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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타데우시
아담 미츠키에비츠 지음, 정병권 외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10월
평점 :
내게 ‘폴란드 문학’이란 인식조차 지니지 않고 읽었던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 (Ferdydurke)》나, 스타니스와프 렘, 쉼보르스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먼 이방의 문학토양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인데, 그것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보여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그녀가 말하는 ‘다정한 서술자’, 우주 만물 궁극의 근원인 태초, 그 일원성(一元性)의 파편들인 우리들 개개 존재의 공통 감각에 대한 날카로운 각성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로부터 시작된 폴란드 문학에 대한 거슬러 읽기를 시작하게 된 것인데, 그 첫 번째 작품은 폴란드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는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소설 《인형》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을 인과관계 없는 조각조각들, 개별 관점의 이야기들이 모여 독자에게 하나의 전체적 조망으로서 관점을 갖게 하는 폴란드의 문학적 전통 예로써 소개했다.
그런데 어디 문학 작품을 읽는 이의 인식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의 형식에만 머물겠는가. 소설 《인형》의 시대배경은 19세기 폴란드라는 유럽 강국들의 야심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탐욕의 희생 영역이었다. 타민족들의 이익에 따라 분할 지배되던 폴란드인들의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어쩌면 20세기 초 한반도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막연하게 닿아있는 이러한 시원적 정조(情調)가 나를 이끈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그네들 문학적 전통의 면면한 흐름의 발견이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인형》의 주인공은 시련을 딛고 상인으로 성공한 보쿨스키라는 인물의 비극적 사랑의 서사를 배경으로 당대 몰락하는 폴란드 귀족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작품이다. 보쿨스키는 내면의 갈등이 솟구칠 때면 ‘미츠키에비츠’의 시집을 읽는다. 그가 읽는 시집이 아마 바로 이 책 《판 타데우시》였을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조국에 대한 향수, 자신들의 나라를 복원하려는 실천적 수행과 여인에 대한 사랑을 모두 성취하는 인물을 시적 운율로 그려낸 일종의 극시(劇詩)이다.
《판 타데우시(Pan Tadeusz)》의 판(Pan)은 폴란드 귀족 앞에 붙이는, 영국식으로 표현하자면 Sir(卿)와 같은 의미이며, 타데우시는 이름이다. 작품 《판 타데우시》는 1810년대 리투아니아 지방의 소(小)귀족 소플리차 가문과 대(大)귀족 호레스코 가문의 해결되지 못한 원한으로 벌어지는 귀족간의 묶은 감정의 대립을 중심 서사로 하여 당대 시골 귀족들의 의식, 사냥, 사교, 식사, 복식 등 일상사와 농촌의 풍경, 조국을 잃은 사람들의 시대 인식이 어우러져 폴란드인들의 애국적 정취를 자극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 작품이 시적 음률과 시어로 써진 까닭은 폴란드인 고유의 정서를 보다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번역된 언어로 그 정조에 감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따라서 운율법칙과 시어가 지녔을 문장의 고유한 맛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은 항상 겪는 아쉬움이다. 결국 시를 산문으로 읽게 되었다는 것이니, 다만 문장이 품고 있는 시적 은유를 상상하는 기쁨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담 미츠키에비츠’는 오늘날 폴란드 민족시인으로 그들의 정신에 깊게 뿌리내린 하나의 정신이니, 폴란드 문학들의 저변에 흐르는 정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하다.
작품은 총 12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책에는 별도의 제목이 붙어있다. 책 1은 〈농장〉이란 제목 아래 도시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리투아니아 지방 소플리차 가문의 저택으로 막 귀환한 타데우시가 잃어버린 조국의 자유를 슬퍼하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있는 현실의 극복에 대한 염원이 조상들의 얼과 현실의 목가적 정취와 함께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넌지시 자극하며 작품을 열도록 한다. 각 책의 제목들, 〈성(城)〉이나, 〈구애〉, 〈정치적 선동과 사냥〉, 〈자야즈드〉, 〈1812년〉처럼 서사적 줄거리를 상징적으로 암시하여, 이 작품이 종국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전개되고 있다.
책 1 〈농장〉의 한 문장을 좀 장황하게 인용해보면,
“그 귀족은 예고하기까지 했답니다. 우리사회가 개혁되고 새로운 문명과 제도가 도입될 것이라고, (...)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군. (...) 그 귀족은 평등을 말하면서도 마르퀴즈 귀족 칭호를 택했답니다. (...) 세월 따라 유행이 변하자, 그 마르퀴즈 귀족은 민주주의자 칭호를 가졌지요. (...) 파리에서 온 그 민주주의자는 남작이 되었더군요.” - 20쪽, 책 1〈농장〉에서
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의 한 구절인데, 당대 귀족들의 사회개혁으로서의 인간평등, 귀족이라는 계급의 의미변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등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함축되어 있다. 즉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의 대중적 이해였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의지하는 것을 이렇게 책 1에 묘사함으로써 이어지는 장면들인 사랑과 원한, 사냥꾼들의 대립, 귀족간의 즈야즈드와 전쟁을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 읽게 된다. 사건의 촉발은 수십 년 전의 한 사건인 호레스코 가문의 성주인 스톨르닉이 소플리차 가문의 야첵에게 살해되고, 이후 러시아의 침공으로 성(城)의 소유주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양 가문이 성을 두고 다투는 것이 주된 서사의 제재(題材)다.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이 미츠키에비츠의 이 시를 잇는 계보로서의 소설로 이해되는 것은 이 살해사건의 동기에 터 잡은 것일 테다. 야첵 소플리차는 스톨르닉의 절대적 충신이자 부상하는 신흥 귀족을 대표하는 청년으로 스톨르닉의 딸 에바와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러나 대귀족인 스톨르닉은 신분상 지위가 낮은 야첵이 원하는 자기 딸과의 결합의 기대를 마치 생각조차 못할 일이라는 듯 모르는 척으로 일관함으로써 청년에게 좌절의 분노를 키워내고 만다. 《인형》의 주인공 보쿨스키가 몰락하는 대귀족의 딸 이자벨라와의 결합의 기대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야첵의 일생을 장악했던 이 기원적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계보 기반을 지니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이렇게 맛보게 된다.
시의 서사적 줄기는 당대 귀족들 간의 사랑의 감정적 거래의 관계와 두 가문간의 대립하는 적의의 은유로서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사냥의 에피소드. 이렇게 두 축(軸)이다. 사냥이라는 쫓고 쫓기는 싸움의 의식은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시기와 경쟁과 얽히면서 더욱 극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야첵은 스톨르닉을 살해하고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로 이름을 로박(폴란드어 ‘벌레’를 뜻함)으로 바꾸고 신부가 되어 조국 독립에 헌신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사이 에마는 원하지 않는 결혼과 소생으로 조시아라는 딸을 출산하고는 야첵에게 자신의 딸을 거두어 양육해줄 것을 부탁하고는 운명한다. 조시아는 소플리차 가문의 먼 친척인 귀족여성 텔리메나라는 여인에 맡겨져 양육되고, 신부 로박은 자신의 정체인 야첵을 숨긴 채 가문의 동생인 판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수행한다.
책 3 〈구애〉에 이르면, 당대 귀족여성들의 결혼관, 즉 혼인의 표면적 거래 관계 아래에 흐르는 정신을 엿보게 되는데, 텔리메나라는 여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성을 저울질하는 심리는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텔리메나는 적막한 저택의 심처에서 사냥을 시작한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으나, 머리 속으로는 두 마리의 짐승을 쫓고 있었다. 어떻게 그 둘을 한꺼번에 포위하여 잡을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백작과 타데우시를...” -152쪽, 책 5 〈분쟁〉에서
이 영리하고 경험 많은 텔리메나라는 여인은 타데우시의 삼촌인 판사의 여동생으로, 즉 타데우시의 고모로서 대우받는 여성임에도 조카벌인 스무 살 남짓인 타데우시와 호레스코 가문의 젊은 백작을 자신의 치마폭에 감쌀 궁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여인이 두 젊은 남성을 유혹하고, 교태를 부리는 은근한 장면들은 이 작품의 분명한 볼거리다. 자신이 양육하는 대귀족 호레스코가문의 혈통을 가진 조시아와 타데우시의 결혼 성사를 손에 쥔 여인이 자기 욕망의 상대자인 타데우시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그 삶의 여정이 변화하는 가를 쫓는 것도 이 작품의 하나의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의 두 줄기 중 단연 그 비중이 압도적인 사냥 장면은 두 가문의 가솔들이 총 출동하여 사냥감을 놓고 경쟁하는 간접적 격전지다. 토끼를 놓고 사냥하며 두 적대집단으로 나뉘어 다투던 사냥은 원시림 숲속에서 튀어나온 곰의 출몰이라는 다분히 은유적 장면으로 전환되어 갈등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미련한 곰이여! 네가 만약 그 밀실에 앉아 있었다면, 너에 대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을. 그러나 너는 벌통의 향기로운 냄새에 유혹 당했는가, 아니면 무르익은 귀리 이삭을 탐하였느냐. 너는 나무들이 드문 숲의 가장자리로 나왔다. 그러자 곧 산림지기가 그곳에서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 134쪽, 책 4 〈정치적 선동과 사냥〉에서
양 집단은 곰 사냥에서 상대 가문을 누르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과정에서 곰이 타데우시와 백작, 두 사람의 앞으로 돌진하고 둘은 총을 동시에 쏘지만 빗나간다. 급기야 다가온 곰에 의해 희생될 찰나에 어디선가 나타난 신부 로박의 총격에 의해 곰은 쓰러진다. 곰 사냥 사건의 각 과정의 장면들마다 사냥꾼들, 두 젊은 청년 귀족에게 지니는 의미는 엄청난 파괴적 위력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곰 사냥 후 옛 호레스코 가문의 성에서 판사, 즉 소플리차 가문의 중심인물이 만찬을 마련하고 주인으로서 식사를 주관하는 가운데, 여인들과 두 집단의 남성들과의 은밀한 희롱들이 곰사냥 결과의 후과(後果)와 섞여 만들어내는 긴장이 드디어 봉합할 수 없는 양 가문의 극한적 싸움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타데우스와 백작, 이 둘의 대립은 민족적 자긍심과 외세, 외부 선진문명의 도입으로 상징되는 대결로서 한 점의 그림을 둔 비평적 논쟁을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백작이시여, 그림을 사랑하시면서, 왜 당신이 앉아있는 주위에 있는 우리나라 나무들은 그리지 않는가? (...) 기름진 들판에 살면서, 알 수 없는 바위와 황야만 그리고 있다” 고 타데우시는 비난한다. 이에 백작은 “자연은 형태, 배경, 재료이고, 영혼은 영감입니다. 영감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예술적 규칙의 바탕 위에서, 안목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오. 자연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열정만으로도 부족하다오. 예술가는 이상의 차원으로 날아 가야한다오!” 이 둘의 조화로운 균형의 필요를 작가는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다.
소플리차 가문이 이끄는 식사자리를 싸움터로 변질시킨 백작은 소플리차 가문 측에 선 심판소장을 향해 성을 두고 벌어지는 소유권 소송의 비난은 물론 그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전례 없는 무례를 행하며,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대귀족의 권위를 되찾을 것을 예고한다. 법 초월적 권위라는 오래 전에 사라진 권력에의 향수, 예술적 이상으로서의 진보적 성향과 모순되는 당대 귀족계급 의식이 혼란 속에 흔들리고 있음의 상징적 장면일 것이다.
대귀족, 즉 구(舊)귀족의 상징으로서 호레스코 가문과 소플리차라는 신흥귀족으로 성장하는 소귀족 소플리차에 대한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들의 반감으로 뭉친 잔반세력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소플리차 가문을 대표하는 판사의 저택으로 총칼로 무장하여 기습하기에 이르고, 판사 저택의 기물들에서부터 가금류, 농장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는 소플리차 사람들을 지하 창고에 가두어 놓는다. 아마 이 지역은 러시아군이 관할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러시아군이 들이닥침으로써 소플리차 가문의 사람들은 풀려나고, 백작 등 호레스코 가문을 비롯한 구귀족들은 포박되기에 이른다. 구귀족들의 어리석은 소플리차를 향한 폭력의 행사를 반대했던 일부 귀족들과 신부 로박은 뒤늦게 도착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하지만 러시아군 지휘관과의 갈등이 촉발되고 이윽고 두 귀족세력간의 싸움은 폴란드인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반목하던 두 세력은 폴란드라는 조국애로 결집하여 러시아군과 싸우게 됨으로써 승리한다.
이러한 서사적 결말은 오늘날 문학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미숙함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극시의 결말은 죽음에 임박한 야첵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속죄와 참회, 그리고 그의 조국 독립을 위한 운동의 명예가 승인됨으로써 양가의 화해와 조국애로의 승화, 자신의 아들 타데우시와 스톨르닉의 외손녀 조시아의 가약으로 사랑의 결합이 완성된다. 《인형》의 보쿨스키는 이 결말이 보여주는 가능성, 사랑의 쟁취와 조국애의 실천을 자신이 병행 성취할 수 있는 존재되기의 모델로 삼았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읽은 이의 정서에 남겨진 것은 어쩌면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의 배경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몰려온다. 그것은 이 작품 전면(全面)에 배경처럼 흐르는 리투아니아 한 농촌지역 서산에 걸려있는 태양이고, 농사일 마치고 귀가하는 건강한 농부의 붉은 얼굴과 어슴푸레 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과 수레단에 실을 호밀단 작업이 남아있음에도 농부들을 들판에서 물러나 작업을 종료케 하는 다정한 귀족의 지시처럼 자유로운 평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짙은 향수이다. 섬세한 레이스 커튼처럼 걸려 있는 서쪽 하늘의 구름, 구름을 에워싸고 타오르는 서편의 햇살, 모두의 손길과 눈길이 즐겁게 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윤무, 고요한 저녁 같은 세계의 기운이 가득한 경건한 추억의 복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폴란드 근대 문학전통을 맛보는 더없는 작품을 경험했다. 당분간 폴란드문학을 읽는 여정을 계속할 것 같다.