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출출할 땐, 주기율표 - 먹고사는 일에 닿아 있는 금속 열전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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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칸듐: 야구장 간식을 고르며 Sc


합금을 만들면 왜 성능이 좋아질까? 세상의 모든 물체처럼 금속 덩어리도 크게 확대해 보면 원자라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원자들은 왜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그렇게 덩어리지어 붙어 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자 속에 있는 전자는 ⊖전기를 띤다. 바로 그 전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두 원자가 달라붙게 해 준다. 전자 하나가 두 원자를 휘감아 돌고 있으면 두 원자는 그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서로 붙어 있으려고 할 것이다. 원자의 중심부 핵에는 ⊕전기가 있으니 ⊖전기를 띤 전자에 잘 이끌릴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와 반대로 원래 붙어 있던 원자들이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다. 대체로 원자들이 잘 붙어 있느냐, 떨어지기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원자가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바뀌는데, 화학은 바로 그런 변화를 연구하는 일이다. 9-10)


원자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개수가 다르고, 전자가 들어 있는 모양도 다르다. 수소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개 있고, 헬륨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2개 있고, 알루미늄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3개 있으며, 스칸듐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 21개가 있다. 또한, 그 전자들이 주로 원자의 겉면 쪽을 돌아다니는지, 아니면 원자의 중심부 쪽을 돌아다니는지도 원자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 잘 맞는 성질을 가진 원자들을 적절히 섞어 놓으면 원자 사이를 밀고 당기며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원자들을 최대한 잘 묶어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튼튼한 합금이 만들어진다. 필요하다면 원자들이 잘 들러붙지 않는 조합으로 합금을 만들어서 쉽게 녹이고 가공하기 편리한 재료를 얻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알루미늄에 스칸듐을 약간 더해서 잘 섞어 주면 그냥 알루미늄 덩어리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재질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야구 방망이가 바로 스칸듐 합금 방망이다. 10)


22 타이타늄: 외계인 초코볼을 집어 들며 Ti


색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보통 흰색을 띠는 이산화타이타늄을 일컫는 경우가 많듯이, 금속 재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타이타늄 합금을 줄여서 말한 것일 때가 많다. 골프채 같은 운동기구에서 군사용 무기까지 타이타늄 합금 재료의 용도는 상상외로 넓다. 가볍고 튼튼하며 녹이 잘 슬지 않는 타이타늄은 사람 몸과 관련된 부품을 만드는 데도 많이 사용된다. 수술로 사람 몸에 장치하는 부품이 쉽게 상한다면 수리나 교체를 하느라 거듭 수술을 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너무 무거우면 사람이 움직이는 데 힘이 들므로 가벼울 필요도 있다. 아울러 사람 몸은 6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 물과 산소가 닿더라도 쉽게 녹슬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타이타늄을 잘 이용하면 그런 소재를 만들 수 있다. 치아 임플란트에서도 가짜 이를 잇몸에 고정하는 뿌리 부분을 타이타늄을 이용해서 만들곤 한다. 19-21)


타이타늄은 땅에 있는 웬만한 금속 중에서도 양이 무척 풍부한 편이다. 우주 전체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수소인데, 지구의 땅에는 수소보다도 타이타늄이 더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학 분야에서 대단히 유명한 치글러-나타Ziegler-Natta 촉매가 타이타늄을 가공해서 만든 물질이라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치글러-나타 촉매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플라스틱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석유를 가공해서 뽑아내는 에틸렌이라는 기체에 치글러-나타 촉매를 조금만 떨어뜨려 주면 에틸렌 기체가 마법처럼 서로 엮여 굳으면서 플라스틱으로 변한다. 이렇게 해서 만드는 물질이 비닐봉지부터 볼펜까지 흔하게 쓰이는 대표적인 플라스틱 폴리에틸렌polyethylene이다. 타이타늄의 가장 큰 단점은 가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타이타늄을 철처럼 다루면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 어찌 보면 너무 튼튼하고 강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22-3)


23 바나듐: 생수 맛을 음미하며 V


원래 바나듐은 금속 제품의 재료를 만들 때 조금씩 섞어 넣는 물질로 유명했다. 금속 공업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매년 8,000t 이상의 바나듐을 수입한다. 특히 널리 사용되는 금속인 철 제품을 만들 때 바나듐을 조금 섞으면 철이 더 튼튼해지고 충격을 잘 흡수하며 열에도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강철에 바나듐을 1% 정도만 섞어도 성질이 확 좋아진다고 하는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이현복 선생이 쓴 글에 따르면 고속도공구강high speed steel이라는 재료는 “바나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바나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고속도공구강은 다른 금속을 깎고 자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 강철 재료를 말한다. 즉, 바나듐을 섞은 강철 덕분에 좋은 공구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공구로 금속 재료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나듐이 있어야만 세밀하고 정교한 금속 부품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 그런 부품이 들어가는 정교한 기계도 만들 수 있다. 26)


화학물질이 서로 반응을 하고 안 하고는 물질에 들어 있는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바나듐은 금속인 만큼 잘 움직이는 전자를 꽤 많이 품고 있어서 잘만 사용하면 독특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희귀한 물질도 아니어서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다. 자동차 매연이나 굴뚝 연기 성분 중에 이산화황이라는 해로운 물질이 있다. 이산화황은 몸에 좋지 않은 스모그의 원인이자 산성비의 주원인으로도 지목되는 물질이다. 공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굴뚝을 통과하는 연기를 공기 중에 바로 내뿜지 않고 물에 한 번 적셔서 그 속의 오염 물질인 이산화황을 잡아채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 많은 이산화황을 어쩌면 좋을까? 이럴 때, 모아 놓은 이산화황에 오산화바나듐을 넣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황산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황산 또는 이산화황 계통의 성분을 빼내고 남은 물질은 그 물질이 필요한 곳에 돈을 받고 팔 수 있다. 29)


24 크로뮴: 쌀밥을 한술 뜨며 Cr


오랫동안 철로 만든 숟가락이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은 바로 녹이 잘 슨다는 문제 때문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최대한 물에 닿지 않도록 하거나 기름칠을 해서 녹스는 것을 피해 볼 수 있겠지만, 항상 음식물에 닿고 입에 넣고 빨아야 하는 숟가락, 젓가락은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철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도 식기를 만드는 데는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 초쯤에 유럽의 과학기술인들이 철에 크로뮴chromium이라는 금속을 조금 섞어 철과 굉장히 비슷하면서 녹이 슬지 않는 합금을 만들었다. 그 기본 원리는 철에 녹이 슬기 직전에 크로뮴 성분이 먼저 녹슨 상태로 변하면서 미세하게 철을 뒤덮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얇은 크로뮴 막이 철을 감싸서 철이 공기나 물과 닿아 녹스는 것을 막아 버린다. 녹이 스는 문제만 해결되면 철은 숟가락, 젓가락에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그 덕택에, 한국의 금속 식기는 놋쇠에서 스테인리스강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34-5)


주변 원자와 달라붙는 데 특히 요긴하게 활용되어서 그 원자의 성질을 따질 때 잘 살펴봐야 하는 전자들을 원자가전자valence electron라고 부른다. 크로뮴 원자 하나가 다른 원자와 연결되어 덩어리를 이룰 때는 크로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3개가 쓰이기도 하고, 6개가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크로뮴은 원자가전자가 3개일 때도 있고, 6개일 때도 있다. 전자 3개를 이용해서 주변의 다른 원자와 연결된 크로뮴을 “3가 크로뮴”이라고 하고, 전자 6개를 이용해서 연결된 크로뮴은 “6가 크로뮴”이라고 표현한다. Cr3+, Cr6+라고 쓰기도 한다. 여기서 Cr6+라는 말은 크로뮴 원자 하나가 ⊖전기를 띤 전자 6개를 소모해서 주변의 원자들과 달라붙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보다 ⊖전기가 6만큼 부족해졌고, 이에 따라 ⊕전기를 6만큼 띠게 되었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Cr3+는 3가 크로뮴이라는 뜻이고, Cr6+는 6가 크로뮴이다. 둘 중에 몸에 병을 일으킬 수 있어서 나쁜 중금속 물질로 손꼽히는 것은 6가 크로뮴이다. 39-4)


25 망가니즈: 깻잎나물을 무치며 Mn


과거에 망간이라고 불렸던 망가니즈는 금속인 만큼, 철 덩어리를 만드는 제철소에서 가장 중요하게 활용한다. 철의 성분을 조절한다는 말은 철의 성질을 원하는 정도로 맞추고, 철이 균일하게 나오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제일 기본으로 따져야 할 문제는 철에 탄소가 얼마나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탄소가 많을수록 철이 단단해지는데,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너무 딱딱해서 오히려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탄소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아주 딱딱한 철을 무쇠라고 하고, 탄소가 적당히 들어 있어서 튼튼하고 질긴 철을 강철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쇠는 강철과 비교하면 너무 잘 부서진다. 그러니까 무쇠 팔, 무쇠 다리보다는 강철 팔이 더 튼튼한 셈이다. 고로에서 녹아 나온 쇳물을 이용해 보통 철을 강철로 만드는 과정에 망가니즈를 사용한다. 망가니즈는 녹은 쇳물이 굳을 때 공기 거품을 제거해 주는 데도 도움이 되며, 철을 부서지게 하는 불순물인 황을 없애는 데도 도움을 준다. 44)


망가니즈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은 바다 밑이다. 왜 바다 밑에 망가니즈 덩어리가 있을까? 바닷속에 사는 고래나 상어 같은 생물 또는 다른 몇몇 작은 생물들이 죽으면 그 뼈와 이빨, 껍질이 물속에 가라앉는다. 마침 그곳이 충분히 깊은 바다라면 그 이빨 조각, 껍질 조각이 바다 밑에 가라앉을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바닷물에 드러난 이빨의 겉면 성분과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아주 약간의 여러 금속 성분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운이 좋으면 그중 일부는 바닷물에 들어 있는 아주 적은 양의 망가니즈 계통 성분을 서서히 끌어당기는 물질로 변하기도 한다. 이렇게 변한 상어 이빨 따위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으면, 그 상태로 아주 천천히 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망가니즈를 겉면에 붙이고 또 붙이게 된다. 이렇게 망가니즈 성분을 많이 품고서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덩어리를 망간단괴라고 한다. 망간단괴 속에는 망가니즈뿐 아니라 니켈, 구리 등 다른 금속 원소도 포함되어 있다. 48)


26 철: 도다리쑥국을 기다리며 Fe


철은 핏속에서 붉은색을 내는 물질인 헤모글로빈hemoglobin에 들어 있다. 사람의 몸 구석구석에 꼭 필요한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헤모글로빈이 맡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쉬면 허파 속에 퍼져 있는 혈관 속을 흐르는 핏속의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 피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진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붙여 왔다가 떼어 주는 일은 쉼 없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붙고 떨어지는 일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숨을 헐떡이더라도 들이마신 산소가 정작 필요한 부위로 퍼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몸속에서 헤모글로빈 대신에 다른 물질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하는 생물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도 모른다. 문어나 오징어의 경우, 철이 들어 있는 헤모글로빈 대신에 구리가 들어 있는 헤모시아닌hemocyanin이라는 물질을 활용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문어나 오징어의 피는 붉은 색이 아니다. 헤모시아닌 계통의 물질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51-2)


핵융합은 한 번 일어나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 별 속에서는 이런 일이 수억 년, 수십억 년 동안 이어진다. 그러면서 한 원소가 다른 원소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원소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단 한 가지 이상한 걸림돌 같은 현상이 있다. 그게 바로 철이다. 원소들이 뭉쳐서 새로운 원소들이 생겨나다가 철이 만들어지면, 그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철은 거기에 무슨 다른 원소를 억지로 갖다 붙여 핵융합을 일으키려 해도, 다른 원소들의 핵융합이 일어날 때만큼 열을 내뿜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을 더 차갑게 식힌다. 따라서 일단 철이 생겨나면, 핵융합으로 발생한 열이 연달아 핵융합을 일으키는 현상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철은 별이 핵융합으로 빛을 내면서 여러 원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지며 열의 연결 고리를 끊는 물질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저렇게 많은 별이 빛나는 만큼, 별이 빛을 내고 남기는 잿더미인 철도 자연히 우주 곳곳에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53)


27 코발트: 김밥을 말며 Co


비타민은 몸에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전혀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병이 들므로 항상 조금씩은 챙겨 먹어야 한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곡식이나 채소에서는 좀체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개 고기에 들어 있는 영양소로 간주한다. 원소로 따져 보면 우리 몸의 성분은 대체로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소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다른 생물도 대개 비슷하다. 비타민 중에서도 비타민A, 비타민C 등은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흔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너무나 독특하게도 코발트cobalt라는 금속 성분을 품고 있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고기를 별로 먹지 않아도 비타민B12 부족 증상을 덜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답은 해조류에 있었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조류를 많이 먹는 편이다. 맛도 독특하고 비타민B12처럼 고기가 아니고서는 찾기 힘든 귀한 영양소도 들어 있는 김은 한국의 개성 있는 식재료다. 59-61)


코발트60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어려운 물질로, 보통 원자력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다. 코발트60은 보통 자연에서 캐내는 코발트보다 무게가 약간 더 나가는데, 59:60 정도로 무겁다. 이름이 코발트60인 것 역시 그런 성질 차이 때문이다. 코발트60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질은 방사선을 꽤 긴 시간 동안 강하게 내뿜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사선을 쏘아 파괴해야 하는 물질이 있을 때 코발트60을 그 곁에 갖다 놓으면 없앨 수 있다. 이 때문에 196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사선 치료 방법을 이용해서 암을 치료하려고 할 때, 바로 코발트60을 활용했다. 코발트60을 최대한 암세포 가까이 두면 코발트60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암세포를 파괴하도록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소독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할 때도 소독하고 싶은 물건을 코발트60 근처에 놓아두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미생물을 파괴해 버린다. 코발트60은 이렇듯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질이다. 65)


28 니켈: 초콜릿을 조심하길 Ni


과거에 니켈은 철을 만들 때 성질을 좋게 하려고 조금 섞어 넣는 용도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철에 크로뮴을 섞으면 녹슬지 않는 강철이라는 뜻의 스테인리스강이 되는데, 스테인리스강을 만들 때 니켈도 약간 넣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니켈의 새로운 용도가 생기면서 산업계에 니켈이 한층 더 많이 필요해졌다. 바로 배터리를 만들기 위한 용도다. 특히 한국의 배터리 회사들은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가니즈를 함께 이용하면 가벼우면서도 오래가는 전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로 NCM(Nickel-Cobalt-Manganese) 배터리다. NCM배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본래 코발트였다. 코발트를 많이 넣어 주면 성능을 끌어 올리기에 유리했다. 그런데 코발트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한국 회사들은 배터리를 만들 때 코발트를 줄이고, 그보다 구하기 쉬운 니켈을 많이 넣는 방법을 다양하게 연구해 왔다. 이렇게 니켈 성분을 많이 넣은 배터리를 흔히 하이니켈배터리라고 부른다. 73)


니켈과 철을 적절히 섞어 만든 재료 중에는 열을 받아도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높아지면 크기가 좀 불어나고 온도가 낮아지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밀 가공을 해야 할 때 온도에 따라 크기가 자꾸 변하면 정확하게 작업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온도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은 니켈계 재료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바invar라고 하는 재료인데, 보통 철 64%에 니켈 36%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니켈 함량 36%를 강조하여 FeNi36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니크롬선nichrome wire을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니켈의 소중한 용도다.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서 가느다란 선을 만들면 전기가 계속해서 쭉쭉 흐르기는 하는데, 어느 정도는 저항 때문에 전기가 잘 안 흘러서 열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이 선에 전기를 흘려 주면 주변을 뜨겁게 데울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이것을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 만든 선이라고 해서 니크롬선이라고 부른다. 74-5)


29 구리: 꽃게를 손질하며 Cu


구리는 문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금속이다. 철은 녹는 온도가 1,500℃가 넘는 데 비해, 구리는 1,080℃ 정도만 되면 녹아내린다. 그만큼 녹여서 가공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사람들에게는 구리가 사용하기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구리가 철보다 덜 녹슨다는 장점은 현대에도 요긴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 건물을 지을 때 물이 통과하는 파이프로는 구리로 만든 관, 즉 동파이프를 사용하면 좋다. 동파이프를 난방용으로 바닥에 묻어 두면 뜨거운 물이 돌 때마다 금속인 구리가 열을 잘 전달해서 바닥이 금방 따뜻해진다. 게다가 구리가 철보다 약하기 때문에 철로 된 공구로 자르거나 두들기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 외에도 조선 시대에 금속활자를 사용해 책을 인쇄할 때가 있었는데, 이때도 구리로 금속활자를 만들곤 했다. 여기에 청동을 비롯해 구리와 다른 금속을 섞어 만드는 오동, 백동 등의 재료까지 합치면 용도는 더욱 많아진다. 79-80)


주기율표에서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끼리는 성질이 비슷하다.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은 같은 족group에 속한다는 말도 자주 쓴다. 그런데 주기율표를 보면 구리 아래에 은이 있고 은 아래에 금이 있다. 구리와 금의 닮은 점으로 녹이 잘 슬지 않는 성질을 꼽는다면, 구리와 은의 닮은 점으로는 전기가 잘 통하는 성질을 꼽을 수 있다. 구리는 은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전기를 아주 잘 전달하는 재료다. 그러면서 가격은 구리가 은보다 훨씬 더 싸기 때문에 예부터 구리로 만든 가느다란 선이 전기를 전달하는 재료로 자주 쓰였다. 그 때문에 구리선이라고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전선의 대표로 꼽힐 정도였다. 철이나 석유도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유용한 자원이기는 하지만, 철은 가격이 흔들리기에는 너무 흔하게 구할 수 있고, 석유는 반대로 너무 귀해서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가격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리만큼 세계 경제를 잘 보여 주는 물질도 없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80-1)


30 아연: 굴전을 부치며 Zn


아연은 전기적으로 다채롭고 특이한 성질을 내는 금속 원소다. 사람 몸속에서도 복잡하고 특이한 물질을 만드는 데 조금씩 활용된다. 특히 몇 가지 호르몬을 만드는 화학반응에 아연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음식으로 먹은 재료를 소화해서 분해하여 다양한 원자들을 얻고, 그 원자들을 재조립해서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을 만들어 낸다. 호르몬도 이런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해내려면 여러 가지 재료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역할을 하는 기계 장치 내지는 도구에 해당하는 물질도 몸속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준비 작업에 아연이 아주 약간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아연이 부족하면 몸에서 호르몬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도구를 제대로 만들 수 없게 되고, 결국 호르몬도 필요한 만큼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식 중에서도 고기나 조개류에 아연이 많다고 하며, 곡식 중에서는 통곡물에 아연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아연 성분이 많은 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굴일 것이다. 85)


현대에는 구리와 아연을 주성분으로 한 합금 소재를 황동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 쓰던 놋쇠 중에는 황동이 아닌 것도 있지만 황동도 그 일종으로 포함된다고 보는 게 맞다. 황동을 영어로는 brass라고 하는데, 트럼펫이나 트롬본 같은 금관 악기를 많이 사용하는 악단을 브라스 밴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악기를 흔히 황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동은 구릿빛을 띤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 때 순수한 구리 못지않게 자주 쓰인다. 아연의 양을 잘 조절하면 구리만 사용할 때보다 훨씬 딱딱하고 튼튼한 재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금속 재질 물건 중에 반짝이는 구릿빛이나 황금색 비슷한데 순수한 구리나 금은 아닌 것 같을 때, 구리와 아연이 섞인 황동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총알은 튼튼하면서도 녹슬지 않고 오래가야 하며, 열과 압력을 잘 견뎌야 한다. 그런데 총알의 겉면인 탄피 부분은 황색을 띤다. 이것은 탄피를 황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7-8)


31 갈륨: 쌈 채소를 씻으며 Ga


LED는 반도체의 일종으로,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는 성질이 있는 특별한 물질을 이용해 만든다. LED라는 부품이 개발된 초창기부터 빨간색 빛을 뿜는 제품은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빨간색 빛을 내는 전자 제품이 그렇게 흔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LED로 흰색 빛을 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런데 흰 빛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빛이 섞인 결과가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파란색 빛을 내는 재료를 만들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주로 일본 과학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되었다. 당시 갈륨gallium이라는 금속 물질과 질소의 원자를 규칙적으로 잘 엮어 만든 물질을 이용하면 파란색 LED의 재료로 쓸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갈륨과 질소를 잘 엮는 작업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화학 회사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슈지なかむらしゅうじ와 동료들이 질화갈륨 결정을 만드는 절묘한 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LED 시대가 열렸다. 92-4)


갈륨은 석탄이나 금처럼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을 캐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갈륨은 다른 원소들과 반응한 상태로 이곳저곳에 조금씩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다른 금속을 돌 속에서 뽑아내고 점점 순수하게 정제하는 과정에서 불순물로 걸러낸 물질을 분리해 갈륨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광산에서 캔 돌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공장이 많은 곳에서 갈륨도 많이 생산된다. 사실 순수한 갈륨 덩어리는 좀 웃기고 재미난 물질이다. 갈륨은 금속치고는 매우 쉽게 녹아내리는 물질이어서 차가울 때는 꼭 철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30℃ 정도의 온도만 되어도 은색 페인트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해 버린다. 그래서 갈륨 덩어리로 칼이나 바늘을 만들어서 누구에게 써 보라고 건네주면, 그것을 받은 사람이 막상 사용하려고 할 때 체온 때문에 녹아 버려서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모양을 잡아 준 뒤에 찬 바람만 좀 쐬어 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튼튼한 강철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96-8)


32 저마늄: 도라지무침을 먹으며 Ge


게르마늄이라고도 부르는 저마늄은 최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의 주원료 물질이었다. 저마늄 덩어리는 전기가 통할 듯한 특성을 많이 갖춘 금속이기는 한데, 막상 전기를 흘려 보면 그다지 잘 통하지는 않아서 부도체에 가깝기도 한 애매한 물질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이 어중간한 성질을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전자 부품을 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진공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더 좋은 부품을 개발했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던 저마늄에 불순물을 조금 섞어 넣으면 평소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다가 조건이 맞을 때만 전기가 흐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잘 활용하면 릴레이를 대신할 수 있고, 진공관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트랜지스터라는 부품이다. 다시 말해 트랜지스터도 “스위칭”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진공관보다 크기도 훨씬 작고, 고장도 잘 나지 않고, 전기도 훨씬 덜 들었다. 이렇게 개발된 저마늄 트랜지스터를 일반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시작으로 본다. 102-4)


# 릴레이 : 전기신호가 약해지는 지점에 기계 장치를 설치해 본래의 전기 신호를 계속 연결하는 방식, 스위칭도 비슷한 개념이다. 


요즘은 트랜지스터 대신 저마늄이 사용되는 다른 분야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는 규소로 만든 보통 유리보다 적외선을 잘 통과시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적외선을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카메라를 만들 때 저마늄 유리 렌즈를 자주 사용한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기능은 어두운 밤에도 물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장비나, 열을 내뿜는 물체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관찰하는 열화상 카메라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가 활용되는 또 다른 분야도 있다. 요즘 인터넷 통신을 이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로 광케이블이 있는데, 광케이블은 광섬유라는 재료로 만든다.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그 정보는 광섬유를 따라 흘러간다. 전선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기를 전달해 준다면, 광섬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빛을 전달해 준다고 보면 된다. 과학자들은 광섬유를 만들 때 약간의 저마늄을 같이 조합하면 성능이 더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04-5)


33 비소: 곶감 사건을 생각하며 As


비상이 사람에게 독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비소砒素라는 원소 때문이다. 비소는 꼭 산소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 몸에 독이 될 가능성이 큰 물질이다. 이것은 꽤 특이한 성질이다. 탄소의 경우, 탄소와 산소 원자가 하나씩 연결된 물질은 일산화탄소이며, 이것은 연탄가스 중독의 원인이 되는 대표적인 위험 물질이다. 하지만 탄소와 산소, 수소 원자가 다른 형태로 일정하게 연결된 탄수화물은 달콤한 음식이 된다. 염소 역시 염소끼리만 모여서 염소 기체를 이루면 대표적인 독가스 무기가 되지만, 염소와 소듐이 1:1로 붙어 있으면 음식 맛을 내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소금이 된다. 그런데 비소는 다른 원소를 어떻게 활용해서 무슨 물질을 만들든 대부분 사람 몸에 해를 끼치는 위험한 물질이 된다. 더군다나 중금속 물질은 주로 사람 몸에 어느 정도 쌓였을 때 피해가 나타나지만, 비소는 적은 양으로도 사람 목숨을 빠르게 빼앗는 위험한 물질이 되는 경우가 많다. 109-10)


지금은 비소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현대에도 우연한 비소 중독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비석이나 웅황을 구해서 사용했고 비상을 제조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소 성분은 돌과 흙 속에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렇기에 유독 비소가 많은 지역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물을 마시거나 그런 땅에서 농작물을 길러 먹는다면, 물이나 작물에 녹아든 비소를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먹게 될 수 있다. 개중에 몇몇 농산물은 특히 비소가 잘 쌓이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하필 이런 농산물을 비소가 있는 땅에 심어 기르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끔은 수입하는 농산물 중에 검사 결과 비소가 나온 것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물을 파고 지하수를 개발해서 쓸 때, 그 물속에 비소가 있는 것을 모르고 사용하다 피해를 보는 곳이 많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등이 자주 언급되는 곳들이다. 113-4)


34 셀레늄: 조기를 구우며 Se


양자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물체가 가진 에너지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 일정한 단계별로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속 20km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있다고 해 보자. 이 차를 운전하면서 가속 페달을 잘 밟으면 시속 22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고, 시속 25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으며, 시속 31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양자이론을 적용하면 그렇지 않다. 주변 조건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바꿀 수 있는 단계가 정해져 있다. 시속 20km에서 더 빠르게 달리게 하면 그다음 단계인 시속 30km가 되어야만 한다. 그 사이의 단계는 없다. 반대로 더 느리게 달리게 하면 그 전 단계인 시속 10km가 되어야만 한다는 식이다. 양자점은 국내에서는 흔히 약자로 QD(quantum dot)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양자점의 첫 번째 유용한 특성으로 꼽는 것은 에너지가 단계별로 정확히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을 잘 활용하면 정확하게 정해진 색깔의 빛만 내뿜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119)


양자점을 만들려면 고작 수십 나노미터, 그러니까 10만분의 1mm 정도밖에 안 되는 극히 고운 가루를 일단 만들어야 한다. 그런 물질을 대량 생산해서 사용하려면 그것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게 곱고 고운 가루를 오차 없이 항상 같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양자점을 어떤 부품이나 장치에 넣어 활용하려면 양자점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에 다른 물질을 살짝 발라서 씌워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핵core 주위에 껍질shell을 씌운다고 말한다. 이때 그 작디작은 가루 알갱이 하나하나마다 보호용 껍질이 제대로 씌워지지 않으면 실패다. 껍질을 씌운 뒤에는 이 알갱이들을 다른 물체에 고정하고 연결해서 쓰기 위한 일종의 갈고리나 접착제 역할을 하는 배위자ligand라고 하는 물질들을 껍질 위에 붙여 줘야 한다. 제대로 된 배위자를 만들어 고르게 붙이지 못하면 역시 실패다. 이렇게 빛을 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양자점의 핵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사용되던 물질이 바로 셀레늄이다. 119-20)


35 브로민: 어묵탕을 끓이며 Br


다시마를 우린 국물이 맛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시마 속에 들어 있는 글루타메이트glutamate 성분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할 때 조금만 넣어도 감칠맛이 확 도는 화학조미료 중에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마 같은 해조류는 바닷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몇 가지 특이한 물질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 코발트나 아이오딘iodine, 요오드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데, 과거에 브롬이라고 했던 브로민bromine도 해조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물질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완도금일수협의 특산물 안내 자료를 보면 다시마에는 브로민이 0.02~0.09% 정도 들어 있다고 한다. 매우 작은 수치인 것 같지만, 대다수 동물이나 지상 식물 몸속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양의 브로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고추의 매운맛이 캡사이신 덕분에 나는 것이라면, 다시마는 대략 그 정도만큼은 브로민 맛이 나는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24)


만약 브로민만 모은 덩어리가 담긴 병을 보게 된다면 꽤 신기할 것이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되어서 마치 핏방울 비슷하게 불그스름한 색깔을 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가지 원소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 상태가 되는 물질은 매우 드물다. 금속으로 분류되지 않는 원소 중에서는 오직 브로민밖에 없고, 금속 중에서는 수은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원소 중에서 그것 한 가지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가 되기 쉬운 물질은 브로민과 수은, 단 두 가지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특이함은 지구의 평범한 환경에서만 그렇게 여겨진다. 철이나 구리 같은 쇳덩이도 아주 높은 온도로 달구면 결국 흐물흐물 녹아서 액체가 되기 마련이고, 헬륨 같은 물질도 아주 낮은 온도 속에 집어넣으면 굳어서 액체가 될 수 있다. 즉, 어떤 물질이 액체냐, 고체냐, 기체냐 하는 것은 주변 조건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필이면 액체 상태가 된 순수한 수은 덩어리와 순수한 브로민 덩어리는 둘 다 몸에 해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129)


36 크립톤: 포장마차 앞에 서서 Kr


빛은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서로 얽혀서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빛을 전자기파라고도 부른다. 빛이 가진 전기의 힘은 빛이 날아가는 동안 빛을 따라가며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아주 규칙적이다. 즉, 빛이 날아가는 동안 전기의 힘은 똑같은 정도로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한 번 커졌다가 작아지는 동안 빛이 날아간 거리를 파장이라고 한다. 크립톤에서 나오는 빛도 날아가는 동안에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이 현상이 일어나는 정도, 그러니까 파장은 빛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 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크립톤 원자에서 나온 그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반복이 한 번 일어나는 거리, 즉 파장이 얼마인지를 측정해서, 거기에 1,650,763.73을 곱하면 그게 바로 1m라는 길이가 된다. 133)


주기율표를 살펴보면 크립톤은 헬륨, 네온, 아르곤 같은 원소와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다. 따라서 크립톤 역시 화학반응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원소를 비활성기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 주위에 있다고 해서 냄새가 나지도 않고 몸에 악영향을 미칠 일도 없다. 어떤 원소 하나만의 성질을 정확히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순수한 크립톤을 구해 실험하면 편리하다. 특정 원자가 내뿜는 빛을 관찰하려면, 그 원자가 빛을 내뿜도록 전기를 걸거나 온도를 올려 주어야 한다. 만약 이런 실험에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수소 기체나 염소 기체를 이용한다면 원자가 전기나 열을 받아 빛을 내뿜기도 전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에 들러붙으면서 엉뚱한 상태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1m를 정할 때 하필이면 크립톤이라는 낯선 물질로 실험하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크립톤은 빛이 선명하게 잘 보이고 정확하게 잘 나오는 특징까지 있다. 그래서 1m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처럼 정밀한 실험을 하기에 좋다. 134)


# 지금은 빛이 날아가는 속력을 기준으로 1m의 길이를 정하고 있다.


37 루비듐: 곰취나물과 밥을 비비며 Rb


루비듐 중에는 방사성을 띠는 루비듐82라는 물질이 있다. 루비듐82는 보통 루비듐과는 다르게 반물질antimatter을 뿜어내는 놀라운 특성이 있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반물질은 양전자positron라는 것이다. 이 물질은 전자 제품 속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전자와 거의 모든 점에서 똑같아 보이지만, 전자가 ⊖전기를 가진 것과 반대로 ⊕전기를 가진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양전자와 정반대 전기를 띤 전자와 부딪혀 반응하게 만든다. 그러면 양전자와 전자가 서로 소멸하며 강력한 빛을 내뿜는다. 이 빛은 맨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물질을 다 뚫고 나온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인 방향으로 두 줄기 빛이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어느 위치에서 빛이 나오는지 관찰하기가 좋다. 그래서 양전자가 소멸하면서 나오는 강력한 빛을 관찰하면 그 양전자가 몸속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전자를 내뿜는 물질을 몸에 주입하면 그 물질이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위치를 정밀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40)


루비듐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는 데도 큰 도움을 준 물질이다. 루비듐이 금속이면서도 쉽게 녹고 잘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금속은 수천억 개의 원자들, 수천조 개의 원자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엄청나게 많은 원자의 덩어리이다. 이런 상태라면 원자 하나하나에 각각 영향을 주어야 하는 정밀한 조작을 하기가 어렵다. 원자를 하나하나 조작하려면 덩어리가 아니라 원자를 하나하나 떼어 놓은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물질을 기체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금속을 녹여서 액체로 만들려고만 해도 쇠가 녹을 정도로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렇게 쇳물이 된 금속을 끓여서 기체로 만들기는 더욱더 어렵다. 그런데 루비듐은 쉽게 녹고 쉽게 끓는다. 그러니 어떤 작업을 금속으로 해야 하는데, 원자 하나하나를 움직여야 한다면 루비듐이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런 이유로 레이저를 이용해 원자 하나하나를 각기 붙잡고 따로 움직이는 실험을 할 때 루비듐은 단골 실험 대상이다. 144-5)


38 스트론튬: 솜사탕을 건네주며 Sr


옛날식 텔레비전의 기본 원리는 전자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을 유리판에 발라 놓고, 전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사하는 전자총을 이용해서, 유리판을 향해 전자를 이리저리 발사하는 것이다. 그 유리판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생긴 빛이 그림을 이루게 된다. 전자는 ⊖전기, 즉 음전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장치를 음극관cathode ray tube, CR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 텔레비전은 전자총으로 전자를 발사해서 CRT에 원하는 모양으로 빛이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영상을 만들어 낸 후에 문제가 생긴다.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충돌해서 갑자기 속력을 잃다 보면 엑스선 등의 방사선이 나온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생기는 엑스선을 흡수하거나 엑스선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물질을 일종의 방어막처럼 텔레비전 화면에 얇게 발라야 했다. 여기에 적합한 물질이 바로 스트론튬이었다. 149)


스트론튬은 여러 방사성 물질 중에서도 특히 골칫거리로 자주 언급되는 물질이다. 정확히 말하면 보통 스트론튬보다 약간 더 무거운 스트론튬90이 문제다. 보통 스트론튬과 무게를 비교하면 88:90 정도로 약간 무겁다. 스트론튬90은 방사선을 오랫동안 꾸준히 내뿜는 점도 문제지만,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점에서도 걱정스러운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스트론튬 바로 위에는 칼슘이 적혀 있다. 방사성 물질이라고 해도 몸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몸 밖으로 나온다면 별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방사성 물질 중에는 그런 것도 여럿 있다. 그런데 스트론튬은 하필 칼슘과 성질이 비슷하고, 칼슘은 뼈에 많이 들어 있다. 그렇기에 스트론튬이 몸속에 들어오면 우리 몸은 스트론튬을 칼슘으로 착각해서 뼈를 만드는 데 칼슘 대신 스트론튬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보통 스트론튬이 아니라 방사성을 띤 스트론튬90이라면, 뼛속에 스트론튬90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151)


39 이트륨: 양배추를 썰며 Y


스웨덴에서 광산 개발과 관련된 산업과 기술이 발전했던 역사는 주기율표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트륨yttrium이다. 스웨덴의 이테르뷔Ytterby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돌에서 나온 원소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대에 희토류로 분류되는 광물들은 이테르뷔에서 발견된 이트륨과 비슷한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들어맞는다. 주기율표에서 이트륨 바로 위에 적혀 있는 스칸듐과 이트륨 바로 아래 칸 근처에 있는 란타넘lanthanum이 대표적인 희토류이기 때문이다. 란타넘의 경우에는 주기율표 모양이 그 근처에서 확장되는 형태로 바뀌기 때문에 정확히 이트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트륨과 같이 엮기에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란타넘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란타넘족 원소라고 분류하는 네오디뮴neodymium, 디스프로슘dysprosium 등 여러 원소까지 모두 합쳐 희토류라고 부른다. 그러니 화학 발전의 역사에서는 이트륨이 희토류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155-6)


흔히 야그 레이저라고도 하는 YAG 레이저는 Y, A, G 세 가지 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레이저 발생 장치를 말한다. 여기서 Y, A, G는 각각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garnet을 가리킨다. 레이저는 빛과 물질 속의 전자가 서로 독특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이용해 특수한 빛을 내뿜는 것을 말한다. 자연 상태의 빛은 여러 성질이 섞여 있고, 진행하는 동안 사방팔방으로 퍼져 버린다. 이와 달리 레이저는 빛의 성질이 잘 가다듬어져 있으며, 잘 퍼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이런 빛을 만들려면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전자를 잘 조정해야 한다. 원하는 색깔의 빛이 생기도록 전자가 특정한 속력으로 움직이고 적절한 힘을 받으며 돌아다니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온갖 물질을 조합해 보다가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놓으면 그 물질 속을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레이저로 쓰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YAG 레이저가 실용화되면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156-7)


40 지르코늄: 과자 봉지를 뜯으며 Zr


촉매 연구는 화학에서 가장 마법 같은 분야다. 원래는 안 일어날 화학반응을 촉매를 써서 일어나게 만들면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설탕물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화학의 눈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대단히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다. 설탕이라는 별것 아닌 재료가 어떻게 사람의 살이라는 귀중하고 복잡한 물질로 변하는 것일까? 설탕물 1kg을 주면서 그것으로 사람 살 1kg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키라는 요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난다. 촉매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과학자들은 지르코늄이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화학반응을 어느 정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 주변을 뜨겁게 만들어야만 이런 반응이 일어난다. 이 말은 연료를 사용해 불길로 주변을 뜨겁게 덥혀 주어야 수소가 생긴다는 뜻이다. 지르코늄의 이 반응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커다란 사고가 발생했다. 163-4)


지르코늄은 중성자와 반응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 때문에 중성자가 많이 돌아다니기 마련인 원자로 내부에 들어갈 재료로 지르코늄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평상시라면 이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원자로에서는 중성자를 잘 조절하여 원하는 만큼 핵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기에 지르코늄 재료를 이용하면 중성자 조절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안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후 온도가 1,200℃에 가까워지자 지르코늄이 물과 반응해 수소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반응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높은 온도라는 조건이 갖춰지자 지르코늄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 수소 생성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 안전을 위한 방어 판 같은 용도로 넣어 두었던 지르코늄이 이런 비상 상황에서 오히려 수소라는 불쏘시개를 잔뜩 만들어 낸 셈이다. 수소가 좋은 연료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불이 잘 붙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결국, 수소는 불이 붙어 폭발을 일으켰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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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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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우주와 은하 … 13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는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원자보다 훨씬 작은 영역에 똘똘 뭉쳐 있었으므로, 온도와 압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을 것이다. 이 상태는 10^-43초 동안 계속되었는데(참고로 10^-2는 0.01이며, 10^-43은 소수점 아래로 0이 42개 붙은 후 비로소 1이 등장한다), ‘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튼 이 시간대를 ‘플랑크 시대Planck epoch’라 한다. 그후 우주는 10^-35초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빠르게 팽창했다. 이 시간대를 인플레이션 시대Inflation epoch라 한다. 우주는 이 짧은 시간 동안 10^70배 가까이 커졌는데, 그래봐야 크기는 직경 몇 m에 불과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인플레이션 시대의 팽창 속도가 빛보다 훨씬 빨랐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은 하나의 역장力場, force field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일어났으며, 이 에너지는 훗날 우주에 존재하게 될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17-8)


인플레이션론이 우주배경복사CMB의 분포를 설명함으로써, 빅뱅이론은 우주 탄생의 정설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주배경복사는 우주 전체에 걸쳐 온도가 거의 같다. 빅뱅이 일어나고 거의 140억 년이 지났는데 우주 반대편에 있는 두 지점의 온도가 아직도 같다는 것은 태초에 이 지점들이 꽤 긴 시간 동안 접촉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두 지점이 접촉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아무런 정보도 교환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오늘날 온도가 같은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과거의 빅뱅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한동안 위기에 처했다가 인플레이션이론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하나의 점에 가까웠던 우주가 급속도로 팽창하여 유한한 크기에 도달하면 모든 영역이 동일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후에도 우주는 이전보다 느린 속도로 계속 팽창했지만 공간의 모든 지점이 이미 정보를 교환했기 때문에 균일한 온도 분포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18) 


인플레이션이 끝난 후 10^-5초 사이에 물질과 반물질이 거의 비슷한 양만큼 형성되었다. 모든 입자는 자신과 질량이 같고 전하의 부호가 반대인 파트너를 갖고 있는데, 이들을 반입자antiparticle라 한다. 예를 들어 전자의 반입자는 양전자positron이고, 뉴트리노의 반입자는 반뉴트리노anti-neutrino이다. 일반적인 입자로 이루어진 물질을 그냥 ‘물질’이라 하고, 반입자로 이루어진 물질을 ‘반물질antimatter’이라 한다. 물질과 반물질이 따로 존재할 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만, 둘이 접촉하면 복사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과정을 쌍소멸pair-annihilation이라 하는데, 이때 방출된 복사에너지의 양은 E=mc2을 통해 결정된다(여기서 m은 물질과 반물질의 질량의 합이다). 빅뱅 후 10^-5초가 지났을 때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공존하다가 서로 만나면서 다량의 복사에너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 많았기 때문에 별과 은하, 행성 등 다양한 천체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18-9)


빅뱅 후 1초~10만 년 동안은 우주 전체가 광자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복사 시대Radiation epoch’라고 한다. 이 시대가 끝날 무렵에 질량과 광자의 밀도가 낮아져서 드디어 빛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즉 우주가 투명해진 것이다. 그리고 빅뱅 후 약 38만 년이 지났을 무렵에 온도가 충분히 낮아져서 드디어 완벽한 원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물질 시대Matter epoch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주배경복사는 이 시기에 마지막으로 방출된 에너지의 흔적이다. 암흑기가 끝날 무렵, 수소-헬륨 기체의 밀도에 약간의 요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중력이 작용하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질량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정 지역에 질량이 집중되면 그곳의 중력이 주변보다 강해져서 더욱 많은 질량이 모여든다. 그리고 중력의 세기는 거리에 관계하기 때문에(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기체가 집중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구형을 띠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별’이었다. 20)


# 암흑기 : 복사 시대가 끝난 후 3억 년 동안 온도가 충분히 내려가고 물질이 넓은 영역으로 충분히 퍼져 나갔기 때문에 광원光源, light source이 사라진 기간


2장 별과 원소 … 41


질량이 태양의 15배 이상인 별들은 중심 온도가 1,500만°C에 도달해도 계속 수축되면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온도가 1억°C에 도달하면 헬륨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탄소와 산소가 생성되고, 이보다 큰 초거성超巨星, supergiant들은 핵융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철까지 만들 수 있다. 무거운 원소를 생산하는 핵융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헬륨 원자핵인 알파 입자(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져 있다)의 융합이다. 그중에서도 3개의 알파 입자가 두 차례의 반응을 거쳐 탄소로 변환되는 ‘3중 알파 입자 반응triple-alpha process’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어서, 탄소보다 무거운 원소가 생성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탄소가 생성되기만 하면 알파 입자 연쇄 반응alpha chain process이 뒤를 이어받아 한 번에 알파 입자 한 개씩을 추가하여 탄소C→산소O→네온Ne→마그네슘Mg→실리콘Si→……→철Fe까지 연이어 만들어낸다. 29)


1869년,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i Mendeleev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를 특정 규칙에 따라 나열한 주기율표periodic table를 만들었다. 이 표에서 철의 원자번호는 26번이고 가장 무거운 천연 원소인 우라늄U은 92번이므로, 철을 기준으로 가벼운 원소는 25종이고 무거운 원소는 66종이다. 그러나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생성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극히 소량만 존재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별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느린 중성자 포획slow neutron capture’을 거쳐 생성되며, 이 과정은 철이 다른 융합 반응에서 생성된 중성자를 포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철의 무거운 동위원소는 상태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성되는 즉시 전자를 방출하면서 중성자 한 개가 양성자로 변하여 코발트Co(원자번호 27)가 되고, 그후에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계속되면서 점점 더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진다. 반면에 모든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빠른 중성자 포획rapid neutron capture’은 거성이 최후를 맞이할 때 일어난다. 31)


거성이 수명을 다하여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면 대부분의 질량은 외부로 흩어지지만, 중심부는 계속 수축하여 초고밀도 상태로 남는다. 이 잔해의 질량이 태양의 2~3배 정도라면, 모든 원자의 부피를 유지시켜주는 전자구름이 잔해의 내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원자핵이 있는 곳까지 압축되어 양성자를 중성자로 변환시킨다. 별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의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으면 중성자들끼리 더욱 강하게 밀착되어 중성자별보다 밀도가 높아진다. 이런 천체에서는 중성자가 쿼크 단위로 분해되기 때문에 ‘쿼크별quark star’이라 부르는데, 아직 발견된 사례는 없다. 잔해의 질량이 태양의 5배가 넘으면 쿼크조차도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아주 작은 부피로 수축된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블랙홀이다. 블랙홀에서는 중력이 하도 강해서 중심으로부터 유한한 거리에서 방출된 빛까지도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천체에서 가운데를 중심으로 빛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는 가장 큰 구면을 ‘사건지평선event horizon’이라 한다. 32)


3장 태양계와 행성 … 63


우리의 태양계는 거의 50억 년 전에 거대한 먼지구름이 수축되면서 탄생했다(이 구름을 ‘모태구름’이라고 하자). 아마도 이 무렵에 근처에서 초신성이 폭발하여 구름의 수축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지구로 떨어진 운석에 초신성이 폭발할 때에만 생성될 수 있는 철의 무거운 동위원소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수축되어 태양과 비슷한 별이 되려면 그 규모가 최소 1~3광년은 되어야 하며, 거성이 되려면 무려 10광년에 걸쳐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은하수의 크기(약 10만 광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모태구름에서 중심부에 있는 일부만이 태양계가 되는데, 이 부분을 구름핵cloud core이라 한다. 수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구름핵의 99.9%는 태양이 되고 남은 0.1%가 행성계를 이룬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행성에 할당된 질량의 대부분은 목성에 돌아갔고, 목성은 태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태양계가 보유한 각운동량의 대부분은 목성이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38-9)


현재 태양계에는 8개의 행성과 160여 개의 위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행성으로 자라지 못했으면서 태양에 흡수되지 않고 외계로 날아가지도 않은 채 태양계 주변을 떠도는 물체들도 많다. 해왕성과 명왕성 너머에는 오르트구름(Oort cloud, 20세기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얀 오르트Jan Oort가 발견했다)라는 거대한 구형球形 구름이 태양계를 에워싸고 있는데, 이 구름과 태양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의 5만 배, 태양과 해왕성 사이 거리의 2,000배에 달한다. 이 정도면 거의 1광년에 가까운 거리다. 오르트구름보다 가까운 곳에는 또 다른 얼음 혜성의 집합인 카이퍼 벨트(Kuiper belt, 20세기에 미국의 천문학자 제라드 카이퍼Gerard Kuiper가 발견했다)가 자리 잡고 있는데, 태양과의 거리는 약 30~50AU이다. 카이퍼 벨트는 핼리혜성Halley’s Comet(주기=76년)과 같은 단주기 혜성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트구름과 카이퍼 벨트는 행성이나 위성에 편입되지 못한 잔해들의 집합일 것으로 추정된다. 45-6)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 벨트도 행성에 편입되지 못한 잔해들의 집합이다. 이곳에는 TV나 자동차만 한 크기에서 베스타처럼 직경 500km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소행성들이 궤도운동을 하고 있으며, 개중에는 직경 950km짜리 세레스처럼 왜소행성으로 분류된 것도 있다. 소행성 벨트는 목성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작은 소행성들이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면 목성의 강력한 조력潮力이 작용하여 덩어리를 산산이 흩어놓는다. 마지막으로, 내태양계의 금성과 화성 사이에는 아모르Amor와 아폴로Apollo, 그리고 아텐Aten이라는 세 개의 소행성 집단이 존재한다.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벨트보다는 밀도가 훨씬 낮지만 아폴로와 아텐에 속한 소행성 중에는 지구의 공전궤도와 교차하는 것들이 꽤 많아서 시도 때도 없이 지구로 떨어지고 있다. 6,500만 년 전에 유카탄반도에 떨어져서 공룡을 멸종시킨 주범도 바로 이곳에서 날아온 소행성이었다(이 소행성의 직경은 약 10km로, 웬만한 소도시 크기였다). 46-7)


4장 지구의 대륙과 내부 … 95


지구 내부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지진학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다. 지구의 내부는 크게 3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 표면은 가벼운 바위로 이루어진 얇은 지각地殼, crust(육지가 자라나면서 점차 두꺼워졌다)으로 덮여 있고, 그 밑으로 지구 반지름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거운 바위로 이루어진 맨틀mantle로 채워져 있으며, 가장 깊은 중심부에는 맨틀보다 무거운 철 코어iron core(중심핵이라고도 한다)가 자리 잡고 있다. 맨틀과 핵의 두께는 거의 같지만 맨틀이 핵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부피는 맨틀이 압도적으로 크다. 지구 전체에서 맨틀이 차지하는 비율은 80%가 넘는다. 지진학자들은 다양한 파동을 분석한 끝에, 지구의 핵이 액체 상태이며 평균 밀도는 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진 때 발생하여 지구 내부를 가로지르는 굽힘파bending wave가 중심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코어는 액체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액체 코어의 가장 깊은 중심부는 고체 상태의 철로 이루어져 있다. 51-2)


맨틀은 워낙 부피가 크고 움직임이 굼뜨기 때문에 불에 달궈진 커다란 돌멩이와 달리 식을 때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맨틀의 상부는 차갑고 무거워서 아래로 가라앉았고, 중심핵에 가까운 하부는 뜨겁게 달궈지면서 위로 떠올랐다. 뜨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을 열대류熱對流, thermal convection, 또는 자유대류free convection라 하는데, 맨틀은 물론이고 바다와 대기, 행성과 별, 그리고 당신의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잔에서도 항상 일어나는 범우주적 현상이다. 지구에서 대류는 태풍과 뇌우, 해류를 일으키고 태양의 대류는 흑점을 만든다. 단, 대류가 일어나려면 물질의 유동성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 뜨겁고 가벼운 물질과 차갑고 무거운 물질이 쉽게 자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맨틀은 고체 상태였지만 긴 시간규모에서 볼 때 (압력, 즉 압착력이나 장력을 받으면) 유체처럼 행동했다. 빙하가 녹거나 흔들리지 않고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서서히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53)


맨틀의 대류는 지각판을 움직이게 하고, 지진과 화산활동을 일으켜 대형 산맥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맨틀의 대류는 지구를 서서히 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구 자체가 식는 속도는 맨틀이 식는 속도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대류는 유체의 열을 식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지표면 근처의 차가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가라앉아서 내부의 뜨거운 물질과 섞이면 전체적인 온도는 내려간다(뜨거운 물에 얼음을 담갔을 때 온도가 내려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심부의 뜨거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표면의 차가운 물질과 섞일 때도 빠른 속도로 열이 손실된다. 그러므로 지구는 자신과 크기가 같은 거대한 돌덩어리보다 식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도 맨틀의 대류 자체가 워낙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정체 상태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 맨틀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지각판을 서서히 이동시켜왔고, 그 덕분에 지구는 안정적인 기후를 유지하면서 생명체를 잉태할 수 있다. 54-5)


우리는 대륙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지구의 내부 구조와 이동 패턴을 살펴보다가 두 가지 신기한 현상에 직면했다. 첫째, 맨틀의 대류는 모든 행성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오직 지구만이 지질구조판을 갖고 있으며, 지구의 맨틀대류는 지진 및 화산활동과 함께 마그마를 표면으로 밀어 올렸고 물과 이산화탄소를 맨틀에 유입시켰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행성에서는 마그마를 표면으로 밀어 올려 화산활동을 촉발했을 뿐, 물과 이산화탄소가 맨틀에 유입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 지구는 강한 자기장을 갖고 있는 유일한 행성이다. 지자기장은 대기권 밖까지 뻗어 있는데, 놀랍게도 자기장의 에너지원은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액체 상태의 철이다. 지구의 깊은 내부와 전체적인 크기는 금성과 거의 비슷하지만, 환경 차이(태양과의 거리와 달)가 두 행성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다행히도 지구에는 자기장과 지질구조판, 그리고 물이 존재했고 이들 덕분에 생명체가 번성하는 유일한 행성이 될 수 있었다. 62)*


5장 바다와 대기 … 147


‘내생기원설Endogenous Origin’은 바다와 대기가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지구 내부에 숨어 있었다는 가설이다. 물은 바위의 표면에서 수화된 미네랄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산화탄소는 바위의 내부에서 탄산염(석회암, 백악白堊 등)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맨틀을 구성하는 바위에도 물과 이산화탄소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지만, 양은 그리 많지 않다(전체 무게의 몇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지구에 바다가 생성되기 위해 맨틀이 다량의 수분을 보유할 필요는 없다. 현재 바닷물의 총무게는 맨틀 무게의 0.03%에 불과하기 때문에, 맨틀이 축축하게 젖지 않아도 바닷물을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지금까지 확보된 증거에 의하면 지구의 대기는 내부의 바위에 숨어 있다가 마그마 바다가 응고되면서, 또는 화산활동을 통해 밖으로 분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최초의 대기는 지금과 완전 딴판이었을 것이다. 특히 화산을 통해 분출되었다면 대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와 수증기였을 것이다. 80-2)


원래 지구와 금성의 대기는 이산화탄소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고 표면 온도와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다행히도 지구는 태양과의 거리가 금성보다 멀었고 기압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대기의 압력이 1기압(1atm)일 때 물은 100°C에서 끓지만, 기압이 높으면 더 높은 온도에서 끓는다(부엌에서 쓰는 압력솥은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구의 대기압이 60기압이었던 시절, 물은 200~300°C에서도 액체 상태로 존재했고(정확한 비등점은 270°C이다) 대기중 이산화탄소가 물과 바위에 스며들면서 기온이 서서히 내려갔다(온실효과가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온이 내려가니 물의 양도 자연히 많아지고, 물이 많아지면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녹아서 기온은 더 내려가고…… 마치 피드백 회로처럼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각판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함유량은 꾸준히 감소하여 아주 소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위 속으로 흡수되었다. 83)


흔히 말하는 ‘날씨’란 대기의 가장 낮은 층인 대류권troposphere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류권의 고도는 지표면에서 약 10km까지이며, 바로 이 영역에서 빠르고 변화무쌍한 열역학적 대류가 일어나고 있다. 대류권 위의 공기층을 성층권stratosphere이라 한다. 대류권과 달리 성층권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 성층권의 꼭대기에 있는 공기는 따뜻하면서 안정하기 때문에 스프레이로 뿌린 연무제aerosol나 화산 먼지가 이 영역에 도달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갇히게 된다. 성층권은 고도 50km까지 계속되고, 성층권 위로 고도 100km까지를 중간권mesosphere이라 한다. 중간권에서는 열복사가 훨씬 효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성층권보다 온도가 낮다. 중간권 위로는 온도가 훨씬 높으면서 밀도가 희박한 열권thermosphere(고도 600km 이하)이 있고, 열권 위로 1만km까지를 외기권exosphere이라 한다. 외기권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우주(행성 간 공간)라 할 수 있다. 84-5)


# 연무제aerosol : 기체 속에 고체나 액체가 섞여 있는 상태


6장 기후와 서식 가능성 … 171


뭐니뭐니해도 지구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양 빛이다. 지표면에 도달한 햇빛은 표면의 특성에 따라 흡수되기도 하고 반사되기도 한다. 어두운 해수면은 다량의 빛을 흡수하고, 밝은 대륙은 빛의 일부를 반사하여 우주로 돌려보낸다. 또한 그린란드와 남극대륙을 덮고 있는 얼음은 대부분의 빛을 반사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면의 평균 흡수율은 약 70%이며(반사된 30%는 달빛moonshine과 비슷한 지구광earthshine을 만든다), 어느 정도 데워진 후에는 열(또는 적외선)의 형태로 복사에너지가 방출된다. 지구에 대기가 없다면 복사에너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우주로 날아가서 표면 온도는 -20°C까지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기에 섞여 있는 수증기와 이산화탄소가 지면에서 복사된 적외선을 흡수하여 열이 우주로 달아나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구의 기후는 ‘지면의 햇빛흡수율’과 ‘대기 중 온실가스함유량’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94-5)


지질학적 탄소순환(신선한 광물의 침식과 풍화에 의해 양이 줄었다가 화산활동을 통해 보충되는 순환)은 아직 확증되지 않은 가설이지만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핵심은 단연 음성 피드백이다. 광물질의 풍화와 침식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온도의 영향을 받는다. 첫째, 온도가 높으면 물의 증발량이 많아져서 비가 자주 내리고, 그 결과 침식이 더 빠르게 진행된다. 둘째, 신선한 광물을 탄소와 결합시키는 탄화나 풍화 과정은 온도가 높을수록 빠르게 진행된다. 따라서 화산이 폭발하여 여분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유입되면 숲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거나 화석연료를 태우고, 온실효과로 기온이 높아져서 비가 내리면 광물의 침식과 풍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다시 낮아진다(수백만 년이 소요된다!). 간단히 말해서 지질구조판은 주기적 변화를 겪으면서 수억 년 동안 기후를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왔다. 여기서 ‘안정적’이라 함은 평균 기온이 수십 ℃ 이상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97-8)


지질구조판 위에 놓인 바다와 대기, 그리고 얼음은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양성 피드백을 낳는다.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밀란코비치 주기Milankovitch cycle는 세 가지 주기운동을 결합한 결과인데, 그중 가장 짧은 주기는 지구 자전축의 세차운동歲差運動, precession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회전하는 팽이의 회전축처럼 가느다란 원뿔을 그리면서 26,000년을 주기로 서서히 돌고 있다. 두 번째 주기는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면에 대하여 기울어진 정도가 변하는 주기이다. 현재 지구의 자전축은 공전면에 대하여 23.5°쯤 기울어져 있는데, 이 값이 40,000년을 주기로 변하고 있다(변화 폭은 22.5°~24.5°이다). 마지막으로 공전궤도의 이심률(원에서 벗어난 정도)도 약 10만 년을 주기로 변하고 있다. 이심률이 변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변하기 때문에 당연히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 밀란코비치 주기는 해양 퇴적물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후변화 패턴을 통해 거의 맞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98)


# 음성 피드백은 효과를 반감시키는 일련의 과정이고, 양성 피드백은 효과를 증폭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다.


7장 생명 … 207


생명이란 화학반응을 이용해서 주변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취하여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개체를 의미한다.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결과물이 반응 자체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자가촉매적autocatalytic이다. 예를 들어 식물은 물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길다란 사슬 구조의 포도당 분자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식물의 몸체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다(세포벽의 주성분인 셀룰로스cellulose의 형태로 존재한다). 즉 광합성의 결과물이 더 많은 광합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반면에 동물과 같은 호기성 생물好氣性은 음식과 태양에너지를 취하여 더 많은 세포를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취한다. 생명은 자원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서 기존에 있는 분자의 생명 활동을 촉진하고 자신과 닮은 개체를 재생산한다. 또한 생명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통해 진화한다. 이 과정은 ‘생명체의 의지’가 아닌 ‘불완전한 복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106-7)


# 호기성 생물好氣性~, aerobic~ : 산소를 이용하여 신진대사를 하는 생물


대기 중 산소 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생명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유기물(포도당, 지방, 메탄가스 등)이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와 물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화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정상상태定常~, steady state라 한다. 즉 광합성에서 생성된 산소가 역반응을 통해 소진되는 소모량과 균형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대기에 섞여 있는 산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백분율로는 약 20%이고, 무게로는 거의 10억×10억kg이나 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산소와 균형을 이루는 거대한 유기물 저장소(광합성의 산물인 포도당 저장소)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이 유기물의 대부분은 대기와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유기물 저장소는 깊은 바다 속 해저면이나 산이 침식되면서 형성된 퇴적층 밑에 있다. 사실 생태계는 아주 작은 시스템으로, 산소의 생산량과 소비량이 거의 균형을 이룬 상태이다. 113)


진핵세포는 원핵세포와 달리 세포골격으로 지탱되는 막膜, membrane 안에 세포핵과 DNA가 갇혀 있고, 세포의 가능을 수행하는 다양한 세포기관을 갖고 있다. 진핵세포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세포내공생설細胞內共生說, endosymbiosis’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2개의 원핵세포가 한 몸이 되어 진핵세포로 진화했다(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었을 수도 있고, 약한 상대를 침범했을 수도 있지만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이 과정은 고세균古細菌이 박테리아를 흡수하거나 그 반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두 생명체 사이에 공생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산소로 포도당을 만들어서 에너지를 얻는 호기성 세균은 산소를 싫어하는 고세균에게 최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또는 광합성 세균이 큰 세포 안에서 포도당을 생산하면 세균과 숙주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 이와 같은 공생 조합은 진핵생물에게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하여 생태계에서 더욱 확고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114)


8장 인류와 문명 … 239


메소포타미아와 서부 및 중앙유라시아 문명의 태동에는 7,000년 전에 일어났던 흑해의 범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홍적세 말기에 유라시아를 덮고 있던 얼음이 녹아 지중해로 흘러들었고, 흑해는 더운 날씨 때문에 서서히 증발하여 지중해와 흑해의 수위 차가 140m까지 벌어졌다. 중력이 작용하는 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중해의 짠물은 보스포루스해협Bosporus Strait을 타고 흑해로 유입되었고, 담수淡水였던 흑해는 지금과 같은 염수鹽水로 변했다. 물론 이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흑해의 가장자리가 살짝 경사져 있기 때문에 수위가 비교적 빠르게 상승하여 결국 해안의 농경지로 범람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경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중앙아시아와 서유럽으로 진출했는데, 특히 흑해 연안에 거주해왔던 인도-유럽어족과 셈족Semitic tribes, 우바이드족Ubaid 등 다양한 인종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모여들어 최초의 문명 도시인 수메르를 건설하게 된다. 125-6)


지질구조판 중 유라시아판은 지질학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대륙의 축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서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농경민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반면에 다른 대륙들은 대부분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기후가 비슷한 동-서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어려웠고, 남-북으로 진출하면 곡물과 가축들이 서식 가능 지역을 벗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이들이 사냥에 의존했다면 남-북 방향 진출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유라시아 문명권이 확장됨에 따라 다양한 종의 가축들도 함께 퍼져나갔고, 점령지의 토착민들은 새로운 병원균에 노출되어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면역력을 키워나갔다. 유리시아는 다른 대륙으로 진출할 때 수천 가지 군사 기술과 함께 토착민들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병균도 가져갔다.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소규모의 원정대만으로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병균 덕분이었다. 126-7)


화석에너지는 환경을 파괴하고 기후를 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누리는 편리함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생활습관을 바꾸려면 꽤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문명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기술과 의학으로 무장한 인간은 지난 수십 억 년 동안 적용되어왔던 자연선택의 섭리를 교묘하게 피해왔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어 자연선택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면, 가장 하찮게 여겼던 미생물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탐욕이나 나태함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진 자원을 무분별하게 낭비하는 것은 경쟁자가 없는 생명체에게 흔히 나타나는 성향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와 역사, 그리고 과학을 이용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므로, 위기가 닥치기 전에 대비책을 세울 능력이 충분히 있다. 우리가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역사, 아니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업적이 될 것이다. 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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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휴가 갈 땐, 주기율표 - 일상과 주기율표의 찰떡 케미스트리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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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소와 매실주 H


수소 원자는 ⊕전기를 띠기 쉽다. 그런데 수소 원자는 그냥 깔끔하게 ⊕전기를 띠는 상태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짝 ⊕전기를 띠는 듯 마는 듯한 느낌으로 ⊖전기를 띠기 쉬운 다른 물질을 약간만 끌어당기는 묘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상태로 수소 원자가 ⊖전기를 띠기 쉬운 다른 물질을 슬쩍 잡아당기는 현상을 수소결합hydrogen bond이라고 한다. 수소결합은 그다지 힘이 세지 않다. 그러다 보니 수소결합으로 연결된 부분은 어떨 때는 살짝 붙어 있다가, 어떨 때는 다른 힘을 못 이겨 떨어지기도 한다. 즉, 여러 가지 다양한 경우가 생긴다. 이 같은 성질 덕분에 수소는 갖가지 복잡하고 이상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온갖 물질이 별별 복잡한 형태로 다채로운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하는 생명체의 몸속에서 수소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생명체가 복잡한 이유의 근원은 수소결합의 힘이 애매한 정도라서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갖고 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0-1)


수소결합, 즉 수소 원자가 ⊖전기를 띠기 쉬운 물질을 적당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이 이상한 특징은 생명체가 유전 받은 대로 자기 몸을 키워 나가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가 들어 있는 DNA는 자기와 똑같은 DNA를 복사해서 한 벌 더 만들어 내거나, 짝이 맞는 RNA를 만들어 내는 등의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 화학반응에서 DNA가 서로 끌어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수소결합이다. 이런 화학반응은 생명체가 선대로부터 유전된 그대로 자신의 몸을 만드는 현상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에서 수소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수소가 흔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단, 지구를 기준으로 보면 오직 수소 원자만 모여서 생긴 수소 기체는 그리 흔치 않다. 수소 기체는 지구에 드물지만 다른 원자 옆에 붙어 있는 수소 원자는 흔한 편이다. 물에는 산소 원자와 함께 수소 원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바다는 수소 원자를 가득 품은 거대한 저장고다. 11-2)


2. 헬륨과 놀이공원 He


사실 태양은 전체 무게의 70% 이상을 수소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거대한 수소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소 원자들은 엄청나게 높은 온도와 압력에서 몇 단계에 걸쳐 서로 합쳐져 헬륨 원자로 변하는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을 원자의 핵끼리 서로 붙는다고 해서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태양이 강한 빛과 열을 사방으로 내뿜는 것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환하고 따뜻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 헬륨이 쓸모가 많은 까닭은 특이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헬륨은 아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서 유용하다. 헬륨은 불을 댕겨도 타오르지 않고, 금속을 헬륨 속에 놓아두어도 녹슬지 않는다. 한마디로 헬륨은 아무 성질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질인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헬륨과 같은 열에 있는 네온, 아르곤 같은 물질들은 다들 이렇게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물질들을 묶어서 비활성기체noble gas라고 부른다. 20-2)


매우 정밀한 가공작업을 하거나 높은 열을 가해야 하는 작업장을 생각해 보자. 세밀하게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화학반응을 잘하는 물질이 주변에 나돌고 있으면 불필요한 화학반응이 일어나 재료가 손상될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제조 시설에 헬륨을 불어 넣어 주면 주위가 헬륨으로 가득 차 불필요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대상이 아예 없는 깨끗한 환경이 마련된다. 당연히 불이 붙지도 않는다. 헬륨은 워낙에 아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질을 띤 까닭에 자기들끼리도 잘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액체로 만들기가 어렵다. 평범한 1기압에서 날아다니던 헬륨 원자들이 서로 들러붙어 액체가 되게 하려면 온도를 영하 269℃까지 낮추어야만 한다. 액체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온도를 낮춰야 하는 물질이다 보니, 일단 액체로 만든 헬륨을 뿌리면 주변 온도 역시 아주 낮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헬륨은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재료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지 않고 냉각 작업에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23-5)


3. 리튬과 옛날 노래 Li


리튬 원자는 전자를 잃고 ⊕전기를 띠는 상태로 쉽게 변하는 성질이 있다. 리튬 배터리는 간단히 말해 리튬 원자가 ⊕전기를 잘 띤다는 점을 이용해서 그 전기를 뽑아 쓰는 장치라고 보면 된다. 리튬은 세상 모든 원자 중에 수소, 헬륨 다음으로 평균 무게가 적게 나가는 원자다. 가볍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수소, 헬륨, 리튬은 모두 성질이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원자들의 차이는 원자핵에 양성자가 몇 개 있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 양성자가 한 개만 있으면 수소 원자가 되어 불에 잘 타는 물질이 되기 쉽지만, 똑같은 양성자인데도 두 개가 꼭 붙어 있으면 헬륨 원자가 되어 아무런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질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소 원자를 이루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양성자가 한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달라붙어 있으면 리튬 원자가 되는데, 이번에는 금속 덩어리가 되기 쉽다.  100종이 넘는 세상 모든 원소 간의 차이는 원자의 핵에 양성자가 몇 개 들어 있는지 그 개수의 차이밖에 없다. 29-31)


주기율표에서 리튬은 소듐의 바로 위 칸에, 포타슘은 소듐의 바로 아래 칸에 써넣는 원소다. 즉, 세 가지 원소는 주기율표의 같은 열에 주르륵 적혀 있다. 이는 현대의 화학자들이 리튬, 소듐, 포타슘을 성질이 비슷해 하나로 묶을 만하다고 본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원소들은 다들 원자가 ⊕전기를 잘 띠고, 화학반응을 잘하며, 한데 뭉쳐 있을 때는 쇳덩어리 비슷한 모양을 이룬다. 주기율표에서는 이들 모두 맨 첫 번째 열에 나열돼 있어서 1족 원소group 1 family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튬을 주원료로 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물질들의 화학반응이 잘 일어나도록 돕느라 리튬을 쓰는 일도 있다. 가만히 두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물질들에 적당한 촉매catalyst를 섞어 주면 그때부터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촉매 자신은 거의 변하지 않으면서 다른 물질은 계속 빠르게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변화하도록 도와준다. 이 때문에 많은 화학 회사에서는 적합한 촉매를 개발하는 일을 핵심 기술로 여긴다. 34-6)


4. 베릴륨과 보물찾기 Be


우라늄은 중성자neutron와 충돌하면 원자핵이 둘로 나뉘어 다른 원자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원자핵이 쪼개지는 현상을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고 하며, 핵분열 현상이 일어날 때는 강한 열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과정을 유지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성자들이 원자로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계속 우라늄 사이를 돌아다니도록 무엇인가로 막아 주어야 한다. 중성자는 이름 그대로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 상태의 입자다. 그래서 딱히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키지도 않고, 서로 밀고 당기는 일도 거의 없다. 유령 같은 중성자를 원자로 안에 가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중성자는 다른 원자의 중심부인 핵 근처에서 그 핵을 이루는 양성자 또는 중성자에 이끌릴 수 있다. 그러니까 중성자는 대체로 다른 물질들을 그냥 통과하는 편이지만, 가끔 다른 원자의 정중앙 근처를 지나게 될 때는 그 원자핵에 들어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에 이끌려 붙잡히거나 진행 방향이 바뀔 수 있다. 42-3)


베릴륨은 세상의 모든 원자 중에 평균 무게가 네 번째로 가볍고, 그만큼 원자 자체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베릴륨의 원자핵은 대개 양성자 네 개와 중성자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다. 주기율표에서 수소, 헬륨, 리튬에 이어서 네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이 바로 양성자가 네 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성자가 베릴륨의 원자핵 근처를 지나갈 때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오묘한 수준의 힘에 이끌린다. 그리고 이 힘 때문에 중성자의 진행 방향이 꺾여서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이 연달아서 일어나면 마치 중성자가 베릴륨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즉, 베릴륨이 중성자를 튕겨내는 반사재reflector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원자로 안에 베릴륨을 넣어 그릇처럼 만들고, 그 안에 중성자와 우라늄을 넣어 반응을 일으킨다. 이렇게 하면 제아무리 유령 같은 중성자라도 베릴륨에 가로막혀 계속해서 튕겨 나가고, 원자로 안에서는 연쇄반응이 꾸준히 일어난다. 43)


5. 붕소와 애플파이 B


유리는 규소와 산소 원자들이 서로 붙어 있는 물질을 주재료로 만든다. 특별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여기에 소듐과 칼슘 원자도 약간 섞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유리는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약하다. 특히 유리를 뜨겁게 하면 유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떨린다. 사실 어떤 물체가 ‘뜨겁다’거나 ‘온도가 높다’는 말 자체가 그 물체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리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원자가 빠르게 떨리다 보면 규소 원자와 산소 원자 사이에 끼어든 소듐 원자 근처에 틈이 생길 수 있다. 원자들 사이에 틈이 생기면 유리의 강도가 약해진다. 다행히 요즘 주방에서 사용하는 유리 제품들은 제법 높은 열에도 잘 견디는 것들이 있다. 유리를 만들 때 붕소 성분을 약간 넣기 때문이다. 규소 원자와 산소 원자 사이에 섞여 있는 소듐 원자 때문에 틈이 생길 만한 자리마다 붕소 원자가 끼어들게 해서 그 틈을 메워 버리는 것이다. 붕소 원자의 크기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 꼭 맞다. 49-50)


붕산boric acid은 황산이나 염산, 질산처럼 다른 물질을 무시무시하게 녹이지는 않는다. 그런 대표적인 산성 물질에 비하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정도도 훨씬 덜하다. 붕산은 이처럼 어중간한 산성을 띠는 덕분에 살충제로 요긴하게 쓰인다. 붕소는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재료다. 반도체의 주재료는 규소인데, 순수한 규소에는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규소와 성질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붕소를 불순물처럼 아주 조금 넣어 주면 훌륭한 반도체가 된다. 규소에 붕소를 살짝 뿌려 주는 이 작업을 도핑dopping이라고 한다. 도핑 작업을 거치면 규소와 붕소의 비슷한 듯 다른 듯한 미묘한 성질 차이 때문에 어떤 때는 전기가 흐르고 어떤 때는 흐르지 않는 반도체의 특징이 생겨난다. 베릴륨이 중성자를 잘 튕겨 내서 핵분열을 부채질하는 것과 반대로 붕소는 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래서 핵분열이 과도하게 일어나서 원자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 같으면 붕소를 넣어 핵분열을 줄인다. 52-3)


6. 탄소와 스포츠 C


탄소를 이용하면 다양한 물질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내기가 무척 편리하다. 아주 단순한 것부터 별 희한한 성질을 띠는 복잡한 물질까지, 탄소 원자를 이리저리 조합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탄소가 이렇게나 다양한 물질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탄소 원자 한 개가 다른 원자 네 개와 결합하려는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탄소 원자 하나에 다른 원자를 붙잡을 수 있는 갈고리가 네 개 달렸다고 상상하면 적당하겠다. 갈고리가 네 개나 있는 탄소를 이리저리 붙여 가면서 뭔가를 만든다면 다른 원소를 재료로 삼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탄소 원자가 다른 원자와 달라붙는 힘은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다.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느냐에 따라 아주 튼튼하게 달라붙을 수도 있고, 조건이 바뀌면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쉽게 떨어지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탄소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도 원자끼리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56)


지구에 사는 모든 유기체, 즉 생명체의 몸에는 탄소가 많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탄소는 모두 어디서 왔을까?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구의 공기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별로 없다. 지구의 공기는 질소가 78%, 산소가 21%를 차지하고, 생명체를 이루는 재료인 이산화탄소는 고작 0.04%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금방 바닥나는 일은 없다. 생명체가 죽으면 곰팡이와 세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유해를 썩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명체의 몸은 다시 이산화탄소로 변해서 공기 중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지상의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요약하면 공기 중에 0.04%밖에 없는 이산화탄소 중 일부가 화학반응을 거치며 탄수화물이 되고, 단백질과 지방의 재료로도 활용되어, 마침내 생물의 몸이 되었다가, 생명 활동을 마친 뒤 분해되어 다시 이산화탄소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58-60)


7. 질소와 목욕 N


사람 몸은 단백질로 이루어졌는데, 단백질은 아미노산amino acid이라는 물질이 수없이 붙어 있는 덩어리다. 그런데 여기서 아미노amino라는 말은 질소가 들어 있는 대표적인 물질 암모니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공기를 들이마셔도 그 속에 있는 질소를 아미노산과 단백질의 재료로 활용할 수가 없다. 생명체가 질소 기체를 몸속에서 단백질 재료로 바꾸지 못하는 것은 질소 원자 특유의 성질 때문이다. 질소 원자 자체는 화약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다른 원자들에 달라붙으며 화학반응을 잘한다. 그런데 같은 질소 원자 둘이 달라붙을 때는 갈고리 역할을 하는 세 전자가 모두 한꺼번에 서로서로를 이끌어 붙이는 갈고리 역할을 해서 질소 원자 둘이 아주 야무지게 붙어 있게 한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질소가 삼중결합을 했다고 표현한다. 이 때문에 생명체가 질소 기체를 아무리 들이마셔 봤자 어지간해서는 질소 원자 두 개를 서로 떼어 낼 수가 없고, 당연히 질소 원자를 재료 삼아 다른 물질을 만들 수도 없다. 66-8)


그렇다면 동식물이 몸속에서 질소 원자를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소 기체가 아닌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질소 원자를 흡수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질소 기체의 삼중결합을 끊어서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물질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동식물이 그 물질 속에 있는 질소 원자로 몸에 꼭 필요한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행히도 지구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런 일을 해 온 특별한 생물이 있다. 다름 아닌 세균들이다. 수많은 세균 중 몇몇 종류가 공기 중의 질소 기체를 흡수해서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형태의 물질로 바꾼다. 식물은 땅속 세균들이 바꿔 놓은 물질을 뿌리로 빨아들여 그 속에 든 질소 원자를 이용해 단백질 등 여러 가지 필요한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동물들은 바로 그 식물을 먹는다. 질소 기체의 삼중결합을 끊어 생명체가 활용하기 좋은 질소 원자로 바꿔 주는 이 세균들이 없다면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동물도 살아갈 수 없다. 68)


8. 산소와 일광욕 O


지구 상공에는 자외선을 흡수하는 보호막이 있다. 바로 지구를 감싸고 있는 오존층ozone layer이다. 오존층은 오존ozone이 많이 모여 있는 공기층을 일컫는 말로, 지상에서 대략 20~25km 높이에 해당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상의 생명체들을 위해 오존층을 선물로 준 것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바로 세균, 그중에서도 남세균 종류다. 수십억 년 전에 전 세계 바다에 나타난 남세균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광합성을 하면서 산소oxygen 원자가 두 개씩 붙은 산소 기체를 공기 중에 내뿜었다. 이 세균들이 수억 년 동안 줄기차게 산소 기체를 내뿜자, 지구는 산소 기체가 풍부한 행성으로 변했다. 지구 대기에 산소 기체가 풍부하다 보니, 자외선이 쏟아지는 저기 하늘 높은 곳에서는 산소 기체가 자외선을 맞고 오존으로 변한다. 산소 원자가 두 개씩 서로 짝지어 있는 것이 보통 산소 기체의 모습인데, 그러다 자외선을 맞으면 원자들이 떨어지고, 이내 세 개씩 다시 들러붙어 새로운 물질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오존이다. 75-6)


남세균이 지구에 산소 기체를 이만큼이나 공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산소는 화학반응을 무척 잘하는 원소다. 어쩌다 산소 원자 두 개가 달라붙어 산소 기체가 되더라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뭔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즉, 산소 기체가 자꾸 다른 물질로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공기 중 산소 기체의 양을 넉넉하게 유지하려면 다른 물질로 변해서 없어지는 것을 보충하고도 남을 정도로 남세균들이 계속해서 산소 기체를 내뿜어야 한다. 그러니 남세균은 그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것이고, 대단히 긴 시간 동안 꾸준히 광합성을 했을 것이다. 산소를 이용하는 다른 생물들은 남세균이 만든 산소 기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호흡으로 산소 기체를 들이마시는 수많은 동물 역시 산소 기체가 화학반응을 잘한다는 점을 활용해 살아간다. 사람 역시 호흡으로 산소 기체를 들이마시고 있으니, 산소 기체의 화학반응 능력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76)


9. 플루오린과 아이스크림 F


물 같은 액체 상태의 물질이 마르면서 기체 상태로 변할 때, 주변의 열을 가져가면서 시원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서 가져가는 열을 기화열heat of vapor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냉장고 정도의 냉각 효과를 내려면 아주 쉽게 기체로 변하는 물질이 유리하고, 기왕이면 재활용하기 위해 기체로 변한 뒤에 액체로 되돌리기 편리한 것이 좋다. 이런 용도로 이용하는 물질을 냉매refrigerant라고 한다. 염소chlorine, 플루오린fluorine, 탄소carbon 원자를 조합해 만든 냉매 물질을 각 원소 이름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CFC라고 부르는데, 이 물질의 상품명인 프레온Freon이 유명해져서 흔히 프레온가스라고 한다. 그런데 CFC가 공기 중으로 빠져나오면 하늘 높이 올라가서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CFC 대신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HFC라는 물질을 쓰기도 한다. HFC는 수소, 플루오린, 탄소 원자 등을 성분으로 만드는 물질이므로, 여기에도 플루오린은 들어간다. 82-4)


플루오린은 예전에 플루오르fluor 또는 불소라고도 불렀던 물질이다. 플루오린은 화학반응을 극히 잘 일으키는 물질이어서 도저히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물질을 건드려 끝내 화학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수소와 플루오린이 연결된 물질을 플루오린산fluoric acid, 혹은 불산불화수소산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불산은 산성을 띤다. 아주 강한 산성은 아니지만, 다른 물질과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자꾸 스며들고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 피부나 다른 생물에 닿으면 위험하다.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작은 칩 위에 수없이 많은 부품이 연결된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반도체 부품은 크기가 1만 분의 1mm, 10만 분의 1mm 정도로 매우 작다. 이렇게 작은 부품을 아주 정밀하게 만들려면 재료를 세밀하게 깎아야 한다. 그 작은 부품을 조각칼 같은 도구로 깎을 수는 없으므로, 적절한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불필요한 부분이 삭게 한다. 바로 이 공정에 불산을 쓴다. 85, 88-9)


10. 네온과 밤거리 Ne


가이슬러관에 기체를 넣고 강한 전기를 걸면, 기체 원자 속에 있던 전자가 전기의 힘 때문에 튀어나온다. 전자는 ⊖전기를 띠므로 전자를 잃은 기체 원자는 ⊕전기를 띠게 된다. 이렇게 전기를 띤 상태로 돌아다니는 기체 원자를 요즘에는 플라스마plasma라고 부른다. 플라스마, 그러니까 ⊕전기를 띤 기체 원자는 자연히 ⊖전기 쪽으로 이끌려 날아간다. 플라스마가 유리관 안에서 다른 기체 원자들과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전기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다 보면 다른 원자 안에 들어 있는 전자들과 부딪히거나 서로 이끌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전자들은 힘을 받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전자가 갑자기 속도를 잃을 때는 전자파를 내뿜는다.  따라서 가이슬러관에 넣은 기체의 종류와 양, 압력을 잘 조절하면 전자파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전자파의 주파수도 조절할 수 있다. 만약 플라스마가 내뿜는 전자파의 주파수를 4억~8억 MHz 정도로 유지할 수 있으면, 그 전자파는 사람 눈에 감지되어 빛으로 보인다. 94-5)


주기율표에서 네온은 헬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 같은 열에 배치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네온은 헬륨과 성질이 비슷하다.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지 않는 비활성기체이며, 헬륨처럼 우주 전체로 보면 비교적 흔하지만, 지구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질이다. 1871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y Mendeleev가 대체로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 순서로 원소 이름을 써넣으면서, 성질이 비슷한 것들은 세로로 같은 줄에 오도록 배치한 것이 주기율표다. 그런데 이 원칙대로 정리했더니 어떤 칸에는 써넣을 것이 없었다. 빈칸이 생겼으니 주기율표를 만드는 원리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주기율표가 틀린 것이 아니라 빈칸에 들어갈 원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물질이 발견되어 그 자리를 채울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1898년에 네온이라는 새로운 물질이 공기 중에 0.002% 정도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물질이 주기율표의 빈칸을 채우게 됐다. 99)


11. 소듐과 냉면 Na


소듐은 ⊕전기를 띠려는 성질이 강하다. 소듐의 전기적인 특성을 이용하면 독특한 노란색 빛을 내는 전등을 만들 수도 있다. 나트륨등은 유리관에 소듐을 넣고 전기를 걸어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아내리고 끓어오르게 해서 기체 상태로 유리관 안을 떠다니며 빛을 내뿜게 만든 것이다. 순수한 소듐 덩어리를 물에 던지면 빠르게 폭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듐이 그만큼 격렬하게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증거다.  가성소다는 가혹한 성질을 지닌 소듐 물질이라는 뜻으로, 가성소다가 동물의 살갗에 닿으면 피부에 해를 입는다. 하지만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성질을 적당히 이용하면 가성소다로 세탁물의 찌든 때를 녹여 없앨 수 있다.  양잿물이 바로 가성소다, 즉 수산화소듐을 말한다. 가성소다가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까닭은 이 물질이 대표적인 염기base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소듐과 염소 원자가 규칙적으로 붙어 있는 덩어리다. 그래서 염화소듐sodium chloride 또는 염화나트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03-5)


우리 몸에서 소듐이 꼭 필요한 곳은 신경이다. 사람과 동물은 온몸에 신경이 퍼져 있다. 거대한 신경 덩어리라고도 할 수 있는 뇌에서 몸을 어떻게 움직이라고 보내는 신호가 신경을 통해 해당 부위에 전달돼야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고 여러 가지 감각도 느낄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신호는 전기신호다. 그리고 신경을 통해 전달할 전기신호를 만들기 위해 인체가 사용하는 물질이 바로 ⊕전기를 잘 띠는 소듐과 포타슘이다. 사람의 신경에는 가까이 있는 물질 중에서 ⊕전기를 띤 소듐만 골라서 한쪽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위가 있다. 소듐통로sodium channel와 소듐-포타슘 펌프Na+ K+ pump라고 부르는 부위인데, 소듐통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기를 띤 소듐이 한곳으로 모이는 바람에 상당한 전기가 걸린다. 그러니 몸속에 소듐이 전혀 없다면 신경에서 전기를 일으킬 수가 없고, 신경을 통해 신호가 전달되지 않으면 온몸이 한마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소듐이 없으면 몸은 뇌와 연결되지 못한다. 106)


12. 마그네슘과 숲 Mg


식물에서 초록색을 내는 화학물질을 엽록소chlorophyll라고 한다. 엽록소를 커다랗게 확대해서 보면 핵심이 되는 부분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금속으로 분류되는 마그네슘 원자가 자리 잡고 있다. 즉, 엽록소라는 물질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마그네슘계 유기화학물질을 이용한 광화학반응 목적의 색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싱그러운 숲의 초록빛을 정확하게 일컫는 말이다. 곡식이나 과일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 관점에서 보면, 광합성은 식물이 햇빛 속의 힘을 흡수해서 영양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엽록소의 중심에 있는 마그네슘 관점에서 보면, 마그네슘 원자와 다른 원자들이 이어진 아주 작은 회로가 햇빛의 힘을 받아 작동하면서 전자로 만든 광선 검 같은 장치가 가동되어 물 분자를 조각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각난 물 분자의 파편인 수소가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화학반응을 일으킨 결과로 다른 동물들이 원하는 당분 같은 물질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111-3)


⊕전기를 잘 띠는 마그네슘의 특징을 이용하면 다른 금속이 녹슬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 금속의 전자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 즉 녹스는 현상은 주위에 있는 무엇인가가 금속에서 전자를 떼어 내 가져가려고 하니까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금속의 전자를 가져가려고 하는 물질이 나타날 때마다 금속보다 먼저 나서서 전자를 던져 주는 장치가 있다면 보호하고자 하는 금속 안에 있는 전자는 뜯겨 나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면 마그네슘으로 금속이 녹슬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 장치는 간단하다. 보호하고 싶은 금속과 마그네슘 덩어리를 전선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보호하려는 금속에서 전자가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마그네슘이 재빨리 자기 전자를 떼어서 전선을 통해 전달해 준다. 이렇게 해서 마그네슘은 하나둘 전자를 잃어 ⊕전기를 띠는 상태로 변한 뒤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삭아 가고, 반대로 보호하고자 했던 금속은 마그네슘 덕분에 전자를 잃지 않아서 녹슬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116-7)


13. 알루미늄과 콜라 Al


지표면의 돌과 모래를 이루는 원자를 분석하면 산소와 규소 원자가 매우 많은 편이고, 바로 그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알루미늄이다. 사람들은 흔히 쇳덩어리라고 하면 철을 떠올리는데, 이는 철이 지구에 흔한 금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루미늄은 철보다 더욱 흔하다. 지표면을 이루는 원자의 8% 정도가 알루미늄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렇지만 돌이나 흙에서 알루미늄 원자만을 골라내서 금속 덩어리로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초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은 (베릴륨을 발견하고 요소를 합성한) 독일의 위대한 화학자 프리드리히 뵐러였다. 뵐러는 화학반응을 아주 잘 일으키는 물질인 포타슘을 염화알루미늄aluminium chloride과 반응시키는 과정을 이용해서 상당히 순수한 알루미늄 가루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알루미늄을 뽑아내는 방법이 점점 더 발전해서, 힘들긴 해도 알루미늄 원자가 들어 있는 돌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 조금씩 덩어리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24-5)


그래도 초창기에는 알루미늄 덩어리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연-알루미늄-술에 결국 성공한 인물로는 보통 프랑스의 폴 에루Paul Héroult와 미국의 찰스 마틴 홀Charles Martin Hall이 손꼽힌다. 1880년대 후반, 두 사람이 각자 발견한 기술은 알루미늄을 뽑아낼 수 있는 재료에 전기를 걸어 주는 독특한 화학반응을 통해 알루미늄을 녹여낸 뒤에 다시 훑어 내는 방법이었다. 요즘에는 주로 보크사이트bauxite라는 돌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며,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된 기술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데는 전기가 많이 든다. 다행히 요즘은 돌에서 뽑아내지 않아도 알루미늄을 얻을 방법이 있다. 바로 재활용이다. 게다가 알루미늄을 재활용하면 돌에서 직접 알루미늄을 뽑아낼 때보다 전기를 훨씬 절약할 수 있다. 재생 작업에 소모하는 전기는 돌에서 직접 뽑아낼 때 소모하는 전기의 2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 알루미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널리 쓰이고 있다. 126, 128, 130)


14. 규소와 선글라스 Si


유리와 수정의 재료가 되는 물질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규소silicon 원자에 산소 원자가 둘씩 달라붙은 이산화규소silicon dioxide에서 출발하는 물질이다. 이산화규소를 이루는 산소와 규소는 둘 다 지구에 흔한 원소다. 지표면을 이루는 원자 중에 산소와 규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75% 가까이나 된다. 한반도에서는 또 다른 물질이 유리를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이산화규소 덩어리였던 유리와 달리 그 새로운 물질은 규소를 중심으로 알루미늄이나 철 등 여러 원자가 다양하게 섞인 것이었다. 그 물질은 다름 아닌 도자기다. 여기에 현대의 기술을 더해 규소 원자가 이루는 모양을 적절히 조절하면 더 튼튼하고 더욱 쓰기 좋은 재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원리로 만들어 낸 도자기 계통의 재료를 흔히 세라믹ceramic이라고 한다. 고대의 유리구슬부터 중세의 도자기에 이어 현대의 세라믹까지, 이 모든 것에는 규소가 있고, 규소를 어떻게 녹이고 굳히느냐에 따라 제품의 품질이 달라진다. 134, 137-8)


1950년대의 학자들은 전기가 잘 흐르는 도체와 그렇지 않은 부도체의 중간 성격을 띠는 어중간한 물질을 잘만 이용하면 원하는 경우에만 전기가 흐르게 조절할 수 있는 전자부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물질을 반도체semiconductor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강대원과 아탈라는 규소를 주재료로 삼고 다른 화학물질들을 조금씩 이용해 정말로 이렇게 동작하는 전자부품을 만들어 냈다. 이 부품을 금속산화물 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metal oxide semiconductor field effect transistor라고 한다. 보통은 줄여서 MOSFET로 쓰고, ‘모스펫’이라고 읽는다. 1979년에 나온 모스펫 2만 9,000개짜리 장치가 바로 최초의 IBM PC 핵심 부품이었던 8088 CPU였다.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뿜도록 반도체를 만들면 LED가 된다. 반대로 빛을 받으면 전기를 내뿜는 반도체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만든 장치는 태양광발전소가 된다. 태양광발전 장치를 만들 때도 역시 규소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140-1)


15. 인과 기차 여행 P


화재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가루가 바로 난연제flame retardant라는 물질이다. 그리고 그 난연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phosphorus 원자가 들어 있는 성분이다. 난연제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에 섞어 넣어 불이 잘 붙지 않게 하는 약품을 말한다. 보통은 불이 잠깐 붙었다가도 번져 나가지 않고 그냥 사그라들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들이 많다. 만약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푹신한 가죽 소파 같은 느낌이 나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가죽과 같은 질감의 플라스틱에 난연제를 섞어 소파를 만들면 되고, 불에 안 타는 벽지가 필요하다면 종이와 같은 질감의 플라스틱을 벽지 모양으로 가공한 다음 난연제를 섞어 두면 된다. 난연제는 화재 위험을 낮추고 싶은 그 어디에나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전자제품이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날까 봐 걱정된다면, 난연제를 첨가한 플라스틱으로 제품을 만들면 된다. 난연제 덕택에 플라스틱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값도 싼 환상적인 재료가 되었다. 146-7)


꼭 난연제가 아니어도 인 원자를 이용한 화학물질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과 수소, 산소가 붙어 있는 물질인 인산phosphoric acid이다. 인이 들어 있는 물질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내는 이유는 이 물질이 비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인 원자가 들어 있는 비료를 뿌려 줘야만 농작물이 잘 자란다. 인이 있어야 잘 자라는 것은 농작물이나 식물만이 아니다. 사실은 세상 모든 생물이 자라는 데 인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사는 데도 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인 원자가 들어 있는 물질인 아데노신삼인산adenosine triphosphate이 모든 생물의 몸이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핵심 연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데노신삼인산이 아데노신이인산adenosine diphosphate으로 바뀌는 화학반응을 일으켜 몸 곳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에 활용한다. 몸속에서는 워낙에 별별 곳에 다 사용되는 물질이라 아데노신삼인산이라는 긴 이름 대신 ATP라고 줄여서 표기하는 일이 많다. 147-8) 


16. 황과 긴 산책 S


생명체에서 뽑아낸 다른 많은 물질처럼 고무나무에서 뽑아낸 고무에도 탄소 원자가 주로 많이 들어 있다. 고무 속의 이 많은 탄소 원자는 대개 서로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기다란 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황 원자는 다른 원자 두 개와 잘 결합하려는 성질이 있다. 갈고리가 두 개 달린 원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래서 고무에 황을 넣어 주면 이쪽과 저쪽 탄소 가닥 사이에 황이 끼어들어 양쪽으로 갈고리를 걸고 붙어 버린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는 실 가닥 같은 물질들 사이사이에 황 원자가 들어가서는 접착제처럼 탄소 실 가닥 곳곳을 붙여 버린다고 상상해도 비슷하겠다.  바로 이 때문에 고무에 황을 적당히 넣어 주면 탄소 가닥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고무가 더 탱탱해진다. 생물의 몸속에 있는 단백질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황은 수소결합보다 더 강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황 덕택에 단백질의 모양이 더 다양해질 수 있고, 생명체는 더욱 다양한 단백질을 이용하며 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158)


술파제sulfa drug는 세균의 몸 속에 들어가면 엽산folacin을 만들 때 쓰이는 원료처럼 반응한다. 지구의 생명체들은 모두 DNA와 단백질로 몸을 만들어 가는데, 몸속에서 각종 영양분을 활용해 DNA와 단백질을 만들 때 조금이지만 엽산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균은 몸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스스로 엽산을 만든다. 그런데 세균 몸에 술파제가 들어가면 세균은 술파제를 이용해 엽산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면 오류가 발생해 엉뚱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아마도 술파제에 붙어 있는 황과 다른 원자들의 모양과 성질이 원래 세균에게 필요했던 물질과 묘하게도 비슷해서 혼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엽산이 없으면 DNA와 단백질도 제대로 만들 수 없으므로 결국 세균은 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죽는다. 이와 달리 사람 몸에는 애초에 엽산을 만드는 능력이 없다 보니 술파제의 방해를 받을 일도 없다. 술파제가 등장한 뒤로 인류는 드디어 몸속에 감염된 세균을 제대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164)


17. 염소와 수영장 Cl


염소는 바닷물 속에 ⊖전기를 띤 상태로 넉넉히 녹아 있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이 바로 소듐 원자와 염소 원자가 한 개씩 쌍쌍이 붙어 있는 물질이다. 수영장 냄새는 염소chlorine로 물을 소독해서 나는 냄새다. 염소 원자 둘이 붙어 있는 물질인 염소 기체를 직접 물에 섞어 소독하는 방법도 있고, 염소 원자를 다른 원자들과 함께 이용해 만든 소독약을 쓰는 방법도 있다. 염소는 주기율표에서 플루오린 바로 아래에 적혀 있는 만큼 플루오린과 성질이 비슷하다. 염소도 플루오린처럼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편이고, ⊖전기를 띠는 상태로 쉽게 변한다. 염소 기체를 이용해 소독할 수 있는 까닭도 염소 원자가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염소 기체는 아주 조금만 물에 넣어도 세균을 비롯해 물속에 사는 여러 미생물의 세포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미생물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꿔 버려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몸의 각 부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미생물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167-9)


염소 원자가 들어 있는 위험한 물질을 꼽자면 염산hydrochloric acid을 빼놓을 수 없다. 쇳덩이를 녹일 만큼 강한 산성 물질로 잘 알려진 염산은 염소 기체를 물에 뿌리기만 해도 물과 화학반응을 해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 독가스로 퍼트린 염소 기체를 병사들이 들이마셨을 때 해를 입는 이유 중 하나도 염소 기체가 몸속의 수분과 반응해서 염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강한 산성을 자랑하는 염산은 알고 보면 우리 몸속에도 있다. 위에서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분비하는 위액의 중요한 성분이 다름 아닌 염산이다. 특히 위액 중에서 단백질을 분해하는 펩신pepsin이라는 물질은 산성 환경에서 화학반응을 가장 잘 일으키는데, 산성 물질인 염산은 펩신이 활발하게 단백질을 분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뿐 아니라 염산은 위 속에서 산성에 버티지 못하는 세균들을 녹여서 없애는 역할도 맡고 있다. 사람 위액 속에 염산이 없었다면 입으로 세균이 조금만 들어와도 그것에 감염될 가능성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171)


18. 아르곤과 제주도 Ar


아르곤은 헬륨과 마찬가지로 다른 원자와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물질이다. 어찌나 반응을 안 일으키는지 그저 낱낱이 흩어져 기체 상태로 날아다니기만 한다. 헬륨은 지구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물질이지만, 아르곤은 공기 중에 1% 가까이 들어 있다. 공기 성분 중 질소 기체, 산소 기체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아르곤이다. 그렇다면 아르곤은 어떤 일에 쓰일까? 헬륨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재료를 보호하거나 작업장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때 아르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아르곤 용접을 들 수 있다. 쇠를 녹여 붙이는 용접 작업을 할 때는 높은 온도로 쇠붙이 주위를 녹이는데, 주변의 잡다한 물질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끼어들어 용접 부위를 더럽힐 수 있다. 공기 중의 산소만 해도 화학반응을 일으켜 쇠를 녹슬게 할 수 있고, 먼지가 타서 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아르곤을 넣어 주면 불필요한 반응을 일으킬 만한 것을 모두 날려 버리고 깨끗하게 용접할 수 있다. 179-81)


그렇다면 결코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아르곤과 무엇이든 화학반응을 일으키려고 하는 염소나 플루오린을 서로 섞어 두면 어떻게 될까? 아르곤과 플루오린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상태 중에 전기적으로 특수한 상황이 되는 것을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 또는 Ar-F 엑시머라고 한다. 세상에는 에너지를 가하면 빛을 내는 물질이 여러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은 전기를 걸면 빛을 내고, 어떤 물질은 높은 열을 가하면 빛을 낸다. 그런데 만약 빛을 쐬어 주면 그 결과로 똑같은 빛을 내는 물질이 세상에 있다면 어떨까? 이런 물질은 쐬어 준 빛을 받아서 빛을 내는데, 자기가 내뿜는 그 빛 때문에 다시 더 빛을 내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생겨난 특이하고 강한 빛을 레이저laser라고 한다.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 역시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 중 하나다.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로 만든 레이저는 일상적인 물질을 깔끔하고 정교하게 깎아 내기에 유리해서 그런 작업에 많이 쓰인다. 182-3)


19. 포타슘과 바나나 K


아랍어로 알칼리al qalīy는 원래 식물 따위를 태운 재를 뜻하는 말인데, 실제로 식물을 태운 재를 잘 골라 물에 녹이면 염기성, 즉 알칼리성 용액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전 우리 조상들도 식물의 재를 녹인 물을 잿물이라 부르고 세탁에 이용했다. 염기성을 띠는 잿물에는 단백질 등의 얼룩이나 때를 이루는 성분을 파괴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를 빨래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식물의 몸을 이루는 수많은 원자 중에 탄소, 산소, 수소 같은 원자들은 태우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낱낱이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서로 적당히 붙어서 이산화탄소와 수증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이 물질들은 기체여서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따라서 식물이 타고 남은 재에는 기체가 되어 날아가지 않는 원자들만 남게 된다. 마침 칼륨 원자는 재로 남는 쪽에 속한다. 지금처럼 정밀한 화학반응 기술이 없었던 시절에 식물을 태워서 얻은 재로 알칼리성 물질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기술은 상당히 실용적이었던 셈이다. 187-8)


사람의 신경은 전기신호를 전달하면서 제 역할을 한다. 몸의 특정 부위에서 감지한 것을 뇌에 전달하고, 정보를 받은 뇌가 다시 신체 각 부위로 명령을 전달함으로써 몸이 움직이는데, 이때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통로가 바로 신경이다. 그러므로 전자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사람 몸에서도 충전과 비슷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사람의 몸은 생명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연료로 활용하는 ATP라는 물질을 반응시켜서 충전한다. 이때, 충전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물질이 세포의 겉면에 있는데, 이름하여 소듐-포타슘(칼륨) 펌프Na+ K+ pump다. 우리가 골똘히 생각해야 할 때나 무엇인가를 느끼고 행동해야 할 때, 우리 몸은 평소에 소듐-포타슘 펌프를 가동해 모아 둔 전기를 이용해서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결국 우리가 삶을 사는 수고의 10분의 1쯤은 소듐과 포타슘을 몸속 세포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보내는 데 소모하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1-2)


20. 칼슘과 전망대 Ca


요즘 사용하는 콘크리트란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 그리고 물을 섞어 사용하는 건설 재료를 말한다. 시공할 때는 묽은 반죽 같은 상태지만 시간이 지나면 굳어서 아주 튼튼해진다. 콘크리트의 재료 중 모래와 자갈은 흙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그보다 핵심 재료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시멘트다. 시멘트는 접착제 역할을 해서 다른 재료들을 돌처럼 단단하게 붙잡아 준다. 현대 시멘트의 성분을 살펴보면 칼슘, 탄소, 산소, 알루미늄 같은 다양한 원소들이 보인다. 알루미늄이야 흙 속에 워낙 많이 있는 물질이니 이 중에 눈에 띄는 주성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칼슘과 탄소다. 특히 시멘트의 재료라고 하면 칼슘 원자 하나에 탄소 원자 하나, 산소 원자 세 개씩의 비율로 붙어 있는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 같은 것을 꼽을 만하다. 칼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몸속에 있는 뼈의 성분을 떠올릴 텐데, 우리 몸속에 있는 칼슘을 제외하고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칼슘이 아마 시멘트 속에 있는 칼슘이 아닐까 싶다. 197-8)


사람은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속에서 칼슘 성분을 다양한 화학반응에 활용하곤 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람의 뼈를 이루는 물질의 상당량은 칼슘이다. 우리가 멸치나 우유 같은 음식을 먹으면 그 속에 있던 칼슘이 물에 녹아서 흘러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서 단단하게 굳어 뼈를 이룬다. 사람의 뼈는 화학의 황제인 탄소와 인 등의 물질이 칼슘과 튼튼하게 붙어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서 가벼우면서도 아주 튼튼하다. 몸속에서 칼슘이 수시로 사용되는 현상은 뼈에 역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동물은 칼슘이 필요하면 뼈에 잔뜩 들어 있는 칼슘을 녹여서 사용한다. 사실 몸의 활동에 꼭 필요한 인 성분도 뼈에 저장되어 있던 것을 녹여서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뼈가 몸 여러 기관에 필요한 칼슘과 인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 외에도 사람이 살다 보면 뼈가 낡고 상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뼈는 항상 조금씩 없어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하면서 유지되어야 한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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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모든 것이 양자 이론
곽재식 지음 / 지식의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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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 electron│물체의 성질 대부분을 정해 주는 물질


우리가 흔히 전자 제품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기계는 전자를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조절하여 복잡한 동작을 하는 기구를 말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역시 전자를 조작해서 특수한 기능을 하게 만든 부품이다. 나아가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기계도 따지고 보면 전자 덕택에 움직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전기를 사용한다고 할 때 그 전기는 다들 전선을 따라서 수많은 전자가 움직이도록 하면서 그 전자의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전기의 힘을 이용하는 장치다. 나는 어릴 때 전기가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선 속을 흘러 다니는 전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기가 빛의 속도로 전달된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전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전기 기구 속의 전자는 의외로 느리게 움직인다. 단지 그 전자가 내뿜는 (-)전기의 힘, 음의 전기의 힘 곧 음전기의 힘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속도가 빛의 속도일 뿐이다. 11)


왜 어떤 물질에는 공기 중의 산소 기체가 그렇게 빠르게 달라붙으며 빠른 변질(산화(oxidation) 반응)을 일으킬까? 답은 전자 때문이다. 공기 속의 산소 기체는 전자를 약간 빨아들이고 싶어 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산소 기체는 물체에 닿으면 전자를 끌어당긴다. 산소 기체가 물체에 달라붙어 그 속의 전자를 아예 뜯어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물체는 원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 물질의 모습도 바뀌고 성질도 바뀐다. 이런 현상이 물체가 불타면서 재로 변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불탄다는 것은 산소 기체가 땔감 속에 들어 있는 전자를 빠르게 뜯어 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전자가 잘 떨어져 나가는 물질은 쉽게 불타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반대로 전자가 쉽게 뜯겨 나가지 않는 물질은 불에 잘 타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구조를 가진 물질이 바로 물이다. 산소와 관련된 것 말고도 세상의 온갖 화학 반응이 일어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대부분은 전자에 달려 있다. 14)


이렇게 전자만큼 작은 크기의 알갱이들을 흔히 과학에서는 입자(particle)라고 부른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 온갖 일을 다 일으키는 전자같이 아주 작은 입자의 움직임을 입자 하나하나에 대해 각기 정밀하게 따져 보기 위해서는 양자 이론(quantum theory)이라고 하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계산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 두뇌 속의 전자 움직임을 누군가 조종하여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두뇌 속의 전자를 어떻게 하면 얼마나 바뀌게 되는지를 계산하기 위해 양자 이론이라는 계산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전자라는 입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음전기를 활용할 때는 대부분 전자 때문에 그 음전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의 뇌세포 속에 있는 미세한 전기든, 발전기에서 고압선으로 보내는 막강한 전기든 음전기라면 어느 것이든 그 속의 전자가 내뿜고 있는 전기다. 18-9)


• 위 쿼크 upquark│우리 주변 물체 속에 양전기를 만들어 주는 물질


우리가 흔히 산성 물질이라고 부르는 물질은 물에 섞어 놓았을 때 양전기를 띤 수소가 많이 생긴다. 이렇게 양전기를 띠고 있는 수소를 수소 이온 또는 수소 양이온(anion)이라고 부른다. 흔히 산성 물질이란 곧 수소 이온이 많이 들어 있는 물질, 수소 이온 농도가 높은 물질을 말한다. 그 양전기는 음전기를 끌어당길 수 있고 음전기를 띤 전자를 끌어당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양전기를 띤 수소는 다른 물질 속으로 파고들어서 전자를 끌어당겨서 원래 있던 위치에서 어긋나게 할 수 있다. 혹은 아예 전자를 자기 쪽으로 당기다가 원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아주 많이 빨리 일어나면 전자를 빼앗긴 물질도 급박하게 성질이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 물질을 만난 여러 가지 물질은 견디지 못하고 망가지고 결국 녹아내린다. 이렇게 보면 산성 물질이 갖고 있는 녹이는 힘은 결국 양전기를 띤 수소가 갖고 있는 전기의 힘이다. 양전기를 띤 수소를 다른 말로 양성자(proton)라고 부른다. 21-2)


# pH : 수소 이온이 물속에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표시하는 기호. 수치가 낮을수록 수소 이온이 더 많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얼핏 생각하면 전자가 많이 붙어 있는 원자는 전자가 넘쳐나니까 전자가 잘 떨어지는 물질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원자일수록 그 전자를 끌어당기는 양성자도 많다.  많은 양성자와 많은 전자 사이에 생기는 양전기와 음전기의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오히려 전자가 훨씬 안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힘도 있다. 전자 개수가 많은 원자는 그 원자 속의 같은 전자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힘이 크다. 전자들은 모두 음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음전기와 음전기 사이의 밀어내는 힘 때문에 서로를 튕겨 내려고 한다. 이런 서로 다른 밀고 당기는 힘의 묘한 균형 때문에 원자들의 종류마다 어떨 때 전자가 잘 떨어져 나오고 어떨 때 전자가 잘 붙는가 하는 성질이 특별하게 달라진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받으면 전자가 얼마나 움직이게 되는 지는 역시 양자 이론을 이용해 계산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힘과 움직임의 정도 차이 덕분에 물질의 성질 차이가 나타난다. 26)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서, 과학자들은 양성자 역시 하나의 작은 알갱이가 아니라 다른 더 작은 물질이 모여서 만들어진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자들은 하나의 양성자가 위 쿼크라는 알갱이 두 개와 아래 쿼크라는 알갱이 하나가 합쳐진 물질이라고 보고 있다. 위 쿼크와 아래 쿼크 중에 양전기를 띠고 있는 것은 위 쿼크다. 사실 양성자가 지닌 가장 선명한 특징인 그 양전기의 힘은 본래 위 쿼크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전자나 쿼크처럼 더 작은 물질로 분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작고 가장 기본이 되는 아주 작은 크기의 알갱이를 기본 입자(elementary particle)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기본 입자라는 말 대신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소립자(素粒子)라는 말도 많이 썼다. 그런데 소립자라고 하니 사람들이 작을 소(小)자를 써서 크기가 작은 입자라는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혼란이 없도록 소립자 대신 기본 입자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추세다. 27-8)


• 아래 쿼크 downquark│우리 주변 물체 속에 중성을 만들어 주는 물질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탄소 중 아주 일부가 좀 이상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상한 새로 발견한 탄소 역시 탄소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이기는 하다. 그 말은 둘 다 똑같이 각기 6개의 전자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새로 발견한 이 이상한 탄소는 보통 탄소보다 살짝 무거웠다. 보통 탄소 원자 하나의 무게가 12 정도라면, 새로 발견한 특이한 탄소 원자 하나의 무게는 14 정도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무게만 무거운 탄소가 있다면 탄소의 원자핵 속에 양성자 말고 또 다른 물질이 뭔가 더 붙어 있어서 무게를 더해 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추가로 더 붙어 있는 물질은 전기를 띠고 있으면 절대 안 된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추가로 더 붙어 있으면서 무게만 더 늘려 줄 뿐, 전기는 띠지 않는 물질을 중성의 작은 알갱이라고 해서 중성자(neutron)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성자는 가끔 그중 일부가 방사선을 내뿜고 양성자로 변화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31-2)


탄소 원자는 여섯 개의 전자를 갖고 있다. 전자들이 원자 속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과 다르게 양성자 여섯 개는 대단히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모여 있다. 그런데 양성자들은 다들 양전기를 갖고 있으니 양전기끼리 밀어내려는 힘으로 강하게 서로를 밀쳐 낸다. 그러므로 이렇게 여섯 개나 되는 양성자가 한 군데 모여 있기가 쉽지 않다. 금방 밀려나 흩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양성자들이 서로 붙어 있을까? 과학자들은 거기에 같이 붙어 있는 중성자라는 물질이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중성자와 양성자, 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과학자들은 핵력(nuclear force)이라고 이름 붙였다. 핵력은 양성자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여 주는 접착력이다. 만약 양전기로 밀어내며 튕겨 나가려고 하는 전기의 힘보다도 접착력인 핵력이 충분히 더 강력하다면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은 좁은 공간에 붙어 있을 수 있다. 36)


한참 나중의 일이지만,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그 중성자조차도 더 확대해서 보면 그 내부는 위 쿼크와 아래 쿼크라는 더 작은 물질이 모여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위 쿼크는 양전기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 중성자가 전기를 띠지 않기 위해서는 음전기를 띤 쿼크도 같이 모여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음전기를 띤 아래 쿼크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기 세 개의 쿼크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양성자는 위 쿼크 두 개, 아래 쿼크 하나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중성자는 아래 쿼크 두 개, 위 쿼크 하나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양성자는 위 쿼크가 많이 있는 물질이고 중성자는 아래 쿼크가 많이 있는 물질이다. 마침 위 쿼크의 양전기 세기는 아래 쿼크의 음전기 세기의 딱 두 배다. 그렇기 때문에, 중성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정확히 같아져서 전기를 띠지 않는다. 그리고 양성자는 양전기가 남아돌아 전체적으로도 양전기를 띤다. 38)


• 기묘 쿼크 strangequark│특이한 우주 방사선의 재료


우리가 방사선이라고 부르는 현상 중 다수는 물질과 반응하면 그 물질이 전기를 띄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물질 속의 전자는 작고 가볍기에 방사선을 맞으면 종종 그 힘에 뜯겨 날아가 버린다. 그러면 그 전자가 물질 속에서 하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전자가 부족해진 물질이 엉뚱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방사선을 너무 많이 맞으면 몸에 해롭다는 것도 이런 일일 때가 많다. 그런 만큼 우주 방사선이 잘못해서 컴퓨터에 사용하는 반도체에 우연히도 교묘하게 명중하게 되면, 반도체를 흘러 다니던 전자를 날려 보낼 수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전자가 반도체를 이용해 어떤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그 반도체를 사용하는 컴퓨터의 결과에도 오류가 생길 것이다. 보통 이렇게 생긴 오류는 기계를 한번 껐다가 켜면 다시 새로운 전자가 새로 흘러가면서 저절로 문제가 회복되곤 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부드러운 오류라는 뜻으로 소프트 에러(soft error)라고 부른다. 43)


우주 방사선의 성분인 작은 알갱이들을 살펴보면, 그중에는 무게가 전자와 양성자 사이의 어중간한 중간쯤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 입자는 양성자 무게보다 작으므로 양성자나 중성자가 여러 개 모여서 생길 수는 없는 물질이었다. 그러나 전자보다는 무거우므로 분명 전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전자 여러 개가 뭉쳐 있다고 보기에는 음전기를 띤 전자 여러 개를 뭉쳐줄 만한 방법이 따로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런 관찰 결과는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전자도 양성자도 중성자도 아닌 무엇인가 다른 물질이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양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영도 아닌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그나마 그런 입자가 한두 가지였으면 전자, 양성자, 중성자 말고, 무엇인가가 하나쯤 더 있다고 치고 적당히 넘어갔을 텐데, 그렇게 이상해 보이는 입자들이 너무 많았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 세 가지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우아한 꿈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46)


그러던 중에 1960년대 중반 무렵이 되자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 나가면서 명성을 얻은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미국의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이었다. 겔만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양성자, 중성자, 파이온, 델타 입자, 시그마 입자, 오메가 입자 등등의 다양한 입자들은 사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쿼크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성자는 위 쿼크 두 개와 아래 쿼크 하나를 합쳐서 만든 것이고, 중성자는 위 쿼크 하나와 아래 쿼크 하나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파이온은 위 쿼크 또는 아래 쿼크와 함께 거기에 더해 그 둘이 아닌 또 다른 세 번째 쿼크를 합치면 만들 수 있다. 그 세 번째 쿼크의 이름은 기묘 쿼크(strange quark)로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겔만의 입자 분류 기준 속에서 진정한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재료가 되는 물질로 쿼크가 있다는 생각이 탄생했다. 지금까지도 전자나 쿼크보다 더 단순하고 작은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47)


• 광자 photon│빛의 재료이자 전자기력의 운반자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에 따르면, 빛이란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엮여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물결치듯 퍼져 나가는 현상이다. 맥스웰의 이론을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해 보자면 빛은 전기장(electric field)과 자기장(magnetic field)이 서로 엮여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허공을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빛을 다른 말로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라고도 하고, 줄여서 전자파라고도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전자기파만을 빛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런데 빛 중에는 자외선이나 적외선처럼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도 많으며 그렇게 보면 전자기파나 전자파나 빛은 다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리고 빛을 이루고 있는 전기와 자기의 힘이 세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정도가 얼마인지를 따지는 말이 바로 주파수다. 만일 어떤 빛이 80헤르츠의 주파수를 갖고 있다고 하면, 그 빛은 1초에 80번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세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빛이라는 뜻이다. 50-1)


흑체 복사(black body radiation) 문제란 성질이 아주 단순하다고 가정한 물체를 대상으로 온도와 빛의 관계를 풀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흑체 복사에서 온도에 따라 빛이 나오는 정도를 계산해 보면 온도가 올라갈수록 높은 주파수를 띤 빛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결론이 나왔다. 온도를 조금만 올려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의 빛인 자외선이 막대한 양으로 쏟아지는 것이 그 시대 과학자들의 계산 결과였다. 만약 현실이 그대로 벌어졌다면, 사람이 높은 온도로 철을 달굴 때마다 거기서 강력한 자외선이나 X선이 마구 쏟아져서 그 빛을 맞고 모두 피부가 상하고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구식 전등 역시 온도를 높여 가며 빛을 내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므로 옛 과학자들의 계산대로라면 전등불의 전등만 켜도 거기서 엄청난 양의 자외선과 X선이 쏟아져 주변을 파괴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오류를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라고들 불렀다. 52)


하지만 1900년, 플랑크는 놀라운 방법으로 자외선 파탄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빛이 세지고 약해지는 정도에 일정한 단계가 있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을 계산 방법에 끼워 넣었다. 그 말은 빛의 양을 따질 때 어떤 최소의 단위가 있어서 빛 한 개, 빛 두 개라고 빛을 셀 수가 있다고 치고 계산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치고 계산해야만 뜨거운 물체가 빛을 내뿜을 때 어떤 색깔의 빛이 나오는지를 더 정확히 예상할 수 있었다. 플랑크는 이 이론의 특징이 어떤 양(quantity)을 작은 단위의 조각으로 단계별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 양의 작은 단위를 퀀텀(quantum) 곧 양자라고 불렀다. 그 덕택에 이 이론의 이름은 양자 이론(quantum theory)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양자 이론에 등장한 빛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빛 한 조각을 광자(photon)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빛과 빛을 이루고 있는 작은 조각인 광자가 과학자들이 생각한 첫 번째 양자 물질이고 퍼스트 퀀텀이다. 52-3)


플랑크는 정작 자신이 양자 이론을 개발해 놓고도 정말로 빛이 광자라는 작은 조각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정말로 광자로 되어 있다는 듯한 증거는 계속해서 등장했다. 결국, 1920년대 중반이 되자 과학자들은 빛의 움직임과 빛이 지닌 힘을 계산하기 위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계산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작은 알갱이의 움직임을 나타내면서도 그 알갱이의 속력이나 위치를 계산할 때는 부드러운 물결의 움직임이나 소리의 높낮이 또는 물체의 떨림을 계산할 때 쓰던 방식을 가져 와서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아주 특이한 계산 방법이었다. 이런 계산 방법을 파동 함수(wave function)를 다루는 파동 방정식(wave equation)이라고 한다. 파동 함수로 양자 이론을 풀이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로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에어빈 슈뢰딩거(Erwin Shrodinger)를 자주 꼽는다. 53-4)


• 글루온 gluon│원자력의 뿌리가 되는 강력의 운반자


우라늄이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 원인을 살펴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강력(strong force)이라는 힘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력의 간접 영향 때문이다. 가장 흔한 우라늄 원자 하나 속에는 그 중심의 핵 부분에 92개의 양성자와 146개의 중성자가 엉겨 붙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핵력이 세다고 해도, 238개 중에 총 92개나 되는 양성자들이 계속 같은 양전기끼리 서로 밀어내려는 전기의 힘을 내뿜는다면, 가끔은 그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쪼개져 떨어져 나올 수 있다. 이런 일이 정말로 생기면, 238개의 덩어리 중에서 일부가 떨어져 튕겨 나간다. 보통은 양성자 두 개와 중성자 두 개가 붙은 조그마한 조각이 튕겨 나온다. 그런 식으로 튀어나온 조각을 알파선(alpha ray)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방사선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이렇게 알파선이 튀어나오는 현상을 알파 붕괴(alpha decay)라고 부른다. 이런 방사선은 C-14 같은 물질 속에서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며 내뿜는 방사선과는 성질이 매우 다르다. 61)


전기의 힘과 강력을 비교해 보면 그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전기에는 양전기와 음전기 두 가지가 있다. 그래서 양전기와 음전기는 서로 끌어당긴다. 반대로 같은 양전기끼리 또는 음전기끼리는 서로 밀어낸다. 이런 전기의 힘 덕택에 수많은 전기 현상이 일어나고 전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러 물질의 서로 다른 성질을 만들어 낸다. 한무영은 전기처럼 무엇인가 두 가지 다른 것이 힘을 만드는 현상뿐 아니라 무엇인가 세 가지 특성이 어울려 힘을 만들 수가 있다면 그런 힘은 강력과 같이 아주 복잡하고 특이한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냈다. 쿼크를 개발한 머리 겔만은 이 생각을 받아들여 그 세 가지 특성에 빨강(red), 초록(green), 파랑(blu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실제로 쿼크가 어떤 색깔로 보이느냐 하는 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색깔 이름을 딴 이런 쿼크의 성질을 그냥 색깔이라고 부르면 눈에 보이는 색깔과 헷갈릴 수도 있으므로 보통은 색전하(color charge)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65)


강력은 세 물체가 빨강, 초록, 파랑 세 가지 색전하를 각기 한 가지씩 갖고 있을 때 그 세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붙이는 힘이라는 것이 한무영의 이론이었다. 이런 독특한 성질이 있다고 치고 계산 방법을 만들면 강력이 일으키는 여러 특이한 현상을 훨씬 잘 풀이할 수 있었다. 강력이 쿼크를 잡아당기는 힘은 해괴하게도 가까울 때는 힘이 약해지고 멀리 떨어질수록 힘이 더 세질 때가 있다. 이런 성질을 점근적 자유도(asymptotic freedom)라고 부른다. 또 쿼크는 항상 둘씩, 셋씩, 여러 개가 붙어 있는 덩어리로만 발견될 뿐, 그 덩어리에서 쿼크 하나만을 따로 떼어내서 관찰하기는 어렵다. 이런 현상을 쿼크 속박(quark confinement)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전자나 광자는 그렇지 않다. 전자는 하나하나 분리되어 있는 상태가 기본이다. 광자 역시 광자 하나만 떨어져서 돌아다니는 일이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강력의 영향 때문에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서로 당기는 힘인 핵력도 탄생한다. 66)


머리 겔만은 한무영의 연구를 받아들여 쿼크와 강력을 계산하는 방법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그 계산 방법에 직접 이름을 붙였다. 그는 강력 계산법은 색전하를 따지는 연구라고 해서 양자색역학(quantum chromodynamics, QCD)이라고 불렀다. 양자색역학이라는 계산 방법의 전체적인 방식을 살펴보면 그 전체적인 흐름은 전기의 힘을 계산할 때 쓰는 양자전기역학과 비슷하다. 즉 두 물체 사이에 힘이 있을 때 힘의 운반자가 그 두 물체 사이를 오고 간다고 치고 그 때문에 힘이 나타난다고 보면서 그 힘에 대한 계산을 해보는 방식이다. 전기의 힘을 따질 때 물체 사이를 오고 가면서 전기의 힘의 운반자가 된 것은 광자였다. 마찬가지로 양자색역학에서는 쿼크끼리 서로 글루온(gluon)이라는 운반자를 주고받는다고 치고 계산하면서 어디에 어떻게 강력이라는 힘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알아낸다. 이때에도 물결치는 듯한 현상을 따지는 방법인 양자 이론을 적용한 방법을 사용한다. 67)


• 맵시 쿼크 charmquark│지금의 과학을 완성해 준 물질


양자장 이론은 모든 물체에 대해 그 물체를 나타내는 양자장이라고 하는 어떤 장(field)이 온 세상에 퍼져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장의 움직임이 곧 물체에 일어나는 변화를 나타낸다고 보고 계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양자장 이론에 따라 물결의 움직임을 막상 계산해 보려고 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때가 많다. 제대로 숫자를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가 자꾸 계산 과정에서 나오는 것은 양자장 이론의 고질적인 문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무한대 문제가 나올 때는, 대충 안 풀리는 부분은 적당히 제쳐 놓고 넘어간 뒤에 나중에 몇 가지 숫자들을 끼워 맞춰서 “아마 이럴 것이다”라고 계산할 수 없는 부분을 숫자 몇 개로 바꿔치기하는 요령까지 개발해야 했다. 일종의 편법이다. 이 편법 계산 요령을 재규격화(renormalization)라고 부른다. 전자와 광자의 움직임과 힘에 대해 계산을 할 때 재규격화 방법을 개발해서 어쨌든, 무엇인가 답이 나올 수 있게 한 것은 리처드 파인먼 최대의 공적이었다. 72-4)


약력(weak force)은 물질의 근본을 바꿔 주는 역할을 하는 아주 기이한 힘이다. 그래서 약력은 강력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방사능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1970년대의 과학자들은 케이온이라는 물질이 약력 때문에 방사선을 내뿜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무엇인가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렇게 연구한 결과를 흔히 김(GIM) 기작(mechanism)이라고 부른다. 김 기작을 연구하던 셸던 글래쇼(Sheldon Lee Glashow)는 김 기작을 좀 더 쉽고 간편하고 깨끗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머리 겔만과 한무영 등의 과학자들이 만든 쿼크에 대한 이론이 맞다고 해야 설명이 쉬워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그때까지는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쿼크가 하나 더 있으면 말이 정말 더 잘 맞아 들 거라고 보았다. 이때 글래쇼는 그 새로운 쿼크를 맵시(charm) 쿼크라고 불렀다. 글래쇼는 그때까지 아무도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쿼크인 맵시 쿼크가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75)


게일러드, 이휘소, 그리고 연구에 도움을 준 또 다른 과학자 조너선 로스너(Jonathan Rosner)가 함께 쓴 논문이 바로 제목도 기가 막힌 <Search for Charm>이다. 1974년 상반기에 이 논문의 원고가 나오고 불과 몇 달이 지난 1974년 11월에 정말로 맵시 쿼크를 품고 있는 물질이 발견되어 버렸다. 팅(Ting)과 릭터(Richter)라는 과학자가 각기 따로 발견했는데, 팅은 그 물질에 제이(J)라는 이름을 붙였고, 릭터는 그 물질에 사이(psi)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과학계에서 말하는 11월 혁명이다. 혁명이라는 말은 너무 과장인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 큰 사건이기는 하다. 단지 맵시 쿼크라는 새로운 물질이 나타났다는 그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쿼크라는 것들로 세상의 보통 물체들 대부분이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 전체가 맞다는 아주 기막힌 증거를 발견한 사건이었다. 덕택에 지금까지도 양자장 이론은 모든 물질과 힘을 설명하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기초 이론 역할을 하고 있다. 77-8)


• 뮤온 muon│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사선의 대표인 전자의 무거운 친척


뮤온은 1936년에 발견되었다. 그때는 과학자들이 온 세상은 모두 음전기를 띤 전자, 양전기를 띤 양성자, 전기가 없는 중성자라는 세 가지의 작디작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음, 양, 중성의 조화가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전자도 아니고 양성자도 아니고 중성자도 아닌 뮤온이 난데없이 발견되어 그 순박한 믿음을 깨뜨려 주었다. 뮤온의 무게는 대략 180론토그램 정도인데, 전자의 무게는 약 0.9론토그램이고, 양성자나 중성자의 무게는 1700론토그램 정도다. 그러니 뮤온의 무게는 전자와 양성자 둘 사이의 애매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전자가 뭉쳐서 뮤온이 된다는 식으로 상상을 해 보자니 너무나 이상하게도 뮤온이 갖고 있는 음전기의 세기는 전자가 갖고 있는 음전기의 세기와 정확히 같았다. 전자와 음전기의 정도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딱 맞춰 놓은 것처럼 전자의 음전기 세기보다 뮤온의 음전기 세기는 1%라도 더 세지도 더 약하지도 않게 똑같은 정도의 세기였다. 83-4)


뮤온은 보통 지구 하늘 높은 곳 즈음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뮤온은 우주 방사선 중에서도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온 우주 방사선의 영향을 받아 지구의 하늘에서 새로 생겨난 2차 우주 방사선 또는 3차 우주 방사선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늘에서 생겨나 떨어지는 뮤온의 속력은 무척 빠르다. 그렇게 빠른 속력으로 날아가는 물체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뮤온은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꽂힌다. 빠른 것은 시속 수천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속력으로 지상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나 빠르게 날아가기 때문에 뮤온은 다른 물체를 쉽게 꿰뚫고 통과한다. 뮤온은 같은 속력의 전자보다도 훨씬 더 물체를 잘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뮤온은 꼭 전자처럼 음전기를 띠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물체 속에 들어갔다가 그 물질 속에 있는 전기를 띤 성분 때문에 이끌리거나 밀리다 보면 날아가는 방향이 휘거나 속력이 늦춰지는 현상도 나타난다. 85)


어떻게 보면 뮤온은 방사능을 띤 전자 같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뮤온은 항상 뮤온 상태로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뮤온은 방사선을 내뿜고 흔한 전자로 변해 버린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전자와 뮤온을 한 묶음으로 묶고, 그 둘이 양성자와 중성자보다 가벼운 물질이라는 뜻으로 가볍다는 뜻의 그리스어를 변형한 말인 렙톤(lepton)이라는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한자어로 번역해 경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전자와 뮤온은 경입자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기본 입자다. 그에 비해 양성자, 중성자 같은 물질은 무겁다는 뜻의 그리스어를 변형하여 바리온(baryon)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다. 역시 한자어로 반영해 중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중입자로 분류했던 양성자, 중성자가 진정한 기본 입자가 아니고 쿼크 세 개의 조합으로 된 물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요즘에는 쿼크 세 개가 조합된 물질을 중입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88)


• 타우온 tauon│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전자의 더욱 무거운 친척


1975년 연말 무렵 마틴 펄(Marin Perl) 연구팀이 찾아낸 물질은 대단히 짧은 시간이 지나면 바로 방사선을 내뿜고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마틴 펄이 찾아낸 물질의 수명은 300펨토초가 되지 않았다. 1펨토초는 1000조 분의 1초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가 찾아낸 물질은 태어난 뒤 30조 분의 1초가 지나면 그 사이에 삶을 다 살고 썩어서(decay) 사라져 버리며 다른 물질로 변하는 그런 물질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질에 대한 무엇인가 연구하고 살펴보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을 활용하면 한 가지 묘수가 생긴다. 만약 펄이 찾아낸 물질을 시간이 지연되는 세상에서 만들고 바깥 세상에서 이 물질을 관찰한다면 어떻게 보일까? 이 물질 입장에서는 여전히 30조 분의 1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흘러갔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시간이 훨씬 빨리 흐른다. 반대로 말해 보면 그 물질의 세상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94)


다시 말해 관찰하려는 물질을 우주로 날아가는 우주선처럼 빠르게, 더 빠르게, 아주 빠르게 움직여서 시간 지연을 많이 일으키면 그 물질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난다. 그리고 기본 입자들에 대해 실험하는 곳에서도 바로 이런 원리를 이용해서 굉장히 빠르게 물질이 움직이면서 벌어지는 현상을 조금 더 오래 세심히 살필 수 있다. 자주 벌어지는 현상 중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뮤온을 맞게 되는 이유도 사실은 상대성 이론과 시간 지연 효과 때문이다. 뮤온의 수명도 길지는 않다. 고작 2마이크로초, 그러니까 50만 분의 1초 정도다. 이 정도면 하늘 높은 곳에서 생긴 뮤온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 수명은 끝나버린다. 그런데 뮤온이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래서 실제로는 상대성 이론에 따라 뮤온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뮤온은 땅에 떨어질 때까지도 수명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우리 머리 위로 뮤온이 떨어져 닿게 된다. 95)


상세한 분석을 거쳐 펄이 발견한 것은 결국 새로운 기본 입자로 판명되었다. 그 이름은 타우온(tauon)이다. 뮤온, 그리고 전자를 뜻하는 일렉트론(electron)과 같은 운율이 되도록 타우(tau)라는 말을 변형해 만든 말이다. 그래서 타우온 대신 그냥 짧게 타우(tau)라고만 부를 때도 있다. 타우 경입자 또는 타우 렙톤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질을 조사해 보니 타우온은 뮤온보다 무게는 훨씬 더 무거웠지만, 나머지 성질은 뮤온과 매우 비슷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뮤온과 성질이 비슷한 전자와 타우온의 성질도 비슷하다는 뜻이다. 뮤온이 그랬던 것처럼 타우온도 음전기를 띠고 있고, 그 음전기의 세기는 전자의 음전기 세기, 뮤온의 음전기 세기와 정확히 같다. 즉 전자, 뮤온, 타우온이 하나의 가문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마침 방사능을 따질 때에서는 어머니(mother)와 딸(daughter)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타우온이 방사선을 내뿜고 뮤온으로 변했다면, 흔히 타우온을 어머니 입자, 뮤온을 딸 입자라고 부른다. 95)


• W 보손 wboson│베타 붕괴 방사능 물질의 원인인 약력의 운반자


돌 속의 K-40, 유물 속의 C-14가 뿜어내는 방사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방사선의 성분이 전부 빠르게 튀어나오는 전자라는 것이다. 보통 방사능을 따질 때는 이렇게 나온 방사선을 베타선(β-Ray)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리고 물질이 베타선 즉 전자를 내뿜으며 변화하는 현상을 베타 붕괴(beta decay)라고 부른다. 원자핵 속에 있는 중성자는 위 쿼크 하나와 아래 쿼크 두 개로 되어 있다. 양성자는 위 쿼크 두 개와 아래 쿼크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니 만약 중성자 속의 아래 쿼크 하나가 위 쿼크 하나로 바뀐다면 중성자는 양성자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것이 베타 붕괴다. 즉 무엇인가가 아래 쿼크 하나를 건드려서 위 쿼크로 바꿔 주는 현상이 일어나면 그 물질은 베타선이라는 방사선을 내뿜는다. 그렇게 아래 쿼크를 건드려 주는 힘이 무엇일까? 바로 그 힘을 우리는 약력(weak for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약력이 원자 속을 건드리면 베타선이라는 방사선이 튀어나온다. 105-6)


보통 과학에서 말하는 가장 근원에 있는 힘들은 뭔가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는 힘이 많다. 그러나 약력은 다르다. 약력은 뭘 밀거나 당기는 힘으로 우리 눈에 그 위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약력은 그 대신 물질을 바꾸어 주는 일을 하면서 여러 현상을 일으킨다. 그것도 물질을 이루는 가장 밑바탕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작디작은 그 알갱이를 바꾼다. 이렇게 보면 약력은 기본 입자를 다른 기본 입자로 변신시키는 힘이다. 핵융합 자체는 강력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핵융합이 일어나려면 그 전에 우선 양성자들이 아주 가깝게 달라붙어야 한다. 그때 약력이 필요하다. 약력이 양성자를 중성자로 바꾸어 준다면 전기가 없는 중성자는 그저 강력만 받아서 철썩 달라붙을 것이다. 중성자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잘 해내게 될 것이다. 약력의 활약 덕택에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어서 접착제 같은 중성자가 많이 생기면 훨씬 쉽게 원자들이 달라붙고 핵융합을 잘 일으킬 수 있다. 106-7)


양자장 이론에서는 힘이 있으면 항상 그 힘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운반자가 있다. 약력도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약력의 운반자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베타 붕괴 등의 현상을 일으키는 운반자를 W 보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약력 때문에 베타 붕괴나 다른 방사능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지 계산할 때에는 물질 사이에 W 보손이 오고 가며 힘을 전달한다고 치고 양자장 이론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계산하면 된다. 기본 입자 중에 보스 통계 방법으로 따져야 하는 물질을 보손(Boson)이라고 하고, 페르미 통계 방법으로 따져야 하는 물질을 페르미온(Fermion)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모든 기본 입자 중에 우리가 물체를 이루는 재료로 보고 있는 기본 입자들은 다들 페르미온이고, 물체 사이의 힘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운반자들은 보손이다. 그러므로 전자, 뮤온, 타우온, 각종 쿼크들이 페르미온이고 전기의 힘을 전달해 주는 광자, 강력의 힘을 전달해 주는 글루온 등이 보손이다. 107-8)


• Z 보손 zboson│전기를 띠지 않는 덜 눈에 뜨이는 약력의 운반자


원자는 크기가 작고 전자는 그 원자보다 더욱 작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원자나 전자도 마치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듯한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원자, 전자 따위의 작은 물체가 뱅뱅 돌아가는 듯한 현상을 스핀(spin)이라고 부른다. 전자 말고도 뮤온, 쿼크, 타우온, 글루온, 광자 모두 이런 현상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관찰 결과 우젠슝의 연구팀은 Co-60이라는 코발트 원자에서 방사능 때문에 나오는 전자는 하나 같이 전부 왼쪽으로 도는 듯이 튀어 나온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전기 장치를 이용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면 보통 전자들은 힘을 어디서 어떻게 받았느냐에 따라서 오른손잡이(right handed) 입자가 되기도 하고 왼손잡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약력이 방사능 물질 속에서 베타 붕괴를 일으키며 전자를 튕겨 내서 날려 보낼 때는 마치 누가 일부러 왼쪽으로 전자를 돌리기라도 하는 듯이 왼손잡이 전자만 나온다. 113)


약력이 이 정도로 상식을 초월하는 괴이한 힘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 힘이 언제, 어느 정도로 생기는지, 그 계산하는 방법을 개발해 내려고 노력했다. 연구 결과로 얻은 결론은 힘을 전달하는 운반자가 실제로 혼자서 나타나게 된다면 무척 무거운 무게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약력을 전달하는 운반자를 발견한다면 그 무게는 매우 무거울 것이다. 결코 풀리지 않을 복잡한 문제의 마지막 고비를 넘도록 해 준 것은 한참 나중에 다시 한번 큰 화제가 되었던 물질인 힉스(Higgs) 입자(particle)였다. 그러니까 일단 약력 이론도 원래는 전자기력이나 강력처럼 무게가 없는 운반자가 힘을 전달해 주는 그런대로 평범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힉스 입자라는 또 다른 새로운 물질이 한번 추가로 더 관여하는 덕택에 약력을 나타내는 양자장이 그 영향을 받는다. 그 힉스 입자가 미치는 영향 덕분에 약력을 전달하는 운반자는 무거워진다. 이런 복합적인 이론이 마지막 결과물이었다. 114-5)


이렇게 개발된 약력 이론에는 또 다른 놀라운 특징도 있었다. 이들이 만든 이 복잡한 이론이 약력과 전자기력은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돌아볼수록 더욱 놀라운 결과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많이 다루어 보았고 가장 자주 일상생활 문제와 연관되는 힘인 전자기력이 반대로 힘 중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특이해 보이는 약력과 알고 보면 같은 힘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통합된 전약력 이론에 따르면, 전약력과 관련이 있는 힘을 전달하는 입자는 결국 총 네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그 네 가지는 양전기를 띤 W 보손, 음전기를 띤 W 보손, Z 보손, 광자다. 이 중에서 친숙한 광자는 전자기력을 전달하는 운반자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남은 W 보손 두 가지와 Z 보손이 우리가 보통 약력이라고 부르는 힘의 운반자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W 보손들은 베타 붕괴 등과 같이 그 전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약력을 전달하는 입자다. 117)


1970년대 유럽 과학자들이 만든 가가멜(Gargamelle)은 자동차쯤 되는 크기의 쇠로 된 단단한 통처럼 생겼다. 거기에 기체를 가득 채워 놓는데 아주 높은 압력으로 꾹꾹 눌러 담아 그 기체가 액체로 변할 정도로 꽉 채워 두되 아주 살짝만 건드리면 바로 다시 끓어 올라 기체가 될 정도로 눌러 담아 둔다. 만약 가가멜 속에 아주 작은 알갱이로 된 물질이 하나라도 날아들어 온다면 그것이 그 속의 액체를 살짝 건드릴 것이다. 그러면 그 충격으로 그 주변이 조금 끓어 오른다. 그러면 그 끓어 오른 자국이 아주 미세한 거품 비슷하게 변할 것이다. 그 거품은 사진으로 촬영하면 찍혀 나올 정도로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장치를 거품 상자(bubble chamber)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가가멜은 거대한 거품 상자였다. 1970년대 초가 되어 가가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후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약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W 보손이 일으키는 현상과는 다른 특이한 반응을 찾아내려고 했다. 118-9)


그 당시에는 Z 보손이 전기를 띠고 있지 않은 중성이라고 하여 중성류(neutral current) 현상이라고 불렀다. 결국, 1973년 가가멜에서 세계 최초로 중성류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 말은 Z 보손이 정말로 세상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만화 속 가가멜은 작은 스머프를 못 잡았지만 가가멜 실험 장치는 그 작은 Z 보손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그것은 Z 보손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 많은 과학자들이 겹겹이 이론을 쌓아 만든 그 복합적인 약력 계산 방법 역시 정말로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었다. 1983년에는 아예 Z 보손이라는 운반자가 그 자체로 따로 튀어나와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명확히 찾아내기까지 했다. 역시 W 보손을 발견한 유럽 과학자들이 해낸 일이었다. 중성류 현상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유령 같은 물질이라고 부르던 흐느끼듯이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다니는 물질의 움직임을  추적해서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은 유령 입자(ghost particle)를 사냥해야 했다. 119)


• 중성미자 neutrino│가까이 있지만 너무나 느끼기 힘든 아주 흐릿한 물질


반물질(antimatter)은 단순히 희귀할 뿐만 아니라 쓸모도 많고 찾는 사람도 많은 물질이다. 어림짐작으로 계산해 보면, 단 0.1그램의 반물질만 있어도 거기서 나오는 빛을 전기로 다 바꾸면 대한민국의 모든 건물, 가게, 공장 등등에서 온종일 사용하는 양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우주 전체에서 같은 무게의 재료를 사용해 그보다 더 강한 빛을 내뿜을 방법은 이론상 없다. 어떤 원료를 쓰든 간에 가장 강한 빛을 만들 방법은 반물질을 쓰는 것이다. 반물질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물질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빛은 더욱더 많아진다. 그렇게 빛을 뿜어내고 나면 반물질은 완전하고도 깨끗하게 사라진다. 그래서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불타고 나서 잿더미가 남는 것 같은 현상조차 없다. 연기나 냄새가 남는 일도 없다. 그저 빛 이외에 모든 것이 완벽히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반물질이 그 짝이 되는 보통 물질과 닿으면 빛을 내뿜으면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현상을 쌍소멸(pair annihilation)이라고 부른다. 121)


1930년대 과학자들은 베타 붕괴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인 전자가 튀어나올 때 과연 어느 정도로 맹렬히 튀어나오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베타 붕괴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속력은 이상하게도 그때그때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전자의 속력이 달라진다는 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law of energy conservation) 위반이다. 결국 파울리는 이 정체불명의 물질이 뭔지는 모르지만 베타 붕괴 때 같이 튀어나오고 그 물질이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이상한 설명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물질이 뭔지 모르는 이유는 그 물질이 전기를 전혀 띠고 있지 않아 전자 장비로 발견하기가 어렵고 무게도 너무나 가볍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엔리코 페르미는 그런 특징을 강조해서 그 물질에 이름을 붙이려고 했고, 그래서 중성을 띤 입자를 뜻하는 말 뉴트론(neutron)을 이탈리아식으로 변형해 뉴트리노(neutrino)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것을 한자어로 번역해서 부르는 말이 중성미자다. 123-4)


중성미자는 너무나 가볍고 전기도 전혀 띠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도 걸릴 것 없이 아무 물질이나 휙휙 통과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한번 튀어나온 중성미자는 벽을 통과해 그냥 바깥으로 쭉쭉 날아가고 그러다 산에 부딪히면 산도 그냥 통과해 날아간다. 벽이나 사람을 스르륵 통과하는 영화 속의 유령보다도 중성미자는 훨씬 더 물체를 잘 통과하는 유령 입자다. 중성미자가 어찌나 물체를 잘 통과하는지, 중성미자가 바닥 방향으로 날아가면 땅을 통과해 지구를 통째로 지나친 뒤 지구 반대편 땅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하늘로, 더 나아가 우주로 날아가는 일도 너무나 흔하다. 중성미자는 전기의 힘과도 상관이 없고 강력과도 상관없다. 그나마 중성미자는 약력과 반응한다. 그런데 약력은 오른쪽과 왼쪽을 따지는 이상한 성질이 있어서 왼손잡이 물질에만 힘을 준다. 그렇다면 보통 베타 붕괴에서 생겨 나는 중성미자는 그냥 중성미자가 아니라 중성미자의 반대인, 반물질 중성미자, 곧 반중성미자(antineutrino)일 것이다. 125)


• 뮤온 중성미자 muonneutrino│블랙홀 쪽에서 날아온 중성미자


중성미자는 아무 물질이나 잘 통과하면서 무게도 너무나 가벼워 굉장한 속력으로 우주를 얼마든지 날아다닐 수 있다. 그렇기에 중성미자는 별들 사이의 광막한 공간조차 건너다닐 수 있다. 중성미자 외에 이런 물질은 드물다. 별에서 나온 중성미자는 심지어 별빛보다도 더 쉽게 우주를 건너올 수 있다. 빛은 물체에 가로막히기도 하고 반사되거나 휘어지며 방향이 바뀌는 일도 흔히 겪는다. 그러나 중성미자는 그런 일을 거의 겪지 않고 그냥 어지간한 물체면 다 통과해서 계속 날아간다. 태양에서 오는 중성미자를 측정한 과학자들은 측정이 거듭될수록 생각보다 적은 숫자의 중성미자가 감지된다는 결과를 얻어 이상하게 생각했다. 면밀한 검토 끝에 그저 기술 부족으로 단순히 중성미자를 놓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 중성미자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있었다. 그 답은 중성미자가 한 가지가 아니며 여러 가지이고 서로 간에 변화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134-5)


그래서 전자와 비슷하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질로 뮤온, 타우온이 있듯이, 중성미자도 비슷하게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중성미자가 날아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전자 중성미자, 뮤온 중성미자, 타우온 중성미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자꾸 바뀌는 모습은 언뜻 진자가 왔다 갔다 변화하는 것 같다고 해서 이 현상을 학계에서는 중성미자 진동(neutrino oscillation)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중성미자 진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는 내용이 많고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꺼림칙한 대목이 많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중성미자가 자꾸 변신하느냐에 대해서도 모두가 즐겁게 공감할 수 있는 산뜻한 설명은 지금도 없다. 예를 들어, 중성미자가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면 그때마다 그 무게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쉽게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아직 전자 중성미자, 뮤온 중성미자, 타우온 중성미자 각각의 무게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136-7) 


• 타우온 중성미자 tauonneutrino│예전 한때 암흑물질의 후보


루빈과 루빈의 동료인 켄트 포드(Kent Ford)가 정리한 결과에 따르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은하의 가장자리 부분이 돌아가는 속력이 이상하게 너무 빨라 보였다. 꼭 무슨 알 수 없는 무게가 더 실려 있는 듯한 모습으로 은하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은 세상에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물질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암흑물질은 단지 색깔이 없는 물질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외선, 전파, 레이더를 이용한 관찰 등등 모든 빛, 전기, 자기의 힘과 관련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암흑물질은 만질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암흑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란 더욱 어렵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암흑물질의 양을 추산해 보니 그 양이 오히려 보통 물질보다도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우주의 물질 중 85%는 정체불명의 암흑물질이다. 그게 무엇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141-2)


중성미자는 모든 물체를 아주 잘 통과해 지나간다. 그리고 빛, 전기와는 반응하지 않고 약력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중성미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으며 감지하기가 어렵다. 그 말은 중성미자의 양이 굉장히 많고 무게도 무거워서 우주 곳곳에 가득 차 있어도 잘 감지는 안 될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 중성미자의 양이 많으면 암흑물질의 묵직한 무게를 충분히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타우온은 전자에 비해 3,500배나 무거운 물질이다. 그렇다면 타우온 중성미자가 의외로 좀 무게가 많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까지는 타우온 중성미자 역시 무게가 별로 무겁지는 않다는 것이 대부분의 연구에서 나온 결론이다. 지금도 중성미자를 연구해서 암흑물질의 정체를 밝히려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있다. 예를 들어 (심지어 약력에도 반응하지 않는) 비활성 중성미자(sterile neutrino)라고 하는 새로운 중성미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144-5)


• 꼭대기 쿼크 topquark│가장 무겁고 불안해서 관찰해볼 만한 물질


양자 이론에서는 결과가 처음부터 과거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확인하는 순간 결정된다고 봐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그리고 그 문제가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는 상황이 바로 ‘양자 얽힘’이라는 상황이다. 두 개의 경우의 수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과학에서는 얽힘(entanglement) 상태라고 한다. 1론토그램도 안 되는 아주 작은 크기의 패를 나눠 가진 두 명의 도박꾼이 그 패를 들춰보지도 않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도 않고 그대로 자기 집으로 온다고 생각해보자. 양자 이론에서는 이런 경우, 그 패를 어느 한 사람이 들춰보기 전까지는 누가 승리인지 패배인지는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결정된 일은 없다는 것이 양자 이론의 계산 방식이다. 이것을 양자 이론에서는 중첩(superposition)이 있었다가 중첩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즉 승리 패와 패배 패, 한쪽이라고 말할 수 없는 중첩된 상태에 있다가 확인해 보는 순간 중첩이 사라지고 승리 패로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150-1)


그런데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기묘함은 따로 있다. 만약 패를 들춰 보는 순간에 승리와 패배가 결정된다면 내가 승리 패를 뽑은 순간, 상대방 패는 패배 패가 되도록 무엇인가가 상대방 패를 동시에 같이 결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승리 패인 것을 확인했는데, 상대방도 패를 들춰 봤더니 역시 승리 패라고 나와서는 안 된다. 내가 승리 패인 것을 확인한 순간, 상대방 패는 패배 패가 나와야만 한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나는 승리 패, 상대방은 패배 패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승리와 패배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양자 이론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런 것은 중첩 상태가 아니다. 내 패가 승리냐 패배냐 하는 문제는 내가 관측하기 전까지는 정해져 있지 않고 관측할 때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양자 이론의 중첩이다. 이 문제를 논문으로 써서 지적한 과학자들의 이름 약자를 따서 이것을 흔히 EPR 역설(EPR Paradox)라고 부른다. 151-2)


EPR 역설에서는 빛보다 빠른 무엇인가가 있을 수 없다는 상대성 이론의 위반부터가 당장 큰 문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뭐가 있길래 어떻게 이런 일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상대방의 패를 정해 준단 말인가? 그것도 빛보다 조금 더 빠른 정도가 아니라 무한히 빠른 속도로 즉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예로부터 수많은 과학자가 뼈저린 껄끄러움을 느꼈다는 양자 얽힘 문제다. 명확히 관찰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양자 얽힘은 여러 물질이 다양한 반응을 일으킬 때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승리 패를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패를 나누어 가지는 때에 영향을 미치는 듯한 현상이라고 볼 만도 하다. 이런 일은 시간 여행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일이라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원인이 결과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바꾸는 것 같기도 하다. 152)


꼭대기 쿼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본 입자 중에서 가장 무겁고 덩치가 큰 물질이다. 꼭대기 쿼크의 무게는 하나에 30만 론토그램 정도다. 전자 하나 무게와 비교해 보면 꼭대기 쿼크는 35만 배나 무겁다. 쿼크들 대부분은 1970년대에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꼭대기 쿼크는 너무나 무겁고 찾기 어려워서 1995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발견된 거대한 꼭대기 쿼크에서도 양자 얽힘 현상은 어김없이 잘 관찰되었다. 꼭대기 쿼크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나타나자마자 대단히 짧은 시간이 지나면 바로 방사선을 내뿜으며 다른 물질로 변화해버리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꼭대기 쿼크의 수명은 대략 1조 분의 1초를 다시 2조 등분한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꼭대기 쿼크는 다른 물질들과 잡다하게 들러붙거나 반응하는 일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그 덕택에 꼭대기 쿼크를 잘 관찰하면, 쿼크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도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56-7)


• 바닥 쿼크 bottomquark│대형 입자 가속기를 만들어 자주 살펴보던 물질


LHC는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의 약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이 장치가 하는 일은 지상에서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아주 작은 물질을 이런 우주 방사선 같이 빠르게 날아가도록 쏘는 것이다. 대형 강입자 충돌기라는 말에서 강입자는 하드론(hadron)을 번역한 단어로, 쿼크 여러 개가 붙어 있는 물질을 말한다. 우주 방사선 중에 흔히 잘 감지되는 것도 양성자이고 양성자는 쿼크 세 개가 붙어 있는 것이므로 역시 강입자라고 할 수 있다. 보통 LHC 같은 장비를 입자 가속기(particle accelerator)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입자 가속기는 전기를 띤 아주 작은 물질 알갱이를 전기의 힘과 자력을 이용해 빠르게 날려 주는 장치다. 사상 최대의 입자 가속기인 CERN의 LHC 역시 바로 이런 원리로 동작한다. 그래서 LHC에서는 양전기를 띠고 있는 양성자를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고 그 양성자가 날아가도록 가능한 한 강한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전기를 사용한다. 160, 162) 


바닥 쿼크의 발견은 1970년대 중반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SLAC, Stanford Linear Accelerator Center)에서 타우온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얻은 성과였다. 그러니까 전자와 거의 같은 물질로 전자보다 좀 더 무거운 뮤온이 있고 그보다 더 무거운 타우온이 있어서 전자-뮤온-타우온 세 가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침 쿼크들 중에서도 아래 쿼크가 있고 그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무거운 기묘 쿼크가 있고 그보다 더 무거운 바닥 쿼크가 발견되어, 아래 쿼크-기묘 쿼크-바닥 쿼크 세 가지가 있다는 결과였다. 딱딱 짝이 맞았다. 박자가 들어맞는 것 같은 3단계 구성이 두 벌  관찰 되었다. 타우온에 이어 바닥 쿼크가 발견된 것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들이 대체로 세 벌씩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아주 좋은 정황 증거였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3개의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결과가 나중에 추가로 관찰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귀가 딱 들어맞게 되었다. 166)


• 힉스 입자 higgs│기본 입자들이 무게를 갖게 해 주는 것


# 현재까지 밝혀낸 우주의 재료

1. 4가지 물질 재료 : 음전기 쿼크, 양전기 쿼크, 음전기 경입자, 전기를 띠지 않는 경입자

2. 4가지 물질재료를 구성하는 3가지 기본입자 : 음전기 쿼크(아래 쿼크, 기묘 쿼크, 바닥 쿼크), 양전기 쿼크(위 쿼크, 맵시 쿼크, 꼭대기 쿼크), 음전기 경입자(전자, 뮤온, 타우온), 전기를 띠지 않는 경입자(중성미자, 뮤온 중성미자, 타우온 중성미자)

3. 힘의 운반자 역할을 하는 4가지 기본입자 : 광자, 글루온, W 보손, Z 보손


바로 이 12가지 물질 재료 기본 입자들과 4가지 힘 운반자 기본 입자들이 어떻게 서로 반응하는지를 따져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을 현대 과학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이라고 부른다. 과학에서는 우주의 모든 일을 일으키는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네 가지 힘밖에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력은 지금의 표준 모형이 다루지 못하고 있는 대상이다. 이래서야 표준 모형이 우주 모든 물질을 다루는 표준 이론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중력을 계산할 때 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방법에 양자 이론을 적용해서 풀이하기 위한 좋은 방법을 아직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자기력, 강력, 약력, 나머지 세 가지 힘은 모두 양자 이론에 바탕을 두고 계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양자 이론으로 풀이해 보려는 시도는 도전이 시작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아직도 깨끗한 답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171-2)


전자기력의 운반자가 광자이고 강력의 운반자가 글루온이듯이 중력을 전달하는 운반자 역할을 하는 기본 입자에 중력자 혹은 그래비톤(graviton)라는 이름을 붙여 놓기는 했다. 중력자가 중력의 운반자라고 보고 양자장 이론을 개발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중력자를 발견한 사람도 없고 중력자에 대해 명확히 확인된 사실도 없다. 그렇기에 다른 힘과는 달리 중력이 얼마나 센지, 약한지를 계산해 보고 싶을 때에는 양자 이론으로 만든 양자장 이론이라는 방식을 쓸 수가 없다. 중력의 운반자가 오고 가는 모습을 물결과 떨림, 소리를 나타내는 기술을 이용하여 계산하는 그 우아하고도 절묘한 방식을 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상대성 이론의 내용 중에서 특수 상대성 이론만 하더라도 양자 이론과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자재로 결합되어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중력을 계산할 때 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은 양자 이론으로 풀이가 되지 않는다. 172)


힉스 입자는 표준 모형에 나오는 다른 물질들이 무게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힉스 입자가 없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물질의 재료들이 무게를 갖지 못하여 빛과 비슷한 상태가 될 것이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힉스 입자를 나타낼 수 있는 힉스장(Higgs field)이라고 하는 억겁의 바다를 채운 바닷물 비슷한 것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다. 양자장 이론에서 말하는 다른 기본 입자들의 양자장과도 비슷하다. 만약 힉스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물질이 있다면 그럴수록 그 물질은 무거운 무게를 갖게 된다. 반대로 힉스장의 영향을 약하게 받는 물질이 있다면 그 물질은 가벼워진다. 즉 질량이 작게 나타난다. 만약 힉스장이 저 혼자 소용돌이치고 휘몰아치면서 어느 위치에 특히 강한 모습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물질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 그 물질이 관찰되면 그것이 바로 힉스 입자다. 175) 


2012년 7월 4일 드디어 CERN에서 공식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CERN의 과학자들은 125기가 일렉트론볼트 정도의 에너지를 갖는 새로운 입자가 있다는 증거를 찾았다면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새로 나타난 낯선 입자의 무게가 22만 5천 론토그램 정도 된다는 뜻이었다. 유럽 CERN의 LEP 실험에서 힉스 입자를 못 찾고 미국 페르미 연구소에서 힉스 입자를 못 찾았던 딱 그 사이의 무게였다. 여길 봐도 없고 저길 봐도 없었던 힉스 입자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후 수년간 이어진 후속 연구를 통해 세상 모든 물질의 재료인 열두 가지 기본 입자들은 그 움직임을 억겁의 바다에 일어나는 물결이나 소용돌이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양자장 이론이라는 방법으로 계산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을 움직이는 힘은 4가지 운반자를 주고받는다고 치고 계산할 수 있다는 우리의 생각은 적어도 아직은 틀린 점이 없고 잘 들어맞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이 대체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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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급진의 20대 - K-포퓰리즘, 가장 위태로운 세대의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김내훈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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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대 현상, 렌즈를 바꾸자


이 책은 ‘20대 현상’이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 그 해답을 찾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한다. 기존의 담론은 공론장에 새롭게 등장한 의제들 — 페미니즘 및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 에 20대 남성들이 보이는 일련의 반동을 ‘이대남 현상’으로 규정한다. 미디어와 정치권은 20대 남성의 돌출된 경향을 뚜렷한 근거 없이 20대 전반의 것으로 일반화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젠더갈등에 편승하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다. 특별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페미니즘을 제외한 정부·여당발 의제에서, 20대 여성들의 입장과 태도가 남성들과 크게 다르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20대 현상’에서 젠더갈등-차이를 사고하려 할 때 발생하는 혼란은 ‘이대남 현상’의 렌즈로 20대의 보편적 여론을 검토하는 한 피할 수 없다. ‘20대 현상’을 먼저 경유해 ‘이대남 현상’을 사고해야 한다. 그렇다면 ‘20대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렌즈는 무엇일까?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12)


1. 만들어진 세대 ? 20년간의 롤러코스터


뇌는 인간이 보는 것을 능동적 추론으로 다시 구성해낸다. 요컨대 우리의 시각 경험은 눈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난다. 촉각, 청각, 후각도 마찬가지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광경, 소리, 냄새)은 직접 경험이 아니라 캄캄한 극장 안에서 펼쳐지는 전기화학적 연극이다. (…) 다양한 감각기관에서 들어오는 신호들을 비교하고 패턴을 감지함으로써 뇌는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최선의 추측을 한다.” 여기서 ‘최선의 추측’ 메커니즘이 바로 가추법적abduction 추론이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지각하는 간단한 행위에도 다분히 능동적인 주관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텅 빈 공간이지만 우리는 눈에 비치는 사물이 딱딱하고 고정된 물체라고 믿는다. 요컨대 우리가 사물을 사물로 보는 것은 착시나 환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늘 이러한 환각 속에 산다. 17)


공정을 지선至善으로 삼는 것도 아닌데 90년대생들이 그토록 공정을 문제 삼는 까닭은 무엇일까? 임명묵은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을 정서적인 것, 느낌의 문제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공정하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일종의 해열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불안감을 경감해주는 것이다. 현재는 노력하면 보상이 따라오고, 잘살 수 있다는 신화가 깨진 상태다. 남은 것은 덜 노력한 이에 대한 응징이다. 점수가 낮은 사람에게,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응분의 푸대접이 가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해야 한다는 게 90년대생 사이의 암묵적 합의다. 이들이 보기에 고용에서의 각종 할당제,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는 주관적 개입으로 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이며, 합의와 신뢰를 깨트리는 행위다. 90년대생들이 탈-가치화함으로써, 정작 90년대생들의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결집은 반反, 안티anti의 네트워크로만 이루어진다. 24-5)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2021)에서 중요하게 검토할 지점은 청년층은 상위 계층을 자임할수록 보수성이 뚜렷해진다는 사실이다. 덧붙여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계층으로 인식한 청년 남성에서 다른 집단들보다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도울’ 경향이 가장 높다는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착해서’ 그렇다기보다 서로 도울수록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위 계층일수록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돕는 행위, 혹은 그러한 의향을 밝히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생각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은 노력을 덜한 사람들이다. 그에 합당한 응징을 받는 것이며, 이에 온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시스템의 교란이자 위선이다. 조사에 응한 청년 남성들은 일말의 공동체적 가치도 부정한다는 눈총을 받을지언정 위선에만큼은 명확하게 거부 표시를 한 것이다. ‘안티의 네트워크’로 결집한 청년 남성 집단이 반-위선의 네트워크도 견고하게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7)


2. 혐오 ? 우울과 불안의 그릇된 방어기제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뇌의 해석이자 추론 결과다. 코나투스conatus(자기보존 능력)가 계속해서 감소하는 상태를, 뇌는 으레 우울감이라고 추론한다(질병으로서 우울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불안감은 자신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그 상태가 지속될 때 생성된다. 이런 우울과 불안에 대한 신체적 반응이 경멸이다. 자신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위안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발현된 경멸은 깎아내릴 대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는 나의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외부 존재를 자의적으로 점찍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혐오다. 그런데 (방어기제로써의) 경멸은 대개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겨냥한다. 문제를 의인화하는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내부 모델에 견고히 자리 잡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 뒤부터는 깨지기 힘든 고정관념과 편견이 타인을 대하는 판단 근거가 된다. 33)


혐오의 견고한 내부 모델을 구축한 사람은 편견을 반증하는 새로운 지각정보가 입력되어도 좀처럼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다. 반례를 한 트럭으로 접해도 예외적 경우로 치부하지, 편견을 반성하는 이는 드물다.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고, 다양성 교육을 진행하는 데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혐오에 빠진 사람에게 그 불합리함을 증명하는 온갖 데이터는 부질없는 처방이다. 난민이나 이주민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범죄 통계가 거짓이라고 설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떻게든 혐오할 이유를 다시 찾고 만들게 되어 있다. 교육의 가치와 효용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훈계와 계몽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혐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신경증 환자에게 곧이곧대로 ‘당신의 행동은 그릇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언행을 고쳐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만으로 증세가 나아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34)


3. 포퓰리즘 ? ‘그들’과 ‘우리’의 항시적 투쟁


포퓰리즘은 어떤 사상 체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정치운동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다. “보통 이들을 포괄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단순히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정치학자 폴 태가트Paul Taggart는 포퓰리즘의 근본적 특징으로 유동성을 꼽는다. 실체라고 부를 내용이 결여되어 있기에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등에 붙어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인민주의, 대중주의, 민중주의 등으로 번역된다. 풀이하면 인민을 중심으로, 인민을 위하고 인민에게 소구하는 사상·체제·어젠다·메시지를 망라하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는 단 하나의 가치를 정해두고 그에 걸맞지 않은 이는 인민이 아닌 존재로 밀어낸다. 인민이 아닌 존재는 부패한 엘리트 집단일 수도, 하층민일 수도, 이주민일 수도 있다. 단 하나의 공동선이 존재하고 그걸 표방하는 자신들만이 인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는 포퓰리스트들은 자연히 다른 세력을 악마화한다. 자신의 당내에서조차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40-1)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포퓰리즘’이라는 명제는 포퓰리즘이 항상 민주주의와 함께 있다는 논의에서 출발한다. 정치학자 벤저민 아르디티Benjamin Arditi는 프로이트의 증상symptom 개념을 빌려와 포퓰리즘-민주주의 관계를 증상-자아 관계와 같다고 주장한다. 자아가 완전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결여하고, 무언가에 억압되어 있는 한, 증상은 자아에 내속해 있으면서 이따금 불안과 소요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포퓰리즘도 민주주의에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하면서 이따금 증상으로 나타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과 관료 등에 위임되어 있다. 그런데 인민은 대표를 직접 뽑는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이에 개입한다. 이렇듯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는 비전문가·대중의 개입이 일으키는 소요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항상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42-3)


4.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 포퓰리즘의 정치경제적 계기


자본주의가 발전한 20세기 이후 프티 부르주아는 신·구-중간계급(각각 경영관리직·전문기술직 등과 자영농)으로 나뉜다. 노동자라 할지라도 관리직이나 전문기술직에 종사할 경우 신-중간계급으로 분류된다. 정치철학자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는 비생산적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모두 중간계급으로 묶은 바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구-중간계급이 크게 감소하고 노동계급이 증가했다. 문제는 노동계급의 숫자보다는 신-중간계급의 가파른 증가에 있다. 풀란차스의 계급 범주에 따르면 후기산업사회에서 노동계급으로 분류되는 상당수 노동자들은 실은 신-중간계급일 수 있다. 계급정치에서 이들의 위상은 논쟁의 대상이다. 이념적으로 이들은 모순되는 위치에 있으며, 따라서 단일 대오로의 결집이 쉽지 않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정체성을 사회적 적대의 기본 단위로 상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늘날 한국의 계급구조는 이런 입장의 현실적 근거가 된다. 55-7)


5. 기만과 위선의 정치 ? 포퓰리즘의 문화정치적 계기


서구 선진국의 기득권 엘리트와 리버럴 세력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일환으로 PC와 정체성 정치, 페미니즘 등 자유주의적 가치를 아전인수 격으로 활용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이를 ‘깨어 있는 자본주의’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휘두르며 희화화한다.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환멸이 뿌려진다.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한국의 청년들이 PC와 정체성 정치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서구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리버럴의 위선과 자가당착이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주요 창구 중 하나는 도를 넘는 ‘관종’ 행각을 벌이고 있는 ‘사이버 렉카’다. 이들의 목적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알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과거에 내놓은 자유주의적 메시지와 그에 어긋나는 행실을 가져다 놓고 ‘내로남불’이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사이버 렉카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PC와 정체성 정치 등 자유주의적 의제와 메시지에 막연한 반감을 가지며, 점차 ‘진보=위선’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각인하게 된다. 66-7)


6. 20대의 탈-정치적 정치 ? 응징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오늘날 20대의 정치 무관심은 10여 년 전과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이른바 ‘적극적 무관심’인데, 바꿔 말하면 정치에 대한 강한 환멸과 불신이다. 과거 20대의 정치 무관심이 시큰둥하고 별생각 없는, 말 그대로의 무관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한층 공격적인 정치혐오에 가깝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도 제도권 정치(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태도가 합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연구참여자 중 한 사람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이후로 정치에 관심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제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경제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느냐에만 관심을 둔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히 정치 문제와 개인의 경제적 이해를 분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체로서 정치에 대한 환멸의 적극적 표현으로 보는 게 옳다. ‘함께 잘사는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으로서 정치라는 관념에 대한 회의는 공공성의 붕괴와 각자도생의 문제로 이어진다. 73)


7. 정치 불균형과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 ? 자유주의에서 극우까지의 세계


한국의 청년들 대다수는 한국의 양대 정당을 크게 다를 바 없는 집단이라고 본다. 동시에 현재 정부·여당이 극단적 좌편향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야가 ‘거기서 거기’라면서도 한쪽은 지나친 좌편향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협소해진 사회·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진보정치의 우경화가 가져온 착시다. 말하자면 청년세대에게는 보수가 중도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보통 한국인’의 정치적 상상력은 자유주의-권위적 보수주의의 박스권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익 포퓰리즘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목격된다. 특히 현재 20대,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가 보편화된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정치적 상상력을 넓힐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 북한 문제와 레드 콤플렉스라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겹치며 자유주의에서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나아가는 발상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79-80)


뚜렷한 지지 정당이 없는, 즉 당장이라면 어느 당에 투표하겠지만 인물과 공약을 보고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들의 선택은 결국 싫어하는 정당의 후보를 떨어뜨리는 투표로 귀결된다. 이렇듯 특정 세력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부정적 투표’ 혹은 ‘응징 투표’를 하는 사람들을 부동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중도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추정컨대 여론조사에서 특정 정당지지자임을 밝힌 20대의 상당수는 ‘응징 투표’의 일환으로 지지 정당을 그때그때 바꿀 가능성이 크다. 증가하는 부동층은 정치 무관심의 산물이며,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불신, 혐오의 적극적 표현이기도 하다. 정치 현안을 인터넷으로만 접하는 부동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극적 기사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헤드라인이 말해주지 않는 맥락과 사정을 능동적으로 살피는 경우는 드물며, 그러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치 무관심은 손쉽게 응징 투표로 이어지고, 그렇게 교체된 정권에서 또다시 실망과 응징이 반복된다. 82-3)


8. 진짜 분노를 가리는 학습된 분노 ? 사유의 외주화


디지털 큐레이션이란 그때그때 화제가 되는 이슈들을 흥미로운 것 위주로 선별하고 단숨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혹은 이해했다는 인상을 남겨주는 콘텐츠의 모음을 일컫는다. 청년들이 시사·정치 뉴스 창구로 이용하는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큐레이션 콘텐츠의 유통에 더없이 적합한 플랫폼이다. 디지털 큐레이션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 본인에게 흥미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판단을 디지털 큐레이션 제작자에게 위탁하고 외주화한다. 이들은 (특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정치 일반에 대한 피상적 인상을 쌓는다. 이 지점에서 그 어떤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클릭을 유도하는 콘텐츠와 그 제작자가 바로 사이버 렉카다. 연구참여자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그거라도 보면서 ‘소셜미디어로 시사를 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 큐레이션과 사이버 렉카의 손에서 연성화·단순화·예능화한 (더 나쁘게는) 왜곡·날조된 이슈의 편린을 접한다고 함이 더 정확할 것이다. 89-90)


분노와 경멸, 혐오는 정치와 무관하고 사이버 렉카 콘텐츠도 아닌 평범한 게시물을 통해서도 전이된다. 경로는 이렇다. 예컨대 유튜브에서 비디오 게임 콘텐츠를 찾아본 사람에게 해당 영상의 시청자들이 많이 본 또 다른 영상이 추천된다. 그런데 20대 남성 게이머들은 대개 정치적 올바름PC에 적대적이다. PC와 페미니즘의 영향에 따른 게임 캐릭터 재현과 서사 구조 변화를 자신들만의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 관련 유튜브 영상을 몇 차례 접한 이는 의도치 않게 반-PC, 반-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콘텐츠로 유인되기 쉽다. 인터넷 여론이 청년세대의 보편적 생각이 아님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단 생산된 비하·혐오 콘텐츠는 특정 커뮤니티에만 고여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렉카 계정들이 퍼뜨리는 이러한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분노 어린 댓글을 마주할수록, 천천히 그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학습하게 된다. 94)


9. 외부인의 생성 ? 공정한 차별주의자들


연구참여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전반을 공정성의 문제와 결부한다. 즉 대북 지원에 대한 이들의 반감은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및 정규직화에 대해 갖는 반감과 같은 논리를 공유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체제에서 더 가혹해진 공안정치와 수탈은 한국사회의 공공성을 붕괴시켰다. 이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존 문제가 되었다. 공공성이 실종된 사회에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펙을 쌓고,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깜깜한 미래를 대비해 일상의 소박한 즐거움은 물론 연애와 결혼, 출산까지 미루거나 포기하며 노력했다. 그렇게 확보한 한줌의 상대적 우위는 어떤 식으로라도 보상받아 마땅하다. 이들에겐 그것이 ‘공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연구참여자들은 여건이 못 되어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임금과 처우와 시선에서 응분의 푸대접을 받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까지가 본인들에게 주어진 ‘공정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98-9)


20대에게 ‘공정’은 정체성 정치를 평가할 때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남성 연구참여자 대다수는 양성 할당제 등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들은 기업이 지금까지 성별을 불문하고 능력에 따라 직원을 뽑아왔다고 믿고 있다. 설사 특정 성별을 선호하고 석연치 않은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의 행태가 있더라도 그것은 입맛에 맞는 노동자를 채용하는 기업·고용주의 권한으로, 자연스러운 시장의 논리일 뿐 정치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할당제 때문에 더 자격 있는 남성 대신 여성 지원자가 뽑힌다고 상상하며 탈락한 남성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남성 연구참여자들이 보기에 ‘남성 특권’은 최소한 자신들이 사는 한국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역차별’론으로 나아간다. 자신들을 “선행 차별에 대한 일종의 차별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어떤 과도기에 놓인 피해자 혹은 희생자로 인식한다. “이미 피해자인데 또 피해를 감수하는 (…) 가중차별을 당한다는 정서인 것이다.” 99)


10. 미래는 중단되었다 ? 부모보다 ‘가난할’ 세대로 산다는 것


연구참여자들은 자동화와 경제인구 감소의 상관관계가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기본소득 의제에 거부감을 보이던 일부 연구참여자들도, 보수우파 진영의 기본소득 프레임에는 반감이 훨씬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파 버전의 기본소득은 국가 규모를 줄임으로써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 즉 기본소득을 분배하되 국가의 사회복지 재정을 대폭 축소하고 나머지 사회보장을 개인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좌파 버전의 기본소득은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엄격한 과세로 재원을 마련해 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파 프레임을 먼저 소개한 다음 좌파 프레임을 설명하자 연구참여자들은 후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듯했다. 인간 노동력의 투입 없이 가치의 생산이 가능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자본의 정언명령의 유효기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107-8)


11. 헤게모니 전쟁 ? 2016 촛불시위와 20대 현상


2016년 촛불시위의 지상목표는 ‘박근혜 퇴진’이었다. 거창한 사회변혁이나 혁명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이 시민들에 의해 전복되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그림이었고 실현 가능한 약속이었다. 그랬기에 제각기 다른 정치 성향을 띤,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치지도 반목하지도 않고 양보를 거듭하면서 한 공간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추상적 의제는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이 빈약한 대중을 결집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프로그램을 내세웠더라면 촛불의 에너지를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보좌파 진영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할 헤게모니 전략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이 촛불의 소명을 박근혜 퇴진으로 국한시켰고, 집권 이후 이른바 ‘촛불정신’을 배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촛불은 처음부터 진보좌파의 것이 아니었다. 115)


20대 안에서 남녀는 물론이고 같은 성별끼리도 서로 다른 요구를 갖고 있지만 특정 국면마다 이들을 거대한 반-정권의 전선에 서게 만드는 헤게모니적 기표가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다.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에서 ‘공정’이란 과연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공정은 속이 빈 기표다. 따라서 ‘공정하지 않다’라는 명제도 공허하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김정희원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오늘날 공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무기가 되어weaponization’ 모든 사안에 관련한 건전한 토론과 숙의를 차단하고 ‘그들’의 배제와 ‘우리’의 투쟁을 성역화하는 데만 쓰인다. 알맹이가 없는 기표로서 공정은 그 자체로 말해주는 바가 없고 해석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특정 정치 세력에게 전유되기 쉽다. 현재 이 기표는 냉전보수 세력이 전유한 상태로, 그들의 해석에 청년들이 스스로를 동기화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진보좌파 역시 이 기표를 전유할 수 있다. 결국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일 테다. 117)


에필로그: 과격화냐 급진화냐


아주 미세한 빗겨남, 이탈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사소하다. 그러나 그로 인한 마주침들은 상호 축적-연결되며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역사의 전 궤적에 걸쳐 변화를 불러온다. 나비효과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개개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최소한의 일탈이 사회를 근간부터 뒤흔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급진적 마주침과 대중의 자연발생적 조직화의 조건은 일상의 사소한 데서부터 행하는 일탈, 즉 ‘일상의 변용’이다. 이것은 문화적 표피를 띠지만 사실은 금융화된 오늘날의 일상생활에서 등장할 수 있는 급진적 문화정치의 한 형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가 형성되는 삶의 구조가 바로 이러한 일상의 구조이며, 동시에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여태껏 익숙하게 적용해온 사고방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의 해결이 불가능한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어쩌면 유일한 저항의 방법일 수 있다. 120)


지금 이대로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20대들은 그러나 정치적 상상력이 협소한 탓에,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어떠한 변화를 지향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20대들이 지금 정치와 사회를 대하는 멘털리티는 브레히트의 잠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올바르지만 오래된 것보다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이 낫다. 그들의 상상력으로 그 새로움이란 정권교체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그 이상의 열망은 항상 남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변화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다. 이 ‘과격화’를 긍정적인 ‘급진화’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20대 현상의 표피는 헤게모니적 기표에 근간한 헤게모니적 접합의 산물이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자연스럽게 발생하기도 하고, 언론과 정치의 손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서 20대를 동원하는 기표는 보수 세력이 완전하게 전유하고 있다. 127)


20대 현상에 대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은 20대들을 무엇으로 호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부르주아지, 기득권 엘리트층을 제외한 나머지 보통 사람으로서 20대들이 공동으로 맞이하고 있고 곧 맞이할 문제, 공동으로 답해야 할 질문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노력, 경제 행위를 압도하는 불가항력의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야 한다. 나는 지속되는 일자리 감소 및 그것을 가속화하는 자동화, 불가피한 계층 하강,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등 혼돈 속에서의 실존적 위협에 놓여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을 호명하는 기표로 ‘위태로운 자들’을 제안한다. 이것을 단지 제도권 정치 차원에서 표심 공략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 바깥으로부터 내부를 재구조화할 압력으로 작용케 해야 한다.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을 벗어나 맹점에 위치한 저 몸부림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새로운 급진 정치로의 전환은 충분히 가능한, 지금 여기의 시나리오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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