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박재용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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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 


1장 그리스 자연철학 


# 이원론(현상계와 구분되는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 :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 일원론(우리가 감각하는 현상계가 실재 세계이다) :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엠페도클레스 


"데미우르고스는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한 한 이데아를 닮은 완벽한 우주를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창조는 불가능했고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재료 즉 '질료'(코라, khôra)의 한계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질료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는 아니고, 공간 그 자체 혹은 받아들임(receptacle)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창조가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필연'(anánkê)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활동 외에도 무작위적이고 비이성적인 힘, 즉 필연이 창조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필연은 논리적 필연성과 같은 의미보다는 강제성이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습니다. 이 필연은 우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로, 플라톤이 완벽한 질서와 불완전한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이 필연이 창조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38)


2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세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하나이자 둘이었습니다. 달보다 위쪽에 있는 천상계(celestial world)와 그 아래쪽의 지상계-월하계(terrestrial world)로 나뉘었지요. 그에 따르면 지상계는 물, 불, 흙, 공기라는 네 원소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이 되는 원소가 네 가지나 된다는 것은 각각의 원소가 어딘가 부족한 불완전한 요소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원소로 구성된 지상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천상계는 완전한 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테르는 지상의 4원소가 가진 모든 속성을 스스로 가진 존재로 완전한 질료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료에 의해 구성된 천상계는 완전한 모습을 가집니다. 에테르(Aither)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핵심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를 '제5원소' 또는 '첫 번째 물질'(Prime Matt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에테르가 지상계를 구성하는 4원소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진 실체임을 의미합니다."(67-8)


"『천체에 관하여』(De Caelo) 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체의 운동은 균일하고 끊임없는 원운동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물질(에테르)의 본성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천체'란 항성천구, 즉 우주의 가장 바깥 경계를 이루는 천구를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항성천구의 원운동이 다른 모든 천체의 운동을 규정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천체들은 모두 항성천구에 고정되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천체의 일차적 운동은 모두 완전한 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부차적 운동'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운동에 추가되는 보조적인 운동으로, 행성마다 고유한 속도와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차적 운동 역시 근본적으로는 원운동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69)


"하지만 불완전한 원소로 이루어진 지상계에서는 원운동이 불가합니다. 물과 흙의 속성을 많이 가진 물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낙하 운동을 하고, 불과 공기의 속성을 가진 물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합니다. 이런 수직운동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죠."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지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여러 천체가 감싸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심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구는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리고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천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천체론』, 제2권, 제4장) 이는 지구중심적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구성하는 것은 무거운 원소인 땅(흙)입니다. 지구 주위에는 물, 공기, 불이 층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은 땅 바로 위에, 공기는 물 위에, 불은 공기 위에 위치합니다. 지상계를 넘어서면 천상계가 시작됩니다."(71-2)


# 『천체에 관하여』(De Caelo)가 원제목이며, 간단히 『천체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창조주는 관조의 신이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저 미신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의 창조주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전 우주의 운동의 제1원인이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는 완벽히 아름답고 불가분하며 완벽한 '관조'만을 '관조'하는 자라고 하지요. 즉 이 세상이 자신이 창조한 원리대로 움직이도록 하되, 개입하지는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기적'은 당치도 않는 행위지요. 창조자가 스스로 정한 원칙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원격으로 작용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서 벼락을 내리치듯이 말이지요. 그로서는 접촉 원리를 벗어난 일이 실제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은 훗날 중세에서 르네승스로 넘어가는 시기 유럽에서 대학과 수도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80)


# 접촉 원리 : 지상계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힘은 접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원리.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3장 지구중심설 대 태양중심설 


"문명세계 최초로 지구중심설(geocentrism)을 부정한 이들은 피타고라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거의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볼 만한 생각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중심에 거대한 불타는 구, 이른바 '헤스티아의 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스티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정과 화덕의 불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불의 수호자이자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였죠. 그들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불에 헤스티아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들이 이 불을 단순한 물리적 실체 이상의 것, 즉 우주 만물을 품고 길러내는 근원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사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천체들의 역행운동처럼 당대의 천문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맹신했던 기하학적 원리와 수의 조화를 우주에 투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짐작합니다."(98-100)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말 그대로 천문학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과학적 견지에서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른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 대다수는 반대합니다. 반대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왜 그 힘(원심력)을 느낄 수 없는가라는 점입니다(지구 공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공전하거나 자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원심력이 중력에 비해 워낙 작아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별의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별이 너무 멀어서 시차 자체가 너무 작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아리스타르코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지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101-5)


# 별의 연주시차(年周視差) :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는 반년마다 반대쪽 끝에 도달한다. 두 지점에서 별을 보았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각도의 차이를 연주시차라고 한다.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도스 섬에 천문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주로 활동한 그리스 천문학자로,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별의 위치와 밝기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삼각법과 구면삼각법을 활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등 고대 천문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업적은 당시 지중해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 내용의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히파르코스가 발견하고 정리한 내용들로 채워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우주의 중심에 대한 히파르코스의 입장이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제자로 알려졌지만 딱히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구중심설을 확고하게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스승의 주장이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외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볼 뿐입니다)."(110, 113)


"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운동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周轉圓, epicycle), 이심(離心, eccentric point) 등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각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원(주원)을 따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원 위의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원(주전원)을 따라 공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전원의 중심이 주원을 따라 움직이는 거죠. 이심은 행성 궤도(주원)의 중심이 지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행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걸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문제는 이렇게 해도 행성 궤도의 실제 관측결과와 잘 맞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다시 대심(對心, Equa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대심은 이심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장소인데, 행성의 주전원이 이 점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일정한 속도로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한 거죠. 그의 우주 모델은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 이론 중에서는 관측 결과와 가장 닮았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116-8)


제2부 소멸, 복권, 균열 


4장 헬레니즘 시대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는 그리스에서 상업, 여행, 전령의 신이자 정보와 의미를 관장하던 신인 헤르메스가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와 동일시되면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탄생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점성술, 연금술, 마법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진 이 반신적 인물에 대한 종교철학적 숭배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던 거죠." "특히 그노시스주의는 헤르메스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지주의'(靈智主義)라고 번역되는 이 사상은 기원후 1~2세기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유행한 종교 사상입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겁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을 신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연의 신비를 깨우치고 이를 자신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미시적 우주(microcosmos)로 여깁니다."(126-8)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수용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는 원자(atom)와 공허(voi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물질 입자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모든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 대해 특히 주목했는데, 그는 원자들이 자유 낙하하듯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아래는 우주의 중심을 뜻합니다. 이때 원자들은 모두 동일한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에 중요 개념을 하나 추가하는데, 바로 '클리나멘'(clinamen, 라틴어로 기울어짐, 편향, 휘어짐)입니다. 이는 원자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미세하게 궤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원자 충돌은 상당히 우연한 경향이 있어 결정론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129-30)


#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우주론도 제시했다.


"'판단중지'(에포케, epoche)로 잘 알려진 피론주의는 기원전 4~3세기경 엘리스의 피론(Pyrrhon)에 의해 체계화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피론은 감각과 이성으로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꿀이 어떤 이에게는 달게 느껴지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감각은 주관적이며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이죠. 또한 이성으로도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같은 대상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도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피론의 생각입니다." "피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판단중지 즉 '에포케'야말로 인간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지름길이라 역설했습니다. 피론에게 에포케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평온한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던 거죠.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적 믿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윤리관이었습니다."(133-4)


5장 이슬람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수학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등의 업적으로 대표됩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의 체계를 세웠고,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 계산과 적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아폴로니우스는 원뿔 곡선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도 수학자들은 십진법과 0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음수를 도입했으며, 방정식 해법에서도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이 두 전통을 수용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룹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관측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천체 관측을 위한 다양한 기기를 발명하고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한 관측 기록을 남기고 새로운 천문 현상을 발견합니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관측 결과와 프톨레마이오스 이론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지구중심설을 유지한 상태로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죠."(147, 150-1)


"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가 계속 움직이는 이유를 주변 공기의 작용으로 설명했지만, 이븐 시나(Ibn Sina)는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봅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공기는 투사체를 앞으로 밀어주는 동시에 저항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븐 시나는 같은 매질이 이렇게 상반된 작용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모순된다고 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라면 투사체의 속도는 급격히 감소해야 하는데, 실제 관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븐 바자(Ibn Bajjah)는 물체의 낙하 운동을 연구하여, 운동의 속도와 시간, 거리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정 속도 낙하 이론과 대비되는 중요한 관찰입니다. 이븐 바자는 비록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분석을 시도합니다."(153, 156)


"플라톤과 유클리드가 주장한 '방출설'은 눈에서 광선이 나와 물체에 닿아 시각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형상'이 매질을 통해 눈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합니다. 알 하이삼은 이러한 기존 이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시각을 일으킨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알 하이삼의 광선유입설은 빛을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로 보고, 눈을 빛을 수용하는 정교한 광학 기관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이후 렌즈와 망원경 발명 등 광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됩니다. 그의 책 『광학 서설』은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고, 로저 베이컨, 비텔로, 케플러 등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에는 『광학 서설』이 일종의 교과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이 책은 원근법 연구에도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157-9)


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복권에서 균열까지 


"12세기부터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지성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대학들부터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업의 중심으로 삼았죠." "왜 대학들은 교회와 여러 번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와 수업의 중심으로 삼게 된 걸까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모두 다루면서도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또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쉽게 말해서 강의용 교재로는 그만이었죠. 특히 『논리학』이 그러합니다. 대학 교육에 딱 맞았습니다. 이런 이유에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융합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고 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수가 된 점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는 건 신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죠."(178-80)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업의 중심이 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먼저, 학문이 더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이전 수도원 학교나 초기 대학에서는 대부분 신학이 중심이자 대부분이었죠.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도 커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고, 논리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이런 태도 때문에 대학에서도 계시나 권위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철학도 독립했지요. 원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리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오면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방식도 바뀝니다. 이전에는 성경과 교부들의 책을 암기하고 반복하는 방식과 강의가 주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글에 대한 주석을 학습하는 것이 추가되었죠. 하지만 이제 책을 같이 읽고 해석하는 강독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그리고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가 주된 교육 방법이 됩니다."(180-1)


"르네상스가 본격화하면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중세의 전성기 혹은 번역 르네상스 시기 이래로 유럽 지성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어 원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학자들은 중세 시대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원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이는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죠. 인문주의 운동의 확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4세기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15세기의 로렌초 발라, 그리고 16세기 초의 에라스무스는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수사학적 분석을 강조했습니다." "16세기 들어 항해술, 광산업, 농업 등 실제 경험에 기초한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순수하게 이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죠. 17세기에 이르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등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제시가 이루어집니다."(184-5)


제3부 과학혁명 


7장 새로운 철학, 새로운 방법론 


"프랜시스 베이컨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선험적 관념에 끼워 맞추는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철학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했습니다. 경험과 실험보다는 권위자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자연의 모습보다는 신의 섭리를 입증하는 데 골몰했던 것입니다. 반면 베이컨은 물체나 생명체의 작동 방식을 꼼꼼히 관찰하고 실험하며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귀납적으로 도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자연의 '목적'이 아니라 '기제'(mechanism)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실험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은 제목부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일종의 도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오르가논』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새로운'이란 뜻의 '노붐'을 붙인 거죠. 베이컨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와 연역법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206-7)


"데카르트는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봅니다. 〈이 우주 즉 물질적 실체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는 그의 말은 당시 떠오르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가 창안한 해석기하학입니다.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하나의 연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자연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갈릴레오, 뉴턴 등 동시대 과학자들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수학에서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주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옵니다.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수학적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는 후에 미적분학 발전의 한 토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좌표계도 데카르트가 제안한 것입니다."(214-6)


"스피노자에 따르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가 바로 신 또는 자연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별개의 실체로 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으로 파악합니다." "그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의 통일성과 법칙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현상 이면의 보편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접근방식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학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필연적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자 독자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216-7)


8장 천문학 혁명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성과 비일관성에 불만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체계를 고안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않습니다. 천구도 그대로 있고, 행성과 지구가 천구에 고정되어 도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단 하나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뀌었습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하학적으로 우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지상 명제 '원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던 것뿐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양과 지구를 맞바꾸는 것만으로 행성 궤도를 완전히 원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행성들이 원 궤도를 돌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체계에 있던 이심과 주전원 개념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모두 원운동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함을 비판한 그였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 역시 여전히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221-2)


"1587년 튀코 브라헤는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펴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독특한 우주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이 모델은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전통적인 지구중심설 사이의 타협안으로 여겨졌으며, 관측 데이터와도 잘 맞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별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또 하나의 깊고 굵은 상처를 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우주에는 어떠한 새로운 천체도 생길 수 없고, 존재하는 무엇도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별이 생겼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14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기록해서 내밀었지요. 마찬가지로 혜성의 발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커다란 구멍을 냅니다. 혜성이 행성들 사이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발견은 천구(Celestial spheres)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행성들의 역행도 견디기 힘든데 그보다 더 괴상한 궤도를 도는 녀석이 우주에 있었던 거죠."(224-6)


"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의 지지자였습니다. 애초에 튀코의 모델이든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든 지구중심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요. 태양을 중심으로 튀코의 관측 자료를 원운동 궤도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겨우 관측 결과와 가장 유사한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케플러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평균적으로 '2분'의 범위 내에 일치하는 모델이기는 했습니다만 특정 지점에서 8분의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8분의 오차. 원을 360등분한 것 중의 하나가 1도이고 그 1도를 다시 60등분한 것 중에 8에 해당하는 오차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믿음과 관측 결과가 다를 때 무엇을 따를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케플러는 관측 결과를 따랐지요. 자신이 온전히 믿고 있던 우아한 기하학의 우주, 그 근본이 되는 원 궤도를 스스로 부정하고 타원 궤도를 도입합니다. 케플러의 제1법칙입니다. '행성은 태양을 그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돈다.'"(229-30)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금의 쌍안경보다 못한 망원경으로 금성의 위상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관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늘을 봤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서는 금성은 항상 태양의 앞쪽에서 지구 주위를 돕니다. 그럴 경우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의 모습은 항상 반달보다 더 얇은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금성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 뒤쪽에 있는 금성이 보름달 모양으로 동그란 걸 볼 수 있습니다. 지동설의 결정적 증거지요." "그에 비해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한 것은 일종의 우연과 목적의식이 겹친 일일 것입니다. 지동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금성의 위상변화와 함께 역행운동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찰하기 좋은 행성이 목성과 화성이지요. 그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은 아마 목성의 역행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매일 그 주변을 살피다 일어난 일이겠지요."(237-9)


9장 역학 혁명 


"갈릴레오는 최초로 '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관성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관성과는 좀 달랐습니다. 갈릴레오에게 관성운동이란 등속 원운동입니다. 즉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으면 계속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뜻이지요. 갈릴레오에게는 (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 원운동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주장이 아니었죠. 플라톤도 그렇게 말했고, 히파르코스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 이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니 갈릴레오에게도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운동이 천체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점도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따라서 갈릴레오에게는 하늘의 기본적 속성인 원운동이 지상에서도 구현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255-6)


"그런데 사고실험이라든가 포물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직선인데 무슨 원운동이냐는 의문을 가질 법합니다. 갈릴레오에게 직선은 원의 근사적 표현일 뿐입니다. 갈릴레오가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지구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 구(sphere)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태양중심설의 중요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제기이지요.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원 궤도로 돈다면 왜 우리는 원심력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첫 번째 문제와, 왜 지구가 원 궤도를 도는데 우리는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느냐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겁니다.(첫 번째 문제는 8장에서 다룬 연주시차입니다.) 하늘의 천체처럼 그리고 지구처럼 우리도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한 번 시작된 원운동을 계속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대 때부터 이어진 태양중심설에 대한 지구중심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257-8)


"상대성 원리의 개념을 처음 떠올린 사람도 갈릴레오입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에서 '절대적인 운동'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모든 운동을 '상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구라는 절대적인 운동의 기준에 따른 우리 일상의 직관과는 다르지만,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갈릴레오는 배 안에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배가 정지해 있을 때나 등속으로 움직일 때나 물체의 운동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었지요. 즉 배 안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배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공은 배 안의 똑같은 지점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들은 운동의 상대성이라는 혁명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할 수 있었지요. 지구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가정했을 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266-7)


10장 뉴턴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이 암시하는 바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행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고 태양에 가까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았죠. 뉴턴은 이 힘을 만유인력, 즉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다음으로 갈릴레오가 중력을 지구 중심을 향한 힘으로 본 반면, 뉴턴은 중력을 모든 질량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반화했죠." "뉴턴은 미적분학을 사용하여 만유인력에 의한 물체의 운동 방정식을 유도했죠. 이 방정식으로부터 그는 케플러의 세 법칙을 모두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혜성의 운동, 조석 현상 등 다양한 천문 현상을 만유인력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이전까지의 행성 운동 이론을 종합하고 극복한, 보편적인 역학 법칙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만유인력 이론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유낙하운동이나 경사면 운동, 포물선 운동에도 적용됩니다."(275-6)


"뉴턴은 데카르트의 관성 직선운동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운동 제1법칙으로 정립했습니다. 관성의 법칙인 뉴턴 제1법칙에 따르면, 물체는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유지합니다. 다음으로, 뉴턴은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 연구를 발전시켜 가속도의 법칙인 운동 제2법칙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물체의 가속도가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죠. 이는 힘과 운동의 관게를 정량적으로 규명한 획기적 성과입니다. 또한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운동 제3법칙을 통해,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역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밝혔죠. 이는 데카르트와 하위헌스의 충돌 연구를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연구되던 역학의 여러 분야를 하나의 통합된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80-1)


"뉴턴의 역학 이론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절대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절대 공간은 그 안에 존재하는 물체와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고 부동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시간을 사건들의 연속 순서로 이해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간 역시 라이프니츠에게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는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 관계로 정의된다고 보았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다면 그 물체의 위치나 운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치와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9세기 말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집니다."(290-2)


11장 데모크리토스의 후예들 


"진공은 예로부터 불신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은 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부정하여 물질과 물질 사이에 진공을 두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었지요. 그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보다 더 많은 진공으로 에워싸인 곳입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긴 유리관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실험을 하지요. 여러 다양한 실험을 통해 토리첼리는 관 속의 수은이 밑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그릇의 수은을 누르고 있는 공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더불어 유리관의 위쪽 수은이 빠져나간 곳은 진공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러나 토리첼리는 갈릴레오의 예상만큼 명민했기에 자신이 한 실험이 미칠 파장도 예상했습니다. 그는 아주 친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입을 다뭅니다. 일찍이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리고 스승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과 싸워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지 알고 있던 그였으니까요."(296-8)


"갈릴레오의 진공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사람은 아일랜드 백작의 아들 보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가 자신의 발견을 숨긴 것과 달리 보일은 적극적이었습니다. 물론 로마로부터의 거리도 멀고 종교도 다르니 별다른 두려움도 없었겠지요. 그는 새로운 진공펌프를 이용해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입증합니다. 그는 나아가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못하지만 빛은 진공을 뚫고 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지요. 이제 진공은 더 이상 불신자의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일은 연금술(Alchymist)의 전통과 결별하고 회의하는 과학으로서의 화학(Chymist)을 선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도,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요소(유황, 수은, 소금)도 거부합니다. 그는 세상 만물이 더 이상 다른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혼합물과 달리 화합물은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299-300)


"19세기 후반, 열역학의 발전과 함께 원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역학과 원자론을 결합하여 통계역학을 정립했습니다. 볼츠만의 접근은 물질이 원자나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아직 물리학자들에게 원자론이 수용되기 전이었기에 당시로은 대담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 분자 운동론을 발전시키면서 열역학 법칙을 통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기체를 수많은 분자의 집합으로 보고, 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온도, 압력, 엔트로피 등 열역학적 물리량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볼츠만의 스승이었던 에른스트 마흐는 원자론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마흐는 과학적 지식이란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그에게 원자와 분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과학 이론의 기초가 될 수 없었습니다."(313-4)


12장 생물학 혁명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첫 번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박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적 유산이 재발견되고, 신대륙 탐험을 통해 신기한 동식물들이 속속 유입되면서 이를 연구할 필요가 생긴 거죠." "16~17세기를 거치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점차 분류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박물학의 발전은 전통적인 종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죠. 신대륙의 생물들은 기존의 분류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주머니쥐나 아르마딜로는 유럽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화석 연구는 멸종한 생물들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조르주 퀴비에가 발견한 매머드나 마스토돈 화석은 현존하지 않는 생물의 증거였습니다. 이는 곧 종이 불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죠."(319-21)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 의학의 오류를 하나둘씩 발견해 나갑니다. 가령 갈레노스는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베살리우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냅니다. 개, 원숭이 등의 동물 해부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인체에 그대로 적용한 갈레노스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 거죠.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출간합니다." "갈레노스는 혈액순환에 대해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온몸으로 퍼져 조직에 흡수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는 이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매일 만들어야 할 혈액량이 너무 많았던 거죠. 하비는 동물 해부 실험을 통해 혈액순환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개구리, 뱀,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의 심장을 관찰했는데, 심장이 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1628년 하비는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합니다."(322-5)


"과학혁명 시기 새로 등장한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망원경과 현미경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미경이 생물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660년대입니다. 영국의 로버트 훅이 복합 현미경을 개발하면서부터죠. 훅은 코르크 조직을 관찰하다 벌집 모양의 작은 방들을 발견했는데, 이를 '셀'(cell)이라 명명합니다."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매우 정교한 단렌즈 현미경을 제작했는데, 무려 300배에 이르는 배율을 자랑했죠. 1674년, 레이우엔훅은 연못물과 침 등에서 작은 '애니멀큘레스'(animalcules)가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죠. 하지만 관찰을 거듭하며 미생물이 엄연한 생명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훅의 세포 발견은 생명의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밝혀줬고, 레이우엔훅의 미생물 발견은 자연발생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미경에 의한 생물학 혁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326-7)


맺는 글: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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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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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내가 〈아이디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생각이고 그것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생각은 경험을 능가하며 단순한 예측보다 탁월하다. 아이디어는 평범한 생각과 다르지만, 이는 그것이 그저 새로운 것이어서만이 아니라 예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는 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환영이나 영감의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 '환각'이나 머릿속의 음악(가사가 없거나 가사가 붙기 전까지의 음악)과는 다르다. 아이디어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델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는 〈우리의 생각(What We Think)〉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과거에 시작된 아이디어 중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각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거나 우리 시대에 새로 등장한 문제에 대처하도록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적 무기고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지혜 또는 우몽의 배경을 이룬다."(8-9)


제1장 물질에서 나온 정신: 아이디어의 주요 원천


"인간 사유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는 아마도 '상상력'─판타지아, 혁신성, 창조성, 오래된 생각을 새롭게 다듬는 능력, 새로운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 영감과 황홀경의 모든 결실─일 것이다. 상상력은 크고 거창한 단어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한 가지 현실에 해당한다. 상상력이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극도로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까? 나는 상상력의 구성요소로 세 가지 능력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기억력이다. 기억력은 우리가 발명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 때 언제나 이전에 생각했거나 만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대부분 기억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그러니까 기억이 정확하고 실제 과거에 충실하며 미래를 위한 토대로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나쁜 기억력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40-2)


"인간의 비효율적인 기억력은 기억력과 상상력의 차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차이는 어떤 경우든 그리 크지 않다.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기억력도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감각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앞서 정의된 것처럼 상상력이 실제로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라면, 기억력은 거기에 더는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기억력은 특수한 형태의 상상력이다. 기억력은 사실과 사건의 표상을 형성함으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상상력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삶은 상식(common sense)을 왜곡한다. 현실에서 기억과 상상은 융합한다. 그런데 기억은 허위일 때 상상력과 가장 가깝다. 기억의 창조적인 힘은 회상을 왜곡하는 데 있다. 거짓 기억은 현실을 환상으로, 경험을 추측으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오래된 일을 잘못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셈이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과 뒤섞고 난도질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51-2)


"상상력은 예측력 이상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는, 예측력의 과잉으로 빚어진 결과다. 일단 우리가 적이나 먹잇감, 문제, 결과 따위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개연성이 더 적은 대상,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운 종, 과거에 먹어보지 않은 음식,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음악, 환상적인 이야기, 새로운 색깔, 괴물, 요정, 무한대보다도 거대한 어떤 수, 신 등을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무(無)'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상상력이 이루어낸 가장 대담한 도약이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예측력과 기억력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상력은 진화의 일반적인 결과물들과 달리 생존 요구를 넘어서고 우리에게 어떤 경쟁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화는 상상력에 보상을 제공하고 그 지위를 드높임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62-3)


"기억력·예측력과 더불어 언어는 상상력의 마지막 재료다. 내가 여기서 '언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상징체계다. 언어는 몸짓과 발화의 합의된 패턴이나 기호의 체계다. 이 몸짓과 발화는 실제 대상과 명백한 유사성을 반드시 띠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가 가진 증거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고안한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더 많다." "당연히 일단 우리가 상징의 레퍼토리를 갖게 되면 상징이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다. 그리고 상징이 많을수록 결과도 더욱 풍부해진다. 언어(또는 모든 상징체계)와 상상력은 서로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언어가 사용하는 기호는 대부분 임의적이고 실제 대상과 유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해를 빚을 가능성은 증가한다. 오해는 유익할 수 있다. 흔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래된 아이디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언어는 성공적인 의사소통 못지않게 왜곡과 재앙을 통해 아이디어의 형성과 혁신의 흐름에 이바지한다."(64-8)


제2장 생각을 채집하다: 농경 이전의 사고


"유물론은 세계를 보는 가장 오래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호미닌 조상들은 필시 유물론자였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망막에 맺힌 인상들이 그들이 가진 최초의 생각들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사지의 떨림과 장기의 동요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표면은 안에 있는 것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5세기 말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 〈진실은 심층에 있다.〉 경험들을 비교하고 그로부터 추론을 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는 생물체는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과 상충된다는 것, 감각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식을 축적한다는 것, 우리는 결코 가상(假像, semblance)의 끝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수 없음을 알아챌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꼭 감각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디어는 만능키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정신 세계로 가는 열쇠였다. 이 아이디어는 무한한 사변의 파노라마를 열어젖혔다. 나중에는 종교와 철학이 이 사상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106-8)


"똑같이 오래되었고 광범위한 인류학 문헌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디어는 모든 사물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 개념은 가령 '무엇이 하늘을 푸르게 만들고, 물을 습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푸름은 하늘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색깔이 바뀐다고 해서 하늘이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습함은 어떨까? 이것은 다른 문제 같다. 마른 물은 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습함은 물의 본질적 속성이다. 어쩌면 모든 속성의 기저에 단일한 실체가 자리해 있어 이 의견상의 충돌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그러한 질문을 계속 한다면 당신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에 관한 심층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만일 인류학적 증거에 기댈 수 있다면, 가장 오래된 대답 중 하나는 보이지 않고 보편적인 동일한 힘이 모든 것의 본성을 설명하고 모든 활동이 실행되게 한다는 것이었다."(116)


"자연을 무척 친밀하게 알고 있었던 초기 인간들은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체계적인 것은 어느 일부분을 통제함으로써 조작이 가능하다. 이렇듯 자연을 조작하려는 노력 중에서도 주술은 가장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방법이다." "주술과 과학은 같은 선상에 있다. 양자 모두 자연을 지성으로 지배해 인간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주술 아이디어는 두 가지의 뚜렷하게 다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는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있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둘째, 정신은 이러한 원인을 불러내어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을 장악할 힘을 획득한다. 주술은 진정 강력하다. 지금도 주술은 자연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만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모든 사회에서 되풀이해 나타난다. 숱한 실망들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118-9)


"일단 코스모스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초기 개념에 영감을 주었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자연은 언뜻 카오스 즉 무질서한 상태로 보이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아래나 내부에는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추론에 도달하려면 커다란 정신적 도약이 필요하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생성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이 아이디어가 생기자 우주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된 정신들은 세계 전체를 단일한 체계 안에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에서 질서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사람들의 행동을 어떤 모범이나 양식에 맞추기 위한─모든 노력에서 질서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주 먼 고대에도 사회적 규범이 있었음이 확인된다."(137-9)


제3장 정착된 정신: ‘문명화된’ 사고


"농경 사회는 기근이 반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풍요로운 일상이 배경을 이루었다. 농사는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 농사는 모든 전문화된 경제 활동의 형태를 고루 갖출 만큼 큰 정착지에 식량을 조달했다. 도시에서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향상되었다. 〈사회적 본능은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준 것이지만 가장 큰 은인은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했다. 도시는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수단 중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세상의 풍경을 속속들이 재상상한 새로운 거주지로 뒤덮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고안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세심히 조성한 새 환경이었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지혜에 따르면 카오스란 〈벽돌이 하나도 놓이지 않고 (···) 도시가 하나도 건설되지 않은〉 때였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았다."(167-8)


"낭만과는 거리가 멀게도 문자는 일상적인 발명품이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지금까지 문자와 관련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이론의 여지 없이 상인들이 사용한 꼬리표나 물표이거나, 세금 또는 공물 징수원이 종류와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한 자료였다." "위대한 문학이나 중요한 역사 기록처럼 소중한 내용은 직접 외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시인의 걸작이나 현자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구술로 전해졌고 수 세기가 지나서야 예찬자들이 이를 문자로 받아적었다. 그전까지 문자로 옮겨 적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 "전문가들은 문자를 국가의 필요에 맞게 조정했고 이어 법을 성문화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최초의 법규는 아마도 사례들로부터 추출한 일반론, 즉 모든 종류의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변형된 계율들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법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중반 중국과 그리스에 세속적 법률 이론이 등장할 때까지 이 추세는 계속되었다."(184-7)


"우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아이디어가 현대적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어느 시대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평등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문화는 오늘날의 악덕을 고발하기 위해 '참으로 좋았던 과거의 한때'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고대 이집트의 속담은 그러한 시절을 〈신들의 뒤를 이었던 시대〉라고 불렀다. 〈지혜의 책들이 그들의 피라미드였던 시대, 여기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이가 있는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기원전 제2천년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는 운하, 감독관, 거짓말, 질병, 노년 등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를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 또는 5세기의 『마하바라타』에는 같은 주제의 고대 인도 전통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축복받은 세계,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지 않은 세계였다."(188-90)


"유한 계급은 법을 고안하고 국가를 규정했으며 새로운 통치 개념을 발명하고 여성과 커플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의무를 배정했다. 그들은 이제 당장에는 급하지 않은 생각,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 또는 종교적 사색으로 분류할 만한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개개인들을 코스모스에 관한 사색으로 이끈 이들 세 가지 아이디어는 운명이라는 아이디어, 불멸성의 아이디어, 그리고 영원한 보상과 처벌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운명, 불멸성, 영원한 처벌 모두 사회적 유용성을 위해 떠올린 아이디어로 보인다. 똑같이 위대하지만 언뜻 유용성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세계는 환상이라는 아이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창조적인 힘이라는 아이디어다. 후자는 사유에 대해 사상가들이 품은 자기 본위의 존경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시기의 전문 지식인들은 여러 가지 철학적 또는 원시 철학적 문제들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아니면 적어도 이 문제들을 최초로 기록했다)."(197, 204, 207)


제4장 위대한 현자들: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상가들


"지금의 우리에게 종교처럼 보이는 것(오늘날 이해하는 방식대로의 종교)이 당시의 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종교와 주술을 구분하는 선은 이따금 과학과 주술을 가르는 선처럼 흐릿하다. 이 시기의 전설은 종교 창시자들을 마법으로 보이는 것들과 연결시킨다." "전통적인 주술에 진 빚이 얼마나 많든 새로운 종교들은 인간이 자연이나 모든 신적인 것과 맺은 관계를 조정할 진정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모든 새로운 종교들은 형식적 의례와 더불어 도덕적 실천을 옹호했다. 단순히 유일신이나 여러 신에게 정해진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윤리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자연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발전을 위한 여정을 밟아나감으로써 추종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현세에서든, 죽어서든, 시간의 끝에서 이루어질 변화에 의해서든, 선의 완성 또는 〈악으로부터의 구제〉를 약속했다. 이 새로운 종교들은 단순히 생존의 종교가 아닌 구원의 종교였다."(222, 228)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개념의 주창자들은 통념적인 지혜와 겨루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주장을 얼마나 열렬히 내세웠는지가 이를 예증한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중국에서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뒤 혹시 자신이 실제로는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인 것은 아닌지 궁금히 여겼다. 장자보다 조금 앞선 플라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고 비슷한 의심을 품었다." "우리가 아는 한 피타고라스는 수가 실재한다고 말한 최초의 사상가다. 분명 수는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꽃 두 송이, 파리 세 마리.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수는 그것이 열거하는 사물들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는 그저 형용사가 아닌 명사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는 아키텍처이고 코스모스는 이에 따라 건설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만물은 수〉라고 표현했다. 만일 당신이 수가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셈이다."(246, 251-2)


"기원전 제1천년기 이전에는 아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었다. 과학은 종교적이었으며 의학은 주술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사상가들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과학과 이성으로 저글링 묘기를 했다. 이때 발생한 충돌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조적 과학─반대자들은 이것을 '과학주의'라고 부른다─과 영적 사유방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자연적 원인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주술을 다양한 수위에서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쫓아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을 완전히 탈신성화할 수는 없었다. 영혼과 악령이 물러나자, 현자들의 정신에서 자연은 대체로 신의 손에 남겨졌다. 중국에서 황제들은 여전히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를 거행했다. 서양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고난의 원인을 죄악에 돌렸다. 과학은 결코 종교와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없다."(258-60)


"현자들의 노력이 과학과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면 그 노력의 또다른 가닥은 윤리와 정치에 관한 생각을 고무했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에 무관심한 정신은 선과 악의 구분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악을 억제하고 싶다면, 한 가지 확실한 수단은 국가다." "모든 정치 사상은 도덕적·철학적 가정에 의해 형성된다. 사상가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얼마나 낙관적이었는지 또는 비관적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정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자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구제 불능이며 사악하거나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약적이고 억압적인 제도를 선호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선함을 풀어내려 한다. 보수주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억누르려 한다."(269-72)


제5장 신앙을 생각하다: 종교적인 시대의 아이디어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상자는 신학과 교회학만으로 불완전하다. 믿는 자에게 유익하며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윤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 가장 급진적으로 이바지한 성 바울의 아이디어는 가장 영감이 넘치면서 가장 문제적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성 바울은 신은 구원을 내릴 때 구원을 받는 자의 공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 바울은 「에베소서」에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 바울이 거듭 단언하듯 구원받은 자의 공적 때문이 아니었다. 이 교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교회는 이 입장을 항상 공식적으로 옹호했다─우리가 행한 선은 신이 베푼 호의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는 아이디어─에서 암울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느낀다."(302-3)


"이슬람교는 도덕적 사상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기독교보다 단순하고 현실적인 교리를 내놓았다. 이슬람은 직역하면 '순종' 또는 '복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에 응답하라고 개개인에게 요청한 반면 무함마드는 더 직설적으로 신의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예언자이자 통치자였던 무함마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한 청사진 역시 제시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세속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과 달리 무슬림들은 두 영역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는 예배의 방식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었다. 칼리프─직역하면 무함마드의 '계승자'라는 뜻이다─는 이 모든 영역을 관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남긴 율법은 어떻게 보아도 포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8세기와 9세기 스승들이 창설한 율법학파는 이 빈틈을 메우고자 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생전에 남긴 가르침들을 수집해 일반적인 명제들을 수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상식 또는 관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312-3)


"이슬람교는 점차 수백 갈래의 분파 및 하위 분파로 나뉘었다. 다양한 칼리프 선출 방식들은 양립할 수 없었고, 칼리프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슬람교는 갈수록 더 큰 균열을 겪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한 세대 이내에 생긴 갈등의 골은 이후 절대 메워지지 않았다. 분열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분파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 통치자나 국가가 칼리프 또는 칼리프에 준하는 지위의 권위를 가로챘다. 그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또는 최근 들어 〈현대화〉나 〈서구화 추세〉를 명목으로 샤리아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을 때마다 혁명가들은─갈수록 더 자주─무함마드의 망토를 깃발 삼고 무함마드의 책을 무기 삼아 통치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비판을 제기했다. 무함마드는 삶의 모든 측면을 관장하는 보편적 행동 수칙인 '샤리아'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샤리아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무슬림들도 이 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314)


"15세기 초, 장 제르송(Jean Gerson)은 세속 정부와 교회 정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후 서양 세계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기원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국가는 죄악 때문에 발생했다. 에덴동산의 바깥에서는 부정한 행위의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자원을 모으고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었다. 시민들의 합의는 국가의 유일한 정당한 토대다. 신이 내려준 교회와 달리, 국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물로서 역사적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고 암묵적 갱신에 의해 유지된다. 군주정의 경우, 통치자의 권력은 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이 골자를 이루는 계약에 따른 것이다. 국가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문제는 사회계약론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국가에 계약적 토대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342-3)


제6장 미래로의 회귀: 흑사병과 추위를 통과한 생각


"생물군의 변화는 우리가 사는 행성의 표면을 농업의 발명 이래 그 어떤 혁신보다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농사는 우리가 '부자연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도입해 진화에 수정을 가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시작된 변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진화의 패턴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전 세계를 떠도는 유럽의 식민지 개발자들과 탐험가들을 따라 생물군도 대양을 건넜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동식물을 이동시켜서 새로운 가축 종을 만들거나 새로운 토양에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혁명적인 변화는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다시 상상했고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수많은 씨앗, 세균, 곤충, 포식자, 사람들이 귀여워해 몰래 들여간 동물 등도 사람들의 옷깃과 주머니, 선박의 창고나 밑바닥을 통해─말하자면 디즈니의 〈놀라운 여행〉을 거쳐─새로운 환경으로 건너가 변화를 빚어냈다."(359-61)


"탐험은 유럽의 영향을 세계 전역으로 투사했다. 아울러 탐험가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라 전 세계적인 생태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콜럼버스가 세계를 상상한 방식─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로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세계가 작다고 생각했다─은 이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의 크기는 탐험가들을 주저하게 했다. 콜럼버스는 작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지구 일주를 시도하도록 자극했다.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잘못된 아이디어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생산적인 예였다."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텍스트적 권위에 대한 콜럼버스의 무관심은 사실상 그를 과학혁명의 전령으로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근대 과학자들처럼 문자로 기록된 권위보다는 관찰된 증거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을 유도한 또다른 요소는 콜롬버스의 영향으로 탐험 지역이 확대되며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나타났다."(375-8)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시대의 새로운 정치사상은 과학과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고대에 대한 경의로 시작해 새로운 발견의 영향에 적응하다 결국 혁명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문제에 대응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주권 국가와 전례 없는 제국의 부상은 새로운 패턴을 구상하도록 강요했다." "사람들은 흔히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모어의 판타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가 오히려 더 창의적인 상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서양에서 통치에 관해 등장한 기존의 모든 사상─국가의 목적은 시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을 비난했다." "이후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으로부터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국가는 도덕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 봉사한다는 현실정치주의고, 둘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국가의 존속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는 과한 조치도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394-8)


"16세기에 유럽 밖 제국의 건설이 낳은 또다른 결과는 정치사상을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더욱 폭넓은 성찰로 되돌려놓았다는 데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도덕 개혁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인류에 속한 민족들은 모두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명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근대의 가장 새롭고 강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인 인류의 통일성을 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 이유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거의 모든 시기에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제1천년기의 현자들은 인류의 통일성에 관해 자세히 논했고 기독교는 우리가 혈통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종교의 정설로 삼았지만, 인간과 이른바 '인간 이하(subhuman)'의 경계선이 어디라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세 생물학은 〈존재의 사슬〉을 상상했다. 이 상상 속에서 인간과 야수 사이에는 괴물들에게 할당된 〈유사 인간(similitudines hominis)〉 범주가 있었다."(415-6)


제7장 전 지구적 계몽: 연합된 세계의 연합된 사상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식인들, 곧 필로조프들(philosophes)에게 세속의 성서나 다름없었다. 이 책의 부제 〈이성에 입각한 과학·예술·상업 사전〉은 아마도 출판 역사상 책의 성공에 가장 크게 일조한 부제일 것이다. '사전'이라는 단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지식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언급된 세 주제는 추상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을 모두 하나의 저작에서 아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디드로는 이 책의 취지를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인류로부터 상찬을 받아 마땅한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계몽주의의 심장부를 차지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코스모스의 메타포였다. 『백과전서』의 저자들은 기계의 우월성이나 우주의 기계적 본성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아울러 이성과 과학은 동맹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공유했다."(431-3)


"18세기 내내 해방 옹호론자와 억압 옹호론자 사이에서 논쟁이 활발했다. 볼테르는 조직화된 종교에 염증을 느꼈고 그 철학적 대안으로서 유학(儒學)에 매력을 느꼈다. 아울러 우주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관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중국 국가체제의 절대 권력은 선을 위한 강제력이었다."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공포를 통치 원리로 삼는 전제국가〉라고 비난했다. 사실 한 가지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갈랐다. 몽테스키외는 법치를 옹호하고 헌법적 안전장치가 통치자에게 재약을 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볼테르는 국민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강하고 분별 있는 정부를 선호했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아시아가 약하고 유럽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은 자유롭고 아시아는 예속적이다.〉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는 서양의 정치 문헌에서 권력 남용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451-2)


"18세기에 만일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만 하면 평등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합리적인 개념이었다. 국가는 언제나 중대한 불평등과 맞선다. 그렇다면 모든 불평등과 맞서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강요된 평등은 횡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 기능은 다른 모든 기능보다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의 가장 신성한 원칙 중 하나와 절연했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원칙이었다. 루소는 사유재산과 국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본성적이고 원시적인 선한 상태를 옹호했을 뿐 달리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루소는 감정과 직관의 가치를 중시하며 어떤 면에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낭만주의자들의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적 감성을 선취했다.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과 폭도에게 탁월한 영웅이었다."(458-60)


"확실한 사실은 계몽주의 운동은 인민 주권과 민중의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럽에서는 실패했지만 미국에서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 무르익는 동안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매도했다. 신중한 사상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한 체제를 추천하기 망설였다. 루소는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에드먼드 버크─18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외쳤다─는 민주정 체제를 〈세계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체제라고 일컬었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마누엘 칸트조차 1795년에 민주주의를 다수의 횡포라고 부르며 기존의 견해를 철회했다." "반면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쑥쑥 자랐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오래된 지배층의 의무는 이에 적절히 부응해 〈민주주의를 지도하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되살리고, 민주주의의 풍습을 정제하고, 민주주의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것〉,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길들이는 것이었다."(468-9)


"18세기 유럽은 이른바 〈이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패─전쟁, 억압적 정권, 시대 자체에 대한 실망─는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직관은 최소한 이성과 동등했다. 느낌은 생각만큼 중요했다." "과학과 낭만성의 융합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1802년 침보라소산에 오르던 훔볼트는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 추위로 몸이 뒤틀리며 코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훔볼트가 겪은 고통과 좌절의 이야기는 유럽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두고두고 기리는 바로 그 주제가 되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내성적인 독일 시인 노발리스는 1800년에 낭만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인 〈파란 꽃(blaue Blume)〉을 창조했고, 절대 꺾이지 않을 이 아련한 꽃은 이후 낭만주의적 갈망을 상징해왔다. 낭만주의의 핵심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충족될 수 없는 갈망─에 대한 숭배가 자리해 있다."(479-82)


제8장 진보의 전환기: 19세기의 확실성


"벤담의 〈공리주의〉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였다. 벤담은 일종의 행복의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벤담은 사회적 〈효용〉을 개인의 자유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벤담의 철학은 급진적이었다. 유구한 전통이나 권위, 과거의 성공 기록을 참조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회 제도를 평가할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신조는 의도적으로 신을 배제했고 유물론적이었다. 벤담이 제시한 행복의 기준은 쾌락이었고 악의 기준은 고통이었다." "벤담은 낭만주의에서 손을 뗀 영국 지배층의 가장 유창한 웅변가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낭만적 열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밀은 처음에는 공리주의를 수정하다가 이후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마침내 자유를 모든 가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다. 밀은 벤담의 최대 다수를 개인이라는 보편적 범주로 대체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499-502)


"마르크스는 국가의 〈소멸〉을 목격하기를 소망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에게 국가는 진보를 유지할 최고의 수단이었다. 어느 정도는 아이디어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이 국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질적인 우발 사건들이 국가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구 성장은 군대와 경찰력의 증강을 가져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무자비하게 실행했다. 세금과 통계 자료, 지식이 누적되었다. 형벌 수단이 증가했다. 폭력은 갈수록 국가의 특권(궁극적으로는 거의 독점적 특권)이 되었고 국가는 개인이나 전통적인 제도, 협회, 지역의 권력 구조보다 더 많은 무기를 보유했고 더 많은 자금을 썼다. 국가는 다른 19세기 권위의 원천─부족이나 혈족 등의 혈연 집단, 교회 그리고 세속 권력에 대한 여타 신정 정치적 대안들, 귀족계층, 사업 연합체, 지방 및 지역의 자주 독립주의, 깡패들의 두목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마피아, 프리메이슨 단체 등─과 맞서는 거의 모든 대결에서 승리했다."(512)


"그러나 19세기에는 개인 숭배가 문화 전체를 재편성했다(초인 숭배의 위험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에 잘 드러나 있다). 영국 남학생들은 웰링턴 공을 모방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의 롤모델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 이름에서 울려 나오는 영웅주의의 메아리가 경외심을 자극했다.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시몬 볼리바르의 인간적 결점은 영웅적 신화에 가려졌다. 헤겔의 영웅 숭배는 피로 물든 폭군들을 향했다. 영웅들은 집단─정당, 민족, 운동─에 봉사했다. 오로지 성자들만이 세계 전체를 위한 덕을 구현한다. 대중의 판단에서 영웅이 성자를 대체하자 세계는 나빠졌다. 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은 위인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도자에게 어느 때보다 큰 권력을 맡겼고 20세기의 수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대중선동가와 독재자들에게 스스로 투항했다."(518-9)


"헤겔은 〈민족(Volk)〉을 하나의 이상으로 보았다. 헤겔에게 그것은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재였다. 일부 민족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와 과학에 의해 민족주의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민족주의는 흔히 신비주의적이거나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민족주의는 일관된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갈망의 상태였기 때문에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체코의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어떤 민족주의 문학 작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민족주의는 〈사고가 아닌 감각〉이라는 가치에 속한다고 선포했다. 주세페 마치니─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공화주의자─에게 민족은 개개인에게 잠재적인 도덕적 완벽성을 마련해준다고 말하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침보라소산에서 〈나를 사로잡은 콜롬비아의 신〉이 〈이상하고 탁월한 불〉을 피운 순간 〈섬망〉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536-8)


제9장 카오스의 역습: 확실성을 풀어헤치다


"앙리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이름을 붙였다. 베르그손은 그것을 엘랑 비탈(élan vital, '생의 약진')이라고 불렀다. 엘랑 비탈은 자연을 진화론에서처럼 내부에서 지휘하지 않았고 신처럼 외부에서 지휘하지도 않았다. 엘랑 비탈은 물질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역량을 지닌 정신적인 힘이었다. 일부 낭만주의자나 주술사가 추구하는 '세계영혼'과 엘랑 비탈이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마 베르그손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베르그손이 엘랑 비탈을 떠올린 것은 우리에게는 과학이 예측하는 것과 다른 미래를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베르그손은 과학을 공격하는 비합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객관적 실재들을 정신적 구성물로 제시하고, 생각하지 않는 창조물에 목적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적 결정론이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한다고, 심지어 위협한다고까지 느낀 사람들은 베르그손의 생각을 환영했다."(585-6)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전환이 가능했다. 평행선들은 서로 만났다. 뉴턴 이래 지배적이었던 질서 개념들은 우리를 호도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상식적인 지각은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토끼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자극을 받아 수행된 실험들은 하나같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더욱이 상대성 이론은 새로운 역설들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아인슈타인이 코스모스의 큰 그림을 다시 상상하는 동안 다른 과학자들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들에 집중했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그전부터 빛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빛은 파동일까 입자일까? 모든 증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새로운 담론은 정합성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쫓아냈다."(593-4)


"프로이트는 20세기의 모델이자 멘토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통설을 (인류학자) 보애스보다도 더 세차게 뒤엎었다. 프로이트의 발견 혹은 주장은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개개인의 자아에 관한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상당수가 무의식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책임, 정체성, 성격, 양심, 사고 방식 등에 관한 전통적 가정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과학〉은 잘 작동하는 듯했으나 가장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했다. 칼 포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고 심리분석 협회는 이 질문에 크게 출렁였다. 그들은 마치 종교 분파나 비주류 정치 운동 세력처럼 굴며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반대자들을 협회에서 추방했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문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문화는 심리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경험은 문화로 인해 다양한 색채를 띤다."(603-4)


"20세기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묘사한 것을 그리는 경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혁신적인 예술작품은 과학과 철학이 불러일으킨 동요와 충격을 표현했다. 1907년 큐비즘은 산산이 조각난 거울에 비친 것 같은 파편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큐비즘 운동을 창시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원자론이 시사한 광경─어딘가 서로 잘 맞지 않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더퍼드가 원자에 관해 설명한 글을 읽고 〈두려운 힘을 느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모든 것이 힘이나 확실성을 잃고 투명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효과들은 새로운 양식의 출현에 반영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실제 대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억눌렀다. 칸딘스키가 시작한 이 완전한 〈추상〉 미술 사조는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묘사하거나, 아예 묘사하지 않았다."(610-1)


제10장 불확실성의 시대: 20세기의 망설임들


"19세기 말을 향해 갈 즈음 모든 측정 가능한 변화의 그래프는 지면을 벗어났다. 토템 연구자 알렉산더 골든와이저는 문화적 변화는 비활성 국면 사이에서 〈솟구치듯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진화는 길게 이어지는 평형상태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모순이 겹겹이 쌓였다. 전자를 관찰한 사람들은 아원자 입자들이 각자 보유한 에너지양과 어긋나 보이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다시 그들의 선배인 연금술사들과 동등한 위치로 되돌아갔다." "과학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진리성을 보장받기 위해 선망하는 객관성의 잣대다. 20세기의 철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어학자, 심지어 일부 문학과 신학 연구자들까지도 주체로서의 지위를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자라 부르며 객관성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기획으로 판명되었다."(626-8)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원래 오래된 철학인 실존주의가 다시금 유행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소외(alienation)〉를 가장 큰 사회 문제로 파악했다. 경제적 경쟁 관계나 근시안적 유물론은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부단히 움직이는 뿌리 없는 개인들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어떤 상태일 뿐이다.〉 아니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든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존재이자, 미래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며 그러한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다〉. 〈그 결과 인간은 쓸쓸하고 그 어디에도 매달릴 곳이 없다. (···) 존재가 진정으로 본질에 선행한다면 인간은 어떤 고정된 (···) 인간의 본성을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정론은 없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다.〉 실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관조라는 방어벽 안에 가둘 수 있었다. 자기 관조는 추악한 세계에 대한 혐오 속에서 찾은 안전한 공간이었다."(635-6)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론적 전회(轉回)〉로 그치지 않았다. 언어 문제들은 불확실성과 결합해 지식의 접근성─과 심지어 실재성─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했다. 전쟁, 학살,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근대 건축 운동이 만들어낸 싸구려 유토피아, 전후 유럽인이 살고 있는 과도한 계획 사회의 음울함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들과 새로운 기회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소외된 사람들은 문화를 되찾아야 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하는 전자 기반 오락 기술이 그들을 도왔다. 이러한 배경에 미루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부분적으로 세대적인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베이비붐 세대는 실패한 부모 세대와 절연하고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와 다원주의의 시대에 어울리는 감수성을 껴안았다. 북적이는 세계와 지구촌에서 삶의 접촉들과 연약함은 다양한 관점을 갖기를 권장 또는 요구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맥락이 부과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문화적으로 조작된 공식이었다."(641-2)


"카오스 이론은 분석의 한 층위를 드러냈다. 이 층위에서 원인과 결과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듯했다. 이것을 임계 질량에 적용하면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무너지게 할 수 있었고, 작은 먼지 알갱이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갑작스러운 변동이 시장을 교란하고, 생태계를 망가뜨리며, 정치적 안정을 뒤엎고, 문명을 산산이 부수고, 우주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무효화하고, 진자의 진동과 중력의 작용을 말한 뉴턴 시대 이래 이어져온 전통 과학의 성소를 침범할 수 있었다. 20세기 말의 희생자들에게 카오스에 의한 비틀림은 복잡성의 작용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체계는 다종다양하고 상호연결된 부분에 더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어느 깊은 수준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로 인해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더 증가했다. 역설적으로 카오스 이론은 더 깊고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탐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652-3)


"조심성, 회의주의, 자기 회의, 머뭇거림 같은 것은 우리가 진리로 오를 때 내딛곤 하는 발판이다. 내가 불안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을 때다. 그릇된 확실성은 불확실성보다 훨씬 더 나쁘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야기한다. 20세기 사회·정치 사상에서는 새로운 교조주의(dogmatism)들이 과학의 새로운 결정론들을 보완했다. 변화가 좋은 것인지 모른다.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 불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권자는 대중 선동가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해결책에 쉽게 현혹된다. 종교는 교조주의와 근본주의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대상, 특히─전형적으로─이민자들과 국제기구를 공격한다. 자원 고갈이 두려워지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잔혹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반응들은 변화의 형태이되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일반적으로 폭력적이며 언제나 위험한 형태의 변화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이유에서, 익숙한 삶의 방식을 붙들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택한다."(682)


"반(反)다원주의는 여전히 흔하다. 21세기 초 몇 년간 일부 서양 국가에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문화 통합〉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유구한 역사의 공동체들이 세계화를 비롯한 여러 거대한 종합적 흐름에 맞서 자신들의 문화를 방어하는 태세를 취했다. 어디에서나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르비아, 수단, 인도네시아는 폭력적으로 분리되었다.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결별했고,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동거의 조건을 재협상했다. 하지만 다원주의의 아이디어는 여전하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이 있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인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이 진정으로 고르게 누릴 수 있는 이득을 제공한다. 역설적이지만 다원주의는 어쩌면 우리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신조다."(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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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노동자가 만난 과학 -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
박재용 지음 / 빨간소금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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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 제국주의와 과학


1. 약탈적 과학: ‘발견’과 ‘발명’이라는 거짓말


피나텍스(Piñatex)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가 2013년 개발한 것으로,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를 부직포 형태로 만든 뒤 특수 처리를 통해 가죽과 비슷한 질감과 내구성을 갖게 했다. 히요사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얻고 아나나스아남(Ananas Anam)이란 회사를 세워 피나텍스를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필리핀 선주민들은 이미 몇백 년 전부터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피나 직물(piña cloth)을 만들어 왔다. 선주민들이 피나 직물을 만드는 과정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정도다. 히요사는 필리핀에서 가죽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선주민들의 이 방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아나나스아남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돌아간다. 주로 서구의 대기업들이 세계 각 지역의 선주민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지역 생물에 대한 지식과 유전자원(genetic resources)을 도용해서 독점적 수익을 올리는 것을 ‘생물해적(Biopiracy) 행위’라 부른다. 8-9)


19세기에는 식물학자, 동물학자, 인류학자 등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식물도 연구하고 동물도 연구했다. 또한 인종에 대해서 살피고 해류나 기상을 관측했다. 이런 과학자들을 박물학자라고 불렀다. 이런 박물학자들의 노력으로 박물학은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 기상학, 해양학 등 세부 학문으로 정립되고 발전했다. 그런데 과연 박물학자들의 성과는 오로지 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을까? 물론 그 노력을 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선주민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박물학자와 함께 탐험한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고용된 사람, 일행일 뿐이었다. 서양 박물학자들의 ‘발견’은 자기네만의 ‘최초’인 경우가 꽤 많다. 오히려 ‘재발견’, ‘서양에서의 첫 발견’ 정도가 적당하다.  이렇게 현지인들의 지식과 도움으로 확보한 식민지에 관한 연구는 영국 제국의 과학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화되었다. 제국들이 식민지로부터 수집한 정보는 서구 과학계에 공유되며 서양의 과학이 되었다. 12-4)


189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에 고무 플랜테이션(Plantation)이 급속히 늘어났다. 플랜테이션이 들어선 장소는 이전에 선주민의 거주지, 농경지, 열대우림이었다. 집이며 논이며,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하던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손수 지은 집에 살며 가족이 먹을 쌀을 재배하고, 과일과 꿀을 채취하고,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현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무 플랜테이션의 노동자가 되었다. 자신의 땅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현지인들은 새롭게 임금노동에 의지했지만, 긴 노동시간, 낮은 임금, 위험한 작업환경으로 생활이 쉽지 않았다. 남녀 구분 없이 플랜테이션에서 일했고, 아이들도 동원되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에서 성행한 아동노동이 19세기 식민지에서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들로는 부족해 노동력을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 화교와 인도인 비율이 높은 원인 중 하나다. 15)


2. 의학과 제국주의: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약자들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이들은 주로 제3세계 사람들과 서구 사회 소수자들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구 결과들은 식민지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들었을까?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선진국 사람들이었고,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은 여전히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열대지방에서 주로 발생하는 20개 질병을 소외열대질환으로 통칭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말라리아는 2022년 세계적으로 2억5,000만 건 정도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61만 명이 사망했다. 전체 감염자의 94%, 사망자의 95%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말라리아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모잠비크에서 발생한다.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전체 사망자의 78%를 차지한다. 22-4)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이렇게 나빠진 데는 제국주의 시절 서양의 책임이 크고 그 가운데 당시 의학의 책임이 상당하다. 물론 제국주의 침략 이전이라고 이런 열대 질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 지배 과정에서 양상이 바뀌었다. 대규모로 농장을 만들고 삼림을 벌채하고 광산을 개발하면서, 말라리아모기 등 질병 매개체의 서식지가 확대되었다. 강제 노동과 대규모 이주 등으로 질병이 더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선주민들의 공동체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전통적 방식의 질병 억제 방법이 함께 무너졌다. 이렇게 식민지 경제체제에서 급격한 도시화는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식민지 자원을 대규모로 착취했다. 식민지 선주민들은 더 빈곤해지고 이에 따라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게다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대 의료 체계는 주로 본국에서 간 사람과 일부 식민지 엘리트를 위한 것이었지, 대다수 현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지인들은 생체 실험 대상으로만 취급되었다. 24)


3. 과학과 제국주의: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이 아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은 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제국주의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인종론은 유럽의 백인이 아시아인과 흑인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가 되었다. 더 진화한 이들이 덜 진화한 이들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인종론은 과학적 정당성이 하나도 없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보다 지역적 연관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물론 19세기에도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처럼 인종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가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19세기의 인종론은 이제 과학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하게 남아 있다. 가령 미국에서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체포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주장한다. “인종은 없다. 인종차별만 있을 뿐이다.” 28-9)


허버트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쓸 때의 의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진화’는 다윈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다윈의 진화란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연 현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진화는 곧 진보이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스펜서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대 정책,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했다. 군사적 사회에서 산업적 사회로의 진화가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회진화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 뒤 다른 식으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사회학자 벤저민 키드(Benjamin Kidd)는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했다.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월한 인종의 지배가 진보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유럽의 식민 지배를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31-2)


2부 현대 자본주의와 과학


4. 현대 자본주의와 거대과학: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거대과학


맨해튼 프로젝트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바로 거대과학(Big Science)의 출현이다. 거대과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우주 탐사도 입자물리학도 핵융합도 아닌 군사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다른 부문에 활용되면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스핀오프(spin-off)’ 기술이라 하는데, 군사용 연구를 정당화할 때 자주 인용된다. 스핀오프 기술이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흔히 ‘GPS’라 부르는 위성항법시스템이다. GPS는 위성항법시스템 중 미국국방부가 개발해 관리하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약칭이다. 그런데 현재 위성항법시스템은 미국의 GPS 하나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글로나스, 유럽연합의 갈릴레오, 중국의 베이더우 등 지구 전체를 담당하는 4개의 위성항법시스템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원래 군사용이기 때문이고 최초 개발국인 미국이 GPS 운영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37-8, 40, 42)


이미 개발된 군사 기술을 민간에 적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다. 스핀오프 기술을 예로 들면서 군사 기술 개발에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붓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스핀오프는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대부분의 군사 기술은 민간에 적용되기 어렵거나 적용 과정에서 막대한 추가 비용 및 시간이 소모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와 제품은 항상 가성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은 성능과 효과가 우선이고, 비싼 가격이나 다른 문제점은 쉽게 감내한다. 무엇보다 스핀오프 기술에 대한 강조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라는 윤리적 문제를 외면한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는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군사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기술 개발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한다. 이는 더 시급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군대를 위해 전용하는 행위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 기술이나 난치병 치료법 개발, 환경 보존 등에 투여할 예산을 빼앗는 셈이다. 42-3)


5 의학과 보편적 건강권: 사람이 특허보다 중요하다


국경없는의사회는 199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상금이 시작이었다. 마침, 아벤티스가 수면병 치료제 생산을 중단한 시점이었다. 기존 다국적 제약 회사를 통해서는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새로운 치료제 개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는 노벨상 상금을 종잣돈으로 비영리 연구개발 조직인 소외질환의약품개발이니셔티브(DNDi)를 결성했다. 목표는 소외열대질환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기존 치료제를 개선하는 것, 개발한 치료제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DNDi는 상업적 이익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비영리 모델을 채택했다. 그리고 현장의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에 주력하고 현지의 필요성을 기반으로 환자 중심의 연구를 주요 지침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DNDi는 수면병, 리슈마니아증, 샤가스병, 말라리아, 소아 에이즈 등 다양한 소외 질환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 58-9)


의약품 특허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시장 논리와 사적 이윤 추구에 종속된다는 점에 있다. 제약 회사들은 신약 개발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이를 회수하기 위해 특허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의 시작은 공공 연구 기관들의 기초연구다. 수십 년간의 공공 투자로 개발된 기술이 민간 기업의 특허권으로 독점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제약 회사들의 연구개발비는 항상 과대 계상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비용이나 임원 보상이 연구개발비보다 더 큰 경우도 많다. 근본적으로 의약품을 하나의 ‘상품’으로만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연구 성과는 공공재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제약회사가 가격을 맘대로 정할 수 없도록 규제해야 한다. 약값이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허권 행사를 제한하고 강제실시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의약품을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62)


6. 특허와 자본: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과학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은 과학 혁명의 완성이자 근대 물리학의 시작이지만, 그의 말처럼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를 두고 피 터지게 싸웠지만, 자신이 이룬 결과물을 이용해 다른 이가 실험하고 응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아니 관대했다기보다 너무 당연해서 시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과학자들이 품이 넓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과학은 돈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과학 연구를 토대로 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18세기만 하더라도 과학과 기술, 과학과 공학은 완전히 남남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방적기와 방직기 기술, 증기기관의 개선 등은 당시 과학과는 상관없이 오직 기술자들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만들어 냈다. 64)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것이 과학인지 기술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자 특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조 공정이나 화학 공정 관련 기술, 기계장치 등이 주된 특허 대상이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자 유전자조작 기술, 회로 설계, 생물학적 처리 방법,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 대상이 다양해졌다. 물질특허와 유전자특허, 그리고 천연물질특허로 특허 대상이 확대되었다. 현대 화학 산업에서 물질특허는 대단히 중요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감광제, 디스플레이용 발광 물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많은 제품이 물질특허의 보호 대상이다. 제약 산업의 경우, 세팔로스포린 같은 항생제나 발사르탄 같은 혈압 약은 물질특허 덕분에 강력한 시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제약 회사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이라고 해서, 원래의 제품에 대한 사소한 변형을 특허로 등록해 특허를 연장하고 있다. 65-6)


어떤 표준을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특허를 표준필수특허라 한다. 표준필수특허는 기술의 공공재적 성격을 무시한다. 특히 통신이나 인터넷과 같은 기반 기술들은 현대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고 표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소수 대기업이 표준필수특허를 독점하면서 이러한 필수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다음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글로벌 불평등을 심화한다. 선진국 대기업이 대부분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서 개발도상국은 계속 높은 특허 사용료를 내야 한다. 이는 기술 종속을 심화하고 국가 간 경제적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공공성을 해친다. 표준필수특허 대부분에는 공공기관의 기여가 핵심적이다. 지금의 특허 제도는 발명가도, 소비자도 보호하지 못한 채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제 특허 문제는 기업을 넘어 과학과 기술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69-71)


3부 민중의 과학


7.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대 이래로 계속되었다. 이런 낙관적 전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핵폭탄의 개발은 과학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을지를 보여 줬다. 이런 걱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믿음은 여전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만든 문제를 또다시 과학기술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커졌다. 예를 들어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많은 사람이 기술 발전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기술 중심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기후 위기는 과도한 생산과 소비,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구조가 근본 원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런 과학만능주의가 종종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기술적 해결책을 내세워 현재의 여론을 잠재우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회피하는 것이다. 과학만능주의는 현재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76-8)


기술결정론은 기술의 발전이 사회 변화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높아진 생산력은 생산양식을 바꾸는데, 이런 경제 영역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주장이다. 기술결정론이 특히 문제가 되는 분야는 노동이다. 산업혁명 시기를 보면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당시 방직공과 수공업자의 일자리는 기계의 도입으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물류 창고의 자동화를 두고 기업들은 ‘스마트 물류’나 ‘디지털 혁신’이라 부른다. 물류 자동화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물류량과 빨라지는 배송 속도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적 혁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과정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 도입 과정에서 효율성만을 강조할 뿐 노동자의 건강이나 작업장의 민주성 같은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사실이다. 79-80)


8 과학과 커먼즈: ‘과학의 로빈 후드’ 혹은 ‘과학의 해적 여왕’


데이터는 다른 정보들처럼 일종의 권력이다. ‘정보 비대칭’은 기회의 비대칭으로 이어지고, 이는 권력이 된다. 정부와 대기업은 데이터 개방을 이야기하지만, 공개되는 데이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은 더 노골적이다. 이들은 해당 사이트에서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추적하고 데이터화한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기업은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더 정교한 행동 조작과 이윤의 도구로 활용한다. 플랫폼 회사들이 제공하는 ‘약관’에 따르면, 이런 데이터를 기업들끼리 서로 유상으로 혹은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공개를 넘어 데이터를 통한 권력관계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시민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권력기관이나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89)


이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최소화의 원칙, 동의와 통제권 중시, 차등적 접근, 알고리즘 투명성을 주요하게 강조한다. 첫째, ‘데이터 최소화’에 대해 살펴보자. 데이터 최소화가 필요한 이유는 데이터를 많이 모을수록 해킹이나 유출 시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둘째, ‘동의와 통제권’ 중시는 데이터를 모으는 쪽, 그러니까 주로 정부 기관이나 기업과 제공하는 쪽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셋째, ‘차등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프라이버시와 공익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모든 데이터를 완전히 공개하면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며, 완전히 막으면 공익적 활용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의료나 범죄 통계 등 민감한 개인 정보를 다룰 때 주요하게 나타난다. 넷째, ‘알고리즘 투명성’ 문제를 살펴보자. 알고리즘 투명성이란 알고리즘이 특정 집단을 차별하지 않는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채용 알고리즘이 여성을 차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네 가지 원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91-2)


9 민중의 과학: 무엇을, 왜,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적정기술’이란 말을 들으면 대개 손 펌프나 정수기, 태양광 조리기 같은 간단한 기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적정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값싼 기술’을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은 아니었다.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중간기술’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은 서구의 거대 기술을 도입하느라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도입된 기술은 현지의 필요와 조건에 맞지 않았고, 소수 엘리트만 이용할 수 있었다. 슈마허는 이런 상황에서 현지의 자원과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으면서 전통적인 방식보다 생산성이 높은 ‘중간’ 정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마허는 기술의 수준 문제만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 기술이 자본 집중과 중앙 집중을 낳으며 이는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여겨,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기술을 제안했다. 103-4) 


빈곤이나 불평등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일부 활동가들은 적정기술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자 한다. 인도의 나브다냐(Navdanya) 운동은 유전자조작 종자에 맞서 토종 종자를 지키는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농민들의 자립적 기술 개발을 돕는다. 결국 우리가 다시 해야 할 질문은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이다. 적정기술 운동이 처음 제기했던 문제의식, 즉 기술이 소수가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는 값싼 기술을 보급하거나 첨단 장비를 갖춘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기술의 생산과 활용 과정 전반에 대한 민주화가 필요하다.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할 것인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 적정기술의 미래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105-6)


10 소수자와 과학: 인공지능의 편향된 공부법


한국에서 전동휠체어가 급속히 확산한 결정적인 계기는 2003년 국민건강보험 급여 품목이 되면서부터다. 이에 더해 정부 지원 정책이 확대되면서 보급 속도가 빨라졌다. 휠체어가 계단을 이동할 수 있도록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실제로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 있다. 그러면 이동 문제가 해결될까? 이런 기술의 개발은 한편으로는 환영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전동휠체어가 삶의 질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술로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기술의 도입보다 저상버스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모든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장애인 전용 콜택시를 늘리는 것이 장애인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의무다. 사회가 해야 할 몫을 장애인 개인에게 맡기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기술 개발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술 개발을 핑계로 지금 해야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12-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 발전의 방향이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에너지 소비는 늘어난다. 인공지능 서버를 돌리는 데 드는 전력량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메타버스나 가상현실 기술이 상용화되면 전력 소비는 폭증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 발전을 불가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기술 발전의 방향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배터리 효율을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처럼, 사회가 요구한다면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 소비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결단의 문제다. 11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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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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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원정을 떠나기 한참 전에,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가나Ghana, 엘미나Elmina에 자리한 유럽 전초기지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항해를 했다. 그 기지는 유럽인이 해외에 구축한 최초의 대규모 요새였다. 15세기 중엽 유럽의 서아프리카 원정은 그 지역 어딘가에 막대하게 비축되어 있는 금의 원천을 찾는 일에 집중되었다. 1471년 포르투갈인이 개척했고, 1482년 엘미나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확보한 황금무역의 규모는 막대하여, 이 수입으로 훗날 바스쿠 다 가마의 아시아 항로 개척 임무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 가마가 캘리컷까지 항해한 이래 거의 10년 동안, 아시아로의 항해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이 10년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이 엘미나에 도착한 뒤부터 그들이 인도에 상륙할 때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기에 대해서도 역사교육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에 유럽과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고 불리는 지역이 불가역적인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15-6)


1부 아프리카의 ‘발견’


"이베리아인의 탐험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형태로 꼽아온 디아스(1488년 희망봉에 도달한)의 행로를 계속 추적해보려는 노력이 사실 초기에는 없었다. 그 시대 포르투갈 왕 주왕 2세와 관련된 사료들을 보아도 디아스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강력한 단서를 포르투갈 왕실이 즐겨 사용한 별명에서 찾을 수 있다. 주앙 2세는 당대에 '아프리카인 주앙'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신하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풍부한 자원에 접근해 이를 가져왔기 때문인데,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서아프리카에서 부를 찾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관심을 둘 만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보다,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었다는 발상이 '대항해시대'를 주제로 한 책마다 일관되게 유지되어왔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현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렇게 아프리카를 그림에서 지우는 것이 서구가 근대로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방식의 가장 근저에 놓인 특징이다."(61-2)


"지금은 에스파냐령인 카나리아제도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가장 가까운 섬은 모로코의 대서양 해안 남단에서 불과 62마일(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카나리아제도는 세계사 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최근 시사문제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대서양에서 유럽인이 처음으로 식민화를 실행한 곳이다.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등이 해외 제국에 대한 경험을 쌓은 곳이고, 그 과정에서 사악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수없이 동원된 지역이다. 대서양에서 동산노예제chattel slavery, 집단학살, 폭력적인 교리 주입, 정착민 식민주의 등이 가장 먼저 선보여진 곳이 바로 카나리아제도이다." "카나리아제도 선주민의 저항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는 유럽인의 노력이 성과를 거둔 것은 1496년에 가서였다. 한편 그 무렵 포르투갈인은 이미 서아프리카의 문을 크게 열어젖힌 상황이었고, 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당시는 이미 디아스가 인도양을 항해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였다."(81-2)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부터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이 15세기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탐험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덕분에 1420년대에 여러 새로운 지역을 개척했다. 우선 1424년 마데이라제도, 그리고 곧이어 아조레스제도를 발견했다. 작은 규모의 섬들이지만 이를 통해 엔히크는 상당한 정치적 후원세력과 금전적 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 정복한 마데이라섬에 제노바 사업가들과 함께 대서양 세계에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제당소를 세우고 엔히크가 그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는 수익성이 높은 투자인 동시에 미래를 예고하는 사업이었다. 15세기 중엽, 마데이라는 매년 약 70톤의 설탕을 생산했다. 당시 설탕은 귀한 외국산 약재로 여겨졌다. 포르투갈인은 설탕을 대량생산하고자 유일하고 현실적인 방책으로 노예 노동을 대규모로 투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마데이라에 처음 노예로 들여온 이들은 카나리아인이었다."(90-1)


"1440년대에 노예제와 관련해 발생했던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칸인의 접촉은 모두 해변에서 펼친 기습공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약탈을 일삼는 무사세력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그 나라의 패기만만한 팽창 계획의 핵심에는, 전쟁에는 항상 보상이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해 있었다. 엔히크는 비용을 많이 들여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황금을 찾았지만, 금은 거의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황금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황금을 향한 탐험에 소모된 비용이 점점 쌓이면서,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소득원을 찾아야 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황금 때문에 포르투갈은 노예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노예는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산업인 설탕 산업의 팽창을 추동했다. 인종은 유럽인 사이에서 노예화의 적격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흑인은 유난히 비천하며 문명이 선사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간주되었다."(96-100)


"포르투갈 상인은 아프리카로 계속 금속제품과 직물을 수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획득한 상품을 북유럽인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 자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포르투갈인이 북유럽에 판매한 아프리카 제품에는 많이들 탐냈던 '천국의 곡물' 혹은 말라게타malagueta 후추라고 불리던 칠리 같은 열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이 이를 오늘날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지역 부근에서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그래서 이 지역을 '후추 해안Pepper Coast'이라고 부른다. 이 '천국의 곡물'을 구매하려고 북유럽인은 포르투갈인에게 새로 발견한 아프리카 사회들에서 수요가 높았던 옷감과 금속제품을 팔았다.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 거래지만, 이는 첫 번째 삼각무역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유명한 삼각무역이 정착한 것은 이보다 한참 뒤였다. 아프리카와 교역을 한 덕분에 남유럽은 북유럽과 경제적으로 보다 더 밀착될 수 있었다."(108)


"오늘날 가나가 위치한 지역의 황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작은 해전을 거친 후에, 포르투갈은 교회가 승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오랫동안 겨뤄왔던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마침내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0년 동안 포르투갈은 엘미나에서 매년 황금 8000온스(약 227킬로그램)를 가져갔는데, 그 양은 1494년까지 거의 세 배로 증가했고, 이 증가세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의 엄청난 황금을 새롭게 독점하면서, 에스파냐가 할 수 있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로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과 대서양의 극서쪽까지 새로운 탐사를 계속 밀어붙이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를 보면서, 에스파냐도 자기만의 귀금속 원천지를 찾아야 한다는 집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과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대서양을 건너려고 하는 이유가 황금이라고 설명했다."(116-7)


2부 중심축


"1481년, (특히 에스파냐에게) 엘미나에 대한 권리를 엿볼 기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주앙 2세는 가나 해안가에 성채 하나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주앙 2세는 엘미나 성채 건립의 지휘관으로 아잠부자를 앉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디아스였다. 귀족 디아스는 이로부터 7년 뒤,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했고, 그곳을 돌아 인도양까지 갔다. 이후 몇 년간, 훗날 '대항해시대'로 불리게 될 시대의 여러 거장이, 포르투갈이 사하라 이남 지역에 처음 세운 전초기지인 엘미나로 들어오거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경력을 갖게 된다. 이는 포르투갈이 시작한 지구적 차원의 사업에서 엘미나가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증명해준다. 이 거장 중에는 훗날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길을 훤하게 열었던 알부케르크와 멀리 동남아프리카에 자리한 주요 왕국인 콩고를 '발견'한 캉Diogo Cão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리스본에서 캉의 콩고 개척사업은 인도로 가는 길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시되었다."(124-5)


"15세기의 막바지에, 포르투갈은 황금 사업에 조바심을 냈고, 이에 따라 1482년 성채가 완공되자마자 교역은 빠르게 성장했다. 엘미나에 성채를 완공한 이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의 카라벨은 '황금해안'을 오가며 왕실 금고에 비축할 몫으로 매달 46~57킬로그램의 귀금속을 가져왔다. 포르투갈 왕국의 재무부를 이전에는 '기니의 집Casa da Guiné'이라고 했는데, 이는 검은 아프리카와의 교역이 재정에서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이름을 '미나의 집Casa da mina'으로 바꾸고, 리스본의 왕궁에 있는 건물로 이주했다. 이 왕국의 번영에서 엘미나의 황금이 차지하던 중요성을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15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엘미나와의 교역으로 포르투갈 왕실 수입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506년까지, 포르투갈 제국의 촉수가 이제는 브라질을 덮었고, 아시아로 깊숙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황금해안은 포르투갈로 매년 약 680킬로그램의 황금을 보냈다."(135-6)


"노예 플랜테이션으로의 혁신들은 상투메섬에서 결집되어 거의 형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같은 시기에 에스파냐가 진행했던, 훨씬 더 유명한 팽창정책보다 월등하게 큰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이는 폭력을 통해 관리된 흑인 노동력이 훨씬 더 지속적이고 생산적으로 경제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은과 브라질의 황금 호황이 막대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사그라들었고 절정기는 한 세기를 넘지 못했다. 반면에 흑인 노예를 동력으로 삼는 플랜테이션 농업은 쿠바를 비롯한 대서양 세계 여기저기에서 모방했다. 직간접적으로, 여기서 생겨난 노예 플랜테이션 모델의 정수가 근대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대규모 농업혁명, 즉 대규모 설탕 생산과 면화 생산의 근간이 되었다. 신세계에서 노예 플랜테이션 경험은 작동할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재배되던 인디고와 담배 경작으로도 빠르게 전파되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쌀과 커피와 카카오 경작으로도 이어졌다."(167-8)


"유럽의 신세계 제국주의 초기 단계에서 크리올은 꽤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들은 흑인세계와 백인세계를 오가며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웠고, 그들만의 대륙횡단 통신망과 형제 관계(포르투갈어로 코프라디아스cofradias)를 유지해갔다. 선박이나 항구 안팎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에 크리올이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근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서, 이 크리올 공동체 출신들이 신세계를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에 함께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발보아, 코르테스, 소토, 피사로의 역사적 정복행위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렇게 크리올은 상업적·사회적 기구들이 잘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가 되었다. 그들은 최고의 중개자였다. 노예제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 벌린은 식민지에 정착했던 크리올을 〈특허장 세대〉라고 했다. 이는 플랜테이션 노예제가 광범하게 수립되기 이전에 꼭 필요한 역할들을 했던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을 지칭한다."(190-1)


3부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


"우리가 제국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쟁을 상상할 때, 이를 영토의 지배권에 대한 것이며,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할수록 더 비중 있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은 다른 원리에 입각해 있었다. 땅의 넓이보다는 흑인 노동력 공급을 통제하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대략 한 세기 반 정도 뒤에 도래할 '면화 대량생산Big Cotton'의 시대 전까지는, 엘미나와 같은 작은 해안 전초기지나 포르투갈의 앙골라 식민지처럼 소규모의 고립된 지역이나 서인도제도의 섬 같은 곳을 장악했을 때 가장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 영토의 일부가 된 오하이오강 계곡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도 카리브해에서 두 강국 사이에 벌어졌던 경쟁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지배자들과 여론 모두 해운업과 무역에 국운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201-2)


"프랑스는 경쟁국 영국을 아메리카 본토에 묶어두어야 영국이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식민지들을 탐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윌리엄 피트가 1757년 집권했을 때, 그는 프랑스의 카리브해 사탕수수 재배 섬들을 공격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서인도제도에서 피트의 첫 목표는 마르티니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롱아일랜드의 4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설탕 생산을 위해 많은 노예를 수입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포함해 미국사를 통틀어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인 전체 숫자보다도 더 많은 아프리카인이 이 섬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섬에 배치된 방어용 대포의 위력에 눌려, 영국은 마르티니크 대신 부근의 과들루프를 공격했다. 그들의 반복된 행동들로 판단해보건대, 이 시대 유럽의 선진 강대국은 노예무역과 노예무역의 공급을 받는 플랜테이션 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203-4)


"17세기 당시에는 〈앙골라 없이는 노예도 없고, 노예 없이는 설탕도 없으며, 설탕 없이는 브라질도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처럼 앙골라인이 공급했던 노예 노동력 덕분에 브라질은 설탕 강국이 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포르투갈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앞서가는 중심지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를 선도하면서 포르투갈은 부국이 되었지만 인구 규모가 작아 인적 자원이 빈약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모델은 용병에 기초해 있었고, 이것이 발목을 잡았다." "네덜란드인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 포르투갈을 패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고, 훗날 브라질이 네덜란드에 이익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637년 네덜란드가 엘미나를 장악하고 곧이어 상투메섬과 루안다를 정복하자, 포르투갈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군주의 제국 자산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대서양 뒤편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218-20)


"네덜란드의 기획은 초기 에스파냐나 포르투갈 정복 사업의 임기응변적인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 이는 이질적이지만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환대서양의 식민지들을 묶어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세운다는 고도의 계획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기획에 따라, 네덜란드는 중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즉 엘미나와 루안다 양쪽에서 여러 주요 노예 공급지를 지배했다. 동시에 네덜란드는 가장 크고 생태적으로도 가장 유망한 설탕 생산지, 즉 브라질에서 네덜란드가 정복한 토지들을 지배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 본토에서 오늘날 매사추세츠부터 델라웨어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지들을 세워 지배하기도 했다. 당시 그 지역은 뉴네덜란드로,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영토들은 곧 초기 모피무역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플랜테이션 경제권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로 변모해갔다. 17세기 중엽부터 빠르게 성장하던 영국은 비슷한 종류의 시너지 효과들을 추구했고,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250-1)


"노동의 윤리적 기반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 우리가 인도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이 영국에서 막 생겨나고 있었지만, 흑인은 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유럽인이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소나 말처럼〉 극한까지 착취해도 문제 없이 용인되었다." "흑인을 잔인하고 타락한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이는 아주 초기부터 백인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이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잡다한 혼합 사회들에서 백인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방법이었다. 아메리카 사회들은 백인에게 유럽 태생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인류이며, 흑인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었다." "설탕 플랜테이션 세계는 들판 혹은 보일러 앞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예의 비율이 높다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업의 일반적인 과정 혹은 삶의 평범한 현실로 여겼다. 설탕 생산에 투입된 노예의 기대 수명은 보통 7년을 넘지 못했다."(265-7)


"바베이도스섬이 도입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무장을 한 〈몰이꾼들drivers〉이 원하는 속도대로 노동자를 몰아붙이며 일하게 만드는 집단노동방식gang labor이다. 이 시스템 역시 리처드 드랙스가 했던 초기 실험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드랙스는 2주마다 관리자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이 보고서를 근거로 드랙스는 노예와 감독관 모두에게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보상을 주기도 하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는 징벌을 내렸다. 드랙스의 플랜테이션에서 처음 선보인, 기록해야 한다는 집착 덕분에 소유주는 서열이 있고 번호가 매겨진 여러 작업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드렉스의 체제는 산업화된 스타일의 노동 분업과 조직화, 그리고 기록 보존을 구체적으로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영국에서 결합되기까지는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 전문화를 강조하고 시간을 크게 고려하는 작업 조정과 같은 경영 기술들은 근대의 조립라인을 예언하는 사례였다."(270-2)


"1642~1649년 영국 내전과 1688~1689년 명예혁명에서 중요한 특징은 노예제를 통해 재산을 일군 새로운 사업가 엘리트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건 모두 영국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왕정의 권력을 제한하여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 싸움이었다. 이에 대해 애스모글루, 존슨, 로빈슨은 그들의 논문 〈유럽의 부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서양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에서 정치권력의 균형을 바꾸어놓았다. 대서양 무역이 왕실과 그 주변세력 밖에 자리한 교역 관계자들, 즉 해외무역을 하는 다양한 대상인들, 노예무역상, 다양한 식민지 대농장주 등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경로를 통해, 대서양 무역은 왕실 권려게 맞서 상인을 보호하는 정치제도가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사례 속에서, 아프리카인의 땀과 생산성의 부산물로 유럽에 주어진 중요한 변화는 시민 사회와 근대적 공론장의 등장이다."(291-2)


4부 비단뱀신의 저주


"1483년 포르투갈 탐험가 캉이 오면서 유럽인과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콩고 왕국은 이미 정교하게 발전된 국가였다. 또 다른 강국 베냉은 유럽과의 접촉 이전에 다각화된 경제를 갖춘 나라로, 유럽 상품이나 유럽 종교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베냉은 새로 온 유럽인과 노예무역을 시작하자마자 금방 중단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이유로 콩고 지배자에게 기독교는 즉각적으로 강력한 매력을 발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콩고에 퍼져 있던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운명적인 우연의 일치로, 콩고의 우주관에는 바다 건너 어디엔가 더 높은 존재가 거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새하얀 생명체들이 창조되어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1491년 5월 3일은 콜럼버스가 동인도제도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에서 서쪽으로 첫 항해를 나가기 15개월 전이다. 그런데 이날, 콩고의 왕 '은징가 아 은쿠아'(통치명 주앙 1세를 자처했다)가 자기 궁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362-4, 369)


"15세기 말 콩고와 포르투갈이 쌍무관계를 수립한 이래, 콩고는 포르투갈에 공물을 제공하지 않았고, 포르투갈도 공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앙 1세가,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에 다양한 종류의 원조를 요청하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들은 계약을 통해서 진행되었고 꼼꼼하게 보상을 받았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나라도 유럽인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체도 복속되지는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발견한 이후 약 150년 동안, 콩고 입장에서 보면 포르투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구가했다. 이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료 사이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두 문명이 만났던 당시 콩고 왕국과 제도들에 내재해 있던 어떤 강고함 때문이기도 했고, 콩고의 국정 운영 능력과 아폰수 1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지략과 지성 덕분이기도 했다."(379-80)


"1622년 말, 포르투갈은 임방갈라와 동맹하여 콩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 의회가 서인도회사를 세우고 1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1625년 콩고 왕 페드로 1세와 소요(해안 지대의 강력한 준자치구역)의 마누엘 백작은 각각 네덜란드 의회에 편지를 보내,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인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공식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1620년대까지 브라질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들로 이송된 노예의 절반 이상이 앙골라에서 출발했다. 중앙아프리카 서부에서 오는 인간 파이프라인을 폐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서인도회사가 이베이라반도 두 강국의 대서양 복합단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콩고의 동맹제안은 아프리카에서도 유럽의 정치 상황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던 곳에서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분명한 것은 콩고의 주도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이 시기 대서양에서 네덜란드의 구상은 '위대한 기획'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397-400)


# 임방갈라Imbangala : 초기 노예무역이나 가뭄으로 인한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병부대


"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처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증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증가로 더 크고 더 강력한 국가가 되고, 더 큰 군대를 조직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인구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아프리카는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출된 노동력은 기획에 따라 절대 다수가 생산성이 최고조에 올라 있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계속 감소세였을 것이다."(418-9)


"정치학자 넌Nunn과 그의 동료 완치콘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노예무역의 강도와 지속기간과 사회적 신뢰의 지속적인 하락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은 노예무역을 경험한 종족 집단들의 문화적 규범을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신뢰수준이 낮은 지역에서 개발된 제도는 더 취약했고, [그들의] 더 취약한 제도는 더 나쁜 행동과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신뢰로 이어졌다. 이런 사회는 비협조적인 행동, 불신, 비효율적인 제도가 평형을 이룬 가운데 갇힌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무역의 압력하에서 개인은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올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지역에서는 타인에 대한 불신의 규범이 신뢰의 규범보다 더 유익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424-6)


5부 검은 대서양과 새롭게 형성된 세계


"전통적인 미국사 교육에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지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프로젝트가 호소력을 가졌던 중요한 매력 중 하나는 미시시피강 계곡과 강안을 따라 세워지고 있던 면화 플랜테이션을 버지니아가 뻗어나갈 수 있는 출구로 이용하여 노예봉기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1820년에서 1860년 사이에 100만 명의 흑인이 예상대로 '강을 따라 팔려갔다.' 이런 이동은 제퍼슨의 구상을 실현하고, 면화 농장주들의 급증하는 노동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한때 영국 직물 산업에 중요한 면화 공급지였던 아이티를 상실한 시기와 우연히 일치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제퍼슨은 앞날을 내다보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생도맹그St. Domingo에서 시작된 이 역사의 첫 장은 ··· 다른 모든 섬에서 모든 백인이 어떻게 쫓겨나게 될지를 자세히 보여줄 것이다.〉 이는 노예봉기에 성공한 후 1804년에 아이티로 이름을 바꾼 플랜테이션 식민지를 언급한 것이었다."(434-5)


"아이티 혁명 이전 10년 동안 프랑스 선박은 22만 4000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가 노예로 팔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생도맹그로 갔다. 1780년대가 되면, 생도맹그가 프랑스 무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프랑스식민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부를 생산했다." "1791년, 나폴레옹이 아이티 노예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라살 후작을 파견했을 때, 그는 그의 군대에 프랑스 혁명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문구인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면 죽음을〉이라는 기치를 〈국가, 법, 왕〉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문구에 담긴 체제전복적 성격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 혁명의 시대에 아마도 가장 일관되게 관철된 규칙이 있다면, 흑인 사이에서 인권과 자유에 관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했던 예방조치들이 모두 소용없었다는 점이다. 여러 신세계 노예 사회에서 속박되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 돌던 '모두의 바람common wind'의 침투력은 너무도 강해서 어떤 검열체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441-2)


"1720년대에 생도맹그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도약한 직후, 이 지역 백인 사이에서 프랑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대표 없이 부과된 세금'에 대해 불만을 품은 대농장주들의 반발이 거세졌던 것이다. 이런 대농장주의 반발은 훗날 발생한 미국 혁명의 중심 주제를 선명하게 예견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농장주는 프랑스 중상주의가 가하는 통제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국가는 노예 공급에 대해 독점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본국 정부는 식민지 정착자가 상품을 본국에만 판매할 수 있게 했고, 판매 조건은 본국만이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대농장주의 분노는 1780년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프랑스가 노예에 대한 착취를 규제하는 일련의 규정들, 즉 흑인법Code Noir을 제정하는 등 온건한 개혁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재산 소유자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백인이 지배하는 노예제 사회들에서 거의 보편적인 주제가 되었다."(464-5)


"노예들의 충성을 얻어 질서를 회복하기를 희망했던 혁명 프랑스는 불안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의 자유로운 유색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는 본국에서 이미 노예제도의 미래를 놓고 논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생도맹그의 백인은 두 가지 발전 모두에 대해 격분했다. 한 대농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예제가 없다면, 생도맹그에는 문명도 없다. 우리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50만 명의 야만인 노예를 찾아 구매한 것이 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식민지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자유인으로서 그들의 존재는 우리 유럽 형제들의 존재와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자유인이 된 흑인과 유럽인의 양립을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때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정확히 1년 안에 그 양립이 실현되었다. 이렇듯 아이티 혁명은 유럽이 대서양 전역에 수립할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세계적 차원에서는 반식민주의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472-4)


"1802년 3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제1집정관이라는 혁명적 칭호를 채택한 지 거의 2년 반이 지난 후, 영국은 아미앵에서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럽에서의 전쟁과 영국과의 해전에서 빠져나오면서, 나폴레옹은 우선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재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02년 5월, 국민의회는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 프랑스령 섬들에서 노예제를 복원하는 것을 놓고 투표하여, 211 대 60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이 와중에 영국은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렇게 노예무역 금지를 주도하면서 영국은 도덕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에서 영국이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영제국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60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여전히 노예 노동을 통해 수익을 얻으면서 이런 과업을 달성했다."(477, 482-4)


"역사학자 스벤 베커트의 비교에 따르면, 면화가 19세기 미국에 갖는 의미는 석유가 20세기 사우디아라비아에 갖는 의미와 같았다. 플랜테이션 노예의 식량을 제한했던 것은 분명 투자 수익의 문제였지만, 심리적 목적도 확실히 있었다. 이런 한계설정은 사회적 지배와 비인간화라는 고의적 전략의 일부였고, 한 인종을 비하하고 다른 인종을 높여서 인종 간의 차등을 강화하는 방법을 계속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동산노예제는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속성에 기초한 서열〉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속성에 기초한 서열〉이란 출신이나 특성의 차이에 따라 인생에서 다른 지위를 부여받도록 오랫동안 작동해온 시스템이다. 물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백인성 자체가 인종적 정체성으로 발전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동산노예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백인성은 근대성이 낳은 영향력 있는 부산물 중 하나이다. 모리슨에 따르면, 〈노예제만큼 [백인을 위한] 자유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없다.〉"(507-8)


"사실, 인디언 추방에서부터 흑인 노예를 동남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했던 것, 그리고 미시시피강 계곡과 인근 지역의 목화밭에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설립하는 것까지 이 모두를 재정적으로 열심히 지원했던 것은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여러 북동부 금융가들이었다. 이에 따라 흑인의 몸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를 기생적인 남부만의 문제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노예제는 대서양 전역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당시 미국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인 것은 분명했지만 예정된 강국은 아니었고, 나중에 미국이 이루게 된 경제적 동력을 발산해내는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후에, 즉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미국은 무엇보다도 목화라는 한 가지 작물에 기초한 플랜테이션 노예제에 힘입어 빠르게 산업화된 국가이자 세계 강국으로 발을 내디딘다. 사실, 한 역사가가 쓴 것처럼, 〈면화 무역은 미국 경제가 갖고 있던 유일한 '주요 팽창력'이었다.〉"(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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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머리말


1. 실크로드의 탄생 


"에우리피데스가 쓴 《바카이Bakhai》의 첫 구절에서 디오니소스는 〈나는 엄청나게 부유한 동방〉에서 〈그리스로 왔다〉고 말한다. 그곳은 페르시아의 평원이 햇빛에 목욕하는 곳이고, 박트리아의 마을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시아와 동방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전에 디오니소스가 성스러운 신비에 싸여 〈뛰어 돌아다닌〉 땅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런 작품을 탐독한 학생이었다.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36년에 암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이 젊은 장군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어느 쪽을 향할지는 명백했다. 그는 유럽 쪽은 한순간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도시도 없고, 문화도 없고, 위신도 없고, 보상도 없었다. 다른 모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문화와 사상과 기회는 (위협도) 동쪽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고대 세계의 최강국으로 향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바로 페르시아였다."(26-7)


"스텝 지역을 서로 맞물리고 서로 연결된 세계와 이어주는 일은 중국의 야망이 커지면서 가속화되었다. 한漢 왕조(기원전 202~기원후 220) 시대에 팽창의 물결은 국경을 더욱 멀리 밀어내 마침내 당시 서역西域이라 부르던 지방에까지 도달했다." "가장 중요하게 거래된 비단은 사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통화로도 쓰였다." "중국인들은 또 외국에서 오는 상인을 통제하기 위해 공식적인 체제를 마련했다. 둔황에서 멀지 않은 솬찬懸泉 역참 유적지에서 출토된 3만 5000점의 문서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쪽과 나무쪽에 쓰인 이 문서들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방문자들이 반드시 지정된 경로를 이용해야 했고, 나중에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점호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2000년 전에도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기회를 제공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기술 발전을 촉진한 일이었다."(34, 38-9)


"역설적이지만 페르시아가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추동한 것은 바로 로마의 성장과 야망이었다. 예컨대 페르시아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장거리 교역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페르시아의 정치적·경제적 무게중심을 북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전에는 스텝 지대에 가까운 쪽이 중요시되었다. 유목 민족들과 가축이나 말을 거래하고, 스텝 지대의 무시무시한 사람들로부터 내키지 않는 관심이나 요구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외교적 접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페르시아 정복 노력이 가져온 가장 큰 효과는 페르시아의 정치개혁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220년 무렵에 등장한 새 왕조 사산제국은 과감한 비전을 내놓았다. 사실상 독립적이었던 지방 총독의 권한을 박탈해서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잇단 행정개혁으로 국가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부상하면서 로마는 전형적인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었다."(53-5)


2. 신앙의 길 


"고대에 태평양,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 지중해를 연결하는 대동맥을 따라 흘러간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사상도 흘렀다. 가장 강력한 사상은 신과 관련된 사상이었다." "실크로드의 지적·신학적 공간은 북적거렸다. 여러 신과 종교, 성직자들과 각 지역의 지배자들이 서로 경쟁했다. 판은 컸다. 당시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초자연적인 일까지 모든 현상을 알고 싶어하던 때였고, 신앙이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해법을 내놓던 때였다.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투쟁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전쟁터 또는 협상 테이블에서 승리하는 것은 곧 문화적 우월성과 신의 축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 등식은 간단하지만 강력했다. 제대로 된 신(또는 신들)이 보호하고 아끼는 사회는 번영하고, 거짓된 우상과 공허한 약속에 매달리는 사회는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성대한 예배 장소 같은 훌륭한 영적 기반시설에 투자할 강력한 동기를 느꼈다. 그것은 내부 통제의 방편을 제공했다."(63-5)


"페르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전통으로 내세워지고 정치적·군사적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가치관과 믿음이 강요되었다. 이와 다른 가치관을 주장하는 사람은 추적을 당하고 대부분 살해당했다. 카리스마 있는 3세기의 선지자 마니는 동방과 서방에서 기원한 여러 사상을 혼합하여 한때 샤푸르 1세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니의 가르침은 이제 파괴적이고 해롭고 위험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무자비하게 추적을 당했다. 가혹한 처우를 받은 것으로 지목되고 카르티르가 배척 대상으로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나스라예와 크리스티오네가 있다. 각각 '나사렛인'과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가 3세기 페르시아의 의식과 정체성에 깊이 파고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 전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기독교는 교역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조로아스터 사상은 인상적인 급진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73-4)


3. 기독교도의 동방으로 가는 길 


"로마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도들의 곤경을 완화시켰다. 스텝 지역 종족들에 대항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직면하자 로마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로마가 크게 쇠약해지자 기독교는 더 이상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100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기독교 주민들을 해방시키려고 준비할 때만 해도 로마는 명백한 위협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410년에 페르시아의 샤 야즈데게르드 1세가 후원한 첫 회의와 이후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페르시아에서 기독교 교회의 지위를 공인하고 그 신앙을 합법화하게 된다. 서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그리고 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와 시리아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간의 의례와 교리의 차이는 계속해서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96-7)


"서방 교회가 다른 견해를 뿌리 뽑는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동방 교회는 야심차고 광범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심지어 스텝 지대의 유목민들에게도 전해졌다. 6세기 중반에는 아시아 깊숙한 지역에 대주교 관구가 있었다. 바스라, 모술, 티크리트에서는 기독교도 주민이 급증했다. 메르브, 군데샤푸르 같은 도시들과 심지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에도 영국 캔터베리보다 훨씬 먼저 대주교가 있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나 스칸디나비아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수백 년 전의 주요 기독교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 기독교가 소개되기 1000년 전에 흥성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중심지였다. 어쨌든 바그다드는 아테네보다 예루살렘이 더 가까웠고, 테헤란은 로마보다 성지가 더 가까웠으며, 사마르칸트도 파리나 런던보다 성지와 더 가까웠다. 기독교가 동방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103-4)


4. 혁명으로 가는 길 


"사태의 전개 과정을 확실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일신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무함마드 혼자만은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또한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전쟁으로 경기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황에서 무함마드가 선교를 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 및 그 결과로 나타난 군국화는 히자즈에서 출발하거나 그곳을 통과하는 교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부 지출이 군대로 빨려 들어가고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 경제에 지속적인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상당히 감소했을 것이다. 전쟁이 전통적인 시장(특히 레반트와 페르시아의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남부 아라비아의 경제는 더욱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동란이 더 멀리까지 파장을 미치고 일상생활에 혼란을 주자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는 무함마드의 경고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132-3)


"이 새로운 정체성의 한가운데에는 통일에 관한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남부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로마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이곳의 경쟁관계를 조종하여 서로 싸우도록 부추겼다. 후원과 재정 지원은 의존적인 예속 지배층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치열한 전쟁은 이런 체제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앙이 현지 언어로 설교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랍인은 이제 독자적인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이 종교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설계되었다. 유목민이든 도시인이든, 어느 부족 성원이든, 그리고 민족적·언어적 배경에 관계없이,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계시를 기록한 책, 즉 코란에 나오는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차용어는 차이보다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던 다多언어 환경을 시사한다. 통합은 핵심 교리였고, 이슬람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다."(134-5)


5. 화합으로 가는 길 


"코란에서 무함마드 당대의 사건을 이야기한 얼마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동로마인들을 좋게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이슬람교 팽창의 최초 국면에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초기 무슬림들이 신봉했던 금욕주의 또한 그리스-로마 세계와 문화적으로 친숙한 판단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동의와 감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은 아흘 아키타브(성서의 사람들)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정책으로 보완되었다. 아흘 알키타브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코란은 초기 무슬림들이 자기네를 이들 두 종교 신자들의 라이벌이 아니라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로 보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코란은 인류가 한때는 하나의 '움마'였으며, 이후 차이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고 탄식조로 몇 차례 이야기하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사이의 유사성은 코란과 하디스에서 강조되고, 차이는 언제나 하찮게 취급되고 있다."(150-1)


# 하디스 :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은 것


"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치열한 대결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이례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고대 말기의 두 강대국이 위력을 과시하며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양국을 모두 대체하여 지배하는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 먼 구석 출신의 일파일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함마드에게 고무된 사람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관개기술과 새로운 농작물을 들여와서 수천 킬로미터를 뻗어나가는 그야말로 농업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이슬람의 정복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경제 대국을 만들어냈다. 자신감과 관대함, 진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이를 추동했다." "이 세계는 질서가 뿌리 뿌리 내린 곳, 상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 지식인들이 존중받는 곳,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곳이 되었다. 메카 부근의 한 동굴에서 신통찮게 출발했지만, 전 세계에 걸친 일종의 유토피아를 탄생시킨 것이다."(174-5)


6. 모피의 길 


"이슬람 제국의 등장은 새로운 교통로와 새로운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북쪽의 스텝과 삼림 지대로 통하는 '모피의 길'이 만들어진 것은 7~8세기의 대규모 정복 이후 수백 년 동안 가용 재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동물과 모피와 기타 산물을 시장으로 쉽게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부유한 유목 종족들은 당연히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정착민 세계와 활발하고 믿을 만한 거래 상대였다. 마찬가지로 스텝 지대에서 가까운 도시들은 부유해졌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이 시장에 가까운 곳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시장 접근성에 큰돈이 걸려 있기 때문에 스텝 지대의 종족 집단들은 서로 경쟁했다. 가장 좋은 목초지와 수자원을 놓고 벌이던 경쟁이 도시와 가장 좋은 교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이는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폭력에 의해 분열되거나, 종족 내부와 종족들이 통합하는 것이다. 싸울 것이냐 협력할 것이냐,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186-7)


"스칸디나비아의 상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이킹의 시대에 가장 용감하고 가장 억센 남자들은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과 남쪽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고향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새로운 나라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더구나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북아메리카에서처럼 미미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게 된다. 발트해에서 카스피해 및 흑해와 연결되는 거대한 수계水系를 장악한 상인, 여행자, 침략자 들의 이름을 딴 나라다. 이 사람들은 루시Rus' 또는 로스rhos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빨간 머리칼 때문이거나, 좀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들의 노 젓는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조상들이었다." "그들은 밀랍, 호박, 꿀 등의 교역에 종사했다. 가장 벌이가 좋은 것은 비단 장사였다. 비단은 북쪽으로, 러시아의 수계를 거슬러 올라가 스칸디나비아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막대한 양의 돈의 원천이었다."(196-9)


7. 노예의 길 


"9세기에 유럽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수입품들의 대금으로 지불된 것은 노예를 팔아 번 돈이었다. 인기 있는 사치품이나 의료 필수품으로 기록에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양념류와 마약은 대규모 인신매매에서 번 돈으로 치렀다. 그리고 노예 장사로 이득을 본 것은 바이킹 루시만이 아니었다. 현재 프랑스 동북부 베르됭의 상인들은 내시들을 팔아 많은 이득을 올렸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이 주요 구매자였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유대인 상인들 역시 내시는 물론 〈어린 소녀와 소년들〉의 매매에 깊숙이 관여했다." "노예 교역은 벌이가 좋았다. 그것이 유럽인 이외의 노예들도 동방으로 끌어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무슬림 사업가들도 뛰어들었다. 그들은 동부 이란을 벗어나서 슬라브인들의 땅을 습격했다. 그런 포로들은 거세를 했고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시기의 한 아랍 작가는 슬라브인 쌍둥이를 잡아 그중 한 명을 거세시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형제보다 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썼다."(209-10)


"셀주크인들이 노예 병사에서 막후 실력자로 갑자기 떠오른 것은 1055년에 칼리프의 초청으로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면서부터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조 이름의 연원이 된 창시자 셀주크의 아들들 이름이 셀주크인은 본래 기독교였거나 아니면 심지어 유대교도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의 이름은 각기 미카일(미카엘), 이스라일(이스라엘), 무사(모세), 유누스(요나)다. 그들의 성공이 좀 더 천천히 이루어졌다면 세계는 아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1071년 현재 터키의 동부인 말라즈기르트에서 재앙을 만났다. 그곳에서 습격을 받고 굴욕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는 오늘날에도 터키 국가 탄생의 순간으로 기념되고 있는데, 제국 군대가 포위되어 궤멸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셀주크의 지배자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황제를 땅바닥에 눕게 하고 그의 목을 발로 밟았다."(226-7)


8. 천국으로 가는 길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이 1차 십자군 기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에는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울한 예측이 나돌았다. 이것이 이제 낙관론으로, 떠들썩한 자신감과 야망으로 바뀌었다. 5년 사이에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환영으로 변했다. 우트르메르Outremer('해외'라는 의미)에 새로운 기독교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예루살렘, 트리폴리, 티로스(수르), 안티오키아는 모두 유럽인들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봉건 서유럽에서 들여온 관습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그것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재산권에서부터 세금 징수와 예루살렘 왕의 권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레반트는 서유럽처럼 움직이도록 개편되었다." "바그다드와 카이로에서는 (방관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편이 라이벌인 시아파나 수니파가 통제권을 갖는 것보다 낫다는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으리라."(233-6)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예루살렘 점령에서 상업적 가능성을 재빨리 발견했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는 심지어 십자군이 성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선단을 바다로 내보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게 했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십자군은 보급이 절실했고, 근거지인 유럽과 연결망을 갖추고자 필사적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의 함대들은 예루살렘의 새 지배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입지는 십자군이 성공적인 포위전에 나서기 위해 하이파, 야파, 아크레, 트리폴리 등의 해안과 항구를 확보할 필요가 커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협상이 타결되어 막대한 이익을 올릴 가능성이 생겼다." "동부 지중해 지역의 교역 패권을 둘러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이전투구는 광포하고 무자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베네치아가 확실한 승자로 떠올랐다. 이는 상당 부분 아드리아해에 면한 지리적 위치 덕분이었다. 동쪽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것이 피사나 제노바로 가는 것보다 항해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240-3)


9. 지옥으로 가는 길 


"그들의 평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지만, 몽골인들이 13세기 초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그 너머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그들이 항상 압제자로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호라즘은 지역 주민들에게 1년치 세금을 선납하도록 명령했다. 임박한 몽골의 공격에 대비해서 사마르칸트 주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고 궁수 부대의 급료를 지불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에게 그런 부담을 주고서는 계속 호의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와 대조적으로 몽골인들은 자기네가 점령한 일부 도시에서 기반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사마르칸트를 찾은 한 중국인 도사道士는 중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그곳에 와 있고 방치되었던 들과 과수원 운영을 돕기 위해 주변 지역과 더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려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만적인 파괴자라는 몽골인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이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파괴와 약탈을 강조해 오도하는 후대 역사서들의 유산을 대변하는 것이었다."(273-4)


10. 죽음과 파괴의 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호황을 누린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고객의 욕구, 그리고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 그곳으로 물건을 사러 온 상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보여준 재능과 선견지명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흥성한 배후에는 몽골인들이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부린 세제상의 재주와 규제가 있었다. 여러 자료들은 흑해 항구들을 통과하는 수출품에 대한 세금이 전체 상품 가치의 3~5퍼센트를 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하는 상품들에서 뜯어내는 통행세 및 부담금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것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세금 부담은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 심지어 30퍼센트에 이르기도 했다." "세심한 가격 설정과 세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은 몽골제국 관료 집단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폭력과 마구잡이 파괴의 이미지에 가려진 점이다. 사실 몽골의 성공은 무분별한 만행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타협하고 협력한 덕분에 이룬 것이다."(299-300)


"페스트로 인해 촉발된 변화는 북서 유럽의 장기적인 번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럽의 각 지역 사이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까지는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체제의 유연성과 경쟁을 긍정하는 태도,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필요하다는 북쪽 사람들의 자각 등이 근대 초 유럽 경제의 변혁의 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연구들을 통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18세기 산업혁명의 뿌리는 페스트 이후 세계의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포부가 커지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다." "15세기의 프라 안젤리코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나 그 이후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이 유럽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덕분이었다. 하나는 아시아와의 교류로 다양한 색을 내는 물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 많아 예술가들을 후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4-5)


11. 황금의 길 


"동부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을 내려가는 탐험으로 카나리아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 같은 여러 도서군島嶼群이 발견되었다. 이 섬들은 추가적인 발견의 가능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돈이 벌리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기후가 좋고 땅이 비옥해서 설탕을 만드는 작물이 자라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설탕은 곧 잉글랜드의 브리스톨이나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멀리 흑해 지역에까지 수출되었다. 콜럼버스가 출항할 무렵에 마데이라에서만 매년 1500톤가량의 설탕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을 열고 서유럽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군사력이나 외교술도, 교황의 면허도, 영토 점령을 둘러싼 왕실 간의 경쟁도 아니었다. 진정한 약진은 모험기업의 배 선장들이 식용유와 가죽을 거래하고 금을 살 기회를 찾는 것보다 더 쉽고 나은 기회를 깨달으면서 이루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사실로 입증되었듯이, 가장 큰 돈벌이는 인신매매였다."(343-6)


"한편 돈이 끝없이 대서양을 건너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새 제국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에서도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야망도 재조정되었다. 1519년, 카를로스는 재정적 영향력을 동원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하기로 단단히 결심한 지배자에게 패하고 압도당하고 밀려났음을 깨달았다."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서 급속하게 팽창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부와 힘과 기회가 변함에 따라 에스파냐는 지중해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지방 변두리에서 세계의 강국으로 변모했다. 한 에스파냐 역사가에게 이것은 〈천지창조 이래 가장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예수의 강생降生과 창조주 자신의 죽음을 제외하고〉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많은 금과 은이 매장된 페루 지방〉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다."(358-60)


"새로운 시대, 진정한 '황금시대'의 도래는 로마의 거리에서 통곡 하게 하고 가슴 치게 했던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잊게 해주었다. 이제 할 일은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옛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종말은 입양된 새 상속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는 아테네나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멸망하는 날까지 대체로 주변부였다. 그러다가 예술가, 작가, 건축가들이 고대로부터 주제와 발상과 문장을 빌려다가 이야기를 꾸미고 과거에서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그럴싸하게 만들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실처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표준이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시기를 르네상스라 불렀지만 이는 결코 재탄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네상스Naissance('탄생')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364)


12. 은의 길 


"서아시아에서 격변의 시기가 지나고 1517년에 오스만이 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한 뒤 지중해 동쪽의 지배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유럽을 위협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오스만은 1538년에 인도 서부 디우에 있는 포르투갈 항구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무렵에는 향신료 교역에서 얻는 이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에서 발을 빼서 다른 아시아 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품목이 무명과 비단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말 무렵에 뚜렷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유럽으로 선적되는 직물의 양이 계속 늘고 있었다. 당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이 향신료 교역에 관여하는 포르투갈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의 결과이자 국왕의 졸렬한 결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은 수입품에 지나치게 높은 세금을 물렸으며, 유럽에 비효율적인 유통망을 만들고 있었다. 오스만의 경쟁력은 포르투갈을 (그리고 주변부를) 극심하게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381-3)


"유럽과 서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려온 발견 소식들과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열린 해로로 인해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가장 휘황찬란한 곳은 인도였다. 1494년 테무르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페르가나 분지의 땅을 물려받았고, 이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남쪽으로 이동한 시점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새 영토는 오래지 않아 강대한 제국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교역로가 열리고 유럽이 적극적으로 구매에 나서면서 갑작스럽게 경화硬貨가 인도로 밀려들어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말을 사는 데 썼다." "말 시장에 접근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관문 도시들은 호황을 누렸다.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은 델리였다. 그곳은 힌두쿠시 산맥에 가까운 위치 덕분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도시의 상업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지배자의 지위도 높아졌다. 곧 이 지역에 직물산업이 번성하면서 이곳 물건들은 아시아 전역과 그 너머에까지 명성을 얻었다."(387-90)


"1571년 에스파냐인들의 마닐라 식민지 건설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꾸었다. 우선 그들은 처음 대서양을 건넜을 때에 비해 현지 주민들에게 피해를 덜 주는 방식의 식민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 정착지는 본래 향신료를 구매하는 기지로 건설되었지만, 곧 거대 도시로 성장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이제 상품은 먼저 유럽을 거쳐가지 않고 태평양을 넘어 운송되었으며, 그 상품 대금으로 치를 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닐라를 통하는 경로가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만제국의 경기가 위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국내의 재정 압박과 합스부르크 및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원정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부은 탓도 있었지만, 수천 킬로미터 밖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상품 교역을 위한 새로운 교차로가 탄생한 것도 오스만제국의 수입 감소에 한몫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의 송금이 줄기 시작하면서 에스파냐의 일부 지역에서도 경고등이 켜졌다."(394-5)


13. 북유럽으로 가는 길 


"잉글랜드는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가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새 교역로에 도전하면서 오스만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1571년 코린토스 만에 있는 레판토 앞바다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신성동맹'이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자 유럽 전역에서 환호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시, 음악, 미술과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조용했다." "두 나라 간의 공식 무역 협정에서 오스만 제국에 있는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후한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스만과 무슬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잉글랜드의 주류 문화 속으로 확산되었다. 《오셀로》에서는 베네치아군에 복무하는 '무어인'인 (따라서 아마도 무슬림이었을) 주인공의 비극적인 고결성이 그의 주변에 있는 기독교도들의 이중잣대, 위선, 속임수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영국 문학에서 공통적인 문화적 준거로서 페르시아가 등장했다."(404-7)


"잉글랜드의 위선적인 태도는 16세기 초의 거대한 변화가 만들어낸 엄청난 기회를 이용하는 데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종교 분쟁과 운 나쁜 타이밍으로 인해 이 나라는 세계 강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로부터, 그리고 동방에서 홍해와 육상 교통로를 통해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교역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이득을 얻기에는 불리한 위치에 서고 말았다. 아무리 에스파냐를 비난하더라도 잉글랜드가 쓰레기 더미나 뒤져 약간의 부스러기만 챙겨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잉글랜드는 〈이 시기에 용감한 젊은이들이 우글우글〉했으며,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으로 경제 침체에 빠져 있었다고 리처드 해클루트는 썼다.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이 왕국〉을 세계 〈모든 바다의 지배자〉로 만들 수 있는 해군을 창설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어쨌든 꿈을 꾸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409-10)


"아메리카에서 돈이 흘러들어오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유럽 전역에서 이른바 물가혁명Price Revolution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자연히 소비자들이 한정된 양의 상품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물가가 더욱 치솟았다.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의 '발견' 직후인 16세기 동안에 곡물 가격이 다섯 배로 뛰었다. 사태는 결국 에스파냐 영토의 일부였던 저지대 국가의 지방과 도시들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곳 사람들은 에스파냐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화가 폭발했다." "오래지 않아 개별 주와 도시들은 가혹하게 높은 수준의 세금을 매기는 데 깜짝 놀라 울부짖었다. 여기에 더해 에스파냐는 신앙 문제에 야만스러울 정도로 폭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경제적·종교적 박해가 복합되고 강력해져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1581년 위트레흐트 동맹이 탄생했다. 이 독립선언에 의해 '7개 주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네덜란드 공화국의 탄생을 알렸다."(413-4)


14. 제국으로 가는 길 


"영국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드러난 으뜸패는 지리적 이점이었다. 잉글랜드(1707년 스코틀랜드와 합병한 이후에는 영국)는 나라를 경쟁자들로부터 지켜주는 천연 방벽을 두르고 있었다. 바로 바다였다. 이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정부 지출을 생각하면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방어할 육상 국경이 없기 때문에 영국의 군비 지출은 대륙 경쟁자들의 지출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영국으로서는 결코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전쟁이라는 유럽의 전염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륙의 나라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서로 상대를 바꾸어가며 티격태격 싸움을 벌였다. 영국인들은 현명하게 개입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만 입장이 불리해질 경우에는 관여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또한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445-6)


"표면 아래서 강력한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뻣뻣해지고 있었다. 동방을 이국적인 초목과 보물로 가득한 놀라운 나라로 보던 태도를 바꾸어, 현지 주민들을 아메리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태도는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인한 흥분에서 노골적인 수탈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은 본래 무굴제국의 지방장관을 가리키던 말인 나와브nawab가 아시아에서 엄청나게 돈을 번 동인도회사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변질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마치 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거친 동부'였다. 100년 뒤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연출되는 '거친 서부'라는 비슷한 장면의 서곡이었다." "이 거대한 재산에 접근하는 열쇠는 동인도회사가 상품을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운송하는 무역업체에서 점령 세력으로 변모한 데 있었다. 마약 거래와 협잡질로 이동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451-3)


"미국 독립전쟁은 영국에서, 단지 상업적으로 수익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교역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지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관한 깊은 반성을 촉발했다. 벵골을 사실상 정복한 것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영국이 자기네 나라에서 이주해나간 정착민들을 지원하는 나라에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다. 그리고 잘 돌아가고 오래 갈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도 알아내야 함을 인식했다.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 제국의 탄생은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인도의 대부분이 영국의 손에 넘어가자 육상 교역로가 생명력을 잃었다. 구매력과 소비력, 자산과 관심이 결정적으로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군사 기술과 전술(특히 화력 및 중포와 관련한)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병대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 또한 수천 년 동안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해주던 길을 따라 운송되던 물량의 감소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는 그 이전의 남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457)


15. 위기로 가는 길 


"19세기를 보통 영국 제국의 절정기로 보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징표들이 있다. 영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필사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고, 종종 전략적·군사적·외교적으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영토들을 점령하고 유지하려 노력하는 현실은 현지 및 세계의 경쟁자들과 벌이는 위험한 벼랑 끝 게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판돈은 점점 더 커졌다. 1914년이 되면 판돈은 더욱 커져 유럽에서의 전쟁 결과에 제국의 운명을 걸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 그림자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영국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러시아가 영국에 가하는 위협은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앞둔 19세기에 암처럼 자랐다. 러시아가 성장하고 팽창하면서 영국과 이익을 다투게 될 뿐만 아니라 영국을 압도할 만한 위협 세력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런던에서는 더욱 자주, 더욱 크게 경종이 울려퍼졌다."(461-2)


"크림 반도와 아조프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곳들에서 잠깐 비쳤던 전쟁(1853. 10~1856. 3)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소수 지배층의 요구에 따른 것이고 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는 크림 전쟁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전쟁으로 인해 심화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병사들의 희생 속에 러시아의 코피가 터진 뒤 마침내 파리에서 협상 조건이 논의되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사르데냐 왕국 총리 카밀로 벤소였다. 그가 이 자리에 간 것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프랑스를 돕기 위해 흑해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 있는 순간을 약삭빠르게 이용해서 이탈리아의 통일과 자주를 요구했다. 이런 구호는 동맹국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본국의 지지자들을 자극했다."(476-8)


"1856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부과한 조항은 러시아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협력해서 자기네 경쟁자의 목을 올가미로 묶었다.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어렵사리 얻은 이득을 빼앗겼고, 흑해의 군사적 접근을 박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곳은 중립 지대로 선포되어 모든 군함이 통제되었다. 해안 지대도 비무장 지역으로 만들어, 요새를 만들거나 병기를 보관할 수 없었다. 그 목적은 러시아에 굴욕감을 주고 야망을 꺾어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는 훗날의 베르사유 조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 조약을 통한 해결이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이 매우 가혹하고 구속적이어서 러시아가 즉각 그 족쇄에서 빠져나오려 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것은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재촉했다." "차르의 농노제 폐지는 1850년대의 심각한 금융위기가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촉진한 것은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와 그 이후의 치욕적인 합의 내용이었다."(478-9)


16. 전쟁으로 가는 길 


"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자신감은 (심지어 완고함은) 빠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조약의 흑해 관련 구절을 백지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 각국 주재 공관들은 차례차례 조약을 개정하고 특히 민감한 구절을 삭제하는 일에 대한 지지를 조용히 호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극심한 불안감은 흑해에 대한 우려보다도 러시아가 갈수록 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군사행동은 비현실적인 가능성이었고 쓸 수 있는 카드도 별로 없어, 영국은 받아들이는 수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는 원하던 것을 얻었다. 다시 말해 해안 지역에서 자기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크림 반도의 항구나 흑해 북안의 다른 지역 어디에든 군함을 배치할 자유를 얻었다. 한 영국인 목격자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기쁨 속에 이를 맞았고, 러시아의 〈승리〉로 해석되었다."(485-6)


"불안은 커져갔다. 제국이 일을 너무 벌려놓고 있다는 통렬한 자각이 나오는 시기였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대치하고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이 해외에서 패배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러시아의 진격에 대한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1901년 말 영국 내각에 제출된 파멸을 예고하는 한 보고서는 철로가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까지 연결되면 러시아는 20만 명의 병사를 중앙아시아에 보낼 수 있고, 그 수의 절반 이상은 불안하게도 인도 국경 가까이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영국의 선택지가 적다는 점이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린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의 폭력적인 장면과 러일전쟁에서 차르의 해군이 참패한 일은 러시아가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이제는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504-5)


"타이밍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이웃이자 앙숙인 독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 갈수록 동요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 공업이 1870년 이후 20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서 러시아의 관심을 그 서쪽 변경으로 돌리려는 영국의 바람은 프랑스에게도 달콤한 음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첫 번째 재조정 국면은 1904년에 일어났다. 1907년에는 동맹국의 범위가 확정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중심을 가로질러 러시아와 공식적인 협약을 맺었다." "영국 관리들은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서 자기네가 결국 끔찍한 사태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를 최악으로 몰아갈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바로 러시아와 독일의 동맹이었다. 이런 공포는 한동안 영국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사실 1907년 영국-러시아 동맹의 목적 중 하나는 아시아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었다."(505-6, 509)


17. 석유의 길 


"석유 발견으로 1901년에 샤가 서명한 문서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수십억 달러짜리 사업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의 길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협정 조항들로 페르시아 국가의 보물에 대한 통제권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뿌리 깊고도 지긋지긋한 증오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민족주의를 촉발했으며, 마침내 서방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과 거부감을 낳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다. 석유 통제권을 차지하려는 욕구는 장래에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녹스 다시가 채굴권을 따낸 것은 놀라운 사업 감각이자 불가능에 도전하여 이뤄낸 성공이었다. 이 사건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발견'한 일과 맞먹는다. 당시에도 막대한 보물과 재산들이 콩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수탈되어 유럽으로 보내졌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545)


"1917년 이후 영국의 일부 정책 담당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다. 동부 페르시아에서 근무해서 이 나라를 잘 알고 있던 노련한 행정가 퍼시 콕스는 1917년에 영국이 러시아, 프랑스, 일본, 독일과 오스만까지 영구히 배제하고 페르시아만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17년 러시아가 붕괴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잡은 직후 독일과 평화에 합의한 것이 유럽에서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밝은 전망을 가져다주었다. 벨푸어 장관은 1918년 여름에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렇게 썼다. 〈[전제 체제하의 러시아는] 그 이웃에게 위협 요소였고, 그 이웃들 가운데서도 바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내부에서 붕괴한 것은 동방에서의 영국의 입지를 생각하면 좋은 소식이었다. 수에즈 운하에서 인도까지 뻗어 있는 지역의 장악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559)


18. 화해로 가는 길 


"'벨푸어 선언'으로 대표되는, 유럽 유대인들의 자치구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관심을 끌었지만,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주시한 것은 그곳이 지중해로 연결되는 석유 송유관의 종점이기 때문이었다. 입안자들은 나중에 이것이 수천 킬로미터의 운송 경로를 줄이고 영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전으로 드러나게 될 곳의 석유 생산에 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수심이 깊고 좋은 항구가 있어 석유를 영국 유조선에 싣기에 이상적인 곳이 하이파를 장악하고, 송유관이 프랑스가 통제하는 북쪽의 시리아가 아니라 이 항구로 연결되도록 해야 했다. 하이파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석유를 수송해오는 송유관의 종점으로 완벽한 곳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1940년까지 400만 톤 이상의 석유가 전쟁 뒤에 건설된 송유관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수송되었다. 《타임》지가 표현했듯이 그것은 〈대영제국의 경동맥〉이었다."(567)


"문제는 이 새로운 제국의 시대가 거의 곧바로, 세계는 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인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영국이 석유 및 송유관 네트워크 통제권을 주장하려 한 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국의 국가 부채가 치솟자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에 관한 고통스럽고 힘든 논의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비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커즌은 썼다." "야망과 능력 사이의 이 부조화는 참화로 가는 길이었고, 그 곤경은 고위 외교관들의 고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런던의 정책 담당자들은 현지 주민들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영국의 전략적·경제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1920년대에 영국은 이라크,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들을 세우고 끌어내리는 데 직접 책임이 있거나 배후에 있었다. 이는 불가피하게 지긋지긋한 문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약해졌다."(580-1)


19. 밀의 길 


"1939년 봄,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불가침 협정에 조인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몇 달 동안은 독일로 상품과 물자가 흘러들어왔지만, 언제나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협상은 팽팽했다. 특히 수요가 많았던 밀과 석유 등 두 가지 자원의 경우에는 더했다. 스탈린은 이 문제를 직접 감독해서 독일이 요구한 80만 톤의 석유를 보낼 것인지 그 일부만 보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했다. 일일이 화물 선적을 논의하는 것은 긴장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독일 전략가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상시적인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연히 독일 외무부는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고 있었고, 소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쏟아냈다. 지도부가 바뀌거나, 그들이 고집을 부리거나, 아니면 단순한 거래상의 이견이 발생하거나 등의 이유로 독일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유럽에서 계속 놀라운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가운데 제기된 커다란 위협이었다."(611)


"독일은 갈수록 식량과 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소련 곡물을 들여와도 만성적인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예컨대 1941년 2월에 독일 라디오는 영국의 교역 봉쇄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농업 전문가 헤르베르트 바케의 제안은 급진적이었다. 소련은 광대해서 지리와 기후가 다양하지만, 대략적인 선으로 나눌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캅카스 산지를 포괄하는 남부는 들판과 자원이 있는 '잉여' 구역이었다. 중북부 러시아와 벨라루사, 발트해 연안 지역 등의 북부는 '부족' 구역이었다. 바케가 밝혔듯이 이 선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곡물을 생산했고,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기만 했다. 독일의 식량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잉여구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무시하면 되었다. '잉여' 구역을 점령하여 그 산물을 독일이 차지해야 했다. '부족' 구역은 잘라내게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생존은 관심 밖이었다."(616-7)


20. 대량학살로 가는 길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독일의 자원 기반을 확장하는 일에서 두 나라를 본보기로 삼았다. 첫째는 대영제국이었다. 독일은 동방의 드넓은 새 영토에 발자국을 찍게 된다. 마치 영국이 인도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 개척에 나선 독일의 소수 주민들이 소련을 지배하게 된다. 마치 소수 영국인들이 라지Raj('통치'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통치했던 것처럼, 유럽 문명은 정말로 열등한 문화에 승리를 거둘 것이다." "히틀러가 자주 언급한 또 다른 모델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유사성을 보았고 여기에 자극받았다. 바로 미국이었다. 독일은 유럽인 정착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곳 원주민들에게 했던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히틀러는 새로 임명된 동방점령지부 장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말했다. 현지 주민들은 몰아내거나 아니면 몰살해야 했다. 볼가 강은 독일의 미시시피 강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문명 세계와 그 너머의 무질서 사이의 경계선이었다."(626-7)


"스탈린은 이제 영국 및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동맹자가 되었다. 문제는 무기와 물자를 어떻게 소련에 공급하느냐였다. 북극해에 있는 항구들로 실어다 주는 데는 수송의 어려움이 있었고, 한겨울에는 위험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이외에 동방에 적당한 항구가 없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무엇보다 태평양의 부동항들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법은 분명했다. 바로 이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지의 독일 요원들과 동조자들이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막을 수 있고, 연합군이 잃으면 곤란한 천연자원을 보호할 수 있으며, 베어마흐트(독일군)의 동방 진군을 저지하고 중단시키는 일에 함께 노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에도 부합했지만, 영국과 소련 각자에게 장기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이란을 점령하면 두 나라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자원, 전략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636-7)


21. 냉전의 길 


"아시아에서 일어난 군사적 압력의 해일은 동방에서 여러 차례의 '됭케르크 철수'를 불러왔다. 영국의 황금시대가 끝났음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마구잡이 퇴각의 사례들이었다." "영국의 어설픈 모습은 영국의 보호령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압둘라 1세와의 거래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압둘라는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비밀 협정을 통해 1946년 독립 이후 자신의 정권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는 이 약속을 이용하여 영국이 철수한 뒤 자신의 영토를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한계는 있었지만 영국의 승인을 받은 셈이었다. 어떠한 조언을 했든, 영국이 발을 빼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부분을 덮친 혼란은 유럽 제국의 세력의 해로운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영국이 고개를 끄덕이고 팔꿈치로 찌르고 눈짓을 해서 실행한 정책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치안 세력이 바뀌면서 힘의 공백이 생겼음을 드러냈다."(666, 669)


"모사데그는 서아시아에서 서방의 영향을 그저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제거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모사데그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한 사람이었고, 그 새로운 시대는 서방 세력이 아시아의 중심부에서 물러나는 시대였다. 그가 쫓겨난 정황에 대해서는 정보기관들이 수십 년 동안 숨겨왔지만, 모사데그 제거가 서방 강국들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 조직한 일이나는 데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모사데그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계승자들을 낳은 정신적 아버지였다. 아야톨라 루홀라흐 호메이니,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 등 다양한 부류의 방법과 목표와 야망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 모두는 서방이 진실하지 않고 해로우며, 현지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핵심 원리를 통해 하나가 되고 있다."(689-90)


22. 미국의 실크로드 


"석유 자원 때문에 이란이 서방에 특히 중요한 곳이 되었지만, 그 이웃 나라들 역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소련의 남쪽 변경에 있다는 위치 때문이었다. 그 결과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이 띠를 이루었다. 소박한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 '북단Northern Tier'이라 명명한 이 지역의 나라들은 세 가지 목표에 이바지했다. 첫째로는 소련의 이익 확대를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고, 둘째는 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 지역을 보호하고 석유를 서방으로 수송하여 유럽의 재건을 촉진하고 동시에 지역 안정에 중요한 수입을 제공했으며, 셋째로 소련 진영과의 긴장이 공개적 충돌로 이어질 경우를 대비한 정보 수집처와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1955년 서쪽의 터키에서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동쪽의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의 나라들이 단일 협정(바그다드 조약)을 결합했다. 서로 간에, 그리고 영국과 맺었던 복잡한 동맹관계를 대체한 것이다."(698-9)


"현지 정권들이 호의적으로 행동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꼼꼼한 고려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955년 말 3년 전 CIA의 지원하에 파루크 국왕을 쫓아낸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집트의 혁명가 가말 압델 나세르가 역시 소련에 무기를 요청하며 접근했다. 깜짝 놀란 미국은 영국 및 세계은행과 함께 아스완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돈을 대주겠다고 제안했다." "나세르는 바그다드 조약에 대해 짜증을 내왔다. 그는 이것이 아랍 통일의 장애물이며 아시아의 중심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서방의 도구라고 보았다. 돈과 지원을 약속받았다면 그는 아마도 누그러졌을 것이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금 지원 약속이 철회되었다. 댐을 건설하면 이집트의 면화 생산이 증가하여 가격이 떨어지고 그것이 미국 농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미국 의회 의원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이기주의는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699-701)


"자유 세계와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수호하고자 하는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목표가 아주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미국의 입지는 비민주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고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약한 방법을 동원하는 독재자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방 정책 담당자들은 현장의 실정을 무시하고 자기네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는 쪽을 택했다. 미국의 많은 관측통에게 이란은 완전한 승리로 보였다. 〈서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견실한 친구들 가운데 하나〉인 이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란의 국민총샌산(GNP)이 급속도로 증가해 최근의 〈주목할 만한 성공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4년 뒤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더 단호한 어조였다." "이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번영하는 나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는 길을 착착 밟아가고 있다고 보고서는 확신에 차서 예측했다."(712, 717-8)


23. 초강대국 대결의 길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지역, 그리고 인도양 지역 사람들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두 초강대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는 관행을 가리키는 말이 생겼다. '불편不偏'이라는 뜻의 '비타라피bi-tarafi'가 외교정책의 원칙이 되어서, 소련이 주는 것과 미국이 주는 것이 비슷해지도록 균형을 추구했다. 소련과 미국은 각기 아프가니스탄의 군 장교들을 공식 교육 프로그램에 초청하여 미래의 지도자들과 연줄을 만들고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양쪽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교들은 고국에 돌아온 뒤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재능이 인정된 장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그들이 선전하는 낙원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해외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 대다수의 반응은 새로운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전도하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자주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727-8)


"사실 이란이 핵 원료를 확보한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정책을 추진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구상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이 〈국제원자력 풀〉에 참여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결국 우방국 정부들은 4만 킬로그램의 우라늄-235를 비군사적 연구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0년 동안 핵 기술과 부품과 원료를 공유하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다. 소련 진영에 맞서 협력과 지지를 해주는 데 대한 직접적인 장려책이었다." "1976년 포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원자로 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이 포함된 미국산 시스템을 구매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재가했다. 이란은 이에 따라 '핵연료 순환'의 전 과정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 리처드 체니(딕 체니)는 주저 없이 이 판매를 승인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란의 동기가 무엇이지 〈알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741-3)


24. 파멸로 가는 길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은 이 지역 전체에서 미국이 세운 엉성한 구상을 허물어뜨렸다. 그곳에는 한동안 불안정을 가리키는 징표들이 있었다. 샤 정권의 부패는 경제 침체와 정치적 무기력, 그리고 경찰의 만행과 함께 고약한 조합을 이루었다." "샤가 몰락하면서 이례적인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1980년 말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장래는 불확실했고, 자기네 지도자들의 선택과 외부 세력의 간섭에 달려 있었다. 지역 전체는 고사하고 각 나라에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추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에게는 모든 일에 다 관여하며 그럭저럭 넘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반미 정서의 씨앗이 20세기 이전에 뿌려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처절한 증오로 자라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에 내렸던 미국의 정책 결정은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놓인 이 지역 전체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755, 777-8)


"동력은 소련 쪽에 있는 듯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소련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희망을 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정책 담당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취해야 할 조치가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담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에서 밀려 붕괴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는 전략적 재난〉이 될 터였다. 이는 페르시아만 일대와 서아시아 전체에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제 석유 시장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새로운 정책이 떠올랐다. 그곳은 미국이 아시아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었다. 사담을 돕는 것은 계속해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이란과 소련 두 나라 모두의 전진을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781-2)


"사담은 여전히 미국과 그들의 목적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며, 이런 모든 조치들이 취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83년 말 레이건 대통령이 도널드 럼스펠드 특사를 바그다드에 보냈을 때 그의 명시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담 후세인과 〈대화를 시작하고 개인적인 친밀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럼스펠드의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운명에 중대한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이를 서방의 전략적 패배로 생각할 것입니다.〉 럼스펠드의 행보는 미국과 이라크 양쪽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대단한 진전〉이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호메이니가 서아시아 전역에 시아파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일에 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라크와의 협력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미국은 사담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눈감아줄 용의가 있었다. 미국에게 이라크는 국제법의 원칙보다도 더 중요했다."(783)


25. 비극으로 가는 길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 몇 시간 만에 빈 라덴을 처리하기 위한 전략들이 만들어졌다. 9월 13일 아침에 나온 실행 계획은 이란과 관계를 맺고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 당국과 접촉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모두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거나 가까운 나라였다. 그 후 일주일 이내에 이들의 기운을 〈다시 북돋우〉기 위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곧 있을 탈레반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9·11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실크로드의 나라들을 줄 세우는 것이었다." "빈 라덴을 찾아내고 알카에다의 역량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범인 추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관심은 아시아의 중심부를 결정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통제하는 문제로 옮겨갔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 지역의 나라들을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미국의 이익과 안전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말이다."(822-4)


"9·11 공격은 미국이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북한과 함께 〈악의 축을 이루어 무장을 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악의 축을 해체하는 것이 긴요했다." "통제권을 장악하겠다는 결의는 대단했다. 안정을 해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전략적 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어날 수 있는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인 전망보다 더 중요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물리치는 것이 것이 핵심이었다. 그 뒤의 상황은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근시안적 태도는 이라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 이 나라의 장래 모습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었다."(825-6)


맺음말 : 새로운 실크로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이 어설프게 개입하고 기타 지역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일 이외에 진행되는 것이 더 있다. 동방에서 서방까지 실크로드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혼란과 폭력, 종교적 근본주의, 러시아와 그 이웃들 사이의 충돌, 중국이 서부 지방에서 벌이는 극단주의와의 사투를 보면 혼란과 동요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한때 지적·문화적·경제적 풍광을 지배했으며 이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의 산고產苦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에 매장된 천연자원이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여기에 새로운 종류의 대동맥들이 추가되었다. 기존 파이프라인과 예정된 파이프라인이 유럽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석유 및 가스 매장지와 연결한다. 이에 따라 자원 수출국뿐만 아니라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나라의 정치적·경제적·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증대된다. 실크로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842, 8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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