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 천천히, 조금씩, 다 같이 행복을 찾는 사람들
나유리.미셸 램블린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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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핀란드에서는 이렇게 뒤늦게 원하는 공부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나이 제한과 같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돌아왔는지, 몇 년이 걸렸는지보다는 그 사람이 꿈의 결승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세상이 정한 시간표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한 시간표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행복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106-107쪽) 

핀란드 교육에 대한 관심은, 한 5~6년 전엔가, [시사IN]에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던 한 핀란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나서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그리고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운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사교육 바운더리에 오랜동안 머무르면서, 초등학교 교사를 준비하던 제게는 눈에 띄는 커버스토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OECD의 위탁을 받아 PISA에서 실시하는 평가에서 늘 최상위권을 달리는 핀란드. 인구 6백여만명의 작은 북유럽 국가인 핀란드가 왜 이렇게 강력한 교육의 성취를 드러내는지는, 같은 PISA 평가에서 늘 최상위권을 달리지만, 핀란드에 비하면 그 교육적 성취가 덜 돋보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목할만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라는 책을 재미나게 읽은 후에, 교보문고를 서성이다가 이 책,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책을 고르는 패턴 중에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후, 첫 부분을 읽다가, 이거다 싶으면 책을 반납하고 사서 읽는 것입니다. 이 책도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렸더랬는데, 첫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결국은 구매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해 알 수 있다. 역으로 삶에 대한 가치의 차이는 곧 무엇을 소비하는가에 대한 차이로 이어진다. (중략) 그러므로 핀란드 사람들 모두가 검소하고 소비 지향적이지 않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남의 시선보다는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해 삶의 질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취미 활동이나 여행 등의 소비에 우선 순위를 정한다는 점에서 핀란드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 엿볼 수 있었다. (188-189쪽) 

그러나 막상 구매하고 읽어본 후, 빌려 읽어도 무방하였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런 류의 책은 저자의 주관에 강력하게 매여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저자가 핀란드 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고민한 부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세상 사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저자의 생각은 제 생각과도 비슷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핀란드에서 수 년간 살아온 저자가, 핀란드 안에서 주목한 부분은 제게도 인상적이었으며 충분히 공감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통하여 얻고 싶은 것은 저자와의 공감대 형성은 아닙니다. 주관성이 조금은 배제된, 그래서 날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얻고 싶은 것이지요. 저자가 보고 느낀 핀란드에 공감하고, 그런 생각과 문화, 삶의 방식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나라도 바뀌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독자인 제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덜 가공된 정보입니다. 

 

결국, 핀란드의 다양한 사람 중심의 삶은, 핀란드라는 국가 공동체가 오랜 기간동안 만들어온 결과물입니다. 그것이 좋아보이더라도, 우리 공동체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덜 가공된 것들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관이 결여된 정보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정보가 선택되는 순간, 저자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가 핀란드라는 나라, 그 삶 속에 너무 깊이 몰입해있음을 내내 드러내는 책입니다. 책을 그저 읽으면, 핀란드에서 살아보고 싶다, 라는 그런 감정이 깊이 들어오도록 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핀란드에 갈 수 없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결국 이 책을 통하여, '핀란드는 좋은 곳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책들이 실은 다 그렇겠지요. 

 

 

다만, 저자가 소개하는 몇 가지 핀란드의 현상들 - 시간은행, 로뿌끼리, 사우나와 코티지 등 - 은 우리 사회에서도 한 번 쯤은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특히, 사우나와 코티지가 현재 우리나라의 캠핑 문화 및 자연휴양림 등과도 매치되는 부분들도 있어서, 이에 대한 운용의 측면에서 조금 더 정책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면, 우리도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왕따를 예방하기 위한 핀란드 정부의 노력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취학 아동들에게 입학 전 언어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중략) 핀란드 사회가 이처럼 어린아이의 언어 능력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말하기가 곧 사회성 발달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략) 아이가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미취학 아동기 때부터 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이러한 제도는 왕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98-99쪽)

핀란드가 이런 곳이구나, 이런 문화와 이런 삶, 이런 생각들이 있는 곳이구나, 라는 것을, 조금은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으신 분들이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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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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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한 남자의 눈이 갑자기 멀어버렸습니다. 마치 우유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백색의 세상만을 보게 된 그 남자. 그런데 그 남자가 만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눈이 멀기 시작합니다. 점차로 눈이 멀기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전염을 걱정한 정부에서는 최초로 눈이 먼 사람들부터 폐허로 변해버린 정신병원에 이들을 차례차례 가두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서히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늘어가는 가운데, 이 세상을 여전히 볼 수 있는 한 사람, 그는 바로 첫 눈 먼 사람이 찾아갔던 병원 의사의 아내였습니다. 


곧, 모두가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세상. 그 곳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존재인 한 여자. 이 책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눈 먼 사람들끼리 모인 격리 공간 속에서, 총을 기반으로 한 권력이 생기고 그로 인한 착취가 발생하였던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너무 안일하게 읽어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혹은,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눈 먼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서로가 어려운 처지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바깥 공간에서 전염을 걱정하며 총부리를 겨누는 군인들에 의해, 시민으로써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필요 이상의 부당한 대우를 받는 눈 먼 사람들. 당연히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을 가진 한 사람이 병실 사람들을 규합하고, 집단을 이루어서, 배급을 통제하고, 성을 착취하는 부분에서, 제가 참 안일하게 세상을 긍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세상은 합리적인 모양새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모순이 모순을 덮어 더 큰 모순으로 돌아가는 사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바람에, 이제는 더 이상의 놀람도 사치스러운 사회. 실은 그런 사회를 이미 살아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불합리와 부조리를 마치 눈 먼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눈을 뜨고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를 두 눈 속에 똑똑히 담고 있는 사람에게,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는 말은 지나친 비아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마치 세상의 모든 눈물을 마셔버리는 왕이 되어 죽음에 이르러야 할지도.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그러나, 한 편으로, 눈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담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학교의 아이들에게, '10분 동안 눈을 감고 지낸 후 느낌 써보기'라는 글쓰기 주제를 내주었더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의 아이들에게는 10분간 눈을 감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었나봅니다. 


눈을 감으면,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는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들리지 않는 것, 냄새 없는 것보다는, 경험상 더 힘든 고통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는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인이, 잿빛 세상이 아닌 우윳빛깔의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여인은 자신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삶. 실은 생각보다 어렵고 슬픈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상 두리번거리면서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눈을 감아도 자신을 향해서 시선을 두지 못한 채, 다음의 스케쥴을, 내일 할 일을, 오늘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도망가버리곤 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발휘하였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용기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인의, 검은 안대를 한 노인에 대한 용기는, 자신을 솔직하게 응시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눈 먼 것 같은 우리, 우리들.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서글프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여서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모두 눈을 뜰 수 있게 되겠지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게 되겠지요. 



그 동안 소설을 멀리하였습니다. 눈을 세상에만 두었지, 내 자신에게 눈을 두질 않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 소설을 다시 읽어내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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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아이들 - 내면의 야성을 살리는 길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오필선 옮김 / 민들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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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늘날 어린 아이를 키우는 대다수 부모에게서는 상황을 실제 이상으로 위험하게 지각하는 현상이 매우 두드러진다. (중략) 공포를 지각한 부모는 겁에 질려 통제 모드로 돌변하고 아이들을 가까이 잡아두려 한다. 똑같은 지각이 육아에 관한 모든 결정에 침투해서 부모는 자녀가 병에 걸리거나 다치지는 않을까, 납치되거나 학대받지는 않을까, 학업에서 뒤쳐지거나 비행청소년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결국 실패한 어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낸다. (301쪽) 

한 때, 아이들을 야외에 데리고 나가면 흙도 못 만지게, 나무도 풀도 못 만지게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병균과 세균이 우글우글거리는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저널을 읽다가, 적당히 더러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자랄 때 면역력도 생길 수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과보호가 아이들의 면역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 야외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아이들이 흙도 만지고, 모래도 만지고, 풀도 뜯어보고 - 너무 심하지 않은 정도에서 - 나무도 만져보고, 자유롭게 놔두고 있습니다. 고궁 같은 곳에 가면, 그래서 저희 부부는 건물 구경을 하고, 아이들은 흙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놀이터에를 가면 풀숲에 들어가서 풀을 뜯어다가 소꿉놀이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부모의 자녀 양육은, 특히 사회가 점차로 정보화 사회로 진전하고 있는 것에 비해, 무지의 영역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듯 싶습니다. 정보가 너무 많으니, 정보가 없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알 수 없는. 과잉의 사교육 투입 현상이 이러한 과도한 정보로 말미암은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는 주체요, 주인은 학생 자신인데, 그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인. 


그러나 대부분의 산업사회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점차 약해지면서 "타자지향형 성격"이 두드러진다. (중략) 타자지향형 '부모'는 자녀에게서 인정받으려 하고 그 자녀 또한 부모에게서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에 상황을 더욱 나빠진다. 이들에게는 내부지향형 부모가 누리던 육아의 자신감이 없고 자기 확신도 부족해 급기야는 동시대 타인과 참고서적, 대중매체를 지침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쏟아지는 최신 양육법에 매달리지만 결국 양육법이 전수하는 기술적 내용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모의 불안을 아이는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다. (282쪽) 

결국 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심정적으로 안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인 셈이죠. 그것이 어린 시절의 과보호로 시작하여, 청소년기의 "심리사회적 유예기(284쪽)" 내내 아이들을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양육하다가, 갑작스런 성인식을 통하여 급작스럽게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고 마는, 그러한 양육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의 독서에 대해서 큰 우려를 가진 지가 꽤 되었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는 탓인지, 저희 아이들도 책읽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큰 아이는 만화로 된 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와이' 시리즈를 비롯하여 역사 만화도 좋아하고 과학 만화도 좋아합니다. 그런 탓에 글로 된 책을 잘 안 읽으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 사놓은 비룡소 세계문학전집이니, 창비의 창작동화 대표선집이니 모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네요. 이런 아이의 독서 습관을 고치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한지 모릅니다. 아이의 글읽기 수준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그냥 놔두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웬만하면 부모가 결정하는 것에 따릅니다. 언제까지냐하면 스무 살이 되기 직전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혹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청소년같은 보호받는 삶을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택하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지난 번 학부모 상담 때 오셔서는, 아이를 이제 학원에 보내서 중학교 선행을 시켜야겠다는 말씀을 하신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제분께서 1학기 1차 서술형평가 반 1등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살짝 당황하시더니, 그래도 중학교 수학이 어려운데 어느 정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제분께서 1학기 2차 서술형평가도 반에서 1등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크게 동요하시는 틈을 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자제분의 역량을 믿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서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자녀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으신가 봅니다' 결국 그 어머니는, 아이를 믿기로 하셨습니다. 학원 대신, 아이의 학습 역량을 믿어주기로 하신 것이죠. 


이 책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것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녀를 믿어주는 것이, 결국은 자녀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과 지내보니까,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그래도 마음과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겉에 껍데기를 두른 채 서로의 속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또다른 나로 서로 대하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에게는 제 진심이 통하는 그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아이들은, 제 마음을 알아줍니다. 저도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믿음을 투영한다면, 아이들은 그 믿음대로 자라갈 것입니다.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위태로와보여도. 솔직히 어른은 안 그렇습니까? 겉 껍데기가 워낙 단단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른도 서툴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도 그렇게 스마트폰, 카톡을 끼고 살면서, 어린이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요 잘못이다, 어린이에게 '너희는 하면 안돼'라고 이야기하려면, 어른 먼저 절제하고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생각한다, 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아이들의 선택을 부모로써 존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택지를 자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에게는 일주일에 2천원씩의 용돈을 줍니다. 그리고, 사용은 마음대로 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리지만 - 초 3, 초 1 - 아이들은 자꾸 이렇게 저렇게 써 보면서 어떻게 써야할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이들을 마트에 데리고 갔는데, 큰 아이가 핫팩이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네 용돈으로 사라고 했더니, 아이가 살펴보고 와서는 사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사지 않냐고 물었더니, 핫팩이 5천 9백원인데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아이에게 선택권을 넘긴 것에 대한 효용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가 더 나은 독서 습관을 스스로 가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틀에 정해진 놀이만, 그것도 몇 가지 되지 않는 놀이만, 주로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놀이만 주로 하고 있다는 우려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어릴 때 얼마나 많은 다양한 놀이가 있었는지를 예로 들면서, 아이들이 자신들 스스로에 의한 다양하고 재미있는 독창적인 놀이를 회복해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약간은 다릅니다. 매체의 발달은, 놀이 환경 자체의 변화를 가지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놀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놀아라, 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변화에 맞게 아이들의 놀이 습관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의 매체 -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 를 통한 놀이를 제한하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가 그 놀이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사용한 게임도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너무 많이 하면 눈이 나빠지는데, 눈이 나쁠 때의 불편함이 너무 크니까, 눈을 위해서 시간을 제한했으면 좋겠다, 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선택도 존중하면서, 아이들의 신체적 발달도 고려한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 아이들은, 매일 컴퓨터 게임도 하고, 놀이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오늘 둘째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가 만든 놀이가 다섯 개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집에 와서 공깃돌로 언니랑 자기가 만들었다는 놀이를 하더군요.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며 아이 스스로 자신의 놀이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하겠지만, 교사는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양한 선택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부모가 교사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사와 아이와 트러블이 있을 경우, 부모가 아이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이들과 자주 이야기하되 알코올, 우울증, 폭력에 대한 화제까지, 그 범위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권고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장황하게 교훈을 늘어놓지만 않는다면 부모의 생각을 기꺼이 듣고 싶어 한다. 부모가 어떤 정보라도 아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기댈 곳은 친구나 미디어밖에 없게 되고 마약 중개인에 의지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326쪽) 

작년에 학부모 한 분이 불시에 학교에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이가 집에 와서 선생님 원망을 하더라, 그래서 혹시 아이가 선생님께 학교에서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함부로 굴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다. 그 아이는 저희 반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학습하는 아이 중에 하나였고, 늘 반듯하게 활동하는 아이어서 저도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이의 글쓰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교정하여주었는데, 아마 아이가 그것 때문에 약간 속상했는지, 집에 가서 선생님 원망을 한 것이었죠. 저는 그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이가 선생님 원망을 하면 받아주십시오, 아이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고 바깥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돌아가야 할 곳은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런 아이의 서운한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으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괜찮으니까 아이가 담임 선생님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면, 너무 과하게 맞장구만 치지 마시고 받아주시고 공감해 주십시오. 


부모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합니다. 아이를 믿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여 주는 것.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존중한 자녀가, 서울대, 고연대를 못가면 어떻게하죠? 아이들의 성공이 어느 대학을 가는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벌이를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대학에 가면, 이 아닌,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라고 말입니다. 대학에 가는 것도, 저는 아이의 선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제 아이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적어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여야 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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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이야기 - 광물과 생물의 공진화로 푸는 지구의 역사 오파비니아 11
로버트 M. 헤이즌 지음, 김미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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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도서정가제 시행과 관련하여 많은 책을 사재기한(!) 바 있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많이 구매한 책은 과학 관련 서적입니다. 마침, 수요가 많지 않은 과학 관련 여러 교양 서적들이 저렴하게 많이 판매되었고, 그래서 아낌없이 과학 관련 책들을 샀고, 그 원흉(!)이 된 책이, 년초에 읽었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바로 이 책 [지구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지구 이야기]는 공진화에 대한 책입니다. 보통 진화라고 하면 생물체의 진화만을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채롭게 소개되는 생명체의 진화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광물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지구가 생겨났다고 추측하는 46억년 전부터, 지구가 우주의 여러 자극들과, 지구 속의 여러 움직임을 통해 어떻게 지구를 구성하는 광물들이 변모해왔고, 그러한 변모를 통해 지구의 생명체와 대기에 영향을 끼쳤으므로, 결국 공진화 - 공동으로, 함께 진화하였다 -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죠. 몇 억년 전에, 대륙이 이동함에 따라, 갈라진 지각 틈에서 나온 여러 생물체의 필수 원소가 조류를 번성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조류의 번성과 죽음은 조류의 몸체 속에 있는 유기 탄소가 축적되는 결과를 불러 왔습니다. 그러한 조류의 번성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소비하였고, 지구가 온실 효과의 따뜻함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죠. 따뜻함보다는 서늘함이 많은 지구가, 해저화산들의 저밀도 대양지각의 제조로 말미암은 해수면의 상승, 그리고 그로 인한 증발과 강우의 증가로 말미암은 암석의 풍화 속도 증가, 그리고 암석의 풍화로 인해 소비되는 이산화탄소로 인해, 지구는 더더욱 서늘해지고, 결국은 얼어붙게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생물의 번성과 쇠퇴, 그리고 대기 조성의 변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지각의 움직임과, 광물의 변화 양상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강력한 생각입니다. 



책이 어렵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나 많다는 것도 시인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억년으로 추정되는 지구 전체의 역사를, 생명체를 중심으로 조망해왔던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다르게, 지구를 이루고 있는 광물의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저자의 여러 개인적인 경험들을 섞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꽤나 흥미있게, 또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3십 몇 억년 전까지의 이야기의 고비만 넘긴다면, 그 다음부터는 술술 읽힐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들어왔던 지구 역사의 빈 구석을 조금 더 채운듯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책을 잘 추천 받았습니다. 어떻게 구매하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질 않지만... - 보통은 '시사인' 서평을 보거나, 알라딘의 메인 페이지를 통해 책을 구매합니다 -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요 근래에 몇 안 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번역자 후기가 독특했습니다. 보통은 의례적인 인사 또는 짧은 감상이 있는데, 이 책의 번역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 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 지구에게 짓는 인간의 업보(...)에 대한 회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지구에게 조금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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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방향 -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 최고古의 동네
설재우 지음 / 이덴슬리벨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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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것은, 구립도서관에서 이책 저책 뒤적거리다가 문득 제목이 눈에 밟힌 까닭입니다. 제가 서촌에 관심이 생긴 것은, 북촌/삼청동 때문이라고 해야할 듯 싶습니다. 경복궁 동편에 자리잡은 북촌과 삼청동. 언젠가 지인의 안내로 삼청동 정독도서관 앞을 다녀온 이후로, 북촌과 삼청동 쪽은 자주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경복궁 저쪽 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고, 무언가 저쪽 공간에도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에, [오래된 서울]이라는 책을 만났었습니다. 서울의 긴 역사를 담담하게 적은, 꽤나 볼만했던 그 책에, 서촌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덕택에 서촌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 후, 이번에는 [서촌방향]이라는 책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래된 서울]과 [서촌방향]을 비교해보자면, [오래된 서울]이 지적이라면 [서촌방향]은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서울]은 서울의, 서촌의 600년 중에서 중요한 순간을 그 인물과 사건을 통해 전달해 줍니다. 그런데 비해 [서촌방향]은 서촌의 토박이로 30여년을 살아온 저자의 삶에 묻어있는 서촌을 보여줍니다. [오래된 서울]이 머리로 읽는 책이라면 [서촌방향]은 마음으로 읽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 [서촌방향]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첫 번째 장이었습니다. 첫 번째 장에는, 저자가 어린 시절 찍었던 서촌 배경의 사진을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는 이벤트가 나옵니다. 배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사진 속 찍힌 디테일과 현재의 디테일의 차이가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오버랩되도록 하는 작업을 책의 첫 장에 소개하였습니다. 

가끔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지금과는 영판 다른 모습의 옛날 사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가 이런 모습이었나?' 싶은 사진들을 보면서 오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찌보면 지금 나의 시절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서촌방향]에서는 저자의 이런 작업들이 책의 첫 장에 굉장히 인상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책의 첫 장을 눈으로 훑고는, '이 책은 빌려야하는 것이 아니라 사야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결국 사게된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 그 뒤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커피집에 앉아 책에 꼬박 집중한 한 시간 반 후 독서를 마치는 시점에서는, 살짝, '내가 이 책을 사야했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독서자의 취향 탓이겠지만, 제게는 [오래된 서울] 같은 책이 더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촌방향]은 삶과 일에 대한, 먹을 것과 누릴 것에 대한, 시와 곳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멋진 사진들과 함께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지만, 이것들이 독자의 공감대를 폭넓게 불러오기에는 저자의 주관적인 감정이 진하게 배어있는 편입니다. 

저는 저자의 서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걸음 정도 물러나서 이야기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 가깝게 다가서 있습니다. 덕택에 몇몇 이야기에 대해서는 독자가 다가서기 어려울만큼, 독자와 이야깃거리 사이에 저자가 끼어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향을 가진 책이 가지는 어려움이겠지요. 저자의 뜨거움이 너무 심한 나머지 저자가 소개해주는 대상이 열기에 일그러져보이는. 

대신에, 한 편으로는, 책에 쏙 빠져서 읽을 수 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하는 독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런 책을 요즘에는 거의 읽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저자의 뜨거움이, 위의 언급한 이유 때문인, 약간의 거부감을 동반하여 독자에게도 옮겨붙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만 다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책을 읽은 후에는, 그런데, 마음은 조금 차가와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서울]은, 머릿 속에 이야기를 우겨넣은 후, 서촌으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데워주는 책이었습니다. [서촌방향]은 오히려 서촌에 대한 생각보다는, 저자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부러움이었다고 해야하겠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곳은, 송파 인근입니다. 롯데월드 옆 아파트로부터, 주택단지들을 전전하며 살아온 제 삶 속에, 과거와 현재의 공명이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과거는 모두 사라져 그 흔적으로 찾을 수 없어 현재만 존재하나, 현재와 닮았으나 기괴한 모습으로 커져가는 미래만을 가진 곳. 저자에 대한 부러움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함 속에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이 책은, 서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촌을 누린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참 부러운 일입니다. 그런 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냈다는 것은 말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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