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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공주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 지음, 최세민 옮김 / 기적의책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1. 이건 로맨스잖아?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공한 로맨스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기에, 현재진행형 상태인 로맨스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 쿨럭 - 끝이 나겠지만, 어쨌든 결혼에 이르는데까지의 로맨스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의 특징은, 그것이 더 이상의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난으로 점철된 노정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를 찬찬히 잘 뜯어보면, 그 속에는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난 따위는 없습니다. 짜릿한 스릴과 행복한 추억만 있을 뿐이죠. 마치, 선택되어 이미 그 끝에 도달한 갈림길이, 더 이상 갈림길이 아닌 행로(行路)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드래곤라자’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죠. 갈림길을 다 걷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이상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걸어온 흔적만 남아있을 뿐.

로맨스는 할 때에는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깨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싸우고 힘들게 갈등하고 맞지 않는 의견 때문에 잠시 떨어져있기도 하고... 그러나 성공한 로맨스의 뒤를 돌아다보면, 갈림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끝을 보았기 때문이죠. [화성의 공주]는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잭 카터와 데자 소리스의 되도 않는 인연,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그 어이없는 과정들. 우연과 행운으로 점철된 듯한 그 무수한 이야기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연인들에게는 과장이 아닌 현실 그대로의 담담한 회고일 뿐입니다.

두 연인에게 물어보죠. 당신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겪었던 그 무수한 기적은...? 기적이라뇨! 그건 우리의 사랑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필연인게죠.


책을 다 읽고, 찌릿한 느낌이 들었던 바로 그 이유는, 두 연인이 겪었던 필연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실은, 우리, 가요의 사랑 가사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에 너무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사랑에 대한 진지하고 아릿한 감정을 고민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현실에서 얽히는 인스턴트 식의 사랑들. 작고 큰 갈등 속에서도 금새 깨어지고 갈라지는 사랑의 양태들. 그런 것들의 무수한 편린이 제 주변을 싸고 도는데, 그 속에서 내가 고구할 진실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화성의 공주]는 이 시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에 대한 환타지를 화성이라는 낮선 공간에서 엮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제게는 너무나 당연해보이고, 그들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 가슴속에서 불끈거립니다. 비록 그들의 이야기는 세부적이지는 않습니다. 100여년 전의 소설이라, 묘사보다는 서사에 기댄 이야기의 전개가 마치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그냥 주욱 훑어간다는 느낌, 그 생경함이 글을 읽는 내내 독자의 한 쪽 마음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십 차례의 전쟁을 거친 군인 잭 카터가 현대인처럼 너무 복잡하게 고민한다면, 혹은 화성의 연인인 데자 소리스가 지구인처럼 조변석개한다면 그 이야기가 더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글을 읽다보면 그네들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 안으로 부나방처럼 뛰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차라리 차오릅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을 잊고, 나의 사랑을 위해서 나를 사랑에 쏟아붇는 그런 것 말입니다.

[화성의 공주]는 사랑을 이루어낸 사람이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로맨스소설입니다.


2. 그런데 우주?

그러나 아마추어 독자가 ‘이 글은 로맨스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작가나 글의 명성이 좀 크네요. 저는 장르에 대해서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시작 격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인 에드거 R. 버로우즈는 [밀림의 왕자 타잔]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작가이구요.

그러나 제게 그런 것들은 유의미한 이야기들은 아니고, 다만 우주라는 공간이 제게는 낯선 공간이라는데 주목해 봅니다. 우주라는 곳이 뭔가 큰 함의를 담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다만 비현실적인 공간일 뿐이라는 말이죠. 요즘에야 화성이 엄연히 현실의 일부가 되고 있기는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우주여행을 가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제게는, 그리고 작가에게는 우주가 다만 이곳이 아닌 저 곳이었을 뿐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나니아 연대 이야기]의 장롱 속이나, 혹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9와 4분의 3 플랫폼 너머의 세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화성의 공주]는 환타지의 비일상성과 상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겠지만... 글 속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이성’과 ‘감정’의 대립과 관용이라고 여겨집니다.

보통 환타지에 들어서는 이야기는, 일상성을 제거해야하는 것들일 때가 많습니다. 매일매일 일어나고 경험하는 일들을 말하기 위해서 환타지의 공간을 빌릴 필요는 없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를 굳이 환타지의 공간 안에 펼쳐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환타지 속에 알레고리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환타지는 그 곳에서만 유의미한 이야기들을 따로 가집니다.

[화성의 공주]에서는, 박약한 제 이해로는,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정이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모습이 가장 많이 보입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라면, 누구나 한 몸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낼 수 없는, 그리고 늘 화합된 형태로 나타날 뿐인, 동전의 앞뒷면 같은 인간의 두 가지 중요한 성질 말입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감정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더 좋은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합리성에 기반한 단어인 이성, 에 대비될 수 있는 단어나 의미가 딱히 떠오르질 않아서, 조악하나마 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합리성의 반대항에 비합리성을 두시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야성(野性) 정도가 대비항으로 적합할 듯 하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는 녹색인과, 한 번 고민해보는 적색인은, 우리가 무언가를 놓고 고민할 때마다 - 가령, 오늘 저녁에 라면 하나를 끓여먹고 내일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 햇살을 맞이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배를 곪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잠들지만 기분 좋은 아침밥으로 배를 채울 것이냐 같은 - 좌뇌와 우뇌 뒤에서 펑, 소리와 함께 나타나서 서로 티격태격되는 악마와 천사의 모습과 그닥 크게 차이나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대립과 관용은 글에서 줄곧 드러납니다. 마치 우리가 숨 쉬듯이 대립하고 관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글이 이쯤에서 그냥 끝난다면 별 재미가 없겠지만, 작가는 저지르기 전에 사고하는 독특한 녹색인 - 타르스 타르카스 - 과 불타는 야성으로 사랑을 향해 갈구하는 적색인 - 데자 소리스 - 의 사이에, 적색인의 몸과 녹색인의 심장을 가진 잭 카터를 두고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행동의 연속과 우연한 선택의 결과로 인해 얻게 되는 해피엔딩은, 인간이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삶의 불합리성을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주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실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잖습니까? 뭔가 시의적절치 않은 어리석어보이는 행동을 계속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으니까요.

우주라는 공간은, 아직 신화가 현실에서 똑 부러지게 분리되지 못한 19세기 말~20세기 초엽에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상정하기에 적절한 만큼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의 신화가 씨줄과 날줄처럼 현실과 얽혀들어 현상의 알레고리로 읽혀졌던 바, 우주라는 공간은 그 시대의 이러한 우화성을 극복하면서도 현실에서 일정부분 거리를 두는 공간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굳이 중간계 같은 이세계(異世界)를 만들지 않아도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충분히 이야기 할 만큼, 우주는 그런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은 우주가 현실의 일부분으로써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환타지의 공간보다는 조금 더 밀접하게 현실과 연결되어있는 것과는 대비해서 말입니다.


읽기 부담스러울 만큼의 긴 글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요즘 글들처럼 세련미 넘치지는 않는 글이지만, 읽고 나서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꽤 강렬하였습니다. 글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은 바, 잭 카터를 주인공으로 한 몇 권의 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꼭 한 번 구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잭 카터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갈구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을 가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하)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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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잔의 창조자, E.R.버로우즈의 스페이스 오페라 [화성의 공주]
    from 즈믄누리 :: 도깨비들의 巨城 2008-06-20 01:46 
    1. 이건 로맨스잖아?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공한 로맨스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기에, 현재진행형 상태인 로맨스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 쿨럭 - 끝이 나겠지만, 어쨌든 결혼에 이르는데까지의 로맨스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의 특징은,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평점을 주다보니까... 계속 별 네 개만 찍게 되네요. 아무래도 일장일단이라서 그런가보죠.
 

일단, 어제 '핀란드 역으로' 를 다 읽은 다음 바로 시작한 책입니다. 시사IN에 잠시 소개된 책이기도 하구요.  

황우석 氏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문과생인데다가, 처음부터 주목하지 않으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래서 드라마도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보지 않게 되거든요. 덕택에 황우석 氏에 대해서 처음부터 접하지 않은 탓에, 2005년의 PD수첩 사건이 있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었지요. 실은 이 책도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리려던 책이 없어서 빌리게 된 것일 뿐인데... 

일단 책을 잡고 나서 쉼없이 읽어제쳤다는 말부터 합니다. 다른 말로는 상당히 흥미있었다는 말이고, 또다른 말로는 가볍게 읽기에 좋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읽게되지는 않을 듯해요. 왜냐하면, 이제 다 알았으니까.  

지식을 전달해주는 류의 책입니다. 사유를 던져주긴 하지만, 디테일한 사건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포괄적인 류의 고민 말입니다. 


요즘 삼성의 전임 법무팀장이던 김용철 氏가 내부고발자의 지위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 책도 내부의 고발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氏와 함께 일하던 연구원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나중에는 부인까지 - 부인도 함께 연구하던 간호사였구요 - 고발에 참여합니다. 

김용철 氏만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처지인데, 2005년 당시에는 더했던 듯 싶습니다. 내부고발자인 두 사람 다, 자신의 직장을 잃고,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에는 무직자로 있는 상태였으니까. 책을 덮으면서, 과연 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직장에 다시 취업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울러, 과연 내부고발자가 도덕적/윤리적으로 지탄받는 분위기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도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온정주의라고 생각되는데... 가족이니까... 라는 커뮤니티 의식이, 내부고발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듯해요. 실제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난 대부분이 그런 부분에 대한 것이니까요. 보스를 배신했다, 먹여살려주던 직장인데 그럴 수 있느냐... 물론 처음에는 다니는 직장에서 '짤리는' 일부터 고민하겠지만... 옳지 않은 일, 특히 속해있는 집단이 사회 전체를 기만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 책임있는 사람이 책임있게 하는 발언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황우석 氏의 거짓말을 고발한 PD수첩의 용기보다는,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한 사람의 진실이 이 사회에서 대우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책이 흥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사건 자체가 워낙 큰 반향을 일으켰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책을 쓴 한학수 氏가 책을 단순한 사건 중심의 나열로 그친 것이 아니라, 사건의 핵심이 되는 다양한 생명공학 지식들을 사건의 얼개 속에 잘 버무려서, 일반인들도 사건의 정확한 실체에 다가가도록 한 글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 문과생(!)인 제가 읽기에도 버겁지 않았는데, 읽고 난 후에 돌이켜보면 상당히 많은 생명공학의 용어들을 접하면서도 어려움 없이 독서할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아울러, 탐사보도를 담당한 PD 답게 글 자체도 탐사보도 식으로, 즉, 황우석 氏가 거짓말장이라는 대명제를 보여준 후에, 사건의 추이를 차근차근히 감질맛나게 보여준 것도, 책을 쉴새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한 요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 편, 불만이라고 한다면, 저널리즘에 입각한 책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깝게 쓰여진 면모가 있어서, 사건의 객관적인 실체보다는,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학수 氏의 비망록 격으로 책을 읽게 되더군요. 물론, 저는 책을 읽으며 황우석 氏의 거짓말 행각에 분노하였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작가와 동일시되어 책을 읽긴 하였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관적인 색깔이 상당히 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황우석 氏를 옹호한 많은 언론들의 무책임함과, 권력기관 - 작가는 청와대를 지칭하고 있지만 - 의 비균형적인 언행은, 내내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진실, 학자적 양심. 황우석 氏가 온 나라를 기만한 사건의 이면에는,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결여한 한 노회한 (학자의 탈은 쓴) 정치인의 작태를 비호하고 옹호한 다수의 언론/권력의 몰지각한 행동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권력은 선거로 심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과연 썩은 언론 - 작가는 조선일보를 지칭하고 있지만 - 은 누가 심판해야 합니까? 그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보게 된 책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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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역으로 -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시사IN 의 소개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이야기 한 바, 사상, 그들의 믿음 등등등.
 
사실 지금 시대에 맑스/레닌주의는 큰 반향을 일으키는 화제는 아니죠. 구소련의 몰락과, 중국의 흑묘백묘론,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 등... 본원적인 맑스주의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편린만 들여다 보았을 뿐, 실제로 맑스/레닌주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소개받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맑스/엥겔스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역시 '자본'을 읽는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걸 바로 접하기엔 부담스러운 나머지 한다리 거쳐가려고 잡았던 책이, 리라이팅 클래식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리고 이 책입니다. 이진경 氏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결국 읽다가 접었는데, 내용의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 문체의 짜증남 때문이었습니다. 적확한 표현이 아닌, 설의적인 - ... 이지 않을까? ... 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등의 - 표현의 남발 탓에 내용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였죠. 결국 다 읽게 되겠지만, 그래도 비추천하고 싶고... 그 책을 중간에 접고나서,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핀란드 역으로' 이책은 본격적으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소개하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던 것이죠. 작가인 에드먼드 윌슨은 저널리스트라고 합니다. 저널리스트답다고 해야하나요? 번역 탓일 수도 있겠지만. 문체가 건조합니다. 입안 가득 기름을 넣고 있다가 삼키는 느낌 같은 거에요. 맑스주의를 독일사상 - 특히 헤겔 - 과 연관하여 서술하고 있고, 맑스주의를 비평하고 있죠. 그래서 아무래도 맑스와 엥겔스 본연의 모습보다는 마치 색안경을 쓰고 보는 세계처럼 작가의 생각으로 평가된 맑스와 엥겔스를 보게 됩니다. 뭐 이런 부류의 책은 그런게 당연하겠지만, 이 책은 저널리스트 작가의 책답게 더합니다. 맑스의 본모습이 잘 안보인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제가 맑스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느낌은 알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이 책은, 맑스와 엥겔스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추천해드리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의 본연을 알고 계신 분들이, 아, 이렇게 맑스와 엥겔스를 읽을 수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고 싶으실 때 좋은 책일 듯 합니다.
 
게다가, 레닌에 대해서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갔을 뿐이지, 맑스주의가 레닌에 이르러 어떻게 구체화되는지에 대한 소개는 좀 박약합니다. 역자의 말처럼, 작가는 맑스와 엥겔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은 1917년 3월 혁명의 초입에서 마무리됩니다. 맑스를 구현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까지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를 변혁하는 그 가슴뜀은 느낄 수 있습니다. 역자도, 이후의 역사는 독자의 몫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천가가 아닌 사유자인 저의 입장에서는 사유의 거리가 하나 줄었다는데 대한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네요.
 
 
그러나, 책은, 초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와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프랑스대혁명, 그리고 19세기의 국제인터내셔널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맑스와 엥겔스를 책이 아닌, 실제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구요. 맑스주의가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보여준다고 할까요? 덕택에 본연에 대한 이해는 빈약하지만, 본연을 둘러싼 삶에 대한 이야기는 풍성합니다.
 
게다가, 역자의 몫이었겠지만, 책에서 인용되는 많은 저작들이, 국내에 번역되어있는 경우라면, 친절하게 각주되어있어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에 접근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외의 서비스(!)에 정말 감동했고, 각주에 언급된 책 중에 꼭 읽어봐야겠다고 체크해둔 책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넘기기 빡빡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의 팍팍한 삶에 경제적인 접근을 이루어낸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의 이론가와 행동가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양극화 현상과 노동자/농민에 대한 과도한 착취(!)가 주는 현대적 의미에 대해 짧게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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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사in 의 소개글을 읽고 무작정 사버렸습니다. :) 실은, 얼마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정태인 氏 인터뷰를 읽고 나서, 읽고 있던 '대한민국 개조론'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신자유주의가 뭔지 조금 알아야되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마침 장하준 교수의 책을 소개받은 것이죠. 물론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대척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 일단 간접경험도 경험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책을 집었습니다.
 
한 번 읽고나서 사실 좀 몽롱한 느낌도 들지만 - 경제에 문외한인 제게는 좀 어렵더라구요 -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간단하게 나열해보면.
 

장하준 교수가 자신의 여섯 살난 아들을 예로 들어 하는 이야기가 일단 좀 강력했죠. 여섯 살난 아들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관점에서는 아들을 노동 시장으로 내보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자유경쟁을 통해서만 경쟁력을 획득하고 결국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에게 강요(!)하는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런 공정한(!!) 싸움을 의도하는 것인데, 과연 (상대적으로) 여섯 살난 아이에게 그런 공정한 싸움의 룰을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공정한 룰로 싸우지 않고 약간의 어드벤티지를 안고서 이 험한 세계 산업 시장에서 싸워야하는 개도국의 입장인가에 대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시민 의원이 쓴 대한민국 개조론에는 - 다 읽지는 못하였지만 - 우리나라는 GNP가 이미 2만달러에 - 비록 달러화의 약세에 기인한 측면이 강하지만 - 육박하고 있는데, 약간의 불리함이 있더라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을 믿고 확 뛰어들어야한다, 라는 이야기에도 어느정도 감정적으로 수긍되는 부분도 있거든요. 일단 이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재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이어 읽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이야기를 하면서 더 자세하게 하고 싶은데, 일단 간단하게 언급하면, 장하준 교수는 재벌이라는 존재가, 중공업 산업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존재였다는 이야기를 통해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에서의 재벌의 역할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유주의에 의하면, 모든 국가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산업 분야를 키우는 것이 시장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것은 실은 언어도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개도국 혹은 후진국은 비용대비 생산성이 월등한 제조업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제조업이라는 분야는 뿌린대로 당장 거둘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초반에 수익 없는 자본이 많이 투입되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이나 싫어하는 공기업 구조를 통해 초기 투자를 감행하거나, 혹은 민간 기업 중에서 초기 자본을 때려부어도 망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진 기업 - 재벌 - 이 개도국 혹은 후진국의 중화학 제조업의 육성에 기여하면서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벌이 지닌 폐혜 때문에 재벌의 순기능까지 폄훼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상당히 공감이 갔고, 저 또한 재벌이 지닌 단어 의미의 선입견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부분에 대해서는 재벌의 순기능과 폐혜를 분리해보게 되었습니다.
 

지적재산권의 부분에서도, 선진국 -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 들이 지적재산권 분야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이, 지적재산권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기술집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며, 지적재산권이야말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흘러가면서 일방향적인 권리 의무 - 의무라면 주로 로열티를 의미하겠죠 - 관계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후진국과 개도국에게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AIDS 에 대한 예를 들고 있는데, 아프리카의 많은 죽어가는 에이즈 보균자의 치료를 위해서, 선진국은 의약품에 대한 특허권을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인권을 위해서 저렴한 가격에 주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지적재산권 분야의 강화가 결국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무장되면서 선진국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장하준 교수는 강조하고 있죠.

저도 법전공한 처지라, 막연한 의미에서 지적재산권은 지켜져야하는 것이라는 법치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지적재산권이란 것이 산업 분야에서 선진국이 개도국 혹은 후진국을 압박할 수 있는 장치로 악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막연한 부분을 상당부분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그 이외에도 IMF 가 우리나라에 강요했던 재정건전성이라든지 부채비율의 과도한 축소 강요 등이 지닌 신자유주의의 이중 잣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한 편이라기보다는 반대편이라는 이야기들 같은 것들을 통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생각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의 논거도 읽어봐야겠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현재까지는 유치산업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명백하다면, 분명히 FTA 는 재고해야할 사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아직까지는 더 알아가는 단계니까,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아무튼, 이 책 이후로 '쾌도난마 한국경제' 를 하루만에 다 읽었으니, 그 책에 대한 이야기도 바로 해볼까 합니다. :)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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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제인에어 납치사건(이하, 납치사건)]이라는 책에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은 역시, [제인 에어]를 읽고 눈에 이슬 한 방울 고여본 적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중 2 때 문고판으로 읽고 고 2 때 독서실에서 한 차례 더 읽을 때, 저는 살짝 맺힌 눈가의 이슬을 스윽- 닦아내면서 제인에어와 로체스터가 맺어진 것이 그리고 그들의 행복한 결말이이 너무나 좋고 또 좋아서 소리없는 웃음을 웃으며 - 독서실에서 소리 내면 안됩니다! - 책장을 살며시 덮었던 여운을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같은 이에게는 이런 점이 크게 어필하는 부분이겠고, 저같지 않은 - [제인 에어]나 고전 영소설을 많이 읽지 못한 - 이들에게는 이런 점이 꽤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만큼 이 책의 작가는 영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 혹은 영어권의 다양한 사건 사고를 왜곡 혹은 변형의 방법으로 계속적으로 꾸준하게 끌어내고 있습니다.

<혹시, 스트래트퍼드의 세익스피어와 런던의 세익스피어가 동명이인으로 존재하면서 2인 1역을 했다는 이야기라든지, 세익스피어의 서른 네 편의 희곡이 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로 다른 네 사람, 혹은 당대의 가장 훌륭한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세익스피어>라는 필명을 사용해서 쓴 글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납치사건]류의 책을 읽을 때, 독서가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배경지식이 어떤 의미에서는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저작물에 대한 접근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작이라는 것이, 타인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결국은 글쓰는이 자신의 개인적인 것을 기본삼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시대를 배경으로 서술된 사실적인 글의 경우에는, 글쓰는이와 독자의 배경지식과 시대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는 주어진 상태이므로 상대적으로 조금 더 쉬운 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개념에 근거하거나 혹은 동시대의 것이 아닌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글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힘겨운 글읽기를 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글쓰는 이가 던지는 배경을 흡수하고 나서 본격적인 읽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납치사건]이 가지고 있는 접근의 어려움은, <사실적인><소설>이 아니라면 어느 글이나 가지고 있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또는, 바꾸어 생각해보면, <사실적인><소설>은 <사실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소설 혹은 소설이 아닌 글> 보다는 독자의 폭이 축소되는 부분도 있으니, 그런 경우에는 어떤 의미에서 되려 사실적인 소설이 더 어려운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즉, [납치사건]에서 느껴지는 그런 생경한 부분은 어떤 글이나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며, 중요한 것은 [납치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매력?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글자체의 매력보다는 소위 <장르>의 매력을 가지고 책을 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요즈음의 독자들은 편식을 하는 듯 합니다. 물론, 내가 좋은 것을 내가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한다면 별로 드릴 말씀은 없지만, 혹시 처음부터 한가지만 먹다보니 다른 것의 맛을 모르는 경우가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할겝니다.

그렇다고, 마냥 잡식이 좋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흰 쌀밥보다는 잡곡밥이 건강에 훨씬 좋지 않습니까? (웃음)

그렇게 건너뛰다가 만난 [납치사건]의 매력은...


1. 소재의 매력입니다.

내가 만약 후치라면, [드래곤 라자]라는 책을 재미나게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입니다. 저는 후치 대신에 칼에 제 자신을 접목시켜봤지만, 그런 작중인물과의 동일화는 소설을 읽는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며, 매력적인 상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소재로 끌어온 것이죠. [납치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영문학사의 기린아들의 작품이 나옵니다. 때로는 영미문학 전공자도 생경한 인물도, 작품도 나옵니다. 그리고 유명한 작품들이 줄을 서서 책 속에서 아우성칩니다. 그 중의 몇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실제로 이(異)세계에서 이[this]세계로 뛰쳐나오기도 하며, 제인 에어도 이 곳 황량하고 삭막한 세상으로 뛰어나옵니다.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어느날 밤 자다가 꾼 꿈에서 만난 미래소년 코난과 그의 친구 포비, 그리고 저의 와이프만큼 매력적인 라나와 함께 즐기는 한밤의 유희. 꿈에서 얻을 수 있는 대리만족 만큼이나, 우리는 글이 주는 개연성을 통하여 또다른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 장르는 모름지기 개연성에 바탕을 둔 대리만족을 향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실주의적인 소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험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있음직한 일>일테고 그것을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일상이 아닌 <환상>에 기반한 환상 소설의 경우에는, 특히 인간 내면이 무의식중에 지향하는 이데아를 현대적인 말과 모양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납치사건]이 가지는 매력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인물의 매력입니다.

서즈데이 넥스트, 고서를 지키는 SO(특수작전망)-27의 비밀 요원, 크림반도에서 진행중인 영-러 전쟁의 참전 용사, 그리고 그 곳에서 오빠를 잃은 여동생.

주인공은 서즈데이 넥스트이고, 환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치고는 제일 현대적 의미의 다양성을 한 몸에(?!) 안고 있는 등장인물입니다.

톨킨의 환상 소설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전형적인 인물 성격을 통한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한 인물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미묘하게 드러내기보다는, 각 등장인물 한 사람마다 일개 인간이 지니고 살아가는 속성을 제각기 부여함으로써 등장인물 전체를 합쳤을 때 비로소 인간 한 개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 양상을 보여주는, 선굵은 혹은 전형적인 인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넥스트는 그와는 달리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 군인이고, 위험한 아버지를 두었으며, 상이용사에, 오빠와 약혼자를 전쟁터에서 잃고(?!), 그리고 하데스에게 끊임없이 유혹당하는 - 다사다난한 갈등의 양상 속에서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면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서즈데이 넥스트를 가운데 두고서, 허구와 허구 속의 허구에서 인물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면서 서즈데이 넥스트를 반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매력을 느낄 수 있는가. 인물 자체의 매력보다는, 인물이 시대와 주변의 인물들과 어울리는 양태를 통해서 매력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사실, 서즈데이 넥스트는, 현대소설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 이제 흔들리는 자아를 지닌 개인은 현대소설의 전형적인 인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놀라울 것도 없이... - 인물상입니다. 그녀를 봐서는 여타의 인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에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전형적입니다. 독특하게 보이는 바, 그들의 성향은 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범상하게 행동하고 범상하게 사고하는 서즈데이 넥스트를 통해서 우리는 좀 더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글 속에서 등장하는 제인 에어라든지 로체스터 이하 고전 소설 속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왜곡된 듯, 그러면서도 설득력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서즈데이의 눈으로 비춰줌으로써, 우리가 흔히 범하는 소설의 선명성(?)에 대한 오해를 비꼬는 효과 또한 가지고 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편안함의 매력

많은 서평들에서도 언급하는 듯 한데, 이 글은 고전적인 서술기법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잘 못느꼈지만, 영화적 서술 - 마치 영화의 장면 전환이나 화자의 시선 등 - 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그런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정보를 드리겠다는 차원에서이지요.

제가 느낀 편안함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흐름을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이 글의 주제가 뭐냐, 고 물으시면서 글을 혹평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글이 주제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큰 오산이지요. 이야깃거리는... 이미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단순히 주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닌, 글쓴이가 자신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글 속에 담궈두는 일인 것이지요. 그 의도가 주제 뿐이라면, 이 세상에 읽을 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납치사건]은 작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환상 - 정말로, 독자라는 사람들에게는 환상적인 - 의 세계를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을 잘 <풀어낸> 작가의 역량 덕택에 빨려들듯이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요즘 소설 쪽에서는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은 논쟁들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학적인가, 아닌가. 과연 문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학자들의 군자연한 사설을 늘어놓는 것 이전에,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문학은 무엇입니까? 저는, 요즘 독서 인구의 감소가, 글을 긍정적으로 읽기 보다는 일단 부정적인 시선부터 가지게 되는 풍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단점을 찾아보려는 독서의 태도,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독자-작가 간의 소통과 관계를 통해서 조금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수단 중 조금 더 의뭉스럽고 여백이 많은 수단인 소설 문학에서는 당연히 독자-작가 간에 암묵적인 긍정과 연합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작가를 일단 삐딱하게 보고, 작가는 독자에게 무례한...

말이 조금 엇나갔지만, 요는, [납치사건]은 다른 책보다도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글의 배경이 되는 영국 문학에 대한 약간 - 아주 약간 - 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글은 사전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니, 그런 면을 차치고라도 글은 재미있고 경쾌하며, 환상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도해 및 기존의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법들에서 상당부분 자유롭습니다. (그것을 몇 분은 영화적인 서술, 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런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재미있는 소설.

재미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협의의 것만은 아닐겝니다. 제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선배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짜릿하게 울리며 아릿하게 파고드는 그러면서 흐릿하게 마음 한 켠에 자리잡은, 그 이야기를 많은 이들은 감동, 전율, 공감 등의 표현으로 드러내겠지만, 광의의 의미로 그것은 결국 작가와 독자가 소통한 흔적이며, 그것이 바로 재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협의의 재미는... 광의의 재미의 의미 속에 당연히 포함되겠지요. 전율은... 시대를 관통하고 묘하게 반추하는 은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름대로 주제를 가지고 한 번 써봤습니다. [제인에어 납치사건]이 읽을만한 글이라는 것을 이 잡글을 읽는 이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니, 주관적인 여러 생각들이 개입하고 파고드는군요. 늘상 느끼는 것이지만, 감상/비평을 쓴다고 끄적대지만 결국 쓸데없는 잡글만 생산하는 제게... 이런 작업은 분명히 <창작> 활동의 하나이고, 많은 생각과 고민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 잡글을 읽는 <독자>분들과 소통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소통>은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 근원적인 의미이며, 비로소 우리의 행위를 유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되겠지요.


좋은 책, 꼭 사서 읽으시기를 권하며.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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