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3 소설 보다
공현진.김기태.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이제는 계절마다 찾아오는 한국 문학을 떠받칠 신예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를 기다리는 것이 내겐 습관처럼 되었다. 나는 매번 세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하고, 그 작가를 마음속에서 응원하곤 한다. 이번 ‘2023 여름편에서도 한 분을 고이 새겨둔다.

 

세상이, 그리고 사람들이 묘하게도 설정하는 기준, 모호하기 그지없는 표준적 양태라는 정상성, 이를테면 그만하면 됐어하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미묘한 감각에 물음을 던지는 공현진 작가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시니컬한 제목의 소설을 시작으로, 늘어난 미디어 채널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전파를 장악한 짝짓기 프로그램을 제재로 한껏 통속성으로 호흡하고 있는 김기태 작가의 롤링 썬더 러브, 마지막으론 공간적 디테일인 구조, 전반적인 톤/색체/분위기 등을 상상하며 글을 쓴다.”는 하가람 작가의 도시 울산을 배경으로 한 재와 그들의 밤, 이렇게 세 편이 수록되어있다. (가나다 이 수록순서의 편집 규칙인 모양이다.)

 

(1) 김기태 작가의 롤링 썬더 러브로 시작해야겠다. 소설은 나 조맹희, 37세 독신.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장미를 들고...”라고 자신을 설명하며, 이성에 대한 적대와 환대의 상징을 양손에 쥔 채 세상을 가늠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흔해빠진 가십거리를 양산하는 짝짓기 쇼 <솔로 지옥>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신청한 여성의 이야기다. 세상 평(), 주변의 시선에서 풀려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출연 남성들에게는 관심을 등지고 자신을 담당하는 PD에 눈독을 들이는 여성, 나는 이 인물을 따라가며 그저 세태의 한 양상만을 읽고 싶어졌다. 문학의 소명이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는.

 


(2) 아마 내게 생각이란 걸 촉구한 작품은 공현진 작가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 할 수 있는데, 소위 적당하고 당연한 기준이라는 사고와 행동의 그러해야 함이라는 기묘한 모호성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두 인물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묘사되는 희주와 주호는 표현된 결과는 닮았지만 당연한 기준에 대한 인식은 존재와 부재처럼 양 극단에 있다. 성인기초 수영반에 등록하고 수영을 배우지만 두 사람은 늘 잘 못 된 동작의 예시로 뽑힌다.

 

두 사람이 물에 뜨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물장구치는 방법을 좀처럼 익히지 못하는데, 희주는 힘을 빼야하지만...그렇다고 힘을 다 빼면 안 되고...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와 같이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는 사람이라면, 주호는 자신이 지금 힘을 주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소설에는 두 개의 커다란 테마가 연결되어 오늘 우리네들 각자가 지닌 적당하고 당연한 기준이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한계, 생태계에 대한 자기 책임의 한계 등에서 대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생각토록 한다.

 

사출성형기에 끼어 죽은 동료에 대한 애도를 그만하면 됐잖아. 이제 그만하고 나와. 더는 무리야.”처럼, 정해진 기간의 기준이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들의 사회적 책임의 한계란 어디까지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꿀벌이 사라지면 사슬처럼 연결된 생태계의 연속적 파괴, 마침내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행성이 됨을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교사에게 용납되지 못하는 것일까? 작가가 묘사해 내는 두 인물에 심취케 하는, 놀라운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서사적 재미를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 사유의 끈을 강력하게 견인하는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3) 하가람 작가의 재와 그들의 밤은 울산이라는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공간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분위기, 고유한 정서를 느끼게 하듯, 그렇게 세밀화를 보듯 한 장면 한 장면에 그려진 현상들의 의미를 씹어보는 맛이 있는 그런 소설이라 할 것이다. 고향 울산의 집으로 향할 때 자신이 20년간 살았던 집(아파트 한울) 앞 산불의 영상,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묘사되는 산에서 시작된 불길이 한울을 집어삼켜...까맣게 재가 되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화자의 바람처럼 한 문장도 버릴 것 없는 촘촘하게 의미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들 신예의 작품과의 대면을 통해 새롭게 응원하는 작가를 마음에 품게 되는 것은 독서가에게 하나의 즐거움이다. 가을에는 어떤 작가의 소설이 인간 세상의 비의(秘意)를 안고 다가올지 벌써 기대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의 유서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 죽음, ‘가 아닌 죽음을 지켜보아야 할 때마다 항상 분노가 치민다. 언젠가 내게도 죽음이 찾아들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문득 그것이 찾아왔을 때, 세상의 모든 것과 연()을 끊어야 함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함을 알 때, 한 인간의 고뇌가 번개처럼 내 신경계로 파고들어 전율을 일으키며 슬픔에 빠지게 한다.

 

이 소설은 철학적 사색이 빼곡하게 스며있는 소피의 세계작가인 요슈타인 가아더의 짧지만 두꺼운 사유의 기록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두 번은 읽어야 하기에 170여 쪽의 작품은 340여 쪽의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이라는 의지가 사용되는 근육의 점진적 작동 불능상태로 생명을 잃는 불치병의 진단을 받은 교사 알버트의 이틀에 걸친 치열한 고뇌가 흐른다.

 

알버트는 아내 에이린과 사랑을 맺었던 37년 전 우연히 찾아들게 되었던, ‘밤의 짙은 눈동자를 닮은 호수가 있는 숲속 오두막을 찾아간다. 그리곤 오두막 주인인 농부가 내놓은 오두막을 사게 되어 두 사람의 동화속의 오두막이 되고 아들과 며느리, 손녀가 찾는 가족 공동의 장소에 이르게 된 사연이 나지막하게 회상된다.

 

인간의 삶이란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

결국은 어두운 밤이 주인공을 덮치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 75

 

그는 이미 왼 손의 근육이 경화되어 사용이 불가능해지고 곧이어 오른 쪽 손도, 나아가 신체의 모든 근육들, 호흡조차 어려워지는 시간을 생각한다. 더 늦기 전에 가족들이 몇 달에 걸쳐 내가 겪을 불명예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함께 경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오두막의 가족 방명록에 밤의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사용할 수 있는 오른 손이 굳기 전에.

 


유서의 이야기들은 에이린과 첫 마주침에서 끌림과 그리고 사랑의 기억들, 아들 크리스티안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세 가족이 오두막에서 맞게 될 설렘의 기쁨들, 그리곤 손녀 사라가 남긴 백조의 그림들, 아들과 손녀 모두와 드넓은 우주의 생명체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들, 아내 에이린과 만나기 전의 연인이었던 이젠 가족 주치의인 마리안네와의 사랑의 이야기들이 순수하게 흐른다. 작가는 알버트의 자살 결심과 관련하여 이들 과거의 기억들, ‘당신과 너,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삶의 애틋함을 말하려 한 것일까?

 

그에게 시한부 삶의 선고를 내렸던 마리안네로부터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는다. 그리곤 힘겨운 고립 상태에 빠져있을 알버트에게 살아있음의 신호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따뜻한 문자가 도착한다. 이어 멜버른에 생물학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있는 아내 에이린으로부터 사랑하는 알버트!’라로 시작되는 문자가 도착한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의 따스한 마음들이 그의 곁에 있다. 그의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깊은 좌절과 비애에 휩싸여 있는 존재, 그는 극도의 감상적 형태로 변질된 존재이다. 누군들 이를 피할 수 있을까?

 

차가운 얼음장 같은 호수, 그는 나룻배를 호수의 중간으로 몰고 나간다. 자갈과 쇠못을 허리에 가득 담은 채. 그러나 그는 이른 새벽 자신이 오두막의 2층 침실에 있음을 깨닫는다.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무엇이 그를 자살에서 다시 살아있기를 요구했을까? 그에겐 새로운 가족을 세상에 내놓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해야 할 이 남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나의 존재적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죽음의 실행을 막아선 것일까? 소설에는 그의 우주론적 사색과 생명체의 존귀함에 대한 사유가 흐르지만 이것이 곧 결행을 중지시킨 요인은 아닐 것이다.

 

몇 달이나 작별을 준비한다는 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저 그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기 만을 바랄 뿐...

그 시간 동안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기 만을 바란다.”  - 173

 

알버트는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죽음의 주체인 의 생각은 어쩌면 이기적이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감성의 충격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였던 것 같다. 다만 길지 않게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그가   당신, 라는 존재를 만들었기에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운명의 몫에 대한 이해였으리라.

 

나라면 이러한 시한부의 삶, 사랑하는 이들에게 수고로움을 불가피하게 초래하게 될,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가족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결심을 할 수 있을까? 영국의 형이상학 시인 존 던(John Donne;1572 ~ 1631)’의 소네트 한 구절처럼 인간은 외딴 섬이 될 수 없다. 개개인의 인간은 대륙의 일부이자.....”라는 그 끈끈한 생의 유대 때문일까? <Time to say goodbye>로 알려진 이탈리아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함께 떠나요; Con te partirò>본 적도 산 적도 없는 곳으로 같이 떠나자는 죽은 이를 향한 애절한 이별의 사랑 노래가 떠오른다. 이 이야기의 결정은 독자의 몫이다. 아마 이 소설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안타까움과 두려움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펼쳐진 사랑의 이야기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트릭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힘과 선함과 총명함과 부드러움과 영혼의 웅장함이 숨이 멎을 만큼 방대할 때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름다움은 산 위의 티끌이며,

불붙은 헛간 근처에서 타오르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 308

 

 

로런 그로프의 소설에 대해서 나는 하나의 느낌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한 자연주의 공동체의 형성과 붕괴의 시간 속에서 흐르던 작은 인생들의 사랑과 무한히 친밀한 마음들로 가득했던 아르카디아(Arcadia)의 향수이다. 시리도록 순수해서 충만해지는 그런 감각이라 할까, 혹은 깨닫지 못했던 태고(太古) 이래 잠들었던 어떤 그리움의 깨어남이라 할까, 아무튼 그런 깊은 감동이 남아있다. 소설 매트릭스는 오로지 이 기억에 의해 이끌린 작품이다.

 

매트릭스短詩(Les Lais)등 섬세하고 감미로운 황홀감을 묘사한 작품을 남긴 12세기 여성시인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를 모델로 하고 있으나, 당대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었으며, 실제 인물에 대해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당대의 시적 감수성을 지닌 여성인물, 즉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서 차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로런 그로프는 그 어떤 신화의 남성 영웅을 넘어서는 위대한 이야기로서 이 여류시인에게 웅대한 영웅 서사의 모습을 부여한다. 오직 여성의 언어로만.

 

몸의 절반에 왕의 피가 흐르는 거대한 몸과 앙주 왕가(12~13세기 잉글랜드 지배)특징이 도드라진 촌스럽고 흉악범처럼 생긴, 어떤 아름다움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을 한 열일 곱 살 사생아 마리 드 프랑스는 왕비 알리에르노의 명에 의해 약탈과 노략의 흔적만이 남겨진 퇴락하고 가난한 왕립수녀원의 부원장으로 궁전에서 쫓겨나듯 부임한다. 이런 상황을 전해주듯 소설이 시작되는 문장은 홀로 말을 타고 숲길을 타박거리는 열일 곱 살 마리와 그녀가 바라보는 수녀원의 모습이다.

 

습한 계곡의 언덕 마루에 수녀원은 희끄무레하고 냉담한 자태로 서 있고,

바다에서 끌려 온 구름은 언덕을 휘감은 채 끊임없이 비를 뿌리고 있다.

모든 것이 회색이고 온통 음지다.” -11

 

말이 왕립수녀원이지 가난과 질병으로 매일 수녀들이 죽어나가는, 얼마 남지 않은 수녀들이 겨우 연명하는 곳에서 마리는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아니 그보다는 종교적 열망이 없는 인물이라는 말이 옳을 것 같다. 직위는 부원장 수녀이지만 정식수녀가 아닌 수련수녀에 불과한 마리는 달아날 궁리도 하지만 자신의 남성을 능가하는 커다란 키와 몸집 등, 궁중의 시선을 피해 도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간은 흐르고 정식수녀가 됨으로써 지저분하고 끔찍하며, 더 이상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세상으로 옮겨감으로써 잘 알지도 못하는 수녀원 여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함을 인식한다.

 


마리의 이야기, 한 여인의 영웅 서사는 비로소 시작된다. 마리의 성장은 이제 수녀원과 수녀들의 공동체를 강력한 유대 집단으로 만들어 내는 것, 자신이 그네들의 탄탄한 울타리가 되는 일련의 생각과 그 집행이다. 연체된 소작료, 미루어진 귀부인의 유산, 인접한 귀족들의 토지를 받아내고 증여받아 수녀원의 자족적 삶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고, 이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전술들을 익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한 지성의 배움이고, 수녀들의 죽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늙은 원장 수녀가 질병으로 타들어가는 호밀밭에는 펄쩍뛰며 주변의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나서는 평판을 위한 대응(對應)술이며, 여자들의 세계인 신성한 수녀원과 외부 세계를 철저히 차단하여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한 장벽의 장치전략이다.

 

마리는 벽을 쌓는 방식을 깨우친다. 부와 혈통과 결혼의 벽, 친구와 첩자와 충언자의 벽, 그리고 가장 바깥의 벽인 평판의 벽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다. 마리는 왕비 알리에노르의 정치술로부터 여자의 권력은 용납되는 만큼만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깰 수 없는 형식 안에서만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원장수녀가 된 마리의 행보, 그녀의 혁명가적 성장기이자 일생의 자취가 이 소설의 테마일 것이다. 수녀원의 자산을 지켜내고, 자신의 딸들인 수녀들을 외부로부터 지켜내는 것, 여인들의 굳건하고 풍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 그럼으로써 소외되고 배제된 세계에서 여성의 권력을 공고히 확보하는 것이다. 이 여정에서 수녀원 내부의 갈등과 위협이 발생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며, 외부의 탐욕을 경계하며, 평판의 도전과 끊임없는 도전을 그 어떤 손상이나 파괴의 위협을 상처없이 받아내는 지혜이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것,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슬기와 용기다.

 

여자에겐 허용되지 않은 글쓰기, 성서를 필사하여 판매 수익을 확보하고, 늪지를 농토로 바꾸는 억척스런 대역사(大役事)를 이겨내는 것이며, 수녀들의 취향을 이용한 적재적소의 작업배치를 통한 능동성의 즐거움이기도 하며, 외부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기 위한 첩자와 정보의 활용이다. 무엇보다 근시안적이고 계급과 권위에 사로잡혀있는 수녀들 스스로가 열등한 성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노예화라는 뿌리 깊은 근성과의 투쟁이다. 마리는 우리의 동정 마리아는 자궁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도록 선택받은 가장 완벽한 그릇 아닌가요?(237)”라고 말한다.

 

수녀들의 미사와 고해성사를 주관하던 남성 사제들이 사제관 화재로 모두 죽었을 때, 그리고 영국 왕실과 로마 교황과의 싸움으로 인한 미사와 축성을 금지하는 성무(聖務)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미사와 고해성사의 주체가 됨으로써 이단적 행위자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수녀들로부터 동의와 비판을 불식시키는 용기는 그녀가 그네들 공동체의 평화를 교란시키지 않기 위한 신념의 강도(强度)일 것이다.

 

미사전서와 시편을 여성형 단어들로 바꾸어 필사하는 것, 여자들만 듣고 말할 글인데 안 될 게 뭐 있는가?(242)” 만큼 한 여인에게 혁명적 실천가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소설은 여성 공동체를 일궈낸 신화적 영웅을 탄생시키고 있다. 마리는 이루어 냈다. 아기들이 어둡고 단조로운 소리가 나는 따뜻한 자궁 안에서 자라듯 자매들이 커가는 자아의 전당(313)”을 지어낸다. 소설의 제목인 '매트릭스(matrix)'는 바로 이러한 성소(聖所)로서의 자궁이며, 삶의 내면에 봉인된 인간 존재에 잠재된 신성성의 의미일 것이다.

 

마리가 당대의 믿음에 반역을 하면서까지 이룩하고자 하는 사상과 행위들을 할 때마다 동정 마리아의 환시(幻視)를 경험하며, 이로부터 역사(役事)를 추진할 동력을 얻으며, 그녀는 영면(永眠)할 때까지 열아홉 번의 환시를 기록해 둔다. 이 숫자는 곧 혁명적, 즉 당대의 시선에서 이단적 기록이라 할 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장대한 힘과 원대한 구상의 동력, 그 전환적 의지이자 용기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마리의 시녀인 세실리가 마리 내면의 빛에 대해 찬양한 말은 가히 영혼의 웅장함에 대한 가장 근접한 축복의 언어이자 이 작품의 본성일 것이다. 아마 이 작품을 여성의 언어로 기록된 최초의 여성 영웅 서사라 해도 곡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에는 마리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수녀들의 세계, 많은 여자들이 등장해서 다양한 색깔들로 여자들만의 고유한 삶의 형상들을 세밀하고 통찰력 깊게 펼쳐놓는다. 그리곤 죽음의 자궁(matrix)이었던 수녀원을 생동하는 삶의 자궁으로 변화시켜 놓는다. 위대한 기적에 대한 노래와 소문으로 가득한 가히 웅장한 여성 일대기이다. 모든 여성들이여 꼭 읽어 보도록 하라. 어쩌면 힘차게 뛰는 맥박을 느끼며 여성으로서의 투지가 솟아오를 것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나를 에워싸고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본성인 자기 보존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불완전하거나 불편한 요인들을 회피하거나 제거하여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그 세계가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器官)들의 윤곽을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낸다면 아마 이러한 의지와 욕망 실현의 접근에서 긴장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셜 맥루언의 이 고전적 저작은 인간 신체의 확장물이자 촉진자로서 <미디어;Media>를 정의하고, 이 미디어를 이루는 기술의 점진적 변화와 발명에 따라 인간과 인간사회를 광범위하게 지배하게 되는 인식 및 지각 모델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탐사하여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수행한다.

 

특히 기계화로 표명되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와 전기(電氣)를 자원으로 하는 오늘의 시대가 지니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징과 현상들을 규명하고, 이것이 인간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행동에 미치는 양상들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들은 매우 급속하게 인간 확장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저자의 선언적 문장은 문자시대와 기계시대의 사고(思考)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관습적, 기득권적 존재들과의 필연적 갈등을 낳은 본질임을 보여준다.

 

어떤 미디어나 기술의 <메시지>는 결국 미디어나 기술이

인간사에 가져다 줄 규모나 속도 혹은 유형의 변화이다.” -36

 

인간 기술의 변화는 돌도끼에서부터 문자, 우마차, 인쇄기술, 철도, 방적기계, 화폐, TV, 영화, 고속도로, 비행기, 컴퓨터, AI Robot에 이르기까지 인간 신체를 확장하는 일련의 작업이다. 즉 이들 각각의 미디어(媒體)는 기존의 과정들을 증폭시키거나 가속화했을 경우 초래되는 정신적, 사회적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익숙한 예로써 철도는 이것이 등장하기 전까지 있던 각종 규모들을 가속화시키고 확대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미디어는 도시와 노동과 여가 생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만들어내도록 강요 한다. 미디어는 이처럼 인간의 행위와 결사(結社)의 규모와 형태를 형성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곧 그 사회 속성 자체의 메시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미디어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지나버린 것들을 붙잡고 낡아빠진 퇴행적 몸짓으로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곤 한다. 이 까닭을 맥루언은 미디어의 <내용> 때문에 그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고 지적한다. 미디어 그 자체가 내용을 지닌다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전깃불이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미디어로서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이의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광통신망 등 전기의 커뮤니케이션, 정보 미디어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는 오래된 아포리즘(aphorism)이 있듯이, 이 이해는 이미 진부한 것이 되고 만다.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지만 시대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설혹 기존의 형()들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 새로운 정반대의 형들이 나타나는 순간을 바로 목격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만한 주의력과 집중력을 지니기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다. 초음속 전투기가 음파를 돌파하기 직전에 음파들은 비행기 날개에서 비로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소리가 끝나기 직전에야 소리가 보인다는 이 사실처럼 새로운 전환은 반대의 상황을 야기한다.

 

우리는 오랜 문자문화 시대와 서구에 비해 상당히 짧은 기계 시대를 살았다. 사실 오랜 문자 문화시대라 하지만 대다수의 평민인 피지배계층은 구술문자 시대에서 인쇄 문자시대로 이행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서구 사회에 비해 인쇄문자, 기계 시대의 경험이 짧기는 하지만 이로인한 급격한 변화의 유 무형 영향들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기계 기술의 본질인 세분화 테크닉이라든가, 관계들의 유형화를 통한 단편적 분석의 경향성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중앙집중적 태도를 심화했다. 이는 인쇄 문자와 어울려 더욱 분석적이고 전문적 심리를 정착화시킨다. 아마 이러한 양상들이 오늘의 합리주의 서구사회의 표상이며, 한국 사회의 지배 계층에 자리잡은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탈기계화, 탈문자화하는 정보통신의 시대로 이미 깊숙이 전환되어 있다.

 

때문에 수많은 갈등과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것인데, 옮겨간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계층과 이를 이해한 계층의 엄청난 간극이 발생한 것이다. 공장 기계화는 공정을 유형화하고 세분하여 효율화하는 것이지만 공장 자동화는 이들을 근본적으로 통합하는 동시성의 기술이다. 즉 중앙집중화(중심-주변)에서 탈중앙집중화(분산화)처럼 정반대의 현상을 의미하듯 두 사회는 아주 다른 사회이다. 문자문화(기계화)에 경도된 인간은 이 새로운 세계에서 감각마비에 상태에 빠지고 만다. 즉 무관심과 무지라는 부정성에 매몰되는 것이다. 인쇄 문자문화에 매몰된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 찬 시각화된 이들 인간은 청각, 촉각 등 총합적 감각의 인간을 배제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검찰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퇴행적 정치 양태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러한 퇴행성 인간을 선택한 많은 대중들 또한 변화된 시대의 메시지를 읽는데 무능했음은 물론이다. 작가 로즈(A.L Rowse)가 영국 지배권력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각종 경고들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반공주의에 혈안이 되어있어 히틀러의 등장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없었다.(50)”고 지적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실패와 동일한 예일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눈으로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는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말은 시대 변화(메시지)를 읽는 데 있어 우리 인간들의 근시안에 대한 준엄한 비판일 것이다.

 


미디어, 새로운 기술의 효과들은 견해나 개념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 오해를 우선 벗어나야 한다. 미디어는 오늘의 스마트폰이나 인스타그램, 유튜브처럼 인간과 인간사회의 감각비율이나 지각 패턴을 서서히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인간 감각 생활의 확장이기에 사람들의 감각 생활을 재편하고, 사람들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견해나 개념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생활의 재편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인간 감각이 시각문화에서 총체적이고 통합적 감각 체계로 변했다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새로운 질서와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금의 권력은 여전히 낡아빠진 수구적 권위주의 독재정치의 회귀를 열망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증폭시키고 확장시키게 해주는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들은,

방부처리를전혀 하지 않은 채 사회라는 신체에 가하는 

어마어마한 집단적 외과수술이다.”   -113

 

기계시대(인쇄 문자시대)는 효율과 실용성을 추구하면서 인간 정서나 감정을 억제시키고 내몰았다. 이제 새로운 전기전자의 시대라는 급격한 반전지점을 넘어 돌아 올 수 없는 극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사람들에게 감지케 하고 있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일방적이고 기계적으로 팽창한다는 낡은 패턴의 집착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도 중요성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소용없는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의 보편적 일상화나 자동화공장처럼 분할된 작업 절차들의 모든 기능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복합적 기관(organs)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변화된 감각비율, 새로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볼품없는 천박한 자아만 비대해진 인간, 물속에 비친 자기모습, 이 확장된 자기 이미지를 스스로 통제하기 전까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소위 나르시스(narcissus) 신화다. 이 감각마비에 빠진 존재는 요정 에코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을 확장한 거울 이미지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깨어나려면, 다시 말해 자신을 진정 확장하려면 자기 단절(절단)의 희생을 감수하여야 하는데, 이를 행하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이 마비에 매몰되어 있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앎(지식)이 아니다. 우리 신체의 중추신경 조직은 상해를 일으키는 기관이나 감각, 기능을 단절하거나 고립시키는 전략을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한다. 자기 확장은 이처럼 필연적으로 자기단절의 선행을 요구한다. 이 선행적 자기 절단의 희생을 회피하는 한 마비는 풀어지지 않고 비대해진 자아로 주변을 괴멸시킨다. 즉 야만적 폭력이 난무하는 퇴행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금은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장의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좋든 싫든 한꺼번에 시야에 밀려드는 현상들에 의한 사회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제아무리 가리려한들 전자전기 시대인 오늘 인간들의 인식을 차단할 수 없다. 퇴행하는 인간들은 이 변화를 부정하고 통제하려들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충돌을 낳는다. 혼란이고, 고통이다.

 

일방통행의 전통적 미디어들에서 다양한 통로를 열어둔 미디어로 이행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관습적 지혜를 대표하는 사람들, 그들이 집착하는 미디어는 자신들의 지위와 안전, 기성의 지식이라는 단순한 형태에 의존해있기에 혁신(새로운 변화)은 파멸로 인식될 것이다. 케케묵은 부패한 지식이라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 추한 낡음은 변화된 인간 세계의 감각비율을 억지로 기계시대의 그것으로 되돌리려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자전기 시대의 미디어가 지닌 본성을 돌릴 길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미디어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 데이터로 가득한 상태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를 '뜨거운 미디어(hot media)'라 부르며, 시각적 언어적 정보가 낮은 저밀도의 미디어를 '차가운 미디어(cold media)'라 한다. 지금 우리들의 세계는 뜨거운 미디어에서 차가운 미디어시대로 이동했다. 차가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있어 이용자의 참여도가 높은 미디어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에 이용자들이 몰려드는 이유이다. 이는 전문성이 강한 인쇄문자의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중적 권력을 인정하지 못한다. 분산화되고 집단적이며 횡적으로 인간들을 통합하는 오늘의 새로운 미디어 시대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 내야 한다. 이를 회피하는 한 혼란과 문화지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광화문과 삼성동에 정권 선전용 전광판을 설치하고 일방적 메시지를 쏟아내려는 사태는 이들이 얼마나 시대의 변화, 변화된 미디어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의 여실한 표징 일 것이다. 차가운 미디어의 시대, 이용자(소비자)가 참여 할 수 있는 미디어를 봉쇄하고, 참여 불능의 일방적 미디어로 훈계하려는 이 역행성의 행위는 이들의 퇴행성을 입증할 뿐이다. 이로서는 결코 참여와 감정 이입이 일어나지 않음을 이들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 기득권 집단이 머물러있는 지나간 기계시대에 대한 향수는 오직 기만과 악의, 야만과 폭력의 야욕 냄새만을 뿜어댈 뿐이다.

 

하나의 감각만을 높이려 들면 최면상태가 일어나고, 모든 감각들을 냉각시키면 환각을 낳게 된다. 권력의 최면상태에 빠져 자신들의 감각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들면 끔찍한 파멸이 야기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이미 실증된 것이며, 이 세계의 원리이자 본성이다. 인간 확장물인 미디어는 어떤 것이 일어나게 하는 인자(因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경험이 지니는 불연속성들을 세밀하게 조사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회피하고 억압하는 기계화 시대의 방법으로는 이 사회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양성, 획일성, 연속성, 계열성과 같은 기계시대의 패턴으로는 복잡성, 다양성, 유기적으로 얽힌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현대 생활의 변화된 조건들을 발견 탐구하는 이 위대한 저작은 인터넷이 출현하기 20년 전에 써진 저술이다. 그러함에도 오늘날의 정보기술 혁명의 시대에 맞이한 미디어들을 해석하는 데 치밀하고 예리한 이해를 돕는다. 맥루언이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숱한 미디어들이 발생할 때마다 인간과 세계의 전환이라는 그 분별성의 원리를, 그 구조적 원칙을 새겨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는 새로운 힘으로써 세계의 근본적 재편성을 만들어내는 그 자체가 메시지인 존재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세계의 현재와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길이 새겨져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니비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4
박문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과 인간 사회 그 던적스러움에 대해서

 


사람들은 끔찍하다가도 애틋했고, 애틋하다가도 끔찍했다.

누추한 동시에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동시에 누추했다.” -37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의 곤혹스러움, 이것의 정체를 묻는 것은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기만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간단히 모든 어려움은 인간들이 앎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얼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라 다시 묻는다면 자신들이 발 딛고 선 곳을 뜯어내고야 마는 몽매성, 변치 않는 태생적 불완전성이라 말하는 것으로 족할까? 어쩌면 이 소설은 이 답변의 한 양태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초제와 수은 그리고 방사능에 절여진 땅’, 자신들이 망가뜨린 세계에 더 이상 희망 없음을 예견한 인간 무리가 마지막 우주선 아듀호를 타고 떠나버리고, 이의 탑승에서 배제된 인간들만이 남은 지구가 배경이다. 소설은 2199년 바로 이러한 마지막 이주가 진행되던 날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2399년의 남겨진 인간들의 세계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200년 전에 진행되었던 탑승 자격과 기준도, 이의 결정권자자들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리에 진행된 도피성 이주,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머지 인간들에게 행한 이 얄팍한 사기극이 남은 인간들의 역사에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는 세계이다.

 

즉 버려진 인간들의 역사이다. 아니, 사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 영악한 무리들, 그 쓰레기들이 버려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사건의 현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2399년의 세계는 대다수 인간이 자연임신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세상이고, 부족한 인간을 대신해 복제 인간 클론이 함께하는 세계이다. 원본과 사본의 문제는 실재와 관련하여 인류 역사의 오래된 논의거리다. 여기에도 이 글의 冒頭에서 기술한 앎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답은 어쩌면 자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별 짓기의 원형적 뿌리에 대한 앎의 한계, 나와 너는 다르다. 다른 존재이니 언제든 배제시킬 수 있다는 폭력성이 은폐된 명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클론인 레아가 읽는 아듀호 사건 이후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으로 살펴보는 21세기부터 24세기라는 책을 통해 2399년의 현재를 설명한다. 아듀 사태 직후의 지옥같은 인간 세상의 양상부터 무력해진 인간들의 생존책, 그리고 거주지구의 계층적 분할, ‘테트라로 불리는 여가형 전자기기와 일종의 편의 인간인 반려기계 휴루의 대중화 등 점진적 복구와 복귀 의 역사가 흐른다. 200년의 시대별 역사는 상징적 제목 하에 기술되고 있는데, ‘카오스 이후’, ‘서행, 슬로우 스텝 무브먼트(SSM)', '인간과 동해하기 시작한 클론’, ‘함께 계속 가야 할 길처럼 역사 시간의 진전에 따른 인간 세계의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소설의 세계인 2399년 현재는 클론과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클론에 대한 구별 의식은 점잖은 휴머니즘의 윤리에 의해 폄훼되고 멸시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유구하고 강력한 가치라는 인간적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이다. 즉 클론을 차별하기 위한 이 거창한 위선의 논리가 윤리의 모습을 할 때, 클론은 상처를 입는다. 여기에는 역설적 모순이 내재하는데, 목적과 효용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클론의 존재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사실 윤리의식이란 존재치도 않는 이러한 탐욕스러움이 오히려 차별을 지우는 것은 그 본색이야 어떻든 표면적 평등을 실현한다. 역시 인간 앎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긴 암흑기를 견뎌낸 인류는 병든 지구와 함께 늙어가며 몸을 천천히 회복해 나가고, 그 엄청난 분쟁과 소란의 역사를 겪은 이후 평화로운 세상으로 접어든다. 이 평화란 인간의 끔찍함과 누추함이 다시금 발현되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이 인간 사회 속성인가보다. 아마 인간과 인간세계란 항시 자신이 저지른 거짓과 기만에 대해 합리적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부도덕하고 몽매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거주지는 도시와 빈민가, 재건지구로 삼분되어 각기 메트로, 게토, 리부트로 불리며, 살아가는 방식, 즉 지구 환경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계층화된 거주 구역을 이룬다.

 


소설의 상당한 서사는 이 구역 중 제로라는 구역의 게토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버리지 말자, 사지 말자, 만들지 말자라는 ()행동 수칙을 엄중히 유지해나가는 공동체다. 이 게토의 수장은 라는 이름을 한 여인이다. (O)'조화, 조율' 쌍둥이 자매와 '마모루'라는 남자 아이와 함께 동굴에 거주하며, 그들 공동체의 수칙대로 살아간다. 가파른 산등성이 안쪽에 자리잡은 오래전 천주교 성지였던 곳으로 게토의 여타 지역 중 가장 폐쇄적인 곳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수렵과 채취, 그리고 나눔과 돌봄이 자유로운 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사랑의 모양은 이성애 하나가 아닙니다. 인류가 혈연과 친족 관계에 매달리다

망친 걸 좀 들여다봐요. 어떻게 과거에서 배운 게 없어요?” - 73

 

만들지 말자라는 수칙은 이들 게토에서 어떤 새로운 생명체도 새로이 탄생하지 말아야 되며, 따라서 임신한 산부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통렬한 자성(自省)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아듀 사태 이후 24세기까지 이어진 생존방식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00년의 역사시대는 폭주에서 순응으로, 그리고 성찰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게 된다. 그런데 돌연한 자전거 사고로 다리를 손상당한 쌍둥이 언니 조화의 임신으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조화와 조율은 가임여성임이 소설 초반의 장면에 등장한다.)

 

임신한 여인으로서 조화는 공동체인 제로 게토에 머물 수 없으며, 더구나 아이의 출산은 그네들의 비행동 수칙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태이다. 방법은 인간 구애 본능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저열한 관찰예능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허니비>에 동생 조율과 마모루를 출연시켜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조화의 아이를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여 기르는 것이다. 수장인 오의 비난과 퇴출을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조화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을 종용한다. 이 모순된 행위의 이유를 발설하는 것은 죄악이 되리라.

 

이 자연 임신과 출산 가능한 인간만이 출연 가능한 번식 쇼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양분되는데, 버려진 땅에서 아기를 잉태해 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헌신적인 형태의 인류애라며, 새 세대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환호하는 부류와 바로 이 환상과 오해의 주입을 통한 인간과 클론을 구별짓는 저열한 기만극이라는 비난이 대립한다. 이 비속한 구애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에 대한 평가는 작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유사 프로그램을 상기하면 그 천박성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허니비 (Honey Bee)>라는 상징적 프로그램명은 다분히 자연 생식의 기만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자연 임신과 출산이 희귀해진 세계의 대중이 환상을 먹고 살든 대리 만족을 하든 이러한 욕망을 자양분 삼아 웃자라기마련이다. 이제 조율과 마모루는 조화가 출산할 아이를 위하여 출연하여 타 출연자들과 함께 열연한다. 여기에 클론인 레아가 해킹을 통해 신분을 속이고 출연자에 합류한다. 자신은 사본 같은 게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그램 <허니비>를 통해 소설은 예전 기수의 출연자가 겪는 프로그램의 후유증들 - 프로그램 후원자들의 지원과 압력과 함께 따라오는 육아에 대한 간섭, 부부가 된 이후의 관계 파탄, 모성애라는 근거없는 이해의 강요, 보여줌으로써 획득되는 재화에 내재된 무수한 갈등과 위선들 등등 - 이 신랄한 비평적 사유들과 함께 조율과 마모루, 레아 세 사람의 미묘한 구애 전선과 더불어 서사적 재미의 균형을 맞추며 진행된다.

 

희생과 양보라는 숭고한 가치와 한 주체의 피로라는 해로움이 대립되는 모성애 논의, 인간과 클론의 구별과 같이 존재를 타자화(他者化)하며 배제하는 불의한 영악함과 같이 소설은 실종되거나 매몰된 이 사회의 위선과 기만, 탐욕 등 자신들의 토대를 무너뜨리곤 책임을 외면하는 아듀호의 비열한 인간들, 그리고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하고 몽매한 인간 군상들을 이야기 한다.

 

아마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조율과 조화 자매의 이름이 절로 떠오를 만큼 인간 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강을 가로지르는 직선은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레아와 마모루는 물에 도착한 조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구별이 해제(解除)되고 비행동수칙, 즉 슬로우 스텝의 삶을 향해가는 굳은 신념의 인간을 나 또한 바라보면서 이 이상적 세상의 도래를 꿈꾸어 본다. 아니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06-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 보입니다.

필리아 2023-06-01 10:53   좋아요 0 | URL
이야기의 재미에 더해 인간 성찰이라는 테마가 녹아 흐르고 있어요. 작가의 필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