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변혁이다 -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비아 시선들
월터 윙크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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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성서 비평의 파산


"신약성서 저자들은 자신들을 신앙으로 이끈 사건들을 증언했다. 그들은 〈신앙에서 신앙으로〉, 독자의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북돋기 위해서 성서 본문을 썼다. 역사 비평 또한 겉으로는 이런 의도에 반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수행하는 학적, 역사적 탐구의 본질이 연구 '대상'object을 두고 가치 판단을 내리거나 대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태도(객관적 중립성)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문제에서 이렇게 거리를 두는 중립적인 태도는 중립이 아니라 본문에 응답하지 않겠다고 미리 결단하는 것이다. 이런 탐구 방식에서 진리와 의미에 대한 물음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신앙에서 진리와 의미 물음은 참여를 통해서만, 본문의 초대에 대한 삶의 응답을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 이런 물음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사 비평은 '진리'truth를 한낱 '사실'fact로 격하하고 본문을 알기 쉽게 풀거나 설명한 것을 본문의 '의미'meaning라고 주장한다."(20-1)


"객관주의objectivism란 어떤 현상에 거리를 두고 감정, 의지, 관심, 편견을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관찰하는 학문적 이상을 가리킨다. 이 이데올로기는 주지주의를 고수하고, 비이성적인 것 또는 무의식적인 것의 존재를 간과하며,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는 오류를 범한다." "객관주의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객관주의는 기만적인 의식이다. 오류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나 기만은 알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잊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자신의 오류를 체계적으로 묵과하기 때문에 기만적인 의식이다. 객관주의는 대상과 거리를 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연구자는 학생들을 사회화하고 사회를 보존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기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자기 연구를 출판해주는 기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다." "객관주의는 '확실한 결론',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척하지만, 실제로 객관주의 방법은 철저한 인식론적 회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새끼를 낳은 다음 잡아먹는 구피처럼 '확실한 결론'을 삼켜 버린다."(24-7)


"성서 비평은 격렬한 논쟁과 변증을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다. 애초에 성서 비평은 기존의 해석들을 논박하는 무기로 쓰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성서 비평은 더 나은 미래라고 믿는 것을 추구하면서 기존의 현실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전쟁은 사실상 끝났고, 성서 비평은 또 다른 기존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 의식하지 못했던 성서 비평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드러났다. 이런 폭로가 서글픈 이유는 자유주의적 성서 연구도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성서 비평이 더는 본래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서 비평은 애초에 싸움을 왜 시작했는지조차 잊은 채 승리를 거둔 전장에 그대로 주저앉아 남은 무기를 헤아리면서 그것들이 앞으로도 유용하게 쓰이기를 희망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여느 혁명과 마찬가지로, 타도하는 힘과 통치하는 힘은 별개다."(33-5)


2 성서 연구의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는가?


3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al

1. 융합Fusion

첫 번째 부정: 대상을 의심함으로써 융합을 부정negation

2. 거리두기Distance

두 번째 부정: 주체를 의심함으로써 부정을 부정

3. 친교Communion


"성서 비평은 교회 전통에서 성서를 분리한 다음 대상화한다. 성서는 분명 인간들이 썼지만,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대상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일부가 된 이상 즉각적으로 '너'thou가 되지는 않는다. 성서는 인간의 사상, 경험, 감정, 전망을 대상화한 것이기에 대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 비평은 특별한 종류의 금욕을 요구한다. 연구자는 본문을 연구자 자신, 자신이 속한 문화의 역사와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주관을 투영하지 않고, 방어 기제를 극복하면서, 본문의 타자성otherness에 공감하는 분석을 수행하고, 해석을 통해 올바른 거리를 회복해야 한다. 주관주의, 선동적 왜곡, 자기 투영 등 우리가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오류로부터 연구자가 지켜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성이다. 타자성이야말로 본문을 매혹적이면서도 신비한 것으로 만든다.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객관성이란 타자와 타자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담은 표현이기 때문이다."(53-4)


"성서 비평은 사람들이 신경Creed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성서 비평이 밝혀낸 (그리고 밝혀내고 있는) 귀중한 정보들에 우리는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생활에서 성서 비평의 재구성하는 힘은 과대평가되었다. 성서 비평의 본질은 방법론적 회의주의이고, 원리상 대상을 해체하므로 그 자체로는 재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통과 단절되면서 일어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두 가지 경향이 출현한다. 하나는 실존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 길을 택한 이는 성서 비평이라는 매서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성채를 쌓아 믿음을 고립시킨다. 또 다른 하나는 부정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을 얻은 건 두 번째 길이다. 객관주의는 주체-대상이라는 이분법을 모든 실존의 규범으로 삼고, 대상을 지배함으로써 삶을 구축하려 한다. 첫 번째 대안이 망상이라면, 두 번째 대안은 우상 숭배다."(63-4)


"〈반대하기〉to object는 대상object을 조종하면서 자기주장을 펴는 주체에게 대상이 가하는 반격이다. 대상은 변증법적 상승의 계기 안에서 반대를 통해 주체를 지배한다. 이렇게 해서 '오브젝트'object의 본래의 의미, 즉 길을 막고 있는 것, '오브옉툼'objectum의 의미가 되살아난다. 대상은 '게겐슈탄트'Gegenstand, 우리를 마주하고 서서 우리에게 저항하고 반대하고 우리와 갈등하는 존재, 수동적인 검토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성서 비평은 본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보다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 상태에서 멈춘다. 그 결과 우리는 본문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친교를 나누는 데 실패했고, 대상이 우리에게 침투하도록 허용하는 데도 실패했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대상화된 주체는 자신이 대상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취약함을 주체가 깨닫는다면, 다음 단계를 향한 길이 열릴 수 있다."(67-8)


"가령, 많은 (신자이기도 한) 성서 학자는 일부 고린토인들이 주장하던 신인神人 그리스도론을 공격하는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의 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말이다." "초기 교회는 활력과 성령이 넘치는 충만한 상태에서 탄생했다. 바울의 십자가 선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타당성과 유의미함을 지닌다. 그의 의도는 초기 교회의 열정을 자제시키는 것이었고, 자아가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사람들에게 법률적 제재는 아니더라도 실질적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체는 카리스마 운동과 거리가 멀고, 활력과 열정과 열광이 지나쳐서 우려를 낳는 일도 거의 없다. 완전히 반대다. 우리의 맥락을 주해하지 않은 채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받아들이면, 애초에 공동체를 위해 넘치는 활력을 활용하려고 고안된 신학을 우리의 영혼 없는 상태, 무력감, 지치고 맥 빠진 황혼기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적 불안감을 합리화하는 신학으로 만들어 버린다."(83-4)


"정신 분석학이라는 도구는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인 지점에서 사용하는 편이 적절하다. 문화적 거리라는 문제는 개념, 언어의 차이뿐만이 아니다. 리쾨르가 말했듯 이는 다른 시대의 언어와 개념이 간직한 근본 물음을 잊어버려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잊은 본문의 물음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 물음이 일으키는 무언가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리쾨르는 이 또한 파괴하는 과정, 파괴자의 확신을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의 전제들과 현대인이 가진 확신을 물리쳐야만, 최초의 물음이 다시금 우리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의 상징 기능을 복원하려면 사유하는 주체가 〈굴욕〉을 당해야 한다. 주체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의 의미론이 부여하는 유리한 위치를 버려야 한다." "이제 종교적 상징이라는 대상뿐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주체도 탐구의 대상이 되어, 상징이 표현하는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86-90)


"주체-대상 이분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주체-대상 이분법을 넘어설 수 없다. 매개되지 않은 실존적 만남을 통해 주체-대상 이분법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주체-대상 이분법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끄는 삶의 흐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이분법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이는 변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대상 이분법은 주체의 고고학을 통해 주체-대상 '관계'에 자리를 내준다. 대화라는 호혜성을 통해 소외된 거리는 주체와 대상 모두 본래의 모습이 보존되는 관계적 거리relational distance가 된다. 이제 주체의 대상은 서로의 대상으로, 서로의 주체로 남아 있다. 둘은 함께 삶을 탐구하는 동반자가 된다. 주체(전통 혹은 유산)의 대상으로 출발(융합)했던 '나'는 반란(거리 두기)을 일으켜 대상(본문)을 지닌 주체로 자신을 확립하고, 결국에는 본문의 주체임과 동시에 대상인 자신, 자기 성찰의 주체이자 대상인 자신을 발견(친교)한다."(112-3)


"전달된 본문이 놓인 지평과 해석자가 놓인 지평의 만남을 통해 해석자는 자신의 지평을 발견하고 이는 곧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의 지평은 해석자가 놓인 지평의 만남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본문의 잃어버린 요소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지평들의 만남은 오늘의 삶과 새로운 관련성을 드러내고 모두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지평들의 친교다. 이 만남 가운데 해석자가 놓인 지평의 어떤 요소는 부정되고 어떤 요소는 긍정되며, 본문이 놓인 지평에서 어떤 요소는 물러나고 어떤 요소는 앞으로 나온다. 본문과 해석자는 모두 질문(해석자에서 본문을 향한, 본문이 해석자에게 제기한)을 받는다. 이제 본문은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대상이 아니라 부적절하거나 낡아 보일지라도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질문이 되며 해석자는 해석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사회를 탐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지식은 필연적으로 앎의 주체의 자기 형성과정과 연결된다."(113-5)


"해석자가 메시지를 뒤섞는다면, 현재 해석자의 주관을 본문에 강요한다면, 해석자는 (어떤 결과가 도출되든 간에) 자신이 변혁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 본문은 수난당하고 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본문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객관성은 '무관심성'이 아니다. 객관성은 낯선 이의 말을 정확하게 들으려는 분투다. 그의 말이 관심을 일으키기에, 동시에 그가 수난받고 있기에, 달리 말하면 창조 그 자체가 생명을 형성하는 과정이 위기에 처해 있기에 해석자는 그의 말을 정확하게 들으려 노력한다. 그러므로 해석자의 관심은 곧 적용을 의미한다." "또한, 본문은 우리의 세계가 명확해지지 않는 한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해석자는 본문을 현재에 적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한다. 본문의 의미는, 부분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어떤 질문을 본문에 던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본문을 적용하는 것이다〉."(124-6)


결론


"성서 학자들인 우리는 새로운 해석 기법이 등장할 때마다 흥분했다. 양식 비평, 편집 비평, 최근에는 관객 비평, 구조주의, 정신사, 사회학적 분석 등 수많은 기법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법은 낡은 객관주의 패러다임에 추가되는 요소들일 뿐 우리를 소외된 거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파산했다면, 그건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긴 시간 잘못된 방식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계의 '좋은' 의견에 대한 의존, 학계에서 정의하는 성공을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 변증법상 거리 두기의 순간에 얼어붙은 파우스트적 왜곡,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향한 비판적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은 그런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분투한 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는 자신이 더는 그런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겠다' 말할 것이다."(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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