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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평점 :
프롤로그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3일 만에 혁명이 실패하자 서재필은 망명하고, 첫 번째 아내는 자살했다.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고, 집안 전체가 멸문당한다. 서재필은 고작 스무 살이었다. 갑신정변의 동지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기대와 달리 일본은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다시 박영효, 서광범과 태평양을 건너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서재필은 어느 미국인 자선사업가의 도움으로 1886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습력이 뛰어났던 서재필은 모든 학생을 대표해 졸업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원하던 독지가는 서재필이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과학을 택했다.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12)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최초의 순 한글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에 맞춰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만든다.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모임은 7월 2일 독립협회로 발전한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국고를 지원했다. 여기에 고종의 측근뿐 아니라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친러파, 친일파 등 정파를 초월한 다수의 관료가 참여했다. 어쩌면 몰락하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석 달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기에 대한 의례를 시작했던 서재필은 독립문에 태극기를 새겼다. 《독립신문》은 태극기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제호에도 태극기를 인쇄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자주 독립국으로서 ‘제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897년 10월, 여론에 호응한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이때만 해도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았던 두 세력은, 곧 민주주의 도입을 둘러싸고 대립한다. 14)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토론 수업을 시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학생들이 토론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협성회’의 시작이다. 협성회는 이승만, 주시경, 오긍선 등 배재학당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으며, 토론회를 기반으로 대중 계몽 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큰 영향을 준 서재필은 그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오긍선 역시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아 서재필의 뒤를 이었고, 나중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의 서양 의학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선도하는 대중 토론회가 인기를 끌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에서는 안창호가 명연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러한 활동은 점차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외교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15)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안창호가 하와이를 지나가고 두 달 뒤인 1902년 12월, 대한제국의 정식 여권을 소지한 최초의 이민자들이 민영환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에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민영환은 이들의 여권과 비자 처리 업무를 맡았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뜬 그는 날로 격해지는 열강들의 침략을 외교 관계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하와이 이주 사업 역시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다. 같은 해, 일본의 요구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도 금지되었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여기서 다했다. 하와이 이민을 주선했던 민영환은 자결하고, 이민자들이 돌아갈 조국은 없어졌다. 20-1)
한편, 3·1운동의 폭풍이 지난 1919년 여름, 파리의 프랑스 정보 당국은 하노이에 긴급 전보를 보내 한 젊은 남자의 신원 확인을 요청한다. 이 젊은이는 ‘응우옌 아이 쿠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응우옌(Nguyễn)은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으로 한자로는 ‘완(阮)’이고, ‘아이 쿠옥(Ái Quốc)’은 한자 ‘애국(愛國)’을 베트남어로 표시한 것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운동가였던 그는 난데없이 파리강화회의장에 들어가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했다. 당황한 프랑스 정보 당국은 이 사람의 배후를 캐기 시작했는데, 밝혀진 내용은 이렇다. 1911년 베트남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미국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스 정보 당국이 기록한 단체의 이름은 ‘Korean National Association’.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이 결성한,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이민자들이 꼬박꼬박 기금을 모으던 바로 그 ‘대한인국민회’다. 24)
#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나중에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1918년 상하이 망명 중이던 여운형 역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김규식을 대표단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이와 동시에 여운형은 전국적인 봉기를 조직해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는데, 이것이 3·1운동의 시작이다. 파견된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서 백방으로 뛰던 도중 프랑스 측으로부터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 한다는 답변을 듣고, 긴급히 여운형 측에 알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25)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의 실체가 드러나자 외교론이나 애국계몽론의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는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설득력을 얻으며, 한인사회당이 임시정부의 다수파가 된다. 임시정부는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세력을 재편하여 동로, 북로, 서로의 3대 군관구를 설정했다. 그해 6월 홍범도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다. 이동휘는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추가 파견하여 이미 활동 중인 박진순에게 합류시키고,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 약속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신용이 없던 신생 소비에트의 지폐가 아니라 환전이 가능한 제정러시아의 금화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이르쿠츠크파가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 계열(김구 등)에 이 돈의 존재를 폭로한다. 이를 임시정부의 공금으로 생각한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띠었다. 1921년 1월, 이동휘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29-30)
한편, 1920년 독립군의 맹활약에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하며, 만주 한인 민간인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15 이에 세력이 위축된 여러 독립군 조직은 1921년 초 연해주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자유시)에 집결하여(4,500명) 단일한 독립군 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다. 사실 이 집결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의 산물이었고, 상해파의 지도를 받는 다수의 독립군 조직을 이르쿠츠크파가 연해주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의 접수를 시도했다. 1921년 6월 28일 볼셰비키와 진압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을 무력으로 제압하는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당시 김구는 좌파 지도자들이 횡령했다고 의심하고, 1922년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 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 분열이 시작되었다. 30)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초기 사회주의자 김철수는 김구에 복수하려는 세력을 끝까지 말렸고,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 이후 새로운 좌파 지도자로 등장한 박헌영 등의 스탈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1990년대 러시아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구가 지목한 인물들의 공금횡령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제적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이동휘와 동행을 마친 이극로는 황진남과 마찬가지로 독일에 남아 1922년부터 베를린대학(Universität zu Berlin)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 언어학을 부전공했던 그는 이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만들어 스스로 강의했다. 2019년, 이극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이 강좌를 1923년 독일 교육 당국이 정식 강좌로 허가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어는 독일어로 ‘Koreanische Sprache(한국어라는 뜻)’라고 표기되어 있다. 31-2)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과학이 조선의 살길이라는 것은 명백했고,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과학을 배우자’라는 구호로 이어졌다.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公民(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36-7)
나경석은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회사와 제약 사업 등에 종사했으나 실패하고, 유학 친구 신익희와 축구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신익희와 함께 비밀 조직을 만들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신익희는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여기서 손정도, 여운형, 황진남과 함께 임시의정원 활동을 했다. 이 무렵 과학 연구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시작은 1924년 김용관이 조선일보에 발명학회 설립을 제안하면서부터다. 대한제국이 이공계 교육을 위해 설립한 상공학교(1899년)에 뿌리를 둔 경성공업전습소(1907년)가 1915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20 이 학교 졸업생들은 최초의 과학도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를 만들고, 1920년 10월 20일 《공우(工友)》라는 잡지를 창간해 과학 계몽에 앞장섰다. 이 창간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37-8)
1933년 6월, 발명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한다.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릉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38-40)
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100년 전, 나라 잃은 민족의 부활 수단으로 인식되며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상대성이론은 1922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조선 전체에 아인슈타인 붐으로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간다는 사실은 6월부터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기 전이었다.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더욱 떠들썩해졌다. 아인슈타인의 세세한 일정을 보도하던 《동아일보》는 11월로 예정된 그의 도착에 맞춰 특집 기사를 기획한다. 필자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황진남. 함흥 출신의 하와이 이주민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서 현순, 여운형, 신익희와 함께 활동했던 그 황진남이다. 임시정부의 분열 때문에 이극로와 마찬가지로 독일 유학을 택했던 그는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다. 43)
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 다음 해인 1923년,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기획한다. 그들의 리더로는 한위건과 이여성이 있었고, 여기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최윤식이 합류했다. 1919년의 3·1운동이 시작되던 첫날, 시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당시 경성의전 학생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한위건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3년 여름 학우회 순회강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순회강연단의 또 다른 리더 이여성은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이다. 그의 조부는 금부도사였고 부친은 현감을 지낸 만석꾼이었다. 그는 집에서 토지 문서를 훔쳐 중국으로 떠나며 어린 시절 항일운동으로 의형제를 맺었던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호를 짓는데, 김원봉은 약산(若山, 산과 같이), 김두전은 약수(若水, 물과 같이) 그리고 이명건은 여성(如星, 별과 같이)으로 불리게 된다. 49)
상대성이론 열풍은 문인 이광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소설 〈무정〉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던 그는 1927년 6월 《동광》에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 시간 공간 및 만유인력 등 관념의 근본적 개조>라는 장문의 논설을 싣는다. 《동광》은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기관지 성격으로 1926년에 시작된 잡지다. 이제는 상대성이론을 단지 어렵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이해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이광수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에 이광수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문체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에테르의 존재가 부정된 마이컬슨의 실험으로 시작해 빛의 상대속도가 어떻게 새로운 중력이론으로 연결되는지 상대성이론을 비교적 정확하게 해설했다. 이처럼 당시 아인슈타인은 일반인에게 알려질 정도로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고, 1928년 8월 22일 《중외일보》는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라는 사설을 싣기도 한다. 이 흐름은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54)
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1923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이 시기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폭등한다. 1923년 10월 한 달에만 300배가 올라, 11월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으로 나치가 급부상했다. 1924년 6월 26일 《신한민보》에 미주 한인들이 베를린 유학생 대표에게 송금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 수령자는 이극로였다. 이렇게 미주 한인들과 인연을 맺은 이극로는 몇 해 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미주 순회 한글 강연에서 ‘언어는 민족의 생명’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나라는 언어에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말과 글의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극로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년)다. 61-2)
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어린 시절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규남은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韓英書院, 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던 1899년 초, 윤치호는 ‘산업 학교(industrial school)’를 설립하기 위해 재산 일부를 남감리교회 재단에 기부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가 이를 종잣돈으로 1906년 개성에 세운 학교가 ‘한영서원’이다. 설립 목적에 맞게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조선에 아인슈타인 붐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고교 야구 선수 최규남은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당시 연희전문 수물과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학과 물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1932년, 최규남은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모교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34년 무렵 양자역학 강의를 시작한다. 서양에서조차 낯설던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65-7)
1931년 교토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1932년 1월 8일, 이태규가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얼마 뒤 일본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다. 다이쇼 천황에 이어 즉위한 쇼와 천황 히로히토에게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며 온건 의회주의자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군부가 행동에 나섰다. 1월 28일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밀어붙이지만 곧이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점령군 수뇌부가 붕괴한다. 밀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5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을 사살하고, 일본의 정당정치가 무너진다. 이로부터 일본은 제동이 걸리지 않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경제공황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먹고사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는 독일 바이마르 체제를,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심지어 조선의 지식인 사회까지 급격히 우경화시키고 있었다. 아마 심훈의 《상록수》(1935년)는 이런 지식인 사회의 변절과 비관에 반전을 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71)
이상의 시 〈삼차각 설계도: 선에관한각서 1〉(1931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요하게나를전자(電子)의양자(陽子)로하라〉 여기서 양자는 ‘量子(quantum)’가 아니라 ‘陽子’로 표기되어 있어, 양성자(陽性子, proton)를 의미한다. 이 시를 쓸 무렵 원자는 전자와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시가 발표되고 한 해 뒤인 1932년에는 중성자도 발견된다. 문제는 양성자와 중성자만으로 이루어진 원자핵이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는가였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들을 붙잡고 있는 힘을 가진 새로운 입자가 필요했고, 유카와 히데키는 이 입자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 ‘중간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실험으로 발견되어 노벨상을 받았다. 1907년생인 유카와 히데키는 1910년생 시인 이상과 동년배였다. 이미 100년 전,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그렇기에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며 시대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으로 시대를 극복하려던 지식인들은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73)
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
1930년대 말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면서 일제가 과학 교육까지 제약하기 시작했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양자역학 연구를 이어가던 도상록은 1941년 만주국(滿洲國) ‘신징(新京)공업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도 록일랑(都 祿一郞, 미야코 로쿠이치로)’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러 편의 양자역학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84-5)
1937년 교토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種)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油菜)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1937년 4월 이태규 박사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종의 합성〉으로 스타가 된 우장춘 박사가 다키이 연구 농장 초대 농장장이 되어 교토로 갔다. 리승기까지 합류해 교토에서 세 사람이 모인 것도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88)
듀퐁의 나일론이 1938년부터 상업적으로 사용되자, 실크가 나일론으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세계 최대 실크 생산국이었던 일본은 다급해졌다.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미국이 원유 공급을 끊자 리승기 교수의 비날론 연구는 더욱 군사화되었다. 석유에서 합성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유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나일론이 들어온 것은 1953년 코오롱이 시작인데, 코오롱은 ‘코리아’와 ‘나일론’의 합성어다.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89-91)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춘원 이광수의 총애를 받았던 윤석중은 자신의 호를 한자 이름인 석중(石重)에서 딴 석동(石童), 즉 ‘돌아이’라고 지었다.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기도 한 그는 1969년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자, 어린이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앞으로〉라는 동요를 작사했다. 비록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로는 우주 개발이 먼 일이었지만,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우주에 대한 꿈을 키우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94-5)
초기 대종교는 무장 독립 세력이 집결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여기에 대종교인이던 김좌진, 홍범도 두 장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궤멸하자 이들은 다른 부분에서 활약한다. 바로 한글 운동이다. 이를 이끈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고, 그들은 ‘조선어학회’로 뭉쳤으며 한글 교육을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보았다.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 책은 한글 창제에서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인간의 발성 구조와 연관되는지, 초성-중성-종성이라는 논리적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한 귀한 자료다. 97)
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와세다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신격호는 1944년 공작기계의 필수품인 ‘절삭유(cutting oil)’ 공장을 차렸으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은 불타버린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절삭유 원료인 피마자기름으로 비누와 포마드 오일을 개발해 크게 성공한다. 이 돈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려 화학제품군을 확장했다. 이때 그의 눈길을 끈 제품이 있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져온 신기한 물건인 껌이었다. 그는 세계 최대의 껌 회사인 미국의 리글리(Wrigley)가 원래 비누 회사였다가 품목을 전환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리고 공정 개발에 착수한다.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출신들을 영입해 이 연구에 투입했다. 당시 여러 일본 회사가 껌 개발에 나섰지만, 화학공학 출신으로 각종 화학제품 생산 경험이 풍부한 신격호가 단연 선두에 섰다. 1948년, 껌이 성공하자 신격호는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 이름을 ‘롯데’로 바꾸었다. ‘롯데(Lotte)’는 신격호가 좋아하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샤를로테(Charlotte)에서 따왔다. 106)
최형섭(1920년생)과 신격호(1921년생)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1940년대 초, 문선명(1920년생)도 이곳에서 유학했다. 그의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당시 와세다대학 건축과에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의 아들 엄덕문(1919년생)도 있었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건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대극장과 인민문화궁전과 같은 대형 공연장에 놀란다. 박정희 정부는 급히 이에 필적할 공연장 건축에 나섰다. 나전칠기 집안에서 자란 엄덕문은 누구보다 전통 양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광화문 거리의 랜드마크가 이렇게 탄생했다. 2022년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 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엄덕문의 원래 아이디어였던 광장도 결국 실현되었다. 엄덕문은 문선명과 평생 친구였다. 해방 전 가시마 건설에서 같이 일했던 그는 한때 통일교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격호의 소공동 롯데 호텔과 백화점도 그의 작품이다. 106-7)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1946년, 삼팔선으로 남북이 갈리며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고,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세울지 곳곳에서 좌우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여운형은 어떻게든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에 나섰지만, 한쪽으로만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그는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던 황진남도 마찬가지였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작은 6월 초, 도상록 교수에 대한 전격적인 파면 조처였다. 당시 경성대학은 자치위원회로 돌아가고 있었고, 도상록은 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건준을 인정하지 않던 미 군정은 자치위원회 역시 인정하지 않았고, 도상록이 자치위원회를 통해 대학 자금을 사용한 것을 공금 횡령으로 몰아간 것이다.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식민 지배 스타일의 강압적인 지배 구조가 이어지자 학계가 반발한다. 파면된 도상록은 월북해서 7월 3일 김일성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김일성종합대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110)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은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국대안)’을 발표한다. 국대안의 요지는 경성대학과 경성의전,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 9개를 합쳐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이것이 서울대학교의 시작이다. 도상록의 해임을 둘러싼 논란이 가시기 전에 이루어진 이 조치로 9월, 이공학부 교수 38명이 집단 사표를 내고 대부분 월북했다. 고향이 평안도 선천인 최윤식은 9월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곧 남쪽으로 내려와 이들 세 교수의 빈자리를 맡는다. 10월 개교한 서울대학교에서 이태규는 문리대 학장이 되고, 리승기는 공대 학장으로 수습에 나섰다. 수학과 교수들이 월북해버린 상태에서 최윤식이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를 맡았고, 교토제국대학 3인방 중 한 명인 박철재가 물리학과 초대 주임교수로 합류한다. 110)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이념 대립으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여운형은 겨레를 통합시킬 유일한 방법이 스포츠라고 믿었다. 보스턴 마라톤 직후인 1947년 6월 15일 시작되는 IOC 총회에 여운형은 미시간대학 출신 전경무를 파견한다. 그런데 5월 29일 서울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후지산에 추락해 전경무가 사망했다. 여운형은 미국에 있던 이원순에게 급히 연락해 IOC 총회에 대신 참가시킨다. 전경무가 사망 당시 휴대했던 서류들이 이원순에게 보내졌다. 여운형은 필사적이었다.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 끝에 마침내 IOC는 6월 20일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KOC)를 승인하고, 여운형이 초대 KOC 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여운형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정식으로 정부를 구성하기도 전에 국제기구 가입부터 이뤄낸 것이다. 전국이 들썩이고 모두가 환호했다. KOC 초대 위원장 여운형은 7월 19일, 올림픽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에서 테러범의 총탄을 맞았다. 이후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는다. 117-8)
1948년 올림픽에 손기정은 선수단장으로 기수를 맡았고, 역도 선수 김성집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나중에 손기정은 이렇게 회상했다. 1945년 봄, 건국동맹을 꾸리던 여운형은 손기정에게 당시 일본군 중좌인 채병덕과 비밀리에 접촉하도록 지시했다. 여운형은 채병덕에게 유사 시 건준에 무기를 공급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비록 채병덕은 친일 일본군 장교였지만, 윤치호와도 친분을 유지했던 여운형은 이처럼 유연한 사고와 광폭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인 1947년 7월 1일, 이승만 견제를 위해 미 군정이 초청한 서재필이 한국에 도착했다. 서재필의 두 번째 귀향이었다. 이미 83세의 노령이던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발탁했던 후배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서재필에게 당시의 남북 대결 구도는 자기 인생 전체가 물거품이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분단은 막아보려던 그는 이승만 계열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고, 1948년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자 결국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119)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1950년 3월 8일, 우장춘이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일찍이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우장춘은 종전 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여러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무려 5년간 무직으로 지내다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한국에서 귀국 추진 위원회는 일본에 남은 우장춘 가족의 생계를 위해 100만 엔을 보냈다.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 박사는 이 돈을 가족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 기구를 구입하는 데 다 써버렸다. 당황한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그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 지 석 달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사의 연구소가 있던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부산에서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난리가 벌어졌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홀린 듯이 종자 개발에만 집중했다. 124-5)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1938년, 이극로는 눈병으로 고생하다 조선어학회 건물 옆에 조선 최초로 생긴 안과 전문 병원 공 안과에 가서 치료받는다. 이때 이극로의 한글을 향한 열정에 감동한 의사 공병우는 한글 기계화에 인생을 걸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던 공병우는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부산으로 피난 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해군 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손원일 제독 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 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 혼용이 한글 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 북한, 중국이었기에 협정문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로 작성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한글 타자기가 없었다. 때문에 UN군은 북한을 위해 한국군의 공병우 타자기로 한국어 정전협정문을 인쇄한 것이다. 131)
1954년 오랜 공을 들인 진도에서 드디어 채소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한국인의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무와 배추 등이었다.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계속된 연구가 결실을 보았다. 가장 큰 성과는 김장용 배추가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가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 더해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의 조상 ‘원예 1호’의 탄생이다. 우장춘은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로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종자를 꿈꾸고 있었다. 1959년 8월 7일, 농림부 장관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수상자였다. 병상의 우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 숨을 거뒀다.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 132-3)
일본을 무너뜨린 원자력 기술은 신생 독립국인 한국의 과학계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분야였다. 이에 이태규, 리승기와 함께 교토제국대학 3인방으로 불리던 박철재 박사가 새롭게 출범하는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그 뒤를 이어 최형섭의 아버지 최지환의 친구였던 김법린이 2대 소장이 되었다. 김법린의 추천으로 1962년 원자력 연구소장이 된 최형섭은 탁월한 연구 행정 능력을 보이며 과학계의 신망을 얻게 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최형섭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대통령을 설득하고, 정부를 움직이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명성 황후의 묘소가 있던 홍릉에 KIST를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어 과학 행정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과학재단(현 연구재단)을 만들고,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했다. 대한민국의 1960~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끈 과학 발전은 거의 모두 그의 리더십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공로로, 최형섭은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133)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1957년 군론(group theory) 연구를 시작한 이임학은 1960년 새로운 유한단순군(finite simple group)을 발견한다. 프랑스 수학자 갈루아(Évariste Galois)로부터 시작된 군론 연구는 20세기 현대 수학의 주요한 흐름이었다. 1950년대 새로운 단순군의 발견이 초미의 관심사였기에, 이임학이 발견한 ‘Ree군’은 세계 수학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임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쪽으로 데려왔으나, 함흥에 남겨진 친척 생각이 간절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Paul Erdös)가 편지 왕래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건네진 북한 친지들의 편지가 빌미가 되어 남쪽의 가족은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많은 후학이 이임학의 국적과 명예 회복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80년대 이임학이 함흥을 직접 방문하자, 국적회복은 더욱 요원해졌다.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행사로 한국에 왔지만, 국적회복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임학은 캐나다 시민으로 2005년 사망했다. 138-9)
에필로그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나는 ‘단절’의 레볼루션(revolution)보다 ‘연결’이라는 의미가 담긴 에볼루션(evolution)을 선호한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인간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만들어냈지만, 강한 자신감은 이념을 만들었고, 결국 끔찍한 제1·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아마 우리 근대 과학사 역시 정치적, 이념적 분열이 만들어낸 단절의 역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망각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비극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린,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록이다. 오염된 이념으로 과거를 재단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 그 흔적 자체를,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걸러지지 않은 날것으로 과거를 살펴야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래는 기억하고 기록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