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리로 세상을 읽는다 - 소소한 일상에서 우주의 원리가 보이는 난생처음 물리책 나는 세상을 읽는다
크리스 우드포드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1. 고층빌딩이 안전한 이유 - #중력 #운동법칙


우리 삶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힘, 우리 중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지구(질량이 무려 6×10의 24승kg)와 질량이 있는 모든 것 사이의 끌어당기는 힘이 증력이다. 도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마천루를 생각해보자. 빌딩이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뉴턴의 운동 제1법칙과 제2법칙에 따라, 빌딩에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제1법칙에 따르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계속 멈춰 있고, 제2법칙에 따르면 운동은 힘에 의해 시작된다.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건물은 외견상 힘을 받지 않고, 따라서 정지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건물에 매순간 중력이 작용한다는 걸 안다. 간단히 말해서 뉴턴의 말이 맞는다면 건물은 가루가 돼 지구 내부로 쓸려 들어가서 영원히 또는 지구 핵의 용광로에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중력이 건물을 땅속으로 잡아당길 때 땅이 정확히 같은 힘으로 건물을 위로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11, 14)


# 뉴턴의 제3법칙 : 힘이 물체에 작용하면 정확히 같은 크기의 다른 힘(반동)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작용・반작용의 법칙


건물 기반이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힘들의 균형이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면, 그 힘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우리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약 100가지 유형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생명의 ‘레고블록들’을 화학원소라고 부른다. 원자가 여럿 뭉쳐서 분자라는 더 큰 구조를 만든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대부분의 힘은 원자 내부와 원자 사이, 분자 내부와 분자 사이에서 비롯된다. 원자 내부는 대부분 빈 공간이다. 원자의 가장자리에는 (배터리의 음극처럼) 음전하를 띤 전자들이 일종의 성긴 ‘전자구름’을 형성한다. 한편 원자의 중심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뭉쳐서 원자핵이라고 하는 단단한 내핵을 형성한다. 원자핵은 (배터리 양극처럼) 양전하를 띤다. 원자의 음전하 부분과 양전하 부분은 원자끼리 너무 들러붙는 것을 막는다. 철근은 쥐어짜도 눌리지 않는다. 철 원자 각각을 둘러싼 음전하 전자구름들이 서로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두 자석의 같은 극처럼 음전하끼리는 서로 배척한다. 14-5)


미술관과 도서관 같은 공공건물의 명칭은 흔히 그 기관에 기부한 부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다. 미터법의 측정단위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해당 단위 뒤의 과학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 붙는다. 힘의 과학에 대한 뉴턴의 지대한 공헌도 거기 딱 맞는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현대 물리학에서 힘의 단위는 바로 N(뉴턴)이다. 1N에 얻어맞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세평에 의하면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 있다가 떨어지는 사과에 머리를 맞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사실이 아닌 건 누구나 안다). 무게가 약 100g인 사과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약 1N이다. 이제 앞서 말한 힘의 균형을 떠올려보자. 사과가 떨어지지는 것을 막으려면 1N의 힘으로 사과를 떠받쳐야 한다. 여기에 10을 곱해보자. 1kg의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약 10N이다. 즉 지구 중력은 1kg당 10N의 힘으로 물체를 잡아당긴다. 내 몸무게가 왜 75kg인지 궁금한가? 지구가 나를 750N의 힘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18)


2. 살이 찔수록 왜 계단이 싫어질까? - #에너지 #전력


과학자들이 쓰는 에너지의 단위는 ‘줄joule’이다. 최초로 에너지 측정 실험을 행한 19세기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 줄James Prescott Joule, 1818~89의 이름을 땄다. 커피 한 잔 분량의 물을 끓이는 데 약 120kJ(12만 J)이 든다. 물 한 잔을 끓이는 일(12만 J)은 오렌지 12만 개(12톤)를 1m 들어올리거나 오렌지 하나를 120km 상공(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4배)으로 던져 올리는 일과 같다. 일상의 각종 일을 수행하는 데 몇 줄의 에너지가 드는지 이론적으로 추산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이는 회계장부로 치면 ‘차변debit’, 즉 에너지의 수요(소비) 측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초콜릿칩 쿠키, 자동차 배터리, 석탄 한 덩어리에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숨어 있는지, 그걸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꽤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이는 차변에 대한 ‘대변credit’, 즉 에너지의 공급 측면이다. 줄의 업적 덕분에 우리는 이 에너지 장부가 항상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에너지 ‘대변’과 ‘차변’은 정확히 일치한다. 25)


그런데 에너지양만 알아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 하지만 관건은 그 일을 얼마의 시간 내에 해내느냐다. 예를 들어 틈틈이 쉬면서 전망을 감상해가며 8시간에 걸쳐 슬렁슬렁 한가롭게 올라간다 치자. 그렇게 분당 네 계단씩 올라간다면 지루하긴 하겠지만 딱히 몸이 힘들지는 않다. 이번에는 꼭대기까지 30분 만에 주파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워보자. 목표를 달성하려면 1초에 한 계단씩 헉헉대며 올라야 하고, 이건 비교할 수 없이 힘들다. 이렇게 에너지에 시간을 더한 개념이 일률power이다. 일률은 에너지 소비율이나 생산율(에너지양을 그것을 사용하거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에너지처럼 일률도 측정 방법을 알면 개념이 잡힌다. 일률을 측정하는 단위를 와트watt, W라고 한다. 1초에 1J의 일을 할 때의 일률이 1W다. 100W 전등은 1초에 100J의 에너지를 쓰는 전등이다. 26-7)


무슨 일이든 거기 드는 에너지양은 항상 같지만, 더 높은 전력을 사용하면 더 쉽고 빠르게 작업을 마칠 수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까지 어떤 방법으로 올라가든 내 체질량body mass을 같은 거리만큼 끌어올려야 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항상 같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전기모터가 내가 내 몸을 옮기는 것보다 훨씬 빨리 내 몸을 위로 옮겨준다. 전기포트, 가스레인지, 모닥불, 또는 숟가락으로 열심히 젓기(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이것들 모두 결국에는 물을 끓게 하겠지만, 각기 다른 일률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각기 다른 전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걸리는 시간은 각기 다르다. 3kW급 고성능 전기포트를 쓰면 1kW급 여행용 포트를 쓸 때보다 세 배 빠르게 물을 끓일 수 있다. 정확히 같은 양의 에너지를 세 배 빠르게, 즉 세 배의 전력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전력의 전기포트를 쓰든 에너지 소비량, 즉 킬로와트시는 같다. 29-30)


돈은 뜬금없이 내 은행계좌에 나타나거나 이유 없이 내 지갑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남들과 끝없이 거래하면서 돈을 벌고 또 소비한다. 에너지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너지를 원하면 (음식을 먹거나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식으로) 어디선가 에너지를 ‘벌어야’ 한다. 뭔가 원하는 걸 하려면 가진 에너지를 어느 정도 ‘소비해야’ 한다. 돈을 찍어내거나 위조하는 등 없던 돈을 난데없이 만들어내 금융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별짓을 다해도 에너지에는 이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제로섬 방식의 거래를 하는 것뿐이다. 즉 어딘가의 에너지 획득은 다른 어딘가의 에너지 손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물리법칙이다. 이것을 에너지 보존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Energy이라고 한다. 흔히 에너지 절약의 의미로 쓰이는 에너지 보존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30)


3. 슈퍼히어로 되는 법 - #지레 #빗면


지레는 모든 기계의 아버지다. 도구 대부분이 지레의 원리에 기반한다. 지레는 막대의 한 지점을 받치고 그 받침점에 작용하는 회전력torque을 이용해 물체를 움직이는 도구다. 지레가 길수록 거기에 가하는 힘을 더 많이 늘려준다. 이 원리를 터무니없이 극단화한 것이 아르키메데스의 지구 행성 들어올리기 비유다. 렌치, 스패너, 크로바가 지레의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손잡이, 스위치, 심지어 두루마리 화장지를 포함한 다양한 물건 또한 지레의 원리에 기반한다. 지레는 두 가지 상반된 방식으로 내가 가하는 힘이나 속도를 증강한다. 지레의 끝을 돌리는 것은 뻑뻑한 너트를 스패너로 돌리는 것과 같다. 지레의 끝을 밀어서 원을 그리며 돌리면 원 중심부에는 더 느리지만 더 강한 회전력이 발생한다. 반대로 지레의 반대쪽 끝(원 중심부)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도끼를 휘두를 때다. 원의 중심에서 어깨가 회전할 때 원의 끝에서 도끼자루가 길게 회전하면서 속도가 붙고, 무거운 도끼머리가 나무를 반으로 쪼갠다. 38)


바퀴의 두 가지 작동 원리 중 간단한 것부터 짚어보자. 일단 바퀴는 지레처럼 작동한다. 바퀴가 커질수록 지레 효과도 커진다. 바퀴 림을 일정량의 힘으로 돌리면, 바퀴 허브(지레의 중심점)는 더 느리지만 더 강한 힘으로 돌게 된다. 이것이 파워핸들이 대중화되기 전 트럭과 버스의 핸들이 그토록 거대했던 이유다. 바퀴의 작동 원리가 한 가지 더 있다. 수레가 있으면 무거운 짐을 옮길 때 편리하다. 바퀴는 어떤 원리로 짐 운반을 쉽게 만들까? 모든 것은 힘의 작용, 다시 말해 바퀴들이 차축이라는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방식과 관계있다. 바퀴는 마찰을 차축으로 전달해 마찰을 줄인다. 아직 약간의 마찰은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수레를 옮기는 데 여전히 힘이 좀 들어가지만 이제는 걱정이 대폭 줄었다. 여기에 바퀴의 레버리지까지 거든다. 수레를 뒤에서 밀면 바퀴들이 지레 역할을 해서 미는 힘을 배가시키고, 결과적으로 바퀴가 더욱 원활하게 차축을 돌면서 남은 작은 마찰을 극복한다. 39-41)


에너지를 생각하면 빗면의 원리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0kg의 자갈을 들어서 땅에서 1m 높이의 트럭에 싣는다 치자. 자갈을 트럭에 어떻게 싣든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거기 드는 에너지의 양은 같다. 이때 필요한 최소 에너지양은 2,000J이다. 자갈을 자루에 채워 똑바로 들어올리는 경우 2,000W의 일률로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전기포트나 전기토스터만큼 빡세게 일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갈을 수레에 담아서 완만한 경사로로 약 4초에 걸쳐 밀어올리는 경우는 똑같은 2,000J의 에너지를 네 배 느리게, 즉 500W의 일률로 쓰게 된다. 단점이 있다면 수직으로 들어올릴 때보다 긴 거리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힘을 긴 거리에 걸쳐 분배한다고 할까. 빗면의 경사가 완만할수록 힘이 적게 들지만 거리는 더 길어진다. 이는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같은 양의 에너지를 써야 함을 의미한다. 힘은 4분의 1만 들지만 대신 네 배 오래 일해야 한다. 41-2)


4. 자전거와 빵 반죽의 공통점 - #바퀴 #마찰


자전거 바큇살은 구부리기 쉽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잡아 늘릴 수는 없다. 이것이 자전거 바퀴의 작동 비결이다. 하중의 압박을 받는 수레바퀴와 달리, 자전거 바큇살들은 오히려 팽팽히 당겨진다. 즉 인장력을 받는다. 바이올린의 현처럼. 거미집의 줄처럼. 허술해 보이는 바큇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큇살이 허브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양상이다. 수레바퀴와 달리 자전거 바큇살은 림에서 허브까지 똑바로 이어져 있지 않다. 대신 각각의 바큇살이 허브 옆으로 조금씩 비껴서 뻗어 있는데, 이것을 탄젠트 연결tangential connection이라고 한다. 바퀴 허브가 꽤 넓다보니 바큇살의 일부는 한쪽으로, 나머지는 다른 쪽으로 치우쳐서 연결된다. 탄젠트 바큇살은 자전거의 전체 하중이 고르게 분산되는 일종의 팽팽한 철망을 형성해 바퀴가 자전거와 탑승자의 무게를 견디게 해줄 뿐 아니라, 고속으로 방향을 틀거나 커브길에서 기울어질 때 받는 전단력shearing force과 비틀림을 견디게 해준다. 51-2)


간단히 말해 기어(톱니바퀴)란 가장자리에 돌기가 있어서 서로 맞물리며 도는 바퀴를 말한다. 한 쌍의 기어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기계의 속도를 높이는 대신 기계의 힘을 줄이거나, 또는 그 반대로 한다. 즉 기어는 속도 또는 힘을 높일 뿐 두 가지를 동시에 높이지는 못한다.  뒷바퀴와 페달바퀴는 신축성 있는 체인으로 연결돼 있고, 양쪽에는 필요에 따라 골라 쓸 다양한 크기의 톱니바퀴가 장착돼 있어서, 변속 레버를 이용해 체인에 걸리는 톱니바퀴 쌍을 바꿀 수 있다. 다시 말해 맞물리는 톱니바퀴들의 상대적 크기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 교묘한 기계적 변속장치를 디레일러dérailleur라고 한다. 디레일러 덕분에 자전거 주행 중에, 심지어 톱니바퀴들과 체인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중에도 변속이 가능하다. 고속 기어에서는 뒷바퀴가 페달바퀴보다 빠르게 회전해서(빠르고 약함) 평지를 질주하기 좋다. 저속 기어는 이와 반대다. 뒷바퀴가 더 느리게 회전하는 대신 페달의 힘을 증대해서 언덕을 수월하게 오르게 해준다. 54-6)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에너지를 소비하는(잃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비비고, 바람을 가르고, 치대느라 잃는다. 이를 전문 용어로 각각 마찰friction, 항력drag, 구름저항rolling resistance이라고 한다. 마찰로 잃은 에너지는 그냥 손실이다. 브레이크와 바퀴로 빠진 열은 다시 주워서 쓸 방법이 없다.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 중 하나는 얼굴에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에너지를 잃는 또 하나의 경로다. 이렇게 물체가 유체fluids 내에서 운동할 때 받는 저항을 항력이라고 한다. 빨리 달릴수록 공기저항(항력)이 커지고, 공기저항이 셀수록 사람의 에너지 낭비도 커진다. 구름저항은 타이어가 노면을 구르며 받는 저항을 말한다. 자전거 타기는 타이어를 변형시키지 않고 다만 (타이거 안의 공기를) 끝없이 당겼다 풀었다 하며 에너지를 열과 약간의 소음으로 전환한다. 두툼하고 넓은 산악자전거 타이어는 얇고 좁은 경주용 자전거 타이어보다 구름저항을 많이 받는다. 57-9)


5. 볼 수 있는 전부이자 결코 볼 수 없는 것 - #빛 #전자


빛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특별하다. 우선, 우리 대부분에게 빛은 주요한 정보원이다. 대뇌피질의 1/3에서 1/2이 우리 눈이 세상에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할애된다. 한편 물리학에서는 빛이 이와는 매우 다른 이유로 중요하다. 아인슈타인 이후 학계는 세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빠른 속도인 광속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 흥미롭게도 광속은 시각과 하등 관계없는 물리방정식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E=mc2이다. 이 방정식은 에너지와 질량은 결국 같은 것이며 빛에 의해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준다. 그렇다 해도 빛을 우리의 편의를 위해 우주와 세계의 어둠을 밝혀주는 거대 우주 손전등의 출력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무식과 안이함의 소치다. 빛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로 존재하며, 동물의 시각이란 진화 과정에서 거기 편승해 우연찮게 얻은 능력일 뿐이다. 65)


빛에 대해 알수록 인간이 보는 세계가 다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적외선은 우리 눈이 감지하기에 너무 빨갛고 자외선은 너무 파랗다. 그런데 만약 빛의 파동(light waves, 광파)을 계속 잡아 늘리면 어떻게 될까? 적외선을 더 붉게 만들면? 파장이 550nm(나노미터, 대략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0분의 1)인 광파를 수십만 배 늘려보자. 마이크로파(극초단파)가 된다. 음식을 조리하고 휴대폰 통화를 이어주는 바로 그거다. 마이크로파를 다시 수십만 배 잡아 늘리면,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우리 집으로 전송해주는 라디오파(전파)가 된다. 이번엔 스펙트럼의 반대편으로 가서, 자외선을 더 파랗게 만들어보자. 자외선을 미세 죔쇠로 최대한 세게 압착하자. 그렇게 원래 파장의 1,000분의 1로 찌그러뜨리면 그게 엑스선이다. 그걸 더 압축하면 감마선gamma rays이 된다. 따라서 감마선은 사실상 초고에너지 엑스선이다. 이들의 차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다. 즉 파동의 크기와 거기 실린 에너지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66)


빛은 1초에 30만 km(지구를 일곱 번 도는 거리)를 주파한다. 따라서 빛이 태양에서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몇 분밖에 안 걸린다. 이것이 우리가 빛의 파동을 바다의 파도를 보듯이 볼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빛이 몹시 작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시광선의 경우 각각의 파장이 수백 나노미터(원자 크기의 수천 배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빛 파동을 볼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빛을 파동으로 보지 않고 입자로 볼 때는? 빛을 파동으로 볼 때는 빛은 전자기파라고 말하고, 빛을 입자로 볼 때는 빛이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광자는 왜 볼 수 없는 걸까? 여기서 우리는 초현실적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 양자이론quantum theory의 세계로 들어간다. 양자이론은 물질이 원자 규모에서 어떻게 거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괴이한 개념들의 묶음이다. 광자도 미치게 작아서 질량조차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광자는 순수한 에너지다. 67-8)


6. 봉화에서 스마트폰까지 - #전자기파 #광속


스코틀랜드 출신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79은 전기와 자기를 네 개의 간단한 수학 방정식으로 멋지게 엮어서 1873년 최초로 전자기이론을 확립했다. 전자기이론의 기본 개념은 전기와 자기가 완전히 분리된 두 가지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이다. 전기가 앞뒤로 진동하면 자기가 발생한다. 나침반을 전선 근처에 놓으면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는 마법을 다들 한번쯤은 봤을 거다. 사실 바늘을 움직이는 것은 마법이 아니라 전선을 타고 앞뒤로 쇄도하는 전류다. 전류가 주변에 생성한 자기장이 바늘을 돌아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요동할 때도 전기가 발생한다. 다이너모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바퀴를 돌릴 때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은 전선 코일을 자석 안에서 회전시키는 것이다. 전선의 자기장이 끝없이 요동하면서 전기를 만들어 자전거 램프에 불이 들어온다. 태양에너지를 제외하고 우리가 생산하는 전기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전자기 발전기에서 나온다. 81-2)


광파처럼 라디오파도 직선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라디오 송신기는 등대 수준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직진만 가능했다면 라디오파 신호가 그냥 우주로 날아가버려 메시지를 15~30km 이상 전송하는 데는 무용지물이었을 거다. 다행히 라디오파는 둥근 지구를 따라 쉽게 휘어지고, 덕분에 편리한 통신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비법이 있다. 첫째, 높다란 라디오 안테나를 땅에 세우면(지구와 연결하면) 지구 자체가 안테나의 하반부처럼 작동한다. 물이 완전히 정지해 있는 호수 위에 안테나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옆에서 보면 안테나가 물에 비쳐서 두 배로 길어 보인다. 호수에 비친 자기 이미지 위에 서 있는 안테나. 같은 현상이 땅에 접한 라디오 안테나에도 일어난다. 즉 지구가 전기를 전도해서 안테나에 이어진 거울 이미지로 작용한다. 그래서 라디오파가 안테나에서 퍼져나갈 때 지구의 윤곽을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진다. 이것을 지상파ground wave라고 한다. 83)


두 번째 비법은 더욱더 신통하다. 많이들 알다시피 밤에 AM(중파) 라디오를 켜면, 낮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온갖 외국 라디오 방송국들의 치직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지구 대기의 전리권ionosphere이 부리는 조화다. 전리권은 지표로부터 60~500km 떨어진 구간을 말한다. (제트기 비행 고도보다 여섯 배 이상 높다.) 여기서는 분자들이 태양에너지로 인해 이온화된다. 즉 전자를 잃고 양전하를 띠는 원자들과 자유 전자들로 분리돼 있다. 그 때문에 전리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즉 전리권은 전기가 잘 통한다. 전리권은 태양복사(태양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의 영향을 극적으로 받기 때문에 낮과 밤의 거동이 급격하게 변한다. 낮 동안은 전리권의 최하층이 지상에서 발사한 라디오파를 흡수해서 라디오파가 아주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 현상이 줄어든다. 밤에는 전리권의 상층이 라디오파를 거울처럼 반사해서, 다른 때라면 우주로 빠져나갈 신호를 다시 지표로 내리쏜다. 84)


# 통신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거울이 하늘에 실제로 있다면? 이것이 통신위성communications satellite을 낳은 기본 발상이다.


전자기복사(electromagnetic radiation, 파장이 짧은 감마선부터 파장이 긴 라디오파까지를 포함하는 에너지)가 형태만 여럿일 뿐 모두 같은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통신에 예를 들어 엑스선이나 감마선이 아니라 굳이 라디오파를 이용하는 걸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전자기복사의 파장은 주파수와 반대다. 수학적 표현으로는 반비례관계다. 즉 파동이 길수록 주파수(와 에너지)는 작아진다. 감마선과 엑스선의 경우 파동은 작고(파장이 원자 수준으로 극소하다) 주파수는 끝내주게 높다. 여기에 다량으로 노출되면 건강에 해롭다. 치명적 원자방사선이 자기 집에 비처럼 퍼붓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통신에 라디오파를 쓰는 두 번째 이유는 라디오파가 더 멀리 가기 때문이다. 라디오파의 파장은 하늘을 껑충껑충 가로지르는 거인의 걸음처럼 크기 때문에 신호 손실이 거의 없이 빌딩과 집, 나무와 자동차를 피해 날아갈 수 있다. 또한 건물 안이나 차 안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라디오 방송국의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 86-7)


7. 난방은 쉬워도 냉방은 어렵다 - #열역학 #엔트로피


열은 물체 내부에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요동하는 원자나 분자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의 한 종류다. 뜨거운 것일수록 내부 요동이 더 심하다. 수증기가 물보다 뜨거운 것은 내부에 운동에너지가 더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얼음보다는 물이 운동에너지가 더 크고 따라서 더 온도가 높다. 기체를 가열하면 그 안에 있는 원자나 분자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요동이 심해져서 서로 더 많이 더 심하게 충돌한다. 이렇게 물체 속 열을 원자들의 범퍼카 게임처럼 묘사하는 이론을 분자운동이론kinetic theory이라고 한다. 뜨거운 커피 한 잔과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거대 빙산을 비교해보자. 커피는 그래봤자 물 한 컵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은 분자를 함유하고 또 그 분자들의 평균 에너지가 높다 해도(얼음보다는 물이 뜨거우니까), 커피의 열에너지 총량은 대단치 않다. 이에 비해 빙산은 온도는 훨씬 낮지만 동시에 훨씬 크다. 여기서 관건은 크기다. 커피가 더 뜨겁지만, 열에너지는 빙산이 평균적으로 약 2억 배 더 많다. 92-3)


에너지는 마법과 거리가 멀다. 뭔가가 에너지를 잃으면 다른 뭔가가 반드시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 교환은 늘 제로섬 게임이다. 이처럼 누가 잃고 누가 얻든 에너지 총량은 결국 변함없이 보존된다는 법칙이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First Law of Thermodynamics)이다. 열 이동에 대한 다른 법칙도 있다. 이번 것은 훨씬 미묘하다. 커피를 빙산에 탁 내려놓으면 커피는 식고 얼음은 따뜻해지지만 절대 그 반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열역학 제2법칙Second Law of Thermodynamics이 있어서 그런 경우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제2법칙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 열은 항상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흐를 뿐 (외부의 힘이 개입하지 않는 한) 결코 그 반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자연현상의 비가역적 방향성을 말한다. 이렇게 열에너지가 흩어지는 현상을 ‘엔트로피entropy 극대화 경향’이라고 표현한다. 쉽게 말해 우주는 자연적으로 질서에서 혼돈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93-4)


열에너지가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전도conduction, 대류convection, 복사radiation라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전도는 뜨거운 것에 차가운 것이 접촉해서 열이 분자 간의 직접 충돌로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뜨거운 물체의 활발한 분자들이 자기 에너지의 일부를 차가운 이웃 분자들에게 직접 전달한다. 대류는 기체나 액체처럼 유동성 물체에서 일어나는 열전달 방법이다. 기체나 액체의 소용돌이나 상승과 하강을 통해 열이 전달된다. 예를 들어 냄비 안의 수프를 가열할 때, 불에 가까운 냄비 바닥의 수프가 먼저 따뜻해져 밀도가 낮아지고, 따라서 슬슬 위로 올라가며 위쪽의 차가운 수프를 있던 자리에서 밀어내 아래로 보낸다. 위로 올라간 수프는 식어서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던 수프가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상승과 하강 패턴이 냄비 안의 열에너지를 천천히 순환시킨다. 세 가지 중 마지막 방법인 복사는 열에 들뜬 원자들이 비가시적 광선의 형태로 공기나 허공으로 열을 방출하는 것을 말한다. 97)


무언가를 가열하고 냉각하는 것이 등가일 수는 있지만 결코 반대는 아니다. 에어컨은 방에서 열기를 ‘빨아들여’ 밖으로 배출한다. 냉각수(끓는점이 낮은 휘발성 액체)로 채운 파이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냉장고와 비슷하고, 공기를 흡입했다가 토해내는 점에서는 선풍기와 비슷하다. 에어컨의 기본 작동 원리는 이렇다. 냉각수가 실내의 열을 흡수해서 가열되고, 파이프를 통해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열을 방출해서 다시 냉각돼 돌아오는 순환 과정이 이어진다. 에어컨이나 냉장고는 열을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물리법칙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에어컨과 냉장고가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다 전기를 주입해서 억지로 그 역행을 만든 것뿐이다. 전기에너지가 뜨거운 것을 더 뜨겁게, 차가운 것을 더 차갑게 하는 비정상적 사이클을 가동해서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마땅히 없어져야 할 집 안팎의 온도차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다. 98-9)


8. 다이어트의 과학 - #칼로리 #연소


우리가 먹은 음식은 복잡한 소화 과정을 통해 포도당(화학에너지)으로 바뀐다. 위와 간이 몸에 들어온 음식을 즉시 사용 가능한 당분으로 저장했다가 느긋하게 사용할 지방으로 변환한다. 우리는 호흡이라는 단어를 숨쉬기의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사실 호흡은 체내에 저장된 연료를 공기에서 들어온 산소를 이용해 다시 가용에너지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호흡은 오히려 광합성(식물이 빛에너지를 이용해 이산화탄소와 물로 스스로 양분을 만드는 과정)의 역방향 버전과 비슷하고 자동차에서 일어나는 연소와 유사하다. 먹은 칼로리를 저장해두는 인체의 능력 때문에 입에 들어가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즉각 연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몸은 기름이 바닥난 자동차나 배터리가 다 된 시계처럼 그렇게 갑작스런 양분 고갈을 겪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물리법칙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생존 가능 기간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으며, 이 한계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의 에너지 함량으로 결정된다. 108)


인체도 음식으로 얻은 화학에너지를 실현하는 능력이 형편없다. 일반적으로 우리 몸은 20~25%의 기계적 효율을 낸다. 다시 말해 호흡을 통해 100kJ의 에너지가 풀려도 그중에서 근육이 몸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분량은 그중 겨우 20~25kJ에 불과하다.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갈까? 무려 60~70%는 우리 몸이 하는 일 없이 공회전하는 데 들어가고 남은 10%는 ‘간접관리비’, 즉 우리가 먹은 음식을 처리하는 데 들어간다. 왜 우리는 단백질도 탄수화물도 아닌 지방을 저장할까? 같은 무게일 때 체지방의 에너지 함유율이 두 배이기 때문이다. 즉 체내에 지방 0.5kg을 저장하는 것이 동량의 단백질을 저장하는 것보다 가용 잠재에너지를 두 배 더 확보하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10억 대의 화석연료 자동차로 굴러간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가 가진 놀라운 에너지 함유율 때문이다. 체지방은 에너지 밀도가 휘발유와 비슷하고, 다른 일상의 에너지원들(석탄, 목재, 천연가스, 배터리)보다 높다. 110, 113) 


하버드대학교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이론은 매우 독창적이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즉 인간의 진화적 성공은 결국 요리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식료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에너지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확보하게 됐고, 두뇌로 더 많은 에너지를 보내게 됐으며, 덕분에 수렵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더 흥미롭고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하게 됐다. 조리가 식료에게 하는 일은 두 가지다. 식료의 에너지 밀도를 즉각적으로 높이고(간단한 예로 뜨거운 음료는 차가운 음료보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체온 유지의 부담을 덜어준다), 식료를 소화하기 쉽게 만들어 신진대사를 돕는다. 랭엄이 말했듯 단백질을 조리하면 단백질 분자의 변성이 일어나 소화하기 쉬워지고 같은 양을 먹어도 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가 음식을 꼭꼭 씹도록 진화한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씹는 데 에너지가 좀 들어가지만 음식을 더 잘게, 더 소화하기 쉬운 입자들로 부수면 음식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회수할 수 있다. 114-5) 


9. 달리는 페라리에 왜 먼지가 쌓일까? - #기류 #유체역학


먼지를 입으로 불어도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먼지 입자는 놀랄 만큼 미세하다. 이렇게 해로운 미세먼지 입자들을 PM10으로 지칭한다. 입자의 지름이 10μm(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 인간의 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분의 1)이하인 대기오염물질을 뜻한다. 작고 가벼운 물질일수록 정전기의 접착력에 의해 물체 표면에 붙들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먼지가 들러붙는 건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지면의 풍속이 0이라는 것이다. 이때 지면이라 함은 말 그대로 지표에서 원자 몇 개 높이 이내를 말한다. 풀잎은 미풍에도 흔들린다. 하지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지표에는 어떠한 공기 움직임도 없다. 선풍기 날개는 분당 수백 번씩 공기를 가르는데 왜 그렇게 먼지 더께가 앉는 걸까? 날개 바로 옆의 공기는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공기 움직임이 없을 뿐 아니라 공기와 플라스틱 사이의 끝없는 마찰로 정전기가 발생해 먼지가 더욱 달라붙는다. 121-3) 


페라리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면 미끈하게 빠진 차체의 표면을 타고 공기가 미끄러지듯 흐른다. 이처럼 공기가 물체 표면의 저항을 받지 않고 쉽게 흐르도록 간소화한 형상을 유선형streamline이라고 한다. 공기역학적으로 이상적인 자동차는 전진할 때 공기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서 차량 후방에 발생하는 공기흐름이 차량 전방의 공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 즉 공기가 방해를 적게 받아 흐트러짐 없이 평행선들처럼 미끄러진다. 이것을 층흐름laminar flow이라고 한다. 전방이 절벽처럼 솟아오른 트럭은 트럭 앞면이 공기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평행하게 흐르던 공기층들의 일부를 막거나 늦춘다. 반대로 트럭 영향권 밖의 공기층들은 곧장 쌩 지나간다. 그 결과 공기층들이 마구 뒤섞여 소용돌이 공기가 생긴다. 이것을 난기류turbulence라고 한다. 난기류는 무질서하게 엉켜 있어서 그걸 뚫고 통과하려는 물체에 엄청난 저항을 만들어낸다. 난기류는 트럭에서 에너지를 얻고 이 때문에 트럭의 속도가 느려진다. 123-5)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꼭지를 돌리면 물이 쏟아진다. 꼭지를 서서히 잠그면 물줄기가 줄어든다. 이때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넓다. 왜 그럴까? 물을 더 작은 공간에 욱여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1초 동안 수도꼭지를 떠난 물의 양과 싱크대 바닥에 도달하는 물의 양은 정확히 같다. 그런데 중력 때문에 떨어지는 물에 가속도가 붙는다. 다시 말해 물줄기의 끝 지점이 시작 지점보다 유속이 높고, 따라서 계산이 맞으려면 물줄기의 끝 부분이 시작 부분보다 얇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도꼭지를 떠난 물보다 싱크대 바닥에 도달하는 물이 많다는 건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를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이라고 한다. 유체역학 버전의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주어진 시간에 흐르는 물의 양은 어느 지점에서나 동일하다는 뜻이다. 같은 이치로 액체나 기체가 갑자기 좁은 공간(주사기나 고압세척기 같은)을 통과하려면 속도를 높여야 한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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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팔레스타인 실험실 - 이스라엘은 어떻게 점령 기술을 세계 곳곳에 수출하고 있는가
앤터니 로엔스틴 지음, 유강은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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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종족민족주의 국가ethnonationalist state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1948년 탄생 때부터 존재했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그 지위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 이 정책을 가장 성공적으로 추구한 이스라엘 지도자는 베냐민 네타냐후인데,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영원히 점령해야 한다고 열렬히 믿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기 총리였지만, 12년이 넘도록 정부를 이끈 끝에 2021년에 마침내 물러났다. 하지만 2022년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우파 연합을 이끌고 다시 당선되었다. 그의 비전 자체가 승리를 거두었다. 네타냐후주의는 그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이데올로기다. 이스라엘은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장비를 편하게 사용해보고 ‘전장에서 시험한’ 무기라고 홍보하면서 세계 최고의 무기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방위군 브랜드를 활용한 덕에 이스라엘의 보안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 대열에 합류했다. 팔레스타인 실험실Palestine laboratory은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홍보 포인트다. 13)


1 필요하다면 기꺼이 팔게요!


1948년 5월 14일, 유대인기구 의장 다비드 벤-구리온은 2,000년 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유대 국가의 수립을 선포했다. 같은 날 미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승인했다.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국방력을 발전시킨 이스라엘은 1950년대 중반부터 국경 너머로 살상 도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정부 소유의 방산 기업들이 발전했고 1960년대에는 민간이 소유한 기업들이 성장했다. 현재 이스라엘 최대의 민간 무기 제조업체인 엘빗도 그때 성장한 기업이다. 1966년에 설립된 엘빗은 순식간에 이스라엘 탱크와 항공기에 쓰이는 필수적인 장비 공급업체로 올라섰다. 몇 년 뒤 엘빗은 민주 국가와 독재 국가 양쪽 모두에 무기를 수출하는 주요 업자로 올라서서 미군을 비롯한 많은 나라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드론부터 야간투시경과 지상 감시 시스템, 최첨단 살상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비를 개발했다. 엘빗은 지금도 이스라엘 군경과 긴밀하게 제휴하며, 심지어 출판 산업으로까지 확장했다. 28-9)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평판이 좋지 않은 정권에 방위 장비를 판매했다. 1950년대에 공산주의 반군과 전쟁을 벌이던 미얀마도 그중 하나다. 이스라엘이 초기에 가장 성공시킨 무기는 건국 직후인 1940년대 말에 처음 설계한 우지 기관단총이다. 이스라엘은 90여 개국에 우지를 판매했는데 스리랑카,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벨기에, 독일 등의 군대에서 주력 총기로 사용한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벤-구리온이 건국 초기에 총기 생산 산업을 구축하는 게 유대 국가에 유리할 것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952년 이스라엘이 서독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배상금은 무기 부문에 필요한 투자 자원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무기 개발과 실용화 가능한 핵무기 개발 연구에 비밀리에 이전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원조가 독일의 배상금과 결합해서 방위 산업이 이스라엘의 주요한 수출 사업이 되었다. 군국주의는 이스라엘의 지도 원리가 되었고, 그 후 줄곧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31)


이스라엘의 역사는 1967년 전과 후라는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6일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의 정책은 고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따금) 억압에 반대한다는 수사적 인상은 풍겼다. 이스라엘은 탈식민 자유를 누리는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과 손을 잡았고, 아프리카 나라들은 유엔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언론인 사샤 폴라코-수란스키Sasha Polakow-Suransky는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의 은밀한 관계를 다룬 저서 『무언의 동맹The Unspoken Alliance』에서 1967년이 이스라엘 방위 정책의 분수령이었다고 말한다. 소련과 아랍의 선전에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이 보호를 필요로 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점차 서구의 제국주의적 앞잡이라는 이미지로 퇴색되었다’. 그 후 많은 제3세계 국가가 이스라엘에 등을 돌렸고, ‘이스라엘 정부는 강경한 현실 정치realpolitik를 위해 도덕적 대외 정책의 마지막 흔적조차 내팽개쳤다’. 34)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관계를 맺은 독재 정권의 숫자를 보면 아찔할 정도다. 1965년과 1966년 무슬림이 다수인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규모로 숙청되어 최소한 50만 명이 사망한 뒤, 이스라엘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대다수의 서구 강대국과 나란히) 1967년에 완전히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 장군의 정권과 유대를 돈독히 하는 데 열중했다.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을 생각해보라. 기밀 해제된 당시의 문서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스라엘은 차우셰스쿠가 반유대주의자임을 알았지만 수십 년간 그와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에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유엔에서 이스라엘 반대표가 점점 많아지는 가운데서도 찬성표를 던진 동유럽의 유일한 나라였다. 이스라엘은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출국하는 것을 오랫동안 막았음에도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세계무대에서 이스라엘이 벌이는 행동을 외교적으로 지지하는 루마니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36)


1983년 〈뉴욕 포스트〉는 모사드와 미국 중앙정보국이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중앙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에서 합동 작전을 진행한다는 협약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핵심 목표는 소련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 보상으로 이스라엘은 미국의 거대한 감시 기구로부터 중동의 군대 이동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과테말라의 제노사이드 정권을 군사적·외교적·이데올로기적으로 엄호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런 현실 정치가 전면에 드러났다. 이스라엘이 과테말라 정권을 지원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하나는 이스라엘의 민간 기업 타디란 이스라엘 전자산업Tadiran Israel Electronics Industries이 컴퓨터 감청 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정교했던 이 기기는 개인 가정에서 전기나 물 사용량의 변화를 탐지함으로써 인쇄기를 사용하는 경우에 반정부 활동에 주목할 수 있었다. 2008년 타디란은 이스라엘 최대의 방산 기업인 엘빗시스템스에 합병되었다. 40)


2 더없이 좋은 사업 기회


이스라엘은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42기에 포위된 상태임을 깨달은 뒤 1990년대부터 줄곧 워싱턴으로부터 군사적 자율권을 확대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이 공격 당시 미국은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았고, 많은 이스라엘인은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중동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노골적으로 내팽개쳤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정부는 점차 민영화를 받아들이면서 사회주의적 뿌리를 대부분 포기했다. 이스라엘은 이제 미국의 원조에 과거만큼 의존하지 않지만 미국의 지원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상대적 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1981년 미국의 원조는 이스라엘 경제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했지만, 2020년에 이르면 연간 40억 달러에 가까운 미국 원조의 비중이 1퍼센트 정도로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의 불법 유대인 거주지나 가자에 대한 공격, 동예루살렘의 주택 파괴 등을 축소하라는 미국의 온건한 압력조차 거의 아랑곳하지 않는다. 45)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 붕괴를 딛고 일어선 이스라엘의 회복력은 독특한 자결권의 서사로 구성되었다.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Affairs가 출간한 『스타트업 국가 : 이스라엘 경제 기적 이야기Start-Up Nation: The Story of Israel’s Economic Miracle』라는 책은 이런 서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내세우는 명제는 이스라엘이 번성한 것은 주로 강력한 징병제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두 저자는 이스라엘 방위군은 세계의 본보기라고 주장했다. 추정컨대 유대인이 다수인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집단적 믿음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와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에 힘입어 네타냐후는 10여 년간 이스라엘을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개발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면서 무기와 감시, 사이버 장비의 전문성을 쌓았다. 이스라엘 정부와 민간 기업 양쪽 모두 자신들의 제품을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실전에서 효과적으로 시험한 것이라고 홍보했다. 48-9)


점령을 현금화하는 능력은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이후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나선 나라들에 전달된 메시지는 단순히 테러에 맞서 싸우고 테러 기지를 파괴한다는 것 이상이었다. 스코틀랜드 사회학자이자 감시 연구 전문가인 데이비드 라이언David Lyon에 따르면 그것은 21세기에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완전히 다시 상상하는 것이었다. 런던 퀸메리 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인권을 가르치는 이스라엘 학자 니브 고든Neve Gordon은 이스라엘이 매력을 발휘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 고든은 이스라엘을 (유대인을 위한) 자유의 요새를 자임하는 자칭 민주주의의 맥락 속에서 분석했다. ‘테러와 싸우는 이스라엘의 경험이 매력적인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테러리스트를 죽일 뿐만 아니라(군사주의적 세계관) 테러리스트를 죽이는 것이 반드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적 목표에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그런 목표를 진전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53-4)


테러리즘의 공포로 이스라엘 군사주의를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성적 매혹을 활용하면 된다. 알파건걸스Alpha Gun Girls, AGA는 2018년 이스라엘 방위군 재향군인 오린 줄리Orin Julie가 창설한 단체다. 노출이 심한 위장복 차림으로 이스라엘 무기를 어루만지는 여자들은 미국의 유사한 총기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시온주의 의제를 강하게 풍긴다. 줄리의 소셜 미디어 게시물에는 총기를 찬양하는 미사여구와 함께 이런 문구들이 도배되어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는 조국을 지킬 것이다!’ 듀크 대학교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의 소피아 굿프렌드Sophia Goodfriend는 ‘소셜 미디어와 초국적 민간 방위 산업은 전쟁의 강건한 미학을 민주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파건걸스는 전쟁을 미학화함으로써 폭력을 부정하고 점령을 정상화하는 이스라엘의 능력을 수출한다. (……) 하이힐과 착탈식 천사 날개를 차려입은 이스라엘의 혼란스러운 에로티시즘은 오늘날 초국적인 상품이 되었다.’ 55)


수많은 이스라엘 기업이 점령을 둘러싼 기반 시설을 유지하는 데 관여하는 가운데 이들 기업은 국가에 서비스를 판매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최신 기술을 시험하고, 더 나아가 전 세계에 기술을 홍보하기 위한 혁신적 방법을 발견했다.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점령이 어떻게 민영화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상대가 국가 공무원이든 사적 개인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민영화 모델은 이스라엘의 광범위한 집단에 이익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본토와 점령지가 전혀 구분되지 않도록 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스라엘 관리들은 여전히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유대 국가 내에서는 서서히 진행되는 점령의 민영화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전혀 없다. 이스라엘 언론에서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의 식민화를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정책 결정권자들은 아웃소싱을 ‘검문소의 민간화’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율권’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56-7)


3 평화를 가로막다


팔레스타인인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은 피자를 주문하는 일만큼 쉬워야 한다. 2020년 이스라엘군이 설계한 앱의 배후에 놓인 논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전장의 지휘관이 전자 장치에 표시된 표적에 관한 세부 정보를 부대에 보내면 병사들이 그 팔레스타인인을 신속하게 무력화할 수 있는 앱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오렌 마츨리아흐Oren Matzliach 대령은 ‘이스라엘 디펜스’ 웹사이트에 이 공격은 ‘스마트폰으로 아마존에서 책을 주문하거나 피자집에서 피자를 주문하는 일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점점 많은 정권이 이스라엘이 정치적 학살politicide을 자행하면서도 무사한 비결을 배우는 데 매력을 느끼고 있다. ‘정치적 학살이란 하나의 정당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실체로서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를 해체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또한 필연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른바 이스라엘 땅에서 팔레스타인인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종족 청소하는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 64)


분리주의는 이스라엘 주류에서 점점 부상하는 이데올로기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역사학자 베니 모리스Benny Morris는 2020년 로이터 통신에 팔레스타인인들을 시야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이상적 해법이라고 말했다. 모리스는 그 원인을 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 제2차 인티파다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인 자살 폭탄 공격 탓으로 돌렸다. 분리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사례는 가자를 포위해 팔레스타인인 200만여 명을 거대한 장벽 안에 가둬둔 채 드론으로 끊임없이 감시하고, 이따금 미사일로 공격하며,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철저하게 국경을 폐쇄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2021년 말 이스라엘이 11억 1,0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가자와 맞닿은 경계선 전체에 65킬로미터 길이의 최첨단 장벽을 완공했을 때, 이스라엘 남부에서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하레츠〉는 이 장벽을 ‘공학과 기술의 복잡한 시스템’이라고 묘사했다. 유럽으로부터 건설 지원을 받아야 했던 ‘세계 유일의 최첨단 장벽 시스템’이었다. 66)


오늘날 가자는 이스라엘의 독창적 지배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한 완벽한 실험실이다. 가자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무한정 가둬둔다는 종족민족주의의 궁극적인 꿈이다. 2012년 11월 이스라엘이 방어 기둥 작전Operation Pillar of Defense이라는 이름으로 벌인 가자 포격은 팔레스타인인 174명과 이스라엘인 6명을 죽이고 1,0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힌 7일 전쟁이었다. 2008년과 2009년 초에 이스라엘이 벌인 주물납 작전Operation Cast Lead에서는 가자 주민 1,400명이 사망했다. 이 충돌을 계기로 이스라엘 방위군이 다양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전쟁을 묘사하는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일부 서구 국가의 여론이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반발하는 것을 우려한 가운데 벌어진 이른바 인스타 전쟁instawar은 하마스 대원을 살해하거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체포한 것을 자랑스럽게 발표하기 위해 만든 인포그래픽과 군사작전을 트위터로 생중계하기 위한 일사불란한 기획이었다. 67)


오늘날 이스라엘 방위군의 인스타그램 페이지에는 강경한 군사주의적 상징들과 나란히 동성애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메시지가 정기적으로 부각된다. 2021년 10월 1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여러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분홍색 조명에 감싸인 본부 사진과 함께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이스라엘 방위군 본부는 분홍색 불을 밝혔습니다. #유방암인식제고를위한달.’ 미군도 이스라엘 방위군이 이런 식으로 벌이는 정보전 전략을 똑같이 따라 한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2021년 ‘휴먼스 오브 CIAHumans of CIA’라는 이름으로 소셜 미디어 캠페인을 개시했다. 좀 더 다양한 공동체에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캠페인이다. 이스라엘의 소셜 미디어 전략은 유대 국가가 벌이는 작전을 서구의 가치와, 또는 적어도 테러리즘(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는 ‘저항’)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지지하는 정책과 연결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정교한 시도다. 68)


디지털 혁명이 탄생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악행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퍼뜨리면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점령에 대한 전 세계적 인식이 급격히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이는 정착민이나 이스라엘 군대와 팔레스타인인의 대결 장면을 편집 없이 그대로 보여준 덕분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인들이 겪고 있다고 말하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명백한 시각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선별한다는 증거도 많다. 이스라엘인들은 우리가 직접 목격하는데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벌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인은 응징하고 죽여야 마땅한 인종 집단일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도덕적 불편도 드문 현상이 되었다. 69)


4 이스라엘 점령을 세계에 판매하다


 2018년 크레타 섬에서 테스트를 거친 뒤 2021년 5월을 시작으로 에어버스가 운영하는 IAI의 헤론Heron 드론은 유럽연합 국경관리기구인 프론텍스Frontex의 장비가 되었다. 난민들이 대륙 본토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싸움의 일환이었다. 한때 해군 경비정이 곤경에 빠진 이주민들을 구조하기도 한 반면, 무인 드론은 접촉이 없는 새로운 감시 형태다. 경제학자 시르 헤베르는 이스라엘제를 포함한 드론 사용 증대에는 뚜렷한 정치적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드론은 누구도 구조할 수 없고 사진만 찍을 수 있죠.” 그가 내게 한 말이다. “실제로 무장한 보트나 의심스러운 선박이 접근하면 드론 조종사가 경비정에 알려서 현장에 출동하게 할 테지만, 물이 새는 난민 보트처럼 보이면 드론 조종사는 항상 시간을 끌고 경비정은 일부러 구조할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늑장 출동합니다. 이게 핵심적 차이이자 드론이 해안 경비를 위한 혁신적 기술인 진짜 이유죠. 난민들이 익사하게 방치하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거죠.” 87-8)


프론텍스가 난민을 찾기 위해 드론을 활용한 여파로 많은 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2021년 10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우르술라 폰 데어 레이엔은 이주민을 차단하기 위해 ‘철조망과 장벽’에 돈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유럽연합은 그리스와 리비아를 비롯해 수많은 나라에서 바로 그런 일을 했다. 지중해 지역은 위험한 해역으로, 국제이주기구IOM ‘실종이민자’ 프로젝트에 따르면 2014년 이래로 최소한 어린이 848명을 포함해 2만 2,748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 끔찍한 수치를 받아든 유럽연합은 이민자를 계속 차단하고 그들의 여정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유럽의 무기 회사들은 시리아와 리비아, 예멘, 튀르키예의 분쟁을 악화시키는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대규모 피란민을 발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럽연합이 점점 잔인한 전술을 구사하며 이민자를 차단하기로 결심하지만 유럽에 들어오려는 많은 사람이 유럽의 방위 장비 때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악순환의 고리인 셈이다. 90-1)


이스라엘의 감시 기업 셀레브라이트는 지금까지 디지털 데이터 추출 장비를 최소한 150개국에 판매했다. 그중에는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같은 독재 국가도 포함되었다. 셀레브라이트는 유럽연합에서 망명 신청자를 감시하는 업무도 일부 맡고 있다. 휴대전화는 이민자가 가진 물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셀레브라이트의 한 영업사원에 따르면 2019년 난민의 77퍼센트가 이민 서류 없이 유럽연합 국가에 왔고, 43퍼센트가 여정 중에 스마트폰을 휴대했다. 이 회사는 따라서 이민자의 여정과 최근의 지리적 위치와 연락 이력을 알아내는 데 자사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화를 과학 수사 기법으로 분석하는 것은 해당 이민자의 동의가 없으면 국제법 위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프론텍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특별 조치’ 사용을 포함해서 난민의 휴대전화에 있는 암호화된 메시지 앱에 불법 침투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가이드북을 개발했다. 93)


팔레스타인 실험실이 번성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많은 나라가 그 밑바탕이 되는 전제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억압적 정권들이 이스라엘의 억압을 모방하고자 하면서 이스라엘의 기술을 사용해서 달갑지 않거나 반항적인 집단을 억압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외교적·군사적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 서구의 승인을 열망한다. 미국을 제외하면 분명 독일이 가장 탐나는 대상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산산조각 난 이미지를 복구하는 것을 도운 한편 베를린은 팔레스타인인을 잔인하게 점령하는 나라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독일이 이스라엘 방위 장비를 점점 많이 구매하는 것은 자국의 역사적 범죄를 용서하는 한 가지 방도에 불과하다. 국제방송 도이체벨레는 2022년 행동 규범을 갱신하면서 모든 직원은 조직을 대변하거나 심지어 개인 자격으로 말할 때에도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지지’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최대 해고까지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98)


유럽 전역의 여론은 꾸준히 이스라엘에 등을 돌리고 있으며, 2021년 이스라엘과 가자의 전쟁은 이런 추세를 가속화했을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연합의 네이버사우스Neighbours South 프로젝트가 2020년에 수행한 여론조사에서는 이스라엘인의 과반수가 자신들이 유럽연합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불일치는 실제로 뚜렷해서 이스라엘인들은 대체로 유럽연합 지지에 찬성하는 반면, 유럽연합의 많은 사람은 점차 유대 국가가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벌이는 행동을 우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 우파의 일부는 이스라엘의 종족민족주의와, 이슬람과 난민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옹호한다. 그리고 유대인이 다수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와 기법을 사들이고 거기서 영감을 얻으려고 열심이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런 식으로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체코공화국에서 친이스라엘 강경파 민족주의자들과 동맹을 이루었다. 100)


5 변함없이 사랑받는 이스라엘의 지배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비슷한 성향의 나라끼리의 사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치, 군사, 외교, 이데올로기적 동맹을 맺었다. 프리토리아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1948년 권력을 잡자마자 백인 외의 인구에 나치식 제한 조치를 발동해서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고 여러 직종에서 흑인이 일하는 것을 막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아파르트헤이트를 통해 이득을 얻었고 그 정권의 지속을 지지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스라엘 정부가 종종 이스라엘군이 개발하고 시험한 무기를 중심으로 정치, 이데올로기, 군사 관계를 공고히 굳히는 1970년대에 이르면 이스라엘을 집권하는 리쿠드당의 다수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세계관에 친밀감을 느꼈다. 언론인이자 『무언의 동맹』의 저자인 사샤 폴라코-수란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두 나라를 문 앞의 야만인들에 맞서 자기 존재를 방어하는, 유럽 문명의 위협받는 전초기지로 규정한 것은 소수자 생존주의 이데올로기였다.’ 103)


상호 이득이 되는 관계는 국방 부문에서 돈을 버는 능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원치 않는 인구 집단을 어떻게 다룰지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친연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투스탄Bantustan, 즉 흑인 주민들이 자치권 없이 거주하는 지역은 이스라엘의 많은 엘리트에게 팔레스타인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델로 영감을 주었다. 자기 나라의 나머지 지역에서 차단된 반투스탄처럼, 곳곳에 분산된 고립 지역에 ‘바람직하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고립시키려는 욕망이었다. 오늘날의 요르단 강 서안에 존재하는 165개 팔레스타인 ‘고립 지역’이 이스라엘 식민 정착촌, 이스라엘 방위군, 폭력적 정착민들에 둘러싸여 질식당하는 기원이 여기에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해 이스라엘의 점령을 옹호하는 행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초의 민주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이 소수 백인 정권과 관계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105-6)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와 그의 힌두민족주의 정당인 인도인민당BJP이 지배하는 인도에서 카슈미르는 인도 정체성의 새로운 비전을 그릴 수 있는 백지나 마찬가지다. 2019년 모디 정부는 인도 헌법 370조와 35A조를 대부분 무효화하고 잠무카슈미르 헌법을 정지시켜 70년간 제한된 자치권을 누린 분쟁 지역을 거의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카슈미르 작가 아리프 아야즈 파레이Arif Ayaz Parrey가 내게 한 말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땅의 상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결국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겁니다) 카슈미르에서는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죠(언젠가 땅의 상실로 전환될 겁니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보면 두 나라의 강압적 체제는 동일한 것입니다.” 카슈미르와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정착촌은 분명 비슷한 점이 많다.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2019년부터 그 지역 주민이 아닌 사람도 카슈미르에서 자산과 토지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의 인구 구성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107, 111)


인도의 엘리트들은 이스라엘의 ‘거리낌 없는 행동’을 부러워했는데, ‘이는 지난 20년간 파키스탄이 테러 집단들을 도구로 활용하는데도 인도는 핵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처럼 마음대로 보복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좌절에서 기인한 결과’라는 말이었다. 힌두민족주의 분위기가 압도하는 것과 나란히 상호 존중도 증대했다. 힌두민족주의 준군사 조직인 민족의용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 RSS을 창건한 지도자 마다브 사다시브 골왈카르는 나치즘 찬양자였다. 힌두근본주의와 무슬림 혐오는 인도인민당 사상의 핵심에 자리한다. 이 이데올로기의 선구자인 비르 사바르카르Veer Savarkar는 ‘무슬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은 나치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힌두민족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종족국가ethnostate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을 찬양했다(다만 그들은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날 전 세계의 극우파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고가 존재한다). 108-9)


미국-멕시코 국경은 이스라엘 보안·감시 기업들의 주요 현장이 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한 작업이 선발 도구로 활용된다. 이런 무자비한 입찰 과정은 매우 효과적이고, 백악관 주인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아무 차이가 없다. 3,000킬로미터 길이의 국경을 지키는 데는 초당적인 지지가 존재한다. 이스라엘의 기술은 국경의 군사화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감시 기술, 국경 기반 시설, 전술부대, 통합 고정탑Integrated Fixed Towers, IFT 시스템을 결합해서 이민자들이 죽음의 사막을 건너는 것을 방지하고 저지한다는 구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활동가들은 자신들에 대한 억압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어떤 식으로 점차 연결되는지 알고 있다. 9·11 이후 미국-멕시코 국경의 환경은 국가가 군대식 통제 방식의 속도를 높이면서 이민자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관리하고 괴롭혀야 하는 위협으로 규정했다. 2021년과 2022년에 미국-멕시코 국경에서 사망한 이민자 수는 최소한 750명으로, 기록적인 수치였다. 116-8)


6 휴대전화에 심어진 대중 감시


이스라엘의 감시 기구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청망인 워싱턴 국가안보국의 경쟁자이자 동맹자다. 인력 규모로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이스라엘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정탐한 오랜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가안보국은 이스라엘과 제휴하며 데이터 채굴과 분석 소프트웨어를 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전 미국 국가안보국의 정보 관리 빌 비니Bill Binney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다시 이 기술을 자국의 민간 기업에 넘겨준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이버 감시 기업인 NSO 그룹을 비롯한 이스라엘 하이테크 기업의 역할도 이런 관점에서 파악된다. 〈하레츠〉의 전 IT 담당 기자 아미타이 지브Amitai Ziv는 NSO의 정체를 밝히는 통찰력 있는 작업을 한 언론인인데, NSO의 힘은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이 아니라 외교에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이스라엘이 몇몇 아프리카 나라에 사이버 감시를 판매할 때 유엔에서 그 나라들의 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점령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는 그 표가 필요하거든요.” 121) 


NSO가 오랫동안 수익성이 가장 좋은 사업을 벌여온 멕시코에서는 스캔들이 속속 터졌다. 마약 카르텔이 부패한 공무원들과 공모해서 페가수스 스파이웨어를 손에 넣어 공통의 적을 제거하는 데 사용했다. 범죄 네트워크는 부패한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이 제거하거나 감시하기를 원하는 개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사이버 감시는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는 산업이며, NSO가 장담하기는 하지만 일단 설치된 페가수스가 법률 위반에 대해 모니터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국가 부패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NSO 스파이웨어에 의해 휴대전화를 해킹당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2017년에 사망한 프리랜서 기자 세실리오 피네다 비르토Cecilio Pineda Birto도 그중 한 명이다. 그가 살해되기 몇 주 전, 그의 휴대전화 번호가 멕시코 국가에 의해 페가수스 감시 대상으로 선별된 상태였다. 이 사건은 NSO의 잠재적 희생자들 중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126)


독재 정권이라면 어느 나라든 페가수스를 구매해서 배치했다. 이스라엘과 공식적 관계를 맺은 나라든 이스라엘 스파이웨어를 절실하게 원하는 나라든 모두 달려들었다. 바레인과 오만의 활동가들은 NSO 기술의 표적이 되고 있다. 르완다는 페가수스를 이용해 반정부 인사 폴 루세사바기나를 감시했다. 모로코는 페가수스를 이용해 에마뉘엘 마크롱을 비롯한 프랑스의 고위 정치인들을 염탐했다. 네타냐후의 긴밀한 동맹자인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는 페가수스를 구입해 야당 정치인들과 비판적 언론인들을 염탐했다. 아마 사우디아라비아가 NSO가 쌓은 공적의 핵심일 텐데, 아랍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국이자 미국의 긴밀한 동맹자인 이 나라는 이스라엘과 공식적 관계가 전혀 없다. 오바마와 바이든 행정부에서 백악관 고위 관리를 지낸 로브 맬리Rob Malley에 따르면 빈 살만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성가시고 짜증나는 일, 즉 공정하게 해결해야 하는 분쟁이라기보다는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고 보았다. 128-9)


사이버 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이 우려를 느끼지만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이 많지 않다는 모순적인 징후가 존재한다.  ‘대중은 국방부가 수출 허가를 내주는 한 이스라엘 국가에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2022년 페가수스가 이스라엘 국내의 일부 시민에게 사용된 사실이 폭로되고서야 많은 대중이 갑자기 NSO와 그 기술이 남용될 가능성에 분노를 터뜨렸다. 이스라엘의 많은 유대인이 볼 때, NSO를 비롯한 사이버 무기 제조업체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이스라엘이 세계무대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고 테러리스트나 소아성애자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에 담긴 함의는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진짜 피해자라는 것이다. 인기 웹사이트 ‘와이넷Ynet’의 한 칼럼니스트는 문제는 NSO의 기술이 아니라 정부가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총이 아니라 사람이 살인을 하는 것이라는 전미총기협회의 주문呪文을 떠올리게 하는 주장이었다. 139)


음침한 사이버 산업에서 일할 기회는 비슷한 군 경력의 이스라엘인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고 있다. 2019년 아랍에미리트에서 채팅 앱 투톡ToTok이 출시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수백만 명이 앱을 다운받았다. 하지만 이 앱은 사실 스파이웨어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민간 기업을 활용해 자국 시민을 모니터하기 위한 감시 시스템을 고안해온 페르시아 만의 수많은 억압적 국가에서 나온 최신 툴이었다. 그 배후에 있는 다크매터는 아랍에미리트 기업으로, 전 이스라엘 정보 관리와 미국 국가안보국 직원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활용한 영국의 컨설팅 기업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의 최고경영자 알렉산더 닉스Alexander Nix는 이스라엘인들을 활용해 정치적 적수를 함정에 빠뜨린 사실을 인정했다. 지금은 없어진 사이그룹Psy-Group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 회사와 비슷한 다른 회사들은 ‘민간 모사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143-4)


7 왜 팔레스타인인을 좋아하지 않을까?


〈워싱턴 포스트〉는 2021년 5월에 놀랍도록 솔직한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페이스북의 AI는 미국의 흑인 활동가를 대하듯이 팔레스타인 활동가를 다룬다. 그냥 차단해버린다.’ 이중 기준이 적용되는 게 분명했다. 소셜 미디어 개선을 위한 아랍 센터인 함레7amleh에 따르면 2021년 5월 소셜 미디어에서 히브리어로 이뤄진 공개 대화 109만 건 중 18만 3,000건이 아랍인에 대한 선동과 이스라엘 유대인의 인종주의로 채워졌지만, 이 콘텐츠는 삭제되지 않았다. 아마 가장 노골적인 검열은 페이스북이 소유한 인스타그램이 이슬람의 3대 성지인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에 관한 많은 게시물을 삭제한 사건일 것이다(나중에 일부분만 복구되었다). 2021년 5월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이 사원에서 기도하는 순간에 이스라엘군이 사원을 습격했을 때 벌어진 일이다. 이 장소가 ‘미국 정부의 제재를 받는 조직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페이스북이 ‘폭력이나 테러 단체’와 연관된 곳으로 잘못 지정한 것이었다. 151-2)


2021년 중반에 세계 곳곳의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갑자기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예루살렘 기도단Jerusalem Prayer Team’이라는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팔로우를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7,500만 팔로어를 거느린 이 페이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친이스라엘 페이스북 페이지였다. 기독교 시온주의자이자 친트럼프 활동가인 마이크 에번스Mike Evans가 운영하는 이 페이지가 추구하는 목표는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드높이는 것이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메타는 ‘의도하지 않은 편향’ 때문에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히브리어 게시물보다 아랍어 내용을 훨씬 많이 삭제했다. 아랍어 구사자의 부족, 조직 자체의 편향, 결함 있는 머신러닝이 그 원인이었다. 소수집단의 우려에 립서비스를 해주는 것은 기껏해야 불편한 일이었다. 다국적 억압의 시대에 현대 하이테크 산업의 지배자들로서는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것이 손쉬운 선택이었다. 정치적 반발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53-5)


요르단 강 서안에 있는 비르자이트 대학교 경영경제학부 부교수인 팔레스타인 학자 아말 나잘Amal Nazzal은 보고서에서 유튜브가 팔레스타인 콘텐츠에 대해 어떤 식으로 지역과 언어 차별을 두루 활용하는지 보여주었다. 아랍어 영상은 내용이 어떻든 신고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특히 ‘하마스’, ‘이슬람 성전聖戰’, ‘헤즈볼라’ 같은 단어가 포함되어 있으면 여지없이 신고를 당했다.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이용자인 하메드는 유튜브 채널 ‘팔레스타인 27k’를 만든 사람인데, 자신이 올린 영상 하나가 삭제된 것을 발견했지만 똑같은 영상을 유럽인 친구에게 보내 업로드하게 하는 실험을 하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콘텐츠를 현금화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디지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통제다. 근대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바라보던 서구의 차별적인 시선과 별다를 바가 없다. 아랍인들은 다시 한 번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159-61)


맺는말│공존할 것인가, 돌연변이가 될 것인가


이스라엘은 여전히 포위 상태에서도 번성하는 민주주의이자 극단주의에 맞선 싸움의 핵심 동맹자로 규정된다. 주요 방위 수출국이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전설과도 같다.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에 군사 원조와 무기, 훈련을 기꺼이 제공하는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드문 경우에만 이런 이미지가 깨진다.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는 이스라엘이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라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 드론, 열렬한 종족민족주의 등에서 글로벌 리더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조만간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 대가를 치를 필요가 전혀 없다. 어느 편인가 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전쟁은 특히 유럽에서 세계적 무기 경쟁을 부추길 것이다. 드론부터 미사일과 감시 기술, 휴대전화 해킹 툴에 이르기까지 가장 치명적인 공격용·방어용 무기에 훨씬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고조되는 투자의 직접적 수혜자다. 169-70)


그저 지구상에서 가장 침투력과 살상력이 강한 몇몇 군사 장비를 원하는 나라들을 넘어서 이스라엘이 호소력을 계속 확대하길 바라는 것은 종족민족주의의 열정을 공유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런 나라들은 엄격한 종교 생활을 자랑스럽게 옹호하며 다문화주의와 자유의 가치에 반대한다. 이 나라들은 사회적으로 관대한 좌파가 전통적 이상을 훼손하고 그 대신 인종, 젠더, 결혼, 섹슈얼리티에 관한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운 관점을 내세운다고 비난한다. 이스라엘의 보수 정치학자 요람 하조니Yoram Hazony는 자신의 전망을 설명한 바 있는데, 이스라엘 유대인의 상당수가 이런 견해를 공유한다. 그는 미국은 기독교도가 다수인 기독교 국가이며, 따라서 기독교도가 나라의 법률과 사회적 규칙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수집단은 ‘별도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어쨌든 다수집단이 지배적이어야 한다. 비슷한 부류의 다른 나라들에도 이스라엘의 경험이 계속 유의미하려면 극단적 무력과 감시, 기술을 성취해야 한다. 171)


이스라엘은 수많은 나라에 숱하게 많은 방위 장비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자국의 끝없는 점령에 대한 정치적 반발을 차단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NSO 그룹의 휴대전화 해킹 툴 페가수스를 비롯한 수많은 하이테크 무기를 판매하는 일종의 무기 정책은 권위주의 국가든 민주 국가든 상관없이 동맹과 우방을 보장해준다.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국가라고 자부한다. 이 전략이 지금까지 작동한 것은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것이 단지 제2의 러시아라는 딱지가 붙는 사태뿐이기 때문이다. 외국 영토를 침략, 점령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것 말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이스라엘을 고립시키기 위한 거대한 국제적 캠페인이나 억압적 국가들에 장비를 판매하는 이스라엘 무기 회사를 표적 겨냥한 법적 소송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 산업은 계속 승승장구할 것이다. 막대한 이윤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도덕은 이 산업과 아무 관계가 없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실험실이 빛을 잃으려면 비난이 가해져야 한다. 173-4)


그다지 큰 환호를 받지는 못하지만, 많은 기관 투자자가 이스라엘의 인권 침해에 공모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면서 이스라엘 기업들에서 투자를 회수하기 시작하고 있다. 자산 규모 950억 달러로 노르웨이 최대의 연금기금인 KLP는 2021년 요르단 강 서안 정착촌에서 ‘용인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인권 침해 위험을 높인다’는 이유로 16개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했다. 같은 해에 뉴질랜드의 슈퍼펀드는 다섯 개의 이스라엘 은행이 보유한 지분 650만 달러를 매각하면서 ‘제외된 기업들이 이스라엘의 불법 정착촌 건설에 프로젝트 금융을 제공한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물결이 바뀔 수 있다. 2021년 ‘책임 있는 투자자Responsible Investor’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투자 매니저의 67퍼센트가 조만간 인권 문제가 핵심적인 투자 고려 사항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이나 미얀마–또는 팔레스타인–에서 억압과 공모하는 기업들에 투자하는 것은 이제 점점 옹호할 수 없는 일이 되고 있다.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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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 소소한 일상에서 만물의 본질이 보이는 난생처음 화학책 나는 세상을 읽는다
크리스 우드포드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1년 6월
평점 :
품절


1. 세상 모든 것의 재료 - #원자 #금속


어떠한 예외도 없이 지구상 모든 것은 미세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100여 종의 성분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을 생명의 레고 블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탄소, 수소, 질소, 산소만 있어도 생물 대부분과 엄청나게 많은 무생물을 지을 원재료를 갖춘 셈이다. 물질과 물질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안에 있는 원자들만이 아니다. 원자들이 결합 방식에 따라서도 물질이 갈린다. 대표적인 예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필수적인 물질, 바로 물이다. 원자가 (금과 은 같은) 화학원소의 기본 단위인 것처럼 분자는 보다 복잡한 물질의 기본 구성요소다. 둘 이상의 원자를 붙이면 분자가 된다. 이제 원자 쪼개기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이 됐다. 러더퍼드 ‘입자가속기’의 현대판 후손들이 원자를 입자들로, 그 입자들을 더 작은 입자들로 쪼개왔다. 오늘날은 원자에 수십 개의 하위 입자가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아원자 입자들은 이제 구닥다리가 된 양성자와 중성자부터 비교적 최근에 인지된 힉스입자Higgs boson까지를 아우른다. 9, 14)


철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은 똑같은 크기의 구슬 수백 수천 개가 빼곡히 들어찬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과 비슷하다. 각각의 구슬은 각각의 철원자에 해당한다. 이 원자들이 나란히 줄지어 그리고 층층이 쌓여 있다. 철은 망치로 두들겨 더 나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원자의 층층들이 서로를 행복하게 미끄러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리와 달리 철은 원자들이 위치 이동을 꺼리지 않기 때문에 모양을 잡을 때 구부러진다. 반면 유리는 원자들이 전체 구조를 허물지 않고는 새 장소로 이동하지 못해 산산이 부서진다. 또한 철은 전기를 잘 유도한다. 원자들이 밀집한 구조에서는 각 원자의 외곽을 도는 전자들이 서로 맞물려 전체 구조를 아우르며 앞뒤로 출렁이는 일종의 흐릿한 바다를 형성해서 전기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열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철을 타고 흐른다. 철을 충분히 가열하면 벌겋게 달아오른다. 원자들이 열에너지를 흡수해서 (붉은)빛의 형태로 내놓기 때문이다. 16)


쇳덩어리는 철원자로 돼 있지만 플라스틱 덩어리는 플라스틱 원자로 돼 있지 않다. 플라스틱은 대개 폴리머(polymer, 다량체)라고 부르는 고분자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폴리머는 대개 탄소, 수소, 산소, 질소를 기반으로 한다. 폴리머는 모노머(monomer, 단량체)라고 부르는 단순한 분자를 긴 사슬처럼 끝없이 중첩시켜 만든 것이다. 플라스틱은 수명은 억세게 길지만 부드럽고 유연하다. 폴리머 사슬이 꽤 약한 결합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자유전자의 바다가 출렁이며 전기와 열을 전달하는 금속과 달리, 플라스틱의 전자는 모두 원자 안에 안전하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열과 전기가 플라스틱 물질은 쉽사리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나일론의 가까운 친척인 인조섬유 케블라Kevlar는 같은 무게일 때 강철보다 무려 다섯 배나 강하다. 케블라 섬유를 30겹 맞대면 1,500km/h 이상의 속도로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는 두툼한 방탄 이불이 만들어진다. 18-9)


2. 스파이더맨의 정체 - #접착 #마찰


자석이 냉장고에 붙어 있다. 자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금속과 금속을 꽉 들러붙게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접착제는 보이지 않는다. 접착제가 있든 없든 모든 종류의 끈적거림과 미끄러움에는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뭔가가 다른 뭔가에 달라붙을 때는 반드시 그것들을 한데 붙드는 힘이 있다. 그것들이 달라붙지 않거나 미끄러질 때도 대개는 같은 힘이 있다. 다만 둘을 묶기에는 힘이 모자랐을 뿐이다. 눈에 띄게 아름답지만 다소 무거운 벽지를 붙이는데, 벽지가 붙어 있지 않고 자꾸 다시 떨어진다고 치자. 무슨 연유일까? 겉보기에는 단순히 중력(벽지를 벽에서 벗겨지게 하는 벽지의 무게)과 풀(벽지를 벽에 붙여두는 힘) 사이의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보기보다 복잡하다.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접착성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첫째, 풀이 벽지에 붙어 있어야 한다. 둘째, 풀의 반대편이 벽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흔히 간과되는 세 번째는 풀도 스스로 뭉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


보다 면밀히 살펴보면 앞의 세 가지 접착성은 사실상 두 종류다. 자기들끼리 달라붙느냐, 다른 것들에 달라붙느냐. 이 두 가지 유형의 힘을 응집력cohesion과 접착력adhesion이라고 한다. 풀이 정말로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강력한 응집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중간에서 쪼개지지 않는다. 접착력과 응집력이 나란히 작용하는 가장 친숙하고 가장 주목할 만한 예가 바로 물이다. 진정한 응집력의 대명사인 물 분자들은 심지어 근처에 움켜잡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있을 때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이것이 비가 방울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물은 접착력보다는 응집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이 빗방울이 퍼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잎사귀 위에 진주처럼 영롱하게 맺힐 수 있는 이유다. 물은 끼리끼리 뭉치는 데는 명수지만 다른 것에 달라붙는 데는 영 젬병이다. 그래서 물을 제대로 퍼지게 하고 물건을 완전히 적시기 위해서는 세제(계면활성제)를 사용해야 한다. 22)


모든 물질은 원자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억하겠지만 원자들은 우리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부르는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양성자는 미소량의 양전하를, 전자는 미소량의 음전하를 가진다. 원자 내부에는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가 있어 서로를 상쇄하기 때문에 원자 자체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원자가 같지는 않다. 어떤 원자는 다른 원자보다 탐욕스럽다. 두 가지 물질을 밀착시켜 반복적으로 문지르면 이쪽 원자들이 저쪽 원자들로부터 전자를 ‘강도질해 온다.’ 이것이 스웨터에 풍선을 비볐을 때 생기는 일이다. 강도(스웨터)는 전자가 늘어 음전하를 띠게 되고, 불쌍한 피해자(풍선)는 전자를 잃어 양전하를 띠게 된다. 그러면 둘은 자석의 양극과 음극처럼 서로 끌어당긴다. 이것이 스웨터에 풍선이 달라붙는 이유다. 0.1g의 굵은 물방울 하나에만 해도 약 30억조 개의 분자가 들어 있다. 이것이 정전기처럼 일견 보잘것없는 힘을 이용해 초강력 접착제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24)


우리가 서둘러 걸을 때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마찰이다. 마찰이 없다면 걷기는 불가능하다. 발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냥 미끄러져 발라당 넘어지게 된다. 운전도 불가능하다. 정지마찰traction 없이는 자동차 바퀴가 헛돌기만 할 뿐 전진하지 못한다. 마찰은 발이나 바퀴가 새로운 위치로, 앞으로 약간 이동할 만큼만 바닥에 붙어 있게 하는 일종의 일시적 접착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거동의 핵심이다. 마찰은 정전기 접착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두 개의 면이 접해서 이쪽 원자들이 저쪽 원자들과 타격 가능 거리(약 원자 다섯 개 길이)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두 표면이 잠시나마 붙어 있다. 그런데 마찰이 접착제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면서 어째서 영구적 접착성은 없는 걸까? 모두 규모의 문제다. 차가 주차돼 있을 때 고무 타이어와 노면 사이의 마찰력은 중력(자동차 무게)이나 바람 등 차에 자연적으로 미치는 힘을 이길 만큼 크다. 그래서 주차한 차는 길에 딱 붙어 있다. 26)


3. 유리가 맑고 투명한 이유 - #유리 #결정구조


금속은 밀집 결정구조지만 원자들이 어느 정도는 이동이 가능하다. 금속을 망치로 때려서 모양을 잡는 것은 원자들의 행과 열을 후려쳐서 새로운 위치로 밀어내는 것이다. 원자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망치 타격이 공급하는 에너지를 쉽게 흡수한다. 반면 유리는 유난스럽다. 유리는 열린 비정형구조라서 원자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지 않고 보다 느슨하게 무작위로 연결돼 있다. 유리는 총을 맞으면 원자들이 재빨리 대오를 정비할 방법이 없고 총알의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소멸시킬 도리도 없기 때문에 전체 구조가 붕괴한다. 이것이 유리가 약간의 압박에도 쉽게 금이 가는 이유다. 요리 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유리컵을 박살내기 위해 반드시 내리치거나 총을 쏠 필요는 없다. 뜨거운 유리컵을 차가운 물에 넣으면 유리가 짝! 갈라진다. 아주 깔끔하게. 왜 그럴까? 역시나 문제는 유리의 비정형구조는 신속한 재배열로 에너지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때의 에너지는 열이다. 35)


물질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은 빛이 그것을 통과하려 할 때 그것이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달려 있다. 금속은 광자photon라고 부르는 빛 입자뿐 아니라 엑스선처럼 빛과 비슷한 것까지 모두 쭉쭉 흡수한다. 금속의 원자들은 자유전자들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이것이 광자를 쉽게 흡수했다가 쉽게 분출한다. 광자를 공처럼 잡아서 왔던 방향으로 다시 던져버린다. 알루미늄과 은처럼 반짝이는 금속은 모든 종류의 광자(온갖 색의 빛)를 몽땅 잡아서 다시 던진다. 유리의 전자들은 괴상한 비정형구조의 원자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붙들고 있느라 바빠서 가시광선의 광자들을 금속처럼 착착 포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광자들 대부분 유리의 한편으로 들어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유리 원자들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자외선은 얘기가 다르다. 자외선의 광자는 가시광선의 광자보다 에너지가 넘쳐서 유리가 흡수하기에 좋다. 이것이 유리가 순수한 자외선 속에서 불투명해 보이는 이유다. 37)


열은 적외선 복사infrared radiation 형태로 허공을 돌진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광대한 진공 공간도 그렇게 가로지른다. 열은 일정한 속도(초속 30만 km)로 질주한다는 점에서 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열(적외선)과 가시광선의 실질적 차이는 열을 전달하는 파동이 살짝 더 길다는 것뿐이다. 무지개(가시광선)의 빨강(바깥쪽)에서 파랑(안쪽)까지의 스펙트럼을 생각해보자. 적외선은 빨간색 바로 너머에,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색들 바로 밖에 있다. 열이 빛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열이 유리창을 곧장 통과하는 것이 하등 신기할 게 없다. 빛이 갈 수 있는 곳은 열도 따라간다. 이걸 막을 해법은 간단하다. 유리에 금속이나 (이산화티타늄 같은) 금속산화물을 얇게 입혀서 부분적 거울로 만드는 것이다. 원자 몇 개 두께의 초박막 코팅은 빛은 투과시키고 열은 차단한다. 타는 듯이 더운 여름날에는 이 보이지 않는 코팅이 바깥의 열을 반사해서 집 안을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유지해준다. 38-9)


4. 모든 물질은 늙는다 - #탄성 #부식


‘엘라스틱’은 물질의 성질이지 물질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탄성은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탄성이란 원상회복이 가능한 신축성을 말한다.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원래 크기(길이)와 모양으로 돌아간다. 어느 집이든 고무줄과 고무장갑, 탄성 붕대와 탄성 반창고, 늘어나는 팔찌와 시곗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엘라스틱’이란 물질은 없다. 다만 신축성 있는 소재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것에 신축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도 바람에 최대 1m 폭으로 흔들린다. 마천루처럼 세상 뻣뻣해 보이는 것조차 신축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지않았다간 빌딩이 뚝 부러진다.) 탄성 있는 물질, 이른바 ‘엘라스틱’의 제대로 된 명칭은 엘라스토머(elastomer, 탄성중합체)다. 그중에서도 천연 엘라스토머인 고무가 대표적이다. 엘라스토머는 커다란 분자들이 엉켜 있는 고분자 물질로, 잡아당기면 고분자들이 쭉 펴지며 길어지고, 손을 놓은 순간 튕겨오르며 다시 뒤엉킨다. 45-6)


‘엘라스틱’이 ‘탄성재료’의 대체어로 쓰이듯 ‘플라스틱’은 ‘소성재료plastic material’의 대체어로 쓰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막연히 세숫대야와 칫솔을 만드는 데 쓰는 형형색색의 물질로 생각하지만, 과학적으로 소성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소성은 외부에서 힘을 받아 형태가 바뀐 뒤 그 힘이 없어져도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이다. 따라서 소성재료는 우리 주위의 플라스틱이 아니라 그 플라스틱의 원료를 말한다. 외력으로 변형된 투명 플라스틱 조각을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하면, 광탄성photoelasticity이라는 현상이 만든 놀라운 무지개 패턴을 볼 수 있다. 소성재료는 탄성재료와 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소성재료에 계속 힘을 가하면 변형되다가 결국은 뚝 부러지고 만다. 또한 플라스틱은 비틀거나 부러뜨리면 불쾌한 냄새가 난다. 변형에 따른 열로 인해 내부의 플라스틱 폴리머에서 기체가 방출돼서 그렇다. 46)


엘라스틱(탄성재료)이 갑자기 또는 서서히 플라스틱하게 변하는 고약한 버릇은 다분히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고무는 계속 늘어나다가 탄성한도elastic limit를 넘어버리면 외부의 힘이 없어져도 본래 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변형된 상태로 남는다. 이걸 소성

변형plastic deformation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금속도 엘라스틱하다. 금속에 탄성이 없다면 주행의 여파로 자동차 차체와 엔진과 그 안을 채운 너트들과 볼트들에 결국 영구적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탄성재료는 한계를 넘어서면 갑자기 끊어진다. 하지만 서서히 망가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고무줄을 당겼다가 놓을 때마다 에너지를 받아 늘어났던 분자들이 모두 정확히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정확히 같은 에너지를 다시 내놓지는 않는다. 고무줄을 몇 번 빠르게 당겼다가 입술에 대보면 고무줄이 좀 뜨뜻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고무줄에 투입한 에너지의 일부가 열로 낭비된 것이다. 이렇게 날아간 에너지는 되찾을 수 없다. 47-8)


직물은 왜 색이 빠질까? 색이 바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염색을 했기 때문이고, 기본적으로 염료는 직물 섬유에 주입된 화학약품이다. 볕을 쬐면 색이 바래는 주된 이유는 햇빛에 있는 자외선 때문이다. (맞다. 우리 얼굴을 태우는 바로 그 고에너지, 고주파 광선을 말한다.) 자외선이 염료 분자들을 때리면 광퇴화photo-degradation가 일어난다. 즉 분자들이 다른 형태로 재배열되는 바람에 전과 같은 방식으로 빛을 반사하지 않게 된다. 플라스틱이 누렇게 되는 것은 내부의 분자들에 변형이 와서 빛의 일부만 보내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다. 보내주는 빛이 빨강과 녹색 계열이라서 오래된 플라스틱은 우리가 아는 누런색을 띠게 된다. 부작용도 있다. 변색과 함께 플라스틱 구조도 취약해져서 갈라지고 부서질 가능성이 대폭 높아진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사실 광퇴화는 플라스틱을 환경에서 분해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광퇴화 같은 자연 효과의 도움이 없으면 플라스틱은 영원히 우리 주위에 뭉개고 있어야 한다. 51-2)


5. 배수구와 만년필의 공통점 - #물 #열


물의 비열용량specific heat capacity은 엄청나다. 물은 다른 물질에 비해 1kg(약 1ℓ)의 온도를 1°C 올리는 데 많은 에너지(4,200J)를 요한다. 물 분자는 매우 가벼운 원자들(수소는 원자 중 가장 가볍고 산소는 여덟 번째로 가볍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물 1kg에는 동량의 다른 물질보다 더 많은 분자가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자는 진동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일정량의 열을 흡수한다. 다시 말해 물이 열을 흡수하는 힘의 원천은 압도적인 분자 수에 있다. 주전자에 물 1ℓ를 채우고, (만약 가능하다면) 철 덩어리로 주전자 모형을 만든다. 이제 두 주전자를 레인지에 올리고 동일한 시간 동안 가열해 각각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흡수하게 한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른다. 그럼 철 덩어리는 어떻게 될까?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엄청나게 뜨거워진다. 철의 온도는 700°C까지 무시무시하게 상승한다. 물의 온도를 높이는 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든다는 사실이 물을 완벽한 열 운반체로 만든다. 59)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는 집을 덥힐 수 없다. 요점은 열에너지와 온도의 차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뜨거운 것에 열에너지도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물체의 온도(얼마나 뜨거운가)와 그것이 얼마의 열에너지를 함유하는가의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차가운 빙상이 엄청난 열을 함유한 이유다. 모든 것은 물이 가진 높은 비열용량으로 귀결된다. 물에 빽빽이 들어찬 분자들 덕분에 물은 놀라운 열 유지 능력을 가진다. 철의 비열용량은 물의 약 9분의 1이다. 다시 말해 철이나 강철 1kg의 온도가 10℃ 내려갈 때 내놓는 열에너지는 물 1ℓ(즉 1kg)가 같은 정도로 식을 때 발산하는 열에너지의 9분의 1에 불과하다. 중앙난방시스템의 물은 보일러에서 흘러나와 각 방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보일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계속 식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열을 발산한다. 거기다 물은 매우 유동적인 액체라서 신속히 회수돼 열을 다시 공급받아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60-1)


파이프 안을 쉽게 흘러다니는 물의 특성도 열을 붙들고 늘어지는 특성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약 물이 더 걸쭉한(점성이 더 강한) 액체라면, 그래서 줄줄 흐르지 않고 진득하게 흐른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물을 많이 사용하지 못했을 거다. 물이 시럽의 속도로 움직이면 샤워하고 변기물을 내리고 설거지하고 옷을 세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상상해보라. 시럽 같은 물로 구동되는 중앙난방은 작동은 하겠지만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찐득한 물도 방에서 방으로 흐르며 같은 방식으로 식겠지만, 잽싸게 보일러로 돌아가 잃은 열을 신속히 보충하지 못한다. 배관은 물의 속성, 그중에서도 압력과 중력에 밀려 줄줄 흐르는 속성에 의지한다. 이 때문에 도시의 급수장과 저수탑은 열이면 열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수도를 틀 때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은 물탱크가 높은 곳(주로 위층이나 옥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배관 설비는 첨단 기술 없이도 놀랄 만큼 효과적이다. 61-2)


6. 빨래의 과학 - #오염 #용해


옷은 동시에 양방향에서 더러워진다. 바깥쪽에서(예를 들어 케첩이 묻었을 때), 그리고 안쪽에서(땀을 비롯한 각종 체액의 분비). 왜 옷은 때가 탈까? 우리가 입고, 신고, 걸치는 것들은 우리의 체온 유지를 위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집을 벽돌로 짓는다면, 옷은 모와 면(천연섬유),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합성섬유)을 꼬고, 짜고, 떠서 만든 실과 직물로 짓는다. 새끼양의 양털은 약 5,000만 개의 섬유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양모 스웨터 한 벌에는 족히 수백만 개의 섬유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스웨터는 원산지가 양의 등이든 유전이든(합성섬유는 석유로 만든다)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고 같은 목적을 수행한다. 즉 촘촘히 얽힌 섬유들이 공기를 가둬서 우리의 체열을 유지한다. 하지만 수많은 미세 섬유가 너무 빡빡하게 엉켜 있으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부작용이 난다. 뭔가가 달라붙을 표면적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데다, 섬유가 워낙 작아서 때와 땀이 원자 단위로 자연스럽게 달라붙는다. 70)


물 분자는 수소원자 두 개가 산소원자 하나에 붙어서 삼각형을 이루는데 수소 끝은 약한 양전하를 띠고, 산소 끝은 약한 음전하를 띤다. 물 분자는 이렇게 자석처럼 두 개의 상반된 ‘극’을 가진 까닭에 극성 분자polar molecule라고 불린다. 그리고 정말 자석처럼, 때 같은 것에 달라붙어서 때를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 그렇지만 물이 모든 것에 달라붙지는 않는다. 첫째, 물 분자는 자기들끼리 더 잘 달라붙는다. 이것이 물이 방울지고, 연못 수면에 소금쟁이가 떠 있을 막을 형성하는 이유다. 물이 뭔가를 제대로 적시려면 물의 이 표면장력surface tension부터 깨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극성 분자는 다른 극성 분자에게 달라붙어 그것을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 이 말은 물이 소금(역시 극성 분자) 같은 물질을 쉽게 용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껌, 접착제, 잉크, 또는 극성 분자를 끌어당길 음극과 양극이 없는 (탄소기반) 유기화학물질로 이루어진 옷 얼룩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비누와 세제다. 70-1)


대부분은 물을 증발하는 방법으로 옷을 말린다. 다시 말해 액체 상태의 물을 수증기로 바꾼다. 그러나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무조건 열이 필요한 건 아니다. 냄비에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 때 우리는 꾸준한 열에너지 공급으로 물 분자들의 활동성을 키워 그것들이 액체 상태에서 벗어나 증기가 되게 한다. 이때는 열이 증발의 동력이다. 이와 달리 추운 데서 옷을 말릴 때는 지나가는 공기에 의지한다. 공기가 불어서 물 분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따라서 이때는 꾸준히 부는 건조한 바람이 마법의 요소다. 여기서 ‘건조’가 중요한 단어다. 빨래에서 물기가 얼마나 빨리 없어질지(또는 없어지기는 할지)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이 바로 습기(주변 공기에 이미 잠복해 있는 수증기의 양)이기 때문이다. 열대우림 한가운데 사는 사람은 빨래를 밖에 널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물이 젖은 빨래를 떠나 젖은 대기로 들어갈 가능성은 낮다. 습도가 낮으면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빨래가 밖에서 잘 마른다. 75)


7. 스웨터는 왜 따뜻할까? - #발열 #통기성


우리는 어떤 경로로 열을 잃을까? 몸의 심부에서 피부조직과 옷까지는 직접 전도로, 피부에서는 증발로, 옷의 표면에서는 대류와 복사로 열을 잃는다. 운동할 때는 체열의 약 절반이 땀의 증발로 잃고, 10%는 복사로 날아가고, 3분의 1 조금 넘게는 전도와 대류로 사라진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날씨에 달려 있다. 쌀쌀하고 바람 부는 날, 또는 달리거나 자전거를 탈 때 차가운 공기가 계속 몸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대류 작용으로 체열을 절반까지 빼앗아가기 때문에 바람막이용 겉옷을 입는 게 최선의 방어다. 반대로 덥고 습한 날에는 주변 공기가 이미 포화상태여서 증발로 열을 잃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시원함을 유지하려면 부채질을 해서 일부러 대류를 일으켜야 한다. 춥고 건조하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복사가 체열 손실의 주범이다. 따라서 옷을 겹겹이 입는 것이 몸의 심부에서 옷의 겉면으로 열전도가 일어나 열이 밖으로 복사되는 것을 줄이는 최선의 전략이다. 80-1)


통기성과 방수성은 모순처럼 들린다. 어떻게 천이 밖에서 물이 스미는 건 막으면서 내부의 땀은 밖으로 내보낸단 말인가? 모든 것은 비의 물방울과 땀이 기화한 증기의 과학적 차이로 설명된다. 빗방울의 물 분자들은 수십억조 개가 뭉쳐 있는 데 반해, 수증기 분자들은 서로 분리돼 자유롭게 떠다닌다. 다시 말해 빗방울은 물 분자보다 비교가 불허하게 크다. 고어텍스 같은 통기성 방수 직물은 이 차이를 이용한다. 고어W.L. Gore & Associates사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고어텍스는 미세 기공이 무수히 뚫린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멍은 물 분자보다 700배 커서 습기는 쉽게 빠져나가는 반면 빗방울보다 2만 배 작아서 비는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소재가 방수성과 통기성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갖게 됐다. 정말 더워서 땀이 많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수증기의 일부는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식어서 응축되고, 그렇게 형성된 물방울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84)


양말과 셔츠부터 드레스와 코트까지 모든 의류에는 공통점이 있다. 날실과 씨실의 패턴. 이는 금속 막대 같은 고체의 내부조직, 즉 원자들이 가로세로로 정렬한 양상과 비슷하다. 다만 금속 막대는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게 강한 반면(이를 전문용어로 등방성isotropic이라고 한다) 직물은 특정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강하다(이를 비등방성anisotropic이라고 한다). 즉 날실이나 씨실과 평행한 방향보다 대각선 방향으로 더 많이 늘어난다. 대각선 방향의 저항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단사들은 날실과 씨실이 대각선이 되도록 직물을 45도 돌려놓고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옷이 해지기 시작하면 끝장은 순식간이다. 청바지 무릎의 작은 마모가 금세 뻥 뚫린 구멍이 된다. 왜 그럴까? 직물에 결함이 생기면 나머지 실들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전보다 커져서 견디다 못한 실들이 차례차례 뜯겨나가기 때문이다. 구멍이 번질수록 남은 섬유에 미치는 인장력이 세져 구멍이 더 퍼져나갈 가능성도 커진다. 86-7)


8. 휘발유부터 전기차까지 - #에너지 #배터리


자동차 운전의 진정한 단점은 어디른 가든 쇳덩이를 차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휘발유 자동차는 우리가 피할 길 없는 비효율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 하지만 이건 새 발의 피다. 실질적인 비효율성은 따로 있다. 자동차의 근본적인 문제는 휘발유에 갇혀 있는 에너지의 단 15%만이 실제로 도로를 달리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실린더의 열 손실, 기어의 마찰, 엔진이 내는 소리, 차의 전기 설비로 가는 동력 등 다양한 경로로 낭비된다. 만약 자동차가 100% 효율적이라서 휘발유에 내장된 에너지가 남김없이 도로를 내달리는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면 동량의 연료로 적어도 5~10배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다. 차에 사람을 많이 태울수록 차량의 무게 대비 실제로 운반할 유효 하중이 커지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높아진다. 이것이 트럭, 버스, 열차 같은 차량이 훨씬 크고 무거운 디젤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데도 효율성 높은 운송 수단에 속하는 이유다. 92-3)


휘발유 자동차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도시 주행에 따르는 스톱스타트 운전 행태다. 뭐라도 하려면 에너지가 든다. 고장 난 차를 밀어봤다면 자동차의 관성(inertia,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상태 또는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깨는 것만도 얼마나 등골 빠지게 힘든지 알 것이다. 무게 1.5톤(1,500kg), 주행 속도 65km/h의 자동차는 상당한 운동에너지를 보유한다. 계산해보면 약 240kJ(킬로줄, kilojoule)인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올라가기에 충분한 에너지양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축구공을 따라 도로에 튀어나오는 아이들이나 교통안전 수칙을 모르는 고양이를 피해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이 240kJ의 에너지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브레이크 패드가 브레이크 디스크와 만나 자동차가 정지할 때 운동에너지는 타이어의 끼익 하는 비명과 풀썩 피어오르는 연기로 사라진다. 주행 중에 이렇게 끔찍히 소모적인 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95-6)


모터로 구동되는 전기차는 그런 면에서 크게 유리하다.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전기모터는 원통형 자석 안을 빙빙 도는 구리 코일이다. 코일은 구리선을 촘촘히 감은 것이다. 구리선에 전기를 주입하면 임시 자기장이 발생해 자석의 자성을 밀어낸다. 이 때문에 구리심이 뱅뱅 도는데, 이 현상을 이용해 진공청소기부터 고속열차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에도 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 전기모터의 위대한 점은 이 과정을 역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터는 발전기가 된다. 전기차가 주행할 때는 배터리가 전선을 통해 동력을 모터에 주입해서 바퀴를 회전시킨다. 그러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전류가 끊기지만 자동차의 모멘텀이 바퀴를 계속 돌린다. 이때 모터도 계속 회전하기 때문에 전기가 발생하고, 이 전기가 다시 배터리에 저장되면서 자동차가 감속한다. 전기차는 브레이크를 잡을 때 에너지를 홀랑 날리는 대신 일부를 다시 잡아서 배터리를 재충전한다. 이를  회생 제동regenerative braking이라고 한다. 96)


9. 디지털이 세상을 바꾸다 - #디지털 #비트


휴대폰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지털 기기의 핵심은 (연속적으로 변하는) 아날로그 신호를 (0 또는 1로 표현하는) 디지털 신호로, 다시 반대로 변환하는 기술에 있다. 이 과정을 샘플링이라고 한다. 정보 뭉치를 작은 덩어리들로 나누고, 각각의 덩어리를 측정하고, 그 측정값을 숫자로 바꾸고, 그 숫자들을 모두 줄줄이 엮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법으로 <모나리자>를 예컨대 1,000개의 행과 1,000개의 열로 또는 100만 개의 사각형으로 나누고, 각 사각형의 평균 색상과 밝기를 측정해서 (둘 다에 숫자를 부여한 후) 그 측정값들을 상하좌우로 차례대로 배열한다. 즉 한 장의 사진을 200만 개 숫자로 구성된 하나의 패턴으로 (또는 200만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하나의 숫자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미지를 컴퓨터에 저장하거나 휴대폰으로 보내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이렇게 아날로그 사진을 온-오프 이진법 숫자(비트)의 격자 패턴으로 만드는 포맷(저장방식)을 전문용어로 비트맵bit map이라고 한다. 104)


구식(아날로그) 카메라에는 렌즈와 셔터가 있다. 이것이 짧게 여닫히면서 밀폐된 카메라 내부로 빛이 들어와 은 기반 화학물질로 코팅된 플라스틱 필름이 빛에 ‘노출’된다. 빛은 이 물질을 미세한 은조각들로 바꾸고 조각들이 한데 뭉친다. 그래서 피사체의 밝은 부분은 필름에 어둡게, 어두운 부분은 밝게 맺힌다. 다시 말해 사진은 명암이 반전된 상태로 시작한다. 이 원본 필름을 우리는 ‘네거티브’라고 한다. 네거티브 필름을 인화하면 피사체의 명암이 다시 반전되고, 따라서 ‘포지티브’ 필름에는 피사체가 원래대로 나온다. 디지털카메라는 전하결합소자charge-coupled device, CCD라는 빛에 민감한 칩을 이용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라스틱 필름이 빛에 노출돼 물체의 연속적 아날로그 표현을 만드는 것과 달리, CCD는 픽셀(pixel, 화소)이라 불리는 수백만 개의 감광 ‘칸’으로 나뉘어 있고 각 칸이 떨어지는 빛을 측정해서 숫자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아날로그 이미지를 디지털 사진으로 자동 변환한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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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역사도서관 교양 19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차용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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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교황이라는 칭호 자체는 정작 그 소유자의 위상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지만, 그가 신의 대리자라는 주장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12세기 이후로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매년 발행되는 『교황청 연감』에도 '베네딕토 16세,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천명되어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보다는 더 고귀한' 존재라는 말로써 교황의 위상을 자리매김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 덕택에 교황은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의 교황은 매고 푸는 권한의 소유자 혹은 베드로와 같은 천국의 문지기라기보다는 윤리와 신앙의 재판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교리적으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 직분을 수행하고 하느님을 대리하는 통치자'이며, 이것이 교황 본연의 임무이다. 이는 불변의 원칙으로 남아 있다."(6-7)


제1부 교황권의 모습


"'거룩한 아버지' 혹은 '교황 성하'. 도대체 무슨 뜻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모든 교황은 공식적인 직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거룩해진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직은 이 직책의 수행자를 더 선한 존재로 만들며, 교황 자신도 이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세속 왕권은 좋은 사람도 나쁘게 만든다. 중세의 교회법 학자들은 이러한 사고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떤 학자는 교황이 거룩함을 전달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보았고, 또 다른 학자는 교황권은 사도 베드로의 공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개인적으로 거룩함이 없거나 심지어 윤리적인 결점이 있더라도 베드로의 공덕이 이를 만회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사교황(papa angelicus)이라는 말이 있듯이, 교황이 개인적으로 천사와 같은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맡은 일에서 연유하는 거룩함과 살아온 삶 자체의 거룩함, 이 둘을 동시에 겸비하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목표였다."(33-5)


"교황과 관련된 의식은, 교황직의 거룩함이 임종과 더불어 종식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의 시신 앞에서 교황 궁무처장이 교황의 본명을 부르면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알비노, 아직도 잠을 자느냐?〉(Albino, dormisne?) 여기서 알비노는 1978년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의 세속 이름 알비노 루치아노를 말한다. 결국 교황에 대한 경의는 교황의 개인적인 업적이 아니라 교황직의 거룩함에 대해서 표해지는 것이기에, 공경에서 불경(不敬)으로의 태도 변화는 너무나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결과 교황궁과 교황의 시신은 역사적으로도 약탈자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에 '망치 소리가 사라지면, 교황의 직무와 연관된 거룩함도 조용히 종식될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어떤 인간도 교황처럼 높이 공경받지는 않지만, 교황처럼 죽음과 더불어 깊이 추락하는 경우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교황은 사라지지만, 교회는 존속한다."(39-41)


"교황권은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다. 신의 독생자는 벳새다 출신의 어부 시몬 베드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인류의 영적 구원을 주관하는 로마 주교로 임명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를 말이다." "교부(教父) 키푸리아누스는 『마태오의 복음서』가 전하는 말이 단지 베드로에게만 전달된 것으로 보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매고 푸는 권한이 모든 사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사도들은 이 권능을 주교들에게 다시 양도했다고 적고 있다. 즉, 구원의 확신은 단지 로마의 주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교들에게 있었다. 결국 베드로는 '동등자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에 불과한 사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교단 지상주의' 이념은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rimat) 주장에 항상 장애물이 되어왔다. 그때마다 로마 교황권은 정교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옹호되어 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인정받아 온 교황의 수위권을 무기로 주교단 지상주의에 대응했다."(56-8)


"주교단 지상주의보다 한층 더 강하게, 또 다른 관점이 교황이 주장한 '완전한 최고 권력'에 맞섰다. 바로 공의회주의였다. 처음 1,000년 간 여덟 번의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4세기와 5세기에 거행되었던 처음 네 번의 공의회는 초현실적인 권위를 누렸다. 개최 장소만 보더라도 대부분이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옛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에서 열렸다. 이는 그것이 처음에는 로마의 황제가, 후대에는 동로마의 황제가 소집한 국가적인 모임이라는 의미이며, 특히 교리 문제를 논의했으며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도직에 근거해서 스스로의 책임 아래 회의에 임했다. 황제가 인준한 공의회 결정 사항은 제국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후대에 와서 결정 사항의 효력이 발생하는 데 교황의 관여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서기 1000년 이전에 개최된 모든 세계 공의회도 마치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축성된 것'처럼 '포장'되었다."(61-2)


제2부 교황들의 역사


서기 1000년까지 


"초기 교황 시대를 거친 후, 서기 800년 성탄절에 레오 3세(795~816)가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황 이념의 정치적 외연을 더욱 확장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이 유럽의 미래에 지니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회 운영에서 교황권의 미약한 위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로마가 권위 있는 역할을 수행하길 원했으나, 로마는 이를 실행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샤를마뉴는 전 제국에 통일된 전례를 원했고, 이를 위해 하드리아노 1세(772~95)에게 로마의 성사집(Sakramentar)을 요청했으나, 그가 받은 것은 낡은 책 한 권으로, 프랑크 제국 내에서만 이용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로마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려고 했지만, 정작 계속해서 통일적인 지침을 내린 것은 프랑크족의 왕이었다. 결국 811년의 유언장에서 샤를마뉴는 로마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제국의 다른 대교구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샤를마뉴를 제위에 올린 교황 레오 3세도 어쩔 수 없이 이를 감내해야만 했다."(123-4)


"니콜라오 1세(858~67)는 당대 교황 중에서 재임 기간 동안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한 유일한 교황이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교황도 니콜라오처럼 수많은 판결을 통해서 교회법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오토 카르텔리에리의 평가에 의하면, 물론 반세기의 시차가 있었지만 그는 '샤를마뉴의 진정한 대적자(對敵者)'였다. 그의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어도, 주장하는 바가 명확했고 이를 관철하려는 의지도 확고했다. 로마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유죄 선고를 받은 자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은 로마에 항소할 수 있으며, 교황이 결의 사항을 인준한 공의회만이 인정된다. 모든 속인은 죄인이며, 최고의 속인인 황제조차도 교황의 재치권에 복속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그가 주장한 바였다." "왕은 최고의 세속 군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장 미천한 신하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신분으로 교회재판소에 굴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 사례는 후세까지 계속해서 기억되었다."(124-7)


# 중(中)프랑크 왕국의 왕 프리슬란트가 본처인 티트베르가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후처인 발트라다가 낳은 자식들을 적자로 인정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니콜라오는 티트베르가만을 유일한 정부인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황 니콜라오 1세의 재임 기간에 급상승한 교황의 위상은 10세기와 11세기 초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가 예측할 수 없는 '잉태의' 시대였기에, 교황의 많은 권리들이 부지불식간에 확보되었고, 이는 수십 년 뒤에 법적 인준을 받게 된다. 991년의 시노드에서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괴물'로 불릴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던 요한 12세는 962년 독일의 왕을 로마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 전통은 이후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교황들은 주교구를 설립하고 이를 교황청 직속 교구로 만들었으며, 지역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교황청에 직속되는 면속(免屬) 수도원들도 생겨났다.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시성(諡聖)에 대해서도 로마는 명확히 규정했고, 그 결과 993년에 있었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울리히(923~73)의 시성식은 교황이 주재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 모든 권리들이 한마디로 엉성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이후의 교회법 제정과 더불어 로마의 재치권 속으로 들어온다."(127, 129)


교황, 세계 통치를 꿈꾸다


"독일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에 따르면,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종교를 단순히 권력 행사의 도구쯤으로 생각했던 '정치의 대가'(Meister der Politik)로 분류되곤 하지만 최근에는 '종교적 천재'(religiöser Genie)로 평가받기도 한다. 신학자 이븐 콩가르는 그레고리오의 신념을 이렇게 기술한다. 〈신에 복종하는 것은 교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오의 유명한 「교황령」 27개 항목에 그의 세계관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 항목들은 모두 선언조의 문구로 구성되었는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로마 교황만이 합법적으로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라는 항목이다." "특히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라는 등의 항목과 관련해서, 가톨릭을 신봉했던 절대군주들조차도 그레고리오의 이러한 숭배 의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레고리의 이름을 성무 일과서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139-40)


# 1077년 하인리히 4세와 카노사의 굴욕을 연출한 당사자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제 교회(Papstkirche)로 나아가는 길을 다져놓았다. 그 결과 교황이 구원의 조건과 교회에서 옳은 것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지배권을 추구하려면 교황에게는 후원자와 조직이 필요했으나, 그레고리오 7세와 같은 혁명가는 그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당시로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서서히 구축하기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임기응변에 능한 전략가가 필요했다. 개혁적 성향의 교황권은 그레고리오의 두 대 후임 교황인 우르바노스 2세(1088~99)와 더불어 시작된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그는 신앙을 수호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던 클뤼니 대수도원 공동체의 원장이었다." "우르바노 2세는 어떤 교황보다도 아우구스티노참사수도회(Augustinerchorherren)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적으로 교회 정책을 전개하기 위해서 참사회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조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선언(1095)이었다."(147-9)


"우르바노의 행정 조직은 안정적이었다. 임기 시작 직후인 1089년에 교황의 궁정 국가를 의미하는 '로마 교황청'(römischer Kurie)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문서성(文書省)의 업무가 자리를 잡았고, 재정 담당 부서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재무 및 수납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관료화, 뇌물 수수, 강탈과 같은 문제들도 대두되었다." "교황이 제정한 법령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고, '산더미 같은' 교황 교령과 서한에 대해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통계로 표현하면, 교황 알렉산데르 3세(1159~81)의 재임 기간인 22년 동안 작성된 문서가 1200년까지 작성된 서한과 문서의 5분의 1에 달한다. 12세기에만 약 1,000개 정도의 교령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1,000년 동안 제정된 전체 교령의 수와 비슷하다. 아마도 법률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상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대부분의 교황들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고, 최근까지도 그러했다."(150-1)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초창기의 법률적 지식에 정통했던 '세계 통치를 꿈꾸던 교황'(Herrschaftspapst)의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인노첸시오는 베드로의 대리자(Vicarius Beati Petri)라는 칭호 대신에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칭호를 사용한 교황이었다. 그에게 베드로는 자신의 '직무상의 동료'(Amtskollege)였으며, 두 사람 모두 신의 대리권을 행사한다. 최후 심판의 날에 결산을 하는 사람은 세계 심판자가 아닌 바로 교황이다." "그는 또한 법률 정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지난 수십 년간 공포된 수많은 교령(敎令)들이 무질서의 극치에 달했던 상황에서, 인노첸시오는 법적으로 중요한 교령을 모은 교령집을 간행하고 이를 공식 책자로 배포했다. 교황청은 철저하게 경영 원리에 근거해 조직되어 갔다. 교회 사업과 수납 제도가 정립되면서, 일을 처리하는 대가로 '선물'을 요구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자발적인' 선물은 용인되기도 했다."(151, 154-5)


"1198년 이후 독일은 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에서 배출한 두 명의 왕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어느 왕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교황이 심판관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교령들을 반포한다. 논지는 다음과 같다. 교황이 독일의 왕을 황제로 등극시키고, 황제권이 본질적으로 독일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교황은 독일의 왕 선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후보자가 그로부터 '사도적 축복'(die apostolische Gunst)을 받는다. 선출 자체는 나중에 선제후(選帝侯, Kurfürsten)로 발전하는 '주요 선거인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가 선거인단 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두 가문 사이에서 심판관 역할을 수행했고, 마침내 제3자였던 풀리아(Apulia) 지역 태생의 소년인 프리드리히 2세를 권좌에 올려놓았다."(157-60)


#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반포하여 선제후들이 선출한 인물만이 독일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수 있게 하였다.


"가문의 조상들 중에서 배출된 교황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보니파시오라 칭했던 새 교황에게는 교황권과 자기 가문의 물질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했다.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이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후대에 이른바 경험법칙(Faustregel)으로 불렸던 것이 당시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은 부유해지려면 교황을 배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메디치, 바르베리니, 델라 로베레, 카라파, 보르게제 가문 등이 모두 그러했다. 물론 이 규칙이 늘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인노첸시오 3세가 대표적이었고,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더 확실하게 입증했다." "이 교황은 1300년에 성년을 선포하고 특별 성년대사(聖年大赦)를 반포하면서, 매고 푸는 권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보니파시오는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성년을 100년 주기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성년의 주기는 50년에서 30년, 마지막으로는 25년으로 줄어들었다."(172-3)


"약간의 전초전이 있은 뒤에 1296년부터 로마 교황권과 프랑스 왕권의 관계는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였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프랑스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십일조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보니파시오는 교령을 통해서 이 과세의 시행을 금지토록 했으나, 필리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세에 아마도 가장 유명했을 교령은 격렬한 성명전(聲明戰) 속에서 등장한다. 교령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가 여기서 등장하는데, 이는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이론적 글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신앙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의 교회만이 있으며, 이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임을 고백하고 믿는다.〉 하지만 이 문서의 절정은 다음의 문장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하고, 말하고, 확신하고, 천명한다.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으려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175-7)


"1303년 9월 7일, 보니파시오 8세를 겨냥한 아나니 암살 계획은 교황권의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었다. 이제 교황은 프랑스에 종속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다(1309년). 로마 교회와 보편 교회를 동시에 상징하는 교황이 반드시 로마에 자신의 거처를 두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교황은 프랑스 같은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전에도 교황들이 로마에서 자주 출타했기 때문에, 교황과 교황청이 있는 곳이 바로 로마라는 인식이 싹터 있었다. 수사에서 태어난 위대한 법학자 헨리쿠스(1271년 사망)─일명 호스티엔시스─는 '교황이 있는 곳이 로마'(Ubi papa, ibi Roma)라는 격언을 만들어내었다. 교황권을 아비뇽에 영구 정착시키려는 구상이 진행되자, 로마법과 교회법에 통달한 발두스 데 우발디스(1400년 사망)는 '교황이 있는 곳이 바로 로마, 예루살렘, 시온이며, 모든 사람의 고향'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180)


종교개혁, 가톨릭 개혁, 적응 시기의 교황들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증오해 마지않았던 콜론나 가문의 마르티노 5세가 공의회 교황(Konzilspapst)으로 선출되면서 서유럽 교회의 분열은 종식된다. 그 뒤로는 보르자 가문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와 같은 특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스페인 사람인 그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예술을 장려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의 부도덕성 역시 이에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던 해에 그와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율리오 2세(1503~13)가 뒤를 이었다. 보르자 일가의 박해를 받던 델라 로베레 집안 사람인 그는 흔히 콘스탄티누스의 옛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피에트로 성당의 공사를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그는 라파엘로,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율리오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1513~21)는 흔히 루터 교황(Lutherpapst)으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었다."(187-8)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하고, 가톨릭 교회에 각성의 종소리를 울리며,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가톨릭적 개혁으로 맞서려는 시도가 다음 세대 교황들의 몫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성 비오 5세(1566~72)는 신중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개혁안들을 실행에 옮겼다(그 결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으로 철저한 금욕주의자이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종교재판관이었던 그에게 신분과 교양이 높았던 인물들은 표적이 되었다. 그는 1517년에 「금서 목록」을 제정했고, 그 결과 수백 명의 인쇄업자들이 독일과 스위스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세속 문제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국가에게도 복종을 강요하면서, '스스로 여왕임을 자처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던 교회의 이러한 조치는 교황이 통치자나 국가원수에게 내린 처벌의 마지막 사례가 되고 말았다."(192-4)


"당시의 교황들 중에서 크게 부각되는 또 한명의 인물은 정열적인 식스토 5세(1585~90)였다." "식스토 5세와 같은 교황이 기념비 건축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스토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9만 명의 거주자들 가운데 5만 명이 살해당한 1527년의 악명 높은 '로마의 약탈'과 여러 차례 창궐한 페스트 뒤, 로마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식스토는 50킬로미터의 거리를 잇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해 물을 끌어들였다." "라테라노 궁전은 토대부터 새롭게 건축되었고, 과거 판테온의 위용을 능가하는 피에트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마무리되었다." "이집트에서 온 오벨리스크를 네로의 정원에서 피에트로 대성당의 광장으로 옮기는 작업 역시 대단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과 5년 사이에 그가 보여준 엄청난 열정과 성공은 초인간적인 힘과 결탁해야만 가능했다. 그는 교황의 모습을 한 파우스트 박사였던 것이다."(192, 204-7)


"식스토 5세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후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모델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식스토 5세 이후, 교황권은 유럽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 휘말려 들어갔고, 로마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절대군주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더욱더 갈등을 빚었다. 절대군주들이 자신들의 지배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종교적 우위권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콘클라베에서도 다른 국가를 가장 덜 자극하는 후보를 선출하곤 했다. 추기경들은 '이 시기에 독실하면서도 경력이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을'(슈바이거) 교황으로 추대했다. 비록 비굴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내적인 불화가 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속화의 가속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이성종교'(Vernunftreligion)인 계몽주의의 충격도 교황권에 불어닥쳤다. 볼테르(1694~1778)는 교황권이 구시대의 유산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208, 212)


"교황권도 시대정신을 따르려 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는 예수회를 해산시켰다는 사실이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1556년 사망)가 16세기에 설립한 교단인 예수회는 특히 '교황에 대한 복종'(Papstgehorsam)을 서약했고, '교황에 대한 복종'이 '교단에 대한 복종'보다 우선시될 정도였다. 제후들의 궁정 고해 신부이자 조언자로서, 학교와 대학의 교사로서, 종교 문화의 전달자로서 예수회 회원들은 가톨릭 신앙과 로마에 대한 복종심을 헌신적으로 설파했다. 1760년 이래로 이 교단은 스페인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절대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상습적인 질서 파괴자로 인식되고,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 출신으로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4세(1769~74)는 세속 권력에 위축된 나머지 예수회의 해산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마침내 1773년 7월 21일에 교황의 소칙서(breve)가 반포되면서, 예수회는 해산되었다. 이후에는 어느 교황도 클레멘스라는 교황명을 사용하지 않았다."(216-8)


"'필요성'(Nutzen), 이것은 계몽 절대주의에서 교황권을 포함한 종교 단체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었다. 합리적인 국가 철학을 추종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는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교황 비오 6세(1775~99)가 요제프 2세에게 교회 관련 법령들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1782년 빈을 방문했을 때는 카노사의 역전극이 벌어졌다. 요란한 환영을 받기는 했으나, 정작 비오 6세가 얻은 것은 없었다." "교황 비오 7세(1800~23)는 나폴레옹과 정교 조약을 체결(1801)해 유럽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프랑스 교회에 대한 나폴레옹의 통제가 강화되고, 무력적인 유럽 팽창 정책이 가속화되자 교황과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려고 들자, 비오 7세는 파문으로 맞섰다(1809). 이후 납치 감금된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쫓겨나고서야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218-21)


바티칸의 시대 혹은 교황령의 종말과 새로운 교리


"새로운 교황 비오 9세(1846~78)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컸다. 사람들은 그의 사교성에 매료되어 갔다. '천사'(È un’ angelo)로 불렸던 그는 노쇠하고 병약했던 전임자와는 달리 일주일에 한 번씩 일반 알현을 했고, 정치적 박해자들에 대한 사찰을 중단시키고, 사면을 발표하기도 했다. 교황은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었고, 통일 자유 이탈리아의 건설을 원했던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대가 날로 커지면서 그것은 교황에게 압박이 되었다. 언론 자유, 세속인의 관료 등용, 성직자 출신의 장관 임용 금지, 시민군의 무장, 이탈리아 동맹의 가입 등등의 문제가 그러했다.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롬바르드 지역에서 1848년 3월에 혁명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교황 군대가 점령군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기대했다. 1850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모든 자유주의적 이념을 배척하고,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모든 제도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는 이제 반동(反動)의 상징이 되었다."(225, 229)


"'위-이시도르'는 이시도르 메르카토르라는 저자가 9세기에 편찬한 교령집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고대와 초대 교회 교황들의 위조된 교황 서한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날조된 일련의 조문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된 것들로, 바티칸 공의회는 1870년 7월에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을 교의로 결정했다." "보편적 사교직은 교황이 모든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정상적인 권력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무류성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교리적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다. 즉, 교황의 교리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영원불멸하다.〉"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의 교리들은 교회 구조의 토대를 다지는 과정의 종착점이었다. 마지막에 병적으로 권력 지향적인 인물(비오 9세)의 등장이 화룡점정이었지만, 전통적인 교회관에서 볼 때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 교리는 지속적으로 담금질되어 온 것이었다."(236-9)


새로운 힘의 충전


"교황령이 소멸된 1870년 이래로 교황들의 활동 반경은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바티칸, 라테라노, 카스텔간돌포만을 왕래했고, 대면하기에 너무 어려운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요한 23세(1958~63)는 공장 노동자, 복지시설 거주자, 교도소 재소자 등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사귀고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대부분의 경우 걸어서 이들을 찾아갔기 때문에 '조니 워커'(Johnnie Walk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요한은 1959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구상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인 재판도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밝히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모여서 분열을 종식시키려 합니다〉라고 했다. 문호를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개방했다. 이들은 더 이상 교회 밖에 있는 개별적인 그리스도교 신자, 이단, 분파주의자로 분류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로 간주되었다. 요한 23세는 타 종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기도를 함께했던 첫 교황이기도 하다."(259-61)


"알비노 루치아니, 일명 '33일의 교황'(1978년 8월 26일~9월 28일)은 처음으로 요한 바오로 1세라는 두 개의 교황명을 택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암시했다. 비록 교황명 선택의 이유를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로부터 각각 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고마움으로 돌리고 있지만, 직무 수행에 대한 그의 의도를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요한 23세의 개방성과 자유로움, 바오로 6세의 교리적 엄격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적 유연함은 노회함과 더불어 '미소의' 교황이라 불렸던 그의 개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교황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소문들을 만들어내었다. 크라쿠프(Krakau)의 대주교였던 카롤 보이티아가 교황으로 선출된 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비오라는 교황명을 쓴 세 교황들이 토대를 마련해 놓은 덕이 컸다. 하드리아노 6세(1522~23)를 예외로 한다면,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1378년 이래로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첫 번째 교황이었다."(266-7)


"교황 재임 초기에 폴란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성스러운 아버지께서는 폴란드에서 진행된 모든 연설문을 무릎을 꿇고서 작성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대변혁 이후 오늘날에는 그의 열정이 과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신의 크라쿠프 주교좌 성당의 수호성인인 스타니스와프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택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눈에는, 폴란드인들이 그리스도교, 국가, 문화 사이의 행복한 융화에 대한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는 물질주의와 서구 사회가 직면한 '욕망과 향락 문화'에 대항하는 '선봉'에 서야 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제작된 렌즈는 로마라는 눈에 씌우기에는 너무 강했던 것 같다. 라디오 바티칸은 폴란드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 날카로운 논조의 사설을 방송했고, 동시에 평화, 빈곤, 신앙과 같은 유럽과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고, 피임약을 거부하며, 성직자 독신제를 옹호하는 데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272-3)


불확실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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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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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비잔티움’이란 무엇인가? 


"이름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문제이다. 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은 아테네 인근 도시 국가 메가라의 식민지였던 고대 도시를 가리킨다. 비잔티움은 기원전 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이스탄불에 세워졌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나라의 이름인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따라서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비잔티움이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를 '파리 국가', 대영 제국을 '런던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가 비잔티움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우구스투스의 고대 로마 제국과 그들의 제국 사이에는 어떤 정치적 단절도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제국의 통치자들은 스스로 고대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황제로 자처했다."(30-1)


"동방의 이웃이자 적이던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역시 이 제국과 지역을 룸(Rūm, 로마)이라고 불렀다. 현대 그리스, 최소한 20세기 말까지 로미오스Rhōmios라는 정체성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발칸 반도와 많은 국가들은 이 제국을 그리스라고 불렀다. 그들의 입장에소 보면 이해할 만하다. 800년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로 알려져 있다)가 교황에 의해 '로마인의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자, 다른 제국들을 더 이상 로마라 부를 수 없었기에 그리스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는 것은 퍽 노골적이었다. 이는 제국의 권위와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잠재적으로 그 수도로 한정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에 담긴 보편성을 부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는 훨씬 문제가 많다. 동방에서 그리스어가 지배적인 언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언젠가부터 이교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31-2)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서기 300년 이후에는 '로마'라는 말을 쓰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형용사가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동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동지중해 세계와 레반트에 중점을 둔 명칭으로, 자연히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오랜 기간 보여 준 존재감을 지워 버린다. 최근에는 '로마 정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중점을 둔 인상을 준다. 이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올바른 믿음을 의미하는 '정교'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가 주장하는 속성이었다. 정교가 동유럽과 중동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인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므로 중세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잔티움이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독자는 이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32-3)


제1장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탄생하다(330~491년) 


"그리스도론 논쟁은 박해가 끝난 순간부터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문제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에도 아리우스파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발렌스의 지원 아래 복권되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 성직자가 니케아 정교를 따른다는 이유로 유배당했다. 이 사태의 또 다른 부작용은 아리우스파 주교 울필라스가 고트인에게 선교한 일이다. 울필라스가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한 일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데, 게르만계 종족 대부분이 울필라스를 따라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열정적인 그리스도교이자 정통 교회를 지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 나지안조스(지금의 튀르키예 네니지)의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택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이라고 다시 한번 선언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아리우스 분쟁을 멈추기는커녕 문제를 키웠다."(67-8)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지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449년 에페수스에서 다시 한번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나, 이번에는 안티오키아학파의 세력이 압도적이었다. 제2차 에페수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독립적인 두 본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제2차 에페수스 공의회를 부정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했다. 칼케돈 신경은 실질적으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단성론보다는 안티오키아학파의 양성론에 가까웠다. 그 결과 각 교회 사이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여기서 단성론파Monophysites라는 말은 '단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노스Monos와 '본성'을 뜻하는 피시스Physis의 합성어로,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최근의 학자들은 합성론파Miaphysites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69-70)


# 양성론은 하나의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는 입장[그러나 분리할 수는 없다]이고, 합성론은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 시리아 그리스도교 교파 대부분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이 해석을 지지한다. 오늘날까지 네스토리우스파와 합성론파는 그리스 정교회나 슬라브 정교회, 로마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달리 칼케돈 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된 모든 원칙을 결정하기 위해 기획되어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카아의 4대 총대주교 관구에 예루살렘 추가)를 규정했지만, 결국 보편 교회가 영구히 분열하기 전의 마지막 공의회로 남은 것은 퍽 역설적인 이야기다." "제노는 칼케돈 공의회로 인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482년 〈통합령Enōtikon〉을 발행했다. 하지만 동방의 교회들은 제노의 명령에 반감을 가졌고, 로마 교회는 5대 총대주교 관구의 수장으로서 지니는 수위권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도전받았다고 여기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교로 선언했다. 이 조치는 518년까지 지속되었다."(70-3)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황제가 다른 어떤 지위보다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은 오직 단 하나이므로 오래된 황제의 신적 지위는 축소되었다. 또한 궁정 의례는 지상에 존재하는 신의 대리인인 황제와 신민 사이를 가르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 엘리트층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는 주교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재위 초기부터 이들은 단순한 영적인 지도자를 넘어 교회의 다양한 자산을 운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대다수는 지주 계층 출신이었는데, 교회에서의 경력은 궁정 관직의 대안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황실과 개인들의 기부금 덕분에 교회는 제국의 최대 지주 가운데 하나로 발돋움했다. 5세기에 이들은 차츰 칼케돈 신경을 지지하고 지키고자 하는 입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는 단순히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합성론파 지역에서 성직자들은 사회적·경제적으로 하위층을 박해하고 과도한 세금을 지우는 국가에 대항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74-5)


"그리스도교와 제국의 결합은 어느 곳보다 제국의 수도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일곱 개 언덕까지 차용할 만큼 로마를 모범으로 삼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곧 '제2의 로마' 또는 '새로운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종교적 지위는 차츰 성장했다. 교회 사이의 위계도 그러했지만, 주요한 성지에 보관된 성물들이 옮겨진 것이 중대하게 작용했다. 425년 국가가 제공하는 고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워 문법, 수사학, 철학 그리고 법학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교육했다. 429~438년에 걸쳐 실시한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테오도시우스 2세까지 재위 시기에 발행된 모든 법령을 수집하는 작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 작업을 감당할 자원이 충분했음을 의미한다. 5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황제들은 이 도시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반 시설과 건축물은 의례와 함께 사람들이 천상의 질서가 지상에 강림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다."(83-4, 88-9)


제2장 지중해의 주인이 되다(491~602년) 


"아나스타시우스의 대외 정책은 동맹 관계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로고트의 테오도리크는 493년 오도아케르를 살해한 후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테오도리크는 서방 황제의 지위에 오르지 않는 대신 서방의 주요한 패권국들(프랑크 왕국·비시고트 왕국·반달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고, 로마의 옛 원로원 귀족들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에 대응하여 칼케돈 신경을 따르는 프랑크 왕국(이 시점에서 알프스 이북의 최대 세력이었다)과 외교적 친선을 추구함으로써 아리우스파를 따르는 고트인과의 사이에 적대감을 부추겼다. 아프리카 수복이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반달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또한 502~506년 페르시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아나스타시우스는 아랍계 부락 연맹인 킨다 및 가산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방면의 국경을 지키고 비잔티움 제국과 함께 싸운 대가로 특권을 누렸다."(92-3)


"유스티누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대외 정책을 이어 갔다. 그는 서방에서는 아리우스파인 오스트로고트를 고립시키고, 동방에서는 페르시아 방면의 방어를 강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은 새로운 동맹을 통해 확대되었다. 제국은 캅카스 지방에서 라지카(조지아어로는 에그리시)와 이베리아의 충성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을 거두어 통치자들을 복속시켰다. 한편 남쪽에서는 그리스도교 악숨 왕국(지금의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이 유대화된 유일신교를 추종하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힘야르 왕국(예멘에 있었다)에 대항해 일으킨 전쟁을 지원했다. 유스티누스 1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위 시기는 조카이자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년)에 완전히 가려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는 527년에 시작되었으나, 학자들은 유스티누스 1세에 재위 기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작성된 사료가 꽤 많고 다양하다는 점이 작용한다."(94-5)


"(황실 강화를 두고 대립하던) 유스티니아누스와 원로원이 의견의 일치를 본 것도 있었는데, 정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중 하나이다. 칼케돈 이후 보편 교회를 회복하고자 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황제와 원로원 모두가 때로는 논쟁을 통해, 때로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강요하려 들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정체성과 직결되었음을 보여 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원로원 엘리트는 칼케돈 신경을 수용했음이 틀림없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황제들은 이 흐름에 동조했으므로 그의 정책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원로원 엘리트층의 기득권을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분명 이단이었다. 여기저기 간섭하기 좋아하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그의 후계자들은 원로원 귀족들과 대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통치 엘리트와 제국의 관리 모두가 정교회를 수호하는 데 집중한 것은 비잔티움 이념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111-2)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사실 종교 정책 덕분에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제노의 〈통합령〉을 지지하고 합성론파에 유화 정책을 취했다." "유스티누스 1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종교 정책을 부정하고 로마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합성론파에게는 놀라우리만큼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는 아마 합성론자가 너무 많아서 절멸시킬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료는 그의 아내 테오도라가 합성론파 지지자였음을 전해 주고 있으며, 그녀는 공개적으로 합성론파를 보호하고 후원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가 의도적으로 입장을 달리했따고 지적했다. 황제 자신은 칼케돈 신경의 수호자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황후를 통해 간접적으로 동부 지역의 인구를 소외시키지 않음으로써 말 그대로 황제 부부가 '나누어서 지배했다'는 것이다. 합성론파에 대한 황실의 지지 또는 관용으로 인해 합성론파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졌다."(115-7)


제3장 생존을 걸고 투쟁하다(602~717년)


"포카스의 짧은 집권(602~610)은 재앙으로 끝났다. 동쪽에서 페르시아의 엘리트층에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는 후스라우는 마우리키우스[포카스 전임 황제(582~602)]에게 복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이후 20년간 지속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 페르시아 군대는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다라, 아미다, 에데사를 잇달아 점령했다. 이 지역들의 상실은 재정 위기와 위신 상실을 의미했다." "특히 페르시아인들이 예루살렘을 함락(614년)한 직후 주민을 학살하고 성십자가를 수도 티스푼으로 가져가 버린 일은 칼케돈파 그리스도교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615년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 해안까지 약탈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가 페르시아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렸고, 619년에는 이집트마저 넘어갔다. 이집트의 상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빵을 더 이상 무료로 배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했다."(125-8)


"외교와 전쟁 양면에 기울인 이라클리오스(601~614)의 노력은 성과를 내서 원정이 시작된지 6년이 지난 628년 페르시아 측은 591년 마우리키우스와의 협상에서 결정된 영토 분할안에 따라 평화 조약을 수용했다. 630년 이라클리오스가 성십자가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오면서 20년에 걸친 대전쟁은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곧 승리를 환상이었음이 드러났다. 같은 해에 무함마드가 이끄는 종교 집단이 그의 고향이자 622년 무함마드를 추방한 메카를 점령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634년부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공격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시리아에서 저항했지만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물러났으며, 638년 예루살렘이 아랍인 손에 떨어졌다." "아랍인들로 인해 국가로서의 페르시아는 16세기까지 출현하지 못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은 살아 남았으나 영토의 3분의 2를 상실했다. 게다가 빼앗긴 영토에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생산력이 높은 지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30-2)


"640년대부터 650년대 중반까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아랍인의 공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랍인들은 소아시아 지역을 공격하고 비록 더디게나마 북아프리카로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랍인들이 함대를 편성해 로도스와 코스, 키프로스, 크레타 등을 공격하면서 우세하던 해상 장악력마저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655년 리키아 해안(지금의 튀르키예 안탈리아·무글라)에서 벌어진, 소위 '돛대 해전'이라 부르는 싸움에서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비잔티움 함대는 아랍 함대에게 대패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이 직후인 656~661년 아랍 제국에서 칼리프 직위를 두고 최초의 이슬람 내전(피트나)이 발생하는 바람에 유예 기간을 얻었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 칼리프 알리가 살해당하자 무아위야 1세의 칼리프 즉위를 방해하는 존재는 남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겨 우마이야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133-4)


"일반적으로 전근대에는 재해로 인구 감소가 발생하면 몇 세대에 걸쳐 회복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시기에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에 의한 대격변 때문에 그 같은 경향이 사라졌다. 일단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그리고 나중에는 북아프리카까지 주요 지역들을 잃은 데다가 아랍인들이 계속해서 소아시아를 약탈하는 등 불안한 상황으로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도 결혼과 인구 재생산율이 크게 떨어졌다. 여러 방면에서의 '상실'은 농업 생산성의 감소는 물론 군대에 충원할 인력과 세수의 감소를 야기했다. 그리하여 이전에도 취한 적이 있지만, 7세기 말부터 9세기까지 특정 종족 집단을 인구가 부족한 지역이나 변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활발하게 펼쳐 확실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비잔티움 군대는 회전會戰은 되도록 지양하고 국지화된 방어에 주력했는데, 이 전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잘 먹혀들었다. 이 때문에 이슬람 군대는 수많은 성채가 촘촘히 배치된 소아시아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143-5)


제4장 부활의 날개를 펴다(717~867년) 


"비잔티움 제국을 대상으로 한 아랍인들의 공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레온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디노스 5세는 740년에 함께 원정에 나서 소아시아 중부의 아크로이논에서 아랍 군대를 대파했다." "이사우리아인들이 새로 배출한 이 두 황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하락세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악명 높고 그만큼 큰 오해가 있는 성상 파괴운동 때문에 비잔티움 사료 대부분은 두 황제를 혐오하고 조롱했다. 성상 분쟁은 신성한 존재를 묘사하는 방법과 그 가치를 두고 벌어졌다. 성상을 둘러싼 이 분쟁은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역사적 주제이지만, 크게 4단계로 구분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우선 754년의 히에리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상 파괴주의가 채택되었다. 787년의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 조치를 취소했고, 815년의 아야 소피아 공의회는 성상 파괴주의를 다시 채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43년에 일어난 일명 '정교회의 승리'로 성상 공경주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59, 162)


"한편 바닥부터 올라온 새로운 인물들도 궁정에서 활동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실리오스이다. 바실리오스는 거친 매력이 있는 미남이자 말을 잘 다루는 레슬러였다. 바실리오스를 총애하여 측근으로 받아들인 젊은 미하일은 862년 바실리오스를 고위 관직인 파라키모메노스Parakoimōmenos(시종장)로 임명했다. 파라키모메노스는 황제가 가장 공격받기 쉽고 가장 위험한 때인 잠든 동안 황제의 곁에 머물러야 하므로 환관들에게만 주어지는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다." "867년은 비잔티움 제국에게 중요한 해이다.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이 권력은 전적으로 황제의 총애에 기댄 것이었다. 866년 바르다스를 숙청하고 처형한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의 총애가 식어 간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미하일마저 살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바실리오스 1세). 이는 비천한 출신에도 민첩하고 수완이 뛰어난 자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다."(175-6)


"7세기 비잔티움 제국은 아랍인과 불가르인의 공세에 맞서 살아남아야만 했다는 점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대 후기 로마 제국과 달랐다." "비잔티움 제국은 크게 두 요인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 하나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자원을 보존하여 그를 기반으로 제국의 남은 영토를 중앙 집권화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군대 조직에 변화를 가해 변경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외침을 저지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스트라티이아는 소아시아 곳곳에 설치되며 제국의 변경을 안정시켰다. 생존투쟁 시대에 제국은 중요한 자원을 관리했고, 수도의 통제에서 벗어날 만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몇몇 개인, 즉 5대 군 지휘관(아나톨리콘·옵시키온·아르메니아콘·트라키시온 그리고 소아시아 남부에 새로 설치된 해군 스트라티이아 키비레오톤의 사령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주었다. 콘스탄디노스 5세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추진하여 옵시키온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었다."(178-9)


"비잔티움 제국은 모든 영역에서 군사화되었다. 따라서 사회적·문화적 가치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8세기 초 옛 원로원 엘리트들이 사라지면서 사회 계층에 몇 가지 중대 변화가 있었고, 그들 중 남은 이들은 궁정과 교회라는 두 개의 안정적인 조직에 흡수되었다. 이 중에서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부터 막대한 재산에 대해 면세의 혜택을 받아 왔으므로 경제적인 면에서 덜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레온 3세와 니키포로스 1세를 비롯한 일부 황제는 교회의 독특한 지위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제 교회 재산이나 교회에 소속된 농민들도 과세 대상이 되었다. 군부에서 일부 지휘관은 귀족층이었지만 대다수는 신참자였다. 스트라티고스들을 비롯한 장교들의 지위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차츰 상승하더니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를 결정하는 존재가 되었다. 관직은 세습되지 않았지만 장교들을 중심으로 성씨姓氏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혈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181)


제5장 제국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다(867~1056년)


"바실리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문을 열었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통치 왕가이고, 그들이 통치하는 동안 제국은 눈부실 정도로 군사적 확장, 경제 호황 그리고 문예 부흥을 누렸다." "인구와 경제가 호황기를 맞이했고, 과거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던 강력한 국가들이 이 시기에 쇠약해져 비잔티움 제국 확장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프랑크 제국에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혼란기에 빠진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9세기 이래 동쪽에서는 아바스 제국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명목상 아바스 왕조 칼리프좌에 충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지역 국가들이 등장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이전과 같이 방대한 자원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국가와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핵심 문제는 새로운 위협을 무력화하고 영토를 보호하는 한편 상업적·외교적·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것이었다."(191, 197-8)


"안보 상황이 안정되자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인구는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2세기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전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다." "이 시기는 전염병과 정치적 불안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도피한 결과 너무 넓은 토지에 너무 적은 인구가 살던 과거와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인력은 전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 관리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군대, 사회 기반 시설, 관리의 급료 그리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외교 정책을 위해 세금을 거두었다. 즉 인구의 대부분인 농촌 지역 소작농이 내는 세금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둔 세금의 잉여를 앞다투어 사용私用하려고 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엘리트층은 국가를 적대시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10세기에는 중대한 국면을 맞았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 황제들이 발행한 신법 모음집에서 그들의 공통 목표는 디나티Dynatoi(권세가)였음을 알 수 있다."(209-11)


"마케도니아 시대 비잔티움 문화의 특징은 황실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방대한 양의 서적 편찬 사업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서적들은 과거 서적의 집성이었지만 공통점은 그뿐이다. 일부 책은 단순한 필사에 불과했지만,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이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지적 유산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종합한 때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세기에 선보인 서적들 가운데 새로 작성된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진 고전 서적의 종합은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가진 것이므로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수준 낮은 작업으로 격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헌의 상당 부분이 10세기에 복사된 필사본이라는 점은 이 부흥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비록 비잔티움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적·정치적 기준으로 고대 그리스의 고전을 선택하고 보존했지만, 그들이 없었더라면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작품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221-3)


"한편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라틴어가 곧 로마어라며 로마어를 쓰지도 않는 비잔티움 사람들이 로마를 자칭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 주장하자, 미하일 3세는 라틴어는 이방인의 언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일화는 어느 쪽이 로마 제국이냐 하는 문제가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도 미묘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같은 반목은 비잔티움 제국과 오토 왕조의 영향력이 선교 사업을 통해 확장됨에 따라 더욱 불타올랐다. 마케도니아 황제들은 마자르인과 루시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마자르인은 폴란드나 덴마크와 같이 독일의 구심력에 포섭되어 로마 교회를 영적인 중심지로 받아들였다. 반면 비잔티움 제국은 루시인을 개종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이 이른바 '비잔티움 공동체'의 시작이다. 이제 동유럽 국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치적·문화적 지향점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잔티움인의 입장에서는 실로 안타까운 사실이다."(224-5)


제6장 강인함 속에 나약함이 깃들다(1056~1204년)


"서방인 특히 노르만인이나 앵글로색슨인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관행은 낯설지 않았다. 서방인 사이에서도 비잔티움 궁정에서 일하는 것이 꽤 수지 맞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유명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몇 세대 동안 이용해 온 방법을 구사하여 서방의 유력자들에게 서신과 사절을 보내 용병을 청했다. 그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사절단을 보내 이교도가 그리스도교를 얼마나 억압하는지, 성묘 교회와 성지를 순례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를 강조하며 도움을 청한 것도 마찬가지 일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으로서는 이 요청이 제1차 십자군으로 진화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는 알렉시오스가 요구한 바 이상이었고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었다." "제1차 십자군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레반트 지역에 라틴계 식민 국가 다수가 수립되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살아남았다. 이 십자군 국가들과 비잔티움 제국은 이제 공존을 생각해야만 했다."(233-5)


"비잔티움 제국은 군사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았지만, 2, 3차 십자군이 실패하자, 비잔티움 제국이 십자군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거나 애초에 지지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을 받았다."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불행하게도, 다음에는 유럽에서 해로로 이집트를 직접 타격하여 아이유브 왕조를 붕괴시키고 십자군 국가를 구원하겠다는 목표로 십자군이 준비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엄청난 여비를 받기로 하고 십자군을 이송할 함대를 채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모인 군대는 기대보다 수가 적었고, 베네치아에 지불할 돈은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달아오른 십자군의 열기는 이집트 공격에서 비잔티움 제국 공격으로 옮겨가더니 결국 목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전환'되었다." "한 차례 실패하기는 했지만 1204년 4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함락했다. 며칠에 걸쳐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하고 재화가 약탈당했다. 동정녀 성모 마리아가 지켜 주는 난공불락의 도시가 마침내 무너졌다."(239, 243-5)


"정력적인 세 황제 이사키우스 1세, 알렉시오스 1세, 이오아니스 2세 치하에서 콤니노스 체제는 잘 작동하는 듯 보였다. 토지는 증가하고 거대한 사유지가 형성되며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그러나 정치 체제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일련의 과정이 두 단계에 걸쳐 발생했다. 먼저 황실 인척과 외척에게 방대한 토지를 하사하는 관행이 시작이었다. 그 토지들은 행정적·재정적으로 독립성을 띠기 시작하더니 지역적 정체성을 강화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부가 가진 구심력을 저해했다. 12세기 들어 군사 행정 기구인 테마Thema(그리스어로 '장소, 배치') 체제가 붕괴하며 이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종래에 각 테마의 스트라티고스나 행정관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게 임명받았기에 주변부는 중앙 정부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제거된 것이다. 그 역할은 수도와 연결된 권력과 후원의 네트워크 안에 있는 주교가 일부 수행했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지역 엘리트층인 아르혼테스가 출현하여 지방의 원심력은 강해졌다."(249-50)


"콤니노스 황제들, 그중에서도 마누일 1세 콤니노스가 추구한 강력한 중앙 권력은 오랜 기간 제국을 틀어쥘 자질과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한 황제가 들어서자 반발에 부딪혔다. 반발은 앞에서 언급한 원심력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몰고 갔다. 10세기 귀족 반란은 정치 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중심부를 장악하려는 목적에서 발생했다. 반면 12세기 후반에 발생한 지방 반란들은 지방에 독립된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 1204년 시점에서 비잔티움 제국령 상당수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반란은 비잔티움 제국의 속국들[예컨대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아르메니아인이 킬리키아로 이주해서 세운 국가)]에서 해방 운동이 폭발하고, 각지의 적국이 재기하면서 한층 거세졌다. 이 같은 움직임의 원인이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반란과 달랐다 해도 결국 영토와 패권의 상실을 낳은 것은 마찬가지이다."(250-1)


제7장 분열의 유산이 수면 위로 떠오르다(1204~1341년) 


"1204년 4월에 일어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약탈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도시 자체는 1261년에 탈환되었지만, 함락에서 비롯된 정치적·경제적·인구적·문화적 여파는 중세 이후까지 비잔티움 세계에 남아 있었다. 1204년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을 그려 보기는 쉽지 않다. 제국은 수십 개의 파편으로 산산이 분열되었다. 이 소국들을 크게 분류하면, 하나는 라틴인 즉 제4차 십자군을 주도한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이 이끄는 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비잔티움인들이 세우고 통치한 국가로 최소한 처음에는 옛 황가와의 연관성을 통치 근거로 삼았다. 이 국가들의 목표는 당연히 제각기 달랐다. 모두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단단히 굳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되, 그리스계 후계국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탈환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결과론적인 시각이지만 그 가운데 니케아 제국이 단연 돋보인다. 결국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기 때문이다."(261-2)


# 주요 그리스계 후계국 : 니케아, 이피로스, 트라페준타 / 주요 라틴계 후계국 : 라틴 제국, 아하이아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 


"한때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던 비잔티움 제국은 이제 모자이크화처럼 군소 정치체로 나뉘었다. 이웃 국가들은 이 틈을 타 영토를 확장했다. 불가리아는 차르 이반 아센 2세 재위기에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일부를 정복했고 세르비아는 독립국이 되었다. 소아시아에서 룸 셀주크 왕국은 트라페준타 제국의 영토를 빼앗는 데 성공했으나, 잇따른 계승 분쟁으로 니케아 제국에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몽골 제국은 1230년대 후반부터 루시 지역을 정복하고 헝가리를 침공했으며 불가리아와 룸 셀주크 왕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일부를 속국으로 삼았다. 비잔티움 세계에 출현한 다수의 국가는 어지러울 정도로 재빨리 동맹을 바꾸어 가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때로는 군사 또는 결혼 동맹을 맺고 때로는 영토를 두고 다투었다. 꼭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국가로 나누어 싸운 것도 아니어서 그리스계 국가 사이에도 갈등은 있었다. 이 상황 덕분에 약화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은 1261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268)


"외부의 위협이 비잔티움 제국을 갉아먹는 동안 내부에서는 신학 논쟁이 비잔티움 제국을 둘로 쪼갰다. 그러나 이 분란은 비잔티움인의 영적 세계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이는 헤시카즘이라는 용어에 전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관행과 신념을 둘러싼 논쟁이다. '정적, 침묵'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이시히아Isychia에서 유래된 헤시카즘은 고대 후기에 묵상과 기도라는 수도원의 주된 측면을 특징짓기 위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이 용어는 '예수 기도'("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죄인을")를 반복하며 신의 환영을 느끼기 위해 애쓰는 묵상법을 이르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신비주의적 실천의 옹호자들은 '예수 기도'를 신의 의지를 학구적이고 이성적인 수단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에 맞추어 체계화한 서방 교회의 스콜라 전통에 반대하는 방법이었음이 분명하다."(278)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촉발된 강력한 반라틴 정서는 비잔티움 세계 구성원들의 정체성 형성에 당연히 큰 영향을 주었다. 각 계승국 내에서 정교회는 그 중심에 있었고,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적이었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나 헬레니즘이라는 정체성이 싹튼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니케아 대륙 소아시아의 폐허가 된 고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의 업적을 향한 경이와 존경은, 미수복지 회복이라는 이상 그리고 전투적인 정교회와 융합하여 일종의 원시 민족주의를 유발했다." "막시모스 플라누디스(1260~1300년 활동)는 이 시기 문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할 것이다. 과거 비잔티움 제국이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절의 학자들은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권을 야만족이라며 그들의 업적을 하찮은 것으로 무시한 반면, 막시모스 플라누디스는 서방의 학문 수준이 발전 중에 있음을 인정했다. 다른 학자들은 이탈리아 북부의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에까지 관심을 가졌다."(287, 291-3)


제8장 몰락을 향해 나아가다(1341~1453년)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죽자 곧 두 파당이 권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 세력은 죽은 황제의 절친이자 정권의 척추이던 이오아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가 이끌었다. 반대 세력에는 남편을 잃은 황후 사보이아의 안나, 총대주교 이오아니스 14세 칼레카스 그리고 놀랍게도 칸타쿠지노스의 후원으로 출세하여 메사존의 지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아포카프코스가 속해 있었다." "칸타쿠지노스는 귀족, 군대, 고위 성직자 등 폭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게다가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와의 우정 덕분에 아토스산의 수도사들도 그를 지지했다. 메시 계층을 포함한 도시민들은 아포카프코스를 지지했다. 유럽은 내전의 무대가 되었고 식량 생산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양 파당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왕조 같은 주변의 강국에서 용병을 고용했는데, 들여오기는 쉽지만 돌려보내기는 어려웠다. 어느 쪽을 지지하는 도시건 간에 무질서와 폭력이 들끓었다."(295-6)


"한편 오스만 왕조가 전략적 요충지 칼리폴리스를 점령한 사건은 발칸 정복의 첫걸음이었고, 한 세기도 되지 않아 발칸반도 전체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수십 년간 오스만 왕조는 그리스, 라틴, 슬라브 등 동지중해 모든 세력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었다. 이제 지휘할 군대가 더 이상 없는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외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기댈 언덕이라고는 서방으로부터의 도움밖에 없는 상황에서 교황이 그 역할을 해 주기 바랐기에 교회 통합 문제는 다시 한번 시급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정책들의 궁극적 목표는 오스만 왕조를 상대로 한 십자군이었다. 1362년 디디모티호와 아드리아노플이, 1363년에는 플로브디프가 함락되었는데 그제서야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이오아니스 5세의 외척인 사보이아의 아마데오 6세의 군대가 1366년 칼리폴리스를 점령했다. 점령군에는 헝가리군과 제노바령 레스보스의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공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일한 군사적 승리 사례이다."(299-300)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연장되었다. 강력한 몽골인 통치자 테뮈르(티무르)가 바예지드의 공세에 노출된 소아시아의 튀르크멘 공국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테뮈르는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바예지드를 사로잡았다. 이후 10여 년간 바예지드의 아들들은 오스만 왕조의 지배자 자리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그동안 소아시아 각지의 옛 통치자들도 오스만 왕조로부터 영토를 탈환했다. 마누일 2세의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트라키아의 배후지 약간, 에게해 북부의 몇몇 섬 그리고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모레아 데스포티스령에 불과했고 그나마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제국'이라는 말은 공허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이 명백하다는 사실은 이웃과 동맹 모두가 자각하고 있었다.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동안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가 정교회 신자들에게 교회는 있으나 황제는 없다고 주장할 정도였다."(305-6)


"자포자기라는 전염병이 퍼지며 극단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비잔티움인, 그중에서도 지식인들은 대체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어떤 이들은 마법에서 위안을 찾았고 총대주교청은 마녀사냥으로 대응했다. 의식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자를 솎아 내자 엘리트층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사 들도 관여되었음이 드러났다.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식인들은 적들에게 포위되어 가망 없는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어 교사로 취업했다. 그리스어를 배우고자 하는 수요는 14세기 중반 이래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최초로 이 길을 택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스승 칼라브리아의 바를라암이다." "1438년과 1439년에 걸쳐 진행된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많은 학자가 방문하자 이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이 학자들은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학식을 지녔던 데다가 서방 세계가 수 세기 동안 갈망해 온 희귀한 사본을 잔뜩 들고 있었다."(318)


제9장 천년 제국의 멸망과 그 후


"1453년은 오스만 제국에게도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그 도시'를 손에 넣은 메흐메드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교훈을 얻었고 비잔티움 제국을 뛰어넘고자 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오스만 제국은 중앙 집권화의 길을 걸었다. 이전에 오스만 영토의 확장을 견인했던 변경의 수령들은 권력에서 멀어져 갔고, 그 자리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이들로 채워졌다." "오스만 제국이 팽창하자 이탈리아 공화국들은 비잔티움 세계에서 누리던 상업적 특권을 상실하고 쇠퇴해 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탈리아인의 활동권은 금각만 너머 갈라타·페라 지역으로 이전되어 축소되었으며 점령 직후 맺은 협정, 다시 말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후 체결된 제노바 협정에 관계없이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위축되었다. 특히 흑해에서 주로 활동한 제노바의 역할은 15세기 말이 되면 거의 사라진다. 베네치아는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편이어서 17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상업적 동맹으로 활약한다."(331-4)


"인문주의자들이 가졌던 그리스어 문헌에 대한 오랜 애정은 변함 없었으나,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동인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계속되는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발생한 튀르크 공포증 때문에 비잔티움 그리스도교도의 운명에 궁금증을 가진 것이다. 두 번째는 독일 지역에서 교회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린 지도자들이 정교회의 선택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설 잠재적 동맹자로 여긴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정교회 쪽이 고대 교회의 전례에 가까우리라 믿었기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은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직접 접촉하기를 희망했다. 양측은 사절을 교환했지만 곧 공통의 경쟁자를 가졌음에도 둘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장 곤란한 문제는 성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정교회 입장에서 성상 파괴의 시대는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이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의 눈에는 성상 공경이 우상 숭배에 불과했다."(347-8)


"유럽이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듦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시각도 변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보이는 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 및 전제적 통치 방식은 인문주의자들이 가졌던 긍정적인 시각과 비잔티움 출신 스승들이 이룩한 업적에 그늘을 드리웠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이 시기의 저명한 사상가들은 중세의 비잔티움 세계를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간주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그토록 오래 존속된 것에 대해 타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제국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을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규정하고 있는 이는 에드워드 기번이다. 기념비적인 저작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그는 훌륭한 글솜씨와 학술적 권위를 이용해 비잔티움 문화를 '야만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존재 의의를 철저히 깎아내렸다. 기번은 6세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익살스럽게 축약하여 기술했지만, 그의 시각은 몇 세기 동안이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지었다."(350)


"동방 제국은 지리와 역사의 측면에서 서방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끼어, 자신을 계승해 줄 민족 국가 하나 남기지 못했다. 다시 말해 비잔티움 제국을 옹호해 줄 그 어떤 민족주의적 역사학도 존재하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은 단지 방대하지만 불편한 투사체로만 남았다. 누군가에게 비잔티움 제국은 전체주의와 신정주의 국가이며 낙후되고 정체된 존재이다. 이를 보완해 주는 미덕은 단지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보존하고 이웃에 퍼뜨렸다는 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벽이 대포 등장 이전에만 난공불락이었듯이, 이 나라는 고대 세계에 뿌리를 두고 점진적으로 변화했지만 주변 세계의 변화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가 투표제를 퍼뜨리고 영국에서 배심 재판을 수용할 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모든 것이 황제 또는 총대주교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14세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테오도로스 메토히티스가 지적했듯이 모든 제국은 태어나고, 꽃을 피우고, 쇠퇴하고, 죽었다."(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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