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형성 - 성서는 어떻게 성서가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존 바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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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성서의 내용


2 책을 쓰다


"히브리 문화는 읽기와 쓰기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도구 하나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음소 문자입니다. 기원전 제1 천년기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에서는 쐐기 문자 체계가 통용되었는데, 이는 쐐기 모양의 필기구를 이용하여 음절을 나타내는 기호를 점토판에 새기는 방식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처음으로 이 음절 문자 체계 대신 음소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는 물론 오늘날 서양의 알파벳의 조상으로, 각각의 기호는 하나의 자음을 나타냈습니다. 수백 가지 종류의 쐐기 문자는 22개의 음소 문자로 대체되어 읽기와 쓰기를 훨씬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비전문가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책은 이 음소 문자로 기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의 세부 양식은 변화했을지언정 기본 22개 문자를 벗어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구약의 일부는 거의 기원전 10~11세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가장 최근 본문인 다니엘서는 기원전 2세기 중엽(160년경)에 나왔습니다."(42-3)


"신약성서는 좀 더 명백한 문자 문화의 산물입니다. 예수 시대 지중해 세계에는 도서관, 서점, 그리고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가 있었습니다. 신약의 언어는 당대의 교양 있는 이들이 일상에서 사용한 그리스어입니다. 이 언어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공용어가 되었고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도 라틴어와 함께 쓰였지요. 당시 작가가 전문 서기관을 고용해 자신의 말을 속기로 받아쓰게 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바울의 대필자 혹은 비서인 데르디오(더디오)의 인사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서신이 진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곳곳에 직접 인사를 써넣었는데(타자기로 작성한 편지 말미에 서명하듯이), 이는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세계는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글의 세계, 책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성서를 이해하려면이 책이 고대 및 현대 작가들에 견줄 만한 숙련된 작가들의 창작물임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43-4)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의 많은 책은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스크랩북이나 선집인 것이지요. 책이 전하는 이야기에 담긴 몇 가지 충돌하는 지점들을 통해 우리는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창세기 4장 26절에서 우리는 아담의 손자 에노스의 시대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했음을, 즉 하느님을 특별한 히브리 이름인 '야훼'YHWH로 부르기 시작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애를 그린 출애굽기 6장 2~3절에 따르면 하느님이 모세에게 동료 이스라엘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등 구약성서 대다수 책은 여러 시기와 장소에서 만든 자료로 구성된 '복합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창세기 저자는 없습니다. 다만 일정한 의도 아래 일련의 자료들을 결합한 편찬자가 있을 뿐이지요."(47-8)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는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입말을 통해 전해 내려온 자료였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글로 적힌 자료가 아니라 구전되는 기억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전통 문화는 중요한 내용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능력을 중시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복음서도 이러한 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구전 자료가 기록 자료에 비해 확인하기 훨씬 어렵다는 것, 그리고 전달 과정에서 감지하기 힘든 수준의 변화를 어떻게 피했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가령, 처음에는 예수를 알았던 이들이, 나중에는 이 사람들을 알았던 이들이 매주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습니다. 그들은 진실하게 주님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이 이야기에 점차 스며들고, 공동체의 요구와 문제가 이야기에 담겼을 것입니다."(53-4)


"신약에 포함된 서신 혹은 편지들의 경우에는 (언제, 어떻게 저술되었는가의 문제보다는) 위명성pseudonymity의 문제가 있습니다." "대다수 비평가는 목회 서신, 즉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가 바울의 이름과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제 저자는 바울이 세운 교회 중 한 곳의 2세대 지도자일 것으로 봅니다." "진짜 바울의 편지들이 늦어도 기원후 60년경 이전에 만들어졌다면, '제2 바울 서신'은 상당히 나중에, 1세기 후반, 심지어 2세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서신들에서 바울은 교회의 설립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는 인물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주교들')은 바울에게서 자신들의 권위를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들에는 바울이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들이 옹호해야만 했던 전승의 집합체, 2세기 저자들에게는 전형적으로 나타나지만 정작 바울에게서는 뚜렷하게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생각, '신앙'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담겨 있습니다."(56-9)


3 책을 모으다


"유대교인들은 모세오경을 여호수아, 판관기 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대 신앙과 삶의 정수가 담긴, 독립적이고 완결된 저작으로 보았습니다. 기원전 5세기 에즈라 시대쯤부터 유대인들에게 오경 또는 '토라'(히브리어로 율법, 가르침, 안내 등을 뜻함)는 자신들의 정체성의 중심이었습니다. 권위와 거룩함에 있어 토라에 견줄 책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당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짐작건대 이들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토라를 중심 문헌으로 간주했겠지요. 그러나 머지않아 다른 사고방식이 나타났습니다. 기원후 2세기경에 이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더는 오경과 다른 경전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중심에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교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세 오경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82-3)


"신약 시대 유대교에서는 거룩한 책을 두 부류(가장 거룩한 토라와 나머지 책들)로 나누었습니다. 신약의 몇몇 구절은 성서를 세 가지로 분류하기도 했음을 암시합니다. 루가의 복음서 24장 44절에는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때 〈시편〉은 예언서들과 일부 다른 책들을 구별하기 위해 쓴 말, 율법과 예언서와 견주었을 때 낮은 위상을 지닌 책들을 가리키기 위해 쓴 말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유대교는 세 번째 범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언서'는 역사서 네 권(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 그리고 엄밀한 의미의 예언서 네 권(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짧은 열두 예언서)만을 가리켰고, 그 외에 오경에 속하지 않는 책은 모두 건조하게 성문서라고만 불렀습니다. 이 같은 구분은 주로 연대순에 기초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달랐지요. 그들에게는 '경전'이라는 한 범주만이 존재했고, 그 안에서 주제나 형식에 따라 책을 배열했습니다."(86-7)


"네 복음서의 순서(그리스도교인들은 오래지 않아 경전을 코덱스로 만들기 시작했으므로 말 그대로 순서를 논할 수 있지요)는 그리스도교가 확립된 시대에 접어들고도 한동안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레네우스는 복음서를 여러 순서로 나열하는데,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아는 순서와 같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 순서를 정했습니다.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는 사도들이 쓴 것이라 하여 앞에 두고, 마르코와 루가의 복음서는 '아포스톨리키'apostolici, 즉 '사도들의 제자들'이 쓴 것이라 하여 뒤에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가운데 사도가 쓴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세계의 모든 이는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서를 사도들이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술 연대를 추정하여 나열한 경우도 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가인데, 저술 연대를 근거로 네 복음서를 우리에게 익숙한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92-3)


4 책에서 경전으로


"물론 성서를 이루는 책들이 처음에 단순한 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공적인 중요성을 갖도록 하기 구상된 책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부족들에게 남긴 말임을 밝힙니다. 이는 처음부터 신명기가 특별한 권위를 지닌 책으로 의도되었음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아가가 수준 높은 연애시 모음으로 탄생했고, 나중에야 유대교(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시에 등장하는 연인들을 하느님과 이스라엘(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와 교회)의 우의적 표상으로 간주해 경전으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또 다른 예로, 잠언은 대부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인간 교사의 현명한 가르침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이를 성스러운 계시로 대하는 것은 본래 의도를 재해석한 것이지요." "바울의 서신들은 분명 자신이 편지를 쓴 교회라는 특정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논평과 지침입니다." "다른 한편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의 복음서는 경전을 자처하는 듯합니다."(106-7)


"구약과 신약을 이루는 책들이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문헌의 전부라면 성서를 결정하면서 당시 이스라엘과 교회가 가진 세속 문헌과 종교 문헌 모두를 성서에 넣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교회는 종교 집단이므로 종교 문헌만을 지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문헌이 종교적인 주제만을 다루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는 차차 성서를 이루게 된 책들 말고도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성서를 이루는 문서들보다 훨씬 많은 문서를 보유했고, 이 중 상당수가 오늘날 발견되었습니다. 토마스의 복음서를 비롯한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속한 책들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인정한 책들이며, 단순히 우연히 있게 된 책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이 책들은 모두 탁월함의 측면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108-9)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서를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보기는 했지만 구약과 같은 경전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거룩한 경전으로 여겼다면 마르키온은 루가의 복음서를 자유롭게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루가 역시 마르코의 복음서를 자유롭게 개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책이 아니라 메모, 혹은 초고를 기록하기 위해 코덱스를 활용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본질상 구전으로 선포되는 복음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대다수 신자는 복음서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원재료를 모아 놓은 문헌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자체로 완결된 문헌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경전을 종교의 필수 요소로 보는 세계에서 그러한 입장은 오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책'들이 '경전'이 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136-7)


5 정경을 확정하다


# 정경화canonisation의 의미

1. 어떤 문헌이 거룩하거나 권위가 있다고 인정받는 과정

2. 성서의 '목록'을 확정함(경전은 추가될 수 있지만 정경은 더 이상 추가되지 않음)


"앞에서 언급한 세 단계, 즉 쓰기, 모으기, 경전으로 받아들이기가 겹친다는 이야기는 '정경화'의 과정인 네 번째 단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책이든 우선 기록되고, 수집되고,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뒤에야 제한된 목록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에서 '정경화'될 수 있습니다." "경전으로 받아들인 책들의 목록을 공식화한다는 의미에서 '정경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일이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혹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특정 저작을 이용하고 공경할 때 그 기준은 신자들이 언제나 그 책을 공경했다는 사실(혹은 그랬다는 믿음)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실제로 정경에 포함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던 대상은 모두 주변부에 속한 책들이었습니다. 성서에 속한 대부분의 책은 오래 전부터 신자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141-3)


"그리스도교 초기 구약 정경을 둘러싼 진짜 논쟁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들레헴에 정착해 많은 유대인의 조언을 받아 성서를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는 당시 유대인들이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 번역한 라틴어 성서, 즉 불가타The Vulgate는 짧은 히브리 성서 목록을 따라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70인역, 그리고 이를 번역한 옛 라틴어 성서는 언제나 부가된 책들을 포함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교사들이 빈번하게 경전으로 인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의 해답은 히에로니무스가 나머지 책들까지 번역하되 이것들을 히브리 경전의 '정경'과 대비되는 '외경'('아포크리파', 즉 '감추어진 것들') 또는 '교회의 책들'ecclesiastical books라 부름으로써 온전한 경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149-50)


"그리스어 정경 전체를 인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종교 개혁 이전까지 서방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추가된 책들은 계속해서 외경 혹은 제2 정경이라고 불렸지만, 이 책들을 분리하여 별도의 부분을 형성하지 않고 지혜서와 집회서는 잠언과 전도서 옆에, 토비트와 유딧은 에스델 옆에 놓는 등 같은 부류의 히브리 책들과 뒤섞은 덕분에 이것이 실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개혁자들은 히에로니무스의 입장으로 되돌아갔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약에는 짧은 히브리 정경에 속한 책들만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어 정경으로부터 온 추가된 책들을 배제하는 데에서 그쳤고, 이런 이유로 개신교 구약 성서는 히브리 성서가 아닌 70인역의 순서를 따르되 일부만 제외한 모습입니다." "역설적으로, 초기의 권위 있는 성서를 복원하겠다는 개신교의 시도는 당시까지 그 어떤 그리스도교인도 알지 못했던  모습의 성서를 만들어 냈습니다."(151-2)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신약'의 어떤 책들이 정말로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인지, 사도가 쓴 것인지, 경전다운 것인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런저런 목록들을 제시했습니다." "에우세비우스는 세 가지 범주, 즉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책들('호모레구메나'), 지위에 관해서 논쟁이 있지만 교회 내에서 널리 읽히는 책들('안티레고메나'), 거짓이므로 배제할 책들('노타')를 제시했습니다. 「헤르마스의 목자」, 「바나바 서신」, 「사도들의 가르침」 등이 세 번째 범주에 속했으며, 이들은 초대 교회에서 널리 공경받았지만 에우세비우스 시대의 그 어떤 주류 교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논쟁이 있는 책들이라는 두 번째 범주입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여기에는 야고보의 편지, 유다의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둘째·셋째 편지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의 나머지 책은 모두 첫 번째 범주(요한의 묵시록은 첫 번째 혹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합니다."(154-5)


"특정 책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교회가 규율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핵심 부분은 아주 일찍 받아들여져서, 나중에 이루어진 여러 판정은 명백한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정경화가 경전으로 인정받은 책들의 배타적 목록을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입증하기에는 고대 교회의 증거들이 너무 빈약합니다. 신약의 책 중 대부분은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의심스러운 책들도 신자들이 교회의 명령에 따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합의는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의 모든 책이 같은 형식으로 인쇄되어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성서를 읽는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에우세비우스는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의 지위를 확신하지 못했고 이는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각 교단에서는 여전히 요한의 묵시록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고 있습니다."(158-9)


# 기원후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작성한 목록은 오늘날의 신약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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