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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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인 불황의 늪이 점점 더해 가는 듯 합니다. 혹자는 1929년의 대공황 때를 빗대어 이 경제위기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때에는 케인즈 식의 해결방안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명확한 방책은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소위 양극화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경제적 계급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가지만, 과연 이것에 대한 해소 방안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도 불분명합니다. 민영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 사실 처음부터 정책의 장점이 존재했는지조차 불분명하지만 - 이제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로, 현재의 경제 상황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아니, 실은 언제라도 경제적 상황은 한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이라면, 그 혜안을 주식이나 외환에 조금만 나누어 주더라도 아마 가장 큰 부를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적어도 1960년대처럼 경제적 낙관주의 - 이 호황은 언제라도 계속되리 - 라도 팽배하였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가진 이들마저도 자신의 소유가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비관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이 안갯속을 걷는 것을 더욱더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에 문외한인지라,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책을 읽어온지 한 4~5년되지만, 안갯속을 헤매이는 것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외려 지금 걷고 있는 이 경제적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안갯속이라는 것을 조금씩 더 알게 되는 듯 합니다. 그래도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조금의 실마리라도 잡아보려하는 노력을 그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만난 이 [자본주의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하, 자본주의)]는 제게 유의미한 독서를 제공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토드 부스홀츠의 책이 경제사 중에서도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면,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이 [자본주의]는 경제사의 흐름을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의 흐름을 따라 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경제사 책의 경우, 필연적으로 그 시작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경제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 아담 스미스이며, 그의 생애 전후에 있었던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비약적인 생산의 증가를 얻게 됨으로써 아담 스미스의 이론이 시의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맞이하게 되는 어려움은, 어쨌든 산업혁명 이전에도 경제 활동은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놓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전에도, 물물교환이든, 장원 경제체제이든, 무언가 인류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 왔다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시장경제를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는 국가일수록, 사실은 시장경제 이전의 생활에 대한 경제적 관점에서의 고찰이 - 그 빈약함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 도외시되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책은, 고대사회의 경제 질서부터 '전통'과 '명령'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인류가 지속적으로 경제활동을 해왔음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 당시의 경제 활동도 유의미한 무언가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장경제 아래에서의 분석을, 인물 중심으로써가 아니라 경제 상황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인물 중심의 경제사 책들이 19세기에 존 스튜어트 밀이나 리카도, 혹은 마르크스-엥겔스나 멜서스에 푹 빠져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넓게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1960년대의 전세계적인 경제호황기 이후의 브레턴우즈 체제의 해체로 시작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훌륭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인물 중심의 경제사 책은 분절적인 느낌이 강해서 한 번에 읽히는 면이 약한데, 이 책은 대공황부터 흐름을 놓치지 않고 급변하였던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진 경제적 문제의 대안을 훌륭하게 제시한 책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폴 크루그먼이나 우리나라의 진보적 성향을 가진 소장학자들의 대안은, 통사적 흐름이 없는 대안이어서 아무래도 그 대안이 통시성을 띤 것이라는 느낌이 약했는데, 이 책은 마지막장을 간략하게나마 통시적 흐름 속에서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대안이 있는 경제학 책이라는 느낌을 잘 전달해주었습니다. 


저자 또한 1962년 초판 이래로 계속적인 증보 - 저자 중 로버츠 하일브로너의 타계로 인해 더 이상의 증보는 불가능하겠지만 - 를 통해 책에 정성을 다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작금의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으로는 조금 간략하며, 경제사적으로는 아주 세세하진 않지만, 경제 체제의 중요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잘 서술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에도 또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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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 - 온누리교회의 교회론과 목회철학
하용조 지음 / 두란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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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읽었던 책은, 작년에 소천하신 하용조 목사의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 였습니다.

고 하용조 목사는 우리나라의 괄목할만한 교회 중 한 곳인 '온누리교회'의 담임목회자였습니다. 한편으로 온누리교회는 '두란노서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 입니다. 두란노서원은 기독교 문화의 영역을 담당하는 온누리교회의 자매격 출판사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온누리교회와 두란노서원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생명의 삶'입니다. QT 문화가 기독교의 대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책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 책으로, 성경 본문과 어울리는 다양한 영성 서적과 연계한 부분이 인상적인 QT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경배와 찬양'입니다. 제 중고교 시절에는 한창 미국의 워십 찬양 형식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시절입니다. 그 선구자로 단연코 하 스데반 목사가 이끌던 '두란노 경배와 찬양' 그리고 '전하세 예수' 앨범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의 경배와 찬양은 서울의 대형 교회 - 경배와 찬양 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 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았더랬습니다. 그러한 워십 찬양 형식은 여러모로 한국 기독교 교회의 예배 형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기타로 찬양한다는 것이 약간의 - 큰 - 거부감을 주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 확실히 적어지기도 했구요. 저도 온누리교회의 경배와 찬양을 위해 갔던 적이 있었고, 대학생이던 시절엔 송정미 씨의 콘서트를 위해 가기도 했던 기억이 있네요.


하용조 목사는 그러한 온누리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켜온 바탕을 이 책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를 통해, 초대교회의 영적 모습에 대비하면서 열정적인 목소리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찌보면 이 책은 '사도행전' 개설서 정도의 의미를 가진 책이라고 볼 수 있는 면모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도행전'은 성경에서 가장 주목하여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2장 42절,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가 초대교회를 명징하는 구절이며, 현대의 교회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르침과 교제, 그리고 기도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특히 교회는 교제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제는 주일 아침 모여 함께 예배하면서 얼굴을 보고 잠시 마주하며 안부를 묻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텝니다. 초대교회는 그런 교제를 뛰어넘어, 개인의 주님과의 교제를 지체간의 교제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남하 목사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예수님짜리'라는 책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경제계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계에서 자꾸만 멀어지던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온 인류가 주님과의 돈독한 관계를 지키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위대한 계획이라는 말씀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교회의 모형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하셨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모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 다시 오실 날까지 꾸리고 누려야 할 교회의 모습을 보이시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가 너무 길었지만, 이 책에서도 크게 이런 줄기를 가지고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우리나라 교회와 온누리교회에 가지는 의미와 의의를 개괄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하용조 목사 개인의 성장기와, 자신이 생각하는 목회방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은 5분의 1 정도의 개인사, 4분의 1 정도의 사도행전 개설, 그리고 나머지는 자신이 온누리교회를 개척하면서 생각하였던 목회방침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목회자가 읽을 때 가장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현대 교회는 전 신자가 사역하는 교회를 목표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전 생애를 통해 사역 -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내는 것 -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소위) 평신도들도 읽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용조 목사 자신이 가졌던 온누리교회에 대한 목회방침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목회자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읽으려고 했고, 또 그리 읽었지만,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몰입해서 읽지 못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여야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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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 / 산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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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다 둔지는 근 3여년쯤 되는 듯 합니다. 실은 이러저러한 책들을 한 달에 서너권 사는 편인데, 요즈음은 독서 말고도 할 짓(!)이 많은 터라, 웹서핑하고 운동경기 보고 애들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다보면 한 달에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책이 쌓여가는데, 그런 책들 중에서도 조금 쉽고 간편한 것들을 선호하다보니, 이 책 [경쟁에 반대한다]는 근 3년이나 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여 동안 질질 끌다가 드디어 독서를 끝낸 지금, - 책을 잡을 때는 무직이었는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일을 하게 되어서 독서 진도가 아주 더뎠네요 - 교사라면 그리고 부모라면,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경쟁에 반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는 경쟁을 장려하는, 아니 그보다도 경쟁이 사회 구성의 필수 불가결 요소인 것인양 강조되고 그것이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교육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체주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경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비겁이요 무능이며 회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우리는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경쟁의 반대항으로써의 협력과 공존에 대해서는 다양성이 아니라 열등함이라고 낙인찍는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도 경쟁에 반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선언적 의사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경쟁이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실과 현상에 대한 선언적인 비토인 것이죠. 만약에 우리 사회가 경쟁과 협력을 같은 위치에서 용인하고 경쟁 만큼이나 협력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라면 굳이 이런 책은 필요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의 승리를 인생 과정에서의 당연한 연결선으로 보는 시선들이 반대 없이 수용되는 사회라... [경쟁에 반대한다] 같은 어마어마한 제목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데 가지는 어려움은, 경쟁에 반대한다, 같은 어마어마한 제목 속에, 그를 뒷받침해줄만한 논거나 자료, 혹은 대안이 빈약한 경우가 많고, 동어반복적인 내용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방대한 참고자료를 인용하면서 저자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300여쪽의 내용에 각주 및 참고자료목록만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 물론 외국 자료라 우리에게 그다지 효용성 있게 다가오는 자료는 아니지만 - 저자의 폭넓음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메모하면서 독자로써의 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비교하여, 요즘 같이 읽고 있는 책 중에 [나 홀로 볼링]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자본'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쓰여진 두툼한 두께의 책으로써, 책의 저자는 다양한 통계 자료를 통해 현재 미국 사회의 사회적 커뮤니티가 점차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통계 자료는, 확실하게 저자의 생각을 구축해주고 있긴 하지만, 책의 분량 중 3분의 1이 넘는 통계 자료의 분석은 저자의 꼼꼼함이 과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경쟁에 반대한다]의 경우에는 협력 학습에 대한 최신의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구축하는 것이 과하지 않고 적절한 양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경쟁의 반대항으로써의 협력이 아니라, 협력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내내 강조하면서도 그에 대한 실제적 대안의 마련은 읽는 독자에게 넘기고 있는 측면이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대안의 마련이 어려우리라 생각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막상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지금 학생들과 수업하고 있는 제 수업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저 또한 배려와 나눔이 수업 양상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방안의 마련에서는 높다란 벽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로서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이 '제대로' 배웠는지에 대한 의심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제 수업 속에서 배려와 나눔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경쟁 사회라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우리의 뿌리 깊고 변하기 힘든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협력 학습에 대한 어떤 시스템을 도입하더라도 결국 더 잘 경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것이 분명합니다. 즉, 이 책을 읽으면서도, 협력을, 더 나은 경쟁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써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경쟁에 반대한다는 것이, 경쟁의 반대항으로써가 아닌 그 자체로써의 협력을 강조하고 그것을 하나의 구조로써 받아들이게 하고 당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길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교사나 학부모가 - 혹은 교사이자 학부모인 저 같은 이가 -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적어도 경쟁에서의 승리가 유일선이라는 확고한 인식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기 위해서는, 경쟁에서의 승리말고도, 나눔과 배려를 통해 모두 함께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과 경험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아이가 뒤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에서의 승리는,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대로, 극소수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경쟁에 뛰어든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누가 한결같이 경쟁에서 승리해서 정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패자가 되는 사회에서, 다만 우리 아이가 승리하기 위한 경쟁의 굴레를 못견뎌한다면, 그것을 저까지 강요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저자도 인정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이 사회는 사회 구성체인 개인에게 경쟁을 강제합니다. 그것에 이르기 전까지라도 협력을 배우고 함께 성취하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면,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부모와 교사에게서 배려와 나눔의 행복을 배우는 자녀들과 학생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지 않을까, 라는 것이 '경쟁에 반대한다!'라는 선언 뒤에 숨겨진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이 책의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밑줄쳐 두었습니다. 

73쪽. 교실이 경쟁의 장이 된다면 아이들은 오히려 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것이다. 확실히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의 주의를 끌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적인 게임으로... 그러나 이런 방법의 실질적인 매력은 더 쉽게 가르치는데 있지, 더 효과저으로 배우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회피책이다.
... 이러한 게임이 평소의 지루한 수업을 대신했기 때문에 - 게임에 경쟁적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78쪽. ... 7세에서 11세... 소녀들... 콜라주 작품... 몇 명은 상을 타기 위해 경쟁하도록 했고, 몇몇에겐 보상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7명의 예술가에게... 평가하게... "상을 위해 경쟁하다록 한 실험 그룹... 독창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경쟁하도록 유도된 아이들의 작품은 자발성, 복합성, 다양성 면에서 부족함이 드러났다... 경연이라는 제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라운드가 진행될 수록 참가자들의 정서는 메마르며, 쇼팽의 연주곡을 위한 감수성은 경연에 별 필요가 없어진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이 생각났네요.

80쪽. 왜 경쟁이 일반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남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선생님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면서 손을 들고 "저요! 저요!"를 외치는 아이를 생각해보자. 결국 아이는 지목받았으나 얼이 좀 빠진 것 같다. 아이는 "근데 문제가 뭐였죠?" 라고 다시 묻는다 아이는 다른 친구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서 문제에 대한 집중력을 잃었던 것이다. 
... 우수하다는 것과 승리한다는 것은 다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 실제 학교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겪게 됩니다.

88쪽. 타인이 나를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책임감은 협력을 가능케 하며, 그 어떤 외적 보상보다 더 큰 성과를 이루게 한다. 

91쪽. ... 협력하는 집단이 더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또 하나의 이유를 불안감의 감소라고 지적했다. 

91쪽. "실패를 피하려는 경향은... 성취 지향적인 행동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102쪽. 우리는 대부분 '희소성'을 재화 공급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즉 어떤 물건(상품)이 모두가 사용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충분하다는 말이 정확히 얼마 만큼인지 명백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지구상에는 모든 인류가 먹고도 남을 정도의 식량이 있다는 것이다. 토지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왜 생필품들의 분배가 이토록 불균형한지의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이 왜 지구 자원의 40%를 소비하는가? 희소성이나 부족함의 문제는 다시 살펴보면 분배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분배 문제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어떤 시스템이 생산적인가, 혹은 효율적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 높은 국민총생산을 달성한다고 해도 누가 그 재화들을 차지하느냐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특정 개인이나 국가에 재화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갖고 있지 않은지를 물어야 한다. 


211쪽. 예를 들어 학교에서 잘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그 원인이 그저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거나, 학교 선생들이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중적인 교육제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유능한 교사와 부유한 학생들은 모두 사교육 시장으로 흡수되고, 공립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는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한다. 학습에 대한 평가가 왜 모두 똑같은 시험을 봐서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왜 비판적 사고보다 무조건적인 복종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가르쳐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학교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우리는 비판하지 않는다. 

이것은 빈곤, 범죄 등 대부분의 사회문제에 적용되는 이야기다. 


213쪽. 어떤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운동선수이든 일반인이든 스포츠에 대해 말할 때엔 그 외의 기준보다 더 낮은 수준의 도덕성을 적용했다. 이 결과는 경쟁을 할 때엔 평균적인 도덕적 규범이 사라지고, 그보다 낮은 자기중심적 도덕관이 자리 잡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경쟁이 매우 낮은 수준의 도덕성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223쪽. ... 성공과 승리(경쟁)의 개념을 혼동... 최근의 한 실험에서도 '남들 보다 내가 더 잘할 때 행복하다.', 혹은 '경쟁에서의 승리는 협력에서 얻는 보상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런 조사 과정의 문제점이 의미하는 것은 여성들이 피하려 하는 것은 타인을 패배시키는 것이지 성공 그 자체는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251-2쪽. 현재의 구조를 존속시키는 많은 특징들과 마찬가지로 경쟁 역시 사회의 취약 계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많은 연봉과 품위 있는 생활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경쟁이 해롭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은 "나의 유일한 희망은 경쟁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들을 패배시키고 올라서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면 가장 기뻐할 사람들은 권력과 힘을 가진 이들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 거의 분명하고,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승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음번에도 이길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 있다. 에드거 프리덴버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분배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규칙이 적용되는데, 일괄적으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사회의 지위 체제는 보호받을 수 있으며, 정당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사회 구성원은 스스로를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며, 패자들도 승리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초등학생과 대학생의 경기에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고 공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의 출발점은 저 앞에 있는데, 결승선만 같다고 해서 공정한 게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주 가끔 이러한 경주에서 이기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경쟁에서 승리하면 이렇게 대우받을 수 있다고 요란하게 선전하는 데 이용된다. 그리고 이 선전의 효과는 매우 커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구조를 바꾸기 보다는 다음엔 승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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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사 (양장)
존 키건 지음, 조행복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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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주제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러한 까닭에 열심히 읽기도 하는 편이지만, 전쟁사에 관련된 책을 읽어본 적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을 거시적인 것으로 바라본, 혹은 전쟁이 하나의 과정으로 기술된 책은 조금 접해보았지만,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둔 책을 읽은 기억은 거의 나질 않습니다.


이 책, [1차 세계대전사(이하, 1차)]는, 많은 현대사 책들이 1차 세계대전을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필연적 귀결로 이야기하거나, 혹은 2차 세계대전의 파국을 내재한 과정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온전히 1차 세계대전에 초점을 맞추어 건조하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차]를 읽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건조하게 전투의 추이를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림자료가 상당히 부족하다는데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궤는 다르지만, [로마인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다양한 전투의 장면에서 간략한 도해를 첨부하여 텍스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다양한 전투 장면들이 건조하지만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이미지를 통해 텍스트의 이해도를 높이는데에도 불친절함이 분명합니다. 혹여라도, 전쟁사에 관심이 있어, 세게부도라도 하나 옆에 놓고 지명과 병력 배치를 하나하나 표시하면서 읽어내려갈 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은 상당히 좋은 책임에 분명하지만, 저와 같이 전쟁의 기술적인 측면에는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읽기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600여쪽의 분량 중 절반에 이를 때까지의 독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절반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전투에 대한 건조한 묘사는 조금 줄고, 전투의 전후 상황에 조금 더 치중하고 있는데, 그 이후로는 읽기에 조금 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분량의 절반 이후로는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미묘하게 얽혀있던 국가간의 동맹/연합 관계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과 그에 대처하는 각국의 대처가 미묘하게 엇나가면서 시작한 전쟁인 탓에, 세계대전의 초중반인 1915년도까지는 전투의 양상이 국가 단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저자의 기술이 상대적으로 전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책 전반부의 흐름은 분절적이고 건조한 미시적 서술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던 세계대전은, 각국의 동맹/연합 관계가 개별 전투에서 결합되고,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의 급작스러운 강화로 인해, 참전국 간의 이해관계가 새롭게 조성되면서 분산되어 있던 전투의 양상이 통일성과 집중성을 띄게 되고, 그 시점 이후로 어렵지 않게 독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실, [1차]를 읽다보면, 1차 세계대전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럽의 제 국가들은 나름대로의 합리성에 기반한 전쟁 억제 장치를 구축하고 있었고, 그것은 19세기의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국가 간의 첨예한 이해 관계의 대립 속에서도 파국을 막는 안전장치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연합과 동맹은 각 이해관계국간의 것이었고, 삼각관계를 넘어선 다자간 연합/동맹체는 아니었으므로, 다양한 세력들은 직접적인 억제 장치로 연결된 것보다는 한 다리 건너 간접적인 이해 관계를 수립하고 있었는데, 적의 적은 동지라는 이러한 합리성이, 병렬적인 국가 간 연계고리 속 어딘가에서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었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발화함으로써, 유럽은 겁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국가 간의 동맹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억제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에 대하여 세르비아를 응징하려는 것은 기실 세계대전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맹과 연합이 파국을 억제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어느 시점에서 어긋나 버릴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바로잡기에는 유럽 제 국가간의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던 탓에 발화선을 끊어내지 못해버리고 폭탄은 터진 것이겠지요. 


이러한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제정 러시아의 붕괴와 볼셰비키 혁명 앞에서 변곡점을 맞이하고,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극적인 귀결에 이르게 됩니다. 독일의 제2제국은 붕괴되고 동유럽의 각 민족은 민족국가를 수립하며, 이제 러시아에서 시작된 레닌의 혁명은 다시 유럽과 세계를 전쟁의 겁화로 몰고 들어갈 불씨가 됩니다. 



이 책, [1차]는 전쟁에 대한 낭만인 생각이 핓빛 죽음과 처연한 고통의 실존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세밀하고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국가 간의 이해 관계와 그에 따른 전황의 극적인 변화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대의(라고 믿었던 것)에 뛰어들었던 개인이 전쟁 앞에서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처연하게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청장년 인구 중 10%가 넘는 이들이 너무도 쉽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버리는 장면을 기술하는 제 전투 장면에서는, 마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프롤로그에서의 아무렇지도 않은 죽음이 주는 섬뜩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세계대전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지는 않고 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필연 속에서 개인과 집단, 국가가 겪었던 겁화의 소용돌이를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영웅적인 개인 혹은 파국을 야기하는 개인이 마치 역사의 변곡점을 제공하는 것처럼 그리는 저자들도 좀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것 없이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골고루 저자의 이해를 분배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익히 명성을 접해왔던 책을, 약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이 2010년 4월 19일이었네요. 그 동안 몇 번 멈췄다 다시 시작했다가... - 다 읽게 되어서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전작인 [2차 세계대전사]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독서였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역자는 조행복 씨 입니다. 얼마 전 작고한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를 번역한 역자이기도 합니다. [포스트워 1945-2005]는 참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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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시사인]이던가 [한겨레21]이던가 - 아니면 둘 다 이던가 - 에서 서평을 통해 만나보고 나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잡고 한 3분의 1정도를 읽었더랬습니다. 마침 한창 바쁘던 4학년 1학기 시기인터라 책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못하다가, 요즘 잉여 생활 와중에 다시 책을 잡아 한 달여 정도 걸려 다 읽어 내었습니다. 



900쪽이 살짝 넘는 책의 분량, 그리고 자그마치 112명 (플러스 알파)의 동/서양 철학자들이 맞부닥치는 책의 구성, 그리고 의외로 읽기에 나쁘지 않은 저자의 필력 등이 잘 어우러져서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의 저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러셀이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기 이전만 해도, 보통 '철학사'라고 하면 서양 철학사를 일컬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두 번째 대학교 시절에 '법철학회'라는 학회에 몸담으면서 [철학과 굴뚝 청소부]라던지, 아니면 [철학 A반을 위한 philasophy] 혹은 [소피의 세계]를 읽으면서 가졌던 편견은 당연히, '철학사는 서양 철학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사실 편견이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동양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만한 학문적 고찰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인터라, 동양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여지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사는 서양 철학사다, 라는 인식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철학VS철학 (이하, VS)]의 가장 주목할 부분은, 전체 56장의 챕터 중에서 동양 철학의 사유 부분에 전체의 절반인 28장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의 논쟁부터,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백가쟁명 시대의 다양한 주장들을 아우르는 저자의 폭넓음은 경이로운바 있습니다. 여담으로, 저와 고작 7살 차이밖에 나질 않는데, 폭넓게 인용하면서 다양하게 주장하는 것은 저자의 그동안의 학문적 고민과 성찰을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VS]와 같은 책에서 독자가 가장 주의하여야 할 점은, 저자의 관점이 강력하게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책의 독서에서, 저자와의 적절한 거리감을 두면서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 속에서 독자가 나름대로의 생각을 열매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할 독서의 목적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책은, 타겟으로 삼는 독자군이 애매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전을 상당부분 저자의 주관적 관점을 통해 압축한 후에 그것을 통해 저자의 주장을 강화하는 요소로 삼는 이러한 책에서, 철학에 입문하는 독자라면 원전의 텍스트는 놓친 채 저자의 해석을 마치 원전의 그것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런 책이 넓으나 깊지 않아 독서가 형식적이 될 가능성이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책은 저같은 애매한 - 철학에 관심은 있으나 깊이 있게 아는 것은 아닌데다가, 계열성을 구축하지도 못해 사유를 조각모음해야 할 필요가 있는 - 독자에게 적절한 부분이 있는 책입니다. 게다가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원전을 함부로 인용한다면 자칫 역사적 사유가 아닌, 저자의 사유를 받아들여 치환시켜 버릴 우려도 다분합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애매한 독자인 제가 보기에, 인용이 적절했고, 저자가 욕심부리지 않고 가장 일반적인 철학자의 주장(?!)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두 철학자의 주요한 주장을 하나의 챕터 속에서 VS 형식으로 대립시키면서 두 철학자의 주장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상당부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저자는 철학자들의 텍스트 중에서 아주 극소수의 일부 - 한 문단 정도? 많으면 두 문단 정도 - 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용이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으며, 텍스트가 어려울 경우에는 적절한 해석을 통해 철학자의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까지 하므로 철학자들의 다양한 생각에 더 가까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절반을 동양 철학의 사유를 설명하고, 서양 철학의 사유와 연게성을 부여함으로써, 서로간의 연결을 통한 이해의 확장을 돕고 있으며, 가깝지만 먼 유학이나 불교, 선종 또는 교종의 주된 흐름을 놓치지 않고 연결짓고 있는 것에서 동양적 사유를 풍성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VS]를 읽은 후에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를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책의 부록에는 주요한 철학자와 철학적 개념어 사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또한 유의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책의 말미의 부록을 읽으면서 책 전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참 어려운 학문임에 분명합니다. 철학은 내가 나를 만나는 과정에 대한 사유이며, 내가 남을 대하는 양상을 통한 사유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깊고도 넓은 철학적 사유를 하나하나의 원전을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는터라, 우리는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정리된 사유를 만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강신주 교수의 이 책 [VS]는 독특한 시도를 통해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자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였고, 그러한 마주침을 통해 넓이 있는 사유를 이끌어 내었으며, 깊이 있는 사유를 욕망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원전을 접하면서,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유를 구축한 연후에, 저자의 이 책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으며,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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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찐따 2014-12-2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 잘 읽었습니다!
철학에서 ˝애매하다˝라는 말을 저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
어떤 술어가 적용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누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 http://textexture.tistory.com/21

하리야헌처크 2014-12-28 23: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방문 감사합니다. (꾸벅)

알려주신 부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D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