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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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샌가 모르게, 문학 장르의 글을 읽지 않고 있게 된지 어언 몇 년이 흘러 버렸습니다. 꽤나 많이 읽었더랬는데, 이젠 문학 장르가 아닌 글들을 더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나마 읽는 문학 장르의 글도, 소위 장르 문학의 글을 많이 읽게 됩니다. '장르 문학'이라는 표현이 적확치 않은 듯하여 - 장르 문학 장르... -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지만, 순수 문학/장르 문학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는 방법 말고는 딱히 방법은 없어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주로 환상 소설을 많이 읽었더랬는데, 요즘은 SF를 더 많이 보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작가의 글은 아직까지 그 양이 많지 않고, 그 질적인 부분에서도 아는 바가 적어 손이 잘 가지 않는데, 우리나라 바깥의 작가들의 글은 이미 세계의 곳곳에서 많이 읽히기도 했고, 영향력도 상당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쉽게 손이 가는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원래 (소위) 장르 문학에 입문한 것이 환상 소설 쪽이라서 처음에는 그 쪽 글들을 많이 읽었더랬는데, 아무래도 환상이라는 것이 현실과의 접점을 최소화하는 방향성을 가지면서도 그 내심에 현상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보니, 쓰는 이도 많지 않고 좋은 글도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루어질 현실에 집중하는 SF 쪽의 작품군이 더 풍성한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라는 서툰 생각을 한 번 해보게 됩니다. 

 

어쨌든,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환상/SF 소설의 다양한 작품군을 소개하면서 독자를 만족시키고 있는 '황금가지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고, 전집을 9만 9천원에 냉큼 사서는, 이제 막 1권을 다 읽게 되었습니다.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1권인 [파운데이션]은, 겉으로 보이는 은하제국의 흥성함 뒤에 배태되어 있는 멸망의 흐름에 집중하는 한 역사심리학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역사심리학자인 해리 셀던은 그의 오랜 연구 끝에 은하제국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은하제국의 쇠퇴에 이은 멸망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류 사회의 문명이 3만년 동안이나 암흑 같은 시기로 후퇴할 것이라는 사실. 해리 셀던은 수학을 기반으로 문명의 행동 양식을 분석하고 계산한 후에,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앎을 전승할 수 있다면 3만년을 천 년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제국과 협상을 하고, 황무한 별을 하나 받아 그 곳에서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면서, '파운데이션'의 역사는 시작합니다. 

 

'파운데이션'은 그러한 목적으로 세워진 정치적 실체이며, 이러한 정치적 실체가 '셀던 위기'를 통해서 차츰 정치 체제를 띄어가게 되어가는 과정을 1권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요 아래에는 아마도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내용 외적인 부분으로, 시대가 훅훅 뛰어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 다섯 챕터의 1권은 모두 20~50년의 시간적 간극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챕터에서 해리 셀던 박사의 '파운데이션' 흥정(!) 이야기가 나오더니, 두 번째 챕터에서는 바로 50년 뒤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다음 챕터에 넘어가니, 이번 챕터의 현실은 역사가 되는... 인간이 살아가는 햇수는 고작 백 년도 되지 않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애쓰면서, 애태우면서, 애가 닳도록 살아가지만, 우리가 살아내는 기간은 기나긴 역사를 생각해 볼 때 빙산의 일각이며 눈썹만큼일 뿐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늘상 들여다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간은 동시대로부터 한참 떨어진 과거일 뿐입니다. 백 년을 살아도 역사를 관통하면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늘상, 현재를 역사로써 들여다보고 싶고, 평가해내고 싶지만, 현재는 백 가지 평가가 존재하기에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역사적인 시간인 셈이죠. 소설 속에서 현재를 읽다가, 현재가 금새 역사로써 평가를 받는 장면을 보는 것은 인상적인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1권에서 내내 일어나면서 독서의 속도를 이야깃 속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가속시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파운데이션]은, 인간 역사의 단편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파운데이션'은 처음에는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전부인 그런 학자 집단의 결사체였을 뿐입니다. 여기에 원자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결정이 들어가면서 '파운데이션'은 주변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 집단이 됩니다. 이 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메커니즘으로 종교가 사용됩니다. 실체는 원자력이지만 현상은 종교적으로 비추어지는. 그러다가 이 종교인 원자력은, 같은 힘을 가진 제국 휘하의 국가 앞에서 한계에 부닥칩니다. 이 때 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상업 개념입니다. 하나의 결사체가 국가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종교와, 외부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능하는 상업의 흐름이 [파운데이션] 1권의 주요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재미나게 1권을 다 읽어 내었습니다. 바로 2권을 읽기 시작했지만, 수마에 무릎을 꿇고 2권의 첫 머리에서 책장을 덮을 수 밖에 없는 어젯 밤이었지만, 오늘은 2권의 남은 부분을  차근차근히 읽어가볼 생각입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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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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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서 1분 거리에 문학사상사가 있습니다. 하하. 그 유명한 문학사상사가 집 옆에 있는지는... 막상 잘 모르고 지냈더랬습니다. 문학사상사 책을 어릴 적부터 자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여하튼,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문학사상사의 책입니다. 


책의 내용들이 기억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이야기들인데, 이 책에서 또 보이는 것이죠. 아마도, [총, 균, 쇠]가 쓰여진 이후에, 주류의 아이디어가 되었겠고, 다양한 책들이 [총, 균, 쇠]를 참고해서 쓰여진 후, 아마도 그러한 책들을 제가 읽었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봤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죠. 



최근의 많은 역사나 경제사 관련된 책들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가장 먼저 야생 작물을 생산하게 된 '비옥한 초승달 지역 -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 현재의 헤게모니를 쥘 수 없게 된 것은 기후의 영향이다라는 것이나, 아프리카나 남북아메리카가 (서)유럽으로 침략해들어갈 수 있는 기술을 찾아낼 수 없었던 이유는, 유라시아 대륙은 같은 기후대로 빠르게 길들여진 작물이나 가축이 이동할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나 남북아메리카는 다양한 기후대를 지나쳐야하기 때문에 길들여진 작물이나 가축이 이동하기 어려웠으므로 작물의 대량 생산을 경험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15세기 말까지 서유럽을 압도하였던 중국이 뒤쳐진 것은 중국 대륙의 통일된 질서가 정체를 유발하였다는 것 같은 이야기는 새롭게 생각해 본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총, 균, 쇠] 같은 종류의 책은 참 읽기 지난한 부분도 있습니다. 한 2년 전에 [나 홀로 볼링]이라는 책을 절반 정도 읽다가 놓은 적이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의 미국 사회의 변화상을 쓴 [나 홀로 볼링]은, 저자의 논거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통계 자료들을 가지고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주장하는 바를 이야기해보면 간단하고 명료한데, 그것에 대한 논증의 내용이 방대하다보니 책을 읽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책 [총, 균, 쇠]도 그렇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만약 남북아메리카가 같은 기후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스페인의 침략에 그리도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인종의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에 현재의 서유럽 중심의 전지구적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의 논증을 600여쪽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죠. 


다행히, [총, 균, 쇠]는 읽기에 편안한 부분은 있습니다. 다양한 사례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이 쉽게 읽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이 책을 읽는데 4달이 걸렸네요. 보통 중간중간에 다른 책들을 읽어주는데, [총, 균, 쇠]는 그런 것도 없이 꼬박 4달이 걸렸습니다. 거의 끝까지 다 왔다가, 어디에선가 흐름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었더니, 실상은 두 번 읽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여하튼, 책을 쉽게 읽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돌이켜보면 꽤나 오래 걸렸다는... 아이러니하죠. 하하.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저자의 주장은 흑인보다 백인이 뛰어나기 때문에 서유럽이 다른 대륙의 식민지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환경적인 부분들이 서유럽의 이후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왜 다른 대륙, 다른 장소는 그렇지 않은지도 길게 논증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막상... 읽느라고 걸린 시간에 비해서 독후감상을 쓸만한 것이 없네요. 저자의 주장은 이제 많은 이들의 생각을 뒷받침해줄만큼 널리 인정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이 쓰여진지 고작 16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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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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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대학가에서 철학 입문서로 많이 쓰였던 책은 이진경 씨가 쓴 [철학과 굴뚝 청소부] 였습니다. 철학사를 시대순으로 주욱 엮어, 아마도 20세기 전반기까지 다루었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철학사적인 접근 방식이 가지고 있는 난해함이 가진 숙명(!)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아무래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사람 중심으로 훑어 내려오는 서술 방식이, 연대기적인 친숙함을 안겨줄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자들이 사유하였던 주된 아이디어의 범주화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법철학회]라는 학회에서 활동을 했었기에, 저희의 견식이 짧아 법철학을 다루지는 못하고 철학 세미나를 했었기 때문에, 저희는 [철학과 굴뚝 청소부], 그리고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라는 정말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책을 텍스트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철학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고 사 두었던 책이 바로 [소피의 세계 1]이었는데, 일전에 온라인 서점 리브로가 교원 그룹으로 넘어가면서 모든 책을 50% 할인가로 팔 때, [소피의 세계] 합본이 생각나서 합본으로 다시 사 두었고, 결국 그 합본을 한 달여 동안 긴 호흡을 가지고 다 읽어 내었습니다. 



[소피의 세계]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피 아문젠이라는 소녀에게 어느 날 의문의 우편물이 배달되기 시작합니다. 마법사가 모자에서 꺼내어 드는 토끼의 털 뿌리 쯤에 자리잡은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는 세계를 직관하기 위해 털을 부여잡고 꼭대기로 향해 올라오는 것을, 바로 철학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우편물은, 결국 소피 아문젠과 알베르토 크녹스의 철학 수업으로 연결됩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철학 수업을 통해, 책을 읽는 독자들도 함께 철학의 중요한 사유를 함께 고민하도록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 뿐이라면 이 책이 가진 이야기로써의 의미는 상당히 부질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20세기 이전까지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바로 존재론과 인식론이었던 것을 상기시켜주려는 듯, 소피 아문젠과 알베르토 크녹스는 자신들의 세계가 현실 세계가 아니며 알베르토 크낙 소령이 자신의 딸을 위해 창조해 낸 소설 세계임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갑니다. 소피 아문젠과 알베르토 크녹스는 앨리스와 곰돌이 푸를 맞닥뜨릴 수 있던 그런 이야기 세계에서 탈출하여, 마침내 알베르토 크낙 소령과 그 딸 힐데가 사는 세계에 발을 디디고, 드디어 이야기와 현실이 교류하는 가능성에까지 이르는 그 순간에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철학 수업 바깥의 이야기를 통해, 아마도 작가는 철학자들이 현실과 현상을 인식하기 위해 사유했던 그 과정을 약간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과연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철학적인 사유에 이야기를 입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연대기적으로 철학적 사유와 철학자들을 만나보기 위해서는 더없이 적절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유가 분절적이어서, 범주화 시키기가 곤란하다는, 연대기적인 철학 입문서의 한계는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와 흄, 스피노자와 버클리를 지나 칸트 쯤 오면, 범주화되지 않은 사유의 분절적 지식이 머릿속에서 서로 유리되어 방황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거기에 소설 이야기까지...


그래도 작가는 철학 교사 답게 철학적 사유를 쉽게 잘 풀어내었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사유했던 주된 것들을 이해하기에는 어렵지 않습니다. 몇몇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일전에 읽었던 강신주 씨의 [철학 VS 철학]에서 해당되는 철학자 파트를 찾아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철학을 시대순으로 엮은 책들이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접근하다보면 20세기 이후의 철학자를 조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사유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연대기적인 철학 입문서는 20세기 이후의 사유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근하는 듯 보입니다. 이 책 [소피의 세계]도 키에르케고르를 끝으로 -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 등 20세기 철학에 영향을 준 사람들을 잠시 언급한 후 - 20세기의 사유는 뭉뚱그려 훑는 정도의 수준입니다. 


이런저런 철학 입문서를 읽어가고 있지만... 견문이 짧아 내내 읽는 책이 이렇습니다. 여러 다른 책들을 통해 철학자들의 사유에 조금 더 가까와지고 싶은 생각이 막 들기도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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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1 (양장) -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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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매력

 

다양한 색채를 가진 많은 환상 소설이 있지만, 그 중 많은 수가 J.R.R.톨킨의 세계관에 기댄 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환상 소설에서는 해묵은 엘프와 드워프의 알력이 당연하다는 듯이 소개되고, 유쾌하고 즐거운 하플링의 매력을 이 장면 저 장면에서 등장시키는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환상이 그렇지많은 않습니다. [어스시의 마법사] 같은 환상도 있고, [미드나이터스] 같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디스크 월드] 같은 것도 있네요. 혹은... [어셔 가의 몰락] 같은 몽환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톨킨의 세계관이 많은 환상 소설의 전범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인간 본연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하나의 사람, 사건, 혹은 사유를 겪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틀에 의해서 드러나는 표상은, 결국 인간 본래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깨끗하게 주어졌던 마음판에, 이것저것 가필을 하다보면, 유달리 드러나 보이는 글씨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보면, 그것으로 사유하게 되겠지요. 그 사유가 개인차를 드러내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타자와 교류하기에 상당한 물질적/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혹은, 글을 쓰는 이들도, 인간 본연의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그의 마음판에 진하게 표시된 글씨들이 자신의 작품에 의식적으로/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형광펜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한 때는 그것에 소명을 두고 글쓰기를 하기도 하였더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소명에서 약간은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간'이 진정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의심케되는 얼척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네요) 그래서, 물론 자신의 사회적 사유와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글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사회와 상황으로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조금은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서 환상 소설은 쓰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와 레콘, 도깨비를,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하플링으로 치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와 레콘, 도깨비를 실은 우리의 한 몸 안에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가와 나머지 세 선민종족이 대확장전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환상 소설은,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본연의 갈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기제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영도 씨의 소설이 있습니다. 

 

 

다름을 긍정하기 

 

[눈마새]의 가장 큰 주제는 바로 '다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긍정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나와 타자(他者)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다른 표현으로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다른 작품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실은, 나는 나'들'인 것이죠. 나라는 존재가 나답게 되는 것은 바로, 나의 옆에 있는 타자를 긍정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애써 부인하려해도, 나는 누군가와 더불어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삶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옆의 타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곁에 있는 타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수가 아닌 셈이죠. 

 

작가는 [눈마새]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동생이 적을 말살하는 것을 보면서, 왜 나의 동생은 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더불어 지내갈 수는 없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적들에게 다가섭니다. 그러한 노력이 두 번 배신당하고, 세 번째의 배신을 앞에 둔 지금, 그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품내내 작가는 한결같이 넷을 모읍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에, 하나는 셋을 부릅니다. 그렇게 모여진 넷은 마치 윷놀이에서 윷가락을 놀듯이 놀아집니다. 선민종족 넷이 함께 나와 너가 다름을 받아들이고 용납할 때, 넷의 놀이는 비로소 오롯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실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나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것이라고 여기라고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지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에게 제한과 족쇄를 두는 것이 죄 (양장본 4권, 316쪽)

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것인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양장본 4권, 316쪽)

은 애써 제한하며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할 때 완전함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에, 하나는 셋을 부르기에. 우리는 셋이 되어야하고 셋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넷이 되어 함께 '날고, 까불거리고, 부딪히고, 굴러야' 합니다. 그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오던 인간은 긍정될 수 있습니다. 함께 했기 때문에.

 

 

끝없는 변화로 완성되기

 

이영도라는 작가가 가진 가장 놀라운 덕목은, 장쾌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한 조각 한 조각에서 의미가 끄집어내어진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계속하여보자면, 그 남자는 결국 세 번째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고, 기온이라는 자연 방벽 앞에서 서로 마주하지 않고 살아왔던 네 선민종족이 팔백년만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마주보게 됩니다. 실은 그 때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팔백년동안 교류없이 지내왔던 네 선민종족이 어떻게 서로 대화할 수 있었는지...

 

우리만해도, 당장에 백 년 전에 사용되는 언어가 지금의 언어와 다릅니다. 의미가 다르고 용례가 달라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눈마새]의 세상에서는 팔백년동안 서로 전혀 접촉없이 살아온 두 사회가, 팔백년 전과 같이 변화없이 지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어야 합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 - 혹은 등장인물을 보살피는 - 이 일갈하는 것처럼, 소설 속 사회는 팔백년동안 변화없이 흘러온 사회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에서야, 등장인물의 입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소설 속 이야기에, 작가의 이야기 구성 역량에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마도 제가 그러한 작가의 설정을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변화라는 것에 민감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겠죠. 다른 말로는 현재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삶이 이미 익숙한 것일 수도... 

 

이미 작가는 다른 글에서 '변화하는 것이 아름답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물론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작자들이 말하는 완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일 겁니다. 그런 자들이 말하는 완전성은 고정이고 정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 완전성은 어쩌면 무수한, 끝없는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양장본 4권, 398쪽)

우리들은 완성을 목적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좋은 대학으로, 안정되고 더 좋은 직장으로 완성된 삶을 원합니다. 그래서 꿈을 물어보면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공무원으로서 무엇을 향하여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공무원이라는 완성된 삶을 의욕할 뿐, 그것을 발판 삼아 새로운 변화를 향한 꿈을 꿀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고정이요, 정체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썩고 쇠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새로운 완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타자와의 끊임없는 어울림을 통해서, 비록 그 다름 때문에 힘겹고 벅찬 나날이 계속되겠지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가는 인생. 그런 변화를 꿈꾸는 삶 자체가 바로 진화하는 완성의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제와 이야기의 유리

 

그러나, [눈마새]의 가장 큰 흠결은, 작가가 가슴에 품고 이야기하는 주제가, 기나긴 이야깃속에 묻어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작가는 그 탁월한 역량대로, 인간과 도깨비, 나가와 레콘이라는 믿을 수 없는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세계관이 맞물려 만들어 낸 세계는, 어느 유명한 작가의 세계와 비교해보아도 탁월한 이야기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이야기공간에만 몰두할 뿐, 막상 이야기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작가가 너무 똑똑한 등장인물들을 두어 - 칼 헬턴트나 라수 규리하 같은 - 그 인물들의 입을 빌어 모든 것을 설명할 때까지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를만큼 작가의 이야깃거리가 너무 다채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가, 계속 자가발전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라는 아쉬움도 표시해봅니다. 결국,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나, 끝없는 변화로 완성을 의욕하겠다는 것은, 작가의 유명한 작품인 [드래곤 라자]나 [퓨처 워커]의 해석판 정도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이야기가 길게 유장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독자는 작가와 끊임없이 공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눈마새]는 마치 재미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중에 끝나기 3분 남겨두고 중요한 공식을 알려주는 수학 수업과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의 주제를 알려면 끝의 마지막 백 쪽만 읽어도 됩니다. 그 중에서도 세리스마와 라수 규리하의 대화만 봐도 됩니다. [폴랩]처럼, 급전직하의 결말이라는 아쉬운 평을 받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그렇게 결말지었다면 아마 더 다채로운 독자의 상상 - 과 아쉬움 - 의 여지를 주었을텐데... [눈마새]는 독자의 아쉬움이 없는 대신 - 이야기 자체는 너무 재미나기 때문에 - 여지를 느끼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10년이 흘러버린 이야기

 

벌써 [눈마새]가 출간된지도 1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출판사 측에서는 10주년 기념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듯 합니다. 그만큼 이영도라는 작가가 가진 파급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터이고, 한편으로는 이제 새로운 작품을 출간해서, 기념판으로 독자를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간간히 짧은 단편으로 독자를 만났지만, 이제 이영도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환상 소설을 상징하는 키워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와는 별개로, [눈마새] 같은 이야기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는 평가받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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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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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그마치 500페이지짜리 책입니다. 두께도 보통 두꺼운 책이 아닙니다. 들고다니기에는 조금 벅찬, 그러나 책의 크기는 보통 우리가 들고다니는 신국판 사이즈보다는 작은, 문고판보다 조금 더 큰 크기를 가진 책이었습니다. 즉, 작고 뚱뚱해보이는 그런 책입니다. 

 

책은 정말 술술 잘 넘어갑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 사건을 교차하여 서술하면서 전개됩니다. 이야기 하나는 2005년 5월 2일, 알란 칼손이라는, 100세의 나이를 맞이하게 된 할아버지 하나가, 뒷방에서 늙어가는 것에 큰 회의와 고민을 가진 끝에, 자신이 기거하던 양로원을 탈출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또다른 하나는, 1905년 5월 2일, 알란 칼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인생을 살아내면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것입니다. 2005년의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다가, 1905년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고... 이런 식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한 60여쪽을 읽고 나서 문득 떠올렸던 책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떠올렸던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 였습니다. 허구 속에 또 다른 허구가 자리잡은 듯한 이야기가 계속 펼쳐지는데, 그 허구인 듯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을 가로지르는 놀라움을 주는 이야기가, 제게 두 편의 다른 작품을 생각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너무 재미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훈이 되거나, 등장인물과 공명하거나, 혹은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은 아니지만, 어린이의 상상력으로 감성으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말괄량이 삐삐의 모험] 같은 그런 느낌 말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처음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참 감동하면서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거친 질곡어린 삶, 그 속에서 그가 가진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과 마음을 통해, 역사는 물결쳐 흘러가지만, 사람은 여상한 모습으로 잠잠히 역사를 관조하며 서 있을 수 있는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영화입니다. 물론 그 감동을 가지고 두 번째 집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 감동이 밋밋하게 깔리는 그런 느낌을 받아 조금 속상했지만...

 

그러나, 이 책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나 [포레스트 검프]가 주었던 감동, 유쾌함에서 약간 비껴서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공인 알란 칼손이 주로 하는 일은 원자폭탄 제조법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원래는 니트로글리세린 혼합법을 배웠더랬습니다. 그걸 가지고 일을 구하고, 사람을 사귀고, 스페인에 건너가서 프랑코를 만나고, 그의 소개(?)로 미국엘 건너가서, 구금되어 있다가 이민국 관리의 연줄을 타고 로스엘러모스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오펜하우어 박사에게 핵융합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후로, 알란 칼손은 가는 곳마다 그의 원자폭탄 제조 비법(!)을 전수합니다. 그의 모국인 스웨덴에서, 소련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알란 칼손의 인맥은 바로 원자폭탄이 만들어 준 인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책에서는 주인공의 우연과 걱정없는 성격이 그런 놀라운 경험의 밑바탕이 된 것인양 꾸미지만, 실제로는 주인공의 (원자) 폭탄 만드는 기술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감정이 희미한 까닭은, 현재의 주인공 나이가 100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인양 여겨지는 그 어마어마한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 살 쯤 살면, 이제 속세(!)에서 홀연히 떠나 곧 아름다운 천국/이상향/낙원으로 접어들어야 하는 나이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들을 모두 한 줌 먼지처럼 여기고는 다음 생애를 준비하기에도 바쁘니... 이제 그가 짊어지고 온 질곡어린 삶을 저멀리 던져버리자라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백 살 쯤 되어서 자신의 그런 잔인한 삶에 대해서 어떤 회한이나 안타까움도 갖고 있지 못한 백 살의 노인을, 백 살 쯤 살았으니까 놔 줘도 되는 것입니까? 

 

이 책의 문제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백 살 노인의 새출발(!)을 독자들은 모두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저지르는 불법, 살인, 그리고 일탈까지 모두 용서할 수 있는 것이죠. 심지어는 주인공이 현대사를 거쳐오면서 겪은 폭력, 전쟁, 이념의 대립, 투쟁의 장면까지도 모조리 희화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유쾌, 상쾌, 통쾌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이것이, 이 책의 이야기 밑에 깔려있는 생각이라면 참 곤란합니다. 원자폭탄이면 어떻고 살상이면 어떠하리, 이제 주인공은 백 살 노인이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는 중에 있는 마땅히 응원받아야 할 사람인데. 이것이, 이 책의 주된 생각이라면 더욱더 곤란합니다. 19세기의 정신으로 20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과 제도와 질서 아래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19세기의 정신을 반성하고 20세기의 법과 제도와 질서를 냉철하게 평가하여, 21세기를 21세기 답게 맞이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입니다. 그냥 묻어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살아온 당대를 평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백 살 노인의 새출발 노정에 스쳐가는 놀라웠던 인생길 정도로 평가해버릴 수 있는 20세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평가와 반성,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그동안 있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더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인류의 삶에 가장 위협적인 물질이자 도구인 원자력이, 한 노인의 인생을 그렇게 화려하고 유쾌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책을 쓴 작가의 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 연장선에서 주인공의 과거에나, 현재에나, 옆에 살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것은, 그 죽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지간에 상관없이, 책을 읽는 내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평가하지만, 책은 술술 잘 읽힙니다. 출판사의 서평이나 여러 독자의 평가대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뿐입니다. 조금만 냉정한 눈으로 책을 바라보면, 더 이상의 평을 할 수 없는 그런 책입니다. 차라리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나 [포레스트 검프]를 다시 한 번 보더라도 이 책의 유쾌함도 얻을 뿐만 아니라, 찝찝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듯 하네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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