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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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와 인간의 반역

 

“새로운 가속된 진화 양식을 출범시켰다. 바로 비유전적 진화다. (...) 

삼차 진화 과정일 것이다. 기계 자신이 참여하는 과정이다. (...)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도 떨어져 나갈까?” 

 - P594, 「50주년 기념판 에필로그」에서

 

모든 학문 분과의 연구목적이란 무엇일까? 인류라는 종(種)의 인간상(像)이 바로 현재의 양태로 존재하는 원인과 그 원인이 야기하는 상태의 진실, 나아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과 우주의 그러함 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인간자신과 그 세계의 무수한 현상들과 미래상을 그려보고자 하는 실체적 유익(有益)일 것이다. 물론 좋은(nice) 무엇에 대한 지향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일 모든 인간학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르지 않다면 자연선택의 기준 단위가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라고 선언하는 이 위대한 진화론의 한 관점 또한 인간의 이해와 가능성 높은 인간 미래상의 이해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진화이론의 한 관점으로 여타 관점을 압도하려는 유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그 세계가 왜 그렇게 형성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진실을 추정하고 해석,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인간 개체들과 그 집단이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든다섯 살이 된 노학자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저술이 50년이 되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진화론과 유전학 분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가운데 어제의 관점이 시대에 뒤떨어져 그 진실성을 잃고 철회, 폐기되기 일쑤임에도 이 저술은 “당장 사과하거나 철회할 것이 없다”고, 나아가 앞으로 50년 뒤(2076년)에도 여전히 통용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탄탄한 이론적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저술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략 30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때의 관심은 아직 인간과 인간사회의 형상 이유와 같은 본질적 사안에 미치지 못하고 ‘이기적’이라는 인격적 형용이 붙은 유전자 명명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V.C 윈-에드워즈의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대립하는 새로운 관점을 알고자 하는 순전히 지식에 대한 욕구였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지금, 이 저술은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현실적 앎의 이해로 읽게 되었다. 또한 새롭게 시선에 들어 온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반역 가능성의 물음’이 AI로 인한 당면 문제들과 어울려 낯선 긴장을 몰고 왔다.

 

1. 유전자의 생존 논리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단순히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생물학적 명제로만 읽는다면, 이 책이 던지는 사유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게 된다. 오히려 이 책의 급진성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는 데 있다. 개체가 유전자를 위해 존재하는가, 유전자가 개체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단위를 유전자라는 복제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이타주의, 협력, 도덕, 문화, 나아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편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사회적 존재들은 서로 협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러한 익숙한 세계를 뒤집는다. 생명체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여 살아가는 주체라기보다, 훨씬 오래되고 안정적인 어떤 존재, 즉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라는 것이다. 몸은 유전자가 세대를 넘어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탈것이며, 뇌와 행동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돕도록 형성되어 왔다.

 

이 주장은 인간을 모욕하기 위한 선언이라기보다 자연선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에 가깝다. 도킨스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반드시 개체나 집단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G. C. 윌리엄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그는 장기간 존속하면서 복제될 수 있는 안정된 단위, 즉 유전자를 선택의 핵심 단위로 본다. 복제자는 장수하고, 많이 복제하며, 높은 정확도로 자신을 복제할수록 유리하다. 그러나 완벽한 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류가 발생하고 변이가 생긴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완전성이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는 완벽한 자기복제의 역사가 아니라, 복제와 오류와 선택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특정한 복제자가 다른 복제자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온 역사인 셈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신체에 대한 시선도 달라진다. 몸은 더 이상 생명의 궁극적 주체가 아니다. 몸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된 구조이며, 유전자는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면서 훨씬 긴 시간 동안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복제자며 우리는 생존기계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섬뜩하다.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체의 생애는 장구한 복제 과정 속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다. 개체는 탄생하고 늙고 죽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건너뛰며 살아남는다. 도킨스가 유전자를 ‘불멸자’에 가까운 존재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의식적인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우선 심리적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행동의 효과에 관한 개념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은 행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이타적이다. 일벌이 침을 쏘고 죽는 행동이나 포식자를 둥지에서 멀리 유인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새의 행동이 그러하다. 표면적으로는 자기희생이지만, 그 행동이 자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유전자의 사본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면 유전자 수준에서는 오히려 이기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 지점에서 도킨스는 ‘종의 보존’을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처럼 설명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이타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집단선택설은, 그 집단 안에 단 한 명의 배신자가 들어오는 순간 흔들릴 수 있다. 다른 구성원들이 희생하는 동안 그 희생의 혜택을 자신만 취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면, 자연선택은 그 배신자의 형질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다. 순수한 이타주의 집단은 내부의 이기적 개체에 의해 쉽게 잠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이 곧바로 진화의 원리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2. 이타주의와 협력의 역설 : ESS(진화적 안정 전략)

 

오히려 도킨스가 보여주는 것은 더욱 기묘하다. 이기주의는 때때로 이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타인을 돕는 행동이 자신의 유전적 이익과 일치할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의 놀라운 자기희생도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일벌은 자신의 자식을 직접 남기지 않으면서도 형제자매를 돌봄으로써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겉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집단이 아니라 유전적 복제의 지속이 중심에 있다.

 

그렇다고 도킨스가 인간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려고 애쓰자”고 말한다. 생물학적 본성이 곧 윤리적 명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이 이기적 복제자의 확산을 설명한다고 해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설명과 규범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오히려 인간의 과제는 자연적 경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거슬러 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개체들이 서로 공격하고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인 공격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비용이 따르고, 상대의 반격으로 자신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공격하라. 달아나면 뒤쫓아라. 반격한다면 달아나라”와 같은 조건부 전략이 특정 환경에서는 안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액설로드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서 등장하는 '팃포탯(Tit for Tat)'은 첫 번째에는 협력하고 이후에는 상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선행이나 무조건적인 배신과 다르다. 먼저 배신하지 않지만 배신을 용인하지 않고,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용서한다.

 

여기서 인간의 도덕은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협력은 반드시 순수한 선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 기대, 반복되는 관계, 상호 보상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때 협력은 이기적인 개체들 사이에서도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도킨스의 세계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다. 이기적 복제자의 논리 속에서도 협력과 신뢰가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협력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기꾼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사기꾼과 호구’, ‘갚는 자’의 관계가 보여주듯 이타적 체계는 언제든 착취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도덕적 교육이 필요하다.

 

3. 밈(Meme)이라는 새로운 복제자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사유가 가장 멀리 나아가는 지점은 문화 전달 단위인 밈(meme)의 등장이다. 유전자만이 유일한 복제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 개념, 사상, 표어, 유행, 예술적 형식과 같은 문화적 단위 역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고 복제된다. 이때 뇌는 밈의 탈것이 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면 밈은 인간의 기억과 언어와 문화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

 

이 발상은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마저 흔든다. 한 인간의 유전자는 세대를 거치면서 희석되고 결국 개별적인 ‘나’의 유전적 흔적은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나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는 흩어졌지만 그의 사상과 이름은 여전히 문화 속에서 복제되고 있다. 『시학』이나 『국가』 역시 그것을 쓴 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간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이 만든 복제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다시 두려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유전자 기계에서 벗어나 밈 기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복제자의 숙주가 된 것인가. 도킨스는 밈 역시 장수, 다산성, 복제 정확도라는 선택압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세계인 동시에 인간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는 또 다른 진화의 장(場)이 된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밈에 의해 배양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문화적 복제자에게 다시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된다.

 

4. 확장된 표현형

 

그리고 『확장된 표현형』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이 문제를 더욱 먼 곳까지 밀어붙인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더 이상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몸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버의 댐이나 새의 둥지처럼 몸 바깥에 만들어진 구조물 역시 특정 유전자의 생존에 기여한다면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기술과 인공지능도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AI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외부 세계에 확장시키는 도구라면, 그것 역시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AGI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도킨스의 마지막 질문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적 본성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체와 뇌를 넘어서는 새로운 복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에 이어 문화적 진화가 나타났다면, 이제 실리콘 기반의 인공물이 새로운 진화의 매개체가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도킨스가 말한 ‘비유전적 진화’가 단순한 문화적 은유를 넘어 기술적 현실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5. 결어 : 인간의 반역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 선택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도킨스의 사유를 단순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의 역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은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모사하고, 단기적인 생존 이익과 다른 장기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 능력이 도킨스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한 가능성이다. 자연의 역사에서는 이타주의가 언제나 유전자 수준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기적 유전자』의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 인간의 몸도 떨어져 나갈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로 읽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 만들어지고 밈 기계로 배양되지만 우리의 창조자들에게 맞설 힘을 갖고 있다”는 앞선 선언처럼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인간은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유전자를 사유할 수 있고, 밈의 운반자이지만 밈을 비판할 수 있으며, 기술의 창조자이면서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질문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유전자가 이기적인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자기복제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출발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을 거슬러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몸은 유전자의 탈것일 수 있다. 문화는 밈의 탈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AI 역시 새로운 복제와 진화의 탈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유전자의 독재에서 벗어난 인간이 다시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의식과 선견지명이라는 능력을 이용해 그 진화의 방향 자체를 질문할 것인가. 『이기적 유전자』가 오늘날에도 불편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진화생물학의 고전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명적, 철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걸작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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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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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는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함께 아베 고보의 1960년대 대표작 중 하나로 작가의 문학적 전성기를 보여주는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같이 정체성의 상실과 실존적 불안이라는 인간이라 믿고 있는 존재의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지위 등이 사실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판박이』는 이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화성인의 지구 침투’라는 본격적 SF적 발상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궤변과 논리적 말싸움(舌戰)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차별화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이 진정 ’나‘인가?”, 그리고 ’나를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증명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즉 이 작품은 두 작품이 말하는 실존적 불안의 변주를 뛰어넘어 인간을 하나의 논리적, 언어적 구성물로 해체해보는 실험실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궁극적으로 『인간 판박이』는 인간 정체성 상실의 소설을 더 깊이 파내려가 인간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증명의 체계’를 해체하는 소설이라고.

 

『타인의 얼굴』이 시각적 단절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하고 있다면 『모래의 여자』는 사회적 고립을 통해 묻고 있음에 비해, 『인간 판박이』는 지성마저 가짜일 수 있다는 가장 극단적 의심에 도달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그 원형을 1951년 발표된 그의 단편 「S. 카르마씨의 범죄」에서 발견한다. 소설의 주인공 S.카르마가 존재를 박탈당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며,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당하는 일련의 장면이 떠오른다. 즉 인간 정체성과 실존의 물음은 아베 고보가 일생 천착하던 중심 주제임을 새삼 확인케 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판박이』는 이러한 물음의 극단인 ’인간‘이란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심까지 제기하고 있기에)

 

S.카르마는 인간이 사회적 기호(이름, 명함, 얼굴 등)를 잃었을 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정체성 상실과 실존의 그 질긴 관계성을 묻는다. 사람으로서의 환대라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의 마련을 말하던 인류학자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의 목소리 중 한 측면에서 좀 더 밀어붙인, 다시 말해 사회적 승인보다 더 심층의 물음인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는 정말 자명한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즉 『인간 판박이』 에서는 외형만 인간인 화성인이 진짜 인간의 자리를 위협함으로써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붕괴시킴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존재 우위론의 허상을 박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라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정체성이란, 사회 시스템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자기 실존성을 인식하거나, 얼굴, 소위 외피(가죽)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서의 정체성에 불과하거나, 진짜와 모방의 경계나, 공통상식과 망상의 경계의 흐릿함을 들추어냄으로써 인간성 혹은 인간이란 것 자체에 대한 확신을 허물어뜨린다.

 

사실 우리들이 같은 종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아니 김현경의 말처럼 인간 상호간의 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이름인 ‘사람’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들의 현실 세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려는 고약한 규제 규칙들을 가지고 사람의 자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로써 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자유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언어에 씌워진 정체성이란 환상이거나 진짜 없는 짝퉁처럼 그 실체기반의 취약함, 그 조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소설 『인간 판박이』의 기묘한 핵심은 바로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존재의 논리로서, 평론 풍 사회극인 <안녕하세요 화성인>이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각본가인 주인공과의 논쟁이며, 그 핵심 질문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사실상 증명된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전제 위에 세워진 약속이라는 사실에 불과하고,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명제가 아니라 공리(公理), 즉 너무 당연하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화성인이 등장하면서 이 증명하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발생한다. 네가 화성인이라는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이 증명 책임에 인간이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얼굴』에서는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지만 『인간 판박이』에서는 얼굴이 너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의 얼굴』은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고 한결 쉽게 물을 수 있었지만, 『인간 판박이』는 완전히 같기에 얼굴만으로 인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지점에 도달한다. 즉 정체성이 얼굴의 상실에 의해서 흔들린 『타인의 얼굴』과 달리 완벽한 동일성이 정체성을 흔든다. 제목 『人間そっくり』, ‘인간과 똑같다.’ 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인간과 닮은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더욱 모호한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화성인은 주인공의 말을 반박하는 논쟁 상대라기보다 상대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정말의 사유를 촉구하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당신은 인간처럼 보인다.

그렇습니다. 인간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이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전제가 전제를 의심하는 무한회귀에 빠져드는 논리의 미로에 갇히고 만다. 자신이 믿고 있던 전제에 의심을 품게 됨으로써 인간이라 믿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임이 흔들리게 된다. 이 대화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까지 뒤집히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인간언어의 의미가 인간 사회의 약속이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제 소설은 그야말로 이들 대화 속에 작가의 말이 작품의 현실을 침범함으로써 인간 정체성을 다루는 SF를 초월하여 소설가와 이야기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화성인>을 쓰는 각본가에게 실제로 갑자기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옴으로써 화성인을 만들어내는 사람, 즉 허구를 만드는 사람에게 허구가 현실로 침입하고,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되어버린다.

 

소설을 읽고 있던 독자는 갑작스레 내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주인공이 쓴 이야기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베 고보가 쓴 것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주인공에게 쓰게 만든 이야기인가? 진정 이야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까지 건드리며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적 층위를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허구성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된다. 이 메타픽션의 층위는 인간 존재 증명의 문제와 뒤엉켜 존재자의 믿음에 근본적 구멍을 뚫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아베 고보가 장식처럼 도입한 위상수학(topology)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모양이 겉으로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보다 관계와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위상수학 기능의 하나이다. 도넛과 손잡이달린 컵이 모양은 다르지만 구멍이 하나라는 위상적 구조가 같기에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듯, 인간과 화성인의 외형이 같다면 둘은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과 화성인의 관계 구조가 같다면 둘을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정상인과 미친 사람, 현실과 허구,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도 위상적 관계처럼 변형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든다. 따라서 소설은 누가 진짜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어떤 관계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로 규정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즉 김현경의 절대 환대의 문제와 유사하게 회귀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인간 존재 증명의 물음에 휩싸여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심의 문제로부터 나는 오늘의 트랜스휴머니즘, 즉 인간 신체의 변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 찬양문제를 떠올렸다.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인간 존재의 최종적 경계로 보지 않고, 유전자 편집과 인공지능, 신체 증강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등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존재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현실적인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의 논의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새로운 종의 출현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판박이』가 오늘날의 포스트휴먼 사유와 만나는 더욱 근본적인 지점은 ‘새로운 인간’을 상상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묻는 데 있다. 소설 속 화성인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인간과 똑같이 말하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외형은 인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의 기억과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임을 보장한다면, 그것들이 인공적으로 복제되거나 변형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 판박이』는 포스트휴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증명해야 한다’는 역설을 앞당겨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이라는 기존의 종을 변형하여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하지만, 『인간 판박이』는 오히려 ‘기존의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 그렇게 명확하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오늘의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무지를 책망하는 듯하다. 이제 최근의 가장 첨예하고 날카로운 문제인 AI와 이미지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의 얼굴을 만들고, 언어를 생성하고, 문체를 모방하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대화한다면 이 인간처럼 보이는 AI는 인간과 다른가? 이 질문은 『인간 판박이』의 제목이자 물음과 정확하게 겹친다.

 

‘인간처럼 보이는 것(Human-like)’과 ‘인간(Human)’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에 따라 둘의 차이는 극히 모호해진다.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기억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오늘의 AI를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AI 시대의 존재론적 질문을 선취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베 고보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인간능력을 새로이 확장하는 방향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거의 대척에 놓여있는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개선하려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고 ‘인간’이라는 말을 먼저 의심한다. 아베 고보는 이렇듯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특별한 것으로 지정하기 위해 명명한 행위일 수 있다고 말이다.

 

자, 이제 소설의 물음을 돌고 돌아 ‘인간 판박이’가 ‘인간’에게 돌아온다. 화성인이 인간 판박이인가? 아니면 인간이 사실상 인간 판박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고 말이다. 즉 판박이가 화성인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속성이 되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고, 행동 양식을 배우고, 규범에 적응하며 인간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을 반복하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믿는 것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 소설 ‘人間そっくり’는 정말 무서운 의미로 와 닿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고 자신들이 정의한 것을 닮은 존재일 뿐이라는 역설로 뒤집혀 버린다. 인간이라고 믿었던 근거가 사회적 약속, 기억, 외모, 이름, 가족, 정상성, 언어, 이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작품 앞에서 그저 인간이라고 믿는 인간의 형식을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 판박이에 불과함에 당혹감과 그 불의하게 보이는 진술에 발끈할지도 모른다.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어쩌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인간윤리에 대한 다른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게 되는 이 위대하고 선취적인 논리의 미로를 거닐어보는 것은 당면한 오늘의 세계에 시의적인 독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인간의 언어라는 그 허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인간이란 범주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인간과 닮은 AI와 인간인 자신이 같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이 선구적 작품을 읽어보시라! 논리의 미로에서 허우적대다보면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의 그 허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허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이 위대한 논리게임과 위상학적 주제와 형식 속에서 우리들의 잘 난 인식론은 허물어질 것이다. 타자와 사회라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만 만들어질 뿐인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을 독자적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 증명의 체계로 세워들 보시라, 아베 고보의 인간 증명체계의 해체에 도전하시는 독자는 아마 AI의 도전에서도 승리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가을을 시작하는 멋진 독서가 되어 줄 걸작 중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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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최근 글로벌 AI기업 앤트로픽의 수장인 다리오 아모데이의 인간 이해와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AI의 재귀적 자기개선 기능에 대한 위험 경고는 공포로 가득했다. 기술 자본들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촉발된 가속화된 AI경쟁은 그 어떤 윤리적 물음조차 건너뛰었다. 그가 근심스럽게 외친 향후 10년 내 인류 종말 가능성은 아베 고보가 말하는 인간 증명에 대한 부실함과 불완전성에 기초한 자기 원인에 대한 무지의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류의 실존적 위험 앞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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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ㅣ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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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로비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희곡이건 소설이건 그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상과 신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는 1967년 인터뷰 《대화》에서 “나의 모든 이야기와 희곡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물이 하나씩 있는데, 그 인물을 감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듯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의 직접의 현신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는 곰브로비치의 희곡 작품 전체를 수록한 희곡집이다. 표제에 명기된 세 편의 작품 외에 희곡 《오페레타》의 초기 원고로 추정되는 미발표 희곡인 《역사-이야기》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콘스탄티 옐렌스키(Kostanty A. Jelenski ;1922~1987)의 평설인 〈맨발에서 나체까지〉가 더해져 비톨드 곰브로스키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완결된 작품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번역자 정보라의 〈앵무(鸚鵡)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라는 〈오감도〉의 “정립된 의미를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모더니스트의 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일종의 해설은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콘스탄티 옐렌스키(좌), 비톨드 곰브로비치(우)】


아무튼 몹시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 있으며 병들고 타락한”, 더욱이 유치찬란하며 조롱과 위악이 버무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하는 쾌감은 콘스탄티와 정보라 두 문인의 덕택이다. 이 야릇하고 기이한 희곡을 해독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작품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글을 먼저 읽고 각 희곡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두 글에서 곰브로비치의 기질 등 개인사와 시대의 정황, 그의 작품 전반의 시종일관하는 일련의 연계성, 각 작품마다 드러나는 비톨드의 현현, 나아가 나름의 인물 해석은 분명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희곡들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향 잡이가 된다. 물론 하나의 단서로서, 또는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주제라는 커다란 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밖에 해당 작품을 읽는 이의 인상에 따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의 특성상 다종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희곡 《결혼식》의 주인공인 프랑스에 주둔하는 폴란드 군인 헨리크는 꿈속에서 자신의 집이 여관으로 변한 것을 본다, 그리곤 어느새 여관은 궁정으로 변모하고 자신은 왕자가 되어 옛 연인 마니아와의 결혼식 거행을 준비한다. 불모성으로 가득한 이 연극에서 헨리크가 주절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여느 정치 담론가의 비아냥거리는 영 쓸데없는 목소리의 본질을 들었다. 그 대사는 이렇다. “불쌍한 주정뱅이의 암시는 사실 꽤나 분명해서 그 더럽고 미끈거리는 혓바닥으로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거든, 하 하 하!”

 

“우리 모두 안감에 어린아이가 꿰매져 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언행들이란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혼란스레 얽힌 한 편의 촌극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모든 상황이 꿈과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헨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고, 자기 꿈속이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며, 스스로 다음 줄거리를 만들어갈 자유까지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어진 담론 권력을 휘둘러 아무 말 대잔치로 정치여론을 휘젓고는 책임으로부터는 벗어나 부하뇌동하는 우중을 세력으로 악의를 더해가는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아버지 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결혼식을 강행하려는 행위는 실패함에도 이 환상의 후과는 아주 더럽다. 이미 절친이 헨리크 자신의 협박, 아니 위협에 의해 자살하였으니 그 무책임한 세 치의 혓바닥은 정말 추하다. 이 부조리극을 나는 내 의지에 의하여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나의 이해로 삼았다. 텍스트가 이처럼 독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부조리극의 독특한 맛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톨드와 내 의지가 구상하며 읽어가는 텍스트의 의지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톨드는 1904년 폴란드 동남부 산도미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소설 『페르디두르케(Ferdydurke)』가 발표된 것이 1937년이었으니 서른네 살 늦깎이 데뷔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희곡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발표했다. 이보나는 못생긴 얼굴에다 그녀의 숙모들의 표현에 따르면 “몸이 부어오르고, 곰팡내가 나며, 콧물이 흐르고, 두통”을 달고 다니는,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가씨다. 왕자 필리프는 이렇게 세상에서 소외된 여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 하찮음 때문에 아무렇게 대해도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 대상자라고 선언한다.

 

극은 해프닝과 말도 되지 않는 진행과정들로 꾸역꾸역 이어진다. 사실 대사들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맥락도 없는 대화들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유치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진실의 사유들이 빛나고 있음을 제아무리 눈치 없는 독자도 읽어낼 수 있다.

 

왕자: 너희들을 이 비뚤어진 여왕님(이보나)에게, 이 오만한 빈혈증 환자에게 소개하겠다!

이자: 이 무슨 바보짓이에요! 그 아가씨를 놔두세요! 뒷맛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요.

왕자: 그럼 언제는 뒷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보나를 친구들에게 자신의 신부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방자하고 치졸한 대화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급기야 궁정에서 이보나를 맞이하는 왕과 왕비의 태도는 이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무반응에 쩔쩔매다 상하가 역전되어 알랑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한다. 이보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쩌다 맥락 없는 짧은 한 마디를 뱉는 둥 마는 둥 한다. 자신의 면전에서 궁정 귀족들의 행태는 무례하고 비이성에 차있으며 미성숙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의 전편은 오직 왕과 왕족, 궁정귀족들의 비루하고 천박하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폭력적인 모습들의 적나라한 해부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역설적? 혹은 반어적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 소설 『페르디두르케』의 노골적으로 유치한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과 부조리한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드러나는 신분, 연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이 극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는 바로 이 미성숙의 유치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순수성을 대비시키려 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미성숙함, 엉뚱함, 유치함이 세상의 가장 깊은 진실에 맞닿아 있음을, 아니 얽혀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며, 동시에 연민과 포용과 온화한 관대함을 지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한한 모순 덩어리 자체다. 어떤 직면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결혼식》과 더불어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또한 마치 비현실, 광기, 특이할 정도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존재하고 있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은 그야말로 인간 세계의 부조리 그 자체의 표상일 것이다.

 

곰브로비치의 모든 극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독자의 낯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부조화로 일그러지게 한다. 아마 발견하지 않으려해도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바로 그 업신여긴 위치로 전락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시종 날카로운 비수를 이들 사회 엘리트라 자부하는 자들의 목을 겨냥한다. 내겐 희곡 《오페레타》가 가히 최고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말 예리한 칼날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아마 미완성 희곡인 《오페레타》의 초고이지만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이 다른 《역사-이야기》의 생생한 날 것의 이야기,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희곡에 부여하려 했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기에 이를 통해 선(先)지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시대배경이 극 속에 드러나지 않으나 1막 대본에 앞서 희곡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희곡을 연극 대본이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텍스트로 썼다. 이후 연극 연출자들의 불평에 따라 점점 무대 대본으로 극 형식의 완결미를 갖춘 듯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걸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야기로 읽는 것이 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여기선 가면이 가면을 고문하는구나! 모두들 가면을 벗으시오! 보통의 인간이 되시오!”

 

사실 극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럽다.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망나니이자 난봉꾼인 히말라이 대공이란 자의 아들 샤름 백작이 아가씨 중의 으뜸인 알베르틴카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대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발단의 한 장면이 중요한 데, 샤름은 알베르틴카를 유혹하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둑을 자신의 개로 이용한다. 백작의 신분이니 자신이 직접 여인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시종을 시켜 먼저 전갈하는 것도 체통에 맞지 않기에 몰래 도둑을 시켜 그녀가 졸 때 그녀의 소지품을 훔쳐 내고, 그러한 도둑을 자신이 잡아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도둑은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한동안 더듬는다. 알베르틴카는 꿈결에 그 손의 감각이 가져온 쾌락을 간직한다.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알베르틴카는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아준 행위보다는 꿈결의 감각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샤름은 그녀를 화려한 패션과 장식으로 치장하여 귀족적 만족감을 더하려하지만, 알베르틴카는 오히려 나체를 꿈꾼다. 이것은 《오페레타》의 초고인 《역사-이야기》 속 ‘맨발’에 가닿는데, 이 헐벗음은 머슴, 하녀, 노동자 등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이자 무엇이든 가능한 맨(naked) 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은 사회적 위상인 대공과 그의 처인 공주, 아들 샤름과 귀족 나부랭이 고관대작들의 잔혹함이라는 구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어 이들의 속물주의와 유치함, 폭력성, 비굴함, 비겁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내 기질과 닮은 모습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아마 구세계의 귀족들의 너절함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패션쇼, 아니 가면무도회가 된 히말라이 성이 혁명의 놀음에 의해 폭탄으로 파괴된 이후의 장면은 그야말로 여느 코미디를 능가한다.

 

피오르(패션의 거장): 여기 누구 있소?

대공: 전등입니다.

피오르: 누구?

대공-전등: 전등이요.

피오르: 대공 아닙니까!

대공-전등: 쉬이잇....쉬이잇...., 제발 부탁이니! 조심하세요!

피오르: 웬 바람이 이렇게!

대공-전등: 이건 역사의 바함(바람)입니다.

여기 옆에요, 선생은 못 알아보시나요? 탁자인 척하고 있어요.

피오르: (탁자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탁자는 사실 네발로 엎드려 화려한 식탁보를 덮고 숨은 공주다) 아!        - 『오페레타』 3막 중에서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기 코 막힌 프랑스어 발음으로 듣기조차 거북한 말을 하는 귀족계급과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치욕적 모습으로 ~인 척 하는 변장으로 숨기에 바쁘다. 비겁한 엘리트에 대한 조소와 그들의 거대한 희화화(戱畵化)된 소극(笑劇)이자 비극(悲劇)이다. 이것은 《역사-이야기》의 맨발로 화신한 비톨드의 목소리와 공명하여 울려 퍼진다.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내 목소리를 빼앗지 못해요.... 나의 벗은 맨발이 내 입을 동반할 거야.....여기, 아래쪽에서. 내 인성을 드러나게 하고 난 맨발로 말할 거야, 맨발로...., 난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속물주의 근성의 귀족들, 구세계 질서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그릇이 없는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칼을 갖다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브로비치는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하나의 질서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이러한 유치 졸렬함과 유아성과 더불어 고귀한 진실, 순수한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함께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고 괴물 같이 표상된다고.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 쪽에 서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니, 귀족의 그 우아하고 잔혹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이기를 자처한 이 전간기(戰間期:1919~1939) 모더니즘 거장의 글에 산재한 그 반골기질의 후예로서 경의를 보낸다. 반복되는 대사, 무의미한 소리들의 아우성,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의 난데없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는 의미의 뒤섞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 자체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 고유의 의미들이 새록새록 부여될 것이다. 이것이 부조리극의 참 묘미이다. 아마 곰브로비치의 까탈스럽고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한 번 빠지면 그의 전작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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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후안 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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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에 ‘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는 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자,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  -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量)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性)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아,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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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고백록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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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작가일기』는 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년 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 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작가일기』 중 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이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反)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 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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