노스트럭처가 우리의 정념을 휘저어놓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갈수록,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상품이 주어질 때 느끼는 공허함은 커지죠. 젊은 반항아들은 그들의 욕망을 비롯해 모든 것을 계획하는 테크노스트럭처의 대담함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불만은 그들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니었어요. 1950년대와 60년대는 자본주의가 자발적인 질서의 자연적 체계라고 믿는 자본주의의 독실한 신자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어느 곳에 눈을 두건 세상 모든 곳이 중앙의 계획으로 돌아가고 있었죠. 49)


한마디로 서구는 닉슨 쇼크와 같은 파국을 맞이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자본주의적인 젊은이들과 자유시장의 광신도들이 모두 죽어가는 구체제를 끌어내리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결국 글로벌 플랜을 허물어뜨린 건 히피 좌파도 자유지상주의 우파도 아니었어요. 테크노스트럭처의 뜻에 따라 잘 움직여온 요소들의 작동이 글로벌 플랜을 망가뜨렸습니다.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서 있던 자리에, 볼커 같은 이들은 열과 성을 다해,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적자, 부채, 도박에 토대를 둔 가장 불안정한 체제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들의 손에 의해 브레턴우즈 체제는 질서정연하게 해체되었고 곧 새로운 국제 체제가 완성됐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제화나 금융화라고 하는 그것 말이에요. 저는 그것을 ‘자본주의의 글로벌 미노타우로스 단계’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어쩌면 그런 작명은 모든 것을 그리스 고전과 빗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50)


3장. 클라우드 자본


돈 드레이퍼는 우리가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실 원치도 않는 걸 우리에게 팔고자 애써온 사람입니다. 돈은 기성품처럼 찍어낸 욕망을 우리 안에 심어놓을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건 일방통행에 지나지 않았어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혹은 시내와 고속도로에 세워진 커다란 간판을 통해서, 돈은 우리의 무의식에 갈망을 이식했을 겁니다. 그냥 그런 거였죠. 하지만 돈의 집에 알렉사가 설치된다면 그건 늘 양방향으로 작동할 거예요. 알렉사의 부드러운 목소리 뒤로 우리의 영혼과 클라우드 시스템 사이에 정보가 끊임없이 오가죠.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자면, 알렉사는 우리를 가장 변증법적인 무한 운동으로 포획하는 셈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알렉사를 들여놓은 우리는 그 물건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훈련시키죠. 그렇게 시작하지만 머잖아 AI 어시스턴트는 우리가 가늠할 수도 규제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되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게 될 겁니다. 61-2)


일단 우리가 알렉사의 알고리즘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버릇과 욕망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고 나면, 알렉사는 우리를 훈련시키기 시작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일단 우리의 변덕에 맞춰 좀 더 섬세하게 선별되어 사용자의 취향에 맞는 비디오, 글, 음악 같은 걸 제공하면서, 조금씩 옆구리를 찔러 나가는 거죠. 일단 그런 식으로 우리를 길들이고 나면, 우리는 AI의 인도에 점점 더 순응하게 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알렉사는 우리가 AI를 더 잘 훈련시키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죠. 그 다음 단계는 더욱 무섭습니다. 우리의 취향에 맞출 수 있는 능력을 뽐내고 나면, AI는 우리를 이끄는 차원으로 나가거든요. 우리의 변덕과 입맛에 맞춰 섬세하게 조율된 이미지, 텍스트, 비디오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머잖아 AI는 우리가 AI를 훈련시키게 할 거고, 우리는 AI를 훈련시키고, 그렇게 훈련하고 훈련되는 무한반복이 벌어질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알고리즘으로 짜여진, 클라우드에 기반한, 명령하는 자본의 본질입니다. 62)


클라우드 자본이 전례 없이 강력한 명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건 클라우드 자본의 특수한 본질을 파악하는 핵심 요소가 되지 못해요. 클라우드 자본의 특수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그리고 명령의 힘을 부리는 방식에서 나옵니다. 지금까지 자본의 재생산은 어떤 노동시장을 통해 이루어져 왔죠. 물론 공장, 사무실, 창고 등등도 있었지만요. 팔았을 때 이윤을 낳는 물건을 만드는 건 임금노동자들이었어요. 노동자들은 기계의 도움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고, 임금을 받으며 남는 이윤으로는 더 많은 기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자본이 축적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이었어요. 반면 클라우드 자본은 임금노동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거의 모든 인류에게 클라우드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라고 명령할 수 있거든요. 그것도 공짜로 말이에요! 우리는 노동자들이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클라우드 농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71-2)


“아마존 닷컴에 접속하는 순간 자본주의와는 작별하는 겁니다. 거기서 수많은 구매와 판매가 이루어지지만, 여러분이 접속해 있는 그곳은 시장이라고 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이곳은 마을 시장이 아니에요. 극도로 자본주의적인 디지털 시장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요. 제아무리 추잡한 시장이라 해도 그곳은 사람들이 만나고 상호 교류를 하면서,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아마존은 심지어 독점 시장보다 더 나쁜 형태라 할 수 있어요. 독점 시장에서도 구매자들은 서로 이야기할 수 있고, 집단을 결성할 수 있으며, 어쩌면 독점자에게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높이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소비자 운동을 조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프의 영토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곳을 다스리는 규칙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불편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그 원리원칙이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들은 제프가 기준을 정하고 그의 선택에 따라 조절하는 알고리즘에 따라야만 합니다. 76-7)


4장. 클라우드 영주의 등장과 이윤의 종언


중앙은행의 돈 찍어내기 노다지는 서구의 은행들이 융단폭격을 당한 직후인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인들과 중앙은행들은 당시 은행이 부도나서 사람들의 예금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죠. 2009년 4월 G7의 중앙은행장들은 각국 대통령과 총리를 대동한 채 런던에서 정상급 회동을 가졌고, 은행을 물에 다시 띄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했죠. 상식적인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몰상식한 결정도 있었어요. 부도 위기인 은행을 구하면서 은행을 그 지경으로 몰아가는데 책임을 져야 할, 범죄자라 해도 무방한 은행가들까지 구제해준 것입니다. 더 나쁜 건 은행가들을 위한 이런 사회주의적 조치가 시행되는 가운데, 노동자와 중산층에게는 가혹한 긴축 조치가 가해졌다는 거였어요. 이런 이중 잣대는 한 세대 내내 지속될 정치 불신을 낳을 수밖에 없거니와, 경제 그 자체만 놓고 봐도 치명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한 사회의 전체 소득이 낮아지는 추세를 부추기게 되죠. 86)


2008년 금융위기와 뒤따른 긴축정책은 마치 권투의 원투펀치처럼 투자를 쓰러뜨렸어요. 그러니 금융가들에게 갓 찍어낸 돈을 안겨준들 투자가 살아날 리 만무했죠. 긴축정책으로 고객들의 소득이 증발해버린 시점에 자본가가 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고요. 은행이 우리에게 마음껏 쓰라고 공짜로, 그러니까 금리 없이 돈을 빌려줬다는 가정을 하는 거죠. 당연히 그 공짜 돈을 받아들었지만 생산 라인을 늘리는 데 그 돈을 쓰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결론에 금세 도달하고 맙니다. 그럼 이 공짜 현금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어요? 부동산이나 예술품을 구입하거나, 그보다 좀 더 좋은 게 바로 자신의 기업 주식을 매수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내 회사의 주가가 올라가서 기분 좋을 뿐더러, 특히 그 회사의 CEO라면 본인의 입지도 튼튼해지고 주가와 연동된 보너스도 올라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말해 새로운 투자 없이 그저 이미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손에 더 많은 권력이 쥐어졌을 뿐입니다.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86-7)


이윤은 여전히 모든 자본가들이 꿈꾸는 야망의 목표였고, 모든 중간 공급자가 노리는 바였으며, 보다 안락한 삶을 떨치고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끌어내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 파이를 키우는 힘, 축적을 통해 부 자체를 늘려주는 자본 축적의 원동력은 이윤과 갈라서고 말았죠. 제프 베이조스나 일론 머스크처럼 대담무쌍하며 재능 넘치는 기업가들이 엄청나게 비싸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클라우드 자본을 쌓아올린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죠. 게다가 기존 사업가들은 사업을 확장하고자 할 때 은행에서 돈을 빌려오거나, 사업의 지분 중 상당량을 남에게 팔거나, 새로운 자본을 끌어들이기에 마땅할 정도로 큰 이윤을 창출해야 했어요. 하지만 클라우드 영주들은 이런 요소에 구애받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2010년에서 2021년 사이, 제프 베이조스와 일론 머스크 두 사람의 서류상 자산, 즉 그들이 지닌 주식 가격의 총합은 100억 달러 이하에서 2백조 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었던 거죠. 92)


저는 자본주의를 진지하게 위협하는 요소는 조직화된 노동의 힘뿐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시대에 벌어진 역사적 전환을 완전히 간과했어요. 인터넷 공유지의 사유화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중앙은행을 통해 쏟아져 나온 공적자금과 맞물려 새로우면서도 엄청난 힘을 가진 유형의 자본을 낳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놓친 거죠. 이 모든 역사적 변환은 그 누구도 기획한 바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요. 클라우드 영주가 되는 미래를 상상했던 자본가는 없었습니다. 중앙은행 역시 클라우드 영주들의 자금줄 노릇을 하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었죠. 클라우드 자본이 민주주의에 끼칠 수 있는 해악을 바라보았던 정치인도 없었고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왕부터 사제, 심지어 농민들까지 그 누구의 뜻과도 상관없이 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클라우드 영주들의 등장은 대다수의 시야 밖에서, 등 뒤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역사적 주체들마저 놓칠 수밖에 없었죠. 97-8)


5장. 테크노퓨달리즘의 본질


아이팟ipod은 단지 훌륭한 휴대전화가 아니에요. 애플이 새로운 보물창고, 클라우드 지대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적인 발상을 했어요. ‘서드파티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애플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애플 스토어를 통해 판매할 수 있게 한다는 급진적 아이디어를 실현한 것이죠. 이렇게 애플은 무임금 노동자, 가신 자본가의 집단을 창출해냈습니다. 아이폰은 다른 어떤 스마트도 제공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즐거움과 기능을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자유이용권이 되었죠. 서드파티 개발자들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했고, 애플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하지만 애플 스토어에 등록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죠. 오히려 애플에 돈을 내야 했습니다. 비용이 얼마냐고요? 전체 매출의 30%를 애플에, 말하자면 ‘바닥세’로 내야 하는 거였죠. 이렇게 최초의 클라우드 장원인 애플 스토어app store가 탄생했고, 그 비옥한 토지 위에 가신 자본가 계급이 성장했습니다. 107)


충분히 많은 서드파티 개발자를 확보하여 그들이 앱을 만들도록 하는 일, 그 과업에 성공한 거대 기업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구글이었죠. 이미 클라우드 자본에서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구글은 애플과는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아이폰과 경쟁할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대신 운영체계인 안드로이드를 만들었고, 소니, 블랙베리, 노키아 등 경쟁사조차 원한다면 무료로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허락했어요. 서드파티 개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개발자들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겠어요? 그 결과 세계 스마트폰 업계는 두 클라우드 영주 기업, 애플과 구글의 독점 체제가 되고 말았어요. 그들이 벌어들이는 부의 큰 부분은 서드파티 개발자들의 무임금 노동에서 나왔습니다. 개발자들은 앱이 팔리는 만큼 정해진 몫을 떼어 바쳐야 했죠. 애플과 구글이 이렇게 버는 돈은 이윤이 아닙니다. 지상의 농지에서 영주가 얻는 지대의 디지털 버전일 뿐인, 클라우드 지대죠. 107-8)


클라우드 영주들은 우리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관심을 더 가져가는 게 진짜 목적이거든요. 이렇게 우리의 주의를 붙잡아놓고, 그 힘을 지렛대로 삼아서 그들은 가신 자본가들에게 클라우드 지대를 받죠. 그뿐 아니라 클라우드 영주들은 더 저렴한, 보다 나은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시장의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죠. 틱톡이 다른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서 사용자와 그들의 관심을 훔쳐갈 수 있었던 건 틱톡이 낮은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서가 아니었어요. 틱톡이 질적으로 더 우수한 ‘친구’나 끈끈한 관계망을 제공한 덕분은 더욱 아니었고요. 틱톡은 전혀 다른 온라인 경험을 제공하여 클라우드 농노들이 이주한 거죠. 디즈니플러스는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영화나 드라마를 더 낮은 가격에, 더 좋은 화질로 제공하는 사이트가 아니잖아요. 단지 넷플릭스에 없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죠. 우리는 장원간의 경쟁을 시장 경제의 경쟁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111-2)


지대에 대한 이윤의 반란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그 거대한 전환을 예언하는 현상이었죠. 사회 경제 체제의 변화를 주는 원동력이 지대에서 이윤으로 변화한 것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시장 봉건주의 같은 용어 대신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대가 아닌 이윤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 경제 체제로 접어들었잖아요. 그 근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묘사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되죠. 오늘날의 전환을 하이퍼 자본주의나 지대 과잉 자본주의 같은 식으로 본다면 그건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일일 겁니다.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 핵심 원리를 놓치는 거죠. 지대가 사회 변화의 핵심 동력의 자리를 되찾았다는 점에서, 저는 테크노퓨달리즘보다 더 나은 이름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어요. 제대로 정의를 내리고 이름을 붙인 덕분에 우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체제 전환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112)


6장. 테크노퓨달리즘의 전 지구적 여파: 새로운 냉전


함부르크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위르겐은 광저우에 사는 시우가 제공하는 원자재를 이용해 선박용 프로펠러를 만들어요. 그 프로펠러는 상하이 인근에서 조선소를 운영하는 아이에게 판매되죠. 시우에게 원자재값을 송금하기 위해 위르겐은 본인이 거래하는 독일 은행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요. 서류에 필요한 항목을 기입하고 엔터를 누르죠. 위르겐이 거래하는 독일 은행은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에 거래된 숫자를 보내고, 분데스방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에 정보를 넘기죠. 이제 유럽중앙은행은 위르겐의 유로화를 달러로 환전한 후 미국이 통제하는 국제 금융망을 통해 중국인민은행으로 보냅니다. 중국인민은행은 그렇게 들어온 돈을 위안화로 바꿔서 시우가 거래하는 은행으로 보내고요. 최종적으로 시우의 거래은행은 시우의 계좌에 돈을 넣어줘요. 이렇게 덜컹거리고 정신없이 복잡하며 비효율적인 거래 시스템이야말로, 각각의 단계에 개입하는 시중은행들이 얻는 지대의 근원입니다. 133-4)


만약 위르겐, 시우, 아이가 중국인민은행이 제공하는 새로운 디지털 지갑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위르겐은 스마트폰을 들고 디지털 위안 앱을 켜서, 일정량의 디지털 위안을 시우에게 보내겠죠. 거래는 즉각 이루어지고 중간 수수료 같은 건 없어요. 거래 끝! 디지털 위안화는 위르겐이 거래하는 독일 은행, 분데스방크, 유럽중앙은행, 결정적으로 미국의 입김에 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국제 송금 시스템 등, 그 모든 중간 거래인들이 설 자리를 없애 버리죠. 2022년 이전까지 중국의 클라우드 금융과 디지털 위안화는 마치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신작로 같은 모습이었어요. 비록 울퉁불퉁하지만 여전히 달러로 만든 초고속도로가 존재하고 그걸 사용하면 될 판에, 세계적인 엄청난 부호들이 중국인민은행의 감시를 받는 위안화 도로를 통해 돈을 움직일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키예프, 카르키프, 마리우풀에서 포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후로는 중국의 돈길을 따라갈 좋은 이유가 생겼습니다. 134)


자본주의 시대를 통틀어 그랬습니다. 지대수익 추구자들이 자본가의 이윤에서 많은 몫을 빼먹을 때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는 없었죠. 자본주의 자체의 역동성이 무뎌지고, 버블이 발생하고 곧 터져버리죠. 약자를 수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국가는 채무에 중독됩니다. 테크노퓨달리즘의 출현은 이런 위기 발생 과정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요.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Adam Tooze가 그리스어 단어 두 개를 붙여 만든 신조어를 빌자면, ‘중층위기poly-crisis’ 상태를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억 명의 클라우드 농노들의 노동은 극소수의 클라우드 영주를 위한 권력과 클라우드 지대를 추출해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돈은 그 자체가 소득이 아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의 소득이 되어 선순환하는 일 따위도 결코 벌어지지 않아요. 저는 이 현상을 글로벌 가치 기반의 위축the shrinking of the global value base이라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142)


기술의 발전은 클라우드 자본의 힘을 점점 더 키워줄 거예요. 대규모, 가변적, 진보한 3D 프린트 기술 및 AI로 강화된 산업 로봇과 결합한다면 클라우드 자본은 전통적인 자본으로 이루어진,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기업 복합체들을 모든 면에서 능가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워싱턴은 중국을 상대로 경제 전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물리적 자본의 탈세계화가 촉발됐죠. 이는 전통 자본의 상대적 쇠퇴를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거대한 클라우드 장원은 희토류, 리튬,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데이터까지, 그 모든 원자재를 두고 전 세계에서 더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미래가 평화에 해로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거기에다 태평양 양쪽에서 한 줌도 안 되는 클라우드 영주들이 움켜쥐는 권력의 강도와 속성을 떠올려 보자고요.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점점 더 붙잡을 수 없는 파랑새가 되어갑니다. 143-4)


7장. 테크노퓨달리즘에서 벗어나기


‘사람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는 권리’는 오늘날 이 사회에서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죠.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누가 질식시켰냐는 겁니다. 갈색 군복을 입은 파시스트도 스탈린주의 수호대도 범인이 아니에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새로운 유형의 자본이 출현해 자본주의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자유주의적인 행동을 하라고 부추기기 시작한 순간 위기에 몰렸습니다. 뭐라고 부추겼을까요? ‘너 자신이 되어라!(아울러, 그걸 성공적으로 해내라!)’ 클라우드 자본은 지금까지 수많은 행태 조작을 시도하고 결과를 개선해가며 돈을 벌어왔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목표를 초과달성해낸 최고의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는 언제나 정신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쳐왔어요. 자유주의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그나마 시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었죠. 테크노퓨달리즘이 그 울타리마저 없애버렸고, 사정은 끝도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어요. 149)


클라우드 자본으로 인해 그다지 소유적이지 않았던 개인은 소유된 무언가로 전락했어요.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격하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군요.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의 관심사에 끼어들면서 우리의 주의 집중력을 위축시켰습니다. 이건 우리의 의지력이 약해진 게 아니에요. 우리의 ‘집중력이 도둑맞은’ 거죠.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테크노퓨달리즘의 알고리즘은 가부장제, 편견, 기존의 억압을 강화하는 성향이 있다보니, 소녀들, 정신이상자들, 한계에 몰린 사람들, 그리고 물론 당연하게도 가난한 이들까지, 이 모든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체성과 집중의 문제에서 불만과 불안을 곧잘 느끼게 되는데, 그에 대한 테크노퓨달리즘의 감정적 보상이 바로 편협한 태도일 거예요. 댓글 관리자를 두거나 혐오 표현을 규제한다 해도 이러한 경향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건 클라우드 자본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문제니까요. 149-50)


진정 자유로운 개인의 이념을 되살리려면, 첫째,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한물갔다는 신화를 반드시 폐기해야 합니다. 둘째, 테크노퓨달리즘의 세계 속에서 좌파와 우파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재검토, 재설정해야만 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마르크스주의는 위협적인 진실을 확신에 찬 어조로 제시했어요. 분노에 가득 찬 우파는 상대주의로 빠졌고 사회민주주의가 그 기회를 잡았죠. 1991년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패배를 당한 후 자유주의적 진리가 복귀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종언을 맞이했어요. 2008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워털루 전투와도 같았고 테크노퓨달리즘이 부상하게 되었죠. 이제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대안우파들은 클라우드 영주들이 허락해준 한 줌의 권력을 놓고 서로 싸우는 중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테크노퓨달리즘적 조건을 이루는 진실을 알아내고, 확신을 품는 것에 달려 있어요. 그것이 밝은 미래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155)


점점 더 클라우드 자본이 지배력을 넓혀나가는 세상 속에서, 테크노퓨달리즘을 무너뜨리고 민중을 민주주의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한 가닥 가능성이라도 쥐고 싶다면, 우리는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와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를 규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클라우드 농노들, 더 나아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가신 자본가의 일부까지 규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들 모두를 포섭한 이 거대한 연합이어야 해요. 테크노퓨달리즘은 민중의 조직화에 맞서 새로운 거대 장벽을 세우죠. 하지만 테크노퓨달리즘은 그것을 뒤엎기 위해 연대하는 꿈을 감히 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큰 힘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 새로운 거대 장벽이란 클라우드 농노와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들 사이에 벌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와 그로 인한 고립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 클라우드 자본이 그 잠재적 반란군에게 부여하는 막대한 힘이 숨어 있어요. 우리에게는 클라우드틀 통해 연대하고, 조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172)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태를 일컬어 ‘소외’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생산해내는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갖지 못하고, 우리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일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가는지 말할 수조차 없는 상태를 이르는 표현이었죠. 테크노퓨달리즘 하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무 시간동안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가고, 나머지 시간은 클라우드 농노로 살아가니까요. 그나마 먹고살 만한 자영업자들은 모두 클라우드 가신이 되어버렸고, 고군분투하는 자영업자들은 클라우드 농노가 되고 말았죠. 클라우드 자본은 민영화와 사모펀드가 알려준 자산 벗겨먹기 사업 모델을 우리의 두뇌까지 확장하고 있어요. 우리의 정신을 각자의 것으로 지키려면, 우리는 클라우드 자본의 집단 소유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그것을 행태 조작 수단에서 인간적 협력과 해방의 수단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니까요.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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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낙태와 동성애 이면에 감춰진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
랜달 발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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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종교적 우파 이전의 복음주의 


"제2차 대각성에 이은 19세기 초의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학교, 평화 십자군, 노예제도 폐지, 금주, 교도소 개혁, 여성의 권리 같은 사회개혁에 매진했다. 그들의 노력에 생기를 불어넣은 요소는 그들이 경건의 규범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좀 더 특별하게는 이곳 미국에─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신학자들은 이를 '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요한계시록 책에 예언된 평화와 의의 천 년이 지난 '후'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본다. 그 교리의 추론으로서 신자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예수의 〈재림〉을 위한 길을 닦아야 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집요한 사회개혁 촉구에 분노한 남부는 결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자체가 후천년설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끔찍한 사상자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게티즈버그와 앤티텀과 머내서스의 전쟁터들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완벽성에 관한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를 재조사하도록 자극했다."(43-4)


"복음주의 사회 개혁가들은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20세기가 한창 진행될 때까지 계속된 묵시주의(apocalypticism)라는 과속방지턱을 만났다. 복음주의자들 중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국 형제단(이후 플리머스 형제단으로 알려졌다)의 구성원인 넬슨 다비의 아이디어를 전용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예수는 천 년 '후'가 아니라 천 년 '전'에 이 땅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재림을 기대할 수 있는데, 재림 때 그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남겨진〉 자들은 신적 심판을 맞이할 것이다. 다비의 해석 체계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세대들(ages 또는 dispensations)로 나눴기 때문에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불렸다. 다비의 전천년설(예수가 천년왕국 '전'에 돌아오실 것이다)의 결과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해결할 책임에서 벗어났다."(45-6)


"1925년 7월에 테네시주 동부는 뜨거웠는데, 데이튼의 레아 카운티 법원 청사 2층보다 뜨거운 곳은 없었다. 존 토머스 스콥스가 테네시주의 버틀러 법(Butler Act)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풋볼 코치이자 시간제 과학 교사였던 스콥스는 그 법의 합헌성을 시험하기 위해 그 지역 시민 운동가들에게 고용되었다." "상징적인 면에서 스콥스 재판은 전환점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를 한층 더 거부했다. 이미 예수가 어느 때에라도 재림하셔서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교리인 전천년설을 수용한 복음주의자들은 회중, 교파, 성경 캠프, 성경 연구소, 대학, 신학교, 선교 단체, 출판사들이 맞물린 네트워크인 복음주의 하위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는 그것 자체가 부패했으며 타인을 부패시키지만, 복음주의 하위문화는 안전한 공간으로서 점점 세속화되는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51, 54-5)


"단기적으로는, 20세기 중엽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대체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조직적인 방식으로는 확실히 참여하지 않았다. 전투적인 밥 슐러, 빌리 제임스 하기스, 칼 매킨타이어 등 목소리를 낸 소수의 복음주의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전천년설 신앙과 미국 사회의 부패에 관한 확신에 근거해서 유권자 명부에 등록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정치는 사탄의 영역이며, 더욱이 이 덧없는 세상은 심판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나 복음주의 하위문화의 구축은 또 다른 장기적은 효과를 낳았다. 복음주의자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종종 아무것도 없던 데서 시작하여 수십 년 뒤에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런 기관들, 특히 학교와 복음주의 단체와 언론 기관은 복음주의자들이 1970년대에 공적 영역에 재진입할 토대를 제공했다."(56-7)


2부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의 부상


"종교적 우파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가장 영속력이 있는 신화는 그들의 기원 신화다. 제리 폴웰과 패트 로버트슨 및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자주 표명되는 이 내러티브에 따르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 판결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무사안일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 기원 신화가 폴웰과 다른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연체동물 같은 탈정치적 무감각에서 벗어나 낙태 합법화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싸움에 나서게 했다. 혹자는 자신을 노예제도라는 해악을 근절하려고 했던 남북전쟁 전의 복음주의 선배들과 연결시키려고 〈신 폐지론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낙태가 종교적 우파 부상의 기폭제였다는 주장이 무너진다. 복음주의자들은 1970년대 말까지 낙태를 〈가톨릭의 문제〉라고 여겼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대부분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낙태를 중요한 문제로 보기를 거부했다."(71-3)


"종교적 우파의 진정한 기폭제는 법원의 결정이었지만 그것은 '그린 대 코널리'(Green v. Connally) 소송에서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법원의 하급심이 내린 결정이었다. 1971년 6월 30일 그 법원은 인종 분리나 인종 차별에 관여한 어떤 조직도 정의상 자선 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면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 특히 북부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편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적어도 조직적으로는 정치적 영역 밖에 머물렀다. 폴 웨이리치는 자기가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자기들이 엄청난 유권자 집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보수적인 대의하에 그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정치적 힘이 달성되면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에게 이 위대한 나라를 재창조할 기회가 것이다.〉 웨이리치는 그런 제휴의 정치적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믿었다."(83, 86-7)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의 교육 기관이 연방의 돈을 받지 않기 때문에(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은 제외하고) 정부가 자기들에게 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나 그런 궤변은 세금 면제가 공적 부조의 한 형태라는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다. 교회들과 비영리 기관들은 (임금에 대한 사회보장세를 제외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 이는 납세하는 시민들이 공원과 경찰의 보호와 국방 등 모든 공적 서비스 공급에 필요한 예산의 차액을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이리치와 종교적 우파의 기타 창시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논거를 인종 분리 방어로부터 종교 자유 방어로 세심하게 이동시키는 한편, 종교 기관들이 세금 면제를 포기하기만 하면 어떤 인종 정책이든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실제로 종교적 우파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상식적인 이해는 보수적인 인종 분리를 방어하기 위해 복음주의자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90-2)


"웨이리치와 폴웰 및 신생 종교적 우파의 지도자들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낙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기 위해 영입이 불가능해 보였던 지지자를 확보했다. 그 인물은 바로 기독교적 가치의 쇠퇴와 그가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른 것의 전진을 경고하고 있던 신학자 프란시스 A. 쉐퍼였다. 쉐퍼는 낙태 합법화가 유아 살해와 안락사로 이어질 것이라며 열심히 경종을 울렸다. 웨이리치의 간계와 쉐퍼의 비탄 사이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서서히 낙태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80년 무렵에는 지미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로서 및 대통령으로서 낙태 사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가 낙태를 불법화하는 헌법 개정을 거부하자 그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겨졌다. 그해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1967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시절에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낙태법에 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서 말이다."(109-12)


3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19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이 선출된 뒤 종교적 우파는 열심히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통합했다. 1980년 공화당 강령은 〈카터 행정부의 국세청장에 의해 시작된 독립적인 학교들에 대한 위헌적인 규제상의 보복을 중단〉하기로 서약했으며, 종교적 우파는 복음주의 학교들을 국세청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레이건은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빌링스를 교육부의 여러 지역 교육국 중 한 곳의 국장으로 임명했다. 빌링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종 분리 정책을 취하는 학교들의 면세를 폐지하려는 국세청의 시도를 막았다. 낙태와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C. 에버레트 쿠프를 공중위생국장으로 임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레이건은 이에 동의했다. 레이건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많은 일반 대중 복음주의자가 낙태 반대 운동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혹자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한 가지 이슈만 보고 투표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123-4)


"레이건의 1966년 주지사 선거운동(과 이후의 다른 선거운동들)은 〈법과 질서〉라는 표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는데 이 어구에는 〈국가의 권리〉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적인 함의가 있으며, 그 어구는 일반적으로 흑인들을 그들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암호 언어로 여겨진다. 로버트 L. 코트가 말한 바와 같이 〈레이건은 인종 차별을 언급할 때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레이건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 "1980년 8월 3일, 레이건은 16년 전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단원들이 보안관과 공무해서 시민권 운동가 세 명을 납치·폭행·살해한 곳인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00명의 백인 앞에서─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남부 연합의 기를 흔들며 〈우리는 레이건을 원한다〉라고 외쳐댔다─조지 C. 월리스와 수없이 많은 다른 분리주의자의 반항적인 슬로건인 〈나는 국가의 권리를 믿습니다〉를 소환했다."(129-31)


"종교적 우파는 결코 성경적 가치들을 진척시키기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행동주의는 인종 분리의 영속화에 뿌리를 둔 운동인데, 그 운동이 1970년대 말에 시작된 보수적 운동이 극우 변두리와 제휴하여 복음주의 자체의 가장 좋은 전통들과 일치하지 않는 돌연변이 형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던 선조들의 개혁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대신, 명백히 복음주의 전통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 복음주의 사회개혁의 오래되고 고귀한 전통을 잘 알지 못하거나 경멸하는 사람과 동맹을 맺었다. 이 묘사는 정치적 우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이 자기들의 전통을 잘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가치 있는 선배들의 모범을 통해 인도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들이 지지한 정치인들과 정책들에 비춰볼 때, 종교적 우파 지도자들이 그 전통을 경멸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143-4)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일단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에 내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인정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의제의 다른 측면들, 즉 종교적 우파와 공화당 극우파의 융합을 통해 과도하게 좌우된 의제를 재조사할 수도 있으리라고 희망한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외인을 환영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새롭게 읽거나 19세기의 복음주의 사회개혁을 이해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이 이민과 공공교육에 관한 견해, 교도소 개혁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태도, 부자 감세에 대한 지지를 재고할지도 모른다. 결국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들 중 가장 작은 자〉를 돌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에너지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한 가지 이슈를 토대로 투표하는 행태를 재고하고 정치적 이슈들을 좀 더 넓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재고는 또한 유색 인종 복음주의자들과의 화해를 위한 문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회개는 영혼에 유익하다."(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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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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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자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한 아이히만의 진술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옛 신문을 읽어보니 아이히만의 말도, 연구서들의 서술도 뭔가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대부분의 나치보다 더 많은 별칭─칼리굴라, 유대인의 차르, 민족 학살의 관리자, 이단 대심문관, 유대인 학살 기술자, 최종해결사, 관료, 대량학살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별칭은 모두 1939년부터 1960년 사이에 아이히만을 일컫던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하지 않았다. 신문이나 유인물, 책에 다 나와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언제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면 누구나 그것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정확히 한목소리로 정반대 사실을 주장한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옛 동료와 전후 잔존 나치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다로 자신들이 아는 바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들고자 했다."(24-5)


"이제껏 논의에서 빠진 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론이다. 장 자크 루소의 통찰에 따르면, 월권과 그로 인한 불의에서는 늘 두 가지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즉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적 영향력을 살펴보면, 그 두 부류 인간의 기괴한 협력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악명 높은 '유대인 담당관' 시절의 아이히만처럼 우리가 그 협력 과정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히만의 역사를 그의 범죄 연대기나 행위의 발전사로 서술하지 않고 그의 영향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누가 언제 아이히만을 알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언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에 그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얼마나 많은 자기 연출이 아이히만 현상에 깔려 있는가? 그의 역할극은 그의 학살 이력과 우리의 역사상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26-7)


1장 “제 이름은 상징이 됐죠”


"나치스 첩보기관인 보안국 대원 시절 아이히만은 유대인 행사를 찾아다니며 유대인들과 교류했다.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을 호기심 많고 성격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아이히만은 (상관이 두 번이나 말렸는데도) 선생을 찾아 히브리어를 배우려 했고 자기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 문헌 연구에 열중했으며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과 유대인 신문을 탐독했다. 아이히만은 국제관계를 살폈고 심지어 한 유대인으로부터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해달라고 초대받기도 했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그것을 〈3년 동안의 학습〉이라고 불렀다. 그런 방식의 삶에 속아 아이히만을 정치적으로는 다소 천박하지만 학문에는 관심이 많은 문예 애호가로 오인하기 쉽다. 특히 카페에서 잡담하고 글을 쓰며 발표하거나 동료들과 전문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해 꼼꼼히 일하면서 반유대주의 선전 작업을 수행하고 게슈타포와 함께 체포하며 조사한 일들이 사료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러기 쉽다."(48)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니었다. 상징과 이상의 활용은 나치즘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의 명성은 피해자들이 그를 알게 됨으로써 높아져갔다. 〈언론을 통해 아이히만이란 이름은 상징이〉 되었다. 〈어쨌든 유대인이란 말은 아이히만이란 이름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의 권력관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것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권력관의 작동 방식은 지도부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아이히만과 동료들도 권력을 행사하는 데 총통식의 지도자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기 연출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유대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간판 인물이 필요했고 〈아이히만〉은 바로 거기에 딱 맞았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상징 인물이 된 것을 우연으로 치장하려고 했다. 아이히만의 역할을 다룬 책이나 논문들도 더러 그런 견해를 따른다."(79-80)


"아이히만이 이민과 재정 확보 문제를 놓고 아직 유대인과 협상하고 국제 단체의 협력을 필요로 했을 때는 협박이 유용했다. 하지만 목표가 이민이 아니라 살해라면 더 이상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협상용 대화를 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던 위협 이미지가 살해 의도를 감추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이제는 협박하기보다는 안정시키고 달래고 분위기를 바꾸며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량 이송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이송 주체들은 이송 대상, 즉 우선 다른 곳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살해될 그 사람들로부터 우선은 아주 조금이나마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열차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측 협상 파트너들을 양보와 협력으로 이끄는 데 항상 성공했다. 그 이유는 주로 유대인 협상가들이 아이히만과 〈협상〉하면 결국에는 더 나쁜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88-9)


"그의 부하들이 아이히만을 〈그에 걸맞는 존경〉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자신의 지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영민한 관찰자인 구스타프 그륀트겐스는 그 기제를 간명히 설명했다. 〈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권력자를 무대에서 보여주려 한다고 해서 무조건 왕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배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하 역을 잘하는 배우들이 왕을 향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무대의 그림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권력자 혼자만이 아니라 집단적 역동성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집단적 역동성이 비로소 권력자를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그 현상을 알아본 사람은 효과를 높이기 위해 희생자들의 무력한 행동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이히만의 부하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자질을 갖췄고 아이히만도 자기 역할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 한층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이히만이 권력자들 사이에서 더 센 권력을 가진 것처럼 연출했다는 사실이다."(102-3)


"나치 시기 막바지에 아이히만은 앞서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 인해 도리어 위험해지는 일을 겪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던 사람이라면 전후 자기 명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후에 아이히만을 잊거나 빠뜨릴 가능성은 전무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그의 이름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유대인 정책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그런 명성으로 인해 자기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아이히만은 완벽한 투사 대상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항상 다른 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제 누구든 아이히만 뒤에 숨기가 편했다." "크루메이는 진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끔찍한 사건을 밝혀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쿠르트 베커는 편을 바꿈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에 공개적으로 거리를 둘 기회라면 뭐든 찾아 나섰으며 그런 연유로 아이히만의 역할이 특별했음을 부각시켰다. 이는 전후 자신을 방어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112, 116-7)


"그 잔악한 허풍쟁이는 자신이 총통 사후에 살아남기 위해 실제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베를린의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오래전부터 새 이름이 적힌 새 신분증들을 안전한 장소에 마련해두었다. 게다가 그는 디터 비슬리체니와 빌헬름 회틀에게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고 거짓말했으며 도주 계획에 대해서도 가짜 정보를 흘렸다. 두 사람은 그 거짓말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아이히만은 정말로 그렇게 조심해야 했다. 그의 부하들은 오래전부터 아이히만을 희생시켜 자신들은 피해를 보지 않은 채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상관이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시절 그를 당으로 인도한 오랜 절친 에른스트 칼텐부르너마저 체포되기 전에 그 달갑잖은 아이히만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마지막에는 아이히만의 오랜 부관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수배 중인 전범〉과 가까이 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124)


"지하에서 활동하는 모임이 있고 1945년 이후 친위대 대원이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그 회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직이 흔들림 없이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공포와 희망의 판타지가 낳은 결과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한 추종자들은 이데올로기 발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강화 요인인 국가가 무너졌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를 버리거나 동료들과의 결속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옛 친위대 대원들로 구성된 대규모 지하조직이 따로 존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하에서, 특히 비합법적 상황에서 협력은 추천과 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고향에서 아이히만의 멋진 출발을 약속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옛 이름의 명성이었다. 친구들은 바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도우려 했다. 아이히만에게 리카르도 클레멘트는 처음부터 그저 신분증상의 이름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로 도항하면서 그는 자유민이 아니라 이름도 되찾는다."(176, 181)


2장 막간극


"아르헨티나는 일시적으로나마 아이히만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우선 은신처를 영리하게 잘 골라서 상당 기간 발각될 위험이 없었다. 게다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어둠 속에서 장기간 지낼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권력을 한창 과시할 때 그를 만난 동료와 피해자들은 그를 민첩하고 오만하며 야심 많은 인물로 기억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지하에서 사는 데 만족할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지배 인종의 일원으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작은 장소에서 무명의 존재로 사는 데 만족할 수 있을까?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기괴한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일을 정말로 중단할 수 있을까? 아이히만 추적이 초기에 엉뚱한 길로 빠졌지만 추적자들은 바로 그런 의문을 계속 갖고 있었다. 1945년 이후 아이히만 스스로도 그 질문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1961년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자문했을 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익명으로 살아야 했기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195-6)


3장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


"오늘날 우리가 1950년대 초 사람들이 나치 범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알고자 했는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그들은 당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재건과 갱신의 와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 절멸에 대해 그래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는 신문 보도, 다시 말해 전범 재판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 전쟁에 패한 국가에서 열리는 그 재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승자 재판' '선전-증언' '흑색선전' '집단 책임' '복수 심판' 등의 용어가 퍼졌고 '6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도록 하려면 증거나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1953년에는 설명과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대응은 불신과 억압이었다. 심지어 공범들조차 〈사실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안도했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255-6)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한 인물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과거사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아이히만은 그들이 정해놓은 진실, 즉 상황은 뉘른베르크에서 나온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고 '유대인들이' 그런 규모의 대량학살을 지어냈다고만 말해야 했다. 아이히만의 진술은 독일인들에게 죄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어야 했다." "당시 정말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여러 문헌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뒤집는 그런 억지 주장에서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들이 내세우는 진실을 보증할 주요 증인으로 여겨졌다. 1950년대에 그 편집증적인 구원 희망은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것은 아이히만 체포 직후에 우파 언론의 반응에서만 분명히 확인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의 증언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에 경고하는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렸다."(257-9)


"1955년, 독일에서든 망명지에서든 나치 몽상가들은 그해 몇 번이나 나쁜 소식을 접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 조약을 체결했다. 서독에서는 점령이 끝났고, 연방군이 창설되었다.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할슈타인 원칙으로 외국에서 독일의 이익을 단독으로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나치 신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것은 모든 대독일주의 이익의 거부 그리고 전승국, 특히 경멸 대상국인 미국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1955년 중반 쾰른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의 전신인 이스라엘 공관이 생겼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의 독일 애국 동지들은 여전히 대사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제국으로서의 의지〉나 〈영원한 독일인의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독일로 돌아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은 전보다 더 희박해졌다. 향후 수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독일에 잔존한 소수의 용감한 동지에게 일종의 초월적인 인종 승리에 대해 희망을 품도록 하는 것뿐이었다."(307-8)


# 할슈타인 원칙 : 대동독 강경책으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서독은 그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한 원칙


"부에노스아이레스인들은 유대인 학살에 관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황을 아주 잘 알았기에 공적 영향이 매우 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세계관 투쟁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 증인, 즉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되었다. 힘러의 참모장 경력자나 수용소 '의사' 경력의 요제프 멩겔레같이 소심한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그런 기대에 조응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 대화는 자신에게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먼저, 뒤러 서클을 통해 아이히만은 혼자서는 확보할 수 없었던 신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 책을 구입하는 것은 너무 비쌌다. 게다가 언론 매체 경험이 풍부한 동료들을 통해 아이히만은 급히 다시 갈구했던 것, 즉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편하고 뿌듯하게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319)


4장 이른바 사선 인터뷰


"아르헨티나에서, 말을 하려는 아이히만의 욕구는 그의 경계심보다 언제나 더 컸다. 이미 봤듯이, 그는 믿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교 모임이나 퇴근 후 술집에서의 우연한 담소는 에버하르트 프리치와 빌럼 사선이 계획하고 있던 것, 즉 역사서와 시사 문제들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실행 계획을 세우고 그 프로젝트에 누가 더 참여할 수 있을지 고려하는─금전적인 이유로─진지한 협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훗날 빌럼 사선, 에버하르트 프리치, 아돌프 아이히만 모두 각자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 시점에 서로 계약을 맺어, 그 책의 판매 수익을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유혈의 꿈〉이었단 할지라도, 그들 모두에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재빨리 한밑천을 챙기는 꿈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용병〉의 삶 같은 면이 있었다."(324-5)


"아이히만은 사람들 앞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대량학살 집행자로써 쓴 역사를 넘어) 후세에 뭔가를 남겨주고 싶어했는데, 이러한 점은 단지 망명에 따른 반작용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가지 상황이 그의 의욕을 더욱 북돋웠다. 첫째, 1955년에 유대인 절멸에 대한 첫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그 책들을 수많은 신문 기사와 마찬가지로 〈적의 문헌〉이자 도발로 여겼다. 둘째, 제3제국 몰락 이후 이념적 투사들에게는 글쓰기와 선전이라는 단 하나의 무기밖에 남지 않았다. 셋째, 그는 펜을 들고 실제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때 처음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이용가능한 출판사를 갖고 있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점인데, 그들은 아이히만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 있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바로 빌럼 사선과 에버하르트 프리치였다. 그의 시각에서는 극우 출판계에서 『길』이 맡고 있는 역할이 굉장해 보였을 것이다."(339)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글을 쓴다. 역사 연구를 방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글들이 확인시켜주는 신뢰할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로, 글이라는 것에는 그것이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사고 작용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기소개와 역사 왜곡을 해석하면서 드러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그의 생각 그 자체다." "아이히만은 이 책을 이용해 독일에서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자기 삶도 되찾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초 서독의 형사 소추 실태를 살펴본다면 아이히만의 계획이 전혀 가망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형은 한 건도 없었고, 대체로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기소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로 끝났다. 아이히만은 아무 문제 없이 독일에서 계속 잘 살고 있는 수많은 옛 동료를 알고 있었다. 전범들은 낮은 형량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주요 나치 범죄자들에게도 공소시효가 만료될 것이었다."(343-4)


"아이히만의 〈내면적 도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어떤 정의 관념이나 보편적 도덕 범주가 아니었고, 심지어 자기 성찰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평결이 잘못된 정치적 입장─〈조국의 윤리〉에서 벗어난, 결과적으로 독일 민족의 관점에서 벗어난 척도─에 기초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처음 읽으면 보편적 정의의 소환이나 모든 사람이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는 호소처럼 들리는 것이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평등권〉임이 드러난다. 아이히만은 자신도 인간이니 자신에게도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이 적용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요구는 어떤 민족사회주의적 도그마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사람이, 무엇보다 독일 민족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변호하는 데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서 그 도그마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349)


"아이히만은 〈이 총력전에서의 승리 아니면 독일 민족의 몰락〉임을 여전히 믿고 있었다. 승리가 선행되지 않은 〈평화 추구〉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적〉 또한 유죄 인정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보편적 요소는 〈유죄〉이지 〈정의〉가 아니다. 전시의 모든 행동이 유죄로 분류되니 유죄임은 마찬가지다.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의 실제 가해자들은 집단 범죄 이론을 늘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이 광범위한 유죄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공범이었다고 설득하게 해주었다. 보편적 유죄 주장은 또한 아이히만의 회피 구실이 되었다. 우선, 다른 모든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과 똑같이 유죄라고 인정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도 유죄를 인정할 것이다. 모두가 유죄라면 아무도 유죄가 아닌 셈이며, 자백에 대해 법적인 결과가, 혹은 사실상 도덕적인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회피의 곡예는 비난에 의한 정당화라고 불릴 만하다. 이것이 규칙을 만드는 지배자 민족이었다."(350-1)


"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1944년 말에 한 통계학자가 힘러와 히틀러를 위해 어떤 수치들을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그 수치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두 차례 '총통 보고서' 초안을 수정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훗날 그는 코르헤어 보고서로 악명 높았던 이 문서와의 관련성을 줄곧 부정했다. 하지만 진짜 거짓말은 세부에 숨어 있다. 이 통계 수치들은 사실 1943년 3월에 잡힌 것인데, 그는 이 통계학자의 보고서 날짜를 1944년 말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런 식으로 날짜를 바꾸는 데 능숙했고, 자신을 좀 더 좋은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이런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만약 누군가 그의 숫자 놀음을 눈치채면 그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혼동할 수도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지했다. 1943년 초의 수치를 최종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아이히만은 2년에 가까운 시간과 100만 명 이상의 살인을 지워버린 셈이다. 그것도, 앞선 수치가 애당초 맞는 것이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358-9)


"아이히만은 자칭 〈제3제국〉의 지도자가 선언한 것처럼 정연명령이 사실상 〈자기 본질에 따라 살고 자기 인종의 가치를 수호하라〉라는 의미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칸트의 가르침도 다른 어떤 철학도 인종생물학적 투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에게 칸트는 절멸 정책을 시행하려 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인 〈이른바〉 도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칸트의 사상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이히만의 일관된 민족사회주의적 태도의 증거이지만, 또한 절대적 권력에 대한 한결같은 욕망의 증거이기도 하다. 근본주의적 사상의 힘은 상급자가 내린 명령의 힘보다 훨씬 크다. 아이히만이 전체주의 체제에 그토록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가 이미 전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하고 하고 싶어했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일을 했다는 존중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싶어했다."(382-3)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는 자기변호를 위해 상상 가능한 온갖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문서들을 생산했고, 언론을 위한 대중적인 글들도 썼다. 사람들이 그를 교수대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마지막 문장들을 쓰고 있었다. 아이히만을 글을 쓴 변명자로 보는 것은 분명 옳지만, 이 홍수 같은 말을 읽는 사람은 다른 동기를 간과할 수 없다. 아이히만은 논쟁 놀이, 말의 힘, 그리고 자신의 조작 능력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글에는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 즉 독자를 제 뜻대로 이끌어 자신의 사고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는 욕구가 항상 나타나 있다. 문명사회의 모든 규칙에서 벗어난 아이히만의 제안, 의견, 계획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기가 한때 있었다. 반유대인 정책이 절멸이라는 아이디어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의 생각은 반유대인 정책의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글로 쓰인 말의 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히만이었다."(398-9)


"1957년 가을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전후의 나치들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독 선거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한 것이다. 독일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극우 운동은 이 선거의 승리를 막고 전후의 독일 정치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것을 꿈꿨다. 그것은 1950년대에도 이미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꿈이었다. 이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 길을 따라 다시금 독일의 상석으로 돌아간다는 전망 또한 좌절되었다. 아데나워가 깨달았듯이, 독일 국민은 더 이상 실험을 갈망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고,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할 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세상은 꽤나 달라져 있었다. 1957년에 이 나라는 앞선 10년간 페론 통치하에 누렸던 활기찬 호황기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 〈운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과거에 갇혀 있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의 가능성에 보조를 맞추기 시작해야 했다."(524-5)


5장 안전하다는 착각


"뒤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아이히만과 사선이 계획했던 출판도 무산되었고,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독일-아르헨티나 커뮤니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치 위계에서 하위에 속했던 〈덜 위태로운〉 망명자 다수는 자신이 자란 곳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껴 유럽으로 돌아갔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의 공소시효와 기타 회생법은 사형죄나 전쟁 범죄를 (또는 적어도 누군가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 아니라면 돌아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버하르트 프리치조차 1958년 3월 초 출판사를 포함해 모든 것을 싹 정리하고 잘츠부르크 근처의 집으로 이사했다. 아르헨티나의 독일 민족주의 공동체는 중요한 준거를 잃었고, 사선은 직장을 잃었다." "사선은 여전히 아이히만을 가끔 만났지만, 이제 더 흥미로운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땅에 남겨진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541-3)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을 만난 적이 있거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가 재판을 받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생각을 알고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아이히만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치 네트워크, 탈출 및 원조 조직, 통신 경로에 대해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해질 수 있었고, 아이히만이 독일 당국에 그것들에 대해 발설할 경우 미칠 여파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재판 회부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망명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옛 나치가 서로의 개인사를 무해한 것처럼 보이도록 다듬어 새로운 경력을 만들었다. 아이히만이 등장하면 그의 옛 동료들이 세심하게 쌓아 올린 외관은 무너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당시 위기에 처한 것은 그들의 깨끗한 경력, 높은 지위, 높은 급여였다."(545-7)


"1960년 5월 23일, 아이히만의 재등장 소식이 빠르게 퍼졌고, 흥분된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이히만 납치는 1945년 5월 패배 이후의 그 어떤 사건보다 친위대 사람들과 기타 대량학살 가해자들의 삶을 더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그들 서로 간의 상호작용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편안한 망명생활과 옛 동료들 간의 자연스러운 신뢰는 갑자기 끝났다. 유대인 절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새로 알게 된 사실로 인해 향수의 감정을 떨쳐버리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갑자기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주의를 환기한) 내가 옳았음을 안다.〉 동요된 요제프 멩겔레는 일기에 이렇게 썼고, 1960년 10월에 더 멀리 브라질로 이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 후, 해외 거주자들은 자신들이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갑자기 상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략을 짤 시간이 조금밖에 없었다."(591, 599)


"이스라엘에서의 최종 진술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대리인으로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햇다. 그 스스로가 세상 어떤 처벌도 충분치 않을 정도의 죄를 진 만큼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상적인 대리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 민족은 아이히만 혼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독일 청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공개적으로 목매달겠다는 그의 제안은 기괴했지만, 그 재판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시스를, 집단적 죄에 대한 집단적 반성을 바라고 있었고, 심지어 아이히만은 자신의 왜곡된 순교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 비애와 장렬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가해자, 협력자, 자발적 동조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희생양을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가족에게 보낸 작별 편지에서 〈역사가 평가를 만들어내도록 맡겨두자〉라고 썼다."(604-5)


6장 역할 변경


"아이히만이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대적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그는 유포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들 중 어떤 것이 자기변호에 가장 유용할지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생산해낸, 유죄를 뒷받침하는 글들 없이, 신중한 관료의 이미지를 내놓았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자신을 교수대에서 구해주리라고 기대한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점적 지식과 자신의 무죄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통찰력을 내세울 여지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자 절멸 프로젝트의 부처 간 조정자, 상관들과 함께 난롯가에서 코냑을 마시며 그 일의 실행을 축하했던 남자가, 스스로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회의록 작성자로 변신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책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관찰력 있는 심문관은 이 피의자가 전략적 계책을 부릴 때 특히 활기를 띤다는 것을 알아챘다."(610-1)


"권력을 갖고 있던 시절에 아이히만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는 희생자들의 희망을 가지고 기만적인 게임을 벌여, 저항도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옛 동지들의 존경과 도움을 얻기 위해서, 민족사회주의가 절멸의 명령과는 별개일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를 확인해주었다. 이스라엘에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본능〉이라고 여기는 것, 즉 이해하고 앎을 얻으려는 유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든, 아니면 그가 악의 이론을 사실로 확인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든 간에, 그는 거울처럼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대를 반영했다. 그 모든 거울 이미지 뒤에는 아이히만의 권력의지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그의 욕망이 근면함으로 위장된 채 놓여 있었다. 단 한 가지가 줄곧 아이히만을 부주의하게 만들고 따라서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의 익명성〉을 떨쳐내야 했던 그의 확연한 인정 욕구였다."(616)


7장 막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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