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이단 아카이브
탁지일 지음 / 현대종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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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기독교 아카이브의 필요성


"이단(heresy)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에서 벗어난 주장에 대한 교리적 판단이 내포된 정통의 상대적 개념이고, 컬트(cult)는 사회적 역기능에 대한 표현으로 사이비의 의미와 용법이 유사하다. 두 용어 모두 부정적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학계에서는 이단이나 컬트보다는 신흥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이라는 표현을 주로 선호한다. 기성 종교보다 상대적으로 새롭고(new), 종교적 답변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종교적(religious)이며, 안정적인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행 과정(movement)에 있다고 정의하는 가치중립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단'은 기독교 성경 및 전통적인 교리와 차별화된 주장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지칭하는 경우에 제한하여 사용한다. '사이비'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종교적 단체라고 주장하지만, 사회적 역기능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에 적용하고, 기독교 교리를 악용한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동시에 노출하는 경우에는 '이단사이비'라고 정의한다."(15-6)


"일제강점 후반기에 열광적 신비주의의 모습으로 싹이 움트기 시작한 기독교이단 운동은, 6.25전쟁 혼란기에 본격적으로 태동한다. 6.25전쟁과 전후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적 상황은 기독교 이단의 발흥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후 1960~1980년대까지의 군사정권 시기는 이단의 성장기였다. 정치적 정통성이 취약했던 군사정권은 적극적인 지지층을 필요로 했고, 종교적 정통성이 부재했던 이단들은 기성 교단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군사정권과 이단들은 서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던 부적절한 공생의 시대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주화와 함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문화사회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JMS,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등 이단 2세대들의 활동이 가시화된다. 특히 1990년 초 공산권의 몰락으로 시작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온라인 환경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화는 한국 이단의 세계적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17-8)


2장 이긴자론


2-1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천부교) (박태선)


"박태선은 1917년 11월 22일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읍남리 148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사업을 했으며, 귀국 후에 남대문교회 집사로 있던 중,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 영향을 받고, 이후 적극적인 신앙생활과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1955년 창동교회 장로였던 박태선은 1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한다. 하지만 3월 26일부터 4월 5일까지의 남산 천막집회로 인해 논란이 야기되자, 7월 1일 한국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한국예수교부흥협회를 조직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박태선의 활동이 사이비종교운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1956년 2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다. 한국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스스로 영생불사를 주장하던 박태선은 1990년 2월 7일 사망했다."(34)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박태선 신격화 교리가 등장한다. 예수는 마귀 대장의 아들이고, 성경의 98%가 거짓말이고, 예수가 한 번밖에 못한 금식기도를 자신은 13번이나 했으며, 죄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는 99% 죄 덩어리이고 음란마귀의 아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신약성경을 부인하고, 자신의 말이 곧 성경이며, 자신의 나이가 5,798세인 새 하느님이라고 주장한다." "박태선은 이사야 41장 2절의 〈동방의 의인〉이 자신이고, 41장 9절의 〈땅끝〉과 〈땅 모퉁이〉, 그리고 25절의 〈해 돋는 곳〉은 한국이며, 1절에서 〈섬들은 내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으니 일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북방에서 오게 하며〉를 북한에서 남한으로 자신이 내려온 것을 의미한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또한 스가랴 4장 11절과 요한계시록 11장 4절의 〈감람나무〉가 자신이며, 또한 요한계시록 2장 17절과 26절에 기록된 〈이기는 자〉의 사명과 권세가 주어졌다고 주장했다."(34-5)


"박태선은 1957년 9월 1일 신앙촌 건설을 선언한 후, 신앙촌이 말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고, 신앙촌에 들어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앙촌을 중심으로 한 박태선의 배타적 구원 주장은 점점 발전한다. 1957년 10월 23일에는,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으로 구원이 없으며, 전도관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1957년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 15만 평 규모의 제1신앙촌과 1962년 덕소에 5만 평 규모의 제2신앙촌을 조성했고, 1970년 부산 기장에 제3신앙촌을 세워 현재까지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태선에게 신앙촌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지상천국 〈새 예루살렘〉이었다." "박태선은 한국 이단의 뿌리로 일컬어진다. 전도관의 영향을 받은 영생교(조희성), 새마을전도회(구인회), 장막성전(유재열), 신천지(이만희), 실로등대중앙교회(김풍일), 동방교(노광공), 한국중앙교회(김순린), 한국기독교에덴성회(이영수) 등 다수의 단체에 영향을 주었다."(37)


2-2 대한기독교장막성전 (유재열)


"17세에 〈어린 종〉이 된 유재열은 1949년 2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북문로 1가 83번지에서 태어났다. 〈삼손〉 혹은 〈선지자〉로 불리던 유재열은, 부친 유인구와 함께 김종규의 호생기도원 신도로 있던 중, 1965년 1월경에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환상을 체험했다고 한다. 이때 예수님 머리 위에 무지개와 일곱 개의 별이 떠 있었고, 한 손에 어린양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김종규의 간음행태를 목격한 후, 호생기도원을 이탈해 부친과 독립적인 모임을 시작한다. 1966년 3월 1일 두 번째 신비체험 후, 유재열은 1966년 4월 4일 당시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청계산 계고에 소위 증거장막을 짓고 27명의 신도가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후 약 6개월간의 기도를 마치고 9월 24일 하산했으며, 1966년 11월 24일에 김종규를 축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부친 유인구 및 측근들과의 계속되는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고, 1969년 11월 1일 시한부 말세 심판 예언이 실패한 후, 세력이 약화된다."(68-9)


"유재열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동방〉(사 24:15)의 〈해 돋는 쪽〉(사 59:19) 그리고 〈생수가...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슥 14:8) 흐르는 곳인 한국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동서로 갈라진 산'(슥 14:4)이 과천의 청계산이고, 이사야 22장 11절의 〈못〉이 과천 막계리이며, 그곳에 세워진 장막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계 11:19)가 있는 곳이라고 해석한다. 장막성전이란 명칭은 요한계시록 15장 5절의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를 근거로 붙여졌다. 바로 이곳에 〈일곱 천사〉(계 1:20)와 〈어린 양〉(사 11:1~9) 유재열이 나타났으며, 바로 그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계 12:5)라고 주장한다. 이사야 34장 16절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를 근거로 짝을 맞춰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9-70)


"장막성전의 일곱 천사를 중심으로, 제1단계로 비사와 비유의 상징으로 된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2단계로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어 신도들을 모으는 한편, 기성교회의 부패와 모순을 개혁하고, 제3단계로 해외로 진출해 구원의 은총을 나눈다는 로드맵을 설정한다." "유재열의 장막성전의 영향을 받은 여러 분파가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만희), 새광중앙교회(김풍일), 천국복음전도회(구인회) 등이 장막성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분파들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장막성전 신도였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설립자 이만희는, 사기를 당해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1967년 2월 장막성전을 이탈했으며, 1971년 9월 7일에는 유재열을 고소하고, 1984년 안양교회를 세워 홍종효, 신종환, 유인구 등과 함께 『요한계시록의 실상』과 『신탄』 등의 교리서를 발간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조직해 나아가 오늘에 이르렀다."(71-2)


2-3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이만희)


"이만희는 1931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에서 태어났다. 신천지 홈페이지의 〈신앙적 약력〉에 따르면, 17세인 1948년 〈서울 침례교 외국 선교사에게 믿음 없이 침례〉를 받았고, 1957년에 〈고향 땅 야외에서 성령으로부터 환상과 이적과 계시에 따라 전도관에 입교〉했으며, 1967년에는 〈성령의 계시에 이끌려 경기도 과천시 소재 장막성전에 입교〉했다고 한다." "이만희의 신격화에도 전도관과 장막성전의 짙은 흔적이 나타난다. 이만희는 스스로를 말세의 〈이긴자〉 〈보혜사〉 〈약속하신 대언자〉 〈약속의 목자〉라고 주장한다. 2017년 1월 5일 개최된 신천기 34년 총회에서 이만희는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우리 이긴자 총회장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내심을 받은 참 목자〉라고 소개된다." "이만희가 『계시록의 진상』에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천지와 영생을 유업으로 받으니 곧 상속자가 된다〉고 언급한 영생불사 〈이기는 자〉가 곧 자신인 것이다."(88-9)


"이만희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을 보고 들었다고 주장한다. 전도관과 장막성전을 탈퇴한 후 유재열을 〈배도한 세례요한〉이라고 비판하며 신천지를 조직한 이만희는, 이로 인해 박태선의 전도관 교리와 많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먼저 〈성경은 때와 장소와 용도에 따라 빙자하여 비유 비사로 기록된 영적 말씀이다〉(이만희, 『요한계시록의 진상』, 512)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이미 일어난 〈교훈〉과 앞으로 일어날 〈예언〉으로 되어있고, 예언은 〈배도〉 〈멸망〉 〈구원〉의 일들로 구분되어 있으며, 구원의 일은 〈선민이 멸망 받을 때 피해 나온 자〉와 인 맞은 〈14만 4천〉과 〈수많은 사람〉(흰 무리)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의 신천지 신도가 바로 〈14만 4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2020년 신천지가 정부에 제출한 명단에 나타난 신천지 교세는 총 31만 732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신천지 신도들 가운데서도 14만 4천에 속하기 위한 경쟁이 불가피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90)


"코로나19 이전에는 모략(위장)이 신천지 포교 활동의 주된 전략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교회에 잠입하거나, 행사 및 활동을 주도하며 신도 모집에 집중했다. 하지만 신천지 대구교회의 코로나 집단감염사건으로 인한 '조직과 신도들의 신분 노출'과 '신천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신천지자원봉사단 중심의 공개적인 봉사활동을 펼치는 한편, 긍정적인 여론 전환과 이미지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신천지 본부는 현재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에 있다. 본부총회를 중심으로, 신천지 12개 지파 조직이 전국 도 단위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서울·경기지역은, 서울야고보, 시몬, 마태, 바돌로매, 요한 지파, 강원도는 빌립, 충청도는 맛디아, 전라북도는 도마, 전라남도는 베드로, 경상북도는 다대오, 경상남도는 부산야고보와 안드레 지파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는 안드레 지파가 담당하고 있으며, 각 지파별로 신천지 해외 조직들을 분담해 관리하고 있다."(92-3)


3장 성적타락론


3-1 이스라엘수도원 (김백문)


"김백문은 경북 칠곡군 인동면 안의동 488번지에서 1917년 10월 19일 출생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과는 다른 성적타락론을 기본으로 하는 교리를 체계화했으며, 저서들을 보면 그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백문은 대구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수련의 실습을 위해 머물렀던 함경북도 청진도립병원에서, 일제강점후반기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운동을 펼치던 황국주의 제자인 김남조를 만나 영향을 받았고, 이후 학교를 중퇴한 김백문은 김남조의 소개로 원산 이스라엘수도원장인 백남주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탁명환은 기록한다. 1943년 일제강점말기에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에 이스라엘수도원을 설립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 상도동에 교회를 운영했는데, 당시 통일교 설립자 문선명이 찾아와 김백문으로부터 교리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백문이 문선명에게 미친 교리적 영향의 흔적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 데칼코마니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105-6)


"김백문은 인류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해석한다. 즉 타락한 천사인 뱀에게 유혹된 하와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과 성적 관계를 갖고 타락하게 된 것이 곧 선악과를 범한 것이고, 다시 아담과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온 인류의 혈통에 죄악성이 들어오게 되었으며(김백문, 『基督敎根本原理』, 485), 〈아담으로 시작된 타락에 육성세계에 근본악성은 혈통적 육체계식을 따라 유전적으로 각종에 죄의 형태를 이루어 인종이 번창할수록 죄악의 종족도 번창했든 것이다.〉 즉 인류가 번창함에 따라, 죄도 함께 번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김백문, 『聖身神學』, 103). 하지만 성적 타락으로부터의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혈통 복귀 교리와 행위로 인해 비윤리적인 성적(性的)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통일교 문선명을 거쳐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등 성적타락론 유사교리를 주장하는 이단 단체들로 인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106-7)


"일제강점후반기 열광적인 신비주의의 확산이 이루어지던 1930년대 말부터 김백문은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김백문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바로 한국이며, 재림주가 강림할 곳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3월 2일 김백문은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계시와 새로운 교리를 세상에 알리라는 사명을 받은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김백문의 삶과 활동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통일교 측의 자료에 부분적으로 행적이 드러나 있고, 김백문의 저서들을 통해 활동의 흔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基督敎根本原理』 서해(序解)에서 김백문은 그의 저술 목적에 대해 〈본서(本書)는 그 신(神)의 가르친 신(神)을 논(論)했고 그 신(神)의 다시 짓는 인생(人生)을 논(論)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 이단 교리를 체계화한 김백문은, 대규모 세력을 형성하거나 광범위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신(神)을 논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논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107-8)


3-2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문선명)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태어났다. 1991년 문선명의 방북과 김일성 면담 이후, 그가 태어난 집터에 통일교 '정주평화공원'이 세워져 통일교 신도들의 성지순례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1945년 최선길과 결혼했으나 1957년 이혼하고, 1960년 18세의 한학자와 재혼한다. 1964년에는 그의 본명인 문용명을 문선명으로 개명한다. 문선명은 1935년 부활절에 인류구원의 사명을 실패한 예수님을 만나 지상천국 건설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1976년에는 〈공자, 석가, 예수까지도 나의 부하〉라고 주장하고, 1992년에는 〈본인은 재림주요 구세주〉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2002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 한학자도 〈구세주,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2012년 9월 3일 사망했으며, 현재 스스로를 〈6천 년 만에 탄생한 독생녀〉라고 주장하는 부인 한학자가 문선명의 뒤를 이어 통일교를 이끌고 있다."(111-2)


"『원리강론』은 인류의 타락이 성적 타락임을 주장한다. 〈인간을 꼬여 타락하게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하여 타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를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불륜한 성적 관계에 의하여 천사장과 일체를 이루었던 「해와」는... 「아담」으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위치를 떠나게 하여, 마침내 그들은 육적인 불륜한 성적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아담」마저 타락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계승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번식하여 내려온 것이다.〉 (문선명, 『원리강론』, 80-91)." "이를 구원하기 위해 제2의 아담인 초림주 예수님이 강림했지만 실패했으며, 이후 제3의 아담인 문선명이 재림주로 왔다는 내용이다.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이 동방인 한국에 세워진다는 것이 『원리강론』의 결론이며, 통일교는 이의 실현을 지상목표로 삼고 활동하고 있다."(112-3)


"통일교는 대표적인 기업형 종교조직이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원리강론』을 근거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단체로 활동하는 한편, 국내외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관련 사업체들을 통해 기업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는 재림주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 곧 통일교 왕국 건설을 목표로 진행되는 종교적 활동들이다." "국내외 각 지역 교회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7년에는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해 제18대 총선에 참여하는 등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모색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했다." "문선명 사후 현재 후계 구도를 둘러싼 친어머니(한학자) 및 친형제(문현진, 문국진, 문형진) 간 대립과 다툼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통일교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은, 문선명의 후계를 둘러싼 갈등과 긴장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한편, 통일교가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114-6)


3-3 기독교복음선교회(JMS) (정명석)


"정명석은 1945년 음력 2월 3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월명동에서 태어났다. 정명석이 1975년 3월 20일 자로 작성한 통일교 입회원서에 따르면, 그가 20년 동안 장로교 집사로 있었으며, 당시 통일교 진산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명석은 1974년 11월 15일에 통일교에 입교해, 1979년까지 승공 강사 등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탈퇴한 후, 1982년 애천교회를 세우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재림주로 따르던 문선명을 〈실패한 세례요한〉이라고 폄하하고, 자신의 이름 영문 첫 글자인 JMS를 사용해, 자신이 예수(Jesus), 메시아(Messiah), 구세주(Savior)라고 주장하며 독립적인 단체를 시작한다. 청년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포교 활동을 하며 교세를 증가시켰지만, 여신도들에 대한 성범죄 혐의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후 현재는 고향이자 활동거점인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월명동수련원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33-2)


"정명석은 〈하와는 십대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 뱀으로 비유한 천사장 루시퍼에게 사랑의 꼬임을 받고서 호기심에 사랑의 충동감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끊고 그와 사랑의 관계를 맺어 이성의 타락을 함으로 영, 육으로 타락을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와는 그 타락한 몸을 가지고 아담을 사랑함으로 또 아담을 타락하게 했다.〉(『구원의 말씀』, 207-209) 라고 주장한다. 정명석의 교리에 대해, 항소심 판결문은 〈통일교원리를 요약·인용한 것으로 성경을 상징과 비유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 재림 예수가 피고인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암시함으로써 위 교단의 신도들은 그를 메시아로 믿고 그의 면전에서 그가 메시아임을 고백〉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성적 타락을 회복하기 위해 정명석이 재림주로 왔으며, 그와 성적 관계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인류 회복을 위한 영적 행위로 합리화한 것으로 법원은 봤다."(134)


"1980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서대문구 신촌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한 후, 초기에는 강남구 삼성동, 성북구 삼선동, 중구 을지로4가 등지로 옮기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국내외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JMS는, 주로 CGM(Christian Gospel Mission) 혹은 위장 동아리의 형태로 운동, 문화, 악기연주, 댄스, 노래, 연예기획, 모델, 치어리더, 행사 의전, 신앙 활동을 내세워 신도들을 모집하고 있다." "김백문의 『기독교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의 주장이 정명석의 「30개론」에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들의 유사 성적타락론의 흐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 사회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탁명환은 〈통일교의 원리를 새 진리로, 문선명 교주를 이 시대의 중심인물의 대권을 자신에게 물려 줄 전자(前者)〉로 가르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애천교회의 최대의 목적은 기독교회와 통일교를 애천교회에 흡수시키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135-7)


4장 시한부종말론


4-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엘렌 G. 화이트)


"안식교로 알려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SDA)는 몰몬교와 여호와의증인과 함께 미국에서 전래 된 가장 대표적인 단체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는 1831년부터 임박한 재림을 주장하던 침례교 설교자 윌리엄 밀러의 주장을 근간으로 시작됐다. 1818년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일어난다고 확신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밀러를 따랐던 사무엘 스노우는 그날이 3월이 아니라 1844년 10월 22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재림 예언은 다시 실패했고, 추종자들은 소위 〈대실망(The Great Disappointment)〉에 직면한다. 이후 밀러에게 영향을 받았던 엘렌 화이트와 조셉 베이츠와 존 바잉턴 등이 시한부종말론을 수정한 후 공식적으로 안식교 활동을 본격화한다. 안식교의 설립과 초기 교리형성 과정에서 엘런 화이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화이트는 23년 동안 200여 차례의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다."(151-2)


"안식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 즉 〈영원한 복음〉(계 14:6)을 전하는 것을 궁극적인 사명으로 이해한다." "안식교는,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희생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효력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승천 직후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봉사하셨다. 그리고 2300주야(단 8:14)의 끝에 하늘 성소의 둘째 칸에 들어가 조사심판을 시작하셨다. 이 심판이 마친 후 예수께서는...재림하신다〉고 설명하면서, 〈재림의 징조에 관한 예언들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한국선교 100주년, 2904~2004〉, 31)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셉 베이츠는 토요일 안식일 준수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고 시내산 언약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시이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짐승의 표식이며, 안식일을 지켜야만 14만 4천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52-3)


"안식교의 국내 전래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와이 이민을 위해 일본에 잠시 체류하던 손홍조가 1904년 6월 12일 일본 안식교 전도자에게 침례를 받은 후, 이민을 포기하고 다시 귀국하여, 안식교 선교사들이 내한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08년에는 일본선교회로부터 독자적인 조선 선교회로 독립했으며, 1915년 4월에는 이근억과 정문국이 최초의 안식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5년 안식교에 참여하면 면직과 제명한다는 장로교의 공식 결의가 있었지만, 현재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는 안식교 삼육대학교가 정회원으로 참여하여 신학적 교류를 하고 있어, 안식교의 이단성 여부에 대한 목회현장의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탁명환은, 안식교 성경해석의 오류, 엘렌 화이트의 환상과 예언에 대한 지나친 권위 부여 등의 교리적 문제점들은 〈이단적인 요소〉라고 판단하면서도, 〈안식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교육, 의료, 사회사업, 구호사업, 금주금연운동 등 실로 괄목할만한 활동을 해왔다〉고 평가한다."(154-7)


4-2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회 (안상홍)


"하나님의교회는 설립자 안상홍을 〈재림 그리스도〉 〈재림 예수〉 〈하나님〉으로 신격화한다. 하나님의교회 홍보 전단에는, 성부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안상홍 하나님이라고 나타나 있다. 안상홍은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내남면 명덕리에서 출생했는데, 하나님의교회는 이날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안상홍은 유년 시절을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보냈으며, 1947년 7월 안식교에 입교했으나, 1962년 3월 24일 안식교를 탈퇴한 후, 1964년 6월 2일 하나님의교회를 설립했다. 안상홍은 1985년 2월 25일 사망했다." "안상홍이 사망한 후 전도사였던 장길자가 안상홍의 뒤를 잇는다. 하나님의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갈 4:26)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장길자를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이자 〈어머니 하느님〉으로 신격화한다."(172)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과 장길자,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신격화하는 새로운 유형을 보여준다.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 나오는 〈우리〉라는 복수형 단어와 하나님의 히브리 원어인 〈엘로힘〉이 복수형 명사라는 것을 근거로 남녀 하나님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엘로힘〉의 성경적 의미는 단수, 즉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 의미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성경해석의 오류라고 비판받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유월절 준수를 강조한다. 인류 역사를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고, 성부 시대에는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셨고, 성자 시대에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으며, 성령 시대에는 안상홍이 유월절을 회복해 구원을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안식교와 마찬가지로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교가 종말의 때라고 주장했던 1844년을 기준으로 새로운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웠다."(172-3)


"즉, 1844년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 들어갔다는 안식교의 주장에 덧붙여, 모세가 장막을 짓는데 소요된 시간이 168일이고, 성경에서 하루는 일년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1884년에 168년을 합치면, 2012년이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1988년, 1999년, 2012년 등의 시한부 종말을 주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나님의교회 정관에 따르면, 영구직 총회장인 김주철에게 조직운영과 소유권 등의 절대적인 권한이 위임되어 있다. 규모와 교세 면에서 신천지와 함께 국내 최대 기독교계 이단으로 알려져 있으며, 적극적인 친사회적 봉사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있으며, 특히 해외에서의 현지인 포교 활동을 통한 교세 확장이 두드러지고 있다." "사회봉사를 기반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가장 폭넓게 진출해 있는 대표적인 한국 기독교계 이단 단체이다. 특히 설립자 안상홍 사후에 급속도로 발전한 점을 고려할 때, 종교사회학적으로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71-3, 176)


4-3 다미선교회 (이장림)


"다미선교회 이장림은 1948년 2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출생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성결교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성결교회 목회자로 있으면서 '생명의 말씀사'에서 성경주석과 휴거 관련 서적들을 번역했다. 휴거와 관련된 책들을 발간한 후, '생명의 말씀사'를 나와 1988년 8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선교회' 즉 다미선교회를 설립한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 24시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1988), 『하늘 문이 열린다』(1988), 『경고의 나팔』(1989) 등의 도서판매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으며, 1989년 3월에는 다미선교회 본부였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 365-25 소재 대지 148평 건평 94평의 주택을 자신 명의로 매입하는 등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장림은 종말을 한 달여 앞둔 1992년 9월 24일 신도들의 헌금 34억을 개인 계좌로 이체까지 한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채권의 지급일은 휴거 이후인 1993년 5월이었다."(204-5)


"다미선교회는 〈인간역사 6000년이 지나면 천년왕국이 도래함을 알 수 있으며,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리라'고 한 말씀에서 한 세대는 이스라엘 독립 후(1948.5.14) 50년(희년)으로 볼 수 있고, 7년 환난 전에 휴거가 있으므로 1992년에 휴거가 있게 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0월 28일 24시에 휴거가 있다고 계시되고 있는 바, 이스라엘에서는 오후 해질 무렵(오후 6시)부터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를 하루로 보며 우리나라보다 6시간이 늦으므로 우리나라의 24시는 이스라엘의 오후 6시로서 하루가 바뀌어 나팔을 부는 시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라고 해석했다." "다미선교회는 휴거된 신도들은 공중에서 재림주와 7년을 지내고, 이때 지상에서는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며, 1999년에 지상 재림하여 이후 1천 년 동안 천년왕국이 지속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택받은 청소년들이 북한과 중공에 들어가 순교한다고 예언했으나, 모두 예외 없이 실패했다."(205-6)


"당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다미선교회 이장림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직통 계시를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이들 중 한국중앙교회 이천성은 1992년 6월 21일 종말 주장이 빗나가자 충청남도 논산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는 1988년 올림픽 개막식 때 사망한 교주 안상홍이 주경기장 공중에서 내려온다고 주장했으며, 영생교는 1992년 2월 18일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면서 조희성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주장했다." "다미선교회의 1992년 시한부종말론은 개신교계 이단 단체의 병리 현상이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던 신도들의 모습은 국내외 언론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휴거의 불발은 신도들과 가정 특히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한부종말론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업 중단, 가정 해체, 가출, 직장 포기, 낙태, 정신질환 등이 폐해가 나타났으며, 사회 혼란의 야기와 함께 개신교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었다."(207-9)


5장 사회적 논란


5-1 동방교 (노광공)


"노광공의 공식적인 출생기록에 따르면, 1911년 1월 13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동방교 〈說敎文〉에 따르면 1914년 갑인년 1월 13일 평양 상수리 일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계 형사로서의 친일행적이 있고, 해방 후에는 경북 안동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했다. 6.25전쟁 후에는 전도관 집회에서 북을 치며 박태선을 추종하다가, 1955년 대구시 신천동에 동방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동방교 경전인 『경화록』에 따르면, 노광공이 태어난 후 3시간 만에 〈내가 世上에 조금 일찍 와서 苦生하겠구나〉라고 말을 했으며, 7시간 만에 〈혼자 일어서서 步行〉을 했다고 한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3개의 치아가 있었고, 3세 때 시조(時調)와 음율(音律)을 읊었고, 6세 때에는 천자문을 20일 만에 통독 암송했고, 학교에서는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7세 때는 콜레라고 죽었다가 모친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한다."(235-6)


"동방교 모든 교리와 행동지침은 노광공에 대한 신격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방교는, 예수는 일래(一來)이고, 〈심판주요 창조주〉인 노광공은 〈여호와 이래(二來)〉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광공과 그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를 삼위일체로 믿었다. 즉 노광공은 성부이고, 노영도는 성자이며, 노영구는 성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노광공을 〈이래 조부님〉, 노영도를 〈아바 조부님〉, 노영구를 〈아브니엘 주부님〉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신도들에 대한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또한 1970년대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으나 실패하자, 신도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연기되었다고 주장했다. 동방교는 구원의 조건으로 〈지성금(至誠金)〉을 내세웠다. 동방교 신도들을 〈성민(聖民)〉이라고 부르면서, 성민이 되기 위해서, 지성금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성금의 종류는 30여 종에 이르렀는데, 61계급의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그리고 각종 절기마다 온갖 종류의 지성금을 바쳐야 했다."(237-8)


"1967년 7월 26일 노광공이 당뇨병으로 사망한 후, 동방교는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 총회로 변신하고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주간기독교」라는 신문과 「청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고, 청림농림학원, 고등성경통신학교, 기독교통신대학, 성봉신학교를 운영했다. 재단법인 밀알복음전도선교회를 운영했으나 끊임없는 반사회적 범죄혐의로 인해 1976년 7월 13일 인가가 취소되었다." "탁명환은 〈1950년대 교조 노광공의 부산 여학생 간음 사건을 비롯하여 1960년댕에 접어들어 간음, 린치, 폭력, 살인 등 갖가지 사건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동방교는 1967년 7월 13일 그 재단법인이 대법원으로부터 취소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실로 가공할 사교로서의 범죄행각〉을 벌였다고 평가하고(『기독교이단연구』, 298, 325), 〈동방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또 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로 변신한 동방교는 기독교 간판으로 위장한 사이비 종교집단〉(『한국의 신흥종교』 제2권, 62)이라고 결론짓는다."(239-42)


5-2 대한구국선교단 (최태민)


"최태민은 1912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서 태어났다. 출신과 배경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태민을 직접 만났던 탁명환은 그를 〈신흥종교단체의 교주〉, 〈유사 무속인〉, 〈권력 그늘 속의 종이호랑이〉, 〈권력의 시녀〉, 〈고려 말 괴승 신돈〉,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돈거래로 목사직을 산 것으로 보이는) 가짜 목사〉라고 묘사했다. 탁명환의 증언과 관련 자료들을 통해 최태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최태민의 종교적 활동이 노출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 최태민은 원자경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을 〈영세계 칙사관〉이라고 주장했다. 즉 스스로를 〈조물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불교의 깨우침, 기독교의 성령강림, 천도교의 인내천을 이룰 칙사님〉이라는 것이다. 혼합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자신의 영험함을 주장했던 유사종교 단체의 교주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구국십자군과 대한구국선교단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신교 목사로 변신했다."(356-7)


"최태민은 각종 기성 종교의 교리를 혼합해서 사용했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 곧 〈영세계 칙사관〉인 자신이 〈불교에서의 깨침,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라고 주장하면서, 〈난치의 병으로 고통받으시는 분께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고 선전했다. 질병 치료와 재난극복을 위해 최태민이 한 일은, 〈벽에다 둥근 원을 색색으로 그린 후 이를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라고 최태민은 주장했다." "최태민은 대한구국십자군과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해 운영했다. 탁명환은 이에 대해, 〈당시 저항 세력이었던 기독교계의 저항을 희석시켜보려는 의도에서 대한구국십자군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357-9)


"최태민은 각종 기독교 행사를 주도했지만, 그는 여전히 '가짜 목사'였다. 정식적인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 그가 금전거래를 통해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증언까지 확보한 탁명환은 그가 가짜 목사라고 판단했다. 특히 그가 주도하거나 참여한 기독교 행사에서 목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최태민을 보면서 탁명환은 그가 목사직을 급조해 만들어 악용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최태민은 한국 사이비종교 역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권력 핵심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체계적인 교리와 치밀한 조직을 갖춘 통일교도 하지 못했던 일을 비주류 사이비종교 교주인 최태민이 해낸 것이었다. 특히 육영수 여사의 사망이라는 절묘한 시점과 그 유자녀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예상 밖의 선택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일단 관계가 형성되자, 소위 구국의 명분을 내세워, 핵심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사욕을 채웠다."(359-60)


5-3 영생교 (조희성)


"영생교의 설립자 조희성의 출생기록에 따르면, 1931년 8월 12일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박태선 전도관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영향을 받았다. 조희성은 전도관을 떠난 후에도 박태선을 〈영모님〉으로 따랐으며, 영생교는 현재도 전도관의 이슬성신절(매년 1월 1일)을 지키고 있다. 1981년 8월 18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에서 독자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1년 10월 10일 부천시 역곡동 74-141에 승리제단을 설립한다. 조희성은 스스로를 〈이긴자〉 〈정도령〉 〈구세주〉 〈하나님〉 〈주님〉 등으로 신격화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이 〈구세진인 正道令〉이고 〈개벽의 주인공〉이며 〈경전과 예언서에는 이슬(甘露)을 내리는 자를 이긴자, 메시아, 생미륵불, 정도령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왔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1980년 10월 15일을 기하여 한국 땅에 출현〉(『승리신문』 1993년 11월 7일 자) 했다고 주장한다."(383-4)


"영생교의 공식명칭은 〈영생교 하나님의 승리회 승리제단〉으로, 〈하나님이 서 계신 승리대, 즉 승리하신 하나님의 재단이란 뜻〉이다." "〈성화(이슬성신)이란〉 제하의 영생교 유인물에는, 〈성경에는 구세주의 증표로 이슬성신이 내린다 했고, 불경에는 생미륵불의 증표로 감로수(甘露水, 이슬)를 부어주신다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예언서에는 정도령의 증표로 감로해인(甘露海印)을 사용한다고 되어있습니다〉라고 설명한 후, 〈승리제단에서는 「이긴자」 조희성님으로부터 10년 동안 계속 이슬성신이 내리고 있으며, 이 이슬성신에 의해 인간 몸이 변하는 새로운 장(場)이 열리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의 출생일인 8월 12일을 성탄절로 지키면서, 2004년 6월 19일 그의 죽음을 〈보광(普光)〉이라고 명명하면서, 보광은 〈구세주의 영광의 빛이 온 누리에 두루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완성〉된 조희성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385-6)


"1992년 9월 서울지검 강력부는, 영생교 신도 실종 사건에 조희성이 관련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1993년 1월 10일 도피 중이던 조희성을 검거했으며, 신도들에게 영생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현금 3억 6천만 원을 가로챈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구속수감했으며, 1994년 8월 30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은 징역 4년에 추징금 5백만 원의 실형을 선고한다. 1995년 3월 8일에는 실종 신도의 유골이 발견되는 한편, 영생교 간부들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조희성은 영생교 신도 6명에 대한 살인교사 및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004년 항소심에서 살인교사 혐의는 무죄, 범인도피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직후인, 6월 19일 수감 중이던 서울구치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현재 조희성 사망 직후인 2004년 6월 20일 승리재단 총재로 취임한 부인 이영자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384, 387-9)


6장 기독교이단 아카이브 현황 및 활용 방안


7장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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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성찰 비아 시선들
데일 C. 앨리슨 지음, 김선용 옮김 / 비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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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적 유용성의 문제


"현대 예수 연구 서적들에는 수많은 역사적 예수상像이 담겨있고 학자들이 제시한 예수상은 지나치게 많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유대인 예언자이자 거의 정통 그리스도교인으로 그린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를 영원한 지혜를 가르친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묘사한다. E. P. 샌더스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유사하게 예수를 유대 종말론적 예언자로 그린다. 존 도미닉 크로산에게 예수는 갈릴리인이면서도 견유학파 철학자 같은 소농peasant으로서, 권력에 바탕을 둔 로마 제국의 정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평등한 왕국과 비폭력적 하느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학자들이 합의점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할 수는 없다. 유명한 사람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한때 영향력 있던 생각도 이내 잊힌다. 오늘 학자들이 이룬 합의도 내일 깨질 수 있다. 예수에 관한 대작들은 구름과 같다. 아무리 크고, 인상적이고, 아름다울지라도 오래 가지 않는다."(31-5)


"신학자들이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활용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각 의견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학자의 역사적 예수상도 순수한 역사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도 역사적 예수 연구 활용을 어렵게 한다. 예수에 관한 (거의) 모든 거대한 책은 그 안에 일정한 신학을 담고 있다." "높은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을 견지하는 학자는 당연히, 역사적 예수가 높은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확률이 높다.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학자는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예수가 아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예수를 발견할 확률이 높다. 개인의 신앙과 역사의 발견 사이의 상관관계는 끝없이 이어진다. 개신교 복음주의자가 쓴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리는 예수는 개신교 복음주의에 우호적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유대교인으로 복원하려는 유대교인이 그리는 예수는 신실한 유대인일 것이다. 이념은 어디에나 있다."(46-9)


"일례로, 존 도미닉 크로산은 개인의 편향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역사를 예수 전승에 투사했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크로산은 자신이 고대 유대인과 근대 아일랜드인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산은 나르시시즘과 실증주의 사이의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공간을 상호작용성interactivism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와 과거,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 사이에 가능한 한 정직한 변증법을 만들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본문에 연구자가 자신을 투영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하는 것과는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홀로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계의 구성원들이다. 어떤 이의 경향은 다른 이의 경향과 대화를 통해 겨룰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을 통해 연구자들은 물론 학계 전체의 이해는 확장될 수 있다."(55-7)


# 크로산은 나르시시즘을 인간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물이나 거울 등에 비친 모습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illusion이라고 보고, 역사 실증주의를 사건을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 망상delusion이라고 말한다.


"근현대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유럽의 이신론자deist들이 시작했다. 그들은 증거를 반反교회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의심의 해석학'이란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교회가 선포하는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 의심했고 그 의심이 맞음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신론자들의 목표는 진실과 허구, 즉 교회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예수에 관한 진실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 지어낸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지우고, 제도 교회가 만들어낸 초인 뒤에 감춰진 역사적 인물 예수의 정체를 알아내기를 원했다." "우리의 자료들이 결코 순수하지 않고, 과장된 이야기, 만들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가정 아래 역사적 관점에서 부활 이전의 예수를 탐구하는 작업은 꽤나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덧칠을 벗겨내는 것이 가능할까? 해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를 포함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예수를 그의 해석자들에게서 깔끔하게 분리해 낼 수 있는지 의심이 커짐을 고백해야겠다."(62-4)


"좀 더 중요한 점은, 교회라는 밭에 묻혀 있는 예수라는 보화를 찾을 때 내가 정확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탐구를 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좀 더 깊이 의식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 가운데 많은 이는 예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예수의 자기 이해를 정확히 가려내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정체는 그의 말과 행동, 자의식, 혹은 이들의 조합으로 축소될 수 없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종종 진지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이 질문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른다.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고려해야 하며 '나'와 중요한 상호작용을 해왔던 수많은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개인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을 이루며 산다."(64-5)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전기를 자서전으로 축소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칭송하기 전의 예수, 있는 그대로의 예수로 돌아가기 위해 마태오의 편집과 마르코의 신학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해 오해할 수 있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반드시 그를 오해한 이야기, 호도하는 이야기라는 법은 없다." "더욱이 한 사람은 자신의 전체 생애의 가치와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분명해진다.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영향의 물결을 막지 못한다. 그가 죽은 뒤에도 영향의 물결은 계속 뻗어나가고, 다른 사람의 물결과 만나 새로운 흐름을 빚어낸다." "시간이 흐르면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 관한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67-8)


2 논쟁적 문제들


"1970년대 신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책에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종교historical religion라고 쓰여 있었다. 그 책들은 힌두교, 불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는 실제 일어난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했다. 당시 이러한 이야기를 하던 수많은 책 중 두 권의 제목을 빌려 표현하면, 〈행동하시는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역사와 관련해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종교라는 생각을 암시했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하면서, 역사는 인식론의 보루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실은 해석을 결정하지 않으며 역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역사를 신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역사에서 신학이 나온다. 그러니 과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대한 현대적인 역사의 재구성은 종교적 믿음이나 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83-5)


"이제 우리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상상력의 산물임을 안다. 세상을 뒤덮은 홍수는 없었고, 동물로 가득 찬 방주도 없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그 역사성을 의심할 법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실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성서에 기록된 그의 활약은 때때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런 사례는 계속 열거할 수 있다. 한때 사람이 역사로 간주했던 것이 이제 대부분 실제 사건이 아님이 밝혀졌거나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받는다. 역사가 사라진 뒤에도 의미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의미가 반드시 역사에 기반을 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이러한 관점을 복음서에 적용하는 이들이 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말했다. 〈엠마오 사건(부활한 예수)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엠마오 사건은 항상 일어난다.〉"(92-3)


"어떤 이들은 (성서) 본문과 역사가 어긋난다면 본문의 권위를 박탈하고 역사의 권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성서 본문이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그 본문은 신학적 권위를 상실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예수를 구성할 때 모든 허구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들을 해체한 뒤 역사적 사실로 간주되는 요소만 빼내어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역사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정경의 지위와 기능은 학계에서 정경의 지위 및 기능과 동일하지 않다. 역사가로서 나는 복음서의 표면을 찢고 역사를 발굴하는 골치 아픈 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교인으로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복음서들을 존중하고 이를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인에게 복음서는 과거의 재구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도구다."(104-8)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인들을 양육하고, 전례 시 읽을거리를 제공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설교에 영감을 불어 넣고, 교리와 윤리 지침을 구성하는 데에 이바지한 것은 재구성된 역사가 아니라 성서 본문이다.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현대 역사가들이 비역사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본문들을 무시한다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과 다름없다. 먼 옛날 마태오와 루가는 Q의 어록 자료를 흡수해 없애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자료가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를 흡수해 둘을 사라지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정경은 이미 확립된 지 오래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버리지 않는 한 정경을 버릴 수는 없다. 정경 복음서에 대해 논쟁을 하더라도, 정경 복음서는 교회의 유산이자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신자들이 성서 내용을 정정하고 재해석할 경우와 마주하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성서나 성서 일부를 폐기할 수는 없다."(110-1)


3 어떻게 연구를 진행할 것인가


"1960년대 이후로 학자들은 이른바 '진정성 판별 기준'criteria of authenticity에 대해 논의했다. 진정선 판별 기준이란 자료들에서 실제 예수의 말과 행동을 걸러내기 위해 사용된 체sieve를 말한다. 주요 기준들(다중 증거의 기준(여러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일수록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론), 비유사성의 기준(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당대 유대교의 관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예수의 말과 행동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 일관성의 기준(몇 가지 역사성이 인정되는 자료의 예수상과 일치하는 본문이 역사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내 관심사는 어떤 기준이 좋고 어떤 기준이 나쁜지, 혹은 좋은 기준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기준들을 정말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내 대답은 〈아니오〉다."(133-5)


"복음서에 나오는 자료 대부분은, 실제 일어났는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우며, 자료가 얼마나 역사에 가까운지 정확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예수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실제 일어났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예수가 한 말이라고 기록한 모든 구절을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1) 예수가 실제로 한 말, (2) 예수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 (3)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예수의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말)." "(3)에 해당하는 본문의 수는 (1)과 (2)의 경우를 합친 수보다 훨씬 많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136-8)


"나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고찰을 통해 역사적 예수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항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전반적인 인상은 제대로 기억한다. 누군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대략의 요지는 기억한다." "우리는 과거 일어난 일의 세세한 부분을 빠뜨리거나,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세세한 부분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그 일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일반적인 사항은 대체로 잘 기억하는 편이다." "이를 고려하면, 일부 자료에 때 묻지 않은 기억이 보존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진정성 판별 기준으로 개별 항목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보다는 반복되는 흐름을 찾고 전체 그림big picture을 찾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믿으려면, 가장 믿을 만한 것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 "진정성 판별 기준은 전체보다 부분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개별 항목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도출한 일반적인 사항을 우선시하는 게 더 신중한 접근이다."(147-51)


"깊은 연민을 가르쳤든 아니든, 동기가 종말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든, 예수는 자기희생을 강조했다. 몇몇 사람에게는 자기를 즉시, 무조건 따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예수 전승의 역사성을 우리가 확증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 전승에 대해 진정성 판별 기준이 뭐라고 판단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수 전승들이 화음을 이루며 빚어내는 흐름이다." "내가 제안한 대로 예수 전승을 분석하면 꽤 많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예수는 사탄을 파멸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이해했던 축귀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분명 계속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며 여러 비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단에) 적용해 보면 1차 자료에 재래의 종말론 내용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가 종말론적 예언자였다는 결론이 거의 필연적으로 도출된다."(153-4)


"예수가 종말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내용이 모든 예수 전승, 즉 예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나 다른 이들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에서, 그리고 이야기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확실하게 나오고,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으나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자료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들어있는 전승과 루가 복음서에만 들어있는 전승도 마찬가지다. 바울서신, 사도행전, 요한 복음서, 도마 복음서, 그리고 기타 여러 문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자신을 어떤 칭호로 불렀느냐와 상관없이, 예수는 자기를 단순히 종말론적 예언자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종말 시나리오의 중심인물, 최후의 심판 때 핵심 인물, 즉 11QMelchizedek에 나오는 멜기세덱 혹은 에녹 1서의 '비유의 책'에 나오는 선택받은 자 같은 인물로 확신했던 것 같다." "반복해 나오는 양상이 실제 예수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예수를 영영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158-9)


"1차 자료는 예수가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데이비드 흄처럼, 기적의 가능성을 의심하거나 기적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1차 자료가 기적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 위의 연구 방법론(반복되는 양상에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 틀렸음을 드러내는 증거로 보일 것이다." "물론, 복음서에서 역사적 기억을 찾고자 하는 이에게 기적은 곤혹스러운 문제다. 나의 요지는, 체험 증언testimoney과 체험에 관한 설명explanation은 별개이며 예수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들을 꼭 순전히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 혹은 모세 전승 같은 기존의 이야기를 재창작한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비평을 근거로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관련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생전에 출중한 축귀자, 치유자, 기적 행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예수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으며, 예수를 아는 사람 중에 자신들이 정말로 예수의 기적을 목격했다고 믿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164-5, 182-4)


4 곤란한 결론들


"신약성서의 예수는 분투하고 의심하고 어떤 것은 알았지만 어떤 것은 알지 못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본문은 예수를 신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이에 대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그리스도교인 에비온파는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보았고 이 관점에 맞지 않는 전통을 거부했다. 이른바 '권능 중심의 단일신론자'들은 예수가 세례받았을 때, 혹은 부활했을 때 인간 예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어 하느님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충하는 전승을 조화시켰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과 혼soul은 가졌지만, 인간의 영spirit은 가지지 않았으며, 대신 이성적인 신적 로고스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는 하느님의 아들이 최초로 피조물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정통파는 역설적 견해, 즉 예수는 전적으로 인간이며 전적으로 하느님이라는 주장을 옹호했다."(192-6)


"일반적으로 정통주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니케아 신경의 그리스도론에 담긴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심지어 교회가 역사적 근거 없이 예수 이야기를 지어냈음을 주장한다고 여기기에 역사적 예수 탐구를 장려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예수가 지나치게 높은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는 이들(현대판 에비온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도 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예수가 높은 그리스도론을 가졌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면 이들은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예수가 언젠가 세상을 심판하려 돌아올 존재가 아니라 단지 영감을 주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이에게, 예수가 자신을 그토록 웅대한 존재로 여겼으리라는 추정은 불편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을 지고의 존재라고 말하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말한 수많은 구절을 보고 예수의 정신 건강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206-7)


"물론, 우리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든,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자기 이해로 한정되지 않는다. 예수는 예수 자신이 의식한 자기의 총합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정통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고 그에 부합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현대성서비평학은 그럴 가능성을 아예 뿌리 뽑았다." "슈바이처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말하면, 역사적 예수는 여전히 이방인이자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나는 이 결론이 그다지 끔찍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적 꿈을 흐트러뜨리는 예수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분명 복음서의 예수는 현실 안주, 자기만족과 싸우는 인물이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우리의 신학을 확증해주는 역사적 예수는 현실 안주의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의 의견을 칭찬하는, 길들여진 예수는 결코 예수가 아니다."(212-4)


"예수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론'을 가졌느냐는 문제는 그의 종말론적 기대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예수가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교회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가 머지않아 있을 부활과 오순절 사건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했다고 믿었다. 반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을 말한 것이라고 믿었다." "면밀한 주석 작업을 바탕으로 요한네스 바이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종교적 이상주의를 통한 사회 정의의 점진적 실현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일으키실 종말을 예고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많은 이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슈바이처는 바이스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바이스가 예수 연구에 기여했다며 열렬히 지지했다. 바이스의 견해는 예수를 철저하게 종말론적 인물로 제시한 슈바이처의 프리퀄이 되었다. 20세기의 연구물들은 대개 바이스와 슈바이처의 변주였다."(214-6)


"이 문제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 이유는 그들의 종말론의 언어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미리 보기가 아니라, 비교 종교 연구가 보여준 것처럼 신화의 옷을 입은 종교적 희망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허구다. 끝은 시작과 같다. 창세기는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고, 신약은 미래에 있을 종말을 예견하는 역사를 담고 있지 않다. 새 예루살렘과 마지막 심판, 부활은 에덴동산과 뱀과 아담과 같은 신학적 비유다. 이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시로 해석해야 한다. 종교적 시는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통해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종말론의 언어는 열 처녀의 비유, 가라지와 밀의 비유와 똑같은 미래에 대한 비전, 즉,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상상만 할 수 있는 것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루시아'는 하나의 비유이다.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날짜가 없기 때문이다."(231-3)


# 파루시아 : 예수의 재림


5 개인적 단상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르키는 이름이자 은유다. 이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예수 전승의 핵심 주제가 하느님 왕국이므로, 하느님에 관한 주된 심상은 왕이 자연스럽다. 특히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 문헌에 자주 나오는 보좌에 앉으신 하느님의 심상 말이다. 그런데,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을 왕으로 언급하는 구절은 드물다. 예수 전승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랑 많은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억압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보살피며 양육하는 존재다." "예수는 그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제압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가 나타내는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압제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선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248-50)


"예수는 창조주는 당연히 구속자이며, 하느님 아버지는 애통해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약속하는 선한 분이고 지금 우는 이들에게 언젠가는 웃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사랑이 넘치는 분임을 직관했다. 예수는 이런 하느님에 대해 굳건히 낙관하므로 〈영원한 삶〉에 대해서도 굳건히 낙관한다." "종말론은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니지만, 종말론 없이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우리가 보게 될 전부라면, 잘못된 점들이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에게 이것은 진부한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이 절대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비극과 황량한 죽음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적어도 나는 예수가 말한 선한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수의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 또는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쓰자면 그와 비슷한 것을 믿는다."(263-4)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장차 올 세상에 의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아버지 하느님과 장차 올 세상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인식하고 이해했다. 그는 하늘의 관점으로 땅을 보았고, 자신을 미래에 투영한 후 뒤돌아봄으로써 현재를 해석했다. 세상의 주요 가치들은 세상 너머에 있다. 즉, 이 가치들은 세상 위에 계시고 세상 안에 계시며 세상 끝에서 기다리시는 하느님 안에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장차 올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장 18절에서 바울이 말했듯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면에서 예수가 비유로 가르쳤으며 상상력의 신봉자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어떤 대상을 그냥 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상상했다." "그의 비유와 격언은 하늘이 땅을 이기고, 미래가 현재를 이기며, 우리가 공허함으로 둘러싸여 있고 딴 곳에 쉽게 정신 팔릴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268-9)


"예수는 새것을 선포했다. 낡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뒤집었다. 세상이 뒤집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 전승에는 그가 특이한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나온다. 펑크의 말을 빌자면, 예수는 〈일반적인 인식을 비전형화하고 낯설게 만든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을 한다. 이야기 도입부에 청중이 잘 알고 공감할 내용을 말했다가 그것을 갑자기 뒤집음으로써 상식과 충돌하게 만들어 청중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예수는 사물과 사태의 진정한 본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확신했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최면에 걸린 듯 뻔하게 사는 삶을 흔들어 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콜리지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우리의 마음이 〈관습의 무기력〉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의 두 눈을 덮고 있는 익숙함과 이기적인 근심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도록 노력했다. 예수는 우리의 관심사를 옮겨 놓고, 인식을 바꾸고, 의식을 확장하고, 우리의 행동을 바꾸려고 애썼다."(270-3)


"인간 실존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석에는 반드시 대다수의 삶을 특징짓는 날카로운 양극성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들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비교적 잘 살아가는 와중에도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의 악의, 어리석음과 마주한다. 죄와 죄책감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삶은 육체와 정신의 고통으로 괴롭고, 늘 의미 없이 제멋대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희생자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불행과 비통 가운데서도, 불가해한 섭리로 인해 우리는 때때로 진, 선, 미를 보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웃음과 기쁨을 맛보며 지식과 지혜를 접한다. 더 나아가 종교적 믿음을 가진 이들은 때때로 수수께끼 같은 은총을 통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인간의 경험, 특히 종교적 경험은 강력한 역설을 제시한다. 어쩌면 파스칼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라고 쓸 때 파악한 진실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279-80)


"예수 어록에는 유대 종말론이 말하는 사건 발생 순서(고난 뒤 신원, 환난 뒤 축복, 죽음 뒤 생명)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는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를 이루는 자, 묵시적 기대의 극단들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한 자다." "예수의 말과 생애는 이 모든 것을 꼭 맞게 표현한다. 인간 경험의 양극단은 종말에 대한 기대에 담긴 양극단, 찬미와 십자가가 공존하는 삶으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예수가 미래에 있을 축복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면 우리는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의 믿음은 삶의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가망 없는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음이라는 운명과 종말의 환난에 대해서만 말했다면, 그의 희망이 너무 보잘것없고 그와 하느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의 환난 및 앞으로 올 환난뿐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구원과 앞으로 올 구원을 선포했기에, 현재와 미래를 모두 살아갔기에 우리는 그를 기리고 신뢰한다."(2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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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변혁이다 -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비아 시선들
월터 윙크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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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성서 비평의 파산


"신약성서 저자들은 자신들을 신앙으로 이끈 사건들을 증언했다. 그들은 〈신앙에서 신앙으로〉, 독자의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북돋기 위해서 성서 본문을 썼다. 역사 비평 또한 겉으로는 이런 의도에 반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수행하는 학적, 역사적 탐구의 본질이 연구 '대상'object을 두고 가치 판단을 내리거나 대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태도(객관적 중립성)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문제에서 이렇게 거리를 두는 중립적인 태도는 중립이 아니라 본문에 응답하지 않겠다고 미리 결단하는 것이다. 이런 탐구 방식에서 진리와 의미에 대한 물음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신앙에서 진리와 의미 물음은 참여를 통해서만, 본문의 초대에 대한 삶의 응답을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 이런 물음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사 비평은 '진리'truth를 한낱 '사실'fact로 격하하고 본문을 알기 쉽게 풀거나 설명한 것을 본문의 '의미'meaning라고 주장한다."(20-1)


"객관주의objectivism란 어떤 현상에 거리를 두고 감정, 의지, 관심, 편견을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관찰하는 학문적 이상을 가리킨다. 이 이데올로기는 주지주의를 고수하고, 비이성적인 것 또는 무의식적인 것의 존재를 간과하며,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는 오류를 범한다." "객관주의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객관주의는 기만적인 의식이다. 오류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나 기만은 알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잊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자신의 오류를 체계적으로 묵과하기 때문에 기만적인 의식이다. 객관주의는 대상과 거리를 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연구자는 학생들을 사회화하고 사회를 보존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기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자기 연구를 출판해주는 기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다." "객관주의는 '확실한 결론',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척하지만, 실제로 객관주의 방법은 철저한 인식론적 회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새끼를 낳은 다음 잡아먹는 구피처럼 '확실한 결론'을 삼켜 버린다."(24-7)


"성서 비평은 격렬한 논쟁과 변증을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다. 애초에 성서 비평은 기존의 해석들을 논박하는 무기로 쓰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성서 비평은 더 나은 미래라고 믿는 것을 추구하면서 기존의 현실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전쟁은 사실상 끝났고, 성서 비평은 또 다른 기존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 의식하지 못했던 성서 비평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드러났다. 이런 폭로가 서글픈 이유는 자유주의적 성서 연구도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성서 비평이 더는 본래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서 비평은 애초에 싸움을 왜 시작했는지조차 잊은 채 승리를 거둔 전장에 그대로 주저앉아 남은 무기를 헤아리면서 그것들이 앞으로도 유용하게 쓰이기를 희망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여느 혁명과 마찬가지로, 타도하는 힘과 통치하는 힘은 별개다."(33-5)


2 성서 연구의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는가?


3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al

1. 융합Fusion

첫 번째 부정: 대상을 의심함으로써 융합을 부정negation

2. 거리두기Distance

두 번째 부정: 주체를 의심함으로써 부정을 부정

3. 친교Communion


"성서 비평은 교회 전통에서 성서를 분리한 다음 대상화한다. 성서는 분명 인간들이 썼지만,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대상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일부가 된 이상 즉각적으로 '너'thou가 되지는 않는다. 성서는 인간의 사상, 경험, 감정, 전망을 대상화한 것이기에 대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 비평은 특별한 종류의 금욕을 요구한다. 연구자는 본문을 연구자 자신, 자신이 속한 문화의 역사와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주관을 투영하지 않고, 방어 기제를 극복하면서, 본문의 타자성otherness에 공감하는 분석을 수행하고, 해석을 통해 올바른 거리를 회복해야 한다. 주관주의, 선동적 왜곡, 자기 투영 등 우리가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오류로부터 연구자가 지켜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성이다. 타자성이야말로 본문을 매혹적이면서도 신비한 것으로 만든다.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객관성이란 타자와 타자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담은 표현이기 때문이다."(53-4)


"성서 비평은 사람들이 신경Creed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성서 비평이 밝혀낸 (그리고 밝혀내고 있는) 귀중한 정보들에 우리는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생활에서 성서 비평의 재구성하는 힘은 과대평가되었다. 성서 비평의 본질은 방법론적 회의주의이고, 원리상 대상을 해체하므로 그 자체로는 재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통과 단절되면서 일어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두 가지 경향이 출현한다. 하나는 실존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 길을 택한 이는 성서 비평이라는 매서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성채를 쌓아 믿음을 고립시킨다. 또 다른 하나는 부정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을 얻은 건 두 번째 길이다. 객관주의는 주체-대상이라는 이분법을 모든 실존의 규범으로 삼고, 대상을 지배함으로써 삶을 구축하려 한다. 첫 번째 대안이 망상이라면, 두 번째 대안은 우상 숭배다."(63-4)


"〈반대하기〉to object는 대상object을 조종하면서 자기주장을 펴는 주체에게 대상이 가하는 반격이다. 대상은 변증법적 상승의 계기 안에서 반대를 통해 주체를 지배한다. 이렇게 해서 '오브젝트'object의 본래의 의미, 즉 길을 막고 있는 것, '오브옉툼'objectum의 의미가 되살아난다. 대상은 '게겐슈탄트'Gegenstand, 우리를 마주하고 서서 우리에게 저항하고 반대하고 우리와 갈등하는 존재, 수동적인 검토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성서 비평은 본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보다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 상태에서 멈춘다. 그 결과 우리는 본문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친교를 나누는 데 실패했고, 대상이 우리에게 침투하도록 허용하는 데도 실패했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대상화된 주체는 자신이 대상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취약함을 주체가 깨닫는다면, 다음 단계를 향한 길이 열릴 수 있다."(67-8)


"가령, 많은 (신자이기도 한) 성서 학자는 일부 고린토인들이 주장하던 신인神人 그리스도론을 공격하는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의 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말이다." "초기 교회는 활력과 성령이 넘치는 충만한 상태에서 탄생했다. 바울의 십자가 선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타당성과 유의미함을 지닌다. 그의 의도는 초기 교회의 열정을 자제시키는 것이었고, 자아가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사람들에게 법률적 제재는 아니더라도 실질적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체는 카리스마 운동과 거리가 멀고, 활력과 열정과 열광이 지나쳐서 우려를 낳는 일도 거의 없다. 완전히 반대다. 우리의 맥락을 주해하지 않은 채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받아들이면, 애초에 공동체를 위해 넘치는 활력을 활용하려고 고안된 신학을 우리의 영혼 없는 상태, 무력감, 지치고 맥 빠진 황혼기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적 불안감을 합리화하는 신학으로 만들어 버린다."(83-4)


"정신 분석학이라는 도구는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인 지점에서 사용하는 편이 적절하다. 문화적 거리라는 문제는 개념, 언어의 차이뿐만이 아니다. 리쾨르가 말했듯 이는 다른 시대의 언어와 개념이 간직한 근본 물음을 잊어버려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잊은 본문의 물음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 물음이 일으키는 무언가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리쾨르는 이 또한 파괴하는 과정, 파괴자의 확신을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의 전제들과 현대인이 가진 확신을 물리쳐야만, 최초의 물음이 다시금 우리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의 상징 기능을 복원하려면 사유하는 주체가 〈굴욕〉을 당해야 한다. 주체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의 의미론이 부여하는 유리한 위치를 버려야 한다." "이제 종교적 상징이라는 대상뿐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주체도 탐구의 대상이 되어, 상징이 표현하는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86-90)


"주체-대상 이분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주체-대상 이분법을 넘어설 수 없다. 매개되지 않은 실존적 만남을 통해 주체-대상 이분법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주체-대상 이분법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끄는 삶의 흐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이분법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이는 변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대상 이분법은 주체의 고고학을 통해 주체-대상 '관계'에 자리를 내준다. 대화라는 호혜성을 통해 소외된 거리는 주체와 대상 모두 본래의 모습이 보존되는 관계적 거리relational distance가 된다. 이제 주체의 대상은 서로의 대상으로, 서로의 주체로 남아 있다. 둘은 함께 삶을 탐구하는 동반자가 된다. 주체(전통 혹은 유산)의 대상으로 출발(융합)했던 '나'는 반란(거리 두기)을 일으켜 대상(본문)을 지닌 주체로 자신을 확립하고, 결국에는 본문의 주체임과 동시에 대상인 자신, 자기 성찰의 주체이자 대상인 자신을 발견(친교)한다."(112-3)


"전달된 본문이 놓인 지평과 해석자가 놓인 지평의 만남을 통해 해석자는 자신의 지평을 발견하고 이는 곧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의 지평은 해석자가 놓인 지평의 만남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본문의 잃어버린 요소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지평들의 만남은 오늘의 삶과 새로운 관련성을 드러내고 모두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지평들의 친교다. 이 만남 가운데 해석자가 놓인 지평의 어떤 요소는 부정되고 어떤 요소는 긍정되며, 본문이 놓인 지평에서 어떤 요소는 물러나고 어떤 요소는 앞으로 나온다. 본문과 해석자는 모두 질문(해석자에서 본문을 향한, 본문이 해석자에게 제기한)을 받는다. 이제 본문은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대상이 아니라 부적절하거나 낡아 보일지라도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질문이 되며 해석자는 해석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사회를 탐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지식은 필연적으로 앎의 주체의 자기 형성과정과 연결된다."(113-5)


"해석자가 메시지를 뒤섞는다면, 현재 해석자의 주관을 본문에 강요한다면, 해석자는 (어떤 결과가 도출되든 간에) 자신이 변혁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 본문은 수난당하고 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본문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객관성은 '무관심성'이 아니다. 객관성은 낯선 이의 말을 정확하게 들으려는 분투다. 그의 말이 관심을 일으키기에, 동시에 그가 수난받고 있기에, 달리 말하면 창조 그 자체가 생명을 형성하는 과정이 위기에 처해 있기에 해석자는 그의 말을 정확하게 들으려 노력한다. 그러므로 해석자의 관심은 곧 적용을 의미한다." "또한, 본문은 우리의 세계가 명확해지지 않는 한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해석자는 본문을 현재에 적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한다. 본문의 의미는, 부분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어떤 질문을 본문에 던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본문을 적용하는 것이다〉."(124-6)


결론


"성서 학자들인 우리는 새로운 해석 기법이 등장할 때마다 흥분했다. 양식 비평, 편집 비평, 최근에는 관객 비평, 구조주의, 정신사, 사회학적 분석 등 수많은 기법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법은 낡은 객관주의 패러다임에 추가되는 요소들일 뿐 우리를 소외된 거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파산했다면, 그건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긴 시간 잘못된 방식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계의 '좋은' 의견에 대한 의존, 학계에서 정의하는 성공을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 변증법상 거리 두기의 순간에 얼어붙은 파우스트적 왜곡,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향한 비판적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은 그런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분투한 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는 자신이 더는 그런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겠다' 말할 것이다."(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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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형성 - 신경은 어떻게 신경이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프랜시스 영 지음,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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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9세기에는 성서의 '역사성'historicity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역사적 종교'라 선언하고 이에 걸맞게 신학을 하려 노력했지요. 그들은 '사실'에 집착했습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해석'과 별개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역사는 이야기의 한 형태고 모든 이야기는 선택 과정을 거쳐 형성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역사 기술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며, 해석을 통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달리 말해 과거의 어떤 사실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전한다는 곧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의 고유한 관심사와 문제의식이 영향을 미치지요. 과거에 대해 논하는 활동은 순전히 개인이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이 활동은 공동체의 활동입니다. 역사는 사회의 구성물이며 보통 정체성의 형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역사 이야기든 최종 결정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18-9)


1 신경들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세계 주요 종교 중 신경Creeds과 교리를 중시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정통'orthodoxy, 즉 올바른 믿음이 있고 이것을 벗어나면 '이단'heresy으로 간주한다는 관념이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이론상 그리스도교는 동질적homogeneous이며, 그 동질성은 '정통 신앙'에 근거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일치운동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그리스도교 집단은 여전히 자신이 전하는 진리가 곧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집단이 이를 공유한다는 점은 부정하면서 말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지요.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종종 학자들이 말하듯 유대 신앙의 핵심은 '정통'이 아닌 '정행'orthopraxy, 즉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올바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따라 정통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공식화했지요."(27-9)


"정통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태도에서 유래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서 기록을 살펴보면 누구도 이후 등장한 교회의 주교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어떤 교리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누구도 논쟁자나 의심하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정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고 결정하기까지 일어난 교리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교리와 관련된 질문, 혹은 도전을 받을 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주교에게 받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하고 신경, 혹은 신경 형식의 요약문을 인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에 세례와 입교와 관련된 일정한 훈련 과정이 있었음을 알려 주지요."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까지 이 신경을 외워야 했습니다." "신경은 처음부터 '정통의 시금석'은 아니었고, 지역 교회들을 담당하는 주교가 새롭게 그리스도교인이 된 이들에게 가르친 신앙의 핵심 전승이었습니다."(29-32)


"이 신경들을 비교해 보면 여러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경도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지요.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연관이 있다고 암시하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은 쓰지 않으며 '하나 안에 셋'이라는 신론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경들은 교리 체계가 아닙니다. 다양한 신경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경들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중요합니다. 이 신경들을 통해 당시 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바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하나이더라도 이를 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기교는 물론이고, 어떤 부분을 중시하고 어떤 소재를 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띨 수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신경의 근본적인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33)


# 초기 신앙 요약들의 특징

1. 2세기 후반, 3세기 초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쓴 신경은 삼위일체의 형태를 갖춘 확정된 신경이 아니었다.

2. 그 전부가 성서에서 유래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내용에는 성서에 바탕을 둔 정형화된 표현들을 곧잘 사용했다.

3. 그들은 이단이라고 불리던 '거짓 교사'와 논쟁할 때 이 신앙의 요약을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했다.

4. 그들은 성서 내용이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이 신앙의 요약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간주했다.


2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신경의 첫 번째 조항에 명시된 교리, 진정한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특정 교리는 매우 고단한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가정, 즉 참된 신은 하느님 한 분이며 우리는 그분에게만 배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사나 악마, 여타 초자연적인 존재를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보면 혼돈에서 질서가 생길 때 하느님은 '무언가'를 가지고 창조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안에서 종말론 성향이 강한 집단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의 적, 즉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도 사탄을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로 묘사하지요.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시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주권자라는 생각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최초로 교회 안에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영지주의와의 투쟁이지요."(58-9)


# 영지주의 집단들의 공통점

1. 창조신 데미우르고스the Demiurge와 궁극자인 '아버지'의 구별

2. 세계의 기원을 우주 이전의 '타락'으로 설명하고 물질 세계를 우연, 혹은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

3. 영적 엘리트들은 물질세계에 갇힌 불꽃이며, 비밀 '지식'을 알게 되면 해방되어 신과 재결합할 수 있다는 가르침


"역설적으로 영지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실제로 이 운동이 유대-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난 운동임을 암시합니다. 영지주의는 한 분이신 궁극적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유대 전통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유대 종말론적 관념에서 악마가 창조자 혹은 '이 세상의 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어떤 학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세우기 위해 로마에 맞서 일어난 반란이 실패하자 이에 대한 실망이 비관주의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그 결과 희망은 오로지 하늘에 있고 지상에는 절망뿐이라는 관점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때 예언은 의미를 잃고 구원은 이 지상에서 탈출하는 것이 되지요. 유대 묵시 문헌이 보여 주는 상징 언어와 영지주의 문헌들이 보여 주는 고도의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언어 사이의 흥미로운 연관성은 이러한 설명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64-5)


# 유대 묵시 문헌과 영지주의 문헌의 연관성 : 공통 비유와 수비학數秘學, 천상으로의 여정 및 계시와 같은 유사한 내용 얼개,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의 대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에 있었던 실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성육신 역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수난은 아예 일어날 수 없게 되지요. 설령 '예수'가 실제로 있었다 해도 그는 부활 후 특정 제자들에게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초자연적 그리스도가 쓴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수난 전에 사라졌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가 마주했던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가현론docetism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부활은 당연히 몸의 부활이 아니게 됩니다. 육체 혹은 몸은 타락한 물질세계의 일부로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신자들은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찬은 지상의 물질들을 가지고 거행함으로써 물질세계와 피조물의 선함을 확언하기 때문입니다."(66-7)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일관성 있는 전체로 다루는 최초의 '조직신학'을 창조했습니다. 앞선 사상가들이 일궈 놓은 관념들과 성서를 활용해 그는 '총괄갱신 이론'theory of recapitulation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참되며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계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낙원에 피조물 중 으뜸인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처럼 순진하던 아담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했고 그분에게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선한 피조 세계가 오염되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선하지만 말이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인간이었고 아담이 한 일을 되풀이하되 그 과정을 뒤집었습니다. 아담이 실패했던 곳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시작되었고 결국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찬에서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물질이지만 영적인 것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이레네우스는 말했습니다."(71-2)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는 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인과 논쟁을 벌이며, 하느님이 자신으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다거나, 영원한 질료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견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은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테르툴리아누스는 다른 선택지들을 거부했을까요? 아마도 영지주의와의 투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주의에서 영원한 질료는 다루기 힘든 수단이고 영지주의자들에게 질료는 가장 커다란 적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존재하거나 심지어 하느님과 대비되는 제2의 원리가 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지요.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러한 이원론은 한 분 하느님이 만물의 유일한 원리, 시작, 기원이라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점 더 하느님의 유일성과 무한한 초월성을 강조했고 그만큼 하느님의 존재와 창조성을 제한하는 질료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져갔습니다."(84-5)


"4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류에게 당신의 형상과 신적 로고스인 자신의 생명과 이성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함으로써 로고스를 상실했고 그 결과 자신이 나왔던 무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성으로서 로고스의 상실은 무지를 뜻했고 생명으로서 로고스의 상실은 죽음을 뜻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몰락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필멸성Motality은 죄의 끔찍한 결과였습니다. 이 곤경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구원은 성육신을 통해 로고스를 인간 본성에 다시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육신은 재창조라 할 수 있습니다. 개별 인간들은 아담에 참여함으로써 필멸할 운명이었지만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로고스를 받은 새로운 인간인 '하느님의 아들'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로 입양되어 불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88-9)


"그리하여 하느님이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다는 '부정의 길'이 등장했으며 창조에 대한 관상은 영성의 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부정의 길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시고,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며, 무형이시며, 불변하시고, 나뉘지 않으시며, 고난받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불가해하시고, 피조 세계의 일부가 아닌 전적 타자이시며, 만물 중 하나가 아니라 만물의 근원이심을 강조합니다. 이 방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자연 숭배에 가까운 이교들, 말하자면 대중 종교와 신화의 다신론, 우상 숭배, 엉성한 신인동형론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교 역사는 영지주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영과 육체의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하지만 영지주의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교리는 이 싸움 가운데 육이 영에게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교회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을 파문했습니다."(91-2)


3 한 분 하느님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스토아 학파는 합리적인 담화를 분석하면서 한 사람의 정신 안에 있는 로고스, 즉 이성과 입 밖으로 나오는 로고스, 즉 말을 구별했습니다." "이 영향 아래에서 유스티누스는 로고스, 즉 말씀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셧으며 그분 역시 참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의 독생자이자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쓰셨던 도구,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만물을 빚어내고 존재하는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그리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혜였습니다. 예언자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참된 진리의 스승들에게 진리의 영감을 준 이도 바로 이 말씀이었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의 진리를 온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드러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로고스 신학Logos-theology은 예수가 어떻게 이교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자녀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독특한 아들인지, 한 분 하느님과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99-101)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이유는 그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경전의 예언들에서 발전한 다양한 희망과 기대를 예수가 이루었다고 보았고 그에게 다양한 호칭을 붙였습니다. 이는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서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머지않아 히브리 경전을 들여다보면서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강조하는 예언은 하느님의 종이 겪을 고통과 죽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에 비추어 수정되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이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의 전체 경전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 기여했습니다." "로고스 신학은 이 모든 해석을 엮어 독특한 계시자의 선재와 신성을 설명하는 일관된 이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교리 형성 과정에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지요."(102-3)


"하지만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는 로고스 신학의 접근 방식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영원의 차원에서 말씀과 성령을 갖고 계신 한 분 하느님이 창조와 섭리를 위해 말씀을 낳고 성령을 내쉬면서 삼위일체가 '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종종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arianism라고 불리지요('살림'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방식, 구체적으로는 그분이 섭리를 바탕으로 세계와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활동, 특히 성육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훗날 이는 부적절한 이야기임이 밝혀졌고 하느님은 영원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것이 교리로 확립되기까지는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더 세세히 규정했고 열린 탐구를 위한 여백은 점점 더 사라졌습니다."(104-5)


"완고한 유일신론을 내세우는 이들을 향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은 이들이 사실상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변화할 수 있으며 고난받을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다양한 양태mode로 나타난다고, 성육신하고 고난받고 죽은 이는 하느님 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맞서 테르툴리아누스는 『프락세아스 논박』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초월자인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로고스를 통해서만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로고스는 초월자를 매개할 수 있는 파생물,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성부라면, 그리스도는 누구를 향해 기도했느냐고, 세계를 주관하는 그분이 없다면 어떻게 세계가 계속 운행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107-8)


"당대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도 어떻게 초월적이고 나뉠 수 없는 일자가 다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만물의 궁극적인 바탕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답은 일자와 다자 사이에 일자의 일자성과 다자의 다중성을 지닌 중재자, 일자-다자One-Many라는 통합체가 있다는 것이지요. 암묵적으로 오리게네스는 보이지 않고, 명명할 수 없으며, 만질 수 없고, 불변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보면 살아남을 수 없는 유대 경전의 하느님과 플라톤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궁극의 일자를 동일시한 것 같습니다. 이 하느님은 초월적이지만 만물의 아버지이자 원천이며 동시에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영원히 자기 곁에 자신의 피조물, 다양한 지적 존재들, 이성을 지니고 있고 영적인 존재들logikoi, 천사들과 영혼들, 다자를 두셨습니다. 이때 한 분 하느님과 수많은 피조물을 잇는 존재가 바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단일성과 피조물의 다중성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114-5)


"유일신론자였던 아리우스는 한 분 하느님이 홀로 태어나지 않으시고, 홀로 영원하시며 시작도 없으시고 시간 이전에 독생자를 낳으시고 그를 통해 시간과 우주를 만드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독생자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하느님의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아리우스는 고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고 말아지요. 물론 그는 '신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은 아니라고 아리우스는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세 위격, 세 존재, 즉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있으나 단자Monad는 오직 아버지뿐이며, 그분만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머지는 아버지에게서 파생되었으며 발생하지 않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리우스는 단자가 사벨리우스가 제안했듯 '아들-아버지'로 나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인, 아버지의 '일부'일 수도 없다고 생각했지요."(124-5)


"반反아리우스주의 글들을 저술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종속론이 동방 교회에서 선호하는 위계를 무너뜨림을 입증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주장에서 로고스는 더는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원리상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면, 신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고스는 '본질상' 하느님과 하나가 아니기에 하느님의 내적 이성인 로고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됩니다. 이 창조된 로고스는 참된 하느님의 지혜가 아니며 그 지혜의 모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고 하느님을 진실로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채택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는 그 자체로 신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 교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전체 위계를 붕괴시킵니다. 이때 로고스는 하느님이거나 피조물일 뿐, 둘 다일 수는 없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126-7)


4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


"아리우스 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상대가 구원을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말씀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은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이 두 투쟁을 통해 동방 교회가 사상을 가다듬는 동안 서방 교회는 상대적으로 방관했지요.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에는 이미 삼위일체론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서방 교회는 '단일성 안의 삼중성'Trinity-in-Unity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계를 중시하는 동방 교회로 인해 문제는 복잡해졌지요. 어떤 의미에서 로고스 신학은 성령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창조도, 계시도 하느님 말씀의 활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로고스 신학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성령의 역할도 말씀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셋은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며 초기 교회는 전례 시 신앙고백을 할 때 셋을 언급했습니다."(132)


"정경이 형성되면서, 대다수 교회는 정경에 담긴 영감 받은 말씀 외에는 어떠한 말씀도 추가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성령이 활동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는 사람만이 말씀을 올바로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세례 시 세례 받는 이에게 있던 거짓 영들은 쫓겨나고 성령이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성령은 교회, 교회 구성원들, 성사, 사제, 선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들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지요." "2세기 후반 '삼위'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였고 3세기 초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라틴어 '트리니타스', 즉 삼위일체로 번역했습니다. 이레네우스처럼 그는 말씀과 성령을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성과 지혜로 여겼습니다. 즉 말씀과 성령은 하느님에게서 파생된 존재로 세계,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에 중재자 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은 위계를 중시하는 동방 교회의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138-9)


"성령 반대파는 성서 본문을 둘러싼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성서 본문을 은유로 설명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그들을 은유론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성령 반대파는 성령이 하느님의 영이라면 그는 또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의 손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자가 독생자이고 형제가 없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견해에 어긋나는 것이었지요. 이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따라서 성령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성화聖化와 신화神化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우리의 신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지요. 아리우스파와 논쟁할 때처럼 이 주장은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논쟁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삼위 모두가 한 분 하느님이라는 단호한 진술로 나아갔습니다."(140-1)


"머지않아 교회는 성령도 성자, 성부와 동일본질이며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부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출생했다'는 표현 대신 (요한 복음서 15장 27절에 근거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발현한다)'는 표현을 썼지요." "'동일본질'homoousios은 단일성을 뜻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람들은 당연히 '본질'(우시아)ousia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셋을 한 위격(히포스타시스)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동방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사벨리우스주의를 뜻했습니다. 동방에서 '위격'이라는 말은 개별적인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본질'과 '위격'이라는 말이 동방에서는 같은 말로 쓰인다는 데 있었습니다." "장님 디디무스는 '실체'substance에 해당되는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한 본질에 세 위격'이라는 정식이 나왔지요."(142-3)


"카파도키아 교부들인 바실리우스와 그레고리우스는 삼위 하느님이 존재 방식에서 '태어나지 않으신 분', '태어나신 분', '말하시는 분'으로 구별되거나 '부성'父性, paternity, '아들됨'sonship, '성화하는 힘'sanctifying power이라는 관계로 구별된다고, 그러나 실체, 활동, 의지에서 하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은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자 성화자이며, 각 활동에서 하나이며, 한 위격 홀로 고유한 활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세 위격이자 한 신성으로 동시에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이레네우스, 트레툴리아누스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대조되는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언제나 삼위일체셨으며, '경륜'economy을 위해 비로소 삼위일체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진리의 원리이므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삼위일체로서 드러나셨다면 그 계시는 그분의 영원한 실재와 일치해야 합니다."(144)


"테르툴리아누스 이래 서방 교회는 삼위일체를 가리킬 때 '세 위격 안에 한 분 하느님, 혹은 '세 위격 안에 한 실체'라는 표현을 썼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표현의 난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체' 대신 '본질'essence이라는 말을 더 선호했고, '위격'이라는 말은 대체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썼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일종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각자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완전하지만 세 무한자, 세 영원자, 세 전능자, 세 완전자 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의 계획, 활동, 의지는 하나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을 유비로 드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인간 정신을 이루는 기억과 이해, 의지의 '내적' 삼위일체, 또는 정신 그 자체, 정신에 대한 앎, 그리고 정신에 대한 사랑의 삼위일체처럼 말이지요."(146-7)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인격)이면서 정신보다 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각 활동을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지각 활동에서 지각의 주체, 지각 대상, 그리고 지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구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기에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세 위격을 구별해 주는 '관계'는 다른 개체 간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위격들은 서로에게 내재하며 모든 유비는 이를 미약하게나마 감지하도록 돕는 흐릿한 거울과 같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아버지를 신성의 '원천'으로 보고 여기서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성령의 '기원'으로 보았습니다."(147-8)


5 성육신하는 하느님의 아들


"아타나시우스의 저술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약함, 혹은 무지를 암시하는 복음서 구절들을 바탕으로 로고스의 '피조성'creatureliness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로고스가 선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이고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며,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었지만 말이지요. 성육신과 관련해 그는 예수라는 '육체' 안에 있는 로고스가 참 '인격'person이라고 전제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었다는 옛 생각을 활용하면 아리우스의 주장이 제기하는 몇몇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연약함은 로고스의 오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영혼이 없는 몸만을 취하〉셨다는 아리우스파의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만 인간으로 오시거나 혹은 인간을 입으신 척한 게 아니라 인간 전부를 취하셨습니다.〉"(172-4)


"영혼에 관한 문제는, 에우스타티우스 및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킨 사상에 대한 아폴리나리스의 반응으로 인해 더 뜨거운 논쟁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아폴리나리스는 저 사상을 아타나시우스의 반反아리우스파 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계시자가 '영감을 받은 인간'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느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는 그는 모든 정신은 '자기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격 안에 두 정신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로고스와 인간의 영혼, 혹은 인간의 정신은 불가피하게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지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혹과 연약함에도 실패하지 않는 '불변하는 정신'이라고 아폴리나리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맥락에서 〈인간이 셋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님께서 인간이시라면, 그분은 영spirit, 혼(영혼)soul, 몸 이렇게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지요. 물론 주님은 〈천상의 인간이고 살아있는 영〉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176)


"아폴리나리스는 중재meditation라는 오래된 관념을 둘 사이의 '중간'mean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말과 당나귀의 중간은 노새,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은 회색, 겨울과 여름의 중간은 봄이라는 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이 그리스도라 말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희석된 신성과 절단된 인성의 기이한 혼합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스는 이러한 표현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동정녀가 낳은 예수는 일종의 생물학적 별종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혼합'을 강조한 것은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론의 핵심이 '영원한 육체를 입는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스는 육신이 하느님과 실제로 연합했고 따라서 〈그분의 육체는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일종의 복합 단일체, 혹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룬 독특한 중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강한 반발을 낳았습니다."(178-9)


"아폴리나리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중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한 모습을 그의 '육체' 탓으로 돌렸다는 점에서 디오도루스는 아타나시우스와 유사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테오도루스의 〈인간의 몸을 취한 (로고스)〉 정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도루스는 로고스가 성육신 경험의 직접적 주체라는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이 되었지요. 이들이 보기에 고난을 받고, 죽고, 부활한 이는 로고스가 아니라 〈다윗의 후손인 그분〉, 혹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수난불가하며, 불멸하며, 불변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디오도루스는 로고스가 〈태어나지 않〉았고, 육신과 '혼합'되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로고스의 본성이 손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은 디오도루스가 〈성자가 둘인 것처럼〉 가르친다고 비난했습니다."(179-81)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하느님과 인간의 본성이 유사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영원과 우연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초월은 내재를 내포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무한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로고스 또한 무한자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지요. 로고스는 어디에나 있지만, 인간에 대한 호의로 특별한 행동을 취해 특정 장소에 있게 되었다고 테오도루스는 말했습니다. 로고스가 은총으로 사도들이나 자신이 선택한 백성과 함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지요. 하느님-로고스는 특별한 호의, 혹은 당신의 뜻을 따라 성육신을 통해 인간을 취해 그와 연합했습니다. 하느님-로고스는 불변하기에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은유일 뿐이라고 테오도루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성육신은 (육체가 아닌) 인간성을 온전히 취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182-3)


"키릴루스는 모든 신경의 주제는 독생자인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성육신하셨고 인간으로 사셨으며 고난받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고, 달리 말하면 로고스는 이성을 지닌 영혼으로 생명을 얻은 육체와 결합해 하나의 위격hypostasis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리스도인은 수난불가한 로고스가 몸소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셨다는 신비를 확언해야 한다고 키릴루스는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로고스는 육체를 따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녀가 로고스의 기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성서는 로고스가 한 사람의 인격과 자신을 합쳤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므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고 키릴루스는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어떻게 육체와 결합할 수 있는지는 〈형언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지만〉, 신경에 따르면 로고스가 성육신의 전체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지요."(188-9)


"네스토리우스에 따르면 니케아 교부들은 신성이 수난 가능하다거나 하느님과 동등하게 영원한 분이 태어났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독생자〉라는 신경의 표현은 교부들이 한 분이신 주님이 분열되지 않도록 각 본성에 해당하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열거했음을 보여 준다고, 또한 그 본성들이 아들의 단일성으로 인해 혼동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지요." "신성의 측면에서는 수난이 불가피하고, 몸으로는 수난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수난불가능하기도 하고 수난가능하기도 하다고 네스토리우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의 '성전'이었습니다. 신성은 몸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몸과 결합했기에 출생, 고난 같은 것은 로고스가 아닌 인성에서 기인한다고 네스토리우스는 지적했습니다. 키릴루스는 이를 매우 불쾌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집트 주교 회의의 이름으로 '12개의 파문 조항'을 보내 네스토리우스에게 순종을 요구했지요."(189-90)


"451년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는 (안티오키아 학파가 혐오했던) '혼합'을 피하면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중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칼케돈 신경은 단순한 역설이나 경계선 그 이상입니다. 이 신경은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일종의 화학 작용과 같다는 잘못된 견해를 거부하면서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신성은 피조 질서에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본성과도 같지 않으며, 단순히 두 피조물이 결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성과 연합한다고 말이지요. 또한, 그리스도 사건은 그 자체로 신에 대한 관념, 그리고 신이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가정과 기대에 도전한다고 칼케돈 신경은 말합니다. 수난불가한 존재가 어떻게 고통을 겪을 수 있느냐는 논쟁 이면에는, 생명의 원리인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인간 삶의 한계를 경험하고 죽을 수 있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은 진실로 고통받고 죽었다는 그들의 확신이 있었습니다."(200-4)


6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레네우스는 창조의 선함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이 물질세계에서 탈출해 신성이라는 불꽃의 파편들이 본래 속한 영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지요. 이에 맞서 이레네우스는 구원은 재창조re-creation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세상 마지막 날에 회복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다른 세계' 관념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전 인격이 회복되는 몸의 부활을 뜻하지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정했듯(당시 대다수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혼불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이라는 신경의 진술은 인간의 도덕적, 영적 차원과 더불어 육체적 차원도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함을 확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찬은 (이레네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피조 세계의 좋은 것을 감사를 담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기쁨의 희생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212-3)


"오리게네스의 저술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하느님의 단일성과 피조 세계의 다중성이 구세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중기 플라톤 철학의 고전적인 문제인 궁극적 일자와 다자 사이의 고리를 마련했습니다." "저는 오리게네스 사상의 핵심이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피조 세계가 연합해 만물이 다시 통합되고 본래 완전함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리게네스 사상의 전체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이때 통합은 영적 통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물질세계는 교정의 역할을 하는 중간 영역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부활을 '영화'spiritualization, 혹은 영혼불멸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육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양가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요.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여야 했고 피조물과 더불어 '선한 것들의 집합체'여야 했습니다."(217-9)


"그의 두 번째 책 『성육신에 관하여』를 읽다 보면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구원을 재창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창조 당시 인간은 이성과 생명의 원리인 로고스를 받았기에 절대적인 것들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자신이 받은 것을 상실했고 그들이 창조되었던 무로 다시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불순종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자신의 경고를 철회하면 그분의 온전함이 깨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창조의 바탕인 그분의 선함과 사랑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로고스의 성육신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이성과 생명의 원리를 다시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성육신으로 인해 우상숭배와 무지, 죄와 죽음은 극복되었고 개별 인간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있게 되었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신화神化, 혹은 자녀됨이었습니다."(221-2)


"그리스도교는 (마니교로 대표되는) 궁극적 이원론을 거부했지만, 동시에 단순한 철학적 일원론도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안에 단일성-복합성이 있다고 보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체로 단순한 일원론을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두 가지 이유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가 이중적임을 인정했습니다. 첫째로 일원론만을 고수하면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할 여지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주라면 하느님 외 다른 것들이 존재하도록 자유 가운데 선택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조 세계는 복잡한 물질적-영적 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본래 누렸던 완전함으로 회복할 것이라고, 창조주와 사랑의 연합을 이룰 것이라고 전통 그리스도교는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그리스도교 영성가가 아가서에 주목한 것,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긴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239-40)


"둘째로, 일원론만을 고수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속하게 되고 따라서 모든 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분명 완전하지 않고 인간은 도덕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함을 그리스도교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부 시대에 구원은 기본적으로 원原창조의 통일성과 완전함으로 회복하는 하느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치유와 재창조, 그리고 관계를 깨뜨린 것에 대한 속죄와 배상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고도의 이원론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완전함을 상실한 세상은 갈등을 초래하는 반란의 장,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영적 세력의 지배를 받는 곳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구원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무언가를 처리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구원론에는 실용적인 이원론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는 기이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240-1)


결론과 성찰


"그리스도교에서는 철학보다 더 진리의 문제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철학자들은 진리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세련된 논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만들었습니다. 각 분파와 학파는 서로를 '이단'이라 불렀지만, 이때 이단은 선택을 뜻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분파와 학파를 선택해도 별 상관이 없는 분위기였지요.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 진리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발견됩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가 철학 탐구의 완성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후 머지않아 그리스도교인들은 진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내비친 '이단'들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며 그들이 사물의 핵심에 자리한 통일성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을 문제 삼았고 이단자들을 축출했지요. 하지만 (정통주의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단들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좀 더 명확하게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250-1)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 즉 신경들을 오늘날에도 믿음의 시금석으로 보아야 할까요?" "교리를 정립하려는 시도는 어떻게든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제한된 인간 정신, 언어와 개념이 결합해 나온 명제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포괄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면도 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언제나 진리와 정체성을 두고 고민했으며 이는 개인이 홀로 자유롭게 생각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문화가 바뀌고 언어가 바뀜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는 해석과 재해석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신경 형태와 교리에 담긴 흐름을 거부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하느님의 로고스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일어나는 순종뿐만 아니라 합리성, 신실함, 진리에 대한 갈망을 머금은 영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2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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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존 바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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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성서의 내용


2 책을 쓰다


"히브리 문화는 읽기와 쓰기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도구 하나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음소 문자입니다. 기원전 제1 천년기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에서는 쐐기 문자 체계가 통용되었는데, 이는 쐐기 모양의 필기구를 이용하여 음절을 나타내는 기호를 점토판에 새기는 방식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처음으로 이 음절 문자 체계 대신 음소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는 물론 오늘날 서양의 알파벳의 조상으로, 각각의 기호는 하나의 자음을 나타냈습니다. 수백 가지 종류의 쐐기 문자는 22개의 음소 문자로 대체되어 읽기와 쓰기를 훨씬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비전문가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책은 이 음소 문자로 기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의 세부 양식은 변화했을지언정 기본 22개 문자를 벗어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구약의 일부는 거의 기원전 10~11세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가장 최근 본문인 다니엘서는 기원전 2세기 중엽(160년경)에 나왔습니다."(42-3)


"신약성서는 좀 더 명백한 문자 문화의 산물입니다. 예수 시대 지중해 세계에는 도서관, 서점, 그리고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가 있었습니다. 신약의 언어는 당대의 교양 있는 이들이 일상에서 사용한 그리스어입니다. 이 언어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공용어가 되었고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도 라틴어와 함께 쓰였지요. 당시 작가가 전문 서기관을 고용해 자신의 말을 속기로 받아쓰게 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바울의 대필자 혹은 비서인 데르디오(더디오)의 인사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서신이 진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곳곳에 직접 인사를 써넣었는데(타자기로 작성한 편지 말미에 서명하듯이), 이는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세계는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글의 세계, 책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성서를 이해하려면이 책이 고대 및 현대 작가들에 견줄 만한 숙련된 작가들의 창작물임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43-4)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의 많은 책은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스크랩북이나 선집인 것이지요. 책이 전하는 이야기에 담긴 몇 가지 충돌하는 지점들을 통해 우리는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창세기 4장 26절에서 우리는 아담의 손자 에노스의 시대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했음을, 즉 하느님을 특별한 히브리 이름인 '야훼'YHWH로 부르기 시작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애를 그린 출애굽기 6장 2~3절에 따르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동료 이스라엘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등 구약성서 대다수 책은 여러 시기와 장소에서 만든 자료로 구성된 '복합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창세기 저자는 없습니다. 다만 일정한 의도 아래 일련의 자료들을 결합한 편찬자가 있을 뿐이지요."(47-8)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는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입말을 통해 전해 내려온 자료였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글로 적힌 자료가 아니라 구전되는 기억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전통 문화는 중요한 내용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능력을 중시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복음서도 이러한 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구전 자료가 기록 자료에 비해 확인하기 훨씬 어렵다는 것, 그리고 전달 과정에서 감지하기 힘든 수준의 변화를 어떻게 피했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가령, 처음에는 예수를 알았던 이들이, 나중에는 이 사람들을 알았던 이들이 매주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습니다. 그들은 진실하게 주님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이 이야기에 점차 스며들고, 공동체의 요구와 문제가 이야기에 담겼을 것입니다."(53-4)


"신약에 포함된 서신 혹은 편지들의 경우에는 (언제, 어떻게 저술되었는가의 문제보다는) 위명성pseudonymity의 문제가 있습니다." "대다수 비평가는 목회 서신, 즉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가 바울의 이름과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제 저자는 바울이 세운 교회 중 한 곳의 2세대 지도자일 것으로 봅니다." "진짜 바울의 편지들이 늦어도 기원후 60년경 이전에 만들어졌다면, '제2 바울 서신'은 상당히 나중에, 1세기 후반, 심지어 2세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서신들에서 바울은 교회의 설립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는 인물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주교들')은 바울에게서 자신들의 권위를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들에는 바울이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들이 옹호해야만 했던 전승의 집합체, 2세기 저자들에게는 전형적으로 나타나지만 정작 바울에게서는 뚜렷하게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생각, '신앙'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담겨 있습니다."(56-9)


3 책을 모으다


"유대교인들은 모세오경을 여호수아, 판관기 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대 신앙과 삶의 정수가 담긴, 독립적이고 완결된 저작으로 보았습니다. 기원전 5세기 에즈라 시대쯤부터 유대인들에게 오경 또는 '토라'(히브리어로 율법, 가르침, 안내 등을 뜻함)는 자신들의 정체성의 중심이었습니다. 권위와 거룩함에 있어 토라에 견줄 책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당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짐작건대 이들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토라를 중심 문헌으로 간주했겠지요. 그러나 머지않아 다른 사고방식이 나타났습니다. 기원후 2세기경에 이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더는 오경과 다른 경전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중심에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교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세 오경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82-3)


"신약 시대 유대교에서는 거룩한 책을 두 부류(가장 거룩한 토라와 나머지 책들)로 나누었습니다. 신약의 몇몇 구절은 성서를 세 가지로 분류하기도 했음을 암시합니다. 루가의 복음서 24장 44절에는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때 〈시편〉은 예언서들과 일부 다른 책들을 구별하기 위해 쓴 말, 율법과 예언서와 견주었을 때 낮은 위상을 지닌 책들을 가리키기 위해 쓴 말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유대교는 세 번째 범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언서'는 역사서 네 권(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 그리고 엄밀한 의미의 예언서 네 권(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짧은 열두 예언서)만을 가리켰고, 그 외에 오경에 속하지 않는 책은 모두 건조하게 성문서라고만 불렀습니다. 이 같은 구분은 주로 연대순에 기초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달랐지요. 그들에게는 '경전'이라는 한 범주만이 존재했고, 그 안에서 주제나 형식에 따라 책을 배열했습니다."(86-7)


"네 복음서의 순서(그리스도교인들은 오래지 않아 경전을 코덱스로 만들기 시작했으므로 말 그대로 순서를 논할 수 있지요)는 그리스도교가 확립된 시대에 접어들고도 한동안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레네우스는 복음서를 여러 순서로 나열하는데,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아는 순서와 같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 순서를 정했습니다.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는 사도들이 쓴 것이라 하여 앞에 두고, 마르코와 루가의 복음서는 '아포스톨리키'apostolici, 즉 '사도들의 제자들'이 쓴 것이라 하여 뒤에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가운데 사도가 쓴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세계의 모든 이는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를 사도들이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술 연대를 추정하여 나열한 경우도 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가인데, 저술 연대를 근거로 네 복음서를 우리에게 익숙한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92-3)


4 책에서 경전으로


"물론 성서를 이루는 책들이 처음에 단순한 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공적인 중요성을 갖도록 하기 구상된 책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부족들에게 남긴 말임을 밝힙니다. 이는 처음부터 신명기가 특별한 권위를 지닌 책으로 의도되었음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아가가 수준 높은 연애시 모음으로 탄생했고, 나중에야 유대교(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시에 등장하는 연인들을 하느님과 이스라엘(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와 교회)의 우의적 표상으로 간주해 경전으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또 다른 예로, 잠언은 대부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인간 교사의 현명한 가르침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이를 성스러운 계시로 대하는 것은 본래 의도를 재해석한 것이지요." "바울의 서신들은 분명 자신이 편지를 쓴 교회라는 특정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논평과 지침입니다." "다른 한편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의 복음서는 경전을 자처하는 듯합니다."(106-7)


"구약과 신약을 이루는 책들이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문헌의 전부라면 성서를 결정하면서 당시 이스라엘과 교회가 가진 세속 문헌과 종교 문헌 모두를 성서에 넣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교회는 종교 집단이므로 종교 문헌만을 지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문헌이 종교적인 주제만을 다루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는 차차 성서를 이루게 된 책들 말고도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성서를 이루는 문서들보다 훨씬 많은 문서를 보유했고, 이 중 상당수가 오늘날 발견되었습니다. 토마스의 복음서를 비롯한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속한 책들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인정한 책들이며, 단순히 우연히 있게 된 책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이 책들은 모두 탁월함의 측면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108-9)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서를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보기는 했지만 구약과 같은 경전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거룩한 경전으로 여겼다면 마르키온은 루가의 복음서를 자유롭게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루가 역시 마르코의 복음서를 자유롭게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책이 아니라 메모, 혹은 초고를 기록하기 위해 코덱스를 활용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본질상 구전으로 선포되는 복음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대다수 신자는 복음서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원재료를 모아 놓은 문헌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자체로 완결된 문헌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경전을 종교의 필수 요소로 보는 세계에서 그러한 입장은 오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책'들이 '경전'이 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136-7)


5 정경을 확정하다


# 정경화canonisation의 의미

1. 어떤 문헌이 거룩하거나 권위가 있다고 인정받는 과정

2. 성서의 '목록'을 확정함(경전은 추가될 수 있지만 정경은 더 이상 추가되지 않음)


"앞에서 언급한 세 단계, 즉 쓰기, 모으기, 경전으로 받아들이기가 겹친다는 이야기는 '정경화'의 과정인 네 번째 단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책이든 우선 기록되고, 수집되고,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뒤에야 제한된 목록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에서 '정경화'될 수 있습니다." "경전으로 받아들인 책들의 목록을 공식화한다는 의미에서 '정경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일이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혹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특정 저작을 이용하고 공경할 때 그 기준은 신자들이 언제나 그 책을 공경했다는 사실(혹은 그랬다는 믿음)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실제로 정경에 포함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던 대상은 모두 주변부에 속한 책들이었습니다. 성서에 속한 대부분의 책은 오래 전부터 신자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141-3)


"그리스도교 초기 구약 정경을 둘러싼 진짜 논쟁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들레헴에 정착해 많은 유대인의 조언을 받아 성서를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는 당시 유대인들이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 번역한 라틴어 성서, 즉 불가타The Vulgate는 짧은 히브리 성서 목록을 따라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70인역, 그리고 이를 번역한 옛 라틴어 성서는 언제나 부가된 책들을 포함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교사들이 빈번하게 경전으로 인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의 해답은 히에로니무스가 나머지 책들까지 번역하되 이것들을 히브리 경전의 '정경'과 대비되는 '외경'('아포크리파', 즉 '감추어진 것들') 또는 '교회의 책들'ecclesiastical books라 부름으로써 온전한 경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149-50)


"그리스어 정경 전체를 인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종교 개혁 이전까지 서방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추가된 책들은 계속해서 외경 혹은 제2 정경이라고 불렸지만, 이 책들을 분리하여 별도의 부분을 형성하지 않고 지혜서와 집회서는 잠언과 전도서 옆에, 토비트와 유딧은 에스델 옆에 놓는 등 같은 부류의 히브리 책들과 뒤섞은 덕분에 이것이 실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개혁자들은 히에로니무스의 입장으로 되돌아갔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약에는 짧은 히브리 정경에 속한 책들만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어 정경으로부터 온 추가된 책들을 배제하는 데에서 그쳤고, 이런 이유로 개신교 구약 성서는 히브리 성서가 아닌 70인역의 순서를 따르되 일부만 제외한 모습입니다." "역설적으로, 초기의 권위 있는 성서를 복원하겠다는 개신교의 시도는 당시까지 그 어떤 그리스도교인도 알지 못했던  모습의 성서를 만들어 냈습니다."(151-2)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신약'의 어떤 책들이 정말로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인지, 사도가 쓴 것인지, 경전다운 것인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런저런 목록들을 제시했습니다." "에우세비우스는 세 가지 범주, 즉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책들('호모레구메나'), 지위에 관해서 논쟁이 있지만 교회 내에서 널리 읽히는 책들('안티레고메나'), 거짓이므로 배제할 책들('노타')를 제시했습니다. 「헤르마스의 목자」, 「바나바 서신」, 「사도들의 가르침」 등이 세 번째 범주에 속했으며, 이들은 초대 교회에서 널리 공경받았지만 에우세비우스 시대의 그 어떤 주류 교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논쟁이 있는 책들이라는 두 번째 범주입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여기에는 야고보의 편지, 유다의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둘째·셋째 편지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의 나머지 책은 모두 첫 번째 범주(요한의 묵시록은 첫 번째 혹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합니다."(154-5)


"특정 책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교회가 규율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핵심 부분은 아주 일찍 받아들여져서, 나중에 이루어진 여러 판정은 명백한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정경화가 경전으로 인정받은 책들의 배타적 목록을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입증하기에는 고대 교회의 증거들이 너무 빈약합니다. 신약의 책 중 대부분은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의심스러운 책들도 신자들이 교회의 명령에 따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합의는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의 모든 책이 같은 형식으로 인쇄되어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성서를 읽는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에우세비우스는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의 지위를 확신하지 못했고 이는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각 교단에서는 여전히 요한의 묵시록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고 있습니다."(158-9)


# 기원후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작성한 목록은 오늘날의 신약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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