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공주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 지음, 최세민 옮김 / 기적의책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1. 이건 로맨스잖아?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공한 로맨스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기에, 현재진행형 상태인 로맨스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 쿨럭 - 끝이 나겠지만, 어쨌든 결혼에 이르는데까지의 로맨스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의 특징은, 그것이 더 이상의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난으로 점철된 노정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를 찬찬히 잘 뜯어보면, 그 속에는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난 따위는 없습니다. 짜릿한 스릴과 행복한 추억만 있을 뿐이죠. 마치, 선택되어 이미 그 끝에 도달한 갈림길이, 더 이상 갈림길이 아닌 행로(行路)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드래곤라자’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죠. 갈림길을 다 걷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이상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걸어온 흔적만 남아있을 뿐.

로맨스는 할 때에는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깨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싸우고 힘들게 갈등하고 맞지 않는 의견 때문에 잠시 떨어져있기도 하고... 그러나 성공한 로맨스의 뒤를 돌아다보면, 갈림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끝을 보았기 때문이죠. [화성의 공주]는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잭 카터와 데자 소리스의 되도 않는 인연,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그 어이없는 과정들. 우연과 행운으로 점철된 듯한 그 무수한 이야기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연인들에게는 과장이 아닌 현실 그대로의 담담한 회고일 뿐입니다.

두 연인에게 물어보죠. 당신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겪었던 그 무수한 기적은...? 기적이라뇨! 그건 우리의 사랑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필연인게죠.


책을 다 읽고, 찌릿한 느낌이 들었던 바로 그 이유는, 두 연인이 겪었던 필연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실은, 우리, 가요의 사랑 가사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에 너무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사랑에 대한 진지하고 아릿한 감정을 고민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현실에서 얽히는 인스턴트 식의 사랑들. 작고 큰 갈등 속에서도 금새 깨어지고 갈라지는 사랑의 양태들. 그런 것들의 무수한 편린이 제 주변을 싸고 도는데, 그 속에서 내가 고구할 진실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화성의 공주]는 이 시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에 대한 환타지를 화성이라는 낮선 공간에서 엮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제게는 너무나 당연해보이고, 그들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 가슴속에서 불끈거립니다. 비록 그들의 이야기는 세부적이지는 않습니다. 100여년 전의 소설이라, 묘사보다는 서사에 기댄 이야기의 전개가 마치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그냥 주욱 훑어간다는 느낌, 그 생경함이 글을 읽는 내내 독자의 한 쪽 마음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십 차례의 전쟁을 거친 군인 잭 카터가 현대인처럼 너무 복잡하게 고민한다면, 혹은 화성의 연인인 데자 소리스가 지구인처럼 조변석개한다면 그 이야기가 더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글을 읽다보면 그네들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 안으로 부나방처럼 뛰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차라리 차오릅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을 잊고, 나의 사랑을 위해서 나를 사랑에 쏟아붇는 그런 것 말입니다.

[화성의 공주]는 사랑을 이루어낸 사람이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로맨스소설입니다.


2. 그런데 우주?

그러나 아마추어 독자가 ‘이 글은 로맨스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작가나 글의 명성이 좀 크네요. 저는 장르에 대해서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시작 격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인 에드거 R. 버로우즈는 [밀림의 왕자 타잔]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작가이구요.

그러나 제게 그런 것들은 유의미한 이야기들은 아니고, 다만 우주라는 공간이 제게는 낯선 공간이라는데 주목해 봅니다. 우주라는 곳이 뭔가 큰 함의를 담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다만 비현실적인 공간일 뿐이라는 말이죠. 요즘에야 화성이 엄연히 현실의 일부가 되고 있기는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우주여행을 가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제게는, 그리고 작가에게는 우주가 다만 이곳이 아닌 저 곳이었을 뿐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나니아 연대 이야기]의 장롱 속이나, 혹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9와 4분의 3 플랫폼 너머의 세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화성의 공주]는 환타지의 비일상성과 상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겠지만... 글 속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이성’과 ‘감정’의 대립과 관용이라고 여겨집니다.

보통 환타지에 들어서는 이야기는, 일상성을 제거해야하는 것들일 때가 많습니다. 매일매일 일어나고 경험하는 일들을 말하기 위해서 환타지의 공간을 빌릴 필요는 없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를 굳이 환타지의 공간 안에 펼쳐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환타지 속에 알레고리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환타지는 그 곳에서만 유의미한 이야기들을 따로 가집니다.

[화성의 공주]에서는, 박약한 제 이해로는,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정이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모습이 가장 많이 보입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라면, 누구나 한 몸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낼 수 없는, 그리고 늘 화합된 형태로 나타날 뿐인, 동전의 앞뒷면 같은 인간의 두 가지 중요한 성질 말입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감정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더 좋은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합리성에 기반한 단어인 이성, 에 대비될 수 있는 단어나 의미가 딱히 떠오르질 않아서, 조악하나마 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합리성의 반대항에 비합리성을 두시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야성(野性) 정도가 대비항으로 적합할 듯 하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는 녹색인과, 한 번 고민해보는 적색인은, 우리가 무언가를 놓고 고민할 때마다 - 가령, 오늘 저녁에 라면 하나를 끓여먹고 내일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 햇살을 맞이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배를 곪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잠들지만 기분 좋은 아침밥으로 배를 채울 것이냐 같은 - 좌뇌와 우뇌 뒤에서 펑, 소리와 함께 나타나서 서로 티격태격되는 악마와 천사의 모습과 그닥 크게 차이나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대립과 관용은 글에서 줄곧 드러납니다. 마치 우리가 숨 쉬듯이 대립하고 관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글이 이쯤에서 그냥 끝난다면 별 재미가 없겠지만, 작가는 저지르기 전에 사고하는 독특한 녹색인 - 타르스 타르카스 - 과 불타는 야성으로 사랑을 향해 갈구하는 적색인 - 데자 소리스 - 의 사이에, 적색인의 몸과 녹색인의 심장을 가진 잭 카터를 두고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행동의 연속과 우연한 선택의 결과로 인해 얻게 되는 해피엔딩은, 인간이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삶의 불합리성을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주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실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잖습니까? 뭔가 시의적절치 않은 어리석어보이는 행동을 계속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으니까요.

우주라는 공간은, 아직 신화가 현실에서 똑 부러지게 분리되지 못한 19세기 말~20세기 초엽에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상정하기에 적절한 만큼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의 신화가 씨줄과 날줄처럼 현실과 얽혀들어 현상의 알레고리로 읽혀졌던 바, 우주라는 공간은 그 시대의 이러한 우화성을 극복하면서도 현실에서 일정부분 거리를 두는 공간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굳이 중간계 같은 이세계(異世界)를 만들지 않아도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충분히 이야기 할 만큼, 우주는 그런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은 우주가 현실의 일부분으로써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환타지의 공간보다는 조금 더 밀접하게 현실과 연결되어있는 것과는 대비해서 말입니다.


읽기 부담스러울 만큼의 긴 글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요즘 글들처럼 세련미 넘치지는 않는 글이지만, 읽고 나서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꽤 강렬하였습니다. 글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은 바, 잭 카터를 주인공으로 한 몇 권의 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꼭 한 번 구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잭 카터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갈구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을 가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하)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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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잔의 창조자, E.R.버로우즈의 스페이스 오페라 [화성의 공주]
    from 즈믄누리 :: 도깨비들의 巨城 2008-06-20 01:46 
    1. 이건 로맨스잖아?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공한 로맨스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기에, 현재진행형 상태인 로맨스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 쿨럭 - 끝이 나겠지만, 어쨌든 결혼에 이르는데까지의 로맨스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의 특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