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트랜스필 총서 4
권용선 외 지음, 최진석 엮음 / 비(도서출판b)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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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感應;affect)이다."

- 16쪽에서

 

사실 '감응(affect)'이란 개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재적 힘"으로 규정한 바있다. 다만 이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도구'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것의 잠재력을 문학을 비롯한 예술, 사회정치 및 세계를 고찰, 규명하는 시도들이라 할 것이다. 여섯 명의 저자가 쓴 여섯 꼭지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유물론적 시학'을 말하는 이진경의 문장을 빌어 말한다면, '내 신체 속으로 밀고 들어와 스며들고 휘감겨', 어떤 변화를 표현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마다 수용능력이라는 감각이 다르니 말이다.

 

.  첫 번째 평설인 이진경의 감응이란 무엇인가?는 제목처럼 감응에 대한 입문으로 제격이다. 그의 말처럼 전공자의 호구가 된, "전공자의 가정된 지식 없이는 무의미한 단어"들을 남발하는 그런 조악하고 오만하며 무지를 포장하는 언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이란 철학자의 이론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그 개념만으로도 사람들의 사유나 삶 속에 파고들어가 무언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효과를 가진 독자적인 말"이라는 그의 정의가 그것이다. 어떤 외부- 책의 문장이 되었든, 사람 그자체가 되었든 - 와의 만남으로부터 촉발 받을 능력이 있는 신체라면 누구라도 이 감응의 시학과 함께 섞이며 감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경은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쓴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감응의 모호한 일원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가는 소설"이라고 35년째 폐지 압축 일을 하는 주인공 '한탸'를 통해 감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압축되어 버려지는 책들을 보면서 점점 스스로가 버려지는 책이 되는 감응을 갖게 되는데, 아마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예술 작품이란 감응의 응결"이란 문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구나라는 반가운 깨달음을 얻게된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딪치며 (...)

각각의 존재자의 신체에 변화를 야기한다." - 15쪽에서

 

감응이란 이처럼 "어떤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내 신체에 발생한 변화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효과를 신체 안에 수용하여 얻는 능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의 시를 비롯한 감응의 다양한 양태들이 소개되는데, 이해되지 않아도 의미화 되지 않아도 전해지고 파고드는 감응의 독특한 능력, 특이함의 문턱을 넘어 흘러가지 않고 기억되어 신체 속에 응결되어 다시금 다른 것을 촉발하는 '사건의 말없는 신체'인 사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합리주의 이성을 말하면서 이러한 감응의 능력을 잃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다 내재된 것임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우리에게는 이같은 탁월한 감응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신체 안에 응결되어 있던 강밀했던 감응의 기억은 어쩌다 무심코 무엇인가에 의해 밀려 들어와 삶의 장소에 쏟아 내게 될 때가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이진경의 평설은 문학작품을 쓰는 이, 그리고 읽는 이들 모두에게 진짜배기 사유의 도구로서 감응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감응, 그렇게 밀려든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시간과 환경이 달라져도 잊지 않기 위해 신체를 갖는 어떤 것으로 응결"시킨 것이 곧 예술작품임을.





.   아마 내가 감응을 지녔던 두 번째 평설은 최유미가 쓴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이 될 것 같다. 생물의 다양성은 세대를 거듭한 차이의 누적이 계통수의 분기로 나타난 결과라는 전통적 진화론을 거부하고, "생물 다양성의 원동력은 분기가 아니라 융합"이라 주장한 1967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gulis)'의 이질적 세포의 공생, 이종간의 우발적인 엮임,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라 말하는 새로운 배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진화론과 신다윈주의자들의 게놈 중심적 생물학은 '타자와 관계를 경쟁과 적대'로 보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연결하는데 소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개체는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임을 인정하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는 화합과 공생의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시지구에서의 고세균과 박테리아가 

서로가 서로를 먹던 시대의 영상을 돌려본다. 이 적대의 일상이 

어느 순간 멈추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고세균이 박테리아를 먹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느닷없는 실패가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틈을 연다.

이들은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각자를 자신의 부분과 융합한 것이다."

- 78~79쪽에서, 부분 변형 발췌인용

 

우리(인간)는 개체였던 적이 없다. "소화불량 메타포는 약육강식이라는 계산된 드라마"의 허위를 들추어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에게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 서로 밀려들어가고 응결되어 새로운 감응을 촉발하는 것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종혼효적 결합의 아름답고 멋진 사례인 꿀물을 제공하지 않는 오프리속 난초와 꿀벌의 공생 이야기는 수분과 꿀물의 교환이라는 타산적 경제원리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과학을 "자연이란 무자비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규정"하여 인간사에 투사하려는 물신화된 왜곡의 도구화 환상을 깨부순다.

 

난초와 꿀벌이 서로의 즐거움과 놀이를 위해 서로 감각을 촉발하고 반응하는 모습은 매혹 이상의 '감흥의 생태학'이 발설하는 얽힘, 그 현명한 신체들의 마주침의 의미를 읽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신체에 맞춰나가는 성취의 기쁨, 아마 고매한 지능을 가졌다는, 신이 되려하는 인간이 망각한 이것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이 바로 지금에라도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각성을 촉발한다.

 

.  내게 감응을 일으킨 세 번째 평설은 문학평론가 송승환이 쓴 증언의 문학성과 시적 감응의 정치성 이다. 2차 세계대전 독일강제수용소 체험의 기록을 쓴 '로베르 앙텔므''프리모 레비', 고문의 기록을 쓴 '장 아메리' 글을 통해 공백의 언어, 비인간의 증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증언 불가능성의 고백이야말로 감응의 말임을 듣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세살 가량 되어 보이는 죽어가는 아이의 환원 불가능한 언어, "'후르비네크(Hurbinek)'의 언어"가 비언어롤 읽힐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지금-여기 부재하는 증인임을 의미화 하는 문장들은 그 상상 불가능성의 사건을 내 신체의 어느 공간 속으로 풀어 놓는다. 이것은 시인 랭보의 1인칭 주체의 시선을 상실하고 타자로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신체에 새기게 되는 시()를 통해 증인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일 수밖에 없음을 몽롱하게 바라보게 한다.

 

.   '발터 벤야민'192612월 모스크바 박물관에서의 세잔의 그림과 우연의 마주침은 "예술작품을 관조와 반성의 대상적 위치로부터 탈출시켜 작품 고유의 무게를 방사하는 '신체'로서의 지위"가 되었다는 신체 또는 감응의 전도체를 말하는 권용선의 평설은 '감응'이 예술작품을 새로운 공동체적 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각성의 전도체임을 가리킨다. 이밖에 스피노자의 'affect'에 대한 해설이라 할 현영종의 글과 문학평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최진석의 글이 감응의 역동적 적용을 시도하여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 글에는 여전히 일본식 번역어인 '정동(情動;affect)'의 사용이나, 또는 감응과 감정의 명료한 개념적 분리 없이 혼용되어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감정은 감응의 산물이다. 감응이 "상이한 정서적 반응이 섞이는 이행상태"라면, 감정은 "이렇게 섞인 정서적 반응이 귀착되는 정서적 상태"이다. 이진경의 지적처럼 사람들의 사유에 파고들 수 있는 언어로서 개념어들의 정리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세계의 이해와 통찰 도구로서 감응이 많은 사람들의 신체로 확산되기를 염원하는 그런 멋진 걸음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삶이란 부단한 배움의 연속인 것만 같다.

 

"동종과 동류가 아닌 것들 사이의 상호적인 포획은 어떻게 하면 상대를 더 잘 촉발할지,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잘 촉발될지를 부단히 배워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신체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어나간 부단한 배움의 기록이다." - 105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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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란 / 철학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월드북 67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김현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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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질서가 횡행하는 것을 이것도 자유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고 

체념할 것이다."

- 존 윌리엄 워드(John William Ward; 1781~1833)

 

1930년 발표된, 당시 부상하던 파시즘에 대한 경고와 대중민주주의의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저술을 2020년 다시 깨워야 하는 것은 "범용한 정신이 ...모든 곳을 밀어 붙이려고 하는(19)" , 고정된 자기 인식에만 맞춰 사는 편협의 공존으로 퇴화하는 사회대중의 현상 때문이다. "말을 토해내고 싶다는 욕망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63)", 정작 필요의 의론은 중지시키고 적의와 선동적 야만이 여론을 장악하는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고 있음에서이다.

 

오르테가는 '대중'이란, "스스로를 ...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생각하고 타인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느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16)" 이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형을 스스로 반복하는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 다른 생각을 배제(19)"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자기 관념의 창고 안에 들어있는 인식에 만족하며 이는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자신 밖에 있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이 "관념의 창고에 안주하고 자기 폐쇄의 메커니즘(59)"을 반복한다. 바로 편협성, 무지의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에 터 잡은 위력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이같이 지성이 폐쇄된 인간들의 군집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알량한 지식, 이미 정해져 있는 관념의 변죽을 울리며 자신의 머리에 쌓인 공허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외곬의 대담함으로 황색언론의 기수로 변신한 스스로에 감동한다. 정의와 공정성을 외치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부정의에 따른 자기 편익뿐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모순된 형태는 자만한 도련님이라는 형태이다." 

- 본문 86

 

이 밀봉된 마음의 존재는 자기만의 규칙에 따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자만한 도련님의 규칙이 아닌 이유이다. 그저 자신의 견해만이 정의라는 태도를 취하는 인간 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대 입장에 어떠한 존중 의지도 없는, 상호 따라야 하는 일련의 규제를 인정하려하지 않는, 결국 의지할 사회적 규준의 권위가 사라지고 협의(協議)의 의론이 불가능(62)"하게 된다. 기댈 수 있는 규칙이 없으니 문화가 존재할 도리가 없어진다. 결국 이 결여는 문화를 사멸시키고 야만성이 득세케 한다.

 

오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와 원한의 거친 언어가 정치 무대를 지배하고, 여기에 환호작약하는 대중의 원시성이 활개를 친다, 조중동을 비롯한 황색언론과 미디어들, 기득권을 결단코 내려놓지 않으려는 수구정당과 검찰 등 권력기관, 여기에 주구노릇을 하며 자기 이익의 기회를 엿보는 기회주의적 담론가들이 마치 정의의 수호자 행세를 하며, 대중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 불어 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야만 상태이며 대중민주주의, 포퓰리스트들이 마음껏 날뛰는 세계를 조성해준다. 틈만 나면 규제의 폐기를 제안하는 '야만인의 대헌장'이 수시로 읊조려진다. 내가, 우리가, 이들 대중이 아니기 위해, 전체주의 세계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해 무지의 편협을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 안에서 풍부한 수단만 보고 고뇌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대중! " 

- 본문 85

 

이제 마음껏 "활개치고 있는 것은 대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세력을 부여받은 원시성 충만한 범용(凡庸)(81)" 인간이 외관상의 승리를 향유한다. 어리석음, 프로파간다, 적의(敵意) 충만한 언어로 인간본능의 가장 저열한 부문을 자극해 점점 지배력을 확장한다. 그래서 오르테가의 책 제목은 '대중의 혁명'이 아니라 '대중의 반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 정신적 야만성을 밀어붙이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자기 영역의 아주 작은 한쪽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래서 대중의 평범성에 기생해 이 사회 모든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는 터무니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누구인가?

 

더구나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복잡 미묘해져만 가는 문명 자체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단을 획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지능과의 부조화(77)"를 깨닫지 못한다. 기술 문명에 킬킬대며 저항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 채 엉뚱한 반문을 하기까지 한다. 앎의 깊이가 어디까지이냐고? 타자의 고뇌를 헤아릴 만큼, 자기 앎이 천박한 것을 인식할 만큼, 이것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자기 관념의 창고가 결여, 공백 투성이임을, 그래서 끊임없이 타자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게 될 만큼 겸허한 앎이면 대중에 파묻히고 휘둘리는 정신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르테가가 정리한 '대중의 심리구조'라 기술한 항목들을 열거하며 맺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권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자신의 의견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매사에 개입하며 자신의 평범한 의견을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혹여 자기 삶에서 비극적인 제약이란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야만적 정신의 응석받이를 탈피해야 우리가 가까이 가려하는 민주주의, 자기 삶의 주역임을 잃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그 사생아인 전체주의는 너무 빼 닮았기에 이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개인의 몫이다. 대중은 항상 어리석기 때문이다.(1) 대중에 대한 이 신랄한 비판적 고찰의 서술은 어쩌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회귀할 테마일 것 같다.

 

 

(1)2016년 촛불을 든 시민들은 '공중'이라 부른다. 이와 달리 대중은 그저 수신자로서의 집합적 군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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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가족특강 시리즈 2
이희경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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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족 특강'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기생충과 가족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에 이은 세 번째 읽기이다자본주의의 동력축으로 근대 이후 독특한 구조로 탄생한 핵가족(엄마-아버지-아이)이 '물적 토대'의 붕괴에 따라 해체분열되며 야기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그 대안의 모색이라 하겠다저자는 '루쉰'의 소설 광인 일기를 비롯해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한국어 번역판 제목)영화감독 김기영의 작품 하녀육체의 약속등을 통해 근대 이전의 가족 형태와 오늘의 핵가족의 차이를 설명하며나아가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가족주의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오마주 했다는 김기영의 하녀는 그야말로 원만한 가족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타자의 배제와 낭자한 피 위에 들어선 잔혹한 동화라고 말하고 있다핵가족 탄생과 관련된 이젠 고루해진 사설은 이쯤에서 그쳐야겠다문제는 21세기 오늘우리네 사회가 이러한 핵가족이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아마 1997년 외환위기로 해체가 시작된 이래 핵가족을 토대로 한 물적 기반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까닭일 것이다.

 

경제적 기초 단위로 작동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소위 '정서적 연대'라는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은 쉽게 허물어져 내린다. OECD 통계는 이혼율 1위 국가에 한국을 올리고, 1인 가족과 2인 가족의 증가와 같은 가족 형태와 주거 형태의 변화는 물론, "모성의 변화뿐 아니라 부부관계낭만적 연애에 기초한 내밀한 사랑이라는 신화도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페미니스트들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가부장제야!, 남자들이 문제야! "기존 가족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지체된 사회적 담론은 퇴행적 진단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 같은 가족 형태의 붕괴가 반드시 결핍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그리고 관계의 독점과 배타적 이기주의와 같은 핵가족의 속성마저 바로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부양하는 남성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정서적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는 아이"라는 삼각형 구도를 깨뜨리는 근인(根因)으로서 자본주의체제가 요구하는 물적 소비와의 균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루쉰의 Q정전 '정신승리법'을 삶의 신조로 하는 아Q란 인물이 마침내 이 좌우명삶의 습속을 의심하는 "성욕과 식욕 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좌절"되는 순간을 겪는 장면은 '연애의 비극', '생계의 비극'이 어디에 토대를 둔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인간 세계의 모든 습관체제의 성립은 물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다이 토대의 붕괴가 몰고 온 오늘의 가족주의 해체 현상은 어린아이는 물론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의 상실에 더해 급진적 기술사회로의 진입이 야기하는 유휴노동력의 양산초고령화 사회화로 인한 비용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세계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로의 '이행'을 위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저자 이희경은 지적한다즉 변화된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담론 지체로 인한 윤리적 공백의 발생이라는 것이다그나마 정서적경제적 안식처였던 핵가족의 붕괴는 폭행과 학대는 물론 버려지는 아이들방치되어 고독사로 발견된 노인들의 양산이라는 돌봄 노동 상실의 결과를 난폭하게 드러내고 있다그렇다고 자기 파멸성을 내재한 핵가족으로 다시금 회귀하여야 하는 것인가아니면 여전히 대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해체되는 가족주의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항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를 되살려내려 한다아마 근래의 레트로 열풍, 1970년대 디스코를 소환하여 추억의 향기에 취하게 한 최근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이나,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복고적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 위기와 돌봄 위기를 다시 가족 안으로 쑤셔 넣는"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는 시간 역행적 질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대 가족주의가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시계를 뒤로 돌릴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경우즉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개인적사회적 대안도 없이 가족의 해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버려지는 아이혐오의 대상으로서 노인에로스를 대체한 성폭력 ..., 한마디로 "공망의 세상이 될거"라 예견한다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적 퇴행이 아닌 문명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연착륙은 무엇일까결국은 우리가 배척하도록경쟁의 대상자로서밟아 뭉개버릴 대상으로 배운 타자와의 관계 회복새로운 관계망의 형성이 구축해야 할 새 질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결혼소울 메이트다자간 사랑(폴리 아모리)을 전제한 집단결혼과 공동 양육 및 재산공유체제인 일종의 집단가족제로서 '폴리 피텔리티등을 제시하고 있지만과연 이것이 가족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다만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공생적 관계의 회복은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연습"해야 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덕목일 것이다삐걱거리는 자본주의와 동행하던 가족주의의 붕괴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지금 종용하고 있다그럼에도 여전히 유대와 연대의 세계라는 그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는 내가 남는다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진정 고집스레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어쩌면 작은 관계들의 형성부터 시작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변화의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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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 1947년 오리지널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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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대기에서 그려지는 기이한 사건들은 (...) 사실 오랑이 평범하다는 게 

첫 인상인 도시요, (...) 꼭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도시나 그 안에서 사는 삶의 

모습이 시시하리만치 평범하다는 사실뿐이다."

- 본문 9, 12쪽 변형 발췌

 

한 도시의 소개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첫 다섯 쪽은 지루한 설명과는 달리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장소나 사람들에게 발생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사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곳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하려는 서술자의 의지 때문이다. 더구나 증언과 서류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기술로서의 '연대기'임을 천명하는 것도 이 소설을 다분히 사실로서, 현실적 체감의 읽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어떤 의도를 느끼게 한다. 서술자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빠져나가려 들지 말라, 이것은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성을 띤 기술이라는 것이다.

 

의사 '리외'가 계단 중간에서 물컹한 죽은 쥐를 밟고 별 생각없이 계단을 내려온 이후 페스트의 질병적 징후와 확산 가능성의 인식이 시작되는, 보건 전문가, 행정 관청은 물론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는 전언은 물론,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에 우선을 두", "자신들의 일상적인 습관을 방해 받고 이해관계에 영향 받는 것에만 예민했"으며, "첫 반응은 언론과 한 목소리로 행정당국을 비난하는 것"이었다는 서술은 여전히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오늘의 우리네를 생각케 한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지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제 생각에만 파묻혀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한다."

-본문 52쪽에서

 

코로나19로 세계가 신음하는 가운데, 감염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매일 발표되고 있다. 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아마 당사자와 이들의 가족 등 관계자, 그리고 이를 감당해야하는 의료진들 정도가 아닐까? 정말 이 숫자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어서 그저 "상상속에 피어나는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는 서술자의 표현을 부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의사 리외가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 사이의 지긋지긋한 투쟁"이라 한것은 이러한 인류적 재난에 씌워진 추상성, 즉 현실과 괴리된 이 추상을 공략하는 것이 바로 과제라는 자각임을 알려준다. 대개 자신만은 이 죽음의 전염병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의 상황으로, 좀처럼 자신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추상이 구체성을 띨 때,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 양식, 삶을 대하는 인간 개개인의 태도를 발견케 된다.

 

재앙이, 페스트라는 억압과 절망의 공포가 '''내 가족'을 덮칠 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삶의 한계라는 그 간극의 좌절을 깨닫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절규하기 시작한다. 부당하고, 부조리하다고. 그럼에도 이 엄습한 불행의 인식, 재앙의 실체를 바로 자신, 인간 모두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이타적인 인간들의 행동이 시작되고 이것이 자신들의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고서야 비롯됨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초기, 대구지역의 확진자가 급증할 때 자원봉사 의료를 위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마 우리도 이때쯤 해서 어렴풋이나마 바이러스를 자신의 안위와 연결짓기 시작했을 터이다.

 

"보건 위생대 덕분에 우리 시민들은 이 병과 싸워 물리치는 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을 납득했다.페스트가 몇몇 사람의 의무가 되자, 페스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다."

- 본문 168쪽에서

 

도시의 폐쇄와 격리, 무차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의 현장이 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용기와 의지와 인내를 상실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을 미래로 재촉하고 싶은 비이성적 갈망" 조차 사그러진 채, 꿈꾸는 것, 미래의 도래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제 발밑만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점,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재앙을 내재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그 한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음이라는 절망적 삶의 유한성, 삶이란 희망이라는 미래 없는 공허함이며 끝없는 패배의 연속일 뿐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해독이 불가능하고 한계가 정해져 있는 이 세계,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의미를 획득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에서

 

재앙적 사건인 페스트는 다의적 언어로 여겨진다. 비인간적인 것, 원초적인 적의로 인간을 공포와 무기력, 절망에 몰아넣는 무 논리의 해독 불가능한 세계로써. 삶의 의미를 삭제하는 이 불모성 속에서 삶을 버텨내고, 이 무의미에서 조차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삶을 어떻게 수행해낼 수 있는 가의 물음일 것이다.

 

페스트의 재앙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시작한다. 폐쇄된 도시 오랑으로부터 연인과의 재회를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혼자 죄수가 되느니 차라리 다른 모든 이와 함께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는 재앙의 시간이 영속되기를 기대하는 '코타르', 주변의 고통에는 무심한 채 가족의 안위에 여념 없는 판사 '오통' 등 일상적 이기심에 침잠하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서술자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겸손함을 잊고, 자기들은 여전히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남들보다 더 잘못된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것이 불모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의 태도가 될 수 없음은 페스트라는 무차별성과 비이성 때문이다.

 

한편 이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위생대를 조직하고 역병의 그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불합리에 저항하는 '타루', 하느님의 재앙이라며 "정의로운 이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고통의 암흑 바닥에 놓여있는 영생의 황홀한 미광"을 역설하는 신부 '파늘루', 내세의 영광이라는 알 수 없는 진리의 말 이전에 현실의 고통을 보살피는 것, 재앙을 회피하거나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의사로서 자기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가 있다.

 

"그 작은 얼굴에서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더니 긴 비명이 흘러나왔다. (...)

아이가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전 인류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항변 같았다."

- 본문 271쪽에서

 

서술자, 아니 리외는 이 세계의 불모성, 인간과 불화하는 운명의 부조리함에 반항한다. 부조리를 자기 삶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삶의 인식의 최선봉에 내세우고 투쟁하는 인간, 모든 초자연적 위안을 집요하게 부정하며 메마르고 자신만만한 명철함 속에서 의사로서의 자기 수행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인간을 발견케 한다.

 

리외는 구원에 호소하는 것, 영원에 대한 향수보다 자신의 용기와 이성을 선호한다. 아마 인간을 부추기는 희망이라는 수단의 거짓됨, 인간인 자신이 가진 것의 한계를 아는 인물이기에, 추상과 그 공허함과 싸우려는 인간으로서 생명, 그 육체성을 지켜내는 구체성이 그의 삶을 정의한다. 오통의 죽어가는 어린 아이와 함께하는 리외의 위 문장은 부조리를 떠안은 인간의 엄숙함, 실천 행위의 숭고함이 절로 마음 깊이 스며들어 온다. 죽음, 이 끔찍한 최악의 부조리에 대한 아이의 긴 비명, 그 항변에 괜스레 눈물이 흘러내린다.

 

우리는 인간의 이해 바깥에 있는, 패배 할 수밖에 없는 이 숙명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서술자는 파늘루와 타루와 리외를 통해서 삶의 부조리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인식한 인간이 어느 순간까지 이 부조리의 논리를 삶의 태도로 지닐 수 있는가를 다시금 묻는다. 부조리의 인식이란 삶의 유한함, 그 허무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육체의 시간에 저항하는 육체라는 모순이 놓여있다.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고 외치는 파늘루 앞에서 악의 오염이 개입할 여지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은 영혼의 정화와 병 걸린 육체의 비논리를 생성한다. 파늘루는 이 부조리에 직면하여 부조리의 논리를 자신의 죽음까지 몰고 감으로써 이 처절한 모순인 신에 저항하는 것 같다. 치료를 거부한 채 페스트로 죽어가며 자신의 믿음에 순응함으로써.

 

이와 달리 '타루'는 그야말로 카뮈가 그의 에세이에 쓴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인다. 리외에게 자신의 과거와 삶의 이해를 말하는 부분은 부조리의 추론속 문장 "부조리는 인간의 가장 극한의 긴장이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유지하는 긴장이다." 를 떠오르게 한다. 방심하지 않는 인간, 긴장의 끈을 놓치 않는 의지, 한 순간도 부조리, 즉 페스트를 지니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인간.

 

"이런 상태를 끝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이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을 극도의 피로를 자진해서 겪는 것입니다."

- 본문 318쪽에서

 

그는 환상 없는 삶을 살아가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 그는 "이 세계에 내 자리는 없다는 걸"알고 있으며, "스스로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추방형"에 처했기에, 그의 삶은 모순으로 찢어졌고, 삶의 현실은 아무런 색채를 지니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리외의 그것과 결별한다. 타루가 리외에게 말하듯이 그는 리외보다 야심이 덜하다. 리외는 부조리와 함께 숨쉬며, 부조리가 가르쳐 주는 바들을 인정하며, 그 교훈의 살아 숨 쉬는 육신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리외는 부조리의 인간, 삶의 완벽한 모델의 전형, 카뮈가 지향했던 반항, 열정, 자유를 삶에 그대로 투영하여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지성, 최고의 풍경이 된다.

 

리외는 인간에게 속한 것만을 바라는 사람이며, 평화는 희망을 전제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희망, 미래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이 부조리, 관념 덩어리는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는 파늘루의 신이나 영속으로의 추락도 아니요, 타루의 관념적 허상이 아니라 인간 삶의 구체적 예증들이며 그 인간적 숨결을 추구한다.

 

"이 연대기는 (...) 모든 이들이 공포에 맞섰던 기록이자,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공포의 가차 없는 맹습에 맞서서 확실히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 본문 390쪽에서

 

연대기를 마치며 서술자가 리외 자신임을 밝히며 기록의 성격을 표명하는 이 문장에서 인간, 자기 힘의 근본으로서 필요한 열의와 집중력과 통찰력을 읽게 되며, 강고한 인간적 확신, 모순 속에서 자기 믿음을 묵묵히 실천하는 단단하고 확고한 인간 존재의 위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어떤 형이상학도, 꿈의 미래와 같은 희망도 거부함으로써 완전한 현실의 자유 속에서 사고하며 행동하는 이 인간적 열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페스트가 도시를 물러나고 폐쇄의 해제를 맞이한 후 이별의 해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가끔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리외는 이 연대기의 작성이 사람간의 유대와 애정이라는 찬미해야 할 인간의 덕목을 또한 헤아리게 한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숭고함이 절로 읽히는 작품이다.

 

지금 우리네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통과 힘겨움에 내몰고 있다. 주어진 한계, 이 현실 속에서 삶의 명백한 가치를 깨닫는 데 이보다 맞춤의 글은 없을 듯하다.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위해 쥐들을 흔들어 깨운 카뮈의 정신에 새삼 겸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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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사 3 - 부상신편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작품집의 배경인 일본 역사의 고대 시대와 중세를 잇는 헤이안(平安)시대(AD 8~12C)는 음악이나 시가 등 예술문화에 대한 지각이 솟아오르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작품은 당대의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 '음양사'를 되살려 미스터리한 에피소드로 각색된 이야기로 이해된다.

 

중심인물인 음양사 '세이메이'는 주술사이자 퇴마사이며 점성가이기도 한 딱히 범주화할 수 없는, 인간계 속의 삶과 죽음의 속성을 헤아리고 있는자라는 느낌이다. 이 인물과 사건 현장을 함께하는 마치 홈즈의 파트너인 왓슨을 상기케하는 고위관료이자 피리부는 가인이기도 한 '히로마사'는 인간냄새를 물씬 풍기며 세이메이의 신비를 현실적인 이해의 세계, 친근한 감각으로 이끈다.

 

이 책에는 7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지만, 매 한 편의 에피소드는 그 속에 많은 일화들과 헤이안 시대의 다채로운 역사적 풍경을 담아내고 있어 의외로 풍성한 읽기를 선사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첫 편인 참외 선인또한 천황의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읍을 휘젓는 괴이한 소문과 눈 앞에서 펼쳐지는 마술적 광경에 더해 귀신인지 신선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방사(方士)의 등장, 요물과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알쏭달쏭한 인간 마음의 세계를 종횡 휘젓는다. 그리곤 보이는 것, 감각하는 것을 실재화하는 것은 과연 인간 마음의 결정에 달린 것인지를 곰곰 생각케 유인하는 듯하다.

 



사실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사고가 지배적인 오늘에 귀신, 혼령, 접신, 기우제 등 인간의 이해가 가닿지 않는 설명 불가능한 것들에 인간 정신이 여전히 어떤 향수를 느낀다는 것은 실로 조화롭지 않은 어떤 모순된 감정을 갖게한다. 여기에 현대적 해석을 붙인다면 신경증, 강박증,분열증과 같은 정신의학적 병인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음양사 세이메이가 히로마사와 기괴한 사건들의 현장으로 우마차로 도착하여 해당 사건들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정신분석가의 그것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애증과 시기, 그리고 명예, 지위, 재산 등을 향한 절제되지 못하는 욕구에 도사린 몽매성을 깨닫도록, 그 지옥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행위가 곧 음양사의 역할인 것처럼 여겨지는 탓이다.

 

냄비 따위를 올려놓는 둥근 삼발 모양의 쇠 받침대를 일컫는 쇠고리라는 에피소드나 헤매는 혼령은 공히 사랑하는 님을 잊지 못해 애끓는 여인의 불가능한 욕망의 이야기이다. 죽은 자를 이생에 다시금 불러 들여 해후하고 싶을 정도의 욕망,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운 마음은 커져만 갈뿐 사그러지지 않는다. 이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귀신을 낳는다. "귀신은 사람이 낳는다. (...) 귀신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일 것이다."라는 세이메이의 말은 환각에 대한 하나의 진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정하게 바둑 두는 모습이 비친 장지에 어린 그림자에서 뱀의 모습을 보는 남자의 마음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의혹의 반영임이 드러나는 것처럼 본인조차 알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 그 심연을 상상케 한다.

 

어쩌면 이 작품집의 의도였는지도 모를 돋보이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에피소드 사랑을 하느냐고는 헤이안 시대의 황금기라 할 시가(和歌;와카)와 예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내리(천황의 궁전)에서 하는 노래시합의 조직, 경연의 구성, 그 과정과 승자의 결정에 이르는 장황한 묘사가 그것인데, 당대 일본의 문화적 영광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아마 그네들에게는 중요한 문화적 중요성을 띤 역사적 문헌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작가적 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단편은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향한 툇마루에 앉아 "밤의 어둠 속에 핀 겹벚꽃, 황매화, 등나무의 향기가 짙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내음을 음미하고 있는 두 남자의 그지없이 평온한 정경과 함께, 실은 보이지 않는 이 존재(향기), 그 생명성에 대한 사유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고, 경연대회의 마지막 와카의 노랫말은 사랑하는 이의 수줍은 소박함으로 사자(死者)의 혼령과 주술을 떠나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케 하는 여운까지 품고 있다.

 

사랑을 하고 있다는 내 소문이 세상에 퍼져 버렸구나

이제 막 남들 모르게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음에도

살며시 숨어들더니 어느새 얼굴에 나타난 내 연심에

사랑을 하느냐고 사람들이 묻는구나

- 228쪽에서

 

한편 엎드린 무녀 피를 빠는 시녀라는 두 에피소드는 시기와 자기 과시라는 속된 욕망의 적나라한 드러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우가 앞선 출세를 하게 되자 참외의 외관을 한 주물(呪物)에 엮인 그 추한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러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의 실체를 깨우치게 하는 음양사 세이메이와 히로마사의 두터운 우정의 대화는 생의 의미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선사한다. 히로마사는 귀신과 원한을 상대하는 친구 세이메이에게 말한다. 자네는 "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는 답변한다. "그렇지 않아. 자네가 있지 않은가." 생명을, 존재를, 그 고독함을, 고통에 대해 대화하며 의미를 나눌 수 있는 두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운지...

 

그런데 인간이라는 고통과 고독한 존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이메이와는 사뭇 다른 라이벌격인 음양사 '도만'의 행위는 생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안겨준다. 그는 "인간 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어차피 여흥일세. (...) 죽을 때까지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 오직 그뿐일세. 아니, 요즘은 그것조차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어쩌면 악의 화신인 듯한 도만이 바라보는 삶이란 집착,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닌 유쾌한, 집요함을 덜어낸 삶, 관조의 여유로운 즐거움으로서의 삶. 요괴니, 귀신이니, 흡혈이니 하는 이 모든 인간 발명의 존재들이란 결국 인간 정신의 변형된 모습 아니겠는가? 나름 고대의 문헌과 전통의 산물을 끌어내 인간 정신의 틈새를 조명한 설화적인 이 소설집은 소재의 가벼움 속에 진지한 삶의 물음들을 지니고 예기치 않은 이야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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