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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비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4
박문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인간과 인간 사회 그 던적스러움에 대해서
“사람들은 끔찍하다가도 애틋했고, 애틋하다가도 끔찍했다.
누추한 동시에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동시에 누추했다.” -37쪽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의 곤혹스러움, 이것의 정체를 묻는 것은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기만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간단히 모든 어려움은 인간들이 앎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얼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라 다시 묻는다면 자신들이 발 딛고 선 곳을 뜯어내고야 마는 몽매성, 변치 않는 태생적 불완전성이라 말하는 것으로 족할까? 어쩌면 이 소설은 이 답변의 한 양태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초제와 수은 그리고 방사능에 절여진 땅’, 자신들이 망가뜨린 세계에 더 이상 희망 없음을 예견한 인간 무리가 마지막 우주선 ‘아듀’호를 타고 떠나버리고, 이의 탑승에서 배제된 인간들만이 남은 지구가 배경이다. 소설은 2199년 바로 이러한 마지막 이주가 진행되던 날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2399년의 남겨진 인간들의 세계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200년 전에 진행되었던 “탑승 자격과 기준도, 이의 결정권자자들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리에 진행된 도피성 이주”,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머지 인간들에게 행한 이 얄팍한 사기극이 남은 인간들의 역사에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는 세계이다.
즉 버려진 인간들의 역사이다. 아니, 사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 영악한 무리들, 그 쓰레기들이 버려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사건의 현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2399년의 세계는 대다수 인간이 자연임신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세상이고, 부족한 인간을 대신해 복제 인간 클론이 함께하는 세계이다. 원본과 사본의 문제는 ‘실재’와 관련하여 인류 역사의 오래된 논의거리다. 여기에도 이 글의 冒頭에서 기술한 앎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답은 어쩌면 자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별 짓기의 원형적 뿌리에 대한 앎의 한계, 나와 너는 다르다. 다른 존재이니 언제든 배제시킬 수 있다는 폭력성이 은폐된 명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클론인 ‘레아’가 읽는 아듀호 사건 이후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으로 살펴보는 21세기부터 24세기》라는 책을 통해 2399년의 현재를 설명한다. 아듀 사태 직후의 지옥같은 인간 세상의 양상부터 무력해진 인간들의 생존책, 그리고 거주지구의 계층적 분할, ‘테트라’로 불리는 여가형 전자기기와 일종의 편의 인간인 반려기계 ‘휴루’의 대중화 등 점진적 복구와 복귀 의 역사가 흐른다. 이 200년의 시대별 역사는 상징적 제목 하에 기술되고 있는데, ‘카오스 이후’, ‘서행, 슬로우 스텝 무브먼트(SSM)', '인간과 동해하기 시작한 클론’, ‘함께 계속 가야 할 길’처럼 역사 시간의 진전에 따른 인간 세계의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소설의 세계인 2399년 현재는 클론과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클론에 대한 구별 의식은 점잖은 휴머니즘의 윤리에 의해 폄훼되고 멸시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유구하고 강력한 가치”라는 ‘인간적’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이다. 즉 클론을 차별하기 위한 이 거창한 위선의 논리가 윤리의 모습을 할 때, 클론은 상처를 입는다. 여기에는 역설적 모순이 내재하는데, 목적과 효용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클론의 존재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사실 윤리의식이란 존재치도 않는 이러한 탐욕스러움이 오히려 차별을 지우는 것은 그 본색이야 어떻든 표면적 평등을 실현한다. 역시 인간 앎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긴 암흑기를 견뎌낸 인류는 병든 지구와 함께 늙어가며 몸을 천천히 회복해 나가고, 그 엄청난 분쟁과 소란의 역사를 겪은 이후 평화로운 세상으로 접어든다. 이 평화란 인간의 끔찍함과 누추함이 다시금 발현되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이 인간 사회 속성인가보다. 아마 인간과 인간세계란 항시 자신이 저지른 거짓과 기만에 대해 합리적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부도덕하고 몽매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거주지는 도시와 빈민가, 재건지구로 삼분되어 각기 ‘메트로, 게토, 리부트’로 불리며, 살아가는 방식, 즉 지구 환경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계층화된 거주 구역을 이룬다.
소설의 상당한 서사는 이 구역 중 ‘제로’라는 구역의 게토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버리지 말자, 사지 말자, 만들지 말자”라는 ‘비(非)행동 수칙’을 엄중히 유지해나가는 공동체다. 이 게토의 수장은 ‘오’라는 이름을 한 여인이다. 오(O)는 '조화, 조율' 쌍둥이 자매와 '마모루'라는 남자 아이와 함께 동굴에 거주하며, 그들 공동체의 수칙대로 살아간다. “가파른 산등성이 안쪽에 자리잡은 오래전 천주교 성지”였던 곳으로 게토의 여타 지역 중 가장 폐쇄적인 곳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수렵과 채취, 그리고 나눔과 돌봄이 자유로운 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사랑의 모양은 이성애 하나가 아닙니다. 인류가 혈연과 친족 관계에 매달리다
망친 걸 좀 들여다봐요. 어떻게 과거에서 배운 게 없어요?” - 73쪽
‘만들지 말자’라는 수칙은 이들 게토에서 어떤 새로운 생명체도 새로이 탄생하지 말아야 되며, 따라서 임신한 산부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통렬한 자성(自省)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아듀 사태 이후 24세기까지 이어진 생존방식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00년의 역사시대는 “폭주에서 순응으로, 그리고 성찰”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게 된다. 그런데 돌연한 자전거 사고로 다리를 손상당한 쌍둥이 언니 조화의 임신으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조화와 조율은 가임여성임이 소설 초반의 장면에 등장한다.)
임신한 여인으로서 조화는 공동체인 제로 게토에 머물 수 없으며, 더구나 아이의 출산은 그네들의 비행동 수칙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태이다. 방법은 인간 구애 본능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저열한 관찰예능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허니비>에 동생 조율과 마모루를 출연시켜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조화의 아이를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여 기르는 것이다. 수장인 오의 비난과 퇴출을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조화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을 종용한다. 이 모순된 행위의 이유를 발설하는 것은 죄악이 되리라.
이 자연 임신과 출산 가능한 인간만이 출연 가능한 ‘번식 쇼’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양분되는데, “버려진 땅에서 아기를 잉태해 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헌신적인 형태의 인류애”라며, 새 세대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환호하는 부류와 바로 이 환상과 오해의 주입을 통한 인간과 클론을 구별짓는 저열한 기만극이라는 비난이 대립한다. 이 비속한 구애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에 대한 평가는 작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유사 프로그램을 상기하면 그 천박성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허니비 (Honey Bee)>라는 상징적 프로그램명은 다분히 자연 생식의 기만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자연 임신과 출산이 희귀해진 세계의 대중이 환상을 먹고 살든 대리 만족을 하든 “이러한 욕망을 자양분 삼아 웃자라기” 마련이다. 이제 조율과 마모루는 조화가 출산할 아이를 위하여 출연하여 타 출연자들과 함께 열연한다. 여기에 클론인 레아가 해킹을 통해 신분을 속이고 출연자에 합류한다. 자신은 “사본 같은 게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그램 <허니비>를 통해 소설은 예전 기수의 출연자가 겪는 프로그램의 후유증들 - 프로그램 후원자들의 지원과 압력과 함께 따라오는 육아에 대한 간섭, 부부가 된 이후의 관계 파탄, 모성애라는 근거없는 이해의 강요, 보여줌으로써 획득되는 재화에 내재된 무수한 갈등과 위선들 등등 - 이 신랄한 비평적 사유들과 함께 조율과 마모루, 레아 세 사람의 미묘한 구애 전선과 더불어 서사적 재미의 균형을 맞추며 진행된다.
“희생과 양보라는 숭고한 가치와 한 주체의 피로라는 해로움이 대립되는” 모성애 논의, 인간과 클론의 구별과 같이 존재를 타자화(他者化)하며 배제하는 불의한 영악함과 같이 소설은 실종되거나 매몰된 이 사회의 위선과 기만, 탐욕 등 자신들의 토대를 무너뜨리곤 책임을 외면하는 아듀호의 비열한 인간들, 그리고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하고 몽매한 인간 군상들을 이야기 한다.
아마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조율과 조화 자매의 이름이 절로 떠오를 만큼 인간 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강을 가로지르는 직선은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레아와 마모루는 물에 도착한 조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구별이 해제(解除)되고 비행동수칙, 즉 슬로우 스텝의 삶을 향해가는 굳은 신념의 인간을 나 또한 바라보면서 이 이상적 세상의 도래를 꿈꾸어 본다. 아니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