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의 형성 - 신경은 어떻게 신경이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프랜시스 영 지음,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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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9세기에는 성서의 '역사성'historicity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역사적 종교'라 선언하고 이에 걸맞게 신학을 하려 노력했지요. 그들은 '사실'에 집착했습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해석'과 별개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역사는 이야기의 한 형태고 모든 이야기는 선택 과정을 거쳐 형성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역사 기술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며, 해석을 통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달리 말해 과거의 어떤 사실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전한다는 곧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의 고유한 관심사와 문제의식이 영향을 미치지요. 과거에 대해 논하는 활동은 순전히 개인이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이 활동은 공동체의 활동입니다. 역사는 사회의 구성물이며 보통 정체성의 형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역사 이야기든 최종 결정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18-9)


1 신경들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세계 주요 종교 중 신경Creeds과 교리를 중시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정통'orthodoxy, 즉 올바른 믿음이 있고 이것을 벗어나면 '이단'heresy으로 간주한다는 관념이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이론상 그리스도교는 동질적homogeneous이며, 그 동질성은 '정통 신앙'에 근거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일치운동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그리스도교 집단은 여전히 자신이 전하는 진리가 곧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집단이 이를 공유한다는 점은 부정하면서 말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지요.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종종 학자들이 말하듯 유대 신앙의 핵심은 '정통'이 아닌 '정행'orthopraxy, 즉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올바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따라 정통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공식화했지요."(27-9)


"정통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태도에서 유래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서 기록을 살펴보면 누구도 이후 등장한 교회의 주교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어떤 교리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누구도 논쟁자나 의심하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정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고 결정하기까지 일어난 교리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교리와 관련된 질문, 혹은 도전을 받을 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주교에게 받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하고 신경, 혹은 신경 형식의 요약문을 인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에 세례와 입교와 관련된 일정한 훈련 과정이 있었음을 알려 주지요."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까지 이 신경을 외워야 했습니다." "신경은 처음부터 '정통의 시금석'은 아니었고, 지역 교회들을 담당하는 주교가 새롭게 그리스도교인이 된 이들에게 가르친 신앙의 핵심 전승이었습니다."(29-32)


"이 신경들을 비교해 보면 여러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경도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지요.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연관이 있다고 암시하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은 쓰지 않으며 '하나 안에 셋'이라는 신론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경들은 교리 체계가 아닙니다. 다양한 신경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경들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중요합니다. 이 신경들을 통해 당시 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바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하나이더라도 이를 전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기교는 물론이고, 어떤 부분을 중시하고 어떤 소재를 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띨 수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신경의 근본적인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33)


# 초기 신앙 요약들의 특징

1. 2세기 후반, 3세기 초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쓴 신경은 삼위일체의 형태를 갖춘 확정된 신경이 아니었다.

2. 그 전부가 성서에서 유래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내용에는 성서에 바탕을 둔 정형화된 표현들을 곧잘 사용했다.

3. 그들은 이단이라고 불리던 '거짓 교사'와 논쟁할 때 이 신앙의 요약을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언급했다.

4. 그들은 성서 내용이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이 신앙의 요약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간주했다.


2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신경의 첫 번째 조항에 명시된 교리, 진정한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특정 교리는 매우 고단한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가정, 즉 참된 신은 하느님 한 분이며 우리는 그분에게만 배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사나 악마, 여타 초자연적인 존재를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보면 혼돈에서 질서가 생길 때 하느님은 '무언가'를 가지고 창조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안에서 종말론 성향이 강한 집단들은 이 세계가 하느님의 적, 즉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도 사탄을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로 묘사하지요.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시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주권자라는 생각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최초로 교회 안에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영지주의와의 투쟁이지요."(58-9)


# 영지주의 집단들의 공통점

1. 창조신 데미우르고스the Demiurge와 궁극자인 '아버지'의 구별

2. 세계의 기원을 우주 이전의 '타락'으로 설명하고 물질 세계를 우연, 혹은 죄의 결과로 보는 관점

3. 영적 엘리트들은 물질세계에 갇힌 불꽃이며, 비밀 '지식'을 알게 되면 해방되어 신과 재결합할 수 있다는 가르침


"역설적으로 영지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실제로 이 운동이 유대-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난 운동임을 암시합니다. 영지주의는 한 분이신 궁극적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데 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유대 전통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유대 종말론적 관념에서 악마가 창조자 혹은 '이 세상의 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어떤 학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세우기 위해 로마에 맞서 일어난 반란이 실패하자 이에 대한 실망이 비관주의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그 결과 희망은 오로지 하늘에 있고 지상에는 절망뿐이라는 관점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때 예언은 의미를 잃고 구원은 이 지상에서 탈출하는 것이 되지요. 유대 묵시 문헌이 보여 주는 상징 언어와 영지주의 문헌들이 보여 주는 고도의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언어 사이의 흥미로운 연관성은 이러한 설명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64-5)


# 유대 묵시 문헌과 영지주의 문헌의 연관성 : 공통 비유와 수비학數秘學, 천상으로의 여정 및 계시와 같은 유사한 내용 얼개,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의 대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에 있었던 실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성육신 역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수난은 아예 일어날 수 없게 되지요. 설령 '예수'가 실제로 있었다 해도 그는 부활 후 특정 제자들에게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초자연적 그리스도가 쓴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수난 전에 사라졌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가 마주했던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가현론docetism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부활은 당연히 몸의 부활이 아니게 됩니다. 육체 혹은 몸은 타락한 물질세계의 일부로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신자들은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찬은 지상의 물질들을 가지고 거행함으로써 물질세계와 피조물의 선함을 확언하기 때문입니다."(66-7)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일관성 있는 전체로 다루는 최초의 '조직신학'을 창조했습니다. 앞선 사상가들이 일궈 놓은 관념들과 성서를 활용해 그는 '총괄갱신 이론'theory of recapitulation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참되며 한 분이신 하느님은 세계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낙원에 피조물 중 으뜸인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처럼 순진하던 아담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했고 그분에게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선한 피조 세계가 오염되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선하지만 말이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인간이었고 아담이 한 일을 되풀이하되 그 과정을 뒤집었습니다. 아담이 실패했던 곳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시작되었고 결국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찬에서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물질이지만 영적인 것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이레네우스는 말했습니다."(71-2)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는 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인과 논쟁을 벌이며, 하느님이 자신으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다거나, 영원한 질료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견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은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테르툴리아누스는 다른 선택지들을 거부했을까요? 아마도 영지주의와의 투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주의에서 영원한 질료는 다루기 힘든 수단이고 영지주의자들에게 질료는 가장 커다란 적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존재하거나 심지어 하느님과 대비되는 제2의 원리가 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지요.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러한 이원론은 한 분 하느님이 만물의 유일한 원리, 시작, 기원이라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점 더 하느님의 유일성과 무한한 초월성을 강조했고 그만큼 하느님의 존재와 창조성을 제한하는 질료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져갔습니다."(84-5)


"4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류에게 당신의 형상과 신적 로고스인 자신의 생명과 이성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함으로써 로고스를 상실했고 그 결과 자신이 나왔던 무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성으로서 로고스의 상실은 무지를 뜻했고 생명으로서 로고스의 상실은 죽음을 뜻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몰락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필멸성Motality은 죄의 끔찍한 결과였습니다. 이 곤경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구원은 성육신을 통해 로고스를 인간 본성에 다시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육신은 재창조라 할 수 있습니다. 개별 인간들은 아담에 참여함으로써 필멸할 운명이었지만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로고스를 받은 새로운 인간인 '하느님의 아들'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로 입양되어 불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88-9)


"그리하여 하느님이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다는 '부정의 길'이 등장했으며 창조에 대한 관상은 영성의 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부정의 길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시고,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며, 무형이시며, 불변하시고, 나뉘지 않으시며, 고난받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불가해하시고, 피조 세계의 일부가 아닌 전적 타자이시며, 만물 중 하나가 아니라 만물의 근원이심을 강조합니다. 이 방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자연 숭배에 가까운 이교들, 말하자면 대중 종교와 신화의 다신론, 우상 숭배, 엉성한 신인동형론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교 역사는 영지주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영과 육체의 싸움은 계속되었지요. 하지만 영지주의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교리는 이 싸움 가운데 육이 영에게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교회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을 파문했습니다."(91-2)


3 한 분 하느님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스토아 학파는 합리적인 담화를 분석하면서 한 사람의 정신 안에 있는 로고스, 즉 이성과 입 밖으로 나오는 로고스, 즉 말을 구별했습니다." "이 영향 아래에서 유스티누스는 로고스, 즉 말씀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셧으며 그분 역시 참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의 독생자이자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쓰셨던 도구,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만물을 빚어내고 존재하는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그리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혜였습니다. 예언자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참된 진리의 스승들에게 진리의 영감을 준 이도 바로 이 말씀이었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의 진리를 온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드러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로고스 신학Logos-theology은 예수가 어떻게 이교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자녀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독특한 아들인지, 한 분 하느님과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99-101)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이유는 그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경전의 예언들에서 발전한 다양한 희망과 기대를 예수가 이루었다고 보았고 그에게 다양한 호칭을 붙였습니다. 이는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서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머지않아 히브리 경전을 들여다보면서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강조하는 예언은 하느님의 종이 겪을 고통과 죽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에 비추어 수정되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이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의 전체 경전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확립하는 과정에 기여했습니다." "로고스 신학은 이 모든 해석을 엮어 독특한 계시자의 선재와 신성을 설명하는 일관된 이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교리 형성 과정에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지요."(102-3)


"하지만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는 로고스 신학의 접근 방식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몇몇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영원의 차원에서 말씀과 성령을 갖고 계신 한 분 하느님이 창조와 섭리를 위해 말씀을 낳고 성령을 내쉬면서 삼위일체가 '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종종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arianism라고 불리지요('살림'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방식, 구체적으로는 그분이 섭리를 바탕으로 세계와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활동, 특히 성육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훗날 이는 부적절한 이야기임이 밝혀졌고 하느님은 영원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것이 교리로 확립되기까지는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더 세세히 규정했고 열린 탐구를 위한 여백은 점점 더 사라졌습니다."(104-5)


"완고한 유일신론을 내세우는 이들을 향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은 이들이 사실상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변화할 수 있으며 고난받을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다양한 양태mode로 나타난다고, 성육신하고 고난받고 죽은 이는 하느님 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맞서 테르툴리아누스는 『프락세아스 논박』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초월자인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로고스를 통해서만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로고스는 초월자를 매개할 수 있는 파생물,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성부라면, 그리스도는 누구를 향해 기도했느냐고, 세계를 주관하는 그분이 없다면 어떻게 세계가 계속 운행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107-8)


"당대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도 어떻게 초월적이고 나뉠 수 없는 일자가 다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만물의 궁극적인 바탕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답은 일자와 다자 사이에 일자의 일자성과 다자의 다중성을 지닌 중재자, 일자-다자One-Many라는 통합체가 있다는 것이지요. 암묵적으로 오리게네스는 보이지 않고, 명명할 수 없으며, 만질 수 없고, 불변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보면 살아남을 수 없는 유대 경전의 하느님과 플라톤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궁극의 일자를 동일시한 것 같습니다. 이 하느님은 초월적이지만 만물의 아버지이자 원천이며 동시에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영원히 자기 곁에 자신의 피조물, 다양한 지적 존재들, 이성을 지니고 있고 영적인 존재들logikoi, 천사들과 영혼들, 다자를 두셨습니다. 이때 한 분 하느님과 수많은 피조물을 잇는 존재가 바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단일성과 피조물의 다중성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114-5)


"유일신론자였던 아리우스는 한 분 하느님이 홀로 태어나지 않으시고, 홀로 영원하시며 시작도 없으시고 시간 이전에 독생자를 낳으시고 그를 통해 시간과 우주를 만드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독생자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하느님의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아리우스는 고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고 말아지요. 물론 그는 '신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은 아니라고 아리우스는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세 위격, 세 존재, 즉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있으나 단자Monad는 오직 아버지뿐이며, 그분만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머지는 아버지에게서 파생되었으며 발생하지 않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리우스는 단자가 사벨리우스가 제안했듯 '아들-아버지'로 나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인, 아버지의 '일부'일 수도 없다고 생각했지요."(124-5)


"반反아리우스주의 글들을 저술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종속론이 동방 교회에서 선호하는 위계를 무너뜨림을 입증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주장에서 로고스는 더는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원리상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면, 신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고스는 '본질상' 하느님과 하나가 아니기에 하느님의 내적 이성인 로고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됩니다. 이 창조된 로고스는 참된 하느님의 지혜가 아니며 그 지혜의 모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고 하느님을 진실로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채택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는 그 자체로 신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 교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전체 위계를 붕괴시킵니다. 이때 로고스는 하느님이거나 피조물일 뿐, 둘 다일 수는 없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126-7)


4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


"아리우스 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상대가 구원을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말씀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은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긍정하기 위한 투쟁으로 곧장 이어졌습니다. 이 두 투쟁을 통해 동방 교회가 사상을 가다듬는 동안 서방 교회는 상대적으로 방관했지요.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에는 이미 삼위일체론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서방 교회는 '단일성 안의 삼중성'Trinity-in-Unity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계를 중시하는 동방 교회로 인해 문제는 복잡해졌지요. 어떤 의미에서 로고스 신학은 성령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창조도, 계시도 하느님 말씀의 활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로고스 신학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성령의 역할도 말씀이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셋은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며 초기 교회는 전례 시 신앙고백을 할 때 셋을 언급했습니다."(132)


"정경이 형성되면서, 대다수 교회는 정경에 담긴 영감 받은 말씀 외에는 어떠한 말씀도 추가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성령이 활동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는 사람만이 말씀을 올바로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세례 시 세례 받는 이에게 있던 거짓 영들은 쫓겨나고 성령이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성령은 교회, 교회 구성원들, 성사, 사제, 선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들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했지요." "2세기 후반 '삼위'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였고 3세기 초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라틴어 '트리니타스', 즉 삼위일체로 번역했습니다. 이레네우스처럼 그는 말씀과 성령을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성과 지혜로 여겼습니다. 즉 말씀과 성령은 하느님에게서 파생된 존재로 세계,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에 중재자 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은 위계를 중시하는 동방 교회의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138-9)


"성령 반대파는 성서 본문을 둘러싼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성서 본문을 은유로 설명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그들을 은유론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성령 반대파는 성령이 하느님의 영이라면 그는 또 다른 '하느님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의 손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자가 독생자이고 형제가 없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견해에 어긋나는 것이었지요. 이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따라서 성령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성화聖化와 신화神化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우리의 신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지요. 아리우스파와 논쟁할 때처럼 이 주장은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논쟁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삼위 모두가 한 분 하느님이라는 단호한 진술로 나아갔습니다."(140-1)


"머지않아 교회는 성령도 성자, 성부와 동일본질이며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부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출생했다'는 표현 대신 (요한 복음서 15장 27절에 근거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발현한다)'는 표현을 썼지요." "'동일본질'homoousios은 단일성을 뜻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람들은 당연히 '본질'(우시아)ousia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셋을 한 위격(히포스타시스)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동방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사벨리우스주의를 뜻했습니다. 동방에서 '위격'이라는 말은 개별적인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본질'과 '위격'이라는 말이 동방에서는 같은 말로 쓰인다는 데 있었습니다." "장님 디디무스는 '실체'substance에 해당되는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한 본질에 세 위격'이라는 정식이 나왔지요."(142-3)


"카파도키아 교부들인 바실리우스와 그레고리우스는 삼위 하느님이 존재 방식에서 '태어나지 않으신 분', '태어나신 분', '말하시는 분'으로 구별되거나 '부성'父性, paternity, '아들됨'sonship, '성화하는 힘'sanctifying power이라는 관계로 구별된다고, 그러나 실체, 활동, 의지에서 하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은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자 성화자이며, 각 활동에서 하나이며, 한 위격 홀로 고유한 활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세 위격이자 한 신성으로 동시에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이레네우스, 트레툴리아누스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대조되는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언제나 삼위일체셨으며, '경륜'economy을 위해 비로소 삼위일체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진리의 원리이므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삼위일체로서 드러나셨다면 그 계시는 그분의 영원한 실재와 일치해야 합니다."(144)


"테르툴리아누스 이래 서방 교회는 삼위일체를 가리킬 때 '세 위격 안에 한 분 하느님, 혹은 '세 위격 안에 한 실체'라는 표현을 썼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표현의 난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체' 대신 '본질'essence이라는 말을 더 선호했고, '위격'이라는 말은 대체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썼습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일종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각자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하고 완전하지만 세 무한자, 세 영원자, 세 전능자, 세 완전자 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의 계획, 활동, 의지는 하나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을 유비로 드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인간 정신을 이루는 기억과 이해, 의지의 '내적' 삼위일체, 또는 정신 그 자체, 정신에 대한 앎, 그리고 정신에 대한 사랑의 삼위일체처럼 말이지요."(146-7)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인격)이면서 정신보다 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각 활동을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지각 활동에서 지각의 주체, 지각 대상, 그리고 지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구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이러한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기에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세 위격을 구별해 주는 '관계'는 다른 개체 간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위격들은 서로에게 내재하며 모든 유비는 이를 미약하게나마 감지하도록 돕는 흐릿한 거울과 같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아버지를 신성의 '원천'으로 보고 여기서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성령의 '기원'으로 보았습니다."(147-8)


5 성육신하는 하느님의 아들


"아타나시우스의 저술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약함, 혹은 무지를 암시하는 복음서 구절들을 바탕으로 로고스의 '피조성'creatureliness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로고스가 선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이고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며,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었지만 말이지요. 성육신과 관련해 그는 예수라는 '육체' 안에 있는 로고스가 참 '인격'person이라고 전제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었다는 옛 생각을 활용하면 아리우스의 주장이 제기하는 몇몇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연약함은 로고스의 오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영혼이 없는 몸만을 취하〉셨다는 아리우스파의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만 인간으로 오시거나 혹은 인간을 입으신 척한 게 아니라 인간 전부를 취하셨습니다.〉"(172-4)


"영혼에 관한 문제는, 에우스타티우스 및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킨 사상에 대한 아폴리나리스의 반응으로 인해 더 뜨거운 논쟁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아폴리나리스는 저 사상을 아타나시우스의 반反아리우스파 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계시자가 '영감을 받은 인간'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느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는 그는 모든 정신은 '자기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격 안에 두 정신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로고스와 인간의 영혼, 혹은 인간의 정신은 불가피하게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지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혹과 연약함에도 실패하지 않는 '불변하는 정신'이라고 아폴리나리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맥락에서 〈인간이 셋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님께서 인간이시라면, 그분은 영spirit, 혼(영혼)soul, 몸 이렇게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지요. 물론 주님은 〈천상의 인간이고 살아있는 영〉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176)


"아폴리나리스는 중재meditation라는 오래된 관념을 둘 사이의 '중간'mean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말과 당나귀의 중간은 노새,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은 회색, 겨울과 여름의 중간은 봄이라는 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간이 그리스도라 말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희석된 신성과 절단된 인성의 기이한 혼합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스는 이러한 표현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동정녀가 낳은 예수는 일종의 생물학적 별종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혼합'을 강조한 것은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론의 핵심이 '영원한 육체를 입는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스는 육신이 하느님과 실제로 연합했고 따라서 〈그분의 육체는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일종의 복합 단일체, 혹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룬 독특한 중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강한 반발을 낳았습니다."(178-9)


"아폴리나리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중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한 모습을 그의 '육체' 탓으로 돌렸다는 점에서 디오도루스는 아타나시우스와 유사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테오도루스의 〈인간의 몸을 취한 (로고스)〉 정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도루스는 로고스가 성육신 경험의 직접적 주체라는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징이 되었지요. 이들이 보기에 고난을 받고, 죽고, 부활한 이는 로고스가 아니라 〈다윗의 후손인 그분〉, 혹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수난불가하며, 불멸하며, 불변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디오도루스는 로고스가 〈태어나지 않〉았고, 육신과 '혼합'되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로고스의 본성이 손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은 디오도루스가 〈성자가 둘인 것처럼〉 가르친다고 비난했습니다."(179-81)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하느님과 인간의 본성이 유사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영원과 우연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초월은 내재를 내포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무한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로고스 또한 무한자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지요. 로고스는 어디에나 있지만, 인간에 대한 호의로 특별한 행동을 취해 특정 장소에 있게 되었다고 테오도루스는 말했습니다. 로고스가 은총으로 사도들이나 자신이 선택한 백성과 함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지요. 하느님-로고스는 특별한 호의, 혹은 당신의 뜻을 따라 성육신을 통해 인간을 취해 그와 연합했습니다. 하느님-로고스는 불변하기에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은유일 뿐이라고 테오도루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성육신은 (육체가 아닌) 인간성을 온전히 취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182-3)


"키릴루스는 모든 신경의 주제는 독생자인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성육신하셨고 인간으로 사셨으며 고난받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고, 달리 말하면 로고스는 이성을 지닌 영혼으로 생명을 얻은 육체와 결합해 하나의 위격hypostasis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리스도인은 수난불가한 로고스가 몸소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셨다는 신비를 확언해야 한다고 키릴루스는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로고스는 육체를 따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녀가 로고스의 기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성서는 로고스가 한 사람의 인격과 자신을 합쳤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므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고 키릴루스는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어떻게 육체와 결합할 수 있는지는 〈형언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지만〉, 신경에 따르면 로고스가 성육신의 전체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지요."(188-9)


"네스토리우스에 따르면 니케아 교부들은 신성이 수난 가능하다거나 하느님과 동등하게 영원한 분이 태어났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독생자〉라는 신경의 표현은 교부들이 한 분이신 주님이 분열되지 않도록 각 본성에 해당하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열거했음을 보여 준다고, 또한 그 본성들이 아들의 단일성으로 인해 혼동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지요." "신성의 측면에서는 수난이 불가피하고, 몸으로는 수난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수난불가능하기도 하고 수난가능하기도 하다고 네스토리우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의 '성전'이었습니다. 신성은 몸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몸과 결합했기에 출생, 고난 같은 것은 로고스가 아닌 인성에서 기인한다고 네스토리우스는 지적했습니다. 키릴루스는 이를 매우 불쾌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집트 주교 회의의 이름으로 '12개의 파문 조항'을 보내 네스토리우스에게 순종을 요구했지요."(189-90)


"451년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는 (안티오키아 학파가 혐오했던) '혼합'을 피하면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중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칼케돈 신경은 단순한 역설이나 경계선 그 이상입니다. 이 신경은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일종의 화학 작용과 같다는 잘못된 견해를 거부하면서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신성은 피조 질서에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본성과도 같지 않으며, 단순히 두 피조물이 결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성과 연합한다고 말이지요. 또한, 그리스도 사건은 그 자체로 신에 대한 관념, 그리고 신이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가정과 기대에 도전한다고 칼케돈 신경은 말합니다. 수난불가한 존재가 어떻게 고통을 겪을 수 있느냐는 논쟁 이면에는, 생명의 원리인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인간 삶의 한계를 경험하고 죽을 수 있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은 진실로 고통받고 죽었다는 그들의 확신이 있었습니다."(200-4)


6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레네우스는 창조의 선함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이 물질세계에서 탈출해 신성이라는 불꽃의 파편들이 본래 속한 영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지요. 이에 맞서 이레네우스는 구원은 재창조re-creation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세상 마지막 날에 회복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다른 세계' 관념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전 인격이 회복되는 몸의 부활을 뜻하지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정했듯(당시 대다수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혼불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육체의 부활이라는 신경의 진술은 인간의 도덕적, 영적 차원과 더불어 육체적 차원도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함을 확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찬은 (이레네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피조 세계의 좋은 것을 감사를 담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기쁨의 희생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212-3)


"오리게네스의 저술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하느님의 단일성과 피조 세계의 다중성이 구세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중기 플라톤 철학의 고전적인 문제인 궁극적 일자와 다자 사이의 고리를 마련했습니다." "저는 오리게네스 사상의 핵심이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피조 세계가 연합해 만물이 다시 통합되고 본래 완전함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리게네스 사상의 전체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이때 통합은 영적 통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물질세계는 교정의 역할을 하는 중간 영역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부활을 '영화'spiritualization, 혹은 영혼불멸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육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양가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요.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여야 했고 피조물과 더불어 '선한 것들의 집합체'여야 했습니다."(217-9)


"그의 두 번째 책 『성육신에 관하여』를 읽다 보면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구원을 재창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창조 당시 인간은 이성과 생명의 원리인 로고스를 받았기에 절대적인 것들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자신이 받은 것을 상실했고 그들이 창조되었던 무로 다시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불순종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자신의 경고를 철회하면 그분의 온전함이 깨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창조의 바탕인 그분의 선함과 사랑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로고스의 성육신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이성과 생명의 원리를 다시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성육신으로 인해 우상숭배와 무지, 죄와 죽음은 극복되었고 개별 인간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있게 되었다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신화神化, 혹은 자녀됨이었습니다."(221-2)


"그리스도교는 (마니교로 대표되는) 궁극적 이원론을 거부했지만, 동시에 단순한 철학적 일원론도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안에 단일성-복합성이 있다고 보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체로 단순한 일원론을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두 가지 이유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가 이중적임을 인정했습니다. 첫째로 일원론만을 고수하면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할 여지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창조주라면 하느님 외 다른 것들이 존재하도록 자유 가운데 선택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조 세계는 복잡한 물질적-영적 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본래 누렸던 완전함으로 회복할 것이라고, 창조주와 사랑의 연합을 이룰 것이라고 전통 그리스도교는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그리스도교 영성가가 아가서에 주목한 것,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긴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239-40)


"둘째로, 일원론만을 고수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속하게 되고 따라서 모든 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분명 완전하지 않고 인간은 도덕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함을 그리스도교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부 시대에 구원은 기본적으로 원原창조의 통일성과 완전함으로 회복하는 하느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치유와 재창조, 그리고 관계를 깨뜨린 것에 대한 속죄와 배상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고도의 이원론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완전함을 상실한 세상은 갈등을 초래하는 반란의 장,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영적 세력의 지배를 받는 곳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구원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무언가를 처리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구원론에는 실용적인 이원론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는 기이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240-1)


결론과 성찰


"그리스도교에서는 철학보다 더 진리의 문제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철학자들은 진리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세련된 논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만들었습니다. 각 분파와 학파는 서로를 '이단'이라 불렀지만, 이때 이단은 선택을 뜻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분파와 학파를 선택해도 별 상관이 없는 분위기였지요.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 진리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발견됩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가 철학 탐구의 완성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후 머지않아 그리스도교인들은 진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내비친 '이단'들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며 그들이 사물의 핵심에 자리한 통일성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을 문제 삼았고 이단자들을 축출했지요. 하지만 (정통주의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단들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좀 더 명확하게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250-1)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 즉 신경들을 오늘날에도 믿음의 시금석으로 보아야 할까요?" "교리를 정립하려는 시도는 어떻게든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제한된 인간 정신, 언어와 개념이 결합해 나온 명제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포괄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면도 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언제나 진리와 정체성을 두고 고민했으며 이는 개인이 홀로 자유롭게 생각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문화가 바뀌고 언어가 바뀜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진리는 해석과 재해석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신경 형태와 교리에 담긴 흐름을 거부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하느님의 로고스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일어나는 순종뿐만 아니라 합리성, 신실함, 진리에 대한 갈망을 머금은 영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2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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