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독일인의 사랑 -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배명자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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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때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 중학교 1학년이거나 2학년 즈음의 내 습관적 행위가 이어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학교가 있는 계동 골목을 내려와 당시 유일한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의 생활패턴이었다. 정말 오래된 시절의 얘기지만, 결코 오래전 얘기로 기억되지 않는 얘기다. 어쩌면 그 시절의 책 읽기가 내 언어와 태도와 행위를 구성했는지도 모르겠다.

 

막스 뮐러의 책은 아마도 아껴 모은 돈으로 한권이라도 더 읽기위해 값싼 문고본으로 서너 권씩 구입해 읽었던 책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판본이나 제본형식 등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춘기 소년에게 어떤 감상을 남겼을 법하지만 그조차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튼 세상 얘기들이 마구 전파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순박한 소년에게 진실의 사랑이라거나 순진한 사랑이라는 사랑에 수식어가 붙어있는 이 유별한 사랑의 담론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마리아와 화자와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남긴 상실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을 것이다.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한 뼘만큼 성장했지만 어느 정도는 여전히 어린아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화자가 말하는 어린 시절이라는 고요한 신비의 숲에 대해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바로 그 고요한 신비의 숲 속에 있었으니 알 턱이 있었겠는가? 요즘 부쩍 소년기의 시간이 자주 떠오른다. 어쩌면 그 때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으며 온 세상에 속했던, 영원한 삶을 살았던 시간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이 책 회상(Memories-A story of German love)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지?”하는 화자의 물음이 괜한 수다를 떨게 했다.

 


이제 막스 뮐러의 순수하고 깊은 사랑,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의 풍파를 겪은 듯하다. ‘좋아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 라는 낯선 규칙과 후작 부인은 남(他人)이고 신분도 높은 사람이니 더욱더 어머니에게 하듯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예의, 이것을 깨닫는 순간, 아마 어린아이로서의 세상은 종말을 고했을 터인데, 나는 그 순간에 해당하는 정확한 장면의 기억이 없다. 그러니 내겐 순수한 사랑이라 말할 것이 없고, 언제나 이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이 아닌 변덕스럽고, 뜨거운 사막 위에 뿌려진 빗방울처럼 스스로 소멸하는, 또는 타오르다 꺼지고 마는 불길로 온기를 주기는커녕 연기와 재만 남긴 이기적이고 의심 많은 사랑에 대한 기억만이 주렁주렁하다.

 

여기서 사회적 정체성이나 존재 자체니 하는 그 어떤 윤리적 삶의 태도 같은 걸 길어 올릴 생각은 없다. 마지막 회상까지 여덟 번의 회상의 기록이 분리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에 따른 기록이기는 하지만 각 회상(回想;memory)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다. 첫 번째 회상에서 화자가 다 잊은 어린 시절의 기억 중 떠올릴 수 있는 세 가지를 말 할 때,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와 달리 내겐 어머니가 들려주고 가리켜 보이던 별자리와 성스러운 노래 소리가 없는 까닭이다. 어머니는 이기적인 분이셨고, 자식들에게 냉엄한 분이었다. 내겐 화자처럼 머릿속까지 스며든 어머니 손에 들린 한 다발의 보라색 꽃 싱그런 향기를 지닌 오랑캐꽃도 없으며, 별에 감탄하며 어머니 품속에서 잠들었던 어렴풋한 기억도, 영혼을 속속들이 파고든 경쾌하고 성스러웠던 찬송의 노래 소리도 없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한 인간의 품성을 만드는데 귀중한 것들일 것이다. 화자의 고귀한 품성, 인간애에 대한, 모든 존재의 우주적 얽힘에 대한 감수성은 이렇게 스며든 것일 게다.

 

남이 뭐예요? 나를 예쁘게 봐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다 좋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좋아하는 건 괜찮단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아.“

- 두 번째 회상, 28~29

 

두 번째 회상은 화자가 여섯 살 쯤 부모와 함께 후작(marquess,侯爵)의 성을 방문했던, 자신도 모르게 후작 부인에게 입맞춤을 함으로써 버릇없는 아이로 질책 받던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경계 없는, 나와 너라는, 사회적 신분이라는 분류체계가 스며들지 않은 아이에게 그 오염된 질서와 규칙이 처벌로 가해졌을 때 아이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너는 봄철에 벌써 꽃잎을 뜯기고 날개의 깃을 뽑히는 구나.”라고 탄식하는 이의 아쉬움은 생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던,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인 사랑에 대한 침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이의 사랑의 샘은 이때부터 막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메말라간다. 더 이상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은 사회가 요구하는 예절과 윤리 규칙 등이라는 이름으로 무례이자 범죄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세상은 작열하는 격정, 타오르는 정열, 요구하는 사랑만을 사랑이라 말한다.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제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푸념하면서 거듭 첫 사랑, 첫 경험의 강렬함을 쫓는다. 그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솔직함, 자기존엄의 욕구라고 정당화한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내겐 고독만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세 번째 회상에서는 사물에 대한 소유,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진정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조용한 사색이 흐른다. 누군가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황금 팔찌가 해낼 수 있다면 소년은 당당하게 그것을 내어줄 수 있다.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 낸다. 이 회상에는 타인의 아픔, 고통에 대한 나눔의 감수성이 백작 지위를 가졌으며, 심장병을 앓고 있는 후작의 딸 마리아와의 최초의 기억으로 옮겨간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마리아가 형제자매들에게 반지를 나눠주는데, 마지막 하나의 반지가 남았을 때, 혈육이 아닌 화자에게 반지를 빼 건넨다. 이때 화자는 그 행위가 그녀의 희생임을 안다. 화자는 반지를 다시 돌려주며 말한다. 이 반지는 날 주지 말고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어,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니까.” 화자는 세상이 강요하는 규칙들에 저항한다. 사랑이라는 태곳적 본래의 감수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화 된, 아니 사랑이란 말이 너무 오염되었기에 우리는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이미 사랑은 순수한 것이어늘.

 

네 번째 회상에서는 기억 속 시간이 많이 흘렀다. 대학생이 된 화자는 방학시즌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한다. 후작의 성()에서 어린 시절 함께 놀던 공자(公子)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성주가 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관계로 더 이상 친밀한 벗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성 안에는 거의 날마다 이름을 불러보고 그리워했던 마음 깊이 남아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 아마 화자는 마리아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존재라면 그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인 모양이다. 편지가 전해진다. 마리아가 화자를 초대하는 그토록 갈망했던 영혼으로부터. 재회, 재발견이 주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한 회상의 기록이 이어진다. 우리는 옛 친구잖아요라는 말에 화답하듯 사람들은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살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서로 소개하지 않고도 함께 노래하는 관계가 되고 싶어 하죠.”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노래하는 새들의 그 다정한 정경을 떠올려보며 그 어울림, 사랑의 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상념을 펼쳐보기도 한다.

 

이후 다섯 번째 회상에서 마지막 회상의 기록들은 마리아와 화자의 봄날 아침처럼 맑고 신선한 영혼들의 고귀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아마 사랑의 정수(精髓)일 것이다. 이미 이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사랑, 그러나 속마음 숨기라고, 그렇게 숨기는 일이 예의요, 분별력이며, 현명함이라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회는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것을 억압한다.

 

온갖 강제로 억압되어 실종된 사랑, 그 잊어버린 사랑이 매슈 아널드의 <파묻힌 생명> 속 생명의 강이 되어 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대변한다. 화자는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을 마리아에게 전한다. 나의 고백이었다, 장시(長詩)인 까닭에 세 연()만 옮겨본다.

 

지금 우리 사이에 가벼운 농담 오고 가지만

보라, 눈물 고인 나의 눈을

이름 모를 슬픔이 가슴을 울리누나.

 

그렇다! 그렇다! 우리는 안다,

농담을 주고받을 줄 알고

미소도 지을 줄 안다.

그러나 이 가슴에 무언가 있어

그대의 농담 안식이 못 되고

그대의 미소 위안이 못 된다.

 

.......中略.....

 

예견된 운명, 변덕스러운 아이가 되어

때로는 장안에 마음을 빼앗기고

때로는 온갖 싸움에 몸을 던지고

본성마저 변하는구나.

그러나 운명은,

변덕스러운 장안 속에서도

순수한 자아를 지키고

존재의 법칙에 순응케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생명의 강에 명령하여

우리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흐르게 하였구나.

그래서 인간의 눈은

파묻힌 그 흐름을 보지 못하고

장님 같은 불안 속에서 생명의 강과 함께 정처 없이 흐르며

영원히 떠도는 것 같구나

........後略...........

 

 꾸밈 없는 마음, 진실의 사랑, 사랑의 추억 등 꽃말을 지닌 보라색 오랑캐꽃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짜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 마지막 회상, 145

 

마리아와 화자의 정기적 만남은 심장병을 앓는 마리아의 생명에 위험신호를 발하였는가보다. 후작 가족의 주치의로부터 자네 탓이니 그만 찾아가라는 완곡한 부탁을 받는다. 인간에게 위안과 사랑을 앗아간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 한 생명을 위한 고귀한 보호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화자가 마리아를 설득하는 순수한 인간애로서의 사랑,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의 것이라는 공상적 사랑의 설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것뿐이라며, 속속들이 이해가 되는 인간처럼 우리를 냉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논리에는 내 협소한 경험이 거부할 말을 찾지 못한다. 사랑에 무슨 윤리적 합리주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신은 너에게 고통을 주셨지만 또한 나를 너에게 보내 그 고통을 나누게 하셨어. 그러니 너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어야 해. 우리는 아픔을 함께 겪어야 해.” 이 말이 화자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마리아로부터 마침내 나는 너의 것이야. 신의 뜻이라면,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너의 것이야라는 생의 마지막 인사인 편지를 받는다. 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다 잃어버렸음을 감사하게 하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이제 나는 주렁주렁 매달린 내 사랑의 기억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을 남들과 연결되었던 기억에서 사라진 어린아이인 나를 찾는 걸음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그 순수의 시절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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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 4
최미래 외 지음 / 스위밍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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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학잡지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최지은 시인의 이름이 눈에 띄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책의 몸피는 여느 소설집 또는 시집과 같은 단행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에 매혹된 것은 책표지의 안 날개에 작게 써진 외양 없는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과 이어진 유령의 목소리가 때론 와글와글 그리고 소곤소곤 들려주는 목소리에 대한 이유 없는 끌림이었다. 이 작은 문학잡지 유령들(ghost friends)Volume4.에는 소설 세편, 네 편의 시, 두 평론과 에세이가 소박하지만 밀도높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말했던 4인칭 서술자로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 따르는 감정을 그대로 기술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전달해주는 충실한 대변자의 음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김예솔비 영화평론가가 나에게서 나에게로에서 말하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그런 충동으로서 우리들이 망각 저편으로 던져버린 잃어버린 목소리로서의 유령들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가 권혜영 작가의 도깨비 갱생일지는 도깨비라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낯선 이미지로 인해 가장 직관적으로 유령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화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게, 가야당이라 불리는 허름한 구제숍을 맡아 운영한다. 인수인계도 없이 돌아가신 탓에 화자 는 할머니가 기록해 둔 업무일지를 지침삼아 미숙하나마 관리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괴생활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도깨비 가족을 데리고 방문한다. 물론 도깨비들은 쉬었음 청년과 은둔 중년, 쪽방촌 노인, 쓰레기집 주민, 중독자처럼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속 존재들의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메리트를 이용해 지식과 경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배제된 자들의 회복과 자립을 지원하는 대기업 운영 집안을 요괴라 지칭한 것은 흥미롭다.

 

도깨비와 요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의 향연은 건너뛰기로 한다. 한 달도 못 돼 도깨비 가족은 갱생프로젝트에서 떨려나고 공무원이 그들을 인솔하고 에게 봉인을 의뢰하기 위해 다시 찾아 온 것이다. ‘는 이들 유령적 존재들을 봉인이라는 절대 감금의 처벌권을 가진 인물이다. 봉인 하루 전날, 이들은 한바탕 흔쾌한 춤과 떼창으로 어우러진다. 이를 방관하며 어울리지 못하던 는 사물 상태로만 있으려는 백소라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잘 들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는 귀를 기울여 그네들의 시끄럽기만한 소리를 비로소 서서히 듣기 시작한다. 엉망이면서 묘하게 기승전결이 있는, 세상과 부딪치는 데도 완전히 매력 있는 선율과 보컬을. 이윽고 도 그들에 끼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천천히 적는다. 도깨비는 흥이 많다. (...) 죽도록 지친 사람까지도 춤추게 만든다.”.

 

이 세계의 요지경을 흔쾌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소음같은 배제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시간이 된다. 장마철엔 물건들이 잠을 설친다.”, “오래된 거울은 습기를 먹으면 요기가 생겨서 시커멓게 흐려진다.”라는 할머니가 남긴 여름철 관리지침의 내용이 예사롭게 들리지만 않는다. ’의 무수한 연장으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지닌 작품이다.

 


두 번째 소설, 최미래 작가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는 산다는 것에 어느만큼 무심한 존재가 된 인물, 그래서 세상사에 펄펄 끓는 마음으로 자기표현을 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첫 단원을 읽어나갈 때 혈액에서 원심분리기로 혈장을 분리하는 장면이 묘한 호기심으로 작동해 내쳐 읽은 작품이다. 삶의 징그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것에 서로들 얽혀드는 관계를 생각게 하는 소설이랄까.

 

생각만큼 돈이 되지 않는, 손님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가난한데도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 징글징글했다. 그 덕을 보고 있는 나도 징그러운 건 마찬가지만

 

피부과 간호조무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는 기력회복주사, 일명 혈장 주입술이라는 불법 시술을 독립적으로 저지르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혈액을 채취하여 혈장을 분리하여 젊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판다. 이렇게 시술을 위해 손님들을 만날수록 사람에게 정이 떨어지고, 산다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유일한 정규 손님인 호떡 장수 이난희 할머니라는 펄펄끓는 존재를 보며 자신이 그런 삶에 끈적하게 얽혀있음을 자각한다. 사실 나는 피가 끓어오르는 이난희 여사보다는 무심한 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이유가 이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때, 우리 사람이란 영원히 환상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온 마음에 열이 오르며 다시 살고 싶어지는, 그런 열정으로만 살아가는 펄펄끓는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아마 열역학적으로 심정지가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혈장은 맑고 투명한 노란색, 노란 피가 내 몸속을 돌고 있는 한, 나는 이 징글징글한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고, 그 모든 사실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문장의 이해 불능의 삶이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게다. ‘를 따라다니는 소녀 고서라에게 간택당하는 삶이 되듯, 모든 삶의 추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일 게다.

 

이 잡지의 기획자인 김화진 작가의 편 고르기는 작품 속 출판사 편집자 이완희의 혼잣말인 내가 한 어떤 선택이 의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걸까, 의미가 없을 확률이 큰데도 자꾸 그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뭘까?”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것만 같다. 매번 잘 안 되지만 누군가의 옆자리에 못 박히고 싶어하는, 사람이랑 꼭 붙어 앉으려고 사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의 외사랑 이야기이며, 흘러 지나칠 수 있는 얘기도 품에 잘 안고 가는 사람을 향한 끝내 말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 말하지 못하는, ‘주변을 맴도는 말, 서성이는 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는 몰라도 너에게는 소중한 책, 그런 게 되겠구나. 거보세요, 쓰시기를 잘했죠. 그런 마음은 분명 편집자의 마음이었다.”처럼 후련하고 허망하기도 한 마음, 또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헛손질하는 마음, 그것 그대로가 좋은이야기이도 하다. 작품 속 편지 쓰기 워크숍 참가자들의 끝내 닿을 수 없는 편지들처럼 우리의 선택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의 반향과 무관하게 그 행위자체가 이미 회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제 읽기보다 소설의 이야기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면서 따라 읽으면 어떤 마음의 좋은 향기가 배어나는 듯함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고 싶다. 김화진의 소설들을 조금 더 읽고 싶어졌다.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대표작, Object; 모피로 된 아침 식사, 

최지은 시인의 <오브제>의 모티브가 된 작품


최지은 시인의 네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정말 반가웠다. 첫 시 오브제는 조금 낯설다. 그가 만지고 간 자리마다 털이 났다로 시작되는 시의 문장은 커피 머그 손잡이 안쪽에서부터 컵의 내외부로, 그리곤 집 안이 털로 뒤덮인 전경을 말하지만, 감추고 싶지도 않지만 드러내고 싶지만도 않아서 홀로 여기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가 떠난 뒤의 일이고, 시 속 화자는 빗질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들여 쓰다듬는 사람이 된다. 자꾸 눈물이 흐를 때마다 한 번씩.

 

그는 누구일까? 어쩌면 털이라는 장식이 아니라 이미 감각체계를 교란하는 장치로 읽히듯, 어떤 본능, 육체성, 또는 내부에 숨겨져 있던 욕망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같다. 집 안 모두에 털이 덮이듯, 나의 상념 속에서는 이 세계의 질서를 찢고 그 아래 잠긴 그리움의 감각과 접하는 매개물, 그 경계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보 나왔어/ 현관 문 열리는 소리 들릴 때무슨 일인지 는 답할 수도 없다. 경계 너머에 있던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이 세계에 홀로 있다는 슬픔의 감각은 그 애틋한 그리운 육체들에 다가서기 위해 쓰다듬음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마음처럼 봄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흘려보내는 마음으로, 열린 문틈으로/ 아끼는 고양이 달려와 안기어오는 오늘 아침(전문)처럼 살아가는 마음으로.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며 응원을 보낸다.

 

김예솔비, 김병규 평론가와 김미래, 황예인 네 분의 평론과 에세이의 목소리는 그렇게 귀 기울이지 못했다. 다만,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 소설가 쓰시마 유코(津島 佑子, 1947~2016) 의 소설집 ()와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 세 여인을 오가며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모두와 손잡고 싶었던 유년기의 감각, 나와 타인을 분리시켰던 최초의 거절이라는 사건을 망각함으로써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잠재성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영화평론가 김예솔비 작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는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손을 붙잡는 아이의 모습들을 연상하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 월간도 계간도 아닌 비정기 문학잡지 유령들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김화진 작가를 비롯 김미래, 황예인 작가 등 편집진들의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라는 노고에 응원을 보낸다.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은 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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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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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오늘을 음모론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초국적 미디어와 플랫폼은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유통시키고, SNS는 누구나 기록자이자 편집자가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공공성 없는 공론장이 형성되고, 사실과 허구, 증언과 조작, 신뢰와 의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혔다. 감정적 키치와 스펙터클은 소통을 대신하고,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맥락을 제거한 편집 영상은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허위와 조작을 방조하는 사이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조직하고 인간의 판단을 선행하는 정치적 장치가 되었다.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한 철학적 응답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오래된 통념을 해체한다. 대신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통해 기억과 증언, 기록과 픽션, 역사와 정치,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서로 얽혀 현실을 구성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다큐멘터리론이 아니라 이미지 철학이며, 동시에 이미지 정치학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다.

 

책의 첫 장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매우 도발적이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보편적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다큐멘터리가 객관성과 사실성을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그 믿음 자체를 의심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CNN이 동시 송출한 영상은 거의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저해상도의 화면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욱 현실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였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숨소리, 어둠 속의 모호한 화면은 객관성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현장에 있다'는 감각만큼은 강렬하게 생산했다. 다큐멘터리의 신뢰는 명료함에서가 아니라 식별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진짜라고 믿게 되는 역설이 작동하는 것이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통찰은 '다큐멘터리=사실'이라는 오래된 등식을 근본부터 흔든다. 카메라가 현실을 담는 순간 이미 화면은 촬영자의 시선과 구도, 편집과 배열을 통해 하나의 구성물이 된다. 인터뷰 역시 기억의 왜곡과 언어의 한계, 사회적 위치에 따른 침묵을 벗어날 수 없다. 사건 당사자의 증언조차 진실 전체를 재현하지 못하며, 때로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것처럼 서발턴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실패한 장르일까. 슈타이얼의 대답은 오히려 반대이다. 진실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실재와 연출,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해체한다. 영화 타이타닉제작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이 지나간 자리(Titanic's Wake)〉〉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면은 거대한 세트장과 화려한 영화 제작 과정을 비추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 놓인 멕시코 해안 마을의 빈곤과 물 부족 지역에 대규모 인공 수조를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민물을 끌어오는 현실을 함께 드러낸다. 거대한 허구를 만드는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실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복제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가 된다. "진실은 오직 픽션의 형태로만 표명된다."는 라캉의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이 지점에서 진실의 색은 아카이브의 정치학으로 사유를 확장한다.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를 과거를 보존하는 중립적 저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기억을 선별하는 권력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를 남기고 누구를 침묵시킬 것인가는 언제나 정치적 선택이다. 기록은 객관적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역사의 질서를 조직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은 무한한 저장 능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엇을 노출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결정한다. 삭제는 기록만큼 정치적이며, 망각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의 효과가 된다. 아카이브는 더 이상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를 지배하는 장치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이미지와 몽타주 편집, 그리고 맥락을 제거한 영상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모론은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미지 속에서 허구는 신념이 되고, 신념은 행동을 낳으며, 행동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전체주의와 선전 정치 속에서 반복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네트워크 플랫폼을 통해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AI 합성 이미지와 왜곡된 영상이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따라 형성되는 시대의 징후이다.

 

베르토프가 외쳤던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라는 선언도 슈타이얼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삶은 결코 '있는 그대로' 이미지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현실의 구성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삶만을 '진정한 삶'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권력 담론이 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명분은 쉽게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한다. 하나의 전형이 규범이 되고, 그 규범에 맞지 않는 삶은 배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보편적 불확실성이라는 슈타이얼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다. 진실은 단일한 명확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해소되지 않는 균열과 모순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와 허위 정보, 기록과 연출, 사실과 픽션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교차한다. 다큐멘터리 역시 더 이상 진실을 보증하는 장르가 아니다. 때로는 스펙터클과 감정 소비를 위한 쇼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은폐하는 선전의 형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더욱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미지를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을 조직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 욕망이 스며있다.

 

결국 진실의 색은 우리에게 진실한 이미지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며,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하는지를 끝까지 읽어내라고 요구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며 사유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필요한 비판적 감각이다. 진실의 색은 다큐멘터리에 관한 철학 에세이를 넘어, 현실보다 이미지가 앞서가는 시대에 진실이 어떻게 생산되고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문하는 보기 드문 정치철학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가장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읽어내려는 지적 용기일 것이다. 이 이미지 철학의 현대의 고전적 지위를 지닐 역작을 거듭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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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책 제본의 부실로 낱장으로 흩어져 읽을 때마다 매 쪽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었다. 이렇게 조악한 제본은 처음이다. 21세기에 쓰여진 고전으로 남을 만큼 압도적인 저술이 이렇게 출간된 것은 정말 수치스럽다. 출판사여, 제발 책 제본도 신경 좀 쓰세요. (책의 물성을 문제 삼는 글을 쓰는 독자는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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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심하네요.
예전 학교 근처에서 전공 서적 제본한 것보다 더 떨어지는 품질 수준이네요.

비의식 2026-07-06 20:44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은 최고수준, 책의 제본 품질은 최저 수준,
어쨌든 슈타이얼의 집요한 통찰은 현대의 고전이라 할 정도랍니다.
 
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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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에 대해서)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 페르난도 페소아, <사실 없는 자서전> P14에서

 

삶을 체험으로서 살아낸 생의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토록 그리운 적이 없다. 진정 떨어보고 피 흘려 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자기 강화와 같은 텅 빈 오만함이 아닌 자기 소멸을 거듭하며 그 빈자리를 끊임없이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박노해 시인의 이 침묵의 언어로 한없이 간결하게 최소화된 언어의 음성들은 그래서 살아내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침에 겨워하는 내겐 시인의 말처럼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하나의 성소(聖所)”가 되어주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항상 내 곁에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벗어나 고독을 향유 할 때 함께하는 스승 같고 때론 벗처럼 도란도란 그 마음을 나누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내겐 그런 책이 되었다. 나는 시인이 홀로 산책길을 걸으며 수없이 떠올리고 다져왔을 그 내면의 이야기들에 감응하기 위해 하나의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자기 소멸의 독서를 말하는 시인의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살라지고 비워져 저 영원의 빛에 감광된 그 순간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없도록 내려치는, 그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하는 그 감응의 찰나를 알기에 그렇게 아주 천천히 읽었다. 아마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잠언(箴言)이자 시()로 엮인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 430여 구절이 사진화보와 어울려 구성된 작고 두툼한 책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공연의 막간에 잠깐 진행되는 그 무엇이고, 가끔 문을 통해 기껏해야 무대배경에 불과한 것을 훔쳐보는 것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의 문장들을 읽을 때 나는 페소아처럼 고통 받지만 말하지 않는 이들 속에서 성스러운 길손이 되려했고, 목적 없는 세상에 이유 없이 묵상하는 순례자가 되려했다. 그럼에도 나의 키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는 한계를 알기에 불가피하게 내 마음이 감응하는 소수의 음성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느 날 또 다른 문장에 내 정신이 번쩍 뜨일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나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책의 문장들 앞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아니 읽어버리려고 애썼다. 온 삶으로 읽어내기 위해, 삶이라는 한 권의 책을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내 무딘 감수성이 호응한 몇 문장들을 이렇게 옮겨 적는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 속도로, 깊이깊이.”, 그런데 자기 삶의 제 속도를 잃기 일쑤다. 그리고는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몸을 떨곤 한다. 제아무리 그 아쉬움이 무용함을 알지만 진정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아~ 돌아보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건만 그 질긴 회한을 떨어내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겨운 것인지. 삶의 미련이 너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산다는 것을 진정 알지 못하는 자의 헛된 욕망인 것 같아 자괴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래 가을 볕 드는 어느 날 나도 가만히 나를 말려야겠다.

 

산다는 것에 그 무어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실재하는 이 몸을 체감하는 동안만큼은 여느 사람도 겪는 그 모든 희로애락을 겪어 볼 일이다. 그리고 가끔은 가슴 벅차고 뿌듯한 충만감을 느끼는 날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또한 모든 길흉화복이 크거나 작게 반복되지 않았나. 그런게 산다는 것이지 더 무어가 있겠는가. 잊지 말자. 막막한 날도 있어야 하리, 떨리는 날도 있어야 하리, 그래, 꽃피는 날이 오리니.”

 

문득문득 내 옹졸한 욕망이 경험(지식)을 쌓아가려 할 때가 있었음에 쓰디쓴 웃음을 웃을 때가 있다. 체험 속에서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어야 그 빈 곳에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자리 잡을 수 있을 터인데, 그만 욕심이 망각을 일으켜 그 무엇도 들어 올 수 없이 꽉 차 편벽해지고 만다.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왜 빈번히 잊게 되는 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 사회에서 나와 더없이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져 나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만들 수 있음에도 나만의 이야기가 없는 하루가 반복되는 날이 더해지기만 한다. 아마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말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사건이 된다.

힘 들어야

힘이 들어온다.

 

이 다층적 의미를 지닌 아포리즘은 인공지능에 의존해 힘 들이지 않는, 사고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경계의 음성으로도 들린다. 자기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유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기계에 대한 영원한 종속, 자본에 대한 노예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을 위한 나일 때 나는 한없이 작게 축소된다. 그 축소된 나 들로 군집을 이룬 집단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악은 갈수록 새로워지고 다양해지고,

평범해지고 다수결 속에 강력해진다.

나는 악의 신비를 지켜보고 있다.

 

악의 신비를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은 변화무쌍한 악의 양태를 꿰뚫어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로운 탐욕, 정의로운 교만, 지혜로운 위선.(Free greed, Just Pride, Wise hypocrisy.)”으로 이름붙일 오늘날의 대죄가 아닐까. 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내 목소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착각이다.“ 내 목소리에 대한 착각, 이 본질적 자기 성찰의 한계는 항상 내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고 있다. 가장 소홀하기 쉬워,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일 테다.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있지 않은 말

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

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있지 않은 말을

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배어 있지 않은, 육화된 즉 숙성된 인식 속에서 다져지지 못한 말 아닌 것들이 난무하고 있다. 절제되어야 할 것들이 기만적이게도 활개를 친다. 정말 조심스러워 해야 할 것이 인간의 말이거늘.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어찌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데 타인을 알겠는가. 그러하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을 듣기 위해 온몸을 기울여 느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일 게다. 달콤하거나 때론 편협과 헛된 위선의 말을 뿌리치기 위해. 그리고 진실의 언어에 공감하기 위해.

 

내가 가장 상처 받는 지점이 내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그 욕망이라는 심연을 외면하고 다른 곳을 향해 저주를 내뱉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실패 앞에 정직하게 성찰하게 하소서, 지금의 실패가 오히려 나의 길을 찾아가는 하나의 이정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목소리를 비로소 낼 수 있는 것일 게다.

 

머리 굴리지 말고

욕심 세우지 말고

겉멋 부리지 말고

단순하게 그냥 가기,

본질로만 승부하기.

 

이 단순한 자세를 잊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고독한 사유의 자리를 찾아내는 여유를 가져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 소란한 세계의 한 구석에

내 영혼이 오롯이 앉을 수 있는

오래되고 아늑한 의자 하나,

잠깐, 생각에 잠기는 그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자리

 

자기만의 의미가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자리를 찾아 여행이라도 떠나봐야 할 것 같다. 반드시 홀로 떠나는 여행으로, 그래서 그 여행의 낯선 길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 둘이서 손잡고 돌아오기 위한 여행길을 향해서 말이다. 세상이 너무 재밌어졌다. 화려한 빛과 소음이 마치 활력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그리움도, 벗도 이웃도, 내 안의 창조성도 사라지고 만다. 조금 심심해 질 필요가 있는 세상이다. 그래야 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깨어날 테다.

 

시인의 생의 체험에서 응결된 이들 시와 잠언들을 읽다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 무언가와 만난다는 것, 산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어떤 진리의 광채에 자신을 잃고 잠시 정지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읽지 말고, 읽어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독서가 된다면 어쩌면 자신을 잃은 것보다 훨씬 커다란 진리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인이 독자들을 위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삭막한 이 시대에,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사라지지 말자고하는 품속의 다정한 말이 시간과 공간을 건너 바로 지금 진실 되게 와 닿음을 체감 하는 독서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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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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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뱀이 근처에 없을 거라며 마음 놓고 있는 새들 같고, 카멜레온의 끈끈한 혓바닥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나무줄기 주위를 맴도는 파리들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 사실 없는 자서전에서


예술 평론가 장 프랑수아 마르텔의 이 책 Reclaiming Art in the Age of Artifice는 예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철학서이자 문명비평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인공물(Artifice)시대'의 위기를 예술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위기'로 규정한다. 정치와 시장, 기술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거대한 '인공물(Artifice)'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적 가치만으로 평가되는 존재가 되었고,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마지막 통로가 된다.

 

마르텔은 예술의 기원을 매우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은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하나의 사건"이며, "낯선 차원에서 들이닥친 한 줄기 빛"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을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근원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피카소가 "최초의 인간이 예술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완성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가 "모든 예술은 쓸모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예술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예술은 정치나 경제, 도덕의 도구가 될 때 본질을 잃고, 오직 자기 목적성을 지킬 때만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마르텔이 말하는 아름다움 역시 단순한 조화나 질서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별한다. 아름다움이 내가 이해하는 세계와 일치할 때 느끼는 안정감이라면 숭고는 현실이 내 예상을 무너뜨릴 때 찾아오는 파괴적 아름다움이다. 숭고는 불쾌하고 두렵지만 바로 그 공포를 통해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의 진실을 폭로한다. 진정한 예술은 안락한 감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에 균열을 낸다.

 

그런 점에서 화가 폴 세잔이 남긴 말은 마르텔이 말하는 예술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다. "나는 이슬비를 맞으며 세상의 순수한 근원을 들이마신다. 그 순간 나는 그림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무지갯빛 혼돈이다."

세잔에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완전히 동화되는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 황홀한 몰입은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실재가 되었다. 예술은 현실을 복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실의 숨겨진 근원에 접속하는 행위임을 세잔은 몸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마르텔이 "예술의 가치는 세상의 근원적 신비를 얼마나 예민하게 느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대목은 세잔의 작업과 정확히 만난다.

 

반대로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술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인공물은 예술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특정한 감정과 행동을 유도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장치다. 진짜 예술은 질문을 남기지만 인공물은 정답을 주입한다. 예술은 모호함을 사랑하지만 인공물은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결국 둘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확실성'이다.

 

이 점에서 마르텔이 예로 드는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특징은 흥미롭다. 이 영화는 경이로운 영상미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한 치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본, 세트, 연기, 연출, 편집까지 모든 요소가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관객은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설계 안에서 움직인다. 악당은 절대적으로 악하며 주인공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인간은 악하고 자연은 선하다는 도덕적 결론을 향해 관객은 조금의 의심도 품지 못한 채 질주한다. 압도적인 영상미는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를 더욱 자연스럽게 내면에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텔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러한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 인공물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을 것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백을 남기는 대신 이미 설계된 감정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공물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조종한다. 말초적 인공물은 소비와 소유를 자극하고, 교훈적 인공물은 증오와 도덕적 우월감을 생산한다. 둘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제거하고 통념과 독사(Doxa)를 강화한다. 그래서 인공물은 언제나 상식을 반복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상식을 배신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의 언어인 상징도 기호로 축소된다. 마르텔은 "기호는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기계적 인과율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상징이 된다"고 말한다. 기호가 정보를 전달한다면 상징은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예술은 소통이 아니라 표현이며, 표현을 통해 상징은 하나의 미학적 사건으로 태어난다. 노래와 영화, 그림은 내 안의 감정을 객관적 실체로 탄생시키고 일시적인 감정을 영속적인 존재로 바꾸는 마법을 수행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 '이중 시선(Double Vision)'은 바로 이러한 상징을 읽는 능력이다.

 


이와 반대로 현대 대중문화는 상징을 제거하고 키치를 양산한다. 밀란 쿤데라는 "키치는 죽음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병풍"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이 이토록 강렬한 이유는 키치가 현실의 근본 조건인 죽음과 상실, 혼돈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불안정한 변화의 과정인데, 키치는 오직 매끈한 질서와 행복만을 보여 준다. 결국 키치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가짜 위안이다. 녹음된 웃음소리가 우리 대신 웃어 주듯 키치는 우리가 직접 감당해야 할 삶의 고통을 값싼 감상주의로 덮어 버린다. 그래서 키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회피이며, 진정한 예술과 가장 멀리 떨어진 미적 환상이다.

 

마르텔은 예술이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멀어질 때 예술은 가장 혁명적인 힘을 획득한다. 정치가 은폐한 현실을 드러내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통념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예술은 비정치적이기에 오히려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그의 명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오늘날 이러한 인공물의 지배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거대해졌다. 이제 소셜미디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삶의 틀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그 안의 이미지에 맞추어 끊임없이 수정하고, 기술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감정과 가치관까지 재편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인공물이 설계한 욕망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르텔은 이러한 시대를 설명하며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를 떠올린다. 작품 속 사람들은 마을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미쳐 죽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목격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그저 색채일 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색채' 너머에 훨씬 더 거대한 존재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그저 알고리즘일 뿐", "그저 기계학습일 뿐", "그저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하며 인공물의 실질적인 지배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문제는 색채 자체가 아니라 그 색채가 우리의 세계를 뿌리째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러브크래프트가 예견한 미래는 바로 '유령사회(Spectral)'였다. Spectral은 빛의 배열인 스펙트럼(Spectrum)과 유령을 뜻하는 스펙터(Specter)를 동시에 품은 말이다. 화려한 빛의 배열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정작 우리는 그 뒤편의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간다. 디지털 이미지와 SNS 속 자아는 점점 선명해지지만 실제의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형체 없는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시대, 인간은 자신마저 잃어버린 채스스로 클라우드 구름 속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간다.

 

그래서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인간 정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칼 융은 "인류의 진짜 적은 인간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숭배하는 인간의 정신이며, 인공물을 진실로 착각하는 우리의 의식이다. 결국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현실로 되돌리는 마지막 통로다. 진정한 예술은 정답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을 깨뜨리고, 통념에 균열을 내며, 인간을 실재 앞에 다시 세운다. 인간은 예술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장 프랑수아 마르텔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가장 절실한 메시지일 것이다.

 

사실 마르텔의 이 책은 읽을수록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술을 정의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설명하지만, 설명이 끝나는 순간 이미 예술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책은 논리적으로 예술을 증명하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예술을 다시 경험하도록 이끄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술은 혼돈을 견디는 능력이고, 인공물은 혼돈을 제거하려는 장치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칼 융의 말을 인용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기술도, AI, 시장도 아니며, 그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인간 정신이라는 말이다. 결국 마르텔은 예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끝으로 이 예술철학 에세이로 규정짓고 싶은 글의 미덕을 말해야겠다.

 

그것은 예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완성한 사건이다와 같이 존재론, “기호를 상징으로 바꾸어 실재를 보게 한다.”는 인식론, “아름다움보다 숭고, 질서보다 균열이 예술의 본질이다.”라 말하는 미학, “인공물·키치·소셜미디어가 인간 정신을 획일화한다는 사회비평, “예술은 비정치적일 때 가장 혁명적이다.”라는 정치철학을 망라한 명료한 지향의식과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사례들의 놀라운 대응이 그 어느 예술비평서보다 총체적 이해의 바탕을 토대로 하여 대중의 수월한 접근을 향한 깊은 노고를 투여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AI시대에 성큼 들어선 오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무엇인지 사유해보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모처럼 강력 추천한다는 사족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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