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보수 본능 - 자본주의, 기독교, 음모론, 민족주의, 반페미니즘을 추앙하는 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하여
최정균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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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도대체 보수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극우가 아니라 보수 전체다. 극우는 단지 보수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강한 보수적 성향을 타고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생물학을 따른다. 또한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처한 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보수에서 극우로 발전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마땅한 의심으로 보수 전반을 평가하고자 한다. 중도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스스로가 ‘합리적’이라며 극우와 선을 긋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수의 이념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중도 보수나 극우나 똑같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만 그 신념에 얼마나 매달리는가 또는 그 신념을 어떻게 실현하려 하는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보수의 이념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애당초 합리적인 보수란 존재할 수 없다. 온건하기는 하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보수와 비합리적인 데다가 과격하기까지 한 보수만 있는 것이다. 7)


1장 보수의 심리: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따로 있다


정치 성향과 관련해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연구된 대표적인 세 가지 심리학적 기제는 체제 정당화system justification , 사회 지배 지향성social dominance orientation , 그리고 우익 권위주의right-wing authoritarianism다. 흥미로운 것은 주어진 체제를 정당하게 여기는 것, 사회의 지배 구조를 옹호하는 것,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모두 보수의 특성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보수의 사전적 의미, 즉 전통을 지킴으로써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과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은 체제 정당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기득권층이 체제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회적 약자나 체제에 피해를 입는 이들도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가 체제 정당화 이론의 핵심이며, 존 조스트John Jost가 처음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정당화, 즉 어떤 생각 또는 행동 유형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지지하는 태도는 여러 사회심리학 이론들의 기반이 되어왔다. 14-5)


이러한 심리는 크게 세 가지 형태, 즉 자기 정당화, 집단 정당화, 그리고 체제 정당화로 구분할 수 있다. 자기 정당화는 기득권자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고정관념을 활용하는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회적 혹은 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그 결과로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집단 정당화는 자기 정당화를 확장된 자아, 즉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확대한 개념으로, 자신과 사회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구성원들의 행동을 방어하는 상황에서 주로 나타난다. 집단 정당화 과정에서는 직접 대면해 본 적 없는 다른 집단에 대해, 자기 집단 속 다른 이들의 고정관념을 공유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와 달리 체제 정당화는 비주류 집단이나 소외 계급이 스스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거나 해를 입는 상황에서도 기존 체제를 수용하거나 심지어 옹호하는 현상을 다룬다. 체제 정당화는 자기 정당화나 집단 정당화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15-6)


우리가 경험해 아는 보수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어떤 내재적인 가치관, 신념, 심리적 기조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때로는 과격한 행동까지 동원함으로써 사회나 체제의 변화를 주도하거나 급진적으로 뒤바꾸기도 한다. 반대로 현실의 진보 역시, 사전적인 의미와 달리, 특정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체제의 변화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한다. 따라서 체제 정당화가 사전적인 보수와 일치할지는 몰라도 실제 보수와는 일치하지는 않는다. 보수를 사전적 정의나 체제 정당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보수적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편견, 혐오가 그들의 본성과 같이 너무나 확고하며 때로는 비이성적일 만큼 과격하고 위험한 행태로까지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를 쓰고 고수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뿌리 깊은 본능일 뿐, 무슨 고상한 인식론적, 실존적, 관계적 동기를 가지고 체제를 지키려 한다는 고차원적인 설명은 그저 잘 포장된 핑계로 들릴 뿐이다. 17-9)


사회 지배 지향성과 우익 권위주의 이론에서는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 본성을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한다. 사회 지배 지향성은 특정 개인이나 계층이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것을 옹호하는 성향을 말한다. 즉, 힘과 능력에 기반한 위계를 지지하는 폭넓은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지배 지향성이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계층적 질서를 선호한다. 한편 우익 권위주의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며, 권위에 반하는 이들을 배척하고, 기존의 규범과 전통을 따르는 성향을 말한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나뉜다. 첫째는 권위에 대한 순응이다.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권위 등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경향을 말한다. 둘째는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성이다. 체제에 반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강하게 배척하며, 강력한 법과 질서를 통한 체제의 유지를 원한다. 셋째는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적 관습을 고수하려는 태도다. 19-20)


사회 지배 지향성은 세상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정글로 인식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서, 이들은 타인을 지배하고 우위에 서려는 동기를 지속적으로 갖는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부자나 기업에 대한 세금 인상, 복지 확대, 무상 또는 평준화 교육과 같은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반면 우익 권위주의는 세상을 위험하고 위협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인식하며, 질서와 안정, 기존 규범을 중시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경계하고 규칙을 중시하는 성격적 특성과도 연결된다. 사회 지배 지향성이 주로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면, 우익 권위주의는 전통적 가치, 국가 안보, 사회 규범 등에 대한 태도를 설명한다. 과학에 대한 보수의 부정적인 태도도 우익 권위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우익 권위주의는 주로 사회적 위협을 인식했을 때 촉발된다. 20-1)


사회 지배 지향성과 우익 권위주의는 인간의 진화적 본성을 비중 있게 다룬다. 이것이 체제에 대한 유연한 심리적 반응에 더 큰 무게를 둔 체제 정당화 이론과의 차별점이다. 그러나 집단 수준에서 유리한 어떤 형질이 진화적으로 선호된다는 가정은 생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기존 체제를 합리화하거나 우월성과 능력에 따른 위계와 차등적인 분배를 옹호하며 사회적 관습, 규범,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심리의 기저에 진화적 압력이 작동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체 수준에서 일어났어야 한다. 이렇게 개체 수준의 진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종교성이다. 우리 선조들은 적과 포식자를 탐지하거나, 자연 현상과 사건들의 원인을 추론하거나, 싸울 것인지 협력할 것인지를 두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인지 능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자 탐지agent detection, 인과관계 추론causal reasoning,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 초자연적 존재인 신에게 투영된 것이 종교의 기원일 수 있다. 24-5)


# 보수의 심리 

1. 그저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 우리의 사회 체제다. 혁명은 예외적이며 일시적이다. 이것이 보수가 기성 체제를 옹호하는 이유다. 

2. 보수가 지키려 하는 것은 체제가 아니라 본능이다. 체제를 정당화하는 동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정당화하는 체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3.  사회 지배 지향성은 돈과 권력, 우익 권위주의는 권위와 관습에 대한 노예근성이다. 권위와 비교해 권력은 더 동물적이다. 고로 권력의 논리에 사로잡힌 현대판 노예들이야말로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2장 보수의 뇌: 참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두려움


내재성 휴리스틱inherence heuristic은 사람들이 어떤 현상의 원인을 내재적인 속성 때문이라고 간단히 추론해 버리는 인지 전략으로, ‘원래 그렇다’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식의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많은 현상은 다양한 외적 요인들이 작용해 발생하지만 그러한 정보 수집과 해석에 노력을 들이는 대신,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내적 요인으로 설명함으로써 인지적 종결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내재성 휴리스틱과 유사한 개념으로 가격-품질 휴리스틱price-quality heuristic이 있다. 한마디로 어떤 상품이 값비쌀 때 곧바로 그것이 우수한 품질이나 성능을 지녔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상품의 품질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기에, 제품이 질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심피언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내재성 휴리스틱은 우리의 본능과 같아서 매우 어린 시기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 29-30)


그런데 휴리스틱에 대해 심리학에서 그다지 주목되지 않은 것이 그것의 적응적 측면이다. 여러 사람에게 어떤 인지적 성향 혹은 선호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진화적 기원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윈의 성선택sexual selection  이론과 행동생태학자 아모츠 자하비Amotz Zahavi의 핸디캡 이론handicap theory 을 알아야 한다.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들을 살펴보면 크고 화려하며 노래하거나 춤추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수컷이다. 여기서 다윈은 생존에 불리해 보이는 수컷의 형질과 행동이 암컷에게 짝짓기 상대로 선택되는 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에서는 생존에서의 불리함과 번식에서의 유리함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이 확실하지 않았다. 이 빠진 퍼즐 조각을 맞춘 것이 바로 핸디캡 이론이다. 자하비는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핸디캡 그 자체가 암컷이 수컷을 선택하게끔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값비싼 신호costly signal’라고 불렀다. 32)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는 이러한 성선택과 신호 이론의 관점으로 인간 고유의 자질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밀러는 그의 저서 『연애』에서 인간의 복잡한 특성들을 짝짓기 경쟁의 부산물로 보면서, 인간이 생존 기계가 아닌 연애 기계라고 주장한다. 지능, 창의성, 예술적 감성, 유머 감각 등은 모두 생식 성공을 위한 신호로 작동하며, 따라서 진화적인 적합도 지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밀러는 더 나아가 『스펜트』에서 비싼 차나 미술 작품 등을 구매하는 현대인의 과시적 소비 행동도 이러한 신호 전략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은 일찍이 그의 명저 『유한계급론』에서 이러한 과시적 소비를 비판한 바 있다. 이처럼 동물로서 우리 인간은 다른 개체가 과시하는 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도록 진화해 왔다. 이것이 바로 내재성 휴리스틱이 타인을 대상으로 작동할 때 우리 안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33-4)


뇌의 정보 처리와 추론 방법을 설명할 때 휴리스틱 이론이 직관에 기반한다면, 베이지언 뇌Bayesian brain 이론은 확률에 기반한다. 베이지언 뇌에서 확률은 사람들이 특정 사건이나 명제에 대해 가지는 신념도 혹은 불확실성에 대한 주관적 평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일 비가 올 확률이 80퍼센트라고 말할 때, 주관적 베이즈주의자는 그 사람이 내일 비가 올 것을 80퍼센트 확신한다고 해석한다. 뇌는 세상에 대한 선험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베이지언 통계에서 사전 확률prior probability에 대응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뇌는 믿음을 조정하는데, 이는 이론에서 사후 확률posterior probability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똑같이 0.5라고 생각한다. 반면 편향을 가진 사람은 동전이 조작되어 앞면이 나올 확률이 0.8이고 뒷면이 나올 확률이 0.2라고 믿는다. 이렇게 사전 확률에 차이가 있으면 같은 결과를 가지고도 사후 확률이 다르게 계산된다. 35-6)


보수적 베이지언 뇌가 지닌 선험적 믿음의 방향성은 혐오, 행동면역계, 교감신경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들 중 하나는 위험한 대상을 재빨리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복잡하고 정교한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단순하고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위험한 것을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대상을 위험하다고 착각해 과잉 대응 하는 편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불확실한 대상에 대한 유전자의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혐오의 감정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렇게 진화한 심리적, 행동적 기제를 ‘행동면역계 be-havioral immune system’라고 한다. 즉, 행동면역계는 병원균의 가능성을 알리는 지각 신호에 반응해, 혐오와 같은 심리 반응이나 회피와 같은 행동 방식을 유도한다. 최근에는 행동면역계가 분자와 세포 수준에서 작동하는 생리학적 면역 반응과 연결된다는 보고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37)


여러 뇌 영상 연구들에서 발견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과 뇌섬엽insula cortex이라는 뇌 부위의 역할이다. 먼저 강한 보수 성향이 더 큰 편도체amygdala로 나타났다면, 더 강한 진보 성향은 더 큰 전대상피질의 부피로 나타났다. 또한 보수에게서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행동실험 상황에서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뇌섬엽이 더 많이 활성화되었다.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의 기능은 경제적 의사 결정, 예컨대 자원을 분배하는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실험이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이다. 여기서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제안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경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본인에게 금전적으로 더 이득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불공정한 제안을 받을 때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이 활성화된다. 이는 공정성에 대한 의식이 단순히 손익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기반을 가진 정서적 반응임을 시사한다. 41-2)


쉽게 말해, 이 뇌 기관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상충하는 정보, 기대를 저버리는 불공정, 사회적 부조리와 고통 등을 모두 오류로 인지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적 신념이 갈등 탐지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종교적 개념에 노출된 신앙인들의 뇌에서는 전대상피질에서 발생하는 오류 반응이 약화된다. 즉, 종교적 신념이 오류에 대한 불안 반응을 완충시킴으로써 갈등을 회피하거나 외면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종교의 성인들을 우러러보는 이유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깨닫고 그것을 초월하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감수하고 그에 맞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현대 종교의 교리는 신앙인들의 종교성만을 자극하며 세상의 아픔을 회피하거나 정당화하게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종교가 점점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42)


# 보수의 뇌

1. 보수의 뇌에서 휴리스틱이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불확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빨리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지적 ‘종결 욕구’ 때문이다. 

2.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휴리스틱 본능은 왜곡된 능력 과시마저 정직한 신호로 착각해 받아들이게 한다. 이처럼 값비싼 신호가 교란된 상태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기득권층이다. 

3. 기존 신념을 고수하는 보수적 베이지언 뇌는 불확실한 대상을 무조건 과잉 경계 하는 진화적 습성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편향성이 끼치는 폐해는 인공지능의 문제보다 더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자연 지능’의 현실적인 위험이다. 


3장 보수의 유전자: 대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들


인간의 행동과 같은 어떤 형질들이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유전자로부터 그 형질까지의 경로가 길고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생명체가 유전자의 조절하에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도 작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험실에서 특정한 유전자형을 도입해 형질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생기는 유전자형도 형질에 곧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히려 형질의 복잡성은 여러 유전자들이 병렬적으로 함께 작용하기에 나타난다. 복잡한 형질일수록, 혹은 더 많은 유전자가 관여할수록 개별 유전자의 영향력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개별적인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환원주의적 접근이 가능한 이유다. 모든 자연 현상은 개별 요소들로 환원할 수 있기에 자연과학은 환원주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환원되지 않는 창발 현상에서도 개별 요소들의 영향력이 존재한다. 다른 유전자형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환경 조건에서도 분명한 표현형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다. 47-8)


인간의 공격성과 지배적 행동 중 일부는 성적인 행위의 일환으로 추정된다. 또한 편도체와 교감신경이 주도하는 불안 및 공포 반응도 출산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환경적 불안정성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건강 기대수명이 짧고 평균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이 첫 출산 연령이 더 낮고 자식의 수가 더 많다. 그런데 주관적인 불안감도 출산 욕구에 영향을 준다. 예컨대 자연재해나 지역사회에 대한 테러를 경험한 경우, 거주지 인근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우와 같이 불안 및 공포 반응이 유도되는 환경에서는 임신 욕구가 증가하고 실제 출산율이 늘어난다. 또한 단순한 심리적 조작으로 사망 위험성을 인지하게 하는 것만으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자식의 수가 많아지고 첫 출산 연령이 낮아진다. 자신의 생존이 불확실하다고 느낄수록 번식을 통해 빨리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하는 것인데, 우익 권위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그러한 경향을 더 강하게 드러낼 것이다. 52)


한편, 기존 연구들에서 정치성과 관련하여 직접 다루지 않았으나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자 중 하나가 옥시토신 oxytocin 이다. 흔히 ‘사랑 호르몬’ 혹은 ‘모성애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은 사회적 심리와의 연관성이 많이 알려져 있으며, 보수 성향을 대표하는 뇌 구조인 편도체와 관련해서도 다수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옥시토신은 우익 권위주의가 추구하는 내집단 중심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익 권위주의는 외집단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에 맞서 내집단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고취하고 협응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실제로 우익 권위주의와 내집단을 우선시하는 태도에는 같은 유전학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옥시토신 회로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유전자들이 여기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다른 말로 ‘지역적 이타주의parochial altru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은 물리적인 의미의 지역만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 집단, 계층, 문화권 등을 포함한다. 53)


한편 사우스웨스턴대학교 연구진의 조사에서 진보 성향을 설명하는 도파민 수용체는 균형 선택의 흔적을 보였다. 여기서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이란 어떤 유전자형이 유리한 상황에서는 점점 많아지다가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다시 줄어들기도 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지능의 역할이 한층 중요해져왔다는 맥락에서 진보 성향을 대표하는 뇌 부위인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이 지능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들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사고 능력인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동성 지능은 선천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어린 나이에 활발하게 작동하는 반면, 반대 개념인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은 후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가 들수록 발달한다. 그러므로 문화의 발전으로 생겨난 새로운 생존 기술을 어릴 때부터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주로 요구된 것은 유동성 지능이었을 것이다. 56-8)


요컨대 보수적 본능이 인간 역사에서 대체로 우세하게 작용한 것과 비교해, 진보 성향을 설명하는 유전자들은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아주 가까운 시기에 이르러서야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문명의 발전은 생존과 번식에 대한 자연선택의 압력을 완화했고, 그 결과 보수적 본능이 약한 이들도 점차 더 많이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편도체가 주관하는 교감신경, 싸움-도주 혹은 돌봄-방어 반응, 행동면역계 등의 작동이 약한 이들도 살인과 전쟁이 줄어든 사회에서, 그리고 감염 질환을 치료하는 의학이 발전한 상황에서 더 높은 수준의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전대상피질과 뇌섬엽 등이 매개하는 유동성 지능 역시 문명화된 환경에서 생존과 적응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생존을 수동적인 결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자부심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는 데서 비롯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을 넘어서기 위한 창조적 몸부림의 산물이다. 58)


# 보수의 유전자

1. 세로토닌, 옥시토신, 리포칼린 등을 둘러싼 유전자들의 생물학적 기능과 진화적 양상, 출산율 통계 등은 보수의 유전자형이 생존과 번식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2. 성공적으로 진화한 ‘다정한’ 자들의 사회성이란 편협한 이타주의, 집단 이기주의, 권력과 위계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며, 그들이 잃어버린 공격성은 불의에 맞서는 데 필요한 투쟁심이다. 

3.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는 데 있다. 반면 진화에서의 ‘적응’이란 인간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 없이 자연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순응’을 말한다. 


4장 보수의 환경: 젊어서나 늙어서나, 부유해도 가난해도


같은 유전자형이라도 다른 환경 조건에서는 다른 표현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에서 세로토닌이 주관하는 위계적 행동과 우울증 간의 연관성은 진화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데이비드 린든David Linden 교수가 『우연한 마음』에서 설명했듯이, 학자들은 우울증과 같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해 보이는 감정이 왜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경우에는 활력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상태가 자신의 공격성을 줄이는 한편, 지위가 높은 개체로부터 공격당할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질수록 그에 따라 세로토닌 수치가 낮아지므로, 세로토닌 부족이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은 그러한 적응상의 이점 때문일 수 있다. 세로토닌 회로 체계가 발달시켰다고 하는 소위 ‘친사회성’과 공격성 감소라는 이면에는 우울증이라는 비극이 있는 것이다. 62-3)


반대로 세로토닌의 활성이 너무 높은 경우도 문제가 된다. 5-HTT에는 두 가지 유전자형이 있는데, 유전자형에 따라 세로토닌 재흡수 기능이 달라 세로토닌의 활성 정도도 다르다. 그런데 세로토닌 활성을 강화하는 유전자형을 지닌 이들에게서 편도체의 공포 반응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스트레스에 더 과민 반응 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일상적인 갖가지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편도체의 교감신경이 싸움-도주 반응을 유발하기에, 5-HTT 유전자형에는 ‘예민한 유전자grouchy gen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예상대로 예민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 여러 우울증 척도에서 높은 수치를 보였다. 그러나 삶에서 경험한 스트레스 사건의 수가 많은 경우에만 그러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또 다른 메타분석에서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기간, 최근에 겪은 스트레스 사건이 언제였는지와 같은 시간적 요소도 작용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요컨대 우울증이 유전자, 환경, 시간의 삼중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었다. 63-4)


남성들이 보이는 보수 성향이 주로 경제와 관련해 드러난다는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성별에 따른 정치 성향 차이의 상당 부분은 경제적 보수주의인 사회 지배 지향성으로 설명되는 반면, 사회적 보수주의를 나타내는 우익 권위주의에서는 남녀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우익 권위주의는 연령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위험’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되는 우익 권위주의의 근간에는 보수적 베이지언 뇌의 작용, 교감신경의 싸움-도주 반응, 옥시토신의 돌봄-방어 반응 등으로 매개되는 생존 본능이 있다. 위협에 대한 신체적 대응이 점차 둔화되는 고령층의 보수성이 사회적 보수주의로 이어지는 이유라고 하겠다. 한편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되는 사회 지배 지향성에는 내재성 휴리스틱과 신호 체계, 세로토닌, 페로몬 등이 주관하는 번식 본능이 있다. 이는 성공과 쟁취의 욕망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남성들, 특히 젊은 남성층의 보수성은 능력주의 기반의 경제적 보수주의로 나타난다. 71-2)


젊은 남성들의 보수화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남성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들의 번식 경쟁력에 대한 전망이 어두운 가정은 딸을 선호하게 되는데, 전 세계적으로 자유경쟁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부모가 아들을 원한다는 이유로 태어나지 못하는 여아의 수가 무려 8분의 1로 줄어들 만큼 남아 선호도는 확연한 감소 추세다. 사실 보수를 자칭하는 젊은 남성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자신들을 사회적 약자 내지는 피해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가정, 또래 관계, 학교, 직장, 혼인 시장 내에서 능력에 따라 남자들을 평가하는 인간 본성이 여전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의 경제 이데올로기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자 생활 양식으로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의 학업 성취와 사회적 성공이 일부 남성들의 부진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압박감이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72)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 성향을 띠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대역폭 세금 bandwidth tax’이라는 개념은 인지적 자원에 부과되는 보이지 않는 세금을 의미한다. 즉, 빈곤한 상황이 정신적 여유 혹은 에너지를 고갈시켜 인지 기능을 저해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렇게 인지 자원이 고갈되면, 기존의 믿음을 고수하는 보수적 베이지언 사고가 지배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깊이 있는 분석적 사고보다는 직관이나 간단하고 빠른 판단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업 기억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 사고가 약해지면서 휴리스틱이 더 쉽게 작동한다. 특히 내재성 휴리스틱으로 인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버리면, 성공은 타고난 이들의 것이며 그들이 누리는 혜택은 정당한 것이라는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또한 사회 지배 지향성이 강화되어 여성에 비해 남성이, 이민자들에 비해 내국인들이 경제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72-3)


# 보수의 환경

1. 인간 정치성의 표현형을 만드는 공격적인 유전자, 예민한 유전자, 탐색 유전자 등은 경제를 비롯한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2. 노화에 따른 보수성이 생존을 위협하는 개인의 생물학적 변화에 기인한다면, 젊은 남성들의 보수성은 번식을 향한 생물학적 본능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에 반응해 나타나는 결과다. 

3. 오늘날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권력에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를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신봉한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발적 노예’가 되어버린 이들은 스스로를 ‘비자발적 독신자’라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 


5장 보수의 문화: 경쟁과 맹신과 배척의 본능들이 만든 세상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겉보기에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광범위한 여러 사안들에 대해 보수는 일관된 입장을 보인다. 이는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먼 과거 자연 속에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며 구축된 진화적 심리가 현대사회의 문화적 요소들에 반응해 발현되는 것을 보수라고 규정하면, 이 모든 현상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휴리스틱과 보수적 베이지언, 신호 체계에 기반한 번식 전략과 같은 인지심리학적 요소들과, 편도체, 교감신경, 행동면역계, 싸움-도주 혹은 돌봄-방어 반응, 페로몬 시스템, 전대상피질, 뇌섬엽과 같은 신경생리학적 요인들, 그리고 옥시토신, 세로토닌,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들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사안들에 반응해 사회 지배 지향성이나 우익 권위주의와 같은 심리 기제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연적 본능에 따르는 가치관을 지닌 자연인들이 만들어 낸 문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보수주의다. 86)


# 보수의 문화

1. 보편적인 보수의 특징은 평등을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을 옹호하는 사회 지배 지향성이다. 공산주의 정권을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하는 우익 권위주의는 강한 반공 정서를 형성한다. 

2. 성서의 내용을 왜곡해 교리로 고착시킨 기독교는 인간의 진화적 종교성을 충실하게 충족함으로써 보수의 핵심 사상으로 군림했다. 한편 과학에 대한 불신은 음모론 맹신으로 이어진다. 

3. 배타적 민족주의는 도덕적 범주가 협소해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한정되기에 나타난다.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배척은 전 세계 우파 정권과 근본주의적 종교의 공통점이다. 


나가며: 그러면 진보란 무엇인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모 컨서버티버스Homo conservativus, 즉 보수적 사피엔스sapiens 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보는 이들은 호모 리버럴리스Homo liberalis, 즉 진보적 사피엔스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새로운 분기점 앞에 서 있다. 컨서버티버스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 '조상형ancestral allele'이라면, '파생형derived allele'의 비율이 늘어날수록 사피엔스는 리버럴리스에 가까워질 것이다. 리버럴리스가 지닌 파생형은 주로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학습하고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질들을 설명한다. 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생존에 불리하거나 눈에 띄지 않았을 특성들이지만, 문명의 보호 속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문명의 발전과 함께 더욱 번창해 왔다. 그러므로 호모 사피엔스의 분기를 촉진하는 것은 자연선택이 아닌 문명의 발전이다. 문명은 리버럴리스를 낳고, 리버럴리스는 문명을 더욱 발전시키며, 더 고도화된 문명은 더 많은 리버럴리스를 탄생시킨다. 89-90)


호모 리버럴리스의 도덕적 합리성은 ‘공정’이라는 이상으로 수렴한다. 만약 현재의 체제가 뒤바뀌어 능력 경쟁보다 평등이 중시되고, 남성보다 여성이, 백인보다 흑인이, 이성애자보다 동성애자가 주류인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진보주의자들의 태도는 어떻게 바뀔까? 그렇게 뒤바뀐 체제가 오랜 시간 유지된다면, 현 체제에 반항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다시 옛 체제를 바라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체제 아래에서도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공정성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능력, 성별, 인종, 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누군가가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서거나 차별을 받는 사회 구조는 공정성에 위배된다. 따라서 진보는 그저 기득권의 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 없는 구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공정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어쩌면 유일한 도덕률인지도 모른다. 합의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모든 이해 당사자에게 공정한 결과가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90-2)


기독교가 존엄하게 창조된 인간을 말할 때, 성서는 공정하게 창조되어야 할 인간을 말한다. 우리가 도덕적 명제처럼 받아들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은 사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정한 생존의 보장을 위한 합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수단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들 사이의 공정한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며, 그 신념 위에 우리의 모든 윤리 체계가 구축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들 역시 존 로크John Locke 가 주장한 자연권이 아니라, 도덕적 합의를 통해 도출한 사회적 구성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존엄성은 우리 안에 생물학적으로 내재하지 않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인간에게 존엄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혹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는 철학적으로는 난제이겠지만,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조차 없다. 인권은 인간이 합의해 도출한 사회적 개념이다. 역사가 이를 분명히 말해준다.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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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글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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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내가 만약 곰팡이라면


곰팡이는 우리와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유지해준다. 화산섬이 생성되거나 빙하가 후퇴해 맨 암석이 드러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지의류地衣類, lichen ― 곰팡이와 조류藻類, algae 또는 박테리아의 연합 ― 이고, 이어서 식물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다. 잘 발달된 생태계에서도 흙을 붙들어주는 곰팡이 조직이 빽빽한 그물망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흙이 빗물에 금방 쓸려 내려가 버린다. 깊은 바다 밑 충적층에서부터 사막의 모래밭, 남극의 꽁꽁 언 얼음계곡, 심지어는 우리 몸의 내장이나 모든 구멍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서 곰팡이를 발견할 수 없는 곳은 거의 없다. 한 그루 나무의 줄기와 잎에만도 수천 종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 이 곰팡이들은 스스로 식물세포 사이의 빈틈으로 들어가 촘촘한 비단을 짜고 그 식물이 질병을 막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자연 상태에서 자란 식물치고 이런 곰팡이가 없는 식물은 없다. 곰팡이는 잎이나 뿌리처럼 식물 세상의 일부다. 30-1)


곰팡이 중에서 일부는 당분을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들거나 빵을 부풀게 만드는 효모처럼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발아發芽를 통해 두 개의 세포로 증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곰팡이는 많은 세포가 연결된 네트워크인 균사hypae를 형성한다. 미세한 관 구조인 균사는 갈라지고, 합해지고, 서로 얽히면서 무질서하지만 매우 섬세한 균사체를 만든다. 균사체 만들기는 거의 모든 곰팡이의 공통적인 습관인데, 균사체는 물체라기보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합당하다. 균사체는 탐험적이고 불규칙적인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균사체 네트워크 안의 생태계를 통해 물과 영양분이 흘러 다닌다. 일부 곰팡이종의 균사체는 전기적으로 들뜨기도 해서 균사를 따라 전기파가 전도된다. 대사상의 특이성 덕분에 곰팡이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관계 맺기에 능하다. 뿌리에서든 줄기에서든 식물은 생겨난 순간부터 양분 흡수와 방어에 있어 곰팡이에 의존한다. 동물도 곰팡이에 의존하기는 마찬가지다. 32-3)


한 개체는 어디서 끝나고 다른 개체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우리는 대개 우리 몸이 시작하는 곳에서 우리가 시작되고 우리 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가 끝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미생물의 생태로 이루어진, 그리고 분해되는 생태계이며, 그 의미는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우리의 몸 안과 표면에 사는 4조 개 이상의 미생물 덕분에 우리는 음식을 소화시키고 우리 몸에 자양분이 되는 필수 미네랄을 생성할 수 있다. 식물의 내부에 사는 곰팡이처럼, 미생물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한다. 미생물은 우리 몸의 발육과 면역 시스템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심히 관찰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질병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경우도 아니다. 박테리아도 몸 안에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 바이러스도 자기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를 몸 안에 갖고 있다. 공생은 생명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다. 40-1)


유혹하는 곰팡이: 버섯과 곰팡이가 퍼져나가는 방법


트러플은 몇 종류의 균근 곰팡이가 땅속에서 키워내는 자실체다. 트러플은 토양에서 흡수한 영양분과 식물의 뿌리에서 흡수한 당분으로 생명을 유지하면서 연중 대부분을 균사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그러나 땅속이라는 서식 환경이 트러플에게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 식물이 씨앗을 만들어내듯이 트러플은 포자를 만들어내는 유기체다. 땅속에서는 포자가 바람에 실려 갈 수도 동물의 눈에 뜨일 수도 없다. 트러플이 내놓은 해결책은 냄새다. 그러나 숲속에서 풍겨나는 온갖 냄새를 누르고 더 멀리까지, 더 강하게 냄새를 풍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트러플의 냄새는 토양층을 뚫고 퍼져나갈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이어야 하고, 다양한 냄새의 스펙트럼 안에서 땅을 파내고 찾아먹을 수 있을 만큼 입맛 도는 냄새여야 한다. 이처럼 시각적으로 불리하다는 단점 ― 땅속에 파묻혀 있는 데다 땅을 파헤쳐도 쉽게 찾아낼 수 없고, 찾아냈다고 해도 그다지 먹음직스럽게 생기지 않은 ― 을 트러플은 냄새로 역전시켰다. 49)


유혹은 곰팡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교배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트러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한쪽의 균사 네트워크에서 나온 균사가 성적화합성이 맞는 다른 균사 네트워크와 융합하여 유전물질의 풀pool을 만들어야 한다. 균사 네트워크로서 한살이의 대부분을, 트러플은 곰팡이의 기준으로 ‘-’ 또는 ‘+’ 의 교배형 중 하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의 교배 형태는 아주 솔직담백하다. - 균사가 + 균사를 유인해 융합하면 접합이 일어난다. 이 두 파트너 중 부계의 역할을 하는 쪽은 유전물질만 제공한다. 다른 쪽은 모계의 역할을 맡아, 유전물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트러플과 포자로 성장하는 과육flesh을 기른다. 트러플의 성별은 인간과 달라서 + 교배형이나 - 교배형 모두 부계가 될 수도 있고 모계가 될 수도 있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사람이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으며, 따라서 반대 성을 가진 개체와 관계를 맺는다면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59)


그러나 트러플과 나무 사이의 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이들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도 섬세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어린 트러플 균사는 파트너로 삼을 나무를 찾지 못하면 금방 죽어버린다. 식물은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는 곰팡이를 피해, 서로 이득이 되는 관계를 형성할 곰팡이를 자신의 뿌리에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도 또 다른 형태의 유혹, 화학적인 ‘밀고 당기기’라고 할 수 있다. 트러플이 숲속에서 동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식물과 곰팡이도 서로를 끌어당기기 위해 휘발성 화학물질을 이용한다. 나무뿌리는 흙 속에 풍부한 휘발성 화합물을 발산함으로써 곰팡이가 포자를 퍼트리고 균사의 가지를 더 빨리, 더 왕성하게 자라게 한다. 곰팡이는 뿌리를 조종하는 식물 성장 호르몬을 분비해 식물이 솜털 같은 잔뿌리를 많이 뻗어내도록 만든다. 잔뿌리가 많이 나올수록 뿌리의 표면적이 넓어지고, 따라서 뿌리 끝과 곰팡이의 균사가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59-60)


곰팡이가 식물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뿌리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서로의 독특한 화학적 조성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신호물질은 식물세포와 곰팡이의 세포를 관통해 직렬로 흐르면서 유전자를 활성화시킨다. 식물 뿌리와 곰팡이의 균사 모두가 각자의 신진대사 과정과 성장 프로그램을 새롭게 구성한다. 곰팡이는 나무의 면역반응을 정지시키는 화학물질을 내놓는다. 그러지 않으면 공생구조를 밀접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공생구조가 확립되면, 균근 파트너십은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균사와 뿌리의 관계는 매우 다이내믹해서, 뿌리 끝과 곰팡이의 균사가 늙어 죽으면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리모델링하는 관계인 것이다. 트러플을 재배하려면, 곰팡이의 특이한 생식 체계를 비롯하여 공생하는 나무, 박테리아의 기벽과 요구를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토양, 계절, 기후 등 곰팡이를 둘러싼 환경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의 중요성까지도 파악해야 한다. 60)


살아 있는 미로: 곰팡이가 길을 찾는 방법


균사체 네트워크라고 하면 균사의 정단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마치 벌 떼나 개미 떼가 바글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체구가 아주 작은 개체들이 수없이 모여서 마치 거대한 개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떼를 이루어 움직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이러한 군집행동swarm은 집단행동의 패턴이다. 그러나 균사체는 개미 떼나 정어리 떼를 훌쩍 뛰어넘는다. 한 네트워크 안의 균사 정단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흰개미 둥지는 여러 단위의 흰개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다. 군집 속의 개체를 하나씩 분리하듯 균사체 네트워크에서 균사를 한 올 한 올 분리해낼 수는 없지만, 균사체 네트워크와 동물 또는 곤충의 군집을 나란히 놓고 비유하자면 균사 정단은 군집 속의 개체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균사체는 그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상호연관된 하나의 존재다. 하지만 균사 정단의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복수의 개체다. 69-70)


# 균사 정단(Hyphal apex)은 균사의 가장 끝부분을 말하며, 이곳에서 세포 성분과 융합이 일어나 균사가 성장하고 분지하며, 기질로 침입하는 등 생장 활동이 집중된다.


균사체를 내는 곰팡이는 미로 거주자이며, 곰팡이가 공간적, 기하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면 곰팡이가 어떤 유기체로 진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곰팡이는 매 순간 자신의 몸을 최적의 상태로 분포시킬 방법을 찾는다. 균사체는 탐험 모드로 출발해 모든 방향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사막에서 물을 찾고자 할 때면 우리는 보통 한 방향을 정해서 찾아 나선다. 곰팡이는 동시에 모든 경로로 찾아 나서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 부분을 강화하고 소득이 없는 부분은 정리한다. 이런 현상을 자연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균사체는 연결점을 과잉생산한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는 다른 부분에 비해 경쟁력이 더 높은 것이 드러난다. 그러면 그 부분은 두터워지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분은 차츰 약화되어 마치 도시의 간선도로처럼 몇 가닥의 균사만 남게 된다. 한쪽의 네트워크는 거두어들이고, 다른 쪽으로는 생장을 거듭함으로써 균사체 네트워크는 새로운 환경으로 이주한다. 70-1)


머리카락곰팡이 자실체는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수 밀리미터 안에 있는 다른 물체를 피해서 자란다. 그 물체가 투명하든 불투명하든, 부드럽든 거칠든 상관없이 머리카락곰팡이는 약 2분 정도 후면 우회하기 시작한다. 머리카락곰팡이는 곰팡이 중에서도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민감한 종이지만, 대부분의 곰팡이가 빛(방향, 강도 또는 색깔), 온도, 습도, 영양분, 독성물질, 전기장을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다. 식물처럼 곰팡이도 청색광과 적색광에 민감한 수용체를 이용해 빛의 스펙트럼에서 색을 ‘볼’ 수 있다. 식물과는 달리, 곰팡이는 동물 안구의 간상체와 추상체에 있는 시각색소인 옵신opsin도 가지고 있다. 균사는 평면의 질감도 감지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콩녹병균bean rust fungus의 어린 균사는 CD의 레이저 트랙 사이에 패인 홈보다 세 배나 얕은 0.5마이크로미터 깊이의 홈을 감지할 수 있다. 균사들이 모여 자실체를 만들기 시작하면 중력을 매우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78)


낯선 자의 친밀함: 함께 뒤엉켜 진화한 미생물


수평적 유전자 교환이 발견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박테리아도 생물학적인 섬이라고 여겨졌다. 한 개체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기간에서 어느 한 중간에 새로운 DNA를 획득하는 것,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화한 유전자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평적 유전자 교환은 이런 사고를 바꿔놓았으며 박테리아 게놈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범존적汎存的 존재, 수백만 년 동안 따로 떨어져서 진화해온 유전자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었다. 박테리아의 경우, 수평적 유전자 교환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어떤 개체든 박테리아 개체 하나가 가진 유전자의 대부분은 진화의 역사를 공유하지 않으며, 마치 우리가 집에 물건을 쌓아두듯이 한 조각씩 획득해서 쌓인 것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박테리아는 ‘기성품’ 특질을 획득함으로써 진화의 속도를 몇 배나 빠르게 가속해왔다. 비록 박테리아가 가장 민첩하고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유전물질은 생명의 모든 영역에서 수평적으로 교환되어왔다. 96)


1967년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생명체의 초기 진화에서 공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론이 불러온 논쟁에서 이 이론을 강력히 지지했다. 마굴리스는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서로 다른 유기체들이 합쳐지면서 ― 그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진핵생물은 단세포 유기체에 삼켜진 박테리아가 그 유기체 안에서 공생을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미토콘드리아가 바로 그런 박테리아의 후손이다. 엽록체는 초기 진핵세포가 삼킨 광합성 박테리아의 후예다. 사실 이런 표현이 상황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식물의 조상은 광합성 능력을 가진 박테리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광합성을 할 수 없는 유기체와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유기체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했다. 진핵세포 안에서,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가지들이 함께 얽혀서 분리 불가능한 새로운 계통으로 녹아들었다. 곰팡이 균사가 그렇듯이 융합 또는 접합된 것이다. 98-9)


지의류는 보편적인 실체이며 생명이 만나는 장소다. 곰팡이는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류 또는 광합성 박테리아와 짝을 이룸으로써 광합성 능력을 수평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조류 또는 광합성 박테리아는 질긴 보호 조직을 뚫거나 바위를 소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곰팡이와 짝을 이룸으로써 그런 능력을 갖게 된다, 갑자기! 분류학적으로 거리가 먼 유기체들이 함께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혼성 생명체를 구성한다. 엽록체와 떨어질 수 없는 식물 세포와 비교하면, 지의류의 관계는 개방적이다. 지의류는 이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도 번식한다. 공생 파트너를 온전히 품고 있는 지의류 조각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새로운 지의류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지의류는 곰팡이와도, 광합성공생자와도 비슷하지 않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성분 원소와는 전혀 다른 화합물인 물이 되듯이, 지의류도 창발 현상, 즉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 된다. 99-100)


균사의 마음: 곰팡이가 우리의 마음을 조종한다면


오피오코르디셉스 곰팡이Ophiocordyceps unilateralis는 목수개미carpenter ant 주변에서 살아간다. 이 곰팡이에 감염된 개미는 자기 둥지를 떠나 가까운 식물을 타고 기어 올라간다. 좀비 곰팡이는 가장 능수능란하고 창의적으로 동물의 행동을 조종하는 하는 것이 바로 곤충의 몸 안에 사는 곰팡이 집단이다. 이 ‘좀비 곰팡이’는 숙주의 행동을 자신에게 확실히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곤충의 몸을 가로챔으로써 그 곰팡이는 자신의 포자를 퍼뜨리고 한살이의 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숙주 곤충의 행동을 대단히 정밀하게 제어한다. 오피오코르디셉스는 자실체를 생성하기 좋은 온도와 습도를 갖춘 곳에서 개미가 식물을 물고 버티게 만든다. 대개 숲의 바닥으로부터 25센티미터 정도 높이다. 이 곰팡이는 개미가 태양의 방향에 맞추어 행동하게 만드는데, 이 곰팡이에 감염된 개미는 정오에 맞춰서 식물을 문다. 나뭇잎 아랫면은 물지 않고, 감염된 개미의 98퍼센트가 주요 잎맥을 문다. 112-3)


2018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연구진은 엔토모프토라Entomophthora의 놀라운 기술을 상세히 밝힌 논문을 발표했다. 엔토모프토라는 파리에 기생하며 파리의 정신을 조종하는 곰팡이다. 연구진은 엔토모프토라 곰팡이가 다른 곰팡이를 감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곤충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논문의 제1저자는 이 발견을 과학계에서 ‘가장 기이한 발견 중의 하나’라고 보고했다. 이 발견이 ‘기이하다’는 의미는, 이 곰팡이가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동물의 마음을 조종한다는 데 있다. 아직 가설 단계지만 상당히 개연성이 있는 논리다. 엔토모프토라가 기생하고 있는 말벌에 의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무당벌레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말벌의 알을 지키는 경비병 신세가 된다. 마음을 조종하는 바이러스를 이용함으로써, 이 곰팡이는 자신이 깃들고 있는 곤충 숙주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을 굳이 스스로 진화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18)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정신의학자 매슈 존슨Matthew Johnson의 말을 빌리자면, 실로시빈 같은 환각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약에 취하게 함으로써 불만족스러운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든다. 말 그대로 시스템 리부팅이다. (…) 환각제는 우리가 현실을 체계화하는 데 이용하던 정신적인 모델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정신적인 유연성의 창을 열어준다.” 약물중독처럼 굳어버린 습관 또는 우울증으로부터 생긴 ‘질긴 비관주의’도 부드러워진다. 인간의 경험을 체계화하는 범주를 유연하게 함으로써, 실로시빈 같은 환각제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강건한 심리 모델 중 하나가 자아감이다. 실로시빈을 비롯한 환각 성분이 바로 이 자아감을 교란한다. 인간이 그토록 의존해왔던, 잘 방어된 ‘자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으며 오락가락 흔들리거나 타자 속으로 차츰 녹아들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더 큰 어떤 것과의 합일, 그리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감이다. 124)


뿌리가 생기기 전: 식물보다 앞서 길을 낸 개척자


최초의 식물은 뿌리도 없고 특별한 구조도 갖추지 못한 초록색 조직 덩어리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초록색 덩어리가 응축되어 기관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조직이 곰팡이 동지를 수용했으며, 곰팡이는 흙 속에서 영양분과 물을 끌어다 주었다. 진화의 결과 첫 뿌리가 나타났을 즈음, 균근은 조류와 곰팡이가 지상으로 올라온 후에 생겨난 모든 생명의 뿌리를 이루었다. 균근mycorrhiza이라는 이름이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균mykes에 이어 뿌리rhiza가 생겨났다.” 그로부터 수억 년이 흐른 오늘날, 식물은 더 가늘어지고 더 빨리 성장하며 식물이라기보다 곰팡이처럼 행동하는 기회주의적인 뿌리를 갖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그렇게 진화한 뿌리도 땅속을 탐색하는 데에는 곰팡이를 넘어설 수 없다. 균근 균사mycorrhizal hyphae는 가장 가느다란 뿌리보다도 50배나 가늘고 그 길이도 식물 뿌리의 100배까지 더 길어질 수 있다. 균사는 뿌리보다 먼저 생겼고, 뿌리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138-9)


식물과 곰팡이 모두가 이 관계에서 이득을 얻어가지만, 어떤 종류의 식물과 곰팡이냐에 따라 공생의 방식이 달라진다. 키어스의 연구팀은 한 종류의 균근 곰팡이를 인이 불평등하게 공급되는 상황에 노출시켜 보았다. 그러자 인이 부족한 균사 네트워크에서는 식물이 더 비싼 ‘값’을 치렀다. 다시 말해 식물이 받는 인 한 단위당 더 많은 단위의 탄소를 공급했던 것이다. 인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쪽에서는 곰팡이가 더 낮은 ‘교환 비율’로 탄소를 받아갔다. 가장 놀라운 것은 곰팡이가 네트워크 전체에서 거래 행동을 조율하는 방식이었다. 키어스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전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곰팡이는 힘차게 움직이는 미세소관 ‘모터’를 이용해서, 인이 풍부해 싼 값으로 식물과 거래해야 하는 영역으로부터 인이 귀해 수요가 높고 비싼 값으로 거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을 힘차게 운반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곰팡이는 인을 더 유리한 교환 비율로 더 많이 거래할 수 있었고, 그 보상으로 더 많은 탄소를 얻을 수 있었다. 146-7)


식물의 잎이나 새싹에서 사는 곰팡이 ― 식물공생균이라고 알려진 ― 도 식물이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능력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염분이 있는 해변의 흙에서 풀을 뽑아 원래의 식물공생균 없이 기르다가 다시 염분이 있는 땅에 옮겨 심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지열이 뜨거운 토양에서 서식하는 풀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이 이 두 가지 풀의 식물공생균을 바꿔치기해서 해변에 서식하는 풀은 지열이 뜨거운 토양에서, 지열 뜨거운 토양에서 자라던 풀은 해변에서 길렀다. 그러자 각각 서식지에서 생존하는 습성이 바뀌었다. 원래 해변에서 자라던 풀은 염분이 들어 있는 토양에서는 더 이상 살지 못한 대신 지열이 뜨거운 토양에서는 잘 자랐다. 원래 뜨거운 토양에서 자라던 풀은 더 이상 뜨거운 지열을 버티지 못하는 대신 해변의 염분 섞인 토양에서 잘 자랐다. 어떤 식물이 어디서 잘 자랄지는 곰팡이가 정한다. 곰팡이는 식물 집단을 서로 격리시킴으로써 새로운 종의 진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 150)


균근 곰팡이는 식물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어떤 이들은 균근 곰팡이를 ‘생태계 엔지니어’라고 부른다. 균근 균사체Mycorrhizal mycelium는 흙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 뭉쳐 있도록 붙들어주는, 살아 있는 접착제다. 만약 흙에서 곰팡이를 제거한다면 흙은 바스스 부서져서 흩어져버린다. 균근 곰팡이는 토양이 흡수할 수 있는 물의 양을 증가시키고, 빗물에 씻겨 흘러가버리는 영양분의 양을 50퍼센트까지 감소시킨다. 토양에서 발견되는 탄소 ― 놀랍게도 식물과 대기 중에서 발견되는 탄소를 모두 합친 양의 두 배에 가깝다 ― 중에서 상당한 비율이 균근 곰팡이에 의해 생산되는 단단한 유기화합물 속에 갇혀 있다. 균근의 통로를 통해 토양 안에서 흐르는 탄소는 복잡하고 섬세한 먹이그물을 지탱한다. 건강한 흙 한 찻숟가락 속에는 수십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균사 외에도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살았던 사람의 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박테리아, 원생생물, 곤충, 절지동물이 있다. 153)


우드와이드웹: 땅속에서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식물


‘정상적인’ 녹색식물은 곰팡이에게 에너지가 풍부한 탄소화합물을 당이나 지질의 형태로 내주고 그 대신 곰팡이를 통해 토양 속의 무기영양소를 얻어간다. 수정란풀은 균근 곰팡이로부터 탄소와 무기영양소를 모두 받아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수정란풀이 가져가는 탄소는 어디서 난 것일까? 균근 곰팡이는 모든 탄소를 녹색식물로부터 얻어간다. 즉 수정란풀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탄소는 결국 균근 네트워크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식물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수정란풀은 식물학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80년대 이후 수정란풀은 비정상적인 식물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식물은 여러 종의 균근 파트너와 문란하게 관계를 맺는다. 균근 곰팡이 역시 여러 식물과 관계를 맺는다. 각각 별개의 곰팡이 네트워크가 서로 합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광대하고 복잡하며 협력적인 균근 네트워크의 공유 시스템이 탄생하는 것이다. 158-9)


캐나다의 숲에서 자작나무와 더글러스 전나무를 연구한 또 다른 사례에서, 식물의 성장이 멈추는 겨울을 제외하고 봄부터 가을 사이에 탄소 이동의 방향이 두 번이나 바뀌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상록수인 전나무는 광합성을 하고 잎이 없는 자작나무는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봄이면 자작나무는 흡수원이 되어 탄소가 전나무에서 자작나무로 흘렀다. 자작나무 잎이 무성해지고 전나무는 그늘에 가려지는 여름이면 탄소가 자작나무에서 전나무로 흘렀다. 자작나무 잎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탄소는 다시 전나무에서 자작나무로 흘렀다. 양분은 풍족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흘렀다. 수수께끼 같은 행동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식물이 양분을 곰팡이에게 주어서 이웃 식물, 즉 잠재적인 경쟁자에게 흘러가도록 두는가? 처음에는 이타주의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진화론은 이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타주의적 행동은 공여자의 희생을 담보로 수혜자가 이득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165)


이 수수께끼를 푸는 가장 빠른 방법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유 균근 네트워크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식물이었다. 곰팡이는 식물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만 이야기에 등장했고, 식물과 식물 사이를 이어주는 파이프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식물과 식물 사이에서 물질을 옮겨주는 배관 시스템 정도의 역할로만 설명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식물중심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곰팡이는 수동적인 케이블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균사 네트워크는 복잡한 공간 감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자기 주변으로 물질을 운반하는 능력을 아주 섬세하게 발달시켜왔다. 물질이 곰팡이 네트워크를 통해 위에서 아래로, 영양원에서 흡수원으로 흐르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그 운반이 수동적인 확산의 형태로만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기 네트워크 안에서의 흐름을 제어하는 능력이 없다면, 버섯의 생장이라는 섬세한 군무를 포함해 곰팡이의 한살이 대부분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166-7)


우드와이드웹이 단 한 가지 종류로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곰팡이는 식물과 연결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서로 얽히고설킨 그물망을 만들어낸다. 공유 균근 네트워크는 식물이 함께 얽힌 곰팡이 네트워크라는 특별한 케이스일 뿐이다. 생태계는 유기체들을 꿰매주는 비균근 균사체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린 보디가 연구한 부패균은, 수 킬로미터를 뻗어가며 놀라운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뽕나무버섯이 그러하듯이, 생태계 전반의 매우 넓은 영역에서 썩어가는 나뭇잎과 떨어진 나뭇가지를 연결하고 썩어가는 나무 밑동과 썩어가는 뿌리를 연결한다. 이 균은 다른 종류의 우드와이드웹을 만든다. 이 웹은 나무를 살리는 웹이 아니라 죽은 나무를 먹어치우는 웹이다. 우드와이드웹의 모든 링크는 제 나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곰팡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드와이드웹을 식물이 영양분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경직된 위계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보살핌과 나눔 그리고 상호 협조의 공간으로 보는 시각을 뒷받침한다. 167-8)


풀뿌리 균학: 세상을 구하는 곰팡이


목질 식물이든 아니든 모든 식물 세포에 들어있는 특징적인 물질인 섬유소, 즉 셀룰로스cellulose는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풍부한 중합체이다. 또 하나의 물질인 목질소, 즉 리그닌lignin은 두 번째로 풍부하다. 리그닌은 나무를 나무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물질이다. 리그닌은 셀룰로스보다 질기고 구조가 복잡하다. 셀룰로스는 질서정연하게 연결된 포도당 분자의 사슬로 이루어진 반면, 리그닌은 분자 고리가 아무렇게나 뭉쳐 있는 형태다. 오늘날까지도 리그닌을 제대로 분해할 수 있는 유기체는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리그닌 분해에 가장 성공한 유기체는 백색부후균white rot fungi이다. 리그닌의 화학적 구조는 너무나 불규칙하다. 백색부휴균은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비정형성효소를 써서 이 난제를 극복했다. 이 ‘과산화효소’는 ‘자유 라디칼free radical’이라는 고반응성 분자를 폭포수처럼 방출해서 리그닌의 단단한 구조를 깨뜨리고 ‘효소 연소enzymatic combustion’ 과정을 진행시킨다. 182)


버섯을 키워내는 대부분의 곰팡이는 인간이 만든 폐기물에서 잘 자란다. 쓰레기에서 환금성 작물을 기르는 것은 현대판 연금술과 같다. 곰팡이는 마이너스 자산으로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낸다.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에게도 이익, 곰팡이를 기르는 사람에게도 이익, 곰팡이 자체에도 이익이다. 인간이 만든 쓰레기가 곰팡이의 관점에서는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지도 않다. 곰팡이는 생물종 전체의 75퍼센트에서 많게는 95퍼센트까지 사라진 대멸종을 다섯 번이나 견디고 살아남았다. 어떤 곰팡이는 그런 재앙의 시기에 오히려 더 무성했다. 공룡이 멸종되고 숲이 대량으로 파괴되었던 백악기 제3기 대멸종 이후, 분해해야 할 죽은 나무가 풍부한 환경 속에서 곰팡이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방사능 입자가 방출한 에너지를 제거하는 방사능 제거 곰팡이Radiotrophic fungi는 체르노빌의 폐허에 무성할 뿐만 아니라 곰팡이의 긴 역사와 인간의 짧은 핵기술의 역사에 최근에 진입한 새로운 참여자이기도 하다. 185-6)


곰팡이는 불필요한 효소는 생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곰팡이종이 무엇을 대사 작용으로 분해할 수 있는지 예측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맥코이는 제초제 글리포세이트를 몇 방울 떨어뜨린 배양접시에서 여러 계통의 느타리버섯 균사체를 길러보았다. 그중 일부 균사체는 제초제를 피해서 뻗어갔지만, 일부는 제초제를 그대로 통과했다. 또 다른 일부는 제초제 가장자리까지 자라다가 더 이상의 생장을 멈추었다. “그렇게 생장을 멈추었던 균사체는 일주일쯤 지나자 그 제초제를 분해하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맥코이의 회상이다. 그는 곰팡이를 화학결합을 풀 수 있는 효소 열쇠꾸러미를 가진 교도소 간수에 비유했다. 곧바로 쓸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곰팡이도 있다. 그렇지 않은 곰팡이는 그 열쇠가 자신의 게놈 안 어딘가에 있기는 하지만, 일단 새로운 물질을 피해보려고 한다. 또 다른 곰팡이는 열쇠꾸러미를 뒤져 이 열쇠 저 열쇠를 꽂아보면서 맞는 열쇠를 찾느라 일주일을 보낸다. 186-7)


곰팡이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염된 생태계의 복원을 돕는 것이다. 그 과정을 균류정화mycoremediation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곰팡이는 환경을 복원하는 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유기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균류정화는 쉽게 접목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어떤 곰팡이종이 배양접시 안에서 보여주는 행동이 오염된 생태계의 격렬한 환경에서도 그대로 재연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소나 추가적인 영양원처럼 곰팡이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고, 우리는 그런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분해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고, 곰팡이와 박테리아가 연달아가며 배턴을 이어받아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곰팡이가 할 일을 하고 떠난 자리를 박테리아가 이어받아 과정을 마무리하거나 그 반대의 순서로 진행되기도 한다. 실험실에서 훈련된 곰팡이종이 새로운 환경에서도 능숙하게 문제를 처리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순진한 발상이다. 188-9)


곰팡이를 이해한다면: 술을 빚는 효모의 신비


인간과 가장 친밀한 역사를 가진 곰팡이는 효모다. 효모는 우리 피부에서도, 우리 폐에서도, 그리고 우리 식도와 우리 몸의 모든 구멍에서도 산다. 우리 몸은 이 효모 집단을 통제하도록 진화해왔으며 긴긴 진화의 역사를 통틀어 항상 그렇게 그들을 통제해왔다. 인류의 문화 역시 수천 년 동안 우리 몸 밖에서, 술통과 항아리 안에 효모를 가두고 통제하는 복잡한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오늘날 효모는 세포생물학과 유전학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본 유기체 중 하나다. 빵이든 술이든, 효모는 초기 농경 사회의 주요한 수혜자였다. 빵이나 술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전에 효모의 배를 먼저 채워주어야 했다. 생활 영역이 농경지에서 도시로 발전하고 부를 축적하며, 곡물상이 등장하고 또 새로운 질병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농경과 연관된 문화의 발달은 효모와 인간이 공유한 문화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효모를 길들인 것이 아니라, 효모가 우리를 길들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205-6)


19세기 후반 진화론의 등장 이후 미국과 서유럽을 지배하던 서사는 갈등과 경쟁의 서사였으며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된 배경에는 산업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인류의 사회적 발전관이 투영되어 있었다. 샙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기체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도록 협력하는 사례는 “예의 바른 생물학적 사회의 가장 후미진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지의류 또는 균근 곰팡이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돕는 관계는 우리에게 알려진 규칙의 의문스러운 예외였고,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마지못해 인정했을 뿐이었다. 진화에서 상호협력과 협조의 아이디어는 서유럽의 진화론자들보다 러시아에서 더 두드러졌다. ‘피 묻은 이빨과 발톱’으로 상징되는, 치열하고 인정사정없는 경쟁이 지배하는 자연의 모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1902년에 쓴 책 《만물은 서로 돕는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 못지않게 ‘사교성’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강조한다. 211)


오늘날 모든 곰팡이를 ‘질병의 원인’ 또는 ‘기생물’의 범주로 한꺼번에 묶는 것은 부조리하다. 알베르트 프랑크가 ‘공생’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기 전까지는 서로 다른 유형의 유기체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설명할 방법조차 없었다. 최근 들어 공생 관계를 둘러싼 서사가 더욱 미묘해졌다. 지의류가 둘 이상의 참여자로 구성된 유기체임을 처음으로 발견한 토비 스프리빌은 지의류를 시스템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식물과 균근 곰팡이는 더 이상 상호협력적으로 또는 기생의 형태로 행동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단 한 종의 균근 곰팡이와 단 한 그루의 나무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상호 거래give and take’는 유동적이다. 연구자들은 획일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상리공생과 기생이라는 양극단 사이의 연속체로 설명한다. 공유 균근 네트워크는 협력과 동시에 경쟁도 촉진할 수 있다.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서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거나 적어도 감내해야 한다. 213)


공생적 상호관계는 종의 경계를 초월한다. 나는 곰팡이를 연구할 때보다 더 곰팡이처럼 행동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호의와 데이터를 서로 주고받는 학계의 상리공생의 세계에 빠른 속도로 녹아들어 갔다. 스웨덴과 독일에서 나와 협업했던 과학자들은 나를 통해서 더 많은 양의 흙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직접 열대지역으로 가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의 손과 발 역할을 했다. 반대로, 곰팡이가 그러하듯이 나 역시 혼자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자금과 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다. 파나마에서 나와 협업한 과학자들은 잉글랜드에 있는 내 동료들의 기술적 지원과 연구기금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내 동료들은 파나마의 내 협업 과학자들을 통해 똑같은 혜택을 누렸다.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네트워크를 연구하기 위해, 나 역시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그건 일종의 순환구조였다. 내가 네트워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네트워크도 나를 들여다본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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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삼위일체론 - 살림지식총서 384 살림지식총서 384
유해무 지음 / 살림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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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기독교의 정체성인 삼위일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행복관을 제시한다. 첫째, 바깥에 있는 물질적 대상을 조작한 결과와 업적으로 얻는 행복이 있다. 두 번째로, 도시 공동체 안에서 지혜로써 정의, 용기, 절제 등의 미덕을 추구하여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삶, 곧 ‘실천적 삶’이 주는 행복이다. 세 번째로, 철학자는 외적 대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 않고, 도시 공동체를 통한 일시적 쾌락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정신적 대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관조적 삶’의 양식을 찾아 은거함으로 신적 자족에서 행복을 실현한다. 이 책에서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또는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의 양 구도를 기독교적으로 원용하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조하는 삶이 믿음이며 동시에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원초적인 삶인데, 그리스적 배경에서와는 달리, 이 삶은 세상에서 물질적 대상을 잘 다루고 공동체에서 미덕을 추구하여 인정받음으로써 기독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3-4)


관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외적 대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다. 이런 관조는 예전(禮典)적 예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원용하여 사용하려는 관조는 ‘관상’과는 다르다. 관상은 물질이나 육체 등 외적인 모든 것을 경시하는 이원론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실천적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관조하는 예배로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는 동시에 실천의 장이 된다. 즉,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제하는 예배자는 이차적으로 예배 중에 다른 예배자와 교제한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일차적인 ‘실천적 삶’의 현장으로 거듭난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대리하는 실천의 현장은 세상이다. 관조적 삶은 관조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성도는 관조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상이라는 실천의 현장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믿음은 세상에서 행하는 실천이며, 실천의 현장은 동시에 지속적인 관조의 현장이다. 4)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기초: 성경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고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요 5:18). 성부는 성자를 고난과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것은 곧 자기 아버지를 증거하는 일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요 17:4).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영화롭게 한다(요 17:24). 그런데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자를 성육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다(눅 1:35). 이처럼 성령은 성자를 세상에 임하게 하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능력의 영이시면서도, 부활한 예수께서 보내시는 영이시기도 하다. 이처럼 예수 사건이 중심에 있다. 성부께서는 아드님을 나사렛 예수로 보내셨고, 아드님은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성도에게 부어 주셨고(행 2:33), 성령은 아드님을 증거한다(행 5:32). 6-7)


구약은 그리스도의 전(前)역사이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계시의 목표점이고 성취이다. 따라서 계시의 시작조차도 완성된 계시의 관점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은 (구약의) 기존 의미가 아니라 성취 사실에서 시작하며, 그런 다음에 필요한 내용을 구약에서 찾는다. 구약은 신약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취의 빛 아래서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진술에서 예언을 찾아낸다. 구약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다.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원시 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으로 지칭되었다.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에 대한 약속(창 12:1~3), 다윗에게 주신 왕위에 관한 약속(삼하 7:11~16, 23:1~7), 여러 시편들(2편, 16편, 110편 등)과 여러 예언서의 약속들(사 7:14, 9:6, 11:1~10, 52:13~53:12 등)은 모두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구약을 읽어야 구약을 구약 그대로 읽을 수 있다. 9)


삼위일체론의 내적 현장: 예배


세례는 신비적 연합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일이며 그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는 일이다. 이전의 삶을 등지고 이제부터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서약이다. 이 연합과 더불어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다. 세례의식에는 이른바 종교적 요소뿐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컸다. 곧,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이웃을 향한 봉사의 임무도 동반한다. 이제부터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신 성전(고전 3:16)이다. 세례는 완전한 교인됨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식이다. 세례 받기 전에 학습자는 오직 설교 말씀만 들을 수 있었다. 학습자는 세례교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성찬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당을 떠나야 했다. 고대 교회에서 예배는 두 부분, 즉 말씀과 성찬으로 구성되었고,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비록 세례는 예배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는 완전한 예배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연계적으로 중요시되었다. 14-5)


성찬에서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교제와 그분의 과거 사역에 대한 기억과 재림의 미래에 대한 대망이 중심을 이룬다.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은 떡과 포도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이 교제가 기초가 되어 함께 참여한 교인들과도 교제한다.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한다. 나아가 그분의 부활을 고백하고 우리의 부활을 소망한다. 성찬에는 예수께서 행한 모든 사역, 곧 성육신과 3년의 지상 사역, 고난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일이 포함된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 가운데 현재 임재하신 그분을 만나 교제하고, 나아가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 곧 종말론적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과 함께 성자 예수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를 둔 성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현장이다. 16)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발전: 교회사


삼위일체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로,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가 있다. 니케아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했는데,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 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그리스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내용과 표현 용어에서 복음의 그리스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그리스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의 교제 중에 고백했다. 21)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주(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일체성)과 예수와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종속설이 당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폈다(마르키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가 정착되자 그리스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그리스 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1-2)


하나님과 함께 선재(先在)하던 로고스는 세계 ‘이성’이나 우주 원리이며, 작은 씨앗으로서 만인에게 임재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전능한 본질에는 속성인 ‘이성적 능력’이 세상 창조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나와 독자적 존재가 된다. 두 입장 다 로고스는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보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양태설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구속역사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등장하나 한 본질의 세 외현(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원성을 강조하는 단원론의 반격을 촉발했다. 단원론(군주론 또는 주권론은 합당한 번역어가 아님)은 성부의 단원성, 곧 성부를 신성의 단일한 원인으로 고수하기 위하여 성자의 신성을 성부의 신성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성부의 외현(外現) 방식이라고 보았다. 22)


라틴어를 사용한 서방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일체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substantia)’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원역사를 위하여 일체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일체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에겐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그는 ‘위격(hypostasis)’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리고 ‘본질동등(homoousios)’으로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일체성을 표현했다. 즉,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본 것이다. 22-3)


아리우스(256~336년경)는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성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일체성과 성자의 종속성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게다가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다만 완전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에 불과하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된 것일 뿐이다. 23)


3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일체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비공유적 속성)을 각각 사용했다. 안카라의 감독 대(大)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했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태어나심을 각각 성부와 성자의 고유성으로 보았고,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으며,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두 사람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90)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본질동등성’을 ‘본질유사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25)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세 명의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유개념(類槪念)으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하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비교는 일체성보다는 구별을 부각시킨다. 이를 빌미로 삼아 아리우스파들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란 삼신(三神)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성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으며 본질은 곧 속성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26)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를 직접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원형인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식은 경험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 신 인식을 신 체험에서 출발시켜서 그 원인자를 찾아 나선다. 최초의 원인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신 인식과 신 언설은 유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유비론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원인성과 완전성의 관점에서 표현한다. 세계의 피조성에서 나오는 인식은 하나님이 제1 원인자임과 그분의 본질의 일체성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육신이나 삼위일체론은 본성적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창조는 자연적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산물이다. 즉,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성육한 성자와 성령의 선물로 완성되는 구원을 올바르게 사유할 수 있다. 29)


종교개혁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데서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을 말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을 학당이 아니라 교회의 소관사로 삼았다. 루터(1483~1546)는 삼위일체론에서 정착된 용어들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삼위일체론’도 용어로서는 만족하지 않았다. ‘관계’는 신성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했고, ‘본질동등성’도 원래 성경 바깥에서 온 용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어들, 이를테면 삼위일체론이라는 용어도 이단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칼뱅(1509~1564)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성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성부가 아니며, 성령도 성자가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별된다는 사실만을 공유한다면, 모든 용어들은 사라져도 좋다고 말한다. 30)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 교회와 세상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배로 이루어지며, 예배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를 이룩한다. 이 하나님은 내적으로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서 서로 관계하고 교제하시며, 외적으로는 예배자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교제로 예배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며 참여한다. 예배자는 이 원초적 교제에 기초하여 형제자매로 결합하고 서로서로 교제한다. 예배자가 나누는 인간적인 교제는 이 신적인 교제 위에서야 가능하다. 구원의 경륜과 배포(配布)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했다. 구원을 삼위 하나님의 협의와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구원이 오로지 구원론적으로만 제한되고 급기야는 인간론적인 개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참여함에 있다(벧후 1:4).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도의 교제도 포함한다. 35-6)


나오며: 예배와 삶의 세계의 통합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삶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론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예배에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뵐 수 있고, 그분과 누리는 교제에서 그분을 받는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배자의 위격을 주고받는 교제이다. 예배자는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예배자는 예배에서 받을 뿐이다. 물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 그렇지만 예배자가 자신을 드리는 곳은 교회와 세상이다. 예배자는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받아 교회와 세상에서 그분들을 드러내고 높이고 영광을 돌린다. 예배가 이론(관조)에 해당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실천에 해당한다. 예배가 튼튼하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교회가 예배가 아닌 일에 열중하거나, 무신론,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종교형태와 구별될 수 없다면,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딤후 3:5)과 다를 바가 없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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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
해리 클리프 지음, 박병철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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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기본 조리법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학자들은 목탄 같은 가연성 물체에 불을 붙이면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물질이 방출되면서 타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즉, 목탄에는 다량의 플로지스톤이 함유되어 있어서 한번 불을 붙이면 오랫동안 탈 수 있으며, 플로지스톤이 완전히 고갈되거나 주변의 공기가 플로지스톤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연소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물체가 탈 때 플로지스톤이 방출된다면 연소가 끝난 후에는 무게가 가벼워져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금속이 불에 타면 타기 전보다 무거워진다. 라부아지에는 정반대의 설명을 제시했다. 연소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 방출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기가 물체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에 탄 물체가 무거워지는 것은 연소 과정 중에 공기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것이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아니라 ‘연료와 결합하여 연소를 일으키는 기체’임을 깨닫고, 이것을 “산소oxygen”로 명명했다. 21-3)


2장 · 가장 작은 조각


돌턴은 이슬비가 내리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가 많은 지역: 옮긴이)로 종종 산책하러 나갔는데, 습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이런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이 축축한 공기 속에 습기가 더 흡수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그렇다. 돌턴을 원자론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돌턴의 실험은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용기 안에 욱여넣은 공기의 양에 상관없이, 흡수되는 수증기의 양이 항상 일정했던 것이다. 마치 공기와 수증기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즉,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개의 공기 원자나 두 개의 수증기 원자는 서로 상호작용을 교환하지만, 공기 원자와 수증기 원자는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가 물에 녹는 정도를 좌우하는 요인이 “원자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즉, 무거운 원자가 가벼운 원자보다 물에 잘 녹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을 증명하려면 원자들 사이의 상대적인 무게를 알아야 한다. 29-30)


19세기 초에는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두 종류의 기체가 알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탄화산소carbonic oxide(무색의 독성기체)이고 다른 하나는 탄산carbonic acid(조지프 블랙이 발견한 ‘고정공기.’ 실험실에서 수많은 쥐들이 과학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이 기체를 마시고 질식했음)이었다. 돌턴은 고정된 양의 탄소와 결합하여 위의 두 기체를 만드는 산소의 양을 측정함으로써, 탄산에 함유된 산소가 탄화산소에 함유된 산소보다 두 배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의 원자 이론을 적용하면 탄화산소는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가장 단순한 화합물이며(현대식 용어로는 일산화탄소이다), 탄산은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화합물이다(현대식 용어로는 이산화탄소이다). 이로써 돌턴은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얻은 탄소와 산소의 질량 비율은 약 1.30:1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알려진 1.33:1과 거의 비슷하다. 31)


3장 · 원자의 구성성분


당시 과학계는 음극선의 정체를 놓고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쪽 진영은 음극선이 라디오파나 빛, 또는 X-선 같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진영은 이온ion처럼 음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실험데이터에 기초하여 일련의 계산을 수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음극선의 질량을 전하로 나눈 값이 수소이온을 전하로 나눈 값보다 약 1,000배쯤 작게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음극선의 전하량이 수소이온의 전하량보다 훨씬 크거나 (2) 음극선의 질량이 수소이온의 질량보다 훨씬(아마도 수천 배 이상) 작다는 뜻이다. 1897년 10월 톰슨은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양전하의 바닷속에 동심원을 따라 미립자가 배열되어 있는” 원자모형atomic model을 최초로 제시했다. “음극선의 구성 입자이자, 음전하를 띠고 있으면서 모든 원자에 들어 있는 엄청나게 가벼운 입자”는 오늘날 ‘전자electron’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44-6)


지난 10년 동안 방사선에 대하여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일부 원자는 왜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원자로 변신하는가? 그리고 방사선에 담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더퍼드의 계산에 의하면 방사성 붕괴가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가장 격렬한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보다 무려 수백만 배나 강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원자의 내부 어딘가에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핵의 발견을 훨씬 뛰어넘어 아원자세계의 그림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원자핵은 원자보다 수만 배 작으면서 원자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가벼운 전자구름이 선회하고 있다. 원자를 축구장 크기만큼 확대하면 원자핵은 센터서클 중앙에 놓인 작은 구슬쯤 되고, 전자는 관중석 어딘가에서 열심히 돌고 있을 것이다. 48, 51)


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태생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맥스웰의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가속운동을 하는 하전입자(전하를 띤 입자)는 전자기파(빛)를 방출한다. 원운동(궤도운동)도 엄연한 가속운동이므로,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는 전자기파를 방출하면서 에너지를 잃을 것이고, 에너지가 작아지면 궤도반지름도 작아진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 전자는 나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원자핵에 가까워지다가 결국은 원자핵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의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문제는 닐스 보어Niels Bohr가 “양자quantum”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보어는 전자가 특정한 궤도만 돌 수 있으며,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할 때마다 광양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원자모형에 의하면 전자는 원형 철로를 달리는 기차처럼 자신에게 할당된 궤도만 돌 수 있기 때문에, 원자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51-2)


4장 · 원자핵 분해하기


당구 게임에서는 한 공이 다른 공을 때리면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폴로늄에서 자연적으로 방출된 알파입자가 베릴륨의 핵을 때리면 투과력이 높은 방사선이 방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렌과 프레데리크가 관측했던 감마선이다. 이 감마선이 다량의 수소 원자를 포함한 파라핀 왁스를 때리면 수소 원자의 핵, 즉 양성자가 빠른 속도로 방출된다. 놀라운 것은 파라핀 속의 양성자(수소 원자핵)가 감마선과 충돌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갖고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양성자가 이렌 퀴리의 실험에서 측정된 값만큼 빠르게 가속되려면 양성자를 때린 감마선은 약 5,000만 eV(또는 50MeV)의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폴로늄에서 방출된 감마선의 에너지는 아무리 커도 5.3MeV를 넘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이 흡수한 에너지보다 10배나 큰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베릴륨 원자핵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63)


채드윅은 베릴륨에서 방출된 방사선을 중성자로 간주하면 에너지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감마선은 질량이 없기 때문에, 파라핀 왁스에서 무거운 양성자가 튀어나오도록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은 탁구공을 던져서 볼링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중성자는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양성자를 중성자로 때리는 것은 볼링공을 또 다른 볼링공으로 때리는 것과 비슷하다. 양성자를 방출시키는 데 필요한 감마선의 에너지는 50MeV나 되지만, 중성자라면 4.5MeV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값은 베릴륨 핵에 흡수된 알파입자의 에너지 5.3MeV보다 작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집합이었다. 원자핵 안에서 베타붕괴beta decay로 알려진 붕괴 현상이 일어나면 중성자가 양전하를 띤 양성자로 변하면서 음전하를 띤 전자를 외부로 방출한다. 이로써 중성자는 양성자, 전자와 함께 원자핵을 이루는 구성성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64-5)


5장 · 열핵 오븐


수소 원자핵(양성자)에 알파입자를 발사하면 대부분이 튕겨 나오지만, 알파입자와 수소 원자핵 사이의 거리가 1천×1조분의 1m 이내로 가까워지면 갑자기 두 입자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강력)이라는 새로운 힘이 발견된 첫 번째 사례였다. “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이 힘이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전기력을 이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원자핵을 에워싸고 있는 “밀어내는 전기장”은 성을 에워싼 가파른 성벽과 비슷하다. 양성자가 이런 성에 침투하려면 성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점프해야 한다. 일단 벽을 넘기만 하면 강력이 작용하여 외부에서 침투한 양성자를 원자핵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일은 양성자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으며, 속도가 그 정도로 빨라지려면 온도가 수천만 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자연적으로 초고온 상태를 유지하는 곳이 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 69-70)


가모프는 우라늄핵에서 방출되는 알파입자에 파동역학을 적용하면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아도 원자핵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모프는 알파입자가 핵을 탈출하기 전에 성벽 안에서 이리저리 튕기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전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작은 공처럼 생긴 알파입자는 누군가가 별도의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절대로 성벽을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알파입자를 파동으로 간주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물통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새어 나오듯이, 알파입자의 파동이 성벽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알파입자는 성벽 밖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물론 확률이 아주 작지만 분명히 0은 아니다. 그러므로 파동함수가 붕괴되었을 때, 알파입자는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은 것처럼 우라늄 원자핵의 바깥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이것을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라 한다: 옮긴이). 가모프의 양자핵이론은 알파입자가 우라늄핵에서 탈출하는 비결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했다. 74-5)


후테르만스와 엣킨슨 두 사람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입자가 장벽을 통과하여 원자핵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면, 밖에 있던 입자가 원자핵 안으로 침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모프의 이론을 태양 중심부와 비슷한 온도에 적용해 보니, 정말로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 중심부에서 양성자가 양자터널을 통해 ‘전기적 척력’이라는 벽을 뚫고 원자핵 안으로 진입한다면, 낮은 온도에서도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에딩턴의 계산에 따르면 태양에 있는 양성자는 성벽 꼭대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핵 주변을 에워싼 장벽은 높을수록 얇아지기 때문에, 태양 중심부의 양성자들이 장벽의 얇은 부분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면, 굳이 장벽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아도 양자터널효과에 의해 원자핵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다. 마침내 태양의 핵융합 반응은 에딩턴이 계산했던 중심부의 온도(약 4,000만 ℃)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 75-6)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에딩턴은 태양 중심부의 온도를 4,000만 ℃로 추정했는데, 이 온도에서는 양성자-양성자 연쇄반응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에 태양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야 한다. 에딩턴이 계산한 4,000만 ℃는 태양의 성분이 지구와 거의 같다는 가정하에 얻은 값이었다. 그러나 1925년에 영국의 여성 천문학자 세실리아 페인Cecilia Payne은 태양과 별의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며, 무거운 원소는 소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의 73%가 수소이고 25%가 헬륨이라는 가정하에 에딩턴의 계산을 다시 해보면, 태양 중심부의 온도는 1,900만 ℃까지 떨어진다. 베테가 이 온도에서 양성자 -양성자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계산해 보니, 실제 관측된 태양에너지와 거의 비슷한 값이 얻어졌다. 이로써 태양이 열을 방출하는 이유가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태양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수소를 원료로 삼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헬륨을 만들어왔다. 79)


6장 · 별


초신성이 폭발하면 은하에 있는 모든 별(수천억 개)을 합한 것보다 훨씬 강렬한 에너지가 방출된다(초신성은 적색거성赤色巨星, red giant이나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처럼 특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별이 아니라, “마지막 진화단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폭발하는 별”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별은 폭발해야 비로소 별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星’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옮긴이). 별의 에너지원은 수소이므로, 세월이 흘러 중심부가 모두 헬륨으로 바뀌면 같은 방법으로는 더 이상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별이 이 단계에 이르면 팽창력의 근원인 열이 공급되지 않아서 자체 중력에 의해 안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엄청난 중력에너지에 의해 중심부가 대책 없이 뜨거워지다가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을 일으킨다 ― 이것이 바로 초신성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호일은 관련 계산을 수행한 끝에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는 별의 내부 온도는 원리적으로 40억 ℃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91-2)


별의 온도와 밀도가 적절하면 헬륨끼리 충돌하는 횟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탄소-12로 자랄 수 있는 베릴륨-8의 개수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즉, 베릴륨-8의 생성과 붕괴가 적정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면, (개개의 핵의 수명이 엄청나게 짧다 해도)매 순간 일정한 개수의 베릴륨-8 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별의 내부에서 탄소-12가 생성되기만 하면, 곧바로 다른 헬륨핵과 충돌하여 산소-16이 만들어진다. 이것 자체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지만(산소는 우주의 중요한 구성성분이다), 반응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생명체의 형성에 반드시 필요한 탄소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우주에는 호일 같은 탄소기반 생명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탄소가 모두 소모되는 것을 막아주는 다른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순간만을 학수고대해 왔던 호일은 기발하면서도 환상적인 답을 떠올렸다. “탄소-12가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려면 아주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92-3)


호일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 호일은 실험결과를 같다 ―“탄소-12 원자핵이 놓일 수 있는 들뜬상태 중에 베릴륨-8과 헬륨핵이 충돌할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에너지와 같은 에너지준위가 존재한다면 탄소-12의 생성 속도가 아주 빨라져서, 이들 중 상당수가 산소-16으로 바뀌어도 우주에는 충분히 많는 탄소-12가 남을 수 있다.” 분석하다가 자칫하면 우주에 생명체가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깨닫고 깊은 경외감에 빠졌다. 생명의 기반인 탄소-12 외에 산소-16에도 이와 비슷한 에너지준위(7.19MeV)가 존재한다면, 별의 내부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탄소-12는 순식간에 산소로 변했을 것이다.[ 5 ] 그런데 산소-16 핵의 특성을 분석해 보니, 천만다행으로 그 값은 7.19MeV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7.12MeV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릴륨-8이 두 개의 헬륨핵으로 분해되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면, 별이 헬륨을 너무 빠르게 소모하여 탄소를 비롯한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것이다. 93-5)


# 원자핵 속의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 주변을 선회하는 전자처럼 몇 개의 특정한 에너지를 갖는 상태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에너지준위energy level’라 한다. 


7장 · 궁극의 우주요리사


현재 우리의 우주는 물질(기체,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지배하고 있지만, 탄생 직후 몇 분 동안 우주를 지배한 것은 물질이 아닌 빛이었다. 이 시기의 우주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물질입자(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격동하는 광자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거품에 불과했다. 이 “태초의 빛”은 처음 몇 분 동안 광자 한 개가 원자핵을 산산이 분해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원자핵이 형성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하여 중수소핵이 되었다 해도, 순식간에 고에너지 광자에게 얻어맞아 분해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분 동안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고, 부피가 증가함에 따라 온도는 빠르게 식어갔다. 약 3분이 지난 후에는 우주 오븐의 온도가 수십억 도까지 내려가서 광자는 더 이상 중수소핵을 분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바로 이때부터 중수소의 양이 급증하면서 우주 조리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117-8)


빅뱅 후 처음 1초 동안 원시 불덩이 속 입자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었으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고에너지 입자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서로 상대방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는 사건과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는 사건이 거의 같은 빈도로 일어났다. 즉, 초창기의 우주는 평등한 세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주가 식어가면서 양성자와 중성자의 미세한 질량 차이 때문에(중성자 › 양성자)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양성자가 무거운 중성자로 변하려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양성자 → 중성자 변환은 중성자 → 양성자 변환보다 드물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우주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보다 많아졌다. 처음 1초가 지났을 무렵,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기에는 우주의 온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중성자의 수가 동결되었는데, 이때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은 약 6:1이었다. 이제 핵융합이 일어날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려면 몇 분 더 기다려야 한다. 118)


그러나 이 시간 동안 홀로 고립된 중성자는 안정한 입자가 아니어서 평균 15분 만에 양성자와 전자, 그리고 반뉴트리노로 붕괴된다. 그 결과 빅뱅 후 2분이 지났을 때 중성자의 일부가 스스로 양성자로 변환되어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1까지 벌어졌고, 바로 이런 상태에서 핵융합 용광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후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중성자는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진 헬륨-4로 융합되었다. 그렇다면 양성자는 얼마나 남았을까? 처음에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 1이었으므로, 만일 양성자 14개와 중성자 2개에서 출발했다면 헬륨 1개가 만들어지고 양성자 12개가 남을 것이다. 즉, 헬륨핵과 양성자의 비율은 1: 12이다. 그런데 헬륨은 양성자보다 4배 무거우므로, 질량 비율로 따지면 헬륨 : 양성자 = 4 : 12가 된다. 다시 말해서,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25%의 헬륨과 75%의 수소(융합에 참여하지 않은 양성자)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관측된 원소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18-9)


8장 · 양성자 조리법


1960년대에 자신의 이론에 ‘팔정도八正道, Eightfold Way(열반에 이르는 8가지 수행법)’라는 이름을 붙인 겔만은 몇 년 전부터 영감 어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생물을 과科와 종種 등으로 분류하는 생물학자처럼, 겔만은 이미 알려진 강입자를 스핀 = 0인 중간자와 스핀 = 1/2인 바리온으로 나누고, 더 깊은 곳에서 각 입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이 같으면서 전하가 다른 ‘쌍’처럼 보였고, 둘 다 스핀이 1/2이므로 바리온에 속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다음으로 전하가 +, 0, -인 파이온(π- 중간자)이 있고, 스핀 = 0이면서 두 가지 전하(+, -)로 존재하는 중간자 케이온이 있다. 겔만은 입자분류게임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목록의 깊은 저변에 심오한 대칭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겔만은 몇 년 전부터 “강입자가 더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내가 발견한 대칭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130, 132)


겔만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소설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를 읽다가 “머스터 마크에게 세 개의 쿼크를!Three quarks for Muster Mark!”이라는 문장에 눈길이 꽂혀, 그 감지되지 않은 입자를 '쿼크quark'라고 명명했다. 겔만은 쿼크가 ‘위up’와 ‘아래down’, 그리고 ‘야릇한strange’이라는 세 종류로 존재하면 강입자의 대칭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단, 위쿼크up quark의 전하는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의 전하는 –1/3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쿼크(그리고 이들의 반입자)를 잘 조합하면, 실험실에서 발견된 모든 강입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 파이온이나 케이온 같은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antiquark가 결합한 입자이고, 바리온은 세 개의 쿼크로 되어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성자와 중성자이다. 양성자는 2개의 위쿼크와 1개의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고(uud),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쿼크와 한 개의 위쿼크로 이루어져 있다(udd). 133)


1973년, CERN의 초대형 거품상자 가가멜Gargamelle이 드디어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 양성자 안에 있는 “점 같은 물체”에 튕겨서 빠르게 날아가는 뉴트리노가 포착된 것이다. 게다가 이 입자는 겔만과 츠바이크의 예측대로 분수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다. 쿼크를 직접 봤다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입자가속기를 동원해도 강입자 감옥에서 쿼크를 해방시키기 못했으며, 쿼크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곤 강입자와 부딪힌 후 튕겨 나온 입자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쿼크는 강입자 내부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강입자 안에서 쿼크를 결합시키는 힘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흔히 강력强力, strong force으로 알려진 이 힘은 항상 인력引力으로 작용하며, 지금까지 발견된 힘 중에서 가장 강하다.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단단히 묶어 놓는 강한 핵력은 그보다 훨씬 강한 강력의 메아리였다(사실 '강력'과 '강한 핵력'은 같은 뜻이다). 136)


# 지금까지 알려진 쿼크는 모두 6가지이다. 위쿼크up quark와 맵시쿼크charm quark, 그리고 꼭대기쿼크top quark의 전하는 (전자의 전하를 –1이라고 했을 때)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 바닥쿼크bottom quark의 전하는 –1/3이다.


1973년에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그로스David Gross와 프랭크 윌첵Frank Wilczek, 그리고 데이비드 폴리처David Politzer는 강력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입자가 아주 강한 에너지로 충돌하면, 강력의 바이스vise(죔쇠) 역할을 하는 부분이 느슨해진다는 사실을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알아낸 것이다. 이는 곧 에너지가 아주 크면 강력의 세기가 약해져서 강입자가 “자유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루어진 과열된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쿼크-글루온 플라즈마quark-gluon plasma’라 한다. 과열된 쿼크-글루온 플라즈마 속에서는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에서 쿼크와 글루온이 강입자의 경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쿼크-글루온 플라즈마가 존재할 정도로 극단적 환경이 조성되었던 시기는 “빅뱅 후 100만분의 1초 이내” 뿐이었다. 약 100만분의 1초가 지난 후에는 우주가 충분히 식어서 쿼크와 글루온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41)


9장 · 입자란 진정 무엇인가?


디랙은 패러데이의 전자기장과 아인슈타인의 광자를 교묘하게 조합하여 “양자장quantum field”이라는 새로운 물리적 객체를 만들어냈다. 여러 면에서 양자장은 패러데이의 고전 전자기장과 매우 비슷하다.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전기력과 자기력을 전달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흔들면 빛의 형태로 장을 가로지르는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양자장과 고전 전자기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고전 전자기장에서는 파동을 임의의 크기로 만들 수 있지만, 양자장에서는 파동의 최소 크기가 정해져 있어서, 이보다 작은 파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는 작은 ‘덩어리’의 단위로 존재한다. 전자기장에서는 0개나 1개, 2개, 또는 1,000조 개의 광자가 잔물결을 일으킬 수 있지만, ‘1/2개의 광자’나 ‘10/3개의 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항상 광자의 정수배로 존재하는 것이다. 좀 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전자기장은 양자화되어 있다quantized.” 151-2)


그러나 디랙의 이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했다. 광자가 전자기장에 생긴 잔물결이라면, 다른 물질입자는 어떻게 되는가? 전자와 양성자는 광자와 근본부터 다른 입자인가? 물론 이들도 파동-입자 이중성을 갖고 있지만 만들어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수시로 탄생했다가 소멸되는 광자와 달리, 전자와 양성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 같았다. 1920년대의 양자역학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부합되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해 움직이고 있는 두 관측자가 얻은 양자역학의 법칙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양자역학이 아직 불완전했다는 뜻이다. 마침내 디랙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후보를 찾아냈다. 이 방정식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모두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가 팽이처럼 자전하면서 갖게 된 특성까지 자연스럽게 설명해 주었다(이 특성을 스핀spin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방정식은 “스핀이 위를 향하는 전자”와 “스핀이 아래로 향하는 전자”라는 두 개의 해를 갖고 있었다. 152-3)


# 전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입자는 1/2의 스핀을 갖고 있으며 위( +1/2)와 아래(–1/2), 두 가지 값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머릿속에는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유도한 방정식에 무언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방정식에는 총 4개의 해가 존재했는데, 처음 2개는 스핀이 업up(↑)인 전자와 다운down(↓)인 전자에 해당하여 별문제가 없었지만, 남은 두 개는 “음의 에너지negative energy를 가진 전자”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입자에 대응되어 디랙의 심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렵게 유도한 방정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디랙은 모든 가능성을 철저하게 타진한 후, 물리학의 역사를 바꿀 과감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음에너지 상태로 떨어지는 전자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음에너지 상태가 이미 다른 전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단, 이 전자는 전하의 부호가 일상적인 전자와 반대여야 한다. “양전하를 띤 전자”라는 뜻이다. 음에너지 상태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디랙은 1931년에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날렸다 ―“자연에는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54-5)


디랙은 순수한 사고思考만으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예견했다. 그리고 1932년 실제로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발견됐다.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물질의 거울에 비친 상象인 ‘반물질antimatter’의 세계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물질입자마다 “모든 물리적 특성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디랙이 예견했던 “양전하를 띤 전자”는 오늘날 ‘양전자positron’, 또는 ‘반전자antielectron’라고 불린다(임의의 입자와 모든 것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입자를 반입자antiparticle라 한다: 옮긴이). 반물질이 발견되면서 “물질은 영원하다”는 믿음도 허물어졌다.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될 정도의 강한 에너지로 두 입자를 충돌시키면 새로운 물질입자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입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운수 사납게 자신의 반입자 짝을 만나면, 강렬한 섬광(복사)을 방출하면서 무無로 사라진다. 156)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입자들은 각기 자신만의 양자장에 대응된다. 광자는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에 생긴 잔물결이고, 전자와 양전자는 ‘전자장electron field’에 생긴 잔물결이며, 위쿼크는 ‘위쿼크장up quark field’라는 양자장에 생긴 잔물결이다. 강입자충돌기LHC에서 두 개의 양성자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일련의 양자장에 ‘자연의 종’이 울리면서 잔물결의 홍수가 양자 교향곡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실험자는 감지기에 도달한 잔물결로부터 교향곡의 악보를 재구성하여 악기의 종류를 알아내는 식이다. 우리는 이 잔물결을 입자로 해석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양자장의 동요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입자가 아닌 양자장이다. 보이지 않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유체 같은 물질이 가장 작은 원자에서 가장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질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화학원소도, 원자도, 전자도, 쿼크도 아닌 양자장이다. 156-7)


10장 · 최후의 구성성분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음전하를 띤 전자와 양전하를 띤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양전하를 띤 양성자와 전하가 없는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양성자와 중성자를 합쳐서 핵자nucleon라 한다: 옮긴이).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위쿼크와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의 구성성분은 전자와 위쿼크, 그리고 아래쿼크라는 세 가지 입자로 귀결된다. 물론 구성성분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물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자의 구조는 구성요소와 함께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중 전자와 원자핵을 결합시키는 전자기력과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키는 강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두 힘은 양자장(전자기장과 글루온장)을 통해 매개되며, 이 양자장에 불연속의 에너지 덩어리를 투입하면 양자화된 작은 파문(또는 입자라고도 함)이 생기는데, 전자기력의 경우에는 이것을 광자라 하고, 강력의 경우에는 글루온이라 한다. 168)


그러나 미시세계에는 아직 논하지 않는 또 하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희한한 힘―그것은 바로 약력weak force이다. 약력이 특별한 이유는 한 종류의 입자를 다른 종류의 입자로 변환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하전입자와 전자기장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 QED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정확한 이론으로, 이론과 실험의 오차가 100억분의 1을 넘지 않는다. 이 놀라운 이론의 핵심에는 “국소게이지대칭local gauge symmetry”이라는 아름다운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줄리언 슈윙거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이 원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전자기력, 강력, 약력 등 근본적인 힘은 자연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대칭으로부터 나타난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칭이란, 주어진 물리계(기체 상자, 또는 태양계, 혹은 우주 전체)에 어떤 조작을 가했는데 그 후에도 물리계가 변하지 않을 때, 그 물리계에는 대칭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168-70)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대칭이 존재하는 곳에 그에 해당하는 보존량(변하지 않는 양)이 존재한다. 회전대칭이 존재하는 경우, 그에 대응하는 보존량은 각운동량(계가 갖고 있는 회전능력)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수많은 실험이 실행되었는데, 운동량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계의 운동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으며, 계의 각 요소에 재분포되는 것만 가능하다. 에너지와 운동량이 보존되는 이유도 대칭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에너지가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시간변환에 대하여 대칭이기 때문이고(즉, 시간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간변환대칭이라 한다), 운동량이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다(즉, 공간 전체를 임의의 방향으로 이동시켜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병진대칭이라 한다). 그러나 대칭이 낳은 결과 중에는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힘 자체가 바로 대칭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170)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역설적 상황에 직면했다. 약력입자(약력을 매개하는 입자. W입자와 Z입자)는 큰 질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력은 매우 강하면서 먼 곳까지 작용하는 장거리힘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입자가 무거우면 이론에서 무한대가 속출하고, 약력의 형태를 결정해 준 보석 같은 대칭까지 붕괴된다. 약력의 양자장 이론이 폐기될 위험에 처했다. 잠깐… 혹시 대칭이 붕괴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약력을 매개하는 입자는 기본적으로 질량이 없지만, 무언가로부터 질량을 획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힉스장Higgs field’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힉스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자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은 스핀 = 1/2인 전자에 대응되는 물질장物質場, matter field이거나, 스핀 = 1인 광자에 대응되는 역장이었다. 그러나 힉스장에 대응되는 입자의 스핀은 0이라는 특이한 값을 갖고 있다. 175)


이뿐만이 아니다. 힉스장은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0이 아닌 값을 가져야 한다. 전자기장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이다. 광자가 알뜰하게 제거된 공간에서는 전자기장에 잔주름이 전혀 생기지 않으므로, 양자적 불확정성에 의해 나타나는 약간의 요동을 제외하면 전자기장의 값은 모든 곳에서 0이다. 그러나 힉스장에서 모든 입자를 제거해도 장의 값은 0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즉, 모든 우주공간은 균일한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 있다. 우주가 처음 탄생하던 순간에 힉스장의 값은 0이었고 세 개의 약력입자 W+, W-, Z0는 질량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SU(2)라는 대칭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주 탄생 후 1조분의 1초가 지났을 때 힉스장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0이 아닌 값을 갖게 되었고, 모든 공간은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약력입자는 갑자기 질량을 갖게 되었다. 초기에 존재했던 완벽한 대칭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으면서 “강한 장거리힘”이었던 약력이 “약한 단거리힘”으로 바뀐 것이다. 175)


우주 탄생 직후에는(탄생의 순간부터 1조분의 1초까지. 이토록 짧은 시간에는 ‘직후’라는 표현이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더 좋은 단어가 없다: 옮긴이) 전자와 쿼크를 비롯하여 모든 물질입자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걸쭉해진” 힉스장 때문에 입자의 속도가 느려졌고, 이들이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교환하면서 없던 질량을 획득하게 되었다. 힉스장이 전자나 쿼크에 끈끈한 액체처럼 들러붙어서 속도를 늦추고 질량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에 광자나 글루온 같은 입자는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힉스장 속에서도 질량이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힉스장은 약력입자뿐만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입자에게도 질량을 부여한다. 힉스장이 없으면 전자 같은 입자가 광속으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원자가 형성될 수 없고,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 힘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힉스장이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할 수 없다. 175)


# 힉스장은 전자와 쿼크 같은 기본 물질입자에만 질량을 부여한다. 그러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갖고 있는 질량의 대부분은 쿼크의 질량이 아니라 쿼크를 결합시키는 글루온장의 에너지이다. 즉,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힉스장이 아닌 강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11장 · 만물의 조리법


만물의 창조 작업은 빅뱅 후 100만분의 1초가 지났을 때 거의 마무리되었다. 처음 100만분의 1초 동안 우주는 엄청나게 뜨거워서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파괴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면서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100만분의 1초가 지난 시점에는 플라즈마에서 양성자와 반양성자 쌍이 만들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면서 대량 멸종이 시작되었다.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무無로 소멸되고, 이 과정에서 생성된 무지막지한 복사에너지가 모든 물질을 쓸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 예상대로 진행되었다면 물질과 반물질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주에는 텅 빈 공간과 그 안을 외롭게 날아다니는 몇 개의 광자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 멸종의 와중에 입자의 100억분의 1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어쨌거나 입자가 반입자보다 100억분의 1쯤 많았기에, 이 자투리 입자들이 진화하여 지금의 은하와 별, 행성, 인간, 그리고 사과파이가 되었다. 187)


# ‘사하로프 조건Sakharov conditions’(우주 초기에 물질이 생성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1. 쿼크가 반쿼크보다 많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2.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은 불완전해야 한다.

3. 물질 생성 과정이 진행될 때, 우주는 열적평형상태thermal equilibrium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이 좌우대칭이라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가정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계 미국인 실험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의 놀라운 실험결과가 알려지면서 오래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1956년 미국 연방표준국의 지원을 받아 실행된 우젠슝의 실험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자연의 기본 힘 중 하나인 약력이 “오른손잡이 입자right-handed particle”보다 “왼손잡이 입자left-handed particle”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입자에 두 손이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잡이”는 입자의 자전효과와 유사한 양자적 스핀과 관련되어 있다. 약력은 분명히 거울 대칭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 후로 이 현상은 “반전성위배parity violation”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여기서 말하는 반전성parity은 ‘좌우대칭성’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옮긴이). 반전성이 위배된 궁극적 이유는 약력이 왼손잡이 전자에게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89-90)


스팔레론은 전자기력과 약력, 그리고 힉스장의 기원을 설명하는 약전자기이론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 분명히 스팔레론은 입자가 아니다. 전자나 힉스보손 같은 입자는 기타 줄을 퉁길 때 생성되는 단일 음처럼 평균값 주변을 오락가락하는 단일 양자장의 진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스팔레론은 이보다 훨씬 미묘한 개념으로, 하나의 양자장이 아니라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바로크양식처럼 섞여서 한꺼번에 움직이는 “양자장의 오케스트라”에 해당한다.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집합적으로 움직이면 스팔레론이 생성되고, 스팔레론은 입자를 반입자로 바꾸거나 반입자를 입자로 바꾸는 기적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스팔레론은 물질을 만드는 기계로서, 여기에 약간의 반물질을 투입하면 일상적인 물질입자가 생성된다. 이 기적 같은 능력 덕분에 스팔레론은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 중 입자 -반입자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이자,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다. 192)


일본 기후현岐阜縣 히다시飛騨市 근처의 이케노산池野山 지하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물 중 하나인 슈퍼 카미오칸데Super-Kamiokande, 슈퍼- K가 열심히 가동 중이다. 슈퍼- K는 세계 최대 규모의 뉴트리노 감지장치로서, 물질의 기원을 밝혀줄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2020년 4월, 슈퍼-K에서 작업 중인 150명의 연구원들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뉴트리노가 깨뜨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앞으로 더욱 정밀한 측정을 통해 사실로 판명된다면 물리학계에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전하 -패리티 대칭이 오직 쿼크의 약한 상호작용(약력)을 통해서만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뉴트리노도 대칭을 깰 수 있다면 빅뱅 직후 물질이 생성되는 두 번째 길이 열리는 셈이다.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질입자인 뉴트리노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것은(슈퍼-K에서 발견된 사실임) 곧 뉴트리노에 질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197-9)


뉴트리노는 분명히 질량을 갖고 있었다. 질량이 너무 작아서 관측이 안 되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뉴트리노의 질량은 0.5eV 이하로서, 전자의 100만분의 1도 안 된다. 왜 그럴까? 뉴트리노는 왜 그토록 작은 질량을 갖게 되었을까? 현재 제일 널리 수용된 답은 “시소 메커니즘see-saw mechanism”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질량이 매우 큰 뉴트리노 3종이 추가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기존의 가벼운 뉴트리노 3종(각각 전자뉴트리노, 뮤온뉴트리노, 타우 뉴트리노)과 균형을 되찾는 식이다. 초경량급 뉴트리노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새로 도입한 슈퍼헤비급 뉴트리노는 질량이 정말로 커야 한다. 예상되는 질량은 양성자의 10억∼1,000조 배 사이로서(109∼1015GeV)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입자보다 무거울 뿐만 아니라, LHC의 최대 출력보다 10만 배 이상 크다. 그러나 초기우주에는 온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이런 입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199)


12장 · 누락된 구성요소


표준모형을 가장 크게 위협한 도전장은 입자물리학이 아닌 천문학 분야에서 날아왔다. 1930년대에 스위스의 천문학자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는 1,000개가 넘는 은하들로 구성된 코마은하단Coma Cluster의 운동속도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중력으로 은하단의 형태를 유지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츠비키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성단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암흑물질dunkle Materie, dark matter(영)”이라 불렀다. 암흑물질보다 더욱 신비한 것은 “밀어내는 중력”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암흑에너지이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팽창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이유를 암흑에너지에서 찾고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물론 질량도 포함된다)의 95%를 차지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은하를 모두 더해봐야 전체의 5%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방대한 미지의 바다를 표류하는 작은 거품일 뿐이다. 209-10)


모든 기본 입자의 질량은 힉스입자의 ‘246GeV’라는 질량으로부터 결정되었다. 집안에서 보일러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처럼, 우주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다이얼을 왼쪽으로 돌리면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입자의 질량이 작아지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커진다. 여기서 질문 하나 ― 우주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여 훗날 지구에 생명체가 번성하려면 다이얼을 얼마나 정확하게 고정해야 할까? 답: 말도 안 되게, 어마무시하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정말 환상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혀온 유령이 숨어 있다. 찬반양론으로 갈려 숱한 논쟁을 야기했던 그 유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다중우주”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우주가 “각기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여러 개(또는 무한개)의 우주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황당한 가설을 받아들이면 힉스장이 기적 같은 값을 갖게 된 것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212, 214)


초대칭supersymmetry은 물리학이 직면한 여러 개의 심오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아주 유별난 개념이다. 기존의 이론에 이 개념을 도입하면 빅뱅 무렵에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았던 이유와 암흑물질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초기에 모든 힘들(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이 단 하나의 통일된 힘으로 존재했다는 엄청난 가설까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초대칭의 가장 큰 매력은 난폭한 진공에너지로부터 힉스장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힉스장이 지금처럼 적절한 값(원자가 생성될 수 있는 값)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칭은 자연의 기본 구성요소에 부과된 또 하나의 새로운 대칭으로,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초대칭을 통해 연결되는 두 부류는 입자와 반입자가 아니라 페르미온과 보손이다. 즉, 초대칭은 전자와 쿼크, 뉴트리노 같은 물질입자를 광자, 글루온, 힉스입자 같은 힘입자와 연결시키는 대칭이다. 216)


# 초대칭짝에 해당하는 입자를 통틀어서 스파티클sparticle(초대칭입자)이라 한다. 


13장 · 우주 만들기


현대물리학은 두 개의 거대한 주춧돌 위에 구축되었다. 미시세계(원자의 입자의 세계)를 서술하는 양자장이론과 거시적 규모에서 우주(은하, 별, 행성 등)의 거동을 서술하는 중력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두 이론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지금까지 실행된 그 어떤 실험도 두 이론에 반하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없다), 빅뱅의 순간으로 다가가면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자장이론은 중력을 고려하지 않았고, 중력이론은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뱅의 순간에는 우주 전체가 아원자규모로 존재했다. 우주 만물(에너지와 장, 시간과 공간)이 원자보다 훨씬 작은 점 안에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이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중력과 양자역학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 탄생의 순간을 물리학으로 서술하려면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양자장이론,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을 하나로 합친 “양자중력이론quantum theory of gravity”이 필요하다. 231)


끈이론은 1970년대에 쿼크를 묶어두는 강력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여 거의 사장된 후 ‘양자중력’이라는 더욱 야심 찬 목표를 내걸고 화려하게 부활한 이론이다. 끈이론은 1984년에 그린과 슈바르츠가 “끈이론에는 수학적 변칙anomaly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면서 하루아침에 이론물리학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끈이론의 핵심은 전자를 비롯한 기본 입자들이 야구공 같은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기본 구성요소는 끈이며, 끈이 진동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입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기타 줄의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하다. 특정 모드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고,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쿼크가 되고, 또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중력자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끈이론은 우주에 초대칭이 존재해야 의미를 갖기 때문에 초대칭 버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다. 234-5)


인플레이션은 대표적인 우주 이론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광학망원경으로 빅뱅 후 1조×1조×1 조분의 1초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탐색 수단을 빛에서 중력파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시공간이 휘둘리면서 거친 파동이 생성되었을 것이고, 그 여파는 지금도 우주 곳곳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들은 파장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강도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지만, 미래형 관측소가 계획대로 완성된다면 우주창조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험실에서 장비를 다루건, 노트에 방정식을 끄적이건, 또는 우주에서 날아온 신호를 분석하건 간에, 모든 과학의 기본은 ‘탐험’이다. 그리고 일단 탐험 길에 올라 새로운 현상과 미스터리를 쫓아가다 보면 출발점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끝날 것인가? 244-5)


14장 · 이것으로 끝인가?


과연 우리는 무無에서 사과파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양자역학과 중력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가 탄생한 순간(중력, 시간, 공간, 양자장 등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실망스러운가? 그럴 필요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과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플랑크 규모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궁극의 이론을 논할 때가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사방에 널려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은 인간을 놀라게 하는 데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금보다 더 먼 곳을 관측하고 더 작은 영역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엇이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한다면, 우주의 조리법을 발견하는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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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교양 100그램 7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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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격변의 시대


탈냉전과 팍스 아메리카나


두번의 위기와 슈퍼맨의 약점


미국 패권은 자신의 장점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주로 ‘나쁜 쪽, 나쁜 국가’들의 존재를 통해 반사적 정당성을 얻었습니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의 대외 정책 결정자들에게 다시금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나눌 수 있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막강한 미국의 상대로 몇십명의 테러리스트가 빌런이라는 구도는 모양도 빠질 뿐만 아니라 정당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대상이 바로 배후국가들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를 색출하면서 만들어낸 적이 바로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 세 국가입니다. 거기에 시리아, 리비아, 쿠바, 아프가니스탄을 합쳐서 일곱개의 ‘불량국가 또는 깡패국가’(Rogue states)를 국제사회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미국은 이 깡패국가들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독재자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세계평화가 온다는 전제하에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어난 전쟁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13-4)


균열을 보이던 미국 패권체제를 거세게 흔드는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납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입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월스트리트가 폭삭 내려앉습니다. 첫번째 전환점이었던 9·11 테러가 미국에 심리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외 정책을 변화시켰다면, 2008년의 금융위기는 소련을 붕괴시킨 자본주의가 드디어 그 모순의 폐해를 실제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모색하며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나라도 참여하고 있는 G20(미국 중국 등 19개의 주요 국가와 2개의 국가연합을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중국이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흡수해준 덕분에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시 냉전 직후의 질서를 어느정도 회복합니다. 그럼 미국은 중국에 고마워할 법도 한데, 그보다는 중국이 이렇게 강해졌다는 데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5)


신냉전이 아니다, 파편화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난 2016년에는 우리가 말하는 서구, 선진국이었던 유럽과 미국에서 사건이 하나씩 발생합니다. 유럽에서는 브렉시트(Brexit), 즉 영국이 EU(유럽연합)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벌어졌고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 두가지 사건은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실제로 구호도 ‘미국/영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같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각종 국제기구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기구와 질서로 인해 오히려 불리해졌으니 거기서 빠져나오거나 무력화시켜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미국 경제에 손해만 끼친다며 WTO(세계무역기구)에 기금도 내지 않고 자유무역체제를 부정하고, 멋대로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트럼프 1기에서는 중국 같은 특정 국가와 상품에 선별적으로 관세를 부과했지만, 2기에 와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부과에 나섬으로써 보호무역주의를 한층 강화합니다. 16)


지금까지 미국에 이익을 줬던 국제 협력체제 혹은 세계화 구조가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제 자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변화의 엔진인 동시에 결과물이 트럼프이고, 트럼피즘입니다. 트럼피즘은 세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앞에서 말한 미국 우선주의로 국제협력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차원입니다. 두번째는 백인 우선주의를 포함합니다. 세번째는 트럼프 개인 차원의 우선주의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의 선거 구호)의 실천 방식이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심지어 독재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하고 트럼프라는 한 권력자가 대내외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의회를 통하지 않고 행정명령을 남발합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하루 동안은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헌법적으로 불가능한 3선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17)


‘신냉전’은 미중 패권 경쟁을 일컫는 자극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오히려 지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용어는 이것일 겁니다. ‘파편화’(fragmentation). 이 말의 기원은 정치철학자 홉스(T. Hobbes)로 홉스가 당시의 영국 정치를 설명했던 단어가 ‘적자생존’입니다. 협력이 아닌 공포의 세계 속에서 가장 힘센 자가 가장 많이 갖게 되는 적자생존,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오늘날 일국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폐해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이를 제어하는 제도들이 다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생겨난 현상들 중 하나가 안보 포퓰리즘입니다. 이런 불안을 이용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런 사람들을 ‘(극우적) 스트롱맨’이라고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이민자나 난민, 소수자들에게 덮어씌우고, 대외적으로는 불안을 조장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호소하면서 외부 세력을 혐오하게끔 만듭니다. 18-9)


분열된 나라: 똑 닮은 미국과 한국


트럼프의 외교 전략: 각개격파와 삥 뜯기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미국의 기존 우방국들은 미국에 이른바 ‘빨대를 꽂아’ 피를 빠는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들 국가를 ‘거머리’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과거 소련, 현재는 중국의 위협과 대응으로부터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공짜로 이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불공정한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적자를 보고 있는 상위 10개국 중, 중국은 1위, 우리나라는 8위입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외치는 것이 ‘페이백 타임’(Payback time), 지금까지 미국을 상대로 이득을 보았던 것을 다 정산할 때라는 겁니다. 이 정산을 위한 수단이 바로 관세 부과입니다. 자유무역(free trade)이 아니라 공정무역(fair trade)을 하자면서요. 물론 그 공정 여부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동의할 수 없죠. 그러나 트럼프는 상황을 아주 단순화해서 미국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했고, 특히 우방국한테 당한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24)


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관점은 네오콘(Neo 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의 세계관입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로 대표되는 네오콘은 철저하게 선악의 세계관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미국이 공공선이라는 예외주의(exceptionalism)에 입각해서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악을 소멸시켜야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고 주장합니다. 네오콘에게 중국은 악이자 굴복시켜야 할 상대인 거지요. 존 볼턴(John Bolton)이나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등 네오콘 인사들이 트럼프 1기 정부의 외교와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들 네오콘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기 때 대외정책이 네오콘의 방해를 받았다며 이들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트럼프는 이익이 되면 하고, 손해가 되면 빠진다는 철저한 거래주의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트럼프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트럼프에게는 평화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습니다. 26)


그렇다면 트럼프는 미중 경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트럼프에게도 중국은 미국의 위상에 도전하기에 꺾어야 할 대상이며, 미국이 만든 질서에서 불공정한 반칙행위를 통해 이익을 챙기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트럼프는 중국을 미국의 자원을 총 투입해 사생결단의 승부를 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압박할 수도 타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미국에 이득만 된다면 유럽은 러시아가, 아시아는 중국이 관장해도 된다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이미 러우 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서고 ‘유럽의 방위는 유럽이 알아서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세계를 미중러의 세 영향권으로 나누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新) 얄타체제’로 이름 붙이기도 하는데요.  그런 질서가 실현 가능할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트럼프의 MAGA가 품고 있는 실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26-7)


한국의 트럼프 대망론이 가리키는 것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나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핵을 많이 보급할수록 평화가 온다는 역설적인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합니다. 핵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못할 거라는 논리인데, 핵무기로 인해 전면전이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려면 군사력 강화를 통해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억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적과의 외교를 통해 적대감을 해소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물론 전쟁을 막을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와 평화를 향한 가속페달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도구를 확보해야 하지요. 그것이 UN일 수도 있고, 자유무역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은 더 일어나기 쉬워졌고 전쟁이 났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은 사라진 상황입니다. 하루빨리 재건해야 합니다. 29-30)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한미동맹과 평화체제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동맹은 전쟁 상태에서 가장 강합니다. 즉 공동의 적대국이 확실할 때 동맹관계는 굳건해집니다. 한미동맹에 적용하면, 남북관계가 악화할수록 한미동맹의 역할과 중요성은 커지죠. 그러니 우리가 계속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과 적대관계로 남아 있으면 한미동맹이 더 안정적이 될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평화체제로 넘어가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은 약화되는 게 자연스럽지요. 심하게 얘기하면 분단이 계속되고 남북한과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될수록 한미동맹은 강해지고, 교류와 협력이 높아지면 역설적으로 동맹은 약해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한미동맹이 평화의 상징으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이뤄질 때마다 오히려 동맹 약화를 걱정하는 역설이 벌어집니다. 역대 진보 정부들이 남북협력을 이루려고 하면 어김없이 한미동맹을 흔든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는 국민에게 강한 소구력을 가져왔습니다. 31)


남북한의 미래, 평화와 통일 등에 있어서 남북이 같은 민족이냐 아니면 구별된 두 국가냐 하는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요. 사실 분단구조에서는 둘 다 맞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두개를 억지로 합치려고 합니다. ‘두 국가’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니 필연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한다고 해서 엄연한 분단현실과 두 국가체제를 부정할 수 없지요. 한 민족과 두 국가라는 이 두 정체성은 매우 불편하지만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를 외면하거나, 또는 억지로 둘을 통합하려는 시도 모두 무리수입니다. 두 국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통일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아야겠죠. 두개의 정체성이 갖는 모순은, 먼 미래에 통일이라든지 분단체제가 해소되어야 해결되기 때문에 지금의 분단구조 안에서는 두 정체성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32)


트럼프 태풍에 맞서는 일은 가능할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제적으로 연대가 필요합니다. 특히 트럼프에게 당한 피해국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트럼프는 지금 ‘일 대 일’로 상대하려 합니다. 많은 국가가 안보와 경제를 미국에 기대고 있기에 쉽사리 반트럼프 연대에 나서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질서가 현재 훨씬 더 다극화되고 평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극화 흐름이 러시아가 추구하는 것처럼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가령 한국과 일본, 그리고 EU 등이 주도해서 새로운 형태의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중일 3국의 역내 협력도 주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3국이 전세계 제조업에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도 중요하지만, 합치면 절대적입니다. 3국이 함께 적극적으로 개방된 공급망과 자유무역을 지탱해준다면 트럼프의 보호주의 태풍을 견뎌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3)


바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가능성


사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가 뒤집힌 적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기득권이 뒤집힌 적도 없지요.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다수의 혁명이 있었지만, 신분제를 타파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친일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리고 분단의 대결구조에서 군대의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연속적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경찰과 검찰도 강해졌습니다. 게다가 유교적인 집단주의 문화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라면 사실 시장이나 시민사회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동학농민운동부터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민주화항쟁, 2024년 남태령대첩까지, 국가가 선을 넘을 때마다 시민이 봉기했지요.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엄청난 저력이고 진정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잘못되고 불평등이 생길 때는 공적 국가를 키워서 고쳐내고, 국가가 반민주·반헌법을 자행할 때는 시민과 시장이 제어하는 겁니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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