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성찰 비아 시선들
데일 C. 앨리슨 지음, 김선용 옮김 / 비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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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적 유용성의 문제


"현대 예수 연구 서적들에는 수많은 역사적 예수상像이 담겨있고 학자들이 제시한 예수상은 지나치게 많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유대인 예언자이자 거의 정통 그리스도교인으로 그린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를 영원한 지혜를 가르친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묘사한다. E. P. 샌더스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유사하게 예수를 유대 종말론적 예언자로 그린다. 존 도미닉 크로산에게 예수는 갈릴리인이면서도 견유학파 철학자 같은 소농peasant으로서, 권력에 바탕을 둔 로마 제국의 정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평등한 왕국과 비폭력적 하느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학자들이 합의점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할 수는 없다. 유명한 사람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한때 영향력 있던 생각도 이내 잊힌다. 오늘 학자들이 이룬 합의도 내일 깨질 수 있다. 예수에 관한 대작들은 구름과 같다. 아무리 크고, 인상적이고, 아름다울지라도 오래 가지 않는다."(31-5)


"신학자들이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활용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각 의견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학자의 역사적 예수상도 순수한 역사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도 역사적 예수 연구 활용을 어렵게 한다. 예수에 관한 (거의) 모든 거대한 책은 그 안에 일정한 신학을 담고 있다." "높은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을 견지하는 학자는 당연히, 역사적 예수가 높은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확률이 높다.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학자는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예수가 아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예수를 발견할 확률이 높다. 개인의 신앙과 역사의 발견 사이의 상관관계는 끝없이 이어진다. 개신교 복음주의자가 쓴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리는 예수는 개신교 복음주의에 우호적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유대교인으로 복원하려는 유대교인이 그리는 예수는 신실한 유대인일 것이다. 이념은 어디에나 있다."(46-9)


"일례로, 존 도미닉 크로산은 개인의 편향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역사를 예수 전승에 투사했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크로산은 자신이 고대 유대인과 근대 아일랜드인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산은 나르시시즘과 실증주의 사이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공간을 상호작용성interactivism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와 과거,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 사이에 가능한 한 정직한 변증법을 만들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본문에 연구자가 자신을 투영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하는 것과는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홀로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계의 구성원들이다. 어떤 이의 경향은 다른 이의 경향과 대화를 통해 겨룰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을 통해 연구자들은 물론 학계 전체의 이해는 확장될 수 있다."(55-7)


# 크로산은 나르시시즘을 인간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물이나 거울 등에 비친 모습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illusion이라고 보고, 역사 실증주의를 사건을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 망상delusion이라고 말한다.


"근현대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유럽의 이신론자deist들이 시작했다. 그들은 증거를 반反교회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의심의 해석학'이란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교회가 선포하는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 의심했고 그 의심이 맞음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신론자들의 목표는 진실과 허구, 즉 교회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예수에 관한 진실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 지어낸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지우고, 제도 교회가 만들어낸 초인 뒤에 감춰진 역사적 인물 예수의 정체를 알아내기를 원했다." "우리의 자료들이 결코 순수하지 않고, 과장된 이야기, 만들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가정 아래 역사적 관점에서 부활 이전의 예수를 탐구하는 작업은 꽤나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덧칠을 벗겨내는 것이 가능할까? 해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를 포함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예수를 그의 해석자들에게서 깔끔하게 분리해 낼 수 있는지 의심이 커짐을 고백해야겠다."(62-4)


"좀 더 중요한 점은, 교회라는 밭에 묻혀 있는 예수라는 보화를 찾을 때 내가 정확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탐구를 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좀 더 깊이 의식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 가운데 많은 이는 예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예수의 자기 이해를 정확히 가려내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정체는 그의 말과 행동, 자의식, 혹은 이들의 조합으로 축소될 수 없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종종 진지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이 질문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른다.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고려해야 하며 '나'와 중요한 상호작용을 해왔던 수많은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개인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을 이루며 산다."(64-5)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전기를 자서전으로 축소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칭송하기 전의 예수, 있는 그대로의 예수로 돌아가기 위해 마태오의 편집과 마르코의 신학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반드시 그를 오해한 이야기, 호도하는 이야기라는 법은 없다." "더욱이 한 사람은 자신의 전체 생애의 가치와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분명해진다.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영향의 물결을 막지 못한다. 그가 죽은 뒤에도 영향의 물결은 계속 뻗어나가고, 다른 사람의 물결과 만나 새로운 흐름을 빚어낸다." "시간이 흐르면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 관한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67-8)


2 논쟁적 문제들


"1970년대 신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책에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종교historical religion라고 쓰여 있었다. 그 책들은 힌두교, 불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는 실제 일어난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했다. 당시 이러한 이야기를 하던 수많은 책 중 두 권의 제목을 빌려 표현하면, 〈행동하시는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역사와 관련해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종교라는 생각을 암시했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하면서, 역사는 인식론의 보루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실은 해석을 결정하지 않으며 역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역사를 신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역사에서 신학이 나온다. 그러니 과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대한 현대적인 역사의 재구성은 종교적 믿음이나 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83-5)


"이제 우리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상상력의 산물임을 안다. 세상을 뒤덮은 홍수는 없었고, 동물로 가득 찬 방주도 없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그 역사성을 의심할 법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실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성서에 기록된 그의 활약은 때때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런 사례는 계속 열거할 수 있다. 한때 사람이 역사로 간주했던 것이 이제 대부분 실제 사건이 아님이 밝혀졌거나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받는다. 역사가 사라진 뒤에도 의미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의미가 반드시 역사에 기반을 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이러한 관점을 복음서에 적용하는 이들이 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말했다. 〈엠마오 사건(부활한 예수)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엠마오 사건은 항상 일어난다.〉"(92-3)


"어떤 이들은 (성서) 본문과 역사가 어긋난다면 본문의 권위를 박탈하고 역사의 권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성서 본문이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그 본문은 신학적 권위를 상실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예수를 구성할 때 모든 허구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들을 해체한 뒤 역사적 사실로 간주되는 요소만 빼내어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역사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정경의 지위와 기능은 학계에서 정경의 지위 및 기능과 동일하지 않다. 역사가로서 나는 복음서의 표면을 찢고 역사를 발굴하는 골치 아픈 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교인으로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복음서들을 존중하고 이를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인에게 복음서는 과거의 재구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도구다."(104-8)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인들을 양육하고, 전례 시 읽을거리를 제공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설교에 영감을 불어 넣고, 교리와 윤리 지침을 구성하는 데에 이바지한 것은 재구성된 역사가 아니라 성서 본문이다.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현대 역사가들이 비역사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본문들을 무시한다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과 다름없다. 먼 옛날 마태오와 루가는 Q의 어록 자료를 흡수해 없애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자료가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를 흡수해 둘을 사라지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정경은 이미 확립된 지 오래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버리지 않는 한 정경을 버릴 수는 없다. 정경 복음서에 대해 논쟁을 하더라도, 정경 복음서는 교회의 유산이자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신자들이 성서 내용을 정정하고 재해석할 경우와 마주하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성서나 성서 일부를 폐기할 수는 없다."(110-1)


3 어떻게 연구를 진행할 것인가


"1960년대 이후로 학자들은 이른바 '진정성 판별 기준'criteria of authenticity에 대해 논의했다. 진정선 판별 기준이란 자료들에서 실제 예수의 말과 행동을 걸러내기 위해 사용된 체sieve를 말한다. 주요 기준들(다중 증거의 기준(여러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일수록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론), 비유사성의 기준(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당대 유대교의 관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예수의 말과 행동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 일관성의 기준(몇 가지 역사성이 인정되는 자료의 예수상과 일치하는 본문이 역사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내 관심사는 어떤 기준이 좋고 어떤 기준이 나쁜지, 혹은 좋은 기준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기준들을 정말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내 대답은 〈아니오〉다."(133-5)


"복음서에 나오는 자료 대부분은, 실제 일어났는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우며, 자료가 얼마나 역사에 가까운지 정확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예수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실제 일어났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예수가 한 말이라고 기록한 모든 구절을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1) 예수가 실제로 한 말, (2) 예수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 (3)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예수의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말)." "(3)에 해당하는 본문의 수는 (1)과 (2)의 경우를 합친 수보다 훨씬 많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136-8)


"나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고찰을 통해 역사적 예수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항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전반적인 인상은 제대로 기억한다. 누군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대략의 요지는 기억한다." "우리는 과거 일어난 일의 세세한 부분을 빠뜨리거나,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세세한 부분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그 일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일반적인 사항은 대체로 잘 기억하는 편이다." "이를 고려하면, 일부 자료에 때 묻지 않은 기억이 보존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진정성 판별 기준으로 개별 항목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보다는 반복되는 흐름을 찾고 전체 그림big picture을 찾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믿으려면, 가장 믿을 만한 것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 "진정성 판별 기준은 전체보다 부분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개별 항목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도출한 일반적인 사항을 우선시하는 게 더 신중한 접근이다."(147-51)


"깊은 연민을 가르쳤든 아니든, 동기가 종말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든, 예수는 자기희생을 강조했다. 몇몇 사람에게는 자기를 즉시, 무조건 따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예수 전승의 역사성을 우리가 확증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 전승에 대해 진정성 판별 기준이 뭐라고 판단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수 전승들이 화음을 이루며 빚어내는 흐름이다." "내가 제안한 대로 예수 전승을 분석하면 꽤 많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예수는 사탄을 파멸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이해했던 축귀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분명 계속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며 여러 비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단에) 적용해 보면 1차 자료에 재래의 종말론 내용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가 종말론적 예언자였다는 결론이 거의 필연적으로 도출된다."(153-4)


"예수가 종말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내용이 모든 예수 전승, 즉 예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나 다른 이들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에서, 그리고 이야기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확실하게 나오고,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으나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자료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들어있는 전승과 루가 복음서에만 들어있는 전승도 마찬가지다. 바울서신, 사도행전, 요한 복음서, 도마 복음서, 그리고 기타 여러 문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자신을 어떤 칭호로 불렀느냐와 상관없이, 예수는 자기를 단순히 종말론적 예언자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종말 시나리오의 중심인물, 최후의 심판 때 핵심 인물, 즉 11QMelchizedek에 나오는 멜기세덱 혹은 에녹 1서의 '비유의 책'에 나오는 선택받은 자 같은 인물로 확신했던 것 같다." "반복해 나오는 양상이 실제 예수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예수를 영영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158-9)


"1차 자료는 예수가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데이비드 흄처럼, 기적의 가능성을 의심하거나 기적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1차 자료가 기적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 위의 연구 방법론(반복되는 양상에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 틀렸음을 드러내는 증거로 보일 것이다." "물론, 복음서에서 역사적 기억을 찾고자 하는 이에게 기적은 곤혹스러운 문제다. 나의 요지는, 체험 증언testimoney과 체험에 관한 설명explanation은 별개이며 예수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들을 꼭 순전히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 혹은 모세 전승 같은 기존의 이야기를 재창작한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비평을 근거로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관련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생전에 출중한 축귀자, 치유자, 기적 행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예수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으며, 예수를 아는 사람 중에 자신들이 정말로 예수의 기적을 목격했다고 믿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164-5, 182-4)


4 곤란한 결론들


"신약성서의 예수는 분투하고 의심하고 어떤 것은 알았지만 어떤 것은 알지 못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본문은 예수를 신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이에 대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그리스도교인 에비온파는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보았고 이 관점에 맞지 않는 전통을 거부했다. 이른바 '권능 중심의 단일신론자'들은 예수가 세례받았을 때, 혹은 부활했을 때 인간 예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어 하느님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충하는 전승을 조화시켰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과 혼soul은 가졌지만, 인간의 영spirit은 가지지 않았으며, 대신 이성적인 신적 로고스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는 하느님의 아들이 최초로 피조물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정통파는 역설적 견해, 즉 예수는 전적으로 인간이며 전적으로 하느님이라는 주장을 옹호했다."(192-6)


"일반적으로 정통주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니케아 신경의 그리스도론에 담긴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심지어 교회가 역사적 근거 없이 예수 이야기를 지어냈음을 주장한다고 여기기에 역사적 예수 탐구를 장려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예수가 지나치게 높은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는 이들(현대판 에비온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도 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예수가 높은 그리스도론을 가졌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면 이들은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예수가 언젠가 세상을 심판하려 돌아올 존재가 아니라 단지 영감을 주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이에게, 예수가 자신을 그토록 웅대한 존재로 여겼으리라는 추정은 불편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을 지고의 존재라고 말하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말한 수많은 구절을 보고 예수의 정신 건강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206-7)


"물론, 우리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든,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자기 이해로 한정되지 않는다. 예수는 예수 자신이 의식한 자기의 총합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정통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고 그에 부합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현대성서비평학은 그럴 가능성을 아예 뿌리 뽑았다." "슈바이처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말하면, 역사적 예수는 여전히 이방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나는 이 결론이 그다지 끔찍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적 꿈을 흐트러뜨리는 예수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분명 복음서의 예수는 현실 안주, 자기만족과 싸우는 인물이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우리의 신학을 확증해주는 역사적 예수는 현실 안주의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의 의견을 칭찬하는, 길들여진 예수는 결코 예수가 아니다."(212-4)


"예수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론'을 가졌느냐는 문제는 그의 종말론적 기대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예수가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교회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가 머지않아 있을 부활과 오순절 사건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했다고 믿었다. 반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을 말한 것이라고 믿었다." "면밀한 주석 작업을 바탕으로 요한네스 바이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종교적 이상주의를 통한 사회 정의의 점진적 실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일으키실 종말을 예고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많은 이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슈바이처는 바이스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바이스가 예수 연구에 기여했다며 열렬히 지지했다. 바이스의 견해는 예수를 철저하게 종말론적 인물로 제시한 슈바이처의 프리퀄이 되었다. 20세기의 연구물들은 대개 바이스와 슈바이처의 변주였다."(214-6)


"이 문제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 이유는 그들의 종말론의 언어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미리 보기가 아니라, 비교 종교 연구가 보여준 것처럼 신화의 옷을 입은 종교적 희망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허구다. 끝은 시작과 같다. 창세기는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고, 신약은 미래에 있을 종말을 예견하는 역사를 담고 있지 않다. 새 예루살렘과 마지막 심판, 부활은 에덴동산과 뱀과 아담과 같은 신학적 비유다. 이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시로 해석해야 한다. 종교적 시는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통해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종말론의 언어는 열 처녀의 비유, 가라지와 밀의 비유와 똑같은 미래에 대한 비전, 즉,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상상만 할 수 있는 것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루시아'는 하나의 비유이다.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날짜가 없기 때문이다."(231-3)


# 파루시아 : 예수의 재림


5 개인적 단상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르키는 이름이자 은유다. 이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예수 전승의 핵심 주제가 하느님 왕국이므로, 하느님에 관한 주된 심상은 왕이 자연스럽다. 특히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 문헌에 자주 나오는 보좌에 앉으신 하느님의 심상 말이다. 그런데,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을 왕으로 언급하는 구절은 드물다. 예수 전승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랑 많은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억압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보살피며 양육하는 존재다." "예수는 그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제압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가 나타내는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압제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선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248-50)


"예수는 창조주는 당연히 구속자이며, 하느님 아버지는 애통해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약속하는 선한 분이고 지금 우는 이들에게 언젠가는 웃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사랑이 넘치는 분임을 직관했다. 예수는 이런 하느님에 대해 굳건히 낙관하므로 〈영원한 삶〉에 대해서도 굳건히 낙관한다." "종말론은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지만, 종말론 없이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우리가 보게 될 전부라면, 잘못된 점들이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에게 이것은 진부한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이 절대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비극과 황량한 죽음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적어도 나는 예수가 말한 선한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수의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 또는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쓰자면 그와 비슷한 것을 믿는다."(263-4)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장차 올 세상에 의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아버지 하느님과 장차 올 세상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인식하고 이해했다. 그는 하늘의 관점으로 땅을 보았고, 자신을 미래에 투영한 후 뒤돌아봄으로써 현재를 해석했다. 세상의 주요 가치들은 세상 너머에 있다. 즉, 이 가치들은 세상 위에 계시고 세상 안에 계시며 세상 끝에서 기다리시는 하느님 안에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장차 올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장 18절에서 바울이 말했듯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면에서 예수가 비유로 가르쳤으며 상상력의 신봉자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어떤 대상을 그냥 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상상했다." "그의 비유와 격언은 하늘이 땅을 이기고, 미래가 현재를 이기며, 우리가 공허함으로 둘러싸여 있고 딴 곳에 쉽게 정신 팔릴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268-9)


"예수는 새것을 선포했다. 낡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뒤집었다. 세상이 뒤집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 전승에는 그가 특이한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나온다. 펑크의 말을 빌자면, 예수는 〈일반적인 인식을 비전형화하고 낯설게 만든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을 한다. 이야기 도입부에 청중이 잘 알고 공감할 내용을 말했다가 그것을 갑자기 뒤집음으로써 상식과 충돌하게 만들어 청중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예수는 사물과 사태의 진정한 본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확신했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최면에 걸린 듯 뻔하게 사는 삶을 흔들어 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콜리지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우리의 마음이 〈관습의 무기력〉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의 두 눈을 덮고 있는 익숙함과 이기적인 근심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도록 노력했다. 예수는 우리의 관심사를 옮겨 놓고, 인식을 바꾸고, 의식을 확장하고, 우리의 행동을 바꾸려고 애썼다."(270-3)


"인간 실존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석에는 반드시 대다수의 삶을 특징짓는 날카로운 양극성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들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비교적 잘 살아가는 와중에도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의 악의, 어리석음과 마주한다. 죄와 죄책감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삶은 육체와 정신의 고통으로 괴롭고, 늘 의미 없이 제멋대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희생자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불행과 비통 가운데서도, 불가해한 섭리로 인해 우리는 때때로 진, 선, 미를 보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웃음과 기쁨을 맛보며 지식과 지혜를 접한다. 더 나아가 종교적 믿음을 가진 이들은 때때로 수수께끼 같은 은총을 통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인간의 경험, 특히 종교적 경험은 강력한 역설을 제시한다. 어쩌면 파스칼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라고 쓸 때 파악한 진실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279-80)


"예수 어록에는 유대 종말론이 말하는 사건 발생 순서(고난 뒤 신원, 환난 뒤 축복, 죽음 뒤 생명)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는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를 이루는 자, 묵시적 기대의 극단들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한 자다." "예수의 말과 생애는 이 모든 것을 꼭 맞게 표현한다. 인간 경험의 양극단은 종말에 대한 기대에 담긴 양극단, 찬미와 십자가가 공존하는 삶으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예수가 미래에 있을 축복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의 믿음은 삶의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가망 없는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음이라는 운명과 종말의 환난에 대해서만 말했다면, 그의 희망이 너무 보잘것없고 그와 하느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의 환난 및 앞으로 올 환난뿐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구원과 앞으로 올 구원을 선포했기에, 현재와 미래를 모두 살아갔기에 우리는 그를 기리고 신뢰한다."(2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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