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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보수주의 - 전통을 위한 싸움
에드먼드 포셋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3월
평점 :
머리말
자유민주주의가 번창하는 것은 차치하고 생존이라도 하려면 우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받아들이는 보수주의자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적으로 태어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린 적이 없다. 근대 정치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협력함으로써 어려움을 견뎌냈으며, 곧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기는 법을 배웠다. 1945년 이후 서유럽과 미국에서 번창한 것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는 우파의 그런 역사적 타협을 통해 자라났다. 지금처럼 우파가 지지하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할 때 자유민주주의의 건전성은 위태로워진다. 나는 『자유주의: 어느 사상의 일생』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이며 그 모든 결함과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이 왜 중요한지 밝힘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 보여주려 했다. 『보수주의: 전통을 위한 싸움』은 그 이야기의 다른 반쪽이다. 책은 과거에 비춰보면서 현재 우파가 자신과 벌이는 싸움을 이야기한다. 8)
1부 보수주의의 선구자들
1장 혁명의 비판자들
조제프 드 메스트르(1753~1821)와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각자 비상한 수사의 힘과 보기 드문 표현의 재능을 지녔다. 메스트르는 지독하게 흑백 논리를 폈다. 대비를 극단으로 몰아갔고 좋은 논점은 부서질 때까지 확장했다. “모든 정부는 전제적이다. 선택은 복종하거나 반역하는 것뿐이다.” “유일하게 영속하는 제도는 종교적인 것이다.” 버크의 글들은 흔히 연설로 시작되고 분노가 덜하며 잉글랜드인의 취향에 더 잘 맞았다. 버크의 비판 대상―종교적 열광, 정치적 지성주의, 법적 성문화―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편하게 받아들여지고 참견하는 질문자들은 의심을 살 만한 것들이었다. 두 사람 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유는 서로 달랐다. 메스트르는 갱생하지 않는 인간을 암울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취했다. 버크는 사람들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규칙을 지킬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규칙을 만들 역량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15-7)
사회의 규칙들이 메스트르가 주장한 것처럼 신성한 원천에서 나왔든, 아니면 버크가 주장한 것처럼 관습에서 비롯됐든 그 기원은 지적인 물음에 닫혀 있었다. 메스트르에게 신성한 섭리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버크에게 관습의 뿌리는 모호한 것이었다. 섭리나 관습을 근거로 논쟁할 수도 없고, 그것들로부터 생성된 규칙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버크는 “오래된 견해와 삶의 규칙들이 없다면 우리를 인도할 나침반도 없을 테고 우리는 어느 항구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썼다. 정치적 지성주의자들은 시도는 해볼 수 있어도 그런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신의 섭리에만 의존할 수도 없고 관습에만 기댈 수도 없었다. 메스트르와 버크 둘 다 확립된 교회가 인도하고 유지하는 공통의 신앙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잘못 이해된 자유는 도덕적으로는 당혹스러움을 낳고 정치적으로는 혁명과 붕괴, 반혁명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17)
버크는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가정이라는 틀에서 뛰쳐나가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버크의 그런 면은 또한 결국 자유주의적인 다양성에 적응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버크는 통합된 사회가 공유하는 관습과 공통의 신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그런 것들이 없으면 논쟁은 지적 전쟁에 빠져들 위험이 있었다. 그와 달리 메스트르는 정치에서 권위와 복종을 원했다. 그의 반이성주의 유산은 권위주의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인 보수주의에 전해졌다. 그 유산은 샤를 모라스와 조르주 소렐, 카를 슈미트, 그리고 훗날 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 이르렀다. 이들이 각자 호소한 권위는 다양했다. 메스트르는 교황, 모라스는 프랑스의 왕가, 소렐은 불만을 품은 노동계급, 슈미트는 일시적인 독재자, 오늘날의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대중”의 권위에 호소했다. 그 대중은 포퓰리스트들이 싫어하는 견해를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포퓰리스트들이 대체하려는, 같은 배경의 엘리트층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18)
버크주의는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의 마음도 끌었다. 일반적으로 버크는 건강한 정치란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는 다양하며 갈등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에는 당파와 논쟁이 필요했다. 자유주의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나아가 주권적인 힘은 필요한 것이지만 포획될 수 있었다.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제도는 버크의 표현으로는 어떤 집단이나 이해관계자도 “완전한 주인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정해야 했다. “완전한 주인”을 피한다는 사고는 보수주의 이전 제임스 매디슨의 미국 헌법에 관한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유주의적인 프랑수아 기조도 그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주권은 어떤 이해관계자나 당파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가운데 행사돼야 하며 최종적으로 도덕과 법으로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그런 버크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덜 자유주의적이고 반세계주의적인 버크에게 더 공감했다. 26)
우파는 정치에서 지성주의를 포기했을지 몰라도 좌파 지식인들과 싸울 수 있는 자체 두뇌가 필요했다. 일찍이 그런 두뇌의 두드러진 본보기가 된 이는 프리드리히 폰 겐츠(1764~1832)였다. 겐츠에게 정치에 관해 잘 추론한다는 것은 혁명과 나폴레옹이 뒤흔든 유럽의 요동치는 현 상태에서 국가이성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숙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훗날의 보수적 현실주의자들에게 그의 질문은 일반화됐다. 어떤 격동의 현 상태에 있든 그들 역시 이렇게 물어야 했다. “지금 여기서 국가이성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유럽의 총리들에게 봉사하는 정치적 지식인으로서 겐츠의 첫 번째 관심사는 권력이 어떻게 행사돼야 하는가에 관해 숙고하는 것보다 그것이 어떻게 행사됐는지를 놓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최고 학위를 가지고 우파 싱크탱크와 보수 잡지,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정책 조언을 하는 영리한 지식인의 초기 모델이었다. 32-3)
2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2장 보수주의의 특성과 관점, 명칭
보수주의자들에게 사회질서는 일정한 지위와 친숙한 의무를 수반하는 안정된 제도 및 사회적 위계에 달려 있었다. 그 그림에서 권위는 고정되고 공인된 통로를 통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플라톤에게 권위는 현명하고 더 높은 진리와 닿는 것이므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안전을 최고의 사회적 가치로 여기는 “현실주의적” 우파의 지적 대부인 홉스에게 권위는 사람들의 타고난 경쟁심이 통제 불능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을 주권적인 중재자로 필요한 것이었다. 흄과 버크에게 권위는 사람들이 복종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면서 이제 고맙게도 그 기원(정복이나 강탈)이 잊힌 것이었다. 각자의 설명에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절대적이었다. 권위는 복종해야 할 것이지 성가신 질문자들이 그 자격을 끊임없이 따질 것이 아니었다. 사회질서가 정착되려면―더 호의적인 용어로는 “확립”되려면―의심과 비판, 그리고 “어쩌면”이 아니라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와 충성, 신뢰가 요구됐다. 49-50)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 사회질서를 위해 권위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지만, 그 힘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권위를 지닐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권력이 일단 “확립”되면, 다시 말해 정착되고 수용되면 정당한 것이고, 따라서 권위 있는 것이었다. 다만 권위의 정당한 보유자가 부당하게 행동할 수는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권력이 정당하려면 습관적으로 복종하거나 참고 견디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권력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은 언제나 “왜 내가 복종해야 하는가?” “왜 내가 지불해야 하는가?” “왜 내가 순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열려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는 거꾸로 된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권력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수용되고 확립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질서의 기둥인 법과 재산권, 관습은 존중돼야 하고, 흠 잡히고 비판받거나 질서 유지 역할을 하는 데 방해받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52)
19세기 말 경제적 민주화―개략적으로 말해 번영의 몫을 모두에게 더 평등하게 나누는 것―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나 개혁가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질 때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점들에서 견해가 일치했다. 관점의 차이는 누그러졌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유주의자들은 권력 자체를 불신하진 않았다. 그들은 권력의 전횡적인 행사를 경계했다. 진보를 믿는 자유주의자들은 한 사회를 다른 사회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병폐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또 권리에는 의무가 따라온다는 것도 이해했다. 대신 보수주의자들은 확립된 권력이라도 반드시 제한이 없고 질문을 면제받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했다. 그들은 안정되고 통합된 사회도 당연히 국부적인 수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보수주의자들은 권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과도하게 확장한 선언으로 권리를 부풀리고 그 값어치를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54-5)
새뮤얼 헌팅턴은 “보수주의의 적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급진주의”라고 썼다. 급진주의자를 정치적인 유형으로 생각하거나 급진주의를 일단의 사상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급진”과 “온건”이라는 표현은 명사적인 것이 아니라 부사적이다. 급격함과 온건함은 내용이 아니라 속도와 태도, 양식과 관계있다. 그 차이는 목표를 어떻게 잡고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직성을 띠거나 유연하거나, 열광적이거나 차분하거나,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방어적으로 웅크리거나, 상대를 절멸하는 데 열중하거나 타협을 허용하거나, 정복하지 않고는 살 수 없거나 패배와 실패에도 살아남을 수 있거나의 차이다. 우리가 정치를 한쪽 편이 경기장을 전부 차지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취급하지 않는 한 전 경기장에서 좌파와 우파의 분할이 계속된다고 인정하는 것은 개략적으로 말하면 정치가 다양성 속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논쟁임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58-60)
3부 보수주의 1기(1830~1880):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3장 정당과 정치가들: 권위 없는 우파
프랑스 우파에게 타협은 이기는 선택으로 판명됐다. 1848년과 1871년 좌파가 일으킨 공화주의적 혹은 민주주의적 격변의 순간에 혁명의 공포는 우파를 뭉치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느 대안이 가장 덜 나쁜지를 두고 자기네끼리 불화했을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좌우 경쟁에는 최후의 승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우파에서 반동, 자유주의적 왕정, 독재의 지지자들은 모두 프랑스라는 국가를 손에 넣어야 할 상품으로 여겼다. 획득한 상품은 각각 오래된 질서나 재산가의 부, 혹은 양식과 재산을 갖춘 중산층으로 상상한 존재인 인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쓸 것이었다. 다른 쪽의 공화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들도 그랬다. 그들은 계급 없이 평등한 시민, 혹은 계급 개념에서 노동하는 대중을 의미하는 인민을 위해 국가를 획득하려고 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시작되고 나서야 우파는 최종 승자가 없는 투쟁이라는 자유주의적인 관념을 받아들였다. 69-70)
1871년 이후 프랑스 우파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급속히 좁아졌다. 그들은 정치의 틀로서 민주적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적합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타협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머뭇거리다가 의회가 1875년 공화제와 의회 체제를 강화한 헌법을 통과시키도록 허용했다. 남성의 보편적 선거권과 강력한 의회, 7년 임기의 약한 대통령제가 도입됐다. 비타협적인 우파는 그들이 혐오하면서도 이해는 하지 못한 제도 안에서 공화국을 좌절시키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1877년 마크마옹이 자신의 권위를 오판하고 개혁적인 총리를 경질했을 때 프랑스 우파는 보수주의자들의 의견이 바뀐 것을 모르고 다음 선거를 휩쓸어버릴 것으로 기대했다. 온건한 보수주의자들은 온건한 공화주의자들이 그들과 함께 일하기로 함에 따라 이미 체념하고 공화국을 지지했다. 양쪽 다 부상하는 사회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보았다. 친공화주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이겨 의석이 거의 2대 1이 됐다. 저항하는 우파는 연타를 당했다. 73-4)
근대 보수당의 첫 지도자 로버트 필(1788~1850)은 두 차례(1834~1835, 1841~1846) 총리를 역임했고, 솔즈베리의 험담에 따르면 두 차례 당을 배신했다. 필은 『타임스』 편집인 토머스 반스(1785~1841)의 도움으로 당이 따르기를 바라는 한 쌍의 융통성 있는 원칙을 제시하는 탐워스 매니페스토(1834)를 기초했다. 불필요한 사회 변화에는 가능한 한 저항하고 필요할 때는 적응하라는 원칙이었다. 매니페스토는 개혁법(1832)을 “중대한 헌법적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해결”로 받아들이고(다시 말해 추가적인 개혁은 없을 것이고), 시민과 교회 관련 제도의 “재검토”를 약속하되 서약은 하지 않고, “입증된 남용의 교정”과 “실제적인 불만의 구제” 형식의 개혁을 수용하며, 그러나 경솔한 변화와 “끝없는 소요의 소용돌이”에는 반대하는 선을 그었다. 그는 소득세를 도입했고, 보수주의자들을 갈라놓은 곡물법을 폐지하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친親필파는 1850년 그의 사후 휘그당―훗날의 자유당―에 합류했다. 75-6)
정치가이자 정치 소설가, 정당 지도자, 그리고 총리(1868, 1874~1880)로서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는 근대 자유주의에 대한 영국 우파의 조심스러운 적응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생각에 확립된 제도―토지 자산과 잉글랜드 교회, 국왕, 오래된 대학들, 그리고 상원―는 기득권이 아니라 충성과 존경, 신앙이라는 보수주의의 이상을 체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상류층의 문화적 특권 상실을 대체로 받아들인 실용적인 관리자이자 전술가로 경력을 마쳤다. 당에 대한 충성과 운용의 감각, 집권을 위한 후각에서 디즈레일리는 영국 우파의 특출난 요소를 잘 보여준다. 그 뒤를 이은 볼드윈처럼 디즈레일리는 보수적 유권자의 핵심인 잉글랜드 중산층의 정서를 파악하는 완벽한 귀를 가졌다. 그는 가식과 소수 지배층의 특권, 지성주의를 직접 경험하거나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는 냉정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국가나 국왕, 제국을 대신해 호소할 때는 열렬했다. 78-80)
독일 최초의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버릇없이 자랐다. 그들은 권위를 완전히 잃어버린 적이 없었고, 국가기관에 계속해서 접근할 수 있었다. 이따금 민주적인 시험을 치렀을 뿐이다. 정당 면에서 보수주의는 1815년 빈 체제 정착 후 지역 명사들의 비공식 연결망으로 시작했다. 구질서 옹호자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부터 군주의 권력을 보호하는 데 단호했다. 오래된 특권들은 폐지되고, 때늦은 봉건적 관행은 끝나고, 입헌 정부에 대한 동의가 이뤄졌다. 바덴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절충적이고 불확실한 절대주의가 지배했다. 프로이센 사람들은 1815년에 헌법을 약속받았다. 헌법은 1848년이 돼서야 도입돼 위로부터 부과됐고, 즉시 끝이 잘려나가고 1850년대에 추가로 여러 차례 개정됐다. 프란츠 요제프는 서둘러 기초한 오스트리아 헌법을 1851년에 철회했다. 구엘리트층이 궁정과 교회, 군대, 관료 조직을 독점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가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82)
최초의 독일 보수주의자들에게 공통된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들은 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근대에 평온하게 사는 대가로 얼마를 치러야 할까? 그 값을 치르는 화폐는 국왕과 군주의 권력, 귀족의 특권, 사회적 통일성, 위계질서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오랜 가치였다. 옛 우파의 완고한 저항자들은 무너져내리는 제도에 집착하며 지나치게 높은 대가에 기분 나빠했다. 더 대중적이고 시대에 적응한 젊고 참신한 우파는 보수주의자들의 충성이 오래된 이익집단에서 벗어나 새롭게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사회적 통일성은 더는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공유된 국민성과 독일인의 정체성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배타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다.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든 선택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실용주의적인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이센 총리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제국의 총리(1862~1890)로서 비스마르크의 성패는 그처럼 상반되는 흐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86)
미국에 보수주의 전통이 없다고 주장한 유명한 저서로 루이스 하츠의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1955)이 있다. 하츠는 미국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나라에는 구체제도 봉건적 전통도 없었으므로 자유주의자들이 공격할 대상이나 보수주의자들이 방어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탈봉건적, 탈전통적 미국 사회라는 하츠의 논쟁적인 구도를 고려하더라도 이 신생 국가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방식에서 보수주의의 토양이었다. 미국 휘그당의 딜레마는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이 맞닥뜨렸던 것과 같았다. 그들은 대중의 요구가 커짐에 따라 자유주의적―그리고 민주주의적―근대와 얼마나 타협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였다. 휘그당은 진보에 관한 믿음에서 자유주의적이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진보를 이뤄간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었다. 또 유능한 엘리트가 경제를 감독하고 대중의 간섭 없이 정신을 드높여야 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적이었다. 91)
미국 정당정치의 진영은 남북전쟁으로 재편됐다. 남부 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국의 보수주의는 북부와 남부를 가르는 선과 더불어 지역과 계급의 구분에 따라 다시 형성됐다. 북부의 공화당은 번창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의 산업 경제에서 노동조합에 맞서며 공장의 생산 현장을 계속 통제한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다. 낙후된 남부의 시골에서는 빈약해진 백인 엘리트가 민주당의 깃발 아래서 가난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을 갈라치며 주 입법부에서 확고한 다수를 차지했다. 최초의 미국 보수주의자들로서 반잭슨파 휘그당은 크고 다양한 공화국에서 사회적 갈등을 통제하는 새로운 수단을 물려받았다. 헌법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잭슨파의 경쟁자들과 그 유산을 공유했으므로 법 자체는 정치에 열려 있었다. 그 기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상세히 설명할 것이냐 하는 일은 그 자체로 당파적인 문제였다. 미국 보수주의 전통은 헌법 논쟁의 당파적 특성과 유동적인 근대 사회에서 법이 달라질 가능성을 허용했다. 93-4)
4장 사상과 사상가들: 자유주의 반대론으로 돌아서다
존 캘훈(1782~1850)은 노예를 소유하는 이익집단의 변명자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냉소적이지도, 논리가 짧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맞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회 입성(1911)부터 죽기 직전까지 가차 없이 논쟁의 재능을 발휘했다. 남부에 대한 캘훈의 꺾이지 않는 방어는 자칫 무계획적인 것으로 보였을 진로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캘훈이 남부를 대변하는 것은 그의 생각으로는 연방을 옹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북은 함께 연방에 속했다. 각자 다른 쪽과 더불어 살며 번영해야 했다. 한쪽이 더 작고 약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정당하게 평등한 발언권과 평등한 배려를 받아야 했다. 남부가 북부에 남부처럼 되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부도 남부에 북부처럼 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둘 다 남북의 동등성과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사회적 미덕과 인생의 더 높은 목표에 더 잘 맞는 남부는 착취로 돈만 긁어모으는 북부에 교훈을 줄 수 있었다. 99-100)
캘훈은 “소수”라는 말을 20세기의 용어와 같은 의미로 쓰지 않았다. 소수는 이를테면 흑인이나 여성, 히스패닉처럼 한때 무시됐던 집단을 뜻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소수는 지역 혹은 사회의 지속적인 “이익집단”으로 국가 안에서 무게를 가질 만큼 크긴 해도 투표에서 이기기에는 너무 작은 이들을 의미했다. “이익집단”이라는 말이 경제적 계급이나 부문, 혹은 압력집단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익집단은 정치적, 문화적 통일성을 지녔다. 그들에게는 역사가 있었다. 캘훈이 보기에 이익집단들은 함께 하나의 국가 공동체를 이룬다. 잘못된 법이 통과될 때는 투표에서 진 이익집단이 실행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헌법 자체가 캘훈이 추적했던 유형의 단순 다수결 문제를 걸러줄, 민주주의에 대한 대항적 기제를 풍부하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캘훈의 염려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헌법은 해석하고 판결해야 했다. 그 명령은 집행해야 했다. 이때 법정과 행정부를 정치적 다수가 지배할 가능성이 컸다. 100-1)
1840년 베를린에서 신임 교수로 취임 강연을 하던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1802~1861)은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야유를 받자 그들을 꾸짖었다. “제군들, 나는 여기 가르치러 왔고 제군들은 들으러 온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프로이센 국가의 동등한 주권을 주장하면서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다. 인민에 대한 국가의 요구는 선택이나 동의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다수가 아니라 권위”가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슈탈의 표어였다. 슈탈은 1848년 혁명으로 정당정치에 휩쓸려 들어갔다. 요점은 혁명과 싸우되 반동은 피하고, 법을 존중하고, 군주든 인민이든 전횡하는 것은 물리치되 왕권의 우위를 지키고, 노동과 상속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독교인들의 법적 평등을 옹호하고, 독일의 통일성과 소속 국가들의 독립성을 함께 유지하는 것이었다. 슈탈은 법에 관한 전문성을 발휘해 프로이센의 뒤늦은 헌법을 기초했고 프로이센 상원에 입성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상원에 머무르며 보수주의의 대의를 밀고 나갔다. 104-5)
법의 지배가 없으면 사회질서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심판할 사법私法이 필요했다. 국가를 통제하는 데는 공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독일에 특히 풍부했다. 슈탈은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각자 헌법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半파(1848년의 독일 자유주의자들)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공법이라는 준비된 수단을 이미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불필요하게 의회에서 제정하는 헌법에 기댔다. 전全파(더 광범위한 대의제를 요구한 1848년의 독일 민주주의자들)는 슈탈이 보기에는 위장한 혁명파였다. 민주주의자들은 사람들이―관심과 역량, 권리 면에서―동등하다고 상상하면서 하나의 획일적인 인간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실재하는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불만을 자아내고 불화의 씨를 뿌리며 광적인 종교에서나 볼 법한 지독한 불신을 조장했다. 슈탈은 1850년 프로이센 헌법을 기초하고 옹호하는 (나중에는 다듬는) 일을 도움으로써 그런 생각을 헌법으로 구체화했다. 106-7)
기독교계 지식인들에게는 한 가지 불안이 나머지를 한꺼번에 아울렀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불안이었다. 자연과학, 종교의 전거에 대한 학문적 비판, 그리고 비판철학은 모두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렸다. 그러나 기독교가 새로운 자리를 찾도록 라므네가 준 답은 교리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케텔러의 경우에도 그랬다. 자유주의적 근대에 기독교 신앙은 더 높은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 가치를 보여줄 것이었다. 케텔러는 그 실용적인 신조를 이렇게 압축했다. “종교와 도덕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곤궁을 구제할 수 없다.” 케텔러와 라므네는 교회의 논쟁이나 정당정치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필요한 이들을 돕자는 가톨릭의 사회적 행동을 옹호했다. 그들의 행동은 나중에 뒤르켐이 강조한 것처럼 종교를 신학 혹은 과학에 대항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공유하는 삶의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근대성 안에서 종교의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의 사회적인 형태였다. 111)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는 자유주의적 근대와는 문화적인 거리를 두었던 시인과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이 작가들이 공유한 것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경악이었다. 로크와 뉴턴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원자론적이고 일차원적인 철학, 물질적 번영을 행복으로 여기는 한심한 발상, 그리고 희망한 것처럼 자연에서 자란, 시골의 목가적인 정서 혹은 탁월함과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시적이고 거칠며 조작할 수 있는 것에서 나온 대중문화가 그들을 경악하게 했다. 콜리지는 영국 사회에서 “분열의 참극”을 보았고, 근대 이전에 충만한 것으로 상상했던 삶의 조화를 상실한 것에 슬퍼했다. 콜리지는 정부에 책임 있는 발언권을 가지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다고 보면서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그 때문에 “상업적인 정신에 지나치게 기울게” 될까 걱정했다. 그 난폭한 기운은 지주계급이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상원이 하원을 감독해야 했다. 120)
콜리지는 보수적인 근대 사회가 결속을 유지하려면 남작과 자유 농민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보수주의 지식인들이 명료하게 표현하고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공통의 시민적인 신조가 필요했다. 신조와 지식인들은 함께 “지식계급 혹은 국가 교회”를 형성할 것이었다. 콜리지는 그 지식인들이 (반드시) 사제의 지위나 종교적 교리를 가지지는 않고 옛 성직자들과 같은 지도적인 권위를 갖기를 바랐다. 그들은 성직자도 평신도도 아니고, 그 중간에―상반되는 것들의 조정자로―있을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지식을 키우고 넓힌 “인간성의 수원”이 될 터였다. 다른 이들은 전국에 퍼져나가 누구도 “주민 계도자와 보호자, 교사” 없이 내버려두지 않게끔 선생이 될 것이었다. 국가는 이 “영속적인 계급 혹은 신분”을 “국적자”에게서 나온 공익 목적의 돈, 쉽게 말해 세금으로 지원할 터였다. 그 신조는 폭넓고 다양하겠지만, 종교적 신념처럼 결속력을 발휘할 만큼 일관성을 갖되 분열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은 없을 것이었다. 121)
4부 보수주의 2기(1880~1945): 적응과 타협
5장 정당과 정치가들: 권위의 회복과 탕진
타협적인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가 1880년 이후 우파의 두려움과 망설임뿐만 아니라 제국의 지나친 확장과 전쟁, 경제의 침체 같은 스스로 일으킨 재난을 극복하고 살아남게 해주었다. 타협한 보수주의자들은 선거민주주의(모두를 위한 투표권)에 대한 저항을 멈추었다. 그러나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경제 민주주의(모두를 위한 경제적인 몫)에 저항했다. 경제 민주주의가 좌파 자유주의자들의 개혁주의로 가든 더 급진적으로 사회주의로 가든 보수는 저항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또 윤리적, 종교적 권위를 보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도덕적 감시를 끝내기는 싫어하면서 문화적 민주주의에 저항했다. 보수주의의 타협은 다시 말해 부분적이고, 점진적이며,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번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0년부터 1945년까지 우파는 실제로 타협했다. 타협이 이뤄진 곳에서는 1945년 이후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어쩔 수 없이 공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마침내 민주적 자유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 138-9)
1880년까지 프랑스의 책임 있는 우파는 이미 자유민주주의를 물리치는 희망을 포기했다. 사회적, 직업적 엘리트는 제3공화국에서 계속 살아남았지만, 예전의 프랑스 명사들은 더 이상 통치계급을 형성하지 못했다. 왕당파의 후예는 대통령직에서 배제됐다. 공무원 조직에서 후견제는 시험제로 대체됐다. 언론에 대한 제약은 해제됐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상원의 종신제는 폐지됐으나 상원 자체는 남았다. 노동계급의 요구는 무시됐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선거 승리로 친공화주의 우파는 결속하고 화해하지 않는 반공화주의 우파는 거리로 내몰렸다.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아홉 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하원의 반공화주의 다수파―두 갈래의 왕정주의자와 보나파르트주의자들―는 쪼그라들어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가진 소수파가 됐다가 그다음에는 희미한 자취만 남게 됐다. 의회에서 좌우 경쟁은 다양한 당명의 급진파인 자유주의적 좌파와 공화파인 자유주의적 우파의 싸움이었다. 141-2)
영국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의 적응은 솔즈베리 경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개스코인-세실(1830~1903)의 오랜 경력에서 볼 수 있었다. 솔즈베리의 지도 아래서 토리당은 토지 기반의 이익뿐만 아니라 기업과 금융을 대변하는 법을 배웠다. 이 당은 오래된 제도(왕, 상원, 국교회)에 대한 애착을 계속해서 존중하는 한편으로 점차 그것을 포기하고 더 모호하긴 해도 똑같이 열정적인 충성을 제국과 국가에 바쳤다. 당은 특히 잉글랜드의 중산층과 다른 유권자들 사이에서 충분히 인기를 얻어 20세기 이후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됐다. 민주주의에 관해 솔즈베리는 평등주의자들이 오도하지만 않으면 사람들이 두말없이 따를 “타고난 지도자들”을 배출한다고 생각했다. 무제한의 민주주의는 더 훌륭하고 합의적인 정부를 장려하기보다 출세주의자와 전문가들만 키워줄 것이었다. 더 나쁜 점은 그런 민주주의가 부자들 못지않게 사악하고 숫자만 많은 빈자가 부자들을 강탈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149-50)
보수당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평판과는 달리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사회 개혁을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미망인과 고아, 고령자를 위한 연금(1925), 슬럼가 정리와 주택 건설, 산업과 농장에서 걷는, 지방세로 알려진 부동산세를 전가하고 지방 당국에 남은 세수 부족을 중앙 정부 보조금으로 메우는 제도 변경, 석탄과 섬유, 전기 부문의 산업 “합리화”가 이뤄졌다. 볼드윈 정부는 비상업적인 영국방송공사(1927) 설립을 허가했으며, 여성의 투표 연령을 21세로 내렸다(1928년 평등선거권법). 강력한 전국 조직을 갖춘 하나의 포용적인 정당 덕분에 영국의 보수주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프랑스처럼 우파의 분열적인 과격파가, 혹은 독일처럼 파괴적인 극단주의자들이 차지할 공간을 거의 남겨주지 않았다. 보수당에서는 처음에 히틀러의 강한 지도력과 독일 좌파에 대한 억압, 독일 경제의 재생에 대한 찬사가 나왔으나 영국 주변부의 토종 파시즘에 대해서는 그런 찬사가 거의 없었다. 154)
보수주의는 어디에 있든 특유의 색깔을 지녔다. 그렇기는 해도 독특하게 독일적인 요인들이 보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서두를지, 미룰지 선택하는 데 복잡성을 더했다. 하나는 빌헬름 제국에서 빚어진 권위의 혼란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8년 이후 의회 정부의 생소함이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권위의 혼란은 비스마르크라는 지배적인 인물과 의회의 상대적인 허약함에 가려졌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의회의 권위는 이론적으로는 인정됐다. 하지만 실제로 권위를 가지려면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우파의 지지가 필요했으나 완전한 지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추락한 후 그 없이는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스마르크 신화가 자라났다. 비스마르크 신화는 기껏해야 반쪽의 진실이었다. 그 신화에서 진실은 비스마르크가 우파에서 과도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지배적인 존재는 성마른 독일 우파가 민주정치의 정당 세력으로서 더 잘 조직하지 않아도 되게 도왔다. 158-9)
1923년의 위기―좌파와 우파의 쿠데타 시도와 외국의 점령, 초인플레이션―후 공화국은 안정됐다. 사회가 스스로 안정되자 우파의 저항과 교란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이 늘었다. 일상적이고 비당파적인 의미에서 혼란보다 질서를, 불확실성보다 안정성을 선호하면서 기업과 법원, 교회, 대학, 심지어 독일의 축소된 군대의 보수주의 세력까지 극우파가 꿈꾸는 대안들보다 공화국이 더 작은 악임을 알게 됐다. 새로운 정상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우파의 핵심 저항 세력은 지적인 주변부가 됐다. 1918년 이후 독일의 우파는 조직화하지 못했고, 어느 조건도 충족할 자세가 돼 있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적극적이고 적대적인 우파의 힘이 바이마르공화국을 침식했는지, 아니면 반대로 우파가 민주적 게임에서 이기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두려움을 갖고 머뭇거렸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어느 쪽이든 독일의 보수주의는 부재의 힘을 보여주었다. 바이마르 체제의 붕괴는 많은 부분 자유민주적 보수주의의 허약함에 기인했다. 163-4)
미국의 보수주의는 그 시대의 위대한 기업가와 금융가들―앤드루 카네기(철강), 존 D. 록펠러(석유),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철도), J. P. 모건(금융)―에게서 근대의 영웅들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들은 과거에서 발굴할 필요가 없고 미래의 희망으로 어렴풋이 그릴 필요가 없었다. 야망을 실현한 본보기이자 진보의 실행자로서 이 거인들은 어떤 정당의 정치인이나 정치사상가도 필적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자유방임 보수주의를 옹호했다. 정당 면에서 공화주의는 분열됐다. 소수파인 개혁가들은 정치와 기업계를 정화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그들끼리 서로의 밥그릇을 나눠 갖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 공화당원들은 “잡종”이나 “머그웜프Mugwumps”, 나중에는 “진보주의자”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자유방임주의를 믿는 다수파는 기업이 스스로 부를 창출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법은 그런 목적에 충실한 것이 가장 좋고, 선출된 공직자들은 개혁에 나설 때보다 매수될 때가 가장 안전하다고 보았다. 165-6)
여러 제도를 통제한 것은 보수의 성공에서 두 번째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의회와 법을 통제한 것이 그랬다. 미국 보수주의자 가운데 전부는 아니어도 많은 이가 의회의 저지는 해롭거나 부적절한 사회적 공학에 대한 의미 있는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의회의 방해주의자들은 윌슨주의(1910년대)와 뉴딜(1930년대), 그리고 ‘위대한 사회’(1960년대)에 반대해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세 가지 논점을 인용할 수 있었다. 개혁은 편익에 견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흔히 무용하고 비효과적이거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수의 성공 요인 중 마지막은 법이었다. 국가 건설기인 남북전쟁과 뉴딜 사이에 미국 법은 기업의 자유를 보호해 경제를 확장하고 번영을 확산한다는 큰 목적에 봉사했다. 법은 국내 장벽들을 제거해 전국 시장을 창출하고, 각 주의 법을 조화시키고, 철도를 비롯한 운송 체계 발전을 원활히 하며, 남부 흑인들의 법적 예속을 위협할 연방정부의 개입을 차단했다. 168-9)
6장 사상과 사상가들: 민주주의와 공적 이성에 대한 불신
국민은 19세기 말 보수주의자들에게 유용한 통합의 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보수의 희망찬 비전과 사회의 명백한 분열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내부적으로 국민의 개념은 옛 군주처럼 공통의 충성이 향할 초점으로 온건하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진정한 국민에 속하는 사람들과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누는 난폭하고 배타적이며 흔히 인종차별적인 방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대외적으로 국민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세계에서 하나의 상태로 생각됐다. 평화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위한 본보기이자 개선자로 생각되거나, 호전적인 관점에서 다른 국민의 잘못을 바로잡는 무장한 교정자로 생각됐다. 그 각각의 방식에서 국민은 특정한 사람들을 상징함으로써(공통된 전체), 사람들을 정화함으로써(원치 않는 이들의 배제), 그리고 긍지나 복수로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더 넓은 세계에서의 행동) 통합의 개념으로 작용했다. 188-9)
현실정치와 배제를 결합한 국가주의 역사가의 두드러진 예는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1834~1896)였다. 트라이치케는 독일이나 프랑스 국민의 실패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한 말을 할 수 있어도 유대인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탄하며 아직 그 ‘용어가 생기기도 전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불평했다. 1880년에 쓴 악명 높은 소책자에서 그는 역사가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산하는 반유대주의에 넘겨주었다. 몸젠은 트라이치케가 반유대주의 시위를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몸젠은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제국 안에 통합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라이치케는 그런 시민적 동화를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버리는 것과 혼동했다.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자유주의적이고 포용적인 국민 개념과 보수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국민 개념이었다. 자유주의적인 몸젠이 보기에 훌륭한 독일인이 되려면 훌륭한 시민이 돼야 했다. 보수적인 트라이치케가 보기에는 훌륭한 독일인이 되려면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돼야 했다. 189-90)
통합하는 국가의 신화는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도 대중에게 보급됐다. 조지 밴크로프트의 장대한 역사(1854~1878)는 미국의 건국과 뒤이은 진로를 헌신적인 미국인들이 문명세계의 자유를 위해 목적의식을 가지고 벌인 성전으로 묘사했다. 존 피스크의 대중적인 역사는 다윈주의적인 추론과 섭리적인 아메리카니즘을 섞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베스트셀러 역사서인 『서부의 정복』(1889~1896)은 변경에 정착할 때 어떻게 좋은, 즉 협력적인 “야만인들”은 이주시키고 나쁜, 즉 저항적인 이들은 쓸어버렸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영국에서 “제국주의의 바이블”인 J. R. 실리의 『잉글랜드의 확장』(1883)은 영토에 한정되지 않고 평화롭게 전 세계로 퍼져나간 영국인의 특성에 관해 썼다. 국민의식은 어디에서도 자생적이지 않았다. 국민에 관한 상상은 어디서나 작가와 지식인들이 촉진하고 길러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촉진하고 길러내려면 먼저 공통의 신념과 애착이 있어야 했다. 191-2)
귀스타브 르봉(1841~1931)의 공헌은 군중에 대한 아주 오래된 공포를 사실처럼 들리는 토대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르봉의 성공 요인은 고래의 편견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군중심리』(1895)에서 르봉은 감춰진 본능에 이끌리는 집단 사고에 관해 썼는데, 그 본능은 군중의 가장 이성적인 구성원들조차 침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는 교양 있는 개인일 수 있지만, 군중 속에서는 야만인이다”라고 썼다. 대중민주주의에 놀란 독자들에게 『군중』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알렸다. 사회는 급진적인 개입으로 개조된 적이 없었다. 사회는 사상과 일상의 점진적인 진화 과정에서 느리게 변화했다. 그것은 위안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 이전 체제는 이미 사라져버렸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었다. 대중은 그들이 선거에서 지니는 비중보다는 그들의 벅찬 요구 때문에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대중은 비합리적이었다. 그래도 군중으로서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면 여전히 통치할 수 있었다. 192)
T. S. 엘리엇(1888~1965)은 일찍이 자신이 태어난 미국 중서부를 버리고 유럽으로 가 저명한 모더니스트 문학가가 됐다. 엘리엇의 문학에서 문화적 전통은 보수주의 정치에서 안정적인 제도가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전통은 『황무지』(1922)에서 시적으로 탐험한 근대의 정신적 공허함에 답했다. 엘리엇은 『성스러운 숲』(1920)에서 전통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쏟고 지켜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에세이는 시적인 규범을 정하고 금욕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않게 “열정에서 보이는 진실”로서 시의 독특한 도덕적 가치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엘리엇은 특유의 웅변으로 자신의 보수주의를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근대에 대한 보수의 대응은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지만, 인간의 성취는 드물고 변덕스럽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산을 파괴할 신이 준 권리가 없으며, 언제나 참을성 있게 질서의 목소리를 따르고 정돈된 삶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210-2)
카를 슈미트(1888~1985)는 국가의 본질과 정치적 권위, 그리고 민주주의에 관한 당혹스러운 문제들을 격앙되고 암시적인 경구로 표현했다. “근대 국가 이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은 세속화한 신학적 개념들이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독재는 민주주의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애를 이야기하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건설자보다는 비판자인 슈미트는 자유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파고들었다. 그는 스스로 통치할 수 없는 대중의 무능력과 제도의 취약성, 그에 따른 단호하고 강력한 정부 지도자의 필요와 관련해 보수주의자들의 믿음을 전에 없이 많이 공유했다.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은 세 가지 모두 잘못 이해했다고 슈미트는 생각했다. 대중의 열정은 일상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허를 찔렀고, 그들은 적들에 대항해 자신들의 제도와 가치를 지키는 데 굼떴다. 통속적인 신화가 정보를 잘 아는 이들의 논리적 주장을 이기는 대중사회에서 대의 민주주의는 공허했다. 212-4)
슈미트가 자유민주주의에 맞서 처음으로 한 일은 민주주의적 대의제를 권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제한과 분리한 것이었다. 의회의 결정은 거래의 중개를 통해 이뤄지거나(비민주적) 끝없는 논의로 미뤄졌다(비효과적). 전횡적 지배를 제한하는 것―권력 분립과 독립된 법원, 효과적이고 법의 제약을 받는 행정부―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했으나 선출된 의회 없이도 가능했다.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주요 실패 요인은 신화적 요소를 건드릴 수 없는 무능력이었다. 이는 슈미트가 좋아했던 소렐의 저서에 따르는 것이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자치의 “합리적 신화”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신화는 경제적 이해의 달라지는 셈법에 달려 있었다. 노동계급이 더 부유해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신화의 흡인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강력한 것은 “비합리적” 신화였다. 오직 그런 신화들만 다수의 인민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다고 슈미트는 믿었다. 현재에 적합한 한 가지 신화는 국가였다. 214)
샤를 모라스(1868~1952)는 왕정주의의 선도적 정파인 악시옹 프랑세즈 배후에서 지적 영향력을 미치는, 제3공화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비판자이자 자유주의와 의회 정부에 대한 불신자였다. 그는 냉정한 경구를 쓰며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이들을 환대하고 추종자들을 폭력으로 유도하면서 사후 책임은 부정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적은 “내부의 낯선 자들”이었다. 그가 악의적으로 쓴 이 말은 프랑스의 개신교도와 유대인, 프리메이슨, 그리고 아직 프랑스인이 되지 못한 이민자들이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모라스의 주된 반론은 사회를 서로 협력하면서 권위에 선택적으로 동의하는 개별 단위의 집합체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공상적인 구도는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모라스는 또 사회에는 공유된 신앙의 결속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콩트를 따랐다.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진영의 적들은 19세기에 향수를 느꼈겠지만 모라스는 중세를 갈망했다. 216-7)
5부 보수주의 3기(1945~1980): 정치적 지배와 지적 회복
7장 정당과 정치인들: 되찾은 용기와 다시 쥔 권력
정치적 우파는 지난 반세기 중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정당하든 부당하든 이제 경제적 침체와 전쟁의 대가를 치렀다. 사회적 성향의 자유주의는 우위를 차지했다. 우파가 회복하려면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수주의 주류는 새로운 자유민주주의적인 현 상태를 받아들이고 곧 숙달했다. 당의 가장자리에서 우파의 저항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지적으로 우파의 자신감이 회복되고 있었다. 역시 성공은 양날의 칼이었다. 보수적인 사상가들이 지배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용할수록 그들은 덜 특이해지고 관점은 더 희미해졌다. 보상은 집권이었고,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복지는 비효과적이고 도덕적으로 부식성이 있었다. 국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윤리적 고삐를 풀어주는 것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그처럼 서로 다른 여러 비난을 합치면 하나의 정돈된 논리로 포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강렬히 느껴져 1980년 이후 오래된 보수 주류에 대항하는 강경우파가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224)
샤를 드골(1890~1970)에게 정치는 이해관계의 중재나 일상의 관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적절한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정치를 보는 드골의 관점은 국민투표 민주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고 의회에 회의적이며 지도자와 인민은 가까이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는 정당정치를 혐오했고, 더 정교한 명칭을 붙이기는 어려워도 확실히 우파에 속했다. 방식은 독재적이었으나 그는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확신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확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뜻이 좌절됐을 때 그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강요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스스로 무대에서 걸어 나왔는데(1946, 1969), 이는 그가 독재자라는 비난이 틀렸음을 보여줬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인 그는 개인의 도덕에 관한 규제적인 법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때면, 바꿀 이유가 없는 익숙하고 편안한 가구 같은 것으로 여겼다. 또 정치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명령은 국가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228-9)
처음에 보수당은 자유주의적인 사회 개혁에 반대하기보다는 적응하며 노동당 옆에 섰다. 그들은 복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더 잘 운영되고, 덜 낭비하며, 비록 그렇게 외치지는 않아도 덜 후한 복지를 약속했다. 예를 들어 우파는 국민건강보험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무료 서비스 체제에서 의사들이 계속 사적으로도 진료할 수 있도록 노동당의 양보를 받아냈다. 경제 면에서는 온건한 케인스주의가 채택됐는데, 『산업헌장』(1947)에 제시된 정책은 완전고용을 목표로, 적자예산을 수단으로 삼았다. 외교정책에서는 노동당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외교정책에 관한 보수당대회 성명(1949)은 노동당처럼 반소비에트주의를 강력히 표명했다. 영국이 제국에서 후퇴하고, 중동에서 혼나고(1956년 수에즈 위기), 경제 면에서 재기하는 프랑스와 독일보다 상대적으로 쇠퇴한 것은 유권자들보다 토리당의 정치계급을 더 크게 흔들어놓았다. 다음 선거 때마다(1955, 1959) 보수당은 다수당으로서 의석 차이를 늘려갔다. 231-2)
서독의 정상화와 독일 우파의 통합을 관장한 지도자는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였다. 그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를 지내고 1950년부터 1966년까지 새로운 기독민주당CDU를 이끌었다. 아데나워의 진지한 회복과 치유의 정치에는 열광과 극단주의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1957년 선거 포스터는 이렇게 외쳤다. “실험은 안 돼!” 그 슬로건은 전후 독일의 경제와 국가 주권, 도덕적 평판과 관련된 과제를 신중하고 고집스럽게 추구한 아데나워의 보수주의를 압축했다. 독일의 특수성에 관한 주장들을 무시한 아데나워는 단호하게 이 나라를 서방 세계 안에 두면서 미국에 대한 국가적 부채를 인정했다(소련에 대한 부채는 얼버무렸다). 그는 이 나라의 도덕적 뿌리를 “기독교적이고 서구적인” 정치 문화에서 찾았다. 아데나워가 말한 기독교적 서구주의는 계몽된 이상과 기독교 전통을 버무린 것이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와 기독교인들이 서로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음을 시사했다. 236-7)
공화당 우파는 아이젠하워 임기 마지막 해인 1960년경부터 서서히 권력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첫 번째 요소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운동은 과거 뉴딜에 반대했고 이제 민주당의 ‘위대한 사회’에 반대하는 대기업들의 로비에 의존했다. 중산층 납세자들에게도 의존했는데, 그들은 게으름뱅이와 미혼모, “도와줄 가치가 없는” 가난뱅이들을 도우려고 세금을 낸다고 생각하며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었다. 우파의 저항에서 두 번째 요소는 인종차별 폐지와 시민권에 대한 백인들의 반발이었다. 반발은 남부에서 시작됐으나 그곳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주지사를 지낸 인종주의자 조지 월러스가 1968년 예비선거 때 북부 노동조합원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닉슨이 유의한 경고 신호였다. 우파에서 저항의 세 번째 물결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휩쓸었다. 그들은 도덕적 방임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 국교 분리 헌법에 대한 더 자유주의적인 해석에 놀랐다. 이것이 바로 배리 골드워터가 자라고 번성하는 토양이었다. 241)
8장 사상과 사상가들: 자유주의 정통에 답하다
이넉 파월(1912~1998)은 1980년대 이후 영국 보수주의의 오랜 우경화에 물꼬를 튼 사상가였다. 중도주의적 타협의 시대에 파월이 한 일은 대처리즘을 예고한 것 말고도 많았다. 대처 자신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대처리즘은 세계적이고도 다자적인 뿌리를 두고 시장을 띄웠다. 파월은 세계적인 시장을 존중했으나 정치는 국가에 돌려주기를 바랐다. 경제적으로 세계주의자인 동시에 지정학적으로는 일방주의자인 파월은 유럽에 등을 돌린 영국 보수주의의 선구자였다. 파월은 “하나의 국가”라는 느슨하고 감상적인 구호를 강화해 지정학적, 사회정치적, 국가주의적 주장과 맞물리게 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이후의 영국은 세계에서 홀로 되고, 영연방은 속임수이며, 미국은 친구가 아니라 골목대장이고, 유럽은 덫이었다. 둘째, 전후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국가는 소외된 영국 사회와 불화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은 특수하고 독특했다. 각각의 관념―고독과 소외, 특수성―은 2010년 이후 영국 우파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247)
리처드 위버와 에릭 푀겔린,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모두 미국에서 활동했다. 푀겔린과 매킨타이어는 유럽에서 온 이주자였다. 역사적, 지리적으로 폭넓게 묘사하는 그들은 “서방”이라는 말을 고전 시대의 지중해 세계와 중세 기독교 세계, 그리고 현재의 부유한 비공산주의 국가라는 의미로 되는대로 썼다. 그들은 서방의 문제가 한 가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집단적인 도덕적 무질서라는 공통의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썼다. 그들은 저마다 사회를 진단하고 역사적인 서사를 들려주며 처방을 제시했다. 진단은 일치했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근대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시작이 언제냐에 관해서는 12세기나 그 이전(푀겔린), 14세기(위버), 18세기 계몽주의(매킨타이어) 시대로 견해가 서로 달랐다. 제안한 처방은 도덕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을 거부하고 도덕을 정치와 공적 삶으로 되돌려놓는 것이었다. 위버과 푀겔린, 매킨타이어는 오늘날의 “가치” 보수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254)
대부분의 미국 보수주의자는 더 일상적인 수준에서 논쟁했다. 시장경제와 반공주의, 그리고 시민적 도덕이 전후 미국 우파가 지적 자신감을 되찾도록 해준 폭넓은 작전을 규정했다. 이 싸움에 집결한 이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뉴딜을 비판했던 이들과 1960년대부터 새롭게 ‘위대한 사회’를 비판한 이들, 안으로 반反집산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설 뿐만 아니라 밖으로 소련의 힘과 압력에 눈을 돌린 반공주의자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윤리적 방임과 공통의 예의 규범의 무시에 혼란을 겪는 다양한 이름의 “가치” 보수주의자 혹은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이었다. 1945년 이후 미국 보수가 반공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나 “가치” 보수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가치” 보수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어려웠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그것들을 “융합”하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세 가지 다 능숙하게 결합할 수는 없었다. 260-1)
신보수주의자 중 많은 이가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은 모두 자유주의자였다. 처음부터 그들의 일원이었던 어빙 크리스톨의 유명한 뉴욕식 어법에서 보듯이 “현실에 습격당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지만 말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반대했으나 최초의 보수주의자들이 저항했던 자유주의가 아니라 오늘날 큰 정부와 반항하는 좌파에 포획된 사회적 성향의 자유주의와 싸웠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보았다. 그들에게는 위대한 사상가의 명부가 없었다. 그들은 지어낸 전통에서 선택한 것을 갖고 논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역사는 현재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반反이데올로기적이고 실용적인 “현실주의자”로 생각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전망에 관해 보수주의적인 음울함을 거의 지니지 않았고 영국인들처럼 큰 사상 없이도 잘해나갈 수 있는 체하지 않았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다시 말해 일종의 진보에 관한 믿음을 공유했다. 264-5)
신보수주의자들은 1970년대 말까지 여러 논쟁에서 이기고 나서 정부에 들어갔다. 리처드 펄과 엘리엇 에이브럼스, 폴 울포위츠 같은 젊은 세대는 모두 레이건이나 부시 행정부(1981~1993)에서 일했다. 그들의 전투는 ‘위대한 사회’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아니라 2차 냉전 시대 워싱턴의 싱크탱크나 대학의 비둘기파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 2세대 신보수주의자들은 지식인들의 환상에 사로잡힌 채 소련 이후의 세계에 진입했다. 그들은 소련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해체됐고, 그 압력은 레이건 시대 미국이 자기 확신을 되찾은 데서 나왔으며, 그 회복에 신보수주의 작가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이 활기찬 공화당 우파의 부상에 논쟁과 사상이 역할을 했다고 본 것은 옳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국가적 자신감과 새로운 지정학적 역량을 키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술 같은 비약이었다. 젊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지지한 이라크 전쟁과 뒤이은 점령은 바로 그런 운동에 대한 응보였다. 266)
6부 보수주의 4기(1980~현재): 초자유주의와 강경우파
9장 정당과 정치인들: 강경우파의 진입을 허용하다
최초의 가장 유창한 변화지상주의자 가운데 영국 보수당 대표(1975~1990)이자 총리(1979~1990)인 마거릿 대처가 있었다. 대처가 영국 보수당을 지배한 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성공적인 토리 지도자들―솔즈베리, 볼드윈, 처칠―은 당의 내분을 관리했다는 역사적인 패턴을 따른 덕분이었다. 대처는 개방된 시장과 자유무역, 그리고 사람들의 개인적 도덕이나 신념에 간섭하지 않는 제한적 정부를 믿는 코브던주의자이자 중산층 자유주의자였다. 대처 이후 보수당의 “진짜 문제”는 당명이 아니라 1990년대가 되자 물리쳐야 할 적들과 팔 국유 재산,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더 효과적인 정부를 위해 시장 원리를 활용한 혁신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널리 모방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뜻밖의 비용이 나타났다. “자산 소유 민주주의”는 비틀거렸다. 그런 비용과 실패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화했지만, 1997년 이후 새로운 노동당이 대처리즘을 포용하면서 그 시기가 미뤄졌다. 272-3)
대처는 휘그인 동시에 토리였고, 친유럽이면서도 반유럽이었다. 또 자신이나 보수당이 많은 역할을 해서 정했던 유럽연합의 방향을 비판했다. 보수당은 1989년 이후 유럽연합의 급속한 확장을 밀어붙였다. 그들은 상품과 서비스, 자본, 그리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유럽 단일 시장을 촉진했지만, 그런 시장 자유와 균형을 맞출 사회·노동 분야 권리를 적용하는 유럽화에는 저항했다. 대처는 유럽 통화 통합을 선호하는 당내 친유럽주의자들을 좌절시켰는데, 이는 1990년 그녀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대처의 지도력 약화가 투표장에서 당의 입지를 위협하자 토리당은 늘 하던 대로 그녀를 쫓아냈다. 당내 반유럽주의자들은 곧 복수에 나섰다. 내부 투쟁―관세, 자유무역, 아일랜드, 제국 문제를 둘러싼 내분―에 익숙한 보수당은 투쟁의 열정을 유럽으로 돌렸다. 대처는 당내 파벌의 균형을 맞췄다. 그녀가 사라지자 명확한 목표나 사상이 없는 당은 국가 우선의 강경우파 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273-4)
독일의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은 1950년대부터 주류 우파가 말로만 통일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통일은 실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콜의 국가주의적인 비판자들이 보기에 통일은 서방화한 연방공화국이 옛 동독을 자유민주적 “기성 체제”로 흡수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속박이 된 체제 아래서 반쪽짜리 주권의 서독이 합의한 동맹관계로 동독을 빨아들인 것이었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비판자들이 꿈꿨던 것은 속박에서 벗어난 주권국가로의 복귀와 세계의 책임 분담, 그리고 독일의 역량이 크기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지정학적 맥락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기동의 자유였다. 문화적인 면에서 비판자들은 행동을 억누르는 수치심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에 관한 암묵적 규칙에서 벗어나 그들이 이해하는 그대로 독일의 정체성을 축복하기를 바랐다. 그런 주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옛 동독의 경제적 불만과 어우러졌고, 그 두 요인이 함께 2010년대 강경우파의 놀라운 부상을 부채질했다. 275)
로널드 레이건(1911~2004)은 공화당의 자유시장 낙관주의자와 극우 자유지상주의자,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도덕주의자, 그리고 미국 우선주의자들을 한데 모았다. 일찍이 닉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민주당 지지자였다가 실망한 이들의 표를 얻었다. 그는 미국 자유주의의 좌우 날개인 뉴딜 민주당 지지자와 엄격한 통화 및 대기업을 옹호하는 공화당 지지자 모두에게 호소했다. 이혼 경력이 있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레이건은 기독교 근본주의를 믿는 청중에게 모든 사람이 “죄와 악”에 맞서라는 “성서와 주 예수의 명을 받는다”고 진정성을 보이며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자립을 자랑스럽게 믿는 서부와 중서부의 현대판 제퍼슨주의자와 잭슨주의자들에게 미국식 자유의 복음이 울리게 했다. 레이건은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회를 돕겠다며 다시금 침입해오는 북부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불안해하는 남부의 백인들과 전국의 대학원에 흩어져 있는 젊고 똑똑한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그 복음을 들려주었다. 276)
오른쪽 당파들을 모이게 한 공통의 주제는 정부에 대한 적대였다. 레이건은 아주 능란하게 “큰 정부”를 헐뜯으며 청중을 흔들어놓아서 그가 운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바로 큰 정부라는 점을 잊어버리게 했다. 정부 지출과 낭비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인 그는 적자가 치솟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자신이 늙었을지 몰라도 어리석지는 않다고 자랑하며 한 번도 의회에 균형예산을 보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건 시대 우파는 반정부 복음에서 근래에 없었던 통합의 주제를 찾았다. 오른쪽 당파들에 큰 정부는 편리한 악당이었다. 기업과 은행들에는 신용과 작업 안전, 소비자, 환경 규제를 하는 정부, 도덕적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갈수록 더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한 법을 집행하는 정부, 미국 우선주의자들에게는 파괴적인 베트남전을 벌이고 외국인의 응석을 받아주는 다자주의를 택하며 소련에 때때로 긴장 완화의 추파를 던지는 물러터진 정부가 바로 그런 악당이었다. 277)
프랑스가 1980년 이후 우파의 지배라는 흐름에서 겉보기만큼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통령 임기는 또 보수주의 역사에도 속한다. 미테랑 덕분에 프랑스 중도우파가 뭉쳐 그에 맞설 하나의 반대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드골주의자와 우파 자유주의자 간의 사회적, 종교적, 상징적 차이가 급속히 좁혀져 어떤 경우에든 그 과제는 수월해졌다. 미테랑은 선거(1986)에서 중도우파의 의석 확대를 제한하려고 선거 제도를 비례대표 방식으로 바꾸게 했다. 우파의 표는 쪼개졌고 국민전선은 의회에서 36석을 차지했다. 미테랑의 책략은 중도우파의 승리를 막는 데 실패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수 정부와 “동거”해야 했다. 그러나 국민전선은 주변부를 벗어났다. 프랑스의 보수적 유권자들은 이제 선거에서 강경우파라는 대안을 갖게 됐다. 국민전선은 1980년대의 성공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쌓았고, 선거 때마다 꾸준히 10~15퍼센트를 득표하며 파괴적일 수도 있는 분열(1999)에서 살아남았다. 278)
강경우파가 이용한 수사적인 논지는 전통적으로 공유된 것이다. 쇠퇴는 그중 하나다. 강경우파는 어디서나 사회적, 도덕적 건전성이 악화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한때 강했던 나라가 쇠약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때 결속된 사회는 갈라졌다. 한때 정숙했던 사람들은 갈수록 타락했다. 국가 쇠퇴의 서사에 따르면 정치와 정부는 대중을 이해하지도 대변하지도 않는 이기적인 엘리트에게 포획됐다. 영국의 브렉시트 캠페인은 쇠퇴와 포획을 영리하게 결합했다. 유럽은 한때 자랑스러웠던 나라의 활력을 빼앗고 속박했으며, 유럽연합은 유럽화된 영국 엘리트의 도움으로 이 나라의 헌법을 포로로 잡았다. 포획의 반대는 구조였다. 진정한 국민―혹은 강경우파가 서로 바꿔 쓴 이름을 붙이자면 “대중”―은 현재 대변자가 없고 무력했다. 국가와 사회의 공동의 기구들―정부와 언론, 대학, 법원―은 부당한 손에 넘어갔다. 국민이 스스로 적대적 엘리트에게서 풀려날 수 있다면 구원과 해방을 맞을 것이었다. 287-8)
그와 같은 국민의 적들은 안팎에서 마지막 논지를 제공했다. 내부적으로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유주의자들이 국민의 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이나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일했다. 자유주의자의 본질적인 도덕적 결함은 탐욕이나 무신앙 혹은 애국심의 결여임을 스스로 드러낼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는 자기중심적이어서 도덕관념이 없고, 신앙의 부름에 귀를 막고, 자신의 목표나 선호를 넘어서는 것에 그다지 강한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희생자 의식은 강경우파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함께 묶는 주제였다. 그들이 옹호한 국민처럼 강경우파 자신도 강탈자의 힘에 희생됐다. 강경우파는 대중을 대변했으나 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대표성도 없는 자유주의자와 언론, 대학 같은 소수만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다수는 침묵했다. 그러나 약함 속에 강함이 있었다. 억압은 스스로 패배하고 결국 선이 이길 것이었다. 미래에 정당성이 입증될 정직한 수난이라는 개념에는 유서 깊은 종교적 계보가 있었다. 288-9)
10장 사상과 사상가들: 초자유주의적 현 상태에 대한 찬성과 반대
비타협적인 우파가 보기에 현상 유지 보수주의는 그 자체의 실패에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경제적, 문화적 파멸은 불가피했다. 그들의 세계주의는 유토피아적이었다. 그들의 너그러움은 부식성이 있었다.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보통 거기까지였다. 우선순위는 논란을 빚었다. 지정학적 반세계주의자들은 국가를 가장 우선하기를 바랐다.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병든 문화를 치유하거나 버리려 했다. 대체로 좋은 삶의 방식에 관한 도덕과 사상을 포함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자 중 누구도 뚜렷한 대안들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두 유형의 보수주의자들을 이어주는 지점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집착했다. 양쪽 다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경시한다고 보았다. 경제적 세계주의는 국가를 사회적으로 공동화했다. 윤리적, 문화적 민주주의는 국가를 도덕적으로 침식했다. 원인이 어느 쪽이든 비타협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독일의 계간지 『투물트』의 표현을 쓰자면 “합의 파괴자”들이 됐다. 299)
사람들이 말하려는 것을 자유주의 정통이 억누르고 검열한다는 강경우파의 주장에는 대중에 관한 것과 역사에 관한 것이 있다. 대중과 관련된 연성 검열 혐의는 미국에서 일반적이다. 그것은 사실상 자유주의 정통이 “대중”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된 주장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더 일반적이다. 그 주장은 자유주의적 정통이 과거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1933~1945년 독일과 1940~194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수치심이 국가의 역사에 관한 왜곡되지 않은 인식을 막고 있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하나의 국가는 과거에 관한 공유된 인식으로 뭉치므로 과거를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그 국가를 손상하거나 부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1945년 이후 독일과 프랑스의 신우파는 국가의 전통에 느끼는 자부심이 신나치주의나 은밀한 패탱주의라는 혐의를 벗도록 무죄 선언을 해야 했다. 강경우파는 과거의 불명예가 더는 현재의 논란에 암운을 드리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305)
비자유주의적 경쟁자들이 가하는 지정학적 위협과 자유주의적 현대 자체가 초래한 지구적 위협에 대한 비타협적인 우파의 지적 불만들은 심각한 걱정거리라기보다 국부적인 골칫거리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들은 1890년대 이후 늘 되살아나고 늘 불신받는 익숙한 논지와 태세를 재연하고 있었다. 자만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는 그 모든 것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염려할 수 있다. 강경우파 비판 중 하나의 전체로 통합되는 것은 별로 없다. 논리정연하게 대안적인 정통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적 자유주의에 명백한 결함과 이행되지 않은 약속들이 있다면, 그리고 정치적 중도에 거침없고 명료한 옹호자들이 없다면, 강경우파가 주장하는 각각의 논점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몇 차례 사소한 감염병에 걸리면 그 각각은 치료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것들은 함께 작용해 체계적 위험이 된다. 312-3)
맺음말: 우파의 선택
포퓰리스트와 자유지상주의자가 뒤섞인 강경우파는 고대의 키메라처럼 엄밀히 말하면 존재할 수가 없다. 포퓰리스트는 배타적인 국민으로서 “우리”를 위한 복지 확대를 원한다. 그들은 의회와 선출된 대표자들의 목소리를 줄이고 자신들의 직접적인 발언권은 늘리기를 바란다. 전문가들과 이른바 엘리트의 목소리도 줄이고 싶어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복지자본주의를 축소하거나 완전히 버리기를 바라며, 무지한 유권자들에게 발언권을 더 많이 주지 말고 더 적게 주기를 원한다. 한쪽은 자국 내 피난처를 요구하고 다른 쪽은 세계 시장의 권위를 중시한다. 양쪽 다 안전을 약속하나 방식은 달리한다. 기업과 은행들은 간섭받지 않을 자유와 자신과 자산을 원하는 곳으로 옮겨갈 자유를 보장받는다. 사람들은 열망했던 익숙한 삶을 약속받는다. 좌우를 막론하고 흔들리는 중도의 정치인들이 둘 중 어느 약속도 실제로 이행될 수 없고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 것이다. 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