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 (양장) -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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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매력

 

다양한 색채를 가진 많은 환상 소설이 있지만, 그 중 많은 수가 J.R.R.톨킨의 세계관에 기댄 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환상 소설에서는 해묵은 엘프와 드워프의 알력이 당연하다는 듯이 소개되고, 유쾌하고 즐거운 하플링의 매력을 이 장면 저 장면에서 등장시키는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환상이 그렇지많은 않습니다. [어스시의 마법사] 같은 환상도 있고, [미드나이터스] 같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디스크 월드] 같은 것도 있네요. 혹은... [어셔 가의 몰락] 같은 몽환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톨킨의 세계관이 많은 환상 소설의 전범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인간 본연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하나의 사람, 사건, 혹은 사유를 겪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틀에 의해서 드러나는 표상은, 결국 인간 본래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깨끗하게 주어졌던 마음판에, 이것저것 가필을 하다보면, 유달리 드러나 보이는 글씨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보면, 그것으로 사유하게 되겠지요. 그 사유가 개인차를 드러내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타자와 교류하기에 상당한 물질적/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혹은, 글을 쓰는 이들도, 인간 본연의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그의 마음판에 진하게 표시된 글씨들이 자신의 작품에 의식적으로/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형광펜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한 때는 그것에 소명을 두고 글쓰기를 하기도 하였더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소명에서 약간은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간'이 진정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의심케되는 얼척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네요) 그래서, 물론 자신의 사회적 사유와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글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사회와 상황으로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조금은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서 환상 소설은 쓰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와 레콘, 도깨비를,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하플링으로 치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와 레콘, 도깨비를 실은 우리의 한 몸 안에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가와 나머지 세 선민종족이 대확장전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환상 소설은,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본연의 갈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기제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영도 씨의 소설이 있습니다. 

 

 

다름을 긍정하기 

 

[눈마새]의 가장 큰 주제는 바로 '다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긍정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나와 타자(他者)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다른 표현으로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다른 작품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실은, 나는 나'들'인 것이죠. 나라는 존재가 나답게 되는 것은 바로, 나의 옆에 있는 타자를 긍정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애써 부인하려해도, 나는 누군가와 더불어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삶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옆의 타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곁에 있는 타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수가 아닌 셈이죠. 

 

작가는 [눈마새]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동생이 적을 말살하는 것을 보면서, 왜 나의 동생은 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더불어 지내갈 수는 없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적들에게 다가섭니다. 그러한 노력이 두 번 배신당하고, 세 번째의 배신을 앞에 둔 지금, 그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품내내 작가는 한결같이 넷을 모읍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에, 하나는 셋을 부릅니다. 그렇게 모여진 넷은 마치 윷놀이에서 윷가락을 놀듯이 놀아집니다. 선민종족 넷이 함께 나와 너가 다름을 받아들이고 용납할 때, 넷의 놀이는 비로소 오롯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실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나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것이라고 여기라고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지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에게 제한과 족쇄를 두는 것이 죄 (양장본 4권, 316쪽)

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것인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양장본 4권, 316쪽)

은 애써 제한하며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할 때 완전함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에, 하나는 셋을 부르기에. 우리는 셋이 되어야하고 셋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넷이 되어 함께 '날고, 까불거리고, 부딪히고, 굴러야' 합니다. 그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오던 인간은 긍정될 수 있습니다. 함께 했기 때문에.

 

 

끝없는 변화로 완성되기

 

이영도라는 작가가 가진 가장 놀라운 덕목은, 장쾌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한 조각 한 조각에서 의미가 끄집어내어진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계속하여보자면, 그 남자는 결국 세 번째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고, 기온이라는 자연 방벽 앞에서 서로 마주하지 않고 살아왔던 네 선민종족이 팔백년만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마주보게 됩니다. 실은 그 때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팔백년동안 교류없이 지내왔던 네 선민종족이 어떻게 서로 대화할 수 있었는지...

 

우리만해도, 당장에 백 년 전에 사용되는 언어가 지금의 언어와 다릅니다. 의미가 다르고 용례가 달라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눈마새]의 세상에서는 팔백년동안 서로 전혀 접촉없이 살아온 두 사회가, 팔백년 전과 같이 변화없이 지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어야 합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 - 혹은 등장인물을 보살피는 - 이 일갈하는 것처럼, 소설 속 사회는 팔백년동안 변화없이 흘러온 사회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에서야, 등장인물의 입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소설 속 이야기에, 작가의 이야기 구성 역량에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마도 제가 그러한 작가의 설정을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변화라는 것에 민감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겠죠. 다른 말로는 현재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삶이 이미 익숙한 것일 수도... 

 

이미 작가는 다른 글에서 '변화하는 것이 아름답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물론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작자들이 말하는 완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일 겁니다. 그런 자들이 말하는 완전성은 고정이고 정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 완전성은 어쩌면 무수한, 끝없는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양장본 4권, 398쪽)

우리들은 완성을 목적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좋은 대학으로, 안정되고 더 좋은 직장으로 완성된 삶을 원합니다. 그래서 꿈을 물어보면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공무원으로서 무엇을 향하여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공무원이라는 완성된 삶을 의욕할 뿐, 그것을 발판 삼아 새로운 변화를 향한 꿈을 꿀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고정이요, 정체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썩고 쇠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새로운 완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타자와의 끊임없는 어울림을 통해서, 비록 그 다름 때문에 힘겹고 벅찬 나날이 계속되겠지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가는 인생. 그런 변화를 꿈꾸는 삶 자체가 바로 진화하는 완성의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제와 이야기의 유리

 

그러나, [눈마새]의 가장 큰 흠결은, 작가가 가슴에 품고 이야기하는 주제가, 기나긴 이야깃속에 묻어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작가는 그 탁월한 역량대로, 인간과 도깨비, 나가와 레콘이라는 믿을 수 없는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세계관이 맞물려 만들어 낸 세계는, 어느 유명한 작가의 세계와 비교해보아도 탁월한 이야기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이야기공간에만 몰두할 뿐, 막상 이야기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작가가 너무 똑똑한 등장인물들을 두어 - 칼 헬턴트나 라수 규리하 같은 - 그 인물들의 입을 빌어 모든 것을 설명할 때까지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를만큼 작가의 이야깃거리가 너무 다채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가, 계속 자가발전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라는 아쉬움도 표시해봅니다. 결국,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나, 끝없는 변화로 완성을 의욕하겠다는 것은, 작가의 유명한 작품인 [드래곤 라자]나 [퓨처 워커]의 해석판 정도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이야기가 길게 유장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독자는 작가와 끊임없이 공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눈마새]는 마치 재미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중에 끝나기 3분 남겨두고 중요한 공식을 알려주는 수학 수업과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의 주제를 알려면 끝의 마지막 백 쪽만 읽어도 됩니다. 그 중에서도 세리스마와 라수 규리하의 대화만 봐도 됩니다. [폴랩]처럼, 급전직하의 결말이라는 아쉬운 평을 받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그렇게 결말지었다면 아마 더 다채로운 독자의 상상 - 과 아쉬움 - 의 여지를 주었을텐데... [눈마새]는 독자의 아쉬움이 없는 대신 - 이야기 자체는 너무 재미나기 때문에 - 여지를 느끼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10년이 흘러버린 이야기

 

벌써 [눈마새]가 출간된지도 1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출판사 측에서는 10주년 기념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듯 합니다. 그만큼 이영도라는 작가가 가진 파급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터이고, 한편으로는 이제 새로운 작품을 출간해서, 기념판으로 독자를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간간히 짧은 단편으로 독자를 만났지만, 이제 이영도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환상 소설을 상징하는 키워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와는 별개로, [눈마새] 같은 이야기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는 평가받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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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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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그마치 500페이지짜리 책입니다. 두께도 보통 두꺼운 책이 아닙니다. 들고다니기에는 조금 벅찬, 그러나 책의 크기는 보통 우리가 들고다니는 신국판 사이즈보다는 작은, 문고판보다 조금 더 큰 크기를 가진 책이었습니다. 즉, 작고 뚱뚱해보이는 그런 책입니다. 

 

책은 정말 술술 잘 넘어갑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 사건을 교차하여 서술하면서 전개됩니다. 이야기 하나는 2005년 5월 2일, 알란 칼손이라는, 100세의 나이를 맞이하게 된 할아버지 하나가, 뒷방에서 늙어가는 것에 큰 회의와 고민을 가진 끝에, 자신이 기거하던 양로원을 탈출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또다른 하나는, 1905년 5월 2일, 알란 칼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인생을 살아내면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것입니다. 2005년의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다가, 1905년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고... 이런 식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한 60여쪽을 읽고 나서 문득 떠올렸던 책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떠올렸던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 였습니다. 허구 속에 또 다른 허구가 자리잡은 듯한 이야기가 계속 펼쳐지는데, 그 허구인 듯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을 가로지르는 놀라움을 주는 이야기가, 제게 두 편의 다른 작품을 생각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너무 재미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훈이 되거나, 등장인물과 공명하거나, 혹은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은 아니지만, 어린이의 상상력으로 감성으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말괄량이 삐삐의 모험] 같은 그런 느낌 말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처음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참 감동하면서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거친 질곡어린 삶, 그 속에서 그가 가진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과 마음을 통해, 역사는 물결쳐 흘러가지만, 사람은 여상한 모습으로 잠잠히 역사를 관조하며 서 있을 수 있는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영화입니다. 물론 그 감동을 가지고 두 번째 집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 감동이 밋밋하게 깔리는 그런 느낌을 받아 조금 속상했지만...

 

그러나, 이 책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나 [포레스트 검프]가 주었던 감동, 유쾌함에서 약간 비껴서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공인 알란 칼손이 주로 하는 일은 원자폭탄 제조법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원래는 니트로글리세린 혼합법을 배웠더랬습니다. 그걸 가지고 일을 구하고, 사람을 사귀고, 스페인에 건너가서 프랑코를 만나고, 그의 소개(?)로 미국엘 건너가서, 구금되어 있다가 이민국 관리의 연줄을 타고 로스엘러모스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오펜하우어 박사에게 핵융합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후로, 알란 칼손은 가는 곳마다 그의 원자폭탄 제조 비법(!)을 전수합니다. 그의 모국인 스웨덴에서, 소련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알란 칼손의 인맥은 바로 원자폭탄이 만들어 준 인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책에서는 주인공의 우연과 걱정없는 성격이 그런 놀라운 경험의 밑바탕이 된 것인양 꾸미지만, 실제로는 주인공의 (원자) 폭탄 만드는 기술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감정이 희미한 까닭은, 현재의 주인공 나이가 100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인양 여겨지는 그 어마어마한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 살 쯤 살면, 이제 속세(!)에서 홀연히 떠나 곧 아름다운 천국/이상향/낙원으로 접어들어야 하는 나이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들을 모두 한 줌 먼지처럼 여기고는 다음 생애를 준비하기에도 바쁘니... 이제 그가 짊어지고 온 질곡어린 삶을 저멀리 던져버리자라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백 살 쯤 되어서 자신의 그런 잔인한 삶에 대해서 어떤 회한이나 안타까움도 갖고 있지 못한 백 살의 노인을, 백 살 쯤 살았으니까 놔 줘도 되는 것입니까? 

 

이 책의 문제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백 살 노인의 새출발(!)을 독자들은 모두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저지르는 불법, 살인, 그리고 일탈까지 모두 용서할 수 있는 것이죠. 심지어는 주인공이 현대사를 거쳐오면서 겪은 폭력, 전쟁, 이념의 대립, 투쟁의 장면까지도 모조리 희화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유쾌, 상쾌, 통쾌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이것이, 이 책의 이야기 밑에 깔려있는 생각이라면 참 곤란합니다. 원자폭탄이면 어떻고 살상이면 어떠하리, 이제 주인공은 백 살 노인이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는 중에 있는 마땅히 응원받아야 할 사람인데. 이것이, 이 책의 주된 생각이라면 더욱더 곤란합니다. 19세기의 정신으로 20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과 제도와 질서 아래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19세기의 정신을 반성하고 20세기의 법과 제도와 질서를 냉철하게 평가하여, 21세기를 21세기 답게 맞이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입니다. 그냥 묻어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살아온 당대를 평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백 살 노인의 새출발 노정에 스쳐가는 놀라웠던 인생길 정도로 평가해버릴 수 있는 20세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평가와 반성,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그동안 있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더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인류의 삶에 가장 위협적인 물질이자 도구인 원자력이, 한 노인의 인생을 그렇게 화려하고 유쾌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책을 쓴 작가의 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 연장선에서 주인공의 과거에나, 현재에나, 옆에 살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것은, 그 죽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지간에 상관없이, 책을 읽는 내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평가하지만, 책은 술술 잘 읽힙니다. 출판사의 서평이나 여러 독자의 평가대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뿐입니다. 조금만 냉정한 눈으로 책을 바라보면, 더 이상의 평을 할 수 없는 그런 책입니다. 차라리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나 [포레스트 검프]를 다시 한 번 보더라도 이 책의 유쾌함도 얻을 뿐만 아니라, 찝찝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듯 하네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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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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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시공사 책이네요. 실은 알면서도 읽었지만, 요 근래에는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팔아주어선 곤란하겠다, 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시공사 책으로 감상글을 쓰는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봅니다. 

 

 

 

[예루살렘 전기]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일대기입니다. 마치 사람의 일대기처럼, 약 3000년 전에 생겨나 긴 시대를 겪어온 예루살렘이라는 땅의 이야기를 연대기 형태로 쓴 것입니다. 

 

이 책의 서술 의도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 나온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누구의 땅도 아니라, 그 땅을 살아낸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수십 쪽의 에필로그를 위해, 저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처음으로 거주민이 자리잡은 때를 시작으로 해서, 그 땅을 거쳐간 수많은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 연대기 순으로 주욱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내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다만 유대인의 도시라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지 예루살렘이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라서가 아닙니다. 종교와 함께 그 땅을 살아내었던 민족이 가진 그 땅에 얽힌 인연과 이야깃거리가, 그 민족과 강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이제 그 땅은 한 공동체를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의미있고 가치있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죠. 시리아 사람들에게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유대인들에게도 그 땅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연결되어 가치를 가지는 땅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책은 정말 깁니다. 성경의 구약 시대와,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의 함락,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부분까지는 흥미롭게 읽힙니다. 오리엔트 땅을 살아내었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거쳐갔는지는 새로운 관전 포인트입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는 조금 밀도가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랍의 역사는 약간은 많이 생소한 부분이기에, 제게도 꽤나 생소한 편이고, 그래서 밀도가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부터 현대의 '6일전쟁'까지, 이야기는 줄기차게 이어지기 때문에, 흐름을 놓치면 읽기가 쉽잖습니다. 게다가, 저자는 가깝게 자리잡은 사건들은 그 연대기를 바꾸기도 합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나오는 사람, 사람들. 고유명사의 홍수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자연스레 책을 읽던 눈은 감기고, 책갈피를 찾아 북마크해두고는 잠을 청하게 됩니다. 

 

대신에 저자는 어마어마한 사료를 토대로 예루살렘에 얽힌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흥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많고, 잘 읽어내면 아랍의 여러 시대를 한 번에 아우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800쪽에 가까운 분량은, 한 번에 책을 읽어내려가기에는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저도 한 달 정도 꾸준히 읽다가 15세기 접어들면서 흐름을 놓치고는, 결국 놓친 흐름 그대로 끝을 보았습니다. 조금 정제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을 조심스레 피력해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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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반란 - EBS 다큐프라임 화제작!
EBS <놀이의 반란> 제작팀 지음 / 지식너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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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시공사의 임프린트 책이네요. 실은 알면서도 읽었지만, 요 근래에는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팔아주어선 곤란하겠다, 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시공사 책으로 감상글을 쓰는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봅니다. 

 

 

[놀이의 반란]은, EBS의 동명의 기획 프로그램 3부작을 책으로 옮긴 것입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책을 읽으면서 EBS에서 방영한 3부작 중 첫 편을 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놀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실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교육에서 잔뼈가 굵은 지라, 계속 아이들을 이런저런 경로로 맡게 되는데, 아이가 가지고 있는 학습 상황에서의 문제점을 찾아올라가다 보니까, 너무 빠른 사교육의 투입, 혹은 어른주도적인 교육 방향의 결정 등이 그 이유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하다보니, 제가 어릴 때 놀던 것들이,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 때는 놀면 되지 않은가, 나도 꽤나 놀았는데, 라면서 말이죠. 그런 막연하던 놀이에 대한 생각이, 보드게임이라는 놀이 수단을 알면서 조금 구체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교직에 들어서면서는 제 경험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대한 투입과 산출로써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아이들에게 놀이가 놀이 그 자체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으며 그것이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서 문제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사전에서는 놀이를 "신체적, 정신적 활동 중에서 식사, 수면, 호흡, 배설 등 직접 생존에 관계되는 활동을 제외하고 '일'과 대립하는 개념을 가진 활동"으로 규정하고, (중략) 아이들에게는 사회의 습관을 익히고 심신을 발달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놀이 (후략). (p 6)  

놀이가 가진 가장 유의미한 개념은, 바로 놀이가 사회성을 익히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놀이가 인지능력에도 창의력에도 유의미한 효과를 드러내겠지만 (p 8), 놀이는 함께함으로써 놀이하는 대상에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회성의 신장을 돕는 역할을 한다는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많은 곳에서 놀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부모는 기왕에 노는 것에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틀을 입히길 원하고, 많은 사설 기관에서는 이런 부모의 니즈에 부합하는 '교육적'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공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놀이의 이익도 누리고, 교육이라는 열매도 따먹으려는 이런 시도는, 실제로 아동들이 제대로 놀지도 못하면서, 교육적 프로그램이라고 하는것이 끼치는 교육적 효과에 대한 실체도 확인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도대체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책은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놀이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겠다는 목적 의식을 버리고, '그냥 놀아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냥 놀아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놀이를 빙자한 이런저런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놀이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계량하고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당연히 없습니다. 다만... 어릴 적에 행복하게 놀았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른이, 아닌 어른들보다는 더 행복해하지 않는가라는 경험에 기댄 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릴 적에 정말 걱정 근심 없이 행복하게 놀았던 제 기억으로는, 이 책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을 계기로 놀이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보고, 학교에서 실제로 놀게 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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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엘 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된 것은, 동학년 선생님 한 분이 방학을 맞이하여 20일 정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돌아보는 해외여행을 떠나시며, 옆 반 선생님은 11월에 결혼하시고 바로 1주일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돌아보는 신혼여행을 떠나신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떠오르던 차에, 요즘 장안의 화제인 [꽃보다 할배]를 지속적으로 보고 있노라니, 프랑스를 가는 것은 박봉 신세에 쉬운 일은 아닌데, 일본 정도라면, 저가 항공사와 게스트 하우스를 잘 이용하여 비수기에 떠난다면 괜찮겠구나, 라는 생각의 꼬리 끝에 피어오른 한 떨기 꽃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여행의 목적은 역사적인 유물이나 유적과 관련된 것이어야하니, 기왕이면 일본의 천년고도인 교토 쪽으로 일정을 잡자,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마침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가 나왔길래 얼른 사서 보고야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토는 3권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안타까왔지만, 조금 기다리면 3권도 보란듯이 나오겠죠. 



유홍준 교수의 책은 언제라도 실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 20대의 가장 기억에 남는 독서라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꼽겠습니다. 역사를 지식으로, 머리로, 앎으로 좋아하는 이들은 많지만, 역사를 발로, 눈으로, 마음으로 받아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그랬더군요. 이 땅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민족의 발자취를 좋아한다고 곧잘 떠들어냈지만, 막상 발로 거치고 눈으로 응시하고 마음으로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찰나에, 1995년엔가 처음 접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과 2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은 관조적인 시선을 띄고는 있지만, 제 휴가의 대부분은 아직도 이 땅에 발딛고 살아간 분들의 흔적을 쫓아다니기에 여념이 없네요.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적인 개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나의 조상은 한반도 땅에서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비슷한 사고과정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니, 그 동질감이 작다고 하기는 어려움이 있겠지요. 그런 유홍준 교수가 일본 답사기를 써 냈습니다. 


일본편을 읽으면서 가장 깊이 생각했던 것은, 일본 역사에 대해서 참 무지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탓에 일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일본에 대한 이야기에 애써 귀기울이려고 하지 않은 탓이 가장 클 겝니다. 책을 잡고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이, '규슈가 어디지?' 라면서 애써 책의 안팤을 뒤적거리면서 규슈의 위치를 머릿속에 넣는 것부터 했어야 하니까요. 


 유형이든 무형이든 문화 유산의 보존에서 절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진정성이다. (p 317)

그렇게 쓰여진 일본편 1 규슈 - 빛은 한반도로부터, 는 규슈에 처음 발디딘 '도래인'의 흔적을 찬찬히 밟아나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한반도 땅을 거쳐 일본에 새로운 청동기 문화를 이루어낸 야요이 인들,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백제인들, 가야인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끌려가 생활도자 문화를 비롯한 일본의 도자 문화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조선인들. 그렇게 현해탄을 건너 규슈 땅에 들어선 한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흔적을 통해, 일본 땅에 이루어진 문화에 한반도의 사람들이 기여한 것에 대한 자부심, 그러면서 그것을 받아서 더 나은 것으로 바꾸어내기도 한 일본인들에 대한 경탄이 이 책에 함께 묻어 있습니다. 


단순하게, 일본의 문화를 우리나라 것의 아류로 볼 것도 아니요, 일본의 더 낫게 평가받는 - 예컨대 도자 문화 - 문화를 함부로 폄훼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와 중국의 조공 문화를 그 문맥의 이해 없이 단순하게 갑과 을의 관계로 치환하여 낮추어보려는 시선과,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다양한 문화의 양상을 단순하게 중국의 아류 쯤으로 폄훼하는 시선을 준엄하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충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의 이런 생각 아래에는, 문화 유산을 바라보는 저자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저런 감정으로 한껏 거칠게 이야기해대고 있지만, 그러나 당시를 살아낸 이들도 과연 그랬겠느냐,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영향을 받으면서 공존공생해나갔던 모습과 마음을 보면서, 저자는 진정성을 가지고 문화 유산을, 그리고 문화 유산이 드러내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옛 조상 사이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책의 가장 좋은 점은, 모든 시각적 자료가 컬러라는데 있습니다. 물론... 요즘 나오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전부 컬러더군요. 그러나 1권부터 5권까지 당시에 사 보았던 제게는, 6권부터 바뀐 양질의 종이에 컬러로 된 인쇄가 썩 마음에 듭니다. 한껏 들뜰 수 있거든요. 


또한 저자는, 문화 유산에 얽힌, 혹은 문화 유산과 관련 없더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박하게 풀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 하나 나옵니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라.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p 298)

문화 유산을 발로 찾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만지는 것이, 결국은 遊於藝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나 안타까웠던 것은, 저자가 일본과 우리나라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약간은 꼰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유홍준 교수의 '진정성'이라면, 충분히 별 말이 없어도 독자들을 이해시켰을텐데... 이 책이 나오게 된 시간적 배경인,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학적 관계가 굉장히 좋지 않은 시기임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꽤나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독자를 '납득'시키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잔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같은 분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이런 책들을 써내려간다면, 양국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가깝지만 먼 관계성에의 인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일본의 벼농사 및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야요이 문화의 주요한 유적지인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을 다녀온 것, 그리고 일본의 도자 문화의 혁신을 가지고 온 조선 도공들의 삶의 궤적을 훑어 본 것, 그리고 일본 메이지유신의 중심지 가고시마 답사기, 그리고 백제의 왕족이 건설했다고 알려진 마을인 미야자키 남향촌 답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석기라든지, 조선 도공의 발자취 같은 부분들이 일본 역사의 주된 흐름에서 비켜서 있는 부분인지라, 2권과 3권을 더욱 기대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 겨울에 교토를 다녀오려면 어서 빨리 3권도 나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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