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이옥 낭송Q 시리즈
고미숙 기획, 이옥 지음, 채운 옮김 / 북드라망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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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정조시대 이옥(李鈺,1760~1815)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수일 전 독서에서 주석에 설명된 스치듯 출처에 표기된 이름으로부터였다. 아마 서울의 이름난 가객(歌客) 송실솔(蟋蟀;귀뚜라미)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 글 주제의 중심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임에도, 작가의 이름만은 뚜렷이 남아 그를 찾아보게 했다. 주류 문필가가 아니었던 고로 연암과 같이 주목받는 이가 아니었던 까닭일 것이다. 게다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시범 케이스가 되어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충군과 정거라는 이중의 처벌을 받아 10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내 시선을 끌어당긴 요인이었을 것이다. 문체반정이란 정조의 일종의 사상통제 프로젝트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삿된 생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 했지만, 사대주의에 터 잡은 사상의 획일화를 옥죄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1790년 중광시에 합격하여 1792년부터 1795년까지 대과를 위해 성균관에 기숙하며, 급제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정조는 무개념(無槪念) 문체를 계속 지적하며 불합격시켰다. 이옥은 왕이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문체를 고집했는데, 그에게는 신개념(新槪念)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그에게만 가혹하다할 정도로 혹독한 벌을 내렸다. 이옥은 1799년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무관(無官)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고 잊혀졌다.

 

정조가 치명적 단점으로 지적한 것은 음조가 슬프고 빠르고 가볍고 들떠 있으며, 우주의 이치, 우국의 정과 성인의 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찮디 하찮은 것들에 대한 하찮은 쓰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이옥의 글맛이라는 점에 아이러니가 있다. 이 책 낭송 이옥은 이옥의 사후에 그의 벗 김려(金鑢)가 글을 모아 문집에 실어 전해진 것으로, 이옥전집에 수록된 글 중 일부 발췌된 것이다. 사실 내 관심은 문체반정에 향해 있었기에 이옥이 분명 어떤 형식으로든 항변하는 글을 남겼으리라는 기대였으며, 그것을 보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기대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은 다섯 성격의 글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독서(讀書), 다정다감의 정(), 마음의 풍경, 미물의 관찰에서 비롯된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타자들의 이야기이다. 다섯 장 41편의 이야기들 어느 한 편의 이야기도 서투르게 읽을 것이 없는 꼼꼼하게 다져진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이 웅대한 삶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폄하하는 자들의 말은 벌레와 꽃, 거리 장사치나 건달, 사랑에 울고 아파하는 여인네들, 저마다 사연을 품고 신산한 삶을 살아내는 민초들에 세심한 눈길과 귀 기울인 이옥의 살아 숨 쉬는 글에 비해 오히려 하찮은 헛소리가 되고 만다.

 

이옥은 취하듯 읽고 토하듯 쓴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글을 모아 묵토향(墨吐香)이라 이름 지었다며, 위장에서 술이 넘쳐 위쪽으로 올라와 용솟음쳐 목구멍에서 토하게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왜 쓰냐는 물음에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쓰고 있지만, 조정(朝廷)의 이해관계, 벼슬길, 지방관의 잘잘못, 재물과 이익, 여색등 칠불언(七不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에, 자신은 새를 이야기하고 물고기를 이야기하고 짐승을 이야기 하며, 벌레를, 꽃을, 곡식을 채소를, 과일을, 풀을 이야기한다.“고 쓰고 있다. 그 잘난 중국사상과 중국말을 고집하는 너희들이 하는 대상은 나는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왕과 사대부 지배계급이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는 것들에 대해 쓰겠다는 저항으로서의 글을 쓰겠다는 다짐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천지만물로부터의 깨달음이라는 책의 3장에 수록된 글은 이와같은 이옥의 미물(자연)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세밀하고 예리하게 벼려져 세상을 통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절창들이라 할 것이다. 벼룩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경금자(이옥의 별명)와 벼룩도사의 은유를 통해 자성(自省)과 하찮은 이익을 쫓다 참 된 것을 잃어버리는 권력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흐르고, 가라지(잡초)로부터 얻은 세 가지 깨달음의 변에서는 한나라 동탁과 송나라 왕안석을 비유하며 그 삿된 것들의 뿌리뽑기의 어려움과 해악을 하찮다는 자연물에서 끌어낸다. 한편으로 목화꽃이 무명옷이 되기까지의 그 고된 과정들을 비추며 곤궁한 민초들의 노고와 삶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어쨌든 이옥의 글쓰기는 그가 벌레를 대상으로 이야기했든, 잡초를 이야기했든, 그것은 자기 욕망의 해독과 보잘 것 없는 현실을 통해 삶의 여실함을 세상에, 특히 지배계급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 나는 읽는다. 특히, 1나는 읽고 나는 쓴다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문체반정에 대한 직접적인 항변으로 읽히는데, 그대의 이언(민간의 속된 말)은 무엇 때문에 지은 것인가?”라는 그의 글에 대한 위협과 비난의 물음에 답변하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재자가 한 것이라 말문을 열면서, 짓는 자가 어찌 감히 짓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천지만물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가 다시 나온 것이 자신의 글이며, 이는 짓도록 만든 자가 짓는 자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 바로 천지만물이라고 답한다. 이 비유로 나비와 국화꽃 이야기를 하는데, 지나가던 나비가 국화꽃에 매화, 모란꽃, 자두꽃의 형형색색의 빛깔을 띠지 않고 하필 노랑이냐고 비아냥거리자, 국화꽃은 때가 그러한 것이니 내가 때를 어쩌겠느냐고 쏘아댄다. 그리곤 그대는 어찌 내게 나비처럼 묻는 것인가?“라며, 정조를 향해 한 방 날리는 것만 같다. 세상을 봐라, 그리고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라. 라고 꾸짖는 듯하다. 어찌 네 잣대로 다른 삶을 측정하려느냐고, 그건 전혀 잘못된 측정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또한 그의 글에 여인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에 대해, 분바르고 연지 찍고 치마입은 여자의 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예가 아니기에 말하지 말라 했거늘, 이옥 너의 이언은 이 같은 것 아니냐고 추궁한다. 이옥은 바로 굴복하여 그것을 태워주십시오. 라고 말하곤, 감히 여쭙는다. 그렇다면 고매한 시전(詩傳)이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 그가 몰라서 물었겠는가? 당연히 경전이라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이옥은 지은이, 누가 골라 책을 지었는지, 그 대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효용은 또한 무엇인지 묻는다. 마지막에 말한 바는 무엇이냐고 묻고는 대다수가 여자의 일이라는 답을 얻는다.

 

세상의 가장 참된 것이 남녀의 정을 살피는 것임을 삶의 일상으로부터 건져 올려 논리적 설득에 이르고, 천도(天道)의 자연적 이치에 대한 논증은 무개념이나 하찮디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진실한 일이라는 것, 바로 신개념의 문체임을 보란 듯 설파하는 당당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그가 본래 명칭대로 쓰지 않고 망령되게 제멋대로 토속이름을 따라 문자로 표현하였다는 추궁에 또한 답하고 있는데, 집을 악양루니 취옹정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백성의 삶과 괴리된 표현인지 지적한다.

 

정조가 보기에 석()을 돗자리로, 등경(燈檠)을 기름등잔으로, ()을 붓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반고씨가 천자가 되어서부터 칙명으로 내린 이름이 아니거늘, 마땅히 저들이 칭하는 것으로 이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옥은 이를 실제 삶에서 오는 소통 불능사태들을 예시한다. 현령이 아전에게 법유를 사오라 했더니 없다고 사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체를 주제넘고 괴팍하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현실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감상을 끝내기 전에 <가을 타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라는 2내 마음의 풍경들에 수록된 한 편의 글을 빼놓기에는 너무 아까워 간략하게 더해본다.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선비다라는 이옥의 말에 대한 또 하나의 추궁이다. 그는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식견은 애상을 분별하기에 충분하고, 마음은 사물에 잘 감응하고, 고서를 읽으며, 고요히 그것을 살피며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선비들 말고 누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이야기다.

 

천지의 기미와 천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이니 서리 내리는 가을을 슬퍼할 수 있는 자는 선비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이옥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시선이 잘난 양반들의 몽매성에 한 방 갈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당대 선비, 지배층은 이옥의 통찰에 대항할 산 지식이 없었을 것이다. 정조가 유독 이옥에게 잔인하게 대한 것은 아마도 그의 앎에 대한 시기와 질시가 아니었을까? 천지만물에 대한 17세기 인물의 생생하고 꼼꼼한 시선과 언어에 매료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문체반정으로 인한 한 사람에 대한 비극이 오히려 독보적인 글을 후대에 남기도록 작용했으니 죄송한 말이지만 다행이라 하고 싶을 정도이다. 사상 통제에 대항해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귀한 정신에 절로 겸허해진다. 시대를 앞서갔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양 마음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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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6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멋진 책과 리뷰글..... 감사합니다. 북드라망 출판 도서는 역시나 좀 달라요.

필리아 2023-12-07 07:28   좋아요 0 | URL
댓글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자연물과 시장 풍경 등에 대한 미주알고주알 만화경같은 진술들과 비유가 넘치는 재치있는 글의 향연이기도 합니다.

호시우행 2023-12-07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