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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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다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내게 상처를 줬다. 끝까지 웃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본문 9쪽 중에서

 

말을 더듬는, 싫어하는 단어 앞에서 그 첫음절을 입 밖으로 토해내지 못하는 열네 살 중학생 소년이 타인으로부터 "너 진짜 말 잘한다."는 진심의 칭찬을 듣기까지 때론 회피하고 주저앉았다가 다시금 마주하고 행동하기도 하며 '감정의 긴 터널'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다.

 

자신에게 말 걸어주고, 친절한 모든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그것이 지속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과 세상에 속았다는 증오로 변질되고 그 회의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속으로 외친다. 자신을 향해 주문을 왼다.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 절대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라고.

 

이보다 처절한 소외와 단절의 외침이 어디 있을까. 소년의 엄마는 "밝게 인사하며 전화기에 힘을 다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114교환원이다. 홀로 고투하며 말을 더듬는 아들이 유창하게 토해 내기를 기대하며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힘겨운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이 아이가 기대하는 그런 엄마이기에는 결여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소년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 주지 못하는 엄마이지만 정작 교환원으로서 타인의 말을 살갑게 들어주는 그 의무적 일로서의 행위가 자신에게 향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문장은 괜스레 방향을 잃고 두근거리는 방황하는 가슴을 쥐어 잡게 한다.

 

소설 표제인 '내가 말하고 있잖아' 라는 문장의 진의가 '제대로 귀 기울여 들어줘'라고 들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간절한 청으로 들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작품 대부분의 서사를 이루는 무대로서 '언어 교정원'은 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모임처럼 느껴진다. 이들에게는 한 달씩 사용할 이름이 가슴에 붙여지는데, 가장 말하기 힘겨워하는 단어가 이름이 되기에 그것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상징어이자 곧 원인이다. 루트, 핑퐁, 피츠제럴드, 모티프, 처방전, 곰곰이, 24..., 그리고 소년의 이름은 그의 중학교명인 무연에서 엄마, 우주... 그리고 용복이로 바뀌는데, 직면한 고통의 거처, 극복해야 할 상황이자 사건의 까닭이다.

 

"더듬는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더듬어.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듬는 모습 그대로도 괜찮으니까." - 본문 71쪽 중에서

 

엄마, 들어주길 기대하는 엄마는 날건달 옛 남자를 집으로 들이고 함께하기 시작한다. 소년은 원장의 제안으로 시작한 일기에 쓴다. '쓰레기'가 죽이고 싶도록 싫다고, 그리고 엄마도. 쓰레기가 뱉는 폭언과 무자비한 폭력이 두렵다. 더듬어 한 글자도 뱉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읽기를 시키곤 조롱하며 빈정대는 국어 선생이 밉다. 복수와 용서를 오가는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질 길이 없어 소년은 날이 밝도록 밤새 쓰고 또 쓴다.

 

자신을 죽이고 싶다고 쓴 소년의 일기를 훔쳐 본 쓰레기가 머리를 감싸 쥐고 경찰을 향해 피해자라며 소년을 피의자로 몰아대는 장면, 말을 더듬어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는 소년의 난감함, 무력하기만 한 엄마, 아마 소설 속 이 장면과 이어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는 고조된 감정 탓으로 잠시 책 장을 덮어두게 한다. ~, 142쪽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금 책을 펼친다. 엄마였으면 하며 바라보던 교정원 동료인 이모를 비롯, 원장, 아르페지오, 24... , 그들이 달려왔다. 들어주고, 아픔을 함께해 줄줄 아는 사람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그 무엇이 사랑일까.

 

"문장을 바꾸면 사실이 달라진다. / 표현을 수정하면 감정이 나아진다. /

.... / 다음을 쓰면 미래는 생겨난다." - 작가의 말, 162쪽 중에서

 

'소년의 팔목과 목의 상처, 강하게 누른 멍, 찢긴 피부'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로 몰아대는 쓰레기의 주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경찰의 조사태도가 전복 될 때, 정말 불순물이 쫙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느꼈다는 기분에 잠긴다. 아마 내겐 두고두고 기억 될 장면이 될 것 같다. 그리곤 소년은 "노트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글자를" 쓴다. "많은 사람으로 많은 감정을 느끼는" , 어지럽고 피곤하지만 좋고, 시원한 기분이 소년을 감싼다. 작가의 말처럼 꾸미고 지우고 바꿀 수 있는 이야기, 내 삶의 이야기는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소년과 언어교정원 그의 동료들을 응원하며, 한편으론 그들로부터 위안을 받으며 읽게 되는 쓸쓸하면서도 마음의 어떤 단단한 구석을 만나게 되는 그런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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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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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숲길이, 한 때 세상에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숲이 있었고, 이 곳이 그런 곳이었다." -156

 

터무니없이 잔혹한 폭력이 지극히 무심하게, 세상 어느 곳에도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오직 어두운 욕망만을 따르는 인물을 쫓게 된다. 아마 '하데스에서 솟아오른 영혼'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어울리는 비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도입부에 색슨과 켈트 혈통의 이 살인마를 "아마도 당신과 다를 바 없을 '하느님의 자녀(child of God)'"라고 정의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이 정의가 괴물을 괴물로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거북함이 된다.

 

밤의 더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면 그곳을 찾아냈을 인간, '레스터 밸러드', 이 자의 시야에 들어 온 여자들의 삶은 더 이상 연속되지 않는다. 시간(屍奸),살인, 방화(放火),유기(遺棄)를 일상으로 하는 종자다. 추악한 배설을 위해 시신을 소유하는 괴물, 그리곤 불타오르는 자신의 거처인 미늘벽 판자집을 뒤로 하고 동굴에 은신처를 마련한다. 레스터는 "자신이 신들에 대항하는 매우 통탄할 만한 사례"라는 자신의 생각이 반쯤은 맞다고 믿는다.

 

사실 이 소설의 도입부야말로 이해 불가능한 괴물의 행위를 납득케 하는 단서일지도 모르겠다. '서비어 카운티'의 아무 소리도 없던 골짜기의 목가적 아침을 흔들어 깨운 것은 탐욕스런 부동산 경매를 위해 몰려든 일단의 무리들이 레스터에게 저지른 폭력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선하신 주님이 세상에서 딱 몇 군데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레스터를 쫓는 보안관에게 들려주는 한 노파의 말처럼 추방되어 되돌아 갈 수 없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었을까?


 



"그를 보라. 그는 같은 인간들, 당신 같은 인간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190

 


인간이 저지른 원죄로 더렵혀진 곳, 레스터를 덮친 무시무시한 영혼이란 특수한 것이 아니라는 각성의 촉구인가? 소설은 강렬한 충격들과 어둡고 구불구불한 텅 빈 돌 틈새의 동굴을 헤매는 구원을 향한 신화로 해석하고픈 충동으로 변질시킨다. 암흑의 동굴에 포위되어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의 유일한 빛인 "시원찮은 손전등 빛줄기가 축축한 벽을 따라 떨어져 내리다 무()와 밤에서 끝나고 멎었다."는 레스터의 생각은 구원의 실패인가?

 

비인간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제도와 규범 등 문명과 충돌하며 발생되는 비열함과 잔혹함의 서사 끝에 어둠의 동굴에 도망해 "아침 틈새의 빛", 계속해서 "동쪽을 살피"고 마침내 자진해서 출두한 인간들의 법정이 심판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 없는 죄로 처형되고 마는 카프카의 소설 '요제프 K'의 역설적 판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잔혹한 살인자의 암울한 욕망으로 연결된 서사에서 문자로 서술 될 수 없는 신비, 말 할 수 없음으로서 드러나는 죄와 심판의 문자적 죄 물음이 실패하는 결말은 '죽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낙원의 인간'이었다는 카프카의 의심의 여지없는 죄와 닮아있다.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죄의 구원이나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긴 한가? 이 폭력적 이야기 끝에 만나는 법의 결합은 성공한 것만 같다. 카프카는 실패함으로써 인류 기원의 표현 할 수 없음이라는 실패를 보여줌으로써 성공적 소설을 썼다. 코맥 매카시는 에덴에 돌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 태생적 비열함을 떨어내고 무구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심판이 지닌 내재적 신비성이 지닌 단죄의 불가능성이라는 또 다른 실패의 표현인가? 결코 단순치 않은 인간 기원에 대한 또 하나의 독특한 서사시의 출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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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0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영목님이 번역하신 매카시는 믿고 구입합니다!

이책 첫 문장 부터 강렬하네요
찜!👆 ^^

필리아 2021-10-07 18:45   좋아요 1 | URL
네,,극단적일 만큼 강렬한 작품이지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 주제들(THEMEN) 시리즈 2
게르하르트 노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에디투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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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도 알 수 없고 사건을 일으키는 특별한 계기도 없는 소설, 독자들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접하면 허둥거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것일까? 독해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카프카의 이야기에 매양 빠져드는 이유는 이 실패가 무의식에 침전된 찌꺼기를 건드려 삶의 무엇인가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이 실패의 충격에 동화되는 알 수 없는 감응의 매혹일 것이다.

 

"인류사의 기원은 이야기기할 수 없습니다. 사실과 목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학의 이러한 본질적 아포리아(Aporia)는 카프카에게도 해당합니다." -26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이라는 긴 제목을 한 이 책은 해독에 지극히 곤란을 겪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사실과 목격자도 없는 인류사 기원"에 대한 저항이라는 단서와 "현대의 근본적 방향 설정의 위기에 대한 표현"이란 두 개의 커다란 관점으로 이해하려 하고 있다. 칸트는 증거도 기록도 없는 인류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원죄를 안고 시작했던 아담과 이브의 사건이라는 '성서'의 서사적 기록으로 시작했다. , 칸트는 "인류학을 인간의 타락과 죄"의 대물림이라는 저주를 이성이라는 계몽의 기회로 바꾸는 시도로 삼았다는 말이다. 결국 원죄란 이성을 잘못 사용한 인간의 책임이므로 스스로의 계발을 통해 점차 좋은 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낙관적 인류학을 펼쳤다.

 

한편 이러한 칸트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발터 벤야민' "제도의 세계, 몸을 규율하는 건축의 세계, 이유없는 죄의 세계"로서 인류학을 전개한다. 그런데 바로 이 원죄, '이유 없는 죄'는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카프카는 이 죄의 문화, 일종의 수치의 문화를 쓰기위해 글을 썼다는 관점이다. 기원은 같지만 칸트의 출발지점과는 반대되는 지점,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 다시 말해 근원적 불안(이유 없는 죄)에 시달리는 시지포스적 고통스런 인식에 천착했다는 것이다.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해명하는 과정이랄 수 있다.



1. 미완성 교양소설 3부작

 

"카프카가 자신의 실패를 강조하며 보인 열성보다 더한 열성은 상상할 수 없네," -게르숌 솔렘(Gershom Scholem), 49

 

실패는 카프카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에는 인생 경력에서 전형적으로 실패하는 주인공들이 즐비하며, 한편으론 이러한 망가진 경력을 표현하는 문학적 형식에 실패하고 있다고 벤야민은 지적한다. 미완의 장편 소설 실종자』 『소송』 『 세 편은 인생 경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교양 소설 삼부작'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자연으로서의 유기적 성장 모델과 제도적, 규율적인 건축적 구성 모델과의 충돌에 좌초하고 만다. 세 작품의 주인공인 'K'기호가 붙은 동일한 인물인 '카를 로스만',"요제프 K', 그리고 'K'는 모두 "성적, 경제적, 가정적 경력을 계속 이어가려"하지만 카프카는 "수치스럽고 비루한 글쓰기 상황에 처했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미완에 그치고 만다. 삶의 위기를 순간적으로 압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는 '비유담(전설 혹은 설화)'의 문학형식을 빈 단편에 집중하게 된다.

 

벤야민은 이 "실패의 근저에는 세계 인식의 패러다임 변화가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상보(相補)적 세계에 살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통합 할 수 없는 두 세계, 과학과 신비주의가 현대세계를 규정한다고 이해한 카프카는 이 통일 불가능성의 세계, 분열된 세계가 유발하는 충격속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일로서의 쓰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삶을 통합적으로 표현하는 데 실패한 이는 전통적인 문학형식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고 이러한 실패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형식으로서 비유담으로서의 단편을 썼다는 것이다.

 

실패를 초래하는 충격이란 (1)이유 없는 죄의 세계에서 깨어나는 당혹감, (2)인간 자기 내부에서 동물을 발견하는 다윈주의가 유발한 모욕감, (3)낯설어진 관료주의와 제도, 그리고 (4)유기체와 기술코드의 비정상적 마주침의 경험이다. 아마 소송의 도입부에서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요제프 K'가 듣게 되는 체포의 소식이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원숭이 '빨간 페터', 황제의 메시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궁궐의 문, 가장의 근심에 등장하는 오드라덱이나 유형지에서의 처형기계를 떠올리면 이러한 해석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2. 실패를 확신한 성공

 

카프카에 대한 독보적 권위자인 이 책의 저술자 '게르하르트 노이만'은 바로 이 실패의 과정이 곧 성공의 도구였다고 주장한다. 문학 형식과 삶의 성장 모델 건축의 실패, 카프카의 아무런 구원도 없고 메시지도 없는 소설이야말로 "인류사와 인류 문화 기원을 표현할 수 없다는" 충격의 표현 그 자체이며, "해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전복적 혹은 내재하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나 역설)"라는 것이다.

 

소설 실종자의 첫 챕터인 화부에는 주인공 '카를 로스만'의 아버지로부터의 추방과 미국향 선박에서의 시초가 된 이야기의 억압과 원()장면을 서술하는 데 거듭 실패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현대 주체의 이야기를 과연 서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거듭되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 개인의 고유성이란 양도 될 수 없는 내밀성의 코드로서 서술이란 해결 할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것이 카프카 문학의 핵심 전략이란 것이다.

 

실패의 싹이 처음부터 내재하는 소송'요제프 K'가 일어나는 장면부터 마지막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점점 자라난다. 이 소설을 읽었던 기억을 되살리면 정말 그로테스크한 희극성에 의해 일상적 삶의 소소한 모든 의식들이 마비되어 가는 것의 기이함에 사로잡혔던 느낌이 되살아난다. 첫 챕터는 주인공의 자아의식을 붕괴시키는, 이른바 실패 장면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제프 K'의 정체성 의식을 제공하던 아침식사를 체포하러 온 두 남자가 먹어치움으로써 아예 난국 타개의 논거를 없애버리는 정체성 위협에 대항해 K가 침대에서 사과를 먹기 시작하는 장면은 신의 금지에 대항하는 멋진 해방극으로 기억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의식의 안정화 기능을 파괴하기 위한 공간에 대한 글쓰기라는 해석에 부합한다고 할 수도 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질서의 틀이 실패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마치 유효한 것처럼 취급합니다." -151

 

인간 주체와 자의식의 세 가지 모욕이자 자아 무력화의 학설로 코페르니쿠스 혁명, 다윈주의, 프로이트 정식분석을 들곤 한다. 책의 저자는 여기에 카프카적 변신을 추가한다. 가장 급진적인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문화의 두 가지 방향 설정 위기에 대한 촛점 맞추기라 한다. 즉 진화 패러다임과 건축 패러다임의 마찰, 다윈주의 논리와 삶의 교육학적 논리의 마찰, 자연적 흐름과 인위적 시스템의 충돌에 대한 통찰로서 카프카는 인간을 경계적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변신'이나 '동물'은 문학적 모티프가 아니라 성장과 구성의 경계를 매개하는 앎의 매개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정체성에 동물의 타자성을 통합함으로써 인간을 정의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란 자기 안의 동물 없이는 스스로를 이해 할 수 없다는 경험의 연출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카프카의 소설들은 서사의 일관된 요약이나 해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무수한 방해 장치들로 겹겹이 쌓여있다. 벤야민은 이를 "자신(카프카)이 겪은 실패의 어려움, 필요성을 독자들이 체험"하게끔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저자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논리와 해석, 그리고 인용된 작품들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금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민감한 감각과 깊은 안목을 지닌 이 독보적인 카프카 문학의 비평서는 무지의 영역에서 상당부분을 앎의 영역으로 이끌어 준다. 문학적 미덕으로 넘쳐나는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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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호 : 권위 인문 잡지 한편 6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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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크기는 인정의 총량과도 같다. 그렇게 축적된 인정을 사유화 할 때 권력이 발생한다." - 정경담, 권위에서 탈출 하는 길, 107

 

'권위(authority)'의 정당성에 균열이 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의 오랜 역사 내내 인정되고 존중되던 정당하다고 인정되던 권위를 지탱하던 많은 기준들이 더 이상 그 효력을 잃었거나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세상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아버지가 지니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는 이젠 격렬한 거부감과 혐오의 언어가 되었으며, 양반이라는 케케묵은 상전노릇은 천박함과 고루함를 일컫는 명사가 된지 오래다.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고위 관직에 붙어 다니던 권위는 지탄과 경멸의 언어와 다르지 않으며, 전문가에 인정되던 지적 권위도 온라인에 깔린 정보의 평등화에 따라 '너나 나나'와 같은 지식 폄하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보이고 드러난 권위의 상실 또는 해체 이외에도 굳이 관찰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작동되고 있는 무수한 권위에 대한 물음이 지속되고 있다.

 

펴낸이 김세영에 의하면 권위란 "설득되어 따르는 이의 인정과 자발적 복종을 야기하는 강제없이 작동되게 하는 힘(8)"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 생활 속에는 지위에 따른 부당하거나 불편한 행위의 요구에 '아니오'라고 저항하기가 만만치 않은 순간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권위를 "낡아빠진 질서의 자기 보존(13)" 욕망이라고 새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쯤 되면 매일 매시간이 기존 권위의 부정을 향한 몸부림이 되고 만다. 어제는 오늘에서 낡음이다. 어제의 질서와 제도는 오늘 부인되어 새로운 것이 그것을 차지하고 그러자마자 다시금 부정되는 혼란이 계속 된다. 딱 지금의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가치의 상실과 정립 불능에 시달리는 정치적, 사회문화적 현실의 모습이다. 인문잡지 한편6호는 '권위' 를 주제로 10 개의 시선을 담고 있다. 이 감상의 글은 저항감을 야기한 몇 꼭지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비판은 길고 공감은 적은 글이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왕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제목의 조선조 예송(禮訟)사건을 빗댄 전() 서울특별시장 고() 박원순의 장례식장 일화에서 건져 올린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언어를 "정파적 권력 그 자체"로서 부정되어야 할 권위주의 산물이라 주장하고 있다. "권력의 정치 앞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망각된다.(37)"며 여전히 한국 정치사회는 예송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전 대표가 "예의를 지키라"라고 쏘아댄 말은 고인의 성추행에 대한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그 무례함에 던진 충고의 변이다.

 

이것은 인간 개인에 대한 예의범절을 지칭한 것이지 서울시장 장례식 범주에 대해 한 말이 아니다. 이 왜곡된 비판의 시선에는 이미 고인에 대한 낙인이 찍혀있다. '성추행 범'이라는 낙인 말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부정적 속성으로 이끄는 '낙인'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사회구성원들의 "(1)눈길을 끌어서 그것을 지닌(낙인) 사람의 인격의 다른 측면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고 관계의 불평등성을 만들어내는 이 편견을 비판하였다. 이해찬 전 대표의 말은 권위주의의 소산도 아니요, 인민에 대한 무례함도 아니다. 낙인찍은 인간에 대해서는 그 인격을 무시해도 된다는 여성주의자의 독단이야말로 시대 언어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권위의 발산은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결혼 여성의 돌봄 노동에 씌워진 남성 권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로 돌보는 법을 알아가기'돌봄 일지 만들어가기'의 살벌한 가사 부담의 평등성에 대한 논의, 결혼 부부에 대한 "출산 지원책은 불안감만 증폭시킨다(56)"는 변에 이르기까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주장은 즐비하다. 결국 주장의 논지는 "일부 사람들만이 작은 예외를 구현하며 만족하라는 메시지(57)"에 대한 거절의 변이다.

 

돌보는 사람에 대한 특별정책(출산율 장려책)이 기혼자에게만 취해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혼자를 위한 형평성에 맞는 지원책을 마련하라는 '완전평등주의'의 요구이다. 그런데 출산 장려책은 사회적 약자나 국가미래를 위한 부양 정책 등의 형평성을 향한 시책의 하나이다. 예로서 저소득층에 지급하는 기초생활비를 모든 사람에게 지급해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분배정책을 왜곡하는 나쁜 제도가 된다. 하루 8시간 정신노동이 피곤하니 비혼 여성에게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외면적으론 평등 같지만 차별의 다른 논리이다. 세상을 같이 사는 동료로서 인민을 생각하자는 논자의 변이 궤변이 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이 아닌가?

 

하나만 더해야 겠다. 중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라는 글은 중국의 김치,한복 등 문화공정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을 '르샹티망'이라고 단정하는 주장이다. "근원적 열등감을 원한으로 바꾼 '노예의 심리'"이며, "국력신장으로 비대해진 자아의 공격성"(120)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부활하여 인민 다중의 무의식에 중국에 대한 권위가 각인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과연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중국에 대한 권위란 것을 갖기나 하고 있을까?

 

아마 대다수의 한국인은 중국을 문화적 후진국으로 인식된 앎 이외에 알고자 하는 의식조차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인을 겨냥할 때부터 잘 못된 것같다. 마치 객관적 시점을 지닌 국외자의 위치에 서려할 때부터 글은 꼬이기 시작한 것 같다. Q의 정신승리는 오늘 중국인의 화법에서 무진장 발견 할 수 있다. 한국인의 반론이 친미로 비칠까봐 조심해야한다는 주장처럼 사대적인 발상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의 태도가 친미적 성향이 짙어져 한국이 곧 미국의 대리인이라는 인식을 중국에 심어줄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굳이 타자의 불안한 양가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간병 없이는 치료도 없다.(...)질병 진단은 고통의 반향을 향해 기울어질 줄 아는 기예(art)를 요구한다." - 73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권위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말하는 인류학자 서보경 교수의 살리는 일의 권위는 뉴노멀을 말해야 하는 오늘에 중대하고 긴요한 논지를 전해주고 있다. "타자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상태(64)"가 바로 돌봄의 형태임을 알려준다. 우리의 몸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몸은 대상을 향해 기운다. 간병 노동자의 하루를 관찰하며 "무릎을 굽히고, 등을 구부리며, 팔을 뻗고, 몸과 마음을, 눈과 귀를 기울이는(70)" 돌봄의 철학을 헤아린다. 방치, 학대, 폭력은 이 기울임의 관계성이 결여 되는 순간에 오는 것임을 격하게 공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꾸로 되었다. 의료를 돌봄과 관계없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의료 발전인 양 여기는 의료 상품화, 즉 물신화 과정만을 중시한다. 결국 간병의 영역은 별개의 하위영역으로 설정하여 지속적인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함에도 헐값의 하찮은 일이 되는 직업에 씌워진 가공의 권위를 이제 대전환시켜야 하는 시대에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 볼 일이다. 그래 "치열한 상징투쟁과 전복"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터이다.

 

끝으로 지위와 연구능력이 부조화한 오늘의 한국 대학의 권위주의를 해부, 비평하는 김미덕 교수의 대학 조직과 연구의 원칙은 편집자가 정의한 권위의 정의를 재정의하게 돕는다. 사실 정당하다거나 인정되었다는 말에 이에 동의하는 타자의 선행이 있다. 그런데 대학이란 좁은 틀은 이들 타자가 하는 권위 부여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한다. 처세술 등 기회주의적 태도와 학연, , 관계망이 만들어내는 한국 대학의 현실은 소위 "탁월한 연구"가 나오지 않는 가장 중대한 이유이다.

 

서구 지식의 어쭙잖은 소개로 권위를 지니고 지식인입네 행세하는 형국에서 무슨 창의성과 탁월성이 출현 할 수 있겠는가? 고작 대중적 지식의 재생산으로 추종세력을 거느리는 천박성이 휩쓸고, 속칭 우라까이에서부터 제자의 연구를 도둑질하는 현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허위적 권세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 우리 사회의 형국을 대변한다. 권위에서 탈출하는 길을 사유하는 영상 비평가 정경담의 글이나 수평적 권위, 즉 안정과 존중의 가치에 방점을 둔 권위를 말하는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진새의 글은 새로운 권위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일종의 방향등 역할을 해준다. 기존의 질서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찾는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이 작은 인문잡지가 그 어두운 강을 건너는 희미한 점멸등이 되어 줄 터이다.

 

 

(1): 출처: 김현경 , 모욕의 의미122, 사람, 장소, 환대, 2015. 3,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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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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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 老子,도덕경,七十三章

 

 

나는 이 소설을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었다. 설혹 그것이 꿈의 기억이고 중음신(中陰身)의 유령이 들려주는 이야기일지언정. 역사 속 인물이 꿈꾸었던 세상, 그것을 좌절시켜 온 파렴치한들의 세상이 여기 있다.

 

반민중(反民衆)집단의 뿌리 깊은 탐욕과 몰염치, 기만성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 땅을 지배하는 한 축으로 작동하며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방해되는 그 어떤 상황의 전개에도 발악적인 혼돈으로 맞서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대한 4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바로 기득권의 항구화에 저항하는 민중을 살해하는 권력에 의해 벌어진 참담함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서 세월호의 어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권력이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의 분노를 향해 드러낸 특권과 무책임과 무례와 오만이 범벅된 잔혹함의 역사이다.

 

동학혁명으로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봉건제의 모든 악폐를 척결하고 무고한 농민에게 평등한 인간의 삶을 주려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을 기다리던 옥사의 어느 날이며, 양반과 지주, 친일 부역자들에의해 핍박받던 민중의 절망과 분노가 만들어 낸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권력에 의한 처형의 몇일이며, 특권과 우월의식에 잠겨있는 검찰 집단의 개혁에 앙심을 품은 정치 검사들과 수구 기득권 정치집단 및 조선, SBS등 언론기득권이 결탁해 망신주기와 조롱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내몬 몇일이며, 가난한 시민이 아이 하나 낳기 힘든 사회조건에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한 아이가 무고하게 수장된 아련하고 아득하기만한 기록이다.

 




역사적 상황이 한 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2021년 오늘에도 친일 부역자의 떨거지들이 정치권력이 된 정치 검찰 집단을 옹호하며 정치공작 운운하고, 여전히 그악스럽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반민족, 반민주를 위해 민족지사들을 암살하고 오직 권력과 부의 축재에 혈안이 되었던 모리배의 후손이 패거리를 이루고 민중의 원()을 호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사람이면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에 사람답게 살기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 사람들을, 그걸 보아버렸는데 어찌 본 적없는 것처럼 굴 수 있단 말인가."  -267

 

이제 불온한 반민중 기득권 집단의 패악질을 분간할 줄 알게 된 민중은 쥐죽은 듯 있을 수만은 없다. 동학혁명에 참여 했다고, 의병에 동조했다고 노륙당하던 전봉준이 살던 시대가 아니며, 반민족 행위자를 두둔하던 이승만과 한민당의 친일 독재세력이 민중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승만의 탐욕스런 권력욕이 외치던 빨갱이 타령은 바로 지금에도 수구정당의 무리들로부터 여전히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동학 농민군의 접주들을 효수하여 저자거리에 내걸던 그 악의를 전봉준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목도 전국방방곡곡에 내걸려 민중의 정신이 일깨워지기를 갈구했다. "작은 복을 지어 마침내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나(150)"라며 옥중(獄中) 청년 '김해원'에게 권력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변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 짜내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던 일제하의 지주와 친일 부역자 등 반민족적 모리배의 작태가 잉태한 공산주의자의 출현은 이 땅의 아픔이다.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정치 검찰은 적의를 품은 채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여느 잡범 취급하며 수구 언론을 이용하여 심문 기록을 흘리며 모욕적 언론플레이를 하고, CCTV를 통한 중수부장의 치밀한 통제 하에 민중을 농락했다. 이 천박하고 사욕에 가득한 집단의 공작 정치 버릇은 2021년 지금까지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 평검사와의 회의 후 "천박한 교양과 특권의식, 무례함과 오만으로 그득한 그들은 기득권 포기 생각이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니 작금의 현실에서 이 언급의 긴급성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중음신이 되어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전직 대통령의 그 날의 정경을 말하는 해원의 시선을 좇다보면 그 쓸쓸함의 기록들이 분노가 되어 되살아나기도 한다. 간악함과 탐욕과 파렴치와 기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 이런 세상에 부모의 사랑으로 키워진 소녀가 이유도 모른 채 검푸른 물결에 내동댕이쳐진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한다. 민중, 시민의 생명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개,돼지 정도로 아는 수구집단의 망령됨이 끝없이 지속되는 이유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순박하고 어리석기만한 우리네에게 부정의에 생을 달리하여야만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온기를 옹색하게나마 쬐는 시간이 된다. 이 좌절된 꿈들, 실패, 그리고 또 실패. 그러나 혁명이란 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촛불혁명의 민의는 지금도 아주 작지만 전진하고 있을 게다. 반동의 힘을 물리치는 오랜 시간의 중단 없는 투쟁을 계속하여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언어로 기술된 소설적 기억을 현실의 역사로 읽는 누를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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