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 4
최미래 외 지음 / 스위밍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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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학잡지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최지은 시인의 이름이 눈에 띄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책의 몸피는 여느 소설집 또는 시집과 같은 단행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이 책에 매혹된 것은 책표지의 안 날개에 작게 써진 외양 없는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과 이어진 유령의 목소리가 때론 와글와글 그리고 소곤소곤 들려주는 목소리에 대한 이유 없는 끌림이었다. 이 작은 문학잡지 유령들(ghost friends)Volume4.에는 소설 세편, 네 편의 시, 두 평론과 에세이가 소박하지만 밀도높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말했던 4인칭 서술자로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 따르는 감정을 그대로 기술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을 전달해주는 충실한 대변자의 음성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김예솔비 영화평론가가 나에게서 나에게로에서 말하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그런 충동으로서 우리들이 망각 저편으로 던져버린 잃어버린 목소리로서의 유령들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가 권혜영 작가의 도깨비 갱생일지는 도깨비라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낯선 이미지로 인해 가장 직관적으로 유령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화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게, 가야당이라 불리는 허름한 구제숍을 맡아 운영한다. 인수인계도 없이 돌아가신 탓에 화자 는 할머니가 기록해 둔 업무일지를 지침삼아 미숙하나마 관리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괴생활관리국 소속 공무원이 도깨비 가족을 데리고 방문한다. 물론 도깨비들은 쉬었음 청년과 은둔 중년, 쪽방촌 노인, 쓰레기집 주민, 중독자처럼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속 존재들의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메리트를 이용해 지식과 경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배제된 자들의 회복과 자립을 지원하는 대기업 운영 집안을 요괴라 지칭한 것은 흥미롭다.

 

도깨비와 요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의 향연은 건너뛰기로 한다. 한 달도 못 돼 도깨비 가족은 갱생프로젝트에서 떨려나고 공무원이 그들을 인솔하고 에게 봉인을 의뢰하기 위해 다시 찾아 온 것이다. ‘는 이들 유령적 존재들을 봉인이라는 절대 감금의 처벌권을 가진 인물이다. 봉인 하루 전날, 이들은 한바탕 흔쾌한 춤과 떼창으로 어우러진다. 이를 방관하며 어울리지 못하던 는 사물 상태로만 있으려는 백소라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잘 들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는 귀를 기울여 그네들의 시끄럽기만한 소리를 비로소 서서히 듣기 시작한다. 엉망이면서 묘하게 기승전결이 있는, 세상과 부딪치는 데도 완전히 매력 있는 선율과 보컬을. 이윽고 도 그들에 끼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천천히 적는다. 도깨비는 흥이 많다. (...) 죽도록 지친 사람까지도 춤추게 만든다.”.

 

이 세계의 요지경을 흔쾌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소음같은 배제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시간이 된다. 장마철엔 물건들이 잠을 설친다.”, “오래된 거울은 습기를 먹으면 요기가 생겨서 시커멓게 흐려진다.”라는 할머니가 남긴 여름철 관리지침의 내용이 예사롭게 들리지만 않는다. ’의 무수한 연장으로서 타자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지닌 작품이다.

 


두 번째 소설, 최미래 작가의 노란 피는 천천히 돈다는 산다는 것에 어느만큼 무심한 존재가 된 인물, 그래서 세상사에 펄펄 끓는 마음으로 자기표현을 하고 행동하는 존재들을 가끔은 부러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첫 단원을 읽어나갈 때 혈액에서 원심분리기로 혈장을 분리하는 장면이 묘한 호기심으로 작동해 내쳐 읽은 작품이다. 삶의 징그러움에 몸을 떨면서도 그것에 서로들 얽혀드는 관계를 생각게 하는 소설이랄까.

 

생각만큼 돈이 되지 않는, 손님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가난한데도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 징글징글했다. 그 덕을 보고 있는 나도 징그러운 건 마찬가지만

 

피부과 간호조무사에서 권고사직 당한 는 기력회복주사, 일명 혈장 주입술이라는 불법 시술을 독립적으로 저지르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의 혈액을 채취하여 혈장을 분리하여 젊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판다. 이렇게 시술을 위해 손님들을 만날수록 사람에게 정이 떨어지고, 산다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유일한 정규 손님인 호떡 장수 이난희 할머니라는 펄펄끓는 존재를 보며 자신이 그런 삶에 끈적하게 얽혀있음을 자각한다. 사실 나는 피가 끓어오르는 이난희 여사보다는 무심한 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이유가 이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때, 우리 사람이란 영원히 환상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온 마음에 열이 오르며 다시 살고 싶어지는, 그런 열정으로만 살아가는 펄펄끓는 삶이란 가능한 것일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아마 열역학적으로 심정지가 곧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혈장은 맑고 투명한 노란색, 노란 피가 내 몸속을 돌고 있는 한, 나는 이 징글징글한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고, 그 모든 사실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문장의 이해 불능의 삶이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게다. ‘를 따라다니는 소녀 고서라에게 간택당하는 삶이 되듯, 모든 삶의 추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일 게다.

 

이 잡지의 기획자인 김화진 작가의 편 고르기는 작품 속 출판사 편집자 이완희의 혼잣말인 내가 한 어떤 선택이 의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걸까, 의미가 없을 확률이 큰데도 자꾸 그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뭘까?”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것만 같다. 매번 잘 안 되지만 누군가의 옆자리에 못 박히고 싶어하는, 사람이랑 꼭 붙어 앉으려고 사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의 외사랑 이야기이며, 흘러 지나칠 수 있는 얘기도 품에 잘 안고 가는 사람을 향한 끝내 말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 말하지 못하는, ‘주변을 맴도는 말, 서성이는 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는 몰라도 너에게는 소중한 책, 그런 게 되겠구나. 거보세요, 쓰시기를 잘했죠. 그런 마음은 분명 편집자의 마음이었다.”처럼 후련하고 허망하기도 한 마음, 또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헛손질하는 마음, 그것 그대로가 좋은이야기이도 하다. 작품 속 편지 쓰기 워크숍 참가자들의 끝내 닿을 수 없는 편지들처럼 우리의 선택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의 반향과 무관하게 그 행위자체가 이미 회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제 읽기보다 소설의 이야기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면서 따라 읽으면 어떤 마음의 좋은 향기가 배어나는 듯함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고 싶다. 김화진의 소설들을 조금 더 읽고 싶어졌다.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대표작, Object; 모피로 된 아침 식사, 

최지은 시인의 <오브제>의 모티브가 된 작품


최지은 시인의 네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정말 반가웠다. 첫 시 오브제는 조금 낯설다. 그가 만지고 간 자리마다 털이 났다로 시작되는 시의 문장은 커피 머그 손잡이 안쪽에서부터 컵의 내외부로, 그리곤 집 안이 털로 뒤덮인 전경을 말하지만, 감추고 싶지도 않지만 드러내고 싶지만도 않아서 홀로 여기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가 떠난 뒤의 일이고, 시 속 화자는 빗질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들여 쓰다듬는 사람이 된다. 자꾸 눈물이 흐를 때마다 한 번씩.

 

그는 누구일까? 어쩌면 털이라는 장식이 아니라 이미 감각체계를 교란하는 장치로 읽히듯, 어떤 본능, 육체성, 또는 내부에 숨겨져 있던 욕망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같다. 집 안 모두에 털이 덮이듯, 나의 상념 속에서는 이 세계의 질서를 찢고 그 아래 잠긴 그리움의 감각과 접하는 매개물, 그 경계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보 나왔어/ 현관 문 열리는 소리 들릴 때무슨 일인지 는 답할 수도 없다. 경계 너머에 있던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이 세계에 홀로 있다는 슬픔의 감각은 그 애틋한 그리운 육체들에 다가서기 위해 쓰다듬음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마음처럼 봄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흘려보내는 마음으로, 열린 문틈으로/ 아끼는 고양이 달려와 안기어오는 오늘 아침(전문)처럼 살아가는 마음으로.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며 응원을 보낸다.

 

김예솔비, 김병규 평론가와 김미래, 황예인 네 분의 평론과 에세이의 목소리는 그렇게 귀 기울이지 못했다. 다만, 다자이 오사무의 딸인 소설가 쓰시마 유코(津島 佑子, 1947~2016) 의 소설집 ()와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 세 여인을 오가며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모두와 손잡고 싶었던 유년기의 감각, 나와 타인을 분리시켰던 최초의 거절이라는 사건을 망각함으로써 타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잠재성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영화평론가 김예솔비 작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는 해맑은 표정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손을 붙잡는 아이의 모습들이 연상되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읽었다. 월간도 계간도 아닌 비정기 문학잡지 유령들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김화진 작가를 비롯 김미래, 황예인 작가 등 편집진들의 문학의 몸피가 되기를 바라는 노고에 응원을 보낸다.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은 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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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 :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히토 슈타이얼 지음, 안규철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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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오늘을 음모론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초국적 미디어와 플랫폼은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유통시키고, SNS는 누구나 기록자이자 편집자가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공공성 없는 공론장이 형성되고, 사실과 허구, 증언과 조작, 신뢰와 의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혔다. 감정적 키치와 스펙터클은 소통을 대신하고,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맥락을 제거한 편집 영상은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허위와 조작을 방조하는 사이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조직하고 인간의 판단을 선행하는 정치적 장치가 되었다.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한 철학적 응답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오래된 통념을 해체한다. 대신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통해 기억과 증언, 기록과 픽션, 역사와 정치,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서로 얽혀 현실을 구성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다큐멘터리론이 아니라 이미지 철학이며, 동시에 이미지 정치학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다.

 

책의 첫 장에서 제시되는 명제는 매우 도발적이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보편적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다큐멘터리가 객관성과 사실성을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그 믿음 자체를 의심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CNN이 동시 송출한 영상은 거의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저해상도의 화면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욱 현실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였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숨소리, 어둠 속의 모호한 화면은 객관성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현장에 있다'는 감각만큼은 강렬하게 생산했다. 다큐멘터리의 신뢰는 명료함에서가 아니라 식별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진짜라고 믿게 되는 역설이 작동하는 것이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통찰은 '다큐멘터리=사실'이라는 오래된 등식을 근본부터 흔든다. 카메라가 현실을 담는 순간 이미 화면은 촬영자의 시선과 구도, 편집과 배열을 통해 하나의 구성물이 된다. 인터뷰 역시 기억의 왜곡과 언어의 한계, 사회적 위치에 따른 침묵을 벗어날 수 없다. 사건 당사자의 증언조차 진실 전체를 재현하지 못하며, 때로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것처럼 서발턴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실패한 장르일까. 슈타이얼의 대답은 오히려 반대이다. 진실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실재와 연출,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해체한다. 영화 타이타닉제작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타이타닉이 지나간 자리(Titanic's Wake)〉〉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면은 거대한 세트장과 화려한 영화 제작 과정을 비추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 놓인 멕시코 해안 마을의 빈곤과 물 부족 지역에 대규모 인공 수조를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민물을 끌어오는 현실을 함께 드러낸다. 거대한 허구를 만드는 과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실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복제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가 된다. "진실은 오직 픽션의 형태로만 표명된다."는 라캉의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이 지점에서 진실의 색은 아카이브의 정치학으로 사유를 확장한다.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를 과거를 보존하는 중립적 저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기억을 선별하는 권력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를 남기고 누구를 침묵시킬 것인가는 언제나 정치적 선택이다. 기록은 객관적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역사의 질서를 조직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은 무한한 저장 능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엇을 노출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결정한다. 삭제는 기록만큼 정치적이며, 망각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의 효과가 된다. 아카이브는 더 이상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를 지배하는 장치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AI가 생성하는 이미지와 몽타주 편집, 그리고 맥락을 제거한 영상의 확산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권력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모론은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미지 속에서 허구는 신념이 되고, 신념은 행동을 낳으며, 행동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전체주의와 선전 정치 속에서 반복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네트워크 플랫폼을 통해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AI 합성 이미지와 왜곡된 영상이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따라 형성되는 시대의 징후이다.

 

베르토프가 외쳤던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라는 선언도 슈타이얼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삶은 결코 '있는 그대로' 이미지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현실의 구성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삶만을 '진정한 삶'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권력 담론이 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명분은 쉽게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한다. 하나의 전형이 규범이 되고, 그 규범에 맞지 않는 삶은 배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보편적 불확실성이라는 슈타이얼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적 유혹을 경계하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다. 진실은 단일한 명확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해소되지 않는 균열과 모순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오늘날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정보와 허위 정보, 기록과 연출, 사실과 픽션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교차한다. 다큐멘터리 역시 더 이상 진실을 보증하는 장르가 아니다. 때로는 스펙터클과 감정 소비를 위한 쇼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은폐하는 선전의 형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더욱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미지를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을 조직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 욕망이 스며있다.

 

결국 진실의 색은 우리에게 진실한 이미지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며,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하는지를 끝까지 읽어내라고 요구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며 사유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필요한 비판적 감각이다. 진실의 색은 다큐멘터리에 관한 철학 에세이를 넘어, 현실보다 이미지가 앞서가는 시대에 진실이 어떻게 생산되고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문하는 보기 드문 정치철학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가장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읽어내려는 지적 용기일 것이다. 이 이미지 철학의 현대의 고전적 지위를 지닐 역작을 거듭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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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책 제본의 부실로 낱장으로 흩어져 읽을 때마다 매 쪽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었다. 이렇게 조악한 제본은 처음이다. 21세기에 쓰여진 고전으로 남을 만큼 압도적인 저술이 이렇게 출간된 것은 정말 수치스럽다. 출판사여, 제발 책 제본도 신경 좀 쓰세요. (책의 물성을 문제 삼는 글을 쓰는 독자는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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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심하네요.
예전 학교 근처에서 전공 서적 제본한 것보다 더 떨어지는 품질 수준이네요.

비의식 2026-07-06 20:44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은 최고수준, 책의 제본 품질은 최저 수준,
어쨌든 슈타이얼의 집요한 통찰은 현대의 고전이라 할 정도랍니다.
 
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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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에 대해서)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 페르난도 페소아, <사실 없는 자서전> P14에서

 

삶을 체험으로서 살아낸 생의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토록 그리운 적이 없다. 진정 떨어보고 피 흘려 본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자기 강화와 같은 텅 빈 오만함이 아닌 자기 소멸을 거듭하며 그 빈자리를 끊임없이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박노해 시인의 이 침묵의 언어로 한없이 간결하게 최소화된 언어의 음성들은 그래서 살아내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침에 겨워하는 내겐 시인의 말처럼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하나의 성소(聖所)”가 되어주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항상 내 곁에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벗어나 고독을 향유 할 때 함께하는 스승 같고 때론 벗처럼 도란도란 그 마음을 나누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내겐 그런 책이 되었다. 나는 시인이 홀로 산책길을 걸으며 수없이 떠올리고 다져왔을 그 내면의 이야기들에 감응하기 위해 하나의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자기 소멸의 독서를 말하는 시인의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살라지고 비워져 저 영원의 빛에 감광된 그 순간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없도록 내려치는, 그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하는 그 감응의 찰나를 알기에 그렇게 아주 천천히 읽었다. 아마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잠언(箴言)이자 시()로 엮인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 430여 구절이 사진화보와 어울려 구성된 작고 두툼한 책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공연의 막간에 잠깐 진행되는 그 무엇이고, 가끔 문을 통해 기껏해야 무대배경에 불과한 것을 훔쳐보는 것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의 문장들을 읽을 때 나는 페소아처럼 고통 받지만 말하지 않는 이들 속에서 성스러운 길손이 되려했고, 목적 없는 세상에 이유 없이 묵상하는 순례자가 되려했다. 그럼에도 나의 키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는 한계를 알기에 불가피하게 내 마음이 감응하는 소수의 음성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느 날 또 다른 문장에 내 정신이 번쩍 뜨일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나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책의 문장들 앞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아니 읽어버리려고 애썼다. 온 삶으로 읽어내기 위해, 삶이라는 한 권의 책을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내 무딘 감수성이 호응한 몇 문장들을 이렇게 옮겨 적는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 속도로, 깊이깊이.”, 그런데 자기 삶의 제 속도를 잃기 일쑤다. 그리고는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몸을 떨곤 한다. 제아무리 그 아쉬움이 무용함을 알지만 진정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해 사무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아~ 돌아보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건만 그 질긴 회한을 떨어내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겨운 것인지. 삶의 미련이 너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산다는 것을 진정 알지 못하는 자의 헛된 욕망인 것 같아 자괴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래 가을 볕 드는 어느 날 나도 가만히 나를 말려야겠다.

 

산다는 것에 그 무어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실재하는 이 몸을 체감하는 동안만큼은 여느 사람도 겪는 그 모든 희로애락을 겪어 볼 일이다. 그리고 가끔은 가슴 벅차고 뿌듯한 충만감을 느끼는 날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또한 모든 길흉화복이 크거나 작게 반복되지 않았나. 그런게 산다는 것이지 더 무어가 있겠는가. 잊지 말자. 막막한 날도 있어야 하리, 떨리는 날도 있어야 하리, 그래, 꽃피는 날이 오리니.”

 

문득문득 내 옹졸한 욕망이 경험(지식)을 쌓아가려 할 때가 있었음에 쓰디쓴 웃음을 웃을 때가 있다. 체험 속에서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어야 그 빈 곳에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자리 잡을 수 있을 터인데, 그만 욕심이 망각을 일으켜 그 무엇도 들어 올 수 없이 꽉 차 편벽해지고 만다.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왜 빈번히 잊게 되는 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 사회에서 나와 더없이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져 나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만들 수 있음에도 나만의 이야기가 없는 하루가 반복되는 날이 더해지기만 한다. 아마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말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사건이 된다.

힘 들어야

힘이 들어온다.

 

이 다층적 의미를 지닌 아포리즘은 인공지능에 의존해 힘 들이지 않는, 사고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에 대한 경계의 음성으로도 들린다. 자기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유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기계에 대한 영원한 종속, 자본에 대한 노예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을 위한 나일 때 나는 한없이 작게 축소된다. 그 축소된 나 들로 군집을 이룬 집단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악은 갈수록 새로워지고 다양해지고,

평범해지고 다수결 속에 강력해진다.

나는 악의 신비를 지켜보고 있다.

 

악의 신비를 지켜보는 시인의 시선은 변화무쌍한 악의 양태를 꿰뚫어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로운 탐욕, 정의로운 교만, 지혜로운 위선.(Free greed, Just Pride, Wise hypocrisy.)”으로 이름붙일 오늘날의 대죄가 아닐까. 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내 목소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착각이다.“ 내 목소리에 대한 착각, 이 본질적 자기 성찰의 한계는 항상 내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고 있다. 가장 소홀하기 쉬워,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일 테다.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있지 않은 말

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

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있지 않은 말을

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배어 있지 않은, 육화된 즉 숙성된 인식 속에서 다져지지 못한 말 아닌 것들이 난무하고 있다. 절제되어야 할 것들이 기만적이게도 활개를 친다. 정말 조심스러워 해야 할 것이 인간의 말이거늘.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어찌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데 타인을 알겠는가. 그러하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을 듣기 위해 온몸을 기울여 느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일 게다. 달콤하거나 때론 편협과 헛된 위선의 말을 뿌리치기 위해. 그리고 진실의 언어에 공감하기 위해.

 

내가 가장 상처 받는 지점이 내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그 욕망이라는 심연을 외면하고 다른 곳을 향해 저주를 내뱉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그래서 실패 앞에 정직하게 성찰하게 하소서, 지금의 실패가 오히려 나의 길을 찾아가는 하나의 이정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목소리를 비로소 낼 수 있는 것일 게다.

 

머리 굴리지 말고

욕심 세우지 말고

겉멋 부리지 말고

단순하게 그냥 가기,

본질로만 승부하기.

 

이 단순한 자세를 잊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고독한 사유의 자리를 찾아내는 여유를 가져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 소란한 세계의 한 구석에

내 영혼이 오롯이 앉을 수 있는

오래되고 아늑한 의자 하나,

잠깐, 생각에 잠기는 그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자리

 

자기만의 의미가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자리를 찾아 여행이라도 떠나봐야 할 것 같다. 반드시 홀로 떠나는 여행으로, 그래서 그 여행의 낯선 길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 둘이서 손잡고 돌아오기 위한 여행길을 향해서 말이다. 세상이 너무 재밌어졌다. 화려한 빛과 소음이 마치 활력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그리움도, 벗도 이웃도, 내 안의 창조성도 사라지고 만다. 조금 심심해 질 필요가 있는 세상이다. 그래야 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깨어날 테다.

 

시인의 생의 체험에서 응결된 이들 시와 잠언들을 읽다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 무언가와 만난다는 것, 산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어떤 진리의 광채에 자신을 잃고 잠시 정지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읽지 말고, 읽어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독서가 된다면 어쩌면 자신을 잃은 것보다 훨씬 커다란 진리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인이 독자들을 위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삭막한 이 시대에,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사라지지 말자고하는 품속의 다정한 말이 시간과 공간을 건너 바로 지금 진실 되게 와 닿음을 체감 하는 독서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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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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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뱀이 근처에 없을 거라며 마음 놓고 있는 새들 같고, 카멜레온의 끈끈한 혓바닥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나무줄기 주위를 맴도는 파리들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 사실 없는 자서전에서


예술 평론가 장 프랑수아 마르텔의 이 책 Reclaiming Art in the Age of Artifice는 예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철학서이자 문명비평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인공물(Artifice)시대'의 위기를 예술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위기'로 규정한다. 정치와 시장, 기술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거대한 '인공물(Artifice)'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적 가치만으로 평가되는 존재가 되었고,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마지막 통로가 된다.

 

마르텔은 예술의 기원을 매우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은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하나의 사건"이며, "낯선 차원에서 들이닥친 한 줄기 빛"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을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근원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피카소가 "최초의 인간이 예술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완성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가 "모든 예술은 쓸모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예술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예술은 정치나 경제, 도덕의 도구가 될 때 본질을 잃고, 오직 자기 목적성을 지킬 때만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마르텔이 말하는 아름다움 역시 단순한 조화나 질서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별한다. 아름다움이 내가 이해하는 세계와 일치할 때 느끼는 안정감이라면 숭고는 현실이 내 예상을 무너뜨릴 때 찾아오는 파괴적 아름다움이다. 숭고는 불쾌하고 두렵지만 바로 그 공포를 통해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의 진실을 폭로한다. 진정한 예술은 안락한 감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에 균열을 낸다.

 

그런 점에서 화가 폴 세잔이 남긴 말은 마르텔이 말하는 예술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다. "나는 이슬비를 맞으며 세상의 순수한 근원을 들이마신다. 그 순간 나는 그림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무지갯빛 혼돈이다."

세잔에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완전히 동화되는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 황홀한 몰입은 캔버스 위에서 영원한 실재가 되었다. 예술은 현실을 복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실의 숨겨진 근원에 접속하는 행위임을 세잔은 몸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마르텔이 "예술의 가치는 세상의 근원적 신비를 얼마나 예민하게 느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대목은 세잔의 작업과 정확히 만난다.

 

반대로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술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인공물은 예술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특정한 감정과 행동을 유도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장치다. 진짜 예술은 질문을 남기지만 인공물은 정답을 주입한다. 예술은 모호함을 사랑하지만 인공물은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결국 둘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확실성'이다.

 

이 점에서 마르텔이 예로 드는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특징은 흥미롭다. 이 영화는 경이로운 영상미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한 치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본, 세트, 연기, 연출, 편집까지 모든 요소가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관객은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설계 안에서 움직인다. 악당은 절대적으로 악하며 주인공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인간은 악하고 자연은 선하다는 도덕적 결론을 향해 관객은 조금의 의심도 품지 못한 채 질주한다. 압도적인 영상미는 오히려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를 더욱 자연스럽게 내면에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텔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러한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 인공물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을 것이다.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백을 남기는 대신 이미 설계된 감정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공물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조종한다. 말초적 인공물은 소비와 소유를 자극하고, 교훈적 인공물은 증오와 도덕적 우월감을 생산한다. 둘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제거하고 통념과 독사(Doxa)를 강화한다. 그래서 인공물은 언제나 상식을 반복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상식을 배신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의 언어인 상징도 기호로 축소된다. 마르텔은 "기호는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기계적 인과율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상징이 된다"고 말한다. 기호가 정보를 전달한다면 상징은 실재를 경험하게 한다. 예술은 소통이 아니라 표현이며, 표현을 통해 상징은 하나의 미학적 사건으로 태어난다. 노래와 영화, 그림은 내 안의 감정을 객관적 실체로 탄생시키고 일시적인 감정을 영속적인 존재로 바꾸는 마법을 수행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한 '이중 시선(Double Vision)'은 바로 이러한 상징을 읽는 능력이다.

 


이와 반대로 현대 대중문화는 상징을 제거하고 키치를 양산한다. 밀란 쿤데라는 "키치는 죽음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병풍"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이 이토록 강렬한 이유는 키치가 현실의 근본 조건인 죽음과 상실, 혼돈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불안정한 변화의 과정인데, 키치는 오직 매끈한 질서와 행복만을 보여 준다. 결국 키치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가짜 위안이다. 녹음된 웃음소리가 우리 대신 웃어 주듯 키치는 우리가 직접 감당해야 할 삶의 고통을 값싼 감상주의로 덮어 버린다. 그래서 키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회피이며, 진정한 예술과 가장 멀리 떨어진 미적 환상이다.

 

마르텔은 예술이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멀어질 때 예술은 가장 혁명적인 힘을 획득한다. 정치가 은폐한 현실을 드러내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통념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예술은 비정치적이기에 오히려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그의 명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오늘날 이러한 인공물의 지배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거대해졌다. 이제 소셜미디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삶의 틀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그 안의 이미지에 맞추어 끊임없이 수정하고, 기술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감정과 가치관까지 재편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인공물이 설계한 욕망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르텔은 이러한 시대를 설명하며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를 떠올린다. 작품 속 사람들은 마을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미쳐 죽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목격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그저 색채일 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색채' 너머에 훨씬 더 거대한 존재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그저 알고리즘일 뿐", "그저 기계학습일 뿐", "그저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하며 인공물의 실질적인 지배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문제는 색채 자체가 아니라 그 색채가 우리의 세계를 뿌리째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러브크래프트가 예견한 미래는 바로 '유령사회(Spectral)'였다. Spectral은 빛의 배열인 스펙트럼(Spectrum)과 유령을 뜻하는 스펙터(Specter)를 동시에 품은 말이다. 화려한 빛의 배열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정작 우리는 그 뒤편의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유령처럼 살아간다. 디지털 이미지와 SNS 속 자아는 점점 선명해지지만 실제의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형체 없는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시대, 인간은 자신마저 잃어버린 채스스로 클라우드 구름 속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 간다.

 

그래서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인간 정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칼 융은 "인류의 진짜 적은 인간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숭배하는 인간의 정신이며, 인공물을 진실로 착각하는 우리의 의식이다. 결국 예술은 이러한 시대에 인간을 현실로 되돌리는 마지막 통로다. 진정한 예술은 정답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을 깨뜨리고, 통념에 균열을 내며, 인간을 실재 앞에 다시 세운다. 인간은 예술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장 프랑수아 마르텔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가장 절실한 메시지일 것이다.

 

사실 마르텔의 이 책은 읽을수록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을 품고 있다. 그는 예술을 정의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설명하지만, 설명이 끝나는 순간 이미 예술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책은 논리적으로 예술을 증명하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예술을 다시 경험하도록 이끄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술은 혼돈을 견디는 능력이고, 인공물은 혼돈을 제거하려는 장치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칼 융의 말을 인용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기술도, AI, 시장도 아니며, 그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인간 정신이라는 말이다. 결국 마르텔은 예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회복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끝으로 이 예술철학 에세이로 규정짓고 싶은 글의 미덕을 말해야겠다.

 

그것은 예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완성한 사건이다와 같이 존재론, “기호를 상징으로 바꾸어 실재를 보게 한다.”는 인식론, “아름다움보다 숭고, 질서보다 균열이 예술의 본질이다.”라 말하는 미학, “인공물·키치·소셜미디어가 인간 정신을 획일화한다는 사회비평, “예술은 비정치적일 때 가장 혁명적이다.”라는 정치철학을 망라한 명료한 지향의식과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사례들의 놀라운 대응이 그 어느 예술비평서보다 총체적 이해의 바탕을 토대로 하여 대중의 수월한 접근을 향한 깊은 노고를 투여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AI시대에 성큼 들어선 오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무엇인지 사유해보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모처럼 강력 추천한다는 사족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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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Paperback)
Barbara Wertheim Tuchman / Ballantine Books / 198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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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시차의 낯선 문명의 과거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한다.

그 발견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summary]

 

감상글의 요약을 앞세우는 이유는 책의 방대함, 이를테면 중세 백과사전이라할 만큼 당대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비롯한 정치, 종교, 문화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어 내 누추한 소회가 산만한 감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 마디로 이 걸출한 역사저술은 타락해가는 교회와 전장의 참상, 궁정과 귀족들의 흥청만청 풍요와 대비되어 절규하는 농민 모두를 목격한 대영주 앙게랑 드 쿠시 7세라는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14세기 파국의 유럽을 들여다보는 역사 서사(敍事)이다.

 

1303년 훗날 소빙하기로 불릴 혹한과 냉해가 유럽대륙 전체를 휩쓸며 대기근으로 14세기를 맞는 당대인들은 이 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간 퇴행의 시대로 기록될 것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이 독특한 역사저술은 600년 시차의 먼 역사의 시간을 오늘의 세계에 비춘다. 그것은 먼 거울, 즉 낯선 문명의 과거에 맺힌 상()으로부터 불변하는 인간본성의 반영을 발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발견을 위한 물음은 아마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야만의 세계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 원인 행위들은 무엇인가?

 

야만과 폭력의 끝을 향하기라도 한 듯 지옥의 구렁텅이로 질주하는 14세기라는 과거는 오늘 우리들의 행동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본성의 거울이 된다. 변화없이 무한 반복하는 인간의 그 어리석은 행동들을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를 통해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이 위대한 저술에서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이 책의 국역본 출간에 앞서 거듭 두 차례 읽으며, 오래 펼쳐볼 소장본의 필요성을 느낀 책이었다. 가족들 모두 돌아가며 읽어 보고 서로 그 소회를 나누기에 좋은 저작이다. 터크먼은 14세기 이 야만의 인간 양상이 20세기 나치의 잔혹상으로 반복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금 오늘 신파시즘과 극우화되어가는 이 세계 양상의 거울이 되어 인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들은 이 책으로부터 무수한 인간 반영(反映)들을 발견하고 현실 통찰의 지혜를 거둬 올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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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는 인간 진보(발전)의 문명 서사가 아니다.

 

역사철학자로서의 헤겔은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특히 인간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는 과정으로서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자유의 진보라는 통일적 의미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은 이 주장의 빈틈을 쫓기라도 하듯 진보의 대척에 있는 퇴행의 역사로, 오직 폭력과 야만의 지배로 규칙이 무너져 내리며 그 바닥의 한계로 빠져드는 속박의 진보(?)’가 인간 정신을 휩쓸던 14세기 중세 100년의 재앙적 시기를 다루고 있다. 헤겔의 역사관을 조롱하듯 자유의 보편원리가 이성의 운동으로 진전해가기는커녕 이 시대는 인간의 오판과 우연, 모순과 정신적 지체를 넘어 퇴행으로 치달으며 역사의 시간 속에서 인간 본성의 항구적 변화 불능성을 입증한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싫어하고 회피하는데, 인류의 진보라는 패턴에 끼워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저자 서문의 글은 곧 헤겔 부류의 철학에 대한 반박의 의지표명일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터크먼은 이러한 반()헤겔주의 역사관으로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문헌과 사료 중심의 객관적 역사를 강조하여 역사의 정확성을 기술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에 기초한 연대기적 서사형식으로 독자적인 역사서술방식을 선택하였을 것만 같다. 이처럼 전통적 역사학자와 다른 걸음으로 자유로운 문체와 극적(劇的) 역사서술을 채택하는, 다시 말해 학술적 엄밀성과 문학적 서사를 결합하여 일반 독자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 끝나지 않고 지속되며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쟁, 교회의 탐욕과 문란함의 극성 등 모든 것의 부패를 향해 마치 의도적으로 미친 듯 질주해나가는 듯한 재앙의 시대를 통해 오늘의 세계를 비춘다. 종말로 치닫는 14세기라는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무엇보다 읽히는 역사(narrative history)’로서 모든 대중들이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 먼 거울 (A distant mirror)은 역사 속 인간의 행위로부터 윤리적, 정치적 반성의 사유를 추출하고자 하는 치밀한 노고의 과실이다. 대체 인간과 인간사회의 반복되는 재앙의 뿌리에 있는 근원 혹은 요인들은 무엇인지 역사적 시간을 따라 밀도 높고 긴장감 있는 전개로 마치 소설처럼 몰입하게 한다. 터크먼 역사서술의 한 특징인데 저자는 추상적 구조보다 시대를 대표할 만한 특정인물의 삶을 서사의 도구로 삼아 그들의 판단, 오판, 성격, 감정에 주목하게 하여 역사를 인간적 드라마로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것이 이 독특한 역사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해서 이 책의 중심인물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대()영주 앙게랑 드 쿠시 7(1340-1397)의 행적과 관련하여 전개된다.

 

공감의 어려움, 즉 중세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가치에 진정으로 들어가기의 어려움이야말로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여기서의 주된 장벽은 바로 당시의 기독교인 것 같다. (...)

중세 기독교의 지배원리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극은 중세의 거대한 함정이었다.” -저자 서문에서

 

이 파국의 시대를 둘러보며 인간이라는 종이 이전에 오늘보다 더 나쁜 일도 견디고 살아남았음을 알게 됨으로써 오늘의 삶을 안심하게 될 거라는 저자의 조크의 목소리에 독서 내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대체 14세기가 왜 치명적 재앙의 시기였는지, 역사의 진보라는 이해에 파열음을 내게 하는지, 그 영향의 요인들을 찾는 대항해(1,200여 쪽에 이르는)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시간이 된다. 14세기 100년의 시간 동안 인간을 더할 나위 없는 야만과 폭력의 심화상태로 몰아넣은 현상들을 시시콜콜 열거하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쏟아 내놓아야 할 만큼 무수하게 복잡한 사안들의 상호 얽힘을 일일이 기술해야 할 터일 것이다.

 

2. 세계의 질서와 규칙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그것은 14세기가 시작되자 몰아치기 시작한 기후변동으로 인한 대기근, 교회의 극단적인 부패와 타락을 비롯한 교권의 분열, 14세기 내내 시차를 두고 6차례나 유럽 인구를 몰살시킨 흑사병의 창궐,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빌미로 삼아 영지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시작되어 이후 100년간 이해관계망의 복잡한 얽힘으로 심화 확장되어간 백년전쟁, 이 전쟁의 부산물인 유럽대륙 전체를 약탈 유린, 방화, 살해가 무법적으로 자행되는 예외없는 유럽전역으로의 귀족과 기사계급들로 구성된 산적단과 용병 무리의 확산, 기사도라는 모순으로 점철된 영예와 관능이 뒤섞인 허위의 정신이 야기한 폭력성의 파급으로서 이식된 파국적 발현들, 여전히 기독교 아마겟돈, 예수 재림이라는 유한 역사성에 매몰된 어리석은 도시평민과 농민들의 노예근성 등이 상호 최악의 상태를 향한 암흑, 즉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의 압력으로 질서와 규칙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린 무법의 시대를 목격하게 한다.

 

정말이지 스위스 역사학자 시스몽디(J.C.LS. de Sismondi)의 말처럼 “14세기는 인류에게 좋지 않았던 시기였다.” 한꺼번에 이러한 동시다발의 재앙적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야만으로 복귀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겠다. 대량운송 역량이 없던 시대에 기근은 지역자원에 의존해야만 하던 사람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을 것이고, 거기에 교회의 사악하기 그지없는 약탈적 세금 징수, 전쟁으로 인한 자원 강탈,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불러온 노동력의 가공할 감소, 여기에 일 없는 귀족들이 벌이는 산적단의 약탈과 파괴, 살인 등이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세상이라면 그 누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사실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낯선 문명, 아니 문명이랄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14세기의 헤픈 정서의 이면에는 고통과 죽음의 장관에 대한 전반적인 무감각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교회에서도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은커녕 하루를 견딜 구원조차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도덕성이란 어쩌면 낯선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거듭되는 국왕 등 귀족세력의 오판과 실정(失政)은 체포된 귀족과 국왕을 석방하기 위한 몸값이라는 납세의 부담 증가로 돌아오고,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이 휩쓰는 흑사병은 무의식적으로 인명(人命)에 대한 경시를 조장했을 것이다. 더구나 끊임없이 벌어지는 약탈전쟁과 산적단의 싹쓸이식 집단 학살에 노출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교회는 삶이란 기껏해야 영원한 고향을 향한 힘들고 지치는 여행일 뿐이며, 내세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중에 겪는 유배의 한 단계라는 의식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지상의 삶에서 겪는 잔인하고 참혹한 헤어날 수 없는 형편은 더더욱 축적된 인류의 지식들인 규칙들의 가치를 상실토록 하는 요소였을 것이다.

 

영토의 지배를 통한 권력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폭력을 요구한다. 14세기 내내 유럽 전역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백년전쟁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의 손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3세가 프랑스왕위 계승권의 주장을 빌미로 시작한 영토 야욕, 즉 교역로의 안정적 확보와 생산물 거점의 확보를 위한 침략전쟁이 발단이다. 이것을 오늘날 형성된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부계와 모계의 가문들, 결혼으로 인해 얽힌 가문들, 조약과 동맹으로 결합된 관계들로 인해 유럽 대륙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그들의 영지로 인해 발생하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국가이전의 봉건체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바라 터크먼이 서사의 중심인물로 내세운 대영주 쿠시가문의 앙게랑 7세는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전형적 귀족이자, 기사이며, 소위 산적단(용병부대)으로 불리는 세력과의 그 경계가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앙게랑 7세의 아버지인 앙게랑 6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공국 카타리나 공주와의 결합은 프랑스 국왕과 오스트리아 공작 사이에 두 번의 조약 체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이미 영토와 부와 정치적 거래를 함유하고 있다. 이것은 카타리나를 통한 새로운 영지를 포함하고 막대한 결혼 지참금과 상호 전쟁동맹을 의미한다. 또한 앙게랑 7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국왕의 장녀 이자벨라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산재한 그의 영지는 유럽 대륙 곳곳에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이것이 실체화되는 과정으로서 교황령 회복을 위해 이탈리아 지역을 통과하며 벌이는 전쟁의 양상에서 드러나는 데, 경로의 도처에서 이해관계자들과 마주치게 되고, 분명 적대적 전쟁이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영주의 지역을 지나갈 때면 상호 양해 아래 공격 없이 그저 통과한다거나, 어제의 우호관계가 돌연 상대의 이해관계의 변화로 인해 배신을 당하는 낭패를 당하는 등 그야말로 정상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혼전의 양태를 드러낸다.

 

게다가 교황은 이를 자기 권력의 보호를 위한 대리전으로 삼음으로써 그 혼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교황파(그 속에서도 또 여러 분파들), 국왕파(잉글랜드 국왕파 프랑스 국왕파 등), 그리고 개별 영주의 이해득실의 판단에 따른 내편과 네편의 규정 불가능성은 더욱 전쟁을 난감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난맥상이 역사의 유래가 없는 100년 전쟁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킨다. 이에 대한 피해는 누가 안아야 할까. 고스란히 피지배자들인 농민과 상인 등 평민들이다. 더구나 공식 전쟁이 아닌 지역약탈 전쟁도 쉴 새 없이 발생되는데, 이것의 토대인 당대 기사귀족계급의 정신인 기사도 정신이라는 허무맹랑하고 모순으로 점철된 폭력성과 예절이 결합된 기이함의 발로가 중대하게 작용한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식 전쟁이 일시적 휴전 상태에 들어가면 병력은 갑자기 주 수입원인 약탈수입이 사라진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약탈을 지속하는 소위 산적단이라는 집단이다. 이것의 세력이 어찌나 강력한지, 그 수장들이 귀족의 이름을 하고 역사 기록에 남아있는 이유이다. 전쟁으로 이미 손상이 극심한 지역의 살아남은 곳을 이들이 다시금 유린한다. 이들 폭력성의 궁극적 배경과 관련해서 눈에 띄게 유치하고 잔인했던 중세 행동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억제되지 못한 충동으로 인한 두드러진 무능력의 원천을 주목하게 된다.

 

인구의 절반이 21세 미만이었고, 3분의 114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이다. 각종의 전쟁 지휘자들과 기사들이 대개 20세 전후였다는 사실에서 전장의 잔인한 야수성이 그들의 격렬한 충동의 배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강간, 약탈, 파괴, 방화, 살인. 한 세기 내내 인구를 절멸하다시피 생명을 반복적으로 습격한 흑사병과 이러한 참혹한 야만적 전쟁은 서로 지옥의 형상을 더욱 재촉했을 것이다. 넘쳐나는 시체들과 악화된 생활환경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원인을 모호하게 하며 삶을 더욱 황폐시켰을 것이다. 14세기 중세의 심리란 어쩌면 성장하지 못한 유아성 탈피에 실패한 시대성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교회를 위시한 국왕과 귀족 지배세력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이라는 정신적 부패의 기반위에 전염병과 전쟁으로 넘쳐나는 시체와 굶주림은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며 그 부정성의 끝으로 치달았다.

 

3. 파괴되는 인간의 삶 - 성숙하지 못한 시민 의식

 

앞서 언급했듯 프랑스 국왕 필리프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와의 싸움으로 비롯된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라고 칭하기도 하는 교황청 이전의 배경도 어떤 세속 군주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세금도 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국왕의 조세 부과권은 교황 자신의 승인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황금 독점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이다. 권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은 유일한 거룩한 자인 (자신인)교황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필수라는 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선언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영지가 있던 프랑스 영토 내 아비뇽으로 교황청의 이전을 초래한다. 세입과 모든 통치 조직을 중앙집중화하여 위신과 권력 벌충에 혈안이 되어있던 교황의 무차별적 조세 약취(略取)와 기만적 성물거래 판매 수익, 사면권 판매, 죽어가는 자의 유증 몰수에 이르기까지 그악한 부에 대한 탐닉이 만들어낸 결과다. 조세 부과를 두고 벌어진 싸움의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의 부담이었다.

 

아아,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나는 장차 어떻게 될까? (...) 촌민으로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힘들구나. 태어날 때에 고통도 함께 태어나는 구나 (...) 너희 귀족들은 마치 먹이를 찾는 늑대와도 같다. 너희는 지옥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니...“

 

이렇게 요구되는 것이란 인내, 고통, 체념뿐이었던 농민의 비참은 절정에 이르렀다. 끊임없는 전쟁 자원의 강제부담과 대기근의 굶주림, 흑사병의 반복적 강타. 교회와 귀족 계급의 폭력적 강탈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자행되는 사회는 사실 그리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홉스가 말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말이 여지없이 들어맞는 사회, 오늘의 독자인 내게는 하나의 폭력을 야기했던 극히 사적 탐욕의 추구를 모두가 개별적으로 자행할 경우,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규칙파괴의 압력은 자동적으로 작동된다는 실증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시민이나 농촌 빈민의 저항이 왜 없었겠는가. 1358년 우아즈 강변 생뢰마을에서 시작되어 10만 명에 달하는 농민조직이 교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 소부르주아와 연합한 이 비()귀족 공동전쟁은 기사귀족, 혹은 산적단에 의해 무참하게 도륙되어 한 달 만에 절멸되기도 한다. 젊은 쿠시 영주 앙게랑 7세가 자기 영지의 신사계급의 선두에 나서서 자크들의 절멸을 완수했다.” 이 기록처럼 쿠시의 영주는 자크들이 집결한 클레르몽으로 진격하여 3000명 이상의 농민을 학살하여 저항운동을 압살하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자크(Jacques)는 귀족계급이 농민을 비하하여 부르던 호칭이다)

 

사실 이 농민봉기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변화도 전무했다는 점에서 이미 누적된 죽음만을 더 늘렸다는 사가(史家)들의 평처럼 농민저항자들은 스스로의 심리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아직 그들의 정신이 숙성되려면 역사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리라. 이와 더불어 1358년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국왕의 실정과 추밀관 등 왕의 측근들의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상인들로 이루어진 제3계급의 개혁운동도 있었다. 시민지도자인 마르셀의 도시 파리 성벽의 수호를 통해 국왕을 비롯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실정과 부패의 시정에 접근했지만 내부 지지자들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좋은 정부를 향한 꿈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린다.

 

바라바 터크먼은 이에 대해 짧은 논평을 하는데, 프랑스 국민은 군주제를 제한하려는 시도를 지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시민대중의 인식능력은 시대의 문화를 호령하고 사회구조 깊이 뿌리내린 제도 종교인 기독교 천년 지배가 만들어놓은 수동적 삶을 떠날 수 없었을 게다. 삼부회의 권리가 사라지고, 이들이 결의했던 개혁법 조항들은 페기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왕실은 절대왕정 시대를 누리며 더욱 왕권이 방치되는 것을 우리들은 안다. 시민대중은 모든 문제, 즉 과도한 세금, 부정직한 정부, 변조된 주화, 군사적 패배. 산적단의 도적질, 자국의 영락한 상황 등을 황실의 사악한 추밀관과 비겁한 귀족 탓으로 돌렸으며. 국왕이나 왕세자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이러한 역사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역사의 발목을 잡는 시민적 몽매성이라는 수구성의 본질을 보는듯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4. 결어 - 파국의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

 

600년 시차의 먼 거울인 14세기 보증된 미래에 대한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던 고통의 시대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시민 개혁운동의 실패의 과정에 주목했는데, 오늘 우리들이 경계해야하는 것은 실정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던 삼부회의 지도자 마르셀이 자신의 지지토대인 시민집단에 의한 피살로 끝났다는 이면의 실체이다. 이러한 살해집단의 심리적 본성은 아렌트도 지적했듯 오늘날 파시즘으로 지칭되는 것, 특히 전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강자 동일시의 유해한 감정이다. 자신들은 분명 피지배 계급임에도 왕족과 귀족, 성직자 계급의 그 약탈적 폭력성과 진실을 호도하는 은폐된 탐욕에 자신들의 권한을 떠넘기는 노예근성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떠도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취약한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쾌락을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교회가 그 금지를 파열시키는 주체였기에. 금전과 소유에 대해서라면 14세기보다

더 관심을 쏟았던 시대가 없었으며, 이른바 육()에 대한 관심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또한 타락의 극한 지점까지 치달은 그들만의 폐쇄된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결탁하여 사회를 밑바닥까지 좀먹었던 중세 교회는 오늘의 한국 개신교마피아나, 사법카르텔, 언론 카르텔 등 기득권으로 결탁한 세력처럼 이 사회가 오랜시간 축적한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들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악성 요인의 실체를 보여준다. 혼인과 동맹과 이해거래로 혼란스럽게 엮인, 폐쇄된 카르텔 네트워크로 형성된 14세기 유럽의 귀족들이 보인 양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 세계의 파국을 만들어내는 대표적 원인임을 증거 한다. 혈연과 이해(利害)로 얽힌 관계에는 정의(正義)의 윤리가 들어서지 못한다. 즉 규칙과 질서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한 세계에서 대중의 삶을 실종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침몰을 맞이하게 될 때, 중세의 사람들처럼 아마겟돈이라는 최후의 전쟁 승리로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라는 망상의 기다림 같은 것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힘겨운 고통의 나락에 젖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공국의 왕과 대영주 귀족들이 그네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전쟁이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평민들의 무고한 죽음과 삶의 기반 상실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전쟁을 야기한 지배계급은 어떻게 행동했나? 끊임없는 강탈과 협박, 살해의 위협 아닌가 말이다. 그들 지배계급은 그 오랜 소모적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의 기록에는 휘황찬란한 궁중과 금을 입힌 산해진미의 성찬 아닌가. 죽을 때까지 쥐어짜여지는 평민과 농민의 한탄이 무얼 말하고 있는가. 전쟁의 폭력을 미화하고 그 야만적 폭력에 환호하는 심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저술의 제목이 "A Distant Mirror"인 것은 이 야만과 파국의 역사를 오늘의 우리들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기를 바라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 역사 속 인간의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인간행위의 그 반복성에 대한 경고의 선언인 것이다. 역사는 우리들의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발견된 모습으로부터 자기 인식의 지평을 돌보아야 할 것이라 믿는다. 세세하게 서술된 방대한 이 역사저술의 미흡한 감상에 머문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내 능력의 한계이다. 독자들은 흑사병, 십자군 전쟁, 교회의 타락, 세금, 노역, 노예제(봉건제)등 사회구조의 붕괴와 함께 결혼, 출산, 노동, 성 역할 등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의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인간의 심리와 정치적 긴장을 극적으로 직조해낸 이 저술로부터 무한한 영감과 반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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