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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왜 아프리카 원조는 작동하지 않는가 - 아프리카 개발협력의 혁신적 전략 10가지
로버트 칼데리시 지음, 이현정 옮김, 허성용 해제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평점 :
1부_ 아프리카는 무엇이 다른가
1장. 변명거리 찾기
아프리카 문제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목되는 것이 ‘국제경제가 아프리카에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규모 농업 생산자들이 국제시장에서 불리하고 자국 농민들을 보호하는 서구 국가들의 정책이 아프리카의 잠재적 수출을 제한하거나 (특히 목화의 경우) 국제가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부유한 국가들의 경쟁자로 인해 입지를 잃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공급자들에게 시장을 내주어왔다.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장 큰 자산인 농업 분야가 과도한 과세 및 여타 잘못된 정책의 도입 탓에 꾸준히 쇠퇴하는 상황을 방관해왔다. 세계경제에서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아프리카 각 정부들은 경제에 스테로이드를 투여하는 대신 생산자에게 족쇄를 채워버린 것이다. 사실 국제경제는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아프리카에 우대 조치를 취해왔다. 부국富國들은 수십 년 동안 농산물을 포함한 많은 아프리카 제품에 시장을 개방했다. 23)
부유한 나라들이 농산물 시장을 더욱 개방해야 한다는 국제적 압력은 결국 열대 지방 농부들의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겠지만,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아프리카 국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생산 효율성을 높이려면 상당한 개혁과 투자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효율성’은 아프리카의 많은 곳에서 금기어로 여겨져왔다. (악당들로 간주되는) 세계은행과 IMF로부터 20년 넘게 받은 조언과 강압적인 정책을 상기시키는 탓이다. 이 두 기구는 아프리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적이다. 아프리카인들처럼 세계화를 비판하는 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세계은행을 비난하고 있으며 몇몇은 극단적 용어를 사용했다.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정적政敵들을 살해했으며, 야당 우세 지역의 사람들을 굶주리게 한 잔인한 독재자다. 그러나 IMF와 세계은행에 비하자면 그가 아프리카에 끼친 피해는 경미하다.” 24)
아프리카 정부들은 왜 정부가 국제기구와 협상하고 있는지를 국민에게 ‘절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정부들과 일부 민간기업들은 개혁에 믿음이 없거나, 대충 동의했거나, 혹은 원조 관계자들이 방심할 경우 개혁을 깎아내렸다. 그 결과 ‘위기’는 그들 자신이 아닌 타인 탓에 초래된 것으로 보였다. 전체 개혁 과정이 틀어진 것도 대개는 아프리카 정부들이 국민에게 상황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가 세계시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 국가예산이 필수 자재와 물자 확보는커녕 공무원들의 급여 지급도 간신히 감당하는 수준임을 아는 아프리카인은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이 목격한 것은 사회기반시설과 공공 서비스의 붕괴뿐이었다. 그들은 자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빈곤을 줄이겠다고 말하지만 매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듯한 외부 기구들은 더욱 신뢰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생산 및 유통 비용이 높고 투자 환경이 열악하다는 근본적 문제는 아프리카를 지원하려는 서구의 서툰 노력에 가려졌다. 26)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인의 사고방식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해도 그 상처가 아프리카 대륙의 물질적 발전을 방해하는 원인인지는 의문이다. 노예제도는 영국에서는 1833년에, 프랑스 영토에서는 1858년에 폐지되었다. 그보다 최근인 제2차 세계대전 때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다른 나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말살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상처가 생존자들을 덜 기업가적이고 자신감도 낮아지게 했다는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감한 주제이긴 하지만 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총리이자 현대 아프리카에 대한 계몽적 도서를 여러 권 저술한 장 폴 응구판데Jean-Paul Ngoupandé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예무역은 실제로 존재했고, 많은 이가 우리의 어려움이 노예무역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 독립을 실현하면서 양호하게 출범한 코트디부아르 같은 나라에서의 쿠데타, 즉 정치적 혼란이 노예무역 탓이라 여기지 않는다. 이는 현 아프리카 사람들의 책임이다.” 27-8)
아프리카의 부채 부담은 어떠할까? 부채는 더딘 아프리카 발전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증상이다. 아프리카가 다른 대륙보다 덜 현명한 방법으로 돈을 빌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신 아프리카의 부채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연간 700억 달러의 수출 소득 손실이다. 게다가 세계 사회는 25년 이상 아프리카의 빚을 탕감해왔다. 부채 탕감이야 새로울 바 없지만 순수 탕감의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1998년 서방 국가들은 아프리카가 가진 500억 달러의 부채를 탕감해주기로 합의했다. 전 세계의 후한 인심의 덕을 보는 것은 국민이 아닌 정부다. 부채 탕감에도 비용이 든다. 일부 국제운동가들은 채무면제가 비교적 힘든 일이 아니며 아프리카 정부들이 부채를 상환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방 정부들 또한 과거의 차관을 회수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부채감소에 충당되는 돈은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3)
2장. 다양한 시각에서 본 아프리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24개국의 경제 정책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구다. 내 업무는 회원국들의 대외원조 절차를 단순화하고 상호조화시킴으로써 개발도상국의 행정 부담을 완화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조국들인 미국, 일본, 독일은 절차의 단순화에 무관심했다. 이들 국가는 자신들의 관대한 원조에도 지켜야 할 ‘조건들’이 있다는 점을 국회나 여론에 보여주고 싶어 했고, 저마다 자신의 양식과 규정을 빈틈없이 지키려 했다. 공동원조의 표준과 절차를 정하고 지켰다면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의 서류 업무는 상당히 줄어들었겠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로 남아 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규칙은 원조 예산을 늘리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이기도 했다. 나는 곧 현장에서 마주했던 구체적인 문제들을 놓치기 시작했고, 그래서 12개월이 채 지나기 전에 워싱턴 D.C.에 있는 세계은행에 탄자니아 차관 담당자로 합류했다. 43)
혹독한 열대우림 기후, 토양, 질병 등 아프리카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동일하게 갖고 있는데도 인도네시아는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기적’의 선두에 있지 않던 이 나라는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정부기관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외국의 기술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발전은 국제개발의 성공 사례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지 않는 나라 중 하나이다. 그 발전이 권위주의적인 정권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고, 인도네시아 경제의 바탕을 이루는 부정부패와 연고주의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정책 입안자들은 정부 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현명하게 자금을 빌렸다가 제때 상환하며, 새로운 도전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등 ‘좋은 살림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들 전략의 핵심은 석유 수입의 대부분을 지역개발 및 소득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에 현명하게 투자했다는 것이다. 43-4)
3장. 권력을 가진 악당들
아프리카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좋은 정부가 한 번도 수립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파트너’ 또는 ‘후원국’이 된 과거 아프리카 식민통치국들은 아프리카 독립 후 초기 몇 년 동안 아프리카가 선거나 다당제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서구인이 갖는 정치적 권리들을 아프리카 사람은 갖지 말아야 한다는 그러한 주장은 당시의 젊은 지도자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 중 많은 이가 전성기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케냐의 톰 음보야Tom Mboya의 이상주의, 선명성, 약속들은 1969년 그가 암살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부르키나파소의 토머스 상카라Thomas Sankara와 같은 이들 역시 어려운 현실에 맞서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볼 기회를 갖기도 전에 살해되었다. 그 이상주의자들도 살아 있었다면 본래 품었던 뜻과는 달리 일당제 국가를 세웠을 수도 있었겠으나 우리로선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이들은 그렇게 했다. 57-8)
아주 작은 진보적 변화까지 알아차리는 데 익숙한 아프리카 전문가들은 1991년 베냉이 국민투표로 정권을 교체한 첫 번째 아프리카 국가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런 예가 희소하다는 점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지난 수십 년간 대부분의 아프리카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발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대륙 인구의 절반은 네 개 국가가 차지한다. 1억 2,700만 명의 나이지리아, 6,400만 명의 에티오피아, 5,100만 명의 콩고민주공화국, 4,300만 명의 남아공이다. 앞의 3개국 인구를 합하면 2억 5,000만 명가량인데, 그들은 삶의 대부분 동안 정치적 혹한기 또는 명백한 사회적 혼란기를 겪었다. 독립 이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누린 나라는 인구가 각각 200만 명, 100만 명인 보츠와나와 모리셔스 두 소국뿐이다. 이 두 나라와 남아공은 1980년부터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국가경쟁력지수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등장한 아프리카 국가다. 이 지수는 냉철한 투자자들에게 투자 가이드 역할을 한다. 59-60)
4장. 문화, 부패, 정당성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에 서구적 윤리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프리카인들이 삶에 접근하는 방식은 반투인Bantu의 고사성어인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이런 구분들이 구시대적이고 논란의 여지를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아프리카인들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가치를 주장한다. 그중 하나가 마을 단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관대함과 환대다. 전근대적 문화에는 놀라운 가치가 있고 그중 일부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고귀한 야만인의 신화를 믿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관대함과 같은 일부 전통 가치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게으름은 악덕으로 여겨졌기에 마을 사람들은 게으름뱅이를 돕지 않고 추방했다. 또한 나눔 문화의 범위는 부족 단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아프리카인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76-7)
또 하나의 뚜렷한 아프리카의 가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아프리카 문화는 가족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개인은 부모나 형제자매에 대한 언급 없이 완전해질 수 없다. 전반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눈앞의 상황에 몰두한다. 거의 모든 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의 삶을 즐기는 편이다. 가족과 즐거움 외에 노인 공경 또한 아프리카인에겐 매우 중요하다. 사실 아프리카인들은 권위 있는 연장자들을 극도로 존경한다. 지혜와 경험이 높이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영향력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리더십은 지혜와 경험 대신 무지와 부정직, 완고함을 특징으로 한다. 결함 있는 상사에 대한 인내심은 도시화와 빈곤의 압박으로 무너지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은 거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대개는 그룹에서 더 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이 먼저 의견을 말하기를 기다리거나,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중개자를 활용하는 3각 대화에 의존한다. 77-8)
누군가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아프리카인의 특징이 1950~1960년대의 이탈리아인이나 스페인인의 특징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족관계, 삶에 대한 사랑, 나이와 권위에 대한 존중은 경제발전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가치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의 특징 중에는 라틴계 사람들을 압도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 가족우선주의는 아프리카에서 압제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자발적으로 가족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잔혹한 방식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또 친척 중 누군가 성공할 경우 그리 큰 성공이 아니어도 다른 친척들은 종종 그 성취의 열매를 나누어 받겠다고 고집한다. 이는 1960년대에 이미 사회적 관습이 되어 있었다. 한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 배척당하고, 씨족에서 추방되며, 끔찍할 정도로 버림받는 상태에 처한다.” 심지어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도 대륙의 쇠퇴에 기여했다. 아프리카인들은 독재와 권위 있는 선출직 공무원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79)
아프리카인들의 종교적 신념 또한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다. 순수한 종교 외에 사악한 종교도 그들을 넘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들은 대개 숙명론적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들의 세계관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사건 통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한다. 많은 부모가 아이가 숨을 거둬도 그 원인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거두어가셨다.”라는 문구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이러한 포용성은 아프리카인들이 현세에서 가혹한 현실에 도전할 가능성을 낮춘다. 사실상 그들의 믿음이 사회정의 구현의 의지를 꺾는 것이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처음으로 프랑스를 방문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시 조상의 나라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것은 수 세기 동안 억압받았던 분노, 야망, 그리고 순수한 인간의 용기일 것이다. 80)
역설적이게도 부패의 뿌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강력한 가족 유대에 원인이 있다. 가족의 압력이 너무 만연하여 아프리카인들은 그것을 농담거리로 삼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가족으로부터 도망가기도 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장관과 고위 공무원들이 있는데, 그들의 문 밖에는 심지어 주말에도 불만을 토로하거나 물질적 지원을 받으려는 사촌, 지인, 유권자가 줄을 서 있다. 아프리카에서 부패가 늘어난 것은 명백한 순수함 때문이다. 이는 변명이나 용납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부패는 아프리카의 매우 고질적인 문제이므로 세계는 이제 아프리카인을 돕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권력이나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격변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 심지어 야당들도 자신들이 악용할 차례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시스템을 별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반부패 캠페인의 목적은 홍보일 뿐이고 홍보 대상은 대부분 외국인이다. 82-5)
아프리카인의 특성이 그들을 운명론자로 만들고 부패가 그들의 사회지도층을 서로 꽁꽁 엮는다면, 서구사회가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는 아프리카의 불행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교정이 필요한 서구의 인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이자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가난해진 아프리카에 대한 일반적 동정심이다. 자신의 복지가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실업자들을 실직 상태에 있다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아프리카에 대한 비판을 꺼린다. 교정이 필요한 두 번째 인식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과거 식민 국가들이 갖는 역사적 또는 인종적 죄책감이다. 이런 나라의 시민들은 식민지 시대가 아프리카의 일부 ‘황금기’를 파괴했으며 인위적인 국경을 만들어 독립정부가 지속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별 이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서구의 이해관계가 아프리카에 가한 피해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고 있다. 85)
세 번째로 교정이 필요한 인식은 아프리카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으며 많은 문제를 훌륭히 처리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구가 아프리카에서 배울 것이 많고, 문제는 오히려 유럽과 북미에 많다고 믿는다. 아프리카인들이 균형 잡힌 시각, 공동체 의식, 회복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네 번째로 정치적 교정이 필요한 인식은 세계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국제무역이 어떻게 가난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국가를 도울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세계 경제를 도덕적 전쟁터로 묘사한다. 그들에 따르면 기업의 이윤은 ‘피 묻은 돈bloody money’이고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는 ‘전쟁 기계’이며, 부유한 국가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세계 전쟁’을 벌이고 있다. 표현 형태가 세속적이든 극단적이든 서구의 이러한 감수성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도록 허용한다. 85-6)
2부_ 최전방 이야기
5장. 탄자니아: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현대 아프리카의 초창기 영국의 탕가니카 보호령과 이슬람 섬 국가인 잔지바르가 합쳐져 1964년에 탄생한 탄자니아는 무엇보다 자립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 실험과 이를 주도한 인물은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에겐 높은 이상, 강한 공직자 의식, 자신을 표현하는 재능, 목표 달성에 대한 완고함이 있었다. 이런 특징들이 가장 잘 표출된 것이 1967년의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이다. 아루샤 선언은 원조기구들에게 최소한 탄자니아만큼은 스스로 중장기 개발을 계획하고 있으며 국제 현실에 맞게 속도나 목표를 조정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우자마아Ujamaa’ 또는 ‘가족주의familyhood’라 불리는 니에레레식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아프리카의 연대와 기독교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탄자니아는 자립을 고집한 덕에 매우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니에레레의 예상대로 외부 지원은 항상 부족했다. 94-6)
아루샤 선언 후 10년이 지난 1977년, 니에레레는 원조사업 진행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내놓았다. 1967년엔 탄자니아 목화솜 대부분이 천으로 만들어지지 못했으나 1975년까지 여덟 개의 방직 공장이 생겨났고, 초등학교 입학률은 거의 두 배로 뛰었으며, 인구의 약 3분의 1인 500만 명 이상이 성인 문해력 교육을 받는 중이고, 농촌 보건소의 수는 세 배 이상 증가했으며, 300만 명의 시골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이용하게 되었고, 개인 소득의 격차가 줄어들었으며, 마을화 프로그램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루샤 선언의 핵심인 농업 부문은 가장 낮은 수익을 기록했다. 식량생산 증가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고 정부가 정한 농작물 가격은 너무 낮았다. 글로벌 경제 상황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입 가격은 높고 수출 가격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탄자니아는 비효율적이었다. 국영기업은 부의 창출은커녕 흡수를 하고 있었고 생산성은 하락 중이었다. 97-8)
니에레레는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빠른 정부 조직의 확대는 탄자니아 및 아프리카 전역을 예산 부족의 고통에 빠뜨릴 것임을 깨달았다. 개발 예산의 60퍼센트는 해외원조로 이루어졌는데 그가 보기에 이 수치는 지나치게 높은 것이었다. 게다가 탄자니아의 부정부패는 처음에 억제되는 듯 보였으나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탄자니아는 계속해서 많은 지원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채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몇몇 원조기구들은 그 부채 중 일부를 탕감해줘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느꼈다. 개별 지원국의 부채 탕감만으로는 탄자니아를 살릴 수 없었다. 고유가, 낮은 수출·입, 악천후 및 늘어나는 부채상환은 1981년까지 이 나라의 목을 졸랐다. 탄자니아 정부는 매주 말 그대로 돈을 세계은행 프로젝트에 쓸지, 아니면 배 한 척 분량의 긴급구호 식량을 더 구매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정부는 아주 자연스럽게 부채 대신 긴급 구호 식량을 택했고 세계은행은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했다. 98-100)
탄자니아 친구들은 그에게 늘 상충된 조언을 해주었다. 우선 초등교육을 강조했던 그를 칭찬하고는 나중에는 고등교육을 소홀히 했다며 항의를 표했다. 1970년대 중반의 재앙적인 가뭄 이후 식량 가격 인상을 장려해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옥수수를 이용한 자급자족을 달성했으나 커피와 차 같은 수출작물 농업을 붕괴시켰다며 되레 비난을 받았다. 1977년 외부인들은 산업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원자재 및 예비 부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수입통제를 완화해달라고 촉구했으나 얼마 후 원조기구들은 탄자니아 정부가 전 세계의 커피 붐이 끝나갈 무렵에야 커피 산업과 관련한 조치를 취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모든 조언은 최고의 분석과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선순위와 인식의 변화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고 탄자니아는 경제적 자립이란 목표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탄자니아 경제에 대한 실험적 시도에 이미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고, 세계적 경기침체와 낮은 국제 원자재 가격은 선택지를 더욱 줄어들게 했다. 101)
아루샤 선언이 있은 지 30년 뒤인, 그리고 니에레레의 성과 평가가 있은 지 20년 뒤인 1997년 세계은행은 연례원조회의를 다르에스살람에서 개최했다. 탄자니아의 요구는 전반적으로 더 많은 원조를 해줄 것, 원조기구는 개별 프로젝트 비용을 더 많이 분담할 것(그러나 이미 80~95퍼센트가 원조기금으로 운영 중이었다), 그리고 해외원조 채무상환을 위한 특별기금 조성을 포함하여 더 많은 부채를 탕감해줄 것 등이었다. 탄자니아의 벤저민 음카파Benjamin Mkapa 대통령은 50개 마을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도 인용했다. 경제원조 결과로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다섯 가구 중 한 가구 꼴에 불과했고, 더 안 좋아진 것으로 느낀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0퍼센트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달라지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남아공 사람들은 양조장과 담배회사를 인수했고, 인도인들은 자전거 공장을 매입했으며, 탄자니아의 인구는 22년 만에 1,700만 명에서 3,30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101-2)
6장. 코트디부아르: 기적의 종말
1960~1990년에 번영했고 안정적이었으며 개인투자자가 몰렸던 이 나라는 인근 국가에서 온 구직자들의 안식처였다. 비록 1990년대 초반에는 주요 수출품인 코코아의 가격하락 및 고평가된 통화로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적은 1999년 12월 24일 군부의 정부 전복과 함께 끝났다. 쿠데타는 아프리카 여타 지역들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코트디부아르로서는 1960년 독립 이후 처음 발생한 것이라 큰 충격이었다. 코트디부아르 내의 다양한 커뮤니티, 내국인과 외국인 간의 관계는 내가 아비장에 살았을 때부터 그 나라에 독이 되었다. 과거 이민자 보호소는 ‘이부아리테Ivoirité’라 불리는 개념에 집착했다. 이부아리테는 코트디부아르 국경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수상한 존재라 암시하는 국수주의 개념이었다. 한때 종교적 관용을 자랑했던 코트디부아르에 새롭게 등장한 이 개념은 이 나라의 최대 단일집단인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인들보다 열등하고 시민권도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4)
1990년에 다당제 선거가 도입되었는데도 코트디부아르는 여전히 일당제 국가나 마찬가지였으며 공개토론 자리는 거의 없었다. 반정부 성향의 야당 언론이 존재하긴 했으나 라디오와 TV 방송은 여당 전용이었고, 정치적 시위는 1992년 2월 이후 금지됐다. 정치적 표현들에 대한 압박, 그리고 ‘좋은 행동’으로 점수를 따려는 야당의 노력에 대한 압박은 여론 형성을 막았다. 이제 대중의 열망과 좌절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격앙된 환경에서 대통령이 된 로베르 구에이Robert Gueï 장군은 모든 올바른 조치를 취했다. 첫 대국민 방송에서 크리스마스와 이슬람 축제를 방해한 것을 사과했고, 몇 달 전 자국민 수백 명을 강제송환한 것에 대해 이웃나라인 말리와 부르키나파소에 유감을 표했다. 그는 통합을 약속했고, 형제애 및 이해와 관련해 우푸에부아니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들을 인용했다. 로베르 구에이의 연설은 이런 변화가 대개 투표보다 쿠데타나 암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105-6)
다음 선거는 2000년 10월로 결정되었으며 로베르 구에이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한 지 불과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전임자의 행보를 따랐다. 가장 중요한 안건인 대통령 출마 자격을 두고 그는 처음엔 모호한 입장을 보였으나 결국엔 ‘외국인’을 선거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이들의 편에 섰다. 이부아리앵 인민전선FPI: Ivorian Popular Front당의 로랑 그바그보 대표는 민주주의자이므로 이러한 선거 조작에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공명정대한 선거가 자신의 당선 확률을 낮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악마와 계약을 했고, 후보 자격 관련 제한을 받아들여 경쟁 구도를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로랑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의 네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열광했고 그간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많은 인사가 중용되었다. 그렇지만 그바그보 정부는 코트디부아르 역사에 또 다른 추한 면을 남겼다. 한때 국제주의자였던 새 대통령은 ‘이부아리테’ 개념을 새로운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113-4)
사실 건국 이래 30년간 지속된 정치적 탄압은 격정과 질투심을 키웠고, 세기 말에는 추악한 모습으로 터져나오게 했다. 또한 자아도취와 자산증식에만 몰두하던 정치 지도자들은 다른 이들이 뒤따를 수 있는 패턴을 형성했다. 혼인을 통해 이미 부유해진 우아타라 같은 사람조차 역사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바그보처럼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감투를 위해서라면 조작된 선거 규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이 나라는 고집 센 정치인 셋과 장군 하나(로베르 구에이)로 불과 10년 만에 몰락했다. 우아타라와 그바그보 같은 몇몇 인물은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결국 권력에 눈이 멀어 원칙보다 잇속을 우선시했다. 2004년 말까지 아비장은 마치 아프리카의 축소판처럼 후미진 곳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2004년 11월 분쟁이 격화되자 코트디부아르인들은 처음으로 안전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한때 유혈 사태와 혼돈의 대명사였던 라이베리아였다. 115)
7장. 중앙아프리카의 불화
탄자니아와 코트디부아르는 각자 다른 이유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이 둘보단 덜 유명하지만 다른 나라들 또한 독재, 시시콜콜한 다툼, 경제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으로 험난한 시기를 겪었다. 중앙아프리카경제통화공동체는 그 명칭이 무색하게도 상호혐오로만 단결된 채 6개 회원국을 엮는 데는 그리 큰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6개국 중 가장 큰 카메룬은 가장 부유한 가봉과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다. 차드는 카메룬이 지배하려 든다고 생각했으며,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차드를 불신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작은 이웃나라인 콩고공화국은 정치 분쟁으로 분열되었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반군들을 숨겨주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적도기니는 야만적 인권침해 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배제되었지만 연안에서 막대한 매장량의 석유를 발견함에 따라 더 이상 이웃나라들을 필요치 않게 되었다. 6개국 중 어느 나라의 역사가 가장 슬픈지를 꼽기란 어려운 일이다. 116)
3부_ 사실과 마주하기
8장. 경제학의 실패
아프리카의 경제규모가 작은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부가 소규모 농가를 짓밟고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민간투자 유치에 좀더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주요 산업인 농업은 모든 종류의 잘못된 관리 정책 탓에 위축되었다. 호주, 캐나다, 덴마크, 뉴질랜드와 같은 부국에서 농업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아프리카의 경제 기획자들은 경제발전의 ‘다음 단계’, 즉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을 갈망했다. 민간투자는 산업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아프리카는 소비자들을 잃는 것과 더불어 민간투자자들의 외면도 받았다. 높은 환율 때문에 일부 상품은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수입하는 편이 더 저렴했고 너무나 많은 세금, 이해할 수 없는 규제들, 타성에 젖은 행정, 법 체계, 임시 또는 계절적 노동자 고용을 어렵게 만드는 노동법, 독점, 부패, 사기 탓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아프리카에 투자하길 꺼렸던 것이다. 125-6)
아프리카의 문제를 시정하려는 노력에 만족하거나 당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여자들은 자유낙하 상태의 누군가에게 안전망을 제공한다 여겼고,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박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의 상황이 안정되길 바라는 원조기구들 입장에선 가끔씩 모래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한편,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마취 없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는 데다 수술대 위에서 몸부림치거나 징징거리지 말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게임의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새로운 아이디어, 기술 및 접근 방식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을 포함한 신규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은 초기 학습과 경험 축적의 기간이 아니라 빠르게 규칙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모두가 그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다. 많은 국가가 다시 성장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인구증가 속도와 겨우 보조를 맞추는 수준일 뿐이다. 131-2)
9장. 국제원조의 험난한 길
해외원조의 기본 철학은 ‘유대-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20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부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 부의 일부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외원조가 경제적으로도 타당하다는 예는 1946년 세계은행의 설립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라 불렸던 세계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무역의 지속적 확장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목적은 자선이 아닌 자기이익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모든 이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 예상되었다. 원조는 자기이익의 다른 측면에도 호소할 수 있다. 나눔은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1970년대 후반 세계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연간 약 50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원조가 군비경쟁에 지출된 4,000억 달러보다 국제안보에 있어 더 나은 투자라고 주장했다. 135)
원조기구들은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1960~1970년대엔 국영 산업을 지원하는 방향이었으나 1980~1990년대엔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또한 농업, 산업 및 주택과 같은 특정 부문에 대한 신용한도 설정부터 시작해 국가 금융 시스템을 지원하고 세부적인 차관 결정은 현지 전문가에게 맡기는 일, 특정 지역의 복잡한 농촌개발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지원부터 유사 목적의 간접적 달성에 필요한 폭넓은 국가 서비스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원조 기획자들은 농업 연구, 도로 건설, 값싼 에너지(수력 전기 등)가 경제성장의 주요 구성요소로 간주되고 결국 보다 균등한 부의 분배를 이룬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의 경험에 의지했다. 이러한 실험들이 시도되기도 전에 회의론자들은 실패를 예상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라면 마땅히 번영을 위해 자국만의 방법을 찾아야 하고, 외부의 도움은 해당국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키고 국내 저축을 저해하며 의존성을 유발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137)
원조기구들은 피지원국이 특정 개혁과제를 달성할 시 그 보상으로 농업, 교육, 또는 보건 분야 국가 예산의 일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부문별 프로그램 원조’를 개발 촉진 수단으로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로젝트와 기술을 제공하기보단 개발도상국의 국가 정책을 바꾸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 점점 강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원조기구와의 합의를 존중할 거라 신뢰할 만한 국가의 수는 매우 적었고, 이 ‘당근과 채찍’ 접근법은 원조효과에 대한 수년간의 연구결과에 반하는 것이었다. 실제 경험에 따르면 원조는 외국 자본가에게 잘 보이려는 정부보다는 이미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자발적으로 파악한 필요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를 설정 및 시행하며, 그에 필수적인 기관을 설립하는 정부의 나라에서 잘 작동한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력과 용기를 갖춘 나라는 아프리카에 거의 없다. 스스로를 개혁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 소수의 국가는 바닥을 경험하며 순수한 수치심이나 절망으로 행동에 나섰을 뿐이다. 138)
아프리카에서 원조 관계자들은 임기응변과 정치적 타협에 취약했다. 그 예로 1970~1980년대에 두드러지게 논의되다가 1990년대에 화제에서 사라진 인구 정책을 들 수 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젊고 성생활도 가장 활발한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이 15세 미만인 아프리카 국가도 많다. 여덟 명 중 한 명꼴인 캐나다, 미국과 대조적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상위 40개국 중 34개국이 아프리카 국가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이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라 일컫는 후손들을 유지하면서도 가난하다고 불평하자 원조 관계자들은 이러한 수치의 인용을 그만두었다. 아프리카 여성들은 산아제한 실천에 긍정적이었으나 그들의 정부와 남편들은 부정적이었다. 남편들은 대가족, 혹은 더 많은 아들을 갖고 싶어 했고, 따라서 콘돔 및 상담을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는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인구 정책이 효과적인 아프리카 국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45-6)
원조 관계자들은 언론인, 기업인, 노동조합원, 환경운동가, 인권운동가, 기타 지역사회 지도자로 구성된 자체 ‘자문 그룹’을 만들어 원조기구에 솔직히 조언하게 함으로써 소속감 고취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공신력 있는 자유언론, 강력한 야당, 모든 층의 여론을 대변할 만한 정부를 그들이 대신하긴 어렵다. 원조기구의 자문 그룹들은 오래되었고 독립성을 잃었다. 또한 회원들은 계속해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와 자문 보수를 소중히 여기기에 때때로 말을 아낀다. 개방된 정치 체제와 평등한 경제적 기회 및 공공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확실히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경제는 1980년대에 전혀 성장하지 않았고, 1990년대엔 역경을 겪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잠재력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개혁을 촉진하고 성장의 이점을 공평하게 공유하려면 정직한 선거, 강력한 의회, 활기찬 자유언론을 주장하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147)
10장. 차드-카메룬 송유관
차드는 아프리카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국토 면적은 프랑스의 두 배가 넘는데 포장된 도로의 길이는 200마일에 불과하고, 모래를 제외하면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 세계 최악의 극빈국 중 하나인 차드의 남부에 사는 엄마들은 건기가 되면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흰개미 서식지를 습격해 애벌레들을 잡을 정도이다. 1970년 이래 차드에선 큰 유전들이 발견되었으나 개발되진 않았다. 이제는 싸우는 이유조차 모호해진 내전, 어떤 투자자로부터도 신뢰받지 못하는 잔혹한 독재정권, 그리고 카메룬을 지나 대서양 연안까지 약 700마일에 달하는 석유 운송 거리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기엔 국제 유가가 너무 낮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90년대 중반, 미국 최대 기업인 엑손모빌Exxon-Mobil과 세계은행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손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국제여론의 힘, 그리고 ‘좋은’ 대의에 맞서 싸우는 데 이상한 수법을 사용하는 일부 비정부기구 사람들의 맹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151)
사실 차드-카메룬 송유관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선 등장하는 주체들부터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 엑손모빌은 1989년에 발생한 알래스카 밸디즈만灣의 재앙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차드-카메룬 송유관 프로젝트의 파트너인 쉘Shell은 나이지리아의 오고닐랜드 지역에 환경적·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며, 그곳에서의 활동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을 억누르려다 유혈 사태까지 일으킨 바 있었다. 더불어 과거 프랑스의 국영 석유회사였던 엘프Elf는 수십 년간 때로는 자신들의 주도하에 혹은 프랑스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무장정권을 지원했고, 차드-카메룬 송유관 프로젝트가 준비 단계였을 당시엔 엘프와 관련된 프랑스 유명 사업가들이 자국에서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세계은행이 그간 기록해온 환경적 발자취를 무색하게 한다는 점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가진 독재국가 차드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프로젝트 전체를 거의 명백한 비판 대상으로 만들었다. 151-2)
프로젝트에는 여러 먹구름이 드리웠다. 첫 번째 먹구름은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 가능하고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그것을 내버려두면 프로젝트엔 치명적일 게 거의 확실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차드와 카메룬은 부채가 많고 국제신용등급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은행은 자체 소프트론soft loan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 나라들을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독일과 미국 같은 세계은행의 주요 기부자들은 학교, 보건소, 아동 영양 및 기타 ‘직접적인’ 빈곤해결 프로젝트에 쓰였던 소프트론 자금을 대규모 민간 부문 에너지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건 반대한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세계은행 총재 짐 울펀슨이 슈투트가르트에 방문했을 때 독일 정부는 그에게 취임 후 2년간 서방 국가에서 얻은 인기를 잃고 싶지 않다면 소프트론을 활용할 생각은 버리라고 말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펀슨은 재정부서 직원에게 신용이 낮은 차드와 카메룬에겐 소프트론 대신 상업차관을 빌려주라고 지시했다. 153-4)
# 소프트론soft loan : 조건이 비교적 까다롭지 않은 차관, 상업차관은 소프트론보다 금리가 높고 만기가 짧다.
프로젝트를 둘러싼 다른 의심들은 이보다 익숙한 내용이다. 석유 산업의 환경적 기록 및 그 분야에서 세계은행이 남긴 파란만장한 역사를 고려해봤을 때 과연 송유관에서 기름이 유출되진 않을지, 반대 단체들이 송유관을 폭파시키진 않을지, 송유관 노선에 영향을 받을 취약한 생태계 및 선주민의 권리는 보호될지 등 국제사회가 어떻게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엑손모빌은 철저히 환경평가를 진행했고, 이 프로젝트의 옹호자들은 평가 자료가 열아홉 권에 이를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분량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자료에선 이 프로젝트에 어려운 과제가 다수 따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물론 지진 지역에 발전용 댐을 건설하는 것과 달리 모두가 감당 가능한 과제들이었다. 환경 계획은 양국 정부가 아닌 엑손모빌이 현지 및 세계의 감독하에 시행할 것이었다.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카메룬이나 차드 정부보다 유능했고, 국제여론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154)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남은 다른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복잡한 사안이었다. 석유 수익이 국가 발전에 쓰일 거라고 누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1998년 12월 차드 국회는 세계은행의 촉구에 따라 석유 수익의 10퍼센트를 해외에서 관리될 미래세대기금Future Generations Fund에, 5퍼센트는 생산 지역에, 나머지 80퍼센트는 농업·교육·보건·인프라 프로젝트에 할당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금 사용에 대한 개방성을 보장하기 위해 엑손모빌은 해외계좌에 정부 몫의 수익을 예치하기로 했다. 차드의 공무원, 국회의원, 종교단체, 인권단체 및 기타 비정부기구들로 구성된 ‘감시’위원회는 정부지출 계획을 심사하고, 국가예산에 대한 석유 수익 공개를 승인하고, 실제 자금사용을 추적할 것이었다. 그 사이 국제환경단체들은 현장방문 시위를 했다. 세계은행의 업무나 프로젝트 최신 정보에의 접근이 제한적인 일부 국제단체들에겐 이 프로젝트가 진심으로 해결해야 할 우려 사안이었던 것이다. 155-6)
토론이 이어지던 마지막 해에 세계은행은 이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편지를 5만 통 이상 받았는데, 그중 1만 6,000통은 캘리포니아의 공익 전화회사인 워킹에셋Working Assets에서 보낸 것이었다. 워킹에셋은 수익의 일부를 좋은 대의에 쏟고 매달 가입자들에게 특정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해왔다. 환경보호기금과 같은 미국 단체들은 여전히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 입장이 마치 공익단체가 지닌 힘을 보여주는 증거, 혹은 미래의 기부자들이 볼 수 있게끔 자사 입구에 전시할 트로피라도 되는 듯 말이다.
세계은행 총재와 가까운 홍보 직원들도 이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할 경우 세계은행의 ‘브랜드 이미지’가 받을 영향을 우려했는데, 이는 놀라운 추론이었다. 외부 비판자들 대부분은 세계은행의 평판이 이미 망가졌다고 여기는 데 반해, 세계은행 직원들은 어렵지만 가치 있는 대의를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58-9)
11장. 가치의 충돌
아프리카의 빈곤은 사실 아프리카의 문제라기보다는 서양의 문제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정부들은 가난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일이라기보단 바람이나 비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 받아들인다. 아프리카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은 빈민은커녕 국가경제와 관련한 기본적 활동들조차 자신과는 무관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 2002년 나는 가봉의 수도인 리브르빌의 빈민 지역에서 기획부 장관과 함께 지역사회 도로 프로젝트 상황을 둘러보았다. 장관이 그 동네를 찾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그가 이 나라의 주요 항구에 방문한 것도 그날 저녁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14년 동안 기획부 장관을 지냈고 그 전에는 총리로 일했지만, 그는 국가경제의 동맥에 해당하는 지역조차 돌아볼 시간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날의 방문도 거의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가 현장으로 따라나선 유일한 이유는 세계은행 부총재가 나와 동행했기 때문이다. 165, 168)
4부_ 미래를 향해
12장. 아프리카를 바꾸는 열 가지 방법
1. 공적자금 추적 및 회수를 위한 메커니즘을 도입한다.
2. 대통령, 장관, 고위 관료들의 계좌 공개 및 감사를 실시한다.
3. 각 국가에 대한 직접적 원조의 50퍼센트를 축소한다.
4. 빈곤감소를 진지하게 원하는 4∼5개국에 집중적인 원조를 실시한다.
5. 국제사회 감독하에 선거할 것을 요구한다.
6. 자유언론과 사법부 독립 등 민주주의의 다양한 요소를 장려한다.
7. 아프리카의 학교 운영 및 에이즈 프로그램을 운영·감독한다.
8. 정부 정책 및 원조 협정에 대한 시민사회 감시그룹을 설립한다.
9. 인프라 및 국가 간 연결에 더욱 집중한다.
10. 세계은행, IMF, 유엔개발계획의 통합을 추진한다.
13장. 새로운 시대
전 세계는 아프리카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 자신들이 가장 중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여길 거라 기대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해외원조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대한 동정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성인과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변명하는 것을 멈추고, 지역적 또는 민족적 기원과 상관없이 아프리카의 인재와 기업을 배출해야 미래가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아직 붕괴되지 않은 한 가지는 ‘아프리카의 정신’이다. 아프리카의 고집 일부는 단순한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또 다른 일부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꺼리는 데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는 잠시 희망이 멈춘 상황이다. 아프리카의 인간적 아름다움, 잠재력, 고통에 익숙한 이들만이 향후 10년 안에 돌파구를 희망할 수 있다. 오직 아프리카인들만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테러, 가난, 평범함의 순환을 끊을 수 있음을 그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잘 알고 있다.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