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관념론 철학
니콜라이 하르트만 지음, 이강조 옮김 / 서광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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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부 피히테, 셸링, 낭만주의


서론


"독일관념론 사상가들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의 목표는 최후의 명백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는 포괄적이며 엄밀하게 통일적인 철학 체계의 창출이다. 모든 사상가들 앞에 저 〈미래의 형이상학〉의 이상이 떠올랐고, 칸트의 강력한 사유의 노력이 처음으로 그 서설을 제공했다. 그들은 칸트가 그의 후기의 두 비판에서 이 형이상학을 이미 개설적으로 구상했다는 사실을 전연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설은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체계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철학의 이념을 충족시키면서 성립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체계가 가능하고 또 인간 이성이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일체의 운동은 젊은이처럼 강력하고, 창조를 기뻐하는 철학적 낙천주의의 특징을 띠고 있다. 일체의 회의는 단지 통과해야 하는 단계의 의미, 검사 및 숙고의 법정이라는 의미, 그리고 여러 문제들을 보다 깊이 내면화하고 철저하게 처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을 의미를 가질 뿐이다."(24)


"이러한 철학적 전개에서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무엇보다도 철학적 영역에서 시도했고, 무한자와 비합리적인 것으로 향하는 그들의 동경의 정신을 관념론적 사변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이다. 유사한 내용이 횔더린에게도 일정 부분 적용된다." "비판적-체계적 사유의 구조 속에서는 낭만주의적, 범신론적 그리고 신비적인 요소가 우선은 여전히 이물(異物)처럼 작용하지만, 이것이 저 사유를 처음에는 천천히 안으로부터 밖으로 완성시켜서 그 직선적 궤도로부터 밀어제친다." "칸트로부터 합리주의적이라는 기분이 드는 관념론이 여기서부터 겪게 되는 만곡(彎曲)은 가장 실증적으로는 윤리학, 미학, 그리고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합리주의는 느지막하게 쇼펜하우어 및 셸링의 후기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만연한다. 반면에 사상적 동기의 풍부함에 있어서 낭만주의적 창작 및 생활의 덕을 입고 있는 헤겔은 최후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전능에 대한 믿음에 충실하고 있다."(27-8)


1장 칸트학도와 반칸트학도


"라인홀트는 〈비판〉을 체계로 변형하려는 요구를 가진 최초의 인물로서 등장한다. 비판은 이론적 부분에서는 경험으로부터, 실천적 부분에서는 도덕법칙, 즉 어떤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비판에서는 통일적인 전제, 즉 일체의 것이 도출될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 원리가 결여해 있다." "동시대인들은 칸트의 철학을 라인홀트의 철학에 비추어서 보았다. 그리하여 두 이론 간의 구별이 우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라인홀트가 전체적으로 보아 칸트철학의 의도를 긴밀하게 고수하면 할수록, 그만큼 바로 요소 철학의 일련의 특유한 특징들이 매우 성과 있는 방식으로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정말로 진실로 남아 있다. 이 특징들은 다음의 것이다. ①형식과 질료 이론의 관철, ②물자체의 필연성과 인식 불가능성의 정립, ③체계의 출발점으로서의 원칙의 통일성, ④조건들의 연속적인 제시로서의 도출 방법, ⑤실천적 능력에 의한 이론적 능력의 피제약성."(34, 41)


"마이몬에게도 물자체가 우선 장애가 되는 주요점이다. 그는 이 개념의 해명을 애초부터 회의적으로, 즉 바로 비판 자체의 그 정의들로부터 얻으려고 한다." "마이몬은 최초로 관념론적 관점을 진지하게 다룬다. 라인홀트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유할 수도 없다. 우리가 물자체에게 덧붙이는 모든 징표─단지 촉발 원인의 징표일지라도─는 의식 속에 정립되어 있고, 따라서 사실상 물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어떤 구조물에 귀속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의식의 바깥에 있는 물자체는 징표를 갖지 않은 대상일 것이고, 어떠한 사유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유는 징표에 의한 규정 작용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물이 아닌 것〉일 것이다. 마이몬은 그것을 수학의 허수에 비유한다. 이에 반해서 비판적으로 이해된 물자체는 유리수와 똑같이 실재하는 무리수─이 무리수가 근사치의 무한 계열의 한계치를 형성하기 때문에─에 비유된다."(49)


"그러나 마이몬은 자기의 고유한 입장을 가장 엄격하게 순수 이성 비판의 입장으로부터 구별할 줄 안다. 이 구별은 출발점 안에, 즉 사실의 문제 안에 놓여 있다. 칸트와 함께 그는 경험의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학문적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이론(異論)을 제기한다. 이 점에서 그는 흄과 일치한다. 수학만이 선천적 종합판단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경험적 회의주의〉라 부른다. 경험적 회의주의는 슐체의 회의주의처럼 비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을 전제하고 있고, 비판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판의 절차만이 모든 경험은 불완전한 인식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이몬의 〈경험적 회의주의〉는 결코 경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경험적 사실 인식은 결코 〈온전한 의식〉이 아니다. 그러한 어떤 온전한 의식에게는 사실을 산출해 낸 선천적 형식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속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이몬의 회의론은 근본적으로 순수한 선천주의이다."(54-5)


"야코비에게 칸트의 체계는 순수한 주관주의를 의미한다. 칸트가 경험론적-관념론적 이해를 거부하게 되는 객관주의적 전환은 야코비에게는 관점상의 탈선으로 간주된다." "야코비가 보기에 우리가 칸트와 함께 물자체를 존립시킨다면, 비판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비판의 전체의 구상은 자발성과 수용성의 이원성에 기초해 있고, 수용성은 주관 바깥의 현존재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물자체 없이는 비판의 관점은 획득될 수 없고, 그러나 물자체와 더불어서는 비판의 관점은 주장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야코비에게는 비판적 관점의 유지 불가능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그는 비판의 결과로부터 역(逆)의 귀결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관념론과 물자체는 통일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포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관념론은 많은 가능한 관점 중의 하나일 뿐이고, 물자체는 모든 인식의 필연적 상관자이다. 따라서 물자체는 고수되어야 하고 관념론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실재론적 관점이 일어난다."(62-3)


"야코비는 자기의 신앙 이론을 매우 엄밀하게 칸트의 이론으로부터 구별할 줄 안다. 칸트 역시 물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서 승인하고 있고, 신앙에게 지식을 초월하는 우월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 신앙은 다만 실천적 확신을 갖고 있을 뿐이고, 따라서 이 신앙은 그 대상의 실재적 본성 속에서가 아니라, 단적으로 신앙하는 주관의 본성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신앙은 역시 인식 조건의 전체 계열과 똑같이 정확하게 주관적이다. 표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은 신앙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에 반하여 야코비에 의하면 신앙은 실재적 대상의 본성 속에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비주관적인 것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천적 확신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 확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대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 신앙을 통해서 제약되어 있다." "야코비에게 〈이성〉(Vernunft)은 곧 초감성적인 것의 〈지각〉(Vernehmen)을 의미한다. 이성은 칸트가 부인했던 능력, 즉 지적 지관을 소유하고 있다."(64-5)


"바르딜리는 칸트가 일관성 있게 주관의 자체 존재 이외에 어떠한 다른 자체 존재도 승인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 확정된 것이라고 본다. 이때 칸트의 철학은 주관으로부터의 객관의 연역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객관을 이와 같이 〈숙고하여 이끌어 내는 일〉을 실제로 수행하는 피히테의 시도는 바르딜리의 마음에는 길 잃은 형이상학을 위협하는 본보기로서 떠오른다. 이 시도를 거스르는 것은 야코비가 의지했던 상식의 자연스런 요구라기보다 바로 논리학의 엄격한 학문적 요구이다." "바르딜리는 야코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에서 비판철학에 일격을 가한다. 지각의 본성이 아니라, 순수 사유의 본성이 객관의 실재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응하여 바르딜리의 실재론 역시 야코비의 실재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르딜리의 실재론은 〈순수한〉(즉 선천적인) 또는 〈합리적〉 실재론이다. 그는 논리적인 것의 실재성을 모든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공동의 존재 토대라고 주장한다."(68-9)


2장 피히테


# 구상력(構想力) : 칸트 철학에서는 감성과 오성(悟性)을 매개로 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능력을 이른다.


"피히테의 철학적 근본 관심은 라인홀트와 매우 유사하다. 그 역시 철저히 윤리적-종교적 측면으로부터 칸트철학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피히테는 처음부터 칸트철학의 전체에, 그리고 기술되지 않은 보다 더 내면적인 이 철학의 핵심에 관계한다." "피히테는 라인홀트가 이미 그랬던 것처럼 결정론을, 비록 이 결정론이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필연적인 것으로 증명된다 할지라도, 적대적인 어떤 것,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게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라인홀트보다 본성상 더 힘 있고 무리하게 그의 사상을 전환시켜 다음과 같은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바로 이 이론적 필연성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고, 이론적 필연성이 최종적인 단안이라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도덕적 존재의 자유가 최초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주어지는 과제는 자연적인 것과 결정된 것의 세계가 어떻게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이해되는가를 지적하는 일이다."(80-1)


"이론적 자아는 비자립적이다. 이론적 자아에게는 비아(이론적 자아의 대상)가 영원히 대립한다. 이론적 자아는, 순수한 관념론이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비아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아의 독립성 때문에 자기 자신도 지양하게 될 것이다." "의식의 고유한 이론적 본질은 결코 의식을 이 이원성 너머로 올려놓을 수는 없다. 이 본질은 이원성, 즉 비아에 결부되어 있다. 단순히 이론적이기만 한 관점이 물자체를 극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자아는 동시에 행위 하고 있다. 행위는 대상에 대한 역의 관계를 의미한다. 자아는 행위 속에서 창조하면서 또 형태를 만들면서 비아에 간섭하게 되고, 자기의 상(像), 즉 자기의 정신의 목적에 따라서 비아를 변형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아에 대한 자기의 우월을 표명한다. 따라서 이곳에서 자아는 사실상 산출적이다. 비아의 자아와의 동등한 권리는 여기서 중지되고, 이것과 더불어 이원성이 종말을 고한다."(89)


"행위 함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고, 직관될 뿐이다. 행위의 본질은 존재에 대한 그것의 대립으로부터 비로소 뒤늦게 파악된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아의 본질은 비아의 본질 속에서 비로소 인식된다. 직관은 아직도 인식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철학자 자신의 직관을 피히테는 이제 〈지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지적 직관은 행위에 대한 직접적 의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직관은 분명히 모든 경험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피히테에게 있어서 물자체는, 엄밀히 생각하면 사유할 수도 없는 〈순전히 비이성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물자체들은 여기서는 그 어떤 인식의 대상으로서도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지식학은 이것들에 대한 어떠한 장소도 갖고 있지 않다. 지식학에서의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감성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식학에서의 지적 직관의 오용(誤用)에 관한 우려 역시 쓸데없는 일로 되어 버린다."(94)


# 직관(直觀) :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자아는 행위가 관계하는 대상이 없다면, 자신을 행위 하는 것으로서 발견할 수 없다. 자아의 존재는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에게 동시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바깥에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정립은 그러나 분명히 자아의 정립에 대한 하나의 반정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반정립적 조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반정립은 자아의 정립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며, 그 자체에 의해서 요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모순이 극복되어야 한다면, 정립과 반정립을 종합으로 결합시키는 보다 높은 통일의 관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립된 것들의 통일의 점〉은 임의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 오히려 다만 이 통일의 점을 현존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일, 즉 통일의 점이 〈대립된 것들의 의식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변증법적〉 절차는, 피히테에게는 아직 발생 중에 있고, 불안정하며, 자기의 본래적 위기를 때때로 위반하기도 한다."(97-8)


"자아의 본질은 모든 자아가 대자적─비아를 규정하는 자로서 자신을 정립하는─이라는 점에 있다. 절대적 자아의 본질인 근원적 활동성은 따라서 자아로부터 원심적으로 무한 속으로 진행하여 자신을 의미도 계획도 없이 상실해 버리는 곳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근원적 활동성은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 속으로 반성될 때만 자아에 대해서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장애와 저지의 근거는 반성의 측면에서 보면 자아 자체의 본질로부터 요구되는 반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지는 활동성을 절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아의 활동성은 무제한적인 것이고, 또 모든 방해를 다시 넘어서고 일체의 저항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천적 태도에 대해서는 특징이 된다. 그러나 방해를 넘어서는 이러한 무제한적인 이행은 오로지 노력해야 하는 일일 뿐이고, 창조, 실현 또는 달성되는 일은 아니다. 무한자는 활동자의 속성이 아니고 활동성의 목표이자 이념이다."(116)


"역사철학은 피히테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윤리적 관점 아래에 서 있다. 역사철학은 역사학처럼 사실의 탐구가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그것이 가장 작고 덧없는 사회이건 또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사회이건 다같이─의 생동적인 작용 및 노력에 대한 불가결의 윤리적 방향 설정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현존재는 자유를 실현하려는 생각을 갖는다. 인류의 발전에 어떻게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역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상승, 보다 높은 발전, 진보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가치 실질은 가장 내면적인 인간 본질의 가치 실질, 즉 이성의 가치 실질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전체의 발전은 무죄의 상태와 더불어 시작하여 죄지은 상태에 이르고, 이 죄의 상태를 결국에는 극복하여 자각적 이성의 나라에서 끝나는 그러한 과정이다. 따라서 진보의 계기는 바로 도덕법칙의 척도와의 연관에서 결코 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반립적인 것이다."(164-5)


"피히테가 자기의 모든 본질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고 느끼는 시대는 〈계몽〉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개별 정신을 담지하는, 그리고 기초에 깔려 있는 위대한 이념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 시대는 전일(全一)의 이성의 생명을 인간의 생활 속에서 보지 못했다." "개별자는 눈앞에 있는 것, 즉 개별자를 감금하는 가장 협소한 범위의 관계 속에 있는 자기 자신만을 본다. 그의 최고의 것은 자기 보존이고, 자기 행복이며, 사리(私利)이다." "피히테는 계몽주의에서 그가 생명과 노력을 다 바친 윤리적 이념의 위엄이 위태롭게 됨을 보았다. 그는 여기서 그 특유한 가치가 모든 윤리적 노력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전체의 내용을 의미한 바로 그러한 자유의 의미가 오래되어 있음을 보았다.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위대한 것과 원대한 것을 옹호한 그는 계몽주의에서는 원칙적으로 편협하고 소규모의 것이 사물의 척도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세계를 축소시키는 사상과의 화해는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167-8)


3장 셸링


"피히테의 체계는 자유의 이념을 위한 투쟁의 결과로서 생겨났다. 이 투쟁은 가차 없고 난폭한 투쟁이었다. 자유에 대립된 것은 폐기되어야 한다. 필연성은 자유에 대립한다. 필연성은 모든 자연적인 것의 내적인 속박이다. 그러므로 피히테는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것을 자유의 창조적 작용 속에서 지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존재는 자연 속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러한 평가 절하는 비자연적이다." "그렇기에 피히테를 넘어서는 셸링의 제일보는 자연철학에로 이르게 된다. 셸링이 자연철학을 완성하고자 할 때, 그는 자연과 정신의 평행적인 구조에 대해서 여지를 갖고 있는 보다 넓은 새로운 기초에 의해서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이 기초를 동일철학의 사상에서 발견한다." "셸링은 이 사상을 거대한 규모로 완성함으로써 헤겔이 그 후의 모든 역사적 체계 가운데서 가장 정연하고 가장 포괄적인 체계를 구축하게 된 토대를 창조하였다."(183-4)


"그러나 헤겔이 지칠 줄 모르는 작업으로 자기의 대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동안에, 셸링은 다시 뿌리로 되돌아가서 파악한다. 셸링은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낭만주의에 가장 근접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문제들의 세계가 그에게 밀어닥치고, 또 해결을 요구한다. 그에게는 예술철학만이 이러한 자극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비로운 것에로의 경향도 이 자극으로부터 나온다. 셸링은 이러한 경향의 뿌리를 일체의 철학적 사유의 제1근본 원리 속에서 발견한다. 자연철학은 그에게서 종교철학으로 변한다.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은 그에게는 신성(神性)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동일성의 체계를 선언했던 이성의 저 전체의 합리적 철학은 참된 원근거(源根據)에 이르지 못하였고, 계시 철학만이 긍정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신앙과 지식의 모든 외견상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계시철학으로써 그는 헤겔의 이성 체계에 대립한다."(184-5)


"셸링의 자연철학은 통일성 철학의 순수한 전형이다. 이 철학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상은 동일성의 사상이다. 즉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 우리 속의 정신과 우리 바깥의 자연과의 본질의 동일성이다. 자연은 외부에 의하여 경계 지어진 것도 아니고, 정신은 내부에 의하여 한계 지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의 외부에도 동일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고, 우리의 내부에도 동일한 자연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자연의 영역 내부에서도 역시 존재하는 통일성의 철학이다. 그리하여 유기적 자연과 무기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원리를 갖고 있는 분리된 두 자연이 아니다. 셸링은 무기적 구조물의 기계론적 이론도, 유기체의 기계론적 이론도 배척한다. 그는 전체 자연을 구별 없이 유기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간주한다." "셸링은 당시의 과학적 성과들에서 취한 이념의 다양성을 자기의 목적론적 근본 사상의 통일성 속에서 포괄하고, 자연 현상의 상이한 유형들을 하나의 근원적 원리의 전상(展相)으로 파악하고자 한다."(195-6)


"이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동질적 통일성에서 차별의 다양성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다. 다양성은 동일성 자체로부터는 유래할 수 없고, 이 동일성에 대립하여 동시에 이 동일성과 함께 현존하지 않을 수 없는 분열의 계기로부터만 유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계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자연 현상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이 공통적인 것은 명백히 분리하는 원리이고, 관통하는 이원성이며, 대립의 법칙이다. 셸링은 이것을 (자석과도 같은) 양극성의 원리라 부른다. 이 점에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대립의 쌍들의 항쟁이, 마치 진실로 〈전쟁〉이 만물의 〈아버지요, 왕〉으로 표현되듯이, 운동을 일으키는 자, 차이 나게 하는 자, 그리고 형성자이다─에 접근한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이 이미 존재자 일반의 전 영역을 통하여 그 모든 단계들을 결합하고 있다. 이 대립의 일치는 초월적인 것이요, 그것의 본질상 모든 인간적 사유를 벗어나 있다."(197)


"피히테의 의식에 관한 이론은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구성된다. 그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셸링은 제3의 구분지인 심미적 의식을 끼워 넣음으로써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인식의 철학 및 행위의 철학과 함께 예술의 철학이 등장한다. 이렇게 의식의 세계를 풍부하게 한 것은 셸링의 예술가적 천성 속에 뿌리박고 있기도 하고, 또 낭만주의 사회 속에서 획득한 이념과 자극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하다." "자연의 산출력과 주관의 산출력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창조적 정신이다. 자연은 대상의 실재적 세계를, 예술은 관념적 세계를 창조한다. 양자는 순수하게 생산적이다. 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통일적으로 일관된 예술품이요, 정신의 근원적인 무의식적 시(詩)이다. 그러나 예술품은 바로 소규모의 그와 같은 우주이고, 동일한 정신의 똑같은 계시이며, 단지 의식적으로 창조된 계시일 뿐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의식 속에서만 포괄적 동일성이 직접적으로 파악된다."(205-6)


"셸링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결코 세계 진행 속의 여타의 생기 현상과 같은 그런 이론적 대상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법칙성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법칙성으로 동화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자신 속에 인간적 결단의 자유를 포함하고 이 자유를 자연의 생기 현상으로부터 구별한다. 그러나 자연철학이 우주의 생기 현상 속에서 통일적 방향 또는 전개를 이끌어내어야 하는 것처럼, 역사철학은 인류의 생에서 진보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 속에서 실행되는 진보의 보편적 조건은 조건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는 탐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의로서 항상 동시에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의식의 관점에서는 필연성과 자유가 대립되지만, 절대자 속에서는 양자가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은 의식적 정신이 어떠한 지(知)로써도 도달할 수 없고 신앙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영원히 무의식적인 것이다."(214-5)


"예술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모방, 즉 모상들의 모사가 아니라, 신적 이념 그 자체의 상대물이며, 무기력하게 감탄하는 상태에서 자연의 배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넘어서서 자연을 고양시키는 것이며, 자연의 완성이요, 본질 그 자체─이것은 세계의 그 어느 곳에서도 혼합되지 않은 채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다─의 순수 직관이다. 예술의 자연과의 편차는 예술의 무력이 아니라 예술의 우월이다. 자연의 산물이 단지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그것을 예술은 영원한 것으로서─예술이 이 산물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고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이 자연의 산물을 그 순수한 존재 속에서, 즉 〈그것의 생명의 영원성 속에서〉 현상하게 한다. 예술은 자연이 결코 그러한 것일 수 없는 것, 즉 이념의 참된 현시(現示)이다." "셸링은 낭만주의와 철학적 관념론의 성공적인 종합에서 태어난 새로운 미학의 창조자가 되었고, 헤겔과 쇼펜하우어 및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에 대한 모범이 된다."(219-20)


4장 낭만주의 철학


"낭만주의는 본래 어떠한 신조도 원리도 아니고, 어떠한 목표도 과제도 아니며, 윤곽이 뚜렷한 사상이나 개념으로 구성된 어떤 체계 속에 자리잡을 그러한 것도 아니다. 순수한 낭만주의 그 자체는 결코 철학이 아니다. 창작이 거기에 보다 더 가깝다. 작가가 낭만주의의 가장 순수한 대변자이다. 셸링이나 슐라이어마허처럼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철학자들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의 단지 한 단편만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단편은 충분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이 전체일 수 없는 것은 사상의 구조가 생활의 어떤 태도 및 세계 이해─이것은 근본적으로 세계 감정이고 또 전체의 감정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다─의 전체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상은 반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세계에서 의도되는 것은 반성되지 않은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사상 진행이 아무리 반성되어 우리에게 자주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반성은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표현의 불완전한 수단일 뿐이다."(265-6)


"낭만주의는 특유한 방식의 생활 기분이다. 여기에 낭만주의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정서적 기분으로 동화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낭만주의는 개념적으로 파악불가능한 것에 대한 의식 속의 황홀경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개인의 유약함의 현상인 것이고, 자기의 눈앞에 떠도는 사실(事實)의 크기에 직면한 의식의 무력함일 뿐이다. 모든 기분의 가치 배후에는, 낭만적 문학이 우리에게 주선해 주는 것처럼, 내용적인 그 어떤 것, 생의 새로운 의미 및 실질, 아니 생 자체가 새로운 의미로 드러난다. 세계의 영원한 수수께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낭만주의자의 본질의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고, 또 이 본질 속에서 직접적으로 간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이 이 낭만주의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예술가의 행위는 무한자를 유한자 속에서 분명하게 현상하도록 하는 일이다. 존재는 숨겨져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마법의 지팡이이다."(266-7)


"낭만주의는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 신비와 유사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대한 자연스런 대립자이다. 천박한 합리주의의 무이념성, 〈상식〉을 통한 세계의 탈정신화에 대립해서 낭만주의는 영감을 받은 상태로, 영감을 부여하면서 등장한다. 낭만주의의 생은 전적으로 이념의 생이다. 여기에 낭만주의가 독일관념론의 철학적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 맺는 지점이 있다. 이 철학적 운동이 사변과 사상적 체계 속에서 추구하는 것을 낭만주의는 직접적으로 생활에서 찾는다. 오성적인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유용한 것, 실천적인 것은 낭만주의에서는 비현실적인 것,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그 고유한 본질이 보다 깊이 이해되면 될수록 이 본질은 더욱더 탁월한 것으로 생각되고, 더욱더 확정적으로 낭만주의 그 자체는 종교로서 파악된다. 낭만적 정신의 이와 같은 측면은 피히테의 지식학이 내면적으로 개조되던 시기에 그의 사상에서 생동하고 있던 그것이다."(268)


"형이상학에의 경향은 예술가적 창작의 충동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매우 유사하고, 양자는 어딘지 창작자의 영혼 안에서는 하나이다. 창작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일이고, 현실적인 것 너머에서 신성하게 부동(浮動)하는 상태이지만, 철학은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상적 포착이고, 파악이며, 간취(看取)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동일한 세계에 관계하고 있고, 동일한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 양자 속에는 이 양자가 하나로 있는 그러한 지점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 양자가 하나로 있는 그러한 인간이 존재한다. 이 통일을 자기 자신 속에 실현하는 일은 이 양자가 뿌리박고 있는 그 깊이의 문제일 뿐이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슐레겔이 동경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성취하는 것은 다만 〈개념적으로는 파악되지 않은 진리의 형상(形象)〉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동경을 자신 속에 있는 일종의 종교, 즉 무한성에의 경향으로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무한자는 예술과 철학의 공동 대상이기 때문이다."(283)


"슐레겔에 따르면, 철학의 본질은 직선적인 진보에 모순되는 것이다. 그것은 순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철학 속의 모든 것은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것이다. 〈중간으로부터의 시작〉이라는 것은 형상(形象)이 아니고, 방법이다. 철학자의 대상은 언제나 전체적인 것이고, 공존하는 것이다. 분리시키는 모든 작업은 여기서는 기술적인 것이다. 대상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파악하는 모든 작업은 대상을 중간에서 파악하는 일이거나─또는 전혀 파악하지 않는 것이다. 연관은 내적 연관이고, 모든 것은 자신 속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순환 철학의 이 개념 속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연관 역시 다만 전체로서 직관된 것이고, 모든 해명이란 것은 전체 속에서 직관된 것의 어설픈 노출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형이상학적 실재론] 속에 헤겔을 회상시키는 그 어떤 것, 적어도 후기의 헤겔적 체계의 의미에 있어서 가장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다."(285-6)


"노발리스를 횔더린─모든 것에 시작(詩作) 형식을 취한─과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극히 명백한 철학적 귀결과 그때그때 나타나는 고도의 개념적 명확성이고, 슐레겔과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변의 관념적 높이와 자연철학적 신비가 매우 우세한 점이다." "노발리스가 보기에,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비밀스런 작용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공동성에 의존하는 것이고, 자기 대화이며 내면적인 교신(交信)이다. 이 작용은 영혼의 비밀과 내면적 다원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자아에 〈관념적 자아〉, 즉 〈진정한 내면적인 너〉가 대립힌다. 그리고 〈최고의 정신적 및 감각적 교제가 발생하고, 최고의 정열이 가능하다. 천재는 어쩌면 그와 같은 내면적인 다원의 결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것이 이제 일종의 자기 계시, 자기 비평, 자기 접촉, 자기 입법적 운동으로 계속해서 특징지어진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의 품위와 의미는 상승한다."(312-5)


"노발리스는 결코 예술가와 예술가 아닌 사람 사이를 그렇게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는다." "철학자는 정신의 지배를 열망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시와 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슐레겔한테서보다도 노발리스한테서 더 강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활동성이란 계기, 즉 창조적인 것이 이 두 사람한테는 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을 또한 〈학문의 학문〉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러나 노발리스는 예를 들어 슐레겔이 순환철학의 이념 안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완결된 학문적 체계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본래적인 철학체계는 자유와 무한성, 또는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어떤 체계 속으로 들어온 무체계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에서는 인간 본성 및 도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규정성과 무규정성 사이에서 부동(浮動)하고 있는 동일한 관계임이 틀림없다. 철학의 본질은 따라서 가장 본래적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시(詩), 즉 절대적 창조이다."(327-9)


"철학적 동시대인 중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특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다만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낭만주의자 사회에 속해 있다. 그는 우정으로 슐레겔과 결합한다. 그는 그의 윤리관에 있어서 슐레겔로부터 자속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매우 다른 철학체계들의 특징을 서로 통일─이 통일은 틀림없이 피상적으로 절충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철저히 유기적인 것도 아니다─시킬 줄 안다. 이 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근원적인 시야의 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면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고, 또 낭만적-보편주의적 도야의 이상이다. . 슐라이어마허는 의식적으로 체계를 추구하였고, 그것을 세목에 있어서 놀랄 만큼 정교하게 수행할 줄 안다." "저 낭만주의자들은 본원적인 이념을 갖고 있다. 다만 체계적인 맥락이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반대로 그도 역시 기획하는 것, 즉 체계를 언제나 똑같이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이념들은 수합된 상태에 있다."(330-1)


"슐라이어마허에게 종교적 의식은 언제나 심미적 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러나 신앙을 담지하는 감정이 다르고, 예술적 창조 활동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 다르다. 이 다름을 규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감정의 대상에 대한 태도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감정은 자신으로부터 직관해 내지 않고, 형태를 산출하지 않으며, 생산적-대상적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헌신적인 것이다. 종교는 또한 계시의 일이 아니다. 계시 신앙은 이미 신의 계시하는 활동성을 안다. 우리는 사실 그와 같은 활동성에 관해서는 신의 그 밖의 본질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신성화된 전통도, 창조된 세계의 현존재도, 세계 속의 인간의 윤리적 과제라는 사실도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신을 가르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은 인식할 수 없고, 또 신에 관한 모든 지식은 그것이 직접적인 것이건 간접적인 것이건 간에 가상(假象)이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은 결코 신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 관한 이론인 것이다."(333-4)


제2부 헤겔


1장 헤겔의 철학 개념


"〈논쟁적(또는 〈형식적〉) 사유〉에서는 판단의 주어는 고정된 지반의 역할, 즉 〈토대〉의 역할을 하고, 이 토대에 내용이 술어의 형식으로 결합된다. 따라서 이러한 술어 속에서는 주어 그 자체는 결코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주어는 개념의 바깥에 머물러 있게 된다. 주어가 개념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그런데 주어는 개념 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아니 주어는 본래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개념 그 자체의 의미가 변경되어야 하고, 술어의 외면성은 사라져야 하며, 술어의 다양성은 대상 자체(주어)의 전개되어 가는 본질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대상의 이 본질─따라서 모든 비사변적 사유에게는 개념에 대해 영원히 외면적인 것 및 초월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바로 그것─은 개념 자체로서, 개념의 가장 내면적인 것, 즉 개념의 진리로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유만이 〈개념 파악적 사유〉이며, 따라서 사태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논쟁적 사유〉의 운명이다."(409)


"〈개념 파악적 사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개념은 대상의 고유한 자기─이 자기는 개념의 생성으로서 나타난다─이기 때문에, 이 자기는 부동의 상태에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정지적인 주어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자기의 규정을 자신 속에 회수하는 개념이다.〉 여기에 사태의 본질이 나타난다. 개념의 다른 모습, 즉 개념의 변증법적 모습이란 대상에 대한 개념의 관계이고, 모든 형식적인 것에 대한 피안의, 그리고 반대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판단이나 명제와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는 개념으로 하여금 맨 처음으로 개념의 규정에 좇아서 존재하게 되는 그것으로,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개념〉으로 만든다. 요컨대 개념이 파악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형식의 구조물이 아니라, 차이성과 대립을 두루 관통하는 형식의 다양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상태를 개념이 전개되어 가는 관통 자체로서, 〈운동〉으로서, 즉 생동성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409-10)


"헤겔에서 우리는 인식 불가능한 것을 은폐하거나 논박하는 일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되는 것, 즉 인식되지 않은 것 그 자체를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서 추구하는 방법, 또 이렇게 추구하는 가운데서 직접 문제를 전개하는 모범적인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방법은 출현하는 어떠한 모순되 회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순 자체를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어떠한 형식에서이건, 무조건 타당하게 하는 그러한 방법이다. 변증법은 바로 이 일을, 즉 모순을 발견하고 또 이 모순을 그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시인하는 이 일을 변증법의 일반적 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변증법이 모순성을 또한 다시 극복한다는 것은─적어도 변증법의 경향에 따라서─변증법이 모순성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한 이성의 개념들을 파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개념이 〈유동적인〉 구성물, 즉 사변적 개념이 되면, 오히려 비합리성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424-5)


"우리가 (헤겔) 논리학의 〈객관적〉 부분에서 처음으로 대자 존재라는 개념을 만나면, 그것의 의미는 외부에 대한 폐쇄성, 즉 단절되어 있음, 자립성 속에서 다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부른 합창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자 존재의 외적 측면일 뿐이다. 이 외적 측면 배후에는 〈대하여〉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또 다른 의미가 꽂혀 있다. 그렇게 되면, 〈대-자-존재〉는 자기 자신을 포착하는 존재, 따라서 자기 자신 속으로의 반성을 이미 거친, 그리하여 이제 이 반성을 자신 속에 보존하는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대자 존재는 그것이 완성되면 자기의식이 된다. 이것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대자 존재라는 것은 어떤 존재자가 그것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자기를 알면서 자신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안다고 하는 이 대자 존재라는 낱말의 그 의미심장한 뜻에 있어서 자기의식인 것이다."(434-5)


"그런데 우리가 어떤 존재자의 참된 존재론적 성질─따라서 존재자에 있어서 누군가에 대한 그것의 현상 방식만이 아니 그러한 것─을 그것의 〈즉자 존재〉라고 부른다면, 동일한 존재자의 대자 존재 속에는 실은 보다 높은 존재의 단계─이때 이 존재자가 〈즉자적〉이면서, 또한 〈대자적〉인 바로 그러한 것인 한에서─가 놓여 있다. 즉자 존재와 대자 존재의 이 종합을 헤겔은, 〈즉자-대자-존재〉라고 부른다. 헤겔에게 종합은 어떤 존재자 자신의 본질을 관통하는 자각적 통찰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존재자는 이러한 완전한 의미로는 하나의 자각한 본질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의 최고도의 정신적 형식에 있어서만 발견된다." "즉 모든 존재자는 정신적인 것의 이 최고의 형식에로 나아가는 경향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고, 또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의식에로 밀고 나아가며, 그 때문에 세계의 전체 단계 영역에 있어서 보다 낮은 단계가 보다 높은 단계 영역에로 이행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435)


"셸링의 동일철학에서 절대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무차별〉이다. 절대자는 또한 〈절대적 이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무차별자가 어떻게 차별지워지며, 또 어떻게 자연의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다. 사실 절대적으로 구별 없는 통일성에서 다양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셸링의 사변이 직면한 한계는 또한 플로티노스의 사유도 부딪혔던 한계이고, 모든 형이상학적 절대적 일원론의 약한 측면이기도 한 동일한 한계이다. 즉 일자 자체는 다수를 낳을 수 없는 것이고, 만알 다수를 낳을 수 있다면 일자는 이미 다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엄밀한 일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일자로부터 다양성이 유래하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셸링은 절대자에 관한 지(知)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사유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지적 직관〉에 마련함으로써 이러한 귀결에 대처하였다."(449)


"여기서 헤겔의 논리학이 시작된다. 모든 세계 이해의 가장 중요한 점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개념 파악적 사유〉가 지적 직관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적 직관이 설정하는 절대자라는 꾸밈없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고, 규정성을 갖지 않은 무정형(無定型)의 실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자한테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기 내 반성〉은 직접적인 것의 자기 투시(透視)이다. 이제 여기서 절대자의 내적 다양성을 볼 수 있게 되거니와, 사상(思想)은 비로소 이 다양성을 차례에 따라 방법적 운동에 있어서 편력(遍歷)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절대자의 본래적 개념은 결국 이러한 편력의 종말에 가서 비로소 설명되고 깊이 사유된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개념은 본래 이 개념이 〈정립〉되었던 단초에는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파악되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449-52)


"절대자의 술어들의 총체성은 내용상으로 이해하면 세계, 따라서 자연, 그리고 정신의 총체성─〈사태 그 자체〉(이 사태를 가장 넓은 의미로 이해해서)─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태〉는 오히려 사유하는, 그리고 철학하는 이성으로서 우리들 속에서 자기의 〈논리〉를 갖고 있는 그 이성이고, 또 모든 자연 및 정신의 형식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그 이념이며, 변증법적으로 노력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그 사상이기 때문에, 이 학문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의 대립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취되어야 한다. 또한 이 학문에 있어서는 객관과 주관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세계와 세계의식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학문은 모든 즉자 존재자들을 해명한 대자 존재인 것이다." "논리학의 대상은 모든 사물의 단초이고, 대상에 관한 지(知)로서의 논리학 자체는 모든 사물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논리학 고유의 대상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은 논리학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결합하며 현실화된다."(455-6)


"칸트는 형이상학에 이르는 통로를 우선 실천 이성에서 발견하였고, 피히테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당위에 기초를 둔 체계를 만들었으며, 셸링은 이 체계를 우주에 확장시켰고, 그리고 헤겔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완성하였다. 헤겔이 이 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철저한 귀결들을 칸트 자신의 명제(정립)로부터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비판의 명제들은 형식상으로는 부정적 명제들이다. 그러나 부정의 의미는 폐기가 아니고, 어떤 긍정적인 것으로의 전진이다. 부정이 긍정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의 힘〉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이다. 칸트가 부정을 시인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 속에 내재해 있는 부정적인 것의 힘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헤겔은 이 힘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한다. 그리고 이때 그의 수중에서 발생하는 것은 바로 칸트가 갈망했던 〈순수 이성의 체계〉, 즉 낡은 형이상학과 그것의 비판을 종합한 새로운 형이상학이다."(467-8)


2장 정신 현상학


"(헤겔에서) 주관은 자기의 객관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도 변화한다는 〈경험을 한다.〉 변화를 추적하는 철학자는 주관의 이 〈경험〉에서 이 경험에 관한 지(知)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 "피히테 역시 자아는 자기 자신과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표상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주시한다〉라고 되풀이한 그 표현은 이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는 이 사정이 역전되어 있다. 그는 결코 연역하지 않는다. 결과라는 거은 선취된 것이 아니고, 자기의식은 전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관이 〈경험하는〉 것, 주관에게 주어진 것에 철저히 의존하고, 그것이 이 소여성에 있어서 어떻게 현시(現示)되는가에 의존한다. 이렇게 그는 사실상으로 주관으로부터서도 객관으로부터서도 그 어떠한 것도 도출하지 않는다. 그는 현상을 단계적으로 발견하는 대로 단순히 이 현상들을 기술할 뿐이다. 그는 의식의 아래로부터 위로의 현실적인 〈현상론〉(현상학)을 부여할 뿐이다."(515-7)


"헤겔은 결코 시간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내면적 단계를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의 다른 의미로, 즉 시간적인 의미로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학문에 이르는 의식의 교양〉이 매우 확실하게 정신의 역사의 단계들에서 재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학의 서문에서 헤겔이 이 관계에 관하여 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문구를 알고 있다. 그는 여기서 〈특수한 개인들〉과 〈보편적 개인〉 간의 관계─여기서 그는 후자의 이름 아래에서 개인들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있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성 일반은 바로 모든 주관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사실상 어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개인〉이 현상학의 본래적 대상이다. 이 보편적 개인은 역사의 기체(基體)─역사 속에서 보편적 개인의 경험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고, 동시에 우리들의 의식의 보편자이다."(535-6)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의식의 두 대립된 형태들〉이 서로 상관적인 관계에 놓인다. 〈하나의 형태는 독립적인 의식이며, 이것에는 대자 존재가, 그리고 다른 형태는 비독립적인 의식이며, 이것에는 타자를 위한 생명 또는 존재가 그 본질이다.〉" "주인이나 노예는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한 관계뿐만 아니라, 물적, 자연적 존재에 대한 관계도 갖고 있다. 주인은 자기의 자연적 존재, 즉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것이 그를 주인으로 만들었다. 노예는 자연적 존재를 위하여 자기의식을 포기하였다. 그는 물적인 것을 〈자립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속에서 비자립적으로 되어 버렸다. 그는 그의 자기 속에 사로잡혀 있다. 〈주인은 자립적인 존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노예에 관계한다.〉" "주인은 이 물적 존재(物的 存在)를 지배하는 위력이다. 동시에 이 (물적) 존재는 타자를 지배하는 위력이므로, 주인은 이러한 추론에서 이 타자를 자기 아래에 예속시킨다. 물적 존재는 노예의 사슬이다."(553-4)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관계가 바뀌게 되는, 그리하여 예속 상태로부터 노예가 고양되기 시작하는 그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인은 자신과 물적 존재 사이에 있는 노예에 명령하고, 자신을 위해서 노예를 노동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노예에게 이 물적 존재의 〈가공(加工)〉을 맡기고, 이 존재의 〈향유〉만은 자기의 것으로 한다. 〈욕망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것이 달성되고, 동시에 완성되며, 항유함으로써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완성되는 일은 쌍날의 것임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자립성〉에 대한 주인의 태도는 그와 동시에 순전히 수동적인 태도, 따라서 사실은 〈예속〉의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노예의 태도는 능동적인 태도, 따라서 자립성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자신 사이에 노예를 끼워넣는 주인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만 사물의 비자립성과 결합하고, 사물을 순전히 향유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립성의 측면을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맡긴다.〉"(554)


"자기의식은 이렇게 주인의 인격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노예에게는 주인의 대자 존재가 그 본질이다. 노예 자신은 수단이다.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 주인의 행위이다.〉 그러나 노예는 인정하는 의식이고, 주인은 인정받은 의식일 뿐이다. 따라서 주인의 대자 존재는 자기의 본질적인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노예의 〈비본질적 의식〉 속에, 이에 못지않게 자기의 〈비본질적 행위〉 속에 존립한다. 〈따라서 자립적인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이다.〉 이것은 전체적인 관계의 내적 모순이고,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이 전체적 관계 속의 불안정한 요소 및 해체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주인의 지배가 이 지배의 본질이고자 한 그것의 전도된 것〉(즉 예속성)임을 나타낸 것처럼, 〈노예의 신분 역시 이 신분을 완성시킴에 있어서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존재했던 그 내용의 역(逆)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 속으로 도로 밀려든 의식으로서 자신 속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자립성으로 역전된다.〉"(554-5)


"자기 자신과의 모순 속에서 자기의식은 〈이중화〉되어 있다.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 속의 이중적인 것이다. 이전에는 두 개별자(주인과 노예)에 할당되었던 것이 지금은 하나 속에 존재한다. 이 이중화는 실은 〈정신의 개념 속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양 측면의 통일성이 결여해 있는 곳에서는 의식은 지리멸렬하고 〈불행한 의식〉이 된다. 이중화의 특징이 되는 것은 가변적 의식과 불변적 의식으로의 양분이다. 전자는 인간이 대자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이 피안의 존재인 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차안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가치 없고,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덧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된다. 피안의 것에는 인간의 희망과 동경이 해당된다." "의식은 그 자신이 본질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자기의식은 하나의 확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부서진 자기 확신〉인 것이다."(558-9)


"의식은 자기의 대상에 대해서 사유하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면서 태도를 취한다. 의식은 〈사유 곁을 지나갈 뿐이고, 기도(祈禱)인 것이다.〉" "〈이 무한한 순수 내면적 느낌도 분명히 그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이 대상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대상은 어떤 낯선 것으로서 등장한다.〉 의식이 다만 기도(祈禱)로서 머무는 한, 어쨌든 의식은 자기의 본질과 동류이다. 그러나 의식의 경향은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의식의 고유한 무능력은 그에게는 유죄와 모독으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의식은 자신과 싸우고, 금욕하고, 고행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한다. 그의 태도는 의심을 품은 채 자기 자신을 망보는 것이 된다. 그 결과는 〈자신과 그 조그마한 행위에 한정된, 그리고 고심하면서 사유하는 초라한 만큼 불행한〉 위축된 〈인격〉이다." "의식이 자기기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의식은 동시에 그 자체에 있어서 이 자기기만의 지양을 경험하게 된다. 의식은 자신에 되돌아와 있음을 발견한다."(559-60)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이 되돌려지는 피안이란 것이 의식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의식 자신 속이 있음을 의식이 발견한다면, 의식은 피안 자체를 지양하게 되고, 피안 속에서 다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도달하게 되는 일은 관념론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이성의 관점을 증명해 준다. 이때까지의 〈타재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로 전환한다. 자기의식은 세계를 희생한 대가로서 자기를 구원하고 보존하는 일을 중지한 것이다. 자기의식은 세계를 다시 자신 속에 수용한다. 〈자기의식은 자신을 확신하는 이성으로서 세계에 대한 평온을 받아들였고, 세계를 견뎌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실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있거나, 또는 모든 현실성이 자기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님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의 사유는 직접적으로 그 자신 현실성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관념론이 현실성에 관계하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560-1)


3장 논리학


"현상학의 서문에서 예고되었던 내용이 이제야 나타났다. 〈학문의 생성〉의 길이 실현된 것이다. 의식이 자기의 대상과 자기 자신에 있어서 겪어야 했던 긴 경험의 계열이 편력된 것이다. 의식은 그 자신이 자기의식임을, 자기의식은 그 자신의 이성임을, 이성은 그 자신의 정신임을, 그리고 정신은 그 자신이 그 자신에 대한 개념적 파악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현상하는 지(知)〉의 현시(現示)는 〈실재적 지〉에로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실재적 지를 이제 완성해야 한다. 이 과제가 나타남으로써 이 연구는 현상학의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학〉이 착수할 일이다. 그러나 현상은 필연적으로 현상 속에 계시되는(〈현상하는〉) 어떤 존재자의 현상이기 때문에, 즉 모든 외면적인 것은 어떤 내면적인 것의 외적 표현이기 때문에, 논리학은 그 귀결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시 현상학의 내용을 이루었던 바로 그 동일한 형태의 계열, 즉 철학의 체계의 구성 요소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603-4)


"논리학의 대상은 절대자이다. 독일관념론의 근본 사상은 절대자가 이성이라는 것이다. 절대자는 의식이 아니다. 의식은 이차적인 것이다. 이성은 의식 이상의 것이다. 이성은 의식 없이 모든 존재자 속에, 또한 가장 시원적인 것 속에도 존재한다고 이미 셸링이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셸링은 우리가 어떻게 이성 속으로 개념적으로 파악하면서 파고들 수 있으며, 또 시원적인 것으로서의 이성을 이차적인 것으로서의 의식으로써 밝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절대자가 이성이고, 우리의 사고도─적어도 철학적 사고가─이성이라면, 우리가 순수한 사유, 즉 사유의 〈논리〉에로 상승하는 그곳, 곧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절대자가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절대자는 실로 의식은 아니지만, 절대자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 의식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식하는 자와 인식된 자는 동시에 실재하는 것으로 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유는 바로 절대자를 그 자신이 파악하는 것이 된다."(604-5)


"사상과 사실, 개념과 존재자는 동일한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논리학과 〈진리〉로서의 논리학은 동일성의 두 측면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한 측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상은 〈자신을 전개하는 순수한 자기의식〉─어떤 타자가 아닌 〈자신〉을 전개시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단순히 즉자 존재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자적 존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사실은 동일한 자기의식이요, 동일한 절대자의 동일한 전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관찰이 어느 측면에서 시작하건 그것은 실제로는 상관이 없다. 관찰이 사실로써 시작하건 또는 사상으로써 시작하건, 관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전체에로 귀납된다." "관계의 양 측면은 물론 자신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반대 측면을 갖고 있다. 이것이 왜 사유에 관한 학문이 사상으로서의 사상을 다룰 필요가 없는지 하는 이유이다. 사유에 관한 학문은 순수한 사상〈이다〉라는 사실로서 충분하다."(609)


"범주는 절대자가 자신을 규정하는 술어들이다. 현상학의 서문은 그러한 술어들의 역할을 확실하게 확립하였다. 가능한 판단의 주어로서의 절대자는 술어 없이는, 그리고 술어에 〈앞서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이 어떤 규정들로 윤곽 지어지기 이전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 모든 사유는 규정성에 구속되어 있고, 그리하여 술어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주어는 술어에 선행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술어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때 주어가 무엇〈인지〉를 술어가 비로소 말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절대자가 그 술어에로 전개되는 곳에 일체의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절대자는 각 단계에서는 정확하게 그것의 술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이다. 〈단초〉는 공허한 것이고, 실체적인 것을 언표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즉 〈절대자에 관해서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절대자는 종말에 가서 비로소 그것이 진리 속에 있는 바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타당하다."(617-8)


"헤겔의 논리학에서 범주는 실제로 거대한 유기체의 기관으로 간주된다. 고정된 오성 개념의 경직성에 대립하고, 또 이 오성 개념의 논리적인 타성의 힘과 끊임없이 투쟁하여 생명력을 표현하는 많은 비유들─예컨대 운동, 출현, 이행, 귀환, 자기내 반성, 재귀, 원환, 소멸, 등장, 유동, 그리고 수많은 여타의 것들─은 결코 단순히 비유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유동화(流動化)라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고, 정의 내려진 개념들은 실제로는 단지 불충분한 긴급 명령에 불과하다. 거대한 노선의 관통하는 역동성은 다른 개념들을 요구한다." "수많은 방법으로 절대자에 접근해 가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자기의 현실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에 대한 사색, 이 발전 과정에 직면하여 헤겔이 수행하는 시원적 행위는 마지막 항(項) 뿐이다. 즉 역사적 사유가 이 발전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체계의 형식으로─인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제가 해결되는 형식은 변증법이다."(621, 627)


"〈학문의 단초(端初)는 무엇으로써 시작되어야 하는가?〉 모든 체계적인 사상은 맨 먼저 이러한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최초의 사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아직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이 생성되어야 한다. 단초는 순수 무(無)가 아니라, 거기로부터 그 어떤 것이 출발해야 하는 그러한 무이다. 따라서 존재는 역시 이미 단초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단초는 양자, 즉 존재와 무를 포함하고, 그리하여 존재와 무의 통일인 것이다─또는 동시에 존재인 비존재이고, 또 동시에 비존재인 존재이다.〉" "〈대립된 것인 존재와 비존재는 따라서 단초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합일된 상태로 있다. 또는 단초는 이 양자의 구별되지 않은 통일이다.〉 거기로부터 단초 속에는 존재와 비존재 그 자체의 모순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구별된 존재와 구별되지 않은 존재의 모순도 놓여 있다는 결과가 생긴다. 단초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680-2)


"그러나 사상(思想)에 요구되는 바는 바로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어떤 적극적인 것으로서 사유하고, 이 동일성의 개념을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만약 우리가 이 양자 속에 어떤 공통된 적극적인 것을 지적할 수 있다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분명히 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존재와 무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양자의 변증법에 있어서이다. 말하자면 변증법적으로는 존재는 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존재는 무로서 증명되었고, 따라서 이 증명 속에서 무로 이행하였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진리인 것은 존재도 무도 아니고, 존재는 무로, 그리고 무는 존재로─이행하는 것이 아니라─이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으로 양자의 이원성과 대립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의 공통된 것, 즉 이행─물론 초시간적으로 이해된─그리고 연결, 유동, 운동 및 연속체의 한 계기, 따라서 현저히 긍정적인 것이 강조된다."(683-4)


"진리는 양자의 〈무구별성〉(동일성) 속에도, 구별성(비동일성) 속에도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주지하다시피 양자가 합일하여 있는 어떤 제3자, 즉 문자 그대로 실재로 모순되는 것(존재와 무)의 공존일 뿐만 아니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인 그러한 어떤 것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도, 그 비동일성도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진리〉는 〈각자가 직접적으로 그것의 반대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어떤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오래되고 잘 알려진 〈생성〉이란 개념 속에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생성〉을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의 운동─따라서 비존재의 존재로서의 이행과 존재의 비존재에로의 이행─으로 묘사하였다. 최초의 인물로서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이 두 길은 하나이요 동일한 생성은 동시에 발생과 소멸이다. 그것은 두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일자의 소멸은 타자의 발생인 것이다."(684)


"〈정재〉(定在)는 이행동작(移行動作)이 사라지고, 존재의 휴지(休止)가 회복된 새로운 존재 형식이다. 헤겔은 이 걸음걸이를 〈생성의 지양〉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실은 소멸과 보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즉 계기들은 모두 보존되지만,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으로서 변화된 것이고, 여전히 재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다른 규정성에 있어서이다. 이 계기들에서 사라지는 것은 생성 그 자체의 불안정이다. 이러한 사정은 변증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즉 생성은 자기의 계기들(존재와 무)을 지양하면서 역시 자기 자신도 지양한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계기들의 소멸은 생성의 소멸이다. 그러나 생성은 〈버팀이 없는 불휴(不休)〉이기 때문에, 생성은 자기의 소멸 속에서 〈정지한 결과 속으로〉 붕괴된다. 이 결과 속에서도 역시 존재와 무의 대립이 존속하지만, 그러나 발생과 소멸의 역학에 있어서가 아니다. 〈정재는, 그것의 생성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비존재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691)


"유한성과 무한성이 진행 속에서 교대로 나타나는 것은 순환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순환은 하나이고, 유한성과 무한성은 순환 속의 계기들이며, 양자는 순화 속에서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아오며, 각자는 타자를 자신 속에 포함하면서 타자를 넘어선다. 이렇게 전체는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양자의 특성 자체를─우리가 어떠한 출발점에서 매개 자체를 적용하는가에 따라서─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들 양자,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그 자체 진행의 계기들이기 때문에, 양자는 공동으로 유한자이고, 그리고 양자는 똑같이 공동으로 진행과 결과 속에서 부정되기 때문에, 양자의 저 유한성의 부정으로서의 결과는 진실로 무한자라고 불린다.〉" "대체적으로 윤곽 지어 보면, 절대자는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는 절대자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는 글자 그대로 〈대자적〉이다. 즉자 존재는 그것의 대자 존재에 도달한 것이다."(710-3)


4장 논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체계


"헤겔 철학이 세상에 선사한 풍부한 사상재(思想財)에서 〈객관적 정신〉이란 개념은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풍성한 결과를 생산하게 된 그러한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객관적 정신 개념은 체계의 귀결도, 변증법적 사상 진행의 산물도 아니다. 과연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사변적 학설 개념도 아니고, 소박한 기술적(記述的)인 개념이며, 관점에서 독립해서 언제나 제시되고, 서술되는 어떤 기본 현상에 대한 철학적 정의이다. 요약하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직관된 것이고, 완전히 그것 자체에 의존하는 헤겔의 발견이다." "헤겔은 처음부터 정신철학자이다. 초기의 저술들, 즉 현상학, 논리학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정신은 그에게는 마찬가지로 명백히 처음부터 객관적 정신─비록 이 술어는 겨우 조금씩 확고해진다 할지라도─을 의미한다. 즉 정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의식이 아니라, 보편자, 개념, 이념─이 이념이 그 객관적인 실현에 있어서 실재적 세계의 참된 내용인 한에서─이다."(822-4)


"객관적 정신은 우리들 모두가 그 속에 서 있고, 출생, 교육, 그리고 역사적 위기가 우리들을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게 하는 정신적 영역이다." "우리들은 어느 시대의 정신적 방향과 흐름에 관해서, 그 시대의 경향, 이념, 가치에 관해서, 그 도덕, 예술, 또는 학문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이것은 그 발생과 소멸, 따라서 그 생명을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시간 속에서 가진다─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들을 역사적인 개체 그 자체─마치 이 현상들이 단순히 개체의 것들인 것처럼─에 결코 돌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구체적으로는 선명하게 각인된 이러저러한 대표물에서 가장 쉽게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표물이 단지 대표물일 뿐임을 알고 있고, 이 대표물 속에서 뚜렷하게 새겨지는 저 정식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이 대표물의 것도 아니고, 또 내용적으로 대표물로 되는 것도 아님을 안다."(824-5)


"객관적 정신은 또한 현재의 생활 속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들의 시대의 지식〉에 관해서 명백하게 말한다. 개별자는 이 지식에 관여하고, 배우면서 이 지식 속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한다. 그러나 이 지식은 결코 개별자의 지식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식에 계속 종사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온전하게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전체적인 것, 관계를 맺는 것, 통일적으로 계속 전개하는 것, 자기의 질서와 법칙을 가진 어떤 형성물이다." "동시에 그것은 실재성에 속하는 모든 것, 즉 성장, 발전, 전성(全盛), 그리고 쇠퇴 등, 시간적 발생을 가지고 있는 철저히 실재적인 것이다. 객관적 정신의 실재성은 개인들의 실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객관적 정신의 생명과 지속이 개인들의 생명 및 질서와는 다른 것인 것과 같다. 객관적 정신은 개인들의 교체 속에서 지속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실재하는 것, 자기 방식의 존재자, 즉 객관적 정신이다."(825-6)


"그러나 객관적 정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객관적 정신이 실로 정신적인 보편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보편적 의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공동체는 의식적인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작품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법, 도덕, 습속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국가 의식, 법의식, 인륜적 의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별적 주관에 있어서일 뿐이다. 객관적 정신은 자기의 의식을 그 자신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들 속에, 즉 주관적 여러 정신 속에 가진다. 그러나 이 의식은 그에게 적합한 의식이 아니다. 객관적 정신은 분명히 보편적, 대우주적 정신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의식은 결코 보편적, 대우주적 의식이 아니다. 헤겔은 이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객관적 정신은 절대적 이념이지만, 그러나 단지 즉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객관적 정신은 그와 동시에 유한성의 토대 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현실적인 합리성은 이 유한성에 외면적으로 현상하는 측면을 지닌다.〉"(827-8)


"비록 인간은 맹목적으로 역사 속으로 몰려 들어간다 할지라도, 역사는 맹목적 생기현상(生起現象)이 아니다. 역사는 이미 역사 안에서 〈실체〉로 전제된 어떤 것이 목적에 따라서 행하는 실현인 것이다. 이렇게 방향을 잡은 존재는 어떤 외적인 숙명처럼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내적 방향이고, 역사의 자기 결정이며, 역사 속의 실체적 본질─이것은 동시에 실재적인 것으로서 현시된다─의 자발적인 창조 활동이다. 이 실재적인 것, 시원적인 것, 실체적인 것,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자가 객관적 정신이다." "정신의 위대한 긍정적인 창조물, 즉 법, 국가, 현존하는 도덕에서 사정은 역사에 있어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는 동일한 객관적 정신을 다만 다른 측면으로부터, 즉 객관적 정신의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이 역사 속의 본래적 시간성을 도외시한다 하더라도, 역사란 결국 자기의 단계들로 구별 지어진 객관적 정신의 전개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833)


"우리는 헤겔의 윤리적인 기본 관점을 현상학으로부터 알고 있다. 이 기본 관점에 의하면 참된 인륜성은 일체의 형식에 있어서 공동 사회 및 공동체의 일이고, 따라서 개인은 인륜성을 다만 공동 사회의 구성 요소로서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륜성은 마치 법 관계라는 외면성으로 몰리는 듯이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법이 인륜적 정감 작용의 제도이고 창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물은 창조하는 힘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산물이 아니고, 이 창조하는 힘의 고유한 생명이며, 그 정재(定在)의 형식이다. 또는 헤겔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법은 〈자유의 정재〉, 자유의 자기실현, 또는 자유에 있어서의 객관적인 것, 〈제2의 자연〉,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자유이다." "시원적으로 법은 오히려 〈자기의 정재 속에 있는〉 자유 그 자체이고, 객관적 정신의 실존 형식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이념인 것이다."(845-6)


"심정의 순수한 내면성으로서의 도덕, 그리고 형식적 법의 객관에 대한 주관성의 반정립으로서의 도덕은 아직도 본래적인 인륜성이 아니다. 인륜성은 최초로 이 형식적 법의 객관과 주관성의 종합이다." "헤겔이 논리학의 변증법적 원리를 그 증거로 끌어 들이는 이 이행(移行)은 인륜성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올바른 심정이 현존한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은 심정에 있어서도 현실적이어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심정도 역시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의 현실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또는 헤겔이 그것을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인륜적인 것은 주관적 심정이지만, 그러나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심정인 것이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불안정한 심정을 갖고 있는 인간은, 어떤 보편적인 것의 실체적 현실이 인간 속에 그것의 형식을 창조하는 한에서만, 이 실현을 객관 속에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인륜성의 외면적 형식은 국가라는 초개인적 형식인 것이다."(872-5)


"〈인륜적 현실성〉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공동적, 그리고 계통적으로 조직된 세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인륜적 현실성이 바로 국가이다. 자유는 자의가 아니다. 자유는 실체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인지하는 의욕과 행동인 것이다. 개인의 여러가지 자유는 국가의 제 법칙이다. 〈실제로 각각의 참된 법칙은 자유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객관적 정신의 이성 규정, 따라서 자유의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인륜적 현실성은 개인이 그 위에서 자라나고, 또 개인을 도덕적으로 바르게 실제로 맨 먼저 산출해 내는 실재적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자연적 생명이 유(類)의 생명 속에 놓여 있는 상태와 유사하다. 외견상으로는 개인들이 실재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개인들 안에서 보다 더 큰 통일적인 유의 생명이 실현된다. 다만 보편적 실체에게는 대자 존재가 결여해 있을 뿐이다. 정신의 영역에서는 이 대자 존재가 주관의 소유로 돌아간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개인에게 이념이 반영(反映)된다."(880-1)


"절대자는 이성이라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기본 명제는 어떠한 영역에서도 역사철학의 영역에서처럼 그렇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헤겔의 역사관은 순전히 목적론적 관점이다. 역사는 그 속에서 객관적인 〈세계의 궁극 목적〉이 일체의 생기현상을 지배하는 목적 지향적인 전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궁극 목적은 객관적 정신의 대자 존재, 자기-자신-에로 도달함, 즉 객관적 정신의 자기 파악이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객관적 정신의 자기실현인 것이다. 그 때문에 세계사는 〈이성의 형상(形象)과 업적〉이다." "헤겔의 해석에 따르면 역사 과정이란 부정적인 것의 바로 이 전진하는 소멸이다. 또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이 역사 과정은 자신을 인지하는 정신의 점차 순수해지는 자기 서술이다. 이 속에 놓여 있는 낙천주의는 분명히 인간적-행복주의적 낙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역사는 지복(至福)의 실현이 아니라, 이성의 실현이다. 이것은 모든 가치의 가치이다."(896-9)


"헤겔은 총괄적으로 역사 진보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이 진행의 결과는, 정신이 자신을 객체화하고, 이 자기의 존재를 사유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의 규정성을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존재의 보편자를 파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원리에게 어떤 새로운 규정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민족정신의 실체적 규정성은 변경되어 버린다. 즉 민족정신의 원리가 어떤 다른, 그리고 실로 보다 높은 원리로 상승된 것이다.〉 이행과 상승의 이 형식이 헤겔 역사철학의 핵심 사상이고, 헤겔 자신의 규정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의미 이해의 열쇠인 것이다. 역사 전진은 내면적인 〈변화라는 개념의 필연성〉이요, 변증법의 논리적 진행이 나타내는 것과 동일한 구조를 나타내는 전진인 것이다. 정신이 어느 민족한테서 성숙시키는 열매는 이 열매가 태어난 그 민족의 품안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민족은 저 열매를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이 열매는 그 민족에게는 쓴 음료가 된다.〉"(910-1)


"이 열매는 다시 씨앗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민족─이 민족을 성숙시키기 위한─의 씨앗이 된다. 정신이 할 일은 자기의 본질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단계를 밟아서 완성되는 일이다. 세계정신에 비추어서 헤아려 보면, 제 민족정신이 이 단계들인 것이고, 〈세계정신의 실현을 완성하는 자〉인 것이다." "이렇게 전진함에 있어서 세계정신은 자신에 맞게 세계를 만든다. 세계정신의 관점 아래에서는 세계사는, 현실성으로 되는 실재적인 것이 또한 언제나 그때마다 이성적인 것이 되는 참으로 〈신적인 과정〉인 것이다. 정신은 그 자신을 〈일정한 형태로서〉 산출한다." "세계정신은 말하자면 역사적인 민족들한테서─자기의 무의식 상태인 어둠을 벗어나서 대자 존재에로─암중모색하면서 전진한다. 과정 그 자체가 차츰 가시적으로 되고, 의식적으로 목표를 지향하게 되면서, 어떤 민족정신은 다른 민족정신에게 길을 비켜 준다."(911)


"역사는 역사 속의 정당한 것과 더불어 그 자신 대단히 정당하다. 그리하여 개인 또는 심지어 개별 민족의 운명에 있어서의 비극성도 역시 역사 속에서는 여전히 정당화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고, 사적(私的)인 행위와는 외견상으로 무관계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을 이 역사의 자기 초월의 수단으로 만들 줄 알기 때문에, 역사는 동시에 세계사이요, 세계의 법정이다." "역사적 지식은 정신적 존재의 한 형식일 뿐이다. 그리고 역사적 지식 자신도 다시 자기의 역사를 가진다. 모든 역사적 지식에는 그것의 시대, 그것의 민족, 그것의 정신적 원리 및 지평의 정신적 친자 관계가 뚜렷하게 각인된다. 그것은─마치 객관적 지식이 자기 자신을 찾아서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처럼─객관적 정신이다. 객관적 정신은 이 발자취가 그 속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모든 오류와 사로(邪路)의 기초에 놓여 있다. 객관적 정신은 또한 역사 법칙의 기초가 되어 있기도 하다. 객관적 정신에게도 역시 역사는 세계의 법정이다."(918)


"신과 인간─이것은 가장 내면적인 변증법적 관계이다. 따라서 이 관계─이 관계는 모순이다─는 모순의 역학의 기저에 놓여 있다. 이 모순의 역학은 종합으로, 〈타자〉의 자기 해소에로, 신 속으로의 귀환에로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진정한 변증법에서 그런 것처럼, 출발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은 자기 자신을 인간 속에서 다시 보존한다. 그것은 신의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이렇게 하여 신은 비로소 대자적으로 된다. 즉 그것은 신이 인간의 인식 속에서 그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현실성은 신의 대자 존재 속에 존립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매개로 하여 비로소 현실적으로 된다. 이렇게 하여 계기들이 서로 바뀐다. 그리고 계기들의 서로에 대한 자립성은 가상(假象)으로서 가면을 벗는다. 〈신은 또한 유한자와 똑같고, 자아는 무한자와 똑같다.〉 이것은 신은 오로지 종교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한 철학의 엄격한 공식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기 때문이다."(944-5)


"정신, 인간, 즉 신의 힘이 자신에로 도달하고 또 〈대자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은 종교 그 자체의 정신이요,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 있어서의 종교의 현실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헤겔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독일 신비주의의 핵심 사상에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 헤겔은 이 일을 의식적으로 행하고, 그리고 그것의 증거로서 신비주의의 고전적 인물인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한다. 〈신이 나를 보는 눈은 내가 신을 보는 눈이다. 나의 눈과 신의 눈은 하나이다. 의로운 일에 있어서 나는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은 나 안에서 그 무게가 헤아려진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쉽사리 오해되는 일이요, 또 단지 개념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이를테면 일정한 종교의 정신이 아니라, 종교 일반의 정신이다."(945-6)


"헤겔의 체계는 최고의 대상으로서의 종교에서가 아니라, 체계 그 자체인 것, 즉 철학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헤겔에게 철학의 철학은 철학 곁에서가 아니라, 철학 안에서 그것도 어떤 특수한 분과 속에서가 아니라, 전체의 전개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이 전개가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서 원으로 완결된다는 것, 우리가 절대정신의 정점에서 다시 절대자의 저 시원적(始原的)인 범주─이 범주로써 논리학이 시작되었다─에 도달한다는─이 모든 것은, 이제 투시할 수 있고, 자명하다는 기분이 든다. 이러한 결과는 지나온 길 그 자체에서 매우 명확하게 발생한 것이다. 다만 이 원리는 그것이 자기의 본질─세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정신의 본질 속에서 완성된 상태로 재발견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 원리의 명제는 물론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고, 또 그런 명제로 지속한다. 체계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명제를 단지 그 귀결에서─대상의 단계들의 긴 계열을 통하여─미리 지시할 뿐이다."(9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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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합본, 양장) 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지음, 윤형식 옮김 / 이학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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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우리는 철학적 문제를 고려할 때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①질문 ②논변(들) ③답변 ④함축(들) 이중에서 제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꼽으라면 답변이 될 것이다. 적어도 답변은 다른 요인들에 비추어서만 유의미해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탈레스의 〈모든 것은 물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탈레스가 '변화'하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루어주는 원천인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탈레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 물었다. 실체(근저에 놓여 있는 것)는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요소와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②탈레스는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간접적 답변을 제시하였다. 즉 우어슈토프(물)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후 실체 문제와 변화 문제는 그리스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21-3)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항상 변화 속에 있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①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 그러나 ②변화는 불변의 법칙(로고스)에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③이 법칙은 대립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④그러나 이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집은 그와 같은 변화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 당분간, 즉 수년 이상 건설적 힘이 파괴적 힘보다 더 우세하고, 이 상황이 지속되는 한 집은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힘들 간의 균형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어느 날 파괴적 힘이 우세해지면, 집은 무너질 것이다. 중력과 부식의 힘이 반대되는 힘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즉 모든 변화하는 사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이것들을 지탱하는 기본 원리는 힘들 간의 상호작용이며, 이 힘들 간의 균형은 법칙, 즉 로고스에 따라서 변화한다. 근저에 놓여 있는 실체는 우어슈토프가 아니라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다양성 속에 숨겨져 있는 통일성이다."(32-3)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것도 변화 속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상정하였다. 이성은 변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감각기관은 변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형적인 그리스인인 파르메니데스는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성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이 옳고,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를 기만한다." "달리 말해 이성은 실재가 정지해 있으며 통일성이라고 인식한다. 감각기관은 우리에게 변화 속에 있고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실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 구분 혹은 이원론은 플라톤과 같은 여러 그리스철학자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이원론자들과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감각기관에 현상하는 모든 것이 실재를 결여하고 있다고 볼 정도로 감각기관과 감각 가능한 대상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감각 가능한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일원론'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36-8)


"3세대 그리스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고도 하고 변화는 불가능하다고도 주장하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와 맞서야 했다. 달리 말해 이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이를 매개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중재적 철학자들로 불린다. 엠페도클레스는 불, 공기, 물, 흙이라는 4원소(혹은 불변적인 우어슈토프)와 두 가지 힘, 즉 나누는 힘(미움)과 묶어주는 힘(사랑)을 상정하였다." "4원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불변적이다. 결코 이 넷보다 더 많거나 적을 수 없다(양적으로 불변). 4원소는 항상 그것들만의 고유한 특성을 보유한다(질적으로 불변). 그러나 이 4원소의 상이한 분량들이 (묶어주는 힘의 도움을 받아) 합쳐지는 것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엠페도클레스는 변화와 변화가 불가능한 것 모두를 포함하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변화하는 것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사물〉이고, 불변적인 것은 4원소의 양과 속성이다."(40-1)


# 아낙사고라스는 엠페도클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유했으며, 다만 원소들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바로 그 단순성 때문에 천재적이다. 오직 단 한 가지 유형의 우어슈토프만이, 즉 더 이상 분리가 불가능한 작은 입자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빈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데, 이것들의 운동은 전적으로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데모크리토스가 우주 전체를 그 다채로움과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수의 아주 작은 물질 입자들이 빈 공간 속을 돌아다니고 모든 위치 변화가 충돌에 의해서 결정되는 하나의 거대한 〈당구 게임〉으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빈 공간, 즉 비非존재는 존재, 즉 원자들의 운동의 전체 조건이다. 이것은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제자들과의 명백한 단절이다. 이 원자들은 물리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었다(그리스어: 아토모스atomos[나눌 수 없는]). 원자는 연장延長, 형태, 무게 등과 같은 물리적 개념들로 서술될 수 있는 양적 속성들이며, 색깔, 맛, 냄새, 고통 등과 같은 질적 속성들이 아니다."(44-5)


"초기 그리스철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이다. 이들의 기본 사상은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구조와 형식 혹은 수학적 관계들을 바탕으로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은 수학을 통해 〈빗장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적 구조가 모든 사물의 근본이라고(실체라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논변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사물들은 사라지지만 수학적 개념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 속에서 '불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 지식은 그 대상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다. 나아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수학적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나온다." "비록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을 정당하게 합리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수학이 이성을 통해서, 그러나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 신비로운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플로티노스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처럼 합리주의적인 신비주의자들이었다."(49-51)



제2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그리스철학자들이 제기한 첫 번째 물음은 자연, 즉 퓌시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략 기원전 600년에서 450년까지의 그리스철학 제1기를 〈자연철학적 시기〉라 부른다. 그런데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싹튼 시기와 같은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즈음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만 종종 잘못 논증된 자연철학적 사변에서 지식에 대한 회의적 비판과 지식 이론으로의 변화가, 〈존재론ontology('존재의 이론', 그리스어: 토온to on[onto] = '있는 것/~인 것', 로고스logos = '이론')〉에서 〈인식론epistemology('지식 이론', 그리스어: 에피스테메episteme = '지식[앎]')〉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인식론적 반응 외에 우리로 하여금 이 시기를 인간 중심적 시기라고 부르게끔 하는, 인간을 향한 또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다. 즉 이제야말로 윤리적-정치적 물음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인간은 이제 사유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로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54-7)


"소피스트들은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후기 소피스트가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론(〈확실한 지식은 없다〉)에, 윤리적-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보편타당한 도덕성이나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일례로 고르기아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고 전해진다. ①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②무언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알 수 없다. ③앎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이러한 세 가지 극단적 언명은 철학이 무의미하다는 논증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사유의 일부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을 순전히 설득의 방법으로만 활용하는 입장을 채택했을 수 있다. 더 이상 참된 지식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합리적 토론과 합리적 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남는 것은 오로지 설득의 기술뿐이다."(60-3)


"소크라테스에게 덕(아레테)은 어떤 면에서 앎(에피스테메)과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개념적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호한 개념들─정의, 용기, 덕, 좋은 삶 같은 개념들─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앎을 추구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덕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과학이나 형식과학을 통해서는 그에 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는 목표나 가치를 포함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좋은 것(그리스어: 토 아가톤to agathon)에 대한 통찰도, 규범과 가치에 대한 통찰 내지는 규범적 통찰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앎이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앎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통찰이어야 하지, 단순히 그 사람이 〈나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말하는 정도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75-6)


제3장 플라톤 / 이데아론과 이상 국가


"플라톤의 이원론[이데아론]은 대체로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세계 구분과 일치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존재론적 구분이 보편적인 윤리적-정치적 규범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좋음─윤리적-정치적 규범들─은 이데아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데아에 대한 통상적 해석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불변적이다." "이것은 또한 좋음은 하나의 이데아로서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든 말든, 그것에 대해 알든 모르든 언제나 변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플라톤은 이로써 도덕성과 정치가 다양한 인간의 의견과 관습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데아론은 윤리적-정치적 규범과 가치에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토대를 확보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99-100)


"우리는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론)과 감각 세계를 경험하는 것(실천) 사이의 지속적 상호작용(변증법)의 형태로서 '인식의 과정'을 갖는다. 이것이 우리가 좋음의 이데아와 이 [감각 세계의] 삶에서 좋은 것, 이들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개선해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철학은─영원한 이데아와 관련하여─보편적이면서 동시에─우리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구체적이 된다. 철학은 지식인 동시에 교육이다. 이 교육과정은 위로는 이데아(빛)를 향하고 아래로는 지각 가능한 사물들(그림자들의 세계)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오로지 진리를 위한 진리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런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을 우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부분적으로 이데아에 대한 통찰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상황에 대한 통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획득된다. 이데아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성취한 사람은 이 통찰을 가지고 세계를 계몽하기 위해 다시 이 삶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102)


그런데 플라톤은 반민주적이지 않은가? 그는 모든 권력을 전문가들에게 넘기고 인민은 위로부터 통치를 받도록 한다. 이 말은 옳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 속의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첨언해야만 한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어떤 개념적 그리고 방법론적 전제들에 근거하여 실재의 특정 부분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좋음〉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에 관한, 사회와 인간의 삶이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목적들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이런저런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해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의 의견보다 '민주주의'가 상위에 있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21)


"플라톤의 예술관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아론과 연관된 또 하나의 논지가 존재한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이데아들은 참된 실재를 대표한다. 감각 지각의 세계의 사물들은 어느 정도 이데아들의 반영물이다." "그래서 (감각 지각 세계의 사물들을 복사하는) 예술의 등급은 이차적이거나 심지어는 삼차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진리의 시각에서 볼 때 아주 높게 등급이 매겨질 수 없다. 복사한다는 생각, 즉 모방은 플라톤의 예술관에 근본적인 것이다. 지각 가능한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복사물이며, 예술 작품은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복사물이다. 그러나 이데아들은 또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의 이상이며, 따라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복사하는 예술 작품의 이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이데아들을 복사하는 시도를 해야 한다. 플라톤의 철학을 전제하는 이상, 이 요구는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모방(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이론은 (이상적 실재와 관련된) 진리에 대한 요구와 연결되어 있다."(127-8)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 / 자연 질서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플라톤은 이성이 요구하는 바에 입각해서 현실을 비판한다. 그에게 정치란 현실을 이상에 보다 가깝게 만들어가는 과제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하는 국가형태들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이성이란 현존하는 것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수단이다. 즉 플라톤은 현존 질서를 초월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으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은 당시 도시국가의 정치 상황에 보다 더 잘 들어맞는다는 의미에서 보다 현실적이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규정하는 것은 물론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차이점에 주목하느라고 둘이 가진 많은 공통점을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주는 연결 요소는 아리스토텥레스가 플라톤에게 반대하면서 논증적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에 있다. 즉 그는 플라톤에게 반대 논증을 제시하면서 플라톤을 합리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134-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식에 이르는 첫 단계는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개별 사물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부수적인 것의 추상을 통해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다다르는 것이다.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정의定義로 포착된다. 예를 들어 종으로서의 말에 대한 정의가 그렇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의 획득을 감각 경험으로부터 본질에 대한 통찰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정의를 향한 추상 과정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존재론에서 주장하다시피) 독립적 존재를 갖는 것은 바로 개별 사물들, 즉 실체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식은 (자신의 인식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속성들에 대한 지식이라고 믿는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이행하고 난 후, 우리는 이 인식을 다른 참된 명제를 얻도록 해주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에 이용할 수 있다."(140)


"형상과 질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은 현실태actuality와 잠재태potentiality의 구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나무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 (현실적으로) 단지 씨앗에 불과하지만 그 자체 내에 나무가 될 자연적 능력들(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무가 성장함에 따라 씨앗이 자체 내에 가지고 있던 능력들이 실현된다. 바로 잠재태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변화란 잠재력들의 현실화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개념과 연관된 문제 많은 비존재non-being 개념을 회피한다. 변화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란 무로부터ex nihilo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발전과 창조적 솜씨에 기초한 변화는 현존하는 능력의 실현을 포함한다. 가능한 것은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재하는 것이란 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화'를 추구하는 무엇이다."(148-9)


# 잠재태 없이 실재하는 유일한 예외는 순수 현실태 =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는 (각각 테오리아theoria, 프락시스praxis 그리고 포이에시스poiesis에 상응하게) 이론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그리고 포이에시스적인[시적인] 학문을 구분하는데 이것들은 각각 지식(에피스테메)과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 그리고 예술[기술] 혹은 기술적 능력(테크네techne)과 연관되어 있다. 이론적 학문의 목적은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다. 세 개의 이론적 학문 분야는 바로 자연철학과 수학 그리고 형이상학이다. 자연철학은 지각 가능하고 변화 가능한 사물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수학은 불변적이고 양화量化 가능한 속성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형이상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적 형상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획득한 윤리적 능력을 통해 지혜로운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리적 능력(프로네시스)은 그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할 때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암묵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156-7)


"포이에시스적인 학문 분야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학문들은 창조적(포에틱)이다. 이 생산은 예술적 창조를 통해 일어나는데, 그런 이유로 시학과 수사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술적 생산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종류의 공예를 염두에 두고 있다. 끝으로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을 그 자체로는 독자적인 학문 분야가 아니지만 모든 학문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연장[도구](그리스어: 오르가논organon)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를 연구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가 언어의 내적 구조로 간주한 것, 즉 논리적으로 올바른 연역들(증명들)을 발견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을 통해 우리는 일련의 참이고 확실한 명제들로부터 동등하게 참이고 확실한 다른 명제들로 나아가는 것이다. 논리학은 이러한 이행을 확보해준다."(158-9)


"예술이 복제(혹은 모방)라는 근본적 생각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이론을 재해석한 이후로는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술을 모방으로 (그리고 인식으로) 바라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개별 사물들 내에 존재한다. 그래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은 플라톤의 경우보다 (형상과 관련하여)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지각 가능한 사물들을 복제하는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가 플라톤의 경우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갖는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를 이끌고 덕성스러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통찰에 대해 보다 민주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해서 (인식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은 도덕적 기능도 갖는다. 예술은 정화, 즉 깨끗하게 씻어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가장 깊게는 카타르시스, 즉 정화하기와 깨끗하게 씻어내기이다."(178-9)


제5장 후기 고대 철학


"우리는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저 인민의 정치적 무력함이 지성적 차원에서는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멀리하고 단 한 가지 문제, 즉 어떻게 한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간의 차이가 얼마나 크든 간에 그리고 이 두 학파 내에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했든 간에 우리는 단순화하자면 여러 면에서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이 두 철학이 집중했던 것은 바로 어떻게 개인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단 하나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답은 서로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도시국가와 연결된 〈공동체 속의 인간〉이라는 고대 그리스적 개념은 그 지반을 잃었다. 이제 한쪽에는 특수한 개인이, 다른 한쪽에는 제국이, 한쪽에는 개인의 덕성과 행복이, 다른 한쪽에는 어느 곳의 누구에게든 타당한 보편법의 개념이 등장한다."(186-7)


"쾌락(그리스어: 헤도네hedoné)을 최상의 (유일한) 좋음으로 보는 이론을 〈쾌락주의hedonism〉라고 부른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주의가 신중함과 숙고로 각성된 쾌락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을 순간적인 감각적 욕망으로 보지 않았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우정이나 문학적 활동과 같이 보다 정제되고 확실한 형태의 안녕을 강조했다. 우리가 사적인 행복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보다 확실하고 정제된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 동시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정치적 활동에 반대하였다. 정치적 활동은 근심만 많이 만들어낼 뿐 확실한 쾌락은 거의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나 사회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직 쾌락만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이며, 이때 쾌락은 반드시 개인의 쾌락이다. 국가와 사회는 오직 개인의 쾌락을 증진시키고 개인의 고통을 예방할 때에만 좋은 것이다. 법과 관습은 개인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190-1)


"스토아학파는 행복은 진정으로 어떠한 외부의 재화에도 의존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덕은 이성에 따라서, 즉 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행복의 유일한 조건은 덕성스런 삶을 사는 것이고 덕은 앎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입장을 전적으로 일관되게 견지했다. 덕성스럽게 사는 것은 인간에게 유일한 선이다." "사람들의 외적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이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의 역경에 처하든 외부적으로 성공해서 명예와 인정을 얻든, 부자든 가난하든, 혹은 주인이든 노예든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구분은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구분이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외부 세계와 관련하여 금욕주의적 도덕을 설파했고 성품의 내적 강화를 위한 교육을 주장했다. 운명의 장난에 직면하여 인간은 스토아적 평정심을, 즉 초연함[그리스어: 아파테이아apatheia]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192-4)


"그리스-헬레니즘의Greco-Hellenistic 스토아학파─제논(기원전 약 326-264), 클레안테스(기원전 331-233), 크뤼시포스(기원전 약 278-204)─에게서 우리는 일종의 〈중간 계층〉의 심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금욕적 은둔만이 아니라 의무와 품성 형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스토아학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자연법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스토아철학은 점차 사회 상층부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변화를 거듭했다. 의무와 품성 형성 및 보편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의 학설은 로마의 상층계급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이들은 마침내 스토아철학을 일종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하층계급적인 퀴니코스학파의 세계 체념적 특징들은 억압되고, 의무와 강하고 책임감 있는 품성의 도야에 기초하여 국가를 뒷받침하는 도덕이 강조되었다. [스토아학파가] 처음에 주장한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은 이제 그 흔적만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내적이고 사적인 것과 외적이고 공적인 것 간의 구분이다."(196)


"로마의 스토아학파─키케로(기원전 106-43),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54), 에픽테토스(기원후 약 50-13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기원후 121-180)─는 인간을 보편적 국가와 보편법하의 한 개인으로 간주했다." "한 사람의 세계가 우주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한 사람의 이성도 보편적 이성의 일부이다. 따라서 인간의 법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영원한 법[법칙]의 일부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원칙적으로 영원한 법과 일치하는 사회의 법률과 그렇지 않은 법률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한 법률들과, 보편적인 자연법과 일치함으로써 타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현존하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주장하는 법률들을 구분할 수 있다. 인간 이성은 그 모든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세계 이성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주어진 것, 현존하는 것이다. 이 점이 사법적司法的, 정치적 법률은 보편적 자연법에 근거한다는 자연법 이론의 핵심 요점이다."(197-9)


"각 시기별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불행을 항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공통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인생철학 학설들 중 어느 것도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것이 고대가 끝나갈 무렵 많은 지지를 얻은 결론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낸 이 인생철학 학설들은 그것들이 약속했던 것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을 확보할 것인가?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초자연적 수단, 즉 종교를 통해서였다. 고대 말이 되면서 종교적 갈망은 커져만 갔다. 신플라톤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에 나타난 종교적 갈망에 부응하고자 했다. 신플라톤주의의 학설은 개인을 보다 광대한 우주론적 그림 안에 위치시키고 악을 결여로, 비非존재로 묘사했다. 또한 육체(물질)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즉 비존재로, 그리고 영혼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인의 영혼이 세계영혼과의 총괄적 합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영혼을 그 유한한 껍데기(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205-6)


제6장 중세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새로운 기독교적 개념들, 즉 만물의 중심인 인간, 직선적 발전 과정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무에서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 개념을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 개념들은 고대의 철학과 융합된다. 신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창조한 이상, 그리고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고 구원을 받을 운명인 인간이 바로 창조의 귀감인 이상, 모든 것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의 내적 존재는 조용한 이성 활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상이한 감정과 의지의 다양한 충동이 서로 다투는 전쟁터이다. 이 내적 존재는 비합리적 충동들의 놀이터, 죄악과 죄과와 구원에 대한 갈구가 난무하는 놀이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내적 삶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은총과 〈초인간적〉 조력을 필요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가 전적으로 신의 예정된 구원 계획에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했다."(243-4)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악마의 투쟁을 각 사람의 내부 투쟁으로 해석했던 것처럼 똑같은 투쟁을 역사적 차원에서는 하느님의 나라(키비타스 데이civitas Dei)와 지상의 나라(키비타스 테레나civitas terrena) 간의 대립에서 찾았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은 명확히 정치 이론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정치학적이 아니라 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특정 정치 체계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나라를 우연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본성이 타락했기(아담과 이브의 원죄) 때문에 인간의 악을 다스리려면 강한 지상의 나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상의 나라는 선과 악의 역사적 투쟁이 지속되는 한, 즉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부터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는 꼭 있어야 할 필요악이다."(244-5)


"〈보편자 문제〉는 보편적 개념들, 즉 보편적인 것[보편자普遍者universals]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어떤 존재 형식을 갖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벌어진 중세의 논쟁과 연관된다." "보편자 문제에서 견해 차이는 보편자의 존재 수준에 대한 물음에 어떤 답을 갖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보편자가 실재real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재론자realist〉(혹은 〈개념conceptual 실재론자〉)로 불린다.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name(라틴어: 노미나nomina)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명론자nominalist〉로 불린다." "초기의 중세철학에서는 실재론이 지배적이었다. 중세 중반(1250년)에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보편자는 신의 생각 속에(인테 레스), 개별 대상들 안에(인 레부스) 그리고 인간의 생각 속에 추상으로서(포스트 레스) 존재한다는 온건한 실재론을 만난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이르면 유명론이 세를 얻는데, 예를 들면 오컴의 윌리엄과 마르틴 루터가 대표적이었다."(260, 264)


"신학적으로 보편자 문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루터에 이르는 전통이 보여주듯이 기독교 유명론자들은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신앙과 계시의 독특함을 강조했다. 유명론자들은 신의 말씀과 신앙을 통해 계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이성이 파악할 수 있다면 신의 육화肉化의 핵심적 의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 실재론자들은 견해가 달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이성의 도움을 얻어 신(시원적 원천)에게 다가갈 것을 제안했는데 이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정신 속의 개념들이 실재에 조응할 경우만이다. 이것은 보편자 문제에 대해 소위 실재론적 입장으로 전개되었던 종류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전제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원죄설과 성체성사의 신비와 삼위일체설과 대속설代贖說을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였는데, 이것들은 개념실재론의 견지에서 볼 때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265-6)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신학적 종합을 이룩해냈다.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토마스주의Thomism적 종합의 특징은 '조화시키기'이다. 신과 세계를 조화시키고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보편자 문제와 관련하여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실재론을 수용하였다. 개념들은 존재하는데 오직 대상들 내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지식은 감각인상들로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는 추상을 통해 대상들 속의 보편적 원리들(보편자들)을 인식한다. 이것은 아퀴나스에게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이성을 통해 많은 우주의 원리를 인식할 수 있다. 우주가 고차원의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통찰도 이에 포함된다(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달리 말해 이성과 계시(신앙)는 합일된다." "그러므로 토마스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행위에 관하여 이성이 의지보다 우선한다는 일종의 주지주의主知主義intellectualism를 표방한다."(268-9, 280)


"『평화의 수호자』(1324)의 저자인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1275/80-1342)는 교황에 적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마르실리우스는 사회가 자족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회는 어떠한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정당화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경우 신앙과 이성은, 성聖과 속俗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사회는 교회와는 독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적 진리와 합리주의적(세속적) 진리에 대한 토마스주의적 조화를 거부했고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즉 이성은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신앙은 계시에 (즉 성서에) 토대하며, 따라서 내세에 적용될 뿐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실리우스는 종교(기독교)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신론은 18세기 프랑스의 산물이다! 그러나 마르실리우스는 종교를 〈내면화〉함으로써, 사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97-8)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주의적 인간론을 계승한 루터의 신학은 흥미로운 주의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다(주의주의voluntarism는 〈의지〉를 뜻하는 라틴어 볼룬타스voluntas에서 유래하였다). 신이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사이에 선을 그었다면 신은 이것을 자주적 의지의 행위로 행한 것이다. 옳음과 선이 옳고 선한 까닭은 신이 어떠한 도덕적 규준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것들을 그러하도록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신은 이 선을 달리 그을 수도 있었다(신의 전능함). 신은 신이기에 그의 의지는 어떠한 규칙이나 잣대의 규정을 받지 않는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오히려 신의 의지가 모든 사물의 잣대인 것이다." "또한 주의주의는 기독교 윤리를 신의 결단주의적 의지에 정초시킨다. 이로써 신은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은 절대적 존엄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루터에게 세계와 도덕적 규준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것들은 원칙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것일 수 있었다."(303-4)


"많은 기독교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라틴명: 아비켄나, 980-1037)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후기 그리스 형이상학(신플라톤주의)의 개념들을 원용하여 이슬람의 진리를 정식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븐 시나의 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그의 물질관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신이 무無로부터 물질을 창조하였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한 빛으로부터의 유출이 물질을 채우기는 하였으나 물질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초기 이슬람 철학 내에 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킨 출발점이 되었다. 위대한 이슬람 신비주의자이자 신학자 중 한 사람이 알 가잘리(1058-1111)는 여러 저작에서 이븐 시나의 신플라톤주의를 공격하였다. 그의 핵심 요지는 철학자들의 신은 코란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이 코란과 충돌할 경우에는 철학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같은 시기 기독교 세계에서도 유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318-9)


"알 가잘리의 도전에 응전한 것은 이븐 루시드(라틴명: 아베로에스, 1126-1198)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이븐 루시드주의[아베로에스주의Avrooism]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스콜라철학의 주요 특징을 이루었다. 알 가잘리와의 논쟁에서 이븐 루시드는 철학적 결론과 코란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명백한 모순들을 설명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이븐 루시드는 서양철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해석 원칙 하나를 도입한다. 그는 코란 속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코란 구절의 문자적 해석이 이성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알 가잘리와 이븐 루시드의 논쟁에 대한 이 간략한 서술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근본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철학과 기독교 철학 둘 다에 존재하는 오래되고 잘 알려진 도전이다."(319-20)


제7장 자연과학의 발흥


"르네상스의 방법 논쟁에서는 탐구를 사실상 중세 스콜라철학을 지배했던 (그러나 그리스철학을 지배했던 것은 아닌) 연역법적 과학의 이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불가피하게 되었다. 순전히 논리적 연역으로는 (논리적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미 전제들 속에 내포되어 있다. 연역적 답들은 확실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찾는 이들에게는 별무소득인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에 추구되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지식이었다. 연역법의 약점은 그것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득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이 인식론적 갈등에 참여한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인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과학적 이상으로서의 연역법을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은 가설과 연역적 추론과 관찰의 역동적인 결합에 놓여 있었다. 이 새로운 조합이 바로 바로 가설연역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이다."(331)


"체계적 관찰과 수학적 모델에 기초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태양중심설은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온 생활 경험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기 인식의 위기를 초래했다." "우리는 과학적 경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이론들이 인간의 생활 경험의 변형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의 자기 인식이 과학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인식의 변화는 그 의미가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추락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새로운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즉 새로운 세계관은 천구는 특별하며 인간이 거주하는 우주의 부분에 비해 질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믿음의 기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우주를 탐구하면서 성취한 진보 덕분에 새로운 긍정적 자기상을 구축할 잠재력이 있었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세속적이고 과학에 근거한, 진보에 대한 믿음의 뿌리이다."(342-3)


"갈릴레이는 과학 지식은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결코 충돌할 수 없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신은 성서와 자연이라는 책에 자신을 계시한다. 신은 두 가지 책 모두의 저자author이다. 그리고 신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다. 그래서 성서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를 조화시키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 갈릴레이의 생각이었다. 이 견해는 교회의 계몽된 구성원들도 수용하였다. 보다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조절과 조화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갈릴레이에 따르면 과학 이론들은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도구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해석은 자연과학에 맞게 조절되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학자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선다. 가톨릭교회로서는 당연히 이 견해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종교적 물음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것이 초래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352)


"[주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는 〈아래로 던져져 있는 것〉, 즉 〈아래에[근저에] 놓여 있는 것〉을 뜻하는 수브-옉툼sub-jectum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에 인간은 진정한 sub-ject가 아니었다. 근저에 놓여 있는 것(sub-stance[실체를 뜻하는 영어 substance는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sub-stans에서 유래했다])은 사물일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주체subject가 되고 다양한 사물들이 대상들이 된 것은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즉 인간은 이제 (근저에 놓여 있는 것subjectum으로서) 대체로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사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주체의 인식 대상들로 이해되었던 것이다(사물은 대상들로 파악되었다)." "관념적으로 보건대 인간은 더 이상 합리적 공동체, 즉 폴리스와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가정, 즉 오이코스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 즉 조온 폴리티콘이 아니었다. 인간은 기술적 지식과 함께 객체[대상]들의 우주에서 지배권을 쥔 주체가 되었다."(375-7)


제8장 르네상스와 레알폴리틱 / 마키아벨리와 홉스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은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정치 이론들과는 구분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물질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거의 한계를 모른다. 그런데 물자는 희소하기 때문에 갈등이 존재한다. 국가는 다른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 기초한다. 법을 지탱하는 권력이 없으면 무질서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인민의 안전을 보장할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점을 주어진 사실로 전제할 뿐,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분석은 행하지 않는다." "좋은 나라는 서로 다른 이기적 이해관계들 간에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안정된 나라이다. 나쁜 나라는 이기적 이해관계들이 적나라하게 갈등하는 나라이다." "정치의 목적은 고대 그리스나 중세에서처럼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함으로써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도덕과 종교를 포함한 다른 모든 것은 그 수단이다."(382-3)


"대부분의 그리스철학자와 기독교 신학자는 도둑질이나 살인과 같은 특정 행위(수단)가 그것이 바람직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치 않고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목적과 수단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주된 관심사는 순전히 정치적인 게임이었다. 나아가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몰역사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시대의 정치 상황을 공부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정치 상황에 통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로마사논고』 참조). 따라서 우리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인,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정치학을 대부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방법은 우리의 개념으로 보자면 〈몰역사적〉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의 시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역사적으로 사유한 것이다."(386-7)


"홉스는 여러 면에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의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와 정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불변적이고 초역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홉스는 개별적 사실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일반화를 하는, 마키아벨리가 했던 것과 같은 단지 기술적記述的인 방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홉스는 새로운 과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철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궁극적으로 우주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자연과학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동시에 홉스는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자였다. 그는 그보다 앞선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변화하는 표피적 사건들을 해명해줄 근본원리를 찾고자 했다.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기초를 찾고자 했다. 르네상스 후기의 철학자로서 홉스는 이 기초를 인간에게서 찾고자 했다. 인간이 바로 수브-옉툼, 즉 토대이며, 이로부터 사회가 설명되어야 한다."(394-5)


"권력은 통합되거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홉스에게 움직일 수 없이 확실한 것이다. 이 통일성의 거소居所가 국왕인지 의회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홉스의 이론에는 오직 하나의 왕만 존재해야 한다는 말 같은 것은 없다. 홉스로서는 법과 질서를 강제하는 이가 한 사람인지 여러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홉스의 절대왕정에 대한 옹호는 빈약하다. 게다가 홉스에게 근본적인 것은 왕이 아니라 개인이다. 이기적이고 고립된 개인들 간의 투쟁이 국가와 왕정의 토대이다. 국가와 왕정은 개인의 자기 보존을 확보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홉스는 사회적인 모든 것이 국가, 더 나아가 개인의 자기 보존 욕구와 관련된다고 보았다. 개인들은 근본적으로 비사회적이며, 그런 점에서 사회는 개인에게 실로 부차적인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본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한 자기 이익에 기초한 계약을 통해 창출된 인위적 산물이다."(402-5)


"국가는 개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주의liberalism가 관용을 지지하는 정치 이론을 의미한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이 경우 자유주의의 근원은 예를 들어 로크에게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틴어: 리베르타스libertas = 〈자유〉[liberalism은 libertas에서 유래]). 그러나 우리가 자유주의를 심리적 태도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개인, 계약 그리고 국가라는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정의한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용어 사용은 우리가 개인, 계약, 국가를 기본 개념으로 하는 자유주의(자유주의자liberalist)와, 관용과 법적 자유를 옹호하는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태도로서의 리버럴리티(리버럴한 사람liberal)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에 따른다면 홉스는 〈자유주의자〉라 불릴 수 있지만 〈리버럴한 사람〉은 아닌 반면, 로크는 자유주의자이자 리버럴한 사람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은 리버럴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아니다."(408-9)


제9장 의심과 믿음 / 중심에 선 인간


"데카르트는 새로운 것의 대변자인 동시에 낡은 것의 대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일소하고 철학을 새롭고 확실한 토대 위에 정초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 그의 신 존재 증명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콜라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철학은 끝없는 논란의 연속이었다. 오직 확실한 것은 연역적인 수학적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연역 체계'를 자신의 과학적 이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철학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철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같은 연역 체계가 되려면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참'인 전제들(공리들)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연역 체계에서 전제들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우면 결론들(정리들)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수학과 일부 연역적인 학문 분야들로부터 차용해 온 과학적 이상은 어떻게 하면 이 연역적인 철학 체계를 위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전제들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끌었다."(414)


"이 지점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懷疑'가 들어오는 지점이다. 방법적 회의는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을 찾기 위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명제를 걸러내는 수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명제들을 연역 체계의 전제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방법적 회의의 목적은 이성적으로 정당하게 의심할 수 있는 것 혹은 그럴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방법적 회의는 연역적 철학 체계의 전제가 될 수 없는 모든 진술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 방법적 회의는 확실한 전제들을 갖는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유 주체는 바로 혼자 생각하는 개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의문에 대한 해답, 즉 회의를 종료시키는 확실성이 생각하는 개인의 확실성이라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의의 확고한 종료인 이 결과는 일정하게 이미 데카르트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속에 녹아들어 있다."(415-6)


"19세기에 그 절정에 도달한 새로운 역사의식은 명백히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에 의해서 미리 준비되었다. 비코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가 창조한 것에 대해서만 명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때 비코가 생각한 일차적 대상은 사회와 역사이지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제도와 법령도 역시 그 대상이다. 사람이 창출한 것은 신이 창출한 것, 즉 자연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자연은 사람이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신만이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오직 외부로부터만, 즉 관찰자의 시각에서만 자연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신처럼 그 내부로부터 자연을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우리가 그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것들뿐이다. 즉 인간이 그것들의 창조자임을 인식할 때뿐이다. 따라서 비코에게 있어 구성된 것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간의 구분은 중요한 인식론적 함의를 갖는다."(430-2)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상상해보고 그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보이지만 비코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비코는 우리가 공통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안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의도와 욕망과 이유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플라톤의 아테네나 키케로의 로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통찰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비코에 따르면 우리는 감정이입 내지 판타지아를 통해서만 그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코는 연역적이지도 않고 귀납적이지도 않은 (가설연역적이지도 않은) 통찰 내지 지식이 무엇인지를 확정하려고 노력한다. 비코가 제공한 새로운 방법적 원리들, 즉 비코의 새로운 과학[시엔차 누오바Scienza nuova]은 문헌학과 사회학과 역사 연구의 종합이다."(434-6)


제10장 체계로서의 합리주의


"스피노자는 시스템, 즉 체계를 세우는 데 뛰어난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합리주의적 체계 수립가로서 스피노자는 공리와 연역 추론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 능력을 극히 신뢰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사적 연결 지점들을 언급하자면, 도덕 이론과 관련해서는 스토아철학과 유사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자연론과 관련해서는 범신론과, 종교 사상과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성서 비판과, 정치 이론과 관련해서는 관용에 대한 근대적 요구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합리적 직관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자이다. 그는 또한 데카르트처럼 수학을 과학의 이상으로 여기면서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연역주의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공리를 찾는 데 주로 몰두한 반면, 스피노자는 공리들로부터 출발하면서 추론에, 체계에 역점을 둔다."(444-5, 450)


"『윤리학』 첫 페이지에서 우리는 기본 개념인 실체substance에 대한 정의를 발견한다.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된다. 즉 그것의 개념은 그것을 형성하기 위한 다른 어떤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체의 정의상 모든 한계 설정이 배제되기 때문에 실체는 하나이자 무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체는 세계에 하나 이상의 실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이다." "또한 다른 어떠한 것도 실체의 원인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 다른 어떤 것은 실체에 대한 완전한 개념 규정 속에 포함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실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연장延長 혹은 사유로 나타난다. 실체는 무한히 많은 현현顯現 방식을 갖지만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방식으로 현현한다." "연장과 사유는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두 가지 독립적인 기본 요소가 아니다(레스 코기탄스[영혼]과 레스 엑스텐사[물질]).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일 뿐이다."(450-4)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다. 개별 인간은 실체의 한 양상이다. 스피노자에게 우리 자신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체의 측면들로, 실체의 양상들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보다 평범한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속해 살아가는 관계들과 연관들도 이해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협소하고 사소한 인연과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괄적인 사회적 그리고 물리적 실재에 의해 내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구원을 주는 진리는 우리가 총체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다 큰 연관 관계 속에서 올바른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다."(456-7)


제11장 로크 / 계몽과 평등


"로크는 회의를 옹호했지만, 그가 옹호한 회의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오류 불가능한 지식을 얻기 전의 일시적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의심하고 검증하는 태도로서의 회의였다. 인식 과정은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끄는 과정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으로 이끄는 과정이다. 우리의 과제는 자연과학에서처럼 우리가 가진 지식을 점차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발흥은 로크에게 합리주의자들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태도와 이상적 인식에 대한 생각을 갖도록 했다." "지식 비판을 행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인식론은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는 도약대였던 반면, 로크와 경험주의자들에게 지식 비판이 갖는 치료적이고 지식을 촉진하는 힘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목적이었다. (로크가 보기에) 오로지 개념들만을 통해서 얻는 통찰은 한계가 있고 문제의 여지가 많다. 적절한 지식 획득은 경험과학에서 검증과 점진적 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466-8)


"우리는 어떤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로크는 이렇게 답한다. 〈정신mind은 어디서 그 모든 이성과 지식의 재료들materials을 가지고 오는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한 단어로 답하겠다. 바로 '경험EXPERIENCE'이다.〉" "그렇다면 경험이란 무엇인가? 로크는 외적 지각으로서의 경험(감각)과 우리 자신의 정신적 작용과 조건에 대한 내적 지각으로서의 경험(반성)을 구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사실 단순한 인상들(관념들)이다. 대체로 로크는 이 기본 경험들이 수동적으로 획득된다고 생각했다. 수동적으로 획득된 이 단순관념들simple ideas은 적극적으로 정신에 의해 상이한 방식으로 가공된다. 이렇게 해서 아주 다양한 우리의 복합관념들complex ideas이 생겨난다." "즉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지각과 반성을 통한 단순관념들로부터 비롯되지만, 정신은 이 재료를 적극적으로 가공함으로써 지식을 만들어내는데, 이 지식은 단순관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470-2)


"로크의 자연 상태는 무정부적 전쟁 상태가 아니라, 개인들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생활 형태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적으로, 즉 그 자체로 모두 평등하다." "나아가 이 평등과 자유는 우리가 자유롭게 우리의 신체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성취한 것, 즉 우리 노동의 결과인 재산에 대해서도 처분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들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 정치적으로 질서 잡힌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자연 상태보다는 질서 잡힌 사회에서 사는 게 더 안전하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크에게 국가의 목적은 무엇보다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러한 로크의 견해는 분명 국가는 무엇보다 윤리적 과제를 갖는다는 고대와 중세의 통상적인 견해, 즉 국가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해야 하며,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윤리적-정치적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견해와는 반대된다."(480-1)


제12장 경험주의와 인식비판


"로크는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관념들, 감각 인상들)와 우리의 감각과는 독립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구분하였다. 우리는 오직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만 이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알 수 있다. 버클리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원인으로서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지각 불가능한 대상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구분은 형이상학적 구성물을 가지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각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에세esse[존재]는 페르키피percipi[지각됨]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에 의해 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지각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 조건하에서 지각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부정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지각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96, 501)


"버클리는 존재가 지각에 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원칙은 지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생각했다. 지각 개념은 반드시 주체(영혼)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반드시 지각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체에게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라는 것이 참이다. 에세[존재]가 지각함perceiving과 같은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인간의 의식, 즉 주체가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데 버클리에 따르면 또한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의식도 존재한다. 즉 지각 가능한 모든 것을 항상 지각하고 있는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신이다. 그래서 신은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세는 페르키피와 같다." "신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지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이 세계에 있지 않다. 즉 관념들 중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가, 질서 잡힌 다양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버클리의 신 존재 증명)."(501-2)


"흄은 오직 두 종류의 인식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경험, 즉 궁극적으로 감각 지각에 근거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주의적 해석에 따르자면 수학과 논리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들 간의 관계에 관한, 관습적으로 고안된 규칙들에 근거한 인식이다.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인식을 초월하는 지식은 가질 수 없다." "흄은 그가 〈인상impressions〉이라 부르는 것과 〈관념ideas〉을 구분한다. 인상은 강렬하고 생생한 지각으로서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감각 지각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증오나 기쁨 같은 직저적인 심리적 경험들도 역시 인상이다. 따라서 인상은 외적 지각과 내적 지각을 모두 포괄한다. 흄은 이러한 직접적 감각 지각, 즉 인상에 근거한 정신적 이미지들이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흄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실체 개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버클리와는 반대로) 신 개념을 포함하여 정신적 실체 개념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인과성 개념도 비판한다."(507-9)


"흄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는 그러한 가능한 필연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경험주의적 의미에서 지식이 아닌 구성 요소를 포함하는 인과성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사건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미래에도 똑같은 과정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흄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도덕규범을 알게 해주는 이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원리들을 알게 해주는 이성이나 이성적 직관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과관계에 대해 아는 것은 경험(감각 지각)에 기초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흄은 인식론적으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결과가 성취 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했지만, 경험과학에서의 점진적이고 자기 수정적인 진보의 가치는 힘주어 강조했다."(514-8)


"경험주의는 합리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경험주의자들은 직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합리주의자들이─데카르트,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자들─자기들끼리 의견이 불일치한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성적 직관을 통해 참된 통찰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리주의의 비판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주의적 주장은 그 자체로 경험적 진리인가? 이 주장은 어떤 종류의 경험에 근거할 수 있는가? 경험주의적 주장이 그 자체로 경험적 진리가 아니라 모든 경험적 진리에 관한 주장이자 의미 있는 진술과 무의미한 진술 간의 구분에 관한 주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경험주의적 주장은 경험주의자들이 수용하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 즉 분석적 진리와 경험적 진리 중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다. 이것은 경험주의적 주장이 간접적으로 경험주의적 주장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529)


제13장 계몽주의 / 이성과 진보


"계몽주의 시대는 확장하는 중간 계층 내의 진보적 낙관주의와 새롭게 각성된 이성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특징으로 한다. 이 세속화된 메시아주의에서는 이성이 복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도움으로 실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밝히고 물질적 진보를 성취할 것이었다. 인간은 점차 근거 없는 권위와 신학적 후견을 벗어나 자율적이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자주적이고 계시와 전통으로부터 독립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상이 해방되었다. 무신론은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곧 기대했던 진보를 실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이 이성(과학)이 크나큰 물질적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분명 옳은 듯 보였지만 그들의 이성 개념은 너무나 모호했다. 그 개념은 논리적, 경험적 그리고 철학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었고 서술적 통찰과 규범적 통찰을 담고 있었지만, 이 진보를 실현하는 데 닥칠 정치적 난점들은 고려하지 않았다."(537)


"계몽사상가들의 이성에 대한 도취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극단적 형태를 띠면 피상적이고 모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을 공격하면서 그것들을 부정의 형태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즉 감정의 함양과 회의적인 비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은 당시의 낙관주의를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루소는 계몽철학에 대한 이 순전히 부정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계몽철학자들이 다소 일방적인 이성의 함양을 부르짖었다면 루소는 감정의 함양을 내세웠다. 계몽철학자들이 개인과 자기 이익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면 루소는 공동체와 '일반의사'를 찬양하였다. 계몽철학자들이 진보를 찬미할 때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계몽철학자들이 악은 전통과 특권에 의해 조장된 무지와 불관용에서 기원하며 그 구제책은 계몽이라고 생각한 반면─이성과 과학이 승리하면 문명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선도 그 모습을 드러낼 것─루소는 문명으로부터 악이 기원한다고 생각했다."(557-8)


"국가가 계약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개인주의적 이론들과 보조를 맞추어 루소 역시 자연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사회계약으로 끝을 맺는 논증의 노선을 따른다. 그러나 루소에게 핵심은 그저 자연 상태와 국가에 의해 형태가 부여된 사회라는 두 개의 뚜렷이 구분되는 개념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형되는 것, 즉 계약에 의한 사회의 형성이라는 문제도 아니었다. 루소의 사유 실험은 사회와 인간의 점진적 발전을 재구성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발전의 궁극적 결과가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이다." "플라톤을 따라서 루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완전히 발전된 인간은 '사회-속의-시민'으로서 내적으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상위 중간 계층이 주창하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보수적 반동을 대표한다. 보수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반대로─밀접한 공동체적 유대를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다."(561-2)


"자유주의 전통은 비록 사회의 유기체적 측면을 종종 간과하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노골적인 권력의 악용으로부터 정치적 과정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양식들을 발전시켜야 하는 의의를 제공하였다. 루소의 유기체적 사회관은 대체로 제도적 문제들을 무시하였다." "일반의사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표현 가능한지가 불분명할 경우 우리는 독단적인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일반의사라고 내세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하는 루소의 유기체적 사회 이론은 비합리적이고 낭만적인 공동체 숭배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루소의 사상이 제도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의사 이론이 한편으로는 (로베스피에르나 마오쩌둥식의) 연속 혁명─인민의 자발적 의사가 통치를 이끌어야 한다─에 복무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버크의 경우처럼) 안정된 민족국가─인민의 의사는 연면한 전통에 의해 창출된다─에 복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564-5)


제14장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공리)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을 근본적인 규범적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엘베시우스를 따랐다. 벤담의 사상에서 새로운 것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일관되게 이 원칙을 법률 개혁의 지침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이 가장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지를 계산하는 체제를 개발하였다는 점에 있다." "쾌락의 계산보다는 고통의 계산을 말하는 것이 아마도 더 타당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우리의 행위 내지 재화의 긍정적 서열을 매기는 것보다는 일정한 근본적인 결핍들을 회피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공리 개념은 쾌락 개념과 같은 개인주의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쾌락 개념은 개인의 경험과 관련되는 반면, 공리 개념은 바람직한 결과와 관련된다. 따라서 공리의 철학, 즉 공리주의는 우선적으로 결과주의 윤리학이다."(578-9)


"벤담은 개인[개체]the individual에 대한 강조를 언어철학의 영역에서도 이어간다. 벤담은 의미를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별 사물들을 지칭하는 낱말들뿐이라고 주장했다. 개별 사물들을 지칭하지 않는 낱말들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벤담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들의 쾌락과 고통뿐이다. 명예, 조국, 진보 등의 낱말들이 종종 미혹과 조작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은 명확하다. 따라서 벤담의 유명론에는 올바른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벤담이 그러한 낱말들은 모두 미혹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 이상 실재의 측면들, 즉 사회적 연관 관계들을 은폐할 위험에 빠진 사람은 오히려 벤담 자신이다. 벤담이 모든 개념어를 거부하는 만큼 그는 익명적 권력 구조 같은 사회의 특유하게 사회적인 측면들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벤담의 유명론의 대가는 비합리적이고 해로울 수 있는 지배적 경향들에 대한 맹목과 무력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580-1)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와 경험주의에 의해 각인된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이 이론들의 이전 형태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그는 사회과학의 힘을 빌려 고전적 자유주의를 수정하려고 시도했고, 정치 이론에 있어서는 자유방임을 거부하고 적극적 입법을 강조하는 사회자유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밀은 익명의 사회적 힘들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로써 밀은 비非사회적인 인간 원자들과 그 외부의 국가 체계라는 설명 틀을 벗어난다. 사회도 개인 및 국가와 더불어 연구해야 할 영역이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국가가 외적 강제를 행한다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의 순진한 견해를 밀이 거부한 것이다. 사회자유주의자 밀은 국가와 법률을 넘어서는 강제성과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입법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가 최대한의 자유와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585, 590)


제15장 칸트 /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흄의 회의론에 대한 칸트의 거부는 인식론적 시각의 역전逆轉에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방법론과 동일하게 칸트는 주체가 대상[객체]object으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써 인식이 생겨난다는 기본적 사고를 뒤집었다. 그는 그 관계를 역전시켜 대상이 주체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주체인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의 역전이 바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인식론의 핵심이다. 칸트는 그가 경험주의적 회의론과 합리주의적 독단론이라고 보았던 것을 회피함으로써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종합을 시도한 셈이다. 칸트는 신과 도덕규범같이 감각을 초월하는 대상들에 대한 합리적 직관 대신에 경험의 근본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 통찰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인식론적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선험적先驗的, transcendental 지식이라 부른다."(602)


"칸트는 모든 인간은 동일한 원칙적 〈형식들〉을 갖는다고 전제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이 동일한 형식들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형식들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형식들〉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형식들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같은, 모든 인식의 일반적 특징들이다. 이것들은 모든 경험적 탐구에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들로서 경험심리학의 비판적 검증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동일한 형식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형식들에 의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확실한 무엇을 안다.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든 간에 그 경험은 시간, 공간, 인과성 등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이 구조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현재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학에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일정한 근본적 특징들이 존재한다."(605, 608)


"칸트는 그가 경험주의적 회의주의라고 보았던 것을 거부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의 조건들에 대한 성찰적 통찰이 존재하며, 이 통찰은 두 학문, 즉 수학과 자연과학이 확고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칸트는 그가 합리주의적 독단주의라고 보았던 것도 거부했다. 사변적 합리주의(형이상학)는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학문[과학]이 아니다.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성적 직관은, 가령 신에 대한 직관은 단지 가짜 통찰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사변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이 시작된다. 전통적 합리주의는 가짜 학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칸트처럼 경험의 조건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에 도달하려고, 즉 감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에 도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의 조건(과 한계)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612-3)


"흄의 윤리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여러모로 칸트의 인식론적 답변과 유사하다. 칸트는 〈너는 ~을 해야 한다〉라는 당위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떻게 이러한 당위 규범이 가능한가? 이 〈너는 ~을 해야 한다〉는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 의무이기 때문에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 없다. 경험적인 것은 (칸트에 따르면) 규범적인 것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험적인 것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너는 ~을 해야 한다〉는 우리 안에 내재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무조건적인 도덕 명령(〈너는 ~을 해야 한다)〉은 우리 행위의 결과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의 결과를 완벽하게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이 도덕 명령은 우리의 도덕적 의지에 적용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 이론은 결과주의 윤리학[공리주의]이 아니라 도덕적 의지의 윤리학이다."(616-7)


"이제 칸트 철학에는 인과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의 세계와, 우리가 자유롭고 책임 능력을 갖는 도덕성의 세계 간의 긴장, 간단히 말해 필연성과 자유 간의 긴장,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간의 긴장과 관련된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하여 칸트는 매개하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이론을 도입했다. 즉 판단력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능력이다(이 매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판단력이 목적론과 미학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우리는 비록 모든 설명이 사실상 인과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 형식들에 대해 즉각 목적론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삶이 마치 목적과 의미를 갖는 것처럼 사고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다. 목적과 의미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자연 발생적인 사유 방식은 두 세계(필연성과 자유) 속에서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636-7)


"미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두 세계를 조화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미학은 두 가지 기본 경험, 즉─위대한 예술이나 자연의 경우처럼─압도적이거나 숭고한 것의 경험과 아름다운 것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들은 인식의 판단이 아니라 〈취향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이 취향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취향이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우리가 이 분야에서도 공통된 의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경험적이고 이론적인 인식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미적 판단은 어떤 면에서 주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하다. 이 점은 우리 모두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예술 작품을 바라본다면 동일한 미적 쾌감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이 공통의 감정이 올바른 판단의 토대이고, 따라서 이 올바른 판단은 (잠재적으로) 보편적이다(이것은 일종의 암묵적 지식이다)."(637-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학은 객관적 토대를 갖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즉 미는 참[眞]과 선과 연관되어 있다. 칸트의 경우 진리와 (정언명령으로 구상된) 도덕성은 구분된다. 따라서 숭고한 것처럼 (그리고 목적론적 사고방식처럼) 아름다운 것이 둘 사이를 (진리와 도덕성 사이를) 매개해야 한다." "칸트의 시대 이후 낭만주의는 특히 창조적 과정에서, 또한 예술의 경험에서도 예술의 주관적 측면을 보다 더 강력하게 강조하는 미학을 발전시켰다. 위대한 창조적 인격체로서 천재가 각광을 받았다. 독특함이 찬양되면서 보편성이 희생되었다. 나아가 모방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전적 강조와는 반대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이 특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독특함에 대한 모든 찬양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 예술가와 비평가는 여전히 예술이 인간에게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특함을 통해서 예술가와 청중은 인간의 삶과 그 잠재력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638-40)


제16장 인문학의 대두


"독일 지성사에서 1770년대는, 합리주의적 계몽주의로부터 반反합리주의적인 전기 낭만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소위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흄으로부터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회의를 물려받았다. 그는 보편타당한 인간 이성과 영원한 보편 기준을 믿는 견해를 거부했다. 루소가 행한 문화 비판과 행복한 〈자연적 인간〉에 대한 이상화에서 헤르더는 계몽주의의 자기 이해와 진보 낙관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영감을 얻었다." "(헤르더의) 역사주의는 우리가 〈역사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일깨웠다. 역사는 철학과 사상의 틀이자 기본 전제 조건이 되었다. 나아가 역사 서술은 지배적 학문이 되면서 다른 인문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인문학들은 〈역사화〉되었다. 즉 인문학들은 (문학사, 예술사, 종교사, 언어사 등과 같이) 역사적 지향성을 갖는 학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주의가 현실을 보는 일정한 방식이자 동시에 인문학적 연구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646-7)


"먼저 역사주의는 역사적 현상을 '예외적이며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개성[개체성]은 개인이나 개별적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성[개체성]은 집단과 〈초개체적인 것〉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한 시대나 문화 혹은 민족은 독특하고 특수한 것이다. 이것이 역사주의의 개체화 원칙이다." "둘째로, 역사주의는 역사적 변화와 운동을 크게 강조한다. 실재에 대한 정적인 이해는 동적인 이해로 대체된다. 모든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처해진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강조는 서양 사상에서의 결정적인 〈혁명〉으로 해석되었다." "역사주의의 개인화 개념과 역사적 변화에 대한 강조는 계몽주의의 여러 기본 전제와 충돌했다. 예를 들면 보편성과 이성에 대한 강조, 인간의 본성은 불변적이라는 생각, 보편타당한 인권 개념 등의 기본 전제들과 충돌한 것이다. 이 점은 역사주의에 일정한 상대주의적 경향성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들어 더욱 뚜렷해졌고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647-8)


"독일의 종교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통상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서 해석학적 순환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텍스트와 같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그 전체를 이루는] 개별 부분들에 자국을 남긴다. 따라서 부분들은 전체를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체는 부분들의 내적 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해석학의 핵심은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개성적이고 독특한 영혼의 내용{〈개성[개체성]〉)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해석학의 지향점은 일차적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창조적 정신이다." "헤르더처럼 슐라이어마허도 텍스트와 저자의 사고방식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감정이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문헌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자와 텍스트의 지적 지평 속에 우리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인문학의 목적은 '이해'인 반면, 자연과학의 목적은 '설명'이다."(653-4)


"빌헬름 딜타이는 인문과학의 학문[과학]으로서의 위상에 대해서, 인문과학을 자연과학과 차별화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하였다." "딜타이는 통상 생生철학자로 불리는데, 이것은 삶[생활]이 그의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 범주라는 것을 뜻한다. 모호하고 해명이 불가능하지만 삶은 우리의 경험의 토대이다. 따라서 삶 자체를 명시적이고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은 삶을 넘어설 수 없다.〉 딜타이에게 인문과학은 해석학적 전회를 뜻했다. 해석학적 학문으로서 인문과학의 중심은 언어적 표현들의 해석에 놓여 있는데, 이 언어적 표현들은 본래의 체험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삶 자체가 텍스트와 예술 작품들로 객체화된 것이다. 달리 말해 인문과학의 탐구 대상은 문화와 사회 속에서 객체화된 정신의 형식들, 즉 도덕, 법, 국가, 종교, 예술, 과학 그리고 철학이다. 따라서 딜타이가 말하는 인문과학[정신과학]은 오늘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한다."(659-60)


"그리하여 인문과학에서 이해는 본래의 체험을 재생하고 추체험하는 연구자의 능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추체험이 가령 어떤 르네상스 예술가의 본래 체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딜타이는 표현의 원천인 주체와 그 표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주체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상정했다. 이 유사성은 궁극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불변적인 공통의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한다." "비코처럼 딜타이도 인문과학의 가능성의 제1조건은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딜타이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간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신은 정신이 창조한 것만을 이해한다.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정신의 활동과는 무관하게 산출된 실재를 포괄한다. 인간이 활동을 통해 자신의 각인을 새긴 모든 것은 정신과학의 대상을 이룬다.〉"(660-1)


제17장 헤겔 / 역사와 변증법


"칸트는 자신이 불변적인 선험적 전제 조건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직관 형식과 인과성을 포함한 범주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주체에게 내재되어 있다. 헤겔은 선험적 전제 조건들의 스펙트럼은 보다 넓으며, 선험적 전제 조건들은 크게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한 단계 속의 하나의 문화에 존재하는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 역사의 다른 단계들 속의 다른 문화들에서도 항상 타당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창출'되었고, 따라서 '문화적으로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확실하고 불변적인 것을 추구했던 반면, 헤겔은 변화 가능한 상이한 세계관들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헤겔에게 있어 구성적인 것[선험적 전제 조건들]은 그 자체로 구성되는 것이며, 이 구성적인 것의 구성이 바로 역사이다. 이로써 역사는 일련의 과거의 사건들과는 다른, 상이한 기본적 이해 형식들의 자기 발전이 이루어지는 집단적 과정으로 이해된다."(672-3)


"계몽철학자들은 대체로 과학적 지식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적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그러나 불충분한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좌파 헤겔주의자들이 말하는 해방의 뜻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초개인적 차원인 전통과 사회로부터의 개인 해방이 아니라 보다 이성적인 사회를 향한 일보로서 사회적 비합리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보다 적절한 사유의 틀을 만들기 위하여 불충분한 선험적 전제 조건들(이데올로기들)을 거부하는 비판적 성찰(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방적 성찰에 대한 헤겔적 시각에 따르면 역사는 고립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다. 역사는 인류가 가장 적절한 사유의 틀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나가는 성찰의 과정이다." "달리 말해 역사는 모든 선험적 전제 조건(삶의 방식)을 체험하고 검증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고 회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역사는 더욱더 적절한 자기 인식으로 이끈다."(677-8)


"지양하다[극복하다]aufheben라는 말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떤 입장의 결함들을 '폐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결함이 아닌 측면들을 '보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 입장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결함이 있는 입장의 변증법적 지양은 그 입장의 부정적 폐기가 아니라 보다 고차적인 다른 입장 안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뜻하는 헤겔의 용어가 바로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재 입장의 결함을 찾아서 보다 큰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화될 수 있는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우리를 보다 참된 선험적 전제 조건들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즉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변증법적 지양의 일부이다." "실제에 있어 변증법적 지양의 목적은 이전의 입장들보더 더 광범위하고 더 완벽한 입장을 성취하는 것이다."(682)


"헤겔이 보기에 개인주의는 원자론적이고 탈역사적이며 자족적인 개인을 가지고 작업하고, 집단주의는 살아 있는 인간과는 분리된 채 독립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국가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과 국가는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윤리적sittlich〉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자기실현을 성취하는데, 헤겔에게 이 윤리적 공동체는 바로 국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유기적 일부분이 될 수 있으려면 먼저 가족과 다른 사회집단 같은 보다 작은 집단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어떤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성장해 나오는 것이다. 이로써 헤겔에 있어 〈국가〉는 사람들을 서로 묶어주는 구체적 유대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유대 관계 덕분에 국가는 윤리적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이 유대 관계는 헤겔에 따르면 쾌락과 이윤에 대한 개인적인 계산을 토대로 한 어떠한 합의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이다."(688)


제18장 맑스 / 생산력과 계급투쟁


"맑스는 인간이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수용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소외가 아니었다. 이 종교적 소외는 단지 자본주의사회의 일반적 소외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 노동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살기 위해서 일하고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노동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양측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변증법적 관계가 된다." "동시에 자본가와 프롤레터리아트 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노동의 생산물 간에 극단적 분할이 발생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들의 생산물의 주인이 아니다." "여기서 맑스가 이 굴욕적 상황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경제체제의 노예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굴욕적 상황은 노동자의 경제적 궁핍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모두가 굴욕적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709-10)


"인간은 외적인 힘들─사물화事物化reification와 노동 압박─에 예속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로 실현할 수 없고, 자신이 스스로 창조했으나 더 이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힘들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동기계처럼 작동해야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이 사물화된 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작동하는 이 〈변형된〉 자연 앞에서도 무력함을 느낀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들을 〈사물〉로 바라본다. 노동력으로, 피고용자로, 경쟁자로 바라본다. 따라서 소외는 이중적이다." "자본주의에서 소외는 안티테제다. 상황이 악화─자본주의의 위기─되면,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에 대해서, 기계와 공장에 대해서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다시 자신들의 인간적 가치를 회복한다." "소외는 혁명을 통해 철폐되고, 인간은 의식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이 된다. 무력함과 사물화는 극복된다. 인간은 경제를 통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710-1)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변증법적 사유

1. 처음에 인간은 천진무구한 상태에서 서로 조화롭게 살았다.

2. 그러다가 인간은 신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신은 인간적 속성들의 외적 표현, 즉 외화外化일 따름이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산물[신]에 의해 억압받는다.

3. 이 소외를 극복하려면 인간은 이 신이 실제로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자신들의 일부라는 것을, 즉 그 연관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맑스는 인간이 다양한 사회집단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를 공유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노동은 [노동이 인간의 자기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형성적formative이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것보다 더 긍정적인 정의이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을 통해 사회제도가 변화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서 다른 인간적 속성들이 실현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인간은 도시국가에서 사는 인간들과는 다른 능력들을 실현할 수 있다. 역사는 인류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형성 과정이다. (역사적인 이유에서 이러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지평을 넘어선다.) 우리는 역사를 알게 됨으로써 인간과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맑스는 경제적 요인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경제의 역사, 노동의 역사이다. 경제적 생활에서의 질적 변화는 역사를 항상 전진하는 불가역적 과정으로 만든다."(712-3)


# 맑스는 〈경제적-물질적 요인들이 역사적 과정의 추진력〉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자'이다.


"그런데 노동은 맹목적인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 노동이다. 노동은 인간을 실재 세계와 접촉하는 하는 특유한 인간 활동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사물에 대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 스스로에 대해서 학습한다. 그리고 노동은 새로운 생산물을 창출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창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더욱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렇게 노동은 맑스 사상에서 근본적인 인식론적 개념이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인식한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광학적 자극을 받아들이는 카메라처럼 바라보는 고전적 경험주의자들의 정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인식 모델과 상충한다. 노동과 인식의 인식론적 연관성에 대한 이 해석이 옳다면 이것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엄격한 구분과 이러한 이분법에 기초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할 이유가 된다. 노동과 인식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노동이 인과적으로 인식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718)


제19장 키르케고르 / 실존과 아이러니


"한 인간으로서도 그리고 작가로서도 키르케고르는 긴장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죄와 불안을 중심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내향적 태도와,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을 향한 갈망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의식적이고 성숙한 태도 간의 긴장이었다. 이 두 태도는 키르케고르가 성장한 배경과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 그 뿌리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적 경건주의가 그 하나이고, 성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자기주장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다른 하나이다." "가끔 그는 헤겔과 사변철학을 아이러니한 태도로 비판하면서도 헤겔주의적 관념론자를 연상시키는 단어들과 표현들─주관적과 객관적, 개별적과 보편적 같은 대립적 용어들─을 사용했다. 경건주의와 자율성, 그리고 관념론과 낭만주의 간의 상호 중첩된 이 긴장들로부터 키르케고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바로 실존적 시각이 그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그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737-8)


"통상적인 산문이나 과학 논문에서 우리는─〈지금 시각은 12시 30분이다〉 혹은 〈허리케인이 동남쪽에서 접근 중이다〉 같은─〈직접적 의사소통〉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직접적 의사소통은 키르케고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표현, 즉 보다 시적인 표현이 필요하다. 이 경우엔 무언가에 대한 명제들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태 전체를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되는 태도와 〈의향〉 전체가 전달 대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이 문제가 될 때 진정한 주제는 바로 다양한 사태에 대한 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세상 속의 객관적 사태로서가 아니라 진정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표현형식이 요구된다. 이러한 종류의 통찰을 전달하고자 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 성찰적 관계를 갖는 문학적 예술가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키르케고르는 〈이중 성찰적 의사소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740)


"세계와 관계하는 우리 자신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독자가 텍스트와 관련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한 텍스트는 과학적 주장이 그렇듯이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자신과 텍스트의 관계를 자유롭게 그리고 책임 있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열정적 몰두와 성찰적 거리 두기가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동시에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아이러니한 열정 그리고 초연한 현존─이 개념들이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하고자 했던 것을 나타내는 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키르케고르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단순하고 직접적인 명제들을 가지고 그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목적은 실존적 자기 인식의 전달과 교화이며, 그 수단은 수사와 아이러니의 사용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740-1)


제20장 다윈 / 인간 개념을 둘러싼 논쟁


"다윈의 자연선택설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특성들이 어떻게 유전되는가라는 문제와 새로운 유전적 특성들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해 설명되었고, 두 번째 문제는 돌연변이 개념에 의해서, 즉 돌연적이면서 상대적으로 항구적인 유전물질의 변화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이론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형질의 변이의 발생도, 자연선택도 어떤 의지나 의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돌연변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특정 돌연변이가 언제 발생할지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돌연변이는 원칙상 과학적으로,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자연선택도 의지나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토대로 하는 신학적 설명만이 아니라 생명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도 배제되었다."(759-60)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해석에 대해 열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중 하나가 바로 〈기본적으로〉, 즉 유전적으로 우리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은 우리의 자기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우리가 무엇인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당위적으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생존 투쟁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가 믿고, 그리하여 인간들 간의 관계가 이기주의적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부당하게도 〈존재〉로부터 〈당위〉로 이행한 것이다. 존재로부터 당위로 연역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과학 이론으로서의 다윈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적자, 즉 강자의 권리를 진화론적 주장을 빌려 사회를 조직하는 규범으로 승격시키는, 다윈주의에 대한 정치적 해석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763-4)


제21장 니체와 실용주의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와 역사를 의미 있고 이성적이며 정의롭다고 보았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세계관들은 단지 카오스를 회피하려는 인간의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세계를 지속적으로 〈위조〉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세계를 카오스로 바라보는 이 견해는 니체 철학의 지배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세계는 무계획적이며 운명의 장난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사유는 언제나 엄격한 논리적 형식과 구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실재는 형태가 없으며 혼돈이다. 카오스의 위협은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만들어서 〈형이상학적 예술가〉가 될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형태를 부여하고 생존하기 위해 〈의미〉와 〈목적〉을 부가한다. 철학적 체계와 세계관은 우리의 실존을 확보하는 데 쓰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부가한 구조는 점차 세계 자체의 구조로, 신에 의해 창조된 구조로 이해된다. 이것이 평화와 안전을 위한 가정이다."(773-4)


"신이 가치와 권위를 상실함에 따라 우리는 신을 대체하여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다른 별들, 즉 정언명령, 헤겔의 이성, 역사의 목적 등을 찾는다. 허무주의는 우리의 외부에도 내부에도 실제로는 어떠한 도덕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신에서 직접 귀결되는 하나의 사유 방식이자 심리 상태이다. 실존이 〈목적〉, 〈통일성〉, 〈목표〉 그리고 〈진리〉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는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무가치함의 감정이 생긴다. 가치가 부여된 이러한 범주들은 우리 자신이 세계에 부가한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범주들을 포기하면 세계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이 죽었다면 도덕과 진리의 토대도 사라진 것이다. 〈진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다 허용된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니체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 그의 화신인 차라투스트라는 신과 허무주의와 실존적 진공상태를 극복하게 된다. 그 조건은 우리가 만든 〈유용한〉 생활용 거짓말들을 떨쳐버리는 것이다."(774-5)


"니체는 그의 위버멘쉬[초인] 이론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다." "니체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가 위버멘쉬와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전망을 피력하려고 쓴 책이다. 역사 속의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세계가 선과 악의 싸움터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러한 실수를 저지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또한 그 점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도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스스로 이 유일한 목적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업을 떠맡았고, 이것이 바로 위버멘쉬 개념이 자리할 곳이다. 〈위버멘쉬가 지상의 의미[Sinn]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져 있는 밧줄이다. 사람한테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그가 위버강[넘어감]이자 운터강[내려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든 것을 떨쳐버려야 한다."(783-6)


"니체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 곧 진술과 사태 간의 대응correspondence이라는 진리대응설을 부인했다. 니체에 따르면, 그 이유는 우리의 이론에 대응하는 중립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사실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항상 〈이론 의존적〉이다. 순수한 사실이라든가 〈중립적 서술〉이란 것들은 모두 은폐된 해석일 뿐이며 여러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힘에의 의지 이론과 영원회귀 이론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허구들과 다른 허구들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니체는 이 이론들이 참이라고 생각했는가? 그 답변은 어떤 해석들은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 해석들은 삶과 삶에 대한 긍정에 유용한 것들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론들이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고 보았다. 그것들이 참인 이유는 그것들이 세계에 대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니체에게는 그러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도움이 된다[실용주의적 진리]는 의미에서이다."(791)


제22장 사회주의와 파시즘


"고전적 맑스주의는 공산주의가 도입되면, 즉 계급사회와 억압이 철폐되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국가가 지배계급의 수중에 있는 억압 기구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경찰, 군대, 법체계─이 모든 것은 계급국가의 단면이다. 그런데 레닌은 권력을 획득하자 국가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소멸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해야 했다. 레닌의 답변의 핵심은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반혁명 시도를 타도하고 봉쇄할 이행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이행기에 자본주의 계급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독재국가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새로운 폭력적 국가가 아니다. 이것은 한 단계 앞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의 독재체제인 자본주의하에서는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소수인 자본가들에 의해 억압당한다. 프롤레타리아트독재하에서는 반혁명적인 소수가 혁명적 다수에 의해 억압당한다."(801)


"그리스 말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이라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위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필요들을 토대로 사회를 재조직하자는 정치 운동이었다." "아나키Anarchy는 조직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조직이 자발적으로, 즉 공통의 이해관계와 그것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생해 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나키즘의 계급 개념은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급 개념과는 다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들과 오직 일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가진 자들 간의 구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통치자와 피통치자, 주인과 노예의 구분이다. 이것이 바로 아나키스트들이 일차적으로 투쟁 대상으로 삼는 구분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일당독재 국가형태의 〈이행기〉가 새로운 계급사회 말고 다른 것을 이룩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적 조건의 진정한 변화를 이룩하려면 대중의 자기 조직과 행동을 토대로 해야만 한다."(803-5)


"파시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파시즘은 야만과 전제정치로의 도덕적 회귀일 것이다.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나타낸다. 자본가들이 무너질 것 같은 자신들의 제도를 테러와 폭력을 통해 안정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파시즘은 균형을 상실한 문화의 극단적 표현으로 보일 것이다. (종교로 대표되는) 진정한 공동체와 참된 권위가 상실되자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들을 추종한 것이다." "파시스트(나치) 국가에서 경제와 사회 일반은 평시에조차 가상적 〈전쟁 상태〉에 있다. 질서와 규율이 부과된다.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도 있는 사유는 제거된다. 자기 이익은 공동의 이익하에 종속된다. 문제들은 거의 명령과 힘에 의해 해결된다. 경제생활은 가격 동결, 임금 동결 그리고 파업 금지와 함께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간다. 동시에 취업률은 높고, 생산수단의 소유는 계속 사적 소유로 유지된다."(811, 815)


제23장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많은 면에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인간 개념을 전복시켰다. 데카르트, 로크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다. 이 능력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격의 핵심이자 의식적 〈자아〉와 연관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psyche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환상이라고 보았다. 의식적 〈자아〉는 단지 강력한 무의식적 정신생활의 외향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꿈과 사소한 실수와 농담과 신경증적 증상들의 배후에는 무의식적 (통상 성적) 동기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프로이트는 주체의 의식적인 의도와 동기에 비추어 볼  때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적 탐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이해가 불가능하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증상들을 무의식적 동기와 의도의 표현으로 볼 경우 그것들이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의심의 해석학〉을 도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23-5)


"우리의 충동과 외부 세계에 대한 관계와 우리의 양심(〈내부의 목소리〉)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생활의 모델(이드, 에고 그리고 슈퍼에고)을 구성했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허구의 개념과 실체 간의 경계 지점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공간적 외연을 가지며 합목적적으로 구성되고 삶의 욕구를 통해 발전된─오직 일정한 조건하의 특정 장소에서만 의식의 현상들을 발생시키는─정신 기구에 대한 우리의 가정은 심리학을 다른 모든 자연과학과 유사한, 예를 들어 물리학과 유사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분명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물리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의 근본적인 메타심리학적 가정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정신생활을 정신적 힘과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정신분석학이 자연과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832-3)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프로이트, 아들러 그리고 융의 이론들이 명백히 경험에 의해 확증되었고 엄청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포퍼는 정신분석학의 강점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라고 보았다. 포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과학적 이론들은 어떤 가능한 과학적 결과들(〈사실들〉)과 양립될 수 없음으로써 반증될 수 있는 반면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모든 사실과 양립 가능하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반증될 수 없고, 그래서 비과학적이다. 즉 반증 가능성이 어떤 경험적 이론을 과학적으로 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반적 판단 기준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과학적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원칙적으로 어떤 사실이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정신분석학의 외관상의 성공은 이와 같이 그것이 내용이 없다는 사실 덕택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철학자는 정신분석학의 전제들과 가설들이 반증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845-6)


제24장 사회과학의 대두


"콩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그리고 실증적 단계라는 세 단계를 거쳐왔다.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은 이미 실증적 단계에 정착하였다. 이것들은 신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이미 벗어난 과학들이다. 그러나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은 여전히 신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사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콩트는 이 학문들을 실증적, 과학적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관점에서 그는 실증적 사회과학을 옹호했고, 그것은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실증적 학문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반反사변적이다. 실증적 학문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는 법칙적 연관 관계에 집중한다. 고전역학은 실증적 학문의 모델이며 사회학은 가능한 한 물리학을 모델로 구축되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자연과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구성적이고 교화적이라는 의미에서도 〈실증적〉이다."(854-5)


"토크빌은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서, 그리고 정치와 제도에서 모두 평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발전 경향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토크빌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것은 귀족적 가치와 엘리트적 지성의 가치만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주의 및 자유와 민주적 평등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적 다수가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잡으면, 다양한 소수와 일반적인 사회 관습을 따르지 않는 개인들은 억압받을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이 억압은 공개적인 물리적 폭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위험하다. 여론은 일반적이지 않은 견해들을 고통 없이 조용하게 억압한다." "토크빌은 자유와 평등은 결합시키기 어려운 것이며, 평등은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토크빌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강한 국가권력을 초래할 것이며 국가는 인민의 물질적 생활 조건을 통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857-8)


"짐멜에게 근대 세계는 균열이 가고 조각들로 분산된 세계였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짐멜은 자신의 대작 『돈의 철학』에서 목적-수단이란 연결 고리들의 계산이 근대적 삶에서 어떻게 더욱 득세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목적 합리성이 다른 형태의 합리성들을 몰아낸 것이고, 화폐경제 때문에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로 변형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짐멜은 독특한 사회관계에서의 소외 및 사물화 이론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만들어낸 사물들이 점차 우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적 상호작용은 객관적이고 초개인적인 구조들로 〈경화〉될 수 있다. 근대적 삶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문화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형식들에 내재하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결과들은 우리에게 낯설게 된다."(867-8)


"뒤르켐의 기본 사상은 사회의 토대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면 사회는 병든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이 연대를 회복하기 위한 올바른 처방을 찾아야 한다. 뒤르켐에게 사회학은 이 연대에 관한 학문이다. 즉 이 연대의 토대와 그것이 어찌해서 약화되는지, 또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뒤르켐은 자신이 살던 시절의 프랑스가 바로 연대가 약화된 사회, 즉 병든 사회라고 생각했다." "뒤르켐이 대체로 반대한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및 맑스주의에 공통되는 것, 즉 그것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계몽주의의 유산인 발전, 해방 그리고 진보의 이념들이었다. 이 이념들을 뒤르켐은 해체로 나아가는 위험한 경향들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안정과 행복의 전제 조건인 사회적 연대를 이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뒤르켐은 주장했다."(869, 873)


"우리는 연구 주제가 가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며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버가 보기에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는 것은 가치를 통해서이지만 우리가 과학자로서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베버의 과학철학에서는 〈이념형〉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념형은 과학에서 사용되는 기본 개념들로 이해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명론자인 베버에게 (〈경제적 인간〉과 같은) 이념형적 개념들은 실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리케르트와 신칸트주의를 좇아서 베버는 이념형은 단지 실재의 다양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는 형식적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념형은 사안의 특정 측면들을 순수하게 부각시키며 어떠한 규범적 성질도 갖지 않는다." "이념형은 연구자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지만, 주어진 사태와 관련하여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적합〉해야 한다."(878-9)


# 네 가지 〈순수한〉 행위 유형들(이념형들)

1. 행위는 주어진 목적과 관련하여 합리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목적 합리적 행위).

2. 행위는 절대적 가치와 관련하여 합리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가치 합리적 행위).

3. 행위는 행위자의 감정 상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정동적affective 혹은 감정적 행위).

4. 행위는 전통과 뿌리 깊은 습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전통 지향적 행위).


"과학적 합리화는 베버가 의미 상실 및 그에 따른 우리의 내적 곤경이라 부른 것을 초래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질병에 대한 진단에서 베버는 근대의 〈무의미성〉 문제에 직면했다. 확고한 윤리가 부재한 가운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등장했다. 이 투쟁의 결과는 합리적 주장과 판단 기준에 의해 결정될 수 없었다.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처럼 베버도 이 투쟁에서 우리는 어떠한 합리적 토대도 갖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베버의 소위 〈결단주의decisionism〉이다." "우리는 베버가 합리성과 관료화의 증대를 우리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베버가 이러한 발전에 대한 유일한 정치적 대안으로 본 것은 카리스마적인 〈수령민주주의(퓌러데모크라티Führerdemokratie)〉였다. 즉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통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의 미래관에는 비관주의가 스며들었다. 베버에게는 어떠한 낙관주의도 환상일 뿐이었다."(889-90)


제25장 자연과학에서의 새로운 진전


"자연이 예전에는 테크놀로지로 간주되었다면 이제는 테크놀로지가 자연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물리학에서 현대물리학으로의 이행과 함께 우리는 인식론적 전환을 하게 된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는 예전에는 연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수학적 속성을 가진) 자연적 과정을 인식하고 따라서 자연은 우리가─평형 바퀴, 낙하하는 구球 등과 함께─공학에서 볼 수 있는 원리들에 의해서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이제 우리는 자연적 사건이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와 공학기술에 의해 결정된 실험 장비 및 관찰 장비의 산물이 되었음을 본다. 우리는 우리의 관찰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학적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측정과 관찰에 사용하는 개념 및 장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요건은 더 이상 내세우지 않는다. 〈실재론적인〉 인식론적 가정은 그렇게 함으로써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901)


"오늘날 우리는 사용하고 이해하는 데 장기간의 수련을 요하는 복잡한 테크놀로지와 복잡한 이론적 전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과 관계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우리 간의 상호 관계는 점차 이렇게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다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펜과 종이가 아니라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쓴다─[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정교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서도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점점 더 삶의 경험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코드들을 매개한다. 이렇게 과학화 과정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매개체를 창출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서나 우리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나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일면적이고 진부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921-2)


제26장 현대 철학 개관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라고 불리기도 하는 논리실증주의logic positivism는 영국 경험주의(로크, 버클리, 흄)와 계몽철학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물리학(아인슈타인)과 새로운 논리학의 새로운 성과에 대한 철학적 응답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전체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들, 특히 독일 나치즘의 등장에 대한 반응으로도 볼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지식이 확증될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어떻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경험에 의해 검증될 때 주장들은 어떻게 강화 내지 약화되는가 하는 방법론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전적 경험주의와 현대적 방법론 및 논리학이 종합되어 논리경험주의로 귀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구문론)와 방법론적 검증에 호소한다. 〈논리경험주의〉란 명칭은 심리학으로부터 언어 및 방법론으로의 이러한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925-6)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언어는 한편으로 원자적 사실을 가리키는 〈원자적〉 언어 표현과, 다른 한편으로 이 언어 표현들 간의 논리적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논리적 관계들은 형식논리학에 상응한다." "변증법은 개념들 간의 내적 관계들을 토대로 한 총체성을 지향한다. 하나의 개념이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때 그런 관계는 '내적 관계'이다. 논리적 원자론에서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갖는 관계들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외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 실증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가치판단들─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은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경우의 거부는 신학적 진술과 형이상학적 진술에 대한 거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진술들은 인식적 근거 성립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태도와 평가를 표현하고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931-4)


"쿤은 서로 다른 과학 패러다임들 간에는 도약이 존재한다고 상정했기 때문에 중단 없는 직선적 발전으로서의 과학적 진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상이한 두 패러다임의 옹호자들 간에 상호 이해를 창출하는 일도 어렵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가정들의 관점에서, 즉 자신의 패러다임을 통해 논점을 바라볼 것이다. 의사소통은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는 가능하지만 상이한 패러다임들 간에는 그렇게 쉽지 않다." "또한 개별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중립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관성과 객관성과 진리의 모든 판단 기준은 특정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다. 그러한 판단 기준 중 어떠한 것도 상이한 패러다임들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고, 모든 패러다임에 공통되는 판단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만약 진리와 타당성의 문제가 상이한 패러다임들과 관련하여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많은 입장이다."(947-8)


"간략히 말해 분석철학은 언어와 실재 간의 일대일 대응 이론을 거부하며, 기본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특정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만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한 단어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는 오직 그 단어가 사용되는 구체적 방식을 언급함으로써만 답변이 가능하다. 단어와 문장은 고립된 채로는 오직 잠재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그것들은 특정 맥락 속에 투입됨으로써만 실제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사용이 의미를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맥락에서 언어는 기술적記述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시와 도덕에서 언어는 주로 실제 사태에 대해서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과학의 언어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언어를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과제는─시나 윤리적 상호작용이나 실생활 같은─각각의 맥락을 지배하는 독특한 언어 사용을 찾아내는 것이다."(950-1)


"비트겐슈타인적 전통에 따르면 무의미성이란 의미 있는 일상언어의 오용이다.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들은 이러한 오용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한 맥락에서는 의미 있는 기능을 가졌던 말들을 그것들이 쓰여서는 안 되는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분석철학은 일상언어의 오용으로 생겨난 언어적 혼란에 대한 〈치료법〉을 제공하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 같은 분석철학자들에게 이 치료법은 특히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위한 것이다." "치료법적 방법의 목적은 상이한 언어적 맥락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방법은 하나의 언어공동체 내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공동체의 의미 있는 언어적 실천 규칙들에 대한 묵시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언어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인 언어분석은 무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분석과 논증을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묵시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시도이다."(952-4)


#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 언어는 기본적으로 발화행위로 표현되며, 이때 발화와 과제와 대상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언어와 실재의 구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론


"현상학은 문자 그대로 현상들에 대한 학문으로서, 사건과 행위를 현상하는 대로 기술하려고 한다. 현상학은 자연과학에 의해서 기술된 것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비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언어철학자들의 언어게임 개념과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현상학이 (후설이 제시한) 생활세계(레벤스벨트Lebenswelt) 개념을 과학적 개념들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세계는 인식론적 우선성을 갖는다. 단순하게 과학이 생활세계로부터 역사적으로 생성되어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가 과학적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식론적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상학의 과제는 현상들(도구, 의도, 동료 인간 등)을 다양한 맥락 속에서 현상하는 대로 기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심원한 목적은 (과학 활동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활세계 내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위와 합리성의 의미 구성적 조건들을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다."(962-4)


"실존주의는 엄밀한 의미의 철학 학파가 아니다. 이 용어는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 무신론자 장-폴 사르트르,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와 존재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서로 상반된 사상가들에게 붙여진다. 그런데 이들 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일정한 가족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방식의 뿌리는 키르케고르,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저 가족 유사성은 이 사상가들이 인간의 존재를─자기의식이 근본적이고 확고부동한 위상을 갖는─미완성의 삶 속에서 종종 비극적이며 역설로 가득한, 유한하고 죽을 운명인 개인으로서 내면화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실존철학의 기본 특징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실존적 성찰 속에서─죽음마저도 정면으로 직시하는─우리는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의식을 가지고 각성하고 사실상 다시 태어난다."(968-9)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는데, 그때는 보부아르가 거의 40세가 되었을 때였다." "당시에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타자'로 정의되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규정하고 여성을 〈제2의 성〉으로 규정한 남성의 시각이었다. 남성적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이 지배했다. 따라서 여성은 제2의 계급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자아관과 남성관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 결과 여성은 허위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규정은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또 그렇게 정당화되었다." "이 역할 모델을 재규정하려면 그것이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규정의 문제라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하고─이론적 노력과 실천적 노력을 통해─남성과 여성 양측이 자신과 타자를 보다 공평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부아르의 필생의 작업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그리고 철학과 문학 모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974-5)


"타자를 평등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현대(탈근대postmodern) 논쟁에서 점차 중심 테마가 되었다. 우리는 젠더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민족성과 문화 일반과 관련해서도 사회비판적으로 차이를 옹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포스트모던적인 문화 다양성이 전면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다양성과 관련하여 몇몇 철학자는 상이한 문화와 가치 간의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규범의 형태로 보편타당한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존 롤즈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일반 규범이라는) 〈옅은thin〉 보편성을 찾으려는 이 시도는 새로운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 규범의 이상적 보편성 역시 구체적 상황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규범들을 구체적 상황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분별력을 요구한다."(977-9)


제27장 근대성과 위기


"르네상스 이후 인식주체가 철학적 출발점이 되었다. 경험주의자들에게도, 합리주의자들과 칸트에게도 그러하다. (로크에서 밀까지의) 정치 이론에서는 시장에서건 정치나 법에 있어서건 개인이 합리성의 담지자이다. 계몽된 주체의 적은 무지와 편견이다. 진보는 과학과 계몽, 자연에 대한 기술적 통제 그리고 물질적 복리의 증대이다. 독립적으로 행위하고 인식하는 주체, 과학과 계몽, 그리고 진보와 이성─이 개념들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개념들이다. 버크와 토크빌, 루소와 헤르더─이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즉 이들은 전통의 힘과 진보의 애매모호함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으로부터 귀결하는 파괴적 경향을 강조했다. 이것들이 〈근대 프로젝트〉에 대한 보수적 비판의 주요 주제들이었다." "맑스와 프로이트와 니체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낙관주의적 믿음에 대한 수많은 비판─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이트의 이성과 자율성 비판, 그리고 니체의 도덕 비판─을 쏟아냈다."(989)


"우리가 자유롭고 도덕적인 행동과 태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합리화라고,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 왜곡이라고, 그리고 환상이라고 폭로되었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의 상이 산산조각났다. 우리에게는 숨겨진 욕구와 소망의 혼탁한 바다만이 남겨졌다." "따라서 진리와 비진리는 서로 손잡고 나란히 나아가고, 모든 것의 저변에는 생명력과 힘에의 의지가 놓여 있다. 과학적 활동과 정치적 행위에서 높이 찬양되는 합리성은 실상은 숨겨진 힘이다. 이로써 신학적이든 인문주의적이든 간에 가치는 환상임이 폭로된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그릇된 희망은 사라졌다. 유럽의 허무주의는 완성되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과 숭고한 행위를 통해서만 합리성의 쇠우리를 벗어날 수 있다.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시적인 것뿐이다. 이것 말고 우리가 가진 다른 형태의 비판은 말과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힘을 폭로하는 〈해체〉이다."(989-90)


"하이데거에게 본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지만 우리 스스로 낯선 것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이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언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어는 열어젖힘이며, 특히 시적인 언어는 전달하기 힘든 것을 유난히 예민하게 포착한다. 같은 이유에서 진정한 예술이 중요하다. 언어는 말이다. 우리는 말로 우리의 뜻을 전달한다. 말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의사소통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알린다." "하이데거는 시를, 그리하여 말을 매우 높이 친다. 언어는 인간의 집이다. 그리고 시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재창조와 실현이 이루어진다. 빈말과 상투적인 언사와 수다에 의한 언어의 빈곤화는 인간 본질의 빈곤화이다. 하이데거에게 전위대는 과학자나 정치가가 아니라 시인이다! 고대 도시국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합리적 토론은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994-5)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의 전제 조건 중 하나는 진정으로 행위할 능력이나 기회가 없는─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측면인─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의 출현이다. 따라서 근대의 〈대중적 인간〉은 새로운 독재 체제의 상응물이다. 아렌트의 분석에서 대단히 흥미로운─그리고 우리를 깊은 불안에 빠지게 만드는─점은 근대의 분화와 합리화가 어떠한 뿌리나 정체성도 갖지 않은 개인들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잉여라고 느끼며, 따라서 자신들에게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정체성을 제공할 수 있는 지도자들에게 매료된다." "정의상 근대성은 모든 한계를 초월한다. 근대인은 언제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 결코 자신의 실존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근대인은 결코 〈여행에 질리지〉 않으며 불멸성을 추구한다. 근대인은 지상에 고착된 삶을 넘어서기를 원하고 이미 우주 공간에서의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 진보 이념은 일종의 휘브리스[오만]이다."(1000-1)


"아렌트는 오직 소수만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엘리트주의적 참여 민주주의를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렌트의 정치관은 다소 낭만적이었다. 정치는 시민들이 영광과 인정을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싸움터이다. 정치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싸움터가 된다. 이러한 사상은 아마도 자기실현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는 어느 정도 자기표현적 행위로 축소된다. 그래서 아렌트에게 진정한 정치는 위대한 연극과 유사하다. 이 관점에서는 일상 정치 개념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언제나 시한에 직면해 있으며 따라서 타협과 전략적 결단 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사라진다." "다양한 맥락에서 아렌트는 〈사회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사회문제는 정치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사회문제를 정치에서 배제한다면 정치적 삶은 아무런 실체적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1003-4)


"해석학자로서 가다머는 철학 텍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영향도 받았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해석이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저자와 저자의 필생의 업적 전체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특정 부분을 저자의 저작 전체에 비추어서만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 삶과 지적 삶 그리고 경력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위 해석학적 순환은 어떤 텍스트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다. 텍스트 이해는 텍스트 전체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부분들을 해석하고 부분들을 토대로 전체를 해석하는 작업을 번갈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삶도, 가급적이면 재구성된 전체로서의 저자의 저작까지도 끌어들이는 해석학적 순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텍스트 해석이 대체로 심리학적 (혹은 역사적) 프로젝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서 가다머는 유보적인 의견을 표명했다."(1007)


"데리다는 텍스트 혹은 글쓰기 개념을 확대하여 언어를 〈글쓰기〉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글쓰기〉로 이해했다." "〈존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서 토대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글쓰기〉를 특징짓는 것은 〈구분짓기(차연差延)〉이다. 글쓰기는 새로운 차이들 간의 끊임없는 경쟁,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같의 경쟁으로 나타난다. 이 열린 경쟁에서 다른 것, 즉 〈타자〉는 우리의 개념들을 가지고 그것을 포착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정의되는 것에 저항한다." "데리다에게 문제는 유명한 자기 지시의 문제이다. 해체가 진리 개념을 포함한 철학의 모든 고전적 개념이 〈분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데리다는 이것에 관해 자신이 말한 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만약 그가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그는 자기 지시적 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을 하나라도 말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1013-4)


"푸코는 구조주의적 입장을 옹호했다. 인간은 사회적 구성물이며, 실재는 근본적으로 구조이다. 다른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처럼 푸코도 구조적 조건 개념을 우선시하지 않고 인간을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는 인간 개념을 지지하는 이론들을 비판했다. 푸코는 그가 지식의 〈고고학〉이라고 부른 것, 즉 특정 시대의 근저에 놓여 있는 구조적 연관 관계를 찾아내려고 했다. 푸코는 특정 시대의 생각과 행동까지도 결정하는 결정 구조를 에피스테메epistémé라고 불렀다."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의 특징은 저작이 취하고 있는 학문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이 실천적(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의 합리주의를 비판함으로써 푸코는 해체주의자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데리다처럼 푸코도 〈타자〉로 정의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푸코의 정치적 헌신은 너무도 강렬했고 철학적 정당화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너무도 일관된 것이어서 그의 철학적 회의주의와 그의 실천적 헌신 간에는 명백한 긴장이 존재했다."(1014)


"로티는 진리대응설이 아니라 유용성을 강조했는데, 이로써 그는 실용주의 쪽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그는 생각은 항상 특정 맥락 속에 〈처해〉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맥락주의자이다. 로티의 실용주의와 맥락주의는 그에게 자신의 모국인 미국의 리버럴하고 민주적인 정치적 전통이 철학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로티에게 철학적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철학적 텍스트를 읽는 것은 흥미롭고 교양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식견과 비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리나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티는 우리가 (진리와 허위의 구분 같은) 철학적 구분들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예를 들어 절대적 진리의 이념이 의문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그것들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형태들에 대한 반박이 진리 개념 같은 보다 온건한 형태들에 대한 반박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1015-8)


"해석학적 전통과 비판적 해체는 모두 텍스트로서의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비교문학 연구와 역사 연구, 신학 및 법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하버마스는 언제나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처음부터 언어를 발화행위로 파악했다. 하버마스의 경우 행위 (그리고 제도) 개념이 텍스트 개념보다 우선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자연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인식관점만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설명하고 통제하는 인식관심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인식관심─기술적 인식관심, 실천적 인식관심, 해방적 인식관심─이 적용 가능하다." "우리는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가설연역적 연구와 해석학적 연구(〈이해사회학)〉 둘 다를 수행할 수 있다. 보다 포괄적인 역사-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하버마스가 본질적으로 통제가 아니라 우리의 상호 이해 능력과 관련된 그런 종류의 합리성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행위가 있다."(1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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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2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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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대륙철학이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자연과학의 모델이 철학 방법의 모델을 제공할 수도 없거니와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에 접근하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유의미한 길을 자연과학이 인간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에 대한 이런 우려는 비록 정당하기는 해도, 근 수십 년간 반과학적 태도와 융합하여 자칫 '몽매주의'로 빠져들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철학에서 피해야 할 두 극단은 (카르나프와 하이데거의 논전으로 대표되는) 과학주의와 몽매주의다." "오늘날 철학 연구의 분열은 부적절하고 분파적인 전문적 자기기술의 결과다.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둘 다 대단히 분파적인 자기기술이며, 이는 철학의 전문화, 내가 보기에는 철학의 비판 기능을 약화하고 문화생활에서 철학을 점차 주변화해온 전문화의 결과다. 철학은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14-5)


1 지식과 지혜의 간극


"나는 지식과 지혜의 관계와 관련하여 덜 극단적인 견해를 취한다. 나는 삶의 의미라는 물음을 경험적 조사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이는 더 나은, 더 포괄적인 이론을 내놓아서 좁힐 수 있는 설명상의 간극이 아니라 도리어 '느껴지는' 간극이다. 설령 인식론적 걱정거리 전부를 과학적 탐구를 통해 경험적으로 해소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이것이 어쩐지 지혜의 문제와는, 인간의 좋은 삶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느낄 것이다. 여기서 역설은 과학적 세계 파악이 지식과 지혜의 간극을 한층 민감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과 기술 면에서 고도로 발달한 사회들에서 이 역설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다는 쪽에 판돈을 걸기까지 할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간극이 심연처럼 넓어져 보이는 곳은 서구의 선진 사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의미라는 사변적 물음은 사치와 풍요의 결과다."(27-8)


"막스 베버의 표현대로, 과학혁명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자연의 탈주술화'를 초래했다. 더이상 자연은 인간도 참여하는 어떤 '세계정신'의 가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순전히 비인격적인 객관적 '물질'로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인간의 의도와는 완전히 별개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근대인들의 문제는 분명하다.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의 탈주술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지식과 지혜의 간극을 경험하고, 그 결과 우리 삶에서 의미를 빼앗기고 있다. 자연은, 실은 인간은 의미 간극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고 좋은 삶에 관한 납득할 만한 견해를 내놓는 방향으로 '재주술화' 될 수 있을까? 이 딜레마는 해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 과학적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철학이 과학주의에 희생될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짐승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를 새롭게 인간화하는 방식으로 과학주의를 거부한다면 몽매주의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광인이 된다."(31-2)


"이런 논의가 대륙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러분은 충분히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짐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광인으로 바꾸겠다고 위협하는 이 딜레마를 오늘날 철학이 철저하게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의미는 지혜라는 물음,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삶의 의미라는 물음을 적어도 철학 활동의 중심 가까이로 이동시켜야 하고, 무관심하거나 당혹스러워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태도로 이 물음들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륙철학이라 불리는 철학의 주된 호소력은 지식과 지혜, 철학적 진리와 실존적 의미를 통합하려고, 적어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 지식과 지혜 사이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을 구별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말해두자. 쟁점은 이것이 아니다. 이 책 전반에 걸친 나의 요지는 그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모든' 철학함의 필요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32, 35)


2 대륙철학의 기원: 칸트에서 독일 관념론에 이른 경로


# 대륙철학의 핵심적 운동들

1.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그 여파 (피히테, 셸링, 헤겔, 슐레겔과 노발리스, 슐라이어마허, 쇼펜하우어)

2. 형이상학 비판과 '의심의 대가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베르크손)

3. 독일어권 현상학과 실존철학 (후설,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하이데거)

4. 프랑스 현상학, 헤겔주의, 반(反)헤겔주의 (코제브,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바타유, 보부아르)

5. 해석학 (딜타이, 가다머, 리쾨르)

6.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카치,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7. 프랑스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포스트구조주의(푸코, 데리다,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리오타르, 보드리야르), 페미니즘(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차이는 대부분 그야말로 칸트를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칸트를 '얼마나 많이' 읽는지에 달려 있다. 제1비판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보통 초월론적 연역이라는 논증의 성공에 관심을 둔다. 이 논증에서 칸트는 우리가 어떻게든 대상을 경험하려면 자신이 말하는 '오성의 범주들'의 작용을 전제해야 하고, 따라서 인식하는 인간의 주관, 즉 지각 경험의 '지독하게 윙윙거리는 혼동'을 개념 아래 통일하는 주관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요컨대 칸트가 말한 대로 〈대상이 개념에 합치하는 것이지 개념이 대상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적 세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현실적이지만, 우리가 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설명하려면 개념 아래 직관들을 통일하는 주관을 논리적으로, 또는 칸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초월론적으로' 전제해야만 한다." "이 관점에 의거해서 읽으면 칸트는 인식론에, 아울러 간접적으로 과학철학에 중대한 철학적 기여를 한 셈이 된다."(45-8)


"1890년부터 1920년대 말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강단 철학을 지배한 신칸트주의 학파는 십중팔구 칸트를 이렇게 읽었다. 근래까지 영미권에서 칸트를 수용하는 방식을 지배한 피터 스트로슨을 비롯한 이들도 칸트를 인식론적으로 독해했다. 그렇지만 제3비판의 야심은 사뭇 다르다. 칸트는 판단 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오성 능력(자연에 관한 인식에 관심을 두는 인식론의 영역)과 이성 능력(자유에 관심을 두는 윤리학의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한다. 판단은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 사이에서 매개자가 될 것이고, 비판철학의 요소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화시킬 것이다. 이 경로를 따라간다면, 칸트 철학의 뜨거운 쟁점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 자연과 자유의 관계의 타당성이 되거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된다.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피히테와 셸링, 헤겔과 초기 독일 낭만주의에 속하는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바로 이 경로를 따라갔다. 주장하건대, 이 시기부터 대륙철학은 줄곧 이 경로를 따라갔다."(48)


"하만은 1784년에 쓴 「이성의 순수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에서 형식주의를 이유로, 즉 인식의 형식적 성격을 과대평가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성과 경험이,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이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칸트를 비판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일련의 잘못된 이원론(형식 대 내용, 감성 대 오성, 이성 대 경험, 자연 대 자유, 순수한 것 대 실천적인 것 등)으로 세분되며, 실천이성의 우위는 추상적 의무의 공허한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하만은 후대에 전개된 철학적 국면인 언어적 전회까지 신통하게 예측이라도 한 듯이, 이성과 경험의 분리, 또는 형식과 내용의 분리는 불가능하며, 그 이유는 당연히 이성과 경험의 혼합물인 언어에 사유가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언어를 사용할 때 당신은 개념과 직관 사이의 정확히 어디에 구별선을 긋는가? 하만은 〈사유하는 능력 전체가 언어에 의존할뿐더러······ 언어는 이성이 스스로를 오해하는 과정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고 쓴다."(50-1)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의 인식이 고전적 형이상학의 사변적 대상들(신, 영혼)에 접근할 수 있음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물자체를 인식할 가능성과 자신이 자아의 '본체적' 근거라고 부른 것─현상으로 현전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가능성을 둘 다 제거하기까지 했다. 야코비의 기본 테제는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변경하는 피히테의 작업이 객관도 주관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빈약한 '자아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입장이 니힐리즘적인 이유는 자아 외부에, 또는 자아와 별개로 존재하는 대상을 전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데카르트 비판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야코비의 피히테 비판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속화하는 합리주의를 니힐리즘 혐의로 고발한다." "신을 부정할 경우 우리는 인간을 신으로 바꾸어놓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야코비가 보기에 칸트와 피히테의 관념론에는 인간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복제물로 바꾸어놓으려는 유혹이 담겨 있다."(57-60)


"마이몬의 중심 논증은 초월론적 관념론의 핵심에 자리한 칸트의 오성과 감성 이원론이 너무도 철두철미한 이원론인 까닭에, 선험적 개념과 경험적 직관이 상호작용할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초월론적 연역 논증이 바로 칸트가 그 연역을 수행하기 위해 상정하는 이원론 때문에 타당성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런 비판에 영향받지 않을 어떤 상위의 통일 원리였다. 피히테 철학과 독일 관념론은 이 물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이 통일 원리를 주관의 활동 안에 위치시켰다.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은 주관의 자기반성 안에서, 자유에 관한 주관의 의식 안에서 통일되었다." "청년기 셸링이 자신의 초기 자연철학에서 표현한 통일 원리는 힘 또는 생명 개념이었다. 통일 원리는 헤겔에게는 정신 개념이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 개념이었으며, 니체에게는 힘, 마르크스에게는 실천,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였다."(65-6)


3 안경과 눈: 철학의 두 문화


"여기서는 대륙철학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두 가지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 대륙철학은 본질적으로 '전문적 자기기술self-description'이다. 다시 말해 대륙철학은 철학자들과 철학과들이 자기네 연구와 강의를 조직하고 지적 충성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륙철학은 철학 전문직화의 일면이다. 전문적 자기기술로서의 대륙철학 개념이 정확히 무엇에서 기원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합의가 없기는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미국이라는 맥락에서, 아울러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에서, '대륙철학'은 기존 용어들인 '현상학'이나 '현상학과 실존철학'을 대체했다." "'현상학'이 '대륙철학'으로 대체된 이유가 완전히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대륙철학은 프랑스어권의 다양한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상 운동들을 다루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들은 갈수록 현상학에서 멀어졌고 대개 현상학에 적대적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라캉, 데리다, 리오타르는 적대감이 약했고, 들뢰즈와 푸코는 적대감이 강했다."(78-9)


"영어권에서 분석철학은 거의 완전한 전문적 패권을 쥐고 있으며, 현상학 같은 비분석철학은 이 패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영어권에서 대륙 사상의 수용은 대부분 철학과 밖에서─문학이론, 예술사, 사회이론, 정치이론, 문화 연구, 역사서술, 종교 연구, 인류학 등─이루어져왔는데, 이는 의미심장하고도 중요한 사실이다." "대륙철학을 둘러싼 논전이 끊임없이 격앙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두번째 주장을 해야 한다. 전문적 자기기술 개념이 대륙철학을 둘러싼 다툼을 격화하고 악화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대륙철학의 더 오래된 '문화적' 의미를 덮어버리기 때문이고, 또 대륙철학이 영국 및 영어권과 유럽 대륙의 관계에 관한 논쟁까지 거슬러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 전통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은 '영국 경험주의', '프랑스 합리주의', '독일 형이상학'처럼 모호하고 실상을 호도하는 개념들에 담긴 정치지리학의 이데올로기적 편견들과 불가피하게 얽히게 된다."(81-2)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콜리지를 결합하면 당대 잉글랜드 철학 전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밀에 따르면 벤담은 위대한 〈전복자〉 혹은 〈그의 시대와 나라의 위대한 '비판적' 사상가〉다. 그런 전복적 비판은 논리 분석의 방법과 경험적 양식(良識)을 사용하여, 〈실천적 사안들〉의 진실을 캐묻기에 이른다. 밀이 보기에 벤담은 흄의 회의주의를 특히 법률과 통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 실천 지향적 사상가다. 벤담의 훌륭한 면모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자세로 이런 비판 재능을 공익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콜리지는 사안의 진실이 아니라 의미를 캐묻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까닭에 콜리지는 두루 받아들이는 학설이나 전통을 파괴하기보다는 그런 학설과 전통의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재구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격변의 강력한 적으로서 전통을 지키려는 쪽은 '콜리지주의적 대륙철학'이고,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친구로서 전통을 파괴하려는 쪽은 벤담이다."(84-6)


"밀은 진리란 전체의 어느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자체를 반성함으로써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은 그런 적대 또는 변증법의 필요성과, 자유민주주의 정체에서 필수적인 요소인 견제와 균형을 비교한다. 경쟁적 정당 제도가 정당한 한 가지 이유는 여당의 정책과 입법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것이 야당의 의무이고, 여당이 야당이 되어도 응당 그런 의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오류는 밀의 희망적인 견해에 따르면 진리의 일부를 전체로 오인하는 것이고,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오류에 대한 두려움을 진리에 대한 욕구의 상위에 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는 벤담이 옳은지 콜리지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철학 경향이 더 큰 진리를 함께 표현하고 진리를 보기 위해 안경과 눈을 공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파괴와 끈기 있는 해석학적 재구축을 공히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은 더 큰 문화적 전체의 반쪽들이다."(90-1)


4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비판, 실천, 해방


"대륙 전통에서 철학적 문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완성품이 아니거니와, 영원한 철학이라는 비역사적인 공상의 요소도 아니다. 이 전통에서 고전적 철학 텍스트를 읽는 일은 대학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보다는, 우리가 이제 겨우 어렵사리 알아듣기 시작한 언어를 구사하는, 먼곳에서 온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철학적 문제들은 텍스트와 맥락에 '묻어 들어가(embedded)' 있는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떨어져(distanced)' 있다. 번역과 언어, 독해, 텍스트 수용, 해석, 그리고 역사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처럼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대륙 전통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바로 이런 묻어 들어가 있는 동시에 떨어져 있는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대륙철학자들은 흔히 '철학'보다는 '문학'을 하고 있다는 당혹스러운 혐의를 받곤 한다. 이런 혐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철학자의 명제와 경험의 관계가 마치 어떤 무매개적이고 투명한 관계이기를 바라는 것이다."(109-11)


"대부분의 분석철학과 달리 대부분의 대륙철학은 철학과 철학사를 구별하는 입장에 타당성이 있음을 부인할 것이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 대륙철학에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잠바티스타 비코와 후대의 장 자크 루소를 두드러진 예외로 치면, 역사 문제는 바로 이 전통에서 하만과 헤르더,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겔의 작업을 통해 철학적 중심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륙 전통의 장점은 실천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과 이 실천에 관여하는 철학자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역사성'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이 역사성에 대한 통찰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물음들은 더이상 사변적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주제들(신, 자유, 불멸성)이라고 정당하게 불릴 수 없게 되었다─칸트는 이 주제들이 도덕적으로는 옹호할 수 있을지언정 인식론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114-5)


"철학(그리고 철학자들)의 본질적 역사성에 관한 인식은 두 가지 문제를 함축한다. ①인간 주체의 근본적인 유한성. 즉 인간 경험 외부에 신과 같은, 우리의 경험을 특징짓고 판정하는 견지나 준거점은 없다. 또는 설령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 ②인간 경험의 철저히 우연적인 또는 피조적(被造的)인 성격. 다시 말해 인간 경험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환경은 그 정의상 우연적이다." "인간 경험이 우연적인 창조라면, 그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이는 철학이나 예술, 시, 사고(思考)의 변혁적 실천, 또는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대륙사상을 관통하고 하버마스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을 계속해서 고취하는 이 요구는 곧 현재의 요건으로부터, 자유롭게 바꿀 여지가 없는 그 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비판과 해방은 실 한 가닥의 양쪽 끝이다."(115-7)


"대체로 대륙 전통에서 철학은 현재를 비판하고 현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반성적 자각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위기를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에 물든 세계에서 신앙의 위기로 표현하든(키르케고르), 유럽 학문의 위기(후설), 인간과학의 위기(푸코), 니힐리즘의 위기(니체), 존재의 망각의 위기(하이데거),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마르크스), 도구적 이성의 헤게모니와 자연 지배의 위기(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표현하든 다른 어떤 위기로 표현하든 말이다." "이 비판은 기존 실천에 대한 비판이며, 그 실천이 정당하거나 자유롭지 못하다고, 진실되거나 온당치 못하다고 느낀다. 이 비판은 기존과는 다른 개인적 또는 집단적 실천을 지향하는 해방, 인간의 삶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다. 그 목표는 니체가 말한 고독한 귀족의 삶일 수도 있고,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 사회일 수도,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한 복수의 생성(~되기)일 수도, 또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130-2)


5 무엇을 할 것인가: 니힐리즘 대응법


"니체의 니힐리즘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구절은 그의 유고 제1권 『힘에의 의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니체에게 니힐리즘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것,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이라는 재귀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비판을 통해 탈가치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일이 그것들의 전개 과정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의미의 질서의 붕괴다. 그렇게 되면 칸트 이전 형이상학에서 가치의 초월론적 원천으로 상정했던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공허해지고, 삶의 의미를 걸어둘 인식론적 갈고리가 사라진다. 삶의 의미를 옹호하는 모든 초월론적 주장들은 그저 가치들로 격하되고 그 가치들은 믿기 어렵게 되어 니체가 말한 '가치 전환'이나 '재평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140-1)


"니체의 니힐리즘 진단은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를 동반한다. 니체의 저술을 규정하는 것은 니힐리즘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이유로 니체는 절망에 빠지거나 어떤 새로운 신을 발명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도 이 생성의 세계를 견디게 해줄 새로운 범주들과 새로운 가치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되풀이해 역설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니체의 저술에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영원회귀' 학설의 기능, 즉 〈의미도 목적도 없음에도 무(無)로의 결말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관한 학설의 기능이다. 니체는 영원회귀 개념으로 범신론의 반(反)테재를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범신론이 만물에 신이 임재한다는 사상이라면, 영원회귀는 시종일관 신이 없는 우주를 생각하려는 시도다. 니체에게 무신론은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니다. 무신론은 인간이 굽실거리곤 하는 우상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상당한 노력의 귀결이기도 하다."(147-8)


"칸트 윤리학의 토대는 순수하고 숭고한 의무이며, 이 의무는 어떠한 경험적 관심에도 근거할 수 없고, 행복과 같은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볼 수도 없다. 덕의 보상은 덕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럼에도 칸트의 윤리학은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 신과 영혼불멸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도덕적 행위와 먼 장래에 행복을 누리며 덕을 보상받을 것이라는 전망은 연결될 여지가 남아 있다. 니체는 칸트의 이런 사상을 칸트보다 더 칸트답게 바꾼다. 니체가 보기에 신은 없고, 영혼불멸 관념은 고약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으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가 없는 우주, 스스로를 끝없이 되풀이할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보장이 없는 우주에 존재하는 우리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상을 감당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이런 사태를 알면서도 '긍정'할 수 있다면, 기독교 도덕적 세계 해석이 함축하는 니힐리즘을 마침내 극복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148)


"물론 철학에서 니힐리즘과의 대결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처럼 각양각색인 사상가들이 인정한 대로, 철학이 다름 아닌 니힐리즘을 만들어내는 힘들과 공모해왔음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니체가 보기에 철학은 니힐리즘적이다." "그렇다면 니힐리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대체로 대륙철학은 근대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법한 비철학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한다. 니체는 고대 아티카 희랍인들의 비극적 사유에서, 하이데거는 시적(詩的) 창조에 관한 명상적 숙고에서, 아도르노는 하이모더니즘(high modernism, 모더니즘의 한 형식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특징으로 한다) 예술의 자율성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진료에서 위기에 대응할 자원을 구한다. 여기서 요점은 대부분의 대륙철학이 예술이든 시든 정신분석이든 정치든 경제든 비철학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니힐리즘이라는 문제들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150-1)


6 오해에 관한 사례연구: 하이데거와 카르나프


"빈 학단의 기본적인 지향은 오토 노이라트의 '형이상학에서 자유로운 과학'이라는 문구로 표현할 수 있다. 철학은 과학의 조수로서 경험과학의 명제와 방법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작업만 한다. 나아가 빈 학단은 철학적 테제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경험과학의 명제를 규명하고 전통 형이상학의 주장을 비판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을 전혀 실천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노이라트는 이렇게 썼다. 〈단일한 경험과학에 속하는 다양한 분야들의 옆쪽이나 위쪽에 자리하는 기본적 또는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철학 따위는 없다.〉" "이 과학적 세계 파악과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거짓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의미한 편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그 명제들에는 인지할 내용이 없다. 그 명제들은 정당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수단은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나 음악이나 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카르나프는 〈형이상학자들은 음악 재능이 없는 음악가들〉이라고 잘라 말했다."(164-5)


"하이데거는 철학을 이렇게 파악하는 입장과 극명히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학문/과학에 맞서 형이상학을 옹호하고자 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학문은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바탕이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무(無)다. 하이데거는 그렇다면 〈무는 어떠한가?〉라고 삐딱하게 묻는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학문은 이 무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 반면에 제대로 된 형이상학은 무엇보다 이 무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카르나프의 주된 논점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언어에서는 그 물음(〈무는 어떠한가?)〉이 형성될 수조차 없다는 것인데, 그 물음이 부정(否定)을 일종의 그럴싸한 명사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그런 물음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이상학이 일상언어에 내재하는 모호한 측면들을 양분으로 삼는다는 것, 논리적 개혁을 통해 형이상학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러한 논리적 언어 개혁은 빈 학단의 초기 프로그램의 일부였다."(165-7)


"하이데거의 논점은 지성적인 방식 외에 사물들을 생각하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들을 이론적으로 현시하기에 앞서 그가 말하는 '기분'─아리스토텔레스의 파토스(pathos) 개념의 번역어─안에서 정서적 혹은 감정적 개시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런 기분을─우울하든 신나든 그냥 무심하든간에─한낱 느낌으로, 이성 일색인 우리의 정신생활에 다른 색을 입히는 일종의 심리적 채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기분은 인간이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무에 관한 물음은 이제 〈무를 드러내 보이는 기분이 있는가?〉가 된다. 하이데거는 그렇다고 답하며, 이것이 불안, 독일어로 앙스트(Angst)의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보기에 불안을 경험하는 가운데 개시되는 무는 존재의 의미에 관한 형이상학 '고유'의 물음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탐구는 빈 학단이 주창한 과학적 세계 파악으로 환원할 수 없다."(167-9)


7 과학주의 대 몽매주의: 철학의 전통적인 곤경 피하기


"대륙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에서 과학주의를 채택할 경우 철학의 비판적·해방적 기능을 포착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세계 파악과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이 공모할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과학주의는 세계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알아채는 데 근본적으로 실패했다. 이런 소외는 여러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고립된 인간 주체와 대립하는 객체의 영역,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영역으로 세계를 변모시키는 식일 수도 있고, 무심하게 조사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공허한 상품으로 객체를 변모시키는 식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신념은 자연과학의 모델이 철학 방법의 모델을 제공할 수도 없거니와 제공해서도 안 되고, 인간이 세계에 접근하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방편을 자연과학이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념을 대륙사상가들 전반에 걸쳐서, 이를테면 베르그손, 후설, 하이데거에게서, 아울러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교제한 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190-1)


"그렇지만 과학주의에 대한 정당한 우려는 자칫 반과학적 태도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해 몽매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제 나는 과학주의를 견제하는 동시에 몽매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현상학을 옹호함으로써 그 중심에 관해 생각해보려 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적 태도의 기반을 이루는 인간 경험의 〈전(前)이론적 층을 드러내는 것〉이 현상학의 과제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현상학 '하기'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경험의 전이론적 층을 드러내고, 이 경험 층을 그 자체로 엄밀하게, 그리고 타당성의 기준에 부합하게 기술할 적절한 양식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 환경세계(독일어 Umwelt)는 과학의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인지적·윤리적·심미적 가치들에 이미 물들어 있는 세계다. 다시 말해 과학주의 또는 후설이 말한 객관주의는 학문적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인 '생활세계'의 현상을 간과한다."(193-7)


"현상학 내에서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 등을 운운하는 어떤 신비적 견해의 이름으로 과학적 연구의 결과를 논박하거나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비판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의식하는 일차적인 방편 또는 가장 유의미한 방편을 과학이 제공하지 않는다고 역설할 뿐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관심에 뿌리박고 있다. 더욱이 현상학적 전학문은 그런 실천들에 필요한 것이 자연과학의 인과적 가설이나 사이비 과학의 인과적으로 들리는 설명이 아니라 해석적 규명 또는 해석학임을 보여준다. 현상학이 제공하는 것은 사람과 사물,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규명하는 재(再)기술이다. 그렇기에 현상학은 어떤 위대한 발견을 내놓기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자연과학의 이론적 태도를 취할 경우 은폐되는 것들을 상기시켜준다. 현상학은 '일종의 상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평범한 생활이라는 섬세한 그물망을 구성하는 배경의 실천들과 일과들을 기억하게 해준다."(197-200)


8 감히 알고자 하라: 이론의 고갈과 철학의 장래성


"칸트는 계몽주의의 기획을 〈감히 알고자 하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표현을 〈너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라〉로 자유롭게 바꾸어서 철학의 장래성,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철학의 장래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철학은 특정한 문화의 생활에서, 한 문화가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문화들과 대화하는 방식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철학은 특수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분석할 때,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처럼 가장 일반적인 형식의 물음으로 특정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때, 비판적 반성으로 기능할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바람은 그러한 물음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고찰이 탐구와 논증을 통해 교육적·해방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스탠리 카벨의 말마따나 철학은 성인(成人) 교육이다. 그러나 이를 새로운 견해로 보기는 어려운데, 소크라테스라면 철학에 대한 이런 기술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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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5
제임스 풀처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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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의 세 가지 역사적 형태

1. 상업 자본주의

2. 자본주의적 생산(소비를 포함하는)

3. 금융 자본주의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이윤을 기대하는 자금 투자이며, 영국 동인도회사의 교역처럼 상당히 위험한 장거리 모험사업에 투자할 경우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이윤은 퍽 단순하게도 희소성과 거리의 결과였다. 예컨대 말루쿠제도에서 후추를 사는 값과 유럽에서 후추를 파는 값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나면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이윤에 비하면 모험사업에 들이는 비용은 별것 아니었다." "이것은 확실히 자본주의였다. 장거리 교역을 하려면 큰 이윤을 기대하는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고수익을 올린 비결은 이런저런 수단으로 독점을 확립하고, 경쟁자를 차단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생산을 합리화하는 활동보다 희소한 생산물을 거래하는 활동에서 이윤이 나왔던 까닭에 상업자본주의가 끼치는 영향은 제한되었다. 유럽 인구 대다수는 자본 소유자들의 이런 활동에 영향받는 일 없이 일상을 영위했다."(9, 12-3)


"자본주의적 생산은 임금노동에 기반을 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 모두 추상적이고 이탈적인 특성을 띤다. 둘 다 특정한 경제 활동에서 분리되고 따라서 원리상 적절한 보상을 주는 어떠한 활동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임금노동자 측에게) 이런 자유는 얼마간 허상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급 노동을 하지 않고 살기가 어렵고 노동의 종류와 고용주를 거의 고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노동자는 필요하거나 소비하고 싶은 재화를 스스로 생산할 수 없으므로 구입해야 하고, 그로써 일군의 새로운 자본주의 기업들 전체를 활성화하는 수요를 만들어낸다. 그런 수요에는 음식과 옷, 개인 소유물뿐 아니라 여가 활동까지 포함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입되자 곧 여가의 상업화에 기초하는 새로운 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생산과 소비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준 임금노동의 이런 이중 역할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작동되기 시작하자 그토록 빠르게 확대된 이유를 설명해준다."(27-9)


"시장은 전혀 새롭지 않지만 매우 새롭고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을 이룬다." "시장은 당신이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약간의 물품을 추가로 구매하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물품이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시세가 변화하는 까닭에 어떤 시장이든 투기를 통해 돈을 벌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상품을 장차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것을 기대하며 사들일 때, 아울러 그 상품을 어떤 식으로든 가공하여 가치를 높이지 않을 때, 투기는 일어난다. 거의 모든 상품이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개 비생산적일지라도 투기는 단순히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언제나 변화하는 탓에 시장은 불안정하다. 재고를 늘리고 쟁여두는 것은 이윤을 갉아먹고 사업을 망칠 수 있는, 피하고픈 시세 변동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방법이다." "투기는 자본주의와 별개인 무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에서 자라나는 불가피한 파생물이다."(29-32)


2 자본주의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영국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원을 찾으려면 16세기에 이루어진 생산과 소비, 시장의 성장을 살펴봐야 한다.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임금노동이 갈수록 흔해지고 있었으며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임금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곧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돈을 가지고 있었고 시장관계가 그들의 일상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시기 영국에는 런던에 거점을 둔 교역상들에 힘입어 전국 단위 시장이 이미 뚜렷하게 출현해 있었다." "계급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14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날품팔이'를 뜻하는 직인(journeyman)들은 보통 도제 과정을 마쳤지만 아직 장인 자격을 얻을 만한 숙련도와 경험을 갖추지 못한 수공업자였다. 장인들은 갈수록 직인들의 장인 자격 획득을 막고 직종을 통제하는 길드에서 그들을 배제하면서 계속 싸게 부려먹으려 했다. 직인들의 대응은 자기네 지위를 지키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을 단체로 협상하기 위한 조직화였다."(40-1)


"봉건 영주의 생계수단은 농민층으로부터 생산물이나 노동력, 현금을 받아낼 권리였다. 하지만 15세기에 시장관계가 봉건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지주로 변모해갔으며, 지주의 생계수단은 시장에서 소작권을 놓고 경쟁하는 소작농이 지불하는 지대였다. 토지는 갈수록 임금노동을 통해 경작되는 한편, 사고팔 수 있는 재산이 되어갔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단속적으로 이어진 인클로저 운동은 이런 토지소유권의 변화를 상징한다. 시장 지향형 농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렇다면 왜 영국에서 먼저 봉건제가 쇠퇴했을까? 주장하건대 영국에서 봉건제가 덜 단단하게 확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통치계급은 유럽 대륙의 통치계급과 비교해 농민층으로부터 잉여물을 얻어내는 데 지역의 군사력을 덜 사용했다. 그들은 토지소유권, 지대, 임금노동에 따른 경제적 메커니즘에 더 의존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통일된 국가가 전국 단위 시장의 출현을 촉진했다."(43-6)


"사실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기법은 때로 유럽의 다른 사회들에서 훨씬 더 발달했다. 유럽에는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오랜 역사가 있었다. 선대제는 플랑드르 또는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고, 14세기와 15세기에 독일에서 널리 퍼졌다." "16세기 무렵 자본주의적 생산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발전하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성장을 생산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 "상업자본주의의 자본 축적을 위한 혁신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과 별로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융 혁신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배하게 된 대규모 산업기업들이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일련의 작은 단계들을 거치며 차츰차츰 이루어진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장보다는 대기업들이 조직한 대규모 자본집약적 공정의 확립이야말로 과거와 단절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7세기 네덜란드 상업자본주의의 금융 혁신은 극히 중요한 변화였다."(47-51)


"도시들이 불가결한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한 원인으로 도시들을 꼽는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분명 도시들이 독립성을 키워간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그후로 먼저 되살아난 봉건 통치자들에 의해, 뒤이어 민족국가에 의해 자율성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 단단하게 발전했다. 새로운 방법과 값싼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시의 길드들이 차단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접근법은 유럽의 다국가 정치 구조에서 출발한다. 다국가 구조는 유럽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제 발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했다. 또한 유럽에서 다국가 특징 덕에 기업가들은 경제 환경이 악화되는 나라에서 기업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숨이 막힐 듯한 대항종교개혁 국가가 등장했음에도 자본주의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56-9)


3 어떻게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가?


# 산업자본주의 발전의 세 단계

1. 무정부적 자본주의

2. 관리 자본주의

3. 재시장화된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18~19세기가 무정부적이었던 이유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활동이 조직된 노동에 의해서도 국가에 의해서도 비교적 견제받지 않은 데 있었다." "규제 완화는 이 시기에 부상한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신념과 잘 어우러졌다. 그렇다고 국가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정반대였다. 시장의 힘은 질서 잡힌 사회에서만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었고 그러자면 산업자본주의가 엄청난 무질서를 낳고 있던 이 시기에 국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 소요, 기계 파괴, 재산 범죄가 생산과 질서를 위협하는가 하면 노조와 급진적 정치 운동이 자본가 고용주와 국가에 직접 도전하는 실정이었다. 소요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어 이따금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경쟁하는 소규모 제조업, 약한 노동조직, 경제 규제 완화, 강한 국가, 최소한의 국가복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 단계에서 서로를 강화한 특징들이었다."(67-70)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70년대에 절정에 이른 자본주의 발전의 다음 단계 동안, 산업의 양편이 더 조직되고 국가의 관리와 통제가 늘어남에 따라 시장을 통한 경쟁과 규제는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 분쟁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각국 정부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으로부터 자국 경제를 보호하는 한편, 적들에 맞서 자국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동원하려 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본주의' 단계를 형성한 대기업의 성장, 계급 조직화의 발전, 국가와 계급 조직들 간 합의주의적 관계, 국가의 개입과 규제, 국가복지, 공적 소유의 확대 같은 과정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를 강화했다. 이 모든 과정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삶에서 시장의 중요성이 감소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갈수록 비인간화했던 시장의 힘에 반발하는 일반적 태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 단계 동안 자본주의는 민족적 제국들 안에서 조직되었다."(70-1, 77)


"관리자본주의가 무너진 한 가지 이유는 합의주의 제도가 결국 작동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물가와 소득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거듭 실패했다. 그런 규제에 필요한 노조, 고용주, 국가 간 협의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마련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국제 경쟁이 확대되면서 기존 산업사회들이 받는 압박이 커졌다는 것이다. 제국들이 쇠퇴하고 자유무역이 성장하는 가운데 각국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 관리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였던 복지와 평등, 고용에 대한 집단주의적 관심은 자유와 선택에 초점을 맞추는 더 개인주의적인 가치에 밀려났다." "결국 시장의 힘을 되살리기 위해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 규제는 없애거나 줄여나갔다. 규제 완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산업은 금융업이었을 것이다. 금융 기능들을 나누는 경계는 경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금융 규제 완화 덕에 속도를 올린 금융화 과정은 2007년 금융위기로 귀결되었다."(78-80, 83)


4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똑같은가?


"스웨덴의 계급협력은 계급투쟁의 소산이었다. 노동자 조직과 고용주 조직이 모두 강하게 성장한 까닭에 관리자본주의가 확고부동한 합의주의 형태로, 즉 자본주의 관리를 양편의 중앙 조직들에 상당 부분 위임하는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사실 스웨덴이 '노동 평화'라는 평판을 얻은 주된 이유는 이 강력한 조직들이 자기네 조직원들을 통제한 데 있었다." "국가복지는 노동운동의 집단주의 정책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노동운동 지도부는 복지가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노조 조직만이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고 국가의 경제 파이를 키워주는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에서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웨덴 경제 정책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수익을 못 내는 기업들을 파산하게 놔두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자원이 수익을 내는 기업들에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가 통제한 노동시장 정책은 일자리를 보호해주었던 게 아니라 노동자의 이직과 재교육을 지원해주었다."(96-8)


"개인주의로 유명한 미국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 및 조직면에서 스웨덴 자본주의와 정반대였다. 미국의 산업화는 분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 모험심과 진취성을 발휘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관리자본주의는 집단 조직화의 범위가 더 좁았고, 국가복지가 덜 보편적이었으며, 반트러스트 법률이 더 강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 단계를 통과했다. 재시장화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분명 생산 영역에서 일어났지만, 가장 두각을 나타낸 영역은 틀림없이 금융 활동에 자본이 투입됨에 따라 규모를 키워간 금융 영역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 세계의 지배적인 공산품 생산 국가에서 금융상품 혁신을 선도하는 국가로 이행한 놀라운 변화였다. 미국은 아주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으로 보였다. 금융 활동에서 큰 이윤이 생겼고 경제 전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금융업 종사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활동이었다."(103, 112-3)


"일본은 독특한 관리자본주의를 창안했다. 국가는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경제 전체를 무대로 사업을 하는 기업군들의 형태로 기업 집중이 진행되었다. 또다른 독특한 특징은 노동조직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조직을 이루려 시도했고 또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노동력 수요가 많았던 1차대전 기간에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지만, 고용주들의 거센 반대와 국가의 탄압에 부딪혔다. 국가복지 역시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통합하고 노동운동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기업복지제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은 1990년대초부터 바뀌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는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의 임시직화'가 진행되고 '성과 기반 고용'이 도입되었다. 2008년 노동력의 3분의 1은 대체로 파트타임, 계약직, 임시직 노동자로 이루어진 비정규직이었다. 이는 생각만큼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다. 초과근무수당이 없는 아주 오랜 노동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15, 120-1)


"1970년대 이후 세 나라 모두 관리자본주의의 관행을 포기하고 시장의 힘이 더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개혁을 도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렇다면 동일한 관행을 받아들인 점이 세 국가별 차이를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먼저 지적할 점은 모델들이 변천한다는 것이다. 세 나라 모두 한때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들이 모방해야 할 선도적 자본주의 경제로 보였다. 실제로 세 나라의 성공 경로를 다른 나라들이 똑같이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의 제도는 저마다 문제들을 낳고 결국 경제 위기를 야기했다. 가장 근래에는 미국의 자유시장과 주주자본주의가 무엇이든 정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이 자본주의가 숱한 스캔들과 2007년 시작된 긴 위기를 초래했다. 국제 경쟁의 격화와 지구화는 세 나라에서 공히 재시장화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이 결과를 수렴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 나라의 자본주의는 이제까지 나름대로의 속도와 방식으로 재시장화되었기 때문이다."(125-6)


5 자본주의는 지구화되었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퍼뜨린 주요 매개체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이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멕시코에서 '마킬라도라'라고 알려진 제조공장이 있다. 마킬라도라는 1965년 멕시코가 미국과의 국경으로부터 10마일 이내 지역에 완제품을 재수출하는 조건으로 원료와 부품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공장의 설립을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어 무역 장벽이 제거되자 마킬라도라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이, 결국 일본의 자본까지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노동력이 저렴했던 것은 단순히 공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이 조직되지 않고 규제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간의 보상이 있기는 했다. 기존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이라도 소비자로서는 분명 득을 봤기 때문이다. 외국의 더 저렴한 노동력과 더욱 치열한 국제 경쟁은 그들이 구입하는 상품의 가격을 낮췄다. 그렇지만 실질임금 증가율은 내림세였다."(131-4)


"제조업만 기존 산업사회에서 빠져나간 것이 아니다. 타자 치기, 전화 응답, 데이터 처리, 소프트웨어 개발, 문제 해결 같은 대다수 사무직 업무를 이제 원격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한 덕에 특히 이런 종류의 업무를 임금과 사무실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외국 지역으로 옮기기가 쉬워졌다." "세계에서 영어권에 속한다는 것은 상당한 이점으로, 이 덕분에 카리브해의 몇몇 섬나라와 인도는 유리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영어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카리브해 일대는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더욱 값싼 노동력과의 경쟁에 직면했다. 원격근무 시설을 쉽게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은 더 반복적인 저숙련 형태의 원격근무가 거의 제약 없이 퍼져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136-7)


"이제껏 검토한 자본주의적 관행이 확산되면서 필연적으로 통화 유통량이 늘었지만, 20세기 마지막 25년간 정말 놀라우리만치 증가한 국제 통화 유통량은 주로 투기적인 통화 이동의 결과였다. 대부분 투기적 성격이었던 국제 투자의 액수는, 1970년부터 1997년까지 거의 200배 증가했다. 20세기 말에 거래된 세계 통화는 하루 1조 5000억 달러에 달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올라가 2011년 하루 5조 달러가 되었다. 이 엄청난 증가세는 외국 여행이나 국제 무역을 위한 통화 거래가 아니라(분명 그런 거래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통화의 이동을 활용해 돈을 벌려는 투기와 관련이 있었다." "국제 통화 거래와 투자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통신 및 금융)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1980년대 재시장화된 자본주의의 규제 완화 풍조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국가가 환율을 고정하고 통화의 국제 이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경쟁에 대한 새로운 믿음에 부합하지 않았다."(143-6)


#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신화

1.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근래에 생겨났다. → 사실 자본주의는 거의 생겨나자마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 자본은 전 지구적으로 유통된다. → 사실 대부분의 자본은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 사이를 오갈 뿐이다.

3.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조직된다. → 초국적 기업도 민족국가 내의 활동이 핵심이다.

4.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통합한다. → 자본주의가 지구화될수록 부의 불평등은 더 심화되어 왔다.


6 위기? 무슨 위기?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밀접했다. 대부분의 생산이 거의 직접 소비를 위해 이루어졌다.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화가 갈수록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되었고,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멀어졌다." "과잉생산 경향은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경향이지만, 이런 위기들이 자본주의를 파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위기가 발생해야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폐업과 파업이 속출하는 위기가 닥쳐야 생산량이 수요량에 더 가까운 수준으로 감소해 과잉생산의 중압이 사라지고, 가장 비효율적인 생산자들이 퇴출당하고, 선순환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더 낮은 임금은 수익성을 높였고, 더 싼 가격은 수요를 자극했다. 더 낮은 이자율은 투자금을 더 저렴하게 빌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생산이 확대되기 시작하고, 고용률이 올라가고, 상품을 구입할 돈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었다."(162-3)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 제 길을 넓히는 셈이었지만,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확장은 〈더 폭넓고 더 파괴적인 위기들〉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어떤 거대한 경제 붕괴로 인해 자본주의가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경우에만 자본주의가 끝날 것이라 전망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에 내재하는 특정한 경향들이 최후의 전복을 촉진할 터였다. 기술이 발전하고 소유권이 집중되면서 생산 단위의 크기가 커지는 한편, 노동자들이 더 큰 규모로 집중되어 더 쉽게 조직될 터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위기는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을 급진화함으로써 분명 일익을 담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결국 혁명적 세력이 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측은 입증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구조에 통합되었고, 자본주의가 차고 넘치게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매료되었다."(164-5)


"생산능력 향상과 기술 변화의 결과로 인해 늘어난 생산량은 수요량이 덩달아 증가하면 흡수될 수 있었지만, 전 세계 수요량은 상품 공급량과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는 않았다. 결국 새로운 생산 중심지들이 등장한 한 가지 이유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데 있으며, 낮은 임금은 소비 수요를 많이 창출하지 않았다. 선진국들의 소비 수요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낮아지는 생산 수익성에 대응한 한 가지 방법이 국외의 값싼 노동력을 찾는 것이었다면, 다른 방법은 생산에 대한 투자에서 주식, 통화,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로 자본을 옮기는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힘들고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서 상품과 서비스 생산으로 수익을 내려고 애쓰느니 이런 금융상품들을 투기적으로 거래하는 방법으로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었다." "국제 경쟁의 격화, 부채 증가, 규제 완화, 자본의 금융화는 안정을 깨뜨리는 갖가지 힘들을 낳았다. 이 추세는 2007년 시작된 위기로 이어졌다."(174-7)


"자본주의가 머지않아 어떤 위기를 맞아 파멸할 것 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오늘날의 문제들은 자본주의가 장기적 쇠퇴 과정에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막대한 환경 비용, 기반시설 비용, 사회적 비용을 사회에 떠넘겨야만 이윤을 낼 수 있다. 그 부담은 대체로 국가가 짊어지지만, 정부가 지출 삭감, 민영화, 긴축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데다 어느 정도는 이런 정책의 결과로 불평등이 심화되어 정부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부담을 떠안는 국가의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민간자본은 단기 이윤을 추구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사용하여 자본주의의 장기 생존능력을 지탱하는 제도와 구조를 실제로 약화시키는 정책을 조장한다. 크레이크 칼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신이 의존하는 조건을 파괴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금융화와 신자유주의는 이 추세를 악화시킨다. 자본주의의 향후 생존은 자본주의를 제거하지 않은 채 이 파괴 추세를 제한거나 뒤집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여부에 달려 있다.〉"(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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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7
제리 브로턴 지음, 윤은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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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로서 그는 프랑스 혁명의 평등주의 원칙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프랑스 민족주의자였다." "그에게 르네상스는 이성, 진리,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위대한 미덕들을 고무했던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상태를 표상했다. 미슐레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근대와 그 자체로서 동일했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를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시대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어떤 정신 혹은 태도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승격시켰다." "사실 미슐레식 르네상스가 갖는 가치들은 미슐레가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 혁명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해 보인다. 둘 다 자유, 이성, 민주주의의 가치를 꽃피우고, 정치적·종교적 전제정을 거부하고 자유의 정신과 '인간'의 존엄을 숭배했다. 그의 시대에 이러한 가치들이 실패하는 것에 실망한 미슐레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승리를 거두고 폭압이 사라진 근대 세계를 약속했던 역사적 시대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21-3)


"스위스 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15세기 이탈리아적 현상으로 정의했다. 그는 15세기 이탈리아 정치의 독특한 성격이 근대적인 개인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고전 고대의 부활, 보다 넓은 세계의 발견, 종교적 불안정성의 확대가 '인간이 정신적으로 개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발전을 중세의 자의식 결핍과 대조했다. 그에 따르면 중세에 '인간은 종족, 민족, 분파, 가족 혹은 조합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스스로를 인식했다.' 달리 말하면 15세기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프로테스탄트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스위스의 개인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예술과 삶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공화주의의 대의가 옹호되기는 했으나 한계가 분명했고, 종교가 국가에 의해 길들여지던 시대로 그려졌던 르네상스의 모습들은 사실 부르크하르트가 사랑해 마지않던 바젤의 이상화된 모습이었다."(23-4)


"20세기 초에는 훨씬 더 이중적인 견해가 출현했다.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19년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위징아는 북유럽 문화와 사회가 이전의 르네상스 해석에서 어떻게 무시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부르크하르트식 시대 구분에 도전했다. 그에 따르면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고 정의했던 양식과 태도는 사실 중세의 정신이 시들어가거나 쇠퇴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하위징아는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중세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선배 역사가들이 그토록 찬양한 르네상스의 이상형에 대해 하위징아는 매우 비관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그리고 유럽 개인주의와 '문명'의 우월성의 만발로 르네상스를 설명하려는 어떤 욕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책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저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27-8)


"20세기 중반에 전체주의가 등장하자, 중부 유럽의 지식인 이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스 바론은 봉건적인 전제군주정에 대한 시민 공화국의 승리로 설명할 수 있는 제2차 밀라노 전쟁(1397~1402)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은 학자이자 정치가인 레오나르도 브루니라고 보았다. 한스 바론에 따르면, 『피렌체 찬가』와 『피렌체인의 역사』에서 브루니는 '정치 참여와 공직 생활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표명했고, 이를 '학자적인 은둔이라는 이상과 대비했다.' '사회와 국가의 성원으로 한 사람을 교육하는 데 헌신하는 것', 그리고 메디치 시대의 피렌체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공화주의적 미덕을 함양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론의 시민적 인문주의의 정의다. 바론의 주장은 유럽이 정치적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위협받던 시대에 인문학자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매력적인 답변이었고,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르네상스의 핵심 기원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8-30)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60년대의 사회적·정치적 격동, 특히 인문학의 정치화와 페미니즘의 등장을 거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번 크게 바뀌었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근대인이 탄생했다고 보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린블랫은 16세기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자의식의 증대'가 목격된다고 주장했다. 남성들은 (그리고 때로는 여성들도)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 맞게 자신의 정체성을 다듬는, 즉 '연출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린블랫은 이것을 특별히 근대적인 현상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린블랫이 보기에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저술가들─에드먼드 스펜서, 크리스토퍼 말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돌이켜보고 다듬어나가는 파우스트나 햄릿 같은 가상의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근대인으로 보이는 최초의 사람들이다."(31-2)


"그린블랫과 제먼 데이비스 같은 비판적 연구자들은 또한 20세기 말의 철학적·이론적 시류, 특히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조들은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 그리고 근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화의 '대서사'에 대해 회의적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미셸 푸코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기원했다고 규정되는 인문학적·문명적 가치들이 나치즘, 스탈린주의, 홀로코스트나 소비에트 강제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에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20세기 말의 사상가들은 어느 누구도 르네상스의 위대한 문화적·철학적 성취들을 찬양하지 않았다. 대신 많은 역사가들은 훨씬 더 지역적인 수준에서 현상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에서 경시되었거나 잊힌 목소리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마녀', '유대인', '흑인' 같은, 배제된 집단이나 주변화된 사물이 새로이 면밀한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33-4)


1 세계적 르네상스


"르네상스에 대한 고전적 정의들이 가진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문명을 배제한 채 유럽 문명의 성취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발명을 목격했던 시대가 유럽이 전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했던 순간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최근 역사, 경제, 인류학 분야에서 르네상스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미슐레나 부르크하르트 같은 19세기 사상가들에 의해 관련 없는 것으로 버려졌던 여러 요소들이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사항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많은 쟁점들을 제기하는 르네상스 작품은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의 걸작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이다." "작품 속에서 마르코는 설교단에 서서 흰 천으로 몸을 감싼 동방 여인들을 향해 설교하고 있다. 성 마르코 뒤쪽으로는 베네치아의 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자의 앞쪽으로는 동방의 인물들이 보다 많은 수의 유럽인들과 뒤섞이는 보기 드문 모습으로 서 있다."(38-9)


"벨리니 형제는 르네상스 유럽의 동쪽으로 펼쳐진 세계가 갖고 있던 신화적 이미지와 실제 모습 둘 다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동방 세계의 독특한 성격, 특히 베네치아의 오랜 무역 파트너였던 아랍 지배하의 알렉산드리아가 갖고 있는 관습, 건축,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벨리니 형제는 이집트 맘루크, 오스만인, 페르시아인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문화들이 유럽 도시국가들이 소망하는 많은 것들을 가졌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동방의 진귀한 상품들, 기술·과학·예술 지식, 사업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런던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들의 문화와 소비에 미친 동방 상품의 영향은 점진적이었으나 심대했다. 음식부터 회화에 이르는 삶의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르코〉라는 그림은 유럽 르네상스가 동방과의 대비가 아니라, 사상과 물질의 광범하고 복합적인 교환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42-4)


"1453년,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제국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장차 르네상스의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주체로 등장했다." "오스만 제국과 유럽 간의 교류와 경쟁이 암시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방과 서방 사이에 분명한 지리적 혹은 정치적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적·정치적인 면에서 이슬람적인 동방과 기독교적인 서방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19세기식 믿음이 두 문화 사이의 교역과 사상의 원활했던 교류를 가려왔다. 분명 양측은 종종 종교적·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물질적·사업적 교류가 계속되어왔다는 것이고 양측에 문화적인 발전을 위한 자양분 가득한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전시대의 과거를 공통의 문화적 유산으로 함께 향유하면서 우리가 현재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결과물이라고 인식하는 새로운 성과물들을 만들어냈다."(52, 57-9)


2 인문주의자들과 책


"15세기 초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과 책은 소수 국제적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면 인문주의와 인쇄기는 엘리트와 민중 두 계층 모두의 읽기와 쓰기 능력 그리고 지식의 지위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그러한 혁명은 북유럽에 더 집중되었다." "인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추종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보장한다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먼저 인문주의는 고전을 익히는 일이 그들을 더 나은, 즉 더 '인문주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사회생활에서 개인이 마주치게 될 도덕적·윤리적 문제들을 숙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둘째로 인문주의는 학생들과 종사자들로 하여금 고전 문헌 교육이 대사, 변호사, 성직자 혹은 15세기 유럽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관료행정체계 속에서 서기관으로서의 미래 경력을 위해 필수적인 실용적 기술을 제공한다고 믿게끔 했다. 인문주의적 훈련은 엘리트 계층으로 진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시장성 높은 교육으로 보였다."(70-1)


"초창기 인쇄소들은 주로 성경, 설교집, 교리문답서 같은 종교적인 책들을 발간했다. 그러나 모험소설, 여행기, 팸플릿, 신문, 그리고 약 처방부터 아내의 의무를 다루는 각종 안내서나 지침서 같은 좀더 세속적인 책들이 차차 소개되었다. 1530년에 이르면 팸플릿 인쇄본이 빵 한 덩어리 값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팔렸고, 신약성서 한 부의 가격이 노동자의 하루 일당과 같아졌다. 듣고, 보고, 말하면서 소통이 이루어지던 문화가 점차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문화로 변해갔다. 궁정이나 교회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일종의 문필 문화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진 인쇄소 주변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다. 문필 문화의 의제는 종교적 정통 교리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요와 수익에 의해 정해졌다. 인쇄소는 지적·문화적 창조 활동을 집단적 모험으로 바꿔놓았다. 인쇄업자, 상인, 교사, 필경사, 번역가, 예술가, 저자 모두가 하나의 최종 결과물을 내놓는데 자신들의 기술과 부를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86-7)


"에라스뮈스는 지속 가능한 학문 공동체를 세우고 교육 방법론을 다듬는 일에 엄청난 지적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쇄된 그의 글들과 최고의 '문필가'라는 지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쇄술은 에라스뮈스의 지적 경력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라스뮈스에 따르면 배움과 삶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홍보하기 위해 인쇄술을 이용함으로써 15세기 인문주의의 학구적인 성취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에라스뮈스 또한 인문주의가 교육과 종교를 개혁할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환심을 살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1516년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을 쓰고 미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헌정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카를 5세가 그의 지침을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어떠한 자리도 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반응은 카를 황제의 정치적 경쟁자인 헨리 8세에게 『기독교 군주의 교육』의 사본 한 부를 보낸 것이었다."(91-5)


3 교회와 국가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寄進狀」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근간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로렌초 발라는 수사학, 철학, 문헌학 분야의 역량을 동원하여, 문서의 역사적 시대착오, 문헌학적 오류, 논리적 모순이 「기진장」이 8세기에 위조된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발라의 폭로 사건은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 정치, 학문 사이의 관계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군주국과 같은 정치 조직들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권위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새로운 지적·행정적 기술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후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발라를 교황 서기로 임명한 사실은 「기진장」을 폭로한 그의 전력에 비추어 이례적인 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학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모르는 악마보다 아는 악마가 나은 법이다). 그것은 또한 발라처럼 정치적으로 전략적인 인문주의자들이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준비가 얼마나 잘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03-4)


"1437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동방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논의하고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려는 종교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렌체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피렌체 종교회의는 르네상스의 본질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정상회담으로서는 실패였다. 동방교회와의 통합을 통해 자신의 지상권을 공고히 하려던 교황의 소망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문화적 사건으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이탈리아 국가들에는 약화된 교황권에 도전하여 동방과의 상업적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배적인 가문들은 통합령을 도출해내는 데 기여한 메디치 가문의 탁월한 능력을 주장했던 고촐리의 프레스코화처럼 호화로운 예술 작품들을 통해 종교회의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교묘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종교회의를 통해 고전 문헌과 사상, 예술 작품이 동에서 서로 전달되며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예술과 학문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07, 111)


"한편, 1420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파당적 분열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곳이 너무나 황폐해지고 쇠락해서 도시 비슷한 모습조차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전 로마제국의 수도나 미래 가톨릭 제국의 수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마르티누스와 후임 교황들은 새로인 중앙 집중을 이룬 로마 교회의 영광을 기념할 수 있도록 야심찬 재건 계획을 세웠다." "로마는 기독교 세계의 제왕적 수도 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노플과 겨루고 있었다. 이 경쟁은 1453년 술탄 메흐메트에게 도시가 함락되자 더욱 거세졌다. 로마와 교황들은 이스탄불과 술탄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06년 4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를 건축가로 지명하고 새로운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았다." "역설적이게도, 장차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풍경을 영구히 변모시킬 저항 운동, 곧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것은 바로 이 기념비적인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비용이었다."(116-7)


"종교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이 잠식당하고 있음을 감지한 로마교황청은 권력을 재확인하려는 차원에서 예술과 건축에서의 과시적 소비를 크게 늘려나갔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예술에서 그러한 압박이 감지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성당을 창세기의 장면들로 장식한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는 로마의 가르침에 기초한 천지창조에 대한 해석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장면들에서 엿보이는 우아한 역동성과 인물들의 강하고 긴장된 근육 역시 그 권위가 흔들릴 경우 표출될 로마교회의 힘과 잠재적인 분노를 표현했다. 이러한 긴장감은 바티칸 콘스탄티누스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서도 감지된다. 이 작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삶과 동방에서 서방으로의 교회 권력의 이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의 인쇄된 '말씀'이 남유럽의 웅장한 기념물들과 장엄한 프레스코화들을 이기고 있었다."(129-30)


4 멋진 신세계


"중세 기독교도들의 지리학은 창조론에 입각한 종교적 상징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14세기에 제작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실용적인 지도들은 르네상스 세계를 형성했던 혼합적인 문화 전통을 보여준다. 1330년경 제작된 작자 미상의 마그레브의 해도는 상인들과 항해가들이 지중해를 가로지르기 위해 사용했던 소위 '포르톨라노 해도'의 실제 예다. 십자형의 항정선(航程線)은 나침반으로 방위를 확인하는 일을 돕고 항해가들이 제법 정확한 항로를 따라 항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라나다나 모로코 둘 중 한 곳에서 만들어진 이 해도는 기독교와 이슬람 공동체 사이에서 지리 지식과 항해 기술의 교류 그리고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202곳의 지명들 가운데 48개가 아랍어에서 나온 것이고, 나머지는 카탈루냐, 에스파냐, 또는 이탈리아어에서 온 것이었다. 아랍인, 유대인, 기독교인 항해가들과 학자들의 이런 실용적인 지도들 덕분에 유럽의 경계를 넘는 최초의 시험 항해가 가능해졌다."(139)


"1522년 9월 8일, 마젤란(의 남은 선원들)이 성공한 세계 일주는 외교적인 대소동을 불러일으켰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왕실 간에 말루쿠 제도 영유권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1529년 제작된 리베이로의 세계지도는 지리적 현실의 조작에 대한 증거로 남아 있다. 리베이로는 말루쿠 제도를 토르데시야스 선의 서쪽으로 172.5도에, 즉 카스티야 영역 안쪽으로 위치시켰다. 이 지도는 카를 5세에게 필요했던 협상력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말루쿠 제도에 대한 권리를 포르투갈인들에게 되팔았다. 카를 5세는 장기적으로 보장되는 상업적 투자 이익보다는 당장 받을 수 있는 현금을 선호했다. 말루쿠 제도로 가는 서쪽 교역로 개척에 들어갈 엄청난 비용과 실행 계획 때문이었다. 경도를 계산하는 정확한 방법 없이는 말루쿠 제도의 정확한 위치를 절대 알아낼 수 없을 터이기 때문에, 자신의 교묘한 지리학적 속임수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리베이로는 카스티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로 처신했다."(156-7)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수탈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대량 사망하자 에스파냐인들은 또다른 노동력 공급원을 필요로 했다. 해결책은 노예였다." "1529년과 1537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실은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 노예를 실어나를 수 있는 허가증을 360건이나 발급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수치스러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르네상스 유럽이 그렸던 세계는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고전시대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뿌리 깊은 신념은 토착 주민들의 문화, 언어, 신념 체계를 설명하지 못했고,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중세로부터 좀더 뚜렷하게 근대적인 세계로 유럽을 변화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새로운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에다 부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더함으로써, 아메리카에서 토착민들과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가공할 고통과 억압을 외면하게 만들었다."(161-3)


5 과학과 철학


"동방과 서방 사이의 학문적 교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출현에도 기여했다. 아랍 천문학과 수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는 13세기 중반 페르시아에 세워진 마라가 관측소였다. 관측소의 선두적 연구자는 나시르 앗딘 알투시(1201~74)로서, 그의 책 『천문학 논고』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순되는 설명을 수정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투시의 쌍원(Tusi Couple)' 개념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이 정리에 따르면, 등속원운동으로부터 선운동이 파생될 수 있는데, 투시는 이 사실을 하나의 구가 반지름이 두 배가 되는 또다른 구 내부를 회전하는 모습을 통해 입증해보였다. 오늘날의 천문학사 연구자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투시의 쌍원 정리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이 정리는 태양계의 태양 중심 체계를 정의하는 데 핵심적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과거에는 어느 누구도 르네상스 과학에 아랍이 끼친 영향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180)


"인쇄술은 전에 없이 예술과 과학을 하나로 결합시켰고,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단연코 알브레히트 뒤러였다. 그는 동판화라는 새로운 기술을 재빨리 익혔고, '원근법의 비밀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새로운 예술은 반드시 과학, 특히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이고 도식적으로 명확하게 구성할 수 있는 수학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었다. 1525년 그는 『컴퍼스와 자를 이용한 측량법』이라는 논문을 출간했다. 뒤러의 논문은 '화가들뿐만 아니라 금세공인, 조각가, 석공, 목수, 그 밖에 측량에 의존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유익하게' 쓰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술적 재능과 실용적인 과학적 소양을 함께 갖춘 다빈치가 저지른 가장 큰 계산 착오는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출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뒤러와는 달리, 레오나르도는 후대에 어떠한 구체적인 혁신도 남기지 못했다. 19세기에 월터 페이터에 의해 무명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는 명민했으나 수수께기 같은 인물로 남아 있었다."(181, 186)


"인문주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새로운 번역본과 주석본을 출간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소홀히 다루어지던 고전 저자들과 철학 학파들 전체, 특히 스토아학파, 회의주의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플라톤학파의 주창자들을 재발견했다. 가장 획기적인 발전은 플라톤의 저작들을 재발견하고 번역한 것이었다." "플라톤식의 접근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두 가지 뚜렷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영혼의 불멸성과 신에 대한 숭배라는 측면에서 15세기 기독교 신앙에 훨씬 더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둘째, 철학적인 추론을 인간이 가진 가장 값진 능력으로 정의했다. 플라톤을 이렇게 해석하면서 피치노는 철학자의 직업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신비주의적인 사색을 앞세워 정치학을 배격한 것은 피치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피렌체의 통치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통치 철학과 잘 들어맞았고, 이러한 이유로 피치노는 1463년에 메디치가 세운 철학 아카데미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187-8)


"그러나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두 철학자의 지적인 우위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과 과학이 더이상 공중에 떠 있지 않도록 하고, 충분한 조사와 검토를 거친 모든 경험들의 견고한 토대에 기반하게 할' 학습의 '대부흥'을 촉구했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 혹은 이성적 사고를 위한 도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의 글이었다." "베이컨은 과학 지식이 관찰, 실험, 귀납법에 기초하여 얻은 자연세계의 자료들의 신중한 집적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이것은 17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왕립협회에 의해 진행될 경험 과학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1626년 베이컨은 플라톤의 유토피아 세계를 본떠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곳의 가장 유력한 시민들은 이제 철학자들이 아니라 실험과학자들이었다. 그것은 근대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과 철학을 결별하게 만든 엄청난 변화였다."(190-2)


6 르네상스 다시 쓰기


"점점 더 박식해지고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들을 찾고 있었던 대부분의 대도시 독자들 사이에서 수요가 생김에 따라 문학적 표현이 바뀌기 시작했다. 1554년 도미니크회 소속의 마테오 반델로는 『노벨레』라는 당대의 도시 생활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출간했다." "친티오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잠바티스타 지랄디는 1565년 『100편의 이야기』라는 소설집을 출간했다." "친티오와 반델로의 소설들은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시대에 상연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위대한 비극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는데, 거기에는 토머스 키드의 『에스파냐의 비극』(1587년경), 셰익스피어의 『오셀로』(1603), 존 웹스터의 『하얀 악마』(1613년경)도 포함된다. 산문 쓰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영국에서 희곡이 발달한 것은 궁정의 후원이나 종교적인 신앙심보다는 투자와 수익성 때문이었다. 덕분에 희곡은 사회와 개인에 대해 점점 더 복잡하게,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201-2)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르네상스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주제다. 그의 문학은 남유럽과 지중해의 영향으로부터 활력을 얻는 고전적 인문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의 끝을 의미하는, 보다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주제에 대한 몰두로 옮겨가는 결정적인 이행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두 작품은 모두 셰익스피어가 과거 고전시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 시대 고유의 관심사들과 걱정거리들 또한 반영하고 있었다. 『실수연발』(1594)에서 일어나는 신원 오인이나 금전과 관련된 혼란스러운 상황은 영국이 이슬람교도에 의해 지배되는 지중해 국제무역에 진입하면서 돈의 유동성과 장거리 교역의 복잡성에 대해 영국인들이 느꼈던 불안을 표현했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또한 영국이 무어인 에런이라는 매력적이지만 불길한 인물 속에 구현된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인물은 후일 오셀로로 재탄생했다."(208-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인 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가 그들을 만들어낸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불후의 창조물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르네상스를 정의하는 하나의 특징이 작품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햄릿이 참으로 르네상스적인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즉 복잡하고 다면적인 근대성을 보여주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말한 통찰력을 예시하는 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또한 셰익스피어 시대의 고유한 압력들과 고민들 사이에서 창조된 인물이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내면적 독백과 살해당한 부왕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우유부단함이 근대의 소외된 모든 10대 소년들이 느끼는 희망과 공포를 반영했다고 해석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영국의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프로테스탄트적 감수성과 그에 따른 구원이나 내세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냈다고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211)


"『템페스트』는 그동안 예술의 힘에 대한 명상록으로 여겨져왔다. 셰익스피어의 무대 고별작으로 알려져 있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고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나폴리의 왕 알론조는 그의 딸 클레리벨을 결혼시킨 뒤 튀니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항해에 나섰다가 지중해 어딘가에 있는 프로스페로섬에서 난파를 당한다. 이는 트로이에서 카르타고를 거쳐 로마로 간 아이네이아스의 여정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또한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신세계의 식민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템페스트』는 동서 양쪽 모두에, 즉 동쪽으로는 과거 르네상스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에게 풍성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던 동부 지중해와 고전 세계를, 서쪽 방향으로는 장차 17세기 후반과 18세기 계몽사상을 탄생시킬 대서양 세계에 주목했다. 문학적·지적·국제적 전망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르네상스의 종말을 의미했다면, 그것은 또한 문화와 사회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명백히 근대적인 사고의 시작을 알렸다."(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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