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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평점 :
1부: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미국의 사정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1950년대에 여기저기서 울려퍼진 반지성주의의 가락은 새롭기는커녕 오히려 익숙한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반지성주의가 195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사실 이 나라가 국가로서 확립되기 전부터의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배경을 살펴보면 미국에서 지식인에 대한 존중의식이 꾸준히 감소한 것도 아니고 최근에 갑자기 실추된 것도 아니며, 주기적으로 변동하기 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시대에 지식인에게 쏠리는 악감정도 지식인의 지위가 땅에 떨어져서 나타난 게 아니라 그 지위가 점차 높아졌기 때문에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내 생각에 이런 일반적인 정식화는 과감한 정의만큼이나 유용할 것이다."(24-5)
"지식인에게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지식인에 대해 양면적 감정을 갖는 듯하다. 즉, 존경하고 경외하면서 동시에 의심과 원한을 품는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껏 많은 사회와 역사의 국면에서 늘 있어왔다. 어쨌든 반지성주의는 사상에 대해 무조건 적의를 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제대로 배운 사람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설프게 배운 사람인 것처럼, 으뜸가는 반지성주의자는 대개 사상에 깊이 몰두하는 이들이며, 종종 케케묵거나 배척당한 이런저런 사상에 강박적으로 빠져드는 이들이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고, 일편단심으로 지적 열정에 사로잡힌 적 없는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반지성주의의 대변인들은 거의 언제나 어떤 사상에 헌신하며, 살아 있는 동시대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식인들을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오래전에 죽은 일부 지식인들─애덤 스미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장 칼뱅,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조차─을 추종하기도 한다."(44-5)
"또한 이따금 반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그것을 무조건적인 신조나 일종의 원리원칙처럼 여기며 헌신하고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무자비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시각이다. 사실 반지성주의는 대개 모종의 정당화될 수 있는 의도에서 빚어진 우발적 결과이다." "만약 반지성주의가 우리 문명에 널리 퍼져 있다면, 그것은 반지성주의가 대체로 정당한 대의, 적어도 옹호할 만한 대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복음주의 신앙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정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지성주의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고삐 풀린 열정은 우리 시대의 다른 망상들처럼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5-7)
2장 호평 받지 못하는 지성
# '지성'과 '지적 능력'의 구분
1. 지성intellect : 여러 상황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음미하고 숙고하고 의문시하고 이론화하고 비판하고 상상하고 사색하는 능력
2. 지적 능력intelligence : 명확히 '한정된' 틀 안에서 어떤 사안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하고 정리하는 (실용적인) 능력
"일반적인 어법에서 지성은 일부 전문직의 속성이라고 여겨진다. 자크 바전이 말한 것처럼, 지식인은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편리한 설명을 포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은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전문직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학문과 관련된 직종이라 할지라도 전문직 종사자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지식인이라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지성은 대부분의 전문직에서 도움이 되지만, 지적 능력만 있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학인이 모두 지식인은 아님을 알며, 종종 이런 사실을 개탄한다. 또한 지성은 전문직을 위해 훈련받은 지적 능력과는 대조적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인물에 부속되는 것이라는 점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회에서 지성과 지식인 계급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을 때, 우리는 일부 직업 집단의 지위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신적 자질에 담긴 가치도 염두에 둔다."(51)
"지식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헌신적이고 진지하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이 모종의 제한된 선입견이나 완전히 외적인 목적에만 봉사하게 되면, 광신이 지성을 삼켜버린다. 정신적 삶에서 지식에 자립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은 특수하게 제한된 지식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일이다. 그 영향을 신학만큼이나 정치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경건함에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경건함이 너무 경직된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지적인 기질에 있는, 내가 장난기라고 부르는 자질, 즉 정신의 놀이이다. 우리는 정신의 놀이에 관해 말한다. 지식인은 분명 정신의 놀이 그 자체를 즐기며, 이런 놀이에서 인생의 주요한 가치를 발견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지적인 활동으로 맛보는 순수한 기쁨의 요소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지성을 건전한 동물적 본능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정신 에너지의 잉여분은 실용성이나 한낱 생존에 필요한 일에서 해방될 때 작동한다."(56-7)
"지성에는 사회를 파괴하는 힘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에게 사실 지성은 안전하고 온건하며 유화적이라고 답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심 많은 보수주의자Tory나 호전적인 속물들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맞다. 지성은 〈위험하다.〉 방치해두면 지성이 음미하고 분석하고 의문을 던지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지식인 계급이 영향력 행사를 자제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어떤 사회에서든 확실한 것은, 만약 지성의 힘의 자유로운 행사를 부정한다면, 행사를 인정한 경우보다 그 사회의 상황이 훨씬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지식인은 문화자경단 사람들의 공상과는 정반대로, 사회 전체를 전복시킬 일은 우선 없다. 그러나 지성은 늘 뭔가에 맞서서 움직인다. 모종의 억압이나 기만, 환상, 도그마, 이익 등은 언제나 지식인 계급의 면밀한 조사를 받으며 폭로와 의분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이에 맞서 지성을 두려워하고 증오한 사람들은 일종의 대항신화를 발전시켜왔다."(78-9)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반지성주의의 전제가 되어 왔던 이 입장은 완전히 추상적인 가공의 적의에 바탕을 둔다. 지성은 감정과 대립된다. 지성은 따뜻한 감정과는 어쩐지 안 어울린다는 이유로 말이다. 지성은 인격과 대립된다. 지성은 단순한 영리함이라서 교활함이나 악독함으로 간단히 바뀐다고 널리 믿어지기 때문이다. 지성은 실용성과 대립된다. 이론은 실용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 〈순전히〉 이론적인 정신은 터무니없이 경시되기 때문이다. 지성은 민주주의와 대립된다. 지성은 평등주의를 무시하는 일종의 차별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의가 일단 인정되면 지성을, 넓게는 지식인을 옹호하는 입장은 사라져버린다." "물론 이런 허구적 적의의 근본적인 과오는 인간 생활에서 드러날 수 있는 지성의 진정한 한계를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결합되게 마련인 인간의 다른 모든 특질을 단순히 지성과 분리해버리는 점에 있다."(79-80)
2부: 마음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정신
"미국의 정신은 근대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 종교는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최초의 활약 무대였고, 따라서 반지성주의를 추동하는 사람들에게도 최초의 활약 무대였다. 초창기 미국 종교에서 이성이나 학습의 역할을 심각하게 위축시킨 모든 요인은 나중에 세속의 문화에서도 그 역할을 위축시키게 된다. 사상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정서, 학설이나 교의에 대한 멸시, 사상을 닦는 것에 대한 경멸, 감정에 호소하는 힘이 있는─혹은 여론 조작 기술을 가진─인간을 사상가보다 중시하는 태도, 이는 모두 20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미국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메리카라는 신세계에서 새로운, 더 악랄한 반지성주의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적 상황에서 전통적인 권위와, 부흥주의 운동이나 열광주의 운동 사이의 균형이 후자 쪽으로 크게 기울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성적인 스타일의 종교는 설 자리를 빼앗겼다."(89-90)
"미국의 각성운동은 유럽에서 일어난 유사한 종교적 변화, 특히 독일 경건주의와 영국 감리교의 출현에 대응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경우는 특히 종교적 재각성을 위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교회의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고, 또 상당수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목사들의 손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것이다." "대각성운동은 1720년에 시작되었다. 정규 목사들의 경우, 처음에는 그 압도적 다수가 순회 부흥사야말로 교구민들의 신앙을 북돋아주는 이들이라며 환영했다. 목사들은 보스턴의 벤저민 콜먼 같은 걸출한 교양인까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부흥사들에게 공통의 영적 소임을 수행하는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그것도 아주 열등한 경쟁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정규 목사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대각성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고부터였다."(101-4)
"실제로 기존 목사들은 각성자들의 도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특별한 종교적 흥분을 느낄 일이 없는 상태에서 늘 회중과 코를 맞대고 살던 정규 목사들은 보통의 일상적 환경에서 신도들의 영적 각성을 유지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부흥운동가들은 청중의 이성에 호소하거나 까다로운 교리 문제를 다룰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설교가 아니라, 청중과 즉흥적으로 직접 대화했다. 그들은 종교적 경험에서의 궁극적 진실─죄의식, 구원의 열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기대─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서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전통적으로 회중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등 기성 교회의 목사들은 신앙심과 영적 자질 면에서 존경을 받았지만, 학식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모든 전제 조건이 마침내 도전을 받았다. 가장 극단적인 부흥운동가들은 개인적인 언행으로 성직자의 위엄을 갉아먹고 있었다."(105-7)
"부흥주의는 훗날 뉴잉글랜드나 중부 식민지(즉 회중교회나 장로교회)로부터 남부나 서부의 개척지대로 옮겨감에 따라 좀더 원시적이고 감정적인, 〈황홀감〉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학식이 부족한 전도자들이 점점 늘어났고, 회심의 수단으로서 육체적인 반응을 별로 자제하지 않게 되었다. 엎드려 기고, 경련을 일으키고, 울부짖거나 하는 반응이 흔해졌다. 남부 식민지에서는 처음부터 휘트필드의 영향이 컸다. 그의 설교와 중부 식민지의 수많은 장로교 부흥주의자들에 의해 힘을 얻은 복음주의 운동은 버지니아나 노스캐롤라이나로,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심남부深南部까지 확산되었다. 그 지역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인구를 대거 거느리고 있는데다 시골 사람이 다 된 성공회 성직자들이 겨우겨우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기성 성공회가 상류 계급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의 민주주의적인 이의제기는 그 함의가 더욱 강렬했다."(115)
4장 복음주의와 부흥운동가
"미국인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희망하고, 미래에 대한 열정이 있으며, 역사에 대한 경멸이 점차 강해졌다. 미국의 정치적 신조에서는 유럽이야말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지난날의 부패를 대표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파들도 그리스도교의 과거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발전은 가치 있는 제도상의 형식이나 관행의 누적되는 과정이 아니라 원시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부패와 타락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도들의 목표는 형식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이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이동이 심하고 유동적인 사회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어야 하는 사회에서 교파들이 기본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회심자를 얻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책무는 부차적이었다. 실용주의는 철학적 신조가 되기 훨씬 전부터 소박한 형태로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셈이었다."(126-8)
"〈스타〉 시스템은 연극계보다도 일찍 종교계에서 그 위세를 떨쳤다. 그 결과, 시드니 E. 미드가 지적했듯이, 〈목사 개념은 이제껏 받아들여진 사제적인 면을 사실상 상실했으며,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현실의 교회에서 특정한 목적의 활동들을 지휘하는 신성한 관리가 되었다.〉 복음주의의 충격이 점점 범위를 넓히며 지배적이 되면서 목사도 점차 부흥주의의 판단 기준─목사로서 얼마만큼의 실적을 올렸는가─에 따라 선발되고 훈련되었다. 목사를 지성과 교육 지도자로 보는 청교도의 이상은 목사를 대중적인 개혁 운동가나 권유자로 보는 복음주의의 이상 앞에서 꾸준히 약해졌다. 신학 교육 자체가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단순한 공식 교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교회는 세속 세계에 지성을 가져다주는 역할에서 눈에 띄게 멀어졌다. 그리고 종교는 지적 경험에 기초하는 생활의 일부를 이룬다는 이념을 포기했고, 종종 합리적 연구 분야를 단념했다."(130)
5장 근대성에 맞선 반란
"극히 현실적이었던 초기 복음주의자들은 전도 대상인 소박한 대중에게 학식이나 지적 자의식으로 무장한 회의주의가 실질적 위협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된 적은 합리주의가 아니라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것을 그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1785년부터 1835년까지 복음주의가 큰 성과를 거두고 이신론이 주춤해짐에 따라 경건주의와 합리주의의 싸움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남북전쟁 후에 일변하여, 합리주의는 다시 복음주의 정신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당시 출현한 다윈주의가 사상의 모든 영역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영향을 끼치자, 정통 그리스도교는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학식 있는 목사나 교육 받은 평신도들 사이에서 근대적인 학문에 힘입은 성서 비평이 이루어지면서 다윈주의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이제 목사와 평신도 모두가 근본주의와 근대주의, 그러니까 보수적 그리스도교와 사회복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175-6)
"19세기 말에 이르러 근본주의자들은 결국 영향력과 체통을 상당 부분 상실했음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종교 스타일이 등장한다. 그것은 성서 비평, 진화론, 사회복음, 갖가지 합리적 비판 등 모든 근대적 가치관에 역행하려는 욕구에서 형성되었다. 마침내 사회적 반동과 종교적 반동이 손을 잡은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이렇게 말한다. 〈극단적 정통주의에서 나타나는 열광이야말로 회의주의의 독이 교회의 영혼을 침범한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확신이 흔들릴 때 오히려 그런 확신을 가장 격렬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의심을 덮어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광기 어린 정통주의로 치닫는다.〉 결국 토론을 통해 합리주의나 근대주의와 대화할 시기는 지났다는 정서는 극히 폭력적인 언사로 그들을 압도하려는 광신적인 움직으로 발전하여 탄압과 위협으로 비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움직임은 1920년대의 반反진화론 십자군운동에서 절정에 달했다."(176-9)
"여기에 등장한 다수지배형populistic 민주주의와 구식 종교의 결합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다. 마음의 문제는 보통사람의 문제라고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보통사람의 직관은 지식인의 직관만큼─실제로는 그 이상이다─뛰어나다고 보았던 그는 종교 문제에서도 보통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와 과학의 싸움에 판결을 내리는 주체는 보통의 일반인들이지 〈인간을 졸업장이나 학위로 평가하는 자들〉이 아니라고 브라이언은 확신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종교적 신념이 브라이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테네시 주의 투표함 앞에서는 똑같이 뛰어난 생물학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결국 브라이언은 진화론 시비를 그리스도교인들의 투표에 붙이자고 제안하여, 쟁점을 다수의 권리 문제로 돌려버렸다. 브라이언이 보기에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185-6)
"근본주의자의 정신은 진화론이나 금주법에 관한 도덕·검열의 문제에서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권위를 지닌 거대한 대중매체에 의해 감성이 훼손되거나 무시당하면서 영향력 저하를 자각하고 있다. 실험적이고 〈세련된〉 현대 사회에서 근본주의자의 정신은 자꾸 구석으로 밀려나고 놀림거리로 전락한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종교적 〈부흥〉도 과거의 근본주의자적 열정에서 보면 도저히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점잖고 온건하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현대의 세속화된 근본주의는 정치의 영역에서 새로운 힘과 응징하는 능력을 발견하고 있다." "근본주의 교육에 여전히 충성을 다하고, 소득세로 타격을 입고, 뉴딜이 추진한 사회 개혁에 적의를 품는 부유층, 그리고 고립주의자 집단과 호전적인 민족주의자들, 〈신 없는 공산주의〉 문제를 놓고 과거의 박해자들과 비로소 손을 잡으려 하는 가톨릭 근본주의자들, 흑백 분리 철폐를 둘러싼 싸움으로 새롭게 활기를 얻은 남부의 반동 세력 등이 그들이다."(193)
3부: 민주주의 정치
6장 젠틀맨의 쇠퇴
"미국이 지식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특히 반지식인 일제 공격의 첫 희생양이 된 유명인사는 토머스 제퍼슨이었는데, 그를 공격한 사람들은 연방주의 지도자나 뉴잉글랜드의 기성 교회 성직자들이었다." "1796년에 제퍼슨이 워싱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할 것으로 예견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연방당 하원의원 윌리엄 라우턴 스미스는 익명의 소책자를 발행해서 제퍼슨을 공격했다. 그는 제퍼슨을 가리켜 철학자라고 지적하면서, 철학자는 정치를 하는 방식에서 교조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자는 감언을 잘 늘어놓고 명예욕이 강하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제퍼슨의 능력에 관해서도 〈나라의 실질적인 이익보다는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얻는 데에〉 더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훗날 지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사용하게 될 수사修辭를 생각해냈다. 지식인은 사소한 일에 매달리다 중대한 문제를 놓친다는 것이다."(206-9)
"제퍼슨은 이신론자이고 세속의 학자였는데도 복음주의나 경건주의 교파들, 특히 침례교로부터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었다. 이 지지자들은 민주주의적 정서를 지녔다는 제퍼슨에 대한 평판에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한 것에서도 비주류 교파로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제퍼슨을 비롯한 세속의 지식인들은 기성 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공통의 반감을 바탕으로 경건주의 교파들과 기묘한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을 이간시키기 위해 기성 교회 성직자들은 제퍼슨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도에게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경건주의자들과 계몽된 자유주의자들의 동맹에서 최종적인 분열이 일어났을 때, 즉 힘을 키워간 대중민주주의 세력이 계몽된 귀족적 지도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때, 복음주의 세력은 반지성주의를 낳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반지성주의는 모든 점에서 기성 교회 성직자들이 제퍼슨에게 사용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독성이 있었다."(212-3)
"미국의 민중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자산 계급이나 지식 계급의 리더십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민중이 스스로 지배하고 자산 계급이나 지식 계급의 리더십을 극력 억누르려 하는 경우, 어디에서 지침을 받아야 할까? 답은 내부에서일 것이다. 민중민주주의가 힘과 자신감을 키워감에 따라, 직관력을 타고난 민중의 지혜는 지식 계급이나 자산 계급의 교양 있고 지나치게 세련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복음주의자들이 마음의 지혜나 하느님과의 직접 교섭을 중시하고 학문으로서의 종교나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성직자 집단을 거부한 것처럼, 평등주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들도 보통사람의 타고난 현실적 감각과 진리와의 직접 대면을 중시하고 훈련된 지도자들을 배제시키자고 제안했다. 보통사람의 지혜를 중시하는 이런 경향은 민주주의적 신조를 과격하게 선언하는 가운데 서민들에 의한 일종의 호전적인 반지성주의로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218-9)
"미국 정치에서 실로 강력하고 대대적인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최초의 충동은 (앤드류) 잭슨주의 선거 운동에서 나타났다." "미국인들은 〈퇴폐의〉 유럽은 〈자연의〉 미국보다 야만스럽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문명의 발달이 〈인위적〉인 것이어서 자국이 자연에서 멀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잭슨 지지자들은 그가 자연적 지혜를 대표한다고 치켜세웠다." "그는 〈자연이라는 학교에서 배웠고〉, 〈인위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하는 인간으로 여겨졌다. 잭슨은 다행히도 〈학교의 교육이나 변론술〉에 오염되지 않고, 〈아카데미즘에 의한 망상적 사색으로 판단을 그르칠 일〉이 없으며, 〈타고난 정신력과 실천적인 상식, 온갖 유익한 목적에 필요한 판단력과 식별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질은 현자가 익힌 어떤 학문보다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정신은 〈삼단논법이라는 번거로운 큰길이나 분석이라는 다져진 좁은 길, 논리적 연역이라는 따분한 샛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220, 224-5)
"누구나 공직을 재산의 일종으로 여겼지만, 잭슨주의자들은 이런 재산을 정당하게 〈공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무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은 경제 문제에 대한 반反독점적 입장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정부 직원의 임무는 너무도 단순해서 거의 누구나 수행할 수 있다는 잭슨주의의 확신에 의해 전문직이나 훈련된 사람들의 역할이 경시되고 결국 정부 기능이 복잡해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젠틀맨이 미국 선거의 필요성 때문에 밀려난 것처럼, 전문직, 아니 그저 유능한 사람조차도 정당 체제나 윤번제에 의해 미국의 정치 체제에서 극히 한정된 자리밖에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숙련과 지성은 결정을 내리거나 관리하는 권한에서 완전하게 소외되었던 것이다. 공공생활에서 지성의 지위는 유감스럽게도 교육이나 훈련에 대한 젠틀맨의 시각에 의존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 명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왔다. 19세기 미국에서 지성은 결국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240)
7장 개혁가의 운명
"직업 정치인에 대한 개혁가의 비판에서는 무지, 천박, 이기주의, 부패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단어들이 거듭 등장한다. 이런 언어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인이나 정치 거물은 하나의 대응책으로서 개혁가들의 우월한 교육이나 문화를 정치적으로 불리한 점이라고 깎아내리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라는 어렵고 더러운 일이 그들의 적성에 맞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다." "(정치인들이 보기에) 현실은 도덕이나 이상, 교육이나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사업이나 정치라는 극히 남성적인 영역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미국 남성이라는 하나의 정착된 선입견에 기대면서, 교양은 비실용적이고 교양인은 쓸모없으며 교양은 여성적이고 교양 있는 남자는 여자처럼 연약해지기 쉽다고 주장했다. 개혁가들은 공직이나 권력을 남몰래 갈망하지만 실제로 필요한 것에 대한 필수적인 이해력이 없어, 성공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개혁가들은 공직자나 권력자의 뒤를 캐는 위선적인 감독관에 불과하다."(259-60)
"정치인들은 개혁가들의 탐탁지 않은 성격에 대한 암묵적 동의의 기반으로서 모종의 정서에 의지하고 있었다. 정치 활동은 남성의 특권이라서 여성은 정치에서 배제된다는 정서, 더 나아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능력이야말로 남자다움의 잣대라는 정서였다." "호러스 부시넬은 만약 여성이 선거권을 얻어 수백 년 동안 이어간다면, 〈여자들의 외모나 기질 자체가 바뀔 것〉이라고 걱정했다. 여성의 생김새는 날카로워지고 몸은 빳빳해지며 목소리는 갈라지고 행동도 조심성이 없어질 것이다. 자기 확신이나 의지, 대담함으로 가득차서 지위나 권력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좀더 순수하고 사심 없는 개인적 이상을 정치에서 구현하려 했던 개혁가들은 정치를 여성화하고 남녀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들었다. 여자들이 정치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여자다움을 잃듯이, 개혁가들도 여성적 기준─도덕성─을 정치 생활에 도입함으로써 남자다움을 잃었다는 것이다."(264-5)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누가 뭐래도 〈투사〉였다. 호전적 국가주의와 정력적인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그의 공격성은 부각되었다. 잭슨과 같은 투쟁과 결단의 자질을 갖추고, 제퍼슨 같은 겁쟁이가 아니며, 존 퀸시 애덤스 같은 학자도 아니고, 커티스에게 던져진 우유부단하다는 비난 따위는 결코 듣지 않을 지식인 정치가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도시화된 산업 문명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리며 타락의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루스벨트를 좀더 남성적이고 활력 넘치는 신세대의 선구자로서 환영했다. 루스벨트는 개혁에 관심이 있는 교육 받은 귀족적 계층의 위신을 되찾아줌으로써,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남성적 덕목을 다시 불어넣음으로써 혁신주의로 가는 길을 닦았던 것이다. 거칠고 강인한 자세를 요구받은 미국의 남성들은 이미 남자다움을 잃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이런 식의 이상주의나 개혁에 부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루스벨트에게서 미국인 정치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발견했던 것이다."(272-3)
8장 전문가의 부상
"잘나가던 도금 시대의 개혁가들에게 뼈아픈 좌절감을 안겨준 지식인과 권력측의 이반은 혁신주의 시대에 들어 조금은 갑자기 끝을 맺었다. 미국 경제와 사회의 발전은 그동안에는 산업의 개발이나 대륙 전체의 지배, 부의 증대에 관심이 쏠렸는데, 여기에 필적한 만한 것이 새롭게 생겨났다. 앞선 수십 년 동안 구축된 거대한 권력들을 인간화하고 조정하려는 기운이다." "거대 권력을 주요 기업가나 정치 거물들의 수중에서 빼앗어 거기에 인간성을 불어넣고 도덕을 가미하려면 정치를 정화하고 경제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행정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더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해질 것이었다. 전문가들을 의심한 잭슨주의적 태도는 불식되어야 했다. 민주주의와 교육 받은 사람 간의 긴장은 해소되어가는 듯했다. 언제나 전문가의 가치를 강조해온 사람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고, 민주주의도 역시 전문가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75-6)
"혁신주의는 지역이나 주 차원에서 전국 차원의 정치로 확대되었다. 정치 세계에서 전문가의 역할을 시험한 무대는 워싱턴이 아니라 주도州都, 특히 위스콘신 주 매디슨이었다." "위스콘신 주의 실험이 교훈적인 것은 정치에서의 전문가나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아가는 모든 단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첫 단계로, 지식인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 변화와 불만의 시대가 있었다. 둘째 단계로는 지식인이나 전문가와, 그들이 관여한 개혁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셋째 단계에서는 이 개혁에 대한 불만이 점차 높아졌다. 개혁의 효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 대개는 이런 불만 표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불만은 특히 기업들 사이에서 심했는데, 그들은 정부의 간섭을 규탄하고 개혁에 따른 비용이 너무 높다고 불평하는 등 다양한 근거로 호소하면서 일반 서민이 개혁가들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겼고, 그 하나가 반지성주의였다. 그리하여 최종 단계에서는 개혁가들이 쫓겨나고, 개혁은 미완성으로 끝났다."(278-9)
"1912년에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지식인이 (윌슨 특유의 고귀한 이미지에 끌려) 그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차대전 이전의 윌슨은 학자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예상된 것과 달리, 정치의 세계에서 지식인 조언자를 등용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불신했다. 루스벨트나 라 폴레트와 달리, 윌슨은 전문가들을 개혁의 추진자가 아니라 오히려 대기업이나 특수 이익에 유용한 고용인으로 여겼다. 대부분의 혁신주의 사상가는 대기업에 의한 통치와, 달갑지 않은 사업 관행을 규제하기 위해 전문가를 고용하는, 민중에 의한 통치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윌슨은 전문가들이 대기업이나 특권화된 이익과 결탁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타파하려면 정부를 〈국민〉의 손에 돌려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루스벨트의 견해와는 달리, 그는 대기업의 규제에 관여하는 전문가는 오히려 대기업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291-2)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국내 문제보다 전쟁이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키웠다. 역사가나 작가가 선전을 위해 동원되고, 온갖 부류의 전문가들이 영입되었다. 군사정보부, 화학전국, 전시산업위원회 등에는 학자들이 우글거렸고, 워싱턴의 코스모스 클럽은 〈모든 대학을 망라한 교수단 회의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결과는 지식인의 지위에 치명상을 입혔다. 윌슨 대통령과 손을 잡고 1차대전을 지휘했던 지식인들은 윌슨과 그와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자신들에게도 미치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다수 지식인들이 무턱대고 열광해서 전쟁 분위기에 가담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도덕심이 무너진 일이었다." "허버트 크롤리는 〈미국인들이 세계대전을 치르는 중압감 속에서 어떤 심리상태〉에 빠질지 자신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대중은 지식인을 쓸모없는 거짓 개혁을 부르짖는 예언자라거나 행정부의 주역, 전쟁 지지자, 심지어 볼셰비키라고 공격했다."(294-6)
"뉴딜 시기 동안 지식인과 대중의 우호적 관계는 복원되었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주장과 지식인의 사고방식이 이토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지난 혁신주의 시대에 지식인과 대중은 대체로 똑같은 대의를 신봉했다. 그것이 뉴딜 시대에는 양측을 더욱 끌어당겨, 지식인들이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윌슨이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뉴딜에 반대하는 소수는 보기 드문 격렬한 적의를 품고 대항했다. 지식인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들에 대한 감정도 악화되어, 2차대전 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우익 인사들은 일반 대중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대중의 편견이라는 오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뉴딜을 비판하는 세력은 지식인들의 권력을 과장했다. 그리고 그들을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고 음모를 즐기는 실험주의자로 보면서, 무명 신세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탓에 오만하고 명성을 의식하게 되었다고 비난했다."(296-7, 301-2)
4부: 실용적인 문화
9장 기업과 지성
"확실히 미국 문화는 학문이나 예술의 후원자인 소수의 부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으며, 이 점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기업계에서의 반지성주의를 특별히 다루는 것은 기업이 미국 사회의 다른 부문에 비해 명백하게 더 반지성주의적이거나 속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업이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강하고 폭넓은 관심을 유발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생활 문화에서는 실용성이 압도적으로 중시되어왔고, 기업가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가장 강력한 반지성주의 세력이었다." "미국의 기업계가 지식인과의 논쟁에서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여러 가지 점에서 전통적인 서민의 지혜와 합치된 데 있었다." "기업계가 지닌 지성에 대한 두려움과 문화 멸시의 기반이 되는 것은 문명과 개인적 신조에 대한 미국인의 두 가지 보편적인 태도이다─첫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과거에 대한 경멸, 둘째는 신앙심조차 실리주의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자조와 자기개발의 사회적 기풍이다."(329-30)
"과거를 멸시하는 미국인의 태도의 근저에 있는 것은 역사의 중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은 과학기술적·물질주의적 야만주의가 아니었다. 미국인들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군주제나 귀족정에 대한, 그리고 무자비한 민중 착취에 대한 공화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항의를 상징했다. 또한 미신에 대한 합리주의적 항의, 구세계의 수동성이나 비관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항의, 그리고 역동적이고 활력 넘치는 독창적 심성을 상징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태도는 의도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반문화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를 혼란과 부패와 착취의 집적으로 여기는 지적 스타일의 발전을 조장하고, 실용적인 지능과 결합되지 않는 모든 계획과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열정을 경멸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대한 이런 견해는 실제적 진보와 관련되는 일이야말로 삶의 요체라는 주장에 쉽게 굴복했다. 많은 미국인은 문명의 진정한 성과는 특허청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330-1)
"유력한 세습 귀족이나 국가의 보호가 부재했던 미국에서 예술이나 학문은 상업적 부에 의지했고, 이런 이유로 기업가들의 교양 수준이 지식인의 삶에서는 늘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처음부터 미국은 일을 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사회였지만, 그래도 18세기 중반에는 동해안의 타운들에서 예술이나 학문의 실질적인 토대가 만들어지고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인 사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계급의 중추를 이룬 것은 상업으로 쌓은 부였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가 꼭 사업을 추구하고 돈을 모으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적으로 여기지는 않은 사람들의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업가가 문명의 첨병이라는 이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에 대한 헌신, 검약, 절제라는 청교도적 가치와, 여가와 문화, 다재다능함이라는 젠틀맨의 이상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특히 동해안의 큰 타운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일관되게 그 이상을 지키며 실현했다."(339-42)
"그러나 상업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제조업이 부상함에 따라, 해외 무역에 종사하면서 폭넓은 시야와 범세계적인 견해를 갖게 되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미국의 경제와 미국인의 정신이 내부로 향하면서 차츰 자족적인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륙의 앨러게니 산맥 너머나 중서부로까지 사업이 급속하게 확산되자, 문화 제도나 심적 여유도 뒤로 밀려났다. 사람이나 물자는 제도나 문화보다도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 간 장벽이 무너지고 보통사람에게도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려, 관련 업계나 상류 사회가 벼락출세한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문화가 보스턴이나 뉴욕,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무렵만 해도 황무지였던 내륙의 신흥 도시에서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과 귀족의 후손들이 대등하게 뒤섞였다. 그리고 대개는 벼락부자들이 젠틀맨 집단을 하향평준화했다." "지난날 정치에 직접 관여했던 사업가들도 공직에서 손을 뗐고, 문화적 생활에서는 더욱 멀어졌다."(345-6)
10장 자조와 영적 기술
"상인의 이상이 쇠퇴하자, 대신에 자수성가의 이상이 대두되었다. 백만장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부유한 사업가가 된 무수히 많은 시골 출신 소년들의 경험과 야망을 반영한 이상이었다. 현대의 사회 동태 연구자들이 완벽하리만치 명확하게 밝혔듯이, 미국의 전설적인 입신출세 이야기는─기업의 역사를 장식하는 눈부신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통계상의 실태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이자 상징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9세기의 가장 열띤 팽창기에도 미국 산업계의 정점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부류였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도 확실히 많았다. 그들의 존재는 극적이고 감동적인 출세 이야기와 함께 신화에 실체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점에 선 사람들과는 별개로, 그만그만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도 있어서, 오히려 현실적인 성공의 목표로 여겨진 것은 이쪽이었다. 출세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의 성공 사례를 열심히 뒤져보았다."(350-1)
"19세기 말이 되면 사업 성공의 전제인 정규 교육에 대한 사업가들의 태도가─정규 교육을 적대시하고 경험을 종교적일 정도로 숭배하는 경향─크게 바뀌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대규모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대기업을 특징짓는 승진 제도는 관료적인 것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성공을 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어느새 시대에 뒤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교육 받지 못한 자수성가한 사람들, 특히 사업으로 원하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이상이 점차 현실성을 잃어가는 상황도 마지못해 직시하기 시작했다. 관료적인 사업의 세계에서 좀더 탄탄하게 출세하기 위해서는 정규 교육이 훌륭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기업 자체에 변화가 생기면서 공학, 회계학, 경제학, 법학 등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렇지만 교육의 효과를 긍정하는 태도가 곧 인문교양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대학 자체가 선발 제도 아래에서 직업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361-2)
"프로테스탄티즘은 초기 단계에서 종교 의례의 상당 부분을 폐지하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교리를 최소한으로 간소화했다. 영감 서적은 이 과정을 완료하고, 교리도 대부분 없애버렸다─적어도 그리스도교라고 부를 수 있는 교리는 대부분 없애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뿐이며, 그런 경험조차도 대개는 개인의 의지를 주장하는 정도에 그쳤다. 숙고하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모두 이룰 수 있다고 영감 관련 저술가들이 말할 때, 그 의미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목표를 세울 힘이 있고 하느님을 움직여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뉴욕 시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노먼 빈센트 필이 말할 정도로 그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은 인간과 운명을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투지를 불어 넣어 운명에 맞서서 격렬히 저항하게 하는 것이다.〉"(370-1)
11장 주제의 변주
"지식을 얻거나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불신의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지식은 특권이나 세련된 품위를 지닌 일부 특수한 사람들의 특전으로 여겨져 반감을 샀다." "물론 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 중 압도적 다수는 농업의 화학적 개량에 대해 아둔하고 자멸적인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상당수 농민들의 농사 관행은 토양을 낭비하고 고갈시켰다. 개혁가들의 계몽 시도에 대해 농민들은 〈실제적〉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이론가를 멸시하는, 〈교과서 농업book farming〉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과학이나 교과서 농업에 대한 이런 반발에 비춰보면, 교육은 (농사 현장에서 하는 실습 훈련은 제쳐둔다면) 자녀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농민들이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도 놀라울 게 없다. 농민들이 농업 교육에 기대를 품었을 수도 있지만, 학교가 많아지면 세금만 무거워질 뿐이라는 우려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376-8, 382-4)
"애초에 미국의 노동 운동은 고용이나 임금 교섭, 그리고 결국에는 그 본질적 특징이 된 파업 같은 협소한 문제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미국 노동 운동에는 언제나 부르주아 지도부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지식인들과 노동 지도자들은 노동 운동에 기대하는 바가 서로 전혀 달랐다. 지식인들은 노동 운동을 더 큰 목적─사회주의나 또다른 형태의 사회 개조─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 운동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로, 노동자 계급 자체에서 배출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지식인들은 중간계급을 멸시했는데, 대다수 노동 지도자들과 일반 숙련 노동자들은 중간계급을 선망했다. 미국노동총연맹 같은 생활 향상을 위한 조직은 지식인들의 이상주의에 조금도 호소하지 않았고, 지식인들도 언제나 그런 조직 지도부를 낮추어 보았다. 노동 지도자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한 부류라고 보는 게 제일 타당할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다수의 기업가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390-3)
"〈부르주아적〉 목표를 추구하던 미국의 조직 노동 운동이 지식인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와 비슷한 문제가 지식인들에게 실제로 큰 빚을 진 비공산당계 좌파, 특히 사회당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획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회당도 어느 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주의 숭배에 시달렸다. 당내의 빈번한 분파 싸움에서 지식인 대변자들에게는 흔히 중간계급 어용학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운동의 보루인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들과 부당한 비교를 당했다(혁명을 향한 열정이 문제가 될 때면 지식인들은 우파보다는 좌파 쪽에 서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사회주의자 지식인들 중에는 견실한 중간계급 출신자도 많고 때로는 부유한 가정 출신자도 있었다. 비판을 받은 그들은 출신 계급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이탈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이상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이런 시도는 불가피하게 모종의 자기비하나 자기소외로 이어졌다."(398-9)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미국인들이 대중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무엇보다 지성을 키우려는 열정이나 학식과 문화 자체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오히려 교육이 가져다주는 정치적·경제적 이득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교육 개혁가들은 교육의 역할을─높은 문화를 이룩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서─강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전〉 수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에 의한 정부 아래서는 국민을 위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념을 내걸고 그것을 미국인들의 마음에 심어놓았다. 교육에 대한 비용 지출을 꺼리는 부자들에게 그들은 대중 교육이야말로 사회의 무질서나 숙련되지 않은 무지한 노동력, 추악한 정치, 범죄, 급진주의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중하층 계급에게는 대중 교육이야말로 민중의 힘의 토대이자 기회 획득의 수단, 나아가 성공을 둘러싼 경쟁에서 평등한 조건을 마련하는 위대한 장치라고 말했다."(419)
"미국 역사를 보면, 학교 교사가 학생을 지적인 삶으로 이끄는 본보기 역할을 한 예가 별로 없었다. 교사 스스로도 그다지 지적이지 않은데다 정작 전수해야 할 기술도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자질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임금이 낮고 교사의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상황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착취나 위협 같은 말을 연상시키게 되었다. 미국의 교사들이 보수나 평가 면에서 우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교사에 대해 존경심보다는 동정심을 더 느낀다. 그들은 교사의 급여가 적다는 것을 알며, 교사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야망이 있고 유능한 청소년들은 교직을 선망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언제까지나 평범한 교사만 나타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교사는 지적인 삶과 그에 따른 보수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러나 교사라는 존재는 본의 아니게 지적인 삶을 전혀 매력 없어 보이게 만든 셈이다."(426-8)
13장 생활 적응의 길
"생활적응 운동은 어느 의미에서는 2차대전 이래 미국 청소년들에게서 보였던 두드러진 의욕 저하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그 이상이어서, 1910년에 시작된 반지성주의적 운동의 가치관을 사회의 주류로 만들려는 교육 지도자들이나 교육청의 시도였다." "개혁 운동의 대변자들에 따르면, 고교생의 20퍼센트가 대학 진학을 희망했고 또다른 20퍼센트는 기능직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다. 나머지 60퍼센트는 양쪽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생활적응론자들에게는 생활적응 교육이 필요한 60퍼센트의 아이들이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가 분명했다. 그 학생들은 대체로 미숙련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부모들의 소득은 낮고 문화적 환경도 열악하다. 학교도 남들보다 늦게 들어가고, 학습 진도에서 계속 뒤처져 성적도 나쁘다. 지능 검사나 학업 성취도 검사에서도 점수가 낮고, 학교 공부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정서적으로 미숙하여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다."(466-7)
"교육청은 〈이런 특질을 거론한다고 해서 이들이 열등하다고 단언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교육자들이 주장하는 이상하고도 자멸적인 〈민주주의〉 해석에 따르면, 가난한 문화적 환경 속에 있는 아이들이 미숙하고 불안정하며 신경질적이고 학습 진도가 뒤떨어진다고 해서, 좀더 좋은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나 성숙하고 안정되며 자신감과 재능까지 갖춘 아이들에게 〈결코 꿀릴 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말로 〈민주주의〉에 아첨함으로써, 그들은 미국 청소년의 다수를 그저 교육 불가능한 존재로 단정한 사실을 놀라운 확신을 담아 은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운한 다수자에게는 어떤 교육이 적합할까? 그것은 지성의 개발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나 소비자, 시민이 되기 위한 실천적인 훈련이다." "결국 생활적응 교육자들이 주장한 바는 지적 훈련은 보통의 청소년들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467-8)
14장 어린이와 세계
"루소와 페스탈로치, 프뢰벨을 경외한 듀이와 그의 세대의 교육 개혁가들이 가다듬은 교육 관념은 개인의 발달─감수성이나 상상력, 개인적 성장이 일차적으로 문제시된─과 사회 질서의 필요성─특수 지식이나 규정된 관습과 도덕, 전통이나 제도에 맞춰진 개인적 소양이 요구된다─을 대립시킨 점에서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그들은 인위적인 사회에 맞설 자연 그대로의 어린이들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어린이는 하늘의 영광을 안고 이 세상에 온 존재이며, 교사들의 신성한 임무는 어린이들에게 이질적인 규칙을 들이밀려는 시도에 가담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어린이의 생활은 자연이나 활동에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즉, 어른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전통을 흡수하거나, 어린이의 욕구·관심보다도 성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서나 기술 습득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500-1)
"〈교육이 곧 성장〉이라는 개념은 듀이의 몇몇 추종자들에 의해 현대 교육 역사상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은유가 되어버렸다." "성장이라는 것은 본래 생물학적인 은유이고 개인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 개념은 정신을 교육의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떼어내 교육의 개인적 기능으로 돌려버리는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의 관심과 대립되는 어린이의 관심에 관한 주장이 되었던 것이다. 성장 개념 때문에 교육 사상가들은 부당하게 두 가지를 대립시키게 되었다. 즉,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지시하는 내부로부터의 성장은 선이고, 외부로부터의 틀에 박은 행위는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종착점end은 상당 부분 유전적 요인에 의해 미리 정해지는 반면, 교육의 목적ends은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듀이는 양측이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육은 곧 성장〉 개념은 어린이를 찬미하고 사회 문제를 무시하는 흐름을 낳았다."(507-8)
"교사들에게는 여전히 그들 나름의 지도에 나서거나 어린이들의 충동이나 욕구를 어느 정도 구별하도록 확고한 의무가 주어졌지만, 방향을 잡아주는 지표는 제공되지 않았다." "듀이는 〈어린이의 천성이 그 나름의 운명을 실현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런 표현은 시간상으로 떨어진 지점에 어린이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종국 목표나 도달점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훗날의 이른바 혁신주의 교육은 수단에 관해서는 매우 풍부하고 독창적이지만, 종국 목표에 관해서는 대단히 무익하고 혼란스러웠다. 교수 기법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무척 귀중한 것이었지만, 그 기법을 활용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입장이 모호했고 종종 무정견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관심을 학습 쪽으로 돌린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초기에 눈부신 효과를 거두었지만, 아이들의 관심에 의해 학습이 밀려난 경우도 많았다. 혁신주의 교육의 기법이 확립됨에 따라 그 도달점은 불분명해졌던 것이다."(509-10)
"앞선 교육 개혁가들은 성인 사회가 교육의 종국 목표를 세우고 그에 걸맞은 교과과정을 고안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듀이는 더욱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와 교육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런 시각이 낳은 한 가지 결과는, 그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유한계급과 노동자 계급에 관한 일반적 논의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의 구체적인 계급 구조나, 이 구조와 교육 기회의 관계, 또는 사회적 유동성을 높이고 계급 간 장벽을 허물기 위한 기회 확대의 수단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요컨대, 교육과 민주주의의 문제에 관한 그의 시각은─용어를 가장 넓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한─경제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이거나 정치학적이지 않았다. 대체로 심리학적 혹은 사회심리학적인 것이었다. 듀이의 이론에서 민주적 교육의 종국 목표는 어린이들을 사회화함으로써 추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경쟁적인 존재에서 협력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마음이 봉사 정신으로 〈가득찰〉 것이었다."(515-6)
6부: 결론
15장 지식인: 소외와 체제순응
"지식인들은 거부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또한 이런 거부는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오랫동안 사회에 대한 반응 패턴을 만들어왔다. 이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은 이제 소외야말로 자신들에게 걸맞은 명예로운 지위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거부나 공공연한 적의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반응에 대한 대처법을 익혔고, 또 그것을 자신들의 숙명이라고까지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소외감의 상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점차 인정받고 편입되고 활용됨에 따라 그저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고, 창의성과 비판 정신을 지닌 참으로 유용한 인간은 사라져간다─기세 넘치는 젊은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런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처지에서 오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반지성주의를 증오하고 그것을 우리 사회의 심각한 약점이라고 보면서도, 지식인들은 스스로가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에 괴로워하고 자기 내부에서 훨씬 더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535-6)
"반지성주의는 이 나라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지식인들은 양립 불가능한 시도에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믿는 선량한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가 끊임없이 자아내는 문화의 속류화에 저항하려고 했다. 자기 계급의 엘리트적 성격과 자신의 민주적 열망 사이의 해소하기 어려운 갈등에 미국의 지식인들이 솔직하게 대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계급 간의 장벽을 끊임없이 공격하면서도 특별한 존중을 받고자 갈구하는 작가들은 대체로 갈등에 정면으로 대응하려 하지 않는 단적인 경우이다. 지식인과 민중의 동맹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적인 지식인 계급은 때로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르든 더디든 지식인들의 정치적·문화적 요구에 대중이 응해주지 않으면, 지식인들은 상처 입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대중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훼손하지 않는 정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555-6)
"사실 가장 버거운 이상과 당면한 야망이나 이해관계 사이의 딜레마에서 어떤 식으로든 괴로워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극적인 곤경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곤경은 지식인에게 특수한 형태로 집약되어 있다." "진지한 사색을 문제제기가 아니라 일종의 오락거리로 여기는 풍조에 작가들은 반발한다. 동시에 작가들은 종종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문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타협─그것 자체는 피할 수 없다─이 자신의 메시지가 지닌 힘을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자기 역시 자신이 비난하는 독자들과 똑같아진 것은 아닌지 의아해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솔직한 태도는 일종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 절망은 저절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에는 〈지위〉나 태도를 추구하게 된다.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도덕적인 시련을 겪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은 얼마나 부정적인 사고가 가능한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느낀다."(569, 572)
"올바른 소외의 스타일이란? 비트족─온갖 사회적 논제를 대할 때 심각한 논쟁에서 발을 빼고 그것을 장난스러움으로 치환하는─과 힙스터─자신들이 선택된 소수자라는 자각을 품고 '정신병적 현명함'을 동경하는─그리고 정치적 좌파의 의견은 서로 대립된다. 하지만 그들은 바람직한 소외의 태도나 스타일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는 공통의 확신을 가졌고, 그럼으로써 예술가의 개성과 창의성을 해방시키거나 사회비평가의 비판 능력을 유지시키며 스스로를 부패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외는 그 자체로 일종의 가치라는 그들이 확신에는 낭만주의적 개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가지의 역사적 원천이 있다." "창조력이 풍부한 지식인은 남들과 〈공동으로 세계와 맞서야 하는〉 보헤미아에 의지하기보다는 보통 자기 혼자서 세계와 맞서는 데 필요한 자질을 키우려고 한다. 공동으로 세계와 맞서는 것은 정치적 전술이지만, 혼자서 세계와 맞서는 것은 창조적인 태도의 특질인 것처럼 보인다."(578, 582)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여론을 움직여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반면에 권력과 결합된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지식인 공동체의 사고에 따르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역할은 반드시 서로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양측 모두 모종의 개인적·도덕적 위험이 걸려 있다. 또한 양측 모두 운을 하늘에 맡긴 개인적 선택을 보편적 규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권력 비판자들에게 특징적인 지적 결함은 권력이 어떤 한계 내에서 행사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특징적인 도덕적 결함은 스스로의 순수함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것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으면 모종의 순수함은 쉽게 확보된다. 한편, 권력자에게 조언하는 전문가에게 특징적인 결함은 비판의 원천이 되는 독립적인 사고 능력을 발휘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전문가는 권력의 관점을 흡수함으로써 권력을 떨쳐버리는 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지적 분별력을 상실할 위험이 상존한다."(586-7)
"모든 지식인들이 권력에 봉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과 관계를 맺는 지식인들이 지식인 공동체와의 연대감을 모조리 빼앗긴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비극일 것이다." "어쨌든 다양한 장점을 이해하려면 솔직함과 관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회에서도 이런 미덕을 발견할 수는 있다. 자유로운 문화의 붕괴나 고급문화의 소멸에 관한 독단적이고 묵시록적인 예언은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것은 저항하려는 의지나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자신감보다도 이런 예언이 자기연민이나 절망감을 퍼뜨릴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현대의 조건 아래서 다양한 선택의 길이 차단될 가능성은 있다. 미래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특정 신조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역사의 저울을 좌우하는 한,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믿으며 산다."(588, 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