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지구 생성부터 기후 재앙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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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구세계와 신세계의 융합(1500년 무렵~1700년 무렵)


"'구세계'가 '신세계'를 차지하는 과정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생태계를 바꾸고 인간의 정착 형태를 변화시킨 자원을 이용하고 개발하고 소비하는 과정이었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추출하고 식품, 광물, 자재, 상품을 돈을 지불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수송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배치한 결과다. 그것은 다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 결과는 세계 제국(유럽에 중심을 둔)의 창설이었다. 그것은 상품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는 것이었다. 지리적 경계를 확장해 더 많은 천연자원(광물의 형태든 농작물의 형태든)을 차지하고 개발하는 것이었다." "물건을 구하기 쉽고 가격까지 떨어지니 그 자체로서 좋은 점이 있었다. 접근성이 확대되면서 그것이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데 이바지하고 유럽 주민들의 '근면혁명'에 매우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 주민들은 갈수록 많은 양의 상품을 갈수록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어서 가처분 재산이 늘고 소유권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는 순환을 가져왔다."(472-3)


"생물 혁명의 충격은 너무도 광범위해서 일부 역사가들은 여기에 일종의 '생태 제국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착 생물군이 새로운 습관, 생활방식, 요구를 가진 새로운 사람들의 도래로 인해,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가축으로 인해 자리를 빼앗기고 변형됐다. 그 가축들의 〈식습관, 짓밟는 발굽, 배설물,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잡초성 초목의 씨앗들〉이 식민화된 지역의 〈토양과 식물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유럽인들은 '큰 가방 생물상'을 가지고 왔다. 재배 농작물과 가축(그것들이 퍼져 토종 동식물과 함께 자랐다)에 더해 잡초, 씨앗, 해충 역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병원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부 유럽인들은 토착민들이 그들의 신앙 체계 때문에 신에 의해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대응책은 현지 주민들에게 강경한 종교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개별 선교 사제들에게 신도를 보살필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원을 호소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480-2)


"'신세계'의 생태적 이점은 초기 대서양 횡단 무역의 핵심 요인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설탕이었고, 이어 담배가 뒤를 따랐다. 담배는 거의 기적적인 약효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정착과 식민화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양자는 새로운 환경의 개발,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심고 기르고 거두고 땅의 과실을 가공할 수 있는 노동력의 확보 가능성이었다. 이는 특히 환금작물에 중요했다. 노동집약적이고 연중 계속되는 과정이었다. 유럽에서 새로 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설탕 생산의 분명한 해법은 강제노동과 노예 사용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인 정착자들은 질병과 기타 요인에 의한 인구 재난의 첫 번째 파도가 닥치기 전에도 노동력을 늘리는 일에 집착했다. 여기에 중요했던 것이 '농장 복합체'의 개발이었다. 이런 곳들의 경제적·생태적 이용에서는 서아프리카 노예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487-9)


16장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다(1650년 무렵~1750년 무렵)


"당시의 마음가짐은 고전기 세계의 관념과 영향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이제 자기네가 그 진정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온화한 땅은 온화한 사람을 낳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다." "몽테스키외는 1784년 〈법의 정신〉에서 그 견해를 비틀어 사람들은 〈추운 기후에서 더 활발〉하고 〈더 자신감을〉 드러내며, 더 〈용감〉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더 잘 인식한다고 썼다. 따뜻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다." "이런 단호한 언설은 북유럽의 추운 날씨가 어떻게 유럽의 세계 제국들을 건설했는가에 대한 정당화와 설명을 찾아내려는 노력에 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인종에 대한 관념과 유럽인들이 먼 나라, 먼 대륙의 다른 민족과 문화를 지배할 권리에 대한 관념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더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명한 입법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몽테스키외는 말했다."(504-5)


"열대열 말라리아는 노예무역과 연관된 독립적인 여러 경로로 들어와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에 자리를 잡았다." "말라리아의 확산은 세 개의 변수에 의존한다. 즉 기생충 자체, 모기, 기후다. 모기 가운데 몇몇 종은 다른 어떤 척추동물보다 인간에게서 피를 빨기를 좋아한다. 기후 자체는 모기 서식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모기는 번식하고 살아남고 확산되는 데 충분한 물과 충분히 더운 온도를 필요로 한다. 1681년과 1683~1684년, 그리고 다시 1686~1688년에 대규모의 엘니뇨 현상이 일어났다. 이 상관관계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이 같은 기상 이변이 열대열 말라리아가 문턱을 넘어 북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의문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식민 정착자들에게 아프리카 인력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었다. 구매자들은 노예를 아무 곳에서나 사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의 출신을(그래서 이 병에 저항력을 갖춘) 선호했다."(510-2)


"(카리브해의 농장복합체에서) 유럽으로 수입되는 설탕의 양이 늘면서 당연히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설탕을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18세기의 한 파리 사람은 이렇게 썼다. 〈중산층 가정에서 손님에게 커피를 내놓지 않는 경우는 없다. 가게 주인이든 요리사든 하녀든 아침에 커피와 우유를 곁들여 식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수도의 공공 시장과 특정 거리 및 골목에서는 여자들이 대중에게 자기네가 카페오레(우유커피)라 부르는 것을 판다고 내세운다.〉 이런 상호작용들은 단지 삶의 질 개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교환, 혁신, 협력에도 중요했다. 예를 들어 찻집과 커피점이 증권거래소의 발전, 보험산업의 발전, 정치적 토론의 발전과 계몽시대(이야기의 필수적인 부분인 파종하고 수확하고 채굴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쇄매체의 보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517-20)


17장 소빙기(1550년 무렵~1800년 무렵)


"일부 평가에 따르면 16세기 말부터 17세기 말까지의 100여 년은 역사상 알려진 것 가운데 유일하게 북반구와 남반구가 동시에 온도가 떨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전 세계적 현상으로서의 소빙기는 역사가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이것이 아주 놀랍지는 않다. 이 시기는 심각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생태적 변화의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1640년대에는 이후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어느 시기보다 세계에서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소빙기라는 개념이 문화와 행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편이자 군사적 대결의 결과를 좌우하는 질병 변천의 맥락으로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우선 온도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일정한 기간에 떨어진 것은 전혀 아니며, 틀림없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것도 아니다.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IPCC)가 밝혔듯이 증거는 소빙기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됐다는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538, 541-2)


"기온 하강이 동향, 유행, 심지어 개별적 사건들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조심스러운 판단이 필요하다. 지리적·시간적으로 상당한 편차가 있는 오랜 기간의 기후 변화를 평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몇몇 시기에는 통상적인 기후 패턴에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는 증거가 있다. 대표적으로 1590년대, 1680년대, 1810년대 등이다. 이 시기에는 화산 활동, 특히 강한 엘니뇨 현상, 또는 그 두 가지가 상승 작용해 여러 지역에서 기온이 떨어졌다." "그러나 세계의 기후 재편의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 불안정하고 이례적인 기후 조건이 재난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기존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숱한 식량 부족 사례에서 문제는 스스로 위험에 노출될 정도로 확대된 도시에서 기인했다. 다만 그 위험 자체는 안전한 곳(그리고 먹을 것)을 찾으려는 시골 주민들의 시도에 의해 악화됐다."(544, 559-60)


"명나라의 멸망은 흔히 일반적으로는 궂은 날씨, 특수하게는 기후 변화와 연결돼왔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1640년에 흉작과 함께 메뚜기 떼의 습격, 식량 부족, 천정부지의 물가, 질병 발생이 겹쳤다. 그리고 이후 3년(1641~1644) 동안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덮쳤다." "그러나 명 왕조의 붕괴에는 1644년까지 형성 중이었던 기후 위기보다 훨씬 깊숙이 뻗어 있고 훨씬 오래 영향이 지속된 뿌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명은 산적한 문제에 적응하거나 이를 처리하지 못하고 죽음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다." "반면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과 베네룩스는 중국에 그렇게 파멸적이었음이 입증된 아주 비슷한 기후 조건을 유행병, 기근, 지배층의 전복이라는 파멸적인 문제 없이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이 성공의 비밀은 평범한 데 있었다. 관리와 행정가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가져올 과제들을 예측해 미리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후는 악화 요인일 뿐,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568, 572-3)


18장 대분기와 소분기(1600년 무렵~1800년 무렵)


"감자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기상 충격과 기후 변화로 인해 제기된 위험을 그 작물이 완화했기 때문이다." "안데스에서 수천 년 동안 재배된 감자는 서서히 받아들여져 1600년 무렵 에스파냐,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불리한 기상 조건의 위험을 완화함으로써 더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식량 부족을 줄이고 열량 섭취를 늘리며 건강과 기대수명을 개선한 것이다. 또한 감자는 고밀도의 인구를 지탱할 수 있게 했고, 17~18세기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규모를 더욱 키우는 동력이 되었다. 감자는 예를 들어 이 기간 인구 규모 증가의 25퍼센트 정도를 책임진 것으로 평가됐다. 그리고 도시화의 가속에서는 더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즉 도시가 상거래를 발전시키고 수요를 활성화시키며 혁신을 자극하는 데에 일차적인 역할을 담당한(그리고 지금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591-4)


"1760년대와 1770년대에 대서양에서 이례적으로 빈번하고 격렬했던 일련의 폭풍우는 교역망을 조정하고 정치적 동맹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했다." "미국 남부와 카리브해 지역의 환경적·경제적 취약성이 식민지들의 상업적·정치적 기회이자 영국에는 약점이라는 인식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전후한 시기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국 선박의 입출항 금지는 사실상 자메이카와 여타 영국 식민지들을 잘라내 물자 부족과 고통을 야기했다." "반면에 카리브해의 프랑스 섬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상인들은 협약을 맺고 미래의 계약을 예약하고 창고를 상품으로 꽉꽉 채웠다. 프랑스와 나중에 에스파냐가 1770년대 후반 독립파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뛰어든 데는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요인은 분명했다. 대서양 서부와 카리브해에서의 상업적 유대를 더욱 긴밀히 통합함으로써 모두가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다."(599-601)


"프랑스 혁명은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많은 지역에 불을 질렀다. 반항은 밖에서도 있었다. 1791년 생도맹그, 즉 아이티의 혁명 같은 것이다. 이 혁명 이후 독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투생 루베르튀르의 지도력과 아이티 주민들의 결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황열병이 프랑스의 권위를 다시 확립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를 궤멸시킨 덕분이었다." "프랑스의 혼란은 영국에 몇 가지 활력소를 제공했다. 혁명의 폭력과 뒤이어 유럽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격변은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에 이미 일반적으로 영국, 더 구체적으로 런던을 사방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만들었다. 재능, 자본, 연줄이 베네룩스, 독일, 그리고 물론 바로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한 역사가가 우아하게 말했듯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벌처럼 꽃가루를 가져와서 새로운 꽃을 피우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 공업의 이륙을 싹트게 했다. 그것이 정치, 사상, 기후 변동의 큰 변화가 일으킨 전례 없는 결과였다."(612-3)


19장 공업, 수탈, 자연계(1800년 무렵~1870년 무렵)


"1815년 4월의 탐보라산 화산 분출은 과거 1만 년 사이에 가장 큰 규모였다." "1820년의 한 보고는 1815년 이래 기상의 '이상' 상태라는 것에 대해 주장했는데, 그 결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산됐다. 기후 요인이 정말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듯하다." "기후가 콜레라 유행에 한몫하기는 했지만, 식생활, 하수 처리, 위생은 더욱 중요한 요인이었다. 콜레라는 무엇보다도 빈곤의 질병이었기 때문이다." "질병, 빈곤, 제한된 취업 전망은 모두 유럽에서 이민의 물결을 내보내는 동력 역할을 했다." "남·북아메리카에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새로운 노동력 공급원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관념, 지식, 문화, 유전자, 제도, 언어를 가지고 와서 급격한 사회경제적·정치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것은 유럽의 변화 역시 자극했다. 대량의 이탈 사태는 노동력의 크기를 줄였고, 이에 따라 임금을 끌어올리고 혁신·기계화·공업화에 더 큰 보상을 제공했다."(626-7)


"자원 수탈의 바탕에 있는 것은 자연에 관한, 땅에 관한, 환경을 어떤 방식이든 자기네가 원하고 최선이라고 믿는 대로 개조할 권리에 관한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자연계는 길들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천재성, 근면, 새로운 도구가 이제 생태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낫고 더 빠르게 모습과 용도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 의해 불이 지펴졌다." "모든 사람이 인간의 활동을 긍정적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고, 일부는 대신에 지속 가능성과 환경에 가해진 장기적인 충격에 대해 우려했다. 산림 파괴와 관개농업 증가가 토양의 건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현실은 삼림 파괴가 19세기와 그 이후에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로 계속됐다는 것이다. 185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대략 1억 5200만 헥타르의 세계 열대림이 초지로 전환됐다. 그 3분의 2 가까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다. 모두 식민지 팽창의 핵심 지역들이다."(634-8)


"세계의 어떤 지역은 별 혜택을 얻지 받지 못했다. 뒤쳐지거나, 물리적 기반시설(도로, 학교, 병원, 철도 같은) 측면에서도, 비물리적인 투자(제도, 교육, 지역의 능력 배양 등)에서도 별다르게 얻지 못했다. 명목상 식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들(남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들 같은)은 전형적인 피착취 위성국 노릇을 했다. 원료를 수출하고 국내 소비품은 수입에 의존했다. 세계 경제의 변화는 인도와 남아시아에 일희일비를 가져왔다. 인도는 1810년에서 1860년 사이에 국내 직물 시장의 상당 부분을 영국에 빼앗겼다. 가격 하락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기간에 곡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풍부하고 값싼 음식으로 흥청거렸지만, 인도에서는 1875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사이에 1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굶주려 죽었다." "이윤 추구, 환경의 지속 불가능한 이용,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일 경우의 자연의 복수가 결합돼 일어난 결과들이었다."(646, 650)


20장 격동의 시대(1870년 무렵~1920년 무렵)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 시장은 한층 통합되고 운송망은 개선됐으며 정보 공유가 가속화됐다. 면화 이야기가 두고 두고 반복되었다." "1930년대에는 수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말레이반도의 세계에서 가장 울창한 우림이 고무나무로 대체됐다. 특히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해 타이어로 쓸 고무 수요가 더욱 치솟았기 때문이다. 선구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따라오는 보상의 흥분은 분명한 것이었다. 남·북아메리카는 이미 벗겨먹었다. 이제 세계의 다른 지역을 벗겨먹을 차례였다." "자원 수탈은 농작물과 초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주석은 직물 생산, 기계공학, 군용 무기 같은 갖가지 산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요 용도는 보존 식품을 담는 깡통이었다. 식품 보존은 시골의 잉여 식료품을 보존하고 그것을 도시로 수송하는 핵심적인 기능이었으며, 따라서 도시화·공업화·세계화에 필수적이었다. 유럽의 주석 생산은 금세 고갈돼 다른 곳에서 공급처를 찾게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동남아시아였다."(651-4)


"인간이 위험하다(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연계에)는 가설은 19세기에 확산됐다. 그런 사고의 논리적 정점을 1960년대에 쓰인 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볼 수 있다. 그 글에서 린 와이트는 유대-기독교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을 덜 배려하게 만드는 세계관을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하고 자연과 별개의 것으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계몽시대 이래의 유럽중심적 관념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동방'의 신앙 체계를 보다 환경 친화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특히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명, 영혼, 자연에 대해 고귀하고 거의 신비적인 태도에 물들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실 종교 전통은 문제도 아니고 문제의 근원도 아니었다. 문제는 탐욕과 개인의 이득이었다. 어느 학자가 지적했듯이 환경(의 급격한 변모)와 식민 지배는 함께 가는 것이었다."(680-1)


"한 저명한 역사가가 말했듯이 19세기의 대륙 간 연결의 심화는 〈질병에 의한 세계 통합〉을 초래했다. 교역로, 이주 통로, 군대의 이동이 세계를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한데 연결하는 〈간균의 공동시장〉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크고 작은 유행병은 치러야 할 대가의 일부였다." "질병의 확산, 정치적 취약성, 경제 파탄에 대한 우려는 국제적 협력을 향한 결집된 요구를 촉발했다. 감염병을 규명하고 그 확산을 막기 위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지난 세기의 가장 유명한 대유행병인 1918~1920년의 '1918년 대유행 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응이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 유행병에 대한 시민의 대응이 투표 행태나 독일의 정치적 극단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대유행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 그리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지방 당국의 1인당 지출이 적었던 곳은 1930년대 초 현저하게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에 투표했다."(690-5)


21장 새로운 이상향 만들기(1920년 무렵~1950년 무렵)


"'자원의 덫resource trap'은 석유, 가스, 광물 자원을 가진 나라들이 권위주의 국가가 되거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 나라들에서) 광범위한 대중에게 권리 분배와 평등은 제한적이었다. 상품 가격이 해마다 천양지차로 출렁이는 경향은 또한 수입을 예측할 수 없고 경기 순환이 널뛰기함을 의미한다." "한 가지 문제는 투자가 사회 발전보다는 자원 추출에 중요한 지역과 시설 주변에 집중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리와 우라늄이 매우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코발트, 주석, 금도 묻혀 있다) 콩고에는 1960년에 여덟 개의 국제공항, 30개의 큰 공항과 100개의 작은 공항이 있었다. 광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에 걸맞은 병원, 학교, 지역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기반시설 건설은 없었다. 현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최소한의 저항을 받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708-9)


"소련에서는 많은 억압의 요소가 있었지만 한 가지 일관된 것은 자연계를 길들여야 할 어떤 것으로 대하는 관념이었다. 자연의 변형은 무산계급의 독창성과 근면성의 표현이었다. 자연은 혁명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고 이바지해야 하는 도구를 제공했다. 도시 무산계급의 이익을 위해 도시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화강암, 대리석, 철, 강철은 모두 그들이 사는 곳에서 흔히 지리적으로 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여러 광년 떨어진 곳에서 베고 자르고 파내온 것이었다. 그것을 추출할 때 환경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중앙 통제와 불가능할 만큼 짧은 기간 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물량이 요구되자, 생산 수준에 대한 과장(그것은 비현실적인 결과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악순환을 낳았다)과 공해, 유해 폐기물 처리, 광부 및 건설노동자들(강제노동자든 아니든)의 건강과 관련된 편법이 나타났다. 어떻든 매년 수백만 헥타르의 땅이 다른 용도로 변경됐다."(717-8)


"20세기 중반의 기후 패턴 변화와 지구 온난화 정체停滯의 또 다른 핵심 요인은 일반적으로 핵 관련 활동의 증가였던 듯하다. 기후 변화를 핵무기 실험과 연관시키는 것은 1950년대에 이미 나온 이야기다. 방사성-생물학적 위험을 살핀 미국원자력위원회(AEC)와 미국 공군의 한 보고서는 방사성 잔해가 상층부 대기의 이온화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논의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기에 입자 물질이 채워지면 (···) 지구의 날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연구(부분적으로 핵전쟁이 초래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이후의 연구에 의존했다)는 공중 폭발, 특히 대형 수소폭탄(그리고 그 결과로 방출된 미세먼지)이 20세기 중반 이후 일어난 지구 온난화 정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 기획자들의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기후가 새로운 대량살상 무기에 의해 우연히 변화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기후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무기의 개발이 가능한지 여부였다."(736-7)


22장 지구 환경의 재편(20세기 중반)


"1950년대에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기후 통제는 온갖 토론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주제였다. 그러나 기후 통제에 대한 낙관적인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실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비구름 파종은 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제상으로도 들어맞았지만, 경제성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를 내리게 하기는 어려웠다(더 나아가 불가능했다). 전략 무기로서든 미국과 기타 지역의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든 말이다. 자금 지원은 계속됐다. 남들이 먼저 기상 변개 기술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그 한 이유였다." "이런 우려는 터무니없이 야심찬 지구공학(기후공학) 분야의 현재 및 장래의 연구에 자금을 제공하도록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꼼꼼하게 고려된 것이었다." "1960년대가 되면 여론은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실험에 대해 그저 회의적인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의 영향에 대한 우려와 겹쳐졌다."(744-5, 749, 752)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은 전 세계에 걸쳐 중대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은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의 빈곤이라는 조건을 안고 좌익의 주장을 홍보하며 각국의 혁명을 부추기는 소련의 망령은 미국 정책 담당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아시아의 농촌 주민은 〈사실상 끝이 없는 마을의 연속 속에서 복닥거리고〉 있다고, 1950년대 초 트루먼 대통령의 대외원조 보좌관 이지도어 루빈은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곳은 〈폭력혁명의 온상〉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안에 세계 수십 개국에 차관, 원조, 전문가가 제공됐다. 2천 명이 넘는 기술 전문가들이 35개 이상의 나라에서 일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업(그 상당수는 농업 생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을 벌인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과잉 인구, 자원 고갈, 굶주림이 정치 불안 및 공산주의자 봉기와 맞물려 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업들은 냉전(즉 미국의 국가 안보)이라는 맥락 안에서 틀이 지어졌다."(761-2)


"소련의 사회경제 정책을 추동한 것은 단지 외부 세계와의 경쟁만이 아니었다. 개혁, 현대화, 적응 실패의 위험성에 대한 공포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수십만 명의 새로운 정착자들이 '미개척지'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 기반시설에 압박을 가하고 사회적 마찰과 생태 재앙을 초래했다. 그것이 소련 역사에서 〈최악의 환경 파괴 사례〉라 불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랄해로 흘러드는 강들을 관개수로로 개조한 것은 구상이 잘못돼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아랄해(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컸다)의 마른 바닥이 드러난 면적은 2010년 8만 7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바람은 매년 4500만 톤의 짜고 오염된 먼지를 확산시켜 길이 400킬로미터, 폭 40킬로미터의 지역까지 이르기도 하는 먼지 기둥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금 500만 명의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 여성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심각한 여성의학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랄해 연안의 개조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770-2)


23장 불안의 증폭(1960년 무렵~1990년 무렵)


"대규모 기아로 이어질 인구 급증에 직면한 세계의 위협은 지금 당장의 문제였다.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듭 강력해진 이야기였다. 폴 에얼리크와 앤 에얼리크가 〈인구 폭탄〉(1968)에서 싸움은 이미 졌다고 경고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온 인류를 먹일 식량을 확보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수천 만의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고 했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지구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망은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에 대한 불안과 자연계의 공업 중심지로의 변화(그것은 흙과 물과 인간을 중독시켰다)에 더해진 것이었다. 과잉 인구는 이제 또 하나의 재앙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그 답을 분명하게 밝혔다. 수전 손택은 1960년대 중반에 이렇게 썼다. 〈백인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 자주적인 문명들을 말살하고 지구의 생태 균형을 뒤엎고 이제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백인이며 백인뿐이다. 그 이데올로기와 그 발명품들이다.〉"(796-7)


"이런 문제들(그리고 공포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의 세계에도 매우 낯익어 보인다. 핵으로 인한 대규모 파괴, 경제 성장 추구로 인한 생태계 손상, 자원의 지속 불가능한 이유, 세계 인구 증가에 따른 기반시설과 식량에 대한 압박, 희망을 높이지만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새로운 착상과 기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협력 강조와 이에 관한 실질적 진전의 결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뿌리 깊은 우려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 역시 추가돼야 한다." "1940년대 말부터 상당한 정력과 자원이 극지極地 연구에 투입되었다. 그 중에서 미국이 600발의 탄도미사일 무기고로 삼기 위해 세운 그린란드 캠프센추리의 과학자들은 얼음 시료를 채취해 여러 가지 발견을 했다. 연구팀은 수천 년, 심지어 수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기후 조건의 경험적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장기적인 기후 조건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02-4)


"1992년 합의되고 1997년 교토에서 조인된 새 의정서는 각국이 〈서로 다른 수준의 책임〉을 진다는 원칙(즉 먼저 공업화된 부유한 국가들이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는)을 제시했는데, 이런 추가적인 협상들마저 결함 있는 결과를 냈다. 미국은 수정 없는 교토 협정의 비준을 거부했다. 상원은 95 대 0의 표결로 이를 부결시켰다." "기후에 관해 올바른 말을 하면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지만 그에 관한 무언가를 실천하면 선거에서 진다고 생각한 것은 부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빌 클린턴 역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더 청정한 에너지 보급에서부터 자동차 효율을 개선(그 결과로 배출을 줄이는 것)하기 위해 업계와 협력하는 것까지 말이다. 그러나 의회의 정치적 분할을 감안하면 기후 변화가 문제라는 〈광범위한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하기 위해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정말로 바늘구멍만 했다."(829-30)


24장 생태 한계의 끄트머리에서(1990년 무렵~현재)


"냉전의 몰락은 상업적 유대와 경제 성장을 더욱 부추긴 촉매재였다. 소련 붕괴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세계 기후에는 좋은 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곧 풍부한 자원이 정치적 신조와 아무런 상관없이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은 채로 세계 시장에서 판매될 기회를 제공했으며, 서방 기업의 소련에 대한 투자는 효율을 개선하고, 생산을 늘리며, 새로운 회사와 분야와 광산과 송유관에 자금을 대고, 세계 상품 가격에 압박을 가하는 데 한몫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되게 한 추동력을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과 뒤이은 카터 행정부 시기의 최혜국대우 지위 부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변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1990년대 초 중국 지도부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결정이었다." "변화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지표를 하나만 들자면, 1985년 중국에는 민간 자동차가 2만 대로 추산됐지만 지금은 2억 4천만 대 이상이 있다."(834-6)


"가장 중요한 환경 변화는 최근 수십 년 사이 인간 집단이 더욱 가까이 모여 살게 된 방식에서 말미암았을 것이다. 도시와 도회 지역은 기후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천이다. 가까이 모여 사는 것은 교환 속도를 높이게 되지만, 도시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의 중심이다. 도시 주민은 음식, 물, 연료가 필요하며 그것은 먼 곳에서 가져와야 한다." "운송은 세계 에너지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의 약 4분의 1의 원인이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더하다. 미국 전체에서는 배출의 약 29퍼센트,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배출의 약 41퍼센트를 차지한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 수치는 2050년까지 70퍼센트로 올라갈 전망이다. 현재의 인구 추세를 감안하면 이는 앞으로 30년 안에 도시에 사는 인구가 25억 명 더 증가한다는 얘기다. 이는 필시 온갖 종류의 자원 수요에, 자연적이고 비자연적인 기반시설에, 탄소와 온실가스와 열기의 배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842-3)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2010~2020년은 1880년대에 근대적인 기록 관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따뜻한 10년이었다. 과거에 특히 춥거나 더운 시기를 포함한 시대가 여러 번 있었지만(소빙기, 중세 기후 최적기, 로마 온난기 같은), 이들 경우는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니고 한 지역이나 일부 지역, 심지어 한 대륙이나 일부 대륙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난 150년은 전 세계가 거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 지구의 98퍼센트 지역에서 20세기는 지난 2천 년 중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시기였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연한 일도 아니다." "인구 증가, 도시화의 진행, 새로운 생산 및 운송 기술과 함께 더 빈번해진 상거래는 최근 수십 년 사이 더 많은 에너지 수요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영향력 있는 작가 데이비드 월리스웰스가 말했듯이 탄소 기반 연료 연소의 약 85퍼센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1989년 이후의 것이다."(854-6)


"지구 온난화를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인 섭씨 1.5도로 묶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쩌면 이미 놓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한 최근 연구는 현재의 전망치들에 근거해 세계의 평균 온도 상승을 파리협정의 목표대로 묶어둘 수 있는 가능성을 0.1퍼센트로 보았다." "세계 주민의 약 30퍼센트가 현재 이미 연간 20일 이상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후 조건에 노출돼 있다. 온실가스 배출이 극적으로 감소하더라도 2100년에 그것은 50퍼센트 가까이로 올라가고, 배출이 계속 증가할 경우에는 75퍼센트 가까이로 치솟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지역은 대개 값싼 노동력과 느슨한 환경 규제에 이끌려 고소득 국가에서 옮겨온 제조업 때문에 높은 수준의 공해로 고통을 받은 나라들이다. 1970년에서 2017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2조 5천억 톤 가까운 자재가 추출된 것으로 평가됐는데, 고소득국가가 그중 75퍼센트를 사용하고 중저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는 합쳐서 1퍼센트 미만을 사용했다."(869-71)


결론


"화석연료에서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자원과 물질에 대한 압박을 증가시킬 수 있는데, 이는 명목상 탄소중립 기술로 전환한다는 사실에 들떠 쉽게 간과될 수 있다. 따라서 풍력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로 옮겨간다는 천명된 의도는 가상하지만, 세계 에너지의 4분의 1을 이런 방식으로 생산하려면 적어도 4억 5천만 톤의 강철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다시 6억 톤 이상의 석탄에 해당하는 화석연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마찬가지로 많은 나라, 주, 도시에서 전기자동차(EV)로 전환하는 것은 충전과 재충전 때문에 전기 수요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며 전기자동차가 높은 수준의 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사실 합성 차바퀴는 미세플라스틱의 주요 원천이다. 차바퀴와 자동차 제동기 같은 비연소非燃燒 근원에서 나온 700만 톤 가까운 입자들이 매년 방출된다. 실제로 자동차 바퀴는 오늘날 자동차의 배기가스보다도 훨씬 많은 입자 오염을 초래한다."(884)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도전은 여러 가지로 인류 초기의 우리 조상들이 마주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주위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떠받치는 기후가 우리의 존재를 틀 짓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이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고, 우리가 자연을 변형시키고 개조하면 모든 장애물과 장벽을 누그러뜨리거나 우회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자신감에는 희생이 따른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땅의 40퍼센트가 지금 지력이 떨어졌다. 현재의 속도대로라면 2050년까지 남아메리카만 한 크기의 지역의 지력이 떨어질 것이다. '생태용량 초과일'(매년 자원 소비가 지구의 재생 능력을 넘어서는 날을 표시하는 추상적인 기준점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지속 가능성 쪽으로 모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은 한 해 중에 계속해서 더 이른 시기로 당겨져, 1990년대에 10월 무렵이던 것이 2022년에는 7월 말이 되었다."(896-7)


"환경 요인(기후 포함)은 인류 이야기에서 행위자(때로 개입을 해서 제국을 멸망시키고 사회 붕괴를 일으키고 불시에 사람들을 붙잡아가는)가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펼쳐지는 무대 자체를 제공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누구인지와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를 규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공연장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주인공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만) 생각하기 일쑤다. 무대장치 자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배우는 왔다가 간다. 그러나 극장이 문을 닫거나 무너지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종말을 의미한다." "우리 가운데 연료를 태우고 삼림을 벌채하고 지각에서 광물을 떼어내는 사람이 줄어들면 인간의 발자국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공상적인 과거의 지속 가능하고 푸른 낙원으로 한발 더 다가설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역사가는 이에 대해 내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897,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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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지구 생성부터 기후 재앙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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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태초 이후의 세계(대략 45억 년~대략 700만 년)


# 태초에 벌어진 주요한 생명 탄생/소멸 과정

1. 약 30억 년 전(또는 그 이전) ~ 23억 년 전 무렵 산소대폭발(GOE)로 복합 생명체 등장을 위한 조건 형성

2. 약 5억 7천만 년 전에 시작된(화석 기록에 따르면) 복합 다세포 생물 출현(대표적으로 삼엽충)

3. 약 4억 4400만 년 전(오르도비스기Ordovices期) 갑작스러운 냉각으로 한 차례 멸종 파동

4. 약 2억 5200만 년 전(페름기-삼첩기三疊紀, 트라이아스기) 거대한 화산폭발로 대멸종

5. 6600만 년 전 유카탄반도를 타격한 소행성 또는 행성 충돌(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거대한 화산 분출과 함께)로 공룡 멸종


"대규모 변화를 초래한 가장 파멸적인 사건조차도 우리가 현대 지구촌 생태계의 기본적 특징이라고 생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6600만 년 전 유카탄반도를 타격한 칙술루브 충돌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열대우림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충돌 이전에 열대림의 나무들은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서 빛이 숲의 바닥에 닿았다. 충돌 이후에는 나무들이 좀 더 밀집해서 자랐다. 아마도 대형 초식동물들이 멸종한 결과였을 것이다. 햇빛도 더 차단되고, 박테리아와의 상호작용 덕분에 공기 중에서 질소를 얻는 콩과식물도 번성할 수 있었다. 충돌로 인해 생긴 강하회降下灰는 지구 생태계에 풍화가 쉬운 인광燐鑛을 보태주었다. 그것은 다시 토양의 비옥도와 숲의 생산성을 자극하는 데 필요했다. 이는 또한 침엽수 및 양치식물과 대비되는 꽃식물의 상대적 이점을 높여주었다. 이에 따라 생물 다양성의 급증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고, 오늘날 탄소 순환의 매우 중요한 부분인 광대한 우림 지대를 위한 조건이 조성되었다."(67)


"대략 2억 5천만 년 전에 시작된 초대륙의 해체와 여러 대륙의 형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지도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후 조건 변화는 대략 560만 년 전의 '메시나기Messina期 염분 위기'를 초래했다. 그 결과로 지중해 물의 증발에 의한 건조가 일어나고 유럽-아프리카-서아시아 사이에 동식물 통로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30만 년 후 대서양의 물이 지브롤터해협을 통해 들어오고 지중해 해분海盆이 급속하게 물로 채워질 때까지 지속됐다. 이 사건이 '잔클레Zancle 홍수'로 알려졌다. 그러나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대륙의 균열 및 충돌, 그리고 큰 대양 해분의 변화가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탄화수소 광상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 세계 27개 핵심 지역에 무리지어 있는 877개의 거대 유전 및 가스전(매장량이 5억 배럴 이상인 곳들이다)의 거의 전부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인위적 요인에 의한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공해는 모두 수억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71)


"지질상의 행운이 현대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비슷한 여러 다른 일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1억 4500만 년 전에서 6500만 년 전 사이의 백악기白堊紀 동안에 세계는 지금에 비해 훨씬 온난했고 해수면도 훨씬 높았다. 수많은 죽은 해양 미생물들이 퇴적층을 이루고 그것이 결국 유층油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다른 결과들도 낳았다. 미국 남부에서는 세계가 추워지고 해수면이 내려가면서 멸종된 플랑크톤과 기타 해양 생물들로부터 거대한 백악층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매우 비옥한 땅뙈기들로 이어졌다. 특히 비가 내려 영양분이 적은 탄산염 광물을 용해시킨 뒤에 말이다. 비옥하고 검은 흙으로 인해 블랙벨트Black Belt로 알려진 미국 동남부 주들의 활 모양의 지역은 집약 작물, 특히 면화 생산에 이상적임이 입증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은 아프리카인들의 집중 주거지가 되었다."(73)


2장 인류의 기원(대략 700만 년~서기전 12000년 무렵)


"인류의 확산과 정착은 무엇보다도 생태적으로 온화한 지역을 찾아내는 일에 의해 좌우됐다. 이는 따뜻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에서부터 사바나 초원과 해산물이 풍부한 해안 지역까지 여러 종류의 주거지를 포함했다. 물론 아주 탁 트인 환경은 고의적으로 회피한 듯하다. 특히 매력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가 지중해 해안과 요르단 열곡裂谷 주변 사이의 좁다란 삼림지대였다. 물의 공급이 안정적이고 비교적 쉽게 야생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유라시아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네안데르탈인도 같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무덤과 유골 및 치아 잔편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역시 그곳에 살았던 현생인류와 피를 섞었다는 흔적도 있다. 생존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었음은 다음 사례가 입증한다. 대략 7만 3천 년 전, 매우 건조하고 빙하로 뒤덮여 힘겨운 시기여서 레반트의 주민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원인은 아마도 지금의 인도네시아 토바산의 거대한 분출이었을 것이다."(86-7)


"1만 9천 년 전 무렵의 해빙은 새로운 일련의 환경 변화를 초래했다. 북아메리카 일대의 빙상이 녹기 시작해 대홍수로 이어졌다. 이는 세계 역사상 최대급의 홍수였으며, 그 경로는 지각의 뒤틀림과 기울어짐에 의해 정해졌다. 그 과정에서 땅의 고도를 수백 미터씩 변동시켰다. 수천 년 만에 북반구의 빙상과 빙하가 물러나자 그 결과로 막대한 양의 민물이 바다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의 해수면이 크게 올라갔다. 평균 80미터나 되었다. 육상 및 해양의 생태계도 큰 변화를 겪었으며,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방출돼 대기로 들어갔다." "환경 및 기후 조건의 뚜렷한 호전이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는 물론이고 중·남아메리카 전역에 성공적으로 이주하고 영구 정착했다는 훨씬 많은 증거들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집단들이 남쪽을 향해 나아갔던 한 가지 요인은 빙하시대 이후의 온난화가 남반구 지역에서 시작돼 그 지역이 더 쾌적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95-7)


"1만 2900년 전 무렵에 일어난 새로운 기후 충격은 장기간에 걸친 온난화 과정을 갑작스럽게 역전시켰다.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로 알려진 이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당연하게도 동물상 및 식물상에 미친 영향은 심각했다. 이번에도 사냥과 기후의 압박, 또는 그 둘의 결합이 원인이었다." "레반트에서는 보다 엄혹한 여건에 대한 대응으로 상주 또는 반상주 주민이 사는 작은 정착지들이 건설됐다. 그런 변화는 자원과 기술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을 테지만, 식량 부족과 압박이 심해지는 시기에 다른 집단들을 상대로 안전과 방어의 필요에 대한 공동의 해법 구실도 했을 것이다. 정주생활은 또한 야생 곡물이 나는 땅을 보호하고 가장 좋은 장소가 남들에게 탈취되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종말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1860년대에 프랑스의 고생물학자 폴 제르베가 이 시기에 대해 처음으로 전신세全新世(홀로세)라는 이름을 붙였다."(98-101)


3장 인간과 생태의 상호작용(서기전 12000년 무렵~서기전 3500년 무렵)


"전신세는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 훨씬 좋은 기후 조건의 시작을 의미했다. 우선 대략 1만 년 전 무렵부터 변화가 일어나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 기후 패턴의 시기가 시작돼 충격의 횟수와 빈도가 줄었다. 물론 대륙 사이 및 대륙 내부에서 지역에 따라 큰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온은 상승했고, 강우량도 늘었다. 결정적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 또한 마지막 극대빙기에 비해 급증했다. 그때는 농도가 너무 낮아 광합성이 제한적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초목을 식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지속성,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했다. 한 영향력 있는 연구 보고에서 말했듯이 전신세 이전에 농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작 이후 완전히 그에 적합한 조건이 되었다." "학자들은 또한 사냥과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인해 대형 동물의 수가 즐어든 것이 보다 고정된 곳에 있는 식량의 원천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고 주장한다."(107, 110)


"곡물을 갈고 가공하기 위한 더 무거운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은 인간 신체에 더 큰 부담을 주어, 농작물 경작이 더욱 확산되면서 골관절염 환자 증가로 이어졌다. 또 곡물 탄수화물의 당분은 치아 법랑질을 손상시켜 충치 발생률 증가로 이어졌다. 치아 건강의 악화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아마도 다산과 그로 인한 호르몬 분비의 불규칙성, 임신 중의 면역력, 임신 중 및 그 이후의 타액 성분 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6000년 무렵의 황소 이용(처음에는 탈곡에 이용했다)은 중요했다. 시간과 에너지가 늘어난 셈이어서 인간 노동력에 대한 압박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식량 소비를 크게 늘리는 바탕을 제공하는 데 이바지했던 것이다. 대형 동물을 농업에 이용한 것은 수레와 쟁기 같은 혁신을 자극했고, 그것이 생산을 더욱 늘리는 데 이바지해 더 많은 땅을 빨리 경작할 수 있게 해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이로 인해 사회 불평등(성 불평등을 포함한)의 씨앗이 뿌려졌다."(116)


"인구 밀도 상승에는 반대 급부가 있었다. 가까이 모여 사는 것은 더 큰 생물학적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세균병을 일으킬 수 있는 배설물 오염과 열악한 위생시설 같은 것들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와 기생충이 확산되기 쉬운 상황도 마찬가지다. 저장된 식량 자원은 설치류를 불러들였다. 그것은 동물원성 질병(즉 동물에서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질병)의 중요한 매개자였다. 소, 염소, 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인구 증가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인구 재생산이 질병으로 인한 유병과 사망의 감소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염병균이 번성하는 공동체에는 희망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것들은 흔히 단기적으로 맹위를 떨치지만 반복적인 발병은 결국 주민들을 '질병 유경험자'로 만들고 잦은 노출 덕분에 부분적인 면역이 생기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기후 조건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수 있게 하거나 인구 규모가 외부 이주를 필요로 할 때 장기적인 이점을 제공했다."(117)


4장 초기 도시와 교역망(서기전 3500년 무렵~서기전 2500년 무렵)


"영구 정착지 건설에는 개인 소유에 대한 관념의 형성이 필요했다. 동산 및 부동산, 땅과 거기서 나는 자원에 대한 접근권 및 통제권 같은 것들이다. 고대와 현대 세계의 사회적 위계의 발전과 존재는 흔히 도시라는 무대와 관련이 있고, 무엇보다도 재산 소유권(경지든 작물이든 가축이든 물건이든)과 관련이 있었다. 그 적절성은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높아졌다. 부의 축적과 양도는 사회 지배층을 형성할 수 있게 했고, 이에 따라 정치 구조와 의사 결정을 규정지었다. 부의 불균형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도시화된 주민이라는 표시였다." "일부 학자들은 높은 지위와 부를 차지한 사람들의 역할이 도시가 더 크고 더 효율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토지 소유권을 장악하고 가축을 소유하고 생산을 통제한 지배 계층은 자기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장려책을 제공함과 아울러 강압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도시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정치 구조를 좌우했다."(135-7)


"환경과 천재지변은 특히 '교화의 신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일 수도 있고 그저 심심해서일 수도 있지만 일탈과 명백한 존경심 결여에 대한 벌을 내렸다. 눈에 띄는 (그러나 놀랍지는 않은) 사실은 기상 조건의 변화(가뭄이 가장 중요하지만 홍수나 폭풍우도 마찬가지다)에 취약한 지역들에서 '교화의 신들'에 바탕을 둔 우주론 체계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 신들은 그런 사건들을, 벌을 주고 자기네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교훈을 주는 데 사용했다. 화를 잘 내고 인간에게 재앙을 잘 내리는 신들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문학 및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문학과 종교 행위에서 나타나듯이 여기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파괴와 처벌이 아니었고, 좀 더 추상적이고 평화적이었다. 한 학자는 초기 중국인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신들과 다투지 않았던 이유가 아마도 〈생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다툴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39-40)


"통제를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도시 주위에 성벽을 쌓는 것이었다. 초기 도시 성벽은 적어도 일부 경우에는 환경적 요인(특히 물과 홍수)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건설됐다는 주장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방어용 요새 구실을 하는 기능을 떠맡았지만 말이다. 최근 지적된 바 있듯이 우르크 같은 곳의 도시 성벽 규모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군사적 요구에 비해서도 훨씬 컸다. 그래서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건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집트에도 그 자연스러운 짝이 있다. 이곳에서는 군사력에 대한 투자와 지출이 왕의 위신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주장(서로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은 성벽이 노동력 공급을 일정하기 유지하기 위해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곡물 공급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사람이 존재하도록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도시 자체의 장기적인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142-3)


5장 분수에 넘치는 삶의 위험성(서기전 2500년 무렵~서기전 2200년 무렵)


"기후 자료는 〈아카드의 저주〉로 알려진 '증발 사건' 가설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홍해 북부의 퇴적물은 북대서양진동(NAO)이나 태양의 변동성과 관련된(아마도 그 둘 모두와 관련된) 서기전 2200년 무렵의 환경 변화를 보여준다. 오만 앞바다의 화석화된 산호는 모래폭풍이 불었던 오래 끈 겨울철을 보여준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난 듯한 흉작과 연결돼 있었다." "이 순간은 심지어 메갈라야기Mehalaya期의 시작으로 명명되었다. 산소 원자동위원소의 변화가 특히 계절풍 강우의 감소를 드러낸 인도 동북부의 한 동굴이 있는 주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국제층서위원회(ICS)에 따르면 서기전 2200년 무렵의 기후 변화는 대가뭄을 촉발했고, 그것이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문명 붕괴를 일으켰다.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인더스강 유역, 창장 유역 같은 곳들이다. 따라서 서기전 2200년은 지질학사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이었다."(157-8)


"그러나 기후 패턴 변화는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일어나며, 고고학 자료는 결정적이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사실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은 나람신이 이끈 군사·행정 개혁이 아카드를 성공적인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카드의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붕괴의 원흉이라기보다는 제국 중앙의 강화를 지휘한 사람이었다. 재난을 아람신의 탓으로 돌린 것과 〈아카드의 저주〉를 구상한 동기는 환경의 압박과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대해서보다는 왕권의 본질과 무엇보다도 지배자와 신들의 관계에서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한 후대 수메르인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후대에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들에게 불경스러우면 후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람신은 니푸르의 에쿠르 신전에서 신을 모독했으며 스스로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신들은 자애로울 수 있지만, 그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생겼다."(165)


"기근과 질병은 거대한 자연재해에 비해 더 흔하기도 하고 더 파괴적이기도 하며, 대개 인간의 오판이 빚은 결과다(현대의 믿음과는 반대다). 아카드 제국의 경우 문제는 상당 부분 확장하고 앗아가는 제국 영역의 현실과 끊임없는 중앙집권화가 정치적 분열과 균열, 심각한 공급 문제로 이어진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위태로운 균형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근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란과 사회적 격동이 발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점은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상당한 기후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느냐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 지배층, 사제, 관료, 노동자가 적응(특히 커지는 환경 압박에 대해)을 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그 선택과 조치가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느냐다. 결론적으로 기후가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렸다기보다는 아카드 제국이 스스로 무너져 새로운 도시국가 무리 속으로 쪼개져 들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167-8)


6장 첫 연결의 시대(서기전 2200년 무렵~서기전 800년 무렵)


"흥미롭게도 역사가들은 흔히 제국, 왕국, 국가의 붕괴나 쇠락에서는 기후의 역할에 대한 논의에 곧바로 뛰어들면서도 통합, 팽창, 개화의 패턴에서는 그것을 주저한다.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위기 이후의 긴 기간 같은 경우 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는 놀라울 것이 없다. 대규모 영구 정착지가 있는 주요 지역은 환경적·생태적으로 인구를 부양하기에 적합한 곳이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성장을 용이하게 하기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취약하지 않은 환경은 또한 인구 증가를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역으로 왜 다른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 중국의 일부 지역, 남아메리카 서북 변경 등이 서기전 2200년 이후 1천 년 동안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다. 동남아시아와 서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말라리아가 인구 규모를 늘리는 데서 제동 장치 역할을 했다. 다른 곳에서 매우 중요했던 종자, 곡물, 식품을 얻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184-5)


"대규모 화산 분출 같은 일회성 사건들이 극적이고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넓게 보아 진짜 문제는 홍수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장기간의 가뭄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인구 하중荷重이었다. 계속해서 흉년이 들 때 먹여야 할 입이 많으면 문제가 된다." "물론 약점은 주로 개개 도시의 규모에 있었다. 궁핍할 때 가장 취약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도시 정착지는 또한 잠재적 위기의 핵심이었다. 불만에 차고 굶주리고 열악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봉기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또는 얼마 전에 편입된 민족들이 봉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특히 군사적으로 정복된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변경에 위치한 지역은 멀리 떨어진 중앙의 지배에 의해 잃을 것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과 해법을 제시하는 독자 세력이 가장 큰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186-7)


"긴밀한 연결은 갑자기 해법의 일부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뒤집힐 수 있다. 상호의존은 취약성이 쉽게 극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빠르게 확산되고 통제를 벗어난 듯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여러 붕괴의 단일한 주요 원인을 규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염의 원리다. 관계망의 한 부분의 문제(흉작 때문이든 지진 피해 때문이든 혈족 사이의 내분 때문이든)는 장애와 혼란, 심지어 관계망 전체의 체계 와해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 고도의 장거리 교역망 또한 상호의존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계망이 붕괴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회 구조, 국가, 제국이 흔들리고 심지어 붕괴할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지역과 역사의 여러 시기에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그 한 사례는 수백 년 후 서유럽의 로마 제국 멸망이다. 대단치 않은 압박이 하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역사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암흑시대'가 되었다. 20세기 말 소련 진영도 거의 하룻밤 사이에 해체됐다."(187, 190)


7장 자연과 신에 대한 관심(서기전 1700년 무렵~서기전 300년 무렵)


"환경 악화, 자원 과소비, 지속 불가능한 인구 유지 부담의 위험은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었다. 일례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가장 이른 점토판인 고古바빌로니아 시대의 것은 서기전 17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생태 경계를 그 한계 너머로 밀고 나아가는 데서 오는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인구 과잉은 엔릴 신을 짜증나게 했다. 그는 〈그들이 내는 소움을 들어야〉 했고, 곧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불평했다. 불평이 지속되자 신들은 그 문제를 직접 처리하기로 하고 사람들 대다수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어느 정도 평화와 정숙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극심한 가뭄을 내려보냈고 그것이 기근을 초래했다. 그 밖에도 과도한 소음과 과도한 사람 수에 대한 다른 '해법'들도 있었다. 일반 질병과 전염병 같은 것들이었다. 가장 극적인 시도는 대홍수였다. 고고학 증거로 입증됐고, 아마도 후대의 이집트 기록의 바탕이 되고 성서에도 나오는 사건이었다."(195-6)


"수백 년(혹은 수천 년)에 걸쳐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농업이나 건축이나 정치 구조나 경제 등에서 연속성도 있었다. 그런 연속성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에 있다. 각 사회는 개별 신에 대한 숭배, 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조언과 경고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개입하려고(특히 기후 및 그 변덕과 관련해서) 노력하는 데서는 접근법이 매우 비슷했다. 천문 일지는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상 현상을 식별한 뒤 그것을 이해하려는 틀을 만들기 위해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 해석하는 일은 메소포타미아 세계의 선지자와 사제들이 담당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신들의 변덕과 의지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징후와 조짐을 설명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황제 요堯 역시 〈천문 담당관에게 일출과 일몰, 항성과 행성을 관찰하고 366일 태양태음력을 만들며 윤달을 계산〉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202, 207)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전 3세기까지 황허강과 창장 유역, 지중해 동부, 레반트, 갠지스강 유역의 철학, 종교, 행동이 정립되고 재정립된 정도와 그 파장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언급했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추축시대Achsenzeir'로 묘사했다." "다른 학자들도 이 시대를 '문화적 결정화結晶化'의 시대, '초월시대'였다고 주장했다. 〈물러나서 앞을 내다보는〉 것으로 묘사된 새로운 능력이 특징이었다." "중요한 것은 문헌의 급증이었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보존·전파·복제였다. 목록, 설화, 경전과 기타 기록물들이 정보 뭉치를 형성해, 그것을 배우고 토론하고 추가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요인은 도시화와 풍요의 수준이 높아진 일이었던 듯하다. 물질적 보상이 자기수양과 이타심이라는 변화를 자극했다. 이는 서기전 6세기 무렵 꽃을 피운 여러 신앙 체계를 통틀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남아시아의 불교와 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동아시아의 공자와 노자 등의 가르침이 그랬다."(226-7)


8장 스텝 변경과 제국들의 형성(서기전 1700년 무렵~서기전 300년 무렵)


"서기 1200년 무렵, 말을 다루고 조련하고 기르는 기술이 갈수록 정교해지면서 식용으로의 의존도와 경제적 이용이 모두 증대했던 듯하다." "말 사육이 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몽골까지 뻗어 있는 개방된 스텝 지역이 특히 건조했던 시기에 시작되고 극적으로 확산됐다는 사실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돼왔다. 그들은 목축을 통한 생계유지와 음식, 단백질, 우유의 공급원이자 노동력 보충을 위해 말에 의존한 것은 기후조건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이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목초지가 필요해졌다. 정착 형태도 반半정주적인 것에서 보다 분산 수준이 높은 형태로 크게 바뀌고 이동의 빈도도 높아졌다. 동위원소 자료는 반추동물이 정착지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풀을 뜯은 것과 달리, 말은 스텝을 가로질러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음을 시사한다. 이런 변화들은 사상, 신앙, 의례의 확산과 상품 및 기술의 교류를 촉진해 장거리 접촉망을 형성하는 데 중요했다."(238-9)


"물론 정주 사회와 유목 사회의 관계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의 상호의존성이었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산물을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소비자들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이런 필요는 단일하지 않았고, 그것 자체도 현지의 요구와 취향과 기후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우유와 채소는 중앙아시아에 비해 서아시아 일대에서 식료품으로 더 중요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고기 소비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환의 패턴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목축민들은 식료, 자재, 상품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사치품과 사회 위계 및 부족 지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 유용한 핵심 요소가 되는 물건의 원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지위를 과신하는 데 사용하고, 자기 가족이나 친족 집단, 더 넓게 관계망을 상대로 사여했다. 초지는 집단의 공동 소유였지만, 동물은 개인의 소유였다. 그 결과로 위신은 가축의 구성이나 규모를 통해서 과시할 수 있었다."(243-4)


"인도는 일찍이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가 '제국이 없는 곳'으로 묘사한 지역이다. 특정 시기의 분명하지만 단명한 예외가 있기는 했다. 서기전 3세기 아쇼카 대제 치하 또는 500년 후 굽타 왕조 치하 같은 경우다. 그러나 대체로 말해서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 그렇게 중요했던, 그리고 말 사육과 정치적 경쟁에 의해 가속화된 합병, 팽창, 중앙집권화의 동력원은 인도아대륙에서는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생태적 요인이 여기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변동이 심한 기후 패턴에 따른 강의 불안정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강들은 자주 토사가 쌓이고, 수심이 깊은 수로가 막히며, 강의 삼각주가 예측할 수 없게 형성된다. 메콩강과 이라외다강은 하구에서 매년 50미터씩 육지를 넘어 확장된다. 자바섬과 솔로강은 라인강의 여섯 배나 되는 퇴적물을 나른다. 이 때문에 도시 생활은 위태로웠다. 동남아시아 일대의 주요 도시 정착지들은 자주 붕괴하고 버려졌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말이다."(251)


9장 로마의 온난기(서기전 300년 무렵~서기 500년 무렵)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성취를 사회, 경제, 군사, 문화의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상이한 언어가 사용되고, 다양한 종교가 신봉되며, 다양한 관습이 받아들여지는 느슨한 정체성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로마와 그 시민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에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적들에 비해 더 잘 조직되고 곤경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줄 알았다. 그들은 남들에 비해 우호적인 상황을 잘 이용했다. 기회를 잡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뛰어났다. 요컨대 로마는 그 모든 경쟁자들과 잠재적 경쟁자들을 압도했기에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운이 좋았다. 우선 지중해가 다른 주요 바다나 수계에 비해 고요하고 건너는 데 덜 위험했다는 사실은 전체 연안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돈이 덜 들고 덜 위험했다는 애기다. 더욱이 연결망이 확장되거나 추가될 기회가 제공돼 교역이 증가하고 지적 지평이 넓어지며 공통의 문화적 가치가 확산됐다."(271-2)


"기후 조건도 로마가 이웃, 한 칸 건넌 이웃, 더 먼 이웃들과 대결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이례적으로 좋았다. 여기에는 서기전 2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습도가 높았던 긴 기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그리스 및 페니키아 식민지의 확대, 그리고 로마 및 카르타고의 등장과 때를 같이한다. 이 시기는 '로마 온난기'(또는 '로마 기후 최적기')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는 350여 년 동안 지속됐다. 정확히 로마가 지중해, 유럽,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안에서 최강자로 떠올랐던 시기다. 이 시기는 지난 4천 년 중에서 단연 가장 습한 시기(꽃가루 및 바다와 호수 생물에서 나온 유기물 증거로 알 수 있다)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4천 년의 지중해 역사에서 단연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는 데 이바지했고, 그것은 다시 인구 증가, 정복을 위한 인력, 안정성을 개선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자들이 자기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했다."(272)


"이 시기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제국의 시대였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제국은 흔히 이웃하는 세력권들이 서로 경쟁하고 모방하고 위협받는 상황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팽창 과정이 일반적으로 기후 조건이 유리한 시기에,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긴 안정기에 일어난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제국 출현을 기후 때문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 정치체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과 물류상의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각 제국은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반응에 직면했다.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단일 문자 체계와 제한된 언어의 다양성이 화합과 제국 핵심의 강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 로마 영토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많은 언어가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사용됐다. 로마의 경우 서로 다른 민족들을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 더욱 인상적이었다."(275)


"로마는 하나의 유용한 사례 연구를 제공한다. 모든 제국, 국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성공이(그리고 도시화도) 막대한 환경 훼손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상품, 사람, 관념이 중심부로 몰려들면서 천연자원에 부담이 가해졌다. 그것들을 원거리에서 가져다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소비자와 산업에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추산은 쉽지 않으나 수십만 명에 이르는 로마 같은 대도시의 주민들에게 난방과 음식과 물자 등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데는 분명히 실제상으로나 물류상으로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벽돌, 주화, 기와, 유리 제품, 철제 도구〉는 장작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다. 로마 전성기의 에너지 생산 규모는 그렇게 컸기 때문에 그린란드의 얼음에 들어 있는 납 미립자가 공업혁명 시작 이전의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많았다. 모든 제국은 생태발자국을 남긴다. 로마의 그것은 엄청났다."(277, 281)


10장 고대 말의 위기(500년 무렵~600년 무렵)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썼다. 〈홍수, 전염병, 흉작, 또는 그 유사한 원인에 의해 때때로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며, 이에 따라 예술과 사회 제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사라졌다.〉 이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런 재난은 인류에게 종종 닥쳤으며, 다시 일어나리라고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 보일지라도 인간 집단은 회복하고 〈마치 처음부터 시작하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은 훌륭하며, 공정하게 말해서 대체로 옳다. 그러나 어떤 재난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심하며, 때로 그것이 가한 파괴의 규모가 파멸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6세기 전반에 잇단 기후 관련 현상들이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규모의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 치명적이었던 것이 530년대와 540년대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대규모 분출이었다." "한 학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530년대와 그저 추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시기는 전신세에서 가장 추운 때였다.〉"(308-9)


"학자들은 이 화산 폭발들 및 그와 연관된 기후 충격이 연쇄적인 사건들의 시작이라고 흔히 생각했다. 〈동로마 제국의 변화, 사산 제국의 붕괴, 아시아 스텝과 아라비아반도 바깥으로의 이동, 슬라브계 민족들의 확산, 중국의 정치적 격변〉 같은 사건들이다. 이것들은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남아시아 일대의 주요 변화와도 관련이 있고 또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일어나고 광대한 아라비아 제국을 건설하는 길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화산 활동과 그 영향에 대해, 거대한 일련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혁명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기존의 문제를 악화시키고 당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던 파열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예를 들어 식량 부족은 수확량 감소와 함께 인구 압박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격변기의 수혜자가 더 잘 적응하거나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사회·민족·문화였던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311-3)


"이례적으로 추운 날씨는 쥐의 생존과 벼룩 번식에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함에 따라 전염병 발생을 야기했다. 흉작을 메울 필요 때문에 지중해를 건너는 식량 수송이 늘었고, 그렇게 늘어난 접촉은 다시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을 초래한 연결망의 강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햇빛 감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간의 면역 체계와 특히 세균 감염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비타민 D 결핍을 초래한 것이다. 이런 요인들이 이제 대규모 전염병이 유행하는 데 완벽한 조건을 조성했다."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 주민들에 대한 유전자 연구는 그들이 자가염증성 질환에 민감하게 하는(그 결과 페스트균에 저항력이 강한) 돌연변이를 보여주었다. 재구된 그 유전체는 유스티니아누스 전염병, 1340년대의 흑사병, 그리고 그 후에 계속 나타난 전염병들과 일치했다. 6세기의 발병이 유전체에 새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유행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염에 널리 노출된 결과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318-20)


11장 제국의 전성기(600년 무렵~900년 무렵)


"아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의 나이테와 남·북극의 얼음 시료 증거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626년에 대규모 화산 분출이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남극 자료에 징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 화산이 북반구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북부 그린란드에서 기록된 이 분출의 황산염 변이가 지난 2천 년 동안의 최대치(18세기 말의 라키 화산은 제외하고)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후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다른 곳도 마찬가지다)의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재구에 따르면 한창때에 섭씨 3.4도가 내려갔다." "압력과 위험을 늘려가는 일련의 환경에 직면해 취약함을 드러내는 곳은 정주 사회 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이례적으로 추운 시기에는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금세 죽어나간다. 그런 재난은 종종 경기 부진에 기인한 사회적 영향을 촉발했다. 빈곤 증대와 대량 이주 같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체제 붕괴는 급속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331-2)


"이런 엄청난 변화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무함마드라는 젊은 상인이었다. 무함마드와 그의 운동 및 추종자들은 전쟁과 질병으로, 경제 위축으로, 그리고 붕괴하는 정주민 국가들과 유목민 연합(전자는 탈진했고, 후자는 끈이 풀어지고 있었다)의 세계 질서에 의해 생채기가 난 세계에 등장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 동반자들은 절묘한 정치적 합의로 메카의 지배층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과거 이교도 사당이었덤 카바가 이 도시의 핵심으로 지정됐다. 이것이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파벌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길을 열었고, 공통의 정체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 정체성이 제공하는 우산 아래 지역의 서로 다른 모든 민족들이 모일 수 있었다. '후다이비야 화약和約'으로 잘 간직된 이 합의는 메카, 그 주변 지역, 그리고 무함마드 자신에게 전환점이 되었고, 세계사에서도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335-6)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의 나이테 기록, 아랄해의 염도 수준, 북대서양진동이 매우 활발해진 쪽으로 변화했음이 관찰된 것 등으로 판단해볼 때, 800년 무렵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더 춥고 더 습한 조건에서 더 따뜻하고 더 건조한 조건으로의 추세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제기한 문제는 오아시스 정착지 수의 감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착지는 이후 수십 년 사이에 거의 70퍼센트가 줄었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란 서부와 유프라테스강 범람원에서 도시와 마을, 농경지가 버려진 사실을 보면 분명한 듯하다. 기후 변화에 더해진 것은 토양 염분의 급속한 증가로 인한 생태계 압박이었다." "이 문제는 800년 무렵 부유한 지배층이 자위, 연줄, 정치적 압력을 동원해 토지 소유를 성공적으로 늘려가기 시작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그들은 조세 체계와 수자원 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희생시켜 단기적인 이득을 가져왔다."(351-2)


12장 중세 온난기(900년 무렵~1250년 무렵)


"역사가 휴버트 램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기후가 눈에 띄게 따뜻했던 서기 1000~1200년 무렵을 '중세 온난 시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후 수정을 거쳐 지금은 학자들이 보통 '중세 기후 이변' 또는 '중세 온난기'로 부르고 있다." "9세기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북대서양을 건너 페로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로 진출한 것은 또한 극지 빙모의 퇴각(이제 얼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종의 북방 이동, 육상에서의 초목 재배에 적합한 조건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북대서양으로 진출한 것은 지역 교역망 및 지식 연결망뿐만 아니라 장거리 교역 역시 강화하는 더 넓은 활동의 일부였다. 동쪽과 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졌고,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은화가 우선은 노르드인의 땅과 발트해 지역에서, 이어 다른 곳들에서 유통되었다. 이런 활동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어우러져 생태계를 변화시켰다. 식용 동물 사냥과 교역도 마찬가지였다."(363, 369-71)


"서기 800년 무렵부터 서태평양 난수역暖水域의 해수면 온도가 갑작스럽게 낮아지고 강우대降雨帶가 북쪽으로 밀쳐졌다. 바누아투, 사모아, 통가, 피지가 있는 다도해의 습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과거 2천년 중 가장 건조한 시기가 되었다. 그보다 거의 1500년 전에 그곳에 정착한 이들 섬의 주민들은 그 이전에는 더 북쪽의 섬들을 탐험하려 하지 않았다. 설령 탐험했더라도 영구적으로 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착의 흔적이 거의(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기상 패턴의 근본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람은 폴리네시아 변경으로 가서 탐험하는 일을 쉽게 만들었다." "방사성탄소 분석은 이주의 물결이 먼저 쿡제도로, 그 후에 동폴리네시아로 넘어갔음을 보여준다. 하와이, 라파누이, 뉴질랜드 사이의 넓은 구역이다. 여러 섬들이 잇달아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도 식민화됐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데려간 돼지 등의 가축이나,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을 쥐 등의 동물이다."(373-4)


"사회 및 환경의 변화는 900년 무렵 이후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분명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서 농작물 잉여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군도들 사이, 그리고 섬들과 남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교류가 증가했다. 이는 앤틸리스제도에서와 같은 도기 양식의 큰 변화로 입증될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섬들 사이의 교류가 급격하게 증가한 징표로 해석됐으며, 또한 전통적인 신들(그들이 이전에 건조한 상태를 유지해준 것이 이제는 좋지 않거나 심지어 잔인한 것으로 여겨졌다)에 대한 신뢰 상실에 따른 반응으로도 해석됐다. 그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이 다양한 동식물 종을 카리브해 여러 지역에 들여온 것이다. 그것이 변화의 촉매 역할을 했다. 이제 현지 주민들은 물고기, 게, 조류에 덜 의존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들의 개체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 섬의 삼림이 벌채됐다. 섬에 처음 들어온 동식물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후 변화가 교류와 신앙 체계와 심지어 식습관의 변화까지 초래한 것이다."(375-6)


"중세 초에 한 무리의 제국들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생겨났다. 그 적절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송宋 왕조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왕조가 등장해 성공을 반복했고, 그들은 서로 모방하고 영향을 미치고 경쟁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무리를 지어 등장해 직간접적으로 서로를 자극했다. 인도 촐라 왕조, 지금이 미얀마의 파간, 캄보디아의 앙코르, 인도네시아 열도의 스리위자야, 지금이 베트남의 다이비엣이 거둔 성공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인도양과 아시아 상당 지역 일대에서 지리적·상업적·문화적 지평이 급속하게 넓어진 것의 일면이었다." "서로 뒤얽힌 인도양 세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고대에도 아시아 여러 지역의 해안과 내륙을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유럽과 연결하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활동의 규모였다. 시야와 야망이 거창한 국가와 왕국의 등장은 규모와 물량 모두에서 눈에 띄는 상업적·문화적 교환의 속도를 과시했다."(384-5, 388)


13장 질병과 신세계의 형성(1250년 무렵~1450년 무렵)


"칭기즈칸의 성공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통제와 협박을 위한 도구로서의 극단적인 폭력의 선택적 사용, 새로운 목표물을 찾아내는 기동력 있는 정찰대의 조직력, 정보 수집에서의 뛰어난 집행력, 새로운 기술과 전술 채택(예를 들어 대포의 사용), 전쟁터에서의 최대한의 혁신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성공의 연료는 1211년에서 1225년 사이의 이례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시기가 제공했던 듯하다. 몽골에서 이 시기는 무려 1110년 이상 만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린 시기였다. 이런 기후 조건은 환경의 수용력을 크게 증가시켜 풀이 더 많이 자라게 하고 가용 초지를 극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가축 떼의 규모를 크게 늘리는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말이었다. 칭기즈칸과 그 추종자 및 계승자들은 전술적으로 뛰어났겠지만, 몽골은 행운을 만난 덕분에 방대한 자원을 이용해 적들을 물리치고 제국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주 제때에 할 수 있었다."(406-7)


"동아시아에서 1260년대 이후의 100년 동안에는 평균 기온이 자주 떨어졌다. 1270년대, 1310년대, 1350년대는 엄혹한 기후 조건이었음이 한국, 일본, 중국의 여러 문헌 및 기후 자료들로 입증됐다." "흉년이 들면 수입이 줄고, 그것은 식량 배급과 재난 구제로 인해 더욱 힘겨워졌다. 이는 결국 황제가 귀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떨어뜨렸다." "늘 그렇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점에서, 사회 불안이 이 시기의 일상적인 특징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영향은 14세기 초에 특히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시대의 시인이자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단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을 따서 '단테 이상 기후'로 알려지게 된 급속한 기후 변화 국면이다." "이 충격은 북유럽 일대 여러 지역에서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군중을 이루어 프랑스 곳곳에서 광란을 벌였다. 그들은 성채, 왕국 관리, 사제, 나환자를 공격하고 1320년 랑그도크 일대에서 특히 유대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415-7)


"1336년에서 1339년 사이의 극심한 가뭄 현상은 일련의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나이테연대학 기록으로 입증된 강우 부족 현상은 초목 면적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는 설치류 개체 수에 대한 압박(먹을 것과 물 공급 부족으로 사망률이 증가했다)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균을 옮기는 벼룩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전염병 전파자는 인간이었다. 몽골이 팽창에 의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가 만들어짐에 따라 경제적·문화적 교류가 촉진되고 교역로를 따라 빠른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 연결은 융단이나 옷 같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적합했고, 그것은 벼룩, 진드기, 이가 확산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것이 감염을 촉진했다. 벼룩 등이 달라붙어 있는 사람과 동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식량, 구체적으로는 잡곡의 장거리 이동은 마찬가지로 '꼽사리' 설치류, 그들과 동반하는 기생충, 그리고 세균 자체를 위한 완벽한 조건을 제공했다."(421-3)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득이 있었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카드, 수레, 말, 황소, 노새, 배, 헛간, 곡물 창고〉가 더 많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전염병 덤'이었다. 역설적으로 기후의 출렁임, 흉작, 장거리 교역에 대한 의존, 격렬한 전쟁, 질병 환경의 변화가 세 대륙에 걸쳐 공동체들을 초토화시킨 조건들을 낳았지만, 종종 장기적인 성장의 촉매제 역할도 했다." "몽골 제국의 건설,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상업적·문화적 연결의 강화, 매우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난 광범위한 대유행병 이후의 시기는 길고도 완만한 통합의 시기의 서막이었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확립된 정치적 중심지와 그곳들을 한데 묶은 연결망의 지리적 주변부에 있던 국가와 민족들이 팽창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거의 글자 그대로 말이다."(437-9)


14장 생태 지평의 확대(1400년 무렵~1500년 무렵)


"흑사병 이후에 여러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이 유럽으로 팽창한 것은 다른 종류의 보상을 제공했다. 대륙 일대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단합이 이루어졌다. 유럽 왕국들 사이의 치열한 교전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초부터 최소한 1600년까지는 갈등이 50퍼센트 이상 줄었다. 이는 오스만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 종교개혁 및 개신교-가톨릭 공동체의 분열과 시기가 겹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오스만의 군사적 능력과 이슬람교 및 튀르크인의 팽창을 뒷받침할 동력은 교회의 역할과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관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고 추가적인 정복 위협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다. 따라서 오스만은 역설적으로, 개신교가 이전의 개혁 운동이 실팼던 방식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한 단결을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은 유럽의 종교, 정치,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441-3)


"정복, 팽창, 왕조 교체가 언제나 구심력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격파를 던져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398년 티무르의 잔혹한 델리 약탈이 그랬다. 그것은 인도아대륙 상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던 술탄국 분열의 촉매제 노릇을 했다. 그 붕괴는 도시국가들의 개화를 촉발했고, 이전에 북쪽의 수도로 흘러가던 조세 수입이 이제 지역에서 재분배되면서 지역 간 상호작용의 범위도 확대됐다. 델리의 손실은 구자라트와 오리사의 소득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원 왕조가 멸망한 뒤 몽골인들이 움츠러들면서 다른 이들에게 기회가 열렸다. 1390년대 한반도에서는 이성계 장군이 권력을 잡은 뒤 대규모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땅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려는 시도가 중심이었다." "1428년 다이비엣의 레 왕조는 〈평오대고平吳大誥〉를 발표해 명나라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고, 여기서 〈이제 우리 다이비엣이 진정으로 문명화된 국가〉이며 독자적인 풍습과 풍광과 민족의 나라라고 선언했다."(457-8)


"유럽인들은 왜 애초에 본향 근처[서아프리카]에 머무는 대신 대서양 건너로 확장하고자 했을까?" "열대 아프리카의 질병 환경에 초점을 맞춰온 역사가들은 유럽인들이 역학적으로 중대한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현지 주민들이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해온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신세계'에서는 생물학적 승산이 그들에게 크게 유리했다." "이는 모두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조직이 매우 발달해 식민화를 고려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말이다. 사실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해안에서 쏘는 대포 너머로〉 뚫고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콩고, 베닌, 오요와 기타 왕국들은 습격을 완벽하게 물리칠 수 있었고, 고국으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나온 소수의 사람들이 가하는 군사적 압박에 그다지 위협받지 않았다. 그들의 정착지는 해안의 몇몇 요새에 불과했고, 그들의 상업 활동은 협상에 의존했다."(4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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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기후적응 시대가 온다 - 종말로 치닫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김기범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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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구는 인류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은 지구가 아닌 인류 자신을 위한 행동이자 우리를 살리기 위한 행동일 뿐 지구를 위한 것도, 지구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더 이상의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전 세계적인 공조 체제를 마련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것. 둘째, 이미 온도가 올라간 상황에서 근미래에 닥쳐올 기후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적응 정책’을 펼치는 것. 이 책은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포함해 인류가 지금껏 노력을 기울여온 첫 번째 방향의 대응이 성공적이었는지 살펴본 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두 번째 방향의 대응책을 점검한다. 폭염, 해수면 상승, 전염병 발발 등 지금껏 우리가 마주해온 각종 기후재난의 형태를 실감 나게 소개하면서도, 우리가 왜 이러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크게 조명받지 못했던 기후적응 정책의 실태를 우리의 현실에 맞게 풀어내고자 한다. 14-5)


1부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인가


국제 연구 단체인 세계 탄소 프로젝트Global Carbon Project가 2023년 12월 5일 발표한 <2023년 세계 탄소 예산 보고서>에는 2023년 화석 연료 사용으로 배출된 온실가스가 2022년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세계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22년보다 1.1% 증가했고, 인간 활동으로 인한 총 온실가스 배출량은 409억t으로 분석됐다. 기상청이 2023년 6월에 발간한 <2022 지구 대기 감시 보고서>에 의하면 충남 태안군 안면도 기후변화감시소의 이산화탄소 배경농도는 425.0ppm을 기록했다. 2021년보다 1.9ppm 늘어난 수치다. 미국해양대기청NOAA이 측정한 2022년 전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배경농도도 417.06ppm으로 2021년 대비 2.13ppm 증가하며 역대 최고 농도를 기록했다. 불과 10~20년 전의 지구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빠르게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 중인지 짐작할 수 있다. 20-1)


최근 공개되는 시나리오들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예상보다 더욱 암울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2023년 12월 초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비영리 기후단체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이 공개한 전 세계 도시의 수몰 이미지가 그 사례다. 이 단체는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예측 결과와 지역별 고도 등을 종합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이하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에 따라 달라지는 각 도시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클라이밋 센트럴은 인류가 탄소 배출량을 급격히 줄여 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했을 때 각 도시의 모습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이 3도에 달했을 때 상승한 해수면은 많은 도시를 집어삼킬 것으로 예상했다. 안타깝게도 3도 상승폭은 이번 세기말 인류가 맞이할 수 있는 미래 가운데 비교적 밝은 미래, 장밋빛 전망에 속하는 편이다. 23)


<호주 보고서>는 특히 ‘찜통지구 Hothouse Earth’에 진입하는 문턱이 사실 2도보다 낮은 수치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찜통지구란 인류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더라도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를 배출해 기후변화를 증폭시키는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찜통지구’ 시나리오가 현실화된 상황에서도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은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는 인류가 예측했던 온난화 수준 이상의 상태를 향해 변화한다. 지구 지표면의 30% 이상에서는 극심한 건조지대화 현상이 발생한다. 남아프리카, 지중해 남부, 서아시아, 중동, 호주 내륙, 미국 남서부 전역 등에서는 극심한 사막화가 일어난다. 2도 상승폭의 온난화로도 10억 명 이상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되고, 인류 문명은 종말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10억 명이 기후난민이 된다는 것은 인류 사회의 상당 부분이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26-8)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내놓는 기후변화의 증거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을까?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생물종의 급격한 감소다. 인위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2024년 2월 12일 UN환경계획UNEP 산하 이동성야생동물보호협약(CMS)은 제14차 당사국총회를 열고 <이동성 야생동물의 세계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이동성 야생동물 중 44%가량의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성 야생동물이란 철새나 고래처럼 나라와 나라, 대륙과 대륙을 오가는, 이동 범위가 넓은 동물을 말한다. 보고서에는 이 협약에 등록된 1,189종 중 260종(22%)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520종(44%)은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분류군별로 가장 심각한 상태에 처한 것은 어류였다. 이동성 어류의 약 97%가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성 파충류의 멸종위기 비율도 70%에 달한다. 49-50)


2부 지구와 인간의 병적 증상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 저감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텍사스A&M대학 연구진은 2020년 5월 한민족과학기술자네트워크KOSEN의 《KOSEN리포트》 에 기고한 <코로나19와 기후변화> 보고서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증하는 ‘리바운드rebound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고, 이 예측은 실현되고 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인간 활동만을 중지함으로써 자연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더러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멸종위기를 맞은 동식물들을 방치하는 것은 인류가 저지른 원죄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일일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생태계와 우리 인류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향에 있어 자연의 회복력을 과신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이 스스로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자연 훼손을 줄이는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서 자연 스스로 회복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78-9)


과학자들은 인간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이용이 앞으로도 더 큰 위험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바이러스의 저수지’라는 별명을 얻은 박쥐의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 인간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 연구진은 2020년 국제학술지인 《이라이프eLife》 에 박쥐가 바이러스를 지니고도 생존할 수 있는 메커니즘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에는 인간의 박쥐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 박쥐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고, 이는 다른 동물들을 감염시킬 수 있는 분비물이나 배설물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추정도 포함돼 있다. 즉 인간이 동굴을 훼손하는 등의 교란 행위를 하면서 박쥐가 위협을 받게 되면 인간도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수공통감염병 역시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훼손하고, 해당 동물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된 사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직까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88-9)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미세플라스틱을 ‘크기가 100nm(나노미터, 머리카락 굵기의 500분의 1 정도) 이상, 5mm 미만인 플라스틱’으로 정의한다. 1차 미세플라스틱은 의도적으로 만든 미세플라스틱이다. 치약, 세안제, 화장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알갱이가 대표적이다. 2차 미세플라스틱은 플라스틱 제품과 파편이 풍화·마모되며 생긴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미세플라스틱 대부분은 2차 미세플라스틱이다. 자연 환경에 있는 2차 미세플라스틱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형태는 미세섬유다. 해양 심층수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미세플라스틱 쓰레기 역시 미세섬유다. 북극의 한대수역 심해에서 채취한 시료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의 대부분(약 95%)은 미세섬유였다. 비닐을 뜯거나 플라스틱 병의 뚜껑을 여는 매우 사소한 행동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류 모두는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시키는 문제에 있어 서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103-6)


미세플라스틱의 생태계 영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미세플라스틱 입자 자체가 미치는 물리적 영향이다. 대표적으로 미세플라스틱 섭취로 인한 영양 감소, 내부 장기 손상, 염증 반응 등이 있다. 체내에 들어온 미세플라스틱은 소화기 내부에 상처를 입히고, 소화 작용을 약화시켜 질병 발생률과 사망률을 높일 우려가 있다. 플라스틱 입자가 작을수록 더 위험하다. 입자가 작을수록 생체조직의 장벽을 통과해 혈관이나 모세혈관에 침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미세플라스틱의 화학적 영향이다. 미세플라스틱에 포함된 첨가제가 침출되면서 생물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플라스틱에 포함된 첨가제 중 비스페놀A, 프탈레이트 등은 대표적인 내분비계교란물질(환경호르몬)이다. 비스페놀A는 갑상선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고, 생식 독성과 발달장애 및 심혈관계질환을 유발하며 유방암과 전립선암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프탈레이트는 생식계 발달장애, 기형 등 다양한 인체 질환을 유발한다. 107)


현재 북극권에서는 세계 평균에 비해 적어도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기후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해빙, 즉 바다의 얼음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로, 해빙이 줄어든 만큼 늘어난 바다의 면적은 약 260만km2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태양광을 반사하는 얼음과 눈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북극권의 물과 토지가 흡수하는 태양에너지는 증가하고, 이에 따라 기온이 상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 ‘얼음-알베도 피드백ice-albedo feedback’이라고 부른다. 알베도는 지표면에서 반사되는 태양에너지의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북극권에서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영구동토永久凍土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북극권 해빙이 녹고 주변 지역을 덮은 눈이 사라지면서 태양열을 흡수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뿐 아니라, 광대한 넓이의 영구동토가 사라지면서 온실가스 중 하나인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114-5)


3부 피할 수 없다면 적응하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 역시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고, 적응의 필요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발표한 ‘주요 작물의 재배 한계선’을 살펴보면, 1980년대 대구에서 재배된 사과는 21세기 들어 경기 포천이나 강원 북부에서도 재배된다. 같은 기간 동안 녹차는 전남 보성에서 강원 고성으로, 무화과는 전남 영암에서 충북 충주로, 복숭아는 경북 청도에서 경기 파주로 재배지가 북상했다. 해수면 온도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따뜻한 바다에 살던 난류성 어류가 북상함에 따라 바다 생태계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난류성 어류인 전갱이는 월동지인 동중국해로 가지 않고 겨울에도 남해 연안에 머문다. 난류를 따라 남해에서 잡히던 멸치는 울릉도 근해에서 어획되고, 일본 혼슈 이남에 살던 다랑어는 울산 앞바다에서도 꾸준히 잡히게 됐다. 반대로 과거 서민들의 찌개거리였던 한류성 어류 명태는 1990년대 이후 남한 수역에서 ‘씨가 말라버린’ 어종이 되었다. 123-5)


유럽에서는 여름철 낮 최고기온이 35도에 이르는 이상고온을 ‘열파heat wave’라고 부른다. 영국의 비정부기구 영파운데이션Young Foundation의 보고서 <열파: 노인 복지에 있어 2003년 프랑스 열파의 영향>은 “노동인구가 휴가를 떠나고 사람이 없는 곳처럼 변한 마을에서 휴가를 갈 경제적 수단이 없는 이들, 특히 갈 곳이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을 폭염의 최대 피해자로 언급했다. 기후적응을 한답시고 무턱대고 에어컨을 사용하면 온실가스가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무더위쉼터’와 같은 사례는 도시의 각 가정이나 매장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사회복지 시스템의 차원에서 농어촌 지역이나 빈민·노인 등 사회적 약자층에 집중된 정책임을 감안해야 한다. 즉 인구가 밀집된 도시 공간에서는 에어컨 사용을 적극적으로 줄이면서 폭염의 직격탄을 맞는 농어촌 지역의 노인들에게는 에어컨 사용을 권장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잡힌 기후적응 정책의 방향일 것이다. 136-8)


기후변화로 인해 전 지구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당장 몰려오는 바닷물을 막을 방법은 제방밖에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상승하는 해수면이 언젠가는 제방의 높이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방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자연의 변화에 무리하게 맞서는 대신, 바닷물이 그대로 육지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는 역발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된 갯벌로 유명한 덴마크에서의 ‘바닷물 침수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연구진은 바닷물이 자연스럽게 해안 지역을 바꾸도록 두는 경우 제방을 쌓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물다양성이나 자연자원 측면에서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물에 잠긴 토양은 기후변화의 주원인인 탄소를 저장하는 기능도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해당 지역은 계속해서 자연적인 석호로 변해가고 있으며 더 많은 생물종이 나타나고 있다. 133-4)


물론 이 연구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뀔 위험이 높은 태평양이나 인도양의 섬나라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일명 ‘도서국가(모든 영토가 섬으로만 구성된 국가)’로 불리는 곳들은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도 선진국에게 강도 높은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요구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이 빨라지고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저지대 산호초섬에 인간이 살 수 없게 되는 시점이 60~70년 뒤인 21세기 말이 아닌 20~30년 뒤인 21세기 중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 하와이대학 마노아캠퍼스 등 공동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어드밴스》 에 2018년 4월 25일 게재한 논문에서 태평양 등 저지대 산호초섬 전체가 바닷물에 잠기지 않더라도 민물인 지하수에 바닷물이 섞여 들어가면 인간의 식수원이 사라질 것이라 내다봤다. 136)


뉴욕 맨해튼의 대규모 전시장 재비츠 컨벤션센터(이하 재비츠센터) 옥상에는 7ac(2만 8,328m2)에 달하는 옥상농장이 조성돼 있었다. 옥상농장에서 재배한 농작물은 재비츠센터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의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고, 주변 주민들에게 판매되기도 한다. 재비츠센터는 한국으로 치면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전시장 역할을 하는 건물로, 뉴욕 34~40번가 허드슨강 인근 6개 블록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런 거대한 건물의 옥상이 농장과 태양열발전시설로 탈바꿈한 때는 2014년이다. 옥상농장을 만든 결과 재비츠센터는 여름철엔 5~6도 정도 시원해졌고, 겨울철에도 5~6도 정도 따뜻해졌다. 그만큼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 옥상농장은 막대한 양의 빗물을 저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농장의 토양과 빗물탱크 등에 저장되는 빗물의 양은 연간 700만gal(2,649만 7,882L)에 달한다. 옥상농장이 많은 양의 물이 우수관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146)


4부 이미 닥쳐온 파국 앞에서


기온이 높고 습도는 낮은 경우나 습도가 높고 기온은 낮은 경우에 비해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인간의 생존률은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MIT 연구진은 2018년 7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에 빠르면 2070년쯤 중국 북부 화베이평원 지역의 습구온도가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연구진은 인류가 현재 추세대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경우를 뜻하는 ‘RCP 8.5 시나리오’를 적용할 경우 화베이평원의 평균 습구온도가 빠르면 2070년쯤 32.6도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칭타오, 상하이, 항저우 등의 습구온도는 35도까지 오를 수 있다고도 추측했다. 습구온도 35도는 건강한 사람도 야외에서 6시간 이상 버티기 힘든 수준이다. 미국 럿거스대학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계속 진행된다면 2100년쯤에는 약 12억 2,000만 명이 33도 이상의 ‘습구흑구온도WBGT 지수’에 노출될 것이라는 논문을 2020년 3월 학술지 《환경연구회보》 에 게재했다. 157)


# ‘습구온도’란 온도계를 증류수에 적신 수건으로 감싼 상태에서 측정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온’은 건구온도로 마른 상태의 온도계로 측정한다.


습구흑구온도 지수는 온열질환을 유발하는 4가지 환경 요소인 기온, 습도, 복사열, 기류를 반영한 수치다. 습구흑구온도가 33도가 넘으면 건강한 사람도 온열질환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연구진은 40개의 기후 시뮬레이션을 분석해 온난화된 지구에서 고온다습한 환경이 얼마나 증가할지 추정했다. 연구진의 추산에 따르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가 1.5도 상승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받는 인구는 약 5억 800만 명, 2도 상승할 경우는 7억 8,900만 명, 3도 상승할 때는 12억 2,000만 명에 달했다. 2020년 습구흑구온도가 33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환경에서 거주하는 세계 인구는 약 2억 7,500만 명이다. 고온다습한 날씨는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특히 폭염은 자살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진은 2018년 7월 《네이처》 자매지인 《네이처 클라이밋체인지》 에 폭염이 자살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57-8)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기후악당’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은 2016년의 일이다. 2016년, 모로코에서의 당사국총회(COP22) 개막을 하루 앞두고 국제연구기관인 기후행동추적은 한국을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기후악당Climate Villain’ 국가라고 지목했다. 여기서 기후악당 국가는 기후변화 대응에 무책임하고 게으른 국가를 의미한다.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노력은 ‘기후변화대응지수 CCPI’에서도 최하위권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기후변화대응지수는 온실가스 배출, 재생에너지, 에너지 소비, 기후정책 등 4가지 부문으로 나눠 평가하고, 점수를 합산해 국가별 종합점수를 매긴다. 한국의 순위는 2016년에는 조사 대상 58개국 가운데 54위, 2020년에는 61개국 가운데 58위, 2021년에는 60위, 2022년에는 57위라는 매우 낮은 순위를 차지했다. 가장 최근 평가인 2023년에는 전체 평가 대상 67개국 중 64위로 순위가 4단계 하락했을 뿐더러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산유국뿐이었다. 160-1)


지금의 몽골을 상징하는 드넓은 초원과 사막은 사실 과거에는 겨울철마다 많은 눈으로 뒤덮이고, 끝도 없는 설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보통 10월 말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12월에는 초원과 사막 대부분에 눈이 쌓였다. 이 눈은 황사의 발생을 막아주고, 녹은 뒤에는 유목민과 가축의 소중한 식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평균보다 적은 양의 눈이 내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특히 고비사막이 있는 몽골 남부 지역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눈이 쌓이지 않거나 1.0~5.0cm 정도의 적은 양만 쌓였다. 이렇게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겨울은 다수의 몽골 유목민을 환경난민으로 만들고 있다. 눈이 내리지 않으면 가축에게 먹일 풀과 물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소, 양, 말 등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잦아진다. 가축이 전 재산인 유목민들은 살 길을 찾아 도시로 갈 수밖에 없다. 전 재산을 잃은 수십만 명의 유목민이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에 모여 일종의 빈민가인 게르촌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다. 166-7)


몽골이 겪고 있는 기후변화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모래폭풍이다. 몽골에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어나면 높은 확률로 황사가 한반도를 덮치게 된다. 황사는 발원지인 몽골에서 고온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눈 덮인 면적이 작을 때 발생한다. 여기에 저기압이라는 조건까지 갖춰지면 모래먼지가 상승기류를 타고 3~5km 상공으로 올라간 후 북서풍을 타고 한반도로 날아오게 된다. 황사 자체는 모래먼지일 뿐이지만 황사가 이동할 때 중국 북부의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중금속과 미세먼지 등 오염물질을 머금게 되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국립환경과학원 자료를 보면 2009~2011년 한국에 온 28차례의 황사 중 13차례(46.4%)는 중국 공업지대를 지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오염물질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의 황사는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확인될 만큼 오래된 자연현상이다. 황사가 불어올 때는 흔히 ‘PM10(지름 10㎛ 이하)’이라고 부르는 미세먼지 농도가 크게 상승하게 된다. 168)


에필로그: 아직 희망은 있다


오존은 산소 원자 3개로 이뤄진 기체다. 지상 20~25km 상공의 성층권에 형성돼 있는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을 차단해 생태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반면 지표에서 오존은 건강에 해를 끼치는 물질이 된다). 오존층이 감소하고,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늘어나면 피부암, 백내장 등의 발병률이 높아진다. 미국 환경보호청의 연구 결과 오존이 1% 감소하면 백내장 환자가 최대 0.6%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존층 파괴의 원인 물질로는 1985년 당시 냉장고와 에어컨, 헤어스프레이 등에 널리 사용되던 냉매인 염화불화탄소(프레온)CFC가 지목됐다. 자외선과 염화불화탄소가 만나 발생하는 광화학 반응으로 염화불화탄소가 분해되면서 염소 원자가 생기고, 이 염소 원자가 오존 분자를 분해시키면서 오존층이 파괴되는 것이다. 염소 원자 하나는 오존과 반응한 뒤 원상태로 돌아와 다른 오존 분자들을 산소 원자로 분해시킨다. 염소 원자 1개는 오존 분자 10만 개를 파괴한다. 183)


충격을 받은 국제사회는 발 빠르게 움직여 2년 뒤인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를 채택해 염화불화탄소 생산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몬트리올 의정서’ 체결을 통한 오존층 회복 노력은 국제사회가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몬트리올 의정서’에는 세계 197개국이 가입했으며 한국은 1992년 2월 가입했다. 이처럼 전례 없는 국제사회 전체의 환경 보존을 위한, 실은 인류 생존을 위한 노력 덕분에 극지방의 오존구멍은 점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 WMO는 2018년 11월 남극과 북극의 오존구멍이 2060년쯤에는 완전히 복원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오존구멍이 2000년대 들어 회복되고 있으며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약 40년 뒤에는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반구와 중위도의 오존구멍은 이보다 빠른 2050년쯤이면 완전히 복원될 것으로 예상했다. 183-4)


오존층 회복에 대해 밝은 전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염화불화탄소 외에도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질의 배출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염화불화탄소의 불법 배출도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18년 6월에는 국제사회가 꾸준히 저감 노력을 기울여온 염화불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가 크게 늘어나는 일도 발생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중국 산둥성 싱푸 지역의 공장들에서 염화불화탄소를 사용 및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세계기상기구 역시 2018년 11월 오존층 회복 전망을 내놓으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염화불화탄소 가운데 삼염화불화탄소CFC11의 불법적인 배출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MIT 연구진은 클로로포름에 대한 연구 결과가 인류의 오존층 회복을 향한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경고라고 강조했다. 오존층 회복을 늦출 수 있는 클로로포름 같은 물질들에 대한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85-6)


오존층 파괴로 인류 일부와 생태계가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인류 전체의 노력으로 오존층이 회복되긴 했지만, 염화불화탄소와 클로로포름이 여전히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지구 전체에서 시기가 빠르든 늦든, 기후위기는 이전에 없었던 재난을 일으킬 것이고, 또 일으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은 —‘완화’와 ‘적응’을 모두 포함해서 —너무 느리고, 부족해 보인다. 인류 전체를 위협할 재난이 더 자주 일어나고, 더 큰 피해를 입힐 때 인류는 결국 전시 동원 체제에 준하는 ‘기후위기 동원 체제’를 가동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장밋빛 전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대책이 시행됐을 때, 인류 전체의 노력은 오존층 회복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예상보다 더 빠른 성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십 년 후를 향한 이 작은 외침이, 조용한 경고가 오늘의 인류와 미래 세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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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서 니체로 - 마르크스와 키아케고어, 19세기 사상의 혁명적 결렬
카를 뢰비트 지음, 강학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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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부 19세기 독일 정신사 연구


서론 괴테와 헤겔


"헤겔도 괴테도 (셸링처럼) 칸트의 이 최후의 이념─자연 개념과 자유 개념을 매개하는 판단력─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논증적인 오성을 타고 넘어서 자기 존재와 세계 존재의 중간에 서는 것으로써 '이성의 모험'을 감행했다. 다만 괴테는 직관된 '자연'의 편에서 헤겔은 '역사적 정신'의 편에서 통일을 파악하는 점에 두 사람이 가진 매개의 차이가 있다. 헤겔이 '이성의 간지(奸智)'를, 괴테가 자연의 간지를 승인하는 것은 이것에 대응한다. 간지는 어느 경우에도 인간의 행위 일체를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전체를 위한 봉사에 이바지한다." "괴테가 밑바탕으로 삼았던 원근법상의 착각은 헤겔이 이해하고 있던 '이념'이 '자연의 방식'이 아니라 정신의 방식을 표명해야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을 헤겔은 자연의 이성으로 풀이하지 않고(헤겔에게 자연은 무력한 것이었지만, 괴테에게 자연은 전능한 것이었다.) 역사의 이성으로 풀이하여, 거기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헤겔은 역사에 있어서의 절대자로 보았다."(29-30, 36)


"헤겔과 마찬가지로 괴테도 종교개혁을 '정신적 고루의 질곡'에서의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들도 모두 차츰 언어와 신앙의 기독교에서 나와 의향과 행위의 기독교로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라는 괴테의 명제는 사실상 벌써 헤겔에서 포이어바흐에, 나아가서는 근본적인 결정으로 통하는 길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이 이교와 기독교의 어느 것을 채택하는가를 결정하려고 한 니체와 키아케고어의 두 개의 상반된 실험은 헤겔과 괴테에 의해서 대표된 융통성이 있는 기독교에 대한 과감한 반동이다." "괴테와 헤겔은 공통적으로 '초월하는 것'을 거부했다. 괴테의 자연은 중용 가운데서 살았고, 헤겔의 정신은 매개 가운데서 움직였으나, 이 중용과 매개는 마르크스와 키아케고어에 있어서 다시금 외면성과 내면성의 양 극단으로 서로 대결하게 되어 결국 니체는 새로운 시발로서 근대성의 무(無) 속에서 고대를 되찾으려고 이 실험을 하고 있는 동안에 정신 착란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43-4, 54)


▷ 헤겔의 정신사 철학에서 생긴 시대정신적 사상(事象)의 기원


1장 헤겔의 세계사 및 정신사의 완성이라는 종말사적 의의


"유럽 정신사의 최후의 단계에서 드디어 나타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욕하고 또한 자기가 의욕하는 것을 알고 있는 〈순수한 자기 의지〉이다. 그것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곤두서게' 되고, 세계의 사상(事象)은 철학의 사유와 일치하게 된다. 〈자유의 의식에서의 진보〉를 원리로 하는 역사의 철학은 이 사건으로 마감된다. 원시 기독교의(그 정신과 그 자유의) 소위 세속화는 헤겔로 보자면 그 본래의 의의에서의 비난될 이반(離反)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적극적 실현에 의한 그 본원의 참된 해석을 뜻한다." "그리스-로마의 세계는 기독교-게르만적 세계 속에서 '지양'되고, 따라서 헤겔의 존재론적 기초 개념은 이중으로, 즉 그리스적 로고스 및 기독교적 로고스로서 규정된다. 그에 반하여 새로이 고대 세계와 기독교와의 결합을 분리라도 해서, 그리스 정신이든지 기독교든지 '어느 한쪽을' 추상적인 본원으로 보고 그것에 다시 복귀하려 하는 것은, 그의 구체적인 역사 감각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61)


"헤겔의 종말사적 구조의 궁극의 근거는 그가 기독교를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에서 본다면 여러 시대의 종말과 '때의 참die Fülle der Zeiten'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지상 시간의 종말의 기독교적 기대를 세계의 사상(事象)에 옮기고, 그리스도 신앙의 절대자를 역사의 이성으로 풀이하기 때문에 세계와 정신의 역사에서 최후의 대사건을 단초의 완성으로 이해하는 경우라면 이치에 맞는다. 실상 '개념'의 역사는 헤겔이 〈여기까지의 그리고 거기서부터〉의 역사 전체를 회상시키면서 여러 시대의 실현으로 이해할 때에 헤겔과 함께 마감되었다. 원리도 없고 따라서 시기도 없는 경험적 사상(事象)이 처음도 끝도 없이 경과하는 것은 그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헤겔의 후계자뿐만 아니라, 그의 논적(論敵)도 상기한 역사적 의식에 의해 양육되었다. 유럽 역사에 대한 부르크하르크의 의식의 최후의 의향은 〈낡은 유럽〉은 종말에 가깝다는 인식이었다."(61-2)


"그렇지만 새로운 분리로의 진전 가능성은 헤겔 자신의 역사적 의식 속에 이미 배태되어 예견되고 있었다. 사실 시대의 실질적인 것에 관한 철학적 인식은 물론 그가 속한 시대정신에서 발생하고 따라서 형식적이긴 하지만 관상적(觀想的) 지식으로서, 그 시대정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유별난 관상적 지식과 함께 한층 더 발전을 촉진시킬 하나의 차이, 즉 〈지식과 현재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이런 차이에서 철학과 더불어 현실에서 새로운 분리로 진전할 가능성과 필연성이 생겨난다." "스스로 완성하는 이 철학은 차후에 현실적인 새로운 형성으로 몰아넣는 정신의 출생지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헤겔이 말하는 지식의 역사의 종결은 출생지가 되어 그것에서 19세기의 사상 및 정치상의 사상(事象)이 발생했다." "즉 헤겔의 매개 대신에 결단으로의 의지가 나타나서, 헤겔이 합일한 것을, 즉 고대와 기독교, 신과 세계, 내면과 외면, 본질과 실존을 다시금 분리시켰다."(70-3)


"헤겔 철학의 영역에서 신앙과 이성, 뿐만 아니라 국가와 기독교와의 화해는 1840년경에 끝나고 있다. 헤겔 철학과 그 시대와의 분열은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국가 철학과의 분열이며, 키아케고어에 있어서는 종교철학과의 분열이어서, 요컨대 국가, 기독교 및 철학의 합일과의 분열이다. 이 분열을 포이어바흐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브루노 바우어도 키아케고어에 못잖게 결정적으로 실행했다. 다만 제각기 그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을 감각적 인간에, 마르크스는 인간 세계에 있는 모순으로 환원하고, 바우어는 기독교의 발생을 로마 세계의 몰락에서 설명하고, 키아케고어는 기독교적 국가도 기독교의 교회나 신학도, 즉 기독교의 세계사적 실재 전체를 방기하고 그 본질을 절망 끝에 결단한 신앙으로의 비약이라는 역설에 환원한다. 그들에게는 현실이 더 이상 자각적 존재의 의식이라는 자유의 빛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소외'라는 그림자 속에 나타난 것이었다."(79)


2장 노장 헤겔 학파, 소장 헤겔 학파, 신헤겔 학파


"(노장 헤겔 학파가 주도한) 헤겔 철학의 보존은 철학 일반이 철학사가 되는 역사화의 도상에서 행해진다. 헤겔의 정신사의 형이상학에서 발단한 역사주의는 문화와 지식을 아직도 믿고 있던 교양인의 '최후의 종교'가 되었다." "헤겔의 경우 정신은 역사의 주체 및 실체로서 절대자이며, 그의 존재론의 근본 개념이었다. 그러기에 자연철학도 국가, 예술, 종교 및 역사 등의 철학과 함께 하나의 정신의 학문이다. 기독교라는 절대적 종교와 일치하는 정신인 까닭에 이러한 절대정신은 스스로를 알고 있음으로써 존재한다. 또한 그 정신은 이미 존재했던 정신의 여러 형태들의 회상을 자기의 갈 길로 삼는 한에서 역사적 정신이다." "그러나 1850년대 이래로 유행하게 된 '정신사'의 개념, 곧 하임에서 딜타이에 이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승인되었던 다소간의 확신은 인간의 정신 그 자체가 '사회-역사적 현실'의 유한한 '표현'이기 때문에 그런 정신은 정치적, 자연적 세계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확신이었다."(93-4)


"소장 헤겔 학파는 청년의 당파를 대표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들이 현실의 청년이어서가 아니라 아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존하는 것의 근거가 박약함을 인식하여 '보편적인 것'과 과거에서 이반(離反)하여, 미래를 예견하고 '일정한', '개별적인' 것을 강조하여 현존하는 것을 부정하려 했다." "그들의 저서들은 선언과 강령이나 주장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실속 있는 전체가 아니고 그들의 학문적인 논증은 그들이 손질하는 동안에 대중 아니면 단독자(개인)에게 호소하기 위해 효과를 노린 설명이 된다. 그들의 저서들을 검토하는 사람이면 그들의 자극적인 어조에도 불구하고 김 빠진 듯한 뒷말을 남긴다는 점을 경험하게 된다. 그 까닭은 그들이 빈약한 수단으로 과도한 요구를 내걸고 헤겔의 개념적인 변증법을 수사적인 문체로 길게 뽑아 늘이기 때문이다." "생성과 운동의 이론가들인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적 부정성(否定性)의 원리와 세계를 움직이는 모순에 고착(固着)되어 있다."(96-7)


"헤겔 학파의 분열은 보수적으로나 혁명적으로나 해결될 수 있는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Aufhebungen'의 원칙적인 애매성에 의해 가능했다. 헤겔의 방법을 '추상적'으로 일면화하기만 하면, 〈그 견해의 보수성은 상대적이고, 혁명적 성질은 절대적이다〉라고 엥겔스의 명제 즉 그것은 세계사의 과정이 진보의 움직임이며 따라서 현존하는 것의 지속적인 부정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모든 헤겔 좌파 사람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명제에 도달할 수가 있다. 엥겔스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고 하는 헤겔의 명제에 깃든 혁명적 성격을 증명한다. 즉 헤겔이 말하는 현실적인 것은 우연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또는 '필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명제는 외견상 반동적이지만 실상 혁명적인 것이라 말한다." "우파는 현실적인 것만이 이성적인 것이라는 점을, 좌파는 이성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으나, 헤겔에서는 보수적 견해와 혁명적 견해가 적어도 형식상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101)


"헤겔을 단지 부분적으로 개조하려 했던 여타 소장 헤겔 학파와는 달리 마르크스는 철학 그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통찰을 역사에서 얻었다." "〈새로운 여신은 아직은 직접적으로 운명의 순연한 광명이든 순연한 칠흑이든 간에 애매모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문장은 마무리지어진 세계의 회색의 황혼에서 철학한다고 하는 헤겔의 비유를 회상케 한다. 그 의미는 철학이 붕괴된 직후, 이 현재의 어두움이 칠흑 같은 어둠 직전의 황혼인지 아니면 새 날의 동틈 직전의 미명인지, 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서는 현실 세계의 노쇠가 철학의 최후의 회춘(回春)과 함께 병행하나, 미래를 선취(先取)하는 마르크스에게서는 마무리지어진 철학이 현실 세계의 회춘과 함께 옛 철학에 역행한다. 철학이 현존하는 '비철학'의 실천에 몰두할 때, 즉 철학이 마르크스주의로 직접적인 실천적 이론이 되었을 때, 현실의 세계에 이성이 '실천praxis'됨으로 인하여 철학 그 자체는 지양된다."(129-30)


"키아케고어를 단지 '예외'로 보지 않고, 시대의 역사적 동향의 내부에서 생긴 현저한 현상의 하나로 본다면, 그의 '단독성'은 적어도 단독적인 일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 정세에 대해 흔히 유행했던 하나의 '반동Reaktion'이었음이 명백해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시대의 사상(事象)에 대한 비판자였다." "'단독자'에 관한 두 개의 각서에서의 서문(1847)은 〈오늘의 시대는 만사가 정치 일색이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것, 즉 사회적 개혁은 시대에 있어서 필요한 것, 즉 무조건으로 확정하고 있는 것의 반대물이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현대의 불행은, 현대가 더 이상 영원에 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 한낱 '시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키아케고어에게 헤겔 철학은 역사적 세계의 보편자 안에서의 단독적 실존의 평준화, '세계 과정' 안에서의 인간의 '산재성'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키아케고어는 헤겔의 체계적 세계사적 해석에 반대하여 자신을 결단하는 실존의 단독성, 즉 개별화된 단독자를 부각시켰다."(148-50)


"세계의 평준화를 향한 발전과 하나님 앞에 '자기Selbst'로서 존재하는 기독교적 요구와의 양자가, 그에게는 재수 좋은 우연처럼 일치하는 듯이 생각되었다." "그는 1848년의 '파국'을 신호로 삼아 종교개혁의 때와는 반대로 이번의 정치적 운동은 종교적 운동으로 급변함을 예언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키아케고어의 소견으로는 전체 유럽은 세계를 매체로 해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영원 앞에서만 해결될 문제 가운데로 끓어오르는 혈기에 휘말려 허둥지둥 끌려 들어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단적인 경련이 계속될지는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세대가 고뇌와 출혈 때문에 온통 기진맥진했을 때, 다시금 영원이 고려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진리를 위해서는 자기가 맞아죽어도 된다는 그런 증인에 의한 기독교의 부흥을 희구하는 이러한 예상을 가진 키아케고어는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을 선전하는 마르크스와 시대를 같이하는 대국자(對局者)이다."(152-4)


"헤겔 철학 부흥의 원리는 베네데토 크로체에 의해 처음으로, 또한 가장 선명하게 헤겔 철학의 '죽은' 부분과 '살아 있는' 부분의 구별에 의해 확정되었다. 죽은 것으로 여겨진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철학이지만, 논리학이나 종교철학도 여기에 해당한다.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객관적 정신의 학문이며, 그 한도에서 그것의 절대적-체계적 주장이 역사적 주장 속에 해소되고 있다." "역사적 의식을 철학과 정신의 문제로 삼아 탁월한 방식으로 이해한 것은 빌헬름 딜타이였다." "딜타이는 헤겔의 현실 개념의 사변적 '파악'을 현실의 가장 일반적인 여러 구조의 분석적 '이해Verstehen'에 환원한다. 딜타이에 의하면 헤겔의 형이상학의 영속적 부분으로서는 '역사적 지향die historischen Intentione'이 존립할 따름이다. 이 경우에 바로 그 체계의 궁극적 부분이 될 형이상학적, 신학적 기초는 제외된다. 헤겔의 영속적인 의의는 그가 낱낱의 생의 현상의 본질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것을 가르친 점에 있다."(162-5)


3장 마르크스와 키아케고어의 결단에 의한 헤겔 매개의 해소


"헤겔 학도로서 마르크스가 이해한 공산주의는 실체가 없는 생존 관계의 참된 해소이고, 공동체로서 생존하는 인간의 현실적 존재와 본질적 이성과의 사회적 일치이다. 헤겔은 양쪽을 단지 사상적으로 융화시켜 실제로는 사적-개별적 생존과 공적-공동적 생존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제약된 모순을 그의 서술 내용으로 취급했다." "결국 현존하는 존재 관계의 급진적인 혁명만이 '세계 국가'에까지 확대된 폴리스, 계급 없는 사회의 '참된 민주 정치'를 대동해서 헤겔의 국가 철학을 근대적 사회의 요소 가운데 실현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철학적 공산주의와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키아케고어는 사적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단독자Einzelne'로까지 구체화시켜 대중의 상황이라 할 외면성에다 '자기 존재Selbstsein'라 할 내면성을 대치시켰다. 그에게 이 개별화된 실존의 다시없는 실례는 아테네의 폴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유대인 및 이교도로 이루어진 전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이다."(192-3)


"현실에 대한 헤겔의 무력의 원인을 키아케고어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원리의 잘못된 귀결에서 보지 않고 헤겔이 전반적으로 본질과 실존을 일치시키려는 점에서 본다. 바로 그 까닭에 그는 '현실적' 존재의 표현에는 이르지 않고 항상 이상적 '개념 존재'에만 이를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essentia, 즉 어떤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보편적 본질에 관계하고, existentia, 즉 어떤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낱낱의 실재, 나 혹은 너 나름의 실존,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의 일이 결정적인 일이 되는 그러한 실존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낱낱의 인간은 정신을 가지고 그 본질로 삼는 보편적 인간 존재의 특수한 한정성을 의미한다. 이 인간 존재의 보편성, 즉 '보편 인간성'을 키아케고어는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단독자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에 반해 헤겔 정신의 보편자이든가 마르크스의 인류의 보편자이든 간에 키아케고어에게는 실존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194-5)


"키아케고어는 관심을 '정열Leidenschaft' 즉 '파토스Pathos'라 칭하여 그것을 사변적 이성에 대처케 한다. 정열의 본질은 그것이 헤겔의 체계의 폐쇄적 '종결'과는 달리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할' 결단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이 비약, 즉 변증법적 반성이라는 〈방법의 역행에 대한 단호한 반항〉은 의미심장한 하나의 결정이다. 비약의 용의가 되어 있는 이 결정의 단호한 정열은 직접적인(무매개의) 단초를 설정한다. 이에 반하여 헤겔 논리학의 단초는 실제로 '직접적인 것'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반성의 산물, 즉 현실에 실존하는 현존재의 추상(무시) 가운데서 순수한 존재 일반을 가지고 시작한다. 이러한 실존 규정을 가지고 키아케고어는 자기를 아는 이성적 현실의 영역을 '하나의 실존자가 그것에 대해 단지 알고만 있지 않는 유일한 현실', 즉 '그가 바야흐로 존재한다고 하는' 현실에 환원시킨다. 스스로 실존하는 자에게 실존 그 자체는 최고의 관심사인 것이다."(196-7)


"1848년 혁명 직전에 마르크스와 키아케고어는 어떤 결정의 의지를 표명했다. 시민-자본주의적 세계의 혁명을 위해 마르크스는 무신자의 대중을 발판으로 삼는 한편, 키아케고어는 시민-기독교적 세계에 대한 그의 싸움에서 만사를 개개인에게 걸고 있다. 이것에 대응하여 마르크스로 말하면 시민사회는 '개별화된 단독자'의 사회여서 거기서는 인간이 자기의 '동류적 본질'에서 소외되어 있고, 키아케고어로 말하면 기독교 세계는 대량으로 전파된 기독교이고, 거기서는 단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순종자'가 아니다. 그러나 헤겔이 이러한 존재하는 모순을, 즉 시민사회와 국가, 국가와 기독교를 본질에 있어서 매개한 연후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및 키아케고어의 결단은 바로 그러한 것들의 매개 가운데 있는 차이와 모순을 지적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마르크스가 문제 삼는 '자기 소외'는 인간 쪽에서 보면 자본주의고, 키아케고어가 문제로 삼는 '자기 소외'는 기독교 쪽에서 보면 기독교 세계이다."(198)


▷ 역사적 시대에 철학의 영원성 희구로의 급변


4장 현대 및 영원의 철학자인 니체


"괴테가 온갖 잔재주꾼보다 탁월하였던 것은 그가 단지 자유를 의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소유했던 점이다. 그는 이 도달된 자유에서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마저도 촉진하며 전체로서의 생활, 그리고 그 외관상의 진실 및 그 진실의 외관을 위한 대변자 노릇까지도 감당해낼 수 있었다. 괴테는 비현실을 의도하며 살던 시대의 한가운데서 확신에 찬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그 속에서 자기에게 연고가 있는 것을 모두 긍정했다." "그는 관용의 인간이기도 하다. 약함에서가 아니라 강함에서의 관용이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범속의 인간이면 몰락할지도 모를 것을 그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는 덕이든 악덕이든, 나약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금지될 것이 없다." "이것은 니체의 '실재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입장'을 나타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실상 『권력에의 의지』의 최후의 경구는 자연에 관한 괴테의 단편과 동일한 정신에서 발상된 것처럼 느껴진다."(231-2)


# 다만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와 괴테의 자연은 매우 상이하다. 이 차이는 기독교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니체가 19세기의 독일인을 위한 참된 교육자는 헤겔의 문하생들이라고 했던 말은, 소장 헤겔 학파를 경유하여 헤겔에서 니체로 통하는 길은 신의 죽음이라는 이념에 관련하여 말할 때 가장 명료하게 언급되고 있다. 즉 헤겔은 기독교 신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즉 '무신성(무신앙)의 진리'에서 기원함을 기초로 하여 자기의 기독교적 철학을 완성하였으나, 니체는 몰락하는 기독교를 기초로 하여 그리스 철학의 기원을 반복하는 것으로 '수천 년의 허위'를 극복하려고 했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신의 성육(聖肉)'은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의 결정적으로 완수된 화해를 뜻하고, 니체와 바우어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참된 본성이 파손되었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신을 '영Geist'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철학적 존재로까지 높였고, 니체는 신을 영이라고 말한 자야말로 육체를 갖춘 신의 재생에 의하지 않는 한 보상될 수 없는 그러한 불신앙에로 누구보다 큰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었다고 주장한다."(243)


"허무주의 그 자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인 몰락과 생활 혐오의 징조일 수도 있고, 생활에의 새로운 의지와 강화로서의 최초의 징조일 수도 있다. 즉 약자의 허무주의와 강자의 허무주의인 것이다. 근대성의 근원인 허무주의의 이 양의성(兩義性)은 니체 자신도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양쪽을 알고 있다. 나는 양쪽 모두인 것이다.' 니체의 철학적 실존의 이런 이중의 의미는 시대에 대한 그의 관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즉 그는 '오늘 및 지난날'의 사람이기도 하고, '내일과 모레 및 다른 훗날'의 사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지난날과 훗날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현재를 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의 철학은 '(기독교적) 후생(後生)의 역사의 단편'이며 동시에 그리스 전생(前生)에서 남겨진 흔적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니체는 최근의 시대의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옛 시대의 철학자이기도 하고 그런 한에 있어서 '나이 든' 시대라고 하는 것의 철학자이다."(246-7)


"니체의 본래의 사상은 처음에는 신의 죽음이, 중간에는 신의 죽음에서 생긴 허무주의가, 마지막에서는 영원 회귀를 지향한 허무주의의 자기 극복이 자리잡는 하나의 사상 체계이다.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 짜라투스트라의 최초의 연설 가운데 있는 정신의 삼중 변화이다. 기독교적 신앙의 '너는 할지어다Du sollst'는 '나는 의욕한다Ich will'라는 자유화된 정신으로 변한다. 무를 지향하는 '그 자유의 사막'에 있어서 '나는 의욕한다'에서 파괴와 창조 속에서 천진스러운 유희의 실재인 영원히 회귀하는 실재로의 최후이자 가장 곤란한 변화가, 즉 '나는 의욕한다'에서 '나는 존재한다'로의, 말하자면 존재 전체에 있어서 '나는 존재한다'로의 변화가 발생한다. 무를 지향한 자유가, 동일자des Gleichen의 영원회귀라는 필연성, 자유롭게 의욕된 그 필연성으로 들어가는 그 최후의 변화와 함께 니체에게 있어서 '영원한 운명'이라 할 그의 시간적 운명이 실현된다. 그의 자아는 그에게 천운이 된다."(250-1)


"니체의 철학에 있어서 영원회귀가 의미하는 것과 같은 영원의 문제는 니체가 '인간'과 함께 '시간'을 극복한 도상(途上)에서 찾아내기 마련이다. 그 길은 기독교 역사에서의 탈출구이며 니체는 그것을 '허무주의의 자기 극복'이라고 일컬었으나, 이 허무주의는 또한 신의 죽음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신과 무의 정복자'이다. 영원회귀의 '예언'과 허무주의의 '예언'과의 이 본질적 관계에 근거하여 니체의 교설 전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다. 즉 그것은 허무주의의 자기 극복이어서, 거기서는 '극복자와 극복당하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그것들이 하나의 것이라는 것은 마치 짜라투스트라의 '이중의 의지', 또한 세계를 보는 디오니소스적 '이중의 눈'과 디오니소스적 '이중의 세계' 그 자체가 하나의 의지, 하나의 눈, 하나의 세계인 것과 동일하다. 허무주의와 회귀와의 이 일치는 니체의 영원을 의욕하는 의지가 니체의 무를 의욕하는 의지의 전향(轉向)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251-2)


"그런데 인간은 신이 그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한다'를 이 이상 말하지 않게 된 이래 의지로 있는 것이다. 실재는 스스로 '다시금 영구히 행위와 죄'가 된다. 그것은 실재가 '현실적으로 있다Da-sein'는 우연에 대하여 자체적으로 책임을 갖지 않음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실재는 언제나 이미 우연으로 있던 것이며 그것이 스스로를 의욕하기 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의지로서 그 책임을 떠맡으려 의욕하지만 아무튼 떠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지는 적의가 되고, 자기에게 귀속된 실재의 부담을 향해서 '뒤에서 뒤로 돌'을 굴리어 마침내는 망상이 일체를 소멸한다. 그러므로 일체는 소멸할 값어치가 있다고 설교한다." "실상, 시간 및 존재의 영원회귀적인 순환을 의욕함에 있어서 의지 그 자체도 또한 끝없이 무한한 것 속으로 향하는 직선 운동에서 미래와 더불어 과거로 향해 의욕하는 원환이 된다. 항상 이미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항상 의욕하는 이 이중의 의지가 니체가 의미하는 '운명애amor fati'이다."(253)


5장 시대의 정신 및 영원의 문제


"헤겔적인 구조의 요강은 대개 역사의 진행을 시간적 진보에 의해 측정한다는 점, 즉 마지막 걸음으로부터 그것에 선행된 걸음을 필연적으로 그 최후의 걸음에까지 인도된 것인 양 역진적(逆進的)으로 구성하는 점이다. 이러한 시간적 결과에 입각한 자리매김은 세계사에 있어서는 성과가 많은 것만이 인정된다고 하는 사실과, 세계적 사건의 연속은 성공의 이성에 의해 평가되어질 것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성공은 헤겔의 세계사적 견해의 최고 심급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상생활의 부단한 척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역시 사람은 어떤 일의 성공은 그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보다 고차원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헤겔의 사색의 통속적인 핵심은 성공에 차 있는 자만이 정당화된 것이라는 일반에게 보급된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파괴되거나 실패로 끝나버린 것 때문에 역사적 기억에서 소실되어 버린 것은 헤겔의 처방에 의하면 '탈권당한 실존'으로 간주된다."(282-3)


"어떤 속담은 '성공은 명인(대가)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반면 니체는 '성공은 언제나 최대의 거짓말쟁이였다'고 말한다. 성공이란 실상 인간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척도이긴 하나, 그것은 일체를 증명하고 또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일체를 증명한다는 것은 세계사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성공하는 것만이 통용되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함은 비록 최대의 대량 성공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성공된 것의 참된 '역사적 위대함'이나 내면적 가치를 조금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천한 것, 어리석은 것, 비겁한 것, 미친 것 등이 벌써 종종 최대의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다." "세계사의 참된 '파토스'는 울림이 요란하고 위세 당당한 '일대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들 위에 가져오는 소리 없는 고뇌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세계사에서 감탄할 것이라도 가진다면, 그것은 인류가 온갖 손실과 파괴와 상해 속에서 항상 새롭게 갱신하는 힘이며 인내이며 끈질김인 것이다."(283-4)


"전체로서의 큰 세계사에 현혹되어 빠져 버리는 편견은 사람이 인간적 현실의 실상과 자신의 환경을 무시하고, 세계사가 마치 그것만으로 하나의 세계인 양 생각하고,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나 수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간과 관계 없이 그 세계사를 다루는 데 있다. 그와 같은 철학적 추상이라는 죄를 괴테는 스스로 범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적 '원리'의 구현으로서의 '민족 정신' 같은 것을 구성하지 않았다." "괴테가 인간의 머리 위를 건너 지나가는 세계사 자체의 위력을 관찰하는 경우, 그것은 괴테에게는 '이성'으로 보이지 않고 자연계의 한 사건처럼 보인다." "괴테는 자연 속에서, 세계사의 진행 중에는 입증할 수 없는 그러한 변화의 법칙을 인식했다. 헤겔이 원래 기독교신학 출신이었기에 역사를 '정신적'으로 파악하고 자연을 단지 이념의 '타재태Anderssein'로 본 것에 반해, 괴테는 자연 그 자체 속에서 이성과 이념을 관찰하고 자연을 출발점으로 하여 인간과 역사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통로마저 발견했다."(286-8, 291)


2부 시민적, 기독교적 세계의 역사 연구


1장 시민사회의 문제


"루소가 이해한 일반 의지란 단순히 개개의 시민의 공통된 의지에 불과하며 진정한 의미의 일반적인 의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전체 의지'와 '일반 의지'와의 모순을 실제로 지양하는 일을 루소는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국가 안에서 합일한다고 하는 것은, 의연히 개개의 인간의 임의적 동의를 기초로 하는 단순한 하나의 사회 계약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헤겔은 국가를 단순한 수단으로 삼는 자유주의적 국가관을 문제 삼고 있다." "시민사회로 보자면 국가는 그저 '귀찮은 것' 또는 '분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이다. 말하자면 그 자체의 실질적인 의의는 없고, 각 개인의 이해 거래를 초월한 '형식적' 통일성이나 일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그 개개의 목적을 위해서도 국가의 일반적 전체와의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의 본질은 시민사회의 제도의 심층 구조에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헤겔은 시민사회의 원리를 부정함 없이 그것을 '지양augheben'시켰다."(310-2)


"키아케고어의 '단독자Einzelne'라는 근본 개념은, 사회 민주주의적인 '인류'와 더불어 자유주의적인 교양을 받은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일종의 교정제이다." "과거에는 승인된 권위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만인이 상호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가 되면서부터 세속적 수단으로 더욱 진정한 의미로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키아케고어가 정치상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절대의 권위가 지배한다는 단지 그 한 가지일 뿐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는 세계의 참된 통치는 벌써 세속적인 내각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자진하여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점유하는 순교자의 손으로 행해진다. 기독교 순교자의 원형으로서 귀감이 되는 것은 민중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참으로 '단독적'인 이 '신인Gottmensch'이다. 다만 그리스도 앞에서만 인간 평등의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차이성의 대소를 본질로 하는 세계에서는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319-21)


"당면한 세계의 비판자로서 니체는 18세기의 루소와 같은 생각을 19세기에 대해 가지고 있었다. 니체를 거꾸로 한 것이 루소이다. 유럽 문명에 대한 것처럼 날카로운 비판에 있어서 루소가 되고, 그 비판의 규준이 루소의 인간 이념과 정반대인 점에서 루소의 역이 된다. 이런 관계를 의식한 니체는 루소의 인간상에는 '근대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하는 힘', 칸트나 피히테나 실러에 있어서도 독일 정신을 결정적으로 부각한 그 혁명력이 갖추어져 있음을 승인하였으나 동시에 니체는 루소를 '근대의 입구에 놓여진 기형아'라든지 '이상가와 천민'을 한몸에 갖춘 사람이라고 부른다. (니체의 말에 의하면) 루소의 평등 관념은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하고 노예 도덕에게 주권을 주는 것이었으며 또한 루소의 민주적 인도주의적 이념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인 인간의 참된 본성을 속이고 왜곡한 것이 된다. 시민적 민주정치에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국가 붕괴의 역사적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332)


2장 노동 문제


"헤겔은 노동의 정신적 성격을 우선 자연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 규정한다. 노동은 본능이 아니라 일종의 '이성적인 것' 혹은' 정신의 존재 방식'이다. 동물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구를 자연에 의해 직접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특징은 자기의 빵을 몸소 간접적으로 만들어 내어 자연을 수단 삼아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구와 그 만족 사이에 있는 이 '매개'는 도구나 기계의 수단에 노동을 더한 것을 가리킨다. 노동은 인간과 그 세계 사이에 있는 '중간항'이다." "독립적인 도구인 기계 덕분에 비로소 완전한 노동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움직이고 자연은 기계에 의해 인간에게 속임을 당한다. 그러나 이 기만은 속이는 자 자신에게 복수한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압제하면 할수록 인간 자신은 비천해진다." "노동이 기계적이 되면 될수록 그 가치는 적어지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법으로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340-1)


"『법철학』은 노동을 '욕구 체계'의 첫 번째 계기로 다루고 있다. 복잡하게 구별된 추상적인 욕구와 동등하게 분화된 그 충족의 수단을 마련해 주는 것이 시민사회의 노동이다. 거기서는 최초부터 노동의 본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즉 인간은 스스로를 생산하는 데에서만 '존재한다'고 하는 것, 그의 전 존재는 온전히 매개하며 또 매개되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세계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 생산적 노동 관계에서 이론적이면서도 실제적 '교양Bildung'이, 즉 다양한 지식, 특정한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생각해 낼 수 있는 활기, 복잡하면서도 일반적인 관계 파악이 발전한다." "노동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나태한 미개인과는 달라서 동시에 교양 있는 자이며 그의 욕구는 생산적으로 형성하는 사람이다. 노동이 인간을 형성(교양)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형식적이거나 교양적 행위로서 그 자체가 이미 정신적인 성질의 것이며 또한 추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밖에는 없다."(344)


"헤겔이 노동을 파악할 때 가졌던 입장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현상론이다. 즉 의식과 자아 의식의 변증법이다. 이중 부정을 그의 운동 원리로 삼는 이 '사고의 산물'을 사용하여 헤겔은 현실적으로 인간적인 표현과 외화(양도), 대상화와 소외를 재치 있게 뛰어넘을 수 있다. 그 때문에 현상론의 운동은 절대지를 가지고 끝난다. '외화(外化)의 역사 전체와 외화가 되찾은 전체는 때문에 추상적, 즉 절대적 사유의 생산의 역사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소외는 뭐라 해도 외화와 더불어 그것의 지양이 본래 관심사이긴 하지만 그것은 '즉자(卽自)'와 '대자(對自)', 의식과 자아 의식, 객체와 주체의 구별로 이해되고 그 점에서 현실적, 감각적 대립이 소멸한다." "헤겔에게 자아 의식은 인간의 참된 본질이라 생각되어 소외된 대상적 본질을 되찾음은 자아로의 복귀로 나타나지만, 이 복귀는 대상적 세계의 '적의 있는 소외'가 '무관심한 소원'에까지 끌어내려진 후에는 비용을 크게 쓰지 않아도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353-5)


"헤겔의 현상론의 위대한 점은 그것이 대략 〈인간의 자기 생산〉을 하나의 과정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 대상화를, 외화로서 획득을 그의 외화의 지양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 요컨대 그것이 노동의 보편적 본질을 이해하여, 인간적 세계를 노동의 성과로 보고 있는 점이다. 〈헤겔은 근대적 국민 경제의 견지에 서 있다.〉 그는 외화의 긍정적 측면만을 알고, 그의 부정적 측면을 관념론적으로 지양시킴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서 파악한다. 그리하여 노동은 헤겔에서는 인간의 〈자립화〉로서 나타나지만 소외의 범위 내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되찾음은 우리들의 대상적인 세계의 소외된 제규정의 〈파기〉에 의하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다. '지양'을 파기로 고치는 이 부수적인 수정에 의해서 마르크스는 헤겔과는 방법에 구별되고, 더욱이 그가 어떻든 헤겔의 범주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각화된 모습으로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붙들고 있는 점에서는 원리적으로도 구별된다."(356-7)


3장 교양 문제


"헤겔에게 학생의 교육 목표로 삼아야 할 세계는 개인적 세계가 아니라 공동체, 즉 국가이다. 그중에서 인간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특성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객관적인 제영역 가운데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인간이 얼마나 유용한가에 있다. 그러기에 교양은 개인이 그의 특성을 방기하도록 교육하고 '사물의 요소'에 들어맞도록 형성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사물의 요소'란 공동의 세계에서 가정의 특수한 개인 관계와는 다르다. 학교라는 중간 영역이 (개인을) 가정에서 끌어내어(공동의 세계로 집어넣어서) 작용한다. 교양된 인간이 '일반적인 자기 존재'를 획득하는 장소인 세계를 헤겔은 그곳에 들어가면 개개인은 그것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한도에서만 통용되는 것과 같은, 즉 '일반성의 체계'로 삼았다. 그래서 학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개개인이 자기를 일반적(사회적) 생활에 소속시키는 능력이다. 이것이 인문주의적 교양이라 부를 때에 규범으로 삼는 인간 교육의 목표였다."(372)


"1846년에 J. 부르크하르트는 바로 이 급진적 운동에 있어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 G. 킨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다음과 같이 썼다. 〈옛날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불장군이어서 세상에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은 그와 반대로 누구든지 자기는 교양이 있는 자라고 생각하고, '세계관'을 모아 엮어서 타인에게 설교를 늘어놓는다. 공부는 더 이상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 침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히 보급된 교양은 매일매일 인습적 사상의, 즉 착각의 건물을 세워서 그 가운데서 사회의 전 계층이 인공적인 감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40년 후에 그는 옛날 자신이 얻은 확신, 즉 대도회식 교양은 '나사못으로 틀어 올린 범용'을 육성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그 후 점차로 보급되고 점점 낮고 천해진 교양의 일반적 상태가 보증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이 '강제 평준화'에 대항하여 중세가 해소된 이래로 생겨난 교양인과 무교양인의 거리감 같은 것은 비교적 적은 폐해라고 변호했다."(381-2)


"니체는 교양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외관상 상반되지만 꼭같이 파괴적인 작용을 일삼고, 그 결과로 최후에 이루어지는 두 개의 흐름이 본래는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세워진 독일 교육 기관을 현재 지배하고 있다. 하나는 교양의 확대로의 충동이며, 다른 하나의 그 교양의 감소와 약화로의 충동이다. 제1의 충동에 의하면 교양은 점점 넓은 범위로 퍼지게 마련이고, 제2의 경향에 따르면 교양은 그 최고의 자주적 주장을 방기하고 다른 생활 형태, 즉 국가의 생활 형태에 봉사하고 종속할 것을 요구한다. 확대와 감소라는 두 개의 숙명적인 경향을 생각한다면 비관이나 절망의 기분에 사로잡힐 것만 같다. 더욱이 정말로 독일적인 두 개의 상반되는······ 경향, 즉 교양의 확대의 대조로서 수축과 집중의 충동, 교양의 감소의 대조로서 강화와 자족의 충동을 도와서 승리로 인도하는 일이 가능해질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면 별문제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교양에 대한 그의 비판은 철두철미 현존하는 인간성에의 비판이 된다."(386)


4장 인간성의 문제


"무한자를 원리로 삼은 철학적 신학과는 반대로 포이어바흐는 미래의 철학 때문에 유한성의 '참된 정립'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참된 철학의 근본은 신이나 절대자가 아니라, 유한하며 죽어갈 인간이다. 〈권리, 의지, 자유, 인격에 관한 명상은 인간 없이, 인간 밖에서 혹은 인간을 초월하여 행해질 때믄 모두가 통일도 필연성도 실체도 실재성도 없는 명상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 인격의 존재, 권리의 존재다. 인간만이 피히테의 자아의 근저, 라이프니츠의 단자의 근저, 절대자의 근저다.〉" "그러나 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과 해방되고 독립된 인간주의의 내용을 참으로 형성하는 것, 이것들을 포이어바흐는 구체적 인간이라는 그의 추상적 원리를 가지고 감상적 미사여구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엥겔스의 말마따나 〈그는 형식상 실제적이고 인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인간은 의연히 『종교철학』 가운데서 행동하는 추상적 인간이다.〉"(391-2)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을 구체적으로 본래부터 시민(유산계급)이라고 한 헤겔의 정의는 근대의 시민-자본주의적 세계의 현존하는 존재 관계에 있는 사실상의 '비인간성'을 나타내는 적절한 이론적 표현이며, 인간의 자기 소외의 표시이다." "인간을 시민사회의 단지 결정적인 국가에서 결정적으로 해방시켜 자기의 공동체 그 자체와 다름없는 공산주의적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마르크스는 무산 계급에게 말을 건넨다. 왜냐하면 무산 계급은 현행하는 것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대립함으로써 하나의 전면저 과제를 가지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헤겔 법철학의 비판』 서문에서 이미 〈사회가 파괴되어 특별한 하나의 신분이 된 것이 무산계급이다〉라는 명제가 포함되어 있다. 무산계급만이 인간의 완전한 상실이기에 송두리째 인간 그대로의 성질을 모두 되찾는 능력을 가질 수가 있다.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의 이런 예외에서 오히려 새롭고도 일반적인 인간적 인간의 이념을 부각시키고 있다."(395-6)


"키아케고어의 '단독자' 개념은 그의 인간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인 근본 개념이다. 보편적 '체계'는 그것이 정신의 체계(헤겔)이든 인간의 체계(마르크스)이든간에 세계사적인 방심 속에서 〈인간으로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인간 일반이 아니라 너와 나와 그 사람, 우리들이 제 나름으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잊어버렸다."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그것(연합의 원리)은 개인을 강화시킴으로써 약화시킨다. 즉 그것은 합병에 의해 수적으로는 강화하는 것이 되지만 윤리적으로는 약체화이다.〉" "자기가 이룬 자아는 추상적으로 개별화된 자아가 아니라, 그 생활 전체에서 구체적으로 보편 인간적인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번에 아주 평범한 인간, 즉 부부 생활이나 직업이나 노동에 있어서 '보편자'를 실현하는 인간으로 본다. 참으로 실존하는 인간은 '똑같지 않은 전혀 개성적인 인간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이다. 그는 단신으로 '홀로 배우는 자'이면서 '하나님을 배우는 자Theodidakt'이다."(400-2)


"기독교와 인간주의의 내적 관련은 니체의 경우 신이 죽었을 때에 초인이 나타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의욕하는 인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어떤 신으로부터도 이미 말해지지 않는 인간에게 신으로부터의 탈출과 동시에 인간의 초극까지도 요구한다. 인간은 그런 점에서 신으로 있는 것과 동물로 있는 것의 중간에 놓여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전통적인 위치를 잃는다. 그는 무(無)의 심연 위에 팽팽하게 걸쳐진 줄 위에 있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 위에 놓여진다. 그의 존재는 『짜라투스트라』의 서언 가운데 나오는 줄광대의 존재같이 본질적으로 위험 속에 있고 위험이 그의 '천직'이며 위험 속에서만 문제가 된 인간 '규정'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인간주의는 버리려고 하면 버릴 수 있는 '편견'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인도주의적 '인간성'과 그 반동의 대조물인 영웅 기질의 편협도 인간의 참된 본성, 즉 그 비참과 위대, 취약함과 견고함을 한결같이 잘못 보기도 한다."(405-6)


5장 기독교성의 문제


"헤겔은 신앙과 지식의 '실증적' 대립을 보다 높이, 동시에 보다 본원적인 통일에로 지향하려고 시도했다." "헤겔은 종교적 신앙과 철학적 지식을 구별하여 분리하는 것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이 비판하는 것은 종교가 반성 철학 내부에서도 여전히 가지는 '실증적 형식'뿐이다. 이 비판의 목표는 '실증'─기독교적 종교의 철학적 개조에 의한 실증적 형식의 원칙적 지양이다." "철학의 '내용, 요구, 관심'은 신학과 완전히 '공통'이다. 〈종교의 대상도 철학의 대상도, 영원한 진리의 객관성 그 자체의 모습, 하나님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 하나님의 설명인 것이다. 철학은 종교를 설명하는 일로써 스스로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철학은 스스로를 설명함으로써 종교를 설명한다. 철학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 대상에서 종사하는 것이고 이 대상, 즉 진리에 침투하는 사색의 정신이다. 이 종사에 있어서, 그리고 이 종사로 인한 주관적 자아 의식의 정화와 진리, 받아누림과 생동이다.〉"(412-4)


"종교의 '신학적 본질'을 그의 참된 인간학적 본질로 지양함은 포이어바흐에게는 헤겔이 단순한 '감정'이라고 냉소했던 바로 그 평범한 형식에로 후퇴하는 데서 생겨난다. 다름아닌 그 형식을 포이어바흐는 직접-감각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형식으로 재건하려고 했다. 그에게 종교의 초월성은 감정의 내재적 초월성에 기초하고 있다. 즉 감정은 당신 가운데서 당신을 넘어서 있다." "포이어바흐의 종교 비판의 가장 일반적인 원칙은 종교의 근원적인 본질이 인간적 본질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 원래의 본질적 욕구의 '대상화'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특별한 고유의 내용은 없다. 그러므로 바르게 이해한다면 신의 인식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자기 인식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그러한 자기 인식이다. 〈종교는 인간 최초의 직접적 자아 의식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에 이르는 도상에 있는 우회로이다. 〈신적 본질의 규정 일체가 인간적 본질의 규정이다.〉"(419-20)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더구나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것을 이미 상실한 인간의 자아 의식이다〉라고 계속 말함으로써 포이어바흐를 넘어선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그러나 세속적 및 사회적 관계에서의 자기 자신이다. 그러기에 종교는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적 본질의 단적인 '대상화'가 아니라 '자기 소외'의 의미에서의 물화Verdinglichung이다. 종교는 도착된 세계이며 이 도착은 공동체로서의 인간적 본질이 아직 참된 현실성을 가지지 않는 동안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내세적 종교에 대한 싸움은 그런 까닭에 간접적으로는 스스로의 보충과 신성화를 위해서 무릇 종교를 필요로 하는 현세의 세계에 대한 싸움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무신론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믿는 것이다. 그가 정복하려 한 것은 이제는 신들이 아니라 우상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상품' 세계가 바로 그러한 우상이다."(440-1)


"키아케고어와 포이어바흐 양자는 각자의 자기화(터득)이라는 입장에서 가톨릭적 실증성에 대한 루터의 비판으로 되돌아섰다.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적 신앙의 해소를 루터로부터 찾듯이 키아케고어도 소위 '수련'과 '반복'을 루터로부터 전개한다." "루터의 '나를 위함'과 '우리들을 위함'에서 포이어바흐는 신앙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임을 추론하지만, 키아케고어는 그것을 '자기화'와 '주체성Subjektivität'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그러나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강조점은 역시 주체적 내면성의 쪽에서 보는 자기화에 있다." "지각되는 정신은 지각하는 정신과 동일한 정신이기에 신은 본질적으로 〈사유〉 가운데서만 있다고 하는 헤겔의 명제는 기독교적 진리의 인간학적 본질이라 하는 포이어바흐의 원칙을 거쳐서 키아케고어에 와서는 신은 각자의 신께 대한 관계의 주체성 안에서 그리고 그 주체성을 위해서만 거기에 존재한다고 하는 실존적 명제로 변하여 간다."(449-50)


"'독일 철학'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니체의 통찰 이면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철학적 무신론'에 대한 니체의 안목이다. 그것은 철학의 과학적 무신론을 용납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중단했기 때문에 절반은 아직 신학이고 절반은 철학이다. 거기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쇠퇴'가 온다." "니체는 자신의 '몰도덕주의'까지도 기독교-프로테스탄트적 전통의 연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적 도덕의 나무에 맺은 최후의 과일이었다. 〈그 기독교적 도덕 자체가 도덕 부정을 성실한 것으로서 강요한다.〉 기독교 도덕의 철학적 자기 파괴는 역시 그것의 가장 고유한 힘의 한 조각이다." "니체가 어느만큼 기독교에서 졸업하고 있지 못했던가는, 그의 '반기독교'뿐만 아니라 그것 이상으로 그것과 대응하는 '영원회귀' 설이 보여 주고 있다. 이 설은 명백히 종교의 대응물이고 키아케고어의 기독교적 역설이 절망으로부터의 도피로임에 못잖게 '무'에서 나와 '유'에 들어가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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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지음 / 책세상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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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니체 철학 입문


"1960년대부터 본격화한 학적 연구는 체계적·역사적 방식으로 니체를 읽는다. 체계적 방식은 니체의 글을 그 창작 시기를 염두에 두어, 특정 사유와 다른 사유들 간의 시기상·내용상의 연관 관계를 살핀다. 예를 들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씌어지기 훨씬 전에 이미 《즐거운 학문》에서 그것을 위한 수많은 예비 절차가 행해지며, 그 결정체는 신의 죽음이 고지되는 유명한 125번 잠언이다. 여기서 신의 죽음을 말하는 '미친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라는 형상의 전(前)단계 역할을 한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1881년에 이미 니체의 머릿속에 떠오른 영원회귀 사유를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 사유는 니체 후기 사유의 대표 개념인 힘에의 의지와 서로 완성해주는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힘에의 의지 개념에 의해 위버멘쉬 개념도 이론적·실제적 보증을 받는다. 그리고 위버멘쉬 개념은 허무주의 극복과 가치의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사유의 결합체만이 니체 철학을 '긍정의 철학'으로 만든다."(82)


"역사적 연구 방식은 니체와 사유를 교환한 동시대인들, 그 시대의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사유가들, 그가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칭찬해 마지않은 사유가들, 니체 스스로는 숨기고 있지만 그가 영향을 받은 사유가들, 그리고 니체가 영향을 미친 사유가들과 니체 자신과의 연관 관계를 고려한다." "체계적·역사적 연구는 전승된 것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비판가의 모습과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이론가의 모습을 니체에게서 부각시킨다. 비판가Kritiker와 이론가Theoretiker로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말하는 철학자로 제시된다. 이 철학은 생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과 정당화 프로그램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성하는 것으로 규명하고, 생성적 성격을 지닌 모든 것의 필연성과 유의미성을 도출해내어, 그것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을 철학적으로 보증하고 싶어 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니체 철학의 정수이며, 허무주의 극복 후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긍정 양식 중에서 최고의 양식이다."(84-6)


제2부 니체 철학의 과제와 방법론


"니체에게 해석이란 해석자의 인식 의지가 세계와 상호 작용 하면서 자신의 의미 세계를 구성해내고 창조해내는 작업이다." "즉 인간의 모든 인지적 활동은 해석이다. 철학적 활동 역시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해석 활동이다. 니체는 이런 해석 활동이 철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해석이고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인 한, 철학은 수학 이론처럼 객관적으로 타당한 개념들의 체계를 구성해낼 수 없다. 또 참과 거짓을 객관적으로 확정해내는 작업도 할 수 없다. 니체는 의미 세계를 조직하고 창조하는 이런 해석 활동 일반을 예술Kunst이라고 부른다. 이 예술 개념은 예술가의 활동이나 이 활동에 의한 예술 작품의 산출이라는 협의적 제한을 넘어서서 학적-논리적 영역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서, 예술을 인지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고차적 예술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도 그것이 해석인 한에서 이런 인지적 예술 활동의 일환이며, 철학자는 〈예술가-철학자Künstler-Philosoph〉인 것이다."(106)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건설하는 첫 단계는 전통적인 철학적 자명성 및 철학적 세계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때 니체가 사용하는 방법론은 심리-계보적 방법론이다. 계보적 방법론은 탐구 대상의 발생Entstehung 조건이나 유래 및 출처Herkunft를 밝혀내면서 탐구 대상을 해명한다. 이때 어떤 최종적인 결론에 대한 추측이나 목적론적 가정은 배제한다. 따라서 탐구 대상의 유래와 출처는 형이상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기원Ursprung일 수는 없다. 니체는 그 출처를 개인적이고도 집합적인 존재인 인간의 심리에서 찾아낸다. 그러므로 심리-계보적 방법론은 일종의 심리 분석의 형태로 진행되게 된다. 이 방법론에 의해 니체는 서양 사유의 자명성을 형성했던 토대가 형이상학적-도덕적-목적론적 해석의 결합체라는 것을 밝혀낸다. 니체는 서양 철학의 제 영역들이 한마디로 도덕 가치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120-1)


"니체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형이상학의 기본 특징은 무엇보다도 이분법적 세계 해명이다. 이분법적 형이상학의 세계 해명은, 세계를 존재(혹은 존재의 세계)와 생성(혹은 생성의 세계)으로 이분하여 그것들의 본질적-가치적 배타 관계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전자에 존재적·인식적·가치적인 우위를 부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생성은 한갓 가상으로 평가절하된다." "이 이분법에서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식과 탐구, 학문과 삶의 토대 역할을 해왔으며, 이 존재에 대한 믿음이 바로 생성 및 생성 세계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니체에게 실제 세계를 가상으로 폄하하는 가상 아닌 세계, 즉 그 자체의 세계 또는 존재의 세계란 한갓 허구일 뿐이다. 니체의 생성의 철학은 '그-자체' 일반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상'이라는 개념의 시민권을 거부하는 '생성에 대한 진정한 철학'이고 싶어 한다. 존재는 이제 다른 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124-5)


"이분법적 형이상학이 범하는 최대의 오류를 니체는 '도구와 규준의 혼동' 혹은 '과도한 순진함'에서 찾는다. 이 오류는 니체가 인간 이성의 소박한 오류로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성이 자신과 자신의 인식 범주들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해서 그것들을 실재에 대한 규준으로 믿어버리는 독단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이러한 이성의 독단성에 의해 서양 형이상학의 전 역사가 규정되고 있다고 이해하며, 이것을 형이상학 비판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표상하고-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고-해석하는 주체'다. 이런 인간의 인식은 관점적 해석이고, 관점적 해석은 삶에 유용한 오류일 뿐이다." "니체는 이 점을 다음처럼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말하기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반대편에 서서 말한다. '사유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허구여야만 한다.' 사유는 실재를 잡을 수 없다.〉"(131-3)


"일반적으로 이론적 허무주의는 진리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부정을, 윤리적 허무주의는 행위의 가치와 규범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니체는 프랑스 문화 비판으로부터 허무주의 개념을 전수받아, '최고 가치의 탈가치'에 의해 초래되는 의미 상실의 경험 상황, 의미에 대한 물음이 아무런 답변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허무주의 상황으로 규정한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주제'로 허무주의를 도입한 것은 1882년 가을부터다. 이때 씌어진 유고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허무주의 주제를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집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특히 정적 암살 행위들이 신문 지상이나 사실주의 문학에 등장하면서 허무주의 개념이 테러리즘과 동의어로 인식되어, 그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고 의미의 축소화 과정을 밟았던 시대적 상황과 맥을 같이한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주저로 기획했던 《힘에의 의지》에 '모든 가치의 전도에 대한 시도'라는 부제를 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195-6)


"니체의 '유럽 허무주의에 대한 철학'에서 허무주의 주제는 '기존 가치의 탈가치', '유럽 허무주의의 역사', '새로운 가치의 설정'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는 인식 이론, 형이상학, 미학을 비롯한 학문 일반 및 도덕, 정치, 경제 영역에서의 진리 상실과 신적 권위의 상실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유럽 허무주의의 역사'에서는 유럽의 역사가 플라톤적-그리스도교적 가치의 몰락 과정, 신 개념의 의미 상실 과정, 그리스도교 도덕의 무력화 과정으로 그려진다. 즉 유럽 역사가 허무주의 과정으로 재조명된다. 이 허무주의 과정은 힘에의 의지라는 새로운 세계 해명 원칙과 위버멘쉬의 등장, 그리고 위버멘쉬에 의한 '새로운 가치 설정'으로 극복되어 새로운 유럽의 미래가 예견된다. 이렇듯 허무주의 주제의 세 부분은 서로 불가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서의 허무주의 주제는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와 위버멘쉬 개념군 안에서 움직인다."(197)


"완전한 허무주의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이자, 동시에 허무주의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역전시키는 허무주의 형식이다. 그래서 인간을 부정의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에의 의지를 긍정에의 의지로, 그것도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의 의지로 전환시키는 허무주의 형식이다. 허무주의가 단지 과거의 것에 작별을 고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게 하는 계기도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니체는 인간에게 근본적 부정과 근본적 긍정 사이에서, 절대적 퇴락의 가능성과 허무주의 극복 가능성 사이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니체는 허무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성공 가능성을 오로지 인간 의식의 전환 여부에서 찾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가치의 설정자이며 창조자로, 해석 주체로 긍정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관점적 인식 상황이 단순한 허무적 위험으로서의 데카당스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적극적 기회의 역할을 하는지가 결정된다."(210-3)


"인간의 변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가치의 설정자이자 창조자로, 해석 주체로 긍정해야만 가능하다. 이런 긍정은 자신의 해석이 자신의 힘과 삶을 위한 전략에 의해 수행되는 관점적 평가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곧 자신의 해석이 필연적으로 오류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음에 대한 긍정이다. 더불어 해석의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의미 있고 필연적이며 정당한 해석이라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다. 동시에 이 의미 필연성이 실재 자체와 일치되거나 실재 자체의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해석 주체로 인정하면 궁극적으로 존재 그 자체는 인간에게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음을 긍정하게 된다. 이는 곧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적극적 긍정을 의미하며 자신의 이성 사용에 결코 절대적 요구를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해석 주체로 긍정하는 이 주체는 니체에게서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명칭으로 불린다."(214-5)


"인간은 자신의 경험 상황의 무의미함과 그 경험 상황의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의 무의미함과 무가치함을 경험한다. 영원회귀 사유는 이런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이 영원히 반복되고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이것으로부터 도망칠 가능성이 전혀 없으리라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영원회귀 사유의 결정적인 기능은 이 사유가 자신의 이론적 적절성을 증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사유의 〈비이론적〉인 면, 즉 이 사유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달려 있다.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사유는 인간을 기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이 사유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단하게 한다. 이 기능을 가리켜 니체는 〈약한 자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강한 자도 결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약자와 강자를 구별하는 목적이 약자의 제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약자일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강자로 만드는 데에 있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영원회귀 사유의 목표인 허무적 상황의 극복 가능성이 주어진다."(221-3)


제3부 새로운 세계 해석의 건설: 생기존재론


"생성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생성의 세계=힘에의 의지=생기Geschehen라는 기본 공식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세계의 기본 사태를 곧 힘에의 의지이며 생기 자체로 이해한다. 따라서 니체의 입장을 마그라이터가 제안한 〈생기존재론〉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다." "이렇듯 니체의 생성에 대한 설명은 (전통적 의미로는) 반형이상학적이지만, 여전히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니체의 이런 프로그램은 근대의 경험철학에서 행해진 반형이상학적 환원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니체에게는 카르납과 달리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가상 문제〉는 아니며, 형이상학적 문장들은 단순한 〈삶의 느낌에 대한 표현〉일 수 없다." "'생성의 의미는 모든 순간에 충족되고 도달되고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그의 의도에 따라 니체는 생성을 오로지 생성적 성격에 의해서만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더 나아가 긍정할 수 있는, 즉 〈생성의 무죄를 입증〉하는 방법을 모색한다."(293, 296)


"생성 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유 단초는 바로 '생성은 살아 있는 존재Sein'라는 것이다." "존재는 살아 있는 것이고 생성의 과정에 있다. 이는 니체가 이해하는 전통 형이상학의 도식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되어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를 새로운 공식, 즉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고, 되어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로 대체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와 대립되는 것은 이제 '생성'이 아니라 '생성하지 않음'이고,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생성'은 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존재'다. 니체 철학은 이렇듯 '전도된 플라톤주의'다. 전도된 플라톤주의가 제시하는 존재와 생성의 일치에서, 존재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성의 과정에 있을 수 있는지는 바로 생기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이 개념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제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힘에의 의지인 한에서 되어간다'라는 윈리로 구체화된다."(310-2)


"힘에의 의지를 니체는 추동하는 온갖 힘의 원천으로 이해한다. 〈추진하는 힘은 힘에의 의지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외의 심리적이거나 역동적이거나 심리적인 힘은 없다〉라는 니체의 단언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의지의 힘의 실제 영역은 무기적인 세계에서부터 인간의 지각과 지성 영역을 거쳐 물리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전 존재 영역을 포괄한다. 이렇게 해서 힘에의 의지는 '존재의 가장 내적인 본성'으로 니체에 의해 상정된다. 이것에 의해 니체의 초기부터의 기본 구상인 '살아 있는 존재'의 내용이 구체화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이 변화와 생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힘이며, 그것도 지배를 원하고, 더 많이 원하며,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의지의 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지의 힘은 바로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전통 형이상학의 정식을 뒤집은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는 것이다'라는 정식은 이제야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된다."(331)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존재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라고 부른다.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의 의지를 세계의 〈본질essence〉로 명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본질' 혹은 '본성'이라는 철학 용어는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니체에게서는 기피되는 용어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가 여전히 전통 형이상학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는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이 용어를 힘에의 의지에 대해 사용한다. 힘에의 의지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이런 보편적 성격을 갖는 힘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자존하는 것도 아니고, 실체적 존재도 아니며, 형이상학적 유類도 아니다. 오히려 힘에의 의지는 관계를 맺으면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의지 작용이다. 즉, 관계적 존재다." "더불어 이런 힘에의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생기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내재하는 〈내적 생기innerliches Geschehen〉이기도 하다."(333-4)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자연 전체의 현재적인 기체〉, 모든 개별적인 사물에 〈근원적인 창조력〉이다. 즉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인 의지는 곧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서의 의지를 그는 〈사물 자체〉로 인정한다. 〈모든 표상은, 모든 대상은 그 어떤 종류이든 간에 현상이다. 사물 그 자체만이 유일하게 의지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힘Kraft 개념에 포함시키던 기존의 표상 방식에서 벗어나 힘을 본성상 의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곧 힘의 형이상학이 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작은 문〉이면서도 동시에 그 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모든 사물의 좀더 내적인 본성〉이라고 여긴다. 의지는 사물 그 자체인 동시에 현상(더 정확히는 표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유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가장 직접적이고도 가장 명료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346)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형이상학적 일원론을 지향한다." "이런 실재를 니체는 한갓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실재성의 〈창백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칸트의 물 자체와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성적 인간의 내적인 규정 근거였으며, 쇼펜하우어에게는 모든 존재자의 일차적이면서도 근원적인 것이었던 의지는, 니체에게는 모든 역동적인 관계들의 일차적인 원천이 된다.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의지의 〈힘의 급작스러운 분출이나 폭발〉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에게 의지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고 잃어버리는 의지들이며, 이미 다른 의지들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의지의 이런 '내용'과 '목적'을 없애버리게 되면 의지의 성격 역시 없애버리게 되며, 내용과 목적이 사라진 의지는 그야말로 〈한갓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게 된다."(346-8)


"힘에의 의지는 힘 소비의 극대 경제의 원칙을 따른다. 의지는 항상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의지들 간의 긴장 관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 니체는 이런 힘 소비의 극대 경제 원칙이 '매 순간' 적용된다고, 즉 '예외 없이' 그리고 '중단 없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즉 '당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본성상 더 많은 힘을 원하는 힘에의 의지는 '모든 순간' 자신의 힘의 극대화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작용 방식의 '지속'은, '매 순간'의 당위는 어디서 보장받을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 때문에 니체는 힘 소비의 극대 경제 원칙과 영원회귀 사유를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같은 것의 영원회귀'는 곧 '같은 것의 같은 것으로의 영원회귀'를 의미하게 된다. 즉 '힘에의 의지'가 '힘에의 의지라는 자신의 본성으로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의지의 힘은 항상 자신의 본성으로 되돌아오고, 매 순간 자신의 본성을 실현한다."(362-3)


"힘에의 의지의 이런 성격은 매 순간 힘의 최고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생성의 전 과정에서 하나의 힘의 극대점이나 힘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생성의 전 과정이 매 순간 힘의 극대화를 경험한다. 더 나아가 힘의 균형 상태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힘의 균형 상태라는 것은 힘들 간의 싸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종의 정지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매 순간 힘의 극대화를 꾀하고 실현시키는 힘에의 의지의 본성에 어긋난다." "영원회귀에서의 영원성은 무시간성이나, 시간적 과정의 멈추지 않음, 혹은 헤겔적 의미의 '끔찍한 무한성', 피안에 대한 믿음에 각인된 종교적 영원성과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절대적인 생기 필연성이 확보되는 개개의 순간의 영원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각 순간들이 그것들의 영원회귀를 원할 정도로 필연적이고 가치가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순간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순간들이 힘에의 의지의 생기 사건이기 때문이다."(364, 376)


제4부 해석적 지식과 해석적 진리: 관점주의 인식론


"니체는 관점성Die Perspektivität을 생/삶의 기본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곧 더 많은 힘을 더기 위한, 즉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의지 작용의 조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필연적 관점주의'는 해석의 보편성에 대한 다른 식의 해명이기도 하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의 작용을 해석 행위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존재자 내부의 유기적 과정은 힘을 얻어 성장을 원하는 의지에 의해 수행된다. 이런 수행 방식이 곧 해석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관점을 설정하는 힘의 보편성은 곧 해석의 보편성을 의미하게 된다." "인간은 힘에의 의지가 활동하는 장이다. 신체-주체의 힘에의 의지는 신체-주체를 단순한 인식 주체가 아닌 해석 주체로 만든다. 해석 주체의 인식 과정은 곧 생기 현상으로서의 해석 작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석 주체의 해석 과정에서의 특정한 관점을 규정하는 규제적 원리가 힘에의 의지고, 이 점은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관점을 설정하는 힘'으로 명명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428-30)


# 니체 철학에서는 언제나 힘에의 의지의 수행=생기=해석 행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신체 개념은 인간에 대한 이원적 해석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 신체는 이원화할 수 없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명칭이며, '큰 이성die groβe Vernunft', '나Ich', '자기 자신das Selbst'은 신체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니체가 신체 개념을 매개로 하여 극복하고 싶어 하는 인간에 대한 이원적 해석이란, 인간을 정신/이성/영혼과 이에 대립되는 육체라는 두 가지 단위로 설명하는 해석을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순수한 이성의 동일성으로 결정되는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인 '나'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없다." "니체는 육체 중심이든, 이성 중심이든 간에 인간을 두 단위로 분리하여 설명하는 모든 해석을 형이상학적 인간관으로 규정하며, 인간에 대한 오해라고 단정 짓는다. 인간은 이런 구분에 의해 이원화될 수 없는 총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영혼/정신 부분과 육체 그리고 의지들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체인 것이다."(435-7)


"신체는 창조 주체다. 여기서 창조는 '가치 평가 작용' 혹은 '의미 창조 작용'을 말한다. 신체는 자신의 자기 극복적인 삶을 위해, 위버멘쉬적 삶의 유지를 위해 평가 작용을 한다. 따라서 어떤 것의 가치와 의미는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의 평가 작용에 의해 비로소 부여된다. 이 가치 평가와 의미 부여는 전적으로 신체의 목적을 위한 것이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 것은 전적으로 신체 의존적이다.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은 그 자체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체의 자기 극복적인 삶의 유지를 척도로 선과 악의 내용이 결정된다. 신체는 이런 평가 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성해간다. 평가 작용은 신체의 삶의 실천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 평가된 의미와 가치는 결코 고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평가 작용에 의해 유지되지만, 이 평가 작용에 의해 상승되고 변화된 삶은 또 다른 평가 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442)


"해석은 관점적 평가다. 니체에게서 관점성은 모든 삶의 근본 조건이며, 인간 인식의 근본 조건이기도 하다. 인식은 관점성에 의존하며, 인식은 단적으로 관점적이다. 관점적 인식은 가치를 평가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해석은 주체의 능동적인 가치 평가 행위이며, 가치 각인적 성격을 갖는다. 이 점은 해석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해석으로서의 인식은 주체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 행위인 것이다. 대상 인식에서 규준이 되는 물음은 이제 〈이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나에게 무엇인가?〉이며, 인식 행위의 결과는 따라서 주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질적인 의미-해석이다. 의미-해석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에 대한 획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체가 자신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의미 창조 작용의 결과다. 하지만 이 행위는 언제나 특정한 목적하에서 이루어진다. 그 목적은 삶의 유지다. 그것도 항상 성장하는 형태의 삶의 유지다."(458-9)


"니체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인식 활동에서 인간은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주관적 관점을 배제한 외재적 관점을 가질 수 없다. 또한 해석된 세계는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이고, 주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그런 세계다. 이 세계야말로 바로 주체에게 '상관있는' 세계다. 그러나 이 세계의 상정이 곧 대상으로서의 세계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해석된 세계의 범위는 단지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의 범위일 뿐, 대상으로서의 세계 자체의 범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내 해석의 한계는 나에 의해 경험된 세계의 한계일 뿐이다. 이렇듯 니체는 세계에 대한 관점적 관계 맺음의 불가피함을, 그리고 해석 세계가 인간 경험의 한계이며, 경험의 한계가 바로 인간 자체의 한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니체는 한편으로는 본질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 경험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인 한계 설정을 하는 약화된 인식론적 실재론을 표명하고 있다."(473-5)


"해석은 비록 필연적으로 오류인 가상Schein이긴 하지만, 니체가 인정하는 유일 실재, 즉 힘에의 의지에 의해 '의욕되고 산출된' 가상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인식이다. 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실재의 기능이며, 가상은 실재에 의해 의욕되고 만들어진 가상이다." "'현상'이자 '의욕되고 산출된 가상'인 해석은 이렇게 해서 기존의 참-거짓의 구분을, 기존의 '참-가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있다. 해석은 비록 가상적 현상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해석 세계이며, 힘에의 의지라는 실재의 산출물이다. 이런 해석과 대립되는 것은 참된 인식이나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해석과 대립적인 것은 우리의 해석 세계로 들어오지 않는 것,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이며, 니체는 이것을 기존의 분류 도식을 벗어나서 '다른 종류의 현상 세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는 비록 지금은 우리의 해석 세계로 들어오지 않지만, 우리에 의해 형식화되고 해석될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은 세계다."(475-7)


"타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라는 것은 우리의 규약적이고도 가치평가적인 해석적 이해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에 대해 공정하지 않은ungerecht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니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정치 않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 이런 '부조화'야말로 우리를 타자에 대한 공정한 이해gerechtes Verstehen로 이끄는 동인이 된다. 공정치 못함에 대한 인식과 통찰은 우리에게 더욱 섬세한 해석적 이해를 원하는 의지를 갖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섬세한 해석은 다름 아니라, 각 개별자들의 개별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거나 일반화하지 않은 해석을 말한다." "섬세한 해석을 원하는 의지는 타자에 의해 사실적인 이해나 동의나 합의를 하라는 강제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런 의지를 갖는 해석자를 니체는 공정함이라는 특성을 갖는, 공정한 주체로 상정한다."(531)


제5부 비도덕주의 윤리학


"니체가 보기에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이 추구해온 진리는 바로 도덕적 진리들이며, 그것도 편견으로서의 도덕적 진리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현실적·자연적 삶을 부정하는, 즉 삶의 본능을 부정하는 반자연적 성격을 띤다. 이런 특징은 형이상학의 성립과 전개에서, 그리고 인간의 진리 추구 노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서양의 도덕과 형이상학과의 숙명적 결합은 이미 지적된 '존재와 생성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형성이나 '도덕적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에서뿐 아니라 '선악의 이분법'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한다. … 이렇게 해서 선과 악,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는 존재적으로나 가치적으로 분리되고, 본질적 대립 관계를 형성한다." "이 도덕은 도덕성을 종교적 초월이나 철학적 초월을 통해 존재 세계/저편의 세계에 근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적 특성을 갖고 있는 도덕을 인정할 수 없다. 이 이분법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며,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550-1)


"니체는 도덕적 가치 판단에서 '행위'가 아니라 '행위자'를 판단의 척도로 상정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애에서 발생하며, 그런 한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기적인 행위들이다. 따라서 이기적인 행위와 비이기적인 행위 사이에는 단계와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후에 니체는 이기심 '자체'가 아니라 이기심의 '주체'가 이기심이나 이기적 행위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밝힌다. 이기심은 예컨대 위버멘쉬적 삶을 목적으로 하는 주체의 자기 사랑일 수 있다. 이런 이기심을 갖는 주체는 '고결한 인간'이자 '강자'이며, 그의 이기심은 '건강하며 건전한' 이기심이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선과 악의 차이를 '선 그 자체'와 '악 그 자체'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차이로 환원해버리는 비도덕주의의 입장을 선취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기심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 이기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기적 '행위'가 아니라 이기적 '행위자'가 문제인 것이다."(556-7)


"〈자연이 퇴화된 자들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연이 반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생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의 증대는 그와는 반대로, 병들었고 반자연적인 도덕의 결과인 것이다〉라는 니체의 단언처럼, 반자연성으로부터 도덕의 구제는 니체에게 시급한 과제다. 니체의 프로그램은 도덕이 갖고 있는 반자연적 성격을 없애고, 도덕의 자연적 유용성을 다시 밝혀내고 부여하여, 도덕을 자연화하고자 한다." "니체의 관심은 특정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전적으로 행위 주체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그 자체로는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없다는 것을 밝혀내어 선과 악에 대한 고정 관념을 없애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니체는 도덕의 기원이 도덕 외적=비도덕적=자연적 유용성이며, 도덕 가치도 오로지 이것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정언적 명제를 세우고 싶어 한다. 〈자연명법으로 정언명법을 대체한다〉라는 짤막한 표명은 니체의 이런 관심을 대변해주고 있다."(584-6)


"반자연적 도덕은 무리 본능과 평균 본능과 데카당스 본능의 소유자들의 힘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도덕이다. 그래서 생명력의 퇴화를 가져오고 삶을 부정하는 데카당스 도덕인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차원 높은' 새로운 도덕은 다른 종류의 해석 주체를 상정해야만 한다. 즉 스스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가치 평가자, 자기 극복과 자기 지배를 할 수 있는 자, 이런 삶을 영위하고자 의식적-의지적으로 노력하는 자, 즉 강자다. 이런 강자를 니체는 노예와 대립시켜 '귀족적 인간' 혹은 '주인Herr'이라고 부른다." "주인 도덕에서 '좋음gut과 나쁨schlecht'의 대립은 '고귀함vornehm과 경멸적임verächt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노예 도덕에서 '선gut과 악böse'의 대립은 그들에게 '위험하지 않음ungefährlich과 위험함gefährlich'의 대립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도덕 유형은 고도로 혼합된 문화 체계 안에서뿐 아니라 한 개인의 영혼 속에서도 공존하고 침투하며 중재되고 있다."(590-1)


"노예 의식을 갖는 개인들 사이에서 타자에 대한 승인은 여론이나 평판 혹은 대중들의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반면 주인 의식을 갖는 사람들 간의 서로에 대한 승인은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타자에 대한 긍정에서 성립된다.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선과 악의 판단 주체라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이 긍정은 자신의 가치 판단과 그것의 행사가 필연적으로 개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이런 반성적 자기 제한은 주인 의식을 갖고 있는 강자의 힘이다. 강자의 반성적 자기 제한은 타자의 가치 판단의 개별성과 차이를 인정하게 한다. 타자에게 자신의 가치 판단에 동의하거나 합의하라고 강요하거나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의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거기서 도출된 타자의 판단을 인정하고 승인한다. 타자 역시 자신처럼 가치 판단의 주체이며, 자신의 창조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정한다."(594-5)


제6부 예술생리학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은 내용상으로는 신화적 세계관, 욕망과 본능,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비극적 운명과 고통, 인간 존재의 경악스럽고 부조리하고 잔인한 삶, 죄와 속죄, 자신의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삶에 대한 긍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형식상으로는 비극적 운명의 개인을 구원하는 역할로서 합창과 음악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성=덕=행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 공식이 신화적 환상과 비극적 운명을 의식성으로, 죄와 속죄의 상관성을 기계적 인과론으로, 동정과 일체감과 음악(합창)의 장을 논리적·이성적 토론의 장으로 변질시킨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제 변증론자이며, 그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 때문이 아니라 논리적 비대화로 인해 파멸한다." "니체는 이런 종말의 책임을 소크라테스주의와, 〈소크라테스적 합리주의의 시인〉이자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를 표방하는 에우리피데스에게 지운다. 니체의 이런 입장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630-1)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두 예술 충동 중에 아폴론적 예술 충동은 형상과 형태를 만들고 제공하는 충동이자 척도를 설정하고 틀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은 '개별화의 원리'를 사용하여 구분 가능하고 산정 가능하며 인식 가능한 조형 세계를 만들어낸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은 인간 안에서 무매개적으로 솟구치는 예술 충동으로서, 울타리나 제한이나 형태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여 모든 것과 그리고 세계의 근원적 모습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지향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 두 예술 충동이 대립적이지만 서로를 요청하는 관계에 있으며,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 활동은 이 두 충동이 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예컨대 음악에서는 디오니소스적 힘이, 조형 예술에서는 아폴론적 힘이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이 두 예술 힘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합일의 상태를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찾는다."(632-4)


"예술가-형이상학은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 역시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고 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인들의) 삶은 다양한 활동의 장이자, 고통과 온갖 종류의 부조리와 잔인함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는 거대한 불협화음의 장이다. 삶의 이런 불협화음을 바라보면서 이것을 해소할 그 어떤 현세적 해결책도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예술이라는 매개물을 요청하게 된다. 예술을 통해 인간 역시 '형이상학적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위로는 도덕에 기초한 초월 세계의 상정이나 정의로운 미래 제국의 건설에 대한 약속과는 다르다. 이 형이상학적 위로는 합리적-도덕적 사고를 넘어서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예술을 〈반도덕적 예술가 신〉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적 위로는 또한 자의적 낙관주의일 수도 없다. '가상의 가상'을 통한 '가상에 의한' 근원 일자와의 합치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비극이라는 예술 양식에 의해 이행된다."(642-3)


"니체는 1881년 이후 예술가-형이상학 대신에 새로운 철학적 과제를 설정한다. 이제 그에게 인간의 삶과 세계는 형이상학적 위로라는 정당화를 통해서만 긍정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세계는 서로 대립되는 측면들을 필연적으로 갖고 있으며, 그 여러 측면들에는 없어도 좋은 것이나 불필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가능성을, 즉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이런 철학에 필요한 도구로서 니체는 다시 예술을 주목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예술은 해석으로서의 예술이다. 해석으로서의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창조력의 소산이다. 그런 한에서 관점적 평가 행위이며 가상이다. 하지만 이 가상은 형이상학적 위로 수단, 아름다운 환상으로서의 가상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힘에의 의지의 예술 활동은 삶의 어두운 디오니소스적 심연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게 한다. 이런 긍정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라고 부른다."(647)


"예술생리학 프로그램은 니체의 관점적 세계 경험을 토대로 하며, 예술을 힘에의 의지에 의한 해석으로 규정한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 안에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를 창조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의 이런 창조 활동을 예술 활동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힘에의 의지의 활동은 그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예외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세계의 본질이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들의 활동은 모두 예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거대한 예술 활동의 장이며,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힘에의 의지의 작용에 대한 다른 명칭이 '해석 작용'인 한에서, 세계는 거대한 해석 작용의 장이며, 거대한 해석 작품이다. '스스로 분만하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세계'라는 니체의 유명한 단언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이렇듯 초기의 형이상학의 토대였던 근원 일자는 이제 힘에의 의지에 창조의 주체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649-50)


"인간의 미적 체험에 대한 니체의 분석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선사한 것이며, 세계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인간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니체의 표현대로 〈아름답다는 판단은 인간의 종적 허영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미학의 제1진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그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다. 인간 외에는.〉" "하지만 니체가 전적으로 주관주의적 입장만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입증된 것'은 일종의 집합적인 생존 조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미 판단이나 미적 가치는 주체 의존적이기는 하지만, 각 개인의 주관성의 영역으로 전적으로 환원될 수만은 없다. 오히려 니체는 미적 체험의 집합적 생존 조건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런 환원에 대해 경고한다. 이것은 현대의 미학 이론이 말하는 객관적 상대주의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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