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의 마치(march)’라는 같은 의미가 중복 표현된 제목에는 야릇한 기만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닌데 그것인 체하는, 혹은 무심한 반복이 지닌 그저 그러함의 자연이 주는 무의지의 쓸쓸함.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 평생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로 살아온, 배우 이마치. 나는 소설의 두 번째 문단을 시작하는 “3월이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듯 쌀쌀한 날씨였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야 했음을 다 읽고 난 후 알아차렸다. 알츠하이머병, 자신을 잃어가는 한 여인이 멈춘 겨울같은 3월의 시간, 화창한 봄날로 가장된 춥고 외로운 인생이야기임을.

 

전 무대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이제 알 것 같아요. (...)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 체홉, 갈매기/ 3월의 마치175쪽에서

 

열다섯 살 이마치가 어머니의 학대로 화장실에 가두어졌을 때 외우던 체홉의 희곡 속 니나의 독백이다. 일곱 살 마치와 아홉 살 언니 준, 어린 자식들을 내버린 채 미군장교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그리고 그 혹독한 헐벗음과 버려진 집에서 죽어가던 어린 언니와 그녀의 죽음과 같이 지냈던 지옥같은 기억들, 미국에서 버려지자 돌아올 도리밖에 없었던 어머니라는 여자와의 재회와 마치의 의식에 남겨진 공포와 증오의 감정은 반복되는 폭력으로 되돌아오고, 집을 벗어나는 일, 새벽 신문배달, 극장에서 하루종일 죽치는 일, 그러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다 같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연극부의 일원이 된다.

 

그녀는 배우, 다른 사람이 되는 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으로서 연극에 빠져든다. 그녀의 유일한 환희가 된다. 그렇게 재능을 인정받고 이상한 운의 연속 속에서 유명 배우가 되지만, 세상은 수군거린다. 너무 많은 감독의 손을 탔다.”, “잠자리 오디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마치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임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의 정수는 무대 위에 있었기.

 

이야기들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은퇴한 노배우 아마치가 담당의에게 술회하는 기억의 편린이고. 가상공간에서 행해지는 VR치료 속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혹은 은폐되었던 자신의 과거와의 재회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 앎의 복기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자와의 결혼, 첫 아이의 출산과 아이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그 낯섦의 감정들, 위협과 강박 속에 갖게 된 둘 째 아이와 그 아이의 실종에 어린 죄의식, 남편의 무책임과 가장의 부담을 지어야만 했던 여배우의 강박적 연기의 몰두, 매니저 K의 헌신과 그의 사랑을 외면하였던 허위의 자존심,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앎을 넘어설 수 없는 어머니로서의 사랑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 온 아이에 대한 무관심 등, 혹독하기만 했던, 그래서 망각해야만 했던 자기의 지난 삶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증오심과 죄의식, 좌절, 절망의 안타까움, 가면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여인의 인내로 점철된 자기와 마주함으로서 채색되어 기만되었거나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소환된다. 그녀가 배우지 못한 삶의 방식들, 생존 이상의 것을 꿈꿔본 적 없는그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 없는 것이었음을 경험한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네 상상의 공간이 지닌 협소성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체험, 그 좁은 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그 고집스러움의 태도가 지닌 한계를. 인생이란 12월생인 이마치가 3월의 이마치가 되듯 허영과 위선, 기만으로 포장된 가면극인지도. 우리들은 결국 밀려오는 무한한 파도, 자기만의 파도 속에 한줌의 공기처럼 가벼워져 날아오르는 그런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토록 진실을 가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내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전달했을까? 배우자에게는,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가면을 썼을까? 이젠 이런 지난 일들에 배어있었을 감정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어나가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내가 누락한 것, 혹은 포장하여 기록 한 것, 숨기고 싶어하는 기억은 무엇인지, 아마 나를 알게 되는 여정이 될 것도 같다. 그럼으로써 나와 한 때 함께했던 사람들 모두에 대해서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발견하고, 이제라도 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경험의 한계를 무한히 확장하도록 상상의 공간을 넓힐 것을, 아마 그 책무를 성실히 수행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3월인데 왠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가면의 집착 때문인 것일까?  이마치처럼 언젠가 내 삶과 화해를 하고 나만의 파도에 훌훌 올라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살의 연구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자살(suicide)에 관한 에밀 뒤르켐 식의 사회학적 성찰이 아니다. 인간의 죽음에 관한 작가들과 그네들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고 그것의 반영으로서 문학의 이해이다. 집단적, 사회적 현상으로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관점이 아닌, 결코 말 할 수 없는 개인의 복잡한 심리, 그 내면과 환경의 영향에 대한 특정한 관심의 표현이다. 또한 그 개별성이 투영된 시와 소설과 산문들을 통해 왜 스스로를 살해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자살을 사건화한 뉴스나 여타 들려오는 소문에 그 어떤 선악과 찬반의 의욕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에 관심을 지니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왜 이 책에 관심을 가졌는가는 실로 아이러니하지만, 문학, 특히 시(,Poem)는 이 자기 파괴적 죽음과 분리할 수 없는 본성 자체라는 생각의 연쇄반응이었거나, 아니면 무관심을 통해 혹시라도 알게 될 삶에 대한 고귀성이 밝혀지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살의 연구는 느닷없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원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8.9.-1948.3.)

 

저자인 앨 앨버레즈(Al Alvarez, 1929-2019)는 책의 마지막 장에 미수(未遂)에 그친 자신의 자살에 대한 회고를 통해 그 지점에 이르는 환경과 심리적 상황, 그리고 계획된 죽음의 방법선택, 자살을 통해 기대했던 자기 인생의 정당화나, 뒤엉킨 두뇌 회로의 말끔한 정리와 같은 구원이란 없었음을 이야기하듯, 자살이라는 주제와 멀지 않은 인물이며, 특히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을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비평가이자 시인이다. 그렇다고 누구와 가까웠다거나 실제의 경험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주제에 더 깊은 통찰이나 식견을 지녔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특히 그 개별의 죽음이 지니는 단독성에 대한 관심이란 애정을 지니지 않고서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진실성을 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책의 백미(白眉)는 제1프롤로그, 실비아 플라스라고 하겠는데, 실비아의 시가 품고 있는 그녀의 자발적 죽음으로의 행위를 의심할 바 없이 정확히 묘사하며, 자살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숙의(熟議)한다. 쓰디쓴 초연함, 그 행위의 극적 상태나 그로 인한 고통 같은 건 조금도 드러나지 않은 자긍심과 연결된 자기 살해의 거스를 수 없는 귀결을 헤아린다. 하나의 주제로서 자살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존재, 금기시 되었던 소재의 개인 정서 체험으로 탐구할 문을 연 시인의 시와 최종의 죽음으로의 날로 이어진다.

 

그녀의 자살이 지닌 그 복잡하고 특수한 함의들을 알지 못하면,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시의 의미 속으로 어렴풋 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이 된 도박, 막을 도리가 없는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자살. 아침노래, 느릅나무, 가장자리, 온정, 아빠, 라자루스, 피니스테레, 죽음 주식회사.....,앨의 앞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실비아, 자신이 소리높여 읽어야 하는 시라고 했던 시들에 대해서, 저자의 몰이해가 그녀를 아프게 했던 비평적 언어들의 후회의 목소리도 있다. 실비아는 결코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죽지 않았다. 가스를 틀어놓고, 누워 죽음의 행위를 하지만, 세 번째 자살 시도인 죽음의 도박은 치밀하게 계산된 이웃의 일어남과 보모가 집에 오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염두에 둔 모험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운 부엌에 메모를 붙여두었다. 의사를 불러 주세요라고 의사의 전화번호까지 적힌 메모였다. 그러나 이 세 번 째 자살은 그녀가 계산한 의도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웃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주택의 출입구는 굳게 잠겼고, 보모는 제 시간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실비아는 그렇게 마침내 죽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실패한 성공이었다. 실비아의 자살은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 도움, 그녀의 도박을 지체시키거나 유혹하는 죽음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줄 사람이 없었다. 벨자, 에어리얼, 거상..., 나는 이 매혹적 죽음충동에 도사린 도약과 도주의 에너지들, 그 섬뜩한 쾌감에 한동안 잠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옴짝하지 않는다.

서리가 꽃이 된다.

 

이슬이 별이 된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누군가의 목숨이 끝났다. - 죽음 주식회사, Death & Co.,

 

자살의 역사적 배경자살과 문학등 시대가 자살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이 수용이 문학작품과 문인들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었는지, 아니 그들로부터 시대를 해독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살을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지적했듯 영웅주의를 위한 극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습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이후의 태도이다. 자살을 범죄시하던 오랜 종교적 억압의 역사 시간이 지나고, 신으로부터, 제도의 흉측한 속임수로부터 풀려남으로써 자살은 순수한 개인의 문제가 된 이후로부터 말이다.

 


이제 자살은 그것이 최종의 궁극적 행위로 실행되도록 하는 무수한 개별성을 보도록 한다. 고대 스토아학파의 합리적인 명예의 존중으로서의 자기 살해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거시적 현상으로서의 사회적 자살, 혹은 신의 명령을 부정한 범죄로서의 자살과 같은 공허하고 조작된 몰이해로서가 아니라 개인이 겪어야하는 고통의 무수한 형태들과 그것의 내적 모습들을 비로소 심연까지 들여다 볼 용기를 가진 것이다. 18세기 낭만주의를 거쳐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문학은 죽음(자살)을 그 자신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살자로 태어난 인간, 체사레 파베세, 능력의 과잉이 가져온 자존심을 파괴하는 세상에 대한 불가항력, 그 무기력에 좌절한 천재, 시인 체터턴 등 젊은 낭만파 영웅들의 때 이른 죽음에 내재된 죄의식과 상실감, 절망감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보게 되고, 돌연한 운명적 전환의 급경사로 치닫는 시인들에게서 나는 오히려 삶에 대한 고유의 가치를 더욱 확인하게 된다.

 

아마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 궁극적 의미도, 그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도 없는 부조리라 말한 삶이야 말로 역설적으로 그것 자체로 향유되어야 함, 그것으로서 말이다. 생이란 아무도 거절해서는 안 되는 선물이다.”는 이 선언적 문장이 의미하는 것일 게다. 실비아의 자기 살해 시도는 아마 사는 동안 한 번도 얻지 못했던 평정과 통제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비아의 죽음은 타임의 대대적인 애도, 즉 영웅주의 극장으로 만듦으로써 그녀의 시와 죽음을 호도했지만, 어쨌거나 위대한 영감의 시인을 오늘에도 우리들이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는 문학과 시대가 자살의 금기로부터 해방되는 19세기에 이르자 성적 금기가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죽음)은 낭만주의 전성기를 거치며 대중에게 심어놓은 내성 탓에 예술의 구조 일부가 되어 문학의 본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 있지 않을 때면 

삶의 총체가 줄어든다.”   -82, 프로이트, 쾌락원리 너머

 

아마 문학이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복수(複數)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동일시했던 주인공과 함께 죽지만, 여전히 살아있음으로서 안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나는 삶이라는 것의 빈약성을 한 차례도 불신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가 지적하듯 죽음충동은 불행보다 더 많은 기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삶에 의존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삶의 비탄 그 자체를 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매일 수천에서 수만 명이 이 세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자살로 인한 사망자의 통계적 수치는 해당 공동체의 인간에 대한 관심의 지표로서 얼마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개별 인간의 자발적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인의 요절을 천재성으로 우상화하거나, 유명 정치인, 연예인의 죽음에 사회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도덕을 치장한 헛소리들로 짖어대지만 결코 그렇게 재단 될 수 없는 것일 게다.

 

자살에 내성을 가진 오늘의 우리들은 품위있는 놀이의 하나거나, 도피, 도주의 단순한 막다른 길 정도로 인식하는 게 고작이다. 자살은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사후적 삶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삶의 위대한 위로자로서 말이다. 숙명적 사멸, 이 부조리에 정면 대결하려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시도를 위한 극렬한 몸짓,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작업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저술은 실비아 플라스를 위한, 자신이 지닌 죽음과 취약함을 다름 아닌 자신에게 투여해 시험한 예술가들을 위한 진혹곡(Requie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자살의 역사와 예술사이며, 정신분석과 사회문화사의 통섭(統攝)을 통한 죽음과의 화해를 위한 치열한 예술론이기도 할 것이다. 유명한 자살의 주인공이 있는 문학작품들, 젊은 베르터의 고뇌, 악령을 비롯해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은 무수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모두의 죽음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언어, 끝까지 밀어붙인 불가능한 언어, 죽어서야 할 수 있는 사후의 언어로써 생의 간절함 그것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만의 집
전경린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좌절하고 받아들이면서 알게 되지,

그런데도 사람이란 또 끝까지 제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고.” -240쪽에서


나는 성숙(成熟)’이라는 단어를 이 소설을 통해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단지 몸과 마음이 자라나 어른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감에 따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수용하며 어떤 성장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게 마음에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는 것으로서의 어디에도 메인 데 없는 선선함, 자유로움으로 이행, 즉 잘 익음, 여무는 것 말이다.

 

스물한 살 딸 호은과 마흔 다섯 살 엄마 윤선의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삶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감에 따라 나는 이들에게서 온갖 삶의 곡절들을 거치며 그것을 자기만의 과실로 잘 영글게 한 레몬이 바로 작가가 전하고자한 삶의 태도로서 성숙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어빠진 맛 속에 살짝 느껴지는 달콤함을 지닌 잘 익은 레몬, 그 성숙의 결실, 우스개 말이지만 통풍으로 고생했기에 나는 치료제로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이제 레몬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If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 278쪽에서

 

작가는 생이 시어빠진 레몬을 주지만, 레모네이드를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큼한 레몬이야말로 바로 우리네 삶의 정체 그것이라 여겨진다. 소설은 그 레몬에서 착즙을 해서 내린 세속적 삶의 모습들, 생계를 위해 고생하고, 사람들과 만나며, 사랑하고, 집안을 닦고 쓸고, 빨래하고, 때론 좌절과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실의에 빠져 생의 의욕을 상실하기도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분투들이 바로 삶의 경건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호은의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아빠는 5.18 민주화운동 세대다. 80년대를 살았던 청년, 역사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던 존재지만, 세상의 가치는 변해간다.

 

고집스레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살기로 한 남자다. 가난하지만 간결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현실이라는 실재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끝없는 이사와 취업과 실직의 반복, 호은의 아빠는 가족의 복지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결코 그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경찰에 쫓기다 피해 숨어들어간 문 열린 미술학원에서 마주했던 미술대 학생과 청년은 그렇게 사랑하고 호은을 낳았다.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닌 까닭에 두 사람은 세상의 변화라는 시간 속에서 함께 보았던 동질성이 무화(無化)되고 타인이 되어버렸다. 상실의 아픔이란 바로 이 세상의 허약함과 근거없는 변덕스러움이란 말일 게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학 초년생인 호은에게 아빠는 재혼한 여자의 아이, 열다섯 살 승지를 떠맡기고는 이유도 대지 않고 사라진다. 이 난데없는 당혹스러움은 곧 엄마의 집으로 발길을 향하게 한다. 엄마 윤선의 난감함, 이 납득키 어려운 의외적 사건은 아빠의 행적을 찾는 세 여자의 동행으로 이어지고, 그 수소문의 여정에서 승지와 투병 끝에 사망한 승지 엄마, 아빠의 친구들을 통해 세 여자를 둘러쌌던 과거의 시간들, 그네들의 삶의 모습들을 비춘다. 그것은 저마다 파괴되면서 지킬 만큼 소중한 것이 있는 삶의 형상들이다. 이혼한 남편의 동선이 추적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의 확인 후, 윤선은 승지를 떠안는다.

 

윤선이 호은에게 들려주는 꿈의 이야기, 100년 동안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변주된 이야기는 마치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인식 속에서 돌연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에 이른 어느 선승의 대오(大悟)처럼 보인다. 윤선은 호은에게 말한다. 세속적 조건에서 살기 위한 온갖 노력의 경건함, 자신의 꿈이 선택한 삶 속에서의 깨어있는 세속성, 존재하는 그 자체의 따름에서 오는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를 말한다. 잠의 넝쿨을 스스로 칼날이 되어 백년의 잠을 깨우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 변형된 깨우침은 그녀가 승지를 받아들이고, 세상의 엄마로서, 그리고 여자의 여린 껍질 속 단단하게 빛나는 광채를 지닌 성숙한 인간의 변신을 보여준다.

 

이렇게 쓰다 보니, 사실 스물한 살 호은의 삶을 위한 두 어른들인 엄마 윤선과 아빠가 살아 온 그 시큼한 오랜 환상과 실재의 상호교환의 수용과 의지에 대한 가슴 뭉클한 사랑의 목소리들이었다는 이해에 이르게 된다. 오직 단 둘이 발사체가 되어 달을 향해 우주로 날아가는 연인들의 사랑이 지구로 귀환하며 각자 낙하산을 타고 따로 도착하며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진짜 아픈 상실에 대한 엄마의 우화적 이야기, 파괴되어야만 했던 이상적 세계의 믿음을 돌고 돌아 욕망이 멈추는 공존과 공유의 선 위에서 좋은 삶의 가능성을 찾아야 함을 역설하는 아빠의 말처럼 생이란 파괴 속에서 지킬만큼 소중한 것을 지니는 것임을. 또한 바로 거기엔 삶을 걸고 지켰더라면 아름다웠을 진실이 있음을.

 

나는 이 소설에서 만나리라 예상치 못했던 삶의 역사에 대한 오랜 사유로 농축된 진실의 목소리들을 발견한다. 자기만의 집, 그것은 가난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가는 것이었고, 밤낮없이 일하게 하는 목적, 즉 생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줄곧 이 집에 대한 마음에 갇혀 살았던 기분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할 것이다. 마음속에서만 갇혀 살았던 곳으로부터의 벗어남, 비로소 문 밖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역설로서의 집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에 대한 모든 부정들이 걷혀 놓쳐버렸던 진실들, 무지와 오해 속에서 살아가던 그 꿈속에서 깨어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모습을 비로소 보게 하는 그런 집일 것이다.

 

사랑과 시절의 역사와 생의 비애와 인간관계의 곡절, 세상이 지닌 그 허약하고 변덕스러운 가치들 속에서 비록 좌절하고 비애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이 삶이고, 삶의 경건한 노력이며, 소중한 자기 의지의 확인임을 인식할 줄 아는 선일 것이다. 시큼한 생의 형태들이 아름답고 충만한 이야기에 담겨 사유가 풍성한 삶의 길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열다섯 살 승지가 쓰는 삼인칭 관찰자 시점의 일기, 지금 내가 어떤 꼴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마 명료한 반영은 어쩌면 바로 이 소설이 발하는 생의 진실보기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작품을 모두 읽고나면 응어리졌던 그 무엇이 해소된 듯한 정화된 느낌이다. 그래 이 작품을 '인생소설'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rest is silence. (今歸于黙),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

 

21세기는 어쩌면 인류의 오랜 진애(塵埃)를 떨어내고, 평상(平常)하고 무심(無心)한 깨달음이 요구되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한국사회도 이제 묵고 낡아빠져 부패한 것들, 죽음 충동, 짙게 드리웠던 그 어두운 그림자를 떨치고 새로운 도약으로 바야흐로 나아가는 삶의 지대에 이르게 된 것 같다. 대체 그 깨달음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한국인의 모습을 위해, 어떤 결여도 없는 유정(有情)의 여여(如如)함에 내재된 무궁한 잠재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음이라. 불교의 대표 공안(公案)집인 벽암록은 승방(僧房)에 좌선하는 선승(禪僧)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고, 그 에너지를 삶으로 전환코자하는 각고(刻苦)의 분투이다. 도올은 그만의 생각으로 풀어 벽암록을 오늘, 이 시대의 사유거리로 현재화했다. 그것은 곧 세계에 대한 인식과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위의 문장은 결투 끝에 죽어가는 햄릿의 마지막 한마디다. 이 말이 뭐 어쨌다는 것인가. 만일 이 말의 속뜻을 헤아린다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또는 희곡작품에 대한 불경(不敬)을 저지르는 것이라도 될까? 도올은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하나의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과제로 제기되는 언행이고 문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내가 실재하고 세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전제한다. 혜능(慧能)은 누구인가. 선종(禪宗)의 씨앗을 뿌린, 하나의 문명에 깨달음이라는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킨 진정한 창시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六祖 혜능(慧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올은 아마 삶의 차별이 해소되는 무차별인 죽음, 열반(涅槃), 삶의 근원적 충동으로서 내면화된 열반에 대한 대오(大悟)와 대각(大覺)을 햄릿으로부터 발견했던 모양이다. 정말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주절거리던 “To be or not to be, this is the question;” 이 햄릿의 실존적 결단의 우유부단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멜로 드라마적 비극의 원천인 건가?

 

도올은 접속사 ‘or'을 결단의 모멘트로 해석하는 순간, 한 영혼을 지배하는 독백의 외침을 듣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삶의 현존의 한 순간에 밀어 닥치는 모든 'or'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즉 존재와 비존재가 초월되는 그 무엇으로서의 해탈일 수밖에 없다고. 햄릿 자신이 죽든 말든, 그의 문제의식은 죽느냐 마느냐하는 실존적 결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의 독백은 죽음과 삶의 선택이 강요되는 독백이 아니라, 죽든 살든 그 선택이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무의미성에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차별에서 오는 희비(喜悲)의 연속이고, 삶 속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까닭에, 그 근원적 충동으로서의 열반이요, 대각이라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일체감을 보았기 때문일까? 햄릿의 독백이 과연 결단의 망설임에 방황하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요, 열반인 삶의 완성에 대한 심원한 목소리였을까?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어 萬古長空, 一朝風月.”과 하이쿠 한 구절이 인용되고 있는데, 만고의 변함없는 스페이스(Space), 그 무차별한 시공(時空), 그런가하면 한 아침 바람에 지는 달이 있다. 무차별과 차별, 영원과 한 순간, 깨달음의 계기는 이 만고장공에 그려지는 일조의 풍월이 있음에 우리의 직관적 총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적막한 옛 못/ 개구리 날라드네. / 물소리 퐁 당”, 적막한 옛 못 위에 던져지는 그 삶의 계기인 퐁 당이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근원인 열반의 의미인 것인가?

 

삶과 죽음의 이중주가 있는 바로 여기, 우리는 열반이 삶의 완성이라 되뇌지만 불현 듯 밀려오는 공포의 아이러니가 분별심을 자아내고, 그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 우리는 삶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햄릿은, 선의 깨달음은 죽음이라는 해탈 그 자체가 해탈되는 곳에 구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었다는 것이다. 열반을 두려워 한 겁쟁이, 이러한 자들이 득시글댈 때 세계는 어둠에 묻힌다. 무장한 계엄군에 맞서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분별을 초월한 해탈의 한 형태를 보았다. 죽음의 충동에 맞선 해탈이 곧 이들 시민이지 않을까?

 


선불교의 대표적 공안집인 벽암록에 대한 부분적 해설인 이 책을 비롯하여 무문관과 같은 선문답의 해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을 듣곤 한다. 즉 선()의 굳건한 주장이 언설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이거늘, 그 수시(垂示)에 개념의 실체화를 도모하는 행위는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선지는 모르겠으나, 시중 대부분의 역서(譯書)들이 단순 문자번역이거나 어의의 해설일 뿐, 그 내면적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배면의 깊은 뜻을 언어화하지 못하면 그 번역(해석)의 정당성도 검증할 길이 없다.” 는 도올의 지적처럼, 벽암록이 합리적 언어의 질서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이유만으로 언어의 궁극에 부닥쳐 자기의 깨달은 바를 여여하고 소박하게 진솔한 마음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불립문자 뒤에 숨어 기만적 언행을 일삼으며 무식함을 영구히 나르는 무식의 항구화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벽암록의 초합리(超合理)는 비합리(非合理)가 아니다. 선계(禪界)를 지배하는 병폐는 초합리를 합리의 벼랑길에서 밝히지 아니하고 또다시 무지의 기만 속으로 얼버무리고만 있다는 지적에 나는 동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자기 해석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한 방편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내 오류나 무지를 걷어내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말이다.

 

벽암록에는 이와 유사한 논쟁의 수시가 있다. 조주스님과 그의 제자 무리의 한 승려가 나누는 대화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재유언어 시간택? 노승부재명백리, 시여환호석야무? (至道無難, 唯嫌揀擇, 纔有語言, 是揀擇? 老僧不在明白裏, 是汝還護惜也無?)

時有僧問: 기부재명백리, 호석개집마? (旣不在明白裏, 護惜箇什麽?)

州云: 아역부지 (我亦不知.)

僧云: 화상개부지, 위집마각도부재명백리 (和尙旣不知, 爲什麽卻道不在明白裏?)

州云: 문사기득, 예배료퇴 (問事旣得, 禮拜了退)

 

조주는 말한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선택적 판단을 싫어할 뿐이다. 선택적 판단에 떨어지지 않으면 명명백백한 절대경지에 가게 된다. 그런데 이 늙은이 조주는 말이야, 그 명명백백한 절대경지에도 있지 않단 말이야. 그런데 그대들은 아직도 그 절대경지를 구하고 있지 않는가? 이때 한 스님이 일어나 묻는다. 절대경지에도 있지 않다면 구할 대상조차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저희들이 뭘 구하겠습니까? 조주는 말한다. 나도 몰라. 스님께서 나도 몰라 하신다면, 왜 명명백백한 절대경지도 있지 않다고 아는 체 하셨습니까? 다 물었냐? 그럼 이제 절하고 가봐. (본문 번역 인용)

 

이 공안을 어떻게 풀까? 평행선을 달리는 이 공안, 즉 논리와 분별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조주와 논리의 철저성을 추구하고 무분별을 거부하는 문승(問僧)이 있다. 왜 이 공안을 풀어 설명하는 책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이 피 튀기는 논쟁의 문제, 논리적 맥락의 도움을 받는 것이 왜 안 된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길을 안내 받는 것이 왜 선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인가? 진리에 대한 준열함을 엿보는 것이 진정 깨달음을 훼손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주의 말뜻은 나는 그걸 바로 알았단 말이야.’ 명백(明白)이란 인간의 상대적 집착이고, 그것은 상대가 모두 멸절되어버린 절대적 경계를 말하는 것임을. 조주는 이 절대적 경계마저 부정했던 것이다. 우리네 삶이란 직관의 총체다. 궁극적으로 무언가 알아들어 먹으려면 스스로 여우굴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들어갔다 나와도 될까말까 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직관 속에서 깨달아야 함이다. 그걸 한마디로 말하라고? 거저 먹으려구, 그렇게 되면 얼마나 손쉽겠나. 오로지 스스로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한국인들은 이제 조금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법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았을 터이다. 작금의 이 불의한 장애적 사건이 어떤 깨달음의 시간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이 책은 해석을 거부하는 수전 손택을 거부한다. 어찌 주관성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인간 개체는 누구하나 같지 아니하다. 다만 그러함에도 우리가 지향하는 길을 찾음에 있어 그 방편의 안내는 불가피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가능했겠는가. 혜능이 비록 의법상전(依法相傳)의 법통을 깨부수고 적통의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선을 우뚝 세웠지만, 그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禪師의 가르침을 전승(傳承)하지 않았던가? 그 전승이 바로 해석이지 아니한가?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가장 숭배하는 언어 呵佛罵組(가불매조)’에 가닿는다. 깨달음의 우열을 말하고, 법랍의 서열을 말하고, 큰 스님을 말하고, 조실(祖室)을 말하고, 방장의 권위를 말하는, 본체는 전하려 하지 않고 의발(衣鉢)만을 전하려 하는 편협과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의 언어다. 이것이 우리사회 전반에 흐르는 필히 뒤엎어야 할 근원적 부조리다. 선생의 권위에 머무르며, 제자의 지식을 억압하고, 빼앗으며, 체하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말이다. 소위 갑질이 여전하다. 윤의 사태도 이 갑질의 뿌리인 권위주의에 기인한 일제의 뿌리깊은 잔재일 것이다. 이제 온 분야에서 걷어내야 할 터이다.

 

벽암록1에서 5에 이르는 덕산과 암두, 황벽과 임제의 일화들은 스승과 제자의 배움의 여정에 있어 서로의 기지를 뛰어넘으려 경쟁하는 격렬한 치고받음을, 그 스스럼없는 평등의 현장을 보여준다. 배움과 깨달음의 격정적 현장이 바로 선종의 극성(極盛)기였음은 아마 진정견해(眞正見解), 무사지인(無事之人)의 생생한 증거일 것이다. 제발 뭘 한다고 꾸미고 으스대고 폼 잡지 말라. 그저 평상한대로 있으시오.(但莫造作, 祇是平常.)” 平常無事! 오늘 우리사회, 정치, 교육의 꼬락서니를 보면 납승(衲僧)의 다반사(茶飯事)에도 못 미치는 연놈들로 무성하지 아니한가? 마치 제가 제일 잘난 연놈처럼 구는 모습에서 부패의 냄새가 진동한다. 짐짓 자신을 뽐내려는 의지로 달마에게 如何是聖諦第一義?(최고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오?)”는 설익은 양무제(梁武帝)처럼 말이다.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었는데 뭐가 성스러워?, 영혼과 신의 합일을 논구할 바탕조차 없는 것일 진데, 뭐 말라빠진 이냐! 라는 말은 경건조차 없을 때, 비로소 절대, 경건이 우뚝 솟게 된다는 얘기다. 정신과 진리의 정체로서 당당히 대결하고, 그러한 존재로서 만날 때, 아마도 이 세상은 조금은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가 될 게다. 절단중류(截斷衆流)”, 사고의 뭇 흐름이 자유로워야 한다. 역순, 종횡, 여탈로부터의 해방, 그래야 비로소 사유의 세계는 비상한다.

 

이제 이 땅을 잠식해 온 썩은 뿌리들을 도려내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찬 발돋움을 도모 할 때에 이르렀다. 깨달음이란 저 심오한 열반과 해탈의 지향이 아니다. 삶의 방편에 대한 올바른 스스로의 각성,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다. 심오한 문장 하나, 기발한 문구하나, 신선한 문제 제기 하나 얻어, 선종의 공안에 펼쳐진 이야기 하나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닐 것이다. 책을 통해 자기만의 작은 깨달음 하나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이 책은 삶의 지혜에 대한 또 하나의 올곧은 전승(傳承)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올선생의 구극(究極)적 탐구자세는 물샐 틈 없는 면밀함이고, 이에 기초한 자유로운 신랄함이다. 내 생활이 갑갑하게 느껴지고, 흐트러져 난삽(難澁)함에 휩싸일 때면, 어떤 말끔하게 씻어낼 지혜의 목소리를 갈구하게 된다. 그럴 때면 도올 김용옥선생의 침묵함으로써 침묵하지 아니하는 金剛經講解하는 이 책은 최고의 시(), 평온한 노래소리가 되어준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트라(sutra)로써, 소박한 붓다 설법의 기술(記述)이다. 도올선생이 표현하듯 고졸(古拙)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으며,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요, 한 편의 이다. 시중의 수많은 번역서들에는 엄청난 현학적 주석과 더불어 현란한 해석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걸어 잠그게 한다. 굳이 그러한 헛소리들을 금강경에 들이 댈 필요가 있을까? 있는 그대로, 문자가 표현하는 그 자체의 의미를 새기며, 암송하면 절로 마음에 새겨질 것을.

 

이 책은 정확히 고려제국대장도감판(高麗帝國大藏都監版)’, 즉 해인사 장경각 고려대장경본을 유일하게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金剛經)이다. 본디 금강경의 한역본(漢譯本)鳩摩羅什(구마라집,kumarajiva), 보뎨류지, 진체, 급다, 현장, 의정이 각기 번역한 六種이 있으며, 한글번역본은 모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역본(譯本)이다. 그런데, 구마라집의 定本이 바로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본임에도 이를 사용하는 한글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놀라울 일이다.

 

일어판본은 고려대장경을 베껴 만든 대정대장경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근본도 없는 판본들의 번역이 난무하는 것이다. 대정대장경고려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만들다보니 오식(誤植)으로 인한 오자나 탈자가 있다. 이것을 그대로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실상은 가히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한글 판본에 대한 비난은 그치기로 하고, 금강경이 한 인간의 현존을 위무하는 읽기가 되었는가를 말하여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내 반골기질에 맞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일체의 교화(敎化)불교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매우 급진적인 토착운동으로서 일종의 반()불교운동이었기에 정서가 일치하였던 것일 게다. 교리도 계행도 필요치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키는 통찰의 설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무릇 모든 종교가 궁구했던 통찰을 말하고 있는 까닭이기에 그 슬기로운 공존, 이념간의 배타성을 아우르는 진리의 목소리로 다가왔던 까닭이기도 하다. 금강경은 아직 대승(大乘)과 소승(小乘)불교로 구분하기 이전의 초기 경전이지만, 소승불교인 부파불교의 차별주의를 냉혹하게 비판하는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들어가는 글과 금강경에 이해를 돕는 도올 선생의 목소리가 100쪽에 걸쳐 기술되고 있는데. 대체 대승은 무엇이고, 보살이란 무엇인지, 한국 불교와 기독교의 현재의 실상이 대체 왜 이 상태인지, 금강경의 金剛은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가 이 경전에서 읽게 될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현재적 신랄한 비평적 시선은 가히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金剛은 범본(梵本, 고대 인도어), ‘vajra(바즈라,跋折羅)’를 번역한 것으로 원래 의미는 벼락이다. 그리고 그 일차적 의미는 능단(能斷,자른다)으로, 청천벽력처럼 내리치는 지혜를 뜻한다.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벼락은 어디에 내리쳐야 하는 것일까? 바로 내 머리통을 내리쳐야 하기에 나는 이 경전을 읽는 것이다. 각성이 흐려져 흐릿하게 더럽혀져 사리분별을 망각하는 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벼락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의 고리에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떨어져, ‘(我相)’無化되고 空化되어 나가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고, 집착이라는 고리도 존재할 자리가 잃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리를 제아무리 끊어봐야 가 여전히 존재하며, 대상이란 실체도 엄존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금강경無我의 경전이다! 나라고 하는 고집스레 자신을 주장하는 환멸의 실체, 그 환상을 떨쳐낸, 홀가분한 무심의 경지가 그리워졌기에 그런 것일 테다. 하찮은 것들이 나를 내세우며 꼴값을 얼마나 떨어대는 세상인가! 그 흉물스러움이란.

 


백담사 오현(五鉉) 큰 스님이 도올 선생에게 들려주던 일화는 금강경경전 본문을 읽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전해준다. 오현스님이 아직은 어린 사미승이었던 시절이니 한국사회가 전란으로 고통스러웠던, 끼니 해결조차 어려웠던 시절의 애기일 것이다. 배고픈 사미승은 밥동냥을 하러 다니곤 했는데, 문둥이들이 밥을 잘 얻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문둥이를 빨리 내치기 위해 사람들은 얼른 찬밥을 내주었던 모양이다. 사미승 오현은 그날부터 문둥이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문둥이들의 거적지에서 함께 껴안고 자고 뒹굴었다.

 

문둥이는 요놈 사미승, 맛좀 봐라! 너 정말 문둥이 될래?” 하고 정말 오현을 문둥이로 만들 생각까지 하였지만, 문득 사미승이 분별심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던 게다. 어느 날, 훌륭한 스님이 될 터이니 성불(成佛)하거라!”하는 작은 쪽지를 하나 남기고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미승 오현은 깨달았다. 아하! 부처님이 문둥이구나!”, 이보다 수월하게 無我를 인식하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이 일화에는 보살(菩薩)과 대승(大乘)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는 열 마디 여래(如來)의 경전보다 더 깊숙이 마음을 채운다. 한하운 스님의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의 한 구절은 아상(我相)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운 시경을 체득케 한다. 버드나무 밑에서 / 찌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 또 한 개 없다.”, 문둥이는 그렇게 시시각각 내가 떨어져나감을 깨닫는다. 날로날로 아상이 없어져가는 문둥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을. 체험의 종교, 실천의 종교를 생각토록 한다.

 

나는 예배당에도 절간에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십계명을 외우고, 반야심경의 진송을 외우며, 성경을 읽고, 반야경을 읽는다. 나는 신을 섬기지 않으며, 극락이나 천당과 지옥을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를 가지며, 그것을 일구고 수행하려 애쓴다. 나는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며,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 특권의식을 거부한다. 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적 해결,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 선언하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된, 또한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된,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된 저 무명(無明)의 엉터리 종교인들을 증오한다. 제도와 권력과 돈, 그 우상들을 쫓는 종교 아닌 종교를 신앙한다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나는 이러한 종교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종교적인 인간이 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인류가 그토록 많은 지식을 축적했음에도 여전히 지혜를 지니는데 실패하였음을 지적하였듯, 사랑과 베품, 삶의 도덕성과 규율성, 종교적 삶의 정진, 참음과 용서, 삶의 가치에서의 우선적 덕목을 그렇게 노래하였지만, 결코 지혜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이 세계의 불완전성에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며, 종말적 위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바로 이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기에 나는 또 읽고 외우며, 노래하려 한다. 자기를 비우고 배움을 청하는 2000년 전 인류 최초의 불교 가람인 기원정사(祗圓精舍)의 대지에 오른 쪽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경하는 장노(長老) 수보리(須菩提)의 아름다운 겸허의 예법에서 비움과 我相의 철폐를 목격한다.

 

, 長老須菩提, 在從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이때, 장노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先賢起請分 第二. 2-1

 

사실 너절하게 그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服其心? (2-3.)”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 애처로운 물음을 하는 수보리(須菩提)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진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anuttarā samyaksambodhi’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의미한다.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 구조를 문의(問義)하는 이 문장에 한동안 머물렀다. 욕망의 항복을 위해 반복해서 암송해본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如來者, 無所從來, 亦无所去, 故名如來.”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29-2

(여래는 어디서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디서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우리 아름다운 삶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는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흘러간 대중가요의 그 가사가 존재의 취산(聚散), 합리(合離)를 지극히 생활에 스며있는 지혜로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마 노래를 부르던 그 가수는 환()의 가능성에 지배된 자신을 체득했던 게 틀림없었을 것이다. 철저한 인식론적 반성 위에서 그는 세계를 논구했던 것일 게다.

 

뿌커수어 뿌커쓰이! (不可說, 不可思議)’, 모든 것을 말하려 들지 말라. 말 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우주요 인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침묵하라는 말과 겹친다. 금강경은 이렇게 맺는다. 不取於相, 如如不動.” 상을 취하려 하지 말라, 여여하게, 부동하게(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왜 그러 하냐구?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기 때문이라네.

 

모든 사람들, 인류에게 바쳐지는 헌시(獻詩)금강경을 나는 노래처럼 반복해서 외워본다. 도올 선생이 제시하듯, 간결한 주제의 반복이자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기에, 그 향기 속에 취해 그 위력을 체감하기 위해 거듭 읽듯 노래한다. 유교(儒敎)의 극성을 과시하던 세종이 만년에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여 유교적 합리주의에 노출된 정신의 한계를 위무 받으려 했듯, 아마도 나 또한 번쇄(煩瑣)한 현실에서 잃어버린 현실 감각을 되돌려보려 안간힘을 쓰는 어떤 무의식이 이 책을 반복하여 읽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인간 구원의 이 혁명적 보살(菩薩)의 운동을 설파하는 금강경은 정말 한 번 온 이 삶에 잘 사는 방편을 헤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 되어 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