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
크리스토퍼 벡위드 지음, 이강한.류형식 옮김 / 소와당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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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역사 자료들 속에 있는 중앙유라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관들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관념, 즉 야만인(barbarian) 판타지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생각들로, 거의 변화된 바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은 〈타고난 전사들〉이 아니었다. 이는 도시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상인〉이 아니었고, 농경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농민〉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목민들이 건설했던 국가와 정주민들이 건설했던 국가는 모두 복합 사회(complex society)였다. 유목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할지라도, 인구도 훨씬 많고 부유했던 주변 정주 국가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직업 군인들이 무척 많았다. 또한 유목민들은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유목민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변 농업 지역 백성들보다 훨씬 더 한가했다. 농경 지역 백성들은 노예였거나 노예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 정도에 불과했다."(41-2)


프롤로그 ─ 영웅과 그의 친구들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초기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정치적-종교적 이상형으로서의 영웅적 군주와 그의 코미타투스(comitatus, 친위부대)이다. 코미타투스는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이다. 기본적인 코미타투스와 그들의 맹세는 스키타이 때부터 존재했다. 이는 목숨을 건 의형제들의 피의 맹세와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맹세는 고대 스키타이 자료로부터 중세의 『몽골비사』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다." "코미타투스 전사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맹세를 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출신 부족이나 출신 나라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들은 주군의 가족만큼, 어쩌면 가족보다 더 주군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는 주군의 집에서 주군과 함께 살았으며, 맹세의 대가로 넉넉한 보상을 받았다. 코미타투스의 존재는 중앙유라시아 전역에서 매장지의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화를 기술한 역사서들을 통해 확인된다."(65-7)


"코미타투스에게 주어진 보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금, 은, 보석, 비단, 도금된 철갑, 무기, 말, 여타 보물들이 주어졌는데, 여러 사료에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다. 코미타투스와 더불어 수많은 무기와 말들이 함께 매장되었다." "이러한 부장품들은 전쟁이나, 혹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조공을 통해 획득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무역을 통해 축적된 것이었다. 무역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 내부 경제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이 정주민에 대해 요구한 평화 조약에는 항상 이러저러한 무역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실크로드는 중앙유라시아 문화와 동떨어진, 소란을 피우는 원인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제의 구성 요소였다. 더욱이 지역 내 근거리 무역과 국제 무역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목 경제와 오아시스 농업 경제, 중앙아시아 도시 경제는 모두 함께 실크로드의 구성 요소가 된다."(86-9)


CHAPTER 1 ─ 전차를 탄 전사들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Central Eurasian Culture Complex)는 거의 4,000여 년 동안 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역사언어학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원시 인도유럽어족(Proto-Indo-European)이 그들이다." "기원전 2000년경,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어떤 민족이 고향을 떠나 이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의 1,000여 년 간, 이들은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원래 살고 있었던 선주민들을 정복하거나, 혹은 그들과 뒤섞이면서 역사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여러 갈래의 인도유럽어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단지 개별 부족 단위였거나 혹은, 사실상 전사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첫번째 밀레니엄(1000~1 BC)이 시작될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유럽어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도 거의 다 인도유럽어족의 문화와 언어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93-4)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전차는 중앙유라시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신타슈타(Sintashta) 유적지로 우랄-볼가 초원 지대 남쪽에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의 유적이다. 역사학적 자료를 보면, 전쟁에서 전차가 실제 사용된 것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건은 기원전 17세기 중반의 일로, 하투실리 1세가 통치하던 히타이트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야누(maryannu)는 미타니 지역의 고대 인도어족 전차 전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전차용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었다. 같은 시기 미케네 그리스인은 히타이트와는 서쪽에서 이웃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자를 개발한 두번째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그들도 정복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했다.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인도 북서부를 침략했던 고대 인도어족도 마찬가지다. 알려진 최초의 전차 전사들이 모두 인도유럽어족이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중앙유라시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말 역시 중앙유라시아가 원산지다."(126-7)


"고고학적으로 알려진 완전한 형태의 전차는 중국 상나라 유적에서 나왔다. 그것은 상나라의 북서쪽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확인되며, 도입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일찍 도입되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발굴 사례가 기원전 13세기를 가리키는 데다가 이미 상나라 방식으로 장식을 세세하게 갖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차가 상나라에 도입된 뒤 상나라의 문화가 덧입혀지는 기간이 더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상나라와 전쟁을 했던 이민족들도 전차를 사용했다. 전차를 끄는 말은 반드시 전차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가축화된 말은 성인 남성과 전차와 함께 상나라 왕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말과 전차 전사와 전차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 말까지는 인도유럽어족만의 독특한 풍습이었을 것이다."(128-9)


"유라시아에서 인도유럽어족이 침략자로서 어떤 국경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정복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도 누가 됐든 이웃한 종족과 전쟁을 했을 것이다. 불특정 민족들과 싸우는 중에, 여태까지 전쟁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던 전차라는 신무기가 유라시아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전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기계였고, 매우 정밀한 기계였다. 그래서 전차를 만들거나 사려면, 그리고 전차에 말과 전사를 훈련시키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전차에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두번째 물결에 속하는 인도유럽어족은 전차를 유지보수하고 실제 사용할 줄 알았던 최초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전차를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전차는 고사하고 가축화된 말만 하더라도,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였는지 여러 텍스트에 자세하게 나온다."(134-5)


CHAPTER 2 ─ 로얄 스키타이 


"북부(혹은 동부) 이란어족인 스키타이는 잔인한 전사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들의 최대 업적은 무역 시스템이었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의 여러 저술가들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스키타이의 교역로는 그리스, 페르시아와 동방 지역들을 연결하였고, 이는 스키타이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무역에 관심을 가졌던 원동력은 그들만의 사회정치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통치자 개인과 그의 코미타투스, 즉 때로 수천 명에 이르는, 맹세로 뭉친 친위대원들에게 공급할 물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번성했던 육로 기반 국제 교역은 스키타이와 소그드인, 흉노, 기타 여러 중앙유라시아 고대인들의 수요에 기반하고 있었다." "스키타이 파워가 한창일 때 고대 그리스어, 인도어, 중국어로 된 철학서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생산되었다는 점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을 끈 주제이며, 그 시기에 이미 이들 문화들 간의 사상적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41-2)


"스키타이 제국과 서부 스텝 지역의 교역망은 이후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등장한 보다 강력한 국가들의 기본 원형이 되었다. 중앙유라시아 지역에서 부와 권력이 성장하고, 여러 문화들과 점점 더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자, 여러 나라들이 그곳을 침략했다. 대체로 그들은 중앙유라시아 측에서 먼저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알려진 바로 가장 오래된 침략자는 중국 지역의 주나라였다. 그들은 기원전 979년 귀신의 나라 귀방(鬼方)을 침략하여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중국인들은 그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회만 닿으면 반복해서 동부 스텝 지역을 침략했다. 다리우스 치하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도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점령했고, 기원전 514년~기원전 512년경 스키타이를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치하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도 기원전 4세기 말에 중앙아시아 지역을 침략했다 이들 두 차례의 정복은 중앙아시아 문화에 예기치 못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42-3)


"헤로도토스와 다른 모든 역사 자료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 전체를 로얄 스키타이가 지배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전사들로서 대부분의 재산을 통제했다. 그들은 〈스키타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용감한 부족이었고, 그들은 다른 모든 스키타이족을 노예로 생각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들 아래로 유목 스키타이가 있다고 했지만, 유목 스키타이는 아마도 로얄 스키타이에 종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축을 기르는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보리스테네스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농경 스키타이는 농부들로서, 그들은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해서〉 농사를 지었다." "이론적으로 스키타이 사회는 네 개의 부족과 더불어 통치 부족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국가의 이상적인 조직 형태로서 몽골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전통이다. 통치 부족은 다른 모든 부족을 〈노예〉로 간주했다. 이 또한 중앙유라시아에서 후대에까지 공통적으로 이어진 전통이다."(151-3)


CHAPTER 3 ─ 로마와 중국 사이 


"고대 중반기, 즉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과 중국 한(漢) 제국의 발전이 가장 눈에 띈다. 이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부분적으로 도시도 발달한 문화였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는 스키타이의 후예인 사르마트가 같은 이란어족인 알란(Alans)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중앙아시아 서부 지역에서는 토하리 연합세력이 이주해 와서 박트리아의 그리스계 나라들을 점령했다. 이를 근거로 쿠샨(Kushan) 제국이 성립했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파르티아의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뻗어나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국경을 맞대었으며, 로마인들과 함께 근동 지역을 두고 힘을 겨루었다. 토하리의 숙적이었던 흉노는 동부 스텝 지역을 압도하다가 반으로 나뉘어져 남북으로 갈렸다. 뒤이어 남흉노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북흉노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무주공산이 된 동부 스텝 지역으로 몽골족 연맹체인 선비족이 들어와 흉노 대신 동부 스텝 지역을 차지하였다."(175)


"기원후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전해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게르만족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타키투스는 코미타투스에 대해 특별히 주목했고, 당시 존재했던 코미타투스의 본질적 요소를 모두 기술했다." "코미타투스는 프랑크 왕국 초기에도 등장했고,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에서는 8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또 몇 세기를 더 유지했다." "타키투스의 설명과 기타 고대 기록들은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즉 고대 게르만족은 프랑크족을 포함해서 모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알란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란어족들처럼 원시 인도유럽어족의 시대로부터 줄곧 이러한 전통을 유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대 게르마니아가 문화적으로는 중앙유라시아의 일부였으며, 게르만족이 그곳으로 이동해온 뒤 천여 년 이상 그와 같은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177-9)


"고트족은 타키투스의 시대에는 동부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 이르러 비스툴라 강 유역의 발트 해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흑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폰틱 스텝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조직화된 국가가 아닌 독립적인 연맹체였다. 나중에 에르마나릭(Ermanaric)이 고트족의 그로이퉁기(Greutungi) 연맹을 창설했는데, 이는 후대에 오스트로고트(Ostrogoths), 즉 '해가 뜨는 곳의 고트족' 혹은 '동고트족'으로 불렸다. 그들은 유서 깊은 국가 수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즉 이웃 부족을 점령하고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나라는 기원후 370년에 이르러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아직 훈족이 공격해오기 전이었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 사르마트족, 알란족, 고트족의 권력은 375년에 이르러 훈족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중앙유라시아인들 중 규모가 컸던 종족들, 대표적으로 고트족은 이후 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로 옮겨와 피난처를 구했다."(181-2)


"기원전 50년경,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라는 쿠샨 추장이 토하리스탄(Tokhâristân)을 구성하는 네 부족을 병합하여 쿠샨 제국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남쪽으로 인도까지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까지 이르렀고, 해상 무역로를 장악했다. 이는 인도와 로마 치하 이집트 항구를 직접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무역로는 파르티아를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파르티아에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쿠샨 왕조는 이 무역로를 획득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들은 동쪽으로 확장하여 타림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쿠산(Küsän)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이는 나중에 토하리 왕국의 수도가 되는 쿠차(Kucha)식 명칭이었다. 카로스트 히(Kharoșț hî)라는 특징적인 문서가 그들의 통치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동쪽으로 크로라이나(루란)까지도 발견이 된다. 쿠샨인들은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186)


CHAPTER 4 ─ 훈족 아틸라의 시대 


"기원후 2세기 이후 고대 제국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라시아 북부의 민족들은 남쪽을 향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이 사건을 민족대이동(Völkerwanderung, 민족들의 거대한 방랑)이라고 한다. 이때 범(汎) 게르만족 그룹들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서쪽 절반을 차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들인 치오나이트족(Chionites), 에프탈족(Ephthalites) 등은 페르시아 제국령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 몽골족 위주의 여러 민족들은 과거 중원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북쪽 절반을 차지했다." "민족대이동은 서유럽 거의 모든 지역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를 전파하였다. 결국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는 영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북부 온대 지역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제 중앙유라시아와 주변 정주 지역 사이의 경계선은 없어졌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혹은 그 반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적, 정치적 구분도 없어졌다."(199-200)


"중앙유라시아에서는 평상시에도 이주가 흔히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사람들은 유목이나 반유목 목축업자들이다. 사실상 농사도 짓지만 농장은 해마다 장소가 바뀌고 곡식과 동물을 데리고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곳 사람들은 어떤 땅에서 일년 중 어떤 시기에 누가 풀과 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누군가의 목초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별해주는 표식이 없다. 따라서 거대한 유동성은 정착경제가 아닌 중앙유라시아의 특성이 되었다. 나라는 민족으로 규정되며, 서로 간의 맹세로 맺어질 뿐이다." "중앙유라시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경이란 의미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부족이 특별히 성공을 거두게 되면, 새로운 나라는 급속하게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전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주변 정주 제국의 성벽이나 요새에 맞닥뜨리게 된다. 중앙유라시아 역사에서 이러한 과정은 최소 세 차례 일어났다. 스키타이, 투르크, 몽골이 그러했다."(220-2)


"분명히 로마와 중국 경제의 쇠락이, 적어도 처음에는, 이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이들 제국의 국경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보다 경제 문제의 여파가 훨씬 심각했다. 중심지에는 경제적인 부가 축적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풍요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국경의 도시나 마을에서는 돈줄을 조이거나 경기가 움츠러들면, 이방인 출신 상인이나 이주노동자들로서는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경제 문제는 중앙유라시아 튱치자들에게도 어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코미타투스나 동맹 세력에게 끊임없이 사치품이나 보물들을 제공해야 했다. 국경 시장이 붕괴되거나 혹은 전쟁으로 파괴되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황폐화되기 마련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큰 범위에서 작동했던 원칙(민족대이동의 경제적 이유)을 확인할 수 있다."(222-3)


"이전 역사가들은 〈야만인의 정복〉이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이라고 믿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게르만식 변종이 서유럽에 소개되었고, 그것이 당시 서유럽의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압도했으며, 그것이 점차로 발전하여 현재 〈중세〉 문화로 알려진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봉건〉 시스템, 무역 도시의 특수한 지위, 전사 계급의 특권 등도 중세 문화에 포함된다. 고집스레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식 요소들(라틴어 위주의 서유럽 문자 언어 같은), 남부 지방에 남아 있는 몇몇 고대 유적들, 이런 걸로 고대 지중해의 화려했던 문화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로마인들과 로마화된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게르만 왕조에서 살았다. 이들은 거의 초창기부터 뒤섞이기 시작했다. 로마화된 서유럽이 다시 중앙유라시아화된 것은 문화적 혁명이었다. 그것이 중세(Middle Age)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알려졌던 것이다."(226)


CHAPTER 5 ─ 튀르크 제국 


"6세기 중반, 동부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Türk)가 유라시아 지역의 다양한 문명들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급속도로 상업·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초기 중세 시대의 국가들은 중앙유라시아를 점령하거나 혹은 적어도 인접한 국경 근처만이라도 빼앗고자 했다. 초기 중세(약 AD 620~840)의 문화적 번영은 이처럼 끊임없는 지역별 전쟁과 함께 나타났다. 새롭게 펼쳐진 전쟁 양상은 마침내 주요 제국들이 국경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그들에 대응하는 제국 규모의 연합체가 탄생했다. 계속되는 전쟁은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8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튀르기스(Türgiš)와 파미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졌고 아랍-당 제국 연합이 승리했다. 뒤이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제가 후퇴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 경제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모두가 중앙유라시아의 번영, 즉 실크로드의 번영에 기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29-30)


"유라시아 전체의 초기 중세 역사 자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중앙유라시아, 특히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어 자료, 고대 티베트어 자료, 아랍어 자료들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넘쳐난다. 심지어 이들보다 편협한 그리스어나 라틴어 자료들에서조차 그들의 왕국에 대한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주목을 끌었던 이유를, 요즘 역사학자들은 당시 유목민 전사들의 침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백하게 그렇지 않다. 사료에는 실제로 그런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오히려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경제 때문이었고,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공유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 탓이었다. 저항하거나 복속을 거부한데 따른 처벌은 곧 전쟁이었다. 초기 중세 유라시아를 통틀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267-8) 


"각각의 나라는 자신의 황제만이 유일하게 〈하늘 아래 모든 곳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미 굴복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이건, 아직 복속되지 않고 반항하는 〈노예들〉이건 막론하고, 모든 이들은 그의 신하가 되어야 했다." "이상적인 중앙유라시아 정치 구조는, 〈칸과 네 명의 지역 군주 시스템〉으로 적절하게 명명된 적이 있는데, 그 분명한 사례는 부여 왕국과 고구려 왕국─부여는 중심부와 4개 하위부로, 고구려는 중앙과 5개 하위부로 나뉘었다─에서 보인다. 비잔틴 제국의 사절로 튀르크 제국을 다녀간 마니아크(Maniakh)는, 튀르크 제국에 네 개의 〈군사 정권〉과 더불어 하나의 통치자가 있고, 그는 아르실라스(Aršilas) 부족에 속한다고 전했다. 티베트 제국의 굉장히 이론적인 4개의 뿔 시스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당나라도 서쪽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방향에도 도호부를 설치했다. 거란 제국과 후대의 몽골 제국 및 그 후예들도 마찬가지였다."(268-9)


"모든 초기 중세 제국들은 사방으로 팽창하고자 했다. 다른 시대 다른 곳의 제국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초기 중세에만, 역사상 최초로, 거대 제국들이 서로 직접 맞닥뜨렸고, 그들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각의 제국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고, 각각은 사실 동등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국을 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서 외교 규약이 발달하였다. 외국에 파견된 사절단은 그 나라에서는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했다. 그 지역에서는 사신들의 복종을 마치 다른 지역 제국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신단이 돌아갈 때는 대개는 방문지의 사신단을 동행했는데, 이들 또한 자신이 방문하는 제국의 황제에게는 비슷하게 복종의 표시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의 경제는 번성했고, 최소한 8세기 중반까지는 강력하게 성장했다. 유라시아 세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특히 경제적으로 전례 없이 가깝게 연결되었다."(270-1)


CHAPTER 6 ─ 실크로드, 혁명, 붕괴 


"8세기 중반의 이른바 13년 시대에는, 유라시아의 모든 제국들이 굵직한 반란이나 혁명 혹은 왕조 교체로 곤란을 겪었다. 742년에 동부 스텝 지역의 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은 위구르 제국이 들어섰다.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곧이어 아랍 제국에서도 아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이 일어났다. 혁명 주도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무역 도시 메르브 상인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도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가 혁명을 일으켰다. 755년에는 티베트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있었다. 같은 해 연말 즈음, 중국 지역에서도 안록산(安祿山)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안록산은 당나라 군대의 장군이었는데, 출신이 투르크-소그드계였다. 뒤이어 섬세하게 계획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을 통해 평화가 다시 회복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은 보다 젊은 제국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275)


"다음 세기에 가장 의미심장한 발전으로 먼저 유라시아 전역에 국민문학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상업, 문화, 학문 중심지로서 서부 중앙아시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무역로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즉 칼리프 제국과 유럽의 무역 루트는 중앙아시아에서 볼가 강을 거쳐 올드 라도가(Old Ladoga)와 발트 해에 이르는 북방 루트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북유럽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다. 한편 동야에서는 중국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무역 루트가 북쪽으로 이동해 위구르의 영토를 통과하게 되었다. 아랍 제국의 수도는 알 마문(al-Ma'mûn)의 치하에서 십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도시 메르브에 있었다. 마침내 칼리프가 바그다드로 옮겨갔을 때, 칼리프는 수많은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중앙아시아 문화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는 아랍 제국에 빛나는 지적 학문적, 융합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대의 성과들은 후대에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고, 유럽 과학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276)


"세계 종교 조직에 대해 공식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자, 문헌 자료가 확산되고 문헌에 기반한 문화가 발전되었다. 이는 전근대 세계의 대부분 민족들에게도 문자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왕국이든 제국이든,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필요하다면 어떤 언어로든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문자 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 혹은 여러 세계 종교가 그 민족에게 전파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 종교는 모두 문자 텍스트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먼저 성스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어야 했고, 텍스트를 복제하여 그 민족의 영토 안에 확산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면, 해당 지역 언어로 텍스트를 번역해야 했다." "이러한 전파 행위의 중요성은 끝이 없었다. 복제된 텍스트나 번역된 텍스트는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하나의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다. 이는 고중세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까지 유라시아 문명 전체적으로 지성이 만개하는 기초가 되었다."(297-300)


CHAPTER 7 ─ 바이킹과 키타이 


"중세 초기 세계 질서가 무너진 뒤, 새로운 나라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유일한 예외라면 비잔틴 제국이었다." "초기 중세와 달리, 이 시대의 고급 문화는 시작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수도원 제도가 모든 유라시아 주요 지역에서 급격하게 번성했고, 문자 문화를 더욱 심도 있게 전파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번영은 아랍 제국이 무너진 그 다음 시대가 상승기였다. 그 무대는 특히 중앙아시아였다. 실제로 고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중앙아시아 출신이거나 그 후예였다." "서부 스텝 지역과 동부 스텝 지역의 나라들은 다 같이 지리적으로 유목 지역과 비유목 지역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갈수록 스텝 지역에 농업의 영향이 증대되었다. 바이킹-슬라브족의 루스 카간국은 유럽의 농업-도시 문화를 서부 스텝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중국도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세운 왕조들의 후원에 힘입어 농업-도시 전통을 동부 스텝 지역으로 확산시켰다."(313-4)


"바이킹은 전사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들은 1차적으로 상인들이었다. 바이킹이 남쪽의 보다 문명화된 나라들로 내려온 것은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러시아의 강을 타고 근동 지역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류리크(Ryurik)가 이끄는 세 명의 추장들은 862년 노브고로드(Novgorod)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882년경, 류리크의 후계자 올렉(Oleg)은 키에프(Kiev)를 정복했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루스는 정교회를 국교로 하는 비잔틴 국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슬라브화된 불가리아 왕국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도 루스와 국경을 마주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미 페르가나인들과 카자르인을 코미타투스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바이킹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이킹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랑기아 가드(Varangian Guard)가 구성되었다."(317-8)


"당시 이슬람 세계는 과학과 수학, 철학과 형이상학에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들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들, 알 파르가니(al-Farghânî. 전성기 833~861, 페르가나 출신), 알 파라비(al-Fârâbî, 사망 950, 파랍[우트라르] 출신), 이븐 시나(Ibn Sînâ, 980~1037, 부하라 근처 아프사나 출신), 알 비루니(al-Birûnî, 973~약 1050, 호레즈미아 카트 출신), 알 가잘리(al-Ghazâlî, 1058~1111, 후라산 투스 출신) 등 많은 이들이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도시들은 모두 유라시아의 빛나는 상업적 지적 중심지였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반지성적인 반작용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한 이는 중앙아시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알 가잘리(al-Ghazâlî)였다. 한동안 바그다드의 니자미야에서 교수를 역임한 그는 궁극적으로 철학 그 자체를 거부했으며, 수피즘의 보수주의적 양상을 선호했다. 그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도그마를 벗어나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려 했다."(334-6)


"중국 지역의 상당 부분이 송나라로 통합되었지만, 북부 지역, 동부 스텝 지역과 겹치거나 혹은 그와 연결되는 지역, 중앙아시아 등지는 독립국으로 남아있거나 비중국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왕국을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다소간의 우열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전제로 국제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중앙아시아나 스텝 지역과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라시아의 나머지 대부분 지역과도 접촉이 없었다." "마침내 중국의 해상 무역이 유라시아의 반대 방향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따라서 남방으로 남중국해 연안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했을 때, 중국 문화를 전파한 세력은 중국의 엘리트가 아니라 독립적인 마인드의 상인들이었다."(340-1)


CHAPTER 8 ─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 


"14세기는 흑사병, 기근, 홍수 및 기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재앙으로 괴로웠던 시대였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은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고 왕조가 무너지는 일이 만연했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자연재해에 맞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몽골 왕국들, 즉 이란 지역의 일칸국과 중국 지역의 원나라는 모두 무너졌다. 아마도 다른 시기였다면 그렇게 빨리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368년 최후의 대칸이자 원나라의 황제이기도 했던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재위 1333~1368)는 상당수 황실 인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몽골 지역으로 탈출했다. 그는 1370년 사망할 때까지 동부 스텝 지역에서 쇠락하는 대칸국을 통치했다. 중부 및 서부 스텝 지역에서 골든 호르데[킵차크 칸국]는 아주 잘 살아남아서 이후로도 2세기를 유지하였다. 이와 반대로 일칸국은, 마지막 일칸 아부 사이드(Abû Sa'îd)가 1335년에 죽자 부족과 분파주의자들의 폭력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다."(365-6)


"중앙아시아에서 차가타이 칸국은 아주 일찍 분열되어 몇 개의 파벌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항구적인 불안정 상태로 고통을 받았다. 타르마시린(Tarmashirin, 재위 1318~1326) 칸이 죽은 뒤 차가타이 호르데는 동과 서 둘로 갈라졌다. 서부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했는데, 차가타이의 명칭을 획득했다. 반면 동부는 유목민 비중이 훨씬 더 많았는데, 무굴리스탄(Moghulistan) 몽골리아로 알려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통치자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차가타이계가 중앙아시아에서 확고한 통치자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카라우나스족의 왕 카자간(Kazaghan, 재위 1346/1347~1357/1358)이 1346년/1347년 차가타이 칸국 최후의 칸 카잔(Kazan)을 살해한 뒤, 직계 라인은 끊어지고 말았다. 카자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차가타이 칸국의 이름을 계속 내세우고 꼭두각시 칸을 세우기도 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366-7)


"전체적으로 보자면 티무르의 정복 전쟁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국의 왕조 설립자들이 했던 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티무르의 군대는 원거리에서 번개처럼 기습하는 기마대도 아니었고, 물론 거대한 해군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 티무르에게도 기마병이 있었고 효과적으로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의 절대다수는 보병이었다. 그리고 티무르가 노린 것은 모두 예외 없이 도시였다. 티무르는 적들이 굴복하는 것에 만족했다. 특히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티무르는 거의 언제나 통치자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세금만 제대로 내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티무르가 통치하던 때는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이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문화 및 정치적으로 유라시아의 중심이 되었던 시기였다. 티무르는 분열 계승된 과거 몽골 제국의 영토를 다시 정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제국에 안정적인 제국의 정부 조직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고, 티무르의 자식들도 티무르의 계획을 물려받지 않았다."(372-3)


"몽골은 최초로 거대 규모의 국제 무역과 세금 시스템인 오르탁(ortag)을 만들었다. 오르탁은 기본적으로 상인 연합 혹은 카르텔이었다. 주로 무슬림들이 이를 수행했는데, 그들은 카라반이나 어떤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통치자들에게는 세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익이 높았다. 오르탁에 대한 정책은 보다 쉽게 참여하거나 자유방임일 때도 있었고(우구데이 치하에서), 엄격하게 통제가 될 때도 있었다(뭉케의 치하에서). 제국 전체가 상업에 열려 있었고, 상인과 기술자들에게 전례가 없을 정도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의 사방에서 기업가들이 출현했다." "몽골인들은 〈무신론자〉였다. 때문에 조직화된 종교라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몽골인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어떤 종교나 종파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티베트 불교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374-5)


CHAPTER 9 ─ 유럽의 바다로 달려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 


"전근대 유라시아 대륙의 거대 제국들이 수립된 것은 르네상스 후기의 정복 전쟁을 통해서였다. 이는 티무르의 정복 전쟁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티무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자체적인 발전을 방해하거나 늦추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1405년에 티무르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곧바로 자신의 제국 영토를 수복했고, 오래도록 추진해왔던 팽창 정책을 다시 개시하여,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잔여 세력들을 소탕하였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들은 티무르가 사망한 뒤 1세기가 지나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투르크멘이 페르시아에 사파비 왕조를 설립한 때는 1501년이었고, 바부르(Babur)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에 무굴(무갈) 제국을 세운 때도 그 무렵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거대한 전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즉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해안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해나가는 것이었다."(383-4)


"유럽인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연안 지역과 그 주변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점차 절대 권력자들과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대 제국들은 해상 무역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결국 국제 무역에 참여하려면 유럽인들은 무역로와 항구 도시를 안정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 지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의 경제가 번성했던 시대,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시대에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군대는 아시아의 지방 통치자들을 제압했고,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인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해 갔다." "유럽인들의 주요한 목적은, 처음에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화롭고 수익률이 좋은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도 또한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해당 지역의 정치 권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행했던 바와 똑같다."(402-3)


CHAPTER 10 ─ 길이 닫히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의 상업, 부, 권력은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심지어 러시아 제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이 중앙유라시아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수도는 발트 해 연안에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는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였다. 러시아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거쳐 바다로 나아갔다. 러시아와 달리, 유라시아의 오래된 나라들은 재빨리 변신을 도모하지 못했고, 결국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대영제국에 합병되었다.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국은 아프간 지배 시절을 거쳐 사파비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러시아와 대영제국 관할 지역으로 나라가 쪼개졌다. 중국의 청나라도 유럽의 각 세력권으로 나뉘어졌다. 유라시아의 경제는 대륙 기반 실크로드 시스템 위주에서, 유라시아 연안을 잇는 해양 기반 시스템으로, 즉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다."(425-6)


"1757년, 청나라는 마지막 남은 독립 스텝 민족인 서부 몽골 세력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초원 제국 준가르가 무너짐으로써 중앙유라시아 실크로드 경제에 찬바람이 불었지만, 그 자체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1727년에는키악ㅌ나(Kiakhta)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국제 무역에 대한 엄격하고 배타적인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국경은 닫혔고, 국제 무역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으며,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중앙유라시아 정치 조직들은 모조리 제거되었다. 이로써 중앙유라시아의 경제는 파탄을 맞았다. 실크로드 경제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사람들도 이렇게 해서 대개 할 일을 잃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중앙유라시아에는(특히 그 중심지인 중앙아시아에는) 극심한 가난이 찾아왔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기타 모든 문화적인 면에서도 급속히 암흑 속으로 후퇴했다."(438-40)


"유라시아 어느 곳에서나 전통적인 국가들은 땅을 지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세 초기 유라시아 전역에는 한 가지 개념밖에 없었다. 즉 아랍어로 마디나(madîna), 페르시아어로 샤흐리스탄(shahristân), 고대 티베트어로 카르(mkhar), 중국어로 청(城, chéng), 고대 고구려어로 구루(kuru)와 같은 것이었다.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것은 실제로 한 가지였다. 즉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그것이다. 각각의 도시를 요새화함으로써 통제를 극대화하고, 적에게 빼앗기거나 적과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며, 각각의 도시를 확고하게 유지하여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는, 도시들이 그 나라 영토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나라의 국경 지역이란 곧 중앙 정치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나 상인들은 무역이 자유로운 국경 지역에 관심이 많았고, 그곳에서는 정치 권력의 간섭이나 세금을 가능한 적게 받을 수 있었다."(458-9)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거대 도시들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 현실이 있었다. 고대와 늦어도 중세 초기부터 그들은 기본적으로 도시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왕국도 도시 하나 이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업 도시들은 중앙유라시아의 중앙 정치와는 연결되지도 않고 별 비중도 없이 그들만의 방식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이는 연안 무역로 주변의 도시들과 같은 처지였다." "대륙 횡단 무역은 스텝 지역 유목민들, 즉 스키타이나 흉노에 의해 중앙유라시아 최초로 거대 제국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직접 무역으로 변화되었고, 유목민들은 이를 통해 괄목할 만한 부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앙유라시아 스텝 유목민과 도시의 번영은 내부 경제의 번영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들의 역사가 단절되고 그 결과 경제가 위축되었던 원인은 명백하다. 즉 주도권을 장악한 초원 제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텝 지역 사람들의 뒷받침과 보호가 없을 때면 어김없이 실크로드도 움츠러들었다."(461-3)


CHAPTER 11 ─ 중심을 잃어버린 유라시아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권에서는 1880년경 카잔과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계몽운동이 일어나서 이슬람권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동투르키스탄 지식인들은 근대 서양식 학교와 교육과정, 저널과 근대식 대중매체를 도입했고, 이와 함께 근대 민족주의 사상도 들여왔다. 중앙아시아에서 혁명이 번져나가자 자디디스트 중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에 초기부터 가담했던 사람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영향으로 1921년 몽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동투르키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비에트는 이를 진압하고, 중국 군벌을 내세워 우룸치(Ürümchi)에 정권을 수립했다. 그 뒤 카슈가르에서 제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933. 11~1934. 2)이 수립되지만 금새 진압되었다. 동투르키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티베트는, 중국 군벌이 한두 차례 동부지방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약 반 세기 동안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488-9)


"1942년 말 일부 칼미크(Kalmyk)인들은 스탈린의 압제로부터 공화국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소비에트가 돌아왔을 때, 칼미크 자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무너졌다(1943. 12. 27). 칼미크는 배신자로 찍혔고, 칼미크 몽골족 전체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사할린 섬 등지의 〈특별 정착촌〉(원래는 강제 수용소로 건설되었던 곳이다)으로 추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가 독일로부터 크림 반도를 되찾은 직후, 1944년 5월 17일~18일, 그곳의 타타르족은 모두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도중에 약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비에트 정부는 크림 반도 타타르족의 역사와 문화, 언어 등 그들의 정체성 모두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동투르키스탄에서는 두번째로 공화국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1945년 여름 동투르키스탄 북부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티베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다."(498-9)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극단적인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의 영향이면 무엇이든지 거부했지만, 근대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만큼은 받아들였다." "몽골과 중국의 공산 혁명가들은 1949년 이전에 이미 몽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3일, 모택동은 몽골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1949년 말까지는 유지되었다. 그 해 중국 공산군이 그곳으로 진군해 공화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다시 신강 식민지로 병합했다. 티베트인들은 갈수록 힘을 키워가는 중국에 대해 민감해졌다." "1950년~1951년, 중국이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은 병력과 무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티베트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중국은 주변 나라들을 새로운 공산주의 제국에 편입시킨 뒤 명목상 〈자치주〉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시스템을 표면적으로 모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명백한 중국화 노선을 채택하였다."(501-2)


CHAPTER 12 ─ 다시 태어나는 중앙유라시아 


"중앙유라시아에서 힘의 열세와 빈곤, 쇠퇴, 외국 의존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어권인 남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와 서남아시아(이란과 쿠르디스탄)뿐만 아니라 근동과 파키스탄도 주로 종교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독재정치의 치하에 놓여 있었다. 전체 지역의 힘의 열세로 인해 인접한 서부 중앙아시아(과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상황 또한 힘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지배 하에 남아 있던 중앙유라시아 나라들은 여전히 독립을 얻지 못했다. 카프카스 북쪽의 칼미크, 투빈(Tuvin), 알타이, 사카, 에벤키, 체첸 등이 그러했다.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새로운 대중추수적 독재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또다시 내외의 비판 세력을 위협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은 여전히 동투르키스탄, 내몽골, 티베트 지역에 군사적 점령 상태를 지속하였고,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대 중앙유라시아 경제가 전반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데에는 러시아와 중국 양측의 직접적인 책임이 크다."(536)


"소비에트 연방이 막을 내리면서, 카프카스의 나라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대부분의 소비에트 중앙유라시아 국가들도 독립을 이루었다. 폰틱 스텝 지역 서부의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독립했지만, 폰틱 스텝의 동부 지역부터 남쪽으로 흑해의 아조프 해에 이르는 지역,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에서 남쪽으로 아스트라한(Astrakhan)의 카스피 해에 이르는 지역은 러시아에 남았다. 이 지역들 중 일부는 대체로 러시아에 동화되었지만, 다른 많은 지역들, 특히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 즉 볼가 강 하류 및 카프카스 산맥 사이 북부 카프카스 스텝 지역의 몽골-칼미크어권 공화국을 포함하는 지역은 문화적으로 러시아에 동화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수많은 러시아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도 모두 독립했다. 이들 나라들은 가까스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고, 대체로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542-3)


에필로그 ─ 야만인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대개 폭력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오해가 〈야만인〉이라는 관념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제국 혹은 왕국은 모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설립되었다. 길고 피비린내나는 배반과 음모의 막장드라마를 거쳐야 했다. 제국의 기초가 서고 나면,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난다. 거의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유명한, 혹은 가장 유명하지 못한 사례는 바로 로마인이다. 그들은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너무나도 악독한 방식으로 대중적인 흥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해서 비난 받은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죽인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도 있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순전히 잔인성과 가차없는 공격성만 놓고 보자면,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나 페르시아, 중국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566-8)


"스키타이와 스텝 지역 민족들에 대한 오해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가난한 유목민(needy nomad)〉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그들 스스로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해서 농업 생산품, 옷감, 기타 주변 정주민들이 만들어낸 물건에 의존했고, 그것을 탐냈다는 것이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이 무역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물과 이웃 제국의 〈선진적인〉 상품을 거래해서 필요한 것, 혹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힘으로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침략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한 니콜라 디 코스모의 비판은 아주 정확했다. 그는 문헌 자료나 고고학적 발굴 자료 모두 이러한 이론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는 민족들과는 평화롭게 무역을 하고 세금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하게 밝혀졌다."(570)


"유목민들이 정말로 강력하고 호전적인 야만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만약 평화를 사랑하는 정주민들과 단지 교역만을 언했다면, 왜 정주민들이 만리장성을 쌓고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고대 중국 사료가 흉노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 훈족을 설명하는 그리스의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정주 지역의 일부 사람들(특히 국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국가에 사는 것보다 유목민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기가 훨씬 쉽고도 자유롭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앙유라시아인들에게 백성과 권력과 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유일한 길은 성벽을 건설해서 국경 도시 무역을 제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필요한대로 스텝 지역 민족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국경에서 멀리 쫓아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정복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정복지 백성들이 이방인에 동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578, 582-4)


"일반적으로 우리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의 역사나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옳거나 그른 행위를 결정했던 정황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충분히 알고 보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중앙유라시아 국가들이나 주변 정주 제국의 국가들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앙유라시아의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강했고, 혹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전쟁에 특히 능숙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도시인도 있었고 시골 사람도 있었고, 강한 사람도 있었고 약한 사람도 있었고, 악독한 놈도 있었고 신사적인 사람도 있었고, 술꾼도 있었고 술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착한 사람도 있었고 악한 사람도 있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도 정확히 똑같이 그 사이에 있을 따름이었다."(609,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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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 사계절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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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초원 내부의 역사는 최상의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여러 투르크-몽골 집단들의 역사이자 가축을 방목시키기 위해 한 목지에서 다른 목지로 끊임없이 옮겨다닌 그들의 이동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이리저리 오가는 그들의 이동은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몇 세기가 지난 뒤에야 완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동안 그들은 신체적 외형이나 생활방식조차 서서히 새로운 지역에 적응해갔다." "앗틸라의 훈족은 불가르인Bulgar(Bolgar)에 의해, 그리고 그들은 다시 아바르, 헝가리인, 하자르, 페체넥, 쿠만, 칭기스칸 무리에 의해 차례로 대체되었다. 이슬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란과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투르크인들에게서 일어난 이슬람화와 이란화의 과정은 중원 제국의 정복자인 투르크·몽골·퉁구스계 정복자들에게서 일어났던 중국화의 과정과 완전히 짝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륙 아시아는 민족들의 자궁(vagina gentium) 혹은 아시아의 게르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26, 32)


1부 13세기까지의 유라시아 초원 세계


1. 초원의 초기 역사 - 스키타이와 훈 


"앗시리아 연대기와 함께 그리스 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과 700년 사이에 키메르인들은 투르키스탄과 서부 시베리아에서 온 스키타이로 인해서 남러시아 초원에서 쫓겨났다. 그리스인들에게 스키트Scyt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람들은 앗시리아인이 아쉬쿠즈Ashkuz라고 부르고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들은 사카Saka라고 부른 사람들이었다. 호칭에서 추측될 수 있는 것처럼 스키타이는 이란인 계통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초원에 있던 '이란인들의 원주지'에서 유목하고 있었고, 이란 고원의 남부에 거주하는 그들의 형제 민족인 메데스(메디아)와 페르시아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앗시리아와 바빌론문명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던 북방의 이란인들이었다. 스키타이는 메디아-페르시아Medo-Persia의 신앙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킨 역사적인 마즈다교Mazdaizm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개혁에서도 역시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42-3)


"이란계 유목민─스키타이와 사르마트─이 초원의 서부인 러시아 남부는 물론 투르가이와 서부 시베리아를 지배할 때, 동부는 투르크-몽골계 종족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지배적인 종족은 중국에 흉노로 알려진 사람들로서, 마스빼로는 현재 북경의 서부와 서북붕 성립되었던 '북융北戎'이 호胡의 하나였다고 추정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가 통합되어 강력한 국가를 이룬 것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선우單于라고 불리던 군주가 있었는데, 그 완전한 칭호는 중국어로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로 전사되며 중국인들은 이를 '하늘(天)의 당당한 아들'이라고 번역했다. 아마도 투르크-몽골어의 어근에 따르면, 탱리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의 탱그리tengri 즉 하늘(天 ; 神)의 전사에 해당된다. 선우 밑에는 좌우도기왕左右屠耆王 즉 좌우현왕左右賢王이 있었다. 한자로 음사된 도기屠耆는 '올바른, 충실한' 등의 의미를 갖는 투르크어 'doghri'와 연관되어 있다."(62-3)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 역사무대에 가공할 만한 큰 세력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진나라(기원전 221-206)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다." "기원전 177-176년경 두만선우頭曼單于(기원전 약 210-209)의 아들이자 그의 계승자인 묵특冒頓(기원전 209-174)은 서부 감숙의 월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해서 그를 정복했다고 의기양양해 했다.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노상(기원전 174-161)은 월지의 위협을 완전히 끝내고 그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그를 감숙에서 쫓아내 서쪽으로 이주하게 하였고, 결국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고원에서 기원한 민족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월지月氏라는 이름─어쨌든 그러한 형태로─은 단지 중국어 전사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동양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를 토하리Tokhari와 동일시하려 했고, 기원전 2세기 투르키스탄에서 박트리아로 이주해옴으로써 그리스 사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 종족은 그들에게는 인도-스키타이인으로 이해되었다."(71-3)


"중국의 사서는 박트리아의 월지가 기원후 1세기에 거대한 쿠샨 왕조(중국어로 귀상貴霜)을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 쿠샨은 기원전 128년경 박트리아를 분할했던 5개 씨족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흉노의 첫번째 공격이 아시아의 이후 운명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흉노는 감숙에서 월지를 쫓아냄으로써 멀리 인도와 서아시아까지도 느껴지는 반향의 연쇄를 시작하였다. 헬레니즘 세계는 아프가니스탄을 잃어버렸고 그 지역을 정복한 알렉산더의 자취는 완전히 일소되어버렸다. 파르티아의 이란은 한동안 동요되었고 감숙에서 쫓겨 나온 부족들은 카불과 인도 북서부에 예기치 않았던 제국을 건설하였다. 우리가 다룰 역사는 늘 이런 것이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9-81)


"220년 후한 왕조가 내란으로 사라졌을 때, 북방 초원의 유목집단들은 이미 중국 군대에게 계속 패했기 때문에 너무나 견제당하고 약화되어서 상황을 이용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인도-유럽계의 타림 오아시스 역시 북중국의 패자 위魏(220-265)에게 조공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대한 흉노 제국이 붕괴되고 그를 대체한 선비 역시 중국 변경을 공격할 만큼의 충분한 힘은 갖고 있지 못했다. 4세기 거대한 야만인의 침공─5세기 유럽의 '민족 대이동'(Völkerwanderung)과 흡사한─이 시작된 것은 초원으로부터의 어떤 위협도 중국을 위협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이런 침입은 유럽처럼 야만인이 사는 배후지역에서 일어난 소란에 의해 촉발되었거나 아니면 앗틸라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단지 중국의 힘이 쇠퇴한 것에 기인하였는데, 이런 상태가 그때까지 중국 변경을 따라서 야영하며 존재하던 번병화된 야만인들을 진공속으로 빨아들였다."(107-8)


"하루가 멀다하고 왕국들이 연이어서 무너지고 있는 하루살이 부족들 옆에서 나머지를 흡수함으로써 북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한 부족─타브가치 또는 중국어로 탁발─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부르군드·비시고트·롬바르드 이후에 살아 남아 그들의 폐허 위에 카롤링거 제국을 세움으로써 로마의 과거와 게르만의 현재를 연결시킬 운명에 있었던 프랑크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해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113-4)


2. 중세 초기 - 돌궐/위구르/거란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후예인) 돌궐은 유연에 예속된 부족 중의 하나였는데, 그 부족은 공통의 언어를 갖는 민족집단 전체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뻴리오는 〈중국어의 돌궐은 몽골(유연)어로 Türk의 복수형인 Türküt를 나타내고 문자상으로 그것은 '강하다'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중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의 토템은 늑대였다. 6세기 초 돌궐은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대장장이 일)에 종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 중국 왕조 수隋가 3세기 이상의 분열을 재통일했던 바로 그때(589), 중앙아시아는 거대한 두 개의 투르크(돌궐)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동돌궐 제국은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했고, 서돌궐 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으며, 페르시아와는 옥서스와 메르브 강 사이 즉, 옥서스 강 남쪽을 따라가는 경계로 구분되었다. 힌두쿠시 산맥 북부의 모든 토하리스탄이 정치적으로 투르크의 판도 안에 들어왔다."(139-40, 146)


"중국 당조가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목적을 성취한 것처럼 보였을 때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유약한 군주 고종의 치세 후반기인 665-683년 사이 이 지역들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665년부터 서돌궐의 두 집단(노실필과 돌육)은 중국에서 임명한 카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하였다. 다음으로는 당시 야만인이나 크게 다를 바 없던 티베트인(토번吐蕃)들이 타림분지로 밀려들어와 안서사진(카라샤르·쿠차·호탄·카쉬가르)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670). 더 중요한 것은 630년 태종에 의해서 멸망한 동돌궐이 옛 카간 씨족의 후손인 쿠틀룩Qutlugh('행운'을 의미)의 지휘 하에 부흥한 것이다." "쿠틀룩을 계승한 사람은 동생 묵철默啜인데, 그가 바로 동돌궐에게 최고의 절정기를 가져온 카파간 카간(691–716)이었다." "카파간 카간 때 투르크는 다시 한 번 가공할 만한 통합을 이루었고 돌궐 대제국이 거의 완전하게 재건되었다."(169, 174, 177)


"한자로 차비시車鼻施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투르크인 왕 또는 타쉬켄트의 투둔(tudun)은 중국에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743, 747, 749). 그러나 750년 그때 쿠차의 절도사였던 고선지는 변경의 방어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투둔을 꾸짖었다. 고선지는 타쉬켄트에 도착하여 투둔의 목을 베었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고선지의 폭력적인 행동은 서역에서의 반발을 초래했다. 751년 7월 고선지는 투둔의 아들과 카를룩 투르크인 그리고 소그디아나에 있던 아랍 주둔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탈라스 강가 즉 현재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잠불) 근처에서 패배했다. 이 날 이후로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무슬림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탈라스에서 중국이 당한 재난은 현종 말년에 일어난 내분과 혁명이 없었더라면 다시 복구되었을지도 모른다. 8년에 걸친 내전(755-763)의 희생물이 된 중국은 단 한 번의 패배로 중앙아시아의 제국을 상실해버렸다."(191-2)


"위구르는 이란 또는 '외곽 이란'으로부터 마니교를 들여오면서 역시 같은 지역으로부터 소그드문자도 차용했는데, 이 소그드문자는 시리아문자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위구르인들은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9세기에는 이 문자가 고대 투르크(돌궐)의 오르콘문자를 대체했고,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민족문학을 만들어냈다. 가장 초기의 투르크 문헌들은 이란어로 된 일부 마니교 경전과 산스크리트어·쿠차어·중국어로 된 많은 불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위구르는 다른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발전했고, 칭기스칸 시대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구르는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힘을 잃었던 게 분명하다. 840년 그들의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고 카간이 살해되었으며 그들의 제국은 훨씬 더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던 투르크인, 즉 예니세이 강 상류─미누신스크와 훕스굴Köbsgöl 사이─에 살던 키르키즈인들에게 정복되었다."(197-8)


"키탄Qitan 혹은 거란(契丹)은 405-406년부터 중국의 연대기에 기록되었는데, 당시 그들은 요하와 그 지류인 시라무렌 강 사이에 있는 요서 지방 즉, 현재의 열하에 살고 있었다." "거란은 10세기 초 야율耶律(씨족명) 아보기阿保機(926년 사망)라는 정력적인 수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에도 여전히 요하의 서북 유역과 그 지류인 시라무렌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야율씨가 칸의 권위를 세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일의 사가들에 따르면, 아보기는 부족민들에게 비록 피상적이긴 했지만 중국적인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947년에는 그의 계승자가 요遼라는 왕조명을 붙였다." "아보기는 926년에 동쪽으로 퉁구스-고구려계 왕국인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는데(그는 이 원정 도중에 사망),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북위 40도 이북)와 요동 동부의 만주(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여순旅順 항구까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만주 동북부의 우수리강 삼림지대의 퉁구스계 여진女眞도 거란에 복속하였다."(202-4)


3. 13세기 투르크인들과 이슬람 


"사만조의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Isma'il ibn Ahmad(892-907)는 893년 이래 동북방으로 탈라스의 투르크 지역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가 고대 사산조의 군주들이 옥서스(아무다리아) 강 북안에 대해 예방적인 차원의 습격을 행하던 정책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시르다리아(작사르테스)의 파수꾼─고대 이란의 군주들이 '라인 강의 파수꾼'이었던 것처럼─에게는 이제 우상숭배자이든 네스토리우스 교도이든 투르크 세계에 대한 페르시아 이슬람의 전쟁이라는 종교적인 구실이 덧붙여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변경지역의 투르크 유목집단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사만조가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던 이 같은 개종은 도리어 그 추진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였다. 그 까닭은 그로 인해 투르크인들에게 무슬림 사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적지 않은 투르크 수령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개종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하였다."(220-1)


"999년 경 동부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이란 영역은 이제 두 개의 무슬림 투르크 세력, 즉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한 카쉬가리아의 카라한조 칸들과 후라산을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조 술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1040년 5월 22일 가즈나조는 메르브 근처의 단다나칸Dandanaqan 전투에서 또 다른 투르크 집단인 셀죽에게 패배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로 물러났다. 그러자 셀죽의 칸 토그릴 벡Toghril Beg은 페르시아의 나머지 지역을 복속시키고, 1055년에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조의 칼리프로부터 동방과 서방의 군주 즉, 술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거대한 투르크 제국은 곧 그 영역을 아무다리아에서 지중해까지 확장하였고, 트란스옥시아나에 있는 카라한조의 군소 칸들의 독립을 감내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때 이후로 카라한조는 셀죽 술탄들의 속료로서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지배하게 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는 셀죽 제국의 속방에 불과하게 되었다."(223, 227)


"이슬람으로 개종한 지 얼마 안되는 유목씨족들 가운데 가장 개화되지 않고 전통도 갖지 못했던 유목집단인 셀죽은 단번에 동부 이란의 패자가 되었다." "토그릴 벡은 아랍-페르시아 세계로 더욱 깊숙이 침투해 들어감에 따라 이 고대 문명국가들의 행정적 관념들을 더 잘 익히게 되었다. 그들이 그를 한 집단의 지도자에서 한 국가의 지도자로 바꿈으로써, 그는 동족의 다른 수령들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장악하고 정상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군주로 변신해갔다." "1058년 칼리프는 토그릴 벡에게 '동방과 서방의 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현세의 대리인이라고 함으로써 이 같은 '기정 사실'을 공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구즈집단의 보잘 것 없던 수령은 자신의 집단과 씨족과 가족에 대해 기강을 확립하고 정규국가의 지도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아랍 칼리프조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는 순니파 세계에서 칼리프조의 구원자이자 복구자라는 찬미까지 받게 되었다."(231-3)


"1040-1055년의 셀죽 정복은 그 나라의 문을 유목민들에게 열어준 것이었다. 범이슬람권의 술탄─아랍의 말릭(malik)이나 페르시아의 샤(shah)─이 된 셀죽 출신의 지도자들은 이제 그들의 전례에 충동되어 동일한 모험을 하려는 중앙아시아의 각종 투르크-몽골 씨족들에 대하여 문을 닫고 빗장을 치고 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페르시아인이 된 셀죽인들은 투르크인으로 남아 있던 투르크인들에 대하여 페르시아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를 성취하려던 그들의 의지나 아무다리아 언덕에서의 '라인 강의 파수꾼'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호레즘·칭기스칸·티무르의 침공을 조달한 병참장교로서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 셈이다. 그들이 사산조 페르시아 국가나, 아니면 9세기 압바스 제국이 만들어냈던 '신사산조 체제'(Neo-Sassanianism)의 강건한 틀을 회복시키는 데 실패한 원인은 지난날 투르크멘의 유산인 지배가문 내부의 고질적인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240)


"'우상숭배자'였고 중국화된 몽골의 세계에 머물던 카라 키타이[동투르키스탄에 건설된 새로운 거란 제국]와 달리 호레즘(오늘날의 히바)의 샤들은 무슬림 투르크 세계를 대표하였고, 1157년 셀죽의 산자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에는 특히 그러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란 동부는 정권의 가장 중요한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1207년 호레즘의 무함마드는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점령하고 카라 키타이 대신 자신의 종주권을 표방하였다. 이렇게 해서 호레즘 제국은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몽골의 침략이 있던 시점에 호레즘 제국은 이제 막 창건되어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칭기스칸 침공시에는 아직 국가로서의 골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단지 그 맹아 또는 제국의 윤곽만이 존재했던 셈이다. 따라서 칭기스칸은 북중국의 금나라와 같은 진정한 국가와 부딪쳤을 때 호레즘 제국과의 전쟁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251, 254-6)


4. 6~13세기의 러시아 초원 


"아바르[몽골계 민족 유연]의 쇠퇴 이후 유럽에서 투르크-몽골인의 주요한 역할은 당분간 불가르인들이 담당하였다. 투르크계에서 기원하고 훈족의 쿠트리구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민족은 7세기 2/4분기 동안에 코카서스의 서북방, 즉 쿠반 계곡과 아조프 해 사이의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9세기 중반 차르 보리스Boris(852-889)의 개종과 점증하는 슬라브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불가르인들은 기독교 유럽에 통합되어버렸다. 아바르의 옛 영토는 9세기 말에 마자르 즉, 헝가리인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헝가리의 왕 바이크Vaik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 스테펜의 치세(997-1038) 동안에 헝가리는 새로운 소명을 띠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유럽의 공포였지만 이제는 아시아적 야만주의의 엄습을 막는 가장 확실한 수호자, 즉 '기독교권의 방패'가 된 것이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에서부터 17세기 오스만의 축출에까지 마자르 민족은 길고 영웅적이며 영광된 십자군의 생애를 살게 되었다. 265-6, 299)


"7세기 초에 러시아 초원의 서남부와 다게스탄은 하자르 제국의 흥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하자르는 탱그리를 숭배하며 카간과 타르칸tarqan들의 지배를 받는 투르크 민족이었다. 바르톨드는 그들을 서부 투르크, 더 정확하게 말해 서부 훈족 계통의 한 분파로 보았다." "비잔티움 궁정은 하자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자르는 유럽에 있던 투르크인들 가운데 가장 문명화되었고, 이는 마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위구르가 그러했던 것과 비슷하다. 비록 그들이 간혹 주장되듯이 정주적 혹은 농경적 생활방식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잔티움과 아랍세계와의 접촉에 힘입어 교역이라든가 상대적으로 높은 문화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풍요하고 정돈된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9세기 들어 유대교를 믿는 이 문명화된 투르크인들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동족 집단들에 의해 일소될 운명에 처했다. 결국 1030년 하자르는 정치적인 세력으로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269-70, 272)


"페체넥은 마르크와르트에 의하면 한때 서돌궐 연맹의 일부를 구성하다가 카를룩 투르크인들에 의해 시르다리아 하류와 아랄 해 방면으로 밀려난 투르크 계통의 부족이었다. 934년 그들은 헝가리인들의 비잔티움 제국령인 트라키아에 대한 공격에 동참하였고, 944년에는 이고르Igor 공의 비잔티움 공격에 참여하였다." "비잔티움은 아시아의 무슬림 투르크인들과 싸우기 위해 유럽에 있는 우상숭배 투르크인들로부터 용병을 모집했지만, 우상숭배 투르크인들의 동족관념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강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에 비잔티움의 비극이 있었다. 1071년 말라즈기르트(만지케르트) 전투가 있기 직전, 페체넥 군사들이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를 버리고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제 비잔티움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모든 투르크인들과 맞서게 되었다. 즉 유럽에서는 우상숭배 투르크인들이, 아시아에서는 무슬림 투르크인들이 혈연적인 유대로 연합하여 제국에 대항한 것이다."(274-5)


"투르크어로 킵착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러시아는 폴로브치로, 비잔티움은 코마노이Komanoi로, 아랍 지리학자인 이드리시는 쿠마니Qumani(쿠만Cumans)로, 헝가리인들은 쿤Kun(코운Qoun)이라고 불렀다." "1054년 러시아 연대기들은 그들이 흑해 북방의 초원에 나타난 것과, 아울러 킵착이 앞으로 밀어낸 오구즈의 출현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오구즈가 페체넥을 격파한 것, 그리고 오구즈가 발칸 원정과정에서 비잔티움과 불가르에 의해 격파된 것(1065년과 그 뒤) 등의 사건에 힘입어 킵착은 러시아 초원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킵착은 1222년 칭기스칸의 부장들이 침공할 때까지 러시아 초원의 패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 킵착 수령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킵착은 후일 몽골 지배 하의 러시아에 자신들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 건설된 칭기스칸 일족의 영역이 킵착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277-8)


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


5. 칭기스칸 


"제한적이고 역사적 의미의 몽골인들은 오늘날의 외몽골 동북 지방, 즉 오논 강과 케룰렌 강 사이에서 계절이동을 하고 있었다. 돌궐이 흥기하기 전에 투르크 민족들이 있는 것을 보았듯이, 칭기스칸과 함께 그 이름을 전집단에게 주게 될 몽골부족의 출현에 훨씬 앞서 몽골어를 사용한 것이 거의 확실한 민족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몽골어를 사용하던 민족들 가운데 3세기의 선비, 5세기의 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6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유럽의 아바르를 꼽았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큰 역할을 했던 거란도 비록 퉁구스 언어들과의 접촉으로 현저하게 구개음화되기는 했지만 몽골어 방언을 사용하였다. 이들 여러 '원原몽골'(proto-Mongol) 민족들이 광대한 영역을 구축하긴 했어도 그 어느 것도 칭기스칸 국가의 몽골인들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12세기에 몽골인들은 수많은 '울루스ulus'로 나뉘었는데, 블라디미르초프에 의하면 울루스는 부족인 동시에 작은 나라를 뜻한다."(286-7)


"칭기스칸은 자신의 권력을 부족들에게 확인받기 위하여 최후의 항복을 받을 때까지, 또는 마지막 처형을 집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1206년 봄 오논의 상류에서, 이미 복속한 모든 투르크-몽골 사람들 즉, 오늘날의 외몽골 지방에 있던 유목민들을 쿠릴타이에 소집하였다. 이때 그는 모든 몽골과 투르크 부족들에 의해 지고의 칸으로 선포되었고, 『몽골비사』는 그를 카간qaghan이라고 불렀다. 카간은 5세기 유연의 칭호로 그 뒤를 이은 몽골 지방의 모든 군주들, 즉 6세기의 돌궐과 8세기의 위구르 군주들이 채택한 칭호였다."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 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 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319-20)


"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 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들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수령들, 아니 적어도 야삭yasaq─문자 그대로 칭기스칸 국가의 '규례' 또는 보통법전을 뜻하며 가혹한 형벌이 특징이다─을 충실히 준수하는 자들에게 약탈은 개인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군 시기 쿠투쿠는 금나라 창고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자기 몫으로 빼돌리지 않았다. 문명에 막대한 재난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당혹감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행위였다."(338)


"몽골인들은 분명히 중국에서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트란스옥시아나와 동부 이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 까닭은 순전히 그들이 이교도로서 또는 오늘날의 우리식 표현으로는 야만인으로서 일으킨 공포심이 여러 세기 동안 그들과 이웃으로 살아온 중국 영토 안에서보다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지역에서 지방주민들을 더 많이 활용한 듯하다.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몽골인들은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비하고 칼끝으로 위협해 해자와 성벽으로 몰아붙였다. 때때로 이 가련한 사람들은 열 명에 하나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고, 수비대는 평야를 뒤덮도록 배치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칭기스칸 국가의 거대한 군대에 위협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책으로 몽골인들의 작은 파견대도 항복을 강요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동원된 인간집단은 소용이 다한 뒤에는 살해되었다."(353-4)


"학살은 잊혀졌고 칭기스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식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시대에는 분명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부드러워졌고, 14세기 위대한 여행가들과 같은 성취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366-7)


6. 칭기스칸의 세 후계자들 


"칭기스칸의 네 아들은 그의 생전에 각자 울루스ulus(일정수의 부족)와 유르트yurt(그 부족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목지)를 속령으로 받았다." "유목민들의 목영지인 투르크-몽골 초원만이 분배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북경과 사마르칸드 주변의 농경지는 제실帝室의 영토로 남겨졌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은 정주민족의 나라들을 분할하여 각자의 소유로 한다거나, 각기 중국의 황제, 투르키스탄의 칸, 혹은 페르시아의 술탄이 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260년 이후 그들의 후계자들이 했던 그러한 생각은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초원의 분할이 칭기스칸 제국의 분할까지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형제들이 화목했던 체제 아래에서는 계속되었다. 더욱이 바르톨드가 지적한 대로 유목민의 법에 의하면 카간의 절대권력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에게보다는 황실가문 전체에 속하는 것이었다."(368)


"1241년 12월 11일 대칸 우구데이(칭기스칸의 셋째 아들)가 죽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일어난 계승 문제로 인해 몽골인들은 헝가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앗틸라 이래 서방이 직면한 최대의 위험에서 서구를 구하였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242년 봄 바투는 불가리아를 경유하여 흑해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고, 거기서부터 왈라치아와 몰다비아를 지나 1242~1243년 겨울 볼가 강 하류에 있는 자신의 거영지에 도착하였다. 1236-1242년 몽골전쟁의 결과, 볼가 강 서쪽 조치의 영지는 상당히 확대되었다. 칭기스칸의 유언에 그의 울루스는 몽골의 말 발굽에 밟힌 이르티쉬 서쪽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게 되어 있었고, 이제 그들의 말 발굽은 이르티쉬부터 드녜스트르와 심지어 다뉴브 하구에까지 이르는 땅 위에 자국을 남겼다. 이 거대한 영역은 바투가 1236-1242년 전쟁에서 명목상이나마 지휘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합법적으로 그의 것이 되었다."(387-8)


"(대칸으로 선출된) 구육은 칭기스칸 일족의 다른 지파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자 이를 근절시키려는 결심에서 장손인 조치가의 군주 바투와 충돌하였다. 1248년 초 그들의 관계는 매우 긴장되어 양측 모두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습영지인 이밀을 방문한다는 구실로 카라코룸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구육이 주색에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요절하기 전까지는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다. 중국 사료에는 구육의 죽음이 1248년 3월 27일에서 4월 24일 기사 안에 들어 있다. 그는 그때 겨우 마흔세 살이었다. 아마 이 죽음이 유럽을 절박한 위험에서 구하였을 것이다. 구육은 킵착의 칸(바투)을 패배시키는 것뿐 아니라, 플라노 카르피니도 증언하였듯이 기독교 왕국을 복속시키려는 꿈도 갖고 있었다. 하여튼 그는 주의를 특히 서방으로 돌린 듯하다. 그러나 톨루이(칭기스칸의 넷째 아들) 가문 왕자들의 즉위(처음에 뭉케, 그리고 누구보다도 쿠빌라이)로 인해 몽골의 주된 노력은 극동으로 향하게 되었다."(393-4)


"뭉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후계자 쿠빌라이처럼) 자신의 종족적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통치구조를 강화하고 몽골 제국을 위대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치세 초기에 (문자 그대로 그를 황제로 만든) 바투에 대한 그의 의무는 바르톨드가 지적했듯이 일종의 권력의 분할─명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실질적인 면에서─로 귀착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바투는 발하쉬 서쪽에서 실질적으로 독립적이 되었다. 그러나 바투의 죽음(늦어도 1255)으로 뭉케는 다시 한 번 몽골 세계의 유일하고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울루스나 칭기스칸 국가 속령의 여러 수령들은 조세를 면제받고 중앙 권려기관과 국고를 공유할 권한이 있다고 여겨왔지만, 뭉케는 이러한 관행을 금지시켰다. 만일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지속하였다면 몽골 제국은 극동·투르키스탄·페르시아·러시아의 칸국들로 분열되지 않고 비교적 통합된 나라로 남았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398-9)


7. 쿠빌라이와 중국의 몽골 왕조 


"몽골인의 관점에서 보면 쿠빌라이는 원칙상(설사 실제로는 아니었더라도) 칭기스칸 제국의 도덕적 통합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칸 칭기스칸과 뭉케가 지녔던 권위의 계승자로서 독립적인 여러 칸국들이 된 칭기스칸 일족의 속방들에 대하여 계속 복종을 요구하였다. 우구데이(카이두)가와 차가다이가에 순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쿠빌라이는 몽골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아우 훌레구가 통치하는 페르시아는 그에게 제국의 한 성일 뿐이었다. 페르시아의 칸 훌레구(1256-1265), 아바카Abaqa(1265-1281), 그리고 아르군Arghun(1284-1291)은 그의 눈에 '일 칸il qan' 즉 종속된 칸들, 그가 임명하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고위직 총독일 뿐이었다."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426-7)


"쿠빌라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통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도로를 보수하고 길을 따라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심었으며 정규역참에 대상들의 숙소를 지었다. 20만 마리 이상의 말이 다양한 역참에 분배되었고, 제국의 우편업무에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북경의 식량 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 중부에서 수도로 쌀을 가져올 대운하를 보수하고 완성시켰다. 기근과 싸우기 위하여 개봉의 송조에서 왕안석王安石이 완성시킨 바 있는 국가통제를 부활시켰다. 풍년에는 남는 곡식을 국가가 사서 공공 곡식창고에 저장하고, 기근이 닥치거나 값이 오르면 곡식창고를 열어 곡식을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공적부조도 조직되었다. 1260년의 칙명은 지방 수령들에게 늙은 학자, 고아,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을 구제하고 도움을 베풀 것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중국행정의 전통에 더하여 쿠빌라이의 심성에 불교가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결과임이 거의 확실하다."(427-8)


8. 차가다이가 치하의 투르키스탄 


"차가다이(칭기스칸의 둘째 아들) 칸국은 옛 구르 칸들의 카라 키타이 왕국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이는 카라 키타이처럼 몽골 지배 하의 투르크 지방 즉, 몽골령 투르키스탄이었다. 그러나 차가다이의 통치자들은 카라 키타이의 구르 칸들, 그리고 그보다 앞선 7세기 서돌궐의 칸들처럼, 서구식 또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식으로 어떻게 정규국가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를 위한 역사적 배경이 없었다." "차가다이의 아들들은 카쉬가르나 호탄 같은 타림의 오아시스에 결코 정착하지 않았으니, 그곳은 닫힌 정원이었고 그들의 가축과 기병에게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직인들이나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의 다소 이란화된 투르크인들 사이에 정착하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혼잡한 도시의 무슬림 광신주의와 폭도들의 불온은 그들의 유목민적 천성과 전혀 맞지 않았던 듯하다. 마지막 15세기까지 차가다이조는 계속해서 초원의 사람들로 남아 있었다."(466-7)


"중국이나 아랄-카스피 해 초원과 페르시아 쪽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쿠빌라이, 조치, 그리고 훌레구 가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차가다이조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목표로 삼았다. 이란의 저 반대편 끝, 아제르바이잔에 조정을 둔 페르시아의 군주들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차가다이조는 이를 틈타 바닥샨, 카불, 가즈니로 밀고 들어갔다. 서부 아프가니스탄에는 케르트가의 아프간-구르 왕조의 강력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토착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왕조는 페르시아 칸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던 차가다이조는 동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였고, 여기서 서북 인도로 이익이 남는 습격을 하였다. 이 시기에 술탄 알라 웃 딘 할지'Ala ad-Din Khilji(1295-1315)가 통치하던 델리의 제국은 차가다이가의 모든 공격을 분쇄한 실로 강력한 군사왕국이었다."(481)


9. 몽골 치하의 페르시아와 홀레구가 


"이란과 무간초원의 쿠라 강 하류와 아라스 강 하류에서 숙영하던 서부 몽골군은 여전히 전권을 장악한 장군들의 지휘 아래 있었다. 처음에는 잘랄 웃 딘의 왕국을 파괴한 초르마간(1231-1241,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다음에는 소아시아의 셀죽인들을 정복한 바이주(1242-1256)가 그들이었다. 서쪽의 속신들, 즉 그루지아의 왕공들, 소아시아의 셀죽 술탄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들, 그리고 모술의 아타벡들은 변경의 군사정부에 직접 종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그런 대로 라틴세계와 어느 정도 교섭이 있었다." "대체로 몽골의 종주권은 이 서남 국경지대에서는 산발적으로만 표현되었다. 초르마간과 바이주는 종속국가들을 강력히 통제하면서도 카라코룸 조정과 지속적으로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정은 거리 때문에 몇 달씩 계속 연기되었으며 종속국 왕자들은 칭기스칸 일족 분쟁의 모든 위험 속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탄원하기 위해 사신들처럼 그곳으로 가야 하였다."(493, 497)


"몽골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지 20년이 지나지 않아, 정규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그곳의 임시적이고 이중적인 통치체제(이란과 무간에서의 순수 군사통치와 후라산과 이라키 아잠에서의 재정행정)를 종결지으려고 생각하였다. 1251년 쿠릴타이에서 대칸 뭉케는 아우 훌레구에게 이란 총독직을 주었다. 훌레구에게는 페르시아에 여전히 존속하던 두 가지 신성한 권력, 즉 마잔다란의 이스마일리Isma'ili 이맘들의 영지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조를 진압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그에게 부과된 또 다른 임무는 시리아 정복이었다." "몽골군의 바그다드 내습은 1257년 11월에 시작되었다. 몽골군의 거센 공격으로 포위된 주민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의 병사들은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몽골인들이 중대별로 나누어 마지막 사람까지 죽였다. 1258년 2월 10일, 칼리프가 몸소 훌레구에게 항복하러 왔다. 몽골인들은 도시의 대부분, 특히 대모스크를 불태웠으며 압바스조의 무덤을 파괴하였다."(501, 504-5)


"훌레구는 시리아의 무슬림 지역을 복속시키려는 시도에서 실패하였는데, 그것은 사촌인 킵착의 칸 베르케의 위협으로 인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 러시아의 초원을 다스리던 칭기스칸 가문의 이 손위 지파는 아마 훌레구가 기독교에 호의를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이슬람을 아꼈을 것이며, 따라서 훌레구의 승리는 그를 경악케 하였다." "그러한 감정으로 베르케는 몽골 정복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기독교도들의 보호자였던 자기 사촌 즉, 페르시아의 칸에 대항하기 위하여 명목상으로는 몽골인들의 적일지라도 무슬림 신앙의 보호자들인 맘룩조와의 합세를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명백하였던 킵착 칸들의 적의와 그 뒤 차가다이 칸들의 적의는 곧 페르시아 칸국에 대한 포위로 귀결되었고, 페르시아 칸국은 코카서스와 아무다리아로부터의 지속적인 측면공격으로 마비되어 시리아 방면으로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칭기스칸 일족 사이의 이 내전은 몽골 정복에 종지부를 찍었다."(517-8)


10. 킵착 칸국 


"칭기스칸은 자기보다 6개월 앞선 1227년 2월경에 죽은 아들 조치에게 이르티쉬 서쪽의 평원을 주었는데, 이는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우랄스크, 아다지, 그리고 호레즘 본토(히바)였다. 조치의 둘째 아들 바투는 거기에다가 1236-1240년에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종주권과 더불어 옛 킵착과 불가르 영토 전역을 추가하였다. 또한 바투 칸국은 고대 스키타이가 지배하였던 유럽 지역 전역도 포함되었다." "바투의 형제들 가운데 오르다Orda는 가문의 최연장자이기는 했지만, 큰 역할이 없었던 탓에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에 속령을 받았다. 바투의 칸국은 역사상 킵착 칸국 또는 금장 칸국(알툰 오르두Altun Ordu)으로, 오르다의 것은 백장 칸국(차간 오르두Chaghan Ordu 또는 아크 오르두Aq Ordu)으로 알려지게 된다. 바투의 또다른 형제 샤이반은 오르다의 북쪽을 몫으로 받았는데, 훗날 샤이반조는 그들의 영역을 서부 시베리아로 확장하였음에 틀림없다."(552-4)


"킵찬 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계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아부 사이드로 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비잔티움 문화에 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 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킵착 칸들의 이슬람화는 상황을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하였다. 그들의 이슬람화는 오히려 그들이 이란·이집트의 고대문명을 정말로 공유하지 못한 채, 마침내 서구 세계로부터 그들을 갈라내 (훗날의 오스만인들처럼) 유럽 땅에 천막을 친 결코 동화되지 않을 외국인들로 만들었다."(557)


"1377-1378년에 톡타미쉬는 티무르의 도움으로 백장 칸국의 칸이 되었다. 톡타미쉬는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하여 킵착 칸국의 세력을 완전히 복구하였다. 금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통일, 모스크바 국가의 절멸은 그를 새로운 바투, 새로운 베르케로 만들었다. 그의 부흥은 칭기스칸 일족이 중국에서 쫓겨나고 페르시아에서 제거되고, 투르키스탄에서 절멸된 지금 더 큰 충격력이 있었다. 그 유명한 가문에서 톡타미쉬는 홀로 굳건히 섰다. 그는 몽골의 위대함의 복구자로서 당연히 조상 칭기스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요청되고 있음을 느꼈으며, 그가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의 재정복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이것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20년 전이었다면 그는 당시 두 지역을 휩쓸던 무정부상태 속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해 뒤에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는 일류 지도자, 실로 톡타미쉬를 도와 통일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 티무르의 소유로 돌아갈 운명이었다."(572-3)


3부 최후의 유목제국들


11. 티무르 


"쿠빌라이의 휘하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 칸국 아래의 투르크인들은 비엔나 성문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 휘하의 투르크인들도 이집트의 강가에 다다랐다. 오직 차가다이의 영지인 투르키스탄의 '중원왕국'에 있던 투르크·몽골인들만이 칭기스칸 일족의 세 울루스에 둘러싸여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서쪽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두르고 있던 페르시아 국가가 사라졌고, 킵찬 칸국이 지배하던 서북방도 쇠퇴하였다. 고비사막 방향으로도 '모굴리스탄'이 폐허화되면서 길이 열렸고, 델리의 술탄국도 일시적으로 붕괴되어 과거 차가다이 칸국 때처럼 인더스 강을 방어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강요되었던 휴식을 보상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티무르의 서사시─계속된 배반과 살육을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면─는 비록 종족으로는 투르크였지만, 그리고 비록 늦기는 했어도 몽골의 서사시의 일부였던 것이다."(590)


"동부 이란 원정에서 티무르는 유목과 조직적인 파괴체제를 통해 '사막화'(Saharifying) 과정의 적극적인 매체로 기능하였다. (몽골인들로 인해) 이미 취약해진 광대한 경작지를 파괴하고 그 땅을 초원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그들은 토지의 죽음을 가져온 무의식적인 공범자가 된 것이다." "서부 이란 원정에서 이븐 아랍샤가 전하는 끔찍한 장면들은 1221년 발흐·헤라트·가즈니에서 일어난 학살과 과련하여 칭기스칸 시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것보다 더 심하였다. 초기의 몽골인들은 단순한 야만인들이었지만, 티무르는 문화적 세례를 받은 투르크인이었고, 페르시아 시인의 열렬한 애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란문명의 꽃을 파괴해버렸으며,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을 겁락했던 것이다." "킵착 원정에서도 티무르는 금장 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으로만 만족했을 뿐, 자신의 정복을 확고히 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톡타미쉬는 권좌를 다시 회복하였다."(604, 607-8, 619-20)


"인도 원정에서 티무르는 통상 해왔던 대로 델리의 인도-무슬림 제국을 기초부터 흔들어놓고 그 나라를 완전한 무정부상태에 빠뜨렸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아무런 질서도 세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브라만교와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한 그가 정작 타격을 가한 것은 인도의 이슬람이었다." "1401년 맘룩조와의 대결에서 시리아를 폐허로 만든 티무르는 그곳에 여하한 종류의 통치체제를 세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빠져나왔고, 그곳은 즉시 맘룩에 의해 다시 점거되었다." "오스만이 앙카라에서 겪은 갑작스러운 재난─1403년 술탄 바야지드의 패배와 사망─은 비잔티움 제국에게 반세기 동안의 숨돌릴 틈을 주었다(1402-1453). 티무르의 금장 칸국에 대한 승리로 모스크바 국가가 혜택을 입었듯이, 티무르의 서아시아 정복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비잔티움이었다. 발칸 기독교권의 이 같은 행운은 오스만을 눌러버린 티무르가 그의 재기를 막기 위해 여러 아미르국들을 복원함으로써 더욱 커졌다."(627-8, 631, 636)


12. 러시아의 몽골인 


"킵착 칸국은 세 개의 '소칸국'들, 즉 크리미아·카잔·아스트라한 칸국으로 나뉘었다. 카잔이 러시아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다. 모스크바 국가의 짜르였던 '공포왕' 이반 4세(1533-1584)는 1552년 6월 강력한 포병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포위하였다. 10월 2일,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되어버렸다." "1554년 공포왕 이반은 아스트라한으로 3만 명의 군대를 보내 당시 집권가문의 일원(즉 퀴췩 무함마드의 후손)이었던 데르비쉬Dervish라는 인물을 조공을 바치는 칸으로 세웠다. 1556년 봄 러시아의 군대가 다시 나타나 데르비쉬를 쫓아내고 아스트라한을 합병하였다. 칭기스칸 일족의 최후 칸국인 크리미아의 기레이 왕조는 오스만의 종주권을 받아들여 200년 이상을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에카테리나 2세가 포템킨Potemkin이 지휘하는 7만 명의 군대를 크리미아로 보내 합병하였다(1783). 이렇게 해서 프랑스혁명 전야에 유럽에 있던 칭기스칸 일족의 마지막 세력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662-4)


13. 샤이바니조 


"페르시아, 중국, 트란스옥시아나, 남러시아에 있던 칭기스칸 일족들이 쇠퇴하고 소멸해감에 따라 이 집안의 다른 지파들, 즉 북방의 초원에 남겨져 잊혀졌던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하고 역사상의 제국들 중에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샤이바니조이다. 14세기 중반경 샤이반 일족에 복속하던 유목민들은 외즈벡Özbeg─혹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불리듯 우즈벡Uzbeg─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는데, 그 이름으로 역사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투르키스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후라산의 주인이 된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벡 제국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4세기 반 동안(1055-1502) 수많은 투르크 및 몽골 군주들에게 복속했다가 이제 막 독립을 회복한 페르시아와 충돌하였다. 백양부의 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넘어뜨리고 권좌에 오른 민족왕조 사파비(1502-1736)는 이제 우즈벡으로부터 후라산을 빼앗아옴으로써 이란의 재통합을 완성시키려고 하였다."(665-6, 671)


"사파비와 우즈벡은 사실상 모든 면에서 서로 반대였다. 하나는 열렬한 시어파였고 이란인이었지만, 다른 쪽은 확고한 순니파로서 몽골·투르크족이었다. 순니파의 영웅이자 칭기스칸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고자 했던 샤이바니는 사파비조의 샤 이스마일Isma'il에게 '이단적인' 시어파를 버리고 복속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만약 그러지 않을 경우 우즈벡은 〈검으로써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1510년 12월 2일 벌어진 전투의 승리자는 샤 이스마일이었다. 이 승리는 동방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란 독립의 회복자가 투르크·몽골세력의 부흥자를 죽였다는 사실─즉 위대한 사산조 제왕들의 후손이 칭기스칸의 자손을 패배시키고 죽였다는 사실─은 이제 시대가 변했고 오랜 세기에 걸친 침입을 끈질기게 참아왔던 정주민이 유목민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시작했으며 농경지가 초원보다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671-2)


14. 최후의 차가다이인들 


"16세기 차가다이계 마지막 칸들의 제국을 마치 쇠퇴하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유누스 칸이나 하이다르 미르자와 같이 고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 반대였음을 입증한다. 중국인들이 그 민족적 특징과 성격을 압살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하려고 했던 이 지방은 그 당시에는 이란·투르크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오는 각종 문화적인 훈기를 받아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다. 유누스 칸의 일생이 이를 입증한다. 시라즈의 학자에게서 공부를 배웠던 유누스 칸은 후일 쿠차와 투르판을 지배했다." "율두즈와 위구리스탄에 사는 부족들의 뿌리깊은 유목주의가 차가다이계 마지막 후예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차가다이가문의 지배가 남긴 최후의 결실은 카쉬가리아뿐만 아니라 쿠차나 카라샤르나 투르판과 같은 옛 위구르인들의 지방을 사마르칸드와 헤라트의 페르시아 혹은 이란화된 투르크문명과 연결시킨 것이었다."(691-2)


15.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 - 15~18세기


"오이라트는 칭기스칸 제국 시대에 바이칼 호 서부 연안에 살던 강력한 삼림 몽골인들이었다. 오이라트의 수령 마흐무드는 명의 영락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그것은 쿠빌라이 가문이나 동부 몽골의 다른 수령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조정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충분히 강화되고 몽골리아의 모든 부족과 왕족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강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 오이라트의 수령은 명조 통치자와의 관계를 서슴지 않고 단절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중국식 생활의 편안함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느슨해졌던 이 유목민들은 원래의 초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옛날의 강인함을 되찾았다. 더구나 이들은 오이라트, 즉 삼림지역에서 나온 서부 몽골의 부족들이었다. 그들은 오르콘이나 케룰렌 지역의 유목민들에 비해 칭기스칸 가문의 정복의 과실을 상대적으로 적게 맛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인 활력을 더 유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699-701)


"오이라트 혹은 서몽골의 쇠퇴가 동몽골의 칭기스칸 일족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동몽골은 종족 내부의 치열한 싸움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이 몽골 국가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족의 유산을 분배하는 관습에 있었다. 다얀의 제국은 비록 외국에 대한 정복전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고 팽창의 범위가 몽골리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칭기스칸 제국과 유사했다. 건국자가 사망한 뒤 여러 수령들, 즉 모든 형제와 사촌들은 차하르의 수령을 배출하는 분파의 지도자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일종의 봉건적 가족국가와 같은 것이었다. 이 같은 분할은 칭기스칸 후예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떠한 예보다도 더 철저한 분열을 초래하였다. 봉건적인 연대도 느슨해졌고 이와 동시에 최고의 칸이 배출되던 일파에 대해 마땅히 표시해야 했던 명목상의 복속도 약해졌다. 이렇게 동몽골은 다얀 칸이 등장하기 전의 혼란스런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706, 709-10, 712)


"원조가 붕괴한 직후, 즉 명조 초기에 후일 만주로 불리게 된 여진족은 숭가리 강과 동해 사이에 거주하면서 어느 정도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1세기 그들의 선조들처럼 그들은 문화의 본류에서 단절되어 수렵과 어로로써 생계를 유지하던 삼림의 씨족집단이었다. 1599년 누르하치Nurhachi라는 강력한 수령이 7개의 여진 '아이만ayman', 즉 부족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재통합하고 1606년 역사적인 만주인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누르하치는 명조가 만력제萬曆帝의 치세(1573-1620)에 퇴락의 상태에 빠져들어갔음을 깨닫고 1626년 스스로 황체를 칭하였다. 1621-1622년 그는 심양(묵덴Mukden이라고도 불림)이라는 변방 거점을 장악하고 1625년에는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1622년 그는 요양을 점령하고 1624년에는 흥안령 동부와 숭가리 강의 만곡부 서쪽에서 유목하던 호르친부 몽골인의 복속을 받아냈다. 그가 사망할 때(1626년 9월 30일) 만주는 군사적 조직이 훌륭하게 갖춰진 왕국이 되어 있었다."(716)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홍타이지Qongtayiji(1626-1643)는 부친의 과업을 이어나갔다. 만주인들이 내적인 단결을 강화하는 동안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결속을 파괴하고 있었다." "오르도스와 투메트는 자기 종족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차하르의 칸에게 복속하느니 만주의 군주인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만주인들은 차하르의 칸인 릭단을 공격하여 그를 티베트로 쫓아버리고, 그는 그곳에서 1634년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되자 차하르도 홍타이지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1643년 오르도스는 6개의 기旗(qoshun)로 재편성되었고, 그 각각은 칭기스칸 가문의 지농 군 빌릭투 메르겐의 후손들인 왕공(jasaq)의 지휘 하에 두어졌다. 이렇게 해서 내몽골 전체가만주 제국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후 차하르, 투메트, 오르도스의 칸들은 신종臣從의 연대와 봉건적인 동맹서약을 통해 만주 왕조와 결합했고 이는 1912년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지속되었다."(716-7)


"한편 준가르의 갈단(1676-1697)은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서 칭기스칸의 서사시를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모든 몽골인들에게 극동의 제국을 만주인들, 즉 일찍이 칭기스칸에게 굴복했던 여진족의 풋내기 자손들로부터 탈취하자고 부추겼다." "강희제는 이 신흥 몽골 제국이 중국의 바로 코 앞에서 흥기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갈단으로서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강희제를 위해 제작한 대포를 상대하기가 벅찼고, 이 새로운 칭기스칸은 당황하여 할하 지방에서 철수하였다(1690년 말)." "1695년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청은 다시 한 번 대포와 소총의 도움을 받아 갈단을 격파하였다." "만주 왕조가 이 승리로 얻은 가장 큰 이익은 할하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권의 확보였다. 강희제가 준가르의 장악으로부터 구해준 네 명의 할하 칸들은 그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외적인 행동이 지극히 만주적이었으며 유목민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던 강희제는 동몽골인들의 조직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731-3)


"준가르 영역의 파괴는 몽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몽골은 한때 그 절정에 이르렀고, 칭기스칸은 칸으로 선출된 뒤 20년 만에 초원세계를 통일하고 중국과 이란에서 작전을 시작하였다(1206-1227). 또 다른 50년 동안 이란과 중국의 나머지 지역이 정복되어, 산맥이라는 천연장애로 인해 그 자체가 단절되어 있던 대륙인 인도를 제외한다면 몽골 제국은 아시아 대륙의 제국이 되었다. 이 강역은 형성된 직후 신속하게 무너졌다. 1360년이 되면서 몽골은 중국과 이란을 상실하였고 트란스옥시아나도 사실상 잃어버려, 아시아에서는 몽골리아와 모굴리스탄─후일 중국령 투르키스탄의 북부를 형성─만을 보유했을 뿐이다." "1759년 건륭제가 마침내 준가르 칸들의 확고한 보호령이었던 카쉬가리아를 정복하고 일리와 병합한 사건은 반초班超의 시대 이래 1800년 동안 중국의 아시아 정책이 추구해온 목표, 즉 유목민에 대한 정주민의 보복, 초원에 대한 농경의 보복을 완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744-5,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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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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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다윈의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암컷들


과거 성차별적 신화가 생물학에 도입되면서 동물의 암컷을 바라보는 방식이 크게 왜곡되었다. 실제 자연 세계에서 암컷의 형태와 역할은 대단히 폭넓은 스펙트럼의 해부구조와 행동을 아우른다. 물론 헌신적인 어머니상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는 자기가 낳은 알을 버리는 암새도 있고, 바람난 아내를 둔 수컷들의 하렘에서 새끼를 키우는 물꿩도 있다. 정절을 지키는 암컷도 있지만 전체 종의 7퍼센트만 성적으로 일부일처이며, 많은 암컷이 여러 상대를 전전하며 섹스하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다. 동물 사회가 전적으로 수컷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다. 알파 암컷은 여러 분류군에서 진화했고, 자애로운 보노보에서 잔인무도한 여왕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암컷은 수컷들만큼이나 서로 살벌하게 경쟁한다. 지난 수십 년간 암컷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세상의 다채로운 암컷과 암컷을 연구하는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혁명을 소개할 것이다. 12-3)


1장 무정부 상태의 성: 암컷이란 무엇인가


암두더지의 생식샘은 난소고환ovotestis이라고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내부 생식기관은 한쪽에 난소 조직, 다른 쪽에 정소 조직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난소 쪽은 번식기의 짧은 기간에만 팽창하여 난자를 생산한다. 그리고 생식이 완료되면 수축하고 그때부터 정소 조직이 확대되어 난소보다 더 커진다. 두더지 암놈의 정소 조직은 테스토스테론을 만드는 라이디히 세포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정자는 들어 있지 않다. 이 성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흔히 수컷과 연관된 호르몬으로, 근육을 키우고 공격성을 부추긴다. 둘 다 힘겨운 지하 생활에 요긴한 무기가 되어 두더지 암컷에게 땅을 파는 힘과 새끼와 지렁이 창고를 지킬 투지를 준다. 이른바 남성호르몬이 넘치다 보니 두더지 암컷은 수컷과 구분할 수 없는 생식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남근phallus’ 또는 ‘음경음핵penile clitoris’이라 불릴 정도로 음핵이 확대되고 번식기가 아닐 때는 아예 질이 막혀 있다. 두더지 암컷은 성을 구분하는 오래된 전제에 도전하는 존재다. 23-4)


아마존에서 거미원숭이 암컷을 처음 봤을 때 아랫도리에 매달린 부속물을 보고 나는 영락없이 수놈인 줄 알았다. 오히려 수놈 쪽은 제 물건을 안쪽 깊숙이 넣고 다니기 때문에 겉에서는 음경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암컷은 보란 듯이 음핵을 덜렁거리고 다닌다. 생물학계에서는 ‘가짜 음경pseudo-penis’이라고 칭하는 해부 구조다. 이런 남성중심적인 용어는 특히 거미원숭이 암컷의 ‘가짜’ 남근이 수컷의 ‘진짜’ 남근보다 더 길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거슬린다. 점박이하이에나Crocuta crocuta 암컷의 20센티미터짜리 음핵은 모양과 위치가 수컷의 음경과 똑같을 뿐 아니라 발기하기까지 한다. 점박이하이에나 수컷과 암컷 모두 ‘인사 의례’ 중에 발기한 부분을 서로 보여주고 훑어본다. 하지만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의 사내다운 특징 중 으뜸은 털 달린 한 쌍의 고환이다. 물론 이 음낭은 가짜다. 최근 과학자들은 점박이하이에나 암컷과 수컷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 ‘음낭을 만져봐야만’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25-6)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의 규칙 위반은 생식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 암컷의 ‘남성화된’ 몸과 행동에도 감탄했다. 야생에서 암컷 점박이하이에나는 수컷보다 몸이 최대 10퍼센트 더 묵직하다. 일반적으로 포유류에서는 수컷의 크기가 더 크므로 아주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포유류를 제외한 동물계의 나머지, 그러니까 대다수 동물에서 암수의 크기 차이는 대개 반대이다. 살찐 암컷일수록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척추동물과 많은 어류, 양서류, 파충류 종이 수컷보다 암컷이 크다. 점박이하이에나 암놈은 수놈보다 더 적극적이다. 지능이 뛰어나고 사회성이 높은 이 육식동물은 최대 80마리가 우두머리 암컷의 지배하에 모계 집단을 이루고 살아간다. 수용, 먹이, 성을 구걸하는 복종적인 낙오자가 수컷이며, 반대로 암컷은 모든 상황에서 지배적이고 거친 놀이와 강한 냄새 표시는 물론이고 영역 방어에도 관여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행동들이다. 26)


‘무엇이 동물의 암컷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의 궁극적 해답이 한 쌍의 XX 염색체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부분은 이 특이한 한 쌍의 성염색체가 남성은 XY로, 여성은 XX로 성별을 정의한다고 배웠으니까. 실제로 Y 염색체에는 SRY(Sex-determining Region of the Y, Y 염색체의 성결정 지역)라는 아주 중요한 성결정 유전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생식기관을 결정하는 일은 약 60개의 유전자가 오케스트라처럼 협업하는 과정이다. 성을 결정하는 이 유전자들은 성별에 따라 X 염색체나 Y 염색체에 딱딱 나뉘어 있기는커녕 모두 다 성염색체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이 유전자들은 게놈 전체에 되는대로 흩어져 있다. SRY 유전자 외에도 60개의 성결정 유전자로 이루어진 이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에서 모두 단원의 구성이 동일하다. 이 유전자들은 난소도 만들 수 있고 정소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생식샘을 형성할지는 유전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협상에 달렸다. 30-2)


포유류에서 보이는 성염색체의 혼돈은 자연계 전체에 존재하는 시스템의 다양성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우선 모든 유전학적 성결정이 XY 시스템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새, 다수의 파충류, 나비가 아주 비슷한 성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커다란 Z와 축소된 W라는 다른 성염색체 위에 있다. 더구나 이 시스템에서는 역전된 패턴이 표준이다. 즉, 암컷이 ZW이고 수컷이 ZZ이다. 이 대체 ZW 시스템에서 마스터 스위치 유전자는 포유류의 SRY처럼 아주 잘 보존된 경우도 있고, 근연 집단 내에서 변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일부 파충류, 어류, 양서류는 성의 분화가 마스터 유전자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자극받는다. 거북의 예를 들어보자. 거북은 바다에서 무겁게 몸을 끌고 나와 열대 해변의 모래에 알을 파묻는다. 이때 섭씨 31도 이상에서 부화하는 알은 난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활성화하고, 반면에 27.7도 이하에서는 정소를 만든다. 두 온도 사이에서는 수컷과 암컷이 섞여서 나온다. 35)


2장 배우자 선택의 미스터리: 여성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는 성선택을 자연선택의 하위 분류로 취급하긴 했어도 암컷과 짝지을 권리를 두고 수컷들이 대결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윈이 물의를 일으킨 부분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율적일 뿐 아니라 남성의 진화를 좌지우지하는 결정권을 가졌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목이 대부분의 (남성) 생물학자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윈은 암컷이 짝을 고르는 기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빅토리아 시대의 기득권층에게 다윈의 새 이론을 매질할 채찍을 주었다.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예술과 음악을 논하는 것은 오로지 상류층의 특권이었으므로 하찮은 공작새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미적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입 밖에 낼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아름다움은 신이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적 기호가 진화의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생각은 이단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다윈의 대담한 새 이론은 공개적으로 조롱과 무시를 받았다. 46-7)


“짝짓기 철의 절정에 산쑥들꿩 레크는 아수라장이에요.” 게일 패트리셀리가 연구실에서 설명했다. 교미의 대부분이 불과 3일에 걸쳐 일어나는데 이때 암컷들은 크게 스크럼을 짜고 가장 인기 있는 수컷에서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한다. 레크를 형성하는 종의 암컷은 대체로 새끼를 혼자 키운다. 그래서 암컷은 짝을 고를 때 수컷이 지닌 영역의 자원이나 잠재적 육아 기술 같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수컷의 유전자만을 볼 뿐이다. 승리한 수컷 혼자서 무리의 암컷 대부분에게 유전자를 전달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이한 장식과 구애 방식을 끌어내는 암컷의 배우자 선택은 그 영향력에 제한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패트리셀리는 훨씬 의미심장한 사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딕과 같은 최고의 수새는 레크에서 가장 요란한 춤꾼일 뿐 아니라 암새가 주는 미묘한 신호에도 잘 반응했다. 인기를 얻으려면 출중한 춤 솜씨는 기본이고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48-9)


모든 전략적 협상에는 인지력이 필요하다.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의 새틴정원사새Ptilonorhynchus violaceus 수컷은 상대적으로 뇌가 크고 수명이 길며 7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사춘기를 보내는데, 그동안 암새를 흉내 내면서 지낸다. 어린 수새는 암새와 똑같이 깃털이 초록색이다. 패트리셀리는 수새가 복잡한 바람둥이 재주를 배우기 위해 이처럼 비정상적인 발달기 동안 암새의 옷을 입고 산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어린 수새는 바우어 제작을 연습할 뿐 아니라 동성의 어른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구애를 받는다. 수컷 새틴정원사새의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한 어느 2009년 연구는 인지 능력이 짝짓기 성공과 연관 있으며 암새는 가장 똑똑한 수새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윈 역시 성선택으로 사람의 인지력이 크게 진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예술, 도덕, 언어, 창의력처럼 ‘자기표현’이 강한 행위에서 영향력이 더 두드러진다. 52)


# 바우어bower : 정원사새가 구애하기 위해 짓는 공간


3장 조작된 암컷 신화: 바람둥이 암컷에 대한 불편한 발견


사회적 일부일처와 성적 일처일부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새들은 아주 충실하게 사회적 일부일처를 따른다. 심지어 어떤 종은 평생 한 배우자와 짝을 이루어 산다. 하지만 과연 성적으로도 그럴까?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제는 암새의 90퍼센트가 일상적으로 다수의 수컷과 교미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수컷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종일수록 암컷이 외도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최근 버키드는 성적 이형이 큰 종일수록 부정을 크게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요정굴뚝새Malurus cyaneus가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컷은 현란한 푸른색 계절깃을 뽐내며 갈색의 작고 수수한 암새에게 노란 꽃을 바치고 구애한다. 하지만 수컷의 야단스러운 구애는 서방질로 보답받는다. 새벽이면 그의 파트너는 몰래 빠져나와 이웃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그러다 보니 둥지에서 사회적 배우자가 부지런히 돌보는 새끼 새의 4분의 3이 사실은 다른 수컷의 씨다. 62)


수전 스미스의 검은머리박새black-capped chickadee 장기 연구가 판도를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총 14번의 번식기에 암컷의 정사 중 70퍼센트는 제 사회적 배우자보다 계급이 높은 수컷의 영역에서 해가 뜬 직후에 일어났다. ‘흔남’과 살고 있는 암새가 월등한 유전자를 얻기 위해 동네 ‘훈남’에게 몰래 접근하는 딱 그런 모양새였다. 성적으로 거리낌 없는 명금류 암컷은 행동생태학계를 뒤흔든 ‘일처다부제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만 확인되었다. 64-5)


허디는 하누만랑구르원숭이Presbytis entellus 수컷 사이에서 영아 살해 행위에 대한 희한한 보고 내용을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누만랑구르원숭이는 긴 회색 팔과 잿빛 얼굴이 특징인 인도 아대륙 토종 원숭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허디의 관심을 끈 것은 암컷이었다. 허디가 처음으로 본 랑구르는 인도 라자스탄주의 타르 사막 근처에서 제 가족을 떠나 총각들 무리로 들어가 하룻밤을 간청하며 교태스럽게 걷는 한 암놈이었다. 허디는 도서관에 들어가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신이 본 랑구르가 유일한 ‘음탕한’ 암컷 영장류는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사회성이 강한 많은 종들이 특히 배란기에는 색정증에 가까운 적극적인 성적 취향을 보였다. 야생에서 침팬지 암컷은 평생 다섯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지만 수컷 수십 마리와 6,000번 이상의 교미를 한다. 배란기에 이 암컷은 무리의 모든 수컷을 유혹하고 하루에 30~50회 섹스를 한다. 그런 지나친 행동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66-7)


인도에서 랑구르를 연구하며 허디는 외부에서 온 수컷들이 무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젖을 떼지 않은 어린 새끼를 죽이는 일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영아 살해 행위가 성선택과 짝을 두고 벌어지는 수컷 간 경쟁의 유해한 부작용임을 깨달았다. 다른 수컷과 낳은 새끼가 젖을 뗀 후 다시 가임기가 될 때까지 2~3년이나 암컷을 기다리는 대신, 새로운 우두머리는 새끼를 살해하여 어미가 즉시 발정기에 들어서게 강제하고 곧바로 제 새끼를 임신하게 한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허디는 암컷이 영아 살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무리에 침입한 수컷과 섹스를 하게 되었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는 제 자식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하여 새끼의 목숨을 보전하는 효과가 있다. 오늘날 수컷의 영아 살해는 영장류 사촌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51종의 영장류에서 의심되거나 실제로 목격되었다. 같은 패턴이 수사자에서도 보이는데 알파 수컷이 새로 무리를 장악하면서 새끼 사자를 죽인다. 69)


바람을 피우는 암컷은 월등한 유전자를 찾거나 자손의 생식능력을 증가시킬 유전적 기회와 면역계의 적합성을 높일 기회를 포함해 많은 면에서 유리하다. 본질적으로 암컷의 난교는 어미가 자신의 소중한 난자를 모두 한 바구니에 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건강한 자손으로 이어진다. 친부가 누군지 혼란을 주는 것이 단지 영아 살해를 막는 보험만은 아니다. 수컷들로 하여금 어린 새끼를 돌보고 보호하게 독려하는 장점도 있다. 허디는 전반적인 영장류에서 수컷이 자신의 새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새끼를 돌보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명백한 사실은 수컷은 오로지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새끼만 돌보기 때문에 일부일처가 암컷에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흔한 가설에 찬물을 끼얹었다. 허디는 바바리마카크와 개코원숭이 연구에서 성욕이 왕성한 암컷들이 성을 이용해 복잡한 친자 관계의 그물로 다수의 수컷을 끌어들인 사례가 보고되었다고 지적했다. 우리 조상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70)


4장 연인을 잡아먹는 50가지 방법 : 성적 동족 포식의 난제


유혹의 대상이 수컷을 아침 식사로 잡아먹는 사나운 포식자라면 짝을 찾는 행위는 곧 죽음과의 춤이 된다. 저녁 식사와 데이트를 한 번에 해결하는 암거미의 성향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 동물학자들에게 여러모로 모욕적이었다. 악랄하고 난잡하며 지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원래의 소극적이고 수줍고 한 남자만 아는 틀에서 벗어난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암거미는 또한 진화의 난제이기도 했다. 생물이 사는 이유가 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라면 섹스도 하기 전에 파트너를 집어삼키는 행위는 진화적으로 적절치 못한 적응 아닌가. 그러나 성적 동족 포식은 전갈에서 나새류, 문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척추동물과 함께 모든 종류의 거미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동물이 아마 사마귀일 것이다. 암사마귀는 연인의 머리를 뜯어먹는 팜파탈이다. 수사마귀는 목이 잘린 채로 용맹하게 뒤로 물러선다. 그런 행동을 보고 수 세대의 동물학자들은 진화가 머리를, 즉 이성을 잃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79-80)


거미만큼 성적 충돌이 극심한 생물은 없다. 동족 포식은 배고픈 암거미의 치명적인 협박에 맞서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수거미에게 극강의 선택압을 가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부터 살펴보면, 많은 왕거미 수놈은 암거미가 지은 거미줄 가장자리에서 대기하며 연인이 점심―아마 사랑의 경쟁자 중 한 놈이겠지―을 다 먹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암거미가 식사를 마친 듯 보이면 그제야 슬슬 움직인다. 검은과부거미black widow spider 수컷은 실제로 암거미의 속사정을 거미줄의 성페로몬을 통해 알 수 있다. 암거미의 위장이 빈 듯하면 멀리 떨어져서 대기한다. 데이트 장소에 간식거리를 선물로 들고 오는 수컷도 있다. 거미판 고급 초콜릿 상자라고나 할까. 수거미가 더듬이다리로 일을 보는 동안 암거미의 입이 비어 있지 않게 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진화는 수거미가 암거미의 소화 상태를 감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성적 갈등은 많은 수컷에게 훨씬 더 교활한 묘책을 선사했다. 82-3)


육아거미Pisaurina mira는 섹스 중에 수거미가 가벼운 신체 결박을 시도한다. 수거미는 암거미의 집에 몰래 들어가 특수한 한 쌍의 긴 다리로 암거미를 붙잡아 제 거미줄로 사지를 묶는 동안 독니의 공격을 피한다. 다윈의나무껍질거미Caerostris darwini는 구강성교로 판돈을 올렸다. 수거미는 연인을 먼저 거미줄로 묶고 교미 전후와 교미 도중에 암거미의 생식기에 침을 묻힌다. 점선늑대거미Rabidosa punctulata 수놈에게는 스리섬threesome이 가장 안정한 성행위다. 교미 중인 커플을 우연히 마주친 총각이 제 운명을 시험하며 슬쩍 파티에 합류한다. 교미에 성공한 수컷을 이미 암거미가 먹어버린 상태라면 뒤늦게 침입한 수컷이 잡아먹힐 확률이 낮다. 말라바거미Nephilengys malabarensis는 교미 중에 위협을 느끼면 더듬이다리를 분질러버리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때 남은 다리는 몸이 없이도 알아서 계속 정자를 펌프질한다. 자발적으로 거세한 수컷은 더 이상 씨를 뿌릴 수 없다. 한 번의 기회에 올인한 셈이다. 83)


공작거미 암컷에게 성적 동족 포식은 적응의 측면에서 완전히 일리 있는 행동이다. 약한 구혼자를 일찌감치 솎아내어 원치 않는 구애 행동으로 방해받지 않고 동시에 공짜로 끼니도 때우는 효과가 있다. 공작거미 암컷의 안목을 조사한 일라이어스는, 수거미가 진동에 노력을 덜 기울이거나 노래와 춤의 박자가 맞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자신의’ 신호에 집중하지 않을 때 암거미가 공격적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산쑥들꿩과 정원사새에서 보았듯이 공작거미의 구애 역시 양방향 소통 과정이다. 다만 암컷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수컷에게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배를 꿈틀거리는 공작거미 암컷은 짝짓기할 기분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구혼자를 잡아먹을 가능성이 크다. 어미는 자식을 위해 최고의 유전자를 원하고 또 새끼를 보살피려면 자신도 크고 건강해야 한다. 구혼자들을 잡아먹을 능력이 되는데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90)


5장 생식기 전쟁 : 사랑은 전쟁터이다


오리의 음경은 몸길이에 비해 척추동물에서 가장 긴 축에 속한다. 왜소한 몸길이보다 10센티미터나 더 길며 와인 오프너처럼 반시계 방향으로 꼬여 있고 기부는 작은 가시로 덮여 있다. 괴이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리의 음경은 수사슴의 뿔처럼 계절을 타는 기관이다. 대개는 10분의 1 크기로 줄어 있다가 번식 철에만 늘어나는데 어떤 종에서는 그 변화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총배설강 입구에 양말을 뒤집어놓듯이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교미 준비가 되면 펌프질로 음경에 림프액을 주입하는데, 그러면 마치 파티 나팔처럼 3분의 1초 만에 시속 120킬로미터로 총배설강에서 펼쳐진다. 이런 사치품은 정자 경쟁의 결과물이라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다. 대다수 오리 종에서는 성비가 수컷으로 기울어져 있으므로 암새는 고를 후보가 많으며 상대적으로 수오리 사이의 경쟁은 치열하다. 그 결과 오리의 정사는 지극히 로맨틱하거나 충격적으로 폭력적인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99-100)


교과서는 오리의 질이 단순한 일자 관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으나 암컷의 생식관은 수컷만큼이나 복잡했다. 길이도 길고 곳곳에 주머니가 숨어 있을 뿐 아니라 수컷의 음경과는 반대 방향의 나선을 이루고 있었다. 브레넌은 오리의 교미 중 3분의 1 이상이 강제로 진행되지만 원치 않은 교미에서 수정된 새끼는 2~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레넌은 수오리의 음경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나선형 질과 중간에 막다른 골목이 있는 특이한 생식관이 진화한 것은 음경의 진로를 차단하여 자신이 싫어하는 수오리의 정자가 수정에 쓰이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해서라는 예감이 들었다. 음경이 가장 긴 종은 실제로 암컷의 생식 배관도 좀 더 구불구불하고 장애물이 심하며 강제된 교미가 만연했다. 백조나 캐나다기러기처럼 일부일처에 텃세가 심한 종의 음경은 훨씬 수수했고 암컷의 질도 그에 상응하여 단순한 편이었다. 브레넌의 눈에는 수컷과 암컷의 생식기가 피차 적대적으로 공진화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101)


브레넌은 암오리가 실제로 자신의 알을 수정시킬 수오리를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의 음경이 난관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통로를 허락하는 것이다. 비폭력적 상황에서 수오리는 교미 전에 춤을 춰서 암오리에게 구애한다. 마음이 동한 암컷은 수용의 자세를 취하여 물속에서 엎드린 채 꼬리를 들어 올린다. “암오리는 배설강 윙크를 해요. 나는 네 것이니 데려가라는 보편적인 신호죠.” 브레넌이 설명했다. 암오리가 알을 낳을 때는 난관으로 상당한 크기의 물체를 이동시킨다. 즉, 암컷에게 질의 내강을 확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강제로 교미가 일어날 때는 암오리가 윙크를 하지 않고 질도 이렇게 정신없이 꼬여 있는 비수용 상태를 유지하지요.” 하지만 암컷이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 때는 원치 않는 수컷 때와 달리 질의 내강을 활짝 열어 음경이 생식관을 따라 깊숙이 들어오게 한다. 누구와 짝짓기할지 결정할 수는 없어도 알의 친부를 결정할 수는 있다는 말이다. 102)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면, 특히 정자 경쟁은 수컷들만의 스포츠로 취급되어 대개 올림픽 선수들처럼 정자가 겨루는 서사적인 ‘경주’로 묘사된다. 가장 강하고 빠른 수컷이 난자를 쟁취하며, 암컷은 이 대회에서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제 몸속에서 100미터 단거리 대회가 열리는데 결과에 전혀 개입하지 못한 채 지켜만 보는 셈이다. 선구적인 저서 『암컷의 통제Female Control』(1996)에서 에버하드는 질이든 총배설강이든 저정낭이든 암컷의 생식기는 정자를 받기 위한 비활성 배관 이상이라는 사례를 제시했다. 암컷의 생식기는 능동적인 기관으로서 구조와 생리, 화학적 특성을 통해 정자를 보관, 분류, 거부할 수 있다. 매력 없는 구혼자의 정액은 갖다 버리고, 선택된 정자는 난자로 가는 직통 노선에 올려 적극적으로 이동 속도를 높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로 같은 통로 속에서 헤매다 끝나게 할 수도 있다. 에버하드가 보기에 일단 씨뿌리기가 끝나면 그때부터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쪽은 암컷이다. 104)


6장 성모마리아는 없다 : 상상을 초월하는 어미들


동물의 암컷은 오랫동안 마치 다른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왔다. 엄마가 된다는 것, 또는 모성은 감정적인 주제다. 양육과 희생의 동의어이며, 따라서 모든 여성은 ‘타고난’ 어머니이고,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신비에 가까운 모성 본능으로 채워진 근원적인 존재라는 오해가 만연하다. 이런 발상의 가장 자명한 문제는 새끼를 돌보는 것이 전적으로 암컷의 책임이라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암컷이 임신과 수유의 책임에서 풀려나게 되면 아빠들이 자식에게 훨씬 더 헌신적으로 된다. 특히 조류에서는 부모가 함께 자식을 돌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조류 커플의 90퍼센트가 그 일을 나눠 가진다. 진화의 단계를 거슬러가다 보면 아비의 돌봄이 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관례 수준이다. 물고기의 경우 전체 종의 3분의 2가 양육의 모든 책임을 아비 혼자서 지는 싱글대디이고, 어미는 알을 기여하는 것 이상은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113-4)


암컷은 자신의 생식적 운명을 잔인하게 통제한다. 야생에서 임신 중인 겔라다개코원숭이는 새로운 수컷이 집단을 장악할 때면 유산한다. 무리에 유입된 수컷은 거의 언제나 제 씨가 아닌 새끼를 죽인다. 그러므로 임신을 종결하는 것은 영아 살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에 괜한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어미의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약 반세기 전에 생쥐에서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힐다 브루스Hilda Bruce의 이름을 따서 ‘브루스 효과’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유산은 그 이후로 사자에서 랑구르까지 다양한 야생 포유류에서 기록되었다. 모성애의 목표는 무작정 새끼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번식할 때까지 오래 살아남는 자손의 수를 최대로 늘리는 곳에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일에 진정한 이타적 헌신은 없다. 오히려 철저히 이기적이다. ‘좋은 엄마’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 때와 포기할 때를 알고 있으며 그건 심지어 새끼가 태어난 후에도 그러하다. 124)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의 황량한 땅에 사는 캥거루 암컷은 그 지역의 변덕스러운 환경 속에서 기발한 분산 투자법을 발달시켰다. 동시에 세 단계의 자식을 저글링 하는 생식 조립라인이다. 첫째는 아직 젖먹이지만 독립이 가까운 상태라 거의 주머니 밖에 나와 어미 옆에서 뛰어다니는 새끼이고, 둘째는 주머니 속 젖꼭지에 들러붙어 있는 분홍색 젤리빈 같은 새끼이며, 셋째는 수정은 되었으나 자궁에 가사 상태로 멈춰 있는 배반포 상태의 휴면 중인 세포 덩어리다. 포식자에게 쫓길 때면 어미는 주머니에서 더 큰 캥거루를 꺼내어 몸을 가볍게 하고 도망간다. 어미를 쫓아가지 못하면 홀로 남은 새끼는 젖을 먹지 못하고 어미의 보호도 받지 못해 죽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슴 미어지는 일이지만 캥거루에게는 고통 없는 의식적 결정이 필요하다. 자연선택은 이미 어미에게 기능적인 차선책을 제공했다. 젖먹이가 사라지면 배아 상태로 대기 중이던 새끼가 휴면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새끼를 빠르게 대체한다. 124-5)


엄마는 어미로서 행동하게 하는 갈라닌과 옥시토신 뉴런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포옹 호르몬은 새끼 돌보기 스위치의 찾기 힘든 방아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완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뒬락은 출산이나 수유와 관련된 호르몬의 홍수와는 무관하고 또한 옥시토신만으로 작동하지 않는 다른 장기적인 애착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엄마, 아빠, 다른 먼 친척, 심지어 양부모와의 관계에서 높은 수준의 애착을 끌어낼 수 있다. 근연 관계가 아닌 새끼를 돌보는 일은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애초에 공동 양육이 진화한 종도 있다. 이는 ‘이중 업무’, 소위 투잡을 뛰어야 하는 동물의 어미에게 엄청난 이점이다. 남의 새끼를 돌보고 부양하는 것은 얼핏 진화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협동 번식은 다양한 분류군에서 여러 차례 진화했다. 1만 종의 조류 중 약 9퍼센트와 전체의 3퍼센트에 달하는 포유류 어미들이 알로마더allomother, 즉 ‘다른 엄마’들로부터 절실한 도움을 받는다. 131-2)


7장 계집 대 계집 : 암컷의 싸움


3월에 짧은 우기가 지나면 토피영양 암컷은 짝을 찾아 레크로 크게 무리 지어 이동한다. 레크는 앞서 산쑥들꿩 이야기에서 등장한 수컷들의 짝짓기 경기장이다. 암컷은 1년 중 단 하루만 발정하기 때문에 번식기는 치열하다. 이처럼 짧은 생식 기간 때문에 24시간짜리 광란의 성적 활동이 일어난다. 브로 예르겐센이 계산해보니 보통 한 암놈이 평균 네 마리 수컷과 짝짓기를 했고, 개중에는 이 제한된 시간에 무려 12마리의 파트너와 짝짓기하는 암놈도 있었다. 최고의 수놈은 중심에 자리 잡고 레크를 장악한다. 암놈들이 싸우는 것도 모두 이 매력적인 수컷 때문이다. 브로 예르겐센은 소위 잘나가는 수컷 토피영양이 다윈의 예측과 달리 아무하고나 짝짓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중한 정자를 보전하기 위해 수컷도 전통적으로 암컷이 취하는 까다로운 태도를 취한다. 되도록 많은 개체와 짝짓기한다는 목적은 변함없지만 정자 경쟁에서 자신의 기회를 최대로 높일 암컷을 의도적으로 찾아 선택하는 것이다. 137-8)


사회적 종에서 서열은 먹이, 주거지, 최고 품질의 정자처럼 번식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는 열쇠다. 그래서 우두머리 암캐가 되는 것은 확실한 이득이다. 수컷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통해 패권을 잡고 관심을 한 몸에 받지만, 집단생활을 하는 암컷은 수컷의 서열과는 무관하게 자체적인 위계질서를 이루고 생활한다. 슈옐데루프 에베는 무리 내 암탉들이 일상적인 다툼을 하는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암탉은―에베가 ‘폭군’이라고 부른―상대적 지위를 망각하고 감히 자신보다 먼저 먹으려는 낮은 서열의 닭을 쪼아대어 수시로 제 위치를 상기시켰다. 알파 암컷의 자리로 향하는 사다리 끝에 올랐을 때 받을 상은 상당한 번식 상의 이점이며 싸울 가치가 충분하다. 수컷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피비린내가 나고 워낙 요란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하지만 암컷의 권력 다툼은 결코 덜 파괴적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대단히 은밀하게 일어난다. 142-3)


높은 지위의 노랑개코원숭이 암컷은 먹이원에 대한 최초의 몫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새끼들을 위한 고차원적 갈취 행위 등 모든 것을 다 누린다. 지위가 낮은 어미와 그 자식은 위의 것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생식능력에도 영향을 미쳐 서열이 낮은 암컷은 지속적인 테러의 결과로 더 늦게 번식하고 배란의 빈도가 낮으며 자발적으로 유산할 수 있다. 다른 암컷의 생식력에 가하는 이런 비열한 행위는 중대한 결과를 불러오며 수컷 사이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개싸움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 유전적 유산이라는 가장 아픈 곳을 때리기 때문이다. 번식하지 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벌은 없다. 24시간 주먹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하여 영장류 암컷이 수컷보다 경쟁심이 부족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들은 더 교활하고 더 치졸하게 싸운다. 영장류 암컷은 ‘서열 차이나 무시의 신호에 집착한다’라고 묘사되어 왔다. 수컷들만큼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143-4)


미어캣은 3~15마리가 씨족사회를 이루고 번식의 80퍼센트를 우두머리 암컷 한 마리가 독점한다. 알파 암컷의 친척, 후손, 몇몇 떠돌이 수컷으로 이루어진 무리의 나머지는 영역 방어와 보초, 땅굴 관리, 아기 돌보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두머리의 새끼에게 젖까지 먹인다. 이런 식의 분업은 과학적으로 ‘협동 번식’이라고 알려졌으나 내게는 아주 완곡한 표현으로 들린다. 미어캣의 동지애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협조가 아닌 노골적인 압력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미어캣 사회는 임신하는 즉시 다른 암컷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는 근친관계 암컷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번식 경쟁에 기반을 둔다.  하여 이 자리는 무슨 수를 쓰든 차지할 가치가 있다. 절대권력을 물려받는 순간 미어캣 암놈은 몸집이 커지고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올라가고 다른 암컷에 대한 적대감이 사정없이 상승한다. 특히 나이와 몸집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즉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를 유난히 적대적으로 대할 것이다. 대부분 자기 자매다. 144-5)


8장 영장류 정치학 : 자매애의 힘


버빗원숭이 암컷은 자신이 태어난 집단에 머물면서 친척들과 평생 강한 유대를 형성한다. 반면에 수컷은 출생 집단에서 나와 혈연관계가 아닌 집단에 합류한다. 이런 시스템이 암컷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한다. 피를 나눈 암컷들의 모계 집단은 안정적인 중심을 형성하고 협력하여 수컷의 지배에 대항한다. 암컷들은 특정 수컷이 무리에 합류하지 못하게 막거나 쫓아내며 그 과정에서 수컷에게 상처를 가하거나 죽이는 일까지 있다. 암컷은 종종 집단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생계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잘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 물색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포유류 암컷은 대개 수컷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전문성이 더욱 강화된다. 그런 지혜가 암컷에게 무리를 이끌 권위를 준다.38 일례로 꼬리감는원숭이에서 먹이를 찾거나 무리가 이동할 때 리더십을 더 자주 발휘하는 것은 알파 수컷이 아닌 작은 암컷들이다. 이런 현상은 지배와 리더십을 동일시하는 오랜 가정에 도전한다. 168-9)


침팬지는 부계 중심에 호전적이지만 보노보는 모계 중심에 평화롭다. 보노보는 몸집이 좀 더 작고 호리호리하고 털이 적을 뿐 실제로 사촌인 침팬지와 아주 유사하게 생겼다. 침팬지처럼 암컷의 몸집은 수컷의 약 3분의 2 정도이고 출생 집단에서 나와 이주한다. 그러나 보노보 암컷의 사회생활은 침팬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뒤를 봐줄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디아스포라로 성인의 삶을 사는 대신 보노보 암컷은 낯선 집단에 합류해서도 피를 나누지 않은 암컷들과 동맹을 형성한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구성된 자매 관계의 힘으로 보노보 암컷은 자신들보다 큰 수컷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의 동맹은 싸움이나 신체적 겁박에 의해 형성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인은 과학자들이 ‘G-G 문지르기’라고 묘사한 행위로 서로 생식기를 비비는 행동이다. 한마디로 보노보 암컷은 상호적인 프로타주의 예술을 완성함으로써 가부장제를 전복할 힘을 얻은 것이다. 171)


# 프로타주 : 옷을 입은 채 몸을 남의 몸, 물건에 문질러 성적 쾌감을 얻는 행위


“애초에 침팬지나 개코원숭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고 보노보를 제일 먼저 알았다고 상상해봅시다.” 프란스 드 발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럼 보노보 사회에 기초하여 초기 호미니드는 여성 중심의 사회였고, 그 사회에서는 성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고 전쟁은 드물거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믿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인류 과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구성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징을 섞은 형태일 것이다. 그것이 침팬지에 더 가까웠는지 보노보에 더 가까웠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보노보 사회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178)


9장 범고래 여족장과 완경 : 고래가 품은 진화의 비밀


인간을 제외하고 범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게 분포한 포식동물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냥 기술로 이 범지구적 킬러들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특정한 먹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해안의 범고래는 땅을 파서 가오리를 잡아먹는 선수이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파도를 타고 해변까지 올라와 바다사자 새끼를 낚아챈다. 알래스카 범고래 집단은 매해 5월이면 유니맥 패스Unimak Pass를 따라 모여서 매복했다가 어린 귀신고래를 습격한다. 남극에서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큰 파도를 일으켜 부빙에 안전하게 피신 중인 물범을 입속으로 쓸어 넣는다. 이처럼 먹이로 특화된 범고래 종족을 생태학자들은 생태종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종이지만 특정 지리 구역에 분리되어 살면서 서로 교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고유의 방언을 ‘말한다’고 하고, 각 종족의 사냥 기술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 인간의 문화에 버금간다고 알려졌다. 이런 범고래 무리에 앞장서서 헤엄치는 것은 폐경 이후의 범고래 암컷이다. 184)


남부 상주군은 태평양 연어, 그중에서도 왕연어라고도 알려진 치누크연어를 가장 선호하며, 범고래 성체 한 마리가 건강하게 생활하려면 하루에 20~30마리씩 먹어야 한다. 미국-캐나다 서부 국경에 걸친 살리시해는 전통적으로 고래들이 이 크고 지방이 많은 생선으로 잔치를 벌이는 먹이터다. 많은 연어가 이곳으로 몰려와서 미국 북서부 지방의 하천 지류를 따라 올라가며 알을 낳는다. 이런 일시적인 연어 서식지는 해와 철마다, 또 조류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에 연어 무리를 뒤쫓는 사냥꾼은 현명하고 약삭빨라야 한다. 범고래는 연어를 쫓아 강 쪽으로 올라가야 할지 신선한 재고를 찾아 심해 연어 식당을 배회할지 결정한다. 이 복합적 인지 활동이 과거보다 훨씬 난해해졌는데, 연어가 산란지로 가는 길을 거대한 콘크리트 수력발전 댐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년의 경험이 있는 노련한 범고래들만 연어를 찾을 장소를 안다. 바로 나이가 가장 많은 여족장들이다. 184)


코끼리 우두머리 암컷은 가족 집단의 수장이며, 사자를 한 수 앞서는 지혜가 있고, 다른 암놈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며 가뭄에는 오래된 수원을 기억한다. 이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은 범고래(그리고 실제로 인간)와 공통점이 많다. 수명이 길고 뇌가 크며 의사소통 기술이 복잡하고 유동적인 사회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나이가 많은 대장 암컷은 친구와 적을 구분할 뿐 아니라 수사자와 암사자의 포효도 가려낼 수 있다.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재주인데 암수의 소리는 거의 비슷하지만 위협도는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자는 주로 암컷이 사냥에 나서긴 하지만, 새끼 코끼리를 낚아챌 수 있는 것은 몸집이 50퍼센트 정도 더 큰 수컷만 가능하다. 나이 많은 여족장의 월등한 식별력은 식구를 안전하게 지키고 긴장을 낮추면서 이들이 우선순위에 집중하게 한다. 먹는 일 말이다. 매콤의 연구는 연륜 있는 암코끼리의 빠른 판단과 자신감 넘치는 리더십은 자손의 증가로 이어져 할머니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5)


할머니 가설이 작용하려면 말년에 생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아주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고래든 그 어떤 동물이든 번식을 멈출 이유가 없다. 새끼를 낳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범고래의 경우 아들과 딸의 차이가 꽤 크다. 열다섯 살이 된 젊은 암컷 범고래가 번식을 시작할 때 이들이 새끼에게 줄 양질의 젖을 생산하려면 연어를 40퍼센트나 더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딸’이 성숙기에 도달하면 무리 전체가 영양학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이처럼 나이 들어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운 사회적 비용이 진화적 자극이 되어 범고래 암컷으로 하여금 중년이 되면 번식을 중단하고 대신 아들과 손자에게 투자하며 딸과 손녀와의 경쟁을 거두게 한다. 그런 동기가 코끼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다른 사회적 포유류처럼 아들이 출생 집단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끼리 암컷 우두머리들에게 가장 무난한 선택은 죽을 때까지 번식하는 것이다. 186-7)


10장 수컷 없는 삶 : 자매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


레이산알바트로스는 태평양 하와이 섬들을 좋아하여 매년 11월이면 6개월의 고독한 삶을 접고 한데 모여 짝짓기하고 새끼를 한 마리씩 낳아서 기른다. 고작 한 마리냐 싶겠지만 그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알바트로스 새끼는 유난히 자라는 속도가 느려서 둥지를 떠나 스스로 하늘에 몸을 띄우기까지 6개월이나 걸린다. 그때까지 부모는 한 팀이 되어 한 마리가 둥지에 남아 시끄럽고 바라는 것 많은 투자 대상을 보호하는 동안 다른 한 마리는 그 입에 넣어줄 오징어를 찾아 출정을 떠난다. 이런 팀워크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이해와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알바트로스가 장기간 인내력을 발휘하여 이룩한 또 다른 특별한 위업의 상징이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알바트로스는 그 드물다는 일부일처성 새이다. 전형적인 알바트로스는 60~70년을 살면서 평생 매년 똑같은 짝을 만나 둥지를 튼다.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헌신적인 저 커플의 3분의 1이 인간의 언어로 말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다. 196)


카에나 포인트의 알바트로스 군집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집단이다. 이 군집은 레이산섬과 미드웨이 환초 같은 하와이 무인도에서 100만 마리 이상이 번식하는 크고 혼잡한 군집에서 나온 자손들이 형성했다. 모험을 감행한 자들은 젊은 암컷 알바트로스들로,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새로운 목초지에서 독립했다. 젊은 수컷은 고향에 머물며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번식을 시작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 바람에 카에나 포인트나 근처 카우아이 같은 지역의 신생 군집에는 암컷이 짝으로 삼을 수컷이 부족했다. 혼자서 새끼를 키우는 것이 알바트로스 사전에는 없는 일이므로, 이 혁신적인 암컷들은 기존 암수 커플의 수컷에게 정자를 기증받은 다음 개척 정신이 뛰어난 다른 암컷과 짝을 짓고 새끼를 키워내는 어려운 과제에 동반하게 된 것이다. 일부는 한두 해 정도 암컷과 짝을 지었다가 다시 수컷을 찾아간다. 일부 암컷은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해 동안 수컷으로 갈아타지 않고 지속적인 동성애 관계를 유지한다. 198-9)


진딧물은 4,000종이나 되며 작물에서 생명을 빨아먹고 질병을 퍼트리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되었다. 또한 이들은 복제의 세계에서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여름이 시작하면서 암컷 한 마리가 50~100마리의 딸을 낳는다. 한데 이 딸들은 이미 발생 중인 배아를 임신한 상태다. 작고 통통한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새끼가 새끼를 임신한 상태로 포개진 덕분에 약충이 성숙하는 시기가 열흘로 단축되고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양배추가루진딧물Brevicoryne brassicae 같은 몇몇 종은 한 철에 41세대를 생산한다. 그래서 한 암컷이 여름의 시작과 함께 깐 알은 무당벌레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 수천억의 자손을 생산한다. 가을이 되어 수가 많이 불어나면 그때부터 암컷은 수컷 진딧물과 교미하여 유성생식을 시도한 후 다음해에 닥칠 난관에 대처할 유전적 다양성을 갖춘 알을 낳는다. 가히 정원사의 최강 숙적이 탄생하는 난공불락의 시스템이다. 언제나 승리는 진딧물의 것이다. 205)


하지만 이것도 윤형동물의 질형목 생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순결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동물의 왕국에서 필적할 자가 없다. 편형동물의 친척인 이 미세한 생물은 무려 8,000만 년이나 섹스의 냄새도 맡지 못했다. 질형목 생물의 450개 종이 모두 암컷이다. 질형목 생물이 진화적으로 장수한 비결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한 조사와 맹렬한 숙고의 영역이었다. 그 비법 중 하나는 식사 중에 다른 생명체로부터 유전자를 ‘훔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어떤 과학자들은 질형목 생물이 저녁거리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수평적 유전자 이동horizontal gene transfer’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기 게놈을 단장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합치면 질형목은 500종 이상의 종에서 외래 DNA를 갖다 붙인 프랑켄슈타인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화를 통해서인지 아닌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처럼 훔쳐온 유전자들은 성이 없는 상황에서 질형목에 필요한 유전적 다양성을 준다. 206)


11장 이분법을 넘어서 : 무지갯빛 진화


따개비는 안착한 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성 체제를 수정하는 능력 덕분에 번식 스펙트럼의 폭이 대단히 넓다. 예를 들어 왜웅矮雄, 즉 난쟁이 수컷은 암컷 위에 내려앉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난소가 발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확실히 수컷으로 분류하기가 뭣하다. ‘수컷의 기능을 강조하는’ 현대 과학이 이 모호한 성을 ‘잠재적 자웅동체potential hermaphrodite’로 기술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웅동체, 암컷, 왜웅 사이의 경계가 너무 흐릿해서 이들의 성적 표현은 명확한 구분이 있다기보다 연속체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따개비에서 보인 한 번식 시스템에서 다른 번식 시스템으로의 빠른 진화는 자연에서 성과 그 표현의 놀라운 유동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따개비,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명체는 진화의 최전선에 서서 우리에게 성이란 이원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현상으로서 진화의 변덕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호한 경계를 지닌다고 가르친다. 216)


러프가든은 『변이의 축제』에서 연어에서 참새까지 3~5개의 젠더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이는 많은 종을 인용했다.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성에 속해 있지만 별개의 외형과 성적 행동을 보이는 동물을 말한다. 무지개양놀래기Thalassoma bifasciatum를 예로 들어보자. 화려한 색깔의 이 자웅동체 물고기를 두고 러프가든은 세 가지 젠더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한 젠더는 수컷으로 태어나 평생 수컷으로 살고, 한 젠더는 암컷으로 태어나 평생 암컷으로 산다. 하지만 세 번째는 암컷으로 태어나 살다가 나중에 수컷으로 변한다. 이처럼 성이 전환된 수컷은 처음부터 수컷이었던 놈들보다 몸집이 훨씬 크다. 환경에 따라 선호되는 무지개양놀래기 수컷의 젠더가 다르다. 해초로 덮인 환경에서는 몸집이 큰 성전환 수컷이 암컷을 지키느라 애를 먹는 반면, 성전환하지 않은 작은 수컷은 더 활발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산호초의 맑은 물속에서는 성전환 수컷이 제 영역과 암컷을 더 잘 지킨다. 따라서 진화는 그 둘의 혼합을 선호한다. 218)


이색적인 앵무고기에서처럼 변화가 영구적이라 일단 성을 바꾸면 죽을 때까지 그 성으로 살아가는 종이 있다. 반면 평생 유동적으로 양쪽 성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물고기도 있다. 산호초 바위 틈바구니에 사는 고비goby처럼 잡아먹힐까 두려워 밖으로 모험하지 않는 물고기에게는 아주 편리한 재주다. 다른 산호 고비를 만나면 상대의 성이 무엇이건 간에 거기에 맞춰 생식샘을 바꿀 수 있으므로 언제나 번식할 수 있다. 어떤 물고기는 성을 뒤집는 빈도가 가히 수준급이다. 초크배스Serranus tortugarum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형광 파란색의 카리브해 물고기로 하루에 최대 20번이나 성을 바꾼다고 알려졌다. 성을 바꾸는 습성은 장기 파트너와 함께 조정하는 행동으로, 정자 생산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산란을 번갈아 하여 상호 공정한 번식 투자를 유지하려는 목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자기가 생산하는 만큼 알을 수정시킨다. 물고기조차 상대와의 관계에서 주는 만큼 받는다는 예시다. 220)


성을 바꾸는 물고기 대부분이 자성선숙이다. 암컷으로 태어나 나중에 수컷이 된다는 뜻이다. 소수지만 그 반대인 웅성선숙의 예도 있다. 흰동가리들이 바로 수컷으로 시작하는 소수에 속한다. 아주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2배색의 이 작은 물고기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말할 것도 것이 이 영화는 흰동가리의 실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적 자유를 발휘했다. 이 일부일처성 산호 서식자는 암수가 함께 말미잘 안에 집을 짓는다. 말미잘의 쏘는 촉수가 흰동가리 커플과 알을 보호한다. 암수의 관계에서 보스는 호전적인 암컷이다. 수컷이 알을 돌보는 동안 영역을 사수하는 일은 암컷의 몫이다. 흰동가리는 최대 30년이라는 긴 수명을 살면서 한 말미잘 안에서 종종 어린 수컷들과 함께 산다. 그러다가 암컷이 예를 들어 꼬치고기에 잡아먹혀 사라지고 나면 미스터 흰동가리가 암컷으로 변신하여 우두머리가 되고 어린 수컷 중 하나가 성숙하여 그 짝이 된다. 220-1)


나오며 편견 없는 자연계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 출간되고 4년 후, 미국의 목사이자 독학한 과학자 안토이넷 브라운 블랙웰Antoinette Brown Blackwell은 『자연계에서의 성The Sexes Throughout Nature』을 출간하고, 다윈은 ‘남성 계통에서 진화한 것들을 과도하게 중시함으로써’ 진화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블랙웰은 유기체가 복잡하고 발전할수록 성별 간 노동의 분할이 더 크다고 제안했다. 수컷에서 진화한 모든 특수한 형질에 대해 암컷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진화시켰다. 그 순수한 결과는 ‘암수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등식에서의 유기적 평형’이다. 블랙웰의 외침은 외롭지 않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소수의 여성 지식인들은 다윈의 연구를 읽은 후 종의 암컷이 소외되고 잘못 이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과학적 가부장제에 의해 묵살되었다. 세라 블래퍼 허디가 비꼬듯이 말한 것처럼 주류 진화생물학에서 이 페미니스트 선조의 영향은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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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없음 - 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
헬렌 톰슨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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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거대한 교란


"지정학의 역사에서 핵심은 에너지다. 석유와 가스에 대해 말하자면, 미국은 1960년대 이래 어느 시기보다도 높은 에너지 자립 역량을 확보했고 금융 분야에서 가진 극단적인 강점이 이 권력을 한층 더 보완하고 있다. 되살아난 미국의 에너지 우위는 중동에서 지정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중국의 해외 석유 의존이 석유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게 했고, 러시아는 유럽의 가스 시장에서 심각한 경쟁 상대[미국]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미-러 경쟁 관계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냉전 종식 이후에 생겨난 단층선들, 그리고 튀르키예를 둘러싸고 더 오래전부터 있었던 단층선들을 압박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이 세계 최대 탄소 배출국인 동시에 재생에너지 발전 및 그에 필요한 금속 생산에서 막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녹색에너지가 화석연료에너지가 일으킨 지정학적 불안정과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지정학적 불안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의미한다."(21-2)


"경제의 역사는 화폐와 금융,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에너지의 요동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EU, 중국의 정책 대응은 세계 경제를 다시 한번 재구성했다. 모든 곳에서 막대하게 쌓인 부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음을 기정사실로 못박았다. 연준은 부채 조달 비용이 지극히 낮은 신용 환경을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다른 나라의 큰 은행들에 최종대부자 역할을 했다. 유로존 위기는 EU와 유로존 사이의 관계를 뒤흔들었고 영국의 EU 잔류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뒤이은 유럽중앙은행의 역할 변화 시도는 유로존을 정치적 림보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2010년대의 10년이 지나면서 세계 경제에, 특히 유럽에 중국의 중요성이 커졌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 연준의 새로운 권력에 제약을 받으며, 하이테크 제조 분야에서 독보적인 초강대국이 되려는 시진핑의 목표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도 제약을 받는다. 이렇듯 경합하는 다중의 압력하에서, 세계 경제는 더 첨예한 지정학적 갈등의 장이 되었다."(22-3)


"민주정치의 역사에서 유럽과 북미의 대의제 민주정은 사람들이 공동의 정치적 삶을 꾸려가기에 안정적이고 우월한 구조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모든 정부 형태가 그렇듯 대의제 민주정도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생겨났을 당시의 지정학적·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불균형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대의제 민주정은 국가공동체주의[또는 민족주의]에 의존했는데, 국가공동체주의는 대의제 민주정의 작동에 꼭 필요하지만 불안정의 원천으로 작용할 소지도 그만큼 크다. 이러한 취약성은 대의제 민주정 정치체들이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했고, 종종 (1930년대 대공황 같은) 부채로 인한 경제 위기 때 등장했다. 1990년대부터 모든 곳에서 민주정 국가의 정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지금보다 늘도록 경제를 개혁하라는 대중의 민주적 요구에 점점 더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주정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금권귀족정plutocracy의 경향성이 커지는 데 취약해졌고 개혁은 더 어려워졌다."(23-4) 


| 1부 | 지정학

1장 석유 시대의 시작


"국내에 석유 매장고가 없는 유럽의 큰 국가들은 에너지 자립에 실패한 것이 유럽의 유라시아 지배가 종말을 고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여겼다. 석유의 시대는 유럽이 세계 패권국이 되거나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적 권력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터였다. 1970년대부터 미국은 독일이 러시아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는 것을 마지못해 용인했다.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미국 국내에서도 충분한 공급량이 없고 중동에서 충분한 공급량을 확보할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에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서 석유와 가스가 재부상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연결은 우크라이나의 독립, NATO의 확대, 독일의 취약한 군사력 등과 연결되는 중대한 지정학적 단층선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중국-이란의 관계는 이 이슈들의 영향을 한층 더 다루기 어렵게 만들었다. 2015년 이란 핵 합의에 참여한 NATO의 유럽 회원국 세 곳 모두가 이란에서 가스를 공급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52)


"미국이 유럽의 에너지 의존도와 관련된 지정학에 오늘날과 같이 관여하게 된 기원은 2차 대전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중반인 이때 유라시아에서 미국이 지정학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는 명심해야 할 커다란 경고등이 하나 있었다. 그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의 승리가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나중에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두 대륙 강국이 동맹을 맺고 유럽과 중동을 나눠먹으려 할 위험도 충분히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석유는 독일 시장을 러시아 자원과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지정학적 논리를 한층 더 강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히틀러는 영토 정복과 제노사이드라는 불가능하고 끔찍한 비전 때문에 그 가능성을 깨뜨렸다. 하지만 전후 세계에서 독일과 소련 사이에 어떤 연합 관계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을 막으려면, 미국은 서독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터였다."(52-4)


2장 석유를 보장할 수 없다


"전후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구상에는 근본적인 단층선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이 중동을 냉전의 장소로 생각하긴 했지만, 트루먼부터 존슨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미군을 중동에 주둔시키거나 페르시아만에 미 해군을 진지하게 개입시킬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너무 많은 군사적 부담을 지는 것이 국내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영국이 중동에서 제국적 통치를 유지해줄 필요가 있었다. 냉전 초기 몇 년간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대비책에는 이집트에 기지를 둔 영국군이 공습을 해주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목적에서, 트루먼은 영국이 수에즈에 짓는 아부 수위르 공군기지 건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훗날 나세르가 소련 쪽으로 기울었을 때, 아이젠하워는 영국이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튀르키예와 반소련 군사동맹을 맺도록 뒤에서 독려 했을 뿐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을 우려해] 그 동맹(바그다드 협약)에 참여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65-6)


"튀르키예도 미국의 1950년대 유라시아 구상에 불편한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 역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탈린이 1946년에 다르다넬스해협의 공동 관할권을 요구하면서 튀르키예에 최후통첩으로 압박을 가하자 트루먼은 미 군함을 지중해로 들여보내고 공습을 승인했다. 명분이 무엇이든간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에너지였다. 트루먼이 의회에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자금 지원 승인을 요청한 바로 그날 미국의 4대 석유회사들이 아람코에 공동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전이 중동으로 확대되자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유럽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안보동맹의 한계를 드러냈다. 1952년에 트루먼 행정부는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NATO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소했다. 하지만 이는 NATO에 첨예한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몇몇 유럽 쪽 회원국이 서유럽 안보와 중동 안보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66-7)


"미국이 중동에 군사적으로 들어와 있지 않다고 해서 중동에서 강압적 위력을 행사하지 않고자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에 대해 은밀한 작전을 펴기 위해(또한 여차하면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도 있게) 트루먼이 세운 CIA가 중동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새 이란 총리 모함마드 모사데그가 1951년에 앵글로-이란 오일컴퍼니를 국유화하고 양허를 종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만에서 이란의 석유 수출을 봉쇄했다. 트루먼은 중재를 시도했지만, 1953년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설득으로 CIA가 영국 정보기관과 함께 모사데그 축출 작전을 펴게 했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개입은 이란의 석유 분야 재건을 돕기 위해 미국 회사들이 이란 국영회사가 꾸리는 새로운 컨소시엄에 들어가도록 미국 정부가 미국 기업들을 압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개입은 미국-이란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고 중동이 미국에 더욱 큰 군사전략적 부담이 되게 했다."(67)


"처음부터 중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는 문제가 가득했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중동 지역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맹렬한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수에즈 이후 10여 년 뒤, 미국이 표방한 서유럽의 석유 보장은 일관성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서유럽이 원한 바도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중동에서 충분히 장기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 석유를 들여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역외 제재를 가하거나 금융으로 위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서유럽이 [소련 석유 대신] 페르시아만 석유를 수입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미국의 기대는 궁극적으로 영국이 중동에 주둔하는 데 달려 있었는데, 영국이 발을 빼기로 했을 때 미국은 이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이라크가 1968년 이후 소련 쪽으로 기울면서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졌다. 또 이제는 이란에 너무나 많이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란의 야망은 이라크가 소련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게 할 인센티브만 만들었을 뿐이었다."(76-8)


"데탕트[1970년대 동서간 긴장 완화]는 베트남 전쟁이 일으킨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에너지와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 1970년대 말이면 미국의 에너지 권력은 사그라드는 반면 소련의 에너지 권력은 떠오르고 있었다. 미국의 원유 생산은 1970년에 정점을 치고 감소하고 있었다. 2018년까지 미국은 1970년 수준의 생산량에 다시 도달하지 못한다. 국내 수요 이상을 생산할 역량이 없었으므로 미국 생산자들은 이론상으로라도 서구에 석유의 최종공급자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미국 자체도 석유를 수입해야 했다. 따라서 미국은 NATO 회원국들이 석유를 페르시아만에서 공급받게 하는 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소련의 석유 수출보다 소련의 가스 수출이 지정학에 더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로, 소련의 가스 수출은 핵발전이 크게 제약될 세계에서 녹색 운동이 서독의 정치에 비중 있게 부상하던 시기에 소련-독일 간 우호 관계의 물적 기반이 될 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다."(80)


3장 유라시아, 재구성되다


"소련 붕괴는 독립 국가 우크라이나가 생겨나게 한 데 더해 흑해와 카스피해 일대 및 이 두 바다 사이에 있는 캅카스 지역에 1차 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도 뒤흔들었다. 이 변화는 소련 말기에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격화되었다. 199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운송하는 파이프라인이 러시아나 이란을 통과하지 않게 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쿠에서 조지아를 거쳐 튀르키예의 항구 도시 제이한으로 이어지는, 공사 비용이 많이 드는 파이프라인을 지원했다. 조지아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를 NATO와 EU에 가입할 기회라고 보았고, 2003년 ‘장미 혁명’을 통해 친서구 정부가 들어섰다. 튀르키예로서는 새로 지어진, 그리고 새로 제안된 수송관이 필수 에너지원에 대해 〈수송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되살아난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동유럽을 둘러싸고 NATO와 EU 사이에 발생한 긴장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102-3)


"1997년 러시아와 튀르키예 정부는 흑해 해저에 블루스트림 파이프라인을 짓기로 합의했다. 2003년에 개통된 블루스트림은 러시아가 튀르키예로 수출을 늘리고 유럽으로 가는 가스 일부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통하지 않고 유럽 시장에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 파이프라인은 유럽에 더 많은 분열의 씨를 뿌렸다. 튀르키예는 수입 석유와 가스에 매우 의존해왔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새로운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면서, 카스피해와 중동을 남유럽 소비자와 연결하는 에너지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러한 석유와 가스 수송 네트워크는 과거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곳들을 연결하게 될 터였다. 이제까지 튀르키예는 에너지가 풍부한 중동과 카스피해의 캅카스 모두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향후 30년간 유라시아의 이러한 에너지 지리학은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협력하고자 하게 만들 동기 또한 상당히 많이 만들어내게 된다."(105-6)


"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석유와 가스 수출의 재정 수입이 늘면서 푸틴은 러시아가 1990년대에 IMF에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고, 이로써 미국이 부채를 통해 러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이 사라졌다. 이라크 전쟁은 러시아-중국 간에 떠오르던 이 에너지 협력 관계를 한층 더 활성화했고 중국이 지정학 전략을 다시 짜도록 자극했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미국의 행동은 미래에 석유 공급이 불길하리라고 말해주는 확실한 전조로 보였다. 미국이 에너지 안보를 위해 군사력을 진지하게 사용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은 중국도 자신의 해외 공급원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 역량을 강화해야 할 이유가 되는 듯했다. 2003년 11월 중국 주석 후진타오는 중국이 ‘믈라카 딜레마Malacca Dilemma’를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 공동 수역에서 항행의 유지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해상 강국인 미국이 믈라카 해협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석유를 차단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중국의 취약성을 말한다."(110-1)


"오바마의 임기가 끝나가던 시기에 미·중 관계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구조적 역학이 있었다. 한편에서 미국은 태평양에서 억지 전략을 펴는 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중국은 유라시아의 상당 지역을 경제적 세력권에 넣어서 믈라카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 기후가 미·중이 협력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기후변화가 미·중 데탕트의 논리를 만들었다면, 그와 동시에 일대일로는 탄소집약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중국-러시아의 석유 관계에 가스까지 보탰다. 2016년 대선에서 〈중국에 맞서자〉 후보(트럼프)가 〈러시아에 맞서자〉 후보(힐러리 클린턴)보다 지정학 이슈를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의 협력이 즉각적으로 일으킨 정치적 문제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관세 압박을 가해 미·중 교역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테크놀로지 경쟁이 국가안보의 문제라고 보는 데서도 이견이 거의 없었다."(119-20)


"2014년 ISIS가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이라크 정부가 붕괴하면서, 오바마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미군을 파병했다. 이 새로운 중동 전쟁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군사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번에도 미국의 국내 정치가 미국 대통령의 운신을 제약했다. 의회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2014년에 오바마는 시리아 ‘공습’에 대해서는 의회에 동의안 제출을 시도하지 않았고 시리아 반군에 물류 지원을 강화하는 것에만 의회에 동의를 구했다. 또한 시리아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약간의 항공 작전과 특수군 활동으로만 한정했으니 지상에서 벌어지는 실제 전투는 현지의 반군 세력을 찾아내 맡겨야 했고, 미국은 쿠르드인민방위군(이하 ‘YPG’)을 선택했다. 이 막다른 전술은 곧바로 튀르키예 정부와 해결 불가능한 갈등을 일으켰다. 튀르키예는 YPG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었다."(126-7)


"이란 문제와 관련해서, 오바마는 이란의 핵 야심을 꺾기 위한 미국의 위력 과시가 관계 재설정의 조건이 되어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미국의 에너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여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2015년의 핵 합의가 일시적으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란이 중동에서 벌이는 지역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합의가 제재하는 바가 없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단지 지연만 시킬 수 있을 뿐이고 이란이 시리아에서의 군사 행동도, 헤즈볼라와 하마스 지원도 계속할 수 있다는 현실은 미국 의회에 첨예한 동요를 일으켰다.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이 조약을 비준할 리 만무했으므로 오바마는 입법부의 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부 간의 협정으로 틀을 바꾸었고, 따라서 미래의 어떤 대통령이든 [역시 의회의 동의 없이]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당내 경선에 나선 공화당의 주요 후보 모두가 반대했으므로, 이란 핵 합의는 민주당이 대선에서 지면 존속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128-9)


"미국이 석유 수입을 완전히 멈춘다 해도(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미국의 에너지 자립은 환상이다. 셰일오일을 처리할 미국 내 정제 시설 용량 때문에 셰일오일 생산량이 제약되기 때문이다. OPEC 플러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유가가 너무 오르면 미국 소비자에게, 유가가 너무 내리면 미국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미국 대신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이 된, 셰일이 구성한 에너지 세계는 역설적으로 카터 독트린의 군사전략적 논리를 강화한다. 중국이 페르시아만에 해군을 영구 주둔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지도부는 이란을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국가로 취급한다. 미·중 간의 지정학적 경쟁 관계가 격화되고 있으므로 어떤 미국 대통령에게라도 중국이 그곳에서 지배적인 해군 주둔국이 되게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으로 가는 석유 수입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페르시아만에 미국이 계속 주둔한다면, 국내 정치에서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131-2)


| 2부 | 경제

4장 우리의 통화, 당신네 문제


"브레턴우즈 종말 이후의 통화 세계에서 유로달러 시장과 석유가 미국 금융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유로달러 시스템은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국내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유지하기가 더 쉬워지게 해주었다. 역외 달러 시장 덕분에 달러가 은행 거래와 신용 거래의 주요 통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3년 오일 쇼크는 유로달러 시장을 한층 더 활성화했다. 또한 아랍 산유국들이 버는 달러 수입이 다시 미국으로 흘러와 재유통되는 메커니즘도 생겨났다. 닉슨의 재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로 번 달러를 [미국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에 빌려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1974년에 사우디가 미 국채를 사주도록 합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보면, OPEC 국가의 국영 기업들이 중동에서 활동하던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점유율을 가져가던 1970년대에, 미국의 중동 에너지 안보에서 사우디의 효용성이 높아진 것과 사우디가 미국이 석유를 달러로 수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한 세트였다."(154-5)


"1970년대의 경제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가 부상해서’라고만 설명한다면 그 10년간 위기의 기저에서 정치인이나 중앙은행장의 성향과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펼쳐지던 물적 요인의 중요성을 절하하는 것이다. 특히 에너지는 1970년대에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정치인들이 자본 이동 규제를 없애려는 강한 동기가 있었던 이유는 치러야 할 석유 수입 대금이 늘어서 달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주창자로 꼽히는 프리드먼도 에너지 문제에 집착했고 연방정부의 유가 통제와 사실상의 석유 배급이 에너지 부족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인플레란 늘 화폐적 현상이고 에너지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그의 학문적 논지는, 정치적 의미로 보자면 석유의 공급 부족을 없애려면 유가가 올라야 한다는 믿음의 쌍둥이 논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156-7)


"1971년 초 무렵이면 도이체마르크는 달러 대비 막대한 절상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독일 기업들이 국내의 일반 금리보다 금리가 낮은 유로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굉장히 많이 빌린 뒤에 그것을 도이체마르크로 되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에 EC는 스네이크 체제Snake in the Tunnel라는 공동 환율 제도를 채택했다[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 유럽 역내의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체결된 환율 시스템. 유럽 역내 통화 사이에서의 환율은 2.25퍼센트의 변동 폭 내에서 움직이도록 하고, 역외 통화에 대해서는 변동환율을 허용했다]. 이 체제는 역내 통화들의 환율이 브레턴우즈에서보다 좁은 변동 폭에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의 변동 폭은 달러에 대한 개별 통화의 변동폭보다 낮았다. 하지만 스네이크 체제는 EC 국가들의 통화를 서로에 대해 안정시키려면 통화가 취약한 국가들이 국내 정치적으로 도저히 고려할 수 없는 정책을 그 국가들에 강제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158-60)


"단기적으로 달러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중기적으로 달러가 유럽 국가들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면 독일과 프랑스가 계속해서 〈두 개의 다른 통화 지역〉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슈미트는 환율조정장치Exchange Rate Mechanism(이하 ‘ERM’)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이하 ‘EMS’)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다소 까다로운 상대이긴 했지만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함께 이 일을 추진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유럽 고정환율 시스템에서 모든 당사국은 인위적으로 만든 새 화폐 단위인 유럽통화단위European Currency Unit(이하 ‘ECU’)[EC의 통화 단위. 1979년에 도입되었고 1999년 1월 1일 유로화로 대체되었다]에 자국 화폐를 고정함으로써 유럽통화제도가 수반하는 통화들 사이의 권력 위계를 가리려 했다. 금융 역사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ECU를 “독일 마르크화에 프랑스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묘사했다."(161)


5장 ‘메이드 인 차이나’는 달러가 필요하다


"2000~2007년, 연평균 성장률이 최고 14퍼센트에 달하기도 했던 중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은 세계 경제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는 달러 대비 인민폐 환율을 수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수출 주도 전략을 폈다. 중국이 2001년에 WTO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2000년에 미국이 중국과 영구적인 무역 정상화를 하기로 하면서 여기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 이 새로운 무역 세계에서 중국의 수출품은 주로 제조품이었다. 따라서 미국과 상당수 유럽 국가들이 막대한 대對중국 무역 적자를 보게 되었다. 미국의 대對중국 상품수지 적자는 1999~2008년 사이에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중국 제조품 수출의 급증은 북미와 서유럽의 노동시장에, 특히 미국 노동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충격의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국의 수출이 집중된 분야에서 상당히 충격이 컸으며 자국내 공급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182-3)


"표면상으로 보면 워싱턴에서의 정치적 대치는 후버 행정부 때부터 레이건 행정부 때까지 의회에 존재했던 보호주의적 압력의 재탕 같았다. 하지만 몇몇 미국 기업은 초국적 생산과 중국의 커다란 공급망으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미국의 테크 분야와 전자제품 제조 분야는 제품을 중국에서 조립하는 데서 막대한 이득을 보았고 월마트 등 값싼 중국제 수입품을 판매하는 거대 할인 유통매장도 그랬다. 2004년부터는 애플의 거의 모든 제품이 해외에서 제조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에서였다. 이렇게 이득이 선택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중국에 맞서자〉는 레토릭에 대한 공감을 감소시켰다. 아이팟을 중국에서 제조하는 것이 미국의 무역 적자를 심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제품의 부가가치 대부분은 여전히 미국이 얻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미국의 정치에서 계급 갈등을 촉발했다. 이득을 얻는 쪽은 주주들이거나 높은 보수를 받는 경영자들이었고 손해를 보는 쪽은 공장 노동자들이었다."(184-5)


"어떤 이들은 21세기 초 미국의 통화 이득과 중국의 무역 이득을 보면서 앞으로 꽤 한동안 금리가 내내 낮게 유지될, 사실상 새로운 국제 통화 질서가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이 질서가 브레턴우즈의 반쯤 부활한 버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과 모리츠 슐리크는 이 경제 세계를 〈차이메리카Chimerica〉라고 불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기적인 불안정성이 상당히 존재했고, 곧 이 불안정성은 세계 경제 전체로 파급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무엇보다, 석유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무해하기만 한 신용 환경을 창출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만들었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석유 수요와 점점 심해지는 공급 부족이 통화 부문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통화 부문에서의 파장은 연준이 유가 상승이 추동하는 인플레를 우려해 통화를 조이기 시작한 2004년 6월에 처음 드러났다. 연준의 고위 정책결정가들에게 고유가의 귀환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191-2)


"사실 2007~2008년 붕괴는 여러 개의, 다중 붕괴였다. 첫 번째 붕괴는 미국의 주택 시장 붕괴였다. 두 번째 붕괴는 미국에서는 2007년 4분기에, 유로존과 영국에서는 2008년 2분기에 시작된 경제 불황이었다. 이 불황은 유가 충격, 그리고 이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정책 대응으로 일어났다. 세 번째 붕괴는 2007년 8월 9일에 레포 시장에서 시작된 은행 붕괴였다. 은행 간 거래 시장에서 모든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이 급등했다. 연준은 통화 정책 대신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에 달러 스와프를 제공하는 쪽으로 정책 수단을 변경했다. 그 중앙은행들을 통해 달러가 유로달러 신용 시장의 유럽 은행들에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연준이 달러 자금 조달 시장을 안정시키려 하는 동안, 은행 위기는 석유가 일으킨 불황과 결합했다. 북아메리카, 유럽, 몇몇 아시아 국가에서 산출과 고용이 더 떨어졌다. 세계 전역에서 소비 수요가 너무 떨어져서 국제 교역이 빠르게 위축되었고 중국의 수출 분야가 타격을 입었다."(194-8)


6장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2007~2008년의 금융 붕괴 당시가 제대로 기능하는 신용 환경이었다면 연준이 매우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폈을 때 신용 시장이 되살아나고 실물 경제가 다시 성장 경로에 올라갔어야 한다. 하지만 유로달러 시장 때문에 금융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 매우 꼬여 있었다. 금리 인하만으로는 은행들의 자금 조달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연준은 유로달러 시장에서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야 했다. 연준의 조치는 주요 유럽 은행들의 파산을 막았지만, 동시에 지정학적 함의가 있는 금융·통화 위계를 만들었다. 2008년 이후의 통화 세계에서 연준은 어떤 나라의 은행이 빌리는 달러를 연준이 지원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었다. 총계적 수준에서 국제 신용 환경은 위축되었다. 그런데 이 위축은 주로 유럽에서, 특히 영국의 은행들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에서는 국경을 넘는 신용 흐름이 증가했다. 그 결과 2008년 이후 중국 경제는 달러 신용 환경에 훨씬 더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205-6)


"양적완화는 체계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중 일부는 자산 가격 인플레와 관련이 있었다. 연준의 조치는 채권수익률을 끌어내리면서 불가피하게 자산 가격을 밀어올렸다. 이는 은행들의 대차대조표가 건전해 보이게 했고 따라서 은행들은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으며, 그러는 동안 은행들이 빌리는 돈에 대해 금리는 계속 제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연준의 정책은 자산 가격 상승과 값싼 신용을 동시에 일으키면서, 기업들이 빌린 돈을 생산적인 역량에 투자하기보다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쓰고자 할 유인을 강화했다. 또한 자사주 매입의 급증은 미국의 많은 거대 기업들이 고위험 금융 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따라서 팬데믹이 강타했을 때 기업들의 현금 보유는 매우 낮은 상태였다. 더 일반적인 면에서, 상승하는 자산 가격은 당연하게도 이미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했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들이 자산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양적완화는 세대 간 부의 불평등을 증가시켰다."(207)


"유로존의 통화 취약국들은 더 심각한 구조적 동학에 처했다. 우선 스프레드를 관리하려면 금융 시장에서 자국의 신뢰도를 방어해야 하는데, 국채 시장에서 압력을 줄여줄 목적으로 통화 정책을 펼 수 있는 중앙은행이 없었다[유로존에서 개별 국가의 중앙은행은 통화 정책을 유럽중앙은행에 이관했고 유럽중앙은행은 개별 국가의 통화 방어를 위한 통화 정책을 펼 수 없다]. 이에 더해,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유럽중앙은행이 회원국 부채를 직접 매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유럽중앙은행은 어떤 나라의 국채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부채 보증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국가 안에서도 유럽 차원에서도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줄 곳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 간 자금 조달 비용의 차이인 스프레드는 사라질 수 없었다. 자본 시장에서 거부당한 나라들(2010~2011년에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은 이제 구제금융이 필요했는데,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구제금융도 금지하고 있었다."(211-2)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중국 지도부는 중국이 〈달러의 덫〉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대규모의 달러를 보유하고 무역을 거의 전적으로 달러로 결제하고 있는데, 미국이 언제라도 달러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이 부채를 조달해 대규모 부양책을 편 후에, 중국의 은행 시스템이 GDP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그 은행 시스템과 중국 기업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국제 달러 신용 환경에 깊이 통합되었다. 2014년이면 중국의 총 대외 부채는 (아마도 축소되었을 공식 발표에 따르더라도) 2008년보다 450퍼센트 이상 높았고 상당 부분이 달러 표시 부채였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여름에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막대한 자본 이탈을 겪은 중국 당국은 국내의 금융 안정성이냐 국제 시장에서의 인민폐의 지위냐 중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중국 당국은 전자를 선택했고 자본 통제를 강화했다. 이렇게 누적된 금융 위험은 중국의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했다."(232-3)


"시진핑 본인의 말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중국 경제를 지정학적으로 다시 계산하고자 했다. 시진핑은 기존의 미국 수출 시장 위주에서 유라시아로의 전환을 한층 더 강화했다. 이러한 지리적 전환은 대對유럽 교역과 투자를 늘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의 유라시아로의 전환은 유럽을 분열을 촉진했다. 중국의 유라시아로의 전환, 그리고 2016년 이후 자본 통제 강화로 인한 중국의 유럽 투자 축소 모두가 유럽을 경제적으로 분열시켰다. 두 요인 모두 EU와 유로존 둘 다에서 독일의 경제적 위치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는 점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러는 동안, ‘차이메리카’의 경제적 공생 관계가 미-중 간의 지정학적 라이벌 관계로 바뀌고 홍콩이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줄면서 유럽의 경제적 분절은 첨예한 지정학적 측면을 갖게 되었다. 중국이 러시아와 더불어 EU에서 NATO를 둘러싼 분열의 원천이 되었고 영국이 EU로부터 멀어지는 데 명시적인 지정학적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236, 240-1)


| 3부 | 민주정치

7장 민주정에서의 ‘시간’


"역사에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 의식이 제공하는 정치적 자원 없이 대의제 민주정이 존재한 사례는 없었다. 개념적으로, 대의제 민주정에서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는 ‘국민’으로서 기능한다. 누가 그 국민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용되어온 답은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nation’이었다. 대의제 민주정에는 패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필요하다. 정부 형태 중 대의제 민주정만이 모든 성인 시민에게 통치자가 누가 되어야 할지를 물은 다음에 그 시민의 일부만 그들이 선택한 대표자를 갖게 한다[나머지 시민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대표자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권력이 교체될 수 있으려면 선거에서 진 사람들이 폭력이나 분리 독립으로 가지 않고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할 암묵적인 정당화 기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정치적 문제에 역사적으로 해법을 제공해온 것이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 의식nationhood이었다."(253-4)


"국민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 정치 형태에서 실제로 국가공동체 의식을 일구는 일이 현실적으로 막대하게 어렵다는 사실은 민주정 정치체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부담이었다.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람들로서의 ‘국민the people’이라는 용어는 필수 불가결했고, 즉각적으로 활용이 가능했으며, 또한 사라지기 쉬웠다. ‘국민’으로서의 민족공동체 개념이 ‘패자의 동의’를 가능케 해주는 통합의 동인이 되리라 여겨진 곳에서, 이 화법은 동일한 민주정 국가의 권위에 귀속되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부인하는 데도 그만큼이나 쉽게 사용될 수 있었다. 민족/국민이 아닌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다른 종류의 충성심을 가졌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배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국가nation라는 단어의 의미를 현재 확립되어 있는 국가의 시민들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재정의하려는 세력에 표를 던지려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259)


"정치에서 시간이 ‘불안정화의 차원dimension of instability’이라는 점(역사학자 존 포콕이 한 말이다)은 한때 정치 사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개념이었다. 유럽에서는 시간에 따른 부패라는 개념 틀로 정부 형태를 이해하려는 접근이 일찍이 폴리비오스부터 시작해 마키아벨리에서 학술적 정점에 올랐다. 폴리비오스는 각각의 정부 형태가 그 자신의 과잉에 의해 파괴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사이클을 막고 중간 상태(‘균형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 가지의 긍정적인 정부 형태인 왕정, 귀족정, 민주정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길항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증가하는 외부적 권력과 물질적 번영은 어떤 구조적 균형이 성립되었더라도 그것에 위협 요인이 된다고 경고했다. 폴리비오스가 말한 귀족적 과잉과 민주적 과잉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정치체가 시간이 가면서 불안정해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260-2)


"대의제 민주정이 가지고 있는 귀족정의 요소는 종종 수사적으로 가려지지만, 일반적으로는 귀족정의 요소가 더 지배적이다. 대의제 민주정은 대표를 위임하는 다수의 사람들과 훨씬 소수인 대표자들 사이를 구분하며, 권위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행정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시킨다. 대통령제에서 이들 중 일부는 선출되지 않고 지명된다. 또한 국민 다수의 표를 얻은 선출직 대표자들이 내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헌법에 의해 제약된다. 모종의 사법적 심사 제도가 있는 민주정 정치체에서, 때로는 헌법 재판소가 선출된 의원들이 만든 법을 철회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사법적·헌법적 실행은 소수자를 보호하는데[다수의 의견으로 정해진 결정도 철회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호받는 소수자에는 부자들도 포함된다(재산권을 통해 보호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고 노동자에게 가는 몫을 늘리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든 것은 보편참정권에 기반한 선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264-5)


8장 민주정 과세 국가의 흥망


"전체적으로 보면, 2차 대전 이후의 지정학적·경제적 세계는 1차 대전 이후의 세계보다 민주정 국가들의 미래에 더 유리한 면이 있었다. 구조적으로, 브레턴우즈 체제는 전후 서구 국가들에서 경제적 공동체주의를 촉진함으로써 이 국가들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다른 나라들에 자본 이동을 통제할 권한을 주고 단기 신용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은 전후 서유럽 민주정 국가들에 중대한 이점이 되었다. 금융을 국가 단위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 전후 민주정 국가들은 통화 정책에서 [국제 금융의 영향력에 대해]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본 이탈 위험이 줄면서, 전후 서유럽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을 국가가 그들에게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으로서 이야기했고, 그러한 경제적 권리가 현실에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두고 서로 경쟁했다. 따라서 정부와 당국자들은 경제를 국가 단위로, 즉 국가 단위의 성장 회계와 성장률을 통해 이해했다."(287-8)


"전후 유럽의 민주정 국가들은 1920년대보다 재정 위기에 처할 위험이 적었다. 1945년 이후로 정부들은 부자들에게 상당한 과세를 하는 것도 포함해 전쟁 시기에 도입된 고율 과세 체계를 평화 시기의 복지 제도에 활용할 수 있었다. 이 복지 제도는 이후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간 이어지게 된다. 국가가 자본 이동을 통제할 수 있어서 부자들의 조세 회피와 포탈이 어려워진 것이 여기에 일조했다. 또한 정부들은 과거의 부채를 상환하느라 고전할 필요가 없었다.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의 자금이 공식적으로 주입되고 이어서 부채 저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 민주정 국가들이 부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이 시기에 새로운 부채를 그다지 많이 쌓지 않았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쪽으로 돌아서기 전까지, 전후의 정부들은 대체로 균형 재정을 유지했고 지출은 자국의 시민과 기업으로부터 걷는 세금으로 충당했다."(291-2)


"미국에서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이 더 높아진 민주정, 모든 시민의 투표권이 연방정부에 의해 보호되는 민주정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시기는 베트남 전쟁에서 징집 군인들이 싸우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종적으로 통합된 군대를 위한 징집제가 새로이 정치적 국가공동체주의를 재생하는 데 기반이 되기는커녕, 되레 인종적·계급적 갈등을 일으켰다. 상당수의 부유한 백인 남성은 [대학생 징집 유예 등으로] 교육 기회를 이용해 징병을 유예했다. 대조적으로 흑인은 인구 비례 수준 이상으로 많이 징집되었고, 인구 비례 수준 이상으로 많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 초기에는 더욱 그랬다. 징집은 베트남 전쟁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징집을 끝내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했을지는 몰라도, 이제 국가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역사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선택지는 미국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뉴딜 버전 국가 공동체주의의 토대였던 경제 여건도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98)


"1970년대 이후 더 국제화되고 금융화된 경제의 여러 영향이 함께 작용하면서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를 끝장냈다. ‘경제적 운명을 공유하는 국가 단위의 정치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경제적 운명에 대해 국가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그것을 지탱해주는 외부 환경이 사라지면서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이익은 너무나 맹렬하고 명백하게 분열되었다. 여러 유럽 국가에서 전국 단위의 단협을 가능하게 했던 국가조합주의는 붕괴했고, 개방적인 자본 흐름과 점점 더 국제화되는 생산 환경에서 그것의 복원은 불가능했다. 예측 가능하게도 부채가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들이 국제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려 지출을 충당하는 쪽으로 돌아가자 저축자이자 납세자인 시민들을 통해 국가의 자금을 조달하고 채권자-채무자간 갈등이 일으키는 위험을 제어하던 기제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다음에 재정 적자를 유지하는 이자 부담은 세금으로 시민들에게 떨어졌다."(312-3)


9장 개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쉽게 고칠 수 없는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통화연맹은 EU 회원국들의 국내 정치에 막대한 부담을 가져왔다. 불안정을 일으키는 요인 중 어떤 것은 맨처음부터 존재했다. 통화연맹 구성이 본질적으로 독일이 제시한 조건대로 이루어졌으므로 회원국 전체에서 지지를 얻기에 정치적 합의가 매우 부족했다. 국가 정치에서의 선거와 EU 조약이 정한 법적 원칙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일반적인 이슈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가 유로존에 일어날 수 없는 변화를 요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로존이 부채가 국내 정치의 장에서 논의와 경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는 방어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2012년에 올랑드가 EU 조약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걸고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약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듯이, 2010년 선거에서 [EU 조약이 정한 단일시장 규칙에 맞서서] 이민자 제한 목표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한 캐머런도 실제로 공약을 실행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353-4)


"2008년 이후의 통화 환경, 그리고 구성 조약을 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유럽중앙은행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독일 정치에 유로존 이슈를 다시 불러옴으로써 기본적인 분열의 동학에 교란 요인을 더 보탰다. 여기에 더해 2015년의 국경 위기는 EU와 유로존에서 독일이 갖는 영향력을 둘러싸고 생겨났던 정치적 문제들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다국가 연합으로서의 UK의 불안정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유로존의 각기 상이한 측면들에 대해 분출한 대중민주적 불만이 억눌러져야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이것이 대연정 정치로의 움직임을 추동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로존 및 EU 조약이 주요 양당을 너무나 약화시켰기 때문에 대연정이 선택지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거리의 시위 정치가 성장했고 때로는 국가가 억압으로 이에 대응했다. 카탈루냐 문제가 대연정의 전조가 되었던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에서보다도 더 가혹하게 국가의 억압적인 대응이 벌어졌다."(354)


"미국에서는 민주정치적 과정이 과두 귀족들의 돈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제약되었다. 핵심 질문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무엇이 동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선거 결과가 합당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되었다.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가 되살아나 더 많은 시민을 포괄하거나 시민권 문제를 해소해주기는 어려워진 상황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인구 구성이 바뀌면서 ‘패자의 동의’가 잘 작동하도록 국가공동체주의를 일구어야 할 필요성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공화당은 냉전 시기에 외교 이슈에서 가졌던 이점이 없어졌고 민주당은 남부에서 강하게 가지고 있던 입지가 1964년 이후로 계속 약화되었기 때문에, 두 정당 모두 유권자 과반을 잡는 데 고전했다. 이에 더해 1960년대 이래 대법원의 결정을 둘러싼 맹렬한 싸움은 매번의 대선을 일정 정도 앞으로 대법원의 정치적 방향이 무엇이 될 것인가의 싸움이 되게 했고, 이는 대법원의 역할이 합의된 헌법을 고수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훼손했다."(355-8)


"패자의 동의가 취약하다는 사실의 기저에는 미국의 국가공동체주의 그리고 그 공동체주의와 연방제라는 형태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다. 미국의 역사적 기억에 대한 이슈들, 특히 미국 공화정의 건국에 대한 기억의 이슈는 해체적인 정치적 열정에 불을 붙인다. 남부연맹의 역사를 집합적인 미국의 역사적 경험에 포함하는 것은 남북 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합의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전의 노예가 이제는 시민이 된 국가에서, 이것은 미국 국가공동체주의의 언어를 크게 제약했다. 아직 미국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 ‘미국인’ 개념을 뒷받침하는 과거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더해 인구 변화로 반다수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상원의 구조가 정치의 결과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충돌 양상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선거 자체가 민주정의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헌법 자체가 점점 더 민주정치적 쟁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370-1)


나가는 글: 앞으로 올 더 많은 일들


"팬데믹은 새로운 변화를 불러온 촉매이자 이전 교란의 연속선이었다. 21세기의 첫 20년간 형성된 문제들은 모든 면에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녹색에너지 투자를 가속화하려는 지정학적 동기는 미·중 경쟁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가장 명백하게는, 미국이 중국 제조업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깨는 데 성공할수록 중국의 맞대응이 더 촉발될 것이다. 중국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국내 시장을 확대하면 세계 경제에는 미·중 간의 지정학적 경쟁 관계가 스며들지 않은 영역이 거의 남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묶여 있는 모든 나라는 해양 수송을 경제 안보의 문제로 여기게 될 것이다. 유라시아에서는 중국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육상 벨트의 일부로 추구하는 철도 경로가 한층 더 정치적인 싸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기후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세계에서 석탄을 태울 수 있는 역량이 중국의 암묵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대기 오염 문제만으로도 석탄에서 멀어져야 할 국내적 인센티브가 상당하긴 하지만 말이다."(392-4)


"녹색에너지가 만들 지정학적 동학은 석유와 가스가 만들어온 오랜 지정학적 동학과 공존할 것이다. 중국이 계속해서 중동 석유에 의존할 것이고 중국이 추진하는 유라시아 벨트의 파키스탄 부분이 ‘믈라카 딜레마’에 대해 부분적인 안전망밖에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에너지와 관련해 미국의 군사적·금융적 권력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전히 있다. 또한 중국의 중동 에너지 의존은 미국이 페르시아만에서 철수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옛 에너지 현실의 지정학적 영향은 2021년에 (중국이 이란의 석유와 가스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을 포함해) 중국과 이란이 25년간의 경제 파트너십을 맺기로 하면서 더 없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과거에 중동을 둘러싼 유럽의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는 데 이란이 핵심이었듯이, 석유와 가스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석유와 가스에 계속해서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이 직면하는 어려움 속에서 이란은 앞으로도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394-5)


"석유 생산을 둘러싼 지정학적·금융적 조건에서 나온 역기능적 동학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공급과 관련해서 셰일오일은 늘 중기적인 해법밖에 되지 못했다. 석유 분야에 막대한 투자가 쏟아져 들어와 고비용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되풀이될 수 없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세계 경제는 2000년대에 그랬듯이 중동과 러시아에서 오는 비싼 석유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고유가가 돌아오면 투자 인센티브가 생겨야 하지만, 이는 화석연료 투자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높지 않을 때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고유가는 생산 투자 인센티브는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경제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할 것이고 다시 한번 소비 수요를 위축시킬 것이며 이라크를 포함해 석유 생산 국가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OPEC 플러스’에 대한 의존이 재활성화할 옛 문제들은, 이들 OPEC 플러스 국가들이 석유 확보 각축전이 새로이 불러올 막대한 중장기적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과 나란히 다시 불거질 것이다."(396-7)


"국내 정치 면에서 보면, 에너지 소비는 불가피하게 옛 갈등을 강화하는 새로운 분배적 갈등을 맹렬히 일으킬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녹색에너지 전환과 전기화에 어떻게 인센티브를 충분히 부여하고 여기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유류세 인상에 저항하며 일어난 노란 조끼 시위는 ‘패자의 동의’ 문제가 선거에서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문제는 에너지의 미래 모습이 실질적으로 어떠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개인 교통수단이 정치적 갈등의 장소가 될 것이다. 개인의 에너지 소비에 대한 분배적 함의가 명백해질수록 탄소 중립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얼마나 많은 탄소를 “제거elimination[실질적으로 탄소를 없애는 것]”해야 하는 것인가뿐 아니라 “상쇄offset[자기 배출량을 다른 활동으로 보상하는 것]”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도 포함해서) 정부가 감축목표치를 발표하는 수준을 넘어 선거 경쟁의 장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398-9)


"에너지 시간의 근본 문제는 이동하지 않았다. 민주정 국가들이 에너지와 관련해 겪어온 난관에서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달라진 게 있다면, 많은 이들이 에너지 이슈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는, 에너지 이슈에 대해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 2050년까지 에너지 전환을 실현한다는 유럽의 원래 공식이 토대를 두고 있는 기술관료적 논리가 느슨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때 현실에서 더 있을 법한 결과는, 기후변화에 직면해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된 이해관계와 개인 교통수단의 전기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불평등 사이의, 그리고 높은 화석연료 가격이 늘 유발하기 마련인 불평등 사이의 깊은 간극이 드러나면서 서구 민주정 국가들이 귀족적 과잉의 덫에 더 깊이 빠지는 것이다.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에너지가 정치적 격동과 무질서의 ‘기저에 있는’ 요인이었다면, 앞으로의 세계에서 에너지는 정치적 격동과 무질서를 ‘주되게 실어나르는’ 핵심 매개가 될 것이다."(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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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서
일란 파페 지음, 백선 옮김, 이희수 감수 / 틈새책방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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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모든 분쟁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다. 과거를 편견 없이 진실되게 이해하면 평화의 가능성과 마주하지만, 반대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면 재앙이 싹틀 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허위 사실이 켜켜이 쌓인 탓에 우리는 그 갈등의 기원을 직시하기가 어렵다. 한편, 관련 사실이 지속적으로 조작되면 계속되는 유혈 사태와 폭력으로 다친 모든 피해자들에게 불리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분쟁의 땅이 어떻게 이스라엘 국가가 됐는지에 대한 시온주의적 역사 서술은 일련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신화들은 분쟁의 땅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도덕적 권리를 미묘하게 의심하게 만든다. 서방의 주류 미디어와 정치 엘리트들은 종종 이들 신화를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지난 6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이 보여 준 행위를 정당화한다. 대개 암묵적으로 수용된 이러한 신화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건국 이래 계속되는 갈등에 서방 정부가 의미 있는 개입을 꺼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9)


PART I. 잘못된 신화: 과거

1.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전체적으로 지중해 동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둘러싸여 고립돼 있기보다는, 광범위한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다른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둘째로, 변화와 근대화에 열려 있던 팔레스타인은 시온주의 운동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에 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자히르 알 우마르Daher al-Umar, 1690~1775 같은 강력한 지역 지도자의 지배 아래 하이파Haifa, 셰파므르Shefamr, 티베리아스Tiberias, 아크레Acre 등의 도시가 새로이 보수되고 활력을 되찾았다. 항구와 마을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 네트워크는 유럽과 무역으로 연결되어 번성했으며, 내륙 평원은 인근 지역과 무역을 했다. 사막과는 정반대로, 팔레스타인은 번창한 빌라드 알샴Bilad al-Sham(북쪽 땅), 즉 당시 레반트Levant 지역이었다. 동시에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 덕분에 시온주의 도래할 즈음에는 인구가 50만 명에 달했다. 26)


중동 및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회에도 19~20세기에 강력하게 정립된 ‘국가’라는 개념이 유입됐다. 중동에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된 데에는 어느 정도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19세기 초, ‘선교’와 함께 ‘자결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파하려는 열망을 갖고 이 지역에 발을 디뎠다. 당연하게도 주로 기독교도와 소수 집단들은 점유 영토shared territory, 언어, 역사,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속적인 국가 정체성 개념을 반색하며 수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민족주의에 동참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 엘리트들 사이에서 열성적인 협력자를 찾았고,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슬람교-기독교 단체가 급격히 증가했다. 아랍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서로 종교가 다른 활동가들 간의 동맹에 합류했다. 시온주의가 현지 유대인 공동체에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팔레스타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27)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는 없었지만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위치는 매우 분명했다. 하나라는 소속감이 있었다. 20세기 초에 창간된 신문인 〈필라스틴Filastin〉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부르는 이름에서 따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만의 방언을 사용했고, 자기만의 관습과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 지도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에 거주한다고 표기했다. 그리하여 1918년까지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 시대보다 더 통합돼 있었지만, 그 후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23년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대한 최종적인 국제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이 땅의 국경을 다시 협상했다. 그 결과 민족 운동이 투쟁할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이 더욱 명확히 정의됐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 분명한 소속감을 느끼게 됐다. 이제 팔레스타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누구에게 속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대 정착민인가? 28-9)


2. 유대 민족에게는 땅이 없었다


16세기 이후 종교 개혁에 따른 신학적·종교적 격변이 일어나면서, 특히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천년 왕국의 끝과 유대인의 개종 및 이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Shlomo Sand는 근대사의 특정한 시점에 기독교 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대인은 언젠가 성지로 돌아가야 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지지했음을 보여 준다. 시온주의를 형성하는 사상과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된 반유대주의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 이렇듯 겉보기에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믿음이 실제 식민지화 프로그램과 강탈 계획으로 전환될 징조가 1820년대 초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이미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기독교 사회로 편입시키려는 전략적 계획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그 핵심에 두는 강력한 신학적, 제국주의적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러한 정서는 영국에서 더욱 퍼졌고 제국의 공식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30-1)


시온주의 사상은 1860년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싹텄고, 계몽주의와 1848년의 ‘국민 국가들의 봄’, 이후에는 사회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 1870년대 말과 1880년대 초 러시아에서 특히 악랄했던 유대인 박해 물결과 서유럽의 반유대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응한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비전을 통해 시온주의는 지적, 문화적 활동에서 정치적인 프로젝트로 변화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이용해 ‘성지聖地’에 더 깊이 관여하고자 했던 영국의 전략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충동은 시온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지적 비전과 일치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는 귀환과 구원의 행위로 여겨졌다. 이 두 충동이 일치했기에 반유대주의와 천년 왕국 사상 간에 강력한 동맹이 만들어졌고,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희생시켜 유대인을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실제 정착 프로젝트가 이행됐다.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이 선포되면서 이 동맹은 대중에게 알려졌다. 35-7)


수많은 민족 운동이 시작될 때 그랬듯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창조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서술이 대량 학살, 종족 청소, 억압과 같은 정치적 계획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특히 19세기 시온주의의 주장에서 중요한 점은 그 주장의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이 로마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의 진짜 후손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고, 그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하며, 그들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명확한 연관성이 다른 유대인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국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대인들 사이에서 소수 의견이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속한 국민이고 따라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들은 영국 관리들과 군사력에 의존해야 했다. 유대인과 세계 대부분은 유대인이 땅 없는 민족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38-9)


3. 시온주의와 유대교는 같다


유대인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은 유대주의와 시온주의 사이의 또 다른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시온주의 이전 유대 세계에서는 《성경》을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담은 단일 텍스트로 가르치지 않았다. 유럽이나 아랍 세계의 다양한 유대 교육 기관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랍비들은 《성경》에 담긴 정치사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유대인의 주권 사상을 영적 학습에서 아주 사소한 주제로 취급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예컨대, ‘시온의 연인들’은 《성경》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나 가나안Canaanite 정권의 지배하에서 고통받은 유대인 국가의 이야기로 읽었다. 이들은 나중에 가나안에 의해 이집트(애굽)로 추방됐다가 다시 돌아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그 땅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국가와 조국보다는 유일신을 발견한 집단으로 본다. 46)


근래에 이 서사에 학문적이고 세속적인 주요 증거를 제공한 것은 소위 성서고고학이다(이는 그 자체가 모순적인 개념인데, 《성경》은 다양한 시기에 여러 민족이 쓴 위대한 문학 작품이지 역사서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 서사에 따르면, 서기 70년 이후 시온주의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땅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러나 주요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거주자가 있는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려면 정착, 강탈, 심지어 종족 청소까지 체계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팔레스타인 강탈을 신성한 기독교 계획의 이행으로 묘사했고, 이는 시온주의를 뒷받침하는 전 세계 기독교인의 지지를 모으는 데 귀중한 수단이 됐다. 식민지 원주민들이 빠르게 알아차렸듯이, 정착민들이 들고 온 것이 《성경》이건, 마르크스의 저서이건, 유럽 계몽주의 소책자이건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48)


시온주의 운동이 요구한 공간은 박해받는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결정됐다기보다, 가급적 소수의 주민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최대한 많이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정해졌다. 신중하고 세속적인 유대인 학자들은 ‘과학적’이고자 노력하면서, 고대의 흐릿한 약속을 현재의 사실로 바꾸었다. 이 작업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주요 역사학자인 벤지온 디나부르크(디누르)Ben-Zion Dinaburg(Dinur)에 의해 이미 시작됐고, 1948년 건국 후 집중적으로 계속됐다. 18세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이 19세기 말 정통 유대인들처럼 유대 국가 개념을 거부했다는 역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와서 이 사실은 외면됐다. 역사적으로는 《성경》과 유럽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 1948년 전쟁을 하나로 묶어 가르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념적으로는 이 세 가지 항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정당화하는 요소로 주입된다. 53-5)


4. 시온주의는 식민주의가 아니다


정착 식민주의를 연구하는 주요 학자 중 하나인 패트릭 울프Patrick Wolfe는 ‘제거 논리’가 정착 식민주의 프로젝트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정착민들이 원주민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정당성과 실질적 수단을 개발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에 또다른 논리가 침투해 있었다고 덧붙이고 싶다. 바로 인간성 말살의 논리다. 유럽에서는 박해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들로서는, 자신들이 당한 것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 악랄한 일들을 자행하기 전에 먼저 원주민 국가나 사회의 인간성을 박탈해야 했다. 누군가가 팔레스타인이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고, 땅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논거 자체를 빼앗기게 된다. 팔레스타인인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정당한 소유자에 대한 근거 없는 폭력 행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시온주의를 식민주의로 논의하는 일과, 팔레스타인인을 식민지 원주민으로 논의하는 문제를 분리하기는 어렵다. 56-7)


19세기 말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팔레스타인 공동체 내에서는 여전히 두 가지 욕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아랍연합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꿈꾸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시리아Greater Syria 개념에 매료되어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에 팔레스타인을 편입시키고자 했다. 범아랍주의자이건, 자기 지역만을 사랑하는 애국자이건, 대시리아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건, 유대 국가에 포함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똑같았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정착민 공동체에 자그마한 영토 일부라도 넘겨주는 정치적 해결책에 반대했다. 1920년대 말 영국과의 협상에서 그들이 분명히 선언했듯이, 이미 도착한 정착민들과는 기꺼이 공유하겠지만 그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적 목소리는 1919년부터 10년간 매년 개최된 팔레스타인민족회의Palestinian National Conference 집행부에서 구체화됐다. 58-9)


1928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나중에 만들어질 정부에서 유대 정착민이 팔레스타인인과 동등한 대표권을 갖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인이 거부할 것으로 판단하고는 이를 지지했지만, 사실 공동 대표권은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지향점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이 동등한 대표권 제안을 수락하자, 시온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는 1929년 폭동으로 이어졌다. 헤브론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고,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는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유대민족기금이 부재지주와 지역 유지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팔레스타인 소작인들에게서 땅을 몰수하자 소작인들은 도시 빈민가로 쫓겨났다. 그런 빈민가 중 하나인 하이파 북동쪽에서 1930년대 초에 망명한 시리아 종교 지도자 이즈 앗딘 알카삼Izz ad-Din al-Qassam이 이슬람 성전聖戰 추종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하마스가 그의 이름을 딴 무장 조직으로 유산을 계승했다. 59-60)


5. 1948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1948년 전쟁에 대한 잘못된 가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생각만이 아니다. 그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세 가지 가설이 더 있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1947년 11월 유엔이 결의한 분리안을 거부했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온주의 운동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종족 청소가, 팔레스타인인과 아무런 협의없이 만들어진 유엔의 평화안을 거부한 데 대한 ‘처벌’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1948년에 관한 가설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아랍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아랍 세계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전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은 전혀 군사력이 없었으며, 아랍 국가들도 상대적으로 적은 군대만 파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67-8)


이스라엘 국가가 분쟁 이후에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세 번째 신화는 어떨까. 자료가 보여 주는 사실은 정반대다. 사실 이스라엘 지도부는 영국 위임 통치 이후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관한 협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거나, 추방됐거나 도망쳤던 사람들의 귀환을 검토하지 않는 등 비협조적이었다. 아랍 정부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비교적 합리적인 유엔의 새 평화 계획에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던 반면, 이스라엘 지도부는 1948년 9월 유엔이 파견한 평화 중재자 베르나도테Bernadotte 백작을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암살했을 때 모른 척했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또한 베르나도테 백작을 대신하여 협상을 시작한  유엔 팔레스타인조정기구PCC가 채택한 새로운 평화안도 모두 거부했다. 역사가 아비 쉬라임Avi Shlaim이 《철의 장벽The Iron Wall》에서 보여 주었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평화를 거부했다는 신화와는 반대로, 지속적으로 평화 제안을 거부한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68)


정치적 함의는 이렇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발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이며,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다. 법적 함의는 이러하다. 비인간적인 범죄에 비록 법적 소멸 시효가 있다고 해도,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아무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범죄라는 점이다. 도덕적 함의는 유대 국가가 죄악에서 탄생했고(물론 많은 국가가 그렇다), 그 죄, 범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나쁜 점은 이스라엘의 특정 집단이 이를 인정했지만, 동시에 과거를 돌이켜 볼 때나 미래의 팔레스타인인 정책을 펼칠 때는 자신들의 범죄를 완전히 정당화한다는 사실이다. 그 범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다. 이스라엘 정치 엘리트들은 이 모든 의미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1948년 사건에서 매우 다른 교훈을 얻었다. 국가가 인구의 절반을 추방하고, 마을을 파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교훈으로 인해 1948년 직후와 그 이후에도 다른 수단을 통한 종족 청소가 계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74)


6. 1967년 6월 전쟁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다


1967년 전쟁을 재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1948년 전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정치, 군사 엘리트들은 1948년 전쟁을 날려버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래야 했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는 이웃 요르단과의 합의 때문이었다. 둘의 결탁은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이뤄졌고, 합의에 따라 요르단군은 1948년 전쟁에서 아랍 전체 군사 작전에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그 대가로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의 일부 지역을 합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서안이 되는 지역이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요르단이 서안을 차지하도록 한 결정을 ‘베키야 레도로트bechiya ledorot’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미래 세대가 한탄할 결정’이라는 뜻이다. 보다 은유적으로 번역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78)


한쪽 팔레스타인 집단(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소수 민족)을 통치하던 군정 통치 기구가 다른 팔레스타인 집단(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을 통치하러 옮겨갈 기회가 1967년에 찾아 왔다. 1966년 말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격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소련이 나세르에게 벼랑 끝 전술을 부추겼을 때였다. 그러나 전쟁에 돌입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이스라엘 지도부 내부에 전쟁 도발을 막을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부에서 어떤 형태로든 마찰이 있었으면 강경파의 갈등 유발을 지연시켜, 국제 사회가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주도하는 외교적 노력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 모두를 공격했다. 이스라엘 내각은 평화 중재자들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6월 11일까지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 서안, 가자 지구, 시나이반도를 모두 장악하고 작은 제국이 됐다. 82-4)


이 역사적 분기점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종전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가 요구한 1967년에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강력한 국제적 압력에 이스라엘 정부가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고대 성서 유적지가 있는 서안의 점령이, 특히 1948년 이전에도 시온주의의 목표였으며, 이제야 전체적으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논리에 들어맞는다고 말하고 싶다. 이 논리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팔레스타인인만 남기고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려는 바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이 내린 첫 번째 결정은 이스라엘은 서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결정은 서안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이스라엘 국가의 시민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이 서안과 가자 지구 주민들을 기본적인 시민권과 인권이 없는 삶으로 내몰게 됨을 이스라엘 정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85-6)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이 정책들을 팔레스타인인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점령 이후 새 통치자는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매우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가두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었다. 시민권 없는 거주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시민권과 인권이 없고 스스로의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수감자이고, 여러 면에서 여전히 그렇다. 세계가 이런 상황을 용인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 상황이 일시적이며, 적절한 팔레스타인 측 평화 협상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만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협상 파트너를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삼대째 감금하고 있으면서, 이 거대 감옥은 임시적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면 바뀔 거라고 설명한다. 88)


PART II. 잘못된 신화: 현재

7.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 국가다


민주주의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자를 얼마나 포용하는가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친다. 이스라엘은 국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본권이나 시민권을 일체 부정한다. 그 사례가 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영토를 얻은 다음에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권에 관한 법, 토지 소유권에 관한 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귀환법이 그것이다. 귀환법은 세계 어디에서 태어났더라도 모든 유대인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특히 이 법은 노골적으로 비민주적이다. 1948년 유엔 총회 결의안 194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전면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시민은 직계 가족이나 1948년에 추방된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부정하고, 동시에 그 땅과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비민주적 관행의 전형이다. 92-3) 


여기에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를 더욱 부정하는 행위가 하나 더 추가됐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군 복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들에 대한 거의 모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방부의 전제는 이랬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군 복무를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은 잠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내부의 적이다. 이 논리의 문제점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가 벌인 모든 주요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5열을 형성하지도 않았고, 정권에 맞서 반기를 들지도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은 해결해야 할 ‘인구통계학적’ 문제로 여겨진다. 토지 문제를 살펴봐도 민주주의 국가라는 주장이 의심스럽다. 오늘날 이스라엘 토지의 90퍼센트 이상은 유대민족기금의 소유다. 토지 소유자는 비유대인과 거래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 정착지는 새롭게 건설되는 반면, 팔레스타인 정착지는 거의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93-4)


이런 비난에 대해 이스라엘의 외교계와 학계는 이들 조치가 모두 일시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어디에서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 나은’ 행동을 보이면 바뀔 조치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책 입안자들은 유대 국가가 유지되는 한 이 땅의 점령 상태를 계속 유지할 작정이다. 이스라엘 정치 체제는 이 점령 상태를 ‘현재 상태’로 간주하며, 언제나 현상 유지가 어떠한 변화보다 낫다고 본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계몽적 점령enlightened occupation’을 주장한다. 여기서 신화는, 이스라엘이 선한 의도로 자비롭게 점령하려고 했지만 팔레스타인인의 폭력 때문에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67년 이스라엘 정부는 서안과 가자 지구가 당연히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즉 ‘이스라엘 땅’의 일부라고 여겼고, 이런 입장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내 우파와 좌파 정당들이 의견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 목표의 타당성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다. 95)


8. 오슬로 신화


오슬로 신화의 첫 번째는 그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2차 인티파다를 선동해 의도적으로 오슬로 협정 이행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1993년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이 한 약속을 아라파트가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꺼림칙한 점이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이행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당국은 점령지 내에서 이스라엘의 보안 하청 업체 역할을 하면서 저항 활동이 없게 해야 했다. 바라크는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를 요구했고, 수도는 예루살렘 근처의 아부 디스Abu Dis에 두라고 했다. 그러고는 서안 중에서 요르단 계곡, 대형 유대인 정착촌 구역, 대예루살렘의 일부 지역은 제외하도록 했다. 그렇게 세워지는 국가는 독립적인 경제 및 외교 정책을 가지지 못하고, 국내 특정 영역에서만 자치권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이 합의의 공식화는 이후 팔레스타인이 더 이상의 요구, 예를 들면 1948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101)


영토 분할안은 오슬로에서 초기 논의를 이끈 핵심 논리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결코 분할을 요구한 적이 없다. 영토 분할은 언제나 시온주의자,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힘이 커짐에 따라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영토 비율도 늘어났다. 따라서 분할안이 점차 세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의 공격 전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측이 협상 조건으로 이 상황을 차악으로 받아들인 것은 단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파타는 영토 분할을 완전한 해방으로 가기 위한 필요 수단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자체를 최종 합의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극단적인 압박이 있지 않고서야 원주민 집단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기 땅을 정착민 집단과 나눌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슬로 협상이 공정하고 평등한 평화 추구의 과정이 아니라 패배하고 식민지화된 민족이 타협에 동의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102-3)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가 실패한 것은 단순히 분할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 협정에는 5년의 이행 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가장 괴롭히는 세 가지 문제, 즉 예루살렘, 난민,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협상한다는 이스라엘의 약속이 있었다. 이 이행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보안 하청 업체로서 이스라엘과 그 군대, 정착민과 시민에 대한 게릴라전이나 테러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오슬로 DOP에서 약속한 바와는 달리, 5년, 즉 첫 단계가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해야 할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지 않았다. 네타냐후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두 번째 단계를 시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이 중단된 주 원인은 1995년 11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됐기 때문이다. 평화 프로세스는 1999년 에후드 바라크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할 때까지 매우 느리게 진전됐다. 103-4)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의제에서 제외한 것은 오슬로 협정이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이 없는 두 번째 이유다. 분할 원칙이 ‘팔레스타인’을 서안과 가자 지구로 축소시켰다면, 난민 문제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소수 민족 문제를 배제하면서 인구학적으로 ‘팔레스타인 국민’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구의 절반 미만으로 축소됐다. 2000년 1월 바라크 정부는 미국 협상자들의 승인을 얻어 협상의 범위를 설명하는 문서를 제시했다. 최종 ‘협상’은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이 이 문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동 노력이었는데,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절대적이고 명확하게 거부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논의가 열려 있던 부분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관리하는 영토로 귀환이 가능한 난민 수였다. 하지만 관련자들 모두 이 밀집 지역에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으며,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에 난민을 귀환시킬 공간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4-6)


이것이 오슬로 협정에 관한 두 번째 신화로 이어진다. 아라파트의 완고함 때문에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 회담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 관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바라크는 유대인 식민지 정책이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일상적인 학대에 관련된 이스라엘의 정책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그는 아라파트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어려운 입장을 취했다. 현실에서 즉각적인 변화를 약속할 수 없다면 바라크가 최종 합의안으로 무엇을 제안하든 별 의미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라파트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돌아온 직후, 제2차 인티파다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서 신화는 제2차 인티파다를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원한, 심지어 계획적인 테러 공격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이렇다. 제2차 인티파다는 오슬로의 배신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대규모 시위였고, 아리엘 샤론의 도발적인 행동이 더해져 악화됐다는 사실이다. 106-8)


9. 가자 신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하마스가 인기 있었던 이유가 오슬로 협정의 성공이나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점령하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괴로움을 해결할 방법을 세속적 현대성을 통해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스가 (점령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많은 이슬람교도의 마음을 사로잡게 됐다. 아랍 세계의 다른 정치적 이슬람 단체와 마찬가지로, 세속 운동이 고용, 복지, 경제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종교로 돌아갔다. 종교는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자선과 연대의 네트워크도 제공했다. 제2차 인티파다 중에 이스라엘이 도입한 새로운 탄압 방식―특히 장벽 건설, 바리케이드, 표적 암살―탓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대한 지지는 더욱 약화되고 하마스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므로 역대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인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고, 점령에 저항할 준비가 된 유일한 집단에 투표하도록 몰아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당할 것이다. 114)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서사에서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철수한,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악랄한 행위를 저지르는 테러 조직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평화를 위해 철수했는가? 대답은 전혀 ‘아니오’이다. 오슬로 협정 이전에는 가자 지구 내 유대 정착민의 존재가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자, 유대 정착민은 이스라엘의 자산이 아닌 부채가 됐다. 샤론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하마스가 부상하면, 이스라엘 시민이 다칠 염려 없이 하마스에게 보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리쿠드당의 좌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눈에 샤론의 움직임은 평화의 제스처이자 정착민을 상대로 용감하게 대치하는 것이었다. 샤론은 좌파와 중도 우파의 영웅이 됐다. 그때부터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반응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이스라엘 정책 비판은 평화를 논의할 분별 있고 믿을 만한 팔레스타인 파트너가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118-22)


샤론도, 그를 따르는 어느 누구도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략을 명확히 제시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인의 눈에 가자 지구는 서안과는 매우 다른 지정학적 실체다. 가자 지구에는 이스라엘이 탐내는 땅도 없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해서 보낼 요르단 같은 배후지도 없다. 종족 청소도 여기서는 효과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자 지구 공격 작전은 모든 영역에서 악화되고 있다. 첫째, ‘민간인’과 ‘비민간인’ 표적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 분별없는 살인으로 인구 전체가 작전의 주요 표적이 됐다. 둘째, 이스라엘 군대가 보유한 모든 살상 무기를 확대하여 사용했다. 셋째, 사상자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작전이 점차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이스라엘이 향후 가자 지구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 즉 바로 계산된 대량 학살 정책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가자 지구 주민들은 계속해서 저항했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대량 학살 작전으로 응수했지만, 지금도 그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127-8)


PART III. 잘못된 신화: 미래

10.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한 길이다


‘두 국가 해법’은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들려는 이스라엘의 발명품이다. 서안에 사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서안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둘 방법으로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서안 일부를 자치 지역, 준準 국가로 만든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귀환이나, 이스라엘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평등한 권리, 예루살렘의 운명, 고향에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희망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 ‘두 국가 해법’은 유대 국가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유대인은 다른 곳이 아닌 팔레스타인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반유대주의의 핵심에 가깝다.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같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유대교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라 고집하고, 그것이 세계 각국에서 거부당하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대교를 향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134)


‘두 국가 해법’은 가끔 영안실에서 시체를 꺼내어 잘 차려입히고 살아 있는 존재처럼 내세우는 것과 같다. 생명이 남아 있지 않다고 다시 한 번 입증되면 영안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역사적 실체의 10분의 1로 축소하여 그것을 평화의 지도로 내세웠던 지도 제작법은 영원히 사라지기 바란다. 대체 지도는 준비할 필요가 없다. 갈등의 지형은 자유주의적 시온주의 정치인, 언론인, 학자의 담론에서는 끊임없이 변해 왔지만, 실제로는 1967년 이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항상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의 땅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운명의 변화를 결정한 것은 지형이 아니라 인구 변동이었다. 19세기 말에 이 지역에 도래한 정착 운동으로 인해 지금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을 인종 차별 이데올로기와 인종 격리 정책으로 통제하고 있다. 평화는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문제도, 지도를 다시 그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제거하는 일이다. 135-6)


맺음말: 21세기의 ‘정착 식민지 국가’ 이스라엘


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전에 시온주의 운동이 누렸던 예외주의는 아랍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침해에 대한 서구의 비판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팔레스타인 인권 침해에 대해 논의하려면, 시온주의 같은 정착 식민주의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유대 정착민은 이제 이 땅의 유기적이고 필수적인 일부가 됐다. 그들은 제거할 수도 없고, 제거되지도 않을 것이다. 유대 정착민도 이 지역 미래의 일부가 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억압과 강탈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 팔레스타인은 비어 있지 않았고, 유대 민족에게는 조국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구원”받은 게 아니라 식민지화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에 자발적으로 떠난 게 아니라 강탈당했다. 심지어 유엔 헌장에서도 식민지화된 민족은 해방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 싸울 권리가 있고, 그 투쟁의 성공적인 결말은 모든 주민을 포함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건립에 있다. 1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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