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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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  -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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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고백록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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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작가일기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작가일기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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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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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드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20071015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출판사 P.O.L에 송고한 유작이다. 아니 유작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서이다. 한 사람의 삶을 응축 글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라는 편집자의 말은 일생을 끝장내기에 앞서 이글을 써내려갔을 르베의 의지와는 다른, 마치 이 글을 자살의 실천을 증언하는 글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음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석함이며, 삶을 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다독임의 유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살이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이라는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고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 살해를 더는 회피할 수 없도록 한 이유 속에서 그것에 이르지 않을 틈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르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제3의 목소리로 그저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또한 삶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그 부조리함 속에서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인식한 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한 실현임을 그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그 어떤 설득의 장황한 설명도 없으며, 감정적 광기의 열정도 없다.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자의 이 곳이 아닌 그 어떤 저곳, 진정 생명력이 들끓는 곳, 죽음이 삶을 구현한다고 믿은 자의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실천적 행위였음을 그저 시선으로 쫓을 수 있을 따름이다.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 르베의 삶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명석한 고독을 따라가다 절망적 확신 속에는 이미 반항이 있다는 카뮈의 말, 생에 대한 희망의 찬가가 얼마나 허약한 웅변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정성을 명료하게 인식하며 끊임없는 투쟁의 성실함,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희망차게 역설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로의 복귀는 아무런 유혹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메마른 불모의 길에서조차 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 초인이 지닌 꺾이지 않는 희망은 대체 어디서 출현하는 것일까? 공허로 더욱 가득해지기만 한다. 인간 개체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 삶을 끝장내는 죽음이라는 원초적 부조리를 삶에 껴안고 그 불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내야 한다는 카뮈의 영웅적 삶이 과연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르베는 자신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내면의 생김새, 취향, 사교 관계, 일화적 사건들의 장면들을 통해 진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음을, 다른 쪽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여기보다 나으리라 확신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 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이 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인 자가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은 진정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고 카뮈는 비난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항력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긑판왕인 ()의 측량기사 K 조차도 반복되는 실패의 여정을 거듭하고 마침내 도덕과 논리, 정신의 진실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비정상적인 희망이라는, 부당함과 증오의 뒤에 무관심한 얼굴을 한 신의 은총이라는 사막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카뮈는 이를 부조리에 굴복하고 신의 세계라는 비약으로 향했다고 카프카의 소설을 부조리의 소설에서 제외하려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그 모순의 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생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조리든 모순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산 자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병사이건, 사고사이건, 자연사이건 간에 그저 동일한 끝이라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정말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끝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가장 부조리한 극한의 몸짓 아닐까?

 


르베는 자신의 자살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진화의 우발적인 흔적인, 결함이 있는 고리였을 것이다. 다시 꽃이 피는 운명을 지지 않은 일시적인 변칙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자연의 당위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열거해본다. 산다는 것의 피곤함과 그를 따라다닐 흔적에 대한 거부감, 공허함, 그리곤 자살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삶의 죽음이었으며, 자살은 죽음의 삶의 구현이라고 믿게 된 인간에게 일생이라는 유한한 시간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희망을 주는 환상들(영원성에 대한 믿음 등)을 거부한다. 그는 어쩌면 폐허의 미학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되지도, 관리하지도 않아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은 앞선 떠남의 음성적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르베에게는 자살이란 이처럼 부조리의 철저한 긍정이지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의 부정이 아니다.

 

흐린 날씨, 겨울, ,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자신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의 조건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논리나 현상학적 정당성의 변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죽음의 부정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자들의 행위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 유서의 마지막에 아내와 지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 있으며, 물론 이 유감의 표현은 우리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고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자살의 이기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자살을 앞둔 그에게 가장 고심을 안겨준 것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오늘을 소모하는 연기(延期이자 演技)는 아마도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에게 진지한 철학적 유일의 문제는 인생이 굳이 살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의 선언처럼 이 질문 뒤에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살아내던가, 아니면 결정적 행위로서 끝장내던가 하나의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살아내기로 했는가? 그렇다면 세계의 부조리함에 넋두리는 소용없으니 그 모순을 안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의가 고통을 안길지언정 저 시지포스처럼 캄캄한 산의 광물조각 하나도 하나의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입증하는 인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르베의 이 아무런 자기 정당화도 없는 글에서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작은 균열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인간은 정말 항상 잘못 판단하는 존재인가? 정말 최악은 무엇인가? 존재의 강약과 광협은 어떻게 인식되는 것일까? 내 존재의 가벼움과 협소함이 더 없이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르베와 카뮈를 함께 읽으면서 이 두 결정적 길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부조리의 끝을 부정하며 사는 것일 게다. 그 영원성의 환상을 머금은 채. 뒤척이다 희미한 빛을 느끼며 깨어있음을 자각하곤 다시 이 세계에서의 저주스러운 반복을 이어간다. 르베의 실패없는 치밀한 결행의 순간이 당분간 내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르베의 아내가 서랍에서 발견한 그의 삶이 응축된 14쪽에 이르는 삼행시 중 몇 구절을 옮기며 맺는다.

 

피곤은 나를 진정시키고

권태는 나를 낙담시키고

고갈은 나를 멈춰 세운다

 

도착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고

보관하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한다

 

나이는 나를 엄습하고

젊음은 나를 떠나고

기억은 나에게 남는다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 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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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엄청난 주석들과 해석이 쌓여있는, 이 작품이 발표 된 이후 흡혈귀 소설의 전형이 된 브람 스토커의 DRACULA에는 성의 정치학이 어떠하다든지, 문화적 편견의 집대성이니, 신구 세계의 충돌이라든가 하는, 한편 정신분석적 비평이니,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이니 하는 진부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관점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작품의 재미를 오롯이 즐기기 위해 낯선 것이 주는 서늘함을 느끼기 위해 읽었다.

 

계속되는 무더위와 더불어 지치고 지루해진 일상적 연속감을 잠시 상실케 할지도 모를 어떤 낮선 것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무 지치고 내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일상을 단절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오래된 소설을 집어 들었다. 가장 낯선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무엇이 아주 조금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몸이 굳어버림으로써 공포를 비로소 체감하듯 이질성을 통해 불연속적인 이질적 세계의 당혹스러움이 필요했던 탓일 게다.

 


소설 첫 장을 펼치면 헝가리-루마니아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의 성으로 향하는 변호사 조너선 하커의 마음에 드리운 불안과 황폐한 풍광이 어우러져 그의 행보가 마치 죽음의 덧으로 들어가는 듯한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여 읽는 이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를 백작의 성으로 실어 나르는 마차와 기이한 마부, 늑대들의 울음소리와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안광(眼光), 굳게 닫친 성의 문 앞에 장시간 홀로 서 있어야만 하는 조너선이 느꼈을 두려움이 온전히 전달되어 온다. 일단 이 소설 읽기는 성공한 것이리라. 그 이질적 세계의 시공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나는 뛰어들었으니까.

 

엄청나게 큰 성에 자신과 백작 이외에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조너선 하커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을 땀줄기의 성분은 혐오와 공포, 백작이 내뿜는 썩은 내 나는 악취의 진저리였을 것이다. 런던에 백작의 거처 구입과 관련한 계약을 위해 고용주 호킨스를 대리한 조너선의 방문은 그 본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백작의 음흉한 의도에 의해 자유를 빙자한 감금 상태에 처해지고, 백작의 실체를 확인하게 됨에 따라 탈주를 향한 그의 시도들은 긴박함과 실패의 두려움이 혼합된 죽음의 공포로 뒤범벅되어 독자의 정신을 꿰찬다.

 

장면은 훌쩍 넘어 조너선 하커의 약혼녀 미나와 그녀의 친구 루시 웨스턴라가 살고 있는 영국의 휘트비로 향한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일기와 편지, 전보, 신문기사 스크랩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재된 기록 일자들을 서로 이어 맞추며 그 간극에 있을 추리와 논리는 독자의 몫이다. 조너선 하커, 그의 생존을 알 수 없이 끝난 일기에 이어 미나의 편지와 일기가 등장하여 휘트비 항에서 발생한 이상한 사건을 진술한다. 폭풍우 속에 항구에 도달한 배와 느닷없이 뛰어내려 홀연 사라진 개 한 마리, 그리고 키잡이에 묶인 채 사망한 선장의 시신 외에 그 어떤 생명도 없는 배, 이후 평소 몽유병을 앓고 있던 절세 미녀인 루시 웨스턴라의 이유를 알 수 없이 수척하고 창백해져만 가는 병세는 드라큘라가 이미 영국에 거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루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정신병원 소장 수어드 박사, 그의 스승인 반 헬싱, 미국에서 왔다는 아서 홈우드의 친구 퀸시 모리스, 약혼자인 아서 홈우드(고달 경), 드라큘라 행적의 전조로서 간접적 기호로 작동하는 렌필드라는 광인에 대한 관찰 기록이 뒤엉켜 드라큘라의 루시를 향한 지속되는 흡혈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이어진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 있는데, 루시를 위해 남성들이 돌아가며 수혈을 하는 것인데, 이 소설이 써질 때 혈액형과 항체반응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지만 수혈이 마구잡이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는 어느 만큼의 이해가 있었음에도 굳이 수혈 부작용의 확률을 늘리면서까지 네 명의 남자가 모두 한 번씩 수혈하는 것이다. 드라큘라에 의한 과다한 혈액의 누출로 루시는 기어이 사망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데, 루시는 혈액이 모자라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수혈자인 모리스의 혈액이 루시의 혈액형과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비평가들은 반 헬싱의 무지에서 비롯된 폭력을 보았기에 이 같은 논평을 그치지 않는 것일 게다.

 

그 이유야 어쨌든 흡혈귀를 쫓는 만능의 지식자로 행세하는 반 헬싱이라는 인물의 행위는 시선을 끌었는데, 조너선 하커가 이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미나와 혼인함으로써 수어드 박사의 정신병원에 임시 거처를 정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사단이다. 미나 하커에게 모든 기록들의 정리자로서, 드라큘라를 쫓는 계획의 주요 종사자의 임무를 맡김으로써 여성의 능동성과 평등성을 은연히 표현했다는 점은 반 헬싱의 남성중심주의와 보수주의적 작품이라는 딱지를 상당부분 떨어내게 해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언데드(undead)가 되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흡혈귀가 된 루시의 영원한 죽음을 위한 행위와 드라큘라의 행적을 쫓는데 시선이 빼앗기고 있을 때 그들의 안 마당에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뒤늦은 발견의 장면이다.

 

반 헬싱은 미나 하커가 황홀감에 도취되어 드라큘라에게 목이 물려 피를 빼앗기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피를 미나에게 주는 언데드의 세례를 보는 장면이다. 흡혈과 수혈의 행위를 유사 성행위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피를 마시는 것은 그 선정성을 더욱 첨예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이 쓰여지고 있던 1890년대가 빅토리아시대의 절정기였다는 점이다. 엄격한 순결주의, 도덕주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인 엄숙주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게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마 반 헬싱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시대의 윤리적 기만을 가장 선명하게 대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문학비평가 크리스토퍼 F. 벤틀리는 그의 저서 침대의 괴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나타난 성적 상징(1972)에서 성기 없는 성교, 혼란 없는 성교, 책임 없는 성교, 죄책감 없는 성교, 사랑 없는 성교, 더 나아가 성교 그 자체라고, 일종의 근친상간적이며 시체 애호적이고 가학적 성교 요소가 뒤엉킨 작품이라고 비난한 것은 어쩌면 일정 부분 정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출간되자 극도로 선정적, 문학적 감각뿐 아니라 건설적 예술성도 부족하다고 비난한 1897. 6. 26애서니엄(Athenaeum)런던 이나 예술적 절제가 결핍된 문학적 실패작이라 논평한 미국판 출간에 대한 1899.12.9. 웨이브(wave)샌프란시스코 처럼 선정성이기는커녕 당대의 위선에 대한 역설적 은유에 가깝기에 닐 게이먼의 비난처럼 소설적으로 취약한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브람 스토커가 쓴 서문의 한 문장에 더욱 주목했는데, 우리의 철학이 꿈꾸는 것 이상으로 하늘과 이 지상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이 말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너머에 훨씬 더 많은 미지의 것, 낯선 것, 외면한 것 들이 있다는 지성에 대한 겸허한 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낯선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흡혈 행위는 당대, 아니 오늘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익숙한 것에의 안주라는 편협이 야기하는 위선과 폭력성의 희생물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것에 덧씌운 자기 몰지각과 편벽함, 아마 당대 영국인들, 나아가 서유럽인들의 심리를 채우고 있던 순혈주의가 여성들의 순결과 궤를 같이 함으로써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그 묘사가 일치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즉 드라큘라의 흡혈은 인종적 위협의 상징적 기호로서 드라큘라의 불쾌한 체취, 희생자의 피의 오염과 더불어 오늘날에도 작동하고 있는 문화적 편견의 한 예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이 소설의 원제목을 두고 스토커는 고심했던 같은데, 집필 원고의 제목은 언데드였으며, 소설로 출간하기 직전 자신이 영업매니저로 일하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을 위한 드라마 개작 작품명은 드라큘라 혹은 언데드였던 것으로 보아도 죽음과 살아있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계지대의 존재임을, 미지의 영역을 활보하는 존재로서 드라큘라를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눈에 보이고, 자신이 아는 것만을 인식하려 할 때 우리는 고집불통이 된다. 루시의 약혼자인 아서는 자신의 피앙새(fiancée)의 시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한 시체훼손에 대해 강한 반대 의지를 보이지만, 반 헬싱의 조작으로 루시의 언데드가 성난 흡혈귀의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자 급작스레 그녀의 시신에 대못을 내리치는 일을 손수 하는 모습은 작가 의도의 한 표현 예라 해도 될 것 같다.

 

Luc Besson, Dracula: A love Tale, 2025》】


드라큘라의 안식처인 언데드가 휴면을 취할 흙으로 채워진 관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 끝에 영국을 떠나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는 드라큘라 백작을 쫓아 마침내 모리스가 그의 보이나이프를 심장에 꽂는 순간 미나 하커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은 길이 남을 장면일 것 이다. 흡혈의 피의 세례로 백작과 텔레파시의 소통력을 지니게 된 미나 하커가 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움이다. 백작이 분해되는 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평온한 표정에 미나 하커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기뻐할 것이라는 표현은 자못 이중적 의미로 다가온다. 백작의 부재로 인한 자유에 대한 기쁨일까, 아니면 영적 파트너였던 백작의 평온한 표정이 준 그와 연결된 자기 영혼의 지속성에 대한 환희였을까. 사실 소설이 끝났음에도 드라큘라를 정말 없애는 데 반 헬싱과 동료 사냥꾼 무리들이 성공한 것인지 장담하기가 애매하다. 낯선 이질의 문명에 대한 반감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란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든 그것은 우리에게 다시금 이질의 괴물성으로 출현하고 부단히 편협의 질서와 투쟁할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네의 세계는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는 의문부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표되고 60년이 지날 때까지 대중성이라는 폄훼의 시선에 의해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작품이었다는 점도 아마 우리들의 집요한 배제의 논리에 은폐된 순수에 대한 혐오스러운 집착 때문일 것이다. 이제 무수한 아류(pastiche)들을 낳고 있으며, 오늘날 가장 강력한 소설 중 하나로 연구되고 기억되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낯섦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붙인 이름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은 더 많은 세계를 포용할 수 있을 게다.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뾰족한 송곳니, 아직까지도 살아있고, 예술로서 성공하고 많은 주석과 해설을 이끈 역작이다. 마침 뤽 베송 감독이 다크 판타지 물로 각색한 Dracula: A love Tale, 2025가 올 여름(8.26) 개봉될 예정인 모양이다. 아마 브람 스토커의 원작과는 달리 15세기 일명 꼬챙이 블라드로 불렸던 블라드 드라큘라(Vlad Dracula) - 오늘날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기려지는 - 가 활약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21세기 드라큘라라는 낯선 존재가 이 프랑스인에게는 어떻게 표현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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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
데라야마 슈지 지음, 손정임 옮김 / 미행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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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악덕, 저항, 독립’, 네 범주의 예찬(禮讚)’을 하고 있는 이 책은 1963년 첫 출간되었지만, 인간과 인간사회에 있는 그 항상(恒常)적 내용처럼 21세기 오늘과 동시대적이며, 기존 질서에 대한 명확한 반감의 냄새가 범상한 글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당대에는 급진성으로 비난과 공감의 물결이 마구 뒤엉켰을 문제작이었을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글들이 흥미로운 것은 현학을 흉내 내거나 진지함을 방패로 삼지 않으며, 그 어떤 위선도 날려버린 날 것의 체 하지 않는 솔직함이다.

 

가출예찬을 비롯한 네 개의 예찬은 공히 오늘날 가족 제도의 근간인 ’, 페미니스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일부일처와 그들의 아이들로 견고하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깨부수고 그 질척질척한 애정으로 묶인 혈연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군상들의 허위의식과 기만성을 박차고 진정한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날아오르자는 변()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심리적 젖떼기이고,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자신의 에고이즘을 정당화하는 엄마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의 내부를 해체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 아이의 독립적 인생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한편 스위트홈의 중추인 부부중심의 결혼 제도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유명한 성()혁명론자이자 성정치론자인 빌헬름 라이히의 주장을 토대로 관능적 체험의 결과로서의 성적인 애착의 충족 관계가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고, 오늘날 사회의 생산수단 사유화로서 경제 기반만을 문제 삼게 되면서 허울뿐인 부부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 에 씌워진 권위주의로 포장된 긍정의식을 해체하고 있다.

 

스위트 홈의 일부일처의 불모성을 비판하는 사례로써 제법 길게 인용되고 있는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 원작의 만화 사자에 씨(サザエさん)의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치 가장 정당한 이데올로기인 양 오늘날 가정을 지탱하는 일부일처제 중심의 에 대한 충성심을 집요하게 주입하는 교조성을 비판한다. 집의 힘에 의해 거세당한 사자에 씨의 남편 마스오와 에로티시즘에 무관심한, 오로지 일부일처를 지켜야 한다는 체념에서 집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는 사자에 씨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복속된 집의 현상을 날카롭게 통찰해 내고 있다. 이 만화가 일본인들의 최고 드라마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로 각색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그네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성정치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통치하려하는지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가출을 말하는데 있어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인데, ()에는 없는 노라의 가출 이후에 조명을 맞추어 집을 나가 매춘부가 되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노라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인형으로 취급했던 으로부터의 단절을 감행했다는 것, 즉 노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가출한 것이므로 그녀 자신의 존재 형성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선택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불행한 시대에 선천적으로 존재했던 집, 노라와 헤르마가 마주해 창조해서 만든 집이 아닌 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집 제도와 관련한 수많은 속박과 금기가 작동한다. 바로 이 금기로서 금지된 것들은 황홀감과 불안이라는 기묘한 쾌락을 대기시키고 사람을 유혹한다. 하지만 이 금기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으니 절대적 윤리 덕목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데라야마 슈지는 대다수의 스위트 홈을 둘러싼 금기란 생생한 연대성을 강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성을 잃지 않은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통에 찬성하지 않는데, 그 이유 또한 의외의 희극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계약으로서 사기인 기브앤테이크의 불균형때문이란다.

 

한국사회도 형사상 범죄에서 비범죄화한 것뿐이고 여전히 민법상 불법으로 보고 있으니 간통에는 신의(信義)의 원칙, 즉 경제적, 심리적 균형에 대한 기대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깊숙이 응시하면 자본주의가 주입한 일부일처, 집에 대한 환상이라는 뿌리와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집이라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이 경제조건을 전제로 유지되는 한 간통에 대한 불안한 법적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악의 예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디즘과 연결 지어 그 발음의 유사성을 지닌 아베 사다(阿部定)’의 실화사건을 소설(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 영화화한(오시마 나기사 감독 감각의 제국) 가학적 성욕을 둘러싸고 사다이즘이자 사디즘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며, 이들이 이러한 소재를 주제로 삼은 것은 새로운 모럴,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사색과 행동의 제안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상에 악이라 생각하는 것 중에 선이 있고, 습관화된 선행 속에 악이 있지 않은 지 자문해 보라고, 스스로 묻지 않고서는 새로운 모럴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당신을 충족시키고 있는 행복의 질서는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렇게 악의 예찬을 읽다 그의 악의 숭배 속에 자유에 대한 인간적 욕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일상 파괴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이 예찬의 속뜻임을 알아차린다. 그는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에너지 원천으로서 악을 숭배하는 것이지, 악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조금 시선을 달리해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주인공 윌리 로먼은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비프야, 지금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남들한테 미움을 받으면 안 돼. 모두가 너를 좋아해야 해.” 남에게 욕을 먹지 않아야 성공한다는 이 착각이 그를 하찮은 소시민으로 죽어가게 했다. 어떤 인간에 대한 확실한 평가 같은 게 존재할리 만무한 것이고, 욕을 먹음으로써 오히려 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칭찬하는, 말끔하게 청결한 인간은 데라야마의 말처럼 무능한 인간이기 십상일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의 시선에 속박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먼저 욕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데라야마의 충심은 스스로 얽어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아마 이 책을 구성하는 무수한 주제를 지닌 작은 글 조각들은 그 가리키는 곳의 삶의 엄중함 탓에 거의 모두가 매혹의 색채를 띠고 있다. 어머니의 약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가난한 소녀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극적 연민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연대의식에 대해 막연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실체적인 책임과는 관계없이 분위기적 책임의식으로 치환하여 실질적인 무책임을 가린다.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는 센 강가에 빠진 여자를 구할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수영도 할 줄 모른다며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 후 그는 강가 길을 피하여 다른 길로 우회하여 걸으며 다시는 그런 갈등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요령을 부린다. 죄책감, 위선, 기만과 심판의 문제가 뒤섞인 이 장면은 오늘의 시대가 책임의 문제, 인간 윤리의 문제를 엄중히 시험대에 올려야 할 사안임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문제들을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통해 무수히 건네며, 삶의 태도를 자극한다.

 

사실 이 책으로 이끈 동기는 정기현 작가의 소설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의 짤막한 소개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제안, 데라야마의 말로 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에 대한 가능성의 소망이었다. 데라야마의 말을 거는 날이라는 글은 진짜배기 소통, 대화, 사교를 잃어버린 오늘의 사회 속에서 소외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들과의 친교, 아니 그 이상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임의 제안을 보게 된다.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임,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 등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지는 작은 모임이 많이 열려도 좋을 것이라며,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듯 대화내용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카타르시스를 향한 모임은 흥미롭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모임이 있다면 기발한 문예의 향연이고 친교 성장의 토양이 될 법도 하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기념일처럼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날로 활성화된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친구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법하기도 하다.

 

반짝거리는 생의 걸음 길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빛나는 이 책은 그것을 급진적이고 과격한 언어라고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려는 맥락을 주의깊은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마 그 부정과 저항의 몸짓들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삶의 생동력임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우리네 삶의 변하지 않는 질서에 대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몰라 옮기는 것으로 맺으련다. 삶의 미묘함이란...

 

모두가 착한 사람이고, 날씨도 좋고, 작은 새들도 지저귀는 데 일어나는 비극...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사랑이나 증오는 사악한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말로 딱 잘라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미묘함과 닿아 있어서 세 배로 눈물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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