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문학사적 위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헤아려야 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1908~1950)’는 “어른이 되어서는 두 가지 경험, 즉 성공과 실패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서글픈 말이다. 극단의 투쟁, 살기 아니면 죽어야 하는 것이 그가 숨 쉬던 파쇼 사회였기에 가능한 말이었을 것이다. 흰 고래를 죽이든지 배가 난파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이 양단의 잔혹하고 참담한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이겠는가? 한 메이저 온라인 책 판매 사이트에 벌어지고 있는 흉물스런 얘기다.
폐쇄집단의 자기이익 실현에만 능숙한 한 천박한 인간이 모비딕을 읽었다는 것을(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천박성을 넘어 수치도 모른 체 책 판매의 선전문구로 사용하고 있음에 아연실색했다. 해당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 두 집단의 권력을 향한 더러운 아부이자 정치적 야합(野合)일 것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고는 그 실패를 덮기 위해, 다시 한 방을 돌려주기 위해 무슨 일이든 실행하는 폭력성, 무도함을 내놓고 지껄이는 이 후안무치함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겁에 질렸거나 이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기회주의적 패거리들이 극성을 부린다.
에이허브는 마치 빈틈이 없으면 강제로라도 뚫어 만들어내서 그 구멍에 온갖 추잡한 것들을 들이 밀어야 한다는 강박적 악의에 경도된 인물이다. 이 인물에 매료된 인간 군상들을 상상해 보라. 왜소한 능력으로 장대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무엄함과 무법성을.
거대하고 불가해한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 불굴의 의지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며, 인간의 지성과 무한한 능력의 한 표본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이것은 배에 탑승한 모든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가장 유해하고 극악하며 탐욕스런 욕구 이상이 아니다. 아직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위엄이 인류사회에 터 잡지 못했던 180년 전 야만의 시대(1851년 초판출간)에 출현한 옛날의 허구 이야기다. 타인의 희생을 토대로 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기만은 오늘의 세계에서 더 이상 그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불의와 어리석음이 저지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 그 배경의 인식 수단으로 모비딕을 이용하는 저열한 욕심만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나와 다른 상대를 죽여 없애거나 거꾸러 뜨려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나만이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스트의 세계가 무엇인지 너절한 설명을 생략하겠지만. 그것은 수많은 사람의 참혹한 학살의 역사임을 알려준다. 그것의 끝은 광기와 전쟁, 공멸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다.
출판업자와 유통판매업자의 무지함이 빚어낸 실수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판매 전략은 의도라는 적극성의 산물이니까. 어느 누구도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배너 창까지 띄워대고, 더러운 욕망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원시적이고 퇴행적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부패하고 있다는 것의 한 상징적 이벤트 같다.
어느 누구나 『모비딕』을 읽을 수 있으며, 또한 읽어야 하는 고전적 지위를 확보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낱 파렴치한 인간의 정치적 선전 수단의 도구로 둔갑했다는 것,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뇌동(雷同)하는 인간 집단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모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