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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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영원함의 매력: 시작과 끝, 그리고 그 너머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여기'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을 떠날 참이다. 이 여행길에서 초기의 혼돈으로부터 생명과 마음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것이며, 자신이 단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고, 근심 많고, 자기 성찰적이고, 창의적이면서 회의적인 마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종교의 탄생과 창조적 표현에 대한 욕구, 과학의 약진, 진리 탐구, 그리고 영원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도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던 영원에 대한 갈망은 미래로 향하는 여정의 핵심 키워드이며, 우리는 여기에 기초하여 행성과 별, 은하, 블랙홀에서 생명과 마음에 이르는 모든 현실적 존재의 미래를 평가할 것이다. 이 여정에서 눈에 띄게 빛을 발하는 것은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정신이다."(36)


2장 시간의 언어: 과거와 미래, 그리고 변화


"(동전 100개를 던졌을 때 나오는 경우의 수를 구할 때) 우리는 동전 무더기의 분포를 낱개로 분석하지 않는다. 29번 동전이 앞면이 나왔는지, 71번 동전이 뒷면이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분포 상태이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앞면과 뒷면의 비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그룹의 '희귀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평등은커녕, 최고 1,000억X10억X10억 배까지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동전 100개를 마구 섞은 후 테이블에 던졌을 때 100개 모두 앞면(또는 뒷면)이 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고(이 그룹의 멤버는 단 1개뿐이다), 뒷면이 1개 나오면 조금 덜 놀라고(멤버 수=100), 뒷면이 2개 나오면 1개 나온 경우보다 조금 덜 놀라고(멤버 수=4,950), 앞면과 뒷면이 50개씩 나오면 너무 평범해서 하품이 나온다(멤버 수=약 1,000X10억X10억). 그룹의 멤버 수가 많을수록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 그룹의 크기다."(51-2)


"(동전의 개별적 상태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동전 던지기를) 예로 든 이유는 과학자들이 증기 기관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물 분자나 지금 당신이 숨 쉬고 있는 방 안에 떠다니는 공기 분자와 같이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는 물리계를 분석할 때, 그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외관상 동일한 배열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을 때 얻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작위로 허공에 던진 동전 무더기의 최종 상태가 '멤버 수가 많은 그룹'에 속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무작위로 부딪히는 입자들도 마찬가지다. 증기 기관 속의 수증기이건 방 안의 공기이건 간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배열(멤버 수가 가장 많은 배열)을 알면 계의 거시적 물리량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양이다. 물론 이것은 통계에 입각한 예측이지만, 입자의 수가 충분히 많으면 맞을 확률이 매우 높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입자의 궤적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는 점이다."(53-5)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경험하는 상태는 거의 대부분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이다. 고-엔트로피 상태는 구성 입자의 다양한 배열을 통해 구현될 수 있으므로 전형적이고 평범하면서 흔한 상태다. 반면에 당신이 저-엔트로피 상태와 접하면 일단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은 거시 상태를 유지하면서 바꿀 수 있는 배열의 수가 적다는 뜻이어서, 고-엔트로피 상태보다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질서 정연하게 가공된 물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설명이 필요하다. 무작위로 움직이는 입자들이 저절로 뭉쳐서 계란이나 개미집, 또는 머그잔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물체를 볼 때마다 생명 활동이나 생명체의 의지가 개입되었다고 생각한다. 계란과 개미집, 그리고 머그잔은 자연에 존재하는 입자의 무작위 배열에 특별한 형태의 생명 활동이 개입되어 질서 정연한 배열로 재탄생한 것이다."(58-9)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고 제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므로, 독자들은 두 법칙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법칙은 깊은 곳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둘 사이의 관계는 〈모든 에너지가 다 같은 형태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폭발 전 다이너마이트에 내장된 에너지는 고품질 에너지에 해당한다. 즉, 에너지가 좁은 영역에 집중되어 있고 사용하기도 쉽다. 그러나 폭발이 일어난 후에는 이 에너지가 '넓게 퍼져 있으면서 활용하기도 어려운' 저품질 에너지로 바뀐다. 또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 제2법칙에 따라 질서가 무질서로 바뀌므로 낮은 엔트로피는 고품질 에너지에, 높은 엔트로피는 저품질 에너지에 대응시킬 수 있다." "미래는 왜 과거와 다를까? 답은 간단하다. 미래에 발휘되는 에너지는 과거에 발휘되었던 에너지보다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보다 엔트로피가 높다."(62-3)


3장 기원과 엔트로피: 창조에서 구조체로


"뉴턴 이후로 중력은 반대 개념이 없는 독불장군으로 군림해 왔다. 인력과 척력이 모두 존재하는 전자기력과 달리, 중력은 오직 인력으로만 작용하는 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빅뱅을 연구하던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거스는 공간이 '우주 연료'라는 특별한 물질로 가득 차 있고, 그 안에 포함된 에너지가 별이나 행성처럼 특정 지역에 집중되지 않고 공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면, 중력이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지름이 10억X10억X10억분이 1미터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영역에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있고(이것을 인플라톤inflaton이라 한다.), 이 에너지가 욕실의 수증기처럼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으면, 밀어내는 중력이 폭발적으로 작용하여 순식간에 현재의 관측 가능한 우주만큼 팽창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밀어내는 중력이 빅뱅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다."(80-2)


"빅뱅 직후의 공간은 여전히 인플라톤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 상태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인플라톤장의 양자요동은 빅뱅의 잔광에 국소적인 온도 변화를 초래했고, 인플레이션이 끝날 무렵에는 입자의 밀도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즉, 인플라톤장의 값은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고 '거의 균일했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다음 단계인 별과 은하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변보다 밀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지역은 조금 강한 중력을 행사하여 많은 입자를 모을 수 있었고, 입자가 모여들수록 중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더 많은 입자가 모여들었다. 이것을 '중력의 눈덩이 효과'라 한다. 이런 상태로 수억 년이 지난 후, 입자 밀집 지역은 질량과 압력, 그리고 온도가 엄청나게 높아져서 자체적으로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양자적 불확정성이 인플레이션에 의해 확대되고 중력의 눈덩이 효과에 의해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서, 빛나는 점(별)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91-2)


"신용카드의 빚이 많아지면 통장에 돈을 입금하여 잔액을 늘리거나 파산을 선언하여 상황이 종료되듯이, 기체 구름 중심부의 온도와 압력이 임계점을 넘으면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는 물리적 과정이 시작되면서 자기 증폭 과정이 종료된다. 핵융합은 원자 집단의 온도와 밀도가 충분히 높을 때 원자핵에 변화를 초래하는 현상으로, 천연가스 연소와 같은 화학 반응보다 훨씬 깊은 단계에서 일어난다. 화학적 연소는 원자 내부에 있는 전자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반면, 핵융합은 원자 중심부의 핵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렇게 깊은 단계에서 원자핵이 합병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입자의 속도가 빨라지고, 이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압력이 생성되어 안으로 향하는 중력과 균형을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핵융합 때문에 수축이 중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정된 상태에서 열과 빛을 방출하는 거대한 천체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을 한 글자로 줄인 것이 바로 '별star'이다."(100)


"(중력이 촉매 역할을 해서) 일단 핵융합이 시작되면 별은 수십억 년 동안 자체 동력을 공급하면서 복잡한 원자핵을 만들어 내고, 빛과 열을 통해 다량의 엔트로피를 외부로 방출한다. 핵융합의 부산물(무거운 원소와 빛)은 당신과 나를 포함하여 더욱 복잡한 구조체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력은 별이 형성되고 상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힘이지만, 수십억 년 동안 최전선에서 제2법칙을 수호해 온 일등 공신은 단연 핵력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력은 주인공이라기보다 핵력과 동업 관계에 있는 파트너에 가깝다." "핵력은 중력의 도움을 받아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을 실행하고, 그 덕분에 물질은 우주 전역을 무대 삼아 춤을 추고 있다. 이것은 빅뱅 직후부터 우주라는 상설 극장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공연되어 온 장엄한 무용극으로, 그동안 수많은 스타(별)를 배출했다. 그리고 별에서 방출된 열과 빛은 주변 행성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생명체를 탄생시켰다."(104-5)


4장 정보와 생명: 구조체에서 생명으로


"빅뱅 직후 숨가쁘게 진행된 사건의 속도와 비교할 때, 별의 내부는 수백만 년 동안 유지될 수 있는 매우 안정된 환경이었다." "그래서 (구조가 가장 단순한 몇 종류의 원자만 생성된) 빅뱅 때와는 달리 수소가 융합하여 헬륨으로 변한 후에도 융합 공정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질량이 큰 별은 주기율표에서 제법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질 때까지 융합 반응을 계속 일으킬 수 있으며, 그 부산물로 다량의 열과 빛을 방출한다. 예를 들어 질량이 태양의 20배인 별은 처음 800만 년 동안 수소를 융합하여 헬륨을 생산하고, 다음 100만 년 동안 헬륨을 융합하여 탄소와 수소를 만들 수 있다. 이 시점부터 중심부의 온도는 더욱 높아지고 원소 생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 가동된다. 그 후 약 1,000년 동안 탄소 원자핵으로부터 나트륨(Na)과 네온(Ne)이 생산되고, 그 다음 6개월 동안은 마그네슘(Mg), 그다음 한 달 동안은 황(S)과 실리콘(Si), 그다음 약 10일 동안은 남은 원자핵을 모두 태워 철(Fe)이 만들어진다."(119-20)


"그렇다면 구리와 수은, 니켈 같은 원소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금, 은, 백금 같은 귀금속은 어디서 왔으며, 이보다 훨씬 무거운 라듐, 우라늄, 플루토늄 같은 방사성 원소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과학자들은 그 출처로 두 곳을 지목했다. 별의 중심부가 대부분 철로 채워지면 융합 반응이 중단되어 밖으로 밀어내는 에너지가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별은 자체 중력으로 수축되기 시작한다. 별이 무지막지한 중력에 의해 안으로 붕괴되는 것이다. 별의 질량이 충분히 크면 붕괴가 빠르게 진행되어 중심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내파implode되는 물질이 중심핵에 되튀면서 엄청난 충격파가 바깥쪽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이 충격파 때문에 별의 중심부는 더욱 강하게 압축되어 무거운 원자핵이 합성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주기율표에서 철보다 무거운 원소의 일부는 이 혼돈의 와중에 생성된 것이다. 별의 중심부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표면에 도달하면 다양한 원소들이 우주 공간에 뿌려진다."(120-1)


"2개의 중성자별neutron star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에서도 철보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중성자별은 수명을 다한 별의 잔해로서 질량이 태양의 10~30배 정도이며, 대부분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어서(중성자는 베타 붕괴를 통해 양성자로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입자다), 새로운 원자핵이 생성되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지면 다량의 중성자가 우주 공간으로 연기처럼 흩어지는데, 이들은 전기전하가 없어서 척력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개의 그룹으로 쉽게 뭉쳐진다. 그 후 중성자의 일부가 카멜레온처럼 양성자로 변신하여(이 과정에서 전자와 반뉴트리노anti-neutrino가 방출된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어 초신성이 폭발하거나 중성자별이 충돌할 때 우주 공간으로 뿌려진 원소들은 장구한 세월을 떠돌다가 거대한 기체 구름으로 뭉쳐서 별과 행성이 되고, 그중 일부는 우리의 몸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물질의 기원이다."(121-2)


"핵융합으로 우리의 태양이 탄생한 후 수백만 년 사이에 회전 원반의 일부 파편들(약 0.3%)이 역시 자체 중력으로 뭉쳐서 태양계의 행성으로 진화했다. 이들 중 가볍고 휘발성이 강한 물질(수소, 헬륨, 메탄, 암모니아, 물 등)은 태양의 강한 복사radiation에 떠밀려 태양계 외곽의 차가운 지역에 축적되었고, 이곳에서 자체 중력으로 응집되어 목성과 토성, 천왕성, 해왕성과 같은 가스형 행성이 되었다. 반면에 철과 니켈, 알루미늄처럼 무겁고 단단한 물질은 태양과 가까운 곳에서 뜨거운 환경을 이겨 내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같은 바위형 행성으로 진화했다. 행성은 태양보다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압력에 저항하는 원자 고유의 능력만으로 적절한 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력에 의해 수축되면서 중심부가 어쩔 수 없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핵융합을 일으키기에는 턱없이 낮은 온도였기에, 다행히도 생명체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다(물론 다른 태양계에도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존재할 수 있다)."(124)


"물 분자의 기하학적 구조는 우주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 분자의 구성 원자들은 넓은 V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데, 꼭짓점에 산소 원자가 있고 2개의 수소 원자는 갈라진 가지의 양끝에 자리잡고 있다. H2O 분자는 전체적으로 중성이지만 산소 원자의 전자 포획 본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수소와 결합했을 때 음전하(전자)의 위치가 산소 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H2O의 산소 원자는 음전하를 띠고, 2개의 수소 원자는 양전하를 띤다." "이 미세한 불균형이 없었다면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 분자는 전하가 비대칭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거의 모든 물질을 녹일 수 있다. 음전하를 띤 산소 원자는 주변의 양전하를 무조건 끌어당기고 양전하를 띤 수소 원자는 주변의 음전하를 무조건 끌어당긴다. 전하를 띤 물질이 물속에 오래 잠겨 있으면 물 분자의 양끝이 전하 갈퀴처럼 작용하여 물질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이다." "이 과정을 두 글자로 줄인 것이 '용해'이다."(132-3)


"살아 있는 조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명을 정의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세포는 출처에 상관없이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세포 1개를 보여 준다면 그것이 쥐의 세포인지 개의 세포인지, 거북이인지 거미인지, 집파리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의 기원은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 수렴한다.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이 이 사실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 친숙한 '정보'다.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법은 생명체의 종류와 상관없이 거의 동일하다. 두 번째 특징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 즉, 모든 생명체에서 세포가 에너지를 입수하고,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법도 거의 동일하다. 그토록 다양한 지구 생명체들이 이런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134-5)


"살아 있는 세포의 배터리는 전기 배터리와 비슷하다. 일상적인 배터리와 다른 점은 전자 대신 양성자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인데, 양성자들 사이에도 전기적 척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작동 원리는 거의 같다." "몇 가지 숫자만 확인하면 세포 공장의 지칠 줄 모르는 기능을 실감할 수 있다. 평범한 세포 1개가 1초 동안 정상 기능을 유지하려면 약 1천만 개의 아데노신 3인산[ATP] 분자가 필요하다. 우리 몸은 수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초 사이에 무려 1억X1조 개(10^20개)의 ATP 분자가 소모되는 셈이다. ATP가 소모되면 원자재(ADP와 인산염)로 분해되고, 양성자 배터리로 구동되는 터빈에 의해 다시 ATP로 재생되어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포 전체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사람의 평균 에너지 소모량을 생각할 때, 세포 터빈의 생산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신이 속독의 대가라고 해도, 이 한 문장을 읽는 동안 당신의 몸은 5억X1조 개의 ATP 분자를 생산했다. 그리고 방금 3억X1조 개가 추가되었다."(144-5)


"RNA는 한 가닥짜리 짧은 DNA(DNA의 반쪽)에 염기가 달려 있는 형태로서, 모든 생명체의 필수 구성 요소이자 매우 다재다능한 분자다. '지퍼가 풀린' DNA 가닥의 일부를 본뜨는 것도 RNA의 기능 중 하나인데, 이것은 치과 의사가 환자의 윗니와 아랫니를 분리한 상태에서(즉, 입을 벌린 상태에서) 치아의 본을 뜨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정보는 세포의 다른 부분으로 전달되어 특별한 단백질을 합성하는 지침이 된다. 그러므로 DNA와 마찬가지로 RNA분자도 세포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의 일부다. 그러나 RNA와 DNA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DNA는 '세포의 활동을 지시하는 지혜의 원천'이라는 우아한 직책으로 만족하지만, RNA는 온갖 화학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포의 리보솜ribosome(아미노산을 조립하여 단백질을 만드는 초소형 공장)은 특별한 형태의 RNA(리보솜 RNA)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RNA는 소프트웨이면서 하드웨어이기도 하다."(154-5)


"또한 RNA는 자신의 복제를 촉진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초기 지구에서 RNA 분자가 계속 복제되던 중 우연히 변이가 발생하여 진화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가정해 보자. 변형된 RNA는 화학 물질 스튜에서 일부 아미노산을 사슬처럼 연결하여 최초의 단백질(오늘날 리보솜에서 생성되는 단백질의 단순한 초기 버전)을 만든다. 이렇게 탄생한 기초 단백질 중 일부가 우연히 RNA의 복제 효율을 향상시켰다면(촉매 반응도 단백질의 임무 중 하나다) 커다란 보상이 되돌아온다. 즉, 단백질은 변형된 RNA를 더욱 번성하게 만들고, 수적으로 우세해진 돌연변이 RNA는 더 많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되는 것이다. RNA와 단백질의 상호 협조하에 스스로 보강하는 화학적 반응이 반복되면서 분자의 변이는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다가 분자의 전술은 또 한 차례 새로운 혁신을 맞이하게 된다. 2개의 레일로 이루어진 초보적 형태의 DNA 사다리가 등장하여 더욱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복제가 가능해진 것이다."(156-7)


# 'RNA 세계' 가설


5장 입자와 의식: 생명에서 마음으로


"챌머스는 〈마음이 없는 입자에서는 의식이 생성될 수 없다〉는 믿음 하에 전자기학의 탄생 배경을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이 〈전통적인 과학을 사용하여 전자기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과감하게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던 것처럼, 의식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면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한계를 넘는 한 가지 방법은 개개의 입자들이 '더 이상 근본적 설명이 불가능한 의식의 씨앗'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의기양양한 전자'나 '심술궂은 쿼크'가 연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것을 원시의식proto-consciousness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서술은 '자연의 기본 단위에 스며 있으면서 더 이상 축약될 수 없는 주관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포함하는 쪽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가설에 의하면 모든 입자들은 이미 알려진 물리적 특성(질량, 전기전하, 핵전하, 양자적 스핀 등) 외에,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원시의식을 갖고 있다."(194-5)


"그렇다면 〈원시의식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런 것이 어떻게 입자에 스며들게 되었는가?〉 당연한 질문이지만 애석하게도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제안자인 챌머스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물리량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나에게 질량과 전기전하에 대하여 위와 비슷한 질문을 해도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입자들이 어떻게 질량이나 전기전하를 갖게 되었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질량이 중력을 창출하고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 그리고 전기전하가 전자기장을 창출하고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뿐이다." "중력과 전자기력의 경우, 본질적인 정의를 작용과 반응으로 대치하는 것이 교묘한 속임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두 힘의 수학 이론으로부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시의식도 정교한 수학 이론이 개발되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195-6)


"신경과학자 마이클 그라지아노가 제안한 인식 이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두뇌 기능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방금 출고된 새빨간 페라리를 살펴본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페라리의 다양한 특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수백 년 전에 과학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페라리 자체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은 서로 90도 각도를 이룬 채 1초당 약 400조 회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전자기장)으로, 3억 m/s의 속도로 당신을 향해 날아온다. 이것이 빛의 물리적 특성이며, 당신의 눈에 도달하는 정보의 실체다. 그렇다. 물리적 서술에는 색상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전자기장이 당신의 눈에 도달하여 망막의 감광 세포(빛을 감지하는 세포)를 자극하면 전기 신호가 생성되어 두뇌의 시각피질로 전달되고, 이곳에서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쳐 특정 색으로 해석된다. 즉, 색이란 물체의 본질이 아니라 두뇌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203)


"그가 제안한 이론의 핵심은 〈당신이 세부 사항에 아무리 신경을 쓴다 해도, 정신적 표현은 항상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에서 접하는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단순화하는 것은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마음이 생존에 필요한 다른 정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빨간색 페라리를 바라볼 때, 당신은 자동차의 간편한 도식뿐만 아니라, '페라리에 집중하고 있는 당신'에 대한 간편한 도식도 함께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세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임의의 대상을 마음속에 떠올릴 때 대부분의 세부 사항은 생략된다. 뉴런이 활성화되는 과정과 정보 처리 과정, 그리고 복잡한 신호 교환은 모두 무시되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만 부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awareness'이라 부른다. 우리의 의식이 마음속에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화된 도식을 선호하는 뇌의 성향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집중을 유발한 물리적 과정이 무시되기 때문이다."(204-6)


"그라지아노의 이론처럼 물리학에 기초한 가설의 매력은 의식을 '생명이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는 구성 성분'으로 축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의식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신경학neurology이라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 그러나 낯선 영역에서 온갖 덤불을 헤치며 힘들게 나아가야 하는 챌머스의 가설과 달리, 물리학에 기반을 둔 그라지아노의 접근법을 수용하면 전통적인 과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이질적인 영역을 애써 탐험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 지도를 전례 없이 세밀하게 작성하는 것이다. 굳이 초과학적인 불꽃이나 물질의 신비한 특성을 소환하지 않아도 의식이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평범한 법칙에 따라 평범한 과정을 수행하는 평범한 물질들이 '사고'와 '느낌'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커피잔을 구성하는 입자들과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바로 그 힘이 복잡다단한 마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206-7)


6장 언어와 이야기: 마음에서 상상으로


"언어학자 대니얼 도어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이 기존의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언어가 상호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는데,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다른 사람의 상상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언어를 사용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사회적 거래는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당신과 내가 함께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맛본 후에 몸짓과 소리, 또는 그림을 통해 각자의 느낌을 설명한다면, 이미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코코넛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맛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고, 추상적인 사고나 내면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일등 공신이 바로 언어다. 언어 덕분에 인류는 교류의 장을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었다." "인류는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영향력이 강한 행동, 즉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게 된다."(242-3)


"('적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스토리텔링은 현실 세계에서 겪게 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연습하여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재미있고 안전한' 두뇌 운동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여 '상상의 목록'을 만들어 놓으면, 자신이 겪어 본 적 없는 비상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대립(갈등)'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한다. 우리는 내적 또는 외적으로 위험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현실적이건 상징적이건,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등장 인물이나 스토리, 또는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놀라움과 즐거움, 그리고 경외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갈등 요소가 빠지면 따분한 이야기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갈등과 어려움이 없으면 이야기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진다."(249-51)


"그렇다면 이 독특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화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낳았을까? 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인간이 진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성이 어떤 동물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완벽한 조화는 아니더라도, 협동 정신을 충분히 발휘하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무리의 안전뿐만 아니라 혁신과 참여, 위임, 그리고 공동의 목적이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공적인 집단이 되려면 이야기를 통해 들은 다양한 경험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제롬 브루너는 〈우리는 주로 이야기를 통해 경험과 기억을 체계화한다〉고 지적하면서 〈인간에게 이야기를 통해 소통하고 간접 경험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집단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신화, 기담, 우화에서 일상적인 사건의 수려한 서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갖고 있는 사회적 본성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감정을 교환한다."(255-6)


"마음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대상에 마음을 부여하는 습성이 있다. 다른 사람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에게 자신과 비슷한 마음을 투영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바람직한 습성이다. 낯선 사람이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행동하면 경계를 풀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의도와 욕망을 부여하여, 그들을 사람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상에 마음을 투영하는 우리의 습성은 가끔씩 정도를 지나칠 때가 있다. 물론 이것도 진화론적으로는 좋은 습성이다. 달빛에 비친 작은 나무를 사자로 오인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표범이 다가오면서 내는 소리를 나뭇가지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로 착각했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주변 사물에 속성을 투영할 때에는 과소평가보다 과장하는 쪽이 유리하다."(265)


7장 두뇌와 믿음: 상상에서 신성(神聖)으로


"19세기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초기 인류가 사후 세계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 원인이 꿈이라고 주장했다. 매일 밤마다 기이하고 유별난 이탈을 겪으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꿈이건 악몽이건 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꿈에서 만났다가 깨어나면 그들이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미묘한 통로를 통해 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고대인이 남긴 문헌을 해석해 보면, 그들은 꿈을 '다른 세계로 가는 창문'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수메르인과 이집트인은 꿈을 신과 접촉하는 통로라고 믿었으며,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도 신의 계시는 주로 꿈속에서 이루어진다. 현대에도 고립된 사회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드림타임Dreamtime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273-4)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사방에 존재한다. 지구와 하늘에 작용하는 강력한 힘(중력)과 예측하기 어려운 일상적인 사건들,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의 그 대표적 사례다. 집단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화해 온 우리는 여럿이 함께 겪은 사건의 원인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번개가 치거나 강물이 범람하거나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생각하는 존재가 이런 일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왔다. 그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를 떠올렸다. 의도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간에, 그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원인을 하나의 존재에게 돌리면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일관된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고 운명을 좌우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들어 냈고, 친숙한 성격에 걸맞은 외모와 이름까지 부여했다."(274-5)


"인간이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거나 독실한 마음을 낳는 신체 기관 때문이 아니라, 진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장구한 세월 동안 투쟁해 왔기 때문이다." "보이어는 창 던지기(사냥)와 짝짓기(번식), 그리고 자기편 만들기(친화력)를 수행하는 신경학적 과정을 '추론시스템inference system'이라고 불렀다. 이 시스템의 성능에 따라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가 결정된다. 보이어가 제안한 가설의 핵심은 이 추론시스템이 고대인의 종교적 기질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타적 관계'로부터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기꺼이 희생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겠다. 그 대신 내일 전투에서 당신(초자연적 존재)은 내가 이기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와 반대로 나쁜 일이 벌어지면 자신(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신성한 존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반성한다."(278-9)


"보이어의 저서 《종교해설》에 따르면, 생존 경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두뇌는 종교를 포용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패키지 진화'의 또 다른 사례다. 종교적 믿음이 생존 경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하나의 습성으로 굳어진 것은 적응력을 높여 주는 다른 기능과 패키지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진화를 통해 단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겼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설탕 바른 도넛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이어가 말한 '종교를 포용하는 특성'이란, 두뇌의 추론시스템이 종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공감 능력 덕분에 고대인의 종교적 습성은 세계적 규모의 종교 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유령이건, 신이건, 귀신이건, 악마이건, 성자이건, 영혼이건 간에, 종교적 상상은 마음의 진화를 견인해 온 지휘자였다.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교리에 따라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다 보니 널리 퍼지게 된것이다."(279)


"종교가 널리 퍼진 것은 인간의 적응력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령, 공동생활을 하는 집단의 규모가 친족을 훨씬 능가하는 경우,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도록 유도하는 유전적 '당근'이 존재할 것인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자기 친족처럼 여기도록 만들면 된다.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제안한 이론을 발전시켜서 사회적 결속의 원동력을 설명한 바 있다. 종교는 교리와 의식, 관습, 상징, 예술, 그리고 행동 지침이 강조된 하나의 '이야기'로서, 종교적 행동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정서적 충성심을 확립하여 가족 못지않은 결속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어도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유전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쳐서 함께 일하고 보호하게 된 것이다."(280-1)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과학이 객관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연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개인의 내면 세계임을 강조했다(내면에서 느끼는 것은 물리 법칙이 아니라 자연 현상의 아름다움과 두려움, 동트는 새벽과 무지개의 '약속', 천둥의 '목소리', 여름에 내리는 비의 '온화함', 별들의 '웅장함' 등이다).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도 내면의 경험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이라고 믿었다. 과학은 객관적 현실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오직 마음이라는 주관적 과정을 통해 현실을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주관적인 마음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수련(여기서는 '영적 수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을 '주관적 경험에 기초하여 내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교리와 객관적 현실이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종교적 또는 영적인 가치를 탐구할 때에는 바깥 세계의 특성을 증명하는 데 연연할 필요가 없다."(309)


8장 본능과 창조력: 신성함에서 숭고함으로


"사회화社會化는 하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인간이 집단을 이루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 친사회적 성향을 갖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술을 꼽았다. 당신과 내가 같은 일을 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적 반응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를 들어 당신과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음악 행사에 자주 참여하여 에너지 넘치는 리듬과 멜로디에 함께 열광한다면, 마치 같은 공동체에 속한 듯 강한 유대감을 느낄 것이다. 단체로 드럼을 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춰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잘 알고 있다. 예술을 매개체로 삼아 강렬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집단에 정서적으로 동화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므로, 집단의 유대감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견고해진다."(329-30)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새로운 실험이나 데이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상대성이론을 구축한 과정은 가장 높은 수준의 창조적 예술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흐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선율은 전치轉置와 반전, 역행을 정신없이 반복하면서도 새롭고 완벽한 하모니를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바흐가 천재임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기존의 이론을 쌓아 올린 벽돌을 낱낱이 해체한 후, 새로운 개념이 적용된 청사진을 토대로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연구 과정을 종종 음악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가끔 방정식과 수학 기호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는 우주의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우주의 리듬을 듣고 패턴을 상상하면서 현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실행했던 예술이다."(331-2)


"예술은 개인의 신체적 한계나 일상적인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무한정 펼칠 수 있는 상상의 장을 제공한다. 진실에 집착하는 마음으로는 무한히 펼쳐진 가능성의 세게에서 극히 일부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익숙해진 마음은 상투적인 생각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펼칠 수 있다. 창의적 사고와 혁신은 주로 이런 마음에서 탄생한다." "강렬한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淨化한다. 이 경험은 돌부리에 채였을 때 발가락에 느껴지는 통증만큼이나 현실적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 나와 진실의 관계는 예술을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면 이런 경험을 좀 더 체계화시킬 수 있지만, 오직 나 혼자 겪었던 강렬한 느낌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언어에 기초한 예술(시, 에세이, 소설 등)도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와 감동이다."(330-6)


"자신이 원하는 만큼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창의적인 마음은 불멸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고 영원을 굽이쳐 흐를 수 있으며, 끝없는 시간을 추구하거나,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를 깊이 사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수천 년 동안 예술가들이 해 온 일이다." "한정된 시간밖에 인지할 수 없는 우리는 예술을 통해 영원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삶을 성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도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죽음을 성찰하면서 죽음의 위력에 도전하고, 죽음의 필연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죽음을 초월한 세계를 상상했다. 학자들이 예술의 진화적 유용성과 사회 결속에 공헌한 정도, 그리고 고대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아무리 열심히 파헤쳐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삶과 죽음, 유한과 무한 등)을 표현하는 가장 획기적인 방법이 예술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340-5)


9장 지속과 무상함: 숭고함에서 최후의 생각으로


"우주 공간 전체를 '암흑에너지dark energy'가 균일한 밀도로 가득 메우고 있다고 가정하면 은하들이 빠르게 멀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은하는 물질의 집합체이므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발휘하여 은하들끼리 멀어지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 또한 공간에 균일하게 분포된 암흑에너지는 밀어내는 중력을 발휘하여 은하들끼리 멀어지는 속도를 점점 더 빠르게 가속시킨다. 우주 공간의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은 암흑에너지에서 유발된 척력이 은하들 사이의 인력(중력)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빅뱅 때 일어났던 과격한 팽창에 비하면 지금의 팽창은 아주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암흑에너지의 양이 너무 많아도 안 된다. 지금과 같은 가속 팽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암흑에너지는 공간 1m^3 당 '100와트짜리 전구를 2천억분의 1초 동안 밝힐 수 있는 양'으로 충분하다. 터무니없이 작은 양 같지만 공간이 워낙 넓기 때문에, 모두 합하면 천문학자들이 관측한 팽창 가속도가 거의 정확하게 구현된다."(364-5)


"암흑에너지를 수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앞으로 점점 약해져서 가속 팽창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고, 점점 강해져서 가속도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밀어내는 중력이 점점 강해지는 추세가 장기간 계속되면 언젠가는 잡아당기는 힘을 압도하고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다. 당신의 몸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원자와 분자를 강하게 결합시켜 주는 전자기력과,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켜 주는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강력) 덕분이다. 이 힘들이 공간을 확장시키는 힘보다 (아직은) 훨씬 강하기 때문에 당신의 몸이 하나의 덩어리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몸이 확장되는 것은 공간 팽창 때문이 아니라 다이어트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충분히 흘러서 밀어내는 힘이 강해지면, 우주 공간뿐만 아니라 당신의 몸속에 있는 공간도 전자기력이나 강한 핵력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확장된다. 결국 당신의 몸도 부피가 커지다가 결국은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365-6)


# 빅 립big rip(거대한 균열)


"밀어내는 중력이 일정하다는 것은 공간의 팽창 가속도가 일정하다는 뜻으로, 약 1조 년 후에는 팽창 속도가 광속을 초과하여 모든 은하들이 빛보다 빠르게 멀어질 것이다." "은하는 팽창하는 공간을 타고 빛보다 빠르게 멀어질 수 있지만,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광속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에 도달하지 못한다. 강물에서 상류 쪽을 향해 노를 젓는 카약 선수가 유속보다 빠르게 노를 젓지 않는 한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빛보다 빠르게 멀어지는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미래의 천문학자가 가까운 별을 마다하고 멀리 떨어진 은하에 망원경의 초점을 맞춘다면 칠흑 같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은하들이 팽창하는 공간에 실려 떠내려가다가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지평선cosmic horizon'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간의 가장자리에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 있어서, 모든 은하들이 그 아래로 추락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367-9)


# 사실 팽창하는 공간에는 앞뒤의 개념이 없다. 공간은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기 때문에,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어떤 방향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생각의 종말이 닥칠 것으로 예상되는) 10^50년은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다. 빅뱅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보다 10억X10억X10억X10억 배 이상 길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긴 시간인 10^75년을 1년에 비유하면 10^50년은 당신이 책상 위의 전등을 켰을 때 전구에서 방출된 빛이 당신의 눈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짧다. 그리고 우주의 수명이 영원하다면 이 또한 찰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방대한 시간 규모에서 우주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한 직후에 생명체가 등장하여 아주 잠시 동안 존재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나 우주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생명체는 곧바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우주의 미래가 암울하다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우리를 비추는 빛과 우리가 떠올리는 생각은 단명하지만, 과학은 이것이 정말로 희귀하고, 경이롭고, 가치 있는 사건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396)


10장 시간의 황혼: 양자, 개연성, 그리고 영원


"생각하는 존재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물리 법칙은 자신이 해 왔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우주의 현실을 펼쳐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물리 법칙의 본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양자역학과 영원은 강력한 결합을 형성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가능한 미래를 허용하는 아주 특별한 부류의 '꿈꾸는 몽상가'다. 물론 모든 미래를 마구잡이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미래마다 특정한 확률이 주어져 있다. 개중에는 우주의 나이만큼 기다려야 한 번쯤 일어날 정도로 확률이 낮은 미래도 있는데, 현실적인 시간 규모에서 이런 것은 완전히 무시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재 우주의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로 방대한 시간 규모에서는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사건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우주의 수명이 무한하다면 이런 사건이 무한 번 일어난다. 아무리 작은 수라 해도 무한대를 곱하면 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이 은밀한 곳에 숨어서 현실로 구현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399-400)


"스티븐 호킹은 빛(복사)을 발하는 블랙홀의 온도 공식을 유도해냈는데, 이에 따르면 질량이 달보다 큰 블랙홀의 온도는 현재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의 온도(2.7K)보다 낮다. 언뜻 들으면 잘난 체하는 사람들의 잡담거리 같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블랙홀 근처에서는 열이 차가운 공간에서 블랙홀로 흐른다. 블랙홀은 호킹복사를 방출하고 있지만, 방출량보다 많은 열을 공간으로부터 흡수하여 질량이 서서히 증가한다. 지금까지 관측된 가장 작은 블랙홀도 달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블랙홀은 덩치를 키워 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우주는 계속 팽창하면서 온도가 낮아지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블랙홀보다 낮아져서 에너지 흐름이 역전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블랙홀은 에너지(열)를 방출하면서 수축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결국은 블랙홀도 사라질 운명이다."(408)


"물리학자들이 '시간의 끝end of time'에 비유하는 시기에 도달하면, 가끔 전자와 양전자가 나선 궤적을 그리며 서로 가까워지다가 소멸되고 이때 방출된 섬광이 작은 점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대부분의 공간은 암흑 천지다. 암흑에너지가 모두 사라져서 공간의 팽창 속도가 잦아들면 대형 블랙홀에 입자가 축적되어, 복사를 방출하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수명이 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암흑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가속 팽창 때문에 입자들이 점점 더 빠르게 멀어져서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상황이 빅뱅 직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빅뱅이 일어난 직후에도 공간은 분리된 입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단, 우주 초기에는 입자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별이나 행성 같은 천체가 형성될 수 있었지만, 우주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입자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이 계속 팽창하기 때문에 질량 덩어리가 형성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411)


"힉스장의 변화는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라는 양자적 현상을 통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전자를 '특별히 아주 작게 제작된' 샴페인 잔에 가두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까?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얌전하게 있는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전자가 잔을 탈출하여 바깥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이용하면 전자가 잔의 내부나 바깥에서 발견될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데 잔이 두꺼울수록, 그리고 잔이 높을수록 전자가 탈출할 확률은 낮아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자가 탈출할 확률이 0이 되려면 잔이 무한이 넓거나 키가 무한히 커야 한다. 고전적이건 양자적이건, 현실 세계에 이런 잔이 존재할 수는 없다. 즉, 전자가 잔을 탈출할 확률은 0이 아니다. 물론 이 확률은 거의 0에 가깝지만 충분히 긴 시간 동안 기다리면 언젠가 전자는 잔의 외부에서 발견된다." "힉스장이 양자터널을 겪으면서 값이 바뀐다면 우주의 장기적인 운명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416-7)


"양자 세계에서 전자가 가끔씩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힉스장의 값도 장애물을 통과하여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해도 전 공간에 퍼져 있는 힉스장의 값이 동시에 변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영역에서 양자효과가 무작위로 발생하여, 그곳의 힉스장이 장벽을 뚫고 다른 값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샴페인 잔을 탈출한 구슬이 더 낮은 곳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힉스장의 값도 낮은 에너지로 떨어지고, 그 주변의 힉스장도 낮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양자터널을 시도한다. 힉스장의 값이 변한 공간은 동그란 구를 형성하는데, 이 효과가 도미노처럼 퍼지면서 구의 반지름이 점점 커지다가 결국은 모든 우주를 뒤덮게 된다. 구의 내부에서는 힉스장의 변화와 함께 입자의 질량이 변하여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우리에게 익숙한 특성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질량이 달라진 입자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새로운 구조물과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다."(418-9)


"최후의 순간이 오면 우리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발견하고, 창조한 모든 것들을 캡슐에 담아서 이곳보다 좋은 영역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며 우주 공간으로 띄워 보낼 수도 있다. 우리의 혈통이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 해도,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요약하여 영원한 혈통을 물려받은 종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흔적을 영원히 남길 수는 있지 않을까? 가리가와 빌렌킨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도이치의 사상에 기초하여 이 시나리오를 분석한 끝에 〈희망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우주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양자요동이 가짜 캡슐을 양산할 것이므로, 우리 후손이 만든 진짜 캡슐은 그 속에 섞여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양자적 잡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우주에서 오랫동안 우주를 생각해 온 생명과 사고는 언젠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상상할 수 있고 영원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직접 만질 수는 없다."(436)


11장 존재의 고귀함: 마음, 물질, 그리고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 자각 능력에 기초하여 시간의 시작부터 수학 이론으로 예측 가능한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시간대를 탐험했다. 이 내용은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당연히 있다. 세부 사항들이 보강되거나 다른 내용으로 대치될 수도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양한 시간대를 거쳐 오면서 목격했던 탄생과 죽음, 출현과 붕괴, 그리고 창조와 파괴의 리듬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엔트로피 2단계 과정과 진화의 선택력은 혼돈 속에서 고도의 질서를 창출하지만, 별과 블랙홀, 행성과 인간, 그리고 분자와 원자는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모두 분해될 것이다. 종류에 따라 수명은 천차만별이지만 당신과 내가 죽고,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고, (적어도 우리 우주 안에서) 모든 생명과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물리 법칙이 낳은 평범한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한 가지 색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446-7)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인 사망과 멸종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삶의 가치를 높이고, 후자는 퇴색시킨다. 이 깨달음은 그 후로 몇 년 동안 미래를 생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수학과 물리학의 시간을 초월한 위력을 절감하고 나름대로 미래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바위와 나무, 사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방정식과 수학 정리, 그리고 물리 법칙이 난무하는 추상적 세계였다. 나는 플라톤주의 신봉자도 아니면서 시간과 물질계를 초월한 수학과 물리학에 절대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인류 종말 시나리오가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방정식과 수학 정리, 그리고 물리 법칙은 진리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칠판에 휘갈기거나 학술지와 교과서에 인쇄된 기호의 집합일 뿐이다. 이들의 가치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창출되며, 그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451)


"우리가 목격한 모든 시간대를 하루로 압축하면, 최초의 생명체가 출현하여 최후의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빛이 원자 1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다. 물론 (인류가 자멸하건, 멸종하건, 다른 은하에서 새로운 서식지를 찾건 간에)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이보다 훨씬 더 짧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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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2021-05-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장까지 읽다가 정리한글일 보며 흐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청양 2021-05-1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까지 읽으면 어떤생각이 들까? 지금으로서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반야심경이 자꾸만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